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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under the title
Preaching Christ from Ecclesiastes by Sidney Greidanus
Published by Wm. B. Eerdmans Publishing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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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발행일 2025년 1월 1일
지은이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옮긴이 전의우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5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 332-7752 Fax. 02 )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94295-28-0 (94230 ) 978-89-6092-900-5 (94230 ) (세트)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서문┃
1976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델타에서 목회하면서 전도서
를 연속으로 설교했다. 그때 어느 은퇴 목사가 이런 하나님 중심의
설교 한 편을 듣고 나를 찾아와 말했다. “시드니 목사님, 설교 참 좋
았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하신 그런 설교라면, 랍비가 회당에서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나는 이 질문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나
이 질문 덕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랍비
와 내게는 구약이 있다는 점이 같다. 더욱이 지혜는 “세상의 관습적
‘질서’”에 대한 숙고다( 1장을 보라 ). 그러므로 지혜 문헌의 메시지는
교회에서 전하든 회당에서 전하든 내용은 같을 것이다. 그렇다. 그래
서 내가 했던 설교를 랍비가 회당에서 했더라도 문제가 없었겠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기독교 설교”를 한 것이 아니고
“구약 설교”를 한 것인가? 1) 나는 구약을 설교할 때, 그 구절이 이제
신약의 맥락에서도 기능한다는 점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는가? 기독
1)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이것을 깊이 있게 구별했다. “구약 본문에 대한 기독교의 선포는 구약 설교가 아니다.” Edmund Clowney, Preaching and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61), 75. 참고. Graeme Goldsworthy,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The Application of Biblical Theology to Expository Preaching (Grand Rapids: Eerdmans, 1988), 195,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모든 성경 계시의 목적, 곧 그리스도 및 그분의 사역과 연결해서 전하는 데 궁극적인 관심을 두어야 한다. 내가 마치
예수가 오시지 않은 것처럼 성경의 한 부분을 설교한다면, 과연 기독교 설교자로서 정직성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교 설교자의 설교는 분명히 기독교적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후, 이 물음을 깊이 연구할 기회가 있 었다. 그 연구의 결과물이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
인가』(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A Contemporary Hermeneutical Method ) 였다. 나는 구약의 본문에 기초한 설교는 단순히 하나님 중심
설교에 그쳐서는 안 되며,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교부들은 이것을 잘 알았으나, 불행히도 그리스도 중심의 설 교를 위해 알레고리 해석 방법을 취했다. 예를 들면, 교부들은 전도
서에 자주 나오는 후렴구인 먹고 마시는 것을 누리라는 말을 성찬에
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행위로 해석하여 설교했다. 암브로시
우스는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구절을( 전
4:12 ) 설교하면서 삼위일체에 연결했다.2)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을 위
해 알레고리 해석을 활용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다. 알레고리 해석
은 알레고리에만 적용해야 하며, 알레고리 해석을 다른 장르에 적용 하는 것은 독단적이고 주관적이다. 알레고리 해석은 성경 저자의 의
도를 심하게 왜곡한다.
지혜 문헌에는 메시아 약속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모형만 드물게
2)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30-31. Svend Holm-Nielsen, “On the Interpretation of Qoheleth in Early Christianity,” VT 24/2 (1974) 175, “코헬렛에 대한 히에로니 무스의 이해는……그가 구약 본문을 해석하는 원칙과 동일한 원칙에 기초한다……그 원칙 이란, 문자적 해석 (interpretatio literalis, 인테르프레타티오 리테랄리스 )과 영적 해 석 (interpretatio spiritualis, 인테르프레타티오 스피리투알리스 )이다. 그러나 영적 해석 은……기독론적 해석에 해당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의 설교자들도 전도서의 알 레고리 해석을 활용해 그리스도를 설교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예. Parsons, “Guidelines,” BSac 160 (2003) 300은 혼인에 대해 설교하면서, 전 4:12의 세 겹 줄을 신랑과 신부와 그 리스도로 해석했다. 참고. Matthew Henry and Thomas Scott, Commentary on the Holy Bible, Vol. 3 (Grand Rapids: Baker, 1960 reprint), p. 413, “두 사람이 함께 세 겹 줄을 이룬다. 두 사람이 거룩한 사랑과 교제로 긴밀하게 연합하는 곳에, 그리스도가 그분의 성령으로 임하시고, 엠마오 마을로 향하는 두 제자와 친히 연합하셨듯이, 세 번째 줄이 되 신다. 이렇게 해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세 겹 줄이 완성된다.” 설교자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전 11:1)라는 구절을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물에 던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Percy P. Stoute, “Bread upon the Waters,” BSac 107 [1950] 223을 보라).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혜 문헌으로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가? 나는 특히 지혜 문헌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 설교하기에
대한 정의를 확대했다. 일반적으로 정의하면, 그리스도 설교하기란
그리스도라는 인성 그리고/또는 그분의 사역에 대한 설교다. 그리스
도의 사역은 빈번하게 속죄로 제한된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가
르침이라는 범주를 추가해 그리스도 설교하기의 정의를 확대했다.
예수는 “너희가 내 말[가르침]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라
는 말씀에서( 요 8:31 ) 자신의 가르침이 갖는 중요성을 친히 강조하
셨다. 그분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로 삼아……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명하실 때( 마 28:19-20 ), 자신의 가르침이 갖는 의
미를 강조하셨다. 나중에, 요한은 이렇게 기록한다. “지나쳐 그리스
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이 9절 ).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 설교하기”란 “본문의 메시지를 신약에 계시
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사역, 그리고/또는 가르침에서 절정에 이
르는 하나님 계시와 진정으로 통합하여 설교하는 것”이라고 정의 했다.3)
나는 구약과 교회사를 연구한 끝에, 구약의 메시지에서 신약의 예 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가는 일곱 가지 적절한 길이 있다고 결론 내 렸다. 그 일곱 가지 길은 구속사의 진행, 약속과 성취, 모형론, 유비, 통시적 주제, 신약 성경의 언급, 대조다. 설교자는 본문에 따라 그중 하나 이상을 활용해 그리스도를 설교하면 된다.
누구보다도 설교자와 신학생과 성경 교사를 위해 이 책을 썼다. 나
의 목적은 바쁜 설교자와 교사가 전도서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독려
3) Greidanus, PreachingChristfromtheOldTestament, 10.
하고 돕는 데 있다. 이분들이 이 책을 통해 전도서 설교와 교훈이라
는 건물을 지을 벽돌을 상당히 빨리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
해, 설교 본문이 되는 문학 단위,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 본문의 주
제 ), 이스라엘의 반응과 현대 교회의 유비( 목적 ), 본문의 주제와 신약
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다양한 방법, 설교의 주제와 목적, 본
문의 모든 절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강해 등을 쉽게 찾게 될 것이다.
설교자는 이 책을 활용해 전도서 시리즈 설교를 해도 좋다. 전도서
전반부 ( 1:1-6:9 ) 를 본문으로 일곱 편의 시리즈 설교를 하고, 후반
부 ( 6:10-12:8 ) 를 본문으로 일곱 편의 시리즈 설교를 하며, 에필로
그( 12:9-14 ) 를 본문으로 한 편의 설교를 하면 된다. 아니면 전반부와 후반부를 본문으로 각각 다섯 편씩 시리즈 설교를 해도 좋다. 성경
교사는 15회에 걸쳐 전도서 전체를 강의하면서 학생에게 각
장( 章 ) 의 ‘설교 강해’ 단원만 읽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독자들이 금방 눈치채겠지만, 전도서 각 문학 단위를 똑같은 기본
형식으로 다루었다. 이 형식은 내가 신학교 신입생을 위해 개발한
‘본문에서 설교까지 거치는 열 단계 과정’을 토대로 했다 ( 부록 1을
보라 ). 결과적으로, 각 장마다 동일한 양식이 되풀이되는데, 본문을
대하는 기본적인 해석학적-설교론적 접근법을 반복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다. 첫째, 문학 단위를 찾아내고, 각 문학 단위의 배경( 문맥 ) 을 확인한다. 둘째, 본문의 구조( 흐름 ) 파악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학
적 특징을 분석한다. 본문이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을 말하는지 확인 하고 나면, 일곱 가지 방식으로 본문의 메시지가 어떻게 신약의 예
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설교 주제
및 목적, 설교의 필요성( 문제, 목표 ) 을 분명하게 정할 수 있고, 적절한
설교 형식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각 장은 ‘설교 강해’ 단원으로 마무
리된다.
‘설교 강해’ 단원에서는 회중이 이해하고 따라오도록 최대한 구어
체를4) 사용했으며,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도 장절을 먼저 제시함으
로써( 회중은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눈으로 직접 확인할 때 훨씬 빨리 이해
한다 ) 설교 모델을 제시하려 한다. 강해가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대부
분의 인용과 복잡한 논쟁과 전문적인 부분은 각주로 처리했다. 본문
에 포함된 절은 거의 모두 강해했다. 그렇더라도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과도한 정보를 제시하지 않도록 선택의 지혜를 발휘해
야 한다. 설교 중에 어디서, 어떻게 신약의 그리스도와 이어질지 제 시했다. 이런 연결은 제안일 뿐이다. 실제 설교문을 작성할 때, 설교
자는 설교 어디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옮겨 갈지를 성령의 인도
에 따라 결정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교에서 설정할 목표와 설교
의 필요성과 관련해서 적용을 위한 짧은 제안을 제시했다. 실제 설
교에서는 설교를 듣는 회중의 상황에 맞는 예화와 구체적인 제안으
로 적용에 살을 붙여야 한다. 부록에는 강해 설교 모델 하나, 전도서
3장 1-15절 묵상, 전도서 9장 1-12절 설교 한 편을 실었다.
특별한 언급이 없을 경우, 인용한 성경은 NRSV다( NRSV가 TNIV보다
히브리어 성경에 더 가깝다. 한글 번역은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개역개정을 따랐다 ).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 강조는 고딕체로 표기했다. 특별한 언급이
없을 경우 고딕체 부분은 내가 강조한 부분이다. 다른 저자의 저서
를 인용할 때도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히브리어 음역은 통일하였다. 각주의 참고문헌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참고문헌’ 단원에 없는 경
우 각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설교자가 이 책에 자극 받아 그동안 소홀히 했던 전도서를
4) 구어체의 여러 특징 중에 몇몇을 들면 다음과 같다: 간결한 문장, 능동태, 짧지만 생생한 단 어, 강렬한 명사와 동사, 구체적인 어법, 현재 시제를 사용한 서술, 성경 장절을 먼저 제시하 여 인용, 청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질문, 청중을 산만하지 않게 하는 성별 포괄적 호칭 사용, 반복법과 평행법, 다음을 보라. Mark Galli and Craig Brian Larson, Preaching That Connects: Using the Techniques of Journalists to Add Impact to Your Sermons (Grand Rapids: Zondervan, 2004).
자주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이 날마다 지혜롭고 기쁘게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해 살도록 돕길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떡을 물위로 던
지듯”( 전 11:1 ) 이 책을 내어놓는다.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에서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전도서 설교하기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전도서는 성경에서 해석하기도 설교하기도 가장 어려운 책일 것
이다. 전도서가 이처럼 어려운 주된 이유는 구약학자마다 전도서와
관련된 몇 가지 핵심 문제에서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도서 저
자는 몇 사람인가? 전도서는 언제, 어디서, 왜 기록되었는가? 전도서
의 히브리어 문체 수준은 어떠한가? 전도서에서 시문 단원과 산문
단원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1) 전도서의 구조 또는 구조의 결핍은 어
떠한가? 전도서 메시지는 염세적인가 아니면 긍정적인가? 2) 두에인 개릿은 “어쩌면 지혜서 설교를 막는 훨씬 큰 장애물은 지혜서가 복
1) Whybray, Ecclesiastes, 16을 보라.
