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전환의 새 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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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1 0 0주년 기념

위기의 시대,전 환 생명학연구회와 전환 콜로키움 의

( 금 ) 2 0 1 5 . 1 2 . 1 1 - 1 2 (토 )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

2층 제 1 회의실

새 길 마을 , 마을 민주주의 그리고 전환

‘몸’의 한 사람

개벽과

주체성과

영성 공동체

사회 의

전환

생명위기 시대, 여성 운동의

풀뿌리 로부터

전환, 근본적 이면서

찾 기

전환 을

꿈꾸다

급진적 으로

적공 , 큰 전환 을

위하여

주최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국제학술대회 조직위원회 협력 생명학연구회 ( 사) 모심과살림연구소



위기의 시대, 전환의 새 길 찾기

생명학연구회 * 전환 콜로키움


진행

생명학 연구회

11일 오후 7시 ~ 9시30분

진행 김용휘 한울연대 공동대표

발제1.

마을, 마을민주주의 그리고 전환 윤호창 전 서울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 마을기업인큐베이터

발제2.

‘몸’의 개벽과 영성공동체 정혜정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

종합토의. 참석자 전원


진행

전환 콜로키움 12일 오전 9시30분 ~ 12시30분 진행 박맹수 원불교사상연구원 부원장

09:30-09:40

개식 (개회, 취지 및 패널 소개) 【제1주제 발제】

09:40-10:00

한 사람 주체성과 사회의 전환 발제 : 주요섭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제2주제 발제】

10:00-10:20

생명운동 시대, 여성운동의 전환을 꿈꾸다 발제 : 윤정숙 (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제3주제 발제】

10:20-10:40

풀뿌리로부터 전환,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으로 발제 :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공동대표)

10:40-11:00

휴식 【종합논평】

11:00-11:30

대전환을 위한 성찰 두 가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지정패널토론】

11:30-12:00

정상덕 (원불교 백년성업회 사무총장) 강해윤 (원불교 개벽교무단)

12:00-12:30

12:30-13:30

【종합토론】 참가자 전원 【점심식사 및 폐회】 원불교 중앙총부 식당


목차

[생명학연구회]

마을, 마을민주주의 그리고 전환 _ 7 윤호창 전 서울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 마을기업인큐베이터

‘몸’의 개벽과 영성공동체 _ 21 정혜정 원광대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 [전환 콜로키움]

한 사람 주체성과 사회의 전환

_ 41

주요섭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생명위기 시대, 여성운동의 전환을 꿈꾸다 _ 72 윤정숙 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풀뿌리로부터 전환,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으로 _ 85 하승우 땡땡책협동조합 공동대표

대전환을 위한 성찰 두 가지 _ 93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부록]

1. 원불교 ‘개교표어’에 담긴 개벽에 대한 열망 2. 물질개벽의 의미와 그 실상

_ 102

박맹수 원광대원불교사상연구원 부원장 3. 멋스러운 둥근 마당

_ 105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참고]

주관 및 협력단체 소개

_ 107

원불교 100주년 기념헹사 프로그램

_ 109

_ 99


* * * 생명학연구회



마을, 마을민주주의 그리고 전환 ....현대사의 우리는 국민으로 태어나 시민이 되기 위해 달려왔으나, 난민이 되어버렸다. 난민을 탈출하는 길은 주민이 되는 데에 있다....

윤호창1)

1. 들어가며

마을이 우리 사회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풀뿌리운동으로서 마을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활동해왔지만 기존의 시민단체와 시민운동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그 자리를 조금씩 대신해 나가고 있다. 지난 9월에 열린 마을만들기전국대회에서 56 여 개 광역·기초 지방정부가 참여한 가운데 마을만들기 지방정부협의회 창립식을 열었다. 현재 106개의 지자체에서 마을만들기 관련 조례가 제정되어 있으며, 40 개 지역에서 중간지원조직이 구성되어 활동 중에 있다. 국회에서는 관련한 기본법 을 준비 중에 있으며, 지방정부협의회에서 2020년까지 거의 모든 지자체가 마을사 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리 사회는 바람이 강한 사회다. 마을이 노동, 경제 등 많은 것들을 해결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통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행정의 이 같은 관심은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행정의 마을에 대한 관심과 개입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많다. 민간의 역량을 통해 자율적, 자 립적, 자치적으로 전개하고 추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한국 사회는 국가와 시장의 힘에 압도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지방자치단체와 같은 공공적 힘과 의 협력을 통해 마을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가 볼 수 있는 하는 점이다. 인구의 절반이 몰려 있는 서울(2012)과 경기(2015)에 광역 단위 마을지원센터가 1) (현) 개벽신문 편집위원, (전) 서울시 마을공동체지원센터, 사단법인 마을, 생태유아공동체 사무처장, YMCA 등에서 활동. 주요 저술: <풀뿌리, 마을 민주주의를 통해 21세기 개벽을 이루자>(2015), <생명운동의 공명(共鳴)과 사회화를 위한 제언>(2005) 등. 7


설립되면서 민관협력방식의 마을운동은 보다 가속화될 전망이다. 중앙정부 또한 70년대 새마을운동의 부활을 외치면서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새마을운동 을 개발독재시대의 관제운동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농촌과 농민 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인해 상당한 가시적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기에 70년대 새마을운동을 민중들의 생활사 관점에서 국가의 정책이 민중의 경험과 어떻게 결 합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 볼 필요도 있다고 주장한다.2) 실제 로 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서울시의 마을운동의 가치와 지향, 방법론에서 큰 차이 가 많이 있지만 유사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87년 이전은 공적영역에 대한 권력의 행사는 국가권력의 일방적인 방식이었다면, 민주화 이후 점점 성장하기 시작한 시민사회와 시민단체가 국가권력의 빈틈을 지 적하고 비판하면서 사회적·공공적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제4의 권력이라 불리면서까지 전성기를 누렸으나, 2000년 중반 이후 시민단체 중 심의 시민사회는 침체기를 맞고 있다. 시민단체가 침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풀뿌 리 자치운동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고 마을운동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민단체 중심의 시민운동이 침체기를 맞이한 데는 짧은 역사와 사회적 인프라의 미흡, 국가의 탄압, 재생산 구조의 취약 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비판이다. 한국 사회의 현안과 과제는 산 적해 있고 시민사회의 힘과 역량은 취약한 상황에서 현안과제 중심으로 활동을 전 개하다고 보니 시민들이 함께하기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의미 있 는 활동을 위한 후원자로 머물렀고, 시민단체는 권력과 대립각을 세우고, 이슈를 만들고, 대변 활동을 하는 데 치중했다. 물이 없는 데서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시민 없는 시민단체 활동은 위축되 고 그 비어가는 자리를 대신해 마을과 풀뿌리 운동이 등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때문에 마을은 기존의 시민운동과 시민단체를 보완해가면서 시민사회를 좀 더 풍성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역할을 나누고, 협력과 연대를 하는지에 따라 시민사회의 성숙과 질은 달라질 것이다. 2) 김영미, 『그들의 새마을운동』, 푸른역사, 2009 8 생명학연구회


2. 서울지역 민관협력 마을운동의 전개와 흐름 2011년 서울시 재보궐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면서 마을만들기가 중요정책 과제 중 하나로 등장했다. 마포의 성미산마을, 강북의 재미난 마을 등 육아와 교 육을 바탕으로 성장한 기존의 마을공동체 모델을 서울의 전 지역에서 보육과 교 육, 주거, 돌봄, 경제 등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산시켜보자는 생각이었고, 서울지 역에서 지역활동을 전개해온 이들이 11년 말부터 12년 상반기집담회와 간담회를 거치면서 준비작업을 했다. 필요와 희망의 목소리와 함께 우려도 등장했다. 이들 우려의 요지들은 △이미 대부분 지역공동체가 상실된 인구 천만의 대도시에 서 마을을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시민역량, 주민역량이 취약한 상황에 서 행정의 개입은 오히려 기존의 성과마저 없앨 수 있지 않은가? △행정과 좋은 거버넌스를 만들 수 있는가? △서울 인구의 절반이 세입자이고, 연간 인구이동률 이 20%에 가까운 정주성이 떨어지는 서울에서 가능한 일인가?등등 다양했다. 하 지만 상당부분 시민들이 참여해 만든 지방정부이고, 거버넌스를 만들어 운영할 틈 이 형성되었기에 적극적 활용을 주장한 이들을 중심으로 실무TF를 구성하고 2012 년 8월에 광역센터를 오픈했다. 실무TF 기획과 준비과정에서 민간단위의 기초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인 식하고 마을대학 / 마을기금 / 아카이브 구축 / 마을담론 등 민간자산을 구축하려 는 계획과 의지는 세웠으나, 재정과 인력의 부족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주로 행 정예산을 중심으로 사업이 전개되었다. 서울 지역의 마을만들기는 주민주도의 마 을계획수립 / 마을활동가 육성 / 10분 거리 내의 주민커뮤니티 공간 확보 / 주민 주도의 커뮤니티 활동지원 / 마을경제 활성화 등을 핵심과제로 삼고 활동을 준비 해 나갔다. 1) 주민주체의 등장과 성장

마을운동의 핵심은 주민의 등장과 성장이다. 하드웨어가 구성된다 하더라도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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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할 주민주체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새마을운동과 관 주도의 마을사업에서 보았 던 것처럼 전시행정에 가까울 것이기에, 주민들이 어떻게 등장하고 성장할 것인지 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준비기간이 충분치 않았고 시민들과 주민들의 욕구를 확인 하는 검증과정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주민주체의 등장은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았 다. 하지만 주민들은 관심과 참여는 예상보다 비교적 뜨거웠다. 12월 8월부터 14년까지 약 30개월 동안 총 4,512개의 모임이 공모사업에 신청했 으며, 이 중 2,100개의 모임이 선정되어 지원을 받았다. 2014년 진행된 ‘서울시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운영 현황 조사’에 의하면 지원받은 모임의 마을지원사업이 종료될 시점에 평균적으로 몇 명의 주민이 모였는지 물었는데, 그 답의 평균을 내 면 28명이다. 이에 근거해 산출해보면 지금까지 연인원 126,308명이 지원을 신청 했으며, 그중 58,800명이 지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각 모임이 지원을 받은 후 새롭게 증가한 신규 회원은 평균 13.8명으로 이에 근거해 계산해보면 마 을지원사업을 통해 마을 활동을 새롭게 시작한 주민은 28,980명으로 추정된다. 마을지원사업을 신청한 대표 제안자 3인은 총 13,536명인데, 이 중에서 제안서에 성별과 나이에 대한 정보를 기입한 사람은 총 6,953명으로 전체의 51.4%이다. 이를 바탕으로 분석해보면 마을지원사업에 참여한 주민 중 여성은 69.4%이고, 남 성은 30.6%이다. 연령별로는 20세 미만이 0.1%, 20대 7.4%, 30대 25.2%, 40대 41.5%, 50대 17.4%, 60세 이상은 8.5%이다. 보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40대 여성이 2,201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30대 여성이 1,266명이며, 50대 여성이 765명으로 세 번째로 많다. 반면에 10대, 20대 남성이 208명으로 가장 적고, 다음으로 10대, 20대 여성이 314명이며, 60대 이상 여성이 279명으로 세 번째로 적다. 세대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비율을 보면 40대 여성이 76.3%로 가 장 높으며, 60대 이상 남성이 52.6%로 가장 높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비율이 높 은 가운데 40대에서 여성 참여가 가장 많지만, 생애주기에 따라 은퇴 후 제 2의 인생을 설계하는 60대부터 남성의 참여가 높아지는 추세를 볼 수 있다.3) 이와 같이 사업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참여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진 것 3) 마을공동체 성과연구보고서(마을,3년의 변화), 2015,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p22-26 10 생명학연구회


은 참여 기준을 주민 3인으로 해 문턱을 낮춘 영향이 크다. 기존의 지원사업은 비 영리단체 이상의 지원자격으로 사실상 주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부재했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에서 협동조합의 최소설립 인원을 5인 이상으로 하고, 마을공동체 제안사업을 3인 이상으로 했던 것은 누구나 뜻을 내면 할 수 있 도록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낮은 문턱이 거품을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오랜 식민지와 독재의 경험, 높은 노동시간과 생활세계의 파괴로 공공의 단체나 모임을 만드는 데 익숙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는 부정보다는 긍정의 효과가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다. 절반 이상이 과거에 유사한 경험 없이 생애 첫 경험을 하는 새롭게 주민들이었으 며, 1년 활동을 마무리지으며 주민들이 서로 평가할 때 나왔던 ‘세금을 내고 처음 세금 덕’을 보았다는 이야기에서 국가와 사회가 개별 시민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주민들의 등장은 2년간 단체와 주민모임의 변화에 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처음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이 시작되었던 2012년에는 공모사 업 신청 건 757건 중 56.4%가 기존 단체가 제안한 사업이고, 주민모임이 제안한 사업은 43.6%였다. 그러나 2014년에는 1,889건의 제안 중 단체의 비중은 14.5%로 감소된 반면 주민모임의 제안 비중은 85.5%로 대폭 상승하였다.4) 초 반에 주민들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미숙함을 드러냈지만, 시행착오와 상호검증을 하면서 비교적 빨리 성장해갔다고 볼 수 있다. 2) 주민의 권한 강화와 네트워크의 형성

2007년 사회적기업지원법이 제정되고 인건비 중심의 직접 지원을 했지만 부정수 급, 내부 갈등, 투입대비 자립기반의 강화되지 않는 등 다양한 부작용이 드러났 다. 사회적 신뢰, 사회적경제 생태계 등 사회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 에서 재정 투입은 눈먼 돈으로 치부되어 옆으로 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 사회혁신적 기업에 대한 개별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핵심은 사회적경제에 대한 생태계와 인프라가 과연 구성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여러 해 동 안의 시행착오 끝에, 사회적경제든 마을공동체든 지역생태계 조성이 최근의 핵심 4) 위 자료 11


적인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인드라의 그물망처럼, 사회적 생태계가 조성되기 위해서든 당사자들 스스로의 필 요에 따라 다른 개인이나 기업들과 관계망을 형성하고 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 다. 하지만 생태계가 지금껏 조성되지 않은 것은 TOP-DOWN의 수직적 관계였기 보조금을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권력관계만 있었지 횡적인 관계망은 형성되지 못한 탓이 크다. 지난 20년 동안 지방자치를 시행해왔지만, 중앙정부가 재정과 인사권 등 권한을 이양하지 않아 제대로 지방자치가 발전되기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때 문에 이 같은 권한의 이양 문제를 염두에 두고 주민들이 스스로 사업을 결정하고, 평가해 질적으로 개선해나가는 방식을 모색했다. 마을지원 사업은 선정된 사업에 대한 집행 권한을 주민에게 확대하는 것뿐만 아니 라 사업 자체를 결정하는 심사 과정에서도 주민결정권을 확대해왔다. 2012년에는 주민이 사업을 제안하면 현장조사원이 방문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주민들이 미 처 서류에 담지 못한 내용을 파악하여 현장조사보고서에 그 내용을 포함해서 작성 했다. 그러면 전문가와 공무원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주민들이 작성한 제안서 와 현장조사보고서를 살펴보고 심사하여 지원 여부를 결정했다. 마을지원사업 시행 초기에는 주민의 필요에 대한 지원 결정을 전문가와 공무원이 독점해왔다. 주민의 필요는 전문가나 공무원이 아니라 주민이 가장 잘 알기 때문 에 지원 결정 과정에서 주민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따라 마 을지원사업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스스로 결정권을 행사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거쳐 제안자가 직접 심사위원이 되는 ‘제안자참여심사’가 2013년 우리마을프로젝 트 3차 공모사업에서 시범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2014년 우리마을프로젝트와 부모커뮤니티 사업에서 전면적으로 시행됐으며, 주민제안사업 활동지원의 겨우 1 차 공모사업에서 시범적으로 도입한 후 2차 공모사업에서부터 전면적으로 시행하 고 있다. 또한 보다 많은 주민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획된 ‘이웃만들 기’공모사업의 경우 기획부터 자치구로 권한을 이양했는데, 25개 자치구 중 21개 자치구에서 제안자 참여심사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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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자 참여 심사는 심사선정 과정에서 주민의 권한을 강화하여 주민 결정권을 확 대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마을공동체에 대한 주민 교육 효과도 높은 것으로 드러 났다. 부모커뮤니티와 주민제안사업의 경우 심사 선정이 끝난 후 동일한 내용의 참여자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제안자 참여심사가 마을공동체 사 업과 해당 사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효과가 있다고 응답한 제안자가 90%를 넘었다. 1천만 서울은 강남3구와 강북으로 대변되는 비강남권의 차이가 있을 뿐 자치구별 정체성이나 차이를 크게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비슷한 지역을 행정단위별로 나눈 다는 정도뿐. 하지만 주민들의 참여하는 마을, ‘마을넷’이란 이름으로 주민의 네 트워크, 지역의 민간리더십과 역량, 자치구의 관심과 지원에 따라 서울이라는 동 질성에서 벗어나 지역이라는 차이가 조금씩 발생하고 있다. 자치구 단위의 느슨한 모임과 실질적인 생활권인 동 단위 네트워크, 건강한 마을생태계의 성립은 지역 간의 차이, 삶의 질의 차이를 좀 더 분명하게 만들어갈 것이다. 내년부터 본격화 될 ‘찾아가는 동 주민센터’에 주목하는 것도 생활권 단위의 마을생태계가 이런 사 업과 활동의 지역정착 여부에 따라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민관, 민민의 협력과 거버넌스

우리 사회에서 거버넌스가 화두로 등장한 지 오래 되었지만 좋은 거버넌스의 사례 를 찾기는 쉽지 않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 위로 인식하지만, 우리 사회가 거버넌스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성숙되어 있 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갑을문제에서 보는 것처럼 힘의 불균형이 심하고, 상호 이해와 협력을 위한 신뢰자본이 충분히 구축되어 있지 않다. 마을운동 역시 힘의 불균형이 심하지만 서울시의 정책사업 중의 하나이고, 자치구 별로 마을넷이 형성되어 있고 지역활동가 출신이 행정책임자로 있어 그나마 여건 은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지원사업을 설계하고 만드는 과정에서는 많은 갈등과 충돌이 어려움이 발생했고, 이해관계 조정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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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서울시의 마을지원사업에 대해 민간에서 제안한 지원절차는 철저히 민간에 근거한 이상적 제도로 설계했다. 2012년의 지원절차에 의하면 ‘사업제안서 제출 및 접수’ 이후에 심층상담이 진행된다. 이는 제안서에 대한 심사를 통해 지원여부 를 결정하는 일반적인 행정의 지원방식을 탈피하여, 주민이 제출한 제안서의 부족 한 부분을 상담을 통해 수정하여 누구나 지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지향 한 방식이다. 주민들이 해보겠다는 뜻만 내면 전문가, 활동가의 도움으로 제안한 주민이 마을공동체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행정은 주민을 지원 할 때 주민이 무엇을 할지 그 구체적인 세부내용까지 확정하여 협약을 체결되고, 행정과 주민은 전형적인 갑을관계로 규정되며, 사업계획의 내용의 변경은 행정의 승인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이에 반해 12년 지원절차는 협약을 통해 행정의 지원여부가 결정되면 주민이 사업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 과정은 주민과 행정이 대등한 입장에서 정책을 함께 결정하는 결정권자라는 지위를 부여하려고 했던 것 이다. 이상에 근거해 만들어진 지원절차는 행정과의 벽과 갈등에 부딪쳤다. 제안서 제출 후의 상담이 현실화되려면 이를 수행한 전문 인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행정은 인력의 운영 예산 편성에는 지극히 소극적이었고, 이를 수행할 인력 없이는 불가 능한 이상에 불과했다. 결국 제안서의 수정ㆍ보완을 위한 심층상담은 심사를 위한 현장조사 전환되면서 ‘주민의 필요에 대한 행정의 심사’라는 행정의 관행으로 퇴 행한다. 제안자 참여심사를 통해 ‘행정의 심사’를 ‘주민의 심사’로 전환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의 지원여부 판단’이라는 프레임을 여전히 벗어나진 못했 다.5) 여러 갈등과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비교적 빠른 시간에 자치구 단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민간의 역량 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6) 인적·물적 자원 투 입이 민간역량의 총체적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다 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치구 단위의 민간역량의 성장이 행정과의 좋은 거버넌스를

5) 마을공동체 성과연구보고서(마을,3년의 변화), 2015,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 p38-45 6) http://cafe.naver.com/seoulmaeul 14 생명학연구회


만드는 바탕이기도 하며, 더욱 생활권 단위 혹은 주민 개개인의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자치구 단위의 마을네트워크는 지역의 사정에 따라 정체와 발전을 되풀이하기도 하고, 역량이 성숙하는 곳들은 동 단위의 생활권으로 에너지가 내려가고 자치구 단위의 사업들은 통합·융합되어가는 곳도 생겨나고 있 다. 민간단위의 역량 강화와 성숙을 통해 행정과 적절한 거버넌스를 이뤄가는 것이 바 람직하지만 과도기적으로 중간지원조직에 정보와 역량이 집중되기 되기 때문에 이 것을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중요하다. 중간지원조직의 역할이 강화되거나 커질 경 우 주민들의 네트워크와 역량이 약화되고 수직화 되면서 민간의 유기적이며, 수평 적인 자산으로 축적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가진다.

3. 과제와 전망 1) 정주성과 젠트리피케이션

서울시의 2010년 주택보급률은 96.7%이며, 자가점유비율은 41.1%, 자가소유율 은 51.3%으로 나타난다. 이에 가능한 해석은 1)서울 시민의 6할은 전세나 월세 에 산다 2)출퇴근과 자녀 교육 문제 등의 이유로, 자기 집을 놔두고 서울에서 전· 월세로 사는 외지 거주자가 많다 3)다주택자 비율이 높다 4)자가점유비율이 낮으 므로 주거이동이 많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은 66.4%(11년), 일 본은 61.2%('08년)로 30년간 크게 변화가 없으며, 유럽은 27개국 평균 73.6%(09 년)의 인구가 자가 소유를 하고 있다.

마을을 관계망의 형성이라는 좀 더 새로운 시선, 문화적인 관점으로 보려는 시도 가 있으나, 마을공동체의 형성에는 정주성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일본 의 동경과 서울은 비슷한 인구 1천만의 대도시이지만, 2011년 기준으로 매년 인구 이동률은 17.4%와 5.6%의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인구이동이 이렇게 빈번 한 상황에서는 마을과 지역공동체의 형성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최근 구로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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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동이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있는 지역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주거문제의 안 정성과 관련이 깊다. 장기전세주택지구라 적어도 10년 동안의 주거안정성이 보장 되어 있기 때문에 단기간에 마을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있어 주거안정성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거의 불안정성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사회적 실험들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청 년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이 스스로의 출자금, 민관협력 사업, 사회투자기금 등을 활용해 대안을 만들어가고 있으며,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 복한 주택)같은 사회적경제 기업이 협동조합형 공동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지원하

고 있다. 최근에는 공동체주택, 사회적 주택을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곳들이 모여 사회주택협회를 구성하고 활동을 준비하고 있으나 우리 사회의 주택과 주거 문제는 난제 중의 하나이다. 주거의 불안정성 문제와 함께 심각한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좋은 뜻으로 시 작하는 마을만들기가 기존의 주민들을 쫓아내는 역설을 보여준다. 서울의 경우 종 로구 서촌을 비롯해 홍익대 인근, 망원동, 상수동, 경리단길, 삼청동 등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의 현장이다. 공동체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 또는 서울시와 자치구에서 조례를 통한 임차인 보호 등을 모색하고

있으나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마을공동체, 지역순환경제의 활성화는 사실 주거안정화과 매우 밀접한 관련한 맺고 있기에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마을, 지역공동체 운동의 향방이 달라질 것이다. 토지나 주택의 가치상승은 공적 자금, 노동, 자본이 함께 개입해 가치를 상승시키 지만 현재의 구조는 노동이나 공적 자금의 기여분은 인정되지 않고, 가치상승분의 대부분을 자본소유자가 가지고 가는 구조이기 때문에 가치상승분에 대한 분배를 혁신적으로 전환하지 않고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공동체토지신탁, 토지보유세의 확대, 법과 제도를 통한 상승의 억제 등 다 양한 방법이 필요하지만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정책결정자로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해소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다. 공동체의 활성화의 물리적 조건은 여기에 달려있다 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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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민주주의의 등장과 실험

높은 이주율과 부동산 가격, 빈부격차 심화와 이념 갈등 등 마을공동체를 어렵게 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는 가운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마을 사업의 경험이 없었던 주민들은 초기에 새로운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지만, 2,3년 참여하고 진행하다 피로감을 호소하며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마 을과 공동체는 위로와 감동이 있는 만큼 피로와 갈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래 서 참여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가치와 비전 발굴 없이는 활성화와 지속성을 담보하 기 쉽지 않다. 마을공동체는 점-선-면의 경로로 변화 발전한다는 생각으로 이에 맞춰 사업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1기(12-15) 사업이 점과 선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2기 사업은 면 단위의 사업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생활권 단위라고 할 수 있는 동 단위의 통합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으 며, 시범사업으로 전개되고 있는 ‘마을계획’과 이를 제도적으로 실행할 ‘찾아가는 동주민센터’가 생활권 단위의 마을을 실질적으로 구축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 다. 서울시 광역 차원보다 앞서 마을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성북구에서 올해 ‘마을민주 주의’를 핵심적인 의제로 제시하면서 실천모델을 제시하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 다. 마을민주주의는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위기상황에서 주민들의 자치역량을 길러 일상의 삶의 문제를 마을을 중심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민주적 질서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7) 구체적으로 동 단위의 마을계 획을 주민들이 세우고 주민총회를 통해 결정하며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 다는 것이다. 마을민주주의에 주목하는 이유는 자산의 양극화, 계층의 고착화 등 물리적인 조건들이 고정화·불변화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과 마을단위의 풀 뿌리 민주주의 모델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7) 성북구 마을민주주의 심포지엄 ‘마을민주주의 시대를 말한다’ 자료집 p12 17


마을민주주의는 참여에서 자치로 나아갈 것을 내세운다. 참여가 대의민주주의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자치는 직접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을 요청한다. 사회 적 계층화와 소유구조의 양극화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극복 방식은 사 실 정치적 참여와 해결 말고는 뚜렷한 방법이 없는 것 또한 오늘의 현실이다. 지 난 10년 권력의 교체를 이루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기반은 여전히 취 약하고 위태롭다. 또한 국가 단위의 권력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큰 전환이나 변화 를 기대하기도 힘들며 기득권이 순환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공고화,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일상과 생활의 민주주의를 다지고 전 환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마을공동체의 성공 여부는 일상과 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느 냐에 달려 있다. 시민과 주민으로서 권리와 책임, 공정성, 배려, 윤리 등과 같은 시민성을 함께 배우고 익혀나가는 시민학습공동체가 자발적으로 형성될 때 튼튼한 기초가 만들어질 것이다. 최근에 민주시민교육지원조례가 서울, 경기의 광역단위 에서 만들어지고 기초자치구 단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8) 조례에서는 민주시민교육계획을 만들고 이를 지역에서 실행할 수 있는 코디네이터 를 양성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지역사회가 충분히 활용할 경우 민주주의의 의미 있 는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성북구에서 제안하고 실험하고 있는 마을민주주의가 쉽게 이뤄지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피를 먹고 자라는 성질이 있는데다, 행정관료와 주민들의 권력분점과 좋은 거버넌스가 어떤 형식으로 이뤄질지 쉽게 짐작하기 어 렵기 때문이다. 행정과 관료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이양한다면 좀 더 쉽게 이뤄 질 수 있겠지만 민간에서도 이를 수용할 만한 역량과 준비가 있어야 큰 갈등 없이 이뤄질 것이다. 마을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민주주의를 내실 있게 운영하는 것이야말로 적공(積功)의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적공 없이는 큰 전환 이 이뤄지기 힘들다.

