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응답하라1961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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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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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40년을 회고하며'의 13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2016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교회협력국

1961


제15호

한국에서의 40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자서전적 회상 제15회에서 나는 나의 관점에서 본 KLM 초기 회원들에 관 한 몇 개의 짤막한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한다. 특별히 1958년부터 1966년까지 의 기간에 중점을 두고자 하는데, 그 초기의 기간은 한국 루터교회 역사에 있어 서 루터교회가 한국 선교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방향과 전략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독특한 도전들을 받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보스(Kurt Voss) 목사가 1958년 1월 김포공항에 공식으로 도착한 세 선 구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의 아내와 세 딸은 서울 집이 마련될 때까 지 도쿄에서 기다렸다가 몇 주 후에 한국에 왔다. 그는 “옛 중국 일꾼(old China hand)”의 한 사람이었다. “옛 중국 일꾼”이란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1949년 이후 중국에서 일어나 사건들 후에 강제로 중국을 떠난 서구의 외국 선 교사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홍콩, 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에 있는 다른 나라들에 다시 배치되어 선교사로 계속 활동하였다. 탄 4월 배에 세 딸 1 9 6 2년 의 들 부부와 그 보스 목사

보스 목사의 경우, 그는 처음에는 중국을 떠나 미국의 한 지역교회를 섬기 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었는데 한국에서 루터교 선교를 시작하는 팀 일원으로 다시 소명을 받았다. 그는 KLM과 함께 하는 동안 회장으로 일을 했다. 그는 4년 반을 한국에서 봉사하다가 1962년 4월에 그의 가족과 함께 배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들을 환송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천 항구에 갔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 때 배를 타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그들의 모습을 몇 장의 사진으로 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특별한 사진을 나는 찾을 수 없었다. 보스 목사는 그 후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KLM 동료로 서 그리고 이웃으로서 단지 8개월가량만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사실상 그들은 한남동 유엔 빌리지 주택 단지에서 살았는데 라우어 가족과 우리 가족도 같은 곳에 있었다. 그곳의 세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고, 서로 소리를 지르면 들을 수 있는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 언덕 꼭대기에서 말죽거리를 향해 남쪽으로 바라보면 아름다운 한강 이 보였고 그 주변 편편한 곳에는 논과 밭이 있었다. 그 당시 서울 도심에서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한강 제1교와 그 다리와 나란히 놓인 한강 철교가 전부였다. 하지만 유엔 빌리지 꼭대기에서 우리는 때때로 작은 배로 노를 젓 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강 건너 편으로 태우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보스 목사 가족과 짧은 시간 동안만 함께 지냈지만, 그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사려가 깊고 친절했다. 보스 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간 후 오하이오 주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로 사역을 계속하였다. 나는 1961년 한국을 향해 출발하기 전에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있 는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선교학교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그 때 나는 보스 목 사가 쓴 긴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 보고서에서 보스 목사는 미국의 LCMS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 현장에서 취한 선교 방식과 접근 방법에 대해, 특별히 중국인 목사들을 신학적으로 훈련시키는 일에 있어서 비판을 하였다. 그는 중국인 신학교육이 미국 LCMS의 신학생들에게 요구되는 학문적 수준 과 같아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별로 찬성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 다. 그 학문적 수준이란 성경을 희랍어와 히브리어 원문으로 읽을 수 있고, 뿐 1965년 바틀링 목사 부부와 네 자녀

