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시대, 동학으로부터 배우는 새로운 삶, 사회,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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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차

모 심 과 살 림 포 럼

전환의 시대, 동학으로부터 배우는 새로운

삶·사회·문명

일시 2014년 4월 11일(금) 오후 2시~6시 장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


2014년 오늘 우리는 경제 사회 생태적 위기가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곳곳에서 새로운 삶과 사회에 대한 열망이 돋아나는 문명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120년 전 조선도 시대적 전환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갑오동학혁명이 있었습니다. 동학혁명 120주년을 즈음하여, 후천개벽의 열망을 실현하고자 했던 동학의 사상과 운동을 통해 오늘 ‘우리의 길’을 다시 묻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동학은 지배계급과 외세에 저항한 민중운동, 민족운동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와 함께 동학은 천민과 여성과 어린이, 나아가 물건마저도 존귀하게 여겨 받드는 살림운동이었습니다. 억압과 죽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재구성하는 개벽운동이었습니다. 모심과살림연구소는 동학을 통해 문명전환과 새로운 사회운동의 길을 탐색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향한 열망을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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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제1부 특강 14:00~15:00 “갑오년에 되돌아본 개벽의 꿈” _ 4 박 맹 수 | 원광대 교수 ·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제2부 토론회 15:00~16:35 주 제 발 표 ‘여성’의 눈으로 본 동학,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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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광순 | 한의사, 빛사람수양회 대표

동학의 ‘깊은 마음’과 문명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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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용 휘 | 한울연대 공동대표

동학의 ‘개벽운동’과 새로운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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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요 섭 |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16:30~17:30 지 정 토 론 윤 기 돈 | 녹색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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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혜 정 | 마음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황 선 진 | 밝은마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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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18:00 전 체 토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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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민중전선과 민족전선’을 넘어 ‘생명전선’으로1) -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에 즈음하여

박맹수 | 원광대 교수

1. 외재적 요인에서 내재적 요인으로 2014년 갑오년 첫 새아침을 경주 용담에서 맞이했다. 경주 용담은 1860년에 수운 최 제우(1824-1864) 선생이 동학을 창도한 곳으로, 갑오 동학농민혁명은 바로 이 동학을 기반으로 일어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한 민중운동이었다. 혁명은 결코 사상이나 조직 없이, 그리고 오랜 준비 없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120년 전의 동학농민 혁명은 바로 수운 선생이 창도한 동학을 그 사상적 뿌리로 하고, 다시 해월 최시형 (1827-1898) 선생의 34년에 걸친 동학 포덕활동, 즉 동학 접포 조직의 전국화와 핵심 지도자 양성을 기반으로 삼아 전개되었다. 1894년에 조선특파원으로 주재하고 있던 한 일본인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는 1,052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중에 서 최소 4분의 1에서 최대 3분의 1이 혁명 대열에 참여했다. 2백만에서 3백만에 이르는 민초들이 보국안민(輔国安民)을 기치로 한 혁명 대열에 참여했던 것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근대적 교통통신망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 대다수 민초들이 문자를 제대로 읽고 쓸 수 없었던 시대, 거기에다가 신분제를 근간으로 한 유교적 지배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지배하던 전통사회에서 어떻게 몇 백만의 민초들이 비일상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혁명 대열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배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1) 이 글은 『녹색평론』 2014년 3-4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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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의 동학 성립과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이야기 할 때, 종래의 통설은 밖으로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안으로는 삼정문란이 중요한 배경 이었다고 강조해 왔다. 조선이라는 나라 안팎의 상황이 동학 창도 및 동학농민혁명을 촉 발시킨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역사 발전의 동력을 밖에서 찾는 타율성론(他律性論)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이같이 외재적 요인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동학사상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것 으로 해석하고, 동학농민혁명 역시 당시의 사회구조적 모순이 폭발한 결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동학을 창도하고 동학농민혁명이 촉발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적 영 위, 그 주체적인 영위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독자성과 보편성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서 성립된 대항 이데올로기”라거나, “동 학농민혁명은 조선후기 민란의 연장선상에서 그것을 집대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 장은 바로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이 지니고 있는 주체성과 보편성을 애써 외면하는 잘못된 견해라 할 수 있다. 올해는 1860년 동학 창도로부터 155년이 되는 해이자, 그 동학을 창도하였다가 ‘좌도 난정(左道乱正)’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수운 선생의 순도 150주년이 되는 해이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뜻 깊은 해를 맞이하여 선결되 어야 할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래 동학을 바라보던 시선을 전면적으로 바꿀 필 요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 발전의 주된 동력으로써 외적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외재 적 요인 중시 태도에서 벗어나 내재적 요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로 코페르니쿠스적 방향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지금이 아닐까 한다. 즉, 동학 창도 및 동학농민혁명의 역사 적 배경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라도 동학이란 파천황적 사상을 만들어내고, 동학농민혁 명이란 거대한 민중혁명운동을 불러일으킨 우리 내부의 주체적 힘, 주체적 문제의식이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중시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그 주체적 힘, 주체적 문제의식의 일단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자. 임진,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조선후기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 데 하나는 종래의 주자학 일존주의를 대신하여 다양한 사상적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한 다는 점이다. 주자학에 바탕한 기존 지배체제와 그 지배이념이 일종의 해체기를 맞이하 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미륵신앙과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비결신앙의 유행, 서학(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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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전래와 그 급속한 전파 등이 바로 그런 사회현상을 대표하고 있었고, 거기에 더하 여 경판본과 완판본으로 대별되는 한글 고대소설의 보급이라든지, 판소리의 유행 등은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신분제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 는 민초들의 사상적 지향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사회적 흐름 속에서 더욱 주 목할 만한 움직임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미륵신앙이나 『정감록』 등의 반주자학적 사상에 의지하여 모순투성이인 기존 체제를 타파하려는 변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조선후기 민초들의 반체제운동 자료를 담고 있는 『추안급국안(推案及 鞫案)』이란 역사기록 속에 미륵신앙과 『정감록』 등의 비결신앙에 기초한 비밀결사들이 조선왕조에 반기를 든 사례가 무수히 등장하는 것이 그 구체적 증거들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지배이념으로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주자학을 대신한 다양 한 사상적 움직임이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기존 지배체제를 비판하거나 기존 체제를 변 혁하려는 민초들의 저항적 움직임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를 일러 학계는 조선후기야 말로 “민이 역사의 주체로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대” 또는 종래 역사의 주체 이면서도 역사의 객체로 억압받고 소외되어 왔던 민중이 ‘변혁주체로서 자기인식을 명확 하게 갖기 시작하는 시대“로 설명한다. 요컨대, 조선후기에는 민이 역사의 주체로서 전 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1860년, 수운에 의한 동학 창도는 조선후기 이래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민중의식의 성장’을 총괄하는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기 시작한 민중 자신들의 ‘사상적, 정신적 자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동학이 성립되자마자 경상도 일대의 수많은 민중들이 동학사상에 공명하여 다투어 입도했다는 사실은 동학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는’ 시대에 얼마나 ‘민중친화적’이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장차 거대한 민중운동의 에너지원이 발전되어갈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왜곡의 세월 120년을 넘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여기저기서 120주년을 맞이하려는 이런저런 움직임이 일고 있 다. 동학 유적지와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찾아가는 크고 작은 답사 여행에서부터,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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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년을 기해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학문적으로 성찰하려는 심포지엄도 여기저기서 조직 되고 있다. 유족회를 비롯한 각종 기념사업 단체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을 현창하려는 노력도 활발하다. 또한, 소설 쓰기나 연극영화 제작을 통해 120주년의 의미 를 살리고자 문화예술계 쪽 인사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들린다. 더더욱 반가운 일은 100일 수련회를 조직하여 동학사상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동학적 수련을 통해 영 성을 함양하는 동시에, 차세대 활동가를 양성하고자 하는 시도가 구체화되고 있다는 사 실이다. 이렇게 각계각층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에 즈음하여 분주한 지금, 어떻게 120주년을 맞이하는 것이 제대로 된 기념이 될까 자문해 본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왜곡의 세월 120년을 뛰어넘는 작업부터 시작하는 것이 120주년을 제대로 기념하는 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120년 동안 왜곡되어 온 동학! 120년 동안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동학농 민혁명! 그 치명적 왜곡의 실상 몇 가지를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곡 1: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서 성립된 대항 이데올로기다.” 이런 식의 왜곡은 현행 모든 역사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동학의 ‘동’ 의 유래와 그 근원을 찾아가 보니 동쪽이라는 방위로서의 ‘동’의 의미 외에, 동학은 ‘서 에게로 활짝 열려진 동’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서학과 동학은 무엇이 같고 다 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수운 선생이 서학과 동학은 “운도 하나요 도도 같지만, 다만 그 이치에서만 다르다”고 밝힘으로써 서학에 대해 활짝 열린 동학의 개방성을 잘 보여준 것이 그 반증이다.

“왜곡 2: 동학은 일종의 저항 사상이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 특히 역사학자들은 동학을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일직선으로 연 결 지어 그것이 혁명사상으로 기능했느냐 못했느냐는 식의 논의로 일관해 왔다. 동학을 그저 조선후기 민중운동의 저항 이념으로만 바라보려 하는 우를 범해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대다수 연구자들은 동학이 “나쁜 병이 가득하여 단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는 시 대”의 민초들을 도탄에서 건지기 위한 ‘살림’의 사상으로써 확립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특히 해월 선생에 의해 그 ‘살림’의 사상이 만인에서 만물에

[특강]‘민중전선’과‘민족전선’을 넘어‘생명전선’으로 7


까지 확대된 사실에 대해서는 더더욱 무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곡 3: 동학의 남북접(해월 선생과 전봉준 장군)은 서로 대립했고, 그 때문에 동학농 민혁명은 실패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에는 1894년 3월의 제 1차 혁명 당시, 남북접이 하 나가 되어 봉기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양호전기』나 『동비토록』 등의 관 기록, 『조선국 동학당 동정에 관한 제국공사관 보고 일건』 및 『도쿄아사히신문』, 『미야 코 신문』 등의 일본 측 기록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북접은 처음부터 끝까지 행동 을 함께 한 것이다. 동학의 남북접 문제를 대립의 관계가 아닌, 창조적 긴장 관계로 다 시 볼 필요가 절실하다.

“왜곡 4: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이 일으킨 지역적 사건에 불 과하다.” 이런 견해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식민사학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 타난다. 문제는 지금까지도 동학농민혁명을 일개 지역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한국인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동학농민혁명 1백 주년인 1994년을 전후하여 많은 사료들이 발 굴, 소개되었다. 그 결과,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만의 한 지역적 사건이 아니라 삼남지 방을 필두로 조선 전역에서 수백만의 민초들이 들고 일어난 거대한 전국적 차원의 혁명 이었음이 확인되었다. 2004년 2월에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가자 명예회복 특별법” 이 통과된 것은 바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 차원의 민중혁명이었음을 공인받는 역사적 쾌거였다.

“왜곡 5: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농민군 측의 전략전술 부재로 실패했다.” 농민군은 대부분이 농민들이었다. 갑오년 당시 농민들은 농사를 통해서는 도저히 자신들 의 생명과 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난리라도 나서 하루빨리 나라가 망 해버리기를” 바라고 바랬을까. 농민들은 생업을 통해 자신들의 생명과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창을 들고 봉기했다. 농투산이 출신이었던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훈련을 받은 바도 없었고, 상대를 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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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전략전술을 익힌 적도 없었다, 왜냐면 그들은 생업, 생명, 생활을 위협받고 있던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 일어난 ‘민군=살림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살림의 군대’였던 동 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았고, 어쩔 수 없 이 싸우더라도 사람의 목숨만은 해치지 아니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이런 농민군을 압살하기 위해 동원된 군대는 바로 사람 죽이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일본군과, 그 일본 군에 장악당한 조선정부군이었다. 이들의 가혹한 탄압과 살육작전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은 좌절되었다.

3. ‘민중전선과 민족전선’에서 ‘생명전선’으로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소재 황토재 마루에는 1963년에 중앙정부가 최초로 지원하여 건립한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그 기념탑에는 <갑오동학혁명기 념탑 명문>이라는 제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을 쓴 이는 1920년대에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동학과 동학란」이라는 졸업논문을 쓴 김상기(1901-1977) 선생이다. 김상기 선생이 굳이 동학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쓴 이유는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많은 이 야기를 들었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출신지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 무대인 정읍 고부 와 멀지 않은 김제였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김상기 선생이 쓴 비문은 전국에 산재한 동학 관련 기념비 비문 가운데 손에 꼽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그 비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봉준 선생은 동학의 조직망을 통하여 농민대중을 안아 들여 우리 역사상에 처음 보는 대규모의 민중전선을 이룩하고”라는 내용과 “제국주 의 일본의 침략에 민족전선으로 항전하여 우리의 민족정기를 현양시켜 뒷날 3.1운동의 선구를 이루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고딕‧강조는 필자)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민 중전선이자 민족전선’으로 명료하게 정리한 김상기 선생의 탁견에 머리가 숙여진다. 만 일 김 선생이 ‘민중전선’만 강조했더라면 동학농민혁명은 그저 무산자 중심의 계급투쟁 으로 한정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선생은 ‘민중전선’에 그치지 아니하고, ‘민족 전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김 선생이 동학농민혁명을 특 정 계층의 계급투쟁으로만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다. 1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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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조선왕조의 낡은 지배체제 아래에 신음하던 민초들이 광범 위한 ‘민중전선’을 형성하여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려는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변혁운동 이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의 국권을 수호하려는 민족주의 운 동의 본격화, 전국화를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김상기 선생의 비문은 동학 농민혁명의 역사적 성격을 아주 잘 드러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김상기 선생이 쓴 ‘민중전선’과 ‘민족전선’이라는 표현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성격이 충분히 드러났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동 학농민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상적 기반이 된 동학사상 속에는 민중전선적 성격과 민족전선적 성격뿐만 아니라, 그 둘을 포함하면서도 그 둘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이른바 ‘생명전선적’ 사상이 풍부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에 나타나는 ‘생명전선적’ 성격은 과연 어떤 것일까? 동학의 핵심사상은 『동경대전』 속의 「논학문」이란 글에 잘 드러나 있고, 그 「논학문」 의 핵심은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気今至 願為大降 侍天 主造化定 永世不忘万事知)”라는 21자 주문 해설에 요약되어 있으며, 그 21자 주문의 핵심사상은 다시 ‘시(侍; 모심)’ 한 글자로 집약되어 진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리고, 그 ‘시’란 「논학문」에서는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内有神霊 外 有気化 一世之人 各知不移)’로 설명되고 있다. 즉 “모심이란, 안으로 생명의 신령함 이 있고, 밖으로 기화하며=내 안의 신령한 생명을 회복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 또한 신 령하게 하며, 온 세상 사람들이 각각 (그런 이치를) 깨달아 옮기지 아니하는 것”이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선생은 ‘성경신(誠敬信)’이라는 세 가지 덕목을 실천하면서 21자 주문을 지성으로 외우면 모두가 다 그 ‘모심’의 경지=생명의 신령함과 그 신령한 생명 의 사회화를 체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바로 여기에 살림의 사상, 생명사상으로서의 동학, 즉 동학의 ‘생명전선적’ 특징이 있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생명전 선적’ 측면에서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동학사상 및 동학농민혁명의 ‘생명 전선적’ 측면에 대해서는 일찍이 경주 출신 범부 김정설(1897-1966) 선생이 4.19학생 혁명이 일어나던 1960년에 「최제우론」이라는 글을 통해 널리 천명한 바 있다. 여기에 범부 선생의 글 한 구절을 참고로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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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시’라 함은 안으로 신령이 있고 밖으로 기화가 있다 고 한 다. 이때 ‘안’은 ‘신의 안’인 동시에 ‘사람의 안’인 것이고, 이때 ‘밖’은‘사람의 밖’인 동시 에‘신의 밖’인 것이다. 말하자면 천주가‘안’인데 사람이‘밖’이거나, 사람이‘안’인데 천 주가‘밖’이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안’이 곧 천주의‘안’이며 천주의 ‘밖’이 곧 나의 ‘밖'이 되는 것이므로, 내‘안’의 신령한 것이 곧 천주의 신령인 동시에 내 밖의 삼라만상이 곧 천주의 기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의 신령을 떠나서 나의 신령 이 따로 있거나 천주의 기화를 떠나서 나의 기화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2)

범부 선생 이후로는 서울대 철학과 출신 윤노빈 선생이 『신생철학』이란 저서를 통해 그 맥을 계승하였으며, 윤노빈 선생의 뒤로는 시인 김지하가 『남녘땅 뱃노래』와 『살림』, 『이 가문 날에 비구름』이란 저작을 통해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의 ‘생명전선적’ 측면, 즉 생명사상으로서 동학의 사상적 특징을 드러내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런 ‘생명전선적’ 측 면에서 동학사상을 아주 쉽게 해석하여 일반 대중들이 관심 갖게 하고, ‘생명살림’을 지 향하는 ‘한살림 운동’을 통해 사회적 실천의 모범을 제시하여 주신 분이 바로 강원도 원 주 출신의 무위당 장일순(1928-1994) 선생이다. 무위당 선생은 동학의 많은 가르침 중에 서도 특별히 해월 선생의 가르침에 주목하여, 그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냈다. “만사지 가 식일완” 즉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온 우주의 이치를 알 수 있다”는 밥 사상을 비롯하여, “천지만물 막비시천주” 즉 “천지 만물이 하늘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경물(敬物) 사상을 특히 강조하시곤 했다. 무위당 선생의 동학사상에 대한 각별한 관심 은 1989년의 『한살림선언』 으로 총정리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다시 일본을 생각하며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1880년대 후반 동학에 입도했다. 그리고 1892년 삼례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지도자로 부상, 1894년에는 농민혁명을 지도하는 최고지도자가 되 었며, 그 해 12월 체포되어 이듬해 3월 29일에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다. 만 40세의 나이로. 그런 전봉준의 최후진술을 담고 있는 『전봉준공초』에는 흥미로운 2) 김범부, 김정근 저. 『풍류정신의 사람 김범부를 찾아서』 도서출판 한울, 2013.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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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많다. 그가 왜 동학에 입도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을 인용한다.

문: 소위 동학이란 어떤 주의이며 어떤 도학인가 답: 마음을 지켜 충효로 근본을 삼으며, 보국안민(輔国安民)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 너도 역시 동학을 대단히 좋아하는 자인가 답: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이기 때문에 대단히 좋아한다.

