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The Person of Christ)

Page 1


Copyright ⓒ 1984 by David F. Wells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as The Person of Christ by Marshall Morgan & Scott in UK and Crossway Books in USA. All rights reserved. This Korean Edition Copyright ⓒ 2015 by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of David F. Wells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 에이전시를 통하여 David F. Wells와 독점 계약한 부흥과개혁사에 있습 니다. 신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 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기독론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데이비드 웰스 지음 | 이승구 옮김


내게 처음으로 “영광의 주님”( 고전 2:8 ) 을 말해 준 친애하는 친구 존 스토트에게


목차

2015년 한국어판 저자 서문 저자 서문

8 12

서론 | 14 소외된 신학자들 지식과 문화 기독론과 그 배경 정합성과 이해 기독론을 발전시키는 일

1부 성경적 토대 1장 기본적인 틀 | 45 선구자들 범주로서의 “하나님 나라” 결론

2장 예수님의 정체성 | 69 구별하기 공관복음서의 함축된 기독론 공관복음서의 분명한 기독론 요한 문헌 서신서 결론

5


3장 우리 주님의 칭호들 | 137 말씀 하나님의 아들 고난받는 종 주님 인자

2부 역사적 발전 4장 전환 | 167 무엇이 정통인가 무엇이 적절한 언어인가 황제는 신학자여야 하는가

5장 고전적 기독론: 교부 시대 | 191 두 학파 두 가지 사례 연구 해결을 지향하여

6장 고전적 기독론: 중세에서 종교개혁까지 | 217 동방의 전통 서방의 발전 두 가지 사례 연구 종합 붕괴


3부 현대의 해석들 7장 계몽주의와 그 영향 | 249 기독론의 분류 케노시스 사상 “예수의 생애” 운동 자유주의 개신교

8장 20세기의 소용돌이 | 285 혼란의 이유 칼 바르트 노먼 피텐저 에드워드 쉴레벡스

9장 결론 | 329 1992년 한국어판 옮긴이 후기 2015년 한국어판 옮긴이 후기

344 348


| 2015년 한국어판 저자 서문 |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이 작은 책에 새로운 서문을 쓰는 것은 저에 게 큰 영예입니다. 특히 이 책이 서구에 머물지 않고 널리 퍼져 가는 것 에 대해서 큰 기쁨을 느낍니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해 주신 많은 분께 감 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이 처음 영어로 출판된 것은 30년 전인 1984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여러 면에서 그렇습니다. 특히 신학계 에서는 그때와 상당히 다른 책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주도적이었던 저 자들이 이제는 잊혀진 경우도 있습니다. 신학이 다루는 주제들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더 넓게는,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지위가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대학교 안의 신학부가 상당히 존중되었 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는 기독교, 특히 성경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기독교는 개발도상국보다는 서구가 중 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고, 따라서 새로운 과제와 새로운 도전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8

기독론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어떠하심[ 위격 ]에 대한 성 경적 이해는 불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히브 리서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피조계는 지나갈지라도 그리스도 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실 것입니다 ( 히 1:11~12 ). 이 책은 원래 각 권이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하나씩 탐구하는 시 리즈에 속해 있었으므로, 시리즈 내의 각 책이 같은 형식으로 쓰였습니 다. 그래서 이 책의 1/3은 성경적 논거를 다루고, 1/3은 이 교리의 역사 적 발전 과정을 다루고, 나머지 1/3은 세 명의 중요한 현대 사상가에 집 중하여 논의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두 가지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 는 첫 부분에 대한 언급이고, 또 하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루는 세 명 의 사상가들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책이 처음 쓰일 때는 성서학계가 유럽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는 때 였습니다. 이런 현대적 학문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동안에 이를 통해 우 리가 얻은 통찰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 나 이 시기에 성경 이해에 대한 상당한 손상이 주어졌다는 것도 아주 분 명합니다. 특히 복음서 비평에서는 모든 기록이 파편화되었습니다. 그리 하여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가 무엇을 하셨는지, 그가 누구셨는지에 대해서 단일하고 정합성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그런 구성을 하기가 불가능하고, 그 배 후의 역사는 숨겨져 있고, 정합성이 없으며, 접근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를 아주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가 누구셨으며 무엇 을 하셨는지를 교회가 말할 수 없다면, 과연 교회가 어디에 있을 수 있 겠습니까? 30년 전에 나는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런 정황과 대화하며 작업했지 만, 그때도 나는 상당히 다르게 작업했습니다. 그때 나는 복음서들의 언어 와 서신서들의 언어 사이에 본질적인 통일성이 있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2015년 한국어판 저자 서문

9


더 나아가, 복음서에서 서신서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한 계 시의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나는 드러냈습니다. 작은 스케일로 한 것이 긴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단일하고 정합적인 이해 안에서” 일어난 역사적 발전 과정을 보여 주는 시도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와 같은 이해에 대한 관심이 더 늘었습니다. 사실 이제 는 복음서와 서신서를 넘어서까지 이런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구약에서 신약으로 나아갈 때 철저히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어 떠하심과 계획을 잘 드러내 주는 기사 ( 記事, narrative ) 전체를 성격상 하나 의 구속적인 기사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즉, 이 기사는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고, 그리스도에게서 이 기사가 극치 ( 極致 ) 에 이르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약 성경은 신약의 구약 사용을 통해 구약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해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신서들은 이 신적 계시에 대한 성찰이 아니냐고, 특히 교회에 대한 의미의 적용을 시도하는 성찰 이 아니냐고 묻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해가 이전의 견해들보다 매우 건강한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칼 바르트 ( Karl Barth ) 와 노먼 피텐 저 ( Norman

