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협동’을 위한 작은 안내서
생산과 소비, 농촌과 도시, 사람과 자연의 협동으로 생명이 빛나는 한살림
김신양
여는 글
한살림은 생활협동조합(生活協同組合)이다. 생활은 생명 활동이다. 생명은 귀 하고 천한 것이 없으며, 높고 낮은 것이 없다. 그렇게 생명은 소중하고 함께 존엄한 것이지만 생기가 있어야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고 생명이 빛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나와 너가 경쟁하고 다투는 관계로 만날 때 우리의 생명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와 너는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것을 찾아 협동하는 관계로 만나기 위해 한살림은 협동조합이라는 조직 에 그 뜻을 담은 것이다. 이것이 한살림의 생명협동운동이다. 한살림의 선구자들은 80년대 초, 세상이 죽임의 문명을 치닫고 있을 때 살림의 문명을 열망하며 뜻을 세우고 대규모 협동운동을 펼치고자 했다. 첨단 산업문명이 발달하고 세계화가 시작되던 시절, 기계를 돌려 이윤을 추구하기 보다는 낫과 호미, 쟁기를 들고 땅을 일구는 농업살림을 택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성장사회가 열리던 때,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먹거리로 밥상 살림을 이루고자 했으며, 쓰고 버리는 일회용 시대에 생산과 소비와 유통이 순환되고 자원이 순환되는 생명살림의 원칙을 세웠다. 사람의 노동이 언제든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되어 거래되고 이윤추구가 최고목표가 된 시장논리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시대, 이윤을 위해서라면 사람 을 죽이는 무기도 거래되는 시장이 팽창하던 시대, 공업대신 농업을, 이윤대신 생명을, 돈 대신 사람을 가치로 삼는 사회의 싹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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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한살림, 새로운 뜻을 세울 때이다. 사람 나이 서른이면 성장을 훌쩍 지나 성숙의 단계에 접어드는 시기이다.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던 청년이 아니라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고, 처지기 시작하는 눈가와 뱃살을 걱정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늘어지고 무거워지지 않 기 위해 몸 건강과 마음 건강을 함께 살피기 시작해야 할 때이다. 하지만 서른 은 아직 노련하지 않다. 생각한대로 행할 수 있는 요령도 부족하고, 아직 경험 도 부족하다. 그래서 더 시도하고 더 부딪치며 어떻게 살 것인지 틀을 잡아야 할 때이다. 이러한 시기,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의 가치에서 보듯 “창건 자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그 뜻을 새기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뜻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작은 안내서는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며 창건자들의 역사 를 살펴보고 협동운동의 참뜻을 깊이 새기고자 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제대로 짚어야 하기에 반성하고 성찰하는 엄격한 시선도 거두지 않고자 한다. 여기에 더하여 이제까지 다소 소홀히 여겼 던 조직의 운영원리를 이해하는 기회를 가지며 협동의 원리를 체득하고, 마지 막으로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인 미래를 내다보기 위한 모색도 담고자 한다. 새로운 뜻은 빌려올 수도, 강요되어 주입될 수도, 베낄 수도 없는 '내 안에서 생긴 내 것'이어야 한다. 이 작은 안내서로부터 그 모험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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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먼저 알아보기 : 협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깊은 이해 1, 협동조합의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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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엇을 협동할 것인가? 2) 어떻게 협동할 것인가? 3) 어떻게 조합원이 주인노릇을 하게 할 것인가?
2. 협동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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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협동의 호혜성 2) 협동의 구조 & 구조적 협동
Ⅱ. 협동조합의 역사 알아보기 : 오래된 미래 1. 협동운동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2. 협동조합은 지구촌 어디서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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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협동조합의 원칙은 경험과 토론으로 만들어졌다 4.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할 때이다
Ⅲ. 자세히 알아보기 : 협동의 그릇, 협동조합 1. 협동조합의 정체성, 가치, 운영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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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협동조합의 정체성 2) 협동조합의 가치 3) 협동조합의 운영원칙
2. 협동조합의 자본과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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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협동조합의 자본 : 출자금은 입장료가 아니다 2) 협동조합의 소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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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운영 구조와 의사결정 방식 1) 총회 2) 이사회 3) 대의원제도 4) 조합원 모임
Ⅳ. 한살림의 협동운동 돌아보기 : 저항과 건설의 한살림운동 1. 한살림 협동운동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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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살림의 탄생철학 ‘한살림선언’ 1) 선언은 운명공동체의 표현 2) 해외의 선언과 헌장의 전통 3) 한살림선언 깊이 들여다보기
Ⅴ. 함께 생각해보기 : 한살림다운 협동운동을 위한 제안 1. 시대 속의 한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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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살림의 어제 : 위기의 시대에 탄생한 새로운 운동 2) 오늘의 모습 : 카리스마의 일상화
2. 미래를 기획하기 위한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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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더십에 필요한 요소
3. 낡은 협동운동을 새로이 하기 위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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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살림다운 협동조합운동을 위한 리더십이 있는가? 2)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여성리더십을 강화하고 있는가? 3) 저성장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부록 1. 총회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 2. 협동조합 학습을 위한 명저 소개
_ 116 _ 120
3. 참고자료 : 프랑스 대학과 지식인의 협동조합선언문
_ 123
목차 5
Ⅰ. 먼저 알아보기 : 협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깊은 이해
화두의 ‘화(話)’는 말이라는 뜻이고, ‘두(頭)’는 머리, 즉 앞서 간다는 뜻이다. 따라 서 화두는 말보다 앞서 가는 것, 언어 이전의 소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협동조 합을 잘 운영하기 위하여 조직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협동에 대한 생 각을 깊이 해보자. 조직 이전에 내 마음을 스스로 잡는 것이 중요하니까.
Ⅰ. 먼저 알아보기: 협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깊은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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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협동조합의 화두(話頭)
협동조합 교육이나 상담을 할 때 사람들이 자주 물어오는 질문이나 의견이 있다. “사람들 생각이 다 다른데 협동이 잘될까?” 또는 “협동하려면 자기 생각 을 양보해야 하는데 이렇게 이기적인 사회에 살면서 그런 사람이 많이 있겠 나?” 등. 그런데 왜 이런 질문과 불만, 하소연 등이 계속 나오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정말 이기적이기만 하고 협동은 불편한 것일까? 그러면 왜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협동조합을 만들어 왔고, 그것이 일반기업과 달리 좋은 가치 를 가지는 기업이라고 소개하는 것일까? 도리어 이런 질문을 하면 자신 있게 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어쩌면 우리가 협동과 협동조합에 대해 남들 이 하는 말을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혹은 협동 조합에 대하여 스스로 너무 이상적인 상(像)을 가지고 현실을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협동을 잘하기 때문에 협동조 합을 만든 것이 아니라 협동을 못하지만 ‘협동하기 위해서’ 협동조합을 만들었 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숙하고 못난 모습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이런 까닭에 협동조합의 운영원칙에 ‘교육, 훈련, 홍보(정보제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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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다. 협동조합에 익숙하지 않기에 교육이 필요하고, 협동에 미숙하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협동하기 위하여 홍보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협동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할 능력이 있지만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도 있고, 못된 생각을 품기도 한다. 그래서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은 생각을 깊이 파야 한다 고 했다. 마찬가지로 협동을 잘하려면 내가 양보하고 희생하거나 이타적인 사람이 되면 된다고 단순히 생각할 일이 아니다. 협동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해야 한다. '깊은 협동'에 대한 이해가 좋은 협동을 만들어내고 협동조합에 대해 잘 알아야 좋은 협동조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협동조합을 하면서 모든 조합원이 공통으로 생각해야 할 화두 가 있다. 첫째는 ‘무엇을 협동할 것인가?’, 둘째는 ‘어떻게 협동할 것인가?’, 셋째는 ‘어떻게 조합원이 주인노릇을 하게 할 것인가?’이다. 협동의 기본은 같은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가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 첫째 질문부터 생각을 파보자.
1) 무엇을 협동할 것인가?
보통 협동조합을 설립해 운영하고자 할 때 ‘자본의 협동’을 우선 생각한다. 조합원들이 출자해 공동으로 소유한 사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상이 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협동은 자본에 한정되지 않는다. 협동조합은 사람들의 결사체이기 때문에 자본의 협동 또한 사람들의 결사에 기반할 수밖에 없고, 그 결사는 ‘생각의 협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생각의 협동을 통해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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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조달할지라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자본력으로 승부하는 대기업과 의 경쟁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협동조합은 자본력만 이 아니라 다른 방안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폐의존성을 줄이는 방안, 그래서 ‘다른 경쟁력’을 가지는 방안, 바로 사람 자체의 협동, 즉 ‘노동의 협동’이다. 이렇게 자본/노동/생각의 세 가지 협동을 통해 협동조합은 진정한 협동의 결사체로 운영됨으로써 일반기업과 다른 조직으로 지속가능할 수 있 다. 그리고 그 세 가지 협동이 이루어지는 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 구체적인 삶의 터전인 ‘지역’이다. 그러니 세 가지 협동이 지역과 만났을 때 최상의 궁합 을 이루고, 살림의 눈으로 지역활동을 하는 지역살림운동도 이 세 가지 협동이 기반이 되어야 제대로 성과가 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이 세 가지 협동은 현실에서는 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그중 가장 큰 어려움을 보통 자본조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협동조합 은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조직이므로 돈이 많은 사람이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 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많은 협동조합의 운영을 살펴보면 부자라고 해서 출자 를 더 많이 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증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개미떼가 용을 잡는다’라는 말이 있듯 협동조합의 운영은 이 개미떼 같은 조합원들의 작은 금액이 모여 자본을 구성하는 것이기에 큰 자본을 가진 부자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사업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그 조합원들이 가진 돈이 있을 때 내어 놓고자 하는 마음, 돈이 없으면 몸으로 라도 때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을 모으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믿음과 사람과 소망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하듯, 자본과 노동과 생각의 협동 중에 생각의 협동이 가장 기본이자 중심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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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떻게 협동할 것인가?
황태덕장의 주인이 자신은 ‘하늘과 동업한다’고 말한 걸 들은 적이 있다. 황태를 말리려면 바닷가의 짭짤한 바람과 강렬한 햇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 다. 이렇게 무슨 일을 하건 우리는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옆의 사람과, 때로는 보이지 않는 자연과도 협동할 때 일이 되고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협동조합에서 두 번째 화두이자 늘 생각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협동할 것인가’이다. 몇해 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분들과 원주에서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초가을, 분위기 좋은 막국수집에서 콩국수를 시켰는데 놀랍게도 여수에서 온 분이 설탕 을 넣어 먹는 것이었다! 우린 모두 경악하며 콩국수를 먹을 줄 모른다는 둥, 전라도가 음식으로 유명하다지만 너무 달게 먹는다는 둥 한바탕 놀려댔었다. 그 후 난 현장 교육이 있을 때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부분에서 이런 질문을 하곤 했다. “여기 10명이 있는데 전라도 출신 1명과 경상도와 강원도 등 다른 지방 출신이 9명 있다고 칩시다. 우리가 콩국을 먹는데 설탕과 소금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결정하는 게 좋을까요?” 잠시 침묵. 그러다 이곳저곳에서 답이 튀어 나온다. “나는 서울 출신이지만 설탕을 쳐서 먹어보고 싶어요”, “난 아무렇게나 결정해도 상관없어요”, 그러다 개중 누군가는 “난 아무 것도 안 넣고 그냥 먹는 게 좋은데요”라고 해 순간 하하하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렇다. 우리는 생긴 것도 입맛도 생각도 다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함께 무언가를 할 때 내가 원하는 것만, 내게 맞는 것만 선택할 수는 없는 상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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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에 처해지기 때문에 협동이 어려울 것이라 말하곤 한다. 설탕과 소금 사이 에서 갈등하는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받고 나온 답은 지역마 다, 모임마다 달랐다. 어떤 곳에서는 전라도 출신이 먼저 나서 다수가 소금을 원하니 나도 따르겠다고 했고, 늘 소금만 쳐서 먹어봤으니 전라도식으로 한 번 먹어보자고 결정한 곳도 있다. 어디 이런 방법뿐이랴? ‘한 번은 설탕, 한 번은 소금, 그렇게 먹어봐도 되지 않겠냐?’라며 제3의 안을 낸 곳도 있다. 이렇게 협동의 방식은 다양한데,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나와 다른 곁의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배려일 수도 있고, 양보일 수도 있다. 협동조합의 가치에서 ‘타인에 대한 보살핌(이타심 혹은 측은지심)’ 이라는 덕목이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그래서 어떻게 협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소금과 설탕 사이에서 옳은 것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소금의 맛과 설탕의 맛이 다른 것이지 어느 하나가 틀린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설탕이 소수이고 소금이 다수여서 무조건 소금을 선택하는 것만도 아니다. 친구 사이 에서 내 것만 챙기지 않듯 사람들의 결사체인 협동조합에서는 항상 자리이타 (自利利他),
즉 너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다. 내가 남이 될 수는 없지만 그 자리에
서 보는 것. 이것은 한살림선언에도 잘 나와 있다. ‘불연기연(不然期然)’이라는 것인데 그 뜻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이다. 우리의 생각은 옳고 그름으로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보면 달라진다는 말이다. 예컨 대 우리는 ‘알다’의 반대가 ‘모른다’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옛날엔 밥상살림이 뭔지 몰랐는데 한살림 조합원이 되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 알고 모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는 알고 누구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 반대가 아니라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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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다른 상태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의 운영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 한다. 일본의 한 의료생협에서는 ‘모두가 달라서 모두가 좋다. 한 사람 한 사람 의 생명이 빛나는 건강한 마을’이라는 모토를 가진다고 한다. 나의 눈 하나로 보고 나의 경험 하나로 생각하는 것보다 열 사람의 눈으로 보고 열 사람의 경험이 보태지면 우리 협동조합이 훨씬 더 다양해지고 풍부해지지 않겠는가? 저 둥근 달처럼.
3) 어떻게 조합원이 주인노릇을 하게 할 것인가?
작년 이맘때쯤의 일이다. 빌라 아래층에 사는 여학생이 찾아와 자기 집 작은 방 천장에 물이 한두 방울 떨어지는데 아무래도 우리 집에서 새는 것 같다고 했다. 순간 귀찮은 마음, 부인하고픈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물 샐 때 바로 올라와서 따지지 않고 며칠을 참다가 와서 차분히 얘기해주는 그 모습이 너무 기특하기도 했고, 또 좁은 집에 다 큰 아들 딸을 둔 네 식구가 사는데 방 하나가 그리 되면 마루에서 자야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래서 아는 집수리 사장님을 불러 누수탐지기로 검사해보니 우리 집 거실 배관이 낡아 터져서 물이 졸졸 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래서 50만원을 들여 배관공사를 하고 나서 한살림 유기농채소 꾸러미를 선물로 드리며 미안하게 되었다고 얘기하니 아랫집에서는 커다란 배추 한 통을 답례로 주었던 흐뭇한 기억이 있다. 만약 그때 내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면 참 곤란했을 터인데 평소에 조금씩 모아둔 여윳돈이 있어 선뜻 지불할 수 있었다. 집을 소유한다고 다 집주인이라 할 수 없다. 많은 집주인들이 전월세로 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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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을 생각은 하지만 세 준 집에 하자가 생길 때 수리해 주기는 꺼려한다. 자기가 대출을 끼고 집을 사서 돈이 별로 없으니 수리해 줄 돈이 없다고 나몰라 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행패가 워낙 심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니 오죽하랴! 임대수익만 챙기고 세입자들에게 해야 할 서비스는 해주지 않고 권리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전월세 사는 사람들 어디 서럽고 억울해서 살겠나? 협동조합에서의 조합원의 경우도 매한가지다. 내가 조합원이고 주인이니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금 더 적극적인 사람은 성실하 게 이용하고, 조합원모임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것이 다 주인된 자로서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세이다. 그런데 ‘참여’가 꼭 주인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 다. 예컨대 누군가가 마련한 자리에 가는 것도 참여이다. 하지만 어떤 모임이나 행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 자리에 참여한 조합원들 중 왜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는 있지만 ‘왜 준비가 제대로 안 되었을 까?’ 하며 살피고 해결책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는 신규사업이 필요한데 자금이 부족해서 하기 어렵다는 보고를 들으면 “그동안 돈 안 벌고 뭐했나?”라 며 지청구를 하는 경우는 있지만 ‘어떻게 증자를 할 수 있을까?’를 스스로 고민하는 조합원들은 별로 많지 않은 실정이다. 출자금을 내고 조합원이 되었으니 무조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주인은 요구하기 이전에 전체를 살피고, 그에 따라 판단을 내리며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알고 권리를 행사하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협동조합의 임원이나 활동가들의 중요한 임무는 조합원들이 제대로 주인노릇을 할 수 있도록 안내 하고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무엇을 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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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어떻게 협동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경제/사회/문화 적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모였고, 무엇을 어떻게 협동할 것인지 정하는 과정이 협동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둘째는 협동조합이 어떤 조직이며, 운영 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직업의 전문성이 있다고, 많이 배웠다고 제대로 된 주인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일반기업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와서 비교하며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경험은 소중하나 무조건 적용 하는 건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 우선 협동조합을 알아야 그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위에 말한 첫째와 둘째의 내용을 알고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협동할지 모른다면 잘한 건지 못한 건지 판단할 수 없고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없다. '자율과 자치'에 기반하는 것이 협동조합이므로 외부에서 가져온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일이다. 주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고, 그 자리는 누가 부여하 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되는 것이다. <그림 1> 협동조합 = 생각+노동+자본 협동
생각
협동 노동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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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협동의 원리
1) 협동의 호혜성(互惠性 reciprocity)
협동조합을 비롯한 결사체 조직의 경제활동은 호혜적 관계로 이루어진다. ‘호혜’의 사전적인 의미는 ‘양편이 서로 특별한 이익과 편의를 주고받는 일’이 다. 쉽게 말하면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관계를 뜻한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주고받아서 꼭 이익을 얻거나 편의가 생기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에서 호혜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살림의 경제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칼 폴라니(Karl Polanyi)1)의 생각을 빌려오는 경우가 많다. 그에 따르면 호혜성이란 ‘대칭이 되는 상관관계 사이의 운동’이다. 대칭되는 상관관계란 예컨대 선배/후배, 스승/제자와 같이 나이와 연식의 차이가 있거나 친구 사이 와 같은 사회관계를 말하기도 하고 부모/자식, 이모나 고모/조카 와 같은 친족 관계를 포함한다. 어쨌든 호혜성은 서로 관계가 있는 사람(집단) 사이에서 뭔가가 왔다갔다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선배가 후배한테 밥을 사주고 후배는 선배가 이사 갈 때 이삿짐을 날라주는 일, 친구 사이에 생일날 선물을 주고받거
1) 호혜성에 대한 이론은 칼 폴라니가 공동으로 저술한 『초기 제국시대의 교역과 시장 (Trade and market in the early empires)』(1957) 가운데 ‘제도화된 과정으로서의 경제(The Economy as instituted process)'라는 글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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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결혼할 때 부조를 하는 등의 활동이다. 협동의 호혜성은 아주 다양하다. 쌍방 간에 주고받는 상호적인 협동도 있고, 사람들이 많을 땐 순환적인 협동도 가능하다. 또 긴 시간을 두고 보면 세대 간의 협동도 가능하다. 상호적인 협동은 내가 주고 너가 받고, 또 너는 내게 되돌려 주는 것이고, 순환적인 협동은 나는 네게 주지만 너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준다. 그러나 그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내가 주지 않은 어느 누군가가 내게 주는 것이다. 순차적 협동은 내가 내 자식이나 후배에게 주고 내 자식이나 후배는 그의 자식이나 후배에게 주는 협동이다. 그래서 때로 협동은 단기간 동안의 관계만 보아서는 잘 알 수 없고 장기간에 걸쳐서 보아야 그 흐름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상호적 협동 : A ⇄ B 순환적 협동 : A → B → C → A 순차적 협동 : A → B → C → D → E
특히 조합원이 많은 대규모 협동조합, 회원조직을 두는 연합회를 가지는 협동조합에 이르면 호혜성의 구조는 아주 복잡해진다. 예컨대 한살림과 같은 소비자생협의 경우 크게 보아 생산자와 소비자가 협동한다. 소비자 조직 안에 서는 조합원과 실무노동자가 협동하고, 조합원 안에서 일반조합원과 활동조합 원과 임원이 협동한다. 이렇게 층층이 겹겹이 협동의 구조가 복잡해지면 내가 누구와 어떻게 협동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긴 시간을 둔 순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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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을 계획할 때는 특히 조합원들의 이해와 동의가 필수적이다. 오래된 조직 의 경우 조합원들은 순차적 협동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경우 단기간의 협동을 보면서 불만을 가지거나 협동에서 소외된다고 생각하거나 협동이 잘 되지 않는다고 속단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래서 구성원인 조합원들은 협동의 원칙만이 아니라 협동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신뢰를 가질 수 있다. 협동의 구조를 안다는 것은 전체를 안다는 것이 다. 이것이 협동조합의 경영에 아주 중요한 요소인데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아 신뢰의 위기가 오기도 한다. 문제가 생길 때 사람(부분)만 보지 말고 구조 (전체)를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협동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조합원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협동의 호혜성 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조를 조합원에게 알려주고, 혹시 그 구조에서 소외된 부분이 있다면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의논하여 문제를 풀어야 한다.
