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20주기 기념 강연 및 대담
생명위기 시대, 다시 보는 무위당의 삶과 사상* 2014. 5. 16 / 조계사 전통문화예술회관
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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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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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120주년에 다시 보는 무위당의 생명사상 | 박맹수 강연 II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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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국사상의 흐름과 무위당의 생명사상 | 김종철 대담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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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의 삶과 사상,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진행 |황도근 말씀 |김상범
무위당학교 교장 전 한살림원주 이사장
이상국 한살림연합 상임대표 임봉재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 최수자 전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이사장 황종렬 대구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 본 행사는 무위당만인회와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주관했으며, 강연과 대담 내용을 모심과살림연구소에서 정리했습니다.
인사말 이경국 무위당만인회 회장 오늘 선생님이 가신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군요. 돌아보면 엊그제 같은데, 모든 게 꿈 이라고 하셨는데, 꿈같이 지나갔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나라가 상중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파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보는 사람과 각도에 따라 다양한 진단과 처방을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욕망추구적 물질 만능주의, 권위주의적 권력과 관료주의, 그리고 나만 잘살면 된다는 경쟁주의, 이기주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정치문화를 협동과 더불어 사는 문화로 바꾸려고 무수히 공부하고 협동조합법 제정을 제안하고 독일에 가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온 손학규 대표도 와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경제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모든 바탕에서 하나의 얼을 심고, 민중 앞의 지표를 세우고 계신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 생님과, 동학을 통해서 무위당의 사상을 열심히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원광대 박맹수 교수님의 철학적 인 말씀을 우리 함께 공부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근대 문명은 자본 중심이요 수직적 권력 중심입니다. 생명이 중심이 아닙니다. 수평적인 공 동체가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 이 온갖 부끄러움뿐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적 성숙도는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기 전보다 훨씬 퇴보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신령스러움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늘 말씀하셨 던 “네가 하나님”이란 이야기, “밥이 한울님”이란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생명의 고귀함을 말씀하신 것이 라 생각됩니다. 또한 자족과 자립의 공동체를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살림운동이나 원주의 공동 체운동이나 귀농운동이나 가톨릭농민운동이나, 그리고 김종철 선생 이하 많은 분들이 해온 녹색평론이 삶을, 근대문명을 넘어서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지금 두 가지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더욱 더 다양한 공동체를 만들고 서로 연결하는 새로운 나라 운동입니다. ‘나라’는 사실 수직적인 국가와는 아주 다릅니다. 옛날 부족 공 동체들이 네트워크처럼 만들어진 것이 나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공동체를 중심으로 서로 돕고 소통하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운동이 중요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신령스러움을 깨달아가는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한울이고 부처이고 하 느님이라는 사실을 각성하는, 그것은 바로 내 앞의 다른 사람이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한울님이란 이야 기입니다. 그것이 모심과 살림 운동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20년 돌아보니 선생님 말씀과 삶 중에서 우리가 그런 신령스러움을 깨닫는 운동이 부족했던 것 아 닌가 생각이 듭니다. 20년, 이제 우리 모든 도반들이 좀 더 용기 있는 사회적 실천들을 해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서 무위당의 후학들이 우리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안내하는 좋은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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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삶의 좌표를 제시하고 삶으로 살아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십시오. 저부터 열심히 잘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상국 한살림연합 상임대표 장일순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 지 20년 됐습니다만, 장일순 선생님을 기린다는 것은, 행동하고 생각하 는 기준을 생명 가치 중심으로 해 나가자, 현재 우리 각자들이 그런 인생을 구체적으로, 아침밥을 먹을 때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일상적으로 실천을 하는 게 기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살림 가족 여러분들은 사회를 향해서 자기 스스로부터 시작해서 이웃에게 이렇게 살자고 권하겠다고 한살림 가족이 되셨기 때문에, 다시 한번 내 안의 생명사상은 어느 정도 더 넓고 깊어지고 있는지, 얼마나 이웃과 사 회를 향해서 더 다가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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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동학혁명 120주년에 다시 보는 무위당의 생명사상 박맹수 원광대 교수,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최근 한 달간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고, 숨을 어떻게 쉬는지, 밥은 어떻게 먹는지, 잠을 어떻게 자는 지 모르는 한 달을 보냈습니다. 지난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로 인해 제가 왜 끝 모를 깊은 좌절에 빠졌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1983년부터 동학에 미쳐서, 갑오년의 그 엄청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과거의 처절한 과오를 제대로 알고 반성해야 한단 생각에 지난 30년간의 세월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행운의 행운을 만나서, 무위당 선생님을 7년 정도 모시고, 생명운동 진영 에도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동학 연구 과정 중에 갑오년 우리나라 인구에 관한 거의 정확한 기록을 최근에 확인했는데, 약 1,052만 명이라는 기록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30년 이상을 발로 뛰면서 공부하 고 조사해보니 갑오년 조선 인구의 최소 1/4에서 1/3이 동학군이 되었더라고요. 그리고 그 중에서 30만 명이 희생이 됐습니다. 30만이나 희생되었다는 기록은 전라북도 익산 출신 오지영 선생의 『동학사』에, 상해임시정부 최초 대통령이 되셨던 백암 박은식 선생님의 『한국 독립운동지혈사』에 명확하게 기록이 나 옵니다. 그 30만의 희생을 헛되이 날렸다는 생각, 그리고 여기 여러 어르신들도 많이 앉아계십니다만, 그 가혹하고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우리 선배님들이, 우리가 존경하는 스승님들이 목숨을 바쳐서 이 땅이 살 만한 땅이 되고 이 나라가 숨 쉴 만한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수없이 많은 희생을 하셨는데, 그런 희생이 하나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저 무고한, 꽃 피어나지도 못한 학생들을 포함 한 그 많은 분들의 희생을 지켜봐야 했다는 한 때문에 지난 한 달간이 많이 고통스럽고 힘들었습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설 용기도 없는데, 그 아픈 마음을 그대로 좀 전달해드리고 싶어서 섰습니다. 이 야기가 처음부터 너무 무겁게 풀려서 죄송합니다. 오늘 제 얘기의 무거운 것은 다 버리시고, 가벼운 거 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가벼운 이야기 하나 드릴게요. 제가 지금 한국학중앙연구원, 옛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데모를 주동했는데, 그때 대학원 박사과정 3학년이었습니다. 우리가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고 있는데 그 장학금은 정권의 장학금이 아니라 국민의 장학금이다. 우리를 가르치는 교수님들, 어용 행위 그만하시고 좀 물러가십시오. 그런 데모를 조직했어 요. 그때 그 소식이 『한겨레신문』에 나서 기자분이 국가연구기관 최초로 조직된 데모를 한다고 해서 주 목하고 취재를 오셨는데, 아무래도 학생들 사이에도 적극적인 친구도 소극적인 친구도 있잖아요. 소극적 친구들이 줄 뒤에 서 있었죠. 그런데 한겨레 기자 분이 사진을 찍으러 오셔서 갑자기 순간적으로 “뒤로 돌아주세요.” 했어요. 그래서 소극적으로 뒤에 숨어 있던 친구들이 『한겨레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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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본의 아니게 투사들이 됐죠. 왜 이런 말씀 드리는고 하니, 사실 저는 학자로서도 꼬래비고, 운동가로서도 꼬래비입니다. 실패한 혁 명만 가지고 30년을 쫓아다닌 멍청한 친구가 어디 있습니까. 성공한 혁명을 쫓아다녀야지. 어떻게 보면 제가 꼬래비 인생을 살았는데, 어떻게 무위당 선생님을 잘 모시게 되어가지고, 생명운동 진영에 몸을 담 게 돼서 지금 큰 스승님들, 선배님들 앞에 서게 됐습니다. 꼬래비가 순간적으로 방향이 바뀌어서 이렇게 서게 된 것을 양해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 말씀 제목이 동학 혁명 120주년에 다시 보는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입니다. 줄이면 세 가지 가 키워드일 것 같습니다. 동학, 무위당, 생명사상. 먼저 질문을 드릴게요. 그리고 오늘 이 강연을 듣고 가셔서 한 일주일 정도 반성을 좀 해주셨으면 좋 겠습니다. 여러분 동학에 대해서 아시는가요? 250~350만 명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학에 대해 아십 니까? 30만 명이 희생됐던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최대 민중운동이자 민족운동인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아십니까? 모른다고 하셔야죠. 왜냐하면, 교과서에 동학을 뭐라고 표현해 놓았냐면 서구 문명이 밀려오 는 속에서, 우리의 아이덴티티가 위기에 처하니까 그 서구문명,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서 동학을 만들었 다, 이렇게 지금도 교과서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동학 연구에 몸을 담고 『동경대전』을 2009년에 번역한 적이 있습니다. 2,3년 준비 과정을 거쳐서 책으로 냈는데, 거기에 서학에 대해서 수운 최제우 선생님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해 놓은 게 있었습니다. 수운 선생 당대 때도 동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시시비비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을 보고, 한울님 한울님 자꾸 얘기를 하고 특히 천주란 말을 한자로 자꾸 쓰니까 서학쟁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선생님의 가르침에는 동학과 서학이 어떤 관계이고 어떤 차이가 있고… 질문하니까 이렇게 간단히 답을 해주셨어요. ‘운즉일(運則一)이고 도즉동(道則同)이며 이즉비(理則非)라.’ 운은 하나요 도는 같으며 이치는 다르 다. 아주 간단하게 대답을 하셨는데, 세 가지 중에 두 가지가 같습니다. 대동소이죠. 운이란 것을 학자 들이 풀어서 뭐라고 하냐면, ‘모더니티’라고 합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요청으로써 서학이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거나 동학이 등장한 거나 시대적 요청으로써는 똑같다. 더 중요한 건, 도즉동이라 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서학이 추구하는 궁극적 길이나, 그 서학은 지금의 천주교, 가톨릭입니다. 가톨 릭이 추구하는 궁극적 길이나 내가 가르치는 동학이 추구하는 궁극적 길은 똑같다. 도의 보편성을 얘기 하신 거죠. 그런데 이치는 다르다. 이치는, 따져 보니까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은 다 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 다음 대목에, 나는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도를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이 것을 서학이라고 할 수 있느냐? 동학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동에서 태어나서 동에서 받았다는 이 야기는 상황성이라고 볼 수도 있고 주체성이라고 볼 수도 있죠. 지금 바로 이 자리죠. 그래서 제가 동 학을 제 나름대로 이렇게 풀어 봤습니다. 1860년에 등장했던 동학은 제 나라 제 땅에서 제대로 된 생각 을 가지고 제대로 된 세상과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사상이다. 그런데 지금 제대로 된 세상입니까?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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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제대로 된 세상인가요? 아닌 것 같습니다. 따라서 1860년에 수운 최제우 선생 님께서 꿨던 꿈은 아직도 미완성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서학을 100% 인정하면서도 나는 내 길을 갈 수밖에 없어 라고 하는. 열려 있으면서도 자기 주체성을 갖는, 이게 동학인 것 같아요.
그런데 동학을 해온 수많은 선배들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소외되고 압박받고 배제당해 온 역사가 우리 역사인 것 같습니다. 이제 120년이 된 지금, 다시 되돌아봐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닌가. 두 갑자라는 것 이 바로 그 진정한 의미를 되물어서 살려내는 새로운 첫 출발의 해로 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동양에는 예로부터 60간지 중에 ‘갑(甲)’자가 들어가는 해에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전통적 사고 가 있습니다. 올해가 마침 ‘갑’자가 들어간 해네요. 저희들이 ‘세월호 참사’라는 큰 비극을 겪었는데, 그 비극이 주는 교훈과 어떤 비전이 있다고 한다면 올해 이 갑오년에 정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것이, 그 한을 품고 죽은 분들의 남은 한을 해결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갑’자의 의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런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사상이 없이, 준비가 없이 되는 게 아니지요. 미래를 우리가 꿈꿔야 하는데,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가려면 어떤 사상과 그 에 바탕한 준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120년 전에 동학농민혁명이 어떤 준비와 어떤 사상 을 가지고 혁명으로 꽃피어났던가 하는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께서 당신이 동학을 창도하는 이유를 표현한 대목이 1861년에 그분이 세상을 향해서 이 길대로 가야 한다는 선언을 한, 「포덕문(布德文)」을 통해서 선포하면서, 거기에 수운 선생 자신이 동학을 만든 이유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국(我國)은 악질(惡疾)이 만세(滿世)하여, 나쁜 병이 가득차 서, 민무사시지안(民無四時之安)하니, 모든 백성들이 한시 한때도 편안한 날이 없으니, 시역(是亦), 이 또한, 상해지수야(傷害之數也)라, 생명들이 다 상처를 입는 운수다. 이런 표현을 하고 있어요. 밖으로는 서세동점이라는, 서양 열강의 침탈 위기, 안으로는 삼정문란이라는 내적 위기, 여기에 콜레 라와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들이 10년 간격으로 유행하고, 전염병이 유행하면 기근과 흉년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1860년, 동학이 창도될 그 무렵에, 이 땅의 민초들은 단 한 때도 편안하게 숨 쉬고 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 생명들을 건지기 위해 동학을 만들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동학 은, 요즘 말로 표현한다면 120년 전의 한살림이고, 120년 전의 생명사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민초들 을 살리기 위해서, 그래서 살림의 가장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근거가, 수운 선생의 위대한 가르침 중 하 나가, 내가 가르쳐 주는 주문 21자만 열심히 외면, 네 안에 있는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생명을 찾을 수 있고 회복할 수 있고 늘 모시고 살 수가 있다. 시천주(侍天主) 할 수 있다. 그렇게 21자 주문을 제시하 죠.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는 주문 말입니다. 이 주문 얘길 하면 제가 사이비 교주가 될 것 같아서 주문 이야기는 조금 빼기로 하고, 거기에서 ‘시 (侍)’라는 내용 하나만 간단히 소개할게요. 「논학문」이라는 글에서 수운 선생이 해설했는데, ‘시’는 내 유신령(內有神靈)하고, 안으로 신령함을 가지고 있고, 외유기화(外有氣化)하며, 밖으로는 기가 널리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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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을 감화시키는 작용이 있으며, 일세지인(一世之人)이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라. 온 세상 사 람들이 옮기지 못할 것임을 철저히 깨닫는 데 있는 것이다. 이게 ‘시’의 해석입니다. 이걸 제 나름대로 간단히 얘기하면, ‘시’의 상태는 영성과 혁명이 통일된 상태, 자기완성과 이웃사랑이 통일된 상태예요. 내유신령이라는 게 자기 완성, 영성이라고 한다면, 외유기화는 이웃사랑, 세상 혁명이에요. 내가 늘 ‘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안으로 늘 신령스러운 상태를 유지하고, 영성의 상태를 늘 발휘할 수 있고, 밖으로는 그런 영성의 바탕에서 모든 사람을 요즘 말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한 단 계 높이는, 이게 ‘시’의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시’는 한국적 영성과 혁명을 통일시키는 사상입니 다. 그 ‘시’가 주문만 외면 가능하다고 했어요. 저도 해봤어요. 동학을 26년간 이론적으로만 공부하다 가 화악산 수도원에 가서 수련을 해봤더니 그 체험이 오더라고요. 그 상태가 뭐냐면, 원래 우리가 사실 은 ‘시’의 상태로 태어납니다. 사욕, 사념, 잡념이 없는 천진난만함을 갖고 원래 태어나잖아요? 나와 남이 없어요, 어렸을 때는. 그런데 이 문명이라는 게 자꾸 ‘나’라는 것을 형성시키잖아요. 개체로써 나. 나의 욕심, 소유, 영역, 세계… 이런 것들을 자꾸 형성시켜요. 그 ‘나’를 지키기 위한 온갖 욕심들이 발동되잖아요. 그런데 주문수련 해보니까 그 나와 남을, 또는 나의 참된 모습을 가리던 것들이 주문수련 속에서 다 녹아나서, 바깥의 어떤 신령한 기운과 저와 합일하는 순간에 스파크가 일어나면서, 여러 가지 신비한 체험들이 오더라고요. 이렇게 모든 사람이 간단한 13자 주문, 21자 주문 수련만 하면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양반이나 상놈이나. 그러면서 또 하나, 너희들이 바로 그런 존재다. 수운선생의 가르침입니다. 양반이나 상놈이나 어른이나 어린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가 다 시천주 상태로 태어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 람은 제 안에 가장 성스럽고 거룩한 존재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파고드느 냐면, 신분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시대에, 수운 선생님이 그 도를 얻으시고 나서 첫 번째 하신 일 이 여자 종 두 명을 해방시키잖아요. 왜? 