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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28 I 2016. 10+11

체험, 삶의 현장 3

건축 현장에서 선교적 교회를 꿈꾸다┃이 힘겹고도 아름다운 육아여!┃청년들의 빚 문제를 함께 책임지다

ⓒ 이재웅 | 상명대98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사42:3)

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www.onivf.com


목차 체험, 삶의 현장 3

04 08 12 16 20

소리정음

건축 현장에서 선교적 교회를 꿈꾸다»양창모 “홈그로운_로컬뮤직재배소”를 열기까지»박수희 나는 엄마다 그리고 엄마들을 만났다»박지승 춘천학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박용한 퇴근길에 드리는 기도»정한신

소리지음

22 27 32 35 38 40 43

말씀산책»하창완 한국현대사 PBS»이강일 길따라 꿈따라»이왕수,박민아 함께, 이어달리기»홍성우 재외학사통신원»송희숙 이렇게 아빠가 되었다»문신실 유금리 라이프»지은실

소리이음

44 50 52 55 57 58

소리가 만난 사람»설성호 CONNENT TO IMPACT, EAGC 2016!»전영준 책 읽는 엄마들의 모임을 응원합니다!»이수정,도원경 안테나 팟캐스트 편집인의 글


소리

깨끗하고 맑은 소리

정음

‘체험, 삶의 현장’이 돌아왔습니다. 이번 방문지는 바로, 호반의 도시

체험, 삶의 현장 3

춘천입니다. 녹록치 않은 현실 앞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하며 춘천에 터를 닦는 학사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들의 삶의 현장에 여러 분을 초대합니다.

04 건축 현장에서 선교적 교회를 꿈꾸다»양창모 08 “홈그로운_로컬뮤직재배소”를 열기까지»박수희 12 나는 엄마다 그리고 엄마들을 만났다»박지승 16 춘천학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박용한 20 퇴근길에 드리는 기도»정한신


4+ 5

체험, 삶의 현장 3

건축 현장에서 선교적 교회를 꿈꾸다

양창모 ◆ 강원대97 강원대학교를 졸업 후 간사로 8년(활동학 사 포함)간 사역했으며, 이미란 자매(성심 대04)와 결혼하여 슬하에 2녀(은설, 은수) 를 두었다. 간사를 사임하고 배운 대로 살 아가는 학사의 삶의 꿈꾸며 최선을 다해 한 걸음 한걸음 살아가고 있다.

3년 반 정도 지난 것 같다. 간사로 8년을 살았고 그의 반 정도를 완전히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 나는 건축노동자다. 정확하게 말해서 타일, 미장기술자다. 다른 학사들과 사는 모습이 너무 다른 것 같아서 소개 하는 데 두려움도 좀 있다. 지난 3년 반 동안 끊임없이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많이 고민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은 아닐까, 상황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아닐까, 사실 아직도 내 삶에 대 해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하나님 안에서 기도하며 걸어가는 건 맞다. 대단한 삶은 아니지만 그냥 나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고 싶다.

간사사역을 마치고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가 하는 것 이었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너무나 잘 안다. 간사를 하는 동안 ‘하나님의 인 도’에 관한 강의를 여러 번 했다. 기도하고, 말씀과 상황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믿음 가운데 결정하고...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아 는 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혼란을 겪었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꿈꿨던 삶 과 현실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임하면서 나름 여러 가지


건축 현장에서 선교적 교회를 꿈꾸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계획이라기보다는 꿈 혹

람이 있구나!’ 그리고 이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

은 바람에 가깝다). 간사 말미에 가장 관심을 가

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기술자들이야 그나마 낫

졌던 것이 ‘선교적 교회’였다. 사역을 마무리하면

지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기술도 없는 일

어떤 모습으로든 선교적 교회가 되어 살아가리

용직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용직 현장 일을 직업

라 꿈꾸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라는 매개체를

으로 삼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간 내가 살던 세

통해서 선교적 교회의 꿈을 이뤄보려고 생각했

계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현실이다. 하루

다. 그래서 카페를 창업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

종일 무거운 시멘트 포대를 나르고 타일 박스를

았다. ‘소상공인 창업지원센터’를 통해 대출받을

나르는 것이 이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

수 있는 방법, 협동조합으로 창업할 수 있는 방

루 일을 해서 하루를 먹고 산다. 중요한 것은 이

법도 알아보았다. 하지만 지방에서 협동조합으

쪽 분야에는 크리스천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사

로 창업하기가 쉽지 않았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

장이나 사람을 부리는 사람들 중에는 꽤 있지만

아서 창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두 아이와 아내

현장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크리스천이 거의

를 둔 가장으로서 땡전 한 푼 없이 창업을 한다는

없다. 이들에게 선교하려면 이런 사람을 이해하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님의 인도에 관해서

고 또 함께 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나 하는 생

참 많이 물었던 것 같다. 왜 내 뜻대로 인도해주

각이 들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시지 않는지 고민도 많이 했다.

있는 곳이라면 하나님을 알려주고 섬길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현장에서 일하면서 나에게

우연히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사임하고 잠시 실

떠오른 생각이었다. 생계를 위해서 잠시 일을 했

업급여를 받는 동안 구직활동을 해야 했다. 그 기

던 건데, 이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이곳으로 부

간 동안 취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강의를 들을 수

름 받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

있었다. 국비지원이고 약간의 수당도 주는 취업

기에서도 선교적 삶이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생

프로그램이라 당연히 수강했다. 그 중에 내 눈에

각하며 그렇게 3년 반이 흘렀고 이제는 현장에

들어온 것 중에 하나가 ‘타일조적반’이었다. 기술

정착해 기술자가 되어가고 있다.

자로 일하는 것도 내 희망 중에 하나여서 ‘타일 조적반’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이것도 내가 재미

기술자 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기술자

있어 하는 분야인데 한번 해볼까?’라고 생각했

가 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다. 그렇게 이 강의를 두 달이나 수강하였고 생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일인 줄 알

계 때문에 현장에 나가게 되었다. 지인이 이쪽 분

았으면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문제는 기술자가 되

야의 일을 하고 있어서 그분의 도움으로 쉽게 적

기 이전에 현장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응할 수 있었다.

쪽 사람들은 아주 많이 거칠다. IVF를 하면서 때 로 공동체가 비인격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

기술을 가지고 건축 현장에 들어가서 처음 느낀

다. 지금 생각해 보면IVF는 너무 배려가 많고 사

생소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런 곳에도 사

랑이 많다. 세상엔 거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

소리 정음


6+ 7

체험, 삶의 현장 3

사람들은 대부분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몸도 힘들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하고 자동적으로 다이어트가 되었다. 족히 7-8kg은 빠진 것 같다. 그렇지만 정말 힘든 건 그들의 거친 모습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현장 사람들이 악의는 없다. 나 름 열심히 사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성격은 좀 거칠다. 생각나는 대로 말한다. 거친 성격 속 에 들어있는 그들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조공(기술자를 도와주는 사람)일을 해야 한다. 직업훈련으로 타 일반을 수강할 때만 해도 타일반을 수강하기만 하면 기술자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아 니다. 현장 일은 현장마다 다른 시공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조공으로 몇 년이 지나서야 기술을 조금씩 배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도 2년을 조공으로 있었다. 처음 기 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한 기술자가 한 5년 정도는 자기 밑에 있으라고 했다. 2년을 배우고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아서 그분에게서 나오게 됐다. 내 경우는 기회가 좋았다. 지인이 기술자여 서 조공의 시간을 많이 거치지 않고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첫 기술자에게서 나와서 지인 밑 으로 오게 되었는데, 1년 반 정도 조공 일과 기술자 일을 함께하며 배우고 있다. 아직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기술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준기술자 정도는 되었다. 뭐 든지 그냥 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힘도 들고 많은 인내의 시간을 거쳐서 기술자가 되어간다.

지금은 꽤 적응이 되어서 몸이 피곤한 것 외에 크게 힘든 일은 없다. 가장 어려운 것은 흔들리 지 않고 초심을 지키는 일이다. 사실 처음부터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하고 싶었다. 이 일을 하 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우와 상황에 따라서 일을 한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나 집주인이 까다로 우면 일을 꼼꼼히 한다. 그러나 반대로 허술하고 잘 모르면 돈을 많이 요구하거나 대충 일할 때가 많다. 나는 상황과 관련 없이 최선을 다해 일하고 싶다. 하지만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다. 혼자 일할 때는 집주인으로부터 일을 잘해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가 많다. 최선을 다해 일한 후 일 시키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렇지만 팀으로 일할 때는 좀 다르다. 공정과 시간을 맞춰야 하고 또 허술한 건축주를 만나면 일을 천천히 하라는 요구 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일을 시키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마음으로 일하고 싶은데 그게 마 음처럼 쉽지 않다.

다른 가치관에 물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이 목표다. 돈을 많 이 벌려고 일을 한다. 때로는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편법을 쓰거나 마땅히 지불해야 할 임금 을 적게 주기도 한다. 이들이 사기꾼이란 말은 아니다. 정말 좋은 사람들도 꽤 있다. 그리고 돈 을 많이 버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이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더 나은 목표가 없기 때문 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 틈에서 함께 살아가면 아무렇지 않게 나 역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


건축 현장에서 선교적 교회를 꿈꾸다

적이 되곤 한다. 아니 잠깐 잠깐 그렇게 느낀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기술자가 되 면 사람을 쓰고 부리게 될 텐데 내가 일하는 것으로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부를 얻어가게 하 고 싶었다. 사실 사업도 하고 싶었는데 그러고 싶었던 이유도 부가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눠지 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돈을 더 벌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샤워실 바닥 타일을 깔아주는 일을 하러 갔다. 일의 양이 많기 때문에 뒷일을 해줄 사람 한 명과 함께 갔다. 처음에 대금 얘기를 정확히 하지 않고 일을 하러 갔는데 보통 이럴 때는 내가 무리하게 요구하 지만 않으면 일이 끝나고 달라는 금액을 결재해 준다. 그날은 일이 좀 늦게 끝났기 때문에 뒷일 해주신 분에게 임금을 조금 더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더 줘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십 분 늦게 일이 끝났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고 했다. 일이 끝나고 집주인에게 임금 결재를 부탁드 렸다. 그런데 처음에 나와 통화한 집주인이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만 있었는데, 집주인이 28만 원을 자신에게 주고 갔다는 것이다. 보통 타일은 뒷일하는 사람과 함께 하루 일하면 35만원을 받는다. 요즘은 더 올라서 40만원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일이 쉽고 빨리 끝나면 돈을 좀 덜 받기 도 한다. 그런데 이날은 양이 많아서 35만원을 다 받아야 했다. 그런데 28만원을 주고 갔다는 것이다. 무슨 근거로, 나와 상의도 없이 말이다! 내가 이 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알고 단가를 깎으려고 한 것이다. 결국 그분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돈을 보태 31만원을 주셨다. 이럴 때면 유혹을 받는다. 사실 뒷일하는 분에게 더 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내가 많이 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름값과 참값 같은 경비를 제외하고 나면 나는 제 단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내가 돈 벌려고 일하는 건 아니지 라고 생각하며 처음 생각한 금액을 뒷일해주신 분에 게 주었다. 세상에서 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자면 그들의 가치관에 물들기 쉽다. 더 많이 소유 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처음 일을 시작했던 초심을 되새기며 일을 하고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나를 통해서, 내 성품을 통해서, 내 삶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알 려지면 좋겠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 사람과 많이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볼 때도 있 다. 기도하면서 이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아직 이 길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인지 아닌지 두 려움이 많다. 나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서 사람들과 다른 길을 걸어가면 두려움을 느낀 다. 그렇지만 여기에 있을 이유를 발견했고 지금은 여기서 사는 것이 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현장에 있음으로 선한 영향력이 흘러가길 바란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선교적 백성으 로 살아가길 기도한다.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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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삶의 현장 3

“홈그로운_로컬뮤직재배소”를 열기까지 박수희 ◆ 강원대02 남편이자 친구인 김남산, 6살 큰딸 지유와 3살 둘째딸 지아, 네 식구가 함께 산다. 선 교, 사회운동, 음악에 관심이 있고 더불어, 함께 잘 먹고 잘 살아가는 것이 꿈.

대학 2학년 때쯤이었나, 어느 설교를 듣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는 자가 되자.”는 마음을 먹었고 그것은 제 소명이 되었습니다. 유년시절부터 다른 사람의 인 정과 바람대로 움직이며 살아왔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싶은 과가 아닌, 점수에 맞춰 국 립대의 진학 가능한 과에 들어갔죠. 결국 대학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람들에 의해 방향 없이 흔들거리고 꺾이는, 제 인생 최대의 암흑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를 하나 님과 공동체가 조금씩 회복시켜 주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소원하는 자’라는 삶의 방향을 정하자 제 삶의 파도는 조금씩 잠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 저의 믿음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물론 과정 속에서 고민도 하지만, 졸 업 후 사무간사 제의가 들어왔을 때 저는 하나님이 저를 원하신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3년 동안 간사로 일하면서 간사공동체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누렸습니다. 그리고 선교 에 대해 알아가면서 선교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춘천 에서 받을 수 있는 선교훈련들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춘천에서 유일한 선교훈련 파송 단체가 GBT여서 ‘내게 허락하신 기회들을 이용하자’라는 생각으로 별 고민 없이 GBT 에 들어갔습니다. 나중에서야 어떤 단체를 결정하는 것이 배우자를 정하는 것만큼 중 요한 일임을 배우게 되었지만요. 그후 단체 지부 사무장으로 사역했고, 지금까지도 춘 천에서 GBT 모임을 이어가고 있답니다.


“홈그로운_로컬뮤직재배소”를 열기까지

이런 경험들을 돌아보면서 나의 소망이나 의지가

서 가사일과 육아를 도와주었고, GBT 행사나 모임

아닌 공동체와 외부의 필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는

이 있을 때도 함께 해주는 백점 남편이었습니다. 우

지, 혹시 외부에 의해 흔들렸던 옛날 모습과 비슷하

여곡절 속에 남편의 음악에 대한 갈망과 좌절이 충

진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제 기질적인 습

돌하면서 부르심에 대해 다시 고민하고 씨름하는

성이 있기도 하겠지만, 두 번의 결정 모두 제게 주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신 소명에 의해 제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라고 고 백하고 싶습니다.

둘째아이를 낳고 남편과 저는 중요한 결단을 내리 게 되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도 선교를 위한

교회에서 기타를 잘 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

첫발을 내딛자! 그래서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당시

다. 그는 모태신앙인이었지만 당시 회의론자 같았

4살과 6개월인 두 아이를 데리고 GMTC에 입학했

어요. 하지만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셔두고 말씀 앞

습니다. 우리의 삶이 재정비되고 배움의 기쁨과 성

에 겸손한 모습에서 이 남자의 가능성(?)을 보았고

장하는 즐거움이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현실

그와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두 명의 딸을 낳는

은 치열했습니다. 물론 교수님들의 사랑과 가르침,

동안 남편과 저는 우리 가정의 방향과 개인의 꿈에

삶의 훈련, 동기들과의 사랑과 우정은 잊지 못할 선

대해서 꾸준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GBT 사무

물이고 은혜입니다. 치열한 삶에서 드러난 문제들

장을 할 때 육아에 당연히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습

은 결국 저희의 부족함 때문이었죠. 육아와 과제와

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남편도 GBT 훈련을 받고

집안일이 매일 엉키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여유가

선교에 대한 마음을 조심스럽게 열어갔습니다. 그

사라지니 잠자고 있던 내면의 문제들이 하나둘 떠

러다 GBT의 ‘종족음악’이라는 사역을 하기로 마음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외면하고 살았던 상처

을 모았습니다. 이 사역을 접하자마자 이거다 싶었

와 어려움을 발견하게 되면서 저희는 뒤늦게 상담

죠. 한 나라 안에도 많은 종족이 있고 그들이 사용하

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GMTC 훈련을 받기

는 언어도 다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울리는

전부터 우울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만의 멜로디와 리듬이 있다고 합니다. 종족음 악은 서구화된 음악이 아닌 그 종족만의 찬양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저희는 좋은 부모가 되기

다가가 하나님을 알리고 교제하는 사역입니다. 이

위해 나머지의 삶을 무시하고 너무 아이들과 가정

거라면 남편에게 주신 달란트로 즐겁게 사역할 수

에 ‘올인’하며 애썼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이를 통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해 얻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지만, 우리 개인의 즐 거움과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놓쳤던 것 같습니다.

저는 잘 모르지만, 남편은 기타를 꽤 잘 친다고 합

그렇게 우리 부부의 바닥을 직면하면서, 우리가 아

니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 위해 곡 작업도 해보

직 선교를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절감했

고, 서울에서 활동하는 자신의 음악색깔과 맞는 팀

습니다. 선교지로 떠나면 새로운 장소와 환경이 주

을 찾아 오디션을 보려고도 했습니다. 그 당시 남편

는 전환이 있겠지만 그 효과는 잠시, 일상을 잘 살

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실용음악학원 강사를 하면

아내지 못하면 어디를 가도 똑같을 것이라는 것을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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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삶의 현장 3

깊이 깨닫고 ‘지금, 이 순간!’을 잘 살아내게 되면 그때 다시 도전하리라 다짐하고 다시 춘천으 로 돌아왔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저희는 부모님의 양해 하에 친정에서 1년간 살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생계를 위해 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목재소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무를 재단하 고 옮기고 배달하는, 위험하고도 힘겨운 일을 남편은 묵묵히 감당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분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얼마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지내는 동안 우리가 하고 싶은 것, 그동안 꿈으로만 그려오던 것을 한 번 살 아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광야의 삶으로 발을 내딛는 것 같아 두려웠으 나, 그렇기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결단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음악작업을 할 수 있는 개인 작업실을 구상하다가 그곳에서 기타 레슨도 하 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공연장까지 그려보니 점점 그림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방 소 도시에 살면서 음악작업을 하는 분들을 보면 처음에는 뭔가 열심히 활동하지만 점차 시들해지 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지방에서 음악 활동하는 것을 체념하고 음악을 접는 분들 도 있습니다. 그렇게 남편도 음악 활동의 좌절을 경험하고 다른 직장을 구해 일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로컬 씬(Local Scene, 지역 밴드)의 꿈을 접지 않고 있었습니다.

뮤지션으로 성공(?)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지속적인 활동을 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 해서는 서울로 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홍대로 진출해야 한다는 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든 그것 을 소비하는 대중의 보편적인 상식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뮤지션들은 서울로, 홍대로 몰리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음악공연을 보러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서까지 홍대로 갑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저희는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만들어 보자. 우리 지역, 우리 동네에서 공연 하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차 한 잔 값으로 부담 없이 음악으로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장 소를 만들어 보자.”

