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by Patrick Schreiner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under the title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Reading by Baker Academic, A division of Baker Publishing Group
P.O. Box 6287, Grand Rapids, MI 49516, U. 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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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Korean edition ⓒ 2025 by The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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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변모
발행일 2025년 4월 15일
지은이 패트릭 슈라이너
옮긴이 박문재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5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94295-56-3 (93230)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 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변모 사건의 원리는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어떤 상황도
‘변모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데스몬드 투투 1)
‘변모하다’( transfigure ) 와 ‘변화하다’( transform ) 는 영어 성경에
서 서로 바꿔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용어에서도
우리는 이 둘을 구분한다. ‘변모하다’는 그 산에서 예수께 일어난 일
을 가리키는 반면, ‘변화하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겪
는 영적 변화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이 두 단어의 배후에
있는 헬라어 단어는 ‘메타모르포오’로서 동일하다.
영어에서 이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지만, 종교적 의미로는 거의 사
용하지 않는다. 과학이 이 단어를 가져갔다. 이 단어를 들으면 우리
는 십중팔구 곤충이나 그 밖의 다른 동물의 유기적 발달을 떠올릴
1) Desmond Tutu, GodHasaDream:AVisionofHopeforOurTime (New York: Doubleday, 2004), 3.
것이다.2) 과학적 관점에서 변태( metamorphosis ) 는 미성숙한 형태에
서 성숙한 형태로 변화되는 과정이다. 나비는 알에서 애벌레로, 번
데기로, 나비로 ‘변태한다.’ ‘변태’는 물리적 변화를 가리킨다.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이 단어는 끈질기게 종교적 차원을 지녔다.
두 명의 로마 작가는 심지어 이 단어를 제목으로 한 작품을 썼다.3)
이 단어는 일시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의 형태를 취한 신, 동물이나
신으로 변화된 인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책에서 나는 ‘변모’( 과학 용어로는 변태 ) 라는 단어의 이 종교적 용
법을 되살리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변모’는 그 산에
서 예수의 정체가 유형적으로 드러난 것( 마 17:2; 막 9:2 ) 을 가리키기
도 하고,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
광”( 고후 4:6 ) 을 보고, 결국에는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요일 3:2 ) 때
그리스도인에게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예
수의 변모와 우리의 변모의 관계는 본질적이다. 예수의 변모에서
우리는 ‘신성이 인성을 파괴하지 않고 어떻게 인성에 침투할 수 있
는지’를 본다. 그리고 우리의 변모에서는 ‘인간이 인성을 잃지 않고
2) 변모라는 단어를 들은 현대인은 호그와트에서 해리, 론, 헤르미온이 맥고나걸 교 수에게서 들었던 수업을 떠올리지도 모른다.
3) Ovid, Metamorphoses, trans. David Raeburn (London: Penguin Classics, 2004); Apuleius, The Golden Ass:The Transformations of Lucius, trans. Robert Graves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09). 오비디우스 의 작품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역사를 다룬 장편 서 사시고, 카이사르가 신이 된 것을 묘사한다.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의 작품은 한 남자가 당나귀로 변했다가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 덕분에 인간의 모습을 되찾 는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그리스도의 변모
어떻게 신성을 닮아 갈 수 있는지’를 본다.4)
당신이 나와 함께 이 산을 오르는 여정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책
의 구조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어떤 사람은 이 책의 구조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조직신학을 다루는 부분에서 짜증을 낼 수 있고, 조직
신학을 기대하고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영적 해석을 다루는 부분에
서 혼란스러워할 수 있다.
저자의 무능( 이것은 아마도 정당한 비난일 것이다 ) 을 제외한다면, 이 불
편함의 한 가지 가능한 원인은 성경을 일차원적으로 읽으려는 우리 의 경향일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을 한 가지 방식으로 읽도록 배웠고,
우리의 방식이 동료 여행자의 방식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바울의 말로 이것을 표현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을 알아
해석을 독점하는 눈이 되어 발에게 “우리에게 너는 필요없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방식은 대부분의 그리스
도인이 여러 세기 동안 성경을 읽어 온 방식과 다르다. 그것은 통탄
스러운 발전이다.
이 책의 본론( 2, 3, 4장 ) 은 이 일차원적 읽기에 의도적으로 도전하 기 위한 것이다. 이 장들에서 나는 지금까지 종종 분리되어 다루어
진 세 가지 주제를 나란히 배치했다.
첫째, 나는 변모 사건의 서로 다른 측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
4) Hywel R. Jones, Transfiguration and Transformation (Edinburgh: Banner of Truth, 2021), x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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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대한 신학적 문법을 전개할 것이다. 석의는 해석학적이고, 삼
위일체적이며, 기독론적이어야 한다는 교리적인 규칙이 있는데, 이 규칙은 해석을 억압하기보다는 빛을 비춰 준다. 성경과 기독교 전
통에 뿌리를 둔 전제는 우리의 적이 아니라 친구다. 나는 교리적 범
주의 도움 없이는 변모 사건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음을 점점 더 확
신한다.
사실 변모 사건은 ‘주석자의 전제와 방법론을 드러내는 시금석’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5) 케어드가 말했듯 “변모 사건은 주석
자의 낙원임과 동시에 절망이다.”6)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한 고전
적 교리는 오늘날의 석의 관행 속에서 닫혀 있던 “석의의 문을 열
수 있는 만능 열쇠 꾸러미” 역할을 한다.7)
제미슨과 타일러 위트먼이 석의를 위한 외재적 규칙과 내재적 규
칙을 구분한 것은 옳다. 외재적 규칙은 외부에서 부과되는 반면, 내
재적 규칙은 자료 자체에서 도출된다. 나는 의도적으로 내 문법을
성경에서 도출해 내어 내재적인 것이 되게 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읽기를 규율하는 것이 되게 할 것이다.8) 해석학적이고 삼위
5) W. L. Liefeld, “Theological Motifs in the Transfiguration Narrative,” in New Dimensions in New Testament Study, ed. R. N. Longenecker and M. C. Tenney (Grand Rapids: Zondervan, 1974), 163.
6) George B. Caird, “Expository Problems: The Transfiguration,” ET 67, no. 10 (1956): 291.
7) R. B. Jamieson and Tyler R. Wittman, Biblical Reasoning:Trinitarian and Christological Rules for Exegesi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22), xxii.
8) Jamieson and Wittman, BiblicalReasoning, xxi–xxii.
그리스도의 변모
일체적이며 기독론적인 문법은 본문에 강제로 덧씌우는 것이 아
니라 더 나은 석의를 가능하게 해 주는 자원이다.
둘째, 나는 성경 전체의 서사의 흐름 속에서 변모 사건의 여러 주
제를 추적할 것이다. 그 산 정상에서 일어난 예수의 변모는 성경의
다양한 서사를 묶어 하나의 생동감 있는 이미지로 만들어 낸다. 변
모 사건은 여러 본문을 엮어 짠 직물처럼 여러 서사의 흐름을 융합
해 만든 언어적 표상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보여 준 영광, 이
스라엘의 출애굽, 모세가 본 것, 엘리야의 사역 같은 주요 사건은 변
모 사건의 예표다. 변모 사건의 의미에 대한 온전한 그림을 그리려
면 이 사건들을 서로 연결할 필요가 있다.