만 아니라 영어와 독일어 신학 서적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몇 년 후 나는 미국에서 한 루터교 평신도연맹(Lutheran Laymen’s League: LLL) 총회에서 보스 목사를 만났다. 나는 그 때 다른 20여개 나라 에서 일하는 루터란아워 책임자들과 함께 그 총회에 초청을 받았었다. 보스 목사는 그가 속한 지역의 LLL의 목사 상담자로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한국 루터교회가 선교 40주년을 기념할 때, 보스 목사의 미망인과 세 딸 이 각각 한국에서 보낸 4년 반 동안의 회고를 적은 간단한 글들을 보냈다. 그 글들은 1998년 루터대학교 교수 논문집인 『신학과 신앙』 9집에 실렸다. 폴 바틀링(박덕인) 목사가 보스 목사가 떠난 후 KLM 회장이 되었다. 그 는 그를 알게 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늘 좋은 인상을 가지고 기억하게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가 방에 들어서면 그 방을 밝게 만드는 밝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한문학자”라고 놀리곤 했었는데,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가운데 한자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한국어 가정교사 중 하나가 유교 배경을 가지고 있는 성균관 대학교 학생이었 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바틀링 목사는 한국 루터교회를 위해 1958년부터 1975년까지 18년을 섬겼 다. 그는 보스 목사에 이어 KLM 회장으로 1962년부터 1970년까지 봉사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루터교회가 1970년부터 1971년까지 한국루터교 선교회라는 임시적인 이름으로 변천과정 중에 있을 때 지원상 목사와 함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 다. 그리고 1972년 옥수동 교회에서 열린 한국 루터교회 2차 총회에서 지원상 목사 가 총회장으로 선출될 때, 바틀링 목사는 부총회장겸 영문서기로 선출이 되었다. 그 는 재선이 되어 1975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그 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루터교 한국선교 15주년인 1973년 바틀링 목사 부부와 네 자녀

바틀링 목사는 행정적인 책임 이외에도 목회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는 데, 그는 아직 안수를 받지 못한 한국인 전도사나 준목과 함께 일하였다. 여러 번 그 는 당시 서울 역관동에 위치한 임마누엘 루터교회에서 책임목사로 봉사하였는데, 처 음은 지원용 박사가 1965년 왕십리에 있는 새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옮겨 갔을 때이 고, 1966년 그는 다시 지원상 목사가 일본에서 공부하기 위해 떠났을 때 임마누엘 루 터교회 책임 목사가 되었다.

바틀링 목사는 또한 1967년 1월에 시작한 중앙 루터교회의 창립 목사가 되었 다. 그는 지원상 목사가 도쿄에 있는 일본 루터교신학원에서 대학원 후 연구과정을 마치고 돌아 와서 목회를 재개할 때까지 중앙교회를 섬겼다. 1967년 지원용 박사가 세인트루이스의 컨콜디아 신학교에 객원교수로 초빙을 받아 갔을 때 바틀링 목사는 다시 임마누엘 교회를 맡게 되었다. 그 때 그는 1967년부터 김해철 목사가 안수를 받

KLM 수양관에서 옥수동 루터교회의 한 할머니와 이야기하고 있는 바틀링 목사

고 그 교회 목사가 되었을 때인 1971년까지 그 교회 책임목사로 일했다. 그러나 다시 김해철 목사가 1972년 옥수동 루터교회 담임목사로 옮겼을 때 바틀링 목사는 다시 그 교회 책임목사직을 맡게 되었다. 한 편 바틀링 박사는 1975년 6월 한국을 떠날 때 까지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임마누엘 교회 책임목사직을 맡게 되었다.

사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임시 기간이 끝날 무렵 임마누엘 교회는 서울 북 동쪽에 있는 도봉 지역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 때 나는 바틀링 목사에 이어 도봉교회 책임목사가 되었다. 나 자신 1975년부터 1986년까지 몇 형태로 그 교회를 위한 목회 사역에 참여하고 책임을 계속 맡게 된다.

