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16=2014. 10+11
타향살이 떠나는 가을. 아쉬워 서둘러 나섰는데 떠나는 가을, 거둘지 말고 쉬어가라 한다.
ⓒ 이재웅 | 상명대98
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www.onivf.com
목차
타향살이
소리정음
04 나그네 길에서 동역자를 얻다_허성호 07 타향살이 10년차_김은희 11 좌충우돌 상경기(上京記)_허민 14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_박민아 18 어디 사세요?_편집부 20 북테라피_정성민 22 말씀산책_문춘근
27 당신의 연애자소서_한선미,김효주
소리지음
30 제이언니의 결혼일기_김용주 32 파란만장한 직장생존기_김작가 34 상연정(常然亭)에서..._홍정환 36 낭만주의자의 영화이야기_정일문 38 소리가 만난 사람_우종학
강원도의 힘! 춘천&강릉학사회 46 일상에서의 만남_이미란 48 일상의 작은 오아시스_한나 50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_신승우 52 재경 강릉학사회의 어제와 오늘_윤원정 55 안테나 58 편집인의 글
소리이음
깨끗하고 맑은 소리
소리정음 타향살이 지난호에 이어 정든 고향을 떠나 나그네 의 삶을 택한 학사들의 이야기를 전합니 다. 특별히 이번호에서는 대학 졸업 후 직장을 찾아 서울로 이주한 학사들의 상 경기(上京記)를 담았습니다. 학사회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 12,000여명의 학사 들 중 약 30%가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 으며, 지방회 평균(서울지역 제외) 17.5% 의 학사들이 상경을 택하는 것으로 보입 니다. (보다 자세한 통계 내용은 18페이지에 서 확인) 타향살이의 설움이야 지면에 모 두 쏟아낼 순 없겠지만, 이들이 겪었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안에 나그네를 환대 하고 연대하는 문화가 더욱 뿌리내리기 를 기대합니다.
04 나그네 길에서 동역자를 얻다_허성호
20 북테라피_정성민
07 타향살이 10년차_김은희
22 말씀산책_문춘근
11 좌충우돌 상경기(上京記)_허민 14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_박민아 18 어디 사세요?_편집부
소리정음‖타향살이
나그네 길에서 동역자를 얻다 허성호│경북대90 경북대에서 전자공학과를 전공하고 현재는 세 번째 직장에 서 기술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커리어로 재밌게 일하고 있 는 19년차 공돌이 학사. 서른넷에 만난 착하고 예쁘고 지혜 로운 아내와 마흔에 얻는 애교만점인 딸로 인해 날마다 행 복하다는 팔불출.
“뭐라카노?”하는 제 한마디에 소그룹 사람들이 “와하하하!”하며 쓰러졌습니다. 1990년 여름, 연대 원주 캠퍼스 에 모인 전국수련회, 우리 소그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IVF 학생들이 저의 대구 사투리에 엄청 즐거워했지요. 2학년 때는 건국대에서 열린 ‘IVF 전국찬양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난생처음 서울에 와서 떨 리는 마음으로 지하철을 탔던 기억도 납니다. 대구 토박이로 27년을 살다가 취업을 위해 상경하면서 저의 나그 네 인생은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생활은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설었습니다. 대구에서는 토요일과 주일은 교회에서 사는 게 제 생활의 기본 이었는데, 서울에서 제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토요일은커녕 주일 낮 예배 이후에는 청년들을 찾아볼 수가 없 었습니다. 대구에서는 교역자 구하기가 힘들어서 전도사님 한분이 주일학교 전체를 담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는 데, 서울에서는 심지어 청년 1, 2부 담당 교역자가 따로 있더군요. 저절로 부흥이 되겠다 싶었으나 꼭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향에서는 나름 명문대로 인정해주던 경북대를 어떤 서울 사람은 그런 학교는 처음 들어본다 했고, 경북대가 대전에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뭐, 경북대는 사실 대구에 있고 대구대는 경북에 있긴 합니다. 카세트테이프나 CD로나 들어볼 수 있었던 CCM 찬양가수를 서울에서는 교회나 콘서트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은 CCM에 흠뻑 빠져있던 저를 흥분시켰습니다. 대구에는 우리집과 가족이 있었고, 가족처럼 지내는 모교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대학생활 내내 신앙의 버팀목 이 되어준 IVF 공동체가 있었기에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게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는 서 울에 올라온 후에야 알았습니다. 자취를 하면서 의식주를 스스로 알아서 챙겨야 했고, 도무지 모이려 하지 않는 낯선 교회에서 이것저것 봉사하느라 진을 뺐습니다. 무엇보다 동역자처럼 지내던 IVF 식구들이 옆에 없었습니 다. 물론, 당시 공동체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구에 있을 때는 학생 신분이었지만, 서울 에서는 권리나 자유보다는 책임이 더 많아진 직장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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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소 리 정 음
서울에서 살면서 소위 “멘붕”의 시기를 꽤 오래 겪었습니다. 예전만큼 자유롭지도 않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받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그리고 과연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인 지 혼란스러운 그런 상황, 이런 내게 조언을 해주고 곁을 지켜줄 사람은 사라져버린 상황이 지속되 었습니다. 왜 그렇게 힘들고 막막했을까 몇 년 후에 돌아보니, 공동체와 관계를 모두 단절당한 채 새 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관계 맺을 만한 사 람과 공동체를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방에서 상경한 학사들까지 포함하는 모임이 없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봉사만 할 수 밖에 없으니 계속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천 리안 IVF동호회에서 인하대 학사 임원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 참여했지만 그마저도 길게 가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영적 고아처럼 방황하던 중에, 천리안 IVF동호회 게시판을 통해 ‘서울지역 연합학사예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학사는 누구나 와도 된다는 거였습니다. “이거다!” 하고 달려갔습니다. 말주변 없고 내성적이던 저였지만, 워낙 갈급한 마음이라 그냥 갔습니다. 중앙 회관이 없던 때라 서교동의 한 교회에 7-80여 명의 학사들이 모였습니다. 마침 경북대 선배가 찬양 인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다 싶던 차에 기타 반주를 시키기에 군소리 없이 했습니다. 그날, “내 가 찾던 모임이 바로 이것이다”라며 눈물 흘린 학사도 있었습니다. 2000년 가을, 서울지역 연합 학사 예배. 이 예배가 그후 14년이나 제가 학사운동을 하게 된 시작점이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이후 연합학사예배에서 이재천 간사님이 전해주시는 성경강해는 문자 그대로 광야에서 목말라 죽어가던 제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비록 소그룹 시간에는 ‘기타 지방’이라는 소그룹 에 포함되어 처음 보는 사람들과, 그것도 매번 멤버가 바뀌는 바람에 제대로 소그룹을 할 수도 없었 지만, 모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제겐 복음이었기에 모임이 있는 날은 열일 제쳐두고 기타 하나 메고 홍대입구로 향했습니다. 몇 년 후, 수도권학사회가 태동하던 때에 남아 있던 십여 명의 학사들(소위 “묻지마1기”) 중에 지방 출신 학사는 제가 유일했습니다. 그 당시 제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지방에서 취업을 위해 서울이나 수도권에 올라온 학사들이 제법 많은데, 나처럼 처절하게 이런 모임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있는 반면 힘들어 하면서도 왜 어떤 사람은 모임에 시큰둥할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교회만으로도 충 분히 좋고 깊은 교제가 이루어져서 필요가 없나 보다 생각했죠. 그런데 이 해석만으로는 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막상 재경경북대 학사들을 만나보면 이야기는 달랐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한참 걸렸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갓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직장초년생 학사들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삶의 방식, 문화,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러한 혼란 속에서 어떻게 캠퍼스에서 배운 삶의 가치를 적용하고 실현해 나갈지 고민할 여유조차 잃 어버리기 쉽습니다. 이때야말로 교회 청년부나 IVF학사회와 같은 신앙 공동체에서 실질적인 이슈를 다루는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그룹이나 원투원 같은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세 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세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새내기 직장인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어떻 게 세계관을 확립해 나가야 하는지, 어떻게 현실 속에서 겪는 어려움을 훈련의 과정으로 감당해 낼 지 배우고 격려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돌봄을 통해 캠퍼스 IVFer에서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 운동원으로 자라나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다 가 비전과 소명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취업 등의 이유로 거주지를 옮겨 모(母)교회와 IVF 공동체와 단절될 수밖에 없는 학사들은 공동체의 부재로 인해 ‘잃어버린 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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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사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거주지 정보가 있는 조사 대상 16,000여 명의 학사 중 30%가 넘는 약 5,000여 명의 학사들이 출신 지방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살고, 이 중 약 3,000명의 학사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에 거주하고 있습니다(그림 참조). 즉, IVF 학사의 1/3은 졸업 후 공동체와 단절된 상태에서 다른 지방에서 사회 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교회를 포함한 건강한 공동체와 연결되지 못한 학사들은 사실상 방치되 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도권 - 고향 5,323명 33%
5,852명 37%
수도권 - 타향 지방 - 고향
1,993명 12%
2,894명 18%
지방 - 타향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학사까지 포함하면 대략 4-5천명의 학사가 저처럼 지방에서 살다가 수도권에서 사회생활하면서 돌봄을 받지 못하고 혼자의 힘으로 공동체를 찾거나 만들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IVF 운동의 효율성 측면 이전에 연속성 측면에서 볼 때 위험한 상황이고, 학사 한 명 한 명을 바라볼 때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제 주변의 몇몇 IVF 친구들을 봐도, “세상 속의 하나님나라 운동? 그게 뭔데?”라며 그저 평범하고 착실한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학사들이 많습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한국교회 상황에서는 그것 만으로도 굉장한 공헌(?)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4년제 대학을 다녀도 막상 기업에서는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채용 후 몇 년간 비용을 들여 재교육 한다고들 합니다. 우리는 짧게는 4년, 길게는 7-8년씩 캠퍼스에서 IVF라는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배우고 연습해온 소중한 미셔너리들입니다. 21세기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라는 야생과 같은 사회생활에 던져졌을 때, 나와 내 가 족만 잘되고 좀 더 편하게 누리며 살고 싶다는 풍조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일터와 가정에서 어떻게 영성을 지키고 일상 선교사로서 살 수 있을지 재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현재 학사회 의 YGM(Young Graduates Ministry) 사역은 IVF 사역의 관점에서나 학사 개개인의 영적 여정에서나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3-4년의 암흑기를 거치긴 했지만 막 태동하던 수도권학사회를 만나 그나마 비전을 잃지 않고 살아갈 힘 을 얻었습니다. 저는 선배로서 지금의 신입 학사들은 그런 암흑기를 최소화해서 나그네의 여정을 함께할 동역 자들을 만나고 소명을 발견하고 비전을 성취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땅에서는 영원히 나그네로 살아갈 수밖에 하늘 백성인 우리가, 서로 불안해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손 맞잡는 그런 공동체를 만나고 또 만들어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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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소 리 정 음
소리정음‖타향살이
타향살이 10년차 김은희│전주대00 2006년부터 IVF 중앙회의 중앙지원부에서 IVF의 살림 (회계)을 맡고 있다. 일처리의 꼼꼼함과 사람을 대하는 넉넉한 마음을 함께 지닌 ‘능력자’로 불린다. 현재는 담 당 업무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14 학번 새내기.
출가 저는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농촌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청소년 시절, 가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언젠가 출가는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집 에서 통학할 수 있는 거리에 대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집을 떠나리라고 예상 했죠. 어차피 떠날 거라면 성적도 되겠다, 고등학생 때부터 독립하자고 결정해서 읍을 벗어나 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물론 여자아이를 타지에서 혼자 살게 할 수 없다는 부모님의 반대가 있었지만, 저는 그때도 고집이 셌던 것 같습니다. 입학식 전날 하숙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짐을 다 내려 주 고 되돌아가시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부모님 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날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을 난생처음 느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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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서울행 고등학교 성적이 좋았다면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겠죠. 하지만 저는 전주에서 대학을 다녔고 그동안 남 동생은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서 대학에 다녔습니다. 졸업을 하자마자 고민할 여유 없이 바로 서울로 올라와 동 생과 자취를 하며 취업을 준비했습니다. 동생과 함께 살아야 부모님의 부담을 줄어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 고, 졸업 전부터 서울에서는 면접 기회가 종종 생기는 반면 아는 사람 많고 친숙한 전주에서는 면접 기회가 생기 지 않았습니다. 지인들과 친구들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들과 다른 걸 싫어하면서도 어떤 선택의 순간에는 전혀 다른 제가 되어 선택을 하는 성향이 제게 있는 듯합니다. 이때 서울 행을 선택한 것이 현재까지 제 삶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끈 것 같습니다. 2005년 9월, 서울에 올라와 여기저기 이력서도 쓰고 지인의 소개로 몇 군데 면접도 보았지만 매번 쓴잔을 맛보 았습니다. 지방대 출신에게 서울에서의 취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경쟁력 없이 종로의 학원가를 전전하며 6개월 을 보냈더니 세상에서 점점 존재감 없는 잉여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정말 절 실한 마음으로 새벽기도회에 나가 딱 한 가지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좋으니 일할 수 있게만 해달라 고 말이죠. 제 삶에서 이때만큼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는 친척집 신세를 졌습니다. 작은아버지 가족 네 명이 살기에 적당한 집이었는데 동생에 다가 저까지 얹혀살게 되니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빨리 집을 구해서 나오려고 집을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그런 데 수중에 가진 돈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방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코딱지만하다” 는 표현이 실감났습니다. 훨씬 싼 가격으로도 넓고 좋은 방을 얻을 수 있는 전주가 그리웠습니다. 우열곡절 끝에 첫 자취집을 구했는데 그나마도 도둑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큰일은 없었지만 불안해서 지금 살 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며칠 전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전세보증금을 올려야겠다고 하면서 준 비해 달라고 했었는데 기한이 되어 연락을 한 겁니다. 계약기간이 끝나갈 때마다 치솟는 서울의 전세 값을 따라 잡으려면 숨이 턱에 찹니다.
IVF 중앙회 입성 취업준비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 마음에 찬바람이 쌩쌩 불던 초겨울의 어느 날, 디아스포라로 중국에서 함께 생 활했고 당시 IVF 중앙회 간사로 일하고 있던 친구가 중앙회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사실 저 는 2003년 여름에 중국 디아스포라 준비모임을 하러 IVF 중앙회관에 처음 가보았습니다. 중앙회관은 전국 각지 에서 모인 낯선 IVFer들과의 어색한 만남이 있었던 곳으로 기억할 뿐이었습니다. 학부 시절, 간사라는 직함은 참 으로 무겁고 커 보이고 높아 보였기에 저는 친구의 제안에 손사래를 쳤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중앙회 사역은 캠 퍼스 사역과는 다르다며 면접이나 한번 보러 오라고 했습니다. 늘 IVF에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참에 IVF를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하는 마음 반, 어떤 일이라도 좋으니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하던 절실한 마 음 반으로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자기소개서와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았 고, 2006년 3월부터 중앙회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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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소 리 정 음
고향 떠난 설움 제가 맡을 분야는 재정파트였는데 난생처음 회계를 접했습니다. 낯선 곳에서 처음 하는 업무 에 대한 긴장감과 부담감 때문이었는지 출근하고 한 달 만에 덜컥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지하철에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움직이기가 힘들었지만 딱 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과는 떨어져 있고 동생은 출근한 상태이고, 도움을 청할 사람 이 떠오르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중앙회까지 기어오다시피 해서 왔습니다. 울면서 걸어가던 그 길, 몸이 아파서도 그랬겠지만 혼자라는 생각에 몹시 서글펐습니다. 병명은 급성A형 간염이었 고 결국 3주 동안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질병이기도 했지만, 엄청 지저분하던 중 국에서 생활할 때도 안 걸렸던 병이 왜 하필 그때 걸렸나 생각해보면, 몇 개월 동안의 타향살이 스트레스로 면역력이 약해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빠름 빠름 LTE급 서울 가끔 전주에 사는 친구가 서울에 놀러오면 늘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서울이 너무 복잡하고 정신없다더군요. 지하철을 타러 가면 복잡한 노선과 분주하게 걸어가는 인파에 어디를 어떻게 가야할지 몰라 당황할 때가 많고, 버스를 타도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길이 막힌다고 합니다. 밤 에도 고요한 맛이 없고 잠자리에 누우면 땅이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참 예민하다 고, 서울 사람들은 다들 이러고 산다고 말하면서도 나 역시 서울에 대한 첫인상이 이랬습니다. 처음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는 마치 내가 두더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놀라웠던 것은 거리에 비해 출퇴근 시간이 너무나 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에 두 세 시간은 기본으로 길거리 에서 보내야 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고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서울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빨리 걸어 다니는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속도가 빠른 서울에 적응하는 데 오 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보물을 얻음 지금 저는 8년의 중앙회 사역을 일단 마무리하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업무 역량을 더 키워서 다시 중앙회로 돌아와 더 많은 기여를 하길 기대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졸업한 지 10 년 만에 다시 신입생이 되었습니다. 다시 모든 게 낯설어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다 행히 대학원 선배들이 학교시설 사용 방법과 수강신청 및 공지사항 확인방법은 물론, 해당 과목 교수님의 수업 스타일에 대한 정보도 잘 알려주었습니다. 개강을 하고 보니, 서울 온 지 얼마 안 되어 처음으로 수도권학사회 모임에 참석했던 기억이 떠 올랐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교회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배의 권유로 수도권학사회에 참 석했었죠. 쭈뼛거리던 저에게 먼저 말을 건네주고 환대해 주면서 따뜻하게 손을 내민 리더와 소 그룹 사람들이 고마웠습니다. 수도권학사회를 통해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교회도 정하게 되었 고, 말씀과 나눔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새신자 소그룹에 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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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교제했던 게 여러모로 힘이 되었습니다. 3주 동안 입원했을 때는 목 사님, 교회 친구들, 또 서울에서 알게 된 지인들이 병문안을 와주었고 심심하지 않게 책과 맛있는 쿠키 를 전해 주었답니다. 그들은 서울에 온 어리바리한 나그네의 설움을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이제는 아주 친숙해진 이 사람들이 제 인생의 보배입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라 고향을 떠나든 떠나지 않든, 누구나 한번쯤은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삽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 낯선 타인이었지만 정착하는 기간을 거치면 대부분 자기가 나그네였음을 잊고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당연해지면서, 전에 가지고 있었던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다른 이에 대해 감사하는 마 음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이죠. 돌이켜 보면, 그 정착하는 기간에 저는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제 노 력으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그 기간 동안 나그네였던 저를 환대하며 제 곁을 지켜 준 제2의 고향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서울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를 겁니다. 혹시 주변에 다른 지역에서 서울로 공부를 하러 오거나 일하러 온 사람들이 보이시나요? 그들에게 가벼운 안부 문자나 몇 마디 인사를 나 눈다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우리 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 려 함이라”(요삼 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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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소 리 정 음
소리정음‖타향살이
좌충우돌 상경기(上京記) 허민│계명대02 서울에서 사랑하는 아내(한미향, 강원대01)를 만 나 세상 속에서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이 무엇인 지 찾고 있으며, 대안적인 삶의 방식(혹은 공동 체)을 고민하고 꿈꾸고 있다.
