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227 I 2016. 08+09
더불어, 함께 살기
서로의 삶을 돌보는 집짓기┃주님께 거처를 마련해 드리는 마음으로┃공동육아:공동체를 이루는 또 하나의 방법
ⓒ 이재웅 | 상명대98
지친 당신이 찾아온다면 숲은 두 팔을 벌려 (김현중 작사, “주님의 숲” 중에서)
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www.onivf.com
목차 더불어, 함께 살기
04 09 13 17 21
소리정음
“볕좋은 동네” 이야기»정동철 용기 있는 선택, “그루터기 공동체”»박근호 아직 허락되지 않은 공동체를 찾아»하현용 서로의 삶을 돌보는 집짓기»서삼열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드리는 기도»정한신
소리지음
22 27 33 36 38 41 44
말씀산책»하창완 한국현대사 PBS»이강일 길따라 꿈따라»이왕수,박민아 함께, 이어달리기»임하은 재외학사통신원»김설규 이렇게 아빠가 되었다»문신실 유금리 라이프»지은실
소리이음
46 51 54 57 58
소리가 만난 사람»임민정,한진희,황세희 공간의 힘을 파악하고 견고한 공동체를 이루자»김택민 안테나 팟캐스트 편집인의 글
소리
깨끗하고 맑은 소리
정음
더불어, 함께 살기 IVFer들이 삼삼오오 모였을 때 가장 많이 나누는 이야기 중 하나는 ‘공동체’ 아닐까요. 함께하는 게 즐거워서,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아 서 나중에도 꼭 같이 살자고 약속했던 기억 하나쯤 있을 것 같습니 다. 여기에 그 다짐을 실천하고 계신 분들을 소개합니다. 이들의 삶 을 통해 갈등과 위기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함께 살 아가는 재미를 느껴보시면 좋겠습니다.
04 “볕좋은 동네” 이야기_정동철 09 용기 있는 선택, "그루터기 공동체"_박근호 13 아직 허락되지 않은 공동체를 찾아_하현용 17 서로의 삶을 돌보는 집짓기_서삼열 24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드리는 기도_정한신
4+ 5
더불어, 함께 살기
“볕좋은 동네” 이야기
정동철 ◆ 울산대91 “볕좋은 동네” 주민, 전(前) IVF 간사, “몸된교회” 전도사, 디자인회사“UP”직원
그리 거창하지 않은 출발
내가 IVF 간사생활을 하면서 느낀 갈증은, 우리가 배우고 바라는 대로 하나 님나라를 이루면서 사는 게 참 어렵다는 것이었다. 학사들의 고달픈 삶을 이해하기에,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라는 권면은 어느 순간 현실과 동떨어진 기대 같아서 자꾸만 주저하게 되었다. 과연 하나님나라가 땅에서 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면, 그 나라는 침노하는 자들의 것이 될 것임이 자명하다. 반면 기대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땅에 묻어 둔 불편한 한 달란트 같은 것이 되리라. 우리의 주인은 결국 다시 오실 것이고 우리 삶에서 무엇 을 실험하고 남겼는지를 물으실 것이다. 나는 마지막 평가에 대한 두려움 보다 그 좋다는 하나님나라의 실존을 이상으로만 여기고 사는 게 억울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실험을 즐겁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 무렵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그리스도인은 생의 대부분을 가정과 직장과 교회, 이 세 곳에서 보 내고 있는데 이곳에서 하나님나라가 실험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그래 서 시작된 3가지 실험이 “몸된교회”의 개척, “카페잇다”의 창업, “볕좋은 동 네”의 설립이었다. 그중 가장 근본이 되는 실험이 주거공동체인 “볕좋은 동
“볕좋은 동네” 이야기
네”이다. 각각의 실험은 별개의 시공간에서 일어났
대 가정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그리 거창할 것이 없
지만 이후 공동체라는 터 위에서 서서히 교회와 기
는, 그저 이웃으로 한 마을에 사는 것이었다. 여섯
업이 통합되고 있다.
세대가 울산 외곽의 한 아파트에 모여 들었는데 우 리는 목적도 조직도 없었고 그저 아는 사람들의 연
시작은 그다지 거창하지 않았다. 기회가 닿는 대
대 정도였다. 가정별로 독립된 공간이 보장되어 긴
로 작은 실험을 시도했고 이런 실험들이 이어져서
장감도 덜했다. 사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구조이므
현재의 공동체가 되었다. 학생 때 같이 자취를 했
로 허입과정도 필요 없었다. 공동체 이상에 대한 분
던 경험과 우리 가정과 다른 가정과의 연대는 다
명한 의지를 가진 가정도 있었으나 삶의 유익을 위
른 점도 있지만 사실 시작은 거기였다. 순전한 마
해 이주해 오거나 중심부 아파트보다 저렴한 시세
음으로 삶의 훈련을 기대했던 것이 다양한 상황에
때문에 이주한 가정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무렵
서 나침반의 바늘처럼 흔들거리면서도 본질을 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도대체 왜 모여 사느냐는 거
향하게 만들었다.
였다. 나는 이 질문에 내포된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우리에게 없어 보이는 ‘목적과 조직’에 대한 질문인
결혼은 공동체의 기반을 만드는 절호의 기회이기
것이다.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것에 앞서 내 안에
도 하지만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은 이들에겐 강력
새롭게 떠오는 질문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럼 우
한 제도적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결
리가 이상적 목표 없이 조직도 없이, 단지 모이는
혼을 잘하여 공동체의 기반 구축에 일조하게 되었
것이 즐거워 함께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가?”
다. 결혼 1년이 지난 후 아내와 나는 가르치는 사역 에 한계를 느꼈다. 삶을 바꾸는 것은 지적인 도전
나는 결혼이 우리의 아이디어가 아니듯 공동체도
만이 아니라 삶의 본을 보이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남녀가 구조적인 욕구를 가지
다. 그래서 재정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넓은 집을 임
고 있듯 공동체도 그렇다고 본다. 그래서 다양한 이
대하여 몇몇 친구들과 공동체생활을 시작했다. 첫
유에서 결혼하지만 로맨스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
아이를 낳은 직후라 긴장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 부부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면 그들이 얼
처음 가보는 그 길엔 신선한 바람도 함께 불어주
마나 대단한 삶을 사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왜냐하
었다. 사생활이 무너지는 듯했으나 기댈 만한 언덕
면 사람의 결합은 유익도 있지만 고통을 훨씬 많이
이 솟구쳤다. 불편함의 자갈길이 끝도 없을 것 같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는 갈 수 없는
았는데 그래도 꼭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2년
길이다. 또한 사랑이 흘러넘쳐야만 이타적인 삶도
여 간 포항에서의 실험을 통해 우리는 충분한 가
가능하다. 공동체 또한 그렇다. 부부가 결혼이라는
능성을 보았다.
제도적 장치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충분한 데이트 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듯 공동체도 로맨스가 필요
로맨스가 필요해
하다.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위에 이 세대와 지역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이 부어지지 않겠는가?
그후 사역지가 바뀌면서 울산으로 이사했고 가정
소리 정음
6+ 7
더불어, 함께 살기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마음속에 A4용지 7장 분량
질퍽한 공동체를 경험하고 싶은 욕구는 우리의 가
으로 정리된 이상이 있었지만, 그것을 말하기보다
슴을 뜨겁게 했고 4세대가 살림을 합치기로 결정을
는 모여 사는 즐거움을 누리고 추억을 쌓았다. 나중
내렸다. 결혼을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인
에 알게 된 사실인데, 공동체는 누군가의 이상에 동
의 철회로 부동산 거래는 무산되었고, 부동산 때문
의하여 모이지만 그 이상 때문에 또 깨진다. 누군가
에 결혼을 결심하긴 했지만 신기하게도 땅이 우리
에 의해 분명한 이상이 제시되었을 때 우리는 수동
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당장은 아니라도 장기적
적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에 동의하거나 거절
으로 공동체적 삶을 이뤄낼 공간을 물색하기 시작
하거나, 이에 따라 공동체가 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한 것이다. 땅을 사고 집을 짓는 일은 지루하고 긴
한다. 문제는 이런 수동적 자세를 가진 자들의 집
여정이 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인근에 저렴한 아파
합은 이상을 생산해 내는 시스템이 빈약하다는 점
트에 모여 살면서 점차 부동산 매입과 건축을 진행
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들은 처음의 방식으
하는 것을 꿈꾸게 되었다.
로 이를 받아들이고 남거나 거부하고 떠나기를 반 복한다. 사랑하는 공동체는 자세가 다르다. 우리에
그때, 아내가 쓰러졌다. 십이지장 부근에 암이 생겼
게 주어진 하나님의 이상을 함께 알아가는 과정을
는데 우리는 그걸 몰랐고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지
거쳤으므로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을 안다. 극단적
고 난 후에야 응급수술을 했다. 모두에게 충격이었
인 경우에는 이상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이상을 생
고 모두 힘든 시기를 보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실
산하는 구조, 즉 사랑하는 공동체는 지속할 수 있
험했던 공동체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나게 만들
다. 결국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상에 동의하
기도 했다. 우리 공동체는 기쁨을 나눌 수는 있지
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공동체
만 고통을 나누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결혼하지 않
이상엔 딱히 나쁜 말들이 없고 아름다움이 배어있
은 관계가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주력
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살아낼 힘이 없
하듯 우리도 그렇게 살았고, 이런 문제 앞에서 마음
다. 사랑과 추억도 없이 그 길을 갈 수 없으므로 충
으로 아파하는 것을 넘어서 삶을 공유하는 것은 아
분한 시간과 로맨스가 필요하다. 그들이 함께 하나
직 익숙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리고 그때의 추억
님의 음성을 듣는 과정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 무의미 했던 것도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장기적 인 계획이라 여겼던 집단 이주를 감행하게 되었다.
결혼 같은 공동체를 기대하다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삶이 엉기기를 기대하고 결 혼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인이 우리에게 산골짜기 땅을 저렴한 값에 주겠 다는 제안을 했다. 그 땅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모
유금리 정거장
든 가산을 정리해야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신혼집 을 장만하는 것 같은 일이었다. 산골짜기라는 점과
포항과 경주 사이 유금리라는 시골에 위덕삼성타
한 공간에 여러 세대가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삶
운이라는 생뚱맞은 아파트가 있다. 우리의 신혼 보
은 더없이 불편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좀 더
금자리로 적격지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가격이 예
“볕좋은 동네” 이야기
술이었다. 19평형 전세가가 당시(2011년) 2천8백만
간과 숙고의 공백이 허용된다. 그리고 자매들의 의
원, 매매가도 5천만 원 정도였으니 이보다 더 좋
지가 결정적이다. 우리는 오래 기다리는 것이 어색
을 순 없었다. 15평형에는 국가임대 아파트도 있
하지 않다. 외부로부터 빠른 결단을 강요받으면 그
는데, 1천만 원 정도의 보증금에 월세가 5만5천 원
냥 그 사안은 거절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면 되니 휴대폰 요금 수준에서 주택문제가 해
중요한 결정은 아주 빨리, 단번에 이뤄지는 기현
결되었다. 땅을 사고 집을 짓기 전에 비용을 아끼
상도 더러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고 목돈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정거장이었다. 그
만지시고 우리 모두가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래서 이주민 모두가 매매가 아닌 전세로 입주하 여 짐을 풀었다. 그리고 정거장에서의 실험이 다
유금리에 주저앉다
시 시작되었다. 떠날 준비를 하는 자들은 삶이 가벼워야 한다. 다 집단이주의 시세차액은 “카페잇다”의 시드머니가
양한 실험을 하는 동안에도 우린 떠날 준비를 하며
되어주었고, 아파트 하나를 매입하여 공동체 커뮤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유금리라는 마을 자
니티 센터로 사용했다. 결혼에 준한 이상 공유와
체에 대한 고민이나 의지는 대단하지 않았다. 그렇
조직을 위해 세 가정이 재정통합이라는 모험도 감
게 2년이 지났는데 우리의 삶은 생각보다 무거워
행했다. 우리는 이를 ‘올인멤버’라는 이름으로 부
져 있었다. 우리로 인해 이주해 온 세대수가 열 세
르기로 했다. 교회는 지역성의 안정감 때문인지 빠
대를 넘어선 것이다. 땅을 사고 귀촌을 원했던 올
른 속도로 자리를 잡았고, 이주 당시 20여 명에 불
인멤버와 달리 이후에 합류한 이들은 유금리 정
과하던 교회 멤버가 현재는 90여 명이 되었다. 하
거장을 좋아했다. 그들이 이곳을 좋아한다면 남겨
나님나라를 위한 세 가지 실험이 유금리 정거장에
두고 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았
서 활력을 얻었고 삶의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다. 책임감, 의무감 같은 감정은 아니었다. 우리가 정해놓은 노선과 하나님의 의도가 다를 수 있다는
공동체생활을 하는 여러 사례를 듣다 보면 우리 공
불편함 쪽이 맞을 것이다. 그동안 사랑하는 공동체
동체와는 사뭇 달라서 어색하다. 보통 형제들이 이
에게 이 세대와 지역에 대한 이상을 주실 것이라는
상적인 제안을 하고 연대를 결정하면 자매들은 이
믿음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과연 이 순간에
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연대에서 오
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 자문하고 있었다. 먼저 이
는 피로감은 오롯이 자매들의 몫이 되어버린다. 그
주민 증가의 원인과 그들의 기대감은 무엇인지 생
런데 “볕좋은 동네”에 모여 사는 주민들의 얘길 들
각해 보았다.
어보면 상황이 좀 다르다. 굳이 행복순위를 따지자 면 첫째는 아이들, 그리고 자매들, 다음엔 동네 길
첫째, 비용이다. ‘7포세대’라고 하지 않던가? 연애,
고양이들, 그 뒤가 형제들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 꿈, 희망을 포기
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이상을 생산하는 시스템 차
하고 사는 젊은이들에게 유금리 정거장은 파라다
이의 결과인 것 같다. 모든 회의는 충분한 논의 시
이스이다. 둘째, 문화이다. 대도시에 비해 유금리
소리 정음
8+ 9
“볕좋은 동네” 이야기
는 문화의 불모지다. 문화를 소비자의 관점에서 보
갈등과 고됨 등 함께 살아서 예상한 어려움들이 쏟
면 당연한 관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의 생산자
아져 나왔다. 이게 다는 아닐 것이라는 불안감마저
가 되었다. 아이를 함께 키우는 문화, 홈스쿨링, 입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공동체
양, 텃밭 가꾸기, 함께 운동하기, 점심 같이 먹기 등
를 시작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그런 문제를 별로 소
유금리는 새로운 문화가 가득한 곳이 되고 있다.
개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공동체는 이 모든 것을
유금리가 르네상스를 맞은 것이다. 분명 젊은 세대
넘어서기에 충분한 감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가 싸다고 움직이는 세대는 아니다. 상대적 박탈감
그랬다. 네 번째 가정에게 우리는 자랑스럽게 권했
을 이길 만한 문화적 힘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
고 고난을 넘어서는 감격을 소개했다.
다. 셋째, 통합이다. 신앙과 삶의 통합을 줄기차게 주장해 온 올인멤버의 헌신과 열정에 동의하는 것
지금 우리는
이다. 우리는 딱히 대단한 신앙교육이 없음에도 영 성훈련에 상당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 적은 내용
지금 우리는 이 지역에 단단히 터를 잡으려고 땅을
을 다루지만 그것이 삶이 되도록 애쓰기 때문이리
샀다. 그리 좋은 땅이 아니라는 평가도 있었고 비싼
라. 이런 이유로 유금리 정거장인 “볕좋은 동네”가
만큼 투자 가치가 없다는 말도 있었다. 이 터를 사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 위해 우리 네 가정 모두 보금자리를 팔아야 했 다. 감추인 보화 때문에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사는
지난해 올인멤버들은 오랜 논의 끝에 유금리에 주
농부처럼 우리가 그곳에 하나님나라가 있는 것을
저앉기로 결정했다. 우리 세대에 대한 사명으로 받
알았으므로 모든 것을 팔아 그 땅을 샀다. 아브라
아들이니 속이 편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실험
함이 막벨라 굴을 시세보다 엄청나게 높은 가격에
에 뛰어들었다. 마을정치에 참여하여 선관위에 가
바보처럼 매입하듯, 우리도 단순히 여기 남으려는
담하고 동대표와 입주민대표를 배출했다. 지금 유
목적만으로 그렇게 했다. 아브라함에게 그것은 하
금리는 이들의 노고로 아파트 도색과 도시가스 유
나님이 가나안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믿음의 표현
입공사가 한창이다. 올인멤버에도 변화가 일어났
이며 나중에 돌아올 후예들을 위해 준비된 귀향지
다. 그동안 우리의 행보에 응원을 보내왔던 한 가
였다. 우리도 그것을 믿으며 기대한다. 또한 우리는
정이 네 번째 올인멤버로 합류한 것이다. 우리에게
실험 중이므로 성과를 말할 수는 없다. 부디 우리의
이 가정은 아주 특별하다. IVF 출신이거나 사역자
실험의 결과가 이후에 실험하는 자들에게 자양분
라는 공통분모와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가정이
이 되길 기도할 뿐이다.
처음으로 합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어려움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네 번째 가정에게 이런 삶을 권할 만큼 우리는 행 복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3개월간 지속되었다. 그간의 소통의 어려움, 섭섭한 마음, 재정적 불안,
더불어, 함께 살기
용기 있는 선택, "그루터기 공동체" 박근호 ◆ 한국외대94 평신도가 주인이 되는 교회를 꿈꾸며 사역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서울에서 IVF 간사와 교회 청년부 목사를 하다 가 7년 전에 고향 광주로 귀향했다. 최 근에 공동체 하우스를 짓고 "그루터기 공동체" 사역을 시작했고, 특수교사 일 을 하다가 휴직 중인 아내(노경화)와 세 아이(건우, 은우, 시우)가 있다.
