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이론과 실천 신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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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21 by The Dutch Reformed Translation Society

Published in English under the title Theoretical-Practical Theology, Volume 3: The Works of God and the Fall of Man by Reformation Heritage Books, Grand Rapids, MI,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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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Korean Edition Copyright © 2025 by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이 한국어판의 저작권은 알맹2를 통하여 Reformation Heritage Books와 독점 계약한 부흥과 개혁사에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 신학 3

발행일 2025년 3월 25일

지은이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흐트

옮긴이 윤석인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5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94295-51-8 (94230)

ISBN 978-89-6092-572-4 (94230)(세트)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 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편집자이자 번역자로서 일곱 책으로 구성한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흐

트의 『이론과 실천 신학』 세 번째 책을 소개하게 되어 기쁘다. 마스트리

흐트는 첫 책에서 신학서론,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 살

아가는 교리로서 신학의 본질, 신학의 기초인 성경, 신학의 분류인 믿

음( 1부 ) 과 사랑 또는 준행( 2부 및 3부 ) 을 다루었다. 두 번째 책에서는 구

원하는 믿음에 대한 장으로 믿음을 다루기 시작하고, 그다음으로 믿음

의 주요 대상인 하나님을 그분의 존재, 이름과 속성에 드러난 그분의 본

질, 세 위격으로 계시는 그분의 존재에 따라 고찰했다. 이 책에서 마스 트리흐트는 6권 끝까지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고찰한다.

2권 서문에서 설명한 대로, 마스트리흐트는 각 장에서 석의, 교리, 변 증, 실천이라는 사중 구조를 따른다. 이 책의 자세한 개요는 목차 또는

1권 “이 저작 전체의 방법론적인 배열” 중에 214-215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제는 하나님의 내적 활동, 즉 하나님의 작정에서 시작 하여 하나님의 외적 활동, 즉 창조와 섭리 일반에 이어 구체적으로 죄와 관련된 하나님의 사역으로 진행한다. 책의 구분 기준은 우리가 독자적 으로 정했지만, 원래 마스트리흐트가 구분한 권 구분은 그대로 유지 했다. 그래서 이번에 내는 책, 『이론과 실천 신학 3』에는 마스트리흐트

의 1부 3권 하나님의 사역( De operationibus Dei, 1.3.1-12 ) 과 4권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배역( De hominis apostasia a Deo, 1.4.1-4 ) 을 실었다.

이 책에 담긴 마스트리흐트의 가르침 중에 소개할 가치가 있는 것으

로 타락과 예정의 관계에 대한 중재적 입장,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거부, 귀신과 마법의 실재에 대한 옹호, 셋째 하늘에 대한 교리의 네 가

지 요점이 있다. 각 논점을 차례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타락과 예정의 관계에 대한 중재적 입장

마스트리흐트가 『이론과 실천 신학』을 저술할 무렵에는 타락과 예정

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거의 한 세기 동안 이어졌다.1  ) 칼빈 이후 개혁

파 내부에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영원한 작정으로, 또는 우리가 관조하

는 이 작정의 논리에 따라, 죄로 타락한( ‘랍수스’ ) 인간을 택했는지 아니

면 타락하지 않은 인간을 택했는지에 대한 곤란한 질문이 생겨났다. 타

락을 허용하는 작정은 논리적으로 개인을 구원으로 택하는 것에 앞서

는가 ( “타락 후 예정론” ) 아니면 그 후인가 ( “타락 전 예정론” ) ? 테오도르 베

자( 1519-1605 ) 는 타락 전 예정론의 입장( 아직 타락하지 않은 상태, 즉 “타락 전”

의 개인을 택함 ) 을 지지하는 것으로 유명해졌으며, 자카리아스 우르시누

스( 1534-1583 ) 는 타락 후 예정론( 타락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을 택함, 즉 “타락 이

후 또는 타락보다 더 나중에” ) 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마스트리흐트가 속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교리적 표준문서인 벨기

에 신앙고백서( 1561 ) 는 16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는 아담의

모든 후손이 이렇게 멸망과 파멸에 빠졌으며……하나님은……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하신 모든 자를 이 멸망에서 구원하고 보전하

1  ) 일반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Klaas Dijk, De Strijd over Infra- en Supralapsarisme in de Gereformeerde Kerken van Nederland (Kampen: J. H. Kok, 1912); Joel R. Beeke, Debated Issues in Sovereign Predestination: Early Lutheran Predestination, Calvinian Reprobation, and Variations in Genevan Lapsarianism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17); Campegius Vitringa, DoctrinaeChristianaeReligionis…ParsII (Leiden, 1762), 40–45; Bernard de Moor, CommentariusPerpetuus…ParsSecunda … (Leiden, 1763), 63–72; William Muenscher, Elements of Dogmatic History, trans. James Murdock from 2nd German ed. (New Haven, Conn.: A. H. Maltby, 1830), 180–181.

시며……다른 자들은 그들이 연루된 타락과 멸망에 그대로 두신다고

믿는다.”2  )

이런 확언은 벨기에 신앙고백서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이

후 시대의 수많은 개혁파 신앙고백서는 타락 후 예정론을 분명히 긍정

한다.3  ) 이중 어느 신앙고백서도 타락 전 예정론을 명시적으로 긍정하

지 않지만, 대부분의 개혁파 정통 신앙고백서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신앙고백서에서는 명시적으로 타락 전 예정론을 거부하지도 배제하지

도 않고 여타 방식으로 타락과 예정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결정하려 시

도하지도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두 견해의 측면이 모두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도르트 총회( 1618-1619년 ) 당시 항변파( 야코부스 아르미니

우스의 신학을 추종한 자들 ) 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개혁파 대의원 대부분 타락 후 예정론자였다. 도르트 신조는 타락 후 예정론의 성격을 띠고 있 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조가 타락

일치한다고 타락 전 예정

론자가 주장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4  ) 이후 수십 년간 네덜란드

2  ) Reformed Confessions of the 16th and 17th Centuries in English Translation, ed. James T. Dennison Jr., vol. 2, 1552–1566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0), 433–434.

3  ) B. B.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제네바 신조(1552), 헝가리 신앙고백서(1557), 제네바 영국 망명자들의 신앙고 백서(1558), 프랑스(1559) 및 벨기에(1561)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 및 신앙고백 서(1618)와 스위스 신앙고백서(1675), 라이프치히 회담(1631)에서 채택된 조항과 함 께……여기에는 아마 다음과 같은 문서도 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 1537년의 제네바 신 앙고백서, 칼빈이 제네바 학생을 위해 작성한 신조(1559), 파리 교회(1557)와 프랑스 교회(1562), 지기스문트 신앙고백서(1614)와 가시 선언(1645), 그리고 확신은 덜하지 만 아마 2차 스위스 신앙고백서(1562)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은 타락 후 예 정론을 분명히 시사하지는 않더라도 표현되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는 근본적인 타락 후 예정론의 관념에서 말하는 신앙고백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어조와 태도의 문제여 서 주장하기에 너무 미묘한 것은 사실이다.

“Predestination in the Reformed Confessions,” PresbyterianandReformedReview 12, no. 46 (Jan. 1901): 126–127.

4  ) 도르트 신조가 타락 후 예정론임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투레티누스가 사용한 논증을

자들은 양측에 줄을 섰다.5  ) 네덜란드뿐 아니라 개혁교회 전체에서 타

락 전 예정론은 고작 소수의 저명한 인사가 대표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 확하지만 이들은 많았고 활발했다.6  ) 특히 마스트리흐트의 스승이자 마

네 번째 주제, 질문 9(I, VI, VII)에서 참고하라.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ed. James Dennison Jr., trans. George Musgrave Giger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 Reformed, 1992, 『변증신학 강요 1』,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7), 1:342. 타락 전 예정론자는 하나님의 무시간적 의도에 있는 작정의 순서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하

기보다 약간의 접합을 통해 이 언어를 구속의 역사적 실행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윌리엄 커닝엄은 설명한다. “총회는……논쟁의 요점에 대해 공식적이거 나 명시적인 견해 제시하기를 삼가는 듯 보이지만, 신조의 일반적 범위와 내용에서는 확실 히 타락 후 예정론의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도르트 총회가 타락 전 예정론의 견해를 정죄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 문제는 매우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한쪽에서는 고 마루스와 푸치우스가, 다른 한쪽에서는 고마루스의 뒤를 이어 흐로닝언 신학 교수로 부임 한 마레시우스 또는 데스 마레츠가 오랫동안 논쟁을 이어 갔다.” The Reformers and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Edinburgh: T&T Clark, 1862), 368. 게르할더스 보스는 도 르트 신조가 “타락 후 예정론의 견해를 유지했으나 타락 전 예정론의 견해를 정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라고 말한다. Reformed Dogmatics, trans. Richard B. Gaffin (Bellingham, Wash.: Lexham Press, 2014), 148–155. 다음도 보라. J. V. Fesko, Diversity within the Reformed Tradition: Supra- and Infralapsarianism in Calvin, Dort, and Westminster (Greenville, S.C.: Reformed Academic Press, 2001); J. V. Fesko, “Lapsarian Diversity at the Synod of Dort,” Drawn into Controversie: Reformed Theological Diversity and Debates within SeventeenthCentury British Puritanism, ed. Michael A. G. Haykin and Mark Jones (Göttingen: Vandenhoeck & Ru precht, 2011), 99–123. 5  ) 마스트리흐트 이전에 네덜란드인이거나 네덜란드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타락 후 예정 론자로서 일반적으로 나열된 인물은 유니우스(1602년 사망), 레이던 개요(1625)의 저자 들, 뤼베르튀스(1625년 사망), 발라우스(1639년 사망), 티시위스(1640년 사망), 폴리안 더르(1646년 사망), 대슈판하임(1649 년 사망), 리베(1651년 사망), 코케이우스(1669년 사망)가 있다. 마스트리흐트 이후 타락 후 예정론자로는 빌헬뮈스 아 브라켈(1711년 사 망), 피트링아(1723년 사망), 아 마르크(1731년 사망), 헬렌브룩(1731년 사망), 더 모 어(1780년 사망), 로테르담(1781년 사망), 페네마(1787년 사망)가 있다. 마스트리흐트 이전에 네덜란드인이거나 네덜란드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타락 전 예정론자로서 일반 적으로 나열된 인물들은 트렐카티우스 2세(1607년 사망), 에임즈(1633년 사망), 보헤르 만(1637년 사망), 고마루스(1641년 사망), 호미위스(1642년 사망), 마코비위스(1644년 사 망), 트리흘란트(1654년 사망), 호른베이크(1666년 사망), 에세니우스(1677년 사망), 하 이다뉘스(1678년 사망), 뷔르만(1679년 사망), 푸치우스(1676년 사망), 왐프리의 존 브라 운(1679년 사망)이 있다. 마스트리흐트 이후 타락 전 예정론자로는 비치우스(1708년 사망), 휘르틀러르(1711년 사망), 홀티우스(1773년 사망), 콤리(1774년 사망), 브라 허(1776년 사망), A. 카이퍼(1920년 사망), 케르스턴(1948년 사망), G. 보스(1949년 사 망)가 있다.

6  ) Cunningham, Reformers, 363; Heinrich Heppe, Reformed Dogmatics, ed. Ernst Bizer,

스트리흐트의 위트레흐트 신학교 전임자였던 저명한 교수 히스베르투

스 푸치우스( 1589-1676 ) 는 타락 전 예정론자였다.

개혁파 정통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하나의 영원한 작정이 ( 하나님처

럼 ) 가장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이 작정이 피조물로 종

결하는 것으로 구별된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논리적 순서로 구성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7  ) 타락 전 예정

론자와 마스트리흐트의 논리 순서는 도르트 신조로 결정되었다. “의도

에서 처음인 것은 실행에서 마지막이다.” 그리고 반대로 “실행에서 마지

막인 것은 의도에서 처음이다.”8  ) 따라서 인간의 구원과 영벌에 대한 작 정의 고전적인 타락 전 예정론의 순서는 간단히 말해 다음과 같다.

1. 개개인에 대한 택함과 유기

2. 이런 개개인의 창조

3. 이런 개개인이 죄와 비참함으로 타락함

4.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성취된 구속

5. 그리스도가 이룬 구속의 은택을 택함 받은 자에게 적용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 1623-1687 ) 는 1679년 라틴어로 처음 출간된

자신의 『변증신학 강요』 1권( 『이론과 실천 신학』 초판은 1682년에 출간 ) 에서 철

trans. G. T. Thomson (1950; repr., Eugene, Ore.: Wipf & Stock, 2007), 162. 7  ) 1.3.1 XXVI. 존 데버넌트는 작정이 이익에 따라 정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 인물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타락 전 예정론 교리와 타락 후 예정론 교리를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 으나……이런 고통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한 내재적 작정에서 우선순위와 차순위는 인간의 나약한 이성의 상상에 불과하며……결국 이 논쟁에서 거의 또 는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아퀴나스는 예정이 인간의 타락과 비참한 상태 이전에 고 려되든 이후에 고려되든 그것은 순간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Summa] Part. 1, qu. 23, art. 1).” Animadversions Written by the Right Reverend Father in God, John Lord Bishop of Salisbury, upon the Treatise intitled, Gods love to Mankinde (London: Iohn Partridge, 1641), 160–161. 8  ) 1.3.2 XXI.

저한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했다.9  ) 투레티누스는 인간의 창조를 인간

의 택함과 유기에 종속시키는 것은 “본성과 은혜의 역사를 혼란스럽게 한다”라고 주장했다.10  ) 그보다 투레티누스는 창조의 질서와 구원의 질

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자유롭게 택하는 하

나님의 작정에 더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유명

한 신조는 창조와 구속의 두 질서 안에서 하위 작정에만 적용되며 두

질서 사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마스트리흐트가 이런 입장에 대응하거

나 이런 입장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지는 않지만, 투레티누스도 마스

트리흐트의 견해를 알지 못했다. 고전적인 타락 후 예정론 입장은 인간

과 관련해 작정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개개인의 창조

2. 모든 피조된 개개인의 타락

3. 개개인에 대한 택함과 유기

4.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성취된 구속

5. 그리스도가 이룬 구속의 은택이 택함을 받은 자에게 적용

두 견해 모두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진리를 사

랑하는 태도에서 하나님이 예정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을 더 깊고 더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스트리흐트는 신

비의 깊이를 더 심오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추가적인 구별을 시

도한다. 이 과정에서 마스트리흐트는 작정의 순서와 관련해 중재적 태

도를 보인다.11  )

마스트리흐트는 한편으로 택함과 유기 모두 논리적으로는 인간이 죄

9  ) Turretin, Institutes, 1:341–350; Nicholas A. Cumming, Francis Turretin (1623–87) and the Reformed Tradition (Leiden: Brill, 2020), 133.

10  ) Turretin, Institutes, 1:342.

11  ) 동의. Heppe, ReformedDogmatics, 162.