Pittenger ),

에드워드 쉴레벡스 ( Edward

Schillebeeckx ) 의

사상에 집

중하여 논의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20세기의 각기 다른 시기에 아주 중 요한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0년 지난 지금의 빛에서 보 면, 이것은 인간의 필연적 죽음에 대한 놀라운 예증이 되는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바르트의 사상은 제가 그를 논의한 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어느 정도 논의되고, 또 지금도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사실 오 늘날 미국에서는 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조금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러나 피텐저는 쉴레벡스가 그런 것과 같이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렸 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면, 그들의 작품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10

기독론


더 강하게 말하면, 이제 그들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조차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쉴레벡스가 주도적인 사상가였던 새로운 로마 가톨릭 사상의 흥기도 역시 이제는 그 힘을 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시대마다 그 나름의 독특한 도전에 직면합니다. 기독교 신 앙은 지금도 이 세상의 어떤 곳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고, 먹 을 것이 풍부하지 않으며, 의료적 돌봄이 거의 없는 소외된 실존적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신실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할 수 있 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기독교 신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다른 종교 들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 호전적인 정황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 와 같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정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은, 적어도 그것이 성경적이기를 원한다면, 그저 편안히 안주할 수 없습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항상 이 세상과 긴장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같은 도 전에 직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정황이 어떠하든지, 우 리의 삶이 얼마나 힘들게 보이든지, 상대적으로 쉽게 여겨지든지 등을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각하는 법 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합니다. 하나 님이 그의 아들의 인격 안에서 친히 이 세상으로 뚫고 들어오신 것에서 시작하여 우리의 사유와 삶 전체가 하나님 중심적으로 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 작은 책이 우리가 그 위에 세울 수 있는 건전한 토대를 놓음 으로써 그런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4년 성탄절에 데이비드 웰스

2015년 한국어판 저자 서문

11


| 저자 서문 |

처음에 이 책을 써 보라는 요청에 얼마나 쉽게 응했는가에 대해 이제 는 놀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 이 책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 지 )

잘 알았어야만 했다. 이 책을 쓰는 일에 착수하자마자, 나는 곧 학문

적 논의의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처음에 내가 마치기로 정한 날까지 이 책을 다 쓰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그러므 로 나는 이 시리즈의 편집자인 피터 툰 ( Peter Toon ) 에게 그의 인내에 대해 서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내가 이 책을 기한을 넘겨서 쓸 수 있도록 해 주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이 시리즈의 다른 책과 좀 다르게 책 을 쓸 수 있도록 흔쾌히 승낙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리즈에 속한 책들의 형태, 스타일, 접근법에서의 일치를 원하는 편집자에게 난감하고 어려운 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원고를 마치고서 피터 툰 ( Peter Toon ), 제프리 스틴슨 ( Jeffrey Nicole ) 과

Steenson ) ,

그리고 나의 동료인 로저 니콜 ( Roger

로이스 그륀러 ( Royce Gruenler ) 에게 원고를 보냈다. 나는 그들의

해박한 조언과 현명한 도움에서 상당히 많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이

12

기독론


완성된 출판물에 대해서는 나 자신만이 전적인 책임을 가진다. 마지막 으로 나는 이 책을 쓰도록 반년의 안식년을 허락해 준 고든 콘웰 신학교 의 이사회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저자 서문

13


| 서론 |

요즘에는 신학자들이 공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일이 아주 드물다. 서구 세계는 기독교 전통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 려 하고, 자신들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일에 너무 빠져 있 다. 그러나 1977년 7월에,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세속 신문에도 보도 된 사건을 통해서 이런 일에 변화가 생겼다. 그달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화』 ( The Myth of God Incarnate ) 라는 제목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기독론 ( the doctrine of Christ ) 이 형성된 방 식에 대해 회의를 던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에 대한 역사적 이 해”를 일소해 보려는 전반적 의도를 가진 논문들을 모은 논문집이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교회는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예 수님에 대해 글을 남기면서 그것들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 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이것은 옳았는가? 그것은 신약 저자들의 은유를 잘못 이해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형이상학적 사유 방식으로 대 체하지 않았는가? 전통적인 칼케돈적 개념은 내적인 정합성을 가지는가?

14

기독론


또한 그것은 20세기에도 여전히 믿을 만한 것인가? 이 논문집의 저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아주 유명해졌다. 사실 이 책이 일으킨 논쟁은 그 논문들 본래의 가치에 비해서 너무나 큰 것이었다. 왜 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의 편 집인인 존 힉 ( John Hick ) 도 이것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밝혔다.1) 그 런데도 대중들은 그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책의 출판에 따라 나온 열광은 아마도 그 대부분이 저자들의 위치 와 관련 있고, 또 이 책의 도전적인 제목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에 대해 서 저자들 중 어떤 이들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 제목이 의도하고 있는 이중의 의도를 놓쳤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순수성을 주장하기 도 했다. 왜냐하면 신학에서 신화 ( myth ) 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 을 가지고 구성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 들은 아주 신중하게 여겨져야 하지만, 문자적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이에 비해서, 일반적인 용법에서 신화란 문자적으로는 물론 그 어떤 의 미에서도 신중하게 여겨지지 않는 환상이나 허위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용법에서는 “그러면 그리스도가 백설공주와 같은 범주에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 논문집의 저자들이 신화라는 말을 아무런 설 명이나 변호 없이 2) 사용한 방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더 신비하게 여기게 했고, 결과적으로 큰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책과 그 저자들을 둘러싸고 일어난 극적인 상황을 이 두

1) John Hick, ed., The Myth of God Incarnate (Philadelphia: Westminster, 1977), p. x. 이

논쟁이 계속될 때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마이클 굴더(Michael Goulder)가 다시 한 번 같은 지적을 했다. 즉, 그는 자신들이 처음 출판했던 책에 대해 말하면서 “(그 책의) 메시지는 이전에도 자주, 때로는 더 나은 식으로 진술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 했다. Michael Goulder, ed., Incarnation and Myth: The Debate Continued (Grand Rapids: Eerdmans, 1979), p. vii. 2) John Maquarrie, “Christianity without Incarnation? Some Critical Comments,” The Truth of God Incarnate , Michael Green, ed. (Grand Rapids: Eerdmans, 1977), pp. 140~144를 보라.