2) 협동의 구조 & 구조적 협동
협동조합을 비롯하여 결사체 조직을 만드는 일은 협동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협동할 것인지 생각을 모으는 생각의 협동으로 시작하 여, 그 형식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노동의 협동과 자본의 협동이 이루어진 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구조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왜 제대로 협동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왜 이탈자가 생기고 불만이 생길까? 그 까닭은 낡은 구조 적 협동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협동의 구조는 한 번 만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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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이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이 들고나며 상황도 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와 같은 원리이 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만들어 놓으면 알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의하 고 감시하고 보고하는 상호작용과 순환체계가 있어야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용과 형식은 계속 변하는 것이다. 이 상호작용을 통한 순환체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통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다’라고 표현한다. 분명히 회의를 했는데 서로 달리 이해하고 예상하 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 당혹스럽게 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 또 회의를 하며 문제가 뭔지 토론하고 성토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느끼게 된다. ‘늘 같은 문제를 얘기하는데 왜 해결이 안 되는 거지?’ 그렇게 여러 번 회의를 하다보면 이제 더 이상 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부담스 럽다. 구조적인 문제는 구조를 확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걸려 있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고, 방법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협동을 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구조적 협동의 딜레마이다. 사람이 협동하지 않고 구조가 협동을 할 때, 이것이 시스템 이라고 생각하며 지키려 하는데 사실 그때 지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조직이 라는 ‘형식’이다. 결사체이기 때문에 그 조직을 지키는 것이 사람을 지키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그때 그 조직은 이미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사람을 벗어난 껍데기이자 제도일 뿐이다. 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2)는 ‘상상의 사회제도’라
2) 『상상의 사회제도(L'institution imaginaire de la société)』는 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 (C. Castoriadis)의 저서이다. 이에 대해서는 『모심과 살림』 6호의 특별기고 “지속가능한 탈성장의 길”(세르주 라뚜쉬)을 참조하기 바란다.
Ⅰ. 먼저 알아보기: 협동과 협동조합에 대한 깊은 이해 19
는 표현을 했다. 사회제도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제도는 사람의 생각이 바뀌면 변화해야 하는데, 사회의 식민지가 된 사람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사회의 노예가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죽음이다. 사람이 만든 제도는 사람만이 깨부술 수 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한다.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금 협동이 제대로 안 되면 조직보호 논리를 벗어나 협동의 구조에 대해 다시 생각 해보자. 이사람 저사람 사람 탓으로 멍들지 말고, 우리는 진정 협동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만나며 일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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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협동조합의 역사 알아보기 : 오래된 미래
역(易)이 역(曆)이 되어 역사(歷史)가 된다. 하루하루의 바뀜이 절기가 되고, 그 절 기의 순환이 역사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또 역사란 지금의 내가 과거를 바라보며 해석하는 일이니 지금의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역사를 볼 것인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역사는 미래가 되는 것이다.
Ⅱ. 협동조합의 역사 알아보기: 오래된 미래 21
1. 협동운동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협동조합 교육을 받아보았거나, 이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아마 1844년 에 영국의 로치데일에서 설립된 소비자협동조합인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 (The Roch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s)'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록3)에 따르면 최초의 협동조합은 175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프랑스의 프랑쉬-꽁떼(Franche-comte)에서 설립된 치즈생산자협동조합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국 런던에서 설립된 화재보험공제회이다. 당시에는 공제회 든 협동조합이든 거의 같은 성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런던화재보험공제회 또한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에 포함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니까 최초의 협동조합 은 우리나라로 보자면 조선시대의 영조가 왕이었고 그의 손자 정조가 태어날 무렵이다. 그런데 협동조합의 운영원칙의 기초를 닦은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가 그로 부터 약 90년 후에 설립되었으니 그 이전의 협동조합의 초기 선구자들은 얼마
3) Jack Shaffer,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Cooperative Movement, Scarecrow Pres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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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을까! 이렇게 본다면 로치데일의 성공은 이전의 수많 은 협동조합운동의 무덤 위에 핀 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로치데 일의 공정개척자들이 자신들의 협동조합을 설립하기 전 모델로 삼았던 것이 ‘맨체스터 질병 및 장례 구호회’였다. 그러하기에 공정개척자들은 단지 소비자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고 상호부조에 기초한 소비회의 모델을 구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국 사회적경제의 선구자인 오웬(Robert Owen)의 영향을 받아 시장 가격의 공정함,
즉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만족하
는 가격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하여 생산하고 공급하고 소비하 는 모든 주체가 서로의 처지를 고려하여 서로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공정개 척자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이상은 노동자들이 운명공동체로 느끼지 않았다면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나의 이해만을 우선하지 않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결사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계획은 상점을 여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공정개척자들은 구성원에게 주거를 제공하기 위하여 주택 을 구입하고, 실업에 처한 구성원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제공할 목적으로 상품 을 생산하고자 하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각성을 위하여 노동자들의 알콜중독 에 대처하기 위한 ‘금주실(禁酒室)’ 사업도 추진하였다.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들은 이러한 자신들만의 운영원칙을 정립하기 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해방될 수 있을까?’. 이 두 개의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 우리는 사회적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이 단지 경제적인 목적을 넘어 사람의 발전을 지향했던 이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자본을 가지지 못하고 먹고살기 힘든 노동자들이 자신과 가족의 생계만이 아
Ⅱ. 협동조합의 역사 알아보기: 오래된 미래 23
니라 운명공동체로서 인식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그 운명을 개척하고자 모험을 감행하려는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은 사회적경제조직이 민주 주의의 이상을 담은 조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전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 한 선구자적인 발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들 의 원칙은 훗날 ICA(International Cooperative Alliance, 국제협동조합연맹)가 협동조합 의 운영원칙을 수립하는 데 토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조직의 운영 원리가 정립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보면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들을 만든 사람들 이전에 오웬이 있었 고, 그들이 만든 소비협동조합회사 이전에 맨체스터의 공제조합(friendly society)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협동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너,
우리만의 협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 세대의 도전과 실패의 경험, 그로부 터 축적된 운영원리가 지금의 우리에게 자산이 되고 자본이 되는 것이다. 그래 서 ICA가 협동조합인들이 지켜야 할 가치를 “창건자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협동조합의 멤버들은...”이라고 정함으로써 이전 세대의 뜻을 이어받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을 것이다.
2. 협동조합은 지구촌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 이후 유럽 전역에서 소비자협동조합은 눈부신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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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루었고 신용협동조합이나 노동자생산협동조합 또한 이곳저곳에서 설립 되었다. 조직의 유형과 수가 많아지고 협동운동가들 또한 많이 양성되어, 그 성과를 바탕으로 1867년에 개최된 만국박람회에서 처음으로 국제협동조합운 동조직을 설립하자는 제안이 이루어졌다. 다시 세월이 흘러 1895년 영국협동 조합총회에서 제1차 ICA총회가 개최되었고, 바로 그 다음해에는 프랑스 빠리 에서 제2차 총회가 개최되었다. 제2차 총회가 개최된 사회박물관은 전 세계에서 최초로 세워진 사회적경제 및 사회복지 관련 박물관이자 도서관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도 이 총회에서 ‘사회적경제 벽문(inscription murale de l'économie sociale)’이 새겨졌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이 벽문은 당시 열악한 노동조건 및 임금과 관련된 모든 국가정책과 더불어 소비자·신용·노동자협동조합 등과 관련된 운영 및 정책을 담고 있어서 협동조합운동이 사회적경제와 같은 전망 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1> 1896년 프랑스 빠리의 사회박물관에서 개최된 제2차 ICA 총회 기 념 사진. 총회 장소인 박물관의 모든 벽에 사회적경제 벽문이 새겨져 있다.
Ⅱ. 협동조합의 역사 알아보기: 오래된 미래 25
<사진 2> 사회적경제 벽문을 모은 자료집
ICA 창립 이후 세계 각국의 협동조합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협동 조합관련법이 제정되기 시작했으며, 이와 관련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관련 연구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0년에는 국제노동기구인 ILO(International Labor Organisation) 내에는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하는 부서가 설 치되었다. 그런데 곧이어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협동조합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시기에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저항의 사상과 운동이 증폭되었다. 그리하여 협동조합 진영에도 이념적 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사회주의계열의 협동조합과 파시스트협동조합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하여 예컨대 소비자협 동조합의 경우 이념의 차이에 따라 한 나라에서 서로 다른 연합회가 만들어지 는 등 갈등을 겪은 시기이다. 이러한 사회적·국제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제10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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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1921)에서는 ‘협동조합과 노동조합과의 관계’가 토론의 주제였으며, 제 11차(1924)에서는 ‘협동조합의 정치, 종교적 중립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기 도 했다.
3. 협동조합의 원칙은 경험과 토론으로 만들어졌다
이념의 갈등, 종교의 영향, 전쟁의 후유증 등을 거치면서도 협동운동은 확산 되어갔으며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 길지 않은 평화의 시기에 협동운동을 추스르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에는 로치데일 공정개척자들의 원칙을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
로치데일 공정개척자들의 운영원칙
평등과 민주적인 통제(1인 1표의 원칙)
자유로운 가입
경제 정의(각 구성원의 활동에 비례한 수익 분배)
공평성(자본 출자에 대한 제한적인 보상)
정치․종교적인 중립
회원의 교육
Ⅱ. 협동조합의 역사 알아보기: 오래된 미래 27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계대전이 끝난 후 ICA는 협동조합의 원칙을 재확인 하며 전후 개발의 과제를 가진 식민지국가와 전승국 모두를 아우르는 협동운 동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 국제사회 는 더 이상의 인류의 참사를 방지하고 세계평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UN을 설립 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리고 UN은 1951년 사무총장에게 협동조합운동의 발전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협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 작하였다. 그 이유는 전승국이든 패전국이든, 부자 나라든 가난한 나라든, 좌파 든 우파든, 도시든 농촌이든, 이념과 종교와 언어를 불문하고 전 세계 모든 나라에 협동조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협동조합조직은 비정부기구인 NGO와 더불어 UN의 중요한 파트너가 된 것이다.
4.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할 때이다
“협동조합이 돈만 잘 벌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물으면 배부른 소리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치니 운동이니 하며 적자 나서 돈 걱정하다보면 협동운동도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라고도 한다. 맞는 말이다. 양반입네 하고 갓 쓰고 앉아 식구들 굶어죽든 말든 공자왈 맹자왈 글이나 읽는 선비 꼴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배부른 누군가가 호강에 받쳐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사업을 하는 조직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결사체로서 협동조합의 궁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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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성찰해보자는 질문인 것이다. 1980년대 접어들어 국제 협동조합운동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었 다. 먹고살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던 시기 협동조합은 빈곤과 기아를 극복하기 위해 힘썼지만 또한 협동조합은 결사체가 탄압을 받던 시기 결사의 자유를 위해 저항을 서슴지 않았다. 문맹을 퇴치하고, 아동노동을 금지 하고, 성차별을 없애고,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데 협동 운동은 누구보다도 앞장섰으며 탄압을 받았지만 살아남았다. 그런데 산업이 발전하면서 협동조합 조직 또한 성장했지만 세상은 전쟁과 기아가 아닌 새로 운 도전을 받게 된다. 70대 초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배제 의 증가, 남부의 가난한 국가들의 늘어만 가는 부채, 석유위기로 시작된 자원고 갈과 생태위기, 지역불평등, 산업화와 기계화로 인한 노동의 소외 등. 경영의 위기, 신뢰의 위기와 더불어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세계가 한 방향으로 쏠리며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지구촌을 평정할 즈음, 1981년에 ICA는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이라는 보고 서를 작성한다. 그러한 흐름에서 협동조합은 어떠한 길을 걸을 것인가 묻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협동조합은 지역사회를 돌아 보게 되었고, 시장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협동조합 간의 협동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렇듯 협동조합의 원칙은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그 시대인식에 기반 하여 만들어지고 변화된다.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자연도 상품의 도구가 되고 인간관계가 시장의 계약관계로 변질되어가는 사회에서 협동조합이 사업적으로만 성공하면 괜찮
Ⅱ. 협동조합의 역사 알아보기: 오래된 미래 29
나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60년대 말, 70년대 초,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협동조합이 등장했다. 이 후 90년대에 들어 사회적협동조합의 영향은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대륙 의 저편 미국에서도 사회적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협동운동의 시 기가 온 것이다.
30 ‘깊은 협동’을 위한 작은 안내서
Ⅲ. 자세히 알아보기 : 협동의 그릇, 협동조합
건전지는 음극과 양극이 한 몸이다. 그리고 양극과 양극, 음극과 음극은 서로 밀 어내지만 양극과 음극은 서로 당긴다. 이렇게 상반된 두 성질이 만나야 힘을 발 휘하듯 협동조합 또한 서로 다른 나와 너가 만나 한 몸이 되었을 때 힘을 발휘하 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한 몸이 될 것인가?
Ⅲ. 자세히 알아보기: 협동의 그릇, 협동조합 31
‘한’은 하나이자 크다는 뜻이다. ‘살림’은 죽임의 반대인 생명살림의 의미이 자, 사람의 살림살이를 말한다. 그러니 한살림은 ‘생명을 살리는 큰 하나의 살림살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따라서 한살림의 협동조합운동은 한살 림을 이루기 위한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의 부족 혹은 인식의 차이로 인하여 그 생명력 이 온전히 발현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즉 협동운동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 목적을 가지는 사업체로서 조합원이 출자하여 이용한다’는 정도에 머물러 있 으며, 협동조합이 ‘사람들의 결사체’라는 이해가 부족하여 내용과 형식이 불일 치하는 상황이다. 조직론, 즉 조직의 법칙(운영원리 및 발전 경로 등)에 대한 학습 과 교육이 기반이 되지 못한 까닭에 맛있는 음식을 조리해 놓고도 어디에 어떻 게, 얼마만큼 담아야 하는지 몰라 제대로 된 밥상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한살림의 탄생철학은 조합원의 몸과 마음, 일상의 실천 속에서 구현되지 못하며 방황하거나 부유하고 있어 조합원들의 결속력과 결사정신을 높이는 데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한 늘어나는 조합 원들에게 이러한 사상과 철학이 제대로 학습되고 계승되지 못하여 단순소비자 조합원과 조직의 탄생철학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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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생명의 보편성은 인정하나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 탄생의 맥 락 속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개혁 프로젝트로서의 역사 를 가진다. 따라서 생명을 중심에 둔 협동조합운동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 해야 할 것이며, 특히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진행된 ‘시장사회’로의 변화와 그에 따른 ‘세계화, 상품화’라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분석하여 대처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협동조합운동의 기원이 되는 민주적 결사체 이념과 그것의 운영원리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실천방안에 대한 탐색이 필요할 것이다.
1. 협동조합의 정체성, 가치, 운영원칙
한살림의 법적 지위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다. 이는 다른 나라의 소비자 협동조합(consumers' cooperative) 혹은 소비협동조합과 거의 같은 조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살림의 경우 생산자회원이 함께하고 있으므로 최근에 알려 진 다중이해당사자구조(multi-stakeholder)인 사회적협동조합(social cooperative) 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살림은 독특한 협동조합의 성격을 가지 고 있는데 한살림다운 협동조합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협동조합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협동조합을 알기 위해서는 전 세계가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정체
Ⅲ. 자세히 알아보기: 협동의 그릇, 협동조합 33
성(identity), 가치(value) 그리고 운영원칙(principle), 이 세 가지를 이해하면 된 다. 사람으로 치자면 정체성은 이름이고, 가치는 정신이고, 운영원칙은 신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이름과 생각과 외모를 봐야 하듯 협동조합 또한 이 세 가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소비자협동조합 이니 신용협동조합이니 하는 것은 어떤 옷을 입었느냐 하는 문제이지 사람으 로서의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로만 완전할 수 없고 삼위일체가 되어야 협동조합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 또한 시간에 따라 변하듯 이 세 구성요소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해 오늘날의 형태로 정해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은 사람들의 결사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는 사회 와 세상이 변함에 따라 그에 적응하며 새로운 방식을 찾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운영원칙의 경우 최초의 그것에 추가되기도 하였다.