로 타락했음을 전제한다고 단언한다. 마스트리흐트는 이것을 인정함으

로써 타락 후 예정론자에게 거의 모든 전권을 넘겨주는 것처럼 보이는

데, 이런 식으로 관련 성경 구절 대부분에 대한 타락 후 예정론의 해석을

고수한다. 다른 한편으로, 마스트리흐트가 제시하는 처음 두 가지 “하나

님의 행동”은 타락 전 예정론의 성격을 띤다. 또한 마스트리흐트가 유기

를 예정 아래 분류하는 견해를 단호하게 옹호한다는 점도 중요한데, 타

락 후 예정론자를 보면 이렇게 하기를 꺼렸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12  )

마스트리흐트의 중재적 입장을 허용하고 구별하는 주요 요체는 (1)

예정과 (2) 택함과 유기를 구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항상 그렇게 명확히 구별된 것은 아니다. 마스트리흐트에 게는 “예정”이 천사와 인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의

미하며, 택함과 유기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마스

트리흐트의 순서에서 하나님의 처음 두 행동은 일반적으로 예정과 관

련 있으며, 마지막 두 행동에만 택함과 유기가 들어간다. 인간과 관련된

작정에서 마스트리흐트의 순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창조될 수 있는 일부 불특정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그분 의 영광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형벌을 내려 그분의 의를 나타내 기 위한 것이다

2. 개개인은 창조되어 죄에 빠질 것이다

3. 이렇게 타락한 개개인의 택함과 유기

4. 택함을 받은 자와 유기된 자의 운명을 이루거나 완성하기 위한

12  ) 1.3.2 XII. 타락 후 예정론자는 유기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작정된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속한 것으로 완전히 긍정하지만, “예정”이라는 용어가 사람을 심판으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정적이고 선택적인 사랑과 구원에만 적용된다 는 점을 종종 성경의 언어와 함께 강조한다. Vos, Reformed Dogmatics, 148–155, 다음 을 인용. Trigland, Sr., Den Recht-ghematichden christen. Ofte vande ware moderatie ende verdraechsaemheyt, nd ed. (Amsterdam: Broer Janz, 1615), 33; Turretin, Institutes,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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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을 마련하고 감독하는 행동

마스트리흐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첫 행동은 단순히 인간의 창조를 통

해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을 나타내기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구체적이

고 창조될 개개인에게 긍휼을 베풀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 형벌을

내려 그분의 의를 드러내기로 결정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첫 행동은

단지 창조될 수 있는 두 집단의 불특정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을 나타내

기로 결정한 것뿐이다.13  ) 독자는 특정 개인과 무관한 이런 행동이 로마

서 9장 21-23절에 부합하는지를 두고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훗날 네덜

란드계 미국인 개혁파 신학자 게르할더스 보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69. 마스트리흐트의 견해에 대해 어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예정을 원래 특정 개인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서 예정이 지닌

실천적이고 위로가 되는 요소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항상

특정 개인과 관련된 표현을 제공한다. 성경은 택함의 첫 번째 행동

이 이미 개개인에 대한 사랑(즉, “미리 아심”)이라고 말한다.14  )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마스트리흐트의 나머지 설명에서 마스트리흐

트가 창조에 대한 타락 전 예정론의 언어를 사용하고 옹호하며, 타락을

허용하고 택함과 유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긍휼과 의로운 진노를 영화

롭게 하고자 예정한 계획의 “수단”으로 여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15  ) 타락 후 예정론자는 종종 하나님이 사람들을 타락, 유기, 징벌 의 수단으로 창조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마스트리흐트가 말하는 첫 번째 행동에는 특정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들의 창조는

13  ) 타락 후 예정론이 말하는 창조의 목적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Turretin, Institutes, 1.346.

14  ) Vos, ReformedDogmatics, 1:148–155.

15  ) 1.3.2 IX-X.

논리적으로 이들의 택함이나 유기 이전에 존재하므로, 마스트리흐트는

일관되게 “유기의 최고 목표는 죄인에 대한 공의로운 징벌에서 하나님

의 보복하시는 공의를 나타내는 것이지 결코 피조물의 파멸이 목표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16  )

마스트리흐트는 자신이 “엄격한 타락 전 예정론자”와 “엄격한 타락

후 예정론자” 사이의 중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스트리흐트 혼자

만 이렇게 한 것이 아닌 것은 마스트리흐트 자신도 “중도의 가장 정통

적인 신학자”에 속한다고 공언한 것에서 드러난다.17  ) 마스트리흐트가

언급하는 또 다른 진영은 “개혁파 보편주의자”로서, 특히 프랑스 아미

로주의자를 가리킨다.18  ) 마스트리흐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신학적

입장을 옹호하는 자들을 “펠라기우스주의화된 자들”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마스트리흐트가 중재적 타락 후 예정론자였는지 아니면 중재적 타락 전 예정론자였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19  ) 마스트리흐트는 한 편으로 택함과 유기를 타락한 인류에게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하면서 타락 후 예정론의 기초를 채택하여 이 분야에서 타락 후 예정론자에게

16  ) 1.3.2 II. 1.3.4 VI에서 유기의 경우 택함에 비해 수단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마스트리흐 트가 추가한 탁월한 평가를 보라. 참조, “과거 타락 전 예정론은 적어도 하나님의 작정에 서 창조와 함께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영광이라는 최고 의 목적에 종속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여기서 타락을 허용하는 것은 수단으로 나타난다. 징벌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Vos, ReformedDogmatics, 1:148–155, section 65.

17  ) 1.3.2 XIII.

18  ) 마스트리흐트는 Schismata sub aetate sexta N.T., (6)의 1.8.3 XLIII에 나오는 자신의 은혜 언약의 역사에서 존 카메론을 “개혁파 보편주의”의 창시자로, 그의 제자 모이즈 아미로를 전파자로 분류하고 “프랑스의 테스타르, 달레 등 여러 사람을 열거했는데, 이들에게서 영 국의 존 굿윈, 리처드 백스터 등, 또한 독일의 콘라트와 요하네스 베르기우스, 루트비히 크 로키우스 외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여러 사람에게도 전해졌다.” 참조, 1.2.17 XXXIII; 1.3.11 XI; 1.4.1 VI; 1.4.4 XXX, XXXV, XXXVI; 1.5.18 XXXIX. 19  ) 루이스 벌코프는 마스트리흐트를 타락 후 예정론자로 분류했고, 보스는 마스트리흐트 를 타락 전 예정론자로 분류했다.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t. 1, Works of God, II, E, p. 118; Vos, ReformedDogmatics, 1:148–155, section 66.

가장 큰 실질적 지분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마스트리흐트가 굳

게 확신하는 중재적 확언은 대부분 타락 전 예정론에서 나온다. 마스트

리흐트도 처음에는 스승 푸치우스처럼 타락 전 예정론 입장에서 출발

하여 타락 후 예정론을 인정했는가? 아니면 네덜란드 주류인 타락 후

예정론으로 출발하여 벨기에 신앙고백서에 더 부합하는 것처럼 보

이다가 타락 전 예정론을 수용했는가?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기 전에 “중재적이고 가장 정통적인 신학자”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

들 가운데 누가 있는지( 그리고 푸치우스가 이 무리에 속했는지 ) 에 대해 추가로

역사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20  ) 분명한 사실은 마스트리흐트가 타락과

예정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자신을 독창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는 점

이다. 그보다 마스트리흐트는 이미 잘 닦인 길을 걷고 있었다.

마스트리흐트는 자기의 패러다임과 관련해, “이렇게 하면 서로 달라 보이는 견해를 가장 쉽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이며, 한쪽이 통례적으로

반대파를 비난하는 어려움을 가장 안전하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21  ) 더욱이 “성경이 이 질서를 가르치고 있으며, 이는 경험

20  ) 마스트리흐트의 견해는 모두가 타락 전 예정론자로 인정하는 사무엘 러더퍼드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르다. 러더퍼드는 영원하고 구별할 수 있는 두 가지 유기 행동을 주장 했는데, 하나는 택함과 병행하여 선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락 후 예정론자가 말하 는 창조와 타락 이후다. 마스트리흐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둘 다 소극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주된 차이점은 러더퍼드가 첫 번째 유기의 행동을 특정 개인에게 속하는 것으로

주장했다면 마스트리흐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택함과 유기에 대한 러더퍼드의 교

리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독특하게 타락 후 예정론적인 용어의 사용과 함께 온건한 타락 전 예정론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Guy Richard, “Samuel Rutherford’ s Supralapsarianism Revealed: A Key to the Lapsarian Position of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The Confessional Presbyterian 4 (2008): 163. 마스트리흐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네덜란드 데카르트주의 신학 교수 요하네스 브라운(1628-1708)은 그 의 책 DoctrinafoederumsiveSystematheologiaedidacticaeetelencticae (Amsterdam: Abraham van Someren, 1691), I.ii.9.24에서 마스트리흐트와 매우 비슷하게 중재적 입

장을 명확히 했으나 분명히 타락 전 예정론에 가깝다. 이후 미국 장로회 교도이자 프린 스턴 신학교 초대 교수였던 아치볼드 알렉산더(1772-1851)도 마스트리흐트와 매우 비

슷하게 중재적 견해를 취했다. God, Creation, and Human Rebellion: Lecture Notes of Archibald Alexander from the Hand of Charles Hodge, ed. Travis Fentiman (Grand Rapids: Reformation Heritage Books, 2019), 75–76. 21  ) 1.3.2 XII.

으로 분명하게 확인된다”고 한다.22  ) 예정, 특히 유기에 대한 마스트리

흐트의 논의는 매우 심도 있고 탁월하다. 가장 박식하고 확신에 찬 독자

도 우리의 거룩하고 주권적이며 선하신 하나님의 신비와 성품에 훨씬

큰 경외심을 갖도록 도전할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거부

고대 후기에 선호하던 태양계 모델은 프톨레마이오스 ( 170년 사망 ) 의

지구 중심설로서, 별이든 행성이든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이론이었다.23  ) 1543년 종교개혁 2세대인 코페르니쿠스는 태양

을 태양계의 중심에 두는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는 획기적인 연구를 발 표했다. 1588년 티호

22  ) 1.3.2 XXI. 23  ) 일반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Hoon J. Lee, “Accommodation—Orthodox, Socinian and Contemporar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75, no. 2 (2013): 335–349; Hoon J. Lee, The Biblical Accommodation Debate in Germany: Interpretation and the Enlightenment (Cham, Switzerland: Palgrave Macmillan, 2017), especially ch. 2, “Accommodation in the Seventeenth-Century Dutch Republic,” 23–60; R. H. Vermij, The Calvinist Copernicans: The Reception of the New Astronomy in the Dutch Republic, 1575–1750 (Amsterdam: Koninklijke Nederlandse Akademie van Wetenschappen, 2002); R. Hooykaas, “The Reception of Copernicanism in England and the Netherlands,” in The Anglo-Dutch Contribution to the Civilization of Early Modern Society, ed. Charles Wilson, Reyer Hooykaas, A. Rupert Hall, and Jan Waszink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6), 33–44; Aza Goudriaan, “Creation, Mosaic Physics, Copernicanism, and Divine Accommodation,” in Reformed Orthodoxy and Philosophy, 1625–1750: Gisbertus Voetius, Petrus van Mastricht, and Anthonius Driessen (Leiden: Brill, 2006), 125–133; T. van Nouhuys, The Age of the Two-Faced Janus: The Comets of 1577 and 1618 and the Decline of the Aristotelian World View in the Netherlands (Leiden: Brill, 1998); E. Grant, In Defense of the Earth’s Centrality and Immobility: Scholastic Reaction to Copernicanism in the Seventeenth Century (Philadelphia: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84); H. J. Howell, God’s Two Books: Copernican Cosmolog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in Early Modern Science (Notre Dame, Ind.: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2); Robert S. Westman, The Copernican Question: Prognostication, Skepticism, and Celestial Order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

이라고 생각한 것을 결합하여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행성

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지구 중심적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1615년에서 시작하여 1621년에 이르기까지 요하네스 케플러는 태양

중심 모델을 더 정확하게 개선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에

“현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는 오래된 프톨레마이오스

태양계를 추가로 무너뜨리는 천문학적 발견을 이루었다. 갈릴레오는 이

발견의 대가로 의혹을 샀고, 후에는 로마 종교 재판소에서 정죄당하게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는 1628년 네덜란드로 이주하여 여기서 자기의

주요 저작을 모두 집필했다. 데카르트는 한때 태양 중심 태양계를 제안

했고 미적분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아이작 뉴턴은 마스트

리흐트의 『이론과 실천 신학』 초판과 2판 ( 1682년과 1698년 ) 사이인

1687년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rincipia ) 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새로 창안된 미적분학과 함께 경험적 증거에서 도출된 케플러의 태양

중심 행성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을 이론적으로 도출했다.

마스트리흐트는 이런 상승세 가운데 “개혁파는 티호 브라허의 천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태양 중심설을 부정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

시가 분명히 태양 중심설을 부정하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밝히

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태양 중심설에 크게 반대했다.24  ) 사실 지구는

“이 우주의 중심”이다( 전 1:4 ). 25  ) 마스트리흐트는 자신이 성경의 분명하

고 빈번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한 것에서 자기의 근거( 헬. ‘푸 스토’, “내가 설

곳” ) 를 찾은 것이 분명하지만( 마스트리흐트는 자기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놀라울

정도로 많은 구절을 인용한다 ), 여기서는 당시의 문제 상황이 우리 시대와는

24  ) 1.3.6 XLIX. Herman Bavinck, Reformed Dogmatics (Grand Rapids: Baker, 2004, 『개 혁교의학』,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1), 2:483. 바빙크는 마스트리흐트와 그의 여러 동시

대 사람을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세계관”을 옹호하는 것으로 부정확하게 묘 사했다. 『이론과 실천 신학』에서 마스트리흐트의 우주론에 대한 주요 관련 부분은 다음을

보라. 1.3.6 XIX, XXVII-IXXX, XLIV, XLVI, XLIX-L, LXVII. 25  ) 1.3.6 XIX. 이것은 태양 중심 모델에서 우주는 무한하며 중심이 없을 수 있다고 제안한 이

탈리아의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의 견해와는 대조적이다.

근본적으로 달랐으므로 지구 중심적인 결론을 요구하는 이런 문제 없

이 마스트리흐트의 해석학에서 그리고 철학과 과학과 계시의 조화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마스트리흐트가 활동한 당시 물리적 증거에 대해서는 대체로 양측이

관점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스트리흐트는 “우리 대적들

은 자기들의 견해를 옹호하여 성경으로부터 무언가를 주장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확실하게 암시하는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주장하려 하지도 않는다”라고 결론 내렸다. 그보다 코페르니

쿠스와 데카르트의 추종자들은 “이 가설의 이점으로 이 세상의 현상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가설이 옳다고 긍정 한다.” 마스트리흐트는 태양

대한 이런 주요 논거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에 “신학을 함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행동은 성경 의 변함없는 증언을 견해나 실제로 철학적

하는 것이다”26  ) 라고 말할 수 있었다.

불과한 것으로 반대

철학적 추측과 대조적으로 그리고 과학 원리에 무지하거나 회의적이

었던 것과 달리, 마스트리흐트는 관찰, 경험, 조사 수단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 진리에 대한 자연의 증거로 충분하므로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심지어 이런 것에 대한 열정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마스트 리흐트는 지구가 전혀 평평하지 않고 “정확히 둥글며” 이것이 순전히 “선원들의 증언”에 근거한다고 여겼다. 마스트리흐트는 1607년에 발행 된 개혁파 자료에서 지구의 둘레가 “5,400 독일식 마일” ( 약

40,000km ) 이라고 진술한다.27  ) 독일식 마일은 약 6.61 미국식 마일이다.

