제14호
한국에서의 40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한국에서의 40년을 회고하며 - 자서전적 회상"이라는 제목으로 글 을 연재하다가 중단하게 된 것은 10여년 전 일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글을 다시 계속 이어서 쓰기로 결심하였다. 나의 이 새 로운 결심은 1961년부터 2004년까지 나의 "두 번째 고향"인 한국루 터교회(LCK) 전업 선교사로 섬길 때, 그리고 그후 2011년까지 일 년에 평균 3개월간 단기 자원 선교사로 봉사할 때 나와 함께 일했던 친구들과 이전 동료들의 요청과 격려 때문에 가능하였다.
나는 마지막 결심을 하기까지 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하였 다. 생각하는 가운데 나는 많은 사진들을 살펴 보았고, 다 른 자료들도 검토하며 기억을 새롭게 하고 또 간단한 노트 를 첨가하기도 하였다. 내가 2003년 글을 시작하였을 때 그 자료들 중 많은 것들이 창고에 있었던 것이었고, 쉽게 손에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 9 6 2년 1 월
한남동 40호 집 앞에 서 있는 선교 사 리머 부부
그 자료들을 다시 검토하면서, 나는 많은 사진들이 LCK 역사 중 많 은 부분을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음을 발견하였다. 그 자료들은 내가 LCK 선교사로 일한 기간 동안에 있었던 수 많은 양 상들과 사역들을 담고 있었다. 나는 이 글과 더불어 그 사진들을 함 께 수록할 예정이다. 내가 바라기는 그 사진들이 이 글의 효과를 증 대시키고, 또 독자들에게 흥미를 제공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각주를 다는 형식의 문서를 쓸 의도가 없다. 단지 주로 나의 개인적인 참여 와 경험을 근거로 하여 내가 알고 있고 또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글 로 옮길 생각이다.
나는 LCK의 선교의 여러 국면들은 일차 자료 기록을 추가로 필요 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목적을 위해 어느 정도 공 헌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별히 한국에서의 초기 루터교회 사역 의 역사는 내 견해로는 루터란 신학, 교회론, 그리고 선교학에 있어 서 독특하고 중요한 경우이다.
나는 이 자서전적인 회상들을 2003년에 쓰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2003년 4일 1자로 출판된 「우리루터란」 봄 100호에 실렸다. 그후 11개의 글들이 4분기마다 「우리루터란」 에 실렸고, 마지막 글은 112 호(2006 봄, 4월 16일)에 실렸다. 내가 쓴 마지막 글은 13번째 글이 었고, 그것은 2006년 7월 1일자 「우리루터란 별책부록」에 실렸다. 그러니까 그 마지 막 13번째 글 이후 나는 10년의 세월을 보낸 다음 이 14호를 쓰게 된 것이다
한남동 유엔 빌리지 40호 옆 주차 장에 있는 두 대의 윌리스 지프.
13개의 글 모두를 영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은 박 일영 목사이다. 그의 번역, 특별히 탁월한 그의 번역에 나 는 적절하게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했다. 그는 자원해서 앞으로 내가 쓸 글도 계속 번역하겠다고 한다. 이 일을 위 해 적절한 능력을 갖춘 그의 기꺼운 자원에 대해 감사하 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영어로 된 내 글을 한국어로 이 해할 수 있도록 한 번역자에게 적절한 인정의 표시가 있 어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지금의 글과 앞으로의 글뿐 만 아니라 과거에 쓴 글들에도 그의 이름이 명시되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이번 글에서 나는 한국 루터교 선교부 협의회 (KLM Conference)에 대해, 그 구성 원들과 회의들을 주요 주제로 삼고자 한다. 이 주제는 다음 글들에서도 전반적인 머리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대부분 나와 내 아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한1961년 9월에 집중할 것이다. 그때 이후 우리는 1966년 일년 휴가 를 얻어 미국의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 5년을 한 국에 머물렀다.
라우어 선교사가 살고 있는 한남동 유엔빌리지 41호 옆에 있는 잔디 위에서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지원용 박사 내외. 지 박사는 아이스크림 을 만들기 위해 크랭크를 돌리고 있다.
우리는 Korean Lutheran Mission의 첫 글자인 "KLM"을 많이 사용하였다. 내가 한국에 땅을 들여놓은 때 부터 즉시 참여하게 된 KLM 협의회의 구성원들은 쿠르트 보스(Kurt Voss) 목사, 폴 바틀링(Paul Bartling) 목사, 메이나드 도로우(Maynard Dorow) 목사, 지원용 박사, 짐 라우어(Jim Lauer: 한국어 이름 나우열) 목사, 그리나 나였다. 1966년까지를 기간으로 할 때 이 조그만 그룹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가 존 하디(John Hodde: 한국어 이름 하대위)이다. 그는 1964년에 한국에 도착했다. 또한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지원상 목사이다. 그는 안수를 받고 서울 역관동의 임마누엘 루터교회 목사 로 취임하자 마자 KLM 협의회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나 의 가족이 휴가로 미국 고향에 돌아갈 때쯤 지원상 목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일본 루터신학교(Japan Lutheran Seminary)에서 일년 동안 신학을 더 공부하였 다.