알람소리에 잠을 깬다. 아침이다.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첫 째 건우는 학교로, 둘째 은우는 유치원으로 보낸다. 그런 다음 나 도 아침밥을 먹고 공동체하우스로 내려가 커피를 내려 마신다. 잠 시 마당을 둘러본다. 개똥을 치우고 개밥을 챙겨주고, 집 앞을 치 우고 잡초를 뽑는다. 그동안 잠에서 깬 셋째 시우는 아내와 놀고 있다. 아이와 놀고 책을 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잡일을 하고 나면, 어느새 아이들을 데려와야 할 시간이 된다. 둘째를 데리러 유치원 에 가면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기회를 틈타 아빠 차를 타 고 같이 집에 온다. 오후에는 주로 사람들과 부대낀다. 어떤 이는 약속을 하고 찾아오지만 불쑥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저녁은 각 종 만남이 이어지는 공적활동의 시간이다. 밤이 되면 다시 아이들 과 보내야 한다. 아이들이 잠을 자야 나의 하루가 마감된다. 개인 기도를 하고 책을 조금 읽으면 잠이 든다. 이렇게라도 책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소리 정음
10+ 11
더불어, 함께 살기
요즘 내 생활은 거의 한 장소에서 이루어지
무언가 이루어지는가 싶었지만 결국 현실
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인 실천의 자리는 외롭고 왜소했다. 결국
다. 주일에는 하루 종일 공동체가 북적인다.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상황이 되었다. 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환대의 공간을 창
쩔 수 없노라고 항복을 한다 해도 누가 뭐
출해낸다. 이렇게 거의 매일 한 장소에서 세
랄 수 없었다.
끼 집밥을 먹으며 살고 있다. 별로 대수로 울 것 없는 공동체에서의 일상이다. 그러
그러나 한번 내딛은 발걸음을 다시 되돌리
나 이런 일상을 얻기 위한 대가는 결코 작
기는 싫었다. 두렵고 떨리는 발걸음이지만
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자고 마음먹었다. 공동체하 우스를 짓기로 했다. 오랜 기간 집짓기를
그때는 그랬다. 사역을 하고 있었지만 사역
공부했다. 설계업체를 선정하고 업체와 함
에 재미가 없어지던 차였다. 부목사로서 교
께 땅을 살폈다. 공부하며 준비한 시간이 1
회에 필요한 부속품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년, 설계업체를 선정하고 땅을 보러 다니고
것 같았다. 일상의 삶에서 제자가 되는 것
설계를 고쳐갔던 시간이 1년, 무려 2년 동
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관점이 생
안 집짓기를 준비했다. 다음에는 시공업체
겨나고 있었지만, 현실은 너무도 명백하게
를 선정했다. 사비를 털고 대출까지 받아서
그와 달랐다.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마침내 나무집을 지었다. 친환경적이며 생
아이들과 부대끼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이
태적인 집을 짓고 싶어서 최대한 시멘트를
대로 흘러가기만 하는 내 삶이 안타까웠다.
쓰지 않았다. 유해한 자재는 사용하지 않고,
내가 그동안 노력해왔던 삶의 결론도 보지
MDF가 거의 없는 집을 지었다. 아내는 집
못한 채, 현실과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그저
을 짓는 내내 선택에 선택을 거듭했다. 선택
그런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을 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짓는 현장에 가서
아내를 설득했다. 공동체적 교회를 세우자
일꾼들을 격려하고 모든 과정을 기록했다.
고 했다. 이도 저도 결정하지 못하고 힘들 어하는 아내를 오랫동안 설득했다. 함께 하
3개월 만에 집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집에
는 청년들에게도 자주 꿈을 이야기했다. 이
들어가기까지 2개월 가까이 걸렸다. 집 하
대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무언가 시작
나가 지어져서 사람이 살게 되는 일은 결코
할 거라고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제안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웃과의 관계도, 행정
도 했다. 함께 살자고 했고, 함께 집을 짓자
적인 절차도 쉽지 않았다. 변수가 생길 때마
고 이야기했다. 공동육아를 하고 대안적 교
다 돈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육을 실천하자고도 했다. 말로만 해서는 안
빚을 져야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
될 것 같아서 이를 위한 모임도 만들었다.
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럼에도 집이 완
용기 있는 선택, "그루터기 공동체"
성되었고 이제는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공동체적 교
믿고 싶었다.
회를 세우고자 하는 나의 진심이 통하는 것 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깨닫게 되는 것
한동안은 우리 가족과 용기 있게 나를 따른
은 그들도 나름대로 답답함 마음에 여기까
지체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럴듯한 간
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답답함이
판도 없었고 홍보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하나둘씩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어
렇게 되기까지 길고 지루한 설득의 과정이
느 날은 모임공간이 부족했다. 그때 당황스
필수적임을 결국 인정하게 되었다. 쉽게 이
러움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그런
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공동체
흥분에 휘둘리기보다는 내 자리를 꾸준하
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절
게 지키며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는 것이
실히 깨달았다.
나의 일이었다. 누군가 공동체를 찾아오면 몇 주간은 그저 지켜본다. 그러다 공동체와
최근에 오랫동안 함께한 형제 하나를 내 손
함께할 의지가 보이면 그때 물어본다. 그렇
으로 내보냈다.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게 조금씩 사람들이 모였다. 몇 개월 함께하
결정이었다. 사람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걸
다 보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사역의 원칙으로 삼았던 내가 이러한 결정 을 내린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함께 살아가는 건 비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데도 내가 왜 그러한 일을 감행했을까? 서
청년들의 자활을 돕고자 공간을 열고 적은
서히 공동체를 보는 전체적인 시각이 생겨
비용으로 살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살기
남과 동시에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력도 보
좋은 공간이 사람 사는 문제를 모두 해결해
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보이자 양단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청년들이 들어오자마
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때도 있다는 것을 알
자 관계가 삐걱거렸다. 서로 생각도 달랐고
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결정을 했다. 이 글
기대치도 달랐다. 아이 셋을 키우는 우리 가
을 쓰는 지금도 속이 쓰리다. 그 친구와 함
정과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청년들의 삶의
께 했던 추억이 떠오르고, 그 친구와 함께
방식도 참 달랐다. 이렇게 다른 상황에서 어
있던 사진에 눈길이 머문다. 꿈에도 여러 번
떠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
나왔다. 공동체적 교회를 시도하지 않았다
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큐티 나눔과 기도
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게다.
회, 식사시간을 만들었으나 이내 우리가 겉 돌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좀 더 자연스럽게
꼬박꼬박 월급을 주던 직장에서 뛰쳐나온
관계가 쌓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들의 생
지 1년이 넘었다. 지금도 수입이 안정적이
활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기로 했다. 그러면
지 않다. 카드명세서가 날아오고 월말이 되
서 조금씩 다시 세워나가려고 한다.
면 긴장이 된다. 그런데 어디에선가 예상치
소리 정음
12+ 13
용기 있는 선택, "그루터기 공동체"
못한 돈이 들어온다. 이렇게 은혜로 산다. 지난 1
다볼 수 없는 길이긴 하다.
년간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이 새로운 현장에 과연 잘 들어선 것일까
이 글을 쓰기 위해 1년 전에 공동체를 여는 예배
스스로 묻는다. 이제는 적어도 매일 아침 ‘오늘
를 준비하며 만든 공동체 기획안을 살펴보았다.
도 의미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헛
불과 1년 전의 구상인데도 지금의 내 생각과는
된 생각과 싸우지는 않는다. 정말 하고 싶지 않
다르다. 지난 1년의 삶의 궤적이 나의 생각을 바
은 일을 하거나 있기 싫은 곳에 있어야 하는 일
꾸었다. 이런 삶을 앞으로 5년, 10년 살게 된다면
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본질에 걸맞게 살 수 있
나는 어떠한 생각을 하며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될
는 자유를 얻어 행복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까. 그게 내가 이렇게 살며 기대하는 바이다.
래저래 하게 된 일도 많다. 지방에서는 정착하기 힘들다는 아카데미 운동을 꽤 활발하게 하고 있
누군가가 내게 1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다. IVF학사회의 GLC+도 광주에서 런칭해 사역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동일한 선택을 할
을 구체화하고 있다. 4년 만에 성서광주 수련회
것이다. 우리에게 삶이 주어진 것은 고난 없이 애
도 시도하고 있다.
매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따르는 삶이
지금은 고통의 이유와 내용이 예전과는 달라졌
어야 하니까 말이다. 그게 우리가 배워온 것 아니
다. 전에는 마냥 답답하고 헛사는 것 같아서 힘들
겠나.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결국 가야할 길 아닐
었다면, 지금은 여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나 자신
까. 결국은 용기가 관건이다. 말하는 것에 그치
을 보는 게 힘들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생각보
면 안 된다는 거다. 누가 용기 있게 본질적인 것
다 먼 길인 듯하다. 쉽게 완성되거나 단시간에 결
을 선택하며 살아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과를 보지도 못한다. 본질적인 일을 시도하되 결
용자들을 많이 보고 싶다. 그래야 나도 용기를 더
과는 아직 미미하다. 또한 상황과 현실이 지나치
낼 테니 말이다.
게 거대해 보인다. 이렇게 해서 이 일이 완성되는 것을 내가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계속 힘을 내야 한다. 계속해서 희망적인 전망을 일구어내며 독려하며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 서 야 한다. 그러다가 힘들고 지칠 때면 어디론가 숨 어버리고 싶다. 그럴 때마다 숨어서 기도를 한다. 가만히 기도하는 자리에 앉아 나의 삶을 되돌아 보노라면 제자리에 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자리는 바로 이곳이 며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은 바로 이것이라는 결론 에 이른다. 부르신 그 자리였지만, 한치 앞도 내
더불어, 함께 살기
아직 허락되지 않은 공동체를 찾아 하현용 ◆ 감신대97 제주살이 3년차로 소리(2살), 지음(9 살) 두 아이와 지항, 현용 부부가 함께 적응해 가는 중. 아름다운 협재 해변 앞 에서 게스트하우스와 식당을 운영하며, 다섯 가정이 "떨기나무 공동체"로 모여 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교회는 내 인생의 큰 부분이었다. 교회는 놀림 받던 내 가 잠깐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고 주눅 들어 구석에 있는 나에게 앞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곳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교회 였기 때문에 기대도 많았다. 하지만 점점 그 기대는 실망으로 변해 갔다.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교회들과 관련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고향 교회에서 느꼈던 모순이 이후에 속했던 교회에서마저 반복 되는 걸 보며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질 문에 도달했다. “성도의 삶에 토대가 되어야 할 교회가 왜 삶의 일 부분이 되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갈증이 깊어가던 때에 ‘공동체’라는, 오래되었지 만 새롭게 느껴진 단어는 시원한 샘물처럼 느껴졌다. IVF 학생 시 절, "이레하우스"와 "아름다운마을공동체" 등을 방문하며 생활공 동체에 관심을 갖다가 협동간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공동체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사를 사임하면서 고민만 하던 것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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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함께 살기
간사를 사임하면서 당시 교회 목사님의 권유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이
로 전임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교회
런 만남을 통해 ‘공동체’에 대해 교회 밖의 다
안에서 근거리에 모여 살면서 육아나 신앙생
양한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느
활을 함께 하는 생활공동체를 이루는 것에 대
꼈다. 이분들은 이미 오랫동안 갈등을 조율하
해 자주 언급했고 이에 공감하는 분들과 모임
고 의견이 나뉘면 토론하고 새로운 이들을 교
을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사역자로서 내가 할
육하는 일을 해왔다. 물론 교회도 이런 일들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을 해왔지만, ‘권위’에 기대지 않으면서 갈등
이사를 가기도 어렵고 주말에 교회일이 있다
을 해결하고 ‘사실상 결론이 난 사항’이 아닌
보니 그 모임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
것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해서 접점을 찾아가
려웠다. 그 모임 역시 주로 삶을 나누고 공동
는 모습을 교회 안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
체 관련 스터디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
물론 그들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내
고 교회 멤버로 구성하다 보니 외부에서 비슷
가 잘 모르는 부분을 교회 내부에서뿐만 아
한 고민을 하는 이들과 연대하기가 어려웠다.
니라 교회 밖의 많은 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 다는 것을 알았다.
결정적으로 공동체를 통해 원하는 바가 사람 마다 조금씩 달랐다. 육아, 거주환경, 예배, 교
앞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나는 이미 교회
육, 재정 등 많은 부분에서 우선순위와 기준
생활을 포함해 생활의 틀이 잡혀 있는 이들
에 차이가 있었다. 나 또한 원하는 바가 있었
이 새롭게 생활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쉽지
기에 이런 시기를 보내며 몇 가지 새로운 고
않다고 결론 내렸다. 교회를 사임하고 생활공
민이 생겼다. ‘내가 공동체를 바라는 것은 단
동체를 이루거나 그쪽으로 방향을 잡은 이들
지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심으로 실체가 없는
과 함께하기로 결심했다. 사임을 할 즈음 나
것을 좇았던 것일까? 내가 원하는 모습의 공
처럼 간사로 있던 한 가정을 만나게 되었고,
동체는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나?’
그 가정도 우리와 비슷하게 변화의 시기를 겪
다시 시작점에 선 것 같았다. 교회 안에서 생
고 있었다. 우리는 1년 정도 같은 동네에 살면
활공동체를 시작해 보려고 했던 나의 시도는
서 자주 만나며 아이도 함께 키웠다. 동시에
이런 질문들만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우리가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는지, 다 른 공동체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지내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교회 전임사역을 할
지 여러 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때 서울시에 ‘마을 만들기’, ‘협동조합’ 등 지
안면이 있던 제주의 한 간사도 공동체에 대한
역시민들이 연대할 수 있는 정책이 많았다.
마음을 가지고 몇 가정이 모여서 함께 지낸다
나는 지역신문사 기자, 마을공동체 만들기
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관계자, 협동조합 관계자, 공동육아 어린이 집 관계자 등 생활공동체와 관련된 다양한
생활공동체로 살아가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
아직 허락되지 않은 공동체를 찾아
니지만 제주로 이사를 가는 것은 더더욱 어
이 시기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서
려운 결정이었다. 우리 두 가정의 네 사람은
로 잘 알지도 못하고 아직 친하지도 않은 이
각자 또 부부끼리 먼저 고민하는 시간을 가
들과 함께 버티는 게 너무 큰 어려움이었으
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다른 부부는 제
리라 생각한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이 시
주로 가기로 결심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제
간은 쉽지 않았다.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
주로 가는 것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다. 가
아왔는지 속 깊은 이야기도 한번 나누어 보
서 어떤 일을 할지 준비된 것도 없고, 이미
지 못한 우리들이 견디기에는 어려운 시간
모여 있는 가정들도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이었고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 바랄 뿐이었
없는데 제주로 가는 것은 너무 큰 모험이라
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공동체를 시작하려
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아내가 염려한 부
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분은 모두 사실이었기에 딱히 아내의 생각
왜냐하면 공동체를 시작하는 이들이 빈번하
을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결
게 겪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심이 확고한데다 결정적으로 제주에서 올라
는 처음 시작하는 이들이 경험해서는 안 될
온 친구와의 대화로 마음이 열려 우리 두 가
경험을 하며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정은 제주에 있는 가정들과 합류하기로 결 정했다.
그 깊은 수렁에서 나오는 데 무엇보다 시간 이 필요했다. 당사자인 부부가 회복하는 시
서울에서 제주로 가기로 결정하고 실행하기
간, 서로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서
까지는 1년이 걸렸다. 다른 가정은 먼저 제주
운함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시간, 그냥 함께
에 내려갔는데 우리는 집이 빠지지 않아 기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사로운 시간
다린다는 것이 그만 기간이 길어져 버렸다.
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마저 우리에
그런데 그 사이 큰 사건이 터졌다. 먼저 내려
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제주에서 정착
간 가정이 건축업자에게 정착자금을 사기당
하는 일 자체가 공동체를 이루는 일 못지않
한 것이다. 이 일은 이제 막 공동체를 시작하
게 힘들었다. 나는 장사를 시작하면서 시간
려는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
에 쪼들리고, 한 친구는 직업을 찾아 몇 군데
다. 아직 어떻게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갑
직장을 옮겨 다니고, 간사를 마친 친구는 새
자기 지워진 짐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우리
로운 직업에 몰두했다. 세 가정의 아내들이
모두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한 해에 모두 아이를 낳게 되어 육아에 지쳤
당사자 부부의 상심이 너무 컸고, 그 시기를
는데 도움을 받을 곳도 위로를 해줄 사람도
다른 이들이 함께 하기에는 아직 서로를 잘
찾기 어려웠다. 집을 짓는 일을 하는 형은 팀
알지도 못했고 각자의 삶도 아직 제주에 적
원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있었고, 두 딸
응 중이었다. 이 일을 겪은 부부는 오랫동안
과 함께 사는 누나는 집안의 여러 가지 사정
교제하고 돌봐준 이들과 함께 있었더라도
이 겹치고, 우리는 각자 자신을 챙기기에도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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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허락되지 않은 공동체를 찾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을 보냈다. 게다가 우리는 목회적인 부분을 감당하는 사람을 따 로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서로에게 목회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마음 은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서운했다. 무엇인가 줄 것 이 있는 사람도, 그 옆에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사람도, 받아야 할 사람도 받지 않아도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도 모두 부담스럽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어떤 실수를 한 것일까? 우리는 어떤 잘못을 했기에 이런 어려운 환경에 처했 을까? 누구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준 것일까? 우 리 모두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진실하게 나누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서먹해지는 관계도 어쩌지 못하는 시간을 보냈다. 후 회스러웠다. 특히 많은 이들이 경험한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다 보니 조언을 듣기도 어려웠고, 먼저 공동체를 경험한 이들도 우리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 주기가 힘들 었다. 가끔 선배들의 조언은 깊이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였지만 우리의 상황을 정확 히 대변해 주지는 못했다.
우리가 이런 시간을 보내며 의연하게 대처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각자 말없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서로를 더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각자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 이상을 짊어지고 왔다. 이제야 조금씩 안정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 는 방향을 잃었고 한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서로 편안한 일상을 가질 수 없었고 지역 사회와 연계하지도 못했고 함께 육아를 하거나 공동식탁을 갖는 일도 어려웠다. 그동 안 깜깜한 터널을 사력을 다해 헤쳐 왔고 이제 그 끝을 보며 잠시 한숨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서로를 모르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알게 된 것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주체가 우리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각자 가지고 있던 이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고, 서로를 받아 주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며 결국 하나님께 우리가 이루려고 했던 바를 올려드릴 수밖에 없 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에게 왜 이런 시 간을 보내게 하시는지 묻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우리가 공동체로 살 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생활공동체든 사역공동체든 예 배공동체든, 어떠한 모습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해야 할 공동 체의 모습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고 또 부단히 찾아갈 것이다.
더불어, 함께 살기
서로의 삶을 돌보는 집짓기
서삼열 ◆ 영남대98 5년 전, 아내(최상미, 계명대00)를 만 나 결혼에 성공했다. 올 연말에 고대하 던 쏭쏭이(태명)가 태어난다. 최근에는 '헬조선'에서 어떻게 공동체가 함께 먹 고 살지 고민 중.