2) “저작 연대든, 저자든, 해석이든 전도서와 관련해 의견이 분분하지 않은 부분이 거의 없다.” Gordis, Poets,Prophets,and Sages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71), 326.
음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보는 많은 사람의 회의적 시각일 것이다”라
고 덧붙인다.3) 많은 설교자가 전도서를 설교 일정에서 빼는 것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개정판 공
동성서일과』( Revised Common Lectionary ) 는 전도서 본문 낭독을 두 번
만 배정한다. 송구영신 예배에 전도서 3장 1-13절( ABC년차 ) , 8월
3일에 가장 가까운 주일에 호세아 11장 1-11절의 대체 본문으로
전도서 1장 12-14절과 2장 ( 1-7, 11, ) 18-23절을 배정한다( C년차 ). 4)
불행히도, 전도서를 설교 일정에서 뺀다면 교회로서는 큰 손실이다.
전도서 설교의 가치
전도서는 인간의 삶을 독특한 시각으로 본다. 그리고 이 시각은 오
늘의 교회에 더없이 적절하다.5) 이언 프로반은 이렇게 말한다. “우
리가 내세의 삶보다 이생의 삶에 집중할 때, 참으로 전도서는 시대
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의 사고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났던 불균
형을, 이따금 마치 기독교를 삶의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를 기다리는
문제인 것으로 보았던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기여한다.”6) 샌디와 기
3) Garrett, “Preaching Wisdom,” 108.
4) 『개정판 공동성서일과』가 전도서를 이렇게 최소한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몇몇 유대교 공동 체가 숙코트(장막절)에 전도서 전체를 읽는 관습과 비교해 보라. 유대인이 숙코트에 전도서 를 읽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전도자는 기뻐하라고 말하고, 기쁨이 숙코트의 분위 기다……전도자는 인생의 덧없음을 선포하며, 숙코트의 임시 오두막(초막)이 이것을 충분히 상징한다. 그리고……가을은 인간의 필멸성을 상기시키는 계절이다.” Michael Fox, Ecclesiastes, xv.
5) Ellen Davis, Proverbs,Ecclesiastes,SongofSongs, 160, “마르틴 루터는 ‘이 고귀한 작 은 책’을 매일 읽어야 한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이 감상적인 종교성을 아주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6) Provan, Ecclesiastes, 42. 참고. Brown, Ecclesiastes, 21, “강단에서 흔히 설교하는 내용 과 반대로, 삶은 단지 유익한 경험의 여정이나 기쁨의 순례가 아니다. 삶은 필연적으로 절망
이나 환멸과 맞닥뜨리고, 죽음과 대면하는 단판싸움이며, 부정의 길(via negativa)다. 간단 히 말해, 전도서는 ‘해 아래에서’ 사는 삶과 하나님 아래에서 사는 삶의 전 영역을 다룬다. 전 도자의 신학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며, 해방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이생의
스는 이렇게 말한다. “전도서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자산에 속한다.
왜냐하면 전도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르침을 전체적
인 성경 계시에 비추어 지속적으로 평가하고 바로잡으라고 촉구하
기 때문이다……전도서의 현자를 깊이 살펴보면, 인간의 자유와 자
족에 대한 신화가 드러나고, 뒤틀린 세상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궁극적인 양극성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7)
더욱이 전도서는 세속주의가 낳는 여러 유혹을 다루기 때문에 특
히 현대 문화에 적절하다. 릴런드 라이켄은 이렇게 말한다. “[전도서
는] 성경에서 가장 현대적인 책이다. 전도서는 소유욕이 강하고 쾌
락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사회에 대한 공격적인 풍자다. 전도서
는 지식과 부와 쾌락과 일과 명예와 섹스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얼빠
진 추구를 폭로한다.”8)
그러나 설교자들이 전도서를 진실하게 설교하려면, 먼저 주석가가
200년 넘게 씨름한 여러 어려움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9) 여기서는
먼저 전도서 해석과 관련된 어려움을 탐구하고, 그다음에 전도서 설
교와 관련된 어려움을 살펴보겠다.
거친 물결을 헤쳐 나가는 항해를 위한 신학이다. 코헬렛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 모든 것 을……거의 말하지 못한 설교자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7) D. Brent Sandy and Ronald L. Giese, Cracking Old Testament Codes: A Guide to Interpreting the Literary Genres of the Old Testament (Nashville: Broadman and Holman, 1995), 271.
8) Ryken, “Ecclesiastes,” 274. 참고. Garrett, “Preaching Wisdom,” 119, “전도서는……인 간이 붙들고 살아가는 이념과 거짓 희망을 벗겨 내고, 사람을 옭아매는 부와 권력과 교육에 대한 추구의 끈을 푼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독자의 눈을 하나님에게로, 영원한 의미와 생명 의 유일한 희망 쪽으로 설득력 있게 돌려놓는다.”
9) Craig Bartholomew, Reading Ecclesiastes: Old Testament Exegesis and HermeneuticalTheory, 31-205에서 제시하는 폭넓은 역사적 개괄을 보라.
전도서 해석의 어려움
전도서 해석과 관련된 다섯 가지 주요 문제를 차례로 살펴보겠다.
다섯 가지 문제는 지혜 문헌의 성격, 전도서의 역사적 배경, 전도서
의 장르와 형식, 전도서의 구조, 전도서의 전반적인 메시지다.
지혜 문헌의 성격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려면, 먼저 본문의 구체적인 장르
를 생각해야 한다. 히브리어 내러티브, 시편, 예언, 묵시 문헌처럼, 지
혜 문헌도 구체적인 문학 장르다. 그러므로 핵심 문제는 이것이다.
지혜 문헌의 특징은 무엇인가? 엘리자베스 액트마이어는 이렇게 말 한다. “지혜는 실제적인 경험의 결과며, 자연계와 인간 세계에 대한
세밀한 관찰의 결과다. 모든 혼란스러운 경험 속에서, 지혜는 세상의
통상적인 ‘질서’, 곧 인간과 자연 현상이 통상적으로 행동하는 방식
을 찾아낸다. 그러므로 지혜는 인간이 주변 세상과 조화롭게 행동하
는 법을 알도록 이러한 ‘질서’를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다.”10) 로더
도 비슷하게 말한다. “지혜는 삶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과 관련 있다.
지혜로운 행동이란 사람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 속으로 조화롭
게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스스로 이 질서 속으로 들어가
도록 규정하는 삶의 규범이 지혜의 가르침이다.”11)
지혜와 구속사의 관계
여러 성경 장르와 대조적으로, 지혜 문헌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역
10) Achtemeier, Preaching from the Old Testament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89), 166. 참고. von Rad, Wisdom in Israel, 92-95; Bernhard W. Anderson, ContoursofOldTestament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1999), 264-267.
11) Loader, Ecclesiastes, 4.
사를 다루지 않는다. 그레임 골즈워디는 이를 두고 지혜가 “하나님
과 현실을 보는 자기 충족적이고 대안적인 방식”이라는 말은 아니라 고 한다. 골즈워디에 따르면, 지혜란 “구원사의 관점을 보완한다. 실
제로, 여기서 나아가 지혜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세상을 살아가는
구속받은 사람의 신학이라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지혜는 구원사만 큼이나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이다.”12)
전도서는 창세기 앞부분에 기록된 구속사의 시작과도 분명히 관
련 있다. 창세기 1장이 하나님을 주권적 창조주라고 가르치듯 전도
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다( 3:14; 8:17 ). 창세기가 하나님이 태초
에 시간을 정하시고( 낮과 밤, 창 1:3-5 ) 계절이 있게 하셨다고 가르치듯
이( 8:22 ), 전도서는 하나님이 시간을 정하시고( 전 3:1-8 )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라고 가르친다( 3:11 ). 창세기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선하게( 토브, 7회 )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듯이 전도
서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선( 토브 ) 을 찾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예.
2:24; 3:12-13; 5:18 ). 창세기가 하나님이 인간을 정직하게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듯이 전도서도 그렇게 가르친다( 7:29 ). 창세기가 인간은 하나
님과 사귀도록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듯이( 창 1:27; 2:15 ) 전도서도 그렇
게 가르친다( 전 12:13 ). 창세기는 더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께 거역함
으로써 이 관계를 단절시켰고( 창 3:6 ), 뒤이어 하나님을 피해 숨었으
며( 3:10 ),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났고( 3:24 ), 하나님이 저주하신 창
조 세계 속에 살아가는 형벌을 받았는데( 3:24 ) 거기서는 의미 있는
노동이( 2:15 ) 수고가 되고( 3:17-19 ) 삶이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끝날 것
이라고 말한다( 3: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전도서도 인간
이 하나님과 멀어진 현재 상태를( 전 5:2 ), 땅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를( 1:15; 7:13 ), 인간에게 부가된 수고의 짐을( 1:3; 2:22 ), 죽음의 비극을
12) Goldsworthy, GospelandKingdom, 142.
비슷하게 말한다 ( 3:20; 12:7,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
니” ). 더욱이, 창세기는 악이 인간의 마음에 거하고( 창 6:5 ), 죄가 다스
려지지 않으며( 4:7 ) 살인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첫째 희생
자의 이름이 적절하게도 아벨( 4:9, 헤벨 =헛됨 ) 이다. 전도서도 이와 비
슷하게, 악이 인간의 마음에 거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 7:20, 29; 8:11; 9:3 ). 이것이 전도서가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헤벨, 1:2; 12:8 ) 라고 거듭
외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13)
전도서는 이렇게 창세기와 연결되고 구속사의 시작과도 연결된다.
그런데도 전도서는 하나님의 구속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두
에인 개릿은 이러한 대조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창세기는 어떻게
본래 생명과 낙원과 무죄 상태에 있던 인간이 죄와 수고와 필멸성에
빠졌는지를 들려준다. 전도서는 이제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이 어떻
게 살아야 하는지 들려준다.”14) 윌리엄 브라운은 이렇게 말한다. “지
혜 문헌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역사성’이다. 놀랍게도, 잠언과 욥기와
전도서에는 출애굽, 언약, 가나안 정복 같은 성경 역사의 큰 주제가
없다. 따라서 지혜 전통은 하나님의 역할 가운데 해방자와 입법자의
역할 또한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조와 인간이 그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강조한다.”15)
그러나 이것은 전도서에 하나님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만사를 성취하시는”( 전 11:5 ) 위대한 창조주시다( 12:1 ). 하나
13) 다음을 보라. Charles G. Forman, “Qohelet’s Use of Genesis,” JSS 5 (1960) 256-263; Robert Johnson, “Confessions of a Workaholic,” CBQ 38 (1976) 22; Roger Whybray, “Qoheleth as a Theologian,” 247-248; Walter Kaiser, Ecclesiastes, 3637; Arian Verheij, “Paradise Retried: On Qohelet 2:4-6,” JSOT 50 (1991) 113-115; David Clements, “The Law of Sin and Death: Ecclesiastes and Genesis 1–3,” Themelios 19/3 (1994) 5-8.