서론

15


가지 요인만으로 다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 세속 신문에 보도한 사람들이 학문적 엘리트의 영지주의적 부호 언어와 학문적 출판 물의 전문 용어로 가득 찬 이 모든 논문을 실제로 읽고 이해했다고 믿는 가? 그랬을 것 같지 않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쏟아진 관심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이 책이 스쳐 지나가듯 보여 주는, 우리 시대의 신학 적 명사 ( 名士 ) 들 중 몇 사람이 갖고 있는 사유 형태다. 세속 신문은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고 한 걸음 물러났다.

소외된 신학자들 사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논문집은 반 하비 ( Van A. Harvey ) 가 “소외된 신학자들”( the

alienated theologian ) 이라고

부른 것의 정확한 모습을 드러내

준다. 이 책 자체보다도 이런 현상이 모든 관심을 집중시킨 이유라고 생 각된다. 기독론에 대한 현대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이 현상을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현대의 거의 모든 신학적 사유가 이루어지는 분 위기이기 때문이다. 소외된 신학자란 아주 쉽게 정의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그러나 그 자신은 ‘신자’ 인 만큼 또한 ‘회의하는 자’인 그런 전문가이다”라고 하비는 말한다.3) 이 진술에서 흥미로운 것은 하비가 제시하는 신학자들의 새로운 역할과 그런 역할 변화를 수반한 이유다. 이 두 측면 모두 좀 더 탐구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신학자의 역할은 기독교 진리를 밝히고, 설명하며, 변증하는 3) Van A. Harvey, “The Alienated Theologian,” McCormick Quarterly 23 No. 4 (May 1970),

p. 234.

16

기독론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신학자의 역할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 훨씬 더 일반적인 것은 신학자들의 역할이 전통적으로 신앙의 핵심 이라고 여겨 왔던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회의하며, 부인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새로운 역할은 신학자들의 오래된 역할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과정에서 신학자가 어떤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가정해 보자. 전적으로 변증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것이 수수께끼처럼, 또 바꿀 수 있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내적 인 회의와 정신적 동요를 숨기는 것이 더 이상 도덕적이지 않다고 결정 해야 하는 위기점에 닥쳤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점증하는 회의를 있는 그대로 공표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이라고 결단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 데 현대에는 이런 공표가 성직 몰수나 사임을 가져오지 않는 경우가 태 반이다. 오히려 그런 회의자는 유명인사가 되고, 신학을 본질적으로 비 판적 회의의 과정으로 새롭게 정의하는 그런 집단 내에서 유력한 위치를 차지한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전통의 틀은 뒤집어지고, 이제 신학자의 전 문가적 의무는 예기치 않은 빛의 깜빡거림 가운데 어떤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게 되었다. 반 하비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서 이런 소외된 신학자들을 설명한 다. 강력한 출애굽에 동참하면서, 만나를 주시고 광야에서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어떤 이들이 점차 냉담해지고 불평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4)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여호와에 대한 철학적이지 않은 말을 불편하게 느꼈으 며,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싫어했다. 만나, 구름 기둥, 불 기둥은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단지 미신과 문화적 조건화 때문에 달 리 해석될 수 있을 뿐이라고 그들은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4) Harvey, “The Alienated Theologian,” pp. 235, 236.

서론

17


따라가면서 때때로 자신들의 느낌을 표현했고, 결국 여호와가 그들을 이집트 사람들에게서 구원하셨다는 문자적 신념을 제거하면 백성이 더 놀라운 진보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모세 가 그것을 믿는 듯하다면 그의 개념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런 확신은 불분명하고 사유하지 않는 것이고 도움이 되 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참된 믿음은 신앙의 질문 자체에 있고, 참된 신념은 회의의 과정에 있다고 한다. 단순히 받아들인 것은 깊 이 믿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고대에도 신문이 있었다면, 현대의 일 간지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화』에 대해서 발견한 것과 같은 의구심을 이런 상황 속에서 발견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바로가 어려움을 겪는 동안 이런 위로를 가져다 준 그런 사람들 에 대한 기록도 없고,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도 않았다고 믿는다. “회 의자로서의 신학자”( the

theologian as doubter ) 는

현대의 현상이다. 그런 사

람들은 한편으로는 현대적 지식관의 산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적 으로 변화하는 문화적 분위기의 산물이다.

지식과 문화 이런 현대적 지식관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 논리와 방법이다. 신념에 대한 신학자들의 열정이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종류의 헌신은 엄밀하고 진지하게 학문을 하는 데 장애가 되고, 치명적인 것으로 여겨진다.5) 신념에 대한 열정은 5) 옮긴이-이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지, 이 책의 저자인 웰스가 그렇

게 여긴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에 현대의 개혁신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충실한 개혁신학자들은 비학문적이다”라는 판단을 받는 학문적 분 위기 속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18