내가 1961년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 내게 주어진 첫 주요 과 제는 2년 동안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한국어 연구생으 로서 나는 1961년 9월에 시작해서 1963년 6월 최종 6단계까 지 연세 한국어 학당에서 언어 연수과정을 마쳐야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라우어 목사는 3단계 과정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 는 함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후 우리 둘이 살고 있 는 한남동을 출발해 연희동에 있는 연세대학교까지 차를 타고 갔다
리머 선교사가 1962년 1월 새 집으로 이사한 후에 선물로 받은 고무신을 신어보고 있다.
수업은 일주일에 5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매 수업 후 10 분간 휴식을 갖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집중” 한국어 연수 과정이었다. 우리가 사용한 수업 교재의 저자는 그 어학 당 관장이었던 박창해 박사였다. 1960년 출판된 제1권은 6단 계 가운데 첫 3 단계를 담고 있었다. 4, 5, 6 단계를 다루는 제 2권은 1965년부터 장정 본으로 출판되었다. 2년차 학생으로 공부를 할 때에 우리는 등사기로 복사한 교재를 사용했는데, 후에 정식 책으로 출판되기까지 줄곧 복사된 자료를 교재로 사 용하였다. 두 권의 교재는 크기와 무게가 비슷했는데, 그 무게 는 상당히 무거운 것이었다. 서울 남쪽에 위치한 한남동과 조금 북쪽에 위치한 연희동 사 이를 오고 가는 길의 교통은 퍽 수월하였다. 도로에는 차량이 거의 없었다. 라우어 목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 이 후의 상황에 대해서 내게 말해 주었다. 그 군사 쿠데타는 박정 희 장군이 주도하였는데, 후에 그는 대통령으로 권력을 잡았 다. 그 때 사람들은 교통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 는 것 같았다. 초년 한국어 연수생들이 겪을 수 있는 많은 실수들이 있다. 그 실수들 중 몇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것일 뿐 아니라 우스꽝 스러운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1단계 학생이었을 때 한번 은 선생님이라는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서 교사를 박 생선님이 라고 불렀다. 물고기에다가 존칭어까지 붙여 부른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또 다른 실수는 내가 “한국어학당 관장이 누구 냐”라는 질문에 박창해라고 대답하지 않고 박정희라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들은 분명 다른 사람들이었다.
1963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건물. 이 건물 3층 에 한국어 학당이 있었다.
되돌아 볼 때, 나는 당시 선교 초기 시절에 가졌던 많은 계획들, 토의들, 그리고 결정들에 함께 참여할 수 있었 던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고 축복이었는지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한 기회들은 실제 시간 가운데서 오직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역사적 순간들, 역사적 사건들 이었고, 그것들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었다. 1958년 1월 18일 공식적으로 미국에서 온 세분의 외국 선교사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합류 한 지원용 박사는 한국에서의 루터교 선교의 선구자로 서 전적으로 유일하고 특별한 자리를 갖는 분들이었다.
라우어 목사나 나나 처음 루터교회 선교에 관한 한 “해변에 도착 한” “첫 파도”의 일부는 아니었으나, 우리 둘 다 즉시 그리고 실제 로 KLM 협의회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지고 참여하게 되었다. 1964년 그 작은 그룹에 참여한 하디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 다. 당시 특수한 한국의 상황에 적절한 전략과 목적을 세우기 위 해 참으로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많은 질문들에 대해 우리는 진지 하게 생각하고 숙고하였다.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있 어서 미국 미조리 시노드 루터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강점과 자원들, 그리고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우리는 좋은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특별히 이미 75년 전에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여 길고도 소중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다른 교파들과 경쟁 을 하지 않고, 한국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세우는데 공 헌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였다.
1962년, 선교사 쿠르트 보스와 그의 아내 엘리, 그리고 세 딸.
그 초기 시절에 근본 전략과 목적을 세우기 위한 우리의 토론들 은 결코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우리의 주요 연구와 관심이 되 었다. 사실상 그 토론들 가운데서 목적의 중요성과 진지함의 차 원은 점점 높아져 갔다.
꽤 오랫동안 나는 KLM 협의회의 문서 기록을 담당하는 서기로 봉사하였다. St. Louis, Missouri에 있는 미조리 시노드 선교국 에 보낼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 회의록들은 상당히 상 세한 것들까지도 포함하였다. 그 점에 있어서 그 회의록들은 내 가 한국에서 보아 온 대부분의 회의록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한 국의 대부분 회의록들은 단지 안건에 대해 마지막 결론만 요약하 는 간단한 문장으로 쓰여졌다 또한 그 회의록들을 복사해서 KLM 협의회 회원들에게 뿐 아니 라 미국의 선교국에까지 보내려면 대단히 힘든 과정의 노동이 요 구되었다. 오늘날은 컴퓨터와 이메일, 그리고 다른 놀라운 기술 의 발전으로 얼마나 편리해 졌는지 모른다. 옛날 구식 등사기, 파 란 잉크로 복사가 되는 스피릿 복사기, 혹은 제록스나 열팩스기 (thermofax)로 복사된 것들은 몇 년 후에는 글자를 읽을 수 없 었다. 그 때와 비교해 보면 오늘날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른다.