남편과 저는 저렴한 상가를 임대하여 둘이서 끙끙대며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둘이서 함께 작업장으로 출근해서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열심히 작 업을 했습니다. 바닥공사, 벽과 천장 페인트, 외부 유리창에 목공작업, 간판, 전등 설치 및 싱크 대와 책상까지... 전문가가 아니니 힘도 들고 서툰 것 투성이였지만,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저희는 뭐든 스스로 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전에 남편이 일하던 목재소에서 저렴하게 나무를 구하 고 공구도 빌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남편에게 돈은 주시지 않았지만 다양한 재능은 주셨 다면서 웃으며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남편은 우리가 함께 그린 그림대로 척척 만들어냈습니다.


“홈그로운_로컬뮤직재배소”를 열기까지

그렇게 “홈그로운_로컬뮤직재배소”가 완성되었습니다. 저희는 이 공간을 우리 동네 텃밭에서 재배되는 유기농 로컬음악 상점이라고 말합니다. 8월 5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매주 공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8월 동안에는 매주 금요일 한 번이었지만, 9월부터는 화, 금 2번의 공연을 진행합니다. 그저 오픈만 하면 된다는 심정으로 앞만 보고 달려오다 막상 시작을 하니 저희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도 있고, 개인의 이익만이 아닌 표현이 거창하지만 지역의 공연문 화를 위한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서운하고 외롭기도 했습니다.

“홍대, 신촌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뮤지션 입니다.” “강원도 춘천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뮤지션 입니다.”

“오늘 홍대 가서 공연 보고 왔어.” “오늘 춘천 공지천 가서 공연 보고 왔어.”

어떤 사람과 어떤 음악이 그 자리를 채웠는지를 말하기 전에 이미 두 문장이 주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서울의 공연에 비 해 훨씬 저렴한 비용임에도 대중은 쉽게 시간과 돈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뮤지션 섭외도 생각 보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된 수입원이 되어야 할 기타레슨은 현재까지 단 한 과정도 생 기지 않았고요. 이 공간을 준비하고 만드는 동안 수입은 전혀 없었는데 네 식구 먹고 살 것에 대출금까지, 걱정이 한 가득입니다. 그래도 저희는 오늘도 뮤지션을 섭외하고, 공연포스터를 만들며, 아이들을 돌보고, 다행히 밥도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제 삶이 만약 영화라면 지금쯤 확 대박을 쳐주어야 주인공들도 힘을 얻고, 그동안의 고생도 보상받고, 우리가 그린 꿈을 실 현하고 성공시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전을 주는 그런 그림이 펼쳐질 텐데, 현실은 역시 녹록치 않네요.

저희 공간 한 쪽 벽에 이런 글귀를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지금, 이순간의 음악” 사람들은 멋진 공간에 가서 감각적인 사진을 찍어 올리며, 남들에게 자신이 그런 멋지고 느낌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공감 받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SNS를 하다 보면 저 또한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 견합니다. 중심부의 문화가 아닌 비주류로서 그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음악하며 지역주 민들과 소통하길 원한다며 시작했지만, 사실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주류를 동경하며 우리 또한 그런 감각적인 공간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고 사람들의 공감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의 욕망과 씨름하면서, 저희의 공간이 화려하고 유명하지 않은 동네의 작은 공연 장이 되도록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 위로와 쉼이 되는 그러한 음악을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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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삶의 현장 3

나는 엄마다 그리고 엄마들을 만났다

박지승 ◆ 강원대01 강원대학교에서 지구물리학을 전공하고 서울로 취직하고, IVFer는 아니지만 함 께 교회를 섬기던 강원대 무역학 전공의 신랑과 결혼하였다. 이시은(8살), 준열(6 살), 시아(4살) 고만고만한 세 남매를 양 육하며 3년 전 춘천으로 이사하였다.

나는 엄마다

엄마라는 이름은 제 내면에 숨겨온 가장 밑바닥을 보게 합니다. 엄마 이기 전의 저는 늘 포장되어 있었고 심지어 포장되었다는 것조차 알 지 못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늘 바빴습니다. 열정적이고 하나님과 가 깝다고 생각했었죠. DPM을 시작으로 1시간도 분 단위로 쪼개서 누 군가를 만나거나 각종 모임을 하고 숙제를 했습니다. 공강시간에는 학교식당 설거지 알바에, 토요일 야간 호스피스 봉사를 했고, 한 학 기동안 ‘과순이’도 하고 3학년 때는 부학회장을 했습니다. 같이 살던 IVF 언니가 저를 우주에서 제일 바쁜 아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습니 다. 굳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좋았고 어떻게 든 맡겨진 일이라면 끝까지 책임을 지고 열심히 하려 했습니다. 그때 의 저는 마냥 사람 좋은 불타는 IVFer였습니다. 선배들은 열심히 하 는 저를 칭찬했고, 후배들에겐 제가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이고 싶 었습니다.


나는 엄마다 그리고 엄마들을 만났다

졸업식 한 달 전에 회사에 들어갔는데 바쁜

그후 대학시절 춘천에서 섬기던 교회 청년부

삶은 이어졌습니다. 학사로서의 삶을 시작

회장오빠와 결혼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한 저는 매일 똑같은 시간표의 삶을 살았습

주일에만 교회에서 보던 사람이었는데, 아는

니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아주 단순해진 삶

사람 하나 없이 서울에서 자취하며 회사생활

이지만 바쁘고 정신없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을 하던 때라 삶 나눔을 시작으로 자주 연락

QT 외에 일밖에 안했는데도 하루는 너무 짧

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학사모임에서 느낀 시

았습니다. 게다가 전공인 지반조사 분야는 건

원한 대화가 이어지면서 결국 결혼에 이르렀

설업계에 속해서, 국가에서 건설하는 도로나

습니다. 남편과 저는 혈액형부터 스타일이 너

다리 등을 TK(턴키)라는 형식으로 대기업들

무 다르지만 둘 다 분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

이 경쟁하여 입찰하도록 해서, 합사(각 분야

자 성향이 강합니다. 단순히 서로 상한 감정

회사들이 일시적으로 차린 합동사무소)를 열

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상할 것이 없이 서

어 수개월 동안 함께 조사하고 연구하여 보

로 맞춰가는 안정형이기에 현재 결혼 9년차

고서를 씁니다. 이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그냥

이지만 크게 싸우거나 한 적은 없습니다. 결

좀비로 살게 되죠. 잠도 못자고 집에 못 갈 때

혼을 통해 제 인생 가장 안정기를 누렸지만

가 더 많고,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한때 제가

결혼은 둘만의 만남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아

맡은 프로젝트는 그랬습니다. 마감이 가까우

온 완전 다른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이기에, 우

면 상사에게 허락받고 교회 가서 예배만 드리

리 둘 외의 다른 것들이 얽히고설켜 누구나

던 것도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마냥 바빴고

그렇듯 그 세계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데 많

그런 바쁜 삶에 지쳐만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집은 경기도 안산인데 회사는 서울이어서 출

그후 이제껏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고난의

퇴근 시간이 너무 고단해 회사 앞에서 친오빠

시절을 맞았습니다. 바로 육아입니다. ‘캠퍼

와 자취를 했습니다. 자취집 근처에 있는 작

스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던 그 시

은 교회를 다니면서 내가 만난 하나님을 나누

절과는 달리, 우리 가정에 하나님나라를 맛

고 함께 성경공부하며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날

보기만 해도 좋겠다는 게 제 소명이 되었습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내면의 갈급함이 있어

니다. 저는 아무런 준비도, 이렇다 할 예고도

서 IVF 선배들을 따라 YGM을 갔고 학사모임

없이, 그 어떤 좋은 본을 보지도 못한 채 엄

의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학사모임

마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계획에는 전혀 없

에서 사실 깊은 삶 나눔이 어려웠습니다. 재

던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것입니다. 특히 17개

경학사로서 더 깊숙이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

월 차이 나는 첫째와 둘째를 키울 때, 제 인

나의 연약함에다가 바쁜 회사일도 이유였습

격의 실상과 내면의 쓴 뿌리를 발견했습니다.

니다.

혼자 울기도 많이 울고, 화도 많이 냈습니다. 저는 좋은 엄마가 아닙니다. 그저 은혜로 하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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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삶의 현장 3

루를 겨우 감당해내는 안타까운 엄마입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언제 제 내면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엄마는 준비가 되고 시작하는 것이 아 니라 엄마가 되어버리고 준비하며 만들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과정 속에 있는 엄 마입니다.

그리고 엄마들을 만났다

딸들은 엄마가 되고 나서야 친정엄마의 사랑을 가슴 깊이 깨닫고 감사한다고 합니다. 저는 엄마가 되고 나서 친정엄마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날 키운 엄마, 어떤 다른 위대한 인물보다 더더욱 상 받아야 할 분입니다. 엄마가 되어서야 엄마를 이 해할 수 있듯이 나이가 다르고 고향이 다르고 살아온 곳이 다르더라도 엄마라면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엄마라서 느끼는 것들이 있고, 엄마의 이름으로 감당하고 견딘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유할 수 있는 것도 많고 금세 끈끈한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동네 엄마들 과 친합니다. 큰아이의 친구들, 다른 학부모들과도 친합니다. 둘째, 셋째아이 유치원이나 어 린이집을 같이 보내는 엄마들과도 친합니다. 그냥 친합니다. 함께 웃고 떠들고 ‘시월드’ 욕하 며, 서로 위로하고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그냥 그렇게 만나고 또 헤어집니다. 이건 그 냥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만난 엄마들 모임 중 하나는 하나님이 저희 가운데 계십니다. 바로 “아이야 모 임(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전하는 모임)”입니다. 이것은 춘천 IVF 아줌마 학사모임입니다. 함께 육아라는 소명을 감당하며 이를 이루어 가는 핵심에 하나 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다른 엄마들을 만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엄마들을 만나다 보면 대 학 때와 직장생활 할 때와는 다른, 정말 현실적이고 어찌 보면 아이 같은 삶 나눔을 합니다. 다른 공동체와 달리 끈끈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아이야 모임”은 단순히 서로 그렇구나 하 고 공감만으로 끝나는 가벼운 만남이 아니라 엄마인 제가 조금씩 변할 수 있는 놀라운 만남 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엄청나게 말씀을 나누거나 오래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어 떤 예배보다도 짧게 기도하고 집중하기도 어려운 만남입니다. 돌아다니는 아이에 우는 아이, 내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 할 때 꼭 엄마를 찾는 아이, 아이들 밥도 먹여야 하고, 어린이집에 보낸 아이들 돌아올 시간도 임박하고... 문자 그대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학사모임입니다. 성 경책보다 기저귀를 가득 넣어온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섭니다. 나누기로 한 책은 바로 전날, 그 것도 아이들이 다 잠든 후에야 부랴부랴 읽죠. 약속시간도 못 지키고 고양이 세수에다가 목 이 다 늘어난 티를 입은 채로 만나는 그런 모임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임하며 이야기


나는 엄마다 그리고 엄마들을 만났다

를 할 때나 들을 때나 눈물이 나고, 또 보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신기한 모임입니다. 엄마이기 에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많지만, 예수님을 믿는 엄마이고 아이를 향한 소명을 품은 엄 마들이기에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더 남 같지 않고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나눔이 있습니다.

“아이야 모임”은 아이를 키우며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대로 키우려는 엄 마들의 동일한 마음이 모여서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출산이나 복직으로 멤버들이 바 뀌기도 하고, 예상치 않게 아이들이 아프거나 갑자기 일이 생겨 집으로 초대한 엄마만 만나 는 경우도 있답니다. 하지만 엄마이기에 그런 상황을 모두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엄마이 기에 더 만나고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엄마가 아이를 아프 게 한다》라는 책을 모임에서 나누며 엄마인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재 엄마 로서의 내 모습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엄마의 모습을 많이 생각하며 기도하고 소망하 였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고 제가 변화된 시간은 마더와이즈 교재 중 <지혜>를 했을 때입니 다. 써야 할 숙제가 많았지만, 실질적으로 실천해야하는 팁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며 정말 시도해 보게 해주었고, 이를 나눔으로 더 깊이 있는 모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기도를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우리 모임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이야기를 통 해 누군가의 엄마인 학사님들께 권면합니다. 엄마로서 마냥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단순히 엄마이기에 공감되는 만남도 좋겠지만 점점 더 악해지는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구별 된 자녀를 키우는 소명을 가진 엄마들을 만나 하나님을 의지한 육아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엄마로서 답을 모르겠고 고민될 때 세상이 주는 답은 돈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답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의 기도문 중 일부를 남깁니다.

“오, 주여. 19명의 아이들을 낳고 돌보는 매일이 분주하고 지치지만, 부엌에서 하루 1시간 주 앞에 기도하는 이 시간이 우리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되 게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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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삶의 현장 3

춘천학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 박용한 ◆ 강원대90 아내 최지현과 가정을 이루고 한창 사 춘기를 겪는 고1 은서, 중1 동주를 두었 다. ‘여가학’을 전공한 것을 바탕으로 삶 과 신앙을 심각하게 바라보기보다 여가 를 누리듯 유연하게 교회를 섬기는 목 사이자 소양댐에서 야간 라이딩을 즐 기는 사람.

과거: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노는 거야

“동주야, 아이들 좀 봐주렴. 아빠는 교회 삼촌, 이모들과 뭐 좀 해야 하니까.” “네, 알겠어요.”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동주는 그래도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 로 들어갔다. 모임을 마친 후 아이들이 조용하기에 애들을 잘 데리고 놀아 주고 있나 보다 생각하고 방에 들어가 보았다. 역시 아이들은 해맑은 얼굴 로 놀이에 집중하고 있다. 옆에 있는 동주의 얼굴을 보니 우려와는 달리 아 이들을 억지로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열심히 놀고 있었다. 아이들 과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놀고 있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동주야, 네가 더 재밌어 보인다.”

동주가 환하게 웃는다. 돌아보는 동주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기가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돌아와 그 순간을 생각하니 흐뭇하면서도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춘천학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

춘천에서 살아온 지 어언 15년, 다양한 사역을 경험했다. 학사회 전임간사, 사무간사, 캠퍼스간 사, 대표간사, 학사회 협동간사 등. 이제는 학사이자 목회자로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면서 춘천 의 학사모임을 섬기고 있다. 아니 섬긴다는 것보다 재밌게 놀고 있다. 춘천학사회에 대해서 글 을 써 달라는 요청에 지난 15년을 잠시 돌아보면서 추억에 빠져 본다.

10여 년 전,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춘천학사회를 섬기고 있던 이석미 학사는 바이올린 연주 자로 학교와 시향에서 일하고 있었고, 한림대에서 강의하던 이민수 학사는 심리학을 전공하였 고, 신학을 전공한 나까지, 셋은 동기이기도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우리끼리 비공식적이면서 도 지극히 사적인) 번외학사모임을 가졌다. 민수 형제의 제안으로 《강자와 약자》를 비롯한 폴 투르니에의 책을 같이 읽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모여 서로 다른 관점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을 가졌다. 모임의 묘미는 누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 하고 즐기는 점이었다. 음악, 심리학, 신학의 서로 다른 전공을 가지고 텍스트를 읽고 나누는 것 이 흥미로웠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자기의 입장에서 보기에 셋이 펼쳐놓았을 때 그 속에서 많 은 인사이트를 받았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가지다 직장을 옮겨야 해서 아쉬움과 즐거운 추억을 간직한 채 모임을 마 무리했다. 많은 학사모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모임이 유독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아련한 추억을 남겼을까? 그 친구들과 모임을 다시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 걸까?

학사모임이라고 하면 약간 무게감을 주는데 아마도 이 모임은 그렇지 않아서였을 거다. 놀고 싶 은 친구들이 함께 모여 일주일에 한 번 신명나게 노는 시간이었기 때문일 거다. 모임을 만들고 멤버를 모으는 형식이 아닌, 서로가 원해서 만들어진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텍스트를 가 지고 나누는 시간이 서로에게 의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멤버수가 많지 않고 소수의 모임이 기에 심적으로도 한결 가벼웠던 것 같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모임을 만들고 인도하고 섬기는 역할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기쁨과 보람도 있지만 모임을 만드는 긴장감과 연락하고 오라고 하는 데 들어가는 피로감도 겹 겹이 쌓여간다. 그래서 모임을 시작하는 것도 좋지만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마음이 가볍고 편 하고 마치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는듯한 후련함도 들었다. 노는 것이 아니라 놀아주는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할머니들이 손주들이 오면 너무 반갑지만 갈 때는 더욱 더 반갑다는 우 스갯소리가 ‘웃프게’ 들린다. 아마도 놀아주기는 하지만 같이 놀지는 않기에 함께 하는 그 시간 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고 불편한 마음도 있었으리라 본다. 어쩌면 많은 IVF 모임들에는 이처럼 미묘한 긴장감이 있는 것 같다.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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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삶의 현장 3

현재: 우리는 반드시 이겨요! 이길 때까지 싸우

학사회 간사를 시작하면서 마음에 수많은 모임

기 때문이죠

을 조직했고, 만들었고, 준비를 했다. 아마도 미 쳤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산타아

한 달 전, 설악산 케이블카 저지를 위한 모임에

고 순례길을 걸었던 그녀처럼 너무 버거운 것들

참석했다. 그 모임에서 강연하시는 분이 나와서

은 하나둘씩 버려야 했다. 학사모임이야 3, 4년

이번 모임이 90여 번째라고 하셨다. 참석자들

간 끌고 갈 수 있지만, 학사모임이 정말 중요한

을 돌아보니 기껏해야 9명 정도밖에 없었다. 속

모임이고 소중한 것이라면 일평생 완주해야 할

으로 이 정도 숫자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순례의 여정이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저

이 들었다. 그런데 모임이 시작되자 내 예상과

런 사정으로 가지치기를 했고, 혹은 스스로 잘

는 달리 모임의 밀도가 매우 강력함을 느꼈다.

라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 내가 하는 것

도청을 향하도록 스피커를 설치하고 시작된 모

은 독서모임 하나이다.

임에서 이분들의 주장은 매우 강력했고, 숫자로 판단한 내가 죄스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끝날

지금과 같은 학사모임을 시작한 지 3년이 넘어

때쯤에 모임의 리더 격인 분이 나오셔서 다음

간다. 교회 개척을 하면서 학사모임을 새롭게

과 같이 외치셨다. “우리는 반드시 이깁니다. 왜

시작했다. 모임을 철저하게 세팅하기보다는 반

냐고요? 이길 때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

대로 대충 하고 싶었다. 중요한 모임보다는 저

침은 모임에 참석한 9명의 하찮은 숫자가 아닌

녁에 친구 집에 모여 함께 먹고 마시고 노는, 그

거대한 권력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런 모임을 만들고 싶었고 거기에 참여한 학사

거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전율을 느꼈다.