시천주를 하고 있으니까. 한울님이니까. 그래서 한 사람은 수 양딸,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죠.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인가. 역사학자의 버릇 가운데 제일 나쁜 게 무조 건 따지는 겁니다. 따져봤어요. 1863년, 수운선생이 살아계실 때, 동학이 너무 거대한 속도로 퍼져 나 가니까 경상도 상주에 있는 도남서원과 우산서원이라는, 동학을 탄압, 배척하는 서원들 간의 연락문서에 ‘동학은 신분의 등위가 없어서 술장사하고 백정들이 좋아하고, 남녀의 차별이 없어서 홀아비와 과부들이 좋아하고…’ 굉장히 악의적인 표현이죠, 하지만 굉장히 상징적이죠.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서로 도 우니 가난한 사람들이 좋아한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은데, 그 다음 대목이 ‘당시에 이 세상이 이대로 가선 안 된다고 고민하는 일부 호기심 많은 지식인들도 다투어 동학에 뛰어들었다.’ 1860년 문서에 나 오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시천주가 결국은 우리 근대 한국의 한국적 평등사상으로 정립이 된다는 증 거를 발견할 수 있죠. 이 문서 내용은 갑오년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충청도 서산에서 농민군으로 활동했다가 가까스로 살 아남은 홍종식이라는 분이, 1920년대에 후배들에게 증언을 합니다. 「동학난 실화」라고. 후배들이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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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죠. “선배님은 어떻게 갑오년 동학혁명에 뛰어드셨습니까.” “동학에 뛰어들면 우선 첫째는 굶는 사람 이 없었다.” 유무상자죠. “또 하나는 동학에 하루 늦게 들어가면 하루 늦게까지 상놈으로 있고 하루 먼 저 들어가면 하루 먼저 양반이 된다. 그런 말을 들어서 양반과 상놈들이 서로 맞절을 한다.” 동학에 들 어가면 굶는 사람이 없고 차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들었다고 대답했어요. 여러분 중에 매천 황현 선생이라고 아시는 분 계실 겁니다. 그분이 제가 볼 땐 진정한 보수주의자라 생각합니다. 보수적 가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셨으니까요. 그분이 갑오년의 상황들을 기록한 『오하기문』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역사책을 남겨놓으셨어요. 그게 최근에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 2010년에 순국 100주년 학술대회가 있 어서 그때 『오하기문』 속에 나타난 매천 선생의 동학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다시 분석을 해봤어요. 그랬 더니 어떤 대목이 나오느냐면, 양반과 상놈이 한집에서 동학에 뛰어들어서, 어제까지는 분명 나으리고 종이었는데, 오늘부터는 동학에서 서로 신도 아닙니까. 양반이 종한테 맞절을 하니까 종이 견딜 수가 없 는 거죠. 어제까지 주종관계가 아무리 동학에 뛰어든다 해서 어떻게 갑자기 바뀔 수 없는 거잖아요. 그 래서 그 절을 못 받고 노비들이 도망간다. 그런 대목이 수없이 나옵니다. 이처럼 동학을 배척하고 탄압 하고 비판했던 보수 지식인으로부터도 동학 조직의 평등한 그런 내용들이 아주 풍부하게 나옵니다. 바로 그런 부분이 갑오년에 또는 1860년부터 1894년까지 모든 민초들이 동학에 다투어 뛰어들게 된 결정적 요인이 아닌가. 시천주라는 만인평등 사상, 유무상자라는 공동체적 요소.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동학에 끌어들인 결정적 요인이 됐다. 그렇게 시천주를 수운 선생이 말씀해주셨지만, 너무 급속도로 사람들이 뛰어드니까 1863년 12월에 체포되셔서 1864년, 지금부터 150년 전에 대구 장대에서 처형을 당하시죠. 처형당한 뒤에, 스승이 가시니까 그 스승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 이 분이 38년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동학사상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기르고 조직을 재건하고 경전을 집성하고 전국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신 거죠. 38년 동안. 이 분은 동학에 뛰어든 순간부터 수배자가 되서 돌아가 신 날까지 그런 삶을 사셨어요. 제가 언젠가, 2002년에 우리쌀 살리기 한창 하던 때에, 그런 얘기를 얼 핏 한 적이 있어요. 해월 선생이 38년 준비했는데, 우리가 1,2년 우리쌀 살리기 해서 어떤 결과가 안 나온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자, 이런 얘기도 했었습니다. 1861년에 동학에 뛰어드셔서 1898년에 처형될 때까지 수배자,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 동학을 퍼뜨리 죠, 조직을 하고. 전국에 해월 선생님이 숨어 계셨던 곳이 250군데 정도 된다고 합니다. 대단하죠. 어 느 곳은 하루 저녁 주무시고 새벽에 가신 곳도 있고, 몇 개월 숨어계신 곳도 있고, 250군데를 전전하시 면서 동학이라고 하는 120년 전의 생명사상을 퍼뜨리고 그 생명사상에 공감하는 지도자들을 양성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동학농민혁명이 한참 진행될 때에도, 충청북도 옥천 청산의 문바위골에서 수련과 공부를 시킨 거예요. 전쟁통에도 공부하고 수련시켰다! 저흰 데모할 때 수련, 공부 못합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거죠. 전국 각지에서 농민군 지도자, 대접주, 접주들이 봉기해서 난리가 나고 있는데도 교대로 올라오게 해서 수련을 시켰더라고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저희들이 오늘 한국사회를 이렇 게밖에 못 바꾼 이유가, 우리의 수련과 영성,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해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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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쨌든 갑오년 혁명의 정국 하에서도 제자들을 끊임없이 공부시켰던 어른이 해월 최시형 선생이었어 요. 또 1889년, 90년 사이에 경북 김천 복호동에 숨어계시면서 여성 수도규칙을 선포하시죠. 「내칙」과 「내수도문」. 다가올 시대에 역할 해야 할 여성들의 위상을 확실히 보여주는 수도규칙인데요, 지금 한국 근대사가 얼마나 왜곡됐냐면, 한국 근대 여성운동은 사실 그 「내칙」, 「내수도문」에 뿌리가 있다고 봐지 는데, 근우회가 우리 여성운동의 시작이라고 되어 있죠. 동학이 뭘 했다라는 것은 아직도 얘기가 안 되 고 있습니다. 그 「내칙」, 「내수도문」에는 가장 소중한 생명을 어떻게 기르고 잉태하고 가꿔야 될까, 그 런 내용들이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기억하고 싶은 내용 중 하나가 어린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칙」에 나오죠. 저도 어렸을 때 저희 집 거실 윗목에 대나무 회초리가 항상 세 개 정도 걸려 있었어요. 잘못하면 회초리 맞고. 옛날에는 애들은 때려서 키워야 한다 는 게 전통이었던가 봐요. 해월 선생, 전봉준 장군 때는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던 것 같 아요. 그런 광경을 많이 보셨겠죠. 그러니까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 리는 것이다. 한울님은 생명의 기가 꺾이는 것, 상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 리고 그와 관련해서 여성들에게 계속 강조하셨던 내용이, “도가에 손님이 오셨으면 손님이 오셨다고 말 하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해라.” 한울님이 강림하셨다는 것을 실천하신 산 증인이 여기 와 계십니다. 최정환 선생님 계시죠? 식당하시면서 ‘집에 오신 손님을 한울님으로 모시면 다 먹여줄 거다’ 라고 무위당 선생님이 말씀하셨다고 했잖아요. 처음에 그 대목 듣고 무위당 선생님의 오리지널인 줄 알 았더니 해월 최시형 선생의 오리지널이었더라고요. 도가에 손님이 오셨거든 손님 오셨다고 말하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해라. 이런 내용들이 해월 선생님 말씀 속에 나옵니다. 1888년은 우리 조선 땅에 대가뭄이 드는 해입니다. 무자년(戊子年) 대흉년은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굉장히 큰 가뭄이었어요. 전라도, 충청도 쪽은 거의 황토밭으로 변해 버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굶 어 죽어갈 수밖에 없었죠. 그때 저희들이 아주 귀중하게 생각하는 해월 선생님의 ‘밥’에 관한 법설이 나 옵니다. 무자대흉년 때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온 우주의 이치를 안다’는, 만사지가 식일완이라는 법설이, 기록을 찾아보니까 무자 대흉년 때 나온 법설이었어요. 그럼 이건 뭘 의미하죠? 해월 선생 말 씀이 상황이라든지 구체적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장 절박하고 절실하 고 간절하게 무언가를 꿈꾸고 그리워한 그 시기에 나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880년대 후반에 청주를 지나가시면서 서택순이라는 제자 집에서 하루 주무시게 됩니다. 건넛 방에서 밤새 베 짜는 소리가 들리기에 제자에게 무슨 소리냐 물었더니, 그 제자가 아직 감을 못 잡으셨 던 모양이에요. ‘제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립니다’라고 답을 했어요. 해월 선생이 굉장히 안타까워하셨을 것 같아요. 혀를 끌끌 차셨을 것도 같고. “어떻게 저게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냐. 한울님이 베를 짜 는 소리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해월 최시형 선생님께서 동학의 역사, 한국 근대사에서 하신 역할은 무엇이냐면, 모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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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거룩한 한울님이라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더욱 더 구체화시키고 사회화시키고 대중화시키고 확대시켜 서, 모든 신분 계층, 계급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한울님으로 드러나도록 아주 실감나는 말씀으로 전파해 주시고, 또 하나는,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에서 더 나아가서 모든 만물이 다 거룩한 한울님을 모신 존 재다, 이렇게까지 나아가셨어요. 그 내용이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최시형 선생의 역할인데, 이 최시형 선생을 오늘에 저희가 기리고 뜻을 이어받기 위해서 공부해야 할 큰 스승이신 무위당 선생님이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이 한창이던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주에 해월 선생과 동학을 무지 좋아하시는 도사님 한 분이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연락이 되어서 갔더니 원주 어디 2층 횟집에 박준길 선 생님과 두 분이 걸게 생선회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시더라고요. 한 서너 시간 말씀을 드렸어요. 이 첫 번째 만남 때 여러 말씀을 들었는데, 첫 번째 말씀이, “너는 어떻게 해월 선생을 연구하게 됐냐? 남들 은 다 전봉준에 미쳐서, 혁명에 미쳐서 황토현에 가고 그러는데, 어떻게 너는 해월 선생을 공부하게 됐 냐?” 이걸 여러 차례 물어보셨는데, 그 당시만 해도 그 의미를 잘 몰랐어요. 그렇게 뵙고 1994년에 돌 아가실 때까지 한 달에 한두 번, 서울에서 원주로 왔다 갔다 하면서 무위당 선생님의 가르침과 동학에 관한 이해와 해월 선생님에 관한 이해를 듣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중간에 제가 궁금했죠. 저는 무위당 선생님을 만나 뵙고 뿅 갔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을 뵙기 전까지는 한 번도 제가 동학을 사상적으로 공부하는 것에 대해서, 해월 선생님을 연구하는 것에 대해서, 선후배나 학계에서 따뜻한 대 접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1987,8년 무렵까지. 전부 혁명해야 된다고 하니까. 시대 상황이 그랬잖아 요. 너무너무 외로웠죠. 근데 저를 격려해주시고 지지해주시는 스승님을 만나니까 뿅 간 거죠. 그 다음 에 찾아뵙고 해월 선생님을 공부하게 된 동기를 말씀드렸죠. 1980년 군대에서 5.18을 겪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야학 운동을 하다가, 처음에는 한 개인에 대한 증오가 너무 심해가지고 대학생 후배들과 똑같이 결사대를 만들어서 쳐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야학운동을 하다 보니까 그게 한 개인의 문제만이 아 니고 한국 근현대사와 관련 있고,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이 있어서, 대학원 와서 공부해보니까 이상하게 해월 선생에 대한 연구가 하나도 제대로 없더라. 왜 그런가, 그런 것이 궁금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는 내용의 말씀을 올렸지요. 두 번째부터 찾아뵈면서 화제가 바뀌었습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저에게 내주셨던 숙제가, ‘전 모’를 사랑해라. 근데 거의 한 30년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100%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 그 말씀을 들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지금은 한 30%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가 지금 남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준석 씨만의 잘못 이 아니잖아요. 저의 잘못도 있거든요. 왜, 우린 하나로 연결돼 있으니까. 직접적으론 안 보이지만 무수 한 보이지 않는 그물망으로 우리가 연결돼 있잖아요. 1980년 5월의 그 문제도 사실 우리 모두와 연결돼 있죠. 물론 제일 책임을 져야 하고 제일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있지만, 우리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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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그것을 해월 선생은 한 포태라고 하셨어요. 그건 조금 짐작이 됐어요. 그래서 지금은 30%는 사랑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나머지 70%를 채우는 게 굉장히 큰일인데. 어쨌든 ‘전 모’를 사 랑해라,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그게 나중에, 뭐로 연결되냐면, 저에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정신문화연구 원에서 제가 3관왕을 했어요. 첫 번째가 ‘어용 교수 물러가라’ 데모해서, 『한겨레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났죠. 그리고 두 번째, 그 무렵이 북방외교, 올림픽을 전후해서 사회주의권 국가와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해서, 학계와 사회과학서적 출판계에서 북한바로알기 운동을 전개했어요. 북한에서 나온 문학, 역사, 종 교책 여러 가지 것들을 찍어서 공급하는 일들을 했는데, 그 중에 제가 했던 일이, 청년사라는 출판사에 서 나온 『조선전사』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나온 게 33권인데, 17권까지가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이에요. 저희도 얼마나 소심한지, 18권부터는 못하고 17권까지만 찍어서 보급하는 것을 했어요. 정신 문화연구원에서 보급책을 제가 맡았죠. 두세 달 지나니까 어느 날 사무국장이라는 분이 오라고 해서 갔 더니, 이러이러해서 네가 리스트에 들어가 있으니,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당분간 나타나지 마 라. 그래서 두 번째 걸리고. 세 번째는 그때 또 잘 아시다시피 6월 항쟁이 가져온 성과 중 하나가 전문 직 노조들이 생기잖아요. 정신문화연구원 노조가 생기고 3개월 파업을 주도했어요. 이리 걸리고 저리 걸 려서 결국은 10년 동안을 학위논문을 쓸 수가 없고, 국가연구기관에 합격했지만 노동조합 파업했다고 불합격되고, 그래서 소송도 하고. 아무것도 안 됐습니다. 1987년 이후부터 96년까지. 그러니까 사람이 이상해지잖아요. 원주 한 번씩 내려가면 제 모습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죠. 선생님 보시기엔. 그럴 때 한 번은 선생님이 “맹수야, 너 운동가의 로망을 알어?” 묵묵부답이죠. 제가 하도 딱해 보였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아요. “운동가는 꿈꿨던 일이 100개가 있을 때 99개는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마 지막 한 개가 남았을 때 그 한 개도 될똥말똥 할 때 그런 데서 절망하지 않고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 나 아가는 게 운동가여. 니가 운동가냐?” 이러시면서 난을 하나 쳐주셨어요. 아직 선생님 서화집 도록에 안 보실려 있습니다. 내유천지(內有天地)하면 외무소구(外無所求)라. 네 안에 이미 천지가 있는데 바 깥에 그거 안 풀린다고 해서 뭐 하나 걸릴 게 있느냐. 네 안의 천지를 믿어라. 그래서 제가 그때 지도 교수를 바꿔라 자퇴해라 하는 압력에 결국은 때려치우려고 선생님 찾아뵈었을 때, 쫓아내면 쫓겨날망정 절대 니 손으로는 쓰지 마라. 그러시면서 그 글을 주셔서, 버텼죠. 결국은 그래서 이 자리에까지 왔습니 다. 무위당 선생님을 그런저런 인연을 통해서 뵈면서 몇 가지 질문을 드린 적이 있어요. 선생님께서는 언 제부터 동학에 대해 관심 갖고 알게 되셨냐 했더니 한국전쟁 전후에 원주 선생님 댁 옆 동네에 오창세 라는 친구분이 계셨대요. 이분이 아주 독실한 천도교인이었던 것 같아요. 해방 직후에 천도교는 민족자 주노선을 세워서 김일성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고 그런 민족자주노선, 그리고 정당은 근로인민당이라는 당에 주로 많이 가셨대요. 나중에 보도연맹 사건에 얽혀서 오창세라는 분을 비롯해서 천도교인들이 많이 희생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 오창세라는 친구분을 통해서 동학과 천도교 얘기를 많이 듣고, 우리 민족사 에서 동학과 천도교가 민족을 위해 가장 모든 걸 다 바친 종교였다는 생각을, 20대 때부터 이미 동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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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 관심과 나름대로 이해를 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제가 전북 익산에서 야학운동을 할 때 어떻게 해서 여러분 잘 아시는 이철수 화백과 인연 이 됐어요. 그 부인 되시는 분이 원불교 신자셨어요. 제가 교무고. 교무와 신자의 관계로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이철수 화백과 가끔씩 연락도 주고받고 했는데, 나중에 봤더니 장 선생님이 동학연작이라는 작품 을 이철수 화백이 제작할 때 글을 다 쓰셨더라고요. 남들이 전혀 관심 안 가질 때, 80년대 초반 그 작 업을 하셨더라고요. 무위당 선생님께서 이렇게 동학에 관심을 가지신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제 느낌 은 처음에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정말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사 회를 만들려고 한다면, 공간적으로는 잠시 후에 김종철 선생님이 세계사적 상황도 말씀해주실 거라고 보 이고요, 시간적으로는 동학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120년 전에 해월 선생이 120년 후에 무위당 선생으로 부활하셨다. 120년 후 무위당 선생님 이 120년 전에 태어났다면 해월 선생님 같은 분이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두 분 사이에 가장 공 통적인 것은 ‘생명’이라는 가치죠. 그리고 두 분 모두 가장 밑바닥의 민초들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자상 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셨어요. 해월 최시형 선생의 설법 중에 꼭 기억해서 말씀드려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해월 선생께서는 삼십 몇 년 동안 이러셨대요. “내가 젊었을 때 머슴살이했는데, 그때 머슴놈 머슴놈 차별하는 게 한이 되었다. 사람이 하늘인데 어떻게 그렇게 차별할 수 있느냐.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해라.” 근데 그런 삶의 모습이 무위당 선생님 삶의 모습과 굉장히 겹치는 것 같습니다.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 민초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저항입니다. 생명은 저항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생명의 특성을 다양하다, 얽혀 있다, 관계성이다, 순환한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동학 답사 하면서 생물학을 전공하신 분들이 참여 하신 적이 있었어요. ‘저항’이라는 것을 생명의 특성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했더니, 항상성(恒常性)이 라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생물학 하신 분이. 모든 생명체는 비정상적 상태에 있을 때 정상적 상태로 가기 위한 몸부림을 친다는 거죠. 이게 우리 사람으로 하면 부당한 억압과 체제와 잘못된 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것과 같아요. 다시 말하면 그 부당한 것을 뚫고, 어떻게 정상적 상태를 회복하려고 할까. 예를 들어, 지금 대한민국이 정상적인 상태입니까? 저는 엊그저께 학생들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종교인인 저를 포함해서, 기성세대 믿지 마라. 전부 사기꾼이다. 전부 다 사기 친다고 생각하고, 너희들의 몸으 로, 머리로, 손발로 하나씩 확인해서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생명이 부당하게 억압받고 왜곡당하고 그런 상태에 있는 지금 이 순간에 그 것을 정상적으로 되돌리려고 하는 항상성, 저항성을 회복하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 다. 