1) 협동조합의 정체성(identity)
이것은 ICA에서 제정한 것으로 20세기 초부터 논의되었으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것은 1995년에 최종으로 승인된 것이다.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업(체)를 통하여 공통의 경제, 사회, 문화적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자율적인 결사체(結社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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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operative is an autonomous association of persons united voluntarily to meet their comm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needs and aspirations through a jointly-owned and democratically-controlled enterprise.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사람들의 결사체이다. 그 사람들은 왜 결사하는 것일 까? 공통의 경제·사회·문화적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럼 그 필요와 열망은 무엇으로 충족시킬까? 바로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 제되는 사업(체)을 통해서이다. 이렇듯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주체, 목적, 그리 고 방법 또는 수단, 이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① 주체 : “협동조합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자율적인 결사체이다” 협동조합은 결사체이다. 협동조합의 토대는 개인이 아닌 서로 연결된 (associated)
사람들이며, 이것에 기반하여 사업(enterprise)이 이루어진다. 그러
하기에 협동조합이 결사체로서 제대로 운영될 때 사업 또한 제대로 운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협동조합을 ‘결사체이자 사업체이며 경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을 동시에 가진다’라고 이해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자칫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우선 결사체이자 사업체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다 고 하지만 혹자는 사업을 더 강조하여 사람들의 관계성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고, 혹자는 결사체이기 때문에 적자가 나도 별로 문제 삼지 않기도 한다. 또한 경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을 동시에 추구한다고 하지만 이를 ‘경제적으
Ⅲ. 자세히 알아보기: 협동의 그릇, 협동조합 35
로 안정되어야 사회적 목적도 실현할 수 있다’라고 해석하여 경제적 목적이 우선되고 사회적 목적은 후순위가 되는 상황도 발생한다. 결국 협동조합을 결사체와 사업체, 경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으로 구분하여 보는 이분법적 사고는 전체를 통합적으로 사고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또한 현실에서는 두 가지를 두고 중요성에 따라 선후를 따지며 대립이나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기본 토대이자 정체성은 결사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협동조합의 사업은 결사체에 기반하고 결사체가 사업을 영위하는 데 바탕이 된다. 사업구조 이전에 우선 ‘공동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야 하고 그들의 관계방식이 존재한다. 협동조합의 사업은 결사한 조합원에 의해 유지되고 확대되고 강화되어야 한다. 예컨대 협동조합기본법 도입 이후 많은 협동조합이 설립되었지만 실제 운영 되는 경우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다섯 명만 모이면 만들 수 있다’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표준정관을 작성하여 행정상으로 설립된 조직은 많지만 사업은 안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 인 것이다. 또한 협동조합은 사람들의 결사체이므로 그 결사체의 관계가 느슨해지거나 서로 소원해지면 해체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업이 잘 안 되는 경우 조합원들의 관계가 단단히 연결되어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사업이 잘 되는 시기에도 조합원의 관계가 느슨해지면 사업의 위험 신호 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사업이 잘 되지 않지만 조합원들 간 끈끈한 유대를 유지하며 함께 극복하고자 결사하는 정도가 강하면 사업적인 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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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 또한 협동조합의 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② 목적 : “공통의 경제·사회·문화적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공통’이라는 것은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지만 백 퍼센트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같은 부분이 있으며 그걸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똑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 쌍둥이도 심지 어 서로 다르지 않은가! - 사람은 모두가 다른데 그 안에 공동의 어떤 부분이 있으며, 그것을 찾는 것이 곧 결사체가 되는 과정이다. 또한 그것을 찾기 위해 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은 단순히 경제조직이 아니며, 경제적 목적만이 아니라 사회적·문 화적 목적도 가진다.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라는 표현이 있듯 현대의 경제적 문제들이 사회적 요인들로 인해 생기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예컨대 여성이라는 이유로, 또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비등록외국노동자(이주노동자)이 기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 그런데 그 사회적 차별은 곧 경제적 차별로 이어진 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는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시에 필요한 사회적·문화적 요소가 굉장히 많이 있다. 협동조합은 사람들의 결사체이기 때문에 사람에 의해서 생기는 문제가 경제적 인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품앗이 같은 지역화폐가 협동조합으로 조직될 수 있고, 학교협동조합처럼 공 공부문 내에서도 설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협동조합은 시장 내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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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needs)는 ‘지금 현재 처해 있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의 목표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는 지역과 나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지금 사회에 있는 조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열망(aspiration)은 미래를 향한 것이며 정해진 바가 없고, 지금 처해 있는 조건과 무관한 경우도 많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계속 고양되고 싶고, 더 나아지고자 하는 숨(호흡)과 같은 것이다. 열망은 계속 진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살림의 경우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조합원이 된다. 그런데 왜 어떤 조합원들은 ‘지역살림’ 활동을 할까?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서? 조직을 강화해 서 무엇을 하려고? 그리고 조직을 강화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협동조합 의 조직이 강화된다는 것은 조합원들의 관계가 강화되어 결사가 높아지는 것 을 뜻한다. 기본적인 필요로 출발할 수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 조직이 협동조합인 것이다. 결사체가 결사체로서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안정화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다 보면 고인 물이 썩듯이 발전하지 않고 그냥 정체되거나 아니면 더 나빠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 만나서 삶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데, 새로이 생겨나는 열망이 제대로 실현이 되지 않으면 점점 떨어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협동조합이 모든 걸 다 해결해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러한 열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야기하고, 방법을 찾아나가는 통로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협동조 합은 많은 시간과 세월이 흘러 변화발전하다 보면 처음과는 아주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로치데일의 공정개척자들이 상점으로 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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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술에 찌든 노동자들의 생활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금주실과 도서관을 운 영한 것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③ 수단 :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업(체)을 통하여”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처분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협동조합이 공동으로 소유된다는 뜻은 조합원으로서 내가 처분권을 가지지만 나만이 아니라 다른 조합원들과 똑같이 가진다는 것을 뜻 한다. 그런데 보통 공동소유는 ‘common ownership’으로 표기하는데 협동조합 에서는 ‘jointly owned’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굳이 이렇게 한 이유는 보다 명확하게 각자의 책임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컨대 유사한 표현인 ‘조인트 벤처(joint venture)’의 경우 동업이긴 하지만 돈만 대거나 하는 명목상의 동업이 아닌 실제 파트너와 같은 개념이다. 각자가 동일한 결정 권과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 ‘민주적으로 통제되는’이라는 표현이다. 보통 ‘민 주적으로 운영된다’ 혹은 ‘민주적으로 관리된다’ 등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 기도 한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민주적으로 통제된다’라는 표현이다. 왜냐하 면 운영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것은 조합원이 통제권을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이기 때문이다. 앞의 두 해석은 다음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첫째, 협동조합의 경영은 모두가 다 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인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국민이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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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을 가져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국민이 다 국회에서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 으로 활동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는 경영의 전문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협동조합의 경영은 조합원이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아무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조합원들 중 전문적인 기능을 가진 이가 맡을 수도 있고, 그 일을 전담할 사람을 외부에 서 영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경우 다 어쨌든 조합원이 통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통제한다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민주주의 제도에서 국민을 대의하 는 국회의원은 국민들에 대해서 보고(report)의 의무가 있다. 이 보고의 의무가 대리하거나 대표하는 자의 책무성으로서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고 결정한 바 를 이러한 방식으로 실현했다’라고 알리는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권한의 행사는, 의원으로 뽑혔으니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을 수렴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판단하고, 그에 따라 실행하고 나서 반드시 그 결과를 보고하고, 그 보고에 대한 평가를 받고, 평가에 따른 책임을 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러한 메커니즘이 작동할 때 민주적 통제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협동조합의 경우 보통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이사회인데, 이사회에서 많은 부분들을 책임지는 반면 임의로 결정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경영진으로서 이사회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보고’이다. 보고를 통해 일반 조합원들이 경영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이러한 과정이 축적되어야 나중에 총회에서 제대 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민주적인 의사결정과정의 가장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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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협동조합의 가치
“협동조합은 자조(상부상조), 자기책임, 민주주의, 평등, 공정함과 연대의 가치에 기반한다. 창건자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협동조합의 멤버들은 정직, 개방성(투명 성), 사회적 책임 및 타인에 대한 보살핌(이타심, 측은지심)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믿는다.” Co-operatives are based on the values of self-help, self-responsibility, democracy, equality, equity and solidarity. In the tradition of their founders, co-operative members believe in the ethical values of honesty, openness, social responsibility and caring for others.
협동조합의 가치는 사회적인 존재로서 협동조합과 협동조합인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큰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협동조 합이라는 조직과 그 안의 사람들이 같이 새겨야 할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문장은 협동조합이라는 조직이 어떻게 사회에 위치할 것인가를, 두 번째 문장은 협동조합인이 어떤 태도와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를 각각 다룬다.
① 조직의 가치 자조는 조직이 스스로 돕는다는 것으로 조직 구성원들 간의 상조(相助), 즉 서로 도와 사회적으로 자기책임을 다하고, 민주주의, 평등, 공정함과 연대의 가치를 가지고 사회적인 기업으로 운영될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한다. 협동조합의 자기책임에 대한 부분은 특히 ‘청산 및 해산에 관한 조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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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히 드러난다. 일반기업과는 달리 협동조합의 경우 부도나 파산의 위기에 처했을 때도 공적 자금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고 빚을 청산한다. 또한 해산 후 잉여가 남을 경우 사회로 되돌려준다. 그 대상은 제도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다른 협동조합이나 공익 목적을 가지는 조직에 기부하는 것이 일반 적이며, 어떤 나라의 경우 지자체에 기부할 수도 있도록 해 두었다. 그러므로 밖으로 자기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안에서는 서로 도와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② 사람(조합원)의 가치 협동조합인들에 대한 덕목에 앞서 우선 ‘창건자들의 전통을 계승하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굳이 이 부분을 덧붙인 까닭은 협동조합이 사람들의 결사 체이므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애초의 목적을 잊거나 간과하 고 결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조직이 발전하고 확대되어 새로 들어온 후세대 사람들은 그 역사와 전통에 대해 잘 몰라서 이해 를 달리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협동조합은 시대에 따라서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고 다르게 진화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창건자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초기 설립자들과 후세 대 간 이해를 달리하여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협동조합인들의 가치에서 강조하는 것은 구성원들이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집단이 되지 않도록 열린 태도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우선 개방성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것은 운영의 투명성을 뜻한다.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조직이다 보니 폐쇄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열린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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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드러내 보여야 하는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조직의 가치에는 ‘자기 책임’이라고 되어 있는데 구성원 들을 위한 가치에는 ‘사회적 책임’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협동조합이 조합원들 의 조직이므로 (지역)사회와 분리되어 조합원들만의 필요와 열망을 배타적으 로 실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경우 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 이후 사회적 배제 문제가 만연했을 때 다수의 오래된 협동조합조직이 사회적 문제 와는 무관하게 자신들만의 사업을 영위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타인에 대한 보살핌’은 협동의 바탕이 되는 타인에 대한 고려와 보살피 는 마음이다. 이는 내가 남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기반하는데, 연민이나 측은지심(惻隱至心) 혹은 유교의 인(仁)과 다르지 않다. 협동은 나의 필요와 열 망을 버리지 않되 늘 내 옆의 사람과 지역 사람들을 함께 보살피는 생활태도에 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협동조합을 하면서도 ‘나’ 중심, 내 욕구와 내 열망 중심으로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가치에는 사회적 책임, 개방성, 정직, 보살핌 등 자기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나 혹은 조직 안에만 매몰되지 않고 사회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중심 을 세워주는 것이다.
3) 협동조합의 운영원칙
일곱 가지로 이루어진 운영원칙은 어떻게 보면 성공하는 협동조합의 지침이 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칙이란 무조건 따를 수 있는 비법이나 매뉴얼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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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로 구체적인 적용방식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또한 원칙이란 법이 아니므로 지키지 않아도 피해나 징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원칙이 가지 는 의미를 잘 새기고, 각 조직의 처지와 조건에 맞게 구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 다. 그것이 협동의 약속이 되는 것이다.
①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제도(Voluntary and Open Membership) : 자발성에 기초한 결사가 중요하다. 스스로 판단하여 가입하지 않은 경우 필요할 때 증자 를 하거나 협동노동을 하는 일에 소극적일 수 있으며, 이는 경영의 위기를 초래한다. 반대로 원하고 필요한 이들을 성별이나 종교, 정치적 신념, 혹은 경제적 조건이나 학력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개방한다. 관계를 기반으로 하나 ‘끼리끼리’의 폐쇄적인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②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통제(Democratic Member Control) : 협동조합의 운영의 시작과 끝은 조합원이며, 임원과 대의원은 조합원을 대의하고 대리하는 이들 로써 그에 대한 보고의 의무를 가진다.
③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Member Economic Participation) : 조합원은 가입 시 출자금을 낼 뿐 아니라 유지와 발전을 위한 재원조달에 참여한다. 많은 경우 가입 시 출자를 한 이후 단순 이용자로 전락하여 재정적 기여를 고려하지 않는 다. 협동조합의 경우 일반기업에 비해 금융접근성이 떨어지므로 조합원의 재 정 기여가 사업의 지속가능성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④ 자율과 독립(Autonomy and Independence) : 자율성은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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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다는 뜻이니 조직의 목적에 적합한 협동의 방식을 스스로 마련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 이는 특히 설립 시 정관을 작성하거나 이후에도 적절한 협동의 방식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원칙이 된다. 독립은 타자(외부)와의 관계 에서 주체의식을 가지고 압력과 간섭에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것이다.
⑤ 교육, 훈련, 홍보(정보제공)(Education, Training and Information) : 조합원이 주인이라지만 주인이 주인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 다. 그리고 더 큰 협동을 위하여 지역사회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꾸준히 정보를 제공한다.
⑥ 협동조합 간 협동(Co-operation among Co-operatives) : 협동조합은 홀로 살아 남을 수 없고 다른 협동조합과의 협동을 통해 함께 성장한다. ‘하나의 물방울이 영원히 마르지 않으려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에서 보듯 넓은 협동조합의 바다에서 활동해야 고사되지 않고 늘 협동조합일 수 있는 것이다.
⑦ 지역사회에 대한 고려(참여의식)(Concern for Community) : 영어로는 concern 이며 불어로는 참여의식인 engagement으로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기여나 공헌을 의미하는 contribution과는 다른 뜻이다. 걱정하는 마음인 것이다. 협동 조합의 조합원들이 지역의 주민이듯, 그들이 만든 조직 또한 지역의 주민기업 이다. 일반영리기업이나 다국적기업이 지역주민의 일자리를 뺏고 지역 자원을 황폐화시키면서 그 수익으로 사회공헌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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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은 지역사회라는 삶의 터전을 지키며 지역이 필요한 사업을 하는 조직이 다. 지역사회가 사라지면 협동조합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항상 지역을 기반으 로,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지역을 위한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늘 지역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 협동조합의 자본과 소유
1) 협동조합의 자본 : 출자금은 입장료가 아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현실도 너무나 당연할까? 생활협동조합의 조합원으 로서, 또는 다른 여러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내가 경험하고 본 현실은 당연 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생협을 지속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출자가 필요하니 그렇게 몇만 원의 출자금을 낸다. 마치 이용할 권리를 얻는 것처럼. 그런데 이후 조합이 사업을 확장하거나 필요한 설비를 갖추기 위해 증자를 요청하면 내 일이 아닌 듯 무관심한 조합원들이 꽤 된다. 왜 그럴까? 출자금은 집을 지을 때 벽돌을 놓는 것과 같다. 나는 하나의 벽돌을 놓지만 나와 같은 조합원들이 하나씩, 둘씩 그렇게 벽돌을 놓아 함께 집을 짓는 것이 다. 그래서 불어로 출자금을 ‘part social’이라고 한다. 즉 협동조합이라는 ‘회 (會)의 부분’이란 뜻이다.
나만을 위한 이용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집을 짓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집을 지어놔도 낡으면 수리를 해야 하고, 식구가 늘어나면 새로 방도 만들고, 때로는 이사도 가야 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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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다 돈이 드니 미리미리 저축을 해 놔야 하듯 적립금을 마련해 두기도 하지 만 그걸로 모자랄 때가 많이 있다. 그럴 때는 같이 사는 식구들이 함께 돈을 마련해야 하는 것처럼 조합원도 있는 만큼, 가능한 만큼, 때로는 적금을 깨기도 하면서 함께 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협동조합의 제3원칙인 ‘조합 원의 경제적 참여’이다. 그런데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를 결정하고 시행할 때 좀 더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다. 조합원이니까 당연히 경제적으로 참여해야 하지만 결정했다고 무조 건 따르는 사람이 조합원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얼마나 돈이 필요한지 잘 알 수 있어야 하며, 함께 결정을 할 때 마음을 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는 ‘생각의 협동’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생각의 협동이 참 어려울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때로는 조합이 돈을 들일 때 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별로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 집을 리모델링하는 이유가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모셔 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부모님들로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할머니의 사랑을 별로 받은 적이 없는 나는 그러한 부모님들의 처사가 잘 이해 도 안 되고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요양원에 모시면 될 걸 왜 굳이 집에 모시냐며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물며 가족의 일도 이러한데 협동조합에 서의 의사결정은 더욱 긴 시간동안의 의논과 고민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한 가지 더 고민할 거리도 있다. 출자가 자본의 협동이고 그 자본의 협동은 생각의 협동에 기반하는데, 협동조합의 협동은 또한 노동의 협동이기도 하다. 모두가 출자를 하지만 경제적 참여가 꼭 돈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푼이 아쉬운 조합원들도 있을 것이니 돈으로 출자하지 않고 노동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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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출자하는 방식도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레츠(LETS, Local Exchange & Trading System)라고도 하는 품앗이는 협동의 중요한 요소이다.
누구는 돈으로
협동하고 누구는 자신의 시간과 땀으로 협동할 때 다양한 협동, 가능한 협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협동에 정해진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니까.
2) 협동조합의 소유권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되는 결사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조합을 탈퇴하는 경우 조합원이 출자금을 돌려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조합을 청산하는 경우에는 채무 등을 변제하고 나서 남는 자산을 다른 협동조합이나 지역사회로 환원하는데, 조합원이 공동소유하면 청산할 때 조합원끼리 나누어 가져야지 왜 외부의 다른 조직에게 나누어주는 것일까? 이렇듯 협동조합은 소유권이 좀 복잡한 조직이다. 그러면 협동조합의 소유에는 어떤 종류가 있고, 각각은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기업으로서 협동조합은 조합을 구성하는 조합원이 낸 출자금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 출자금은 최소한도와 최대한도가 정해져 있다. 이 출자금은 탈퇴할 때 환급받을 수 있으므로 개인적 소유 또는 사적 소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은 사람들의 결사체이고, 매 시기 자본이 달라지고, 그 소유자들의 숫자 또한 변하는 조직이다. 또한 협동조합은 개방적인 조직이기에 누구나 가입할 수 있고 새로운 조합원이 들어오면 소유자의 숫자는 달라진다. 그리고 최소한의 출자금을 낸 조합원이나 최대한도의 출자금을 낸 조합원이나 총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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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1인 1표로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출자금은 사적 소유이지만 그것이 협동조합 전체의 소유권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분할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집합적 소유이다. 협동조합의 선구자들은 경험에 기초하여 조직을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정관에 의거하 여 공제하는 적립금제도를 두었다. 적립금 구성은 법정적립금인 의무적립금이 있지만 협동조합의 경우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조직을 더 발전시키기 위하 여 잉여가 발생하는 경우 일정한 비율을 적립하는데 이것은 미래를 위한 대비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협동조합은 잉여가 발생할 때 개인에게 배당하여 현재를 만족시키기보다는 공동의 미래를 위하여 적립을 우선한다. 적립금은 일종의 공동자산이다. 그래서 조합원 개인은 이 자산에 손댈 수 없고, 개인적인 이익을 취할 수도 없다. 적립금과 관련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귀속(歸屬)’조항이다. 귀속이란 재 산이나 영토, 권리 등이 특정 주체에게 붙거나 딸린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안보를 이유로 서울의 용산기지를 미군이 사용하고 있었으나 점유의 이유가 사라지면 한국으로 귀속되는 경우와 같은 이치이다.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이 해산되거나 청산절차를 밟을 경우 자산으로 발생한 잉여(적립금의 가치)는 유사 한 사업을 위해 사용되지 어떠한 경우에도 조합원들에게 분배할 수 없는 것이 다. 그러면 이 적립금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실 이 집합적 재산은 어느 누구 에게도 속하지 않으면서 모두의 것이 된다. 그래서 모두의 저축으로 만들어진 작품인 적립금은 협동조합만이 가지는 특별한 소유형태이다. 이러한 협동조합 적 소유는 사회적 소유(social ownership)도 아니고 개인적 소유와도 다르다. 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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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그것은 협동조합이라는 사적인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것이지만 그 집 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독창적인 특성은 협동조합도매상점(2차조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매상점은 회사들의 회사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트러스트(trust)나 카르텔 (cartel)4)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매상점의 독창성은 순자산이
이를 구성하는 개별 회사의 적립금을 합한 금액과 같거나 때로는 더 많다는 점이다. 게다가 도매상점은 개별회사보다 더 막강한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 하여 더욱 많은 적립금을 형성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도매상점은 2차 집단적 소유이나 실제 모든 조합원들의 소유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협동조합은 두 가지 소유형태를 가진다. 그런데
4) 카르텔은 기업연합(企業聯合)이라고도 한다. 카르텔은 가맹기업 간의 협정, 즉 카르텔 협정에 의하 여 성립되며, 가맹기업은 이 협정에 의하여 일부 활동을 제약받지만 법률적 독립성은 잃지 않는 다. 일반적으로 카르텔은 가맹기업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결성되나, 국가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결 성되는 경우도 있다. 협정내용이 어떤 부문에 관한 것인가에 따라 구매카르텔·생산카르텔·판매카 르텔로 구분되며, 구체적으로는 판매가격·생산수량·판매지역 분할·조업단축·설비투자제한·과잉설 비폐기·재고동결 등에 관하여 협정을 맺게 된다. 자본주의 기업의 경쟁이 격화하던 1870년대 이 래 특히 유럽 지역에서 급속히 발전하였는데, 경제의 비효율화, 국민경제발전의 저해 등에 미치는 폐해가 크므로, 국가에 의한 강제 카르텔의 경우 외에는 일반적으로 각국은 금지·규제하고 있다. 한국도 이 폐단의 심화를 막기 위하여 1980년에 제정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로 통제하고 있다. 트러스트는 기업합동·기업합병이라고도 한다. 카르텔보다 강력한 기업집중의 형태 로서 시장독점을 위하여 각 기업체가 개개의 독립성을 상실하고 합동하는 것을 말한다. 트러스트 라는 용어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성행한 기업합동의 하나의 특수형태에서 유래한 다. 즉, 당시의 기업활동에서는 기존의 여러 기업의 주주가 그들이 소유한 주식을 특정의 수탁자 (受託者:trustee)에 위탁함으로써 경영을 수탁자에게 일임하는 형식으로 실현되었다. 이 같은 방법 에 의존할 때, 수탁자는 자기자금을 거의 준비하는 일 없이, 다수 기업의 관리를 한손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고전적 트러스트 외에 기업합동의 형태로는, 기존의 여러 기업의 주식 중 에서 지배가능한 주수(株數)를 매수함으로써 지배권을 집중화하는 지주회사 형식, 기존의 여러 기 업이 일단 해산하고 자산을 새로 설립된 기업에 계승시키는 통합형식, 또는 어떤 기업이 타기업 을 흡수·병합하는 형식 등이 있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트러스트로 불리지 않으나, 통상은 이러 한 형식까지를 포함한 기업합동을 트러스트라고 한다.(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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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형태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개별 조합원들의 사적 소유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고 협동조합의 집합적 소유는 도착점이라 할 수 있다. 설립 초기 협동 조합은 조합원들의 출자금의 가치밖에는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발전하고 사업도 늘어남으로써 감가상각을 고려하더라도 적립금이 형성되면 서 상황은 바뀐다. 예컨대 조합원이 아주 많고, 사업 규모도 아주 크며 잘 되는 협동조합을 보면 적립금 대비 출자금의 비중은 점점 작아진다. 이렇게 볼 때 협동조합이 발전한다는 것은 집합적 소유가 점차 개인적 소유 의 땅을 흡수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도매상점은 조합원 모두의 소유가 되지만 특정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운영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협동조합은 개인적이지 않고, 나눌 수 없고, 양도 불가한 재산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하나의 지역사회 전체로 확대되고, 사회적으로 확대될 때 협동조합은 비로소 사회적 소유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소유권 유형
특징
출자금
조합원의 사적 소유
탈퇴시 환급
적립금(운영시)
조합원의 집합적 소유
비분할, 양도불가
적립금(청산, 해산시)
집합적(사회적) 소유
유사한 사업에 귀속
적립금(2차조직)
사회적 소유
비개인, 비분할, 양도불가
이것이 협동조합공화국의 이상을 가졌던 이들이 구상한 협동조합의 발전 경로이다. 그래서 협동조합운동의 전통에 따라 협동조합법이 제정된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 귀속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소비자생활협동
Ⅲ. 자세히 알아보기: 협동의 그릇, 협동조합 51
조합법에는 관련조항이 없었으나 최근 제정된 협동조합기본법에는 “정관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상급 협동조합연합회 또는 다른 협동조합에 기부할 수 있다” 로 되어 있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제56조 (잔여재산의 처리) 해산한 조합이 채무를 변제하고 잔여재산이 있을 때에는 출자좌수의 비율 에 따라 총회에서 정한 산정방법에 의하여 이를 조합원에게 분배한다. 다 만, 보건·의료사업을 하는 조합은 청산잔여재산을 조합원에게 분배할 수 없 다. 협동조합기본법 제59조 (잔여재산의 처리) ① 협동조합이 해산할 경우 채무를 변제하고 잔여재산이 있을 때에는 정관 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이를 처분한다. ② 제1항에도 불구하고 제60조의2제4항에 따라 조직변경 시 협동조합의 적립금으로 한 사내유보금은 정관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상급 협동조합연 합회 또는 다른 협동조합에 기부할 수 있다.