14) Garrett, Proverbs,Ecclesiastes,Song of Songs(『NAC 잠언·전도서·아가』, 부흥과개 혁사 역간, 2019), 279.
15) Brown, Ecclesiastes, 11-12.
님이 시간을 정하셨고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
셨다”( 3:11 ). 하나님이 인간에게 호흡을 주셨고( 12:7 ), 인간을 “정직하
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내었다”( 7:29 ). 하나님이 “곤고한
날”뿐 아니라 “형통한 날”도 지으셨다( 7:14 ).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
평생”을 주시고( 5:18; 8:15 ), “재물과 부요”를 주시며, 그것들을 “능히
누리게 하시며”,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다”( 5:19; 6:2 ). 하나님
이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고( 2:26 ), “지혜자들의 말씀들”도 주
신다( 12:11 ). 하나님은 사람들이 삶을 누리길 원하시는데, “하나님이
네가[사람들이]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이다( 9:7 )
하나님은 사람들을 시험하시고( 3:18 ),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
하시며”( 5:4 ), 진노하기도 하신다( 5:6 ).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행동의
책임을 물으시고,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
신다”( 3:16; 11:9; 12:14 ).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는 날 동안 “기뻐해야”
하고( 11:9 ), 자신의 “창조자”를 기억해야 하며( 12:1 ), “하나님을 경외해
야” 하고( 3:14; 5:7; 7:18; 8:12 ), “그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12:13 )
골즈워디에 따르면, 지혜도 구원사처럼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두
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지혜의 세 측면이 신약에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첫째, 복음서 내러티브는 예수를 지혜자로 묘사한다.
예수가 하신 많은 말씀이 형식과 내용에서 이스라엘 지혜 교사의 전 통을 따른다. 둘째, 예수는 여기서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주장하신다. 셋째, 어떤 신약 저자는……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의미를 구체적인 지혜 사상에 비추어 이해한다.”16)
모순
여러 주석은 전도서에 담긴 모순을 전도서의 문제로 지적한다. 전
16) Goldsworthy, GospelandKingdom, 149.
도자의 말을 서로 비교해 보자. 전도자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
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라고 말하
고( 9:4 ), 다른 곳에서는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
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라고 말
한다( 9:4 ). 같은 단원 안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나온다. 전도자
는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
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8:12-13 ) 라고 말
한 후에 곧바로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
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라고 말한다( 8:14 )
그러나 모순은 지혜 문헌에서 자연스러운 요소다. 삶이 복잡하기
때문이다.17) 모순된 충고의 아주 분명한 예가 잠언 26장 4-5절에
나온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때로는 미련한 자에게 대답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고 하다가 때
로는 미련한 자에게 대답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한다.18) 전도서에 모
17) 어떤 학자들은 모순을 시간이 흐르거나 환경이 바뀌면서 생각이 변한 것으로 설명한다. Crenshaw, Ecclesiastes, 49, “나는 전도서의 긴장이 대부분 평생에 걸친 탐구의 열매라 고 믿는다. 환경 변화에 따라, 기존 지혜와 자신이 과거에 품었던 생각에 대한 반응이 달라 진다……그러나 모순은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만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은 일 상생활의 모호함과 이것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내포하는 비합리성을 표현한다.” 어 떤 학자는 모순을 근거로 전도서의 저자가 여럿이라고 주장한다(아래 27-31쪽을 보라). 18) 비슷한 ‘모순’은 속담에도 있다. 우리는 때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고 말 한다. 그러나 때로는 “늦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이 적절하다. 때로는 “망설이 는 자는 기회를 놓친다”라고 말하면서도 때로는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라고 말하 거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라고 말해야 한다.
순이 있으니 전도서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보다 이 모순을 활용해
저자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래 43-44쪽의 ‘병치’ 단원
을 보라 ) 19) 레이먼드 밴 리레이우언이 말했듯이, “성경의 지혜는 우
리에게 모호한 부분과 ‘모순’을 제거하거나 ‘조화하라’라고 강요하
지 않고 삶의 미묘한 차이와 복잡함을 깊이 생각하라고 말한다. 우
리에게 지혜로워지라고 말한다.”20)
전도서의 역사적 정황
지혜는 “세상의 통상적 ‘질서’”를 가르치기 때문에,21) 저자와 독자
의 역사적 배경을 정확히 밝히는 것이 성경의 다른 장르만큼 중요하
지는 않다. 그럼에도, 전도서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을 어느 정도 알
면, 설교자가 메시지를 이해하기 편하고 메시지의 본래 의미를 파악
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해답을 찾아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전도서는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기록했는가?
저자(들)
전통적으로, 성경학자들은 솔로몬왕을 전도서의 저자로 보았다. 그러나 루터는 이러한 단순한 판단에 의문을 품었다.22) 솔로몬이 전
도서 저자라면, 왜 잠언 1장 1절에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
19) 참고. Fox, A Time to Tear Down, 3, “전도서의 모순은 실제적이고 의도적이다. 이 모순 은 해소 대상이 아니라 해석 대상이다.” 1-26의 ‘모순을 읽는 법’(On Reading Contra- 다.” 모순을 Reading Contra- On dictions) 단원 전체를 보라. 같은 저자의 Qohelet and His Contradictions 외에 “The Inner Structure of Qohelet’s Thought”도 보라.
20) Raymond C. Van Leeuwen, “Proverbs,” in ACompleteLiteraryGuidetotheBible, eds. Leland Ryken and Tremper Longman (Grand Rapids: Zondervan, 1993), 266.
21) 위 22쪽을 보라.
22) “아마도 마르틴 루터가 최초로 솔로몬이 전도서 저자가 아니라고 보았을 것이다. 루터는 전 도서를 ‘십중팔구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에우에르게테스 도서관의 수많은 책에서 내용 을 빌려 온 일종의 탈무드’라고 했다. J. Stafford Wright, “Interpretation of Ecclesiastes,” EvQ 18/1 (1946) 19.
몬의 잠언이라”라고 자신을 직접 밝혔듯이 전도서에서도 그렇게 하
지 않았는가? 그 대신에, 전도서 1장 1절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라고 되어 있다. 전도서에는 저자가 “전도자”,
곧 코헬렛23)으로 나온다. 솔로몬이 전도서 저자라면, 왜 솔로몬 본인
이나 편집자가 솔로몬의 이름을 숨기려 했을까? 트렘퍼 롱맨은 솔로
몬이 필명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며 이렇게 주장한다. “실제 저자가
자신을 솔로몬과 연결하는 동시에 실제 인물인 솔로몬과 거리를 유
지하려고 코헬렛이라는 별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것
은 문학적 목적과 소통을 위해 솔로몬이라는 인물을 채용했음을 암
시하는 방식이다. 간단히 말해, 코헬렛이라는 별명을 사용한 지혜자
는 세상에서 의미의 길을 탐구하면서 솔로몬인 체한다.”24)
루터가 솔로몬이 전도서의 단일 저자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
은 이후로, 무수한 추측이 쏟아졌다. 전도서의 모순과 빠른 관점 변
화를 근거로, “한때 전도서의 저자가 둘, 셋, 심지어 아홉이라고 주장
하는 학자까지 나왔다.”25) 이 모든 복수의 저자가 서로 다른 목적으
로 전도서 저작에 참여했다면, 설교 본문의 구체적인 메시지를 찾아
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떤 배경에서 본문의 메시지를 결정해
23) 70인역은 히브리어 코헬렛을 엑클레시아스테스로 번역했다. 고전 헬라어에서 엑클레시아스 테스는 ‘엑클레시아에 앉아 있는 사람 또는 엑클레시아에서 말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엑 클레시아란 지역 시민 회의를 뜻한다. 전도서에만 나오는 코헬렛이라는 히브리어는 ‘모 이다’라는 뜻의 동사 카할의 분사형이 거의 확실한데, 동사 카할은 명사 카할(‘총회’)과 연 계된다(70인역에서 카할은 엑클레시아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Whybray, Ecclesiastes, 2.
24)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4-5. 일부 주석은 여전히 솔로몬을 전도서의 저자로 본다(예. Kaiser, Ecclesiastes [1979], 25-29; 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 [1993], 264, 266). 솔로몬이 전도서의 저자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다음을 보라. Young,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347-348; Kidner, Wisdom of Proverbs,Job,andEcclesiastes, 105;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4-8.
25) Kidner, Time to Mourn, 14. D. C. Siegfried, “Prediger und Hohelied,” in W. Nowack, Handkommentar zum Alten Testament (Göttingen, 1898)는 전도서의 저 자를 아홉 명으로 주장했다.
야 하겠는가?
현대 설교자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전도서 저자가 한 명이며,26) 여
기에 12장 8-14절이나 12장 9-14절의 에필로그와 아마도 1장
1절, 1장 1-2절, 1장 1-3절,27) 1장 1-11절 28) 중 어느 하나에 해당
하는 프롤로그를 쓴 편집자가 한두 명 있었을 것이라는 합의가 이루
어지고 있다( 1인칭으로 기록된 몸통 부분과 달리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3인칭으
로 기록되었다 ). 이제 핵심 문제는 일부의 주장대로 최종 편집자가 전
도자의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느냐( 그리고 깎아내리느냐 ) 다. 이
물음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전도자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
석하느냐가 상당 부분 결정된다. 예를 들면, 롱맨은 소위 ‘테두리 서
술자’( frame-narrator ) 가 전도자의 가르침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고
주장한다.29) 제리 셰퍼드는 롱맨의 “테두리 이론”을 받아들이지만, 이것을 확대해 전도자의 지혜 설교를 욥의 친구들의 연설에 비유
한다. “전도서에 나오는 코헬렛의 긴 자전적 연설은 하나님의 말씀
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책에 포함되어 있다.”30) 전도자는 열두
장에 걸쳐 자신의 지혜를 제시한다. 그러나 전도자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되는 두 절은( 12:11-12 ) 그의 지혜를 단번에 반박한다. 그리고 전
26) “[역사적, 비평적 접근에서는] 솔로몬이 전도서의 저자가 아니며, 전도서가 BC 3세기 무렵 에 기록되었다는 데 일반적인 합의에 이르고 있다. 20세기 내내, 에필로그를 제외한 전도서 의 기본적 통일성에 대한 동의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Bartholomew, Reading Ecclesiastes, 81. 참고. 104.
27) 이러한 다양한 입장을 견지하는 주석에 대해서는 Whybray, Ecclesiastes, 35-36을 보라. 28) 동의.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7-9, 20-21, 37, 57-59.
29) 앞의 책, 38을 보라. “에필로그는 코헬렛의 가르침에 대한 두 번째 지혜자의 요약으로 시작 한다. 이제는 익숙한 ‘헛되다’라는 후렴구를 인용함으로써, 테두리 서술자는 자신이 코헬렛 의 궁극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제시한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때부터, 테두리 서 술자는 자신의 평가를 진행하며, 그의 평가는 찬사로 시작해 의심으로 옮겨가고 마침내 비 판에 이른다.” 앞의 책, 281에서 전도서 12:12에 대한 부분도 보라. “본질적으로, 그는 아 들에게 코헬렛의 생각은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말한다.” 참고. Longman, “Comparative Methods in Old Testament Studies: Ecclesiastes Reconsidered,” TSF Bul 7 (1984) 5-9, 특히 8-9; Dillard and Longm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252-254. 30) Shepherd, “Ecclesiastes,” 269.