익숙한 삶의 무기력함 꿈과 소망을 품고 졸업을 했다. 하지만 막상 사회로 나오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많 았다. 이력서에 이렇다 할 만하게 내세울 경력은 없었고 IVF 활동내역, 교회나 각종 단체 봉사 활동, 해외여행 경험이 전부였다. 쓸모 있는 자격증도, 뛰어난 영어 실력도 없었다. 더구나 대구 에서 내가 선택할 만한 직종이라고 해봐야 공장직원이나 텔레마케팅 정도였다. 외국어를 잘한 다거나 특정한 영역에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 마냥 부러웠다. 그들은 별다른 고민 없이 아무거 나 골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구에서는 내가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을 해 볼 기회조차 별 로 없었다. 6개월 동안 정해진 직장 없이 이것저것 기웃거렸다. 무한(?)하다 싶을 정도로 시간이 많아지고 약속이 없는 생활이 이어지니 사는 게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대학 시절 휴학을 했었 는데 그때 어떤 책임도 맡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을 어찌 관리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댔던 기억도 떠올랐다. 또 집이 주는 안락함에 익숙해지는 것도 두려웠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막연한 부담감만 있었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내 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고민만 깊어갔다. 다르게 생각하면, 내 길은 어떤 다른 친구 들보다 더 다양하고 선택의 폭이 크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러나 위로보다 는 스트레스와 고민이 훨씬 컸던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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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 떠나자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밥값은 하며 살 수 있을까? 가진 게 하나도 없는데 뭘 해 볼까? 많이 보고 배울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대학 시절 그 흔한 아 르바이트도 한번 해 보지 않은 게 뼈저리게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중, 친구 하나가 서울에 ‘한국어교육자격 증’을 이수하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그 친구와 동행하기로 했다. 내게는 다양한 사회 경험을 위한 서울 행이었다. 그러나 집을 떠나 몸을 쉴 만한 공간조차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서울행을 선택한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선교나 해외봉사라도 간다면 다니던 교회에서 축복기도라도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마저도 서울행을 택한 내겐 사치였다. 무모했지만, 뭔가 모를 자신감은 있었다. 의지가 있고, 건강한 몸과 마음이 있고, 게다가 이십 대라는 창창한 나이가 있지 않은가.
타향살이의 설움 첫 거주지로 동대문구 이문동에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방을 얻었다. 친구와 함께 반지하방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갑작스레 결정한 서울행이었으니 부모님께 기댈 입장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직업도 없는 우리에게 월세 30만원은 너무나 큰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손을 벌 렸다. 우리는 서로를 위안삼아 어려운 서울 생활을 이어나갔다.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월세와 당장의 먹을거리 를 감당하느라 하고 싶은 일은 제쳐두고 하는 수 없이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시간제 아르바이트 혹은 일용직에 가까운 잡부였다. 초기에 아르바이트만 고집한 데에는 나 름의 이유가 있었다. 정규직이 아닌 만큼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만큼 뭔가 배울 수 있는 시간도 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당시 나는 사회문제와 사회참여, 그리고 미디어 관련 직종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쪽 분야를 계속 알아볼 요량이었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각종 세미나와 아카데미에 참여하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야박한 시급제 아르바이트는 내 몸과 시간과 젊음을 갉아먹고 있 었고,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는 편의점 수준의 음식만으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때 나는 정말 밥의 소중함을 직접 체험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중한 경험인 것과 는 별도로 그런 삶이 나에게는 처절한 생존싸움이었다. 새로 일하게 된 곳에서 한 달 정도 지난 후, 인터넷 강의를 촬영하는 일을 해 볼 기회가 생겼다. 이 일은 그나마 내가 관심을 가졌던 영역의 일이었다. 관련 종사자의 이야기도 듣고 업무가 돌아가는 상황도 보며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이 일 역시 파트타임 직종이라서 월세와 생활비를 채우기에도 버거웠고, 생활은 하나도 나아지는 게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후 지인의 소개로 작은 무역회사 인터넷 담당 업무를 맡게 되었다. 소개받은 일은 으레 그렇듯 기대만큼 일 을 잘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예상하지 않게 임시로 경리 업무를 맡게 되었는데, 업무에 제대로 적응하지도 못 한 채 수습기간 6개월만 채우고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잘 모르는 분야의 일을 억지로 배워가 면서 무진장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건 핀잔과 질책뿐이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돌아온 건 권고사직이었다. 자존감은 무너져 내렸고 살고 싶은 의지나 살아야 할 의미도 땅에 떨어져 극단적인 생각까지 자주 들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다니던 교회마저도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 힘 들게 버티며 암울하게 지냈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었다. 삭막한 회색도시와 차가운 시선과 분주한 사람들의 발 걸음뿐…. 나라는 존재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의미 없이 생명만 연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은 우울과 침 체의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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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고 나니 오히려 내게 한 템포 쉬어가라는 여유를 준 귀한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밀려오는 업무의 스트레스와 상사의 기대치를 채우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시달 리다 보니 차라리 퇴직이 좀 더 여유로운 삶의 피난처로 작용했던 것 같다. 내게는 가장 힘든 서 울에서의 시간이었지만, 되돌아보면 시련과 고통 속에서 그만큼 나는 단련되고 성숙하고 성장 할 수 있었다.
나그네이나 선교사처럼 작은 무역회사에서 정규직으로 번 돈은 퇴직 후 쉬는 기간 동안 버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늘 월세가 문제였다. 다시 수많은 직장에 이력서를 내면서 구직활동에 전념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다. 이전 직장에 다니면서 구입했던 카메라를 처분하려고 알아보던 중, 현재의 직 장에서 올린 구인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라 지체하지 않고 연락 을 했고 면접을 보러 갔다. 그후 나는 현재까지 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벌써 4년이 지났다. 이 직장에 다니는 동안 힘들었던 서울생활에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안정적인 소득으로 재 정상황이 나아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좀더 여유로운 삶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변에 나와 비슷한 처지로 상경을 한 지인들을 만나 함께 삶을 나누며 타향살이의 어려움을 공유할 수 있었고 마음에 위안을 받았다.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누군가에겐 고향이고 삶의 터전이며 익숙하고도 안락한 공간이지만, 나 처럼 타향살이를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서울 생활은 아직도 너무나 낯설고 힘든 야생의 삶 같 다. 어떤 이에겐 마치 또 하나의 선교지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나는 서울에 정착했 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도 지나가는 삶의 여정 중에 머무는 하나의 장소일 뿐이고, 나는 또 다른 미래를 꿈꾸며 준비하는 나그네와도 같다. 거칠고 메마른 타향살이지만 이곳에서도 그리 스도를 닮은 선교사처럼 살고 싶다. 지금 나는 나와 같은 처지의 학사들이나 후배들에게 밥 한끼 든든히 대접할 만한 여유(?)가 생 겼다. 또 두세 명 정도는 재울 수 있는 작은 우리집과 행복한 가정도 꾸렸다. 그냥 지금의 직장과 집과 가정에 안주하고 싶진 않다. 이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의미 있는 것인지 하나님이 원 하시는 뜻을 애써 구한다. 여기서도 대구에서 그랬듯이 동역자를 찾고 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타향살이, 쉽지는 않지만 해볼 만하다. 혹시 나와 비슷한 삶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다면, 먼 저 거친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분명한 가치관과 용기, 지혜를 갖추기를 충심으로 조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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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소리정음‖타향살이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 박민아│제주대08 현재 EBS 한국교육방송공사 ‘다큐프라임’ 작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는 것,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꿈이며 목표이다.
“네 후배 있잖아, 민아. 그래. 잘 지내고 있다. 지금 우리 9개월째 같이 잘 살고 있다.” 설거지 중 떨어지는 물소리 사이로 학사님의 통화소리가 들렸다. 제주에 계신 학사님과의 통화였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구나. 문득 이 집이 새삼스러워졌다.
난 왜 이곳에 왔을까? 나는 남의 집에 산다. 서울에 온 지 어언 9개월. 가장 많이 들어본 질문 중 하나는 “어디 사니?”이다. 그때마다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남의 집에 살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상 식적이지 않다. 모두가 “뭐?”하며 되묻는다. 하지만 사실이다. 현재 나의 또 하나의 가족이 된 한병선 학사님 가 정은, 딱 한 번 만나 본 ‘제주IVF 신입 학사’를 새로운 식구로 맞아 주었다. 이 모든 과정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 다. “집에 방이 하나 남는데, 올래?” 그 한마디였다. 사실 50만원이 든 통장과 짐만 달랑 들고 이곳에 불쑥 찾아 온 나도 참 미스터리하다. 그만큼 나는 떠남이 절박한, 저 밖에 서 있을 것만 같은 진짜 내 모습이 너무나도 그리 운, 그런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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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작년 여름, 제주는 뜨거웠고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한 번 더 겪었다. 대학생활의 마지막 학기 를 보내고, 스물다섯이라는 괜찮은 나이에 졸업을 했음에도 나에게 남겨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것 만 같았다. 사실 제주에서도 내가 일할 수 있는 자리는 있었다. 인턴생활을 했던 신문사에서도 수습기자가 필요하다며 선뜻 정규직원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일까. 어려서일까.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밖을 향했다. 부모님의 영향권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나라는 사 람이 진짜 누구인지 찾고 싶은 마음, 가족과 공동체를 떠났을 때 나는 과연 누구인지, 제주를 떠 난 나는 진짜 어떤 아이인지 찾아보고 싶은 호기심, 학생의 신분을 완전히 벗어버린 내게 이 시 간은 직장을 찾기 전 마지막 자유인 것만 같았다. 갈망은 늘 현실에 부딪힌다. 고향을 떠나온 학사들과의 대화 속에서 늘 화두는 ‘집’이다. 난 이 제껏 한 번도 내가 머물 곳에 대해 고민하고 염려해본 적이 없었다. 집은 언제나 당연했기 때문 이다. 후배는 직장 근처에 있는 고시텔에서 혼자 자취를 한다고 했다. 사촌동생은 원하는 분야의 공부를 위해 가장 싼 고시원을 택했다. 친구는 대학원 준비를 위해 자취를 시작했고, 부모님께 보증금을 받는 대신 월세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고향을 떠난 우리들에게 집과 함께 더불어 오는 고민은 집세를 동반한 재정의 문제다. 고시원 의 경우 월 30만원은 싼 편이고, 대부분 40만원이다. 원룸은 보증금이 비쌀수록 월세가 낮은데, 500만원의 적은 보증금으로는 매월 40만 원 이상을 부담해야 했다. 첫 월급은 기껏해야 120만 원 안팎이다. 여기에서 헌금을 떼고, 식비, 차비, 핸드폰 요금까지. 엄마는 결혼자금을 위해 월급 의 50%를 저축하라고 한다. 머리가 돌아간다. 수학과 담 쌓고 산지 10년이나 됐는데. 내 경우, 학사님 가정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손에 든 여러 보따리 중 큰 짐을 내려놓게 된 거다. 모두가 나에게 “정말 다행이다. 돈 걱정 덜었네.”라고 말한다. 하긴, 나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행운아였고, 하나님은 내가 제주를 떠났으면 하셨구나 싶을 정도로 과정은 순조로웠다. 돈 백만 원 받는 것이 다행인 막내작가라는 직업과, 타향살이의 현실 앞에서 집세를 면제받는 것은 엄청 난 일이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서울에 거처를 마련한 나는, 결정한 후 몇 주 되지 않아 서울로 짐을 옮겼다. 정리할 짐도 얼마 없었고 이제 살기만 하면 됐다. 앞으로의 길을 고민하고, 시내를 누비며 정보 도 찾았다. 머리가 아프기도 했지만 떨리고 재미있었다. 아, 무엇보다도 난 자유를 느꼈다. 아무 도 날 재촉하지 않았고, 다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나에 대해 아무도 관여하지 않음을 느끼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그 들뜬 기분을 누리며 난 내가 꿈을 꾸던 방송계 막내작가 의 일을 구할 수 있었고, 이 역시 하나님의 인도였다며 신나게 떠들고 다녔다. 그러던 중, 그 자유로움이 극심한 외로움으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고, 나는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사로잡 기 시작한 건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쯤 됐을 때였다. 그동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색하 지 않고 오히려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외로움이란 인생에 몇 번 느끼지 못하는 감정 이라며 쓸 데 없이 교만했다. 성향 상 나는 축제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힘든 일들도 많이 겪었지만 내 옆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가족, 친구, IVF, 교회. 그 탄탄한 기지 속 에서 난 참 안전하게 살아왔다. 언제부턴가 답답해졌을 뿐, 알게 모르게 그 큰 유익을 당연하다 는 듯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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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사실 별 일도 없고 남들과 똑같은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뿐인데, 난 아주 급속도로 외로움을 타기 시작했다. 울 고 싶은데, 전화해도 날 만나러 와줄 사람은 없었다. 이제 막 알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약한 모습을 보일 용 기는 더더욱 없었다. 처음 관계를 맺어가는 시기에 겪는 긴장이 채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좋은 사람’이어 야 했다. 남들 다 겪는 일인데, 징징 우는 아이일 수는 없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편안한 공동체 가 너무 그리웠다. 서울에 사는 학사들이 있을 텐데, 특별히 모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하나님도 찾지 않았다. 의존할 만한 사람들과 공동체가 사라지고 나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빠른 속도로 무너 져 갔다. 돌이켜보면 내 영적 생활의 문제점은 ‘의존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워야 할 성 전을, 사람, 관계 등의 모래 위에 세워왔던 내 모습이 외로움 앞에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삶 은 조금씩 병들어갔다. “타지에서 아프면 서러운데.” 모두가 걱정하며 했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외로움과 낯선 환경이 스트레스가 되어, 제주에서 나름 건강의 상 징이었던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퇴근 후 몸이 너무 아파 병원을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무작정 택시를 탄 적도 있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응급실이 있었고, 링거 한 병을 다 맞은 후에야 혼 자 걸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 몸은 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응급실 해프닝 이후 자주 ‘피곤하다’고 느끼던 어느 날이었다. 월경 주기도 아닌데 피가 비치더니 이후 두 달이 넘어가도록 하혈증세가 점점 심해졌다. 병원에 서는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출혈이라고 했다. 처방은 따로 없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마세요.” 미혼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몸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피는 쉽게 멈추지 않았고, 난 절망했다. 잔병치레 한 번 없었기에 더욱 이 모 든 일이 혼란스러웠다. ‘가난하게도 충분히 살 수 있다’며 심심치 않게 큰소리치던 난 병원을 다니며 들어가는 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난은 병을 가져오고, 그 병은 더 큰 가난을 부르는, 이 사회의 아픈 한 구석을 너 무 모르고 살았음을 알았다. 이곳저곳 검사비를 들이며 병원을 옮겨 봐도 처방은 호르몬제뿐이었고, 결국 나는 1주일이라는 휴가를 받고 다시 제주로 내려가 차도가 있길 바라며 인내해야 했다. 고향 집에 누워 쉬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굳이 서울에서 살아야 할까? 상경한 학사들의 이야기를 들 어보면, 상경 직후 1년이 고비라고, 그 1년을 잘 넘기면 살 만하다고 했다. 아픈 몸과 마음을 끌어안고 고민했 다. 내가 제주에서 사는 게 더 좋은 이유, 포기하고 제주로 돌아와도 되는 이유, 요 몇 개월 간 감당해야 했던 부 담과 고통. 명분은 충분했지만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왜일까. 힘들었지만, 사실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말이다. 졸업 후 방황하 던 마음을 다잡게 하셨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살게 하셨다. 아무 이유 없이, 이득도 없이 나를 받아주는 사람들 을 만났다. 아무 경력도 없는 내가 방송국 본사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 우연히 나들목하늘교회를 인터넷 기사로 보고, 그렇게 사랑하는 목사님을 만났다. 내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다 세심한 인도였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가 있을 거라는 확신도 뿌리칠 수 없었다. 난 왜 이곳에 왔을까? 분명 이 유가 있겠지. 난 다시 2호선 지옥철을 타야만 출근이 가능한 이곳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몸은 많이 좋아졌고, 6개월이 지난 이후로는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며 물었던 그 물음이 이 글을 쓰며 조금씩 풀려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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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이곳에 와서 난 내 집이 아닌 곳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내 힘으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음을 고 백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학사님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이 내게 익숙함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 신다는 사실을 알았고, 사람이 아닌 오직 그분을 의존하기 원하신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외로움 을 겪어내면서 얼마나 예쁜 우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 알았다. 깊은 고독을 버텨내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도 배웠다. 몸이 아프면서, 내가 내 건강에 대해 얼마나 자신만만했으며 나는 내 생명을 하루도 연장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더 있다. 저 옆 동네에는 대통령이 살고, 또 그 옆에서는 투쟁을 한다. 이 동네 고시촌에는 아메 리카노가 천 원인데, 저 동네 펜트하우스는 평당 6000만원이란다. 방송계 막내로 들어와 일을 하면서는 돈의 무서움을 본다. 사람은 그저 노동력이며, 보이지 않는 카스트가 계급을 나눈다.