3. 운영 구조와 의사결정 방식
협동조합을 비롯한 결사체 조직의 운영구조는 거의 다 비슷하다. 사람들의 결사체로서 협동조합의 처음도 사람이고 끝도 사람이다. 그러하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의견이 중요하며 모두가 평등한 한 표를 가지는 민주적인 의사결정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모두가 모여 의논하고 모두가 함께 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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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모두가 함께 결정하지 않고 총회, 이사회, 대의원제도, 사무국 등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각각은 어떤 역할을 하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아보자.
1) 총회 (總會, general assembly)
보통 총회를 최고의사결정기구라고 한다. 그래서 협동조합 조직도를 그리 면 제일 꼭대기에 총회가 위치한다. 하지만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총회는 그야말로 협동조합이라는 회(會)의 사람들이 총집합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총회는 꼭대기에 위치한 위계구조가 아니라 조합원의 총합 이므로 조합원 한 명이 곧 총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서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업체를 통하여’라는 구절이 바로 총회의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협동조합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연구 중 이 총회에 대하여 이상한 논리를 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예컨대 협동조합은 ‘집단운영체제’이므로 전문성이 떨어지는 사람도 의사결정에 참여하며, 이로 인하여 의사결정에 시 간이 많이 걸리므로 비용이 많이 들어 주식회사에 비하여 효율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협동조합은 전문성 결여와 효율성 저하로 주식 회사에 비해 돈을 더 잘 벌지 못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약점을 가진다는 뜻이다. 우선 협동조합은 돈을 많이 벌어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조합원과 지역사회의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므로 주식회사보다 돈을 더 잘 벌고 못 벌고는 협동조합의 주된 관심이 아니라는
Ⅲ. 자세히 알아보기: 협동의 그릇, 협동조합 53
점을 전제하자. 그 다음은 전문성과 효율성의 문제이다. 이 지점에 대해 서양철 학의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론(politika)’ 3책 9장에서 총회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쉽게 설명하였다. “판단을 내리기 위해 단지 두 눈과 두 귀밖에 없으며, 행동하기 위하여 단지 두 발과 두 손밖에 없는 한 사람이 많은 조직구조를 가진 개인들의 모임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지하는 것은 참으로 불합리한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도 평범한 이들이 구성한 총회보다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총회는 가능한 한 가장 다양한 각도에서 문제를 살필 수 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각각 다른 경험으로 인해 다양한 관점이 생기는데 이것이 우정, 형제애 또는 사랑(philia)으로 결합된다. 이 과정은 과학보다 우월하다” 이렇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에서 집합적인 의사결정이 중요함을 강 조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주권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거나 비효율적이며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는 논리는 민주적 운영을 돈의 가치로 판단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더욱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두 눈과 두 귀에 근거해 판단하고, 두 손과 두 발로 행동한다’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총회가 단지 1인1표라는 의사결정의 평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눈과 귀를 열어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다각도에서 검토한다는 숙의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 deliberative democracy)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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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두 손과 두 발이라
는 표현을 통해 뛰어난 한 사람의 전문성이 아닌 여러 사람의 행동(협동)이 더 나은 운영을 보장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2) 이사회 (理事會, board of directors)
이사회는 글자 그대로 협동조합이라는 회의 일을 바르게 이끌 지도자들의 모임이다. 우리가 보통 임원이라고 하는 이사와 감사 등으로 구성되는데 평상 시의 운영책임단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사회는 명망가나 전문가들의 집단이 아니라 협동조합을 바르게 이끄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사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자신이 속한 협동조 합의 목적과 운영방식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조합원들의 필요와 열망이 무엇인지 가장 잘 살피는 것이다. 또한 협동조합과 같은 결사체조직의 이사는 사업의 집행을 책임지는 상임이 사나 집행위원장과 같은 직위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원봉사활동으로서 모든 조합원에게 열려 있으며 협동노동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이사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할 수밖에 없다거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해야 한다는 등 자격 요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이사회의 본질적인 임무 는 바르게 이끄는 것이므로 특정한 하나의 능력만 요구되지는 않는다. 대외적 으로 조직을 대표하는 대표성, 조합원을 대의하는 대의성, 결정한 사업을 집행 하는 전문성 등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므로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사회는 정치제도에서 국회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사회는 지역을 대표하는 이사, 성별이나 연령, 직업이나 경제적 수준 등 조합원의 특성을
Ⅲ. 자세히 알아보기: 협동의 그릇, 협동조합 55
반영한 이사, 협동조합 사업이나 조합원의 활동을 책임지는 이사, 조합원과 실무자 등 다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사 등으로 구성되며 대표성과 대의성, 전문성을 두루 갖추어 공동리더십을 발휘하는 장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이사회를 선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이사회의 책무와 관련한 것이다. 대표든 대의든 민주적 운영의 중요성은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오고가는 순환이다. 그러므로 이사회 는 조합원에 대하여 보고(report)의 책무를 가진다. 총회에서 살펴본 것과 마찬 가지로 이사회 또한 조합원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통제되어야 하며, 이를 실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사회의 논의와 결정사항이 조합원들에게 투명하 게 공개되어야 한다. 반대로 조합원은 이사회의 보고를 확인해야 하며, 필요 시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조합원들이 이사회를 경영책임자라고 간주 하며, 자신은 조직의 운영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이사회 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주식회사에서 회사의 속사정을 알 필요가 없이 투자 수익만을 노리는 주주의 자세이지 협동 조합 조합원의 자세는 아니다. 이사회가 협동조합을 바르게 이끄는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조합원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적 운영은 오고 감, 순환의 과정으로 실현되는 것이지 총회에서의 한 표가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란 점이 협동조합 민주주의의 특성이다. 3) 대의원제도
협동조합의 정체성으로부터 대의원과 대의원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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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세 가지 화두에서 살펴본 것 중 두 번째 화두인 어떻게 협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바로 협동조합 경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모든 조합원이 고민해야 할 것이지만 일상의 운영에서 가장 큰 책임을 가지고 있는 단위가 이사회이고, 총회의 장에서 조합원들이 그 결과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자본의 협동은 출자, 증좌, 조합비 납부 등이 있다. 그런데 누구는 증좌하고 누구는 증좌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노동의 협동은 임금노동자나 실무활동가로서 역할 하거나 자원봉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대의원이나 이사가 되어 협동노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드물까? 시간이 너무 없어서일까? 자본과 노동의 협동이 안 되거나 어려운 이유는 바로 생각의 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협동조합은 그냥 사업을 위해 누구는 노동만 하고 누구는 조합원활동 을 하고, 누구는 그냥 이용만 하고 있으면 돈이 필요할 때 제대로 돈을 모으지 못하고, 협동노동이 아닌 임금노동만 남게 될 것이며, 조합원은 내 물품만 소비하는 단순소비자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그러하니 평소에 늘 생각의 협동 을 만들어가야 하고, 이것을 조합원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있는 대의원이 해야 할 역할이다. 그러면 대의원은 어떻게 생각의 협동을 모아낼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세 번째 화두에서 찾을 수 있다. 조합원이 주인노롯을 한다는 것은 그냥 가입해 서 출자하고, 물품을 이용하고, 때로 소모임에 ‘참여’하거나 총회에 참석하여 손들고 투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객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지 온전히 주인의 자세가 아닌 것이다. 온전한 주인노릇을 하려면 우선 내가 공동으로 소유한 이 협동조합이 무엇을 어떻게 협동하는지 제대로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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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하며, 그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의원은 이 세가지 화두를 가지고 조합원을 만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가장 단순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천은 내 옆의 사람을 만날 때 나는 내 맘 속에서 “그 사람과 어떻게 협동할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만나는 마음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너는 이래서 나와 다르고, 너는 저래서 나를 불편하게 하고 등 그러한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사람인지라. 그렇다 하더라도 잊지 말자. 우리는 협동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4) 조합원 모임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을 위하여 쓴 책 ‘니코마쿠스 윤리학’에는 ‘우정에 대하여’라는 편이 있다. 그는 우정에 대해 한 부분을 할애할 정도로 정치공동체 에서 우정은 정의에 앞설 만큼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의 책을 많이 인용하는 이유는 그 철학자의 사상으로부터 오늘날의 협동조합 과 같은 결사체 조직의 이론적 토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우정과 정의는 같은 대상과 관련되어 있고 같은 사람에게 적용된다. 모든 결사체에서 어느 정도의 정의와 우정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신과 함께 항해하고, 전쟁터에서 는 당신의 곁에서 싸우는 사람을 친구로 여긴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떤 종류의 결사체든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친구로 대하는 것이다. 결사체가 넓어질 수록 우정의 척도도 넓어진다”(339쪽)라며 결사체와 우정의 관계에 대해 썼다. 또한 같은 책 318쪽에서 그는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도처에서 사람이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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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으로써 모르는 사람이 친구가 되는 관계에 대한 통찰을 담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이렇다. 협동조합에서 조합원 들은 친구 사이, 언니 오빠나 형 동생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공제조합을 영국에서는 friendly society, 즉 우애조합이라고 부른다. 피로 맺어진 인연도 아니고 결혼과 같은 제도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 만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과 같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조합, 그러나 그 안의 사람들은 직업이나 신분, 학력과 상관없이 평등하기에 우애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협동조합이 설립될 때는 대부분 서로 아는 사이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업이 확대되고 조직이 커져 조합원이 확대되면서 모르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러다 보니 서로 생각의 협동을 이루어내기가 어려워지고, 그러면서 하나 둘 멀어지 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협동조합은 단지 사업을 통한 경제적 이익만 성취하면 그만인 조직일 수 없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사람들의 뜻과 의지로 운영되기에 그들 간의 생각의 협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기에 조합원 모임의 의의가 있다. 회의 때 만나 몇 시간 토론한다고 금방 생각이 모아지지 않는다. 평소에 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조건에 처해 있는지 알아야 그 사람의 생각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만나서 같이 공부도 하고, 생산지 방문도 가고, 요리를 배우거나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고민거리를 나눌 뿐 아니라 때로는 우리 지역의 문제를 나누며 서로 알아가는 것이다. 사귀는 과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행이라는 표현 을 쓴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먼 길을 가기 위해 한 배를 타고 가면 상인들과도 친구가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사람을 사귀고 친구가 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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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협동조합에서 조합원모임은 회의나 토론을 통해서만은 알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하는 과정이다. 삼삼오오 그룹을 만들어 이런 저런 공통의 활동을 하고 공통의 기호를 발견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며 ‘공동의 것(commons)’을 넓히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삼삼오오는 시간이 지나면 확대될 수도 있고 소멸되어 또 다른 삼삼오오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그렇게 관계에 기반한 활동을 하는 것이 협동조합이며, 이러한 모임이 잘 운영되면 대의원제도나 이사회, 총회 또한 잘 운영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위한 배려를 하기 어려우며, 그럴 경우 논의하여 결정하는 것도 참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합원 모임은 협동조합의 조직 체계는 아니지만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풀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림 2> 협동조합의 구조
모임
모임
모임 조합원 총회 이사회 모임
대의원 제도 모임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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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한살림의 협동운동 돌아보기 : 저항과 건설의 한살림운동
유영모 선생은 모든 사상과 철학은 ‘미정고(未定稿)’라 하셨다. 미정고는 완성되지 않은 원고, 아직 못다 쓴 원고, 지금도 쓰고 있는 원고다. 한살림도 그렇다. 한살림선언은 시작을 했을 뿐이다. 생명은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Ⅳ. 한살림의 협동운동 돌아보기: 저항과 건설의 한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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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말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로 가기 위해 진통을 겪던 격변기. 학생과 청년들이 거리로 나가 연일 민주주의를 외치며 독재권력에 저항할 때다. 그 시기에 허허벌판과 같았던 제기동에 ‘한살림농산’ 간판을 내걸고 시작된 한살 림사업-운동.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가 목청껏 외쳐도 시원찮은 판에 쌀가 게를 연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 바닥에 올라와 쌀자루를 지고 석발기(石拔機)를 돌리는데, 몸과 마음은 길바 닥을 향하는 거예요. 정작 소비자들은 찾아오지 않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지금 나라 일이 급하니까 이것부터 해결하고 나중에 한살림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5)
저항의 시기에 한가롭게 쌀가게 차려 장사나 하고 있는 꼴을 보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장사가 잘되면 그나마 낫겠지만 사회 상황도 별로 좋지 않고 아직 여건이 제대로 성숙되지 않았기에 어려움이 컸고 그만큼 고민과 갈등도 많았을 것이다. 가게는 손님이 와야 장사가 되는 법인데 외지에 있는 가게 문턱이 닳을 정도로 사람이 모이기는 힘든 일. 찾아오지 않으면
5) 박재일, ‘언제나 생명 가진 모든 존재와 함께 – 박재일 선생님이 들려주는 무위당 이야기’,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녹색평론사, 2004,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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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야 하고, 찾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시작 된 것이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이다.
<사진 3, 4> 87년 민주화운동과 한살림농산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출처:한살림)
뚜렷이 구별되는 이 두 이미지는 겉으로 보면 방향이 다른 두 가지 운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가 가진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어느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독재권력에 의해 억압과 탄압이 이어졌고, 경제 적으로는 산업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비인간적인 노동에 맞서 노동조합이 조직 되기 시작하였다. 도시를 중심으로 보면 학생과 노동자, 도시빈민 운동 등이 활성화되고, 언론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위한 운동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그러 나 도시를 벗어난 농촌지역에서 모순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독재정권하 에서 추진되는 산업화는 농촌과 농업을 희생하여 치러지는 행진이다. 농업은 산업의 역군들을 먹여 살리는 식량산업이며 농민은 그 식량산업의 생산자로 여겨져, 공장의 노동자가 가혹한 노동에 인간성을 상실해갈 때 농촌의 농민은 대량생산의 기계가 되도록 강제되었다.
Ⅳ. 한살림의 협동운동 돌아보기: 저항과 건설의 한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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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민주화와 자급, 저항과 건설, 이렇듯 달라 보이는 여러 문제의 기저에 흐르는 복잡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이해할 때 한살림운동과 그 운동을 시작한 사람 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시대로 돌아가 사회 속에서 한살림이 탄생한 역사를 짚어보자.
1. 한살림 협동운동의 선구자
한살림의 생명협동운동은 결사체의 뜻과 방향을 세우는 사람들의 모임과 그 뜻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이 결합된 형태이다. 그것은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실천이 아니라, 생각을 모으고 그것을 드러내어 실천에 영감을 주고, 또 다시 학습과 토론을 통하여 생각을 다듬고 새로운 실천을 모색한, 생각과 실천의 오고감의 과정이었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회고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면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애초에 행동이 있기 전에 그것을 생각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것 또한 그 생각 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오랫동안 협동조 합을 비롯한 사회적경제 조직에 대해 연구한 이 분야의 저명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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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회적경제를 말할 때 어떠한 기업 활동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 기업을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며, 사회적경제는 참여 주체의 생각과 이를 공유하기 위한 교육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경제는 ‘교육에 기반을 둔 경제운동’이 아니라 ‘경제에 기반을 둔 교육’이며 궁극적으로 사람을 해방하기 위한 운동이 그 목적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과 실천 간의 상호 연계가 중요하다.” - 쟝 프랑수아 드라프리(Jean-François Draperi), 사회적경제국제리뷰 『RECMA』 편집위원장6)
그러면 우리는 지금부터 그 생각과 실천의 상호연계 혹은 오고감이 어떻게 한살림이라는 새로운 운동을 만들었는지 살펴보자.
1981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이 “더 이상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선언하며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선포한 시기.
그 나라의 협동조
합운동이 탄압을 받고, 미국의 비영리단체(NPO)들의 보조금이 삭감되기 시작 한 그 시기. 지구의 다른 한편 한국이라는 나라는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열망하던 사람들의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그 시기, 민주화운동의 중심인 대도시가 아닌 작은 도시 원주에서 ‘원주사람들’이 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운동을 예고하는 문서가 발간된다. ‘생명의 세계관 확립 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제호가 붙은 이 문서는 1980년에 원주캠프에서
6) 이 글의 출처는 2013년 6월, 성공회대학교 시민사회복지대학원의 해외연수 후 발간한 「사회적경 제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보고서이다.
Ⅳ. 한살림의 협동운동 돌아보기: 저항과 건설의 한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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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된 사회운동인 민주화운동과 지역개발운동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작성되었 다. 1980년 9월에 김지하 시인에 의해 초고가 작성된 이후 무위당 장일순 선생 등이 함께 읽고 토론하며 1981년 상반기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원주보고서를 작성한 원주사람들의 생각은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들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미 77년경이다. 한살림농산을 설립한 박재일 선생은 당시의 고민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농업이 경제가치에 종속되다보니까 비료, 농약 때문에 농토가 망가지고 환경이 파괴되고, 농민은 농약에 중독되고, 농산물이 독성에 오염되니 이게 아니라는 생 각이 들게 되었지요. 사실 초기에는 기존의 농민운동적 시각에 따라 농민의 사 회적 권익을 회복하기 위해서 억압구조를 깨야겠다는 생각에 머물렀는데, 무위 당 선생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그것만으로는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거예요. 사회, 사물들 속에 있는 상생(相生)의 관계를 기초로 세계를 보 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보게 된 것이지요.”