‘수심경천’과 ‘보국안민’의 도학이기 때문에 동학을 대단히, 너무너무나 좋아했다는 것 이 전봉준의 대답이다. ‘수심경천’은 요즘 말로 말하면 개개인의 ‘영성함양’을 말한다고 할 수 있고, ‘보국안민’은 사회변혁을 위한 실천운동, 즉 사회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봉준은 개인의 영성과 사회의 혁명을 아우르고 있는 동학사상 에 매료되어 동학에 입도, 혁명지도자가 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도 많은 이들은 전봉준을 그저 혁명 지도자로만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20주년에 들어서서는 전봉준을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바뀔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전봉준은 “왜 다시 봉기(2차 봉기)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일본이 일반인들에게 일언반구 알리는 일 도 없이, 또 ‘격서’ 즉 선전포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끌고 쳐들어와 왕궁을 점령 하고, 임금을 포로로 삼는 국난이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다시 “그러면 다른 외국에 대해서도 일본과 똑같이 모두 몰아내려 했느 냐”는 일본 영사의 질문에 대해, 전봉준은 “그렇지 않다. 다른 외국은 다만 통상만 하고 있는데, 유독 일본만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왔기 때문에 일본군만 몰아내려 했다.”고 답 했다. 이러한 진술은 당시의 국제법, 즉 ‘만국공법’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내용이다. 무명의 시골선비 출신인 전봉준의 국제적 안목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동학농민혁명은 농민군 내부의 문제 때문에 좌절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제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근대적 무기로 무장하고 고도의 전술로 단련된 군대를 파견하여 농민군에 대해 ‘전원살육 작전’을 펼친 제국주의 일본 때문에 좌절되었다. 제 국주의 일본에 의한 농민군 학살의 전모는 2013년에 일본에서 간행된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또 하나의 청일전쟁』(코분켄)과, 『메이지일본의 식민지지배-홋카이도에서 조선으 로』(이와나미 서점)이라는 두 권의 저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와

12 제23차 모심과살림포럼


이노우에 카츠오 교수 등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의 각고의 노력 끝에 120년 간 역사의 어둠에 가려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게 것이다. 우경화의 바람이 거세지고 있는 엄혹한 현 실 속에서도 그 엄혹한 현실에 맞서 진실을 추구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기 에 역사는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다가오는 10월에는 <제 9회 한일 시민이 함께 하는,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의 일본 측 참가자 수십 명이 경주 와 대구의 동학 유적지를 찾아오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들은 아마도 일본 쪽 ‘생 명전선’의 전사들일 것이다.●

[특강]‘민중전선’과‘민족전선’을 넘어‘생명전선’으로 13


주제발표 1

여성의 눈으로 본 동학 동학의 가치로 새로운 생명운동을! 고은광순 | 한의사, 빛사랑수양회 대표

1. 20-21세기 한국 여성의 삶 여성권한척도 (Gender Empowerment Measure, GEM/2010년 폐지) GEM은 정치·경제 분야의 중요한 정책결정의 행사에서 여성참여 정도를 지표화한 것으 로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인간개발보고서를 통해 발표. <표> 우리나라 현황3) 연 도

순위/대상

여성의원

여성행정

여성전문

남 녀

비율(%)

관리직(%)

기술직(%)

소득비

점수

2009년

61/109

0.554

14.0

9

40

0.52

2008년

68/108

0.540

13.7

8

40

0.52

2007년

64/93

0.510

13.4

8

39

0.40

1위 아이슬란드 2위 핀란드 3위 노르웨이 4위 스웨덴 5위 아일랜드 6위 뉴질랜드...19위 쿠 바... 22위 미국 23위 모잠비크... 28위 우간다... 39위 스리랑카...44위 몽골... 59위 러 시아연방... 66위 베트남... 69위 중국... 84위 멕시코...86위 방글라데시... 101위 일본... 3) 2012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The Global Gender Gap Report 2012). 세계경제포럼(wef) 웹사이트 (http://www.weforum.org)

14 제23차 모심과살림포럼


105위 인도... 108위 한국... 127위 이란...131위 사우디아라비아... 135위 예멘

출생성비 (여자 100명당 남자수/일반 평균 105~107)

연도

출생성비

첫째아이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107.2 106.8 107.4 108.3 109.4 111.7 108.8 113.3 111.8 116.5 112.4 113.6 115.4 115.3 113.3 111.7 108.4 110.2 109.6 110.2

106.3 105.4 105.8 106.1 106.0 107.3 104.7 107.2 104.1 108.5 105.7 106.3 106.5 106.0 105.9 105.3 105.3 106.0 105.6

둘째아이 106.7 106.0 106.2 107.2 107.8 111.2 109.1 113.3 112.5 117.2 112.5 112.5 114.7 114.1 111.7 109.8 106.4 108.1 107.6

셋째아이 107.1 109.2 111.8 116.9 129.2 138.6 134.7 164.4 181.5 189.0 179.8 192.0 203.2 203.1 177.8 164.6 134.0 146.0 143.1

출처 : 보건복지부, 「보건복지통계연보」

- 1980년대 중반, 태아의 성비를 감별할 수 있는 초음파기기가 도입되면서 출생성비(자 연계 105~107 : 100/ 남아:여아)가 파괴되기 시작함 => 전래의 차별의식이 문명의 이기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 - 성비파괴는 성감별 뒤의 낙태가 원인이며 1990년의 경우 백말띠 해를 맞아 유난하게 파괴된 것을 볼 수 있음.(백말띠 여성은 팔자가 사납다는 전래의식의 반영) - 1993년, 1994년의 경우 셋째아이 출생성비가 203이 넘고 있는데 지역별로 나누어보 면 대구, 부산 등의 셋째아이 출생성비는 300을 넘기고 있음.(영남지역의 남아선호, 남성중심주의, 성차별의식의 강고함을 엿볼 수 있음) - 2013년 셋째아이 출생성비가 108.1이 됨으로써 조선후기 이후 양반가에서 불어 전국

[주제발표1] 여성의 눈으로 본 동학 15


민에게 영향을 주었던 남아선호의 광풍은 일제시대, 해방기를 거쳐 21세기 초에 이르 러 비로소 잠들게 되었음.(페미니스트들의 가열찬 여성운동의 결과)

<표> 출생성비와 감별후 여아낙태수 (출생시 자연성비 106:100을 역으로 계산한 추정치) 년도

출생아수/명

출생성비

남아

여아

1986

636,019

111.7

355,217

280,802

335,110

54,308

1987

623,831

108.8

339.364

284,467

320,155

35,688

1988

633,092

113.2

358,330

274,732

338,047

63,315

1989

639,431

111.8

357,442

281,989

337,209

55,220

1990

649,738

116.5

378,472

271,266

357,049

85,783

1991

709,275

112.4

398,613

310,662

376,050

65,388

1992

730,678

113.6

415,025

315,653

391,533

75,880

1993

715,826

115.3

412,674

303,152

389,315

86,163

1994

721,185

115.2

415,403

305,782

391,890

86,108

1995

715,020

113.2

404,701

310,319

381,793

71,474

1996

691,226

111.5

385,358

305,868

363,545

57,677

1997

668,344

108.3

361,908

306,436

341,422

34,986

1998

634,790

110.2

349,769

284,732

329,971

45,239

1999

614,233

109.6

336,600

277,633

317,547

39,914

2000

634,501

110.2

349,610

284,891

329,821

44,930

<100>

計 902,073

<15년>

<106>

정상여出추정 감별낙태추정

- 여태아 낙태가 전국적 유행현상이 된 것은(15년간 연평균 6만여 명의 여태아가 감별 된 뒤 살해당함) 1)호주제와 같은 성차별적 제도와 2)남성중심의 관혼상제 문화 등이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성차별이 당연하여 여겨졌기 때문. - 호주제와 같은 공적제도는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연대투쟁으로 사라졌으나 사적영역 안 의 남성중심의 문화 즉 족보, 종중, 종중재산, 제사, 명절문화, 대 잇기, 가문, 성씨 에 대한 성역과 금기화 등은 내부의 노력 없이는 깨기 힘듦. 부계혈통제가 근간이 되

16 제23차 모심과살림포럼


고 있는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문화는 남성들의 자각과 실천 없이는 쉽게 변화되기 어 려운 반생태적, 반생명적인 것.

2. 반생태적이고 반생명적인 부계혈통주의, 남성중심문화

김.이.박 3성이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하고 있는 극심한 성쏠림현상 - 일본이 호구조사를 하던 1909 당시 양반으로 분류된 계층은 1.9%에 불과 (충남 10.3%, 충북 4.5%, 경북 3.8%, 경남 2.3%, 한성 경기 2.0%)

- 1909년 일본이 민적(호적)을 만들면서 성씨 없던 평민, 천민들이 김. 이. 박, 최, 정 등 명문 세도가의 성씨를 선택함. (조선중기에도 절반의 인구는 성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함.) - 성씨를 새로 갖거나 바꾸는 경우, 족보를 새롭게 만들면서 몇 십대조 조상으로 김수 로, 박혁거세, 좌의정, 여의정, 정승, 판서를 배치, 그의 후손으로 둔갑하게 됨 (정약 용 1762-1836 당시에도 진위를 확인해달라고 가져오는 족보 10이면 10이 모두 가짜 였다고 함/목민심서 8권) - 부, 모 양계에서 유전자를 받는 것이므로 한줄기 가문, 혈통은 존재할 수 없음.

족보, 종중, 제례, 부가(夫家)입적, 결혼·장례문화 족보 -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1476년 안동 권씨 족보로 관직세계가 포화상태가 되자 배타 적인 사회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중국황실 흉내를 내어 만든 것.(권씨 380명, 타성 8,000명/사위, 외손...) (김수로왕, 박혁거세, 고주몽 등 왕을 시조로 만든 족보는 모두 가짜) - 정부관리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세금을 면제받기 위해, 또는 상류사회로의 편입을 위해 가짜가 난무하게 됨(탁보) - 현재 국민임을 증명하는 기본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국가가 기록, 관리하므로

[주제발표1] 여성의 눈으로 본 동학 17


사적인 혈연기록이 필요한 시대는 지나갔음. (중국 족보는 황실에서 권력의 승계, 배 분을 위해 필요했던 것으로 광대한 지역을 안전하게 관리 유지하기 위해 왕비, 후궁 을 통해 많은 왕자를 생산해야 했으며 이들의 서열관계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음. 이 를 조선 왕조가 흉내 냈고 양반들이 흉내 낸 것임. 예: 용비어천가) 종중(재산) - 양반 가문의 집단적 힘의 과시. 현재는 엄청난 소송, 친족간 분규 원인이 되고 있음 제례 - 중국에서 수입된 황실문화-> 양반문화로 확대->일제시대 전국민문화로 확대. 조상을 기리고 조상에게 복을 비는 구복(求福)·기복(祈福)적 사고방식의 확산, 남성중심 문 화의 핵 (서구에서 사라진 10․1조 헌금이 한국기독교에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이유 는?) 부가(夫家)입적 - 중국의 종법제(宗法制)를 모방. 처가로 장가드는 풍습이 조선 중기 이후 부가입적으 로 바뀜. 여성차별, 학대의 핵. 2005년의 호주제폐지로 법적으로 사라지게 됨. 결혼·장례문화 - 외화내빈. 감동이 존재하지 않는 양반적 허세문화. 빚으로 시작하는 결혼(허니문 푸 어). 죽은 자를 기리지 않는 장례문화 조선후기 조상이 양반임을 내세워 남다른 혈통이 전수된다고 우겨야 신분제 사회 속에서 득을 보게 되는 상층부가 ‘강상의 도’를 내세워 전근대질서를 온존시켰고, 개벽을 시도 한 동학이 좌절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진보적 성향을 가진 국민이 사라진 남쪽에서 민 중 대부분이 양반놀이, 양반흉내를 내기 시작하는 반동(反動)의 시대가 도래함. 차별적 양반주의의 근간이 되었던 부계혈통주의는 식민강점시기, 해방이후 독재정치, 군 사독재정치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위계질서(재산, 나이, 성별, 학벌, 학번, 기수, 지역)로 확장되어 전 국민의 삶 구석구석에 강고하게 자리 잡게 됨. 외부적으로 과시하 려는 껍데기문화의 확산.(엄친아, 엄친딸, 명품, 성형-세계가 놀란 턱뼈탑)

18 제23차 모심과살림포럼


3. 동학의 차별금지사상(개벽)

양반사회의 수직적 위계문화 => 동학의 수평적 민주문화 (개벽) (신분, 성별, 나이)

(모든 차별 철폐)

=>

- 시천주 (논학문)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萬事者 數之多也 知者 知其道而受其知 也故 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이 있고 밖에 기화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영세」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요 「불망」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만사」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요 「지」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 에 이르느니라.

- 천주직포설 (대인접물)

[주제발표1] 여성의 눈으로 본 동학 19


余過淸州徐 淳家 聞其子婦織布之聲 問徐君曰 「彼誰之織布之聲耶」 徐君對曰「 生之子婦織布也」 又問曰 「君之子婦織布 眞是君之子婦織布耶」 徐君不卞吾言矣 何獨徐君耶 道家人來 勿人來言 天主 降臨言 내가 청주를 지나다가 서택순의 집에서 그 며느리의 베짜는 소리를 듣고 서군에게 묻기를 「저 누 가 베를 짜는 소리인가」하니, 서군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하는지라, 내가 또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짜는 것인가」 하니, 서군이 나 의 말을 분간치 못하더라. 어찌 서군뿐이랴.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 사인여천 (대인접물) 人是天 事人如天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라

- 부화부순 夫和婦順吾道之第一宗旨也 道之通不通 都是在 內外和不和 內外和順則天地安樂父母喜悅 內外不和則 天大惡之父母震怒矣 父母震怒卽天地之震怒也...女人偏性 其或生性 爲其夫者盡心盡誠拜之 一拜二拜 溫言順辭勿加怒氣 雖盜 之惡 必入於化育之中 如是拜如是拜 부화부순은 우리 도의 제일 종지니라. 도를 통하고 통하지 못하는 것이 도무지 내외가 화순하고 화순치 못하는 데 있느니 라. 내외가 화순하면 천지가 안락하고 부모도 기뻐하며, 내외가 불화하면 한울이 크게 싫어하고 부모가 노하나니, 부모의 진노는 곧 천지의 진노이니라...여자는 편성이라, 혹 성을 내더라도 그 남편된 이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절을 하 라. 한번 절하고 두 번 절하며 온순한 말로 성내지 않으면, 비록 도척의 악이라도 반드시 화할 것이니, 이렇게 절하고 이렇게 절 하라.

- 부인수도, 내수도문, 내칙 (생활예절, 포태시 유의점) 問曰 「吾道之內 婦人修道奬勵是何故也」神師曰 「婦人家之主也 爲飮食 製衣服 育孀兒 待賓奉祀之 役 婦人堪當矣 主婦若無誠而俱食則 天必不感應 無誠而育兒則兒必不充實 婦人修道吾道之大本也 自此 以後婦人道通者多出矣 此一男九女而比之運也 過去之時婦人壓迫 當今此運 婦人道通 活人者亦多矣 此 人皆是母之胞胎中生長者如也」

20 제23차 모심과살림포럼


묻기를 「우리 도 안에서 부인 수도를 장려하는 것은 무슨 연고입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 「부 인은 한 집안의 주인이니라. 음식을 만들고, 의복을 짓고, 아이를 기르고, 손님을 대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부인이 감당하니, 주부가 만일 정성 없이 음식을 갖추면 한울이 반드시 감응치 아니하 는 것이요, 정성 없이 아이를 기르면 아이가 반드시 충실치 못하나니, 부인 수도는 우리 도의 근본 이니라. 이제로부터 부인 도통이 많이 나리라. 이것은 일남구녀를 비한 운이니, 지난 때에는 부인을 압박 하였으나 지금 이 운을 당하여서는 부인 도통으로 사람 살리는 이가 많으리니, 이것은 사람이 다 어머니의 포태 속에서 나서 자라는 것과 같으니라.」

... 이 내칙과 내수도하는 법문을 첨상가에 던져두지 말고, 조용하고 한가한 때를 타서 수도하시는 부인에게 외워 드려, 뼈에 새기고 마음에 지니게 하옵소서.

- 향아설위 ...任奎鎬問曰 「向我設位之理 是何故也」神師曰 「我之父母 自始祖以至於幾萬代 繼承血氣而至我也 又父母之心靈 自天主幾萬代繼承而至我也 父母之死後血氣 存遺於我也 心靈與精神 存遺於我也 故奉祀 設位爲其子孫而本位也 平時食事樣 設位以後 致極誠心告 父母生存時敎訓 遺業之情 思而誓之可 也」... ...임규호 묻기를 「나를 향하여 위를 베푸는 이치는 어떤 연고입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 「나 의 부모는 첫 조상으로부터 몇 만대에 이르도록 혈기를 계승 하여 나에게 이른 것이요, 또 부모의 심령은 한울님으로부터 몇 만대를 이어 나에게 이른 것이니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혈기는 나에게 남 아있는 것이요, 심령과 정신도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 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 여 심고하고, 부모가 살아계실 때의 교훈과 남기신 사업의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으니 라...

4. 동학의 가치로 개벽하여 21세기를 살자!

동학은 큰 좌절을 맞았으나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신분차별, 적서차별, 아동천대 등은 모두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차별의 경우 제도적

[주제발표1] 여성의 눈으로 본 동학 21


으로는 평등이 이루어졌다고 하나 문화적으로는 부계중심의 허세적 양반놀이(흉내)문화 때문에 여전히 도구적 삶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러한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인여천의 동학의 꿈이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동학을 이은 천도교의 많은 자료에도 여성(아내, 딸)에 대한 자료는 대단히 소홀하게 취급 (예. 손씨부인(딸들), 김씨부인...에 대한 기록 부실. 무덤, 비석도 없는 상태)

결론

동학은 인류 공통으로 지향해야 할 아름다우며 진화된 철학이다. 동학의 가치를 간직하 는 사람들은 인권운동, 환경운동, 생명운동의 주역이 될 것이다. 한국의 제도와 문화가 모두 개벽의 내용으로 변환되고 전환되기 위해 동학의 가치를 추구하는 각성한 한국남성 들이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은 상당히 많다. 한국사회의 진화를 발목 잡는 대표적인 가부장문화로는 족보문화, 종중문화, 제례문화, 허세적 결혼·장례문화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는 모두 양반들이 독점했던 문화(양반흉내내 기 문화)였다. 그러나 그 시작이나 진행과정이 차별적이고 불순하거나 허위에 찬 것으로 감동이 사라진 과시용 문화는 동학의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아래의 제안을 실천하고 확장시키는 남성들이 많아지기를 고대해본다.