26  ) 1.3.6 XLIX.

27  ) 1.3.6 XLVI. 독일식 마일은 “17세기와 18세기 초에 네덜란드 항해사들이 주로 사용 한 해상 측정법으로 길이는 4해리와 같았다.” “German Mile,” Oxford Reference, accessed Feb. 18, 2021, https://www.oxfordreference.com/view/10.1093/oi/ authority.20110803095849560. “해리는 원래 자오선(경도의 남북선)을 따라 1분(60분의 1도)의 호가 지구 표면을 가로지르는 길이로 정의되었다.” “Mile,” Britannica, accessed Feb. 18, 2021, https://www.britannica.com/science/mile. 해리조차도 지역과 역사에 따라 다르게 정해져 왔으며 마스트리흐트의 출처가 사용한 정확한 측정값을 알기도 쉽지

마스트리흐트의 측정은 현재 추정되는 지구의 자오선 둘레와 약

0.011%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이 오차는 대부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일식 마일의 지역적 또는 시간적 변형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28  )

마스트리흐트는 많은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지구관을 가지

고 있었다. “지구는 우주와 비교할 때 그 크기에 있어서는 작은 점에 지

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고려한다면 가장 광대한 크기다.”

마스트리흐트는 지구가 정말 “공중에 매달려 있다( 욥 26:7; 38:4-6 ) ”라는 것을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 신비는 “많은 사람을 괴롭혀 왔지

만”, 마스트리흐트는 이 현상을 단순히 “신이 내린 기적”으로 치부하기

보다는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자연 원리를 제시한다.29  ) 한편 마스트리흐트는 유성, 폭풍, 화산, 간헐천이 자연적으

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30  ) 마스트리흐트는 또한 달이 조수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31  ) 마스트리흐트는 점성술을 거

부했으며, 성경의 증언뿐 아니라 자연 이성, 경험, 상식에도 상당 부분

의존해서 그렇게 했다.32  ) 이 모든 입장과 일관되게, 마스트리흐트가 태

양 중심설보다 지구 중심설을 확증했던 중요한 이유는 “현상과 경험

이……성경의 체계를 더 진실하고 견고하게 확증하며, 지금까지 기독교

인의 상식도 이에 동의해 왔기 때문”이었다.33  )

마스트리흐트의 성경 해석 방법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해

않지만, 1929년 이후 해리는 국제적으로 1,852m로 정의되었다. 28  ) 이것은 NASA 고더드 우주 비행 센터의 데이터를 사용한 것으로서 다음에 따른다. Tim Sharp, “How Big Is Earth?,” accessed Feb. 18, 2021, https://www.space.com/17638how-big-is-earth.html. 오늘날 지구 둘레는 더 부푼 적도 부분을 기준으로 측정하는 경

우가 많지만, 17세기에는 더 평평한 극에서 측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둘레가 더 작 았다.

29  ) 1.3.6 XLVI.

30  ) 1.3.6 LVIII.

31  ) 1.3.6 XLVII.

32  ) 1.3.6 LXVIII.

33  ) 1.3.6 XIX.

석법보다 발전한 것이었다.34  ) 1.3.6 XLIV에서 마스트리흐트는 시편

104편 5-6절에서 주가 땅의 기초를 놓은 것과 관련된 표현이 시적이고

비유적임을 “마치 기초 위에 놓인 것처럼” 확인한다. 마스트리흐트는

성경 해석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이전 저작에서

“비유 표현이 거짓은 아니지만……이런 문제에서 단어는 사안의 진실

에서 옮겨져 똑같이 진실한 사안을 나타낸다”라고 설명했다.35  ) 이 밖에

도 “성경은 보통 사람의 공식을 사용할 수 있다.”36  ) 마스트리흐트는 진 술한다. “성령께서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때때로 대중적인 언어의 거친

말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진실되게 표현하려는 가운데 해당 문제가 상응한 수준에 미치지 못 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37  ) 이 구절에서 마스트리흐트는 성경

이 때에 따라 조정의 원리를 통해 진리를 전달한다는 것을 분명히 긍정 하면서도, 이것을 자기 반대파가 명시적으로 옹호한 신조의 거짓된 의

전달하는

34  ) 마스트리흐트의 다음 저작을 보라. Vindiciæ Veritatis et authoritatis Sacræ Scripturæ in rebus philosophicis adversus dissertationes D. Christophori Wittichii [크리스토프 비티 히의 박사 학위 논문에 반대하여 철학적인 사실에 대해 신성한 성경의 진리와 공의를 정 당화함] (Utrecht: Johannis a Waesberg, 1655). 1장과 5장은 다음 저작의 4장에서 영어 로 번역되어 있다. J. A. Schlebusch, “Cartesianism and Reformed Scholastic Theology: A Comparative Study of the Controversy” (master’s thesis, University of the Free State, South Africa, 2013).

35  ) Schlebusch, “Cartesianism and Reformed Scholastic Theology,” 75.

36  ) Schlebusch, “Cartesianism and Reformed Scholastic Theology,” 72.

37  ) Schlebusch, “Cartesianism and Reformed Scholastic Theology,” 76.

38  ) Schlebusch, “Cartesianism and Reformed Scholastic Theology,” 77. 마스트리흐트의 대적이었던 크리스토프 비티히도 파우스투스 소키누스와 데카르트의 뒤를 이어 이 원칙 을 따랐다. Lee, Biblical Accommodation, 23. 개혁파 스콜라주의에서 이해되는 “조정” 을 정의하면서, 리처드 멀러는 “조정은 특별히 율법과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말 과 개념을 사용할 때 발생하지만, 진리의 상실이나 성경 권위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은 전 혀 아니다. 조정이나 겸비(謙卑)는 계시의 방식이나 양식, 즉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를 유 한한 형태로 선물하는 것을 의미하며, 계시의 질이나 계시된 내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Dictionary of Greek and Latin Theological Terms Drawn Principally from Protestant Scholastic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5), 19.

철학과 성경의 일관성과 관련된 마스트리흐트의 더 큰 관심사에 종속

되어 있었다.39  ) 구체적으로 말해, 마스트리흐트는 자연철학과 성경 계

시의 조화를 목표로 하는 “모세의 물리학”이라는 오랜 교회사적 전통

안에서 작업했다.40  ) 모세의 물리학은 당대의 철학과 관련하여 다양한

문제를 포함했으므로 자연철학은 성경을 뒷받침하는 한에서 잠정적으

로 유지되었고, 개혁파는 구체적 사례의 명확성과 장점에 따라 다양한

정도와 범위로 철학을 통합하는 데( 또는 그렇게 하지 않는 데 ) 능숙했다.41  )

마스트리흐트는 경험적 지식에 큰 비중을 두었고 확고한 일반 해석학

방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고 도움이 되는 한에

서 특정 철학을 느슨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고려

된 태양 중심설의 뚜렷한 문제는 마스트리흐트의 체계에 본질적으로

결속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장점에 따라 서거나 무너져야 하는 것으

로 보였다. 마스트리흐트에게 문제는 천문학 가설( 코페르니쿠스주의 ) 을 성

경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자연철학으로도 증명할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것에 대한 유일하게 중요한 주장이 모든 사람의 실제 경험과 상반되는

듯하면서 어느 정도의 이론적인 현상학적 편의성을 제공한다는 것일

때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천문학자들은 1727년과 1838년에 태

양 중심설에 유리한 두 가지 명백한 증거 또는 경험적 증거를 발견했다.

1851년 처음으로 일반인도 푸코의 진자 운동을 통해 지구 자전에 대한

39  ) Mastricht, Vindiciae veritatis.

40  ) 슬레뷔스는 이렇게 말한다. “판 마스트리흐트는 신학을 과학의 여왕으로 여기고, 그 주 요 출처인 성경이 다른 모든 과학적 연구 자료와 결론에 대해 주된 권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분명하다.” “Cartesianism and Reformed Scholastic Theology,” 144. 41  ) 하우드리안은 설명한다. “세 가지 다른 주제……창조의 6일, 실체적 형태, 코페르니쿠스 주의가 논의될 것이다. 첫 번째 주제는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성경의 구체적인 본문 자료 를 가지고 어떻게 작업했는지를 보여 줄 수 있다. 두 번째 주제는 그 자체로 성경이 아닌 철학의 기원을 가진 철학 개념이 성경 해석에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현대의 입자설에 직면 하여 어떻게 옹호, 수정, 포기되었는지를 보여 줄 수 있다. 세 번째 문제인 코페르니쿠스 주의 역시 물리학(또는 천문학)과 성경이 만나는 영역에서 기본적인 태도를 보여 준다.” ReformedOrthodoxyandPhilosophy, 104–105.

가시적인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과 관련해 마스트리흐트가 활동한 당시 선원들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경험을 통해 직접적이고 반복적으로 조사하고 시험하고 확인할 수

있다. “성경과 이성에도 하나의 같은 진리의 빛이 있다”라는 마스트리

흐트의 말대로42  ) 우리는 하나님이 때에 따라 듣는 사람들의 지리적 관

점에 따라 그들의 유익을 위해 성경에서 진리를 말씀하신다고 결론 내

릴 수 있다.43  )

마스트리흐트는 성경이 자연의 빛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한정

하는지 그리고 자연의 빛이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형성하

는지에 대해 진실하고 일관된 견해를 발전시키고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마음에 놀라움과 경이로

움을 품을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욥에게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

냐’( 욥 38:4-6 ) 라고 묻는다.”44  )

귀신과 마법의 실재에 대한 방어 『이론과 실천 신학』이 출판된 17세기 마지막 3분기에는 귀신과 소위

42  ) Schlebusch, “Cartesianism and Reformed Scholastic Theology,” 70. 43  ) 이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조정은 특정 구절을 해석할 때 석의의 원리로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경의 영 감, 권위, 무오성을 유지하는 데도 공헌했다. 예컨대 창세기는 해와 달을 한꺼번에 “두 큰 광명체”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칼빈은 달의 표면이 반사 요소로 구성되어 있 어서 그 자체로 빛을 발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하지만 칼빈은 모세가 달에 대한 설명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보다 모세는 조정된 방식으로 글 을 썼다. 모세는 과학적 진리를 인간의 시각적 지각과 현상학적 언어 사용에 맞게 조 정했고, 이것은 성경이 모든 문제에 대해 완전한 무오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Biblical Accommodation, 4. 44  ) 1.3.6 LI.

“흑마술”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 쇠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45  ) 그런 의

심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마스트리흐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븐 시

나, 이븐 루시드와 그들의 추종자들은 어떤 귀신도 인정하지 않고, 귀신

의 영향을 우화나 자연적 원인으로 축소했다”라고 지적한다.46  ) 적어도

16세기 후반부터 이런 것들, 특히 주술과 관련해 개신교 신자 사이에서

( 소수이기는 하지만 ) 상당한 회의론이 있었는데, 이런 마법과 그에 따른 민

사 소송에 대한 대중의 이해는 주로 미신, 로마 가톨릭, 가난한 자에 대 한 압제에 기인한다고 생각되었다.47  ) 이런 회의론은 상당 부분 정당화

되었다. 1450년에서 1685년까지 여전히 로마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던

45  ) 일반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K. R. Hagenbach, A Text-Book of the History of Doctrines, ed. Henry B. Smith (New York: Sheldon, 1867), 2:341–343; Scott Taylor, “The Gadarene Demoniac in the English Enlightenment,” in A Linking of Heaven and Earth: Studies in Religious and Cultural History in Honor of Carlos M. N. Eire, ed. E. Michelson, S. Taylor, and M. Venables (London: Routledge, 2012), 49–66; 이 논문 끝에 나오는 일차 참고문헌은 특별히 18세기 상황에 유용하다. Owen Davies,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Witchcraft and Magic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Johannes Dillinger, The Routledge History of Witchcraft (London: Routledge, 2020); Witchcraft and Magic in Europe, ed. B. Ankarloo and S. Clark, 6 vols.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9–2002); Encyclopedia of Witchcraft: The Western Tradition, ed. Richard Golden, 4 vols. (Santa Barbara, Calif.: ABC-Clio, 2006); William E. H. Lecky, “The Declining Sense of the Miraculous: On Magic and Witchcraft,” in History of the Rise and Influence of the Spirit of Rationalism in Europe, vol. 1 (New York: D. Appleton 1919); Witchcraft in the Netherlands from the Fourteenth to the Twentieth Centuries, ed. M. Gijswijt-Hofstra and W. Frijhoff (Rotterdam: Universitaire Pers Rotterdam, 1991); Brian Levack, The Oxford Handbook of Witchcraft in Early Modern Europe and Colonial America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Claudia Swan, Art, Science, and Witchcraft in Early Modern Holland: Jacques de Gheyn II (1565–1629)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네덜란드의 상황을 다루면서 두 단원을 할애한 Brian Levack, Witchcraft in Continental Europe, vol. 2 (London: Routledge, 2013); Renilde Vervoort, Bruegel’ s Witches: Witchcraft Images in the Low Countries between 1450 and 1700 (Bruges: Van de Wiele, 2015), 특히 다음 단원 Dries Vanysacker, “Prosecutions for Sorcery and Witchcraft in Europe,” 11–17.

46  ) 1.3.8 XVIII.

47  ) Philip C. Almond, England’s First Demonologist: Reginald Scott and the Discoverie of Witchcraft (New York: I. B. Tauris, 2011).

네덜란드 남부의 정부 당국은 마녀로 추정된 약 1,150-1,250명을 처형

했으나, 개혁파에 속한 북부 지방에서는 1608년을 마지막으로 160200명을 처형하는 데 그쳤다.48  ) 이 지방에서 다른 유럽 국가보다 훨씬

일찍부터 기소 건수가 급감한 이유는 네덜란드 국가 위정자가 한창 번

영하던 시기에 “에라스무스 회의론”을 표명하고 주술과 마술에 대한 고

발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49  )

지적인 측면과 관련해, 르네 데카르트( 1596-1650 ) 는 앞서 언급한 대로 1628년 네덜란드 북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기의 주요 저작을 모두 저술했다. 물질과 정신의 이원성( 후자가 전자에 작용하지 않는다는 주장 ) 을 강

조하는 데카르트주의는 1640년에 이르러 개혁파 정통 신학을 압박하기 시작했다.50  ) 데카르트의 뒤를 이어 스피노자는 1660년에 발표한 저서

에서 초자연적인 것과 마귀 및 영의 존재에 대해 더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마스트리흐트가 나중에 글을 쓰게 될 주요 대적은 이 논쟁에서

가장 큰 폭풍을 일으킨 네덜란드 개혁파 목사 발타사르 베커였다.51  )

베커는 목회에서 물러나는 빌미가 되는 그의 주요 저작 『마법에 걸린

세계』( 1691/1695 ) 에서 귀신이 실제로 존재하더라도 사람의 영혼이나 신

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베커는 성경을 다루

48  ) Vanysacker, “Prosecutions for Sorcery,” 13-14.