조직신학이 성경 주위에 원을 그린다면, 성경신학은 성경 안에 선
을 그린다.9) 또는 다른 비유를 사용하자면, 마이클 호튼은 서로 다
른 접근 방식을 서로 다른 종류의 지도에 비유한다. 조직신학이 성
경 속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교리 사이의 논리적 연결을 보여 주는
도로 지도 같다면, 성경신학은 지세·발전·진화를 추적하는 지형
도다.10)
변모 사건은 성경의 주요 도로망과의 연결 관계와 성경의 지형
이라는 관점에서, 즉 교리와 서사의 흐름 둘 모두와 관련해 바라보
아야 한다. 예수의 변모 사건은 성경 서사의 일부이므로, 이 사건의
9)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Old and New Testaments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5), 15–16.
10) Michael Horton, The Christian Faith: A Systematic Theology for Pilgrims on the Way (Grand Rapids: Zondervan Academic, 2011, 언약적 관점에서 본 개혁주의 조직신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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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표가 되는 사건을 간과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또
한 예수의 변모 사건을 생각하는 데 난간 역할을 하고, 베드로가 표
현하지 못한 것( 마 17:4; 막 9:5-6; 눅 9:33 ) 을 표현하도록 돕는 정통적인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본의 아니게 비정통적인 신념을 채택할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이다.
끝으로 나는 2, 3, 4장을 우리 자신의 변모에 대한 짤막한 성찰로
마무리하겠다. 예수의 변모는 비현실적이거나 천상에 속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참여와 행동을 요구한다. 그 산 정상에서 빛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미래다. “우리가 다”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 고전 15:51 ). 변모하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소망이다.
우리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작업을 하고 나서, 우리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그런 작업을 끝
낸 것은 단지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어떻게 성화에서 진보할 수 있으며, 어떻게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
는 자”가 되는지를 묻는 것이다( 벧후 1:4 ). 교회사 속에서 영적 변화
의 여러 단계는 정화·조명·연합으로 지칭되어 왔다.11) 이 여러 단
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따라 변모 하는 관계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변모 서사와 특히 잘 부합
11) 위디오니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 여러 단계를 그런 식 으로 지칭했다.
그리스도의 변모
한다. 우리가 어떻게 변모되는지에 대해 묵상하지 않는 것은 진정
으로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변모 사건은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 는 것에 대한 보증”이다.12)
나는 2022년 3월 봄방학 동안 변모 사건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
각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강연을 위해 워싱턴과 오리건으로
여행했다. 그곳에서 나는 브라이언 데일리가 편집하고 번역한 『산
위의 등불』( Light on the Mountain ) 을 읽었는데, 이것은 내가 이 주제와
관련해 읽은 첫 번째 책이었다. 이 책은 지금도 여전히 내게 변모
사건에 대한 최고의 책이고, 내가 모두에게 이 주제를 연구할 때 가
장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사실 그 책에 담긴 교부
들의 주석은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모든 현대적인 주석서를 건너뛰고 단지 그 강해만을 읽기만 해도 될 정도로 풍부하다. 그 주
석은 비평이 도입되기 이전 시대의 석의의 우월성을 의심할 여지
없이 보여 준다. 나는 이 책이 교부들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워싱턴에서 우리는 린든에 있는 바크만-터너 오버드라이브 저택 에 머물 수 있었다. ( 바크만-터너 오버드라이브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기’와
12) Dale M. Coulter, “The Taboric Light,” First Things (blog), August 15, 2014, https://www.firstthings.com/blogs/firstthoughts/2014/08/the–taboric-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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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되었어’라는 곡으로 유명하다. ) 다섯 살인 내 아들 가나
안은 집 안에 수영장이 있는 저택에 언제 다시 머물 수 있느냐고 종
종 묻는다. 나는 여러 교부의 강해를 읽다가 아이들과 함께 수영장
에 뛰어들던 일을 기억하며 즐거워한다.
나는 2023년 2월 미드웨스턴 침례교 신학대학원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이 책의 초고를 넘겼다. 원고를 읽고 글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퀸 모지어와 톰 슈라이너가 이 글
을 처음으로 보았고, 내 논지가 명확하지 않은 대목, 논증이 지나친
대목, 동방 정교회의 용어를 무비판적으로 채택한 대목을 지적해
주었다. 퀸은 참고문헌 작업도 도와주었다. 마이크 키비는 존 가타
의 자료를 포함해 변모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자료를 많이 보내 주었
고, 중요한 조언도 해 주었다.
샘 파킨슨은 초고를 읽고, 지복직관에 대한 대화 상대가 되어 주
었다. 케빈 밴후저는 변모 사건이 해석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에 대한 자신의 책을 집필하면서 유익한 조언을 해 주었다. 채드 애
쉬비는 나의 글쓰기 기술을 개선하도록 도와주었고, 석의와 관련한
제안을 해 주었다. 그는 원고에서 쓸데없는 부분을 많이 제거해, 단
어 수를 2만 단어 가량 줄여 주었다. 브라이언 다이어는 책의 분량
을 줄이고, 내가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시도하지 말라고 권고해 주
었다. 나는 2023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틴데일 하우스에
머무는 동안 원고를 마무리했다.
나의 초기 독자 중 대부분은 내가 ‘알레고리’라는 용어를 버리고
‘영적 읽기’로 대체할 것을 권했다. 그들의 말이 옳겠지만, ‘알레고
그리스도의 변모
리’는 초대교회의 용어였으므로, 이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밴
후저는 독자가 ‘알레고리’라는 용어를 원래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
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용납될 수 있다.
이 책의 사운드트랙에는 스테파니 그레칭거, 젠슨 맥레이, 노보
아모르, 보니 라이트 호스맨, 반더러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나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쓴 곳인 캔자스시티 시내의 두 카 페 ‘다우 메이이스트’( Thou Mayest ) 와 ‘로체스터’( Rochester ) 에 감사 한다. 그곳의 분위기는 글을 쓰기에 완벽했다. 나는 안식년 동안 우
리 새집 서재에서 이 책을 다듬었다. 나는 이 책과 그 밖의 다른 프
로젝트를 작업할 수 있도록 2022년과 2023년 두 해에 걸쳐 안식년
을 허락해 준 미드웨스턴 침례교 신학대학교 제이슨 알렌 총장과
제이슨 듀싱 학장에게도 감사한다. 고등교육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 두 분의 지속적인 지원, 관대함, 하나님 백성을 위한 유익에 대한
시각은 독특하다. 이분들은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목표가 아니라, 장 기적인 유익을 위해 결정을 내린다. 다른 기관도 이런 모습을 본받
으면 좋겠다.