도자는 더 이상 항변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31) 이언 프로반의 주장
이 타당하다. “전도자의 방대한 말씀을 전부 인용한 후에 12장 8-12절의 저자가 단지 몇 마디 논평을 덧붙여 이를 의심하고 비판
하려 했다는 것은 ( 그것도 명확하게 하지도 못했다 ) 일반적으로 설득력이
없다.”32) 대부분의 주석처럼 전도자와 그 편집자가 한목소리를 낸다
고 생각해야 한다.33)
해석자에게 저자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여러 주
석이 전도자가 전통적인 성경의 지혜를 비판하고 반대한다고 추정
한다. 예를 들면, 로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전반적으로 낙
관적인 지혜 교사에 대한 전도자의 반대가 절대 수그러들지 않는다
고 결론 내려야 한다.”34) C. L. 서오는 전도자가 특정 시점에 “전복의
수사를 채용한다”라고도 주장한다.35) 또다시 전도자는 상자 속에 갇
히고, 자신의 지혜를 제대로 말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사실, 우리는
전도자가 어느 잠언을 전통적 지혜에서 인용했고 어느 잠언을 직접
지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마이클 폭스는 보다 열린 태도로 전
31) 예를 들면, 전도자에 대한 셰퍼드의 묘사를 보라. “전도자를 예컨대 신약 이전의 기독교 신 앙 변증가 또는 이런 측면에서 구약 신앙 변증가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도자는 전 도서에서 선지자들이 전했던 것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경고했던 내용인 경험적 탐구에서 나온 회의적이며 염세적인 지혜 철학과 더불어, 겨우 정통적일 뿐이고 생명도 없 으며 색채도 없고 아무런 실제적인 헌신도 없는 믿음을 대표한다. 앞의 책, 327.
32) Provan, Ecclesiastes, 33, n. 13. 참고. Eaton, Ecclesiastes, 40, “편집자가 전도서를 주 석을 덧붙여 내놓았을 가능성은 상당히 크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에 불만스러워 하는 사람 이라면 이렇게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래 아래 486-487쪽도 보라.
33) 참고. Garrett, Proverbs,Ecclesiastes,SongofSongs, 263, “테두리 서술자, 지혜, 전도 자 모두 가면을 쓰며, 우리는 그 가면 뒤에서 저자의 한목소리를 듣는다.”
34) Loader, Ecclesiastes, 82. 다음도 보라. R. Gordis, “Quotations in Wisdom Literature,” JQR 30/2 (1939) 123-147, 특히 132-139. 참고. Seow, Ecclesiastes, 40-41. 자세한 참고에 대해서는 Scott C. Jones, Qohelet’s Courtly Wisdom: Ecclesiastes 8:1-9,” CBQ 68 (2006) 211-212, n. 2를 보라. 반론. Fox, “Inner Structure of Qohelet’s Thought,” 226, “현재 유력한 접근법은 코헬렛이 구체적인 진술을 인용해 그것들을 논박하거나 수정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접근이다……인용했 든 안 했든 저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하는 말은 달리 보여 주지 않는 한 저자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다.” 아래 261-262, 330-331쪽도 보라.
35) Seow, Ecclesiastes, 244.
도자의 말을 경청한다. 폭스의 주장에 따르면, 전도자는 “전통적 지
혜의 가르침에 반대하거나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전도
자가 차이를 인정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전도자는 ‘전통적 지혜에
반대하면서 전통적 지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는 단지
전통적 지혜를 사용할 뿐이다.”36)
전도서의 원독자
내적 증거로 전도서가 의도하는 독자에 대한 실마리가 몇 가지 나
온다. 개릿의 주장에 따르면, “전도서는 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기록한 책이 아니었다. 반대로, 전도서의 원독자는 왕을 알현했
고 ( 8:3 ) , 지혜 추구에 몰두했으며 ( 1:12-18 ) , 부를 소유했거나 추구
했다( 5:10-17 ). 간단히 말해, 전도서의 첫 독자는 귀족이었다.”37) 와이
브레이는 이렇게 덧붙인다. “코헬렛은……유대교 신학자요 선생이
었으며, 그의 주된 목적은 진정한 믿음에 기초한 방법, 젊은 성인 남
성 독자가 강한 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방법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38)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
어다”( 5:1 ) 라는 전도자의 권면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이들은 예루살
렘과 성전 근처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내적 증거로 전도서의 원독자가 돈에 정신이 팔렸음도 드러난다.
전도서에는 상업 용어가 많이 나온다.39) C. L. 서오는 이렇게 결론
36) Fox, A Time to Tear Down, 275. 참고. Seow, 앞의 책, 250, “이러한 접근법의 약점은 전통적 지혜와 코헬렛의 지혜를 독단적으로 분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접근법은 때때 로 전통적 지혜의 개념을 실제로 ‘전통적 지혜’에는 없는 코헬렛의 말에서 끌어낸다.”
37) Garrett, “Preaching Wisdom,” 117. 참고. Huwiler, “Ecclesiastes,” 177은 추정 독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최저 생계 수준을 훨씬 웃도는 생활을 하며, 십중팔구 예루 살렘이나 근교에 사는 이스라엘의 젊은이다. 아마도 정부 관리, 사업가, 농장 소유주가 여기 에 포함되었을 것이다……관료 사회의 젊은 구성원이 주요 독자였을 것이다.”
38) Whybray, “Qoheleth as Theologian,” 245.
39) “케세프(돈), 오셰르(재산), 아쉬르(부), 스굴라(사유 재산), 사카르(급여, 보상, 배상), 나 할라(유산), 키슈론(성공) 같은 일반 용어 외에도, 생생한 상업 환경을 암시하는 용어도 집
내린다. “[전도자의] ‘회중’은 온갖 사회․경제적 이슈로 불투명한 경
제, 부의 기회, 유산, 사회적 지위, 불확실한 삶, 상존하는 죽음의 그
림자에 사로잡혔던 것이 분명하다. 코헬렛은 이러한 관심사를 제시
하고, 청중에게 친숙한 관용적 표현을 사용해 이들의 태도를 뒤집
는다.”40)
전도서는 또한 의도된 독자의 세계관도 잘 보여 준다. 전도자의 청
중은 “관심이 이 세상의 지평에 매여 있다. 전도자는 이들에게 익숙
한 부분에서 시작해 이 세상이 헛되다라는 점을 인식시킨다. 이것은
‘해 아래에서’라는 전도자의 독특한 표현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
난다.”41)
전도서의 저작 연대
전도서를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전성기에 썼다고 보면, 전도서의
염세적인 어조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보수적인 학자 에드워드 영은 “솔로몬이 전도서의 저자라는 주장은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며,
정통 개신교 신학자 대부분이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말
한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전도서의
배경이 솔로몬 시대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전도서가 기록된 시대는
불행하고 헛된 시대였고( 전 1:2-11 ), 솔로몬의 영화가 이미 사라진 시
대였으며 ( 1:12-2:26 ) , 이스라엘에 죽음의 때가 막 시작된 시대였
고( 3:1-15 ), 불의와 폭력이 난무한 시대였으며( 4:1-3 ), 이방인이 폭정
중적으로 나타난다. 이트론(순익, 흑자), 헤스론(적자), 헤슈본(회계), 네카심(자산), 트부 아(수익), 하몬(재산), 이냔(사업), 아말(수고, 수고의 열매), 오켈(소비자), 오베드(피고용 인), 헬레크(분배). Seow, “The Socioeconomic Context of ‘The Preacher’s’ Hermeneutic,” PSBul 17/2 (1996) 173-174.
40) 앞의 책, 195.
41) Hendry, “Ecclesiastes,” 570. “해 아래에서”라는 표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아래
42쪽 각주 67과 68-69, 79쪽을 보라.
을 행하던 시대였고( 5:7, 9-11 ),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여긴 시대였으
며( 7:1 ),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였다( 8:9 ).”42)
전도서 저작 연대를 바벨론 포로기 이후로 보는 것이 증거에 훨씬
부합한다. 와이브레이는 이렇게 말한다. “전도서는 솔로몬이 죽고
여러 세기가 지난 BC 3세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전
도서 저작 연대를 이렇게 추정하는 데는 세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전도서에 사용된 히브리어의 특징 때문이고, 둘째는 논
증의 분위기와 문체 때문이며, 셋째는 전도서가 사상사에서 차지하
는 위치 때문이다.”43) 와이브레이는 전도서가 “팔레스타인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을 때”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그때
는 “경제가 가파르게 발전하고……국제 교역이 확대되며……기
업가가 큰 부를 쌓을 기회가 많았던 시대였다. 화폐가 교환 수단으
로 어느 때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러한 발전은 돈과 이익
에 대한 코헬렛의 관심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44) 브라운은 이
렇게 말한다. “코헬렛은 이러한 경제적 발전으로 일반적인 유대인
사이에 퍼진 염려와 희망을 반영한다( 예. 5:10-12; 7:12; 10:19 ). 실제로, 현자는 1장 3절에서 인간의 상황을 숙고하면서 ‘해 아래에서 수고 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물음으로써( 3:9; 5:16도 보라 ) 이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한다.”45)
42) Young,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347-348, 헹슈텐베르크(Hengstenberg) 의 주장을 근거로 제시.
43) Whybray, Ecclesiastes, 4. Kidner, Wisdom of Proverbs,Job,and Ecclesiastes는 전 도서가 BC 350-250년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반면에 Crenshaw, Ecclesiastes, 50은 전 도서가 BC 250-225년에 기록되었다고 보며, Towner, “Book of Ecclesiastes” 351은 “BC 3세기 중반, 250년 무렵 기록되었다”라고 본다.
44) 앞의 책, 9-10.
45) Brown, Ecclesiastes, 9. 참고. Seow, “The Socioeconomic Context of ‘The Preacher’s’Hermeneutic,” PSBul 17/2 (1996) 171-189; Seow, “Theology When Everything Is out of Control,” Int 55/3 (2001) 238-243; Seow, Ecclesiastes, 35-36. 전도 서를 설교할 때, 전도서의 배경이 되는 경제적 부흥과 유혹을 알고 있다면, 전도서가 BC 5세기에 기록되었든(서오, 브라운) BC 3세기에 되었건(와이브레이, 크렌쇼) 거의 차이가
이스라엘의 사회·경제적 배경 외에, 달라진 종교관도 고려해야
한다. 로더는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이 BC 6세기에 망하고 백성
이 포로로 압송된 후, 유대인의 종교관이 크게 달라졌다. 이들은 아
직도 조상이 섬긴 하나님을 섬겼으나 이들의 하나님 개념은 더 비인
격화되었다.”46)
전도서 저작 장소
전도자는 전도서를 어디에서 기록했는가? 어떤 학자는 팔레스타
인 밖에서 기록했다고 주장하지만, 전도서 자체는 팔레스타인을 암
시한다. “예측 불가능한 날씨, 비에 대한 의존……연이은 폭풍우 같
은 기후 조건에 대한 언급은( 12:2 ) ……팔레스타인을 암시한다……장
작 패기( 10:9 ) 와 항아리 사용처럼( 12:6 ) 코헬렛이 언급하는 지역 풍습 가운데, 팔레스타인에는 해당하지만 이집트에는 해당하지 않을 풍
습이 여럿 있다……이에 못지않게 전도서가 팔레스타인에서 기록되
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성전에 대한 언급이다[5:1-7; 8:10; 9:2].”47)
전도서의 목적
전도자는 왜 전도서를 기록했는가? 전도자는 자신의 목적을 분명
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분명한 해답을 얻으려면 전도서의 내
용과 구조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아래를 보라 ). 그러나 전도자의 숙고,
즉 원독자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전도자의 반응을 살펴보면, 잠정적
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전도서의 원독자는 신학적
기반을 잃었다. 이들은 수평적이고 세속적인 수준에서, 다시 말해,
없다.