기독론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대치되었다. 이 새로운 목적은 또 새로운 방법 을 채용했는데, 이것은 과학적 절차들을 수용한 것으로서, 학자가 논의 중인 주제와 관련되기보다는 그 논의 대상과 분리되어 초연하기를 요구 한다. 이런 객관성이 분명히 나타난 이후에야, 우리는 좀 어려운 일들이 그저 덮어지거나 논의가 자의적 ( 恣意的 ) 으로 어떤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을 것이라고 상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또 신학자가 탐구의 결과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록 그의 발견이 더 신뢰할 만하다. 이런 방법은, 하비가 다른 곳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6) 어떤 것을 믿는 것이 타당하며 어떤 것을 믿지 않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해서 학자들 사 이에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상식”인 일종의 포괄적인 논리를 만들어 낸 다. 그러므로 현대적 정황에서는 결과에 대해 미리 정해진 관심을 가지 거나 증거에 대한 의견 일치보다 더 확신을 가지고 어떤 의견을 전개하 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비도덕적인 것이 되었다. 이에 비해서 현대에는 이 방법론적 엔진에 연료를 공급하는 끊임없는 회의주의가 도덕적인 것 으로 등장한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별로 비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증거도 없는 의견을 붙잡고 있는 것은 옳지 않으며, 발견을 왜곡하고 증거를 가 려서 특정한 견해가 도전받지 않도록 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의사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잘 보지 못하 는 것은 학자의 전적인 초연을 강조하는 듯한 이 현대적 방법이 사실상 이미 가정된 인지 구조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종교 철학자들에 의해 자주 논의되어 왔으므로, 여기서 이를 장황하게 설명 할 필요는 없다. 이 회의주의적 구조가 객관적인 것임을 가정하면서, 사실은 그 성격상 만족스럽게 답변될 수 없는 특정한 전제들 내에서만 6) Van Austin Harvey, The Historian and the Believer: The Morality of Historical

Knowledge and Christian Belief (Philadelphia: Westminster, 1966), pp. 68~163.

서론

19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상 황에서는 그저 질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주 유리하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중요성에 대한 현재의 논의는 대부분 역사적 사실들이 영원한 진리를 낼 수 없다는 레싱 ( Lessing ) 의 선언과 유비 ( 類比, analogy ) 에

대한 트뢸치 ( Troeltsch ) 의 논의가 최종적이라고 가정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와 과거는 항상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 일어나 지 않는 것은 그 어떤 때도 일어날 수 없었다. 오늘날 어떤 생선 가게에 서 물고기와 떡 덩이가 신비하게 불어났다는 일이나, 죽은 이가 다시 살 아났다는 일이나, 어떤 어부가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물 위를 걸었다는 일들은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들은 신약 성경 시대에도 일어날 수 없었다고 추정된다. 물론 기적의 형태에 따라 거부의 정도가 다양한 것은 사실이다. 자연 법칙을 파괴하면서 일어나는 기적들은 가장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치유 기적들은 현대 감각에 좀 덜 거슬리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 하다. 어쨌든 오늘날에는 인간의 물질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사이에 신비한 상호 관계가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트레스와 불안이 신체적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자주 있고, 따라서 예수님이 신체적 질병의 배후에 있는 원인을 파악하시고 그것들 을 언급하심으로써 사람을 “치유하실” 수 있다는 것은 가능성 밖에 있 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학문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 은 것으로, 적어도 신약 성경에 기록된 식으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 기는 것이 일상적 관례가 되었다. 대답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여러 가지 질문이 이런 가정과 기본 법칙 을 가지고 기독교 전통에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이 부 활에 의해 입증된다면, 그리고 그 부활이 단지 개연적인 것을 넘어서기

20

기독론


때문에 역사가들이 그에 대한 사실성을 판단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 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참됨 ( authenticity ) 을 믿을 수 있겠는가? 또 예수님 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보다는 초대 신앙공동체나 그 편집자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전승의 모음집일 뿐이라면,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확신을 가지고 선언할 수 있겠는가? 또한 비교 가능한 현대의 사건들이 없어서 복음서 기록을 판단하기 위한 “규 제적 사례들”( control cases ) 을 수립할 수 없다면,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은 왜 20세기의 그렇게 많은 학자가 기독교 신앙을 그 역사 적 뿌리에서 끊어 내려고 노력했는지 설명해 준다.7) 예를 들어 루돌프 불트만 ( Rudolf

Bultmann ) 은

예수님에 대한, 특히 예수님의 자의식에 대한

전기적 정보는 공관복음서 내에 함께 엮여 있는 다양한 전승에서 잘 발 견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우리는 오직 그의 삶의 뼈대만 을 알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태어났고, 자신을 일종의 유대인 선지자로 여긴 듯하고,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아래 처형되었다는 것이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트만에 따르면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 ( the historical Jesus ) 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 다. 기독교는 실존적 결단에 의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 지, 지적으로 역사적 사실들과 연관하는 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불 트만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역사와의 절연은 그토록 철저해 서, 만일 예수님의 뼈가 발견되면 그의 신학에 어떤 영향이 있겠느냐는

7) 양식비평의 기독론적 함의에 대한 뛰어난 입문으로 Norman Perrin, “Recent Trends in

Research in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Essays in Divinity , Vol. Ⅵ: Transition in Biblical Scholarship , J. Coert Ryladrsdam,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6), pp. 217~233; Patrick Henry, New Direction in New Testament Study (Philadelphia: Westminster, 1979), pp. 120~152; William G. Doty, Contemporary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Englewood Cliffs, N.J.: Prentice - Hall, 1972), pp. 52~86 등을 들 수 있다.