8) 서울시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조례(2014년 1월), 경기도 민주시민교육 조례(2015년 9월)가 제정 되었으면, 성남시 민주시민교육조례는 2015년 11월에 제정되었다. 18 생명학연구회


3) 마을과 전환

지난 9월 제8차 마을만들기 전국대회에서 마을선언문을 만들고 발표했다. 그동안 지역적으로 파편적으로 진행되던 마을운동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마을운동의 가치 와 의미, 방법론에 대해 통합적으로 재구성해보자는 시도이다. 마을 단위에서는 주민들의 토론과 합의를 통한 마을선언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마을은 그 성 격상 분권과 자치를 기본적인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통일적인 담론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살 아가는 주민들이 장소성과 시간성에 맞는 적절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마 을하기’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을은 다양성 속에서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간디가 인도 에서 70만 개의 마을을 꿈꾸었던 것처럼, 마을은 다양성 속에 그 매력이 있다. 흑 백 논리가 난무하고, 위계질서가 강한 우리 사회가 다양성을 만들어가는 차원에서 라도 마을은 중요하다. 상하, 질서의 관계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강한 관계는 새 로운 억압이 될 수 있기에 느슨한 관계의 마을, 출입이 자유로운 무지개 마을이 더욱 필요하다. 사실 모든 구성원이 만족하는 마을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마을이 세상을 구한다’, ‘동네 안에 국가 있다’ 등과 같은 선언적 이야기들이 회 자되고, 혁신적인 리더십을 가진 마을과 도시의 지도자들이 색다른 방식으로 사회 혁신을 이끌고 있다. 마을민주주의, 청년배당과 같은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 그런 사례이며, 앞으로 그 빈도와 종류는 더욱 높아지고 많아질 것으로 보인 다. 여전히 국가가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이나 소규모 공동 체, 그리고 지역과 도시의 역할이 강화될 것이다. 그 흐름 속에서 마을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려도 많다. 어느 정도 기반을 구축했다고 생각했던 민주주의가 쉽게 퇴 행하는 것을 보면서, 마을이 민주주의와 충분한 결합을 하지 못하면 퇴행과 왜곡 의 모습을 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사회적경제든, 마을이든 민주주의 기반과 훈련 없이는 다종다양한 갈등만 양산할 뿐 온전한 성장을 기대하기 힘들다.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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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마을을 만들어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과 경험이 중요하지만,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 조급한 우리 사회는 여기에 충분한 관심과 인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보다 많은 이들이 인내를 가지고 풀뿌리 마을민주주의에 적공을 해나가는 수밖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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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개벽과 영성공동체

정혜정9)

1. 동학의 한울체험과 ‘몸’의 개벽 19세기 후반 독선적이고 완고한 조선사회에 한국문명의 새로운 물꼬를 연 것이 바로 동학이다. 동학은 ‘한울의 개벽운동’이다. 한울이란 인간과 한울이 심천상합 (心天相合)하여 하나됨의 “대 우주생명체”를 말하고, 개벽이란 “부패한 것을 맑고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동학은 “악질(惡疾)이 세상에 가득 차서 ‘民’이 하루도 편안할 때가 없던 때”, ‘民’을 도탄에서 건지기 위한 광제창생, 보국안민, 후천개 벽의 도로서 창도되었다. 사회의 부패와 모든 폐단을 ‘한울을 회복하는 재생운동’ 으로부터 고쳐나가는 사회변혁이다.10) 개벽이란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는 개천벽지(開天闢地)의 의미라기보다 억압과 부 패를 갈아 없는 ‘다시 개벽’을 말한다. 각자위심으로 생겨난 ‘사회적 병폐와 모 순’, ‘한울과 분리된 마음’을 치유하고, 전체 생명과 하나 됨으로 돌아가는 지상 천국건설의 개벽이다. 한울을 상실한 문명세상은 괴질로 넘쳐나는 세상이다. 자신 의 ‘한울 됨(궁궁)’을 깨닫지 못한 자, 한울과 분리되어 각자위심하는 자는 병든 자요,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생명을 어긴다 .”11) 한울님과 일체가 되면 병든 인간이 치유가 되고 병든 사회가 함께 회복된다. “천지만물에 가득 차고 우주에 뻗쳐 있는 천지 기운과의 합일”은 몸에서 시작된 다. 수운의 “천지만물의 생명”, “사람의 생혼”, “한울의 대혼백(大魂魄)”12) “우주 9) (현)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전) 중앙대 초빙교수, 인천대 연구교수. 주요 저술: 《동학의 심성론과 마음공부》(2012), <조선 선불교의 심성 이해와 마음공부론>(2012), <동학의 한 울 교육사상>(2007) 등. 10) 동학의 개벽은 각자위심에서 오는 개인의 질병과 사회적 제도의 폐단을 한울의 마음, 천지의 지극 한 기운과 하나로 통하게 하는 것, 각자위심이 천심(天心)의 동귀일체로 열려가는 것, 그리하여 스 스로 말미암는 사회적 영성으로 사회를 새롭게 변혁시키는 한울의 생성활동이다. 11) 『東經大全』, 「論學問」, 不正而心有移 故與天地違其命. 12) 이돈화, 『천도교창건사』, 경성: 천도교중앙종리원, 1933, 14쪽. 21


한 기운”, “대 우주생명체”의 한울체험은 하나 된 천지만물의 생명을 자각한 것이 고, ‘세상을 살리는 한울의 살아있는 혼(生魂)’이며 천지만물을 꿰뚫어 우주로 뻗 치는 일통(一通)의 우주일심(宇宙一心)이었다. 천지 기운과 하나된 ‘우주생명’의 체험으로서 대우주생명과의 심화(心和)‧기화(氣和)를 이루는 것이 곧 몸의 개벽이라 할 수 있다. 동학의 개벽은 현대화된 표현으로 흔히 물질개벽, 민족(사회)개벽, 정신개벽 등 을 떠올리지만 개벽은 무엇보다도 먼저 수운의 한울님 체험에서 이해될 수 있다. 『동경대전』 논학문을 보면 수운은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外 有接靈之氣)’이 있고 안으로 강화가 내리는” 한울님을 체험하였다. 그는 시천주의

‘모심(侍)’을 “내유신령 외유기화(外有氣化)”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곧 ‘외유 접령 지기(外有 接靈之氣)’로서 내면의 신령한 본성이 천지의 기운과 하나 되는 천심(天 心)의 기화(氣化)를 이룸이다. 즉 인간의 신령한 본성이 밖으로 우주기운과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신령과 기화는 처음부터 둘로 된 것이 아니라 한 이치로서 “영성과 우주기운은 본래 하나”이다. 수운은 『용담유사』 권학가에서 “쇠운(衰運)이 지극하면 성운(盛運)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同歸一體) 하였던가”라 하여 후천개벽이 동귀일체에 있 음을 말하였다. 그리고 도덕가에서는 “지공무사(至公無私) 하신마음 불택선악(不擇 善惡) 하시나니 효박(淆薄)한 이 세상을 동귀일체(同歸一體) 하단말가”라고 하여

‘이 세상을 동귀일체하는 지공무사한 마음’을 노래하였다. 동학의 개벽은 ① 인간 의 신령한 본성이 몸을 통해 밖으로 우주기운과 일체가 되는 것으로서 천인상합 (天人相合)의 동귀일체(同歸一體)가 되고, 이로부터 ②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마음

이 발휘되어 보국안민, 광제창생, ‘다시 개벽’의 주체가 된다. 수운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21자 주문(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 忘 萬事知)도 보면 ‘안으로 신령함을 모셔 밖으로 지극한 기운과 크게 하나 되고자

함’을 나타내고 있다. 지극한 기운이란 우주를 주재하는 생명기운으로서 인간에 모셔진 한울님과 하나 되고, 밖으로 접령(接靈)의 기운으로 모든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세상을 화할 때 개벽이 일어난다. 이를 해월은 이천화천(以天化天)이라 했다. 인간의 신령한 본성이 밖으로 우주기운과 일체가 되는 것에 동학의 영성이 있고 천인상합(天人相合)의 개벽이 이루어진다. 천인상합은 자연과 인간, 강대국과 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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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남쪽과 북쪽, 영성과 몸이 갈라져 각자위심하는 상태에서 몸과 영성, 인간과 자연, 개인과 사회, 인간과 한울님이 동귀일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학의 개벽은 몸에서 시작하고 몸은 우주의 지기와 인간의 신령한 본성이 합하여 작용을 이루는 곳으로서 몸의 우주 기운과 내면의 신령이 일치할 때 몸과 영성의 개벽이 동시적 으로 일어난다.

2. 성신쌍전(性身雙全)의 개벽 의암(손병희)은 수운의 개벽사상을 집약하여 ‘성신쌍전(性身雙全)의 개벽’으로 표현하면서 “후천개벽 시기에 처한 우리는 먼저 각자의 성신(性身)부터 개벽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성신쌍전이란 ‘영성(性)과 몸(身)을 함께 온전히 함’을 말하는 것인데, “만일 자기 성신(性身)을 자기가 개벽하지 못하면 광제창생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없다”하여 “후천개벽의 시기에 처한 우리는 먼저 각자의 영성과 몸부터 개 벽하자”하였다. 영성을 개벽한다는 것은 영성의 권능으로써 비고 고요한 경지를 무궁히 하고 우 주의 근원을 확충(擴充)함을 말한다. 그리고 몸을 개벽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 가 있는데, ① 하나는 “내 속에 어떤 내가 있어 굴신동정을 하게 하는가를 일마다 생각하여 오래도록 수련을 쌓아 영성이 주체가 되게 함”13)이다. 영성이 주체가 된 다는 것은 몸에서 우주의 지극한 기운이 통하여 천지 일기(一氣)와 하나됨(氣和)이 고, 천지만물의 본래 일심인 천심(天心)과 하나됨(心和)이다. 이때 마음은 무념으 로서 비어있어야 한다. 망념이 조금이라도 끼면 몸의 열림을 막게 되고, 영성이 우주대생명체와 하나 되지 못한다. ② 또한 몸의 개벽이란 몸의 권능으로써 활발하고 거리낌 없이 현 세계에서 “인 간과 만물을 함양함”을 말한다. 인간과 만물을 함양한다는 것은 곧 광제창생과 보 국안민으로서 그 함양하는 만큼 인간의 몸적 조건이 해방되어 영성을 더욱 진보시 켜 간다. 영성과 몸의 개벽이 같이 가는 것은 몸에 지극한 우주기운이 통함으로 말미암는 접령지기(接靈之氣)에 의해서 영성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몸의 개벽을 이루어야 영성이 주체가 되고, 몸이 사회적 폐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영성이 살아 13) 지눌의 ‘깨달음의 마음공부’(2015), 참고. 23


난다. 의암은 몸에서 영성이 활성화되어 인간이 한울과 하나 되는 단계를 허광심(虛光 心)-여여심(如如心)-자유심(自由心)에 이르는 3심(三心)을 말했다.14) 이는 곧 몸

의 “몸의 열림”인데, 몸의 개벽은 허광심, 여여심, 자유심으로 심천상합을 이루어 우주의 지기와 인간의 한울이 하나 될 때 이루어진다.

① 허광심이란 밝히 깨달아 어둡지 않고(惺惺不昧), 고요하여 혼미하지 않아 (寂寂不昏) 빈 가운데서 마음의 빛이 나타남이다. 이는 곧 공적영지(空寂靈知)

의 마음, 두렷하고 어둡지 않은 마음인데, 이로써 회광반조하기에 생각 없이 안 다. ② 여여심은 공적한 우주 본심에 이르러 삼라만상이 본래 나와 일체임을 체험 하는 만물일체의 마음이다. ③ 자유심은 만물일체의 자각에 의해 보편성을 얻어 스스로 말미암는 자유로 서 판단과 주재를 행함이다. 이는 곧 모든 마음의 장애로부터 해방되어, “하고 자 함이 없으면서도 이루지 못함이 없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무심행(無心行)‧ 무애행(無碍行)이다. 무심행과 무애행은 곧 전체의 공도‧공행(公道‧公行)이 다. 생각함은 전체적일 수 없다. 무심만이 전체적일 수 있고 스스로 말미암는 자유 행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자유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기보다 전일체의 보 편성에 이르러 드러나는 스스로 말미암는 주재함’이다. 또한 공도·공행은 개인 의 다양한 형태를 따라 표현되는 사회적 영성이다. 이는 동학이 궁극적으로 지 향했던 바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보국안민, 광제창생, 후천개 벽의 활동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몸에 자리하고 있는 본성적 영성이 그것의 운동 변화를 주도하는 우주의 14) 『無體法經』, 「三心觀」. 24 생명학연구회


지기(至氣)가 몸을 통해 일치가 될 때 심천상합, 즉 천심(天心)이 발현되고, 만리 만사(萬理萬事)를 형성한다. 즉 공적(空寂)한 영성이 몸의 개벽을 통해 至氣와 일 체가 되면 후천개벽을 이루어 무위이화의 지상천국을 만들어 간다. 이는 자신을 치유하고, 우주정신의 ‘산 혼(魂)’으로 인간사회의 폐단을 고치는 총체적 ‘살림’이 다. 의암은 이를 허광심-만물일체의 여여심-공도‧공행의 자유심으로 세상을 치유 하고 뭇 생명을 함양하는 ‘사회적 영성’으로 말했다.

3. 이돈화의 3대 개벽 이돈화에 의하면 “조선의 민족성은 유교에서 얻은 숭고(崇古)사상, 의타(依他)사 상, 숭문배무(崇文排武)사상, 숭례계급적(崇禮階級的) 사상에 입각하여 만사를 선 왕의 도로 표준”15)하여 왔다. 이로 인하여 조선민족은 장래가 없는 민족, 자력이 없는 민족이 되어 왔고, 또한 불교로부터 생긴 퇴굴(退屈)사상, 출세간(出世間)사 상은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수동적인 삶을 살게 해 왔다. 수운은 “너희라 무슨 팔 자 불노자득하단말가 함지사지출생(陷之死地出生)들아 보국안민 어찌할까”하여 동 적 도덕을 고조하였고, 유교의 의타주의, 사대주의의 민족성을 바꿔나가기 위하여 후천개벽을 말했다. 이 모두 동국혼(조선혼)을 부식시키고자 한 수운의 노력이었 음을 이돈화는 말하면서 수운의 후천개벽을 3대 개벽으로 구체화 시켰다. 그것이 민족개벽이며 사회개벽이고 정신개벽이다. 동학의 목적은 지상천국으로 그 理想에 이르는데 까지 나가고자함에는 부득이 여러 계단을 밟지 않을 수 없는데, 이돈화는 지상천국을 이루는 단계에서 3대 개 벽의 과정이 있음을 말하였다. 동학의 기치인 3단(三端: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 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에서 ‘보국’은 민족개벽을 ‘안민’은 사회개벽을 의미하며 ‘포덕천하‧광제창생’은 지상천국을 의미한다고 그는 보았다. ① 민족개벽 은 세계 이상과 인류의 해방에 입각해 있지만 먼저 민족적 특수사정이 있기에 민 족으로 표준을 삼아 민족과 민족의 평등을 이루고 민족단위의 향상을 일컬음이다. ② 사회개벽은 인간 우주격중심주의 아래서 경제적 해방과 더불어 최고 인간품격 의 발휘를 목적으로 한다. 인간을 모든 비열한 동기로부터 해방하는 곳에 진정한 15) 이돈화, 『신인철학』, 경성: 천도교중앙종리원신도관, 1931, 221쪽. 25


이상적 사회가 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③정신개벽은 사람성 한울을 기준으로 한 역사적 고찰과 반항도덕을 의미한다. 역사적 원인에 대하여 장래의 결과를 고찰하 여 냉정한 이지로써 사리의 시비곡직을 비판하여 전도의 순차를 지정하는 것과 기 성의 윤리 혹은 정치제도의 결함을 알아 그 부자연에 대한 반항을 이름이다.16) 또한 이돈화는 동학의 天道를 진화성(進化性)으로 말하면서 한울의 무궁성이 혼 원일기(混元一氣)가 되고 태양계가 되며 만유가 되며 나아가 생물이 되고 끝에 가 서 인류가 되었다고 말한다.17) 天道는 고정불변의 체가 아니라 무궁의 개벽성으로 모든 사물이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일정한 계단을 밟아 역사가 되고 사상이 되어 불완전으로부터 완전에 나아가는 개벽이자 정신과 물질, 양자의 병행개벽이다. 개벽을 통해 이루어나가는 天道의 진화는 심천상합의 운동에서 시작된다. 심천 상합의 시천주를 이룸을 이돈화는 ‘인간격’, 혹은 ‘한울격’, ‘전우주격’이라는 말 로 표현하는데, 우주격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방면의 자유심으로 발전케 하는 것이 개벽운동이다. 우주격으로서 인간의 본령은 시대의 요구로써 시대정신을 체 현하여 이상을 현실에 부합시키고, 전우주의 활동력을 자기의 몸 안에서 체인하여 사회의 부정의와 모순을 그 무궁성의 힘으로 개혁‧향상시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 평등과 개혁의 기준은 인간격으로써 그 표준선을 긋는다. 인격상 개개인은 개인적 욕구와 자유를 인간격적으로 융합케 하고, 각 개인이 인간격의 자유를 체득하여 궁극에 타인의 자유와 융합함에서 개인과 사회의 조화를 이루면 서 인간격의 향상을 방해하는 모든 사회시스템과 불합리한 관행을 개조해 가는 것 이다. 종교의 신조, 도덕의 발전, 법률, 정치, 교육, 경제 등 모든 제도의 실행은 인간격인 ‘사람 한울격(우주격)’을 근거로 해야 한다.

4. 원불교의 ‘공‧원‧정(空圓正)’과 정신개벽 원불교는 개교의 동기를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 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 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 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18)라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진리적 종교의 16) 이돈화, 『신인철학』, 앞의 책, 211쪽. 17) 이돈화, 『인내천요의』, 경성: 천도교중앙총부, 1924, 20-21쪽. 18) 「正典」, 원불교정화사, 『圓佛敎全書』, 원불교출판사, 2010, 21쪽. 26 생명학연구회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 각자가 내면으로부터 솟는 진리추구의 영성적 힘을 신앙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은 바, 도의 작용으로서 덕성을 발휘하여 신성한 정신을 사회에 확대시켜감이다. 도덕훈련에서 도덕은 도체덕용(道體德用)으로서 무아봉공의 도덕 이 되고, 이 무아봉공의 확대는 일체 생령의 광제와 지상극락을 이루어 간다. 여 기에 원불교가 지향하는 정신개벽이 있다. 동학이 한울님을 말한다면 원불교는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말한다. 일원상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그 핵심은 “세상을 비추는 공적영지” 의 광명과 “우주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진공묘유의 조화”에 있 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수행은 일원상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마 음을 알자는 것이고, 이 마음을 양성하자는 것이며 이 마음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일원상의 마음을 사용한다는 것은 일원의 체성에 합하는 것으로 “시방 삼계가 다 오가(吾家)의 소유인 줄을 알며”, “우주 만물이 이름은 각각 다르나 둘이 아닌 줄을 알며”,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함”이다. 이 ‘원만구족‧지공무사한 것’ 으로 눈을 사용할 때에 쓰고, 귀를 사용할 때 쓰고, 코를 사용할 때에 쓰고, 입을 사용할 때에 쓰고, 몸을 사용할 때에 쓰고,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19)이 도 (진리)로부터 수반되는(덕), 도덕의 실천이요 개벽의 구현이라 할 것이다. 일원의 진리는 곧 空‧圓‧正이 된다. 불교의 정수는 空이지만 원불교는 이를 空‧圓‧ 正으로 표현한다. 空은 천하 만물의 주인이다. 천지는 허공을 이용하여 그 덕을

베풀고, 인간은 빈 마음을 이용하여 적절하게 물질을 이용한다. 禪은 마음 허공을 알리고, 마음 허공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학이다. 원불교 제2대 종법사를 역임한 정산 송규종사는 “그대들은 허공이 되라!”20) 하였다. 허공[空]은 비었으 므로 일체 만물과 하나 되고[圓], 마음 허공을 잘 알아 이용하면 세계의 주인이 된다. 空은 공의 원리를 알고 공의 진리를 체받아 항상 청정한 마음을 닦아 기르 며 無私한 마음을 닦아 행함이다. 마음이 허공이 되면(허광심) 일체 만물과 하나 됨이기에 이는 곧 여여심이라 할 것이다. 또한 “선악 미추와 자타미오(自他迷悟)의 相이 없는 자리에 서는 분별”이기에 그 분별이 바르다[正]. 이 분별로 진리를 증

득하고 세상에 실천함이 삼학(三學)의 정신개벽이다.

19) 「正典」, 앞의 책, 25-26쪽. 20) 「鼎山宗師法語」, 위의 책, 825쪽. 27


〈원불교 일원상의 空‧圓‧正과 삼학의 정신개벽〉 삼학(三學) 일원 상

정신수양: 양성(養性, 定) 유무초월의 자리를 관하 는 것

사리연구: 견성(見性, 慧)21) 일원의 진리가 철저하여 언어의 도 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없는 자리를 아는 것

마음의 거래 가 없는 것

知量이 광대하여 막힘이 없는 것

마음이 어지지 것

아는 것이 적실하여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는 것

기울 않는

작업취사: 솔성(率性, 戒) 모든 일에 무 념행을 하는 것 모든 일에 무 착행을 하는 것 모든 일에 중 도행을 하는 것

정신개 벽

비고 (동학‧천도 교)

허공일 심

허광심

원만구 족

여여심

지공무 사

자유심 (공도‧공행)

일원 세계의 구현

지상천국

소태산은 수운의 『용담유사』에 나오는 ‘이재궁궁을을’을 해석하여 “궁궁은 무극 곧 일원이 되고 을을은 태극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 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22)이라 풀이하 였다. 또한 “이러한 도덕을 신봉하면서 염불이나 주송을 많이 계속하면 자연 일심 이 청정하여 각자의 내심에 怨心과 毒心이 녹아질 것이며, 그에 따라 천지 허공 법계가 다 청정하고 평화하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니 많이 부르라 하였다. 원불교 가 유일학림을 세우면서도 유일(唯一)한 목적을 제생의세에 두고, 유일한 행동을 무아봉공에, 유일한 성과를 곧 ‘일원세계 건설’이라 한 것은 동학의 광제창생, 보 국안민, 후천개벽과 동귀일체의 지상천국 건설과 이어져 있다. 정산 또한 “사람의 마음을 天心이라 하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요, 사람이 이 자리를 알아야 진리를 두려워하고 숨은 공을 쌓을 줄 안다”23)하였다. 우주의 진리와 자신이 부합되어 크게 위력을 얻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서고, 일심으로 허공과 하나 되며 만물과 일체가 되어 적실한 판단을 이루고 무아봉공하 면 개벽이 무궁해 질 것이다. 21) 소태산은 견성의 다섯 계단을 말하여 첫째,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 둘째는 진공의 소식을 아는 것, 셋째는 묘유의 진리를 보는 것, 넷째는 보림하는 공부를 하는 것, 다섯째는 대기대용으로 이를 활용하는 것이라 하였다. 22) 「大宗經」, 위의 책, 252쪽. 23) 「鼎山宗師法語」, 앞의 책, 827쪽. 28 생명학연구회


원불교의 정신개벽 역시 몸의 개벽과 분리되지 않는다. 우주 만유가 靈과 氣와 質로써 구성되어 있고, 靈은 만유의 본체로서 영원불멸한 성품이며 氣는 만유의

생기로서 그 개체를 생동케 하는 힘이다. 또한 質은 만유의 바탕으로서 그 형체 (몸)를 이름인데, 기와 질은 함께 간다. “氣가 靈知를 머금고 영지가 기를 머금었 기에 기가 곧 영지요 영지가 곧 기이다. 형상 있는 것, 형상 없는 것, 동물, 식 물, 달리는 것, 나는 것 이 모두가 氣의 부림이요 靈의 나타남”으로서 “大性이란 곧 영과 기가 합일된, 둘이 아닌 자리”24)이다. 이는 동학에서 말하는 지기와 한 울의 합일에서 개벽을 이루는 것과 유사한 틀을 지니고 있다.