46) Loader, Ecclesiastes, 11.
47) Whybray, Ecclesiastes, 13.
“해 아래에서” 살았고, 따라서 이들의 하나님은 멀리 계셨다. 그러므
로 전도자의 목적은 이러한 독자에게 그들의 세속적 세계관의 결점
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
되도다”라고 외친다( 수미상관, 1:2; 12:8 ). 그러므로 헨드리는 전도서가
“중요한 변증서”이자 “세속주의와 세속화된 종교에 대한 비판”이라 고 말한다.48) 바살러뮤는 이렇게 덧붙인다. “전도서는 어느 지혜 교
사의 도움으로, 하나님 경외라는 ‘안경’ 없이 개인의 체험과 분석을
토대로 지혜를 구하는 경험론적 인식론[헬라의 에피쿠로스 철학]을
풍자적으로 정교하게 폭로한다……전도서는 삶의 의미와 하나님의
목적을 몰라 씨름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더라도
그분이 주시는 좋은 선물을 누리고 그분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하나님을 창조자로 인정하는 온전한 사고를 형성함으로써 참된 지
혜를 추구하라고 촉구한다.”49)
전도서의 장르와 형식
전도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먼저 전도서가 어떻게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전도서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어떤 장르와 형식과 언어( 문자적 언어나 비유적 언어 ) 를 사용하는지를 알
아야 한다. 전도서의 장르는 넓게 보면 지혜 문헌이다( 앞에서 논의 했다 ). 주석은 전도서의 장르를 “틀을 갖춘 지혜 자서전”50)이나 “자
전적 보고서”51)처럼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려고 노력했다. 롤런드 머 피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단일 장르도 통렬한 비판도 전도서를 특
48) Hendry, “Ecclesiastes,” 570. 참고. Eaton, Ecclesiastes, 44, “그렇다면, 전도서의 목적 이 무엇인가? 전도서는 변증서다. 전도서는 그렇지 않은 삶의 비극을 지적함으로써 관대하 신 하나님을 믿는 삶을 변호한다.”
49) Bartholomew, ReadingEcclesiastes, 263.
50)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17.
51) Brown, Ecclesiastes, 17.
징짓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것은 전도서가 전도자 자신의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그의 가르침은 아주 다양한 문학 장르[형식]를 포함하
기 때문이다.”52)
그러므로 전도서를 해석하려면, 전도서가 지혜 문헌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며, 특히 전도서의 다양한 세부 장르, 다시
말해, 전도서의 다양한 형식에 주목해야 한다. 가장 일반적인 형식을
하나씩 살펴보자.
숙고
숙고는 전도서의 특징적인 형식이다. 전도서는 인생의 가장 깊은
문제를 숙고한다. 전도서는 “내가 마음을 썼으나”,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보니” 같은 1인칭 동사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다. 숙고는 “구조가 느슨하다. 숙고는 일종의 관찰로 시작하
고, 관찰은 하나 이상의 관점에서 이뤄지며, 결론으로 이어진다. 숙
고에는 어록이나 잠언[또는 일화]이 포함되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생각을 전개하거나 살찌우는 데 활용된다( 예. 1:12-18 ).”53)
잠언
잠언은 전도서 전체적으로 나타나지만, 특히 7, 10, 11장에 많이 나타난다. “잠언은 삶의 진실에 대한 간결하고 아주 수려한 진술
이다.”54) 예를 들면, 전도서 10장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52) Murphy, Wisdom Literature, 131.
53) Murphy, Ecclesiastes, xxxii.
54)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20.
잠언은 일반적 진리를 말하지만 모든 상황을 다 망라하지는 않
는다. 토머스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잠언은 한 사례를 담을 순 있
지만 모든 사례를 다 담을 만큼 크지는 않다. 동일한 모음집 내에 서
로 모순되는 잠언이 있다는 사실은……잠언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잠언은 지혜로 하나의 상황에 국한하지는 않지만,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만큼 무차별적인 함의를 갖지는 못한다.”55)
잠언을 “진리” 잠언( 예. 1:14,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
‘비교’ 잠언( 예.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참고. 7:1-3, 5, 8 ) , “동등” 잠언( 예.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
니라” ) 으로 세분할 수 있다.56)
교훈 “교훈이란 저자가 독자를 설득해 특정한 행동이나 생각으로 이끌
거나 아니면 멀어지게 하려고 사용하는 가르침이다.”57) 교훈의 형식
은 일반적으로 하나 이상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며,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인 ‘동기’가 이를 뒷받침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전도 서 5장 1-2절은 동기가 뒷받침하는 교훈이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
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55) Thomas G. Long, Preaching and the Literary Forms of the Bible (Philadelphia: Fortress, 1988), 55.
56) Loader, Ecclesiastes, 5-6을 보라.
57)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20.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자전적 내러티브
자전적 내러티브란 “실제거나 가상이거나……하나의 문학적 허구
로 양식화된 개인의 체험에 대한 1인칭 서술( 예. 성경 저자나 편집자가 문
학적, 신학적, 교훈적 목적에서 쓴 개인 체험 서술 ) ”이다.58) 예를 들면, 전도서
1장 12절-2장 16절과 7장 23-29절은 자전적 내러티브다.
일화
일화( 또는 비유 ) 란 3인칭으로 구성되며, “재미있는 원리나 진리를
설명하려고 들려주는 짧은 이야기”다.59) 예를 들면, 전도서 9장 1315절은 지혜에 대한 고찰로 시작하여 이를 일화로 설명한다.
내가 또 해 아래에서 지혜를 보고 내가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
니 곧 작고 인구가 많지 아니한 어떤 성읍에 큰 왕이 와서 그것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에 가난 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의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그것이라 그러
나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은유 은유는 “비유하는 말이며, 여기서는 문자적으로 일종의 대상이나 개념을 지칭하는 한 단어나 구가 둘 사이의 닮음이나 유비를 암시하
58) Andrew E. Hill, “Non-Proverbial Wisdom,” in Cracking Old Testament Codes: A Guide to Interpreting the Literary Genres of the Old Testament, eds. D. Brent Sandy and Ronald L. Giese (Nashville: Broadman and Holman, 1995), 265-266.
59)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20.
는 방식으로 다른 대상이나 개념을 대신해 사용된다.”60) 예를 들면,
전도서 12장 6절은 사람의 죽음을 암시하는 네 가지 은유를 제시 한다.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
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전도서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은
유는 “헛됨”인데, 문자적으로 “증기 또는 “호흡”을 뜻한다. 전도자는
어떤 의미로 인생을 “증기”에 비유했는가? 인생이 짧다는 뜻인가?
인생이 실체가 없거나 무익하다는 뜻인가? 인생이 불합리하거나 무
의미하다는 뜻인가? 구체적인 뉘앙스는 문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61)
알레고리
알레고리는 확대된 은유다. 예를 들면, 전도서 12장 3-4절은 어느
노인을 집과 그 집에 거하는 자의 측면에서 묘사한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
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
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물론, 알레고리는 알레고리
필요하다. 다른 본문을 알레고
리로 해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도 모
60) Webster’sNewCollegiateDictionary.
61) James Kugel, Great Poems of the Bible, 310, “[전도자는] 삶에서 자신에게 무익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무엇인지를 묘사하려고 이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전 2:1, 11, 17, 20, 23과 그 후에도 빈번하게 사용한다). 때로 헤벨은 그저 당황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듯이 보 이며(전 5:9; 7:15), 때로는 부당하고 불의한 것을 의미한다(전 2:26; 4:7; 6:2; 8:10, 14). 그리고 [전 12:8에서]……이것은 숨결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덧없다.’”
른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해석은 알레고리라는 문학 형식에 국한해
야 한다.62)
전도서의 구조
전도서의 전체 구조를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본문은 그것이 위치
한 문맥 안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님이 코끼리
를 만지는 친숙한 옛날이야기는 이러한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준다. 장님은 코끼리 옆구리를 만져 보고 벽이라고 결론 내
렸다. “벽”을 따라 이동한 후, 다리를 만져 보더니 벽 옆에 큰 나무가
서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코끼리의 꼬리를 만져 보더니 나무에 뱀
이 있다고 했다. 장님이 전체를 알았다면, 코끼리를 만지는 동안 개
별 부분을 정확히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전도서를 정확히 해석하려면, 전도서의 각 부분을
전도서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불행히도, 전도서의 전체 구
조를 밝혀내기는 매우 어렵다고 입증되었다. 롱맨은 “자세히 살펴보
면 알수 있듯이, 코헬렛의 생각은 두서없이 반복되며 이따금 모순
된다”라고 말한다.63) 프란츠 델리치는 1891년에 이렇게 예견했다.
“일관된 사상뿐 아니라 점진적 발전, 전 포괄적인 계획, 유기적 연결
이 있음을 보여 주려는 시도는 지금껏 모두 실패했고, 반드시 실패
할 것이다.”64) 그러나 전도서의 전체 구조를 찾아내기 어렵다는 회
의론에도 불구하고, 여러 주석은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65) 그러나 그
62) 알레고리 해석이 전도서의 비알레고리 본문에 적용된 예는 위 서문 11쪽과 아래 127-128, 188, 397, 429쪽을 보라.
63)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22. 1:12-18과 2:11-16; 4:1-3과 5:8-9[7-8]; 4:412와 5:10[5:9]-6:9와 관련해서 한 말이다.
64) Delitzsch, Commentary on the Song of Songs and Ecclesiastes (1891; rpt. Grand Rapids: Eerdmans, 1982), 188. 델리치의 주장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주석은 Wright, “Riddle of the Sphinx,” CBQ 30 (1968) 314, n. 3을 보라.
65) 노르베르트 로핑크(Norbert Lohfink), J. A. 로더, 애디슨 라이트(Addison G. Wright), A.
어떤 세밀한 주장도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학자들이 전도서의
구조와 관련해 이렇게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설교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학적 패턴
설교자가 학자들의 이런 교착 상태에 대응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전도서의 복잡한 문학 구조에 매이지 않고 전도서를 살피면서 각 부
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보다 간결한 전체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다. 전도서가 수미상관으로 통일된 구조를 보여 주는 것은 분명 하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
되도다”( 1:2; 12:8 ). 수미상관은 사람의 수고가 무익하다고 말하는 여
는 시( 1:3-11 ) 와 독자에게 늙어 죽기 전에 자신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고 독려하는 닫는 시( 12:1-7 ) 를 통해 강화된다. 이 양쪽 ‘북엔드’ 사이
에서 전도자는 삶의 의미를 탐구한다. 전도자는 처음부터 “모든 것 이 헛되도다”라고 말하며, 전도서 전체적으로 이 말을 38회 정도 반
복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전도자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선하다/선 함’이라는 표현( 51회 ) 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6회의 권고( 3:14; 5:7; 7:18; 8:12-13[3회] ) 와 어울려 균형을 이룬다. 이것은 삶의 의미 추구에
대한 편집자의 최종 요약으로 이어진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2:13 ).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많은 정지와 출발을 통 해, 전도서의 패턴은 최종적인 일곱 번째 권고 “하나님을 경외하라” 글래서(A. Glasser), 프랑수아 루소(Francois Rousseau), 마이클 폭스(Michael V. Fox), 한스-페터 뮐러(Hans-Peter Müller), H. W. 헤르츠베르크(H. W. Hertzberg), 로버트 고 디스(Robert Gordis)를 비롯한 여러 학자의 다양한 주장에 대한 개관은 Crenshaw, Ecclesiastes, 38-48; Bartholomew, Reading Ecclesiastes, 69-81, 118-205를 보라. Murphy, Ecclesiastes, xxxv-xli에서 제시한 개관과 Wright, “Riddle of the Sphinx,” CBQ 30 (1968) 315-316, nn. 4-6에서 제시한 개관도 보라.
