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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29 I 2016. 12+01

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이 땅에서 IVF 리더로 설 수 있을까?┃유금리 라이프┃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 이재웅 | 상명대98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대하 7:15)

Graduate Christian Fellowship www.onivf.com


목차 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04 07 12 16 19 22 23 28 34 37 40 43 46 48 55 57 58

‘캠퍼스와 세상 속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향한 IVF의 60년 여정»이강일 IVF, 우리들의 연결고리!»우정미,최명길,차병호,김기인,김희연 이 땅에서 IVF 리더로 설 수 있을까?»유태식 IVF의 꽃은 학사운동이다»이상엽 캠퍼스 사역, 더불어 같이!»박종서 IVF 60주년을 감사하며 드리는 기도»정한신

말씀산책»하창완 한국현대사 PBS»이강일 길따라 꿈따라»이왕수,박민아 함께, 이어달리기»이일 재외학사통신원»선일석 이렇게 아빠가 되었다»문신실 유금리 라이프»지은실

소리가 만난 사람»김병선 안테나 팟캐스트 편집인의 글


소리정음

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이 땅에 IVF 운동이 시작된 지 60년이 흘렀습니다. 여러 우여곡절 속에 서도 믿음의 선배들이 뿌려놓은 씨앗이 신실하게 열매 맺어 가는 것을 보며 감사합니다. 60년간 쌓아온 추억을 되새기고, 앞으로 남겨진 과제 에 대해 학생, 학사, 간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8+ 9

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1. 어떤 계기로 IVF를 만나셨나요?

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저는 단과대 게시판에 붙 어있던 포스터를 통해 만남을 시작했어요. 그 해

우정미: 문과에서 이과로 입학했기 때문에 동아

의 포스터는 색지와 매직으로 손수 만든 것이었

리 가입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떤 선배님이 하

지만 이후로는 중앙회 차원에서 디자인한 세련

루도 빠짐없이 찾아오셔서 끈질기게 IVF 가입을

된 포스터를 받아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설득하셨어요. 계속 거절하던 중에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님 일을 위해 저렇듯 열심

김희연: 저는 부모님의 20년간의 자연스럽지만

이신데 작은 힘이라도 되어 드려야 하지 않을까.

의도적으로 은근했던 세뇌교육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선배님을 따라 한번 가보았다가 제 인생

IVF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아시는 분도 계시겠

의 많은 변화와 우여곡절을 가져온, 그야말로 최

지만) 저는 간사님 부부의 딸이라서 IVF와 인연

고의 선택인 IVF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깊은 삶을 살았죠. 직접적인 압박(?)은 없었 지만 부모님을 보며 저도 IVF 생활을 하고 싶다

최명길: 교회 고등부 시절, 카리스마가 엄청 강

고 생각한 것 같아요. 특히 같은 지부 커플인 부

한 강도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무슨 꿍꿍이

모님을 보며 캠퍼스 로망을 꿈꾸기도 했어요. 신

가 있었던지 대학에 들어간 우리 동기들을 여러

앙생활과 학교생활, 그리고 우정까지 같은 추억

기독동아리로 찢어 놓으셨죠. 주로 교단에 속한

을 공유하는 점에 더 끌렸던 것 같아요. IVF에 들

기독동아리에 들어갈 것을 압박하셨는데 저에게

어가기 전에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하는 신앙훈

는 운동권 이름 같은 IVF에 들어가라고 권고하셨

련과 같은 개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학 들

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덕분에 저는 IVF와 인연

어가서 한 달 정도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난

을 맺게 되었고, 지금도 조용히, 그 질긴 인연이

후, 대학에 다니면서 뭘 할까 생각하던 중에 첫

이어지고 있어요.

LGM을 갔어요. 아, 입학 전인 2월에 카카오톡 으로 연락하던 리더 언니랑 만나서 카페에 갔던

차병호: 교회 선배 소개로 CCC 동방으로 가는

기억이 나네요. 같은 학교 IVF 선배를 처음 만난

중이었는데 (하필 그 때) 교회 동기에게 전화가

거죠. 그래서 아는 언니를 따라서 IVF 가입한 척

왔습니다. “나 어제 IVF 엘젬 갔는데 너무 좋았

하려고 했는데 이미 다들 제가 누군지 알더라고

다.” 그 말에 학생회관에 붙어 있던 IVF 홍보포

요. 예상치 못한 신분노출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

스터 보고 그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남

제는 저만의 신앙과 저만의 IVF 생활을 만들어

자 간사님이 나오시더니, 우리 개척지부인데 함

가고 있습니다.

께 하자고 하시더군요. 신입생과의 첫 만남인데 말이죠.

2. 소그룹과 어떻게 소통하셨나요?

김기인: 교회에서 같은 소그룹이었던 친한 언니

우정미: 늘 시간에 쫓기던 우리는 항상 찾아와 괴

의 소개로 IVF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입학하자

롭히시던 선배님들과 마찬가지로 짬짬이 시간을

마자 IVF에 연락할 방법을 고민했죠. 제 또래 중

내어 일일이 찾아다니며 참석을 독려하고 확답

에는 인터넷 사이트 싸이월드를 검색하여 찾아

받고 다시 확인했어요. 열심히 하긴 했던 거 같


IVF, 우리들의 연결고리!

네요. 많은 숫자가 서로에게 격려가 되기도 했

요. 이 질문에 대한 예시로 동아리 방 메모, 전화,

으니까요. 힘들지만 행복했던 기억들이 더 많

삐삐 등을 들어주셨는데, 저희는 전화 통화조차

아요.

도 많이 하지 않은 세대인 것 같아요.

최명길: 중앙도서관이 우리 지부의 중심 활동지

3. 주로 어디에서 원투원을 했나요?

였습니다. 학과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도, 고시 를 준비하는 사람도 없었건만, 고시 준비생과

우정미: 가끔 소나무 향 가득한 나무 밑 잔디밭

우등생들만 차지하던 중앙도서관의 2층 열람실

에서 두 손 꼭 잡고 기도로 시작했어요. 그 간절

이 IVF 활동의 중심지였죠. 이 열람실의 입구와

한 염원이 기억이 나곤 합니다. 대개는 조용한

열람실 붙박이 지체의 자리는 연락 쪽지와 지

동아리방에서 서툰 기타 반주로 영혼을 울리던

부의 광고로 넘쳐났어요. 삐삐도 흔하지 않았던

찬양의 시간을 가졌죠. 아, 그립기가 끝이 없네

시절, 가장 효과적인 연락 방법이었죠.

요... 모든 것에 서툴긴 했지만 하나님은 살아계 신 주님이시라는 확신 하나로 나누던 그 말씀들

차병호: 공지나 광고는 소그룹과 LGM을 통

이 지금 우리의 삶에 얼마나 탄탄한 인도자가

해서 했고 중간에 어떤 연락 없이 약속장소에

되어 주는지요. 한번은 어떤 자매가 만나자고

서 모이곤 했습니다. 대화는 메신저(네이트온,

하더라고요. 나무 밑에서 원투원하는 저희를 보

msn 등)가 흥하였습니다. 전화 원투원도 많이

면서 도대체 뭔가 싶어 전봇대에 붙어있던 어느

했고, 손편지로 소통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교회의 성경공부 알림을 보고 찾아갔고, 성경공 부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주님으로 받

김기인: 주로 문자와 전화를 사용했어요. 대부분

아들이겠다고 고백했다고요. 그 이야기를 듣던

의 학생이 핸드폰을 소지하긴 했지만 스마트폰

잔디밭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이 보편화된 시대는 아니었죠. 모임 안내와 같 은 공지사항도 개별적인 문자로 전달되는 것

최명길: 독점적으로 소모임 공간을 차지한다는

이 일반적이었는데, 아직 카카오톡이 등장하기

것은 어려웠습니다. 날씨와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전이었고 각종 메신저도 컴퓨터에서만 가능했

소모임 공간은 동아리방, 학생 식당, 학교 인근

던 시절이라 카톡방과 같은 단체 채팅의 개념

교회, 학교 벤치, 커피숍 등으로 이동했어요. 특

이 없었어요. 안부를 물을 때는 서로의 미니홈

히 학교 근처 교회가 소모임 공간을 개방해 주

피나 블로그에 찾아가 방명록을 남기기도 했어

었죠. 고맙고, 귀한 배려였습니다.

요. 미니홈피의 일기장이나 사진첩을 들여다보 면 그 사람이 무슨 고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

차병호: 계절과 학내 상황에 따라 캠퍼스 주변의

는지 알 수 있었죠.

이곳저곳을 이용했습니다. 캠퍼스 벤치 및 산 책, 도서관 휴게실, 식당 구석, 캠퍼스 주변의 교

김희연: 소그룹은 다른 친구들과 특별히 다르지

회, 카페, 자취방(밥 해먹이며...) 등에서 했습니

않게 그룹 카톡 채팅을 이용해서 소통했어요.

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엔 동방이 없었습니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사진 올릴 때 태그하고

다ㅜㅜ) 분위기 좋은 카페는 정말 진지해야 했

소리 정음


10+ 11

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전북 (1993년) 겨울훈련

부산 부산대 개척 당시

충남 나사렛대

경인 인하대 가족의 밤

던 원투원이나 ‘원빙데(원투원을 빙자한 데이

port: 지금은 MS)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고, 헌

트)’를 목적으로 할 때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신도 부족했어요. 매주 큰모임에서 부정기적으 로 헌금을 하기도 하고, 매월 일정액을 분담하

김기인: 학교 근처 카페나 음식점에서 자주 만

기도 했지만, 액수와 횟수도 매우 작았습니다.

났어요. 원투원하기 좋은 카페 몇 군데를 점찍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이 팀 서포트를 분담하는

어 놓기도 했죠. 제가 멤버였을 때는 전국적으

것은 중요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로 생과일전문점이 유행하고 있어서 그곳에도 자주 들렸던 것 같아요. 때로 깊은 이야기가 필

차병호: 평균 20,000원 정도였습니다.

요하거나 재정 상황이 힘든 날은 대학교회나 교내 벤치를 이용하기도 했어요.

김기인: 멤버 때는 3,000원~5,000원 사이를

작정했고, 리더가 된 후에는 15,000원 이상으 김희연: 캠퍼스, 카페, 우리 집, 자취방, 도서관

로 자유롭게 작정했어요. 당시 저희 지방회에

등등 많이 있는데 식당과 카페를 포함한 음식

서 십의 이조 운동(십일조는 교회에, 십일조는

점이 가장 많았어요. 편안하고 약간 조용한 곳

IVF에)을 하고 있어서 십일조만큼의 금액을 작

을 선호합니다.

정하는 리더들도 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김희연: 2만원이요. 처음에 저는 정액제인 줄

4. 당시 MS 작정 금액은 얼마였나요?

알았어요. 나중에 아니란 걸 알게 되었지만요.

우정미: 작정 금액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네요.

5. 학부 때 읽었던 책 또는 필독서 꼽아주신다면?

최명길: 가장 철없고 생각과 행동이 부족한 부

우정미: 좋은 기독서적은 무조건 많이 읽어야

분은 재정 분담이었습니다. 우리 주머니 사정

되겠지만 처음으로 원투원을 통해 죄인이라는

도 빠듯했지만, 간사님과 지부 살림살이는 더

생각에 빠져 들 때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빠듯하고 어려웠는데... 팀서포트(team sup-

즐겨 읽었던 것 같아요. 또 조지 뮬러 목사님의


소리 정음

IVF, 우리들의 연결고리!

강원(춘천) (1982년)

대구

겨울리더캠프 이동하는 시내버스안에서

대구교대

광주전남 지방회 개척 당시

《기도》를 항상 되뇌이며 살았던 것 같습니

톰 라이트, 존 스토트, 헨리 나우엔, 폴 투르니

다. 《소유냐 존재냐》도 추천합니다. 기회만

에, 알레스터 맥그라스 등을 추천합니다.

있으면 주님을 말하던 그 행복했던 순간들이 이제 아득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후회 없는

김기인: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그리스도

열심으로 IVF생활 해보시길 바랍니다!

의 십자가》입니다. LTC 멤버였을 때 필독서 였는데 두께 때문에 읽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

최명길: IVF 신입생에서부터 리더가 되는 과

이 나네요. 그밖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정에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참 많았지만, 내

《하나님의 뜻을 갈망하다》, 《니고데모의

용을 충분히 흡수한 책은 많지 않았습니다.

안경》, 《사랑에 항복하다》, 《관계의 가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 《세상

면》 등의 책을 읽고 나눔을 했어요. 하나님

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비전》, 《진정한

과의 관계나 내면의 영적 성장에 관련된 책을

영적 생활》 등 각종 세계관 시리즈, 귀납적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성경 공부 교재와 사회과학서적들 등을 읽고 세미나도 했어요. 주옥같은 고전들이지만, 당

김희연: 지금까지 읽었던 IVP 책 중에 가장 추

시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제가 충분히 소화

천하고 싶은 책은 LTC 소그룹에서 읽은 《성

하기에는 어려웠습니다. IVF 학사들의 삶의

경은 드라마다》입니다. 성경을 드라마로 표

소식은 다양하지만, 우리를 이어주는 가장 중

현해서 개괄적으로 설명해 주는데 저처럼 성

요한 매개는 우리가 가장 간절히 붙들었던 하

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읽기에 좋

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사랑과 낮아지셨던

은 책이고 쉬워서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나

삶이었습니다.

요. 큰 그림을 잡고 싶은 분들이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전 아직 학부생이고 리더 경험도

차병호: 닥치는 대로 읽으시길 권합니다. 그래

없어요. 책은 앞으로 읽을 날이 더 많을 것으

도 추천을 하자면 복음, 교회론(공동체), 내면

로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

세계, 관계 등의 주제를 정리할 수 있는 책들 을 권합니다. 너무 많지만 대략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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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이 땅에서 IVF 리더로 설 수 있을까? 유태식 ◆ 고려대12 대학에 들어와 이전까지 누구에게도 털어 놓지 못했던 신앙의 고민과 질문들을 IVF 공동체와 함께 풀어나가면서 IVF와 하나 님나라 운동에 매료되었다. 2년간의 리더 생활을 거친 후 군입대로 인해 현재 IVF 활동을 쉬고 있지만 여전히 IVF 운동론에 관심을 가지고 청년 기독인으로서의 고민 을 계속하는 중이다. 꿈꾸며 뜬 구름 잡는 이야기만 잘하다가 요즘은 대안언론이라 는 키워드를 잡아서 진로를 구체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14년 1학기. 개강이 코앞인 추운 아침에 우리는

오든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나

포스터와 테이프를 챙겨 들고 캠퍼스 구석구석을

에게는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

누볐다. LTC를 마치고 이제 막 리더 생활을 시작

가 있었고 함께 헌신하기로 약속한 공동체가 있었

하게 된 나는 신입생을 맞이한다는 들뜬 마음으로

기에, 속으로는 걱정하면서도 패기를 잃지 않을 수

IVF를 홍보하는 데 열심이었다. 멤버로서 지난 2년

있었다.

간 선배 리더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지냈던 시간들 을 돌아보며 이제 나도 리더가 되어 같은 자리에 서

그렇게 시작한 리더 첫해에 나는 실패감을 실컷 맛

게 되었다는 사실이 왠지 뿌듯했다.

보았다. 신입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적게 들 어왔다. 그나마 새롭게 들어온 멤버들 중에는 IVF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내 마음은 걱정과 불안으로

에 잘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특히 내

가득 차있었다. 멤버 시절 공동체의 규모가 눈에 띄

소그룹 멤버들이 공동체를 많이 떠나기도 해서 자

게 줄기 시작했고, 나는 이 공동체와 우리 운동이

책은 더 심해졌다. 1년간 쉬지 않고 계속되었던 노

곧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힘들

방전도에 열매라고 할 게 딱히 없어서 과연 지금 시

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입생이 얼마나 들어

대에 캠퍼스 전도가 가능한지 회의감에 부딪혔다.


이 땅에서 IVF 리더로 설 수 있을까?

캠퍼스 리더의 환멸과 회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과거에 비해서 지금의 노력이 결코 적어진 것은 아

이 운동이 캠퍼스에서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좋

니었다. 리더의 수가 줄어든 탓에 한 사람당 하는 일

겠고 나 자신도 후배들에게 이 운동을 권하고 싶은

이 오히려 많아진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데 솔직히 권하기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

다양한 부분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고전을 면치 못

인이 신앙하는 삶을 살아가기도 벅찬 세상에서 선

하고 있었다. 단순히 규모에서만 변화가 일어난 것

교단체를 한다는 것은 고통을 주는 것 아닐까, 사

이 아니라 모임이나 수련회를 참석하는 인원의 비

명과 가치를 앞세워서 정작 중요한 개인의 삶의 문

율 역시 많이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제를 놓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내 안 에 떠올랐다.

