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12장 1-5절) 김선우 목사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연합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린 사건들이 많습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에 대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며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죽였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야고보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롯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야고보를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는 더 많은 환심을 얻기 위해 베드로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베드로가 사형장에 끌려갈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사형장에 끌려가기 전날 밤 베드로는 손이 묶이고 양옆에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감옥에서 나오게 될까봐 철통같이 지킨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된 교인들은 베드로를 위해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들키게 되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교인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함께 모여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 합니다. 위기 앞에서 겁을 내거나 도망가지 않고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천사를 보내시고 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깨웁니다. 천사가 들어오니 베드로를 묶고 있었던 쇠사슬이 풀리고 모든 옥문이 열렸습니다. 성도들이 함께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시고 철통같이 에워싼 군인들 가운데서 베드로를 건져주시고 교회를 부흥케 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모여서 예배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 현장 속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정기적으로 모여서 예배드리는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뜨거운 열정과 새 힘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또 우리에게 때로는 어려움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사람을 찾아갑니다. 이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닥친 어려움은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합니다. 그 품안에서 새롭게 도약하고 일어 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격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정치적 성향도 서로 달랐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싸우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면서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12명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 되기 어려웠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차별하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고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서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 되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Contents 06 십자가 08 카라멜식빵팝콘 10 N은 다리예요. 하나로 이어주죠. 16 이삿짐에 담은 기억 20 쉴 곳이 있다는 건 24 HomecomiNg 26 Dear Mr. JJK 32 Cafe IN 38 Lim N 40 i+n=in 42 예수제자 JESUS FOLLOWER
Letter from The Editor.in.chief 참 정신없이 보낸 2월이었습니다. 날 수가 짧은 탓도 있었지만 참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명절, 수련회, 그리고 부서, 개인적인 일 등등. 그러다보니, 변명일 수 있겠지만 발간이 조금 늦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여자가 약속시간에 늦는 심리 같은 거.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대요. 이런 말을 하는 이유, 예 찔려서 그래요.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앞으로 안 늦을 게요. 지난 호 잡지를 만들고 나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너무 우리들만의 리그가 된 것 같았거든요. 예전엔 전도지를 만들고 싶었고, 그러다 우리가 우리를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 각 사람의 속마음을 쏟아냈어요. 굉장히 안정이 됐다고 느꼈는데, 어느덧 잡지에는 우리 목소리만 담겨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은 과도기인 것 같아요. 계속해서 바뀌어가는 에디터즈가 되겠습니다. 이번 호는 주제가 없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입니다. 왜냐면 앞으로의 주제는 계속‘n’이 될 거거든요.‘n’이란 건 참 많은 걸 담을 수 있는 것 같아요. NweSong의 n, 하나님과 나, 너와 나, 다리(Bridge), 그리고 함께..사실 작년, 젊은소리에서 매거진‘n’으로 리뉴얼을 할 때 생각했던 것들입니다. 그걸 잠시 잊고 있다가 오래 된 서랍에서 다시 꺼내봤어요. 살짝 먼지가 덮였지만, 좋더라고요. 처음이니까, 이번에는 조금은 문자 그대로의, 날것의‘n’을 풀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문자‘n’은 사라지고 그 의미만 남게 하는 것, 그게 지금의 생각이에요. 여러분에게‘n’은 무엇인가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며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요. 그 n이 무엇인지 흐릿하게 윤곽이 드러날 때쯤, 아마 봄쯤일 것 같네요. 그때 새로운 n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에디터즈 편집장 하영준
사진 전보민(24)
십자가 글/디자인 전보민(24)
그럴 때가 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던 것들이 예전과는 다르게 보일 때. 어느 날 책을 읽다가 같은 문장을 반복적으로 읽게되면 ‘어? 받침이 이게 맞았나?’라는 생각이 든다든지, 혹은 청소를 하다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햇빛이 들어와 보이지 않던 수 많은 먼지들이 보여 숨을 참아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말이다. 그 날도 그랬다. 금요일 저녁 7시. 여느 날처럼 부서모임 장소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모임을 시작하려는데 그날따라 벽에 걸린 십자가는 왜 그리 붉게 보였는지. 십자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응?” 십자가가 엑스모양이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각도를 틀어보니 그렇게 보였다. ‘십자가가 엑스로 보이기도 하는구나’. 십자가에서 처음 엑스를 발견한 순간 그것만큼 낯선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가 엑스라면, 정말 예수님은 우리가 지기 싫어하는 것을 지고,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가셨구나. 그리고는 머리 속이 박하사탕처럼 하얘졌다. ‘아..근데 오늘 여기 왜 온거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야 내가 여기에 왜 왔는가를 생각했다. ‘부서모임이니까’ 그리고 다시 십자가를 봤다. 예수님이 홀로 십자가를 지고 계셨다. 십자가에 있던 엑스 때문에 그렇게 쓸쓸해 보였나. 주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감당하겠다는 마음으로 부서모임을 왔던 나는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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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IPE
SPECIAL INTERVIEW
이창섭 부장집사 오프닝오프닝오프닝
질문질문질문짐눌 본문본문본문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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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빵 테두리가 n모양이네.’ 그래서 이번 레시피는 캬라멜 식빵 팝콘.
카 라 멜 식 빵 팝 콘
이번 호에는 다 뭉쳤다. 레시피 담당 에디터들. 그런데 선조들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 없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헨젤과 그레텔에게 주면 싸대기 맞을 빵조각으로 강화를 성공했다. 실패를 통해 얻은 하나의 교훈. 요리는 오래 참고...
먼저 식빵을 먹기좋은 크기로 잘라 줍니다. (칼보단 가위가 더 깔끔하게 잘려요) 큰 조각들은 따로 두고 부스러기들은 입으로 털어 넣어 줍니다. 달궈진 후라이팬에 버터를 살짝 두르고 노릇노릇해질 때 까지 볶아줍니다. 살짝 바삭바삭해질 때 까지 볶아진 빵을 그릇에 담아 줘요. 이제 소스를 만들어 줄 차례에요. 후라이팬에 설탕3스푼과 물3스푼을 넣고 중불로 가열해 줍니다. 절대로 섞지 말고 온전히 녹을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정말 너무너무 젓고 싶으면 후라이팬 손잡이를 잡고 살짝 돌려 주세요. 이 과정에서 야무지게 섞을 경우 이렇게 덩어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절대 섞지 말아주세요. 설탕이 완전히 녹았으면 약불로 줄이고 우유를 두 스푼 넣고 저어주세요 (이때 우유가 확 튈 수 있으니 조금씩 넣어주세요) 갈색 빛으로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면 캬라멜 소스가 거의 완성 된 거에요. 이제 볶아둔 빵을 넣고 잘 섞어줍니다. 빈 그릇에 담아서 식혀준 뒤 취향에 따라 견과류를 뿌려주면 카라멜 식빵 팝콘이 완성됩니다! 글 전아영(25) 디자인 신은주(21) 요리 신은주(21), 윤지현(22), 전아영(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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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은 다리예요. 하나로 이어주죠’ 글 하영준(28) 디자인 이지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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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13:30 천호역
pm 16 : 00 팔당대교 어디쯤
오전 중에 만날 계획이었지만 첫 걸음이 살짝 엉켰다. 깜빡 잠들었다가 부랴부랴 자전거를 빌려 온 노준이, 나 역시 공휴일임을 망각해 미처 펑크를 때우지 못한 내 자전거 대신 아는 동생의 자전거를 끌고 와야 했다. 미니벨로.. 젠장.(참고로 필자는 키가 186이다. 절대 자랑이 아니다) 1시 30분. 만나기로 했던 멤버 네 명이 다 모였다. 정훈이는 신금호역에서 합류하기로 했으니 정확히는 셋. 정훈이와 나는 팔당으로, 노준이는 여의나루역으로 출발했다. 물론 지하철 맨 끝 칸에 자전거를 굴리며 말이다.