로 이어지며,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라는 부분이 이 권고를 설
명한다.66)
전도서에서 씨줄과 날실이 교차하는 패턴에도 주목해야 한다. 씨
줄( 가로 ) 은 “해 아래에서”의 삶을 묘사하고, 날실( 세로 ) 은 하나님을
향한다. 전도서를 날실과 씨줄이 교차해 짜인 옷감에 비유할 수 있다. 씨줄은 세속적 시각에서 본 삶을 묘사한다. 곧 “해 아래에서”
의 삶은 하나님 없는 삶이다.67)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
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1:2-3 ). 그 대답은 절대로 아무것도 유
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하나님 없는 세상이 전부가 아
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을 39회 언급한다. 전도자가 하나님을 말할
때, “‘해 아래에서’라는 용어는 배경으로 사라지거나 완전히 없어
진다( 2:24-26; 11:1-12:14 ). 그 대신에, 전도자는 ‘하나님의 손’( 2:24 ), 사
람의 기쁨( 2:25; 3:12; 5:18, 20; 9:7; 11:7-9 ), 하나님의 너그러움( 2:26; 3:13; 5:19 ) 을 말한다……전도자는 하나님이 ‘주신다’라고 열두 번 말하고,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기쁜 ‘몫’을 받는다고 일곱 번 말한다.”68) 전도
자는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과 희락”( 2:26 ) 을, 음식과 음료와 수고함
으로 누리는 즐거움( 3:13 ) 을, “재물과 부요”와 이를 누릴 능력을 주
신다고 말하며( 5:19; 6:2 ),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것을 하나
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한다( 9:7 ). 전도자는 또한 하나님이 “우매한 자
66) 참고. Fox, Ecclesiastes, xvi, “전도서는 일반 원칙에서 시작해(1:3), 주제의 전주곡으로 나아가고, 등장인물과 그 배경을 소개하며, 자신의 과제를 기술하고, 자신이 내리는 결과를 예고하며, 그런 후에 자신의 탐구로 나아간다. 마지막 단원 12:1-7은 절정이며, 이곳 외에 적절한 자리가 없다.”
67) “‘해 아래에서’라는 표현은 코헬렛의 트레이드마크이며, 무익함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 표현은 전도서에서 39회 사용되며, 오직 ‘이 세상’의 영역에서 자신의 지혜와 감각을 사
용하여 홀로인 사람의 관점을 투영한다. Reitman, “The Structure and Unity of Ecclesiastes,” BSac 154 (1997) 301, n. 17.
68) Eaton, Ecclesiastes, 45.
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5:4 ), “의인과 악인을……심판하신다”라
고 경고한다 ( 3:17; 11:9 ) .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3:14; 5:7; 7:18; 8:12-13; 12:13 )
병치
씨줄과 날실이 교차하는 패턴으로 전도서에 나타나는 모순 구절
이 어느 정도 설명된다. 전도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의 자리에
앉아 세속적 시각에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
나 하나님의 실제를 보는 눈이 있다면, 모든 것이 다 헛되지는 않다.
전도자의 시각에서 보면, 죽음이 종착지이므로 삶의 의미는 제한적
이다. 그렇더라도 삶은 의미 있다. 이러한 전도서의 양극성을 기술하
기 위해, 어떤 학자들은 “극성 구조”69) 또는 “병치”70)를 말한다. 어
떤 학자들은 전도서의 특징으로 “비난”71)이나 “대화”72)나 “변증”73)
을 든다. 이렇게 다양하게 전도서를 묘사한 것에서 공통점을 확인해
보면 그것은 전도서가 세속적 시각74)과 하나님 중심 시각 사이의 긴
장을 말한다는 점이다.
병치는 의도적이다. 전도서는 렘브란트의 그림과 비슷하다. 렘브
69) Loader, Ecclesiastes, 11. 같은 저자의 Polar Structures in the Book of Qohelet (Berlin and New York: de Gruyter, 1979)도 보라.
70) Bartholomew, Reading Ecclesiastes, 238-254, Sternberg, The Poetics of Biblical Narrative를 언급.
71) Norbert Lohfink, Kohelet (Stuttgart, 1980).
72) T. Anthony Perry, DialogueswithQohelet:TheBookofEcclesiastes (Philadelphi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1993).
73) Ryken, “Ecclesiastes” 269, “전도서의 대화체 구조를 말한다.” “순서가 아니라 대조가 전 도서의 구성 원리다. 전도서 자체가 두 형태의 자료, 즉 부정적 자료와 긍정적 자료를 전환 없이 부드럽게 오간다.”
74) “우리가 지금껏 주목한 빛줄기는 독자에게 보내는 신호로서 저자 자신의 입장과 결론이 세 속주의자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저자는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면서 잠 시 세속주의자의 입장에 서 있었을 뿐이다.” Kidner, Wisdom of Proverbs, Job, and Ecclesiastes, 93.
란트의 그림에서 어두운 배경과 인물이 시선을 밝은 곳의 인물로 향
하도록 이끈다. 헛됨과 죽음이라는 전도자의 어두운 배경은 독자의
시선을 빛에 속한 요소로 유도하려 한다. 누려라.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빛은 전
도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초점이다. 그러나 그 초점은 하나님 없는
삶의 어둠과 대조될 때만 드러난다. 부정적인 부분과 긍정적인 부분
사이의 이러한 양극성을 주목하는 것이 설교학적으로 중요하다. 전
도서의 부정적인 단원만 따로 떼어내서 전도자의 메시지라고 설교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모든 설교 본문은 더 넓은 문맥에서 이해
해야 한다.
전체 구조
여러 주석이 전도자가 7회에 걸쳐 말하는 카르페 디엠 ( “현재를 즐
겨라” ) 을 활용하려 했다.75) 2장 24절에서, 전도자는 “사람이 먹고 마
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전도자는 인생을 즐기라는 이러한 조언을 3장 12-13, 22절, 5장 18-20절, 8장 15절, 9장 7-10절, 11장 7-10절에서 반 복한다. 매일을 즐기라는 조언이 이처럼 중요하게 반복된다는 사실
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조언이 나오는 간격이 크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반복이 전도서의 구조
로 적절하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주장 가운데,76) 애디슨 라이트의 주장이 전도서의 문학 구조
를 가장 설득력 있고 자세히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77) 그의 분석
75) 다음을 보라. 예. Kaiser, Ecclesiastes, 17-24; Perdue, Wisdom Literature, 190-191.
76) 앞의 각주 16, 각주 65를 보라.
77) Wright, “The Riddle of the Sphinx: The Structure of the Book of Qohelet,” CBQ 30 (1968) 313-334; 같은 저자의 “The Riddle of the Sphinx Revisited: Numerical Patterns in the Book of Qohelet,” CBQ 42 (1980) 38-51.
은 “관련 단원을 동일한 단어나 구로 끝맺는 저자의 단순한 기술”을
토대로 한다. 라이트는 이러한 반복을 토대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전도서의 몸통은 1장 12절-6장 9절과 6장 10절-11장 6절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코헬렛은 전반부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
떤 것이 선한 일인지’( 2:3 ) 를 탐구하며, 자신이 경험으로 얻은 결론
을 서론적인 두 목적 진술( 1:12-18 ) 과 여섯 개의 해설 단원( 2:1-6:9 ) 으
로 표현하고, 여섯 단원 모두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
는 것이며’라는 말로 끝낸다 ( 이 표현은 6:9 이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
는다 ) ……전도서 후반부( 6:10-11:6 ) 에서 전도자는 두 질문으로 시작
한다.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누가 알며, 미래를 누가 알겠
는가 ( 6:10-12 ) ? 그는 첫째 질문을 네 단원 ( 7:1-8:17 ) 에 걸쳐 전개
한다……각 단원은 로 마차 ( ‘알아내지 못한다’ ) 로 끝나며, 마지막 단원
은 3중 부정으로 로 유칼 하아담 리므초……벨로 이므차……로 유칼
리므초[‘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능히 알지 못하나니……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로 끝난다( 8:17 ). 전도자는 둘째 질문을
[나중에 네 단원으로 줄어드는] 여섯 단원에 걸쳐( 9:1-11:6 ) 전개하는
데,78) 여기서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설명한다. 각 단
원은 로 야다 ( ‘알지 못하느니라’ ) 로 끝나며, 마지막 단원은 3중 부정으
로 에느카 요데아……로 테다……에느카 요데아[‘네가 알지 못함같 이……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알지 못함이니라’]로 끝난다( 11:56 ).”79)
라이트는 두 번째 연구에서 자신이 이전에 내린 결론을 확증하면 서 흥미로운 수의 연구로 그 결론을 장식한다.80) 여러 주석이 라이
78) Wright, “The Riddle of the Sphinx Revisited,” CBQ 42 (1980) 42, n. 15e를 보라.
79) 두 번째 논문인 Wright, “The Riddle of the Sphinx Revisited,” CBQ 42 (1980) 3839이 요약한 내용.
80) 1:1-6:9이 111개 절이고, 6:10–21:14도 111개 절이다. 그리고 1:1-12:9이 216개 절인 데, 하벨 하발림 학콜 하벨(1:2; 12:8)의 수를 합한 값이 216이다. 1:2에서 “헤벨(=37)은 단
트의 방법과 결과에 비판적이다.81) 그런데도 라이트가 제시하는 전
도서의 구조를 여기에 제시하는 이유는( 아래 도표를 보라 ) 82) 라이트가
전도서 저자가 의도한 구분을 대부분 파악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라이트의 형식 범주는 전도서의 내용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
별 문단 이해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라이트의 분석
은 의도된 문단의 경계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되며, 문단별로 설교 본
문으로 활용할 수 있다.
전도서의 전체적인 메시지
주석마다 전도서 구조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 전도서의 전체적인
메시지에 대한 견해도 일치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83)에
서 “네 인생을 즐겨라”84)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어떤 학
수로 3회 사용되며, 전체 숫자값은 111(37×3)이다 그런데 전도서 전반부(1:1-6:9)에 나 오는 절 수를 모두 합하면 111절이다. 그리고 헤벨은 전도서 전체에서 총 37회 사용되는 데, 이것은 헤벨 자체의 수에 해당한다.” 앞의 책, 43-44.
81) 예. Fox, Ecclesiastes, xvi, “라이트의 가설은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힌다. 정교한 어구가 문단을 나누는 기준이 아니다. 핵심 구절이 문단의 마지막에 ‘나와야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문단마다 크기와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계획이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참 고. Fox, A Time to Tear Down, 148-149; Crenshaw, Ecclesiastes, 41-42; Longman, Book of Ecclesiastes, 21, n. 76; Seow, Ecclesiastes, 44-46. 어떤 주석은 라이 트가 제시한 구조를 따른다. 예. Murphy, Ecclesiastes, xxxix. Murphy는 J. S. M. 멀 더(Mulder)와 렌트토르프(R. Rendtorff)도 그렇다고 말한다. Stephen Brown, “The Structure of Ecclesiastes,” EvRT 14/3 (1990) 195-205는 라이트의 분석에 전체적으 로 동의하지만, 패턴을 보다 세밀하게 전개하려 한다.