그런 점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님과 무위당 선생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갑오년에 전봉준이 병사(兵事)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러면서 동학 도인들이 타살 당한다 는 소식을 들으시고, 호랑이가 집에 쳐들어와서 사람을 물어죽이고 있는데, 앉아서 죽을 수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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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워라 하셨습니다. 이 얘기는 제 얘기가 아닙니다. 김구 선생의 『백범 일지』에 나옵니다. 모든 학자들이 그걸 갑오년 9월로 해석했습니다. 아니더라고요. 일본 가서 자료를 찾 아보니까. 그리고 9월로 해석할 수 없는 게, 김구 선생이 1893년 가을에 황해도에서 출발했어요. 옥천, 보은까지가 아무리 어린애 걸음도 석 달이 안 걸려요. 그런데 전부 갑오년 9월로 해석해서, 친일파들만 의 기록에 나오는 그런 것만 가지고 해월 선생과 전봉준이 대립한 것으로 말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동학 의 역사가 잘못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틀렸습니다. 아니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해월 선생님이 폭력을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해월 선생님이 어떤 명령을 내렸느냐, 우리 동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사람의 목숨만은 해치지 않으며, 행진하면서 지나 갈 때 남의 물건이나 민폐를 절대 끼치지 말고, 충신과 효자와 열녀와 존경받는 학자가 있는 동네에는 절대 주둔하지 마라. 이것 때문에 갑오년에 뜻있는 지식인과 부자와 양반과 전직 현직 관료들이 몰래 뒤 에서 다 동학농민군을 도왔더라고요. 제가 2010년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라는 대대장의 후손 댁을 찾아서 압수 해갔던 동학 문서 35건을 찾아서 국내에서 전시한 적이 있어요. 거기에, 전라도 여산부사가 전봉준을 도왔던 대목이 나옵니다. 군량미 500석 가운데 300석을 제공하고, 짚신 3천 켤레를 제공하고, 농민군 지도부가 지나가니까 소 일곱 마리를 잡아서 걸게 대접했다고 말입니다. 갑오년에 생각이 있는 모든 사 람들이 혁명대열에 가담했더라고요. 왜 그랬냐. 동학이 생명운동이었으니까.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운동 이었으니까. 바로 그런 부분에서 생명운동 하는 저희들이 더욱 더 절차탁마해야 할 중요한 부분 중 하나 가, 생명이 지니고 있는 항상성, 저항성이 아니겠는가. 그런 부분을 영성과 결합시켜서, 자기 수련 공부 와 결합시켜서 탁월한 모범으로 이 땅에 보여주고 가신 두 분의 스승님이 바로 해월 최시형 선생님과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분들의 삶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들도 그 길을 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말씀드리면서 제 오늘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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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소국사상의 흐름과 무위당의 생명사상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오늘 제가 이런 자리에 서서 말씀을 드리게 됐는데, 굉장히 외람되단 생각이 듭니다. 박맹수 선생님은 무위당 선생님을 한 30% 이해한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전 아무개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가끔 생각하면 가엾단 생각, 불쌍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듭니다만, 그런 데 사랑까지는…. 그래서 제가 오늘 무위당 선생님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무위당 선생님의 사상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할 자격이 있는가, 아까부터 고민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오전에 집에서 나오려고 하니까 어느 신문 기자가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모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겁니까? 그래요. 와서 들으면 될 거 아니냐, 그러니까 신문사 시간 마감 때문에 지금 기사를 써야 된다, 미리 좀 말씀해주시면 기사를 쓸 수 있겠다. 그래서 몇 마디 주절주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마 한겨레신문에 내일 아침에 기사가 나오지 싶어요. 모 르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지만, 똑같은 이야기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참 침울한 나날입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결국 우리가 역사적 과제를 제대로 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불행한 사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금년이 갑오 2주갑인데, 동학혁명 당시 제기되었던 근원적인 물음, 역사를 통해서 후손들이 이걸 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내외 조건들에 의해서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해결의 전망도 시원하게 보이지 않는 그런 상황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 다. 결국은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이런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우리의 정신 적인 혹은 사상적인 빈곤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 공부도 제대로 해야 하겠지요. 오늘 박맹수 선생 강 연 통해서 중요한 몇 가지 점에 대해 계몽을 받았습니다. 해월 선생이 전봉준 장군의 1차 기포에 대해 서 반대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얘기, 중 요한 이야기 같습니다. 저도 금년이 갑오 동학농민혁명 2주갑에 해당되는 해이기 때문에, 명색이 지식인의 입장에서 우리 역 사를 다시 한 번 돌이켜봐야 하지 않겠는가는 생각에서 요즘 역사책을 이것저것 들춰보고 있습니다. 보 면서 확인하는 것은 청년 시절에 배웠던 역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그 사이에 역사학계에서 많은 새로운 업적이 있었던 것 같고, 관점 자체도 상당히 달라진 점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젊었을 때, 즉 70년대나 80년대에 읽고 배웠던 한국근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지금도 유효한 것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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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그런 생각도 새삼 듭니다. 장일순 선생님 20주기가 마침 동학 2주갑에 해당되는 해인데, 이게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에 는 너무나 절묘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장 선생님의 사상의 기본적 뿌리는 해월 선생님이셨 던 것 같아요. 끊임없는 자기수양, 만물에 대한 존경심, 이것을 바탕에 깔고 생명과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말씀하셨는데, 그런 점에서 장 선생님의 전생이 어쩌면 해월 선생님인지도 모르고, 해월 선생님 의 부활하신 모습이 무위당 선생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역사라는 게 굉장히 소중한 역사입니다. 비록 실패한 역사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또 실패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죠. 제가 보기에는 무척 소중한 역사입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서 어쨌든 이 땅을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보려고 애써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을 위해서 분투 해온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결국 해월 선생의 부활한 모습이 아닌가,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오늘은 제가 좀 어울리지 않게 학문적으로 접근해볼까 합니다. 학문적이라는 말은 거창한 말이지만, 무위당의 사상과 삶을 근현대사의 문맥 속에서,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그런 뜻입니다. 무위당의 삶과 사상이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런 각도에서 조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아까 박맹수 선생이 동학농민전쟁에서 30만 명이 희생당했다고 했죠, 당시 인구의 1/3 내지 1/4이 혁 명운동에 참여했다고요. 사실 세계사적으로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보던 농민반란하고도 성격이 상당히 다 르죠. 우리나라에서 그 이전에 있었던 민란과 비교해서도 다르고요. 어쨌거나 동학농민전쟁은 사상적으 로 아주 잘 무장이 된 민중반란이었습니다. 그것은 3,40년간 해월 선생께서 지하에서 잠행하면서 끊임 없이 민중을 가르쳤던 토양, 거기에서 길러진 토양이 그런 열매를 맺었다고 할 수 있겠죠. 저는 전봉준 장군의 사상과 해월 선생의 사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해월 선생이나 수운 선생이나 결국 근본적으로는 조선이라는 오래 지속되었던 나름대로 확고한 민본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었던 왕조국가의 유교적 이념 속에서 숙성된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사상을 일궈낸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글 읽는 선비들이 정치를 하고 나라를 통치한다고 하는, 세계에서도 거의 유례가 없는 그러한 전통 속에 서 면면하게 지속되었던 덕치, 민본주의 사상과 동학사상은 사실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었던 거죠. 조선왕조가 망한 왕조이기 때문에 그 정신적인 유산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반드시 장구한 시간에 걸쳐서 계속되었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500년 지속되었 다는 것이 그렇게 흔한 예는 아니고, 임진왜란 이후에 나라가 많이 혼란스럽고 특히 정조대왕 사후에는 외척들의 발호 때문에 나라 전체가 엉망이긴 했지만, 어쨌든 동학농민반란이라는 엄청난 세계사적 사건 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유교 국가에 잠재되어 있던 실력, 사상적 토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 다. 그것이 오로지 수운, 해월 선생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수운 선생 자신도 자기를 유생이라고 생각했죠. 매천 황현 선생,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 선생 같은 분은 동학군을 매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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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직접 토벌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5세 소년이었을 때 자기 아버지가 이끄는 동학 토벌대에 참가하여 전투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군의 입장에서 보면 적이죠. 그런데 자세히 들 여다보면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는 사정들이 있습니다. 황현 선생이나 안태훈 선생 같은 분도 동학군 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충군애국이라는 정념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유교국가의 선비로서 민본주의적 관점을 통해서, 백성이 죽 창을 들고 나올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우리는 조선왕조가 굉장히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오로지 중앙에 집중돼 있는 국가였다고 생각하기 쉬 운데, 실상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들이 많았습니다. 소위 재지사족이라고 하는 선비들이죠. 지역에 거주하는 이 선비들이 향청이나 향교 등등 준 제도적인 조직을 통해서 수령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충고를 하고 간섭을 했습니다. 중앙정부로부터 임명을 받아 부 임해온 수령들은 어차피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현지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엉 뚱한 짓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러면 그때마다 지방 선비들은 여론을 모아서 수령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지방 선비들은 특히 조선조 후기로 갈수록 많이 타락하긴 했지만, 기본적 으로는 유생으로서의 소명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즉 자신들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소명감 말입니다. 문제는, 유교국가의 근본적인 한계, 즉 민중 자신이 스스로 를 다스릴 권리와 자격이 있다는 데까지는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죠.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 본주의죠. 그러나 지금 껍데기뿐인 민주주의보다는 그 시대가 현실적으로는 더 나은 점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조선의 사림들은 맹자 이래 왕도정치를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폭군이라면 쫓아내도 된 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백성의 살림살이를 거덜 내는 정치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비판했단 말이죠. 지 역에서부터 말이죠. 이런 전통이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동학혁명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인 움 직임도 결국은 이러한 유교적 민본주의 정치이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지 않은가, 저는 그렇게 생각 합니다. 좀 말이 되는 것 같아요? 지배층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서 밑으로부터의 민중의 요구를 압살해버립니다만, 물리력 앞에서는 도리가 없는 거죠. 죽창을 가지고 어떻게 현대식 무기를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봉준 장군도 아마 자기 쪽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다음 두 달에 걸쳐서 심문을 받습니다. 그게 전봉준 공초라는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심문관은 일본 영사와 조선 사법관리 두 사람이 맡아서 진행했습니다. 그 사람 들의 주된 관심은, 동학군 봉기에 대원군이 어느 정도까지 개입했느냐는 것을 캐내는 것이었던 같아요. 주안점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심문하는 도중에 심문자들이, 지금으로 치면 검사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전봉준 선생의 인격에 굉장히 감화를 받아요. 그래서 심문이 끝나고 재판으로 들어갈 때 일본 영사가 본 국정부에 상신을 합니다. 이 사람 죽여서는 안 됩니다. 굉장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사법 관리도 굉장히 애통해 해요. 당시 개화파 정권이 방침을 미리 정했기 때문에 별수 없이 사형선고를 내리는 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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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가지만, 굉장히 아까워합니다. 재판이 끝나고 나서 마지막에 이런 문답이 오갔다고 합니다. “할 말이 없느냐?” 전봉준 선생이 “내가 죽는 건 두렵지 않다. 다만 분한 것은 내가 역적으로 몰려서 죽는 것이 다.” 그러니까 심문했던 그 사법관이 장박이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랬다고 합니다. “누가 당신을 역적이라 하더냐? 당신 역적 아니다. 당신의 충군애국 정신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당신으로 인 해서 지금 조정에서도 조금은 정신을 차리려고 하지 않느냐.” 지금 대한민국 검찰과는 수준이 달라도 너 무 다르죠. 이런 전통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이라는 것, 세계사적으로도 독특한 것이거든요. 저는 공 부를 별로 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유럽 농민전쟁 같은 걸 보면 대개 평등까지는 이야기를 해요. 대 개 그 맥은 기독교 사상의 급진적인 흐름에서 나오는 것이죠. 인간은 누구든지 하느님의 형상을 받아서 태어났다. 그러니 당연히 누구나 평등하다. 태어날 때부터 양반이 어디 있고 상놈이 어디 있는가. 이런 논리는 서양의 민중반란에서 흔히 볼 수 있죠. 근데 동학사상이 보여주는 그런 심오한 궁극적인 진리까 지 이야기하는 경우는 보기 어렵습니다. 수심정기라든가 경천사상이라든가 그런 엄청난 사상적인 토대로 부터 거대한 민란이 일어난 것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습니다. 물론 당시 상황으로 봐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물밀 듯 쳐들어오는 서양 제국주의의 물리적 힘 앞에서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한 거죠.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결국 사회진화론을 수용했습 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이건 세계사의 항거할 수 없는 법칙이고 진리다, 그렇게 생각한 거죠. 단재 신채호 선생도 초기에는 사회진화론자였습니다. 박은식 선생도 그랬고요. 이런 이론에 입각하면, 사람이 버틴다는 게 힘듭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친일파가 되거나 상황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 길을 모색하 는 거죠.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은 실력에 의한 국권회복이라는 당시로서는 비현실적인 꿈을 꾸면서도 절 대로 굴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조선을 탈출해 중국으로 갑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 개하다가 결국 체포당하고 감옥에서 순사하셨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생각이 많이 바뀌죠. 사회진화론이 라든지 약육강식이라든지, 이것이 지금 현실적으로는 서양 세력의 지배를 설명해주는 논리는 되겠지만 이걸 우리까지 수용하면 우리가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서 투쟁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를 마련할 수 없다. 그래서 포기합니다. 그래서 국제적 민족주의, 혹은 민족적 국제주의, 이런 방향으로 사상적 방향을 재정 립하면서 나중에는 아나키즘까지 받아들입니다. 신채호 선생이 감옥에서 돌아가신 뒤 발견된 유품은 몇 가지 안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크로포트킨의 책이 들어있었다는 점입니다. 상당히 아나키 즘에, 그것도 민중의 상호부조와 연대에 의한 협동적 자립생활을 강조한 크로포트킨식의 아나키즘 사상 에 경도돼 있었다는 얘기죠. 여기에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결국 일제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받는 시대로 들어가고, 우여곡절 끝에 해방을 맞이하여 나라는 찾았지만 곧 분단되고, 전쟁 터지고, 휴전 후 이승만 정권 밑에서 신음하다가 4.19라는 빛나는 순간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1년 만에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짓밟혀버렸습니다. 그 뒤 근 30년 동안 군사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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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계속되다가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군들이 제시했던 역사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마침 내 1987년 6월 항쟁에서 열렸다고 할 수 있죠. 그 이후에 비로소 우리가 어느 정도 자주적으로 자기 정 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 사이 명색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두 차례의 민주정부에 의 해서 남북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획기적 조치도 나왔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또다시 구한말 이래의 뿌 리 깊은 반민족, 반민중적인 특권세력의 계승자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현실로 퇴행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히 말씀드릴 시간도 없고, 실력도 없어서 윤곽만 말씀드리면 대강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으로부터 근대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하 는데, 식민지가 되면서 산업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태동된다고 할 수 있죠. 