그토록 예뻐 보이던 길이 이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돌아가는 길의 풍경은 더 이상 아까의 설레던 풍경이 아니었다. 역방향으로 부는 바람 때문에 가뜩이나 아픈 다리가 더욱 욱신댔다. 패러글라이딩 동호회가 다시 보였다. ‘허허벌판 한강에서 저걸로 뭐하는 거지? 웃기지도 않아.’ 사람이 얼마나 교활하고 가벼운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아까와 달랐다.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된 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간신히 돌아왔을 이후였다. 조금 달리자 핸드폰이 울렸다.
pm 15: 22 팔당역 ‘저 반포 도착이요’ 팔당역에 도착했다. 중간에 지하철을 거꾸로 타기도 했지만 무사히, 조금 늦게. 팔당으로 오는 도중 마포대교에 먼저 도착한 노준이에게 전화가 왔었다. 정훈이가 자전거를 못 타더라고. 웃지 못할 해프닝에 보조바퀴를 알아봤지만 결국 성인용 보조바퀴는 없는 걸로 판명, 팔당대교에 도착해서 노준이에게 전달한 대책은‘2인용 자전거’였다. 결국 그렇게 노준, 정훈은 2인용 자전거로 마포대교에서 출발, 나와 원이는 팔당대교에서 출발했다.
노준이었다. 도중에 연락 않기로 했는데. 2인용 자전거를 타고 달렸을 노준이를 생각하니 좀 걱정이 되었다. 남자 둘이서 타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도 나왔다. 하지만 그런 걱정보다 당장 뒤로 보이는 팔당대교를 벗어나고 싶었다. 2시간 가까이 달렸는데 다음 다리인 미사대교까지도 못 갔다니. 팔당대교가 계속 뒤에 보였다. 중간에 잠깐 귤과 초콜릿으로 기력을 보충한 뒤 계속 달렸다.
중간에 서로 전화는 않는 걸로, 그냥 다리 하나씩 찍으며 가다가 한강 자전거길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나기로. pm 16 : 58 미사대교 추위를 걱정했던 어제의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적당히 시원하게 바람 불고, 자전거길 옆으로 보이는 한강이 잔잔하고 그 위로 살짝 물든 햇빛이 때때로 이는 파장에 또 조용히 반짝이는. 미니벨로 자전거라 다리가 아프긴 했지만 멋진 정경에 힘든 것도 잊었다. 마치 멀리 놀러온 것 같았다.
“저게 미사대교인가? 앞에 다리 같은 게 보였다. 팔당대교 다음에 이어지는 미사대교인가 싶었다. 그런데 다리라기엔 모양이 이상했다. 건물 외벽을 둘러 곡선으로 이어진 차도? 불길한 느낌에 지도 어플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자전거 페달을 밟은 지 15분가량이 지난 그때야 알았다. 우리가 반대로 왔음을.
“응?” 근데 2인용 자전거로 그런 속도가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노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근데 제가 5시 30분까지 광진교 대여소에 반납을 해야 돼서요.” 일정 거리마다 있는 한강 자전거 대여소는 반납할 곳을 정하면 꼭 빌린 지점이 아니라도 반납이 가능하다고 했다.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응, 그럼 먼저 가 있어. 우리도 최대한 서둘러 갈게” “네, 형”
결국 미사대교에 도착한 건 우리가 출발한 지 1시간 40여분이 지나서였다. 정상대로였다면 8.4km, 자전거로 4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중간에 지도 어플을 확인하다 강 건너편으로 가라는 안내에 식겁하기도, 미사대로 아래 이정표를 보고 하남 시내로 빠질뻔도 했다. 잊고 있었는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우리 둘 다 길치라는 걸. 핸드폰을 확인하니 46분에 카톡이 와있었다.
“네, 형”
‘청담대교 주파’
“응?”
“우와~저거 뭐지?” 사람들이 낙하산 같은 걸 메고 있었다. 패러글라이딩 동호회라고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 멋져보였다. 지금의 우리도 그런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
마포대교에서 12개의 한강다리를 돌파한 거다. 우리가 겨우 팔당대교에서 미사대교까지 가는 동안.
“노준아, 정훈이랑 같이 있어?”
전화를 끊고 원이를 봤다. 여러 구도에서 미사대교를 찍고 있었다. 힘든 소리 한 번 없이. 기특한 마음에 원이 어깨를 툭 치고 말했다.
“아뇨, 정훈이는 먼저 갔어요”
“가자, 다음 다리로”
pm 17 : 24 강동대교 어떻게 된 영문인가 하니, 2인용 자전거를 타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정훈이는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결국 노준이는 마포대교에서 자전거를 대여한 후 홀로 달렸다고. “형은 어디세요?”
강동대교에 도착했을 때 노준이가 광진교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강동대교 다음이 광진교니까, 결국 여의나루에서 팔당까지의 다리는 모두 찍은 거다. 비록 팔당팀이 3개, 여의나루팀이 17개를 찍는 불균형이 있었지만.(그래도 거리 차이는 4km남짓이었다) 이제 남은 건 이 길을 따라 가는 것뿐이다. 그럼 광진교 어딘가에서 손을 흔들어 맞이해줄 거였다.