서론
두 층위의 기독론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5
서방 교회가 예수의 변모 사건을 간과해 왔다는 것은 보편적
으로 인정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방 전통은 지속해서 변모 사건을 전면과 중앙에 배치해 왔다. 변모 축일( 8월 6일 ) 은 교회력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한다. 서방 전통에서 이날은 찬양받지도, 존중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한 채 지나간다.1) 생각해 보라. 당신은 변모 사건에 대한 설교를
몇 번이나 들어 보았는가? 변모 사건을 노래하는 찬송을 몇 개나 알
고 있는가? 변모 사건은 실천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 호기심의 대상
이다.
내가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한 사전 조사를 시작했을 때, 변모 사건
에 대해 쓴 저작이 부족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학교 도서관
에 가서 ‘예수’라는 항목을 살펴보았다. 역사적 예수, 예수의 탄생·
죽음·부활에 대한 책은 많았다. 서가에 꽂혀 있는 예수의 변모 사
건에 대한 책은 단 세 권이었다. 라이트가 쓴 예수에 대한 741쪽에
달하는 저작은 변모 사건을 단 한 번, 그것도 그냥 지나치면 미안할
것 같아서 지나가며 언급할 뿐이다.2) 표준적인 조직신학서들에서
변모 사건에 대한 어떤 의미 있는 언급을 찾기는 어렵다. 아마도 오
늘날 일부 학자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회의적이므로 변모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피한 것 같다.
아마도 학자들이 변모 사건을 소홀히 한 또 다른 이유는 변모 사
1) 성공회 전통에서 변모 축일은 1549년의 ‘공동 기도서’에서는 사라졌다가, 1662년의 교회력에 다른 특별한 규정 없이 다시 등장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서는 1474년부터 최소한 1969년까지는 사순절 둘째 주일에 변모 축일을 지 켰다. 오늘날 일부 교회력에서는 주현절기 마지막 주일, 즉 재의 수요일 직전 주 일에 변모 사건을 기념한다. 이 마지막 날짜는 변모 사건을 기념하기에 적절한 때다. 변모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신”(눅 9:51) 사역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2) N. 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London: SPCK, 1996), 650. Larry Hurtado’s Lord Jesus Christ (Grand Rapids: Eerdmans, 2005)도 비 슷하다(263, 333).
서론 ┃ 두 층위의 기독론 23
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
처럼 어리둥절하게 되었다( 막 9:6 ). 변모 사건은 대단하지 않은 마술
처럼 보인다. 제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별 도움을 주지 않는 빛을 발
하는 한 사람! 예수의 다른 이적들, 즉 사람들을 먹이시고, 치유하시
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은 이해가 되지만, 변모 사건은 혼란스
럽다.
한 저자는 “지금까지 변모 서사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석을 제시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을 시작한다.3)
또 다른 저자는 어떻게 많은 사람이 학문적 사변의 미로 속에서 길
을 잃게 되는지를 언급한다.4)
만일 내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거나 죽음에서 부활
하지 않으셨다면 무엇이 달라졌을지를 당신에게 묻는다면, 당신은
상당히 빠르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께서 변모하지 않
으셨다면 무엇이 달라졌을지를 묻는다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빨리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변모 사건이 십자가나 부활과
같은 정도의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
리가 변모 사건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두지 않는지를 보여 준다. 변
모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수의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토머스 제퍼슨식으로” 성경에서 변모 사건을 삭
3) G. H. Boobyer, St.Mark and the Transfiguration Story (Edinburgh: T&T Clark, 1942), viii.
4) Allison Trites,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A Hinge of Holy History (Hantsport, Nova Scotia: Lancelot, 1994), 11.
그리스도의 변모
제한 경우에, 성경을 읽는 방식이 달라질까? 5)
이 질문들은 대답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변모 사건이
복음의 중심이거나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계시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는 변모 사건이 없었어
도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밖의 다른 본문으
로 우리의 기독론을 충분히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한다. 이 생각 때문에 변모 사건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데 거의 영
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변모 사건은 우리가 결코 그 깊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
어 보이는 사건 중 하나다. 그 서사의 단순함이 변모 사건의 심오함
을 감춘다. 변모 사건은 삼위일체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
등 모든 주요 교리에 흔적을 남긴다. 변모 사건의 빛은 이 모든 핵
심적인 신념 위에 반영된다.
변모 사건은 최고의 계시다. 변모 사건은 과거를 현재와 하나로
묶는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분이 이제 빛으로 둘러싸여 계
신다. 변모 사건은 복음의 축소판이다.6) 변모 사건은 기독교의 위대 한 신비, 즉 예수의 유일무이성을 계시한다. 한 학자가 말하듯 변모 사건에서 “신약신학의 다양한 요소가 만난다.”7) 하지만 조직신학자
5) 토머스 제퍼슨은 이적 사건을 삭제한 복음서 판본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6) 복음의 축소판이라는 표현은 Allison Trites,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The Gospel in Microcosm,” EQ 51, no. 2 (1979): 67–79의 부제로 사용되 었다.
7) Arthur Michael Ramsey, The Glory of God and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Eugene, OR: Wipf & Stock, 2009), 144.
서론 ┃ 두 층위의 기독론 25
와 성경신학자는 둘 모두 자신의 저작에서 여전히 이 사건을 대체
로 무시해 왔다.
이 책은 서방 전통에서 변모 사건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다. 나
는 이 사건을 다음 세 가지 주요 관점에서 검토함으로써 그렇게 할 것이다. (1) 영광스러운 배경, (2) 영광스러운 표징, (3) 영광스러운
말씀.
보다시피 영광이라는 개념이 핵심이다. 이 사건을 지칭하는 영어
명칭은 헬라어 ‘메타모르포오’와 라틴어 ‘트란스피구라투스’에 근
거한 ‘변모 사건’( the transfiguration ) 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의미를 더
잘 표현해 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디 페어클레룽( die Verklärung, 영 화 ) 이라는 독일어 명칭이다.8) 변모 사건 기사에서 누가복음만이 “영
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사도 영광
으로 빛난다. 또한 베드로는 자신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을 들
려주면서, 예수께서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
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 와 영광 을 받으셨느니라”( 벧후 1:17 ) 고 말
한다.9) 영광은 변모 사건에서 중요한 개념이고, 아마도 근본적인 개
념일 것이다.
이 서론에서 나는 변모 사건의 개요를 간단하게 설명한 후, 무엇
8) Ramsey, GloryofGod, 101.
9) 나는 CSB를 표준 영어 번역본으로 사용할 것이며, 이를 벗어나거나 사역을 할 때는 따로 표기하겠다. CSB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본일 뿐 아니라, 편집자 중 한 분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CSB 번역본을 보도록 강권하셨다.
그리스도의 변모
과 왜를 살펴보겠다. 변모 사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변모 사
건은 왜 일어났는가?