멤버십의 감소와 모임의 위축은 그만큼 피부로 느 껴지는 변화였다. 물론 규모만으로 IVF 운동을 평

이 운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은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지

나 자신부터 실패감에서 벗어나고 규모로 공동체

방회의 다른 지부에서 LTC를 받는 멤버가 나오지

를 평가하는 편견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1인칭으로

않는 곳이 생겨났기에 그것이 더 충격적으로 느껴

IVF를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

졌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난 참 절박한 마음이었다.

변 사람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과

사실 우리는 이런 변화의 원인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실패자로 바라보시

사회와 캠퍼스가 선교단체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물론 가시적인 변

나 척박한 환경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명확한

화가 우리를 당장은 힘들게 하겠지만, 대신 하나님

인과관계가 나에게는 큰 무기력감을 안겨주었다.

은 IVF를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고

우리는 원인을 이미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계속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동역하고 있던 선배는 IVF 운동의 외관보다도 이외에도 나는 2년간 리더로 활동하며 부정적인 감

본질을 바라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정에 휩싸일 때가 참 많았다. IVF와 학교의 기독학

우리들이 IVF를 설명할 때 LGM, DPM, 소그룹이라

생연합회 그리고 교회까지, 세 개의 공동체에 속해

는 구조와 틀로 설명한다는 게 불만스럽다고 했다.

있었는데 많은 모임과 예배에 지치기도 하고 때로

그래서 우리는 이 운동의 지속을 위해 구조의 변화

는 내가 지나치게 종교적인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에 집중하기에 앞서 IVF 운동의 본질이 정말 무엇

특히 IVF가 작은 공동체로 변하면서 나는 자연스

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내가 IVF를 하면

럽게 더 큰 책임감을 지게 되었는데 캠퍼스 ‘사역’

서 겪은 변화들을 규모의 변화를 중심으로만 해석

이라는 말이 참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때때로

하지 않고 운동의 본질과 관련지어 고민할 수 있음

공동체의 일을 나의 일보다 우선순위로 두었던 행

이 신선했다. 나는 곧 애초에 왜 이 운동을 포기하

동은 헌신이라는 가치를 앞세워서 나 개인의 삶을

지 않았고 이 운동은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질문으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불행한 결과를 낳기

로 향하게 되었다.

도 했다.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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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진리를 살아내는 공동체

동참하기를 결단했다. 될 수 있으면 이 운동의 불 꽃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올라서 많은 사람의 삶을

지금도 IVF라는 세 글자를 되새길 때마다 마음속

바꾸었으면 좋겠다. IVF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속

깊이 감사하게 된다. 처음 만난 공동체의 인상은

히 임하기를 바란다.

나에게 천국과도 같았다. 어디서도 받아보지 못한 환대에 당황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긴장이

역사 속에서 찾은 정체성

풀렸다. 경쟁만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캠퍼스 속에 서도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느끼며 자존

나는 이렇게 내가 경험한 IVF 운동을 정리하면서

감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공동체의 사랑에

IVF가 6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앞으로도 계속되

마음을 열고 그동안 교회에서는 털어놓지 못했던

기 위해선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

삶과 신앙의 문제들을 마음껏 털어놓았다. 가난이

게 되었다. IVF가 무엇을 위한 운동인지 기억하고

너무 고통스럽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예수님

그 본질을 시대와 상황에 맞는 구조에 담아낼 때,

이 부활하셨는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등, 어려운

우리는 비로소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

문제들을 함께 듣고 고민해주는 리더들과 간사님

가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이 있었기에 나는 성장해갈 수 있었다. IVF가 스스로 설정한 (Living Stone이나 비전 2020 결정적으로 나는 IVF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자

과 같은) 정체성을 보며 다소 일반적이고 포괄적

신의 삶을 바친 사람들을 만났다. 개인의 인격과

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보다 구체적인 공동체

영성의 깊이를 추구하면서도 신앙의 공공성을 회

특유의 정체성은 그 공동체의 역사로부터 찾을 수

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균형 잡힌 복음주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역사 속에 존재했던 IVF

의자 선배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신앙이 성

의 전통을 붙잡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는 쉽사리

경 공부와 기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

공허해지고 위태해질 것이다. 한국 IVF의 역사와

상 구석구석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깨닫고, 신앙을

내가 경험한 IVF의 짧은 역사 가운데서 공통으로

삶과 분리했던 이전의 모습을 회개할 수 있었다.

나타나는 IVF 운동의 특징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또한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시대정신 앞에 대안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IVF의 두드러진 정체성으

추구하며 경제적,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를 고백

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실제로 살아내고 있는 학사들의 삶을 볼 때 깊 게 감명 받았다. 기복주의, 극단적인 내세관, 성속

나는 60년 전의 선배 IVF 학사님들부터 2016년의

이원론 그리고 비이성적인 신앙관을 비롯해 교회

1년 차 멤버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잇는 중요한

의 도덕적 타락이 극단에 달한 한국 기독교 생태계

연결고리를 ‘기독교적 지성’과 ‘공동체’라고 결론

속에서 건강한 복음주의 신앙을 이어가는 이 공동

내렸다. IVF는 과거부터 성경 말씀의 해석과 적용

체와 함께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에 천착하는 그룹으로 유명했다. IVP의 문서운동 사역과 질문하고 토론하는 문화는 지금의 IVF 활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고 있

동에도 굉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함석헌 선생

는 사람들의 삶을 보며 문득 나 역시도 그렇게 살고

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말했던 것처럼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나아가 이 운동에 계속해서

지성이 생명의 근원적 요소라면, 기독교적 지성은


이 땅에서 IVF 리더로 설 수 있을까?

IVF 운동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

고 있는 학생자발성일 것이다. IVF 운동이 캠퍼스

인 동력임이 분명하다. 또한 공동체는 언제나 IVF

속에서 학생들이 주체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

운동의 기본적인 가치였다. 지금도 수많은 IVFer

하는 환경과 구조를 조성할 때 학생들의 감춰졌던

들이 공동체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고

자발성이 수면 위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백하는 데서 우리 운동에서 공동체가 가지는 중요

들어 멤버들을 포함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참여

한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는 공동회의는 공동의 의사를 나누고 결정권을 행사하는 과정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공동체의 주

학생자발성의 새로운 회복을 위해

인의식을 함양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LGM과 소그룹 성경공부에 있어서도 누군가가 떠

두 가지 핵심가치는 IVF의 전통적 가치이면서도

먹여 주는 방식을 최대한 지양하면서 학생 스스로

동시대에 가장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기독교적

가 말씀과 지식에 대면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방법

지성은 근본주의 기독교 외의 선택지를 찾지 못해

론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 혹은 종교적 배경이 없거 나 기독교를 혐오하는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사회학자 엄기호 교수는 사회와 교회가 공통으로

가 이 세상과 개인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를 설명

청년들을 무기력한 존재로 간주하고 일종의 서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윤리적으로는 기독교

스를 제공해서 활력을 되찾게 하려 한다고 보았다.

가 사회적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근거가 되는 철학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청년들이 공적인 노동의 과

과 담론을 발전시키고 소통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정에서 배제된 것일 뿐이지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그리고 공동체는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고 돕는 것

제공받아야 할 객체가 아님을 지적했다. 즉 학생

을 귀찮게 여기는 시대에 이웃사랑이라는 진정한

들에게 기독교의 진리와 세계관을 가르치는 데만

기쁨과 생명의 계명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나아가

중점을 두지 말고 학생 스스로 고민하고 질문하여

현대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횡포 속에서 공동체는

주체적으로 답을 찾도록 돕는 IVF 공동체가 되어

그 자체로 대안이 되어 새로운 경제체제의 모델을

야 한다. IVF 운동의 주체로서의 학생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신뢰하고 그들이 리더로 성장하도록 돕는 IVF의 구조가 고안되기를 기대한다.

나는 IVF가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구호를 이 두 가지 핵심가치인 기독교적 지성과 공

마지막으로 우리가 변화의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

동체를 중심으로 재편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그렇

기를 소망한다. 존 스토트가 이야기한 대로 “성경

다면 IVF의 핵심적인 목표는 기독교적 지성을 통

의 기독교는 안정을 지향하는 우리의 감춰진 본성

해 (500년 전 루터가 바랐던 그대로) 성경을 주체

을 깊이 뒤흔”드는 역동성을 가졌다. 캠퍼스 선교

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개인을 키워내고, 그 개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IVF가 변화를 두려

인들이 연합하여 시대의 우상에 저항하는 하나님

워하지 않고 선교라는 부르심을 위해 자신의 모습

나라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을 개혁하고 갱신해나가기를 기대한다. 60년간 우 리와 이미 함께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언제 어디

그리고 이것을 캠퍼스 속의 하나님나라 운동과 연 관시킬 수 있는 단어가 우리가 이미 익히 들어 알

서나 우리를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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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IVF의 꽃은 학사운동이다

이상엽 ◆ 중앙대90 [소리] 편집위원으로 오랫동안 섬기며 학 사회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결국은 차기 학사회장으로 물망에 올랐다. 학사회 실 행위원이자 직장인 사역 담당자이며 남 서울IVF 이사장을 겸한다. 2년차 새신 랑 그리고 100일이 안된 아기의 늙은 아 빠이다.

최근 [소리]에서는 매년 전국의 IVF지방회 학사회를 방문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얼마 전에는 춘천학사회를 방문했고 지난 호에 그들의 이 야기가 실렸다. 그때 있었던 일이다. 왜 그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물론 많은 사람이 내가 아무런 맥락이 없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들 한다), 아마도 춘 천학사회 모임을 유지하는 데 힘이 든다는 간사님의 말씀에 대해 내가 대뜸 이렇게 말 했던 것 같다. “저는 그나마 성공적인 학사회 사역 모델은 [소리]라고 생각해요!” 곧 간 사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특별한 이유 가 있나요?” 아차 싶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깊게 생각하지 않고 말을 먼저 내지르는 버릇이 순간 튀어나온 것이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었고 쩔쩔매며 내가 그렇게 생각 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고 대충 궁색한 답변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당혹스럽고 부끄럽다. 말을 그렇게 해놓고는 그 당시에는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학사회 사역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볼 때, [소리]가 분 명히 하나의 성공모델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정 말 [소리]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학사운동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이런 글을


IVF의 꽃은 학사운동이다

쓰는 것은, 내가 [소리] 편집위원으로 10여년을 관

님들의 손을 거쳐서 문자화 되어 전파되는 작업이

여해온 것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일종의 ‘제 식구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싸기’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겠다.) 세 번째는 완전 무제한, 무체급으로 이루어지는 기 첫 번째로는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 같

획회의이다. “회의(會議)하면서 회의(懷疑)가 든

다. 처음 IVF가 학사를 배출했을 때부터 학사들을

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IVF 문화에서 기나긴 회

위한 모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가장

의 문화는 그리 독특할 것이 없다. 하지만 [소리] 기

먼저 시작한 활동이 흩어져 있는 학사들의 소식을

획회의에는 뭔가 독특함이 있다. 무제한 토론을 하

공유하기 위한 학사회보를 만드는 일이었다. 1979

게 되면, 어떤 주제에 대해서 강의나 강연을 듣는

년이었다. 처음에는 몇몇 학사들의 손길에 의해 자

것보다 화자와 청자 간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하고

발적으로 만들어지던 소식지는 점점 틀을 갖춰서

자 하는 바가 더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가령

90년대에 들어서 편집위원과 편집간사의 협의체

무엇이 진정한 IVF 학사로서 살아가는 모습인가

라는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간에 정간(停刊)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이것이 IVF학사의 삶의 모

이 된 적도 있지만, 기본적인 틀의 변화 없이 지금

습이라 생각한다며 난상토론을 펼치게 되면, 오히

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초기에는 학사들의 소식을

려 주고받는 내용들 가운데서 공감도 하고 때로는

공유하던 기능에서 지금은 새로운 동향과 의견을

새롭게 배우며 더욱 쉽게 주제에 대한 내면화가 되

제시하면서 발전해왔다. 다른 크리스천 매체들보

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소리] 편집위원의 구성

다도 앞서서 좀 더 폭넓은 형태의 고민거리를 계속

원이 변하여도 기본적인 방향과 주제의식은 쉽게

해서 심도 있게 다루고 있어서 [소리]의 영역은 점

바뀌지 않으며, 새로 참여하는 편집위원도 기본적

점 더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 [소리]의 편집방향이 이렇다는 점을 말하지 않 아도 배워갈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학사와 간사 사이에 역할 분담과 동역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소리]를 직접 만드는

네 번째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만 모이는 효율

데는 간사님들의 손을 가장 많이 거치게 된다. 편

성이다. [소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두 달에 한 번 만

집을 담당하시는 분, 디자인을 담당하시는 분 등,

나 회의를 한다. 한두 번 정도 더 모이는 경우도 있

일정에 맞추어 원고를 청탁하고 그 원고를 받아서

지만, 대략 1년에 6회 정도 만나는 셈이다. 사실 이

교정교열을 하고, 디자인을 하고 수정을 거쳐 최종

렇게 만나지 않고 더 자주 만나게 된다면 일상생활

적으로 인쇄소에 넘기고 각 지방회 사무실로 발송

을 하는 학사로서는 모임에 참여하기 부담스럽고

될 때까지, 이 모든 과정에 간사님들의 손길이 필

어려울 수도 있다. 목표가 명확하다면, 모이는 횟수

수적이다. 하지만 매번 기획주제를 정하고, 때로는

는 중요하지 않다. 학생시절에 가졌던 기준으로 소

연재물의 내용을 정하고, 필자들을 정하는 모든 과

그룹 모임과 전체모임을 하다가는 1~2년 사이에 어

정은 모두 학사님들과 간사님들의 협의를 거친다.

쩌면 대부분 지쳐서 나가떨어질지도 모르겠다. 모

필진은 되도록이면 IVF 학사님들을 섭외하는 것을

임 횟수의 간결함이 어쩌면 29년 간 꾸준히 이어올

우선으로 하고 있다. 결국 [소리]에 실리는 이야기

수 있었던 저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는 실제로 학사들이 살아내고 있는 이야기가 간사

소리 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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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F의 꽃은 학사운동이다

《세상을 위한 교회, 세이비어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이전에도 세이비어 교회의 모습에 대 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간략하게 내가 이해한 바로는, 세이비어 교회의 독특성은 “내적여정”과 “외적여정”의 강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학부 생활을 통해서 “내적 여정”에 대한 방법과 방식을 배워왔으나, 학사가 되어서는 “외적여정”을 살아가야 한다. 하 지만 IVF 내에는 학사들을 위한 “외적여정”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었으며, 단순하게 학부 에서 잘 훈련받은 학사라면 알아서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사회 활 동의 결과물을 본다면 이런 방식이 결코 성공적이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외적여정”이라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거대한 어떤 것을 들고 나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한다. 나의 “외적여정”은 [소리] 활동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운 좋게도 [소리] 편집위 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 활동을 통해서 학사운동을 지속적으로 접해왔다. 지금 은 또 다른 “외적여정”인 직장인 사역을 통해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만들 어 가고 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외적여정”의 리스트가 확보되었으면 좋겠다. 졸업하는 학사들이 학사회 에 준비된 여러 활동을 보면서 각자의 개성과 부르심에 맞게 찾아 들어가서 활동하게 되는 것이 우리 학사회가 풍성해지고 학사운동의 지경이 넓어지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미 많은 학사님이 본인의 삶의 영역에서 크건 작건 여러 활동을 하고 계실 것 같다. 어쩌면 학사회의 역할은, 그러한 활동들을 연계해서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다른 지역에도 알려서 비슷한 모임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돕고, 또는 새로운 운동을 만들고자 할 때 지원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졸업할 때, 누군가가 “IVF의 꽃은 학사운동이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하지만 졸업해서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어떤 학사는 사기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몇 해가 지나서 후 배들을 만났을 때 “너희가 만들어야지” 했더니, 돌아오는 후배들의 대답은 “아직도 아무것 도 없어요?”였다. 이제 나는 “아직 시작 단계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 이 사기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로 자신 있게 “IVF가 60주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졸 업생을 수없이 배출하였어도 학사운동은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이 시 작은 꺾이지 않고 이어질 것이며, 이 시작의 결과물로서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여기저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기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캠퍼스 사역, 더불어 같이! 박종서 ◆ 외국어대92 IVF 학원사역부 총무. 두 딸과 아내와 더 불어 살고 있다. 가족뿐 아니라 여행, 놀 기, 야구가 최근의 관심사. 예수 안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캠퍼스의 변화와 현재

동은 여전히 지금도 학생들을 통해 맥을 이어 오 고 있습니다.