들어가며
저희는 경북 청도에 모여 사는 공동체입니다. 처음부터 집을 지어 함께 살자고 계획했던 것은 아니고요. 신앙 여정 속에서 허락된 지 체들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오다 보니 어느 날 집을 짓게 된 거죠. 다들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었고, 재정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값싸고 좋은 집을 짓고 싶다는 욕심만 가득한 상태였죠. 당연히 집짓기 과 정은 좌충우돌,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답니다. 하늘 아버지의 눈에 이런 저희들이 딱해보였는지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만나 무사 히(?) 공사를 끝낼 수 있었죠. 모든 공정을 마치고 실제로 함께 살 아 보니, 집짓기 자체에만 목적을 두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할 수 있 고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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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함께 살기
“하하호호” 공동체
견하고 집을 지어 살게 되었습니다.
저희 공동체는 “더함 공동체”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곳을 선택한 이유
정확한 이름은 “하하호호”입니다. 지금 함께 살 고 있는 이들 중에는 ‘더함이’가 아닌 분들도 있
저희는, 교통과 상권이 좋은 영남대 근처에 살고
거든요. 저희는 경북 청도군 다로리에 살아요. 씨
있었어요. 직장도 가까웠죠. 처음에는 의성이 어
없는 감과 소싸움으로도 유명한 곳이죠. 다로리
떨까 했는데, 의성과 영남대는 생활면에서 너무
마을 입구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산 지 2년이 다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직장이 고민되더라고요.
되어 가네요. "하하호호"는 여덟 가정에 아이들
그때 앞서 말한 IVF 두 가정을 만나게 된 거죠.
열셋, 청년이 다섯(남3,여2)명으로 모두 35명이
이들은 청도에 땅을 보러 다니는 중이었어요. 청
나 됩니다. 이 많은 사람이 때로는 가깝게, 때로
도는 영남대에서 차로 15분, 인근에 경산이나 대
는 느슨하게 생활공동체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
구 같은 도시를 끼고 있어 생활환경도 나름 좋은
습니다.
편입니다. 이사를 해도 같은 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었고, 지불해야 할 대가를 최대한 줄이면서도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다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곳이 청도였습니다.
더함은 공동체를 꿈꾸며 시작했습니다. 대표로,
집짓기 과정
리더로 IVF를 함께 섬겼던 이들이 졸업한 이후 에도 각자도생이 아닌 공생하는 길을 찾아보자
2013년 이른 봄부터 청도에 땅을 보러 다녔는데,
며 모이기 시작했죠. 집을 짓기 전, 저희는 차로
6월쯤 지금의 땅이 나왔어요. 동네 입구에 위치
10분 반경에 모여 살고 있었어요. 하지만 모두 직
한 땅인데 주인이 급매물로 내놨더라고요. 그래
장생활을 하다 보니 일상을 공유하기가 어렵더
서 바로 가계약을 했고 9월에 최종계약을 했습
라고요. 공동체를 꿈꾸며 왔는데 정작 주일 외에
니다. (가계약을 한 이유는 매입에 필요한 나머
는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 때도 있었죠. 이때쯤
지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분할측
더함은 ‘생활권을 공유하는 교회를 세우는 공동
량으로 땅을 세 등분으로 나누었죠. 하나는 더함,
체’라는 방향을 잡게 됩니다. 그리곤 함께 살 방
나머지 둘은 동료 두 가정을 위한 공간이었죠.
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어요. 도시 외곽의 싼 아파 트에 모여 살거나, 농촌의 헌집을 사서 수리하는
땅을 가계약한 순간부터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것 정도가 가능한 방법이겠다 싶었습니다. 그 와
설계사와 건축업자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재정
중에 우연히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주택을 지
만 넉넉했다면 갑의 입장에서 찾을 수도 있었겠
으려고 땅을 알아보던 IVF 동료 두 가정을 만나
지만, 저희는 아니었어요. 좋은 설계와 멋진 집
게 되었죠.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땅을 찾으러 탐
을 싸게 해 줄 수 있는 분을 찾아야 했습니다. 가
험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의 땅을 발
을쯤 설계사님을 만나 각자가 그려온 설계도를
서로의 삶을 돌보는 집짓기
가지고 조율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에
시더라고요.
는 목조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장로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목조주택의 장점에 대해서 알게 되
땅이 수도원관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확인
었죠. 장로님이 저희 사정을 들으시곤 흔쾌히, 믿
하는 것도 필요해요. 수도를 만드는데 원관과 2
을 수 없는 가격으로 공사를 해주시기로 했습니
미터 조금 넘었는데도 비용이 300만원 넘게 나
다. 겨울을 넘기고 2014년 2월, 드디어 기초공사
왔거든요. 도시는 몰라도 시골에서는 아주 중요
가 시작되었고 7월에 다섯 채의 집이 완성되었
한 부분이랍니다.
답니다. 돈은 어떡하지 어떤 땅을 사야 하나 저희의 경우, 비용은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한 돈과 집을 지을 땅은 도로와 맞물려 있어야 해요. 아
대출을 받아 마련했습니다. 대출은 크게 부담스
니면 허가가 나질 않거든요. 저희가 매입한 땅이
럽지 않았어요. 지자체마다 다르겠지만 농촌지
원래는 밭이었는데 바로 옆에 마을 도로가 있었
역에는 새롭게 집을 짓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
어요. 그래서 당연히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
출을 해주는 제도가 있거든요. 청도 같은 경우는
는데, 아뿔싸, 그 도로가 사유지였던 거예요. 길
6,000만원까지 가능했는데, 이자는 2%대에 3년
은 길인데, 주인이 있는 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거치 17년 상환이에요. 조건이 좋다 보니 신청자
주인의 동의가 있어야 허가가 가능하대요. 그런
가 제법 많아 모두 받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
데 토지대장을 떼어 보니 땅 주인의 출생연도가
런데 대출담당자가 젊은 사람들이 농촌 마을로
무려 1900년! 동네에 아무리 수소문 해봐도 누군
이사 들어오는 게 보기 좋았는지 더함이들 모두
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설
받게 해주시더라고요. (웃음)
계를 변경해야 했어요. 이 일로 고생을 꽤나 많 이 했죠.
그리고 집짓기를 할 때 비용과 관련해 놓치기 쉬 운 지점이 있는데요. 땅의 경우 평당 비용 외에도
사고 싶은 땅이 나타났거나 소개 받았을 때는 반
추가로 드는 비용이 꽤 있어요. 측량도 새로 해야
드시 지적도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토지이용규
하고요. 전답일 경우 대지로 전용을 해야 하는데,
제정보서비스 http://luris.mltm.go) 실제 땅 모양
그 비용이 저희 같은 경우에는 1,000만원이 넘었
과 지적도의 땅 모양이 다를 수도 있어요. 또 건
어요. 세금도 있고 취득세도 있어요. 집도 마찬가
축이 불가능한 땅도 있고요. 건폐율도 땅마다 다
지예요. 평당 가격도 중요하지만 어떤 재료를 써
르거든요. 그리고 가능하면 지자체에 가서 건축
서 어디까지 공사를 해주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
담당자를 미리 만나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답니다. 예를 들어 토목이나, 싱크대, 조명, 데크,
거예요. 저희가 사는 읍사무소 담당자도, 미리 자
조경, 수도, 오폐수 같은 건 평당 가격에 포함되
신과 상의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하
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이 가격만 해도
소리 정음
20+ 21
서로의 삶을 돌보는 집짓기
1,000만원이 훌쩍 넘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 반
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시간들을 지나고 나니
드시 체크를 하셔야 합니다.
서로 조금씩 더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알고 나면 이해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과정 중에 겪은 어려움
집이 가까이 붙어 있으니 여름에는 아무래도 방 음이 어려워요. 아이들을 혼내는 것도 눈치가
첫 번째는 위치선정 문제였어요. 같은 땅이라
보였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적응이 되고 나
도 좋은 위치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제비뽑기
니, 이젠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또 한 가지, 우
를 해서 정하는 공동체도 있겠지만, 저희는 양
리 식구끼리만 맛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는
보를 통해서 해결했어요. 공사를 다 하고 나니
거예요. 배달이 안 되는 지역이라 때로는 통닭
양보를 한 사람은 또 다른 은혜를 누리게 되더
이나 피자 같은 도시 음식을 사와서 다 같이 먹
라고요. 두 번째는 시공자와의 소통 문제였어
곤 하는데, 매번 먹고 싶을 때마다 같이 먹는 게
요. 집을 지어주신 장로님이 성격이 화끈(?)하
힘들잖아요. 그렇다고 냄새는 풍기는데 혼자만
고 고집도 있어서 중간 중간에 꽤 애를 먹었네
먹기도 애매한 경우가 있으니까 머뭇거리게 되
요. 소통 없이 그냥 잘 해주시려고 해서 오해도
죠. 혼자 먹는다 해도 쓰레기 배출하는 날에는
생기고 그랬어요.
반드시 들통이 나거든요!(웃음)
마을 분들의 텃세가 없었냐는 질문을 받은 적
나가며
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조금 그랬어요. 그런데 이장님과 관계를 잘 맺었고, 공사 도중 어버이
집짓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사실 더
날에는 마을회관에 가서 찬조도 하고 인사도 드
중요한 것은 ‘공동체’입니다. 내 집이 아니라 지
리고 하면서 괜찮아졌어요. 공사를 마친 후에는
체들과 더불어 살아갈 집짓기인 거죠. 일상을
마을 전체에 감사 떡을 돌리기도 했고요. 그래
공유하며 서로의 삶을 돌보고 더불어 생존하기
서 살면서도 마을 분들이 어렵게 하는 일은 크
위한 집짓기입니다. 이런 집짓기, 한번 해 보지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않으실래요?
함께 사는 현실
덧붙여, 아직은 서툴지만 저희가 농사(여름에 는 자두, 가을에는 감)도 조금 짓고 있습니다.
집을 지어 같이 산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매
자두청과 감말랭이도 만들어서 판매하니 구매
일 서로를 보는 게 곤욕일 수 있죠. 일상의 나를
해서 한번 드셔 보세요. 제법 맛이 기가 막히답
보여주어야 하고, 일상의 상대방을 봐야 하니까
니다!
요. 마음이 어려워도 봐야 하고 보기 싫어도 봐 야 하니까요. (웃음) 몇 번의 갈등을 겪긴 했어 요. 해결 과정에서 눈물을 보일 정도로 심각하
* 페이스북에서 “하하호호”를 검색하세요.
일상기도문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드리는 기도 완전한 공동체로 온전한 사귐을 보여주시는 삼위 하나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역시 다른 이들과 더 불어 살아가며 공동체를 이룰 때 온전해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끝없이 자기 자신을 주장하고 타 자의 존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갈등하고 반목할 수밖에 없 는 우리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주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외롭게 홀로 살아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 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모든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시고,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묶어주시 며,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바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공동체가 깨어지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무너져 버린 척박한 공간이 되 어버렸습니다. 팍팍한 생활 속에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연약하고 실패한 이들을 돌보며 함께 살 길을 찾기보다 는 서로의 삶에 대해 무관심하고, 이웃의 고통에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각자도생의 모습이 편만해 있습니다. 또 한 편으로는 공동체를 운운하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람들을 착취하고 거짓 위로를 주며 조직 자체를 배불리기에 급 급한 거짓 공동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주님의 피값으로 세우신 공동체의 본질을 잃어 버린 채, 허우대만 멀쩡한 건물을 자랑하고 사람들의 세력 다툼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오, 하나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통 받고 실망하며 좌절하고 있는 주님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깨워주시고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살 아가는 즐거움을 일깨우고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들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담아 내면서 관계를 세워가고 구조와 내용을 만들어 가는 이들, 세상 속에서 연대하는 이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 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주거를 공유하며,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함께 마을공동체를 만들며, 함께 교회를 이루는 이들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주님께 간절히 구하오니,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강고한 구조 속 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로움과 지혜로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깨어지고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수많 은 모순과 죽음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정사와 권세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그런 세상 속에서 오히려 생명 과 평화와 사람다움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때로는 함께 살아가는 일이 불편하고 어려우며 의심과 오해로 인해 마음 상하는 일도 있지만, 세상 속에서 동역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바라보며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 오늘도 우리 곁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 가운데 교 회와 공동체를 세우신 그 지혜와 경륜을 찬양합니다. 주님이 펼쳐내시는 놀라운 이야기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좋은 향기를 내는 꽃으로 피어나리라 믿습니다. 영원하고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한신 ◆ 부산대94 IVF 일상생활사역연구소 기획연구위원(peacemaker99@hanmail.net). IVF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아내(한은정, 동아대 99학번)와 두 아들과 더불어 성숙하는 가정을 꿈꾸며 살고 있다. 캠퍼스에서 법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일상생활사역연구소에서 일터와 삶터를 살아 가는 영성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TGIM 운동, ‘일상기도’ 운동 및 ‘일상학교’ 운동에 힘쓰고 있다. 전자책 《일과 기도 : 일터와 직장을 생 각하며 드리는 일상기도》(일상생활사역연구소, 2014)를 펴냈다.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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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산책
사울처럼? 다윗처럼! (삼상18~27장)
하창완 ◆ 부산대82 84년 부산지역 IVF가 개척될 때부터 같 이 시작하였고, 아내도 IVF에서 만나고 큰딸도 IVFer인 행복한 골수 IVFer. 국어 교사로부터 출발해 목회자가 되어 부산 에서 ‘하나님나라를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찐한 공동체’를 꿈꾸며 맑은물 교회를 개척, 12년째 섬기고 있다.
쫓는 사울의 쫓기는 심정
상급을 내걸면서 충동질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놈 도 더 강한 적을 만나 죽게 되겠지. 상급 중의 으뜸
사울이 보기에 현재 이스라엘의 최대 난제는 다윗
은 왕의 사위가 되는 것, 내 딸을 주겠노라고 약속
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향한
하자. 흐흐흐.’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 사울은 자기 미래의 암울한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울은 다윗에게 싸움에서 이기고 오면 큰딸을 주 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이 이기고 돌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던 게야. 저놈은 필시 백
아오자, 이건 아니다 싶어서 아무 말도 없이 딸을
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나를 몰아내고 왕이 될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둘째
놈이야.” 사울은 혼자 있을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
딸 미갈이 다윗을 좋아한다는 말에 또 같은 조건
렸다. 다윗이 전쟁에서 이기면 이길수록 사울을
을 내걸었다. 이번에는 다윗이 더 적극적으로 약
옥죄어오는 위기감은 더 커져갔다. ‘이놈을 어떻
속을 지키려 나오는 통에 결국 그 딸을 다윗과 결
게 하나?’ 사울은 날마다 그게 숙제였다.
혼시킬 수밖에 없었다.
“옳거니!” 사울은 무릎을 쳤다. ‘전쟁은 날마다 있
‘거 참, 다윗이 전쟁 하나는 정말 잘한다니까… 인
고, 전쟁터에서는 언제든지 죽음이 눈앞에 있게
생이 왜 이리 뜻대로 되는 게 없어!’
마련. 그냥 쭉 전쟁터에 내보내면 되는 거야. 계속
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
사울은 갈수록 다윗이 미워졌다. 아니 이제는 두렵
지 해? 미갈도 그러더니 이젠 아들놈마저, 이런 천
기까지 했다. 전장에서 다윗을 죽이는 계획이 실패
하에 애비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하자, 그는 아들과 대신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트집 을 잡았다. 다윗을 내손으로 죽이겠노라고 선언했
다윗을 추격하던 부하들이 가져온 소식에 사울은
다. 비록 요나단이 다윗을 변호하였지만, 뭐 그까
그만 눈이 뒤집혔다. 놉 땅에 있는 제사장이 다윗
짓 거야 아들인데 뭔 일이 있을 리도 없고, 사울에
과 부하들에게 무기와 음식까지 내어주며 도망가
게 동조하는 신하도 제법 있는 마당에 다윗 하나
게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사지를 부들부들 떨면서
잡아 없애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사울은 제사장까지 죽이라는 광기 어린 명령을 내 렸고, 그날 85명의 제사장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기회는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딸 미갈이 다윗의 아내이니 딸만 도와주면 만사 오케이. 사울은 즉시
(그 사이 다윗은 블레셋 진영의 가드 왕 아기스에
자객을 딸네 집으로 보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게 망명 갔다가 여의치 않자 유다광야로 도망가서
발생했다. 미갈이 아버지 사울의 계획을 도와주기
굴에 은거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서 사울 치하에서
는커녕 오히려 훼방을 놓은 것이다. 세 번이나 자
먹고 살기 힘든 사람, 압제 당한 사람들이 다윗 주
객을 보냈으나 미갈 때문에 다윗은 도망치고 말았
변으로 몰려와 사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윗
다. 이런 젠장, 사울은 미갈을 불러다 호통을 치는
과 함께 살게 되었다.)
것으로 분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반역이다! 반역자들을 결코 살려둬서는 안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한다더니, 다윗이 요나단의 도
된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다
움으로 아예 사울의 진영을 벗어나 멀리 달아났다
윗을 따르다니, 이게 반역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는 첩보를 듣고서 사울은 노발대발했다. 요나단에
사울은 반역자들을 색출하려고 군사들을 동원해
게 너무나 화가 난 사울은 결국 아들에게 할 말, 못
서 광야를 이 잡듯이 뒤졌다. 다행히 다윗이 어디
할 말을 다 퍼붓고야 말았다. “이런 패역무도한 놈
에 숨어있는지 알려주는 충성된 백성들이 있었다.
을 봤나? 네 놈이 한 짓이 뭣인지 알기나 해? 넌
사울은 급히 군사를 몰아 다윗을 추격하였다. 사울
네 애비의 자리와 네 자리를 넘보는 놈을 도와준
은 산 이쪽으로 추격하고 다윗은 산 저쪽으로 도망
거라고!”
가고, 숨 막히는 추격전이 펼쳐졌다. 그런데 갑자 기 전령이 긴급하게 사울을 찾았다. 블레셋이 쳐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사울은 몇날며칠을
어왔다는 것이다.
계속 허공을 향해 소리쳐댔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도대체 왜 저 모양인지, 애비의 심정을 그
하필 이럴 때 블레셋이라니, 사울은 못내 아쉬웠지
토록 몰라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죽고 나면 이 자
만 블레셋이 쳐들어온다는 데야 별 수 없지 않은
리는 자기 차지가 되는데, 그걸 딴 놈이 꿰차려고
가? 급히 군사를 돌려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둥 마
하는 마당에 오히려 그놈을 두둔하고 도와주기까
는 둥 하고는 다시 다윗을 추격하러 나섰다. 이번
소리 지음
24+ 25
말씀산책
에는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다. 사실 유다 광야에는 수많은 동굴이 있어서 정 확한 정보 없이는 추격하기가 쉽지 않다. 이번에도
‘아무튼 이번에도 경황이 없어서 내가 그놈을 축
분명 어느 동굴엔가 숨어있을 것이기에 하나씩 뒤
복해 주고 받아들여 주는 말을 했지만, 내가 그놈
져보는 수밖에 없었다.