▪족보 없애기 (가짜도 세월이 지나면 진짜로 둔갑되어 너와 나를 속이게 되는 허세 문화 의 극치) ▪제사 없애기 (내제사거부/ 제사는 기원전 3300년전 중국의 조갑이 쿠데타 일으킨 이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차별화 위해 면피용으로 만든 것으로 중국에서도 사라진 외래문화) ▪종중개념 없애기 (종친 등 씨족 개념의 해체, 분규원인인 종중재산의 사회환원) ▪성씨 사용의 융통성 확대 (한 줄기 혈통이나 가문은 존재할 수 없으니 성씨는 나의 존 재, 뿌리, 근원을 증명해주는 기호가 될 수 없다.

22 제23차 모심과살림포럼


▪위계질서 없애기 (위계질서 있는 곳에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허례문화 없애기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작은 결혼장례문화의 확산)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가장 진화된 철학, 사상인 동학은 ‘실천 하는 것’이다. 부계혈통 중 심의 문화는 여성을 도구적 존재로 가두어 두고 있으며 이러한 남성중심의 양반문화, 수직 적 위계질서, 껍데기문화의 해체는 남녀 모두의 해방, 한국사회의 진화를 뜻한다. 동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분투를 바란다! ^^ (남성중심의 양반놀이 문화 속에 동학의 가치와 부 합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주제발표1] 여성의 눈으로 본 동학 23


주제발표 2

동학의 깊은 마음과 문명전환 김용휘 | 한양대 강의교수, 천도교한울연대 공동대표

옛날 호주의 오지에 모든 거래가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지는 한 작은 마을이 있었다. 마 을 사람들은 장날마다 닭과 달걀, 햄, 빵을 가지고 나와 흥정을 계속한 끝에 필요한 물 건으로 바꿔가곤 했다. 수확기처럼 중요한 시기나, 폭풍이 지나간 뒤 헛간을 수리해야 하는 집이 생길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고국에서부터 간직해온, 서로 돕고 사는 전통에 따랐다. 그래서 언제라도 문제가 생기면 주위에서 도와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장날, 반짝이는 검은 구두를 신고 멋들어진 흰 모자를 쓴 한 낯선 사내가 나타나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로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는 닭 여섯 마리를 커다 란 햄 하나와 바꾸기 위해 우리에 몰아넣고 있는 한 농부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 했다. “이렇게 구식이라니, 딱한 사람들이로군.” 그 말을 들은 농부의 아내가 쏘아붙였 다. “그러면 댁은 얼마나 닭을 잘 다루시기에?” 그러자 낯선 사내가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이런 번거로운 일들에서 벗어나는 훨씬 더 좋은 방법이 있지요.” “그래요? 그게 뭔데요?” 농부의 아내가 묻자 사내가 대답했다. “저기 저 나무 보이죠? 저기서 기다릴 테니, 누가 커다란 소가죽 한 벌만 갖다 주시고 집집마다 저를 찾아오시면, 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죠.” 일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는 소가죽을 원 모양으로 조각내어, 조각마다 정교하고 우 아한 문양의 작은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원조각 열 개씩 나눠주고는, 조각 하 나가 닭 한 마리의 가치를 지닌다고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부터 다루기 힘 든 닭 대신 원조각으로 거래하고 흥정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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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생각이었다. 반짝이는 구두에 멋진 모자를 쓴 사내의 말에 모두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건 그렇고,” 사내가 덧붙였다. “저는 일 년에 한 번씩 다시 와서 같은 나무 밑에 앉아 있겠습니다. 그러면 집집마다 원조각 열한 개씩 가지고 저를 찾아오세요. 열한 번 째 원조각은 제가 여러분의 삶을 기술적으로 향상시켜드린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알고 받겠습니다.” 그러자 닭 여섯 마리를 데리고 있던 농부가 물었다. “하지만 그 열한 번째 조각은 어디서 나오나요?” 사내는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알게 되실 겁니 다.” 마을 인구와 연간 생산량이 그 다음 해에도 똑같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 어났을까? 열한 번째 원조각이 새로 생겨날 리 없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모두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열한 가구 중 최하위 한 가구는 나머지 열 가구에 열한 번째 원 조각을 제공하기 위해 원조각을 모두 잃어야만 한다. 결국 폭풍이 불어 농작물이 위험에 처하는 집이 생겨도, 사람들은 시간을 내어 돕는 데 더 인색해졌다. 장터에서 닭 대신 원조각으로 거래하면서 사람들은 훨씬 더 편리해졌 지만, 마을의 전통이었던 자발적인 협동이 어려워지는, 의도치 않은 부작용도 겪게 되었 다. 새로운 머니게임이 참여자들의 삶 전체를 경쟁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Bernard Lietaer, The Future of Money, ‘열한 번째 원조각’)

전환의 시대 이 시대를 규정하는 심리적 기조는 ‘불안’이다. 물질적으로는 편리해졌지만 빨라진 삶 의 속도와 불안정한 미래로 인해 누구나 편안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절 망적인 파멸과 가냘픈 희망이 교차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기후변화는 갈수록 심각 해지고 지구 생태계는 급속히 무너져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에너지 소비의 지속적 증가, 지나친 개발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도 가속되고 있다. 종교‧인종․이념․영토‧국익‧핵무 기 등을 둘러싼 갈등은 여전히 평화를 요원하게 만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시 장 만능으로 인한 서민의 삶의 붕괴, 물질만능, 물신주의의 팽배에서 오는 소외, 정신의 위기 또한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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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위기의 배후로 초국적기업과 금융자본의 규 제되지 않는 탐욕을 지목할 것이다. 그러나 찰스 에이젠슈타인은 진정한 원인은 화폐 시 스템 자체에 있다고 한다. 진짜 원인은 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방식에 내재해 있으 며, 그 시스템의 중심에 고리대금이 있다는 것이다. 고리대금이야말로 이 세계에 만연한 결핍의 원인이자, 이 세계를 집어삼키는 무한 성장의 엔진에 연료를 공급한다는 것이다. 위에 제시된 비유담은 어떻게 우리 경제가 이자로 인해 경쟁, 불안, 탐욕에 빠지게 되는 지 잘 보여준다.4) 경제 위기에 대한 습관적인 첫 대응책은 더 많은 돈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 즉 돈 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뭐든 바꾸는 일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생물 권 파괴가 일어나며, 수많은 분쟁과 갈등, 때론 전쟁이 야기된다. 그러나 에이젠슈타인 은 이제 본격적으로 역행 과정을 시작할 때가 왔다고 한다. “고리대금의 시대, 도약의 이야기, 분리의 시대가 끝날 날은 머지않았다. 새 시대를 탄생시키고 인류가 성년이 되 기 위한 시련의 시기는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경제적 붕괴와 파시즘, 소요사태, 전쟁 까지 수반되는 혼란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암흑기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짧고 훨씬 가 볍게 지나가리라 생각한다.”5) 그러면서 에이젠슈타인은 상품과 서비스 영역에 있던 것 들을 선물, 호혜, 자급자족, 공유의 영역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 대의 제거, 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의 내부화, 경제, 통화의 지역 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 문화와 P2P 경제 등을 통해 구체적이면서도 점진적 인 방식으로 제기하고 있다.6)

4) Charles Eisenstein, Sacred Economics, Random House Inc, 2011. "문제는 이자에서 비롯된다. 이자를 낳는 빚은 언제나 새로운 돈을 수반하기에, 빚의 총액은 언제나 현존하는 돈의 총액을 넘어 선다. 돈의 부족은 우리를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끊임없는 구조적 결핍에 시달리게 만든다. 항상 자 리가 모자라 누군가 낙오되는 의자 뺏기 게임과 같다. 빚의 압박은 시스템 자체의 고질병이다. 빚을 갚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시스템 자체가 점점 확대되는 전반적인 채무 상태를 요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금융위기의 원인은 더 이상 돈으로 전환할 사회, 문화, 자연, 영적 자본이 남아 있 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건강, 생물권, 유전자, 심지어 정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신성한 것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팔아치우고 있다. 세계화는 그런 자산을 약탈해, 끝없이 집어삼키고 끝없이 돈으로 뱉어내는 기계에 집어넣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지역을 약탈하는 것도 한계에 봉착 했다." 5) 같은 책, 맺음말. 6) 같은 책, 18장 참조. 경제적 지대의 제거는 조지 헨리의 『진보와 빈곤』에서 제기한 탁월한 통찰인 토지소유에 따른 지대 제거를 오늘날 경제 상황에 맞게 모든 경제 영역으로 확대한 것이며, 사회배 당금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뜨겁게 논의되고 있는 기본임금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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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평온했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겪은 과 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사회 변동은 수천 년에 걸친 것보다 더 많은 삶의 변화를 초래 했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기원전 800년부터 200년까지를 ‘축의 시대’ 라고 했다. 중국과 인도, 이스라엘과 그리스에서 인류의 정신과 문명이 획기적으로 비약 했던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위대한 종교와 철학은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그러나 이 정신문화는 그냥 꽃핀 것이 아니다. 고난과 고통 위에 핀 꽃 이었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전쟁의 시대로 폭력과 살인이 일상이었다. 그러한 고통과 고난에 대한 응답으로 참된 인간의 길을 제시하면서 나온 것이 4대 문명이었다.7) 지금은 또 하나의 축의 시대를 건너고 있는 듯하다. 인류 전체의 절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과거보다 더 심각한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문명적 위기를 맞고 있다. 따라서 총체 적으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다. 새로운 정신,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하는 사상이 나와야 한다. 과학의 성과에 배치되지 않으면서도 과학만능주의, 과학적 유물론 에 빠지지 않고 우주와 생명에 대해 통합적 안목을 가지고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인격 적 완성과 진정한 내면적 평화와 자유 그리고 타자와 더불어 생태적이고 미학적으로 살 아가는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가능한 새로운 경제 체제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나는 ‘문명 전환의 시대’, 이런 대안의 가능성을 한편으론 앞에서 언급한 ‘신성한 경 제학’에서 찾고, 한편으론 동학에서 찾고자 한다.8) 신성한 경제학은 마고시대의 신시神 市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신성한 경제학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하지 않는 다. 또한 돈이나 물질 자체를 문제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신성한 방식으로 만든다 는 점에서 동학의 통합적 세계관과 잘 상통한다. 에이젠슈타인의 탁월함은 새로운 경제 학을 경제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에서도 고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가장 큰 혁명은 자아의식과 정체성의 혁명”이

7)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축의 시대, 교양인, 2010. 8) 오강남은 “동학의 가르침은 세계 종교사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가치의 결집”이라고 평했고(오강남,  세계종교 둘러보기,서울:현암사, 2003, p.341.), 윤노빈은 “동학의 ‘人乃天 혁명’은 밀레토스의 로고 스적 혁명이나 예루살렘의 파토스적 혁명이 가져온 결과보다 더 놀라운 변화를 인류의 앞날에 가져 다 줄 것”이라고 하면서 동학의 세계사상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윤노빈, 「동학의 세계 사상사적 의미」, 新生哲學 (서울:학민사, 2003년 증보판 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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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면서 “우리는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모든 생명과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달아가고 있 다”고 역설한다. 영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원리를 경제에 구 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미덕이 있다. 다만 서로 연결되는 느낌을 선물을 통해서 만 가능하다고 보는 점에서 동학의 시천주 체험이 마음의 차원에서 보완되면 좋을 것이 라 생각한다. 외부세계에서 신성함을 발견하려면 먼저 내 안에서 신성함을 깊은 마음의 차원을 발견해야 하며, 진정으로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외유기화의 체험을 통 해 보다 구체화될 것이다.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 아래에서 동학을 통한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동학의 통합적 세계관과 새로운 형이상학 스티븐 호킹은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에서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 다”라고 주장해 세계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9) 책은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아도 지금의 우주를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시대 최고 의 물리학자답게 대중적인 언어로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신 없 이도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 을 논증하지는 않았다. 마치 살인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면서 검시관이 죽음의 원인을 교 살인지, 독살인지, 자상에 의한 것인지 등을 의학적 차원에서 물리적 원인을 규명한 것 과 같다. 하지만 이로써 사건이 다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경찰은 이런 부검결과를 참고 하면서 살인의 동기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원한관계인지, 이해관계인지, 우 발적 범행인지 등의 심리적 원인을 가려내야 한다. 스티븐 호킹의 연구는 물리적 인과관 계를 규명한 유의미한 작업이지만 그것으로 우주와 생명의 탄생, 인간의 의식현상까지 모두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로 스티븐 호킹은 기독교 문명에 한정해서 신을 논하고 있다. 인격신으로서 창 조주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지만 다른 문명권에서 이해하는 신에 대해서까지 부정하는 것

9) 스티븐 호킹,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위대한 설계, 까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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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니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인류 종교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유일신 이름들 (야훼, 알라, 브라만, 도, 하늘님 등)은 신비 자체, 진리 자체, 존재 자체이신 언표 불 가능한 절대 포괄자로서의 ‘궁극적 실재’가 구체적인 인간 공동체들의 ‘삶의 자리’, 곧 그들이 처한 정치적‧문화적‧자연 환경적 맥락 속에서 계시된 ‘궁극적 실재’를 이해하고 응답한 해석학적 반응”10)이라고 했다. 스티븐 호킹의 언급은 지금까지 주류 기독교에서 궁극적 실재를 인격신, 창조주라고 일면적으로 이해하고 규정했던 것에 대한 비판일 수는 있지만, 그의 시선 역시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과학적 환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철학자나 종교인들도 과학적 업적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유덕한 삶, 아름다움 같은 다른 차원의 진리를 언급하려면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유물론이냐 유심론이냐, 일신론이냐 범신론이냐의 이분 법을 벗어나서 과학과 종교, 철학이 이룩한 업적들을 존중하면서 보다 통합적으로 신과 우주, 생명에 대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동학의 신관은 더 다듬어져야 하지만, 통합적 신관의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동학의 신관은 보통 범재신론(凡在神觀, panentheism)으로 분류된다. 궁극적 실재의 초월성과 내재성, 유신론과 범신론이 통합된 신관이다. 그렇지만 수운이 이런 신 관을 사색을 통해 이끌어낸 것은 아니다. 그의 신에 대한 이해는 신에 대한 다양한 체험 을 통해 넓어지고 깊어졌다. 수운은 신을 규정하지 않았다. 수운의 하늘님 체험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밖에서 인격적인 존재의 목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온몸이 떨리는 기운으로 체험했고(外有接靈之 氣), 밖에서 들렸던 목소리를 내면에서 듣는(內有降話之敎) 것으로 체험했다. 더 나아 가서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고 표현하는 합일체험,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 한 나’를 자각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런 체험을 거치고 다시 1년여의 성찰의 시간을 보낸 후 수운은 시천주(侍天主)라는 명제를 제출한다. 시천주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만유가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자각의 표현이다. 수운은 이 시천주를 깨침으로써 하늘님이 실재하되, 저 하늘에 초자연적인 인격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기(靈氣)로서 우주에 두루 편재하면서 내 몸을 만들어놓고 다

10) 김경재, 이름 없는 하느님, 삼인, 2002,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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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고 보았다. 또한 나라는 존재를 우주의 생명과 연결시키 고 있으며, 내 안에서 신비한 영(神靈)으로 모셔져 있음을 체험적으로 통찰했다. 그러므 로 하늘님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요, 바로 내 몸에 모셔져 있음을 기운과 신령으로 체험 해야 하는 존재이다. 동학의 하늘님은 우리 민족이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고 믿어왔던 소박한 하늘님과 다른 존재가 아니다. 또한 기독교의 하느님(하나님)과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성리 학의 이기(理氣), 불교의 불성(佛性), 도가의 도(道)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동학의 하 늘님은 요즘 언어로 하면, 우주 기운(至氣)이자 우주 생명이며, 우주적 영(하나의 영)이 자 우주정신이다. 이 영은 물질로도 정신으로도 나눌 수 없는 애초부터 정신과 물질이 통합되어 있는 하나의 근원적 실재이다. 근원에서 하나이지만, 정신의 차원에서 이야기 할 때는 ‘영’이라 하고, 우주에 가득 차 있으면서 만물을 생성하는 에너지로 이야기할 때는 ‘기’라고 하고, 인격적 의지를 가지고 가르침을 내릴 때는 ‘하늘님(천주)’라고 하 고, 그것이 내 안의 본질로서 내재했을 때를 ‘마음(심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동 학의 통합적 세계관에서는 물질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도 말할 수 없다. 동학은 우주와 생명에 대해서도 기존의 성리학이나 서양의 근대적 사유와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주는 본래 혼원한 하나의 지극한 기운(至氣)으로 가득 차 있다. 기(氣)는 모든 만물을 생하게 하는 근원적 질료이자 만물을 만들고 변하게 하는 에너지 이기도 하다. 이것은 성리학의 기 개념과 상통하는데, 동학의 기 개념이 조금 다른 것은 ‘기가 곧 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기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적 실재이기도 하다는 점이 동학의 특징이다.