올해는 한국 IVF가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 다. ‘60년’이라는 시간 속에는 수많은 사람과 사

그러나 대학 사회의 변화는 아주 빠르게 진행되

건이 있었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건

고 있습니다. 대학이 대중화, 상업화되기 시작

속에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바로 한국 IVF 60주

한 것은 오래전 일이고,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

년의 역사입니다. 다양한 사연과 추억이 60년의

로 인해 대학구조 개편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학

역사 안에 담겨 있습니다.

과의 이름이 바뀌거나 학과가 통폐합되고, 대학 의 존폐 위기가 심심치 않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IVF 운동은 특히 ‘캠퍼스 복음화’를 위해

대학의 낭만, 여유, 즐거움은 사라진 지 오래입

꾸준히 사명을 감당해왔습니다. 시대에 따라 표

니다. 취업과 미래준비에 대한 부담으로 캠퍼스

현 방식은 조금씩 바뀌어 왔지만, 캠퍼스를 어

는 점점 더 삭막한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떻게 하면 복음화할 것인가는 IVF 운동의 핵심

이러한 대학 사회의 변화로 인해 공동체 생활은

적인 목표였습니다. 60년을 지나오면서 대학과

더 빡빡해지고, 소그룹 시간을 함께 잡는 것이

대학생의 변화를 위해 땀과 눈물을 흘렸던 지난

어렵다고 캠퍼스 간사들이 호소합니다. 기독교

시간이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인해 사람을 세우

인구 감소 및 탈종교화되는 대학 현실 속에서,

고, 공동체를 일구며, 세상을 섬기는 일을 온전

신입생 유입도 줄어드는 형국입니다. 전반적으

히 힘써왔습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주는 삶

로 지부 규모가 예전보다 축소되고 있는 상황에

의 풍성함, 이것은 다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놓여 있습니다. 방학 때 수련회를 참석하는 것도

젊은 날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

이전에 비해 다른 경쟁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계

소리 정음


20+ 21

IVF와 걸어온 길, 아직도 가야할 길

절학기, 여행, 아르바이트, 다른 학업 등으로 인

해 가고 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 개별 지부와 지

해 수련회 참석이 예전만 같지 않은 것이 현실입

방회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니다. 공동체, 소그룹, 전체모임, 수련회에서 이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실질

제는 이전과 다른 역동이 일어나고 변화가 요구

적인 역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간도 줄이며, 참

되고 있습니다.

여적 방식으로 모임을 바꿔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한 IVF의 대응

학생 리더십 배양이라는 측면에서 2013년부터는 대안대학 ‘산돌(Living Stones)’을 운영하고 있습

IVF 운동은 여러 도전 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

니다. 4개월가량 다양한 분야의 강사를 모시고,

에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매체를 통해 지금 청년

참여토론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왔습니다. 20

들이 처한 어려움은 익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명의 학생과 학사들이 참여하여 공동체를 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IVF 운동의 활기를 떨

릴 뿐만 아니라, 해외 탐방과 국내 탐방을 통해

어뜨리고 있고, 공동체를 누리고 사람을 세워가

여러 전문가 및 활동가들과 직접 소통하며, 각자

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수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해결해가는 모습을 봅 니다. ‘산돌’에 와주셨던 강사들은 IVF가 이러한

따라서 IVF 공동체는 변화하는 캠퍼스 상황 속

학습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에 대해 지지

에서 어떻게 사역을 할지 많은 고민을 하고 각종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실험을 진행해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운동 의 본질과 특징은 성경에 있음을 재확인하였습

또한 신입생 유입의 어려움이라는 공동체적 고

니다. 성경공부는 12대 정신의 특징 가운데 두드

민과 교회의 필요가 맞물리면서 IVF 공동체는 전

러질 뿐만 아니라, IVF 운동이 지속적으로 강조

공 박람회, 지역별 중고등부 수련회를 개최하였

한 가치이고 특징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시

습니다. IVF가 가지고 있는 인격적 만남, 소그룹

대에 맞는 방식으로 성경 공부를 진행하고 나눌

모임 등의 그간의 장점을 발휘하였고, 참가한 교

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나라 복음

회와 학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의 관점에서 접하도록, 다양한 성경연구 방법론

다양한 지역에서 이와 같은 사역이 지속적으로

을 통해 창의적이고 참여적 방식으로 성경을 읽

진행될 예정입니다.

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에 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성경이 우리의 삶

학사들의 참여 방법

과 우리가 놓인 상황 즉 대학과 사회로 연결될 수 있는지 실천하는 것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시대

개인적으로 학생으로 간사로 공동체와 함께한

와 상황은 바뀌지만, 성경 공부는 IVF 운동을 이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학사님들의 존재와 섬김

끄는 매개와 전략이 될 것입니다.

은 이 운동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를 갖도록 해주 었습니다.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때 지금

핵심 사역은 유지하면서도 지부 운영, 수련회 기

의 삶과 운동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음을 깨닫게

간에 있어서 상황이 고려된 유연한 방식을 채택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학사님들의 크고 작은


캠퍼스 사역, 더불어 같이!

관심과 섬김은 캠퍼스 운동을 하는 학생과 간사

경험의 차이에 따라 기여할 수 있는 바가 다양할

들에게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운동

것이라 생각합니다. 적절한 소통을 통해 다양한

이 일어나고 사역이 확장될 때는 자연스럽게 관

경험이 후배들에게 나눠진다면, 우리 운동이 더

심을 갖고 여러 필요를 나누는 것도 어렵지 않았

풍성해지고 알찬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사역이 위축될 때, 관심과 지지와 지원이 더 쉽지 않을 수 있겠

교회 학생들 혹은 지인들에게 IVF 운동을 추천

지만 그래서 더욱 학사님들의 관심과 지지가 절

하고 연결해 주세요. IVF 여러 지방회 및 권역에

실합니다. 학사님들이 캠퍼스 운동을 위한 지원

서는 방학을 이용한 중고등부 캠프, 수능을 마

그룹이 되어 주십시오.

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등을 준비 하고 있습니다. 수시 혹은 수능을 마친 친구들

캠퍼스 사역을 위해 관계의 끈을 맺고, 학사님들

이 IVF와 연결될 수 있도록 알려주시길 바랍니

의 이야기를 나눠주십시오. 캠퍼스 사역은 다양

다. 그들이 대학 안에서 좋은 공동체를 만나고

한 방식의 지지와 지원이 있을 때 열매를 맺어왔

경험하면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배우고 실천해

습니다. 특별히 학사님들의 살아 있는 이야기가

갈 수 있도록 그 가교 역할을 학사님들께 부탁

나눠질 때, 학생들은 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더

드립니다.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추억과 사연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달된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분주한 학사

면, 학생들은 캠퍼스 안에서 담대함을 갖게 되고

의 삶이지만, 캠퍼스 사역을 위한 기도를 부탁드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립니다.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다면 물어봐주 시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을 위해

그리고 학생들과 간사들의 필요에 반응해 주십

어떤 기도가 필요한지 살펴주시고, 기도해 주시

시오. 후배들과 이들을 돕는 간사들에게 어떤 구

면 좋겠습니다. 학사님들의 관심과 기도가 그들

체적인 필요가 있는지 살펴주시고 그 필요에 응

에게 커다란 격려와 힘을 줄 것입니다.

답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요즘 많은 학생이 아르 바이트를 통해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습니다. 학

캠퍼스 사역이 힘들고 어렵다고들 합니다. 물

사님들의 삶도 쉽지 않고 넉넉지 않겠지만, 학

론 학사의 삶은 더 고단하고 힘들 수 있지요. 그

사님들이 학생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모습을 보

래도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선배들의 섬

며 그들은 아낌없는 사랑의 복을 누리게 될 것

김과 나눔을 통해 후배들은 하나님나라 복음에

입니다.

대한 자긍심과 소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흘러가는 모습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분

또 학사님들의 은사와 재능을 발휘해 주세요. 대

노와 실망, 낙심을 경험하는 시대입니다. 어두운

단한, 눈에 띄는 은사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학

길을 걸어가는 이때에 학생과 학사들의 연합과

생들을 도울 수 있는 은사가 있다면, 만남을 통

동역이 소망의 빛을 비춰가는 하나님나라 운동

해서, 모임을 통해서 공동체를 세우고 자라가게

이 되길 기대합니다.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학사님들의 사회

소리 정음


22+ 23

일상기도문

IVF 60주년을 감사하며 드리는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60년 전에 이 땅에 IVF 운동을 세워 주시고 지금까지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 니다. 또한 캠퍼스와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며 학생으로, 학사로, 간사와 이사로 당신 과 함께 즐거이 일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지난 60년간 IVF 운동을 통하여 당신이 이루신 일들을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많은 이들이 IVF 를 통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소명을 발견하고 제자의 삶을 배우며 평생 동역자를 만난 이들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또한 당신이 주신 지혜 와 은사로 캠퍼스와 세상을 섬기며, 살아있는 공동체를 누리고 세워가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 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을 살고 교회를 섬기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IVF 운동을 통해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캠퍼스의 상황이 어려워지고 교회가 세상 속에서 신뢰를 잃어버린 현실을 바라봅니 다. 때로는 IVF 공동체가 교만하고 안주하여 책임 있게 행하지 못하였음을 돌아보면서 회개합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기도로 캠퍼스의 아침을 깨우고 말씀을 탐구하며 진리 안에서 삶을 세워가고 하나님나라를 위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들을 계속해서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 와 다양한 분야에서 하나님나라를 일구어가는 리더들과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 가는 IVFer들을 세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도 IVF 운동을 사용해 주시기를 소망합니 다. 부디 IVF 운동이 지나온 역사를 잘 성찰하고 오늘의 상황을 잘 분별하며 내일을 잘 준비하여 열매 맺는 운동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까지 이 운동을 이어온 이들의 눈물과 땀을 기억하여 주시고 위 로와 충만한 감사의 열매로 채워 주소서. 또한 지금도 캠퍼스와 세상 속에서 개척자로 살고 있는 동 역자들의 기도를 돌아보아 주시옵소서. 원대한 계획 속에서 IVF 공동체와 함께하여 주실 당신을 찬 양합니다. 모든 영광을 캠퍼스와 세상의 참 주인이신 당신께 올려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한신 ◆ 부산대94 일상생활사역연구소는 일상생활이 곧 예배이며 사역이라는 관점과, 성도들이 보냄 받은 곳이 어디든 사역의 현장이며 선교의 장이라 는 관점을 나누기 위하여 연구하고 운동하는 연구소입니다. 일상의 다양한 주제를 기도로 드리는 훈련인 “일상기도”를 더 만나고 싶 으신 분은 연구소 홈페이지(www.1391korea.net)와 페이스북 페이지(1391korea), 또는 블로그(http://missionallife.tistory.com)를 방 문해 주세요.


말씀산책

상상력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다시 읽다 눅1:26-38; 2:1-20

하창완 ◆ 부산대82 84년 부산지역 IVF가 개척될 때부터 같 이 시작하였고, 아내도 IVF에서 만나고 큰딸도 IVFer인 행복한 골수 IVFer. 국어 교사로부터 출발해 목회자가 되어 부산 에서 ‘하나님나라를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찐한 공동체’를 꿈꾸며 ‘맑은물 교회’를 개척, 12년째 섬기고 있다.

천사들이 브리핑하는 이스라엘의 뉴스를 들으신 성부하나님이 한숨을 쉬셨다. “에휴,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을 저들에게 보냈는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분의 뒤를 이어 성령님이 말씀하셨다. “나도 정확한 숫자는 계산해 본 적 없는데... 아마 엄청날 걸요?” “어쩌면 좋을까?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천지 분간도 못하면서 냅다 지옥으로 뛰어 드는 저 사람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도대체 누가 가서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삼위하나님의 한숨소리가 하늘에 가득했다. 떨어지는 눈물은 빗물이 되어 땅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 한참 만에 성자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가볼까요? 가서 사람들과 똑같이 태어나고 자라고 먹고 자고 노동하면서, 구 체적으로 저 사람들이 어째서 그리 지옥으로 내달리는지 직접 느껴도 보고, 우리 마음 도 전해 보는 거죠. 자기들이 달려가는 그 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참된 행복의 길이 있 다는 걸 보여 주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안에 충격을 받은 듯, 다들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였다.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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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산책

“그걸 네가 견딜 수 있을까? 아기가 되면 울음소리밖에 내지 못할 테고, 육체에 갇히면 우리가 누리는 초월적 자유가 엄청나게 제한될 텐데... 게다가 지금처럼 우리와 나누는 대화와 교제의 즐거움은 상당히 제한 받을 수 밖에 없을 거야.” 성령님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우리 중에 누군가가 가서 직접 이야기하면 좀 낫긴 하겠죠... 근데 그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란 말야... 만약 저 사람들이 우리 말을 듣지 않는다면, 시기하고 모함해서 죽음으로 몰아버린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 야? 거의 백 퍼센트 그렇게 될 텐데...” 고민 가득한 얼굴로 서있던 성부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십중팔구는 그렇게 되겠지만...암튼, 난 내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 도록 할 거야. 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그 헌신이 열매가 있도록 나는 너의 죽음을 인간의 원수인 사탄을 향한 심판으로 사용하겠다. 결국 사탄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거니까 말이야.” 하나님은 비장한 표정으로 아들을 돌아보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비록 죽음을 겪는다 해도 반드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너를 부활시킬 거라고 내가 약속하마. 네가 내 려가서 펼친 모든 과정을 통해 돌아오는 이들을 나는 너의 이름으로 일컫는 ‘에클레시아’라고 부르겠다.” “그래. 나도 적극적으로 도와야쥐. 인간의 몸을 입고 가는 순간,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널 공격할 테니까, 내가 힘을 다해 같이 그 공격을 막아내고 온전하게 우리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게.” 성령님이 적극적으로 같이 있겠다고 하시자 예수님은 힘이 나시는지 한껏 고무되었고, 벌써 마음은 인간 세계 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인간들을 바라보셨다. “저 곳으로, 저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려간단 말이지? 벌써 긴장되는 걸? 인간의 몸과 정신으로 살면 어 떤 느낌일까? 제한된 인격과 몸과 능력을 통해서 성부와 성령을 만나는 게 어떤 것일까? 그 느낌, 한번 느껴보 고 시포~~ㅎㅎ." “내가 만든 사람들과 같이 되어 살아본다니! 와우~~” ‘저것이 철이 없는 거야, 속이 없는 거야? 저리도 좋아하다니... 그 길은 너의 죽음의 길이란 말야...’ 성부하나님은 속으로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잠깐, 우리 계획에 먼저 해결해야 할 게 있어요.” 성령님이 뭔가를 생각하고는 갑자기 소리치셨다. “예수가 아기로 태어나려면 누군가가 아기엄마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누가 그 일을 하죠? 남자를 가까이 하 지 않은 여인이 아기를 갖고 또 출산하고 키워야 되는데...” “참, 그렇지... 그럼 가브리엘을 보내서 그 여인부터 찾아야겠다.” 예수님이 맞장구를 치자 하나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내가 벌써 보아둔 처자가 있어요.” “그래요? 벌써? 아... 하하하”


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

삼위하나님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바라보고 웃었다.