들도 동의했다. 같이 먹으러 다니거나 스트레칭 을 하기도 하고, 아님 두세 시간 수다만 떨다가

춘천 학사모임은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의 여정

헤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책들을 같이

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막상 시작하려고 할

돌아가며 읽으면서, 같이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

때 할 것이 엄청 많아 보였다. 학교별 모임, 동기

서, 조금씩 어느덧 성큼 이 순례의 여정을 걸어

모임, 직능모임, 관심별 모임, 지역모임 등등, 학

왔다. 《산둥수용소》를 읽으면서 신앙이 필요하

사모임을 조직하려고 해보니 모임 수만 일주일

지 않고 오직 생존기술만이 우대받던 그곳에서

에 10여개가 훌쩍 넘기도 했다. 이것을 기획하고

궁극적으로 신앙이 왜 있어야 하는지를 깨달았

준비하고 연락하는 수고는 마치 스페인 산티아

다. 《샴고로드의 심판》을 읽으면서는 피고인석

고 순례길을 준비하던 자매의 모습과 흡사하다.

에 하나님을 불러내서 우리 삶에 고통과 슬픔을

그녀가 산티아고를 가려고 준비할 때 가져가야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고, 《고백

할 것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길을

록》을 통해 그들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했음에

걷는 동안 하나둘 배낭에서 버려야 했고, 가장

공감했다. 이렇게 다양한 책들을 읽으면서 신앙

기본적인 것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래야 그 순

의 풍성함뿐만 아니라 내 삶의 문제도 돌아볼

례길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다고 했다.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춘천학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

모임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찮은 건 결

평범한 일상 속에 특별함이 있음을 깨달았다.

코 아니다. 나의 삶을 드러내고 고민하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의 휴식처를 가지고 있다는 게 마

어쩌면 학사모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치 든든한 집 밥을 먹는 느낌이다. 화려하지는

본다. 모임이나 예배가 부족해서 우리의 삶과

않지만 정성과 사랑이 묻어 있고, 자유로운 바

영성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모임이 사건이

람과 격한 공감의 폭풍도 느낄 수 있는 사람

되고 공감의 시간이 되고 노는 시간이 되어야

들이 함께 한다. 어른이 되는 순간부터 성장

한다. 그래야 내가 그 안의 주체가 되고 내 안

이 멈춘 사람이 너무 많다. 그렇기에 제발 책

으로 사건이 되어 들어온다. 나는 학사모임에

을 읽고 사람을 읽고 마음을 읽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래서 먹고 나

책도 읽지 않고 사람도 모르고 자기 마음도 모

누고 놀고 읽었다.

르는 어른들로 인해서 다음 세대가 힘들다. 그 래서 우리 모임은 책을 읽고 사람을 읽고 마음

이제는 글을 쓴다. 책을 읽고 독후감이나 감상

을 읽는다. 우리 모임의 목적은 하나다. 끝까

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을 쓰고 내

지 갈 거다. 좋은 친구와 평생 같이 할 수 있다

고통을 쓰고 궁극적으로 내 삶을 쓴다. 펜을

면 주안에서 “형제가 연합함이 얼마나 아름다

잡고 쓰는 순간 고구마 줄기처럼 과거와 현재

운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의 모든 것들이 함께 땅위로 올라온다. 거기에 는 아픔도 즐거움도 고통도 환희도 있다. 글쓰

미래: 걸으면 생각이 올라와요. 글 쓰면 마음이

기는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천천히 걷기

보여요

가 생각을 길어 올리는 수단이라면 글쓰기는 그 생각을 지금의 자리에서 재구성하는 것이

“자, 걸으세요. 발끝을 보면서 가급적 천천히

다. 노는 것과 읽는 것, 그리고 글쓰기는 서로

걸어보세요. 뭐가 생각이 나죠?”

다른 것 같지만 중요한 종교적인 행위다. 지친 학사들의 삶과 신앙의 여정 속에서 마음껏 자

드라마치료 워크숍을 하면서 디렉터의 말을

기를 표현하고 드러내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의

따라 아주 천천히 걷는다. 한번도 이렇게 천

광장, 이것이 춘천학사회의 모습이었으면 한

천히 걸어본 적 없는데, 발끝을 보면서 천천히

다. 비록 많은 학사들이 춘천을 떠나 대부분

걷다 보니 다양한 생각이 올라온다. 과거의 어

수도권으로 내려가지만, 조만간 연어와 같이

떤 장면도 생각나고 사건도 선명하게 보인다.

춘천으로 회귀하는 학사들이 많아지리라 본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행동을 통해 자신

다. 흙이 좋아지면 생명은 자연스럽게 자라나

의 아픔도 기쁨도 고통도 나눈다. 단지 걸었을

기에 우리의 모임이 그런 토양이 되기를 간절

뿐인데... 드라마치료를 공부했을 때 선생님이

히 소망한다.

인도하신 워크숍에서 걷는 행위가 완전 새롭 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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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도문

퇴근길에 드리는 기도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창조의 정신과 온갖 은사를 주셔서 이 세상 속에서 일하게 하 셔서 감사합니다. 보냄 받은 일터에서 당신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웃을 돌보고 섬김으로써, 주인이신 당신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당신의 나라에서 우리의 일로 당신께 영광 돌 릴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오늘도 보냄 받은 일터에서 퇴근하면서 기도드립니다. 일을 통하여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과 우리의 일 을 향한 당신의 놀라운 계획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이어지는 고된 노동과 온갖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인해 피곤 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당신께 나아갑니다. 일터에서 우리가 하는 일이 때로는 그저 고된 수고의 짐이요,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일을 통하여 당신을 섬기고 또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어 감사하면서도 돈 을 벌기 위해서 행복을 유보하고 조직의 요구와 자본의 구조 속에서 소모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마다 한숨이 나 옵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막막하게 느껴지는 미래, 외로운 순간들로 인해 고개를 숙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퇴근 길에 당신을 바라보면서 기도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고 끌어안아 주시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면서 만나는 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어둡고 피곤에 찌든 얼굴들 속에서 어그러진 세 상과 노동의 현실을 절감합니다. 직장 동료들과 상사와의 관계 속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마음에 담은 채 퇴근 길에 오른 이들을 만납니다. 직장의 부조리한 현실과 불안한 고용 환경 속에서 갈등하며 답답해하는 이들을 만납 니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불황의 늪에서 생존의 문제로 씨름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일자리가 부족해서 희망을 찾 기 어렵고, 겨우 얻은 일자리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저질 일자리여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청년들의 얼굴을 봅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당신의 손길을 구합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이웃들의 퇴근길을 밝 혀 주옵소서. 피곤한 어깨에 새 힘을 더해 주시고, 홀로 걷는 외로운 발걸음에 동행해 주옵소서. 일하시는 하나님, 당 신이 우리에게 베푸신 일이라는 선물을 회복하여 주소서. 노동의 즐거움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당신의 나라에서 누 리는 아름다운 일로 우리의 일을 구속하여 주소서. 하나님, 퇴근길을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어서, 그래서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숱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일해야 하기에 퇴근의 권리를 누릴 수 없고, 마땅히 받 아야 할 임금을 받지 못해 퇴근하지 못하며, 일할 곳이 없어 퇴근길을 누릴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 일하는 이 들이 온전히 퇴근의 권리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이 땅 가운데 정의를 세워주소서. 땀의 가치를 제대로 보상받 고 일하는 이들이 그 존엄을 누릴 수 있는 일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시고 보내시는 하나님, 오늘도 당신을 의지하면서 퇴근합니다. 당신 안에서 참으로 안식하 며 새로운 힘을 얻고, 내일 당신을 노래하며 출근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 니다. 아멘.

정한신 ◆ 부산대94 IVF 일상생활사역연구소 기획연구위원(peacemaker99@hanmail.net). IVF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아내(한은정, 동아대 99학번)와 두 아들과 더불어 성숙하는 가정을 꿈꾸며 살고 있다. 캠퍼스에서 법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일상생활사역연구소에서 일터와 삶터를 살아 가는 영성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TGIM 운동, ‘일상기도’ 운동 및 ‘일상학교’ 운동에 힘쓰고 있다. 전자책 《일과 기도 : 일터와 직장을 생 각하며 드리는 일상기도》(일상생활사역연구소, 2014)를 펴냈다.


삶 과

음 에

관 한

김 영 봉 의

설 교

소리 정음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김영봉 지음 | 236 면|1 1,00 0원

생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나그네 인생길로의 부르심을 깨달아 더욱 충만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저자의 현실과 밀착된 혜안은 쉬운 문체로 손에 느껴지듯 새롭습니다. 죽음을 벗하며 필요한 존재로 살기를 나지막이 권하는 고전으로 오랫동 안 기억될 소중한 기록입니다.

_김응교(시인,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하고 유익한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잘 모르 는 이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유족들에겐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그리고 언젠가는 다가올 우리 자신의 죽음은 어떻게 예비해야 할지 를 따뜻하고도 진솔한 언어로 제시해 주는 지혜로운 지침서입니다.

_이해인(수녀, 시인)

www.i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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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산책

시글락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삼상27장~31장)

하창완 ◆ 부산대82 84년 부산지역 IVF가 개척될 때부터 같 이 시작하였고, 아내도 IVF에서 만나고 큰딸도 IVFer인 행복한 골수 IVFer. 국어 교사로부터 출발해 목회자가 되어 부산 에서 ‘하나님나라를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찐한 공동체’를 꿈꾸며 ‘맑은물 교회’를 개척, 12년째 섬기고 있다.

애정을 쏟아 부은 사람이 배신을 할 때, 그에게 주었

사울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래도 이스

던 사랑은 오히려 차가운 눈물이 되고 그 눈물은 그

라엘 왕으로서 사울이 해야 하는 수많은 결정 가운

와 나 사이에 벽을 만든다. 그의 배신과 나의 눈물이

데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절차가 있기 마련이다. 그때

만든 단단한 벽. 옛날에 어떤 가수는 그걸 ‘유리벽’이

마다 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일종의 제비뽑기-편집

라고 노래했던 기억이 난다.

자 주)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물었지만, 하늘로부터 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게다가 예전에 사울이 경험

하나님과 사무엘은 사울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러나

했던 ‘성령에 사로잡혀서 춤추며 예언하던 것’은 한

사울은 하나님보다는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낱 추억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꿈이든 예언이든 그

그러더니 점점 권력에만 집착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무엇이든,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사

오로지 다윗을 잡을 생각에 골몰한다. 그때 하나님

무엘마저 세상을 떠난 후라 더 이상 그를 찾아오는

과 사무엘이 쏟아놓은 한숨과 눈물을 우리는 기억한

선지자도 없었다. 하나님과 사울 사이에는 오직 거

다. 하나님과 사무엘이 사울과 씨름하며 수도 없이

대한 장벽, ‘하나님의 눈물’이라는 유리벽만 놓여 있

흘렸을 눈물이 이제는 그들 사이에 장벽이 되었다.

었다.


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

그 즈음에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치르려고

지키는 데도 소심한 방식(질투와 경쟁자 몰아내기 등

군대를 모으고 있었다. 지금까지 두 나라의 전쟁은 주

등)을 취하는 법이다.

로 남동부 지역의 세펠라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이번 에는 너비가 16km 정도인 북쪽 이스르엘 평야가 전쟁

사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그에게 하나님

터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남북을 갈라놓는 평야를 장

은 단지 제사 때 만나는 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처

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

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배웠던 경험이 이를 더 강화

려는 블레셋의 작전이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산지

했을 수 있다. 사울이 제사 드렸다고 사무엘에게 실컷

사람이라 평야에서 기마병을 중심으로 하는 전투에

야단맞으면서, 그는 제사만큼은 잘 드려야 한다는 것

는 경험이 없는 반면, 블레셋은 평지 전투에 익숙한

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사무엘에게 귀가

사람들이었다.

따갑도록 들었던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어 디로 갔을까? 왜 그건 배우지 못했을까? 왕으로서의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보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블레

일상, 적과의 전투에서 그는 자기 방식대로 모든 것

셋과의 평소 싸움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끝장을 낼

을 결정하고 행동했다. 일상과 종교의 철저한 분리가

것 같은 그들의 위용에 기가 꺾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였다. 사람들의 인정, 경

그동안 지속된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그는 이미 한

쟁자에 대한 질투,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

참이나 기가 꺾여 있었다. 그는 벌써 며칠째 잠도 못

지 않는 저돌성 등이 그의 삶의 태도와 방식이었다.

자고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무엘이 그리웠다. 이미

그 속에 들어있는 자기 고집, 집착 등이 하나님께로

죽어버린 그가, 평소에 그렇게 자기에게 쓴 소리만 내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의 근

던 그가 왜 이리 보고 싶은지... 결국 사울은 무당을 찾

본은 사울의 죄성, 곧 하나님 없이 살고 싶은 인간의

았다. 온 나라 안에 있는 마당과 박수를 쫓아낸 게 바

자기중심성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죄가 상처나 두

로 사울 자신이건만, 마음이 답답하고 미칠 지경이 되

려움, 불안 등의 심리와 어우러지면서 의지적 행동을

자 무당을 통해서라도 사무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찾지 않는 건 당

다. 수소문 끝에 신접한 여인을 찾아 변장을 하고 밤

연한 것이다.

에 그녀를 찾아갔다. 그가 그렇게 소심한 사람인 것을 하나님은 몰랐을까? 사울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쯤 되면 누구나 자

사무엘의 말을 들어보라. “임금님께서 스스로 하찮은

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던 그 무렵에 주님께서 임금님

생을 천천히 뒤따라온 우리는 그 이유를 금방 찾을 수

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셨습니다.”(삼

있다. 맨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그의 ‘권력에 대한 집

상15:17) 소심한 것 자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문

착’이다. 처음에 그는 집착이 없었다. 오히려 소심했

제가 되지 않는다. 소심함이든, 과감함이든, 모험적이

다. 그런 그에게 왕은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도 모른

든, 그 사람의 특징일 따름이다. 하나님을 따라 걷는

다. 하지만 왕이 된 다음 그는 달라졌다. 권력에 대한

길에서 그것은 성숙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운

집착이 남달랐다. 소심함에서 출발한 사람은 권력을

특징이 된다. 각자의 성격과 기질이 하나님 대신 인간

소리 지음


24+ 25

말씀산책

의 죄성과 맞물릴 때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

엘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깊이 돌이

이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을 만났어야만 했다. 하나

키는 기회로 삼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늦긴

님을 만남으로써 소심함과 경쟁심, 질투와 집착으로

했지만,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

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배우고 주장하고 성숙의 길

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하신 하나님

을 걸어가야 했다.

의 말씀에 기대어, 이스라엘을 치러 진군해 오시는 하 나님의 군대 앞에서 “지금이라도 옷을 찢지 말고 마음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

을 찢으라.”(욜 2:12)고 눈물로 진언하는 요엘 선지자

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악한 자는 그 길을 버

의 말처럼 이때라도 사울이 진심으로 마음을 찢고 돌

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

이켰더라면 어찌되었을까.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

한편, 거의 같은 시각에 다윗은 다윗대로 하나님 앞에

여 주실 것이다.” (사55:6~7)

매우 군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점점 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갔

하나님은 벽 너머에 있는 사울이 너무나 불쌍하고 측

던 얘기는 지난번에 했다. 그러나 다윗이 언제나 하나

은했다. 무당을 통해서라도 사무엘을 찾고 싶어 하는

님 앞에 온전하게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기심으로

사울에게 사무엘의 영혼을 만나게 해주셨다. 이 여인

똘똘 뭉친 나발이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얼마나

이 강신무이든 아니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한다고 믿

흥분했고 과하게 반응했는지, 하나님이 급하게 아비

고 구덩이에서 조상신을 불러내는 역할을 해왔던 사

가일을 보내지 않았다면 정말 대형사고 칠 뻔한 것을

람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왕 사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실수 중에서도 가장 큰 실

울이 찾은 그녀를 그냥 사용하셔서 사무엘의 영혼을

수는 사울을 피하다가 지쳐서 블레셋의 아기스에게

만나게 하는 통로로 사용하셨다. 그만큼 하나님의 마

로 망명한 것 아닐까? 누군들 다윗과 같은 처지가 되

음에는 사울을 향한 측은지심이 깊었고 이렇게라도

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마는, 망명자로

유리벽을 깨고 싶으셨다. 사무엘은 전해야 할 하나님

서 다윗의 삶은 사실 무척 비참했다. 다윗은 졸지에

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했다.

자신의 동족을 아기스 앞에서 ‘나의 대적’이라고 불러 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눈앞의 삶을 정당

“사울아, 네가 나에게 순종하지 않은 시간들을 생각해

화하기 위해 아기스를 철저히 속여야만 했다. 유다 남

보렴. 내가 네게 대답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겠니?

쪽 지방의 네게브 지역을 침탈하고서 아기스에게는

이제 너는 내일 자식들과 같이 전쟁에서 죽고 이곳으

유다를 쳤다고 얘기해야 했고, 소문이 날까 봐 침탈

로 오게 될 것이다.”

한 부족민은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다 죽여 버리는 잔 인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 말대로 사울은 다음날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요나

아기스는 오히려 이로 인해 다윗을 신뢰했고, 마침내

단을 포함한 아들들도 같이 전사했다. 한 사람이 살아

이스라엘을 치러가는 전투에 선봉장이 되어줄 것을

온 역사에 ‘만일’은 없겠지만, 만일 사울이 이날 사무

요청하였다. 이제 다윗은 동족을 치러가는 전쟁의 선


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

봉장이 되어야 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사울이 죽는

큰 재앙은 사람을 최선 아니면 최악으로 만든다. 사

그 전투에 다윗이 참여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울이 무당을 찾는 최악을 선택했듯이, 시글락에서 사 람들은 최악으로 변했다. 다윗을 죽이려고 몰려온 그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해주셨다. 블렛셋의

들은 누구였나? 환란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

다른 도시의 왕들이 아기스를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

한 자, 한마디로 사회에서 버림받고 오갈 데 없는 처

에 다윗은 전장에서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지 아니었나? 그랬던 그들이 다윗과 더불어 10여 년

도 하나님은 최악의 비극은 막아야겠다고 생각하셨

을 보내는 동안 점차 하나님의 사람들로 바뀌어왔다.

다. 자기 휘하의 600명을 먹여 살리느라 노략질을 하

때로는 구렁텅에 빠지기도 했고 때로는 구름을 타고

긴 해도, 동족을 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대적들

나는 듯할 때도 있었던 그들은, 한마디로 영적 공동체

을 정리하고 다니는 모습에 조금 점수는 줄 만하다고

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간 맞닥뜨린 여러 시

생각하셨는지도 모른다.

련과 사건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상황 앞에서, 그들 은 지금까지 쌓아온 영성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기사회생하여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온 다윗 일행, 그

버리는 것을 경험했다. 영성이 초토화되어 버린 그들

곳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

은 가장 최악의 방법을 선택하고 영적 지도자를 죽이

치 곰을 피하여 죽도록 달려 집에 왔다가 한숨 쉬면

자고 달려들었다.