49  ) Vanysacker, “Prosecutions for Sorcery,” 14.

50  ) Daniel Ragusa, “Petrus van Mastricht’s Ad Verum Clariss. D. Balthasaren Beckerum: Beginning with Scripture, Ending with Worship,” in Petrus van Mastricht (1630–1706): Text, Context, and Interpretation, ed. Adriaan Neele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2020), 143–158.

51  ) 주제, 논쟁, 베커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Ragusa, “Beginning with Scripture”; Jonathan I. Israel, 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375–405. 데카르트가 베커의 견 해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W. van Bunge, “Balthasar Bekker’s Cartesian Hermeneutics and the Challenge of Spinozism,” 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Philosophy 1, no. 1 (2008): 55–79. 베커의 영향에 대한 18세기 설명은 다음을 보라. J. L. von Mosheim,InstitutesofEcclesiasticalHistory, 5:432–438, 17th cent. sect. 2, pt. 2, ch. 1, XXXV–XXXVIII. 베커의 저작과 기타 관련 문헌의 다양한 판본을 인용한 내용은 이 책 1.3.7 XXVII의 각주를 보라.

는 범위에서 성경 저자가 조정의 원칙에 따라 기사를 썼다고 주장했다.

베커는 이것을 태양 중심설에서 추론했다. “별에 대한 지식은 성경 저

자들이 대중의 양식과 능력에 적응했으며 하늘, 땅, 해, 달, 별에 대해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그리고 그 자체에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사람들

의 일반적 관념에 따라 말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보여 주는 몇 가

지를 분명히 밝혀 준다.”52  )

지리적 관점이나 시적 관점과 관련해서는 자연스럽게 조정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귀신에 대해 또는 그러한 귀신에게 예

수가 말했다거나 귀신 들린 것으로 알려진 사람에게는 작용하지 않는

귀신에게 또는 귀신에 대해 예수가 말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예수는 사

람들과 제자들의 상식, 경험, 선의와 반대되는 명백하게 비이성적인 발

언 그리고/또는 거짓에 관여한 것이다. 하지만 마스트리흐트가 보기에 “성경이 철학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철학이 성경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 출발점만이 영과 육, 하늘과 땅을 포함한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창조

의 전체적 본질을 설명할 수 있으며,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이것을 설명

할 수도 없고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 이끌 수도 없다.”53  )

마스트리흐트는 온전한 성경의 가르침과 “일반적인 견해”를 지키고

자 노력하면서 지나친 것을 경계하도록 조심했다. “개혁파는 곳곳에서,

특히 교황주의자 가운데서 아무런 근거 없이 전해지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미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문제 삼지 않지만, 그럼에도 악한 천

사의 도움을 받아 자기 예언을 제시하고 악한 일을 벌이는 마술사는 존

재한다고 생각한다.”54  )

52  ) Balthasar Bekker, The world bewitch’d, or, An examination of the common opinions concerning spirits: their nature, power, administration and operations … ([London]: Printed for R. Baldwin in Warwick-Lane, 1695), 257.

53  ) Daniel Ragusa, “Catching Up on Petrus van Mastricht,” Reformed Forum, July 10, 2018, accessed Feb. 16, 2021, https://reformedforum.org/catching-up-on-petrus-vanmastricht/.

54  ) 1.3.8 XXII.

마스트리흐트는 퍼킨스의 말을 인용하여 정신병에 걸린 많은 사람이

마귀와 상상으로 계약을 맺은 것으로 생각했다.55  ) 마스트리흐트는 진

정한 귀신 들림이 나타나는 경우 교황주의자가 행하는 퇴마 의식이 아

닌 에베소서 6장의 “기도, 싸움, [그리고] 사도의 전신 갑주”로 충분

하다고 이해했다.56  )

1682년과 1698년에 각각 초판과 2판이 출간된 『이론과 실천 신학』은

뉴잉글랜드에서 악명 높은 세일럼 마녀재판이 벌어진 시기 ( 16921693 ) 와 겹친다. 이 유감스러운 사건은 미국 식민지에서 처음이자 마지

막으로 발생한 일련의 주요 마녀재판이었는데,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과

함께 고찰하면 사라져 가는 시대의 마지막 숨소리와도 같았다.57  ) 영국

에서 마법으로 인한 처형이 마지막으로

슬러 올라간다.58  )

55  ) 1.3.8 XIV. William Perkins, A discourse of the damned art of witchcraft so farre forth as it is reuealed in the Scriptures, and manifest by true experience … ([Cambridge]: Cantrel Legge, printer to the Vniuersitie of Cambridge, 1610), 24, 96, 190.

56  ) 1.3.8 XXIV.

57  ) History.com의 편집진은 세일럼 마녀재판의 결론과 유산을 설명한다.

존경받던 목사 코튼 매더는 유령 증거 ( 또는 꿈과 환상에 대한 증언 ) 의 모호한 증 거 가치에 대해 경고했지만, 세일럼 마녀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코튼의 우려는 거의 무시되었다. 하버드 대학 총장이자 코튼의 아버지였던 인크리스 매더는 나중에 아들 과 함께 마법에 대한 증거 기준을 다른 범죄와 같게 적용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무 고한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것보다 마녀로 의심되는 10명을 달아나게 두는 편이 낫다”라고 결론지었다……재판은 1693년 초까지 강도가 점점 약해지면서 이어졌는 데, 그해 5월에 필립스는 마술 혐의로 수감된 모든 사람을 사면하고 석방했다. 1697년 1월 매사추세츠주 법원은 세일럼 마녀재판의 비극을 추모하기 위해 단식의 날을 선포 했고, 이후 법원은 이 재판이 불법이라고 판단했으며, 주심 판사 새뮤얼 수얼은 이 과 정에서 자기의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매사추세츠 식민지는 1711년 사 형수의 명예를 회복하고 상속인에게 재정적으로 배상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Salem Witch Trials,” History, Nov. 4, 2011, accessed Feb. 16, 2021, https://www. history.com/topics/colonial-america/salem-witch-trials. 그 후에도 산발적으로 재판이 열리기는 했으나 그 횟수는 극히 적었다.

58  ) 이 보고서의 타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Wallace Notestein, A History of Witchcraft in England from 1582–1718 (Washington, D.C.: American Historical Association,

하지만 이런 이념적 변화는 단순히 과잉에 대한 반작용이나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 마스트리흐트가 경고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에 대한 의심이 승리했음을 보여 주는 충격적 증거였다. 근대 이전

에 유령과 마녀에 대한 불신을 처음으로 공표한 사람들은 주로 자유사

상가였다.59  ) 과거의 어느 역사가는 “진실은 마법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마법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60  ) 실제로 “마법에 대한 불신이……일련의 확실한 주장이나 새

로운 발견의 결과가 아니라, 유럽에 만연한 사고 습관이 점진적이고 무

의식적이면서도 심오하게 수정된 결과이자……이것이 견해에 미친 영

향의 결과라는 사실은 이 문제를 공정하게 조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

나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 틀림없다”라고 말했다.61  )

영국의 1735년 마녀 처벌법은 유럽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마법

은 불가능한 범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제 마법을 행한다고 주장하

는 사람은 단순히 사기꾼으로 여겨져 벌금과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하

지만 마스트리흐트의 3권 8장 “악한 천사”는 영적 실재와 관련해 현재

영어로 번역된 가장 완전하고 성경적 통찰이 있으며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작품 중 하나로서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지닌다.

셋째 하늘의 교리

오늘날은 그리스도인이 땅에 속한 모든 열망과 기쁨의 결실을 변화된

땅의 황홀한 기쁨에서 찾게 될 것이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육체적 재산과 마찬가지로 부활 후에도 우리는 무한하고 고무

적인 기회를 제공하는 새 땅을 지배하면서 산업을 성취하기 위해 영원 히 수고할 것이다.62  ) 이런 견해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선례가 있었지만, 1911), 419.

59  ) Lecky, HistoryofRationalism, 12.

60  ) Lecky, HistoryofRationalism, 12.

61  ) Lecky, HistoryofRationalism, 10.

62  ) Michael E. Wittmer, Heaven Is a Place on Earth: Why Everything You Do Matters

마스트리흐트가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개혁파의 지배적 견해는 신자가

새 땅이 아니라 하늘에 영원히 거하며, 그들의 가장 크고 주된 기쁨은

영적인 것, 즉 바로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63  ) 결국, 성

도가 죽은 후에 “가장 높은 하늘로 영접받고 그곳에서 빛과 영광 가운

to God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01–207; Randy Alcorn, Heaven (Carol Stream, Ill.: Tyndale House, 2004); Ian K. Smith, Not Home Yet: How the Renewal of the Earth Fits into God’s Plan for the World (Wheaton, Ill.: Crossway, 2019). 특 히 미국의 청교도 시대와 대조적으로 남북전쟁 후 황금기와 1890-1920년 진보주의 시대 에 미국사에서 이 관념이 부상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The Busiest Place in the Universe” and “Heaven: ‘A Busy Hive, a Center of Industry,’” in Gary Scott Smith, Heaven in the American Imagina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119–121; 141–144. 천국 교리의 역사와 대중의 마음속에 있는 천국 개념에 대해서는 중세까 지 고대사를 다루는 Edward J. Wright, The Early History of Heave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성경 시대 이후 현대사를 다루는 Colleen McDannell and Bernhard Lang, Heaven: A History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88), 주제별로 다루는 Alistair McGrath, A Brief History of Heaven (Blackwell Publishing, 2003), 1650-1750년대를 다루는 Philip C. Almond, Heaven & Hell in Enlightenment Engla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를 보라.

63  )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문답90. 존 H. 더프는 “새롭게 된 세상의 용도와 관련해 두 가 지 주요 견해가 존재했다. [17세기 영국의] 대다수 학자는 깨끗해진 세상이 하나님의 영 광과 지혜와 권능에 대한 기념비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의 영원 한 거처에서 이 기념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신학자는 새 하늘과 땅이 그리스도 와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영원한 거처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채택했다.” “‘A Knot Worth Unloosing’: The Interpretation of the New Heavens and Earth in Seventeenth-Century England” (PhD diss., Calvin Theological Seminary, 2014), viii.

셋째 하늘에 대한 마스트리흐트의 주요 부분은 다음을 보라. 1.3.6 XXX-XXXII, XXXIVXXXVI, XXXVIII-XLIII.

네덜란드의 『순수 신학 개요』(1625)는 이렇게 가르친다.

XXXVI. 또한 이 문제에서 하늘은 최후 심판 때까지 복 받은 영혼의 거처가 될 것이

지만, 그럼에도 부패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영광스럽게 된 이 땅은 복 받은 사람의 거 처가 될 것이며, 그 후에는 하늘만 천사에게 남겨진다고 표명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

울여서는 안 된다. 마 5:12; 눅 12:33; 히 10:34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로, 성경은 성

도의 모든 상급, 그리고 변함없는 상급을 하늘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늘은 신 자에게 최종적인 상급으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 마 5:10; 19:14 ). 셋째, 땅과 반 대되는 하늘은 우리의 영원한 집 ( 고후 5:1 ), 우리의 성 ( 빌 3:20 ), 우리의 본향 ( 히 11:16 ) 으로 불리며 따라서 우리는 세입자처럼 잠시만 거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거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종말에 죽을 신자는 그 안에 잠시만 머무를 것이고, 마지막 날에 살아 있는 것으로 나타날 사람은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 인데, 이 모든 주장은 터무니없고 신성한 약속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86문답, 마 25:34, 46 ), 이런 경험을 한 다음 이 땅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

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 앞에서 떠난 성도의 영역을 “셋째 하늘”이라고 부

른다( 고후 12:2 ). 마스트리흐트는 성경을 근거로 첫째 하늘을 지상의 하

늘과 대기, 둘째 하늘을 별이 빛나는 하늘 또는 항성계, 셋째 하늘을 하

나님의 성소 중 가장 높은 하늘인 천상의 하늘이라고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첫째 날에 창조되었다( 창 1:1 ). 64  )

루터파와 달리 셋째 하늘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

역으로 존재한다.65  ) 실제로 신자는 에녹, 엘리야, 그리스도가 현재 그렇

듯 언젠가 몸과 영혼이 그곳에 거할 것이므로( 시 27:4; 요 14:2-3; 히 11:16 )

“셋째 하늘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편이 진리에 더 가까워 보 이는데, 언젠가는 몸도 받을 운명이기 때문이다.”66  ) 하늘은 “가장 넓은 곳이며……이런 이유로 우리 구주는 그곳에 거할 곳이 많다고 했다( 요

14:2 ).” 하늘이 “지극히 찬란하고……‘온전히 빛나며’”, “썩지 않는 이유

는 썩거나 변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절대 썩지 않을 것이기 때문인데,

이로써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영원한 집이라고 부른다( 고후 5:1 ).”67  )

하늘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유한한 것이 틀림

없다. “어떤 종류의 무한성도 하나님의 교류할 수 없는 속성에 해당하

기 때문이다.”68  )

하늘의 목적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의 집이 되는 것인데, 그곳

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거하기보다 자기의 위엄과 영광을 우리에

Synopsispurioristheologiae, ed. Herman Bavinck (Leiden: Didericus Donner, 1881),

Disputatio LII, 662.

64  ) 1.3.6 II.C.1.a, XIX, XXVI, XXX, XXXIV.

65  ) 1.3.6 XXXV.

66  ) 1.3.6 XXXI.

67  ) 1.3.6 XXXII.

68  ) 1.3.6 XVI.

게 보이신다.” 따라서 하늘은 성도가 영원토록 수고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우리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는 곳( 히 4:9-11 ) ”이 될 것이며 “우리

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볼 것( 고전 13:12 ) ”이다.69  )

마스트리흐트는 6권에서 “하늘과 땅”( 벧후 3:7; 10절도 보라 ) 이 불에 의해

쇄신될 것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70  ) 17세기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 구

절의 “하늘”이 낮은 첫째 하늘과 아마도 둘째 하늘만을 의미했는데, 그

이유는 어느 17세기 종말론 학자가 지적한 대로 “가장 높은 하늘은 그

리스도, 성도, 천사의 거처여서 정결하게 하는 불을 겪으리라고 믿기 어

렵기 때문”이었다.71  ) 그렇다면 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가정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개혁파는 성경이 계시하는 것

이상으로 말하지 않도록 조심했으나 하나님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위 한 목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이해했으며, 종종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이 전에 인간을 향해 베푸신 능력과 지혜와 선하심에 대한 기념

비”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또한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주목하고 살필 수도 있을 것이며, 현재 하늘에 사는 천사가 이따금 하늘 과 땅을 오가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간혹 그곳을 여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72  ) 더 작은 영광은 여전히 그 놀라운 질서와 다양성, 특히 그들

69  ) 1.3.6 XXXII, XLII.

70  ) 1.8.4 VIII, XIX, XXI.

71  ) Duff, “‘A Knot Worth Unloosing,’” 158n 90.