가브리엘 천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 가브리엘은 쏜살같이 팔레스틴 땅 나사렛 동네의 마리아를 찾 아 나섰다. 그리고 집에 혼자 있던 마리아 앞에 나타났다. “어험!” “아이, 깜짝이야. 자기 왜 이제 왔어? 으응?” “아니, 아니... 난 요셉이 아니야.” “예? 그럼 누구세요? 여긴 또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난 네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셔서 왔단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놀라지 마. 넌 특별히 하나님이 선 택한 사람이야. 때가 되면 넌 아기를 갖게 될 거야. 그의 이름은 예수라고 해야 돼.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 시아로 오실 거야.” “예? 뭐라고요? 제가 아기를... 아기를 갖는다고요? 전 결혼도 안했어요! 전 처녀라고요!” “그걸 아니까 이렇게 일부러 찾아온 거잖아? 성령이 너와 함께 할 거야. 염려하지 마. 네가 잉태할 아이는 하 나님의 아들이야. 봐, 네 친척 엘리사벳도 나이가 많은데 아기를 가졌잖아? 그것도 성령님이 하신 일이야. 하나 님께 불가능이란 없단다.” “아... 근데요... 전 요셉하고 정혼한 몸인데... 아... 어떡하지?” 마리아의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각과 의문이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성 령님은 차근차근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마침내 더는 질문할 내용도 없어졌고 뭔가 대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 걸 알기에, 마리아는 혼란 속에서 마음 을 가다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마리아가 최종 응답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쉿! 조용히~~ 마리아가 뭐라는지 들어봐야지.” 천상에서는 삼위 하나님도, 천사들도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초집중모드로 마리아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전 주님의 여종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게 제 마음의 중심입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또 무슨 일이 어떻게 펼쳐질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와우! 부라보~~” 삼위하나님 사이에서는 하이파이브가 이어졌고, 천사들은 벌써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니까!” 성부, 성자하나님의 탄성 속에서 예수님은 장차 당신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를 애정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엄마!’라고 불러보며 기분이 좋은 듯, 멋쩍은 듯 씩 웃으셨다. 그렇게 첫 번째 성탄절을 열 달 앞둔 어느 날은 저물어가고 있었다.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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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산책

서울 광화문 광장에 100만 명이 속속 모여들어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치고 있다. 그 일주일 전에는 20만명 이 모여 같은 목소로 외쳤고,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는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 져 일 년을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한 시대의 의인이 유족들의 오열 속에 땅에 묻혔다. 한편 바다 건 너 미국 땅에서는 전대미문의 막말 생산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고,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다. 또 다른 채널에서는 갑자기 끼어든 승용차를 피하려다 관광버스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전복하면서 4명이 목 숨을 잃고 40여명이 다치는 사고가 보도되었다. 한진해운은 박근혜와 최순실의 모금에 비협조적이었다가 회 사부도라는 엄청난 보복을 받게 되었다는 뉴스도 흘러나왔다. 인천 지하철이 전 구간에 걸쳐 올 스톱되는 사 고가 생겼다. 조사결과 부실시공이 원인이란다. 과전압을 방지하는 퓨즈가 설계보다 용량이 적은 게 설치되었 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오랜 불임 끝에 낳은 아이가 제 아빠가 아닌 그 교회 담임목사님을 쏙 빼닮았다는 소문이 돌 았다. 급기야 아이 아빠는 유전자 감식을 했고 아이와 목사의 유전자는 99.9% 일치했다. 물론 아내도 목사도, 자 기들은 엄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버티고 있다. 같은 시각 또 다른 곳에서는 장로와 목사가 멱살을 잡고 싸 우고 교회를 둘로 쪼개었다. 이 얘기는 뉴스거리도 되지 못한 채 당사자들과 주변 사람들만 분통을 터뜨리고 있 다. 수천억을 들여 지은 어느 교회는 통유리로 건물 전체를 덮어놓았다. 주변에서 그 유리에 비치는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다는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 교회 목사는 각종 거짓학위와 학력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삼위하나님이 걷고 계신 하늘 정원에서는 마치 ‘google earth’를 보는 것처럼 지구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 다. 멀리서도, 또 가까이 다가가서도 볼 수 있었다. 아주 가까이 가서 볼 때는 하늘 정원이 마치 지구의 어느 한 편에 자리 잡은 정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삼위하나님 중 한 분은 사람들이 발행한 신문과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고 계셨다. 또 한 분은 사람들 가까이에 서 우리의 웃음과 한숨과 분노와 울음을 들으시고, 사람들이 쏟아놓는 말들을 귀담아 들으시고, 우리의 행동을 유심히 보고 계셨다. 그러다 마치 〈인터스텔라〉 영화에서 웜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시간여행을 하듯, 우리 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각 사람의 행동을 멀리서도 또 시간을 꿰뚫어서 그 결과까지 보셨다. 하나님 은 모든 인류가 너나 할 것 없이 각자 희로애락의 감정에 이끌리고,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과, 배신당하는 슬픔과 이별의 아픔, 남들처럼 살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지닌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모든 것을 다 가 진 것 같으나 정작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지옥을 살고 있음을, 또 영원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도 보셨다. “내가 이러려고 십자가를 졌는지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아요.... 참 복잡한 감정이 뒤엉키는군요...” 예수님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그러게나 말이야... 아들이 지상에 있었을 때 그랬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아들이 사람들에게 간다고 했을 때, 아기 예수를 받아들였던 마리아의 믿음과 순전함을 보고 내가 얼마나 기 뻐했는데... 사람들 마음에 마리아 같은 진정성을 다시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들 왜 이러세요? 그래도 잘 찾아보면 그보다 더한 순전함이 어딘가에서 꽃피고 열매 맺고 있을 거라고요. 희망을 가지세요, 희망!”


말씀과 함께 걷는 우리의 삶

성령님은 특유의 즐거운 목소리로 성부, 성자하나님의 처진 마음을 띄워보려고 크게 말씀하셨다. “그래. 있을 거야. 있지. 암 있고말고. 그래야 우리도 소망을 갖고 사람들을 만나지, 안 그래? 자, 다들 힘내서 다시 사람들 챙기러 가보자고!” 우울함을 벗어던지고 싶었는지 신문을 던져버리고 성부하나님이 소리치셨다. “그래요. 가서 또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봅시다. 누구든지 문을 열어주면 들어가서 같이 밥 먹고 또 그도 우리 로 인해 새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우울한 뉴스에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을 챙겨서 생명수 흐르는 강변에서 잔치할 날이 다되어 가잖아요? 힘내봅시다. 아자~~” 삼위하나님의 힘찬 목소리에 하늘을 날던 새들이 깜짝 놀란 듯 지저귀고, 지나가던 구름도 잠시 멈칫 하는 듯 하였다.

소리 지음 에필로그)

지난 1년 동안 부족한 제 글을 관심 있게 읽어주신 [소리]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나누었던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상상력을 이용해서 성경본문을 확대해본 것입니다. 상상력은 지성처럼 하나 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차원으로 정화되거나 성화될 수도 있고, 사탄의 도구가 되어 폭력적이 되거나 불안과 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정화된 상상력을 통해 성경본문을 새롭게 써본 이야기들을 통 해 누릴 수 있는 유익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과 성경 속 인물들의 마음을 잘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마음에 가 만히 머물러서 같이 느끼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의 현장에 같이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 마음에 이끌려 내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죠. 특히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알고 있는 마리아의 수태고지가 하나님이 그냥 밀어붙이신 운명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허락을 구하고 마리아가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요셉의 집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는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로 풀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일이 벌어질 때까지 하늘에서는 얼마나 많은 삼 위하나님의 한숨과 눈물, 의논과 헌신이 있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더불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시 는 하나님의 마음도 같이 느끼게 되었고요. [소리]의 독자들도 이렇게 상상력을 풍성하게 사용하면서 성경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성경 읽기를 통해 다 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 미흡한 글이 그 길에 조금이나마 도 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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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박정희를 청문회에 세우다 이강일 ◆ 고려대88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소장. 1993년 부터 캠퍼스 간사를 시작했고, 종교학으로 학위를 마친 2015년부터 제 정신을 차리고 연구소 사역에 나서고 있다. 특히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모임을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면 가리지 않고 모색 중. 책장을 넘기며 왁자지 껄 토론하는 독서모임이 전국에 그득그득하 기를 기도하고 있다. 회사를 다니며 집안을 살리는 아내, 대학 가는 큰딸, 맛난 음식을 보면 기분이 업되는 중3 둘째딸과 서울 홍제 동에서 살고 있다.

제1회 박정희 추모예배ⓒ오마이뉴스 이희훈(2013.10.26.)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2016년 이 겨울, 때마침 [소리]에서는 박 정희 시대를 돌아보는 순서가 되었다. 그의 시대를 돌아보는 것은 오늘날 박근 혜 정권 폐습의 기원을 찾아가는 것일 수 있다. 만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 년에 사망하지 않고 유신체제를 좀 더 끌고 나갔다면 1980년대 전두환처럼 민 주화 항쟁에 무너져 청문회에 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해보면 서 그를 가상 청문회의 증언자로 세워 그의 시대를 돌아보고자 한다. (가상 증 언자 박정희의 발언 중에 근거가 있는 것은 밝혔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작가 적 상상임을 밝힌다.) 박정희의 경력에 대하여 질문자(이하 질): 오늘 이 자리는 1960-70년대 18년간 국가를 통치한 전 대통 령 박정희 씨에게 지난 과거사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가상 청 문회입니다. 증인에게 묻습니다. 1917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1961년 5.16 군 사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씨 본인 맞으시죠? 일제 시기 이력을 말해주세요. 박정희(이하 박): 그렇습니다. 제가 박정희입니다. 저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 하고 3년간 문경 공립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23살에 만주군 군관학교인 신경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성적우수자로 졸업하면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하고 졸업, 1944년부터 만주의 관동군으로 근무했습니다.


이강일 소장과 함께 하는 근현대사 관찰․해석․적용

질: 증인, 만주군관학교 입학당시 증인이 혈서로

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총선에 의해 집권

지원서를 낸 사실이 있죠? 입학 지원자 모두가 입

하여 장면 내각이 정상적인 정치를 하던 시기였습

학할 때 혈서를 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제가

니다. 거창양민학살 등 과거사 청산운동, 교원노조

된 것 같습니다. 증인의 기억을 돕는 차원에서 읽

결성운동, 한미경제협정 반대운동, 남북학생회담

겠습니다. 1939년 <만주신문> 3월 31일자입니다.

운동 등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시

“경북 문경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23)군

민들의 민주화의 요구가 거셌던 것은 사실이죠. 그

의 피로 쓴 편지가 송부돼 관계자를 감격시켰다.

럼에도 1961년에는 시위도 잦아들었고 정국은 생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정신과 기백으로

각보다 평온했습니다. 유혈사태 등으로 국가기능

일사봉공을 위해 굳건히 결심합니다. 견마의 충성

이 마비된 상황은 아니었던 거, 아시죠?

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각오를 밝혔다.”1) 아주 작

박: ‘저희는 다급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난을 면

정하고 일본군이 되고자 했던데 어떻게 생각합니

하기 위해 걷고 있을 겨를이 없어 세찬 달음박질

까?

을 한 셈입니다.’2) ‘상극과 파쟁, 낭비와 혼란, 무위

박: 당시 저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 없었던 20대 초

와 부실의 유산... 이 오염된 민족사에 종지부를 찍

반의 피 끓는 청춘이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일본

고 자주와 자립으로 번영된 내일의 조국을 건설하

국의 백성으로 자라나 일본이 주도해가는 세상이

려고 한 것입니다’3)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반도 출신 조선 인에게 만주는 하나의 도전이었습니다. 지금 기준

질: 무엇보다 증인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일

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본 근대화를 군인이 주도한 사실에 각별한 매력을 느낀 것 같습니다. 메이지 유신(1866), 쇼와 유신

질: 그러면 장준하(광복군, <사상계> 편집인, 1918-

(1936) 모두 일본의 사무라이나 현역군인이 천황

1975), 김준엽(광복군, 전 고려대 총장, 1920-2011)

을 앞세워 일본의 부국강병을 명분으로 일으킨 혁

선생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시 증

명 아닙니까? 특히 쇼와유신은 민주화와 인권을

인과 비슷한 나이에 일본군 학도병으로 갔다가 탈

탄압하고 천황중심으로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영하여 6천리 길을 걸어 광복군이 된 분들입니다.

군사력을 강화하는 모델이었죠. 실제로 증인은 친

이처럼 다른 길도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구인 작가 이병주에게 ‘젊은 군인들이 나라를 바로

박: ......

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 어엎어야 할 것 아닌가’4)라고 했었죠? 그뿐이 아닙

5.16 군사 쿠데타에 대하여

니다. 1961년 쿠데타 성공 후 일본을 방문해서 전 만

질: 증인은 1961년 5월 16일에 군사력을 동원해 헌

주국 관리출신 정치인들 앞에서 ‘나는 정치도, 경

정질서를 깨뜨리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때

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메이지 유신당시 일본의

가 그렇게 절박했습니까? 4.19 혁명으로 부패한 자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

1) 오마이뉴스, 2015년 1월 13일자(http://www.ohmynews.com/

asp?C_IDX=26764&C_CC=AC)

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2024)

3) 1963년 8월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 연설의 일부이다. (http://

2) 1963년에 함석헌의 박정희 정권 비판에 맞대응한 공보비서 이

chogabje.com/board/view.asp?C_IDX=26764&C_CC=AC)

낙선의 표현을 인용한 것이다. (http://chogabje.com/board/view.

4) 한홍구, 《유신》, 한겨레출판, 2014, 53.

소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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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식민지 배상금을 제대로 받

생각’이라고 해서 그들을 흐뭇하게 했다죠.5) 그리고

아내지 못하고 역시나 큰 빚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을 만나서는 큰절을 올렸다

만 지는 결과를 만들었습니

고도 했습니다. 일국의 집권자로서 적절한 처신이라

다. 월남에는 32만 명을 파병

고 보십니까?

하고 1만 2천명이 희생되어

박: ... 저는 제가 아는 상식으로 제 결의를 밝히고 선

돌아왔습니다.8) 이 과정에서

생님에 대한 예의를 다했을 뿐입니다.

외환보유고가 급격히 늘어난 거죠. 경

만주군 육군 예비소위 시절 박정희

제성장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내준 것 아닙니까? 질: 증인이 그렇게 국가를 대표하는 신분임을 망각

박: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하고 저자세로 나오니까 1963년 대통령 취임식에 특

굶어죽어 가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까?

사로 왔던 일본 국회의원 오노 반보쿠가 ‘아들의 경 사를 보는 것 같아 무엇보다 기쁘다.’라는 망언을 지

질: 증인, 솔직해집시다. 백성이 굶어 죽어가던 시절

껄인 것 아닙니까?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에 유익

은 전쟁 때였고, 나라 경제가 바닥을 친 지는 몇 해가

했다는 망언의 순위를 갈아치우는 이야기입니다.

지났습니다. 1960년 4.19를 통해 민주화를 향한 시민

박: 듣기 나름입니다. 지한파 정치인이 있는 것은 우

의 저력이 드러났습니다. 민주화를 이루며 성장하는

리나라에 손해가 아닐 것 같습니다.

건강한 모델이 없다고 보십니까? 왜 자기가 경험한

6)

군국주의적 경제발전모델 만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경제성장에 대하여

증인의 그런 태도를 바로 독선이라고 합니다. 억지

질: 증인은 쿠데타 초기 ‘양심적 정치세력에게 정권

성장은 반드시 돌이킬 수 없는 패망의 길로 추락한

을 이양한다’7)고 했는데 스스로가 양심적 정체세력

다는 사실을 왜 모른 척합니까! 몰랐다고 하기에는

을 자처한 민간인이 되어 대통령에 올랐습니다. 정

대가가 너무 막대합니다. 군인은 자기 본연의 자리

통성이 취약한 정부였으니 경제성장으로 정당성을

를 지키고, 정치영역으로 월권하면 안 되는 겁니다.

입증해야 했을 겁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

박: 그러니까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고 경제의 규모를 급속히 끌어올려 국민총생산을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9)

1961년 83달러에서 1966년에 125달러로 높였고, 3공 화국 내내 연간 경제성장률 8.9퍼센트라는 경이로운

질: 증인의 그런 국가 주도의 수출중심 경제성장 정

성적도 냈었죠. 문제는 경제성장의 동력을 미국과

책 때문에 대기업들만 더 큰 재벌이 되고, 정작 이 나

일본자본에서 찾았다는 겁니다. 성장하는 만큼 빚도

라의 농민과 노동자들만 속절없이 피해를 봤습니다.

함께 증가했죠. 채권자인 미국은 일본과 협정을 종

자기 몸에 휘발유 뿌리고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며 숨

용하고 월남 파병을 요구했는데, 거절하기 힘들었을

진 20살 청계천 재단사 전태일(1971.11.13)을 아세요?

겁니다. 1965년에는 졸속으로 한일수교협상을 해서

증인을 ‘나라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직접 편지까지

5) 같은 책, 50.

8) 박현채 편,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소나무, 1994. 244.

6) 같은 책, 52.

9) 1963년 8월 30일 박정희 대장의 전역식 연설문에서. 이 연설을 끝

7) 강만길, 《20세기 우리역사》, 창작과비평사, 1999, 291.

으로 그는 민간인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강일 소장과 함께 하는 근현대사 관찰․해석․적용

썼는데 전달이 안됐나요? 증인은 서울의 무허가

드)만 아니었다면 내가 뭐가 답답해서’11) 그랬겠습

건물 보기를 못마땅해 하셨다죠. 결국 도시빈민들

니까? 그리고 얼마 전 세 번째 대선에서 새파란 김

수십만 명을 경기도 광주 외딴 지역에 몰아놓고 아

대중에게 하마터면 저는 질 뻔했습니다. 그가 모

무런 제반조치를 하지 않아서 생긴 ‘폭동’(1971년 8

인 유세장마다 인파와 열기가 상상 이상이라는 보

월)과 그 후유증을 알고는 있습니까? 증인하면 떠

고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폭동이라도 나면 어쩌나

오르는 것이 새마을 운동(1973년 1월)인데, 이 운동

하는 걱정에 잠을 못 잤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

으로 농촌을 살리자고 하면서 남아돌기 시작한 시

니다. 이렇게 불안하고 번거로운 미국식 민주주

멘트를 마을마다 공급했었죠. 처음엔 농민들도 자

의 체제보다 한국 상황에 맞는 ‘한국적 민주주의’

발적으로 호응했습니다만 결과가 어땠는지 아시

를 해보자고. ‘유신적 개혁’은 그렇게 시작된 것12)

죠? 농가부채는 늘어나고, 도시주민보다 수입이

입니다.