난 왜 이곳에 왔을까? 떠남과 정착. 그 모든 선택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디든 나를 어떻게든 또 살게 하시는 은혜, 누리게 하시는 공동체가 예비되어 있다. 타지에서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모든 학사들이 존경스럽다. 언젠가 모두 만나 그 어려움 속에서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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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소리정음‖타향살이
어디 사세요? 학사회가 확보한 전국학사주소록을 토대로 주소가 확인 된 12,000여 명의 거주지를 분류해보았 습니다. 전국학사주소록은 각 지방회의 학사주소록을 취합한 것이며 2014년 초에 조사된 내용 입니다. 여기에 제공된 주소는 우편물 수령지이므로 실제 거주지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 IVF 학사들은 과연 어디에 살까요? 1. 전국 학사 거주지 분포 서울(30.15%)과 경기(21.58%) 지역에 절반 이상의 학사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울권 30.15%
강원권 5.97%
경기권 21.58% 인천권 3.97% 경상권 대구 8.80% 부산 6.89%
충청권
경남 3.07% 경북 5.22%
대전 1.96% 충남 1.60%
울산 2.13%
충북0.96% 세종 0.08%
전라권 전북 2.34% 전남 0.32% 광주 1.05%
제주권 0.59%
해외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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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소 리 정 음
2. 지방회별 서울-경기 지역 거주지 학사 비율 각 지방회에서는 어느 정도 비율의 학사들이 서울로 이주 할까요? 서울의 4개 지방 회를 제외하면 평균 17.5%의 학사들이 취업 및 다양한 이유로 서울행을 택하는 것 으로 파악됩니다. 보다 자세한 데이터는 IVF학사회 블로그(ivfgcf.tistory.com)에 공개 할 예정입니다. 90%
28% 31%
68%
27% 30%
52%
29%
45% 30%
56%
31%
60%
56%
20%
50%
23% 30%
28% 22%
0%
동서울
서서울
남서울
북서울
경인
21%
경기남
춘천
20%
원주
강릉
서울
90%
경기
68%
45%
38% 18%
12% 12%
23% 24%
0%
대전중부
15% 6%
21%
충남
15%
전북
8%
18% 12%
광주전남
영남동부
10%
11%
대구
부산
8%
8%
7%
6%
경남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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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테라피‖여러 고민으로 곮치 아픈 그대에게 드리는 책 처방
더듬더듬 하나님나라 정성민│울산대 97 주민등록등본에 여자가 셋. 저항 과 도전, 인문학적 상상력과 구체 적인 생으로 하나님 나라를 펼쳐 내는 직장인이자 청년부 간사.
한 때 말을 더듬었다. 디귿과 미음 등 특정한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에서 어김없이 숨이 막혀왔다. 찰나의 순 간에 죽음을 경험하곤 했다. 혀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단어를 다른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로 신속히 대체 하고서야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직 내 혀에 바벨의 흔적, 죄의 저주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때 필연적으로 알았다. 우리는 흩어지고 분리되어야 하는 슬픈 운명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 는 일치와 연합을 향한 깊은 욕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더듬더듬 산다. 세상나라 속에 살면서 하나님나라를 산다. 세상에 속해 있지만 하나님나라의 백성 으로 산다. 도무지 융합될 수도, 그렇다고 철저히 분리될 수도 없는 나라를 동시에 산다. 세상의 시민이면서, 동 시에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산다. 이것이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숙명 일 것이다. 우리는 운동하고 성장하는 하나님나라의 경계에서 전쟁하듯 산다. 혼란과 확신, 고통과 환희, 기쁨과 두려움, 희망과 절망 속에서 산다. 땅을 벗하며 살지만, 하늘을 디디며 산다. 낯선 땅에서 더듬더듬 산다. 말더듬 증상이 거의 사라지던 시기에 나는 하나님나라를 배웠다. 아니, 은혜의 하늘이 열려 그 나라를 선물로 받았다. 하나님나라의 청사진이 마음과 머릿속에 섬광처럼 찍혔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나라를 이해 하고, 깊이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활동학사로 공동체를 1년 섬긴 후 백수가 된 시절의 일이었다. 그 간 IVF 공동체에서 받은 많은 훈련이 자양분이 되었겠지만, 그 특정 시기의 설교와 성경읽기와 독서가 흔들림 없는 믿음의 근간을 만들었다. 거룩한 하나님나라를 향해 쉼 없이 육박하는 경계에 서게 되었다. IVP BST 시리즈 《마태복음 강해》와 김세윤 박사의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통해서도 적잖이 영향 받았 지만, 그 중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김회권 목사님의 설교와 저서였다. 그분의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 서 읽는 모세오경》시리즈는 내게 하나님나라 입문서였다. 책을 읽고 정리하면서 그 나라가 활짝 열렸다. 하나 님나라의 빛으로 신약과 구약이 관통했다.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성경지식이 한데 모여 하나님나라를 가리켰 다. 그렇게 졸업 후 IVF 공동체를 떠나고 나서야 성서에 본격 입문할 수 있게 되었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사랑하는 선후배 여러분께 그 감동과 영감을 전하고 싶다. 먼저 모세오경 시리즈1 창세기, 출애굽기 강해를 꼭 읽고 공부하시길 권면한다. 혼자 성경공부하면서 밑줄 긋고 기록하며 읽기에 단연 최적이다. 하나님나라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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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는 현장’이고, 말씀이 순종되고 복종되어 ‘현실’이 되는 세계 다. 김회권 목사님의 설교와 책을 통해 2005년 여름 이후 내 삶의 모든 이야기들은 바로 그 하나 님나라로 충만했다. 그 나라를 향한 순종적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선후배님 여러분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책을 찾아 읽어주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드린다. 하나님나라를 은혜로 받았으나, 선명하게 그려진 하나님나라 지도를 가지고 이 땅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또 다른 범위의 문제였다. 모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듯이, 아는 것과 행하는 것도 엄연히 다른 차원이었다. 학생에서 생활인, 직장인 되고 나니 더욱 그랬다. 하 나님나라는 끊임없이 세상나라와 충돌했다. 사회의 규범과 자본의 질서, 대중의 욕망과 공동체 적 가치, 그리고 직장의 요구와 충돌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사는 우리네 인생은 늘 이방 인일 수밖에 없었다. 말씀에 순종하여 보이지 않는 나라 백성으로 암약(暗約)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 가문으로 입적된 우리의 숙명이었다. 부요한 시대든 가난한 시대든, 찬란한 시대 든 암울한 시대든 우리는 이중 국적으로 산다. 하나님나라를 현실의 나라로 가져오는 삶을 산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누룩으로 살아간 두 선배를 소개하고 싶다. 하나님나라의 역사성과 구체성은 문익환 목사님을 통해 처음 발견했다. 말씀이 육신을 입을 때, 하나님나라가 복종을 통해 시대의 역사 속에서 현장성을 획득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 는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문익환 평전》을 읽고 책의 첫 장에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생 속으 로 스며드는 복음’ 민중들의 삶과 역사적 현실에 괴리된 복음이 아닌 구체적인 형태로 사람들의 곁에, 사회 속에 임하는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게 된 것이다. 겨울 속에서 봄을 살고, 분단된 조국 에서 통일 한국을 살았던 문 목사님의 예언자적 삶을 동경했다. 교회 지도자가 실종되고 교회의 영향력이 급감하다 못해 욕먹는 게 당연해진 지금, 난 문 목사 님이 그립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모인 100만 인파를 보면서 문익환 목사님을 떠올 렸다. 고통 받는 약자들의 편에 서서 자신의 삶을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삶에는 그리 스도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났다. 그는 말씀이 깊이 체화된 실천적 예언자였다. 이 슬픈 시대가 다시 그분의 신앙과 삶을 조명하게 한다. 《문익환 평전》은 평전으로서도 매우 빼어난 책이니 소장 자체로도 아깝지 않다. 또 한 권의 책은 송인수 선생님의 《우리는 아이들에게 모두 빚진 사람들이다》라는 책이다. 2005년 여름 성서한국 대회를 통해 처음 뵌 선생은 보이지 않는 그날이 이미 왔다고 선포하며 그 간극을 자신의 삶으로 채우는 분이셨다. 선생은 2003년 교직을 내려놓고 <좋은교사운동>의 대표를 거쳐 2008년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시작했다. 소명을 위해 기꺼이 자 신의 삶을 경계 너머로 던지고, 운동을 위해 자신의 삶을 끊어낼 수 있는 선생은 내게 늘 좋은 모 범이었다. 그해 여름 이후 난 송인수 선생의 삶과 글, 삶의 여정을 통해 큰 통찰을 얻어왔다. 추 천하는 책은 선생이 페이스북에 남긴 기록들을 정리하여 출간한 신간이다. 줄줄 눈물 쏟으며 책을 읽었다. 굳은 확신과 믿음 뒤 숱한 좌절과 고뇌, 남모르는 아픔과 눈물 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게 변함없이 흔들림 없이, 아니, 실제론 사시나무 떨 듯 늘 흔 들리면서도 한 길을 걷는 선배가 고마웠다. 미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아팠다. 성도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선배의 인생 여정 속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늘 힘들고 약 하고 또 작은 유혹에 흔들리면서도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는 삶, 혹시 우리 선후배 들이 그런 수고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책이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픔과 통곡의 시대, 갈등과 대립과 분열의 시대 속, 우리의 좌표는 어디 즈 음인가. 우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이 시대를 어떻게 관통하여 살아갈 것인가. 슬프고 어지러 운 시국에서 길을 잃고, 마음을 잃고, 용기와 소명을 잃고 지내는 선후배님들이 혹시 계시다면, 2014년 가을, 세 권의 책을 꼭 붙잡아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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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산책‖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
빌레몬서 산책 5
그리스도 안에서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1(몬17-22) 문춘근│부산대 83 1992년 방현주(동아대82) 학사와 결혼하여 인생을 공유 중이다. 선물로 받은 아들 희찬을 미국 Emory 대학교에 보내놓고는 신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2008년 사귐의 교회를 개척하 여 옆집 아저씨 같은 ‘다님‘ 목사로서 성도들과 함께 춤추듯 살아가고 있다. 가족학을 전공한 아내와 함께 거닐면서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데 용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 옆집 같은 교회를 몇 곳에 더 세우기를 바라고 있다.
친구가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인생을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까? 이를 알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우정 관계를 살펴보 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합니다. 양해해 주세요. 제 이야기지만 들으시면서 여러분 역시 친구들을 떠올려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980년 봄, 이렇다 할 친구가 없이 생활하던 고2 시절, 초등학교 동창에게 노방 전도를 당한(?) 바람에 교회라 는 곳을 난생처음 방문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교회 안에 있는 친구들과 선후배들과의 만남은 즐거웠고 신선 했습니다. 물론 3년쯤 지나니 그 교회 생활은 시시해졌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 봄, 개척이 시작된 부산대 IVF 공동체를 만났고 저는 그 기독학생 모임을 통해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제게 삶의 활기와 의미 를 더해주던 공동체였죠. 그후 1988년 졸업과 동시에 주님은 저를 부산 IVF 간사로 불러 주셨습니다. 내심 탐내 고 있던 ‘기독교적 사역-캠퍼스 선교’를 매일 업으로 하는 사회인으로 십 수 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2005년 가을부터는 지역교회의 부목사로 섬기면서 지역교회 생활을 배웠습니다. 2년 후에 는 ‘자발적 안식년’(아내의 허락과 후원 하에 스스로 백수로서 일정한 기간을 휴식하는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 다가 2008년 가을부터 우리 부부를 포함해서 6명의 성도들과 ‘사귐의 교회’를 개척하여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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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약 35년 정도의 세월을 신자로, 사역자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두 개 정도 떠오르는 데요. 바로 ‘형제자매’라는 호칭과 ‘동역자’라는 단어입니다. 흔해 빠진 단어이면서도 피할 수 없 는 단어요, 그 의미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단어입니다. 여러분의 친구들 중에 진심으로 하 나님의 가족처럼, ‘형제자매’로 여길만한 예수 믿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친구들 중에 하나님나 라를 위해 힘쓰는 ‘동역자’로 지내는 예수 믿는 벗들이 있나요? 제 삶을 되돌아볼 때, 어떤 면에 서 제 신앙 여정은 ‘형제자매 같은’ 친구들을 얻고 ‘동역자’인 벗들을 만나고, 그러다가 여러 가 지 이유로 헤어졌다가 다시 붙잡는, 험난한 분투의 과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빌레몬서를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묵상해 볼 빌레몬서 본문(17-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So if you consider me a partner, welcome him as you would welcome me.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If he has done you any wrong or owes you anything, charge it to me.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 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I, Paul, am writing this with my own hand, I will pay it back-not to mention that you owe me your very self.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I do wish, brother, that I may have some benefit from you in the Lord; refresh my heart in Christ.
21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Confident of your obedience, I write to you, knowing that you will do even more than I ask.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
And one thing more; Prepare a guest room for me, because I hope to be restored to you in answer to your pra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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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이자 동역자 “춘근 형제! 반가워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참 이상했습니다. 피를 나눈 적도 없으면서 무 슨 형제인가 했죠. 하지만 점차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제자매’라는 호칭을 나도 모르게 즐겨 사용하게 되었습니 다. ‘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서로 누구인지 즉,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이로구 나’ 하며 이해하게 된 것이죠. 빌레몬서에는 서로 서로 ‘형제’ 혹은 ‘동역자’로 부르는 것을 자주 나옵니다. ‘형제’라는 표현을 눈여겨보십시 오.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1절), 바울이 빌레몬을 칭찬하면서(7절), 바울이 빌레몬에게 도망간 노예인 오네시모 를 종이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 두라고 말할 때(16절), 마지막으로 본문 20절에 바울은 빌레몬을 간곡히 “오 형 제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캠퍼스에서 리더가 되면서는 형제자매들을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나라 복음을 진 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이 일에 함께 수고하는 형제자매들을 더 강하게 결속시키는 단어였습니다. 저희는 다른 학생들을 향해 이 사역에 참여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일생에 걸친 동역자가 되자고 촉구하기도 했지요. 캠퍼스에서 잠깐 만나고 말 사람들이 아닌 ‘평생 동역자’가 되어 보자고 했습니다. 빌레몬서에도 이 ‘동역자’라는 표현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을 향해 동역자라고 교회 앞에서 불 러줍니다(1절). 또한 편지 마지막 지점에서는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를 통으로 ‘나의 동역자’라 부릅니다 (24절). 특히 본문 17절에서는 본심을 드러내는 부탁을 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바울과 빌레몬과의 ‘동역자’ 관계입니다.
철저하게 관계에 기초한 세 가지 명령 본문에 보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세 가지의 부탁 혹은 간청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지난 호에서 잠 시 살핀 대로 17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나를 대하듯 영접하라”고 합니다. 둘째로 20절에 보면 바울은 빌레 몬에게 “내 마음이 평안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셋째로 22절에서는 흥미롭게도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고 명합니다. 편지의 말미에 등장하는 이 세 가지 부탁을 살펴보면, 철저하게 관계에 바탕을 둔 간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 문은 오로지 세 사람 사이의 형제관계, 동역자 관계라는 관점으로만 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우정의 관 계 때문에 서로 복음의 정신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오네시모 영접 건과 관련해서 바울이 취하는 자세는 아래에 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명령으로 이어집니다. 결국은 용서와 화해의 복음 앞에 오네시모가 분명히 순종할 것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20-21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22절에서는 기도의 응답을 통해 숙소에 머물 면서 더 깊은 우정을 누리게 될 것을 바랍니다. 이렇게 세 가지 부탁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동역자 관계, 형제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관계 안에서 진심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오네시모 영접 건에 대해 살펴볼까요? 바울은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나를 동역자로 여 긴다면 나를 영접하듯 도주 노예 오네시모를 영접하라”고 말이죠. 바울은 오네시모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빌 레몬도 그렇게 대우해 주기를 명합니다. 용서와 화해의 복음은 동역자라는 우정 관계 안에서 늘 새로운 이야기 를 만들어 냅니다. 바울은 성경의 어떤 구절을 들이대거나 혹은 사도의 영적 권위를 앞세워 자기 말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 습니다. 자기의 사적인 필요를 채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용서와 화해의 복음적 사건이 벌어지도록 구체 적으로 이 관계에 자신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18-19절에서 보듯이, 만약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잘못한 일이나 빚진 것이 있으면 바울 자신 앞으로 계산하라고 말합니다. 분명 오네시모가 심각한 손실을 입혔음에 틀림없습 니다. 그냥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빚진 것을 자신이 다 대신 갚겠다는 진심을 강조하고자 지금 이 부분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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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인이 친필로 쓰고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동역자 관계라는 우정은 이처럼 복음적 사건이 또 다시 일어나게 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고민과 관련해서 같이 생각해 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 는 놀라운 설교를 하는 분들이 왜 사적인 삶에서는 그렇게 어이없이 추한 행태를 벌이는 것일까 요? 잘 알다시피 우리는 어느 나라 신자들보다 많은 예배를 통해 많은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내 가 다니는 교회의 설교가 성에 안 찬다 싶으면 얼마든지 인터넷을 통해, 설교집을 통해 탁월한 설교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의 삶은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 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4)”라는 말씀처럼 되어버린 것일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원인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저는 점점 이런 생각이 듭니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각자를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를 비롯한 우리 각 사람은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맞는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빌레몬서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 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혹은 ‘주 안에 있다’입니다. 교회나 단체로 사람들이 찾아와서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보낸다고 저절로 ‘그리스 도 안에’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지 않고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 과 진리에 순종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라는 용어는 -씨, -양, -군 이란 표 현을 대체하는 기독교 버전의 호칭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장유유서라는 위계질서 속에서 서 로를 편하게 불러 서먹서먹한 관계를 무마시키고자 하는 장치가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절 실하게 서로의 영적 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해 주는 형제자매, 동역자 관계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우정 만들기 여러분에게 진정한 친구들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속한 교회 안에도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관계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로는 오늘날처럼 아무리 훌륭한 설교가 넘쳐난다 해 도, 성경통독을 수차례 거듭한다 해도, 제자훈련-사역훈련 프로그램을 수료한다 해도, 심지어 출중한 성적으로 신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진정한 의미의 순종의 제자도를 보기는 힘들 것입니 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형제 같은, 동역자 같은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목회자에게는 친구 같은 성도, 장로, 집사가 필요합니다. 사모들에게는 우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권사와 집사가 필요합 니다. 성도들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진정한 형제자매 관계를 만 들어가고 복음을 위한 동역자 관계를 세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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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정 음
서로 마음이 통하는 벗
소리지음 27 당신의 연애자소서_한선미, 김효주 30 제이언니의 결혼일기_김용주 32 파란만장 직장생존기_김작가 34 상연정(常然亭)에서..._홍정환 36 낭만주의자의 영화이야기_정일문 38 소리가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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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 당신의 연애자소서 ] 당신의 연애에 한선미-김효주 부부가 띄우는 ‘자’상하고 ‘소’상한 편지(書)
Q.두둥, 결혼?! 안녕하세요? 저는 두분의 깨알 같고 찰진 답변을 즐겨찾기 하는 학사입니다. 저는 이제 긴 연 애를 마치고 곧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입니다. 귀엽고 예쁘고 아름답고, 누가 봐도 반할 만한 미소를 지닌 제 예비신부를 보여드릴 수 없는 점이 참 아쉽네요. 제 예비신부가 얼마나 매력적 인지 쓰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테니 칭찬은 여기서 줄일게요.
