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답게 -인농 박재일 선생 1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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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답게 인농 박재일 선생 1주기

인농기념사업위원회


한살림답게 인농 박재일 선생 1주기

펴 낸 이 인농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이상국 위 원 곽금순 김민경 박현선 이경국

이병철 이호열 윤형근 조희부

펴 낸 날 2011년 8월 16일 기획·편집 도서출판 한살림 전

화 02-3498-3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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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답게


한살림답게! ‘한살림답게!’는 2008년 한살림 가을걷이 행사 때 방명록에 박재일 회장이 쓴 말입니다. 이 말은 이듬해 한살림의 중점 활동목표 ‘한살림답게! 사회와 함께!’의 연원이 되었습니다.


“한살림은 끝없이 만들어가는 거예요. 완성된 게 아니라 생활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삶을 통해서 만드는 거지요.” - 《살림이야기》 05호 ‘살리는 사람을 찾아서 - 박재일’


차례

1부

박재일과 한살림

생명의 길 살림의 길

010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 박재일

024

2부

우리 안의 박재일

독재정권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 가농을 이끌고 지킨 박재일의 힘 | 이길재

046

박재일과 한살림이 없었다면 환경농업정책 도입과 환경농업육성법 제정이 가능했을까 | 최양부

049

그 웃음 그대로 살아 있어 | 서형숙

057

한 생명의 오고감은 거룩한 일 | 이경국

060

한살림운동은 형이 몸으로 일구어 낸 성과 | 김정남

063


3부

어진 농부의 한평생

대담·박재일이 들려주는 무위당 이야기

언제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함께 | 박재일·윤형근

068

고희연·생명의 길 살림의 길

山이 온다 | 이병철 비 오는 날이면 달 따러 가는 님 | 이상국 말없이 오로지 몸으로 삶으로 보여준 스승 | 정재돈

100 104 108

일가상·수상 소감

자연과 사람, 도시와 농촌이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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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좋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가 가장 큰 힘 | 김선미 4부

120

산알아비여 안녕

추모의 글

135

아버지 박재일

‘나는 한살림이 참 좋아. 참 재미있었어!’ | 유가족

166

언론이 전한 박재일 선생 추모 기사

178

1주기를 맞아·한살림의 마음을 박재일 선생님께

182

인농 박재일 선생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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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박재일과 한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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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

살림의 길

희망이란 원래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고,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원래 땅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 - 루신魯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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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동대산 기슭 볕바른 산골마을 따스내, 박재일은 1938년 이 마을에서 산에 기대 논밭을 일구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재일’을 박재일답게 만든 것은 산맥의 힘이고 땅의 힘이며 자연에 기대 흙을 일구던 부모님과 산골마을 사람들의 심성이었다. 좌우익의 대립과 전쟁의 참화는 산골마을도 비켜가지 않았다. 6·25 발발 전후로 산골마 을에는 소개령이 내려지고 박재일은 대구로 피신해 초등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국채보 상운동의 발원지 대구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 진보 혁신운동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 었다. 조동일, 김중태, 현승일 등 박재일의 경북고 동문들은 4·19 이후 학생운동에서 중 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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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결혼식이 열린 처가에서

박재일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 4·19 혁명이 일어났다. 박재일은 하교 길 전차에서 뛰어내 려 시위대에 합류했다. 조직이나 논리의 요구보다 그른 것을 부인하고 옳은 것을 추구하 는 내면의 목소리가 그의 삶을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밀고 갔다. 혁명은 전쟁 이후 짓눌 려 있던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분출시켰지만 이내 5·16 군사 쿠데타의 혹독한 반동에 부딪히고 만다. 박재일과 그의 친구들은 굴욕적인 한일수교를 추구하던 군사정권의 야만과 억지에 맞섰 다. 초조해진 권력은 계엄을 선포하고 대학 교정에 착검한 군인들을 진주시켰다. 각 대 학을 돌며 연대투쟁을 조직했던 박재일도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이 무렵 그는 남산 중 앙정보부 인근에 있는 이층 양옥집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숨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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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을 한 학기 앞둔 1965년 3월 박재일은 이옥련과 결혼했다. 박재일이 ‘박재일’을 간직 하고 성장하며 활동하고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묵묵한 눈길과 웅숭깊은 배려가 있 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 7월, 한일협정 국회비준 반대시위가 격화되자 박재일과 친구들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40일 동안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당한 끝에 구속된다. 아이를 잉태한 아내가 옥 바라지를 해야 했다. 1966년 8월, 출옥한 그는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은 상처받은 그의 몸과 마음을 보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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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은 친구인 김지하 시인의 소개 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만났다. 그리 고 1969년 8월, 원주로 내려가 진광중 학교 영어선생이 되었다. 장일순 선생 은 원주로 이사한 박재일에게 “잘 왔 다. 우리 같이 살자”며 맞아 주었다. 이 무렵 장일순 선생은 원주교구의 지학 순 주교와 함께 원주가톨릭센터에서 ‘협동조합강좌’를 열었다 1971년, 박재일은 월급이 많이 깎이는 것을 감당하면서도 교사직을 그만두고, 진광중학교 안에 있던 ‘협동교육연구소’ 로 직책을 옮긴다. 그리고 시내버스 종 점부터 마을마다 차례로 찾아가 농민들 과 함께 모내기도 하고 들밥도 나눠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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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협동조합운동을 소개했다. 원주에서는 이 무렵부터 지역 전 체에 대한 종합적인 운동 기획이 싹트고 있었다. 1972년 8월 19일 남한강유역 대 홍수는 한강유역 58개 읍면의 논 과 밭, 생활터전을 휩쓸어 버렸 다. 원주교구의 구호 요청에 가 톨릭 조직인 미제레올과 까리따 스에서 3억6천만 원 상당의 구호 금을 보내 왔다. 원주교구 사회개 발위원회는 이를 기반으로 광산 촌과 농촌마을에 협동·자조 운동 을 전개했다. 박재일은 농촌마을 의 협동과 자조 운동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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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민청학련사건. 정통성 없는 유신정권은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고 지학순 주교를 구속하고 김지하 시인에게는 사형을 선고한다.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일은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원주는 유신독재를 향해 호통을 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력이었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 치하에서 박재일은 1973년 가톨릭농민회에 참여 하였다. 1975년 쌀 생산비 조사 사업. 1976년 함평고구마사건, 1979년 오원춘사건 등 농 민을 수탈하는 정부와 농협의 횡포에 맞선 가톨릭농민회의 운동 현장에는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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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부터 장일순 선생과 그 제자인 박재일, 김지하 등 원주의 운동가들은 독재권 력에 맞서 억압 구조를 깨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도시와 농촌이 함께 사는 세상 을 향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고 있었다. 박재일은 1981년 일본생활클럽생협 등과 유기농업운동, 대만의 원주민소협, 1984년에는 가톨릭농민회 지도자들과 일본 야마기시 실현지 등, 일본 생협과 도농직거래 운동의 앞 선 경험을 견학했다. 1985년 원주가톨릭센터 지하에 매장을 마련하면서 원주소비자협동 조합이 출범했다. 박재일은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유기농업도 도농직거래의 경 험도 일천해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횡성 공근마을의 정현수 생산자의 유정란, 충북 음성의 최재영, 최재명 형제의 유기농쌀이 주된 품목이었다.


1986년 봄 네덜란드 인권포럼은 한국의 박재일 등 아시아, 아프리 카의 인권운동가들을 초청했다. 2개월 가량의 방문 프로그램을 마 치고 박재일은 미제레올이 있던 독일의 아헨으로 찾아가, 정체돼 있던 도농직거래사업 지원이 진 행되게 한다. 이를 기반으로 그해 12월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 문 을 열었다. 출발 시점부터 도농상생과 생명 운동의 지향을 분명히 한 점이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주인으 로 참여한 점에서 한살림은 우리 사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 다. 한살림은 출범한 지 얼마 되 지 않은 1988년 한살림공동체소 비자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조합원 모두가 주인으로 참여하는 협동 운동의 틀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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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충북음성 성미마을에서 도시 소비자조합원들이 함께 참여한 가운데 한살림 단오잔치가 열렸다. 1992년에는 성균관대학교 교정에서 가을걷이잔치가 열렸다. 장터와 대동놀이가 어우러진 흥겨운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이후 매년 개최되고 있는 이들 행사 는 한살림이 지향하는 농촌공동체복원과 도농 교류의 상징적인 행사가 되었다. 1991년 시작된 우리밀살리기운동, 1992년부터 시작된 협성생산공동체의 세탁용가루비 누생산물살림, 1993년 설립된 흙살림 연구모임흙살림, 1994년의 친환경농업단체연합회 결 성과 1997년 친환경농업육성법 제정 등에도 한살림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기농산물 직거래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한살림운동은 우리 사회에 생태순환의 원리를 실현해 가는 종합적인 운동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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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물이 한생명, 한살림이라는 것이 한살림의 사업과 활동에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이 었다. 그린코프 같은 일본 생협들과의 교류, 수돗물불소화, 유전자조작식품반대 캠페인, 1997년 굶주린 북한동포 돕기 모금운동, 2001년 아프가니스탄 난민돕기 모금운동, 2006 년 1억5천만 원의 기금을 남과 북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한 생명쌀 기금 모금운동 등 은 한살림운동의 지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잘 말해 주는 것이다. 출발 이듬해인 1987년 한살림은 조합원 800가구 규모로 성장하며 공동체 공급을 시작했 고 1991년 3월에는 전국협의회를 구성했다. 1994년에는 전국조직인 사단법인 한살림,

2002년에는 물류연합을 위해 한살림사업연합을 설립했다. 현재 한살림은 14만여 조합원 과 2천여 생산자가 참여하는 19개 지역조직과 한살림생산자모임연합회, 모심과살림연구 소 등으로 분화 독립하며 진화하고 있다. 2000년 1월 아산 산정리, 2001년 4월 홍천 명동리 농약 없는 마을 선포, 2007년 아산 ‘친 환경농업센터’ 건립 등 한살림 생산지 마을들은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기획을 통해 우리 농업과 농촌의 대안을 마련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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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 박재일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지 어느덧 17년이 됐습니다.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렇 습니다. 처음엔 어떻게 하면 농산물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소비가 뒷받침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 길을 모색하다 보니까 농산물 거래 라는 게 딱 걸립디다. 시장에 가 보니까 도저히 그게 안 된다는 게 느껴 진 거죠. 이걸 하기 위해서는 도시 사람들과 농촌 사람들이 기존 농사 방식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느꼈습 니다. 즉 소비자에게는 어떤 농산물이 공급되어야 하는가, 생산자는 소 비자에게 필요한 농산물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농산물의 정당한 가격 실현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는가를 서로 공유하고 문제가 있으면 서 로 의견을 모아야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기존의 관행으로는 도저히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직

이 글은 2003년 11월, 박재일 선생의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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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 만나서 문제를 풀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직거래를 생각한 것인데,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개념이 정확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직거래라고 했을 때 그것도 결국 은 사고판다는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인데, 제가 생각한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딱 나눠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전체와 인간관계를 바꿔 내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는 농산물뿐만 아니라 다른 공산품도 마찬가지고, 인간관계 는 모두 팔고 사는 관계뿐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는 경제적인 관계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 이해가 상반됩니다. 소비자는 보다 싸게 사려 하고 생산자는 보다 비싸게 팔려고 합니다. 결국 둘 중에 하나는 손해를 보 게 되는 거죠. 이런 대립 관계가 한참 가면 어떻게 하든지 상대의 약점 을 이용해서 내 이익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돼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밥상을 살리는 일이 이렇게 대립적인 관계로는 불가능합니다. 소비자의 밥상 살림과 농업살림은 둘로 나눠진 대립 관계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즉, ‘생산과 소비가 하나’라는 관점에서 출발했을 때 필요한 것을 서로 협력 해서 만들어 낸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은 농산물 직거래운동, 도농 간 삶의 연대, 공동체운동 등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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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이 같이 모여서 생산자는 밥상을 살 리고 생태계를 살리고 땅도 살리는 생명의 농업, 즉 유기농업운동을 해 나가고 소비자는 그 운동이 지속되고 확장될 수 있도록 소비를 책임짐 으로써, 농업도 지키고 건강한 밥상도 지키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지 키기 위해서 바로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 니다. 다만 역할을 나눠서 하는 것이죠. 농민 생산자는 생산, 소비자는 소비 역할을 동시에 나눠서 하는 것이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주인으로 참여하는 한살림운동 이런 생각을 갖고서 농산물 직거래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으로 서울에서 1986년 12월 4일 동대문구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고 직판장을 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준비를 철저히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회원제 운영도 아니었습니다. 직판장에다 생산물 을 갖다 놓고 지나가는 손님들에게 우리는 이러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생산을 한 것이니까 자유롭게 이용하시라는 정도였습니다.

20평 되는 점포를 임대해서 시작했는데 한 일주일 있어도 사람들이 안 와요. 그냥 왔다가는 사람에게 한살림을 시작한다는 홍보물을 주니 까 관심 있는 분들은 오기도 오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상하다 생각하 고 들어오기도 하는데, 물건을 보면 얼굴빛이 달라지는 거예요. 배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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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먹어 구멍이 뻥뻥 뚫려 있으니 쳐다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놓고 파니까 ‘참 웃기는 놈들도 다 있다’는 표정으로 외면해 버리 고 말더군요.

이렇게 처음엔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운동을 해 오면서 사람들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쁜 세상이고 삭막하게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정말로 사람이 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 다운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뜻밖에 참 많았습니다.

손님이 뜸하긴 했지만 어쨌든 저희의 참뜻을 이해하기도 하고 좋은 의견도 나누는 한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일 년 반쯤 지나니까 매장을 거쳐 간 사람들이 한 1천 500세대, 그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용 하는 사람들은 10% 정도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오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이 직판장에 공급한 물품은 쌀을 중심으로 해서 한 열 가지밖에 안 되었습니다.

계속 하다 보니까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의견들이 모아졌습니다. 이 운동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다 협동조 합방식이 떠오른 것이죠. 그래서 이름을 ‘한살림공동체 소비자협동조 합으로 했다가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으로, 그리고는 지금의 ‘사단법인 한살림’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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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협동조합방식의 한살림운동은 영리를 추구하 는 조직이 아닙니다. 한살림운동은 우리의 밥상과 농업을 살리고 나아 가 온 누리의 생명을 살리는 운동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기초적으로 먹을거리와 밥상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살림 은 밥상을 차리는 소비자와 생산하는 생산자가 같이 주인으로 참여해 함께 운동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생산하는 생산자 회원, 소비하는 소 비자 회원이 다 같이 회원으로 참여해 같이 꾸려 나가는 형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한다 농산물을 다루다 보니 이런 문제가 있습디다. 예를 들어 쌀을 생산하다 보면 생산자는 보통 9월이나 10월 초에 수확을 합니다. 몇 가마를 수확 하든 일단 생산하면 이를 일거에 팔아야 영농비와 생활비에 쓸 수가 있 습니다. 그런데 밥상 차리는 소비자가 일 년 먹을 밥상을 하루아침에 차리고 364일은 밥상 차리지 않아도 된다면 몰라도 그럴 수가 없는 거 죠. 생산은 일시에 되는데 소비는 일 년 내내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 다면 이제 생산한 쌀을 누가 보관하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 가 생깁니다. 저희는 이 문제를 초기에는 생산자 회원들이 해결했습니 다. 수확이야 한 번에 하지만 관리는 일 년 내내 해야 되니까 고생이 많 죠. 그러나 꾸준하게 소비만 되면 힘든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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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이 추구하는 바는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 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생산은 계획 생산을 하고 소비는 책임소비를 해나가는 역할과 관계를 설정했습니 다. 이런 관계와 목표를 정하고 회원들이 모여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 단 물건이 올라오면 대금을 빨리 생산자에게 보내주기 위해 자금이 필 요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금을 어떻게 조달을 할 것이냐가 중요한 과제 였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를 좀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 가 치가 사람 가치보다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가치, 생명 가치가 위 에 있고 그 다음에 경제 가치는 이의 보조 수단이 되는 관계로 생각을 한 것이죠. 우선 회원이 되려면 자금을 출연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출자라고 하는데, 맨 처음에는 5만 원을 투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 은 3만 원을 출자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자금은 물품 구입, 사무실 얻 는 돈, 배달 차량 구입, 기타 사업을 위해 필요한 재정으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협동조합을 만든 게 1988년 4월 21일이었습니다. 그때 참 여한 회원 수는 70여 명이었고 모인 돈은 약 78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죠. 지금 현재 회원 수는 매년 늘어나 2003년 11월말 현재 서울에만 4만9천 세대전국적으로는 7만3천여 세대, 2011년 7월 현재 약 27만 세대 가 되었습니다. 이 회원들이 출자해서 모은 돈은 45억 정도에 이릅니 다. 출자금에 제한은 없지만, 회원이 되려면 3만 원 이상의 출자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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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야 합니다. 출자금이기 때문에 서울에 살다가 이사를 간다든지 외국 으로 이민을 간다든지 해서 탈퇴를 하게 되면, 출자한 돈을 환불해 드 립니다.

그 1년 동안 살림살이를 꾸린 후에 매년 결산 총회를 하는데 차량비, 인건비 등 운영비와 모임이나 산지 방문 등 행사하는데 드는 비용 등 전 체 예산을 다 제하고 남은 돈은 다시 회원들에게 배당을 합니다. 완전히 공개하는 거죠. 이렇게 해서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고 다음 해의 생산과 소비계획을 짭니다. 생산계획을 예로 들면 쌀농사는 가을에 추수하고 12월 중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이 모여 의논을 합니다. 증가한 회원 수를 감안하여 내년도엔 쌀 소비량이 몇 천 가마가 될 것인지 계산을 합니다. 그게 곧바로 생산계획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생산계획량을 생산자 회원들이 의논을 해서 산지를 배정하고 계획생산 을 합니다. 일 년이 지나 수확한 쌀을 도시에 있는 소비자 회원들이 책 임소비를 합니다. 그런데 계획한 대로 책임소비가 딱딱 들어맞는 게 쉽 지 않습니다. 그동안 여러 사정이 생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천 가 마 예상했는데 살림살이를 해보니까 2천 900가마만 소비를 할 수도 있 고, 또 거꾸로 농사가 안 되어서 2천 900가마밖에 생산을 못 해 100가 마가 모자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만, 모든 물품 이 다 그렇습니다. 17년 전에 출발했을 때는 10개 품목밖에 안되었지만 현재는 생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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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높아졌고 품질도 높아져 많이 발전했습니다. 처음 3~5년 계속 노력 을 해 오다 보니까 다행스럽게도 땅도 살아나고 생산도 증가됩디다. 그 런걸 보면 ‘참 자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귀하구나, 생명이라는 것이 이렇게 강하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수확량이 떨어지 지만 지력이 자꾸 회복되니까 생산량도 늘어납니다. 안전성뿐만 아니 라 품질도 굉장히 향상됐습니다. 요즘은 쌀 같은 경우는 시중에 나오면 다른 일반미 못지않게 잘 나갑니다. 초기에는 형편이 없었습니다만 겉보기에도 훨씬 나아졌습니다. 하나 하나 이런 식으로 개선시켜 나가다 보니까 지금은 가공품까지 합쳐서 일 년에 약 450여 가지의 물품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도시 소비자 회원 들은 한살림 생산자 회원들이 생산해 내는 것만 가지고도 시장을 보지 않고 밥상을 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산하는 삶과 소비하는 삶이 연계를 긴밀히 해 가면서 하다 보니까 하나하나 목적한 대로 이루 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딸기가 한창 익을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루 자고 나면 100kg 따던 것이 200kg으로 늘어납니다. 그러면 남는 100kg을 한 정된 소비자 회원이 갑자기 먹을 수가 없잖아요. 딸기는 며칠만 두면 망 가지기 때문에 가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딸기잼을 만들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가공품들이 자꾸 개발되고 늘어나서 350여 가지가 된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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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 나눔의 행사를 통해 신뢰를 돈독히 한다 이런 과정이 여러 해 동안 진행되다 보니까 사람들의 생각이나 관계도 달라집니다. 현재 한살림 회원들은 일반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지 못합 니다. 이 물건을 사도 괜찮은 것인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희 소비자 회원들은 생산자 회원이 생산한 것에 대해서 이런 불안감 을 갖지 않습니다. 믿고 안심하고 사는 것이죠.

저희는 ‘한살림’이라는 소식지를 한 달에 두 번씩 발행합니다. 시기마 다 나오는 생산물과 가격의 변동, 그리고 이 품목은 누가 만들었다는 것이 이 소식지에 나옵니다. 직접 찾아가든지 전화를 하든지 해서 확인 을 합니다. 이런 과정들이 축적되니까 불신이 걷힙니다. 일단 약속이 되면 바로 생산 공급이 되기 때문에 안심이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 한 것은 도시와 농촌을 따로따로 별개의 것으로 여겼던 생각이 바뀐 것 입니다. 그러면서 사람 관계도 바뀝니다. 만약에 태풍이 몰아치면 소비 자 회원들이 생산자 회원에게 전화를 합니다. ‘태풍이 왔는데 사과가 어떻게 됐느냐? 다 떨어지지 않았느냐? 홍수 때문에 벼가 어떻게 됐느 냐? 사람 다친 데는 없느냐?’ 식으로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안부까지 묻습니다. 도농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쌀을 생산하는 5만여 개 자연부락이 있습니다. 이 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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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과거에 삶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의 농업이 이런 식으로 계속 도시에 의해 피폐해지면 농촌사회가 깨집니다. 그러면 남 아 있는 공동체마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농촌과 도시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회가 아니라 삶을 얼마든지 함께 하고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단지 물품만이 오고가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직 접 왕래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생산자는 농사를 지으면서 도시에 있는 우리 회원들 얼굴을 떠올립 니다. 도시의 소비자 회원들은 쌀이든 수박이든 딸기든 수확물을 먹을 때, 우리 생산자 회원들의 얼굴과 삶을 생각합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직접 생산지를 방문해 생산자를 만나고 농사 체험도 하고 서로를 알아가면 저절로 생각이 나게 됩니다.

직접 해 보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 는 10여 년 전만 해도 소비자 회원들이 벼 베기를 많이 했습니다. 수확 할 때가 되면 소비자 회원들이 전부 낫을 쥐고 직접 거둬들입니다. 평 생 처음 낫질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기억에 남고 생 산자의 삶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수확 철에 논에서 메뚜기가 생겨나 면 아이들하고 메뚜기 잡으러 오라고 연락을 합니다. 농약 친 논에는 메뚜기가 별로 없지만 저희 생산자 회원들은 모두가 유기농을 하기 때 문에 그때만 되면 메뚜기가 천지거든요. 그러면 아이들이 엄청 좋아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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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한바탕 어우러져 노는 거죠. 그 모습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또 배추 등 채소를 심어 놨는데 일손이 부족해 자꾸 풀이 자라면 김매 기를 도와주러 갑니다.

또 하나 음력 5월이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자리에 모여 파종의 기 쁨을 나누고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단오잔치 한마당’을 엽니다. 5월 단오는 사실 모심는 문화 축제였는데 지금은 다 없어졌거든요. 이것을 다시 살리려는 것이죠. 1989년부터 매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 면 도시 소비자들이 어느 생산지 하나를 정해서 갑니다. 옛날처럼 그네 도 만들고 여러 놀이도 즐기며 마을 사람들과 소비자 회원들이 하나가 되어 단오 문화행사를 합니다. 이런 문화행사는 더욱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그래서 한 번 행사에 참여하고 나면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달라집니다.

또 추수가 끝난 후 10월 말이 되면 도시에서 농촌의 생산자를 초청해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한 해 동안 소비자와 생산자가 서로를 격려 하는 자리인 ‘한살림 가을걷이 잔치 한마당’을 엽니다. 말하자면 장터 같 은 형태죠. 각지 생산자들이 자기가 생산한 물품을 갖다 전시도 하고 음 식을 만들기도 해서 소비자들과, 무사히 수확을 할 수 있게 한 모든 이 에게 감사합니다. 이것도 1989년도부터 매년 해 오고 있습니다. 이런 만 남의 행사는 우리의 전통문화체험을 곁들여 합니다. 우리 문화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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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되새길 수가 있고, 재밌게 장을 벌립니다. 우리가 처음 이런 장터를 할 때는 다른 데서 하는 것을 못 봤는데 요즘은 많은 곳에서 장터가 열 리고 있습니다. 참 좋은 일이죠. 그 뜻이 변질만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식으로 한살림에서는 산지 방문과 도시의 장터 행사라는 나눔 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살림이 하고 있는 중요한 활동 중 하나입니다.

이와 같은 운동은 우리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들을 위 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후세들에게 좀 일 찍 빌려 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때문에 우리 자식들에게도 그 런 생각들을 일러 줘서 그들이 살아갈 환경과 생존 터전을 제대로 가꾸 도록 가르쳐 주어야 하죠. 그것이 미리 빚내서 쓰고 갈 사람들의 몫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 아이들은 자연에서 멀어져 있어 정서가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귀한 아이들을 위해 저희는 초·중학교 학 생을 대상으로 여름과 겨울방학 때 ‘한살림 생명학교’를 열고 있습니다. 생산지 한 곳을 정해서 3박 4일 동안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논 맬 시기엔 논도 매 보고, 풀도 뽑아 보고 감자도 캐 보고, 소꼴도 베어 서 소에게 먹여 보기도 하는 등 농사 체험도 하고, 생태 관찰도 하고,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보기도 하면서 협동 생활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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됩니다. 자연을 온몸으로 체험해 보는 기회는 또한 아이들의 정서 함양 에 매우 유익합니다. 그곳을 갔다 온 아이들은 자연에 대한 이해가 어 른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핵심적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 속에서 함께 뒹굴고 놀아 본 아이들은 친구 관계도 훨씬 부드러워집니다. 혼자서만 놀던 아이도 친구들과 같이 놀 줄 알게 되기 도 하죠.

먹을거리운동은 공동체운동과 환경운동으로까지 확대됩니다 어쨌든 우리의 농업이 잘 보존되고 발전되어서 식량자급을 완전히 이 뤄 내야 하겠지만 워낙 국토가 좁아서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쌀, 보 리, 밀, 콩, 옥수수 같은 기본적인 기초식량은 충분히 자급할 수가 있습 니다. 그를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생산자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고 우 리 모두의 삶이 농업에 대한 협력적인 삶으로 나아가야만 가능할 것으 로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농업이 건강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 이 돼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밥상도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흙 자체도 죽어 결국에는 생산하고 싶어도 생산이 안 되는 심각한 사태가 올 것입니다. 비료와 농약만 마구 치면 땅은 얼마 든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맘껏 생산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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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착각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화학비료에 의존하던 농사는 더 이상 증 산이 되지 않고 땅만 망가져요.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아무리 비료를 쏟아부어도 되질 않습니다. 고 작 30~40년 만에 이런 상태로 와 버렸어요.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문 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국민들에게 필요한 기초식품 생산은 농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나라 전 체로 보면 이것이야말로 중대한 안보 문제입니다. 북한을 보세요. 안보 가 보장되고 있습니까? 철통같아 보이던 안보가 먹을거리 때문에 하루 아침에 사면초가가 되었죠. 먹을거리 기초식품을 안전하게 생산할 수 있는 농업방식이 보급되고 정착이 되어야 합니다. 포괄적으로 ‘환경보 전형 농업’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도시와 농촌이 하나로 힘을 모아 내는 공통 과제가 남 아있습니다. 이를 실현하는 데에는 생산자들이 할 몫이 있고 소비자들 이 할 몫이 있습니다. 이 몫들을 서로 나눠서 열심히 해 나가면 얼마든 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한살림의 경우가 바로 한 예입니다.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뭐든지 처음 하려고 하면 힘도 들고 발전은 느리지만, 꾸준히 해 나가다 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확 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도 17년 전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호 소를 해도 손님이 없었습니다. 그저 친구들이 와서 술이나 먹고 갔고 저희도 화가 나서 술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훌륭한 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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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모여서 어느새 7만3천여 세대2011년 7월 현재 27만 세대라는 규모가 됐 습니다.

한살림을 이용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좀 복잡하죠. 일주일에 한 번 정한 날에 공급을 해 줍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요즘 얼마나 편리한 세상이 되었습니까? 조금만 나가면 없는 물건 없이 빼곡히 진열 되어 있는 백화점, 대형 슈퍼마켓들이 즐비하지 않습니까. 세상은 이렇 게 편리해졌지만 저희는 주문을 해도 날마다 갖다 주지도 않고 4만 원 이상이 아니면 공급 비용을 더 받아요. 몇 년 전에는 매장도 많지 않았 고 5가구 이상 공동 주문을 하지 않으면 아예 갖다 주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까닭은 단지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추구하는 게 단지 건강한 먹을거리를 먹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모두 다 함께하는 공동체적인 삶이기 때문에 도시 사람들 간에도 서로 간에 나누는 문화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그런데 현재 도시의 문화 라는 게 어떻습니까? 서로가 삶을 나눌 기회는커녕 파편처럼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 않습니까? 놀라운 것은 20여 년 만에 서울에 올라왔 는데 제가 떠날 때는 서울이 이렇지 않았거든요. 아파트가 엄청나게 생겼고, 길들이 엄청나게 넓어졌어요. 그런데 사 실 아파트의 옆집과 옆집 사이의 두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하찮 은 두께가 대단한 철옹성이에요.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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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어요. 저는 그래도 옆집 사람과 인사 정도는 하고 사는데 서로 부 딪히는 기회가 없어 진짜로 몇 달에 한 번씩 보는 것 같아요. 그래 얼마 전에 복도에서 만났는데 서로 나눈 인사말이 ‘오랜만입니다’에요. 바로 옆집 사람끼리 이런 인사말이 성립할 수 있는 건지 참으로 의문입디다.

한 동에 100여 세대가 사는데 같이 이웃하며 살면서도 이웃이 없어 요. 다 쪼개져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헐어내기 위해 공동구매라는 공 동체를 만든 것입니다. 이걸 하니까 물건을 주문하려면 옆 사람들을 찾 는 것입니다. 처음 만나 어색하지만 자꾸 공동구매를 하다보면 자주 접 촉해야 되고 그러다보면 친한 사이가 됩니다. 친한 사이가 되니까 살아 가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기쁨도 얘기하고 고민도 얘기하고, 그러다 좀 더 발전해서 서로 취미활동을 같 이 한다든가, 아이들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 등을 부모가 돌아가며 가르 쳐 준다든가 하면서 자체 모임을 만들어 갑니다. 그 모임이 커지면 지 역공동체가 되고 지역공동체가 좀 커지면 지부가 됩니다. 그 지역에 사 는 회원들이 지부를 만들어, 말하자면 독립을 하는 것이죠. 현재 한살 림서울생협에는 지부가 다섯 곳 있고2011년 현재 서울에는 7개 지부가 있다 공동 체지역모임는 많습니다.

한살림 회원이 되면 공동체로 이용할 수도 있고, 개인으로 이용할 수 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5가구 이상이 모여야 회원 가입이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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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부터는 개인 가입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3가구 이상이 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고, 이용 금액에 따라 우대 혜택도 주어집니다. 그리고 1회 이용 금액은 4만 원 이상이어야 하고, 그래야 공급하는 비 용이 나옵니다.