서 벽을 짚는데 그만 벽에 붙어 있던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았다. 아말렉이 시글락을 완전히 초토화시키

한편 다윗은 달랐다. 앞에 닥친 재앙 앞에서 다윗은

고 모든 사람을 사로잡아 가버린 것이다. 이스라엘의

최선을 선택했다. 절망과 분노가 뒤엉켜 날뛰는 성난

원수로 등장하는 아말렉. 하나님은 사울에게 이들을

폭도들 앞에서 다윗은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그는 자

진멸하도록 명하셨으나, 왕 아각을 사로잡아왔던 바

기가 믿는 주 하나님을 더욱 굳게 붙잡았다. 기도 후

로 그 종족이었다.

그는 제사장 아비아달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두 사 람은 함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이끌려 들어가 하

다윗과 부하 600명은 불타는 연기와 깨어져 나뒹구

나님을 만났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외부세계가 완

는 가재도구들 사이에서 절망했다. 울고 또 울었다.

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다윗은 내면세계로 돌아가 자

눈물이 마르고 목이 쉴 때까지, 더 이상 울 힘조차 남

신의 중심을 돌아보았다. 지난 16개월 동안 이기스에

지 않을 때까지 울었다. 울음을 그친 부하들의 마음은

게 묶여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비통함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그들을 이 지경으로 만

마음의 중심을 바로 세웠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회

든 책임은 오로지 자기들의 지도자인 다윗에게 있다

복하고자 기도했다. 다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

고 여겼다. 아무리 아기스가 겁이 났어도 처자식을 지

람, 다윗’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하나

킬 만큼의 군대는 남겨두고 갔어야 했다. 누군가가 소

님께 구하였다.

리쳤다. “다윗을 돌로 쳐 죽여 버리자.” 그 소리는 이 내 고함소리로 변했고, 성난 남자들은 다윗에게로 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음 중심으로부터 이상한

려갔다.

힘이 솟아올랐다. 더 이상 아기스에게 묶여있지 않은

소리 지음


26+ 27

말씀산책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아기스의 비위만 맞추고 있던 그의 마음에 다시 하나님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생겼다. 다윗은 즉각 하나님께 귀를 기울였다. 그를 영적으 로 이끌며 조언해왔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그는 침묵과 묵상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계획을 묻고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말렉을 즉시 추격하라고 말씀하셨다.

600명의 무리와 다윗은 똑같이 절망적 상황 앞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각기 계획을 내놓 았다. 무리들이 내놓은 계획은 그들의 지도자 다윗을 죽이자는 것이었다. 슬픔이 분노로 뒤바뀌는 감정에 휘둘린 결과였다. 우리 모두는 종종 이런 결론을 내고 실행에 옮긴다. 분노와 실망에 싸여 공격하고 파괴하고 헤어지고... 많은 부부가 분노에 의해 싸우고 헤 어지기를 감행한다. 반항하는 자녀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장 동료와 상사 앞에서도 이 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 주인공의 당당한 모습이 슬로우모션으로 나오고 멋진 음악이 깔린다. 정말 멋있게 보인 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떨까? 당일이야 시원한 감정 그대로 보낼 수 있겠지만, 그 다음 날 아침에 눈 뜨면 실직자인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이 600명의 무리가 분노와 좌 절 때문에 다윗을 죽였다면, 다음날 아침 그들은 처자식도, 먹을 것도, 지도자도 없이 뿔 뿔이 흩어질 게 뻔하지 않은가? 황야의 먼지처럼 유랑하는 10년 전의 자신의 모습보다도 못한 모습이 될 것이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불안감에 휩 싸여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가 찾아야 할 곳은 점집이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 의 성소여야 했다. 그곳에서 자신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침묵의 무게를 견뎌내 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다윗의 계획은 분노나 불안에서 나온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비통한 상황 앞에서 그 동안 놓쳤던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은 얼마나 애타게 그를 기다렸던지 즉각 만나주셨 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셨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일어선 다 윗, 그는 부하들을 설득하고 빼앗긴 여자와 아이들과 재산을 찾기 위한 길을 떠났다. 무 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지금 아말렉의 약탈로 폐허가 된 시글락에 앉아 있는 다윗과 같 은 심정일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다윗을 죽이려는 무리들, 혹은 무당을 찾고 싶은 사울 의 처지일 수도 있다. 자신의 자리에서 다윗의 선택과 무리의 선택, 사울의 선택을 눈여 겨보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무리를 이끌고 있는 다윗에 주목하기 를 바란다.


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김성칠 교수를 함께 쓰는 일기 (2) 동족 5백만이 죽고 다친 전쟁의 나날

이강일 ◆ 고려대88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소장. 1993년 부터 캠퍼스 간사를 시작했고, 종교학으로 학위를 마친 2015년부터 제 정신을 차리고

소리 지음

연구소 사역에 나서고 있다. 특히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모임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색 중. 책장을 넘기며 왁자지 껄 토론하는 독서모임이 전국에 그득그득하 기를 기도하고 있다. 회사를 다니며 집안을 살리는 아내, 대학 가는 큰딸, 맛난 음식을 보면 기분이 업되는 중3 둘째딸과 서울 홍제 동에서 살고 있다.

2016년 9월 1일

1950년 6월 27일

역사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던 사람으로서 한국

내 이럴 줄 알았다. 대통령을 위시해서 고위관료

현대사를 적어나가기 시작한 지 여러 달이 됐다.

들은 아침 일찍 다 서울에서 사라졌다. 도망하는

흩어져 있던 정보와 기억을 글로 되살리자니 확인

이들을 지켜본 유진오 교수는 ‘어둠과 비를 뚫고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솔직히 고단하다. 《전

뛰어나가 질주하는 자동차를 가로막아 보고 싶은

쟁과 사회》에서 김동춘은 이렇게 말한다. “이 작업

충동을 느꼈다’고 했다.2) 이제 서울 사람들은 자기

은 일종의 기억투쟁이다. 통제된 기억을 되살리려

살기에만 혈안이 될 것이다. 나중에 저들이 돌아

는 것이다.”1) 그렇다. 누군가의 사관에 맞춰 고정

오면 우리같이 곧이곧대로 남아있는 사람들을 무

된 사진 몇 장 같은 기억을 반복하려고 이러는 것

슨 낯으로 보려나. 아니지 우리가 남아서 무슨 짓

이 아니다. 내 안에 의문으로 가득한 과거사를 여

을 했는지 추궁하려나.

러 각도로 살피려고 한다. 그래도 빈 구석이 보이

* 당시 서울인구는 144만 6,000명. 이중에 개전과 함께 피난 을 떠난 이들은 40만 명이었다. 이들 중 32만 명은 월남민이 고, 8만 명이 관료, 군경가족 등으로 추정한다.3) 이들 도강파 들은 서울 수복 후 잔류파를 대상으로 부역혐의자 5만 5,900 명 이상을 색출, 검거하였고 대부분 5년 형 이상을 선고받았 다. 이중에 사형이 집행된 경우도 242명이었다.4) 다른 기록 에는 부역자 56만 명 중에 1,000명이 사형언도를 받았다고 한다. 다들 남으라고 해서 남았던 사람들이었다.5)

면 작가 같은 상상력으로 메우면서 말이다.

1) 김동춘 《전쟁과 사회》, 창비, 2012, 387. 2) 김성칠, 《역사 앞에서》, 창비, 2015. 155-156. 3) 김동춘, 앞의 책, 161. 4) 김동춘, 위의 책, 246., 김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2012. 5) 위의 책, 161.


28+ 29

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7월 25일 김성칠의 일기

을 한 폭밖에 되지 않으리니, 그 아니 어리석은 짓

...여기서 본 인민군들도 모두 행동거지가 단아하고

인가?’하면, 그도 지지 않고 ‘네 놈들처럼 민족과 국

정중하여, 이즈음 늘 갖는 느낌이지만 인민군은 질

가의 운명이야 어느 지경으로 가든, 이를 남의 일처

이 좋고 훈련이 잘되어 있다. 맨 처음 학교에서 받은

럼 좁은 연구실 창구멍으로 내다보고만 있을 수 있

인민군에 대한 불쾌한 인상은 갈수록 씻겨진다.6)

느냐 말이다... 젊은 양심을 지니었다면 어찌 뛰쳐 나와서 일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배길 수 있을 것

7월 27일 김성칠의 일기

인가?’

소위 중립파들의 방송이 김효석보다는 대한민국을

‘그 미친 놈 소리 좀 작작 하려무나, 너희 말대로 하

덜 욕하고 인민공화국에 덜 아첨하여서 듣기 좋았

루 이틀에 끝날 민족문제가 아니어든, 삼천만이 모

다. 이는 개인의 됨됨이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지만,

두 정치에 미쳐 날뛰고 교육은 비워둔다면, 내일의

이래서 중립이란 귀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7)

조선은 텅 비인 머리로 무엇 한단 말이냐...’하며 서 로 지지 않으려 했다.9)

50년 7월 어느 날 남로당 등에서 전향한 좌익경력자를 ‘보호하고 인

50년 9월 16일 김성칠의 일기

도한다’는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에 가입한

식량도 다 되어간다. (서울대 사학과 교수직) 직장

사람들이 헌병과 경찰, 방첩대에게 잡혀 사라지기

에서도 떨려났다. 대문만 삐걱하면 가슴이 덜컥 내

시작했다. 전쟁 때 남한 측에 적대행위라도 할까봐

려앉고 허겁지겁 마루 구멍으로 기어들어가지만...

두려워서였을까?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전국 지역

이곳저곳서 무고한 시민이 수없이 잡혀 들어가고

단위로 학살되었다는 소문이 있는 걸로 봐서 우발

때로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적인 사건 같지 않다. 남측은 지금 누구랑 싸우고

들려온다.

있는 것인가?

나는 본시 대한민국에 그리 충성된 백성이 아니었

* 당시 보도연맹 가입자는 최저 10만 명에서 최고 30만 명까 지 추산하고 있고, 그들이 거의 희생되었다고 추정한다. 대부 분 머리수 채우라는 지시를 따른 일반 민간인들이었다. 보도 연맹 사건은 한국전쟁 최대 규모의 민간인 학살이었다.8) 영 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에서 서북청년단원(김수로 분) 이 아낙(이은주 분)을 총살하는 장면이 바로 보도연맹 사건 을 묘사한 것이다.

다. 그 해나가는 일이 일마다 올바르지 못한 것 같 고, 그의 되어가는 품이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아서 언제든 한번은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지 않을 수 없 는 날이 오려니 하고 예견하였다... 그러면 인민공 화국에 대해선 각별한 향념을 품었었느냐하면 그 런 것도 아니었다. 내 기대는 갑자기 식어졌었다... 이기영, 한설야, 이태준 같은 사람들이... 말끝마

50년 7월 19일 김성칠의 일기

다 우리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

나는 좌익운동하는 친구 철을 면회 갔다가 기다리

르고... 모든 사회현상이... 김일성 장군의 영명하신

는 중에 그와 벌이던 격의 없는 논쟁이 떠올랐다.

지도의 덕택인 것처럼 떠든 것이 비위에 맞지 않

내가 ‘결국은 미, 소 중 어느 한 세력의 앞잡이 노릇

았다.10)

6) 김동춘, 앞의 책, 141.

9) 김성칠, 앞의 책, 129-130.

7) 위의 책, 152.

10) 위의 책, 227-228.

8) 위의 책, 308.


이강일 소장과 함께 하는 근현대사 관찰․해석․적용

50년 9월 28일 김성칠의 일기

51년 2월 11일

새벽부터 인민군이 버리고 간 군수물자 약탈극이

거창에서도 양민 약 500명이 죽었다. ‘적에게 협조

벌어졌다... 이윽고 소탕전도 끝나고 아내도 아이

하는 주민은 적으로 간주하라’는 작전명령에 기초

들과 함께 무사히 돌아왔다. 나도 오랜만에 마음

했다.14) 여순사건 때도 초등학교에 반란군과 부역

놓고 대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한동안 죽었다 살

자를 온 주민들 앞에서 일본도로 목을 쳐서 유명해

아난 것만 같다.11)

진 대령 김종원은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 워, 국회조사단의 접근을 막기 위해 공비를 가장한

50년 12월 27일

군인을 보내 국회조사단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보통이 아니다. 이 전쟁을

신앙 간증이 신문에 실려 있다. ‘내가 지난 수 년 간

아주 종교적인 확신 속에서 치르고 있다. 예수교

군대와 결찰에서 수만 명의 공비를 토벌했는데, 개

장로회 각 교파 연합 신도대회 명의로 ‘UN사무총

중에 억울한 죽임을 당한 분들도 있을 것이라는 인

장, 트루만 대통령, 맥아더 사령관에게 드리는 메

간적 참회와, 인간의 죄악상을 통감하고, 하나님을

시지’를 통해 ‘당면한 전쟁은 세계민주주의 자유국

떠나서는 올바른 삶을 이룩할 수 없다는 심경에 도

가들과 공산독재국가들과의 양 진영 사이에 필연

달하게 되어 입신하였다.’15) 참담하기 짝이 없다.

적으로 일어날 최후결전의 전초전이므로 한국 땅 위에 일으킨 양 진영의 최후결전을 UN군이 승리

51년 4월 8일 김성칠의 일기

로 마칠 때까지 전진무퇴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 피란꾼의 고달픈 살림살이 속에서 봄을 맞이하

하였다.

였다... 앞으로 ‘사랑의 학교’에 비길만한 책 하나는

* 1920년대부터 시작된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갈등은 1932 년 ‘기독교 사회신조’를 통해 아예 반공주의가 교리화 되다시 피 했다. 기독교의 반공주의는 일본 제국주의 이해와도 맞았 고, 기독교의 일제협력의 명분이 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도 민족주의 진영의 반탁운동에 가담하여 친일경력을 세탁하 기 위해 반공주의가 사용되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재산 을 잃고 내려온 실향기독교인들에게 반공은 이념을 넘어 생 존의 문제였다. 그 분노와 상실감은 남한 사회주의 세력을 향 한 보복으로 나타났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만들어 두자고 아내와 이야

12)

50년 12월 29일 김성칠의 일기 경기, 강원, 충청 3도의 제 2국민병 해당자를 깡그 리 쓸어서 신병교육대라는 이름으로 남하시키고 있다. 우리 고을을 지나가는 청년만 하여도 날마 다 수만 명의 다수이다.13)

기했다. *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와 있던 김성칠 교수는 이 일기 를 끝으로 고향 영천을 다녀오는 길에 괴한에게 의문의 저격 을 당해 세상을 떠났다.

51년 8월 12일 국민방위군 사건의 책임자 5명이 공개 총살되었 다. 남한에 아직 징집되지 않은 청장년 50만 명을 제 2국민역으로 편성해 경남지역 신병교육대로 내려 보내는 사업을 작년 연말부터 실시했는데, 그 3개월 동안 굶어죽고 얼어 죽은 사람만 수만 명 이상이었다. 더 정확히는 총 68만여 명 중 교육대 에 최종 도착한 인원은 29만 8,124명16)이었고, 사망

11) 김성칠, 앞의 책, 248.

15) 강성호, 《한국기독교흑역사》, 짓다, 2016, 126.

12)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중심, 2007, 66.

16) <경향신문>, 2007년 3월 9일자. http://news.khan.co.kr/

13) 김성칠, 앞의 책, 322.

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3090854041&c

14) 김동춘, 앞의 책, 302.

ode=940202 2016. 7.1.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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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확인자는 1,234명에 불과했다. 당시 국군 통역장교

독교 국가인양 군종, 형목제도를 도입하고 성탄절

로 그 참상을 겪었던 리영희도 ‘인간을, 포로도 아

을 공휴일로 만들었다.20) 유독 기독교에만 혜택을

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

주고 있다. 이에 화답하듯 기독교계에서 8월 3일

었다. 6.25 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말살 행

주일 신문을 통해 노골적으로 이승만 박사에게 표

위’였다고 회고했다.17) 더 참담한 것은 이 일로 해

를 주자는 대담무쌍한 기사를 올렸다.21)

당 가족들은 국가에 대해 분노하기보다 ‘자신들의 주변머리 없음’을 탓하며 ‘야릇한 부끄러움’을 느

53년 6월 18일

꼈다는 점이다.18)

2년에 걸친 휴전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오늘, 2만 7천명이나 되는 반공포로가 갑자기 석방되었

51년 8월 15일

다.22)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도발적 결

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민주주의와 공

정이었다. 미국은 크게 당황했다. 전쟁이 터지자

산주의가 생존을 경쟁하는 큰 바퀴에 우리가 끼

마자 군사작전권을 훌러덩 자신들에게 넘겨놓고,

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주의는 함께 병립할 수 없

이제 와서 갑자기 독자행동이라니. 이 사건은 미

는 것이니 그중 하나는 없어져야 합니다.’라고 말

국이 한국정부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사건

했다. 이제 보니 민주주의와 독재 혹은 자본주의

이 될 것이 틀림없다. 이 날 반공포로 풀려난 사람

와 공산주의가 대조되는 건데, 이 분은 혼동하고

은 김범우23)와 이동준24)이었다. 김범우는 미군통

있다. 아무튼 미국과 소련은 이 전쟁에서 자국의

역을 돕다가 인민군 입대를 했고 결국 반공포로로

위신과 이익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지에만 관심

풀려났다. 역시 반공포로였던 이동준은 남도 북도

이 있었기 때문에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싫다며 중립국 인도로 가는 배에서 실종되었다.

않았다. 그래서 맥아더와 이승만은 합작하여 북진 하여 전면전이 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19)

53년 7월 27일 일단 전쟁이 멈췄다. 종전은 아니다. 쉬는 시간 후

52년 8월 5일

에 곧 수업 시간 오듯이 그런 ‘휴전’인 거다. 소련

이 대통령은 이 전쟁 통에 ‘발췌개헌’을 해서 자신

도 중국도 미국도 휴전이 필요했다. 북한도 미군

에게 유리한 직선제를 만들더니 결국 재선에 성공

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북한 지역 재건이 시급했

했다. 그는 한국의 모세요, 예수를 자처하는 독실

다.25) 그런데 우리 남측만 휴전에 완강하게 반대했

한 기독교인이다. 반공국가와 아울러 제도를 통해

다. 물론 이 독보적인 강경함 때문에 한미상호방

기독교 국가를 만들려는 의지도 강하다. 마치 기

위조약이나 군사, 경제 원조를 따낸 국부였다는

17) 김동춘, 앞의 책, 256.

일본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고향에서 좌익 부역자를 돌보

18) 위의 책, 159.

다가 체포되어 미군 통역관으로 일했으나, 미군의 만행

19) 김동춘, 《대한민국은 왜》, 사계졀, 2015, 113-114.

을 보고 탈출, 인민군에 입대했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되

20) 강성호, 앞의 책, 133. 21) <한국기독교신문>, 1952년 8월 3일자. 강성호, 앞의 책, 137.에서 재인용. 22) 박태균, 앞의 책, 272. 23)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이다. 그는 일제 때

었다. 24) 최 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이다. 남한을 밀실같이 느 껴 월북했다가, 국군의 포로가 된 후 반공 포로로 석방되 었으나, 자유를 찾아 제 3국을 택하여 떠났다. 25) 박태균, 앞의 책, 272.


