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삼위일체 교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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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by D. Glenn Butner Jr.

Originally published in English under the title Trinitarian Dogmatics by Baker Academic, A division of Baker Publishing Group

P.O. Box 6287, Grand Rapids, MI 49516, U. 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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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d and translated by the permission of Baker Publishing Group through rMaeng2, Seoul, Republic of Korea.

This Korean edition ⓒ 2025 by The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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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의학

발행일 2025년 3월 20일

지은이 글렌 버트너 주니어

옮긴이 임원주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5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 332-7752 Fax. 02 )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94295-52-5 (93230 )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감사의 글 10

서론 12

삼위일체 하나님을 안다는 것 16

이 책의 구조 26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30

1장 동일본질 35

동일본질의 성경적 뿌리 40

하늘의 중재자들과 기독론 43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것과 성령 46

니케아와 동일본질 교리 52

동일본질에 대한 세 가지 역사적 설명 57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 57

토마스 아퀴나스 65

그리스도인-무슬림의 대화 75

동일본질의 교리적 의미 80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82

2장 발출과 위격적 속성 85

영원한 출생에 대한 최근의 도전들 88

기독교 전통에서의 영원한 출생 92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95

토마스 아퀴나스 99

기타 신학자들 103

영원한 출생과 영원한 발출의 교리적 의미 106

신적 발출을 위한 해석학적 기초 110

하나님의 발출을 옹호하기 위한 현재의 해석학적 전략 110

유비에 의한 해석학적 정당성 114

위격의 속성 121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123

3장 단순성 125

여러 형태의 단순성과 신적 속성 127

단순성과 신적 속성의 개념적 구별 128

단순성, 유비, 속성에 대한 가상적 구별 130

단순성과 형식적 구별 132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 단순성 및 창조되지 않은 신적 동력들 134

신적 단순성이 삼위일체 교리에서 갖는 교리적 기능 136

하나님의 단순성을 옹호하는 성경적 사례 141

신성의 위계가 없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142

신적 단일성을 제거하지 않는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147

신적 단순성에 대한 다른 성경적 옹호들 154

삼위일체와 단순성의 논리적 문제 158

결론 161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162

4장 위격과 관계 165

필리오퀘 논쟁: 발출, 관계, 위격 166

신적 위격성을 정의하기 171

신적 파송 및 아들과 성령의 신성 256

경륜적 및 내재적 삼위일체 261

신적 파송에 대한 교리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해 266

파송과 하나님의 경륜 271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273

7장 불가분의 사역 275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단일한 능력 278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불가분의 사역 287

불가분 사역과 위격적 구별 298

불가분의 사역 속에 보존되는 위격적 구별성 298

신 의식에 대한 추측 301

전유 교리와 구별된 위격적 행위 303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309

8장 하나님과의 교제 311

친교와 교제 313

교제의 세 가지 모델 317

등위적 모델 318

선형적 모델 327

통합적 모델 334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341

┃용어 정리 343

┃참고 문헌 361

합리성 기준 173

부동성 기준 177

기독론적 양립성 기준 181

관계성 기준 191

단일성 기준 198

고유성 기준 200

신적 위격에 대한 정의 204

필리오퀘, 위격, 관계 205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209

5장 페리코레시스 211

페리코레시스의 개념 212

페리코레시스와 상호 교차 침투적인 움직임 213

페리코레시스와 상호 내주 217

페리코레시스와 사랑, 의식, 의지의 단일성 219

현대 신학에서의 페리코레시스 221

페리코레시스의 교리적 기능 229

페리코레시스와 구원 230

공유의 기간과 변화 234

공유의 범위 235

공유를 위한 존재론적 기초 236

페리코레시스와 연합에 있어서의 좌우대칭 237

교회론적 및 종말론적 결어 238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240

6장 파송 교리 243

성경과 하나님의 파송 246

선재 247

신현으로서의 파송 253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 책을 어떻게 시작하는가? 삼위일체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영원토록 하나이며 유일무이하며 비가시적인, 영원

토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삼위일체적 하나님은 창조하고 구속하고 장차 피조물을 새롭