17년 전만 해도 강남 쪽에 가면 길은 넓고 차는 없고 그랬습니다. 그 래서 공급하는 형제들이 차를 몰고 나가면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죠. 이제는 너무 많이 막혀 일하기가 곤란할 정도예요. 그리고 주부들의 사 회활동 기회가 자꾸 늘어나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 주문도 못하고 개인 주문도 못하는 회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작은 지역 점포를 만들었습니다. 2003년 현재 고양 을 포함한 수도권에만 과천, 분당, 일산, 전농 등 19곳에 있습니다.2011 년 7월말 현재 전국 129개 수도권 71개

공동 주문, 개인 주문, 매장 판매 등 3가지

형태로 물품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되 중심은 공동 구매 공급방 식입니다.

저희 소비자 회원들은 또한 여러 가지 환경운동도 합니다. 1990년부 터는 우유팩을 모았습니다. 1주일에 한 번 공급 나갈 때 모아 와서 그 것을 제지회사에 가져가서 휴지로 만들어 재활용했습니다. 이후에 환 경부에서도 분리수거한다고 하여 계속할 필요가 없어서 그만두었습니 다. 용기도 재활용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재활용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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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에서 나온 물품 병을 회원들이 깨끗이 닦아 다시 물류센터에 보 내면 물류센터에서 수집해서 다시 산지로 보냅니다. 폐식용유 같은 것 도 하수구로 흘려보내면 한강물이 굉장히 오염이 되기 때문에 분리수거 하여 비누를 만들게 되었고, 나중에는 ‘협성생산공동체’라는 곳에서 젊 은 노동자들이 모여 재생비누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물건은 다시 한살림에서 물건을 받아다 회원 들에게 공급합니다. 이런 환경운동 및 재활용운동을 하다 보니 행정부 처에 제안을 하게 됐습니다. 음식물 찌꺼기가 많이 나오는데 우리에게 조금 지원을 해주면 퇴비나 사료로 재활용하는 일을 맡겠다고 제안하게 된 것이죠. 몇 군데 아파트단지를 선정하여 그곳에서 배출되는 음식물 찌꺼기를 직접 수거하여 닭과 오리를 키우는 농장으로 보내어 바로 사 료로 직접 활용하는 실천운동도 했지요. 이렇게 직거래운동은 환경운동 으로 나아가고 또 행정부를 바꾸는 일로도 연결이 되었습니다.

생명 가치관에 따른 환경농업만이 살길 한살림운동은 밥상차림운동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또 밥상살림과 농 업살림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밥상살림과 농업살림을 통해서 우리의 삶과 운동을 생명살림 운동으로 변화시켜 가고자 노력했습니다. 세상은 온통 물질과 돈과 출세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생명 가치에 중심을 두고 생명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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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어 가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바꾸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 도 바꾸고 농사도 그런 세계관에 따라 짓는 생명살림 세상, 더불어 사 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유기농산물을 취급한다니까 관이나 협동조 합, 농협 등에서 상당히 백안시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생각이 좀 삐딱 하지 않느냐, 속이 빨갛지 않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그런 시절 을 생각하면 지금은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농업이 살아남아 국제적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가격 경쟁밖에 없다고들 합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환경도 살리고 국민의 건강도 보장해 주는 농업, 즉 질적으 로 맛도 뛰어나고 안전성도 있는 농업, 이것이 바로 앞으로 미래를 열 어갈 농업입니다.

지난 1998년 11월 14일 ‘환경농업육성법’이 제정됐습니다. 그동안 환 경농업육성을 위해선 법이 필요하다 해서 관련 단체들이 모여 이뤄 냈 습니다. 1999년 1년 동안 환경농업육성법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시행 령을 작업했습니다. 작년 11월 14일 날 시행령이 발표되어 이제 환경보 전형 농업을 육성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정책적인 노력이 뒷받침되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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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전만 해도 우리의 일에 대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주 위 분들도 직거래운동에 대해 자문을 구하면, 필요하기는 하지만 고생 스럽고 가능성이 있겠냐 하며 말리기만 했습니다. 그런 일을 저희들 같 은 미련한 사람이, 그야말로 소처럼 미련스럽게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정부가 함께 나서서 법도 만드는 그런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과거에는 한강의 둔치 같은 넓은 공간 직거래를 위한 문화장터를 한 번 열자고 해도 허락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지방자치단체에 서 나서서 적극적으로 장소를 활용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 다. 이제 이 운동을 지혜를 갖고 열심히 해 나가면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수 있지 않겠냐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운동이 산업주의 에 의해 빚어지고 있는 여러 절망적인 문제를 극복할 대안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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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우리 안의 박재일

2011년 8월 18일 ‘문학의 집·서울’에서 인농 박재일 선생 1주기 추모 좌담이 열렸습니다. 이병철 님의 사회로 이길재 최양부 김정남 이경국 서형숙 정광영 조현선 장용진 님 등이 함께 한 좌담회 ‘우리 안의 박재일’ 참석자들이 보내 온 원고와 장례식 때 추도사 등을 모았습니다.


독재정권과 가장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 가농을 이끌고 지킨 박재일의 힘 ● 이길재

박재일 회장은 1973년경부터 1985년까지 약 12년간 한국가톨릭농민회가농 전국본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직함은 이사, 부회장, 8대 회장1982~1983년으로, 가톨 릭농민회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군사독재정권과 투쟁하고 운동의 성장 을 도모한 시기에 활동하였다. 1970년대 유신독재 하에 가농의 주요 활동을 살펴보면서 박 회장의 행적과 노고를 회고해 본다. 소작농 실태 조사와 농지 제도에 대한 문 제 제기, 쌀 생산비 조사를 통한 저곡가 정책 폭로, 함평 고구마 피해 보상운동, 안동교구 오원춘 납치 사건과 인권운동, 농협의 민주화운동 등이 사회적 주목을 이끈 활동이었다. 특히, 박 회장이 전국 회장을 맡은 시기는 정치 상황 변화와 함께 가 농은 엄중한 시대적 소명에 직면하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의 잔존 세력인 전두환 쿠데타 집단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군사작 전으로 진압한 참혹한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전 국민에게 알리는 국민적 행동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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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투쟁을 할 수 없을 때는 힘을 기르자는 판단 하에 대전에 회관 건립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건축 기금을 모았는데, 회원들 ‘쌀 한 말 내기 운동’과 국내외 모금 활동을 벌이면서 조직력을 가동했다. 그리고 가농운동의 새길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여, 구조적 모순을 극 복하고 농민의 인간적 삶을 쟁취하고 동시에 생명공동체운동을 실천하 기로 결론을 내렸다. 박재일 회장은 가농 지도부의 핵심으로 앞에서 소개한 주요 활동 과 정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였다. 박 회장이 했던 많은 역할 중에서 다음 사항을 소개하고 싶다. 하나, 1972년부터 시작한 남한강 상류 수해 지역의 원주교구 사회개 발 사업에 깊이 관여했던 현장 경험과 그 교훈, 그리고 원주교구 지학 순 주교를 중심으로 진행된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교회의 현실 참여 운 동의 경험 등을 가농 전체 운동에 투여한 박 회장의 역할은 매우 소중 하다고 본다. 물론 가농운동에 참여한 원주교구 다른 동지들의 역할도 기억한다. 하나, 박 회장은 포용력과 배려가 있는 인품으로 가농 조직 내 상호 신뢰를 조성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음을 높이 평가한다. 열악한 운동 여건 속에특히, 사찰과 공작 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조직 내 상호 신뢰는 운동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에 있어 지도층의 운동 이론이나 지혜 못지않게 중요한 점 이 지도층의 인품이라는 것을 박 회장을 회고하며 다시 생각한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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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농 동지들 사이에는 넉넉하고 따뜻한 형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 인성 때문에 박 회장보다 한 살 더 많은 연배인 서경원 동지가 의심 없이 박 회장을 한참 동안 형이라고 칭하여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항상 넉넉하고, 웃음 짓는 박 회장이 그립다.

이길재 님은 한국가톨릭농민회 회장, 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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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과 한살림이 없었다면 환경농업정책 도입과 환경농업육성법 제정이 가능했을까 ● 최양부

‘우리 안의 박재일’을 생각해 보는 1주기 추모 좌담회 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은 나의 시계를 17년 전인 1994년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세월의 먼지를 뒤집 어쓴 채 역사 속에 쳐 박혀 있었던 나의 자료 파일을 꺼내게 했다. 환경 농업정책의 구상과 도입, 제도화에 관련해 모아 둔 자료들이었다. 파일 을 여는 순간 한살림과 박재일이 살아났다. 한살림이 없었고, 박재일 선생의 조용하고 온화한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과연 환경농업정책의 도 입과 환경농업육성법의 제정이 가능했을까, 환경농업단체연합회가 그 렇게 빠르게 중심을 잡고 제도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이 들었다. 정부 측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내가 환경농업정책의 도입을 밀어붙일 수 있던 것도 돌이켜 보면 한살림과 박재일 선생이란 듬직한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기억으로 한살림을 만나고, 박재일 선생을 비롯한 한살림 관계자 를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10월 30일, 한살림 창립 10주년 기념 농업정 책토론회에 초청을 받아 ‘문명의 전환과 우리 농의 장래’란 주제로 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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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를 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농촌경제연구원이란 국책연구기관의 부원장이었는데 다소 앞서가는, 정부 시책과도 상충하는 이야기를 공 개된 자리에서 꺼냈다. 다가오는 탈산업사회에서는 점증하는 소비자들 의 ‘안전한 식품과 깨끗한 환경’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킬 ‘생명의 농지속 가능한 건강한 농업’의

실천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환경보전형 유기농업’이

필요하고 이를 육성 지원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우리 농 정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 달 후 나는 대통령 농수산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었고 김 영삼 정부의 농정을 총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수석 일을 시작하면서 환경농업정책을 도입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 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나는 정부의 저항, 특 히 농촌진흥청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론 화를 위해 농어촌발전위원회농발위의 의제로 유기환경농업육성문제를 다루도록 했고 당시 한살림의 이상국 전무가 발표에 나섰다. 이 전무의 발표를 기초로 대통령 농어촌발전위원회는 환경보전형 농업의 정책적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저투입 환경보전형 농법의 개발과 보급, 유 기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지원, 환경보전형 농산물에 대한 환경마크제인 증제실시,

그리고 농림수산부내에 환경보전형 농업전담부서 설치와 환

경보전형농업육성법가칭 제정, 유기농산물로 학교급식추진, 환경보전 형 농업에 대한 소비자교육과 홍보 강화를 건의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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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환경농업육성정책에 대한 큰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나 정부의 태 도는 여전히 미온적이었고 형식적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 이후 농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중대규모의 품목별 전 업농육성과 함께 이러한 정책에서 소외되는 영세 중소 가족농을 중심 으로 유기환경농업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논리를 가지고 나는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농발위의 건의를 계기로 유기환경농 업을 실천하는 단체들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정부 는 처음으로 ‘중소농고품질농산물생산지원사업’이란 이름을 가진 유기 환경농업을 실천하는 농가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을 검토하기 시작했 고, 1995년부터 지원을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거치면서 환경 농업정책의 제도적 확립을 위한 조치에 나섰다. 먼저 정부 내에 이를 담당할 기구와 인력이 필요하고 이를 지원하는 예산이 확보되어야 하 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추진해 나가는 데 청와대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정부 내의 저항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유기환경농업관련단체의 조직화된 뒷받침 이 절대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유기환경농 업관련 단체장들을 시내 한 음식점으로 초청 해 오찬간담회1994년 9월 28 일 해남 천일관에서를

갖고 환경농업육성법 제정, 정부 내 환경농업전담부

서 설치에 대한 나의 구상을 설명하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환경농업단 체의 결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했다. 오찬간담회는 그 자리에서 발 기모임으로 바뀌었고 박재일 선생을 초대 상임공동대표로 모시고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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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환경보전형농업 생산소비단체연합회현 환경농업단체협의회’가 창립되 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기환경농업생산과 생협 등 소비자단체 모두를 하 나로 품고 힘을 모아가는 일은 정말 지난한 과제였다. 단체들 간 연합 활동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단체 간 조그만 이해관계로 갈등 이 빚어지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급조된 단체는 흔들렸다. 그러나 박재 일 선생이란 큰 그릇의 조용한 카리스마가 이를 모두 품어 안았고 빠르 게 조직을 안정시켜나갔다. 환경농업단체연합회가 창립과 함께 빠르게 자리를 잡아 가게 된 것도 사실 박재일회장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 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농림부에 환경농업과가 설치된 것은 사실상 농림부와 나의 한판 힘 겨루기였다. 김영삼 정부의 ‘작은 정부론’으로 있는 부서도 줄이고 통폐 합하는 판에 무슨 환경농업과 신설이냐고 저항이 심했다. 하지만 당시 의 비료농약 등 자재를 담당하던 부서 이름을 환경농업과로 바꾸는 형 식으로 관철시켰다. 비료 농약을 많이 쓰게 했던 과를 이제는 적게 또 는 못 쓰게 하는 과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타협점 을 찾았고, 1994년 12월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환경농업육성 법 제정은 더욱 험난한 여정이었다. 정부와 국회의 반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민간단체의 역할이 중요했다. 1995년도가 시작되면서 환경 농업육성법을 기초하기 위한 전문가 태스크 포스가 환경농업단체연합 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지만 ‘유기농업인가, 환경보전형 농업인가,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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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보전형 농업의 범위와 대상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단체 간 갈등이 빚어졌고, 이 틈새를 타고 정부의 입법 반대 세력들의 저항 에 부딪쳤다. 결국 단체연합회가 국회에 청원하는 형식으로 입법을 추 진했지만 정부의 소극적 대처로 국회가 임기를 마치면서 법안도 자동 폐기되었다.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살리기 위해 1996년 7월 정부 내에 법 제정 실 무작업반을 다시 구성하고 법안을 다듬었지만 정부 내의 저항은 여전 했다. 이번에는 환경부가 완강히 반대했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특 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대통령 선언이었다. 그렇게 해서 1996년 11월 11일 제1회 농업인의 날 대통령 기념사를 통해 “정부 는 환경농업육성법을 제정하여 우리 농업이 환경을 가꾸고 지키는 생 명산업으로 육성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라는 김영삼 대통령 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서는 결국 의원입법 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따라 박재일 회장을 중심으로 다시 협회 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법안은 협회를 통해 청원입법으로 국회에 다시 제출되었고 여야의원이우재, 이길재의 초당적 협조를 받았다. 마침내 1997 년 11월 18일 환경농업육성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2월 13일 공포되었 으며 1년여의 준비를 거쳐 1998년 12월 14일부터 시행에 들어가게 되 었다. 법안의 입안과 의원 입법의 추진도 역시 박재일 선생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환경농업단체연합회 의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지원과 박 회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더해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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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97년 11월 18일 환경농업육성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12월 13일 공포되었으며 1년여의 준비를 거쳐 1998년 12월 14일부터 시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법안의 입안과 의원입법의 추진도 역시 박재일 선생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환경농업단체연합회의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지원과 박 회장의 헌신적인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정권이 바뀌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환경농업육성 법의 시행을 앞둔 1998년 11월 11일 김성훈 장관에 의해 갑작스럽게 ‘친 환경농업원년의 해’가 선포되면서 1994~1997년간 환경농업정책의 도 입과 제도적 정착을 위해 쏟아 왔던 모든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린 헌 신적 노력들은 역사의 수장고에 감금되었고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역사 왜곡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흘린 땀의 결실을 챙기는 무임승차자 들이 설치면서 박재일 선생과 한살림의 업적은 잊혀졌다. 그렇게 13년 의 세월이 흘렀다. 그렇다고 피땀으로 기록된 역사가 모두 지워지는 것 은 아니다. 우리는 이쯤에서 환경농업정책의 역사적 진실 앞에 설 때가 되었다. 이제는 제4차 환경농업육성 5개년계획을 제3차라고 부르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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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도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박재일 선생과 한살림이 담당했던 역사 적 역할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가능해진다. 그래야 아직까지도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친환경을 넘어 한반도에 진정한 유기농업, 생태 농업을 일으키는 진솔한 정책이 가능해진다. 새삼 박재일 선생과 그리고 그 존재감이 가지는 리더십이 없어 더욱 아쉽기만 하다. 장난치는 지도자가 아니라 일을 위해 헌신하는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박재일 선생이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셨다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원고에 나오는 ‘국민의 정부’가 시행한 ‘친환경농업원년의 해’에 대한 평가는 필자의 견해이며 인농기념사 업위원회의 입장과는 관계 없습니다.

최양부 님은 환경농업단체연합회 고문으로, ‘문민정부’ 시절 농림해양수석비서관을 지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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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웃음 그대로 살아 있어 ● 서형숙

2010년 7월 22일, 회장님은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운 듯 찡그린 채 두 팔을 들어 휘저었는데 어찌 보면 너 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말을 걸어 보았다. “회장님,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 많이 만나고, 좋은 것 많이 보고, 좋은 것 많이 먹고, 좋은 일 많이 하고 한바탕 참 잘 노셨지요? 저희들도 더 불어 잘 놀았어요!” 아는 듯 모르는 듯 대꾸 없이 응시하셨다. 회장님은 1994년에 허리를 다쳐 오랫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툭툭 털 고 일어났고 암 수술을 하고도 건강을 되찾았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일 어서실 줄 알았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박재일 회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한살림 총회에서였다. 그 무렵 회장님은 잠시 소비생활협동조합 중앙회 회장직을 맡고 계셨다. 얼마 뒤 한살림 전무이사로 다시 한살림에 전념하시게 되면서 나는 회 장님과 늘 가까이 지냈다. 내가 한살림 평회원으로 돌아온 2005년까지 늘 함께 매달, 매주, 초창기에는 이삼일이 멀다 하고 같이 만나 큰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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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 하나 되는 한살림을 이야기했다. 참 재미있었다. 사단법인 부회장 이 되면서는 바깥일은 회장님이 하시고 소비자 활동과 생산자, 실무자 들의 잡다한 일, 안살림은 내가 꾸렸다. 회장님은 걱정거리가 생기면 밖으로 불러내어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며 안타까워 하셨다. 좋은 취지 로 시도했던 회원 자주 매장이 너무 개인 사업처럼 되어갈 때, 실무자 들 간 알력이 생겨 긴장이 높아졌을 때…, 그래도 되돌아보면 회장님은 언제나 느긋하셨다. 회장님은 성을 잘 내지 않았다. 1992년에 불거진 생산자 문제를 박 재일 전무 책임으로 돌려 해임안이 제출되자 이상국 상무와 실무자협 의회 회장이 우리 집을 찾아오는 등 모두가 다급한데도 회장님은 의연 히 ‘그냥 내가 책임지고 물러나지요’ 했다. 회장님은 어지간한 일에 서 두르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자신을 재지 않았다. 회장님은 늘 웃으셨다. 소리 내지는 않았으나 세상이 환해질 만큼 이 를 다 드러내고. 어려운 시절 이야기를 할 때도 그저 웃으셨다. 장가들 러 갔다가 얼마 뒤 구속되는 바람에 사모님이 아이를 낳은 뒤에야 처가 에서 나오도록 했던 긴 고난의 세월을 이야기 할 때도 그랬다. 순수한 사모님, 소명한 다섯 따님과 사신 분이라 그랬을까? 1998년 일본 그린 코프 연합 10주년 행사에 함께 참석했을 때, 저녁에 “내일 입을 옷 좀 다려드릴까요?” 하고 여쭈어보니 이미 주름 펴지라고 물 뿌려 욕실에 걸어두었다고 아이처럼 웃으셨다. 회장님은 감성적이셨다. 초창기 실무자 윤희진현 한살림경기남부 상무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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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을 한 것을 계기로, 나는 모든 실무자의 엄마로서 사무실 내 금연 운동을 벌였다. 회장님께도 사무실 내에서는 피우지 않으면 좋겠다며 완곡히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으셨는데 얼마 후 “나, 6개 월 됐어요!” 하며 그날 이후 실천한 금연 자랑을 하셨다. 업혀 한살림에 오던 두 돌, 네 돌 우리 아이들이 자라 대학에 들어가 자 회장님은 가장 먼저 전화로 축하를 해 주셨다. 어찌나 기뻐하시는지 전화기 너머 웃는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2006년 문을 연 ‘엄마학교’를 보러 오셔서는 여길 보고도 웃고 저길 보고도 감탄이셨다. 맛있는 점심 을 함께 먹고는 가장 필요한 게 뭐냐 물으셨는데 얼마 뒤 스테인리스 전기 주전자를 보내 주셨다. 회장님 회갑 때 드린 말씀이 떠오른다. “회장님은 욕심이 없어서, 또 욕심이 많아서 좋아요. 돈 욕심은 없고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있잖아요.” 회장님은 한평생 욕심대로 사셨고, 지금은 우리들의 한살림으로 살 아 있다. 넉넉한 미소로 우리를 대하던 환한 그분의 얼굴이 한살림에 그대로 묻어있기에….

서형숙 님은 한살림 초창기 조합원으로 한살림의 기반을 닦는데 기여했고 자신의 경험 을 다른 엄마들에게 전하겠다는 생각에 ‘엄마학교’를 열고 책으로도 펴내 세간에 널리 알 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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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명의 오고감은 거룩한 일 ● 이경국

재일이! 잘 살아 주어서 고맙네! 여의도성모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자네를 보며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 하지 못해 안타까웠네. 언제고 병상에서 일어나면 꼭 자네와 함께 한 삶 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못 일어나고 영면하다니 야속하 고 아픈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네. 좀 더 정신이 성성할 때 만 나 40여 년 동안 자네가 보여준 삶과 자네와 함께했던 시간들에 대한 감 사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게 지금 이 시간 후회스럽고 안타깝네. 1969년 무위당 선생을 통해 자네를 만났지. 그리고 의기투합하여 원주 를 중심으로 민초들의 삶과 환경을 개선해 보고자 농촌으로 광산으로 고단한 줄 모르고 다니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현장에서 돌아와 오 랜 회의를 끝내고 원주 남부시장 선술집에서 소주 한잔에 피로와 고달 픔을 달래며 희망의 꿈을 키우던 때가 자꾸 떠오르네. 1986년 자네가 한 살림운동을 하기 위해 서울 제기동에 구멍가게 같은 ‘한살림 농산’을 차 렸던 때가 언제인가 싶은데 한살림은 이제 20여 만의 조합원과 3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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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를 아우르는 20대 청년의 늠름한 모습으로 키워 놓아 늘 친구로서 뿌듯함을 감출 수 없는데 이렇게 가 버리다니…. 돌이켜 보면, 무위당 선생과 함께 생명사상과 운동의 방향을 토의해 나갈 때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가? 그 길에서 한살림운동과 생활협동 운동을 생각하고 실천의 방향으로 잡았을 때 그 길의 험난함을 알고도 주저치 않고 그 길에 나서던 자네 모습은 오늘을 사는 모든 젊은이들에 게 귀감이 되네. 특히 자연과 인간을 대립시키고 인간의 욕망만을 위해 달려온 죽임의 현대문명 아래서 무너져 가는 농촌과 화학비료와 농약 등으로 오염되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먹을거리문화를 생명의 농업을 통해 살 리고 밥상을 살림으로써 도농상생의 공동체문화로 바꾸고자 했던 것은 생명운동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네. 다른 사람은 한살림의 외형적 성과를 볼지 몰라도 나는 지금 자네가 뿌려 온 생명운 동의 씨앗이 온 누리에 퍼져가는 모습을 본다네. 생활협동운동, 유기농 업운동, 마을공동체운동, 지역살림운동, 생명평화운동 등 이 모든 것들 은 한국사회에 생명운동의 시대가, 후천개벽의 시대가 다가옴을 알려주 고 있지 않은가? 생명사상과 운동의 큰길을 열어 온 자네의 그 삶과 정신으로 이제 후배들 에게 따듯한 조언과 충고를 해 주어야 될 때인데 이렇게 일찍 삶을 접다니…. 그러나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여아동근與我同根이라 했지 않은가? 자네 말대로, 무위당 선생 말대로, 모든 생명은 서로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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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존재하는 우주이지만 또한 개체로서의 생명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모든 생명은 한 뿌리를 머금은 한울이지만, 때가 되면 개체로서의 생명 은 거룩한 삶을 살다 죽지만 우주로서의 생명은 영원한 것 아니겠는가? 한 생명의 오고감은 거룩한 일이지 않는가? 자네의 삶은 거룩한 삶이었 기에 자네 삶의 마감 또한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 거룩한 삶의 마감이 영원한 삶으로의 전화 轉化임을 평생의 도반으 로서 나는 믿어 의심치 않네. 자네를 보내는 안타까운 마음과 슬픈 마음 은 우리 스스로가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라 생각하네. 이제 자네의 삶과 정신이 온 누리에 퍼져 자네와 한 뿌리인 후배들이 농업살림, 밥상살림, 지역살림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지켜보 면서 좋은 기운 많이 나누어 주게나. 살아 있는 동안 나누어준 자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도반으로서 나 누었던 진리의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이제 자네를 떠나보내네. 우리 모 두 자네를 영원히 마음속에 기억할 걸세. 재일이! 편히 가시게나. 그리고 곧 다시 보세! _ (사)무위당사람들 이사장 / 공동장례위원장 이경국

이경국 님은 박재일 선생과 원주를 중심으로 사회개발위원회 활동을 함께했습니다. (사) 무위당사람들 이사장이며 인농 선생 장례식 장례위원장 가운데 한 분입니다. 이 글은 2010년 8월 21일, 영결식 때 낭독한 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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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림운동은 형이 몸으로 일구어 낸 성과 ● 김정남

인농仁農 박재일 형 대구의 천규석 형과 함께 찾아갔을 때, 통증으로 고 생하시는 걸 보고, 왜 형한테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 시는지 정말 하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현숙한 어머니 밑에서 훌륭하게 자난 다섯 딸들의 지극 정성이 담긴 눈물겨운 간호를 보면서 어쩌면 기적 같이 형이 살아 돌아올지 모르겠다고 일말의 기대를 가졌 었는데, 형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형은 일생을 오직 일 속에 파묻혀 일만 하다가 가셨습 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을 ‘무던한 사람’, ‘일만 하다가 간 사람’으로 기 억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서울로 다투어 몰려오는데 유독 형만 이 보따리 짐 싸들고 원주로 내려갈 때부터가 그랬습니다. 원래 일복을 타고 태어난 탓도 있겠습니다만, 형 스스로 일을 찾아나선 것이 그 몇 번이었습니까. 원주교구에서의 재해대책본부 활동으로부터 시작해 끊 임없이 이어지던 일, 해도 해도 끝이 없던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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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협동조합 활동, 가톨릭농민회 활동, 그리고 만년의 한살림운동에 이 르기까지 형은 일에 파묻혀 살았습니다. 형은 한 번도 그 일을 마다하 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져야 할 짐이라면, 저 짐에 눌려 신음하는 사람 들에게 한 줌 보탬이 되는 것이라면, 형은 언제나 그 짐을 기꺼이 맡아 지셨습니다. 형은 또 불의에 짓밟히면서도 호소할 데 없는 사람, 가난 이 제 탓만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도 언제나 솔선해서 그들의 짐을 맡아 지셨습니다.

또 형은 고생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만학으로 대학에 들어와 한일협정비준 반대 투쟁으로 구속되면서부터 형의 고생은 시작되었습 니다. 장가는 갔으되 아직 시집은 안 온 상태에서 부인께서는 당신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금호동 언덕배기에서의 신혼살림은 또 얼마나 간고했습니까. 그 이후 농민운동을 하면서 칠팔십 년대에 몸과 마음으 로 겪은 고생은 얼마나 컸습니까.

형은 건강한 먹을거리운동, 우리밀살리기운동, 유기농운동, 농촌살리 기운동, 한살림운동을 뼈 빠지게 자신으로 몸으로 시작했습니다. 비료 와 농약을 안 주거나 덜 준 고추 부대를 들고 동분서주하던 때가 어제 같습니다만, 지금 한살림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 튼튼히 뿌리내리고 있 습니다. 이 모두가 형이 몸으로 일구어낸 성과라고 저는 믿습니다. 고생, 고생 끝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좀 편하게 쉬었다 갈 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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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는데, 형은 덧없이 이렇게 가시고 말았습니다. 일만 하시다 실컷 고생만 하시다 풍성한 추수로 영화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가셨습니다. 이는 필경 형이 몸을 너무나 혹사한 탓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합니다. 일도, 고생도, 고통도 없는 저 세상에서 이제는 제발 편히 쉬십시오. 삼가 명복을 빕니다. _ 김정남 올림 .

김정남 님은 박재일 선생과 대학시절 친구로, 학생운동을 함께했습니다. 문민정부 시 절 청와대 교육문화 수석을 지냈습니다. 이 글은 2010년 8월 장례 기간에 보내 온 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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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어진 농부의 한평생

박재일 선생은 1938년 10월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사암2구에서 태어나 2010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위당 선생과 함께한 ‘원주시절’에 대해 나눈 대담, 지난 2007년 10월 8일 ‘문학의집·서울’에서 열린 ‘생명의 길 살림의 길-박재일 한살림 회장 고희 기념행사’에 보내 온 지인들의 글, 2009년 일가상 수상 소감, 계간 《살림이야기》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그의 삶과 실천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대담 박재일이 들려주는 무위당 이야기

언제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함께 ●

윤형근

《나락 한알 속의 우주》나 《노자이야기》와 같

은 이야기 속에서 저희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무 위당 선생님은 생명사상을 실천하는 인자한 할아버 지의 모습인데요. 하지만 생명사상이 나오기까지는 오랜 활동의 경험 과 고뇌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재일 회장님께서는 1960년대 후 반부터 신용협동조합운동, 농민운동,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의 지역 사회개발운동, 가톨릭농민회, 원주소비자협동조합, 한살림 활동 등 무 위당 선생님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무위당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고 물 러서 계시는 입장이라면, 박 회장님께서는 항상 앞에 나서서 활동을 하 셨는데, 그 과정에서의 경험과 고뇌, 그리고 장 선생님과 함께 하셨던 과정들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박 회장님께서는 원래는 원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셨는데 언제, 어떻게, 왜 오시게 되었고 원주랑 인연을 맺

이 글은 2002년 당시 모심과살림연구소 윤형근 사무국장이 무위당 선생과 함께한 ‘원주 시절’에 대해 대담한 것으로 <무위당사람들> 소식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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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시게 되었는지 먼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박재일

1965년 무렵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운

동 등으로 학원가가 매우 시끄러울 때인데, 김지하 시인의 소개로 선생 님을 처음 뵙게 되었는데, 그때 기억으로는 선생님께서 참 편안하고 인 자하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고 포용력 있는 모습으 로 맞아주셨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몇 년 후에 원주로 오게 되었는데, 무슨 운동을 할 목적을 하지고 원주에 온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일원이 되어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었고, 소도시이면서 농촌지역사회였다는 점도 들 수 있겠죠.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거치고 군대 갔다 와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옥에 갔다 나오니 학교에서 벌써 졸업이 되어버려 학생 신분이 아닌 거예요. 사회에 나와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활동에 제약이 많았어요.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 몇 년간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이 농사라는 게 아무나 짓는 게 아니에요. 나에게 농사를 가 르쳐 준 이웃 친구들과 똑같은 시기에 똑같이 씨 뿌려 똑같이 가꾼 내 땅에서 자라나는 농작물배추이 서로 다른 거라. 나오는 싹이 다르고, 자 라나는 모습이 다르고 수확 때의 결실이 달라. ‘야 이거 농사라는 게 그 냥 뿌리고 가꾼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농사를 지을 역량을 갖지 못했구나’를 절감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정 착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연락이 왔어요. 1968년으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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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장 선생님께서 김지하 시인을 통해서 연락을 주셨는데, 내려와 서 보니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세운 진광중학교에 교사로 부르신 거라. 자세한 영문도 모른 채 원주로 와서 다음 날, 당시 단구동 종축장 자리에 있던 진광학교로 가서 장화순 교장선생님을 만나 면담을 하고 허락이 되었는데, ‘내게 교단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고민하면서 진광학교에 근무하게 되었어요. 그때 무위당 선생님이 내게 “잘 왔다. 우리 같이 살자” 하시면서 맞아 주시더라고요.