5. ‘몸’의 개벽과 영성공동체 1) ‘몸’의 우주순환과 생명공동체

동의보감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근본요소로서 地‧水‧火‧風의 4대를 말하고 4대로 말 미암아 인간 심신이 구성됨을 말한다. “영명한 정신 활동이 우주 요소 가운데 풍(風)에 속하고, 풍이 왕성하면 지혜가 많아진다.”고 한 것은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없음을 말 해준다. 흔히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구분하지만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은 결합되어 있 다. 우주를 이루는 지수화풍의 4대는 인간 심신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우주와 상호 순 환하기 때문에 몸과 마음, 물질과 비물질, 인간과 우주의 경계가 모호하다. 몸의 내부 는 외부와 순환하고 몸이 비물질이 되며, 마음이 물질이 되기도 한다. 인간 심신은 우 주 근원의 요소인 4대로 구성되는 우주의 활동이고, 우주와의 상호 결합과 순환을 이루 는 전일체이다. 호흡을 한다는 것은 외부의 공기를 통해 생명력을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내 부의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것으로 인간과 우주는 공기를 통해 연결되어 있 고, 물을 통해 순환하며 음식을 통해 한 몸을 이룬다. 이 모두 우주 기운의 순환 이다. 물, 공기, 밥을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먹는 것이 아니라 한울이 한울을 먹 는 신성한 행위이다. “내 자신이 먹는 것이 아니라 우주 생명이 드심”이다. 동학에서 몸의 생명은 곧 우주 생명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 24) 위의 책, 822-823쪽. 29


靜)이 모두 ‘한울’의 작용이요25) 사람의 호흡과 맥박,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모두

나의 우주근원이 시키는 바다. 내가 노력해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호흡 이 이루어지고 맥박이 뛰는 것, 나의 심장이 저절로 박동하고 나의 오장이 나의 지시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 작동하는 것, 이 모두 나에게 부여된 우주근원이자 우 주 생명의 활동이다. 혜강 최한기에 의하면 인간 몸의 운화기(運化氣)는 천지의 운화기에 의존하여 생 장하고 천지의 운화기는 내 몸의 운화기를 통해 변화한다. 몸의 모든 구멍과 살을 통해 듣고 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는 것은 우주기운의 신기가 듣고, 보고, 만지고 냄새 맡는 것이다. 혜강은 몸의 아홉 구멍과 감촉을 통해 우주 만물이 하나로 연 결되어 있음을 말했고 인간 앎이 몸에 기초해서 이치를 형성해 나가는 것임을 강 조하였다.26) 몸에는 외부로 열린 여러 구멍과 감각들이 존재하고, 몸은 신기(神氣)가 통하는 기계이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호흡하고 맥박이 고동치며 걷고 뛰는 것, 이 모 두 내가 있어 주재함이 아니라 나에게 내재된 신기의 주재함이다. 빛이 눈을 통해 야 천하의 빛이 모두 신기의 작용이 되고 소리가 귀를 통해야 천하의 소리가 모두 신기의 작용이 되고, 냄새와 맛과 모든 촉감은 모두 입과 코, 손과 발로 통해야 사물의 운동이 모두 신기의 작용이 된다. 천하의 소리와 냄새와 맛, 몸에 접촉하 는 모든 것이 인간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신기의 활동운화이다. 이목구비란 한 갓 그 이목구비의 외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몸에 들어 있는 신기 가 이목구비에 통하는 신기의 이목구비이다.27) 내 몸은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우 주의 몸이다. 신기는 여러 가지 감각 기관, 사지, 몸통으로부터 발현되고 성장하는 것이라서 비록 잠시 동안이라도 그것이 정체되면 현란해지고 지나치게 움직이면 정신이 혼 미하여 쓰러지며, 몸에서 떠나면 생명이 끊어지며 형질이 쇠약하여 혈액이 고갈되 면 신기도 따라서 없어진다. 신기는 항상 몸을 주재하는 것으로써 밖으로 통할 뿐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28)

25) 『海月神師法說』, 「道訣」, 行住座臥 語黙動靜 何莫非天地鬼神造化之赤. 26) 정혜정, 「혜강 최한기의 활동운화로서의 인간본성과 ‘몸-마음’의 도덕교육」, 『한국교육사학』 34-4(서울: 한국교육사학회, 2012), 151-168쪽. 27) 『神氣通』 序, 60쪽. 28) 『神氣通』, 39쪽. 30 생명학연구회


“자기 한 몸의 마음과 지식으로 모든 변화의 근원을 삼으면 항상 주아(主我)의 폐단이 많지만 한 몸의 신기로써 천지운화기를 통달하면 만물이 하나가 된다.”29) 추측이 기화와 합치하여 보편적이 되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 평생 사용하는 몸 이 바로 신기의 활동운화임을 깨닫는 것에 있다.30) 끊임없이 몸으로 돌아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우주의 활동운화를 느끼고, 활동운화의 현상을 인식의 근원으로 삼는 것이다. 인간과 우주 본성은 하나로서 인간 몸 자체가 우주의 활동운화가 통 하는 하나 된 생명체이다. 특히 혜강은 기륜설(氣輪說)을 말하여 우주가 기(氣)로 가득 차있고 우주만물이 이 기(氣)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어 그 전일성을 입증 하려고 했다.31) 2) 현대사회에서의 몸의 영성과 교육공동체

① 삶의 방향을 공유하는 ‘교육주체형성’과 교육공동체 [국가 공권력의 교육독점으로부터 교육주체의 분권화] 박근혜 정부가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화 하는 것은 공권력이 지니는 교육독점 의 심각한 폐해를 보여준다. 국가는 종교 및 이념 편향의 교육을 해서는 안 되고, 특정 가치, 특정 신념 및 정권의 독트린을 주입해서도 안 된다. 국가는 교육기회 의 균등을 위해 무상교육의 지원은 하되 교육의 내용과 제도의 운용은 교육 주체 의 자율과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 교육의 주체는 1차적으로 부모, 교사, 학생, 전 문 학자들이고 국가는 2차적이다. 우리의 교육 현실은 부모, 학자, 교사, 학생 어느 누구도 주체로서 서있지 못하 29) 같은 책. 30) 우주활동운화의 본성을 통하게 하는 것은 몸이고 이를 마음으로 하여금 추측하게 하는 것은 신기 의 작용이다. 몸의 통함은 모두가 동일하지만 이를 미루고 헤아리는 데는 서로 같지 않다. 추측은 어디까지나 상대적 리(理)이지만 모두에게 이익되고 타당할 수 있는 보편리로 끌어올려져야 한다. 이것이 천인운화(天人運化)이다. 보편적 리(理)의 획득은 넓고 깊고 멀고 크게 통하는 만물일체의 지 각경험과 추측을 쌓는 것에서 가능하다(같은 글, 105쪽). 인간이 활동운화의 우주본성에 통하는 몸 을 그대로 따를 수만 있다면 인간의 인식과 삶은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천지와 인간 만물이 한 가지로 통하는 ‘몸 통(通)’의 천인운화기(天人運化氣)로 사람에게 선(善)과 이로움(利)이 되는 것을 취하면 세상의 이치가 변화되고 발전을 이룬다(『神氣通』 序, 60쪽). 31) 혜강은 우주의 별들이 각기 氣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氣輪을 가지고 있는데 기륜이 다른 별에 이 어져 접촉하고 교감하며 감응하는 것이라 하였고, 지구의 기륜 역시 사방에 있는 별들의 기륜과 접 촉하여 運化를 행하며 모든 별들이 통일성을 이루어 궤도를 따른다 하였다(박권수,「최한기의 천문 학 저술과 기륜설」,『과학사상』30, 1999, 97쪽). 31


다. 어떠한 삶을 살고 어떠한 사회를 지향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구조와 자율적‧전 문적 교육체계가 부재하다. 교육 주체의 삶의 선택 방식에 따라 교육이 달라진다. 주체들이 그들 삶의 방식을 드러내는 공동체 자체가 하나의 교육현장이 되고 공부 의 장이 되어야 한다. 교육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의사결정을 국가가 독점할 것이 아니 라 1차적 주체에 의한 전문적‧자율적 교육체계가 중시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교육 주체들이 삶과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고 사회적으로 책임을 지며, 지방행정구역별 로 교육의 특성과 자율을 살릴 수 있도록 대학을 집중 지원하고 육성해야 한다. 대학의 평준화가 아닌 대학의 다양화를 통해 입시교육의 폐해를 해결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옳다고 믿는 바에 따라 삶의 교육적 핵심을 정하고, 그 교육의 핵 심을 공유하고 실천하여 영성적 사회를 이루어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삶의 교육 적 핵심은 무엇이어야 하는가?(평등? 인권? 연대(solidarity)? 생명? 환경? 민주? 통일? 도덕문명? 인간격?…) 우리가 고려하고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삶의 방식과 교육의 방향은 시대적 과제 를 기꺼이 끌어안는 역사적 책임과 우주대생명체의 영성적 자각에서 이끌어져야 한다. 그 속에서 평등, 인권, 연대, 생명, 환경, 남북통일을 생각하고 인간의 영 성을 진보시켜나가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교육공동체는 지역적으로 ‘한반도 공동체’이고 집단적으로 ‘우주생명의 공공인(公共人)’이며 삶의 방향으로 ‘몸의 생명‧영성‧개벽’을 지향한다. ② 생명공동체교육: 스승으로서의 자연, 생명사랑 자연과의 일체감, 계절놀이 몸의 영성을 기르는 교육은 자연, 생명, 영성, 개벽의 공동체 교육을 통해 가능 하다. 자연은 스승이다. 달을 배우고, 바람을 배우는 것은 시인이 될 밑바탕이 되 고, 바다를 배우고, 大空을 배우는 것은 장차 度量이 넓어질 바탕이 되며, 들에 나가 쌀과, 콩, 팥, 조, 피, 기장, 수수, 깨, 콩 등 모든 곡식을 구경하며 배워두 는 것은 농부들의 고마움을 배우는 것이다. 자연에서 교육을 받고 큰 사람이라야 완전하다. 빈부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다 같이 존경하며 사랑할 수 있고,

새, 짐

승, 풀, 나무들도 다 같이 사랑할 수 있다. 동학은 어린이들에게 생명사랑을 가르 친다.

32 생명학연구회


사람은 흙을 사랑하여야 쓰겠습니다. 사람은 살아도 흙 위에 발을 딛고 살고, 죽어도 역시 흙속으로 몸이 들어갑니다. 흙 위에 강이 있고 산이 있으며 풀이 나 고 나무가 크며 꽃이 피고 물이 흐르고 새가 노래하고 눈이 쌓이고 돌이 둥글지 않습니까. 우리가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여기서 나고 입는 것도 쓰는 것도 결국 은 여기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흙을 사랑치 아니하고 되겠습니까.32)

에드워드 윌슨은 생명을 사랑할 수 있는 성향과 포용력이 사람의 본성 중의 하 나라고 말한다. 생명사랑(biophilia)은 이미 우리 안에 부여된 선천적 성향이다. 그 리고 이러한 성향이 자연과의 순수한 교감에서 드러날 때 우리는 생명과의 일체감 을 맛보게 된다.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있고, 모든 세포에 인류의 시공적 경험이 코드화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우주 자연과 순환하는 유기체이기에 자연 생명과 친 화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자연친화감은 곧 ‘자기 친화감’이 된다. 우리가 자연을 마주할 때면 우리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바이오필리아의 경향에 따라 자연생명에 이끌리게 된 다. 자연과 일체가 되는 체험은 마치 고아가 엄마를 찾은 것처럼 애절하고, 모든 감각을 초월하기에 황홀하며 가슴은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이 체험은 정신적 지평을 상승시켜준다.33) 인간은 오래전부터 다른 생명체와의 공진 화를 통해 감정적인 유대감을 형성해 왔는데, 이는 일종의 친화감에 이어져 있는 아름다움의 감성이라 할 것이다.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충만한 인간이 되도록 돕 는 우리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은 지구 전체에 대한 제유34)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자 연의 아름다움을 크게 느끼고, 크게 알고, 크게 표현하는 것은 큰 마음을 갖는다 는 것이고, 이 큰 마음은 사람과 종족과 바위와 별들이 생성소멸하는 가운데 온전 하게 있는 유기적 전체의 조화를 우러르는 것을 배우는 마음”이다. 이는 “우리의 몸이 자연을 향하여 열림이고 자연은 모든 생명체를 포함하는 전체성의 느낌을 안 겨준다. 이는 세계의 전체성에 대한 원형적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 32) 신영철, 「흘과 사람」, 『어린이』4-2, 1926 33)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우리시대의 마음 병』, 공동체, 2015, 60-61쪽. 34) 여기서 제유란 하나의 자연으로 전체 또는 그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표현을 말한다. 우리 가 흔히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할 때 여기서 빵은 먹는 것의 모든 것을 지칭하듯이 강과 달은 전 체의 자연을 드러내는 제유적 역할을 한다. 33


은 구도자들의 깨우침이 깊은 산에서 경험된 것이라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서 산대사는 지리산 소쩍새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고, 초의선사는 월출산의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멕시코의 전통적 스승들은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줄 때, 먼저 경치 좋은 산야를 계속 찾아다니는 단계에서 시작한다. 산야를 계속 찾아다니다보면 빛으로 가득한 풍경을 보게 되는데 이는 우주가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카스 타네다(Carlos Castaneda)는 실제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멕시코의 험한 산 속을 갔는데, 가다가 불줄기 같은 빛들이 쭉 뻗쳐진 산을 보게 되었다. 그 빛을 본 후 실제로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회상하면 그것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고 침착 한 마음을 돌이켜 주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는 자연‧생명 공동체 교육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현대의 멕시코 스승들은 알려지지 않은 비인간의 세계를 추구하고, 인간이라는 무리 밖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인간 세계 밖에 있는 것들, 새의 세 계, 동물의 세계, 알려지지 않은 인간의 세계도 아닌 모든 것을 포괄하는 온전한 세계를 추구하면서,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세계, 무한한 영역 들을 포괄하고 있는 온전한 세계, 그러면서도 그 세계들은 조합점의 각각 다른 위 치에 있음”35)을 말한다. ③ 영성공동체교육: 영성교육(환단법, 호흡, 허심합도, 경락, 마르마, 명상, 삿 상, 음식)의 실천 3) ‘몸’의 해방과 역사 공동체: 광제(廣濟)와 공의(公義)의 국가문명 지향

해월은 “한울님을 속이지 않는 것, 한울님을 거만하게 대하지 않는 것, 한울님 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 한울님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 것, 한울님을 일찍 죽게 하지 않는 것, 한울님을 더럽히지 않는 것, 한울님을 주리게 하지 않는 것, 한울 님을 파괴하지 않는 것, 한울님을 싫어하게 하지 않는 것, 한울님을 비굴하게 하 지 않는 것”36), 이 모두가 한울님을 기만하지 않는 계율이라 하겠는데 이들 모두

35) 여기서 조합점이란 각 생명체의 결합방식으로 각각의 개별성(code)을 드러낸다. 36) 『海月神師法說』, 「十毋天」. 34 생명학연구회


는 몸의 해방에 큰 영향을 미친다. M. 메를로 뽕띠에 의하면 인간은 사회와의 연 관 속에서 ‘몸의 도식(body schema)’을 만들어 간다. 사회가 인간 몸을 틀 지우 고 인간 본성을 길들여 가는데, 사회가 생명을 억압하고 주리게 하며 파괴하는 틀 속에 인간 생명을 가두면 몸은 비틀려지고 영성은 쇠잔해 갈 것이다. 몸과 영성의 해방은 곧 사회적 질곡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외부적 장애로부터 벗어남을 수반한 다. 박노자는 오늘날 대한민국 지배층이 “‘민족’ 대신 ‘자본’ 위주로 사고하면서 오 로지 자기만의 생존과 성공을 위해서만 자나 깨나 분투하고 자신의 시간까지도 어 릴 때부터 투자가치 있는 일에만 쓸 줄 아는 경제동물형 인간을 새로운 모범인격 으로 내세운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와 맞물리는 박근혜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국가나 기업단위의 경쟁에서 원자화된 개인의 무한경쟁의”으로의 강화, 그리고 민족적 역사의식의 용도폐기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재단한다.37) 경쟁을 목표로 하는 원자화된 개인에게는 국가권력에의 복종이 유익이 되고, 외화반출은 범죄가 아니라 기회가 된다.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할 때 조선인이 일본군에 입대해 장교 가 되고 항일독립군을 토벌해도 일본군과 거래해서 이윤을 추구한 것이 곧 “우리 나라 발전을 위한 애국”38)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1948년을 건국의 기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도 식민지근대화론과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근대화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족이 나아갈 방향의 이정표 인 “역사의식의 부재”에 있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탄생한 임시의정원 및 임 시정부 수립과 “대한민국의 국호제정과 건국”은 일제와 저항하면서 개화기 때부터 추진했던 근대 국가수립의 역사적 과제39)를 범국민적으로 실천한 것이었다. 현정 37) 『한겨레』, 2015.11.25. 38) 같은 글. 39) 서구 근대국가성립에서 국가란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로서 대외적인 적과 내전상태 를 피하고 인민의 권리보호를 위해 인민의 모든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 법치국가이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할 능력을 보유하는 동안만 지속된다. 개화기 한국의 대표적 국민 계몽서인 『국민수지』(1906)에서는 “영국 황제가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면 인민이 그 권리를 스스 로 보호할 권리가 있고 영국 황제가 전제 학정을 행하여 국민권리를 침탈하고자 하면 영국인민이 不許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천죄만악(千罪萬惡)이 다 권리를 침범하는데서 나오기에 국가의 흥망과 세상의 치란이 모두 국민의 생명권과 재산권 등의 권리보호의 여부에 있다.”하였다. 또한 “정부관리 는 국가사무를 국민을 대행해서 수행하는 것으로서 국민의 고용이라”하여 ‘국가의 존재 이유가 국민 의 권리보호에 있음’을 거듭 천명했다.(이건상 외,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의 근대』, 모시는사람들, 35


부가 1948년을 건국의 기점으로 삼겠다는 것은 역사의 맹아(盲兒)를 자처하는 것 이고, 이는 3.1독립선언문에서 제시되었던 “자주독립국의 도덕문명 건설”이라는 민족적‧역사적 지향을 백안시하는 것과 같다. 3.1운동에서 나타났던 “자주독립과 도덕문명의 실현”은 개화기 근대국가수립운 동의 기본 정신이었다. 『국민수지(國民須知)』와 더불어 대표적인 개화기 천도교 계 몽서였던 『초등교서』(오상준, 1907)에서는 “인간의 본무란 내적으로 도덕, 지혜, 사상을 확충하고 밖으로는 가족, 사회, 국가를 진보케 하는 데 있다.”고 하여 “輔 國安民과 아국(我國)의 4천년 기초를 위하여 아국(我國)이 지향해야 할 국가문명은

도덕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도덕이란 곧 “모든 생명을 자신과 일치됨으 로 인식하는 광제주의(廣濟主義)와 공의(公義)‧공덕(公德)‧공익(公益)의 정치운용”을 뜻한다. 도덕은 “인류의 최고의 문제”라 그는 말하였다. 3.1 독립선언은 조선인의 자주, 독립의 정체성을 공간적으로 세계만방에, 시간 적으로 자손만대에 고하는 것이고, 민족자존의 바른 권리를 영구히 가짐을 선언함 이었다. 이는 어떤 민족도 타민족에게 억압받지 않을 권리로서의 인류평등의 大義 를 克明함이었고, 인류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에 순응해 함께 나아가고자 함이다.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이란 “도의의 시 대”로서 도덕적 문명을 실현하는 것에 있었다.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克明하고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 하여 민족자존의 正權을 영유케 하노라. ... 민족의 恒久如一한 자유발전을 위하 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 기운에 순응병 진하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一天의 明命이며 시대의 대세며 全人類 共存 同生權의 발동이라. 천하 何物이든지 이를 沮止 抑制치 못할지니라. ... 위력의

시대가 去하고 道義의 시대가 來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鍊磨長養된 인도적 정신 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始하도다.”

동학혁명으로부터 개화기 근대국가수립운동, 그리고 3.1운동으로 이어져 내려오 는 국가건설의 이상은 “자주독립과 도덕문명의 건설”에 있었고, 이는 동시에 한국 민족의 역사적 과제였다. 그러나 한국은 해방과 독립을 스스로의 힘으로 달성하지

2013, 134쪽). 36 생명학연구회


못함에 따라 남북분단의 족쇄가 채워졌고, 미완의 독립국가로 남아 현재에는 더욱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종전협정을 실현하는 역사공동체]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질곡은 남북분단의 족쇄일 것이다. 분단의 족쇄는 8 천만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이고, 분단의 족쇄는 종전협정에서부터 풀어야 할 것 이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평화협정을 미국에 촉구해 왔지만 미국은 부정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미군측은 “핵문제를 덮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기 위한 기회주 의적 전략”,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다시 평화협정 카 드를 꺼내 든 것”,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는 자신들이 대미 협상에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는지 여부와 미국 정부의 약한 고리를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 외에 어떤 진정성도 없어 보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버웰 벨) 제임스 서먼 전 주한 미군 사령관 역시 “북한이 실제로 원하는 건 평화협정이 아니고 다른 목적을 위한 구실로 삼고 있을 뿐”이라며 “다소 안정적으로 바뀐 듯 보이는 한반도 안보 실태 역시 여전히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주한미군 특수작전사령부 대령 출 신인 데이비드 맥스웰 조지타운대학 전략안보연구소 부소장은 “북한은 핵보유국 대접을 받고 미국과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하겠다는 것이며, 한미동맹을 갈라놓기 위한 오랜 전략”40)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동북아시아권에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 자국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고, 이익이 되지 않는 사안은 배제할 것이다. 종전협정은 북한과 미국이 당사자로서 그들이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새로운 문명건설을 위한 근본적 문제로서 남한의 국시(國是)가 되어야 한다. 종전협정은 곧 평화협정이기도 하지만 북한이 평화협정이라는 말을 쓰기에 정치적으로 악용당하지 않기 위해서 종전협정 이라는 말을 선별해 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 평화수비군 유지”라는 말을 덧 붙여야 할 것이다.

40) 『블루투데이』, 2015.10.20 37


38 전환 콜로키움


* * * 전환 콜로키움



천 개의 달 천 개의 유토피아 -‘한’ 사람 주체성과 사회의 전환(草)

주요섭(사발지몽)41)

1. 완성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향촌(鄕村) 건설을 통해 사회주의 중국을 완성하겠다는 굳센 의지를 지닌 청년 공 산당원과 탈물질-탈국가의 열망을 숨기지 않는 형형한 눈빛의 청년 농민42)이 아 름답다. 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지난 10월 상하이 근교 한 농가에 한 국의 원로·중견 사회운동가들과 중국의 청년 사회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였다. 청년 공산당원의 향촌건설운동은 삼농(三農/농민·농촌·농업)의 위기는 중국 사회주 의의 위기이며, 삼농의 부활이 없다면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도 없다는 단호한 신 념이다. 굴기하는 사회주의 중국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중대한 ‘결손’이라고 말 해도 좋을 것이다. 충족이 절대절명의 과제인 것이다. 청년 농민의 자연농업와 도농직거래는 비즈니스를 넘어 상하이 시민들의 생태적 삶, 영성적 삶에 대한 열망과 닿아 있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이미 논외였다. 낡 은 체제에 불과했다. 청년 공산당원의 목표가 ‘완성’이었다면, 청년 농민의 시선은 ‘초월’을 향하고 있 었다. ‘완성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필요의 충족’과 ‘열 망의 실현’의 양자택일이라고나 할까. ‘필요(needs)’와 ‘열망(aspiration)’의 충족 과 실현은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조합 정의에 나오는 협동조합의 존재이유 다. 청년 공산당원의 목표가 ‘충족’이라면, 농민 청년의 지향은 ‘실현(realizing )’43)인 셈이다. 완성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이것은 나만의 물음표가 아니다. 한국사회 지식 41) (현) 한살림연수원 사무처장. (전) 모심과살림연구소 소장, 한살림전북 이사장, 생명민회 사무국장. 주요 저서: 《전환 이야기》(2014), 《녹색 대안을 찾아서》(2008)(공저) 등. 42)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농민 청년의 나이는 40, 청년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긴 했지만, 열망의 눈빛은 분명 청년이었다. 43) ‘열망의 실현’은 나의 표현이다. 원문은 ‘필요와 열망의 충족’으로 되어 있다. 41


인과 사회운동가와 정치인들의 공통된 질문이기도 하다. 미완의 근대적 과제를 완 성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근대를 졸지에 뛰어넘는 게 중요한가? 물론 후자 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아직 다수는 아니다. 그러나 과제 자체로는 모두가 인정 하는 바일 것이다. 그리고 흔한 답 중 하나는 ‘이중적 과제’에 대한 ‘이중적 전략’. 장기적 과제와 중단기적 과제의 복합적 대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복지국가는 중단기적 과제에 대한 응답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탈성장녹색사회’에 대한 기대는 장기 과제에 대 한 응답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지국가가 근대의 완성이라면 녹색사회 는 근대 이후의 전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니 그렇다면, 어떻게 프로세스를 정할 것인가? ‘우선순위의 결정’ 혹 은 ‘선택과 집중’을 전략이라고 말한다면, ‘이중과제전략의 전략’은 무엇인가? 그 열쇠는 무엇인가? 옛날식 표현으로 하자면, 연결고리를 찾아야 할 일이다. 그 렇다. 이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다시 그런데, 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척도 혹은 프레임이 중요하다. 결 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사회’가 아니라 ‘사람’,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다. 완성인가 초월인가에 대한 지금까지의 프레임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사회다. 인 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 없이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대전제가 있다. 그것 이 진보의 테제이고 우리는 이러한 사고의 자장 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사람은 단지 교회나 절집에서 하느님과 부처님을 만날 때, 애인과 밀당을 할 때만 진실로 유의미하다. 상하이에서의 완성과 초월의 범주와 척도도 당연히 사회 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사회가 아니라, 사회 안에 있는 ‘한’ 사람을 통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제 뒤집어 물어야 할 일이다. 완성의 목적은 무엇인가? 초월 의 목적은 무엇인가? 완성은 사회적 완성이기도 하거니와 개인의 삶의 완성이기 도 하다. 초월함으로써 완성하려 한다. 요컨대 지금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할 때인 바, 전환의 주체도 출발점도 척도도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주와 지구생태계와 이웃들과 종횡·좌우·상하· 표리로 연결된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통해 사회를 본 다. 사회를 통해 인간을 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 전환의 특이점, 혹은 열쇠가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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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건설운동가들이 완성코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국가시스템일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나 그것은 조건의 완성일 뿐 아닐까? 초월의 열망을 지닌 상하이의 농민 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완성을 지향했던 것 아닐까? 자기초월, 즉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완성.

2. ‘한’ 사람의 출현 그러데,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 사회를 보면, 군 중을 보면, 계급을 보면, 정당을 보면, 무리로 보면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 의 변화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한’ 사람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멈추어야 한다.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라는 베스트셀러 제 목처럼 멈추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세 모녀의 눈물과 한숨소리도, 어머니의 주 름도, 소쩍새 소리도, 개울물 소리도 멈추지 않으면 들을 수 없다. 특별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잠깐 멈춰서기만 해도 보이고 또 들린다. 멈추어 한 사람을 지 긋하게 바라보아야, 그의 욕망 안에 열망이, 그의 에고 안에 셀프가, 사(私) 안에 공(公)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사회적으로 보면 욕망과 에고와 사(私)만이 두 드러져 보이지만, 멈추어 한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보인다. 아쉬움, 그 리움, 슬픔, 기쁨, 그리고 보다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한’ 마음. 1) 거리의 성인들

500여 년 전 일이다. 제자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선생에게 여쭈었다. “오늘 기묘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무엇이 기묘하다는 말이냐?” “거리 안의 사람이 성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러한 광경은 보통 일이 아니냐! 무엇이 기묘하다는 것이냐!” 양명학에서 나오는 만가성인(滿街聖人) 이야기다. 길거리에 성인이 넘쳐난다. 테러 의 공포 속에서도 자신을 몸을 희생해 다른 이를 구하고, 600일째 세월호의 아픔 을 함께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적 영성에 환호하고, 골목마다 명상·힐링센 터가 들어서고, 5차원과 사랑의 에너지를 말하는 영화를 1천만 명이 관람하고, 서 43


점엔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인터넷을 검색하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 고, 촌로들도 글로벌 시민임을 자각하는 시대, 진짜 만가성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 아닐까? 미국의 풀뿌리 영성운동 단체인 휴머니티 팀(huminity team)은 하나됨선언 (Oneness declaration)을 통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시대를 천명한다. 선언은 이렇 게 시작된다. 하나. ‘하나됨 선언’은 인류와 더불어, 생명세계와 더불어, 나아가 신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고 상호의존하는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이는 지속가능하 고 사랑으로 가득 찬 인류의 미래를 고대하던 오랜 기다림에 대한 답변이기도 합 니다. 둘. 영적 시민권의 힘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셋. 인류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변화가 개인의 변 화에서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신성과 내면의 지 혜를 발휘하여 인류에게 최고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를테면 ‘나’를 찾는 과정이었다. 서구적 근대는 귀족과 사제들 에게 독점되었던 물질을 해방시켰다. 물질적 욕망은 ‘나’의 일부이다. 억압된 육 체를 해방시켜야 했다. 국부론의 저자는 그 통찰력을 시장경제에 적용했던 것 아 닐까. 서구적 근대는 신으로부터, 신분으로부터, 선택불가의 공동체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자기 결정권을 갖는 주체가 될 수 있게 하였다. ‘나’라는 주체를 찾아가 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서구적 근대는 오버했다. 넘쳤다. 독립을 강조한 나머지 ‘나’ 외에, 인간 외에 모든 존재를 타자(他者)로 만들었고, 마치 질풍노도의 청소년처럼 부모의 품 을 뛰쳐나갔다. 가진 돈을 탕진하고 부모의 가슴팍을 파헤치고, 급기야 부모의 존 재마저 부정했다(반면 동아시아는 나를 ‘우리’ 안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다. 우리가 진짜 우리(감옥)가 되었다. 한반도 북쪽은 서구적 근대와 만나 잘못된 만남의 극 단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21세기, 돌아온 탕자처럼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자각한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타자가 곧 나임을 자각한 사람, 자신을 우주와 연결된 존재임을 인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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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지구에서 태어났으나 이제 지구의 운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인간과 인공지능 기술의 결합을 이야기 하며 인간3.0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새로운 인간이다. 신인류다. 이를테면 인간 개조가 아니라 인간개벽이다. 진짜 때가 된 것 아닐까. 미국의 마음챙김(mindfulness) 열풍과 한국의 인문학 열풍 사이에서 말 그대로 뜨 거운 열망이 느껴진다. 사람의 근본에 대한 성찰과 탐구 속에서 보살과 철인과 군 자와 신선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일본의 교포 동학연구자 조 경달은 동학을 ‘만인 신선화’ 운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유럽의 대안운동가들은 ‘출현(emergence)’이라고 말한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 듯, 바다 속에서 잠수함이 떠오르듯 새로운 존재로 나타난다. 상하이에서 만난 농 민의 얼굴에서 500년 전 만가성인의 그 얼굴을 떠올린다. 태평천국운동의 홍수전 을 떠올린다. 길 위의 성인들은 제각각의 모양과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 이다. 그리고 중국판 신인류를 예감한다. ‘한’ 사람이다. 13억 중 한 명의 그 ‘한’ 사람이면서, 직거래를 통해 상하이를 출렁이게 하는 ‘한’ 사람이며, 완성을 열망하는 ‘한’ 사람이며, 이를 초월하려는 ‘한’ 사람이다. 2) 그날은 언제 옵니까?