변모 사건의 개요
‘변모 사건’은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올라가 모습이 변화
되신 것을 가리킨다. ‘예수의 얼굴은 빛났고, 예수의 옷은 밝은 흰색
으로 변했으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함께 있었고, 하늘
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 사건 전체는 마태복음 17장 1-8절, 마가복음 9장 2-8절, 누가
복음 9장 28-36절에 기록되었고, 베드로후서 1장 17-18절에는
간단히 언급된다. ‘변모되었다’( ‘메타모르포오’ ) 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
에서 단지 네 번 나온다( 마 17:2, 변형; 막 9:2, 변형; 롬 12:2, 변화; 고후 3:18, 변화 ).
변모 사건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끝나는 시점, 즉 예수께서 예
루살렘으로 향하시기 직전에 일어난다. 이 사건은 베드로가 예수는
메시아라고 고백한 지 일주일 후에 일어나고,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
도 있느니라”는 예언의 성취다( 막 9:1; 또한 마 16:28; 눅 9:27을 보라 ).
산에서 일어난 이 변모 사건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기사는 놀라울
정도로 병행을 이룬다. 부활·십자가 사건·예수의 치유 이적·가
르침에 대한 서사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변모 사건은 예수의 제자
┃ 두 층위의 기독론 27
들 기억 속에서 대체로 ‘변조 불가능한 것’이었던 것 같다. 달리 말
해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큰 영향( 우리에게 미친 것보다 더 큰 영향 ) 을 미 쳤다.
공관복음서 기사는 모든 본질적인 다음 세부 내용에서 일치한다.
예수는 산에 올라가시고, 베드로·야고보·요한을 데리고 가신다.
예수의 외형의 영광스러운 변화가 일어난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
옆에 나타나 예수와 대화를 나눈다. 베드로는 자신들이 그곳에 있
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반응을 보이며, 세 개의 장막을 짓겠다고 제
안한다.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막 9:7; 또한 마 19:5; 눅 9:35를 보라 ) 라는
음성이 들린다. 그런 후에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예수
와 제자들만이 남아 있게 된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는 자
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방금 본 것을 아무에
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이야기의 전개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지만, 그 그림을 채우는 이
야기들에 사소한 차이들이 있다. 나는 이 책을 전개해 나가면서 그
차이들을 논의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겨난다. ‘우리
는 이 사건의 의미( 무엇 ) 와 중요성( 왜 ) 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무엇: 이중적 아들이라는 예수의 지위
이 책에서 내 기본적인 주장은 이것이다. ‘변모 사건은 이중적 아
들이라는 예수의 지위를 계시한다. 10) 변모 사건에서 고난받는 이 땅
의 메시아적 아들의 미래적 영광과 영원 속에서 나신 하늘에 속한 아
들의 선재적 영광 둘 모두가 계시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이 산 정상에서 이루어진 계시는 한 인격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서사적 묘사일
수 있고, 초대교회가 예수의 존재론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11)
이 논증은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일 수 있다.12) 내가 한 학생에게 내 논지를 설명했을 때, 그 학생
은 “당신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대부분
의 사람이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것은 좋
은 질문이다.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대답
10)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내가 사용한 표현인 ‘이중적 아들이라는 지위’에 대 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특히 4장에 나오는 기독론적 문법을 보라. 나는 두 아 들의 존재가 아니라, 한 인격 안의 두 본성을 주장한다. 또한 이중적 아들이라는 지위에 대한 논거는 하나의 세부적인 내용이 아니라, 배경·표징·말씀의 결합 속에서 발견된다.
11)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라고 단언하고(히 1:3), 니케아 신경은 예수께서 “빛에서 나온 빛”이라고 고백한다. 변모 사건은 미래를 내다봄과 동시에 과거를 회상하므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상과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과거에 대한 인식을 둘 다 포함한다. 예수의 예정된 영광과 선재적 영광은 분리될 수 없다. 사실 이 둘은 나뉠 수 없다. 예수께서 신실한 메시아일 수 있으셨고, 아버지에게서 영광을 받을 수 있 으셨던 것은 이 영광이 이미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아적 아들이 받게 될 미래의 영광은 영원 속에서 나신 자신의 본성에 기초한다. 12) 베어(F. W. Beare, The Earliest Records of Jesus [Nashville: Abingdon, 1962], 141)가 “복음서에서 변모 이야기만큼 다양하게 해석되어 온 본문은 아 마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옳다.
서론 ┃ 두 층위의 기독론 29
했다. 즉,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선재성을 지지하지 않고, 변모 사건
은 단지 다가올 메시아적 영광의 예고편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학계
의 지배적인 견해인데, 이 책은 그런 견해에 반대한다는 것이다.13)
그런 견해는 요한복음이 교회가 여전히 자신의 신념들을 발전시키
고 있던 훨씬 후대에 쓰였다는 전제 아래 고등 기독론을 요한복음
에만 국한한다.
나는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도 기독론에 대한 그런 오해를
토대로 변모 사건을 읽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변모 사건에서
학자는 예수의 지상적 사명만을 보고, 교인은 예수의 신성만을
본다. 어느 쪽도 이 둘을 연결하지 않는다. 나는 둘 다 변모 사건을
충분히 면밀히 검토하지 않아 왔다고 주장하려 한다.
제임스 던은 변모 사건에는 “선재성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다”라
고 주장함으로써 현대 학계의 견해를 대표한다.14) 던은 이 주장을
세 가지 근거로 뒷받침한다.
첫째, 복음서는 이 사건을 예수의 부활과 높아지심을 예고하 는 것으로 보았다.
13) 이 견해는 초대교회와 관련해 발터 바우어의 저작과 초대교회에 정통 교리에 대한 서로 다투는 견해들이 있었다는 바우어의 주장을 전제한다. Walter Bauer, Orthodoxy and Heresy in Earliest Christianity (Mifflintown, PA: Sigler, 1996)를 보라.
14) James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Philadelphia: Westminster, 1980), 47. 부비어(Boobyer, St.MarkandtheTransfigurationStory, 66)는 변모 이야기가 회상이 아니라 예상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단언한다.
그리스도의 변모
둘째, 예수의 변모와 구름은 모세의 영화를 상기시킨다.
셋째, 눈부시게 흰 옷은 영화롭게 된 성도를 포함한 천상의 존재에게 전형적이다.
던은 “여기에는 선재적 영광에 대한 분명한 암시 같은 것은 확실
히 없고, 성육신과 관련된 함의도 전혀 없는 것 같다”라고 결론을
내린다.15)
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마크 스타인은 사람들은 변모 사건을 그
리스도의 성육신 이전 영광의 표징으로 보거나, 장차 올 인자의 영
광을 미리 잠깐 엿보게 해 준 것으로 본다고 지적한다. 스타인은
“이 기사 속에는 변모 사건 이전에 예수께서 이 시점까지 가려졌던
감춰진 영광을 소유하고 계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결론을 내린다.16) 존 하일은 변모 사건은 예수께서 “아직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에 의해 외적이고 예고적이며 일시적으로 천상의 존재로 변화되신 것”을 묘사한다고 주장한다.17) 더 나아가
15) Dunn, ChristologyintheMaking, 48.