줄어 이농현상이 세배나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은 농촌 공동체만 깨지고, 새마을운동은 공무원들

질: 한마디로 나라가 무너질 것 같아서 유신을 감

의 승진수단으로 전락해 더 이상 농민들의 자발적

행했다는 건데, 제가 보기엔 증인 자신의 정권을

참여를 기대할 수 없는 관제활동이 되고 말았습니

잃을까봐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당시 한

다. 사실상 생산성 떨어지는 농촌을 해체하고 도

반도 안보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된다고 봤어요. 북

시중심의 산업화전략의 일환으로 새마을운동이

측이 중공과 소련의 지원 없이 남침을 감행하는 것

작동했던 것입니다. 이런 초고속 성장을 떠받치던

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13) 주한미대사도 ‘비상대

일반 국민들의 피해를 어떻게 할 겁니까?

권까지 가동한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때 유신

박: 큰일을 하려면 희생도 따르는 법입니다. 매우

은 불필요하다’14)고 판단했고요. 그런데 적화야욕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실제로 광주 대단지 사건의

에 불타는 정권인 북측을 상대로 남북공동성명은

경우 주민들의 요구를 뒤늦게나마 수용했습니다.

왜 한 겁니까? 국민들 들뜨게 해놓고, 갑자기 간

10)

첩사건 만들어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 유신체제 유신체제에 대하여

가 들어선 겁니다. 너무 의도된 시나리오 같지 않

질: 5.16혁명 초기와 세 번째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

습니까?

선 삼선개헌 전까지 정권퇴진 운동은 없었던 것으

박: 통치권자의 정무적 판단입니다. 다 보기 나름

로 압니다. 그런데 증인은 초법적 유신헌법을 통해

인 것입니다.

총통제 같은 영구집권체제로 나갔습니다. 몇 년 전 부터 타이완에 총통제 연구자를 보내기도 했었죠?

질: 증인의 유신체제는 사람들의 억압된 인권의

박: 정권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잘 삽니다. 미국의

식을 깨운 듯합니다.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경제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면

위기가 찾아왔고, 군사정권의 억압을 피부로 느낀

서 아시아에서 발을 빼려고 해서 자위 차원에서 한

이들의 저항도 시작됐습니다. 평화통일을 기대하

불가피한 조처였습니다. ‘그런 만남(미중 화해무

는 혁신계 인사들을 체포, 고문, 구금하고 민주화

10) 한홍구, 앞의 책, 294.

13) 역사학연구소 저,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7, 330

11) 같은 책, 42.

14) 한홍구, 앞의 책, 37.

12) 같은 책, 49.

소리 지음


32+ 33

이강일의 한국현대사 PBS

시위를 하던 대학생들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교포 사회도 큰 수치를 느꼈고, 분노한 재일교포

(민청학련)이라는 단체 조직원으로 묶어 1,024명

하나가 증인을 저격하려고 하다가 그만 육영수 여

을 체포하더니 그들의 배후로 소위 ‘인혁당 재건

사가 희생(1974.8.15)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를 잃

위’를 그려놓고 8명을 주모자로 만들어 사형을 선

고 슬픔에 잠긴 증인의 큰딸 박근혜는 이 시기에

고(1975.4.8)하고서는 바로 다음날 새벽에 사형을

사이비 교주 최태민과 만나 기괴한 인연을 시작했

집행하다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습니다. 그리고 장준하 선생이 등산 중에 의문의

뭐가 그리 급했습니까? 유가족들은 고인들이 사

추락사(1975.8.17.)했던 거 아시죠? 장 선생은 광복

망할 때까지 일 년 동안 면회 한 번 못해봤습니다.

군으로 시작해서 진보적 지식인으로 변화하면서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서 당시 ‘사형수 8명

증인과 정면으로 맞서온 진정한 민족주의자입니

에게 씌운 증거가 의심스럽다’고 성명을 냈고, 국

다. 그분은 ‘국민은 대통령될 자격이 있어도 다카

제법학자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는 등

기 마사오(高木 正雄)는 자격이 없으며’, ‘자기 사

국제적인 반발이 있었습니다.15) 결국 이분들 모두

상을 갖지 못한 사상적 방랑아’17)라면서 거침없이

2007년에 무죄판결이 난 거 아십니까? 국가 배상

증인을 비판하셨죠. 증인은 그분을 생각하면 어떤

금도 받았어요. 증인이 사형선고를 내린 많은 사람

느낌이 드십니까?

들이 오늘날 거의 모두 무죄선고가 나고 있어요.

박: 그 당시 저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일부 몰

왜 그러셨어요?

지각한 인사가 황당무계한 경거망동을 한다’18)고

박: ...... 유감입니다.

말했습니다.

질: 늘 그렇듯이 증인은 진짜 사과를 할 줄 모르는

질: 1975년 4월 베트남 사이공이 결국은 함락되자

군요. 증인의 딸 박근혜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

긴장한 증인은 그해 5월 13일에 그 악명 높은 긴급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서 입장을 요구받자 ‘대법원

조치 9호를 선포했죠. 그동안 유신반대를 틀어막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고 답해서 난

으려고 만든 긴급조치 중 가장 초법적인 조치였습

리가 났었습니다. 최종 판결이 두 가지라니요. 두

니다. 그런데 1978년에는 총선에서 여당이 패했습

번째가 최종입니다. 부녀간에 참 답답합니다.

니다. 경제는 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서슬 퍼런

16)

유신체제 속에서도 반대여론이 커지기 시작한 것 저항운동과 유신정권 몰락에 대하여

입니다. 1979년 8월에는 YH라는 가발공장의 무단

질: 증인의 경제성장을 앞세운 철권통치에도 내리

폐업에 맞서 싸우던 여자노동자들이 야당인 신민

막이 있더군요. 세 번째 대통령을 하면서부터 무

당사를 찾아가 절박한 처지를 알리며 농성을 벌였

리수를 둔 듯합니다. 대선실패 후 일본에서 유신

는데, 경찰의 무도한 진압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

반대운동을 하고 있던 김대중을 제거하려고 납치

씨가 사망했습니다. 이들을 보호하며 나선 김영삼

(1973.8.8)했다가 국내로 데려왔잖아요. 참, 김대중

총재는 의원직을 잃었습니다. 1979년 10월 18일 부

이분이 결국 대통령을 지내신 건 아시나요? 재일

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유신

15) 위키피디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항목

17) 한홍구, 앞의 책, 136.

16) 한겨레 2012년 9월 11일자 (http://www.hani.co.kr/arti/society/

18) 같은 책, 146.

society_general/551154.html)


이강일 소장과 함께 하는 근현대사 관찰․해석․적용

을 시작한 후 벌어진 작은 나비의 날갯짓 같은 저항이 점점 커져서 해일처럼 밀려온 겁니다. 그리 고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증인은 언제나처럼 연회를 즐겼죠? 거기서 부마항쟁 소식을 들 으며 ‘서울에서 4.19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겠다’고 했고, 증인의 심복인 경호실장 차지철도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이 죽어도 까딱없었는데 데모대원 1백 만, 2백만 정도는 죽여도 걱정없습니다’라고 부추겼죠? 박: 뭐 그렇습니다. 국가안보가 제일 중요하니까. 그 모든 저항 배후에는 북한의 계략이 있는 겁니 다. 국가 없이 개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역사발전을 위해, 대의를 위해 소는 희생될 수도 있고요. 질: 개인이 잘 보호되어야 사회도 튼튼해지는 겁니다. 합리화하지 마세요. 다시 10월 26일로 가보 죠. 그날 밤 증인에게 총을 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재판과정에서 부마항쟁이 필연적으로 대도 시로 넘어올 것이고 거기서 생길 유혈사태를 막는 길은 증인을 지금 제거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고 증언했습니다. 증인이 유신이라는 무리수를 두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사건은 증인의 죽음을 향해 몰려가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박: 국가를 살리려고 견마지로(犬馬之勞)의 충성을 다했는데, 그만 내가 국가의 버림을 받았군요. 나의 조국근대화가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를 받게 된다면 ‘내 무덤에 침을 뱉으십시오.’19) 질: ...... 네, 이렇게 해서 청문회를 마칩니다, 지켜봐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증인을 다시 불러내 고 싶지 않으나 필요하면 다시 부르겠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만큼 우리 한국현대사에서 끈질기게 영향을 미처 온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그의 생각과 태도 는 우리의 세계관과 사회구조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다. 절대빈곤 시기에 집권하여 경제 규모를 크게 키운 당사자로서, 굶주림을 모면한 국민들에게 감사의 대상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외자중심 경제개발로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외채과잉 상태를 만들었고, 독점 대재벌을 육성하여 정경유착의 악습을 남겼으며, 저임 금을 기반으로 한 수출지향적 공업화를 추구하여 무역의존도를 높였다.20) 고통스러운 대가는 말없이 일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민주화와 인권이 절대적으로 억압당했고, 국가주도의 성장주의가 민주주의와 인권보다 우선한다는 왜곡된 국민의식이 자리 잡았다. 박정희식 통치의 폐단은 결국 1997년에 이르러 외환보유고 위기 사태로 이어졌다. 그리고 2016년을 격랑으로 몰아넣은 최순실 사태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박정희는 이 모 든 사태의 기원에 속하는 자리에 놓인 인물이다. 그는 일종의 ‘아론의 금송아지’(출32:1-6)를 연상시킨다. 생 존과 성장이 절실했던 시절 박정희는 우리의 욕망의 화신으로 세상에 튀어나온 셈이다. 이 아론의 금송아지 는 백성의 금귀고리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는 점도 기억하고 싶다.

19) 중앙일보, 2011년 9월 11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9289961) 20) 강만길, 앞의 책, 316-319.

경북 구미시에 세워진 박정희 동상

소리 지음


34+ 35

길따라 꿈따라

남은 것, 소망 하나

이왕수◆ 제주대05 현재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업 기획부에 서 근무하고 있다. 공동체, 선교, 그리고 가 치 있는 조직을 만들어 보는 것이 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나라의 논리가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실력보 다 열정이 앞서는 청년. 박민아◆ 제주대08 현재 EBS 한국교육방송공사 작가. 복음을 이야기하는 작가가 되는 것, 선하고 아름 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꿈이며 목표이다.

여기 먹고 사느라 분주히 한 해를 보내고 있는 학사 둘이 있다. 각각 상경 1년 차, 3년차인 우리는 같은 학교 IVF를 섬겼던 선후배. 캠퍼스에서 나눴던 이 야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그때의 불씨를 피우려고 부단히 부채질을 하는 우 리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이어서)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는 일상. 이제는 우리가 이 길을 싸우며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가고 있다. 세상에 나가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겠다며 눈 물로 다짐했던 시절은 한때의 추억이고, 지금은 아무리 세상이 시끄러워 도 내 속 시끄러운 오늘을 잘 넘기는 게 더 중요해졌다. 이 시점, 우리 둘 사이의 대화 역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 이 남아있는 걸까?


좌충우돌 하지만 꿋꿋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박양: 우리 둘 다 파란만장한 상경의 여정을 보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어떤 갈증을 느껴.

네. 요즘은 어떻게 지내?

박양: 예전 같으면 이직을 고민했을 텐데. 하하. 그 이군: 글쎄, 어릴 때 내가 상상하던 삶은 아니야. 어

래도 요즘은 좀 다른 것 같다?

디든 마음껏 날아다니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군: 막연하게 이직만 고민할 때랑은 좀 다르지. 박양: 새도 아니고 말야. 사람으로 태어나서?

갈증이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신념이나 가 치가 부딪히는 걸 몸으로 느낄 때마다 주변에 함

이군: 그러게 말이다. 어쩌면 새가 낫지. 선배 직장

께 부딪히고 있는 사람들을 찾게 되는 것 같아. 성

인들이 늘 비효율 속에 산다더니 정말 그래. 화도

경적 가치의 경제관을 공부하는 모임에도 들어갔

나고, 답답하지만 딱히 대안도 없고. 그렇게 버티

고, 한국의 주택문제를 놓고 대안을 찾아가는 강의

다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0년 지나고, 40년 지

도 듣고 있어. 너는 요즘 어떤 부분이 제일 힘들어?

나고 그런 거 아니겠어? 넌 어때? 그래도 프리랜서 에 창작직이니까 좀 다르지 않나?

박양: 나는 요즘 인문학 관련 프로그램을 맡고 있 어. 지식 짧은 내가 소화하기에 벅차기도 했지만

박양: 다르긴 뭐가 달라. 똑같이 답답해.

제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포스트모던 시대에 서 말하는 신의 존재였어. 시대를 꽉 잡고 있는 대

이군: 아... 1년 간 [소리]에 연재한다고 나름 이것저

세와도 같은 무신론과 마치 중세시대에 머물러 있

것 고민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편까지 왔는데

는 것 같은 나의 믿음이 꽝 하고 부딪히는 느낌?

도 우리 현실은 달라진 게 없구나. 요즘 나라가 시

매력적인 인본주의 앞에 고리타분한 신본주의자

끄러워서 그런지 일하면서도 이게 대체 무슨 의미

가 된 내 모습이 조금은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했

인가 싶고, 쉽게 무기력해지는 것 같아.

고. 내 믿음이 휘청 하고 흔들리는 순간을 경험한 것 같아.

박양: 그래 맞아. 나의 일상은 그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더라. 오늘도 나 하

이군: 그렇구나. 그래서 세상 앞에 선 그리스도인

나 먹고 살려고 내 온 에너지를 쓴다는 게 죄스럽

은 정말 무모한 존재인가 봐. 과학기술 시대에 인

기도 하고. 요즘 선배 인생의 화두는 뭐야?

문학 공부가 엄청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역시도 분별이 필요하겠네. 그래서 요즘 어떻

이군: 더 새롭고 재밌는 건 없을까 라는 고민은 계

게 지내고 있어?

속되는 거 같아.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에 익숙 해지고 현실을 생각하다 보니 이젠 뭔가를 새롭게

박양: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겠고, 지식과 정보는

도전한다는 것에 많이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 회

넘쳐나고. 알아야 할 것은 많지만, 무작정 그냥 많

사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일에 몰두하지만, 집으로

이 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싶었어. 우선은 도움

소리 지음


36+ 37

길따라 꿈따라

받을 수 있는 문을 두드리고 있지. 크리스천

을 가지고 있다는 게 참 감사하네. 결국 그 소

학자들의 강연도 듣고, 책도 보고. 하지만 머

망이 이 힘 빠지는 세상에서 숨 쉴 구멍이 되

리로만 아는 지식이 참 한계가 있나봐.

어 주는 것 같아. 아, [소리] 때문에 이런 대화 를 나누고, 글을 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인

이군: 와. 진짜 한 해 한 해 갈수록 너무 어렵

데 소감이 어때?

다. 사는 거 뭐 없다 말하면서 속 편히 살고 싶은데. 아니 어쩌면 그렇게밖에 살 길이 없

이군: 이야. 진짜 1년이 갔네. 난 내 생각을 이

는지도 몰라.

렇게 나누고, 말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정리 해서 글을 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박양: 그래서 요즘 그렇게 살고 있어? 우리

몰랐어. 사실 [소리]를 볼 때마다 정말 쑥스럽

가 대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다른 게

더라. 하지만 [소리]를 통해 내 이야기에 궁

뭘까?

금증을 가진 학사들과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도 됐고, 다 담지 못한 내 이야기들

이군: 쓸데없이 발버둥 치며 산다는 거 아닐

을 가지고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까? 하하. 바라기는, 예수님 앞에 서는 그 날 까지 난 발버둥 치며 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

박양: 난 1년간 [소리] 덕분에 자라가는 우리

어. 이 지루한 싸움 앞에 날 서게 하신 이유를

를 볼 수 있어서 좋았어. 아직 미숙한 대화고

반드시 찾아야지.

어설픈 글이지만 학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 구가 되었던 것도. 그렇지?

박양: 오. 발버둥 친다는 건? 이군: 응. 여전히 다음 걸음을 고민하고, 정리 이군: 기도할 곳이 있다는 거지. 좀 흐릿하긴

되지 않은 내 꿈과 비전을 앞에 놓고 갈팡질

해도 나와 세상에게 창조된 목적이 있다는 사

팡하는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다

실 만큼은 아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안

는 것도 참 감사해.

그래? 힘들고, 짜증나고, 아니 그보다 정말 무 의미한 것만큼 사람 힘 빠지게 하는 게 없는

박양: 앞으로 좀 더 많이 하자. 그리고 더 많

데.... 그 순간마다 난 내게 의미를 주시는 분

은 학사들과 나눠야겠어. 직장생활뿐 아니라

께 갈 수 있잖아. 그리고 또 다른 의미를 찾고.

결혼, 육아, 가정, 교회... 다양한 분야에서 함 께 고민할 지점을 찾고, 막막한 문제 속에서

박양: 결국 우리에게 남은 건, 소망 하나구나.