사실 ‘언제’라는 물음표는 함정이다. 그날이 따로 없으니 ‘언제’도 없다. 개벽은 후에 오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 수운 최제우도 그래서 ‘후천개벽’이라 말하 지 않고 ‘다시개벽’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개벽은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지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 수십만 년이 지나야 올지도 모른다. 지금의 시간 개념 으로는.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수십 개의 TV 채널이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고 있다. 그 사이 청년들은 점점 더 희 망을 잃어가고, 사람들의 마음도 강퍅해져 간다. 만가성인은 그들만이 이야기인지 도 모른다. 1894년 갑오년의 혁명은 참혹한 실패로 끝이 나고, 마음 좀 추스른 후 제자들이 묻는다. “그날은 언제 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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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대답한다. “산이 검게 변하고 길바닥에 비단일 깔리고 만국이 교역을 할 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무슨 뜻일까?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해월 최시 형의 답은 너와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조건에 대한 답이었는지도 모르 겠다. 절실한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친절하게 대답한 것이다. 그 귀한 비단이, 그 당시 부의 척도였던 비단이 흔해빠져 누구나 걸칠 수 있게 될 때, 그리고 그 부가 인류 모두에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질 때, 그리고 황 폐해진 생태계가 어느 정도 복원될 때, 그때가 ‘그날’ 아닐까. 엄밀히 말하면, 그 날의 필요조건이 만들어진 것 아닐까. 산업화를 통한 물질로부터의 해방, 민주화 를 통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그날이 오는 것 아닐까. 이러 한 물적 사회적 토대위에서만 새로운 인간의 탄생이 가능한 아닐까. 물질개벽이 있고서야 정신개벽이 가능한 것 아닐까. 상하이의 열망도 그 때가 된 덕분일까? 최근 『중국일기』라는 책을 출간한 도올 김용옥이 한 인터뷰에서 경제적으로 여유 가 생신 중국 사람들의 종교적 출구를 언급한 바 있다. “공산주의의 허망함을 지 금 한국의 격렬한 기독교인들이 가서 메워주고 있다. (중략) 요즘 돈 번 사람들이 많아져 어떤 출구가 필요한데 에너지가 전부 종교적인 데로 빠지고 있다.”(중앙일 보 2015년 12월 4일). 때가 된 것일까?

도올만이 아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프라센짓 두아라 시카고대 교수도 같은 이야기 를 한다. 보다 명확하다. “중국의 변화는 다당제에서가 아니라 다종교에서 올 것 이다.” “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속 여부가 다당제로의 이행에 있다고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다종교의 허용이 얼마나 가능할지가 관건입니다. 즉, 개혁 개방으로 '小康 (소강) 사회'에 진입한 다음에는 인민들의 초월적, 영성적 욕구를 얼마나 충족시켜 줄 수 있느냐에 중국 공산당의 장래가 걸려 있습니다. 중국뿐 아니라 모든 국가들 이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이병한 두아라와의 인터뷰, 프레시안) 사실 이미 맹자 시절부터 이런 통찰은 있었다.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먹고 사는 게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갖기 어렵다. 자본주의는 항심의 조건을 만 들어주었다. ‘거룩한 개인주의’는 진화의 한 과정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필연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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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다. 물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피를 먹고 자라지만, 빵이라는 필요조건이 필수적이다. 경 제발전과 민주발전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론도 일리가 있다. 산업화가 있었기에 민 주화 가능했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상보적 관계라고나 할까. 개혁개방의 상징 상하이가 그것을 웅변한다. 자본주의를 비난할 일이 아니라 자본 주의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역할은 여기까지. 우리는 지금 인류사적 사명을 다 한 자본주의의 마지막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다. 행복경제학자들에 따르면 소득 2만 달러가 넘어서면서부터는 소득 만족도가 줄어 든다. 때가 된 것이다. 열망의 실현이 절실하다. 애벌레의 시대가 지나가고 질풍 노도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나비를 예감하는 시대가 되었다. 특별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예수와 소크라테스가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 거리를 활보할 조건이 형 성된 것이다. 3) 새로운 주체성: ‘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목사 이현주와 생명운동가 무위당 장일순이 묻고 답한다. “왜 인간은 사욕을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 “무명(無明) 때문이야. 깨닫지를 못해서 실재를 보지 못해서, 그러니까 진리를 몰 라서 그래서 ‘사(私)’라는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 “깨닫는 게 도대체 뭡니까?” “기독교에서는 그걸 거듭난다(重生)고 하지? 새 사람이 되는 것 말일세. 그러니까 다르게 사는 거지, 깨닫기 전하고.” 요점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통한 삶의 전환이다. 그것이 새로운 주 체다. 여기서 주체란 객체를 전제한 주체가 아니다. ‘나’다. ‘자기’이다. 굳이 말 하면 ’에고‘이면서 ’셀프‘인 나에 대한 자각이다. 나의 실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그것이 ‘사회적 실존’을 넘어서는 ‘생태적 실 존’, ‘우주적 실존’에 대한 앎과 함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사회적 주체로써 의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나는 새로 태어났다. 이를테면 나비적 주체다. 물질적 충만이 존재의 이유였던 애 벌레의 시절이 지나고 이제 하늘을 날고 있다. 그러나 나비의 몸에도 애벌레는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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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있다. 에고이면서 셀프다. 이기(利己)이면서 이타(利他)다. 몸에 이로운 일을 하 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너와 내가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이기 없는 이타가 아니라, 이기에서 이타로의 중심이동으로 질적 변화가 일어난 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2차원을 살던 애벌레가 3차원의 공간을 산다. 신세계 다. 그러나 1차원도 2차원을 떠난 것은 아니다. 나는 복(複)차원적 주체다. 내 안 에는 여전히 애벌레가 꿈틀거린다. 애벌레시절에도 내 안에 나비가 존재하고 있었 듯이.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먹는 것도 즐거운 일 이지만, 하늘의 나는 쾌감은 어찌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회적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한 사람 개인 주체만이 아니라, 새 로운 사회적 주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민(民), 이를테 면 21세기의 ‘신민(新民)’이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를 만들어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던 안창호가 1920년 3.1독립운동의 성과로 수립된 상해임시정부 신년인사회 에서 연설을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소. 대한 나라의 과거에는 황제는 1인밖 에 없었지마는 금일은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 (중략) 황제란 무엇이요. 주권 자를 이름이나 과거의 주권자는 오직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제군이 다 주권자 외다.” 해월은 아즉천(我卽天)이라 선포했고, 강증산은 스스로를 옥황상제라 칭하며 거룩 한 존재임을 천명했는데, 안창호는 2천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황제라고 말한다. 새로운 사회적 주체, 동아시아의 근대적 주체의 출현이다. 대학(大學)에서 말하고 있듯이 큰 배움의 길은 또한 신민에 있으며(在新民), 그 신민이란 하늘의 도를 깨우친 사람인 것이다. 전체성을 자각한 개인, 즉 전일적 존재인 것이다. 과 연 신민(新民), 거듭난 ‘한’ 사람이다. 21세기 신민은 공동체에 파묻힌 존재도 아니고, 계약에 의해서 관계가 이루어지는 결사체적 존재도 아니다. 전체성을 자각한 개체이다. 사(私)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공(公)을 자각한 민(民)이다. 이를테면 ‘거룩한 개인’이다. 거룩하다는 사전적 의 미는 ‘높고 위대하다’이다. 그렇다면, 거룩한 개인주의란 이를테면 땅 위의 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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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을 중하게 여기자는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탁월한 공공철학자 김태창은 새로운 주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활사개공(活私 開公)이 그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글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나를 살려 공을 연

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명하다. 사(私) 안에 공(公)이 있기 때문이다. 외형은 육체와 자아에 갇혀 있으나 동시에 생태적으로 또한 큰나로 열려있는 민이다. 함 석헌은 그러한 존재를 ‘씨’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맥락에서의 한 사람, 즉 개체이면서 동시에 전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새로운 주체는 인식론적 오만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사람은 실재를 인식 할 수 없으며, 단지 자신의 주관으로만 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 지 일부를 알고 있지만, 협업을 통해 끊임없이 ‘실재’에 가까이 가고 있을 뿐이 다. 다음으로 존재론적 오만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나는 주체, 너는 객체로 상대 를 통제와 관리와 이용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네가 있어 내가 있음을 자각한 사람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 없듯이 단절된 삶과 생명이란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내가 만들었지만, 내가 샀지만, 내 아이디어지만,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숨겨진 하나됨을 느끼고 자각하여 자비심이 흘러나오는 사람. ‘한’ 사람은 물론 피부라는 경계가 있어 한없이 욕구에 충실한 존재이기도 하지 만, 동시에 몸과 마음이 우주로 열린 사람일 것이다. 한국의 고대사상인 한 사상 에서 말하는 그 ‘한’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늘사람의 ‘한’이고, 칸(우두머리) 의 ‘한’이고, 전체로써의 ‘한’이다. 낱이면서 온인 그 ‘한’이다. 전체성을 지닌 개체이다. 전일적 주체다. ‘한’ 사람 없이는 새로운 공동체도 협동조합도 기대할 수 없다. 거꾸로 필요의 충 족에서 출발했으나 보이지 않는 열망의 실현에 응답하지 못하면 협동조합도 공동 체도 지속할 수 없다. 유토피아는 말할 것도 없다. 새로운 사람 없이 새로운 사회 없다. 이제 때가 되었다. 새로운 사회의 조건은 충분히 성숙했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주인공들이 자라나고 있다.

3. 전환, 지금여기 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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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예사롭지 않다. 말 그대로 위기는 기회, 전환의 징후다. 큰비 뒤 대나무 숲 속에서 새로운 싹 돋아나듯이, 욕망의 분출 그 뒤끝에서 새로운 하늘과 땅과 사람 을 예감케 한다. 다시 묻는다. 완성할 것인가? 초월할 것인가? 이미 대답은 나온 셈이다. 한 사 람의 관점에서는 지금 여기서 초월함으로써 나와 우리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열망이기도 하고, 거듭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관 계, 즉 지금여기의 유토피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사회의 개벽적 변화, 즉 전환이다. 보완을 통해 완성에 이르는 개혁과 도 구별되고, 과거의 것을 철폐하고 새 것을 건축하는 혁명과도 다르다. 전환은 질적 변화이다. 그러나 사람의 질적 변화, 즉 환골탈태와 거듭나기이면서, 사람의 변화를 통한 질적으로 다른 관계(사회)의 창조이다. 그리고 그 질적 변화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진다. 닫힌 완성이 아니라, 열린 완성이다. 끊임없는 완성의 과정이 다. 동시에 초월의 과정이다. 이를테면 ‘내재적 초월’이다. 그러나 다차원적 초월 이다. 몸의 세계를 부정하는 마음의 세계가 아니다. 3차원은 1차원과 2차원과 복 층적으로 공존한다. 차원변화의 진실은 새로운 차원의 발견이다. 1) 자기구원시대

‘안고넘기’, 포월(包越)44)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삼농의 과제를 싸안고 동시에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간다. 상하이의 근교의 한 농가에서 그것을 예감한다. 아니 기대한다. 초월적 전망을 가지고 있으되, 지금여기 그날을 실현하려 하는 ‘한’ 사 람을 본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은 여기저기에 있다. 편재한다. 그의 눈빛은 120년 전 전봉준의 눈빛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짜 태평천국의 홍수전일까? 세월호 600일, 이제는 잊혀지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무도 그이들을 치유해줄 수는 없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내가 치유한다. 병든 사회를 치유해야 하지만, 먼 저 병든 한 몸을 치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치유가 이루어져야 자기를 구원 할 수 있다. 그의 눈빛은 내가 메시아라고 속삭인다. 그렇다. 만인 진인(眞人)시대다. 지금여기 나의 삶을 충만케 하고 완성하는 전환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44) 아주 오래전 인하대 철학과 김진석 교수가 내세운 개념이다. 50 전환 콜로키움


조선의 성리학은 모든 존재 안에 하늘의 이치가 작용하고 있다고 인식했지만, 성 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양반들뿐이었다. 심지어는 양반의 씨인 서자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성인이 될 수 없었다. 홍길동도 허생도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백성들은 대상일 뿐이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아야 할 객체일 뿐이었다. 사실은 동학 역시 만인의 신선화를 열망했지만, 여전히 정도령과 같은 존재를 기 대했다. 갑오년 혁명이 일어났던 전라도 인근에서는 손화중이 미륵이었고, 김개남 은 정도령을 자임했으며, 전봉준 역시 또 다른 의미의 구세자로 기대되었다. 그리 고 3.1운동의 지도자 의암 손병희마저도 망한 나라 조선을 구할 또 다른 정도령이 었다. 오직 해월 최시형만이 그 믿음을 단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 “만인신선”. 그리고 말년엔 온 천하에 선언한다. “내가 하늘이다.” 아즉천(我卽天)을 선언하고 향아설위(向我設位)를 가르친다. 글로컬리제이션(glo-caliztion), 세계화의 중심은 지역이다. 지역의 자기중심성이 다. 최신 경영학은 핵심 중 하나는 셀프리더십이다. 자기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리더가 되어 스스로 통제하고 행동하는 것을 셀프리더십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정읍이 우주의 배꼽이다. 또한 나는 출렁이는 우주적 그물의 중심이다. 자기치유, 자기구원은 열망이기도 하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과제이기도 하다. 농촌지역의 정신과 의원이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한다. OECD 국가 중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산업화 세대들은 늙어서도 마음 둘 곳이 없 다. 청년들을 N포세대로 내모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자기구원의 불가피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120년 전 동학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섰듯이 이제 스스로 나설 수 밖에 없다. 서양 서람들은 ‘그리스도의식(christ consciousness)’이라고 말한다. 내가 하늘님이라는 자각은 곧 내가 스스로 구원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무엇보다 진정한 자기구원이란 스스로 새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 환골탈 태/거듭나기로써의 전환(transformation)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가르침 없이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구원이란 “내가 곧 진리가 되는 것”이다. 자기실 현함으로써 자기구원 한다. 2) 땅 위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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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소설보다 현실이 훨씬 탁월하다. 다시 동학 이야기다. 지금여기 궁궁 촌은 탁월하다. 궁궁촌을 찾아 헤매던 수운 최제우는 고향 용담에 돌아와 신비한 체험을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체험. 그리고 접이라는 이름으로 16개 공동체 를 만든다. 땅위의 천국이다 (기독교의 초기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백정과 양반 이 서로 존대를 하고, 노비를 딸과 며느리고 삼고, 없는 이와 있는 사람이 함께 밥상을 받으니 지상천국이 아닐 수 없었다. 유토피아는 이미 나와 너, 우리 사이 로 왔다. 전환이란, 이를테면 지금 여기서 이루어내는 초월적 완성이다. ‘나’에게 초월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천국이다. 땅 위의 천국이다. 허생의 섬나라 와 홍길동의 율도국, 그리고 18세기의 민초들의 열망이었던 십승지와 궁궁촌을 지 금 여기서 창조해내는 일이다. 한국의 선가에서는 신선의 나라를 선계(仙界)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선계 의 삶을 지금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밝을마을 대표 윤중 황선진은 이렇게 선계의 모습을 설명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중심이다. -내가 그러하듯이 너도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중심이다. -각각 중심인 사람들이 중심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서로 돕고 어울려 산다. -서로 돕고 어울려 살기 위해 구축하는 삶의 시스템이 곧 마을이다. 마을과 마을 이 모여 나라를 이룬다. 나라는 인간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중심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동식물도 마찬가지다.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계와 인간은 서로 돕고 어울리며 살아간다. 선계 마을의 관계의 특징은 ‘어울림’이다. 중심과 둘레의 관계인 ‘더불어’가 아니 다. 힘센 자만 살아남는 정글적 구조와는 아예 인연이 없다. 정글의 대안인 피라 미드와 같은 수직적 위계와도 전혀 다르다. 웬일인지 일본말로 자기는 ‘자분(自 分)’, 나누어진 존재다.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천황이 있고, 그 아래로 주군과 사

무라이들이 있는 모양새다. 민초들은 그저 부분, 아니 부품일 뿐이다. 적어도 정 치적으로는 그러하다. 새로운 공동체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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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 곧 마을이고 사회고 공동체다. 요체는 ‘무엇으로 이어져있는가’이다 자본주 의 사회는 돈으로, 신분제 사회는 신분을 매개로 한 권력이 관계의 핵심일 것이 다. 그렇다면 선계의 관계는 무엇으로 이어져 있을까? 그렇다. 이제 사람과 사람 을 이어주는 끈이 더 이상 물질/돈이 아니다. 관계의 중심이 달라진다. 자본주의 적 관계의 중심엔 돈이 있다면, 새로운 관계의 중심엔 마음이 있다. 물질과 물질 의 관계 속에서도 정신이 더 중요하다. 선물경제가 그것이다. 선계의 사회조직모형을 상상해본다. 이를테면, 공동체와 결사체를 넘어 ‘서로 살 림의 마당(場, 혹은 플랫폼)’으로. 말 그대로 ‘한’ 마당이다. 하나이면서 전부인 마당. 공동체와 결사체를 넘어서, 아니 네트워크까지를 포함하여 그 모두를 품은 마당이다. 마당 ‘둥근 빈터’, 장(場), 영어로는 필드(field)이다. 조금 맥락이 다 르긴 하지만, 플랫폼이라 해도 좋다. 그런데 장은 신을 모시는 곳이었다. 플랫폼 에 운영체계가 있듯이 마당에는 신, 혹은 공심(公心)이 있다. 내부에 황무지조차 품고 있는, 여백이 있는 거대한 숲이다. 그 안에는 자연군락(공동체)도 있고 조림 지(造林地)(결사체)도 있으나, 무엇보다 갖가지 모양의 나무와 풀과 동식물들이 다 양하게, 그러나 하나하나 오롯하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전체로써 어울려 있다. 그리고 나무들을 관통하는 숲의 정령, 숲의 신. ‘사회적 영성’이 있다. 3) 천 개의 유토피아

2006년 아일랜드의 킨세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는 놀라운 일이 시작됐다. 석유로 부터 독립한 마을을 지금여기서 당장 시작해보는 것이다. 지금은 전 세계 40여개 나라 2,000개의 마을이 참여하는 역동적인 마을운동이 된, 지구적 전환마을운동이 그것이다. 전환마을운동은 기후변화와 피크오일(Peak Oil)에 대한 공동체의 대안 을 함께 만들자는 삶의 전환운동이다. 전환마을은 석유로부터 독립하고 에너지를 줄이거나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는 것과 함께 마을 공동체의 회복, 관계의 재구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또한 하나의 유토피아 아닐까. 더욱 이미 이행 중인(in transition). 유토피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유토피아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과 함께 지금 이곳을 유토피아로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망을 만드는 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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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 조합원과 2천 생산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생산-소비 하나의 한살림운동, 40 년 동안 선물거래를 고집해온 일본의 쓰고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 한국 화 성에 있는 30년 역사의 무소유 공동체 야마기시즘 실현지. 그리고 점심 때마다 공 동체밥상으로 파티를 여는 시골 어느 마을회관, 영성적 일터공동체 당근농장, 영 혼을 이야기하는 유토피아 경영학, 행복한 교실을 만드는 아이들과 선생님, 청년 농사꾼들의 공동체 해남의 미세마을 등등. 그리고 미국식 유토피아와 부탄식 유토 피아, 영국식, 이탈리아식, 불교식, 기독교식… 지난 10월 장강 하류의 작은 마을, 상하이의 달을 떠올린다. 아마도 서울에도 같 은 달이 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하이의 달. 서울의 달과 상하이의 달 은 하나이면서 둘이다. 숨겨진 하나가 제 각각으로 실현된다. 이를테면 월인천강 (月印千江)이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깃드는 것을 '월인천강', 하나의 달이 모든 강물에 비침)이라고 한단다. 모든 사람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는 말이 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은 달이다. 태양이다. 마을도 마찬가지다. 간디의 70만개의 마을공화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국에는 3만6천 개의 마을공화국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도에는 70만 개의 각기 유토피아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하느님은 하나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수천, 수만, 수십만 개이다. 지금 여기 궁궁촌도 수천 수만 개이다. 만인성인, 만인신선 이 만개의 마을, 만개의 유토피아를 창조한다. 가지가지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도 있다. 모든 존재 안에 신이 있 듯이, 모든 삶과 사회에는 유토피아가 현존한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 다. 절반의 유토피아도 있고, 1/3 유토피아도 있고 3% 유토피아도 있다. 만약 단 1%의 유토피아도 없다면 그곳은 아마도 그곳은 지옥일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중층과제이다. 한국 사회 역시 중층적 과 제를 안고 있다. 전근대적 과제와 근대적 과제. 다른 한편 정글자본주의에 적응도 해야 하고, 정글 자체를 벗어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를 한 사람의 관점 에서 설명하면 그것은 시간적으로 순차적이면서도 동시적이라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를테면 매슬로우의 욕구의 5단계를 사회에 적용해 보는 것이다. 인간은 생리적 필요의 충족, 즉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이 가자 기초적이지만, 이것이 단계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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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아니다. 동시에 필요하다. 더욱이 어느 정도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말이다. 사회적 진화의 정점에 다다른 인류는 이미 다중적 열망을 포기할 수 없다. 물질개 벽에 걸맞은 정신개벽을 요구하고, 직장도 필요한데 탈노동도 절실하다. 안전의 욕구와 생리적 욕구와 인정욕구와 자기실현의 욕구와 초월 욕구, 어느 하나 소홀 할 수가 없다. 자기구원시대 욕구는 단계적이지 않다. 동시적이다. 유토피아는 다 차원적 욕구와 열망에 응답해야 한다. 다른 삶, 다른 꽃 다른 열매로 하나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들을 만들어야 할 일다. 나의 유토피아, 가족의 유토피아, 마을/지역(지각의 교감) 유토피아를 지금 당장 실행해보자는 것이다. 70% 유토피아 국가는 어렵지만, 30% 유토피아 국가를 꿈 꿀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10% 유토피아라도... 2016년이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세상에 나온 지 500년이 되는 해이다. 글 로벌 유토피아 페스티벌이라도 열어야 할 일이다.

4. ‘한’ 사람을 위한 나라 150년 전 1862년 수운이 16개의 ‘접’이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지금여기의 궁 궁촌을 실현했지만, 그것만으로 국가의 중력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시개벽 을 열망한 수운 최제우의 나라, 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배고픔도 전란도 전염병도 막지 못했다. 그러니 나 라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백성의 기초적 생존마저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 국안민(輔國安民)이다. 갑오년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은 대원군과 교섭을 하고, 일 본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해월이 30년을 숨어다니며 전국 곳곳에 수많은 공동체를 만들었지만, 국가라는 구 조가 엄연하게 삶을 지배했다. 나라를 바꿔야 했다. 당장 국가를 지상천국으로 만 들 수는 없다. 나라는 갑옷처럼 나를 보호해준 적도 있었으나 이제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국(輔國)’할 것인가? 어떻게 유토피아의 조건을 만들 것인 가? 상하이의 ‘한’ 사람은 국가를 초월하여 지금여기의 유토피아를 만들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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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언젠가 보국의 필요를 절감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 하다. ‘한’ 사람을 위한 나라를 상상한다.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 국민 한 사람의 목숨, 존엄, 품위를 지켜주는 나라를 고대한다. 이것이 나라의 존재 이유 아닌가. 동시에 자본주의 이후, 다음 사회로 이행하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1) 한 사람을 보라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고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을 보라’고 외쳐야 할 때다. 나라를 바꾸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우선 ‘한’ 사람에게 관심 해야 한다. ‘한’ 사람을 보아야 숨은 과제를 찾을 수 있다. 더 깊은 민주주의, 더 공평한 경제가 가능하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무엇일까? ‘깊은(deep) 민주주의’라는 말이 떠오른다. 깊은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헤아리는 민주주이며, 획기적 재분배란 ‘한’ 사람의 형편을 헤아리는 재분배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도 ‘한’ 사람을 보아 더욱 깊고 넓어질 것이다. 사람 안에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듯이 경제에도 ‘보이는 경제’와 ‘보이지 않는 경 제’가 있다. ‘양(陽)의 경제’와 ‘음(陰)의 경제’가 있다. 유럽의 경제학자 리이테 르 베르베르라는 분이 이론이다. 국가통화에 대한 지역통화 같은 것이 그것인데, 경제로 영역을 넓이면 교환경제를 지탱해주는 영역을 말한다. 가사노동, 수공예 품, 봉사활동, 자가돌봄 등등이 GDP로 계산이 되지는 않지만, 살림살이경제의 바 탕이 된다. 한사람의 경제생활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면, 음의 경제가 확연해진다. 음의 경제가 있듯이 ‘음의 정치’도 있지 않을까. 슬프고 안타깝지만, 세 모녀 이 야기로 다시 돌아가 본다. 그녀들에게 정치란 무엇이었을까? 투표는 어떤 의미였 을까? 1인 1표가 불행일까 다행일까? 어떤 사람들의 새누리당과 박근혜에 대한 지지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음의 정치 아닐까? 양의 정치적 프레임으로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지 모른다. 감정과 무의식 까지도 느끼고 통찰하는 정치를 기대한다. 그러나 진짜로 치열하게 접근해야 할 것은 양의 정치에서 아예 배제된 존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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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투표를 할 수 없는 청소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정치의 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미래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동식물들과 땅과 바람의 목소리는? 사회운동도 이제 ‘한’ 사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회운동에 헤아려야 한다. 단지 인종차별 버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의 상징인 된 로자 파커 스의 ‘한’ 사람 혁명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링컨의 명구(名句)를 다시 읽 는다. ‘한 사람의, 한 사람에 의한, 한 사람을 위한 사회운동을 상상해본다. 사회운동은 집합적 행동만인가? 동원된 운동만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움직임인 가? 더욱 근본적으로 뉴튼역학의 ‘movement’만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양자역학적 움직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중(大衆/mass)의 관점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롯이 살피지 못한 채 ‘무리’ 로만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규모가 커지고 조직이 확대됨에 따라 이러한 경 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집합적’ 운동의 한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마음과 형편이 보이지 않는다. 대중운동은 전위운동에 비하면 비약이지만, 근본적 으로 양(量/陽)의 운동의 한계 속에 있다. ‘진영(陣營)’이나 ‘세력화’에 대한 고 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운동’ 개념 그 자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운동(movement)은 활동 (activity)의 한 형태, 꼭 집어 말하면 생명의 존재양식 중 하나이다. 전부가 아니 고 부분이다. 주체-대상-동력이라는 뉴튼역학을 사회에 적용한 것이 ‘사회운동’이 다. 때문에 사회운동 개념은 집합적이고 과시적이고, 고체적이다. 양(陽)의 운동이 있다면, 음(陰)의 운동도 있다. 보이지 않지만, 한 사람의 활동과 염원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물리적인 실체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파동이 사람의 마음을, 사회의 기운을, 물질의 내면적 변화를, 일으킨다. 미국사람들의 문법으로 말하면서, 양의 운동이 ‘street activism’이라면, 음의 운동은 ‘subtle activism’ (정묘한 실천행동)이다. 전라도 고부의 또 다른 민중 메시아 강증산은 음개벽을 주장했다. 양의 시대에서 음의 시대로 간다는 말이다. 괴테 식으로 말하면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시대이다. 과학적으로 말하면 재균형이다. 역동적 균형을 찾아가는 생명의 본성이 라면, 이 나라의 과제는 사회적 재균형을 어떻게 잡아나가는 것 아닐까? 2) 꼬리칸 사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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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내다보는 부국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가난하다. 여전 히 애벌레의 감각에 머물러있는 이들을 고려하더라도 절대빈곤이 적지 않다. 기업 과 나라는 부자인데,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다. 우리 시대의 꼬리칸 사람들이 적 지 않다. 컵밥과 컵라면을 먹고 교도소 독방보다 더 작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나비를 꿈꿀 수는 없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에게는 생존을 보장하고, 나아 가 물질적 조건을 만족시켜주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만족시킬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재균형이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에 따라 형편이 모두 다르다. 먹을 것을 찾는 애 벌레에게 향긋한 바람은 조롱이다. 때가 아직 아니다. 소득불균형, 자산불균형, 남녀불균형, 지역불균형, 도농불균형, 그리고 남북불균형을 바로 잡아야 한다. 분 배과정의 불균형 해소와 획기적 재분배의 실행이 좋은 나라의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있다. 나라의 또 다른 반쪽, 북한이다. 민족공동체 의 일원으로써 북한 주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더구나 널리 인정되고 있듯이 구조적 위기에 봉착한 북한권력은 베트남이나 중국식 사회 주의 시장경제는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북한 주민 한 사람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국에게 성숙경제가 요구된다면, 북한에는 지금 ‘성장경제’가 절실한 때다. 다만 전환의 관점에서 ‘좋은 성장경제’에 대한 기획과 지원이 이루어진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이다. 혹시 장마당에 호혜시장적 성격을 도입할 수는 없을까. 협동농 장을 노동자협동조합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물질적 욕구와 더불어 안 창호와 조소앙과 이회영과 여운형 등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에게서 발견되는 한국 적 수양의 전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사실은 이 점이 가장 어려울 것 같 다.) 3) 이행의 징검다리