시천주는 내 안에서 신령한 한울의 생명과 신성을 발견함과 동시에 내가 전체 우주의 뭇생명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나라는 주체의 존엄성과 생명의 연대성에 대한 자각이 다.(內有神靈, 外有氣化) 또한 이런 생명의 연대성과 떨어져서 나의 생명의 유지될 수 없음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다.(各知不移) 자기 안에서 하늘의 신성을 발견한 사람은 이 제 더 이상 과거의 낡은 자기로 있을 수 없다. 그동안 거짓 자아 속에 파묻혀 있던 마음 의 깊은 차원을 발견함으로써 자기 안에서 초월적 차원을 열게 되는 동시에 다른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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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속에서도 하늘의 신성을 발견하게 된다. “동학적 주체성은 자신의 마음을 우주의 생성에 조율하는 노력을 통해 고요한 안정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외부 사물과 소통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11) 이런 체험은 천지를 부모님처럼 섬기는 실천과 더불어 다른 사람은 물론 모든 존재를 깊이 존중하는 진실성과 공경성, 신실함으로 일상 에서 드러난다. “이 깊은 마음은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조건들-생물학적, 진화 론적, 우주론적, 또는 존재론적 조건에 연결되어 있는 것일 것이다. 다른 층위의 마음의 움직임 아래 들어 있는 것도 이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신비에 대한 외포감으로 인간의 마음을 열릴 수 있게 한다.”12) 이런 깊은 마음의 회복 이 모든 문명적 원리의 기초가 되어야 하고 새로운 경제학의 인간학적 토대가 되어야 함 은 물론이다. 수운은 시천주 사상을 통해서 모든 존재가, 심지어 무기물조차도 영을 지니고 있고, 생명이 있다고 했다. 우주의 실재는 보이지 않지만 원초적 생명과 영성을 가진 기운덩어 리이며, 모든 것이 하늘의 기운에서 생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도 모 두 하늘이 표현된 것이다. 그 안에는 하늘의 영과 하늘 기운과 하늘 생명이 내재(內有 神靈, 外有氣化 各知不移)하고 있다. 해월은 나아가서 천지 자체를 우리 생명의 근원 으로 부모님, 즉 ‘천지부모’라고 했다. 천지는 단순한 물리적 자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주적 생명, 모든 만물을 낳는 생명의 근원, 영적 활력과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유기 적 생명일 뿐 아니라 받들어 모셔야 할 ‘님’이다. 단순히 생명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넘어 일체의 존재가 신성으로 가득차 있는 경이로운 신비라는 것을 온몸 으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해월은 “어찌 홀로 사람만이 입고 사람만이 먹겠는 가. 해도 역시 입고 입고 달도 역시 먹고 먹느니라.”라고 하며 모든 만물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그 속에서 신성함을 발견하고 공경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늘님을 인 격적 실체가 아니라 '기'라는 실재, 그것도 영성과 생명을 이미 담고 있는 우주 기운, 우 주 생명으로 볼 때, 서양의 초월신관과 동양의 범신론, 유학의 이기론이 상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13) 이것이 또한 신성한 경제학의 존재론적 인간학적 기초가 될 수 있을 것 11) 이규성, 최시형의 철학, 이대출판부, 2011, 23쪽. 12) 김우창, 깊은 마음의 생태학, 김영사, 2014, 18쪽. 13) 이것을 탁월한 심리학자이자 영성가이기도 한 켄 윌버는 “활동 중에 있는 영”이라고 표현한다. 켄 윌버는 물질에서 생명으로 마음(정신)으로 관통하는 공통의 진화적 줄기가 있는데, 진화는 ‘활동 중 에 있는 영’, ‘창조 중에 있는 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그는 우주는 물질계로만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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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전체 존재는 깊이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경이로운 신비와 생명의 활력으로 가 득차 있고, 사람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라 너의 아픔이 곧 나 의 아픔이고, 너에게 하는 행위가 곧 나에게 하는 행위임을 깊은 마음의 차원에서 느끼 는 공감의 주체로서 재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대중영성’ 시대의 수행과 깨달음 불안이 곰팡이처럼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고 각종 스트레스와 우울증, 외로움,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경쟁이 기본 원리인 사회에서 타인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화려한 백화점의 네온사인과 복작대는 대형마트, 스타를 동원한 매스미디어의 과대광고는 소비자들의 텅 빈 가슴을 파고들어 불필요한 욕망을 부추긴다. 수많은 지식이 난무한 가운데, 여전히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 차별이 엄존한다. 심리치료나 마음공부, 명상수행의 필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이 분야 시장 규모가 벌 써 10조원을 넘어섰다는 보도도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 단기 프로그램을 통해 잠시 체험 하는 정도에 그쳐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수행의 목표를 바르게 설정하 고 긴 호흡을 가지고 일상에서 꾸준히 마음을 살피는 노력이 보다 중요하다. 수행은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것이지만, 깨달음을 우주의 운행 원리를 깨닫고, 다른 사람의 운명을 헤아리고 신통력으로 병을 고치고,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고 못 듣는 것 을 듣는 그런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수행은 일단 원만한 인격, 유덕한 사람이 되 는 것이 목표다. 마음에 꼬인 것이 없고, 맑고 밝아 스스로도 구김이 없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그런 훈훈한 인격을 갖추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내면의 참나를 발견함으로써 생사를 초월해 자유롭고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인격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회로부터 시작해 상처받고 억압된 마음을 치유하고, 본래의 맑고 밝은 하늘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하 늘의 신성을 발견하고, 궁극적으로 나와 하늘이 둘이 아니라는 비이원성, 무궁성을 깨닫 될 수 없고 물질계, 생명계, 정신계, 신계를 모두 포함한 전체 우주로서 온우주Kosmos로 본다. 켄 윌버, 모든 것의 역사, 대원출판, 20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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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수련이다. 동학 역시 이런 마음공부(심학)을 기본으로 한 수행의 종교이자 깨달음의 종교이다. 수운은 모든 사람이 자기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본래의 깊은 마음을 깨달아 현인군자 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그가 새로 제창한 것이 ‘수심정기(守心正氣)’이 다. 수심정기는 모든 실천에 앞서 먼저 마음과 기운을 맑고 밝게 하는 공부다. 동학의 수도법은 ‘마음이 하늘(님)’이라는 데서 시작한다. 하늘이 저 공중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바로 내 마음이 하늘(님)이고, 내 마음을 떠나 따로 하늘이 있는 것이 아 니기 때문에, 하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곧 내 마음을 공경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이 다. 하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내 마음이 맑고 밝지 못하고 분노와 탐욕, 시비지심, 물질과 세속적 성공출세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는 하늘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동학의 마음공부는 마음을 항상 맑고 밝고 온화하게, 그러면서 깊이를 회 복하는 것이다. 해월은 “성품이 중심에 이르면 백체가 자연히 편안하고, 영기가 중심에 이르면 만사가 자연히 신령한 것”이라 하였다. 현재의 마음을 늘 살펴서 항상 맑고 밝게 하되 일상적 세속성을 극복하고 초월적 차원, 마음의 깊이를 회복하여 하늘의 신령함에 다가가는 것이 동학의 마음공부이다.

요컨대 동학의 수심정기 수도는 결국 마음을 본래의 하늘마음으로 가꿔나가는 공부다. 마음이 바로 하늘이며 마음 밖에 따로 하늘이 없다. 이 마음을 붙들고 마음 안에 본래부 터 있던 하늘의 씨앗을 매일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키워서 마음 전체를 향기 나는 하 늘의 꽃밭으로 바꾸는 것, 그렇게 마음을 하늘마음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동학의 수도 이자 영성의 핵심이다. 동학 수도의 의미는 결국 ‘참나’의 발견, ‘주체의 재발견’에 있다. 인간이 이기적, 충 동적, 무의식적 존재만이 아니라 내면에 하늘님을 모신 신령하고 거룩한 존재라는 재발 견이다. 인간은 우주 진화의 최종 열매이다. 더 진화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격으로 나 아갈 수도 있다. 내가 우주적 주체이며 창조적 주체라는 것을 깨닫고 천지와 더불어 모 든 생명과 조화롭게 공존 상생해야 하는 자유로운 주체이자 책임 있는 존재임을 자각해 야 한다. 그리하여 고립적인 자기중심주의를 넘어서 하늘과 내가 둘이 아니며, 우주만물 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온몸으로 깨달아 마음의 무한한 확장, 비이원성, 무궁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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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자각으로 나아가는 것이 동학 수도이다. 지금이 새로운 축의 시대이고, 전환의 시대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류의 획기적 도 약을 전제로 한다. 이제는 모두가 정치적 평등을 누리는 대중 민주주의의 시대를 지나 ‘대중영성’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수운의 ‘개벽의 꿈’은 지금까지 한두 사람의 영적 천재들에 의해 깨달음을 얻던 시대를 지나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통한 집단적 의식의 진 화, ‘집단 지성’을 넘어 ‘집단 영성’, ‘대중 영성’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지금의 정황 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암울하지만, 의식의 집단적 깨어남이 들불처럼 일어난다면 우리의 미래도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향아설위, 문명전환의 상징 최근 우리나라는 제사 문제를 놓고 부부나 형제 갈등이 많다. 종교가 달라서도 갈등이 생기고, 제사 음식 장만을 놓고도 갈등이 많다. 그러다 보니 아예 제사를 안 지내는 가 정도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제사는 영혼의 실재성 여부에 대한 종교적 교리를 떠나서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들을 그날 하루만이라도 생각하고 기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 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진짜 우상숭배는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면서 인간을 ‘거짓 절대 앞에 예속시켜 자유를 박탈하고 인간성을 비인간화하는 것이다.14) 정의와 진리를 향한 마음보다 돈과 성공에 마음이 더 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 다.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깊은 마음이다. 정성된 마음으로 부모를 기린다 면 청수 한 그릇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싸면서 진수성찬을 차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 다. 동학에서는 해월 시대부터 모든 의식에서 청수(淸水) 한 그릇을 올렸다. 물은 만물 의 근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가난한 서민들의 형편을 생각한 것이기도 했다. 또 한 옛 어머니들이 아침마다 정화수 한 그릇으로 하늘에 기도했던 그 맑은 물이기도 하 다. 역사적으로는 수운이 참형 당하기 전에 청수 일기를 봉양한 데서 유래한다. 동학의 의례에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바로 ‘향아설

14) 김경재, 앞의 책, 7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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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向我設位)’다. 해월은 죽음을 예감하고 한 해 전인 1897년에 기존의 벽을 향해서 제 사상을 차리는 이른바 ‘향벽설위(向壁設位)’에서 나를 향해서 제사상을 차리는 ‘향아설 위’로 파격적인 전환을 선언했다. 벽을 향해 제사상을 차리지 않고, 나(후손)를 향해 제 사상을 차린다는 것은 조상이 사후에 저 세상에 있다가 제삿날 벽을 타고 밖으로부터 오 지 않고 자손의 심령과 혈기 속에 함께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이는 신 중심의 수직적이고 저 벽 쪽, 피안, 미래, 저 종말, 역사의 저쪽 혹은 과거 조상들의 시간을 향했던 관습을 자기에게로,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삶과 생명으로 되돌 리는 것을 의미한다. 관습이 가장 바꾸기 어려운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간단한 밥 그릇 위치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돌아오는 것은 후천개벽의 상징이며 인류 문명사 전체의 질서를 뒤집어놓는 후천개벽의 가장 완벽한 집행이라고 할 수 있다.15) 이처럼 제사 양 식의 변화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다시 개벽, 다시 동학 지금의 문명의 위기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화페 경제시스템에 있다. 그것이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부추기고, 결핍을 유발하면서 의자게임 같은 경쟁의식을 촉진한다. 성장에 대한 갈증은 문화․생태적 공유자원은 물론 사회적, 영적 자원까지도 자본으로 환원한다. 그 과정에서 생태계의 파괴가 불가피하며, 정신적 고립감과 불안은 심해진다. 그러니 주 변 사람들을 연대하고 협력해야 될 동료라기보다 경쟁자로 분리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는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고, 자연을 한갓 물리적 대상으로만 본 서양근대의 세계 관과 인간을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라고 본 인간이해가 깔려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문명은 이것을 뒤바꾸는 인식론적 전환이 요구된다. 정신과 물질을 자연과 인간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이 요구된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우주의 모 든 존재는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이것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신령한 마음, 깊은 마음을 회복하면서, 동시에 외부세계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명이며, 영적 활력으로 가득찬 경이로운 신비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직

15) 김지하, 생명학1,(화남, 2003년) 231-23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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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적 체험에서 가능하다. 수운의 시천주 체험, 내유신령, 외유기화의 체험은 바로 이것 에 대한 직접적 체험이다. 이것에서 다른 사람을 비롯해서 모든 만물에 대한 경외지심 이, 공경함이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이 해월에 와서 사인여천과 삼경사상, 물물천사사천, 특히 경물(敬物)로 구체화되었다. 해월의 ‘경물’은 서양의 차갑고 천박한 유물론을 넘어 ‘새로운 물질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물론이고, 신비로 가득찬 경이로운 마음의 회복, 어린 아이 같은 순수성과 현자의 사물에 대한 깊은 시선, 깊은 마음의 드러남이 경물이다. 물 건 하나하나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그것에 유일성과 연대성을 부여하는 것이 경물이다. 돈이나 물질을 문제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다시 신성한 의미를 회복시켜 그것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경물이며, 새로운 물질주의이다.

요컨대 동학은 서양의 근대문명, 보이는 것, 물질, 경쟁, 남성성이 중심이었던 선천문 명의 극점에서 새로운 문명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그런 전환의 시기에 새로운 영성과 새 로운 주체의 되살림을 통해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나온 가르침이 다. 동학은 자기 내면에 하늘님이 있다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자기의 삶을 존엄하게 변화 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존재 속에서 불가침의 신성을 발견하고 공경하는 윤리가 문 명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공경'의 철학이다. “내면의 깊은 마음이 밖으 로 드러나 피어난 것이 생명․평화이다.” 이 깊은 마음을 어떻게 오늘날에 되살려 이 시 대 생명과 평화의 가치로 실천할 것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21세기 대안 사상 으로서의 동학을 다시 되살리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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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발 표 3 -1

전환이 개벽이다 -동학혁명 2주갑에 생각하는 생명운동의 길16) 주요섭 |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1. ‘우리의 길’은 무엇입니까? “갑오 일로 말하면 인사로 된 것이 아니요 천명으로 된 일이니, 사람을 원망하고 하 늘을 원망하나 이후로부터는 한울이 귀화(歸和)하는 것을 보이어 원성이 없어지고 도 리어 찬성하리라. 갑오년과 같은 때가 되어 갑오년과 같은 일을 하면, 우리나라 일이 이로 말미암아 빛나게 되어 세계 인민의 정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니라.” - 해월신사법설 [오도지운(吾道之運)] 전면적 봉기가 결국 참혹한 패배와 죽음으로 끝난 상황에서 동학의 미래를 묻는 제자 의 물음에 해월 최시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894년 갑오년의 거사는 천명(天命), 즉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명이란 단순히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억 수만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인연이 모아져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해월은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혁명의 실패를 예견하고 있 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처음 전라도 고부와 무장, 금산 등에서 기포를 하려 할 때, 가볍 게 움직이지 말고 때를 기다릴 것은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5만년 선천의 인 연과 업이 쌓여서 분출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실패마저도 감당해야 한다고 결단합니 16) 이 글은 애초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연간 정세보고서에 ‘전환이 희망이다’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만, 내용을 보완하고 제목을 ‘전환이 개벽이다’로 바꾸어 다시 공유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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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억조창생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는 해월의 피눈물이 눈에 선합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갑오년이 되었습니다. 동학혁명17) 이후 첫 번째 갑오년인 1954 년은 한국전쟁 뒤끝,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014년 두 번째 갑오년에 즈음하여 ‘우리의 길(吾道)’은 무엇일까요? 새 하늘 새 땅은 열리는 때는 언제일까요? “세계 인 민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빛나는 때”가 오기는 할까요? ‘우리 도의 미래’를 묻고 있는 120년 전의 그 제자처럼 혜안을 가진 선지식을 만나 묻고 또 묻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2014년 우리는 전환점에 서있습니다. 최근 격화되고 있고 중국과 일본, 중 국과 미국 사이의 긴장과 충돌 때문에 동북아 역사의 분기점이 된 120년 전 청일전쟁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도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마트와 백화점엔 고객이 넘쳐나고 도시의 밤은 여전히 휘황찬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행복한지, 잘 살고 있는 건지 말입니다. 돈 앞에서, 권력 앞에서, 죽음 앞에서, 출세와 성공 앞에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도움과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많은 청년들이 기존 시스템에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 서 버티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산업문명과 자본주의의 머리칸에 가까이 선 한국사회는 이 미 중환자입니다. 2,500여 년 전 공자의 한탄처럼 학교가 학교답지 못하고, 종교가 종 교답지 못하고, 정당이 정당답지 못합니다. 이렇게는 정녕 아닙니다. ‘각비(覺非)’, 수운 최제우가 19세기 조선에서의 삶과 사회 를 돌아보며 뒤늦게 얻은 통절한 깨달음입니다. 새로운 삶의 모습은 보이지는 않지만 이 렇게는 살 수가 없습니다. 탈출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탈학교, 탈노동, 탈도시, 탈종교, 탈물질, 탈정당, 탈자 본, 탈국가…. 여전히 대세는 돈과 권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상치가 않습니다. 협동조합 열풍이 불고, 귀농귀촌 인구가 이농 인구를 넘어서고, 무엇보다 모든 계층을 망라하여 일어나는 힐링 신드롬이 수상합니다. 동학의 그 제자처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17) 지금껏 1894년 3월 무장기포 이후의 동학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적 거사를 일반적으로 ‘동학농 민혁명’이라고 썼습니다만, 여기서는 ‘농민’을 빼고 ‘동학혁명’이라고 쓰려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 음 기회에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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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학, 19세기 ‘제3의 길’ 폭정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서구열강의 침략과 중화의 굴욕으로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 진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묻습니다. “우리의 살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이들은 밖에서 길을 찾고, 어떤 이들은 옛 것에서 답을 구합니다. 그 사이 이도저도 아닌 새로 운 길을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19세기 조선에는 3개의 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길입니다. 이들에게 살 길은 옛 것을 지키는 데 있었습 니다. 문을 닫고 조선을 500년 동안 지탱해온 성리학적 질서, 중화적(中華的) 질서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둘째는 개화(開化)의 길입니다. 살길은 밖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서구의 문물을 받아 들여 부국강병을 꿈꿉니다. 일본이 역할모델이 됩니다.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그해 일본 의 힘을 빌려 이른바 ‘갑오경장’이 실시됩니다. 셋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길입니다. 동학은 19세기적 제3의 길을 대표합니다. 살 길은 나와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하늘 새 땅을 열망합니다. 지금 여기 새로 운 삶과 사회가 왔다고 믿습니다. 재가녀(再嫁女)의 아들로 과거시험조차 볼 수 없었던 불우한 지식인 최제우도 전국을 떠돌며 ‘살길’을 찾습니다. 서구열강의 침략전쟁을 피하고, 굶주림을 면하고, 전염병의 공포에서 벗어날 십승지(十勝地)와 궁궁촌(弓弓村)을 찾아다녔습니다. 지리산과 계룡산 깊은 산골에 가면 장생(長生)의 비결을 찾을까 하여 이리 묻고 저리 수소문합니다. 그 모습을 수운 최제우는 용담유사에서 이렇게 씁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이재궁궁 하였다네 매관매작 세도자도 일심은 궁궁이오 전곡 쌓인 부첨지도 일심은 궁궁이오 유리걸식 패가자도 일심은 궁궁이라 풍편에 뜨인 자도 혹은 궁궁촌 찾아가고 혹은 만첩산중 들어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해서 각자위심 하는 말이 내 옳고 네 그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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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경전공부는 물론이거니와 입산수도를 하기도 하고, 천주학도 공부하고, 장사도 해보고,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이거다 싶은 ‘길’을 찾지 못합니다. 이내 개화나 수구가 아닌 개벽의 길에 희망을 걸어보지만, 세상을 구하고 자 신을 구할 후천개벽의 비결을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1859년(그가 하느님체험을 하기 1 년 전입니다.), 식솔들을 이끌고 폐허가 된 고향집으로 되돌아옵니다. 귀(歸), ‘돌아옴’ 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라는 하 늘의 소리를 들립니다. 아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0여년을 찾아 헤매던 궁궁의 비밀 이 ‘내 안’에 있었습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신비체험으로 깨달았습니다. 재가녀의 아들로써의 차별은 그만의 아픔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굶주리는 백성들의 아픔 과 차별받는 여종의 눈물이 수운 자신의 아픔과 눈물이 되었습니다. 온 백성이 찾아 헤매던 궁궁촌은 ‘지금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깊은 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습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는 제자 들의 질문에 “네 안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말입니다. 장생의 비밀은 ‘그날 저 기’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현재에 있습니다. 궁궁은 내 안의 큰 생명, 거룩한 생명이었습니다. 나만의 생명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하나인 ‘한 생명’이었습니다. 다시 개벽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이 열립니다. 나의 모습 이, 나와 너의 관계가 환골탈태, 애벌레가 나비되듯 완전히 새롭게 변화합니다. 내 안의 궁궁촌은 관념이 아닙니다. 수운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너와 내 안에 있 는 하느님을 모시는 사람들끼리 ‘접(接)’이라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양반 상놈 할 것 없 이, 적서와 남녀의 차별이 없이 서로 존대를 합니다. 유무상자(有無相資),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재산을 나누어 서로를 먹입니다. 일상이 굶주림이었던 이들이 먹을 것 을 나누고, 평생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 존대를 받으니 이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사도행 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 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동학의 접 공동체는 이미 지상천 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접은 나라를 바로잡는 ‘보국(輔國)’ 운동의 주체가 됩니 다. 동학의 접은 수행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이자, 정치공동체였습니다. 전일적인 삶/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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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공동체였습니다. 요컨대 희망은 나와 우리 안에, 혹은 공동체 안에, 다시 말해 ‘함께 살림’, ‘서로 살 림’에 있다는 말입니다. 나만 살고자 하는 각자위심(各自爲心)을 넘어서 더불어 사는 마음, 곧 형제애입니다. 수운 최제우는 오심즉여심이라는 ‘하나됨’ 체험을 통해 하나됨 을 체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사회적 표현이 접이라는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19세기 조선의 ‘제3의 길’이었습니다. 역성혁명을 통한 왕조의 교체 만으로는 백성을 편안케 할 ‘안민(安民)’의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옛것에서나 밖에 서도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위정척사파가 기존의 질서를 고수하는 데서 살길을 찾고 개화파가 문을 열어 서구열강으로부터 부국강병의 비책을 찾으려 할 때, 수운은 우리 안 에서 ‘오래된 미래’를 찾으려 했습니다. 개벽의 길, 19세기 제3의 길 동학이 2014년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길은 나와 우 리 안에 있다.” 그리고 화두를 던집니다. ‘깊은 마음’, ‘공동체’, ‘개벽’. 한마디로 ‘생 명’.