원주사람들은 보고서 완성 후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학습과 더불어 다양한 해외 연수도 추진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85년 <원주소비자 협동조합(현 한살림원주생협)>과 1986년의 <한살림농산>의 설립으로 이어지 는 근거가 되었다. 특히 한살림농산의 설립취지문을 보면 한살림농산이 원주 보고서에서 선언한 새로운 운동의 이상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갈수록 더해가는 분열, 불신과 공해가 만연하는 죽임의 삶을 협동과 화합,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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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가득한 살림의 삶으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려 는 한살림 운동을 펼쳐 나가고자 한살림농산을 개설한다.”
이뿐 아니라 1988년 4월 21일에 창립된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 은 정관에서 “생명살림의 실천으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생산방법과 생활 양식을 지양하고, 사람다운 협동의 삶을 실현하기 위하여 먹을거리를 살려내 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나가려 한다.”며 이를 더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한살림공동체소비자협동조합>이 유기농업이 아닌 ‘생명농업’을 지향하고 물품의 선정기준에서도 ‘생명의 본성에 따른 생산방법과 삶의 방식을 위한 노력이 담겨 있는가’, ‘인간간의 협동적 노력이 담겨 있는가’, ‘농업과 농민생활 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가’ 등을 중시한 것에서도 그런 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2. 한살림의 탄생철학 ‘한살림선언’
모든 나라에 탄생신화가 있듯이 어떤 조직 또한 그것을 만든 탄생철학이 있다. 단군신화가 한국의 탄생신화이듯 한살림의 탄생철학은 한살림선언이다. 정도전은 ‘민(民)’이 ‘본(本)’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선을 건국하였고, 그의 사상과 철학은 조선경국전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하 여 독립을 갈구하던 열사 33인은 기미독립선언문에 조선의 독립과 세계평화 를 위한 염원을 담아 만방에 선포하였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한살림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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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데는 한살림선언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
“한살림선언은 헌법이 아니라 탄생철학이다”
혹자는 한살림선언이 한살림조직과 구성원들의 ‘헌법’과 같은 위상을 가진 다고 생각한다. 헌법이란 개념은 역사적 발전과정과 사회적 접근방법에 따라 다르게 분석되거나 정의되지만 어쨌든 법이란 ‘제도’이지 ‘정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선언의 성격과는 다르다. 또한 헌법이란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국가의 구성·조직·작용과 기본권보장에 관한 기본적 원칙을 규정한 근본법이며 최고 의 수권법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한살림선언이 한살림의 사람과 조직의 머리 위에 존재하며 전권(全權)을 가지고 있는가? 그 렇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한살림 협동운동조직은 바로 사람들의 결사체이기 때문에 그 안의 사람들이 최고의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살림선언은 법이 아니라 탄생철학이기에 사람과 조직을 지배할 수도, 억압 할 수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것을 잊고 산다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고, 부정한다면 버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탄생철학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잊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묘한 힘이 있다. 그 이유는 사람과 마찬가지도 조직 또한 탄생이란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며, 생명이란 바로 ‘생(生)의 명(命)’이기 때문이다. 생의 명이란 왜 태어났 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놓치는 순간 내가 나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특히 어떠한 조직이나 집단이 탄생철학을 가질 때는 그것은 각기 처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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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이 다른 사람들이 ‘운명공동체’로 느끼게 하는 힘을 가진다. 운명공동체를 영어로 ‘shared destiny’, 불어로는 ‘communauté de destin’이라고 한다. 영어 의 의미는 ‘공유한 운명’이란 뜻이며, 불어는 우리말과 똑같은 ‘운명공동체’이 다. 사회적경제의 저명한 학자인 벨기에의 드푸르니(J. Defourny) 교수는 사회적 경제가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집단적인 정체성’ 혹은 ‘운명공동체’ 정신이라고 한 바 있다. 많은 이들이 협동조합은 필요를 충족시 키는 조직이라 하며, 필요가 있어야 모이고 일이 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역사 적으로 살펴보면 협동운동을 추동하고 발전시킨 힘은 단지 ‘필요의 조건’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언론에도 많이 소개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의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Mondragon Cooperative Complex, MCC)’가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날 거대한 협동복합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스크족의 집단적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운명공동체의식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1) 선언은 운명공동체의 표현
“한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공산당 선언』만큼 전 세계에 널리 읽히며 또한 현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 정치적 문서는 아마 없을 것이다. 카를 마르크 스(Karl Marx),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작성한 이 문서의 프랑스 어판은 1848년의 6월 반란 직전에 파리에서 출판되었으며, 최초의 영역본은 1850년 런던에서 간행되었다. 이리하여 『공산당 선언』은 국제적 노동운동 및 혁명운동에 관한 지침으로 또한 사회주의의 이론적 기초로서 불멸의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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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1959년까지 8개 국어로 출판되었다는 보고가 있는 데, 사회주의 국가뿐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존재 양태에도 커다란 영향 을 미쳤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이 선언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나라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그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었던 것일까? 그 까닭은 아마 그 많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만국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말했기 때문이며, 그들의 해방을 예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방의 무기는 총칼도 아니요, 자본도 아닌 ‘단결’이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몰락하였고, 그 이념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이미 인정되 었기에 공산당선언의 저자들이 가진 사상의 옳고 그름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은 선언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 그리하여 나 하나가 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나의 열망이 실현될 수 있는 친구를 얻게 하는 것. 그러한 의미에서 한살림선언을 다시 보며 그 의미를 새기는 것은 단지 낡은 족보를 뒤적거리는 선비의 향수어린 습관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30년 역사가 지난 이 시기에 한살림선언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나는, 우리는 어떤 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그 명을 어떻게 받아들이 고 살아왔는지, 지금 내게 그 명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극복 하고 새롭게 할 것인지’ 그렇게 살아있는 정신으로 물어보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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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외의 선언과 헌장의 전통
한국에 한살림선언이 있었다면 사회적경제의 개념이 생긴 프랑스의 경우 1900년대 초부터 이미 많은 지식인들이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적 변화를 갈망 하며 선언을 공표하는 전통을 가졌다. 특히 협동조합운동의 실천을 바탕으로 연구를 축적해갔으며, 그러한 탄탄한 이론적·실천적 성과를 토대로 선언의 형식을 통하여 분명한 사회변화의 전망을 제시해왔다. 특히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사적인 변화와 전환의 시기, 협동조합이 ‘어떻게 미래 사회의 평화공존에 기여하는 사회경제조직으로서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1920년대에는 ‘협동조합공화국’이라는 이상을 담은 서적이 출간되어 정치적 공화국의 실현에 더하여 경제에서의 공 화국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대학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협동조 합운동의 올바른 발전을 위한 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7). 다른 한편 프랑스의 경우에는 사회적경제부문이 헌장을 제정함으로써 자신 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스스로의 다짐으로 삼는 전통 이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사회적경제조직은 70년대 초부터 연합조직을 구축 하며 사회적경제 부문(sector)으로 인정되었다. 1970년에 협동조합과 공제조 합이 연합한 후 1976년에 결사체까지 확장되면서 1980년에 ‘전국공제조합협 동조합결사체위원회(Comité national de liaison des activités mutualistes, coopératives
7) 이 선언의 전문은 부록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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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associatives, CNLAMCA)’가
창설되어 프랑스 정부 및 국제기구에 대표성을
가지게 되었다. 1977년 CNLAMCA는 이미 20만 명의 피고용인을 두고 2천만 명의 조합원(회원)을 포함하는 조직을 형성한 후 1980년에 ‘사회적경제 헌장’ 을 제정하였다.
사회적경제 헌장 (부분 발췌) (CNLAMCA, 1980) 제 1 조 사회적경제기업은 민주적으로 운영되며, 상호 연대하고 평등한 의무와 권리를 가지는 회원으로 구성된다. 제 5 조 사회적경제기업은 특별한 배분방식 및 이익분배 제도를 가진다. 사업의 잉여 는 기업의 성장과 기업의 통제권을 가진 회원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 기 위한 목적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제 7 조 사회적경제기업은 궁극적 목적이 인간에 대한 봉사임을 천명한다.
그런데 1981년 사회당정부가 ‘사회적경제대표부(Délégation à l'économie sociale)’를 두면서 사회적경제는 프랑스 법의 규제대상이 되며 제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9년 CEE는 국무위원회에 사회적경제조직연합을 인정하는 관보를 발표하였으나 유럽 차원의 명칭이 통일되지 않은 이유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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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협동조합, 공제조합, 결사체, 재단(CMAF)연합’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1991년에 CNLAMCA는 선언문을 발표하며 일반기업과의 차이를 분명히 한 바 있다. 이 선언문은 ‘사회적경제기업은 인간에 봉사하기 위한 연대의지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창출된 이윤은 인간을 위한 봉사에 사용하는 것을 우선으 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3) 한살림선언 깊이 들여다보기
⑴ 시대적 배경 및 취지
한살림선언이 발표된 시기는 1989년이지만 이 선언의 공동집필자들은 1980년에 ‘원주보고서’를 낸 바 있다. 그러니 한살림선언은 거의 10여 년의 고민 끝에 세상에 외칠 수 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원주보고서에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큰 방향을 세웠다면 한살림선언에 서는 이러한 방향에 길을 내어 주며 운동이 되기 위한 원칙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80년대였을까? 그 까닭은 70년대라는 커다란 문명의 위기 를 겪은 후에 오는 각성의 시기였기 때문이다. 70년대는 73년에 발생한 ‘오일 쇼크(oil shock)’로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시작된 시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이미 68년의 베트남전쟁 및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진 ‘68혁명’에서 그 징후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경제의 역사에서 보 면 70년대는 석유문명의 위기를 겪은 후 생태적 각성이 일어나고, 만연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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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배제에 대항하기 위하여 북부국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대안경제 운동인 ‘연 대의 경제’가 탄생한 시기이다. 또한 남부국가에서는 독립 후에도 무역을 통한 경제적 종속이 지속되어 산업화된 북부국가의 성장모델이 아닌 다른 개발모델 을 추구하며 ‘민중경제’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듯 70년대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격변의 시기였으며 문명사적인 전환 의 시기이기도 했으나 그 전환의 흐름은 80년대에 접어들어 세계화와 신자유 주의라는 기형적인 문명으로 정착되었다. 앞서 서술했듯 협동조합과 비영리 영역에서 벌어진 일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시작된 ‘세상의 상품화’의 단면일 뿐이다. 세상의 상품화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시장의 계약관계에 의해 지배 되고, 기업에서 생산된 제품만이 아니라 자연까지도 다 시장에서 팔기 위한 상품이 되는 현상을 뜻한다. 그리하여 과거 사회적으로 성취한 무상의 영역인 교육, 보건의료, 교통 등이 민영화(시장화)되었으며, 문화와 전통도 인류 공통의 유산으로 보존되지 않고 팔기 위한 상품이 되지 못하면 버려지게 되었다. 지구 의 허파인 아마존은 개발로 원주민의 삶이 붕괴되고, 전 세계를 떠도는 값싼 노동력은 전쟁과 더불어 투기자본에 의해 경제가 붕괴된 지역의 노동자들이거 나 식량난민들이 되었다. 한살림운동의 선구자들은 80년대 초, 세상이 죽임의 문명을 치닫고 있을 때 살림의 문명을 열망하며 뜻을 세우고 대규모 협동운동을 펼치고자 했다. 첨단 산업문명이 발달하고 세계화가 시작되던 시절, 기계를 돌려 이윤을 추구 하기보다는 낫과 호미, 쟁기를 들고 땅을 일구는 농업살림을 택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성장사회가 열리던 때,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먹거리로 밥상 살림을 이루고자 했으며, 쓰고 버리는 일회용 시대에 생산과 소비와 유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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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되고 자원이 순환되는 생명살림의 원칙을 세웠다. 사람의 노동이 언제든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되어 거래됨으로써 이윤추구가 최상의 목적인 시장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시절, 이윤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이는 무기도 거래되는 시장이 팽창하던 시절, 공업대신 농업을, 이윤대신 생명을, 돈 대신 사람을 가치로 삼는 사회를 향한 운동의 싹을 띄웠던 것이다. 선언이 가지는 의미는 그 내용만이 아니라 발표된 시기와 운동의 좌표를 어떻게 설정했는가 하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죽임의 장이 전장만이 아니라는 것, 정치제도만이 아니라 산업(경제)이 죽임의 장이라는 점을 인식했다는 것이 다. 그리하여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는 농약을 쓰도록 하고 심지어 정부가 이를 장려하는 죽임의 정치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죽임의 정치에 대항한 운동이 정당운동이나 생활문화운동의 형태가 아니라 ‘대규모 협동운동’이라는 ‘살림’운동의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이러 한 점에서 한살림선언은 생협운동의 선구자 역할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일상 의 관계의 변화, 생활정치의 필요성, 살림의 공간의 재정치화의 과제를 제출하 는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가 겪었던 문제인 이윤에 희생되는 생명의 위기를 알린 전조가 되었다는 점은 선언의 의미가 현 시점에서 더욱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지점이다.
⑵ 선언의 구성과 해석
‘한살림모임’ 명의로 발표된 선언은 ‘생명협동운동선언문’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선언의 초안이라 할 수 있는 원주보고서의 제목이 ‘생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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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었고, 선언의 발간취지문에서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이에 입각한 새로운 생활양식의 창조를 위한 대중적 협동운동 을 구체적이고도 광범위하게 펼쳐나갈 것”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다. 1장에서는 ‘산업문명의 위기’를 진단 하고, 2장에서는 그 문명의 사상적 토대인 ‘기계론적 모형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하며, 3장에서는 이에 대응할 사상적 토대로 ‘전일적(全一的) 생명의 창조 적 진화’를 설정하였으며, 4장에서는 ‘인간 안에 모셔진 우주생명’이라는 생명 사상을 설명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러한 생명의 세계관의 확립에 기초하여 협동적 생존을 구현하기 위한 ‘한살림’운동의 전망을 밝힌다. 선언 전체를 해석하기엔 지면의 한계가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선언이 제기한 중요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1장에서는 산업문명의 위기를 사람의 비참한 노예상태에서 찾는다. 이는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사회적경제라는 학문이 처음으로 탄생했을 당시의 문제의식과 유사하다. 샤를 르 지드(Charles Gide)는 산업혁명 후 임금노동사회로 인하여 사람과 사회가 비참한 상태에 놓였으나 기존의 정치경제학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떠한 언 급도 없었다는 진단으로 ‘사회적경제’라는 학문의 등장을 설명한다.8) 마찬가 지로 한살림선언은 사회의 변화를 노예상태로 변한 사람의 존재, 생명의 의미 의 변화를 문명의 위기로 본 것이다, 혹자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발전하 고 신분제가 폐지된 평등사회에서 노예상태라고 진단한 것이 과하다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사회는 과거 신분제도에 기반한 노예가 아니라
8) 김신양, ‘한국에서 사회적경제의 의미’, 한국사회적경제연구회 운영위원회 워크숍 발표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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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Arendt)9)적 의미의 노예, 즉 자유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정치행동 (action)이나 문화를 만드는 작업(work) 활동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생계를 위하
여 노동(labour)이라는 활동을 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에 서 시민은 정치를 담당하고 생계는 노예가 담당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사는 삶은 노예에 다름 아닌 삶으로 간주되어 ‘노예상태’라고 한 것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투표권 획득 등 정치제도의 측면에서는 자유로운 시민권을 누리고 있고 보편 교육의 혜택을 받아 자유로 운 삶의 선택이 가능한 듯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적인 문제에 예속되어 있고 소비의 자유를 진정한 자유로 간주하는 인간 이 되었기에 이는 경제의 노예에 다름 아니라는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로 중요한 개념은 ‘생명’에 대한 성찰이다. 3장에서 생명은 ‘자라는 것’이고, ‘부분의 유기적 전체’이고, 무엇보다도 생명은 ‘정신’이라고 해석한다. 선언에서 생명의 개념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저자인 함석헌 선생의 ‘뜻’과 상응하며, ‘전체’는 사회, 세상, 역사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 에서 생명은 유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에서 비롯된 ‘씨알’사상과도 조우한다. 그리고 생명의 각성은 씨알사상에서 말하는 전체의 자리에 선 인간, 즉 역사적 존재임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인간이고, 아렌트의 의미로 해석해보면 진정 자유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인 행동(action)하는 인간인 것이다, 다섯 번째 장은 취지문에서 밝힌 대중적 협동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한살림 운동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한살림은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이며, 자연
9) 한나 아렌트(Hanna Arendt)의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의 세 유형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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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생태적 각성이고,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각성이다. 이 세 가지의 각성 으로부터 출발하는 한살림운동은 결국 생명(나)-사회(공동체)-자연(생태) 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를 연결해 보면 ‘나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지구를 넘어 우주적 존재이니 역사적 인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며, 그 ‘나’가 모인 사회는 이기적인 개인의 집합이 아닌 운명공동체로서 살아가며, 그 운명공동 체의 삶의 터전은 개발의 대상이나 자원이 아니라 사람과 마찬가지로 귀하고 소중한 생태로서 사람과 상호작용을 한다’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살림운동이 본래 지향했던 바는 사회적경제의 이론적 토대가 된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사상이나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이론과도 상통한다.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하우(hau)’라는 마오리족의 용어를 빌 려 재화와 서비스의 순환구조를 설명한다. 하우란 ‘주어진 것의 영혼, 최초 증여자의 영혼’이다. 그러니 사람과 사물, 주체와 대상 간 확연한 구분이 없으 며, 사물이나 자연 또한 인격화된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선물을 줄 때 “내 마음이야”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그것을 주는 나의 마음을 받아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뿐 아니라 시험을 보는 이에게 쩍쩍 달라붙는 엿이나 철썩 붙는 찹살떡을 선물하는 것도 합격하기를 바라는 주는 이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다른 한편 생명에 대한 우주적 각성이나 자연에 대한 생태적 각성은 칼 폴라니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는 경제의 기원을 살펴보면 ‘사람의 살림살이(the livelihood of man)’로서 ‘물질 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의존하고, 사람과 자연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살림은 폴라니의 살림살 이로서의 경제와도 통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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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한살림선언과 사회적경제
한살림선언의 핵심 사상은 동학의 영향이 크다. 동학은 서양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상체계에 대응하여 형성된 한국 고유의 사상이다. 그러나 동학은 서양의 기독교사상의 탁월한 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있다. 한살림선 언은 이러한 동학사상에 기반함과 동시에 동서양학문의 축적된 성과를 바탕으 로 정리되었다. 따라서 선언에서 제시한 주요 개념은 사회적경제의 관점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앞서 한살림운동의 다른 이름을 생명 협동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선언에서 보여진 주요한 개념을 통해 생명협동운동의 원칙을 정리해보자. 첫째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이다. “우주와 인간은 협력하고 동역(同役)함으로 써 창조적 진화를 이룩해 나가는 것”이다. 이를 장일순 선생은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한다. “우리가 여기 모두 소비자인데 농사짓는 사람이 없으면 먹고살 수 있어요? 또 소비자가 없으면 농사꾼이 생산할 수 있어요? 바로 그런 관계다 이 말이야. 이게 없으면 저게 없고, 이게 있으면 저게 있고 우주의 모든 질서는, 사회적인 조직은 그렇게 돼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 누구를 무시하고 누구를 홀대할 수 있느냐 말이지.”10) 그래서 “예전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음을” 이라 표현하지 않았던가? 이렇듯 생명은 연결되어 있고, 관계 속에 존재하니 그 본성이 협동일 수밖에 없다. 그 협동은 사람과 사람을 넘어, 자연과의 상호 작용에까지 이르는 크고 넓은 협동이다.