을 받아주다니, 어림도 없는 얘기다. 아무튼 그놈 이 살아있는 한 내 왕국에 평화는 없어!’ 사울은 마
그런데, 그곳에서 그만 사울은 끔찍한 경험을 하고
음을 다잡으며 돌아갔다.
말았다. 굴을 뒤지다가 용변이 급해서 혼자 어떤 굴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홀가분하게 나왔다. 그런
얼마 뒤,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 망
데 거기에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있었고, 사울이 볼
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을 보던 중에 다윗은 용감하게 사울의 겉옷자락 을 베어갔던 것이다. ‘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그러면 그렇지. 놈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했다. 근데 내가 그놈 앞에서 왜 그런 말을 했을꼬?
원래부터 짐짓 나를 위하는 척하면서 전쟁에서 이
부하들 앞에서 창피하게시리… 뭐, 그때야 살아났
기고, 그것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린
다는 안도감에 그놈을 칭찬하고 축복을 빌어줬다
다음 나라를 삼키려 했던 게야. 내가 호락호락하
마는, 그놈이 왕이 될 거라고 한 말은 내가 경솔했
지 않으니 드디어 이스라엘의 적군에 가담해 버리
어.’ 다윗이 사라지자 사울은 다윗 앞에서 앞뒤 안
지 않았느냐? 나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온 국민
가리고 내뱉은 말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에게 알린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는 모조리 다 명백히 이스라엘의 적인 것을 다시 한 번 선포하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는 바이다!”
반역자를 두고는 잠도 오지 않고 일도 손에 잡히 지 않았다. 이번에도 십 광야의 주민이 다윗이 있
사울은 드디어 다윗을 쫓기를 멈추었고 마음의 평
는 곳을 알려주었다. 사울은 드디어 다윗의 은신
화를 얻었다. 군사들은 일상으로 돌아갔고, 사울의
처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군사들도 지쳤고
왕궁에서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날도 저물어 일단 진을 치고 야영을 한 다음 싸우 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다윗이란 놈이 쥐새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리, 거기에는 두려움만이
마냥 사울의 장막까지 잠입해서는 자기의 물병과 창을 들고 가버렸다. ‘아... 하마터면 이번에도 개죽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일상을 쭉 따라 같
음을 당할 뻔 했다. 그런데 저 다윗이란 놈, 무모한
이 걸어봤다. 공식적인 국가 업무이기도 한 그의
용기는 있는지 몰라도 어지간히도 배포가 작은 놈
일과 생각을 따라가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나? 무
아닌가? 벌써 두 번이나 기회가 있었건만 내게 아
엇보다도 사울이라는 인간이 참 옹졸해 보이지 않
무 짓도 못하는 걸 보니, 왕이 될 재목은 아닌 게 분
았는지? 질투에 눈이 멀어 공사(公私)도 구별 못하
명해!’ 사울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위기감보다는
는 속 좁은 사람 말이다. 사람이 옹졸해질 때는 언
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
제일까? 가만 보면 옆 사람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그가 이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을 찾았다는 기록은 하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보다 내 옆의 누군가가 하나
나도 없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수사적인 의미
님과 더 가까운 것 같고 더 신앙적 권위가 있어 보
로 몇 번 사용했을 뿐, 그에게 하나님은 이제 더 이
일 때, 괜히 그 사람의 얘기에 딴지를 걸게 된다. 일
상 의미 없는 존재였고, 경건의 모양도 능력도 부
상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비교경쟁’이라는 놈만 만
인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질투와 경쟁심 앞에 더
나면 사람이 치사해지고 옹졸해지고 심지어 병적
이상 왕으로서의 대의를 쫓는 마음도, 자기 성찰의
인 모습으로까지 돌변하는 것이다.
지혜도 무디어져만 갔다. 주변에서 자신을 사랑하 던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그저 불같이 화만 낼 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셨건만, 하나
그 이유를 깊이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는, 인격적으
님보다는 사람들의 지지가 왕권 유지에 더 중요한
로도 파탄에 이른 병든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토대라고 생각하며 달려온 사울. 다윗이 자기보다
그러면서도 그의 마음 저 밑에서는 뭔가에 쫓기고
백성들로부터 더 칭찬을 받는 것처럼 보이자, 그를
있었고, 뭔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에 불안해하며 살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던 사울. 그
아가고 있었다.
는 허망하게도 이렇게 스스로 만든 적을 추격하고 제거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다 쓴 것을 왕의 업적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
으로 남겼다. 남들이 볼 때는 치졸해 보이고 옹졸
다 하는도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
한 행동이었는데도 사울 자신에게는 국가의 흥망
려워하였으니”(시 14:1, 5).
성쇠가 달린 중차대한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쫓기는 와중에 하나님을 좇은 다윗 국가적인 위기라고 할 만한 아찔한 장면도 많았다. 그가 다윗을 추격하느라 주력부대를 움직인 곳은
다윗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왕이 이토
이스라엘의 중앙산지 동쪽, 사해 쪽으로 향하는 광
록 노여워하고 자기를 죽이려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야였다. 블레셋은 중앙산지 서쪽 평야지대에 살고
없었다. 그러나 이해해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있으면서 늘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블레셋이 쳐들
그래서 비록 그전 날 사울이 자기를 향해 창을 던
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 군대가 어떤 상황인지
졌어도 다음날이면 비파를 들고 찾아갈 수 있었다.
상상해 보라. 그들은 산지 동쪽 비탈에서 다시 허
사울이 자신에게 사위가 되어달라고 했을 때나, 조
겁지겁 산으로 올라가서 다시 서쪽 산비탈을 내려
건을 만족시켰지만 큰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
가야만 방어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마치
내 버리는 사울을 보면서도 다윗은 애써 자신의 신
휴전선 철책 근무병들을 빼내어 서울의 시위현장
분을 생각하며 사울을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
에 투입하는, 뭐 그런 상황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다 미갈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도 사울에겐 이런 위험한 상황이 눈에 들어오질 않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녀와 결혼하고 사
았던 것이다.
위가 되고나면 사울도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 을 것 같았다. 다윗은 얼른 지참금조로 내건 약조를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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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산책
지켰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난 후 다윗은 모든 게
에 귀 기울이면서 다윗은 점점 하나님을 깊이 알아
행복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갔다. 또한 시시각각 들이닥치는 수많은 위기 속에
함께 다윗은 마냥 즐거웠다.
서도 다윗은 때마다 돕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가 운데, 그 생명싸개 속에 자신이 둘러싸여 있다는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울이 자객
걸 체험했다. 그래서 그는 안심했다. ‘이건 내 잘못
을 보낸 것이다. 아내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사무엘
으로 인한 게 아냐. 그냥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선지자에게 도망갔다. 그에게 가면 지혜와 조언을
견디면, 의롭고 아름다운 평화의 열매를 맺는 시간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울은 거기까지
이 올 거야.’ 다윗은 이런 생각과 확신 속에 거하고
부하들을 보냈다. 결국 사무엘의 조언에 따라 친구
있었기에, 동굴 속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
요나단을 은밀히 찾았고, 사울이 다윗을 그냥 질투
를 만났어도 또 사울의 진영에 잠입해서 막사까지
하고 미워해서 죽이려 한다는 것, 그걸 피해 멀리
갔었어도, 사울을 죽이고 억울함을 풀어볼 생각보
달아나는 게 최선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다윗은
다는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생각을 더 먼
정처 없이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가
저 할 수 있었다.
족과 아내를 두고 부하 몇 명만을 데리고 외롭고 힘든 도망자의 길을 떠났다. 다행히도 고마운 사
시간이 좀 더 지나면서 다윗은 생각했다. ‘이렇게
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아내도 그렇고 요나단(둘
광야에서 지내는 시간이 오래된다면, 여기서도 뭔
다 사울의 자녀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만), 게다
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과 삶이 있지 않을
가 도망가는 자신을 챙겨주느라 제사장의 규례까
까?’ 다윗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훈련시켜 뛰
지 어겨가며 진설병(제사상에 올리는 떡)을 먹으
어난 군사가 되게 했다. 그리고 들에서 목축하는
라고 내주었던 아히멜렉(결국 그는 이 일로 죽임
유다사람들을 보호하고 순찰자의 임무를 스스로
을 당한다), 아둘람 굴로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
떠맡으면서 살아갔다. 그는 광야의 쏟아지는 별빛
다윗은 이들의 도움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아래서, 또 서늘한 새벽 기운 속에 하나님과 많은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었고, 점점 단단해지고 성숙해가고 있었다.
하나님께 피하는 기쁨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사실 그는 광야에서 지내는 삶이 익숙했다. 아버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주께 피하
지의 가축을 돌보며 야영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
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
가? 비록 상황은 바뀌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광
는 자들은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주를 영원히 즐거
야에서 지새우는 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마음을
워하리이다.”(시5:3,11)
배우기에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또 묵상했다. 때로는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쏟아놓기도 하고 때로는 침묵 속에 하나님의 음성
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김성칠 교수를 따라 쓰는 해방일기 (1) 이강일 ◆ 고려대88
소리 지음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소장. 1993년 부터 캠퍼스 간사를 시작했고, 종교학으로 학위를 마친 2015년부터 제 정신을 차리고 연구소 사역에 나서고 있다. 특히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모임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색 중. 책장을 넘기며 왁자지 껄 토론하는 독서모임이 전국에 그득그득하 기를 기도하고 있다. 회사를 다니며 집안을 살리는 아내, 대학 가는 큰딸, 맛난 음식을 보면 기분이 업되는 중3 둘째딸과 서울 홍제 동에서 살고 있다. 김성칠 교수 가족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번 호에서는 해방 직후 대혼란기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비판적 인 인물을 상상하면서 글을 썼다.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그 인물이 느꼈을 소회를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해 보았다. 이 형식은 역사학자 김성칠 교수1) 의 6.25 일기모음 《역사 앞에서》에서 착상했고, 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있는 그대로 발췌하여 올렸다. 다른 날은 역사 연표에 맞춰 사건과 함께 앞서 언 급한 인물의 소감을 기록했다. 사건은 책에 나온 그대로 묘사한 것이고, 소 감만 자유롭게 창작하였다.
1) 김성칠 교수는 해방 직후 조선역사를 간행하여 명성을 높였던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 다. 그의 아내이자 이대 국문과 교수였던 이남덕이 남편의 일기를 묶어 《김성칠 저, 역사 앞에서(1993), 창비, 2015》라는 책을 발간하여 1993년 이후 현대 독자들에게도 알려졌다. 70대 노인이 된 이남덕은 남편을 회고하면서 ‘그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영원히 감사하며.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났고, 한국인의 대표와 같은 남자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어 조국이 겪는 수난의 시대를 함께 살았다는 사실에 감사한다’고 했 다. 그의 됨됨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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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45년 8월 6일
만 5천명이고, 만주국 관리출신이 3천명이었는데,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무조건 항복을
동포들에게 나타날 염치가 없었던 이들은 거의 출
요구받았지만 답하지 않고 버티더니 너무 엄청난
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4) 세상이 변하긴 변한 것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
이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쳤을 것인가?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아무리 적국 이라도 어떻게 원폭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
45년 9월 6일
가? 유럽에선 엄두도 못 내더니 일본이라서 사용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했던 좌, 우익이 다 이탈해
다는 말인가? 막대한 민간인 피해 앞에 할 말은 아
서 각각 인민공화국과 한민당으로 갈라져가고 있
니지만 서양인이 아시아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다. 좌든 우든 ‘일제 아래서 체득된 국가주의적 사고
듯해서 심히 놀라고 불쾌하기 그지없다.
방식과 행동양식’5)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이다. 미워하며 닮는다고,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일제의
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에서 다 기립하라더니 천황의 ‘옥 음(玉音)’을 방송하겠다고 했다. 기미가요가 나오 고 곧 천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황 목소리가 세
잔혹함이 우리 안에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친일세 력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서로를 배척해서는 안 되 는 엄중한 상황이다. 서로 힘을 합쳐야 미국과 소련 앞에서 겨우 견뎌낼 가능성이 생길 텐데...
상에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지난 달에 있었던 미, 영, 중, 소 4개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인데, ‘민족의 멸망과 인류의 붕괴까 지 초래할 것 같아’ 원폭 공격 앞에 무조건 항복한 다는 의미였다.2) 주인 없는 조선을 두고 벌일 힘 있 는 세력들 간의 아귀다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 리가 아득하다.
45년 9월 9일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난달 11일에 38도선을 중심 으로 한 한반도 분할을 미국이 제안했다고 한다. 일 본군의 무장을 해제해 주겠다며 조선 반도에 들어 온 소련에게 조선을 다 뺏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 란다. 사실 이 힘센 두 나라는 전쟁 끝나기 전부터 카이로(43년 12월)에서 조선독립을 언급했고, 얄타
45년 8월 20일 그동안 열심히 좌우를 아우르며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리셨다. 마땅
(45년 2월)에서는 신탁통치 구상이 있었으며, 포츠 담(45년 7월)에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신탁통치 기 간을 5-10년으로 잡기로 했었다.6)
한 일이다. 일본총독부도 자신들의 안전한 퇴로를 마련해야 했는지 굳이 그를 불러 의논까지 했다고 한다.3) 현재 총독부 등에서 일하던 조선인 관리는 4
미국은 41년부터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 를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정황을 주중 대 사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7)고 하니 강대국들의 용
2) (https://ko.wikipedia.org/wiki/옥음방송, 2016년 6월 30일)
5) 강성호, 앞의 책, 67.
3) 이성무ㆍ이희진, 《다시 보는 한국사》, 청아, 2013, 583.
6) 심용환, 《역사전쟁》, 생각정원, 2016, 155.
4) 김동춘, 《대한민국은 왜》, 사계절, 2015, 70.
이강일 소장과 함께 하는 근현대사 관찰․해석․적용
의주도함에 놀랄 따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임정 요
46년 3월 19일 김성칠의 일기
인들을 개인자격으로 입국하게 했단다. 우리 독립
전차를 타고 가면서 보면 정류장마다 서 있는 군
세력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않은 이상 이
중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애쓰는 양이 잘 보인다...
런 모욕을 피할 길은 없어 보인다.
오늘날 이곳 시민의 불행과 초조와 혼란이 이 일면 에 응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지도자에게 오랫동
한편 대세에 적응하는데 탁월한 감각을 가진 부일
안 속아왔기 때문에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의 판
협력세력은 민첩하게 ‘친미반소’ 입장을 취했고,
단에 의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의 무
미국의 의중에 따라 공격적인 반공주의 노선을 앞
장이 있어서 차장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거니 하고
세웠다. 그들에게 과거는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10)
이제 그 수치심은 공격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8) 46년 3월 20일 45년 12월 27일
한반도의 임시정부 구성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오늘 동아일보에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가 열렸다. 이 위원회가 잘 진행되어야 우리나라가
즉시독립 주장’이라는 1면 톱기사가 났다. 외세 통
산다. 그런데 여기서 소련은 모스크바회의 결정을
치에 신물이 난 우리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반대하는 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 부적당하니 제
고 난리다. 특히 북의 조만식 선생과 남의 김구 선
외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위원회
생이 크게 분개하셨다. 신탁통치를 하자는 제안을
가 결렬되고 말았다. 한반도에 하나의 국가 건설
소련이 했다는 소식에 좌익세력은 졸지에 찬탁을
이 이리도 어려운 것인가.
추종하는 민족반역자로 몰렸다. 반탁을 매개로 어 느새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과 임정 우파가 가까워
46년 10월 2일
졌다.9)
미군의 무능한 통치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고 있다. 북한과 달리 토지개혁이 미뤄지고, 군정
(나중에 알려진 것이지만 신탁통치 제안은 미국이
의 쌀 배급정책이 실패해 식량난도 심했다. 친일경
했고 즉시 독립은 오히려 소련이 한 것인데, 동아
찰이 여전히 득세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일보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꿔 보도한 것이다. 이
모두 좌익세력으로 몰아 본격적으로 탄압하고 있
역사적 오보 때문에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었고. 한
는 상황에 9월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동안 정처 없던 친일부역세력은 민족주의 우익세
어제(10월1일) 대구에서 경찰이 노동자 파업시위
력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대에 발포하여 두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오 늘은 항의시위를 벌이던 시위대 17명이 또다시 총 에 맞아 사망했다.11) 이 정도면 혁명과 다름이 없지
7) 강만길, 《20세기 우리 역사》, 창비, 1999, 176.
9) 강만길, 앞의 책, 196.
8) 김동춘, 앞의 책, 73.
10)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2015, 43-45.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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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않은가! (총 136명 사망, 경북지역만 70만 명 이
47년 10월 21일
상 시위 참여) 일제 때 동족을 함부로 대하던 친
소련 대표단이 북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미소, 좌
일 경찰의 잔혹함은 여전한 것 같다.
우 모두가 부딪힐 뿐 합의라는 게 없다. 38선이 이대로 국경선이 될까 걱정이다
47년 3월 12일 미국의 새 대통령 트루먼은 소련을 특별히 싫어
48년 4월 3일
하나보다. 의회에서 소련과의 협력노선을 포기
2년 전 대구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이번엔
하고 봉쇄정책으로 전환한다는 입장을 천명했
제주에서 정말 큰 사단이 났다. 작년 3.1절 집회
다. 공산주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는
에서 시위군중 6명이 경찰의 총에 사망했던 것
나라에게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이 발단이었다고 한다. 해방됐으니 이전과는 달
남측 반공 우파에게 힘이 실리는 발언으로 격렬
라질 줄 알았는데, 미국 군인들의 정치가 참으로
한 좌우대립에 기름을 붓고 있다.
무능하다. 불만이 점증하는 이때 남로당이 제주
12)
지역 저항에 앞장을 섰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47년 5월 21일
서울에서 서북청년단이라는 민간조직이 내려와
작년에 한번 모이고 말았던 미소공동위원회 2차
있었다. (한경직 목사는 이 서북청년단이 당신
모임이 겨우 열리나 싶더니 결국 성과 없이 끝나
이 목회하는 영락교회 청년들이라고 자랑스레
버렸다. 결국 이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가게 생겼
고백한 바가 있다15)) 이들은 북한의 사회주의 개
다.13) 유엔이라는 조직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
혁을 피해 월남한 전직 경찰과 우익 청년들이었
는 곳인 만큼 소련이 동의하기 싫어할 것이다. 사
다.16) 이들의 보복심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실상 미국에 남북의 운명이 맡겨지는 것인가...