“아, 우리는 이제 미사대교 찍고 강동대교 가는 중이야” 미안한 마음에 조금 거짓말을 섞었다. “음, 조금 천천히 달려도 될 것 같은데? 노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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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18 : 00 광진교 언덕인 줄 알았는데 평지를 가고 있었다. 작은 자전거 탓에 쥐어짜듯 페달을 밟아야 겨우 앞으로 갔다. 옆으로는 앞질러 가는 많은 사람들, 뒤에는 원이가 내 속도에 맞춰 따라와 주고 있었다. “어?” 저 앞에서 누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쪽 팔을 뻗어 위아래로 흔드는 것이 택시를 잡는 것 같기도, 어릴 적 달리기 시합 때 결승점을 알리던 몸짓 같기도 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노준이임을 알았다. ‘다 왔다’ 약간은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웃음이 났다. 천천히 노준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노준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38.1km 애초 계획처럼은 되지 않았다. 중간에 몇 번 길을 잃어 헤매기도, 중간에 서로 연락도 했다. 자전거길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날 것 같았던 머릿속 그림은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도 뭐, 괜찮다. 결국에 만났으니까. 끝과 끝으로 헤어져 설마 만날 수 있을까 했는데, 마주한 모습은 헤어질 때 얼굴, 그대로였다. 3시간여 동안 우리가 한 건‘38.1km’라는 거리를‘0km’로 만드는 일이었다. 찬바람을 많이 맞았다며 얼른 따뜻한 것 좀 먹으러 가자는 투정을 웃으며 부릴 수 있는 거리. n은 다리다. 가다보면,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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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했던 설날의 떡국 2014년 설날이었다. 그 날은 설날인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휴일처럼 느껴졌었다. 방안 침대에서 누워있던 중 갑자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방문을 열어보니 48호 할아버지였다. 무슨일인지 영문을몰라 빤히 얼굴을 처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할아버지 손에는 자그마한 그릇에 담겨있는 떡국이 보였다.
“떡국 끓였는데 먹어보라고~” “아, 네.” 떡국을 받아들고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얼버무리며 한마디를 건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자그마한 그릇속의 떡국에는 떡이 가득히 담겨있었고 그 아래에는 고기와 계란까지 풍성히 담겨있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마주칠 때면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셨었다. “밥은 먹었냐?” 하며 물어보시던 안부인사가 아직도 귀에 맴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다른곳으로 가셨는지 보이질 않았다. 정신없이 삶을 살아가다 보니 언제, 어디로 가신지도 모른체 그저 문득 그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이 났던 것이다.
이삿짐에 담은 기억 글 소민수(26) 디자인 우세연(25)
‘아 그러고보니 할아버지가 요새 통 안보이시더니 다른곳으로 가셨나보구나.’ 정을 받고도 나는 계속해서 소극적으로 이웃을 대하였던 모양이다.
가깝지만 먼 당신 요즘 우리는 차가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웃과 촘촘히, 겹겹히 밀집되어 가깝게 살아가고 있지만, 소통은 없어지고 서로에 대한 관심도 없어지는 것 같다. 나부터도 이웃과 소통해야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오히려 이웃은 눈치를 봐야할 대상이었다. 내가 확실히 차가워졌음을 느낀건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이다. 혹여나 이웃들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복도에서 사람을 마주쳐도 인사조차 안 하는 소극적인 생활을 했다. 내가 생활하는 고시텔은 조그만 소음만 내면 금방이고 옆방에서 욕설이 들려온다. 자연히 이웃을 마주쳐도 인사하기보다는 긴장하게 되었다.
고시텔을 처음 들어가게 된 것은 2013년 10월 무렵 이였다. 9월에 군대를 제대하고서 한달을 휴식하며 보내던중. 일을 하면서 공부할 계획으로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준비하게 되었다. 여러방면으로 알아보던 중 찾게된 지금 고시텔은 아마도 강동구 전 지역에서 가장 저렴한 일 것이다. 고시텔 방을 처음 보러 갔던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허스름하고 어둑한 복도를 지나 깊숙한 곳에 있던 50호가 바로 나의 방이었다. 2평 남짓한 방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걱정과 염려보단 기대감이었다. 그 땐 부모님 곁을 떠나 처음 독립하여 생활하는 것이었기에 더 설레었던 것 같다. 이젠 친구를 만나러 두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올 필요도 없었고, 약속시간에 늦을까 노심초사하며 차시간표를 계속 꺼내볼 필요도 없게 되었다.
군대에서 배운 알뜰하고, 검소한 삶이 아직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에 자취생활에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만큼 순탄한 생활은 아니였다. 문제는 이웃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문제 중 가장 예민한 것은 소음이었다. 방음이 잘 안 되어서 옆방에서 잠을 자면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눈을 감으면 한방에 같이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그래서 방에서 물한 모금을 마실때에도 조심조심 먹어야한다. 언젠가는 물을 마시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는데,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는 내 모습을 보곤 피식 웃음이 났다. ‘나 인터스텔라 찍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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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IR
조기 한 마리 고시원 생활을 하다가 보면 가끔은 조촐하게 밥을 먹는다. 부모님이 반찬을 해오시는게 늘 주일이다보니 금요일이나 토요일쯤이 되면 밥상은 더 조촐해지곤 한다. 그날도 없는 반찬으로 밥을 먹을 생각에 시무룩히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는 반찬을 해먹을 수 있게 주방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스레인지 앞에 조기를 굽고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조기굽는 냄새가 휴게실에 진동하자 마음은 더 힘들어졌다.
‘한점만 달라고 할 수 도 없고…에이, 빨리 먹고 헤치워버리자.’ 빠르게 주린 배를 채우고 있는데 조기를 굽던 아저씨가 슥 한번 뒤돌아보더니, 조촐한 밥상을 보셨는지 조기한점을 들고 오셨다. 아저씨는 노릇한 조기한점이 담겨있는 그릇을 내밀면서.
“조금 짤 수도 있는데 드셔보셔요.” “아,,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괜찮다고 말함과 동시에 손을 내밀어 그릇을 받았다. 마음은 괜찮지 않았나보다.
부메랑이지 내 마음을 열어 재끼다
총무님은 가끔 만나면 신앙의 조언을 해주시곤 했다. 언제 한 번은 감사가 뭐라고 생각하시냐고 물어본적이 있었다.
“총무님은 감사란 뭐라고 생각하세요?” “감사란 부메랑이지. 우리 집 우리 엄마는 무당이야. 오십년 정도. 그 중에서 내가 구원을 받았어.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고난을 겪었어. 온갖 고난과 온갖 모욕을 경험했어. 그런 경험 중에서 굴하지 않고 극복하고 권사까지 온 것. 그게 내 감사야. 어려운 가운데서 감사하면 또 다른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생겨. 불평한다면 또 다른 불평 할 조건이 생겨. 부메랑과 같아.”
49호 형 일년 반동안 나를 제일 힘들게한 사람을 한명 뽑자면 49호. 옆방 형이었다. 조금만 소리를 내도 금방이고 욕이 들려오니 늘 신경 곤두새우고 옆방을 신경쓸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형은 기술직에서 일했는데, 새벽녘에 일어나서 일을하러 나가곤 했다. 그러기에 내가 보는 형은 늘 방에서 잠만자는 형으로 보였다. 다음 출근까지 잠을 잘 자야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소리에 예민했던 것이다. 형은 그렇게 욕을 하다가도 가끔은 과자를 바리바리 사서 먹으라고 건내주곤 했다. 나도 시간이 지나자 미운정이 들었는지 복도에서 형을 마주치면 피하기보단 먼저 인사하며 안부를 물었다. 얼마전엔 이사를 앞두고 49호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형, 저 곧 이사해요.” “아 진짜? 아쉽네.” “언제 한 번 식사 같이 해요.” “그래, 다음주 중에 한 번 먹자.” 그렇게 말하고 방으로 돌아온지 한 시간쯤 되었을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보니 49호 형이었다.