10) 최성현, 『좁쌀 한 알, 장일순』, 도솔출판사, 2004, 3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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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불연기연(不然其然)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아니다. 그렇다’인 데 이는 우리가 반대라고 여기는 것의 의미를 뒤집는 논리이다. 예컨대, 우리는 ‘알다’의 반대말이 ‘모르다’라고 배운다. 하지만 ‘옛날엔 나는 너를 몰랐는데 지금은 너를 안다’에서 보듯 시간의 차이를 두고 보면 ‘몰랐다’는 ‘아직 알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요즘 우리가 흔히 ‘다르다’를 ‘틀리다’라고 잘못 쓰는 경우처럼, 알다와 아직 알지 못하다는 반대라기보다는 시간에 따라 상태가 다른 것이다. 그러니 어느 한 시점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변화발전하는 시간과 공간, 관계 속에서 바라보면 대립이나 반대의 시각이나 옳고 그름의 이분법이 아닌 ‘다름’의 관점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다양 성을 존중하는, 다원주의의 원리로서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 개념은 향아설위(向我設位)이다. 조상이 아니라 나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니 언뜻 보면 역사의식이나 전통을 무시하는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존재는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으로 부터 온 것이고, 나의 부모님은 또 나의 조부모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니 내 안에 나의 부모님, 조부모님의 유전자와 DNA가 이어지는 것이기에 내 안에 그들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는 나의 존재를 역사 속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고, 나를 모신다는 것은 나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세우는 과정이다. 이러한 인식은 결사체 운영원리의 핵심으로 나의 자발적인 의사에 기반하여 너와 만 나 우리가 되는 것이지, 내가 없이 우리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스스로 말미암는 것이 자유(自由)이니 향아설위는 결사체의 토대가 되는 주체 의 자유함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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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이화(無爲而化) ⇨ 협동의 원리 “우주와 인간은 협력한다. 전일성의 자각은 관계 속의 나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불연기연(不然其然) ⇨ 다원주의, 민주주의의 원리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이고 다양성이다” 향아설위(向我設位) ⇨ 행동의 주체인 나의 자유함 “역사적 인식 속에서 나를 세운다”
⑷ 한살림선언 다시 쓰기
한살림선언의 의의는 한살림생협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언은 한국 사회운 동이 저항의 운동에서 새로운 문명의 전환을 만들어가는 전환의 운동이 되기 를 호소했다. 그리고 그 호소는 미래에 보편화될 운동의 예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살림선언은 한국 사회적경제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료가 된다. 정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의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만들어 나가고, 이를 위해서는 생활세계에서 살림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임을 일깨웠다. 그런데 많은 조합원들이 한살림선언은 읽기 어렵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선언의 내용은 많은 학문과 사상을 아우르고 있으며, 지식인과 전문가들 이 사용하는 어려운 개념들이 곳곳에 포진해있기 때문이다. 한살림선언이 살 림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으나 삶의 현장에서
Ⅳ. 한살림의 협동운동 돌아보기: 저항과 건설의 한살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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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고 자각하기에는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한살림선 언은 대중운동을 이끄는 지침서가 되기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운동이 란 글로 읽고 머리로 이해해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법. 소수가 이해했었지만 생활과 실천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사람에서 사람으로 계승되고 전파되어 왔던 것이다. 그 힘은 결국 사람에 있었으니, 한살림선언이 한살림운동이라는 결사체의 토대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사람도 변하는 데 여전히 지나간 시대의 인식과 소수 전문가의 화법으로 서술된 이 선언문을 붙들고 새로운 운동의 좌표를 설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선구 자들의 과오가 아닌 후세대의 몫으로 두어야 할 과제이다. 향아설위라 하지 않았던가? 선언에 담긴 생명협동운동의 원칙은 선구자들, 선배들을 향해 잔을 들 것이 아니라 내게 잔을 올려야 한다. 그러니 조상을 모시듯 한살림선언을 모셔둘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 있도록, 새로이 창조하는 주체는 ‘나’ 여야 한다. 나는 그 탄생철학을 어떻게 재창조할 것인가? 한살림선언 다시쓰기 가 살림운동의 길을 안내하는 별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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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함께 생각해보기 : 한살림다운 협동조합운동을 위한 제안
“총회에서는 토론도 없이 결정사항을 채택하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지도자들을 뽑는 척한다. 그게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물론 선거 원칙을 가져야 한다. 그 러나 거기에 가치와 토론의 실천을 수반해야 한다. 또한 총회에서 회계보고를 승 인한다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변화를 성찰하고 우리가 그러한 변화에 적 절히 대응하고 있는지 성찰하는 과정이다.” - 위그 시빌(프랑스 사회연대경제 씽크탱크 Le Labo de l'ESS 대표)
Ⅴ. 함께 생각해보기: 한살림다운 협동운동을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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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에 첫 협동조합이 등장한 이후 약 270년이 지났다. 혹자는 협동조합 의 역사가 150년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마 협동조합의 운영원칙이 정립되기 시작한 영국의 로치데일공정개척자로부터 역사를 카운트다운 했기 때문일 것 이다. 하지만 실제 그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다. 그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많은 조직이 명멸을 거듭했지만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는 곳도 있다. 그중 하나가 캐나다의 데쟈르뎅운동이다. 알퐁스 데쟈르뎅(Alphonse Desjardins)의 이 름을 따서 만든 데쟈르뎅금고(Caisse Desjardins)는 세기가 바뀐 1901년 시작하 여 2017년인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동안 변한 것은 무엇이고 또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아니 변하지 않은 그 무엇이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유지될 수 있도록 한 것일까? 어떻게 한 사람의 생각이 많은 사람들의 운동이 된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이 안내서의 마지막은 한살림다운 협동조합이 되기 위한 리더십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모두가 함께 가기 위한 길을 내기 위해서 누군가는 먼저 미지의 땅에 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 하지만 그 누군가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기에 지난날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성찰해보며 몇 가 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구체적인 활동의 역사가 아닌 굵직굵직한 흐름을 중심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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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 속의 한살림
1) 한살림의 어제 : 위기의 시대에 탄생한 새로운 운동
한살림 역사의 시작으로 여기는 한살림농산은 1986년에 설립되었고, 한살 림정신으로 여겨지는 한살림선언은 1989년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그 선언의 작성자들은 이미 1980년에 원주보고서를 작성하며 생각을 다듬었다. 그렇다 면 한살림의 선구자들은 1980년 이전에 모임을 가지고 활동을 한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즉 한살림의 생각이 싹튼 것은 70년대이고 무르익은 시기는 80년 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살림 탄생의 배경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는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1970년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그 위기의 핵심은 오일쇼크로 시작된 석유위 기이자 자원의 위기이다. 그리고 위기는 석유를 기반으로 한 산업구조의 위기 였으므로 이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내용으로 한 생태운동이 탄생한 시기이다. 또한 70년대는 프랑스의 68년 5월혁명의 영향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 한 시대이다. 68혁명은 문화혁명이라고도 하는데 기존의 제도가 사람들의 불 신을 사기 시작하여 권위주의 타파, 양성평등 및 교육개혁 등에 대한 요구가
Ⅴ. 함께 생각해보기: 한살림다운 협동운동을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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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 나왔다. 이로 인하여 새로운 사회운동이 탄생했고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 였다. 다른 삶을 살기 위한 대안적인 운동이 등장했는데 우선 자각된 여성의 사회참여 및 여성운동이 활성화되었고 교육개혁과 더불어 시민주체의 다른 교육운동도 시작되었다. 또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중심으로 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하여 지역불평등이 심해지면서 내 지역에서 내 일을 하며 살고자 하는 청년들이 농업을 기반으로 ‘지역에서 살기’운동을 시작하였다. 다른 한편 식민지에서 독립한 남반부의 여러 나라에서는 북부의 선진국들과는 다른 발전 모델을 추구하며 내발적 지역개발운동을 비롯한 민중경제가 탄생한 시기이다. 협동조합운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 레이들로보 고서’가 작성된 것은 1980년이다. 레이들로 박사가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요청으로 이 보고서를 작성한 이유는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1979년에 소련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전 세계에는 전운이 감돌았고 3차 대전 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었다. 이에 협동조합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량학살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우려했던 시기에 지속가능한 사회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어떻게 협동조합이 평화와 공존의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작성된 보고서이다. 그러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물리적인 전쟁 못지않은 이념적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세계는 이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특징인 시장화, 상품화, 민영화 정책은 민주주의의 허파라고 할 수 있는 시민사회운동의 탄압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특히 시민사회조직에 대한 기존의 정부보조금을 끊기 시작했는데 영미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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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기업운동이 시작된 것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한살림운동은 이러한 세계사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탄생되었다. 자원과 환 경의 위기, 사회위기, 생명의 위기 속에서 태어난 생태운동, 여성운동, 지역개 발운동, 청년운동 등 다른 삶을 살기 위한 사회운동의 흐름 속에서 잉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선구자들은 이런 세계사적인 인식이 되어 있었으나 여성운 동이나 성평등 문제 혹은 청년들이 지역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깊이 녹아들어있지 않은 듯하다. 이는 물론 지금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겠지 만 당시에 무엇이 부족했는가를 인식해야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과거운동과 새로운 운동의 접점의 시기에 탄생한 한살림운동은 조직적으로 는 이전에 존재한 소비자협동조합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운동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살림운동은 혼란의 시기,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시기에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처럼 여러 가지 것들이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시기에 탄생했기에 그 여파로 지금 정체성의 혼란 을 겪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원주보고서나 한살림선언을 비롯하여 논의되고 결정되었던 문서가 남아있긴 하지만 그러한 과거의 문서로 다 설명하기는 어 려울 것이므로 차차 정리하고 체계를 잡아나가야 할 것이라 판단된다. 그런데 “우리는 다 있어”라고 생각하며 안일하게 생각하게 생각하는 경향도 보인다. 이제 서른 살 된 청년이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늙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늙은이인 척하지 말자.
Ⅴ. 함께 생각해보기: 한살림다운 협동운동을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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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의 모습 : 카리스마의 일상화
앞서 한살림은 서른밖에 안 된 청년이라고 했다. 긴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에 서 보면 아직 젊다고 할 수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된 것은 사실이다. 젊지만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에서는 오래된 조직이라는 그 감각을 같이 가지고 가야 할 것이다. 오늘의 한살림에 대해 물어보면 ‘무겁다’, ‘권위적이다’라는 반응을 많이 들 을 수 있다. 사실의 진위 여부를 떠나 그러한 반응을 새길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오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막스베버에 따르면 카리스마형 지도자의 죽음은 항상 불확실성으로 찬 공 간을 만들어내고, 그의 지지자들은 제도화를 통해 그의 정책을 이어가려 한다. 막스 베버는 이를 ‘카리스마의 일상화(routinization of charisma)’라고 칭했다. 카 리스마적 지배가 일상화되면 일상적, 세습적 또는 관료주의적 지배형태로 귀 착한다. 안전지향, 특권의 유지와 같은 욕구들은 기존의 권위나 질서를 변화시 킨 카리스마가 일상화되는 과정이다. 한국의 사회적기업에서 이러한 현상이 만연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회조직 으로 존재하던 많은 조직이 경제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제도적 동형화와 더불 어 진부해지는 현상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사회적 목적을 실현하려면 수익 성을 높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경쟁하여 살아남아야 하며, 옳음 을 보여주기 위해 성공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다. 또한 기존의 관제(관변) 협동조합과는 달리 자발적인 결사에 의해 설립되어 건강한 협동조합의 문화를 가진 소비자생활협동조합도 조합원 확대에 따른 규모화로 조합원 참여율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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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형식적인 대의제에 기초한 운영 등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생협 간의 경쟁과 수익성 증대를 위한 시장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정체성의 위 기가 지적되고 있다.”11) 카리스마가 발휘된다는 건 카리스마적 인물의 말(생각, 사상, 방식)이 먹힌다 는 뜻이다. 그는 기존의 제도나 형식을 파괴하고 스스로가 법칙이 되고 제도가 되는 캐릭터이다. 카리스마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가지는 특성 이다.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카리스마를 가지는 사람이며 한살림의 선구자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특성은 밀고 나가 고 장애를 헤쳐 나가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설립되어 안정된 이후에는 리더 십의 변화가 필요하다. 카리스마의 일상화라는 표현은 이 카리스마로 인해 만들어진 형식(운영, 지배) 이 그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그의 이미지를 모방하고 제도로 만들어 특권층이 생기고,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활용될 때 사용되는 표현이다. 한살림이 그런 체제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표현이 갖는 의미가 주는 시사점이 있기 때문에 인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살림을 시작했던 사람들의 성향이나 방식 이 전통과 운영원칙이 될 수는 있지만 한편 답습되는 현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8~90년대 이후 새로운 한살림을 위한 어떤 사상과 비전이 만들어졌는가? 한살림의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이후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국의 고속성장의 분위기 속에서 한살림도 성장했다. 조직은 확대되었는
11) 이 문장은 필자가 참여한 연구보고서 「사회적기업의 유형별 심층사례 연구」(2015)의 168~169쪽 에서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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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어떤 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중적 방향과 지침이 생산되었는가? 몸집은 커졌는데 생각은 옛날 것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2. 미래를 기획하기 위한 리더십
협동조합하는 사람들은 종종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리더를 대표와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리더는 선출된 사람의 의미가 아니라 시대를 읽고 시대에 맞는 활동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민주적 운영과 리더십도 다른 것이다. ‘우리가 뭐할까요?’라고 묻는 것은 의견수렴이지 리더 십이 아니다. 현재 아주 많은 조합원들은 그냥 이용하는 소비자일 뿐이다. 자기 일을 가지 고 있고 자기 생활의 근거가 다른 곳에 있지 협동조합에 있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동일하지 않고 조직 전체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잘 모른다. 단지 의견과 바람이 있는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들의 의견을 다 수렴한다고 전체 방향이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조직을 만들면 처음의 방식이 지속되지 않는다. 사람이 바뀌고 사회경제적 조건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십도 변해야 하는 것이다. 한살림 초기에 가톨릭농민회, 주부활동가. 교회신도들 등 여러 모임이 있었 다. 그러나 촉발을 한 것은 선언을 쓰고 선언 이전에 모인 사람들이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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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흩어져 있던 운동들이 모일 수 있었고 한 방향으로 정렬된 것이다. 그렇게 흡수할 수 있는 것이 리더십이다. 하지만 그 리더들은 많이 싸웠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이 시기에 민주화투쟁이 아니고 이런 걸 할 때냐”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리더는 그 싸우는 과정에서도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계속 지켜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리더는 싸울 수 있는 사람이고, 반대까지 다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통해 ‘동의하는 사람들을 확보해 나가는’ 일을 하는 사람이 다. 이걸 마다하면 리더십을 형성할 수 없다. 평화롭게 형성되면 좋겠지만, 필연적으로 싸움이 있더라도 이는 상대를 몰락시키고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설복시키는 과정이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과정 역시 내 방식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하기에 리더십과 민주적 운영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조합원들이 주인이기 때문에 전체가 운영한다고 생각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주인노릇을 하는 것과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조합원들이 총회 에 참여하고 표를 행사하며 의사결정에 참여하지만 모든 사람이 리더가 되어 지휘를 하는 것은 아니다.
1) 리더십에 필요한 요소
⑴ 시대와 사회에 대한 성찰과 적절한 방향 제시
협동조합운동의 역사에서 보았지만 리더의 첫째 임무는 시대읽기, 사회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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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세상읽기다. 시대 성찰을 통해 어떤 방향을 세울 것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데쟈르뎅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데쟈르뎅이 민중금고를 시작한 건 당시 고리대금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 다. 그가 신문기자로 일하다가 국회의 서기로 활동했던 당시, 한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고리대금 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어떤 사람이 150달러 원금에 이자 5천 달러를 갚아야 했던 사건이었다. 이렇듯 실제 서민의 생활을 억압하 는 것은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그런데 정부는 고리대를 금지하고 고리대금업자를 잡아들이지만 돈을 빌려주지는 않는다. 제도는 규제 를 만들지 대안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때 국회 서기를 맡은 데쟈르뎅은 이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국회도서관에 있었기에 많은 문서에 접근 이 가능했던 그는 독일의 슐체-델리치 신용금고의 사례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민이 자가소유가 아닌 월세 로 살고 있어서 지금과 같은 담보대출이 불가능했을 때이다. 담보 잡힐 것이 없어 신용접근이 불가능했기에 데쟈르뎅은 캐나다에 맞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 기로 했다. 그래서 작은 돈이더라도 꼬박꼬박 저축을 통해 대출이 가능한 시스 템을 구상했다. 그는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이 모델을 전파하는 활동을 펼쳤다. 대표였지만 월급을 받지 않고 자기 일을 통해 번 수익으로 차비를 대었고 잠은 교회를 이용했다. 그렇게 친해진 교회의 신부들을 활용하여 데쟈르뎅금고의 운영원칙을 기독교 교리를 활용한 문답식으로 만들어 전파한 것이다. 이렇게 리더는 시대를 읽고,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읽음으로써 어떤 활동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일본 협동조합의 아버지인 가가와 도요히코 는 일본의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면서도 노동운동과 협동운동을 아우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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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협동운동을 하고자 한 비전을 가졌다. 현재 일본의 노동자협동조합과 생협이 건강성을 유지하는 건 가가와 도요히코가 뿌려 놓은 씨가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살림운동이 시작되었던 오일쇼크 때도 아닌 2017년에 살고 있고, 저성장 시대로 들어섰다. 그러면 저성장 시대에 맞는 협동운동은 어떠해 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그에 맞는 방향을 정하고, 그것을 조합원들과 공유해야 할 것이다.
⑵ 관련 제도의 이해
협동조합은 필요의 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를 포착하여 만들 어지지만 그것이 활동하는 공간은 사회이므로 관련된 제도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필요한 제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만들기도 하고, 관련 제도가 운영에 장애가 될 때는 제도에 억지로 맞추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제도 개혁을 하거나 철폐하는 것도 필요하다. 요즘 GMO표시 의무제를 요구하 는 운동을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제로포장운동12)을 하려면 제도적인 장애가 많다. 소분 및 개별포장 의무화 등. 따라서 제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되는 제도를 없애면서 잘 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또한 리더십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협동조합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 발전에 기여해 왔다. 이렇게 될 때 조합원들만이
12)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장의 비오쿱 사례를 참조하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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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시민들이 “아! 저 조직은 저렇게 활동하는구나” 하고 보면서 조합원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많은 곳에서 안전한 먹거리를 판매하고 있으므로 그것만이 목적이라 면 굳이 생협을 이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로만 온다면 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는 가격경쟁력이나 편리함이 중심이 될 것이므로. 백화점이나 대 형마트와는 다른 활동방식으로 다가가는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과 활동을 세우려면 사회 제도와의 적합성과 불협화음이 무엇인지 보는 것 또한 중요한 이유이다.