소위 경제성장이라는 게 시 작되는 시대로 접어든 거죠. 그래서 그 경제성장으로 인해 근대적 물질문명이 조선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서 사람들의 삶이 전근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될 수 있다는 기대 혹은 환상이 지속 되는 한에 있어서는 우리가 우리의 역사적인 진정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민중이 나라의 실질적 주인이 되고, 그야말로 자립하고 자치하는 삶의 공간을 건설하는 것, 이게 바로 우리의 역사적인 과제라고 요약할 수 있죠. 어쨌든 그런 역사적 과제가 이미 120년 전 동학혁명 당시에 제시되었는데,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경제성장이라는 마약에 마취되어서 말이죠. 그 망각의 결과가 결국 이 세월호 사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녹색평론에서는 20년 전부터 그 이야기를 해왔습니다만, 이제 경제 성장은 안 되는 시대로 접어들었거든요, 세계적으로 그렇습니다. 왜냐면 서양 자본주의 근대라는 것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에너지거든요. 화석 연료 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입니다. 원자력도 따지고 보면 화석연료 에너지입니다. 석유 없으면 원전을 건설할 수도, 유지할 수도, 폐쇄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석탄과 석유인데, 그 중에서도 석유의 중요성은 막강하죠. 이미 70 년대 초부터, 1차 석유쇼크, 그리고 2차 석유쇼크가 발생했을 때부터 온 세계적으로 석유문명은 끝난다 는 게 예고가 되었었습니다. 그런데도 세계의 주류 정치, 주류 경제학에서는 이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 이지 않았습니다. 엉뚱하게 금융화, 즉 돈이 돈을 버는 카지노 도박 경제 쪽으로 세계경제를 끌고 감으 로써 30년 이상 버텨 왔습니다. 그러다 2008년 뉴욕에서 시작된 금융 붕괴 사태로 인해서 이것도 더 이상 갈 길이 없다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면 깨달아야 합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에너지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전혀 다른 문명을 새로이 구상하고 그 쪽으로 방향전환을 해야 했 는데, 지금까지도 못하고 있죠. 인식 자체도 없습니다. 여기는 좌파, 우파도 없습니다. 우파는 말할 것 도 없고, 좌파도 이 사실을 냉정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조금 더 인간적인 정치를 한다면 약간의 일자리는 더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더 갈 수가 없습니다. 석 유문명,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문명을 더 이상 지속했다가는 전면적인 환경파괴, 특히 기후변화 때문에 인류는 결국 절멸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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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제가 시골에서 오신 분한테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 벌이 없잖아요? 이렇게 신록의 계절인데도 꿀벌을 볼 수가 없어요. 도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시골에서도 벌을 볼 수가 없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냥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엄청난 문제입니다. 무조건 계속해서 성 장을 하면 된다고 하다가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꿀벌 없는 세상은 곧 생태계의 총체적인 죽음이 임박 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고식적인 방법, 즉 지난 수백 년 혹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해온 방법 을 계속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방향 전환을 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까 말씀드렸지만, 사상적 빈곤 탓입니다. 해답은 우리의 역사를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돌아보 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협동운동이라든지 생명운동이라든지, 이런 게 그냥 서 양에서 빌려온 게 아니고 자본주의 근대문명 속에서 시련을 겪다보면 궁여지책으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리 땅도 살아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면서 살아온 땅인 데 여기선 그런 사상적 뿌리와 흐름이 없었겠느냐, 그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동학 이후 우리 근대사의 전개를 겉핥기식으로나마 읽다가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이 책은 일본에서 나온 책인데, 여기에 실린 논문 중에 <근대 조선의 소국사상>이라 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조경달이라는 재일조선인 역사학자입니다. 이 글을 읽고 무릎을 쳤어요. 일본에서는 주류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메이지유신 직후부터 서양의 강대국을 모델로 나라를 발전시킬 것이 아니라 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 등 조그마한 나라들을 모델로 삼아서 일본을 근대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비주류지만 그런 흐름이 계속 존재해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사상가로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이라고 저널리스트로 활약했고, 전후에 잠깐 일본 총리까지 되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920년대에 동양경제신문이라는 신문의 주필이었는 데, 거기에서 일본이 진정으로 살려면 대만, 조선과 같은 식민지를 포기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세계열강들이 다 제국주의 세력화해서 식민지를 거느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무리한 일들을 하고 있다. 국제법도 어기고 세계를 위험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결국 세계전쟁밖에 없는데, 이 상황에서 일본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과감하게 조선과 대만을 포기하라고 주장합니 다. 그러면 오히려 일본이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세계에 대해서 대단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그 의 논리였죠. 그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의 이권을 버리면 서양 사람들도 몰염치한 짓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결국은 세계가 평화를 위해서 가게 될 것이다. 이런 논리를 폅니다. 굉장히 비현실적인 논리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실용주의적인 관점이기도 하죠. 군국주의를 향해서 폭주해 가면 결국은 전멸일 것이 분명한데, 그것에 제동을 걸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 는 게 현실적으로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일본에서는 사상적으로 그런 일련의 흐름이 있습니다. 일본의 전후 평화헌법도 결국은 그런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일본의 평화헌법의 골격은 맥아더 사령부에서 작성했다고는 하지만, 원래 일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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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한 헌법 학자들이 만든 헌법 초안이 있었고, 맥아더 사령부는 그것을 중요한 자료로 참고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헌법 초안을 작성한 일본 학자들은 이시바시 단잔으로 대표되는 소국주의 사상의 계승자로 볼 수 있다는 거죠. 하여간 이런 사상이 있는데, 다만 주류가 아니고 비주류이기 때문 에 잘 드러나지 않았고, 한국 언론에서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잘 몰랐던 거죠. 그럼 조선은 어땠는가. 식민지 하에서는, 지식인의 생각과 행동이 정치적으로 근본적인 제약을 받기 때문에 어떤 좋은 사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게 사실 현실화될 가능성이 거의 전무하고 따라서 리얼리티 가 없죠. 그런 점에서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왔던 우리 선배들을 생각하면 굉장히 비감스럽습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이라는 것은, 아무리 가혹한 상황에서라도 열심히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독립을 할 것인가, 독립한 뒤에는 어떤 국가 모델을 채택할 것인가, 어떤 식으로 우리나라를 인간다운 나라로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서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토론해야 하는 게 지식인의 임무입니다. 특히 동 양에서는 그런 면면한 전통이 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유교 전통에서 선비들, 글 읽는 사족들이라는 존 재는 나라 일을 생각하는 게 그들의 존재 이유 자체였으니까요. 그런데, 역사학자 조경달 교수가 쓴 이 글을 읽어보면 비록 식민지 치하였지만, 조선 근대에도 이런 사상이 계속돼 전승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조경달 교수는 명확하게 그런 말은 안했지만, 제가 조경달 교수의 논리에 따라 생각해보면, 동학농민전쟁에서 전봉준 선생 같은 지도자들과 농민군 자신들 이 생각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물론 그때는 다급한 상황이니까 우선 외국 침략자를 쳐부수고 국내의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을 척결해야 한다는 게 우선적인 목표였겠죠. 이미 한일합방이 되기 훨씬 전에도 일본 사람들이 조선에서 쌀을 많이 강탈해가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굉장히 핍박을 받았어요. 조선 지배층에 의한 가혹한 수탈 때문에만 고통 받은 게 아니고, 강화통상조약 이후에 소위 무역이라는 형태로 조선 민중의 경제생활이 근본적으로 위협을 받고 수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군산에 가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생긴 세관 있잖아요, 그 기록에 보면, 한일합방 훨씬 전에 세워졌어요. 거기를 통해서 미곡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농민들의 쌀이 많이 강탈당했습니다. 동학전쟁이 전라도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건 우연이 아닙니다. 곡창이기 때문에 더 많이 착취를 당했던 거죠. 농민 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서 자신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을 통절히 몸 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동학농민항쟁이라는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속에서 우리도 힘에 대해서 힘 으로라는 논리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학농민반란이 세계사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무엇보다 그 사상적인 탁월함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하니까, 우리도 힘으로 하겠다는 게 아니었다는 거죠. 물론 죽창을 들고 일어나서 싸웠지만 그 싸움은 단순히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맞선다는 게 아니었죠. 동학농민군이 목표로 한 것은 말하자면 인간적인 새로운 문명의 건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뚜 렷한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것이 확실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동학농민군이 내세운 기치, 즉 보국안민, 척왜양, 유무상자 등의 구호에 포함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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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철학적 입장을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보국안민이라고 할 때 나라 ‘국(國)’자는 고종이라는 임금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체계를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나라라는 것은 굳이 어느 특정한 국가 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정부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백성들이 사는 땅이에요. 그 땅을 떠나 면 갈 데가 없잖아요. 척왜양도 마찬가집니다. 그것은 특정한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정을 드러내는 게 아 니라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약자를 희생시키겠다는 비인간적인 논리, 그 세력에 대해서 항거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히 평등한 세상, 공생의 원리를 기본으로 하는 민중적, 인간적 세상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거죠. 이렇게 볼 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유무상자(有無相資)라는 개념입니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서로 도와서 살자. 이게 동학농민전쟁이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갖는 민중혁명이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상적 입장입니다. 그런데 견강부회의 논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유 무상자라는 것은 동학의 가르침 이전에 오랜 세월에 걸쳐 전승돼온 전통적인 농민의 인생관, 세계관입니 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같이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 이것은 고대 이래 국가가 생기기 이 전부터 농민 속에 집요하게 흐르고 있었던 기본적으로 풀뿌리 농민의 사고였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사회의 전통에 소국사상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결국 농민적 세계관을 근원적 뿌리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국사상이라는 건 결국은 패권을 차지하고 부국강병 해서 내가 살기 위해 약 자를 희생시키겠다는 노선이 아니고, 남들과 더불어서 평화롭고 소박한 삶을 살겠다는 사상입니다. 유교 적 정치이념도 따지고 보면 근본적으로 이 농민적 세계관에서 움튼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의 유교 정치의 이상도 패도가 아닌 왕도였잖아요. 조선의 유교사상, 정치사상에서도 그렇고, 동학 이래 우리나라 생각 있는 사상가들이 추구한 것은 대개는 패도도, 부국강병 노선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 려 친일파들, 그리고 지금 친일파의 후손들인 이 나라의 주류 지배계층들이 부국강병이니 뭐니 하는 쓸 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왔잖아요? 그래서 생각 없는 대중들도 덩달아 부국강 병이라는 턱도 없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요. 스스로 내면적인 수양을 통해서, 외적의 침입을 방비할 수 있을 만큼의 군사력만 가지면 되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중요한 것은 내적인 충실이다. 이게 원래 조선의 정통적인 정치사상이었습니다. 부국강병이 아니죠. 부국강병이라는 건 식민지 시대 이래 강자의 지배를 받아오던 중에서 한국 사람들이 자기도 모 르게 길들여진 잘못된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부국강병 논리는 일제 식민지 잔재의 하나라고 할 수 있죠. 일제 잔재 중에 또 하나 타기해야 할 게 하극상이라는 개념, 용어입니다. 하극상이라는 개념은 원래 조선사회에는 없었던 거예요. 단어 자체도 일본 사람들이 가져온 겁니다. 일본에서는 800년 동안 칼잡 이들이 지배해왔기 때문에, 아랫사람의 옳은 이야기도 그것이 높은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면 가차 없이 처형해버렸습니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가장 무거운 죄악이 하극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에서는 통속적인 사극에도 자주 나오고, 옛날 사료 같은 것을 보더라도, 임금 노릇하기가 정말 어려웠던 나라였습니다. 신하들이 끊임없이 임금한테 불편한 소리, 상소문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눈치 없이요. 조 선에서는 아예 하극상이란 말 자체가 없었어요. 어디까지나 그것은 식민지 후유증, 극복해야 할 유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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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래서 저는 소국사상이라는 것도 일본보다도 본시 조선의 전통에 더 자연스럽고 적합한 사상이었 다고 생각하는 거죠. 조경달 교수는 우리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소국사상가로서 두 분을 꼽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하고 민세 안재홍 선생이 그 분들입니다. 안재홍 선생은 해방 후 군정 때 민정장관을 하신 분인데, 1920년대 후반 에서 1930년대 초에 걸쳐 조선일보가 신간회 기관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조선일보 주필과 사 장을 맡고 계셨지요. 신간회라는 것은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전선으로 국내에서 독립운 동을 시도하던 대표적인 지식인 단체였죠. 안재홍 선생은 그 신간회를 주도하셨던 분이죠. 조선일보가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였습니다. 어쨌든 저도 전에는 이 안재홍 선생을 별로 주목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조경달 교수의 글을 읽고 찾아보니까 재밌는 발언이 많아요. 이분은 기본적 으로 농본주의자입니다. 물론 그 당시 농민이 80% 되는 나라이니까 농본주의는 아주 자연스럽지만, 실 은 그 당시에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많은 지식인들이 우리가 독립하면 공업입국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는 식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안재홍 선생은 원래 조선의 길(조선도)은 농민의 길(농민도) 이라고 명확히 말씀하셨어요. 그리하여 우리가 산업을 발전시킨다면 경공업과 전통적인 산업을 부활시켜 야 하고,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또 동시에 상호견제하면서 사는 공생의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 제가 개인적으로 반가웠던 것은 이분이 덴마크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많이 표명하셨어요.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여기저기서 덴마크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해왔거든요. 그런데 벌써 일제 시대 때부터 덴마크 이야기를 하신 제 선배가 계시더라고요. 덴마크란 나라는 150년 전에 독일과 전쟁을 하고 완전히 패망한 뒤에 협동조합운동과 국민교육운동을 통해 일어선 나라잖아요. 지금도 덴마크는 어떤 다른 서구 국가보다 굉장히 자립정신이 강한 착실한 나라입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강인한 자주성, 자립심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투철한 나라입니다. 국민체조라는 것도 덴마크에 서 생겼습니다. 안재홍 선생도 우리가 모방을 해야 할 나라가 있다면 덴마크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내적충실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소국주의 사상이죠. 민세 안재홍 선생은 역시 시대가 시대니만큼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좌파적 성향 을 가졌기에 민족주의 좌파 지식인에 해당합니다. 물론 좌파 성향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이데올로기적으 로 분류하자면 우익 사상가입니다. 나중에는 신간회가 해산되고 나서는 사회주의자들과도 결별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 해방 전에도 그랬지만, 궁극적으로는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해방 후에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잠시 몸을 담았는데, 사회주의자들 이 참여를 못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좌우합작이라는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기서 나오셨 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남북에서 정부가 각기 따로 들어서고, 곧 전쟁이 터졌고, 6.25때 납북을 당하셨습니다. 