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기획
다시 돌아온
1 6 9 1 라 하 답 응 고하며...' 회 을 년 0 4 의 서 한국에 '이무열 선교사,
우리루터란에 연재되었던 이무열(Hilbert Werner Riemer) 선교사님의 '한국에서의 40년을 회고하며'의 13회 연재 되었었고, 이후 선교사님께서 새로이 글을 작성하셨습니다. 번역은 박일영 교수님이 해 주셨습니다.
2016
기독교한국루터회총회 교회협력국
1961
제16호
한국에서의 40년을 되돌아보며 (자서전적 회상) 힐버트 리머 박일영 교수 옮김
이번 호 자서전적 회상 16회에서 나는 특별히 한국 루터교 선교부(KOREA LUTHERAN MISSION: KLM)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들: 즉 그 회원들과 회의들에 초점을 맞추어 계속 글을 쓰려고 한다. 나는 다시 주로 1958년, 혹은 1961년부터 1966년까지의 초기시기를 내 이야기의 주요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할 것이다.
15회에서 나는 한국에 온 첫 세 선교사, 즉 크루트 보스 목사, 폴 바틀링 목사, 그 리고 메이나드 도로우 목사에 대한 기억들과 회상들을 함께 나누었다. 이번 호에서 나는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 중 네 번째 선구자인 지원용 박사에 대한 몇 기억들과 회상들 1968년 여름 제네바로 떠나기 전 리머 선교사 집에서 지 박사와 리머 목사
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KLM 형성 초기에 지원용 박사의 역할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 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에 있어서 미국인 동료 선교사 들이 결코 따라 잡을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1958년 9월 그의 모국으로 돌아오 기 전 10여 년 동안에 지 박사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참으로 모국으로 돌아 온 순 간부터 바로 “땅을 박차고 달릴 수” 있었다.
지원용 박사의 삶과 일과 사역에 대해 알 수 있는 가치 있고 필수적인 두 권의 중요 한 책이 있는데, 두 권 모두 지 박사가 저술한 것이다. 두 책 모두 한국어뿐 아니라 영어 로도 번역되었다. 첫 번째 책은 1988년 미국 컨콜디아 신학교가 컨콜디아 신학교 모노 그래프(전공서적) 제1호로서 출간한 『한국루터교회사: 회고와 전망』이란 제목의 책이 다. 두 번째 책의 제목은 『나의 나 된 것은: 편운 지원용 박사 자서전』인데, 이 책은 미시 간 주 맥콤의 루터란 헤리티지 파운데이션에 의해 2004년 영어로, 그리고 한국에서는 기독교 한국루터회에 속해 있는 컨콜디아사에서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나는 그 책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정보들을 단순히 이번 호에 옮겨 적을 생각이 없 다. 오히려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에서 왜 지원용 박사가 한국 루터교회를 위해 “위대한 1963년 9월 서울 신당동 지 박사 집에서 열리 한 생일 잔치에서 선교사 사모들과 아이들을 대 접하고 있는 지 박사 사모(김애경)
분”이었는지 그 이유에 대해, 그리고 한국 루터교 선교 초기에 선구자요 지도자로서 공 헌한 뛰어난 그의 역할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그 점에 있어서 1958년 과 1968년 사이의 10년 동안의 기간은 매우 중요하다.
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지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내 아내와 내가 1961년 9월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그는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된 후 외국 유학 허락을 받고 미국에 건너 간 첫 번째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학생 비자를 받고 1948년 미국에 도착한 후에 그는 수 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세인트 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에 오게 되었고, 마침내 1957년 거기에서 박사학위를 받았 1964년 여름 한남동에 있는 라우어 선교사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 손잡이를 돌리고 있는 지 박사
다. 그는 또한 1948년부터 1958년 한국에 돌아오기까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비롯해 미국 내 여러 다른 고급 교육기관에서 수학을 하였다.