“이거 마시고 자.” “어? 감사합니다.” 따뜻하게 대핀 헛개꿀대추차였다.
1819
차가웠고, 굳게 닫혀있었던 내 마음을 처음 열어 재낀 분은 고시텔 총무님이셨다. 총무님은 어느 교회 권사님이셨는데, 내가 명성교회에 다닌다고 하니, 보기드문 착한 청년이라며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교회에 가는 길에 총무님을 마주치면 교회에가냐면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인사해주시곤 했다. 고시텔은 공동체 생활과 다름이 없다. 같은 세탁기를 쓰고, 같은 샤워실을 쓰며, 같은 화장실과 부엌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규율 또한 존재한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에는 따로 준비한 슬리퍼를 신을것, 세탁기는 밤 11시 이후에는 사용하지 말것, 냉장고에 간식을 넣을 때는 방번호표를 붙여 잘 정리해서 넣을 것 등 수많은 규율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규율들을 잘 지키지 않았다. 눈치를 보다가 총무님이 주위에 있을 때에는 하는 척 하고 없으면 그만 편한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수고할 분은 총무님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몸이 편한 쪽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늘 총무님을 마주할 때면 마음 한켠에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이사 일년 반에 가까운 고시원 생활을 마감하려니 행복한 마음이 컸지만 마음 한켠엔 짙은 아쉬움이 남았다. 될대로 되라하며 규율을 어기머 멋대로 생활 했던 것, 늘 보던 이웃을 마주쳐도 아무 인사 없이 지나쳐 버리던 행동들, 이웃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 건낸 것이 계속 떠올랐다. 이웃이 다가오려고 해도 내가 먼저 벽을 쌓고, 내가 멀리 도망가 버린 것은 아닌지. 늦게나마 깨달은 것에 감사하며 앞으론 한 발짝 먼저 다가가 보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쉴 곳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가끔은 숨으러 오지만 그분은 받아주세요”
일러스트 윤지현(22)
2021
“눈에 보이진 않지만 느껴져요 그분은 정말 멋진 날개를 지녔어요”
일러스트 윤지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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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는 거는 마음먹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막상 마음을 먹으면 이렇게 좋은 걸...”
글 조현택(25) 디자인 윤지현(22)
일본에는 유명한 자살절벽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닷가에 위치한 절벽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 위해서 그곳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한 노인분이 계시는데, 그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자살할 것 같은 사람을 보면 아무 말 없이 찹쌀떡을 건넨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명절이면 가족들이 모여서 찹쌀떡을 먹는 관례가 있어서, 찹쌀떡을 먹을 때면 집과 가족이 떠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찹쌀떡을 건네고, 그것을 먹은 사람은 집과 가족을 생각하며 자살하려는 마음을 버린다고 합니다. 살기 힘든 이 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강퍅하게 변합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하여 줄 수 있는 곳은 모두가 자신의 편이며, 자신을 기다려 주는 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요즘 많이 힘드시죠? 집으로 돌아오세요. 언제나 당신의 편에서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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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Dear Mr. JJK 글 박노준(22) 디자인 박보근(26)
"존경하는 JJK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명성교회 대학부에서 [매거진n] 라는 소식지를 만드는 에디터입니다. JJK님의 도착 9번트랙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괜찮을까요? " 어떤 SNS 매체의 특성상 140자로 인사와 자기소개, 그리고 간청까지 모두 담아야했다. 그날을 다시 생각하면 스스로 무례하기 짝이 없어 낯 뜨거울 정도.
“JJK가 소개하는 JJK 안녕하세요. 신촌교회에 다니고 있는, ADV라는 크루의 리더 JJK입니다. 큰 회사의 자본을 통해 TV와 같은 곳에서 활동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하기를 선택한 가수입니다. 아 그리고 힙합씬에서 몇 안 되는 유부남이고요.” 그럼에도 친절한 답변을 해준 준 JJK씨. 아직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ADV, JJK하면 홍대음악거리에선 그의 이름을 모를 이가 없을 정도. 발매된 앨범만 7장, 곡만 100곡이 넘고 수없이 많은 공연을 한 디스코그래피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힙합을 좋아하는 필자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존경하는 아티스트와의 주고 받는 이메일. 그렇게 필자는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닐 썰이 늘었다. 처음엔 곡을 추천하는 형식을 취하려 했으나 메일을 주고받다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물론 JJK씨는 친절히 답변해주셨다.
존경하는 JJK님께 우선 저는 형의 Big fan이에요. 형의 랩을 들을 때면 가끔 저도 느껴지는 감정을 가사로 옮겨보고 싶어져요. 옮겨봤는데 오글거리기만 하고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더 형을 존경하게 됐어 요. 어떻게 보면 형은 제가 랩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데, 형이 랩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아, 그리고 제가 교회를 다니거든요. 근데 가끔 주변 분들이 제가 듣는 음악의 playlist를 보고 이런 노랠 왜 듣느냐 물어요. 또 그와 반대로 힙합을 듣는 친구들이 크리스천인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제가 형의 얘기를 듣고 더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저도 형과 같은 크리스천이기 때문 인 것 같아요. 형도 기독교와 힙합이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모태신앙, 10년차 힙합 리스너 - 박노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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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준 에디터님께 우선 저를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 이런 질문들은 언제나 반가운 일이지만, 교회를 다니시는 분의 질문이라 더 반갑습니다. 저는 중학교시절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긴 했는데, 소극적인 성격이라 미국 생활에 많이 위축됐던 것 같아요, 근데 또 재밌는 것이 미국에 있으며 본토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지누션이라든지, JK라든지 한국 곡들을 들으며 위로를 받았었어요. 그시절쯤 저도 노준씨처럼 랩을 시작하게 됐구요. 대척점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딱히 랩을 쓰는 행위가 신앙에 어긋난다고 여긴 적은 없어요. 저는 솔직한 저의 이야기를 쓸 뿐이었으니까요. 아마 제가 <대화>나 <가시길>같은 CCM 힙합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저 자신을 솔직히 표현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네요. 위와 같은 곡을 만들면서 주위의 시선이 두려웠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간혹 'JJK는 기독교 이야기 하는 거 때문에 싫다'는 글을 본 적은 있지만요. 상관없습니다. 저 자신에게 충실한 음악들이 기 때문에 저는 당당해요. 제 신념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두려울 이유가 없죠.
더욱 존경하는 JJK님께 Rock이든 Pop이든 Hiphop이든 무조건 대척점에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거죠? 정체성에 혼란이 올 뻔했는데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메일을 주고받는게 꿈만 같아요. 사실 저는 JJK님을 ‘Makes the way’라는 곡으로 알게 됐어요. 조금 강한느낌을 많이 받았어요.(그런 느낌의 곡 맞죠?) 그리고 그 곡 제목을 다른 곡에서도 자주 언급하시는 걸 봤고요. 혹시 무슨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 최근에 알았는데 그 곡이 팔로알토를 디스한 곡이라고들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도착] 9번트랙 피쳐링에 그분 이름이 있어서 좀 놀랐어요. 쉽게 화해하긴 어려울 정도로 강한 곡 이라 생각했는데. 참, 그리고 9번트랙 '가시길', 너무 좋아요. 어떻게 이 곡을 쓰신 거죠? 이 곡을 들으며 느낀 게 참 많아요. 저는 제가 먼저 미안하단 말을 해본 적이 손에 꼽거든요. 화해하고 싶은데 솔직하게 그 맘을 전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JJK님도 그래서 곡을 쓰신 거 맞죠? 가시길 앞에 선 에디터 - 박노준 올림.