⑶ 협동조합에 대한 깊은 이해
협동조합 조직도를 그릴 때 총회를 제일 위에 두고 그 아래에 이사회와 감사를 두며, 사무국이 이를 보조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이 그림에서 조합원(모임)은 어디 있을까? 조합원은 총회에 있다. 그러면 결정된 것을 따르 는 조합원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조합원은 아래 에서 따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 최고의결기구인 총회의 성원이기도 하다. 협동조합은 사람들의 결사체이기 때문에 위계구조가 아니라 조합원에서 시작 해서 조합원으로 끝나야 한다. 이렇게 위계 구조로 그리면 조합원들은 절대 협동조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따르는 사람이자 결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존의 조직도는 책임과 권한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일 뿐이다. 최종의사결정기구 는 조합원 속에 있는 것이라는 점이 드러나야 한다. 끊임없이 순환되고 왔다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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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할 수 있는 구조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협동의 구조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총회에서나 대의원대회 에서 결정한 후 나중에 딴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경우 전체적인 구조에 대해 잘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조합원들에게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다. 왜 자기 생각만 하느냐”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러면 대개 는 조합원들이 “너네들이 운영을 잘 못하니까 그런 거지”라고 반응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소식지에 물품정보나 생산지 소식이 중심이 되고 간간이 운영에 대한 보고를 하기도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조합원들이 협동조합 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가 되어야 제대로 된 의사결정도 하고 경제적 참여도 하고 신뢰를 가지게 된다. 그러니 우선 리더가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설명해 줄 수 있고, 질문했을 때 잘 답해줄 수 있다. 만약에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10년 후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업계획을 세우고 증자를 결정했다고 가정하자. 조합원들한테 “10년 후에 받을 수 있을 거예요.”라고 하면 대부분은 “난 싫어. 10년 후엔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 는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연 단위, 연중 정도는 가능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동시에 다 충족시키지는 못하지만 12개월로 나누어 누구는 1월 누구는 2월, 또는 반은 상반기에 반은 하반기에. 하지만 사업을 하다보면 신규 매장 설립이나 자기 건물 갖기 등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할 때도 있다. 신규매장 설립 계획에 대해 “우리 지역도 아니고 난 거기 갈 일도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돈을 내지 않게 된다. 당장 내게 오는 건 없으니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단지 돈이 없거나 아까워서만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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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왔는지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앞서 깊은 협동의 이해에서 보았듯 협동의 호혜성에는 시차를 두고 세대 간 이루어지는 순차적인 협동도 있기 때문이다. 조합원들은 “아~ 나에게 이렇게 돌아오는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길면 이해가 어렵다. 이해가 안 되면 협동도 어려워진다. 따라서 리더는 이런 구조적인 측면을 잘 얘기해줄 수 있어야 한다. 구조에 대한 얘기는 단지 회의 때 어떻게 결정이 되고 회칙이 어떻고 등등 문서 조항을 읽는 것이 아니다. ‘원래 협동조합은 이런 거야, 협동조합의 가치기 때문에 해야 해, 혹은 우리 정관은 이런 거야’ 등 원리원칙에 대한 지리한 설명으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우리의 협동의 구조가 어떠한지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그 그림 속에서 당신은 어디에 위치되어 있는지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운영원칙과 구조에 대한 이해가 안 되어 있으면 사람 탓을 하기 쉽다. 사람만 의 문제가 아닌데 사람문제로 되고 의사소통이 안 된다고 성토하기도 한다. 조직 안의 협동, 지역 내에서의 협동, 연합회와의 협동 등 여러 그림이 가능하 다. 여러 가지의 협동의 구조와 방법을 보여주는 사람이 리더이다.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임원이나 대표라는 자리의 권위로, 혹은 자기희생이나 봉사 등 개인 의 인간성으로만 협동의 위기를 해결할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지형으로 해결하 는 지혜를 발휘할 때이다.
⑷ 차기 리더십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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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는 차기 리더십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조직의 지속가능한 운영의 토대가 된다. 차기 리더십 형성은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도제방식으로 현재의 리더가 가능성이 있는 후계자를 발굴하여 양성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새로운 리더십을 형성하기 위한 환경을 구축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경우는 리더의 성향에 달려있으니 여기서는 두 번째 경우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리더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에 긴 시간을 두고 준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만약 그가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다수의 조합원들로 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다. 그래서 리더십을 형성한다 는 것의 의미는 리더가 드러나기 위한 조건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뜻이 다. 그 조건은 조합원과 조합원, 조합원모임과 모임 등 상호 관계를 계속 만들 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협동조합 안에서 관계가 형성이 되어서 둘둘 혹은 삼삼오오 만나서 모임을 지속할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 도 있을 것이다. 리더의 의식적인 노력은 각각 다른 모임끼리 계속 만나고 소통하도록 하여 끼리끼리만 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임끼리도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학습모임, 생산자방문모임, 요리모임 등이 있다면 연말에 한번, 혹은 총회 때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어떻게 서로 교류하고 만나도록 할 것인지 기획이 필요하다. 핵심은 종적이 아닌 횡적인 관계를 만들고, 강화하 며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튼튼한 관계성이 형성되었을 때 새로운 리더가 드러날 수 있는 기초 조건이 마련된다. 이는 연대체나 연합회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연합회 이사회에서 서울이나 청주, 혹은 경남 등 각 지역의 문제는 잘 논의되지 않는다. 그러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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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구체적인 부분이 실종된 전체(연합회)만 남게 되어 조직의 구체성과 생명력 은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가 소비자생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 라 소비자생협이 소비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지역조합이 연합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연합회가 지역조합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옆과의 관계가 친해져야 한다. 위에서 결정하기 위해 아래에 있는 사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다. 리더십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면서 친한 관계 속에서 탄생하는 정신이다. 이러한 기반이 없이 사람을 임명하거나 투표를 하여 선출하는 것은 리더십 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어쩌다 대표가 되어’, 얼떨결에 되고, 권해서 되고, 마지못해 되다 보니 ‘내가 저것까지 해야 하나!’ 하는 억울함 혹은 후회, 심하면 원망이 들기도 하여 희생의 아이콘이 되는 것이다. 리더는 조합원리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무리더도 필요하다. 그러니 실무 자들에게 실무교육만 할 것이 아니라 리더교육과 연수도 필요하다. 그 안에서 실무리더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리더가 되는 건 의무 를 이행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 교육과 연수는 원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원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면 키워주어야 한다. 옆의 사람과의 관계, 모임끼리의 관계가 촘촘해지면 전체 조직에 대한 신뢰 가 높아지고 충성도도 높아진다. 이 충성도는 신하가 주군에게 바치는 서약이 아닌 운명공동체로서 느끼는 유대감이다. 그 평등한 분위기가 성숙되었을 때 사람들은 안심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리더가 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큰 지침이라는 것이 조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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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고 실무자와 조합원들은 조직에서 소외된다. 지금 현재의 리더나 대표가 이 모든 과정을 다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고 못하는 건 무엇인지 판단은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계획을 세울 때, 그 다음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3. 낡은 협동조합운동을 새로이 하기 위한 질문
정체성의 위기는 변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 결사체 조직은 늘 새로워져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결사체조직의 지속가능성은 늘 새로워질 때 담보될 수 있다. 조직의 정체성과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의 원칙과 활동을 답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체성(identity)이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 가치와 원 칙에 비추어 '나를 보는 과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설립당 시의 원칙과 가치를 늘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하고 현실의 조건과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방식을 강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결사체가 사람들 의 조직이기 때문이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조직 안의 문제만은 아니다. 법적인 지위나 제도적인 지위 또한 불변의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사회·경제·문화 적 조건의 변화를 고려하여 변화될 수 있다. 실천이 제도의 장벽에 부딪힐 때 제도에 순응하기 위한 변화가 아닌 제도를 바꾸는 변화를 이루어 내는 것 또한 중요한 실천활동이다. 오래된 조직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이유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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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설립 초기의 정신이나 원칙과 가치를 굳건히 지키는 것은 바람직하 나 그것을 불변의 진리로 간주하거나 성역으로 여겨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제도가 될 때 그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도 해방시키지도 못하고 자율성을 억압하게 된다. 막스 베버의 의미로 ‘카리스마의 일상화’인 것이다. 새로워진다 는 것은 기존의 질서가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전환기에는 혼란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혹자는 이 시기를 마치 조직의 위기인 양 여기며 두려워 하거나 경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적 혼란이다. 두려움의 실체가 작은 기득권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가 아니라면 기꺼이 혼란 속으로 들어가 야 할 것이다.
1) 한살림다운 협동조합운동을 위한 리더십이 있는가?
정치결사체든 사회경제결사체든 많은 조직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거나 침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잘 보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들이는 노력에 비해 문제는 여전히 답보상태이거나 도리어 회의에 빠져드는 결과를 야기한다. 협동의 위기다. 퍼실리테이션, 워크숍, 교육 등 제안된 다양한 도구 를 활용하고 대의, 숙의, 직접, 간접 등 다양한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 고 함께 모여 의논하여 문제점을 찾아내고 개선방안을 모색하지만 왜 돌파구 가 보이지 않을까? 협동도 시너지도 리더십이 없다면 불편한 동거가 될 뿐이 다. 투표로 대표를 뽑거나 책임자를 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리더십의 부재란 무엇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하는 전망과 더불어, 그것을 실행에 옮길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사람을 조직해 가는 힘, 능력, 그것을 갖춘 사람이나 집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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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이다. 그러하기에 조직의 운영원리에 있어 조화와 균형만이 미덕이 아니 다. 직면하여 드러내고, 서로 각을 세우며 부딪치고, 거기서 설득과 설복의 과정을 거치며 침투해가는 과정, 그 역동적인 흐름이 생겨날 때 현상유지와 지리멸렬한 운영에서 탈출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똑바로 보며 직면하고자 마음 단단히 먹는 그 사람, 한 시기나 한 철 동안 역할을 떠맡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역사를 쓰고자 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하는 사람, 그리고 그 법칙을 즐기며 뾰족한 장대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 그 사람이 있는 가? 그 사람을 준비하는가?
매니저(경영자)와 리더의 차이 (알랭 까이에(Alain Caillé)) 매니저는 자신의 능력이나 주어진 지위에 근거하고, 리더는 자신이 만든 권위와 카리스마에 근거한다. 매니저는 기능적 측면에 주목하므로 계약과 규칙을 중시하고 리더는 사 람에 주목하므로 공감과 창의성을 중시한다. 매니저는 합리적-법적 권위를 가지며, 리더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진 다. 매니저는 행정적 역할을 하며 리더는 정치적 역할을 한다. 매니저는 사물과 이성과 기능을 관리하는데 리더는 사람과 생각과 열정 을 동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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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여성리더십을 강화하고 있는가?
왜 여성주의 관점을 얘기하는가? 첫 번째 이유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 한살림이 탄생할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여성주의운동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다소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한살림은 생명을 살리는 협동조합운동을 하고자 한다. 그 생명의 반은 여성이다. 그런데 그 여성의 사회적 존재방식은 남성의 그것과 다르다. 그렇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의 필요와 열망에서 그 한 사람은 추상적인 인간으로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 는 존재로서의 접근도 필요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여성주의가 탄생한 배경에서도 알 수 있듯 이러한 사상과 운동은 이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그것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실천의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꼭 여성주의만이 답이 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운동이 역사의 경험과 실천의 성과를 이어 받아 만들어나가는 것이며, 사회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외부의 다양한 성과를 활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남성중심의 권위주의 사회에서, 실무책임도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여성주의 관점으로 협동운 동을 한다는 것은 협동조합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사회의 문제도 해결 하자는 것이다. 여성주의운동은 협동조합운동과 같이 가는, 협동조합을 더욱 협동조합답게 만드는 운동이다. 이러한 성찰은 현실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살림의 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경우를 예로 들면, 그 협동조합이 결사체로서 유지 되게 하는 정신의 근간은 여성주의이다. 초기 설립자가 공동체운동과 여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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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을 한 이들이며, 이 조직은 매년 여성주의학교를 운영하며 활동가를 형성한 다. 그러다보니 이 조합에서는 한국 사회의 대부분의 조직에서 보이는 남성중 심의 권위적인 문화는 보이지 않는다. 여성주의가 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성 주의의 시선을 가지기에 차별과 권위와 위계에 대한 감수성이 발달되어 있고, 민감하기에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더 적극적이기 때문인 것은 사실이 다. 또한 이 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이어진 다. 치료받을 데가 별로 없고 언어의 제약도 있는 이주노동자나 성 소수자,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수급자나 근로빈곤층, 노인 등 이 사회의 많은 사회적불 이익자들(socially disadvantaged)에게 다가가고 개방한다. 그러면 왜 여성리더십이 필요한가? 대다수 조합원이 여성인 까닭도 있지만 그것만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현재 협동조합운동 또한 실무의 책임은 대부분 남성이고 한살림도 예외가 아니다. ‘이게 무슨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남성이 실무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현실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수 조합원이 여성 이어서 대부분 지역조합이나 연합회의 대표는 여성이 된다. 또한 조합활동가 도 여성이다. 그런데 실무 책임자 및 주요 책임직은 남성이다. 현실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남성실무책임자들은 경험도 많고 경력이 오래되어서 전체 상황도 잘 알고 경영에 노련하다. 반면 조합원 활동을 하다가 2~3년에 한번 계속 바뀌는 대표 들은 이 실무책임자들만큼 조직 전체의 상황에 밝지 못하고 경영 노하우나 관련 제도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이러다보니 이들 실무책임자들에 대한 의존성이 점점 커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사업 위주의 운영이나 조합원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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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노동의 부재로 인하여 실무자들의 부담이 커지면서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이러면 간극이 점점 더 벌어져서 급기야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기도 한다. 실무자들은 “조합원대표들이 뭘 제대로 모른다. 책임도 안 지려고 한다”고 하게 되고 조합원대표들은 “우리가 대푠데, 우리가 뭐 허수아비냐!”라고 불만 을 토로하기도 한다. 때문에 여성리더십 형성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한살림을 비롯한 생협에서 그 중요성을 느끼고 지금 착수해야 할 과제이다. 그런데 이 문제 또한 남성책임자들에게 맡길 것인가? 설사 맡긴다 하더라도 그들이 공감하며 해결할 수 있을까? 이를 해결할 주체는 여성리더이고, 이런 문제를 건드림으로 써 스스로 여성리더십을 형성해나가야 할 때이다. 또한 여성리더십 문제는 노동과 활동이라고 분리되어 있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한살림다운 협동조합이 되기 위해서는 한살림다운 노동/생산/활동으로 이 루어져야 할 것이고, 한살림다운 노동 안에 여성의 노동문제가 있고 여성의 생산 문제와 여성의 활동 문제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여성활동가, 여성실무자, 여성 임원과 대표가 되며 그들이 어떻게 노동과 활동을 제대로 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여성주의의 관점과 여성리더십의 필요성을 그러한 관점으로 보고 방향과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한살 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한살림의 문제를 해결하 는 것이 곧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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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례1:
협동조합여성길드(Cooperative Women's Guild, CWG) CWG는 1883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협동조합운동의 보완 역할을 했다. 이 조직은 협동의 원칙과 실천의 관점으로 여성을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사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특히 1911년에는 보험제도(National Insurance Act)가 수립될 때 출산수당이 포함되도록 하는 데 기여한 바 있다. 이후 정치적 사안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최저소 득 및 출산급여 보장을 목적으로 하며 1914년에는 헤이그에서 열린 국 제여성총회에도 참여하여 전쟁완전반대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요즘 은 활동이 좀 미미하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협동조 합의 주요원칙에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을 가치로 삼지만 한국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사례가 경제적 문 제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협동조합운 동의 지평을 넓혀주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협동과 여성과 평등과 평 화라는 키워드가 만나는 지점이다.
3) 저성장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학문이든 종교든 궁극에 이르는 길은 자기부정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나의 앎을 고집하지 않고 그것을 버릴 때 나의 앎은 새로운 깨달음으로 도약할 수 있고, 자기애를 고집하지 않을 때 내 옆의 너가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사랑은 참으로 버리는 것, 버리는 것" 이런 노래를 흥얼거리면서도 알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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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그 사랑과 운동의 관계.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하 여 치료로 수익을 내는 방식이 아니라 예방에 힘쓰고 면역력을 길러 주민이 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건강공동체를 지향한다. 민중교역 또한 남부국가 로부터 더 많은 물자를 수입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그곳의 생산자와 노동자 들의 자립을 도우며 종국에는 무역에 종속된 삶을 벗어나기를 목표로 한다. 그러하듯 지금의 운동은 나를 버리는 것, 나를 부정하는 길로 가야 할 듯하다. 생태위기, 생명위기의 시대에 경기불황이라고 소비자협동조합은 소비를 장려 할 것인가? 오히려 이 때 '스스로 제한하고 축적하지 않는 삶'을 제안하며 조직팽창의 논리가 아닌 우리 삶과 삶의 터전을 지키는 운동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뭘 하는 운동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는 운동이 더 크고 더 어려운 운동이다. 나를 내세우고, 나를 주장하는 자기팽창과 확대의 운동이 아니라 나의 근거를 부정함으로써 사회를 살리는 것. '하나의 물방울이 영원히 마르지 않기 위해서는 바다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되새길 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저성장 시기다. 저성장 시기는 장사를 열심히 해도 많이 팔리기 어려운 시기, 돈이 잘 안 벌리는 시기다. 그러니 장사를 많이 해서 조직이 발전하기는 어려운 시기가 왔다. 고정 수입이 안 들어올 수도 있다. 많이 팔아서 시장에서 팽창하는 시기가 아닌 것이다. 이전의 성장은 기획하고 주도해간 것이 아니라 사회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나 이대로 계속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저성장 시기에 소비를 조장해야 하는가? 아니면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가? 비정규직을 고용하 면서 인건비를 절감해야 할까?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못 먹고 못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삶의 질을 떨어뜨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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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소득의 수준을 기준 으로 하지 않고 삶의 질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큰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⑴ 다른 교환 체계 구상(LETS)
사회불평등과 양극화가 극에 달하면 필시 정치공동체가 붕괴된다. 이는 다 만 브렉시트(Brexit)로 인해 영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남 북,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에서도 발생하는 문제이다. 경제공동체를 만들며 사회적유럽을 만드는 데 실패한 유럽. 그것은 저성장, 혹은 제로성장과 마이너스 성장의 지속으로 가속화되었지만 결국 제국주의로 축적한 부에 길들 여진 때문이 아닐까? 이제 뺏을 명목이 없으니 가진 거라도 뺏기지 않겠다는…. 하지만 사회적 문제와 저성장 시대를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지역보 조통화, 레츠(LETS), 시간은행(TimeBanking), 아꼬흐드리(Accorderie) 등 이것들 은 이웃을 돌보고, 지역사회를 강화하며, 사회를 만드는 ‘다른 교환체계’이다. 돈보다 사람, 노동의 가치를 우위에 두며, 상호부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교환체계는 사회적경제의 역사와 함께한다. 결사체사회주의자인 오웬의 노동 쿠폰(Labour note), 아나키스트인 조지아 워렌의 시간상점(Time store), 크로포트 킨의 공제주의(mutualism) 등. 이런 전통이 있었기에 1980년대 신자유주의 정 책이 본격화되면서 시간은행(Time dollar)이나 레츠, 그리고 90년대에 시간은행 과 아꼬흐드리, 지역보조통화 등이 이곳저곳에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특히 재밌는 건 미국에서 시작되어 영국으로 발전되어간 시간은행과 캐나다 퀘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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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시작되어 프랑스로 퍼져나간 아꼬흐드리다. 둘 다 똑같이 모두의 시간이 평등하다는 원칙에 기반하는데 왜 이름이 다를까 궁금했었다. 영어권과 불어 권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보니 아꼬흐드리의 경우 직접적인 직업서비스는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점이 달랐다. 예컨대 내가 의사인데 나의 진찰 1시간을 교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캐나다에서 레츠가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빈곤과 사회적 배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또 다른 나름의 전통. 우리사회 에서도 저성장, 아니 탈성장으로 살아가기 위한 우리 방식의 교환체계를 상상 해보면 좋겠다. 예컨대 내가 한살림에 원고를 쓰면 쌀, 샴푸, 린스, 비누 등 생필품으로 받는 다. 이런 게 나와 한살림의 관계에 머물지 않고 협동조합 간 협동으로 확장된다 면 어떨까? 큰 협동에 대한 기획이 필요하다. 한살림조합이 이사를 갈 때 철거 및 리모델링이 필요하면 두꺼비하우징이 해주고 그 대가를 한살림 물품이용권 으로 지불한다면? 또한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의 건강 관련 프로그램에서 먹거리 교육을 담당하며 조합원들의 일상적인 질병 예방교육을 받게 하면서 품앗이를 확대한다면? 시장이 우리의 통제 범위 밖에 있고 금융은 불안정한 반면, 이들 협동조합 조직은 안정적이진 않을 수도 있지만 예측이 가능하고 통제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점차 화폐의존도도 줄이고 협동의 관계도 강화될 것이다. 협동조합 간의 큰 협동을 할 때 협동조합지역사 회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니 협동관계로 만들어지는 사업을 기획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활동은 연합회 차원에서 결정하기 어렵고, 결정한다고 해서 실행된다는 보장도 없다. 구체적인 지역에서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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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결정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지역 차원에서 고민하여 시범으로 해 보시길 바란다.