소 리 지 음
결혼식까지는 대략 반 년 정도 남았고 지금은 상견례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식장과 신혼여행 계약은 했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네요. 연애를 길게 하였음에도 막상 결혼하려고 하니 생각하고 준비할 게 너무 많더군요. 그래서인지 마음만 분주하고 진척되는 상황은 없는, 그런 느낌입니다. 두분도 이러한 기분 이미 겪으셨겠죠? 예전에 “연애는 단막극이라면 결혼은 일일연속극이다”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연애는 단막 극처럼 갈등이 생기면 각자 집에서 고민하고 친구와 얘기하면서 실마리가 풀리기도 하는데, 결혼을 하게 되면 갈등이 생긴 상태로 얼굴 마주보고 어색한 시간을 보내며 푼다는 그런 뜻이 었습니다. 또는 연애는 단막극처럼 뭔가 이벤트와 재미있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짧은 이야 기라면, 결혼은 조금은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으로 채워져 있는 길고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 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음에도 저는 아직도 결혼생활에 대해서 상상이 잘 안 됩니다. 대체 우리에 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어떤 갈등을 겪어야 할지, 어떤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지 말이죠. 물 론 저희도 지난번에 결혼하면 같이 사용할 치약이 매운 맛이어야 하는지, 짠 맛이어야 하는지 를 놓고 토닥거린 적도 있긴 하네요. 결혼생활 전반에 관한 두 분의 조언을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질문이 너무 포괄적인가요? 예를 들면, 결혼생활을 위해 이런 고민과 기도를 해 봐라, 또는 결혼 전에 이런 얘기는 미리 결 론을 지어야 나중에 더 편하다, 아니면 이러한 결혼식이나 신혼여행을 계획해 봐라 등등. 먼저 결혼하신 선배로서 초보 결혼준비생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시길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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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미│한성대99
Answer
캠퍼스 간사 6년을 포함, 20대를 고스란히 IVF에서 뒹굴거리다가 지금은 살림과 육아에 전념 중이다. 2002년 착하고 성실한 줄 알았던 형제를 만나 열심히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를 무 한 반복하다 그만, 2007년에 결혼까지 해버린 상태다. 하루에 4만 마디쯤은 거뜬히 하고 뜨개 질, 바느질, 독서 외에도 각종 오지랖을 넓혀가고 있는 아줌마.
어머, 사연 잘못 온 거 아닌가요? 이건 고민이 아니잖아요. 첫 문단부터 자매님 자랑이라뇨? 자매님이 누군지 귀띔 좀~ 제 가 가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봐야겠어요. 보나마나 이런 형제님을 만난 자매님이니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겠죠? 결혼까 지 꽤 긴 시간이 남았네요. 제가 주님 다시 오실 날을 매우 기다 리는 사람이지만, 형제님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 기도 안 할게 요. 하하하. 일단 결혼식부터 시작해 볼까요? 저는 간사로 일했던 터라 행 사 기획은 별로 어렵지 않았어요. 신부대기실에 앉아서도 홀 음 향 점검부터 시작해 PPT 잘 나오는지 테스트 해봐라, 자봉들 딴 데 가지 말고 자기 자리 지켜라 등, 어찌나 잔소리를 해댔는 지 몰라요. “신랑 입장”하고 주례 목사님이 부르셨는데, 신랑이 밖에서 안 들어오는 거예요. 다들 “드디어 신랑이 정신 차리고 제 갈길 갔다”고 웃어대는 통에 신부 입장할 때는 떨릴 겨를도 없었네요. 식을 준비하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 중요해져 요. 양가 어머님 한복 색깔은 괜찮은가, 신부 드레스가 너무 파 인 건 아닐까, 신랑 키높이 구두는 티가 많이 나지 않을까 등등. 수많은 결혼식을 다녀 본 하객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놀랍게도“여기 뷔페 맛있네” 정도에요. 그나마 다음 결혼식 갈 비탕이 더 맛있으면 바로 잊히는 거예요. 결혼식에서 중요한 건 뭘까요? 사람들에게 잘 보여지는 결혼 식이 아니라,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주인공인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의 결혼식이 되느냐가 중요해요. 어떤 결혼식을 기대하시 나요? 예비신부와 그날을 상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보세 요. 저는 기쁨이 넘치는 혼인예배가 되길 기도했는데 되돌아보 면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바다였던 것 같아요. 교회 다니지 않은 친구들도 참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결혼식이었다고 말한 것 보면 기도응답이겠죠? 그 다음은 신혼여행! 대부분의 커플 이 양가 부모님과 지인들 선물 사면서 싸우더라고요. 미리 목록 을 정리해서 형제님이 쇼핑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세요.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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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다른지 정말 모르겠고 다 괜찮아 보여도, 눈 감고 딱 하나 좋다 고 말해 주세요. 설령 처음에 골랐던 것을 결국에 다시 고르더 라도 잘했다고 넘어가 주시길. 그리고 신혼여행 가기 전에 결혼 식 후유증으로 몸살 나는 커플 많이 봤어요. 식 끝나면 피로회 복제 하나 쎈 걸로 먹어주쎄~요!! 이제 두분의 집으로 돌아오면, 신혼여행 짐에서 쏟아져 나오 는 빨래부터 진정한 결혼생활의 시작입니다. 곧 이어 카드명세 서도 날아올 테고요. 연애를 오래 했어도 같이 사는 것은 처음 이기 때문에 생활 방식은 많이 달라요. 그러니 대화와 합의, 그 리고 양보와 배려로 원만하게 넘어가세요. 치약 고르는 걸로 싸우며 살기엔 시간이 아깝잖아요.^^ 두 사람의 통장은 어떻게 합칠지, 집안일은 어떻게 나눌지, 자녀계획은 어떻게 할지, 교회 는 어떻게 해야 할지, 부부싸움하고 나면 어떻게 할 건지 미리 대화를 나누세요. 물론 미리 준비한다고 그대로 되지는 않겠지 만, 시시콜콜한 사건의 수많은 언덕을 힘겹지 않게 넘어가려면 아무래도 준비운동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형제님은 어떤 남편 이 되고 싶으세요? 신부가 형제님의 사랑을 한평생 어떻게 기억 했으면 좋겠어요? 자매님은 어떤 아내로 빚어져 가길 원하시나 요? 두분의 혼인 서약을 하객들이야 잊겠지만 서로의 마음과 인생 속에서 날로 더 단단해지고 깊어가는 결혼생활은 어떨까 요? 다들 그렇게 말하죠. 결혼은 현실이라고요. 맞아요. 현실 이죠. 그러나 그 현실을 이기게 하는 것은 서로의 믿음과 사랑 이겠죠? 그것만 100% 충전 완료 되었다면 뭐 그리 어려운 게 있 을까 싶어요. 교황님이 바티칸에서 20쌍의 결혼 주례를 하시면 서 이런 말씀을 하셨네요. “결혼은 고된 여정과 같아 때로는 어 렵고 또 때로는 격랑이 일기도 한다. 남편과 아내가 다투는 것 은 늘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 절대로 화해를 하지 않고 하루 를 끝내지 말라” 저는 제가 지금까지 한 일 중에 제일 잘 한 일이 결혼인 것 같아 요. 결혼 정말 축하해요.
김효주│고려대99 진중하고 과묵한 성격이었으나 하루에 4만 마디 하는 자매를 만나 연애시절 건당 30원하는 문 자메시지 값만 3만원 넘게 나오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는 뭐 하나 꾸준히 하는 게 없는 캐릭터인 데, 한 사람과 6년 연애 후 결혼 그리고 결혼 후 6년 이상을 살고 있다. ‘오늘 점심 뭐 먹지’가 최 대 고민인 회사원 8년차이자 두 돌 지난 딸이 하나 있고 풀코스를 두 번 완주한 초보 마라토너.
Answer
우선, 축하합니다! 물론 진짜 결혼까지 잘 골인하실 때 얘깁니 다, 하하하!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결혼준비 하다가 영원 히 남남됐다는 얘기가 종종 들린답니다. 그러니까 우선 긴 연 애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결혼식까지, 마지막 스퍼트를 시작 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운동을 좀 해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헛 둘헛둘! 결혼을 하기 위해서 보통 결혼식을 하지만, 결혼과 결혼식은 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되었든 결혼식도 하나의 의 식이기 때문에, 좀 심하게 말하면 그냥 행사 하나 거하게 치른 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다만 이 행사는 수많은 관계가 얽혀 있어서 난이도가 높아요. 배우자를 포함한 소중한 사람들이 저 마다 결혼식에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모두의 ‘로망’을 다 잘 채 워줄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 로망들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 도 적지 않거든요. 그걸 사전에 잘 조율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 미 일등신랑! 그렇다면 결혼식과는 좀 다른 ‘결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취향에 맞게 다양하게 유려하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두 사람이 사랑하며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혼식 준비하다가 결 혼준비를 놓친다면 이거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셈이죠. 날이 갈 수록 참담해지는 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다른 누구도 보장해 주거나 보장 받을 수 없는 서로의 편이 되어주겠다는 약속이 얼 마나 귀한지요. 형제님, 아직도 그 자매님을 사랑하나요? 아니 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갈라서시고요. 그렇지만 정말, 여전히 그 자매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같이 걸어온 시간이 참 소중하고 행복하다면, 그래서 앞으로 이 여자가 어떻게 변할 지 모르겠지만 평생 같이 살겠다는 마음으로 결혼하고자 한다 면,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결혼식을 위한 ‘to-do list’ 수 백 가지 중에, 맨 위에 이런 거 하나 넣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결혼식 전에 빼곡하게 한 장 이상 손 편지 쓰기” 편지 쓰는 거 쉬운 남자 없고, 편지 읽는 거 싫은 여자 없습니다. 삐뚤빼뚤 글 씨가 좀 안 예뻐도, 편지지 고르기부터 시작해서 꾹꾹 한 자씩
눌러가며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남자라면, 당신은 이미 벌써 내 여자에겐 따뜻한 차도남! 사연 중에 치약 얘기가 있었는데요, 정 안되면 치약은 각자 하 나씩 사놓고 쓰면 됩니다. 많이 안 비싸요. 가정의 평화를 지키 는 값으로는 아주 싼 편입니다. 화장실 변기커버를 올려야 하나 내려야 하나, 의견이 분분한데, 그냥 쓰는 사람이 쓸 때 성별에 맞게 쓰면 됩니다. 예비부부가 보통 들을 법한 수많은 얘기들, 이를테면 설거지는 내가 하고 청소는 네가 한다든지, 양말은 냉 장고 앞이 아니라 세탁바구니에 놓아야 한다든지 하는 얘기들 이, 저는 잘 지켜지지 않더라고요, 하하하. (앗, 아내, 사랑해!) 잔소리 한 번 더 하느니 내가 한 번 더 움직이는 게 십자가 정신 이구나,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다만 그런 얘기들을 아내가 언 제든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갖춘 남자라면 당신은 역시 훈남!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주로 결혼의 일상이 궁금 하신 것 같았어요. 안타깝게도 제가 대신 결혼해줄 수가 없어서, 그 일상을 만끽하는 것은 오롯이 형제님의 몫으로 놔둘게요. 다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는 점, 그리고 그렇 게 쌓아가는 하루하루가 형제님이 자매님을 더 사랑하게 만들 거라는 점만 기대하시길! 마지막으로 꿀팁 하나 드리자면, 신혼 여행 때 싸우지 않을 준비를 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무사히 결 혼식 마치고 신혼여행 때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는 부부 많 습니다. 결혼식에 신경 곤두세우다가 식이 끝나면서 긴장도 풀 어지고 마음도 말랑말랑해져서 별 거 아닌 일로 다투는 일이 많 은 거 같아요. 저희 부부는 “어, 지금 위험해” 방법을 썼어요. 약 간 신경 곤두서다가도 누구라도 먼저 “어, 지금 약간 위험해” 하 면 피식 웃으면서 마음이 풀리는, 요런 귀여운 방법으로 여행 내 내 큰 다툼 없이 행복했답니다. 신혼여행, 아, 좋겠다! 신혼여행 안 싸우기까지 준비하는 당신은 이미 멋진 남편! 신혼여행 후 일 상은 어떻게 사냐고요? 그냥 사는 거죠, 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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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제이언니의 결혼일기 ] ‘제이언니’가 남편 그리고 아빠로 살아가며 얻은 반성과 성찰
부부사이? 모자(母子)와 부녀(父女)사이를 넘어서 김용주│한양대95 한양 IVF 학사이며 SNS에서 '제이언니'로 불린다. 결혼, 출산과 육아의 경험은 나를 '유사 페미니 스트'로 만들었고 그런 생각들을 모아 오마이뉴스에 <제이언니의 아빠일기>를 연재했다. 대인배 아내, 토끼 같은 아들과 함께 일희일비하며 살고 있다.
“우리집은 아들만 셋이에요. 아빠나 아들 둘이나 어쩜 하는 짓이 똑같은지.” “우리집은 딸만 둘이에요. 퇴근하면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주변 부부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다. 우리 부부도 가끔씩은 서로를 ‘딸-아빠’, ‘아들-엄마’의 관 계로 환원시켜놓고 은근슬쩍 상대방을 갈구기도 하는데 이런 농담이 자칫 지나치면 부부싸움으로 번지는 경우 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농담처럼 얘기한다 하더라도 상대를 아들, 딸로 치부하는 대화의 기저에는 내심 상대 를 도움이 필요하고 보살펴야 하는 수직적 관계의 대상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화점을 다녀온 아내에게 “애나 엄마나 돈 아까운 줄 모른다”라고 말하거나, 아이를 훈육하려는 남편에게 “애랑 싸우지 말고 사 이좋게 놀아라”라며 툭 던지는 말을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발끈하여 결국엔 부부싸움의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 가 허다하다. 물론 부부 사이 연륜이 쌓여서 이런 모종의 역할극을 잘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잘만 대처한다면 아빠 같은 남편, 엄마 같은 아내의 위치에서 이른바 ‘베푸는 자’의 뿌듯함을 누리게 된다. 내 아내는 어릴 때부터 남동 생이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탓에 성인이 되어서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질 수 없었던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었 다. 나는 그런 물건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기념일 같은 날 깜짝 선물을 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진심으 로 기뻐하곤 했다. 그 행복한 얼굴과 상기된 목소리라니. 그때 내게 보여준 아내의 웃음과 고맙다는 말들, 그 따 뜻한 느낌은 지금도 선물 자체가 무색하리만치 소중한 기억이다. 반대로 내가 두통에 시달리자 아내가 나를 자 기 무릎에 눕혀서 머리를 안마해주고 새벽까지 끓인 배숙을 챙겨주었을 때는 마치 다시 보살핌을 받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를 떠나왔지만 이제는 새 엄마처럼 아내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그런 안정감이 서른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솔직히 싫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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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하지만 부부 간의 이런 ‘엄마, 아빠 역할극’을 계속 즐기다 보면 아들과 딸이라는 미숙한 상태에 머무르고 싶은, 혹은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커져 어느새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상대방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들곤 했다. 나는 어 릴 적부터 약했던 건강을 빌미로 몸이 아플 때는 주변 사람들이 마치 엄마가 나를 대하듯 걱정해 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물론 대놓고 타인에게 표현한 적은 없다.) 그래서 아내에게도 평소엔 내가 헌신적일 수 있지만 적어도 몸이 아플 때는 좀 과하리만치 나를 아들 대하듯 ‘우쭈쭈’라도 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내심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릴 때부터 건강했던 아 내는 전혀 공감할 수 없어 하는 눈치였다. 도리어 아내는 내가 건강상의 적신호를 어느 정도는 알면서도 그냥 방치해 버 리는 내 습관을 읽어냈다. 아플 기미가 보이면 쉬면서 몸을 보호하거나 병원에 가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나는 의도적으로 더 과로를 했고 병을 키웠다. 그리고는 머리를 싸매고 비장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곤 했다. 안쓰러운 얼굴로 머리에 손 이라도 얹어주길 바라며. 물론 아내는 그럴 때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병원에 보냈다. 역할극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 더 미묘한 부부 사이의 우월감과 열등감도 존재한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고 아내 와 나는 미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되었다. 연애를 할 때, 아니 신혼 초까지만 해도 콩깍지가 씌어서인지 서로가 좋게만 보 였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 시간이 꽤 흐르자 나는 아내가, 마치 한 공간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 다. 조용한 집에 단둘이 있으면서도 서로가 각자의 일에 몰두할 때면, 적절한 표현이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뭐랄까, 어떤 친밀함, 에로틱한 느낌과는 사뭇 다른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거기엔 라이벌 관계에서 생기는 미묘한 경쟁심마저 존재했 다. 배우자가 가진 어떤 재능이나 성격, 직관력, 풍성한 인간관계, 사회적 자본을 은근히 부러워하기도 하고 유년시절 부 모와의 친밀도가 뜻밖의 질투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마치 그림자에게 쫓기듯 아내는 나와, 나는 아내와 보이지 않는 경쟁 을 했다. 솔직히 우리는 상대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보다 정직하게 내면 깊은 곳에서 인지되는 어떤 우월감과 열등감을 직면하는 날엔 함께 살을 부비며 누워 있어도 서로에게서 일정한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아내를 통해, 아니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선을 보다 세밀하게 경험하며 산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나를 대면하는 경험을 한다. 물론 지금도 그 경험은 ‘현재진행형’이다. 때론 아내에게 아들이고 싶은 내 모습과 더 불어 아내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는 아빠가 되고 싶은 내 이중성을 본다. 때론 그보다 더 창피한 우월감과 열등감에 사 로잡힐 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나름의 꿈을 꾼다. 그런 거창한 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한다. 특히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많은 교인들이 ‘공동 체’를 말하고 ‘관계중심적’인 담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한 인격을 통해 나의 내면을 투영해볼 만큼 깊은 관 계에 집중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라는 역학관계는 여전히 아내와 나에게 많은 화두 를 던지는 듯하다. 나는 기대해 본다. 이 모든 감정선의 기복을 털어내고 아내에게 그저 사랑하는 남편이자 진정한 친구로 자리매김할 날을, 그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아내와 한 공간 안에서 일상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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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파란만장 직장생존기 ] 직장에서 겪는 하루하루의 분투를 담은 에세이
‘월도(월급도둑)’인가, 예배자인가 김작가│필명, J대06 올해로 학사 4년차이자 하나님의 나라를 청소년들과 함께 재미있게 살아가고 싶은 청소년 활동 가. 현재 5명의 팀원들과 함께 파란만장한 직장생활을 경험해가고 있다. (필자와의 합의에 따라 필명을 사용합니다.)