이강일 소장과 함께 하는 근현대사 관찰․해석․적용

평가가 있는데, 좌우간 이 노인은 지금 세계열강

했다는 측면에서는 미국과 이해가 같았지만, 일

을 움직이고 있다.26)

본 수교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그를 저 버렸을 수도 있다.

56년 5월 15일 기독교계는 이승만을 한결같이 지지했다. 기독 교계는 기독교신앙동지회를 앞세워서 선거운동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반공주의와 국가주의를 신

을 했다. 이들은 각 교파 대표 앞에서 ‘하나님을

앙과 혼합한 기독교계는 미국식 반공 기독교 국가체

두려워하고 기독교 정신으로 생활하고 정치하는

제를 꿈꾸는 이승만과 뜻을 같이하면서 그의 반공주

우리의 신앙형제 장로 이승만 박사를 앞으로 4년

의적 통치행위와 전쟁에 앞장서기도 했다. 결국 오

간의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길만이 오직 남은 하

늘날의 남한 국가체제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감당

나의 길’이라고 역설했다.27) 이 대통령은 기독교

했다. 김동춘은 이승만 정권에 대해 ‘과정의 무책임

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세 번째 대통령

성은 최종목표에 대한 책임성으로 정당화하기에는

이 되었다. 그 유명한 또 한 번의 억지, ‘사사오입’

너무나 치명적인 것’28)이라고 비판한다.

개헌을 통해서... 수백만 명을 희생시킨 일제가 떠나갔지만, 해방된 60년 3월 15일

남과 북은 남의 나라까지 끌어들여 5백만 명을 죽

미국의 식량원조에 전적으로 기대고, 그나마도

이고 다치게 했다. 한반도 전 주민은 유가족이 되

독점 대기업을 밀어주며 썩어간 정권. 무슨 낯으

었다. 이들의 분노와 상실감은 상대방을 악마화하

로 그러는지 이 대통령은 85세 나이로 네 번째 대

고, 내부의 과오에는 눈감는 생활태도를 정착시켰

통령에 도전했다.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들켜 항

다. 한국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음 호에서는

의하던 시민 80명이 다쳤다. 늘 그렇듯이 공산당

성장과 억압이 공존했던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

이 사주한 결과라고 또 겁을 주었다. 언제나처럼

을 관찰해보자.

나도 혹시나 그런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60년 4월 19일 마산 시위 중에 경찰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김주 열 학생의 시신이 바다 위에서 발견되면서 시위 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오늘은 급기야 경찰 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 무려 186명이 사망하 고, 1,500명이 다쳤다. 마침내 교수들까지 시위에 나섰고 이승만은 권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 다.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주의 분단국가를 건설

26) 김동춘, 앞의 책(2015), 168. 27) 강성호, 앞의 책, 141.

1950년 10월 16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표지인물로 실린 이승만 대통령

28) 김동춘, 앞의 책(2012), 176.

소리 지음


32+ 33

길따라 꿈따라

무지 + 용기 = 섭리 (2) 이왕수◆ 제주대05 현재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업 기획부에 서 근무하고 있다. 공동체, 선교, 그리고 가 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보는 것이 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나라의 논리가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실력보 다 열정이 앞서는 청년. 박민아◆ 제주대08 현재 EBS 한국교육방송공사 작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는 것, 선하고 아름 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꿈이며 목표이다.

여기 먹고 사느라 분주히 한 해를 보내고 있는 학사 둘이 있다. 각각 상경 1 년차, 3년차인 우리는 같은 학교 IVF를 섬겼던 선후배. 캠퍼스에서 나눴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때의 불씨를 피우려고 부단히 부채질을 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이어서) 선택은 어렵다. 우리는 그것을 해내기 전까지 수많은 대안을 비교 분석한 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나 몇 번의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본 후 우리는 알게 된다. 철저한 분석이 반드시 가장 최고의 선택을 가져오진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몰라서 한 결정이, 근거 없는 용 기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다면 선택의 기로 앞에서 여 전히 무지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결과가 어찌됐든 나에게 최선을 허락하실 그분의 ‘섭리’에 시선을 둘 필요가 있다.


좌충우돌 하지만 꿋꿋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군 : 또 다른 먹구름이 찾아왔어.

새로운 동기가 생길지도 모르겠단 기대감

박양 : 지나가는 먹구름? 아님, 한바탕 시원하게

이 있었지. 사실 한 달간은 나도 회사도 서

비가 내린 건가? 또 무슨 문제가 있었어?

로를 알아보는 시간이라서 회사를 나오는

이군 : 그런 거 있잖아. 비를 쫄딱 맞았는데 개운해

게 덜 부담스러웠어. 그리고 대표님이 좋은

지는 기분? 그래, 그런 기분이었어. 결론부

분이셔서 나의 상황과 마음을 잘 이해해 주

터 말하자면,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셨어. 돌이켜보면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선택

일을 그만 둠과 동시에 새로운 일을 바로 시

하지 못했던, 그리고 조금은 무책임했던 내

작했던 게 나에게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던

모습에 여전히 죄송한 마음이 있어.

거지. 이번엔 내면의 문제에 부딪혔던 거야.

박양 : 참, 모든 일은 타이밍과 마음가짐이 중요한

박양 : 버티는 게 능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버

가봐. 그래서 그 컨퍼런스는 어땠어? 원하

텨보지 그랬어.

는 걸 얻고 돌아온 거야?

이군 : 글쎄, 물론 첫 직장을 통해 경험한 나의 모

이군 : 3박 4일간의 일정이었어!! 이 컨퍼런스를 계

습을 반영해서 선택했던 직장이었어. 그래

기로 나는 무려 3개월간의 백수생활을 시

서 잘 해봐야겠다는 각오도 더 있었지. 그

작하게 됐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

런데... ‘너무 성급했던 건가? 내가 일 자체

간이었어. 나는 이 시기를 게으르지만 재밌

를 싫어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게, 여유롭지만 분주하게 보냈던 거 같아.

무기력한 시간이 지속됐어. 일 자체가 힘든

박양 : 궁금하네. 어떻게 지냈어?

것도 아니고, 내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분

이군 : 성급함과 조급함, 불안함과 싸우며 제대로

위기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지. 나는 내 스

찾아보기로 결심했어. 관심 있던 사회적 기

스로 동기부여가 돼야 일을 잘 할 수 있고,

업, 협동조합 강의도 들으러 다니고, 관련

환경보다는 내 내면의 상태가 중요한 사람

단체에도 무작정 문을 두드리며 사람들을

이거든.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일을 해야

만났어. 통일한국을 꿈꾸며 남북청년들이

했던... 그런 마음의 상태가 가장 어려웠어.

통일 시대를 미리 살아보고 있는 필리핀 공

박양 : 그래도 취업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고, 점

동체의 선교사님도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점 미래에 대한 부담감이 있어서 또 그만 두

계획에 없던 태국여행도 다녀왔어! 조금이

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라도 관심 가는 일들을 접해보고, 관련 분

이군 : 아... 사실, 그 당시 ‘진로와 소명 컨퍼런스’라 는 청년연합수련회가 있었어. 광고를 보는 순간, ‘진로+소명’ 이라는 단어에 꽂혀 버린 거야. 정말 너~무 가고 싶은데 휴가를 쓸 수

야에 계신 분들을 만나봐야겠다는 마음이 컸어.

박양 : 백수생활이 무기력하지 않았겠네? 태국은 뭐야? 태국 이야기 좀 들어보자!

없는 상황. 답답함의 연속이었지. 계속 이렇

이군 : 용기 있게 나오긴 했지만, 다시 원점에 서있

게 무기력하게 일을 하느니, 그만두고 다녀

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답답했나봐. 계속 연

오자! 라는 생각이 들었어. 혹시 내 마음에

락을 주고받던 몽골에서 만난 교수님과 중

소리 지음


34+ 35

길따라 꿈따라

국인․몽골인 친구 부부가 태국에 살고 있

있게, 진지하게 반응할 수 있기를 소망하

었거든. 문득,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게 됐어. 그리고 항상 완벽한 선택을 해야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보고 싶었어. 그래

한다는 내 스스로가 만든 부담감을 조금씩

서 계획 없이 하루 전날 저녁 비행기를 예

내려놓는 법도 배웠지.

약했어.

박양 : 뭐? 하루 전날?

박양 : 이야, 비로소 타이밍을 찾았구나? 이군 : 오래 걸렸지? 어쩌면 나한테는 시간이 필

이군 : 백수의 특권이잖아. 그렇게 한 3주 가까이

요했던 것 같아. 크고 추상적인 꿈이나 비

치앙마이에서 머물렀어. 교환학생으로 갔

전을 좇아야 된다는 생각에 시작부터 맘이

던 몽골에서 만난 사람들이야. 몽골에서

조급했는지도 모르지.

시작된 만남이 그곳까지 이어진 거지. 두

박양 : 사회 초년생인 우리들이 흔히 겪는 일이

아이의 부모가 된 친구 부부와 그곳에서 새

지. 그 ‘건조한 일상’의 의미를 우린 아직 잘

로운 길을 준비하시는 교수님 가정. 많은

모르잖아.

것들이 변해 있었어.

이군 : 맞아. 건조하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이 일상

박양 : 감회가 새로웠겠다. 뭘 느끼고 돌아왔어?

을 견디는 게 내게 가장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군 : 사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맘이 없었다면

들었어. 그리고 바로 지금, 나는 그 지루하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내가 마주한 건, 현실을 수고하며 살아가 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어. 교수님 가정과 친구 부부 또한 새로운 출발 앞에 떨림과 기대감을 가지고 그곳으로 떠났지만, 정작 그곳에선 아주 건조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 었지. 그들의 삶의 여정을 들으며 삶이란 내 계획대로, 내 구미에 맞게 결정되지 않 음을 인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 고 삶이라는 아주 긴 여행을 위해서, 조금 가벼워져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

박양 : 오. 삶의 본질을 배웠군. 이군 : 무작정 배낭하나 메고 왔던 이곳에서 뜻밖 에 귀한 만남들이 있었고, 아주 귀한 대접 을 받고 돌아왔지. 역시 만남이 참 귀하다 는 걸 배우기도 했어. 그리고 이제 내가 살 아가야 할 곳에서의 새로운 만남도 기대하 게 됐어. 그리고 그 만남에 조금 더 책임감

고 땁땁~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

박양 : 건투를 빌어! 선배.


함께, 이어 달리기

아이들을 돌보고 잘 자라게 하는 일에 헌신하고파 소리 지음

홍성우 ◆ 고려대95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서울지부 사무국 장. 임소영 학사(고려대95)와 16년차 부부 이며, 딸 세연(초5), 아들 진기(초3)와 도봉 산 밑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역아동센터 종사자들을 위한 교육을 기획하고 강사를 섭외해서 함께 교육 을 받았다. 서울시의원을 만나 지역아동센터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예산을 편성해 줄 것을 부탁했다. 문구류와 과자, 책, 로션이 한 트럭씩 와서 창고에 들여놓고 신청을 받아 센터로 배분했다. 장학금 사업 심사의원으로서 학대 아동 중 학습기회를 얻기 원하는 학생들을 심사했다. 잠실체육관에서 진행된 어린이 체육대회에 가서 열심히 짐을 날랐다. 지역아동센터를 방문하여 개보 수와 작은도서관을 만들 수 있도록 기업과 연결해 드렸다. 교육단체협의회에 참여하여 학교비정규직을 어떻게 도울지 함께 고민했다.

제가 이번 달에 했던 이런 저런 일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좀 설명해 달 라는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지역아동센터(구, 공 부방)와 관련된 “여러 가지 모든 일”입니다. 사실 지역아동센터가 아이 들과 관련된 오만가지 일을 하기 때문에 지역아동센터협의회도 마땅히 그래야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아동센터란, 예전 공부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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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이어 달리기

후신으로 방과 후에 돌봄이 필요한 초중고 학생들이 오는 곳입니다. 저녁급식, 학습지도, 문 화활동, 치료연계 활동, 부모교육, 지역사회연계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 센터 당 19~49명 의 아이들(평균 29명)이 있는 사회복지 이용시설입니다. 전국적으로 4,000여개, 서울지역 에는 400개가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운영하는 곳이 많습니다.)

저의 일과는 전화로 시작해서 전화로 끝납니다. 물론 정해진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은 있습 니다. 하지만 지역아동센터가 워낙 열악하고, 쉽게 말해 어디 물어볼 곳도 없고 힘든 문제 를 호소할 곳도 없으니 저에게 수시로 전화가 옵니다. 일과를 일찍 시작하신 선생님들이 전 화를 하고, 아이들을 보내고 늦게 행정업무를 하시다가 궁금한 것이 있는 선생님들이 밤늦 게 전화하기도 합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은 20% 이하이고 그저 듣고 공감해 드릴 수밖 에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제 별명 중의 하나가 ‘지역아동센터의 120다산콜센터’입 니다. 홍성우라는 이름보다 이제는 ‘서지협(서울지역아동센터협의회) 사무국장’이라는 호 칭이 더 친근합니다.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막연하게 복지에 관련된 일, 특히 청소년이나 아동 쪽의 일을 해야겠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사회복지학과가 없어서 비슷한 과를 가면서 인생이 꼬이 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거나 열심히 공부한 건 아니고, IVF와 교 회활동을 하면서 청소년부, 아동부 교사를 했습니다.

결혼을 하려면 일단 돈을 좀 벌어야겠다 싶어 회사 생활을 2년 하고, 학원 강사로 2년을 일했 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서른. 서른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서 아내와 상의한 끝에 시민단체에 들어가 공부방 지원업무를 4년 동안 했습니다. 서지협에 온 지는 7년 9개월이 되었습니다.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면 아마도 제도권 복지로 들어 갔을 텐데, 지금 여기서는 제도권에서 배우고 느낄 수 없는 더 많은 일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아동청소년 관련 일이 많지만, 방과 후에 방치되는 아이들을 ‘직접’ 돌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훌륭한 일을 하시는 선 생님들(이분들은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최저임금을 받고 최대노동을 하는 직업인입니다)이 지역아동센터를 잘 운영하실 수 있도록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돕고, 선생님들이 부딪친 문 제를 함께 해결해가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제가 하는 일이 아동청소년복지가 아 니라 중장년여성복지(4, 50대 여선생님들이 많습니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이 듭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살아가는 학사들의 일상

제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월급은 제대로 받느냐는 것입니다. 밀린 적은 없으나 사회생활 15년 차가 지나도록 입금내역 앞자리에 2,3자가 찍혀본 적이 없습니다. (8,9가 찍혀본 적은 있죠.) 4년 전부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게 된 아내에게 먼저 감사하고, 부모님과 장인장모님 이 연금을 받으시고 개인적인 빚이 없기 때문에 돈 걱정을 많이 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자본 주의 사회에서 없이 사는 것을 도덕적인 우월감으로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이러한 제 환경을 감사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지역아동센터는 교회나 교회 관련된 단체, 교인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 이것이 교회의 아동청소년부를 강화하기 위한 전도나 선교목적으로 운영되기도 합니다. 또한 회계나 기부가 교회와 분리되지 않고 운영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기독인으로 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하 기에, 더욱더 명확히 원칙을 지키며 운영할 것을 강하게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제가 4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며, IVF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저 포함 2명이 함께 일하는 아주 작은 단체에서 일하다 보니,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고민이 많습 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평생 여기서 일하다가 정년퇴임하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국가보조금 없이 회원의 회비와 기부금으로 일하는 단체에서 그렇게 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막연하나마 지역아동센터에 다니는 아이들이 더 잘 돌봄을 받고 더 잘 자랄 수 있 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것을 생각하기에는 지금 현재 할 일이 너무 많지만요.

이 일은 제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언제나 나의 선택을 존중해준 아내와 이 제는 열성적인 지지자이신 부모님, 시민단체에 있을 때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소식 지조차 안 보내주는 불친절한 활동가를 믿고 후원해주는 선후배들, 부족한 저를 늘 지지하고 믿 어주시는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s. 어떻게 해야 이러한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지, 지역아동센터를 돕는 일에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지 등의 문의 사항은 개인적으로 연락주시면 답변 드리겠습니다. hongsungwoo7@hanmail.net)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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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 학사 통신원

봐나 예수 아 시퓌우에!

송희숙◆ 성신여대80 현재 아프리카 동북부 케냐의 작은 도 시 키탈레(Kitale)라는 곳에 살고 있다. joysong@gcuniv.edu

주 안에서 하나 된 IVF 형제자매님들, 안녕하세요?

교에 들어가 영어도 공부도 어려워 눈물만 쏟던 시

저는 성신여대 80학번(전설적인!) 국어국문학과 송

절부터 이후 몇 년 동안 하나님은 제 마음 속에 “선

희숙이라고 합니다. 먼저 여기 사람들 방식으로 인사

교”에 대해 밭을 일구시듯 일하셨습니다. 모든 그리

드립니다. “봐나 예수 아 시퓌우에”란, 스와힐리어로

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이, 그리고 교회가 ‘선교적’이어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이에요.

야 함을(마 28:18-20) 깨닫지 못한 채 선교를 그저 특 별한 사역이라고만 여겼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역이

학생 시절, 활동적인 IVF 멤버는 아니었지만 성경공

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었죠. 그러나 1999년 박사

부와 수련회 등을 통해 제 신앙의 본질을 가르쳐주었

학위를 시작하던 해, 미국 시카고에서 열렸던 코스타

던 IVF와 IVF에서 만난 자매들은 평생 소중한 인연입

집회 마지막 날에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

니다. 지난 30여년의 여정을 한정된 지면에 담아내기

성을 들으며 평생 선교사로 살겠다고 헌신했습니다.

엔 제 실력이 모자라니,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저는 “Touch the World through Christian Education”

은혜와 섭리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라는 비전을 받고, 숱한 고비를 넘나들며 2004년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후 이민교회의 한인2세 사역

저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자로 몇 년간 섬겼습니다. 2009년부터는 조지아주 애

1993년 미국에 들어간 후 10년 동안 두 곳의 신학

틀란타시 소재 Georgia Christian University에서 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MACE&M.Div.)와 박사학위

수로 재직했고 은퇴 후에 선교지로 나가게 될 것이

(Ph.D.in Christian Education)를 취득했습니다. 신학

라 생각했습니다. 첫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후 6년간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학사들의 일상

하나님은 저에게 교무처, 기획처, 총무처의 책임자로

였습니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 감사와 평안이 아픈

대학의 모든 시스템과 행정을 익히게 하셨습니다. 그

상처들을 치유했고, 비록 벼룩과의 사투는 있었지만

과정이 참으로 힘겹고 많은 아픔과 이해할 수 없는 일

말씀의 은혜 안에서 내 안에 사랑이 회복되는 것을 느

들로 채워졌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확

꼈습니다. 가난하고 단순한 원시적인 삶을 보게 하셨

신 하나로 버텨내야 했습니다.