서론

21


질문의 터무니없음을 크게 비웃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8) 칼 바르트 ( Karl Barth ) 는 물론 이와 좀 다르고, 덜 급진적인 방식으로지 만, 자신의 신학을 비판적 학문의 기준에 의해 확언되는 역사 ( Histo­rie  ) 와 분리시켰다.9) 실제로 바르트는 현대의 비판적 학문이 신약 성경의 본질 또는 그 말하는 바에 대해 어떻게 논의하든지 전혀 상관이 없도록 자신 의 거대한 신학을 구축했다. 이와 같은 그리고 다른 많은 비슷한 종류의 해결책이, 만족스럽게 대답될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할 필요가 없게 기독교 신앙을 변형시킴으로써, 현대 성서학의 결과를 피해가도록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런 발전을 위해 이미 상당한 값을 치렀다. 결국 도 널드 다위 ( Donald

Dawe ) 가

주장하듯이,10) 현대 기독론들은 용감하게 세

상으로 나아갔으나 얼마 후에 자신이 껍데기만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 탕자와 비슷하게 되었다. 학문적 객관성을 보장하려던 것이 많은 경우 에 환원주의적 인지 구조를 형성했다. 어떻게 지식이 획득되고 검증되는가에 대한 이 현대적 견해는 그리스 도에 대한 믿을 만한 견해를 주장하려고 노력하는 학자들에게 큰 어려 움을 가져다주었다. 현대의 맥락에서 신뢰할 만한 견해를 제시하기 위 해서는 전통적 이해의 상당한 부분을 제거하거나 급진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에서 신해석학 ( new hermeneutic ) 에 이르는 개 신교 신학은 하비가 인정하듯이 “일련의 구조 작업으로” 나타났다. 즉, “어떻게 지적인 순수성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시도였다.” 11) 이것이 바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에 8) Green, The Truth of God Incarnate , p. 59. 9) 이 문제에 대한 간단한 입문으로 Michael F. Palmer, “Can the Historian Invalidate Gospel

Statements? Some Notes on Dialectical Theology,” Downside Review 95 ( January 1977), pp. 11~18; K. Schubert, “Geschichte und Heilsgeschichte,” Kairos 15 No. 1~2 (1973), pp. 89~101를 보라. 10) Donald Dawe, “Christology in Contemporary Systematic Theology,” Interpretation XXVI No. 3 ( July 1972), p. 260. 11) Harvey, The Historian and the Believer , p. 104.

22

기독론


대한 신화』가 한 일인데, 잠시 동안 기독교 학계 일부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면서 외부인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물론 피터 버거 ( Peter Berger ) 의 작업을 통해 제시된, 이 과정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이 있다. 버거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현대 의식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제공했다.12) 그 주장에 따르면, 위에서 우리가 언급한 접근들은 실상 기독교 전통을 현대 의식의 인지적 한계와 기대에 따르도록 만들 어 보려는 노력들이다. 이것은 높은 지적 수준에서 수행된, “번역”( trans­ lation ) 을

위한 신실한 노력이고, 이 노력이 성공적인 것은 그 결과가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어떤 것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제 안된 개념들과 현대의 세속적인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 간에 관련성이 있지만,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신학을 인간론으로 끌어내리고 외적인 하 나님을 축소하여 개인적 지각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13) 초월에 대한 이런 “재해석”은 신학적인 이유에서 수행된 것처럼 보이 지만, 사실상 이것은 서구 문명의 붕괴에 대한 지적인 공명이며, 현대인 의 지적 기대가 오늘날을 위해 규범적이고 과거의 어떤 것들보다 우월 하다는 가정의 결과라고 버거는 주장한다. 이전에 융성했던 획일적 세계관이 오늘날에는 의심할 바 없이 다양한 세계관들로 대치되었고, 이 다양한 세계관들은 개념의 시장에서 서로 투쟁하며 경쟁한다. 동시에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믿을 만한가를 판 단하는 기준은 문화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념이란 사회와 상호 호혜적 관계 ( reciprocal

relationship ) 를

가지고 있어서, 항상 사회에서 빌려

12) 예를 들어서, 그가 Thomas Luckman과 공저한 The Social Construct of Reality: 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 (New York: Doubleday, 1967); Peter L. Berger, Brigitte Berger, and Hansfried Kellner, The Homeless Mind: Modernization and Consciousness (New York: Irvington, 1974) 등을 보라. 이 책들에서 탐구된 주제들 은 그의 다른 저작들에 있는 다른 문맥 내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13) Peter L. Berger, Facing Up to Modernity: Excursions in Society, Politics, and Religion (New York: Basic, 1977), pp. 162~181.

서론

23


오기도 하고 사회에 빌려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이 흔히 반영 하는 사회적 규범은 실증적·다원주의적 동의에 의한 규범이다. 이것은 세상 속에서 기적적으로 활동하실 수 있는 초월적인 하나님 개념을 가 진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친근한 규범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상당 히 많은 현대 신학적 작업에 적응의 과정을 강요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 제는 대부분의 신학이, 현대성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것보다 더 알 수 없고 더 말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확신시켰다는 데 있다. 이렇게 시대 정신에 사로잡힌 것은 마치 하수구 안에서 조심스럽게 걸어가면서 그 안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술취한 사람과 유사하다고 버거는 말 한다. 다른 말로 해서, 현대 신학자의 딜레마는 그것이 신학적인 만큼이 나 그 기원에서 사회학적이라는 것이다. 반 하비가 말하고 있는 지적인 신뢰성을 유지하려는 진지한 관심은, 현대성이 “진리”라고 부르기로 동 의한 것에서 낙오할까 걱정하는 신경쇠약이라고 버거는 주장한다.

기독론과 그 배경 오늘날 어떤 신학적 관점을 발전시키는 일에 함축된 어려움은 기독론 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사실 그것은 기독교 사상의 전 구조를 통해 느껴지는 어려움이고, 이것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한다. 밥티스타 몬딘 ( Baptista

Mondin ) 이

진술한 바와 같이, 분명한 신 개념과

분명한 인간의 본성 개념을 전제하지 않으면 그 어떤 기독론도 구성될 수 없다.14) 비교적 새로운 과학들, 특히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기념비적인 시도들을 해 왔다. 인간의 본성이 마치 14) Baptista Mondin, “New Trends in Christology,” Biblical theology Bulletin IV No. 1

(February 1974), p. 33.