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소망을 함께 찾아야지.

그래서 베드로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 한 이유에 대해 준비하라고 했나 보다. 그러

이군: 그래! 우리 모이자. 맨날 누구 결혼식

고 보니 아직 내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

때만 만나지 말고!


함께, 이어 달리기

이방인을 환대하고 대신 목소리를 내다 소리 지음

이일 ◆ 서울대00 법학을 전공한 서울대 빛지부 00학번. 사 법연수원 39기로 수료 후 해군법무관을 거 쳐 ‘공익법센터 어필’ 상근변호사로 일하면 서 아내, 두 딸과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신앙의 관점에서 법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법은 악이 창궐한 세 상에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요 도구 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활용되느냐에 따라서 압제하는 사람들의 기 준과 도구도 될 수 있어서, 어떻게 활용하고 감시하는가가 중요한 규범 이죠. 저는 바로 그와 같은 관점에서 법의 올바른 역할을 고민하며 공익 법센터 어필이란 공익변호사단체에서 이방인들 곁에 서는 변호사로 일 하고 있습니다.

2011년에 시작된 공익법센터 어필은 5년째를 맞이하였고, 지금은 미국 변호사 1분을 포함하여 5명의 변호사와 연구원, 인턴들, 그리고 500명에 이르는 후원회원들이 함께 운영하는 비영리단체입니다. 어필(APIL)은 ‘Advocates for Public Interest Law’의 앞 글자를 딴 것인데요, 변호사를 뜻하는 여러 영어 단어 중 Advocate의 원뜻인 ‘대신 목소리를 내다’에서 착안하여, ‘목소리가 없는 취약한 이방인들을 위해 법을 이용해 대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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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이어 달리기

하는 단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어원이 바로 Advocate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 곁에 대신 목소리를 내주어야 할 많은 사람이 있지만, 어필은 그중에서도 가장 취약하며 아무 런 권리기반이 없는 난민, 구금된 이주민, 인신매매 피해자, 무국적자, 해외진출 한국기업에 의한 인권침해 피해자와 같은 다섯 분야의 취약한 이방인들을 여러 시민단체들과 함께 돕고 있습니다. 인접분야인 이주민옹호와 달리, 저희들이 옹호하는 분야는 수도 적고 더욱 다급하거나 취약한 분 들이 많습니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고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으나 이곳에서도 환영받지 못 하는 난민들, 부당한 법제도 속에 억울하게 구금당하는 이주민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매매와 착취를 당하는 인신매매 피해자들, 낮은 기준과 자본의 논리 속에 착취당하는 해외의 근로자들. 우 리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한국사회 속에 그들이 있습니다.

저는 법을 배워오면서 어떻게 일하는 것이 옳을까 고민하던 중, 군법무관 시절을 거치면서 판사는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너무 작고 수동적인 직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검사는 중요한 역할이지만 제 천성에는 아무래도 맞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변호사가 되어 대형 로펌에 들어가서 비즈니 스 법률가로 살아가는 게 어떤 사람에겐 맞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즐거운 길이 아니었어요. 열정을 다해 일할 수 있는 기간이 인생에서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점차 알게 되는데, 기왕이면 즐겁게 일할 수 있고 보람찬 일을 여가활동이 아닌 직업적 소명과 일치시키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익변호사 단체들을 탐색하다가 어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일한 지 3년이 넘어가는데요. 믿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정말 즐겁고 보람차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어려운 시간도 많습니다. 제한된 영역에서 일하다 보니, 누군가를 지금 당장 적실 하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지구상에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어깨가 무거워질 때도 있습니다. 또 많은 고통과 짐을 지고 있는 분들을 대하다 보면 저 역시 몸은 물론이고 정서나 영혼이 소진되고 상하는 순간도 많습니다.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제도의 벽이나, 자신보다 취약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고 잔인한 얼굴을 무의식중에 드러내는 대중을 맞닥뜨리게 될 때, 답 없이 막막한 경 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을 매순간 느끼기 때문에 보람이 있습니다. 벌써 1년 전의 일입니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되고, 소위 유럽발 난민 위기에 대한 보도들이 맥락 없이 한국에 쏟아 졌습니다. 한국정부는 전쟁의 위기에서 탈출한 시리아 국적 난민들에게도 국경을 걸어 잠그고 공 항에 그들을 가두었습니다. 한국으로 가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친척들을 찾아 피신해온 그들, 미 처 변화된 정책을 듣지 못하고 계속 도착한 28명의 난민들은 공항의 송환대기실이란 방에 자그마 치 8개월 동안이나 갇혀 있었습니다. CNN과 같은 외신을 포함한 여러 언론에서 주목해서 보도했 습니다. 이들의 필요를 돕고, 극적으로 승리하고 입국하여 마침내 그들이 한국 땅을 밟기까지 얼마


시민단체에서 활동가로 살아가는 학사들의 일상

나 울부짖고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저희는 국가의 잘못을 대신하여 용서를 빌고 그들을 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습니다.

또한 저희가 혼자가 아니고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사례 는 물론, 보호소에서 오랫동안 구금된 난민들, 어머니와 함께 갇힌 아이들과 같은 여러 가 슴 아픈 사건들 앞에 서면, 이들의 어려운 사정을 접한 많은 시민과 단체들이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느냐고 물어오십니다. 저희와 함께 분개하고 고통을 나눠주시는 분들이 계십 니다. 한국사회에서 사는 게 결코 녹록치 않지만, 그래도 타자를 보듬고 껴안는 사람들이 사 회에, 교회에 여전히 계십니다. 다양성을 포용하지 못하고 취약성을 경멸하는 한국사회에 서, 저희의 활동은 이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것뿐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 배우며 한국사회 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방인들은 핍박 받 는 예수의 얼굴로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그들을 환대하면서 그들 역시 동등하게 지음 받은 존엄한 인간이란 사실을 실제로 확인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로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고 그 곁에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인 법의 또 하나의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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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 학사 통신원

스위스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선일석◆ 감신대01 스위스인 아내 Ruth, 첫째딸 유나, 둘째딸 단아, 막내아들 지미와 함께 살고 있다. 아 내와 함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고, 몇 년째 테니스에 푹 빠져 살고 있다.

“Ich ha s z’erst gha!(내가 먼저 갖고 있었어!)” “Ich ha s no z’erst gha!(아니야, 내가 더 먼저 갖고 있었어!)”

아침부터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 우는 소리로 집안이 가득하다. 언제 상 상이나 했으랴. 내 아이들이 저렇게 한국어가 아닌 스위스 독일어로 싸우 는 모습을 보게 될지. 더군다나 그 옆에서 셋째아이 분유를 먹이는 아내 의 눈동자 색깔이 파란색일 줄이야! 이렇게 외국인들(?) 틈에 섞여 지내 는 내 모습이 가끔 낯설 때가 있다.

신학대학원에서 멀쩡히 공부하다가 남들이 걷는 똑같은 길을 걷지 않겠 노라고 이스라엘로 떠난 지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다. 그곳에서 스위스 사 람인 아내를 만났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한국에서 취미로 하던 사진을 직업으로 삼아서 스위스에 정착해 살고 있다.

스위스에서 만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현지 친구가 많지 않아서 이곳에 적응하는 데 아주 힘들고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감사하 게도 나는 아내의 가족과 현지 교회의 스위스 친구들이 그 시간을 채워 주었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타국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여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가는 학사들의 일상

전히 언어로 인한 스트레스와 문화 차이로 인해

을 꼭 보장해준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이가 자기

실수투성이인 삶이지만, 사랑스런 아내와 두 딸

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길 원하는 마음이 있기

그리고 막내아들의 존재는 내 삶에 큰 힘이 된다.

때문이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한국인을 부모로 둔 아이들의 대다수가 대학에 진학하는 상황을

알프스 산맥과 늘 푸른 들판과 많은 호수, 광활한

보면, 학구열이 높은 것이 한국 사람의 자녀들인

자연과 넉넉한 경제력 그리고 수준 높은 시민의

지 그 부모인지 헷갈리곤 한다.

식은 이곳의 삶을 더 풍요롭고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 다양한 연령 간에도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

독일어로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해질 무렵부터

고, 교육 수준의 정도와 상관없이 서로 존중하며

소그룹을 시작했다. 제빵사, 건설인부, 관광버스

더불어 잘 살고 있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준다.

기사, 회계사 등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구성원들 이었다. 먼저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갖

스위스에서는 약 2, 30%의 아이들만 대학에 진

고, 이후 성경공부 및 삶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학을 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아이들은 중등 교육부터 배움과 일을 병행하며 사회인으로 성

제빵사인 친구는 태어날 때 병을 앓은 후 학습에

장한다. 페인트공이나 미장공처럼, 한국에서는

장애가 있어 특수반 위주로 교육을 받았고 말도

별도의 교육과정 없이 현장에서 배우는 직업도

조금 어눌한 편이다. 건설 인부인 친구도 학업에

학교에서 관련 교육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에 놀

그리 성실하지 않았고 야외에서 일하는 것을 더

랐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대학진학 유무가 결

선호해서 지금의 일을 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

정되는 환경에 대해서는 여전히 찬반논쟁이 있

를 들을 수 있었다.

지만, 차후에 진로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있기 때문에 큰 문제로 삼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가지고 제각기 다양한 의견 들을 나누면서 나는 사실 조금 당황했다. 서로 의

직업에 귀천이 없는 편이고, 무슨 일을 하든지

견을 나누는 수준이리라 예상했는데 웬걸, 생각

기본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환경이라서 사무직이

했던 것 이상으로 조리 있고 깊이도 있었기 때문

든 노동직이든 자신이 선호하는 직업에 종사하

이다. 주어진 교육과정을 잘 소화할 수학능력이

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직업에 대한 만족도도 높

부족한 것으로 나는 이 사람들의 소통할 수 있는

은 편이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선

자질을 과소평가했다. 정작 고등 교육과정을 거

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지는

치고 더군다나 신학을 공부한 나는 대화에 소극

훈련 또는 교육이 결국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족

적이었다. 이런 상황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들이

도를 더 높여주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고, 창의적으 로 사고하는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인지 궁금했다.

많은 스위스 부모들은 한국과 비교해 상당히 낮 은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 대학진학이 삶의 질

제빵사 친구는 후에 교회에서 예배 인도자 중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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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으로 세워졌다. 예배 인도자는 예배의 진행을 돕고, 설교를 도울 수 있는 예화나 자신의 경험 을 말해야 하는 직책으로서 창의력과 자신감을 필요로 한다. 이 친구는 주위의 걱정스런 시선들 을 무시라도 하듯 그 역할을 상당히 잘해내었다.

우리 큰아이는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데,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만들기, 운동, 놀 기 등으로 채워져 있다. 글과 수학 같은 것은 학교에 들어가서 차차 배워간다. 아직 본격적인 학부모로서의 삶을 시작한 것도 아니지만, 한국에서 30년 가까 이 경험하고 한국적 사고를 가진 내가 부모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지 계속 고 민이 된다. 아이의 입장에서 최대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선택에 대 한 책임을 아이에게 맡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아내를 통해서 아이 를 존중하는 법도 배우고, 스위스 사회에서의 일반적인 사례들을 들을 수 있어 서 큰 도움이 된다.

스위스 부모들은 대개 퇴근 후 일찍 귀가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다. 휴가는 한 해 5주 정도인데, 그것도 가족끼리 여행하며 보내는 경우가 많 다. 또한 매주 수요일 오후에는 모든 학교가 수업이 없기 때문에 이 시간에는 개 인적으로 취미활동을 많이 한다. 이처럼 한 아이가 성숙한 인격체로 자라가는 데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가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거시적인 내 삶의 모습은 이러하지만, 정작 일상생활 속에서의 나는 아이들이 자주 다퉈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서 스스로 화를 주체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고뇌하기도 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처럼 내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내 아이들을 통해 성취하려는 마음도 있어서 이것을 눌러가 며 나 자신과도 싸우고 있다. 이처럼 기본적인 부모의 소양을 갖는 것도 벅차서 결국 하나님 없이는 제대로 된 양육을 할 수 없다고 늘 고백하며 산다.


이렇게 아빠가 되었다

나는 이렇게 아빠로 자라간다 문신실 ◆ 전주교대05

소리 지음

만나는 아이들의 삶이 행복한 기운으로 가 득하고, 아름답게 성장하길 소망하는 7년 차 초등 교사. 사모하던 캠퍼스 시절 리더 누나와 결혼하여 알콩달콩 일상이 즐겁다. 그리고 아이와 자전거를 타거나 캐치볼하 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 꿈이다.

아내가 은찬이를 재우러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엄마를 알아보기 시작 한 은찬이는 밤이 되면 꼭 아내를 찾는다.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아내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은찬이를 재우다 아내도 잠이 들었나 보다. 이 글을 쓰느라 컴퓨터 앞에 앉은 5개월차 왕초보 아빠는 곰곰이 생각한 다. 이제 나에게 일상이 된, 아... 육아란 진정 무엇인가?

육아는 반복되는 일상이다. 은찬이가 태어나고 전쟁과도 같던 50일이 지나자 은찬이와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졌다. 아이의 패턴도 자리 잡았고 이제는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다. 아내가 수 유를 하고 나면 나는 트림을 시켜 준다. 어깨 위에 올려 자장자장 하면 어느새 은찬이는 잠이 든다. 깨면 놀다가, 배가 고프다고 울면 다시 수유 를 한다. 그렇게 3, 4시간 간격으로 4번 정도 반복하면 긴 하루가 지나간 다. 저녁에는 고운 피부를 위해 목욕재계를 한다. 목욕을 마치면 꼼꼼히 로션을 발라주고 옷을 입힌다. 그리고 아내가 은찬이를 재우러 방으로 들어간다. 그때 우리는 파이팅을 외친다. “기필코 한 번에 재우리라!” 나 는 아내를 응원하며, “이제 퇴근해야지!”하며 소파에 눕는다. 하지만 겨 우 5분 정도 좋아할 뿐, “정신 차려, 신실아!”하며 집안일을 시작한다.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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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빠가 되었다

소기를 밀고, 걸레로 닦고, 빨래를 널고 개고, 설거지도 하고, 마무리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밖 으로 나간다. 깊은 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며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군대 생각이 났다. 힘든 야간근무를 서다가 바라보았던 그 밤하늘, 내일도 근무를 서야 하는 착잡함이 비슷해서일까, 이상하게도 그때의 밤하늘이 떠올랐다.

육아는 기쁨의 일상이다. 육아가 마냥 힘들고 지루한 것만은 아니다. 은찬이가 성장하면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 또한 커지고 있다. 희미했던 이목구비가 점점 뚜렷해지고, 내 갈매기 눈썹을 닮은 아 들이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방긋 웃어주면, 똥기저귀를 갈다가도 내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오 르고 은찬이의 응가가 향기롭기까지 하다. 어느 날, 가만히 누워만 있던 은찬이가 뒤집기를 하려 고 옆으로 돌아 팔에 힘만 주면 되는 상황이었다. 우리 부부는 옆에서 “문은찬, 힘내라! 은찬아, 할 수 있어!” 하며 신나게 응원했다. 우리의 응원에 힘을 얻었는지 은찬이가 마침내 뒤집기에 성공했 을 때, 아내와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정말 좋아했다. 이제 은찬이는 뒤집기를 자유자재로 하고, 비 행기 자세로 몸을 360도 돌려 원하는 물건을 잡으려고 한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할 줄 아는 게 하 나씩 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누리는 가장 큰 기쁨은 교감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서로의 눈을 바 라보고, 재밌는 소리를 내면 까르르 웃어주고, 같이 성경동화책도 읽는다. (물론 은찬이는 무슨 말 인지 모르겠지만.) 아들과 아빠 사이에 부자간의 정이랄까, 뜨거운 혈연관계랄까, 그런 감정이 생 겨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육아가 시작되면서 그 흔한 카페나 영화관에 가본 적이 언제인가. 그렇게 우리 둘만의 즐거움이 끝 난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 셋이 함께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 하루는 은찬이를 유모차에 태 우고 산책했는데,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라는 듯이 은찬이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우리는 은찬이가 깰까, 살금살금 걸으며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었다. 고즈넉한 저녁, 세 식구가 같이 걷는 이 길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게 이게 아닐까 싶었다.

육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는 일상이다. 아기를 키우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 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있다. 작고 연약한 아기를 돌보기 위 해서는 자세를 낮추어야 하고 아기와 같이 작아져야 한다. 내가 편하고 쉬운 길을 내려놓고, 아기의 필요에 무릎으로 헌신해야 한다. 은찬이에게는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은 찬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사실 편리하고 좋은 것만 누 릴 때는 몰랐던 우리의 죄성을 발견한다. 그런 모습에 직면하고 기도하면서 서로를 더욱 이해해가 는 중이다. 그동안 아내에게서 보지 못했던 다른 모습(?)을 보게 되고, 나도 그런 모습을 아내에게


평범한 내가 너를 만나고 아빠가 되기까지

보여주게 된다. 아이를 키우며 이런 저런 작고 사소한 일에서 아내와 부딪친다. (예를 들어 ‘가 제수건을 어떻게 갤 것인가’ 같은 것부터...^^) 이러면서 아내도 나도 인격을 다듬어가고 있다.