16) Mark Stein, Mark, BEC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8, 마가 복음,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4), 417. 갈랜드(David E. Garland, Luke, ZECNT [Grand Rapids: Zondervan Academic, 2011], 384)도 스타인과 비슷하게 변모 사건은 예수의 영원한 영광의 예고편이라고 말한다. 프랜스(R. T. France, The Gospel of Matthew, NICNT [Grand Rapids: Eerdmans, 2007, 마태복음,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9], 641–651)는 주로 어떻게 예수 께서 새로운 모세인지에 대해 말한다.
17) John Paul Heil,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Narrative Meaning and Function of Mark 9:2–8, Matt 17:1–8 and Luke 9:28–36, AnBib 144 (Rome: Pontifical Biblical Institute, 2000), 76.
서론 ┃ 두 층위의 기독론 31
그는 변모 사건은 예수께서 이미 소유하고 계신 영광을 드러내거나
계시하신 것으로 해석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중에
그는 변모 사건은 “내적인 자기 변모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이루
어진 외적인 변모”라고 말한다.18)
이 같은 설명은 베드로후서 1장 16-18절에 나오는 변모 사건 기
사에 대해서도 전형적이다. 피터 데이비스는 “베드로후서에서 변모
사건의 요지는 예수의 신성이나 영광이 계시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에게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이다”라
씀으로써
18) Heil, Transfiguration of Jesus, 92. 대니얼 커크(J. R. Daniel Kirk, A Man Attested by God: The Human Jesus of the Synoptic Gospels [Grand Rapids: Eerdmans, 2016], 191–199)는 변모 사건에서 예수는 자기 본래의 영광을 수여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반영한 이상화되고 영화롭게 되신 인간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딜버트 버켓(Dilbert Burkett, “The Transfiguration of Jesus (Mark 9:2–): Epiphany or Apotheosis?,” JBL 138, no. 2 [2019]: 413–432)은 마가복음의 변모 사건은 하나님의 현현 사 건이 아니라, 신격화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마가복음의 예수는 사람이 된 신 이 아니라, 신이 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19) Peter H. Davids, The Letters of 2 Peter and Jude, PNTC (Grand Rapids: Eerdmans, 2006), 202.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 2 Peter and Jude: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NTC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9], 104–105)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비슷한 평가를 한다.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에게서 존귀와 영광을 받았다고 하신 것을 주목하라. 이 것은 헬레니즘적인 신적 인간(‘데이오스 아네르’)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이것은
베드로후서가 변모 사건을 예수의 감춰진 신성이 드러난 현현 사건으로 보았다
고 생각한 에른스트 케제만(Ernst Käsemann)의 견해가 얼마나 빗나간 것인지 를 보여 준다. 초기 기독교의 이해에 따라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수행 하도록 임명되셨으므로, 신적 영광이 예수께 수여된다.” 토머스 슈라이 너(Thomas Schreiner, 1,2 Peter,Jude, NAC 37 [Nashville: B&H, 2003], 314)가 “위엄(‘메갈레이오테스’)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신성을 의미하는 것은
초대교회에 고등 기독론이 있었음을 옹호하는 이들조차도 변모
사건이 지닌 함의를 온전히 고려하지 않았다. 래리 허타도는 예수
에 대한 초대교회의 “경배 패턴”을 인정하지만, 예배의 기초인 예수
의 선재성을 과소평가한다.20) 도리어 초대교회가 예수를 예배하게
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고 높아져서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가 되
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1) 본질적으로 허타도 등은 지상 생애 동안
나사렛 예수에 대한 예배는 없었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선재성과 예수에 대한 예배를 언급했을 수도 있지만, 공관복음서는
이 점에 대해 침묵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또는 적어도 반쯤은 틀렸다고
단언한다. 변모 사건은 다가올 일을 보여 주는 것이자 과거를 드러
내는 것, 즉 미래의 영광의 예고편이자 선재성의 표징이다. 변모 사
아니지만(에스드라1서 4:40), 이 문맥에서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리킨다([벧후] 1:1; 하나님에 대해-눅 9:43; 렘 40:9 칠십인역; 에스드라1서 4:40)고 주장한 것은 독특하다.
20) Larry W. Hurtado, One God, One Lord: Early Christian Devotion and AncientJewishMonotheism (New York: T&T Clark, 2015).
21) 허타도는 자기는 선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경배의 역사적 동력과 기초를 검토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옹호한다(Larry W. Hurtado, “The Origins of Jesus-Devotion: A Response to Crispin Fletcher-Louis,” Tyndale Bulletin 61, no. 1 [2010]: 5; Crispin FletcherLouis, Jesus Monotheism, vol. 1, Christological Origins: The Emerging ConsensusandBeyond [Eugene, OR: Cascade Books, 2015], 65–88도 보라).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God of Israel:God Crucified and Other Studies on the New Testament’s Christology of DivineIdentity [Grand Rapids: Eerdmans, 2008])은 공관복음서가 지상 생 애 동안 예수에게 신적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믿지만, 성육신보다는 부활하고 높아지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
서론 ┃ 두 층위의 기독론 33
건은 이 둘 모두다. 이 두 부분은 사실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또한 순서가 있다.22) 예수의 변모 사건은 예수의 본성에 기초한다.
나는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변모 사건을 진
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23)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의 지
상적 사명이나 예수의 신성 중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것을
배제한다. 즉, 변모 사건은 예수께서 신적 존재라는 것에 대한 것
이라거나( 초대교회가 고백한 대로 ), 미래에 영화롭게 되실 예수의 몸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주석자가 주장하는 대로 ) 24) 하지만 변모 사
건은 둘 모두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우주적 인물이자 역사적 나사
렛 예수다.
22) 어떤 이들은 ‘미래의 영광’이 반드시 ‘과거의 영광’을 함축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천사에게도 영광이 있고, 인류도 변화될 것이며, 이 땅도 마 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조 된 존재의 미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과 연합되거나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얻는다.
23) 외경인 요한행전과 베드로행전은 둘 다 변모 사건을 하나님의 현현 사건으로
해석한다.
