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15=2014. 08+09
인생은 나그네 길 Bloom where you are planted!
ⓒ 이재웅 | 상명대98
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www.onivf.com
목차
인생은 나그네 길
소리정음
04 나그네의 삶, 이민_하시용 08 너 있는 곳에서 꽃을 피워라_전계도 11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세상은 넓다_김진선 15 부르신 곳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_엄현주 19 모험으로 사는 인생_송민영 24 북테라피_정성민 26 말씀산책_문춘근
소리지음 31 당신의 연애자소서_한선미,김효주 34 제이언니의 결혼일기_김용주 36 파란만장한 직장생존기_김작가 38 상연정(常然亭)에서..._홍정환 40 낭만주의자의 영화이야기_정일문
소리이음 자발성으로 꽃피는 경남학사회 43 일상에서의 만남_이기형 45 소리가 만난 사람_류재한 49 경상대IVF 학사회를 소개합니다_진상욱 51 그 도를 따르는 자매들!_경남 WOW(Women On the Way) 53 우리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_김자현 55 안테나 58 편집인의 글
깨끗하고 맑은 소리
소리정음 인생은 나그네 길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우리는 모두 나그네의 삶 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해외 이민을 선택한 분들 은 이를 더욱 가깝게 느낄 것 같습니다. 2013년 10 월 한국갤럽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 이 18%라고 합니다. (출처: 한국갤럽, www.gallup. co.kr) 이들은 선택 이후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이미 그 길을 걸어가신 분들에게 물었습니다.
04 나그네의 삶, 이민_하시용
24 북테라피_정성민
08 너 있는 곳에서 꽃을 피워라_전계도
26 말씀산책_문춘근
11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세상은 넓다_김진선 15 부르신 곳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_엄현주 19 모험으로 사는 인생_송민영
소리정음‖인생은 나그네 길
나그네의 삶, 이민 하시용│연세대81 16년전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왔고, 현재는 샌프란시스코 에서 조그만 이민교회를 섬기고 있다. 인디애나 대학 종교 학과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였으며, 기회있을 때마다 학부 때 익힌 PBS를 젊은이들에게 강의하는 것을 즐긴다. 보냄 받은 곳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묵묵히 하나님나라 운 동에 동참하면서 50대를 보내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
시작하면서 이민(Immigrant)이라는 영어단어를 고등학교 때 처음 접하고 외워놓았던 것 같다. 영주를 목적으로 조국을 떠 나 타국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현상이나 사람들을 이민(자)라고 배웠다. 그때만 해도 이민자라는 단어가 내게 해 당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도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게 될 줄이야. 그런데 지금 나는 조국 대한민국의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이 되어 있다.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님이 아시면 크게 역정을 내실 일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미국에 영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영주권자로서 미국에서의 법적 신분은 “영 원히 거주할 수 있는 외국인(permanent resident alien)”이었다. 학생 신분과 종교인 신분이었을 때는 그나마도 “임 시로 거주하는 외국인(temporary resident alien)”이었으니 미국에서의 신분은 말 그대로 임시로 체류하는 나그네 였다. 맨 뒤에 붙은 단어, ‘alien’이 ‘외계인’으로 들릴 때는 기분이 묘했다. 영주권자가 된 후 5년이 지난 작년 초 에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렇게 나와 우리 가족은 듣기에도 생소했던 ‘재미 교포’가 되었다. 게다가 벌써 9년째 이 민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 미국은 말 그대로 이민자의 나라이다. 미국 본토에 오래전부터 원주민들(native americans)이 살고 있었지만, 실 제로 오늘날의 미국을 세운 사람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그 이후로 세계각지에서 이민자의 대열 이 줄을 이었고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영주권을 취득하고, 슬며시 미국에 들어와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천만 명 이상에 이른다. 오바마 행정부는 매년 막대한 예산을 배정해서 이민문제를 다루고 있다. 한인들의 이민역사는 1903년 1월, 102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우 연의 일치겠지만 한인들의 숫자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에 온 청교도들의 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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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똑같다. 한인들의 경우 일종의 취업이민이었다. 이들이 하와이에 정착한 후, 한국에서 아내 를 데려오기(?) 위해서 중매쟁이가 보내준 사진만 보고 결혼했다고 해서 ‘사진신부’라는 말도 생 겼다. 하와이를 벗어난 한인들이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해서 미국 본토로 이주했고,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한인사회를 형성해 나갔다. 초기 한인들의 이민유형은 가족초청과 국제결혼이었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가족이 민이 주춤했다. 배우자와 자녀 또는 부모와 같은 직계 가족이 아니면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 는 대기기간이 문제였다. 그 이후로 취업과 투자이민이 증가했다. 미국에서 직업을 갖게 되면서 자연스레 영주권과 시민권을 얻는 경우로, 결혼이나 직계가족 초청과 더불어 가장 확실한 이민 경로가 되었다. 물론 미국에 영주할 목적이 아니어도 학업 또는 단기간의 투자나 취업을 위해서 미국에 체류하는 경우도 꽤 늘어났다. 미국 이민을 위해서는 스폰서로 불리는 가족 또는 후원 직장이나 단체가 있어야 한다. 가족의 경우 초청의 형식을 띠고, 취업이나 투자의 경우 미국의 기업이나 단체가 미국 국익에 꼭 필요 한 사람이라는 보증 하에 영주권을 신청하게 된다.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미국에서 활동하 는 해외 우수 인력 가운데 특별한 업적이나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한 인재들에게 영주권 취득의 문이 열려 있어서, 한인 젊은이들이 자력으로 영주권을 취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 살려는 뜻을 가지고 차근차근 이민을 준비하면 영주권을 취득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반면에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거나 미국 이민 허용기준에 맞출 수 없 는 경우는 체류 자체가 쉽지 않아서 마음고생은 물론 몸까지 망가진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공부하러 왔다가 눌러 앉다 나는 1998년에 가족과 함께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왔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30대 중반에 목 회의 길에 접어들었기에 3년간의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현장으로 가기보다 유학을 통해서 조금 더 목회를 준비하고 싶었다. 거기에 신학교 은사님의 추천으로 유학길에 올랐는데 큰아이가 여 덟 살, 둘째가 여섯 살이었다. 한국에 노부모님이 계셔서 서둘러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7년 정도의 기간을 정해서 유학길에 올랐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 처럼(잠16:9), 박사과정 중에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지를 샌프란시스코로 옮기면서 애초에 세웠 던 계획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학업은 늦어지고 첫째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미국에 남을 것인 지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목회지로의 부르심 과 아이들을 위해서 미국에 체류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안수 받은 목사에게 영주 권 문호가 항상 열려 있어서 교회의 후원으로 큰 어려움 없이 그린카드라고 불리는 영주권을 취 득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집 살림을 쭉 둘러본다. 침대와 가구 등은 10년도 넘은 것들이다. 유학생 시절 학업을 끝낸 교인들이 귀국하면서 주고 간 것을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져와서 그대로 쓰고 있다. 제대로 된 식탁도 없어 예전에 책상으로 쓰던 테이블을 식탁으로 쓰고 있다. 신발장이며 책꽂이도 다 중고장터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한국에 있었다면 일찌감치 폐품 처리했을 법한 것 을 애지중지 아끼며 사용하고 있다. 이민교회 목회자의 삶이 넉넉지 않은 탓도 있지만 나 같은 경우 처음부터 이민을 생각하고 미국에 오지 않아서인지 마음 깊은 곳에 ‘귀국’이라는 단어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전무한데도 마음은 물론 집안 살림까지 공중에 붕 뜬 상태에서 지내는 것이 이민자의 삶임을, 집안을 둘러보며 다시금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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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한국 방송이 너무 재미있다 9년 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면서 의아하게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미국에 이민 온 지 30년 넘은 분들 이 미국방송을 마다하고 한국방송을 시청하며, 한국신문을 구독하고, 미국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한국정 치를 주르륵 꿰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학생이야 귀국을 꿈꾸고 있으니 한국에 대한 관심도 컸 고 인터넷으로 한국 드라마며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한다지만, 오래전에 이민 오신 분들의 애틋한 한국사 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요즘은 나도 집에 들어오면 한국방송을 먼저 튼다. 조국에서 연거푸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개그콘서트>는 빼놓지 않고 보는 인터넷 방송이다. 아내도 틈틈이 한국드라마를 챙겨 본다. <러브인 아시아>라는 방송을 가끔 보게 되는데 한국에 시집온 며느리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애환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한국인 남편과 함께 고향을 찾는 장면에서 나 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목회하면서 만났던 할머니 권사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1960년대에 미국인 남 편을 따라서 미국 중서부 한가운데로 시집오신 분들이 들려주신 이야기와 어찌 그리도 똑같은지! 종종 한인들이 주최하는 음악회에 갈 때가 있다. 알 수 없는 이태리어나 독일어, 영어로 부르는 가곡들 은 졸음을 재촉한다. 그런데 음악회 말미에는 꼭 <그리운 금강산>, <가고파>와 같은 가곡을 부른다. 그때 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소위 은혜를 받는다. 박수와 앙코르가 쏟아진다. 수구초심이라고, 수십 년 이민자 로 살아도 영락없는 한국사람이다.
나그네 설움, 그래도 걷는다 이민자들은 말 그대로 낯선 타국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나그네 삶은 매우 성경적이 다. 구약성경에서 나그네를 히브리어로 “게르”라고 부르고 영어로 sojourner라고 옮기는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모두 나그네였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 살 때도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면서 가족을 부양했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 가나안 역시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온 것이지 그곳이 자신의 땅은 아니었 다. 가뭄이 들자 아내 사라를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도 아브라함은 나그네였다. 타민족들 가운데 섞여 살다보니 두려운 마음에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을 것이다. 이국땅에 여러 민족과 함께 살다보면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주류사 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을(乙), 즉 소수자로 살게 마련이다. 영어 구사 능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거주기간에 비례해서 퇴보하니,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는 이민자들에 게 아킬레스건이다. 그러다보니 이민 1세로서 떨치기 어려운 외로움과 서러움을 안고 살아간다. 아메리 칸 드림을 꿈꾸고 태평양을 건너왔다가 몸과 마음은 물론 가정까지 부서진 경우도 자주 본다. 한번 조국 을 떠난 사람들이 모여서일까? 이민사회는 물론 이민교회도 쉽게 등지고 소위 격을 지고 떠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이민자의 삶이 녹록치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민자로서 느끼는 감사와 기쁨도 있다. 나그네의 삶을 살다보니 넘어지고 얻어맞고 몸과 마음에 멍이 들어서 욱신욱신 쑤시는 곳이 많이 있지만, 아브라 함이 실수를 거듭하면서도 결국에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경험하였듯이 이민자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을 깊이 그리고 구체적으로 만나곤 한다. 넓은 미국 땅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 거주지가 해결되었을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던 광야의 하나님을 똑 같이 경험한다. 고달픈 타향살이지만 작고 소중한 감사들이 이곳저곳에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나그네 길 에서 동고동락할 좋은 신앙공동체, 친지들, 믿을 만한 이웃을 만나면 형제자매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함께 걷는 순례자가 된다. 그렇기에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은 오늘도 종종걸음을 치면서 걷고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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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마치면서 - 이민을 생각하는 분들께 정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서 타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다. 또한 이민생활 의 범위와 경험이 제각각이어서 어느 한 가지 제안이나 경험담에 의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민이나 이주를 생각하시는 분들께 내가 경험하고 지켜보았던 것을 근거로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을 말씀드리고 싶다. 무엇보다 이민이 한국 생활이나 현재의 삶에 대한 도피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앞에서 몇 가지 예들을 들었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정도로 나그네의 설움이 많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땅은 한국이든 미국이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피난처가 되 신 하나님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을 피난처삼고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둘째로 이민을 생각할 때 자녀교육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 한국의 교육환경은 말 그 대로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미국에서의 교육이 아이들 위주이고 경쟁이 낮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조건 미국에 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샐 수 있다. 미국 중고등학교에는 마약과 폭력이 만연하다. 한국사람 넓게는 동양인으 로서 겪는 차별도 만만치 않다. 종종 언론에 나오는 소위 성공한 인물들은 굳이 미국에 오지 않 았어도 그만한 위치에 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일 수 있다. 무엇보다 자녀를 위해서 부모의 삶을 희생하는 것을 두고 조심스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미국 이민이나 이주를 고려할 때 타국에서의 생계수단인 직업을 놓고 현실적으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평생 살 돈을 짊어지고 태평양을 건너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 에 부딪칠 것이다. 미국의 주거형태는 자기 소유가 아니라면 사글세 임대주택이다.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방 두 개를 가진 임대주택의 월세가 250만 원 이상인 경우 가 대부분이다. 이민을 생각하면서 미국에서의 생계유지 수단을 놓고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실 제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영주권 취득여부와 직결되기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다. 넷째로 가족과의 합의도 중요하다. 나의 경우 팔순이 넘으신 부모님을 한국에 두고 유학길에 올랐다. 귀국이 늦어지고 영주권 절차를 밟으면서 부모님 모두 소천하셨고 장례식에도 참여할 수 없었다. 이민자들 대부분은 한국에 계신 가족들 특히 병약하신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아니 죄책감을 갖고 산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민을 앞두고 한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이민이야말로 상황의 인도하심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이민을 놓고 말씀과 기 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상황의 인도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말씀 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이 미국으로 보내신다는 분들과 가끔 상담을 하거나 이메일을 주고받기 도 하는데, 얘기하다 보면 믿음은 가히 산을 옮길 만하지만 산을 옮길 삽 한 자루도 손에 쥐고 있 지 않은 안타까운 경우를 본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민이야말로 상황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중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길이 열리고 미국에서의 체류신분이 확보되어야 이민 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환상을 갖고 이민을 선택하는 것은 금물이다. 뿌리를 옮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 가! 하지만 우리의 앞길을 모두 알 수 없다. 한국에 살든 타국에 살든, 믿음 가운데 하나님이 허 락하신 인생길을 걸어갈 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민자로 살아가는 것도 틀림 없는 은혜요 축복이다. 이민을 통해서 나그네의 설움과 기쁨에 참여할 수 있고, 나그네 길을 가 면서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좋으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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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정음‖인생은 나그네 길
너 있는 곳에서 꽃을 피워라 전계도│연세대93 아내(안지영, 가톨릭대94)와 딸(주은)과 함께 LA에서 살고 있다. 직장에서의 일과 교회를 섬기는 일의 ‘이중 소명’에 대해 고민하 며, 어떻게든지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 보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다.
[소리]로부터 이민에 대한 글을 부탁 받았을 때 사실 조금 난감했습니다. 한국을 떠나온 지 햇수로 12년이나 되었지만, 저 스스로를 ‘이민자’라고 인식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트 위터의 영향인지 140자 이상의 글을 써 본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글쓰기와 담을 쌓고 살아왔기 에 더욱 부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리]는 개인의 경험이나 느낀 점을 소중히 여긴답니다."라는 편집인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고, 제 개인적인 경험과 고민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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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갑작스런 떠남 보통 이민을 하려면 많은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에 비해 제 경우는 무척 갑작스럽게 진행되었습니다. 2002년, 당시 제가 근무하던 벤처회사는 한국에서의 비즈니스 부 진을 미국 시장 개척을 통해 극복하고자 저를 포함한 개발팀 4명에게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출 장을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정도의 기간이면 경험삼아 좋겠다는 생각에 아내와 함께 가겠다 고 회사에 양해를 구해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미국에서 아이를 낳아 기 르며 10년 넘게 살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2002년 추수감사절 하루 전 날 미국에 도착했고, 다행히 그해 겨울에 성과가 좀 있어서 회사에서는 미국지사에서 재채용하 는 형식으로 제게 취업비자(H1B)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도 ‘이민’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명확하지 않은 체류신분 때문에 겪고 있던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과 여전히 몇 년 정도 경험 삼아 있어 보자는 생각으 로 회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회사에서 구해 놓은 방 2개짜리 아파트에서 함 께 출장 온 동료들과 동거생활을 해야 했기에 아내가 무척 힘들어 했습니다. 제 명의로는 아파 트를 빌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차가 없이는 움직이기 어려운 LA의 교통 환경 속에서 회사 소유의 차를 동료들과 나눠 써야 했기에 그것도 무척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비록 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출장길에 아내와 함께 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동료들과도 불편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2003년 3월, 본격적으로 미국 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었지만 회사의 재정상황이 급격하게 나빠 지기 시작했습니다. 봉급이 밀리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월세로 집을 빌려서 생활하고 있 었고 저축이 가능할 만큼 여유로운 생활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활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회사가 문을 닫았고, 저희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주변 분들의 권유로 용기를 얻어 미국회사에 이력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별 성과가 없던 중에 한국인이 운영 하는 벤처회사에 채용이 되어, 2004년 1월부터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Permanent Resident Alien 새로운 직장에서는 이전 직장보다 연봉이 조금 줄었음에도 훨씬 편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 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미국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미국 생활에 조금 더 익숙해진 덕분이겠죠. 하 지만 무척 당황스러운 일도 있었습니다. 회사를 옮기면서 새로운 은행 계좌를 개설했는데, 회사 에서 받은 첫 봉급 수표를 새 계좌에 입금하고 곧장 현금으로 인출하려고 하니 새로운 계좌는 2 주가 지나야 인출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지요. 그때그때 받는 봉급으로 생활 하던 입장에서 한 번의 봉급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다행히 직장 동료에게 돈을 빌려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돈을 찾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던 순간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두 번째 회사의 재정상황도 갈수록 어려워져서 매년 10% 가까이 연봉이 삭감되었고, 봉급이 밀리는 상황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H1B비자는 혹시 회사가 문을 닫거나 회사에서 해고된 경우 미국에 체류할 수 없게 되어 바로 출국해야 합니다. 회사를 옮긴 직후에는 해고 될까봐 늘 불안 했고, 회사의 재정상황이 어려워지면서는 회사가 문 닫게 될까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관리 업무 담당자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진행하였습니다. 영주권을 진행하기에는 당시 제 연봉이 너무 적어서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주권을 진행하게 되면서 뒤늦게 ‘이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영어 로는 영주권 소지자를 ‘Permanent Resident Alien(영주하는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흉측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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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인을 떠올리게도 하는 ‘alien’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성경이 떠올랐습니다. “너희도 이방인이 었으니 너희 가운데 거하는 이방인들을 압제하지 말라”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말씀, 우리의 삶이 나그네의 삶 이라는 베드로전서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몇 번 접해보았던 외국인 노동자들도 떠올 랐습니다. 사실, 제가 바로 그 외국인 노동자였습니다.