어서 현지 주민들은 이들이 ‘종로에서 뺨맞고 한 강에서 화풀이하듯 한다’고 증언했다.17)
47년 7월 19일 여운형 선생이 갑자기 돌아가셨다.14) 좌우가 힘 을 합쳐 중도적인 정부를 수립하려고 혼신의 힘 을 다한 지도자셨는데,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 청 년에게 피살된 것이다. 다들 극우파 세력이 그랬 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통합하려
결국 오늘 새벽 남로당원들이 경찰서를 습격하 면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민간인 학살 은 1953년까지도 지속되었으며, 당시 제주도민 30만 명 중에 약 3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는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고 있다.
11) 김동춘, 앞의 책(2015), 73. 12) 강만길, 앞의 책, 221.
15)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55-56. 강성호, 앞의 책, 113 쪽에서 재인용.
13) 위의 책, 200.
16)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게, 2012, 282.
14) 위의 책, 213.
17) 위의 책, 319.
이강일 소장과 함께 하는 근현대사 관찰․해석․적용
떠도는 얘기로는, 토벌대가 붙잡은 노인 임차순
여된 특별위원회와 특별경찰대가 움직이게 되
과 그의 손자 임경표에게 서로 따귀를 갈기게 하
었으니 뿌듯하다. 일제 잔재 청산이 모든 변화
는 참담한 희롱을 하고 끝내 총살해 버렸다고 한
의 시작이다.
다. (훗날 고은 시인의 시 ‘오라리’의 소재가 된 다) 그밖에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패륜적이고
48년 10월 19일
야만적인 학살 방법이 모조리 동원되었다고 한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14연대 군인들이
다. 인종 간 학살은 많이 들어봤어도 이런 종류
제주도로 가지 않겠다고 반란을 일으켰다. 2천
의 동족 학살은 유례를 찾기 힘들 것 같다.
명의 군인들이 올 봄에 시작된 제주 사건 진압
18)
을 거부한 것이다. 반란군은 여수, 순천 지역의 48년 8월 15일
경찰과 우익 인사들 150명을 학살하였고, 정부
정부수립과 함께, 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
군은 다시 반란군에게 부역한 혐의가 있는 민간
승만 박사가 선출되었다. 3.1운동 때 시작된 우리
인 439명을 학살하였다. 이미 한국전쟁은 이곳
나라의 임시정부가 드디어 정식 정부가 되는 역
에서 일어난 것이다. (여수, 순천 사람들의 전쟁
사적인 날이지만, 남북한 통일 정부가 아니어서
기억은 6.25전쟁이라기보다 여순사건이라고들
정말 유감스럽다. 이승만 박사는 욕망하는 바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남녀 아동까지라
이룰 줄 아는 사람이다. 여운형, 김구, 김규식 등
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는
기대를 걸었던 국내외 독립운동 지도자를 제쳤
명령19)을 내렸다. 여수에서는 김종원이라는 서
다. 국내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인지도가 거의 없
른도 안 된 경찰이 일본도를 가지고 부역혐의자
었는데도. 실권자의 필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
500명을 여수 주민 4만 명이 모인 종산초등학교
었던 것 같다. 대미외교에 능하고 미국보다 더
에서 기독교인 여부를 가린 후, 예수 안 믿는 자
미국적인 철저한 반공주의로 무장한 한국의 지
를 중심으로 참수20)하였다. (당시 기독교 집사였
도자가 있다면 그는 단연 이승만 박사이다.
다는 이 자가 간증하기를 ‘그동안 수만 명의 공비 를 토벌하였는데, 개중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분
48년 9월 22일
도 있을 것’21)이라고 고백했다) 도대체 누가 우리
반민족행위특별법이 드디어 공포되었다. 벌써
더러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고 했던가.
단죄를 받았어야 할 친일부역자들이 미군정과
이 잔인하기 짝이 없는 족속을.
이승만 세력의 보호를 받으면서 다시 활개를 치 고 다녔다. 이제라도 이들은 과연 단죄될 것인
49년 6월 20일
가? 그래도 기소권, 심판권 등 상당한 권한이 부
국회위원 7명이 작년 연말에 제정된 국가보안
18) 위의 책, 321.
21) 강성호, 앞의 책, 126.
19) 강성호, 앞의 책, 121.
22) 김동춘, 앞의 책, 296.
20) 위의 책, 122.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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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48년 12월)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국회프락
“...봉석이 아버지는 그동안 편안하신지요... 나는
치 사건으로 알려졌다) 좌익 계열의 활동은 불법
편지를 받아 보고 영광으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들 중에는 공교롭게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보았습니다...그
반민특위 위원도 있었다. 이건 틀림없이 이승만
리고 나는 칠월이 오면 면회를 가겠습니다....나를
대통령 작품이다. 이전부터 이 대통령은 자신이
생각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 하나밖에 없습니
바라는 반공정권을 세우는데 반민특위가 큰 걸
다. 답변을 빨리 해주세요.” (50년 6월 8일 홍은애,
이 되는 상황이었다.
22)
림돌이라고 여겼다.
23)
과도한 권한을 가졌기 때
자강도 만포구 고산면 춘산리 제8반)25)
문에 삼권분립정신이 침해된다는 명분을 내세웠 다. 반민특위가 7천 명에 달하는 친일 혐의자들을
50년 6월 26일 김성칠의 일기
조사하면서 친일 경찰 노덕술을 체포하자 부하
질풍같이 달리는 군용차가 끊일 사이 없고... 전쟁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다. 이
이 기어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에 뒤이
나라 경찰은 누구를 지키는 것인가?
어 5년 동안 민족의 넋을 가위누르던 동존상잔이 마침내 오고야 마는구나 하는 순간, 갑자기 길이
49년 6월 26일
팽팽 돌고 눈앞이 캄캄하여졌다.26)
이번에는 김구 선생이 현역 군인의 총탄에 맞아 서거하셨다. 우파 민족주의자로서 반탁운동에 앞장서 이승만 대통령과도 처음엔 뜻을 같이했 고, 남한 단독 선거를 막는 일이라면 북측의 김일 성과도 협상하기를 마다하시지 않았다. 남북 분 단 정권이 가져올 가공할 결과를 아셨던 것이다. 김구 선생의 서거로 이제 남한은 극우 반공체제 의 골격이 확립되고 있다.24)
50년 6월 27일 김성칠의 일기 새벽 라디오에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의 특별방 송이라 하여 정부가 수원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한다... 그래도 설마 ‘서울이야’하고 진득이 배겨 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 단박에 맥이 탁 풀린 다.... 세상이 바뀌는 일이 있다면 나 자신은 어떠 한 처지에 서게 될 것인가...27)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포기하고 대구와 대전을 오르내리
50년 6월 8일 홍은애의 편지
고 있었다)
곧 터질지도 모를 전쟁을 앞두고 군 복무 중인 남편 강 득화에게 보낸 아내 홍은애의 편지 하나를 소개한다. 이 편지는 남편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우체국 사서함에 서 발견되었다.
23) 김동춘, 앞의 책(2015), 85. 24) 강성호, 앞의 책, 82. 25) 이홍환 엮음,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삼인, 2012. 26) 김성칠, 앞의 책, 72.
바람 잘날 없던 해방 5년이었다. 인민군의 서울 점령 시기를 그린 김성칠 교수의 일기는 다음 호에서 자세 히 다루고자 한다.
27) 위의 책, 73-76.
길따라 꿈따라
무지 + 용기 = 섭리 (1) 이왕수◆ 제주대05
소리 지음
현재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업 기획부에 서 근무하고 있다. 공동체, 선교, 그리고 가 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보는 것이 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나라의 논리가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실력보 다 열정이 앞서는 청년. 박민아◆ 제주대08 현재 EBS 한국교육방송공사 작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는 것, 선하고 아름 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꿈이며 목표이다.
여기 먹고 사느라 분주히 한 해를 보내고 있는 학사 둘이 있다. 각각 상경 1 년차, 3년차인 우리는 같은 학교 IVF를 섬겼던 선후배. 캠퍼스에서 나눴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때의 불씨를 피우려고 부단히 부채질을 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선택은 어렵다. 우리는 그것을 해내기 전까지 수많은 대안을 비교 분석한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몇 번의 선택과 결과를 본 후 우리는 알게 된다. 철저한 분석이 반드시 가장 최고의 선택을 가져오진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몰라서 한 결정이, 근거 없는 용기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선택 의 기로 앞에서 여전히 무지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결 과가 어찌됐든 나에게 최선을 허락하실 그분의 ‘섭리’에 시선을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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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꿈따라
박양 : 선배, 갑자기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군 : 1년? 그래, 거의 1년 가까이 걸렸
선배의 대학 4학년 생활은 어땠
던 거 같아. 각자의 자리에서 일
어? 내 기억으론 취업하겠다고
을 하고 있는 학사들도 만나고,
바쁘게 뛰어다니거나 그러지는
공동체로 사는 청년들도 찾아가
않았잖아.
만나 보며 그 수많은 사례 중에
이군 : 3학년 1년을 교환학생으로 몽골
나에게 맞는 옷을 찾으려고 부단
에서 보내느라 못 채운 학점을 이
히 애썼지. 그리고 취업을 하기
수하느라 정신없었지. 야간수업
로 결심했어. 얼마 되지 않아 아
에, 계절 학기까지... 아유, 생각하
주 막연하게 여기 들어가서 일하
고 싶지도 않다.
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기업에
박양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들 4학 년 때부터는 취업준비에 바쁜데, 불안하진 않았어?
서 연락이 왔어.
박양 : 그래, 기억난다! 평소 가고 싶어 하던 곳이라 합격했을 때 많이 좋
이군 : 불안보다는 답답함이 컸던 거 같
아하던 선배 모습. 얼마나 좋았을
아. 하루는 멍하니 캠퍼스를 걸었
까. 근데, 들어가지 얼마 되지 않
지! 하루 종일. 캠퍼스 안에는 온
아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통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광고
이군 : 내가 사회의 무서움을 몰랐던 거
현수막들로 가득했어. 그런데 문
지! ㅎㅎ 기대했던 조직의 모습과
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난 왜
는 많이 달랐고, 무엇보다 내 스
대학에 왔을까? 외국어 하나쯤은
스로 계속해서 동기부여가 되지
유창하게 하고, 그럴듯한 스펙 쌓
않더라고. 하고 싶은 직무이긴 했
아서,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기 위
지만, 막상 해보니 나와는 잘 맞
해?” 대학의 목적은 진리탐구라
지 않았던 거야. 일의 어려움과
고 했는데, 진리를 탐구하면 이상
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던 거
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이 아이러
같아.
니한 곳은 뭘까... 싶었지.
박양 : 회사 분위기가 어땠기에?
박양 : 요즘 같은 취업난에 대단한 여
이군 : 음... 외국계 기업이었는데, 외국
유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
문화와 한국문화가 믹스돼서 참
낸 거야?
이도 저도 아닌 거 같았어. 수평
좌충우돌 하지만 꿋꿋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적인 거 같은데, 여기도 한국인지라 서열,
이는 수많은 시선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조직문화의 단점이 이상하게 접목돼 있더
이군 : 해보고 싶던 일이었지만 막상 해보니 생각
라고. 자율과 책임이 아닌, 책임과 개인주
만큼 나의 성향과는 잘 맞지 않았어. 그래,
의? 서로 눈치 보기 바빴어.
사실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길 했다
박양 : 헐. 그랬구나. 그래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
면 ‘좀 더 치열해져라.’ ‘다른 데라고 다를 것
과 사이도 좋았잖아? 그러면 더 나오기 힘
같냐.’ ‘1년이라도 더 빨리 경력 쌓아서 옮겨
들었을 텐데?
라.’ 같은 이야기를 해줬겠지. 하지만 난 누
이군 : 그래. 동기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어. 많
구를 신경 쓸 여유도 없었어. 난 정말 누구
이 친했지. 그런데, 처음 들어가자마자 교
보다 열심히 살고 싶었거든. 아마 하나님은
육 기간부터 담당자는 은연중에 서로 경쟁
아셨겠지.
하라는 듯한 분위기를 심더라고. 그래. 자본
박양 : 결정을 앞두고 많이 괴로웠을 것 같아.
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숙명일 수도 있겠
이군 : 그래, 진짜 그랬지. 원래 다 이런 거 아닐
지. 근데 막상 그 민낯을 접하고 나니 마음
까, 후회하는 거 아닐까... 생각이 너무 많아
이 참 무겁더라. 내 스스로의 발전보다도 타
잠도 못 잤어. 그런데, ‘아, 이 길이 아닐 수
인을 의식하는 게 더 중요했지. “저 사람을
도 있다... 이런 마음으로 제자리를 걷느니,
누르고 이겨야 해.”라는 마음도 내 속에서
차라리 거칠게라도 한 발을 내딛겠다...’ 스
불쑥불쑥 올라오고. 이런 내 모습을 직면할
스로 내 상태, 내 현실을 인정했어. 그러고
때 특히 힘들더라고. 이 게임의 룰에 적응해
나니 다음을 생각할 여유가 생기더라고! 그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고.
리고 오히려 색다른 기대감이 생기는 거야.
박양 : 그래. 그 느낌, 정말 무섭지. 사람들은 어땠 어?
박양 : 와, 정말? 이군 : 그래, 이 경험을 통해 나에게 더 맞는 직장
이군 : 교육이 끝나고 실무를 배우면서는 상사들
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꿈을 안고. 그리고
의 눈에서 ‘내 옆에 있는 저 동료를 앞서가
정말 신기하게도 바로 다른 일자리를 찾을
야지’ 하는... 그 보이지 않는 눈빛, 태도, 말
수 있었던 거 같아. 이번엔 진짜 잘 해봐야
투들을 보면서, 더 마음이 힘들었어. 내가
지!
보기엔 참 실력 있고 열정 있는 동기들, 선
박양 : 그렇게 빨리? 우와, 타이밍 굿이네!
배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가진 능력을 조직
이군 : 그렇게 이군은, 새로운 직장에서 열심히 일
이 너무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
했습니다...일 줄 알았는데!
고 결심했지. “가고 싶은 곳이 아닌 필요한
박양 : 알았는데?
곳으로 가야겠다.” 어느 고등학교 직업 십
이군 : 음... 또 다른 먹구름이 찾아왔어.
계명에서 봤던 문장이었어.
박양 :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겠네. 사실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고, 다시 백수가 되면 신경 쓰
(다음에 계속)
소리 지음
36+ 37
함께, 이어 달리기
주님께 거처를 마련해 드리는 마음으로 임하은 ◆ 고려대09 따뜻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지성을 가질 수 있길, 복음주의 운동가이길, 공동체를 세우 는 사람이기를 꿈꾼다. haunim09@gmail.com
저는 현재 ‘주민기숙사 주택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주민기숙 사 주택협동조합’은 청년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주민들과 함 께 세운 협동조합입니다. 저와 함께 성균관대 09학번 김원미 학사, 그리 고 다른 세 명의 집주인들과 같이 시작했습니다. 2014년 11월쯤 다른 집 주인들을 만나서 준비하기 시작했고, 2015년 1학기에 시범사업으로 37 개 정도의 방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일을 했어요. 그리고 2015년에 사회 적기업진흥원의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에 선정되어(창업대회 수상) 6 월에 법인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희 기숙사 방은 50개 정도로 늘었고, 1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서울시에서 예 비사회적기업으로 지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서울시내 원룸의 평균 시세는 보증금 1,000만원 기준 월세 42만원입니 다. 학생들이 밀집한 대학가의 경우는 물론 더 비싸고요. 여기에 관리 비, 공과금 등을 포함하면 주거비가 훨씬 높아집니다. 경제적으로 어려 운 사람들은 주거비를 낮추려다 보니 소위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 원)’ 혹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게 됩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살아가는 학사들의 일상
주민기숙사는 이런 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협동조합
저는 많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창업이라는 복불복
입니다. 기존의 원룸에 기숙사식으로 사용할 수 있도
같은 도전을 더구나 소셜벤처의 형태로 진행하기 위
록 2층 침대 등의 집기를 넣어서 기숙사 형태로 공급
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데, 실패에 대한 자유함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학생들은 민간 기숙사 방
이 그렇게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 같습니
식의 자취방을 일반 원룸의 절반 정도 되는 가격으로
다. 물론 고생도 많이 하고 있고, 지금 하는 일을 언제
이용할 수 있고, 주민들은 자신들의 방에 공실이 생
까지 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자유함을 누리며 작게나
기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마 소신을 지키며 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제가 2012년에 참가했던 전국리더대회가 아직도 생
이 일을 하면서 보람 있고 기쁜 순간이 많았습니다.
생하게 기억납니다. 저는 2011년에 지부 대표였는데,
각종 창업 대회에서 소셜 미션을 인정받아서 상을 받
전국대표모임에 참석했을 때 우연히 사회적기업 포
을 때도 기뻤고, 학생들이 저희한테 이렇게 살 수 있
럼 팀의 디렉터를 맡게 되었습니다. 사회적기업 포럼
게 돼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해줄 때도 정말 기뻤습
을 준비하면서, 평소에 제가 가지고 있었던 기업에
니다. 그렇지만 가장 기뻤던 때는 하나님의 마음이
대한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습
느껴졌을 때였어요. 어느 주일예배 후 기도 시간에,
니다. 원래 창업에 관심이 있었지만, 기업에 대한 철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라는 말
학적인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
씀과 연동되어서, 제가 하는 일이 결국 하나님께 거
하기보다는 묻어두고 있었는데 하나의 해결책이 나
처를 마련해 드리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이 마음으로
타난 거죠. 사회적기업은 기업과 비영리단체의 특성
다가왔습니다. 그때 말도 다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
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사회문제를 기업의 형태로
던 기억이 납니다.
해결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학부생이었을 때, 사회 나가면 신앙 지키기 어렵다 소셜벤처 창업을 마음먹은 이후로 벤처기업에서 인
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그게 무슨
턴도 하고, 창업스쿨, 사회적기업아카데미 등도 열심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막상 알고 나니 슬프기도 했
히 다니면서 아이템을 준비했어요. 다 중요한 경험이
고, 신앙이 무너져서 발버둥 쳐보았지만 소용없다고
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결국 함께할 동역자를 만
느낀 순간도 많았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감사하게
난 게 아닐까 싶어요. 앞서 소개한 성균관대 09학번
도 저희 교회공동체에 새벽기도가 생겼고, 그 덕분
김원미 학사가 그 주인공인데요. 고생할 때나 기쁠
에 학부시절 DPM이 추억이 아닌 현재의 삶으로 이
때나 함께할 수 있는 동역자의 존재는 정말 큰 힘이
어지게 되었어요. 그로 인해 참 많은 회복을 경험했
되었던 것 같습니다.