전환은 그날이 오면 이루어질 꿈이 아니라 ‘이행(transisiton)’과정이다. 좋은 나 라는 그러하듯이 삶의 전환의 조건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좋은 나라는 나아가 그 이행을 돕는다. 재분배와 성장 지원이 남과 북의 사람들에게 전환의 디딤돌이라 면, 전환의 징검다리도 있다. 이를테면 선계로 가는 길, 혹은 지상천국 연습이라 58 전환 콜로키움


고나 할까. ‘주 21시간 노동’, 꽤 오래전 영국에서 나온 보고서다. 기후변화와 지구적 불평등 과 경제위기에 대한 영국의 엔지오 nef(new economy foundation)의 해법이다. 여 기서 ‘노동’이란 물론 기업이나 정부조직에 고용되어 돈 받고 일하는 임금노동 (paid work), 고용노동을 말한다. 그렇다면 노동시간 단축으로 어떻게 당면한 위 기를 해결한단 말인가? 그 답은 대충 이런 정도이다. “주 21시간 노동은 초과노동시간, 과소비, 실업, 탄소배출, 삶의 질 저하, 불평등 의 고착과 같은 절박하고도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문제들의 열쇠가 된다. 오히려 삶을 즐기고, 서로를 돌보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해준다.” 생명활동으로써의 노동은 그 자체로 생존노동적 성격과 창조노동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생존을 임금을 통해 실현해왔지만, 노예노 동만은 아니었다. 의미와 보람은 모든 노동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제 생존노동 에서 창조노동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지고 있다. 나비의 노동은 무엇일까? 물론 나 비도 세끼 밥은 먹어야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은 음개벽 문명전환으로 가는 징검다리를 놓는 일이라고나 할까. 탈 물질정신문명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며, 그 자체를 연습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너무도 유명하여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돈벌이가 절실한 맞벌이도 있고, 국가복지 시스템의 취약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노동시간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유행어로 만들 만큼 치명적이다. ‘한’ 사람의 관점에서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일 자리 나눔 등등은 그 다음 이야기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기본소득, 혹은 사회적 배당이 그것 이다. 사회적 배당은 공유자산에 대한 사유화와 국가독점에 대한 민의 권리로 이 해될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관점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보다 근본적으 로는 노동가치설에 대한 성찰이기도 한다. 내가 만든 것은 내 것인가? 내가 만든 것은 내 것만이 아니다. 이것이 생명세계의 실상이다. 물론 자본가치설은 말할 필 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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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물질정신문명’, 혹은 ‘탈성장창조사회’의 길이라고나 할까. 한국적 맥락에서는 산업화/민주화를 안고 넘어서 새로운 사회와 문명으로 길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 다. ‘한’ 사람의 그 ‘한국’이 노동시간 단축과 사회적 배당으로, 다음 사회로 가 는 징검다리를 놓기를 기대해본다.

5. 다시 고부 전봉준과 사발통문을 쓴 그이들은 ‘자기’를 역사에 드러냈다. 한 사람, 한사람을 우주의 교직에 서명했다. 전봉준은 하늘공부와 사회변화를 동시에 염원했다. 동학 의 접주가 되기 전 아마도 그는 정약용의 개혁적 토지제를 공부하고 200여 년 전 인근 부안에 기거했던 실학자 유형원의 토지개혁론을 검토했을 것이다. 다시 고부다. 갑오년 혁명 전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사발통문으로 뜻 을 모은다. 변방 한 고을에서 개벽적 열망이 터져 나왔다. 물론 참혹한 실패였으 나 한 고을에서 시작된 혁명의 들불은 전국을 불살랐다. 그리고 2015년 오늘, 오 늘의 변방은 노자가 말대로 창밖을 열지 않아도 지구로 열려있다. 고부 안에 서울 과 뉴욕이 있다. 쓸쓸한 노인들과 실패한 도시의 장년들도, 심지어는 존재하는 모 든 사물들까지 인터넷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고부다. 새로운 질서는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된다. 재구성, 재창조, 재 균형이다. 2015년의 다시개벽이다. 120년 전과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역시 향아설위 아닐까. 한 사람의 청년과 여성과 노인이 자신을 향해 제사상을 모 시는 것. 자신을 지극히 돌보고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 푸코가 소크라테스에게서 발견했다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한 사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기도 하 다. “만물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새롭게 포태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나로 거듭 나야 한다는 말이다. 수운 최제우의 다시개벽은 무엇보다 나의 거듭남이다. 개벽 은 초월적 자기완성이다. [미움 받을 용기]나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와 같은 자기계발서가 유행이지만,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물어야 할 일이다. 여기 ’리셋(reset)세대‘가 있다. 적공 의 핵심은 역시 사람이다. 한 사람이다. 새로운 주체의 양성이다. 산파의 역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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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다. 사실 한 사람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보는 눈‘이 중요하다. 발 견이 중요하다. 언론은 ‘젊은 육체에 성숙된 정신으로 리셋’이라는 타이틀을 뽑고 있다. 그리고 기사는 이렇게 보고한다. 삼성이 보고한 글로벌 신세대소비동향 보고서의 일부라 고 한다. “금융위기와 이에 따른 불확실성은 리셋 세대들로 하여금 삶을 진지하게 보게 만 들었다. ‘생활의 변화에 욕구를 희생하겠다’는 비율이 65%였다. 3분의 1이 절약 하기 위해 소비를 줄인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명품(46%)∙최신기술제품 (39%)∙영화(37%)∙외식(36%) 순으로 소비를 줄였다”. 리셋세대에게 성공∙행복에 대한 정의는 이전 세대들과 달랐다고 한다. ‘삶에서 가 장 중요한 3가지 덕목’을 묻는 질문에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를 꼽은 비율이 67%에 달했다. ‘건강’을 선택한 비율은 58%, ‘사랑과 로맨스’는 47%였다. 반 면, 명품 옷(11%)∙비싼 차(14%)는 중요도가 떨어졌다. 진정한 리셋을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계발이 요구된다. 자기는 자기만이 아니고, 이웃이고, 자연이고 우주라는 각성 말이다. 자의식과 더불어, 70-80년대 386들을 설레게 했던 사회의식도 외면할 수 없다. 나아가 집단무의식에 대한 자각이나 우 주의식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한살림선언은 전일적 주체로의 거 듭나기 위해,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을 제안한다. 그렇다. 하나의 촛불이 100만개의 촛불이 되는 개벽 전야다. 구성원이 절반은 진 입조차 하지 못하고(청년들), 구성원의 절반은 너무 일찍 밀려나는 시스템이라면 폐기될 수밖에 없다. 시스템 밖에 있는 것이 행복이다. 이미 리셋은 시작되었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서로를 살리는 시스템, 그리고 연대 의 힘. 만남, 대화의 사건, 만남의 기적. 민회... “물질계와 정신계를 통해서 자유평등의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하자.” 해월 최시형 의 아들 최동휘가 참여한 고려혁명당의 강령이다.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지금 나의 이웃과 함께 하면 된다. 이것이 리셋코리아의 출발점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사발통문이다. 도덕과 정치가 둘이 아니고, 수양과 혁명이 둘이 아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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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양심을 조롱하는 사회는 나락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새로운 녹색의 길이 기도 하다. 다시 두아라다. “나를 사회와 자연과 우주와 연결시키는 삶의 기술을 복원해야 합니다. 아시아의 종교는 영성과 양생의 기술들을 오랫동안 발전시키고 전수해 왔습니다. 20세기를 지배한 민족주의와 소비주의에 맞설 수 있는 소박하면서도 지구적인 주체를 양성 하는 방법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환경 단체와 녹색당은 20세기형 NGO와 정 당으로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영성과 양생의 기술을 전파하는 새로운 전위 조직 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프래신짓트 두아라(시카고대학 교수), 프레시안 이미 시작되었다. SF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적공은 이미 그들 내면에 무위이화로 쌓 이고 쌓여왔던 것,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예수님처럼. 단지 물방울 하나가 부족 한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대전환이 나를 통해 일어날 수 있을까?” 도 와 덕으로 체코혁명을 이끌었던 ‘한’ 사람 바츨로프 하벨의 시가 내게로 온다.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일단 내가 시작해야 하리, 해보아야 하리, 여기서 지금, 바로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어디서라면 일이 더 쉬웠을 거라고 자신에게 핑계대지 않으면서, 장황한 연설이나 과장된 몸짓 없이, 다만 보다 더 지속적으로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알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와 조화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62 전환 콜로키움


나는 홀연히 알게 되리 놀랍게도 내가 유일한 사람도 첫 사람도 혹은 가장 중요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모두가 정말로 길을 잃을지 아닐지는 전적으로 내가 길을 잃을지 아닐지에 달렸다는 것을.

[참고자료1]

‘전환’, 무엇을 할 것인가? 전환의 비전은 ‘신인간(new human)의 출현’과 ‘신세계(new world)의 창조’ 다.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나기와 그에 걸맞은 사회경제시스템의 생성이다. 신인간 없이 신세계 없고, 신세계 없이 신인간 없다. 물론 그 주인공은 신인간이다. 그리 고 신세계는 마치 조물주가 그러했듯이 신인간이 창조하는 다시개벽의 새 문명이 다. 혁명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간도 신세계도 여전히 공허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나와 우리를 설레게 하지 못한다.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마을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신인간과 신세계’가 도대체 어떻단 말인가? 이렇게 작디작은 비주류의 소수파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환의 기획’을 이야기하는 21세기 오늘에도 20세기의 혁명을 추억하는 사람들 이 적지 않다. 혁명의 이념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전복적 사회변혁은 그 당시 지구촌 수많은 지식인들의 가슴을 대지진처럼 뒤흔들었다. 그 63


렇다면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의 소수파들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한 마디로 권위와 권력의 진공상태, 러시아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성공조건은 여기에 있었던 듯하다. 양적 확대로 세상을 변혁하는 사회운동이나 정치혁명은 없 다. 혁명은 사회·경제· 문화적 대변동의 혼돈/진공상태에서 비온 뒤 대나무순처럼 새로운 질서가 순식간에 돋아나는 하나의 사태다. 러시아혁명의 경우엔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진공상태가, 중국혁명의 경우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한 진공상 태가 소수의 혁명세력이 새로운 질서를 폭발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어 주었다. 120년 전 갑오동학혁명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청나라의 세력약화와 서구열강 및 일본의 침략 속에서 조선의 사회적 권위와 지배력이 급속히 이완되었 고, 이 틈새에서 동학이 만들어가는 ‘접(接)’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는 민초들에게 희망의 새 세상이 되었다. 요컨대 혁명이건 전환이건 사회적 대변혁은 양적 확대를 거듭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혼돈/진공의 특별한 조건 속에서 소수의 새로운 존재와 시스템이 폭 발적인 자기조직화로 확산하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전환, 새로운 존재의 출현

결국 문제는 소수냐 다수냐가 아니라, 호랑이 등을 타고 가는 주체의 질적 차이 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진공상태는 분명 러시아혁명과 중국혁명의 성공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와 중국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없었다면 중국과 러 시아의 정치사회적 생태계는 숲의 천이와 같은 질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 다. 그 당시 볼셰비키와 중국공산당은 소나무 숲의 도토리와 같은 새로운 종(種) 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존재의 출현(emergence)’, 이것이야말로 전환의 대전제다. 근대 서유 럽 산업혁명기에는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주체와 ‘팔기 위한 생산’과 같은 새로 운 시스템이 존재했다. 새로운 존재만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다. 천지인 삼재의 ‘묘합(妙合)’이라고나 할까. 이미 우리사회는 진공상태인지도 모 른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교회도, 사찰도, 학교도, 노동조합도, 정당도, 정부 도, 기업도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존재의 이유가 퇴색되고 있다. 탈학 교, 탈정당, 탈종교, 탈도시가 현실이 되고 있다. 64 전환 콜로키움


그러므로 지금 다시 확인할 것은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다. 더 좋은 활동이 아니 라, 확실하게 구별되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이다. 이 시대의 새로운 존재를 찾아야 한다. 아니 스스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전환의 출발점은 무 엇보다 환골탈태이며 거듭나기(transformation)이다. 새로운 존재는 이미 우리 안에서, 우리 곁에서 태어나고 있다. ‘가르침 없이 깨 달은’ 수많은 우리시대의 성인과 진인들이 속출하고 있다. ‘신종(新種) 인류’와 ‘신종 문화’와 ‘신종 시스템’이 미세하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생성되고 있다. 기존 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귀를 열고 눈을 열면,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삶의 양식, 새로운 관계의 롤모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열망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이렇게는 아니다’라고 자각한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새 로운 그 무엇에 접속할 준비를 하고 있다. 기르고 초대하고 행동하다

때가 되었다. 초대하고 연결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마당, 그물, 계기를 만들 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초대하고 연결하고 행동하는 새로운 주체들 사이사이에 서 창조된다. 다시 조안나 메이시의 ‘산파’를 떠올린다. 새로운 존재의 출현을 돕는 산파의 몫과 거기에서 배양되고 자라난 새로운 존재들의 활력에 주목할 일이다. 나비를 열망하는 ‘상상하는 세포(imaginal cell)’을 찾고 격려하고 또 길러야 한다. ‘전환 운동가/활동가‘를 모시고 기르고 살려야 한다. ’깨어있는 활동가(conscious activist)‘ 혹은 ’영적 활동가(spiritual activist)‘를 깨워야 한다. 그들의 사회적 응답과 새로운 방식의 실천을 도와야 한다. 신종 효모균을 배양하는 배양소를 떠올릴 수도 있다. 활동가 양성소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때 양성은 ‘양성(養成)’이 아니라 ‘양성(釀成)’이다. 다른 존재되기 이다. 물과 밥을 술이라는 다른 존재로 만드는 누룩처럼 말이다. ‘민주적인 시민’에서 ‘깨어있는 시민’으로! 새로운 존재로의 질적 변화를 위한 ‘전환워크숍’을 상상해본다. ‘전환워크숍’에 참여한 그는 이제 ‘깨어있는 시민’이 된다. 그의 불안과 두려움은 이제 새로운 삶과 사회를 위한 자극제와 촉매제가 된 다. 그리고 또 다른 깨어있는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생성한다. 이를테면 ‘전환의 시민운동’이다. 지금 여기 스스로 만들어가는 생활 속의 유토피아다. 새 65


로운 공동체운동이다. 120년 전 동학의 그들처럼 스스로 우리시대의 접주가 되어 마을마다 마음공부와 생활나눔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전환의 공동체를 만들어 야 한다. 전환의 플랫폼(마당)이 절실하다. 마당에 초대하고, 외톨이로 떨어져 있는 사람 들을 연결해주고, 열망의 표현을 도와주어야 한다. ‘동원하는(mobilizing)’ 마당이 아니라, ‘초대하는(inviting)’ 마당이다(조직도 마찬가지다, ‘묶는 조직’에서 ‘초대 하는 조직’으로.). 관건은 초대의 호스트가 누구냐이다. 때를 만나지 못한 이웃들 이, 사심 없이 준비된 전환 플랫폼의 초대장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다시 열망. 우리에겐 전환의 사상도 있고 전환의 비전도 있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발아하는 전환시민들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행동이다. 열망을 분출시 키는 ‘열정’,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드는 ‘낭만’, 꿈을 현실로 만드는 ‘이상’이 절 실하다.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아니 일주일에 한번 아니라, 하 루에 한 번, 치열한 ‘만남’이 절실하다. 전환은 이미 진행형이다. 이제 스스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초대하고 연결하고 행동할 때다.

[참고자료2]

전환의 특이점과 내재적 초월

1. 시점의 전환

국어사전에서 전환(轉換)이란 “다른 상태나 방향으로 바뀌거나 바꿈”이다. ‘상태 의 전환’이란 이를테면 애벌레에서 나비되기이다. 맹맹한 물이 누룩이라는 촉매를 만나 술로 발효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전환은 중심 이동이다. 중심이동을 통한 질적 변화다. 강증산에 따르면 후천개벽이란 다름 아닌 음(陰)개벽이다. 양에서 음으로의 무게 중심의 이동이다. 이를테면 남성과 여성, 물질과 정신, 상극과 상 생, 소유와 관계, 중앙과 지역, 상품경제와 호혜경제, 생산자와 소비자의 재균형 (re-balance)을 통한 시스템의 질적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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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은 나도, 우리도, 이 세계도 이런 상태와 방향을 더 이상 지속할 없다는 자 각에서 출발한다(覺非). ‘전환운동(transition movement)’은 전환함으로써만 지속 가능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회적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전환은 ‘차원이동’이 며, ‘질적 변화’이고, 의식과 삶과 문명의 ‘전일적 탈바꿈’이다. 전환은 ‘깨어나 기’이다. 기존의 고정관념, 사고의 틀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전환은 무엇보다, 애 벌레가 나비되는 ‘거듭나기’다. 전환의 첫 번째 조건은 의식의 전환이다. 다시 의식의 전환의 조건은 ‘시점(視 點)’의 전환이다. 이야기의 시점이 3인칭에서 1인칭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전지

적 작가시점’이 아니라 아프고 고단하고 툴툴거리는 나(우리)의 시점에서 이야기 해야 한다. 심판자로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헉헉거리며 뛰고 있는 운동장 안의 선수로서 이야기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내 옆에는 누가 있는가? 내 옆의 그들과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등등. 해월 최시형의 향아설위(向我設位)처럼, 시선을 저 너머에서 지금 여기로, ‘그’ 에게서 ‘나와 우리’로 옮기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식론적 전환이다. ‘객관적 실재(reality)는 없다“는 자각이다. ‘객 관’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거 나 생각함”이다. 인지과학의 보고에 의하면 인간은 원초적으로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철학에서 객관이란 “세계나 자연 따위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 재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주관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실재는 없다. 그러므로 세 계는 토마스 베리 신부님의 말씀대로 “객체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의 성스러운 교 감(communion)”이다. 2. 출현

전환은 계획의 결과물이 아니다. ‘창발(創發)’ 혹은 ‘출현’이다. 동해바다 수평 선 아래서 느닷없이 떠오른 잠수함 같은 존재다. 예민한 바다 생물들이라면 잠수 함의 출현을 예감할 수도 있겠지만, 전환은 도둑처럼 온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계획(planning)과 emergence(창발)을 비교한다. 새로운 질 서는 양적 확대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제를 기준으로 만든 사업목 표의 양적 변화가 아니다. 창발은 원점, 제로포인트, 백지상태에서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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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계는 출현(emergence)하는 것이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듯. 물론 무는 그냥 무가 아니다. 보이지 않았을 뿐. 바다 속 대륙붕에서 마그마가 끓어오르듯 오랜 시간 동안 생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섬으로 출현한다. 3. 특이점

현대과학에서는 ‘무에서 유가 되는 아주 특별한 하나’를 ‘특이점(singularity)’이 라고 말한다. 설명에 의하면, 특이점은 “일반상대론에서 부피가 0이고 밀도가 무 한대가 되어 블랙홀이 되는 질량체가 붕괴하게 된다”는 이론적인 한 점을 말한다. 특이점의 대폭발로 생긴 원시우주는 폭발 후 짧은 시간 동안 지수함수적으로 급격 히 팽창하다가 온도와 밀도가 빠르게 떨어졌다고 한다(네이버 지식백과). 특이점이라는 말은 구글의 인공지능 책임자이며, 세계적인 발명가이자 사상가인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책 ‘특이점이 온다’라는 책으로 인해 널리 알려졌다. 이 책 은 트랜센던스(transcendence)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가 됐다. 요약 하면 인공지능으로 합성된 트랜스휴먼이 인류의 기술적 특이점이 될 것이라는 얘 기이다. 그렇다면, 전환의 특이점은 무엇일까? 새로운 패러다임,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 는 ‘아주 특별한 하나’는 무엇일까? 전환의 사상적 특이점, 사회적 특이점은 무 엇일까? 페이스북의 창업자 저커버그는 ‘10년 후 소셜미디어의 미래’에 대해 묻는 어느 페이스북 사용자의 질문에 ‘인터넷닷오알지, 인공지능, 가상현실’이라는 3가지 키 워드를 꼽은 바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그룹의 하나인 SK그룹의 회장 부인이 기업가와 과학자 등과 함께 단체를 하나 만들었다. 그 이름은 ‘싱귤래러티99’이 다. 1%의 기업가와 자본가를 위한 특이점이 아니라, 99%를 위한 기술적 특이점 사회적 특이점을 만들어가겠는 뜻이다. 오늘날 어떤 의미에서 가장 진보적인 집단은 기업가들이다(끊임없이 혁신하는 태도를 그들 스스로 ‘기업가정신’이라고 말한다.). 돈 벌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 해서... 오래전부터 미국의 경영 그루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마음챙김과 자기수 양의 리더십을 강조해왔다. 몇 년 전 자본주의 4.0 캠페인을 벌였던 조선일보의 경제특별판에 연재하는 ‘탈산업사회의 경제학’이 눈에 띤다. 그들은 전환기를 예 측하고 영원한 주도권을 위해 그들만의 특이점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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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 조선의 동학의 깨달음은 이를테면 전환의 사상적 특이점이다. “내가 하늘이다(我卽天),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며, 만인군자, 혹은 만인신선 을 선언했다. 자기치유, 자기구원의 만인군자, 만인성인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증산은 “내가 옥황상제”라고 선포한다. 정도령만이 진인(眞人)이 아니라, 백성들 이 모두 진인이 된다. 새로운 주체성, 거룩한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 동학의 세계 를 지금여기의 유토피아로 만들었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이 세상의 모 든 지식과 해법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 진정한 만인메시아의 시대가 되었다. 30년 전 한살림도, 하나의 작은 특이점이 되었다. ‘생명은 하나’라는 사상적 특 이점과 더불어 생산과 소비의 호혜시스템을 매장의 상품교환시스템에 실어냄으로 써 오늘의 한살림을 ‘탁월한 성과’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직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리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1인1표의 민주제는 근대사회 최대의 특이점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 그것은 여 전히 유효할까? 자본주의의 주식회사, 사회주의의 전위정당도 사회경제적 특이점 이 발명품이었다. 20세기 막바지 인터넷과 모바일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사회적 특 이점으로 작동하고 있다. 기술의 시대다. 다시, 21세기 문명전환의 사회적 특이점은 무엇일까? 오늘날 사회운동에서 질적 변화의 걸림돌은 계획과 창발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개혁과 전환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예컨대 협동조합은 학교와 국가와 정당과 노 동조합과 마찬가지로 낡은 틀이다. 대안학교, 협동조합 열풍, 대안정당 자체가 이 를테면 형용모순이다. 물론 학교와 국가와 정당과 같은 근대적 구조물은 고대의 석조건축물이 그러하듯이 굳세게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게중심은 분명 이동 하고 있다. 4. 내재적 초월

전환은 초월(trans)이다. 경계를 넘는 것이다. 하지만, 전환의 특이점은 우리 안에 있다. “내가 곧 특이점이다.” 전환은 ‘내재적 초월(transcending but including)’이다. 트랜스휴먼은 인간과 지구와 삶을 육체를 초월하려 하지만, 내재적 초월이란 삶의 다차원성에 대한 재 발견이다. 사회적 전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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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묻는다. ‘탈성장(de-growth)’ 좋다. 그런데 가능한 일인가? 성장을 못 하면 그 피해는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고... 그 답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다차원 접근법이다. 평행우주론이나 끈이론에 따르 면 우주에는 11차원(혹은 26차원)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의 삶과 경제도 10 차원까지는 아닐지라도 여러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민경제만이 전부가 아니다. 크게는 동아시아경제권과 글로벌 경제권이 있고, 작게는 광역경제권, 생활경제권, 마을경제권, 가정경제권 등 경제는 복합 층위로 존재다다. 탈성장이 정녕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행복의 길이라면, 당장 나의 경제와 가족의 경제를 탈성장시키면 된다. 학원갈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함께 나 들이를 가면 된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소득을 줄이고 소비도 줄이면 된다. 가정경 제의 탈성장의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문제는 경제 그 자체가 아니라, 관습적 삶으 로부터의 이탈에서 오는 불안감이다. 국민경제로 접근하는 것이 어렵다면, 지역경 제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일단 가정경제가 먼저 시작하고. 일본의 깨달음세대 한 사람의 개인경제(소비패턴)가 일본의 국민경제를 변화시 키고 있다. 한국의 ‘삼포세대’가 ‘비소유경제(공유경제)’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 다. 청년세대의 절반 이상이 기존시스템에 들어갈 수 없는 시대, 이들은 자신만의 4차원 경제시스템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주의라고 꾸짖을 일이 아니다. 4차원을 깨닫고 4차원에 공감하면서, 동시에 4차원과 더불어 3차원의 세계, 감각 의 세계, 욕망의 세계도 삶의 일부임을 공감하도록 도와야 한다. 요컨대 삶의 다 차원성, 혹은 전일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진정한 깨달음 세대의 탄생을 도와야 한 다. 5. 산파

다시, 조안나 메이시의 ‘호스피스와 산파’다. 전환기에는 기존 세계를 잘 갈무 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불어 새로운 질서(시스템)가 태어나도록 도와야 한다. 할머니/할아버지가 되는 일이다. 새로운 가치의 산파, 새로운 활동의 산파, 새로 운 시스템의 산파...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의 산파. “내가 특이점이다.” 유토피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내가 유토피아의 주인공이 되는 것, 그리고 지금 이곳을 유토피아로 만드는 것이다. 사회적 특이점을 만들어야 하지만, 관건은 역시 새로운 사람이다. 이미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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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고 있다. 지금 절실한 것은 거듭남을 돕는 산파(産婆)다. 새 문명의 출현을 돕는 산파다. 트랜스휴먼 혹은 네오휴먼을 돕는 산파와 새로운 시스템의 출현을 돕는 산파다. 해월 최시형은 갱정포태지수(更定胞胎之數)라는 표현으로 그 산파역 을 후천개벽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기성세대를 위한 또 하나의 제안: 비소유세대와 함께하는 어르신들의 비소유 운동. 노동가치설과 지식가치설(지적재산권)에 대한 성찰. 내 손을 만든 것은 내 것인가? 내가 일해서 번 돈은 오로지 내 것인가? 내 머리로 만들어낸 발명품은 내 것인가? 비소유세대를 위한 기성세대들의 ‘비소유운동’. 예컨대 ‘사회적 상 속’, ‘무이자은행’, ‘호혜경제지원센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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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위기 시대, 여성운동의 전환을 꿈꾸다 윤정숙45)