⑵ 쓰는 것을 줄이는 방안
쓰는 것을 줄이는 것이 버는 것만큼 중요하다. 임대료나 카드 수수료 등 나갈 돈을 안 나가게 해야 한다. 돈관리가 중요한 때이다. 월간 살림이야기에도 실린 바 있는 ‘비오쿱(Biocoop)’의 제로포장 운동을 살펴보자. 비오쿱은 한살림 과 나이가 같은 서른 살이며, 생산자와 소비자와 노동자의 협동으로 이루어지 는 새로운 협동조합모델이다. 비오쿱은 프랑스 최초 유기농공정무역전문매장 으로서 땅(생산)에서 소비자의 식탁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친환경적으로 하 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배송할 때 좁은 차 안에 채소를 구겨 넣지 않기 위해 배송탑차를 개발했고 비행기를 사용하지 않는 특별한 물류이동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런데 소비자에게 도착하고 나서도 요리할 때까지 신선함을 유지 하기 위한 방안까지 전체 시스템을 다 해결하고 나서 보니 마지막에 남은 것이 포장 문제였다. 거기서 제로포장운동을 한 이유는 단지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환경운동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첫째, 플라스틱이건 종이건 대다수의 포장재질에 포함된 유해한 화학물질 이 유기농식품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기농먹거리라 해도 포장을 통 해 오염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둘째, 포장을 한다는 것은 전 세계에 유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도 스위스의 네슬레나 미국의 필라델피아크림치즈가 그대로 마트에서 판매되
Ⅴ. 함께 생각해보기: 한살림다운 협동운동을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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듯 전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제품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먹거리가 낱개 포장이 불가하다면 지금처럼 수입될 수 있을까? 만약 네슬레 초콜릿 10킬 로그램이 들어오면 소비자들이 자기 그릇을 가져가서 200그램씩 사먹을까? 더불어 비오쿱이 이 운동을 전개하는 방식도 신선했다. 우선 빠리 10구의 한 매장에서 2015년 11월 4일부터 12월 30일까지 57일 동안 시범운영을 한 것이다(57일 이후까지 지속됨). 정말 가능한지, 조합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지, 어떤 불편함이 있을지 등. 그리고 조합원들이 자신의 장바구니 안에 담을 그릇이나 주머니 등을 가져오지 않을 경우 매장에서 이런 것들을 나눠주기도 하고, 미역으로 만든 개량컵도 활용했다. 또한 이 한시적 매장의 모든 시설은 100% 재활용될 수 있도록 목재로 만들었다. 이 매장의 실험이 다른 160여 개 매장으로 확산된다고 한다. 모두가 한꺼번 에 변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조직의 철저한 시도가 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 킬 수 있다. 그렇게 아래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협동운동이다. 포장물 자제가 유해하고 포장비용(인건비)이 들어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한데, 조합원들이 스스로 용기를 가져와 담는 등 모든 것을 조합원들이 하므로 이는 간접적인 조합원노동이 되는 것이다. 비용 감소 는 조합원에게 돌아간다. 가격이 인하(15~20%)되어 운영비용이 줄어들고 조 합원들의 살림에도 도움이 된다. 평균 한 달에 10만 원 정도가 절약된다면 일 년에 120만 원 정도를 절약할 수 있다. 한살림 덕분에 저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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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례2:
식비 증가 없이 친환경지역먹거리 먹기 운동 친환경먹거리운동의 민주화는 다양하다. 협동노동을 통해 노동비용을 낮추어 저렴한 가격에 친환경로컬푸드를 제공하는 모델과 더불어 생활 양식의 변화로 음식민주화를 이루는 모델도 있다. 프랑스의 '좋은먹거 리가족운동'은 2012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운동이 내건 슬로건은 '식비 증가없이 친환경 지역먹거리를 먹자'이다. 어떻게? 이 세상에 하나의 완벽한 처방은 없다. 그러니 구슬을 꿰어야 한다. 그래서 일련의 프로 그램을 구성하여 진행되며 동반지원을 한다. 일단 원하는 가족의 신청 을 받아서. 주부의 자각도 중요하지만 가족의 협조가 있어야 효과가 있 으니까. 1. 제철 먹거리를 지역생산자 먹거리 직거래와 연결 : 제철에 사고, 직거 래는 훨씬 싸니까 2. 다른 요리법 안내 : 버리는 부분 없이 요리하기, 냉장고 구석에 처박 아 두었던 재료로 요리하기 등. 음식물 쓰레기도 줄일 수 있다. 3. 스스로 생산하기 : 베란다나 발코니 등을 활용해서 기르기뿐 아니라 빵 직접 만들기 등 4. 나와 가족을 넘어 지역으로 : 가족단위, 마을단위 먹거리 이해와, 함 께 먹으며 지역경제를 생각하기 등의 과정을 안내해주는 길잡이가 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실제 가계부를 보며 정산을 하고, 연말에 좋은 사례 시상식도 한다. 마을모임, 조합원 모임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다.
Ⅴ. 함께 생각해보기: 한살림다운 협동운동을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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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고정지출을 막는 법
비용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임대료와 카드수수료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이 대기업이나 다국적기업 또는 금융소득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다. 한살림에서 연간 카드 수수료로 68억 원이 들어가는데 이는 전체 잉여의 1/3에 해당한다. 이는 지역 및 사회경제 영역 전체로 보면 엄청난 비용이 될 것이다. 사회적경제란 이름으로 활동해서 대기업 살찌우는 데 기여한 셈이 된다. 반면 이 두 비용에 비해 인건비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런데도 저성장이라고 인건비를 줄이고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경우도 있다. 제도적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차별적인 기업이 되는 과정일 것이다. 방법은 하나만 있지 않고 여러 가지가 있다. 당장 카드를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이를 개인의 소비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한계가 있다. 낡은 계몽주의 적 방식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익숙해져 있고 어쩔 수 없이 쓸 상황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 생활문화운동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이렇 게 아낀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조합원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의견을 들어볼 수도 있다. 예컨대 아낀 수수료로 유기농 청년생산자 정착지원 프로그 램 운영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착하도록 생산자와 연계해주고 시설을 갖추는 과정까지 돈을 벌지 못하므로 일종의 한살림식 기본소득을 보장할 수도 있다. 또한 교환체계의 변화와 연동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고 거래를 편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물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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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체계를 만들 것이 아니라 실제 카드처럼 쓸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다. 예컨대 수표제도가 있는데 이것이 확대되면 지역화폐가 된다. 이런 것을 새로 만드는 비용에 비해서 수수료가 나가는 비용이 훨씬 크다. 여러 가지 구체적인 그림을 보여주자. 이것을 우리 조합은 어떻게 협동할 것인지, 어느 정도 달성할 것인지. 개별 조합의 목표가 있어야지, 연합회가 목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국가체계와 다른 협동조합 체계이다. 또한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따르라 하는 일반기업의 방식과 달리, 협동조합의 방식 은 새로운 시도가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모험하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험하려는 사람을 막지는 말아야 한다.
Ⅴ. 함께 생각해보기: 한살림다운 협동운동을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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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1. 총회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 2. 협동조합 학습을 위한 명저 소개 3. 프랑스 대학과 지식인의 협동조합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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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회 준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형식적인 행사가 되어 박수치고 통과하는 고리타분한 총회, 갈등이 폭발하 여 아수라장이 되는 총회, 날밤 새고 야근을 밥먹듯 해서 겨우 준비했지만 성원이 미달되어 무산되는 총회 등. 협동조합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총회를 한 해의 활동을 마감하는 자리로 서로 다독거리며 치르는 모습은 점점 보기 어려워졌다. 그러다보니 총회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특히 누구에게는 길 고 지루한 서류 준비로 지치는 고된 행사일 뿐이기에, 또 누구에게는 조합원들 의 질타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리이기에, 민주적운영이 협동조합의 본질이 라는 말이 무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꾸 넘어진다고 일어나기를 포기하지 않아야 하듯, 지금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면 제대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피곤함과 두려 움으로 맞이하는 총회가 아니라 정리하고, 돌아보고, 공유하며, 성찰하는 자리 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실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할 요령을 알려주지 못하는 매뉴얼이 아닌 지금 우리 조직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실전을 염두에 둔 준비과정을 안내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부록이 해결 방법을 안내하는 것은 아니다. 혹시 빠진 것이 없는지, 안 한 것은 없는지, 알면서도 안 한 건지, 몰라서 못 한 건지 등, 그렇게 챙기는 과정이다. 하지만 미리 챙기다보면 막연 한 걱정을 하던 내가 어느새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예측하며 준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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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것이다. 갈등이 폭발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이 터졌을 때 잘 못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문제이듯.
① 사업 위주의 평가와 계획 수립을 줄이고 함께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를 확인하며 그 생각의 편차와 상이한 이해지점을 먼저 짚어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결사체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항상 실천과 생각 의 오고감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업을 나열하여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생각을 방기하는 것이고, 생각을 방기하면 그 활동의 주체인 '나'가 없어진다. 나가 없어지면 나로부터 시작하여 관계로 이루어지는 결사체는 약화되고 만 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하고자 했고, 함께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늘 짚어보며 실천과 생각, 나와 우리를 동시에 사고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세밀한 사업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는 지루하게 하면서 생각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섬세하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사람이 배제되 는 걸 많이 보아왔다. 자율성은 ‘나’의 ‘생각’에서 시작된다.
② 조직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좋아서, 이런 분야의 활동이 좋아서 등 여러 동기로 어떤 일을 시작했 지만 당최 뭐가 문제인지 감도 안 오고 방향을 잃는 때가 많다. 작은 결사체들 에서도 의외로 조직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예컨대 사회적협동조합을 하면서 그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운영원리를 가지 며, 또 법적․제도적 환경은 어떠한지 잘 알고 준비하며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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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다. 여기서 혹시나 법적․제도적 조건이 자신들이 속한 조직에 대해 절대적인 규정력을 가지는지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시작의 동기가 지속성을 담보해주지 못하는 법, 함께하고자 한 사람들이 택한 조직에 대한 이해는 기본이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 그릇에 맞는 활동을 기획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나는 무엇을 하며 각자 어떻게 역할을 나누어 협동 에 이를지 상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되다보니 조직의 리더에 게 비전을 맡기고 하급실무자는 전체에 대한 이해가 안 된 상태에서 그냥 부분 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어 사람 간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내부 균열이 일어나 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전체 속에서 사고할 때 진정한 협동이 이루어지 지, 조직의 위계가 협동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더불어 조직이란 유기체여서 그 모습이 변하므로, 그 변화를 읽어내어 대처하는 것 또한 운영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그에 따라 때로는 분화를, 때로는 통합을 고려해야 조직이 짐이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
③ 가장 기본적인 운영원칙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결사체의 생명은 민주주의와 자율성이다. 그것은 조직을 지키기 위한 방안 이자 그 안의 사람들이 우정을 쌓고 확대하며 공정함을 잃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장치이다. 어느 누가 배제되는지, 나는 나의 뜻을 살려서 활동할 수 있는 지,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한 일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추진하는지 등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장치와 더불어 이런 것에 시간과 예산을 들여야 한다. 사업의 성과란 이러한 바탕 위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사업에 사람을 맞추지는 않는지 살필 일이다. 민주주의를 대의제로만 사고하거나 회의구조로만 해결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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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함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구조 가 되어야 가능하고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문제제기가 올라오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문제제기가 되지 않는 것이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관심이나 방관, 혹은 순종에 더 가깝다. 이것은 결사체를 죽이고 권위적인 조직이 되는 징조이다. 마지막으로 결사체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조직임을 안타깝지만 인정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모든 것은 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다. 불멸은 역사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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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협동조합 학습을 위한 명저 소개
1) 협동조합공화국 (République coopérative, 1920)13)
❍ 1920년 발간. 저자는 이념적으로는 결사체사회주의자이자 맑시스트였으 며, 프랑스 소비자협동조합총연합회 사무총장이었던 에르네스트 뿌아쏭 (Ernest Poisson).
❍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국가라는 것이 다른 국가의 식민지가 되어 나라 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1917년 러시아혁명을 보며 한 사회가 '다른' 나라를 세울 수 있음을 보며 “공화국은 사회적이어야 한다” 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협동조합 공화국’의 전망을 세움. ❍ 협동조합에 대한 이념적 논쟁을 불식시키고 새로운 사회건설의 이념이자 수단으로서 협동조합의 전망을 제시. ❍ 의의 : ㉠ 자본주의시스템에서 탄생하였으나 그 사회를 극복한 미래를 담고 있는 조직으로서의 협동조합의 법칙을 다룸. ㉡ 단지 신념과 가치의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고 협동조합의 현 실태에서 대안의 이유를 제시했다 는 점. ㉢ 협동조합을 정치적 과제가 아닌 사회경제적 과제를 해결하는
13) 국내 번역본은 『협동조합공화국: 협동조합 경제학』, 진흥복 역, 선진문화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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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으로 정립함으로써 협동조합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불식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념이나 운동(맑시즘 등)과 대립하거나 경쟁하는 것도 아니 라는 점을 분명히 하여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타 운동과 접점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
2) 서기 2000년의 협동조합, 레이들로 보고서 (김동희 역, 한국협동조합연구소)
❍ 1980년 모스크바 총회에 제출한 연구보고서로서 협동조합운동의 위기를 역사적 관점에서 진단하며 새로운 시대의 과제를 제출 ❍ 1981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이 “더 이상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INA)”를 선언하면서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미 도
래할 시대를 예견하며 협동조합의 방향과 과제를 제시한 보고서 ❍ 보고서는 73년에 시작된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생태위기 등의 사회경제 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거대한 전환을 맞게 되는 도래할 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협동조합운동의 거대한 전환을 제안함. ❍ 의의 : ㉠ 신자유주의세계화가 미처 시작되기도 전, 시대적 인식에 기반하 여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준비한 역사적인 글로써 단지 협동조합 분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음. ㉡ 특히 세계화시대, ‘다른세계화 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협동조합지역사회라는 이상과 거기에 이르는 과정 및 방법론을 제시함으로써 현재 진행되는 다양한 사회 적경제 진영에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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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기의 시대: 1990년경의 소협과 그들의 문제 (A time of crises, consumer co-operatives and their problems around 1990)
❍ 1986년 오스트리아 Konsum의 연구 후 ICA에서 발행, 2001년 발간. ❍ 유럽 9개국(스웨덴,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프랑스 등)과 일본의 소협운동의 역사 및 운영 진단과 분석을 다룬 심층사례연구. ❍ 연구의 목적 : 가) 특정한 경제적 의존성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그 메커니즘과 더불어 협동조합 성공의 요소가 된 새로운 의존성에 대한 분석 나) 협동조합 설립의 과업을 맡은 구성원들의 초기의 열정의 역할이 고려되 어야 하며, 역동성의 상실, 위계화, 조직경화증(硬化症) 등 최근 협동조합 발전에서 보이는 문제 고려 다) 구성원의 참여의 긍정적인 측면뿐 아니라 일부 부정적인 측면 고찰 ❍ 의의 : ㉠ 사례연구이나 역사적인 접근을 통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 연유를 밝히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며, ㉡ 특히 사업체로서의 협동조합과 사람들 의 결사체로서 협동조합간의 현실적인 갈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보여 주며 ㉢ 단기적인 측면에서의 성과가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해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길고 넓은 안목을 갖게 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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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자료 : 프랑스 대학과 지식인의 협동조합선언문
* 이 선언문은 218명이 서명하여 1921년 RECMA지 1면에 실렸다.
1차 세계대전은 협동조합운동에 전혀 예기치 못한 요청을 보냈다. 소비물자 부족과 가격 상승에 더하여 상인의 착취에 시달린 소비자들은 소비자협동조합 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또한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소비자협동조합 상점은 굶주린 국민들에게 거의 유일한 식량보급소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공권력은 협동조합에 공적인 권한이 부여되고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협동조합에 특정한 통제권을 부여했다. 가격상승에 대처하고 국민 의 식량보급 및 피해지역 재건, 철도와 우체국의 건설을 담당하고, 심지어 알콜중독과 빈민굴을 일소하기 위하여 제도화된 대부분의 자문위원회에의 몇 몇 의석은 소비자대표자들에게 할당되었다. 그러나 여론도, 언론도, 경제학자들도 협동조합운동에 이 선언의 서명자들 이 표명한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협동조합운동을 강점과 약점을 가진 여느 상업조직과 동일하게 여겼을 뿐, 협동조합운동이 거둔 현실적인 성과를 넘어 사회재구축울 위한 종합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쟝 조레스는 소비협동조합을 ‘사회의 실험실’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리고 지난 75여 년 동안 이러한 실험은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나 경제조건이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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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도 계속되었으며, 이를 통해 미래사회의 특징을 파악하기에 충 분하며, 사회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요구 중 실현가능한 것이 무엇이고, 공상에 불과한 것이 무엇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바로 지금부터 다음과 같은 지침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침이라고 한 이유는 엄격한 틀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이 말하듯 협동조합은 헌법이 아니라 운동이기 때문에. 협동조합은 기업도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불가피한 조건, 즉 이윤추구와 경쟁의 압박을 벗어나서 살아남고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협동조 합기업은 구성원들에게 혜택을 돌려주기 때문에 이윤이라는 흥분제 없이 일하 며, 경쟁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연합을 구축하고 통합함으로써 경쟁을 대체하 기 위해 노력한다. 이윤 그 자체가 사라지는 날 더 이상 이윤을 위한 경쟁은 필요 없어질 것이며, 그때엔 다만 서로 협동하기 위한 경쟁만 남을 것이다. 협동조합은 또한 기업의 성공에 자본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 며, 성과를 내게 하는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협동조합이 자본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자본을 구성할 때까지 자본을 요청하여 고정이 율로 서비스를 지불하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자본에 명령권을 부여하지도 않고, 자본이 이윤을 창출했다는 명목으로 기업의 이윤을 자본에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협동조합은 발전이 되는 경우에 한해 보호주의 형태의 경제 국수주의에 대항하며, 제국주의에 다름 아닌 국제주의에도 대항할 것이다. 30년 전 국제협 동조합연맹(ICA)을 창설하면서 협동조합은 ‘국제연맹(the Ligue of Nations)’14)을 앞질렀으며, 현재로서는 이윤추구를 위한 투쟁이 되어버린 국제교역을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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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각국의 자원을 활용하기로 정한 국민들 간의 협동이라는 본래의 형태로 돌려놓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소비협동조합은 자본의 독재를 - 단순노동자든 생산자이든 - 노동의 독재 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요즘 노동자 측에서는 경제 질서에 그들을 위한 정부인 노동조합을 요구할 뿐 아니라 정치질서에도 직업대표를 요구하는 경향 이 있다. 그러나 협동조합은 생산자 단독으로 공익을 대표하는 자격을 가졌다 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업종이나 기업의 이해에 지배되기 때문 이다. 반대로 조직된 소비자들은 다른 이해가 아닌 모든 사람의 이해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집단은 공익기관이 될 자질을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하 여 적어도 경제 질서에서라도, 주어진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국가의 역할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생산자와 소비자 간 원칙의 대립만 수립할 뿐, 인간적 적의나 계급투쟁을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소비협동조합 내에서는 이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눈부신 성공을 거둔 소비협동조 합은 거의 대부분 노동자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만약, 참 바람직하게도, 모든 소비자가 동시에 생산자가 된다면 자신의 내부 에서 이 대립되는 이해를 구별하고 중요성을 따지는 법을 배울 것이고, 보편적 인 것을 위해 개인적인 것을 희생하는 법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소비협동조합이 소비자에게 매일 가르치는 교훈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 가 전파하고자 하는 경제교육이자 도덕교육인 것이다.
14) UN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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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협동’을 위한 작은 안내서 집 필 김신양 펴낸날 2017년 2월 9일 펴낸이 황도근 펴낸곳 (사)모심과살림연구소 서울 서초구 서운로 19 서초월드 3층 02)6931-3604 www.mosim.or.kr mosim@hansalim.or.kr * 본 책자는 비매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