게 하실 분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이다( 골 1:16; 히 2:10 ). 그러므로 삼위일체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만물의 배후에

만물의 원천으로 놓여 있는 저 궁극적 실체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며, 그 강림으로 창조가 성취되는, 그래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저 궁

극적 실체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다( 고전 13:12; 15:28 ). 삼위일체를 이

해하려면 무한하신 분을 알아야 하는데, 이런 종류의 지식은 오직 하

나님께만 고유한 것이다. 따라서 칼 바르트가 유명하게 주장했듯이, 삼위일체를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인간을 자신의 자기 계시

의 대상으로 삼으심에 달려 있으며, 이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1)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의

1) Barth, ChurchDogmatics, II/1, 63–178.

좀 더 오래된 표현을 사용해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하

나님이 자신에 대해 갖는 “무한하고 원형적인” 지식의 “형상이며 모 형”이다.2) 이는 우리가 찾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진전될 수 없는 담

대한 시도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 그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 하나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하나님이 은혜롭게 허용

하고 싶어 하시는 만큼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런 교리 를 공식화하는 것은 교회의 복음 전도적 사역을 성취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사용해, 우리가 선포하는 자비와 은혜를 베푸

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자기를 내주심이 갖

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올바른 예

배를 확보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삼위일체 교리를 추구해야 할 시기상

의 근거들도 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는 성경적이지 않다

고 주장한다.3) 삼위일체 교리의 전통적인 공식들이 그리스 철학 때문 에 부패했다거나, 철학적 일관성이 결여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4)

2)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1.2.6(『변증신학강요 1』, 부흥과개혁 사 역간, 2017).

3) 예로, 린더 케크(Leander Keck)는 요한복음, 히브리서 및 바울서신들의 여러 측면 이, 삼위일체 신학이 결합하기 시작한 니케아의 관점보다는 아리우스의 관점에 더 가깝다고 본다(Why Christ Matters, 149-155). 영원한 출생, 신적 사역의 불가분 성, 신적 단순성을 포함한 삼위일체 교리의 여러 측면에 대해 해석학적 도전도 많 았다.

4) 이 논증을 전개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돌프 폰 하르낙이었다. 더 최근의 신학자들

이 신적 단순성과 불가분의 사역들과 같은 다양한 삼위일체적 논제들에 대해, 그리 고 신적 위격들에 대한 고전적 정의들에 대해 유사한 도전을 제기한다. 하지만 하르 낙은 기독교 역사를 초기 단계와 후기 단계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초기 단계는 좀 더 유대교적이었고, 후기 단계는 철학, 특히 플라톤주의를 강조하는 특징 이 있는 헬레니즘적 단계였다. 하르낙은 당시에는 이런 전환이 문화적 의미를 지 녔다고 인정하는 반면에, 현대의 맥락에서는 이런 개념들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고

삼위일체를 옹호하는 사람 중에서조차도, 앞으로 몇몇 장에서 살펴

보겠지만, ‘동일본질’과 같은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용어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곧 ‘위격’ 사이의 동일성을 서술하는 핵심 용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무엇인지를 세 위격의 독특성이라는 점에서 묘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용어들의 의미를 바꾸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변경은 삼

위일체 사상의 발전에서 핵심적인 역사적 자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의 결핍에서 야기되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삼

위일체 교리의 해석학적 기초와,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교의적 설명에

도 근본이 되는 개념들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분석을 다루겠다.

역사 신학과 성경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음에도(아마도 부분적으로

는 이런 강조 때문에), 이 저작은 엄밀히 말해 역사적 또는 해석학적

작업이 아니다. 이것은 삼위일체 교의학 작품이다. 제목에서 ‘교의학’

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에밀 브룬

너에 따르면, 교의학은 신학자들이 이단들에 맞서 벌인 변증적 투쟁, 기독교 입문자들과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적합한 장르를 개발하는 노

력, 성경에 대한 체계적 탐구, 이렇게 ‘삼중적 뿌리’에서 출현한다.5) 교

의신학은, 어떤 사람들은 정통적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단

적이라고 생각하고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불일치의 정도가 바뀔 여지

가 있다고 생각하는 다양한 성경 해석의 역사적 발전에 주의를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성경 주석을 뛰어넘는다. 하지만 이

교리적 설명이 변증학적 방식으로 다루게 될 현대 신학적 입장들이 여

전히 남아 있다. 이 작업의 폭넓은 범위를 고려할 때 종종 간략하게 다

루므로 교의신학은 역사신학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 신학은 모든 교

의신학과 마찬가지로, 교육적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 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Harnack, WhatisChristianity?, 200-209).