윤형근

회장님도 6·3사태 등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시기도 하셔

서 상당히 혈기왕성하셨을 때인데, 무위당 선생님과 만나실 무렵 회장 님의 사회나 운동에 대한 생각은 어떠하셨나요?

박재일

글쎄,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화를 열망했지만 학교를 떠난 몸이니

무슨 역량이 있었어야지. 단지 생각뿐이었지. 그저 열심히 살아보는 수 밖에.

윤형근

처음에는 사회운동이나 이런 것을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네

요. 신협운동, 지역사회개발운동 등의 구체적인 활동들은 언제부터 같 이 하시게 되었나요?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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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 오기 전까지는 협동적인 삶에 대해서 관심은 있었지만,


협동조합운동에 대해 문외한이었어요. 당시 가톨릭센터에서 무위당 선생님께서 ‘협동조합 강좌’를 열고 계셨 는데, 학교가 끝난 후 자연스럽게 참가하게 되었어요. 이 협동조합 강 좌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운동에 관심과 매력을 느끼게 되 었고 민의 자발적 협동조합운동의 일환으로 ‘신용협동조합’운동에 참여 하게 되었지. 그 당시는 농촌에서 부락 공동기금의 부정한 사용, 장리쌀, 고리 사채 등이 성행하던 시절이라 서민들의 삶이 피폐하고 어려웠던 시절이고 불신도 극심했었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려운 사람들끼리 십시일반 으로 서로 돕고 자립하는 길을 모색하여 함께 살아 보자는 이 신협의 정신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된 거지. 나는 학교에 근무하면서 일과가 끝나면 저녁에 주로 가정방문을 많이 다녔어요. 학교에서도 권장했지만 이게 아이들 가정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정말 필요한 거야. 밥을 못 싸오는 아이들, 수업시간에 견디지 못하 고 조는 아이들, 다 가정을 찾아 다녀보면 그 이유가 있는거라. 이 가정 방문을 다니고 학부형들을 만나면서 가난한 가정들의 실체를 직접 접하 고 알게 되었고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 당시 신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조합원 교육을 철저하게 했어 요. 탄탄하고 만만치 않은 교육을 다 마친 후 교육받은 사람들이 주체 적으로 조합 결성 여부를 결정했어요. 또 신협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자원봉사자가 되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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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받아야 됐어요. 그래서 협동교육연구원에서 실시하는 21일간의 단기지도자교육을 받았어요. 교육을 받고 자격을 얻어 장상순 씨를 따라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때 지금 관설동에 있는 세교신협을 창립하게 되 었지. 다 농민들이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그들과 같이 공부하고 하면 서 신협을 준비했지. 그리고 호저면 영산에서도 신협을 만들기도 했고. 그 무렵에 진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가 생기고 장상순 선생이 소장 으로 혼자서 그 일을 맡게 되었는데, 이때 내가 자청을 했어요. 교단에 계속 있는 것보다 이 신협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협동교육연구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최초로 만든 ‘학교소비조합’의 일도 거들게 되었지. 이게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소비조합일 텐데. 아침에 도시락을 하나 싸 가지고 나가서 시내버스 타고 우선 종점까지 갔어요. 다시 시내 쪽으로 걸어내려 오면서 모내기도 거들고 하면서 사 람들을 만나 얼굴을 익히고, 새참을 나눠 먹고 막걸리도 얻어 먹고 하 면서 자연스럽게 협동적인 삶과 협동조합의 필요성 같은 것에 대해 이 야기를 나누고 하면서 홍보도 하고 그랬어요.

윤형근

무위당 선생님은 국립서울대 설립안 반대, 도산 선생의 뜻을 이

어받은 대성학원의 설립, 1956년 통일사회당, 1960년 사회대중당 참 여, 중립화평화통일론을 주창하셔서 옥고를 치르는 등 통일운동, 정치 운동, 교육운동에 전념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박 회장님께서 보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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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선생님의 정치의식, 통일에 대한 생각은 어떠셨나요? 또 무위 당 선생님은 주로 교육에 전념하시면서 뛰어난 의식화 전도사라는 평 도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 회장님이 보시는 무위당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박재일

선생님은 이래라저래라 하시는 분이 아니셨어요. 가만히 옆에

계시면서도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자발적이고 주체적 인 노력들을 생성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고, 후배들이 실천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해 주신 분이지요. 4·19혁명, 5·16쿠데타, 굴욕적인 한일회담반대투쟁으로 이어지는 정 치적 격동기에 분노와 좌절로 몸부림치던 나를 품어준 곳이 바로 선생 님이 계신 원주였어요. 선생님과 원주 사람들, 지역사회가 함께 협심하 여 자기가 살고 있는 삶터를 좀 더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 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협동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실천한 것이지. 선생님의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어요.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나뉘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학생이 되기도 하고 학생이 선생이 되기도 하는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이다.” 즉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도 의사가 일방적으로 환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의사를 찾아 온 환자가 ‘어데가 어떻게 아프다’ 고 의사에게 일러주는 과정에서는 환자가 선생이고 의사는 학생이 되 고, 진료하는 의사가 환자에게 이렇게 저렇게 치료해 주는 과정, 이때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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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의사가 선생이 되고 환자는 학생이 되는 것처럼 다 서로 가르쳐 주 고 배우는 상호작용이다 이거야. 따라서 교육의 본질은 인간다운 삶을 함께 배우고 느끼는,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의식의 상호 공유 작용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 또 전쟁의 예를 들자면 장수 혼자 잘 나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많은 병사들이 함께 힘을 합쳐 잘 싸워 주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거라. 그 공을 장수 한사람에게 돌려서 는 안 되는 거지. 우리 교육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잘난 몇 사람 길러 내 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서로 존중받고 주체적으 로,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음가짐과 인격을 키우는 교육, 서로 협동해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나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인간답 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지. 선생님 은 그걸 강조하셨어요. ‘의식화’하면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상 하게 보는 시대가 있었지만, 선생님은 자기 스스로 옳고 그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주시고 조언해 주신 분이지. 이거다 저거다 일일 이 설명해 주시고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곁에 있으시면서 큰 말씀 없이 우리에게 깨달음의 가르침을 주셨어. 우리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셨지. 어느 누구도 내치지 않으신 분이야. 감싸고 포용하시면서 그 편안함 속에서 옳은 길이 무엇인지를 자기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게 해 주셨지. 선생님은 진정한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적이고 온전한 삶은 통일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늘 일깨워 주시고, 인간간, 지역 간, 민족간, 나라간 나아가선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와 통일을 일러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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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 했지. 천지天地는 내 부모요, 내 안에 천지가 있다는 생각이랄까? 또한 “혁명은 보듬어 안는 것”이라 하신 선생님은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 압당하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정이 많으셨고 그들과 함께 하 시고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시지 않으셨나 생각이 들어요.

윤형근

원주의 사회 운동들이 1972년 남한강 유역 대홍수 이후 큰 전환

점을 맞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재해대책 사업이 어떻게 전개되고, 이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요?

박재일

1972년 8월 19일 집중폭우로 강원도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지

요. 당시 자료에 의하면 3개도 13개 시군, 87개 읍면에 피해액 187억 원에 이르렀지요. 그래서 피해를 입은 수재민을 돕기 위해 천주교 원주 교구에서 전 세계에 호소하여 독일 쪽에서 지원이 오게 되었어요. 그래 서 원주교구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을 구성하고, 어떤 식으로 재해민 들을 도울 것인가 정책을 결정하고 실제로 현장에 투입되어 지원사업 을 펼치는 집행위원회로 나눠서 지원 사업을 진행하게 되요. 그때 집행 위원회 위원장을 김영주 선생께서 맡게 되고, 이경국 형제가 광산 지역 을, 나는 주로 농촌 지역을 맡아서 정인재, 김상범, 홍고광, 박양혁, 장 상순 등 여러 분들과 본격적으로 수해 지역 지원 사업을 펼치게 되지 요. 이것이 내가 농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을 살게 된 출발이랄까. 먼저 실태를 알기 위해서 현지조사를 한 후 구체적인 지원 방안 등을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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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고 시작되었는데, 몇 가지 원칙을 정했어요. 첫째, 식량 지원이 우 선이었지. 농민들이 가을에 수해가 났으니 당연히 그해 농사를 망친 거 고 다음해 수확기까지는 먹을 것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지. 두 번째는 흙이 떠내려가 황폐해져 버린 농토를 복구하는 사업이야. 농지가 복구 되야 다시 농사를 지을 것 아냐. 그리고 세 번째는 농민들의 소득원을 개발하는 문제, 그런데 이 모든 지원 과정에서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수 혜가 아니라 재해를 당한 농민들을 그 모든 작업 과정에 함께 참여시 켜, 그러니까 자기 몫의 일을 담당하게 하는 거지. 그래서 식량지원사 업도 소위 품삯 등의 명목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지원받도록 하는 거 야.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구호가 아니라, 절망에 빠진 그들 이 스스로 자립의 의지와 자신감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 처음에 는 힘든 상황이니까 그냥 도와줄려면 도와주기나 할 것이지 이래라저 래라 간섭한다고 귀찮아하는 눈치도 있었지만 차츰 그들도 시간이 지 나면서 능동적으로 의욕을 가지고 참여하기 시작하더군. 특히 동일한 작목을 할 수 있는 생산협동체를 구성하여 협동 작업이 가능하게 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생산협동조직’을 구성했고, 이런 저런 협동체들이 모여서 마을 총회를 구성하여 마을의 일들을 민주적이고 협동적으로 처리했어요. 그때만 해도 유신 시절이라 마을민들이 자꾸 모이는 것 자 체가 관련기관의 주목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농민들은 생각이상으로 자 기네들끼리 큰 다툼 없이 대상 분야를 조정하고 결정하는 등 하나의 자 율적인 일 처리, 자기 조절 능력을 발휘했어요. 또 생산된 작물, 농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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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수송도 문제라, 당시만 해도 운송 수단이 별로 없을 때니까, 수송 수 단으로 경운기 지원 사업이라든가 또 탈곡기, 건조기 등 시설 등을 지 원해서 공동 사용해야 하는데, 그런 기계, 시설 등을 관리할 수 있는 사 람들을 마을민들 중에서 선정해서 일종의 ‘이용협동조직’을 구축하는 거지. 이런 모든 활동들을 현지에서 펼쳐나가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원주에 모여서 그간에 진행되는 활동 상황이나 결과 등을 서로 보고하 고 점검하고 그랬어요. 그런 때도 항상 선생님께서 그 자리에 나오셔서 우리들 얘기를 쭉 들어주시고 했었지. 선생님 계신 자리에서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토론도 하고 하다보면 선생님께서 긴 말씀 안 하셔도 바람 직한 방법들을 우리 스스로 찾아나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부락 단위로 이렇게 협동 조직이 구성되고 운영해 나가다 보니까, 기금도 생기고 그것을 잘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된단 말이야, 협동 공동체를 운영해 나가는 기금을 만들고 운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신용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거지. 필요한 교육 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주민들의 자발적 선택에 의해 신용협 동조합이 구성되게 돼요. 내가 알기로는 그 당시에 농촌과 광산촌에 대 략 74개의 신용협동조합이 창립되었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신협들을 만들어 가니까 자발적 조직으로 활성화된 거야. 어렵고 가난한 마을민들이 푼돈을 모으고, 또 집집마다 어렵지만 조금 씩 조금씩 모아 두었던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출자해서 신협을 세우 고 통장을 갖게 되고 하니까 자부심도 생기는 거지. 당시에 관련을 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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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활동한 지역이 3개도 13개 시군, 47개 읍면 129개 리, 17개 광업소광 산이었어요.

또한 농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생활에 필요한 공산품 등의 물자를 외부로부터 사와야 돼요. 식량의 생산 공급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 구입 소비도 함께 이루어지는 거예요, 농촌이나 광산촌의 공산 품 가격이 도시보다 20~30% 높았지요. 그래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따 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지. 이런 인식 속에서 도시민, 농민이, 그리고 생 산자, 소비자를 구분하지 말고 바른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바르게 유통 하고, 안전한 공산품을 만들고 제대로 공급하고 하는 과정이 전부 구분 되거나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다, 이런 생각 아래 신협뿐만 아니라 소비자협동조합운동도 진행된 것이지요. 협동 조직의 다양한 형태들, 즉 신협, 소협들 이 중에서 지역의 여건이 나 특수성 등의 조건에 의해 전문화된 형태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지. 주민시민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조화롭고 인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이 바로 협동조합운동이에요. 이건 또한 자발적인 민주 화운동이기도 하지. 자치, 자율, 자기조절능력을 갖춘 한 사람 한 사람 이 힘을 합쳐서, 일방적인 지원 체제가 아니라 당당한 상호부조체제를 만들어가는 것이 협동조합의 정신이에요. 마을에 여러 개의 작은 협동 체생산·이용들이 조직, 운영되면서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조직이 생기고 마을의 모든 일들이 민주적인 회의를 통해서 결정됨으로써 민주적이고 협동적인 마을로 변해갔지. 점차 마을들이 연대해서 횡성 강림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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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연남 지역, 평창 대화 지역 등 지역협동운동이 태어나고, 소협, 농 촌협의회, 광산협의회 등 보다 광범위한 협동운동으로 발전해 갔지요.

윤형근

그 무렵 민청학련이나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김지하 시인 사건

등이 복잡하게 얽혀서 참 어려운 시절이었을 텐데, 이 원주의 민주화운 동과 재해대책사업은 어떤 관계였습니까?

박재일

농촌에서 재해대책사업나중에 사회개발위원회로 바뀜이 진행되면서 마

을단위별로 농민들 스스로가 민주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다양한 조직들 이 생겨났고, 자신감도 형성되었지. 그런데 당시 정부에서 보면 이게 불안한 거라. 마을이나 신협에서 민주적으로 투표하여 대표를 뽑고, 수 시로 모여서 작목반회의 등을 하니까 걸핏하면 와서 감시를 하고는 했 는데 뭐라고 딱히 꼬투리를 잡기가 어려워서 난감해 하곤 했어요. 그런 가하면 농민들은 자신들이 심고 싶은 종자를 심으려고 하는데 면에서 나와 일반 벼 못자리를 엉망으로 만들고 일방적으로 통일벼를 심도록 강요하고 하니까 농민들이 반발하게 된 거예요. 결국 이러한 억압적인 강제 등이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즉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싹트고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거지. 당시 에 원주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은 대단했어요. 한편 광산촌에서도 조합활동 등을 통하여 민주적 의식을 가지게 된 친 구들이 앞장서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에 김지하 시인 등이 참여한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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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련사건이 일어나고 지학순 주교님이 구속되었지요. 상황은 긴장의 극치라고나 할까? 언행일체, 모든 활동이 엄중한 감시 속에서 진행되 었지요. 이때처럼 긴장 속에서 나날을 보낸 적이 없어요. 공작과 조작 이 난무하던 시대 아닙니까? 그때부터 우리들은 농촌에서는 지속적으 로 해오던 사업들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지학순 주교 석방을 위한 운동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했으니 정부에서도 정신이 없었지요. 동에 번쩍하고 서에 번쩍하니까. 1974년 민청학련사태를 전후하여 농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병행해 가 며 상당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모두들 열심히 활동들을 했지요. 그게 스트레스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보면 활동가로서의 의무감, 책무라 고 할 수도 있어요.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 내버려두 어도 잘 살 수 있지만 약한 자, 가난한 자, 고통 받는 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기 위해선 서로서로 도움이 필요하거든. 마침 또 나 같은 사람 은 이런저런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 고 하는 것이 직업인데 이런 일을 마음 놓고 하고 다닐 수 있도록 건실 하게 뒷받침해 준 것이 집행위원장 김영주 선생이고, 지 주교님이시고, 천주교 원주교구이고, 원주의 많은 분들이었는데 이 모든 일들이 올바 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중심을 지켜나간 분이 장일순 선생이었어요.

윤형근

제가 들은 바로는 무위당 선생님이 몽양 여운형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농민운동가들에게 강의하실 때에는 마오의 모순론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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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강의하시던 분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발표된 자료는 아닌데, 김 지하 시인 인터뷰에는 그 무렵 원주는 농업사회주의를 지향하고도 있 었다고도 한 것 같은데 얘기를 들어보면 무위당 선생은 무슨 사상을 앞 에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기보다는 밑바닥의 일들을 하면서 부닥 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사상들을 적용했다고 볼 수도 있 는 것 같구요.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박재일

무위당 선생이 딱히 어떤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분은 다양한 사상과 교감을 나눈 분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사실 그 무렵에 내가 활동을 하면서 자주 선생님을 접 할 때마다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도대체 이 양반은 어떤 주의자일까 하는 것이었는데 통 모르겠단 말이에요. 사람이 어떤 카테고리 안에 잡 혀야 이해하기가 쉬운데 이 양반은 잡히지가 않아요. 하지만 행동이나 말씀하시는 데에는 늘상 수긍 가는 당위가 있었단 말이에요. 만인의 관계가 교사와 학생이 고정된 일방적 관계가 아니듯이 사상이 니 주의니 하는 것과 인간의 관계도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장일순 선생도 어떤 특정 사상의 추종자라기보다는 다양한 사 상과 열린 자세로 만났던 분입니다. 그러한 만남과 관계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끊임없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분이지요. 당시의 활동에 대하여 농업사회주의라고 보는 분들이 있는데 무위당 선생님이 농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1차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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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산업 할 때의 경제학적 의미에서의 농업을 말한 것이 아니라 농農 그 자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하였지요. 농農은 인간의 삶과 가장 기 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요. 자동차니 건물이니 옷이니 하는 것들은 없 어도 불편하기는 하지만 사람이 못살게 되지는 않지요. 하지만 농農은 다르단 말입니다. 없어선 안 된다는 말씀이에요. 그 무렵에 선생님이 내게 주신 글씨가 식이위천食以爲天이에요. 의식주라는 생존의 필수 조 건들을 창조해 내는 것이 농업이란 말입니다. 바로 농업은 인간 생존의 근본자리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농업문제를 바르게 하려는데 많은 관심을 쏟았고, 관련된 사상들을 생각하셨겠지요. 그러나 이 양반 은 그러한 사상들을 항상 당신 것으로 소화해 내었다고 생각해요. 나는 난 치는 것을 잘 모르는데 선생님의 난을 보면 일반적인 난하고 많이 다르지요. 이게 꼭 사람 얼굴인데 어떤 것은 웃는 모양이고 또 어 떤 것은 묵상하는 듯하고 그러잖아요.

윤형근

농촌개발사업이 진행 과정에서 많은 성과를 남기기도 했는데 시간

이 지나면서 어려워지게 되었잖아요. 어떤 문제 때문이라고 보시는지요.

박재일

두 가지 원인을 말할 수 있겠는데 우선은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

는데 교육도 해야 하고 사람도 쓰려면 비용이 드는데, 수익이 발생되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에요. 협동조합의 경우는 자체적으로 수익 을 창조하는 사업을 진행하지만 사회개발위원회는 갈수록 일은 늘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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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재정문제를 해결할 제도적 뒷받침이 없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오 늘날 정부에서 하고 있는 공공복지사업을 주관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주민들이 민주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또한 공정하 게 사업을 집행하면서 신뢰를 얻고 했던 과정에서 공공사업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사람문제예요. 농촌개발이니 하는 것도 모두 사람들 이 모여서 하는 것인데 일단은 사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요. 그런데 74년부터인가 강원도에서는 사실상 강제이주가 시작이 돼요. 예 를 들면 화전민 정리가 있는데, 일정 고도 이상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이 주시킨 것이고, 그 다음에 젊은 층들이 일을 찾아 공장으로 도시로 옮겨 가기 시작했지. 그리고 전국적으로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환경개선사 업이 진행되었어요. ‘초가집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자’, ‘토담집을 벽 돌집으로 바꾸자’, ‘취락 구조 개선 사업이다’ 뭐 이런 것이었는데 여기 에서 정부보조를 받았는데 자부담이 있었어요. 자부담은 그 농가에서 지불해야 돼. 가뜩이나 사채, 고리채로 빚더미에 있는데 자부담은 더 큰 부담이 된 것이에요. 그뿐인가? 요즘에도 그렇지만 소를 키우면 소값이 폭락하고 농산물을 생산하면 판로 보장이 안 되는 거라. 이런 부분들이 정책적으로 뒷받침이 안 되다보니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거라. 작목반도 만들고 해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죽도록 일만하고 소득을 못 올리는 꼴이 된 거에요. 부락들이 연결이 되어 신협도 만들고 했었는데 이 부분들이 사람이 빠져나가니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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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자체가 공업 중심, 도시 중심으로 가니까 농촌이 몰락하는 것이 고, 농촌은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한 겁니다. 도시로 몰린 노동자가 저임 금을 받고도 밥만 먹으면 일할 수 있으니까 밥값을 낮추어야겠고 결국 저농산물가격정책으로 일관된 것이지요. 또 농촌에서는 저농산물가격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증산을 해야 하고, 그러니 농약을 마구잡이로 뿌 려야 하고 이게 바로 농업정책이었지. 또 광산촌의 경우는 석유가 주에너지원이 되면서 폐광이 되고 몰락하 게 되었지요. 탄광노동자들의 생계가 어려워지고 하니까 동원탄광사건 같은 게 자연스레 일어나게 되었지. 그 당시의 원주를 보면 농촌, 광산 지역운동, 이창복 씨가 참여했던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노 동운동, 거기에 김지하 시인 등의 청년학생들의 민주화운동과 지학순 주교님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의 부정부패 반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사회참여 등이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천주교의 경우도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한 것이 이곳이 처음이었어요. 1970년대 천주교 원주 교구와 원주는 나라의 민주화와 정의사회 구현에 아주 큰 몫을 했어요. 이것은 원주 시민의 역사적 긍지로 남을 것입니다. 거기에 장일순 선생 님도 계셨는데, 우리의 삶의 양식이 제대로 가게 하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었으니까 당연한 거지.

윤형근

그러다가 77년경이지요. ‘종래의 방향으로는 안 되겠다’고 깨닫

고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하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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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겠다고 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말씀을 들어보니 과거 와 단절된 것이 아니네요. 그래도 그 방향 전환이라는 것이 운동을 보 는 시각이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 었습니까?

박재일

다른 부분은 모르고 농업문제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면 농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억압구조를 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관에서 와서 못자리를 짓밟고 통일벼를 심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협동 조합이라는 게 민주적인 곳인데 농협에 강제로 출자를 하라고 강요하 지를 않나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마구 하던 때였으니까. 농업 이라는 게 생존의 기초인데 농민이 떠나고, 농업이 무너지고 나면 도대 체 우리의 삶은 뭐가 되느냐 말이야. 그런데다 농업이 경제가치에 종속되다 보니까 비료, 농약 때문에 농토가 망가지고 환경이 파괴되고, 농민은 농약에 중독되고, 농산물이 독성에 오염되니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지. 사실 초기에는 기존의 농 민운동적 시각에 따라 농민의 사회적 권익을 회복하기 위하여 억압구조 를 깨야겠다는 생각에 머물렀는데 무위당 선생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 서 그것만으로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사회, 사 물들 속에 있는 상생의 관계를 기초로 세계를 보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보게 된 것이지요. 그 다음부터는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런 시각 에 기초한 관계를 형성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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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생태농업을 하겠다는 생각이라기보다는 공동체성에 기초한 전통 적인 농업의 원리에 의거하고, 그 안에 경제가치가 아닌 생태적 가치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여기에 도시와 농촌이 협력과 연대 를 통해 함께 가는 새로운 운동방식을 고민하게 된 거지요. 그리고 일 본의 생협 활동들에서도 많은 생각의 단초를 얻었지요. 도시와 농촌의 연대, 생산과 소비의 협력관계를 고려하면서 농산물 직 거래운동, 유기농 직거래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런 운동을 무어 라 칭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어요. 원주에서 시작할 때는 협동조합이라 고 했는데 일반적인 협동조합적 개념으로는 이상한 양식이지요. 조합 원의 생활영역이 다른데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조합원이라니요. 문 제는 서울로 갔을 때인데 원주만 해도 밝음신협도 있고 작은 지역이라 협동조합을 하기가 쉬웠는데 서울은 워낙 방대한 지역이라 협동조합 만들기가 어려운 문제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런 내용을 담아낼 적절한 용어를 고민하던 중에 ‘한살림’이란 용어가 떠오르더군 요. 한살림이 어떠냐고 하니까 장일순 선생님과 김지하 시인도 좋다고 하더군요. 인간의 심성은 메마르고, 공동체성이 붕괴되고, 마음은 갈가리 찢어지 고, 사람들은 돈, 물질, 과학기술의 맹신자가 되고, 생태·환경·자연 파괴 등으로 온 세상이 황폐화되고 있는데, 이는 물질주의적 산업문명 이 이룩한 산업사회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의 근본적인 전환이 없는 한 인류의 건강한 미래를 바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선생님은 현대 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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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문제와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문명 창출이 필요하다 고 여기시고 생명운동으로 그 길을 잡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윤형근

원주 때와는 달리 허허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제기동에 쌀

가게였던 한살림농산을 내시고, 일반 쌀가게도 아니고 쉬운 일이 아니 어서 힘이 많이 드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때 무위당 선생님이 힘이 많이 되셨을 것 같은데… 제 기억으로는 박 회장님이 힘든 일이 있으시 면 늘 원주에 내려가셨지요.

박재일

1986년에 6개월 정도 준비를 하고 서울에서 농산물을 도시 소비

자들에게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그해 12월 4일이었지요. 한살림농산이 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쌀가게를 시작한 거죠. 이 일을 시작하면서 같이 농민운동했던 친구들, 노동운동하는 친구들, 교회 분들하고 상의를 많 이 했어요. 꼭 필요한 일이기는 한데 성공하기는 힘들 거다, 고생길이 니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었어요. 그런데 선생 님과 원주 분들과 의논을 해 보면 그건 꼭 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성공 을 전제하지 말고 해야 할 일, 필요한 일이니까 꼭 해야 한다고 하시면 서, 물론 고생길이 훤하니까 안타까워는 했지만, 해 보자고 용기를 주 시는 거예요. 그에 힘을 얻어서 겁 없이 시작했어요. 농업도 제 모습으 로 회복시키고, 농촌도, 농민도 긍지를 가지며 살게 하고, 도시 소비자 들도 건강한 밥상을 차리게 하자고 농촌과 도시가 삶의 연대를 하는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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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협동 관계를 만들어보자고 <한살림을 시작하면서>라는 취지문 한 장 을 갖고 우리 사회에 얘기를 걸기 시작한 것이죠. 그때 우리 사회는 엄청난 격변기,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이 거세게 이어 지던 때 아니었겠어요. 그러니 서울 바닥에 올라와 쌀자루를 지고 석발 기를 돌리는데, 몸과 마음은 길바닥을 향하는 거예요. 정작 소비자는 찾아오지 않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지금 나랏일이 급하니까 이것부터 해결하고 나중에 한살림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소주 도 많이 먹고, 문을 나섰다 이게 아니지 생각하고 돌아오곤 했어요. 어 려움도 갈등도 많았지. 그럴 때마다 내가 찾아갈 곳이 어디겠어요. 원주에 내려가서 선생님한 테 하소연을 할 수밖에. 내가 잘못 시작한 게 아닌가 하고…. 그런데 선 생님은 많은 말씀을 안 하세요. 특히 선생님과 내 경우에는 그랬어요. 또 직설적으로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저 대포집, 선술집에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 고민이 저절로 풀려버리는 거야, 이 방향 으로 가야겠다, 이 문제는 이렇게 대처해야겠다는 게 자연스럽게 나온 단 말이지. 이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무위당 선생님의 신비예요. 선생님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은 사람도 안과 밖이 분리되어 있는 건 아닌데, 있기는 있다는 말이지. 이 안팎의 조건이 형성되지 않고는 일 이 이루어질 수 없고 상황, 조건, 여건이 조성이 되어야 일이 되니 조급 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생각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선생님이 내 과거를 잘 아시니까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화운동 쪽으로 가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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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말씀 중에 기억나는 것 은 사람도 안과 밖이 분리되어 있는 건 아닌데, 있기는 있다는 말이지. 이 안팎의 조건이 형성 되지 않고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상황, 조건, 여건이 조성 이 되어야 일이 된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생각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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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면 절대 돌아올 수 없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죠. 그리고 지금까지 원주의 경험들을 원용을 해라 하셨어요. 바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일을 논의해 나가는 경험 말이죠. 마을에 가서 어떤 일을 할까, 어떤 방법으로 할까 계획을 세워 스스로 협동체를 구 성하는 데까지 어떤 마을은 6개월도 걸리고, 어떤 마을은 한두달 걸리 지만,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경험이다. 협동조합도 마찬가지고, 서울에서 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야 하고 그런 사람들과 논의를 해 나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일이 당위로만 될 수 있는 것도 아 니고… 원주의 경험을 살려 사람들을 만나고 분위기를 형성하면 일이 좋은 형태로 발전될 수 있지 않겠냐고, 기반이 형성되지 않은 곳에 가 서 아무리 안타까워하고 조바심을 낸다고 해서 일이 되는 게 아니라고 격려하셨죠.

윤형근

무슨 일이나 마찬가지지만 한살림의 처음 시작은 황무지에 나무

를 심는 기분이셨을 것 같아요. 그래도 사회적으로 인식이 확산되고 한 살림에 대한 이해가 넓혀지면서 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박재일

그때는 동료나 후배, 선배들이 하나둘씩 찾아 주고 같이 한두 시

간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었죠. 서울에서는 농촌이 어떻게 되어가고, 매일 대하는 밥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생각들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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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어.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 몸으로 겪어 왔고, 보아 왔던 우리의 농 사를 짓는 방식이나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이야기하니까 듣는 사람들 은 기절초풍을 하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과 만났죠. 세 월이 가면서 관심을 가져주고 한살림운동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씩 늘어가니까 참 반갑더라구요. 그런데 이 일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하고 소용되는 일이라면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필요로 하는 사람들 스스로 해야 한다 고 생각해서 관심 있는 분들과 같이 협동조합을 만들게 된 것이죠. 1987년부터 뜻을 가진 소비자 분들이 준비를 했어. 그때까지 제기동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거쳐 간 사람들이 1천500여 명 정도 되는데, 그 분들에게 협동조합을 만들겠다고 소식을 전해 1988년 4월 21일 70여 명의 조합원들이 모여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을 창립했죠. 한살 림이 생활협동운동 틀을 갖게 된 의미 있는 시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 다. 우리 생존의 필수조건인 농을 생태적이고 협동적으로 살려 내어, 그 농산물을 농촌과 도시의 생활자들이 같이 연대해서 본격적으로 만 들어가게 된 것이죠. 도시의 생활자들은 유정란 하나를 먹으면서도 건 강한 밥상을 위해 애쓰는 생산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고마워 하고, 또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농사짓고 생산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게 된다 말이죠. 구체적으로 생활 에 필요한 것들을 소재로 해서 서로 고마워 하면서 생활이 달라지고 또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된 것이죠. 게다가 좋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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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게 된 것을 그저 고마워만 했는데, 이 일을 통해서 논이나 밭, 물 등 생태계가 살아난다는 것도 알게 되고…. 한편 무위당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이 힘이 되어 주셨던 것이 농촌과 도 시가 서로 나누는 운동이 기본이지만, 이 운동이 단순히 물건을 나눠먹 는 차원에서만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의 생각과 관계의 내용을 바꾸는 것으로 가야 한다,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어요. 그래서 사회 전체가 서 로 나누는 삶을 지향하는 길을 가야 하지 않으냐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살림연구회를 꾸려 1년 여 준비를 해서, 1989년 10월에 한살림모임 을 창립하고 우리 운동의 지향과 내용을 밝힌 한살림선언을 발표했죠. 그게 큰 힘이었어. 자네도 거기 참여했지만… 한살림농산이나 조합이 재정이 탄탄했다면 이런 일을 펼쳐나가는데 뒷받침이 될 텐데… 그게 아니더란 말이지. 심지어 무위당 선생님이 난 전시회를 열어 뒷받침을 하시는 등 큰 힘이 되어주시기도 하셨지. 모두가 모여서 같이 생각을 정리해서 우리 모두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과 지침을 선언에 담았 지. 사회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살자는 거였어요. 지금도 그게 지침이란 말이지. 아마 영원한 지침이 되리라고 난 생각하는데….