청춘 박노준에게 보내는 편지
박노준 에디터님께 교회에서 온 메일이라 저를 자세히는 모르실 줄 알았는데, 잘 아시네요. 감사하면서 조금 민망하네요. 우선 'Makes the way'는 굉장히 직설적인 곡인데...사실 그 말은 제 슬로건이라고 해도 무방해요. 어릴 적에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뒤에 오는 사람들이 편하게 올 수 있도록 하는 선도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 어린 마음이 얽혀서 ‘Makes The Way’라는 문구를 쓰게 된 거죠. (굉장히 오글거리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 곡을 만들게 된 계기는 '먼저 용서하고 먼저 화해하라'라는 설교말씀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이었어요. 저도 노준씨처럼 먼저 미안하단 말을 건넨 적이 몇 번 없어요. 자존심이나 주변의 눈 때문에 선뜻 나서지지가 않죠.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무조건적인 용서를‘선’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딜레마에 빠진 제 모습을 마주한 거죠.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행동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런 내적 갈등을 표현한 곡이 <가시길>입니다. 비트를 받고, 제 가사를 옮기고 나서까지 팔로알토 형한테 사과를 드리지 못했어요. 근데 가만히 든 생각은 이 곡의 완성, 이 곡이 던지는 메시지의 완성이 제가 그분과 화해를 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곡이 완성되었을 때 형에게 메일로 곡을 비트와 함께 보내드렸어요. 사실 식사라도 하면서 말씀드려야 할 것이었는데 자존심 때문에 못했죠. 지금 생각해도 참 멋없이 사과했네요. 그래도 관계가 회복되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볍습니다.
JJK님께 보내는 마지막 편지 지금 보내는 편지는 에디터가 아닌 20대 청춘으로서 마지막으로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끄적거려봅니다. 사실 저는 앞으로 무얼 하고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요. 또 사회의 시선이란 게 언더 랩퍼들을 괄시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잖아요.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통념도 강하고요. 근데 전부터 말씀 드렸듯이 전 JJK님의 열혈 팬인지라 출연하신 다큐멘터리까지 빼놓지 않고 챙겨봤는데, 그때 하신 인터뷰가 기억에 남아요. 언더 랩퍼들을 괄시하는 시선에 대해 자신은 하고 싶은 것 (랩퍼)이 너무나 뚜렷해서 그렇게 하고 있고, 오히려 무엇을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이 더 불안해보인다고. 그걸 봤을 때 전 저한테 한 얘긴 줄 알았어요. JJK님이을 더 부럽고 존경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죠. 하지만 지금 저는 여전히 불안해요. 저 어떡하죠?
[Too Old Hiphop-kidz]도 보셨군요. 정말 제 팬 맞으시구나. 거기 많은 친구들이 나오잖아요. 지조, 허클베리 피,‘랩’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죠.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가 더 멋있어진 이유가, 왜 ‘랩’말고도 다른 분야에서도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나오잖아요. 물론 저희와 랩을 하다가 다른 길로 간 친구들이지만, 그 분야에서 열심히들 살지요. 아무래도 저는 젊은 문화의 중심인 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보니 젊은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데 너무 놀랐던 적이 많았어요.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를 모르는 청년들이 너무나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젊은이들이 더 불안해 보여요. 왜냐하면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 인터뷰에선 제가 너무 격하게 말했던 것 같아요. 마치 제가 제 비전에 대해 고민했던 날을 기억하지 못한 것 같은 말이었죠. 저는 여기서 청년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 조금 솔직해졌으면 좋겠어요. 없어도 있는 척, 아파도 괜찮은 척하는, 그런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말에는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그것이 제 게 아님에도 제 것인 것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굳이 힙합용어로 설명하자면 Swag 인데, 스웩이란 것도 그것이 이미 현실일 때 멋있는 거지, 없는데 빌려와서 있다고 하는 것이나, 지금 뼈가 부러졌는데 힙합걸음이라며 주춤대는 건 의미 없는 것이라 생각해요. 아플 땐 아프다고 말해야 해요. 노준씨는 정상적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노준씨께 마지막으로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저희 어머님은 이런 말씀을 항상 해주세요.“한낱 비둘기도 먹이를 주시는 하나님이 네 먹을 것 안주시겠느냐.”갑자기 확 위로가 되더라고요. 근데 제가 느낀 건 구해야 주시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엔 비둘기도 기도를 하는 것 같아요 먹을 것을 달라고 말이죠. 그리고 또 먹이를 먹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죠. 우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구하고 노력하고 간단한 공식만 풀면 되지않을까요.
며칠 간의 설레던 대화가 끝났다. 그리고 당장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직면한 문제의 벽은 여전히 높아만 보인다. 하지만 내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 되겠다 다짐하니, 우울한 감정은 사라진다. So what 정신. 그게 필요한 게 아닐까.
어떻게 생각하면 화해하고 싶지만 선뜻 사과를 하지 못하는 것은 감정에 솔직하지 못함 아닐까. 내가 옳다고 계속해서 나를 속이는 길이야 말로‘가시’가 깔린 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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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보민(24)
INTERVIEW
Prologue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적어도 몇 년은 더 그 자리에서 카페를 운영할 것 같던 형이 갑자기 부산에 간단다. 부산에 있는 신학대학교에 들어갈 거라고. 새해 된 지 얼마나 됐다고 1분기부터 사람 놀라게 하는 거다. 얘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아쉬웠지만 당장 내일 내려갈 기차표를 예매해놓았다는 상황에서는 그저 응원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은 에디터로서 만나는 거니까, 어떻게 해서든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주일이라 카페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다른 카페였다. 약간 아이러니하지만 카페 사장을 다른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게 된 거다. 사장님은 자리에 안 계신 상황이었지만 형은 여기 사장님이 오시면 민망해진다며 웃었다. 올해로 스물여덟, 2013년 11월 11일부터 명일동에 커피 전문점‘Cafe In’을 열었고, 이제는 카페 일을 그만 두고 신학을 위해 부산으로 간다. 내일 떠나는 사람이었지만 참 한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카페 사장은 흰 와이셔츠에 깔끔한 외모여야 하는데 형은 그런 이미지와 멀다는 농담에 카페 사장이 왜 그런 이미지냐, 카페 사장은 약간 털북숭이어야 한다고 응수하는 모습이 정말로 익숙했다.