가만있어 보자. 또 육아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려는 순간, 잠에 취한 아내가 비틀거리며 방에서 나온다. 수고한 아내를 안아주며 고생했다고 말하고 그사이 내가 해놓은 집안일을 자랑스럽게 내보인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선물 같은 기쁨을 누리며, 연약한 자를 돌보시고 있는 모습 그대 로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며 나는 이렇게 아빠로 자라간다.

다음날, 수업을 마쳤으니 곧 퇴근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런데 집에 가까이 갈수록 보 고 싶은 이들을 볼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함도 밀려온다. 뭐지, 이 답답 한 기분은 대체 무엇일까? 나는 무려 [소리]에 육아일기를 쓰는 국민아빠인데...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퇴근인데 집에 다시 출근하는 것 같은 기분은 왜일까. 에필로그) 안녕하세요. 이런 갈팡질팡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은찬이 아빠 문신실입니다. 1년 동안 [소 리]에 미천하나마 글을 쓸 수 있어 정말 영광이었고 감사했습니다. 6번 연재하는 동안 콩알 만했던 충만이가 5개월의 은찬이로 자랐네요. [소리]에 은찬이의 성장기가 실리게 된 것은 은찬이와 저희 가족에게 커다란 선물이 되었어요. 2016년 [소리]는 가보로 대대손손 간직하려고요. 20년 후 은찬 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 이 글들을 보여주며, “이미 넌 20년 전에 IVFer가 되었다.”라고 알려줘야겠어 요. 앞으로 은찬이가 어떻게 성장할지 무척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엄마아빠, 혹은 곧 엄마아빠가 되실 모든 학사님들에게 존경과 응원의 인사를 보내며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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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유금리에서의 느릿느릿 또렷한 하루

지은실 ◆ 동덕여대02 포토샵, 일러스트와 몇 년째 ‘밀당’하는 프리랜

유금리 라이프

서 디자이너. 2년전 성산동 생활을 마치고 자연 과 조금 더 가까운 유금리로 왔다. 빵 굽고 커피 볶는 남편과 밥해먹고 동네 언니, 동생들과 수다 떨고 볕 쬐며 (별 일 없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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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만난 사람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김병선 ◆ 강원대71 진행 이시종 / 정리 편집부

IVF 60주년을 맞아 IVF가 지금의 전국적인 운동으로 성장하는 데 초석을 놓은 김병선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IVF가 서울지역 모임을 벗 어나 지역에 기반을 둔 사역으로 확장했던 첫 번째 사례가 강원(춘천)지방 회입니다. 김병선 선교사님은 이 강원(춘천)지방회 출신 제1호 간사였습 니다. 그리고 IVF의 열매 중 하나인 해외선교 영역에서도 33년간 선도적 인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선교사님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초심과 순수했 던 시절의 열망을 상기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해외 에 체류 중인 선교사님과 서면으로 진행했습니다.

* 선교사님, 반갑습니다. 우선 선교사님과 가족 분들의 근황을 듣고 싶 습니다.

저와 아내 홍은희 선교사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남단에 있는 Bandar Lampung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미전도 종족 가운데 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은 사역을 하고 있어요. 외동딸 리나는 결혼하여 5살 된 손녀와 함께 서울에 살고 있고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1970년 IVF 전국 학생수련회

와 남궁영, 이영숙, 이혜숙, 이현숙, 지명희, 차재실, 황현덕 자매 등 열심 있는 인물들이 가세하여 규모와 열정이 더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중에서 많은 목사와 선교사가 배출되었죠. IVF회관을 만들기 위한 모금을 하느라 성탄카드를 만들어서 춘천 명동거리 에 나가 팔았던 기억도 납니다. 당시 모임에서는 성경 을 한 장씩 연구하여 집중 토론했습니다. * 강원(춘천)지방회가 시작되던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IVF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그

* 공동체를 개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임 규모가

리고 개척 당시 어떤 분들과 함께하셨고 어떻게 개척

서울지역 이상으로 커졌다고 들었습니다. 빠르게 모

을 시작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임이 활성화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요?

1971년 봄, 강원대학교 경영학과 1학년이었을 때, 같은 과 친구의 소개로 춘천제일장로교회 교육관에서 토

열심히 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춘천IVF 모임 규모가

요일 오후에 모이는 작은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어

서울보다 커졌다는 것은 과장인 것 같습니다. 성경공

요. 그게 춘천지역 IVF모임이었습니다. 춘천IVF는 권

부 모임에 열심이었던 것과 섬기는 교회에서 성실히

일헌 선배님(현재 터키 주재 선교사)이 두 해 전쯤에

봉사하여 주위에 좋은 평이 있었던 것이 좋은 열매

시작하였는데 매주 15명가량 모였고, 봄, 가을에는 춘

를 맺은 것 같습니다. 공휴일에 IVF 학생들이 IVF수

천 근교에서 1박 2일 수련회로 모였습니다. 겨울과 여

련회에 참석하고 지역교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 교

름에는 주로 서울지역 학생들과 함께 전국수련회에

회의 프로그램이 어려워졌다는 비판을 받은 일은 있

참석했습니다. 수련회 때는 서울에서 김영철 총무님

었지만, 그것도 평소에 IVF학생들이 얼마나 각자 지

이 오셔서 인도해 주셨고, 평소에는 학생들이 돌아가

역교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는가를 보여

며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주는 현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강원대학 과 춘천간호대학, 춘천교육대학이 중심이었지만, 친

제가 처음 참여했던 때에 함께했던 사람으로는 김창

구들이 다니는 대학들에 연결되면서 삼척공전, 원주

영, 남궁석, 남궁경호, 심형규, 박민환, 정주벽 형제와

상지대 등에서도 자연스럽게 성경공부 모임이 시작

김문자, 박영순, 박순호, 김순예 자매가 기억납니다.

되었습니다.

그 다음 해부터 유기남, 김진현, 최승만 형제와 홍은 희, 최춘남, 윤명순, 한영숙 자매가, 그 후에는 김운석,

* 어려운 시기에 간사로 헌신하셨습니다. 송인규 교

남진선, 한철호, 김종호, 김종찬, 정영식, 박용진, 최양

수님과도 동역하시며 서울지역의 여러 학교도 담당

순, 홍남희, 이병철, 윤병식, 전상일, 임점길, 이흥섭,

하셨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의 이야기가 궁금

이예원, 이배원, 박상배, 이용세, 허민구, 엄기홍 형제

합니다.

소리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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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만난 사람

를 종종 사용하는데, 학생들은 알아듣는 것 같은 데 저는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 유로 송 간사를 싫어하고 송 간사 의견에는 반대부 터 하는 삐뚤어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춘천 소양댐 아래 어디선가 겨울수련회를 할 때입니다. 제가 다 음 날 설교를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수련회에 참석한 학생들은 정말 순진한데 그들 1976년 2월 졸업식. 앞줄 왼쪽부터 당시의 김병선 간사, 김영철 총무, 송인규 간사, 뒷줄은 76년 졸업생.

에게 설교를 할 제 마음은 너무 불순하다고 느꼈습 니다. 그 핵심 이유는 송 간사를 시기하여 미워했 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저는 송 간사가 자는 방

저는 1975년 3월 간사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렸고, 잠에서 깬 송 간사에게 용서를 구

당시에는 김영철 총무님, 송인규, 정옥숙 간사님,

하였습니다. 비교의식에서 나온 열등감 때문에 송

그리고 저, 이렇게 네 명이 간사였어요. 정옥숙 간

간사를 미워했다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사는 필리핀IVF에서 사역했음으로 한국에는 총무

놀랍게도 그날 밤 송 간사도 저에게 용서를 구했

님과 송 간사, 제가 한국 IVF 전체 간사였습니다.

는데, 본인이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성경에

IVF가 “학생이 인도하는 운동(Students led Move-

대한 지식이 얕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성경을

ment)”이라는 특성이 있어서 학생들에게는 성장

잘 아는 것 같은 저를 싫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의 기회가 더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재정적으

그날 밤 송 간사와 저는 부둥켜안고 주님 앞에서

로는 아주 열악해서, 제가 4년간 간사로 사역을 했

울며 회개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송 간사가 영어

지만 단 한번 사례를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도 보

를 잘하는 것이 (그는 사탄과의 싸움에서 우리 편

람이 있어서 간사로 살았던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이니까)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시내버스를 탈 돈이 없어서 걸어서 캠퍼스를 갔던

송 간사를 매사에 인정하고 좋아하게 되었죠. 그

기억, 두 끼 쯤은 거뜬히 굶었던 배고픔의 경험도

후 하나님은 송 간사의 영어 실력과 학자적인 자

간사 시절에 주셨던 은혜로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

질을 사용하셔서 한국IVF가 여러 면으로 도약하

습니다. 그때 "IVF모임이 나를 강사로 초청하면 선

게 만드셨습니다.

약이 없는 한 거절하지 않는다, 그리고 IVF에서는 강사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라고 결정하고 지금

* 1984년에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신 것으로 알고

까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있는데, 그때는 해외선교운동의 초창기였습니다. 어떤 계기로 선교사로 헌신하셨고 이후 인도네시

간사가 둘뿐인 한국 IVF에서 송인규 간사와의 관

아로 가시게 된 과정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계에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송인 규 간사와 비교하여 저는 영어를 못한다는 열등

1977년 여름, 국제선교협력기구(Korea Interna-

감이 있었습니다. 송 강사는 강의와 설교에 영어

tional Mission)가 수원에 있는 ‘말씀의 집’이라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곳에서 하기선교대학원(SIWM; Summer Insti-

이 신부님과 황지에 있는 문곡 성공회에서 신년

tute of the World Mission)을 개설했습니다. 저는

예배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한 후 담소를 나누는

거기서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습니다. 당시 세계

중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하나님이 제게 방언의

인구의 1/6 가량이 무슬림이고, 그들을 위하여 복

은사를 주셨는데, 제가 의지적으로 그것을 억제

음을 전하는 기독교 사역자 수는 50명 이상 100

하기 때문에 방언을 못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명 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억의 무슬림들이

이상한 말이 나오더라도 억제하지 말고 말하라

복음을 들어볼 기회도 없이 죽어간다는 정보에

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방언을 해보라고 하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두 주간의 프로그램 중 첫

셨고, 저는 얼떨결에 어떤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주말인 토요일 밤, 저는 침대에서 이슬람지역에

토레이 신부님이 곧 기도하시기를 “하나님, 이것

어떻게 하면 선교사를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고

이 주님이 주신 방언이라면 통역을 주십시오.”하

있었습니다. 그 지역의 나환자촌에 대하여 들은

시고는, “사랑하는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기억이 나서 나환자촌에 의사가 봉사하러 간다

내가 너를 나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보내겠

고 하면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다.”라고 통역하셨습니다. 저는 그 경험으로 제가

가 간사로 지도하는 IVF학생들 중 의과대 학생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하

을 권면해 그리로 보내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때

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인받

갑자기 성령님이 제게 “다른 사람을 보내려 하지

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선교사역이 하나님의 뜻

말고 네가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라는 것을, 그 이상한 경험에 기초하기보다는

그날 밤, 저는 의대생도 아니고 실력이나 나이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더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3

보아 의대를 갈 입장이 아니라고, 침대에서 손을

년 4개월의 단기 군목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바

저으며 씨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울의 집에서 1년 6개월간의 선교훈련을 받은 후, 1984년 2월 무슬림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인

그 다음 날 아침, 예정했던 것과는 달리 SIWM에

인도네시아로 떠났습니다.

참석했던 외국인들을 후암교회로 인도해야 할 상황이 생겨서 후암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 인도네시아라는 거대한 나라의 어느 지역에서

되었습니다. 예배 중에 Moody Institute에서 오신

사역하셨는지요? 주로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Dr. Whale 교수님이 설교 중에 “당신들 중에 하나

선교하셨는지,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 궁금합니

님이 지난 밤 이슬람지역의 선교사로 부르신 사

다.

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일어나세요.”라고 하였습 니다. 아무도 안 일어났고, 그분은 거듭해서 일어

영국의 WEC선교회에서 세계선교의 정보를 종

나라고 했습니다. 결국 저는 제가 바로 그 사람이

합해서 2010년 발간한 《Operation World》(세계

라고 생각하여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선교기도정보-죠이선교회 번역, 출간) 7판 454쪽 에 의하면, “Sumatra is the largest unevangelized

다음 해인 1998년 1월 1일, 예수원 원장이신 토레

island on earth. (수마트라는 세계에서 복음화되

소리 이음


52+ 53

소리가 만난 사람

지 않은 가장 큰 섬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수 마트라가 만일 국가라면 수마트라보다 미전도 종 족이 많은 국가는 9개뿐일 정도이다. 그곳에는 무 너져야 할 영적 요새가 많다. 49개의 미전도 종족 가운데 적어도 29개 종족에 토착교회가 하나도 없 고, 8개에는 아직까지 복음 사역자로 알려진 사람

홍은희 선교사(강원대72)와 김병선 선교사(강원대71) 부부

이 전혀 없다.”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죠

32개 모든 종족에 사역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이와

이선교회 번역 책자 제3권 40쪽) 패트릭 존스턴은

더불어 단중에님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현지 목회

IVP에서 번역 발간한 《세계교회의 미래》의 214쪽

자 재충전을 위한 특별 집회도 인도하고 있습니다.

에서 “수마트라, 지상에서 가장 큰 미복음화된 섬” 이라는 제목으로 수마트라 섬을 소개하고 있습니

* 선교현장의 사역뿐 아니라 선교행정가로서도 큰

다.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2.2배나 되는, 세계에서

역할과 기여를 하셨네요. 그간 섬기셨던 선교단체

6번째로 큰 섬이지만 인구는 세 번째로 많은 섬입

와 거기서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소개해 주시면 좋

니다.

겠습니다. 선교행정가로서 지난 30여년의 한국선 교운동을 돌아보며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지도 듣

선교사역 초기에는 단중에님 신학교에서 양육하

고 싶습니다.

며 가르치는 일과 자바인 이주민 지역에 교회를 개 척하는 일, 그리고 팔렘방이라는 도시에 대학생 소

선교지에 주재하는 선교사로서 사역을 한 기간과

그룹을 양육하여 Perkantas(인도네시아IVF)를 시

본국과 선교본부에서 동원, 행정, 훈련 업무를 수

작하게 하는 사역을 하였고, 팔렘방에 새 교회를 개

행했던 기간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간 경험한 본

척하고, 수라바야라는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에서

부의 일은 KIM과 PWM 한국본부 총무로서 선교현

안디옥교회라는 인도네시아인 교회를 목회하기도

지를 지원하는 일과 후원자들을 관리하는 일을 했

하였습니다. 그후 철수하여 내수동교회를 담임하

고, KWMA연합선교훈련원 원장과 GPTC훈련원장

였고, 여러 선교본부 사역을 경험한 후 지난해 다시

으로 선교사들을 훈련하는 일, GP선교회 국제대표

인도네시아로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수마트라 섬

로서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을 돌보

의 남부에 있는 세 주(Bengkulu, Sumatra Selatan,

는 사역을 했죠. 또 코디아 대표로서 해외에 흩어진

Lampung)에 있는 인구가 2만 이상인 32개 종족을

한인 디아스포라들을 선교에 동원하는 일을 했습

전도하기 위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3개의

니다. 각종 선교 주제의 특강과 설교를 통해 선교

인도네시아 교단 총회와 협력하여 21개 종족 가운

동원사역을 지속적으로 해 왔습니다. 특별히 신구

데 사역자들을 파송하고 훈련하며, 생활비와 사역

약 성경을 통하여 주로 “성경이 말하는 세계선교”

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후원자가 더 생기는 대로

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가는 학사와의 인터뷰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이 수적으로는 증가되었지만

니다. 죄인인 사람이 성경의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

성경이 말씀하는 “미전도 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조연자로 여겨

사역”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모든 민족에 천국

집니다. 이런 신학에 더하여, 사람이 은혜로 구원받

복음이 증언되어야 세상 끝날이 올 것이라고 주님은

고 다시 죄를 지어도 구원에는 변함이 없다고 가르치

선교의 방향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 24:14). 모

는 ‘성도의 견인’ 교리는 죄를 철저히 끊고 거룩한 삶

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 하셨고(마 28:18-20), 만민에

을 살게 하는 노력을 느슨하게 만들었습니다. 행함이

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없는 명목상의 신자들을 많이 만들어서 교회가 영적

이르러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행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1:8).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피값으로 사신 사람들 은 세계 모든 종족 중에 있음을 말하고 있고(계 5:9),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

실제로 모든 종족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함께 주

주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중

권자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에는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하는 바벨

있습니다(계 7:9-10). 모든 종족이 복음을 들어야 주

탑 정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이런 정

님이 재림하시고 유형적으로 하나님나라가 도래하

신은 하나님의 이름(영광)이 아니라 목사나 교회의

게 될 텐데, 미전도 종족 선교에는 관심이 약한 것이

이름(영광)을 추구하고, 나누고 흩어지려고 하지 않

안타깝습니다. 주님의 선교의 대위임령을 문자 그대

고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로 순종하는 선교는 아주 소수의 선교사들만 하고 있

노력에 집착하게 합니다. 이런 정신이 한국교회를 쇠

는 것으로 보입니다. 타겟을 잃어버린 선교로 자원

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이 무너뜨

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선교운동이 바로 되

리셨습니다.