24) 일부 현대 주석자는 예수의 영원한 영광과 미래의 영광을 둘 다 언급한다. 카 슨(D. A. Carson, “Matthew,” in TheExpositor’sBibleCommentary, vol. 9, Matthew and Mark, rev. ed. [Grand Rapids: Zondervan, 2010], 437)
은 제자들이 예수의 성육신 이전의 영광을 엿보았고, 예수의 다가올 높아지심 을 내다보았다고 말한다. 제임스 에드워즈(James R. Edwards,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PNTC [Grand Rapids: Eerdmans, 2001], 261–271)
는 제자들이 변모 사건에서 예수의 참된 본성을 보았다고 단언하지만, 계속해 서 변모 사건은 주로 예수의 미래 영광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요하네
스 크리소스토모스(John Chrysostom, Homily21 [PG 63:700])는 초대교회
를 대변해, 변모 사건에서 예수께서 “신성을 조금 드러내시고 내재하신 하나님
을 보여 주셨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변모
이렇게 변모 사건은 어떻게 예수께서 인간이시자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의 내적 활동과 외적 활동이 어디에서 만나는지에 대한 것
이다. 변모 사건은 아들이 누구이고, 그가 누구로 될 것인지를 우리
에게 말해 준다. 변모 사건은 아들의 존재론과 아들의 사명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아들의 신성과 인성을 나누지 않으면서 구분해야
한다. 성경의 어떤 본문은 시간 이전의 예수의 본성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신학화하고 ), 어떤 본문은 구속사 안에서 이루어진 예수의 사
역에 대해 말한다( 경륜화한다 ). 변모 사건 본문에서 아버지의 음성은
예수의 이중적 아들이라는 지위를 확증한다. 변모 사건에서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예수의 모습과 신적 위격의 존재 방식은 한 위격 안
에서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인성은 변모되고, 예수의 신성은 드러
난다. 산 위의 빛은 예수께서 항상 어떤 존재였는지와 예수께서 어
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드러낸다. 영원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을
때 자신의 신성을 내려놓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의 신
성을 억누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인성을 억누르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을 자유롭게 했고, 해방했으며, 강 화했다. 요한복음의 한 구절은 이 책의 논지를 짧게 표현한다. “아
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
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5 ). 예수는 이 구절에서 자
신의 이중적 영광, 즉 시간 이전의 자신의 빛과 시간 안에서의 자신
의 빛을 단언하신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에게 자신이 항상 소유
해 오셨던 영광( 과거와 현재의 영광 ) 으로 영화롭게 해 달라고( 미래에 )
요청하신다.
변모 사건에서 일어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아버지는 아들이
항상 소유하셨던 바로 그 영광으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 이다.25)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는, 예수는 자신의 고유한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께서 인간이시라는 점에서는,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왜: 계시를 통한 소망
변모 사건은 예수의 이중적 아들이라는 지위를 계시한다. 그렇다
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 미래의 영광을
더 일찍 보여 주지 않으셨는가? 왜 예수는 자기 미래의 영광을 제자
중에서 오직 세 명에게 보여 주기로 선택하셨는가? 이 사건은 자신
의 행위와 이적을 통한 예수의 점진적 계시와 어떻게 부합하는가?
이 여러 질문은 모두 변모 사건의 서사적 배치와 관련이 있다.
변모 사건은 인접한 서사, 복음 이야기,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해
석되어야 한다. 또한 변모 사건은 시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먼저 공관복음서의 인접한 맥락에서 시작해 보자. 다행히 모
든 공관복음서는 이 장면에 대해 대체로 같은 구조다. 변모 사건의
배경을 개략적으로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25) 변모 사건은 선지자-제사장-왕이라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선지자 예수는 반드시 경청해야 할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제사장 예수는 제사를 드리려는 참 된 중보자로서 빛을 발하신다. 왕 예수는 장엄한 영광을 발하실 뿐 아니라 영광 의 선물을 주신다.
단락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베드로의 고백 16:13-20 8:27-30 9:18-21
수난 예고 16:21-23 8:31-33 9:22
“자기 십자가를 지라” 16:24-28 8:34-9:1 9:23-27
변모 17:1-8 9:2-8 9:28-36
엘리야의 등장 17:9-13 9:9-13
치유의 실패 17:14-20 9:14-29 9:37-43a
수난 예고 17:22-23 9:30-32 9:43b-45
세금을 냄 17:24-27
“누가 가장 큰 자인가” 18:1-5 9:33-37 9:46-48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네 가지다. 첫째, 변모 사건
은 베드로의 고백을 확증하지만, 그것을 넘어선다. 모든 공관복음서
는 변모 사건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행해진 베드로의 고백과 연결 한다. 그 이유는 변모 사건이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베
드로의 고백을 확증하면서도 더 많은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26)
이 서사는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해, 예 수께서 자신을 인자라 부르시는 것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아버
지가 예수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버
지의 음성은 예수의 정체성에 가장 깊이 다가간다. 예수는 이스라
26) 마태복음에서만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메시아 고백에 예수께서 “살아 계신 하 나님의 아들”(16:16)이라는 고백을 덧붙인다. 이 어구가 예수께서 ‘메시아’라 는 것과 같은 의미인지, 아니면 예수의 메시아적 지위를 넘어서는 것인지에 대 해서는 논란이 있다. 내 해석은 베드로가 원래는 삼위일체적인 의미로 이 고백 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마태는 이 고백을 기록할 때 예수의 아들이라는 지위에 대해 더 깊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서론 ┃ 두 층위의 기독론 37
엘의 메시아 그 이상이다. 즉, 예수는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참된 하
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시간 이전에 아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런 의미에서 변모 사건은 예수의 미래 영광과 예수께서 항상
소유하셨던 영광 둘 모두에 대한 것이다. 주석자들은 변모 사건
보다 베드로의 고백을 훨씬 더 주목해 왔음에도, 변모 사건은 베드
로의 고백을 넘어선다. 아마도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기독론이
필요한 정도 만큼 정교하지 못했던 이유일 것이다.
둘째, 변모 사건은 소망과 격려를 준다. 변모 사건을 둘러싸고 있
는 서사는 힘든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하다. 예수의 임박한 죽음과
이 땅의 혼란에 대한 여러 예언이 변모 사건 서사를 앞뒤로 둘러싸
고 있다. 변모 사건 서사 안에서 예수는 자신의 출애굽에 대해 말씀
하신다. 변모 사건 서사 이전에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후 예수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
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다”( 마 16:21; 또한 막 8:31; 눅 9:22를
보라 ). 모든 제자가 들은 모든 것은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
을 당하시리라는 것이다. 변모 사건 서사 후에는 경련하는 아이 기
사가 나오고, 이것은 우주적 타락에 대한 묘사다. 가타가 지적하듯
“이렇게 변모 사건은 극심한 고통으로 둘러싸인 영광이다.”27)
변모 사건은 제자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영광을 얼핏 보게 해 주
27) John Gatta,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and Cosmos: A Focal Point of Literary Imagination,” Sewanee Theological Review 49, no. 4 (2006): 489.
는 사건이다. 이 서사는 암울한 전망을 뚫고 터져 나오는 밝고 강렬
한 폭발처럼 세상의 왜곡되고 추악한 모습에 도전한다. 이 서사는
죽음이 삼켜지고 영광만 남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계시
한다. 톨킨이 미래의 왕 아라곤에 대해 묘사한 구절은 예수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재에서 불이 일어나고,
그림자에서 빛이 솟아나리라.
부러졌던 검이 새롭게 되고,
왕관 없는 자가 다시 왕이 되리라.28)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다가올 치욕에 대비하도록 제자들을
무장시키신다. 변모 사건의 일차적 목적은 ‘파라클레시스’( 격려 위
로·소망 ) 를 주는 것이다. 안디옥의 티모테우스가 말하듯 변모 사건
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불신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오히려 신속하게 그들에게 확신을 주셨다……[예수
는] 그들에게 부활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셨다.”29) 예수는 하나님 안 에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 계셨으므로, 죽음이 그를 이길 수
28) J. R. R. Tolkien, The Lord of the Rings, vol. 1, The Fellowship of the Ring (New York: Ballantine Books, 1965), 231.