“어? 여기서 뭐하세요?” 거짓말 같은 타이밍에 카페 사장님이 들어오셨다. “아, 얘기 좀 하느라고요..지금 가게에 우유가 떨어졌는데 좀 복잡해서..하하..” 묻지도 않은 대답까지 한 형은 이래서 못 있겠다고 민망해하며 웃었다. 작게 얘기했지만 다 들린 것 같았다.
응, 너무 하기 싫었어요. 귀찮았어. 근데 김 모 씨라고 형이 있는데 구체적인 레시피는 아니지만 계속 딸기를 하라고 언질을 넣는 거예요. 그래서 했는데 와, 그게 계절메뉴인데 제일 많이 나갔더라고. 어이가 없어요 그래서. 커피메뉴보다 더 많이 나갔어.(웃음)
당황했어요. 아는 사람이라 더 당황했죠. 더 잘 해주고 싶었고, 더 챙겨주고 싶었는데 내가 잘 못하니까요. 한 번은 커피 빈에서 일하는 형이 와서 ‘쿠키 앤 크림’을 주문했는데, 그게 지금은 잘 나가는 메뉴지만 그때만 해도 레시피가 안 잡혀있었어요. 맛이 약간 맹탕? 그래서 주문을 받고 고민하다가 형에게 말했죠. 이거 내가 생각했을 때 좀 별로인 것 같다고. (웃음) 스스로 메뉴 디스를 했죠.
그럼 첫손님 말고, 제일 기억나는 손님은요? 컨테인(인터뷰 진행 중인 카페) 형님들 오셨던 게 제일(웃음). 진짜 겁이 났었어요. 네 분이 오셔서 맛보겠다며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시는데 ‘아, 내가 몇 명의 입에 오르내릴까’(웃음).
깔끔한 외모에 손목이 보이게 소매를 접어 올린 흰 와이셔츠,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의 검정색 앞치마, 사람이 없는 시간엔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기도 하며 잠깐의 여유를 즐길 줄도 아는 모습. ‘카페 사장’하면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런데 에디터가 만난 카페 사장은 조금 달랐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이. 카페를 시작한 이후 부쩍 늘어난 체중, 큰 덩치와 살짝(?) 나온 배, 웃으면 눈이 뒤집어진 팔(八)자 모양으로 찢어지는 모습까지, 카페 사장의 느낌 보단 이웃집 푸근한 아저씨 같다. 우리는 그동안 미디어가 주는 이미지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을 지도. 사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건 오늘 만난 사람이 에디터와 오랜 교분이 있는 사람이기에 그렇다. 김대곤(28) 사장이 1년 반이란 시간 동안 운영했던 카페는 개인적으로 자주 가던 곳이기도 했다. 이제 카페를 정리하고 다른 꿈을 위해 멀리 떠나는 상황에서, 혹시 못 다한 얘기는 없었는지. 인터뷰이 선정 기준이 너무 친분에 기인하지 않았나 싶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같은‘n’이니까, 오랜 시간 함께 예배드렸던‘New song’인이니까, 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잘 나갔던 메뉴? 기본 메뉴 중에는 카페 라떼..
안 나는데?
첫 손님이 아는 사람이라 당황은 안 했겠네요?
글 하영준(28) 디자인 윤지현(22)
제일 잘 나갔던 메뉴는 뭐였어요?
아, 하여튼 기본 메뉴 말고 제일 잘 나갔던 건 딸품요!(딸기를 품은 요거트)
그냥 다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내 친구들이 자기가 첫 손님 하겠다고, 자기가 돈 내고 먹겠다고 막.
come what may
닥쳐. 아니 근데, 그냥 무서웠던 거죠. 여기 형들은 워낙 잘하시고 오랫동안 하셨던 분들이니까 평가받는다는 게.(웃음) 진짜 그거뿐이에요.
Part 1. 아는 손님 기억나는 게 오픈 전날에 친구랑 찾아가니까 형이 아메리카노를 줬어요. 한번 마셔보라고. 혹시 첫 손님 기억나요?
아..(당황)
Cafe IN
나 이거 그대로 쓸 거예요.(웃음)
원래 그거 하기 싫어하지 않았어요?
Part 2. 이 남자의 쉬는 법 카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었죠? 전에도 한 번 말했는데, 그냥 어머니가 차려준 거예요.(웃음) 가게 싸게 나왔는데 한 번 해보지 않겠냐는 식으로.
그동안 봐왔던 일도 있고, 아무래도 교회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지금이야 매출이 올랐다지만 예전에 당장 카드값 막을 돈이 없을 때 무리해서 주말에 아르바이트 쓰고, 수련회 때마다 가게 문 닫고. 새벽에 신문 돌릴 생각까지 했었죠 아마? 응 그 생각도 했었죠. 좀 힘들다 보니까. 새벽 3시부터 9시까진가? 근데 특수차량이 있어야 된대서 못 했어요.(웃음) 단순히‘믿음이 좋다’는 말로 이해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단면적인 일도 아니고. 그렇게 무리하면서까지 했던 이유가 뭐예요? 음, 나는 일단 주말에는 봉사를 해야 했으니까요. 이걸 은혜롭게 얘기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봉사가 좋았어요.‘직분에 충성해야지’하는 당연한 얘기보다도 나한테는 토요일, 주일 봉사하는 게 쉼이었거든요. 아르바이트비 주는 돈으로 나는 쉬는 거라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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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그 모든 것들도 인복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말들이야 많이 들었다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만났으니까요. 아, 그건 정말 난 사람들 복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편하게 생각해주고 많이 다가와주고, 또 내가 다가갈 수 있었던 모든 것들. 진짜 일 년 반 동안 일하면서 돈은 한 푼도 안 남았는데(웃음), 근데 내 주변에 사람들이 남은 것 같아요. 인생에서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던 적이 없는 것 같거든요. 내 부끄러운 모습까지 오픈할 수 있는 사람들. 이전에 나는 교회 사람들과 전혀 연락을 안 하고 살던 사람이었어요. 토요일 주일에만 만났지 평일에는 연락 한 번 안 했었거든요. 근데 카페를 하면서, 특히 작년과 올해는 너무 달랐어요. 우리 에디터즈도 자주 갔지만 카페가 약간 만남의 장처럼 된 것 같아요. 그런 생각 든 적은 없어요? 사람들이 카페를 정말 편하게 생각해주는구나, 그들 마음에 우리 카페가 하나의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구나 했던 적. 어..이건 농담으로 하는 얘기긴 한데, 에디터즈에서 와가지고 음료 하나도 안 시키고 앉아있을 때.(웃음) 와, 이 사람들이 여기가 진짜 편한가보구나, 하나도 안 시키고 이렇게 앉아있을 수 있구나.(웃음) 시켰어(웃음), 시켰어~~!! 야, 너네 안 시킨 적 있어.(웃음) 일곱 명이서 한 잔도 안 시키고 야, 내가 말 한 마디 안 하고 있었는데 얘들이, 음..그렇구나.(웃음) 아, 그것도 있다. 이 사람들이 말도 안 하고 갑자기 치킨을 들고 들어왔을 때. 그때 아, 이 사람들이 여기를 정말 자기네 공간이라 생각하는구나.(웃음) 그래도 주위에서 걱정을 많이 했잖아요. 저도 만류했었고. 집에서는 어땠어요? 안 좋았죠. 금전적인 부분에서 독립을 못한 상황에서 부모님의 돈으로 한 거니까요. 아르바이트를 쓰는 것도 부모님의 간섭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부분인데 난 그게 싫었고. 근데 부모님도 나중에는 손발 드셨어요.(웃음) 어떻게 보면 부모님은 익숙하실 일인 게, 예전에 군대 전역하고 이런저런 일을 할 때도 수련회 있으면 부모님 만류에도 일을 그만뒀으니까요.