나는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에 1956년 9월에 입학해 1961년 6월에 졸 업하였다. 그러나 나는 지 박사와 같은 시기에 캠퍼스에 있지 않았다. 내 아내와 내가 한국에 도착한 지 그렇게 오래지 않아 나는 지 박사를 당시 덕수궁과 서울시청 건너편 에 위치한 덕수빌딩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나는 그 때 그 만남을 지금도 기 억하고 있다. 지 박사는 KLM이 당시 하고 있던 여러 활동들에 대해 간단한 브리핑을 해 주었다. 그 활동들 중 하나가 『새생명』이라고 하는 월간 잡지 출판이었다. 그는 내 게 매 월 정기적으로 글 하나를 영어로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 해 그 잡지에 싣자는 계획이었다. 나는 그 책임을 맡기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예언자 의 소리”라는 제목 하에 매 월 글을 썼는데, 그 일은 1966년 휴가를 위해 미국 고향으 로 돌아가기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KLM 문학부에서 대부분의 번역 작업을 한 직원이 배한국 씨였다. 그는 신 학교육도 받고 학문적으로도 재능이 있는 KLM 직원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배한국 씨는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교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그 후 잠시 한국으로 돌 아 왔다. 그러나 몇 년 후에 그는 다시 캐나다에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 다. 캐나다에서 그는 박사 학위공부를 마치고 그 나라에서 그의 여생을 살았다.
나는 종종 배한국 씨와 지 박사와의 관계가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와 필립 멜란히톤 관계와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멜란히톤은 뛰어난 학자로서 마르틴 루터와 관련해,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 발전 과정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 해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아무튼 그들은 좋은 관계로 함께 일을 했다. 그리고 나 는 배한국 씨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기로 결정하였을 때 지 박사가 매우 실망하였다 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1967년 여름 위스콘신 사와노 호수에서 바틀 링 선교사의 아들 빅터(Victor)가 운전하는 트 랙터에 매달린 트레일러에 타고 있는 지 박사
지 박사는 미국 내 몇 다른 대학교에서 추가로 공부를 하였지만, 그 외에도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일 년 동안 대학원 후 연구를 하였다. 그 모든 기간 동 안의 공식적인 연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특별히 루터교회를 위 한, 더욱 특별히 한국 루터교회를 위한 그의 미래의 사역과 섬김을 준비하는 과정이 되었다.
또 다른 의미 있는 일은 지 박사가 모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미네소타 세인트폴 에 있는 여호와 루터교회에서 가진 목회 사역의 경험이었다. 지 박사는 1957년 6월 에 김애경 씨와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1957년 8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어네스트 드 루스(Ernest Drews)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여호와 루터교회 부목사로 부임하게 되 었다. 당시 그는 32세였다. 드루스 목사 부부는 좋은 사람들이었고 지 박사의 가까운 친구,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들은 또한 특별히 LCK 신학교육 프로그램을 위해 많은 재정적인 도움을 준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신갈에 있는 루터대학교 정문에는 1977년 여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근처 에 있는 “올드 브리지”에서 지원용 박사
드루스 목사 부부를 기념하는 패가 새겨져 있다. 내 사진이나 슬라이드 어디 엔가 드 루스 목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지게를 지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그분들을 모시고 한국의 시골 마을들을 여행하는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지 박사가 고도로 훈련되고 그래서 독특한 자격을 가진 인재였다는 사실이 LCMS 지도자들과 선교부 책임자들로 하여금 한국 루터교 선교에 관심을 갖게 하였 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상 한국에서의 루터교 선교는 75년이나 늦게 시작 되었다. 한국 개신교 선교는 1885년 부활절에 인천에 도착한 장로교 선교사 호레이 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한 편 1832년 한국 해안에 도착했던 칼 귀츨라프(Karl Guetzlaff)는 루터교 목사였지만, 그는 오래 한국에 머물지 않았 하이델베르크 “올드 브리지”에 서 있는 한국 루터교회 총회장 지원상 목사와 지원용 박사
다.
한국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초반에는 미국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그 당시 루터교 교인들이나 지도자들도 한국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한 국은 그들의 레이더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LCMS 경우 그들은 꽤 오랫동안 아시아 지역에서 인도와 중국 선교에 참가해 왔었다. 루터교와 관련된 미국 내 다른 교단들 이나 유럽, 특별히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많은 루터교 선교 단체들은 일본과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1958년 1월과 9월 네 명의 루터 교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어떤 공식적인 루터교 선교활동도 한 국에서는 전혀 없었다. 사들 서 루터교 목 교 수양관에 터 루 국 한 1 9 7 3년 박사 하고 있는 지 에게 강연을
지 박사는 가끔 그 사실을 안타까워하곤 했었다. 어떻게 전 세계 루터교회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에 관심을 갖지 못했을까? 그 질문 자체가 선교 전략을 수립 하 는데 있어서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야 하는 과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초기 KLM 선 구자들은 참으로 독특한 도전들에 직면하였다! 한국 선교 현장에 늦게 등장한 “신참” 지각생인 KLM이 어떻게 적절하고 효과적이고, 그리고 참으로 이 땅에서 참 하나님 선교를 진척시킬 수 있는 방식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KLM 회원들이 가졌던 폭 넓으면서도 집중적인 연구의 토론의 주요 주제였다.