5) Brunner, Dogmatics, 1:93–96.

삼위일체 교의학

학은 비록 전문적인 신학자들에게도 이바지할 것을 소망하고 기대하

지만, 신학교와 다른 대학원 수준의 수업을 목표로 한 것이다. 달리 말

하면, 이 책은 목회 사역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

이 이해해야 하는 근본적인 교의 또는 교리들을 전달하려 한다. 신학

의 추상적인, 또는 구상적인, 또는 응용적인 측면들을 교의학에서는

반드시 무시해야 한다. 기본 원리에 대한 교육이 신학자가 그런 믿음

으로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6) 삼위일체

에 대한 이 교리적 설명의 변증적 차원과 교육적 차원은 결코 우리를

교의신학의 성경적 차원들에서 벗어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의신학은 신학적 해석들과 함께 역사적·문법적 해석, 즉 단어 연구

와 서사 분석, 정경적 독법, 본문을 수용한 역사를 고찰한다. 교의신학

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주경신학 또는 성경신학 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성경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경신학

또는 성경신학은 성경 연구 과목의 교육적·기술적 필요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개별적인 책 또는 주제에 대한 분석을 선호한다. 삼위일체

적 교의학 서적을 저술함에서 필자가 염두에 두는 저술 방식은, 성경 에 의거해 규범화된, 그리고 현재까지 수 세기에 걸쳐 진행된 변증학

적 토론들을 통해 형성된, 삼위일체에 대한 체계화된 설명을 서술하는 것이다. 내 목적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교훈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 문이다. 이런 임무가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6)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예배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최

선의 능력대로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기 위한 개념적 구조 틀이므로, 나는 삼위일체 교리는 다른 목적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의도된 교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용 되는 대상이 아니다. 즐겨야 할 대상이다. 여전히 이 논점은 구상적인 목적들을 위 해 사용될 수 있고 사용되는 다른 교리들을 대변한다(Augustine, On Christian Teaching, 1.4).

삼위일체 하나님을 안다는 것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말해야 한다고 필자는 담

대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그래서

어떤 누구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딤전 6:16 ). 이사야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고 선 스랍들이 자기 눈을

가려야 했다. 이사야는 불결하고 죄악 된 사람인 자신이 완전한 하나

님을 보았으므로 망하게 되었다고 부르짖는다( 사 6:1-5 ). 그러나 하나

님은 속죄할 방법을 베풀어 주시고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언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스랍 가운데 하나가 이글거리는 숯을 제단에서 집어 이사

야에게로 가져와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하게 했다( 6:6-7 ). 사람으로 하

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이 속죄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

리스도만이 아버지를 계시하셨고( 마 11:27; 눅 10:22; 요 1:18 ),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지성소에 도달하게 만든다( 히 10:19 ). 이

사야의 환상에 있는, 숯을 가져오는 스랍이 수행하는 역할을 성령이

더욱 완벽하게 성취한다. 그 역할은 우리의 불결을 씻어 줌으로써, 우

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 주기 위해 속죄의 혜택들을 신자

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고전 6:11 ). 현대의 많은 신학자, 특히 칼 바르트

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이 모형론적 독법보다는 변증법적 신학에 의

존함으로써 올바르게 주장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이 그리

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폴 몰나르는 삼위일체는 믿음을 통해 알려지지만 하나님

은 아들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런 지식과 믿음을 가능하게 하신다고

주장한다.7) “만일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 자신의 바로

7) Molnar, “Classical Trinity,” 77.