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두 단어를 강조한다면 선교대 상은 ‘미전도 종족’이고, 실행할 사역은 ‘전도’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안은 신학의 변화입 니다. 신학교와 교회에서 “구속신학”과 함께 “왕국신

* 한국교회의 쇠락과 함께 캠퍼스선교의 동력도 급락

학(Kingdom Theology)” 중심의 신학이 강조되어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인 선교운동의 열기 또

합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왕국신학

한 완전히 식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러한 흐름을

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재림

안타까워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으로 완성될 하나님나라의 완성이 중심적인 내용입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해야 할까요? 선교사님의 마음

니다. 구원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의 시작점

과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입니다. “구속신학”이 중심이 되는 가르침은 “왕자님 과 결혼했어요.”하는 식으로 끝나는 백설 공주나 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구원

데렐라 같은 동화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나

받는 것이 가르침의 중심인 “구속신학(Redemtive

라와 의를 구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의

Theology)"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도

도래를 강조하는 신학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들이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으로 만들었습

소리 이음


54+ 55

소리가 만난 사람

선교사역의 목적도 하나님께는 영광과 찬양과 예배를 드리게 하고, 사람들은 구원받고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 며, 악과 사탄은 제거되고,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 한국사회와 교회는 이제 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저성장 혹은 쇠락의 흐름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후배들에게 어떤 말씀을 나누고 싶으신지요. 세상에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로 알라고 했습니다(딤전 6:8). 세상에서도 있는 것을 누리기만 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그분의 뜻(목적)을 이루 는 것을 우리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그것을 이루는 목적이 있는 삶, 사명에 이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의 역사관을 따라 다시 오실 왕 예수님의 영광스런 귀임(歸任)을 준비해 드리는 삶을 살면, 그분과 함께 영원히 영광 중에 지내게 될 것입니다. 미전도 종족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는 날이 우리 세대에 오게 된다면, 우리는 주님이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모습을 보는 세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제 선교사로서도 후반부를 살고 계십니다. 어떻게 선교사로서의 삶을 마무리 하고 싶으십니까? 인생 후반 전의 기대감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까지 달려오신 인생을 돌아보며, 주님께 고백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땅 끝에서 주님을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 이 찬양을 부를 때, 가장 순수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모 습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그분을 예배하는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종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면 주님이 재림하실 것입니다(마 24:14). 그날이 되기 전에 부르시든지, 아니면 마지막 종족이 복음을 들어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그곳에서 맞이하게 되 든지, 저는 미전도 종족 가운데서 주님을 뵙기를 소망합니다. 병들고 쇠약해지는 육신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약 할수록 주님을 더 닮아가는 제 모습을 보며 평안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 력으로 충만한 그 나라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땅 끝에 있기를 기대합니다. 혹 어떤 모양이든 저에 게 주신 영광의 면류관이 있다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께(시 23:3) 그 면류관을 벗어 드 림이 마땅합니다. * IVF 운동의 목표였던 ‘전도(E), 제자도(D), 선교(M)’를 인생의 모토로 삼아 모험으로 살아가는 학사님의 역동 적인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이 모습 이어가시길 기대합니다.


12월 안테나

● 중앙사무국

● 서서울학사회

1. 11월 14일(월)에 실행위원회가 IVF중앙회관 학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사사역부 사무실에서 있었습니다. 2. 11월 26일(토)에 열릴 예정이었던 일삶축제

주부학사모임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30분 / 좋은땅 공숙영 010-2405-9928

“푸른 산돌”의 일정이 연기되었습니다. 12월 17일 (토), ‘홈스쿨링’의 사례발표를 듣고 네트워크를 만

● 동서울학사회

들어갈 “푸른 산돌”을 기대해주세요. 자세한 공지 는 다시 드리겠습니다.

1. IVF 학사회 팟캐스트 <아학팟> 일정입니다. 12월 3일 북잡담회 시즌2 12월 10일 요람에서 취업까지

● 6070학사회 2. 주부학사모임이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반부터 1. 12월 1일(목) 저녁 7시에 6070학사회 운영위원

오후 1시까지 동서울 선교센터에서 모입니다. 타

회가 열립니다.

지방 학사님도 오셔서 함께하고 있사오니 주부학 사님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2. 2017년 신년회 및 총회가 열립니다. 많은 분들 과 함께하는 시간이길 기대합니다. 일시: 2016년 1월 19일(목) 저녁 7시 장소: IVF중앙회관 지하 좋은땅(서교동)

주부학사모임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30분~오후 1시 동서울 선교센터 동서울IVF 070-8275-6325

● 수도권YGM 학사회

● 경인학사회

1. 수도권 YGM 모임이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30

경인지방회의 정기 학사모임이 매월 마지막주 목

분 IVF중앙회관 지하 좋은땅에서 있습니다. 수도

요일에 있습니다. 경인IVF 학사님들, 인천지역에

권지역에 거주하는 학사님들은 언제든 모임에 참

거주하시는 모든 학사님들을 초대합니다.

여할 수 있습니다. 모임문의 이철민 간사 070-8275-6363 페이스북 http://www.facebook.com/ivfygm

경인IVF 070-8223-6192

● 강원(춘천)학사회

2. 12월 모임일정입니다. 12월 6일(화) 에베소서 성경강해 12월 13일(화) 송년회 12월 30일(금) 리더 송년회

정기 학사모임 안내입니다. 함께하기 원하는 학사 님은 아래 일정을 참고해 주세요.


·춘천 엄마들모임(아이야) 매달 첫주 목요일 오전 11시 30분 사공은혜(한림대95) 010-5367-9120 춘천학사모임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 은혜교회 김아주(한림대05) 010-6381-1635 ·수원 매월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최경순(한림대94) 010-9536-0703 ·부천 매월 1회 토요일 저녁 / 순회 박은혜(한림대00) 010-9703-8815 ·평촌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 6시 / 평촌성심병원 김태준(한림대99) 010-5136-5877

● 충남학사회 1. 충남학사모임을 천안과 서울 두 곳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연락처로 문의 부 탁드립니다. ·천안 이준희(단국대06) 010-5171-0569 ·서울 손윤형(백석대02) 010-9154-1160

2. 12월 학사LGM 일정입니다. 12월 학사LGM 일시: 12월 7일(수) 장소: 천안천성교회

일시: 매주 토요일 아침 6시 30분 장소: 전주 덕진 체련공원 문의: 전성진 학사 010-7448-0255

3. 함께 책 읽고 토론하는 모임 '아볼로스터디'에 초 대합니다. 새로운 책으로 모임을 시작하니 관심 있 는 학사님들 많이 찾아와주세요. 아볼로스터디 일시: 한 달에 2~3회, 저녁7시 문의: 이진주 학사 010-2970-8742

4. 초보엄마, 예비 엄마들을 위한 모임 '마더와이즈' 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더와이즈 일시: 매주 화요일 오전 11시~오후 3시 장소: 이집 저집에서 만나요^^ 문의: 임하정 학사 010-4696-8050

● 영남동부학사회 정기모임 안내입니다. 함께하기 원하는 분들은 아래 연락처로 문의 부탁드립니다. 경주-포항 빨래터모임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30분 / 경주위덕삼성타운 김효남 010-4099-5242 울산 주부학사모임 격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박경아 학사 010-6572-2176 8090 울산대 학사모임 진동일 학사 010-6560-2176

● 전북학사회

● 대구학사회

1. 학사큰모임이 하반기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구학사회 정기모임 시간 안내입니다.

(구체적인 일시와 장소는 전북IVF 학사회 페이스북 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2월 10일(토) 작은 홈커밍데이 "동행" 12월 23일(금) 큰모임 저녁 7시 30분

2. ‘IVFC’라는 축구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전북출신 학사님이 아니어도 관심 있으신 학사님들은 오셔서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IVFC

IEF(교대학사 교사모임) 매주 월요일 오후 6시 가정피움팀(가정사역자모임) 매주 목요일 오후 8시 사회복지팀(사회복지관련자모임)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평신도 지도자 남편모임 매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예사모 아내모임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


inG 수료자 모임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 저녁 7시

● 부산학사회

팟캐스트

부산학사회 정기 소모임 안내입니다. 모임에

IVF 학사들을 위한, IVF 학사들에 의한,

함께 참여하기 원하는 학사님들은 아래 모임

IVF 학사들의 팟캐스트! 학사님들을 위한 팟캐스트를 소개합니다.

일정을 참고해주세요. TGIM(Thanks God It’s Monday) (1달에 2번 일상생활영성과 보냄 받은 의식을 고취 하기 위한 모임) 대구 동성로점 김종수 010-3260-1391 부산대점 양말희 010-2061-5260 창원점 정수정 010-3620-9495 E.M.포럼(복음주의목회자포럼) 매월 마지막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박철진 010-3578-7086

● 나음누리

아학팟 IVF 학사회 팟캐스트. 본격 기독B급 팟캐스트를 지향합니다. 책을 읽고 나누는 신나는 수다 <북잡담회>와 자녀교육에 대한 <요람에서 취업까 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책나눔 -복팟 IVF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에서

의료인 학사들이 지역별로 모이고 있습니다.

진행하는 팟캐스트 '복팟'입니다.

모임에 함께하기 원하는 의료인 학사님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책모임을 지원합

아래 모임 일정을 참고해주세요.

니다!

·서울지역 삼성병원모임 한 달에 한 번 / 삼성서울병원 이은경 010-8892-8076 ·경기지역 수원․용인모임 한 달에 한 번 / 장소 별도 공지 송재현 010-2231-1424 ·영남지역 대구모임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 장소 별도 공지 최선미 010-6248-8708 부산모임 한 달에 한 번/ 장소 별도 공지 이은정 010-3862-4189 모임문의: 백성대 간사 070-8275-6345

퇴근하고 뭐할래? 직장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루어보는 방송입니다. 취미, 일, 가정생활 등등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시도 하고 적용하며 공부합니다.

맑은물소리 하창완 목사와 함께 <시냇가에 심 은 나무(시심)>(IVP)의 진도를 따 라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묵 상도우미.

말씀으로 여는 하루 IVF 출신 목회자들의 설교 팟캐스트


58 편집인의

메아리

60번째 생일은 인생에서 특별하게 축하하는 날 이죠. 그렇지만 연이어 쏟아져 나오는 충격적인 소식들 속에서 맘 놓고 축하하고 기뻐하기는 어 려웠습니다. 우리의 지난 발자취를 한눈에 들여 다볼 수 있도록 연표를 준비했으니 이후에 찬찬 히 감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IVF 운동의 주 인공인 학생 리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 도 마련했답니다. 이번 [소리]가 우리의 역사를 잊 지 않고 미래를 그려 가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합 니다. (이번 연표를 만들어준 이강일 간사님과 [대 학가] 엄창근 간사님, 그리고 디자인과 제작을 맡 아준 간사님들에게 감사합니다.) IVF의 60주년을 맞은 2016년에 6번째로 내는 이 번 [소리]는 저에게도 특별합니다. 지난 6년간 펼 쳐낸 36권의 [소리] 중 제가 편집인으로 참여하는 마지막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인사를 전할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잡지입니다. [소리]의 볼륨을 높여주세요! 홀로 씨름하며 분투하는 동역자에게 “내가 너를 지지한다”고 외칠 것입니다. 후원금은 전액 [소리]의 제 작비로 사용됩니다. 후원계좌 [우리] 1005-000-990258 [국민] 760-01-0038-627 예금주 (사)한국기독학생회 2016년 9~10월 후원자 명단 곽지영(*2) 국효숙 권도균 금빛내렴 김선미(*2) 김재원(*2) 김종 기(*2) 김종수-구한나(*2) 김지은(*2) 나현순(*2) 남은경(*2) 민은 혜 박정현(*2) 박창재(*2) 서성진 손정엽 송인규(*2) 여운성(*2) 오 규덕(*2) 윤정범-지은실(*2) 이상엽(*2) 이원경(*2) 임정하(*2) 장 은숙(*2) 전선애(*2) 정민경(*2) 정성구-윤정은(*2) 정재성(*2) 조 창훈-민혜경(*2) 최수연(*2) 허성호(*2) 황진욱(*2)

분들이 끝없이 떠오르네요. (따로 찾아뵐게요!) 어리숙한 저를 아낌없이 격려해주셨던 분들 덕 분에 6년간 즐겁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소리] 덕 분에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기도 했지요. 바통을

강릉(*2) 경기남(*2) 경남(*2) 경인(*2) 남서울(*2) 대구(*2) 대전 중부(*2) 동서울(*2) 부산(*2) 북서울(*2) 서서울(*2) 영남동부(*2) 원주(*2) 전북(*2) 춘천(*2) 충남(*2)

이어 받을 새로운 편집인도 따뜻하게 맞아주시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월 후원하시는 분은 중앙지원부(070-8275-6303)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길 바랍니다. IVF가 특별한 한 사람이 이끌어가는 단체가 아니 라,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라 참 좋 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고유의 색깔을 가지고 다 채롭게 꾸려갈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함께 걷는 이 길 위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만날 날 을 꿈꾸면서요_!

민혜경│편집인│sori@ivf.or.kr

제34권 제6호 통권229호 발행일 2016년 12월 1일 발행처 (사)한국기독학생회 학사사역부 주소 (04031)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56-10 (서교동) IVF 중앙회관 전화 070-8275-6313 팩스 02-333-7361 발행인 주상윤 편집장 이시종 편집인 민혜경 김경아 김기인 편집위원 국효숙 김기인 김지은 박정현 오한웅 이상엽 조창훈 한병선 허영신 편집디자인 김아롬새미 문이선 표지 이재웅 제작 김효영 인쇄 예원프린팅


Good Life and Culture +

GLC+와 함께 해주세요!! 일터와 삶터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소리를 함께 공유하며, 좋은 삶과 문화를 만 드는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시도를 연결해가기 위한 실제적인 사역의 장으로 자 리잡아가고 있는 GLC+는 직장생활, 결혼, 자녀양육과 교육, 소비생활, 주거, 환 경, 정치참여, 노후생활, 재테크 등 우리 일상의 문제를 신앙과 통합하고 대안을 만드는 시도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GLC+의 사역은 각 지역의 필요에 따라 특색있게 이뤄지고 있으며, 현재 서울을 비롯한 광주, 경남, 대구에서 다양한 주제의 강좌, 스터디, 독서모임, 워크샵 등 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는 제주에서도 GLC+와 함께하실 수 있고, 추가적으로 2~3개 지역에서 GLC+ 사역을 준비하며 협의하고 있습니다.

GLC+는 하나님나라가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 임하도록 돕는데 힘쓰고 있습니 다. 하나님나라의 좋은 삶을 꿈꾸는 GLC+의 비전과 운동에 후원과 참여로 힘을 실어주시고 함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문의 070-8275-6361, glc@ivf.or.kr 후원 국민은행 032901-04-115063 사)한국기독학생회

GLC+의 소식은 IVF학사회 페이스북 페이지(https://www.facebook.com/graduateivf)와 블로그(http://ivfgcf.tistory.com)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예배 세계관 문화적 형성

제임스 스미스 | 박세혁 옮김 364면(예상) | 17,000원

우리는 지금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가? 또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는 급진적인 제자 형성의 길을 모색한다! 제임스 스미스는 인간 본성의 자리가 머리가 아닌 마음과 오장육부에 있음을 지적하며, 참된 욕망을 형성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됨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긍정하면서도 독특한 기 독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독교 예배를 강조하는 스미스의 통찰은, 현대 사회 한가운데서 길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적 신앙을 토 대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실천적 지혜를 제시한다. 제임스 스미스는 오늘날 현대 문화와 신학과 철학을 아울러 이야기 할 수 있는 기독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그에게서 훨씬 더 심화되고 확장된다. _강영안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김재윤, 김진혁, 우병훈, 임성빈, 존 위트블릿 등 추천!

www.i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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