“선생님, 다음 주에 한 번 더 회의하려고 하는데 회의실 좀 잡아주세요.” 내가 담당하고 있는 학생이 회의록을 가지고 들어오며 말했다. 아이와 상의해서 적합한 날짜를 정하고 회의실을 예약했 다. 그러나 아이가 사무실에서 나가자마자 내 입에선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휴, 다음 주에도 회의를 하는구나. 또 야근이로구나.’ 학생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야간 근무가 늘어날 걸 생각하니 짜증이 솟구쳤다. 단순히 내 시간을 빼앗겨서가 아니라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나태함이 내 속에서 점점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중고생들과 함께 가을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아이들이 직접 축제를 기획하고 준비해서 당일에는 스스로 진 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역할이다. 내가 사는 지역의 청소년 자치문화를 활성화하고, 청소년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 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내 업무의 목표였다. 실제로 축제 기획단으로 참가했던 학생들 중에 는 그 시간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학생의 인생에 유익한 경험을 남기고, 한 명이라도 자신의 진정한 꿈을 발견하고, 그 목표를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전 이면서 내게 맡겨진 중요한 업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정작 내 초점이 맞춰진 곳은 아이들이 회의할 때마다 야근을 해야 하는 내 현실이었다. 내 근무 시간에는 아이들 은 학교에서 수업을 받기 때문에 당연히 방과 후에 아이들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나 역시 퇴근시간 이후로 근무가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매일 9시, 10시까지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을 한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주일에 두세 번 퇴근시간 이후에 근무하는 내 현실은 안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나태함으로 가득해져 버린 내게는 일주일에 한 번 야근하는 것도 버겁게 다가왔다. 일의 양이 벅차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냥 싫증이 난 것 같다. 올해로 직장생활 4년차, 주변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많다.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라며 순응해버린 사람 도 있고, 일부는 자신과 안 맞는 직장인 것 같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친구들 중에는 고민 끝 에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백수가 되어 시간이 많아진 그들이 여행을 다니고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사는 모습은 부러움을 가중시켰고, 그것은 다시 업무에 대한 불만과 싫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은, 어린 시절 수없이 적어 냈던 ‘장래의 꿈’을 이루어가는 자리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비전’을 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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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하는 자리도 아니고 단순히 월급을 받기 위해 참고 견뎌야
고 한다. 그렇게 좋아했던 일도 직업이 되면 싫어질 수밖
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직장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
에 없다는 이 이야기는 직장생활로 하루하루 지쳐가는 우
와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기보다
리 시대의 삶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연
는, 그저 내 한 몸 편하고 내 마음 즐겁게 살고 싶은 죄성이
함 때문에 나는 월급도둑을 넘어서서, 나를 통해 아이들에
꿈틀거리며 피어나고 있다.
게로 이어져야 할 하나님의 마음마저 가로막고 있었다. ‘선 생님 덕분에 장래의 꿈이 바뀌었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들
이 직장에 합격하여 입사했을 때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 었다. 무슨 일을 시켜도 최선의 최선을 다했고 작은 일에도
때문에 나는 이 한 명의 아이들을 향해 품은 하나님의 비전 을 얼마나 소홀히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보람을 느꼈다.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도 기뻤고 초과수당 을 주지 않아도 자진해서 야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지금
물론 야근 여부로 일에 대한 열심을 평가할 수도 없다. 삶
의 나는 어떤가. 연차가 늘고 일이 손에 익자, 처음의 마음
에는 휴식도, 건전한 여가생활도 필요하다. 머리가 아플 때
대부분을 첫 장소에 떼어놓고 온 것만 같다. 경력이 늘어나
하는 게임 한 판이 근무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고도 생각
고 경험이 쌓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작은 실수 정도는 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야근을 하든 게임을 하든, 하나님이
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고, 대충 시간을 때우려는 요령만
내게 허락해 주신 삶에서 예배자로 살아가고 있는지 ‘월도’
늘었다. 내 퇴근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회의를 하겠다는
로 살아가고 있는지 고민하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직장
아이들이 야속하고, 관리자들의 말 한마디에도 불만이 생
에서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
기고, 출장비가 지급되는지 혹은 월차를 쓸 수 있는지 같은
라 자위하는 게 당연한 걸까? 옆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비
문제에 예민해졌다. 한가한 시간에는 인터넷 쇼핑을 하고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내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여 씁
카드게임을 하거나 관심 있는 분야를 검색하며 시간을 보
쓸했다.
내는 월급도둑, 나는 이른바 ‘월도’가 되어버렸다. 해가 가고 달이 가면서 생활에 익숙해지고 또 어느 정도 몇몇 SNS에서 나와 같은 ‘월도’를 위해 엑셀형 버전을 지
나태해지는 면도 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원래 다 그렇게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에는
사는 삶’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예배자의 삶과는 거리가 멀
분명 엑셀 화면이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SNS를 재
어 보인다. 넋을 놓고 살아가고 싶은 나를 일깨우고, 잊어
구성해놓은 것이다. 컴퓨터 화면에 당당하게 SNS를 띄워
버린 비전을 새롭게 상기하는 것은 야근을 하는 것과는 비
놓고 근무를 하는 척하면서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 모르게
교할 수 없을 만큼 버겁고 피곤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
사사로운 대화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램이다. 근무
나 부지불식간에 귀찮은 존재로 변해 버린 이 아이들을 바
를 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과 이 시대 직장인의 모습을 반
라보는 내 눈빛에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사랑스
영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오가는 대화의 대부분은
러움을 담고 싶다. 볼멘소리를 하기보다는 한 아이의 목소
“아, 일하기 싫어….”이다. 다른 직원들에게 비친 내 모습은
리, 하나님이 계획하신 한 사람의 인생에 귀를 기울이고 싶
청소년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축제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
다. 대충 빨리 끝내고 집에 갈 기회만 엿보는 사람이 아니
이지만, 사실 나는 잔뜩 나태해진 채로 ‘퇴근바라기’가 되
라 내가 맡은 아이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기대하고 함께 기
었다. 어떻게 하면 일을 쉽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다.
뻐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저 그렇게 사는 ‘월도’가 아니라
하루의 삶, 한 순간이 전부 하나님 앞에 예배가 되어야 하
하나님과 함께 비전을 꿈꾸는 예배자로 살아가고 싶다.
건만, 늘 똑같아 보이는 내 하루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오늘도 아이들은 회의록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서며 내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빛이 너무나 좋아
게 야근 통보를 한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 ‘월도’
서 그들에게 전해주고자 이 직업을 선택했다. 나태함과 싫
가 아닌 ‘예배자’로서의 미소가 배어나오기를, 나는 진심
증으로 첫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으로 바란다.
도 모르겠다. 흔히들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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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상연정(常戀亭)에서... ] 소설 형식으로 풀어낸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이야기
모기 신앙 Vs. 주되심 신앙 (1) 홍정환│부경대98 하늘가족공동체의 식구들과 더불어 삶을 예술로 가꿔가는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자료개발위원(복사와 컴퓨터 수리담당).
이산화탄소의 향긋함이 느껴졌다. 나는 ‘살아서 후손 을 남겨야 한다’는 절실한 일념으로 향기 나는 방향으 로 움직였다. 향기의 진원지에서 잠시 호버링(hovering: 공중의 한 지점에 떠서 머물러 있는 비행기술) 하 며 주위를 둘러보자, 겹눈에 ‘먹이’가 포착되었다. 나 는 먹이의 가장 향기로운 곳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두텁고 질긴 껍질을 뚫어낸 후 흡혈관을 꽂았다. “망할 놈의 모기…. 물어도 꼭 이런 곳을” 식자가 뒤꿈치를 긁으며 투덜거리자 적자는 고소한 표정을 억지로 감추며 말했다. “모기가 일 년 내내 있어서 참 고통스럽습니다.” “그러게 말이네. 오죽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도 <증문 (憎蚊)>이란 시를 쓰셨겠는가?” “그런 시가 있었습니까? 정말로요?”
“그렇지. 하나 단순한 모기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어 렵고… 아마도 선생은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 오리를 모기에 비유해서 쓰신 것이겠지.” 적자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식자는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흡혈을 즐기는 것은 모기나 사람이나 매일반이야. 그리스도인도 예외는 아니고.” “아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년 전 소천하신 달라스 윌라드 선생의 《잊혀진 제자도》를 보지 못하였는가? 그 책에서 선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구원만을 사모하고 일상생활에 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일 컬어 뱀파이어, 즉 흡혈귀 같은 자들이라고 하셨다네. 우리는 드라큘라 백작 같은 흡혈귀 민담이 익숙한 서 구인이 아니니, 흡혈귀 신앙을 모기 신앙이라고 불어 도 좋지 않겠는가?”
“어허, 이 사람. 못 믿겠거든 검색해보게.” 적자는 무릎을 탁 쳤다. 적자는 냉큼 스마트폰을 꺼내 “정약용”과 “모기”라는 검색어를 입력했다. 그리고 키득거리며 검색결과를 읽기 시작했다. “‘맹호가 울밑에서 으르렁대도 / 나는 코골며 잠잘 수 있고 / 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려있어도 / 누워서 꿈 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 / 모기 한 마리 왱하고 귓가에 들려오면 / 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단다 / 부리 박아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 어이하여 뼈에까지 독기를 불어넣느냐 (후략)’ 사형, 다산 선생 이 유머 감각도 아주 뛰어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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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 (Saviour)로 고백하는 것에만 치우쳐 예수님의 주님 되심(Lordship)을 잊어버린 사람을 말씀코자 하셨던 거군요?” “그렇지. 자네가 이렇게 명민한 순간도 있구만 그려.” “사형도 참….” 적자가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을 보며 식자는 빙긋이 웃었다.
“존 스토트 선생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에서 ‘우 리는 구원자와 주님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일부 사람 들은 그렇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 원자로 받아들이고 나서 몇 년 후에 주님으로서 그에 게 복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보면, 그와 같은 가르침은 옹호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말 씀하셨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이 점차 성 숙해서 당신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 터 당신을 구주와 주(Lord&Savior)로 믿고 따라야 한 다는 말씀이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구원 받았다고 마 음 놓지 말고, 날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나는 주님 의 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신게지요?” “흠흠… 뭐 그 말도 맞네만… 거기서 멈추면 자칫 주 되심을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 묶어둘 수도 있다네.” 적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니, 제가 주님의 종이면 되는 거지, 개인적이 지 않은 주되심 고백이 또 있단 말씀이십니까?” “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허나 예수님은 우리를 둘러 싼 모든 영역의 주님이시라네. 아브라 함 카이퍼 선생은 그것을 ‘There is not a square inch in the whole domain of our human existence over which Christ, who is Sovereign over all, does not cry, “Mine!”’라고 말씀하셨지.” “사형, 지금 저 놀리느라고 일부러 영어로 하신거지 요?” “아니네. 그냥 나 잘난 척 하느라 그랬다네. 허 허……. 어허, 주먹 펴게. 손도 떨지 말고. 간단히 옮기 면 ‘만유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주 장하지 않는 영역은 인간의 삶에서 한 치도 없다!’라 는 말씀이네.” “멋진 말씀이로군요. 그런데 어디서 비슷한 말을 들
은 것 같습니다.” 적자는 고개를 한참 갸웃거렸다. “‘삶의 한 자락이라도 그리스도 주님의 것’ 말이냐?” “아! 맞습니다, 스승님.” 적자는 문 열고 들어온 스승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대 답했다. 지자는 제자들을 둘러본 후 자애로운 목소리 로 이야기했다. “얘들아, 삶 전체의 주되심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상연정의 근간에 해당하는 부분이란다. 그리스도께 서 내 몸, 내 돈, 내 인생 전체의 주님(Lord)이 되신다 는 제자도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내 영혼의 구세주(Savior)’라는 찬양을 몽환적으로 되풀 이 할 수밖에 없단다. 본회퍼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값싼 은혜’란다. 모든 삶의 영역, 시공간, 행위 가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있다 여기고 그리스도의 주권에 걸맞은 삶으로 반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모 든 일상생활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Service)와 이웃 을 섬기는 봉사(service)라는 의미에서 사역(Ministry) 이다’라는 소위 ‘일상생활사역’의 신학적/신앙적 기초 가 된단다. 그러니 널리 알리거라. ‘삶의 한 자락이라 도 그리스도 주님의 것!’” “예, 스승님. ‘삶의 한 자락이라도 그리스도 주님의 것’이 문구를 널리 알리겠습니다.” 식자는 적자의 반응에 흡족한 표정을 짓으며 식자에 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식자는 뭘 그리 꼼지락거리는 게냐?” “아, 스승님…… 그게…… 뒤꿈치가 너무 가려워 서……. 소생 결코 모기와 같은 신앙인이 되지 말아야 겠다는 결심을 다지는 중이옵니다.” <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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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낭만주의자의 영화이야기 ] 낭만 가득한 영화 리뷰
자기 자리를 향한
홀로서기 정일문│연세대87 세대를 관통하는 씨네필(cinephile)이자 신앙과 문화의 접점을 모색 하는 물과학자. 좋은 친구이자 상담자인 아내, 토토로를 좋아하는 개구쟁이 딸과 함께 옳고도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프란시스 하(2012)> 스물일곱 살 뉴요커의 꿈과 우정 그리고 힘겨운 홀로서기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 노아 바움백 감독의 <프란 시스 하>는 주제와 형식 모두 신선한 작품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접수하는 거야. 소피, 넌 출판계에서 알아주는 거물이 되고.” “프란시스, 넌 완전 유명한 현대 무용수가 되고.” 프란시스(그레타 거윅)와 룸메이트 소피(미키 섬 너)는 허구한 날 침대에 누워 행복한 공상을 하지만 머지않아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힙니다. 무용단의 견습단원인 프란시스의 별명은 ‘(애인이)안생겨요(undatable)’. 그 이유는 바로 쌍둥이 같은 절친 소피 때문이었죠. 눈빛만봐 도 통하는 그녀는 프란시스에게 그야말로 완소(완전소중한) 친구였습니다. 그런 소피가 갑자기 애인을 만나 떠 나자 프란시스는 멘붕상태가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임시 해고통지가 날아들자 그녀는 깊은 나락에 빠집니 다. 집세가 버거워 타인과 주거공간을 공유해야만 했던 프란시스는 당장 생계문제가 급했습니다. 그렇다고 캘리 포니아에 계신 부모님께로 역주행할 수도 없었지요. 무엇보다 프란시스는 자기에게 맞는 삶의 자리를 찾아야 했 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고 계속 우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영화를 보는 내내 홀로서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프란시스처럼 저도 대학 4년간 학교생활부터 교회생활까지 함께하며 의지했던 단짝 친구가 있 었어요. 그런데 4학년 말, 저와 다른 진로를 선택한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스터디를 시작했고, 교회 자매와 교제하면서 저와 더 이상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홀로 남겨진 쓸 쓸함을 이겨내긴 쉽지 않았어요. 프란시스가 유명한 무용수를 꿈꿨던 스물일곱살에 저는 당치도 않게 조지 루카스같은 영화 제작자를 동경했습니다. 80년대를 풍미했던 “Boys, be ambitious!”라는 구호와 “내게 능력주시 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빌사일삼’(빌립보서 4장 13절의 줄임말) 성공주의 로 무장했던 저는 세상에서 주목받는 인생을 꿈꿨고, 주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믿었죠. 인생의 성공을 세상적 위치와 양적 부흥으로 측정하려했던 당시 교회분위기도 한 몫 거들었습 니다. “당황하지 말고 예수만 믿으면 빡, 끝!” 그렇게 청년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강호(江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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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에 나와 보니 기존의 순진한 신앙으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가 너무 많았습니다. 날개 치며 올라가야 할 독수리의 모습 대신 전선위에 간신히 걸터앉은 비 맞은 참새 꼴로 전락하기 일쑤였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할 순간에 순결 한 비둘기처럼 굴다가 선배들에게 혼나기도 했습니다. 꿈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전공 분야에서 뒤쳐지지 않으려 고 몸부림치며 이십대를 보냈습니다. 겨우 살아남고 보니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제 모습 이 보였습니다. 한편, 홀로서기 위해 프란시스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는 성장통을 겪어야 했지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동시에 유년기의 따뜻했던 추억,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서의 평안했던 추억과도 안녕을 고했습니다. 얼마 전 방 한한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양자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長江後浪推前浪)”는 중국속담을 인용했습 니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을 대신하고 고인 물은 썩는다’는 의미로 시대의 변화를 선언하는 말이었죠. 1989년 베를 린 장벽이 무너지고 세상은 급변하는데 제 생각의 틀은 그대로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기독교적 시각으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고착화된 선입견을 깨야만 했는데 그럴 때마다 존재가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도 경 험했지요. 아프니까 청춘, 아니 아프니까 복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축복과 고난이 함께 온다는 것 도 알게 됐고요. 텍스트로만 보아왔던 그분의 말씀이 세상 속 콘텍스트와 만날 때 내안의 화학적 반응이 역동적 으로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의미도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가끔 씩 영혼의 성장통을 경험할 때면, 기꺼이 아픔을 받아들이려 노력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프란시스는 꿈과 현실의 절충점을 찾아냄으로써 홀로서기를 일단락 짓습니다. 무용보 다는 안무에 소질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삶의 자리를 찾게 된 것이지요. 비록 무 용수가 아닌 무용단 사무원이 되었지만, 프란시스는 취미로 안무를 기획하는 일에 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친 구들을 모두 초청하여 짧은 공연을 여는 날, 프란시스의 삶을 수놓은 듯한 독창적인 안무에 친구들은 감동받지요. 특히 예전처럼 소피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둘의 우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합니다. 저 역시, 하고 싶은 일과 잘 하는 일이 달랐음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십 년 전, 학사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소명 이란 어떤 직업이나 위치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뜻밖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게 됐지요. 작은 일에 충성하고 남의 시선보다는 내 스스로 작은 성취에 만 족하다보니 내가 잘하는 분야를 찾게 되었고, 주어진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옳고도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후 그토록 찾고 찾았던 내 삶의 자리가 보였습니다. 며칠 전 대학교 때 단짝이었던 그 친구에게 카톡이 왔어요. 해외파견중 억울한 사건에 휘말려 6개월간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친구. 간절히 기도하면서 고난과 씨름했던 그가 극적으로 명예회복을 한 후 다시 출국한다는 소식 이었어요. 하나님 앞에 새롭게 홀로서기를 한다는 그의 마지막 메시지는 이랬습니다.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잠 깐이었지만, 옆에서 고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해주어 고맙다,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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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 소리가 만난 사람 ]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신앙과 과학을 어깨동무한 과학자 우종학│연세대89 진행 이시종 / 정리 편집부
우종학 학사는 현재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학생 때부터 꾸준히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의 식을 가지고 살아왔고, ‘신앙-과학’이라는 주제를 평생의 소명으로 다져 온 ‘크리스천 천문학자’입니다. 그가 지향하는 관점과 태도는 무엇인지, 과학자이면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 이야 기를 나누었습니다.