뿌리째 뽑혀 옮겨심긴 남편 때문에 덩달아 인생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 아내가, “뿌리째 뽑혀 옮겨심긴” 느낌이라고 한 말이 생각 납니다. 같은 말, 같은 문화를 가진 사람들 또 가족들, 친구들을 모두 떠나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어느 날 갑자기 정착한 뒤 겪어야 했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자리에 적응하기 위해 제가 밖에서 나름의 분투를 하는 동안, 아내는 또 아내대로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것 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많은 밤 옆에 누워 소리죽여 흐느끼던 아내의 울음소리로 미루어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곳에서 만나게 된 다른 한인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기나 노동 착취 등 극심한 어려움을 당한 사 람도 많습니다. 저는 그 정도의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지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겪는 설움은 한국에 살 때는 생각지도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잘못한 것 하나 없어도 지나가는 경찰차를 바라보면 왠지 마음이 불안해 지기도 하고, 고압적인 태도의 공무원에게 속 시원하게 따져보지도 못하고 답답해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가 도 이곳은 제게 여전히 남의 땅이고, 저는 남의 땅에 얹혀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하다보니 몸은 이곳에 있지만 늘 마음은 한국에 있는 것 같은, 일종 의 자아분열적인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굵직한 일들이 터질 때마다 제 마음은 그 영향 아래에 있 지만,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미국인 동료들 속에서 혼자만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만 같 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한국 소식을 끊고 지금 발 딛고 살고 있는 곳에 더 집중하려고도 해보지만 태어나 자라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국으로 향하는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이런 경계인의 삶을 살다보니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 강한 자들이 아닌 약한 자들에게 향하신다는 것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주변부 의 하나님, 약자의 하나님,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런 하나님을 만나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Bloom where you are planted 이곳에 더 있으라는 하나님의 싸인인 양 영주권을 받게 되었고, 두 번째 회사가 문을 닫기 직전에 규모가 큰 미 국 회사로 이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적극적으로 삶의 터전을 바꿀 만한 그 런 성향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제 성향에 맞춰서 하나님이 ‘점진적으로’ 저를 이끌어 오셨음을 이제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왜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냐고 하나님께 많이 물었습니다. 찬송가 <내 맘이 낙심되 고 근심에 눌릴 때>를 부르며 찬송인지 한숨인지 모를 고백을 드릴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 님은, 이 노래의 후렴처럼 “그 은혜가 내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랬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나오게 하셨고, 많이 외로웠지만 또 새로운 벗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니 정말 삶의 매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내와 제가 뿌리째 뽑혀 낯선 땅에 옮겨 심겨진 삶을 고통스럽게만 생각할 때, 한 지인이 “Bloom where you are planted.”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여전히 이곳은 낯선 땅이고 오늘도 이방인의 삶이 계속 되지만, 하나님이 여 기에 심으셨기에 저는 지금도 ‘이민자’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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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소리정음‖인생은 나그네 길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세상은 넓다 김진선│대구가톨릭대91 이영택(경북대90), 김진선 학사 부부는 희균(15세), 희준(11세), 온유(5 세) 세 자녀와 함께 9년째 호주에서 살고 있으며 2013년에 시드니에서 차로 10시간 정도 떨어진 소도시 리스모어로 옮겨와 전문의 과정을 밟 고 있다. 틈이 나면 가까운 바다로 낚시를 가는 것이 세 남자들의 공통 취미가 되었고 이사 후 전업주부가 된 엄마는 딸과 함께 플레이그룹, 오가닉 가드닝, 나무공예 그룹에 가입해 새로운 만남과 배움의 기회를 즐겁게 넓혀가고 있다.
이민을 결심한 계기 저희 부부가 처음부터 이민을 결심하고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유학을 생각하고 준비하던 중에 가족이 함 께 유학을 하는 경우 영주권을 받아가서 공부를 하면 학비나 생활비가 훨씬 낮아진다는 조언을 받고 이민의 형식을 빌려 호주라는 나라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 같은 게 있었던 건 아 니지만 저는 어디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가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한 것 같고, 남편은 어느 땅이 크리스천 의사로서 더 유익하게 쓰임을 받을까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언어소통이 잘 안 되는 교민이나 유학생, 불법 체류 상태라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간간이 도우면서 마음이 많이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러 던 중 남편은 의료경영에서 호주 의사면허 시험 준비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준비과정 그리고 초기 정착 영주권을 취득한 후 유학을 떠나기로 하고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어시험, 기 술이민에 필요한 공부(경영학)도 하고 서류 준비 등, 영주권을 취득하는 데 3년 정도 걸렸습니다. 그 후 서 울로 이주해서 2년 정도 [나음누리] 멤버인 이용훈 학사님과 ‘사랑을 나누는 의원’에서 함께 일을 하다가, 2005년 4월에 호주 시드니로 옮겨와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경우만 보더라도 준비를 시작하고 나서 5년 이라는 시간이 걸렸듯이, 이민이라는 형식으로 이주를 할 경우 항상 예상보다 더 넉넉하게 준비기간을 잡아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달리 호주는 서류나 일처리가 꼼꼼하긴 하되 빠른 나라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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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먼저 시드니에 정착하신 친척이 계셔서 집을 구하는 문제나 기본생활에 필요한 정보 등을 가까이 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 또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새로 오시는 분들의 손과 발이 되어 도움을 드리는 입장이 되더군요. 작게나마 한인커뮤니티가 형성이 되어 있는 곳이라면 정착초기 도움을 받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초기에 힘이 들었던 것은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활환경이 었던 것 같네요. 일단 저녁시간 이후에는 집밖이 깜깜해지고 갈 곳이 없습니다. 너무 조용하고 가족중심적 인 환경이라 퇴근 후 볼일이 많고 모임이 많던 사람들은 특히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각종 모임과 일로 늘 바빴던 남편은 이 남는 시간을 어떻게 할지 몰라 한동안 당황스러워 했던 기억이 나 네요. 이민을 해서 이곳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을 보니, 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와 언어의 장벽으로 인 해 자의반 타의반 고립된 생활환경 때문에 위축되고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 서인지 호주 시드니에는 아예 한인커뮤니티가 형성된 곳에서 살면서 한인교회를 다니며 한국식으로 생활 하기를 선택하는 이민자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호주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현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능동적으로 찾아다니는 것이 언어나 문화의 장벽을 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다면 학부모 회의나 학교의 행사에 자원봉사로 참여하는게 현지의 문화와 사람들을 가까이서 접할 기회가 되고 더 나아가 마 음 맞는 친구를 사귈 수도 있습니다. 현재 저희는 한인이 거의 없는 소도시에서 남편이 일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현지교회에서 호주인들과 신앙생활을 하고 교제를 나누며 일 년 정도 지냈는데, 시드니에서 살 때보다 불편한 점은 있지만 호주라는 곳에 조금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호주사회의 한 일원으로 기여하면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도 생기게 된 좋은 경험인 것 같습니다. 오자 마자 이런 환경이었다면 많이 힘들었겠지만 이미 시드니에서 한국문화와 호주문화를 적당히 오가며 완충 기를 지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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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부터 지금까지 제일 힘든 건 역시 의사소통입니다. 한국에서 30대에 이민을 오시는 경우 는 대부분 전문직에서 일했던 분들이라 같은 직업으로 해외에서 일을 하려면 보통수준 이상의 영어구사력이 요구되는데, 일의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어느 분야이든 의사소통의 문제 가 제일 큰 것 같습니다. 저는 이곳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을 시작했는데 (호주에서는 학사학위 이상의 교사는 주로 원장급의 업무능력을 요구합니다), 학부모와 상담을 하거나 문서를 처리하 는 것이 달라진 교육환경에 적응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들었습니다. 한국말로 하면 별것도 아닌 일을 끙끙대면서 하고 있으니 많이 답답했지요. 남편의 경우, 호주의사 면허 시험을 준비하면 서 두 가지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는데 먼저 이 길을 걸어간 한국인 의사들이 별로 없었던 관계 로 혼자서 모든 것을 찾아서 준비해야 했던 것이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가지를 통과하면 그 다음까지 6개월에서 많게는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시스템 또한 지치게 했었던 기억이 납니 다. 이 곳 생활 9년차에 접어드는 지금도 저희들에게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는 부분이 언어능력 향상이 아닌가 싶네요.
이민 9년차, 지금의 선택에 만족을 하는가? 묘목도 다른 땅으로 옮겨 심으면 초기에는 자리를 잡을 때까지 힘이 들지요. 마찬가지로 삼 십 년 이상 살던 한국 땅에서 호주 땅으로 옮겨와 뿌리를 내린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일까요. 하지 만 힘들고 불편하고 무엇보다도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맘껏 볼 수도 없는 타국생활을 결심하고 살아가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제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돌아 오는 생각은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세상은 넓다”이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엡5;16)”라는 성경 말씀이 영어로는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NLT성경)”라고 번역되어 있더군요. 저 와 남편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고, 자고 나면 훌쩍 크는 아이들 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삶보다 느리더라도 주변 을 돌아보는 여유가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보다 배우는 즐거움 을 앗아가지 않는 학교생활을 아이들에게 맛보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저와 남편의 공통 된 고민이었고, 그러던 중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점에서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호주는 노동시간이 일반적으로 일주일에 38-40시간입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 이 많아 취미를 공유하고 여행하면서 보낼 수 있다는 점이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희 아이 들이 이곳에서 덜 경쟁적이고 여유가 있는 학창시절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감사하고 한편으로 는 부럽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 1세대로서 산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이제 십대로 접어드는 1.5세대, 2 세대인 자녀들과의 소통 문제도 만만치 않은 고민이고, 언어적 문화적 장벽은 여전히 높기만 합 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절로 가난하고 낮아져서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게 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된 것 같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점에서 광 야생활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지난 8년간 호주라는 땅에서 저희 부부는 광야학교를 지나온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저희들이 선택해서 온 길이지만 익숙한 고향땅을 떠나게 하신 하나 님의 뜻이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물질적, 관계적, 영적, 육체적, 그야말로 총체적 영역에서 하나 님 앞에서 저희의 연약함이 드러나고 점검되고 치유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점이 아마도 저희 들의 9년 전 선택에 대한 가장 놀랍고 감사한 결과가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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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을 생각하거나 준비하시는 형제, 자매들께 이민이나 유학은 상당히 고립되기 쉽고 외로운 상황들이 많습니다. 부부끼리 함께하는 시간도 많지만 부 딪히는 시간도 많아집니다. 저희 부부의 경우 초창기 3년 정도 아주 심각할 정도로 부부관계가 힘이 들었 습니다. 각자 일하고 공부하랴, 적응하느라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하고 이해하며 지낼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해 주고 마음을 열고 대화하고 격려하는 그룹이 아주 중요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의 중심을 잃지 않고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인도를 받는 것이 이민준비에 가장 필수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선교사가 파송을 준비할 때 기도후원자 그룹을 모으는 것처럼 말 입니다. 한인이 별로 없는 교회라든가 현지에서 외롭게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을 때는 형제자매들과 의 긴밀한 기도소통이 있어야 한다고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유학이든, 이민이든, 선교사 파송의 형식 이든, 모습은 달라도 본질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중심적인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기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에 대한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대학이라는 경쟁의 관문을 통과한 젊은이들의 내공 정도라면 세계 어디 를 가더라도 잘 적응할 뿐 아니라 그 땅에서 필요한 사람들로 충분히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 니다. 내가 배운 것 또는 잘하는 것들을 한 가지씩 몸에 담고 언어라는 무기를 잘 준비해 그리스도의 심장 을 가지고 세계 구석구석으로 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습니다. 비록 전공이나 하던 일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일에 도전을 한다고 해도 잘 견디며 해내는 주변의 한인들을 보게 되면서 그런 생각에 점점 확신 이 듭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민을 바로 결정해서 진행하기 전에 기회가 된다면 가족과 함께 이주를 원하는 나라로 여 행을 해서 짧은 기간이라도 살아보는 경험을 한 후에 결정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도 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서 나라로 이주하는 문제는 경제적, 정서적, 시간적으로 많 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효과적이겠지요. 첫째는 직접적으로 그곳의 라이프스타일을 맛볼 수 있고, 이민을 해서 살고 있는 분들을 통해서 여러모로 관찰한 결과에도 불 구하고 나와 내 가족이 이 땅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느냐 아니냐가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 아주 중요한 역 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경험과 결심이 편안함과 안정된 생활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이주한 나라에 서 모험을 시작하면서 닥치는 어려움을 상쇄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럴 줄 몰랐 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이겨내자”라는 마음으로 삶을 대하게 된다는 차이라고 비교하면 너 무 과장일까요? 일일이 지면으로 다 말씀 드리지 못해 아쉽지만 언제라도 연락하시면 저희들이 할 수 있는 한 도움이 되 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고 붙드셔서, 세계 곳곳에서 주의 향기 날리는 학 사님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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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정음‖인생은 나그네 길
부르신 곳에서 열심히 살아갈 뿐 엄현주│부산대83 문학, 도서관, 정보,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책 읽기를 즐겼으나 눈이 급격히 나 빠지는 나이이므로 요즘은 책, 영화, 여행 관련 팟캐스트 방송을 즐겨 듣는다. 주말에는 밴쿠버 근교의 산을, 매년 여름이면 록키의 산에 오르고, 작년 가을에는 제주 올레길을 걸었고 올 가을에는 스페인 까미노 산티아고 순례길 을 떠날 계획이다. 즐겁고 건강하게 사는 것과, 열심히 일하다 은퇴한 후에 터키, 몽고, 베트남 같은 나라를 떠돌며 일손이 필요한 도서관에 가서 자원봉사하는 요원한 꿈을 품고 있다.