72  ) Edward Elton, The Triumph of a True Christian (London: Richard Field for Robert Mylburne, 1623), 497. Duff, “‘A Knot Worth Unloosing,’” 183에서 인용. 이와 비슷하 게 마스트리흐트도 1.8.4 VIII에서 신중한 추측을 제시한다. 신자의 영원한 거처 및 새 하 늘과 새 땅에 대한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의 다른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William Bucanus, Institutions of Christian Religion (London: George Snowdon, and Leonell Snowdon, 1606), 492; Andrew Willet, Hexapla, that is, a six-fold commentarie vpon the most diuine Epistle of the holy apostle S. Paul to the Romanes (Cambridge: Cantrell Legge, printer to the Vniuersitie of Cambridge, 1611), 366–373; Johannes Wolleb, Abridgment of Christian Divinity (London: T. Mabb for Joseph Nevill, 1660), 301–309; Thomas Adams, A commentary or, exposition vpon the diuine second epistle generall, written by the blessed apostle St. Peter (London, 1633), 1356–1382; Richard Baxter, ThegloriouskingdomofChrist (London, 1691), 71–73.

을 비교할 때 나타나는 차이를 통해 더 크고 점증적인 영광에 이바지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창조주가 우리에게 땅을 준 이유는 ( 우리의 집이 아니라, 히 13:14; 11:9 )

우리가 잠시 머물 거처가 되게 하려는 것이므로 우리는 땅에 속한 자가

되지 말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빌

3:19 ).”73  ) 또한 “땅은 하늘의 소유를 얻기 위해 몸과 마음으로 최선을 다

해 애쓰도록 우리를 자극한다.”74  )

결론

이 서론적인 고찰이 독자에게 이 책을 이해하고 유익하게 사용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연구와 집필에 도움을 준 트래비스 펜티먼에

게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또한 4권의 편집에 도움을 준 마이클 헌터,

키스 메티슨, 우터 피터스에게도 감사한다.

끝으로, 라틴어 원문이나 네덜란드어 번역본의 독자는 지금까지 세 권의 책에서 우리가 원래 절 표기에서 여러 가지 실수를 수정해야 했다

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마스트리흐트의 상호 참조와 우리

의 상호 참조를 현 영어판의 번호와 일치시켰다.

우리는 독자에게 마스트리흐트의 가르침과 적용을 추천하며, 주가 이

책에 복을 베푸셔서 그분의 놀라운 사역이 감사함으로 선포되고 죄인

이 죄의 형벌과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조엘 비키 - 토드 레스터

73  ) 1.3.6 LIV.

74  ) 1.3.6 XLII.

하나님의 행동과 작정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 에베소서 1장 11절

우리 믿음의 또 다른 지주는 하나님의 유효성이다.

I. 우리가 생명을 위해 하나님에게 두는 우리의 믿음은 두 지주 위에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구원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충분성이며, 다른 하나는 공급할 수 있는 것을 공급하

는 하나님의 유효성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의 생존에서 비

롯한 것으로서 이 시점까지 설명한 것이고, 이제는 후자를 택하여 하나

님의 행동 일반에 대해 서론의 형식으로 말한 다음 하나님의 내적 활동

또는 작정에 대해 말할 것이다. 사도가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두 가지 모두에 대한 길을 보여 줄 것이다.

석의 부분

하나님의 행동과 작정은 본문의 석의에 기반한다.

II. 이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행동 성격을 제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준다.

A. 하나님의 역사 자체: “모든 일을……일하시는 이.” 이 말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1. 정관사 ‘투’( “~하는 이의” ) 의 감추어진 행위 주체는 우리가 앞

장에서 말한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행위 주체는

각 위격의 구체적인 자존 방식에 따라 모든 것을 이루는 하

나님에게 속하므로 삼위일체 전체와 관련해 신학적으로 고

찰된 하나님이거나 경륜적으로 고찰되는 하나님, 즉 앞 구절

전체를 통해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안에서 이

루는 성자와 구별되는 분으로서 오직 성부로만 이해된다.

2. 행동: ‘에네르군토스’( “일하시는” ) . 이 단어는 유효성뿐만 아

니라 틀림없이 최고의 유효성과 결합한 행동을 의미하고, 이 의미는 성경의 용례에서 비롯한다. 70인역 번역자들은 이사

야 41장 4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 해당 구절에서는 가

장 유효한 역사, 즉 모든 장애물을 뚫고 제거하며 그 효과를

달성하는 역사가 묘사되어 있다. 사도는 에베소서 2장 2절에

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마귀의 권세와 불순종의 아들들

에 대한 그분의 통치하시는 힘을 표현한다. 이런 이유로 여

기서는 어떤 피조물의 힘으로도 자유로운 선택 의지로 일어

나는 일을 그 목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저항하는 것이

불가능한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한다.

3. 이루어진 행위: ‘타 판타’( “모든 일” ). 다시 말해 (1) 단순하면

서도 가장 폭넓게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일.” 여기에는 이

런 은혜의 유익뿐 아니라 모든 것, 즉 선한 일도 악한 일도

모두 포함된다. 여기서 악한 일은 그것이 일이라는 점에서는

도덕적으로 악하지 않다. 하나님이 자기 목적을 위해 가장 탁월하게 감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더 작은 것에

비추어 더 큰 것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논증한다. 즉, 하나

님이 심지어 가장 작은 피조물에서도 모든 일을 하신다면 이

렇듯 인간의 구원과 관련된 일은 얼마나 더 많이 하시겠

는가? 또는 (2) 더 좁게는 “이 모든 일.” 즉, 사도가 계속 말

하고 있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일. 또는 (3) 가장 좁게 하

나님의 단독 사역. 즉, 사명을 부여하여 그리스도를 보내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며, 복음의 성취에 대한 계시와 이 성취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들에 대한 일. 이 일은 삼위일 체 전체의 활동을 배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부의 경륜적

사역도 포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이로써 성부는 첫째 위격으로서 영원부터 구속의

사역을 계획하고 그 후에 시간 속에서 그 계획을 실행했다.

B. 하나님의 사역 규준: ‘카타 텐 불렌 투 텔레마토스 아우투’( “그의 뜻의 결정대로” ). 그 이유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이루어진 영원한 평화의 의논이 구속의 모든 과업을 실행하도록 위임된 규준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언급

되어 있다.

1. 계획: ‘카타 텐 프로테신’( “계획을 따라” ). 성경에서 “계획”( ‘프로

테시스’ ) 은 때에 따라 택함의 전체 작정이나 평화의 의논을 나

타내거나, 때에 따라 하나님이 일부 특정 인물에게 값없이 복을 베풂으로써 자신의 영광스러운 긍휼을 나타내려는 최

초의 택함 행위, 즉 이 값없는 복이 시간 속에서 나타날 특정 한 사람들을 택하고 지명한 선택 행위를 나타내거나, 때에 따라 이 복에 적합한 수단을 마련하려는 택함의 세 번째 행

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택함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고( 엡 1:11 ), 때로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 의 뜻이며( 롬 9:11 ), 때로 하나님의 뜻의 계획과 결정과 선한 기쁨에 따르는 택함( 엡 1:5 ) 이라고 한다.

2. 결정: ‘카타 텐 불렌’( “결정대로” ). 그 이유는 모든 결정에는 목

적에 따른 계획 외에도 수단에 대한 숙고, 그리고 마지막으

로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이 특정 수단에 대한 의도가 있

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고는 무지를 수반하기 때문에, 원래적

인 의미의 숙고는 하나님 안에 자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숙고는 본성이 아니라 자유롭게 계획이나 선택이나 이성적

만족1  ) 에서 비롯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가진 지식의 확실

성,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이 일하는 지극히 완전한 방식과 관련해 하나님에게 귀속된다.

3. 뜻의 의도: ‘투 텔레마토스’( “그의 뜻의” ). 여기서는 이미 이전 에 선택한 수단이 적용된다. 이 수단이 확실히 자유로우나

또한 지혜롭고 의롭게 적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내린 결 정을 바탕으로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하 고 절대적인 권리를 기준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문 전체에서 먼저 모든 성경 역사의 일반적 방법을 명시한

다음,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특별히 다루게 될 하나님의

작정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번째 정리 – 하나님의 행동

교리 부분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역사한다.

III. 그러므로 본문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엡 1:23 ). 이런 이유로 모든 것, 곧 만물이 주

1  ) consilium(“권고”), proai,resij(“선택”, 때로는 “결정”), ‘complacentia rationalis(“이성적 만족”, 즉, 이성적 기쁨)는 이 책 전체에서 liberum arbitrium(“자유로운 선택”)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이다.

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하며( 롬 11:36 ), 예수

는 아버지가 일하므로 자신도 일한다고 말씀한다( 요 5:17 ). 하나님은 만

물의 제1 원인이어서 하나님 없이는 세상에서 어떤 작용도 있을 수 없

으므로 이것보다 더 분명한 것도 없다. 제1 원인이 작용하지 않으면 이

차적 원인이 어떻게 작용하겠는가? 활동하지 않는 것보다 활동하는 것

이 의심할 여지 없이 더 완벽하며 이런 이유로 활동하는 것은 가장 완

벽한 이에게 적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굳이 여기에 덧붙일 필요도

없다.

일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방식

IV. 또한, 적어도 피조물의 경우 일하는 것, 행동하는 것, 이루어 내는

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함축한다. (1) 일하는 주체가 있어, 이 주

체에게는 (2) 일하는 능력이나 힘이 있고 이것으로부터 (3) 일하는 행

위 자체 또는 작용이 비롯하며 이것이 (4) 일을 산출한다.2  ) 이 네 가

지가 피조물 안에서는 각각 다르더라도 가장 단순한 행위인 하나님 안

에서는 똑같은 것이며, 하나님 안에서는 일하는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

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는 본질만 존재한다. 하나님의 외적 사역에서는

일이 일하는 주체와 일하는 것과 다르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일하는 것

은 하나님의 활동적인 본질과 그 일과의 관계라는 두 가지를 포함한다.

이뿐 아니라, 피조물의 일에는 일하는 주체와 일이 잠재태에서 현실태

로 옮겨져서, 이전에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태에만 있던 일하는 주체가

이제는 현실태에서 일을 하고, 이전에는 행해질 수 있는 상태에만 있던

일이 현실태에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에서 잠재태

에서 현실태로 옮겨 가는 것은 일뿐인데, 일은 그 자체로 항상 그리고 균일하게 활동하는 하나님의 본질에 종속하게 되며 일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잠재태와 현실태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2  ) 마스트리흐트는 명사 opus(“일”)를 사용하여 행동과 일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operatio (“일하는 것” 또는 “작용”)와는 대조적으로 일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 만물에 미친다는 것

V.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물 안에서 역사한다( 롬 11:36 ). 여기서

모든 것은 자연적이든 도덕적이든 어떤 본질 또는 선함을 지니는 것을

가리키고, 모든 이차적 원인의 작용이 모든 실제 상황뿐 아니라 일하는

것의 본질과 관련해서도 필연적으로 제1 원인의 작용에 의존하기 때문

이다 (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절대적인 제1 원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 . “나는 여호

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사 45:7; 애 3:37-38 ). 이런 이유만으

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악한 일을 행하거나 죄를 짓지 않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시 5:4-5 ). 이런 것들이 효과가 아니라 효과의 결핍이기 때

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율법을 범할 수도 없다. 율법을 범하는 일에는

이런 악의 작용만 있기 때문이다( 요일 3:4 ).

하나님의 위격에 고유한 사역 방식

VI. 하나님의 일( 즉, 그분의 외적 사역 ) 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전능성, 즉

우리가 위에서 분명히 말한 하나님의 전능한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것

으로 고찰할 수도 있고3  ) 또는 위격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고찰할 수

도 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일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나타난다. (1)

위격 간의 협력. 이로써 모든 위격이 분리할 수 없이 같은 것을 역사

한다( 요 5:17, 19 ). 흔히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외적 사역이 나뉘지 않기

때문이다( 요 16:13-14 ). 그러므로 (a) 모든 위격은 역사하는 능력과 관련

해서는 그분 자신으로부터( a se, ‘아 세’ ) 일한다( 요 5:26 ). 모든 위격에게

공통된 하나의 역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b) 이런 일

에서 이 위격이나 저 위격이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모든 위격이 함께

같은 능력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요 5:21-23 ). (2) 각 위격의 고유한 작

용 방식. 삼위일체와 관련된 장에서 가르친 대로, 이로써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통해 자신으로부터, 성자는 성령을 통해 성부로부터, 성령은 자

3  ) 1.2.20 X.

신을 통해 성부와 성자로부터 각각 고유한 자존 방식에 따라 일한다.4  )

여기서는 (3) 전유. 이로써 다른 모든 점에서는 세 위격에게 공통된 일

이 특정 이유로 말미암아 한 위격에게 특별하게 귀속된다. 따라서 첫 번

째 위격에게는 최초의 외적 사역인 창조와 예정을 통한 구속 사역의 첫

번째 계획이 귀속되고, 두 번째 위격에게는 그분이 자기 피로 구속을 성

취하므로 구속이 배정되며, 특히 세 번째 위격은 성화에 직접 관여하므

로 성화와 그것에 부수된 일들이 그분에게 속한다. (4) 활동의 종결. 이

종결을 통해 모든 위격에게 공통적인 사역의 종결점은 한 위격에게 특

수하다. 따라서 세 위격 모두에게 공통되는 능동적 성육신의 종결점, 즉

인간 본성은 특히 그것을 취하는

번째 위격에게 돌려진다.

하나님 사역의 배분

VII.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나님의 외부에 또는 하나님과는 다른 어떤 것도 발생시키지 않는 내적 사역 또는 내재적 사

역,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어떤 것을 발생시키는 외적 사역 또는 일시적 사역으로 나눈다. 다시 말하지만, 전자는 위격적이고 특징적인 사역이

며 이로써 위격이 서로 구별되는데, 낳는 사역은 성부에게 속하고 ( 시

2:7 ), 나시는 것 또는 나신 자의 길로 나아가는 사역은 성자에게 속하

며 ( 미 5:1 ), 발출된 자의 길로 나아가는 사역은 성령에게 속하는 것 ( 요

15:26 ) 과 같다. 또는 이것들은 본질적인 사역인데, 이로써 위격들은 예컨 대 성부가 성자를 알고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며 성자가 성부를 차례로

영화롭게 할 때 부분적으로는 서로를 향해 전달된다. 부분적으로 피조 물들을 향해 전달되는 사역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알고 사랑하고 택하 고 유기하는 것인데, 이 안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작정이 일어난다. 후자 의 ( 외적 ) 사역은 창조와 섭리를 가리킨다.

4  ) 1.2.24 X.

1장 하나님의 행동과 작정 75

변증 부분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된 네 가지 논쟁

VIII. 첫째, 에피쿠로스학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물 안에서 역사

한다는 사실을 직무의 측면에서 부정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수많은

피조물을 창조하고 보전하고 다스리는 일로 자기의 평온과 복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무관심 속에 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

는다 5  ) 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

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라는 이사야 40장

28절의 말씀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둘째, 스토아학파는 하나님의 사

역 자체를 운명이나 이차적 원인의 연결 관계 위에 둠으로써,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이런 원인의 연결 관계를 친히 일으키지 않았거나 자기의 기

쁘신 뜻대로 그것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물 가

운데 역사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셋째, 펠라기우스주의자는 자유로운

선택의 최초 결정을 하나님의 역사 아래 두지 않음으로써 이 사실을 부

정하여, 죄 역시 그 불법성 6  ) 과 관련해서뿐 아니라 보편적으로 그 불법

성의 기반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섭리를

다룰 때 해당 부분 7  ) 에서 각각 살펴볼 것이다. 넷째, 소키누스주의자와

보르스티우스는 하나님의 본질과 다르고 하나님에게 우연한 사건인 그

런 일을 하나님 안에서 상상하여 이 사실을 부정한다. 이들의 주장은 하

나님의 단순성과 불변성에 의거해 해당 부분8  ) 에서 논파되었다.