윤형근

어려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역사적, 사회적인 요구가 있어서

오늘 이렇게 어느 정도 기반도 갖추고 회원도 3만이 넘을 정도까지 갔 는데…. 한살림모임 말씀도 하셨지만 무위당 선생님의 생각에 비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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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5월 12일 원주 송골에서 해월 최시형 추모비를 세우고 무위당과 함께.

보았을 때, 지금의 모습을 생각할 때 더 강조하고 더 해나가야 할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박재일

그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무위당 선

생님이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사회문제들의 원인이 무엇이냐,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관계를 회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것이 독재 때문이냐, 그러면 민주화가 되면 해결되느냐, 독재와 관계 없이도 사람이나 마을이 다 찢어지는데… 그러면 분단 때문이냐, 탄압 때문이냐, 가난 때문이냐… 그런 것들이 부분적인 이유는 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이 다 해결된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삶과 사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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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느냐,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뇌였어요. 이건 문명이 필연적으로 만들 어내는 결과 아니냐, 그럼 앞으로 이 문명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느 냐는 생각이었지. 기술공학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을 거예요. 가령 엄청나게 쏟아지는 쓰 레기를 기술공학적으로 처리하는 것에도 노력을 해야 할 거예요. 하지 만 결국 쓰레기를 줄이거나 발생시키지 않는 사회, 삶이 도모되지 않고 는 세월이 갈수록 인간의 생명도, 생존 조건도 더 심각하게 위협받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이것을 풀어 내는 길은 보다 근원적인 데서부터 출 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에요. 무위당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기 억나는 것이 ‘원시반본原始返本인데, 근원적인 데서부터 다시 한 번 생각 을 해보자는 입장, 모색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차원에서 앞서 얘기한 것처럼 한살림이 초기에는 멋진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한쪽에는 생명을 존중하는 새로운 가치나 새로운 삶을 모 색하는 한살림모임이 창립되고, 또 한편에서는 우리 생존의 필수조건 인 농을 살려나가면서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농산물을 농촌과 도시의 생활자들이 같이 연대해서 만들어 가면서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새로 운 가치와 삶을 실천해 나가는 생활협동운동이 전개되었잖아요. 제 역 할들을 해 나가며 생각을 정리하고 실천을 하면서, 지금 사회가 재미없 다 생각했는데 이 사회가 이렇게 되어야겠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재미있구나, 이런 생각과 삶의 모습들을 키워낼 수가 있었는데…. 그런데 한살림모임이 유지될 수 없어서 그걸 접었을 때 선생님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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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우리 모두가 안타까워 했지요. 물론 농촌과 도시의 나눔을 하면서 도 한살림 모임이 하고자 한 일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생활 협동운동에 전력투구하다 보니 쉽지 않았지요. 새로운 안목에서 현재 우리의 삶을 재해석하고, 할 일들을 모아 내고 이런 것들을 활발하게 개척해야 하는데, 한살림모임이 유지되었다면 서로 간에 큰 보탬이 되 었을 텐데 어느 면에서는 균형이 안 맞았다고 볼 수 있죠. 그게 항상 안 타까웠는데….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기반이 구축되었으니, 노력을 해 보자 하고 있어요. 이제부터는 잘되지 않겠느냐 생각이 들어요.

윤형근

한살림모임 막바지에 제가 간사를 하다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무

위당 선생님이 붙잡으셨는데 아마 그 일이 다시 시작되는 걸 아시면 무 위당 선생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짓궂은 질문일지 모르 겠는데 무위당 선생님에게 서운하신 때는 없으셨나요.

박재일

왜 없었겠어요. 재해 대책 때문에 한참 바쁠 때는 정신이 없었

고, 원주에 이런저런 일들이 터졌을 때, 선생님에게 출마를 하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 드린 적이 두어 번 있었어요. 현장에서 아무리 노력 해도 일이 안 되니까… 지역개발 사업을 위해 갖은 고생 다했는데, 가 령 소를 2년 동안 잘 길렀는데, 한우 가격이 폭락해서 소득으로 연결이 안 된다 말이지. 농산물 가격 지지 정책만 제대로 된다면 힘을 받을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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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이건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 아닌가, 그 러기 위해서는 정치적 역량을 갖춰야 하지 않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게다가 원주는 꽤 기반이 구축되어 다른 곳에서는 ‘원주민주공화국’이 라고까지 했단 말이지. 그래서 선생님에게 출마하시라고 했더니 막 화 를 내시더라구. 너는 아직도 생각이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하시면서. 그러니까 젊은 사람은 화가 나지, 답답하고… 그래서 원주를 떠날 생각 도 했었어요. 게다가 선생님은 다 끌어안으면서 가시는데, 도저히 그래 가지고는 일이 안될 것 같았거든.

윤형근

정치문제에 있어서 무위당 선생님이 거리를 두셨던 것은 개인적

으로는 과거의 실패가 한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박재일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지. 우선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시지 않은 사회안전법이라는 정치적 제약이 있었 고, 두 번째로는 정당정치 면에서는 진보나 새로운 세력이 발붙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상 을 만드는 일이 몇 사람 앞장서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뿌리 를 박고 사는 생활인들이 하는 삶의 운동이 되야 하지 않겠느냐, 이게 아니고는 길이 없다라고 선생님은 보신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뜨려고 하면 주저앉히고, 주저앉히고 하셨던 것 같아요. ‘물속에 잠수해서 기 어’라고까지 말씀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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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러셨느냐, 아니에요. 공무원에게는 공 무원이 할 수 있는 일, 관청에 찾아오는 민초들을 친절하게 자상하게 보살피는 일을 일러주셨지요. 사람에 맞게, 분야에 맞게, 오는 사람 누 구에게나 들려주실 얘기가 있었어요.

윤형근

박 회장님은 주저앉히셨지만, 무위당 선생님께 정치인들도 많

이 찾아오셨지요.

박재일

그랬지요.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것은 기본이었지요. 원래 삶의

기본이 그러셨으니까요. 계산을 하거나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그 사람 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일러주시고, 잘한 일이 있으면 등을 두들겨 주시 고… 이런 것들이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지. 선생님이 소용된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죠. 원주 봉산동 에 계시면서 모든 운동을 하신 것이지.

윤형근

마지막으로 무위당 선생님을 기리는 모임에 바라는 얘기를 들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일

우선 젊은 후배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니까 고맙고 희

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리는 모임은 다른 기념사업회 등과는 달 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생님을 선전하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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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선생님의 생각, 바라시던 삶의 모습, 사회적인 관계,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모습들을 생각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할 거예요. 그리고 그런 귀한 생각을 사회에 전달하는 역할도 필요하겠죠. 사람들 이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모색하는 데 힘이 될 수 있게 말이죠. 오늘 내가 선생님에 대해 얘기는 했지만, 이건 선생님의 한 부분일 거 야. 장님 코끼리 만지기를 한 것이지. 무위당 선생님과 함께 하셨던 여 러분들과 온전한 선생님의 생각과 모습을 찾고 나누는 일이 필요할 거 예요. 그런 것들이 정리되어 책으로 엮어졌으면 해요. 이전에 이영희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무위당 선생님의 족적이 담긴 소박한 기념관이 만들어졌으면 해요. 봉산동이라도. 함께 모여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저 선생님의 모습대로.

윤형근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며칠을 두고 들어도 다 듣지 못할 이야기

라는 생각이 듭니다. 회장님이 지금 하시는 일 속에 무위당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일이 제대로 되어간다면 아마 선생님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장시간 좋은 말 씀 감사드립니다.

박재일과 대담을 나눈 윤형근 님은 초창기 한살림모임의 간사로 활동했고, 지금은 한살 림성남용인 상무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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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연 생명의 길 살림의 길

山이 온다 ● 이병철

이 글은 2007년 인농 선생 고희연에서 낭독한 축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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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仁農 박재일 형의 고희古稀에

여기산山이온다 밥상을차려산을빚은이 그는참나무처럼단단하지만 버들처럼유연하다 불같았던사람 불의에맞서온몸불사르고 물같았던사람 생명앞에선온몸을낮춘다 그불과물이어울려한생명을낳았다 한살림 밥이하늘이고 천지만물이한몸,한뿌리임을일깨워주신스승을섬기며 그가르침온몸에새겨 한길에두르지않고뚜벅뚜벅걸어예까지왔다 돌아보면먼길이다 동해東海영덕의푸른파도를실어 동숭동문리대교정에서거센함성으로솟구치다가 주먹떨며어둠에몸숨기다가 원주原州에서마침내무위당无爲堂,기다려왔던그스승을만나고 눈빛맑은아이들과한동안뛰놀기도하면서 큰물난리나전답과농심함께휩쓸려간자리에 자립과협동의씨뿌리며일어서게하다가 겹겹의덧옷껴입고도오싹하던86년그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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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수도서울의제기동한모퉁이에쌀가게를열었고 이렇게간판을달았다 ‘한살림’ 함께살리고크게살림이니 “밥상을살려세상을살린다” 모셔라, 천지만물가운데하늘을아니모신것이없으니 살려라, 서로죽이고모두죽어가는이죽임의굿판을걷고 더불어모두를살려라 기어라, 자신을낮추는것이섬기는것이니 분노를놓고품어안으라 닭이알을품듯 새로운혁명의길에서 우리의무기는총칼이아니다 한사발의밥이다 밥속에모신하늘이다,신명이다,해방그대동세상이다 밥상살림이흙살림물살림이요 농업살림세상살림이니 한그릇의밥상을제대로마련하고모시는일이 자기속의하늘밝게드러냄이니 큰살림꾼, 한살림의큰살림꾼으로 온정성쏟아우주생명의큰밥상을차려온지어언이십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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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 어진농부의길을걸으라하셨던스승의말처럼 지금그가경작하는밭은 이땅의농촌,농업,농심 이땅에서밥먹고똥싸는이들의모든밥상 평생한평의논밭조차제대로가꾸질못했지만 세상에서그누구보다큰농사꾼 남의말잘안듣는다는노겸형이말했다 인농의말이라면팥으로메주를쑨대도믿는다고 나태어나맨처음으로 형님이라불렸던사람 그런형이황소같은고집과뚝심으로치닫다가 때로는바람처럼물처럼흐르면서 마침내오늘,고희古稀에이른자리 드러나는것은드러나지않는것에바탕하나니 형이이루어온것가운데그공의절반은 숨은꽃향기머금은형수이옥련李玉蓮님의몫인건새삼말해무엇하랴 다섯딸들로풍성한살림 저기밥상이온다 산처럼거대한밥상 일찍이옛스승이 ‘내몸이다.나를먹어라’시던생명의밥상 어진농부가한평생차려온그밥상 생명의큰산이되어 여기에온다

이병철 님은 전국생태귀농학교 대표를 지냈고 지리산생태영성학교를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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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이면 달 따러 가는 님 ● 이상국

박재일 회장님을 이사님이라는 호칭으로 처음 뵙게 된 때를 더듬어 보니 31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 가게 된다. 흔히들 한평생을 60이라고 하는데 그의 반평생을 이런저런 배움을 얻으면서 때로는 당신의 가슴을 아프게도 하면서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뭉게구름처럼 뭉실뭉 실 피어오른다. ‘박재일’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형님’이 라는 단어다. 처음 뵈었을 때 느낌이 그랬다. 봄날 흐드러지게 피어 어 우러진 산천의 진달래와 샛노란 개나리꽃 덩굴과 같은 밝고 환하고 따 뜻한 모습은 당시 군사독재정권과 맞서 생사불고의 민주화 쟁취의 길 에서 실생활로 들어서던 나에게 편안한 출발을 하게 해주었다. 한살림 을 시작하고 나서 한참 동안까지도 사무실에서 불렀던 호칭은 형님이 었고 지금도 사석에서는 형님이다. 나는 박재일 회장님은 모두의 형님 으로 불릴 만한 삶을 살아왔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박재일 형님’을 생각하면 패러다임 혁신의 전문가, 위대한 전략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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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말이 생각난다.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애창하고 계시는 “비 오는 날이면 달 따러 가고 달 밝은 밤이면 공 차러 간다…”는 노래 때문이다. 조금 더 나가 “막걸리 따라 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는 대목에 가면 고성 이 되면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랬다. 칠팔십 년대에 이미 기존의 가치관이나 방식 가지고는 온 생명이 더불어 사는 밝은 문명사 회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계셨다. 위기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 을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안을 찾고 실행하는 데 조금도 조급해 하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모든 일을 운용해 온 형님은 위대한 전략 가이자 패러다임의 혁신가라는 생각을 나는 한다. ‘박재일 형님’을 생각하면 태평양 중에서 제일 깊은 바다 한가운데가 생각난다. 한살림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쯤이다. 한살림 이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장일순 선생님과 술을 나누는 기회가 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이런저런 격려의 말씀 끝에 “상국이 자네 말이야, 박재 일 회장을 잘 도와야 하네. 박재일 회장은 말이야, 바다를 건너도 발을 바다 밑바닥에서 떨어지지 않게 해서 건너는 사람이야…”라는 말씀이 있으셨다. 그때 태평양에서 제일 깊은 곳을 숨 가쁜 기색도 없이 태평 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회장님의 모습을 접한 이래로 나는 형님을 수 십 리 바닷길도 늘 바닥에 발을 떼지 않고 걷는 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실제 삶도 그랬다. 늘 세심한 배려가 있고 바다 밑바닥도 두드려 보고 발을 딛을 정도로 신중하고 살갑게 보살피며 살아온 분이다. 그런데 바 다 밑에 딛고 있는 그 깊이를 내가 잘 느끼지 못해 한 번도 제대로 장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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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 선생님의 당부를 실천하지 못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박재일 형님’을 생각하면 농업, 농민, 농촌에 대한 희망이 떠오른다. 농촌 출신으로 농민의 삶에 대한 애정과 그 삶의 중심에 있는 강원도 산골에서부터 시작한 농업살림의 행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 모 두의 생명을 위해 가장 절실한 당면 해결 과제가 농업문제임을 깨닫게 하는 물결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인간이 체득하 는 통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깨어있는 농민 만들기를, 농민과 밥을 먹 는 사람과 함께 처음으로 하신 분이다. 이를 통해 진정한 삶을 배우는 학교로서 농업과 농촌이 제 기능을 하게 했다. 또 그는 지속가능한 생 존 터전으로 이 땅의 튼튼한 농업 살리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 을 우리 사회에 심어 준 분이다. ‘박재일 형님’을 생각하면 황소가 떠오른다. 청년시절의 학생운동이 그랬고, 칠팔십 년대의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할 때도 그랬으며, 오 십이 된 나이에 당시 사회적으로 낯선 생명운동을 할 때도 그랬다. 더 불어 사는 밥상 살리기를 들고 나온 그 뚝심이 강원도 비탈 자갈밭을 큰 소부쟁기로 척척 갈아엎는 황소를 떠올리게 했다. ‘박재일 형님’을 생각하면 우주 은하계가 떠오른다. 당신의 오랜 친구 이면서 특별히 배려했던 분이, 내가 보았을 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식’ 이어서 도리어 곁에 있는 내가 화를 삭이지 못할 정도인데도 당신은 그 저 말 없이 지켜보시는 것을 보면서 그 품이 우주 은하계와 같다는 생 각을 했다. 평소에 넓은 가슴을 느끼면서 지내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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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볼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재일 형님’을 생각하면 여린 속살이 느껴진다. 어려움에 봉착할 때 마다 상처에 약을 발라 주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해 준다. 해외여행길 을 같이 다녀 볼 때면 사모님에 대한 연정, 후배들에 대한 보살핌이 사 랑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여린 속살과 같은 정을 갖고 있었다. ‘박재일 형님’을 생각하면 모두의 어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약 어려운 먼 길을 떠나게 되어 우리 가족을 누군가에 맡기고 가야 될 그 런 형편이라면 가장 믿고 부탁해 보고 싶은 분이다그렇게 할 염치는 없지만. 그동안 한살림을 함께 하면서 한 명의 회원이 생길 때부터 지금 수십만 명의 회원에 이르기까지 회원 한 분, 한 분에 대한 생각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어버이 마음으로 초지일관하는 모습에 서 그런 생각이 든다. ‘박재일 형님’을 생각하면 땅이 생각난다. 무엇이든지 잘 길러 내는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고희를 맞이하시지만 회장님의 마음 밭에는 새 로운 씨앗이 뿌려져 물을 주고 땅에 양분을 주시기에 바쁜 모습을 본 다. 회장님이 땅에는 세대를 물려가면서 끝없이 생명의 세계관에 기초 한 밝게 깨어 있는 사람 되기와 농업살림으로 뭇 생명살림의 씨앗이 뿌 려질 것이다. ‘박재일 형님’ 땅의 자양분은 그것을 알차게 길러 낼 것임 을 나는 확신한다. 밝은 지구문명을 향해. 이상국 님은 박재일 선생과 한살림운동을 함께 이끌어 왔으며 현재 한살림연합 상임대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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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이 오로지 몸으로 삶으로 보여 준 스승 ● 정재돈

“막걸리가 좋으냐, 색시가 좋으냐? 막걸리도 좋고 색 시도 좋지만 막걸리 따라 주는 색시가 더 좋더라! 엥 헤이 엥헤야……” 뭐 이렇게 나가는 노래가 있습니 다. 왕년에 재일이 형님 십팔번이었습니다. 암울했던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원주 개운동 천주교교육원에서 있었던 농민교육 친교 시간이었지 요. 공식 일정을 마치고 뒤풀이가 길어져 밤늦도록 젊은 참석자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이 늦게 오셔 서 ‘이제 그만 자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같이 어울려 이 노래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민청학련사건 관련으로 복역하다가 출소한 후, 소여물이나 끓 이며 노동야학 교감으로 왔다 갔다하던 1975년 말 1976년 초였습니다. 원주에 형님을 비롯하여 좋은 분들이 계시다는 얘기를 듣고 천주교원 주교구재해대책위원회나중에 사회개발위원회로 바뀜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서 형님을 추천인으로 하여 가톨릭농민회에 입회를 하고 또 강원연합회 창립총회나 교육에 참가하면서 형님 댁에 가서 자기도 하고 장일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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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님 댁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 럼 숨통이 트였습니다. 그날도 원주에서 하는 쌀생산비조사원 교육에 가기로 했는데, 멀리 서 민청학련 징역 동기인 이병철, 서종수 형이 저를 보러 춘천까지 찾 아오셨기에 그런 사정을 얘기하고 교육에 같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당 시 교육 내용보다도 그날밤 함께했던 술자리와 노래를 통해 보여주신 재일 형님과 가톨릭농민회의 작풍에 반해서 오늘날까지 긴 여정을 함 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래 재일 형님과 함께 농민운동, 민주화운동, 생협운동, 한살림운동, 우리밀살리기운동 등 생명운동을 따라 배우며 살게 된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왕초보였던 저희들이 춘천교구에서 준비가 부족 한 채 성급하게 분회를 창립한다 했을 때도 그저 함께 하시며 격려해 주셨구요. 또 어느 무덥던 여름날엔 안동교구 현지 농민교육에까지 모 시고 다녔지요. 함평고구마사건 피해보상촉구 단식농성에도, 춘천농민 회 간부석방투쟁에도, 안동농민회사건에도, 광주민주화운동에도…. 농민의 각성과 투쟁이 벌어지면 광주로 춘천으로 안동으로 전국 어디 라도 함께 달려갔습니다. 1982~1983년에는 형님께서 가톨릭농민회 전국 회장을 맡으시고, 계엄하 최초의 민중집회인 1982년 농지세제 시정 음성농민대회와 1983년 농협조합장 직선제 실시 백만인 서명운동을 이끄셨습니다. 그 리고 부분적인 양보와 제도개선을 성과로 따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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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제도와 사람, 사회와 개인의 동시적인 변혁을 겨냥하며 운 동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사실 이 때부터 생명운 동, 공동체운동의 맹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거기엔 전국 회장이던 형님과 정호경 전국 지도신부님의 노력과 영향이 크게 작용 했습니다. 1985년 사회개발위원회를 정리하신 형님께서 서울 경동시장 근처에 쌀가게를 내시곤 한살림운동을 시작하여 오늘날 전국적으로 확산시키 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운동의 지평을 넓히셨습니다. 관념적 수준에 머 물던 생명운동을 실천으로 구체화하고, 생활 속에 살아 숨 쉬도록 생명 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거창한 구호보다는 나부터 실천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거꾸로 부는 바람 탓만 하기보다 내가 선택하고 조정할 수 있는 돛을 움직여 오히려 바람을 이용하여 원 하는 방향으로 배를 가게 하셨습니다. 타고난 얼굴 바탕이야 내가 어찌 할 수 없지만 그때 그때 표정은 내 가 선택할 수 있듯이, 내가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일들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들을 탓 하며 걱정하고 조바심하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생명을 아끼고 모시 고 살리는 데는 누구보다도 넉넉하게 품으셨지만, 생명과 평화를 해치 는 일체의 요소들과 대결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치열하셨습니다. 세상 을 바꾸는데 중앙의 위대한 지도자보다는 수많은 지역의 풀뿌리들 하 나하나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운동은 시간을 먹고 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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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보다 아버지하고 나이 차이가 더 적다고 하시던 선배이자 스승이 셨으나, 한마디 가르치시지 않으셨고 통 크게 그냥 어울리셨습니다. 석가가 “사십구년 일자불설四十九年 一字不說”이라고 하셨듯이 말 없이 오 로지 몸으로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있으신 듯 없으시고, 없으신 듯 있으시고, 부드러우시나 강하시고, 따뜻하면서도 차고, 소탈하시나 위 엄이 있으시고, 놀라운 친화력과 지도력이 예술적으로 잘 조화되신 그 런 분이십니다. 사실 형님께서 워낙 크고 깊으셔서 그 끝을 저희가 잘 모릅니다. 1990년대 초에 버스를 타고 다니시던 형님이 급정거로 인한 교통사 고로 허리를 다치셔서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문병을 갔던 제가 “후배들이 얼른 돈 벌어서 자동차를 사드리겠노라”고 말씀 을 드렸던 적이 있는데 그만 빈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참 뒤에 순원 이를 비롯한 딸들이 사드린 승용차를 손수 운전하게 되셨습니다. 또 국 선도를 시작하셔 이제 사범자격까지 갖춘 고수가 되셨습니다. 사랑하 는 친구였던 담배와도 작별하시고 당뇨도 잘 조절하시며 건강하게 활 동하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형님은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시위현장에 뛰어들어 서울대 선발대 가 왔다며 투쟁을 고무시켰고, 4월 19일 경무대 진격과 발포 현장에 계 셨습니다. 4·19세대이시자 6·3세대이시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민주 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실시한 ‘민주인사구술기록’ 후 살아오신 삶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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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이자 스승이셨으나, 한 마디 가르치시지 않으셨고 통 크게 그냥 어울리셨습니다. 석가가 “四十九年 一字不說”이라고 하셨 듯이 말 없이 오로지 몸으로 삶으 로 보여 주셨습니다. 있으신 듯 없으시고, 없으신 듯 있으시고, 부드러우시나 강하시고, 따뜻하면 서도 차고, 소탈하시나 위엄이 있으시고, 놀라운 친화력과 지도 력이 예술적으로 잘 조화되신 그런 분이십니다. 사실 형님께서 워낙 크고 깊으셔서 그 끝을 저희가 잘 모릅니다.


돌아보신 소감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경우에는 돌아보니까 ‘아 이런 게 인생이구나. 허망한 꿈도 있을 수 있고 그게 한창 꿈이었는데 근데 그게 결코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 것들이 느껴지고 우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태까 지 살아온 과정들이 ‘참 저런 인간은 없으면 좋은데’ 하는 그런 인간이 되지 않았던 거. 아무에게나 다 주어지는 게 아니고 그래서 좀 뭐 고생 을 했다든지 이런 걸 떠나서, ‘그래 나는 이 세상을 태어났다가 살고 가 는데, 그래 욕 먹고 그런 건 아니었구나. 참 다행한 거다.’ 이런 생각을 하게 돼. 그리고 우리가, 내가 참여한 운동, 이런 데서는 참 아쉬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 운동들이, 모습은 시대에 따라서 자꾸 달 라지겠지만 진짜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장이야. 그래서 그 시대에 맞게 잘 했으면 좋겠다. 한살림운동도 그 한몫을 충분히 했 으면 해. 그 다음 만나서 같이 뒹굴고 말이지, 고뇌하던 그 얼굴들을 잊 을 수가 없지. 참 소중하고 귀한 인연이라 생각해.”

정재돈 님은 가톨릭농민회회장, 전국농민연합상임대표,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공 동대표 등을 맡았던 박재일 선생의 후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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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상 수상소감

자연과 사람, 도시와 농촌이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 박재일

이 글은 지난 2009년 제19회 일가상 시상식에서 농업 부문을 수상한 고 박재일 선생의 수상 소감입니다. 일가상 시상식은 2009년 9월 5일 서울 중구 충정로1가 농협중앙회 대 강당에서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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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자격 없는 사람에게 과분한 상을 주신 데 대해 뭐라고 송구한 마 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상이 일가一家 김용기 선 생이 꿈꾸신 것처럼, 저에게 남은 생을 어려움에 처해 있는 우리 농업 과 농촌을 위해 더욱 노력하라는 뜻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또한 이 뜻깊은 상이 저 개인을 향한 칭찬이 아니라 밥상살림, 농업살 림, 생명살림의 길을 함께 실천해 온 한살림 가족 모두의 활동을 이해 하고 평가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1986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작은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 때까지, 저는 강원도 원주 지역에서 20년 가까이,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장 일순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여러 선후배 동지들과 함께 ‘사회개발위 원회’, ‘가톨릭농민회’를 통해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고 자립을 기반으로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활동한 경험이 있습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그 시절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려웠고 농촌과 탄광지역 주민들의 현실은 더욱 고단했습니다. 사회개발위원회는 주민들 스스로가 자립과 협동을 통해 마을을 일으켜 세우도록 지원하는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이때의 활동 경험은 1985년 원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결성하고 훗날 한살림운동을 펼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우리 사회는 경제개발, 식량증산에만 몰두하면서 환경을 망 가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매년 농민 1천500명이 농약중독으로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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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을 만큼 자연에 기대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역시 안전하지 못한 상황 이었습니다. 물과 공기처럼 너무 소중해서 그것을 빼 놓고는 단 하루도 우리의 삶을 지탱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종종 고마운 마음을 잊고 살기 일쑤입니다. 농업과 농촌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면서도 삶의 기반인 농업과 농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운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한살림은 도 시와 농촌이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해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이 첫발을 내딛던 1986년 당시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유기농 업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한살림의 생산자들은 주변의 냉소를 무릅쓰고 땅과 사람을 함께 살리는 농업을 고수해 왔습 니다. 또한 도시와 농촌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해 주는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한살림은 노력해 왔습니다. 해마다 생산지 방문, 일손돕 기, 한살림 어린이생명학교 등 다양한 도농교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987년부터 가을에 생산자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모여 가을 걷이 잔치를 매년 열고 있으며, 1989년부터는 전국의 생산지에서 도시 소비자들과 함께 단오잔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살림은 농 업을 기반으로 마을을 되살리고 농촌마을과 연결된 도시의 삶 또한 함 께 건강해지는 사회를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 결과 2009년 현재, 한 살림에는 전국적으로 소비자 회원 18만 세대, 농민 생산자 2천 세대가 참여해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 직거래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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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물품만 오가는 차가운 관계가 아니라 인정이 오가는 훈훈한 공동 체로서 한살림은 결코 작지 않은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한살림 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 유기농업, 친환경농산물의 중요성을 어느 정 도 확산시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농업 전체를 생각해 보면 아직 미미한 수준에 불과합니다.

저는 농업과 농촌의 기반을 다져 민족의 장래를 개척하려고 했던 점 이나 물자를 아껴 쓰는 절제된 삶과 근면한 노동을 통해 생활을 개선하 고 사회를 바꾸어 온 일가 선생님과 가나안 농군학교의 뜻과 정신에 대 해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살림이 하고 있는 일 또한 큰 맥락 에서는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살림이라는 말 자체가 도시 와 농촌, 사람과 자연이 한집살림하듯이 함께 살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 습니다. 또한 ‘크다’는 뜻의 ‘한’과 생명 가진 존재들을 조화롭게 살아가 게 한다는 의미인 ‘살림’을 합쳐 다 함께 큰 살림을 한다는 의미인 점을 돌이켜 보면 그 의미는 좀 더 분명해 질 것입니다.