지금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누워 계시다고 합니다. 결국 이게 우리 현대사의 비극입니다. 지금 좌파, 우파로 극명하게 분열되어서 좌파 쪽 사람들은 좌 파 사상가들만 부각시키고, 우파는 우파 쪽 인물들만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바람에 통일을 지향한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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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들은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죠. 저도 젊은 시절에 민세 안재홍 선생 같은 분을 잘 몰랐던 것은, 그 런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구 선생도 결국은 민족주의자이고 우익 사상가입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우익이 아니 라 어디까지나 통일을 지향한 통합사상가였습니다.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 말미에 쓰신 나의 세 가지 소 원 있잖아요? 조경달 교수는 이 김구 선생의 ‘소원’에 굉장히 큰 의미부여를 하면서 그것이 전형적인 소국사상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쉽듯이 김구 선생의 세 가지 소원은 그냥 한 애국자가 즉흥적으로 기분 나서 쓴 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나라는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아름다 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문화적 수준이 높은 나라이다, 라는 김구 선생의 이야기 말 입니다. 김구 선생은 현재 수준의 군사력, 경제력, 자연과학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 굉장히 과감한 발언이잖아요. 역시 이런 이야기는 즉흥적으로 나올 수 없는 이야 기입니다. 그리고 이거야말로 오래된 조선의 소국사상을 명확히 계승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그리 고 김구 선생의 세 번째 소원, 즉 옛날 성인들처럼 모든 인민들이 그런 성인군자의 경지까지 갔으면 한 다는 이야기는 바로 동학사상과 통하는 이야기죠. 내적 수양만 거치면 누구든지 진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해월 선생의 말씀과 완전히 같은 맥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물론 백범 선생 자신이 청 년시절에 동학도였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맥 속에서 우리가 무위당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한번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 다. 무위당 선생님 같은 비범한 분이 해방 후에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난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사상적 빈곤을 벗어나는 것은 세계적인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이제 시대가 완전히 전환기에 있다는 것 을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고대에서 중세,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이행기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더 본질적이고 더 근원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전환기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이런 결정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전환기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슬기롭게 전환하지 못한다면, 얼마 안 가서 전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 공포를 가지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요컨대 우리가 계속 해서 성장이니 개발이니 부강한 나라 건설이니 하는 식으로 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러면 이런 절체절명의 전환기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뭐냐 하면, 도대체 문명이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깊이 숙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좋은 자료가 있어서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상황은 서양 근대 자본주의 문명이 동아시아 지역으로 물밀 듯 쳐들어오면서 멀쩡한 사회가 식민지로 전락하고, 우리 도 일제의 침략을 받아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제국주의자, 식민지 지배 자들이 내걸었던 명분이 뭡니까? 문명화의 논리였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통 감에 부임하면서 내걸었던 명분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 자신이 스스로 진심으로 믿었던 명 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자기도 의식하지 못 하는 새에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자기기만의 논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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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이토의 평전을 읽어보면, 그는 나름대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이 군대의 발언권이 강해져서는 안 되고, 문민 통치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 니다. 만약에 이토 히로부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일본의 군국주의 노선이 덜 야만적인 방향으로 가 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평전을 읽어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그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문명 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물론 그게 허위의식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여튼 침략의 명분 은 문명화였고, 조선 지식인들도 그 명분 앞에서는 항거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문명화의 논리는 일본만 의 것이 아니라 영국도, 프랑스도, 그밖의 다른 유럽 제국주의 국가가 다 그랬습니다. 마르크스도 그랬 습니다. 영국의 인도에 대한 식민 지배가 없다면 인도가 자기 힘으로 문명화를 성취시킬 수는 없다고 하 면서, 식민 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을 인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무렵,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대항운동인 동학농민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그 당시에 일본에서는 다나카 쇼조(田中正造)라는 한 운동가, 정치가, 사상가에 의해서 격렬한 ‘반문명’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이 다나카 쇼조라는 분에 대해서는 제가 그동안 여러 자 리에서 언급했는데, 이분도 원래 글 읽는 유학자 가정의 출신입니다. 청년시절부터 의협심이 강해서 지 방 관헌의 불합리한 행정에 항의를 하다가 감옥살이를 몇 차례 했던 사람인데, 그런 경험을 통해서 국가 와 민중의 관계를 비롯하여 근대문명의 모순 등등에 대하여 성찰을 하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데 당시 는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근대적인 산업국가, 군사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광산을 개발하 고 공장을 세우고 하는 바람에 많은 사회적 마찰과 갈등, 환경문제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서 가 장 유명한 것으로 아시오 광독사건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본 도기치 현에 아시오 구리 광산이 있는 데, 근대식 산업을 돌리고 무기를 만드는 데 불가결한 금속이 구리라고 하잖아요. 일본의 산업화가 본격 화되면서 그 구리광산이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리라는 게 독성이 매우 심 하죠. 구리를 캐내서 거기에서 정련을 합니다. 그러면 증기와 물을 통해서 아래 마을들의 농작물이 말라 죽고, 가축들이 괴질로 쓰러지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홍수가 나면 그 물이 둑을 넘쳐서 논밭을 완전히 못쓰게 만들고. 거기서 키운 작물을 먹은 사람들도 질병에 걸리는 사태가 빈발합니다. 이걸 아시오 광독 사건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대규모 공해 사건입니다. 근대 라는 것은 바로 공해의 역사죠. 그래서 다나카 쇼조라는 분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애를 다 바칩니다. 몇 십 년 동안에 걸쳐 서요. 순전히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하자마자 매일같이 국회에서 이 문제를 따집니다. 아무리 주권이 천황에게 있다고 명시돼 있는 천황제 국가라고 하지만, 천황이 사랑하는 인민 의 생명과 삶을 거덜 내는 것은 헌법위반이라는 논리로 매섭게 따집니다. 정부가 굉장히 귀찮아해요. 목 숨을 걸고 천황에게 직소까지 하는 사태로 전개됩니다. 아무리 중요한 정치가도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천 황에게 직소를 하면, 일본의 법에 의해서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유 서까지 써놓고 천황에게 직소를 한 거죠. 결국 천황의 특명으로 사형은 면했는데, 나중에 일본 정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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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광산 밑에 큰 유수지를 하나 만들어서 광산에서 흘러내리는 독성물질을 일 단 정체시키기로 조치를 취합니다. 그러나 유수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또 몇 개 마을이 수몰됩니다. 마을 이란 백성이 몇 백 년 동안 일구고 살아온 터전인데, 이것을 정부가 근대적 산업과 무기생산 때문에 없 애려고 하는 것은 결국은 국가의 안중에는 백성의 생명과 삶은 없는 것이 아니냐면서 항의를 계속합니 다. 그러면서 국가를 위해서 백성을 죽이는 게 ‘문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문명을 가장한 조직적 대량 학살이라고 주장합니다. 처음에는 농민들의 위험에 처한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시작한 반공해 운동이 어느새 근대국가, 근대문명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묻는 심원한 반근대 사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나카는 짐을 싸서 자신의 거처를 그 수몰 예정지 마을로 옮겨서, 마을을 끝까지 지키기 위 해서 마을 사람들과 버티다가 결국 지병으로 거기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저는 다나카 쇼조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근대 동아시아 최대의 의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 다나카라는 분이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동학농민군의 군율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대규 모로 군사행동을 하자면 군율이 있게 마련인데, 그때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정한 군율에는 여러 가지 항목이 적혀 있었지만, 일관된 원칙은 생명을 존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절대 생명을 해치지 말라, 군사행동 중 민폐를 끼치는 행위는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효 자와 열녀가 사는 마을은 멀찍이 주둔을 하라 등등. 이런 열 두 개 정도의 군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접하고 다나카 쇼조라는 분이 이것은 참으로 ‘문명적’인 사상이라고 감탄했다는 겁니다. 그런 말을 자신의 일기인지 편지인지 어디에서 했다는 거예요.(그런데 다나카 쇼조의 이 발언 기록을 확인한 학자가 바로 박맹수 교수입니다. 제가 어느 일본학자가 쓴 책을 보니 그렇게 적혀 있더군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동시대인데도 이토 히로부미가 말한 ‘문명’과 다나카 쇼조의 ‘문 명’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명 개념이 완전히 이질적이죠. 다나카 쇼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산천의 수명, 즉 자연의 생명은 영원하고 인간의 생명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순의 생명 에 불과한 인간이 자연을 상하게 하는 것을 문명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다나카 쇼조 자신도 이 토 히로부미의 문명관이 당시에 주류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겠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광산을 개발하고 독성물질로 백성의 삶을 희생시키는 시스템이 문명의 본질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그는 이래서는 본래적인 의미로 ‘문명’이라는 말을 쓸 가치가 없다 고 생각한 겁니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근대문명을 건설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근대국가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나카 쇼조라는 분은 중요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마을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국가는 일시적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지만, 마을이라 는 것은 몇 천 년, 적어도 몇 백 년 동안에 걸쳐서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축적되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인지 생각해 봐라.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에 대해서 싸워야지 일순간의 생명밖 에 없는 무가치한 것에 대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또 “지금 세계 인류 대다수는 기계문명에 의해서 살육당하고 있다. 문명은 인간을 집어삼키는 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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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가 되었다.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케 하지 않고 마을을 파괴하지 않고 인간을 죽이지 않는 것이 참 된 문명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지식인과 엘리트의 차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 라 인민은 어리석게도 정직해서 항상 백년의 대계를 생각하는데, 엘리트들, 관료, 특히 상층 엘리트들은 백년은커녕 1년의 계획도 없이 일시일각의 욕심뿐이다. 무학의 토민 노동자는 일시적 유한의 이익을 위 해서 영혼의 토지를 못 쓰게 하는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요즘 다나카 쇼조를 재발견하여, 이분을 말하자면 생태주의 사상의 선구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태주의의 선구적인 사상가 정도로 이분을 자리매김해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 다. 근대 세계사 전체, 혹은 조금 범위를 좁히면 동아시아의 근현대의 핵심적인 ‘어둠’을 가장 명료하게 꿰뚫어 보신 분이고,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살길을 찾아갈 것인지를 명쾌하게 밝히신 분이라고 생각합니 다. 우리는 물론 앞으로 한동안 국민이나 민족 개념을 완전히 떠나서 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민세 안재홍 선생도 그런 말씀 하셨지만, 우리의 민족주의는 늘 세계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배타적 민족주의 로는 희망의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안재홍 선생은 국제적 민족주의 혹은 민족적 국제주의를 제창하셨다 고 합니다만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세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이런 세 계로 열려진 사상이야말로 활인의 사상, 생명사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무위당 선생님을 생명사상의 스승으로서 기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 생명 사상을 토대로 전국 각지에서 국가와 자본의 논리를 벗어난 자립과 연대의 협동적 삶을 실현하기 위한 많은 뜻있는 움직임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은 우리사회의 희망의 표지이면서도 한편 생 각하면 그만큼 지금 상황이 다급한 위기에 처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사상의 뜻을 진심으로 새기고 그것을 좀 더 실속 있게 발전시켜 나가자면, 국내외의 생명사상의 전통, 생명사상의 선 각자들에게서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무 위당 선생님의 발자취를 회고하고 기념하는 이 자리에서 제가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은 것은, 무위당 선생님의 삶과 사상도 보다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봐야 그 진정한 의미가 더 잘 드러날 수 있 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 위기 시대의 난제를 푸는 데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사상적 빈곤을 벗어나 기 위해서도 선인들의 사상을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숙고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경청해 주 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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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무위당의 삶과 사상,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황도근 사회, 무위당학교 교장 무위당 20주기를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해왔습니다. 저도 원주에 간 이후에 무위당 선생님 일을 20년 가까이 지켜보았는데, 초기에는 무위당 선생님을 아는 분도 몇 분 없으셨어요. 20주기 오기까지 무위당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알리는 데 주력을 해왔다고 봅니다. 2008년부터는 전국에 전시회를 다녔 고요. 그런데 이후에는 무위당 선생님을 알리는 것보다 무위당 선생의 삶과 사상을 어떻게 실천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것이 무위당 20주기의 가장 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오늘 대담의 방향도, 여기 나와 계신 어르신들이 무위당 선생님을 느끼고 체험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그 것을 전반부에 말씀해주시고, 그리고 지금 무위당 선생님의 삶과 사상이 다시금 조명 받는 이유는 그분 이 하셨던 말씀과 고민이 지금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현재적 의미의 무위당 사상을 어떻게 실현 할 것이냐. 그건 아마 세월호 문제에서도, 또 최근에 협동조합이 급격히 늘어난 모습 속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나누고 난 뒤에, 참석하신 분들의 말씀을 몇 분 듣고요, 마지막에는 부산 에서 우창수라는 훌륭한 분이 오셨는데요, 무위당 선생님 노래와 선생님이 좋아했던 아침이슬 같이 부르 면서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참석하신 분들 소개하겠습니다. 임봉재 선생님. 여성농민운동의 1세대, 가톨릭농민회에 오래 몸담으면서 회장도 맡으셨습니다. 원주에 무위당 선생님과 지학순 주교님이 한참 일하실 때 지켜보셨던 분입니다. 이상국 대표님, 평생 박재일 회장님과 함께 한살림의 고난과 수난을 다 겪으시면서 지금의 한살림이 되 게 하셨습니다. 최수자 선생님, 간호원으로 독일에서 8년간 계시다가,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선생님이 원주로 오시라 고 하셔서 재해대책사업회 벽지보건팀으로 3년 동안 원주에서 일하시면서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선생 님을 가까이 체험하셨습니다. 지금 복음자리 이사장 맡고 게십니다. 김상범 선생님은 원주에서 제자 분들을 대표해서 오셨습니다. 대성중고등학교 학생 때부터 무위당 선생 님을 지켜보셨기 때문에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살림에서도 오래 일하 셨고 박재일 회장님과 더불어 농촌 현장에서 오래 일하셨습니다. 황종렬 선생님은 생태영성 신학자이십니다. 생전에 무위당 선생님이나 지학순 주교님을 뵙진 않으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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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누구보다 그 두 분의 사상을 정리해나가고 계십니다.