지원용 박사 부부(1987년 여름)
물론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에서 세계2차 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된 사 건이 큰 변화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 전쟁이었다. 그 전쟁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마침내 1953년 7월에 조인된 휴전 협정을 끝 났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갈등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어 세 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기를 거쳐 한국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국제 뉴스에서 한국은 정기적으로 다루어진다. 하지만 뉴스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이슈 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뿐만 아니라 휴전 1988년 중앙교회에서 열린 한국 루터교 선교 30주년 기념예배에서 지원용 박사 부부에게 감 사패를 주고 있는 지원상 총회장과 리머 선교사
협정이 조인된 이후에도 한국에서 봉사했던 수만 명의 군인들로부터 나오는 관심사 와는 사뭇 다르다. 한국에서 시간을 보낸 친척들과 친구들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 에 그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한국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악을 선용하신다.” 잘 알려진 성경 개념이다. 창세기 50장에서 요셉 이 그의 형들과 화해하는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2차 세계대전 때문에 LCMS 가 일본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처럼, 한국 전쟁이 선교 후보지로서 한국이 부각 되었다.
그것은 또한 LCMS가 국제적으로 선교활동을 더욱 크게 확장하는데 관심을 1993년 6월 지원용 박사와 지원상 총회장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컨콜디아 신학교를 1961년에 졸업한 내 동기들 185명 가운데 15명이 해외 선교사 소명을 받아들였다. LCMS는 1936년 이래 매우 적은 수의 나라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나이제리아나 인도 같은 나라에서만 선교활동 을 하였다. 모든 친구들이 1945년을 전후에 LCMS가 선교를 개시한 나라들의 선 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전쟁 후 그 시기에 LCMS 교인들과 지도자들은 새로운 지 역에서 선교를 시작하는 것에 매우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3년 LCMS 총회에서 한국 선교를 승인하는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결의안 이 통과되었다. 몇 명의 한국인 학생들이 LCMS 학교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1984년 지원용 박사에게 감사패를 주고 있는 리머 선교사
1957년 LCMS 총회에서 보다 상세한 내용을 담은 보다 특정적인 결의안이 통과 되었다. 1957년에 그 결의안이 채택된 것은 단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때 선교국 지도자들은 신학적으로 잘 훈련을 받고 이미 문화나 언어 면에 있어서 준비가 되어 있는 지원용 박사가 있어서 그를 통해 즉시 한국 선교를 시작할 수 있 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자세한 것을 여기에서 다 다룰 수 는 없지만 선교국은 지 박사를 한국의 현지인 선교사로서 소명하였는데, 여기에는 특정 과제도 함께 주어졌다. 그것은 한국에서 루터란아워 라디오 방송 선교를 시작 하는 일이었다. 루터교 평신도 연맹이 그의 봉급 중 일부를 담당할 것이었다. 그러 한 방식으로 지 박사는 한국 루터란아워(KLH)의 창립자이자 첫 국장(Director)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일에 놀라운 에너지와 상상력과 창의성과 효율적인 행정력 을 보였다.
2004년에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은 1907년 “대부흥운동” 백 주년을 맞아 특별 히 LCK와 관련된 두 가지 선교 사역을 선정하여 감사를 표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한 국 루터란아워 미디아 선교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원용 박사의 공헌으로 돌려야 마 땅할 것이다.
KLM 초기에 “무엇을” “어떻게”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 고 토론하는 그 때에, 그 특별한 선교 맥락에서 우리는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결 정하였다. 한 편 한국에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다른 교파들을 답습하고 그들 과 경쟁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비칠 것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또 다른 한 2003년 11월 지 박사에게 그의 자서전 한국어 출판을 축하하는 리머 선교사
편 한국의 기독교 전체의 성장을 위해 지원하고 공헌하는 선교 사역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질 것이라는 것에도 관심하였다. 지 박사는 그러한 도전에 긍정적이고 창 의적이고 효과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위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사실 다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것이 인생이 다”라는 프로그램을 고안하기 전에 지 박사는 시간을 갖고 조사하고 기획을 하였다. 이것은 매 주 30분간 방송되는 프로그램으로서 다큐멘터리 형식의 드라마였는데 당 시 이미 유명했던 주태익 씨가 각본을 썼다. 그 작품의 질은 매우 우수했다. 참여한 성우들은 모두 일급 성우들이었다. 첫 프로그램이 1959년 HLKY 기독교방송 (CBS)을 통해 방송되었다. 불과 수 년 후인 1963년에 “이것이 인생이다” 프로그램 은 종교방송이든 일반방송이든 전체 라디오 프로그램 중 세 번째로 가장 유명한 프 2003년 11월 그의 자서전 한국어 출판기념 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지원용 박사
로그램으로 인정을 받았다.