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은 더 큰 분이심 을 잊지 말자고, 학사님들의 삶을 격려하고 응원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도 빼먹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요.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줬던 IVF 공동체를 거치면 서, 실패할까 걱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살피던
고 싶습니다.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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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 학사 통신원
베트남 하노이의 주재원 생활 리포트
김설규 ◆ 서울시립대94 하노이에서 아내와 큰딸 은비, 작은 아들 은호와 함께 살고 있다. 베트남어와 골프에 탁월해지고 싶어 관심을 가지고 공부 중이 다.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잘 자라는 것과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 꿈.
나는 2001년에 서울시립대를 졸업하고 2002년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회생활 10년 만에 해외 주재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공 산주의 국가 베트남 하노이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기대되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았던 것 같다. 이곳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는 데 돌아보니 주재원 생활도 올해로 벌써 5년차다. 여기로 떠나오면서 40 여 명의 동문 아베퍼(IVFer)들을 모아놓고 신고식(?)을 치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흐르다니...
이곳 베트남은 일본만큼이나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것이 5년차 주재원 으로서 느끼는 소감이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같은 중화 문화권이어서 언어의 70%가 중국 한자에서 기원한다. 그래서 비슷한 발음의 단어가 상 당히 많아서 친숙함을 더한다(특히 ‘호흡’과 ‘사막’이라는 단어는 발음이 100% 똑같다). 문화 또한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조상신을 엄격히 숭배하 고 사람이 죽으면 49제를 꼭 지킨다. 이곳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처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학사들의 일상
5년전, 베트남으로 떠난다는 신고식 후
럼 노래를 즐겨 부르고(베트남 거리를 다니다 보면 시골과 도시를 막론하고 한집 건너 한집씩 가 라오케-한국식으론 노래방-가 널려 있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터라 곡조마다 애환이 서려 있다. 최근 동남아에서 불고 있는 한류 바람이 여기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최근 <태양의 후예 >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이렇게 가까운 베트남이 어느 순간 멀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주재원 생활에서 느끼는 이 나라의 국민성이다. 어찌 보면 그 국민성은 미국을 몰아낸 지독한 근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어 찌 보면 공산당 1당 독재 밑에서 지금껏 삶을 살아온 뿌리근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때로 논리가 통 하지 않고, 때로는 법보다 생떼와 주먹이 더 가까울 때도 있으며, 합리성보다는 독선과 독단, 편리 를 앞세우는 이기심이 표독스레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지독한 여름 날씨와 그보다 더 지독한 겨 울 날씨가 떠오른다. 한국의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습도가 너무 높아서 더위가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느낌이랄까. 일기예보 어플이 알려주는 자외선지수는 항상 11(매우 위험)이다. 겨울은 12 월 중순부터 시작해서 4월말이 되어야 끝이 난다. 지난 5년 동안 총 6번의 겨울을 맞았으나 아직도 겨울은 내게 힘든 계절이다. 이곳 겨울은 영상 10도 언저리에서 18도 사이의 영상기온을 유지하지 만, 습도가 너무 높아서 추위도 맹위를 떨친다. 목욕탕에 가서 냉탕의 온도를 유심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10-18도가 얼마나 사람을 추위에 떨게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추위도 더위마냥 진드기가 되어 들러붙는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에 얼굴 피부가 상할까 봐 마스크를 쓰고 오토바이를 타지만, 겨울에는 매서 운 바람결에 얼굴이 얼거나 돌아갈까 봐 마스크를 쓸 정도다. 두꺼운 오버코트가 없이는 살 수가 없고 집집마다 전기히터는 필수이다. 그중에 가장 참기 힘든 일은 해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4개월 이 넘는 날 동안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고작 보름 정도나 될까? 해를 볼 수 없는 날이 이어지면 사람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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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 학사 통신원
들 모두 쉽게 우울 증세를 보이고 면역체계가 약해져 잔병치레도 많이 한다. 그래도 베트남 사람들은 더운 여름보다는 추운 겨울이 더 낫다고들 말한다. (이러한 반응은 남쪽 사이공 호 치민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다. 호치민 사람들은 이런 북쪽 날씨에서는 절대 살수 없다고 하고, 북쪽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더운 곳에서 어떻게 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글을 읽는 많은 학사들 중에는 해외 주재원 생활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 하지만 실제 살아보면 그 생활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을 개수로 나열 해 보면 좋지 않은 점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가장 힘든 점은 생활의 단조로움에서 오는 외로 움 같은 거다. 이건 순전히 나라는 사람의 소극적인 성격에서 오는 듯하지만 많은 주재원들 의 공통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족과 같이 있지만 가족 외에는 내 삶을 나누거나 공유 할 수 있는 사람이 적다. 그건 아내나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재원 생활을 하는 5년 동안 내가 누리고 있는 것 또한 많다. 처음 베트 남에 오면서 나름대로 세운 네 가지 목표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영어, 베트남어, 골프, 헬스 였다. 처음에 가족과 떨어져 지낸 1년 반 동안 난생 처음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이 생겼다. 그 많 은 시간에 골프와 헬스에 집중하고 틈틈이 베트남어를 배웠다. 5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어는 제법 원어민에 가깝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몸이 항상 약했고 체성분 검 사에서 항상 심각한 마른 비만이었는데 지금은 꾸준한 헬스로 비만 수치가 정상범위 내로 들 어왔고 체중도 늘었으며 어느 정도 다부진 몸매를 가지게 되었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을 고려해 보면,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정말 좋은 환경이다. 직장이 걸어서 5분 거리인데다 심지어 내가 출근하는 시간은 아이들이 등교하는 시간보다 늦다. 그 래서 항상 매일 아침 느긋하게 식탁에 앉아 아이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현관 앞에서 아이들을 끌어안고 축복기도를 한다. 아이들과 우리 부부는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려 하트를 그리며 한껏 구애를 보내고 나서야 문을 닫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같이 저녁을 먹고 수영장에 가거나 아파트를 돌며 산책을 하고 자전거를 타거나 인라인 타는 아들을 지켜 본다. 비싼 비행기 티켓 탓에 한국에 자주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한국에 다녀오는 경비의 반 의 반 값으로 국내 여행을 하거나 가까운 동남아 여행을 가기도 한다.
주재원 생활은 한편으로는 나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직면하는 광야이기도 하나 다른 한편으 로는 내게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기도 했다. 광야이면서 축복의 땅인 이곳 베트남에 서 내 인생의 새로운 2막이 곧 열릴 것 같다. 예상했던 것보다 주재원 생활이 더 길어질 것 같 아서다. 아마도 이건 내가 넘어지고 무력한 중에도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베푸신(더하신) ‘이 모든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며 감사하고 있다.
이렇게 아빠가 되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다 소리 지음
문신실 ◆ 전주교대05 만나는 아이들의 삶이 행복한 기운으로 가 득하고, 아름답게 성장하길 소망하는 7년 차 초등 교사. 사모하던 캠퍼스 시절 리더 누나와 결혼하여 알콩달콩 일상이 즐겁다. 그리고 아이와 자전거를 타거나 캐치볼하 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이다.
작년 9월에 우리 부부를 찾아온 충만이는 엄마의 뱃속에서 무럭무 럭 자랐다. 충만이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출산예정일, 5월 30일이 다 가오고 있었다. 정말 빵빵해진 아내의 배를 볼 때마다 금방이라도 충만이가 나올 것 같았다. 5월 중순쯤 되었을 때, 아내에게 출산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정일이 아직 좀 남아서 준비를 안 했 는데 갑자기 충만이를 만날 생각에 깜짝 놀라 부랴부랴 짐을 쌌다. 그리고는 주일에 교회에 가서 교인들에게 다음 주에는 교회를 못 오게 될 테니 순산을 위해 기도해주십사 부탁했다. 그런데 충만이 는 나오지 않았고 못 갈 거라고 예상했던 그 주에 교회에 가서 정말 다음 주에는 못 나올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시, 못 나올 줄 알 았던 그 주에도 또 교회에 가서 아마 다음 주에는 진짜 못 나올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는 3주가 지나고 게다가 출산예 정일까지 지났는데도 아내는 진통 없이 평화로웠다. 출산에 필요 한 물건을 넣어둔 가방은 저만치 방치되고 있었다.
42+ 43
이렇게 아빠가 되었다
첫아이는 출산이 늦다고들 하지만 예정일 3주 전
짧아졌고, 이제 아이가 완전히 나오도록 아내가
부터 오늘일까 내일일까 기다리고, 결국 예정일
힘을 주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집에서 아내와 함
마저 지나가고 말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진통을
께 호흡과 힘주기 연습을 했었는데, 세상에... 글
마냥 기다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무슨 일을
로, 동영상으로 배운 호흡과 힘주기는 아무 소용
하려다가도 ‘오늘 충만이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이 없었다. 아내는 힘을 아랫배에 주지 못하고 얼
하며 충만이의 시간에 맞추어 기다려야만 했다.
굴에 주는 것 같았다. 얼굴에 핏줄이 다 서고 잔
우리가 생각한 날, 우리에게 좋은 날이 아닌 아
뜩 찡그린 채 고통을 견뎌내는 아내가 정말 힘들
이가 나오고 싶은 시간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시
어 보였다.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
간이었다. 아이를 기르다 보면 그런 기다림이 더
내가 힘을 줄 때 함께 힘을 주고, 옆에서 땀을 닦
많아질 것 같다. 그런데 마침내, 그날은 도적같이
아주고, 함께 구호를 맞춰 주는 일뿐이었다. 성경
다가왔다.
에서 보아온 해산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내 눈으 로 확인하는 순간, 이 일을 직접 겪는 아내는 어떨
예정일이 일주일이나 지난 아침, 아내는 진통이
까... 나는 그저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어서 이 고
오는 것 같다고 했다. 짐을 챙겨 병원으로 향하
통이 끝나고 해산의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오길
면서 “진짜 충만이 나오는 거야?”, “오늘이 그날
기도할 뿐이었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기쁨은 해
이야?”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병원에 도
산의 고통 없이는 맞이할 수 없었다.
착하여 진료를 받아보니 자궁이 4cm정도 열려있 다고 했다. 10cm정도가 되면 아이가 나오는 것이
나는 아내가 힘든 것만 생각했는데 의사선생님
란다. 이제 진짜 충만이가 태어난다니! 떨리는 한
은 양수의 색깔을 보시더니 예정일이 지나서 아
편 과연 우리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
기가 힘들어 태변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이럴
다. 충만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
경우 아기의 심장박동수가 떨어지면 수술을 해
지만 아내와 충만이 모두 무사히 건강하게 이 시
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은 수시로 아기
간이 지나가기만 바랄 뿐이었다. 감사하게도 신
의 심장박동수를 체크하셨고 아이에게 산소를 공
앙을 가진 담당 의사선생님이 함께 기도해 주시
급하기 위해 아내는 산소호흡기도 착용했다. 선
고 아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며 잘 해보자
생님은 출산의 과정 중에 아기가 엄마보다 10배
고 격려하셨다.
는 더 힘들다시며 아기가 잘 버텨주고 있으니 엄 마도 힘을 내자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다행히
난생 처음 들어가 본 가족 분만실의 구조는 단순
충만이와 아내 둘 다 잘 버텨 주었고 끝나지 않을
했다. 산모용 침대와 시술 장비들만 덩그러니 놓
것 같았던 힘주기의 시간도 지나 충만이가 드디
여 있었다. 진통의 간격이 길 때는 아내와 두런두
어 모습을 드러냈다. 충만이가 “엄마아빠, 저 해
런 이야기도 나누고 셀카도 찍으며 시간을 보냈
냈어요!”라는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자 아내도 나
다. 그때만 해도 앞으로 다가올 고통의 파도를 감
도 충만이처럼 엉엉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히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점점 진통의 간격은
아빠인 나는 눈물범벅이 되어 그간 충만이와 아
평범한 내가 너를 만나고 아빠가 되기까지
내를 이어 주었던 탯줄을 잘랐다. 드라마에서만
태어나 빨갛고 쭈글쭈글한 얼굴인데도 충만이가
보던 탯줄 자르기를 내가 할 줄이야! 분만의 과정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엽다. 하나님께도 내가 이렇
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지만 어떻게 아내의 몸에서
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걸까?
충만이가 나왔는지,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몸이 너무나도 신비로웠다.
이제 지난 10개월 동안 익숙해진 ‘충만이’라는 이 름을 보내주어야 할 시간이 왔다. 놀라운 하나님
충만이가 무사히 이 시간을 감당해 주어 너무 고
의 은혜를 노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충
마웠다. 무엇보다 아내가 정말 고생했다는 생각밖
만이에게 ‘은찬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
에 들지 않았다. 분만 당시에는 몰랐는데 다 끝나
다. 삶의 모든 순간이 은혜인데, 은찬이가 그 은혜
고 보니 아내가 아기를 힘들게 낳은 케이스였다고
를 경험하고, 기억하고, 그 은혜를 노래하는 삶을
했다. 얼굴과 눈, 목의 모세혈관들도 다 터지고, 출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아직은 서툰 이 아빠도
혈도 많았는데 지혈이 잘 되지 않아 다른 자연분
너의 삶 속에서 그 노래를 함께 부를게!
만한 산모들과 달리 회복의 시간이 많이 필요했 다. 늘 건강하던 아내가 온 힘을 다해, 몸이 다 부 서지도록 아이를 낳았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부 모가 되는구나, 세상의 어느 아이 하나 귀하지 않 은 아이가 없구나 싶다. ‘우리 엄마도 날 이렇게 낳 았겠구나. 나에게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지만, 이 렇게 힘든 출산의 과정이 있었겠구나.’ 부모가 되 고 보니 새삼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에 더욱 감사 하게 된다. 직접 경험해 보니 그냥 미루어 짐작하 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분만실 밖에서 오랜 시간 맘 졸이며 기다린 양가 가족들이 충만이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축복의 기도를 해주셨다. 가족들과 함께 크신 하 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충만 이를 보며 밝게 웃는 양가 가족들을 보며 나도 함 께 웃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존재 자 체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충만이. 아버지라 부 르는 우리 하나님이 우릴 보시는 마음이 이런 걸 까? 부모가 되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던데 바로 이런 마음인가 싶다. 갓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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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유금리에서의 느릿느릿 또렷한 하루
지은실 ◆ 동덕여대02 포토샵, 일러스트와 몇 년째 ‘밀당’하는 프리랜
유금리 라이프
서 디자이너. 2년전 성산동 생활을 마치고 자연 과 조금 더 가까운 유금리로 왔다. 빵 굽고 커피 볶는 남편과 밥해먹고 동네 언니, 동생들과 수다 떨고 볕 쬐며 (별 일 없이) 산다.
I V P 모던 클래식스 0 1 2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균형 잡힌 성경적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독교 고전! 20쇄 기념 전면 개정판
복 음 ・제 자 ・성 경・교 회・세 상 진정한 복음이란 무엇인가? 순종하는 제자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어떻게 성경을 현대 사회에 온전하게 관련시킬 것인가? 교회의 부르심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세상 한가운데서 교회의 선교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은 성경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이어야 한다.
존 스토트 지음 한화룡 ・ 정옥배 옮김 | 김회권 해설 양장 584면 | 26,000원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는 면에서 성경적이며 시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면에서 현대적이다. 저자는 그런 삶은 오직 성경에 침잠하면서도 세상에 귀 기울이는 ‘이중적 귀 기울임’의 자세를 가질 때 가능함을 강력하게 설파한다. “참으로 폭넓고 풍요로운 정통 기독교 신앙을 탁월하고 치밀한 논리로 옹호한다!” _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탁월하게 좋은 책이다.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스토트가 남긴 지상 설교라 할 만하다!” _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저자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번역을 전면 수정한 개정판입니다.
www.ivp.co.kr
소리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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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만난 사람
공동육아; 공동체를 이루는 또 하나의 방법
IVF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가장 많은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이들 은 현재 3~40대 초중반으로, 이들에게 가장 뜨거운 이슈는 아마도 자녀양 육과 교육일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홀로 풀어가기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임민정 ◆ 홍익대02 황세희 ◆ 건국대02 한진희 ◆ 가톨릭대01 진행 이시종 / 정리 편집부
세태와 다른 방향을 잡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이를 실제적으로 실행하고 지속하기도 힘들죠. 이번 [소리]에서는 자녀양육의 짐을 함께 풀어나가는 학사들을 만나보았습니다.
* 먼저 [소리] 독자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가족과 일터에 대한 소개도 해주세요. 한진희(이하 진희) 저는 가톨릭대 01학번 한진희입니다. 80년생으로, 모 임의 대표를 맡고 있어요. 남편은 건국대 05학번 박경균으로 교회에서 만나 결혼했어요. 남편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농사를 짓고 있고요. 다 섯 살인 한율이와 세 살인 한들, 이렇게 딸 둘을 두었습니다. 대학에 들 어와서 첫 해에는 IVF가 뭘 하는 곳인가 지켜보며 관찰자로 지내다가 2 학년 때 학교 선배인 정규연 언니와 함께 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언니 가 제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봤고 한번 IVF를 열심히 해보자 고 마음먹었죠. 모태신앙이었지만 기복신앙을 가졌던 저는 IVF를 통해 그걸 탈피할 수 있었어요. 당시 서너 명이 공동체하우스 생활을 같이 했 는데 이때의 경험이 지금 공동육아를 하는 데 굉장한 도움이 됐어요. 그 때 친구들끼리 나중에 모여 살면서 아이도 같이 키우자는 이야기를 많 이 했어요. 당시 이레하우스가 막 생길 때여서 굉장히 부럽기도 했고요. IVF를 통해 하나님도 만나고, 공동체를 알았고 사랑하는 방법도 배웠죠. 황세희(이하 세희) 저는 1학년 마칠 때쯤 IVF에 들어갔어요. 남편이 건국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황세희
임민정
한진희
대 02학번의 대표였고 저는 부대표여서 함께 사역하
앗이 육아에 참여했었어요. 그때의 경험이 좋아서 서
다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아이 하영은 하나
울에 돌아와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없
님의 영광이라는 뜻으로 네 살이에요. 둘째인 두 살
더라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지
예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뜻이죠. 아들 둘을 낳아서
않고 키우겠다고 생각했기에, 마음 맞는 엄마들이 삼
힘겹게 육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민하고 섬세한
삼오오 모여서 함께 하면 좋겠다 싶었죠.
스타일인데 둘째는 상남자 스타일이죠. (웃음) 남편
민정 저희 교회에 뱀띠(2013년생) 아이가 16명이나 되
은 현재 건국대를 담당하는 김선민 간사입니다.
거든요. 그래서 뱀띠 엄마들끼리 커뮤니티가 생겼어
임민정(이하 민정) 저는 새벗 출신이에요. 하나님의
요.