지난 30여 년을 여성운동가로 살아온 필자는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생각의 큰 전 환점을 맞았다. 인간이 만든 최첨단의 과학기술이 자신은 물론 지구와 자연에 가 한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파괴와 소멸을 목도하면서 오랫동안 가져온 나의 신념 과 실천, 삶의 방식을 뿌리에서부터 돌아보게 되었다. 이 글은 나의 삶, 나의 여 성운동의 전환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지의 고민 속에서 얻게 된 생각의 변화에 대한 소회이다46). 과정에서 ‘생태적 세계관’ 그리고 ‘생명과 모성’을 다시 돌아보 게 되었다. 이들 개념 중 생명과 모성은 여성운동에서는 논쟁적인 측면이 적지 않 지만, 전환을 꿈꾸는 여성운동가들에게 이 개념들은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성운동의 결과로 이제 겨우 맛보기 시작한 여성들의 파이 한 조각조차도 부패 되고 발암성을 유발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부인되어 왔던 기회들을 얼마나 갈망하는가와 관계없이 확실히 우리 여성주의자들의 이론과 정책은 이 점을 인식 해야 한다. 우리 모두를 죽이고 있는 체제 내에서 평등하게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 을 의미하는 것일까”47)

비탈길에 선 ‘성평등’ 여성운동

어느 때보다도 여성운동은 정체성과 방향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진보적 여성운동’의 정체성을 가지고 큰 존재감을 드러냈던 여성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은 45) (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46) 이제 막 내 삶과 운동의 전환을 꿈꾸기 시작한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마땅한 일인지 자꾸 자 문하였다. 이 글에서 언급한 여성운동은 내가 경험했던 운동을 말한다. 47) 이네스트라 킹, ‘상처의 치유: 여성주의, 생태학 그리고 자연, 문화의 이원론’, 아이린 다이아몬드, 글로리아 페만 오렌스타인 편저, 정현경, 황혜숙 역,『다시 꾸며보는 세상』, 이화여대출판부, 1996, p.169-170. 72 전환 콜로키움


전처럼 돋보이지 않는다. 젠더 이슈가 사회적, 제도적으로 발화조차 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여성대통령시대’가 여성들의 높은 위상을 말해주지 않느냐는 희극적 언설 속에서 여성혐오와 역차별 담론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여성운동은 어느 시 기보다 적지 않을 당혹함과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으며, 변화의 열망 또한 어 느 때보다 깊어 보인다. 여성운동이 대안적 패러다임을 제기한 것은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끼어들기’와 ‘새판짜기’ 중 무엇이 우선인지, 혹은 이중전략은 어떻게 가능할지로 전개되었던 토론은 지금 ‘전환’으로 이동되었다. 2011년과 2014년에 한국여성재단이 주최한 ‘여성회의’의 주제는 <여성운동의 새로운 전환의 모색>과 <여성운동의 전환을 꿈꾸다>였다. 다양한 영역과 한 세대에 걸친 많은 여성운동가 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일상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어 떻게 자신들을 재정치화할 수 있을지,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장화된 사회에서 여성 운동과 여성주의가 다시 만들어내야 할 ‘사회’질서는 무엇이고, 그 내용은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는가48) 하는 문제제기와 함께 여성주의 실천 현장의 새로운 실험 들과 어려움들이 토론되었다. 그러나 정작 여성운동의 ‘전환’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며,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못하였다. ‘전환’은 기존 생 각과 실천방식을 전복하는 것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지금의 방식이 더는 전처 럼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직면하면서 그를 뛰어넘어 설 생각의 틀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은 ‘젠더의 제도화’가 꽃피워진 시기였다. 신자유주의 적 사회질서로 재편되었던 때였지만 이 시기에 ‘국가페미니즘’(state feminism)은 어느 때보다 활발히 작동되었다. ‘성평등’과 ‘성주류화’(gender-mainstreaming) 는 여성운동과 정부정책 모두에게 중심 담론이고 전략이었다. 국가여성기구(여성 부)의 설치 및 성평등 아젠다는 국가정책과 제도 안으로 빠르게 흡수되었고 젠더 거버넌스는 관행이 되어갔다. 운동과 이론 영역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행정부의 ‘페모크라트’로, 또한 의회정치에 직접 참여하면서 여성운동의 성취는 ‘눈부실 만 큼’ 돋보였다. 젠더의 제도화에서 ‘정치적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던 때 였다. 반면 많은 상황에서 운동가들은 법제화 전략의 테두리에 갇히는 경우를 경험했

48) 전희경, ‘여성, 여성주의, 정치적 액티비즘에 대한 생각들’, 『한국여성운동의 전환을 꿈꾸다』 2014 여성회의 자료집 73


다. 법제화되면 여성운동은 더 이상 초대되지 않고 의제는 전문가와 행정의 손에 넘어간다. 거버넌스의 이름으로 정부의 ‘갑질’을 경험하거나 국가보조금 및 위탁 사업의 확대로 운동가는 준공무원으로 취급받는 상황도 적지 않다. 이런 점에서 거버넌스와 젠더의 제도화는 양날의 칼처럼 여성운동의 ‘아찔한 선택’이었다49)는 고백은 큰 공감을 얻었다. 내부적으로는 운동이 전문화, 파편화되어 ‘표류하는 듯 하고’, 조직은 살아남기 위한 활동에 치중하게 되고, 활동가들은 ‘프로젝트 매니 저’, ‘전문가의 조교’로, 혹은 ‘사무직 노동자화’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속 내를 숨길 수 없는 현실50)에 공감대는 넓어진다. 성평등 여성운동의 담론과 전략 은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성평등 친화적인 정부가 들어서서 ‘정치적 의지’를 발휘 하면 상황은 나아지는 것일까. 남성이 주도하는 주류사회에 ‘젠더 관점’으로 끼어 들어 주류를 바꾸는 일은 얼마나 가능할까. 남성이 만든 사다리에 오르는 것은 결 국 지배남성 집단이 만든 문명, 체제, 가치관에 근거한 모델 속으로 진입하는 게 아닐까. 여자도 군대 가고, 남자처럼 야근철야 해야 하고, 원자력위원회에도 여성 할당제를 주장하고, 여성도 삭발 철야농성해야 투쟁성인가. “페미니즘은 단지 남성과의 평등이라는 그렇게 낮은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51)라 며 여성주의 목표가 남성 세계로 진입하는 것인가를 묻는 샌드라 하딩의 질문은 성평등 여성운동의 전환의 방향을 시사한다. 따라잡기보다 낙후시키기, 같아지기 보다 여성의 ‘다른 경험과 가치’, ‘다른 언어와 실천방식’으로 ‘다른 세계’의 가 능성을 말하고 실천하는 것, 여성과 자연에 대한 지배와 폭력성의 뿌리인 가부장 적 세계관, 남성들의 세상운영의 가치관과 작동방식을 상대화하는 것, 이것이 ‘전 환’의 시작점이 아닐까. 얼마 전 ‘여성동학다큐소설’ 13권을 완간한 ‘동학언니들’은 ‘다르게 말하기’를 통해 전환적 사유점을 시사해준다. 남성 역사에서 주변의 보조역할로 가려진 여성 들을 주체로 불러낸 13명의 여성필자들은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돕는 ‘유무상 자’ 정신, 생명을 귀하게 여기던 평화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다간 선조들의 삶에서 눈물과 한숨, 통곡을 느꼈고, 공감하며 함께 울었다”52)고 했다. 소설 내 용, 쓴 사람들, 쓰는 과정 모두가 통념을 벗어난 새로운 방식이다. 여성필자들은 49) 50) 51) 52)

김미경, ‘거버넌스와 제도화 전략은 여성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위의 자료집 A 여성활동가 인터뷰에서 샌드라 하딩, 이재경, 박혜경옮김,『페미니즘과 과학』이대출판부, 2002 한겨례, 2015.1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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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의 시대를 꿈꾸며 싸운 사람들의 정신과 삶의 방식에 눈물로 공감하며 보이지 않았던 여성들을 세상 속으로 불러냈다. 이를 주도한 페미니스트 한의사 고은광순 은 말한다. “우리는 계란이 아니야, 저들도 바위가 아니야”라고. 그녀에게 물었 다. 평생 추구해온 여성주의는 뭡니까? “귀한 우리, 함께 잘 사는 것”53). 몇 달 전엔 미국에 건너가 펜타곤, 백악관, 무기회사 보잉사에서, 지금은 미 대사관 앞 에서 1인 평화시위를 한다. “모든 군인은 누군가의 자식이다(Any soldier is some mom's child)”라고. 그녀가 전환을 꿈꾸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이런 언어들 을 가질 수 있었을까. 위험하고 무모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여성운동이 대대적 으로 호주제 폐지운동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그녀는 호주제폐지운동을 하면서 ‘앉아서 오줌 누는 빨갱이년들’이라며 부계혈통 따지는 ‘찌질한’ 남자들과 싸웠 다. 가부장적 전통과 질서를 ‘찌질한’ 것이라 부르며, 다른 언어와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며, 그 누구든 귀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배제와 죽음을 불러오는 문화, 가치와 체제에 균열을 내는 것. 이것이 여성운동의 전환이 보여줄 한 모습일 것이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그물망 관점

“새롭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창의적인 접근법은 이 세상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과 공유하는 것이라는 데서 출발한다”54) 『침묵의 봄』 맨 마지막 페이지 에서 레이첼 카슨은 이렇게 말한다. 그를 페미니스트로 명명할 수 없지만 그의 세 계관이 생태여성주의자들에게 끼친 영향력과 통찰력은 지대하다. 그녀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개인과 사회의 정신적 성장에 절대 필요하며, ‘우주’의 경이로움은 자 연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줄여준다고 했다. 자연은 착취와 이용, 소모의 대상이 아 니라 우리 삶과 연관되어 나누고 배우고 공존하는 우리의 일부라는 그물망 세계관 이다. 운동의 전환은 세계관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간과 인간,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근대적 합리주의와 과학주의적 세계관을 바꾸면 질문도 해법도 달라진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적 세계관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상대화하며, 다르게 세상을 53) 한겨례, 2015.10.24일자 54) 레이첼 카슨, 김은령 옮김,『침묵의 봄』, p.325, 에코리브르, 2011 75


해석할 언어와 가치를 찾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간의 여성운동 담론에서 자연 과 우주, 생명현상은 사유와 담론의 범위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자연에 대한 지 배와 착취가 여성에 대한 그것과의 어떤 연관성을 있는지 깊이 탐구하지 못하였 다. “땅이 인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 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늘을 짜는 것이 아니라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지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시애틀 추장의 연설, 1854). 세상은 모든 것이 연결된 그물망이고, 인간은 그물의 한 부분이라는 것,

서로가 연결되고 기대어 있으므로 어느 한 부분의 고통은 바로 자신의 것으로 돌 아온다는 생각. 이보다 더 분명하게 인간중심의 세계관의 한계와 생명의 생태적 속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인간이 그물을 짠다’는 생각을 전복하며, 인간을 생태 계 그물망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생태적 관점은 인간, 자연, 지구가 화해, 공존 하는 세계관이다. 인간중심적 문명에 대한 생태적, 여성주의적 성찰을 통해 새 길 을 만드는 일이 ‘전환’일 것이다. ‘20세기는 가장 역설적인 세기’라는 이유는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이 가장 비 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인간의 생존과 자연생태계는 가장 위협적인 세기’이기 때 문일 것이다. 핵폭탄, 핵발전소, 생명(조작)공학 등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태 계가 생명/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불안사회를 목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의 방식, 지배권력 남성들이 주도해온 산업문명과 과학기술에 대한 근원적 질문 을 더 유보할 여유는 없다. 오늘의 과학기술문명은 자연에 대한 정복의 관점, 과학의 거대화와 정치화 및 (순수)중립성신화, 생명에 대한 조작적 상업적 관점의 생명공학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요청한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삶의 풍요로움과 행복, 경제성장과 진보, 효율성과 지속가능한 발전 등 익숙한 개념과 가치들을 재정의 해야 할 것이다. 인 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적 사유는 ‘자연 속의 생명이 협 력, 상호보살핌, 사랑을 통해 유지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새로운 우주론과 새로운 인류학의 필요성을 얘기한다.55) 핵 발전의 위협, 황우석사태, 세월호를 아프고도 공포스럽게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돈보다 생명’은 현존하는 문명과 가치관의 55)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쓰, 손덕수, 이난아 옮김,『에코페미니즘』, 창작과 비평사, 2000 76 전환 콜로키움


본질을 꿰뚫는다. ‘돈이 신이 된’ 사회에서는 어떤 생명도 이윤의 동기 앞에서는 물질일 뿐이다. 돈 우선 세상에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지배남성과 그 외 의 집단들의 관계는 폭력적 위계 속에 재편된다. 생명이 우선하지 못하는 사회에 서 모든 관계는 폭력과 배제의 위협에 놓이게 된다. 정신과 문화는 천박해지고 생 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자신 존중의 생명력을 잃고 말 것이다. 반핵운동가이자 시민과학자인 다카기 진자부로56)는 젊은 시절 연구원으로 일하 며 알프스, 남극, 남태평양 등 지구의 어디를 가도 방사능 핵실험으로 인한 ‘죽음 의 재’가 측정되는 놀라운 것을 경험했다. 이후 자리를 옮겨 우주역사를 하는 연 구원이 되면서 자연으로 나가 연구하게 되었다. 물고기, 꽃과 새를 관찰하는 연구 를 하면서, 비로소 그는 ‘인간의 감각’으로 방사능을, ‘생명의 자리’에서 야만스 런 공포의 기술을 인지하게 되었다 고백한다. 연구소 안에서 하나의 물질로 수치 화된 핵연구를 하던 그는 자연을 접하면서 비로소 생명의 감수성을 회복하고, 핵 의 치명적 폭력성을 체감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느낌과 감수성은 그 의 세계관과 삶의 방향을 바꾸어 주었다.

과학과 생명에 대한 여성주의적 성찰

과학이 생명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여성주의적 성찰의 역사는 짧지 않다. 특히 생 명공학기술은 여성의 재생산과 불가분관계에 있는데 생명에 대한 기계적, 폭력적 인식과 상업화는 1970년대 이후 에코페미니즘을 중심으로 꾸준히 비판되었다. 서 구 근대과학의 생명관에 도전하는 생태여성주의는 여성의 몸과 재생산능력이 도구 화, 상업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생명체를 인위적으로 분리, 조작 및 재조합하는 ‘정상과학’을 해체하며, 그것을 ‘특수한 과학’으로 상대화한다. ‘단 하나의 과학’ 이 지배하던 시기에 ‘다른 과학’이 가능함을 밝힌 바바라 톡의 연구방법의 핵심은 ‘생명의 느낌’이다. 이블린 폭스 겔러57)는 바바라 매클린톡58)이 ‘지성과 감성’이 절묘하게 혼합된 직관적 통찰력(insight)을 지녔으며 그녀가 수행하는 과학의 핵심 56) 다카기 진자부로, ‘생명의 자리에서 원자력 발전을 생각하다’, 『녹색평론』1995년 1-2월호 57) 이블린 폭스 켈러, 김재희 옮김, 『생명의 느낌』,양문, 2001 58) 식물유전학자 바바라 맥클린 톡의 방법론은 남성과학계의 견제와 조롱을 받았으나 결국 1983년 (81세)에 여성 단독으로 첫 번째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상업화된 과학계의 모습을 ‘시 장판이고 투기장 같다’고 표현했다. 77


은 ‘생명에 대한 온전한 이해'(understanding)이고, 생명과 소통하는 감각이라고 한다. 그 방법론은 “마음을 모아 그 일에 전념하는 거야. 생명현상의 그 복잡다단 한 면모를 어떻게 조각내서 다룰 수 있겠어. 생명의 온전함과 나도 하나가 되는 거야”라는 그녀의 말에 그대로 녹아있다. 연구 대상의 냉정한 거리를 요구하고, 생명체를 분자로 환원해 관찰하는 전통과학의 방법론과는 전혀 다르다. 바바라 맥 클린은 정답을 정해놓고 그것으로 사물을 보지 말고 “사물이 말하는 그대로를 가 감 없이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며 선험적 가설을 가지고 실재하고 유동하는 생명현상을 끼어 맞추는 연구방법을 뒤집었다. ‘같은 것은 하나 없는’ 생명 하나 하나의 특별한 개체성과 신비함에 주목했다. 그녀는 이 세상이 자연과학이 허용하 는 것보다 훨씬 놀랍고 복잡하다고 했으며, 시인의 눈으로 자연과 생명의 질서를 읽고 이를 과학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탐색한 ‘또 다른 과학’은 전환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생명을 물질로 취급하는 생명과학기술을 박경미 교수는 예리하게 통찰한다. “인 간배아 복제연구가 시험관아기 시술 후 남은 냉동 수정란 처리에서부터 시작되었 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상에 새로운 생명 하나가 받아들여지기 위해 수 백만 년 동안 인류가 해왔던 다정한 몸짓 대신 난자와 정자, 수정 같은 육두문자 가 난무한다. 내 몸 밖에서, 내 몸과 분리되어 이루어지는 출생은 더 이상 생명의 신비를 간직할 수 없다. 그것은 탄생이 아니라 번식이고, 신성모독이기 이전에 인 간모독이다. 현재 생식 목적의 인간배아 복제연구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치료 목적의 연구만 허용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치료 목적의 인간배아 연구라 할지 라도 인간 생명의 가장 내밀하고 시원적인 부분을 기계화, 물질화해서 다루기는 마찬가지다. 막돼먹은 짓이기는 치료 목적 연구나 생식 목적 연구나 똑같다”59) 그는 생명공학기술을 비판하면서 황우석 연구에 사용된 1,600개가 넘는 난자를 ‘국익을 위해 고문당하고 폐기처분된 난자’, ‘조국을 위한 난자’, ‘기계에 강간당 한 난자’, ‘물질이 되고 기계가 된 난자’60)로 명명한다. 오랜 세월 스스로 창발 한 생명을 물질로 취급하는 것을 인간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생명공학기술에 대한 여성주의 인식론은 이성과 과학을 넘어서는 생명의 역동적 자율성에 대한 경

59) 박경미, ‘어떻게 살 것인가, 『녹색평론』, 2006. 1-2월 60) 박경미, 위의 글 78 전환 콜로키움


외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여성주의가 과학과 문명 자체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샌드라 하딩은 근대 서구과학이 지닌 진보적 성향과 퇴행적 성향 중에서 진보적 측면은 발전시키고, 퇴행적 측면을 차단해야 하는데 이는 페미니즘에 주어 진 과제61)라고 말한다. 여성주의 인식론과 생태적 생명관은 과학이 내포한 진보적 성향을 키워나가는데 핵심적 방법론임은 분명하다. ‘황우석 사태’, 전무후무한 과학사기사건은 우리 사회 지배집단의 가치관과 권 력/자본 운영구조의 바닥을 드러낸 대표적 사건이다. ‘과학기술중심사회’를 국가 비전이자 핵심국정과제로 내건 참여정부에서 그는 과학기술부장관으로 거명되고, ‘황우석노벨상추진위원회’의 주인공이었다. 이 사건은 “생명산업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이 돼야 우리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소신과 국가적 지 원62)은 물론, 정치인, 관료들의 이너서클인 ‘황금박쥐’의 결성 등은 정치화된 과 학의 극단을 보여주었다. 정치화는 한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이데올로기를 첨예하 게 반영하며, 여성의 몸과 생명체가 국가주의, 경제성장주의, 과학주의의 도구가 되었던 대표적 사건이다. 여성운동에서는 여성환경연대(1999년 설립)를 제외하고는 ‘과학과 생명’에 관한 여성주의적 논의는 별로 없었다. 황우석 사건을 전후로 배아복제연구와 생명윤리 의 논쟁은 1998년 이후 일부시민, 여성단체가 주도했지만 인식론적인 논쟁보다는 하나의 이슈로 대응했으며 지속되지 못했다. 생명과학기술은 생명의 자율적 역동 을 통제하는 기술이며,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생명력을 이용하게 된 시대이며, 생명체나 생명 자체가 경제적 대상’63)이라는 점에서 어떤 과학기술과는 달리 인간 생명을 포함한 생명체의 창발적 속성에 대한 위험한 도전이다. 반대 입장을 밝힌 여성계는 시민단체등과 연대활동을 벌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난자채취피해자 신고센터 개설 및 손해배상청구소송’(2006년) 등 독자적 활동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여성운동은 ‘가짜논문에 대한 진실규명’ 및 ‘여성의 인권(몸의 권리)과 건강권’ 차원의 반론과 관련 법제도의 개혁에 초점을 두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론의 관심도, 시민/여성운동의 대응도 약회되는 가운데 이 사 건은 2009년 연구비 유용에 관한 횡령죄(서울중앙지법)로 축소되었다. 더욱이 2010 61) 샌드라 하딩(2005), 위의 책 p.45 62) 김환석(2006), 『과학사회학의 쟁점들』, 문학과 지성사, 63) 이진경(2007), 『모더니티의 지층들』, 그린비, p.348 79


년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9인의 전원 일치로 ‘배아는 인간기본권을 부여받는 대상 이 아니다’라고 판결했는데, 이로써 난치병치료 목적으로 과학연구에 활용하는 것 이 합헌이 되어 불임시술 후 잔여배아를 이용한 배아줄기세포연구가 법적 정당성 을 기반으로 다시 활성화될 가능성을 지닌다. 지난해 차병원이 미래창조과학부와 함께 성인피부세포 핵을 난자에 이식해 세계최초로 ’체세포복제 줄기세포‘를 만드 는 데 성공했다는 보도에 이어 ‘차바이오앤’의 주가가 급등했다64). 한 언론은 줄 기세포기술을 ‘차세대 성장동력’, ‘시장규모는 2012년 11억 달러에서 2020년 160 억 달러로 급증’할 것, ‘정부와 학계, 기업도 줄기세포 연구가 활성화하는 데 힘 을 모아야 할 것’65)이라고 덧붙였다. 차병원측은 ‘누가 먼저 줄기세포 치료를 상 용화할 수 있느냐에 따라 병원뿐만 아니라 국가미래가 좌우될 것’이고, ‘줄기세포 분야 중 아스피린 같은 메가히트 상품을 만들어야 아시아 및 세계의 줄기세포 치 료의 허브가 될 수 있다’66)고 한다. 결국 10여 년 전 황우석이 ‘대한민국의 기 술’이라며 국가를 호명했던 담론은 연속되고, 생명기술연구는 성장과 경쟁, 국익 의 논리를 동원하며 생명(체)의 산업화와 상업화를 위해 치닫고 있다. 생명공학은 고부가가치 산업, 미래선진산업, 메가히트 상품의 산실로 명명되고 있다. 불임클리닉 인터넷 사이트에는 ‘수년간 노하우와 높은 성공률, 각종 노하우 와 옵션과 예상비용. 빈틈없는 성공관리로 만족스러운 결과, 성별선택 정확도 100%, 대기기간 최소, 성별선택 및 쌍둥이 시도’ 등의 언어가 나무하고 난정자매 매 사이트에서는 ‘매매알선’ ‘계약서’ ‘웃돈’ ‘등급’ ‘보상금‘ 등의 언어가 통용 된다. 난/정자는 수백만 원, 대리모 5천만 원에 난자 불법매매 인터넷 동호회와 건수는 매년 늘고 있다. 생명체들은 조작, 매매되는 상품이 되어 돈으로 환산된 다. 과학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 없이는 ‘여성의 과학’ 혹은 ‘여성에 의한’ 과학은 될 수 있으나 ‘여성주의 과학’이 되기는 어렵다. 2003년 한국여성학회에서 여성계 처음 <생명공학과 여성>을 주제로 한 공개 심포지엄을 제외하고는 여성주의 과학 과 생명에 대한 공론화의 장은 거의 없었다. 2012년에 열린 <리우+20>의 한국민 간위원회 입장문67)에서도, 여성포럼 등에서도 생명공학 주제는 거의 등장하지 않 64) 65) 66) 67)

경향신문, 4월 19일자 매일경제, 사설. 2014.4.19일자 매일경제, 2014.2.12 차병원 차병렬원장 인터뷰 여성환경연대(2012),『지속가능발전과 여성』-리우+20 자료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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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불임여성과 난치환자 등 이해관계자들이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현실적으로 논쟁과 해법이 단순하지 않지만, 여성주의는 이 주제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말아 야 한다. 2014 여성회의에서 “세월호, 밀양, 군대성폭력 등에 여성운동은 왜 합의된 목 소리로 개입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 생명가치와 여성주의를 연결하지 못했다 는 한계와 생명의 문제에 젠더 관점으로 논평 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가족중심의 이슈방식, 모성애부각, 아버지 부각등)고 답했다68). 부담이 되었던 그 지점이 무엇인

지, 왜 그러한지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생명가치와 여성주의를 연결하는 것은 전 환적 사유에 중대한 이음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근대 과학의 생명관에서 출발한 생명공학에 대해 여성주의는 이를 하나의 근대적 과학으로 맥락화하고, ‘하나의 과학’ ‘하나의 생명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명의 관점에서 다른 목소 리를 내야 한다.