“어디서 왔나요?(Where are you from?)”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흔히 하는 질문이다. 어느 나라 출신이냐는 뜻이 기도 하지만 어디에 사느냐는 질문에 가깝다. 이민 와서 처음에는 “한국”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캐나다에 여행 온 거냐고 묻는 사람이 있어서 요즘은 “밴쿠버”라든가 캐나다 밖에서는 “캐나다”라고 답한다. 14년 전, 나는 캐나다 에 이민을 왔다. 캐나다 시민권을 받은 지도 꽤 되었으니 법적으로는 더 이상 한국사람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한국 사람이면서 동시에 캐나다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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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민을 온 이유는 우리나라가 싫어서 혹은 돈을 벌어서 잘 살고 싶어서라거나 아니면 자식을 좋 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오직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였다. 유학생보다 이민자에게 학비 가 싸다는 것이 유학이 아닌 이민을 선택한 이유다. 소위 386세대인 나는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쭉 부산 에서 살았고, 서울도 대학생이 되어서야 가보았던 지방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 외국을 갈 기회도 없었고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살았다. 그러나 시대는 예측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변했고, 20세기 말에 는 외국여행이 흔한 일이 되었다. 삶에는 뜻밖의 일들이 찾아오고 그 경험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 는데, 나의 경우에는 세 번의 외국여행이 그랬다. 대학도서관에서 일하던 당시, 다른 나라의 도서관을 돌아보고 그 시스템을 배워오는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두 번에 걸쳐 호주와 일본의 도서관을 돌아보고 올 기회가 있었다.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겉모습만 훑고 오는 시간이었음에도 다른 문화에 대한 깊은 인상을 안고 왔다. 그리고 또 한 번은 태국에서 열린 IFES동아시아 학사수련회에 참석한 것이었다. 간사 님이 한국어로 통역을 해주셨지만 조별모임 때마다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 학사들 과의 만남은 나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 세 번의 외국 나들이를 통해 세계로 향한 눈이 열리기 시작했고 다른 나라의 도서관을 더 보고 공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그 당시 내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정 말 하고 싶어서 전공을 바꾸어 다시 공부한 끝에 어렵게 얻은 일자리였지만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는 답답함이 생겼다. 그리고 혼자 나이 들어가는 딸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걱정과, ‘노처녀’에 대한 사회의 편견어린 시선도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막연하게 유학을 생각만 하던 차에 캐나다 이민 수속 중이었던 후배가 이민을 가면 유학을 가는 것보 다 학비가 싸다며 이민을 알아보라고 권했다. 이주공사에 알아보니 독립이민은 점수가 안 된다고 했다. 안된다고 하자 오기가 발동해서 직접 캐나다 이민국 사이트에 들어가 살펴보니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 도 아니어서 이주공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서류를 준비하여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길을 열 어주시길 기도하면서 1999년 연말에 이민 신청서류를 보냈다. 인터뷰 없이 통과되는 일이 드물었기 때 문에 이민 심사가 시작된다는 파일번호가 오면 인터뷰 준비를 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해 봄 에 파일번호와 함께 인터뷰 없이 이민수속을 하라는 허가가 나왔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로 가서 살 일은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둔 지 열흘 만에 한국을 떠났다. 2000년 11월, 일본과 미국을 경유하여 18시간 만에 밴쿠 버에 도착했다. 랜딩(Landing-이민비자에 최종확인도장을 받고 입국하는 일)할 때 이민관의 인터뷰도 쉽 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바짝 긴장한 채 이민국에 들어갔는데, 이민관은 별 말도 묻지 않고 캐나다 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비자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캐나다에 첫 발을 밟은 그 날은 밴쿠버의 전형적인 겨울날씨답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IVF 선배이자 친구남편인 지성근 목사님이 신학연수 차 밴쿠버에 살고 있어서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주셨다. 목사님 집에서 연말까지 한 달여를 보낼 수 있 었다. 이민도 일종의 이사라고 할 수 있다. 나라에서 나라로 이동한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일단 주민등록증 (SIN, Security Identification Number)과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는다. 의료보험 신청하고, 은행 계좌 개설하 고, 살 집 구하고, 차 사고, 한국에서 부친 짐도 찾고, 이사하고 전기연결, 전화 설치하고 자녀의 학교전 학 등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지의 상황을 모르면 이런 일을 처리해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현 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많다. 이민자들이 처음 도착해서 교회에 출석하는 대 부분의 이유가 이런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도움을 주겠다고 접근한 교포들에게 힘든 일을 당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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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도 많아서 이민 가는 사람이 제일 조심해야 하는 사람은 한국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 민 와서 처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이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민자가 두 번째 해결 해야 하는 과제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다. 아무리 한국에서 미리 공부했다 하더라도 실 제로 새로운 문화에 들어오게 되면 문화적인 충격을 겪게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 기해서 밀월의 시기를 보내지만, 문화가 달라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 문화를 증오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습득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 정부에서는 신규이민자들에게 무료로 기초 영어코스들을 제 공하기도 한다. 나는 가족도 없고 가방 두 개만 달랑 들고 들어온지라 이사는 비교적 간단했다. 하지만 캐나 다라는 나라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캐나다의 좋은 면은 조금만 지내보면 금 방 알게 된다. 장애인과 약자를 항상 우선으로 하는 사회로, 예를 들면 대부분의 버스에 휠체어 나 유모차가 오를 수 있는 시설이 있어서 휠체어 탄 사람이나 유모차 끄는 사람들이 먼저 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불평 없이 기다린다. 또한 가족중심의 문화라서 상가도 일 찍 문을 닫고 사람들도 일찍 귀가해서 저녁이면 거리가 조용하고 한산해진다. 무엇보다 도시 곳 곳에 있는 공원이나 나무들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다. 캐나다 사회의 좋은 점이 바 뀐 것은 아니지만, 캐나다에서 내가 가진 밀월기는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기숙사에 살면서 그 학교의 언어교육원에서 영어코스를 듣던 3개월 정도로 끝이 났다. UBC에 입학을 준 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그 영어코스는 꽤나 비쌌기 때문에 3개월 후에 싸게 공부할 수 있는 학 교로 옮기면서 한적한 주택가의 지하층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 하필이면 버스 운전사들의 파업 이 시작되었고 파업은 장장 넉 달이나 계속되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서 1시간 넘게 걸어가야 했 기 때문에 집주인이 출퇴근할 때 차를 얻어 타고 전철역까지 나가고 들어와야 했다. 캐나다에서 는 공공 노조를 포함하여 여러 직종의 노동조합들이 피켓시위, 태업 심하면 파업까지 가는 경우 가 많은데 사람들은 그들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이지만 엄청난 생활의 불편 을 초래하곤 했다. 그때의 버스 파업이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겪은 최악의 경험이었다. 첫해를 그 렇게 보내고 다음해 1월, 밴쿠버에서 차로 1시간쯤 떨어진 애보츠포드라는 도시에 있는 신학대 학(Columbia Bible college)에 입학하면서 그 도시로 이사했고 곧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생활하게 되었다. 사실 먹고 사는 데 도움도 되지 않고 공부하느라 고생스럽기도 했지만, 한번쯤은 공부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고 어쨌든 영어는 늘겠지 하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워낙 영어 실력이 시원찮 을 때여서 수업 내용을 반쯤만 알아듣고 IVF에서 배웠던 짬밥으로 나머지 반은 해결해나가야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캐나다에서 살아가는 일에 적응이 되어갔다. 새로운 나라에 온 순간 무얼 해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된다. 사업이민의 경우에는 잡화점, 야채가게, 주유소, 빨래방이나 음식점 등을 시작한다. 독립이민으로 오는 경우, 전문직 에서 일하던 사람일수록 자기 분야에 취업하기는 힘들다. 여기서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새 로 얻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짧게 직업훈련을 받고 쉽게 취직 할 수 있는 다른 직종으로 전직을 한다. 배관공, 자동차 정비사, 목수, 정원사 같은 일들인데 육 체노동이긴 하지만 임금도 괜찮은 편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직업을 택한다. 마지막 선택이 직업훈련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영어를 잘 못해도 가능한 단순 노동이다. 식당의 접시 닦기나 농 장에서 과일 따는 일 등, 일하려는 마음만 먹으면 일자리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애보츠포 드로 이사를 한 후에 나도 저축한 돈만으로 버틸 수가 없어서 기숙사 식당 접시 닦기, 일식당 헬 퍼, 한국신문사 편집 등 여러 가지 파트타임 일들을 하면서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그 시간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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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해 배운 것은 노동의 신성함이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해서 잠잘 곳과 먹을 것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았다면 남들이 나를 실패자로 여겼을 것이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캐나다라는 사회 속에 들어오면서 한국에서 내가 얼마나 배웠고 어떤 일을 했던지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 인생은 이 사회 속에서 새롭게 리 셋된 것이다.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던 단기코스도 마쳤고 영어 공부도 고등학교 영어 10학년부터 12학년까지의 과 정을 공부하는 코스를 마침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공부를 위해 이민했지만 원래 꿈을 좇아 대학원을 가 야할지 아니면 직업훈련을 받고 취직을 해야 할지 마음이 오락가락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원을 마친다고 캐나다에서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취직을 하는 것이 나쁜 선택만도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평생 즐겁게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는데 어느 길도 답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 께 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YWAM(예수전도단)에서 하는 DTS훈련이었다. 하와 이 코나에서 보낸 3개월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서 그 사랑 안에 잠겨서 보낸 시간이었 다. 그후 캐나다로 돌아와서 시민권 취득을 한 후에 한국에 나갔다가 뜻하지 않게 제주에 있는 열방대학 (YWAM에서 운영하는 훈련기관)에서 스텝으로 1년 가까이 도서실에 있는 책을 정리해주며 지냈다. 먹고 사는 일에 대한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삶의 방향을 하나님과 재조정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에 남을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내가 살 곳은 캐나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2006년 캐나다로 다시 돌아 왔다. 내가 배운 것과 경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마음먹고 정부가 지원하는 구직프로그램에 등록 해 이력서를 다시 쓰고 면접 준비를 하면서 취업을 준비했다. 몇 달의 노력 끝에 지금 일하고 있는 도서 관에 취직했다. 현재 UBC 도서관에서 한국책의 수서와 목록을 담당하며 8년째 일하고 있다. 결국 도서 관 일로 돌아온 셈이다. 지난 14년간의 삶을 되돌아볼 때 나의 이민생활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처해 있던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과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공부를 통해 나 자신을 좀 더 계발해보겠다는 욕심이 이민을 결심하고 이곳에 오게 했다. 한국에 계속 살았다면 결혼하지 않은 채 나이 들어가는 여자 들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과, 대학교육을 마쳤으니 이 정도의 생활수준 또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잣대 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캐나다에 살면서 이 사회가 그런 것에 대한 편견이 덜하기 때문에 나 자신을 좀 더 관용 있게 또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뭘 하든 사람들을 덜 의식하고 본연의 내 모습으 로 살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익숙한 문화를 벗어나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좌충우돌 하면서 얻은 값진 경험은, 어떤 것은 버려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이 생겨났 다. 마지막으로 내 삶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게 되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뭔가 이룰 줄 알았는데 내 인생 을 이끌어 가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분 앞에서 겸손히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힘 쓸 뿐이다. 나는 오늘도 주어진 하루를 살아간다. 세월이 준 나이의 무게, 기쁨과 감사도 늘어간다. 하나님이 아브 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가나안 땅이 갈대아 우르보다 더 살기 좋은 땅이 라서 보내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땅을 향해 가는 여정이,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일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훈련이 되었을 것이다. 캐나다에서 산다고 해서 더 좋은 것도, 한국에서 산다 고 나쁜 것도 아니다. 어느 곳이든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어디에 살든 이곳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 하나님이 이곳에 있게 하셨으니 나는 이곳에서 그저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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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소리정음‖나그네의 삶, 이민
모험으로 사는 인생 송민영│성신여대91 호주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민 12년 차이다. 가가호호 방문 하여 독거노인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2년 전인 2012년, 나는 둘째아이와 함께 8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는 우리 가족이 이민 온 지 10년차에 접어드는 때였고, 둘째 은지가 10살 되던 해이기도 하다. 은지는 우리의 이민 역 사와 함께 자라고 있는 산 증인인 셈이다. 8년 만에 한국방문을 결심한 것은 이민 갈 때 준비했 던 MBTI 강사 자격을 갱신하고, 호주에 태어나 한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은지를 위한 스페 셜 여행이었다. 큰딸 은혜는 마침 그해 6월에 재외동포모국방문단에 호주NSW(시드니) 대표로 뽑혀 이미 한국을 다녀왔었고, 스페셜로 구입한 티켓으로 가는 여행이라서 은지와 나는 학기 중 에 휴가를 내고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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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해 IVF 전국학사수련회도 우리의 일정과 맞아 호주에서 미리 예약을 하고 수련회에 참석했다. 2002년 은혜와 우리 부부가 IVF 학사수련회를 참석한 후 호주로 이민을 왔는데, 전국 규모의 IVF 학사수련회에 참석하 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호주 토종(?)인 새가족 은지를 데리고 참석한 것도 하나님의 세밀한 예비하심 이었던 것 같다. 사실 수련회는 인하대 학사인 남편이 더 가고 싶어 했는데 가장으로서의 책임 때문에 함께 하 지는 못했다.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 이제 한국도 예전의 한국이 아니어서 한국말만 할 뿐이지 그야말로 나그 네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은지가 수련회 동안 유창한 한국말로 아이들과 잘 어울 릴 수 있어 참 뿌듯했다. 성신 학사들과 원투원을 하고 후배들을 만나며, 그동안의 이민 생활을 돌아보는 계기 가 되었다. 호주 시드니에는 친정의 둘째오빠와 남동생 가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남편의 여동생 가족 그리고 어머님이 우 리와 함께 사신 지 5년이 되어간다. 단일 가족만 이민 와 사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그래도 형제들이 많아 호주 적응에 많은 도움을 받았고 외롭지는 않은 편이다. 아직 친정 부모님과 큰오빠네 그리고 도련님 가족이 한국에 남아있어 좀 아쉽고 그립다. 우리가족의 이민은 둘째오빠가 단독으로 기술이민을 신청하며 시작되었다. 손아래 올케가 패션디자이너로 기술이민을 신청했고, 그후 남편이 조경으로 기술이민을 왔다. 고모부도 IT로 오게 되 었다. 둘째오빠 덕분에 가족 점수 10점을 받을 수 있어 가능한 이민이었다. 남편은 나름 영어(IELTS시험이 필수) 와 백과사전 두께의 A4용지에 빽빽하게 호주에 관한 정보와 자료도 준비해서 이민을 왔지만, 우리가 만난 시드 니에서의 삶은 녹녹치 않았다. 시아버님의 명퇴와 주식투자로 시작된 시댁의 어려움은 호주 땅에 온 남편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 다. 모든 게 낯선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두 아이, 은지와 은혜도 힘겹게 삶과의 씨름을 해야 했다. 건축 전공자로서 편한 일이 있었음에도 남편은 가족의 안위를 위해 시드니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돈이 되는 노동일을 시작했다. 일에 지친 남편은 집에 오면 거의 녹초가 되었고, 남편의 심리적 부재로 나는 이민 와서 지금까지 거 의 과부처럼 사는 것 같다. 남편이 있으나 모든 것을 내가 혼자서 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늘 말없이 뒤에서 든든하게 버텨준 남편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벌써 16살(11학년)이 된 은혜가 영어 과목에서 《Looking for Alibrandi》를 읽고 5분 Speech를 하는 숙제가 있 었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은혜의 발표를 들으면서 나는 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연습을 해야 한다며 몇 번이고 내 앞에서 스피치를 했는데 그때마다 마르지 않는 샘처럼 눈 물이 흘렀다. “... 아빠는 물리적으로 내 곁에 있어 주셨지만 나와 거의 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 최근에 아빠가 나와 친해지 려고 시도하는 것이 어색하고 싫었다. 그러나 Josie Alibrand가 어렸을 때 헤어졌다 다시 만난 아빠와 갈등하고 화해하는 것을 읽으며, 우리 아빠가 표현한 사랑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해서 우리가족이 경제적 으로 어렵지 않게 살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또한 사랑에는 사랑이 자라날 수 있는 공간과 상 대를 기다려 주는 인내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내가 IVF를 할 때, 폴 트루니에의 책이 참 많이 번역되었던 것 같다. 이민 와서 둘째오빠에게 《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읽어보라고 권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아직도 그 책을 읽지 못했다. 이번에 이 글을 준비하 며 읽어보려고 했는데 7번의 잦은 이사 중에 내가 보물처럼 아끼던 책들이 많이 없어졌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도 그 책을 읽지 못했다. 나와 남편이 선택하고 결정한 호주이민은 참으로 위험해 보이는 도박이었다. 남편은 큰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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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을 선택했다고 우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가정적인 남편은 성공 위주의 직장생활에 시달려 급기야는 망막박리(한쪽 눈이 거의 실명 위기였다) 수술을 받았고, 그후 한국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꼈다. 게다가 주식으로 모든 안정된 삶의 기반을 파탄 낸 아버지와 그런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외국생활을 동경했으나 고지식하고 완고한 아버지로 인해 그 꿈은 늘 꿈에 불과했다. 영어시험에 반복해서 실패하고 이주공사의 사기로 3년이나 지연되었던 이민에 대한 남편의 꿈은 2002년, 드디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와 함께 찾아온 갑작스런 경제적 위기는 남편의 정체성까지 위협했다. 이민 올 때 약 간의 전세금을 가져왔으나 남편은 매주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렌트비와 자라고 있는 아이들(당 시 은지는 임신 중)을 보며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삶을 선택했다. 그런 달라진 남편을 보며 나는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과연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냐고 처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다. 그때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내 삶의 잊지 못할 멘토를 하나님의 섭 리 가운데 호주에 보내주셨다. 지금 그분은 호주에 계시지 않지만, 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셨다. 주부 8년차였지만 공부 외에는 딱히 잘하는 게 없었던 나에게, 그분과의 만남은 내 정 체성의 회복, 살림과 육아, 기도와 찬송까지, 전 존재적인 회복의 시간을 갖게 하였고 주님을 인 격적으로 깊이 만날 수 있게 한 주님의 축복이었다. 나와 남편은 IVF 리더수련회에서 만났다. 기도짝이었다. 데이트할 때 남편은 건축이 전공이니 해외근무가 많을 것이라서 일하면서 그곳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교수 가 되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혼 이후 우리의 삶은 ‘지성사회 복음화’와 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신혼에 학사들을 위해 가정을 오픈하고 나름의 모양새는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소위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삶을 좇아가고 있었다. 양가 부모 님의 과잉 관심과 부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착한 아들, 딸 그리고 사위와 며느리가 되고자 우 리 부부는 너무나 두꺼운 가면을 쓰고 살았다. 이민을 와서 우리 부부는 그런 가면을 하나씩 벗고 있다. 호주의 보통사람들은 삶이 ‘easy going’이다. 한 예로, 우리는 7년 정도 호주침례교회 생활을 했다. 여름에 오전 9시 가족예배 시간 에는 복장이 자유롭다. 반바지에 샌들도 오케이다. 물론 10시 장년예배 때는 찬송을 주로 부르 고 노인 분들이 캐주얼 정장을 입고 예배를 드린다. 예배시간에도 반바지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원래 넥타이를 질색하는 남편은 특히 호주교회의 그런 자유로움을 좋아했다. 방학 때도 목사님들은 꼭 휴가를 정기적으로 떠난다. 수요예배도 없고 새벽기도도 없다. 안식년도 반드시 챙긴다. 매우 성경적이다. 그에 비해 이민목회를 하는 한국 목사님들은 너무 일을 많이 하고 쉬 지 못하는 것 같다. 남편도 나도 영어시험(IELTS)을 준비하고 호주에 왔다. 그러나 영어라는 것이, 서른 살 넘어 이 민을 선택한 우리 부부에게는 너무나 큰 산이었다. 호주에 와서 영어 학교 한번 다니지 않고 호 주 철골설계 회사에 6년 이상 근무했던 남편은 그야말로 불가사의하다. 남편말로는 잘 알아듣 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도 자유롭게 못해서 힘들지만, 자기가 하는 분야는 기술직이라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면 호주인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이메일 로 해서 정확한 의사소통이 되도록 하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증거를 남긴다고 한다. 회사 간, 개인 간에 민사소송이 보편화된 사회이다 보니 그런 보호책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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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을 때 나는 내 전공분야에서만 내가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다른 분야에서 도 배우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호주사람들이 무엇을 입고 먹고 느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호 주의 주류 사회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TAFE(Technical and Further Education,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주립 기 술 전문대학)의 영어코스를 등록했다. 아침에 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놓고 은지는 TAFE 안에 있는 Childcare Centre(어린이집)에 맡긴 후, 오전 9시부터 오후 2시 반까지 수업을 들었다. 곧바로 3시에 은혜를 픽업하러 돌아 와야 했다. 아이들을 일찍 재워놓고 밤늦게까지 숙제를 하지 않으면 졸업장을 받기 힘든 과정이었다. 그러나 교 실에서 배우는 영어는 늘 한계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잘한다고 칭찬을 받아도, 현실에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꿀 먹은 벙어리 신세였다. 오히려 나는 성경공부를 통해 영어를 많이 배운 것 같다.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은퇴한 노인들이 아이들을 사랑으로 잘 돌봐주셨다. 은지가 다니던 호주교 회의 한국 플레이 그룹에서 소개받아 시작한 영어성경공부(Know Your Bible)는 나에게 호주교회를 소개해주었 고,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신실한 호주 크리스천 공동체와 교제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물론 처음 3년 은 그냥 가서 듣기만 했다. 누가 말이라도 걸면 그냥 웃기만 했다. 플레이 그룹의 한국리더 옆에 앉아서 열심히 들었다. 그때 모태신앙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영어는 안 돼도 지금 성경 어디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파 악할 수 있었다. 체면치레보다는 검소하고 꾸밈없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호주 그리스도인들이 좋았다. 육아와 직장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내 나이 또래의 호주 아줌마들을 만날 수 있어 나에 겐 대단한 도전이었고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둘째 은지는 임신 중에 다운증후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때 병원에서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은 지의 초음파 검사결과를 전화로 3자 통역 서비스를 통해 전달했고 그 후 병원 컨설팅과 양수검사 등 모든 과정 을 우리를 위해 무료로 준비해주었다. 또한 호주의 교육시스템은 과히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공부하 고자 하는 국민을 정말 잘 도와준다. 50세가 넘어 직업을 위해 공부하면 일정금액의 상여금도 지급된다. 직업교 육이 더 우선이고 나이 들어 대학에 갈 때는 이점이 더 많다. 호주에서는 모두가 대학에 가지 않는다. 공부하고 싶은 사람만 대학에 간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는 것보다 졸업하는 것이 몇 배나 어렵고 실제로 20-30%만 졸 업을 한다고 한다. Plumber(배관공)나 Builder(건축업자)가 40%까지 세금을 내야하는 직장인보다 시간당 급여가 더 높고 잘산다. 호주로의 이민을 선택한 후 여러 가지 위기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발견한 것 을 필두로 여러 은혜가 있었다. 양가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심리적 독립을 했고, 부부관계가 회복되었고, 동생 은지로 인해 은혜의 성품이 회복되었다. 체면치레 없이 솔직하게 사는 삶도 배웠고, 근검절약하고 작은 것에 감 사하는 simple life를 몸소 체험하며 살게 되었다. 이런 것이 이민 12년차의 열매인 것 같다. 나그네 인생인 우리가 하루하루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것을 호주에서의 삶을 통해 더 절 실히 느꼈다. 지금 나는 호주에서의 삶에 감사한다. 우리 가족 각자의 회복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사귐이 귀하고 소중하다. 나는 이곳에서 남편과 함께 신혼 초에 꿈꿨던 은퇴사역자를 위한 센터를 만드는 일을 소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내게 주어진 아내, 엄마, 며느리, Aged Care Worker(요양보호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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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시대 극복을 꿈꾸는 그리스도인의 통일 교양
구교형 지음 196면|10,000원
냉전 한국・분단 한국을 넘어 평화 한국・통일 한국으로! “이 책은 예언자의 반열에서 이탈한 것을 깊이 회개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필독서다. 개인의 삶과 조국의 운명을 바꿀 회개의 열매를 사모한다면 지금 이 책부터 읽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이만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강경민(일산은혜교회 목사, 평화와통일을위한기독인연대 공동운영위원장), •이문식(광교산울교회 목사,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공동대표, 남북나눔운동 사무총장), •윤환철(미래나눔운동 사무국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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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테라피‖여러 고민으로 곮치 아픈 그대에게 드리는 책 처방
최상급 수련회로의 초대 정성민│울산대 97 주민등록등본에 여자가 셋. 저항과 도전, 인문학적 상상력과 구체적인 생으로 하나님 나라를 펼쳐내는 직장인이자 청년부 간사.