29) Timothy of Antioch, “Homily on the Cross and Transfiguration,” in Light on the Mountain:Greek Patristic and Byzantine Homilies on the Transfiguration of the Lord, trans. Brian Daley, Popular Patristics 48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2013),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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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다.
변모 사건은 다른 모든 빛이 어두워졌을 때 프로도를 돕기 위해 갈라드리엘이 그에게 준 유리병과 같다. 변모 사건은 별 가운데 가
장 밝은 별이다. 산 위에서 제자들의 반응은 어둠 속에서 프로도가
외친 것과 비슷하다. “아이야 에아렌딜 엘레니온 안칼리마!”( 가장 밝
은 별, 에아렌딜이여, 만세! ). 30) 죽음 자체는 빛의 변모 과정의 일부일 뿐
이다. 빛은 죽음 이후에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셋째,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변모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
고, 추가적인 변모가 반드시 필요함을 보여 준다. 변모 사건은 미래
를 보여 준 것일 뿐이고, 미래를 실현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산
위에서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고, 다른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온 후
치유에 실패했으며, 그들은 산을 떠나면서 누가 가장 큰 자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빛이 왔지만,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다. 새 시
대는 이 땅에 완전히 오지 않았다. 우리는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 현실은 특히 마태복음에서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빛이 사라질
때, 어둠이 세상을 뒤덮는다. 산 위에서 예수의 얼굴은 해처럼 빛
났다. 그러나 예수와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들은 “간 질”( moonstruck ) 로 고생하는 소년을 만난다( 마 17:15 ). 31) 대부분의 번
역본은 단순히 이 소년이 “발작을 한다”거나 “간질 환자”라고만 말 한다. 하지만 그렇게 번역된 헬라어는 ‘셀레네’( 달 ) 에서 유래한 ‘셀
30) J. R. R. Tolkien, The Lord of the Rings, vol. 2, The Two Towers (1954; repr., New York: HarperCollins, 2012), 720.
31) 내게 이 점을 지적해 준 채드 애쉬비에게 감사한다(고전 15:41을 보라).
그리스도의 변모
레니아제타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간질 발작을 달의 초월적 힘과
관련지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말하면, 예수는 달의 어둠에 사로잡
힌 자들을 치유하시러 태양의 빛으로 오셨다( 4:24를 보라 ).
이 현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의 장면이 반역을 암시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에서 더욱 강조된다. 누가복음 기사에서
는 귀신이 그 소년을 내던져 “산산조각 낸다”라고 표현한다( 눅 9:39
저자 사역 ). 이 단어는 모세가 돌판을 땅에 던져 산산조각 낸 것을 묘
사할 때 사용된 바로 그 동사다( 출 32:19 ). 예수는 그들을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라고 부르시는데( 마 17:17; 막 9:19; 눅 9:41 ), 이것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떠오르게 하는 표현이다( 출 16:28; 민 14:11, 27 ). 32)
따라서 변모 사건의 목적은 단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
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변화되게 하 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인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게 된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것을 잘 표현한다. “따라서 이 상징적 사건[변모
사건]은 곧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이고, 우리 모두가 그분
안에서 신이 된다는 것에 대한 계시다. 변모 사건에서 우리는 어떻 게 영원하신 아들의 비우심 ( ‘케노시스’ ) , 즉 유년기·성인기·피곤
함·슬픔·고난·죽음의 빈곤과 연약함을 통해 자신을 쏟아 내심이
32) Alastair Roberts, “Transfigured Hermeneutics—ransfiguration and Exegesis,” Reformation21 (blog), December 18, 2015, https://www.reformation21.org/blogs/transfigured-hermeneutics-tran.php. 이것은 여 섯 편으로 된 논문 중 하나다. 다른 다섯 편의 논문에 대해서는 참고문헌 중 “논 문” 항목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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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우리의 충만함( ‘플레로시스’ ), 즉 신적 아름다움의 소멸되지 않
는 광채와 무한한 생명, 거듭남과 부활의 빛으로 우리의 본성을 채
우시는 것인지를 본다.”33) 예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빛으로 충만한 유일하신
분 예수는 자신의 빛을 나누어 주려 하신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
를 변모시킨다.
마지막으로, 변모 사건은 인류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영원한 삼위
일체적 사랑을 보여 준다. 변모 사건의 맥락은 지상의 현실을 초월 한다. 예수의 광채 나는 모습과 예수의 아들이라는 지위에 대한 선
언은 하늘의 교리다. 예수는 성부 및 성령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항상 존재해 오신 영원한 아들이시다. 이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이 인류를 위해 부어진다. 성자는 자신과 같은 종들이 신적 본
성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성부는 인류를 구
원하시려고 성자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다. 성자는 육신을 취하심
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다. 이 과정보다 언약이 먼저다.
이런 식으로 예수의 아들이라는 지위는 왕권보다 친족 관계에 더
가깝다. 예수의 아들이라는 지위는 그의 소명에 국한될 수 없고, 성 부 및 성령과의 관계를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성자를 통해 성령 안
에서 성부의 빛을 안다.
요약하면, 변모 사건의 목적은 계시를 통해 희망을 주는 것이다.34)
33) David Bentley Hart, foreword to The Uncreated Light, by Solrunn Nes (Grand Rapids: Eerdmans, 2007), xiv.
34) 목회자에게 ‘계시를 통한 희망’이라는 개념은 변모 사건에 대한 설교의 중심 주
예수의 이중적 아들이라는 지위는 예수의 고난이 이 이야기의 끝이
아님을 보여 줌으로써 제자들에게 소망을 준다. 예수는 단지 이
스라엘의 왕이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예
수는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이 사랑하시
는 영원한 아들이시다. 변모되지 않은 이스라엘은 언젠가 빛 되신
예수와 연합하게 됨으로써 치유될 것이다.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
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 3:2-3 ).
변모 사건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은 빛에서 나온 빛이라는 계
시가 주어지지 않게 된다. 변모 사건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임박한
십자가 또는 그들 자신의 십자가( 마 16:21 ) 를 생각할 때 제자들에게
는 소망이 없다. 변모 사건이 없다면 우리는 변모될 소망이 없다. 변
모 사건은 우리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있게 될 뿐 아니라, 우리가 그와 같게 될 것도 보증한다.
내 기도는 이 책이 당신을 도와 영광스러운 아들을 바라보게 하
고, 바라봄으로써 당신도 변모되게 하는 것이다.
제가 될 수 있다. 설교의 개요는 내가 제시한 구조(배경, 표징, 말씀), 공간적 진 행(산 위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각 부분에 함축된 명령(오르라, 보라, 들 으라) 또는 행동(바라봄, 들음, 아들에게서 위로받음)에 대한 강조를 따를 수 있다. 설교 제목은 ‘보고 들으라’, ‘영광의 비전’, ‘빛을 보다’, ‘보라: 빛’, ‘변모 되라’, ‘예수는 누구인가?’가 될 수 있다. 설교의 주요 기조는 그리스도에 대한 경이로움과 어두운 때 격려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변모의 필수불가결성
복음서의 신학과 역사에 대한 최근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일부는 변모 사건을 완전히 생략한다.