*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가르치시는 천문학에 대해서,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해 주세 요.(웃음) 그 중에서도 학사님의 전공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연세대 89학번으로, 학부와 대학원에서 천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예일 대학교에서 천체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바라 캠퍼스(UCSB)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에서 연구원 으로도 일했죠.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지 5년쯤 되었습니다. 학부 시절에는 미팅 나가면 문학 전공자라고 했어요.(웃음) 천문학은 크게 물리학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 리학은 사물의 근본 원리를 다루는 학문인데요, 천문학을 천체물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연구대상이 우주, 천체 이기 때문에 물리 중에서도 특화되었죠. 백억 년 이상 된 우주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제가 집중하는 건 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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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랙홀입니다. 얼마나 무거운지 질량도 측정하고, 다양
런 건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과학을 충실하게 하는
한 물리현상의 원인도 파악하고요, 우주의 역사 속에
것 자체가 기독교적인거라고 생각했죠. 포도나무이신
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연구합니다. 연구를 위해 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가지로서 과학을 하는 것이
대형망원경을 사용하는데 손으로 들고 보는 게 아니
중요하지, 과학을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
라 거대한 관측기기를 써요. 일 년에 두세 번씩 하와
고 보았어요. 예를 들어, 기독교적 축구는 없죠. 게임
이, 칠레, 미국 애리조나 등 대형 망원경이 있는 산에
의 룰을 지키며 정직하게 임하는 선수가 충분히 신앙
가서 며칠씩 관측하고, 거기에서 얻은 데이터를 연구
적일 수 있는 것처럼, 데이터를 속이지 않고 논문을 조
실에서 처리하고 분석하고 측정합니다. 그래서 주로
작하지 않으며 자신의 명예를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에
컴퓨터를 보면서 살고 있어요.
선향 영향을 주는 방향의 연구 자세를 갖는 것이 기독 교적으로 과학을 하는 것이죠. 사실 과학 그 자체가 어 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적이기도 합니다. 창조를 연구하
* 아내 분이 전직 [소리] 간사이죠?
맞습니다. 아내는 숭실대 94학번입니다. 제가 GSF
는 학문이니까요. 한편, 학사가 되어서도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님나라
(기독대학원생회)의 대표를 맡고 있을 때 수련회 준비
운동을 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를 하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학사회 간사님들을 찾
자가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며 주변에
아뵈었습니다. 당시 아내가 [소리] 담당 간사여서 처음
영향을 줄 것인가, 저는 그게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만났죠. 그러다가 어느 날, 제가 간사님들께 밥을 사
물론, 이런 지향점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얼마나 잘 하
기로 했는데, 아내 혼자만 나왔더라고요. 아직 밝혀지
고 있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시간이 흐
진 않았지만 저는 거기에 음모가 숨어있다고 생각합
를수록 세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도 달라지는 것 같고.
니다.(웃음) 그러고는 5개월쯤 후에 결혼했어요. 제가
상당한 벽에 부딪히기도 했죠. 한국에서 교수라는 직
출장 간 3일을 빼고는 매일 만났었죠. 결혼한 지는 15
업을 갖기 전까지는 사람들과의 관계성보다는 혼자서
년 지났고 아이는 없습니다. 아이가 없으니 그만큼 일
고민하며 소위 탁상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하는
을 할 수 있었어요. 아내는 라이프코치로 일하고 있어
학문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했죠. 지금은 교
요. 구청에서 봉사도 하고 회사에 소속되어 강의도 합
수로서 학생들을 많이 만나고 지도하다 보니 캠퍼스라
니다. 가끔 저도 코치를 받는데, 코치 자격증을 따더니
는 영역에서 저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잘하
질문이 달라지더군요.(웃음)
지는 못하지만, IVF를 통해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 야 한다는 훈련을 받은 것 같습니다.
* ‘신앙과 학문의 통합’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어떤 계 기가 있었나요?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아간다는 거시 적인 개념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내 삶의 주인이 나 인지 주님인지 주도권 다툼이 있어요. 거시적인 문제
근본적으로는 학부 때 IVF를 하면서 삶의 방향성이
도 개인의 삶이 담보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나 신앙의 색깔이 정해진 것 같아요. 어떻게 삶의 영
그렇다고 개인에게 매몰돼서도 안 되겠지만 일단 출
역에서 하나님나라를 드러낼 수 있는가 고민하며 많
발점은 일상이라고 생각해요. 학문의 세계에서도 동
은 이야기를 나눴죠. 본격적으로 ‘신앙과 학문’이라는
일한 싸움이 있습니다. 아주 치열하죠. 기업에서는 돈
단어를 사용했던 건 GSF를 할 때부터였습니다. 학문
이 문제일 수 있겠지만, 학문 영역에는 명예도 걸려 있
에 대한 생각은 이때 거의 정리했어요. 과학이라는 학
습니다.(웃음) 여기도 굉장히 치열해요. 이런 싸움에서
문이 있고 기독교 신앙이 있는데, 신앙과 과학을 통합
어떻게 보다 하나님나라의 관점으로, 성경적인 관점으
하려고 한다면 ‘기독교적 과학’이 되겠죠. 그런데 그
로 살아갈지를 고민합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나라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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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랄까요. 이제는 거대한 변화보다는 제 자신, 제 주변, 제가 지도하는 학생에게 더 중점을 두고 있어요. 자기 일에 성실하고, 무례하지 않으면서 도 인간적인, 사람에게 도움을 끼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개인적인 영 역으로 축소된 면도 없진 않지만 그게 가장 우선되어야 하니까요. 학생들 도 지도교수를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기적으로 학생들을 부려 먹는 것이 아니라, 품어주기도 하고 혼도 내면서 학생들을 학자로 기르는 길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신앙과 학문의 통합은 인간관계 속에서 자연스 럽게 드러나는 것이므로 나와 연결된 관계, 즉 학생들과 동료교수들, 내가 고용한 연구원들을 어떻게 대하고 관계를 맺느냐가 관건이죠. 덧붙여 학 문적으로도 훌륭한 성과를 내야하구요. 굉장히 어렵겠죠?(웃음)
* 천문학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될 텐데요. 유신론적인 설명 과 무신론적 설명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근거를 기반으로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신앙이 그 근거들을 해석하고 재구 성하도록 영향을 주지 않나요? 반대로 자기 신념에 반하는 근거들이 나타날 때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천문학을 포함해 과학이라는 학문은 경험적인 자료에 기초합니다. 경험 적인 자료를 중시하고 거기에 많이 기댑니다. 그리고 과학은 물리적인 인 과관계를 주로 찾는데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기계적입니다. 다른 게 개 입하기 어렵죠. 인과관계가 쭉 얽혀있는 학문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탄탄 한 정합성(整合性)도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적이거나 철학적인 선입 견, 믿음이 개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믿음의 근거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크리스천은 별로 사 용하지 못하고요. 사실은 양쪽 모두가 수용 가능한데도 무신론자의 근거 로 사용되고, 크리스천은 신앙과의 대립으로 받아들인 면이 있습니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과학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현재의 과학 을 넘어서는 영역이에요. 그러나 출발하지 않으면 그 이후가 성립되지 않 죠. 이런 게 미묘한 지점이에요. 우주의 시작, 생명체의 탄생, 의식의 시작 같은 미묘한 지점은 아직 과학이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미묘한 지 점에서는 다양한 철학적 견해나 종교적 입장이 부딪히거나 연결될 수 있 죠. 저는 그런 지점에서 유신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영역들은 사실 과학이 상당히 설명해내고 있어요. 과학이 설명해 내는 자 연현상들도 물론 유신론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무신론적으로 해석할 수 도 있지요. 자연현상 뒤에 신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문제는 해석의 문제입 니다. 그러니까 과학 자체를 얘기할 때는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모두 동등 한 입장일 수 있죠. 그런데 흔히 무신론자만 과학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석하는 일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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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 중요한 지적입니다. 크리스천은 과학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학을 무신론자와 동등하게 쓸 수 있다는 인식만 활성화 되어도 굉장히 다른 태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요. 과학으로 증명되는 영역이 분명히 있지요. 반면에 자연세계를 넘어서는,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지 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실체가 있는데도 과학으로만 재단하려는 것이 문제에요. 그런 시각을 퍼트리는 것이 과학을 등에 업은 무신론자들이죠. 아쉽 게도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과학과 종교 간의 ‘창조 대 진화’로 요약 되는 논쟁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과학을 버리고 부정함으로써 신앙을 강조하려는 전략을 선택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내용을 보면 과학과 다른 것 같죠. 그런데 그게 당연합니다. 성경이 몇 천 년 전에 쓰였으므 로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적혔겠죠. 당시의 우주관이 창세기에 반영된 겁니다. 창세기에 쓰인 우주관이 우리 실제의 우주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죠. 창세기의 우주를 접하다가, 발전된 과학을 통해서 다른 우주를 보게 되니 일단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 충격을 잘 넘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얼마 나 풍성한지 과학을 통해 눈이 넓어져야 하는데, 자연이라는 책을 아예 덮어버리고 성경에만 갇혀버린 슬픈 일 이 일어난 것이죠. 다윈의 《종의 기원》 이전에도 지구의 나이에 대한 논란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과학 전문지식에 근거하지 않 고, 과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비전문가인 사람이 성경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메시지를 읽어냄으로써 과학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결국 지식을 가진 사람,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기독교가 꼴통으로 보이는 것이죠. 이것은 기독교 변증에 굉장한 걸림돌이 됩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과학을 배우며 혼란을 겪고 교회를 떠나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제일 안타까운 건 과학이 하나님의 것이고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데, 교회 가 잘못된 전략을 선택해서 점점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 된 거죠. 그걸 뚫고나갈 방법은 과학을 어느 정도 인정하 고 유신론적으로도 얼마든지 수용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 이런 관점을 담아 《무신론자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라는 책을 쓰기도 하셨는데요, 반발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관점을 타협이라고 여기는 분도 많고요.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나요? 그때 어떻게 대처하셨나 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시작한 게 1996~97년쯤으로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할 때였어요. 당시 <복음과 상황>에 유 신론자와 무신론자 모두 과학을 수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로 기고를 했어요. 그후 학교에서 마주친 IVF 후배가 저를 보자마자 대체 무슨 글을 쓴 거냐며, 어떤 지인이 우종학이란 사람이 크리스천이 맞느냐고 물었다 더군요. 제3의 길이 가능하단 글에도 크리스천이 맞느냐는 반응이 나오는 걸 보면서 솔직히 좀 충격이었어요. 1999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가자마가 미국IVP에서 나온 창조진화를 보는 네 가지 견해에 대한 책을 번역했죠. 그러면서 저도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과정을 한 곳이 시골이라 시간이 많았어요. 책을 많이 읽었죠. 지적설계론, 창조과학 관련 연구와 논문을 많이 봤습니다. 그러다 다시 <복음과 상황>에 지적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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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를 비판하는 글도 썼는데 타협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온라인상에서 논쟁도 많았고요. 저는 일단 억 울했어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런 의심을 받지 않았을 텐데, 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면 타협 한 크리스천이라고 의심하더라고요. 제 의도와는 다르게 오해하고 또 저를 비방하기도 한 글을 보면 억울했어 요. 그때는 아직 학생이었고 이후 단계적으로 훈련되면서(웃음)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별 흔들림 없이 이런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2006년 즈음에 미국 코스타에서 세미나강사로 섬겼는데, 그때 강의안이 《무신론 기 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의 초고가 되었고 2009년에 IVP에서 발간했습니다. 지적설계를 비판할 때 창조주, 혹은 지적설계자가 있다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비판하는 건, 그런 가능성을 논하는 것을 과학이라며 과학 시간에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이죠. 그건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때 신앙을 강화시킬 수 있고 설득력이 높을 수 있지만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죠. 그런데도 현재의 과학 대신 지적설계를 과학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 합니다. 저는 지적설계자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진 않았다는 거고요. 철학적 논증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보통 지적설계를 “Bad Science-Wrong Theology”라고 해요. 과학도 아니고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는 얘기 죠. 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지적설계자가 증명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반면에 과학으로 설명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적설계는 그 부분을 논증 에서 모두 버려요. 저는 하나님이 과학에서 설명되는 방식으로 주로 일하시는 것 같아요. 완전히 기적적으로 창 조했거나 스스로 발현하도록 창조했거나 둘 중 하나이지, 중간에 개입해야만 하는 창조는 왠지 불완전해 보이 죠. 중간 중간 갑자기 나타나 개입한다면 굉장히 불완전한 창조처럼 생각되거든요. 물론 그렇게도 하실 수 있겠 으나, 그보다는 우주를 마치 씨앗처럼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발현되도록 만드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게 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게 더 완전하죠. 자꾸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빈틈을 찾는 그런 방식의 논증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까워요.
*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과학 선생님들이 도전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학습교재를 만들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 진척이 되었나요?
원고는 마무리가 되었고 교정하는 중이에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개최한 포럼에서 발표를 했던 게 발 단이었죠. 그때 오셨던 선생님들이 현재의 과학교육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시며 이전에도 제 강의를 접했다 가 또 들으러 오셨다고 하더군요. 원래 갖고 있는 생각들이 깨지는 ‘멘붕’을 겪으셨다고 하더라고요. 마치 출생 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처럼 말이죠.(웃음) 학교에서 과학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고민하는 선생님들께 좀더 헌신해서 세미나도 열고, 자료집도 내고 교과서를 만들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 한 분이 진짜로 휴직 을 하시더군요. 다행히 IVF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지원을 받아 그분의 6개월 생활비를 모금할 수 있었고 ‘징검 다리’라는 연구프로젝트로 진행했어요. 반년 동안 저와 두 주에 한 번씩 세미나를 하고 다른 선생님들과도 세미 나를 했습니다. 그러니 거의 매주 모인 셈이에요. 그 내용을 다듬어서 책의 원고를 만들었습니다. 학생들이 볼 수 있도록 예화도 넣고요. 현직선생님이 쓴 책이라 접근성이 좋더군요. SFC 쪽에서 출간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 습니다. 과학교육이 아주 중요한데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여러 사람들이 연결되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겠 더라고요. 앞으로는 공인된 교과서도 만들고자 합니다. 기독교 대안학교나 주일학교가 많지만 과학교육을 어떻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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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더라고요. 창조과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과학교육을 아예 안하고요. 대안이 없으니까요.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들 대상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이분들이 어떻게 가르쳐야 하냐고 호소하더군요. 여러분이 일선에 있으니 답을 찾으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때 자료가 정말 없다는 걸 절감 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자료를 개발하긴 어려워요. 책이 나와야 그걸 가져다 쓸 테니 그게 가장 시급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 특히 아이들이 과학을 접하며 헷갈려 하더군요. 학생들을 위해 쉬운 말로 된 과학책이 필요하단 말씀에 공감합니다.
현재 과학에 대한 해석의 대부분은 무신론적이죠. 우리에게 필요한 건 크리스천 과학자가 동일한 데이터와 이 론을 가지고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목소리가 너무 없어요. 여러 전략이 필요하겠죠. 교과 서에는 구체적인 해석이 들어가면 안 될 거예요. 다만 뉘앙스가 있을 뿐이죠. 선생님들과 의논하면서 기독교에 서 사용하는 용어는 쓰지 말고 중립적으로 하자는 이야기도 했고요. 한편 기독교 대안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을 만한 더 명시적인 교과서도 만들 수 있겠죠.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쓸 만한 교재도 있을 테고요. 현재로서는 이 런 게 전무한 실정입니다.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과학을 수용하는 입장에서도 기독교 변증을 할 수 있으 리라고 봅니다.
* 신앙과 과학을 통합적으로 보는 것은 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기초에도 중요한 과제라 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 학사들이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이 분야의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책도 있을까요?
학사님들에게는 자기 자신보다는 자녀들의 문제가 더 와 닿을 것 같습니다. 과학이 신앙의 걸림돌이 될 가능 성이 있죠. 부모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예방주사 차원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좀 더 수용하 는 입장을 공부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선 제 책을 먼저 읽으시면 되겠습니다.(웃음) 숲을 보는 느낌으로요. 지 식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고학년이 되어 좀더 구체적인 필요가 있으면 IVP의 《오리진》을 추천합니다. 《오리 진》의 경우 조금 어려울 수 있으나 제 책을 읽고 더 알고 싶다는 아이들에게 전체를 읽히기보다 원하는 부분을 발췌해 읽도록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모든 고등학생이 읽을 만하진 않지만 부모님이 먼저 읽고 추천해 주시는 방 식으로요. 본인의 교양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 변증이나 전도의 차원에서도 과학은 중요합니다.
* 학사님 말씀대로 교회가 과학을 적대시 하며 놓친 부분이 아쉽습니다. 앞으로 장 기적인 계획과 비전을 가지고 교회 내에 서 과학의 대중화가 차근차근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이 과정에 학사님의 노력이 귀하게 쓰이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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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지 음
‘삶’ 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일상의 영성가 유진 피터슨을 읽다!
유진 피터슨 읽기 삶의 영성에 관하여
“피터슨의 발치에 앉아 그의 글을 번역하고 사숙한 저자의 솜씨가 경이롭다.”
_김기현(로고스서원 대표) 오랜 기간 유진 피터슨을 지적 멘토로 삼아 꾸준히 번역 작업을 해 온 양혜원은 유진 피터슨의 모든 저작을 꿰뚫는 가장 핵심 주제를 존재와 삶이 일치하는 기독교적 삶이라 정의한다. 작가다운 예리한 시각과 우리의 삶의 정황에서 유진 피터슨의 영성과 작품을 성찰하며 지금 여기서의 삶에 뛰어들 것을 요청한다.
옥명호(월간《복음과상황》편집장), 이종태(목사, 번역가) 추천!
양혜원 지음 176면|9,000원
www.ivp.co.kr
서로의 소리를 잇는 공간
소리이음
강원도의 힘!
춘천학사회 & 강릉학사회 강원도의 춘천과 강릉학사회는 학사들의 필요에 맞게 거주지별 모임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춘천지방회의 경우 춘천 뿐 아니라 수원, 부천, 평촌에서 강릉지방회는 영동지 역, 서울, 원주에서 자발적인 학사들의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중 몇 개의 모임 을 [소리]를 통해 소개합니다.