1. 관찰 세월호는 침몰해 있고, 세월호 국정조사는 파행이다. 특별법은 오리무중이고, 진실은 아직 깊은 바다 속에 잠 겨 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3명은 십자가를 지고 1,900리 도보순례에 나섰다. 십자가 지고 가는 희생자의 누 나는 안산에서 멀어질수록 동생과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라며 동생에게 용서받고 싶고, 빨리 만나고 싶다고 했 다. 이들의 뒤를 지역의 경찰서 정보관이 미행했다가 들통이 났다. 진실을 밝혀달라며 단원고 2학년 생존학생들 도 여의도를 향해 1박2일의 도보를 시작했다. 여의도 국회 앞에는 유가족들이 단식을 하며 농성 중이다. 국가개조와 개혁을 위한 적임자로 소개 되었던 문창극 신임 총리 내정자는 14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그의 신 앙대로 분명 하나님의 뜻이었을 것이다. 세월호 사태를 책임지기 위해 사의를 밝혔던 정홍원 총리는 유임되었 다. 유임인지 연임인지 중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세월호 사태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되었다. 두 총리 후보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정홍원 씨는 안수집사이고, 그가 고문변호사로 몸담았던 법무법인 의 이름은 로고스였다. 문창극 씨는 잘 알려진 것처럼 장로이다.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자리에 오른 두 명의 신 앙인은 그 신앙의 여정에서 몇 번은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기회가 올 것을 기대하며 기 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포에 휩싸인 왕과 국민들을 달래지도, 죽을 위 기의 생명들을 구하지도 못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연일 폭격하고 있다. 일주일간 지속한 가자지구 공습으로 팔레스타인 사 망자만 최소 189명. 이 가운데 4분의 1이 어린이, 4분의 3이 민간인이라고 유엔은 전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최첨 단 미사일 방어시스템 아이언 돔의 활약으로 사망자가 보고되지 않고 있다. 아이언 돔을 개발한 이스라엘 방위 산업체의 이름은 라파엘, 하나님이 낫게 하신다는 뜻을 가진 유대교 3대 천사의 이름이다. 이렇게 알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사실들을 매일 눈앞에 맞닥뜨리며 산다. 알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따로 공 부하지 않아도, 특별한 통찰을 기르지 않아도 우린 매일 이 잔혹한 사실을 목격하고 있다. TV와 신문, 페이스북 이나 트위터 같은 새로운 매체를 통해 현장의 사실들이 생중계되고 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들 모두는 수많은 타살의 증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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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2. 해석, 적용 많은 사건과 사고로 분노와 좌절이 맘속에 똬리를 틀 고 앉아 있습니다. 대체 어느 지점까지 이 땅의 교회가 참담하고 무력해질 수 있을까요.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가 아닌 기독신앙을 가진 성도들에게, 아니 바로 우리 후배들에게 우리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 고 전달해야 할까요. 이런저런 문제들과 씨름하던 차에 책 한 권을 잡았습니다. 평화운동가 쉐인 클레어본과 크리스 호가 집필한 《대통령 예수》라는 책입니다. 쉐인 클레어 본의 전작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처럼 흥미롭고 도발적인 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집 디자인까지 도발적(?)이어서 읽는 것 자체가 어려워 포기했던 책이었습니다. 허나 ‘읽기’의 어려 움을 힘겹게 극복하고, 다시 이 책을 들여다보니 지금 이 시점에 선후배님들께 권하기에 적당한 책인 것 같았습니다. 추천사와 서문 사이, 몇 장의 사진과 글 말미에 이렇게 저자가 읊조리고 있습니다. 다급해 보이 는 병원, 뒤통수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중동지방의 한 소녀의 사진 아래에 있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인가 싶다. 하나님이 정말로 권좌를 통 해 역사하시는지 의문스럽다. 혹시 하나님의 생각은 완전히 다른 건 아닐까’ 여러분들과 불경스 런 책과 마음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대통령 예수》는 복음서와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님과 하나님나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저자는 매력적이고 활기 넘치는 운동가일 뿐 아니라, 성경과 역사에 대해서도 해박 합니다. 본격적인 성경강해서가 아니지만 생생한 현실감을 가지도록 성경을 풀어냅니다. 어떤 성경강해보다 더 새롭고 생생하게 성경을 해석해 줍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자꾸 복음서를 다 시 읽고 싶어집니다. 아울러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본을 삼아야 할 진짜 교회의 모습과 참된 신앙인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만한 다양한 사례와 고백들이 곳곳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독특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말씀에 단호하게, 혁명적으로 복종하는 이들을 보면 서 담대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의 삶과 가르침을 실천할수록 더 강하 게 제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일상의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국제적인 현실에 이르기 까지, 어떤 방식의 혁명적 순종과 거룩한 저항이 가능한지 폭넓은 통찰을 얻게 될 것이라 확신 합니다. 전국 IVF 수련회 주강사급 설교에 육박하는 책입니다. 혹 수련회 계획은 없지만 하늘로부터의 강력한 동기부여가 필요하신 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단호한 문장으로 오직 하나의 주와 하나의 왕국을 섬기도록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일체 의 퇴로와 타협 없는 원색적인 복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유의하십시오. 아주 드물게 최상급 수련회에서 만났던 ‘순교의 영광’을 말하는 책입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고 순교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성도가 된다_유스티누스(주후 165년에 순교) 저자는 폭력과 테러의 시대에는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단순 히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죽을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무력함의 실체는 믿음과 용기의 부족인지도 모릅니다. 이 슬픈 제국의 시대에 죽을 각오로 살고 사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많으니 움직이라고, 이 책이 저와 여러분을 채찍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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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산책‖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
빌레몬서 산책 4
용서와 화해의 복음, 인격적으로 살아가기(몬13-17) 용서와 화해의 복음 이야기를 실천하는 이야기, 빌레몬서 문춘근│부산대 83 1992년 방현주(동아대82) 학사와 결혼하여 인생을 공유 중이다. 선물로 받은 아들 희찬을 미국 Emory 대학교에 보내놓고는 신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2008년 사귐의 교회를 개척하 여 옆집 아저씨 같은 ‘다님‘ 목사로서 성도들과 함께 춤추듯 살아가고 있다. 가족학을 전공한 아내와 함께 거닐면서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데 용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 옆집 같은 교회를 몇 곳에 더 세우기를 바라고 있다.
루이스 스미즈 교수는 《용서하며 잊으며》라는 책에서 용서의 절박함과 중 요성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용서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잘못이 생 기고 서로 간에 깊은 상처를 주며 사는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이 고안해 내신 발명품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용서하심으로써 그 일을 시작하셨다. 그 런 뒤에 우리 모두를 서로 서로 용서하는 일에 초대하신다.” 가장 어려운 사 랑의 일이자 가장 큰 사랑의 모험이기도 한 이 용서와 화해의 문제! 함께 빌 레몬서를 묵상하면서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인격적으로’ 살게 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 살펴볼 빌레몬서 본문(13-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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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I would have liked to keep him with me so that he could take your place in helping me while I am in chains for the gospel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But I did not want to do anything without your consent, so that any favor you do will be spontaneous and not forced.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Perhaps the reason he was separated from you for a while was that you might have him back for good--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no longer as a slave, as a dear brother. He is very dear to me but even dearer to you, both as a man and as a brother in the Lord.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So if you consider me a partner, welcome him as you would welcome me.
바울의 소원, “그를 영접해 주시게나!” 사실 바울이 빌레몬서를 통해 빌레몬과 그 교회 앞에 밝히는 권면은 바로 17절입니다. 쉽게 풀 어본다면, “빌레몬이여!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고 영접함으로써 화해의 복음을 살 아주시게나.” 이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복음 앞에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권 면을 하고자 얼마나 뜸을 들이며 공을 들이며 조심스럽게 빌레몬에게 내어 놓는지 모릅니다. 빌 레몬서 8-12절에 이어 오네시모를 영접해 달라는 이 한 마디를 하려고 15-16절에서 바울은 오 네시모를 영적으로 두둔하는 공을 들입니다.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 즉 오네시모가 노예 신분 으로서 주인인 빌레몬 몰래 도망쳐 버린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하나님은 빌 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원히 두게 하시려고’ 한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마’라는 표현을 통해서 넌 지시 말입니다. 이어서 말하기를 바로 그 사건 전에는 종과 주인이라는 관계에 불과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이후로는 오네시모가 종 이상으로, 즉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며 마지막 간 청을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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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살게 하는 요소- 1. 인격적인 위험(리스크) 감수하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굳이 돌려보내는 것일 까요? 아무리 오네시모가 회심했다 하더라도 당시 노예 제도를 고려할 때 치명적인 중죄를 범한 노예를 옛 주 인에게 보내는 일은 어떤 면에서 오네시모와 빌레몬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제3자 들이 볼 때는 ‘마땅한 일’일지 모르지만 바울의 이 결정(오네시모를 빌레몬의 품으로 돌려보내기)은 대단히 인격 적으로 위험스런 결정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네시모 입장에서 보면, 빌레몬이 예수를 믿는 주인이라고 해서 오네시모를 ‘반드시 용서해 줄 것이다’라는 무슨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회는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체제였기에, 노예주들은 노 예 제도의 확고한 유지를 위해 노예 신분에 걸맞지 않는 노예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벌을 내렸는지 모릅니다. 이 런 위험한 상황으로 바울은 오네시모를 되돌려 보내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요? 바울에게 순종 하여 빌레몬에게 간 오네시모가 이런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면에서 그의 믿음은 놀랍습니다. 빌레몬의 입장에서 볼 때도 인격적으로 위험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도망친 노예로 인한 체면과 이 미지 손상과 경제적 손실 등을 생각할 때, 몇 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난 오네시모의 얼굴을 보았을 때 빌레몬의 표정은 어떠했을까요? 편지를 통해 그가 바울의 전도로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당연히 놀랍고 기 쁜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케이스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예민한, 아마 국 가 보안법과도 비슷한 이슈였을 것입니다. 그의 결정(용서와 화해의 문을 여는 영접)은 다른 노예주들과 다른 노 예들에게 막대한 파장을 미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빌레몬은 오네시모의 귀환과 이에 대한 그의 반응 을 통해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믿고 살고 있는 교회 성도들의 기대와 시선을 직면해야 했기에 빌레몬은 인격적 으로 상당한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왜 바울은 오네시모를 굳이 빌레몬에게로 돌려보낸 것일까요? 위험하 게 말이죠. 13절을 보시면 바울이 원래 자기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자기 에게 머물게(Keep) 하여 복음을 위하여 죄수의 몸으로 고난 받고 있는 자신을 섬기게 하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 에게 복음의 빚을 진 빌레몬도 회심한 오네시모가 자기 대신에 바울 곁에 남아 그를 섬기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 라고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만일, 만일이지만 바울이 가진 원래 소원대로 편지만 보내고 오네 시모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은혜롭게(?) 만사가 해결되었을까요.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겪어야 할 인격적 인 위험(리스크)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얼마나 이런 식의 해결을 요구하고 기대하고 정당 화 하는지 모릅니다! 인격적인 리스크, 고민해야 하는 스트레스, 이런 것을 피하거나 생략하는 것이 훨씬 은혜 로운 용서요 자비로운 복음이라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바울은 요즘 말로 복음의 ‘까칠한’ 선택을 견지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인 오 네시모와 빌레몬을 인격적인 위험 속에 빠뜨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복음의 이야기가 이들의 만남과 숙고를 통해 서 구체화 되기를 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그저 관념적으로 마음과 생각 속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부담 없이’ 손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나라의 복음 이야기는 오네시 모와 빌레몬이 겪었을 “인격적인 위험 감수”의 과정을 통해서만 실제화 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과 같은 영 적 암흑기에 우리가 복음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내려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인격적인 위험부담 안기”의 상상 력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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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용서와 화해의 복음을 살게 하는 요소- 2. 인격적인 반응 기회 제공하기 용서와 화해의 복음 이야기를 살아내는 데 필요한 두 번째 요소를 14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회심 한 오네시모, 동역자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러 있게 하기를 원했지만 그 소원을 내려놓고 그를 육신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고 합니다. 바울은 왜 그런 위험스런 결정을 내린다고 14절에서 밝힙니까? 빌레몬이 용서와 화해의 복음 이야기에 인격적으로 반응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다만 (But)’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삶의 중요한 원칙을 밝힙니다. 아무리 그가 사도의 위치이고,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19절)’ 즉 빌레몬이 바울에게 복음의 빚진 자라 할지라도, 빌레몬의 ‘승낙이 없이는’ 그런 소원을 주 장하고 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무리 선한 일(14절), 바람직한 일이라도 당사자의 승낙 없이는 실행으로 옮기지 않겠다는 것이 바울의 고귀한 자세입니다. 13절을 통해 이미 바울은 오네시모의 진정한 회심과 그의 사역적 가치와 바울의 처지에 대한 빌레몬의 사랑과 헌신을 믿고는 ‘인격적인 위험 감 수’의 과정을 생략한 채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게 하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이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에 그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바울이 너무 융통성이 없고 경직된 성품 이라서 이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어 그는 그런 원칙에 깔린 이유를 밝힙니다. 선한 일은 결코 억지로 되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자의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14절에서 말하는 ‘너의 선한 일’은 직접적으로는 감옥에 있는 자기 곁에 오 네시모를 그냥 머물게 하는 문제를 말합니다. 누가 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름답게 보였을 것입니다. 나중 에 밝히지만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화해한 후 자신에게 그를 보내서 섬기게 할 마음이 충 분히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21절). 그러나 이런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런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수 단이나 방법이 억지로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영적으로라도 강요로 느껴져 내려진 결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일수록 반드시 자의로, 즉 ‘기꺼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의 선한 일’을 좀 더 넓게 본다면 무엇일까요? 빌레몬의 선한 일이란 자기 삶과 인격에 큰 손상을 입히 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복음 안에서 용서함으로써 화해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일 것입니다. 바울이 굳 이 위험스러운 방식으로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만나게 하는 궁극적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위험스런 상황에 직면하게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 빌레몬이 복음에 합당한 결정을 인격적으로, 스스로 반응하도록 기 회를 제공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였습니다. 특히 슈퍼 갑의 입장에 서 있는 빌레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경험 한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정말 진지하게 그러나 스스로 합당한 반응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그의 사역의 원칙이었습니다. 어떤 선한 일이라도 억지가 아니라 자의로 되게 하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 문화 속에는 유난히 형식주의와 체면 그리고 권위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이 제대로 뿌리내리고 실체화 되지를 못해서 성도가 성도답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해 세상으로부터 욕과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도가 성도답게, 교회가 교회 답게, 하나님나라 사역이 정말로 선한 일이 되게 하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복음이 요구하는 인격적 인 위험을 우리가 진실하게 감수해 나가는 노력이 아닐까요?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억지가 아닌 자 의’의 정신으로 행해지도록 인격적인 반응의 여지를 서로 열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인격적인 위험 감수와 인격적인 반응 기회 제공! 말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용서와 화해의 복음 이야기를 새롭게 쓰기 위 해서는 우리의 연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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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마음이 통하는 벗
소리지음 31 당신의 연애자소서_한선미, 김효주 34 제이언니의 결혼일기_김용주 36 파란만장 직장생존기_김작가 38 상연정(常然亭)에서..._홍정환 40 낭만주의자의 영화이야기_정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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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 당신의 연애자소서 ] 당신의 연애에 한선미-김효주 부부가 띄우는 ‘자’상하고 ‘소’상한 편지(書)
Q.소통의 기술 소 리 지 음
제게는 참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저와는 다른 성격을 지닌 그를 알아갈수록 재미가 있었고, 다른 세상을 보여주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만난 지 어언 1년이 되어가네요. 그런데... 이제는 좀 지친다는 느낌이 듭니다. 분명히 장점은 장점대로 맘에 들고 단점은 단점대로 매력 적이었는데, 제 마음이 달라진 걸까요. 더 이상 바뀌지 않는 그와 제 자신이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저와 그는 취향이 너무 다릅니다. 같이 볼 영화 하나 고르기도 어려워요. 저는 잔잔 하고 메시지가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반면, 그는 시끌벅적하고 볼거리가 많은 영화를 좋아합 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관에서 보긴 아깝다나요. 그리고 저는 미술관이나 각종 전시를 보러 다니는 게 취미였는데 제가 좋아하는 걸 남자친구와 함께하긴 참 어렵더라고요. 운동을 좋아 하는 남자친구도 마찬가지고요. 또 남자친구는 애교도 많고 표현도 풍부한 편이에요. 그래서 저에게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건 참 좋지만... 제가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때가 많더라고요. 그리고 저에게 도 같은 강도로 표현해 주길 원하는데 저에겐 그게 참 어렵습니다. 평소 무뚝뚝한 제가 이것저 것 노력을 해봅니다만, 남자친구의 필요를 채워주진 못할 뿐이고 저는 저대로 있는 그대로 받 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하고요. 이런 다툼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평행선을 그릴 것 같다는 게 무엇보다 절망 적이에요. 1년 정도 만나니 결혼을 고민하게 되는데 이런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 다. 너무나 다른 저희가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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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미│한성대99 캠퍼스 간사 6년을 포함, 20대를 고스란히 IVF에서 뒹굴거리다가 지금은 살림과 육아에 전념 중이다. 2002년 착하고 성실한 줄 알았던 형제를 만나 열심히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를 무 한 반복하다 그만, 2007년에 결혼까지 해버린 상태다. 하루에 4만 마디쯤은 거뜬히 하고 뜨개 질, 바느질, 독서 외에도 각종 오지랖을 넓혀가고 있는 아줌마.