덧붙여서 시간 지연의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요한 문서나 정보를 보내고 받기 위해서 우편 제도에 의존하였기 때문 이다. 항공 우편으로 한국과 미국 사이를 오가는데 걸리는 시간 은 가장 빠르게 잡아도 2주나 3주가 되었다. 배 편으로 편지 답 장을 받으려면 두 달에서 네 달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973년, 선교사 폴 바틀링과 그의 아내 루스.
KLM 협의회에서 논의된 것들을 요약해서 기록하고 공유하는 서 기의 책임을 맡은 나는 그 과정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 내 나름대 로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나는 그것을 “두서 없는 기록 (Rambling Record)”이라고 불렀다. 그 기록은 우리 내부용으 로만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고, 우리 회의에서 진행된 것들을 기 록한 공식적인 문서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방법으로 나는 기록을 보다 빨리 할 수 있었다. 더 세련된 공식 문서를 준비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8년 7월 속초, 지원용 박사와 그의 아내.
1995년, 선교사 메이나드 도로우와 그의 아내 셜리.
나는 그 때 내가 썼던 그 “두서 없는 기록들”을 다시 읽거나 검토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아마도 후암동 LCK 본부 의 어느 서류함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LCK의 첫 10 년의 역사 이야기를 정확하고 또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 으로 연구하고 또 저술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 글들은 상당히 흥미 있고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 두서 없는 기록들은 영어 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서랍 한 칸을 채울 정도의 분량이지만, 당시 KLM 협의회가 결정한 많은 것들 배후의 생각들과 이유들 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많은 토론을 거쳤던 한 중요한 주제는 선교국으로부터 지원을 받 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교회 부지를 구입하거나 건물을 짓 는데 필요한 비용을 선교국으로부터 지원받아야 하였기 때문이 다. “토착적”, 그리고 “네비우스 방법”이라는 개념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믿기로는 이러한 개념들 때문에 미국에 있는 선교국 직원이나 임원들이 한국에서는 토착적인, 혹은 네비 우스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기대하기도 하 였다. 그들은 한국에서의 괄목할 만한 선교의 “성공 이야기”, 특 별히 장로교나 감리교의 성공 이야기들을 들었거나 읽었던 것이 다. 그 당시에 그러한 성공 이야기들은 상당 부분 사실이었고, 또 오늘날까지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 었다. 서울 시내 퇴계로의 대한극장에서 멀지 않은 곳인 역관동에 세우 게 된 임마누엘 루터교회 부지 구입과 교회 건축과 관련하여 KLM 협의회는 그러한 도전에 실제적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나 는 그 당시 거래의 상세한 내용들에 대해 모두 다 알지는 못하지 만, 그 부지 구입과 건축을 위한 비용을 선교국으로부터 지원받 기 위해 많은 토론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기억하 기로는 그 건물은 이전에 다른 교파에서 사용되었던 것이었는데, 뒤 마당에 교역자 가정을 위한 조촐한 숙소를 갖추고 있었다.
1963년 서울 시내 광화문 앞 모습. 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63년 9월 8일 첫 예배를 드린 왕십리 루터교회의 부지 구입 과 건축을 위한 과정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원용 박사가 그 교 회 창립 목사였다. 미국 선교국의 몇 직원들 가운데는, 심지어는 임원들 가운데에도 한국의 실제적 상황을 지나치게 순박하게 추 측하고 우리에게 그러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판단이 결코 불공평하거나 부정확 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1958년 첫 한국 선교를 시작한 네 분의 개척자들이 보여 준 뛰어난 지도력과 성직자로서의 모습에 대해 계속해서 칭찬과 존경을 표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다. 그들은 LCMS에서 새로운 선교를 시작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행에 옮기기 훨씬 어려 운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선교국과 그 임원들은 다른 생각과 기 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한국 선교 초기에 결정된 전략들은 당시로서는 절대적으로 적절 하고 옳은 것이었다고 확신한다.
10개의 달걀을 싼 볏짚 꾸러미
10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한 후 1962년 1월 그의 집 식탁 머리에 앉아 있는
1972년 시카고로 돌아 간 선교사 존 하디와
선교사 짐 라우어. 왼 쪽에는 두 명의 미군,
그의 아내 바바라, 그리고 그들의 다섯 자녀가
오른 쪽에는 요안 리머 사모와
시카고 집에서 찍은 사진.
록산느 라우어 사모가 앉아 있다.
'15호'를 기대해 주세요!!
1987년 10월, 지원상 목사와 그의 아내.
글 이무열 번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