Part 3. 친구 집 or 부모님 방 카페를 하며 제일 신경 썼던 건 뭐예요? 맛, 서비스, 관계나 뭐 그런 거. 제일 신경 썼던 건, 맛도 맛이지만 사람들과의 관계? 이걸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됐고, 많이 즐거웠죠.
순전히 수련회 때문에요? 그건 아니죠? 뭐, 일의 불투명성도 이유였지만, 사실 수련회 때문에 그만둔 게 맞아요. 수련회 가야되잖아. 수련회 가고 싶은데.
어떤 때요? 음..친구였던 사람들이 손님으로 오면서 나한테 친구가 아닌 모습으로 대할 때? 그게 좀 서러웠던 것 같아요. 친구랑 관계가 약간 이상해지는 거죠. 약간 갑과 을이 되는 것 같은? 나는 그래서 카페 일을 누가 언급하는 걸 되게 싫어했어요. 카페가 나에게 면류관이면서도 아킬레스건이었어요.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걸로 아는데. 물론 힘들었던 적도 있어요.
왜 그렇게까지 가고 싶었어요? 은혜도 받아 본 사람이 안다고, 전역하고 나서 2010년 동계수련회에서 정말 큰 은혜를 받았었거든요. 그것도 개회예배 때. 지금도 그때 받았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번엔 어떤 은혜를 주실지 늘 기대하게 돼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근데 부모님은 걱정하셨죠. 청원경찰을 1년 정도 했을 때는 한 달만 더 하면 퇴직금도 나오고 실업급여도 나오는 상황인데 그만뒀으니까요.
어떤 말들이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냥 카페가 어떠니 맛이 어떠니 이런 식으로 얘기가 나오는 게 싫었죠. 꾸준히 찾아주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어떤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까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그냥 한 번 지나가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건 좀 듣기 힘들더라고요. 아직도 싫어요 그건.
내가 부모였어도 그건 뜯어 말렸겠네요. 응. 근데 퇴직금이나 실업급여가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시기에 그만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카페를 그만두는 것도, 부산으로 가는 것도 그래요. 지금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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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치킨 드시고 짜장면 시켜 드셨잖아요.(웃음) 뭐 아무튼, 그때 기분 어땠어요? 근데 진짜 전혀 나쁘지 않았어요. 나빴다면 내가 한 명한테라도 나중에 얘길 했겠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는 돈 버는 것 보다 사람이 더 중요했어요. 음료 안 시켜도 오는 게 좋았어. 카페를 운영하면서 그런 게 있었나 싶어요. 찾아오는 사람들이 이것만은 느끼고 갔으면 좋겠다 싶었던 거. 직접 말은 안 했어도, 무언으로 손님들에게 설득하고 호소했던, 혹은 그냥 툭 던졌던 메시지 같은 거. 글쎄요..나는 솔직히 맛은 다른 주변 카페보다 자신이 없어요. 좋은 재료를 썼지만 실력적인 부분에서요. 그래서인지 나는 조금 다른 거, 편안함을 드리고 싶었어요. 조용한 편안함이 아니라, 고민을 서로 얘기할 수 있는? 여기 왔을 때는 서로가 같이 나눌 수 있었으며 했던 거죠. 나는 사람이 들어왔을 때 표정을 많이 봐요. 이 사람이 평소랑 많이 다르다? 지금은 어떻지? 어떤 마음으로 여기 왔지? 그런 거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 성격이라 혹 이 사람이 안 좋은 기분으로 들어왔어도 나갈 땐 기분 좋게 나갔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굳이 나로 인해서가 아니더라도 그냥 일이 잘 풀려서요.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작년, 한창 힘든 일을 겪던 나도 유일하게 형네 카페는 자주 갔었으니까. 확실히 카페 같은 조용한 편안함은 없었다. 오픈 시간도 들쭉날쭉, 자리에 앉으면 형이 앞에 앉아 계속 말 걸고 게임하자 그러고. 카페에 공부하러 가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카페에 가는 게 아닌 매일 친구 집에 놀러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혼자 가도 절대 심심하지는 않았던, 어릴 적 눈치도 없이 매일 놀러가도 괜찮았던 그런 친구 집 말이다.
카페를 제일 잘 했다 싶었을 때는 언제예요? 딸품요 잘 나가서 그런 거 말고.(웃음) 아 잘 나갔지. 너무 행복했어요.(웃음) 농담이고, 사람들이 내 집처럼 생각해줬을 때가 좋았어요. 진짜 너~무 내 집처럼 생각하는 사람 말고.(웃음) 약간 어려운 방 있잖아요. 부모님 방? 내 집이긴 한데 약간은 눈치를 봐야 되는? 딱 그 정도, 앞으로도 그 정도 공간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Part 4. Cafe I‘ n ’ 신학을 한다고 부산에 내려가는데, 사실 좀 갑작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요. 형을 잘 알던 사람들에게도,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가야할 길이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다만 지금까지 미뤄왔다면, 이제는 길이 생겼을 때 빨리 가자는 생각인 거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라도? 작년 말부터 새로운 길들을 많이 보여주셨던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캐나다 가는 것도 알아봤었고, 방통대(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가는 것도 알아봤었고.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자퇴처리가 되긴 했지만 예전에 처음 갔던 대학교도 기독교 대학이었거든요? 과도 복지신학이라고 사회복지와 신학을 접합시킨 과였는데, 그러한 것들이 조금씩 나를 이쪽으로 이끌지 않았나 싶어요. 주변에선 뭐라고 해요? 카페 그만두고 내려가는 거에 대해서. 굳이 부산을 가야 되냐는 말도 있었고. 가게 사정에 대해 잘 알던 사람은 왜 그만 두냐, 지금이 본전 찾을 땐데, 매출 올렸는데 왜 그만 두냐고.
INTERVIEW
매출도 많이 올랐어요? 많이 올랐죠. 이 상태로 카페를 계속 하면 1년 안에는 본전을 다 찾을 수 있다 생각해요. 그럼 그때부터는 순수익이 되는 건데, 뭐, 일이 이렇게 됐네요.(웃음) 안정기로 들어서려는 시기에 이걸 내려놓는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두렵진 않아요? 당연히 두렵죠. 3월 2일에 개강인데 아직도 가게가 나가지 않았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월요일에 면접을 보러 가는 상황인데 붙을지 안 붙을지도 모르고. 아, 안 붙으면 다시 오는 거예요? 그럼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와서 카페 하고 있을 거예요 (웃음). 근데 내가 생각하는 건 우리가 얼마나 탄탄대로를 갈 것이냐는거예요.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잖아요. 맞는 길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래서 나는 부르심이라 생각해요. 그렇게 믿어요 분명 좁은 길이긴 하지만 이게 맞다는 확신이 있으니깐 두려워도 가는 거죠.