Answer
자매님! 축하합니다. 드디어 두 눈에 단단히 씌워 있던 콩깍지 가 벗겨지셨습니다. 짝짝짝!! 저는 100일 정도 만에 콩깍지가 벗겨지는 바람에 나머지 시간인 약 5년 정도를 전화기 던져가며 싸우고, 눈물 콧물 섞인 수 십장의 편지로 화해하며, 그렇게 지 냈답니다. 그런데 무려 1년 만에 그 콩깍지가 벗겨지시다니요!! 정말 형제님에게 푹 빠져 계셨군요. 자, 지금까지 준비 체조, 몸 풀기 시간이 끝났습니다. 혹시 주변에 결혼에 골인한 부부들이나 연애 잘 하고 있는 커 플들이 있나요? 한번 물어보세요. 두 사람의 MBTI는 얼마나 닮았는지, 성격, 취미생활은 얼마나 비슷한지, 처음부터 그렇 게 잘 맞았는지 말이죠. 제가 꼭 평균적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 지만 제 주변에 있는 부부들이나 커플들은 이상하게 다 다른 성 격, 다른 취향, 너무 다른 스타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다른 밑 그림 속에서도 닮아 있는 것들이 한두 개는 있지만요. 대부분 처음에는 나와 다른 모습에 끌리기 마련이에요. 자매 님 말대로 반대여서 매력적이었는데, 나중에는 그 반대의 모습 때문에 싸우고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물론 저희 부부도 그랬 지요. 저는 하루에 4만 마디의 말을 하는데, 남편은 제 그런 모 습을 처음에는 신기해하고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말이 너무 많 으니 피곤해 하더군요. (지금은 8만 마디를 하는 딸에게까지 시달리고 있어요.) 처음에는 대부분의 선택권을 저에게 주는 남편이 배려심이 많다고 느꼈는데 나중에는 ‘아니, 이 인간은 왜 결정을 못해, 결정 장애야?’ 하며 책임을 안진다고 느껴지는 것이에요. 맙소사. 제가 사랑했던 사람은 똑같은데 왜 배려심 많은 사람에서 하루아침에 무책임한 사람으로 추락해버린 것 일까요? 도대체 누가 변한 것일까요? 영화 취향이 다른 문제는 두분 취향대로 번갈아 보면서, 상대 방 취향의 영화에 마음 열고 보기로 하는 거죠. 수준 낮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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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잠이 온다거나, 욕하지 않기로 약속하고요. 미술관이나 전시는 원래 혼자 가서 보는 게 제 맛 아닌가요? 아니면 한 달에 한번은 전시회에 같기 가기로 약속해 보는 것도 추천해요. 운동은 건 강에도 좋으니 이왕이면 같이 해봐도 좋을 것 같고요. 애정표 현 문제는 자매님은 넉넉히 받아주되 형제님은 자매님에게 강 요하지 않기로 협상해보면 어떨까요. 맞아요. 5년의 시간 동안 숱하게 싸우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바로 그 평행선이었어요. 우린 그렇게 계속 평행선을 달릴 거예 요. 결혼하면 그 레일이 하나가 될까요? 아니요. 그 선은 계속 평행선이에요. 왜냐면, 우리는 너무 다른 존재이거든요. 레일 하나로는 기차가 달릴 수 없어요. 방향이 같다면 다른 두 레일 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겠죠. 그럼 이제 선택해야 해요. 이런 문제들이 두분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어려울 만큼 자매님을 힘 들게 하는 문제라면 다른 레일을 찾아봐야 할 거에요. 그러나 자매님이 있는 그대로 용납 받고 싶은 것처럼 형제님을 온전히 용납하고 내 기준, 내 스타일을 뛰어 넘어 사랑하기로 헌신해 야 하는 문제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는 것 같아요. 저는 여러 사소한 문제들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되더라고 요.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하하하. 그냥 ‘영접’했어요. 통째 로! 네, 맞아요. 저는 사실 쉬운 여자였어요. 흑흑. 남자친구를 사랑하긴 하는데 내 기준으로 아무리 해도 이해가 안 되는 거예 요. 그래서 ‘이해’를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받아들임’을 선택했 죠. 그 선택의 기본은 사랑이에요. 내 것을 다 포기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제일 중요한 사랑을 얻게 되죠. 아 빡센 사랑. 자매님, 계속 사랑하고 싶으세요? 이 형제를 위해 <트랜스포 머>를 기쁜 마음으로 볼 수 있겠어요? 자, 본 게임의 호루라기 가 울리네요. 쉽지 않은 경기겠지만, 나중에 두분 다 승자의 기 쁨을 만끽할 수 있길!
김효주│고려대99 진중하고 과묵한 성격이었으나 하루에 4만 마디 하는 자매를 만나 연애시절 건당 30원하는 문 자메시지 값만 3만원 넘게 나오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는 뭐 하나 꾸준히 하는 게 없는 캐릭터인 데, 한 사람과 6년 연애 후 결혼 그리고 결혼 후 6년 이상을 살고 있다. ‘오늘 점심 뭐 먹지’가 최 대 고민인 회사원 8년차이자 두 돌 지난 딸이 하나 있고 풀코스를 두 번 완주한 초보 마라토너.
Answer
혈액형 테스트입니다. A형은? “소세지”래요. 소심하고 세심하 고 지랄 맞아서. B형은? “단무지”래요.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 랄 맞아서. O형은? “오이지”래요.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랄 맞아서. 그렇다면 대망의 AB형은? “3G”랍니다. 지랄 맞고 지랄 맞고 지랄 맞아서. 이 타이밍에서 웃으셨어야 되는데, 어땠나 요? 자매님은 무슨 유형이세요? 이 유머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선, 인간은 모두 지랄 맞다 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인 간이란 존재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알 수도 있지 않겠어요? 게 리 채프먼은 그의 역작 《5가지 사랑의 언어》에서, 사람은 각자 사랑을 느끼게 되는 고유한 표현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런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엄청 사랑해서 선물을 막 사주는 남 자친구에게, 여자친구가 이런 말을 건네는 거죠. “난 그냥, 너랑 함께 있고 싶어.” 아, 돈은 돈대로 깨지고 분위기도 뻘쭘한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요? 개인마다 사랑의 언어가 다 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는 내 언 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언어를 알고 배워 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남녀 간 사랑에서 가장 오래 걸 리는 일 아닐까 싶어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배우고 또 써보 고, 상대의 반응을 보고 피드백하고 하는 과정, 마치 외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말이죠. “웬수”는 어떨 때 “웬수”가 될 수 있을까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은 “웬수”가 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건 그냥 무관심하거나, 모르는 사람이죠. “웬수”의 성립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서로 잘 아는 사람일 것. 둘 째, 그 사람이 싫을 것. 농구 한 게임 뛰고 온 그 남자의 땀 냄새 마저 향긋하다가, 샤워도 안 하는 것 같은 위생관념이 의심스 러운 건 한 순간이죠. 남자가 말도 참 예쁘게 하는 것 같아 사랑 이 퐁퐁 솟다가도 말 참 지지리 많네 하게 되는 데는 이유가 없 는 겁니다. 보통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웬수”가 되기
가 쉽습니다. 제 주위 사람들을 보면요. (저는 아닙니다, 험험.) 이 황당하고 절망스러운 전우주적인 딜레마를 어찌해야 할까 요! 사실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이건 논리의 문제가 아니니 까요.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개인이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왔던 방식이 계속 발목을 잡을 겁니다. 우선 솔직하게 잘 드러내는 게 지혜로운 방법인 것 같아요. 대신 조금씩 덜 심각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오늘은 자매님이 좋아하는 미술관 가기! 형제님에게는 숙제를 주는 겁니다. 작 가의 화풍과 상징하는 바를 맞추면 애교 한 번 부려주기. 운동 을 좋아하는 형제님을 위해 배드민턴이나 볼링 같은 걸 가지고 내기를 하면 어떨까요? (참고로 전 졌었죠. OTL) 잔잔한 영화 보고 졸지 않기나, 애교 금지 기간 일주일 수행하기 등등. 이러다 보면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전시회 관람 좋아 하고, 표현이 부족한 것 같은 나도 있는 그대로 좋아해 줄 남 자는 없을까? 꼭 이렇게 어색하고 조금은 오글거리기도 하는 노력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 고민 끝에 우리는 불편한 진 실을 마주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사랑이라는 게 생각보다 달 콤하지 않다는 진실을요. 전 커피를 참 좋아하는데, 주로 아메 리카노를 즐기는 편이에요. 거기에 첨가하는 게 물이건 우유이 건, 설탕에 시럽 두 바퀴 반이건 간에 변하지 않는 진실은, 커피 는 쓰디쓴 에스프레소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죠. 커피는 어른의 음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이라는 것도 사실 본 래의 모습은 쓰디쓴, 하지만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는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랑이 달콤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마치 딸 기맛 감기약 같은, 아직은 쓴 게 힘든 아이를 위한 배려가 아닐 까요? “사랑은 세상의 커피이니 커피가 만일 쓰지 않으면 무 슨 맛으로 먹으리요” 커피복음 2장 3절 말씀. 원액이 진할수록 향은 그윽할 겁니다. 첫 맛은 몸서리쳐질 정도로 떫은 것 같지 만 마실수록 빠져드는 에스프레소 같은, 사랑의 맨얼굴을 만 나는 교제하시길 빌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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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제이언니의 결혼일기 ] ‘제이언니’가 남편 그리고 아빠로 살아가며 얻은 반성과 성찰
‘몸의 대화’, 그 므흣함에 관하여 김용주│한양대95 한양 IVF 학사이며 SNS에서 '제이언니'로 불린다. 결혼, 출산과 육아의 경험은 나를 '유사 페미니 스트'로 만들었고 그런 생각들을 모아 오마이뉴스에 <제이언니의 아빠일기>를 연재했다. 대인배 아내, 토끼 같은 아들과 함께 일희일비하며 살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낯선 일이다. 이성을 보고 불현듯 가슴이 설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온다. 그 사람 을 계속 떠올리며 히죽거리고, 만나면 자주 ‘정줄’을 놓게 되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여름에 도 찰싹 붙어 다니는 이 기이한 현상들... 지금도 주변을 둘러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국에서는 주말마 다 남남이었던 수백 쌍의 커플이 결혼을 한다. 결혼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그 기저에 ‘므흣한’ 스킨십과 섹스 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그것이 이전에 가능했다 해도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즐거움이 분명 존재한다. 뭐랄까, 이제는 부모에게 쉬쉬하지 않아도 되는 쾌락이라는 점에서 결혼이라는 굴레가 더 은밀한 자유 를 허락하는 역설적인 묘미가 있는 셈이다. 사실 이번 글은 쓰면서도 도대체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지금도 쓸 말보다는 쓰 지 않을 말들에 대한 머릿속 계산 속도가 더 빠르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부터 나는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 그건 마치 교회 에서 말하는 ‘구원의 확신’처럼 내겐 자명한 진리 같았다. 나는 부드러운 남자고 여자들과 말도 잘 통하고 이성교 제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으니, 이 결혼이 아내에겐 참 ‘남는 장사’일 거라는 황당한 자기확신 같은 게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기대와는 달리 우리 부부는 여전히 육체적으로 친밀하지 않다. 오히려 대화로 더 즐거움 을 얻는 편이다. 결혼을 하고 나면 청년시절에 꿈꾸던 ‘나쁜 짓’을 대놓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 ‘나쁜 짓’ 이라는 게 삶의 다른 일상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 사이의 온갖 정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불행히도 남성 으로서의 내 문제도 발견했다. 성관계를 몸의 대화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을 아내와의 기나긴 대화 끝에 갖는 ‘스트레스 해소’의 시간으로 여겼다. 그래서였을까. 아내와 몸으로‘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내겐 피곤하면서도 일정 부분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그 무엇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결혼 직후에는 야릇한 긴장 감을 즐기며 섬세하게 배려하고자 노력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적 본능 사이에서 나는 심 한 내적 분열을 경험했다. 솔직히 나는 부부관계에서 육체적 교감에 관한 어떤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물론 책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욕구를 참는다거나 아내의 반응을 살핀다거나 하는, 이런 식의 몸의 대화가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았다. 매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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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아내와 교감을 나눠야 하는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몸은 잘 따라오지 않았다. 아니 그 상황 자체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는 ‘몸을 통해’ 즐거운 날들도 있었지만 나의 즐거움이 아내에겐 도리어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아내 또한 성 적인 대화가 편하지 않았기에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간혹 정서적 불편함을 표현하곤 했다. ‘여자는 뭐가 이렇게 복 잡한 거야?’ 몸의 대화가 점점 불편해졌다. ‘구원의 확신’만큼 확실하던 내 성적 자존감은 어느덧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 어딘가를 서성이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내 고민은 우리 사회의 보다 깊은 영역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조금 씩 알게 되었다. 이른바 부부 사이의 성적 역학관계라고 해야 할까. 가부장적인 한국사회 남자들의 대다수는 섹스에 관한 한 여전히 일방적인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욕구에 대해 매순간 여성이 이해하고 받아줄 것을 기대한다. 통계적으로 여성들의 상당수가 자신은 즐겁지 않더라도 남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성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섹스가 두 사람 사이의 또 다른 대화의 형태가 아닌 아내의 일방적 봉사인 경우도 자주 발 생한다. 주변에서는 육아에 지친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한다고 불평하는 남편들의 당당한 하소연도 종종 들린다. 한때 아 내가 가입했던 인터넷 출산육아 카페에서 남편의 성욕해소를 위해 임신 중에 유흥업소 출입을 방관했던 엄마들 이야기를 읽었다.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 글에 공감의 댓글을 다는 아내들도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교회 안의 결 혼예비학교에서도 사역자들이 공공연하게 남편의 성욕을 아내가 ‘긍휼한 마음’으로 해소시켜줘야 한다는 말도 한다. 이 렇듯 부부간의 섹스는 내 세대에서조차도 여전히 남편의 성욕을 받아주거나 아니면 받아줄 수 있는 다른 방법마저도 허 용하는 느낌이 강하다. 남성의 성욕을 언제나 긍정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남성의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 말이 불편하다면 고 쳐 말해서 성욕이 해소되지 않을 때 그의 전 인격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아내가 잠자리를 거부할 때면 그 순 간만큼은 전 존재가 거부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성욕의 좌절 그 이상의 감정적 동요에 휩싸였다. 나는 이것이 남성의 성욕을 절대시하는 이 사회가 개별 남성 한 명 한 명의 깊은 내면에 뿌리내린 부정적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 다. 흔한 말로 부부싸움 후의 섹스에 대한 농담이 그런 단적인 예이다. 남편은 아내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가장 강력한 신호 로 잠자리(성욕의 해소)를 들지만, 이것이 아내의 입장에서는 ‘신앙적 긍휼함’이었거나 ‘굴욕적 외교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교회는 자주 부부관계를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관계에 비유하곤 했다. 미숙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욕망을 채워 줄 것을 기대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땐 환호했지만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가길 원할 때는 불편해 하고, 스스로가 원하 는 형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이라 일컫기도 했다. 혹은 아예 하나님을 떠나 풍요를 빌어주는 이방신을 섬기기도 했다. 나는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성경 속 백성들이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남편들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한 다. 결혼생활의 전 영역에서 모범 남편이 되고 싶어 하는 기대와는 달리, 나는 성적인 부분에 있어 왜곡되어 있고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아이가 태어난 이후의 현실적 문제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사실 아직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그것이 남성인 내겐 구원이자 희망이다. 나는 그렇 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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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파란만장 직장생존기 ] 직장에서 겪는 하루하루의 분투를 담은 에세이
오늘, 내 자리에 고군분투하다 김작가│필명, J대06 올해로 학사 4년차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청소년들과 함께 재미있게 살아가고 싶은 청소년 활동 가. 현재 5명의 팀원들과 함께 파란만장한 직장생활을 경험해가고 있다. (필자와의 합의에 따라 필명을 사용합니다.)
근무시간, 잠깐 화장실에 앉아있는데 낯익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팀장님의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팀장님이 서럽게 우시는 통에,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처럼, 나는 한참동안 그 좁은 곳에 앉아 팀장님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침내 사무실로 돌아가니 어쩐지 팀 내 분위 기가 침통했다. 팀장님도 그렇고 전체 팀 분위기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싶어 살짝 물어보았더니 팀원 들의 입에서 과장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과장님은 우리 기관 내에서 기관장님 다음가는 위치의 관리자로, 8개의 팀을 지휘하고 있는 이른바 ‘높은 분’이다. 그런 데 8개의 팀을 아우르는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평소에도 논란과 불만이 끊이지 않았 다. 작년에는 과장님과의 마찰로 세 명의 직원이 직장을 떠났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몇몇은 과장님의 이 름이 나오기만 하면 치를 떨었다. 우리 팀에서는 최근, 지난 사업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외부 인사들을 초청하여 전문 평가단을 구성하고 있 었다. 평가단의 구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에 섭외할 인물들에 대한 명단을 두고 수차례 검토가 있었고, 오랜 협의 끝 에 팀장님과 과장님의 승인을 받아 결재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과장님으로부터 평가단 위원으로 선정된 어떤 교사를 평가단에서 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교사가 이 사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므로 전문성도 없고 다른 선생님들도 반대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미 결재까지 마친 상황에서 팀장님과 팀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 의 견이 있었다면 진작 얘기해주시는 게 맞지 않았을까? 게다가 결재 당시에 승인도장을 찍은 관리자들 중에는 분명 과장님 도 있었다! 결국 팀장님과 임 선생님이 과장님을 찾아가 우리 팀의 의견을 전달해보기로 했다. 과장님이 지명한 교사는 사업 초기 부터 함께 했으므로 누구보다 사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과장님의 반대가 완강할 경우 평가단에서는 제하 되 조언을 얻는 차원에서 협력을 구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이야기를 들은 과장님은 많은 직 원들이 보는 앞에서 팀장님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팀장의 역량이 부족해서 팀이 엉망이라지 않나, 능력이 없으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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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이라도 잘 들으라는 식으로 두서없이 쏟아진 폭언은 팀장
나에게는 너무나 야속했고 과장님에게는 퍽 여유로웠던
님에게 상처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옆에 계셨던 임 선생님
이 캠프의 불합리함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다.
은 결재 판을 집어던지고 회사를 나가고 싶었다고 할 정도
태어나서 이런 즐거운 활동은 처음 해봤다는 한 중학생의
로 마음이 상했고, 결국 팀장님은 화장실로 찾아와 혼자 눈
고백이나 소중한 추억과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는 청소년
물을 삼켰던 것이다. 직원들이 올린 기안을 처음부터 꼼꼼
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고생을 함께 했던 8명의 자원봉사
히 보지 않은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팀에서 낸 의견을 과
자들과는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장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인 것이나 자신의 분
나의 자리에서 내 역할을 다했기에 받을 수 있었던 이 선물
을 다스리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누군가에
들은, 분명 과장님이 그날 캠프에서 독서를 하며 쌓았을 지
게 인격적인 상처를 남기는 행동이 과연 많은 팀을 이끌어
식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리라.
가는 관리자로서 합당한 역량인지 나는 정말로 이해할 수 가 없었다.
하나님은 분명 세상에 여러 가지 질서를 세우셨지만 그 세상은 또한 죄로 얼룩져 있다.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지
사회 초년병 시절, 나는 내가 만나는 수많은 관리자들 역
키고 싶은 마음, 아랫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권위자
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생각했
의 마음, 내 분노로 상처 입을 사람들보다 분노한 자신이
다. 비록 그 중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그럼에
더 중요한 마음, 그리고 사실은 그 권위자에 대항하며 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고 내게 허락하신 권
존심을 지키고 싶고 역량 없는 지도자를 무시하고 싶은 내
위이므로 언제나 참고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이다.