첫 번째 얘기는, 무위당 선생님 얘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전쟁 이후에 원주에 오셔서 지역 운동에 계 속 머무시는데,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대성고등학교를 설립하셨습니다. 당시에 김상범 선생님이 학생으로 계셨는데, 그때 얘기 좀 해주시죠.
김상범 전 한살림원주 이사장 먼저 얘기하려니까 떨립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선생님하고의 관계를 얘기하려면, 그 당시에는 무위당 선생님이 이사장, 설립자셨기 때문에, 특별히 깊은 얘기 나눈 것도 없고, 제 입장에선 무척 어려웠던 분 이죠, 뭐. 그래서 그때 얘기는 들려드릴 만한 게 없고, 제가 한 두어 가지, 졸업하고 난 뒤 재해대책사 업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을 때, 그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 강의에서도 중점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선생님께서는 이웃 사람들이나 특히 젊은 사람들, 재주 있으면서도 진학을 못하거나 재주를 피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아끼셨어요. 그래서 항상 기탄없이 얘기를 들으시고 충고해주시고 힘닿는 대로 협조해주셨죠. 한번은 겨울날인데 바깥에서 약주를 하시고 집에 들어가실 때 부축을 해서 모시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근데 들어가시면서 저희 친구들의 안부를 몇 사람에 대한 거를 자꾸 물으셔요. 그래서 이것저것 물으시는 대로 대답을 해 드리다가, 제가 나중에 그 런 얘길 했습니다. “아니, 선생님 이 시국에 대해서 중요한 일을 신경을 쓰고 계시는데, 뭐 그 아이들 의 집안 내력을 그렇게 꼬치꼬치 물으시고 염려하시고 그러십니까? 그런 건 좀 염려 놓으시죠.” 그랬더 니, “야 인마 나는 너들 지내는 거에 대해서 99%까지는 채근을 좀 해야 되겠다. 100%까지는 내가 얘 기를 못하지마는, 그렇게 해야 되겠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관심을 갖고 채근하시고 잘못되면 충고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저는 그래서 선생님을 사회교육자라고 명명합니다. 물론 제도권에서 교육자도 되시지만, 사회교육자로서 그렇게 지내 셨구나 생각이 듭니다. 제가 강원도 인제에서 군대생활을 했는데, 그 당시에 일등병이었어요. 선생님이 춘천교도소에 계실 땐 데, 휴가를 내서 면회를 갔습니다. 가면서 몇 가지 질문할 걸 준비를 해 가지고 갔어요. 면회 시간은 짧으니까, 이런 건 좀 여쭤봐야 되겠다. 그런데 면회시간에 만나서 얘기 시작하자마자 선생님께서 계속 해서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뭐, 자당은 잘 계시냐, 누군 어떠냐, 어떠냐 자꾸 물으셔서 대답만 했습니 다. 그러다보니까 시간이 다 되고 면회 끝이에요. 그래서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허무하기 짝이 없더라고. 제가 좀 아둔해서, 얼마 후에 깨달았는데, 그 당시에 선생님께서는 사상범으로 몰려 들어가 계시는데 허튼 소리 나오며는 거기 계신 당신보다는 내가 다칠까 염려가 되어서 내 말을 막으신 거 같 더라고요. 뒤늦게 좀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과 인연은 그런 것들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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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근 다음은 최수자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실 텐데요, 독일에서 오신 것도 쉽지 않으셨던 것 같고, 오셔서 두 분 주교님과 무위당 선생님을 옆에서 보셨는데 어떠셨는지요.
최수자 전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이사장 저는 독일에서 그야말로 재밌게 잘살고 있었거든요. 그랬는데, 지 주교님이 오셔서 “너희들만 편해서 되 겠느냐, 지금 강원도 촌에 가면 아주 간단한 질병, 예를 들면 감기 같은 것도 빨리 치료를 못해서 병이 더 커지고, 병원에도 못 가니까 집에서 그러다 죽고 그러는 경우가 참 많다. 좀 와서 함께 일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셔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려고 그랬는데, 당시 주교님이 그러고 나서 감옥에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준비 상황이나 이런 거 궁금해서 여쭤보느라 편지 하면 몇 달 있다 답장이 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제 입장에서는 독일의 남의 나라 물을 먹고 있다 보니까 사고방식이 그렇게 됐 는지, 깐깐하게 따졌어요. 이렇게 준비도 안 해놓고 오라고 그러시면 어떡하냐. 나중에 주교님이 다른 분을 통해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당신이 쉽게 아무 이야기나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건 다 빼시고, “네가 한국에 와서 만약 네가 굶어야 하면 같이 굶을 것이고, 네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할 것이다, 그러 니 와라.” 그때는 잘 이해를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뭔가 다 되어 있겠거니 하고 한국에 왔습 니다. 저는 장일순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몰랐는데, 먼저 와 있던 분이 대단한 분이시라 그래요. 댁에 가 보니까 집도 되게 헐었어요. 옛날 일본식 건물이고. 그래서 우리가 가니까, “어, 왔어?” 그러시는데, 참 편안하시더라고요. 제가 장 선생님에게 가진 첫 인상이 항상 ‘왔어?’ 예요. 지금도 그게 제일 먼저 떠오르구요. 제가 벽지보건팀 일을 하다 보니까 저희는 직접 현장에 농민들이 살고 계시는 마을에 들어가서 살고 있 었습니다.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래도 각오를 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그거는 다 감내하고 지 낼 수 있었는데요, 한 달에 한 번씩이었던 거 같아요. 재해대책위원회에서 회의하자고 나오라 그러면, 회의가 2박3일 걸리는 정도예요. 그러면 지역을 비우게 되잖아요. 그럼 주민들이, 그동안에도 애초에 없었으니까 모르다가 사람이 있다 없으니까 불편하신가 봐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 불편함을 호소하세요. 왜 그렇게 자주 원주에 나가느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섭섭하고 속상하니깐 어디 가서 하 소연할 데가 장 선생님밖에 안 계세요. 가서 이러고저러고 불평하면 고개 끄덕끄덕하고 들어주시고, 그 렇게 지냈습니다. 한번은 저희 있는 지역에 독일에 있는 가톨릭청년농민위원들이 왔어요. 그분들이 우리 활동을 많이 지원 했었습니다. 저희 지역뿐 아니라 원주 교구에 와서 저희 지역에도 와서 하룻밤 자고 동네도 보고 일도 보고 그랬거든요. 우리 지역 주민들하고 사귀시니까 나중에 답례로, 저희들더러 독일에 한번 오라고 했 어요. 자기네 협동조합 사업을 보여주겠다고. 그래서 원주교구에서 세 분, 그리고 농민회원 두 분,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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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주교구에서 세 분 이렇게 가는데, 독일에서 전화가 왔어요. 장 선생님을 그분들은 화가로 기억하시 더라고요. 그 화가 분의 그림을 몇 점 가져오라는 거예요. 처음에는 화가가 누군지 몰라서 누구를 얘기 하냐 그랬더니,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요, 아, 장 선생님. 그래서 선생님한테 가서 말씀드렸죠. 그래서 난을 세 장을 쳐주시고 글을 하나 써주셨어요. 그래서 갖고 갔는데 독일 사람들이 볼 적에 서양화에 익 숙한 사람들이 장 선생님의 난을 이해한다는 거는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래서 자기들은 그걸로 부활절 카드를 만들어서 팔아서 여러 가지 비용에 충당하려고 그러는데 안 되겠다고. 그게 참 난처하더라고요. 뭐 어디 팔 데 없을까 하고 사람들한테 물어도 다 안 사겠대요. 그래서 도로 가지고 왔어요, 한국으로. 근데 선생님께 차마 그걸 그대로 드리기는 제가 송구스러워서 안 되겠더라고요.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을 드리고 그 그림을 제가 갖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그랬더니 그래라 하셔서, 제가 갖고 있다가 무위당 만인회에도 드리고 노동운동하시는 양요순 수녀님께도 드리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님 관련해서 저에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저희가 이후에 다른 일로 독일에 가는데, 미제레올에 들리라고 하시더라고요. 저희 원주교구를 많이 후원했던 단체입니다. 가서 하라는 말씀이, 우리가 그동안 독일에서 많은 외원을 받아서 이만큼 성장하고 이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우리에게 주던 외원을 그만 주시고 다른 어려운 곳에 주시면 좋겠다고 전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고맙다고. 그 말을 듣고 독일 분들이 무척 놀라셨어요. 수많은 나라에 외원을 주지만, 끝까지 받지 어느 선에서 우리는 괜찮으니 그만 받겠다고 한 데는 원주가 처음이라고. 아, 지학순 주교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제 가 크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황도근 이상국 대표님께도 말씀 청하겠습니다. 한살림을 처음 하실 때, 박재일 회장님이 장일순 선생하고 한살 림농산에서 건배하실 때 나이가 50이 가까우셨어요. 그 나이에 조그만 쌀가게를 차린다는 게 보통 사람 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죠. 그리고 박재일 회장님 초기 인터뷰를 읽어봤는데, 한살림농산 하던 때에 계 속적인 유혹이 있었어요. 당시 6.10항쟁도 있었는데, 자꾸 필드로 나오라 하는데 그걸 또 지켜야 하니 까 당신은 굉장히 갈등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이상국 대표님은 그때 계속 지켜보셨고, 원주에도 많이 오셨고. 초기 얘기를 좀 아울러서 다 해주십시오.
이상국 한살림연합 상임대표 제가 보기에 장 선생님은 시공에 매이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시다가 가신 분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도 지금 살아계시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이 76년 가농 사무국 연 수를 하러 원주에 갔는데, 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강의하셨던 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한살 림 안에서 박재일 회장님과 관계 속에서 특히 인상 깊게 남은 것은 87년도 10월쯤 된 거 같은데, 한살 림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서로 얘기하는데, 장 선생님께서 “한살림이란 이름 참 잘 지었네.” 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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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이면서 전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고, 살림이라는 말이 온 우주 만물을 내 생명처럼 살린다는 말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운동이란 말을 붙여도 손색이 없고, 아주 좋겠다고 하셨어요. 사실 한살림운동이란 언 어가 그 속에서 태어났는데, 박재일 회장님이 안 계시니까 말씀드리면, 내가 꽤 괜찮은 능력을 갖고 있 구나, 그런 표정과, 장 선생님의 후배로서 지혜로운 언어를 만든 데 대한 자랑스러움, 두 분 얼굴 사이 에 교차되었던 것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또 하나 두 분 관계 중에서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게 있는데, 누가복음에 보면 ‘하나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그걸 가져다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자리에 깃들었다.’ 장 선생님의 생명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많은 고민과, 후배들과 주변에 이 렇게 사는 것이 인간이 살아야 할 원리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걸 받아들여서 땅에 씨앗을 뿌리셔 현재 43 만 명이 깃들게 한 것은 박재일 회장님이시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런 관계 속에 있지 않나 생각해봤습니 다.
황도근 임봉재 선생님은 거제 계실 때부터, 수녀님 되시려고 하시다가 농민 운동을 하셨는데, 원주에 오신 거는 여성가톨릭농민회 일로 오셨었죠? 선생님 얘기하고 지학순 선생님 애기 해주시죠.
임봉재 전 가톨릭농민회 회장 방금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원래 고향이 거제도예요. 거제도가 옛날에는 그냥 섬이었어요. 지금 은 우리나라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만큼 섬이라는 느낌을 못 받지만요. 제가 왜 여성운동을 하게 되었 는가, 어떻게 지 주교님, 장일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가 말씀을 드리면. 제가 10남매 맏이로 태어났 거든요. 저희 부모님이 아들 다섯, 딸 다섯 골고루 낳으셨어요. 그런데 딸을 낳을 때마다 저희 어머님이 할머니 할아버지랑 가족들을 편한 얼굴로 못 보시는 거예요. 거기다가 저희 딸들은 계집아이라는 이유로 숨도 크게 쉬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어요. 그렇게 어머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왜 엄마가 저렇 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시 아버님이 목수 일도 하시고 농사도 지으셨는데, 땅을 조금 갖 고 있고, 가난하지만 남을 해꼬지할 줄 모르고, 그렇게 사시는 분들이 마을에 면 서기만 나타나도 주눅 들어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왜 농사꾼이란 이유로 저렇게 주눅 들어 사는가. 또 여자라는 이유로 왜 저렇게 살아야 되나. 하느님은 남자건 여자건 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했는데, 그리고 저희 부모님께도 항 상 ‘사람답게 살아라. 사람이 가난하게 살더라도 사람다운 짓을 못하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만도 못한 거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랐어요. 자라면서 제대로 학교도 못 가고 부모님 도와서 농사일을 거들면서 열 심히 사는데 항상 이게 사람으로서의 그게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이건 아니다, 농사짓는 사람도 사람 답게, 사람대접 받는, 그런 사회가 되면 참 좋겠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도 어디 가서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고, 허리 펴고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이 어린 마음에서부터 생겨나면서, 난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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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살 거야, 하고 수녀원에도 들어갔다가, 다시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신자들은 그렇게 얘기하는 데, 원래 제가 수녀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시집을 안 가려면, 그 당시에는 집에서 그냥 살 수가 없었 어요. 하나의 피신처였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걸 수녀원 안에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나왔 죠. 수녀원에서 만학을 하고, 나와서는 70년대 초에 협동조합운동을 했습니다. 지금 기억해보면, 협동교육연구원에 교도원으로 있었는데, 거제도 지부에서 일을 하다가, 교육이 있으면 3주간, 4주간 서울에 와서 현장 견학도 가고, 그때 원주를 갔던 거 같고. 무위당 선생님을 뵈었어요. 저는 무위당 선생님과 개별적인 친분은 없습니다. 공동으로 모임, 단체 모임에서 무위당 선생님께서 하 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어렸을 때 느꼈던 부분들, 어두운 골방에 있다가 햇빛을 보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무위당 선생님 주기 때마다 가는 이유가 거기 가면 선생님의 평소에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고,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가는 데 지렛대 역할을 해주고 있고, 힘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농촌여성회를 70년대 중반에 시작했는데, 우리 사회에서 여성 하면 항상 차별이 있지 않습 니까. 특히 농촌 사회는 보수성이 강하고 더하죠. 그런 데다가 가톨릭농민회를 수원교구에서 처음 시작 했는데, 교회 안에서도 여성 모임이라는 건 힘들었어요. 몇 년 하다가, 회장할 땐데, 아, 농촌 엄마들하 고 이렇게 해선 안 되겠구나. 왜냐면 농촌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 시부모, 자식 키우면서 그때만 해도 여성들이 다 논밭에 가서 일을 했어요. 여성농민들의 어깨에는 항상 5중, 6중의 짐이 지워져 있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혼자서 한두 달 짐 싸고 돌아다니다가 와도, 누가 너 왜 돌아다니냐, 밥 달라 찾지 않으니까. 이걸 늦게, 몇 년 뒤에 깨달았어요. 그때 조직이 굉장히 어려워졌죠. 그때 제가 지학순 주교 님을 찾아갔어요. 원주교구가 지역사회개발도 잘 되고 하니까,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지역 에, 한 마을에 들어가서 살겠습니다. 원주교구의 지역에서 저를 받아들이면 하겠노라고 말씀드렸더니, 원주교구에는 사람이 많다. 내 생각에는 안동교구가 농촌교구이고 사람도 적고 하니까 너라면 가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주교님이 편지를 한 장 써 주셨어요. 그 편지를 들고 안동교구를 찾아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서 봉화에서 한 2년간 살았어요. 그때 거기서 5.18을 만나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때도 지 주교님의 격려를 많이 받았죠. 봉화에서는 원주가 가깝기 때문에 두 달에 한 차례씩 원주를 가 고, 원주에도 파독 간호사로 계시던 분이 와 계시고 그랬어요. 지 주교님께서 그런 어려움 속에서 일하 고 계시던 여성들을 많이 다독거려 주셨어요. 기억에는 치악산에 지 주교님이 같이 산행을 가자 하셔서 도시락을 싸서 올라가다 중간에 주교님이 다리를 다쳐서 내려왔던 기억도 있고요. 하여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는 그런 많은 분들의 힘이랄까 그런 걸 참 많이 받고 왔는데, 그 중에 특히 기억나는 분이 지 주교님, 무위당 선생님이네요.