치약마저도 아껴서 3mm씩만 쓰도록 강조한 가나안 농군학교의 생 각에 대해서도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는 물질이 넘쳐나는 풍요로운 시대에 마음껏 쓰고 버리는 식의 삶을 살고 있습니 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이것은 생명의 원리에도 맞지 않으며 언제까지 고 지속될 수도 없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자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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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마음대로 훼손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 생명 의 일원으로서 생태계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생각을 갖는다면 우리는 물자를 아껴 쓰고 보다 단순한 삶을 지향하며 검박하고 근면한 삶을 지 향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살림은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1997 년에는 이북의 굶주린 동포를 돕기 위해 회원 모금 운동을 진행했으며, 2001년에는 전쟁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프카니스탄 난민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 2006년에는 ‘생명살림기금’을 조성해 북한 고성 지역 의 탁아소와 남한의 저소득층 공부방 등에 1억5천여 만 원어치의 쌀을 보내주었습니다. 올해 2009년에는 한살림 서울에서 용산과 광명 지역 에 저소득층 지원을 위한 공부방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우리의 희망과는 무관 하게 위태롭고 우울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세대의 무절제한 소비로 말미암아 온실가스가 증가하고 기후변화 때문에 무섭고도 걱정스러운 환경 재앙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화석에너지에 절대적으로 의존 하고 있는 삶의 방식은 요동치는 유류가격의 파동에 따라 여러 가지 위 기의 증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살림은 기후변화에 대해 회원들과 함 께 ‘가까운 먹을거리 캠페인’과 ‘병재사용 운동’ 같은 환경실천운동을 전 개하고 있습니다. 한살림은 식량파동, 기후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인 위기들은 소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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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리거나 경제를 팽창시키는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 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우주 생명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깨닫고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려는 생각을 분명히 하면서 보다 절제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생명의 근간인 땅 과 농업의 가치를 깨닫고 도시와 농촌이 긴밀하게 교류하고 협력하는 데에 오로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출발한 한살림은 이제 그러나 처음에 생각한 뜻을 올곧게 유지하면서 조합원들과 함께 우리 사회에 작은 희망의 싹을 틔 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뜻깊은 상을 주신 일가재단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뜻 을 잘 헤아려 어려움에 처한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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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좋은 사람들과 맺은 관계가 가장 큰 힘 ●

글·김선미 사진·류관희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요즘 무슨 일해요?”부터 묻는다. 나는 “살림해요”라고 답한다. 그러면 더 이 상 질문이 이어지지 않는다. 대개 ‘집에서 살림한다’ 는 말을 ‘일하지 않고 쉰다, 논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사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대답은 “한살림해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살림깨나 한다는 소리처럼 들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살림은 ‘죽임’의 반 대말이다. 그래서 살림한다는 말은 생활 속에서 무엇이든 온전히 ‘살리 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실제로 잘 못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꾸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림하는’ 나는 하루에 두 번, 모두 다섯 컵의 쌀을 씻는다. 이렇게 해서 한 달 동안 우리 부부와 중학생 두 딸이 집에서 먹는 유기농 쌀이 16kg 정도, 일 년이면 대략 두 가마 반 분량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8년 우리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75.8kg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부 이 글은 《살림이야기》 제05호 ‘살리는 사람을 찾아서’에 실린 글로, 2009년 여름 박재일 의 자택에서 이루어진 고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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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한 양이라고 느낀다.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을 책임진다’는 생협의 약속을 생각하면, 과연 나는 자식 처럼 쌀을 길러주는 생산자를 책임지는 자세로 소비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쌀을 길러내는 농민은 그 쌀을 먹는 소비자의 생명뿐 아니라 논에서 사는 숱한 생물들도 지키 면서 지구의 온실가스도 줄이고 있다는 것까지 떠올리면, 문득 매일의 밥상에서 마주치는 쌀 한 톨 앞에서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마 음을 조금씩 배우고 깨우치게 한 것이 한살림이다. 그 한살림을 일궈낸 큰 살림꾼 박재일 회장을 만나러 간다. 나는 인 터뷰를 위해 그의 집에서 평소대로 차린 밥 한 끼를 함께 먹고 싶다고 청했다. 살림하는 이의 입장에서 이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요구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고집을 부렸다. ‘밥상 살림·농업 살림·생 명 살림’을 내건 한살림의 큰 어른, 어떻게 그가 먹는 일상의 밥상이 궁 금하지 않겠는가.

협동으로 만들어가는 행복한 세상을 밥상에서부터 단비가 내리는 초여름 어느 날 한창 제철인 빨간 장미 화분을 사 들고 그를 찾아갔다. 공교롭게 그의 집도 잠실에 있는 장미아파트였다. 그는 1986년 원주에서 올라온 이후로 줄곧 그곳에서 살고 있다. 오래된 아 파트 단지의 숲은 빗물을 머금은 아름드리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팽 팽하게 부풀어 올라 청신했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숲이 있다는 게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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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상경했을 때만 해도 사정은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원주에서 근 이십년 만에 다시 서울에 올라왔는데 처음엔 눈도 따갑 고 아주 힘들었어요.” 그는 이 집에서 시작한 서울살이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공기의 질 보다 더한 것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바로 옆집하고 벽 두께가 이렇게 얇은데, 서로들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 게 참 이상했어요. 아주 커다랗긴 하지만 모두가 한집에 사는 건 데 말이죠.” 그는 아파트를 ‘한집살이’라고 했다. 온 우주의 생명이 한집살이를 하 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살림운동을 시작한 사람다웠다. 현재 전국 19개 지역에서 18만 세대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살 림은 1986년 12월 4일 서울 제기동에서 ‘한살림농산’이라는 스무 평 남 짓한 쌀가게로 출발했다. 당시 쌀가게의 문을 연 박재일은 나이 쉰 살을 앞에 두고 뒤로는 딸을 다섯이나 둔 어깨 무거운 가장이었다. 고향인 경 북 영덕에 계신 노모는 서울대학교까지 나온 똑똑한 아들이 독재정권에 쫓겨 다니다 감옥살이까지 하더니, 한동안 원주에서 교사도 하고 재해 대책사업과 협동조합 운동으로 뿌리를 박는가 싶어 잠시 안도했었다. 그런데 다시 서울에 올라가 ‘쌀 팔고 계란 파는’ 일을 벌인다고 여간 낙 담하시지 않았다. 그를 맞은 서울 친구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로 한 격동의 시절, 서울에 온 박재일은 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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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이 난무하는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묵묵히 쌀가게의 석 발기를 돌렸다. 하루하루 농약을 치지 않고 길러 낸 귀한 쌀에 섞인 작 은 돌 알갱이를 골라내는 것이 그에게는 수행과 같았을 것이다. 젊은 시 절 그에게 익숙한 몸짓과 습관은 자꾸 거리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물론 아주 외면하지는 못해 거리에 나서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러다가는 영원히 쌀가게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 잡고 쌀가게를 지켰다. 원주에서 쌀가마니를 지고 상경할 때 품었던 생 각은 눈앞의 정치를 바꾸는 일보다도 어쩌면 훨씬 더 원대한 것이었다. 폭력은 독재권력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 크고 위험한 폭력이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밥상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무렵 한 해 1천 500명 가량의 농민들이 농약중독에 쓰러져 목숨을 잃는 것을 지켜 보았다. 농부들이 돌보던 땅과 물도 마찬가지였다. 병든 땅에서 길러 낸 먹을거리가 다시 사람을 병들게 하는 악순환을 어떻게든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망설일 수도 없는 절박함이 이미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도시와 농촌이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통해 공생을 모색하는 일을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심지어 배부른 소리를 한 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우리를 이용해 먹는 거 아닌가, 자기 사업을 하려는 거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었다며 웃었다. 어차피 누군가 먼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않는다면 새로운 길이 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혼자 앞서 걸어가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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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그로 하여금 몰이해와 냉소, 그로부터 비롯되었을 외로움을 고스 란히 감내하고 이겨내도록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원주에 있는 동안 농촌에서 사람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면서 같이 일궈 냈는데 그 일들이 참 잘됐어요. 그때 저렇게 협동을 하면 참 재밌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구나 느꼈죠.” 그는 1972년 남한강 유역의 대홍수로 삶의 터전이 쓸려 내려간 수재 민들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의 재해대책본부 활 동으로 함께 했던 사회개발사업과 가톨릭농민회의 경험이었다.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함께 원주 사람들이 일구어 낸 재해대책 사업은, 전쟁 이후 소위 동냥하듯 ‘밀가루 신자’를 만들어 내 던 이전의 구호 사업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수재민들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자립의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늘이 스스로를 돕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이때의 가슴 벅찬 경험들이 협동조합운동의 소중한 자산 이 되었다. 그는 원주에서의 추억을 더듬는 동안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목소리도 생기가 더해졌다. 사실 그는 지난 겨울 위암 수술을 마치고 치료 중에 있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대화를 청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 록 그의 몸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는 것 같았다. 협동으로 일궈낸 행복한 세상에 대한 꿈이 그의 힘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 있었고, 은연중에 국민성 때문이라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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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도 많아서 힘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체험한 희망 의 증거들이 있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왜 이런 일들을 하는지 제대로 알려내고, 교육하고, 투명하 게 공개하기만 하면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이 생기죠. 협동은 그 믿음의 힘으로 커져가는 거예요.” 한살림도 모든 것을 조합원들에게 다 드러내놓기 때문에 신뢰를 얻 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월급 받고 일하고, 나 먹을 것 은 매장에 가서 조합원들하고 똑같이 돈 내고 사 먹는 것을 보고 놀라 는 사람들도 있어요”라면서 웃는다. 사회제도를 바꾼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살아가는 방식 부터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데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 되기 힘든 것처럼 생각의 틀과 생활 습벽을 바꾸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 이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누구나 공감하는 절실한 문제로부터 출발하 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고 한살림의 뜻이었다. “그게 밥 아닙니까. 어느 누구도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게 밥이잖 아요. 그러니 그 안에서 밥과 세상과 사람들의 관계로부터 시작한 거예 요. 우리가 제대로 된 생명의 밥상을 차리자 그래서 가정의 밥상, 들판 의 밥상, 도시의 밥상, 사회의 밥상을 다시 꾸리자고 말이죠. 그런데 의 외로 좋은 생각을 가지고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는 오늘의 한살림을 만든 것은 생명의 밥상을 차리려고 노력한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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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당위나 거창한 무엇을 내걸고 한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스스로 깨닫고 시작한 일이라 꾸준히 지속된 것이라는 말이다.

병은 나를 깨우치게 한 스승이다 그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선뜻 이야기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 한살 림의 조합원이 급격히 늘고 있는 데에는 식품 안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진 영향도 있을 것이다. 특히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나 암에 걸린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통해 보다 근원적인 치료를 하고자 찾아온 경우 가 많다. 그런데 한살림과 함께 20여 년을 함께 살아온 그가 병에 걸린 일을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유기농 먹을거리를 시장에 서 상품으로 파는 기업체라면 이를 숨기고 싶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요새는 채식을 중심으로 양도 적게 먹어요. 그동안 내 자신이 너무 나를 돌보지 않고 건방진 삶을 살았구나 하고 이번 기회에 많이 배우게 되었어요.” 어린아이처럼 밝은 표정이었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얼굴은 조금 야 위었을 뿐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피부가 맑았다. 그는 위를 다치고 나 서야 비로소 위장의 기능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너무 많이 먹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몸이 신호를 보냈을 텐데 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자신에게 무관심했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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쳤다. 젊은 시절부터 집에서는 하숙생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일에 쫓 겼고 늘 밖에서 음식을 사먹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한다. 또 농민들과 어울려 마음을 터놓고 일을 해야 하다 보니 자연 술을 마실 기회도 많았다고 한다. “저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었어요. 그러면서 한살림운동을 열심히 해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더라도 모두가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하루빨리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만 했어요.” 정작 자기 몸에 좋은 것을 골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따로 해 본 적 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한살림운동이 지향해온 일관된 생 각이다. 그는 한살림이 물품 가운데 물을 취급하지 않는 원칙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조합원들 사이에는 좋은 물을 공급해 달라는 요구들은 끊임없이 있 었어요. 하지만 도저히 수돗물을 못 먹겠는 사람들이라면 개인적으로 형편껏 생수를 사 먹으면 돼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모두가 먹는 수돗 물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을까 노력하는 데 힘을 쏟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살림이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거든요한살림은 1999년 수돗물불소화반대국민연대에도 참여했다.” 더불어 그는 건강이란 단지 먹을거리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을 둘러싼 물과 공기 같은 환경과 무수히 많은 관 계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살림을 통해 이 세상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게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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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맺은 것이 이제껏 잘 살게 해 준 힘이었어요” 그가 하는 이 간단한 말이 어쩐지 깨달은 이의 게송처럼 들려왔다. “결국 건강 문제는 자초한 거지요. 오히려 내 몸에 제대로 관심을 갖 지 않은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어요.” 그의 스승이었던 무위당 장일순은 “병은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친 구처럼 내 몸에 잘 모시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했었다. 이제 박재일도 제 몸의 병을 스승으로 모실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와 함께 나 눈 밥상은 예배를 보는 경건한 자리였다. “제대로 차근차근 씹다 보니 맛도 새롭게 느끼고 있어요. 그러다 보 니 자연스럽게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생각이 깊어져요.” 그래서 하루 세끼 그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아내에게 더욱 감사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다섯 자매를 반듯하게 키워 온 사람이었다. 문득 박재일은 어떤 아버지이고 남편이었을까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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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인자하고 좋은 모습뿐이었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던 늘 바쁜 아버지였기 때문이 라고,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육아와 살림살이에 지친 아내가 하소연을 할 때면 늘 “여보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해서 그래요.” 하면서 다독여 주었다고 한다. 그 힘으로 용기를 얻었다고. 조직 안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쳐서 내치는 것보다 끌어안으면서 시 정해 가려고 노력한다”는 그의 성품을 다시 확인하게 해주는 말이었다. 국어사전을 펼쳐 살림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 가는 일 또는 살아가는 상태나 형편’이라고 적혀 있다. 여기서 말하는 ‘ 한 집안’의 의미를 가정과 사회, 사람과 자연까지 모두 아우른 온 우주 로 확장시킨 것이 바로 한살림운동일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에서부터 다시 한살림을 하고 있었다. 꿈을 꾸는 머리와 따뜻하게 사람을 품는 가슴뿐 아니라 하루하루 밥을 삼켜 에너 지를 만들어내는 인체의 기관들도 한 사람의 몸속에서 함께 살림을 해 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다. “한살림은 끝없이 만들어가는 거예요. 완성된 게 아니라 생활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삶을 통해서 만드는 거지요.” 그 역시 오늘도 자기 몸에서부터 다시 한살림을 만들고 있었다.

김선미 님은 한살림조합원으로 《좁쌀 한 알에도 우주가 담겨 있단다》, 《살림의 밥상》 등 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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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산알아비여 안녕

박재일 선생은 2010년 8월 19일 05시 20분 향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그이의 유지대로 일체의 부의금과 화환을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1일 서울 천주교 방배동성당에서 열린 추도식과 충남 괴산군 청천면 장례식장에 함께한 사람들, 해외에서 보내 온 추모의 글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추모의 글

산알아비여 안녕 누가 당신을 일러 ‘산알아비’라 부르더이다 산알은 생명이니 햇곡식이요 그 아비이니 세상의 밥 걱정하는 양반의 뜻. 듣기 좋더이다 이제 고생 많던 이승을 떠나 그 시커먼 제기동 가게도 떠나 영덕 큰 바다 같은 저승에서 산알이 사리가 되시는 때 사리아비이니 왈 한울님. 생각만 해도 좋소이다 이젠 우주 걱정 하소서 부디 평안하소서 안녕. _ 김지하 삼가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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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인농生者仁農, 한살림의 혼으로 피다

오늘 산이 무너졌다 세상의 동종銅鐘이 모두 소리 내어 울고 있다 밥상살림의 한 길을 걸어 마침내 생명살림의 큰 산을 이룬 사람 아직 가 보지 않았던 길 누군가 앞장서 열어가야 할 그 길을 걸어 그가 걸어온 길 이제 큰길이 되었다 한살림의 길 함께 살고 모두를 살리는 큰 살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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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살림이 땅살림 물살림이요, 생명살림이니 밥상을 살림이 마침내 세상을 살림이니 밥 속에 모셔진 하늘을 보아 한 그릇의 밥상을 제대로 마련하고 모시는 일이 자기 속의 하늘 밝게 드러내는 것이니 그렇게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것이니 자신의 생명마저 상품으로 사고팔며 독이 든 먹거리 다툼으로 눈먼 세상 속에서 생명의 밥상을 함께 마련하고 나눔으로 농촌과 도시가 생산자와 소비자가 손길 맞잡고 서로의 생명과 살림을 내맡기며 한 사발의 밥을 함께 모심으로써 품어 안는 새로운 혁명의 길을 개벽의 새 세상을 온 몸으로 열어 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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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 일찍이 어진 농부의 길을 걸어라 하시던 당부를 가슴에 새겨 평생 한 평의 논밭을 갖지 못했지만 밥상살림의 오롯한 한길로 자신을 갈고 마침내 온 세상을 갈아 생명의 밥상을 마련했던 이 땅의 가장 큰 농부 우주의 참 농사꾼 인농 박재일 선생 이 땅에서 생명평화를 꿈꾸던 이들의 맏형 같았던 사람 오라버니 같았던 사람 생명살림의 큰 살림꾼이었던 사람 온 몸으로 세상의 고통을 함께 앓던 그 마지막 자리에서까지 한살림의 앞길을 기도했던 사람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당부했던 사람 오늘 그가 갔다 그렇게 큰 산이 무너졌다 그 산이 무너진 자리 그 산에서 빚어 만든 동종들이 함께 큰 울음 하는 이 자리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산들을 본다 연이어진 그 봉우리마다 품고 있는 인농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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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과 살림의 대동세상을 인농, 그는 갔다 이 땅에서 해야 할 그의 몫을 다 감당했으므로 훌훌 몸을 벗어 지워지지 않는 생명 모심의 이름이 꺼지지 않는 생명살림의 불꽃이 되었다 한생을 오롯이 세상을 살리는 밥상이던 삶을 접고 마침내 오늘 한살림의 영원한 혼으로 피었다.

_ 인농仁農 선생의 영전에 여류如流 이병철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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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 회장님! 세상에서 가장 큰 농사를 짓던 당신. 작은 욕심 버리면 모두 한 가족 되어 살 수 있다며 한살림을 꿈꾸던 영원한 청년. 이제 정녕 떠나가시렵니까. 뜨겁던 여름의 끝자락에 날아든 비통한 소식에 우리는 모두가 황망합니다. 생명의 길 살림의 길, 갈 길이 아직 먼데 기어이 우리를 두고 가시렵니까. 시장의 논리에 인정이 휩쓸리고 사람이 왜소해지던 그 때 우리 농업과 농촌의 운명이 벼랑 끝에서 위태롭던 시절, 당신은 모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함께 살자, 함께 이마를 맞대고 손 맞잡으면 모두가 가족이 되고 살 길 이 있다.” 한살림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고 그 이름을 단 작은 쌀가게에 원대한 희망의 씨앗을 심은 당신 삶 전체가 한살림이었던 당신, 당신이 있어 우리들은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육신이 이토록 고단한 줄도 모르고 저희들은 행복한 꿈 꿀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밝고 환한 곳으로 당신이 꿈꾸던 한살림 온전한 그곳으로. 아니 당신의 지친 몸은 보낼지언정 당신의 그 순진무구한 꿈, 온 생명이 더불어 사는 평화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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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은 영원히 간직하고 이어가겠습니다. 박재일 회장님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_ 장례위원장 김민경 이경국 이길재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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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꼭 함께 계셔야 될 분, 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선 늘 저희에게 스승이며 어버이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저희는 배움을 미쳐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과 자애로운 품 을 잃어버린 비통함으로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무슨 말이든지 끝까지 마음껏 하도록 기다리며 지긋 이 경청하시던 모습, “이게 말이지, 한살림은 재미나게 하는 거란 말이지” 하며 격려해 주시 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도시에서 농촌에서 생명을 살리는 밥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더불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살림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오신 당신, 높은 이념과 말씀만이 아닌 몸으로 실천해오신 당신, 마지막 순간까지 굶주리는 북녘 동포를 걱정하신 당신을 기억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보여 주신 경청의 모습과 자애로움을 기억하며 못 다 이루신 살림세상의 꿈을 이룰 것을 약속합니다. 당신을 보내고 슬픔 으로 가득 찬 가족들을 당신이 계신 듯이 외롭지 않게 따뜻하게 위로하 며 함께 슬픔을 이겨내겠습니다. 멀리 일본에서 와주신 다나카 요코 회장님을 비롯한 그린코프 연합 손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하늘나라 가시는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이승의 손을 놓아 드립니다. _ 사단법인 한살림 회장 김민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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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그이의 평생 화두 시대는 생명의 때다. 평화와 함께 생명이 이 시절의 총 화두다. 그 생명을 참으로 구체적으로 걱정하고 애써 마련하는 이가 귀하지 않 을 도리가 없는 때다. 박재일, 이 분이 바로 그 귀한 분이다. 이 분이 돌아가셨다. 어찌 서운하고 서럽지 않으랴! 평생을 생명 한 글자에 그야말로 생명을 바치신 분. 남들 몰두하는 일 체 가치 너머 삶의 근본에서 그 근본을 꿰뚫 때 더욱이 그것을 참으로 구체적으로 생활적으로, 그렇다! 생명적으로 관철하셨다. ‘생명문제의 생명적 관철!’ 모심! ‘밥’이다. ‘밥’이 박재일 선생의 최고 철학이었다. 귀하신 분 가시는 길에 어찌 상서로운 꽃다발이 없을 수 있으랴! 나사렛 예수는 밥을 ‘사크라리온’, ‘현실적 신성성’ 혹은 ‘거룩한 지역’이 라 불렀으니 성찬聖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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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선사雲門禪師는 ‘진진삼매塵塵三昧’라, 다름 아닌 ‘화엄법신華嚴法身’이라 하였으니 한살림! 해월 선생은 ‘밥 한 그릇이 만사지萬事知’라 드높이 칭송하였으니 모심! 박재일 선생은 바로 이 ‘현실적 신성성’, 곧 현대문명사 최고의 숙제인 ‘마음 속의 몸’을 실사적으로 탐구하신 수도자다. 다름 아닌 ‘산알’이다. 이제 우리는 깊이 고개 숙여 이 분의 뒤를 따르는 일, 참으로 거룩한 ‘사리’를 찾아 현실의 숲과 몸을 헤쳐나가야 할 때다. 안심하고 편히 가소서 총총.

_ 못난 벗 김지하 삼가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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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 박재일 형 영전에 어제도 그제도 저는 박재일 형을 생각하면서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 찬을 먹었습니다. 한살림에서 배달해 주는 채소를 맛있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렇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먹게 하느 라고 정작 박 형은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농약, 살충제, 제초제 등 죽임의 독약으로 범벅이 된 먹을거리들을 우 리 밥상에서 몰아내고 건강한 먹을거리로 바꿔 내려는 운동에 나선 박 형과 동지들의 노력으로 이제 우리 어린 자식들에게 유기농 무상급식 까지 하게 될 이즈음에 박 형이 우리 곁을 떠난다는 현실이 우리들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1986년 서울 동대문 밖 제기동에 문을 연 한살림농산이라는 작은 가게 가 25년 만에 이 나라를 대표하는 생활협동조합으로 발전했다는 사실 이 박 형과 동지들의 발자취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농촌과 도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엮는 직거래를 목표로 시작된 생활협 동조합운동이 오늘의 한살림운동으로 발전하기까지 긴 세월의 준비가 있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님, 장일순 선생님, 김영주 선배님, 김지하 시 인, 그리고 박재일 회장을 비롯한 원주 사람들이 민주화운동과 분단극 복운동 너머 저 멀리까지 내다보는 생명운동을 모색하고 실천한 결과 가 한살림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윤 추구, 경쟁과 배제, 생태파괴 그리고 죽임으로 상징되는 현대 인류문명의 끝을, 다시 도시와 농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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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생산과 소비의 호혜, 밥상의 살림 그리하여 생명이 넘치는 새로 운 문명으로 전환하려던 것이 한살림운동의 목적이었습니다. 박 형은 4월 혁명과 6·3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에서도 동년배들 속에 서 언제나 맏형이었습니다. 큰 바위처럼 말없이 언제나 필요한 자리에 서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톨릭농민회 회장, 원주소비자협동조합 회 회장 등 박 형이 이끈 운동은 거센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위기에 처 한 우리 농촌과 농민들의 활로를 열고 아울러 오염으로 찌든 도시민들 의 밥상을 씻어 내는 일이었습니다. 칠순이 넘도록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묶어 우리 생활을 전면적으로 바 꿔내는 운동을 벌인 활동가는 박 형 말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박 형을 비롯한 한살림 활동들의 실천이 20여 년 전인 1989년 선포했 던 ‘한살림선언’을 새롭게 주목하도록 만들고 식민지, 분단, 전쟁, 양극 화, 생태파괴, 오염, 죽임으로 점철된 이 한반도에서 마땅히 울려 나와 야 할 생명선언과 그 실천은 대안문명을 향한 진지한 모색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박 형이 시작하시고 남겨 놓으신 숙제들은 남은 동료들과 후배들이 이 어서 짐 지고 나아갈 것입니다. 현숙한 부인 이옥련 여사와 다섯 따님들과 네 사위들은 박 형의 유지대 로 꿋꿋이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 힘든 짐 내려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영면하소서. _ 이부영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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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리 농민의 아버지였습니다 회장님! 당신은 우리 농민의 아버지였습니다. 모든 허물과 잘못을 덮어 주는 아 버지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농민의 어머니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농민의 친구였습니다. 늘 가까이 다가와 막걸리 잔을 나누 며 우리의 고민과 아픔을 들어 주고 함께하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농민의 스승이었습니다. 어떤 삶이 진정한 농민의 삶인지 를 가르쳐 주셨구요. 혼자 살기보다 함께 살기를, 늘 함께 나누고 용서 와 화합하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생명을 돌보는 대지의 어머니, 진 정한 농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회장님과 함께한 24년은 우리 한살림 농부에게 큰 기쁨과 위안, 행복 이었습니다. 지나온 세월만큼 남아 있는 우리들은 당신이 남기신 유지를 받들어 농 업살림세상, 생명살림세상의 큰길로 나가겠습니다. 당신이 꿈꾸던 행복한 농촌마을, 도시와 농촌이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 는 도농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당신이 늘 말씀하시던 “농촌과 도시는 하나다.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우리는 한살림이다”라는 말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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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 해온 24년은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떠나보내면서도 늘 당신과 함께 할 것이라 확신하기에, 또 우리 모두가 당신의 뜻을 잘 받들어 모실거라 확신하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미소와 부드러운 음색을 늘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박재일 회장님 이제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따사로운 햇빛이 되시고 은은한 달빛이 되셔서 이 땅에 뭍 생명들을 키워주시기 바랍니다. 시원한 바람이 되셔서 농부의 이마 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이루고자 한 생명세상 우리가 꼭 이루어나가겠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2천 생산자의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불러 봅니다. 박재일 회장님!! _ 한살림전국생산자연합회 회장 이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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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실천이 일군 변화를 기억하며 가신 이를 기리는 상투어가 아니라 진심으로 훌륭한 인물 박재일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살 만큼 산 사람들이 숱하게 많은 판에 박재일이 먼 저 간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프다. 박재일의 학생운동가 면모, 그리고 그가 이루어낸 협동조합 ‘한살림’의 성공담과는 별개로 숨 막히는 군사정권 시절 그가 보여준 성실함과 신 뢰감이 나에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톨릭 농민회의 활동가로서 고 지학순 주교·장일순 선생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원주권’을 서울의 재야 세력과 연결하는 고리의 하나가 박재 일이었는데, 이 일에는 김정남과 정성헌을 빼놓을 수 없다. 박재일을 처 음 만났을 때 당당한 체구와 과묵함이 매우 잘 어울린다고 느꼈으나 말 숱이 적을 뿐 그는 의견전달자로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이른바 ‘오원춘 사건’ 당시 그가 안동에서 열린 집회에서 가 톨릭 농민회 회원들을 앞에 놓고 행한 열변을 나는 현장에서 들었다. “형 제 여러분”이라는 그의 말문은 신앙공동체에서 흔히 쓰는 것이지만 그때 거기서는 가식과 위선의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농협 민주화’, ‘우리밀살 리기’,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등 여러 분야에서 농업운동가로서 실천해 온 그의 삶 자체가 담보된 표현이었기 때문이라 믿는다. 과묵함의 또 다른 일면이겠으나 경북고-서울대 출신인 박재일은 학력 을 자랑하는 패들이 흔히 즐긴 이데올로기 담론에서 거리를 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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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도산 안창호가 말한 ‘무실역행’이 어떤 것을 상상했던 지는 찍어낼 수 없지만 농민운동가와 협동조합 조직 및 관리자로서 묵묵히 일하여 구체적 성과를 올린 박재일은 우리 시대의 그 살아 있는 본보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젊은 세대는 무실역행이란 표현이 고리타분하다 며 그 실체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번드르르한 변설보다 실천을 중요시 하며 그 일에 자신이 앞장서는 자세가 박재일이 보여준 것이라고 답하 면 어떨지 모르겠다. 박재일은 이를테면 분단 시절 서독의 사민당 수상 헬무트 슈미트 같은 사람이다. 그는 화려한 수사의 사민당 이론가가 아니었고 현장에 뛰어 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독일말로 마허Macher·실행자·실행지도자 가 슈미트였다. 10여 년 전 독일인 변호사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그의 아버지는 사회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실천가 슈미트가 좋아 서 사민당에 표를 던진다는 거였다. 가신 임, 박재일의 뜻을 잇는 길은 더 많은 박재일이 젊은 세대에서 나 오는 것이다. _ 임재경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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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 동지, 가시는 길 평온하옵소서 박재일 형제님, 왜 그렇게 서둘러 가시옵니까? 가시는 동지의 등 뒤에 비치는 주마등에는 이 땅에 누구도 고개를 숙이 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구려! 국가권력마저 자본시장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농업을 지키자고 아무리 함성을 질러도 국가권력은 외면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농업은 농민과 소비자가 생명논리로 결속되지 않으면 살릴 길이 없다는 판단으로 시 작한 한살림운동이 동지의 뜻대로 활활 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불똥이 사방으로 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농도 그 불똥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과묵한 성품이지만 은은하게 비쳐 나오는 다정다감한 언행에 모든 동 지가 당신을 좋아했다는 것을 아시나요. 후배들이 틀린 생각을 고집할 때도 직설이 아니라 돌아가는 여유를 갖 고 비유하고 반문하면서 후배들이 마음 상하지 않게 생각을 들려 주는 박 동지의 리더십은 우리 조직에 귀감이 되는 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박 동지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따라 우리 아이들이 나의 생일을 잘 챙기는데 그 이유가 생일을 여러 번 하지 못한다는 판단 으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아서 지난 생일날 아이들 앞에서 고백했다오. 유산을 넘겨 줄 것이 없어 죄스럽다고 말이요. 그러나 나에게도 쓸 만한 재산 하나는 있다고 큰소리를 치니 아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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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모아졌죠. 그때 나의 재산을 공개했답니다. 30대에 굳힌 뜻 그것이 소신이든 철학이든 이념이든 잘 된 것이든 못 된 것이든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갖고 가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재산 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줄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이오! 아이들이 동의하는 말들이 이어지고 아버지의 재산을 진시 알지 못함 이 죄스럽다는 눈치였다오. 세상에 믿을 데가 없고, 믿을 사람 없고, 저 사람이야 했던 지도자도 어 느 날 곡학아세하면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재산이 얼마나 소중함을 후세는 말해줄 것이오. 박 동지의 가시는 길이 다시는 아버지를 못 보기 때문에 자녀들은 슬퍼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노라 다짐할 것이오. 박 동지, 이제 남은 일일랑 남은 사람들이 몫이요. 부디 평온한 마음으 로 가시옵소서. _배용진 전 안동교구연합회장 / 가톨릭농민회 《농민의 소리》 201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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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나라에서 온 추모 글

고 박재일 선생은 생전에 이 땅의 농민과 자연을 사랑하셨던 만큼 해외에서 같은 뜻을 가 지고 활동하는 분들과 굳건히 함께 연대하며 생명살림을 실현하는 데 애썼습니다. 그동안 함께 활동했던 해외 인사들이 전해 온 애도의 글을 모았습니다.