3. 생명운동, 동학의 환생 그렇습니다. 갑오년 동학혁명 이전 동학 그 자체의 탄생을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동 학혁명의 숨은 열망이 바로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길’의 미래를 생각하기 전에 생 명운동 그 자체의 뿌리를 되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 20주기를 생 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걷는 동학’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무위당은 말 그대로 ‘생명운 동가’였습니다. 생명운동의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혹 쓰러질까 북돋아 주시고 격려 해주셨습니다.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 1990년 4월 12일 원주 호저 송골, 무위 당 장일순과 김지하 시인을 비롯한 원주캠프의 동지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112년전 송골 에서 붙잡힌 해월 최시형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지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추모비는 무위당과 원주캠프의 오랜 염원이었습니다. 드디어 생명운동으로 되살아난 동학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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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평행이론입니다. 1860년대 초 동학의 포덕이 시작되고 30여년 후 동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2주갑이 지난 1980년대 초 생명운동의 태동하고 30여년 후 2014 년 오늘 생명운동이 문명전환운동으로 새 시대를 엽니다. 동학의 환생이라고나 할까, ‘오심즉여심’이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깨닫는 마음으로 되살아납니다. 전사(前史)가 있었습니다. ‘신생철학’과 ‘태인전투’가 그것입니다. 유신의 폭압이 맹 위를 떨치던 1974년 부산대 철학교수 윤노빈이 새로운 삶의 철학을 화두로 던집니다. 생명사상으로써의 동학이 ‘생존’이라는 개념을 빌어 소개됩니다. 시인 김지하는 갑오년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혁명과 삶과 죽음의 숨은 뜻을 찾는 영화 시나리오(가제 ‘태인전 투’)를 구상합니다. 동학이 본격적으로 되살아나기 전 눈 밝은 이들이 동학의 부활을 예 감했던 것입니다. 1982년 민주화운동의 성지 원주에서 역사적인 문서가 발표됩니다. “생명의 세계관 확 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일명 ‘원주보고서’)”이 그것입니다. 가톨릭 영성의 밭에 동학 의 씨앗이 뿌려집니다. 생명의 시대를 천명하면서 해월의 ‘이천식천(以天食天, 하늘이 하늘을 먹는다)’을 빌려 협동적 생존을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서학과 동학이 만나 생명 운동으로 거듭납니다. ‘생명’을 열쇠말로 사회운동의 대전환을 선언합니다. “생명의 진리는 중도다.” 원주보고서는 생명운동의 길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시 에 넘어서는 ‘제3의 길’임을 명확히 밝힙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은 인간과 지구생태계를 죽음으로 내모는 산업문명입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산업문명의 쌍생아라는 것입니 다. 동학이 그렇듯이, 제3의 길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절충이나 수정이 아닙니다. 거 목 아래 어린 나무들이 태양을 좇듯 모든 생명이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최적의 길이며, 꼬리칸과 머리칸의 2차원적 대결구도를 넘어서는 차원변화입니다. 이제 생명운동은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갑니다. 일본과 대만의 협동조합과 유기농업을 배우고, 새로운 삶과 사회를 향한 밑그림을 그리고, 새로 운 전략을 탐색하고 실천합니다. 그리고 1985년 6월 원주에서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이 발 족됩니다. 새로운 사회운동의 씨앗이 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듬해 1986년 12월 서 울에서 한살림농산이 문을 엽니다. 도농직거래를 중심으로 하는 생명공동체운동이 ‘한살 림’이란 이름을 얻고 걸음마를 시작한 것입니다. 120년 후 새로운 ‘접’이 만들어진 셈 입니다.18)

42 제23차 모심과살림포럼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동학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생명운동은 무엇보다 뭇 생명의 아픔에 공감하는 운동입니다. 농부가 쓰러진 벼를 일으 켜 세우듯 쓰러진 이웃을 일으켜 세워주는 게 생명운동입니다. 갈 곳 없는 수배자를 보 살펴주는 게 생명운동입니다. 깊은 하나됨과 형제자매애의 드러남입니다. 생명운동의 태동과 전개, 그 한가운데 무위당 장일순이 존재했습니다. 원주 생명협동 운동의 살아있는 역사인 밝음신협 한편에 글씨 한 점이 눈에 뜨입니다. 1991년 신협 설 립 20주년을 기념하여 무위당이 쓴 글씨라고 합니다. “공생시도(共生是道)”, 공생이 곧 길이라는 뜻입니다. ‘한살림의 길’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돌아간 지 20년, 생명운동가 무위당을 추억합니다. 아니 내 안에 살아있는 무위 당을 모십니다. 동학이 살아있듯 무위당은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다. ‘나는 미 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옆으로 답례‘와 같은 말씀이 지금도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누구보다 해월을 사랑했고 또한 해월처럼 살고자 했던 무위당, 개벽세상을 열고 자 했던 무위당, 그의 20주기에 즈음해 ‘음덕(陰德)’과 ‘축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원주보고서 30년, 생명운동은 이제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생 명운동(生命運動)[명사]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생명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사회적 운동”. 생명평화결사, 한살림 등 기왕의 생명운동 단 체 외에도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한국YMCA연맹 등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수년 전부터 생명평화 강령을 채택하였고, 시민사회운동의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 가 톨릭의 생명운동은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대중적으로는 이들 종교계의 생명운 동, 환경운동이 친근할 정도입니다. 이제 생명운동은 원주의 것도 아니고, 한살림의 것도 아닙니다. 물론 동학의 것도 아 닙니다. 동학의 입장에서는 생명운동이 동학의 환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경전과 고전은 한결같이 영생의 비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고요. 생명운동은 모두의 것입니다. 생명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합 니다. 동학은 창도 후 30년 숨죽인 포덕활동 속 접을 만들고 땅위의 천국을 일구었습니다. 18) 그리고 3년 후 1989년에 원주보고서를 모태로 전일적인 생명공동체운동의 길, 문명전환의 길을 밝 힌 한살림선언이 발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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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으로 사명을 다할 수는 없었습니다. 억조창생의 열망을 대변해야 했습니다. 만국(萬國)/만민(萬民)/만물(萬物)을 ‘살릴 계책(活計)’을 내놓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오늘 생명명운동의 사명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평화운동, 생명살림운동, 생명 공동체운동, 생명문화운동 등 조금씩 다른 이름을 가진 생명운동‘들’이 함께 모여 이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생명운동, 천주교생명운동, 불교생명 운동이 더불어 뜻을 모을 때가 되었습니다. 생명운동은 진정 우리 시대의 ‘활계(活計)’ 가 되어야 합니다.19)

4. 전환, 21세기 개벽의 길 다시 평행이론입니다. 동학이 경주에서의 ‘포덕’ 선언 30여년 후 갑오년의 혁명을 통 해 개벽의 길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려 했듯이, 생명운동도 원주에서의 ‘생명’ 선언 30여 년 후 오늘, 대전환의 문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생명운동은 지난 30여년 각자의 현장에서 마음운동과 공동체운동을 통해 새로운 생활 양식을 실천해왔습니다. 이제 전면적인 사회적 전환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할 때입니다. 자립적 삶을 일구는 생명운동,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를 만드는 생명운동, 새로운 사람 으로 거듭나는 생명운동을 사회와 함께 널리널리 펼쳐야 할 때입니다. 날개를 펴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고비원주(高飛遠走)’입니다. 생명운동은 이제 문명사적 전환기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삶과 사회를 예감하는 수많은 이들과 만나야 합니다. 의식의 전환, 삶의 전환, 문명의 전환을 위한 지렛대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동학과 서학이, 옛것과 새로운 것이 함 19) 동학과 생명운동은 공동점이 많습니다. 동학도 생명운동도 무엇보다 권력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생 명에 천착했습니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모심의 깊은 마음에 기반한 사 회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만들기를 통해 삶과 사회를 바꾸고자 했습니다. 전일적입니 다. 생활과 수행과 사회변혁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개벽, 혹은 문명전환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운동의 경로가 다릅니다. 동학이 수행공동체에서 시작해 생활공동체로, 다시 정치공동체로의 확장의 경로를 보여주었다면 생명운동은 생활공동체에서 출발 해, 수행공동체로 깊어지고, 다시 정치공동체로의 확장을 탐색해야 할 터입니다. 물론 사람도 세상도 달라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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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예컨대 동학의 하늘사람(天人)과 서유럽 대안 운동의 나비혁명이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동학혁명 1년 전 전라도 고부에서 만들어졌던 사발통문처럼 사회적 공모가 필요합니 다. 더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새로운 삶과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전환 의 공모’, ‘개벽의 공모’입니다. 영어의 공모, conspiracy는 ‘함께 숨 쉬다’ 라는 뜻이 라고 합니다. 이심전심, 기운을 모으고 마음을 모으는 것이 공모입니다. 아마도 사발통 문은 전라도뿐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등 곳곳에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21세 기 한국의 생명운동, 삶의 전환운동이 곳곳에서 돋아나고 있습니다. 마을공동체를 일구 며, 농사를 지으며, 녹색평론을 읽으며, 생명평화학교를 열며, 협동운동을 펼치며 기운 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지난해 5월 보은취회 120주년 행사장 소년소녀들의 맑은 얼굴빛 을 기억합니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120년 전 무장포고문처럼 큰 틀의 문명전환운동을 세상에 알리고, 둘째, 새로운 패러다임과 사회적 비전을 제시하고, 셋째, 깊고 넓은 연대와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각자의 현장과 지역공동체 에 터하되 지역을 횡단하여 연결하고 또 펼쳐야 할 때입니다. 물론 갑오년 한 해의 봉기 가 아니라 긴 호흡의 새 사람,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대전환운동이 절실합니다. 1) 문명전환 선언 문명전환은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도 아니고, 정치구조를 혁신하는 정치개혁에 머물 지도 않습니다. 문명전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안에 의식의 전환, 생활의 전환, 정치 /경제시스템의 전환, 기술의 전환을 모두 포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명전환 운동은 개벽운동입니다. 예컨대 탈물질 정신문명, 탈도시 농촌문명, 탈자본 살림문명, 탈국가 공동체문명... 전환은 ‘중심이동’입니다. 옛것을 폐기하고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이동하는 것입니다. 가치의 중심이동, 생활의 중심이동, 체제의 중심이동. 전환은 애벌 레가 나비가 되는 ‘탈바꿈’입니다. 전환운동은 새로운 삶 ‘일구기’입니다. 새로운 공동 체 만들기, 새로운 사회 만들기 운동입니다. 전환은 생태, 공동체, 영성을 키워드로 새 로운 삶을 실천하는 ‘이행(transition)’입니다.20) 한국의 전환운동은 '방향전환'이면서 동시에 '이행'입니다. 다시 말해 삶의 전환과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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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삶의 실천을 동시에 이루어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비약입니다. 탈근대를 성찰하면서 도 동시에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적 압축성장과는 다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던 내재된 ‘하나됨’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동학의 각지불이(各知不移)와 같습니다. 잃어버렸던 공동체성, 신명, 합일의 정신을 따로 또 같이, 창조적으로 되살리 는 것입니다. 2) 새로운 패러다임과 사회적 비전의 제시 한국 가톨릭 농민운동의 대부였던 故정호경 신부님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면서 새삼스 럽게 깨달았습니다. 생명운동, 공동체운동을 함께 펼치셨던 수많은 선배 운동가들이 있 었기에 오늘 내가 있다는 것, 그것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정호경 신부님은 생명운동을 ‘음(陰)의 운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방법론이 아 닙니다. 패러다임입니다. 비전과 실천방안을 포함한 큰 틀의 방향입니다. ‘음개벽’이란 말이 딱 맞습니다. ‘양의 시대’에서 ‘음의 시대’로의 전환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陽)의 패러다임에서 음(陰)의 패러다임으로 중심이동. 이미 많은 이들이 직감합니다. 남성성에서 여성성으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상극에서 상생으로, 돈벌이에서 살림살이로, 사고파는(매매) 관계에서 주고받는(호혜) 관계로의 중심이동 말입니다. 조금 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빠름에서 느림으로, 강함에서 부 드러움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중심이동. 다시 강조하거니 와, 물론 ‘폐기’가 아니라 ‘중심이동’입니다. 특히 정치와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합니다. 권력의 향배가 중심이 되는 ‘양의 정치’에서 민생이 중심이 되는 ‘음의 정치’로, 돈벌이와 성장 중심의 ‘양의 경제’에서 살림살이와 행복 중심의 ‘음의 경제’가 요구됩니다. 1인1표의 기계적 민주주의로는 부족 합니다. 시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또 그 마음이 잘 드러나는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가 모색되어야 합니다. 돈벌이 중심의 ‘양의 시장’ 및 ‘양의 화폐’에서, 필 요의 충족이 중심이 되는 ‘음의 시장’ 및 ‘음의 화폐’가 요구됩니다. 기계적 평등에 의 한 ‘양의 재분배’가 아니라 각각의 형편을 배려하는 ‘음의 재분배’가 필요합니다. 20) 서양에서는, 의미가 조금씩 다르긴 합니다만, 중심이동(shift), 방향전환(turning), 이행(transition), 변형(transformation) 등으로 표현됩니다. 처음에는 중심이동, 방향전환이 주로 언급되었습니다만, 벌써 30여 년 이제 ‘이행’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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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이란 중심을 이동하여 균형을 되찾는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의 전일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양’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생명세계의 ‘역동적 균형(dynamic equilibrium)’을 되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음의 정치’란 다시 말해 ‘전일성의 정치(holistic politics)’이고, ‘음의 경제’는 '전일성의 경 제학(holistic economy)’입니다. '평등과 정치경제학'과 '자유의 정치경제학'을 안고, 또 그 한계를 넘어서는 '박애의 정치경제학'이 요구됩니다. 한살림선언은 자기실현, 생태적 균형, 사회정의를 사회적 목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안에 있는 하늘, 땅, 사람 을 아우르는 전일적인 비전을 시대의 언어로 정리하고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자본주의 넘기’의 목표도 더욱 분명해져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의 패권을 장 악한 오늘날, 자본주의 넘기는 명확히 사회적 과제가 됩니다. 체제전환, 즉 시스템의 ‘진화적 재구성’입니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이야기하는 ‘통일대박론’은 역설적으로 한 국 자본주의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반증합니다. 생명운동의 선배들은 명백하게 사회주의 와 자본주의의 동시적 극복을 선언하며 새로운 경제사회질서를 끊임없이 탐색해왔습니 다. 최근 일본의 대안운동은 ‘축소사회’를 사회적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생명 운동의 체제적 대안도 본격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때입니다.