5  ) avne,rgeian

6  ) avnomi,an

7  ) 1.3.10 XXVIII.

8  ) 1.2.6 XXIII.

실천 부분

1. 하나님의 유효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

IX.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물 안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은 먼저 하나님

의 영광을 나타낸다. 이것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

에게로 돌아가며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 때문이요( 롬 11:36 ), 하나님

이 빛을 창조하고 어둠을 만들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

는 여호와기 때문이다( 사 45:7 ). 다시 말해,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의

영광을 나타낸다. (1) 하나님의 독립성. 모든 것을 역사하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롬 11:35 ). (2) 하나님의 전능성. 하나님

은 다른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역사

한다 ( 시 115:3 ) . (3)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행

한다( 시 114:24 ). (4) 감사. 우리는 인간으로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누리는

모든 선의 영광이 하나님에게 속하는 만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물 안

에서 역사하는 분이며 우리 안에서 특별히 소원과 행함을 위하여 역사

하는 분이므로( 빌 2:13 ), 현재의 우리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으며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전 15:10 ).

2. 하나님의 유효성은 불경건을 책망한다.

X. 둘째, 무신론자의 특징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존자의

입에서 선이나 악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애 3:37-38 ), 마음으로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라 고 말하는 것( 습 1:12 ), 마치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찾지 않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10:6, 11; 114:7, 10 ) 이다. 그래서 무신론자는 모든 것을 모든 것 안에서 역사

하는 하나님을 지각없는 우상으로 만든다.

3. 하나님의 유효성은 역경에서도 위로를 준다.

XI. 셋째, 하나님이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신 분( 사 45:7 ) 이며, 여호와가 행하지 않으면 성읍에 재앙이 없다

는 사실( 암 3:6 ) 은 어떤 역경에서도 경건한 자에게 위로가 된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경건한 자가 어떤 고난에서도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는 것

은 주가 이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시 39:9 ).

4. 하나님의 유효성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키우고 강화한다.

XII. 넷째, 하나님의 유효성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키우고

강화하며, 이로써 우리는 여호와에게 우리의 길을 맡기면 여호와가 행 할 것이므로( 시 37:5 ) 이렇게 모든 것을 만물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유효성은 우리를 하나님과 경건함에 결속시킨다.

XIII. 다섯째, 하나님의 유효성은 우리를 하나님에게 결속시키는데, 우

리가 하나님을 떠나 피조물로부터 받을 어떤 선에 대한 소망이나 악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서는 안 되고 진실한 예배와 경

건으로 하나님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물 안에

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하나님을 우리 오른편에

모시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시 16:8 ). 하나님이 우리

를 위하면 누가, 무엇이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롬 8:31 ) ? 그 반대의 경우

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반대한다면 누가, 무엇이 우리를 위하

겠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물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

이다. 아마도 다른 곳, 즉 섭리를 다루는 장 9  ) 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할

이런 사항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다루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두 번째 정리 - 하나님의 작정

교리 부분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내적 행동 속에서 발생한다.

XIV.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언급한 하나님의 사역에서 우리는 내적 활

동, 그리고 이 중에서 특히 하나님이 자기 뜻의 결정에 따라 모든 것을

역사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작정을 가장 먼저 마주한다. 하나님의 작정 은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쳐 드러난다. 예컨대 이사야 14장 26-27절은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 하셨느니라”라고 진술한다( 단 4:24; 시 2:7; 슥 2:2; 행 2:23; 4:28; 롬 8:29-30; 마 11:26 등 ). 하나님은 본성상 짐승이나 생명이 없는 것들처럼 경솔하게 이 유 없이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특히 우리가 이미 입증한 바 있고10  )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지성과 의지가 있으므로 선택과 결정에 따라 행

동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본성이나 본능보다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

이 의심할 바 없이 더 완벽하다는 점은 굳이 여기에 덧붙일 필요도 없다. “작정”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우리가 다음 절에서 제시할 것처럼 그 자체가 많은 동의어로 기

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런 이유로 작정이 온당하게 하나님에게 속하 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지성과 의지는 가장 온당하게 하나님에 게 속하며 마찬가지로 이미 제시한 이유에 따라 자유롭게 또는 이성적 만족에서 행동하는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작정에서는 숙고가 필요하고 그들의 결정에서는 무지가 관찰된다는 사실도 방금 말한 이

9  ) 1.3.10 XXXVI–XLIV. 10  ) 1.2.13 III, IV; 1.2.15 III.

런 것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 단순히 작정의

일부가 아니라 피조물의 작정에 불과하기 때문인데, 하나님의 교류할

수 있는 속성에서 통례적으로 그렇게 하듯 피조물의 불완전성도 하나

님에게서 떼어내고 제거해야 한다.

작정은 하나님의 확정적 선고인가?

XV. 작정은 재판관이 다투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선고를 내릴 때든, 심의에 따른 그 밖의 다른 작정이든 확정적 선고를 나타낸다. 다른 이름

으로는 결정, 기쁘신 뜻, 계획, “정하신 뜻”( ‘프로오리스메네 불레’, 행 2:23; 4:28; 엡 1:9, 11 ) 이라고도 하고 마찬가지로 “명령”( ‘호크’, 시 2:7 ) 이라고도 한다. 작정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 뜻의 결정에 따라 미래의 모든 것을 확보하는 일과 관련해 미리 결정한 판결 외에 어떤 것도 나타내지 않

는다. 그러므로 작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내포하는 확정적 선고다.

(1) 작정하는 행위. 이것은 생명의 활동 방식에 따라 고찰되는 하나님

의 본질, 즉 작정하는 하나님 자신 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2) 미래에

확보할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성향과 관계. 이런 성향은 하나님에게 어

떤 변화나 본질의 완전화를 유발하지 않는다. 본질을 더 완전하게 만들

기 위해 본질에 추가된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작정은 본질과 다르다. 본질은 어떤 성향이나 관계를 포함하

지 않기 때문이다. (3) 작정되는 것, 또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과 다르다. 첫째 항목과 관련해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며 필연적이고 영원하지만, 둘째 항목, 즉 성향과 관련해 하나님의

작정은 자유롭고 다양하여 마치 중심이 하나인 원과 같아서, 중심에서

그어진 선들은 참으로 다양하더라도 중심에 전혀 반대되지 않는다.

작정의 확정적 선고는 세 가지를 내포한다.

XVI. 또한 작정의 이 확정적 선고는 다음과 같은 것을 수반한다. (1)

작정하는 주체가 자신 앞에 두는 목적. 하나님에게 이 목적은 오직 자기

의 영광이며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으로 말미암아 ( 잠

16:4 ) 그리고 자신에게 돌아가는 방식으로( 롬 11:36 ) 역사한다고 한다. (2)

수단에 대한 구상. 이것은 ( 피조물에게 )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숙고하는 것인데, 이런 이유로 작정은 결정

이라고 부른다. (3) 의지의 의도. 이에 따라 여러 수단 중에 한 수단이

의도한 목적을 지향하도록 선택된다. 그리고 이 의도는 참으로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의 원인이지만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을 막론하고 미래에

실제로 일어난 일 자체의 원인은 아니다. 작정은 하나님의 외부에 아무

것도 발생시키지 않는 내재적 활동이기 때문이며, 미래에 일어날 일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더라도 미래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작정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결정하는 데 관여한다.

XVII.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확정적 선고는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이거

나 자유롭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상관없이 미래에 일어날 개별적인

모든 일에 대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미래에 실제로 일어난 일 자체의 원

인은 아니다. 따라서 작정은 참으로 미래에 일어날 죄의 원인이지만 미

래에 실제로 일어난 죄 자체의 원인은 아니며, 미래에 실제로 일어난 죄

는 죄를 짓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을 그 원인으로 인정한다. 그 이유는

어떤 일의 미래성의 원인이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 전

부터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 미래였을 것인데, 이것은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운명 이상의 무언가를 수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시간 속에서 존재하게 될 어떤 일이 영원 전부터

존재해 온 것의 원인이므로 결과가 그 자체의 원인에 앞서게 된다는 점

은 굳이 여기에 덧붙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편 미래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창조나 섭리를 통해 작정을 따르는 것은 확실하지만, 선한 일의 경

우 작정이 그 원인이 되어도 악한 일의 경우 작정은 단지 선행 사건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미래에 일어날 일은 실행하거나 허용함으로써 확보되는 것

이다.

XVIII. 따라서 하나님은 선한 일의 경우 실행하고 악한 일의 경우 유

효하게 허용함으로써 작정에 따라 미래에 일어날 일과 미래에 실제로

일어난 일을 확보하고자 하므로, 작정은 실행의 작정과 허용의 작정으

로 구분할 수 있다.

확보의 규준은 결정이다.

XIX. 끝으로, 이런 확보의 규준 또는 규준과 같은 것은 더 엄격히 말

하면 하나님의 뜻의 결정이다( 엡 1:11 ). 그 이유는 숙고가 숙고를 통해 제

거되는 무지를 전제하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결정은 ( 피조물에게 그러한 것처

럼 ) 숙고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에게 해당하지 않지만, 가장 완벽한 판단

과 관련해서는 피조물에게서 통례적으로 신중한 숙고를 따르는 종류, 즉 경솔함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지혜롭고 적절하게 준비하기 때문인

데, 이것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의 결정을 “행사”나 “역사”( ‘파알’, 잠 8:22; 사 5:12 ) 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작정의 속성: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다.

XX. 더 나아가, 이 하나님의 작정은 우선 영원하다( 엡 1:4 ). 이런 이유

로 하나님의 모든 일은 옛적부터 하나님에게 알려졌다고 말하며 ( 행

15:18 ) ,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려는 계획도 영원 전부터 있었다고 말

한다( 딤후 1:9 ).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지혜를 만세 전에 은밀한 가운데

미리 정했다고 말하는데 ( 고전 2:7 ), 이것은 작정하는 행위와 관련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일을 확보하는 하나님의 성향과도 관련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작정함으로써 잠재태에서 현실태로 넘어갈 것이며 변

화에 종속될 것인데, 이런 변화는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가장 정확하게

배제하는 것이다( 말 3:6; 약 1:17 ).

하나님의 작정은 마찬가지로 지극히 자유롭다.

XXI. 한편 둘째로 하나님의 작정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지극히 자유

롭다( 롬 9:11; 렘 18:6; 마 11:26; 20:15 ). 이것은 하나님이 작정하는 능력이나

행위 없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지성과

의지 없이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작정하는 능력이나 행위가

어떤 대상에 대한 성향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작정 없이 작정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언

제든지 작정하거나 작정하지 않더라도 상관없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게

되면 작정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작정함으로써 변화되었을

것이다. 작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자유롭다. (1) 하나님은 본성상 이

런 방식으로 작정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작정하더라도 상관없다. (2) 하

나님은 다른 방식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 작정할 때 오로지 하나님 자신 의 이유만으로, 즉 이성적 만족으로 말미암아 작정한다. 그러나 하나님

은 정말 독립적이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 최고의 원인에 의해 결정되더라도 피조

물의 작정과 마찬가지로 ) 자유로울 뿐 아니라 지극히 자유롭거나 절대적으 로 자유롭다.

하나님의 작정은 지극히 지혜롭다.

XXII. 셋째, 하나님의 작정은 지극히 지혜로우므로 여기서 “깊도다 하

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라고 외치는 것이 마땅하다( 롬 11:3334; 시 104:24 ). 하나님이 자기 목적에 지극히 적합한 수단을 선택하고 마

련하기 때문이다( 롬 8:28-30 ). 또한 하나님은 이유 없이 어떤 것을 작정 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작정이 지극히 지혜로워서 그것을 산출할 수 있는 모든 원인을 배제하더라도 반드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유 대부 분이 우리에게는 비밀이지만 하나님은 가장 잘 알고 있다 ).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이고 불변한다.

XXIII. 넷째, 하나님의 작정은 절대적이고 불변하다( 사 46:10; 행 4:28; 잠

1장 하나님의 행동과 작정

19:21 ). 그 이유는 작정하는 일이 특정한 원인과 조건에 달린 경우가 많

더라도, 작정하는 행위 자체는 모든 원인과 조건과 독립적이며 따라서

완전히 불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보편적으로 유효하다.

XXIV. 다섯째, 끝으로 하나님의 작정은 보편적으로 유효하다( 시 115:3;

135:6; 사 14:24 ). 하나님의 작정은 예컨대 죄 같은 것을 작정하고 시간 속

에서 실행하지는 않더라도 죄가 미래에 저질러질 것과 관련해서 유효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정은 악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작정 외의 어떤

것도 죄가 저질러지는 일을 일으킬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이 지

니는 이런 유효성은 이런 일들에 어떤 필연성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확실성만 부과할 뿐이다. 하나님의 작정이 어떤 사건이 그 자체

로 정해지지 않은 우연한 근접 원인으로 발생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우리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지도 않

는다. 인간이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

로 하나님의 작정이 유효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강력하게

추동한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의 작정은 모든 우

연한 사건의 근원이자 원천인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 또는

그런 우연한 원인을 정하고 그런 사건에 결부시키는 지극히 자유로운

어떤 최고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연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 이다.

하나님의 작정 대상

XXV. 작정에 선행하는 대상은 가능한 일이고 작정을 종결하는 대상

은 미래의 일인데, 하나님이 가능한 일에 비추어 이러저러한 미래의 일

을 작정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작정은 모든 미래의 일 ( 엡 1:11; 롬 11:36;

애 3:37-38 ) 과 구체적인 죄( 행 4:28 ) 에도 영향을 미치므로,11  ) 우리가 말한

것처럼 죄가 범법에서 비롯하더라도 죄의 미래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작정에서만 비롯한다.

작정은 작정하는 행위와 관련해 하나다.