마음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 참담한 세상 속에서도 복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그런 생각들이 매우 단편적인 판단
음이 심겨진 우리들은 자신의 자리와는 상관없이 변화하
이 아니었나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는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닐까.
작년에 300여명의 중고등학생을 데리고 1박2일로 캠프 를 간 적이 있었다. 당연히 총책임자로서 과장님도 함께 동
이렇게 관리자의 역량 운운하며 과장님을 신랄하게 비판
행했는데 그 때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과장님은 자신
하고 있는 나 역시, 과장이라는 자리에 가면 과연 내 말에
만을 위한 별도의 방을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가방을 가
반대 의견을 내는 직원들을 포용력 있게 받아줄 수 있을지
득히 채울 만큼 많은 책을 들고 와 피서를 즐기기 시작했
솔직히 자신이 없다.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고 인격적인 말
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자신만의 특실에 누워 교양
과 행동으로 대우하는 관리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나
있게 독서를 하다가 때로는 주변 풍경을 즐기며 산책을 하
는 복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분명 지금의 과장님
고 식사시간이 되면 그제야 아이들에게 얼굴을 비췄다. 팀
에게서 보았던 행동과는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으로 자
장님과 주무관님들은 과장님을 수행하느라 캠프에는 일
라가고 싶다. 내가 반드시 저 과장님과는 다른 인격적인 관
절 신경을 쓸 수 없었고, 당연히 캠프에는 진행인력이 부족
리자가 될 수 있다는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지금 내게 주어
하게 되었다.
진 일개 담당자의 역할에서부터 내 마음과 인격이 자라가 기 위해 분투한다면 관리자의 위치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
그 무렵 나는 어디에 나타나든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 다. 8명이라는 소수의 대학생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300여
의 사람답게 자라가기 위해 분투하는 내가 될 수 있지 않 을까 생각한다.
명의 청소년들을 통솔하고 이끌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를 아이들과 함께 뛰어다녔고, 혹여
올해도 과장님을 모시고 청소년들과 함께 가는 캠프가 기
나 이탈하는 청소년이 없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캠프장 곳
획되어 있다. 작년의 악몽이 떠오르지만 나는 이 캠프를 준
곳을 누비며 신경을 썼으며, 비어버린 팀장님과 주무관님
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람이 발휘해야 하는 역
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두 배 세 배 발로 뛰며 갖은 고생을
량’을 갖추기 위해 오늘, 내 자리에서 고군분투한다.
했다. 캠프에 다녀와서 탈진해버린 나는 난생 처음으로 링 거주사를 맞아야 했고 주일에 예배에도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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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상연정(常戀亭)에서... ]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이야기
도시 농업 (2)* 홍정환│부경대98 하늘가족공동체의 식구들과 더불어 삶을 예술로 가꿔가는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자료개발위원(복사와 컴퓨터 수리담당).
적자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이었고, 식자는 말없이 입 안에 든 감자 씹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종자는 그들
으로 그러하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러하더냐?”
을 흘끗 본 후 스승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지자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스승님, 제자는 몇 해 전 우연히 《똥, 땅을 살리 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보았사옵니다.” “‘똥, 땅...’ 거, 제목 한 번 기똥찹니다.”
“정화조가 연결된 수세식 화장실에서 대소변을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편의를 위함이었습니다. 똥 누는 일 하나도, 저의 편의보다는 하나님의 질서에 순
적자가 빈정거리자 종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응하는 방식으로 할 때에, 땅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던졌다.
“사형... 그러면 소변만 거름으로 모으시는 게 아니 “자네 아는가? 똥을 비롯한 자연거름으로 키운 당근
었군요.”
1개와 화학비료로 키운 당근 10개의 미네랄 함유량이 같다는 걸.” “예에?”
적자가 창백한 표정으로 말하자, 감자를 삼키던 식자 가 비명처럼 외쳤다.
“주님은 똥을 통해 사람과 땅이 만나게 해주셨다네. 땅이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줄 뿐만 아니라, 사람도 땅에
“좀 조용히 하게!”
영양분을 돌려주는 것이지.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면
“흠흠... 조심하겠네.”
서 순환이 깨어져버렸다네.”
“아니요, 사형은 괜찮습니다만 저 친구가...”
“... 대단하십니다.” “칭찬으로 듣겠네. 아무튼 스승님... 일찍이 스승님으
식자에게 지목당한 적자는 억울하다는 듯 어깨만 으
로부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특히 밥 먹고 잠자고, 볼
쓱거렸다. 종자는 식자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낮은
일 보는 것과 같은 평범한 영역에서도 주되심을 고백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있어야 한다던 말씀을 익히 들어왔기에 다큐멘 터리를 본 날부터 생각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자
“가정에서도 쓸 수 있는 ‘퇴비화 변기’라는 게 있네.
그맣게나마 텃밭 농사를 시작하며 과연 그러하다, 참
《똥 살리기 땅 살리기》(녹색평론사, 2004)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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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만들어 봤는데 괜찮더군. 아내는 아직 설득 못했네만, 난 요즘 거기에 거름을 모으고 있지.”
“요즘은 귀농학교나 도시농부학교 같은 것들이 많이 열리는 것 같던데, 그쪽으로는 알아보았느냐?”
“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형.” 스승의 호의적인 반응에 종자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 이번에는 종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단할 게 뭐 있는가.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님의 영 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을... 거 참 신기하지? 나도 처음엔 냄새가 많이 날줄 알았는데, 볼 일 본 후 에 톱밥만 넉넉히 부어두니 냄새가 안 나더란 말이야.
지 못했다. “물론입니다, 스승님. 차근차근 제대로 배워볼 생각 입니다.” “사형은 누구와 달리 열정이 많고 성실하셔서 잘 하 실 것입니다.”
땅에서 일 년 정도 숙성시킨 똥은 구수한 냄새가 나는 천연 비료가 된다네. 사실 우리가 똥을 더럽다고 생각
식자는 한 마디 말로 적자를 깎아내리는 동시에 종자
해서 눈에 안 보이는 정화조에 모아두는데, 오히려 그
를 추켜올렸다. 적자와 종자의 상반된 표정이 교차되
렇게 치워놓은 쪽이 훨씬 더럽지 않은가. 자연에서 숙
는 것을 보며, 그는 스마트폰의 메모장 프로그램을 실
성시키면 훨씬 깨끗하고.”
행시켰다.
“사형, 다른 이야기 하시지요! 사형의 마음은 알겠으 나 좀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비위가 약하여 더 듣기가 힘듭니다.”
“얼마 전에 ‘침묵식사 기도문’을 우연히 보았는데, 사 형께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필요하시면 보내드리겠 습니다.”
마침내 식자가 단호박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식자가 내민 스마트폰을 받아든 종자는 화면에 떠오 “미안하네. 자네가 그 정도로 불편한 줄은 몰랐네.”
른 기도문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소리 내
“허허, 열정적으로 몰입할 일을 찾은 것이 부럽구나
어 읽었다.
종자야. 게다가 그것이 단순한 소일거리로 끝나지 않 고, 일상의 영성을 추구하는 통로가 된다니 더욱 좋고!”
“우리는 지금 이 식탁에 앉아서 한 방울의 물에 스며 있는 하늘과 땅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한 알의 곡식에
적절하게 개입한 지자의 말을 들으며 종자는 고개를 빠르고 강하게 끄덕거렸다.
스며있는 사람들의 땀과 노동을 묵상합니다. 하늘과 땅, 이웃들의 수고를 통해 이 음식을 우리에게 허락하 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나는 이 식탁에 앉아
“맞습니다, 스승님. 저는 옥상 텃밭을 가꾸면서 일상
생명의 밥으로 오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이 음식을 먹
과 신앙이 하나됨을 구체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뿐만
고 우리도 가족과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밥으로 살아
아니라 먹는 것 하나에 머물지 않고, 생태적인 삶으로
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도 생각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태적인 삶, 자 연의 흐름에 동조하는 농사법 같은 것들을 배우고 싶 어 여기저기 알아보는 중입니다.”
<to be continued> * “도시 농업”편은 식자의 실제 모델인 김종수 학사님(IVF일상생활사역연구 소)의 글과 강연을 기초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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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낭만주의자의 영화이야기 ] 낭만 가득한 영화 리뷰
운명을 받아들인
한 왕비의 이야기 정일문│연세대87 세대를 관통하는 씨네필(cinephile)이자 신앙과 문화의 접점을 모색 하는 물과학자. 좋은 친구이자 상담자인 아내, 토토로를 좋아하는 개구쟁이 딸과 함께 옳고도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2013)> “주일날 예배 끝나고 영화 한편 보시겠어요?” 사십대 후반의 아들은 칠십대 후반의 어머니에게 뜬금없는 데
그녀에게 수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장미꽃을 헌화 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트를 신청했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그레 이스 오브 모나코>의 광고를 본 순간 가장 먼저 어머니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는
가 떠올랐기 때문이죠. 어릴 때 어머니를 통해 왕년의
지금도 추앙받는 은막의 스타 그레이스 켈리(1929-
할리우드 여신들 리스트를 전수받았습니다. <애수>의
1982)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인기절정
비비안 리, <카사블랑카>의 잉그릿드 버그만, <로마의
이었던 1956년, 그레이스는 칸 영화제에서 만난 모나
휴일>의 오드리 헵번, <젊은이의 양지>의 엘리자베스
코 왕자 레니에 3세와 결혼하여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
테일러 그리고 <하이 눈>의 그레이스 켈리까지. 아홉
았습니다. 53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
살 때 식민지배에서 해방을 맞고, 열네 살 때 한국전쟁
지 동화처럼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만 알려졌던 그녀
을 겪고, 스무 살부터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척박한
의 왕실생활이 사실은 순탄하지 않았음을 영화는 보
삶 속에서도 어머니는 미녀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한줌
여줍니다.
의 로맨틱한 꿈을 간직하셨나 봅니다. “그레이스 켈리 는 모나코 왕자와 결혼했어. 배우가 왕비가 된 거란다.”
1960년대 초반의 모나코는 프랑스의 보호 하에 각종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소녀처럼 환해지던 어머니의 표
면세혜택을 누리던 약소국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
정은 잊을 수가 없었지요.
했지만 사회복지 수준은 형편없었고, 국고는 점차 바 닥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여기에 프랑스의 노골적인 경
몇 년 전 프랑스 출장 때 모나코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
제적 압박까지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레이스(니콜 키
다. 몬테카를로의 유명한 카지노 주차장에서 난생처음
드먼)는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모나코 사람들에
롤스로이스의 행렬도 보았고, 손님들은 절대 이길 수
게 여전히 낯선 존재였고, 외톨이 같은 느낌으로 고통
없다는 슬롯머신에서 단숨에 10유로를 날려보기도 했
받았습니다. 게다가 남편인 레니에 3세(팀 로스)는 경
죠. 지중해를 바라보는 언덕위의 저택들도 환상적이었
제문제 해결을 위해 오나시스 같은 재벌만 따라다니는
는데 모두 대부호들과 유명스타의 것이었습니다. 하지
유약한 인물이었죠. 한마디로 시댁인 모나코 왕실은 허
만 가장 잊을 수 없는 곳은 바로 그레이스 켈리의 무덤
세만 가득한 곳이었고, 규율과 의전으로 사생활 통제가
이었죠. 모나코의 한 성당 지하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심해지면서 그레이스는 왕비라는 자리에 염증을 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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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기 시작합니다. 때마침 히치콕 감독이 찾아와 영화계로의 복귀를 권유하자 그녀의 마음은 크게 흔들리지요. 진정 한 자아를 찾고 싶었던 그녀는 주목받는 스타의 삶과 고독한 왕비의 삶 사이에서 크게 갈등합니다. 한편, 모나코 왕비가 할리우드로 복귀한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악용되면서 프랑스의 압박은 더욱 거세졌고, 그레 이스의 선택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한 국가의 흥망이 달린 사안이 되어버립니다. 그녀의 멘토인 터커 신부(프랭 크 란젤라)는 현재 주어진 모습이 하나님이 주신 길이라고 상기시켜 주지요. 먼저는 아이들의 어머니로, 충실한 아내로 그리고 왕비로서의 역할까지 감당하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고 충고합니다. 그레이스도 배우로 복 귀하려는 내면의 열망을 점검하면서 왕실의 삶이 버거워 탈출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풍 전등화와 같은 모나코 왕국의 운명 앞에서 그레이스는 마침내 어려운 결단을 하지요. 예전의 꿈을 접고 보다 의 미 있는 실천을 위해 진정한 왕비의 역할을 감당하기로 말입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방황했던 까닭에 그레이스의 갈등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지요.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미련,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회한이 넘칠 때면 늘 적성에 맞지 않다는 핑계로 현실을 도피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붙잡아 준 동력은 주어진 환경에 충실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 다. 호된 시집살이를 묵묵히 감내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완벽주의자였던 남편의 요구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제 대로 된 옷 한 벌 사지 못했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헌신했던 어머니. 영화 속의 그레이스가 힘겨운 왕 비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처럼, 어머니는 가족을 위한 어떤 종류의 십자가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라는 거울 앞에서면 저는 늘 부끄러운 아들이었죠. 영화의 후반부에서 그레이스는 동화 같은 인생을 통해 얻은 힘을 옳은 일, 약자들을 위해 사용하는 자애로운 왕 비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어려운 프랑스어와 까다로운 의전도 열심히 배우고 각종 자선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는 왕비의 행보가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존경과 사랑을 보내오지요. 더 나아가 그레이스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 세계 지도자들을 모나코로 초청하는 초특급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한편의 영화 같은 그 행사의 클라이맥스는 다름 아닌 그레이스의 연설장면이었죠.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세력 앞에 선 전직 여배우 는 ‘군사력이 아닌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고 당찬 제안을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되뇌며 왕에게 진언 했던 에스더와 같은 그녀의 모습은 좌중을 압도했고, 호소력 넘치는 진심 앞에 고집스런 드골 대통령도 혀를 내 두르고 말지요. 이 대목에서 관객은 모나코를 살리기 위해 그레이스의 달란트를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을 만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는 하나님께 지음 받은 인간이 뒤늦게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 린 성장영화로 다가왔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지요. “영화 어떠셨어요? <모나코의 은총>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요?” 극장문을 나서면서 아들은 묻습니 다. “그래, 요즘 영화 같지 않게 우아하고 좋더구나.” 젊은 시절 아버지와 영화관을 자주 다니셨던 어머니에겐 롤 랑 조페 감독의 <미션>이후 근 삼십년만의 극장 나들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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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서로의 소리를 잇는 공간
소리이음
자발성으로 꽃피는
경남학사회 경남IVF는 2005년 2월, 부산IVF로부터 분립•개척되었습니다. 서부경남의 끝인 진주에 서부터 통영, 마산, 창원, 김해까지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죠. 이런 특성상 경남학사회 전 체가 모이기보다는 자발적인 지역별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1년에 한 번씩은 경남 학사수련회로 모이는데, 한 국가씩 돌아가며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처럼 학교별로 돌아가 며 주최합니다. 올해는 창원대가 운영하였고, 내년에는 김해의 인제대학사회가 중심이 될 예정입니다. 또한 곳곳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꿈꾸며 생활을 함께하는 공동체가 태동되고 있습니다. 학사들의 자발성으로 무르익어가는 경남학사회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43 일상에서의 만남_이기형 45 소리가 만난 사람_류재한 49 경상대 IVF 학사회를 소개합니다_진상욱 51 그 도를 따르는 자매들!_경남 WOW(Women On the Way) 53 우리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_김자현
55 안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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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58 편집인의 글
일상에서의 만남
각자의 소명을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학사들의 삶 이야기
나그네의 삶, 그는 내가 택한 길을 알고 계시니 이기형│인제대 00 졸업 후 1년 동안 활동학사로 사역했다. 전공을 살려 충남의 지적장애인시설 생활교 사로 3년 일했으나, 새로운 도전을 위한 아일랜드 여행을 계기로 두바이를 찍고 현재 서부아프리카의 가나에서 살고 있다. 결혼 2년차의 아내(조나영, 경남대04)와 뱃속 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의 출생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졸업 전에는 진로에 대해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활동학 사로 섬기던 중, 캠퍼스의 영혼들을 향해 쏟아내는 간사님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바라보며 나의 에너지는 어디로 향하고 있 는지 이후의 삶에 대해 제대로 된 고민을 시작했다. 난 예전부터 새것보다는 흠이 있고 고장이 난 물건을 고쳐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 다. 주위엔 항상 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고, 난 그들에게 더욱 집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공을 살리고자 항상 함께였던 장애인, 공동체 두 가지 키워드에 맞는 지적장애인 시설에 취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번도 가보지 않았 던 충남의 낯선 시골마을에서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 장애인들과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이때부터 집을 떠난 나그 네의 삶을 지향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를 위해 이 길을 선택한 직장 선배들이 비윤리적이고 소명이나 사명하 고는 거리가 먼 일터의 삶을 오히려 자신의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불편한 마음이 생겨났고 딱 딱하게 굳어진 그 마음을 바꾸려 애를 써봤지만 이상을 따라 살고자 했던 그곳에서 내 삶을 건강하게 지키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앞으로 꾸려갈 가정 또한 건강하게 지켜낼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일을 과감히 그만두었다. 실망스런 마음에 다른 일을 찾고 싶었지만, 서른에 어떤 준비 없이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없는 환경임을 직시하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6개월간의 아일랜드 여행을 떠났다. 반년의 가난한 유학생활 동안 아일랜드 현지의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 어 눌하고 경상도 억양이 섞인 투박한 영어로 소통하며 교제했고, 코치서핑 커뮤니티를 통해 다양한 문화, 연령,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하며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유쾌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2주간 머무르며 경험했던 영국의 브루더호 프(다벨공동체) 역시 공동체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주위 많은 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던 아일랜드 행의 여정은 내 인생의 가치 있는 배움의 장을 열어주었고, 한국으로 돌아 가 다시금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나로서는 새로운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계기 또한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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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그렇게 다시 찾은 직장은 UAE(아랍에미리트 연방)의 두바이에서 한인 유통업체의 재고를 관리하는 일이 었다. 두바이는 인구의 70%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곳이고 교육과 여러 문화가 발달되어 삶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임금 격차가 심해 인도와 파키스탄, 필리핀의 노동자들에게 는 힘든 삶이다. 내가 출석했던 교회도 다양한 인종의 10개국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각 나라 의 음식들을 나누며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는데, 복음으로 하나 되는 그 시간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하 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해외에 취업한 덕분에 신혼생활을 두바이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찾아온 근심도 있었다. 싱글로 일을 할 때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빡빡한 근무패턴이 낯선 땅에서 홀로 집에 남겨진 아내에게는 외 로움과 싸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발전된 도시였지만 인공적인 것들과 사막이 주는 삭막함이 힘겹게 다가온 듯했다. 나 역시 여유가 없는 팍팍한 삶에 점차 지쳐갔고, 스트레스로 몸이 상했다. 주객이 전도되지 않으려 내 삶과 내 가정을 건강하게 꾸려가기 위한 직장을 다시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일이든 직 장에서의 스트레스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은 내려놓더라도 앞서 두 직장을 경험 하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충분한가’와 ‘함께 예배드릴 건강한 공동체가 있는가’, 이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직장을 찾았다. 그러다 지금의 아프리카 대륙까지 오게 되었다. 다양한 인종이 살아가던 화려한 두바이와는 달리, 가나는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자부 심을 가지고 있지만 두바이에서 누리던 편리함과는 거리가 먼 낙후된 환경이었다. 거주자 대부분이 현지인 이다 보니 처음에는 다른 피부색과 문화가 어색하기도 했다. 지금 이곳에선 흑인 여성에게는 필수가 된 가 발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회사의 회계를 맡고 있다. 장애인 시설에서 회계 업무를 맡아보았지만 해외에서의 회계업무와 가발은 참 낯설었다. 그러나 점차 여성들이 미를 추구하는 그런 마음은 세상 어디나 다를 게 없 다는 것과 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가 서로의 머리를 만져주며 친밀함을 쌓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시간이 흘러 어색했던 현지인들과 함께 웃는 날이 많아졌고, 여유가 많은 업무 환경 덕분에 아내와 같 이 보내는 시간도 늘어났다. 전혀 다른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에너지를 도움이 필요한 이들 에게 쏟을 수 있어 감사하다.