[ 일본에서,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

경애하는 박재일 선생님 선생님의 급작스런 비보를 접하고 매우 놀랐습니다. 인생의 소중한 스 승을 잃었다는 슬픔으로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건강하실 때의 모습이 떠올라 부고를 접한 지금도 믿기질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건강히 오래도록 살아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지금은 단 지 먼 곳에서나마 그 모습을 떠올리며 명복을 빌 수밖에 없음이 가슴 아픕니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과의 만남은 한일 교류의 시작이었고, 어느덧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님과 우리들의 공통된 염원은 한일 양 국의 제1차 산업이 잘 발전하고, 생명을 기르는 산업으로서 정당한 평 가를 받으며, 그 담당자인 농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파고는, 세계 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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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일본 사이타마현 근로자생협 교류.

에서 농민을 피폐시키고, 소비자들로부터는 먹을거리의 안전이라는 가 장 기본적인 신뢰를 빼앗아 갔습니다. 이런 파고에 대항하여, 우리들은 일어섰고 싸워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대감에 충만한 교류를 쌓아 왔 던 것입니다. 이런 연대와 교류는 다양한 형태로 지속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 습니다. 박재일 선생님은 항상 그 연대의 중심에 계셔 주셨고, 우리들 을 따뜻한 눈길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도 또한 선생님의 뜻을 배워 발족한 운동이었습니다. 건강에 대한 약간의 불안함이 있으면서도, 선생님께서는 민중기금의 이사 취임을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해 주셨고, 한살림이 정식으로 참여한다고 표명해 주신 것은 우리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은 아시아에서의 광범위한 민중교역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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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기반 위에서 아시아에서의 연대를 보다 넓고 깊게 구축하고자 결의한 바로 이때에 우리는 박재일 선생님 을 잃었습니다. 우리들은 비통할 따름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들의 상실감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울고 있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선생님으로부터 큰 꾸지람을 들을 것입니다.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은 설립총회를 마치고 이 제 막 첫 융자사업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이제 겨우 작은 발걸음을 한 발 내디뎠습니다. 우리들은 이 작은 발걸음을 확실한 발전으로 이어가 기 위해, 박재일 선생님의 뜻과 열정을 받아 한살림 여러분들과 함께 힘찬 걸음걸이를 나아갈 것입니다. 박재일 선생님. 부디 앞으로도 남은 우리들을 먼 곳에서나마 지켜봐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_‘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후지타 가즈요시 대표, 임원과 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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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고베대학 ]

한살림 이사장님 귀하 어제 두레생협 김기섭 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박재일 선생님의 서거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 28일, 김기섭 님의 안내로 선생님 자택에 병문안 갔을 때, 빨리 쾌차하셔서 고베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돌연한 부고를 접하게 되어 놀라움과 함께 너 무나 빠른 영원한 이별에 서글픈 마음 이루 금할 수 없습니다. 아직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셔야 할 소중한 분이었는데, 또 본인도 아 직 의욕이 넘쳐 계셨는데, 정말 안타깝고 서글플 따름입니다. 충심으로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박재일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1983년에 있었습니다. 김영주 선생 님,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이건우 선생님과 함께 가톨릭농민회 방문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 직후 일본을 방문해 직접 성금을 전달하는 박재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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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 일원으로 효고현의 유기농업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그 때, 이 치지마의 유기농업을 시찰하셨습니다. 저녁 친교 시간에 한국분들이 힘차게 농민가를 부르시는 모습에 놀랐고, 또 말술을 드시는 것에 놀랐 으며,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모두가 춤추는 모습에 또 놀랐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그 이후 2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고베와 서 울에서 교류를 다졌던 것은 저에게는 정말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특 히, 고베대지진 때 곧바로 위로 방문을 해 주셨고, 한살림 여러분들의 격려 말씀과 함께 많은 지원금을 전달해 주신 점은, 지금도 잊을 수 없 습니다. 다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엄격한 박재일 선생님은 저에게는 항상 형 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조만간 고베에서 재회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 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박재일 선생님께서 쌓아온 공적의 한 부분이 라도 잊지 않고 노력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우호친선을 위해 앞으로 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박재일 선생님, 오랫동안 지도 편달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 음속 깊이 명복을 빕니다. 길고도 힘든 투병이 끝났습니다. 부디 천국 에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_ 미천한 아우 야스다 시게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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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그린코프 ]

박재일 선생님. 우리들과 만나 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운동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무엇인가를 만들 어낸다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그것은 말 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이 말일 뿐이라면, 단지 상황을 그럴듯하게 꾸밀 뿐 곧바로 연기처럼 사라져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말은, 현 실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상황을 딛고 상황을 타개하고 현실을 새로 이 갱신해갑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렇게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운동이 또 전개되리라 생 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어떤 사람이 한 것이거나 그 어떤 사람의 어떤 행위가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혼자서 생각해낸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 람이 살아온 모든 과정, 즉 그 사람과 그 사람이 함께 살아 온 동료들이 함께 해온 모든 것을, 그 사람이 체현해서 말하는 것임을 우리는 항상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쌓인 것들을 누군가 말로 엮어내 주시는 것 입니다. 박재일 선생님. 당신은 우리들에게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 도 당신은 한국의, 당신과 여러분들이 함께 이루어온 ‘생명운동’을 담당 하는 모든 분들, 또 이 운동에 찬동하는 모든 분들에게 있어 분명 그런 분이었습니다. 때문에 한살림과 두레의 여러분들은 당신과 헤어져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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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일본 효고현 유기농업연구회 방문.

하는 오늘, 슬픔과 안타까운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그 무엇보다도 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우리들 또한 당신과 이별해야만 하는 슬 픔과 안타까움과 감사도 같은 정도로 큽니다. 생명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 생명을 자연성으로서 존중해야 한 다는 것, 그리고 자연으로서의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를 바르게 탐색하는 것, 거기에 미래가 있다는 것,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당신들과의 만남을 통해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박재일 선생님. 당신은 생명에 다가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우리들에 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아온 당신의 가족 여러분, 당 신과 함께 살아온 한국의 여러분들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들에게도 당 신은 그러했습니다. 당신의 온화한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온화함 뒤에 지금껏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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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해온 역경이 있음을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잠깐씩 쉬어가는 듯한, 조용하게 한마디 한마디 말씀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온 마음과 온 몸을 바쳐 일하면서, 격무로 시달렸을 당신의 생애를 마음에 새깁니다. 당신이 살아 오신 궤적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갈 것입니 다. 우리들도 그분들과 마찬가지로 당신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합 니다. 생명의 운동은 인류가 마지막까지 싸워가는 것일 듯합니다. 당신과 만날 수 있었던 우리들은 절대 이점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 음 깊이 맹세합니다. 박재일 선생님, 우리와 만나 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음 편히 쉬십시오. _ 일본 그린코프의 동료들과 함께, 그린코프공동체 전무이사 히가시하라 고이치로 배상

[ 필리핀에서, 농촌발전을 위한 협동조합Cooperative for Rural Development; CORDEV]

박재일 회장님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에 가슴 깊이 아픔을 느낍니다. 저희의 진심 어린 애도를 유가족 분들께 전달해 주십시오. 회장님이 남기신 업적이, 그분의 길을 따라 평화를 사랑하는 민중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우리와 모든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리라 믿 습니다. 다시 한 번 회장님 영전에 애도를 표합니다. _‘농촌 발전을 위한 협동조합’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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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에서, 전 농업통상 대사 ]

삼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기도합니다. 뜻밖에 회장님의 부음에 놀랍고 비통한 마음입니다. 먼 길을 떠나 아르헨띠나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음을 접하니 회장님 께 마지막 인사도 올리지 못해 더욱 안타깝고 슬픈 마음입니다. 생전에 회장님이 시작하시고 일구어 놓으신 환경·유기·생태 생명농업 발전의 유지를 받들고 이어나갈 것을 삼가 다짐하며 떠나시는 회장님 께 존경과 감사와 사랑의 뜻을 전합니다. 회장님, 하나님의 집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_멀리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최양부 삼가 올립니다

[ 중국에서, IFOAM CHINA ]

박재일 선생의 작고 소식을 듣고 저는 깊은 슬픔과 충격을 감출 수 없 습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을, 좋은 동행자를 그리고 오랜 친구를 잃 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2년 전 이탈리 아에서 그분을 만났던 때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앞으로도 그분과 함께 했던, 잊지 못할 추억들을 늘 소중히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유가족과 또 한국에 있는 제 친구(동지)들이 선생님을 잃은 깊은 슬픔 에 빠져 있을 텐데, 비통한 슬픔에서 감정을 잘 추스르셔서 빨리 회복 되시기를 바랍니다. _Zhou Zejiang IFOAM Chin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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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에서, GreenNet ]

깊은 애도의 뜻을 통절한 슬픔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_Vitoon Panyakul GreenNet 대표

[ IFOAM 세계본부 ]

박재일 선생의 작고 소식에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2008년도 이 탈리아에서 개최된 IFOAM 세계유기농대회에서 만났던 박재일 선생 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평화가 깃든 밝은 세상에서 그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게 되기를 진심 으로 기원합니다. _Vanaya Ramaprasad IFOAM 세계 이사, Green Foundation 대표

[ 동티모르에서, 샘물이 솟아 큰 강을 이루는 연구소Kdalak Sulimutuk Institute ]

동지 여러분, 박재일 회장님을 떠나 보내며,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진심을 다하여. _‘샘물이 솟아 큰 강을 이루는 연구소’와 동티모르 공동체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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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에서, 농촌발전을 위한 협동조합Cooperative for Rural Development; CORDEV]

유족들과 아시아민중기금 회원단체, 그리고 회장님과 함께 일하셨던 모든 분들께 애도를 전합니다. 회장님의 영면 소식을 듣고 충격과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5년 전,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방문하신 회장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 회장님께서는 팔레스타인의 운동 방향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 사 람들과 연대하는 것에 진심어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이후 우리의 민중교류는 더욱 확고해졌으며, 그 과정에서 박 회장님은 중요한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회장님은 떠나가시며, 모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크나 큰 빈자 리를 남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와 가난한 이들에게 큰 버팀목이 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회장님의 선한 업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박재일’ 그분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_농업개발위원회 대표 Khaled Hidmi 외 일동

[ 팔레스타인에서, 농업 부흥 위원회Palestinian Agricultural Relief Committe; PARC ]

동지 여러분, 박재일 회장님의 영면 소식은 우리를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회장님은 우리에게 지도자이셨고 동시에 친구이셨으며 정의를 위해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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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강인한 투사이셨습니다. 회장님은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셨습니다. 회장님의 위대한 업적이 유족과 동지들, 그분을 아는 모든 이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애도를 전합니다. _팔레스타인 농업부흥위원회 일동

[ 필리핀에서, 대안무역재단 Alter Trade Foundation. INC; ATFI ]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의 이사였던 한살림의 박재일 회장님께 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회장님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시아 민중기금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회장님께서 민중 연대 의 숭고한 원칙과 목표에 깊은 뜻을 두셨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족분들과 친지분들께 우리의 깊은 조의와 애도를 표합니다. _진심을 다하여, 대안무역재단 이사 Edwin Lopez

[ 파키스탄에서, 알카일 비즈니스 그룹 Al-Khair Welfare Society / Business Group; AKBG]

박재일 회장님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에 깊은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 다. 유가족 분들과 친지들께 저희들의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합니다. 회장님께서 평화 속에 잠드시기를 기원합니다. _알카일 비즈니스 그룹 대표 Mohammad Mazahir 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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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박재일

“나는 한살림이 참 좋아. 참 재미있었어!”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솔뫼마을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유족인 다섯 딸이 조문객들에게 드 린 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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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버지가 투병을 하시면서 옆에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는데 오늘의 이 상황은 여전히 가슴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 속에 있기 때문에 저희 다섯은 어머니와 함께 꿋꿋이 이 날을 보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저희가 가졌던 기억들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나 밖에서나 늘 같은 모습이셨고요. 그래서 저희가 고민을 하다가 2년 동안 투병하시고, 상상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우리 가족 모두가 경험했던 서로 사랑하고 치유하는 그 기억들을 여러분께 나눠 주고 싶어서 이렇 게 나섰습니다. 저희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 중에 행복하셨는지를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_첫째 딸 박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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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의 이야기

“딸 다섯 가진 아버지는 한살림을 하게 된다”

저는 막내딸 박주희고요. 제가 기억하는 저희 아버지의 투병 생활과 그 때 있었던 얘기를 말씀드릴게요. 아버지가 구강 수술을 하시고 다음날 아침에 되게 극심한 통증이 있으셨는데도 불구하고요. 저를 보시더니 “아빠가 하나도 안 아파” 하시면서 팔다리를 막 움직이시면서 “걱정하 지 마”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아, 우리 아버지는 정말 강 하신 분이구나’ 느꼈고요. 또 아버지가 평소에 저희에게도 말씀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셨어요. 그런데 편찮으시면서 저희에게 그러시더라고요. 이제부터는 감정 표현 에 솔직해지려고 하신다면서요. “사랑한다. 아빠가 미안해”하시면서 얼굴을 쓰다듬어 주시는 그 따뜻한 손길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 습니다. 저희는 회복하실 거라고 생각했고 아빠도 그러셨어요. 투병 중 에 아빠가 평소에 가시기 원하시던 솔뫼에 저희 보고 3층 집을 짓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딸들에게 각자 맡을 역할을 정해 주고 가셨어요. 셋째 언니인 소현이는 아이들의 교육에 똑 부러지니까 아이들을 가 르치고, 넷째 언니인 현선이는 아이들과 잘 노니까 신나게 놀아주라 하 고, 막내인 저에게 되게 막중한 임무를 주셨어요. 국제적인 관계나 정 리를 잘하니까 사무를 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어깨가 무거워 요. 그런데 큰언니인 순원 언니랑 둘째 언니인 정아 언니에게는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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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도 안 주고 가셨어요.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들을 잘 보 살피라는 의미에서 그러신 것 같고요.

그리고 아버지의 후배가 딸을 데리고 저희 아버지에게 병문안을 왔 을 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한국에서 딸 하나를 키우면 아버지가 진 보가 되고, 딸 둘을 키우면 좌파가 된다”고 말씀하시고요. 그 다음에 “딸 셋을 키우면 혁명가가 된대요” 이러셨더니 저희 아버지가 또 한유 머를 하셔서 “딸 넷 가진 아버지는 생명운동가가 되고, 딸 다섯 가진 아버지는 한살림을 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러 면 나 때문에 한살림이 만들어졌네” 이랬더니 아빠가 “그럼!” 하시던 그 모습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두 손으로 산소마스크를 빼시면서 컵처 럼 받치시고 “물, 물!” 이러셨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아버지 걱정을 해 서 “드릴 수 없다”고 “안 된다”고 했더니 “왜, 왜?” 이러시면서 너무 예쁜 눈웃음으로 저를 쳐다보시면서 싫은 내색 하나도 안 하시고 그러 던 아빠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요. 아버지는 당신 때문에 식구들이 고생한다면서 마음 아파하시고…… 근데 아빠, 저희는 너무 너무 행복 했고요. 아빠랑 보낸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정말 아버지가 주신 큰 사랑 잊지 않고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아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막내딸 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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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딸의 이야기

“내가 네 살짜리 손주들에게 예쁨을 받아야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넷째 박현선입니다. 아버지랑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뿐이지만 저는 투병 생활 중에 죄송스 러웠던 기억 두 가지가 생각이 나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구강암 수술하시고 방사선 치료도 잘 받으시고 집에서 열심히 회복 을 하시던 중에 척추에 또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저희가 정말로 많 이 좌절하고 겁도 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 어리석은 생각에 아버지 께 의논드리지 않고 혼자 자료를 찾아서 온열치료가 암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자료를 보고 덜컥 기기를 사서 친정으로 배달을 시켰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걸 보시고는 굉장히 화를 내시더라고요. 그런 데 그 순간에는 아버지 화를 좀 가라앉혀 드리려고, 아버지께서 화내시 면 그게 너무 몸에 안 좋으니까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고 엄마도 같이 쓰시면 된다고 그렇게 아빠를 설득하고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돌 아왔는데요. 그 다음날 아버지가 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셨어요. 전날 저녁에 통증이 너무 심하셔서 그걸 한 번 해봤다고, 아주 좋다고. 니 마 음을 내가 헤아리지 않고 화를 내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렇게 자식한테 미안하다고 전화를 주시더라고요. 사실은 아버지께 먼저 의논드리지 않고 그렇게 일을 저지른 제가 먼저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 데 저희 아버지는 늘 그러셨던 것 같아요. 당신 몸이 어떻건, 당신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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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떻건 상대방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신 그런 분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척추암이 전이되고 2차 방사선 치료를 받 으러 다니실 때 워낙 통증이 심하셔서 제가 운전을 하고 동생이 어머니 와 아버지를 같이 부축하고 또 언니가 집에서 동갑내기 네 살짜리 아이 둘을 봐 주고 그렇게 서로 역할 분담을 해서 다녔었거든요. 언니는 친 정집에서 아이 둘을 보고 있으니까, 아빠가 치료를 받고 돌아오시는 길 에, 신천 한살림 매장이 있어요. 거기를 지나가게 되는데 꼭 그러시는 거예요. “우리 네 살짜리 손자들 주게 한살림에 가서 맛있는 것 사 가 자. 애들 간식거리 사 가자. 뭘 좋아하느냐?” 그래서 저희가 좋아하는 걸 얘기했더니 “아, 그러면 땅콩카라멜하고 양갱하고 그런 걸 사다 주 자. 내가 네 살짜리 손주들에게 예쁨을 받아야 된다” 그러시면서 매일 매일 그렇게 그걸 요구하셨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아버지가 너무 너무 통증이 너무 심하셨으니까 그런 것조차도 아버지에게는 무리가 되어서, 열 번 중에 딱 한 번만 그걸 허 용해 드렸어요. 그게 너무 죄송해요. 아버지를 추억하는 지금, 너무 아빠가 많이 보고 싶고요. 안녕히 가세요. 아빠.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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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딸의 이야기

“엄마들이 원하는 음식 말고 아이들이 원하는 과자를 사 주어라”

안녕하세요. 셋째고요. 박소현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외국에 나가서 십 년을 살다가 들어왔어요. 결혼을 하 고 자식을 낳아 보면 어른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전에는 너무 철없게 아 빠에게 항상 그랬는데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철이 들어갈 때 너무 떨어 져 있어서 아빠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들이 항상 마음에 걸리고 그랬어요. 오자마자 아빠께서 위암 수술을 하시고 또 구강암 수술하시고 이래서 솔 직히 저는 아빠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항상 마음에 걸리고 그랬거든요.

아산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그때는 정말 인간의 고통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아빠가 온 몸으로 저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그런 시간이었 어요. 그 와중에, 제가 큰아들이 5학년인데 어쨌든 아이도 챙겨야 해서 캠프를 보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막상 보내려고 하다 보니까 일 년 사 이에 부쩍 커서 여름옷이 바지가 맞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지나가 는 말로 “승재가 내일모레 캠프를 가는데 바지가 하나도 없어서 바지 를 좀 사야겠어” 이렇게 동생하고 언니하고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단 한시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통증에 시 달리고 있던 아빠가 그 와중에 갑자기 막내한테 지갑을 가져오라고,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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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중에 빨리 지갑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그 떨리는 손으 로, 기운 없는 손으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시더니 반드시 이 돈은 다른 데 쓰지 말고 승재 바지 사는 데 쓰라고, 원하는 옷 다 사주고, 네 살짜 리 손자들 데려가서 엄마들이 원하는 음식 말고 그 아이들이 원하는 과 자를 사 주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날 곧바로 가서 저희 아이 의 옷과 과자를 사 가지고 와서 아빠께 너무 감사하다고 그랬더니 아빠 께서 그 힘없는 모습에서 미소를 보여주시면서 ‘정말 잘했다’는 듯이 너 무너무 기뻐하셨거든요. 십 년 간 외국에 나가면서 아빠와 나누지 못했 던 그런 것들을 정말 너무 감사히 받았고요.

또 저희 아빠께서 항상 의식이 돌아오시면 이렇게 크게 두 팔을 벌리 고 사람을 안아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시고요. 그리고 병문안 오 신 분들께 항상 두 손 모아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하셨거든요. 그 모습 이 너무 그립습니다. 아빠 딸로 살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빠.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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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의 이야기

“한살림은 식량 자급과 지역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절대로 놓치면 안 돼, 그 화두를 가지고 신나게 해”

저는 둘째 딸 정아예요. 저희 아버지가 구강암 수술을 받으러 입원하시 면서 《밥상 혁명》이라는 책을 가져가셨어요. 그래서 수술 전날까지 그 걸 다 읽으시고요. 수술실에 들어가시기 전에 저한테 “이거 꼭 읽어 봐 라” 그러셨거든요. 그리고 수술을 열 네 시간을 받고 그 다음 날 회복 하시고 의식을 찾으시니까 “그거 읽어 봤냐?”고 하셨어요. 말씀을 못 하셔서 필담으로 “읽어 봤냐? 니 생각은 어떠냐?” 그러시면서 아버지 가 한살림에서 하고 싶었던 그런 즐거운 활동들이 여기에도 담겨져 있 다고, 한살림은 식량 자급과 지역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고, 그 화두를 가지고 신나게 하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셨고요.

구강암 수술 이후에 회복이 되시면서 아버지한테 큰 꿈이 하나 있었 는데 한살림 쉼터를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한살림운동 한다고 늘 고생 하면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서 참 마음 아파하셨거든요. 그래서 힘들고 지치고 그만하고 싶을 때 언제나 쉽게 찾아와서 그냥 편히 쉬고 다시 기운 내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쉼터를 만들고 싶어 하셨고 그 쉼 터 옆에 조그만 토담 짓고 텃밭 가꾸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그렇게 살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퇴원하시면 밥 짓는 것부터 배우고 코펠도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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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그 계획을 세우시면서 어려움들을 잘 이겨 나가셨고요.

그리고 운명하시기 전 몇 주간은 정말 어린아이, 천사 같으셨거든요. 그래서 가끔 의식이 돌아오면 솔직한 말씀들을 참 많이 하셨는데 그때 자주 하셨던 말씀 중에 한 가지가 “나는 한살림이 참 좋아. 참 재미있 었어!” 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생각하는 한살림은 아빠 혼자 만들어 가신 게 아니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마음과 노력으로 같이 만들어 가셨기 때문에 여러분들 소식을 늘 궁금해 하셨고요. 늘 사랑하셨고 너무나 행복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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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딸의 이야기

“나에게 딸이 다섯이 있는데 곱고 예쁘게 잘 커 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7월 13일에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하시고 며칠 지난 후 열흘 가까이 혼수 상태셨어요. 그때 저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어서 돌아와서 아버지 음성을 듣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버지 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는데 깨어나시고 나서 저희에게 주셨던 이야 기가 있습니다. 필답으로 주셨는데요.

첫째 날. 저희는 아버지가 혼수상태라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다른 일 을 하고 계셨어요. “무엇을 하셨나?” 그랬더니 “첫째 날, 동그랗고 밝 은 빛의 아기 영들과 아기 천사들과 춤추고 놀았어. 너무 좋았어.” 이 렇게 써주셨어요. 그리고 “하루 지나고 다음날, 둘째 날” 이렇게 쓰시 고 아버지께서 그 동그랗고 밝게 빛나는 영들과 함께, 그들을 아기 천 사라고 하셨어요. 아기 천사하고 백두산, 한라산, 태백산, 지리산, 바 다들을 다니시고 민민회의를 하셨대요. 그래서 그 말씀을 들었고요. 그 다음에 깨어나셔서 말씀하셨어요. 하느님을 뵈었다고. 그런데 하느님 을 뵈니까 너무 따뜻하고 좋았는데, 그 얼굴이 주희를 가르치면서 “너 랑 닮았어!” 이러셨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셔서 뭐하셨어요?” 그랬더니 “나에게 딸이 다섯이 있는데 너무 곱고 예쁘게 잘 커 줘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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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감사합니다.” 하고 자랑하셨대요. 그렇게 하시고 당신 모습도 보고 오시고 그래서 참 좋다고 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의식을 잃으셨는데 투병 내내 가끔 깨시면 너무나 애절한 눈빛으로 이렇게 몸을 가리키고 하늘을 가리키고 이러면서 “나, 이 몸에서 나가고 싶어!” 이러셨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게 고통 중 에 있는 생각이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아버지께서 오셨던 곳으로 돌아 가시고 결정하시니까, 그게 진심이었는데 그걸 돕지 못했구나 이런 후 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펼쳐 주신 저희에 대한 하느님께 고 하는 그 지극한 사랑이 앞으로 저희 살아가는 평생에 저희의 그늘막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여러분이 계셔서 저희가 더 든든하게 잘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짧게 위로차 말씀드리려 고 했는데 저희 설움에 복받쳐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아버지를 정말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근원으 로써 빛을 따라서 천상에 들었다고 오늘까지만 슬퍼하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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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전한 박재일 선생 추모 기사

2010년 8월 20일 <한겨레신문>

2010년 8월 21일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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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중앙일보>

2010년 8월 21일 <한국일보>

한살림답게

2010년 8월 20일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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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국민일보>

2010년 8월 20일 <경향신문> 2010년 8월 21일 <조선일보>

2010년 8월 20일 <머니투데이>

2010년 8월 21일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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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재경일보>



4부

산알아비여 안녕

박재일 선생은 2010년 8월 19일 05시 20분 향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그이의 유지대로 일체의 부의금과 화환을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1일 서울 천주교 방배동성당에서 열린 추도식과 충남 괴산군 청천면 장례식장에 함께한 사람들, 해외에서 보내 온 추모의 글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추모의 글

산알아비여 안녕 누가 당신을 일러 ‘산알아비’라 부르더이다 산알은 생명이니 햇곡식이요 그 아비이니 세상의 밥 걱정하는 양반의 뜻. 듣기 좋더이다 이제 고생 많던 이승을 떠나 그 시커먼 제기동 가게도 떠나 영덕 큰 바다 같은 저승에서 산알이 사리가 되시는 때 사리아비이니 왈 한울님. 생각만 해도 좋소이다 이젠 우주 걱정 하소서 부디 평안하소서 안녕. _ 김지하 삼가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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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자인농生者仁農, 한살림의 혼으로 피다

오늘 산이 무너졌다 세상의 동종銅鐘이 모두 소리 내어 울고 있다 밥상살림의 한 길을 걸어 마침내 생명살림의 큰 산을 이룬 사람 아직 가 보지 않았던 길 누군가 앞장서 열어가야 할 그 길을 걸어 그가 걸어온 길 이제 큰길이 되었다 한살림의 길 함께 살고 모두를 살리는 큰 살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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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살림이 땅살림 물살림이요, 생명살림이니 밥상을 살림이 마침내 세상을 살림이니 밥 속에 모셔진 하늘을 보아 한 그릇의 밥상을 제대로 마련하고 모시는 일이 자기 속의 하늘 밝게 드러내는 것이니 그렇게 새 하늘 새 땅을 여는 것이니 자신의 생명마저 상품으로 사고팔며 독이 든 먹거리 다툼으로 눈먼 세상 속에서 생명의 밥상을 함께 마련하고 나눔으로 농촌과 도시가 생산자와 소비자가 손길 맞잡고 서로의 생명과 살림을 내맡기며 한 사발의 밥을 함께 모심으로써 품어 안는 새로운 혁명의 길을 개벽의 새 세상을 온 몸으로 열어 온 사람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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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 일찍이 어진 농부의 길을 걸어라 하시던 당부를 가슴에 새겨 평생 한 평의 논밭을 갖지 못했지만 밥상살림의 오롯한 한길로 자신을 갈고 마침내 온 세상을 갈아 생명의 밥상을 마련했던 이 땅의 가장 큰 농부 우주의 참 농사꾼 인농 박재일 선생 이 땅에서 생명평화를 꿈꾸던 이들의 맏형 같았던 사람 오라버니 같았던 사람 생명살림의 큰 살림꾼이었던 사람 온 몸으로 세상의 고통을 함께 앓던 그 마지막 자리에서까지 한살림의 앞길을 기도했던 사람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당부했던 사람 오늘 그가 갔다 그렇게 큰 산이 무너졌다 그 산이 무너진 자리 그 산에서 빚어 만든 동종들이 함께 큰 울음 하는 이 자리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산들을 본다 연이어진 그 봉우리마다 품고 있는 인농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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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심과 살림의 대동세상을 인농, 그는 갔다 이 땅에서 해야 할 그의 몫을 다 감당했으므로 훌훌 몸을 벗어 지워지지 않는 생명 모심의 이름이 꺼지지 않는 생명살림의 불꽃이 되었다 한생을 오롯이 세상을 살리는 밥상이던 삶을 접고 마침내 오늘 한살림의 영원한 혼으로 피었다.

_ 인농仁農 선생의 영전에 여류如流 이병철 모심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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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 회장님! 세상에서 가장 큰 농사를 짓던 당신. 작은 욕심 버리면 모두 한 가족 되어 살 수 있다며 한살림을 꿈꾸던 영원한 청년. 이제 정녕 떠나가시렵니까. 뜨겁던 여름의 끝자락에 날아든 비통한 소식에 우리는 모두가 황망합니다. 생명의 길 살림의 길, 갈 길이 아직 먼데 기어이 우리를 두고 가시렵니까. 시장의 논리에 인정이 휩쓸리고 사람이 왜소해지던 그 때 우리 농업과 농촌의 운명이 벼랑 끝에서 위태롭던 시절, 당신은 모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함께 살자, 함께 이마를 맞대고 손 맞잡으면 모두가 가족이 되고 살 길 이 있다.” 한살림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고 그 이름을 단 작은 쌀가게에 원대한 희망의 씨앗을 심은 당신 삶 전체가 한살림이었던 당신, 당신이 있어 우리들은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마음과 육신이 이토록 고단한 줄도 모르고 저희들은 행복한 꿈 꿀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밝고 환한 곳으로 당신이 꿈꾸던 한살림 온전한 그곳으로. 아니 당신의 지친 몸은 보낼지언정 당신의 그 순진무구한 꿈, 온 생명이 더불어 사는 평화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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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은 영원히 간직하고 이어가겠습니다. 박재일 회장님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_ 장례위원장 김민경 이경국 이길재 모심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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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꼭 함께 계셔야 될 분, 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선 늘 저희에게 스승이며 어버이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저희는 배움을 미쳐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과 자애로운 품 을 잃어버린 비통함으로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무슨 말이든지 끝까지 마음껏 하도록 기다리며 지긋 이 경청하시던 모습, “이게 말이지, 한살림은 재미나게 하는 거란 말이지” 하며 격려해 주시 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도시에서 농촌에서 생명을 살리는 밥을 이웃과 함께 나누며 더불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살림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오신 당신, 높은 이념과 말씀만이 아닌 몸으로 실천해오신 당신, 마지막 순간까지 굶주리는 북녘 동포를 걱정하신 당신을 기억합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보여 주신 경청의 모습과 자애로움을 기억하며 못 다 이루신 살림세상의 꿈을 이룰 것을 약속합니다. 당신을 보내고 슬픔 으로 가득 찬 가족들을 당신이 계신 듯이 외롭지 않게 따뜻하게 위로하 며 함께 슬픔을 이겨내겠습니다. 멀리 일본에서 와주신 다나카 요코 회장님을 비롯한 그린코프 연합 손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하늘나라 가시는 길이 평안하기를 기원하며 이승의 손을 놓아 드립니다. _ 사단법인 한살림 회장 김민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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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그이의 평생 화두 시대는 생명의 때다. 평화와 함께 생명이 이 시절의 총 화두다. 그 생명을 참으로 구체적으로 걱정하고 애써 마련하는 이가 귀하지 않 을 도리가 없는 때다. 박재일, 이 분이 바로 그 귀한 분이다. 이 분이 돌아가셨다. 어찌 서운하고 서럽지 않으랴! 평생을 생명 한 글자에 그야말로 생명을 바치신 분. 남들 몰두하는 일 체 가치 너머 삶의 근본에서 그 근본을 꿰뚫 때 더욱이 그것을 참으로 구체적으로 생활적으로, 그렇다! 생명적으로 관철하셨다. ‘생명문제의 생명적 관철!’ 모심! ‘밥’이다. ‘밥’이 박재일 선생의 최고 철학이었다. 귀하신 분 가시는 길에 어찌 상서로운 꽃다발이 없을 수 있으랴! 나사렛 예수는 밥을 ‘사크라리온’, ‘현실적 신성성’ 혹은 ‘거룩한 지역’이 라 불렀으니 성찬聖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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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선사雲門禪師는 ‘진진삼매塵塵三昧’라, 다름 아닌 ‘화엄법신華嚴法身’이라 하였으니 한살림! 해월 선생은 ‘밥 한 그릇이 만사지萬事知’라 드높이 칭송하였으니 모심! 박재일 선생은 바로 이 ‘현실적 신성성’, 곧 현대문명사 최고의 숙제인 ‘마음 속의 몸’을 실사적으로 탐구하신 수도자다. 다름 아닌 ‘산알’이다. 이제 우리는 깊이 고개 숙여 이 분의 뒤를 따르는 일, 참으로 거룩한 ‘사리’를 찾아 현실의 숲과 몸을 헤쳐나가야 할 때다. 안심하고 편히 가소서 총총.