XXVI. 하나님에게 속하는 작정은 작정하는 행위와 관련해 오직 하나

며 지극히 단순하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있었고 현재에 있으며 앞으로

있을 미래의 일을 영원 전부터 아무런 숙고도 없이 동시에 한 번에 결

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작정은 또한 다양한 대상에 대한 성

향과 그 성향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종말과의 관계에서 각양각색의 형

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결정”( ‘에초트’, 사 25:1; 개역개

정, “정하신 뜻” ), “생각”( ‘마하샤바’, 사 55:8 ), “일”( ‘미프알’, 잠 8:22 ) 이라고 언급

한다. 그리고 많은 작정이 존재하는 한에서 이것들은 지극히 아름답고

지혜로운 질서 속에서 서로 일관성이 있다.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방

식에 따르면, 작정된 일뿐 아니라 그것들이 작정되는 방식, 하나님의 결

정, 생각, 행사 자체에서도 나름대로 순서가 목격된다. 그것들 속에 실

제로 작정하는 다른 행위가 있거나 시간의 측면이나 본성의 측면에서

한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뒤에 있어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같은 결정의

다른 부분들을 생각하면서 그것들을 적절한 순서로 결부시키고 이로써

우리가 그 작정의 모든 지혜를 더 분명하게 생각하고 더 완전하게 끌어

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른 것 없이 한 가지만 작정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적합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기 영광에 대한 어떤 결정 없

이 인류를 창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지혜롭지 못하고 경솔하게 목적

없이 창조했을 것 ) 이나 수단 없이 목적을 작정하고 그 반대로 목적 없이 수

단을 작정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적합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

리는 작정의 다른 부분들을 구별하고 한 부분 또는 한 작정이 다른 부

11  ) Attingit: 접촉하다

1장 하나님의 행동과 작정 85

분을 생성하는 원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이유라고 부르고, 사

도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롬 8:32, 29-30 ) 한 부분에서 시작하여 다른 부

분으로 논증을 이어 간다.

하나님의 작정 순서

하나님의 작정의 이런 순서에 근거해, 하나님이 목적을 위한 수단

보다 목적을 먼저 의도하고, 수단 중에서도 그 목적에 더 밀접하게 닿는

것을 먼저 의도했다고 인식하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의도

의 측면에서 먼저인 것은 실행의 측면에서, 즉 의도의 순서에 따라서는

마지막이지만, 실행의 순서에 따르면 그 목적보다 먼저 수단을 의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의지와 관련해

서는 마치 선행하는 것과 후속하는 것이 있다는 식으로, 그리고 마찬가

지로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보다 작정되고 의도되는 것과 관련해 하나님에게는 선행하는 것과 후

속하는 것, 특히 수단과 목적에 대한 의지와 가장 지혜로운 조정이 있어

서 하나님은 지극히 적합하고 자유롭게 서로를 연결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작정이 어떤 사물이나 조건이나 수단에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작정은 앞서 말한 대

로 하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대단히 절대적이기도 하다. 작정의 실행

도 효과 및 결과와 마찬가지로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절대적인 작정에 의존한다.

작정은 실행의 작정이거나 아니면 허용의 작정이다.

XXVII. 끝으로, 다양한 작정은 실행의 작정과 허용의 작정으로 나

뉜다. 작정은 사실상 내재적 행동이고 이런 이유로 엄밀하게 말하면 작

정이 실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어떤 것은 실행하 고 다른 것은 허용하기로 정한 작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

든 존재자의 제1 원인이자 보편 원인이므로 실행의 작정은 자연적인 것

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모든 선한 일에 관여한다. 허용의 작정

은 단지 미래에 일어나게 되는 일만을 확보하는 것이며 미래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피조물이 어떤 일탈과 결함을 통해 발생시키고, 하나님은

이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다 ( 시 81:12; 창 20:6과 함께 행

14:16-17 ). 이 후자의 작정은 도덕적 악, 즉 죄에 관여하고, 그런 만큼 하

나님은 이 작정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허용하는 것일 뿐이다( 행 2:2324; 4:27-28 ).

변증 부분

1.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인가?

견해 차이

XXVIII.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작정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인가 하

는 것이다. 헬라 교부 사이에서는 한때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의

지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 질문이 제기되었는데, 순교자 유스티누스

또는 『헬라인을 위한 질문』의 저자12  ) 에게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일부

는 부정하고 일부는 긍정했다. 이 질문에 대해 후대의 교부들, 특히 아 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작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에서, 그리고 마

찬가지로 스콜라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안니스, 롬바르두스, 아퀴나 스 등도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했다.13  ) 항변파 호교론자들은 소키

12  ) 위작의 목록은 다음을 보라. Justin Martyr, “Tertia ad Graecos Christiana quaestio,” Quaestiones Christianae ad Graecos in S.P.N. Justini philosophi et martyris opera quae exstant omnia (Paris, 1742), 520–526.

13  ) John of Damascus (c. 675–749), Expositio accurata fidei orthodoxae in Patrologia Graeca (PG), ed. Jacques-Paul Migne (Paris, 1857–1866), 94:807–834; idem, An Exact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in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II (NPNF2), ed.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New York: Christian Literature Co., 1890–1900; reprint Peabody, Mass.: Hendrickson, 1994), 9:6–11; Peter Lombard, Sententiarum IV Libri, bk. 1, d. 45, ch. 1 in Patrologia Latina (PL), ed. Jacques-Paul

1장 하나님의 행동과 작정 87

누스주의자의 호의를 얻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단순성을 더 강하게

배격하고 하나님 작정의 가변성을 더 쉽게 주장할 수 있도록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대답한다.14  ) 소키누스주의자는 하나님의 단순성과 불변성

을 뒤집을 목적으로 이 질문을 더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 안에 존

재하는 우연적 속성에 대해 거론한다.15  ) 개혁파는 작정된 것들이 하나

님의 본질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 그리고 마찬가지로 어떤 대상을

향한 작정의 성향이 실제로 하나님의 본질 자체는 아니어도 작정의 구

성을 위해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작정하지 않는 작정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16  ) 하지만 개혁파

는 작정하는 행위와 관련해서는 작정이 본질과 같다는 점을 인정하면

서도, 절대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로 고찰할 때 본질이 형식적으로 고찰

되는 이러저러한 대상에 대한 성향을 함축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에 비추어 개혁파 중에서 본질과 작정을 구별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

으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안에서 어떤 합성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성향은 기껏해야 관계일 뿐이기 때문이고, 엄밀하게 말하면 이 관계에 하나님을 합성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Migne (Paris, 1841–1855), 191:641–643; idem, The Sentences Book 1: The Mystery of the Trinity, trans. Giulio Silano (Toronto: Pontifical Institute of Medieval Studies, 2007), 1:241–245; Aquinas, Summatheologiae (ST), 1.19.11. 14  ) 예로 다음을 보라. 시몬 에피스코피우스(1583-1643)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인 익명의 Apologia pro confessione sive declaratione sententiae eorum, qui in Foederato Belgio vocantur Remonstrantes (1630), 41r–47v, 54r–58r. 항변파에 대한 개혁파의 비난은 다음을 보라. Johannes Polyander (1568–1646), André Rivet (1572–1651), Antonius Thysius (1565–1640), Censura in confessionem sive declarationem sententiae eorum qui in foederato Belgio Remonstrantes vocantur (Leiden: Bonaventure and Abraham Elzevir, 1626), 28–48, 59–62.

15  ) 예, Conrad Vorstius (1569-1622), Tractatus theologicus de Deo, sive de natura et attributis Dei (Steinfurt: Theophilus Caesar, 1606); idem, Epitome exegeseos apologeticae (Steinfurt: Theophilus Caesar, 1616).

16  ) 예, Johannes Maccovius (1588–1644), Loci communes (Amsterdam: Lodewijk and Daniel Elzevir, 1658), 120–130. 여기서 마코비우스는 하나님에게 우연적인 특질이 있다 는 소키누스주의자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개혁파가 제시하는 근거

개혁파가 작정을 하나님의 본질과 같은 것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다

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단순성. 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한 장의 해당 부

분 17  ) 에서 입증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의 단순성을 통해 모든 우연적

속성을 거부한다. (2) 하나님의 무한성. 해당 부분 18  ) 에서 밝힌 것처럼

하나님의 무한성은 서로 다른 사물이나 부분 또는 합성을 허용하지 않

는다. (3)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 외의 어떤 것이 아

니라는 사실.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사

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 우연적 속성. 본질적으로 불완전함을 암

시하는 우연적 속성은 가장 완전한 분에게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론

이런 반대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1) 하나님에게 많은 작정이 있으 나 본질은 하나뿐이라는 것. 나의 대답은 “작정들”을 작정된 것들이라

고 이해한다면, 그런 것들은 분명히 많고 실제로 하나님의 본질과도 다

르고 서로 간에도 다르다. 그리고 작정을 대상들에 대한 성향으로 이해

한다면 그래서 작정이 많게 된다면, 이것은 무언가 본질과 다른 것도 아

니고 우연한 속성도 아니며 단지 하나의 관계로서 오로지 구별할 뿐 구

성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작정들”을 작정하는 행위로 이해한다면, 우

리가 그것을 일이 미래에 일어날 것과 관련해 적극적인 것으로 생각하 는 한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본질일 뿐이다. (2) 하나님 안에 있는 작

정은 자유로우나 본질은 필연적이라는 것. 나의 대답은 이성을 지닌 피

조물에게도 작정하는 능력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 안에도 작정하는 행위는 자유롭지 않고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대상

을 향한 행위의 성향은 하나님 안에서도 자유롭지 않고 필연적이며, 저

대상보다 이 대상에 대해 작정하는 행위의 성향은 자유로울 뿐더러 지

17  ) 1.2.6 XXII. 18  ) 1.2.6 XXI.

극히 자유로울지라도, 하나님은 무언가 작정할 것이 없으면 작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향은 작정하는 것 또는 작정된 것과의 관

계에서 우리에게 인식되므로 우리는 이런 성향을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부르지 않고 단지 작정하는 행위라고만 부른다.

2.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영원한가?

우리 대적들의 견해

XXIX.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모든 작정이 영원한가 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자, 소키누스주의자, 항변파는 (1) 하나님의 작정이 하

나님은 아니라는 것, (2)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은 독립적인 중립성에

있는데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하다면 이 중립성은 파괴되리라는 것, (3)

인간이 기뻐하는 선택에 따라 날마다 발생하는 작정이 있다는 것을 더

쉽게 주장하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고 보전하고 다스리는 작정, 그리스

도를 세상에 주고 보내는 작정,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푸는

작정, 자유로운 선택의 중립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른 것들에 대한

작정같이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존재한 어떤 작정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정한다. 이들은 그럼에도 모든 작정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부

정한다.

개혁파의 견해와 그 근거

이와 반대로, 개혁파는 하나님의 모든 작정이 영원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앞 단원에 따르면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

자신이며, 이런 이유로 하나님이 영원하다면 하나님의 작정도 영원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미래의 모든 일을 미리 알았으

며 ( 행 15:18 ), 그런 작정이 아니고서는 미리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

이다. (3) 반대 가설대로라면, 영원 전부터 이 작정들이 시간 속에서 발

생할 때까지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많은 일에 대해 알지 못하고 생각

하지 못하고 불확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작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지식에 포함되는 대부분의 완전함을 시간 속

에서 받았을 것이고 매일 받을 것이며, 이런 이유로 영원 전부터 가장

완전하지 않았을 것이어서 하나님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우

리 대적은 자기들의 반대 가설에 근거해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필연성

보다 더 큰 필연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시간 속에 존재

하는 것이 영원 전으로부터 미래의 일이 되도록 정해졌고 미래에 일어

나게 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작정에 달려 있지 않다면,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 자체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에 일어날 일이 영원 전부터 그리고 작정 없이 미래의 일이

되도록 정해졌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 일과 다른 것을 확정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일이 미래에 일어나게 되는 것에 종속될 것이다.

반론

우리 대적은 다음과 같은 반대 주장을 제기한다. (1) 하나님만 영원

하고, 작정들은 하나님이 아니므로 영원하지 않다. 나의 대답은 이러

하다. (a) 작정들은 하나님이다. 작정들이 어떻게 하나님인지는 앞 단원

에서 이미 증명했다. (b) 우리 대적들도 하나님의 어떤 작정이 영원 전

부터 존재하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어떤 작정은

하나님 자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작정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왜 모

든 작정이 하나님이 아닌가? (c) 에베소서 3장 11절에서 사도는 작정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렇더라도 작정이 영원하다고 말 한다. “그[하나님]가 만드신 영원한 계획에 따라”( ‘카타 프로테신 톤 아이오논 헨 에포이에센’; 개역개정,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대로” ). 그러므로 (d) 사도에게는 “그가 만드신 것”이 “그가 생각하신 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 는다. (2) 하나님의 작정은 자유로우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a) 우리 대적들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어떤 작

정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므로 영원성은 자유에 모순되는 것이 아닌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모든 작정이 자유롭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b) 그러므로 작정은 하나님 본성의 필연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만족에서 비롯하므로 자유롭고, 이는 작정이 영원 전부터 존재

한다는 것에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c) 따라서 작정은 작정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대상을 향해 결정된 성향과 관련해서 자유롭다. (3) 우

연적이거나 임의적인 효과가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

님의 작정이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효과다. 이런 모든 효과가 그 원인을

뒤따르기 때문이다.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a) 무언가 작정된 것에 대

해 말씀이 말하는 경우, 작정은 그 원인에 뒤따르는 것이므로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말씀이 작정하는 행위에 대해 말하는 경우라면, 작정은 반

드시 작정된 것보다 나중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작정하는 행위와 공

존한다. (b) 광선이 태양과 공존하므로 시간 순서로는 태양보다 나중에

존재하지 않고 본성 순서로만 태양보다 나중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

지로, 작정도 본성의 순서로만 작정하는 행위보다 나중에 존재할 뿐 시

간의 순서로는 뒤처지지 않는다. (4) 어떤 작정이 다른 작정보다 나중

에 존재하기에 모든 작정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영원에 선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a) 작정된 것에 주의

를 기울이면 작정 간에는 선후 관계가 존재하지만, 작정하는 행위에 주

의를 기울이면 작정 간에는 선후 관계가 없는데, 하나님이 단일하고 지

극히 단순한 행위로 모든 것을 작정했기 때문이다. (b) 우리가 작정을

인식하는 방식에서만 작정 간에 선후 관계가 존재할 뿐이며 작정 자체

에는 선후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c) 본성의 순서에서만 작정 간에

선후 관계가 존재할 뿐이며 시간의 순서에서는 작정 간에 선후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5) 하나님의 어떤 작정은 시간 속에서 생겨나므로

모든 작정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어떤 작정이

시간 속에서 생겨난다는 선행 전제는 예레미야 18장 11절과 31장

28절, 신명기 28장 63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나의 대답은

이 본문들이 작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과 위협에 대해 말하

고 있으며, 약속과 위협은 작정과는 천지 차이라는 것이다.

3. 하나님 작정 중에 조건부 작정이 존재하는가?

견해 차이

XXX. 세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작정 중에 조건부 작정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자, 펠라기우스주의화된 자, 소키누스주의

자, 아르미니우스주의자, 교황주의자, 루터파 등 개혁교회 외부의 많은

이들은 인간의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선택,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각각

구원하기로 작정했다는 생각을 더 쉽게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조건부

작정, 즉 선행적 작정과 후속적 작정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로써 모든

사람이 각자 믿고 회개하고자 소원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이들을 구원 하기로 정했다는 것이다. 개혁파는 “작정”을 작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는 예컨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 이전의 믿음과 회개를 통해 구원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처럼 하나님이 어떤 일이 이전의 조건을 근거로

이루어질 것을 영원 전부터 결의했다는 점에서 조건부 작정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작정”을 하나님이 작정하는 행위로

이해하는 경우는 이것이 어떤 조건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개혁파가 제시하는 근거

개혁파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작정이

하나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뜻의 결정대로”( 엡 1:11 ). 하지만 우

리는 위의 2권 15장 XXVII-XXIX에서 하나님 안에는 그런 조건부 의

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증명했다. (2) 하나님의 작정은

위의 XXVIII에 따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이 어떤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작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3) 절

대적으로 최초며 독립적인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모순 없이 다른 존재

에 의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작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기 때문

이다. (4) 앞 단원에서 증명한 대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작정은 시간

속에서 발생할 조건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이 조건부 작정은

그 조건으로 말미암아 시간 속에서 그리고 말하자면 무대 안에서 만들

어질 것이기 때문이다.19  ) (6)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하

는 일들을 그것들의 발생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알고 예측할 수 없을

것인데, 이런 예지는 절대적인 작정에만 의존하므로 결국 하나님 안에

무지가 생겨날 것이며 따라서 가장 완전한 분 안에서 불완전함이 생겨

날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7)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시 115:3; 사 46:10; 욥 42:2 ).