황도근 원주에서 저희들이 무위당 선생님 일과 협동운동을 하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은 지학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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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원주에서의 밑바탕이 대단히 컸다는 것이고, 지 주교님은 무위당 선생님보다 일곱이 위이신데, 지 학순 주교님에 대한 공부를 지금 다시 하고 있습니다, 원주에서. 황종렬 박사님께서는 두 분을 뵙지 못했지만, 학문적으로, 영성, 생태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를 하 고 계십니다. 의미를 포함해서 편안하게 말씀해주시죠.
황종렬 대구가톨릭대학교 겸임교수 저는 지학순 주교님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장일순 선생님의 자취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제가 97년에 미 국에 박사학위를 하러 가는데요, 그 전에 한국에서 자료를 구해서 갑니다. 저에게 여러 분들이 조언을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자료 가져가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짐만 될 테니까 놓고 가라고. 저 같은 경 우에는 그분들 말씀은 안 듣고, 여러 가지 구해서 간 거죠. 그 중 하나가 장일순 선생님의 『노자 이야 기』였습니다. 제 박사학위 논문이 <한국 신학의 방법론과 실천>이거든요. 한국인으로 가톨릭 신앙을 만나서, 어떻게 신학을 하고 그 신학을 살아갈 것인가. 그 논문을 쓰기 전에,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주교회의에서 나왔 던 『사목』이라는 잡지에 1년 동안 ‘한국 토착화 신학의 구조와 역사’라는 글을 매달 발표하고 갔었거든 요. 그러니까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그리스도 신학을 살 것인가라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갔었기 때 문에 그런 상황에서 무위당 선생님을 만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지학순 선생님 관련 내용도 논문에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지학순 주교님과 장 선생님을 이야기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 는 이야기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입니다. 그것은 저 바티칸에서 있었던 일인데, 한국에서 왜 이렇게 회자 가 되는가, 이런 것이죠. 그분들은 모를 겁니다. 유럽에서 그 당시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여해서 그 비전을 형성했던 분들은 그것이 한국에서 이렇게 쓰였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무위당 선생님이 그 정신을 몸에 익혀서 당신의 언어로, 그 당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나 가톨릭교회에서 내려왔 던 사회와 교회의 상관관계 등을 통찰한 내용들이 놀라울 정도로 깊은 거예요. 예를 들면 1967년에 신 협 지도자들을 위한 교육이 설계됐는데, 그 주제 가운데 하나가 ‘민족들의 발전에 관하여’였습니다. 이 게 신협 교육 내용입니다. 이 문헌은 1967년 그 해에 바오로 6세에 의해서 발표된 문헌이거든요. “세계 가 진정으로 발전을 이루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그런 것들을 무위당 선생님은 통합해서 강연으로 발표해주셨는데, 이 내용이 어떤 것이냐면, 서구 세계의 식민지배 형태, 서 구 자본주의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침략, 수탈 구조,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복음적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에 관한 논의입니다. ‘민족들의 발전’이라고 이름 붙여져서 나온 거거든요. 이런 것들을 신 협 교육 내용으로 말씀하실 수 있을 만큼 내면화하셨던 거죠. 세계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이 내다본 세계 질서에 대한 통찰을, 그 당대에 일반적으로 볼 때 사제들이나 주교님들이나 수도자들이나, 사실 이런 것 들을 식별하기가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거든요. 더군다나 군사정권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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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는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할 말만큼은 하셨죠. 이 지혜가 어디에서 왔는가. 이렇게 세계 교회의 흐름들을 한국에서 민족사회의 에너지 원천으로 쓰일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셨던 이 선구자의 삶에 대해 조명하면서, 이번에 제가 기획하는 건 그런 겁니 다. 이제는 제2의 신학이 필요하다. 제1의 신학이라고 하면, 서구에서 형성된 것들을 거기에서 이야기 해요.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 가서 그 제1의 신학들을 어찌 보면 배우는 거예요. 근데 배운 그것이 이 지역사회, 민족사회에서는, 원주, 강원도 남부, 충청도 지역 이곳에서 어떤 복음적 에너지를 발생시 켰는가. 이번에는 가서 전해주는 거죠. 이것이 제2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한 그 일이 그냥 그 걸로 안 끝난다. 선배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자기의 고향을 떠나 몇 만 리 떨어진 한국 땅에 와서 존 재를 걸고 복음을 전해준 결실이 여기에서는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장일순 사건, 지학순 사건, 원주 사 건으로 이렇게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을 한 번 보시라. 그래서 그 제1의 신학을 했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했던 사람들이, 이건 도대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 네, 신학 하는 것이, 그런 거죠. 단적으로 최수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장 선생님의 존재가 담긴 그 그림이 독일에 가서 카드로 제작될 수가 없었다는 것은 못 알아들었다는 거죠. 그들이 못 알아듣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매개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매개 작업이 이루어지면, 아, 그런 것이었구나. 겨자씨 한 알과 조 한 알이, 이 세상의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뿌리내려서 뻗어 오르면 공중에 새들이 깃들이게 하는 원천으로 쓰인다. 독일 신학계가 한국, 원주, 그 씨앗에서 자라난 신학과 영성에 깃들이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 런 흐름 속에서 무위당 선생님을 만나고, 이런 것들을 제가 함께하고 있는 대구가톨릭대학 대학원생들하 고 함께 나눠 가고 있는데요, 제가 ‘생태영성과 토착화’라는 것을 1년 동안 강의하면서 강의 가운데 한 부분에서 장 선생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놔 주거든요. 그리고 만난 느낌을 발표를 하는데, 한 학 생이 자기는 한 번도 무위당 장일순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거예요. 이분이 누군가 하고 막 찾 아봤대요. 자료를 보니까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한 번 놀란 거예요. 아, 내가 너무 무지했구나. 그래서,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면 아마 가톨릭사전에 올라 있지 않을까? 찾아봤는데 없는 거예요. 또 놀 랐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한국적 정체성을 찾고 만났으니, 그것으로 신학을 하 셔라. 그렇게 자기 이름을 알 때, 백조가 자기가 백조라는 것을 알 때, 자기가 오리로 알 때와는 다른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가 생성될 것이다. 그것을 증거하고 그런 흐름 속에서 세계가, 한국 신학, 한국 가 톨릭교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이 민족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가 알고 세계가 공유하게 될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무위당 선생님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 있고,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신 여정을 통해서 가다 보면 우리가 새롭게 만나는 역동성을 좀 더 충만하게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2의 신학, 이제는 우리에게 전해준 그 신학을 우리에게 알려준 그분들에게 우리의 신학을 전해주는 시간이 필요하 다. 이런 맥락에서 장 선생님을 같이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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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근 65년에 지학순 주교님 부임하셨을 때가 마흔넷이더라고요. 윤공희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 두봉 주교 이런 분들이 다 40대에 주교가 되시거든요. 근데 그 자체가 혁명적이지 않았는가, 천주교도 그 당시에 는 연세 많으신 신부님들이 하고 계셨는데요,
황종렬 지학순 주교님이 원주에 가시면서 장일순 선생님을 만나게 되시는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선조건이, 이 분이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시거든요. 똑같 은 시기에 유학하신 분이 김수환 추기경이에요. 김수환 추기경은 독일에서 사회학을 하셨고, 지학순 주 교님은 교회법을 하셨는데, 그 59년이 어떤 해냐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겠다고 발표한 해예요. 그 걸 모르는 분들을 주교로 세워 봐야 그분들 가운데 나올 수 있는 것이 식견에 따라서 설교가 나오는 거 거든요.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주교를 선임하실 때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알 만한 사람들을 선택하시 는 거죠. 김수환 추기경 같은 경우에 그렇게 빨리 추기경에 임명이 되시는데, 그 배경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죠. 그 정신으로써의 개문유화 있지 않습니까? 무위당 선생님이 써놓으신 글에 있잖아요. 문을 열고 아래로 흐르라. 이런 공의회 정신을 장 선생님 말씀으로 표현하신 거거든요. 놀라울 정도의 이런 것들이 있는데, 이런 정신을 갖고 있는 그분들이 교회 지도자로 서실 때가 바로 그때인 거죠. 한편으로 는 혁명적이라 말할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통해서 준비될 수 있지 않겠는가 기대가 있는 거죠. 실제로 움직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황도근 이제 객석 토론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재적으로 와 닿는 현실적 인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상을 연구하고 공부한 것만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없기 때문에, 혁 명적인 삶의 전환이 필요한데요,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지금 세월호가 보여주듯이 우리 사회 모든 문제 가 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돈과 경쟁의 사회구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하나는 지금 무수한 협 동조합이 새로 생겨나고 있습니다. 대안사회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이 어떻게 가야 되는지에 대 해서, 그 외의 것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얘기해주시면 되는데요, 몇 분들께 사전에 부탁드렸습니다.
박혜숙 한살림서울 이사장 저는 장일순 선생님을 직접 뵙지를 못해서, 딱히 함께했던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요, 제가 한살림 활동 을 처음 시작한 게, 98년, 99년, 강동지부를 처음 만들 때, 초창기 멤버인데요, 정말 일개 조합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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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만 이용하던 조합원에게 운영위원으로 참여해달라고 했을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뭘 할 수 있을까 했었죠. 그때는 실무자 분들이 조직활동을 하던 때였는데, 할 수 있다고, 박혜숙 씨가 가진 그동안 경험한 것들을 갖고 한살림 안에서 충분히 같이 함께하면 그동안 한살림 안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더 풍성하게 잘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얘기했어요. 처음 그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그게 어떤 의민지, 이분이 나를 과대평가하신다는 부담이 컸어요. 그때 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학습모임도 하고 그랬는 데, 장일순 선생님 책을 운영위원회 하면서 읽었을 때 정말 쉽게 편하게 와 닿았던 게, 굉장히 쉽게 다 가오는 사례를 들어가면서 말씀을 편안하게 해주시면서, 아, 그래, 내가 그래야지, 라고 쉽게 동의될 수 있도록 직설 화법으로 편안하고 구수한 말씀으로 전달받았는데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루뭉술하지 않고, 날카롭고 정직한 표현들을 들으면서, 아 이렇게 살아야 되는구나 느꼈어요. 그때 운영위원 역할을 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됐던 계기가, 시천주의 ‘시’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산을 이루고 있는 많은 나무, 돌멩이, 풀, 이런 것들이 다 이루어졌을 때 산이 이루어진다고 하시면서 그 수많은 풀들 가운데 하나도 자기의 결대로 색깔대로 그 자리에서 자기 모습을 다한 것처럼 사람도 자기가 생겨난 태생처럼 자기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다하면서 모시는 그런 삶이 ‘시’라고 표현하셨어요. 한편으로는 장 선생님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박재일 회장님이 늘 애송하시던, 나 하나 꽃피면 온 세상이 꽃핀다는 표현과 일 맥상통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가, 그래도 그 자리에서 그냥 현재 존재하는 자체로 한살림 꽃으로 피어나고 변화되면 주변도 꽃피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던 계기였어요. 요즘 도 회의하거나 모임 할 때 나눔의 글로 활동가 분들이 장일순 선생님 글을 많이 넣어주세요. 어쩜 이렇 게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오래 전에 하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시의적절하고 와 닿게 편안 한 말씀들을 많이 해주시는지, 그 순간순간 모임에 참여하면서 그 글귀를 읽으면서 깨어나는 저를 발견 합니다. 박재일 전 회장님과 함께했던 시간도 있기 때문에 저희가 힘든 이야기 하면 그저 묵묵히 들어주 셨는데, 무위당 선생님도 그보다 더하지 않으셨을까… 뵙지는 못했지만 그런 모습으로 저에게는 남아 있 습니다.