3) 새로운 계획과 실천 생명운동은 무엇보다 연민입니다. 측은지심, 다른 존재의 아픔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 합니다. 이웃과 하나 되고 자연과 하나 된다는 것은 모든 생명과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 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가치와 생활을 바꾸는 삶의 전환으로 이어집니 다. 그러나 생명운동이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고, ‘문명전환’을 선언한다면 그에 걸맞은 새로운 전략과 실행계획이 나와야 합니다. 이를테면 120년 전 혁명적 거사를 앞두고 동 학이 그러했듯이 공동체 중심의 ‘접(接)운동’에서 공동체와 공동체를 연결하고 나아가 생명을 중심가치로 활동한 다양한 그룹이 함께하는 ‘포(包)운동’ 전략, 큰 연대가 필요 합니다. 포함삼교(包含三敎)의 그 포입니다. 이때 포는 쓸어담는 포가 아니라 모시고 함께 가 는 포입니다. 좋은 선례가 있습니다. 3.1운동이 그것입니다. 천도교가 중심에 서고 매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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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을 했으되 기독교와 불교와 더불어 함께 가는, 셋이 모여 새로운 차원의 하나가 되 는 3.1운동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포운동’이 절실합니다. 특히 종교의 본원적 의미가 생명의 비밀을 찾는데 있다는 점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불교와 원불교 등의 종교단체들 은 ‘생명’을 열쇠말로 하는 문명전환운동의 중심이 됩니다. 그 무기(?)는 도덕입니다. 동학에서는 전쟁무기를 ‘살인기(殺人機)’, 도덕을 ‘활인기 (活人機)’라고 말했습니다만, 도덕(道德)이란 고상한 담론이나 규범이 아니라 ‘가치지 향과 어진 행동’, 혹은 ‘새로운 의식과 생활양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삶과 문화 입니다. 생명운동은 문화로써 세상을 바꿉니다. 마치 피리를 불어 세상을 평화롭게 한 만파식적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결론은 ‘사람’입니다. 스스로 활계(活計)의 비법이 됩니다. 동학의 접포 는 이를테면 학습조직과 학습네트워크였습니다. 함께 공부하고 길러내어 우리 시대의 활 인기를 벼려야 합니다. 이제 생명운동은 전사회적인 문명전환운동으로 날개를 펴야 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마을과 생산현장에서, 도시의 협동조합에서 종종걸음으로 살림을 꾸렸다면 이제 날개를 펴고 하늘로 비상해야 할 때입니다.

5. 셋이 모여 새로운 하나를 열다 해월 최시형은 ‘궁을회문명(弓乙回文明)’, 즉 ’궁을이 문명을 바꾼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명전환기, 그 속뜻이 의미심장합니다. 궁을 혹은 궁궁은 동학의 부적이기 도 합니다. 마음의 약동을 상징하기도 하고 생명의 비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궁을회문명이란 마음의 시대가 온다는 뜻일 수도 있고, 생명운동이 문명을 바꾼다는 뜻 인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120년 전 동학이 개벽의 열망을 사회혁명으로 확장했듯이, 생 명운동도 문명전환을 선언하고 뜻을 모으고 사람과 공동체를 연결하고 이제 행동을 해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물론 또 다시 실패를 해서는 안 되므로 신중하고 섬세하게 준비해 야 합니다. 거기에 인류와 지구의 대안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4년 동학혁명 2주갑, 무위당 20주기를 맞이하며 이런 희망을 가져봅니다. 오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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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무위당 20주기 추모행사가 열리는 원주에서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제2의 삼례집회 혹은 보은취회를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민초들의 열망을 모아 전환의 이정표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올가을 공주 우금치에서 ‘제2의 무장기포’를 시도해보았으면 좋겠습 니다. 참혹한 패배의 자리에서 삶의 전환, 문명의 전환을 선언하는 것도 참 멋진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향한 대전환운동 의 플랫폼을 출범시킬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동안 뿌려졌던 씨앗들이 새봄과 함께 싹을 틔우려 하나 봅니다. 경향각지 남녀노소 의 마음과 기운이 심상치 않습니다. 2014년 한국형 전환운동이 모습을 드러내려나 봅니 다. 지난 몇 년간은 조금씩 조금씩 전환의 마음을 나누었다면 올해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전면적인 기포(起包)를 선언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속 깊이 숨겨진 ‘하나됨’, 공심(公心)을 찾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땅속에 박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한 사람의 뿌리, 공동체의 뿌리, 지구의 뿌리, 생명의 뿌리를 찾는 일입니다. 내 안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박애와 사랑과 자 비와 연대의 마음을 찾는 일입니다. 1919년 민족의 영혼을 일깨웠던 대사건이자, 새문명의 함성이었던 3.1운동을 다시 떠 올려봅니다. 칠흑 같은 식민지 치하였으나 남과 북, 좌와 우, 마음과 몸이 둘로 갈라지 지 않았던 사회적 하나됨의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뜻은 깊고 대의는 바다와 같았습니 다. 그리고 33인이, 천도교와 기독교와 불교가, 아니 온 겨레가 서로를 공경하고 배려했 습니다. 천지인 삼재가 하나가 된 삼일(三一)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희망의 촛불이 되었 습니다. 지금 여기 “세계 인민의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빛나는 일이 시작됩니다.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도 다. 얼어붙은 얼음과 찬 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 저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 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하늘 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때를 맞고, 세계 변화의 물결을 탄 우리는 아무 머뭇거릴 것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온 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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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정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우리가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나아가 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침한 옛집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삼라만상과 더불어 즐거운 부 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천만세 조상들의 넋이 은밀히 우리를 지키며, 전세계의 움직임 이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나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 다만 저 앞의 빛으로 힘차게 나아갈 따름이로다.” - <기미독립선언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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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발 표 3 -2

‘전환’의 사회운동 -동학으로부터 배우는 ‘새 꽃 피는’ 사회운동의 길21) 주요섭 |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1. 사회운동은 어떻게 새 꽃을 피울 수 있을까?

1) 낡은 것이 되어버린 한국의 사회운동 - ‘새정치민주연합’의 약칭 논란을 보며 민주주의 애처로운 신세를 생각한다. 누구는 ‘새정치연합’이라 하고 또 다른 누구는 굳이 ‘새민련’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민주 주의는 이미 계륵이 되었다. - 시민사회운동의 지방선거 대응과 준비를 보며 한없이 무기력한 모습이 슬프다. 정책 제언을 한다고 하나 반향도 신선함도 감동도 기대하기가 어렵다. 일할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나마 움직이는 사람은 오래된 사람들뿐이다. 낡고 늙은 사회운동이 안쓰럽다 (물론 필자도 그 중 하나이다.). - 스스로 되묻는다. 나는 무엇을 열망하는가? 한국 사회운동의 변혁적 열망은 무엇일 까? 야당과 제도정치의 뒤로 쫓는 사회운동, 국가복지시스템의 하위구조로 작동하는 사회운동, ‘필요(needs)’의 충족에 만족하는 사회운동을 본다. 열망의 사회운동을 어 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다시 사회운동은 꽃을 피울 수 있을까?

21)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해 일단 문제의식만 담았습니다. 추후 보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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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묵은 나무에서 새 꽃 피어나듯 - “묵은 나무에도 해마다 새 꽃 새잎이 오시는구나.” 판화가 이철수의 작품 주제 중 하 나이다. 아마도 배롱나무인 것 같다. 잎이 돋아나가 전 배롱나무는 늙은 농부의 팔뚝 같은 가지를 가졌으나, 봄이 되고 가을이 오면 늙고 낡아 보이는 가지에서 새 잎이 나오고 새 꽃이 피어난다. 향기가 난다. - 한국의 민주주의와 사회운동도 그런 것 아닐까? 낡고 늙어 보이지만, 아직 사라질 때는 아니다. 묵은 나무에 새 잎 새 꽃 오시듯 한국의 사회운동도 꽃을 피우고 은은 한 향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 같아보여도 지난해의 그 꽃이 아니다. 2014 년 오늘의 새 잎 새 꽃이다. - 귀농귀촌 현상, 힐링 신드롬, 협동조합 열풍이 예사롭지 않다. 도시로 향하던 사람들 이 농촌으로 되돌아가고, 이웃과 자연과 똑 떨어져 살며 ‘돈벌어 독립’을 주장하던 이들이 이웃사촌과 옛 공동체를 그리워한다. ‘경쟁시스템’에서 벗어나 ‘협력시스템’으 로 먹고살 방도를 찾는다. 아픈 만큼 절실해지는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아닐까? - ‘치유’의 사회운동이 절실하다. ‘열망’의 사회운동을 보고 싶다. 아픈 사람들에게 위 로가 되고,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삶과 사회와 문명을 향한 전환운동이 되었으면 한다. -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이 먼저 ‘전환’해야 한다. 요컨대 ‘사회운동의 전환’이다. 기존의 고정관념과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 패러다임으로부 터 ‘전환’해야 한다. - 꽃이 핀다. 내 안의 열망이 돋아난다. 욕망 아래 숨겨진 열망에 주목한다. 열망의 사 회운동, 전환의 사회운동을 모색한다.

3) 동학혁명 2주갑에 즈음하여 - 120년전 개벽적 열망으로 분출한 1894년 갑오년 동학혁명. 2회갑이 되는 2014년 오 늘, 동학을 통해 한국 사회운동의 ‘오래된 미래’, ‘오래된 새 길’을 묻는다. 열망과 전환의 사회운동, 그 한국적 원형이 ‘동학’에 있다. - 열망과 전환의 관점에서 동학을 새롭게 보고 싶다. 동학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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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아야 한다. 동학은 농민혁명, 계급혁명만이 아니다. 동학은 단지 척양척왜의 민 족운동만이 아니다. 120년전 갑오년의 일시적 봉기가 아니다. - 동학은 1860년 수운 최제우의 ‘하나됨 깨달음’에서부터 시작해 1894년 사회혁명으로 분출하고 그 맥을 3.1운동 이후까지 이어온 열망의 사회운동이었다. 정치적 변화나 왕조의 교체만을 꿈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회적 질서, 무엇보다 새로 운 사람으로의 거듭남을 꿈꾼 개벽적 사회운동이었다. - 동학으로부터 배운다. 인류사적 전환기, 동학운동/동학혁명은 우리에게 어떤 영감과 시사점을 주는가? 생태/사회/경제의 복합위기 시대에 우리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2. 동학으로부터 배운다: 동학의 사회운동적 함의 동학은 농민혁명이 아니다. 동학은 갑오혁명이 아니다. 동학은 깨달음이고 공동체이며, 길고 긴 사회적 행동이었다. 선천적 질서를 바꾸고 후천적 질서를 창조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동학의 안과 밖, 동학의 좌와 우, 동학의 앞과 뒤를 온전히 살펴야 한다. 특별히 ‘삶/생명’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19세기 조선 민초들의 ‘궁궁(弓弓)’의 열망, 장생(長生)에 대한 열망을 헤아려야 한다.

1) 동학은‘깨달음의 사회운동’이다. -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하늘이다’ 라는 말은 사람이 하늘만큼 귀하다는 뜻이 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하늘적 존재, 즉 우주생명의 일원이라는 깨달음 이다.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깨달음이 그것이다. - 오심즉여심,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 동학은 1860년 수운의 ‘하나됨 체험(혹은 나 늘님체험)’, 즉 ‘온 생명세계는 하나다’ 라는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바로 이것, ‘숨겨 진 하나됨’이 바로 동학운동의 영성적 기초가 된다. 접(接)이라는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기초이며, 수많은 집회들과 갑오년 동학혁명의 에너지가 된다. 보국안민, 제폭구 민의 혁명정신 아래에 오심즉여심이 깔려있다. - 억조창생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해월의 모습, 불의에 맞선 전봉준의 봉기는 ‘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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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하나됨’의 인격적 드러남이다. 단 전봉준에게서 그것은 주로 민중들에 대한 연민으 로 표현되고 있는데 비해, 해월의 경우 전 생명세계와의 깊은 교감으로 드러난다. ‘경물(敬物)’에 경지에 이른 해월의 모습이 그것이다. - 그런 맥락에서 ‘모심(侍)’이란 내 안에 숨겨진 근본적인 하나됨에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애와 연대의 공동체로 실현된다. 숨겨진 하나됨의 사회적 실현, 그것은 정확히 수운의 ‘시(侍)’에 대한 해석과 같다. 내유신령(內有神靈)하고 외유기화(外有氣化)하여, 일세지인(一世之人)이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 - 공심(公心), 공공성의 뿌리도 바로 하나됨체험, 우리는 모두 하나, 한생명이라는 생 각이다. 우주생명과 내가 하나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뜻이기 도 한다. 양반과 노비도 하나요. 남성과 여성도 둘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 프랑스혁명은 3대 모토인 자유, 평등, 박애가 시사하듯, 박애(하나됨) 없는 자유와 평등은 팥소 없는 찐빵이나 다름이 없다. - 오심즉여심은 무위당의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로 이어지고, 인농 박재일의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로 계승된다.

2) 동학은 대전환의‘개벽적 사회운동’이다. - 그러므로 동학의 혁명과 운동은 개벽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주생명과 하나됨 체험에 기초하였으므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변혁을 열망하는 것은 너무 도 당연한 일이었다. - 거꾸로 정치적 개혁이나, 1회적 봉기,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일이었다. - 동학의 ‘동(東)’은 ‘서(西)’에 맞선 동이기기도 했거니와 오히려 동의 질서를 다시개 벽으로, 창조적으로 부활시키고자 했다. - 동학은 민초들의 장생, 생명살림의 염원을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실현코자 했다. 선 천의 질서를 안고, 또 동시에 넘어서 후천의 질서를 꿈꾸었다. 그것은 새로운 삶, 사 회, 새로운 삶, 새로운 문명을 향한 꿈이었다. - 신분으로 차별되고, 적서가 차별되고, 남녀가 차별되는 선천의 질서, 그리고 상극으로 서로를 죽이는 선천세상을 넘어서, 노비와 주인이 어우러지고, 적자와 서자가 차별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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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남자와 여자가 둘이 아닌 후천세상으로의 개벽적 전환을 꿈꾸었다. - 특별히 동학은 새로운 사람, 즉 하늘사람을 꿈꾸었다. 모든 이들이 하늘사람으로 거 듭남으로써만 진정한 개벽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동학‘농민’ 혁명이 아니라‘동학’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은 농민혁명으로 협소하게 볼 수 없다. 계급의 잣대로만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 할 수 없다. 19세기 말 조선은 그냥 농민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농업사회 그 자체였다. 계급적 구분이 무의미했다. 생업이 농업인 민초 모두가 ‘동학’이라는 새로운 가치와 비전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동학농민혁명’은 ‘동학혁명’, ‘동학운동’이 되어야 한다. 1894년 갑오년을 중 심으로 하는 혁명적 거사를 ‘동학혁명'으로, 1860년 수운의 ‘하나됨 체험’ 이후 갑오년 혁명과 3.1운동에 이르는 기간의 동학당의 활동은 ‘동학운동’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3) 동학은‘전일적 사회운동’이다. - 동학은 일즉다(一卽多), 하나이면서 여럿, 여럿이면서 하나인 전일적(全一的) 사회운 동이었다. - 동학운동은 수행과 생활과 정치의 전환을 동시에 실현하려는(시간차는 있겠지만) 전일 적인 사회운동이었다. 수행에 치우치지 않고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정치에 매몰되지 않았다. 동학의 접은 수행공동체이면서 생활공동체이면서 정치공동체였다. - 1860년 수운의 깨달음 이후 접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시천주 수행을 통해 하나가 되었고, 이후 하나됨의 일상적 실현으로써 생활공동체로 발전하였으며, 갑오년 혁명적 시기에 동학의 접포조직은 혁명의 군대, 강력한 정치공동체가 되었다. - 동학의 전일적 사회운동은 보은취회 이후 오랫동안의 ‘민회(民會)’운동을 통해 1919 년 31운동으로 꽃을 피우고 대한‘민국(民國)’의 기초가 된다. - 동학은 ‘삶의 개벽’의 모형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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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열망과 전환의 사회운동을 위하여 묵은 나무에 새 꽃이 피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기가 절실하다. 단절이 아닌 불연속적 연 속의 도약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의 방향전환, 곧 ‘중심이동’이 요구된다. 중심이동을 통 한 사회운동의 심화 확장이다.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 대항적/대변적 사회운동에서 대안적 사회운동으로 ‧ 중앙중심적 사회운동에서 풀뿌리 사회운동으로 ‧ 집합적(우리들) 사회운동에서 개성적(나들) 사회운동으로 ‧ 이성적 사회운동에서 영성적 사회운동으로 ‧ 남성성의 사회운동에서 여성성의 사회운동으로 ‧ 인간주의적 사회운동에서 생태주의적 사회운동으로 ‧ 사회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생명으로... ‧ 계급적 사회운동에서 전인적 사회운동으로 ‧ 필요의 사회운동에서 열망의 사회운동으로 ‧ 개량적 사회운동에서 전환의 사회운동으로 ‧ 개량적/혁명적 사회운동에서 개벽적/전환적 사회운동으로 등등등 ‧ 너를 바꾸는 사회운동에서 나를 바꾸는 사회운동으로

1) 사회적 영성과 열망의 사회운동 - 협동조합이 뜨고 있다. 경쟁의 삶에 매몰된 우리에게 상호부조의 협력적 삶의 복원을 위한 계기를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필요’의 협동조합에 머물고 있다. ICA 가 규정하는 협동조합의 정의에도 나와 있듯이 협동조합의 ‘필요(needs)의 충족’과 ‘열망(aspiration)의 실현’의 역동적 균형이다. - aspiration의 어원은 to+spire, 무엇을 향한 깊은 마음을 의미한다. spire와 spirit(영 성)은 어원이 같기 때문이다. ‘열망’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욕구나 욕망이 아니라 열망이라고 번역해야 옳다. 협동조합의 열망이란 내안에 깊이 곳, 하나됨에 대 한 ‘뜨거운 바람’일 것이다. - 앞으로 사회운동은 모든 존재의 깊은 곳에 숨겨진 공심(公心)에 기초해야 한다. 한자 말로 公(공)의 옛 모양은 무엇인가 닫힌 것을 여는 모양이라고 한다. 옛날의 쓰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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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신을 모시고 일족(一族)의 사람이 모이는 광장을 나타낸다고 한다. - 다시 말하면, 영성에 기초한 사회운동, 깨달음에 기초한 사회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 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라는 각성이 새로운 사회운동의 출발점이다. - 오래전 이를 우리는 의식화라고 했으나 이제 의식화가 아니라 깨달음이다.