극적인 인도로 홍익IVF에 들어가 영접했어요. 공동체
진희 그 엄마들도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싶은 마음은
안에서 저의 인생은 바뀌었고 인생의 근간을 새롭게
있었지만 시도를 못하고 있었죠. 그럼 함께 모여서 놀
다졌어요.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아가 건강해졌고 사
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 모여 보자고 했더니 거의
랑하는 법도 배웠죠. 졸업 후 회사생활을 하다가 GLC
다 왔어요. (웃음) 그렇게 놀다가 다음엔 이렇게 해보
간사로 3년간 일하기도 했어요. 학부 때와 졸업 이후
자고 프로그램도 짜고 돈을 모아서 재료비로 지출도
에도 IVF에 입체적으로 참여하면서 공동체가 인생의
하고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남편은 연세대 02학번 민
민정 그때 진희 언니는 둘째를 낳은 지 100일도 지나
형필이고, IVF를 통해 만났고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
지 않은 때였어요. 아기를 업고 안고 프로그램을 진
꾸며 살고 있어요. 학생 때 리더 공동체가 정말 좋아
행했죠. 그때 저희는 아이가 한 명씩이라 둘을 데리
서 졸업 후에도 공동체로 살면서 아이들도 같이 키우
고 모임을 나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몰랐어
는 게 꿈이었죠. 남편도 또래 친구들과 그런 꿈을 꿨
요. (웃음)
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40개월 민소윤, 7개월 민이
진희 이전에도 교회에서 공동육아를 해보려는 시도
안, 두 딸이 있는데 둘의 결정적인 공통점은 잠을 잘
들이 있었어요. 공동육아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안 자서 엄마를 애먹이고 있다는 거예요. (웃음)
근처에 살면서 서로 아이를 돌봐주고 밥도 같이 먹 는, 그런 모임을 하신 선배 엄마들이 계세요. 이런 배
* 공동육아 모임을 하게 된 계기와 과정이 궁금합니다.
경이 있으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그렇게 뱀
진희 저희는 2014년 5월부터 준비해서 6월에 본격적
띠 엄마들과 소소하게 시작했는데 교회의 다른 자매
으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저희 가족이 남편 직장 때
들도 참여하게 되어 10명 정도가 모임을 꾸려가게 되
문에 강원도 동해시에 살았던 적이 있어요. 거기서 품
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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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 2014년 7월까지 모임을 하고 마지막에 평가회의
아 사업에 지원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을 정도였죠. 하
를 했어요. 다들 IVF 출신이다 보니 이런 회의가 익숙
지만 2015년에 둘째 출산을 앞두거나 막 임신을 한 엄
하죠. (웃음) 제가 우연히 평가회의 전에 《아이들은
마들이 많아서 여유가 없을 것 같아 거절했어요. 이후
놀이가 밥이다》를 쓴 편해문 놀이활동가의 강의를 들
에는 기존 모임에 더해 그리스도인 엄마들끼리 하루
을 기회가 있었어요. 중랑구의 한 공동육아팀이 강의
더 모여 <큐티아이>와 책 나눔을 하면서 일주일에 두
를 진행했는데, 서울시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하시
번씩 모임을 지속했어요.
더라고요. 평가회의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니 추진력
진희 작년 하반기가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출산 때문
있는 언니가 바로 그 다음 주에 마을공동체사업팀과
에 인원이 줄어 네다섯 명이 모임을 이어나갔죠. 모
의 상담을 예약했어요. 돈이 많으면 교구도 사고 활
임을 계속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기로에 서자 책임감
동도 다양해지니까 사심 섞인 마음으로 신청하기로
이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엄마들에게 어린이집 보내
한 거죠. 그렇게 상담을 받고, 부랴부랴 서류를 준비
지 말라고 권면했었거든요. 엄마들이 둘째들을 돌볼
하고, 애기들 안고 가서 사업계획 발표도 했어요. 다
수 있도록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줘야겠다는 책임감
행히 반응이 좋아서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었고, 100
을 느꼈어요. 그래서 2016년에 첫째아이들이라도 같
만원을 지원받아 9월부터 좀 더 규모 있는 공동육아
이 데리고 놀겠다고 이야기했죠. 2015년 내내 어린이
를 시작했죠.
집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났고 먹을거리를 중
진희 다들 IVF도 하고 직장생활을 해봐서인지 계획
요시하는 엄마들도 있었어요. 신뢰하는 사람이 자기
세우고 전략을 짜고 지금까지 해온 걸 점검하는 데 익
아이를 봐주면 좋겠다는 엄마들이 많았죠. 한 자매가
숙해요. 그래서 처음 서울시에 사업계획서를 낼 때,
그럴 거면 아예 공동육아 사업에 지원해보자고 했어
전략적으로 부모교육 강의를 먼저 한 후 여기에 참석
요. 그래서 우리에게 맞는 시스템이 무엇일지 생각해
한 이웃들과 모임을 이어가겠다고 했죠.
보게 되었죠. 그 결과 이틀은 아이들이 선생님과 시
민정 사업명칭이 ‘이웃 만들기’사업이라 말 그대로 이
간을 보내고 하루는 엄마들까지 함께하는 시간, 이렇
웃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지원금을 바
게 일주일에 3일씩 공동육아를 진행하기로 했어요.
라며 시작했지만 이후엔 우리뿐 아니라 혼자 육아하
세희 둘째를 낳으니 제가 두 아이를 동시에 데리고 있
는 엄마가 한 명이라도 오면 좋겠다고 기도하며 준비
진 못하겠더라고요. 뱀띠 모임에서 제가 가장 먼저 둘
했죠. 그래서 포스터와 팸플릿을 만들어 인근의 마을
째를 낳았어요. 첫째를 어린이집에 적응시키고 한 달
도서관과 인터넷의 지역 엄마들 카페에 홍보했어요.
정도 지나서 둘째를 낳았습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그래서 첫 부모교육 강의에는 비그리스도인 엄마들
보내긴 했지만 사실 미덥지 못했어요. 제가 어린이집
도 대여섯 명 참석했죠. 사업 취지에 맞게 마을의 아
시스템과 선생님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거든요.
줌마들이 참석한 거예요.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
어린이집 관련한 무서운 뉴스도 계속 나와서 불안했
어져 오고 있어요. 그렇게 엄마들만도 18명, 아이들은
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안 가겠다는 아이를 겨우 달
20명인 모임으로 규모가 커졌고 하반기의 모임이 안
래서 1년간 보냈네요. 물론 좋은 어린이집도 많겠지
정되었죠. 11월에 모임을 마치며 결산했는데 노원구
만 저희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의 경우, 선생님이 너
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지원 규모가 큰 공동육
무 자주 바뀌었는데 그때마다 아이가 적응해야만 하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니 힘들었죠. 그래서 지난 1월부터는 어린이집에 보
하고 있습니다.
내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그러던 차에 공동육아 제안
세희 어린이집에 안 보내면 국가에서 10만원씩 보조
이 와서 기꺼이 참여했죠. 저처럼 이런저런 사정으로
금이 나오는데 거기에 5만원씩 추가로 부담해서 지
모임에 합류한 사람들이 많아요.
출하고 있어요.
민정 저희 교회 김병년 목사님이 공동육아를 잘 시작
진희 서울시 지원금은 외부활동에 지출하고 있어요.
했고 축하한다고 하시면서,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만
사실 개인의 필요로 만들어진 모임이다 보니 불만의
모임이 지속되어선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우
소리도 많아요. 중간에 와해될 뻔한 위기도 겪었죠.
리가 앞으로 대안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방향을 전환
민정 공동육아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과 기대가 사람
할 수 있었어요. 저희 안에도 여러 의견이 있어요. 외
마다 정말 달라요. 모두가 전적으로 헌신하는 이상적
부로 모임을 확장해야 하지 않겠냐, 우선 내부를 잘
인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고, 어떤 모양이든 함께하
다져야 한다, 의견이 분분해요. 그래도 고인 물처럼
는 데 의의가 있다는 사람도 있고요. 그래서 지난 6월
우리끼리만 친목을 다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은 모두
5~6일에 1박 가족캠프를 하며 서로의 생각과 기대를
에게 있어요. 아직은 다들 에너지가 없어서 못하지만
나눴어요. 그리고 매월 운영회의에 모두 최우선순위
요.
를 두고 참여해서 하나하나씩 의논해가며 공동체를
진희 사업계획서 상으로는 8월에 모임을 외부로 오
세워가자고 결의했죠.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픈하자고 했어요. 상반기를 마쳤으니 논의를 거쳐 진
비온 뒤의 땅처럼 더 단단해졌어요.
행해야겠죠.
진희 사실 여태까지 남편들은 관망하는 편이었는데 전체 캠프에서 남편들도 다 같이 회의에 참여했어요.
* 구체적으로 공동육아는 어떻게 운영하고 계신가요?
그러면서 여러 오해도 풀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
진희 지금은 사실 보육 단계에요. 교회에서 보육교사
했죠. 남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태도로 전
자격과 경력을 갖춘 분이 일자리를 찾고 계셨고 저희
환했고요. 그러면서 각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파
는 아이를 돌봐줄 선생님이 필요하던 참이었어요. 그
트별로 기준을 만들기로 했어요. 먹을거리, 위생, 안
분을 모셔 와서 오전에 선생님이 30분 수업을 하시고
전, 바깥놀이 등 카테고리마다 기준을 세우고 모임을
1시간 바깥놀이를 해요. 오후에는 30분간 찬양과 성
운영하기로 했죠. 외부에 소개할 때도 합의된 문서를
경읽기를 하죠. 저희가 처음에 세 가지 목표를 세웠는
만드는 게 중요하겠더라고요.
데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 나를 사랑하는 아이,
민정 또 하나 모임의 구심점이 된 건 기도모임이에요.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는 아이로 기르자는 거였죠. 바
세희 교회에 세상과는 다른 기준으로 자녀들을 잘 키
깥놀이할 때 자연을 사랑하는 걸 배우고 수업시간에
우신 분이 계셔서 그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거죠. 공동육아 멤버로 남
있어요. 그분이 저희에게 기도하고 말씀 보는 데 힘
은 친구들이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라, 찬양하고 말
써야 한다고 조언하셨어요. 저희끼리 모이면 잡담으
씀 읽는 것에 다들 동의해서 오후에 말씀 읽고 찬양하
로 흘러가기 십상이었는데 이참에 기도모임을 인도
며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도와요. 3~5세 아이들이 총
해주시기로 했죠. 그게 참 유익했어요.
8명이 함께하고 있고, 회비는 아이 당 15만원씩 분담
민정 같이 기도할 때 성령님이 저희의 마음을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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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주시는 걸 느껴요. 친목모임은 유리알처럼 깨지
요. 특히 올해 초 공동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기 쉬운 관계더라고요. 기도 안 하면 갈등을 헤쳐 나
더 그랬죠. 아무리 그래도 홀로 지내는 게 더 힘들다
갈 에너지가 생기지 않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아이를
고 생각해요. 홀로 아이를 키웠던 때보다는 함께하는
맡기고 싶은 욕구만 가득한 모임이 되더라고요.
지금이 행복하고 유익해요. 물론 처음 공동체를 구성
세희 나중에 보니 저희 모임의 엄마들이 아이를 통
하고 시작할 땐 힘들지만 홀로 육아하는 것보단 수월
제하고 싶은 욕구가 높았어요. 그러니 일반 어린이집
해요. 직장생활을 하다가 전업주부로 육아만 하려니
을 신뢰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고요. 기도하며 그런
까 사회와 단절되는 느낌도 있었는데, 능력과 재능 있
우리의 죄성을 볼 수 있었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는 다른 엄마들과 무언가를 만들어가다 보니 성취감
도 알았어요.
도 생기고요. 엄마들이 공동육아를 통해 각자 은사를
민정 사실은 우리 욕심대로 하고 싶었으면서 거기에
개발하는 부분도 있어요.
하나님도 얹어서 가고 싶은 거였어요. 기도모임이 아
민정 올 상반기 저희 가정에 힘든 일들이 많았는데,
니었다면 이런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몰랐겠죠. 하나
그때마다 틈틈이 소윤이를 공동육아 모임에서 잘 보
님이 이 모임을 반대하시진 않지만 좋아하시지도 않
살펴줬어요. 정말 감사해요. 이런 유익을 많은 분들이
는다는 느낌도 받았고요.
누렸으면 좋겠어요. 공동육아를 시작하면서 내 자식
세희 그걸 뼈저리게 느꼈던 게, 공동육아 지원금이 원
사랑하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의 아이를 사랑할 수 있
래 계획되었던 금액에서 절반이 삭감되어 나왔어요.
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 모임을 기뻐하시면 이게 통과
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엄마들과의 관계더라고
되게 해달라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절반이 삭감된 거
요. 엄마들끼리 서로 신뢰하고 포용하며 사랑하는 것
예요. (웃음) 결국 공동육아는 아이를 위해 시작했지
이 정말 중요하죠. 갈등을 겪으며 눈물로 기도하고,
만 엄마들에게도 정말 좋은 모임이 되었죠.
주장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사이를 조율하며 관계 를 회복하고요. 공동육아가 결코 쉽지는 않아요. 일은
* 공동육아를 꿈꾸는 다른 부모들에게 조언 부탁드립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관계의 어려움을 같이 풀어나가
니다.
는 과정이 없으면 공동체를 이룰 수 없죠. 그 각오만
진희 이미 잘 일궈진 공동체를 보면서 우린 못할 거라
있다면 누구나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고 좌절하지 말고 작고 소소하게 시작하면 될 것 같아 요. 서울시가 이런 사업을 다양하게 지원하고 있으니 정책에도 관심을 가지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 서로를 위해 열정적으로 애쓰는 모습이 참 보
민정 특히 서울시는 마을지원 사업이 정말 잘 되어있
기 좋았습니다. 양육 이후 자녀교육 문제도 부
고 정보 접근성도 좋아요.
각될 텐데, 함께 잘 헤쳐 나가길 응원합니다. 이
진희 조금만 부지런히 그런 정보를 이용해보시면 좋
런 모임이 곳곳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길 기대합
겠어요. 두세 명이 한 집에 모여서 놀다가 조금씩 시
니다.
도해 보셔도 좋겠습니다. 세희 여기까지 오는 데 사실 에너지가 많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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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힘을 파악하고 견고한 공동체를 이루자 -공간신학 강의 후기
김택민 작은 설계사무실에 근무하며 집짓는데 필 요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한다. 교회 식구 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삶을 나누는 공 간을 마련하는 것이 현재의 꿈. 누구나 찾 아와 도시의 갑갑함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 할 수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싶다.
올해 초, <복음과 상황>에 게재된 최규창 선생님
했다. 거기에 대응하는 과정 중에 나의 신앙을 좀
의 인터뷰를 통해서 ‘공간신학’이라는 개념을 처
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도
음 접하게 되었다. 사실 나에게 ‘공간’과 ‘신학’은
록 준비해 놓아야 그들과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
각각 개별적으로 의미를 갖는 키워드였다. 대학에
고 의미 있는 답변을 내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서 건축설계를 전공하고 그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들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신학’에 대한 관심으로
나에게, 비록 그 범위가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어
이어졌다.
있긴 하지만, ‘공간’이란 늘 친숙하면서도 붙잡고 씨름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또 대학시절부터 “학문과 신앙의 통합” 혹은 “삶 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주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
‘신학’에 대한 관심은 역설적이게도 신앙생활보다
온 공동체가 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내가 하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욱 커졌다. 세월호 참사, 창
고 있는 건축설계라는 작업이 어떻게 복음과의 관
조와 진화 논쟁, 동성애에 대한 인식, 목회자의 성
계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을까
추문을 포함한 기독교 내의 부정과 비리 등, 기독
고민해왔다. 이런 고민은 세파에 시달리는 실무 3
교 관련 이슈들이 미디어를 통해 보도될 때면 여
년차 대리가 되고 보니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없이 비신자 동료들의 질문의 화살이 나를 향
이때 ‘공간신학’이라는 주제와 맞닥뜨리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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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나의 삶 속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그래서
경 해석과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해
막연할 수밖에 없었던 ‘직업과 신앙’에 관련된 여
석하는 관점은 너무나 평면적이고 단순화되어 있
러 이슈와 고민을 하나로 엮어내고, 앞으로 수행
다는 문제인식이 ‘공간신학’의 출발점이다. 이를
하게 될 작업과 신앙이 어떻게 조화를 이뤄나갈
극복하기 위해 요청되는 ‘공간적 사고’를 습득해
수 있을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나의 오랜 질
야 한다. 먼저 ‘공간’이 자연과학과 철학 및 사회학
문에 대한 대답처럼 다가왔다.
의 영역에서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 역사적 순 서에 따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나는 조급한 마음에 강좌가 열리기 전부터 SNS
살아가는 근대화되고 도시화된 공간이 어떻게 형
를 통해 최규창 강사님께 나의 이런 생각과 강의
성되었는지 이해하고, 근대 이후 양화(量化)되고
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나누고, 미리 읽어볼 만
기계화된 공간이 인간의 사고와 삶을 어떻게 재
한 책을 추천 받았다. 박해천 교수의 «콘크리트
조직하였는지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토피아»는 주거 공간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치 적, 사회적 인식을 주조해갈 수 있는지, 우리나라
강의 중반(4~6주차)에는 ‘외부 공간’에서 시선을
의 근현대사와 맞물린 ‘아파트 불패 신화’의 발전
전환하여 ‘인간 내부의 공간’에 관한 이야기를 다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월터 윙크의 «사탄의 가
루었다.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 특히 융에
면을 벗겨라»는 융 심리학의 주요 개념을 간단
게 중점을 두어 인간 내면의 의식과 무의식의 특
히 정리하고, 그것을 통하여 공간 속에 작용하는
성에 대해 공부하고, 더 근본적인 영적인 차원의
영적인 실체와 그 힘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공간으로 이야기를 확장해 나갔다. 중반부 말미 에는 그동안 다룬 주제들을 갈무리하며 강사님이
드디어 8주 일정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는 특
체계화한 “공간의 6가지 속성”에 대한 소개와 “다
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강사님이 주제와 관
중공간모델”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련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풀어가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그날 다루게 될 내용을 정리한 핸드아웃
융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우리 내면의 ‘선/악’과
이 제공되었고, 강사님은 주어진 내용 안과 밖을
‘영적인 힘들’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월터 윙크
넘나들며 해당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유롭게
의 이론을 개괄하고, 또 융의 정신분석이론에서
나눠주셨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이란 개념을 통하여 한국 사람의 내면에 뿌리 깊이 자
강의 초반부(1~3주차)에는 공간적 사고에 대한
리한 ‘샤머니즘’과 그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와 한
필요성 및 문제의식을 이끌어내고 ‘공간’이란 무
국 사회 속에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과 어떠한 연
엇인지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차원의 이론적 접
관관계를 가지는지 설명하였다.