역사상
-아서 램지 1)
최고의 TV 코미디 시리즈는 <사인필드>( Seinfeld ) 다. 당
신이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틀
린 것이다.
<사인필드>는 뉴욕시에 사는 네 친구가 하루 동안 일어나는 여러
1) Arthur Michael Ramsey, The Glory of God and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Eugene, OR: Wipf & Stock, 2009), 104.
사소한 일을 중심으로 서로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이 코미디극의
대부분은 제리의 아파트나 동네 식당에서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사인필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다룬 코미디극”이라고 스
스로 설명하고 있는데도 NBC를 재정적 파산에서 거의 혼자 힘으
로 구해 냈다. 이 코미디극의 엄청난 성공은 모든 시즌을 관통하는
줄거리라는 표준적인 구조가 없다는 점에서 더 인상적이었다. 각각
의 편은 기본적으로 독자적으로 작동한다. 심지어 각각의 편 안에
서조차도 한 편을 관통하는 줄거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사인필드>가 대성공을 거둔 이유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다룬 코
미디극이어서 모든 것을 다루는 코미디극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사인필드>는 줄거리가 없었으므로 온갖 관계, 일상의 기이한
일,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사람들의 상호작용 방식을 다룰 수 있 었다.
마찬가지로, 변모 사건의 서사도 혼란스러울 수 있다. <사인필드> 의 각 편이 전체 줄거리와 자연스럽게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변모
사건의 서사도 성경의 연대기나 우리가 구원받는 ‘방식’과 자연스
럽게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는 <사인필드>의 어느 특정한 편을 건너
뛰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 아닌지를 확신하지 못할 수 있다. 왜냐하
면 그 편을 건너뛰어도 <사인필드>의 서사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다는 듯이 그 이후로 계속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인필드>는 각 편이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
로, “해양생물학자”나 “퍼피 셔츠” 같은 편들이 이 코미디극의 상징
이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변모 사건도 통상적인 범주를 초월함
으로써 예수의 정체성과 복음 메시지 전체의 상징이 되었다. 변모
사건은 단지 빛나는 얼굴을 가진 한 유대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변모 사건은 단지 겁먹은 세 어
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운명에 대한 것이다. 변모 사건
은 단지 눈부시게 흰 옷과 밝은 구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만유의
목적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변모 사건을 소홀히 해 왔다. 이제는 산 위의 제자들처럼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때다( 눅 9:32 )
변모 사건을 소홀히 하는 다섯
변모 사건은 어려운 시기를 겪어 왔다. 변모 사건은 더 이상 우리
의 신학이나 우리가 예수에 대해 말하는 서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변모를 소홀히 하면 손해를 보게 된다.
변모 사건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복잡한 것이 감
춰져 있다. 변모 사건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여러 주제를 함께 묶
어 주고,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묵상은 성경 읽기와 교리를 표현하
는 것에서 큰 유익을 줄 것이다. 이 장에서 나는 우리가 변모 사건
을 소홀히 하는 다섯 가지 이유와 변모 사건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이유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겠다.
우리는 변모 사건이 성경과 신경에서 사소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변모 사건을 소홀히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 사건이 성
경 서사와 교회의 역사적 신경에서 사소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
이다.
예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한다면, 내 추측으로는 50명 중 49명은 변모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건을 성경에서 제거해도 복음서 기자들의 서사는 별
로 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예수는 구유에서 태어나, 해
골의 장소에서 생을 마감하신다. 변모 사건은 예수의 삶·죽음·부
활·승천처럼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사건
이 지닌 묵시적 성격은 이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
는 괴짜 같은 서사로 만든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세 공관복음서는 모두 변모 사건을 다
루지만, 이 사건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의 기사
는 8절( 마 17:1-8 ), 마가복음은 7절( 막 9:2-8 ), 누가복음은 9절( 눅 9:28-
36 ) 로 이루어져 있다. 요한복음에는 이 서사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바울도 이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서를 제외하면, 신
약 성경은 베드로후서에서 이 사건을 한번 짧게 언급할 뿐이다.
표준적인 신경과 신앙고백서도 예수의 삶의 주요 순간을 열거할 때 변모 사건을 포함하지 않는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은 둘 다
예수의 탄생·십자가 죽음·부활·승천·미래의 재림을 열거한다.
예수의 변모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요약하면, 우리가 변모 사건을 소홀히 하는 이유는 성경 전체 줄 거리와 자연스럽게 들어맞지 않고, 서사 자체가 매우 짧으며, 신경
들이 이 사건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수 있다. 이것으로
필수불가결성 47
우리로 하여금 동방 전통이 이 사건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과대평
가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원의 목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변모 사건이 자주 소홀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는 왜 구원받
는지보다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기 때문
이다.2) 서방 전통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찬양해 왔다. 십자가와 부
활은 우리 구원이 관련된 기제다. 그리고 성경이 이 영광스러운 사
건에 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테면 속죄론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우리로 하여금 인
류의 목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
과를 초래했을 수 있다.3) 인류의 목표는 단지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은 이것을 지복직관이라 불러 왔다. 성경은 이 주제로
시작하고 끝난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렸다. 사탄은 다른 목표(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 ) 가
2) 예컨대 그루뎀의 저서에서는 지복직관에 대해 작은 항목으로만 다루고, 에릭슨 이나 벌코프의 저작에서는 이 주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Wayne A. Grudem, 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Biblical Doctrine, 2nd ed. (Grand Rapids: Zondervan Academic, 2020);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3r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3);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2nd ed. (Edinburgh: Banner of Truth, 2021).
3) 어떤 의미에서 수단과 목표의 구분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우리는 바라봄 으로써 구원받는 것이기도 하다(고후 3:7-18; 요일 3:2).
그리스도의 변모
아니라, 다른 길(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 ) 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유혹
했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자기 백성과 거하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변모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 서
사 전체의 목표는 하나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이 관점은 서방 전통이 듣는 것을 우선시하는 역사를 가진 현실
과 결부되어 있다. 반면에 변모 사건은 보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일부 개신교인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분명히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롬 10:17 ). 그러나 우리의 최종적인 상태에서는 모든 감각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다. 구원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과 하나님
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변모 사건은 영화롭게 된 인성과 그리
스도의 희생 제사의 결과로 일어나게 될 일을 묘사한다. 마귀의 목
표는 에덴동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높은 상태로 끌어올려지
는 것’을 막는 것이다. 우리의 신학을 ‘끝인 목표를 중심으로’ 정렬
하고 형성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우리는 변모 사건을 너무 신비롭고 상징적이며 신비주의적이라고 생 각한다
우리가 변모 사건을 소홀히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서방에서 살아 가는 우리 중 다수는 상징·신비·모호성을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변모 사건은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이고 비의적이며 도피주의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명확하고 직접적이며 모호하지 않은 의미를 지닌 기사에 더 끌린다. 우리는 불투명함이 아니라 투명함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