바틀링 목사는 그가 한국 루터교회를 위해 남긴 현저한 유산과 함께 늘 기억되 고 존경을 받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읽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

센터에서 교회 서비스 터 루 제 국 링 목사와 1 9 7 5년 6 월 배 때의 바틀 예 별 송 진 가 의 네 자녀 , 그리고 그들 스 루 내 아 그의

한 말을 아주 잘했다. 나는 그를 “말쟁이”라고 놀리곤 하였다. 그가 모국어 영어를 사 용할 때 나는 그를 언변이 뛰어난 웅변가로 여겼다. 그는 좋은 단어와 사상들을 사용 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였고, 또 그의 설교는 감정적인 힘과 열정으로 넘쳤다. 바 틀링 목사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혹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이야기 를 들었을 때, 아주 특별한 자신의 방식으로 “믿을 수가 없어요 (UNBELIEVABLE!!!)”라고 외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과 바틀링 목사와 그의 아내 루스, 그리고 네 자녀들은 문자 그대로 옆집 이웃이었다. 그들과 우리는 연희동에 있는 KLM 사택에 같이 살았다. 나는 가끔 밤늦게까지 바틀링 목사와 함께 나눈 많은 만남과 대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점에 관련해 나는 종종 주기도문의 네 번째 간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 대해, 그리고 여기에서 마르틴 루터 가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변한 것을 생각한다. 루터는 아주 다양하고 긴 목록을 열거한 다음에 “좋은 친구들, 신실한 이웃들, 그리고 그 와 같은 것들”로 결론을 맺는다. 나는 루터가 특별히 “좋은 친구들”, “신실한 이웃들”을 언급하고, 그리고 그들을 특별한 하나님 은총의 선물로서 언급하 며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을 추가한 것을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가족이 바틀링 가족과 함께 나눈 특별한 관계 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내가 느끼기로 그들의 집은 특별한 방문객이 한국에 올 때마다 접대 본 부로 여겨졌다. 선교국 대표들이나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바틀링 목사 사모는 모든 손님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많은 음식을 준비하였다. 다른 선교사 사모들도 그러한 접대에 참여하였고, 번갈아 그런 손님들을 각자의 집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바틀링 목사집이 그 러한 접대를 위한 주요 본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바틀링 목사는 또한 한 편으로 미국 육군 예비군의 군목으로 봉사하였 다. 그는 1964년 고향에서 보낸 휴가 마지막 날에 군목 중위로 임관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용산 미군 기지에서 정기적으로, 주로 월요일에 시행되 는 미 육군 예비군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1975년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도 바틀링 목사는 군목 중령으로 은퇴할 때까지 미 육군 예비군 봉사를 계속 하였다. 1975년 바틀링 목사가 한국을 떠날 때 그는 미국 오레곤 주 포트랜드 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로 소명을 받았다. 후에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 루터교회의 목사로 5년간 사역하였다. 공식 은퇴 전 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직분은 미국 복음루터교회(Evangelical Lutheran Church in America: ELCA) 교단의 미국 북서쪽 한 지역 감독이었다. 그

바틀링 목사 막내 딸 “허 니” 작별 인사 사 인을 들고 있 바틀링에게 는 브루스 리 히터

것은 대단히 명예롭고 책임 있는 자리였는데 그가 얼마나 높은 존경을 받았 는지를 확인하는, 그리고 그의 지도력을 인정하는 또 다른 하나의 증거였다. 공식 은퇴 후에 바틀링 목사 부부는 전 세계를 두루 여행하였다. 그 해 외여행 중 그들은 몇 번 한국을 방문하였었는데 18년 동안 그들이 살았던 곳에서 다시 그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내가 한국 루터교회 총회장을 지낸 고 지원상 목사와 함께 교회 관련 회의 참석차 해외를 여행하는 도중 우리는 여러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예를 들면 남미의 브라질, 유럽의 스위스와 헝가리, 그리고 미국의 여러 다른 주에서 그들을 마주칠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바틀링 목사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꽤 흥미 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바틀링 목사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나이지리아 복음루터교회(ELCN) 의 준목 선교사로 1954년부터 1956년까지 2년을 보냈다. 그것은 세인트루 이스 컨콜디아 신학교의 학생회가 재정 지원을 하는 한 특별한 해외 선교 프 로그램과 관련된 것이었다. 1984년 11월에 나는 지원상 총회장의 통역으로 나이지리아 오봇 이딤 (Obot Idim)에서 열린 국제 루터교회 협의회(Internation Lutheran