82) Wright, “Riddle of the Sphinx Revisited,” CBQ 42 (1980) 49 (나는 라이트가 “남자”, “그”라고 쓴 부분을 “사람”으로 바꾸었다). Wright, “Additional Numerical Patterns in Qohelet,” CBQ 45 (1983) 32-43도 보라.
83) Loader, Ecclesiastes, 14,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서에 하나의 근본 사상이 있다고 인정해 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의 선포이며, 몇몇 관점에서 분명하게 제시하고 설명하는 사상 이다.”
84) “전도자가 즐거움을 전심으로 추구하라고 권하는 일곱 구절은……그 구절의 주제를 점진 적으로 강조하고 엄숙하게 말하는 방식으로 배열된다.” Whybray, “Qoheleth, Preacher of Joy,” JSOT 23 (1982) 87. 다음도 보라. Kaiser, Ecclesiastes, 42, “전도서의 분위기 는 기쁨의 분위기며, 이와 더불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킬 때 겪을 삶과 누릴 삶의 모든 좋은 것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자는 전도서의 주제를 복수로 주장한다. 브라운은 이렇게 말한다.
“전도서에서 통일되고 분명한 의미를 찾기란 이 책 배후에 있는 현
자가 지속적인 유익을 확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도 몇몇
주제가 두드러지며, 말하자면 특히 인간의 연약함,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해가 지
기 전에 ‘현재를 즐겨라’라는 충고가 두드러진다.”85) 설교 본문이 이
것들을 말할 때, 설교자는 이런 주제들을 설교해도 좋을 것이다.
전도자는 다양한 주제를 제시한다. 그렇다면 전체를 아우르는 하
나의 주제를 찾아낼 길이 있는가? 전도서 전체를 놓고 한 편의 설교
를 해야 한다면, 무엇이 주제가 되겠는가? 86) 이미 살펴보았듯이, 전
도자는 수미상관과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표현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강조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전
도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즐기라”라는 말도 반복한다. 게다가 전도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라”라고도 거듭 강조해서 말하며, 결론 부분
에서는 한층 강조해서 말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
니라”( 12:13 ). 이러한 주요 주제를 하나의 포괄적 주제로 아우를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다음을 전체적인 주제로 생각볼지도 모르겠다.
헛되고 공허한 삶을 하나님의 선물을 누리는 의미 깊은 삶으로 바꾸 기 위해 하나님을 경외하라.87)
85) Brown, Ecclesiastes, 12. Crenshaw는 “Wisdom Literature,” 379에서, 전도서 전체에 흐르는 여러 주제를 제시한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와 “알아내지 못하 리라”,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에 제한을 두셨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밖의 여러 표현”을 열거한다. “이것들은 젊고 힘이 있는 동안에 삶을 즐기라고 독려하는 결론적 인 요약을, 자기점검과 결과가 따르는 개인의 행위를 말하는 ‘사려 깊은’ 관찰을, 그리고 바 람과 수고와 운을 좇는 데 대한 암시를 포함한다.” 86) 물론, 전도서에 대한 연속 설교의 서론 격이 아니라면, 전도서 전체를 놓고 단 한 편만 설교 하는 것은 추천할 만하지 않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전도서의 전체적인 주제와 관련해 하려 는 일은 각 부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전체적인 사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87) 참고. 영은 이렇게 주장한다. “전도서의 대 주제는 오직 하나님만이 삶에 의미를 주시므로
이것이 전체적인 주제라면, 독자를 독려해 세속적 세계관을 버리
고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게 하는 것이 전도자의 전체적인 목
적( 목표 ) 일 것이다. 이턴이 말하듯,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권고한다( 3:14; 5:7; 8:12; 12:13 ). 이것이 지혜의 시작일 뿐 아니라 기쁨
과 만족과 열정과 목적으로 넘치는 삶의 시작이기도 하다. 전도자는
자신을 믿으며 하나님은 없는 장밋빛 삶, 그로 인한 삶의 필연적인
냉소주의와 쓰라림에서, 그리고 지혜나 쾌락이나 부나 인간의 정의
나 정직을 신뢰하는 데서 우리를 구해 내려 한다. 전도자는 하나님
이 거기 계시고, 하나님은 선하고 너그러우시며, 이런 시각을 가져야
만 일관되고 성취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려 한다.”88) 전체적인 구조에서, 설교자는 개별 설교 본문과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Young, Introduction, 351. 참고. Ryken, “Ecclesiastes,” 269, “전도서의 주제는 전혀 어렵지 않으며,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실질적 요약이다. 이에 따르면, 순전히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으로 사는 삶은 헛되지만, 하나님 중심의 삶은 해독제다.” 참고. Fox, “The Inner Structure of Qohelet’s Thought,” 225, “나의 기본 논제는 코헬렛의 책에서 중심을 이루는 관심사가 의미라는 것이다 덧없음이 아 니며, 일이 아니며, 가치가 아니며, 인간의 유한성이 아니다. 이런 주제들이 전도서에 있으 나 이것들은 더 근본적인 문제, 곧 삶의 의미에 접근하는 길일 뿐이다.” 88) Eaton, Ecclesiastes, 48. 참고. Garrett, Proverbs,Ecclesiastes,Song of Songs, 278, “전도자는 독자들에게 그들이 언젠가는 죽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촉구하 려 한다. 이들은 자신이 중요하다는 모든 환상을 버리고, 죽음과 삶을 직시하며 두렵고 떨 림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216
제목
(1:1 ) 1
수고에 대한 시 (1:2-11 ) 10
I. 삶에 대한 코헤렛의 고찰 (1:12-6:9 )
두 개의 서문 (1:12-15 ) 4 (1:16-18 ) 3
즐거움의 추구에 대한 연구 (2:1-11 ) 11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한 연구 (2:12-17 ) 6
수고의 열매에 대한 연구
그것들이 타인에게 넘어간다 (2:18-26 ) 9
제때 행동하지 못한다 (3:1-4:6 ) 28
“둘째”의 문제 (4:7-16 ) 10
자신이 축적한 전부를 잃을 수 있다 (4:17-6:9 ) 29
II. 코헬렛의 결론 (6:10-11:6 )
서론: (6:10-12 )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알지 못한다
무엇이 유익한지 알지 못하며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A. 자신이 무엇을 해야 유익한지 알지 못한다.
전통적 지혜에 대한 비판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대해 (7:1-14 ) 14
공의와 악에 대해 (7:15-24 ) 10
여자들과 어리석음에 대해 (7:25-29 ) 5
지혜자와 왕에 대해 (8:1-17 ) 17
B. 미래를 알지 못한다
자신의 때를 알지 못한다 (9:1-12 ) 12
장차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9:13-10:15 ) 21
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10:16-11:2 ) 7
선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11:7-12:8 ) 4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에 대한 시 (11:7-12:8 )
에필로그 (12:9-14 )
6
전도서 설교의 어려움
설교자들은 전도서 해석이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뿐 아
니라 전도서를 설교할 때 몇 가지 구체적인 어려움에도 직면해야
한다. 여기서는 세 가지 어려움을 살펴보겠다. 첫째는 적절한 설교
본문 선택과 관련된 어려움이다. 둘째는 단일 주제 정하기와 관련된
어려움이다. 셋째는 전도서에서 그리스도 설교하기와 관련된 어려 움이다.
적절한 설교 본문 정하기
성경 저자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하나의 문학 단위를 설교
본문으로 선택해야 한다. 문학 단위나 절의 일부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89) 성경 내러티브의 경우 문학 단위를 찾기가 아주 쉽지만, 전
도서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시블리 타우너는 이렇게 말한다. “전도
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개별 인용구를 찾아내기란, 아마도 잠언서를
제외하고, 히브리어 성경의 다른 어느 책보다 어려울 것이다.”90)
주석은 전도서 1장 1-11절과 1장 12-26절이 개별 문학 단위라
는 데 일반적으로 동의하지만, 이어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다. 한 본문의 의미가 그 본문의 범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전
도서를 설교할 때 적절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선
택한 본문이 단일 문학 단위가 아니라면, 설교는 처음부터 길을 벗
어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전도자는 자신의 숙고를 제시하면서 “내가 보건대/
내가 보았도다/내가 살폈더니” 같은 시작 구문과( 예. 3:16; 4:1, 7; 5:18;
89) 나의 Modern Preacher, 126-128을 보라.
90) Towner, “The Book of Ecclesiastes,” 265.
7:15; 8:9; 9:11, 13 ),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같은
종결 구문을 사용함으로써( 1:14, 17; 2:11, 17, 26; 4:4, 6, 16; 6:9 ) 주요 문학
단위와 부수 문학 단위를 찾아내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91) 애디
슨 라이트의 문학 분석도( 위 49쪽을 보라 ) 선택한 설교 본문이 적절한
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라이트가 정확히 말하듯이, “전도서는
자료를 어떻게 세분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말할 수 있다는 점
에서 어려운 책이다……결과적으로, 저자가 자신이 자료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어떤 식으로든 암시한다면, 그 암시가 바르게 강해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92)
물론, 설교자는 이 책에서 설교 본문으로 제시한 단위보다 더 작은
단위를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작은 문학 단위93)
를 타당하게 해석하려면, 큰 문학 단위의 맥락 가운데서 이해해야 한다.
단일 주제 정하기
현대 설교는 통일성과 감동을 겸비한 설교를 위해 주제를 하나로
정할 것이 요구된다.94) 그러나 전도자는 음극과 양극을 나란히 두거 나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라”와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처럼 양극만 둘을 제시함으로써( 11:9; 12:1 ) 자신의
요점을 입체적으로 말하려 한다. 설교 본문에 두 메시지가 있을 때, 두 극단을 모두 정확히 파악하면서 단일 주제를 정해야 하는 어려움 이 있다. 두 주제 가운데 어느 쪽이 우세한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91) 참고. Reitman, “The Structure and Unity of Ecclesiastes,” BSac 154 (1997) 308309.
92) Wright, “Riddle of the Sphinx Revisited,” CBQ 42 (1980) 50.
93) 이러한 일부 세부 단위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이 책 90-91, 122-123, 152-153, 181184, 230-231, 367-368, 373, 392-393쪽.
94) 나의 Modern Preacher, 131-136을 보라.
하나를 다른 하나 아래 두거나 둘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주제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에서 그리스도 설교하기
설교자는 교회에서 단순히 구약의 지혜를 ‘복음’으로 선포해서는
안 된다. 할례, 안식일, 금기식 등 구약의 율법을 교회를 위한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에서 ‘복음’으로 선포하려면 신약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지혜도 복음으로 선포되려면 먼저 신
약의 확인을 받아야 한다. 신약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체현된 “하나님의 지혜”이실 뿐 아
니라( 고전 1:24, 30 ) 사람들에게 “권위 있는 자와 같이” 지혜를 가르치
셨다( 마 7:29 ). 예수는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
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39-40 ). 우리는 구약 본문을
단순히 설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사람들이 생명을 얻도록 그
리스도와 연결해야 한다.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30여 년 전에 전도서를 시리즈로 설교할 때
였다. 어느 날 설교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느 은퇴 목회자가 찾아와, 내가 했던 그런 설교라면 랍비가 회당에서 할 수 있는 설교가 아니
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랍비도 그런 설교를 할 것이라고 인정해야 했다. 이것은 내가 ‘기독교 설교’가 아니라 ‘구약 설교’ 95)를 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더 깊이 연구한 끝에, 기독교 설교는 반드시 그리스
도를 설교해야 한다는 교부들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
러나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가? 전도서에는 ‘메시아 본 95) 이 둘은 클라우니의 용어다. 위 서문 각주 1을 보라.