고,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 목회자들과의 만남과 대 화를 통해 이곳 케냐에 왜 신학교육이 필요한지, 제

2015년 초, 몇 달 동안 예배 때마다 “주님 말씀하시면

사명의 자리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 다”라는 찬양을 부르며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의 헌신

그후 11월에는 우리 대학과 협력할 작은 신학교(Af-

을 다짐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작년 4월 말 케냐로 오

rica Theological Seminary)가 있는 문명의 도시 키탈

게 되었습니다. 키탈레라는 작은 도시에 대학의 장기

레 시내로 이사왔습니다. 이제 이 대학에서 강의도

계획인 교육선교의 장으로서 우리 대학의 분교를 설

하고 애틀란타 본교를 오가면서 케냐 교육부에 필요

립하는 사명을 띠고 온 것입니다. 1999년, 선교에 헌

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케냐에는 “교회”도 많

신한 지 16년 만에 말이죠. 그때 저는 하나님께 “아프

고 “기독교인”도 많지만, 복음의 진리, 하나님나라와

리카만 아니면 될 거 같아요”라고 (벌레들이 징그럽

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무늬와 행습의 기독교나라가

고 싫다는 이유로) 해서는 안 될 제 스스로의 한계를

되어버렸습니다. 전통문화와 기복적 신앙의 흐름 속

만들어놓았는데,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그런 저를

에 타락해버렸기에 무엇보다 성경의 진리와 참된 영

아프리카 케냐로 보내셨습니다. 할렐루야!

성으로 훈련받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삶을 살고 가르 칠 복음의 일군을 세우는 일이 시급합니다. 신학교육

이곳에서 처음 다섯 달은 문화적응과 테스트의 시간

은커녕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을 살았습니다. 엘곤산 꼭대기, 전기도 수도도 인터

의 지도자로 세워져 있는 오지에 훈련된 사역자들이

넷도 없는 곳, 그야말로 50여 년 동안 살았던 문명과

절실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과 약속을 마음

는 동떨어진 곳, 자연과 동물밖에 없는 곳에서 매일

에 새기면서 저는 오늘도 이곳에 서 있습니다. 이 글

벼룩과 모기에게 강제로 헌혈하며 살았습니다. 그러

을 읽으시는 여러 학사님들, 이러한 가슴 뛰는 사명

나 그곳은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치유와 회복의 자리

에 동참하지 않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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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빠가 되었다

이 힘겹고도 아름다운 육아여!

문신실 ◆ 전주교대05 만나는 아이들의 삶이 행복한 기운으로 가 득하고, 아름답게 성장하길 소망하는 7년 차 초등 교사. 사모하던 캠퍼스 시절 리더 누나와 결혼하여 알콩달콩 일상이 즐겁다. 그리고 아이와 자전거를 타거나 캐치볼하 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이다.

아내는 회복을 위해 조리원에서 은찬이와 잠시 떨어져 몸조리에 집중했 다. 은찬이는 신생아실에서 눈을 감고 의젓하게 누워있었고, 나는 유리 창 너머로 은찬이를 볼 때마다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내가 저 아이의 아 빠라니! 신생아실의 수많은 아기 중에 우리 은찬이가 훤칠하니 단연 돋 보였다. 어서 안아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내 팔 위에 안긴 저 작 은 아기와 눈을 마주친다면 어떤 기분일까?

조리원 생활을 마칠 때쯤 우리는 은찬이를 맞을 준비를 했다. 집을 구석 구석 닦고 문지르고, 노래가 나오면서 돌아가는 모빌과 기저귀, 물티슈, 가재수건 등을 손에 닿기 편한 곳에 세팅하고, 은찬이 옷들을 빨고 널고 개고, 집에 올 때 차안도 깨끗해야 한다고 처음으로 스팀세차도 했다. 우 리 집은 은찬이만을 위한 환경으로 변해있었다. 조리원에서 집으로 올 때는 아기 머리 흔들리면 안 된다고 차도 정말 살살 몰았다. 바야흐로 은 찬이에게 맞추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평범한 내가 너를 만나고 아빠가 되기까지

본격적인 육아는 지금부터였다. 아기는 자장가를 들으며 스르륵 잠이 들고 그 옆에서 엄 마 아빠는 아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총각시절 꿈꿔왔던 육아의 모습은 은찬이가 집에 온 지 2시간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초소형인간 은찬이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 아빠, 엄마였고 매순간 혼란스러웠다.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고, 은찬이와 함께 하는 생활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특히 낮에도 안자고 밤에도 안자는 은찬이의 잠고문은 죽을 맛이었다. 은찬이에게 지금 잠만 자게 해준다면 앞으로 놀이공원도 많이 데려가고 캐치볼도 신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은찬이는 못 알아듣고 계속 울었다. 50일까지는 정말 밤이 두려웠다.

은찬이는 체온과 기압에 상당히 예민했다. 이때쯤이면 깊이 잠들었겠다 싶어 살며시 바 닥에 누이는 순간, 은찬이는 팔다리를 파닥이다가 응애응애 울며 이런 눈빛을 보낸다. (“응애 응애”란 의성어는 정말 잘 만들었다. 은찬이는 정확히 “응애 응애”라고 운다.) ‘아 빠, 나는 그렇게 쉽게 잠들지 않아요. 어서 다시 안아주세요!’ 그러면 나는 입으로는 “오 야오야~ 쉬쉬쉬.”같은 백색소음 소리도 내고, 무릎이 나가도록 바운스를 하며 한참을 재 우려 애쓴다. 그렇게 하다보면 은찬이는 다시 천사처럼 잠이 든다. 이제 눕혀도 되겠지 싶어 정말 살며시 눕힌다. 화장실 좀 가야지 하면서 방을 나서는데 파닥파닥하는 소리 와 함께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1차 시도는 실패다. 2차, 3차... 5차 시도쯤 해야 은찬 이가 깊이 잠든다. 그리고 내 어깨를 만져본다. 감각이 없다. 방안에 두고 울게 놔두면 수 면 습관이 잡힌다는데 맘 약한 쿠크다스 마더 파더인 우리는 이때 아니면 우리 아기 언 제 실컷 안아주겠나 싶어 우리의 팔과 어깨를 은찬이에게 바치기로 했다.

귀여운 독재자님의 뜻에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의 모유는 항상 5분 대기중이였고, 모유가 모자랄 때 먹는 분유는 딱 알맞은 온도에 맞춰야 했다. 조금이라 도 더우면 얼굴에 땀띠가 났다. 그래서 에어컨을 켜거나 선풍기를 틀어놓으면 이번에 는 코에서 콧물이 나왔다. 폭염 속에 실내온도 26도를 맞추기 위해 적당히 껐다 켰다를 반복해야 했다.

은찬이가 태어나고 50일이 될 때까지 아내는 참 힘들어 했다. 그래도 육아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경험해 보니 달랐다. 아내는 은찬이와 24시간 붙어서 모유 수유와 재우기, 안아주기, 내려놓기를 반복해서 해야 했다. 아이는 밤낮없이 2시간마다 깨니 아내는 2시간만 반듯하게 누워 자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나는 다음날 직장에 나가야 해서 밤에는 아내가 거의 은찬이를 돌보았는데, 아내는 밤 이 정말 길고 홀로 수유하는 그 시간이 너무 고독하다고 했다. 갑자기 엄마로 변화된 아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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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빠가 되었다

내는 자주 울었고, 작은 것에도 상당히 민감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건전한 의사소통이 어려 웠고, 어떤 날은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밀려와 집안이 무거운 침묵 속에 있는 날도 많았다. 육체의 피로감이 우리의 좋은 관계를 앗아가는 듯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아내는 선배 주부들을 만나 육아의 경험 담을 들었는데,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우리 아이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나 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풀린다고 했다. 그리고 멀어졌던 예 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에너지를 짜내서 영적 생활을 유지해 나가자고 의기투합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혼란 속에 있다. 쉽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교대로 쉬는 시간을 주기도 하고, 집안일에도 새로운 역할분담을 하면서, 퇴근 후에는 하루 종일 육아로 지친 아내의 마음을 공감하려 노력하면서 적응해나가고 있다.

은찬이가 우리의 삶에 들어오면서 삶이 아주 단순해졌다. 집, 직장. 집, 교회. 당분간은 어떤 약속도 어떤 모임도 없다. 은찬이에게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유모차를 밀어보니 보행자 도로에 턱이 낮은 곳이 없어 찻길로 가야할 때면 왜 이렇게 만들었나 생각하게 되고, 어딜 가더라도 어린 아이가 가기에 적합한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예전엔 전혀 안보이던 것들 이 눈에 보인다. 나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변하고 자기 유익 위주로 생각하던 시각도 변하게 되었다. 지금이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아이를 위해 인내하며 헌신하면 서, 우리를 위해 온전히 죽음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 육아선 배들은 그래도 누워있을 때가 편하니 지금이 좋을 때라던데 그 말은 아내가 임신했을 때부 터 수도 없이 들어왔다. 앞으로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가! 아, 그야말로 나는 죽고 은 찬이는 사는, 힘겹고 보람찬 인생의 시작이다.

은찬이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섬집아기’ 가사처럼 스르륵 잠이 든다. 고요하고 가장 순수하게 자는 모습을 보면 치유가 되는 느낌이다. 어쩌다가 날 보고 웃어주 면 내가 이 아이의 아빠라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은찬이의 존재 자체만으로 너 무 사랑스럽다.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슬며시 침대에 내려놓는다. 하나님도 날 바라보시며 이런 아빠 미소를 지으시겠지. 내가 은찬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날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하며 돌아서는 순간! 은찬이는 또 깼다. 아, 이 힘 겹고도 아름다운 육아여!


경주 유금리에서의 느릿느릿 또렷한 하루

지은실 ◆ 동덕여대02 포토샵, 일러스트와 몇 년째 ‘밀당’하는 프리랜

유금리 라이프

서 디자이너. 2년전 성산동 생활을 마치고 자연 과 조금 더 가까운 유금리로 왔다. 빵 굽고 커피 볶는 남편과 밥해먹고 동네 언니, 동생들과 수다 떨고 볕 쬐며 (별 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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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만난 사람

청년들의 빚 문제를 함께 책임지다; ‘청년부채탕감운동’

이번 인터뷰에서는 ‘청년부채탕감운동’을 펼치고 있는 설성호 학사를 만 납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이웃의 고통의 문제를 보 기 시작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 대 설성호 ◆ 경희대 96

해 이야기 나누어 보았습니다.

진행 이시종 / 정리 편집부

* 독자들에게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가족소개도요.

천안지역 활동학사였던 임은선과 결혼하여 10년차가 되었고요. 9살 아 들 한결, 6살 딸 한솔이까지, 이렇게 네 식구가 잘 지내고 있어요. 지금은 ‘생명의빛 광성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면서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 의 이사 및 지갑트레이너로, ‘청춘희년네트워크’에서는 본부장으로 활동 하고 있습니다. * 간사사역을 마무리하고 그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간사사역을 마친 후 교회개척을 생각하면서 신대원에 진학했어요. 캠퍼 스 공동체를 떠나 학사의 삶을 살아보니, 세상에 홀로 던져진듯한 느낌 도 들었죠. ‘그동안 학사들이 느낀 마음이 이런 것이었겠구나...’하는 생 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신대원 학생으로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숙제하고, 팀 과제 때문에 사람들과 시간 맞추고 부대끼고, 그렇게 빠듯한 시간에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도 교회 사역을 병행하고... 그렇게 신대원 생활을 하

절감했어요. 돈 문제 때문에 가족 분위기도 나빠지고

는 동안 제가 간사로 사역할 때 같이 동역했던 학생

요. 그러던 중에 원래 부모님과 함께 사시던 할머니

리더들의 마음도 헤아려볼 수 있었죠. 신대원 다니면

가 요양원에 계시다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어요. 그런

서는 어떻게 하면 본질에 가깝고도 새로운 패러다임

데 입원기간이 길어지니 비용이 쌓이는데 심리적인

으로 목회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개척을 하려

압박이 느껴지더라고요. 어느 날은 기도하는데 할머

고 실제로 준비도 했는데 그 과정 속에서 지금의 재

니는 오래 사셨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셔도 되지 않겠

정사역과 연결되었습니다.

나, 남은 사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나... 이런 마음 이 올라오더라고요.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사역한다

* 재정사역에 뛰어들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

는 사람에게 이런 마음이 들다니! 아무리 신앙훈련을

요?

잘 받았더라도 돈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민낯이 드러 날 수밖에 없더군요. 어떻게 하면 돈에 휘둘리지 않

재정문제는 제 인생사 속에서 늘 고민하던 영역이에

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

요. 가족 중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저 혼자였고, 그

을까, 돈에 휘둘리지 않고 가치를 지키며 살 수 있을

래서 가족으로부터 심리적, 재정적으로 고립된 채로

까 고민되었습니다.

생활했어요. 활동학사 시절엔 정말 어렵게 생활했어 요. 월세가 23만원인데 제 한달 후원금은 16만원이었

물론 간사시절에도 재정상황은 어려웠어요. 모금률

죠. 있는 거 없는 거 다 끌어다가 생활을 했어요. 정말

이 낮아 평균 사례비 지급률이 60% 정도였죠. 간사

필요할 때 채워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기도 하면서요.

6년차에야 100%를 받았는데 간사가 월급을 이렇게 많이 받을 수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웃음) 아내와

그런데 제가 간사로 있을 때 부모님이 하시던 사업을

둘이 살 땐 어려운 상황에도 버틸만했지만 애가 생

정리하셨어요. 여러 곳에 분산투자하셨던 게 잘 안

기니 다르더라고요. 어머니가 주신 신용카드가 하나

되었고 새로 시작한 사업도 완전히 망해버렸고요. 졸

있어서 카드를 쓰기 시작한 게 하나둘 늘어나며 카드

지에 빚이 7억이 생겼습니다. 당시 저는 이미 결혼한

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사례비로는 카드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한 달에

대금 결제가 안 되어서 연체되고 독촉전화가 오고요.

천만 원씩 빚이 늘어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

그럴 때마다 마음이 위축되었죠. 겨우겨우 연체를 막

고요. 저와 동생이 어떻게든 빚을 갚아보려고 대출

는 생활을 지속했어요. 교육전도사 시절은 더 힘들

도 받아봤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방법이었죠.

었어요. 보통 교육전도사의 사례비는 월 70만원인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어요. 결국 부모님이 파산신

요. 대한민국에서 4인 가족이 생활하기 어려운 금액

청을 하고 면책을 받으면서 빚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이죠. 여기에다 저는 신대원 등록금까지 마련해야 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재정사용의 틀을 다진 상태이고

는 상황이었고요.

적게나마 후원도 하고 있어요. 교회에서 목적헌금을 해주시기도 하고 때마다 도움 그러면서 돈이 개인과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을 주신 덕분에 고비를 넘기며 살았어요. 문제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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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만난 사람

결되고 기도응답이 쌓이는 한편으로, 이런 게 일상이

련되었더라도 소비 패턴이 똑같으니 일상이 변하질

되다 보니 심리적 피로도가 너무 크더군요. 늘 긴장

않고요. 결국 아는 것과 삶이 분리될 수밖에 없더라

상태인 거죠. 아주 큰 빚은 없었지만 조금씩, 빚이 어

고요.

디에 얼마큼 있는지도 모른 채 방어하는 삶을 살 수밖 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답답한 마음에 갑자기 확 지르

이런 고민을 계속하면서 개척 준비를 하던 중 ‘교회개

기도 하고요. 빚이 있다 보니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척학교 숲’이라는 과정에 참여했어요. 거기에서 만난

어려워지고, 하나님나라 비전은 있지만 현실로 가져

‘성경적 재정교실’을 통해 재정에 대해 좀 더 심도 깊

오는 데는 간극이 너무 컸어요.

은 고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에 접했었던 재정 강의보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어요. 돈을 어떻게

* 만나와 메추라기만 먹고 사는 건 참 어려워요.

나눠서 관리하고 부채를 어떻게 갚아가야 하는지 배 울 수 있었고요. 여전히 원론에 가까운 이야기였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렇게 하나님을 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저에겐 도움이 되었어요.

망했는지 이제는 이해가 돼요. (웃음) 제가 겪어 보니 채무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감수성이 생겼죠. 그들이

현재 함께하고 있는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이하 청

겪는 웬만한 일은 저의 경험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자

지트)’와의 인연은 ‘가계부 워크샵 트레이너’ 양성과

신의 상황을 공유하지 않고 혼자 해결하다 보니 잘못

정을 이수하며 생겼습니다. 그해 연말에 현재의 청지

된 정보로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아요. 그들과 재무상

트 센터장에게 연락이 왔고, 회사를 함께 세워보자는

담할 때 공감대가 잘 형성돼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제안을 받았어요. 어차피 재정은 제가 고민해온 영역

상황을 잘 알겠어요.

이라 사람들을 만나보았어요. 가계부 워크샵 트레이 너 양성과정을 진행하며 눈여겨봤던 사람들을 모아

그러다 돈이 생기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베풀어야 할

놓았더라고요. 그렇게 그분들과 함께 사업을 구상했

것 같은데 막상 그렇지도 않아요. 아이러니죠. 돈에

는데 그게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으로 선정되었고,

대해 양가감정이 있어서 탐욕과 집착이 더 생겨요. 이

그 지원금을 씨앗자금 삼아 이것저것 준비했어요. 역

런 마음과 씨름해야 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아

량강화를 위해 금융공부를 지속하며 재무설계사 공

무리 제자훈련을 잘 받아도 돈을 사용하고 진로를 찾

부도 하고요. 여러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하며 생각의

는 일에 비그리스도인과 차이가 없어요. 소비패턴이

결을 맞춰갔죠. 자체적인 강의와 워크숍도 열고요. 지

나 라이프스타일이 똑같아요. 돈을 사용할 땐 단순히

원금으로 재무상담 키트를 만들어보기도 했어요.

금액만 오가는 게 아니라 가치관이 함께 따라가는 거 예요. 가치관과 우선순위가 소비행위에 드러나기 마

하지만 회사 하나를 세우고 수익을 낸다는 게 정말 어

련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라면서 당연하게 소비생활

렵더라고요. 강의를 열어도 수강료가 너무 비싸면 사

을 해왔지만 어떻게 돈을 바라봐야 하고 사용해야 하

람들이 안 오고 너무 저렴하면 수익이 안 생겼죠. 처

는지 배운 적이 없어요. 그러니 비그리스도인이 일상

음엔 신나서 진행했는데 여름쯤엔 모두 지쳤어요. 쏟

적으로 쓰는 것처럼 돈을 쓸 수밖에 없죠. 마음이 훈

아 부은 거에 비해 나오는 게 없었으니까요. 의사소통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과정을 간소화하고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들

서 지원받아 무료로 재무교육을 해주거나

이며 장기적으로 함께할 수 있도록 조율하

상담을 해주는 ‘찾아가는 금융생활’ 사업을

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반기에

하고 있고, 조만간 ‘청년활동지원사업(청년

는 속도가 났어요. 꾸준히 지속하니 점점 청

수당)’에 선정된 청년들의 재무상담도 하게

지트가 알려져서 교육 위탁도 들어오고요.