“그는 내가 택한 길을 알고 계시니 그가 나를 연단하시면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발 걸음을 따랐고 그의 길을 지켜 벗어나지 아니하였도다.” (욥 23:10~11) 가나에 와서 들었던 말씀이다. 나그네처럼 살아가더라도 내가 지금 어디로 걷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의미 로 무엇을 향해 걷고 있는지 늘 돌아보며, 그의 길을 지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올해 끝자락이면 드 림이(태명)가 세상에 나와 아프리카 가나에서 첫해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사야서 54장 13절 말씀처 럼 주 하나님의 교훈을 배우며 어느 곳에서든지 큰 평안이 함께하는 아이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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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소리가 만난 사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학사운동의 역사를 만나다_ #6
자발적으로 즐겁게! 류재한│경상대98 진행_이시종 / 정리_편집부
IVF는 ‘자발성’을 가장 중요한 공동체의 문화적 가치로 여겨왔습 니다. 여건과 상관없이 자발성이 꽃 피는 때에 학생운동과 학사 운동 모두 생명을 잉태하고 향기를 뿜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앞 으로 ‘학사운동의 역사를 만나다’ 지면을 통해, 자발적으로 학사 운동을 일으키는 분을 찾아다니고자 합니다. 경남학사회는 학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 습니다. 그중 진주지역의 류재한 학사는 졸업 이후 10여 년간, 지 치지 않고 즐겁게 학사모임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와 나눈 유쾌 하고도 감사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 [소리]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 학사운동의 역사를 정리했 습니다. 이제부터는 학사가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학사운동의 사례를 발굴하고 이야기를 들으려 합니다. 우선 독자들에게 학사님 소개를 해주세요. 지금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하고 있다고 들었는 데, 어떤 주제의 강의인가요? 저는 경상대 철학과 98학번입니다. 지금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사고력에 관련된 ‘논리학개론’과 ‘비판적 사고’ 같은 강의를 주로 합니다. 이와 더불어 2학기 에는 ‘GNU인성’ 강의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이 과목은 본교 기초교육원에서 의도적으로 개설하는 과목인데, 6명의 교수가 6개의 주제로 2주씩 돌아가며 강의를 합니다. 그런데 감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웃음) ‘인성’이 라는 개념 자체를 잡기도 어렵지만 한정된 시간에 학생들의 인성이 양육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여름 방학 동안 잘 준비해야겠죠. ‘비판적 사고’의 경우 광의적인 측면에서 논리적 사고의 일부분이고 ‘논리학개론’ 은 5년 정도의 강의 경험으로 내용적인 면에서 익숙합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강의 과정을 함 께 만들어갈 수 있도록 틀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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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 세부 전공을 논리학 쪽으로 하셨나요?
있던 가치관과 계속 충돌이 생겨서 힘들었습니다. 그 런 혼동과 혼란의 시기를 공동체 지체들이 따뜻하게
전공은 생명(의료)윤리학입니다. 이는 생명과 의료 에 관련된 철학적 반성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학위 논
수용하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러다 1학년 1학기에 영접을 했습니다.
문은 생명윤리학의 방법론에 관련된 주제로 쓰고 있 습니다.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부에 서 2학기마다 했던 이슈파이팅의 일환인 ‘낙태반대 캠페인’입니다. 낙태반대연합모임에서 제공하는 영 상물과 유인물을 통해서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메시
* IVF에서 신앙적으로 태어나신 거군요. 진주라 는 도시 자체도 각별하겠습니다. 학사회로는 언 제부터 모이셨나요?
지를 전달했지만, 우리 안에 이 이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대안이 정립되어 있는가라는 반성과 외부적
경남학사회는 공간적으로 120km 흩어져 있습니다.
으로는 캠페인이 학생들에게 인식의 변화 내지 실천
학사 큰모임을 한다면 어디서 모여야 하는지부터 고
적인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라는 질
민이 시작됩니다. 학사님들이 고속도로로 한 시간 이
문이 생겼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생명의료윤리’
상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민은
라는 과목이 신설되었고 참 재미있게 수강했던 걸로
학사 대표자 모임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기억합니다. 그리고 낙태를 주제로 학부 졸업 논문
대표간사님이 허브역할을 하며 학사 대표자들 간의
을 썼습니다.
소통의 장을 디자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경남학사 회 전체적으로 1년에 딱 한번, 학사수련회를 통해 흩 어진 학사들이 모입니다.
* IVF와는 어떻게 연결되었나요?
진주지역 학사모임은 경상대 개척멤버인 96학번 누 나들이 졸업 이후 소그룹 형태로 시작했습니다. 하지
저는 요즘말로 하면 ‘새벗’ 출신입니다. (웃음) 그때
만 중간에 그 모임이 소멸해 제가 학사 2년차가 될 때
는 EBS였는데 요즘은 새벗이라 하더라고요. IVF와의
까지 모임이 없었습니다. 2005년 가을에 코스모스 졸
첫 만남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로 기억합니
업한 한 후배가 PBS를 하자는 제안으로 모임을 다시
다. 인제대 IVFer였던 친누나의 초대로 인제대 형들
시작했습니다. 본문은 다니엘서로 기억합니다. 그리
의 공동체하우스에서 2박3일 동안 함께 먹고 놀았습
고 2006년 다른 두 후배가 졸업하면서 모임의 형태가
니다. 그리고 1년 뒤 학교가 경상대로 결정되자 누나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세 명을 두고 삼위일체라
가 당시 경상대를 담당했던 정성우 간사님과 학생대
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정기적인 모임 시간 외에도 일
표였던 명옥 누나에게 연락을 다 해놓았더라고요. 그
주일에 네 번 이상 모였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저를
래서 진주라는 낯선 땅에 정착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
포함해서 동생들도 사회초년생이어서 여러 가지 문
았습니다. 자연스럽게 전도성경공부와 큰모임에 참
제를 풀어낼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석했고요. 그 과정에서 복음을 접하며 제가 가지고
그 원동력으로 그해 가을에는 지성근 간사님(일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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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활사역연구소)을 모시고 진주지역 예비학사들을 초
할 것인지 자연스럽게 균형을 맞추어 갔습니다. 모임
청해서 함께 강의를 들었습니다. 또한 겨울에는 신동
의 방향성과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간사와 학
열 소장님(소명교육개발원)을 모시고 소명캠프도 했
사라는 구분보다는 같은 학사로서 함께 이야기하고
습니다. 이 캠프에는 학사뿐만 아니라 지역교회 청년
만들어가며 균형점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죠.
여러 가지 형태의 실험을 거쳐서 최근 5년 사이에 모
이렇게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을
임이 안정되었습니다. 현재는 매주 주일 저녁 7시부
잘 모을 수 있었던 것과, 일명 ‘삼위일체’ 세 명이 비
터 9시까지 모입니다. 시간만 정해 놓고 학사들의 필
교적 시간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직업군이었기 때문
요에 따라 모임에서 담아내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입니다. 보통 주변 학사님들을 보면 아침 7시에 출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학사들이 놀이가 필요하다고
해서 밤 10시, 11시에 퇴근하는데 우리는 그래도 마
해서 거의 3달 동안 매주 다르게 놀았습니다. 스터디
음에 따라 시간을 사용할 수 있었던 구조이기 때문에
가 필요하다면 북스터디도 합니다. 북스터디는 일상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생활사역연구소가 방학마다 실행하는 <식객>의 형 태로 하고요. 또한 우리 모임에는 ‘대표’ 또는 ‘리더’ 라는 고정된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주지역에 계
* 시간이 여유로운 사람이 학사모임을 섬겨주 면 유익이 있는 것 같아요.
시는 간사님들도 간사로서가 아니라 학사로 참여합 니다. 이런 분위기는 학사들 사이에 간사도 학사로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풀어낼 수 있는 곳이 필요
저는 ‘섬긴다’는 단어를 학사(회)운동에 사용하는 것
하다는 공감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이렇듯 진주지역
이 마음에 걸립니다. 자발성을 강조하는 운동에는 적
모임은 이끌어가고 지도하는 고정된 자리 없이, 서로
절하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섬
간의 교류와 역동으로만 존재합니다.
기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섬기지 않는 사람과 구 분되며, 섬기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모든 학사들이 함께 하 나님나라에 대한 관심과 상상, 실험을 하는 운동이라
* 자발적인 학사모임의 모습이 캠퍼스 때부터 이어져온 것 같습니다.
면, ‘섬기다’와 같은 여러 의미가 함축된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이 우리의 운동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
경상대 IVF의 특징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강한 자
니다. 모든 학사들이 각자 보냄 받은 자리에서 하나님
발성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캠퍼스에 있을 때 개척
나라 가치에 따라 살아내고, 필요에 따라서 함께 마음
상황이라서, 1학년 때부터 리더와 멤버들이 함께 뛰
을 쓰며 학사회를 이루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어야 했습니다. 개척을 담당하셨던 정성우 간사님의 사임이후 한 학기 정도 간사가 없었습니다. 그때 학생 자발성이라는 문화가 더욱 강화된 것 같습니다. 경상
* 그렇습니다. 학사님의 문제제기에 공감합니 다! 이후에 모임은 어떻게 정착되었나요?
대에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2박 3일 동안 챕터를 통해서 다음 학기 POGS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한 리 더가 ‘이 방향성이 맞는 건가?’라고 질문하자 모두 뒤
그후 경남지방회 차원에서 지역마다 YGM 모임을
엎고 P부터 다시 짰다고 합니다. 학생들 간에 자발적
만든 걸로 기억합니다. 진주지역은 이미 학사모임이
으로 소통하고 의사결정하며 행동하는 문화가 학사
있어서 진주YGM 담당 간사님이 모임에 합류하게
가 되어서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생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진 주지역 학사모임에 미묘한 긴장감이 생기기도 했습 니다. 다른 말로 간사님은 저의 눈치, 저는 간사님의 눈치를 보게 된 거죠.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협업
* 경남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복음화 비율 이 낮은 지역입니다. 선교지 같다는 이야기도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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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고 있죠. 이에 대해 학사회에서는 어떤 고민을 하고, 학사들이 어떤 구체적인 시도를 하고 계신 지 궁금합니다.
다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웃음) 기본적으로 상황과 사람에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태도를 지닌 자매 가 정서적으로 안정된 자매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 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
제 안에 이런 질문들이 솟아납니다. 학사운동을 어 떻게 규정할 것인가? 학사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심이 많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수용할 수 있으면 좋 겠습니다.
경남지방회가 학사운동의 차원까지 와 있는가? 혹은 학사운동까지 가야만 하는가? 경남지방회가 설립된 지 내년에 10년이 됩니다. 저를 비롯하여 많은 학사
* 앞으로의 꿈과 계획이라면?
들이 자기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도 어렵습니다. (웃 음) 이런 상황 가운데 학사회 차원에서 어떤 운동으
제가 20대에서 30대로 넘어오면서 30대를 어떻게
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교회 또는 지역사회
살아갈지 계획을 할 때 두 가지를 생각했어요. 하나는
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라는 방향성에 대한 논의
가르치는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변혁하는 가장 효과
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적인 방법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떻게 보면 학사수련회가 경남지방회 학사회 전체
그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또 하나는 연구자로서
의 방향성과 정신을 담아내는 틀이라 할 수 있을 것
의 삶입니다. 생명윤리학 분야에 다양한 논쟁이나 그
같아요. 이 틀을 기반으로 다양한 형태의 자생적이고
에 따른 대안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자발적인 모임들이 세팅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 들어낼 수 있을까, 이미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학사 모임을 네트워크할 수 있는 적절할 틀을 어떻게 만들 어낼 수 있는가, 이러한 고민이 있습니다.
* 학사모임에 어느 정도 시간과 비중을 두고 있 나요? 학사회에 너무 열심이라 아직 결혼 안하 고 남아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학사운동 함 께 할 자매를 찾는 것인가요? 전국적으로 자기 홍보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런 자매 만나고 싶다, 공개구혼 한번 해보시지요. IVF 후배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형은 IVF에서 빠 져야 결혼할 것 같다고 합니다. (웃음) 그 이야기를 듣고 제 삶을 되돌아보니, 일단 모임이 많습니다. 진 주지역 학사모임, 생활공동체를 준비하는 공동체 모 임, 그리고 스터디 모임 두 개를 매주 하고 있고요. 이 주에 한번씩 TGIM 진주점 모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기본적으로 사람 만날 기회가 부족했더라고요. IVF 자매를 만나면 좋겠습니다. 많은 걸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 공유하고 있는 정신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자매면 좋겠 습니다. 한 선배한테 이렇게 말하니 그런 사람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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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즐겁게 하고 있는 학사운동에 대한 태도나 문화가 보기 좋았습니다. 자발적인 모습도 도전이 되었고요. 앞으로도 계속 자발적이고도 즐겁게 학사운동의 내실을 다져갈 경남학사회를 응원합니다.
소리이음
자발성으로 꽃피는 경남학사회
경상대IVF 학사회를 소개합니다~ 진상욱│경상대01 경상대를 졸업하고 석사과정 후 회사생활을 한 지 5년차. 같은 학교 IVF를 함께한 자 매 중, 남다른 미모와 풍부한 감성을 지녔으며 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송은혜 자매 와 7년의 연애 끝에 2011년 1월에 결혼했다. 최근에 아이가 생겨서 많이 기다렸다는 의미로 태명을 “다림이”라 지었다. 진주에서 같은 꿈을 꾸는 선배, 동기들과 공동체를 꾸려 가고있다. 지금은 전략적으로 같은 아파트에 이사해서 매주 모임을 하고 빈번한 만남을 통해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고 있다.
경상대 학사회는 물질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3년 전인 2011년 여름, 경남지방회 차원에서 학사수련회 참석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원플러스원’ 전략을 시행했습니다. 수련회비용을 충당하고자 매월 만원씩 걷는 운동을 벌인 거죠. 좀 더 질 높은 수련회를 제공하 려고 했지만...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이 계획은 1년 만 에 공식적으로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플러스원 활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해 지방회 학사수련회에 대해 다시 모여서 의논을 하던 중에, 우리 학교는 만원씩 모으는 일(이하 동창회비) 을 계속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고, 우리만이라도 별도로 운영해보자고 결정했습니다. 대표와 총무를 세 우고 계좌를 개설하기로 하고, 어떻게 활용할지 의견을 모아 보았습니다. 사실 졸업과 동시에 취업을 하는 학사 들이 많지 않아서 시간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물질을 내어놓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학사수련회 비용은 부담이 되겠다는 의견으로 수렴이 되었고, 수련회를 비용 부담 없이 올 수 있도록 회비로 활용하기로 했 습니다. 그리고 종종 학생들과 간사들로부터 10만원, 20만원 요청이 오면 학사대표는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필 요할 때마다 연락을 돌려 모금을 하는 것보다 이 동창회비를 통해 해결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동창회비는 한 달에 만원인데, 취업 준비생이나 재정이 어려운 경우 강요하지 않고 IVF정신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진행하 기로 했습니다. 수련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알려야 하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 카톡방을 연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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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별로 나누어 3개의 그룹을 형성하고 그룹장을 정했습니다. 그 룹장들과 대표, 총무는 별도의 창을 만들어 모금된 돈을 어떻 게 사용할지 의논하고 결정하고 각 창에 전달해 주기로 했습 니다. 2012년 가을에 경상대 출신의 2번째 간사가 배출되었습니다. 신입간사훈련에 참석하기 위해 재정후원을 요청했는데 동창회 비가 모이는 만큼 후원해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덕분에 수련회 에 참석하지 않은 학사들에게 자연스럽게 연락해서 동창회비 모금 참여를 독려하게 되었고 훈련비의 절반을 모아서 전달하 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학교는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일 수 있지만 저희 규모로 볼 때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3년, 지방회 학사수련회에 참석한 경상 대 학사들은 등록비 부담 없이 참석할 수 있었고, 참석율도 상 당히 높았습니다. 간식도 동창회비로 넉넉히 먹을 수 있었습니 다. 모으는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더 많은 인원이 모이고 더 많은 인원이 동창회비를 내고 있습니 다. 모인 돈을 통해 더 많이 참석하게 되고 서로를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여름에 1박 모임을 하고 싶다는 의견이 나와 후배들의 주도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고 동창회비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소통이 되지 못해서 갖게 된 의문을 해결하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더 좋 은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과연 잘 쓰고 있는 것인지,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 참여는 어떻게 하는지, 관리는 잘 되고 있는지 등등,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그날, 학생 때처럼 해가 뜨는 것을 볼 때까지 게임을 하 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올해 2월, 여느 때처럼 신입학사 환영회를 준비하는데, 한 학사의 제안으로 리조트에서 1박으로 신입학사모임 을 하기로 했습니다. 비용은 제안한 학사와 동창회비로 해결하였습니다. 거제도에 펜션을 잡고 함께 모여 식사 를 준비하고, 함께 기도하고, 삶을 나누고, 새벽 4시가 넘도록 놀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 다. 신입학사들도 명절 같다며 즐거워했습니다. 매년 식사와 차 마시는 것으로 신입학사환영회를 진행했었는데 1박 모임으로 하니 참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올해 학사수련회도 역시나 우리 학교는 무료 수련회를 했고, 풍성한 간식과 나눔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회장과 총무도 교체하고 동창회에 더 적극적인 참여 유도를 위해 카톡 그룹장도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해를 더해 갈수록 참여는 조금씩 더 늘어나고 있지만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동창회비 모금 에 참여하지 못하는 미안함, 불편한 관계로 남아 있는 지체, 또 개인적인 이유로 인해 학사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어려워도 상황이 힘들어도, 그럴 때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여해서 삶을 나누 고 서로에게 힘을 더해 줄 수 있는 학사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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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소리이음
자발성으로 꽃피는 경남학사회
경남 WOW(Women On the Way)
모임을 소개합니다. - 그 도를 따르는 자매들! 황타의│창원대02, 감근혜│경남대03, 정신혜│마산대07, 정은총│창원대07
* 경남 지방회 학사 모임 중 WOW 모임이 있다던데 어떤 모임입니까? 황타의: 최근에 읽은 책,《전도의 유산》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 를 일컬어 ‘People on the Way’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힌트를 얻 어 WOW(Women On the Way; 그 도를 따르는 자매들)이라 부 르게 되었어요. 현재는 여자들만 모이고 있거든요. 졸업 후 학사 로 살면서 개개인이 세상 속에서 가지는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어 떤 식으로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내기 위해 함께 마음을 나누 고 서로 도전하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기에 매주 한번 씩 모이 고 있습니다.