문’이 하나도 없으며,96) 도래할 메시아에 대한 약속도 없다. 메시아
본문이 전혀 없는 책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가?
불행히도 교회사에서 상당 기간 알레고리 해석이 구약에서 그리
스도를 설교하는 방법으로 통용되었다.97) 그러나 알레고리 해석은
일종의 자기 해석이다. 다시 말해, 신약의 예수를 구약에 넣어 의미
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설교하기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위험한 흐름이다. 브라운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해석가 사
이에 코헬렛을 단순히 복음서 메시지를 위한 포장지 정도로 취급하
려는 유혹이 전반적으로 번지고 있다. 이것은 단호히 바로잡아야 할
어리석고 위험한 시각이다.”98) 때로는 전도서의 메시지와 대조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다양한 선
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약과 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구약에서 그
리스도를 설교하는 적절한 방법을 적어도 일곱 가지는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일곱 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방법이 본문의 메시지를
신약의 그리스도와 이어 주는지 살펴보는 것은 머리를 맞대는 창의
적 사고의 한 형태이며 대개 여러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물론 설교
하면서 이 방법을 모두 사용해서는 안 되고, 가장 설득력이 강한 방 법을 아마도 나머지 한두 방법의 지지를 받는 선에서 활용해야
한다. 일곱 가지 방법을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보겠다.99)
96) Ronald Knox, Waiting for Christ (New York: Sheed and Ward, 1960), 279-282는 구약의 ‘메시아 본문’ 150개를 열거한다. 여기에도 전도서 본문은 전혀 없다.
97) 나의 PreachingChristfromtheOldTestament, 69-176을 보라.
98) Brown, Ecclesiastes, 121. 일례로, 브라운은 트렘퍼 롱맨의 전도서 주석, Book of Ecclesiastes를 언급한다. 위 29-30쪽을 보라. 제리 셰퍼드가 2008년에 쓴 “Ecclesiastes” 도 이러한 접근법을 따른다(위 29-30쪽을 보라). James Steward, “Ecclesiastes and the Christian Preacher: An Exercise in Sermon-Preparation,” CQ 29 (1951) 120127은 전도서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책”이며 “긍정적인 방식으로 감동이나 교훈을 줄만 한 것이 전혀 없다”라고 말한다(120). 따라서 설교자의 “과제는 묘사된 인물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서 이러한 옛 초상을 제쳐두고,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찾아야 할 대상이 되는 분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다”(122).
99) 더 자세한 설명은 나의 PreachingChristfromtheOldTestament, 227-277을 보라.
구속사의 진행
어느 동료가 이 책의 제목 『전도서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
인가』( Preaching Christ from Ecclesiastes ) 를 보더니, “목사님, 모든 본문
에서 빼놓지 않고 그리스도를 찾아내려 하시는 군요. 그렇죠?”라고
물었다. 나는 “저를 바울과 혼동하시는군요”라고 대답했다 ( 고전
10:4를 보라 ). 나중에 이 즉흥적인 대화를 생각하면서, 내가 대답을 잘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모든 본문을 다 들춰서 그리스도를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단서를 잇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구약의 주변에 있는 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의 계시 중심과 연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구속사의 진행은 여러 점을 잇는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방법이다.
구속사의 진행은 인간이 타락해 죄를 지었을 때 시작해서( 창 3:15 ) 하
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는 과정을 거쳐,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최종적인 재림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 설교자는 구약의 구절을 이러한 구속사의 진행에 비추어 이
해해야 한다.100)
예를 들면, 전도자는 죽은 자의 부활을 모른다. 전도자는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3:17; 8:12-13; 11:9 ). 그렇더라도, 전도
자의 주된 생각은 죽음이 끝이라는 점이다.101) 그래서 전도자는 이
렇게 말한다.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
100) 구속사의 진행은 계시의 진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속사가 진행하듯 계시도 진행 한다. 구속사의 진행은 약속-성취, 모형론, 대조라는 길의 기초가 된다. 반면에, 계시의 진 행은 특히 통시적 주제라는 방식을 통해 표현된다. 유비의 방식은 구속사와 계시의 역 사가 전개될 때도 여전히 존재하는 전체적인 연속성을 반영한다. 101) 다음을 보라. Antoon Schoors, “Koheleth: A Perspective of Life after Death?” ETL 61/4 (1985) 295-303.
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
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
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19-21; 참고. 2:15-16; 9:5)
그러나 죽음이 끝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
의 부활에 이르면서 극적으로 바뀐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예수가
죽음을 정복하셨다. 예수가 친히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나는 부
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 11:25-26 ). 예수의 부활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진행은 전도자의 메시지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비춘다.102)
약속-성취
구약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많이 나온다. 이런 약속에서
예수의 도래로 이루어진 성취로 바로 옮겨 갈 수 있다. 그러나 전도
서에는 메시아 약속이 없기에, 전도서의 경우 이러한 약속-성취의
방식을 사용하지 못한다.
모형론 모형론은 구약 본문에서 신약의 그리스도에게 옮겨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구약에 나오는 구속 사건이나 인물이나 제도는 위대한 원
102) 참고. 헤르츠베르크의 코헬렛이 헛됨을 포괄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구약의 마지막에 위 치한 코헬렛의 책은 구약이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아 예언이다”라고 말한다. Der Prediger, 237-238, Kidner, The Wisdom of Proverbs, Job and Ecclesiastes, 114에서 재인용.
형,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그리고/또는 사역을 예표하는 모형 역
할을 한다. 그러나 전도서는 지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전도서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을 기대할 수 없다. 가능한 두 예외는 전도서 1장
12절-2장 26절에 나오는 “솔로몬”과 12장 11절에 나오는 “한 목
자”다( 아래 100-101, 489-490쪽을 보라 ). 나아가 지혜를 가르치는 지혜로
운 전도자 자신이 지혜로운 랍비 예수의 모형이라는 주장도 가능
하다. 예수도 마샬 ( 잠언/비유 ) 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103) 그러나 우리
는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연결을 유비라는 범주에서 다룰 것
이므로, 이러한 종류의 모형론은 필요하지 않다.
유비
구약에서 신약의 그리스도로 옮겨가는 길이 더 있다. 유비의 길
이다. 전도서에 적용하면, 유비는 구약 선생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
침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을 찾아낸다. 이러한 유비가 존재하는 이
유는 예수가 가장 지혜로운 교사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
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골
2:3 ). 따라서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
전 1:24, 30 ). 예수는 지혜에 대해 자신이 “솔로몬보다 더 크다”라고
하셨다( 눅 11:31; 참고. 2:52; 7:35 ). 그러므로 예수의 동시대 사람들이 예
수를 지혜로운 선생으로 여기고( 막 1:22 ), 예수가 주로 잠언 104)과 비
유105) 형태의 지혜로 가르치셨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103) 몇몇 교부(디디모스, 오리게네스, 닛사의 그레고리오스)는 실제로 솔로몬으로 이해되는 ‘전도자’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았다. Robert Wright, Proverbs,Ecclesiastes,Song of Solomon, 190을 보라.
104) Alyce M. McKenzie, “All Who Exalt Themselves Will Be Humbled: Jesus’ Subversive Sayings,” Preaching Proverbs: Wisdom for the Pulpit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1996), 59-78을 보라.
105) 예수의 “지배적인 가르침 형태는 비유(파라볼레, 히브리어로 마샬[=잠언]), 곧 지혜의 한 양식이었다.” Dillard and Longm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245. 참고.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자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 사이에서 유
비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전도자는 재물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
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
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
도다”( 2:18-19; 참고. 20-23절 ). 예수도 비슷하게 경고하신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
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마 6:19 ). 사실 예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을 더 크게 짓고
자신의 모든 재물을 쌓아 두겠다고 마음먹고는 자신에게 “영혼아 여
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
워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
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19-21 ).
통시적 주제
통시적 주제는 구약 본문과 신약의 그리스도를 잇는 또 하나의 길 이다. ‘통시적 주제’는 성경신학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다. 통시적 주제란 성경을 관통해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주제를 말 한다. 이러한 통시적 주제 개념을 활용해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 는 것은 구약의 주요 주제가 모두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미 확인했듯이, 하나님 경외는 전도서의 주요 주
Ben Witherington III, Jesus the Sage: The Pilgrimage of Wisdom (Minneapolis: Fortress, 1994), 155-156, “신중하게 평가하더라도,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적어도 70%는 금언, 수수께끼, 비유 같은 지혜의 말이었다.”
제다.106)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주제는 이스라
엘 역사의 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창 22:12; 출 14:31을 보라 ), 거기
서부터 하나님이 나중에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
니라”라는 반복 구절과 함께 주신 계명들( 레 19:14, 32; 25:17, 36, 43 ) 로,
지혜 문헌( 예. 잠 1:7; 9:10; 15:33; 욥 28:28 ) 으로,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서( 느 5:9 ) 와 전도서( 3:14; 5:7; 7:18; 8:12-13; 12:13 ) 로, 신약에서
예수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 10:28 )
신약 성경의 언급
구약의 구절에서 신약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여섯째 길은 신약
의 언급이다. 그리스도를 설교할 때 구약을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
려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면 된다. 그렇더라도
신약 서신서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면, 서신서를 활용해
도 좋다. 불행히도, 신약이 전도서를 직접 인용하는 경우는 드물며,
불과 12회 인용하거나 암시할 뿐이다.107) 전도서의 가르침과 비슷한
신약의 가르침을 찾으려면, 컨코던스, 관주 성경, 주석, 컴퓨터 성경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신약의 언급을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로 활용하지 말고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나
머지 길 가운데 하나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예. 앞에서 살펴본 구속사의 진행, 유비, 통시적 주제, 바로 아래 나오는 대조에
서 신약이 구약을 어떻게 인용하는지 보라 ).
106) 앞의, pp. 17, 22와 아래의, p. 127, n. 18를 보라.
107) Nestle-Aland, Novum Testamentum Graece (1993), 부록을 보라.
대조
구약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지는 마지막 길은 대조다. 구속사와
계시의 진행 때문에, 현대 교회를 위한 메시지는 이스라엘을 위한
전도자의 원메시지와 사뭇 다르다. 따라서 대조를 활용해 이스라엘
을 위한 전도자의 메시지에서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로 옮
겨 감으로써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묻는다( 1:3 ). 이런 대답
이 예상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2:18 ). 그러므로 우리의
힘겨운 모든 수고가 헛되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후,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루는 강력한 장을 이렇게 끝맺는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
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
이러한 여러 길 가운데 어느 길이 설교 본문의 메시지를 신약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지 탐구하는 것이 본문을 기독교 정경 전
체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분명한 방법이다. 이러한 탐구를 통해 구약 메시지와는 대조적인 메시지가 나올 수도 있으나 그 메시지를 아버
지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사역, 가르침에
비추어 확증하고 풍성하게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마 11:27; 요 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