반론

또한 하나님의 작정이 피조물에 의해 제공될 조건에 따라 자주 변경

되고 중단된다는 반론도 유효하지 않다( 렘 18:7-10 ). 하나님이 선한 것을

약속하거나 악한 것으로 위협할 때마다 조건에 따라 변경되거나 중단

되는 것은 작정이 아니라 오히려 작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작정이 약속 과 천지 차이라는 점은 굳이 여기에 덧붙일 필요가 없다. 작정은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이지만 약속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

서 약속은 조건에 따라 중단되고 변경되는 반면, 작정은 조건에 따라 직

접적으로 중단되거나 변경되지 않는다.

4. 상황에 부합하는 작정이 존재하는가?

항변파와 예수회의 견해 XXXI. 네 번째 질문은 상황에 부합하는 작정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 이다. 항변파와 예수회는 회심의 문제에서 한편으로는 전적으로 작정에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돌리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

19  ) 참조, Seneca, Epistulae 22.1.

적인 인간의 선택에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사람

중에는 거듭나기 전에 다른 사람보다 회심에 더 기울어지는 본성을 가

진 사람이 있어서 시간, 장소, 동기의 상황에서 이 본성에 부합하는 방

식으로 부름을 받으면, 이 부합하는 부름에 순종하고 스스로 자유롭게

회심할 것이며, 자기의 자유로운 선택의 힘으로 스스로 결정하여 믿음

과 회개로 나아갈 것이라고 진술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이 본성에 부합

하는 방식으로 부르기로 작정했다고 진술한다.

개혁파의 견해와 그 근거

이와 반대로, 개혁파는 모든 사람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똑같이 죽었

고 최종적으로 부름을 받았더라도 믿기에 무능하므로 상황에 부합하는

작정이라는 이 개념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여러 면에서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1) 앞서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이 죄로 죽었으며( 엡 2:1-3 ), 그 결과로 영적인 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지극히 작은 선한 생각에도

똑같이 무능하다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고전 2:14; 고후 3:5; 롬 8:7-8; 딛 3:3; 렘 13:23; 창 6:5; 8:21 등 여러 구절 ). (2) 작정이 상황과 회심에 선행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행 13:48; 롬 8:29-30 ). (3) 회심에 대한

의지의 결정이 다만 의지를 적절하게 향하게 하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고 같은 성경이 말하기 때문이다( 빌 2:12-13; 잠 21:1; 롬 15:18; 고전 15:10 ). (4)

상황에 부합하는 작정이 존재한다면, 자기의 작정과 일치하는 독립적이 고 절대적으로 최초인 하나님은 적절하고 부합하는 상황에 의존하고

종속하게 되어 하나님의 작정이 이런 상황에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5) 상황에 부합하는 작정이 존재한다면, 이 작정은 그런 부합하는 상 황과 예컨대 베드로의 자발적 회심 간의 연결 관계, 심지어는 확실하고

분리할 수 없는 연결 관계를 하나님의 작정에 선행하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작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성을 피하려다 스토

아학파보다 더 심각한 운명에 빠지게 된다. 또는 (6) 상황에 부합하는

작정은 불확실한 연결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

은 이런 연결 관계를 확실히 예측할 수 없으므로 그런 상황에 부합하는

어떤 작정을 확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확실하지 않은 것은 또한 확실히

예지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전지성은 깨진다. (7) 상황에 부합하는

작정은 회심과 믿음을 독립시켜 인간의 선택에 귀속케 하며 다른 한편

으로 하나님도 같은 인간의 선택에 의존하게 만든다.

우리 대적들이 주장하는 견해의 토대

그들이 상황에 부합하는 작정을 옹호하기 위해 내세울 근거는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을 보존하는 데 적합하다는 점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의 대답은 우리 대적들이 우리 선택의 자유가 단순한 독립적인 중립

성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잘못이며 실제로 이 자유는 이성적 만족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이 베드로가

자유롭게 또는 결정에 따라 믿고 회개하리라고 영원 전부터 작정한 한

도 내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작정은 이런 능력을 파괴하지도 않고 실

제로 해치지도 않는다.

5. 선행적이고 일반적인 작정이 존재하는가?

견해 차이 XXXII. 다섯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작정 중에 선행적인 작정과 후속

적인 작정, 일반적인 작정과 특별한 작정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다. 앞

서 말한 항변파와 예수회는 독립적으로 중립적인 선택에 대한 자기들

의 생각에 도움이 되고 또한 사람보다 인간의 상태와 더 관련이 깊은

일반적인 예정, 택함, 유기를 옹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행적이고 일반

적인 작정을 통해 예컨대 믿는 자가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확정했으

며 그리고 후속적이고 특별한 작정을 통해 베드로가 믿으려는 의지가

있으므로 구원받을 것이라고 확정했다고 생각한다.

개혁파가 제시하는 근거

개혁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선행적이고 일반적인 작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1) 모든 일반 지식은 담론적 추론과 구체적 사항으로부터의

추상을 통해 발생하며, 이런 담론적 추론은 구체적 사항에 대한 의존을

내포하거나 또한 추론에서 이전에 없던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서 무

지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2) 이전의 작정을 제한하고 수정하여 사실상

폐지하는 후속적인 별도의 구체적인 작정을 전제하는 경우는 이 일반

적인 작정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3) 모든 개별적인 것과 관련된 구

체적인 작정이 있을 때 일반적인 작정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일반적인 작정은 쓸모가 없는데, 하나의 지극히 단순한 행위로 각

각의 모든 사물을 알고 있고 참으로 그 자체로 알고 있는 하나님에게는

일반적인 개념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4) 유개념은 존재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에게 대상이 없는 작정이 존재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작정이 아니었던 것이 작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5) 이런 작정은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된다. 하나님에 게는 일반적인 것, 불확정적인 것, 다른 것, 개별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

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6) 예컨대 각각의 모든 사람을 위 한 구원을 선행적이고 일반적으로 작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완

전성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을 영원 전부터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론 항변파와 예수회는 성경 구절, 예컨대 요한복음 3장 16절의 “그를 믿

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6절의 “아들에 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리라”, 사도행전 10장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와 이런 종류의 다른 여러 구절이 하나님 안에 일반적인 작 정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나의 대답

은 이 구절들이 작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약속과 위협

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반적 용

어가 아니고서는 각각의 모든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사람들에게 약속과 위협을 사용한다.

6. 하나님의 작정 중에 가변적인 작정이 존재하는가?

XXXIII. 여섯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작정 중에 가변적인 작정이 존재

하는가 하는 것이다. 소키누스주의자,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예수회, 루

터파, 기타 펠라기우스주의화된 자들은 시간에 따라 똑같이 변할 수 있

는 자유로운 선택과 그 선택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작정을 옹호하기 위

해, 또한 조건부의 보편적 선택이 그 조건이 성취되지 않아 유기로 바 뀐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가변적인 작정이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개혁파가 제시하는 근거

개혁파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모든 작정이 불변이라고 주장

한다. (1) XXVIII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하나님 자신

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이 불변이라면 하나님의 작정도 불

변이다. (2) XXIX에 따르면,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영원한데 영원에는

변화의 순환이 없기 때문이다. (3) 가변적인 작정이 존재한다면, 하나님

은 자신보다 앞서는 다른 대상에 의해 변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절대적

으로 최초인 존재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4) 가변적인 작정이 존

재한다면, 하나님은 더 나은 것으로 변하거나 더 나쁜 것으로 변하거나

똑같이 선한 것으로 변할 것이다. 하나님이 더 나은 것으로 변할 수 없

는 것은 이런 것이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 더 나쁜 것으로 변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부

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똑같이 선한 것도 마찬가지로 존재하

지 않는다. (5) 성경은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완전히 불변할 뿐 아

니라( 말 3:6; 약 1:17 ),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작정도 불변한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사 46:10; 시 33:12; 히 6:17 등 여러 곳 ).

반론의 근거

또한 항변파와 예수회는 약속과 위협이 조건부라고만 주장하는 성경

구절 외에는 반대 주장의 근거로 제기할 것이 없다. 하지만 약속과 위협

은 작정과 완전히 천지 차이며 조건부라고 하더라도 본래적인 의미에

서 볼 때 약속과 위협이 변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논쟁의 여

지가 남아 있더라도 주가 원하시면 예정과 택함과 유기를 다루는 아래

의 해당 부분20  ) 에서 해결될 것이다.

실천 부분

1.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주 되심과 주권의 위엄을 칭송한다.

XXXIV.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된 더 일반적인 실천적 통찰은 특히 예

정, 택함, 유기라는 특별한 작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21  ) 한편 이 주

제에 속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작정이 완전함에 비추어 하나님의 주

되심과 주권의 위엄과 완전성을 헤아리는 것인데, 이를 근거로 하나님

의 경영은 기묘하고 광대하다고 말한다( 사 28:29; 렘 32:19 ). 개별적으로 설

명하면 다음과 같다. (1) 범위. 하나님의 작정은 각각의 모든 미래 일에

도 미친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자기 뜻의 결정대로 행하므로( 엡 1:11; 시 115:3; 사 46:10 ), 하나님이 이전의 작정으로 명령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

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애 3:37 ). (2) 독립성. 이 세상의 모든 지배와 통치

는 하나님이 작정으로 미리 결정한 선고 외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

는다( 롬 11:34-36 ). (3) 권세와 전능성. 하나님의 결정은 권세가 있고 전

능함 가운데 서게 되며, 하나님은 자기의 모든 뜻을 이루므로( 사 46:10 )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과 대상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다.

20  ) 1.3.2 XXIV; 1.3.3 XV; 1.3.4 XI.

21  ) 1.3.2 XXVIII; 1.3.3 XXII; 1.3.4 XVIII.

(4) 지혜 ( 롬 11:33-34 ). 하나님의 작정은 특히 규례와 교훈에 나타나며,

이런 이유로 지혜자에게는 책략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 렘

18:18 ), 위격적인 지혜는 계락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잠 8:14 ). (5)

항상성과 불변성. 하나님의 결정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통치의 견

고한 토대로 서 있기 때문이다( 딤후 2:19 ). (6) 자유. 이로써 하나님은 어

떤 필연성 없이 오직 자기 뜻의 결정대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베풀고

자기의 뜻을 행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위엄을 칭송하고, 이 목적을 위해 (1)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시 93:1-2, 100:3 ), (2) 하나님의 주권을 영화롭게 하고 찬양하고( 시 99:1-5 ), (3) 하나님에 게 굽혀 복종하며( 시 95:6 ) 하나님의 결정을 섬기는( 행 13:36; 시 100:2 ) 등

을 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작정은 우리에게 그에 어긋나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 한다.

XXXV. 둘째,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작정을 남용하는 모든 행위를 주

의 깊게 경계하는 것도 이 주제에 속한다. (1) 하나님의 은밀한 작정을

경솔하게 조사하는 것( 신 29:29; 행 1:7 ). (2) 하나님의 작정을 무시하고 멸

시하며( 사 5:19; 벧후 3:4 ) 하나님의 작정에 저항하는 것( 눅 7:30 ). (3) 지극

히 지혜롭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우리 이성의 작은 척도에

따라 설명할 것을 촉구하고 그 근거를 요구하는 것( 욥 38:2; 롬 9:20-21 ).

(4) 작정의 보편성, 유효성, 불변성으로 말미암아, 즉 마치 하나님이 비

이성적인 작정으로 수단 없이 목적만을 의도한 것처럼 나태함에 빠져

수단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는 것. (5) 같은 작정의 항상성과 불변성

으로 말미암아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에 대해 선언한 하나님의 비

밀스러운 결정이 우리에게 분명하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모사인 것처럼

역경 속에서 절망하는 것( 롬 11:34 ).

100 이론과 실천 신학 3

3. 하나님의 작정은 우리에게 그 용도를 보여 준다.

XXXVI. 셋째, 이 주제에 속하는 것은 방금 말한 것과 반대로 하나님

의 작정을 묵상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을 위해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이다. 즉 (1) 하나님의 작정으로 우리가 겨같이 멸망하는 심판의

날( 습 2:2 ) 이 이르고 하나님의 작정으로 우리에게 갑자기 멸망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심하며 죄에서 피하는 것( 렘 18:7; 눅 19:42-43 ).

(2) 우리에게 닥치거나 닥칠 수 있는 모든 역경을 인내하고 마음의 평

안을 얻는 것.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이 영원히 불변하여 하나님의 손 과 결정이 일어나도록 작정한 것 외에는 어떤 강력한 피조물에게서도

우리에게 어떤 일도 닥칠 수 없으며( 행 4:27-28; 2:23 ), 같은 작정의 지혜

와 우리를 향한 선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떤 뜻도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

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롬 8:28 ). (3) 우리 구원의 문제를 확신하고 평안

을 얻는 것. 그 이유는 우리의 구속, 칭의, 양자 됨, 성화, 영광이 영원하 고 지극히 지혜로우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작정, 즉 “주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신다”라는 이런 인침이 있는 견고한 기초 위에 있기 때 문이다( 딤후 2:19; 롬 8:29-30 ).

4. 우리는 특히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서 하나님의 모범에 비추어 지혜로 운 결정을 따라 행해야 한다.

XXXVII. 넷째, 끝으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하나님을 본받아야 한다. (1) 경솔하거나 충동적으로 하지 않고 결정에 따라 작

정을 근거로 모든 것을 역사하고, 작정 안에서 자기 영광을 목표로 두 고, 지혜로운 결정에 따라 모든 것을 저 목표로 향하게 하며, 확고한 의

도로 구상한 바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 이 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 이다. 끝으로 (3) 우리의 주된 완전성이 하나님에 대한 이런 모방과 닮

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 특히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구원에 몰두하는 일에서 충동에 따르거나 성급하여 짐승

1장 하나님의 행동과 작정

같거나 ( 시 32:9 ) 본성으로 하지 말고 ( 유 10절 ) 작정과 지혜로운 결정 ( 엡

5:15 ) 으로 행하여 우리의 예배가 합당하도록 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롬 12:1 ). 그리고 이 작정에서 우리는 의로운 목표, 즉 하나님의 영

광, 우리 자신의 구원, 이웃의 유익을 우리 앞에 두어야 하고, 신중한 숙

고를 통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찾아야 하며,

끝으로 수단을 찾은 후에는 지속적이고 흔들림 없는 결단으로 그 수단

을 확장하여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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