24

기독론


그와 다른 육체에 부과된 일종의 영원한 본질로 분리되고 분석될 수 있 고 옛날의 신학자들 중 어떤 이들이 생각했듯이 거리를 두고 묘사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사실, 신론과 인간론 모두가 우리의 문화에서 일어난 폭넓은 변화에 자주 휘말렸다. 20세기에는 우리의 철학적 유행이 존재 ( being ) 보다는 생 성 ( becoming ) 을, 본질 ( essence ) 보다는 실존 ( existence ) 을, 세계로부터의 추 상적 절연 ( aloofness ) 보다는 세계 안에서의 역동적 출현 ( emergence ) 을 강 조했다. 이것은 폭넓게 받아들여진 실존적 주제 ( existential motifs ) 로의 전환 이다. 객관성 ( objectivity ) 보다는 주체성 ( subjectivity ) 을, 대중보다는 개인을, 우리의 결단으로 우리가 형성하고 실체를 부여하기까지는 아직 형성되 지 않고 심지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본성을, 지식보다 는 연관을, 정보보다는 선택을 말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우리의 많은 문 헌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는 진화의 개념이, 즉 그 자체가 신적인 어떤 것을 드러내는 실재의 전개가 기독론적 사유 의 직접적 맥락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전의 견해들은 비실재적이고 추상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조셉 시틀 러 ( Joseph Sittler ) 는 어떻게 이런 변화가 세계교회협의회 ( W.C.C.) 의 논의들 에 나타났는가를 지적했다.15) 1951년 룬드 ( Lund )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Jesus Delhi )

Christ and the Church ) 였는데,

1961년 뉴델리 ( New

총회는 그 시야를 더 넓혀서 주제를 “그리스도, 교회, 그리고 세

계”( Christ, the Church, and the World ) 로 했다. 그리스도를 해석하는 데 필요한 문맥은 헬라 철학이 정의하고 칼케돈 ( Chalcedon ) 신조의 정의가 사용한 옛 범주들을 넘어서서 현대의 우주적 경험 전체를 포괄하도록 넓혀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칼 라너 ( Karl

Rahner ) 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5) Joseph Sittler, “The Scope of Christological Reflection,” Interpretation XXVI No. 3 ( July

1972), p. 332.

서론

25


사실상 교회와 같은 제도적 한계와 옛날의 교의적 사유에 의해 날카롭 게 정의된 방식의 한계를 넘어서서 세계 영성 ( world spirituality ) 을 찾아보려 는 시도였다고 주장했다.16) 이런 새로운 사고의 방향은 유명한 칼케돈 신조의 정의를 위험에 빠 뜨렸다. 사실 20세기 후반의 기독론들은 그 출발점이 칼케돈 신조의 정 의에 대한 거부여야 한다는 점에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17) 그런데 칼 케돈적 규정에 대한 불만은 두 가지 아주 다른 수준에서 나타난다. 한편 에는 이 진술을 만들어 낸 이들이 사용한 개념을, 그리고 “본질”( sub­ stance ) 과

“본성”( nature ) 과 같은 용어에 나타나 있는 개념을 불편해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를, 이런 철학적 용어의 사용 은 결코 중립적 문맥에서 나타날 수 없다고 한다. 즉, 이 용어들은 특정 한 철학적 이해를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런 철학적 이해는 그것이 한 부 분이 된 신학적 진술에서 이질적 ( 異質的 ) 요소가 된다. 이 용어들이 대변 하는 철학적 관점이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옳게 공박한 프톨레마 이오스적 세계관보다 더 신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 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같은 이유에서, 우리 자신의 현대 인지적 관심을 반영하는 대안적 용어들이 반드시 더 믿을 만하고 개연 성이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러나 칼케돈에 대한 더 심각한 도전은 그 용어뿐 아니라 그런 용어들 이 보호하는 그 실재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서 온다. 가장 일반적으로 16) 참고. Karl Rahner, “Christology and an Evolutionary World View,” New Testament

Themes for Contemporary Man , R. Ryan, ed. (Englewood Cliffs: Prentice - Hall, 1969), pp. 217~225; 또한 T. Pearl, “Dialectical Panentheism: On the Hegelian Character of Karl Rahner’s Key Christologicol Writings,” Irish Theological Quarterly 42 (April 1975), pp. 119~137도 보라. 17) 베르카우어(G. C. Berkouwer)와 같은 보수적 사상가도 이 사실을 인정할 정도로 압력을 받고 있다. 그는 Studies in Dogmatics: The Person of Christ (Grand Rapids: Eerdmams, 1954)의 첫 장에 “양성론 교리의 위기”(The Crisis in the Doctrine of the Two Natures)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의 선언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전통적인 칼케돈 규정의 “폭넓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26

기독론


이 도전은, 앞서 시사한 바와 같이, “인간적인”( human ) 것과 “신적인”( di­ vine )

것이 구별된 실체들이라는 명제에 대한 의심에서 온다. 이것이 현

대 정신에 특히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것에 앞서는 신 적인 것, 인간이 지각하는 내용과 동일하지 않고 인간의 개념의 범주를 초월하는 하나님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하나 님이 인간의 의식 내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다양한 형태의 주장이 더 잘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신적인 것이 모든 사람 안에서 모호하고 그림자 적인 방식으로 발견될 수 있으나, 한 사람 나사렛 예수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생각이다.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이 이 견해를 주장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독특한 것이 무엇이냐는 분명한 질문을 제기했다. 물론 이 질문은 그것 보다 더 큰데, 왜냐하면 기독교의 독특한 것은 무엇이냐, 기독교가 말하 는 기록된 말씀과 살아 계신 말씀의 독특성은 무엇이냐, 그 배후나 그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의 독특성은 무엇이냐 하는 등의 질 문도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대답은, 지금처럼, 그 독특성이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9세기 에는 좀 낮은 수준의 영적인 진정성을 다른 종교에서도 찾아보기 시작 했고, 오늘날 우리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 세계 영성, 다른 종교들에 있 는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독교 진리의 내용을 확대하 려는 이런 충동은 칼케돈 신조가 보호하려고 하는 그리스도 사건의 독 특함 및 유일무이함과 실제로 정면으로 충돌한다.18) 18) 이런 발전에 대한 소개로 Richard Lucien, “Some Recent Developments on the

Question of Christology and World Religions,” Eglise et The' ologie 8 No. 2 (May 1977), pp. 209~244를 보라. 여기서 다루어진 책들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Paul Tillich, The Future of Religions; George Rupp, Christologies and Culture: Toward a Typology of Religious Worldviews; John Cobb, Christ in a Pluralistic Age; Schubert Ogden, The Reality of God and Christ without Myth ; John Hick,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s ; Charles Davis, Christ and the World Religions ; Raymond Panikkar, The Unknown Christ of Hinduism .