될 예정이에요.

연말에 육성사업 평가를 받을 때는 최우수 팀으로 선정되며 잘 마무리했습니다.

* ‘청년부채탕감운동’도 진행하고 계시죠. 어 떤 내용인지, 어떤 단체들과 협력하고 계신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진행하고 계신가요?

지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청지트는 청년들의 재무교육과

처음 운동을 주도했던 건 ‘희년함께’였어요.

상담을 진행합니다. 간혹 청년생활과 관련

<쿼바디스>의 김재환 감독이 관객이 만 명

된 연구사업이나 정책제안 등도 하고요. 최

넘으면 수익을 후원하겠다고 공약했어요.

근에는 서울시가 작년부터 진행한 ‘희망두

그리고 그 약속대로 수익 3천만 원을 <쿼

배 청년통장’이라는 사업을 함께했어요. 청

바디스>에 나오는 기독단체들에 기탁했죠.

지트의 센터장이 기획 때부터 참여했었는데

그래서 ‘희년함께’가 기금을 어떻게 사용할

요. 임금이 많지 않은 저소득 또는 중저소득

지 고민하다가 취약계층인 청년을 위해 사

청년들이 자산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

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재무 역량이 없으니

는 것이죠. 참여조건은 소득이 200만원 이

다른 단체와 협력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예

하여야 하고, 부채가 너무 많아서도 자산이

요. 그렇게 막 발을 떼던 청지트와 연결되었

어느 정도 돼도 안 돼요. 시민들로부터 기금

습니다.

을 마련해서 저축한 금액의 1.5배로 돌려줍 니다. 이자수익을 따지면 굉장하죠. 꽤 목돈

작년 4월에 ‘청년희년운동본부(이하 청춘희

으로 불릴 수 있어요. 대신 결혼자금, 주거마

년)’가 출범했고 2015년 5~8월에 1차, 2015

련, 부채상환 등 제시된 목적 중 하나를 정

년 11월~2016년 3월까지 2차로 부채탕감운

해서 사용해야만 해요. 여기에서 저와 청지

동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3차 운동을

트는 재무상담을 맡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진행하고 있어요. 차수별로 조금씩 내용이 바뀌고 있는데요. 1차에는 학자금대출 연체

또 올 여름에는 사회연대은행에서 지원을

6개월 이상 또는 다중채무를 지닌 20~35세

받아서 ‘청년생활경제상담사’ 양성과정도

청년이 지원 대상이었어요. 45명의 지원자

열었습니다. IVF 간사님들도 참여하셨죠.

중 10명을 선정해 재무교육을 하고 200만원

한두 번 더 진행한 후에는 민간자격증으로

씩 무상으로 지원했죠. 지원 후에는 후속모

도 등록할 예정이에요. 이 외에도 서울시에

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참여율이 떨어지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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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만난 사람

라고요. 끝까지 참여한 사람은 10명 중 2명이었어

가 얼마인지 확인했어요. 이 과정에서 동작신협

요. 이분들과 국회에 가서 ‘을지로위원회’와 청년

도 협력하게 되었죠. 신협이 처음 출발한 것도 지

부채에 대한 정책 토론을 하기도 했죠.

역사회에 환원하기 위함이었고, 이웃사랑을 실 천하려는 마음이 있었죠. 신협 담당자는 우리의

이렇게 1차를 마무리했는데, 이 운동에 대해 듣고

이야기를 듣고 동작구에서 파악된 132명의 신용

‘푸른나눔’에서 2천만 원을 기탁해주셨어요. 이

불량자가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매년 1천만 원씩

기금으로 2차 운동을 진행했죠. 제가 직접 참여

기탁하겠다고 약속해주셨어요.

한 건 이때부터인데, 본격적인 재무 상담과 교육 을 진행했어요. 10명을 선정하는 데 지원자는 66

장기적으로는 청년 정책이 바뀌는 것까지 바라

명이었어요. 지원기준은 학자금 3개월 이상 연체

보고 이번 캠페인이 마중물처럼 사용되길 기대

로 낮추고 다른 기준은 동일했죠. 동기부여를 위

하고 있어요. 이번 프로젝트가 좋은 사례가 되면

해 과정을 좀 더 보완했어요. 교육과정을 수료하

다른 지역의 신협도 참여하도록 제안할 수 있겠

면 50만원을 우선 탕감해주고 이후에 성실하게

죠. 전국으로 이 운동이 퍼져 가면 좋겠습니다. 올

부채상환을 하면 60만원을 추가로 탕감했어요.

해 6월에는 ‘대전청춘희년’이 출범해서 자체적으

그리고 한 달에 한번씩 4번의 교육과정을 진행하

로 청년부채탕감운동을 진행하고 있어요. 부산

며, 월 최대 10만원씩 세 달 동안 저축하면 60만

의 ‘청년,함께’도 청년 부채 이슈를 다루고 싶다고

원을 돌려주는 ‘두배통장’을 운영했습니다. 그래

했고요. 얼마 전엔 광주에서도 광주 경실련과 함

서 개인당 총 140만원을 지원받을 수 있도록 했지

께 30-40명의 청년들이 <청년부채ZERO 캠페인

요. 비슷한 금액을 지원받지만 의미 있게 동기부

>을 광주에서 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여

여를 해서인지 1차 때보다 성공적이었어요. 10명

기저기에서 이런 운동이 일어나면 청년 정책의

중 8명이 끝까지 참여했고 이들의 경우 빚은 여

판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전히 남아있었지만 채무 악순환에서 벗어나 장 기적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재무교육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뿐 아니라 전 계층에게, 그리고 교회에서도 이런

올해는 청년부채 이슈를 다루고 싶었던 서울시

교육을 진행하면 좋겠네요.

청년활동공간 ‘무중력지대 대방동’에서 예산을 지원했어요. 거기다 동작구와도 연결되어서 ‘동

제가 만났던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작구청’과 ‘무중력지대 대방동’, ‘청춘희년운동본

이었어요. 하지만 이들의 공통된 고백은 교회에

부’가 협약을 맺고 <청년부채ZERO 캠페인>을

서 돈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거였죠. 재정을 믿

진행하고 있습니다. 민간차원의 운동이 정부기

음의 문제로 바라보고, 빚을 수치로 여기는 분위

관과 함께 일하게 되었죠. 동작지역 청년들의 학

기가 있어요. 어쩔 수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누군

자금대출 현황을 파악했고, 학자금 연체 때문에

가 관심을 가지고 함께 고민해주는 것만으로도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이 몇 명인지, 이들의 부채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된다고 하더군요. 교회 안에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서 돈에 대한 바른 관점을 제시하고 돈에 대한 고

정에 참여하실 수도 있습니다. 양성과정을 수료

민을 자유롭게 나누면서 성경적 가치에 따른 대

하신 분들은 청지트 소속 트레이너로 활동하실

안을 찾아가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할 이유가 여

수도 있지요.

기에 있어요. 청춘희년의 경우엔 이후 사단법인이나 재단법인 교회 안에서도 모두 빚 때문에 고민하지만, 내면

으로 세워갈 계획 중인데, 이 과정에서 도움을 주

의 이야기는 나눌지언정 재정 상태에 대해 털어

셔도 좋겠습니다. 청춘희년에 직접적으로 활동

놓지는 않아요. 교회마다, 공동체마다 이 부분을

가로 참여하시거나 또는 저희가 이 운동을 지속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씩은 있어야 한다고 생

해나갈 수 있도록 지원기금을 기탁해주시면 큰

각합니다. 성경에 재정사용에 관한 구절이 2,350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청춘희년이 아직 후원기

구절이나 될 만큼 돈은 우리의 신앙과 밀접한 관

반이 약하거든요. 지금까지 활동해 온 게 기적과

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지갑 안에서는 날마다 성

같죠. 앞으로 정기후원자를 개발해야 하는 게 큰

경적 가치관과 세속적 가치관이 서로 치열하게

숙제입니다.

부딪치죠. 돈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해요. 하지만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돈 이야기를 잘 다루지 않아요. 그저 단순히 믿음으로 해결하 려 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교회가 돈을 추구하며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기도 하죠. 그 렇기 때문에 돈 문제를 교회에서 다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세속적인 방식으로 돈에 대 한 가치를 세우고 사용하니까요. 그래서 이를 도

* 학사님의 고민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이

울 수 있는 ‘기독생활경제 상담사’ 양성과정을 생

웃을 섬기는 통로가 된 과정을 들으니 감동

각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적입니다. 학사님의 바람대로 곳곳에서 청 년운동이 일어나고 미래 세대를 위한 길이

* 독자들이 재정사역에 어떻게 협력할 수 있을까

열리길 응원합니다.

요?

가장 쉬운 건 청지트에서 하는 강의나 상담을 통 해 돈에 대한 건강한 관점을 기르는 거예요. 공동 체에서 강의를 함께 들은 후에는 자체적으로 돈 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소모임 등을 운영할 수도 있겠죠. 좀 더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청지 트에서 운영하는 ‘청년생활경제 상담사’ 양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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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NECT TO IMPACT, EAGC 2016!” 전영준 ◆ 성균관대08 중학교 때 들은 ‘비전’을 찾고 싶었으나 직 접 해보지 않으면 감을 못 잡는 성격으로 인해 전공을 두 번 갈아타고 복무중인 전 문연구요원. 그 ‘비전’은 환상이었다 결론 짓고 하루하루 일상에 집중하는 삶을 살기 로 했다가, 숲은 없고 나무에만 치중하는 삶이 되었음을 발견하고 숲도 보게 해달라 기도하고 있다.

EAGC나 EARC에 대해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IFES

거니와 왠지 마음에 걸려 기도하던 내게, 하나님은 수

에 관심이 많거나 선교에 관심이 많거나, 혹은 외국

련회에 가서 후회한 적이 있었느냐, 특히 힘들게 많이

친구들과의 만남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가는, 3년

희생하며 간 수련회에서 은혜가 없었던 적이 있었느

에 한 번 열린다는 그 행사! 한국에서 한 번 했다는 것

냐 물어보셨다. 결국 나는 순종하기로 했다. 마침 고

같은데 그때 못가서 아쉬운 느낌의, 누군가 다녀왔다

민하던 비전과 동역자라는 문제들도 있었고.

고 하면 재밌었겠다, 다른 행사와 뭐가 달랐냐고 물어 보기는 하지만 정작 다음엔 나도 가겠다고 말하지는

이번 EAGC가 열리는 태국에 가기 전부터 주님의 은

않았던 그런 행사!

혜가 이어졌다. 참가신청 기간이 지난 후 뒤늦게 신청 한 일을 시작으로, 군인 신분으로 해외여행 허가서를

입사 3개월 차 신입사원으로 정신없이 살던 지난 6월

받고 여권을 만들고, 극성수기에 주말 앞뒤로 4일 휴

중순이었다. 갑자기 한 간사님이 EAGC에 참가하지

가를 허락받고, 비행기 타기 전날 4시간 조퇴를 허락

않겠냐고 추천해 주셨다. 언제 열리는지 들어 보니,

받은 일, 한복을 빌리려 동분서주하다가 단념했을 때

사회라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입사 후 첫 휴가 기간

새신랑인 남편의 한복을 빌려준 새댁 리더누나, 태국

과 겹쳤다. 휴가 계획에 갑자기 훅 들어온 제안이라는

정보와 바트까지 내어주신 회사 분들, 쏟아지는 별 속

것만으로도 일단 거부감이 들었다. 휴가를 낼 수 있을

으로 날아갔던 밤 비행기, 혼자 온 여행객에게 주어

지, 비용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기도해 보

진 비상구 좌석, 무사히 마친 공항 노숙 등등, 내 몸과

겠다고 일단 대답했다. 기도하겠다고 내뱉었기도 하

마음의 필요를 끊임없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CONNECT TO IMPACT, EAGC 2016!”

을 경험하며 마침내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 도착했다.

사들의 자원봉사만으로 이루어졌었다 하고, 사실 나 는 영어듣기가 쉽지 않아서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큰

어색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항에서 EAGC 태국 스

의미를 갖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

텝들을 만나고 다른 참가자들과 합류했다. 3시간 정

부분의 순간은 ‘CONNECT’가 있었던 식사시간과 자

도 더 버스를 타고 마침내 EAGC 장소인 호텔에 도착

유시간들, 각 국의 의상(일본 친구 하나가 피카츄 옷

했다. 태국에서의 첫 끼니였던 점심식사는 정말 맛있

을 입고와 스타가 된 것을 보고 우리도 송중기 군복과

었고 그렇게 나의 첫 EAGC가 시작되었다. 다양한 나

썬글라스를 준비해갔으면 인기였겠다 싶었다.)을 입

라, 문화,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며,

고 각자의 컵라면을 교환해 먹으며 밤늦게까지 둘러

또 함께 섞여서 소그룹이 되었고, 개막식에 각국 공동

앉아 기타치며 찬양(과 만화주제곡)을 불렀던 culture

체 대표들이 깃발을 들고 입장할 때와 폐막식에서 ‘주

night이다.

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이라는 찬양을 각 나라의 언어 로 돌아가며 불렀을 때는 우리가 정말 한 분이신 성령

EAGC 기간 동안 참 많은 것들을 느끼고 생각했다. 새

님을 통해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실감하며 눈가가 촉

로운 관계,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정, 새로운 경험, 새

촉해졌다.

로운 음식, 새로운 풍경... 그 모든 것들이 좋고 감사 했지만 동시에 고민거리가 되기도 했다. 내가 막연히

그 성령의 역사일까, 같은 소그룹 친구들이든 우연히

기대했던 것들. 만나고 싶었던 각국의 동역자란 결국

만난 사람이든 너무도 반갑게 서로의 존재 자체를 환

무엇인지, 이 관계들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교제

대해주는 시간들이 정말 행복했다. 타지에서 외국인

로 발전해나갈 수 있을지, 결국 직장에서의 거룩함이

을 만나는데도 긴장하거나 경계할 필요 없이 스스럼

란 무엇인지, 내 삶의 방향성에 대한 힌트는 없는 것

없이 나를 드러내고 인사를 하고 친구가 되었던 경험

인지...

은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었고, 그것만 으로 EAGC에 참가한, 그리고 다시 참가할 가치가 있

그저 감사한 경험으로 끝나도 되는 것일까. 그냥 온 열

다 생각한다.

방의 하나님,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 은혜를 주신 하나님, 동아시아를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EAGC 프로그램은 학사수련회답게(?) 강의와 설교가

경험한 것으로 충분할까? 응답 받고 싶었던 문제들은

반, 자유시간과 나눔시간이 반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뭔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

중간에 도시, 역사, 쇼핑 세 가지 투어를 선택해 참가

도 아니다. 하지만 문득, 하나님은 학부 수준의 강의만

하거나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강의와 설교

큼도 살고 있지 못한 나에게 뭔가 꼭 얻으려 하지 말

는 주로 현실적인 주제들을 많이 다뤘는데, 너무 일반

고 은혜의 바다에 잠겨 잠시 쉼을 누리라 부르신 것일

적인 이야기였다는, 심지어 학부생 수준이었다는 평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쏟아졌던 은혜와 섬

가도 있었다고 한다. ‘CONNECT TO IMPACT’라는 대

김, 감사한 시간, 여러 동역자들을 기억하고 소통하며

회의 주제에 맞게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되었

connect to impact 할 수 있도록.

다면 더 좋았겠지만.. 태국의 EAGC 준비위원회는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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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엄마들의 모임을 응원합니다! - 《(스펙보다 중요한) 내 아이의 자존감》을 읽고

지난 상반기, 학사사역부는 “책 읽는 엄마들의 모임을 응원합니다!”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총 8개 그룹에게 도서비를 지원하였습니다. 각 모임마 다 자유롭게 책을 선정해서 함께 읽은 후 서평을 보내주셨어요. 그중 한 모임의 후기를 공유합니다. 올 하반기에도 프로젝트를 운영할 예정이오 니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모임후기

우리의 모임은 교회에서 비슷한 또래 아이를 키우는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 다. 적당히 표면적으로 알던 사이였는데 이 책모임을 통해 엄마가 되기 이전 의 자기 이야기도 쉽게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마치 소그룹 첫모임 때 하 던 ‘나는요’를 한 것 같아요. 사진 왼쪽부터 서숙영, 도원경, 이수정, 조다혜. (모임을 함께하 던 곽혜린은 아이가 아파 마지막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같이 읽고 나누었던 책, 《내 아이의 자존감》은 예시 위주로 구성된 책 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눌 만한 내용이 있겠나, 책 선정을 잘못했다, 고민 거리가 없을 것 같다는 등, 한마디씩 했었죠. 그런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만났 을 때는 다들 부모님 특히 엄마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고민했고 지금도 고민 중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예시가 많으니 빠져나갈 구멍 없이 다들 한두 가 지씩 걸리는 부분이 있었죠. 나와 엄마와의 관계에서 시작된 낮은 자존감을 원망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고민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책 읽는 엄마들의 모임을 응원합니다!

서평1

이수정 ◆ 광운대01 전쟁 같은 육아와 가을의 낭만, 그 사이에 서 방황하는 아줌마(?!)

성장하며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아이가 독립적인 개체로 성장

특히, IVF를 하면서 자존감 이야기가 더 많이 거

해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고, 아이는 자신의 길을

론되었다. 비교적 어려움이 없고 화목한 가정에

찾아 주관을 가진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

서 자란 아이가 보통 자존감이 높았고, 자존감이 낮은 아이는 이러저러하게 모난 부분이 있어서

아이는 엄마의 신뢰감 있는 사랑을 통해 세상에

좀 더 나은 인격으로 거듭나려고 애를 쓰는 모습

대한 안정감을 쌓아간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

을 보았다.

해 친밀함을 기르고 동성부모의 가치관과 도덕관 을 학습한다. 그 외에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인정

마음 밭이 좋아야 좋은 열매가 열리고, 자존감이

해주고 존중해야 한다.

높아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잘 수용하고 넘어가기 쉽다. 마음의 힘이 무엇을 하든 가장 중요한 기초

아이의 자존감은 몇 가지 가이드로 해결되는 문

가 된다. 우리 아이는 반석같이 중심이 건강한 아

제가 아니다. 주의사항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먼

이로 키워내고 싶은 욕심이 내게 있다.

저 부모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 슈퍼맘은 아 닐지라도 자신의 상처와 약점을 뛰어넘어 자기분

그럼 어떻게 해야 자존감이 높은 아이로 성장할

석을 통해 더 나은 자신으로 나아가며, 있는 그대

수 있다는 걸까? 이 책의 서론에서는 무척이나 높

로의 자신을 용납하고 사랑함으로 아이에게 양질

은 기준을 거론한다. 아이의 자존감은 엄마의 행

의 사랑을 공급해야 아이의 자존감이 높아진다.