* 그럼 현재 모이는 멤버를 소개 부탁드려요. 그리고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정신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학사 5년차 마산대 07학번 정신혜입니다. 졸업 후 바쁜 업무로 병원과 집만 오가며 아무생각 없이 지내다 불현듯 ‘내가 잘 살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캠퍼스에서 생각했던 공동체에 대한 고민은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겐 그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이 현실이 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체가 없이는 바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이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감근혜: 학사 7년차 평범한 회사원, 경남대 03학번 감근혜입니다. 졸업 후 정말 치열하게 좌우를 살피지 않고 살 다 어느덧 그런 삶에 적응해버린 저를 발견했어요. 그러다 캠퍼스에서 고민하고 배웠던 대로 살기 위해선 혼자선 절대 바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형식으로든 일상에서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아갈 모임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중앙회에서 모이는 YGM이나 대구학사회처럼 경남에도 활발한 학사모임이 있었으면 좋겠 다는 바람으로 대표간사님께 말씀드리면서 모임이 시작되었어요. 그 소원을 성취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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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정은총: 졸업 후 2년간 활동학사를 하고 지금은 어린
이에요. 화요일이 오면 오늘 모임하는 날이네 하며 기
이집 교사 2년차인 창원대 07학번 정은총입니다. 1년
다려져요. 힘든 점은 불규칙한 퇴근시간으로 사람들을
간은 직장에 적응하며 정신없이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다들 편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직장생활에 바빠 잊은 것들
하게 기다려주셔서 오히려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을 생각하는 그런 공동체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있는 모임이란 생각에 기분 좋아집니다.
요. 그래서인지 처음 모임을 시작할 때 아주 편하게 시 작할 수 있었어요. 모두 자매라 편해서 더 좋더라고요. 뭘 하든 지속적이고 꾸준하게 모였으면 좋겠다, 구체적 인 방향이 없어도 일단 모이자, 나누자, 생각하자, 그 생
* 앞으로 이 모임을 향한 개인적 기대 그리고 공 동체적으로 소망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각을 모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혜: 기본적으로 이 모임이 길고 가늘게, 오래오래 황타의: 결혼 후 진주에서 살다 창원으로 온 지 2년 된,
가는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아이를 업고도
학사 6년차 창원대 02학번 황타의입니다. 진주에는 학
모일 수 있는 그런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더 근본
사모임이 있어서 모임에 대한 필요가 그다지 없었는데,
적으로는 모임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삶을 공유하는 함
창원에서 카페를 시작하면서 분주한 삶 속에서 학사모
께 살아내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임에 대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모 임에 함께하게 되어 참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여자들만 모이는 모임이라 편안하고 좋네요.
감근혜: 먼저 각자의 삶에 실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모 임이 되길 바라고 나아가 다양한 사회 문제에 대해 구 체적인 기독교적 대안을 찾아가는 모임이 되길 기대합 니다. 그리고 이 모임을 통해 경남에 학사 소그룹들이
* 현재 모임을 하면서 좋은 점은 무엇이고 힘든 것은 무엇입니까?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황타의: 소망하기는 이 모임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감근혜: 이 모임을 통해 평소 계획에서 끝났던 일들이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정기적인 강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좋습니다. 나와
좌나 세미나를 통해 비와우(wow)학사들과 비학사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합
더 나아가서는 비그리스도인들을 섬기는 그런 공간으
니다. 힘든 점은 평소 5시 퇴근하는데... 7시까지 배가
로 자리 매김하면 어떨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너무 고픕니다...ㅠ 정은총: 함께 하는 것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책도 정신혜: 세상 속에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저를 붙잡아
보고, 여행도 가고, 이런 소소한 것들부터 사회의 전반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이 참 좋아요. 편하게 내 생각을 이
적인 문제들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모임이 되길 바라
야기 할 수 있고, 편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고, 또 이런 모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열려있
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힘든 점은... 사실 하루 일과
는 그런 모임이 되면 좋겠습니다.
를 끝내고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일 주일에 한번 모이는 모임인데 일주일이 왜 그리 빨리 오는지...ㅎ 그래도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엔 다음 의 모임이 기대되고 설레고 그래요. 정은총: 월수목금이 그냥 커피라면, 모임이 있는 화요 일은 T.O.P예요.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 멈춰서 직장에 선 나눌 수 없는 깊이 있는 나눔이 있는 그런 특별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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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 현재 와우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 (매주 화요일 7시~9시 반) 경남IVF 센터에서 윤재두 대표간사와 자매 4명이 모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모임은 대그룹이 아닌 소그룹을 지향하여 다양하면서도 깊이 있는 나눔을 계획 중입니다.
8월 안테나 ● 중앙사무국 1. 7월 21일(월)에 정기 실행위원회가 IVF중앙회관 6층 세미나실에서 있었습니다. 2. 7월 7일(월), 8월 25일(월)에 두 차례에 걸려 GLC 2기 기획회의가 있었습니다. 새롭게 출범할 GLC를 위해 기 도를 부탁드립니다. 3. 2015년 학사대회를 위한 기획회의가 8월 12일(화)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후 준비위가 꾸려질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 YGM(수도권지역 학사회) 1. YGM(수도권지역 학사회) 모임은 매주 화요일 저녁 7 시 30분 IVF중앙회관 지하 좋은땅에서 있습니다.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전국 1-5년차 학사님들은 언제든 YGM 모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2. 7월에는 '소명,진로'의 주제로 강의, 자기탐색, 성경강 해가 진행되었습니다. 8월 6~9일 필그림하우스에서 여 름수련회가 진행됩니다. (주강사 : 문태언 목사) 3. 8월~9월 모임 일정입니다. 많은 학사님들이 YGM에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8월 6~9일 여름수련회 8월 12일, 19일 소그룹 주간(예배 대신 소그룹으로 자유롭게 모 입니다.) 8월 26일 성경강해 - 이철민 간사 9월 2일 성경강해 9월 9일 추석연휴 9월 16,23,30일 성경강해 모임 문의: 유신석 간사 070-8275-6343
● 강원(춘천)학사회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함께하기 원하는 학사님은 아래 일정을 참고해 주세요. ·춘천 엄마들모임
매달 첫주 화요일 오전 11시 30분 사공은혜(한림대95) 010-5367-9120 춘천학사모임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 회관 김아주(한림대05) 010-6381-1635 ·수원 매달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최경순(한림대94) 010-9536-0703 ·부천 매달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박은혜(한림대00) 010-9703-8815 ·평촌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 6시 / 평촌성심병원 김태준(한림대99) 010-5136-5877
● 충남학사회 1. 6월5~7일 학사수련회를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첫 학 사수련회였음에도 많은 학사님들이 함께해주셔서 참 감 사한 시간이었습니다. 2. 충남지방회 학사예배가 있습니다. 일시: 매원 첫 주 목요일 장소: 단국대대학병원교회 문의: 김수환(충남학사회 대표) 010-9910-9180
3. 서울에서 함께할 수 있는 충남학사모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지역적 제약이 있지만 모든 충남 학사님들께 열려있으니 연락바랍니다. 문의: 손윤형(백석대02) 010-9154-1160
● 전북학사회 1. 6월 27일(금)에 비전센터 지하예배실에서 종강큰모임 을 열었습니다. 2. 학사 여름수련회가 열립니다. 아래 일정을 참고해 주 세요. 일정: 8월 21일(목)-23일(토) 주제: 바이블퍼스펙티브(The Bible Perspective) 장소: 미정
3. 2학기 정기 학사모임은 9월부터 시작됩니다. 매달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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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 주, 넷째 주 금요일 저녁 7시 30분에 모일 예정입니 다.
● 영남동부학사회 1. 지난 6월 5일(목)~7일(토) 울산시민교회에서 곤도 유 미 전 일본KGK 간사를 모시고 영남동부IVF 학사수련 회가 열렸습니다. 2.6월 30일(월)부터 7월 5일(토)까지 경남, 영남동부 그 리고 제주IVF의 연합 여름수련회를 열었습니다. 정민영 선교사를 주강사로 모시고 ‘썸&쌈(하나님나라와의 썸& 우상나라와의 쌈)’이라는 주제로 진주의 경남과학기술 대학교에서 은혜의 시간을 누렸습니다. 3.7월 7일(월)~12일(토)에 영남동부과 제주IVF가 연합 하여 BC훈련을 했습니다. 울산의 언양평화쉼터에서 1,2 년차 멤버들을 대상으로 정태형 전도사님을 모시고 진 행했습니다. 앞으로의 영남동부IVF 사역을 위해서 학사 님들의 기도 부탁드립니다. 4.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울산 주부학사모임 격주 화요일 10시 30분 박경아 학사 010-6572-2176 포항 주부학사모임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 경주 위덕삼성타운 최유정 학사 010-3450-3172 포항 싱글학사모임 격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김정우 학사 010-9287-7411
사회복지팀 모임 매주 화요일 / 김희연 010-.6295-0179 가정피움팀 모임 매주 화요일 / 정희돈 010-9775-4209 평지 모임 매주 월요일 / 신응종 010-4513-1391 예사모 모임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내모임; 평지모임의 아내들모임) 매주 목요일
3. 콜링앤잡(비전캠프) 60, 61기를 모집합니다. 비전과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합니다. 일시: 60기 7월 19일(토) / 61기 8월 23일(토) 장소: 대구GCF센터(대구IVF 사무실 지하) 참가신청 : 훈련담당 정희돈 010-9775-4209
4. inG school Build up class 3기를 모집합니다. 일정 inG school 설명회 - 8월 13일(수) 오후7시 inG 3기 선발 - 8월 20일(수) 오후6시 inG 3기 일정 - 9월 3일(수)~11월 19일(수) inG 3기 수료식 - 11월 29일(토) 오후2시 문의: 훈련담당 정희돈 간사 010-9775-4209
5. 18기 커플피움학교가 열립니다. 일시: 9월 13일(토)~11월 1일(토) (7주 과정) 장소: 대구 GCF 센터 대상: 커플(선착순 12쌍) 문의: 훈련담당 정희돈 간사 010-9775-4209
6. 대구지방회 온라인 소식지로 학사님과 소통하려 합니 다. 스마트폰으로도 접속이 가능하오니 많은 관심과 방 문 부탁드립니다. dg.ivfnews.org 로 놀러오세요^^
● 대구학사회 1. 7월 10일(금)~11일(토)에 성주하늘목장에서 김사훈 목사님을 모시고 평지(평신도지도자모임) 부부세미나를 가졌습니다. 평신도 지도자의 삶의 뿌리인 가정, 그 가정 의 중심인 남편과 아내가 하나됨을 위한 몸짓이 필요함 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2. 대구 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함께 하 기 원하는 학사님께선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대구교대IEF 모임 매주 월요일 / 조현진 010-3536-9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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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 부산학사회 부산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함께 참 여하기 원하는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일정을 참고해주 세요. TGIM(Thanks God It’s Monday) (1달에 2번 일상생활영성과 보냄 받은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모 임) 진주점 류재한 010-8529-8216 창원점 정수정 010-3620-9495
서면점 송민규 010-6774-5079 센텀점 최진욱 010-9677-8613 대구점(주부모임) 정수미 010-7538-7757 E.M.포럼(복음주의목회자포럼) 매월 첫째 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해운대미래교회 문춘근 010-5504-5790 박순흠 010-8586-2535 마마클럽(주부학사모임) 매월 1회
매주 금요일 / 배기헌 학사 집 최선미 010-6248-8708 부산 모임 매월 둘째 주 목요일 / 장소미정 최정빈 010-5165-9170 모임 문의 양미희 간사 010-4226-0396 인터넷카페 http://club.cyworld.com/ilgfwork
임지은 010-4143-4936
● 나음누리 의료인 학사들이 지역별로 모이고 있습니다. 모임에 함 께하기 원하는 의료인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일정을 참 고해주세요. ·서울지역 평촌한림대병원 모임 격주 수요일 6시 / 이레미즈외과 정성구 010-635-2491 삼성병원 모임 매주 수요일 / 삼성서울병원 이은경 010-8892-8076 아산병원 모임 격주 수요일 / 서동대 학사 집 민수정 010-8938-3417 대학로 모임 격주 금요일 / 정지영 학사 집 박현덕 010-8950-8903 서울대병원 모임 매월 둘째 주 금요일 / 서울대병원 장예림 010-8632-4597 ·강원지역 춘천·원주 모임 한 달에 한 번 / 원주 지역 학사 집 박인성 010-4148-0902 ·경기지역 (용인)수도통합병원 모임 매주 수요일 / 장소 미정 이은주 010-5075-0704 일동병원 모임 첫째 셋째 화요일 / 국군병원교회 허난설 010-3060-4046 ·영남지역 대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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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편집인의 글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이런 기대가 있었나봅니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면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까, 다른 상황에 놓이 면 내 존재가 새로워지지 않을까... 푹푹 찌는 날씨에 나라 안팎으로 시끄러운 소식이 가득하니 더욱 이런 마음이 불쑥 불쑥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호 필자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 주더군 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 고요.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온 필자들의 고백을 통해 삶의 지혜를 하나 더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학사님들은 이 여름을 어떻게 버티고 계신지요. 보냄 받은 그 자리에서 치열하게 일상을 보내고 계실 학사님을 응원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지치고 피곤할 땐 이번 기획의 제목 을 따온 노래 <하숙생>을 추천합니다. 저희 편집인들은 노 랫말에서 큰 위안을 얻었답니다. 다음호에는 또 다른 나그네들을 만날 예정입니다. 다음호에 서 전할 이야기도 기대하며 기다려주세요!
민혜경│편집인│sori@ivf.or.kr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잡지입니다. [소리]의 볼륨을 높여주세요! 홀로 씨름하며 분투하는 동역자에게 “내 가 너를 지지한다”고 외칠 것입니다. 후원금은 전액 [소리]의 제작비로 사용됩니다. 후원계좌 [우리] 1005-000-990258 / [국민] 760-01-0038-627 예금주 (사)한국기독학생회 2014년 5~6월 후원자 명단 강산선(*2) 국효숙 권도균 김계숙 김선미(*2) 김재원(*2) 김종기(*2) 남은경 명관선(*2) 민은혜(*2) 박설혜(*2) 박창재(*2) 송인규(*2) 여운성(*2) 오규 덕(*2) 윤정범-지은실(*2) 윤창근(*2) 이상엽(*2) 이원경(*2) 이은원(*2) 익 명(*2) 임정하(*2) 장은숙 전명환(*2) 전선애(*2) 정민경(*2) 정성구(*2) 정 재성 조창훈(*2) 차성원(*2) 최말숙(*2) 최수연(*2) 하현용-용지항(*2) 허성 호(*2) 황석주(*2) 강릉(*2) 경기남(*2) 경남(*2) 경인 남서울(*2) 대구(*2) 대전(*2) 북서울 (*2) 부산(*2) 서서울 영남동부 춘천 충남(*2)
*4월 1일, 5월 2일, 6월 2일에 국민은행 계좌로 입금하신 익명의 후원자님! 중앙지원부(070-8275-6303)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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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제32권 제4호 통권215호 발행일 2014년 8월 1일 발행처 (사)한국기독학생회 학사사역부 주소 (121-838)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56-10 (서교동) IVF 중앙회관 전화 070-8275-6313 팩스 02-333-7361 발행인 한기수 편집장 이시종 편집인 민혜경 김경아 편집위원 국효숙 김고운 김기인 김지은 박정현 오한웅 윤창근 이상엽 조창훈 한병선 편집디자인 김아롬새미 강은아 문이선 그림 김아롬새미 표지 이재웅 제작 김효영 인쇄 예원프린팅
IVF 6070학사회 제5회 여름수련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의 비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9-10)
일시/ 2014.8.22.(금)~23(토) (1박2일) 장소/ 광림세미나하우스 주강사/ 권영석 목사 (학원복음화협의회 대표) 회비/ 8만원 (국민은행 743201-04-090994 조경숙) 8.22(금)
8.23(토)
12:00~14:00 등록
07:00~08:00 기상, QT 및 기도
14:00~15:00 개회예배 – 박영덕 목사
08:00~09:00 아침식사
15:00~18:00 야외 활동(광릉수목원 탐방)
09:00~09:30 찬양
18:00~19:00 저녁식사
09:30~11:30 에베소서 강해(2), 조별토론
19:00~19:30 찬양
11:30~12:00 하산 준비
19:30~21:30 에베소서 강해(1), 조별토론
12:00~13:00 점심식사
21:30~23:30 친교 및 소망나누기
13:00~14:00 폐회예배 (에베소서 강해(3),조별토론)
소개의 시간 / 학사 간증 (김재원 학사) 조별발표_장기자랑 (촌극, 찬양 등) 조별발표_6070학사회의 비전확립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전체 기도회
문의 및 안내 6070학사회/ 총무 김용주 010-9853-9855 / 연락담당부회장 김재원 010-4329-0823 학사사역부/ 행정간사 이주영 070-8275-6340 glory86@ivf.or.kr
소그룹
영혼의 사귐을 통한 영성지도
영성훈련
개인의 영혼과 소그룹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룹 영성지도 입문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도록 돕는 영적 훈련인 영성지도의 개념과 목적, 형식과 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개인, 그룹 영성지도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게 해줄 핸드북. “가장 훌륭한 영성지도 입문 핸드북이다!”
앨리스 프라일링 지음 | 최효은 옮김 244면 | 13,000원
_레이튼 포드,「하나님을 주목하는 삶」의 저자
한국 기독교계의 일대 자성을 불러일으킨 화제의 책,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교회가 세상의 소망일 수 있을까? 리처드 마우 지음 | 홍병룡 옮김 226면 | 10,000원
극단으로 분열되고 세속화되어 가는 현장에서 교회가 대처해야 할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이고 성경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 한국 교회에는 기독교적 교양이
_신원하,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시급히 요구된다.” www.i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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