모성성에 대한 전환적 사유

모성(성)은 여성주의에서 가장 논쟁적인 개념의 하나이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인 것은 아니며, 모성(성)은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로 정당화하는 핵심 기제이 기 때문이다. 운동에서도 많은 경우 ‘어머니의 이름으로’라는 언설과 구호는 자주 삼가된다. 모성성은 보호받아야 할 ‘여성의 권리’로 인식된다. 평등의 주장 안에 서 때론 모성성은 회피되거나 거부되기도 하였다. 정희진69)은 어머니는 개별 여성 의 선택적 역할이므로 모든 여성이 어머니로 환원되는 것을 경계한다. 가부장제에 서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남성의 호칭이고 담론이라는 것이다. 남성적 담론 안에서 어머니와 모성성은 성별화된 역할을 정당화하며, 보살핌(복지사, 보육교사 등) 노동 의 차별적 평가 등으로 환원된다. 결국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학이다. 모성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관계라는 것이다. 어머니 의 사적 영역에서의 헌신은 추앙되지만, 모성적 사회노동은 가치절하 되는 것이 명백한 현실이다. 모든 여성을 어머니로 환원하며 이중적 의미와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가부장제의 여성지배의 담론으로 작용하는 것도 명백하다. 68) 2014년 여성회의 자료집, p. 106 69)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81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이자 상징으로 표현되어온 모성성은 경계와 배제의 대상 일 수 있다. 그러나 모성성 자체가 부인될 수는 없다. 남성의 만든 기표로서의 모 성성은 부인되어야 하지만, 모성성은 여성주의 맥락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재의미 화 해야 한다. 흑인민권운동가들이 ‘검은 것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 생태론자들 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 혹은 흑인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우머니 즘(womanism)으로 부르며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성을 다르게 해석하고 정치화하지 않았는가. 여성의 출산과 수유, 양육의 경험은 생물학적 개인적 행위이지만, 생명 을 잉태하고 다른 생명과 한 몸이 되었다가 출산을 하고 젖을 물려 키운 경험이 부여한 보살핌, 살림, 공존의 감수성은 인간과 자연의 공동체로 확장되어야 한다. 여성의 이러한 경험과 감수성이 사회적 원리와 가치로 확장될 때 세상은 달라지게 된다. “남자들은 생명을 생각하지 않아요. 자연과 적을 정복할 뿐이지요.”70) 체르노 빌 참사 후 한 러시아 여성의 말은 여성들은 자연과 생명의 파괴를 남성과는 다른 감수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1970년대 독일의 핵발전소 반대운동, 80년대 영국과 시칠리아 핵미사일 기지 반대운동과 반핵평화운동에서 여성이 두드러진 것 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모성의 경험과 감수성은 핵이 가져다줄 아이들과 생명에 대한 가공할 만한 파괴에 대한 민감성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대한YWCA의 비전 구호인 ‘생명의 바람, 세상을 살리는 여성’은 여성운동의 어떤 메시지보다 간결하 고 강력하게 보인다. 그 안에 생명과 살림을 의미를, 모성적 가치로 잘 담아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일부 여성학자들은 ‘모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하자는 주장을 편다71). “남성중심 적 해석을 그대로 수용한 상태에서 모성 자체의 거부를 해방전략으로 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72)라고 전제한다. 요약하면, 다른 삶의 질서를 창조하려 할 때 모성은 특유한 영감적 속성을 지니는데, 이러한 ‘모성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탈가부장적 상상력이 된다. 생물학적 차이로서의 모성을 본질주의로 해석하는 함 정을 피하고 모성에 대한 ‘문화적 공명’으로 만들자. 모성에 대한 가부장적 숭배, 강요 혹은 열등함의 기표로 해석되는 모성이데올로기를 해체하면서 어머니가 되는 70) 반다나 시바, 마리아 미스, 손덕수, 이난아 옮김,『에코페미니즘』, 창작과비평사, 2000, p.27 재인 용 71) 이경아, ‘모성에 대한 여성주의 재사유’, 『한국여성철학』제 11권, p.179, 2009 72) 이경아, 위의 글, p.179, 2009 82 전환 콜로키움


생물학적인 불변의 역할을 인정하고, 생물학적 구분/차이를 넘어 모성성이 남성에 게도 문화, 가치, 태도로 받아들이게 하자는 것이다. 모성성에 대한 전환적 사유 방식이다. 본질주의적 모성에 빠지지 말고, 모성성을 사회적 가치로 만들자는 것 이다. 성별을 떠나 누구라도 모성적 가치와 역할에 공명하면서 성별화된 생산/재 생산 노동 간의 긴장과 대립의 관계로 설정되는 패러다임을 넘어 서 ‘맞벌이와 맞 살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체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출산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어머니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사회적 활동이다. 여 성은 감정, 남성은 이성이라는 이분법은 거짓 신화이고, 그것이 여성주의가 모성 (mothering)이 경시되지 않는 사회성을 세우려는 중요한 이유이다”73) 돌봄의 가 치로서의 모성성이 사회의 재구성에 주요 가치와 문화로 자리하면, 자연과 타인과 공동체의 삶을 보듬는 가치로 확대될 것이다. 탈가부장적 상상력의 핵심 가치로서 의 모성의 관점은 파괴되고, 황폐해지고,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과 돌봄의 시선을 갖는다. “여보, 이젠 제발 그만 하세요. 제발, 나무 좀 그만 베라 하세요. 새들이 앉아 있을 나무조차 베에 버리면, 새들은 마을로 내려와서 우리가 애써 지은 곡식 을 먹어버려요. 그럼 우리 아이들은 무얼 먹나요? 땔감조차 싹 쓸어 가면 우리는 뭘 가지고 밥을 짓나요?”74) 1972년 인도 히말라야 가르왈 지역 칩코운동을 했던 여성들의 경우 모성으로의 삶의 경험과 가치관이 이러한 전환적 싸움을 벌이게 한 동력이 아닐까. 전환의 전제는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의 세계관을 전복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남성이 만든 가치관, 세계관과 질서에 부단히 질문을 던지며 그것을 상대화하며 ‘다른 세계’로 이동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페미니 즘과 여성운동이 꿈꾸는 ‘다른 세계’는 남성과 여성의 평등함, 젠더 관점으로, 사 회구조와 제도의 개혁을 중심으로 토론되고 기획되었다. 오랫동안 마음과 몸을 담 았던 내가 열렬히 사랑했던 여성운동이 더 이상 새롭지도, 나의 생각과 실천의 한 계를 뛰어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을 잃었다. 어디로 발걸음을 떼어야 할지 적지 않은 시간을 주춤거리며 서 있었다. 이제야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은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란 나의 생각과 실천 그리고 삶 한가운데에 자연, 우 73) 이네스트라 킹, 위의 책, p.185 74) 최창희, ‘칩코운동과 반다나 시바, 김재희 엮음, 『깨어나는 여신: 에코페미니즘과 생태문명의 비 젼』, 정신세계사, 2000. p.141 재인용. 83


주, 생명(체)의 신비와 창발성, 그리고 인간을 넘어 존재하는 생태계의 경이로움 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운동의 전환은 이런 고맙고 반가운 존재들을 활 동가 개인들과 운동조직의 생각과 마음 안에 들여놓는 데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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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로부터 전환,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으로 하승우75)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지 아래로부터의 힘을 모으자는 전략이 아니다. 풀뿌리 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지역사회를 변화의 거점으로 내세우는 전략도 아니다. 풀 뿌리로부터의 전환은 단순히 민중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강조하는 전략도 아니 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기성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이상만을 좇고자 하는 전략 도 아니다.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어려운 것은 풀뿌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기 도 하다. 아래, 지역, 민중, 이상과 같은 단어들은 풀뿌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 지만 그것만으로 풀뿌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위와 연결되지 않은 아래는 없고 국가와 무관한 지역사회도 없으며 완전무결한 주체도 없고 이상 이 무조건적인 진리나 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전형(典型)에 대한 부정, 국가주의 또는 중앙 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삶의 재구성이자 현실적인 이상주의이다. 이 발제문은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이고자 하는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 를 드러내고자 한다. 이 발제문의 내용은 풀뿌리운동 내에서 합의된 의견이 아니 라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임을 미리 밝힌다.

1. 전형에 대한 부정, 공론장

한국사회에서 공론장(public sphere)이라는 단어가 많이 회자되지만 맥락이 뒤틀린 채 논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H. Arendt)에 따르면 공론장은 정치 가 이루어지는 장이기에 진리와 선이 아니라 판단에 따르는 곳이고 의견(doxa)이 소통되는 장이다. 그러니 공론장을 통해서는 어떤 진리와 선에 이를 수 없고 그런

75) 땡땡책협동조합 공동대표,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사회투자지원재단 연구위원, 교육공동 체 벗 이사. 주요 저서: 《아렌트의 정치》(2015)(공저), 《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2014), 《공공성》(2014), 《민주주의에 反하다》(2012) 등. 85


논의가 이데아(idea)를 자처할 수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서 공론장은 그런 장을 구성하기 위한 노력보다 공론을 표방하는 여 론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미 어떤 입장을 가지고 찬반을 나눈 뒤 의견을 제시하 기보다는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한다. 설득하지 못하는 의견은 의견이 아닌 듯이. 이미 답을 정해놓은 상태에서, 아니 답은 분명히 있다는 전제하에서 논의가 진행 된다. 어떤 기준을 세우는지 논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기준에 따라가는 작업이 주를 이룬다. 시민사회운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답은 분명히 있고 우리가 그 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공론장은 전략적인 활용의 장이지 그 장 자체가 근본적인 목적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전형의 부재는 한국인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떤 기준이 존재해야만 사물이 나 사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으니 전형의 부재는 변화는 불가능하다며 냉소한 다. 그렇게 보면 전형과 냉소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기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거부가 냉소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형 없음이 냉소로 이어진다. 19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새로운 논의의 시 작이 아니라 변화의 불가능과 변절, 냉소로 이어진 건 이 때문이 아닐까?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그런 전형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위로부 터의 주도, 아래로부터의 힘, 이렇게 명명되는 것도 일종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혁명이 실제로는 복구를 뜻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76)은 우리가 대립한다고 생각하 는 개념들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위가 아래를 규정하고 아래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래라고 불리지만 실은 그곳이 바로 중심이나 위일 수 있다. 시민이 무참하게 권리를 짓밟히지만 그들이 바로 주권자이듯이 어떤 위치에서 보 는가에 따라 위, 아래는 뒤바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계속 위의 필요성 때문에 아래를 호명하는 것은 아래를 또 다른 전형으로 만들 수 있다. 아래는 이래야 한 다, 주민/시민을 조직하는 방식과 목적은 이래야 한다는 전형은 풀뿌리의 역동성 을 갉아먹는다. 그렇다면 풀뿌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풀뿌리의 전일(全一)적인 인식틀은 위와 아

76) “‘혁명’이라는 용어는 원래 천체 궤도의 운행(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이라는 코페 르니쿠스의 표현을 통해 자연과학에서 점차 중요해진 천문학 용어였다. 이 과학 용어에서 혁명이라 는 용어는 라틴어의 의미를 그대로 유지했다. 별들의 회전 운동은 인간의 영향력을 벗어난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새로움이나 격렬함이라는 특징과는 분명히 거리가 먼, 규칙적이 고 합법칙적인 것을 의미했다.”(한나 아렌트, 『혁명론』) 86 전환 콜로키움


래가 분리될 수 없음을, 위와 아래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다. 아무리 아래를 강조하더라도 위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변화를 지속시킬 수 없다. 위를 아무리 뒤흔들더라도 토대의 성격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가 지속되 지 않는다. 결국 풀뿌리는 위와 아래가 분리되지 않고 순환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고 볼 수 있고 그런 변화를 준비한다고 봐야 한다. 순환의 역동성, 그것이야말로 풀뿌리의 힘 아닐까? 성장하고 결실을 맺고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고 다시 성장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키어 진행 되는 과정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공동체에서 그렇게 아래 위를 연결시키고 순환시키는 작업은 어떤 것일까? 나는 헌법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는 “반란과 해방 운동이 새롭게 획득 한 정치적 자유를 헌법에 담지 못한다면, 반란과 해방보다 더 무익한 것은 아무것 도 없다.”고 말했다. 즉 자유의 공간을 틀 지우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헌법이라 고 봤다. 그동안 시민사회운동 내에서 법과 제도에 대한 논의들은 많지만 그 모든 걸 틀 지우는 헌법에 대한 논의는 드물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대한민국헌법 제 1조가 시민들 입에서 되뇌어지긴 했지만 중요한 건 명목상의 제 1조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자유를 구성하고 누리기 위해 이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는가? 우리 는 자유로운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과 정치공동체에서의 생활을 얼마나 연계시키고 있을까? 헌법은 이런 질문들을 담는 그릇이다. 물론

헌법조차도

이런

전형에

머물러서는

된다.

위르겐

하버마스(J.

Harbermas)가 말했던 헌법의 지속적인 변화가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헌법의 고정된 문장은 변화하는 해석의 흐름 속에 서만 생동하는 것으로 남는다. 헌법은 시민권을 실현하기 위한 완수되지 않은, 앞 으로도 결코 완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이다. 시민권은 매 세대마다 변화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새롭게 비판적으로 해석되고 소화되어야 하며, 그 실체도 지금까지 보다 더 포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풀뿌리 공론장은 이런 완 수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장이다. 그리고 더글러스 러미스(D. Lummis)는 『Radical Democracy』에서 민주주의를 일 종의 상태로 정의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제도나 경제제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제도나 경제제도가 가져오거나 가져오지 못할 어떠한 상태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이지,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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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민주주의는 통치형태들 중 하나가 아니라 통치의 목적이며, 인류 역사에서 계 속 유지되어온 제도가 아니라 역사적인 과제이다.” 물이 액체, 기체, 고체로 변할 수 있듯이 상태로서의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고정되지 않는다. 내부의 구성요소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민주주의의 상태는 달라진다. 근본적이 자 급진적인 풀뿌리의 민주주의 역시 이런 상태를 지향하고 이를 가능케 하는 정 치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2. 국가주의 또는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와의 결별, 연방주의

국가를 가장 근본적인 정치공동체로 보고 다양성을 억압하는 국가주의(statism)는 식민지 시기부터, 아니 그 이전 시대부터 한국인에게 의식/무의식적으로 강요되어 온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 는 해방 이후에도 거의 아무런 변화 없이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체제에서는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도 무력화되고 대통령이라는 정점에 연결된 강력한 관료집단들이 생활세계를 식민화시키고 지배한다.77) 풀뿌리로부터의 전환은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이런 국가체제를 근본적이고 급진적 으로 변화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아니, 이런 체제전환을 통해서만 사회전환이 가 능하다. 전환이 특정 영역에서의 부분적인 변화나 정신승리법이 아니라면 국가구 조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연방주의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연방주의는 연방국가를 포괄하는 더 넓은 개념이다. 연방주의는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한을 가지도록 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한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하면 거의 동등하다. 우리의 생각보다 이런 체제를 갖춘 곳이 꽤 많은데, 연방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더라도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 이탈리아, 인도처럼 지역 정부가 독자적으로 입법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스위스나 벨기에처럼 작은 국가들에서도 연방주의가 실시되고 있으니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만 실시되 는 것도 아니다. 물론 연방정부가 수립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연방정부가 만들어지면 정치는 더욱더 필요해지고 그만큼 더 활성화된다. 시민들 77) 그 과정에 대한 분석은 하승우․권정우의 『아렌트의 정치』 참조. 88 전환 콜로키움


이 어떤 뜻을 품는가에 따라 국가체제는 그에 맞게 계속 바뀔 수 있다. 국가가 정 치공동체라면 구성원의 뜻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특히 ‘내부 식민지’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처럼 수도권이 비수도권의 사람과 자원을 계속 빨 아들이고 착취하는 체제에서는 정치가 복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인 결정권이 모두 서울에 있으니, 생산하지 않는 곳이 생산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 을 내리는 모순 아닌가. 추상적인 주장보다는 재정과 정책을 운영할 권한이 어디 에 있는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의 국세와 지방세 비중 은 79.9%와 20.1%로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국세 비중은 계속 증가해 왔 다. 결국 지방자치제도 실시 이후에도 중앙정부가 계획하고 지방정부가 그 예산에 기반해 사업을 집행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평가하는 체제가 변하지 않았다. 기득권 층이나 재벌들이 쌈짓돈처럼 쓰는 세금을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곳에 쓸 수 있고,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가진 건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산이다. 연방주의는 이런 근본적인 부조리를 급진적으로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한국은 사실상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있다. 언제나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기득권 층의 국가와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도 언제나 지배를 받는 시민들의 국가. 그리 고 기득권층 대다수는 서울에 살고 있고 중앙부처들은 각종 시행령과 지침으로 지 방정부들을 통제하고, 지방정부들은 그런 통제를 알리바이 삼아 자신들이 대변해 야 할 지역주민들을 속인다. 지역에는 이들과 연결된 토호들이 기득권 행세를 한 다. 시민과 지역의 협조 없이는 국가가 유지될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대안을 찾지 못한 시민과 지역사회들이 무기력하게 기득권층의 국가를 유지시키고 있다. 연방 주의는 이 상태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북한과의 통일을 고려한다면 연방주의로의 전환은 필수적인 부분이기도 하 다. 통합/통일이라는 추상적인 환상은 갈등과 대립이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조건을 은폐하고 억압하기 쉽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모순된 국가체제를 지양할 수 있는 연방주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연방주의는 국가주권의 강화보다 주권을 지 속적으로 폐기하는 역할을 맡고 풀뿌리의 정치역량을 활성화시킨다. 풀뿌리로부터 의 전환은 이런 연방주의 국가형태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3. 삶의 재구성, 경제의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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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의 경제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민주화가 되었 으니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지만 기본적인 경제조건을 결정하는 정 치과정의 중요성이 중산층 신화 속에 망각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서 노동의제가 핵심적인 사안으로 부각되지 못했다는 점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국가는 노동운동을 억압하고 쟁의에 개입하며 자본의 양적 성장을 지속시켰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경제적인 자산은 재벌에게 집중되었고, 그만 큼 시민들의 삶을 결정하고 그걸 뒤흔드는 재벌들의 힘도 커졌다. 그리고 수도권 과 비수도권의 격차 역시 커졌고 비수도권에서 생산된 부가가치는 수도권으로 흡 수된다.

민주정부라고 불렸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이런 경향을 근본적으로 바로잡지 못 했다. 그런 점에서 풀뿌리 삶의 재구성은 이렇게 식민지로 전락한 삶을 자립의 삶 으로 되돌리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연방주의 역시 이런 자립 속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그런 자립경제에 관한 단초를 박현채의 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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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는 『한국경제구조론』에서 “경제발전의 과정은 단순한 경제적 과정이 아니다. 그 것은 전체적인 사회적 변혁의 과정이어야” 하고, “경제발전의 추구는 민족주체적 으로 한 민족의 민족주의적 요구, 민족의 자립과 민족주의적인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을 경제적으로 밑받침하는 것이어야” 하며, “경제발전에 있어서 토착적인 것 의 최대한의 활용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발전론의 모색에서는 경제이론에서의 인간 복권(復權)이 이루어져야” 하며, “경제발전은 경제발전의 중요한 동인인 인간 의 창의․창발성에 서는 것이어야” 하고, “시장결락(market failure)에 의한 공해는 물론 경제제량만을 위한 무원칙한 경제성장의 추구가 가져오는 생활환경 및 생태 계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제 나 미국에 의한 원조경제, 재벌과 결탁한 관료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벗 어나 국민경제, 자립경제를 이뤄야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박현채는 강조 했다. 그렇지만 세계자본주의와 한국경제의 조건 속에 농업을 놓고 농업과 중소기 업으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만들려고 했던 박현채의 시도는 김대중 정부와의 결별 로 실패하게 된다. 세계화의 현실에서 자립경제의 가능성과 범위를 어느 정도로 인정할 것인가는 논 의가 필요하지만 경제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삶 속으로 가져오는 작업은 필요 하다. 앞서 논의한 연방주의도 경제를 우리 삶 속으로 가져오기 위한 디딤돌이다. 경제 면에서 연방주의는 협동과 우애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 생산과 소비, 농업과 산업을 분리시키지 않고 지역과 지역이 동등하게 자원을 나누고 협력하고 자 하는 전략이었다. 없는 걸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연방 주의 정신에 따라 강화시킨다면 자립경제라는 목표는 헛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런 전환의 과정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런 정책을 구성 하는 과정에는 시민의 개입과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의 와해=지역 자치의 활성화’가 아니듯 ‘독점의 해체=자립의 활성화’는 아니다. 각자의 삶의 규모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과정도 필요하고 지역사회의 필요와 가능성을 해석하고 결정하며 그런 것을 공통의 과제로 구성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공통의 불안과 위험 속에 있다는 자각이 있어야 공통된 삶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그리고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구호와, 이미 고용 자체가 한계에 달했다는 앙드레 고르(A. Gorz)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선언을 함께 고려한다면,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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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제도라 불리는 임금노예제도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임금제도는 노동력을 빌미로 인격을 구매하는데, 구매당한 인격은 스스로 삶의 규모를 조절하 기 어렵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화, 자동화와 더불어 기업의 구매력 자체가 줄어들 고 있다. 실업과 노동빈곤(working poor)이 정치를 경제화시켜서 인간을 생존욕구 에 불타는 좀비로 만든다면, 기본소득(basic income)은 경제를 정치화시켜서 죽어 버린 좀비의 심장을 다시 뛰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본소득에 관해 이런저런 우려들이 있지만 아렌트 식으로 말한다면 자유로운 정 치공간이 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사실 엄청나게 새로운 이야기 같지 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코뮨주의 원리의 현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공유지를 만드는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고립된 생활을 강 화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며 공유지를 만들고 확장시키는 방법이라 본다면, 기본소득은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풀뿌리로부 터의 전환은 경제를 근본적/급진적으로 정치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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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을 위한 성찰 두 가지 백낙청78)

1. 말문을 열며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는 제가 『창작과비평』 166호(2014년 겨울호)에 발 표한 글의 제목입니다. 주최측에서 저의 논평 제목으로 적어놨습니다만 그대로 사 용하면 자기표절의 혐의를 받기 십상이지요. 짤막한 논평의 제목 치고 너무 거창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대전환을 위한 성찰 두가지’라는 표제 아래, 오늘의 발제 를 들은 소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그에 앞서, 큰 전환의 필요성을 공감하며 각자 적공해오신 발제자 여러분과 자 리를 함께해서 즐겁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세분의 발제를 들으며 많이 배웠고, 전날의 생명연구학회 발제문들도 자료집으로 읽으면서 배웠습니다. 우선은 오늘의 발제 3편에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주요섭 선생이 강조하신 “신인간이 창조하는 다시개벽의 새 문명”(자료집 63면) 이라는 목표에 저도 깊이 공감합니다. “사회적 특이점을 만들어야 하지만, 관건은 역시 새로운 사람이다”(70면)라는 점에도 동의합니다. 주선생님은 『전환 이야기』라 는 저서도 내신 것으로 아는데, 개인적 사정이 있어 이번 발제문 「전환, 무엇을 할 것인가?--삶/생명의 눈으로 본 인간, 사회, 문명」은 충분한 전개에 이르지 못 한 듯하고 제게도 막바지에야 파일이 전달되었습니다. 토론시간에 한결 구체적인 검토와 진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윤정숙 선생은 오랫동안 여성운동을 해오신 분으로서 그동안 성평등을 실현하는 사회제도 개혁을 통해 ‘다른 세계’를 이룩하고자 했으나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 란 나의 생각과 실천 그리고 삶 한가운데에 자연, 우주, 생명(체)의 신비와 창발 성, 그리고 인간을 넘어 존재하는 생태계의 경이로움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자료 78) (현) 서울대 명예교수. 브라운 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 1972년 하버드 대학에서 D. H. 로런스 연구로 영문학박사 학위 취득. 1966년 계간 「창작과 비평」창간 이래 편집인. 발행인 등을 역임하 며 분단현실의 체계적 인식과 실천적 극복에 매진해왔다. 제2회 심산상, 제1회 대산문학상(평론부 문), 제14회 요산문학상, 제5회 만해상 실천상 수상. 93


집 84면)이 한층 본질적인 전환의 조건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모성성’을 포함

한 ‘여성성’을 본질주의에 빠지지 말고 문화적 가치로 만들자는 주장(83면)도 그 일부입니다. 저 자신 성평등이 중대한 당면과제이긴 하지만 여성운동 또는 대전환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지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여성이 아닌 사람이 그런 말 을 하다가는 기득권자의 쟁점 흐리기라는 비판에 직면하기 십상이었습니다. 실제 로 그런 경고를 받기도 했지요(『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296-300면). 윤선생님 같은 분의 문제제기로 한층 활발한 논의가 가능해지리라 믿습니다. 하승우 선생은 「풀뿌리로부터의 전환, 근본적이면서 급진적으로」에서 ‘전형(典 型)’을 깨뜨리는 사고의 전환, 특히 국가주의와의 결별과 연방국가를 포괄하지만 연방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지역이 더 많은 결정권을 가지도록”(자료집 88면) 하는 한층 넓은 개념으로서의 ‘연방주의’를 제창하십니다. 이 또한 제가 공감하는 원칙 이며, 특히 헌법 문제를 제기하신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이다”라는 우리 헌법의 제1조 제1항은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나 무랄 데 없는 조항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한 제2항은 한편으로 훌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민’ 대신에 ‘시민’ 또는 ‘주민’을 쓰자는 발상이 따라야 ‘전환’에 걸맞은 헌법 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헌법 제3조의 영토조항이 지켜지지 않고 지켜질 수도 없는 현실부터 직시해야 할 것이고요. 그러다보면 대한민국에는 공포된 헌법 외에 이를 다분히 무력화하는 ‘이면헌법’이 존재한다는 인식에 다다를지 모릅니다 (졸저 『2013년체제 만들기』 제7장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반도 분단체제」 144~7면 참조).

세분의 말씀에 그밖에도 경청할 바가 많지만 우리가 대전환을 실제로 이룩해내 지 못하면 미사여구로 끝날 것입니다. 그 점에서 성찰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 습니다만, 두가지에 한정해서 말씀드리는 것으로 논평자의 책임을 면할까 합니다.

2. 분단시대와 그 제약

어제 발제하신 두분을 포함한 모두가 원불교에서 강조하는 ‘이소성대(以小成大) 의 정신으로 전환의 작업에 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큰 원(願)을 이루기 위해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입니다. 대전환을 꿈꾸되 나부터 바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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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와 마을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서 출발하는 자세입니다. ‘이소성대’는 공부와 사업의 기본이지만 그 ‘큰 것’을 실제로 달성하려면 일의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어디서 막히고 뒤틀리는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은 먼저 그 사실을 인식하고 거기 맞는 특별한 훈련과 대비를 거침으로써만 남들처럼, 또 는 남들 이상의 성취를 기할 수 있습니다. 장애요인을 망각한 채 일을 도모한다면 뜻한 바가 계속 실패하는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을 터이고, 원망심만 점점 커질 것이며, 더러는 헛된 꿈에 빠짐으로써 자신을 달래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전환이 잘 안 이루어지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일까요? 자 본주의 세계체제의 지배력이라든가 남한사회 특유의 온갖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 겠습니다만,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잊고 지내는 것이 한국이 분단사회라는 사실입니다. 그 점에서 어제 발제하신 정혜정 교수가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질곡은 남북분단의 족쇄일 것이다”(자료집 37면)라고 설파한 것은 정확한 지적입니 다. 다만 정녕 이 말이 옳다면 그것이 어떤 질곡이요 족쇄며 어떻게 작용하고 있 는지 한층 세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질곡’은 원래 수갑과 차꼬를 뜻하고 ‘족쇄’는 옛날에 쓰던 차꼬를 대신해서 발 을 묶어놓는 쇠사슬입니다. 그리고 수갑이나 족쇄보다 약간 더 여유 있게 묶어두 는 방법으로 예컨대 개를 개집에 묶거나 데리고 다닐 때 쓰는 가죽 줄도 있습니 다. 줄의 길이보다 멀리 가지 않는다면 직접적인 구속을 안 받고 스스로 묶여 있 는 상태임을 잊고 지낼 수조차 있습니다. 분단시대를 식민지시대와 비교한다면 족쇄보다는 이런 가죽 줄이 더 방불하지 싶습니다. 타민족의 직접통치를 받는 식민지생활은 족쇄를 찬 상태에 가깝고 묶은 끈이라 해도 비교적 짧게 맨 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제의 식민통치도 오 래 지속되면서 자연스러운 여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기간도 분단 시대의 절반에 불과했으려니와 그 말기로 갈수록 폭압이 심해졌기 때문에 잊어버 리고 살기가 족쇄만큼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식민지의 해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빼놓고 ‘전환’을 이야기하다보면 병폐의 근원을 우리 자신의 민족성에서 찾는 민족개조론으로나 흐르기 일쑤였습니다. 분단시대는 비록 나라가 반쪽으로 갈렸지만 각기 자체 정부를 갖고 자국 인사가 다스리며 자기 언어로 생활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 목에 맨 끈이 한결 길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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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입니다. 특히 분단 초기의 아픔과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은 뒤, 1953년에 정전체 제가 성립하여 60년 이상 지속되면서 ‘분단체제’라고 일컬음직한 비교적 안정된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더구나 분단체제는 어쨌든 전쟁의 재발을 막았을 뿐 아니 라 남한에서는 일정한 민주화와 괄목할 경제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족쇄’를 차 고 살아간다는 실감이 한층 흐려졌습니다. 급기야 제가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 후군’이라 부르는 인식상의 장애가 진보적 지식인들이라는 많은 분들 사이에마저 퍼지는 상황에 이른 듯합니다. 물론 분단인식을 강조하는 것이 분단을 만악의 근원으로 보고 통일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다만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올 바를 알음알이를 갖춰야--묶인 끈의 범위 안에서는 거동이 자유로운 듯싶다가도 어느 선 이상의 개혁이나 전환을 시도할 때면 번번이 제동이 걸리는 자신의 처지 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어야--복지문제든 생태계문제든 민주주의든 또는 남북관계 의 발전이든 헛심을 쓰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가능한 작은 일을 착실히 쌓아가되 묶은 끈을 어떻게든 잘라내거나 그것이 단번에 안 된다면 조금씩 늘여가고 풀어가는 작업을 병행하는 지혜가 필수적입니다. 그 점에서 주요섭, 윤정숙, 하승우 세분이 중요한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스스로 제시하는 전환의 작업이 분단체제로 인해 어떤 제약에 놓였고 이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앞으로 연마할 숙제로 남았다고 판단됩니다. 어제 「마을, 마을민주주의 그리고 전환」을 발표하신 윤호창 선생은 마을민주주의 의 발전을 위협하는 여러 제도적·현실적 조건을 언급하면서 “어느정도 기반을 구 축했다고 생각했던 민주주의가 쉽게 퇴행하는 것을 보면서, 마을이 민주주의와 충 분한 결합을 하지 못하면 퇴행과 왜곡의 모습을 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자료 집 19면)고 결론지으셨는데, “어느정도 기반을 구축했다고 생각했던 민주주의”가