2) 음개벽과 전환의 사회운동 - 인류사적 전환기에 즈음하여 의식의 전환, 생활의 전환, 사회의 전환, 나아가 문명의 전환을 21세기의 한국 사회운동의 사명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 동학(東學)의 표현으로 한마디로 말해서 후천개벽, 선천의 패러다임에서 후천의 패러 다임의 전환이다. 동학의 참옥한 패배를 또 다른 하나됨으로 치유코자 했던 강증산은 이를 일러 ‘음개벽(陰開闢)’라고 표현했다. - 음양론을 빌어말하면 양의 패러다임에서 음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이다. 예컨대 가부장 과 물질 중심의 질서에서 가모장(家母長)과 정신 중심의 질서로의 전환이다. ‘중심이 동’이다.(생명세계에서 폐기는 없다. 순환이 있을 뿐, 물론 성질이 바뀐다.) - 생명평화란, 생명세계의 평화(平和), 즉 균형과 조화를 되찾는 것이다. 생명운동이란 생명세계의 역동적 균형을 되찾는 것이다. 전일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시 말 해 생태적, 사회적,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들어올림으로써 가능하다. 예수님말 씀처럼, 나중된 자가 먼저되는 것, 가난한 자를 부자되게 하고, 약자를 강자로 만드 는 것... - 음개벽이란 양의 질서에서 음의 질서로의 중심이동이다. ‘음의 정치’를 통한 전일적인 정치로의 전환, ‘음의 경제’를 통한 전일적인 경제로의 전환이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 다. ‧ 물질에서 정신으로 ‧ 가부장에서 가모장으로 ‧ 이성에서 감성과 영성으로 ‧ 이코노미(economy)에서 에콜로지(ecology)로 ‧ 사고팔기/매매에서 주고받기/호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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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시장에서 호혜시장으로 ‧ 국가에서 공동체로(국회에서 민회로) ‧ 경쟁시스템에서 협력시스템으로 ‧ 빠름에서 느림으로 ‧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 중앙에서 지방으로...

3) ‘나들’ 살림마당과 열망과 전환의 플랫폼 - 아즉천(我卽天), 내가 곧 하늘이다. 해월 최시형은 인간이라는 집합명사가 아니라, ‘나’라고 적시하였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이 생각난 다. 집합적 인간이 아니라, 그래서 각지불이(各知不移)아닐까 생각된다. - 그러므로 그런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어느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이름처럼, ‘나들’이다. 그러나 나들 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됨(不移)이 있다. ‘나’는 이미 전 일적이다. 나는 수행공동체의 일원이고 생활공동체의 일월이며, 정치공동체의 일원이 다. - 그리고 그 ‘나들’이 만나는 광장, 마당, 플랫폼이 절실하다. 서로를 구속하는 결사체 보다, 대동단결의 연합체보다, 이를테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플랫폼이다. 들고남이 자유롭고 오고감에 제한이 없는 그러나 광장 한 가운데 보이지 않는 끈, 즉 공심이 있어서 각자 돌아가 있어도 여전히 하나로 연결된 네트워크적 마당. - 마당과 아고라와 신시(神市)는 전일적 에너지/정보의 장(field)이다. 촛불이 그랬던 것 처럼, 민의가 모아지는 민회(民會)면서, 신명나게 노는 축제의 장이면서, 심령대부흥 회(?)의 교회당이다. - 지금으로부터 20년전 1994년 열린 ‘생명민회’가 떠오른다. 20년이 지난 2014년 오늘 살림의 마당이 열리기를 고대한다. 참혹한 패배의 현장이었으나, 오히려 후천개벽의 열망이 잠들어있는 공주(公州) 우금치에서 혹, ‘2014년 살림마당’이 열리고 마당의 한켠에서 ‘생명민회2014’가 열리면 좋겠다. 삶의 전환, 생활의 전환, 사회의 전환, 그리고 문명의 전환, 그 열망을 담아서... - 이름은 ‘생명민회’가 아니어도 좋겠다. 다만 그 마음을 이어가자는 것이다.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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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이름짓기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니까. 살림 페스티벌도 좋고, 한살림마당도 좋고... 동학혁명 2주갑, ‘전환’의 사회운동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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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토론 1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전환의 핵심이며, 동학혁명의 핵심이지 않을까? 윤기돈 | 녹색연합 사무처장

‘전환의 시대, 동학으로부터 배우는 새로운 삶, 사회, 문명’ 포럼에 토론자로 나와 달라 는 말을 전해 듣고, 토론문을 어떻게 써가야 할까 막막했다. 동학의 깊은 뜻을 모르기 에, 지금 내 고민과 동학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가 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토 론자로 나와 달라고 제안한 주요섭 씨의 ‘전환이 개벽이다’라는 글을 읽으며, 다음 이야 기를 매개로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 전환을 위해 고민해 볼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자 한다. “해월은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혁명의 실패를 예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처음 전라 도 고부와 무장, 금산 등에서 기포를 하려 할 때,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때를 기다릴 것은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5만년 선천의 인연과 업이 쌓여서 분출할 수밖에 없는 일 이라면 실패마저도 감당해야 한다고 결단합니다. 억조창생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는 해월의 피눈물이 눈에 선합니다.” - 주요섭, ‘전환이 개벽이다’중에서

전환의 길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가능성을 읽어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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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의미는,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참여가 필요하 다는 이야기이지 않았을까?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이 가능성을 읽어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도미야마 이치로가 ' 폭력의 예감'에서 언급한 내용은 참고할 만하다. 그는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폭력 에 이미 저항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폭력을 예감하고, 그래서 자신에게 닥쳐올 폭력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폭력에 저항할, 폭력을 종식시킬 가능성을 찾아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소통의 과정에서 '성급히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단정적 표현'보다, ' 소통을 이어가며 상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 기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비단 폭력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시민운동이든, 녹색운동이든, 생명운동이든 운동의 한계를 예감하였으나, 그 극복방안을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한 채 주저하는 사람들에게서, 혹은 자본주의의 한계 혹은 공포를 예감하고, 자본주의가 내 삶 을 피폐화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읽어낼 것인지 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때 중요한 것이 상상력을 억제하는 단정적 표현을 쓴다거나, 혹은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거나,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존의 것(모습, 제도, 틀 등)을 떠오르게 하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현재의 한계와 공포 를 뛰어넘는 대안의 상상력을 만드는 과정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하 는 핵심이다. 이것이 해월선생이 이야기한 핵심이 아닐까? 먼저 행동(저항)에 나선 사람들에겐 비겁자로 보일 수 있는 침묵하는 다수에게 가능성 을 읽어내는 일은 당위적으로는 쉽지만, 실제 운동과정에서는 매우 어렵다. 변혁의 과 정, 전환의 과정을 노부모나 어린 아이와 함께 변혁, 전환이라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나 혼자 혹은 건장한 이들이 뛰어 오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다. 다른 하나 중요한 것은 가능성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 치와 원칙의 적용이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가지는 가치와 원칙을 내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곤 한다. 내가 가지는 가치와 원칙이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끊임없이 제외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더 많은 사람이 동참할 수 있도록 작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내 자신은 원칙을 지키되, 그 원칙이 다른 이들에게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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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는 형식으로 시민들과 소통, 공감해야 한다. 정답은 하나가 아니며, 어떤 하나의 답에 이르는 길도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해결해 야 할 과제들이 놓여있을 뿐이다. 그 과제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고민을 던짐으로써 침 묵하는 다수는 물론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도 소통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가지는 고민들과 고민에 이르게 된 우리의 가치를 그들과 공감해 야 한다. 그 과정이 우리의 가치를 훼손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내 가 가지는, 우리가 가지는 가치는 다른 이들에 의해 훼손될 수 없다. 우리 스스로가 훼 손할 뿐이다. 따라서 물러설 수 없는 핵심 가치는 스스로 지켜내며, 그 핵심 가치를 상 대방이 느끼게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변화의 욕구를 싹 틔울 수 있도록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쳐내는 운동이 아닌, 다양 한 사람들을 묶어내는 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다. 선험적 도덕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몇 번의 선거와 몇 번의 첨예했던 이슈들을 겪고 난 후, 난 SNS가 비슷한 생각을 하 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웅덩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네들끼리 분노, 안타까움, 기쁨, 슬픔 등을 증폭시키는 공간으로, 단순히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치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 웠다. 몇 다리 건너지 않아도 세상 모든 사람을 알 수 있다는데, 왜 SNS는 웅덩이가 되 었을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지만, 그 속에서도 약간씩 차이가 있고, 그 약간의 차이로 세상 모든 사람들과 아니 적어도 한국 사회의 SNS를 하는 모든 사람들과는 이론 상 연결되어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왜 SNS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열정은 찻 잔 속의 태풍에 머무를까? 그에 대한 내 답은 나의 글이, 우리의 글이 울림을 주기보 다, 일방적 선언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울림이 못 되고, 그 냥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주고받는 대화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즉, 나와 반 대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가 울림을 줄 수 있는 글이 못 되기 때문이다. 꼭 울림을 주지는 않아도 된다. 정말 생각을 고쳐먹어야하는 사람들의 폐부를 찔러, 그네들 이 화들짝 놀라게 만들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투쟁력을 잃어버린 시민운동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금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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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맞는 운동의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잃어버린 10년. 이것은 보수 진영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땅에서 땀 흘리며 하루하루 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희망을 일구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변화의 기반을 쌓아 야할 10년 동안, 변화의 결실을 따내려 했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지난 5년 우리는 우리가 튼튼하게 다져왔다고 믿었던 기반이, 집권세력의 힘 앞에 속절 없이 무너져 내림을 보았다. 투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투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거리에서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산으로 갔듯(신동엽시인의 '진달래 산천'에 나 오는 구절임), 2008년 여름 거리를 가득 메우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난 그 답을 김우창이 언급한 '선험적 도덕의지'의 폭력성에서 찾고자 한다. 선험적 도덕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선입관과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김우창이 한용운의 소설을 비평한 글을 요약한다. 김우창은 한용운의 소설이 시와 달리 실패한 것은 선험적 도덕의지가 앞서서, 독자들로부터 충분한 공감대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평 한다. 일제시대라는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 할 긴급한 상황에서 해방을 위해, "어떻게 어떠한 통일적인 행동의지가 사회적으로 성립할" 수 있냐는 한용운에게 중요한 것은 아 니었다. 한용운에게 일제에 대한 저항은 "외로운 도덕적 인간의 실존적인 결단이거나 독 재적인 의지"로 표현되어도 충분했다. 따라서 그는 구문명과 신문명 사이에서 갈등을 겪 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해나가야 하는지를 구체성 있게 그려내지 못했다. 선험적 도덕의지로 인한 구체성의 부족으로 한용운의 소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김우창은 비평한다(이 글은 문광훈이 김우창의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읽고 쓴 『사무사』에 나오 는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 '선험적 도덕주의'와 관련되어 『사무사』에 나오는 몇 단락을 인용한다. 「"사회나 정치의 문제"란 "어떠한 의지를 행동에 옮기는 것에서가 아니라, 어떻게 어 떠한 통일적인 행동 의지가 사회적으로 성립할 수 있느냐 하는 데서 시작하"는일이다. 단순히 각 개인이 확신하는 바를 사회에 일방적으로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공 적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의 상호주관적 관계를 통해 최선의 상태로 점차 조율해가는 것 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직관적, 선험적 도덕주의가 '오늘날'에도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것은 "아직도 우리가 긴급한 사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역사의 형성이 시작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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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아니라 역사 이전의 과도기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이슈가 사회적 공론 과정을 통해 합리적으로 조절되고 조율되는 것이 아니 라, 몇몇 사람의 영웅적 혹은 유사영웅적 행동에 따라 이뤄지고, 그 때문에 결국 전 사 회적 폭력성이 가중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김우창적 시각에서 보면, 행동의 사 회정치적 차원에 대한 고려보다는 선험적 도덕주의가 앞서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사람과 사물을 만나고, 어떻게 삶의 사건들을 경험하 는가에서 생각과 판단이 자라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경험 이전에 주어진 틀로 행 동의 가능성을 미리 재단한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 선험적 도 덕주의의 위험은 경험의 현실적·사회정치적 의미를 외면하는 데 있다. 한국 현대 시의 실패란 경험의 모순을 고려할 수 있는 사고 구조의 실패라는 대목에서 도 부분적으로 다루어졌다. 이것은 더 나아가면, '민족'이나 '통일', '평화'나 '평등' 혹은 '정의'와 같은 이념을 선호하는, 그래서 이런 이념의 선창과 제시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양 여기는 한국 사회 특유의 명분주의 혹은 순결주의 병리학에서도 확인되는 일이 다. 이러한 이념의 표피성에는 말할 것도 없이 피상적 감정과 불철저한 사고가 자리한다. 그리고 이 모든 파편화된 감정과 사고와 이념은 한국 사회의 전반적 외양화-허세화-내 용 부실로 이어진다. 명분주의의 강고한 체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이 강고한 아집 때문에 사회의 모순은 끊임없이 은폐되고, 이념의 불순성과의 정면대결이 끊임없이 유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정의와 어떻게 만나고 대결할 것인가라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 의식은 거짓 정열의 구호 아래 파묻히고 만다. 그러나 삶의 조화는 모순과의 대결에 있 고, 인간의 자유는 균열과의 싸움에 있다.」 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 대 반민주, 통일 대 외세, 노동 대 자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모호해져 왔다. 그것은 비단 한국 사회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 변혁 의 과정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를 형성하는 것을 좋아한다. 싸워야 할 대상이 분명하다는 측면에서. 그런데 이런 이분법적 구도를 시민들도 여전히 받아들이는 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선뜻 그렇다고 답변하지 못할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구도 속에서 이렇게 자명하게 이분법적 구도로 설명될 수 있 는 공간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고, 이에 대한 시민의 참여나 지지도 한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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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딪히고 말 것이다. 단순히 선악의 대결을 그리는 영화에 대해서 비난의 목소리가 높 고, 선악의 대결을 벗어나 인간 내면의 여러 모습을 파헤치는 영화를 수작이라고 하듯 이, 운동도 그러해야할 시점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선험적 도 덕주의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문을 해봐야 할 때가 왔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개개인이 자존감을 높여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기 머리로 철학하게 하라 "무엇이 시민을 창조하는가? 시민사회가 깊은 문화적 결핍증을 앓고 있으며,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는 것이며, 시민사회 또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위 문단은 박영신 교수의 글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다양한 내용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이 자존감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의지, 혹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충분히 인식하는 마음, 이것이 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해 나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원동력이 아닐까? 개인들이 자존감을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살아온 삶의 경험을 체득하는 과정이 필요하 다. 경험을 체득하는 과정은 경험을 곱씹으며, 그 경험이 뜻하는 바를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감으로써 몸으로 깨닫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쉽지는 않다. 부단한 자 기 성찰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누군가 주위에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 경 험을 자존감으로 체득할 가능성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항상 올바른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기에 부끄러운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누군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스스로의 삶을 보다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고, 그 아 픈 경험을 딛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그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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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살아온 삶의 가치, 자존감을 세울 수 있는 지점, 그것이 바로 시민됨으로 거듭 나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현장 장악력 강화를 통해 팩트를 생산하고 생산된 팩트를 사건화 해야 한다 시민운동의 중심에 현장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현장 장악력은 운동의 기본이다. 그러 나 앞으로 우리가 장악력을 높여야 할 현장을 선택할 때, 그 공간과 시간이 활동가가 담 보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분야에 집중해 현장 장악력을 높여 갈 것인지는 단위마다 논의를 통해 합의할 필요가 있다. 현장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백두대간과 4대강 공사 현장, 산양이 뛰노는 울진삼 척 등이 현장이듯, 에너지자립마을을 꿈꾸는 등용마을, 민들레공동체, 통영연대도 현장 이며, 녹색을 꿈꾸는 회원과 시민들이 모여 있는 공간도 현장이다. 현장을 떠난 시민운 동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장을 장악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접근이 어려운 군기 지 환경문제와 탈핵운동이 다른 운동에 비해 쉽지 않은 것은 현장 장악력이 떨어지기 때 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발 딛고 서야할 현장을 발굴하고, 현장을 장악해 나가는 것 은 우리 운동을 성숙시키는데 핵심 요소가 될 것이다. 현장 장악력을 높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매해 자신이 흘린 땀의 의미를 구체화시킬 수 있는 내용을 생산함으로써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지치지 않고 운동을 해나가기 위 해, 보잘 것 없이 보일 수 있지만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팩트를 생산해 내는 것, 그래 서 함께 그 내용을 공유하는 과정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흘린 땀의 가치를 구체화해 나가는 과정, 그것의 주기가 어떻든 그 과정이 있을 때 우리는 지치지 않고 운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 팩트를 어떻게 사건화할 것인지의 문제다. 사건 화와 관련해서는 이진경이 「대중과 흐름」에서 언급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현존하는 사건이 정치적 파장력을 갖는 사건으로 현행화 되는 과정에 있어서, 일차적으 로 사건이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잠재적 힘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를 매혹 이라 부르며, ‘매혹이란 고독한 사건의 영혼’이라 규정한다. 매혹이 뜻하는 정확한 의미 는 책을 참고하길 바란다. 매혹에 의해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이 휘말림의 과정은 여러 사람들에게 전염처럼 증폭되어 사건화에 이르게 한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증폭이 감각화-센세이션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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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는 기존의 이성적 측면의 의식화와 달리, 감성적 측면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바로 여기가 고민의 지점이다. 이성적 측면에서 생산한 팩트가 어떻게 감성적 측면의 사건화로 이어지게 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이것은 사건화가 사회변화의 최종단계로 나아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결합이기도 하다. 삼보일배, 지율스님의 단식, 희망버스, 강정, 강원도 골프장 현장, 용산, 밀양이 지속 해서 사회에 울림을 주고 변화의 동력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팩트와 사건화가 어떻게 상 호보완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방안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개개인을 묶어내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운동 방식을 창조해야 한다. 이런 변화의 흐름은 시민운동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핵심으로 떠오르지는 못하 는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두물머리를 지키기 위한 밭전위원회, 강정지킴이, 밀양의 친 구들, 희망버스에 함께 하는 개인들이 하나의 주요 운동으로 상호간 수평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러나 이것이 기존 단체가 중심이 되어 활동해 온 시민운 동과의 결합이 활발히 진행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앞으로 운동은 이처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개개인을 묶어세우고, 이를 통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어떻게 만들어나가느냐에 그 성패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를 위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소통하고, 사람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세울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시도와 시행착오 속에서 중단 없는 실험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 를 통해 작지만 실질적인 변화를 통해 양질전환이 가능한 운동의 내용과 시스템을 구축 하는 것이 절실하다. 이를 위해서는 운동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 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내건 가치,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읊조리게 하고, 그 길이 나의 길인 듯 걸어가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진정한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 진 정한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덕경과 아나키즘에 깃들어있는 철학으로부터 배 워야할 것들이 있다.