1954년 아프 리카 나이지 바를링 목사 리아에서 를 위한 언어 도우미로 일 사람과 198 했던 4년 11월에 함께 사진을 찍은 리머 목사

Conference)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오봇 이딤은 퍽 오지에 있는 시골이 었는데 거기에 교회 본부와 ELCN의 신학교가 있었다. 어느 날 교회 지도자 전체 그룹이 몇 지방 마을과 교회들을 방문하게 되 었다. 한 마을에 왔을 때 한 사람이 우리를 그의 집 안으로 초대하였다. 우리 는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집 벽에 바틀링 목사가 그 사람과 함 께 찍은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그 사진은 30년 전에 찍은 것이었 을 것이다. 바틀링 목사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외쳤던 큰 목소리는 아직도 내 귀에 들리고 있다. 그 사람은 바틀링 목사가 준목으로 그곳에서 일했을 때 전도사였고, 그리고 언어 소통을 도와 준 사람

별예배에 에서 가진 송 회 교 터 루 제 한남동 국 바틀링 목사 를 하고 있는 사 인 별 작 서

이었다. 그 여행 때 지 총회장과 나는 한국에서 직접 만든 놋쇠 십자가를 가지고 갔었다. 그 십자가 전면은 삼위일체 하나님 상징과 한국어로 쓴 주기도문으 로 장식되어 있었고, 후면은 주님의 만찬 상징과 한국어로 쓴 제정의 말씀으 로 장식되어 있었다. 우리는 목에 걸 수 있도록 황금 리본을 단 그 십자가 하나를 그 사람에게 주었다. 그는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 우리 역시 그에게 그 십자가

바틀링 가족이 미국에서 보낼 휴가를 위해 1963년 6월 출발 준비를 할 때 라우어 목사와 리머 목사 집에 잠깐 들르는 모습

를 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기뻤고 자랑스러웠다. 참으로 놀라운 우연이었 다! “믿을 수가 없어요!!!”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 십자 가를 목에 건 그 사람의 사진을 찍었다. 1975년 6월 바틀링 목사와 그의 가족이 한국을 떠난 날은 슬픈 날이었 다. 한국 루터교회는 한남동에 있는 국제루터교회 서비스 센터에서 특별한 송별 예배를 가졌는데, 한 방에는 참석자들이 입석으로 서 있어야 했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의 지도력과 봉사가 맺은 결실과 함께 현저한 유산을 남겼다. 그는 한국을 떠난 후에도 성공적인 목회 사역과 교회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 주었다. 은퇴 후에까지도 그는 2009년 9월 소천하기 까지 그가 그렇게도 충성되고 훌륭하게 섬겼던 한국 루터교회의 교인들과 목