왜 그렇게 쉽게 퇴행했는지, 1987년 6월항쟁으로 군사독재는 무너졌지만 1953년 이래의--‘분단체제’라 부를 정도로 굳어진--정전체제를 군사독재체제와 마찬가지 로 자신의 토대로 지닌 것이 87년체제가 아니었는지를 탐구해야 더 이상의 퇴행을 막고 마을민주주의의 전진도 기약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북분단의 족쇄’ 를 강조한 정혜정 선생은 정전협정을 대체할 ‘종전협정’을 해법으로 제시했는데, 물론 동의합니다만 이 또한 분단체제의 다각적이고 신축적인 작동방식에 대한 치 밀한 인식과 그에 걸맞은 종합적이고 슬기로운 대응책이 따르지 않고는 쉽게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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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3. 후천개벽·물질개벽·정신개벽

원불교의 개교표어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입니다. 정신개벽은 일 찍이 석가모니가 깨치신 진리를 이어받는 일이지만, 19세기 중반 이래 한반도의 자생종교들이 설파한 개벽사상을 겨냥한 것이기도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무상 대도(無上大道)임을 인정하더라도 지난날의 불교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깨달음을 강조해온 데 비해, 전환기의 절박한 시대상황에 부응코자 한 것이 후천개벽(後天 開闢)의 사상입니다. 동학이 그랬고 증산사상이 그랬는데, 시대상황을 ‘물질개벽’

으로 특정하고 이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을 촉구한 것이 원불교의 독창적인 면모 라 하겠습니다. 개교표어는 일종의 화두이므로 이를 끊임없이 연마함으로써만 당면한 전환의 과 제에 응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물질개벽 자체에 대해서도 한층 곡진한 성찰이 필 요합니다. 흔히 개교당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대세와 연관지어 ‘서양의 물질문명 대 동양의 정신문명’이라는 도식에 머물기도 하지만, 물질개벽을 자본주의 및 과 학기술문명으로 이해한다면 서양에서의 물질개벽 역시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서 출발하여 서양 내부에서도 점차로 퍼져나간 흐름입니다. 16세기 영국에서 이미 시 작된 자본주의 농업과 17세기 유럽 곳곳에서 이루어진 과학혁명에서 비롯되었으 며, ‘동점’에 앞서 서남쪽으로 아메리카 신대륙의 ‘개척’과 수탈이 있었기에 가능 했습니다. 그런 전체 과정을 살펴야 물질개벽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입니 다. 동시에 물질개벽이 궁극적으로는 정신의 쇠약을 초래하긴 했지만 물질의 융성 자체가 서양인들의 엄청난 정신적 공력이 거둔 성과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과학 주의자들과 일부 과학자들은 근대의 과학이 형이상학과 신학을 본질적으로 넘어선 것처럼 말하지만, 고대 그리스 이래의 형이상학과 중세 신학의 면면한 성취를 모 태로 삼아 탄생한 것이 과학이며, 오늘날 서양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서양의 사상 과 학문 전체가 누리는 세계적 권위는 그렇게 해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물론 한반 도인의 입장에서는 과학기술문명에 짓눌려 정신의 힘이 쇠약해진 데다 서양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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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과 문물 일반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심마저 갖게 되었으니 이중의 노예화라 하겠 습니다. 그러나 ‘동양 대 서양’이라는 이분법으로 이 상황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 다. 실은 ‘정신 대 물질’의 대비도 서양철학의 전통적 이분법으로 해석해서는 물질 개벽을 촉진할지언정 정신개벽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동학에서 ‘몸의 개벽’(정혜 정, 위의 글)을 말한 것을 보나 원불교에서 정신을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

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정전』 교의편 제4장 제1절 ‘정신수양’)로 규정한 것을 보나, ‘물질’을 사용할 ‘정신’은 유(有)의 영역 속에서 ‘정신적’인 것으로 분류되 는 존재자가 아니라 ‘유무초월’의 경지에 이르는 능력이며 거기서 나오는 위력입 니다. 근대과학뿐 아니라 서양의 전통적 철학에서도 거의 실종된 힘이며 이를 회 복하고 응용하는 공부와 사업이 곧 정신개벽이요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길인 것입 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곧바로 너무 어렵다, 아리송하다, 비과학적이다 하고 연마 를 포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근대주의의 병폐요 물질개벽 에 응답할 정신개벽의 포기가 아닌지 스스로 물어볼 일입니다. 큰 전환에는 큰 적 공이 필수적이며 적공 자체가 전환의 작업이라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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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원불교 ‘개교표어’에 담긴 개벽에 대한 열망 박맹수79)

2015년은 원불교가 개교한 지 1백년이 되는 해이다.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 (1891-1943) 대종사의 ‘큰 깨달음’을 계기로 1916년에 출범한 근대한국을 대표하

는 민중종교의 하나이다. 원불교 개교 1백년에 즈음한 한국 사회에서는 기이하게 도 2014년부터 ‘전환’ 또는 ‘대전환’을 제목으로 한, 곧 한국 사회의 근본적 전 환=개벽을 외치는 책들이 줄줄이 출간되고 있다. 물론 2009년에도 세계적인 경제 학자 칼 폴라니의 책이 『위대한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소개된 적이 있지만, 이번처럼 여러 권의 책들이 다수의 저자들에 의해 ‘전환’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간 행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책이 나온 순서대로 소개하면 『정의로운 전환』(김현우, 2014), 『분명한 전환』(김성균, 2015), 『전환 이야기』(주요섭, 2015), 『백낙청이 대

전환의 길을 묻다』(백낙청, 2015), 『전환의 키워드, 회복력』(마이클 루이스, 팻 코너 티, 2015) 등이다. 여기서 ‘전환’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작년에 도서출판 한살

림에서 출간된 『자본주의 넘어』(다다 마헤슈와라단다, 2014)도 결국은 오늘의 세상을 ‘어떻게’ 전환시킬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 점에서 개벽 계열 책이라 해도 좋을 것 이다. 왜 이렇게 갑자기 ‘전환’을 부르짖는 책들이 다투어 출간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요컨대 전환이 없다면 우리 사회에 남는 길은 천천히 죽어가는 것뿐”(김종 엽, 창작과 비평 2015년 가을호, 16쪽)이라 탄식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극에 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1916년 원불교 개교 당시 원불 교의 역사적 사명을 잘 집약하여 제시하고 있는 개교표어(開教標語)에 관하여 이야 기하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원불교가 개교할 무렵인 19세기말 20세기 초는 일찍이 세계사 79)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부원장, 모심과살림연구소 이사장. 주요 저술: 《생명의 눈으로 본 동 학》(2014),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2011), 《동학농민전쟁과 일본》(2014)(공저), 《사 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2009) 등. 99


에서나 한국사에 있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격동의 시대였다. 대격동의 첫 째 요인은 ‘서세동점(西勢東漸, Western Impact)’이었다. ‘서세동점’이란 우리나라 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가 서양 열강의 침략을 받아 종래의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朝貢体制)에서 세계 자본주의체제(資本主義体制)로 타율적으로 편 입되게 된 현상을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자본주의가 먼저 발달했던 서구의 여러 나라들은 자국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해외에서 식민지를 필요로 하였던 바, 인도 와 동남아시아 각국이 먼저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이윽고 한국과 중국도 그들의 희생양이 되어 각각 식민지와 반(半)식민지로 전락해 간다. 대격동을 촉발 한 둘째 요인은 5백 년 넘게 지속되어 온 조선왕조 지배체제가 19세기말에 한계에 이름으로써 망국적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망국적 현상을 대표하는 말이 바로 ‘삼정문란(三政紊亂)’이었다. 삼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이 부담하고 있던 각종 세금을 지칭한다. 일 찍이 전봉준 장군도 지적했듯이 삼정을 악용하여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리들의 문 제는 어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그 결과 가혹한 세금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민란(民亂)을 통해 저항을 계속하였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일 어나지 않았다. 대격동의 세 번째 요인은 ‘민(民)의 각성(覺醒)’ 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 다는 점이다. 예컨대 왕조 시대에는 전통적으로 지배층만이 역사의 주인으로 행세 할 수 있었지, 피지배층 곧 일반 농민이나 상인들은 어디까지나 지배층에게 필요 한 재화를 공급하는 ‘통치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같은 신분제도가 조선왕조 말기에 이르러 한글소설의 보급, ‘사람은 누구나 제 안에 거룩한 하늘님 을 모시고 있다’고 가르치는 동학(東學) 등이 등장함으로써 백성들은 서서히 자신 이 곧 역사의 주체요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상, 19세기말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던 ‘서세동점’, ‘삼정문란’, ‘민의 각성’ 등은 ‘시대의 대전환’, 곧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이었으며, 그 같은 근본적 전환 요구에 대한 민초들의 간절한 열망을 집약한 사상이 바로 ‘개벽(開闢) 사상’ 이었고. 그 개벽의 열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바로 원불교의 개교표어 였다. 개교표어는 『원불교교전』맨 앞에 나오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 자’를 말한다. 이 개교표어에는 원불교가 이 땅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이유가 아주 짤막하게 집약되어 있다. 그러면 이 개교표어는 언제 정식으로 등장 100 전환 콜로키움


했을까?초기 원불교 역사를 찾아보니, 현행 『원불교교전』의 원형(原型)이라 할 수 있는 『보경 육대요령』(1932년) 앞표지에 처음으로 등장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 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일은 개교표어가 활자화되어 잡지에 실린 것이 1932년 이라는 것이지, 사실은 그 이전 단계 곧 1916년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 당초부터 ‘구상’되어(『회보』 23호, 1936년 3월호, 19쪽, 제산 박제봉 <입회 감상> 참조), 1924년 전북 익산에서 불법연구회가 창립된 직후부터 쓰여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이다. 왜냐면 모든 기록이란 어떤 사건이나 일이 먼저 있고 나서 이루어지기 때문 이다. 어찌됐든 『보경 육대요령』에 ‘공식적으로’ 처음 등장한 개교표어는 『보경 삼대요령』(1934년)의 표지에 다시 나오고, 『회보』 13호(1935년 1월호)부터 65호 (1940년 6월호)까지는 연속하여 표지에 게재되고 있으며, 『회보』 23호(1936년 3월 호)에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제하의 회설(會説)을 통해 개교표

어가 지향하는 바를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개교표어는 1930년 대 초반에 활자화되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여 1930년대 후반에는 『중앙일보』 (1937년 9월 11-13일)에도 소개될 만큼 대중적 인지도를 얻고 있었다.

본회에 처음 입회한 나로서 어찌 광대한 교리를 바로 관찰하였다 하리요마는 우선 쉽게 감상된 바는 본회의 표어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하 셨으니 이 말씀은 곧 근본을 밝히는 말씀이며, 시대에 제일 적절한 요법이라 고 생각됩니다. 과연 현금은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되었고 과학문명이 발달 됨에 따라 세상에는 편리하고 화려한 물질이 일부일진보(日復日進歩) 되었으며 물질이 진보됨에 따라 사람은 예의염치의 도덕적 정신이 여지없이 말살되고 오직 물질의 세력이 천하에 팽창하여 소위 황금만능시대라 칭하며 개인, 가 정, 사회 , 국가 간에 격렬한 이욕쟁탈전이 일어나서 모든 대중이 서로 원망 하고 서로 해하며 서로 살육을 감행하여 더욱더욱 불안과 공포와 고민에 쌓여 점점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되니 어찌 위험치 아니하며 또한 한심치 않겠습니 까?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본회에서는 21년 전부터(1916년부터 -주) 이 정신 개벽이라는 표어를 주창하셨고 따라서 실지적 훈련을 계속해 온 것이 지금에 있어서 누구나 물론하고 그 선견지명을 감탄치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회보』 23호, 1936년 3월호, 19쪽, 제산 박제봉 <입회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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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

물질개벽(物質開闢)의 의미와 그 실상 박맹수

지난 글(원광 2015년 11월호)에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 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원불교가 개교할 당시의 시대상을 물 질개벽 시대로 진단한 의미가 무엇이며, 물질개벽의 구체적 실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 물질개벽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 여 다음 글을 주목해 보자. 물질개벽의 내용에 대하여 저 나름으로 풀이한다면 현대를 물질개벽 시대로 진단한 것은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하면서 옛날과는 전혀 다른 시대가 왔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해석됩니다. 이것을 사회과학적 언어로 바꾸어 보면 자본 주의문명이 지금 극에 달하여 물질적 변화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히 주도하고 있지만, 이 문명의 이념이나 사상은 이제 생명력을 상실한 시기, 즉 세계사의 대전환기 내지는 인류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는 위기라는 말이 될 수 있겠습 니다. (백낙청,「한국 민중종교의 개벽사상과 소태산의 대각」,『원광』1996년 4월호)

물질개벽이란 말에는 원불교 개교 당시의 시국, 시대에 대한 ‘과학적’ 판단과 현 실에 대한 ‘사실적’ 인식이 들어 있다. 그런 점에서 원불교의 개벽론(開闢論)은 동 학이나 증산교의 그것과 일정하게 구별된다. 신비주의적이거나 예언자적 차원의 발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면한 시대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사고 에 기초한 가운데 개벽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낙청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여타 종교의 개벽 사상에 비해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것이 원불교 개벽론의 특징 인 것이다. 다음으로 왜 물질이 ‘발달’ 또는 ‘발전’ 한다고 하지 않고 ‘개벽’ 된다고 하였 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문명의 발달 곧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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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발달은 누구나 실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물질의 발달이라고 표현하는 것 이 자연스러울 터인데 왜 굳이 조금은 생소한 개벽이라는 말을 써서 물질개벽이라 한 것일까? 개벽이란 말을 쓴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 만 가장 큰 이유는 원불교가 개교할 당시의 물질문명의 발달 수준이 지금까지 인 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수준까지 극도로 발달함으로써 ‘문명의 근본적 전환’ 곧 인류 역사에 있어 대전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개교 당시 극에 달하고 있던 물질개벽 현상 곧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하고 있던 현상을 초기 교단의 기관지 『월보』에서 인용한다. 현대는 전에 비하여 실로 문명한 시대이다. (중략) 알기 쉽게 의식주 3건만 가지고 본다 할지라도 나무와 흙으로 얽어놓은 오막살이가 변하여 석재나 연 와(煉瓦; 벽돌)로 건축한 찬란한 가옥이 되어가며, 소루한 무명이나 삼베 밖에 모르던 옷감이 세루(細累)니 인조니 기타 별별 종류로 진출되어 가고, 음식으 로도 전에 비하여 일본, 지나(支那; 중국), 서양 요리 등등 수백 가지가 생겨 났도다. 그뿐인가. 밤을 낮같이 하는 전등류, 수천 리를 순간에 돌파하는 전 차, 기차, 자동차. 만리 소식을 앉아 듣는 라디오, 하늘로 날아가는 비선(飛 船) 비행기,수국(水國)을 정복하는 기선과 군함, 산악을 무너뜨리는 대포,

인간을 멸종시킬 독가스, 우주를 개벽시킬 살인 광선 등이 있고, 그 외에도 입과 붓으로 그릴 수 없는 각양각색의 물질이 기상천외로 발달되어 인류 생활 이 실로 무섭고 편리하게 되었으며, 전에 비하여 입을 벌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문명세계이다. (전음광, 「회설: 현대문명과 미래도덕」,『월보』 36호, 1932년 7월호, 4-5쪽)

위의 글은 원불교 초기교서 가운데 현행 교리의 기본골격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보경 육대요령』(1932년 4월) 표지에 개교표어가 처음으로 실린 지 3개월 뒤인 동 년 7월호 『월보』에 실린 회설(會説)의 일부이다. 개교표어에 담긴 물질개벽의 의 미를 원불교 역사상 최초로 상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이 회설에는 극도로 발달하 고 있던 물질문명 곧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에 따라 점차 물질문명의 노예로 전락되 어 가고 있던 당대 사람들의 모습이 아래와 같이 아주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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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현대의 사람은 그 문명 풍조에 도취하여 입으로는 문명을 부르짖으며, 몸으로는 문명한 모든 도구를 마음껏 사다 놓고 그 속에서 이목지소호(耳目之 所好)와 심지지소락(心志之所楽)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락의 생활을 하여 보

고자 함이 지극한 원이었으며, 자연 그 문명의 산생지(産生地)인 서양을 숭배 하여 자기의 입장은 회고할 여지가 없이 몸과 마음을 오로지 서양 풍조에 뺐기 고 말았나니, 대세상(大勢上)으로 본다면 서양은 오로지 동양을 정복하고 말았

다. 의식주나 일상생활 모든 것에 서양 것이 아니라면 시들하게 알게 되었으 니 이 오죽이나 자주력(自主力) 없는 생활이며 한심한 생활이냐. 또 현대인은 그 문명한 모든 도구를 취할 수 있는 자물쇠가 황금(黄金)이라는 그것에 있는 줄을 깨달아 그것이 욕심날수록 황금욕이 강렬하여져서 이 황금을 얻기에 주야 몰두하고 있다. (전음광, 위의 글,5쪽, 고딕은 필자)

물질문명의 산생지(産生地)인 서양을 숭배하여 몸과 마음을 서양 풍조에 빼앗겼다 는 것은 자기 나라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망각하고 맹목적으로 서양을 따르는 서양중심주의 풍조를 말씀하고 있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자주력 없는 생 활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개교의 동기」에서 말씀한 그대로 ‘모든 사람이 도 리어 물질의 노예 생활을 면하지 못한’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다. 또한 황 금욕이 강렬하여져서 황금 얻기에 주야 몰두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대 종경』 교의품 34장에서 대종사께서 지적한 대로 ‘돈의 병’ 즉 자본주의문명의 속 성인 황금만능주의에 물들어 병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의 실상을 적나라(赤裸々)하 게 표현한 것이다. 원불교가 개교할 즈음, 식민지조선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는 이상과 같은 물질개벽 의 폐단이 극에 달하여 제 3세계에 속한 민족의 고유문화는 서양에서 밀려온 물질 문명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갔으며, 사람들은 점차 물질문명의 노예로 전락되어 가는 한편, 자본주의문명이 강요하는 ‘돈의 병’에 감염되어 신음하고 있었으니 이 것이 바로 물질개벽의 구체적 실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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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3.

멋스러운 둥근 마당80) 조성환81)

전라북도 익산시에 자리 잡고 있는 원광대학교는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에 원불 교단체에 의해 세워진 종합대학이다. 원불교는 식민지시대에 탄생한 불교계열의 신종교로, 둥근원(O)을 최고의 진리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작년 이맘때 처음으로 일하러 내렸갔을 때에 가장 먼저 눈에 띤 것은 캠퍼스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수덕호'라는 호수였다. 수덕호 주위에는 4개의 동상이 반원을 그리며 서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그 동상들은 원불교 창시자도 아니고 성 직자도 아닌, 인류의 4대 성인의 동상이었다(소크라테스, 예수, 공자, 붓다). 순간 나는 원불교의 둥근 '원'이 상징하고자 한 것은 혹시 이러한 종교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얼마 후에 이 직감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와 해 후하였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의 박맹수 교수님이 주도하는 원불 교 스터디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오늘은 조 박사가 흥분할 만한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라며 환하게 웃으면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닌가! 자료를 받아보니 1932년에 오사카에서 출판된 [조옥정백년사]라는 전기자료였 다. 조옥정(曺沃政. 1876~1957)은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의 제2대 회장을 지 낸 핵심인물로, 56세 때인 1932년 11월부터 3개월간은 오사카에서 살기도 하였 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다채로운 종교편력이었다. 구한말의 유 학자로 출발하여 일제시대에는 동학교도가 되었다가 식민지시대에는 기독교 장로 로 30년을 지냈다. 그리고 말년에는 원불교에 귀의하였다. 이 흐름이 나로서는 대 단히 재미있었다. 네 개의 종교적 아이덴티티가 한 사람에 들어있는 것이 아닌 가! 그가 원불교에 귀의하자 기독교 관계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80) 일본 미래공창신문[未來共創新聞] 제26호(2015년 11월 20일자)에 실린 글. 번역은 다음카페 <지 중유산>에 수록. http://cafe.daum.net/bookofchange 81)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105


한다: "기독교인으로 불법에 종사하다니 어찌된 일이요? 당신은 어째서 초심불개 (初心不改)하여 일방(一方)에 처하지 않소?"

이에 조옥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초심불개하여 일방에 처함보다 백천만사 를 양방(兩方)으로 지어감이 적합할 줄 아노라. 눈이 하나보다 두 눈이 낫고, 손 이 하나보다 두 손이 낫고, 다리가 하나보다 두 다리가 어떤가?" 그러자 좌중들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화엄식으로 말하면 '교교무애(敎敎無碍)' 즉, "가르침과 가르침이 장애가 없다"는 사상에 다름 아니다. 아니 장애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가르침은 많을수 록 좋다는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복수의 종교적 아이덴티티를 인정하는 경향이야 말로 한국인의 종교적 영성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표현하면, 한글로는 ' 한'이나 '하늘', 이미지로는 'O', 한자로는 '通'이나 '風流'가 될 것이다. '한'이나 'O' 은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마당과 같은 역할을 상징한다. 통일신라시대 의 최치원은 그것을 '멋'(풍류)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미의식을 실현시 키기 위한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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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및 협력단체 소개]

원불교사상연구원 Institute of Wonbuddhist Thought

원불교사상연구원은 원광대학교(총장․원장: 김도종)의 교책연구원으로 원불교의 사상을 바르고 넓고 깊게 연구함으로써 원불교와 인류사회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원불교학 수립과 사관수립을 위한 연구를 목적으로 1974년 7월 4일 설립되어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1974년 11월 원불교사상(창간호)를 발간하고, 2004년 2월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한국연 구재단 등재지)로 제호를 변경하여 2015년 현재 66집의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설립

년도에 시작한 제1차 월례연구발표회는 2015년 현재 제212차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2월에 는 <원불교사상연구 학술대회>를 통해 이 분야 연구자들의 연구와 교육 및 학술진흥을 도모 하고 있습니다. 2010년 10월에는 인문한국(HK)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마음인문학연구소(현재, 자체연구소로 독립)가 발족되고 인문학적 마음치유와 인격도야, 영성계발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연구소의 주요사업으로는 학술지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발간, 각종 국내외 학술대회 개 최, 월례연구발표회 개최, 각종 총서 및 논집 발간을 통해 국내외에 원불교는 물론이고 여러 종교의 사상과 교리, 문화 등을 폭넓게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의 대 학은 물론이고 미국, 중국, 일본, 뉴질랜드, 홍콩 등의 대학 및 연구기관과의 국제교류를 활 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원불교100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와 원광대학교7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실시할 계획으로 전 구성원들이 무아봉공의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주 소 :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460 전 화 : 063-850-5565 이메일: y-wonsa@wku.ac.kr 홈페이지: http:/www.wth.or.kr https://wth.jam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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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한 사상과 이론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을 중심 으로 2014년 말에 출범한 생명학연구회는 생명학 분야의 연구 내용을 심화시켜 장기적으로 ‘생명학파’로 발전시 켜나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를 위해서 인문, 사회, 자연과학 분야 연구자들이 함께 하는 학제간 연구모임을 개최하 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생명’에 대한 전일적 이해를 돕는 이론을 발전시키고, 생명위기 시 대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와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연구모임은 정기모임과 주제별 비정기 세미나로 진행되며 연구모임 운영은 모임 참여자들 의 회비를 토대로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2015년 발표 주제 “동서 통합을 위한 생명담론 - 이기상 교수의 <글로벌 생명학>”(김용휘) “하늘과 땅의 생명사상 - 최시형과 안도 쇼에케를 중심으로”(조성환) “탈근대 가치와 주인공에 대한 탐색”(김용우) “펠릭스 가타리의 생태철학”(신승철) “에너지의학의 관점에서 본 생명의 정의”(최윤석) “생명경제와 체제전환”(주요섭) “아이살림·생명살림의 생활교육 실천 운동”(임재택) “생태주의와 생명사상의 융합을 통한 녹색국가 설계”(정규호)

모심과살림연구소는 생명운동, 한살림운동을 연구하고 확산하 기 위해 2002년 설립되었습니다. 생명의 관점에서 지속가능 한 농업과 먹을거리, 협동운동과 사회적경제 생태계 구축, 다 양한 대안적 이론과 실천 활동 등을 주요 주제로 하며, 관련 세미나, 포럼, 출판, 연대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요 발간물로는 생명협동 운동의 이론과 실천 사례를 다루는 무크지 『모심과 살림』, 관련 정세와 동향을 정리하여 전달하는 「모심의 눈 살림의 길」을 2012년부터 펴내고 있습니다. 단행본으로는 『모심과살림 총서』 시리즈 외 다수가 있으며, 매년 주요 연구과제들을 정리하 고 분석한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유관 연구 단체들과 교류를 통해 시민사회운동을 지원하고 연구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생명운동 제단체들과 연대하여 우리 사회에 생명과 평화의 메시지를 확산하는 활동에 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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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100·원광대학교 개교7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대전환, 큰 적공 : 원불교100년, 종교·문명의 대전환을 꿈꾸다!>

■ 일시 : 2016.04.28.(목)~2016.04.30.(토) ■ 장소 : 국립중앙박물관 복합 다중의 위기적 시대 ! 대 전환의 새길찾기가 시작되다 ! 2016년, 원불교100년 성업회와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는 <대전환, 큰 적공 : 원 불교100년, 종교·문명의 대전환을 꿈꾸다>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이번 학 술대회는 특히, 종교·정치·경제·생명의 분야에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중위기의 심각한 상 황들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슬기로운 해결책을 찾기 위해 학계와 활동가들이 함께 고민하는 자리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함께 지혜를 모으실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 프로그램 ● 【기조강연】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폴커 게르하르트(독일 훔볼트대 명예교수) ● 【메인세션】 ○ 제1세션 : 종교의 대전환 한자경(이화여대 교수), 돈 베이커(미국 브리티시 콜롬비아대 교수), 현응스님(조계종 교육원장) 김한중(솔성수도원장), 카마다 시게루(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박광수(원광대교수)

○ 제2세션 : 정치의 대전환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서승(일본 리츠메이칸대학 특임교수), 김성곤(국회의원) 윤법달(서울디지털대 교수), 진징이(중국 베이찡대 교수), 이재봉(원광대 교수)

○ 제3세션 : 경제의 대전환 다다 마헤슈와란다(<자본주의를 넘어> 저자), 칫다다(한국명 고철기, 중국), 강신준(동아대 교수) 문국현(유한킴벌리 회장), 윤병선(건국대 교수), 성제환(원광대 교수)

○ 제4세션 : 생명의 대전환 쑨거(중국 사회과학원 교수), 소광섭(서울대 명예교수), 이병철(생명운동가), 김정현(원광대 교수) 최봉영(한국항공대 교수), 쓰치다 다카시(일본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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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세션】 ○ 제1세션 : 생명 평화 활동가 한마당 ○ 제2세션 : 미래청년종교리더 한마당 ○ 제3세션 : 문화자본과 다문화(2016.09. 개최예정)

■ 문의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063-850-5565, y-wonsa@wku.ac.kr http:// www.wth.or.kr, http://wht.jam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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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대,전환의 새 길 찾기 생명학연구회 * 전환 콜로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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