복-아빠의 도움-건강한 사회로 이어진다고 한다.

최고의 엄마, 완벽하고 단점이 없는 부모는 아닐

그럼 아이를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아니라 온 우

지라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좋은 엄마로 서있으

주까지 함께 도와야 한다는 말인가!

면 된다. 가장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아이를 안 아주면 세상에서 쉽게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나

아이가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자존감

나아갈 힘을 지닌 아이가 된다.

이다. 그러려면 아이는 “엄마가 나를 좋아해!”라 고 느껴야 한다. 이를 위해 엄마는 부모로부터 물

좋은 아이를 키워내려면, 마음이 건강한 아이로

려받고 자신이 품고 있는 상처와 그늘에서 벗어나

자랐으면 한다면 먼저 엄마(부모)가 먼저 행복해

야 한다. 자신의 무의식과 마주하고 상처받은 내

지기를, 이 책을 읽은 결론이다.

면 아이를 의식세계에서 대면해야 한다. 그래야

소리 이음


54+ 55

소리이음

서평2

도원경 ◆ 대구보건98 몸은 엄마인 듯 엄마 아닌, 엄마 같기도 하 고픈. 마음은 엄마이고픈 3년차 엄마.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부모님은 칭찬에 인

로 나를 보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안정감

색했고(오히려 친구 부모님들이 나를 칭찬했

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될 거라 믿는다.

다), 나는 더 잘 하지 못해 좌절했다. 늘 더 잘 하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부모님과 주위

한 친구가 생각났다. 학창시절 그 친구는 평범

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심하게 자책했다. 사

했다. 공부를 그렇게 잘 하지도 다른 재주가 많

회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나 자신을 참 괴

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사랑받는 것 같

롭게 했다.

았고 행복해 보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밝고 사 랑스럽고 긍정적이다. 예쁜 여자는 다른 여자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행위가 아닌 존재

이 시기하기 마련이지만(웃음) 남자든 여자든

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

모두 그 친구를 좋아했다. 이는 자존감에서 나

은 후, 나는 자유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

온다는 것을 알았다.

전히 내 안의 작은 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발견 할 때마다 이 지긋지긋한 함정에서 얼마나 벗

있는 모습 그대로 아이를 인정해주고 친밀한 감

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혼을 하고 한 아이

정과 정서를 나누는 관계맺음이 필요하겠지. 아

의 엄마가 되고 나니 내 아이는 절대로 이 고통

직 두 돌이 안 된 내 아이가 나의 친구처럼 건강

의 굴레를 겪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한 자존감을 가진 아이로 자랄 수 있기 위해서

생겼다.

는 누구보다 나의 노력이 필요함을 안다. 내 아 이가 내 기대만큼 하지 못했을 때도 아이를 닦

책을 읽으면서 두려웠다. 자존감이 대물림된다

달하지 않고 격려하며 기다려줄 수 있도록 지

니! 내 아이에게 이 낮은 자존감을 물려주지 않

금부터 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겠다. 아이가

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책장을 넘겼다. 나 자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아이의 좋은

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던 터라

안내자이자 친구가 되고 싶다.

여전히 더 잘 하려는 내 마음을 내려놓아야겠다 고 생각했다. 불편한 감정들은 현명하게 처리하 고 더 이상 나를 흠집 내지 못하도록 이성적으


10월 안테나 ● 중앙사무국

● 서서울학사회

1. 8월 29일(월)에 실행위원회가 IVF중앙회관 학사사

1. IVF 60주년을 기념하여 서서울IVF 학생, 학사들이

역부 사무실에서 있었습니다. 10월 10일(월)에 가질 실

사경회로 한 자리에 모입니다.

행위원회를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2. 주부학사회에서 10월 20일(목), 27일(목)에 책 《사려 깊은 수다》를 바탕으로 기획한 ‘춤, 수다’를 엽니다. 기 대 부탁드립니다. 3. 6070학사회의 마지막 공식행사인 야외행사가 10월 22일(토)에 예정되어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 드립니다.

· 서서울IVF 가족사경회 <돌아봄과 내다봄> 일시 : 11월 4일(금) 오후 7시 / 11월 5일(토) 오후 2시 장소 : 연세대학교 백양관 대강당 주강사 : 이시종 간사 (前 서서울IVF 대표간사, 現 학사회 총무)

2.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 주부학사모임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30분 / 좋은땅 공숙영 010-2405-9928

● YGM(수도권지역 학사회) 1. 수도권 YGM 모임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30분 IVF 중앙회관 지하 좋은땅에서 있습니다. 수도권지역에 거주하는 학사님들은 언제든 모임에 참여할 수 있습 니다. 모임문의 이철민 간사 010-8716-4934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ivfygm

2. 10~11월 모임일정입니다. 10월 4일 성경강해 10월 11일 성경강해 10월 18일 성경강해 10월 25일 특강-청춘들의 재정사용(1) 11월 1일 특강-청춘들의 재정사용(2)

3. ‘내일을 잡아라(4기)’를 진행합니다. 취직과 이직을 준비하는 모든 분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 내일을 잡아라(4기) 일시 : 9월 24일부터 6주간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오후12시 30분 문의 : 김광호 (010-9755-0846, callingkkh@naver.com)

● 경인학사회 경인지방회의 정기 학사모임이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 에 있습니다. 경인IVF 학사님들, 인천지역에 거주하시 는 모든 학사님들을 초대합니다. · 9월 학사모임 일시 : 9월 29일(목) 저녁 7시 장소 : 경인IVF 회관

● 강원(춘천)학사회 1. IVF 60주년 기념 신앙 강좌를 개최합니다. “선교적 교회에서 길을 찾다”라는 주제로 세 가지 강의를 준 비했습니다. · IVF 60주년 신앙 강좌 "선교적 교회에서 길을 찾다" 일시 : 11월 10일(목)~11일(금) 장소 : 지성근 목사(일상생활사역연구소장) 10일(목) 오전-목회자 포럼 "한국 교회의 선교적 교회 운동" 10일(목) 저녁-XLGM "캠퍼스에서 선교적 삶을 산다는 것" 11일(금) 저녁-공개강좌 "일상생활의 사역과 삼위일체 신앙"


56+ 57 2.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함께하기 원하는 학사님

강사 : 신응종 간사, 정희돈 간사

은 아래 일정을 참고해 주세요. ·춘천 엄마들 모임(아이야) 매월 첫주 목요일 오전 11시 30분 사공은혜(한림대95) 010-5367-9120 · 춘천 학사모임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 은혜교회 김아주(한림대05) 010-6381-1635 ·수원 매월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최경순(한림대94) 010-9536-0703 ·부천 매월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박은혜(한림대00) 010-9703-8815 ·평촌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 6시 / 평촌성심병원 김태준(한림대99) 010-5136-5877

2. 대구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함께하 기 원하는 학사님은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 IEF(교대학사 교사모임)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 가정피움팀(가정사역자모임)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 사회복지팀(사회복지관련자모임)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 평신도 지도자 남편모임 매주 화요일 오후 8시 30분 · 예사모 아내모임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 inG 수료자 모임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저녁 7시

● 대구학사회

● 부산학사회

1. 10~11월에 열릴 다양한 강의에 학사님들을 초대합니다.

1. 부산IVF에서 준비한 올해의 두 번째 학사의 날이 열립

· 가정피움 무료공개강좌 내용 : 가정피움 팀이 3개월에 한 번씩 성경적인 가정을 이 루기 위해 꼭 필요한 내용과 주제로 준비해 오픈하는 공개강좌입니다. 일정 : 10월 6일(목) 저녁 7시 반~밤 9시 반 장소 : 대구 르호봇 교육센터(교보문고 11층) 강사 : 정희돈 간사 · 대구․경북 청년 멘토 100명을 위한 의미경영 콘서트 내용 : 주 안에서 달려온 인생을 뒤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생 을 함께 계획하며, 더 나아가서 다음세대를 살리기 위 한 인간 도서관을 준비하는 모임입니다. 일시 : (14회) 10월 16일(주일) 저녁 7시 (15회) 11월 20일(주일) 저녁 7시 장소 : 아멘교회 3층 드림홀 · 커플피움학교 22기 내용 : 커플을 대상으로 ‘행복! 그 이상의 꿈’이란 주제로 5 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입니다. 가정 속에 형성된 나 의 자아, 자기와 타인 알기, 커플별 상담, 건강한 남 성/여성, 그리스도인의 결혼준비, 커플의 사명 등을 다룹니다. 일정 : 11월 5일(토)~12월 3일(토) 5주간 오후 5시~9시 장소 : 대구 르호봇 교육 센터 (교보문고 11층)

니다. 학사 10년차까지 저년차 학사님들을 대상으로, 캠 퍼스 시절의 큰모임을 추억하며 준비했습니다. 함께 말 씀 듣고, 교제 나누면 좋겠습니다. · 부산IVF 학사의 날 일시 : 10월 8일(토) 오후 4시 장소 : 부산IVF 선교센터(거제동) 말씀 : 김유복 목사 대상 : 10년차까지 학사들(03~12학번)

2. 부산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함께 참 여하기 원하는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일정을 참고해주 세요. · TGIM(Thanks God It’s Monday) (1달에 2번 일상생활영성과 보냄 받은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모임) 대구 동성로점 김종수 010-3260-1391 부산대점 양말희 010-2061-5260 창원점 정수정 010-3620-9495 · E.M.포럼(복음주의목회자포럼)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박철진 010-3578-7086


● GLC+ 하반기 강의 일정입니다. 더 다양한 강의와 자세한 안내는 IVF학사회의 페이스북 페이지와 블로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하나님나라복음과 제자도 일시 : 10월 6일~11월 10일(6강),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 주님의새교회(서초동 소재) 강사 : 노종문 목사 · 공동체, 집짓기의 모든 것 일시 : 10월 8일~10월 29일(4강),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12시 30분 장소 : edm어학원 홍대지사 강의실 강사 : 최규창, 정동철, 서삼열, 박근호, 이남혁

팟캐스트 IVF 학사들을 위한, IVF 학사들에 의한, IVF 학사들의 팟캐스트! 학사님들을 위한 팟캐스트를 소개합니다.

아학팟 IVF 학사회 팟캐스트. 본격 기독B급 팟캐스트를 지향합니다. 책을 읽고 나누는 신나는 수다 <북잡담회>와 자녀교육에 대한 <요람에서 취업까 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나음누리

그리스도인의 책나눔 -복팟

의료인 학사들이 지역별로 모이고 있습니다. 모임에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함께하기 원하는 의료인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일정

진행하는 팟캐스트 '복팟'입니다.

을 참고해주세요

그리스도인들의 책모임을 지원합

·서울지역 삼성병원모임 한 달에 한 번 / 삼성서울병원 이은경 010-8892-8076 ·경기지역 수원․용인모임 한 달에 한 번 / 장소 별도 공지 송재현 010-2231-1424 ·영남지역 대구모임 매주 한 번 / 장소 별도 공지 최선미 010-6248-8708 · 부산모임 한 달에 한 번/ 장소 별도 공지 이은정 010-3862-4189

니다!

퇴근하고 뭐할래? 직장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루어보는 방송입니다. 취미, 일, 가정생활 등등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시도 하고 적용하며 공부합니다.

맑은물소리 하창완 목사와 함께 <시냇가에 심 은 나무(시심)>(IVP)의 진도를 따 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묵

모임문의 백성대 간사 070-8275-6345

상도우미.

말씀으로 여는 하루 IVF 출신 목회자들의 설교 팟캐스트

소리 지음


58+ 58 편집인의

메아리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잡지입니다. [소리]의 볼륨을 높여주세요! 홀로 씨름하며 분투하는 동역자에게 “내가 너를 지지한다”고 외칠 것입니다. 후원금은 전액 [소리]의 제 작비로 사용됩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8월의 어느 토요일, 춘천에 다녀왔 습니다. 1년에 한번 씩 지방회를 방문해 학사님들을 만 나겠다는 다짐을 3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인데요. 갑작 스러운 호출에 어리둥절하셨을 텐데도 정성스럽게 환 대해주신 덕분에 짧지만 찐한! 만남을 하고 돌아왔답 니다. 학사들을 불러모아주신 사공은혜 간사님, 회의 에 함께해주신 박나영 간사님, 김미화 학사님, 회의에 왔다 필자로까지 참여해주신 박용한 학사님, 박수희 학사님, 박지승 학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소 리정음’에서 부산, 전주와는 다른 춘천만의 매력을 듬

후원계좌 [우리] 1005-000-990258 [국민] 760-01-0038-627 예금주 (사)한국기독학생회 2016년 7~8월 후원자 명단 곽지영(*2) 국효숙(*2) 권도균 김선미(*2) 김재원 김종기(*2) 김 종수-구한나(*2) 김지은(*2) 나현순(*2) 남은경(*2) 민은혜(*2) 박정현(*2) 박창재(*2) 손정엽(*2) 송인규(*2) 여운성(*2) 오규덕 (*2) 윤정범-지은실(*2) 이상엽(*2) 이원경 이은원 임정하(*2) 장 은숙(*2) 전선애(*2) 정민경(*2) 정성구-윤정은(*2) 정재성(*2) 조 창훈-민혜경(*2) 최수연 허성호(*2) 황진욱

뿍 맛보셨길 바랍니다. 이번호를 마무리하며, 원고들을 다시 찬찬히 읽어 내 려가다 괜스레 울컥했습니다. 유난했던 여름 더위에

강릉(*2) 경기남(*2) 경남(*2) 경인(*2) 남서울(*2) 대구(*2) 대전 중부(*2) 동서울(*2) 부산(*2) 북서울(*2) 서서울(*2) 영남동부(*2) 원주(*2) 전북(*2) 춘천(*2) 충남(*2)

갓난아이를 돌보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아이들에 게 헌신하고, 해외의 거친 환경에서 복음을 바로 전하 기 위해 분투하시는 학사님의 면면이 뭉클했어요. 갑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월 후원하시는 분은 중앙지원부(070-8275-6303)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자기 닥친 지진에 놀라기도 하셨겠죠. 삶의 터전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역자들을 [소리]가 힘껏 응원하 고 있음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2016년에 IVF가 60주년을 맞았답니다. 60주년을 기념 하여 지방회별로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고 있으니 학 사님들 꼭 기억해주세요. (‘안테나’에서 몇 가지 소식 을 보실 수 있어요.) [소리]도 다음호에서 우리의 시간 을 기념하려고 합니다. 갑자기 찾아온 가을에 몸과 마 음 모두 적응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요즘 가을하늘이 참 근사하더라고요. 풍성히 계절을 누리시며, 다음호 도 기대해주세요_!

민혜경│편집인│sori@ivf.or.kr

제34권 제5호 통권228호 발행일 2016년 10월 1일 발행처 (사)한국기독학생회 학사사역부 주소 (04031)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56-10 (서교동) IVF 중앙회관 전화 070-8275-6313 팩스 02-333-7361 발행인 주상윤 편집장 이시종 편집인 민혜경 김경아 편집위원 국효숙 김기인 김지은 박정현 오한웅 이상엽 조창훈 한병선 허영신 편집디자인 김아롬새미 문이선 표지 이재웅 제작 김효영 인쇄 예원프린팅


Intro

04

우리 그날을 위해 97년 전국수 주제곡

06

섬광

08

청년, 예수에 빠지다 15년 전리대 수록곡

02

왕국과 소명 87년 전국수 주제곡

08년 전국수 주제곡

07

05

03

복음의 발걸음 땅 끝까지 93년 전국수 주제곡

주는 내 빛이요 05년 전리대 주제곡

Vision 2020 remix 12년 전리대 주제곡

Q&A 1.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 이 뭔가요? · 자금이 없는 예술가나 사회활동가 등이 자신의 창작 프로젝트나 사회공익프로젝트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익명의 다수에게 투자를 받는 방식을 일컫는 말로 일종의 목적성 모금 형태입니다.

2.

배송은 어떻게 되나요? · IVF 60주년 기념앨범은 예약판매 상품으로 9월말부터 순차적으로 배송이 시작됩니다.

3. 60주년 한정 기념품을 잡아라!

Event

IVF 60주년 기념앨범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분들께는 1만원 기념앨범 3만원 기념앨범 + 기념품 1가지 5만원 기념앨범 + 기념품 3가지 10만원 기념앨범 + 기념품 5가지를 드립니다. <IVF 60주년 기념앨범> 문의 학원사역부 이유화 간사

070-8275-6330, freshman0221@ivf.or.kr

어떻게 구매할 수 있나요? · 오른쪽 QR코드를 핸드폰으로 찍어서 앨범 신청 페이지로 들어오시거나 직접 서포터즈 주소 http://goo.gl/O7MQxi 로 들어오셔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인터넷 사용이 어려우신 경우,

국민 451201-01-008709 (사)한국기독학생회 로 송금자 명과 60을 기입하셔서 (예: 홍길동60)으로 금액을 보내주신 후, 이유화 간사 070-8275-6330 으로 연락주십시오.

IVF가 60주년을 맞이하여 수련회, 소망나누기에서 전 세대가 손을 맞잡고 불러왔던, 그 노래들을 새롭게 재 해석하여 한 앨범에 담았습니다.

01


건강한 교회, 건강한 그리스도인을 위한 복음 전도 프로그램!

CE 기독교 탐사 성경 공부 교재 시리즈 “지금까지 당신이 들어 본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기독교 탐사는 7주간의 마가복음 성경 공부를 통해 참석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무슨 일을 이루셨는지, 그 일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교회, 가정, 학교에서 다양한 규모의 모임을 통해 복음을 전할 탁월한 방법을 만나 보세요. “CE 기독교 탐사는 일반적으로 쉽게 간과되는 진리들, 즉 죄의 엄중함, 십자가의 중심성, 은혜의 충분성, 회개의 필수성을 제대로 강조하는 탁월한 성경 연구 교재입니다.” _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저자

교재의 특징 •세계 30여 개 언어로 번역, 50여 개 나라에서 널리 활용되어 온 효과적인 복음 전도 및 제자 양육 과정 •존 스토트와 동역한 리코 타이스를 비롯한 여러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개발한 성경적 · 복음중심적 교재 •기독교 탐사 모임 진행을 위한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는 홈페이지(www.cemikorea.org)와 훈련 교육 과정 제공 •복음의 핵심 주제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메시지 자료 영상물(DVD)과 리더 핸드북을 함께 활용 •신앙 단계에 따른 후속 성경 공부 프로그램 구비(‘Life Explored’ ‘Discipleship Explored’ 출간 예정) 마이클 호튼(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 크리스토퍼 라이트(『하나님의 선교』 저자), 신현우(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교수), 오종향(뉴시티교회 목사) 추천

기독교 탐사 핸드북 76면 | 4,000원

기독교 탐사 리더 핸드북 200면 | 10,000원

기독교 탐사 메시지 자료 62면 | 20,000원 | 부록 DVD 포함

www.i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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