1963년 6월 바틀링 목사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간 몇 가족과 친구들

사들과 가깝고도 따뜻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메이나드 도로우(도로우) 목사는 1958년 1월에 한국에 발을 내딘 첫 선교사들 중 세 번째 사람이다. 도로우 목사는 초기부터 회계를 맡아 수고 했다. 그는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그 타이틀을 유지했는데, 장기 선교사로 KLM과 LCK와 함께 한 40년 동안 그는 그 직책을 임명직으로 혹은 선출직으로 수행하였다. 바틀링 목사와 함께 그 또한 확실히 한국 루 터교 선교 역사에 있어서 항상 기억될 뛰어난 유산을 남겼다. 1977년 메이나드 도로우 목사, 그의 아내 셜리, 그리고 세 어린 자녀 메리, 피터 , 사라. 가장 나이가 많은 존은 당시 미국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종종 도로우 목사에게 그가 김포 공항에 도착 시에 썼던 모자와 신발을 역사적 보물의 가치를 가진 기념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내 가 알기로는 그는 아직 나의 제안을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도로우 목사가 선교사로 일하면서 남긴 많은 공헌들 가운데 특별히 의 미 있는 것으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신학 교육 분야에서 그가 보인 열심과 지도력일 것이다. 물론 루터교 신학원(Lutheran Theological Academy: LTA)을 시작 하고 첫 원장이 되신 지원용 박사의 참여와 지도력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 다. LTA는 1966년 3월에 지원용 박사와 네 명의 학생으로 제동 빌딩 4층 에서 첫 공식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 박사가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 객원교수로 1966-1967 대부분을 보냈기 때문에 그의 직접적인 참 여는 불가피하게 제한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 해 후 1968년 여름에 지 박 사는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 LWF) 아시아 총무 로 소명을 받아 제네바 스위스에서 7년 동안 일하게 되었다. 1997년 12월 한국 정부의 교육부가 루터신학대학교(Luther Theological University: LTU)라고 새로 교명을 바꾼 우리 학교를 공식적 인 학위인정 대학교로 승인하였을 때까지 몇 번의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나 는 도로우 목사가 그 대학교의 첫 총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 취임식은 1998년 3월 첫째 주에 시작된 첫 학기 개강예배 때 열렸다.

1962년 6월 휴가를 떠나기 위해 김포공항에 간 도로우 목사, 그의 아내 셜리, 그리고 세 자녀 존, 메리, 피터

도로우 목사가 한국 루터교회를 40년 동안 섬긴 후에 공식적으로 은퇴 하였을 때, 나는 그의 총장의 직위가 그의 봉사에 걸 맞는 마감이라고 생각 하였다. 1998년 첫 학기 마지막 무렵인 6월에 은퇴하게 되었을 때 도로우 목사는 한국 정부로부터 특별한 훈장을 받았는데, 그것 역시 대단히 그의 봉사에 마땅한 적절한 것이었다.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 간 후에도 도로우 목사 부부는 한국 루터교회와 루터대학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수 년 동안 그들은 정기적으로 단 기 선교사로 자원, 한국을 방문하여 몇 개월 동안 머물며 루터대학교에서 가르쳤고 또 지역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1958년부터 1966년까지 KLM 초기에 도로우 목사는 한국에서의 루 터교 선교 시작을 위해 많은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공헌을 하였다. 그는 참 으로 중요한 KLM 팀의 일원이었고 뛰어난 신학자였다. 그는 목사 안수를 위해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기본 신학교육을 마친 후 계속해서 대학원 공부를 해 신학석사(Master of Sacred Theology: S.T.M) 학위를 취득하였다. 후에 그는 또한 그의 모교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Doctor of Divinity: D.D.) 학위를 받았다. 그것 역시 그의 봉사에 마땅한 적절한 인정이었다. 1975년 11월 브라질에 있는 한 회의 에 참석 차 가는 도중 바틀링 목사를 방문하기 위해 오레곤 포트랜드에 들른 지원상 총회장과 리머 목사

나는 항상 도로우 목사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전혀 거미줄 을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하고 명확한 사고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동료가 대단히 훌륭한 개요를 갖춘 좋은 발표를 했다고 생각한 몇 경우가 있 었는데, 그러한 경우에도 도로우 목사는 더 숙고한 후에 몇 가지 점을 다시 조정해 원래 발표보다 훨씬 훌륭하고 더 논리적이고 더 효과적인 결과물을 만들곤 하였다. 도로우 목사는 또한 바틀링 목사와 마찬가지로 KLM과 LCK의 지역 교 회들을 위한 목회 사역에 책임목사로서 중요한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자 세한 것을 다 다룰 수 없지만 도로우 목사가 다양한 시기에 책임 목사직을