46 일상에서의 만남 _이미란 48 일상의 작은 오아시스_한나 50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_신승우 52 재경 강릉학사회의 어제와 오늘_윤원정
55 안테나 58 편집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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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만남
각자의 소명을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학사들의 삶 이야기
쌀을 씻어 밥을 짓는 드라마 이미란│한림성심대 04 남편 양창모(강원대97)와 결혼한 지 5년차 주부. 출산 후 육아에 전념하고 있으며 4살 은설이와 뱃속에 기쁨이(태명)가 자라고 있다.
요즘에 새로 재미를 붙인 건 아침드라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딸내미를 준비시 켜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내고 들어오면 아침드라마를 시작할 시간이다. 처음에는 집안일 하며 대충 보았는데 요즘은 혼자 보면서도 어찌나 몰입을 하는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을 당하고, 버려지고 빈털터 리가 되어도 보란 듯 성공하여 나타나고, 소년소녀 가장으로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 지며 힘들게 살다보면 느닷없이 재벌 부모님이 친부모라며 나타난다.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드라마인 법이다. 문득 내 삶이 드라마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마 애국가 시청률도 안 나오겠지 싶다. 누군가 보고 싶고 듣고 싶어 할 만한 에피소드가 없으니 말이다. 좀 억울하긴 하다. 특별할 건 없어도, 살면서 끝없이 희로애락을 겪는데 왜 일상은 재미도 없고 박진감도 없는 것 같을까? 2년 전, 남편은 8년 동안의 간사 사역을 마쳤다.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사 실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걱정과 갈등, 희망이 공존했는지 모른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인정하고 포기하는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미래를 준 비하는 과정으로 여기며 기술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남편이 고맙고 사랑스럽지만, 처음에는 ‘괜찮을까?, 할 수 있을까?’ 불안하고 안쓰러울 뿐이 었다. 늘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아침 일찍 나가면서도 펼쳐 놓은 QT책 이 때로는 나에게 감동을 준다. 요즘에는 강제 다이어트로 체중이 15kg이나 줄어 때 늦은 비주얼 전성기(?)를 맞이했다며 좋아한다. 새로 살 곳을 마련하고 이사할 때는 어땠는가? 새집에 대한 기대감 같은 건 넣어두 고 계약이 잘못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파워블로거가 올려놓은 멋진 인테리어를 할 수 있으리라 꿈꾸며 뜬눈으로 검색에 열을 올렸지만, 현실에서는 경제적인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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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움 때문에 전혀 실행할 수가 없었다. 최근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12월생 딸아이를 3세반으로 보내야 할지, 4세반으로 보 내야 할지, 엄청나게 고민하고 상담하고 의견을 물었다. 12월생이라서 4세반에 가면 다른 애들에게 치이지는 않을까, 그 렇다고 3세반에 있으면 친구들보다 뒤처지는 건 아닐까, 나도 열어볼 수 없는 내 마음속에서 끝없는 갈등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아침드라마처럼 배신과 복수, 출생의 비밀 같은 막장 요소는 없었지만, 내 일상의 사건 속에도 분명 고난과 기쁨과 감사 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제3자가 들여다본다면 별다른 재미나 감동 을 느끼지 못할 평범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드라마처럼 특별하고 큰 일(?)이 벌어지길 기대할 때도 있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좋은 일을 기대하기도 하고, 보란 듯이 고난을 이겨내 모두가 감동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기도 하다. 하긴, 게을러지고 현실에서 전 혀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으며 무감각 속에 살아가는 것은 눈물로 간청할 기도제목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상 의 소소한 사건 속에서 주님을 찾기보다는 포털사이트에 도움을 청하며 열을 올린다. 그러니 어느 날 닥쳐올지도 모를 큰 일(?)앞이라고 해서 내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으리란 걸 난 알고 있다. 나에게 드라마보다 더 큰 반전이라면 끊임없이 그 “매일”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지난 시간을 다 잊어버리고,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결될라치면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든 무관심하게 돌변한 다. 학생 시절, 양화진 성지에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하나님! 이 믿음의 선배들보다 더 나은 믿음을 주세요. 죽음 앞 에서도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때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목숨을 위협받는 고난 앞에 놓이 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양화진 앞에 서 있던 20살 여학생은 이제 30살이 되었다. 내게는 지금 더욱 절실한 기도가 있다. ‘밥하기 싫어 외식하고 싶은데 정해 놓은 생활비를 다 써서 또 쌀을 씻어야 합니다. 이런 사소한 일 앞에서도 그저 당신 한분만으로 기쁘고 감사합니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며 감사의 제사를 지내는 삶을 소망한다. 은설이 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남은 하루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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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소리이음
강원도의 힘! 춘천학사회&강릉학사회
일상의 작은 오아이스 - 책과 함께하는 엄마들의 이야기 한나│춘천교대02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셋째 출산 후 육아휴직 중이다. 어떻게 하면 육아와 요리의 고수(高手)가 될 수 있을지가 요즘의 고민. 모두에게 따 뜻한 ‘오픈홈’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초췌해 보이는 부자, 엄마
를 보면서 오늘 모임도 즐겁고 행복하겠구나 하는 마 음이 들어 흐뭇해집니다.
아침부터 “카톡왔숑”하는 알람이 바삐 울립니다. 모 임이 있는 날 오전에는 카톡이 쉴 틈이 없네요. 오늘은
책 나눔 하고 먹고 이야기 나누다 보니, 아이들이 어
한 달에 한 번, IVF 엄마들의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참
린이집에서 돌아올 시간이 다되었네요. 기도제목을 나
석하겠다, 조금 늦는다, 아기가 아파 오늘은 참석할 수
누고 짧고 굵게 기도하고 마칩니다. 아이들을 다시 들
가 없다, 엄마들의 다양한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쳐 업고 각자의 집으로 향하며 “다음 달에 또 뵐게요.” 하며 아쉬운 맘을 뒤로하고 문을 나섭니다. 남들 보기
오늘은 저희 집에서 모이는 날입니다. 일찍 일어나 서 남편 밥 차려주고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챙겨서 어
엔 조금 초췌해 보여도, 마음만큼은 부자인 저희들의 모습입니다.
린이집에 보냅니다. 두 아이를 보냈는데도 아직 한 아 이는 제 등에 업혀 있습니다. 모임 준비를 위해 막내는 이른 낮잠을 재웁니다. 이쯤 되면 제 몰골은 말이 아닙
공부하고 배우는 엄마들
니다. 양치하고 머리감고 대충 옷을 챙겨 입고는 청소 기를 돌립니다. 후다닥 청소를 마친 뒤에는 모임 때 먹 을 점심도 간단하게 준비해 놓습니다. 휴.
저희는 춘천에 살고 있는 IVF 출신 엄마들의 모임입 니다. 2013년 3월부터 모이
11시쯤 되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합니다. 어린이집에
기 시작하여 한 달에 한 번
아이를 보내고 가뿐하게 온 엄마도 있고, 한 명은 어린
첫째 주에 모이고 있습니다.
이집에 보내고 한 명은 등에 들쳐 업고 온 엄마도 있습
대학시절 IVF에서 나름 이
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눈 밑에는 다크서클, 꾸미지
름을 날렸던(?) 저희가 주부
않은 수수한 옷차림.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해맑은 미
가 되어 다시 만났습니다. 학교, 학번 모두 다르고 함
소를 띠며 “저 왔어요.”하고 등장합니다. 해맑은 미소
께 훈련을 받지 않아 잘 몰라도 대학시절 오고가며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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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두 번 보고 지낸 것과, 결혼과 출산 그리고 자녀양육
두 번째 책은, 마더 와이즈 시리즈의 《자유》였습니
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인지 첫모임부터 화기애애
다. 이 책은 올바른 자녀양육을 위해 어머니들을 일깨
했습니다.
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게 하고 자신 의 신앙을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는 은총을 자녀들에
결혼한 지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이 된 저희는, 특별
게 물려 줄 수 있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한 주제가 없어도 많은 이야기로 3-4시간을 훌쩍 보
엄마로서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경험할 수
내곤 했습니다. 남편과 자녀양육, 교회 이야기, 그밖에
있는지 매일매일 공부할 수 있게끔 구성되어있습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 등,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합
한 달에 한 번, 저희는 한 주 분량을 공부해 오고 나누
니다. 보통 5-10명 사이로 모이고 있는데, 모임을 시
었는데 정말 자유를 향한 갈망을 강하게 불러일으킨
작하고 몇 달 동안은 모일 때마다 새로운 멤버가 추가
책이었습니다. 다음 달부터는 본격적으로 한 과씩 나
되어서 자기소개 하며 깔깔거리던 기억이 납니다. 특
누려고 하는데, 모두가 지금보다 더 큰 내적 자유를 누
별한 주제 없이 그냥 모여도 그간 있었던 가정사와 고
릴 수 있길 기대합니다.
민을 나누기에 시간은 늘 부족했지만, 좀 더 의미 있고 깊은 나눔을 위해 독서 나눔과 기도제목을 나누는 모 임을 하고 있습니다.
엄마들의 소망
학생시절에는 책도 많이 읽고 영적인 양식을 얻고자
저희 모임의 구성원들은
무척 애썼는데,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한 달에 책 한 권
모두 결혼과 함께 기쁨도
도 제대로 읽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독서모임
누리고 있지만 아직도 아
을 시작하면서 어쨌든 책을 읽는다는 점과 책 나눔을
내로서, 며느리로서, 아이
하면서 나의 고민이 나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의 고민
들의 엄마로서 그리고 각자의 교회공동체에서의 역할
이 되어 더 쉽게 문제를 풀어가게 되는 것을 경험하는
속에서 조금은 버겁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학시
것 같습니다. 교회공동체에서는 나눌 수 없는 자신의
절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과는 달리 한가정의 아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저희 모임의 가장 큰 장
내와 엄마, 며느리로서 느끼는 영적 책임감은 모두의
점이자 모일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민인 것 같습니다.
맨 처음 함께 읽은 책은 《우리들의 거듭난 결혼이야
자녀 양육을 하며 나의 인격이 이것밖에 안 되는 사
기》였습니다. 어느 평범한 부부에게 일어난 일상의
람인가 뼛속 깊이 한계를 느낍니다. 출산과 양육으로
기적을 다룬 이야기인데, 우리들의 결혼 생활을 아주
인해 예배드리는 게 어려워서 영적으로 사막을 걷고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몇 년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저
하는 언약적 결혼의 의미와 아내의 역할에 대해 다시
희는 이 모임을 통해 갈급함에 목을 축이는 영적인 오
금 깨닫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아시스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없었던 부부만의 은밀한(?) 문제도 서슴없이 꺼내어 나눌 수 있었습니다.
대학시절, 여러 가지 가치관 속에 방황할 때 하나님 은 IVF공동체를 통해 저희의 신앙을 새롭게 세워 가셨
그 책을 마치고 <용기와 구원>이라는 영화도 보고 짜
습니다. 지금 사막을 걷고 있다고 느끼는 이 엄마들에
장면도 시켜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책이
게 이 모임이 한 줄기 빛이 되어 주님이 우리를 말씀으
아닌 영화를 함께 보니 더욱 재미있었고, 각자 받은 은
로 새롭게 빚으시고 세우시길 소망합니다. 다음 모임
혜를 실시간으로 나누니 영화의 내용이나 메시지가
은 10월 2일에 있습니다. IVFer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머리와 가슴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누구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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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소리이음
강원도의 힘! 춘천학사회&강릉학사회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듯이 신승우│삼척대89 영동지역(강릉, 동해, 삼척) 학사모임의 총무. 강릉에서 살고 있으며, 강릉지역 학사 들과의 소박하지만 지속가능한 학사운동을 꿈꾼다.
영동지역 학사모임의 어느 날 퇴근시간은 다가오는데, 아직 할 일이 많다. 설 계사무소에 다니는 나는 항상 납품기일에 쫓겨 산다. 가능하면 주일과 휴일에는 일을 안 하려고 애쓰는 편이라서 평일 야근은 불가피한 게 현실 이다. 하지만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학사회 가 있는 날.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았지만 직원들에 게 오늘은 야근하지 말자며 퇴근을 부추긴다. 강릉 기차역 부근 주택가, 2층으로 된 60평 규모의 붉은 벽돌집. 이곳에 강릉IVF 회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곳이 강릉IVF의 보금자리가 된 지도 벌써 3년이 되어간다. 7시, 회관에 도착해 보니 몇몇 학사들이 일찍 와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잠시 후 강릉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삼척에서 목회를 하는 고진용-주재선 학사 부부가 도착했다. 그리고 삼척에서 고 목사님 부부와 동승한 김정이 학사. 남편도 IVF학사지만 직장 때문에 같이 못 오고, 아직 첫돌도 되지 않은 아이만 안고 왔다. 그런 열심이 참 대단하고 고맙다. 동해에 살면서 학사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상걸 학사는, 그의 아내와 함께 매번 학사들의 식사를 챙긴다. 오늘 은 손이 많이 가는 비빔밥을 준비해 왔다. IVF 출신은 아니지만 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상걸 학사의 부인 김미 영 자매는 이제는 누가 뭐라 해도 핵심 IVFer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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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들었다. 학사회 회장이 특별히 모신 목사님께 변화되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하는, 행동하지 못하는 믿음에 대해서 들었다. 신앙의 도전을 많이 받은 시간이었다. 준비해 온 비빔밥으로 밥상 공동체를 이루며 교제하는 시간은 우리 모임에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또한 그동안 살아온 삶을 나누고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은 늘 부족하고, 헤어져야 할 때는 언제나 그렇듯 아쉽기만 하다. 보 기엔 별다를 것 없는 모임이지만 강릉IVF 학사모임은 그 자체가 은혜이고 축복이다.
왜 모일까? 뭘 해야 할까? 강릉지방회 학사모임은 영동지역 학사모임, 재경 학사모임, 재원주 학사모임으로 구성되 어 있다. 매월 둘째 주 월요일 7시, IVF 강릉회관에서 모이는 영동지역 학사모임은 삼척과 동해 그리고 강릉에서부터 15명에서 20명 정도의 학사들이 참석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 왜 모일까? 왜 모이자고 권면하는 걸까? 그리고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한 다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오늘날 신앙공동체는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우리는 매일 시간에 쫓겨 산다. 바쁘다. 믿 는 사람들과 교회를 제외하고는 모이기 힘들다. 교회 중심적인 신앙생활이 당연한 것이겠 지만, 그걸 지나치게 강조하면 장소와 시간과 내용에 엄격한 제한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 선 성경공부를 예로 들어보자. 교회 밖에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신앙서적을 읽는 모임을 해 보려고 하면 이단이 아닌가 하는 의심부터 받기 마련이다. 먹고사는 문제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이러저러한 이유로 IVF 학사모임 역시 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캠퍼스 상황 역시 어렵다고 한다. 모임에 나오는 학생들의 수가 점점 준다고 한다. 학생들 에게도 먹고사는 문제가 더 큰 관심사가 된 모양이다. 그렇다. 학사회나 캠퍼스 모두가 어 렵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학사회부터 생각해볼 때 채워갈 내용이나 이유는 뒤 로 미루고 일단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교회에서는 다음 세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렇다면 캠퍼스 안에 하나님나라를 세워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다음 세대의 지도자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캠퍼스를 떠나 사회로 나갔을 때, 지속적으로 함께 고민하며 기도하는 공동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IVF로서 추구하였던 것을 어떻게 삶속에 이루어 나가야 하는가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숙제다. 이 숙제를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한 달에 한번이라도 꾸준히 모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별히 하는 것은 없다.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같이 밥을 먹고 삶의 희로애락을 나눈다. 간사님을 통해서 어려운 캠퍼스 사역 이야기도 듣는다. 그리고 애통한 마음으로 같이 기도한다. 그것뿐이다. 너무 단순해 보이는 일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한때는 거창한 꿈을 꾸었다. 세상 속에 하나님나라를 이루어 나가겠다고. 하지만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어찌 보면 학사모임, 학사운동이 실패의 연속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은 모임 이라도 지켜 나가는 것이 작은 불씨 하나 지키는 것이라 여기고 싶다. 그 불씨로부터 언젠가는 큰 불이 일어나 길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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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소리이음
강원도의 힘! 춘천학사회&강릉학사회
재경 강릉학사회의 어제와 오늘 윤원정│강릉대90 강원도 설악산 아래,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降仙)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나 강릉대 90학번으로 IVF와 인연을 맺었다. 졸업 후 ROTC장교로 군 복무 후 제약회사에서 2년 근무하였고, 지금은 13년째 3차원 캐드 소프트웨어 유통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 출신의 자매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고, 서울 중계동에 살고 있다.
먼저 이렇게 재경 강릉IVF 학사회(이 후 재경학사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자 리가 마련되어 감사합니다. 저는 강릉대 90학번으로, 학사회에 참여한 지 20년 되었고 명칭에서 아실 수 있듯이 서울에 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재경 학사회 시작 1994년 1월, 대학졸업을 앞두고 처음으로 재경학사회를 방문했습니다. 사실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선 배들 모임에 참석하게 된 것입니다. 변변한 모임 장소도 없이 분식집에서 모였고, 다들 서울에서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듯 보였습니다. 저는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하였기에 학사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는 어려웠죠. 하지만 부대가 파주금촌 지역이다 보니 가끔 외박을 나와 외국어대 옆 지하방 모임에 참 석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이영기 학사(관동대88)님이 모임을 이끌어 주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IVP에서 나온 주제별 성경공부나 책별 성경공부 교재로 공부하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년 뒤 다 시 서울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재경학사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학사회에서 가장 힘든 점은 매번 새로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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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를 정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사들 집을 돌아다니
는 자체가 체력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거나 교회의 공간을 임대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재경
그때는 토요일 밤까지 근무하기도 했는데, 주말 영동
학사회장이 되었던 시기에는 봉천동 반지하 자취방에
고속도로는 항상 정체되었습니다. 업무가 끝나자마자
서 모였습니다. 학사모임에는 운동성이 있어야 한다는
강릉으로 출발해도 저녁 9시 넘어 도착하거나 학교별
이야기가 나왔지만, 현실적으로 객지생활에 대한 어려
모임 시간에 겨우 참석할 수 있을 정도였죠. 짧은 만남
움을 토로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나마 본가가
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갔습니다.
서울이었던 학사들은 다소 여유로웠지만, 저처럼 지방
그러고 나서 밤새 달려 주일 예배 참석하는 일도 다반
에서 서울로 일하러 온 학사들은 빠듯한 주머니 사정
사였습니다.