근을 시도했다. 성경이 말하는 또 우리가 목격하 고 경험하는 삶의 문제, 고통의 문제는 2차원의
‘다중공간모델’은 강의에서 다룬 내용을 한눈에
평면처럼 단순하지 않고 입체적이며 ‘공간적’ 구
파악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다이어그램으로서,
조와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오늘날 교회의 성
개인 혹은 공동체의 실존과 하나님나라 사이의
공간신학 강의 후기
여러 공간적 켜들이 어떤 양상으로 펼쳐져 있는
한다고 했다. 본 강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예
지 표현한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수님이 말씀하신 아가페와 필레오의 사랑 중에 어
의 실존을 둘러싼 여러 차원의 공간의 켜들을 통
느 것이 더욱 성숙한 사랑인지 그 의미를 재고해
과하는 동안 공간 속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힘’에
볼 것을 요청하며, 이 ‘공간신학’을 이해한 공동체
의해 ‘굴절’되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굴절’
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증여’와 ‘환대’를 넘어 ‘우
을 유발하는 공간과 그 속에 작용하는 힘들에 대
정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 이해 없이, 단순히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 석과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집단적 무의식’으로 자
두 달여 간의 강의를 돌아보며 정리하고 보니, 긴
리 잡은 ‘무속신앙’과 영합한 ‘현세 기복적인 기독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
교’는, 세월호 사건과 같은 통약 불가능한 고통을
이 ‘공간’과 그 속에 작용하는 ‘힘들’을 이해하기
겪는 중에 힘겹게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이들을 향
위해 바울이 환상 속에 가 닿았던 삼층천부터, ‘집
해 그 어떤 유의미한 해석도 제시하지 못한다. 오
단적 무의식의 원형’이 웅크리고 있는 우리의 내
히려 그들을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는 섣부른 판
면 깊은 곳까지를 오르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또
단만을 남발할 뿐이다. ‘공간신학’이 추구하는 바
시간적으로도 인간이 여러 신들을 대면하여 살면
는, 이 다양한 층위의 ‘공간’에 대한 이해를 토대
서 집단적 무의식의 기초를 쌓아가던 초기 인류부
로 굴절된 하나님의 말씀을 역추적하여, 하나님
터 스마트폰이 뇌구조를 변형하고 행동을 지배하
의 법과 통치가 ‘이 시대 공동체의 가치’로 구현되
는 오늘날의 사회까지 쉴 새 없이 오가야 했으니,
게 하는 것이다.
시간 ‘여행’이란 표현이 가히 적절한 것 같다. 강사 님의 방대한 독서량과 깊은 고민, 또 고민한 것을
강의 후반부(7~8주차)에는 2주에 걸쳐 동시대를
삶 속에서 구현하고자 애쓰며 맞닥뜨린 많은 쓰
사는 이들 가운데 이러한 공간의 힘을 이해하고
라린 경험이 모두 녹아 있는 강의였기에 쉽게 이
그 압박을 효과적으로 견뎌내며 자신의 공동체 안
해하거나 바로 소화시킬 수는 없었다. 짧은 지면
에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 삶을 살고자 노
에 그 풍성함과 유익함을 다 담아낼 재간이 없어
력하는 이들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그러한 공동체
아쉽지만,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많은 것들을 이
를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준비과정에 대한 설명을
미 결정지어 놓는 공간의 힘을 파악하고 그에 맞
끝으로 강의를 마무리했다.
서는 견고한 공동체를 이루길 소망하는 이들에게 이 강좌를 추천하고 싶다. 항상 시간이 아쉽다. 좀
지금껏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
더 여유 있는 일정으로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
천이라 믿고 수행해온 ‘증여’는 이미 그 안에 수여
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사님은 더는 힘들어서 못
자와 수급자 간의 계급화를 내포하고 있기에 온전
하겠다고 하셨지만, 올 하반기 아니면 내년 봄에
한 의미의 사랑의 실천을 이루기엔 한계가 있다.
라도 꼭 다시 강좌가 개설되면 좋겠다.
한나 아렌트는 이러한 ‘증여’의 맹점을 간파하고, 기독교의 아가페가 온전히 구현되기 위해선 ‘비인 격적 평등성’이 보장된 공공재를 통해 구현되어야
소리 이음
8월 안테나 ● 중앙사무국 1. 7월 18일(월)에 실행위원회가 IVF중앙회관 학 사사역부 사무실에서 있었습니다. 학사회의 하 반기 사역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8월 30일 성경강해 9월 6일 성경강해 9월 13일 성경강해 9월 20일 성경강해 9월 27일 성경강해
● 서서울학사회 2. IFES 동아시아 학사대회, EAGC가 8월 5~9 일 동안 태국에서 열립니다. 한국에서는 스텝 을 포함하여 성인 23명이 참석합니다. 서로 환 대하고 격려 받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 6070학사회 2016년 제7회 6070학사회 여름수련회가 열립 니다. 풍성한 말씀의 은혜와 교제의 시간이 되 도록 기도해주시고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일시 : 2016년 8월 19~20일(금~토) 1박2일 장소 : 광림세미나하우스 (경기도 포천군 소홀읍 직동리 456) 주강사 : 주희재 목사(건국대73) 회비 : 개인 10만원, 부부 18만원
● YGM(수도권지역 학사회) 1. 수도권 YGM 모임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30 분 IVF중앙회관 지하 좋은땅에서 있습니다. 수 도권지역에 거주하는 학사님들은 언제든 모임 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임문의: 윤혜정 간사 070-8275-6343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ivfygm
2. 8~9월 모임일정입니다. 8월 4~6일 여름수련회 8월 16일 성경강해 8월 23일 성경강해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 주부학사모임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30분 / 좋은땅 공숙영 010-2405-9928
● 춘천학사회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함께하기 원하는 학사님은 아래 일정을 참고해 주세요. ·춘천 엄마들 모임(아이야) 매월 첫주 목요일 오전 11시 30분 사공은혜(한림대95) 010-5367-9120 · 춘천 학사모임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 회관 김아주(한림대05) 010-6381-1635 ·수원 매월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최경순(한림대94) 010-9536-0703 ·부천 매월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박은혜(한림대00) 010-9703-8815 ·평촌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 6시 / 평촌성심병원 김태준(한림대99) 010-5136-5877
● 원주학사회 원주 학사모임이 ‘카페인’이라는 이름으로 매 월 둘째, 넷째 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에 모이 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공동체와 함께, 세상
의 지친 몸과 마음에 말씀으로 ‘카페인’을 불어 넣
도 관심 있으신 학사님들은 오셔서 함께 하시면 좋
어 각성시킨다는 의미로 세운 청년학사 공동체입니
겠습니다.
다. 정기모임의 자세한 안내는 페이스북 학사페이 지 및 밴드에 공지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자발적인
문의 오대원 학사 010-4221-1777
참여만을 바라고 있으니 부담 없이 오시길 바랍니 다. 그럼, 샬롬! · 카페인 매월 2,4째 주 목요일 표영민 010-5117-0715 · 시니어 카페인 매월 한 번 / 장소와 시간 그 주에 공지 서동일 010-5332-0662
● 충남학사회 천안과 서울에서 학사모임이 열리고 있습니다. 참 여 가능하신 학사님들 함께해주세요. · 천안 편태장(단국대03) 010-2035-8071 · 서울 손윤형(백석대02) 010-9154-1160
● 전북학사회 1. 6월 24일 1학기 종강큰모임을 무사히 마쳤습니 다. 다음 큰모임은 9월 9일(목)에 하늘가족교회 에서 저녁 7시 30분에 모입니다. 9월 정기 큰모임 매월 둘째, 넷째 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2. 8월 11일(목)~13일(토) 전북학사수련회가 봉동 우 해수양관에서 있습니다. 쾌적한 장소에서 진행되오 니, 영적회복과 학사님들과의 즐거운 교제가 있기 를 소망합니다. <전북학사회 여름수련회> 일시: 8월 11-13일 장소: 봉동 우해수양관 주강사: 박태선 목사
3. IVFC라는 축구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매주 토요 일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공을 찹니다. 장소는 덕 진체련공원 축구장이며, 전북출신 학사님이 아니어
● 영남동부학사회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 경주․포항 빨래터모임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30분 경주위덕삼성타운 김효남 010-4099-5242 · 울산 주부 학사모임 격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박경아 010-6572-2176 · 8090 울산대 학사모임 진동일 010-6560-2176
● 대구학사회 1.주 안에서 달려온 인생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생 을 함께 계획하며, 나아가 다음 세대를 살리기 위해 인간 도서관을 준비하는 모임, ‘대구경북 청년 멘토 100명을 위한 의미경영 콘서트’가 지속되고 있습니 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일시 : (제12회) 2016년 8월 21일 (주일) 저녁 7시 (제13회) 2016년 9월 25일 (주일) 저녁 7시 장소 : 아멘교회 3층 드림홀
2. 대구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함 께하기 원하는 학사님은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 IEF(교대학사 교사모임)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 가정피움팀(가정사역자모임)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 사회복지팀(사회복지관련자모임)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 평신도 지도자 남편모임 매주 화요일 오후 8시 30분
· 예사모 아내모임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 나음누리
· inG 수료자 모임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저녁 6시 30분
의료인 학사들이 지역별로 모이고 있습니다. 모임 에 함께하기 원하는 의료인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일정을 참고해주세요
● 경남학사회 지역별로 정기모임이 있습니다. · 창원지역 책읽기 학사모임 매월 둘째, 넷째 주일 오후 5시~8시 김지현 010-2967-6959 · 창원지역 학사모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9시 30분 / 경남IVF 사무실 정은총 010-2418-2414 · 진주지역 학사모임 매주 주일 오후 7시~9시 류재한 010-8529-8216 · 인제대 동창회 모임 매월 1회(유동적) 박춘원 010-2578-1582 · 진주교대 동창회 모임 매월 셋째 주 금요일 오후 7시 신상운 010-3137-5379
● 부산학사회 부산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함께 참여하기 원하는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일정을 참 고해주세요. · TGIM(Thanks God It’s Monday) (1달에 2번 일상생활영성과 보냄 받은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모임) 대구 동성로점 김종수 010-3260-1391 부산대점 양말희 010-2061-5260 창원점 정수정 010-3620-9495 · E.M.포럼(복음주의목회자포럼)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박철진 010-3578-7086
·서울지역 삼성병원모임 한 달에 한 번 / 삼성서울병원 이은경 010-8892-8076 ·경기지역 수원․용인모임 한 달에 한 번 / 장소 별도 공지 송재현 010-2231-1424 ·영남지역 대구모임 매주 한 번 / 장소 별도 공지 최선미 010-6248-8708 · 부산모임 한 달에 한 번/ 장소 별도 공지 이은정 010-3862-4189 · 모임문의 백성대 간사 070-8275-6345
팟캐스트 IVF 학사들을 위한, IVF 학사들에 의한, IVF 학사들의 팟캐스트! 학사님들을 위한 팟캐스트를 소개합니다.
아학팟 IVF 학사회 팟캐스트. 본격 기독B급 팟캐스트를 지향합니다. 책을 읽고 나누 는 신나는 수다 <북잡담회>와 자녀교육에 대한 <요람에서 취업까지>를 진행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책나눔-복팟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팟캐스트 '복팟'입니다. 그리스도 인들의 책모임을 지원합니다!
퇴근하고 뭐할래? 직장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루어보는 방송입니다. 취미, 일, 가정생 활 등등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시도하고 적용하 며 공부합니다.
맑은물소리 하창완 목사와 함께 <시냇가에 심은 나무(시심)>(IVP)의 진도를 따라 성경말 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묵상도우미.
말씀으로 여는 하루 IVF 출신 목회자들의 설교 팟캐스트
58 편집인의
메아리
막연한 꿈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앞집옆집 살며 같이 밥도 해먹고 아이도 함께 기르면 좋겠습니 다. 그런데 저에 대해 알아갈수록 삶을 누군가와 깊이 공유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생활이 점점 굳어지 니 익숙하고 편한 방식을 고수하고만 싶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큽니다. 이번호를 준비하며 공동체 를 이루고 계신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이상적인 공동체와 비교하며 자책하거나 포기하지 말 라던 조언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저렇게까지는 못 하겠다고 스스로 핑계를 대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 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주변의 학사들을 만나보면 주거문제 와 자녀교육이 거대한 이슈더라고요. 이를 위한 다양 한 시도들을 이번호 곳곳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임 하은 학사의 ‘주민기숙사 주택협동조합’과 공동육아 를 하는 분들과의 만남은 개인적으로 정말 반가웠습 니다. 개인의 필요와 고민에서 시작했지만 이를 확장 해 이웃을 섬기려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 고 소소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라 는 격려를 받으며 막연했던 꿈에서 현실로 한발짝 다 가선 기분이었어요. 지난 6월호에 뜨거운 관심을 보내 주셔서,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잡지입니다. [소리]의 볼륨을 높여주세요! 홀로 씨름하며 분투하는 동역자에게 “내가 너를 지지한다”고 외칠 것입니다. 후원금은 전액 [소리]의 제 작비로 사용됩니다. 후원계좌 [우리] 1005-000-990258 [국민] 760-01-0038-627 예금주 (사)한국기독학생회 2016년 5~6월 후원자 명단 곽지영(*2) 국효숙 권도균(*2) 김선미(*2) 김재원(*2) 김종기(*2) 김종수-구한나(*2) 나현순 남은경(*2) 문신실 민은혜(*2) 박애숙 (*2) 박정현(*2) 박창재(*2) 손정엽(*2) 송인규(*2) 여운성(*2) 오 규덕(*2) 윤정범-지은실(*2) 이경임 이상엽 이원경(*2) 임정하(*2) 장은숙 전명환 전선애(*2) 정민경(*2) 정성구-윤정은 정재성(*2) 조창훈-민혜경(*2) 최수연 한병선 허성호(*2) 강릉(*2) 경기남(*2) 경남(*2) 경인(*2) 남서울(*2) 대구(*2) 대전 중부(*2) 동서울(*2) 부산(*2) 북서울(*2) 서서울(*2) 영남동부(*2) 원주(*2) 전북(*2) 춘천(*2) 충남(*2)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월 후원하시는 분은 중앙지원부(070-8275-6303)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감사드립니다. 호응에 힘입어 ‘죽 음을 배우다’ 기획 글들을 모아 호 외로 배포하였습니다. 옆의 QR코 드를 따라가면 다운받으실 수 있어요. 날씨가 더워지니 입맛이 없어지고, 그래서 차가운 음 식만 자꾸 먹고, 그러다 밤에는 배탈이 나고, 배도 아프 고 날도 더우니 잠이 안와 입맛은 더 없어지고... 저는 매일 이 악순환을 겪으며 여름날을 지내고 있답니다. (ㅎㅎ) 8월에는 각종 수련회가 있으니(특히, 동아시아 의 IFES 식구들이 모두 만나는 EAGC가 있죠!) 마음도 보양하고 더위에 지친 몸도 잘 단련시켜야겠습니다. 한껏 달궈진 날들이 조금 시원해지면 다시 찾아뵐게 요. 그때까지 안녕하시길_! 민혜경│편집인│sori@ivf.or.kr
제34권 제4호 통권227호 발행일 2016년 8월 1일 발행처 (사)한국기독학생회 학사사역부 주소 (04031)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56-10 (서교동) IVF 중앙회관 전화 070-8275-6313 팩스 02-333-7361 발행인 주상윤 편집장 이시종 편집인 민혜경 김경아 편집위원 국효숙 김기인 김지은 박정현 오한웅 이상엽 조창훈 한병선 허영신 편집디자인 김아롬새미 문이선 표지 이재웅 제작 김효영 인쇄 예원프린팅
과학과 신앙에 대한 101가지 질문 IVF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는 ‘과학과 신앙에 대한 101가지 질문’을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공유합니다. 신앙과 과학 사이의 오해를 풀고 가장 기본적인 질문 101가지를 통해 과학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시간,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던, 그래서 멀리하게 되는 과학에 대한 거리를 좁히는 시간으로 활용해주세요. 신앙에 대해 질문이 많은 청소년, 청년들과 함께하는 학부모, 주일학교 교사, 대학생들께 추천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유투브, 페이스북, 웹페이지 등을 통해서 새로운 질문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과학과 신앙에 대한 101가지 질문 만나는 방법
1. Youtube 에서 “한국교회탐구센터” 구독하기 2. Facebook에서 “한국교회탐구센터 페이지” 좋아요 누르기 3. 한국교회탐구센터 웹페이지(www.tamgoo.kr)즐겨찾기 추가하기
‘매주 금요일’ 새로운 동영상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업로드된 동영상 목록
기획 / 한국교회탐구센터 제작 / IVF Media 감수 / 송인규 소장 (한국교회탐구센터)
우종학 교수 (서울대물리천문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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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청년들은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을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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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에 기독교가 직면한 세 가지 도전은 무엇인가?
003 >
과학과 기독교, 적인가 동지인가?
004 >
크리스천은 왜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005 >
‘나’와 ‘세상’을 설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006 >
외계인은 과연 존재하는가?
007 >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기독교 신앙에 위협이 될까?
008 >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도 있다고?
009 >
성경은 과학적 사실을 담은 책인가?
010 >
그리스도인은 진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011 >
그리스도인은 과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012 >
여호수아서의 태양이 멈춘 사건을 NASA가 증명했다?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56-10, 4층
Web /
www.tamgoo.kr
Email /
tamgoocenter@gmail.com
리더가 리더에게 탁월한 지도력을 위한 4가지 핵심 원리
정곡을 콕 찌르는 리더십 멘토링! 시대와 상황을 초월해 모든 리더들이 직면할 난제 4가지, 낙심, 탈진, 관계, 연소함.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며, 리더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리더 존 스토트가 들려주는 사려 깊은 원포인트 레슨. 리더들이여, 이 책을 꼭꼭 씹어 먹으십시오. 현대 복음주의에 한 획을 그은 석학, 존 스토트에게 직접 리더십을 배우는 듯한 생동감을 느낄 것입니다. _진재혁, 지구촌교회 담임목사 명료하지만 단순하지 않고, 신학적이지만 난해하지 않으며, 쉽지만 피상적이지 않은 청량제 같은 책! _루스 헤일리 바튼, 《영혼의 리더십》 저자 마크 래버튼(풀러 신학교 총장), 메리 케이트 모스(조지폭스 신학교 교수) 아지드 페르난도(YFC 교육 총무)
존 스토트 | 김명희 옮김 124면 | 7,000원
사무엘 에스코바(전 IFES 총재) 추천
www.i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