1993년 바틀링 목사와 그의 아내

루스

맡았던 지역교회는 최소한 6개였다. 왕십리교회, 옥수동교회, 대조동교회, 영등포에 있는 남부교회, 방배동교회, 그리고 경산교회가 그 교회들이다. 내 아내 조안과 내가 1961년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했을 때 도로우 가 족은 서울 북아현동 지역의 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은 새로 지은 집이 아니라 일본식 집이었고 문지방이 매우 낮았다. 나는 최소한 한 번 이상 그 문지방에 세게 부딪혀 내 머리 피부가 그 문지방에 묻게 된 것을 기억한다. 아마도 그 때의 경험과 1961년 서울역 건너편에 있었던 KLM과 루터란 아 워 사무실 2층 계단 중간에 가로질러 있었던 콘크리트 빔을 머리로 받았던

1988년 한국 선교사 봉사 30년을 맞이하여 감사패를 받고 있는 도로우 목사 부부

경험이 지금 내가 대머리가 된 이유 중 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번 호에서 특별히 도로우 사모에 대한 언급을 생략할 수 없다. 셜리 도로우는 인디애나 주 발파라이조(Valparaiso) 대학교에서 디코니스 (deaconess) 교회사역자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네 자녀를 두었는데 그 들 대부분 KLM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가족의 일원으로 연희동 지역에서 성 장하였다. 나의 두 자녀들은 지금까지도 한국에서의 다른 선교사 자녀들을 미국에 있는 사촌들보다도 훨씬 가까운 사이로 여기고 있다. 그들의 우정과 사귐의 유대감은 지금까지도 오히려 더 강하게 남아 있다.

1989년 루터신학교 사무실에서 도로

우 목사

도로우 사모가 한국에서의 루터교 사역에 공헌한 역할들은 현저하고 독특한 것들이었다. 그 중 몇 가지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공헌을 언급하자 면 그녀는 뛰어난 작가였고 또 뛰어난 사진사였다.


그리고 그 재능을 잘 사용해 한국에서 루터교 사역을 알리고 증진시 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LCK와 여러 다양한 사역들, 특별히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알리는 국제 뉴스 기자와 서기로서 그녀가 공헌한 역할에 대 해 그녀는 특별한 감사와 인정을 받아야 마땅하다. 1989년에 루터신학교 신갈 캠퍼스에서 도로우 목사의 60회 생일(미 국 나이 계산법에 따라)을 축하하는 환갑잔치가 열렸다. 그 잔치는 전체 대학 캠퍼스가 참여한 멋있는 축제였다. 그 잔치에 도로우 목사의 작은 딸 1990년 도로우 목사 부부

사라 도로우가 참석했었다. 또한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었던 윌리암 댕커 박사도 참여하였는데, 그는 나의 신학교 시절 교수였고, 또 1962년 제동 빌딩을 구입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LCK의 오랜 친구였다. 캠퍼스 본관 로비에 그에 대한 감사의 글이 새겨져 있다. 루터신학대학교 캠퍼스에서 2000년 10월에 열린 또 다른 하나의 뜻 깊고 마땅히 가져야 할(well-deserved) 축제는 도로우 사모의 비헤른 봉 사상 수상을 축하하는 잔치였다.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할”이라고 말한 것 은 도로우 목사 부부의 삶과 사역이 특별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한국 사람들을 위한 돌봄과 배려와 동정심에 있어서 뛰어난 것이었기 때문이

2000년 10월 도로우 사모가 비헤 른 봉사상을 수상하였을 때 도로우 목사 부부와 리머 목사 부부

다. 도로우 목사 부부 두 분이 한국에서 행한 복음을 위한 수고에 대해 그 들은 사랑과 존경으로 항상 기억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그 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말과 행동을 통해 세상의 구세주이며 주님 되시 -끝-

는 예수 그리스도를 웅변적으로 증거하였다.

16호를 기대해 주세요

1989년 10월 도로우 목사의 환갑 , 60세 생일 축하 잔치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

도로우 목사 부부, 바틀링 목사 부부, 리머 목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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