_ 못난 벗 김지하 삼가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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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농 박재일 형 영전에 어제도 그제도 저는 박재일 형을 생각하면서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 찬을 먹었습니다. 한살림에서 배달해 주는 채소를 맛있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렇게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먹게 하느 라고 정작 박 형은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농약, 살충제, 제초제 등 죽임의 독약으로 범벅이 된 먹을거리들을 우 리 밥상에서 몰아내고 건강한 먹을거리로 바꿔 내려는 운동에 나선 박 형과 동지들의 노력으로 이제 우리 어린 자식들에게 유기농 무상급식 까지 하게 될 이즈음에 박 형이 우리 곁을 떠난다는 현실이 우리들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1986년 서울 동대문 밖 제기동에 문을 연 한살림농산이라는 작은 가게 가 25년 만에 이 나라를 대표하는 생활협동조합으로 발전했다는 사실 이 박 형과 동지들의 발자취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농촌과 도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엮는 직거래를 목표로 시작된 생활협 동조합운동이 오늘의 한살림운동으로 발전하기까지 긴 세월의 준비가 있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님, 장일순 선생님, 김영주 선배님, 김지하 시 인, 그리고 박재일 회장을 비롯한 원주 사람들이 민주화운동과 분단극 복운동 너머 저 멀리까지 내다보는 생명운동을 모색하고 실천한 결과 가 한살림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윤 추구, 경쟁과 배제, 생태파괴 그리고 죽임으로 상징되는 현대 인류문명의 끝을, 다시 도시와 농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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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생산과 소비의 호혜, 밥상의 살림 그리하여 생명이 넘치는 새로 운 문명으로 전환하려던 것이 한살림운동의 목적이었습니다. 박 형은 4월 혁명과 6·3 대일굴욕외교반대운동에서도 동년배들 속에 서 언제나 맏형이었습니다. 큰 바위처럼 말없이 언제나 필요한 자리에 서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가톨릭농민회 회장, 원주소비자협동조합 회 회장 등 박 형이 이끈 운동은 거센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위기에 처 한 우리 농촌과 농민들의 활로를 열고 아울러 오염으로 찌든 도시민들 의 밥상을 씻어 내는 일이었습니다. 칠순이 넘도록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묶어 우리 생활을 전면적으로 바 꿔내는 운동을 벌인 활동가는 박 형 말고는 찾아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박 형을 비롯한 한살림 활동들의 실천이 20여 년 전인 1989년 선포했 던 ‘한살림선언’을 새롭게 주목하도록 만들고 식민지, 분단, 전쟁, 양극 화, 생태파괴, 오염, 죽임으로 점철된 이 한반도에서 마땅히 울려 나와 야 할 생명선언과 그 실천은 대안문명을 향한 진지한 모색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박 형이 시작하시고 남겨 놓으신 숙제들은 남은 동료들과 후배들이 이 어서 짐 지고 나아갈 것입니다. 현숙한 부인 이옥련 여사와 다섯 따님들과 네 사위들은 박 형의 유지대 로 꿋꿋이 살아갈 것입니다. 이제 힘든 짐 내려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영면하소서. _ 이부영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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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리 농민의 아버지였습니다 회장님! 당신은 우리 농민의 아버지였습니다. 모든 허물과 잘못을 덮어 주는 아 버지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농민의 어머니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농민의 친구였습니다. 늘 가까이 다가와 막걸리 잔을 나누 며 우리의 고민과 아픔을 들어 주고 함께하셨습니다. 당신은 우리 농민의 스승이었습니다. 어떤 삶이 진정한 농민의 삶인지 를 가르쳐 주셨구요. 혼자 살기보다 함께 살기를, 늘 함께 나누고 용서 와 화합하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생명을 돌보는 대지의 어머니, 진 정한 농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회장님과 함께한 24년은 우리 한살림 농부에게 큰 기쁨과 위안, 행복 이었습니다. 지나온 세월만큼 남아 있는 우리들은 당신이 남기신 유지를 받들어 농 업살림세상, 생명살림세상의 큰길로 나가겠습니다. 당신이 꿈꾸던 행복한 농촌마을, 도시와 농촌이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 는 도농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당신이 늘 말씀하시던 “농촌과 도시는 하나다. 생산과 소비는 하나다. 우리는 한살림이다”라는 말씀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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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함께 해온 24년은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떠나보내면서도 늘 당신과 함께 할 것이라 확신하기에, 또 우리 모두가 당신의 뜻을 잘 받들어 모실거라 확신하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미소와 부드러운 음색을 늘 잊지 못할 것입니다. 박재일 회장님 이제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하늘나라에서 따사로운 햇빛이 되시고 은은한 달빛이 되셔서 이 땅에 뭍 생명들을 키워주시기 바랍니다. 시원한 바람이 되셔서 농부의 이마 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이루고자 한 생명세상 우리가 꼭 이루어나가겠습니다. 전국 방방곡곡 2천 생산자의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불러 봅니다. 박재일 회장님!! _ 한살림전국생산자연합회 회장 이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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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실천이 일군 변화를 기억하며 가신 이를 기리는 상투어가 아니라 진심으로 훌륭한 인물 박재일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살 만큼 산 사람들이 숱하게 많은 판에 박재일이 먼 저 간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프다. 박재일의 학생운동가 면모, 그리고 그가 이루어낸 협동조합 ‘한살림’의 성공담과는 별개로 숨 막히는 군사정권 시절 그가 보여준 성실함과 신 뢰감이 나에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가톨릭 농민회의 활동가로서 고 지학순 주교·장일순 선생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원주권’을 서울의 재야 세력과 연결하는 고리의 하나가 박재 일이었는데, 이 일에는 김정남과 정성헌을 빼놓을 수 없다. 박재일을 처 음 만났을 때 당당한 체구와 과묵함이 매우 잘 어울린다고 느꼈으나 말 숱이 적을 뿐 그는 의견전달자로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1980년대 초에 있었던 이른바 ‘오원춘 사건’ 당시 그가 안동에서 열린 집회에서 가 톨릭 농민회 회원들을 앞에 놓고 행한 열변을 나는 현장에서 들었다. “형 제 여러분”이라는 그의 말문은 신앙공동체에서 흔히 쓰는 것이지만 그때 거기서는 가식과 위선의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농협 민주화’, ‘우리밀살 리기’,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 등 여러 분야에서 농업운동가로서 실천해 온 그의 삶 자체가 담보된 표현이었기 때문이라 믿는다. 과묵함의 또 다른 일면이겠으나 경북고-서울대 출신인 박재일은 학력 을 자랑하는 패들이 흔히 즐긴 이데올로기 담론에서 거리를 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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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도산 안창호가 말한 ‘무실역행’이 어떤 것을 상상했던 지는 찍어낼 수 없지만 농민운동가와 협동조합 조직 및 관리자로서 묵묵히 일하여 구체적 성과를 올린 박재일은 우리 시대의 그 살아 있는 본보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젊은 세대는 무실역행이란 표현이 고리타분하다 며 그 실체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번드르르한 변설보다 실천을 중요시 하며 그 일에 자신이 앞장서는 자세가 박재일이 보여준 것이라고 답하 면 어떨지 모르겠다. 박재일은 이를테면 분단 시절 서독의 사민당 수상 헬무트 슈미트 같은 사람이다. 그는 화려한 수사의 사민당 이론가가 아니었고 현장에 뛰어 들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독일말로 마허Macher·실행자·실행지도자 가 슈미트였다. 10여 년 전 독일인 변호사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그의 아버지는 사회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실천가 슈미트가 좋아 서 사민당에 표를 던진다는 거였다. 가신 임, 박재일의 뜻을 잇는 길은 더 많은 박재일이 젊은 세대에서 나 오는 것이다. _ 임재경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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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일 동지, 가시는 길 평온하옵소서 박재일 형제님, 왜 그렇게 서둘러 가시옵니까? 가시는 동지의 등 뒤에 비치는 주마등에는 이 땅에 누구도 고개를 숙이 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구려! 국가권력마저 자본시장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농업을 지키자고 아무리 함성을 질러도 국가권력은 외면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농업은 농민과 소비자가 생명논리로 결속되지 않으면 살릴 길이 없다는 판단으로 시 작한 한살림운동이 동지의 뜻대로 활활 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불똥이 사방으로 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농도 그 불똥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과묵한 성품이지만 은은하게 비쳐 나오는 다정다감한 언행에 모든 동 지가 당신을 좋아했다는 것을 아시나요. 후배들이 틀린 생각을 고집할 때도 직설이 아니라 돌아가는 여유를 갖 고 비유하고 반문하면서 후배들이 마음 상하지 않게 생각을 들려 주는 박 동지의 리더십은 우리 조직에 귀감이 되는 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박 동지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따라 우리 아이들이 나의 생일을 잘 챙기는데 그 이유가 생일을 여러 번 하지 못한다는 판단 으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아서 지난 생일날 아이들 앞에서 고백했다오. 유산을 넘겨 줄 것이 없어 죄스럽다고 말이요. 그러나 나에게도 쓸 만한 재산 하나는 있다고 큰소리를 치니 아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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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모아졌죠. 그때 나의 재산을 공개했답니다. 30대에 굳힌 뜻 그것이 소신이든 철학이든 이념이든 잘 된 것이든 못 된 것이든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갖고 가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재산 이다, 이제 너희들에게 줄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이오! 아이들이 동의하는 말들이 이어지고 아버지의 재산을 진시 알지 못함 이 죄스럽다는 눈치였다오. 세상에 믿을 데가 없고, 믿을 사람 없고, 저 사람이야 했던 지도자도 어 느 날 곡학아세하면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재산이 얼마나 소중함을 후세는 말해줄 것이오. 박 동지의 가시는 길이 다시는 아버지를 못 보기 때문에 자녀들은 슬퍼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노라 다짐할 것이오. 박 동지, 이제 남은 일일랑 남은 사람들이 몫이요. 부디 평온한 마음으 로 가시옵소서. _배용진 전 안동교구연합회장 / 가톨릭농민회 《농민의 소리》 201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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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나라에서 온 추모 글

고 박재일 선생은 생전에 이 땅의 농민과 자연을 사랑하셨던 만큼 해외에서 같은 뜻을 가 지고 활동하는 분들과 굳건히 함께 연대하며 생명살림을 실현하는 데 애썼습니다. 그동안 함께 활동했던 해외 인사들이 전해 온 애도의 글을 모았습니다.

[ 일본에서,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

경애하는 박재일 선생님 선생님의 급작스런 비보를 접하고 매우 놀랐습니다. 인생의 소중한 스 승을 잃었다는 슬픔으로 망연자실할 따름입니다. 건강하실 때의 모습이 떠올라 부고를 접한 지금도 믿기질 않습니다. 언제까지나 건강히 오래도록 살아 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지금은 단 지 먼 곳에서나마 그 모습을 떠올리며 명복을 빌 수밖에 없음이 가슴 아픕니다. 생각해 보면 선생님과의 만남은 한일 교류의 시작이었고, 어느덧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생님과 우리들의 공통된 염원은 한일 양 국의 제1차 산업이 잘 발전하고, 생명을 기르는 산업으로서 정당한 평 가를 받으며, 그 담당자인 농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파고는, 세계 도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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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일본 사이타마현 근로자생협 교류.

에서 농민을 피폐시키고, 소비자들로부터는 먹을거리의 안전이라는 가 장 기본적인 신뢰를 빼앗아 갔습니다. 이런 파고에 대항하여, 우리들은 일어섰고 싸워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대감에 충만한 교류를 쌓아 왔 던 것입니다. 이런 연대와 교류는 다양한 형태로 지속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 습니다. 박재일 선생님은 항상 그 연대의 중심에 계셔 주셨고, 우리들 을 따뜻한 눈길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도 또한 선생님의 뜻을 배워 발족한 운동이었습니다. 건강에 대한 약간의 불안함이 있으면서도, 선생님께서는 민중기금의 이사 취임을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해 주셨고, 한살림이 정식으로 참여한다고 표명해 주신 것은 우리들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은 아시아에서의 광범위한 민중교역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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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축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기반 위에서 아시아에서의 연대를 보다 넓고 깊게 구축하고자 결의한 바로 이때에 우리는 박재일 선생님 을 잃었습니다. 우리들은 비통할 따름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들의 상실감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울고 있기만 한다면 틀림없이 선생님으로부터 큰 꾸지람을 들을 것입니다.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은 설립총회를 마치고 이 제 막 첫 융자사업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이제 겨우 작은 발걸음을 한 발 내디뎠습니다. 우리들은 이 작은 발걸음을 확실한 발전으로 이어가 기 위해, 박재일 선생님의 뜻과 열정을 받아 한살림 여러분들과 함께 힘찬 걸음걸이를 나아갈 것입니다. 박재일 선생님. 부디 앞으로도 남은 우리들을 먼 곳에서나마 지켜봐 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_‘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 후지타 가즈요시 대표, 임원과 회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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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고베대학 ]

한살림 이사장님 귀하 어제 두레생협 김기섭 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박재일 선생님의 서거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 28일, 김기섭 님의 안내로 선생님 자택에 병문안 갔을 때, 빨리 쾌차하셔서 고베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돌연한 부고를 접하게 되어 놀라움과 함께 너 무나 빠른 영원한 이별에 서글픈 마음 이루 금할 수 없습니다. 아직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셔야 할 소중한 분이었는데, 또 본인도 아 직 의욕이 넘쳐 계셨는데, 정말 안타깝고 서글플 따름입니다. 충심으로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박재일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1983년에 있었습니다. 김영주 선생 님,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신 이건우 선생님과 함께 가톨릭농민회 방문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 직후 일본을 방문해 직접 성금을 전달하는 박재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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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 일원으로 효고현의 유기농업을 방문하셨을 때였습니다. 그 때, 이 치지마의 유기농업을 시찰하셨습니다. 저녁 친교 시간에 한국분들이 힘차게 농민가를 부르시는 모습에 놀랐고, 또 말술을 드시는 것에 놀랐 으며,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모두가 춤추는 모습에 또 놀랐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그 이후 27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고베와 서 울에서 교류를 다졌던 것은 저에게는 정말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특 히, 고베대지진 때 곧바로 위로 방문을 해 주셨고, 한살림 여러분들의 격려 말씀과 함께 많은 지원금을 전달해 주신 점은, 지금도 잊을 수 없 습니다. 다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엄격한 박재일 선생님은 저에게는 항상 형 님 같은 분이셨습니다. 조만간 고베에서 재회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 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박재일 선생님께서 쌓아온 공적의 한 부분이 라도 잊지 않고 노력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우호친선을 위해 앞으로 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박재일 선생님, 오랫동안 지도 편달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 음속 깊이 명복을 빕니다. 길고도 힘든 투병이 끝났습니다. 부디 천국 에서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_ 미천한 아우 야스다 시게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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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그린코프 ]

박재일 선생님. 우리들과 만나 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인간이 행하는 운동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무엇인가를 만들 어낸다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인간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그것은 말 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이 말일 뿐이라면, 단지 상황을 그럴듯하게 꾸밀 뿐 곧바로 연기처럼 사라져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말은, 현 실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상황을 딛고 상황을 타개하고 현실을 새로 이 갱신해갑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렇게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새로운 운동이 또 전개되리라 생 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어떤 사람이 한 것이거나 그 어떤 사람의 어떤 행위가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혼자서 생각해낸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 람이 살아온 모든 과정, 즉 그 사람과 그 사람이 함께 살아 온 동료들이 함께 해온 모든 것을, 그 사람이 체현해서 말하는 것임을 우리는 항상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쌓인 것들을 누군가 말로 엮어내 주시는 것 입니다. 박재일 선생님. 당신은 우리들에게도 그런 분이셨습니다. 무엇보다 도 당신은 한국의, 당신과 여러분들이 함께 이루어온 ‘생명운동’을 담당 하는 모든 분들, 또 이 운동에 찬동하는 모든 분들에게 있어 분명 그런 분이었습니다. 때문에 한살림과 두레의 여러분들은 당신과 헤어져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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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일본 효고현 유기농업연구회 방문.

하는 오늘, 슬픔과 안타까운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이 그 무엇보다도 클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우리들 또한 당신과 이별해야만 하는 슬 픔과 안타까움과 감사도 같은 정도로 큽니다. 생명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것, 생명을 자연성으로서 존중해야 한 다는 것, 그리고 자연으로서의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를 바르게 탐색하는 것, 거기에 미래가 있다는 것,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당신들과의 만남을 통해 여러 차례 확인했습니다. 박재일 선생님. 당신은 생명에 다가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우리들에 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아온 당신의 가족 여러분, 당 신과 함께 살아온 한국의 여러분들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들에게도 당 신은 그러했습니다. 당신의 온화한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온화함 뒤에 지금껏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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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해온 역경이 있음을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잠깐씩 쉬어가는 듯한, 조용하게 한마디 한마디 말씀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온 마음과 온 몸을 바쳐 일하면서, 격무로 시달렸을 당신의 생애를 마음에 새깁니다. 당신이 살아 오신 궤적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갈 것입니 다. 우리들도 그분들과 마찬가지로 당신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합 니다. 생명의 운동은 인류가 마지막까지 싸워가는 것일 듯합니다. 당신과 만날 수 있었던 우리들은 절대 이점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마 음 깊이 맹세합니다. 박재일 선생님, 우리와 만나 주셔서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음 편히 쉬십시오. _ 일본 그린코프의 동료들과 함께, 그린코프공동체 전무이사 히가시하라 고이치로 배상

[ 필리핀에서, 농촌발전을 위한 협동조합Cooperative for Rural Development; CORDEV]

박재일 회장님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에 가슴 깊이 아픔을 느낍니다. 저희의 진심 어린 애도를 유가족 분들께 전달해 주십시오. 회장님이 남기신 업적이, 그분의 길을 따라 평화를 사랑하는 민중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우리와 모든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리라 믿 습니다. 다시 한 번 회장님 영전에 애도를 표합니다. _‘농촌 발전을 위한 협동조합’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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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에서, 전 농업통상 대사 ]

삼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기도합니다. 뜻밖에 회장님의 부음에 놀랍고 비통한 마음입니다. 먼 길을 떠나 아르헨띠나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부음을 접하니 회장님 께 마지막 인사도 올리지 못해 더욱 안타깝고 슬픈 마음입니다. 생전에 회장님이 시작하시고 일구어 놓으신 환경·유기·생태 생명농업 발전의 유지를 받들고 이어나갈 것을 삼가 다짐하며 떠나시는 회장님 께 존경과 감사와 사랑의 뜻을 전합니다. 회장님, 하나님의 집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_멀리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최양부 삼가 올립니다

[ 중국에서, IFOAM CHINA ]

박재일 선생의 작고 소식을 듣고 저는 깊은 슬픔과 충격을 감출 수 없 습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을, 좋은 동행자를 그리고 오랜 친구를 잃 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2년 전 이탈리 아에서 그분을 만났던 때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앞으로도 그분과 함께 했던, 잊지 못할 추억들을 늘 소중히 간직하고 있겠습니다. 유가족과 또 한국에 있는 제 친구(동지)들이 선생님을 잃은 깊은 슬픔 에 빠져 있을 텐데, 비통한 슬픔에서 감정을 잘 추스르셔서 빨리 회복 되시기를 바랍니다. _Zhou Zejiang IFOAM Chin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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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에서, GreenNet ]

깊은 애도의 뜻을 통절한 슬픔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_Vitoon Panyakul GreenNet 대표

[ IFOAM 세계본부 ]

박재일 선생의 작고 소식에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2008년도 이 탈리아에서 개최된 IFOAM 세계유기농대회에서 만났던 박재일 선생 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평화가 깃든 밝은 세상에서 그의 영혼이 편히 쉴 수 있게 되기를 진심 으로 기원합니다. _Vanaya Ramaprasad IFOAM 세계 이사, Green Foundation 대표

[ 동티모르에서, 샘물이 솟아 큰 강을 이루는 연구소Kdalak Sulimutuk Institute ]

동지 여러분, 박재일 회장님을 떠나 보내며,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진심을 다하여. _‘샘물이 솟아 큰 강을 이루는 연구소’와 동티모르 공동체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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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에서, 농촌발전을 위한 협동조합Cooperative for Rural Development; CORDEV]

유족들과 아시아민중기금 회원단체, 그리고 회장님과 함께 일하셨던 모든 분들께 애도를 전합니다. 회장님의 영면 소식을 듣고 충격과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5년 전,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방문하신 회장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 회장님께서는 팔레스타인의 운동 방향을 지원하고 팔레스타인 사 람들과 연대하는 것에 진심어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이후 우리의 민중교류는 더욱 확고해졌으며, 그 과정에서 박 회장님은 중요한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회장님은 떠나가시며, 모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크나 큰 빈자 리를 남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와 가난한 이들에게 큰 버팀목이 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회장님의 선한 업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박재일’ 그분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_농업개발위원회 대표 Khaled Hidmi 외 일동

[ 팔레스타인에서, 농업 부흥 위원회Palestinian Agricultural Relief Committe; PARC ]

동지 여러분, 박재일 회장님의 영면 소식은 우리를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회장님은 우리에게 지도자이셨고 동시에 친구이셨으며 정의를 위해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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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강인한 투사이셨습니다. 회장님은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셨습니다. 회장님의 위대한 업적이 유족과 동지들, 그분을 아는 모든 이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애도를 전합니다. _팔레스타인 농업부흥위원회 일동

[ 필리핀에서, 대안무역재단 Alter Trade Foundation. INC; ATFI ]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의 이사였던 한살림의 박재일 회장님께 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회장님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시아 민중기금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회장님께서 민중 연대 의 숭고한 원칙과 목표에 깊은 뜻을 두셨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족분들과 친지분들께 우리의 깊은 조의와 애도를 표합니다. _진심을 다하여, 대안무역재단 이사 Edwin Lopez

[ 파키스탄에서, 알카일 비즈니스 그룹 Al-Khair Welfare Society / Business Group; AKBG]

박재일 회장님께서 영면하셨다는 소식에 깊은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 다. 유가족 분들과 친지들께 저희들의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합니다. 회장님께서 평화 속에 잠드시기를 기원합니다. _알카일 비즈니스 그룹 대표 Mohammad Mazahir 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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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박재일

“나는 한살림이 참 좋아. 참 재미있었어!”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솔뫼마을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유족인 다섯 딸이 조문객들에게 드 린 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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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버지가 투병을 하시면서 옆에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는데 오늘의 이 상황은 여전히 가슴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 속에 있기 때문에 저희 다섯은 어머니와 함께 꿋꿋이 이 날을 보내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저희가 가졌던 기억들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나 밖에서나 늘 같은 모습이셨고요. 그래서 저희가 고민을 하다가 2년 동안 투병하시고, 상상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서도 우리 가족 모두가 경험했던 서로 사랑하고 치유하는 그 기억들을 여러분께 나눠 주고 싶어서 이렇 게 나섰습니다. 저희들의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고통 중에 행복하셨는지를 나누셨으면 좋겠습니다. _첫째 딸 박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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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의 이야기

“딸 다섯 가진 아버지는 한살림을 하게 된다”

저는 막내딸 박주희고요. 제가 기억하는 저희 아버지의 투병 생활과 그 때 있었던 얘기를 말씀드릴게요. 아버지가 구강 수술을 하시고 다음날 아침에 되게 극심한 통증이 있으셨는데도 불구하고요. 저를 보시더니 “아빠가 하나도 안 아파” 하시면서 팔다리를 막 움직이시면서 “걱정하 지 마” 이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아, 우리 아버지는 정말 강 하신 분이구나’ 느꼈고요. 또 아버지가 평소에 저희에게도 말씀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셨어요. 그런데 편찮으시면서 저희에게 그러시더라고요. 이제부터는 감정 표현 에 솔직해지려고 하신다면서요. “사랑한다. 아빠가 미안해”하시면서 얼굴을 쓰다듬어 주시는 그 따뜻한 손길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 습니다. 저희는 회복하실 거라고 생각했고 아빠도 그러셨어요. 투병 중 에 아빠가 평소에 가시기 원하시던 솔뫼에 저희 보고 3층 집을 짓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딸들에게 각자 맡을 역할을 정해 주고 가셨어요. 셋째 언니인 소현이는 아이들의 교육에 똑 부러지니까 아이들을 가 르치고, 넷째 언니인 현선이는 아이들과 잘 노니까 신나게 놀아주라 하 고, 막내인 저에게 되게 막중한 임무를 주셨어요. 국제적인 관계나 정 리를 잘하니까 사무를 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어깨가 무거워 요. 그런데 큰언니인 순원 언니랑 둘째 언니인 정아 언니에게는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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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도 안 주고 가셨어요.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들을 잘 보 살피라는 의미에서 그러신 것 같고요.

그리고 아버지의 후배가 딸을 데리고 저희 아버지에게 병문안을 왔 을 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한국에서 딸 하나를 키우면 아버지가 진 보가 되고, 딸 둘을 키우면 좌파가 된다”고 말씀하시고요. 그 다음에 “딸 셋을 키우면 혁명가가 된대요” 이러셨더니 저희 아버지가 또 한유 머를 하셔서 “딸 넷 가진 아버지는 생명운동가가 되고, 딸 다섯 가진 아버지는 한살림을 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러 면 나 때문에 한살림이 만들어졌네” 이랬더니 아빠가 “그럼!” 하시던 그 모습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두 손으로 산소마스크를 빼시면서 컵처 럼 받치시고 “물, 물!” 이러셨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아버지 걱정을 해 서 “드릴 수 없다”고 “안 된다”고 했더니 “왜, 왜?” 이러시면서 너무 예쁜 눈웃음으로 저를 쳐다보시면서 싫은 내색 하나도 안 하시고 그러 던 아빠의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요. 아버지는 당신 때문에 식구들이 고생한다면서 마음 아파하시고…… 근데 아빠, 저희는 너무 너무 행복 했고요. 아빠랑 보낸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정말 아버지가 주신 큰 사랑 잊지 않고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아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막내딸 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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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딸의 이야기

“내가 네 살짜리 손주들에게 예쁨을 받아야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넷째 박현선입니다. 아버지랑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뿐이지만 저는 투병 생활 중에 죄송스 러웠던 기억 두 가지가 생각이 나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구강암 수술하시고 방사선 치료도 잘 받으시고 집에서 열심히 회복 을 하시던 중에 척추에 또 전이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저희가 정말로 많 이 좌절하고 겁도 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 어리석은 생각에 아버지 께 의논드리지 않고 혼자 자료를 찾아서 온열치료가 암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자료를 보고 덜컥 기기를 사서 친정으로 배달을 시켰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걸 보시고는 굉장히 화를 내시더라고요. 그런 데 그 순간에는 아버지 화를 좀 가라앉혀 드리려고, 아버지께서 화내시 면 그게 너무 몸에 안 좋으니까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고 엄마도 같이 쓰시면 된다고 그렇게 아빠를 설득하고 저는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돌 아왔는데요. 그 다음날 아버지가 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셨어요. 전날 저녁에 통증이 너무 심하셔서 그걸 한 번 해봤다고, 아주 좋다고. 니 마 음을 내가 헤아리지 않고 화를 내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렇게 자식한테 미안하다고 전화를 주시더라고요. 사실은 아버지께 먼저 의논드리지 않고 그렇게 일을 저지른 제가 먼저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 데 저희 아버지는 늘 그러셨던 것 같아요. 당신 몸이 어떻건, 당신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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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떻건 상대방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신 그런 분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렇게 척추암이 전이되고 2차 방사선 치료를 받 으러 다니실 때 워낙 통증이 심하셔서 제가 운전을 하고 동생이 어머니 와 아버지를 같이 부축하고 또 언니가 집에서 동갑내기 네 살짜리 아이 둘을 봐 주고 그렇게 서로 역할 분담을 해서 다녔었거든요. 언니는 친 정집에서 아이 둘을 보고 있으니까, 아빠가 치료를 받고 돌아오시는 길 에, 신천 한살림 매장이 있어요. 거기를 지나가게 되는데 꼭 그러시는 거예요. “우리 네 살짜리 손자들 주게 한살림에 가서 맛있는 것 사 가 자. 애들 간식거리 사 가자. 뭘 좋아하느냐?” 그래서 저희가 좋아하는 걸 얘기했더니 “아, 그러면 땅콩카라멜하고 양갱하고 그런 걸 사다 주 자. 내가 네 살짜리 손주들에게 예쁨을 받아야 된다” 그러시면서 매일 매일 그렇게 그걸 요구하셨거든요. 그런데 저희는 아버지가 너무 너무 통증이 너무 심하셨으니까 그런 것조차도 아버지에게는 무리가 되어서, 열 번 중에 딱 한 번만 그걸 허 용해 드렸어요. 그게 너무 죄송해요. 아버지를 추억하는 지금, 너무 아빠가 많이 보고 싶고요. 안녕히 가세요. 아빠.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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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딸의 이야기

“엄마들이 원하는 음식 말고 아이들이 원하는 과자를 사 주어라”

안녕하세요. 셋째고요. 박소현입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외국에 나가서 십 년을 살다가 들어왔어요. 결혼을 하 고 자식을 낳아 보면 어른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전에는 너무 철없게 아 빠에게 항상 그랬는데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철이 들어갈 때 너무 떨어 져 있어서 아빠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들이 항상 마음에 걸리고 그랬어요. 오자마자 아빠께서 위암 수술을 하시고 또 구강암 수술하시고 이래서 솔 직히 저는 아빠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항상 마음에 걸리고 그랬거든요.