만약 목회를 하게 되면 카페를 운영했던 경험이 나름 도움이 되겠죠? 그럼요. 카페에서 사람들 힘든 이야기 들어줬던 거, 내가 얘기 했던 거, 많이 도움이 되겠죠. 원래 얘기하는 거 좋아해요. 원래 방통대도 청소년 상담학과를 가려다가 붙었지만 안 갔어요. 신학 할 거니까. 시간 좀 지나고 카페 다시 할 생각은 없어요? 절대 없어요.(웃음) 제가 잘 할 자신이 없고, 저는 카페랑 맞는 사람이 아니에요 솔직히. 나는 부지런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앞으로 부지런해지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카페는 정말 아닌 것 같아. 제 길은 이거 하나밖에 없네요. 카페는 다른 분이 잘 하셨으면 좋겠어요. 가게도 얼른 나가서 맡게 된 분이 잘 하시고, 카페도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근데 조금 샘날 것 같기도 해요.(웃음)
Epilogue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형이 면접에 붙었다는 얘길 들었다. 지금은 그곳 기숙사에서 지내며 평일엔 종일 열람실에서 지낸다고. 카페인도 다른 분이 잘 이어받아서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에디터, 나는 지금 형이 남겨놓고 간 카페에서 원고 마감을 하는 중이다.
마음이 어때요? 카페를 정리하면서.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다음 주, 그 다음 주에도 계속 하고 있을 것 같고..이러다 월요일에 면접 떨어지고 진짜 계속 하고 있으면 어떡하죠?(웃음) 아마 카페 안 열고 일주일 정도 지나면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어요. 눈을 떴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없을 때도 실감이 날 것 같고. 원래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지라, 그때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외로움이 오는 것 같네요 이번에 형을 인터뷰하게 된 건, 형이‘n’이었기 때문이에요.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뉴송인이니까,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고 응원해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형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혹시 그동안 못 다했던 얘기 있어요? 못 해서 아쉽거나. 아쉬운 거는 내가 너무 게을러서 카페에 바꿔야 했던 많은 걸 바꾸지 못했다는 거? 지금 카페 가보면 메뉴에는 있는데 없는 게 많아요. 특히 쿠키? 쿠키는 제가 귀찮아서 잘 안 만들었거든요. 쿠키 열 개 사겠다는 분한테“안 돼요”하기도 했었고.(웃음) 민망했죠. 못 다했던 얘기라..나는 옛날에 그런 걸 공감 못 했어요. 토요예배 때문에 면접까지 포기하는 애들이나, 교회 일 때문에 다른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사람들을요. 근데, 정말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내 마음에 이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니까 다른 걸 선택할 수 없는 거죠. 그런 울림, 부르심이 있을 때 빠르게 반응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 게 결국 본인에게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전혀 알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래서 부르신 분이 주님이라는 거. 이끌어 가실 분도 주님이시고, 그러니까 거기에 그냥 잘 붙어만 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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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리고 무한해요. n은 그러한 우리의 죄를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이 공식에서 n이 크면클수록 0에 가까워져요. 분자가 1이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죄도 그래요. 오직 한 분이신 예수그리스도로 인해서 무한대와 같이 반복되는 우리의 죄도 씻겨지죠. 결국 0인 거에요. 구원에 이르게 되죠. 글 전아영(25) 디자인 전보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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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 i + n 해마다 봄이 오는 날이면 우리 마음은 누추해집니다 몰라보게 달라진 누군가가 내 안에 집들이오는 걸 부끄러워하거든요 큰 맘먹고 들여보냈더니 아직 먼지가 남아있더라구요 그때 참 미안해져요 시선들이 번쩍이는 이빨 내밀면 우리 뒷모습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다에요 있잖아요 그러지말고 이곳으로 올래요? 당신이 서 있는 뿌리를 타고 올라와요 당신이 걸터앉을 가지를 만들어 놓을게요 꾸준히 외식할 일도 없구요 혼자 걸을 일도 없어요 고민이 있다면 단단한 머리들을 맞대고 쉬고싶을 때는 입 크게 벌려 하품도 해봐요 시간은 우리가 꾸며가는 거니까 그러니까 우리 같이 있어봐요 당신의 손을 내밀어주세요
글 김정훈(22) 일러스트 신은주(21)
NEWSONG NEWS
예수제자 JESUS FOLLOWER 2015 동계수련회 프로그램 소개
‘예수제자’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번 동계수련회. 이번에도 알찬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어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프로그램을 참여하다보면 가끔은 "이거 왜하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이번 동계수련회 프로그램들은 어떤 의도로 기획되었을까?
'듣다' 1부에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전을 받고, 2부에는 '독일통일과 한반도: 한국교회의 역할’이라는 강의를 통해 청년으로써 통일이라는 꿈을 더욱 구체화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알아가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과 믿음을 그래프로 나타내보고 이를 팀원들과 나눔으로써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밤새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밤. 아쉬움 가득한 팀원 그리고 친구들이 이야기와 게임을 통하여서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사랑하다' 새큼이 35기들을 축복해주는 시간이다. 뉴송에서 준비한 선물인 목도리를 그룹장님이 직접 감아주는 등 따뜻하고, 포근하게 35기를 맞이하고자 하였다.
'하나되다' 팀이 하나 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었다. 노끈 안에 하나로 된 팀이 서로 상의하며 퀴즈를 풂으로써 단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쉬어가다' 팀과 함께 쉬며 쌓여있던 피로를 회복하고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주님의 길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즐기다’ 각 대학부원의 사연을 듣고 기수별로 준비한 찬양을 듣는 보이는 라디오 형식이다.
'새기다' '따라가다' 여러 가지 게임을 하며 내가 버려야 할 나쁜 것(죄, 게으름 등) 들과 쌓아야 할 것들 (감사, 사랑, 기쁨 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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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때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팀에서의 추억을 공유하며 새기자는 의도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글 소민수(26) 디자인 박보근(26)
젊은소리 0304월 #ISSUE 34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강동마 00006 발행인 김삼환, 청년대학부 김선우, 편집인(편집장) 하영준, editor 전아영, 김경준, 장원, 배형주, 송승찬, 소민수, 조현택, 김정훈, 김희진, 김은진, 이하은 이가람. 박노준, 이효준, 정성현 design 전보민, 윤지현, 신은주, 이지현, 우세연, 박보근 facebook.com/mseditors 인쇄 문영사 02 2263 5087, 발행처 대한 예수교 장로회 명성교회 대학부 /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 330-5호, 02 440 9361-5 web www.mscolleg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