지원용 박사의 이러한 창의적인 지도력 하에서 그 초기 시절에 다른 선교 사역 들도 시작되고 발전되었는데, 그것들은 한국에 있는 전체 기독교를 위한 참으로 귀 한 사역들이 되었다. 방송 마지막의 “광고”는 청취자들에게 가까운 교회에 참석하라 고 권면하는 메시지였다. 기독교 통신강좌(Christian Correspondence Course: CCC)를 시작한 후에 그 자료를 청취자들에게 무료로 보내 주었는데, 그들은 먼저 KLH/KLM 본부에 신청을 하여야만 했다. 통신강좌 기본 단계는 기독교의 근본 가 르침을 다루는 12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권 마지막에는 공부를 마친 후 다시 본부에 보내도록 간단한 퀴즈를 첨가하였다. 퀴즈 질문지가 완성된 후에 CCC 사무 실에 보내지면 그것을 직원들이 채점을 한 후 그 다음 권을 등록한 사람들에게 발송 2001년 여름 지원용 박사 부부와 리머 목사 부부
해 주었다.
CCC 프로그램은 처음에는 라디오 방송 후속 프로그램으로 개발되었다. 방송 을 들은 사람들이 기독교 가르침을 더 알기를 원하면 CCC 교재를 신청하도록 격려 한 것이었다. 컨콜디아사라는 이름으로 문서 선교가 시작된 것은 1959년 8월 출판 사 인가를 받은 후였다. 다시 지 박사의 창의적인 지도력 밑에서 월간지 『새생명』은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기독교 통신강좌 기본 과정을 마친 사람들을 위한 후속 자료 가 되었다.
그 초기 시절에는 최근 수료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생명』 다음 호에 실어 그 과정을 마친 것에 대해 격려와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한 과정을 끝까지 마친 사람 들에게는 그들의 이름을 새긴 고급스럽게 인쇄된 수료증이 주어졌다. KLM 본부 직원들은 또한 수료자들에게 한국어로 번역된 루터의 『소교리문답서: 해설서』 책을 선물로 보냈다.
말할 것이 더 많이 있지만, 그 라디오 프로그램과 그 후속 기독교 통신강좌 프 1994년 12월 지원상 총회장, 지원 용 박 사와 함께 있는 리머 선교사
로그램에 대한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성공은 지원용 박사가 남긴 여러 뛰어난 유산들 중 하나로 역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번 호에서 지 박사에 대해 글을 쓰면서 이것은 다음 호의 기억과 회상 속에 서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KLM 초기 역사의 제한된 맥락 가운데서 도 이야기해야 일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 이번 호를 마감하면서 나는 1973년 1월 한국 루터교 선교 15주년을 맞아 지원용 박사에게 주어진 감사장을 소개하고자 한 다. 그 때 지 박사는 1968년부터 맡게 된 LWF 아시아 총무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행 일정을 조절해 서울 왕십리 교회에서 열린 그 행사 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 감사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감사장
루터대학교 신갈 캠퍼스 정문에 새겨 져 있는 드루스 목사 부부 기념패
1958년 한국에 루터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선구자 역할을 담당하신 것에 대해; 한국 루터교회의 존재와 사역을 위해 든든한 토대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 그의 섬세한 신학적 통찰력에 대해; 작가, 번역가, 신학자, 학자, 교육자, 그리고 교회 사역자로서 한국 루터교회를 위한 다 년간의 충성되고 뛰어난 봉사에 대해; 매스 미디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 사역을 위한 창의적이고 뛰어난 공헌에 대해; 한국 루터교회 발전을 위해 매우 의미 있는 공헌을 한 그의 다양하고도 위대한 지도력에 대해;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신실하게 증거한 것에 대해; 가치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 신사,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준 것에 대해;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군으로부터 루터교 장 병 기념 도서관을 위해 받은 편지 들과 다른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는 지 박사
우리와 함께 한 그의 사역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미래의 사역에서도 함께 하실 것을 믿는 확신으로 지원용 박사님에게 이 감사장을 드립니다.
1973년 1월
레오나드 폴 바틀링 목사
대한민국 서울
한국 루터교선교부 회장
17호를 기대해 주세요
글 이무열 변역 박일영 편집 최석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