아산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그때는 정말 인간의 고통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아빠가 온 몸으로 저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그런 시간이었 어요. 그 와중에, 제가 큰아들이 5학년인데 어쨌든 아이도 챙겨야 해서 캠프를 보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막상 보내려고 하다 보니까 일 년 사 이에 부쩍 커서 여름옷이 바지가 맞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지나가 는 말로 “승재가 내일모레 캠프를 가는데 바지가 하나도 없어서 바지 를 좀 사야겠어” 이렇게 동생하고 언니하고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단 한시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통증에 시 달리고 있던 아빠가 그 와중에 갑자기 막내한테 지갑을 가져오라고,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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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중에 빨리 지갑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그러시면서 그 떨리는 손으 로, 기운 없는 손으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시더니 반드시 이 돈은 다른 데 쓰지 말고 승재 바지 사는 데 쓰라고, 원하는 옷 다 사주고, 네 살짜 리 손자들 데려가서 엄마들이 원하는 음식 말고 그 아이들이 원하는 과 자를 사 주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날 곧바로 가서 저희 아이 의 옷과 과자를 사 가지고 와서 아빠께 너무 감사하다고 그랬더니 아빠 께서 그 힘없는 모습에서 미소를 보여주시면서 ‘정말 잘했다’는 듯이 너 무너무 기뻐하셨거든요. 십 년 간 외국에 나가면서 아빠와 나누지 못했 던 그런 것들을 정말 너무 감사히 받았고요.

또 저희 아빠께서 항상 의식이 돌아오시면 이렇게 크게 두 팔을 벌리 고 사람을 안아주고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시고요. 그리고 병문안 오 신 분들께 항상 두 손 모아 감사하다는 인사를 꼭 하셨거든요. 그 모습 이 너무 그립습니다. 아빠 딸로 살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빠.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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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의 이야기

“한살림은 식량 자급과 지역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절대로 놓치면 안 돼, 그 화두를 가지고 신나게 해”

저는 둘째 딸 정아예요. 저희 아버지가 구강암 수술을 받으러 입원하시 면서 《밥상 혁명》이라는 책을 가져가셨어요. 그래서 수술 전날까지 그 걸 다 읽으시고요. 수술실에 들어가시기 전에 저한테 “이거 꼭 읽어 봐 라” 그러셨거든요. 그리고 수술을 열 네 시간을 받고 그 다음 날 회복 하시고 의식을 찾으시니까 “그거 읽어 봤냐?”고 하셨어요. 말씀을 못 하셔서 필담으로 “읽어 봤냐? 니 생각은 어떠냐?” 그러시면서 아버지 가 한살림에서 하고 싶었던 그런 즐거운 활동들이 여기에도 담겨져 있 다고, 한살림은 식량 자급과 지역이라는 두 가지 화두를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고, 그 화두를 가지고 신나게 하라고 그런 이야기를 하셨고요.

구강암 수술 이후에 회복이 되시면서 아버지한테 큰 꿈이 하나 있었 는데 한살림 쉼터를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한살림운동 한다고 늘 고생 하면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에 대해서 참 마음 아파하셨거든요. 그래서 힘들고 지치고 그만하고 싶을 때 언제나 쉽게 찾아와서 그냥 편히 쉬고 다시 기운 내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쉼터를 만들고 싶어 하셨고 그 쉼 터 옆에 조그만 토담 짓고 텃밭 가꾸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그렇게 살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퇴원하시면 밥 짓는 것부터 배우고 코펠도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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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그 계획을 세우시면서 어려움들을 잘 이겨 나가셨고요.

그리고 운명하시기 전 몇 주간은 정말 어린아이, 천사 같으셨거든요. 그래서 가끔 의식이 돌아오면 솔직한 말씀들을 참 많이 하셨는데 그때 자주 하셨던 말씀 중에 한 가지가 “나는 한살림이 참 좋아. 참 재미있 었어!” 라고 얘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빠가 생각하는 한살림은 아빠 혼자 만들어 가신 게 아니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마음과 노력으로 같이 만들어 가셨기 때문에 여러분들 소식을 늘 궁금해 하셨고요. 늘 사랑하셨고 너무나 행복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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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딸의 이야기

“나에게 딸이 다섯이 있는데 곱고 예쁘게 잘 커 줘서 너무 감사합니다.”

7월 13일에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하시고 며칠 지난 후 열흘 가까이 혼수 상태셨어요. 그때 저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어서 돌아와서 아버지 음성을 듣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버지 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는데 깨어나시고 나서 저희에게 주셨던 이야 기가 있습니다. 필답으로 주셨는데요.

첫째 날. 저희는 아버지가 혼수상태라고 했었는데 아버지는 다른 일 을 하고 계셨어요. “무엇을 하셨나?” 그랬더니 “첫째 날, 동그랗고 밝 은 빛의 아기 영들과 아기 천사들과 춤추고 놀았어. 너무 좋았어.” 이 렇게 써주셨어요. 그리고 “하루 지나고 다음날, 둘째 날” 이렇게 쓰시 고 아버지께서 그 동그랗고 밝게 빛나는 영들과 함께, 그들을 아기 천 사라고 하셨어요. 아기 천사하고 백두산, 한라산, 태백산, 지리산, 바 다들을 다니시고 민민회의를 하셨대요. 그래서 그 말씀을 들었고요. 그 다음에 깨어나셔서 말씀하셨어요. 하느님을 뵈었다고. 그런데 하느님 을 뵈니까 너무 따뜻하고 좋았는데, 그 얼굴이 주희를 가르치면서 “너 랑 닮았어!” 이러셨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셔서 뭐하셨어요?” 그랬더니 “나에게 딸이 다섯이 있는데 너무 곱고 예쁘게 잘 커 줘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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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감사합니다.” 하고 자랑하셨대요. 그렇게 하시고 당신 모습도 보고 오시고 그래서 참 좋다고 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 의식을 잃으셨는데 투병 내내 가끔 깨시면 너무나 애절한 눈빛으로 이렇게 몸을 가리키고 하늘을 가리키고 이러면서 “나, 이 몸에서 나가고 싶어!” 이러셨어요. 그래서 저희는 그게 고통 중 에 있는 생각이라고 했었는데 이렇게 아버지께서 오셨던 곳으로 돌아 가시고 결정하시니까, 그게 진심이었는데 그걸 돕지 못했구나 이런 후 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펼쳐 주신 저희에 대한 하느님께 고 하는 그 지극한 사랑이 앞으로 저희 살아가는 평생에 저희의 그늘막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여러분이 계셔서 저희가 더 든든하게 잘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짧게 위로차 말씀드리려 고 했는데 저희 설움에 복받쳐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아버지를 정말 너무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근원으 로써 빛을 따라서 천상에 들었다고 오늘까지만 슬퍼하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께 감사를 전합니다.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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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전한 박재일 선생 추모 기사

2010년 8월 20일 <한겨레신문>

2010년 8월 21일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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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중앙일보>

2010년 8월 21일 <한국일보>

한살림답게

2010년 8월 20일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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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국민일보>

2010년 8월 20일 <경향신문> 2010년 8월 21일 <조선일보>

2010년 8월 20일 <머니투데이>

2010년 8월 21일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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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재경일보>



1주기를 맞아

한살림의 마음을 박재일 선생님께 곁에 계실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떠나시고 나서야 산처럼, 숲처럼 우리를 품고 계셨다 는 것을, 우리가 그 품속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밝은 웃음으로 대해 주시 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_ 배영태

작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온화하신 미소로 격려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언제나 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 같은 선생님, 늘 한살림 식구들과 함께 계실 것을 믿습니다.

_ 이동엽

제가 모셨던 회장님은 늘 호기심이 많으셨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쉴 요량이면, 노점 트럭 앞에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한참을 구경하시곤 했던 회장님이 생각이 납 니다. 늘 인자하게 웃으시는 회장님, 보고 싶어요.

_ 이규원

회장님을 생전에 뵙지 못한 것도 많이 아쉬운데, 추모 1주기 준비라니…. 준비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옵니다. 한살림에 남기신 깊은 뜻을 잘 살펴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천국 에서 평안하세요.

_ 이경미

박재일 회장님! 영원한 아버지, 영원한 스승님을 생각하면 저는 참 소소한 일상의 모습 이 떠오릅니다. 수많은 논쟁의 장에서 듣기를 먼저 하시던 모습, 무엇이던 맛나게 드시 던 모습, 느릿하고 조용한 어조가 생각납니다. 어느 자리에서나 강조하셨죠. ‘생산자와 소비자는 하나다’, ‘도시와 농촌은 하나다’라는 말씀, ‘한살림이라는 것은 재미나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회장님, 당신의 소리 나지 않는 함박웃음과 따뜻한 품이 참 그립습니다. 당신이 보여주신 어진 모습, 늘 기억하고 따르겠습니다. _ 김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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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래~ 잘 지내고 있지?” 아프신 와중에도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언제나 잔잔한 미 소를 지으시며 말없이 그렇게 봐 주셨지요. 지금도 그 모습이 잊히지가 않습니다. “네. 회장님, 잘 지내고 있습니다. 회장님도 잘 지내시는지요? 많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_ 유지원

인농을 그리며

어젯밤에 보았다. 쓰러진 나무를 일으켜 세우는 그 사람을 모래알마저 힘을 보태고 바람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생명의 여백을 그냥 지나치지 않던 그 사람이 떠나간 지 일 년 원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전국으로 그리고 작은 먼지들이 날리던 생명들 사이의 섬들 속에서 누구처럼, 누구처럼 웃고 있던 그 사람이 떠나간 지 일 년

따라가지 못하지만 차마 비슷하게 웃지 못하지만 생명의 여백 언저리에서 그리움처럼, 그리움처럼 그저 그리울 뿐입니다.

기록과 이야기 속에서 더 많이 접했던 회장님을, 원주이기에 더 속 쓰린 기억들이 나뭇 잎처럼 팔랑이는 이 8월에 그 뜻을 그저 흉내 내며, 애들이 사방치기 하듯이 정해진 대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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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가는 저이기에 늘 부끄럽고 부족합니다. 차마 애정이라고 말 못하고, 그저 비슷하게 흉내 내고 있습니다. 있게 해 줘서 감사합니다. 있게 해 줘서 감사합니다.

_ 박준영

“열심히 하지?” 찐한 미소로. 든든했어요. 그립습니다. 감사합니다.

_ 이정섭

활동을 하면서 일이 내 기대치에 미치지 않아서 ‘이 일을 계속해? 말아?’ 갈등할 때 다 시 내게 힘을 준 것은 “한살림은 즐겁게 하는 거야!”라는 회장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살 아생전에 뵙지는 못했지만 그 말씀 항상 마음속에 새기며 힘들고 지칠 때마다 꺼내어 먹는 ‘보약’으로 삼겠습니다. 회장님! 편안한 곳에서 항상 우리가 한살림을 잘할 수 있 도록 보살펴 주시고 자애로운 미소로 지켜봐 주세요.

_ 김순임

매일매일 늦게까지 일을 하던 20대 후반 시절, 회장님께서 회의를 마치고 술을 한잔 거 나하게 드시고서 다시 사무실로 오셨습니다. 한살림의 깊이에, 그리고 많은 일에 정신 을 못 차리고 있던 그때, 잔잔한 미소로 말씀하셨어요. “한살림은 모두 자네들 덕분이 야.”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한살림이 조금은 가볍고 재미있어진 것이. 여전히 많이 그립고 아직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눈물이 나옵니다. 회장님이 들려주셨던 한살림 세상, 저도 다시 웃으며 떠올려 봅니다.

_ 이승언

사진 속의 회장님이 환하게 웃고 계시네요. 바라보는 마음도 덩달아 환해집니다. 일상 속에서도 자주 웃으시고 웃음을 전해 주셨더랬습니다. “눈앞이 캄캄해도 웃으면 길이 생기지 않을까?” 이래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웃는 모습이 잘 어울리고 사진도 잘 받 으시는데요. 그 언젠가 연수 가는 남행길에서 디카 매뉴얼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던 옆 자리의 학구파, 회장님 모습이 새삼 생각납니다.

_ 여대운

날이 갈수록 세상은 각박해지고, 존경스럽고 본받고 싶은 정신적 스승을 찾아 모시기가 어렵습니다. 대형화·상업화의 논리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한살림도 시 류를 뛰어넘지 못하고 결국 타협해 가는 것만 같습니다. 작은 소리, 쓴소리도 귀담아 들 어 주시던 박재일 선생님! 당신이 부쩍 그리워집니다. 천국에서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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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강문필


지부를 창립하고, 매장을 새로 열고, 총회를 개최할 때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 오시어 언제나 변함없이 따뜻한 미소와 손을 내어주시며, 느리지만 조금씩 여럿이 함 께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우리들에게 격려와 지지와 용기와 힘을 주셨던 회장님! 오랜 시간 저희 아이들에게는 할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친정아버지가 없는 저에게는 친정아버님처럼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존경스러운 어른이셨습니다. 늘 이맘때면 회 장님이 몹시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회장님이 있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 스럽고 행운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_ 박연주

어느새 1년이네요. 좋은 곳에서 밝은 웃음 지으시며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 니다. 저도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

_ 유봉재

박재일 회장님은 늘 정겹게 웃으셨고 음성이 따뜻하셨습니다. 뭔가 퍼 주고 내어주는 마음이 느껴지는, 그래서 누구나 그리워할 그 모습이 제 마음에도 담겨 있습니다. 회장 님!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라고 바랍니다. 두고 가신 생명의 가치가 계속 커 가도록 웃 음 지어 주시고요. ^^

_이연희

이런 일화가 있었지요. 회장님께서 매장 앞에서 서성이고 계셨는데 어느 초보 활동가 가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했다죠. 회장님께서 “나 한살림 회장이올시다. 허허!” 하시 자 초보 활동가 왈, “아이~ 할아버지 농담도 잘 하세요.” 하였더랍니다. 뵙기에 너무 소탈해 보이니까 그분이 한살림 회장님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겠지요. 저에게 여름은 참으로 슬픈 계절입니다. 20대 중반이었던 한여름에 아버지를 여의었 고, 지천명을 바라보는 여름 끝자락에 또 한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두 분 모두 그립 습니다. 뵙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_ 황미희

한살림을 빛내시던 그 큰 별이 진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회장님의 뒤를 이어 많은 분들이 그 빛을 비추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자리엔 안 계시지만 회장님의 빛 은 한살림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한살림답게

_ 이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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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회장님 유택 앞에 덩그러니 꽃 한 송이 놓고 돌아서는데 차마 발길이 떨어지 지 않아 몇 번이고 뒤돌아본 기억이 납니다. 우리 모두에게 큰 스승이시자 어버이였던 회장님! 살아생전 그 넓은 가슴에 꽃 한 번 달아드리지 못한 게 이내 한이 되어 제 가슴 에 맺힙니다. 생전에 솔뫼 땅을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영혼이 아닌, 살아 계신 회장님으 로 함께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골에 갈 때마다 찾아뵙고 차 한 잔 청해 마시며 회장님의 얼굴을 보며 음성을 곁에서 들으며 함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처 럼 힘들고 지칠 때 더욱 그립습니다. 이제는 마음으로만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는 현 실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회장님, 곧 찾아뵙겠습니다.

_ 김순규

“난, 한살림이 참 좋아.” 한살림에서 일어난 이런 저런 일들에 대해 불만이 섞인 목소리 로 말씀드리면, 회장님은 환하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판단하고 분별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회장님은 늘 자비로운 미소로 우리를 사랑해주셨 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면 아직은 눈물이 납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회장님이 해주 신 말씀을 한살림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한살림, 재미있게 해!” 회장님은 참으로 경쾌한 분이십니다. 저도 이제 밝은 마음으로 다시 한살림 하겠습니다.

_ 윤희진

소박한 한살림의 첫 수확물, 무쇠 솥에서 막 지어낸 따끈한 밥상을 연상시키는 우리네 아버지 같은 인자한 모습이셨지요. 눈 위의 첫 발자국 같은 의미로 마음속에 살아 있는 회장님을 존경합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_ 최평자

좋은 곳에서 평안하세요! 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_ 조아라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진정한 흙과 사람의 향기를 가지셨던 분인 것 같습니다. 한살 림을 전해 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부디 주님의 자비하심과 사랑 가득한 그곳에 서 영면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_ 방지영

박재일 회장님의 모습이 더욱 그리운 요즘입니다.

_ 김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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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살림이야기》 인터뷰에 아파트 한 동이 한 집이고 벽이 그렇게 얇은데도 서람 들이 서로 친하지 않은 게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 게 가끔 떠오릅니다. 마음을 닫으면 한 공간에 있어도 서로가 천리 멀리 있고, 마음이 통해 서로를 잘 이해하면 이 승과 저승의 구분마저도 큰 의미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한살림이라는 말과 세상에 전 에 없던 한살림이라는 집을 지어 주신 덕에 참 많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회장님! 감사 합니다.

_ 김성희

어느 곳에서든지 모두를 지켜보고 계시겠지요. 그 인자하신 모습으로…….

- 이종진

가만히 회장님을 떠올릴 때면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듯한 평온함이 느껴집니다. 따뜻 하고 너른 느낌이 마음으로 전해집니다.

- 이승진

한살림을 알고 나서도 함께 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살림에서 첫발을 내 딛을 때, 설레면서도 많이 긴장도 했습니다. 그때 회장님이 따뜻한 미소로 저의 경직된 마음을 순식간에 녹여주셨지요. 회장님이 떠나신 지 벌써 한 해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뒤뚱뒤뚱 중심 잡기에 서툰 저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가까이 계실 때 왜 좀 더 열심히 찾아뵙고 말씀을 구하지 않았는지 아쉬운 반성을 하게 됩니다. 회장님, 넉넉한 미소로 저희들 지켜봐 주실거죠? 마음 모아 열심히 한살림 해 나갈게요.

- 정규호

박재일 회장님과의 작은 일화가 생각납니다. 2004년 무더운 여름의 시작이었습니다. 입사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던 때 급증하 는 공급 물량 때문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퇴사한 제 동기 한 녀석이 당시 송파 구 신천동의 한 아파트로 공급을 나갔었습니다. 열심히 공급을 하고 뒤돌아서는데, 어떤 노인 한 분께서 시원한 미숫가루를 타주시면 서 말을 걸더랍니다. “요즘 많이 덥지? 공급을 하는 게 참 힘들거야.” 당시 철이 없던 제 동기 녀석은 너무 덥고 바쁜데 자꾸 말을 시키니까 건성건성 “네. 네” 하면서 돌아서 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물으셨답니다. “자네 혹시 내가 누군지 아는가?” “누구신데요?”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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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박재일일세.” “아, 그러세요? 무슨 할 말 있으세요?” “더운데 고생하라고. 허허.” “네~감사합니다!” 하고 휙 돌아섰답니다. 제 동기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바쁜 마음에 그냥 뒤돌아 섰답니다. 그리고 공급센터에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들은 “설마 그분이 회장님은 아니겠지?” 말했습니다. 그 동기는 아찔함을 느끼고 선배들에게 고백을 하게 되었고, 결국 입사 동기 전부가 심한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박재일 회장님께서는 그냥 웃으시면서 별도의 조치(?)는 전혀 취하지 않으셨지만, 선배 들이 특단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무지한 후배들에게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고 모든 수습 실무자들에게 박재일 회장님의 활동 영상을 보게 했습니다. 결국 그 이후부터 한 살림 수습실무자 교육 과정 중에, 박재일 회장님 소개 영상 시간에는 아무도 졸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운 여름날이면 우리를 웃으면서 맞아주시고, 시원하게 미숫가루를 타 주시던 사모님 과 회장님이 생각이 나곤 합니다. 아마 지금도 사모님께서는 공급실무자들이 오면, 시 원하게 미숫가루를 타 주시겠지요? 그 시원한 미숫가루와 따뜻한 미소가 지금 너무나 그립습니다.

p/s 사모님! 미숫가루를 좀 아껴서 타 주시면, 실무자들이 훨씬 좋아할 거예요. 맛은 진짜 최고인데, 너무 양도 많고 걸쭉해서 먹고 나면 배가 너무 불러 점심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꼭 한번 다시 한잔 얻어 먹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O^

_ 한살림연합 권오준

‘박재일 회장님’ 하면 가장 먼저 환한 웃음이 떠오릅니다. 환하게 웃으시면서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는 그 모습이 늘 감동이었습니다. 동대문중랑지부(현 북동지부)에서 생활 한복을 만들어 드렸는데 큰 행사 때마다 그 옷을 입어 주셔서 뵐 때마다 마음 깊이 감 사했습니다. 회장님이 한살림 해서 행복하셨던 것처럼 저희 또한 한살림 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_ 서울생협 조합원상담부 박혜영

2001년 한살림에 들어와 2008년 초까지 7년여 사단법인 한살림에서 일하는 동안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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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과 지근거리에서 일하며 많은 말씀을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분을 내가 모신다는 사실 자체가 내내 은근한 자부심 을 주었던 느낌만은 또렷합니다. 다른 조직으로 발령 받아 떠나게 되어 환송회를 하던 날, 회장님과 가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개인적으로 굉장히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노 라고 소감을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분들이 회장님을 찾아왔 는데, 한결같이 반갑게 인사하며 그들을 맞으시던 모습. 항상 넉넉하고 푸근했던 그 품 이 그립습니다.

_ 한살림서울 한혜영

인농 박재일 선생님이 생전에 하셨던 삶의 약속은 계속 진행 중입니다. 몸과 마음이 함 께하지 못함은 한살림 정신의 부재요, 실천하는 삶의 부족함입니다. 배부른 한살림정신 이 인농 박재일 선생님께 죄스럽습니다. 아직까지 신경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앞으 로는 저희 한살림 생산자연합회 청년위원회가 한살림 정신을 모범적으로 실천하겠습 니다. 이제 편안히 쉬세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세요.

_ 청년위원회 청년위원장 조대회

박재일 선생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한살림의 시작이 당신의 삶과 함께였기 때 문에 한살림의 존재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의 못 다하신 염원을 잇겠습니다. 열심히 생 산하는 생산자로 천지보은공동체를 이루어 가겠습니다. 당신이 한살림이고, 제가 한살림 임을 전 생애를 통해 전해 주셨습니다. 당신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_ 파주천지보은공동체 김상기

박재일 회장님, 늘 맑은 웃음으로 한살림제주가 많이 자랐다며 조급해 하지 말라고 다독여 주시던 인 자한 모습 떠올려 보곤 합니다. 회장님께 존경의 인사를 채 드리지도 못하였는데 너무 멀리 계셔서 제 가슴은 더욱 아려옵니다.

_ 한살림제주 김영순

지난 2009년 병환 중에 계시면서도 제주생산자연합회 출범식에 오셨지요. 삼양 검은모 래 해변의 밤바다에서 ‘우리 한살림답게 살아보자’던 회장님의 인자한 말씀이 기억납니 다. 사랑과 나눔이 지난 자리에는 그 씨앗이 남아 다시 피어난다는데, 제주 들판에 뿌린 회장님의 생명평화와 모심의 공동체운동을 꼭 피워내겠습니다.

한살림답게

_ 제주생드르연합회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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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걸으신 발자국이 끊어지지 않도록, 저희들이 최선의 삶을 살며 그 발걸음 이어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_ 제주생드르구좌공동체 임인철

제주의 생산자들과 함께하기로 약속한 뒤에야, 지난날 박재일 회장님께서 더불어 내 이 웃과 더불어 생명실천 노력을 하며 얼마나 어려운 길을 걸으셨을지 미흡하나마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과 다행이라는 마음이 공존합니다. 마음을 다잡아 모두 가 함께하는 살맛나는 울타리를 꼭 만들어 보겠습니다. 부디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_ 제주생드르연합회 강아람

박재일 회장님이 뿌린 씨앗, 정성껏 가꾸겠습니다. 생명평화의 세상에서 영면하소서. _ 제주생드르 김기홍

모자란 힘이나마 선생님이 남겨놓은 뜻을 이루는데 보태려 합니다. 그것이 그동안 고 생하며 실천하신 선생님의 발자취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인 것 같습니다. 이제 편안 히 쉬십시오.

_제주생드르조천공동체 오재익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나에게, 어떤 삶으로 내 삶을 마감할 것인가에 대해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리고 답한다. 박재일 회장님처럼 ‘우리’와 ‘생명, 평화’를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요즘 들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절실히 느낍니다. 회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_제주생드르 고정숙

회장님께서 유일하게 부르실 수 있다던 그 노래!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유일하게 불 러 주셨던 그 노래! 너털웃음 섞인 굵직한 음성으로 불러 주셨던 그 노래가 오늘 따라 더욱 그립습니다. “막걸리가 좋으냐~. 소주가 좋으냐~. 막걸리 따라 주는 색시가 좋 다.~”

_ 한살림서울 동부지부 김순규

회장님을 떠올리면 늘 환한 미소로 사람을 귀히 대하시던 모습이 떠올라요. 2003년 박 재일 회장님의 차편으로 명동리 정월대보름 행사에 동행하였습니다. 덕분에 이런저런 질문을 드리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회장님은 한 번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답변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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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요. 그때 저는 “한살림운동을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을 했는데, 회장님께서는 “한 살림은 말야.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하는 거야. 그러니까 생산자 분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돼. 듣고 함께 해 나가는 거지. 소비자 혼자서만 앞서 가면 한살림운동 하기 힘 들어”라고 하셨거든요. 조합원 활동을 하면 할수록 회장님의 그 말씀이 얼마나 지켜 내 기 어려운지 알게 되더군요. 말씀대로 한살림운동을 하신 덕분에 지금의 한살림이 가 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의 말씀이 제게 조합원활동의 근간이 되어 무시로 되새겨 보는 경구가 되었답니다.

_ 한살림서울 김석순

넉넉한 웃음 늘 그립습니다. _ 한살림제주 홍성여

회장님의 웃는 모습 그립습니다. _ 한살림제주 송태문

늘 당신처럼!!! _ 한살림제주 백경호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답하렵니다. _ 한살림제주 김화선

맛있게 고기국수를 드시던 그 모습이 사뭇 떠오릅니다. _한살림제주 강진이

회장님, 사랑합니다. _한살림제주 조병준

가슴속에 늘 당신의 모습! _한살림제주 김미경

나지막하게 조용히 실무자들의 이름을 부르실 때마다 힘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큰 품 을 갖고 계신 분이 한살림에 계시니깐’ 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타 단체 사 람들에게도 회장님을 모르냐고 하면서 ‘한살림은~’ 하면서 소개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한살림을 지키신 회장님, 1년이 지났지만 온화하게 웃음 짓던 모습 뵙고 싶습니다.

한살림답게

_ 김동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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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서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어 '이걸 어떻게 풀어야하나' 하나 막막할 때, 선생님을 떠올리곤 합니다. 어떨 때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도 명쾌하게 정리해 주시 않아 답답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왜 그리하셨는지 알 듯합니다. 스스로 해결해 갈 기회와 힘을 주 신 거지요. 또 그리해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걸 일러주신 것이기도 하구요. 선생님께서 바라보시는 자리에 문화공간이 옳게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 선생님의 그 뜻을 이어가 는 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지켜봐 주세요. 선생님!

_ 이근행

강한 인상과는 달리 항상 환한 웃음으로 한살림을 지켜 주셨던 박재일 선생님! 늘 우리 가슴에 남아 있을 겁니다.

_ 김미선

생명학교로 떠나는 아이들의 설레는 재잘거림 속에서, 환한 웃음으로 아이들과 교사들 을 손잡아 맞아 주시고, 차가 떠날 때 손 흔들어 배웅해 주시던 인자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리운 회장님.

_ 김종우

제 생애 가장 큰 기둥, 나무셨던 박재일 회장님! 그 아래에서 한살림 하던 때가 너무도 그립습니다.

_ 박현숙

편찮으실 때도 한살림과 매장을 걱정하시고, 제 건강을 염려해 주셨습니다. 회장님, 많 이 보고 싶고 많이 그립습니다. 한살림 열심히 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한살림을 지 켜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 배영혜

최근에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박재일 회장님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단어가 ‘사랑’이더군요. 농촌의 아픔을 껴안고, 우리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혁명은 껴 안는 거”라는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시고, 큰 뜻을 펼치신 것은 모두 사랑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수습실무자 시절에 공급팀 간담회에서 뵌 회장님이 기억납니다. 회장님은 소원이 100 만 조합원이라며, 그 정도 되면 이 사회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시며 그 유쾌한 비전 에 함께 동참하는 동지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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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기행 때 모두들 곤히 잠들어 있던 버스에서도 책을 들여다보시고 계시던 회장님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습니다. 격동기 시절 한(모두)의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오신 박재일 회장님과 함께할 수 있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소중한 것은 당신이 이 시대를 지나는 지혜의 등대이기 때문일 겁니다. 회장님이 가신 지 이미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회장님이 남기신 추억은 많은 사람 들의 마음속에,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현재형으로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 박도선

저 또한 선생님이 남겨 놓으신 끈을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작은 힘을 보태며, 그 끈이 더 많은 분들에게 이어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안가진

선생님께서 지켜 내신 한살림정신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강복심

박재일 선생님의 삶을 영원히 기억하고 실천하겠습니다.

- 현동관

90년대 초반의 늦은 봄날 저녁, ‘조합원 확대 행사’를 마친 저희 실무자들을 우이동 계 곡으로 부르셔서 일일이 술 한 잔씩 따라주시며 “수고했다”고 격려해 주시던 회장님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힘들 때마다 그때 회장님의 말씀과 미소를 떠올리면서 다시 새로운 힘을 얻고 있습니다. 다정한 미소와 따뜻한 격려로 저희를 북돋아 주신 회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부디 평 안한 곳에서 잘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 양시원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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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農 박재일 선생 연보 1938년 10월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사암2구에서 태어남 1959년 2월 경북고등학교 졸업 1960년 3월 서울 문리대 지리학과 입학 1964년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김지하 등과 63 한일협정 반대시위 주도. 계엄령으로 도피생활 시작

1965년 3월 이옥련 여사와 결혼 1965년

한일수교협정이 조인되고 반대시위가

격화되면서 구속됨

1969년 8월 김지하 시인의 권유로 원주로 내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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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을 만나고 진광중학교

영어교사가 됨

1971년

진광중학교 안 협동교육연구소에 합류,

학교 신협 창립에 참여

1972년 8월

남한강 일대 대홍수가 벌어져

수재민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개발사업에 동참

1973년

가톨릭농민회에 참여

1981년

재해대책 실무자들과 일본생협, 생활클럽,

대만 원주민소협 등 방문

1982년

가톨릭농민회 회장

1984년

가농 지도자들과 일본 유기농 산지 등 방문

1985년

원주소비자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이 됨


1986년 12월 4일

서울 제기동에 한살림농산 설립

1988년 2월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 3대 회장 역임

4월 21일

한살림공동체생활협동조합 설립

1989년 10월 29일 공동 집필한 <한살림선언> 발표

한살림모임 의장으로 취임

1991년 11월

우리밀살리기 운동 시작, 우리밀살리기 운동본부 공동대표 취임

1994년 2월

사단법인한살림 설립

11월

환경농업단체연합회 결정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 역임

1997년 10월

일 본 그린코프생협과 함께 북한동포돕기성금을 <한겨레신문>에 전달

11월

철탑산업훈장 수훈

2000년 6월

서울환경상대상 수상

2001년 12월

아프카니스탄 난민돕기 모금 진행

2005년 12월

친환경농업대상 소비자 유통 부문 최우수상 수상

2006년 5월

생명의쌀 기금 모금을 북녘 고성군과 남의 사회복지시설 등에 전달

2009년 1월

위암 발병으로 투병 시작

4월

제 13회 정일형 이태형 자유민주상 수상

8월

일가상 수상

2010년 2월

한살림 명예회장 취임

8월

73세를 일기로 영면

한살림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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