김선기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 사무국장 원래 예정된 자리가 아니라, 당황스럽고 어렵습니다. 원주협동사회네트워크는 2003년 밝음신협, 원주한 살림, 원주지역 단체들이 새롭게 출발해서, 협동조합기본법 시대에 맞춰서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을 했습니다. 저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민 삶에 필요한, 조합원단체로 들어가 있는 단체가 24개 단체거 든요.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농민,생산자단체, 사회서비스 기관, 다양한 단체들이 조합단체 로 가입되어 있습니다. 시업 목적은 조합원 단체들이 협력해서 자립, 자치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가는 것이고요, 궁극적으로는 주민 삶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서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그 협동조합들끼리 연대해서 자립하고 자치하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저희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문서를 보니까 예전에 협동조합운동을 원주에서 하셨던 목표 역시 많은 분야에서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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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해서 대안적인 공동체들을 만들어가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더라고요. 예전의 그 목적과 지금 추구하 는 게 일맥상통하게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데 아직 완성된 단계는 아니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 개인적인 생각인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런 목표들을 갖고 100미터 앞을 보고 있는데, 저희 때 할 수 있는 건 10미터 가면 굉장히 잘한 게 아닌가.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지 않더라고요. 뭐 하나 이뤄서 정착을 시킨다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큰 그림이 있다면 수를 놓는다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수를 놓고 후배들에게 연결해주는 작업들이 끊임없이 연결되어야만 오랜 시간 뒤에 장일 순 선생님께서 꿈꾸셨던 그런 지역사회 모습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고요. 또 하나는, 올해 사업계획들을 세우면서, 총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해서 활동들을 했어요. 뭔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는데, 결국 찾아낸 게, 사람이 빠져 있더라고요. 협동조합이라는 것도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 중요한 건데, 소통하고 모여서 합의하고 논의하는 구조가 없었던 게 발견이 됐어요. 끊임없이 소통하 는 구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전체 24개 단체 실무자회의를 했는데, 모여서 얘기하니 까 굉장히 많은 다양한 얘기가 나오고, 서로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넓더라고요. 예전엔 잘 몰랐었는데, 그런 모임들이 이어지면 확대되고 정착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협동조합 관련해서는 올해 정기총회 때 정관을 개정했어요. 기획재정부에 인가 신청을 했는데, 담당 공 무원이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뭐가 잘못됐다고 여러 가지 얘길 했는데, “왜 정관 개정 바뀐 부분에 밑 줄을 안 쳐서 보냈습니까?”라고 하더라고요.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그 공무원이 예전에는 ‘담당 공 무원이 아니면 아닌’ 거라고 얘기했던 공무원들이거든요. 협동조합이 제도화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협동조합의 정의부터 시작해서 관에서 먼저 장악해 들어가려 는 게 굉장히 우리에게 독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자치단체에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고 접근하는 것은 좋은데, 본인들의 생각이죠, 그 생각에 민간의 자율적인 움직임들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움직임이 팽배해 있지 않나 합니다. 경계해야 할 게 아닌가 싶고, 협동 조합이 자발적으로 결사를 해서, 필요를 해결해가려는 자발적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법인격을 취득하는 것과 협동조합을 하는 것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도 많은 상담을 하지만 열 분이 찾아오 시면 여덟 분은 ‘이런 사업아이템이 있는데 협동조합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고 대부분 여쭤보시는데, 그러다 보니 실제 본인들의 필요와 염원을 해결하느라 협동조합을 하는데 사업 때문에 사람이 다치고 상 처받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협동조합의 근본적인 다양성, 그런 문화들이 전파되지 않은 상태 에서 협동조합 개수가 너무 많이 늘어나는 게 문제이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어느 논문을 보니까 장일순 선생님께서 협동조합운동을 처음 하실 때 협동조합을 통해서 만인이 평등하 고 자유로우며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어보자고 말씀하실 건 같은데, 협동조합의 궁극적 인 방향성이 그런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개개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지역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 을까 생각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 보면 비극이라고 하는데, 저희 원주도 가까이 보면 좀 힘듭니다. 가까이 봐도 희극이 될 수 있는 지역사회가 될 수 있도록 실무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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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박도선 한살림연합 교육지원팀장 무위당 선생님을 추모하고 여러 분들이 말씀 나누는 자리에 나오게 돼서 굉장히 영광입니다. 저는 개인 적으로 한살림을 통해서 무위당 선생님을 알게 됐어요. 사실 아까 생명과 경쟁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도 대학 들어올 때 성적이 거꾸로 하면 적성이잖아요. 돈 잘 번다 그래서 기계공학과를 갔는데, 군대 갔다 오니까 정말 죽어라 공부를 하는 거예요. 이게 올바른 건가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 ‘행복한 삶이 뭘까’ 고민하다가 깨달음이 하나 왔어요. 밥상을 놓고 밥을 먹으려고 보니까 밥상 안에 모든 게 다 깃들어 있더라고요. 정말 내가 은혜로 살아가는구나, 깨닫고 그때부터 제 삶이 좀 바뀌었어요. 그래서 한살림을 알게 됐어요. 한살림에 사람 구한다고 해서 보니까 밥상살림 농업살림 생명살림 한다고 되어 있는 겁니다. 한살림에 들어와서 한살림선언과 동학의 말씀 식일완만사지. 밥 한 그릇의 뜻을 알면 온 우주를 다 안 다는 말씀을 만나면서, 운명이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생명에 대해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고, 젊은 친구들이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이 친구들이 정말 행복한 게 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명에 대해서 나름의 각성들이 필요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고요. 요즘 한살림 교육하면서 어떤 걸 강조하느냐면, ‘한살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물어봐요. 한살림의 20주년에 만든 노래가 있습니다. 오이 당근 딸기… ‘오이가 원래 이런 맛을 가졌어 … 이제야 알게 됐어 한살림 만나서’ 이런 노래가 있어요. 이런 노래 들으면서 아 이 게 바로 깨달음의 노래구나. 한살림에 들어오신 분들은 모두 깨달은 분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요. 뭘 깨달았을까. 이대로 살면 안 되겠구나. 아무거나 먹어선 안 되겠구나. 우리 아이들을 키우려면 한살림 해야 되겠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런 분들을 모두 모시면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 니다. 협동조합이 많이 생겼는데, 그렇다면 과연 한살림이 왜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정말 작은 쌀가게에서 아주 크게 성장을 했을까,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데, 거기에는 바로 정신과 가치가 있지 않나, 지금은 외양적인 것을 보고, 협동조합이 된다니까 많이들 오시는데, 내부에서 흔들리고 외부에서 어려움 이 닥치면 무너져 버리는 거죠. 한살림은 그런 것보다도 정신이나 가치를 먼저 공유하고 참여하고 그것 을 운동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때까지 많은 사람들의 성원 속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 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우창수 선생님 오셨는데, 장일순 선생님 하면 가장 떠오르는 말씀이 있 습니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노래) 감사합니다.
황도근 오늘 와주신 다섯 분께 잠깐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까 하는 문제에 대해 서, 우리 사회 현상, 협동조합의 나가야 될 길,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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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자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번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너무 막막했어요. 여러분들도 그러셨 겠지만 세월호 사건을 접하면서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저희 지역 사람들도 몇 사 람 희생이 됐거든요. 故박지영 씨도 제가 사는 지역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어요. 이 사건을 보면 서,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느꼈을 우리나라 상층부, 소위 권력 을 가진 분이라든가, 막강한 재력을 소유한 분들의 도덕성에는 우리하고는 거리가 좀 먼 느낌을 많이 받 았는데, 여러분들도 받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지금 이름을 거론할 수는 없지만 우리 스스로가 몇 년 전 에 도덕적으로나 여러 가지 흠결이 많은 분도 경제를 살려준다고 하니까 다 찍어 줬잖아요. 그런 리더를 우리가 뽑았는데, 아까 김종철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정말 시대가, 사상적으로 철학적으로 너무 빈곤 한 거 아닌가. 저는 현실적으로 볼 때, 큰 사상가 이전에 지금 현재 정치를 하시는 분들이 너무 철학적 인 사상이 부족하구나, 그분들이 무엇무엇 해주겠다는 쓸데없는 공약이나 남발하잖아요. 저희는 그걸 보 고 그분들을 찍어주는데,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시민단체들 도 정말 우리 사회에 대한 대안들을 같이 고민해서 제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압력단체의 역할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정치에 관심 갖자 그러면 “시의원 나갈 거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정치가 잘못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게 저희 같은 서민들이잖아요. 저는 철거민들이 모여 사는 복음자리 마을에 같이 있는데, 그분들은 사회적으로 굉장히 소외된 분들이거 든요. 그분들이 일차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얼마 전에도 세 모녀 자살 사건으로 다들 마음 아파했잖아 요.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정치하는 분들이 나눔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도 봤지만, 사람 귀한 줄을 모르고 사람이건 뭇 생명이건 돈으로 환산되는 존재로 판단하고 있구 나. 그래서 우리 사회를, 여기 모인 우리들이라도 작게 작게 변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깨어 있고, 끊임 없는 수련을 해야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아까 강의 들으면서도, 매일 수련을 해야겠다 생각했는데요, 우리가 그렇게 나가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주민들에게 저는 우리 정치 잘못 됐을 때 할머니들이 정신 대로 끌려가 고생했지, 정치가 온전했으면 그렇게 됐겠느냐, 우리가 학연, 지연, 혈연 이런 거 다 떠나 서 정말 자기 경륜을 갖고 있는 그런 분들을 뽑았으면 좋겠고요. 아까 손학규 씨 다녀가셨지만, 저는 그분이 내건 표어 중에서 ‘저녁이 있는 삶’ 참 좋게 느껴졌거든요. 저는 지역에서 우선 아이들을 좀 교 육을 시켜야 되겠다 싶어서 공부방도 하고 있고, 지금은 제가 은퇴해서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의 할머니가 되어주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그런 식으로 길게는 어린이들부터 청년들까지, 생명에 대한 외경심,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주력을 해야 되겠고, 여러분처럼 가정에서 자녀들 을 키우시는 분들은 가능하면 저녁이 있는 시간을 많이 확보하시길 부탁합니다.
임봉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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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에 협동조합에 관련해서 하신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이번 세월호 사건이라든가, 늘 우리 주변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사건들, 이런 것들의 바탕을 보면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가, 그래서 협동조합도 지금 숫자도 많이 늘어나고 우려하는 부분도 있습니 다만, 초기 60~70년대 협동조합운동을 할 때, 그때만 해도 신협이나 소협, 의료생협, 이런 협동조합들 을 망라해서 교육했었는데, 기본 철학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고 생각해요. 지금 협동조합을 잘 모릅니 다. 아까 제도화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저는 그것이 문제의 시발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 히 농촌에서 요즘 귀농하시는 분들이 지역마다 많은데, 이분들이 협동조합 얘기를 하거든요, 근데 저는 그 동기가 저는 우려스러워요. 지원금에 관심 갖는 거예요. 원래 협동조합이라는 것은 자발적으로, 자발 적인 의지에 따라서 기본 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 동기가 우선 저는 가치를 어디에 두느 냐, 이것도 있고, 그것이 안 될 때는, 흔들린 제도화, 당연히 올 수 있는 거죠. 잘 하시겠지만, 어떤 문제가 터지고 나서 우왕좌왕 내 탓 네 탓 하잖아요. 저도 이번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본 게 아니라 들었죠, 밭에 모종 심고 씨 뿌리느라 바빠서, 라디오를 켜놓고 뉴스를 듣는데, 이틀 지나고 라디오를 꺼버렸어요. 내가 우울증이 걸릴 것 같더라고요. 한동안은 내 자책에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그러다가 오늘이 꼭 한 달이네요, 그러고 보니까. 버스를 타고 올라오 면서 든 생각이, 우리 사람들은 참 너무 망각, 건망증이 아니고 망각에 모두가 잘 빠지지 않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처음에는 막 와와 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버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아가버리 는, 이것이 계속해서 이런 사태를 만들어내고 있고, 내가 스스로 이 일에는 내 자신을 좀 돌아보면서, 아까 정치 이야기도 하는데, 정치가 제대로 안 되는 이유가, 저는 정치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자리 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자기가 어떤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것, 이런 데 대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협동조합에 있어서도 그렇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래서 정말 기 본 가치관, 이것이 분명하게 서 있을 때 아무리 지원금이 있고 돈이 있다 할지라도 우선하는 것은 사람 이 먼저여야 하고 생명이 먼저여야 하는데, 지금 세월호 사건의 경우는 ‘돈’이거든요. 사람을 모시고 생 명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돈을 모시는. 그런 속에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거죠. 그래서 저는 이런 말씀 을 드리고 싶어요. 좀 적으면 어떻습니까. 적으면 적은 대로. 좀 적게 쓰고, 적게 먹고, 낮게 보고, 내 자신부터, 우리 삶이 지금 너무 편하게 편리하게 길들여져 있는 이것을 지금부터, 우리 한 사람 한 사 람, 나 하나가 먼저 변화한다면 앞으로 계속해서 기후변화, 식량위기, 많은 위기들을 얘기하고 있지 않 습니까? 앞으로 재앙으로 다가올 텐데,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내다, 우리 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 삶을 변화시켜 간다면 적어도 다음 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갈 수 있 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상국 저는 지금 한살림 처음 시작할 때나 장일순 선생님이 생명운동 말씀하셨을 때보다 총체적 생명 위기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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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심화되고 있긴 하지만, 이런 생명 가치관을 자신의 삶과 전체 지역사회에서 같이 실현해보자는 노 력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생명파괴 현상이 심각해지지 않겠는가. 비록 의석도 내지 못한 녹색당 이지만 그러나 그게 있어서 지금만치 망가져있지 않지 않겠는가. 거기에서 희망을 넓히고 키워나가야 되 겠단 생각도 들고요. 한살림 같은 경우는 다시 한살림의 기본, 마음의 출발, 부엌과 들판에서 다시 되새 기고 다가갈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장 선생님 작품 중에 ‘수기안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나를 닦아서 주변을 편안하게 만든다’ 제가 요즘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반성 많이 하고 있습니다.
황종렬 사실 현상이 나타나는 데는 심상이 작용하지 않습니까? 심상이 나타나는 데는 마음에 착상되는 게 있습 니다. 그리고 그 논리를 생산해 내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걸 같이 못 보면 현상과 구조가 하나로 놓여 있습니다. 그게 이어져 있는데, 정의로운 관계에 나름 헌신하는 사람들은 현상과 심상과 착상과 구조가 바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불의한 관계를 기획하고 그 구조를 정착시키려 하고 그 위에서 세력을 형성하 려는 사람들은 현상과 심상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어 놓습니다. 현상은 선한 것으로 드러내면서 심상은 다른 데 가 있고, 현상이 드러나게 되면 심상을 숨기기 위해서 이번에는 착상으로 숨어들고. 착상까지는 어떻게 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 구조는 안 건드립니다. 이런 것들을 식별할 수 있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않습니다. 구조라는 것은 뇌세포 속에 층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걸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꿔지지가 않습니다. 중독을 바꾸고 싶다고 해서 안 되는 것처럼, 그걸 바꾸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합니다. 이 수행을 얼마만큼 지속시켜갈 수 있는가. 이 수행이 동반되지 않는 현상이라든가 비판, 논리를 분석하고 드러내주는 것들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 구조를 건드리지 못하는 한 그대로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구조로부터 시작해서 착상, 심상, 다시 현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장 선생님께서는 한마디로 말씀하십니다. ‘속이지 마 라.’ 그 말은 ‘구조와 현상이 하나로 될 수 있도록 살아라.’ 이 말이라고 저는 알아듣습니다. 정말 우 리 교회는 안 속이나? 이번에 그렇게 일용직 내지 비정규직 선장 이야기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비정규직 이 많이 있습니다. 구조는 건들지 않는다, 다른 데 나타난 현상은 비판하면서. 그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그분의 요청, 호소, 그리고 도전, 속이지 마라, 말한 대로 살아라. 하나님께 받은 혼대로 살아라. 거기 에 길이 있다. 단순히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구조라는 것은 공동체 차원, 민족사와 관련된 것이고 지 구공동체와 관련된 것이다. 속이지 마라. 여기에 길이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상범 무위당 선생님은 제가 곁에서 모셔보니까 범사에 철두철미한 분이라고 느꼈어요. 정치나 유신 엄혹한 체 제 하에서 운동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각별하게 신경을 쓰셨지만, 자기 주변에 있는 동료나 젊은 사람들 에 대해서 제가 아까 얘기하다가 말았지만 그렇게 신경을 쓰시면서 뒷바라지 해주셨어요. 그래서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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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정신이 뭐냐, 그걸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역시 그 생명사상이 아니냐. 인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철두철미한 정신하고 모든 생명에 대해서 존엄하게 여기는 그 생 각, 이것이 체질화되어 있는 분이다, 이렇게 느꼈습니다. 젊은 사람들, 제가 여기서 이름을 다 거명할 순 없지만, 특히 칠기나 서화나 이런 거 하는 젊은 사람들은 선생님이 지도를 많이 해서 그렇게 키운 겁니다. 제도권 교육기관 나오셨지만 사회에서도 사회교육자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 밑바탕에 깔 린 거는 근본적으로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생명존엄 사상을 체질화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 마 지금 살아계셔서 세월호 같은 사건 보실 때는 선생님 아마 상당히 우셨을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듭니 다. 일단은 오늘 선생님에 대한 사상을 얘기할 때, 생명중시 사상을 여러 가지로 얘기하고 조명했는데, 상당히 좋게 생각을 합니다. 제 얘기 마치겠습니다.
황도근 앞으로도 더 많이 공유하고 공부하는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섯 분께 다시 한번 박수 부탁드립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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