중단의 운동, 탈각(탈선)의 운동을 통해 증여/선물의 관계를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전환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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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의 운동과 탈각의 운동은 이진경이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과 「대중과 흐름」에서 하나의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1970~80년대 파업이 참가한 노동자의 숫자로 볼 때 지금보다 적었으나, 강력했던 이유는 참가한 노동자들의 삶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라고,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전환을 가져왔다는 측면에서 강력하다고 이야기한 다. 이 말에 동의한다. 개개인의 삶을 기존 관성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전환할 계기로 파 업은 1970~80년에 매우 효과적이고 유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 파업의 참여가 개개인의 삶을 바꾸는 데 작용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개개인들이 관성 적 삶을 중단시키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살아보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여기서 교육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수단이다. 다른 하나는 작은 모임 들을 활성화해가는 것도 방안일 것이다. 자기의 삶을 함께 성찰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소모임, 작은 공동체를 다양하게 구성해나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회나 파업은 아 니나, 전환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축제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탈각의 운동은 그동안 운동이 체제 내에 들어가 체제를 바꿔내려는 침범의 운동이었 고, 이 운동은 체제 내에 들어감으로써, 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에 복무하거나, 어느 덧 자신이 체제의 중심에 서는 한계가 존재한다면, 체제 밖으로 사람들을 나오게 하는 탈선 /탈각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그 예로써 도롱뇽 소송을 든다. 똥개도 자기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다. 체제 내로 편입될 수 있는 위험성도 심각히 고려해야할 요소이지만,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으로 사람을 나오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에서 그들의 프레임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논의를 우리의 프레임으로 전환시키는 게 필요하다는 주장에 비추어 볼 때, 탈각 /탈선의 운동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프레임의 전환, 탈각/탈선의 운동에 있어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증여와 선 물의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이다. 증여와 선물의 관계는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이미 개인 단위에서는 실현된다. 그것이 꼭 가족의 관계는 아니더라도 아무 조건없이 자신이 쌓아온 부를 사회 에 환원하는 사람들이 대표적 예일 것이다. 그런데 특수한 시점의 관계가 아니라 일상의 관계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확대발전시켜나갈 수 있을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흔히 은행이 이자에 의해 운영된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이자 없는 은행이 있다. 「화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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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하라」 책에서도 소개하고 있는 이 시스템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은행과 고객의 관계맺음을 변화시킨 하나의 방안이다. 이렇게 우리가 관성으로 받아들이는 관계맺음을 비틀어, 다른 관계맺음을 이끌어올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없애는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은행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은행과 고객, 사회의 관계맺 음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단순히 육식을 버리 고 채식을 하며, 대형마트 대신 재래시장을 찾는 도식적인 바뀜이 아니라, 편의점과 시 민들이 관계 맺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더디지만 답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 를, 무엇인가를 없어져야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순간, 무엇인가를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제외하는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 까? 최근 열풍처럼 일어나는 협동조합과 사회적기업의 움직임도 이런 관계맺음의 변화 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의미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숙성되지 않은 고민이지만, 관계맺음의 변화, 선물의 관계, 증여의 관계를 일 반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동학혁명이 꿈꾸던 세상을 더 빨리 앞당길 수 있지 않을 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내가 속해있는 녹색연합은 ‘4+1(사실상 9+1)’과 ‘남 좋은 일 하는 날’로 관계맺음의 변화를 실험하고 있다.

[또 하나의 고민] 얼마 전 신임 전농 사무총장을 만났다. 사람이 바뀌면서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부가 고관세를 전제로 쌀 전면 개방을 협상카드로 만지작거리기에 이에 대해 식량주권의 차원에서 운동을 함께 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전하는 자리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다만 식량주권의 문제로만 접근하기에는 시민과 공감대를 얻기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길 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운동은 접점을 만들어 영향력을 확장하기보다는 저들이 만든 접점에서 영향력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흘러온 것은 아닌가라는 반성이 든다. 그렇 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분야를 뛰어넘어 종합 적으로 사고하고 운동의 힘을 결집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녹색연합만 해도 농민들과 하는 사업이 다양하다. 에너지자립마을도 그렇고, 숲길도 그렇고, 골프장 반대 운동도 사실상 주요하게 농민들과 하고 있다. 그리고 녹색연합이 직접 하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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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한 선후배들이 하는 다양한 활동도 있다. 이러한 각각의 활동을 묶어내어 하나의 흐 름으로 만들고, 저들의 공세에 대해 수세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새로운 아젠다를 던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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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토론 2

동학으로부터 배우는 새로운 삶·사회·문명 정혜정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학혁명 120주년을 맞는 2014년 올해, 동학에 기초하여 생명운동을 펼쳐온 ‘모심과 살림연구소 포럼’에 저 같은 ‘연구실 개구리’도 참여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발표자 세 분의 말씀에 공감하고 또 많은 가르침을 얻었음을 말씀드립 니다. 동학은 한국역사의 전환점을 이룬 사상이자 운동이었고 그 역사적 구현은 현재에도 진 행 중에 있습니다. 여러 선생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동학은 정신적·물질적 토대를 새로 바꾸는 반봉건운동이자 ‘전환의 사회운동’이었고, 한국인의 ‘깊은 마음’이 분출된 진리운동이었습니다. ‘시천(侍天)’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 낡은 체제를 뒤로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현하 는 삶(생명)의 운동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좌절된 것이 아니라 애국계몽운동기에는 근대 국가건설운동으로 3.1운동에서는 독립운동과 공화제 임시정부수립운동으로, 그리고 1920 년대 문화운동, 6.10만세, 신간회, 좌우합작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전환의 축을 형성해왔 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분단과 독재정권의 구도 속에서도 지금까지 동학은 개개인의 영성적 자기변혁과 통일국가수립의 시대적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주요섭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근대적이 아닌 탈근대적 사회운동, 대항적이 아 닌 대안적 사회운동, 중앙중심적이 아닌 풀뿌리 사회운동, 집합적이라기보다는 개성적인 사회운동으로, 이성적이기 보다는 영성적 사회운동, 남성성 사회운동에서 여성적 사회운 동으로, 인간중심이 아닌 생태주의적 사회운동으로, 계급적이 아닌 전인적(전민적?) 사 회운동으로, 가부장에서 가모장으로, 이성에서 감성으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상품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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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에서 선물교환/호혜로, 상품시장에서 호혜시장으로, 국가에서 공동체로(국회에서 민 회로), 경생시스템에서 협력시스템으로, 빠름에서 느림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중 앙에서 지방으로 등은 구체적인 오늘날의 시대적 과제라 할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권위적 위계질서와 폭력, 경쟁, 그리고 권력의 파시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한국인은 자신들이 원하는 인간다운 삶과 사회체제를 지향해 왔지만 구현해보지 못하 고 외세에 의해 또는 외세 협력자들에 의해 권력을 장악당하고 지배당해왔습니다. 본래 한국인이 지향했던 사회는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동학혁명 당시는 무장 포고문과 폐정개혁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민을 학대하고 탐학하는 관리로부터의 생 존권 보호와 신분제 철폐를 원했고, 애국계몽운동기 당시는 헌정연구회, 대한자강회, 신 민회를 조직하면서 인민주권(국민주권)이 실현되는 서구근대국가체제를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제병합으로 근대국가수립의 열망은 좌절되고, 이천만 동포 모두가 거족적 으로 참여했던 3.1운동을 통해 공화제를 지향하는 임시정부수립으로 환생되었습니다. 그 러나 임시정부 통치수반을 ‘미국 갱단 보스이자 친일파’22)였던 이승만에게 넘겨줌으로 써 독립운동의 자금난과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가져왔고, 해방 이후 친미반공에 힘입 은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이어지면서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민주정권의 건립, 국민 인권 존중의 사회제도 실현, 누진세 세칙과 국비교육제도, 전민적(全民的) 정치균 등의 삼균주의(정치, 경제, 교육의 평등)의 국가건설은 또 다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6.25 내전과 남북분단의 고착화, 독재정치가 진행되면서 한반도는 늘 긴장 상태 에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인은 어디서부터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까요? 이는 서구에서도 계속 제기되고 있는 탈근대국가론에서와 같이 자본주의체제와 맞물린 법과 제도의 폭력 22) 3.1운동 이후 선포된 임시정부안은 총 6종으로 분류된다. 6개 안은 대한민간정부, 대한국민의회(노 령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정부,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안이다. 이 중 대한민간정부, 대한국민의회, 조선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을 주도했던 손병희를 수반(首班)으로 하고 있고 신한민 국정부는 이동휘를, 한성임시정부와 상해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고 있다. 한성임시정부안 과 상해임시정부안이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인데 한성임시정부안은 기호파 유림과 기독교계 인사들 이 주도한 것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시 수반이 이승만이 되도록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 갱단 보스이자 친일파였다.(http://www.youtube.com/watch?v=HBtBnBAxydc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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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먼저 자각할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 애국계몽기나 3.1운동 당시 한국인들이 열망했 던 근대국가체제는 분명 이러한 국가체제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국민주 권이 행사될 수 있는 국가체제, 민의가 수렴되어 국정을 운영하고 정부는 국민의 종복이 라는 개념을 가졌던 당시의 국가건설 구상과는 분명 다릅니다. 그러나 이는 법과 제도에 의한 근대국가체제 자체가 이미 폭력을 수반하는 것임을 단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 리고 국가존망의 위기에 있어 근대국가건설만이 그 대안으로 대두된 시기이었기에 근대 국가체제 자체를 검증할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서구 근대국가의 성립은 자연권 즉 사유재산과 생명권을 위한 목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위생 등 다방면에 걸친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법률이나 도덕, 재판, 법적 제도가 없는 상태에서는 사유재산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사람들은 사유권과 생명 권을 보전하기 위해 권리를 제한하는 강제[폭력]를 수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발터 벤 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양한 폭력의 기능은 어떤 특정한 법적 상황을 토대로 삼음으로써 가장 구체적으 로 전개될 수 있다. 법적 계약은 그것이 제아무리 평화적으로 계약 당사자들에 의해 맺어질지라도 결국에는 폭력의 가능성으로 이끈다. 왜냐하면 법적 계약은 각 당사자 에게 상대편에 대해 만일 상대편이 계약을 위반하게 될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폭력 [강제력]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자연법이나 실정법 모두가 예상하는 폭 력의 전 영역에서 법적 폭력의 문제성에서 벗어나 있을 폭력은 하나도 없다. 법이 의존하는 폭력들 전체, 즉 종국에는 국가권력[국가폭력]을 탈정립하는 데서 새로운 역 사시대의 토대가 마련된다.” 근대국가는 법과 제도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국가권력과 사회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회기관들(군대, 경찰, 학교, 행정 관료제)을 활용하여 감시를 제도화합니다. 또한 자 연 생명이 국가 권력의 메커니즘과 계산속으로 통합되기 시작하고 정치가 생명정치로 변 화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주권을 위임받은 법의 이름으로 모든 벌거벗은 생명을 체계 적으로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사회 전체가 수용소 속의 ‘호모 사케르’가 되어버렸고 한국 역시 식민지, 전쟁, 고도성장과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무수히 많은 생명정치적 체험을 하 였습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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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정치체제 지배의 본질은 대중의 균질화와 표준화로서 가치서열을 매기고 생명의 독자성과 다양성을 박탈하는 것에 있습니다. 과학만능을 지향해 인간의 무용성을 증명하 고, 인간이 필요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목표아래 지속적인 과학과 기술의 발전, 끝없는 개발과 환경 파괴, 자본의 독점, 그리고 이에 따른 고향 상실을 증대시키고 있습 니다. 모든 것을 기술적 통제하에 두고자 하는 근대국가체제는 그 자체 이미 파시즘적 요인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생명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파시즘을 느 낍니다. 고은광순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여아 낙태, 각종 다양한 형태의 위계질 서와 껍데기문화는 우리 사회 곳곳에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다리를 쭉 벌리고 않는 남 성, 등산 다닐 때 뽕짝을 크게 틀고 다니는 남성, 여성 운전자에 대한 폄하, 여성을 무 능력자이자 비주체적 인간으로 드러내는 드라마와 광고, 군대와 정치인들의 여성비하발 언, 간통죄의 인권 침해, 언론의 정치 편향과 종교집단의 자종교편향, 종북좌빨 담론의 언어적 폭력, 학교와 교육문화의 일상에 스며든 권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통제이고 지배입니다. 저는 이 사회에서 숨쉬는 것 자체가 마취를 당하는 느낌입니다. 동학의 생명운동은 권력체제의 문화가 가하는 폭력과 일상의 파시즘으로부터 상처받고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살리고자합니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 환경 등의 전면적인 사 회운동이자 영성운동이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와 밀착된 국가체제의 통제로부터 자신 과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영성적 자기변혁을 통해 자유와 평등, 남북공생의 사회를 이루 어가는 것에서 동학이 살아날 것입니다. 김용휘 선생님의 글 ‘동학의 깊은 마음과 문명 전환’은 생명운동의 힘을 돋아주는 좋은 비타민이 될 것 같습니다. “깊은 마음을 되살리 는 것이 새로운 문명 전환의 기초가 될 것”임을 저도 깊이 느끼고, 새기고자 합니다. 감 사합니다.●

23) 조르조 아감벤, 박진우 역, 호모 사케르, 새물결, 2008, 27쪽(역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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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토론 3

하나됨 및 어울림의 길 - 동학을 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 길 황선진 | 밝은마을 대표

동학을 마주 합니다. 새삼스럽게 바라봅니다. 동학은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어떤 길 을 보여주고 있는가? 120년 전, 갑오의 길에서 <지금, 여기>의 우리가 갈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스스로 묻고, 생각합니다. 문득 동학은 <나/다른 사람/모든 생명/만물/일 (事)/하늘(神) 등,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하나됨 및 어울림>으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 이 듭니다.

Ⅰ. 동학은 우선 21자 주문이라는 단순하고도 확실한 수련을 통하여 습관된 나와 참된 나가 하나 되는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나와 안에 있는 나의 일치입니다. 안 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사다리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은 곧 나와 하늘과의 하나됨이며, 시천주(侍天主)이며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입니다. 동학은 또한 사람과 사람들의 하나됨과 어울림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양반과 상놈, 어 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 등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어울리는 삶이 올바른 길이라고 거듭 거듭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해월선생님의 법설은 참된 사람의 길이 사람이 다른 존재와의 어울림으로 난 길을 알려주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 천대받고, 인권이 존중되지 못하고 있던 여성의 지위를 하늘로 제자리 매김합니다. 어린아이도 하 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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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벽설위(向壁設位)를 혁파한 향아설위(向我設位)는 단순히 제사 방식을 바꾼 것뿐만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 저승과 이승을 하나로 잇고, 귀신과 하늘이 결국 지금 살아있는 내 안에서 통일되어 있다는 혁명적인 가르침입니다. 동학은 그 이전까지의 전통을 법고창신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 래라는 시간의 벽을 넘어 하나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동학 당시를 기점으로 과거의 전통을 당대화시키고 있습니다. 동학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옛 법과 이치를 그 시 대에 맞게 새롭게 했습니다. 저 오랜 예부터의 세계관을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단순명 쾌한 명제로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홍익인간(弘益人間), 접화군생(接化群生), 이화세계 (理化世界) 등 우리 민족이 세상에 임하는 전통적 가르침을 당대화하여 보국안민(輔國 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 등으로 새롭게 내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양 유학의 핵심 가르침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수심정기(守心正氣)로 새 로이 했습니다.

Ⅱ. <생명이 곧 하늘>을 세계관으로 하여, 그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마을=공동체> 를 이루고, <마을=공동체>가 연대하고 협동하여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사회경제시스템> 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동학을 <지금, 여기>에 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 길입니다. 동학의 종지(宗旨)인 인내천(人乃天)을 오늘의 말로 하면, <생명이 곧 하늘>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역점을 기울일 일은 <스스로 살리는> 일입니다. 스스로 살리는 일은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하나됨과 어울림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동학은 한울님의 가르침을 일상의 삶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접(接)을 만들고, 이를 세상에 더욱 널리 펴기 위해 포(包)를 조직했 습니다. 그 분들이 한 일을 <지금, 여기>에 새롭게 할 방법을 마련해 봅니다. 하늘의 이치에 따 라 순리대로 살기 위한 일은 스스로를 수양하는 일에서 한 걸은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 니다. 참된 울타리로서의 <마을>이 필요합니다. <지금, 여기>의 마을, 즉 공동체는 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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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에 모여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고, 정보와 통신이 발달하여 소지역을 넘어 하나의 생활권을 구성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소지역을 넘을 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현실 삶의 대부분을 편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 살리

는> 일입니다. 뜻을 같이 하며,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존재해야 사람과 함께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내 몸과 같이 돌보고 교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사회운동은 기존 사회경제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불합리한 점을 개선 하고 바꾸기 위하여 전력을 다 했습니다. 나름대로의 성과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 가 이 정도나마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통적 사회운동에 힘입은 바 큽니다. 동학은 기존 체제의 모순을 넘어서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세상을 만들려고 한 데에까지 나아갔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자신들 삶의 거의 모든 것 을 함께 하기 위하여 <하늘의 이치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경제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 는 물자와 인력과 힘이 있습니다. 그 사회경제시스템은 곧 <세상을 살리는> 일의 기본 토대입니다. 본래 <나라>라는 말은 <나=땅 + 라=태양>으로서, 즉 <하늘의 뜻이 임한 땅>이라는 뜻입니다. 동학은 120년 전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지금의 하나됨입니다. 120년 전, 당시의 어른들은 아직 당신들의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있 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명(天命)으로 알고 수백만의 생명을 던졌습니다. 그 고 귀한 희생은 오늘을 위한 밑거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 는 우리 모두는 어쩌면 그 옛날 동학에 참여한 사람들이거나, 그 분들과 인연 있는 생명 들이지 않았을까요? 동학의 어른들이 간 길은 <하나됨과 어울림>의 정신으로 <하늘의 이치에 따라 순리대로 사는 삶>을 개척한 길입니다. 그 분들은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종파와 정파, 계층 과 계급, 남녀노소, 지역 및 국경을 넘어 한 뜻으로 함께하기를 손짓하며 기다리고 있지 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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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동이론지

<모심과 살림> 2호 (23년 겨울)

제23차 모심과살림포럼

전환의 시대, 동학으로부터 배우는 새로운 삶·사회·문명 사)모심과살림연구소 서울 중구 장충단로 213 동훈빌딩 5층 02-6931-3604 salim@hansalim.or.kr http://mosi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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