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침체기와 도약 학교별 모임으로 학사회가 변화 6~7년 학교별 모임이 지속되었으나 바쁜 사회생활 강릉IVF는 사실 영동지역IVF라고 봐야 합니다. 동우
로 인해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관동대의 경우, 교회 담
대, 강릉대, 관동대, 영동대, 삼척대(현 강원대 삼척캠
임목사님이 되신 학사님의 교회에서 다소 순조롭게
퍼스), 초기에는 이 5개 대학 학사들이 함께 모였습니
모일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하지만 열심
다. 하지만 학생 때 학교별로 모였던지라 학사모임도
히 활동했던 덕분에 침체기를 잘 극복하고 ‘회관 건립’
기본적으로 학교별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학
을 주제로 한 수련회도 가졌습니다. 회장, 부회장, 총
교별 모임의 주축이 된 것은 강릉대, 관동대였습니다.
부, 고문 등의 직책을 만들어 회관 건립을 위해 활동하
아무래도 4년제 대학이다 보니 배출된 학사도 많았습
기 시작했습니다. 가급적 연장자가 회장이 되고 중심
니다. 강릉대 출신의 상당수는 영동지방 출신이고 관
활동을 하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로 회관은 만
동대는 서울 출신 학사들이 많았습니다. 6~7년 정도
들어졌지만 학사회는 여전히 침체기였습니다.
학교별 모임을 하다 보니 학교별 학사회장이 선출되 었고 보통 3~4년 임기는 기본이었습니다. 학교별 모 임을 강조한 강릉대 학사회는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Band’ 활용으로 분위기 전환
고정 멤버가 생겼고 새로운 시도도 많이 했습니다. 챕 터캠프도 하고 주제별 발표회, PBS 실습, 독서 토론회
스마트폰 열풍이 불면서 학사회 ‘밴드’를 만들었습니
등, 여름에는 선교현장 방문, 자체 여름 수련회도 개최
다. 한번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그
했습니다. 가끔 대표간사님이 서울로 올라오시는 경
런데 몇 개월 뒤 알음알음 회원이 폭증하기 시작하더
우, 다른 대학 학사들과 연합모임도 가졌습니다. 간사
니 20년 가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학사들을 찾을
님이 오실 때는 출석률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녹록치
수 있었습니다.
않은 서울생활에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었으니까요.
밴드를 통해 학사모임에 대한 이야기가 솔솔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강릉, 서울, 원주 지역에 학사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다시 학사회를 세우기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가족의 날
로 마음먹었습니다. 첫 모임 장소를 중앙회관으로 정 하고 제가 주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을 몸으로 겪는 재경학
했던 간사님을 강사로 초대하고 학사들을 기다렸어요.
사회 회원들의 또 다른 향수는 ‘가족의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는지 참석자는 간사님과 저, 단
사회생활이 힘들면 힘들수록 찾게 되었습니다. 참석하
둘뿐이었습니다. 그날, 간사님과 원투원 하면서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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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리 이 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날의 사진을 밴드에 올렸더니 많은 지체들이 관심을 보였고, 서울뿐만 아니라 원주, 강릉 학사회에서도 매달 모임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도전 새롭게 시작된 학사모임을 위해 조직을 개편하기로 했습니다. 학교 구분 없이 연합모임을 하기로 하고 임원진 을 구성했습니다. 3개월의 준비기간과 별도의 모임으로 머리를 맞대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회장, 총무를 세우고 공식 출범했죠. 조직은 정비되었지만, 내부적 비전이 강하지는 않았습니다. 지방 출신이다 보니 IVF 전체 차원의 활동에 대해 소극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지방 학사회도 저희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2012년 전국학사 수련회와 2013년 EAGC에 참여하면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강릉지역 참석자가 타 지역에 비해 너무 적다는 것 입니다. 물론, 배출 학사가 적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참석자가 적으니 수련회의 감동을 나눠도 호응이 별로 없었습니다. EAGC 기간에 저는 밤마다 꿈속에서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이 저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고 당시 상황에서 그가 어떤 생각으로 행동했는지 깊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상황과 21세기를 살아가는 IVF학사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꿈 이야기는 집에 돌아 와 아내에게만 해야 했죠. 함께 참여해서 은혜를 나눌 지체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대부분의 재경학사들의 상황이 저희 강릉학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 은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오래 살다 보니 다른 지역 학사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각자 직장에서 고민이 많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가 하 나님께 순종하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계셨어요. 물론 학사만의 고민 은 아니겠지만 학사들이 연합하여 함께 기도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나아갈 바를 알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소망 나누기 추석 기간에 한 학사님의 부친상에 문상(問喪)을 갔다가 80년대 대(大)선배님, 대표간사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IVF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생각을 나눌 수 있었죠. 선배님은 이미 지방회 이사님으로 활동하고 있 지만 나름대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13년째 사역을 하는 간사님은 요즘 학생들의 변화와 어려움을 토로했습 니다. 재경학사들 역시 객지에서 겪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저는 이제 IVF에서 학사들이 방향을 주도해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중앙회와 타 지역 학사회, 주변국 IVF와도 더 많이 교류하면서 더 큰 안목으로 우리를 보아야 하 지 않을까 싶습니다. IVF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지역교회의 프로그램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타지(他地), 타국(他國) IVF의 변모를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강릉학사회는 재강릉학 사회, 재원주학사회, 재경학사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각각 임원이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외 다 른 지역에서도 학사모임이 자발적으로 구성되어 지역적 특성을 마음껏 살린 모임으로 성장, 발전하기를 기대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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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안테나 ● 중앙사무국 1. 정기 실행위원회가 9월 1일(월), 10월 27일(월)에 IVF 중앙회관 6층세미나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2. GLC 2기 기획회의가 10월 19-20일 이틀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새롭게 출범할 GLC와 기획위원들에 게 학사사역을 향한 지혜와 분별을 주시기를 기도해주 십시오. 3. 8월 22-24일 동안 태국에서 ‘GCF Ministry Consultation & EAGC 2016 Preparation Camp’가 열렸습니다. 한국에서는 이철민 간사, 송혜원 학사, 고지혜 학사가 참 석했습니다. 송혜원 학사는 이후 2016년 EAGC 대회 준 비위로 활동하게 됩니다. 위해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60-70학사회 1. 지난 8월 22-23일에 광림세미나하우스에서 제5회 여 름수련회가 열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복음의 비밀’이라는 주제로 에베소서 강해를 진행했으며, 권영 석 목사(건국대73)가 주강사로 섬겨주셨습니다. 26명의 참석하여 뜻 깊은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2. 10월에 야외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많은 학사님 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10월 7일 성경강해 - 정석률 간사(시심사역부) 10월14일 특강 - 구교형 목사(《뜻으로 본 통일한국》 저자) 10월21일 성경강해 - 정석률 간사(시심사역부) 10월28일 성경강해 - 정석률 간사(시심사역부) 11월 4일 특강 - 김종수 목사(일상생활사역연구소) 11월11일 특강 - 양정지건 학사 11월18일 특강 - 김홍빈 전도사(MVP 선교회) 11월25일 선교 특강
● 경인학사회 1. 매달 1회 금요일 저녁 Kindle afresh라는 주제로 학사 모임을 갖습니다. <11월 모임> 일시: 11월 14일 저녁 7시 30분 장소: 경인지방회 회관 강사: 미정
2. 10월에는 가을맞이 제 3회 학사사경회가 열립니다. 일시 : 10월 24-25일(금-토 1박) 장소 : 경인지방회 회관 강사 : 이시종 간사
일시: 10월 25일(토) 장소: 미정(추후 공지 예정)
● 강원(춘천)학사회
● YGM(수도권지역 학사회)
1.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함께하기 원하는 학사님 은 아래 일정을 참고해 주세요.
1. YGM 모임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30분 IVF중앙 회관 지하 좋은땅에서 있습니다. 수도권지역에 거주하 고 있는 학사님들은 언제든 YGM 모임에 참여할 수 있 습니다. 모임 문의: 유신석 간사 070-8275-6343
2. 9월 모임은 동,남,북서울,경인지방 대표간사님의 성 경강해와 각 지방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 습니다. 3. 11월 모임은 '일상,선교' 주제로 진행됩니다. 4. 자세한 모임 일정은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춘천 엄마들모임 매달 첫주 화요일 오전 11시 30분 사공은혜(한림대95) 010-5367-9120 춘천학사모임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 회관 김아주(한림대05) 010-6381-1635 ·수원 매달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최경순(한림대94) 010-9536-0703 ·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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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박은혜(한림대00) 010-9703-8815 ·평촌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 6시 / 평촌성심병원 김태준(한림대99) 010-5136-5877
2. 10~11월에 학사 강의와 사경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강사: 권일한 학사(교육대90) 일시: 10월 23일(목) 저녁 7시 장소: 은혜감리교회 <학사사경회> 강사: 한철호 선교사(교육대90) 시간: 11월 12~14일 저녁 7시 장소: 미정(한림대학교 예정)
● 강릉학사회 1. 8월 14-15일 일박으로 강릉지역 학사수련회가 있었 습니다. 풍성한 먹거리와 나눔 그리고 놀이가 있는 즐거 운 만남이었습니다. 2. 11월 14-15일(금-토) 가족의 날이 있습니다. 학사님 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3. 매월 서울, 원주, 강릉에서 학사회 정기모임이 진행되 고 있습니다. 강릉IVF학사회 밴드에 매월 모임 일정과 장소가 공지되고 있습니다. 밴드로 확인이 어려운 분들 은 아래로 문의해 주세요. 영동지역 학사모임 매월 둘째 주 월요일 저녁 7시 / 강릉IVF센터 이상걸(강릉학사회 회장) 010 9440 6224 재경 학사모임 IVF중앙회관 6층세미나실 이상석(삼척90) 010-3923-7273 김정기(강릉91) 010-2359-7951 원주지역 학사모임 강호석(관동85) 010-7346-7846 김남학(강릉90) 010-9053-5017
장소: 단국대대학병원교회 문의: 김수환(충남학사회 대표) 010-9910-9180
2. 서울에서 함께할 수 있는 충남학사모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지역적 제약이 있지만 모든 충남 학사님들께 열려있으니 연락바랍니다. 문의: 손윤형(백석대02) 010-9154-1160
● 영남동부학사회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울산 주부학사모임 격주 화요일 오전 10시 30분 박경아 010-6572-2176 포항 주부학사모임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30분 / 경주 위덕삼성타운 최유정 010-3450-3172 포항 싱글학사모임 격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김정우 010-9287-7411
● 대구학사회 1. 대구 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함께 하 기 원하는 학사님께선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대구교대 IEF모임 매주 월요일 조현진 010-3536-9814 사회복지팀 모임 매주 화요일 김희연 010-6295-0179 가정피움팀 모임 매주 화요일 정희돈 010-9775-4209 평지 모임 매주 월요일 신응종 010-4513-1391 예사모 모임(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내모임(평지모임의 아내 모임))
● 충남학사회
매주 목요일
1. 충남지방회 학사예배가 있습니다.
2. 18기 커플피움학교가 열립니다.
일시: 매월 첫 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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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일시: 9월 13일-11월 1일(7주) 장소: 대구GCF센터
대상: 커플(선착순 12쌍) 문의: 훈련담당 정희돈 간사
3. 대구지방회 온라인 소식지로 학사님과 소통하려 합니 다. 스마트폰으로도 접속이 가능하오니 많은 관심과 방 문 부탁드립니다. dg.ivfnews.org로 놀러오세요^^
● 부산학사회 부산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함께 참 여하기 원하는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일정을 참고해주 세요. TGIM(Thanks God It’s Monday) (1달에 2번 일상생활영성과 보냄 받은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모 임) 진주점 류재한 010-8529-8216 창원점 정수정 010-3620-9495 서면점 송민규 010-6774-5079 센텀점 최진욱 010-9677-8613 대구점(주부모임) 정수미 010-7538-7757 E.M.포럼(복음주의목회자포럼) 매월 첫째 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해운대미래교회 문춘근 010-5504-5790 박순흠 010-8586-2535 마마클럽(주부학사모임) 매월 1회 임지은 010-4143-4936
대학로 모임 격주 금요일 / 정지영 학사 집 박현덕 010-8950-8903 서울대병원 모임 매월 둘째 주 금요일 / 서울대병원 장예림 010-8632-4597 ·강원지역 춘천·원주 모임 한 달에 한 번 / 원주 지역 학사 집 박인성 010-4148-0902 ·경기지역 (용인)수도통합병원 모임 매주 수요일 / 장소 미정 이은주 010-5075-0704 일동병원 모임 첫째 셋째 화요일 / 국군병원교회 허난설 010-3060-4046 ·영남지역 대구 모임 매주 금요일 / 배기헌 학사 집 최선미 010-6248-8708 부산 모임 매월 둘째 주 목요일 / 장소미정 최정빈 010-5165-9170 모임 문의 양미희 간사 010-4226-0396 인터넷카페 http://club.cyworld.com/ilgfwork
● 나음누리 의료인 학사들이 지역별로 모이고 있습니다. 모임에 함 께하기 원하는 의료인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일정을 참 고해주세요. ·서울지역 평촌한림대병원 모임 격주 수요일 6시 / 이레미즈외과 정성구 010-635-2491 삼성병원 모임 매주 수요일 / 삼성서울병원 이은경 010-8892-8076 아산병원 모임 격주 수요일 / 서동대 학사 집 민수정 010-8938-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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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편집인의 글
언젠가 인터넷에서 서울사람들은 서울 외의 지역을 모두 시골인줄 안다는 하소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 무지한 서울사람 중 하나인데요. 돌아보니 지금껏 비 슷비슷한 동네에서 살아와 저에겐 ‘타향살이’의 경험이 없네요. 대학 때도 자취 없이 집에서 통학하였고 직장도 가까운 편이라 인도에서 보낸 5개월을 제외하고는 부모 님 집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 기획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생활하는 학사들의 경험을 접할 수 있었는데, 생각 을 환기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통계를 내 보니 우리 안에 적지 않은 수가 이미 타향살이를 하고 있 고요. 나에겐 익숙한 공간이 누군가에겐 철저하게 낯선 곳일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평소에 기억하기가 참 쉽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잡지입니다. [소리]의 볼륨을 높여주세요! 홀로 씨름하며 분투하는 동역자에게 “내가 너를 지지한다”고 외칠 것입니다. 후원금은 전액 [소리]의 제 작비로 사용됩니다. 후원계좌 [우리] 1005-000-990258 / [국민] 760-01-0038-627 예금주 (사)한국기독학생회
지 않은데요. 안부문자 하나, 친절한 인사처럼 나그네를
2014년 7~8월 후원자 명단
환대하는 소소한 습관을 몸에 잘 새겨야겠습니다.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자꾸만 무뎌지는 저의 마음을
강상선(*2) 국효숙(*2) 권도균(*2) 김계숙(*2) 김선미(*2) 김재원(*2) 김종기(*2) 김종수-구한나(*2) 명관선 민은혜(*2) 박설혜(*2) 박정현 박창재(*2) 송인규(*2) 여운성(*2) 오규덕(*2) 오대원 윤정범-지은실 윤창근(*2) 이상엽(*2) 이원경(*2) 이은원(*2) 임정하(*2) 장은숙 전 명환(*2) 전선애(*2) 정민경 정성구(*2) 정재성(*2) 조창훈(*2) 최말숙 (*2) 최수연(*2) 하현용-용지항 허성호(*2) 황석주 강릉(*2) 경기남(*2) 경남(*2) 경인(*3) 남서울(*2) 대구(*2) 대전중부 (*2) 동서울(*3) 북서울(*2) 부산(*2) 서서울(*2) 원주(*2) 강원(춘천)
봅니다. 저에게 허락된 당연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사무치
(*2) 충남(*2) 영남동부(*2) 전북
한편으로는 지난 4월 집을 떠나 아직까지 집으로 돌아오 지 못한 열 분을 비롯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길거리 에 내몰려 생활하고 계신 분들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도록 그리운 하루이겠지요. 어느새 익숙해진 일상과 환경 에 나태해진 저의 몸과 정신이 주변의 약자와 나그네를 향한 관심과 실천으로 새로워지면 좋겠습니다. 이 가을이 저에겐 저의 틀을 깨고 거듭나는 시간이길 바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월 후원하시는 분은 중앙지원부 (070-8275-6303)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랍니다. 학사님의 가을은 무엇으로 채워질지 궁금하네요. 오늘 하루도 안녕하시길, 온 맘 다해 바랍니다.
민혜경│편집인│sori@iv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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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제32권 제5호 통권216호 발행일 2014년 10월 1일 발행처 (사)한국기독학생회 학사사역부 주소 (121-838)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56-10 (서교동) IVF 중앙회관 전화 070-8275-6313 팩스 02-333-7361 발행인 한기수 편집장 이시종 편집인 민혜경 김경아 편집위원 국효숙 김고운 김기인 김지은 박정현 오한웅 윤창근 이상엽 조창훈 한병선 편집디자인 김아롬새미 강은아 문이선 그림 김아롬새미 표지 이재웅 제작 김효영 인쇄 예원프린팅
혼란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근원적 부르심 인격・소명・참여・윤리・선교
온전한 그리스도인 존 스토트|한화룡 옮김 144면|8,000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향한 5가지 요청
제자도의 기초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존 스토트의 명강의를 만나다! 전 세계 유일하게 책으로 출간되어 출간 이후 28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아 온 스테디셀러의 화려한 귀환! 혼돈의 세상 속에서 어떻게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 그리스도인 청년들을 향한 따듯한 애정과 담대한 요청이 담긴 강의들을 통해, 존 스토트는‘인격, 소명, 참여, 윤리, 선교’ 의 5가지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의미를 제시한다. 성경과 삶의 근본적인 주제들을 심오하면서도 명료하게 조명하는 존 스토트의 은사는 오늘과 같은 불의와 혼란의 시대에 그 진가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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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미국, 스페인 동시 출간
제일소명 세상을 향한 하나님 백성의 제자도
교회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소명의 의미가 작아지고 교회의 소명이 무엇인지 완전히 잊힌 오늘,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향한 소명을 살아 내고 있는가?
마크 래버튼 지음 | 하보영 옮김 204면 | 10,000원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어떤 신학적 문제보다, 어떤 정치적・도덕적 논란보다, 어떤 공동체적・제도적 위기보다 교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기함 풀러 신학교 총장인 저자는 본서를 통해 너무나 당연해 오히려 잊어버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교회의 가장 근원적인 부르심의 안부를 묻는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하는 당신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무엇’ 을 하며 사는 것이 부름받은 자다운 삶인지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무엇’ 에 대한 방향성과 실천 방법을 제시함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_진재혁(지구촌교회 담임목사) 오형국(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연구훈련원장), 김선일(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이태형(전 국민일보 기독교 연구소장) 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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