서론

27


정합성과 이해 신약과 구약의 내적인, 또 그 둘 사이에 있는 통일성의 본질은 교회 내에서 늘 논의되어 온 문제다. 현대의 많은 주석가가 글을 쓰는 방식에 서 늘 분명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현대 성경 해석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통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질문들은 대개 새로운 발견 을 동반하는 열심을 가지고 논의된다. 사실 이 문제는 마지막 사도가 죽 기 전부터 제기되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대개 세 가지 다른 종류의 접근법이 나타났다. 초대 교회에서 어떤 이들은 신비 한 경험을 통해 그 모든 다양성 가운데서 성경의 통일성을 찾았다. 이 신비한 경험이 바로 성경이 알레고리적 방식으로 지시하는 바며, 성경 을 “의미” 있게 한다는 것이다. 후에, 특히 중세에는 한번 파악되고 적용 되면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고 전부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 체계 안에 서 그 통일성을 찾았다. 오늘날 우리는 합리성에 대한 신뢰가 거의 없 고, 이 초기 형태의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도 거의 없다. 오늘날 대개 우 리는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아낼 수 있는 조직의 형태를 새로운 문학적 기법들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 배후에는 만일 우리가 문학적 층들을 충 분히 구별해 내기만 하면, 결국은 기독교의 참되고 결정적인 의미가 발 견되리라는 가정이 있다. 다양한 해석이 계속되면 결국 그 밑에 있는 암 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학적 탐구는 현대 성경 비평의 발전 전체와 거의 동시에 일어 난 아주 복잡한 이야기이므로 그것을 다 논의하다가는 우리의 관심인 기 독론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이를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데, 현대의 수많은 기독론이 상당히 오해된 예수를 이 고대의 문학 적 모호성의 틀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헛된 희망에서 제시되었기 때문 이다.

28

기독론


유명하지만 잘못 방향지워진 “역사적 예수 탐구”( quest Jesus ) 는

for the historical

19세기에 바로 이런 토대 위에서 시작되었다.19)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는 “예수의 생애”( the lives of Jesus ) 가 출발점으로 삼는 세 가지 전 제가 있다. 첫째로, 온전한 인성 ( 人性 ) 과 온전한 신성 ( 神性 ) 을 가진 단일 한 인물을 말하는 칼케돈적 그리스도는 경건한 상상에서 나온 허구라는 가정이다. 만일 이에 대한 지지가 바울에게서 발견된다면, 이는 기독론 이 없는 복음서들의 단순한 예수와 바울의 엄청난 “신 - 인”( the God - man )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자유주의 개신교의 가정을 강화해 줄 뿐 이라는 것이다. 이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운동을 통해 모든 경건과 신학 의 배후로 들어가 보려고 한 것은, 이 경건과 신학이 예수님의 어떠하심 과 하신 일들을 밝혀 주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게 한다고 여겨졌기 때 문이다. 둘째로, 이 “예수의 생애”의 저자들은 그들의 자료가 전통적으 로 사용된 것과 전적으로 다르다고 가정했다. 19세기에도 전통적인 그 리스도인들은 4복음서를 일종의 “퍼즐 조각”으로 보고, 그 조각들을 가 지고 조화로운 그림을 맞추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성서 비평의 등장과 함께 먼저 요한복음서가 그 사용하는 용어와 사유 형식이 다르다는 이 유에서 다른 복음서들과 상당히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뒤에는 공 관복음서들도 비판적으로 풀고 아주 급진적이고 새로운 방식으로 조각 조각 파편화했다. 이 탐구는 이 모든 작업 배후에 있는 세 번째 전제를 형성한 질문에 답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즉, 자신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별로 19) 이런 움직임의 문맥에 대한 간단한 입문은 Alec Vidler, The Church in an Age of

Revolution: 1789 to the Present Day (Harmondsworth: Penguin, 1961)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역사물은 아직도 Albert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 W. .. Montgomery, trans. (New York: Macmillan, 1948)이다. 그러나 Werner Georg Kummel, The New Testament: The History of the Investigation of Its Problems , S. McLean Gilmour and Howard C. Kee, trans. (New York: Abingdon, 1970)에도 이에 대한 흥미 로운 이해가 나타나 있다.

서론

29


메시아같이 행동하지 않은 인물에 대해 복음서들이 보여주는 역설을 해 결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이 역설이 이 운동의 실패를 증명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자의식 ( 自意識 ) 은 복음서 독자들에게 아주 숨겨져 있거나 복음 서 기자들에 의해 상당한 유보를 가지고서 다루어지고 있어서, 19세기 “예수의 생애”의 저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조작해서 그에게 부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탐구를 비판하여 파괴하면서 또 자기 나 름의 탐구를 시도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 Albert

Schweitzer ) 도

아주 솔직하

게 인정하기를, 예수라는 인물을 생동감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증오와 사랑을 그에게 부여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결국 소위 역 사적 예수가 점점 더 “예수의 생애”를 쓰는 19세기 자유주의 개신교 학 자와 비슷해 보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슈바이처는 아주 적절한 어구 를 써서 이를 표현하기를, 그들은 인류사의 깊은 우물을 내려다보다가 그 밑바닥에 반영된 자신들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이렇게 고대의 문 학적 모호성 안에 감추어진 예수님은 결국 독일의 합리주의적 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이 탐구가 시작되던 때의 그 의기양양함 과 그 실패에 따라 나온 절망감을 다 감지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여태 까지 수수께끼같이 가려졌던 예수님의 참 모습이 드러나고 설명될 듯 싶었다. 그러나 결국엔 그와 그에게서 나온 신앙은 이전보다 더 불확 실해졌다. 또한 공교롭게도 이 실패는 유럽 문화의 근본적 전환기와 제1차 세계 대전 개시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다. 그래서 유럽에는 자 유주의 개신교의 잔해만 남았는데, 미국에서는 1930년대의 대공황 전 까지 자유주의 개신교가 계속 성행했다. 이런 신학적 상황에서 바르트 주의 ( Barthian­ism ) 와 다양한 관점이 나타났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기 독교 신앙이

( 계속되는 역사적 성찰과 날카로운 비평 도구의 사용 이후에도 아직도 불분명

하고 수수께끼같이 남아 있는 )

30

기독론

그 인물과 다시 연관될 수는 없다는 인식이었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데이비드 웰스 지음 | 윤석인 옮김 | 476쪽 | 20,000원

이천 년 전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를 부르셨던 예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절

수님은 과연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과 일치하는

대 진리나 윤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웰스는 이 러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어떻게 기독교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이 세상에서의 선교적 사명을 완수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보여 준다.

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신학적 작업이 전통적 신학에 입각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구분 짓는

로 인정받고 있는 데이비드 웰스 ( David F. Wells ) 교

알리스테어 벡·싱클레어 퍼거슨 지음

수는 이 책에서 칼케돈 회의의 신앙고백에 충실

영향력 있는 목회자인 두 저자는 오랜 목회 경 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이 성경을 전체적으로 바

한 입장을 견지하며 개혁신학에 입각한 기독론을 진술하고 있다.

라보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있는 일곱 가지 핵심적인 속성을 살펴보도록 안내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시선을 집중하게 되고,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신학의 다른 분야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를 바탕 으로 기독론을 밝혀 주고, 신약 성경 시대로부

저스틴 홀콤 지음 | 이심주 옮김 | 280쪽 | 13,000원

분야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설명하는 지은이의

과거에 있었던 기독교 공의회와 이를 통해 작성

탁월성은 기독론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보여 줄

된 신조와 신앙고백을 살펴보는 것은 그리스도

것이다.

인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이 책은 독자들을 교 회 역사의 과거로 안내하여 당시의 역사적·신학적 배경을 소개하 고, 교회가 어떻게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애썼는지 개괄적 으로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정통 기독교 교리가 형성된 역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단을 알면 교회사가 보인다

데이비드 웰스 지음 | 이승구 옮김

신조를 알면 교회사가 보인다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성 가운데 한 사람으 로서 신학과 교회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과 학의 여러 학문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우리 시대 의 세속적 문화와 복음주의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해 결책을 제시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솜씨를 보여 준 다. 대표작으로는 4부작 『 신학 실종 』 , 『 거룩하신 하나님 』 , 『 윤리 실종 』 , 『 위대하신 그리스도 』 , 그리고 그 완결판 『 용 기 있는 기독교 』 와 대안편 『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 ( 이상 부 흥과개혁사 역간 )

T h e P e r s o n o f C h r i s t A Biblical and Histor ical Analysis of the Incar nation

옮긴이

이승구

기독론 그 리 스 도 는

누 구 신 가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과 ( B.A.  ) 를 졸업하고, 서울대학 교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가치 교육에 관한 논문으로 석 사 학위 ( M.Ed. ) 를 받았다. 합동신학대학원 ( M.Div. ) 을 졸 업하고, 영국의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교 신학부에서 신 학 석사 ( M.Phil.,

1985 ) 와

신학 박사 ( Ph.D.,

1990 )

학위를 받

았다. 미국의 예일 대학교 신학부에서 연구원 ( Research Fellow, 1990~1992 ) 으로

저스틴 홀콤 지음 | 이심주 옮김 | 272쪽 | 13,000원

있다가 1992년에 귀국해 웨스트민

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 1992~1999 ) 와 국제신학대학원대학

데이비드 웰스 지음 | 이승구 옮김

교회는 교회를 위협했던 이단들과 싸우며 참된 진리를 지켜 왔다. 이 책은 과거에 있었던 주요

교 ( 1999~2009 ) 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현재 합동신학 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있다. 개혁신학을 전문적

이단들의 핵심 사상과 그들이 이단으로 불리게

으로 연구하는 학자로서 수많은 저서와 역서를 냈다.

된 과정을 간명하게 다루는데, 이를 통해 독자들은 이단들의 역사 적·사상적 뿌리는 물론이고 바른 교리가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 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등 많은 저서가 있다. 현재 고든 콘웰 신학

교의 조직신학 및 역사신학 교수로 있다.

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논의된 기독론을 포괄적 이면서도 명료하게 서술해 주는 등, 신학의 여러

데이비드 웰스 ( David F. Wells )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지은이

ΙΧΘΥΣ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현대 개혁주의 조직신학 분야에서 탁월한 대변자

| 차수정 옮김 | 208쪽 | 10,000원

기독론

위대하신 그리스도

ISBN 978-89-6092-407-9 www.rnrbook.com 값 16,000원


Turn static files into dynamic content formats.

Create a flipbook
Issuu converts static files into: digital portfolios, online yearbooks, online catalogs, digital photo albums and more. Sign up and create your flip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