그 존재와 행위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 근거를 두지 않는다

면, 사실상 그 지식은 우리의 자기 경험에 근거를 둔 우리 자신의 종교

적 또는 비종교적 추측에 다를 바 없는 것이다.”8) 삼위일체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삼중적인 인간 경험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런 이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보다는 인간의 심리학적 지식을 더 많이 갖 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9)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생명을 “인간 측면

에서” 정의하는 시도는 하나님을 인간 이성의 한계, 즉 하나님이 초월

하시는 한계 안에 무리하게 가둬 놓는다.10)

20세기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관심을 되살렸다고 종종 인정받기

도 하는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인간적인 노력의 한계를 잘

알았다. 일찍이 로마서 주석에서 이 점을 매우 분명히 했다. 로마서 주

석에서, 사도행전 17장 23절을 의지해, 하나님을 ‘알려지지 않은 하나

님’( the divine incognito ), 즉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라고 언급한다. 사색적 추리를 통해 발견되는 신은 우상숭배적이

며 전혀 신이 아닌, 즉 거짓되며 인간의 개념이며 투사다.11) 바르트의

지적과, 이와 유사한 몰나르의 지적은 타당하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서 확인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제외하면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계시다. 성령의 역사를 제외하면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르트는 이 심오한 통찰을 받아들 인다. 그리고 이 통찰을 활용해, 하나님의 자기 계시 행위에서 출현하 는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는 “하나님

8) Molnar, DivineFreedomandtheDoctrineoftheImmanentTrinity, 15.

9) Molnar, Divine Freedom and the Doctrine of the Immanent Trinity, 136–138.

10) Molnar, “Classical Trinity,” 74. 이 문장은 몰나르가 신성의 발출이 형언할 수 없 는 것임을 논하는 문맥에서 나온 것이다.

11) Barth, EpistletotheRomans, 35–48.

이 자신을 주( 主 ) 로 계시한다”라는 복음 선포의 구조에서 분명하게 드

러난다. 이것은 삼위일체가 계시 행위자, 계시 그 자체, 그 계시의 계시

됨을 포함하는 이 신적 자기 계시의 본질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과

같다.12)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 아버지 ), 그 하나

님이 계시하시는 계시( 아들 ), 하나님의 자기 계시 행위를 “하나님과 사

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효과적인 만남”으로 만들어 주는 계시됨( 성

령 ) 을 필요로 한다.13) 하지만 자기 계시는 오직 하나다. 분명, 바르트의

방식은 삼위일체 교리를 제시하는 가장 통찰력 있는 방법 가운데 하

나다.

비록 나는 바르트와 몰나르가 주장하는 넓은 의미의 요점, 즉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자기 계시를 통해 우리를 그분 자신의 지식으로 이끌

어 주지 않으시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나는

그리스도 사건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삼중 형태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구성하는 바르트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바르트의 방법이 그의 신념에 충실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종종 성경엄수주의라고 비난을 받을 정

도로까지 성경신학을 전개하려고 뚜렷하게 추구한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위한 기초로서, 계시의 삼중적 본질에 대한 바르트의 강조는 약

간 임의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14) 모리스 와일즈가 언젠가 “이 논증

전체는 [명제적 계시]에 기초해 이제 새로운 기초를 찾고 있는 교리를

뒷받침하려는 후대의 합리화처럼 의심스럽게 들린다”라고 비꼰 것처

럼 말이다.15) 와일즈는 명제적 계시라는 개념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

12) Barth, ChurchDogmatics I/1, 351.

13) Barth, ChurchDogmatics I/1, 381.

14) Watson, “The Bible,” 59. 왓슨은 보수주의적 성경엄수주의라고 하는 이 혐의는 바르트 구상의 주된 윤곽을 놓치는 것이라고 믿는다.

15) Wiles, “Some Reflections,” 105.

러므로 바르트의 구상이 설득력이 없다고 보았다. 내 생각에는 역사적

으로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결국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데 있

어 자신만의 접근법을 취하도록 촉구했던 것처럼, 성경 자체의 말씀이

왜 삼위일체로 이어지는지 고려하며 정면으로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

이 더 낫다. 여기서 완전한 신학적 방법론을 찾는 이들은 아마도 실망 할 것이다. 결국 이것은 서론에 불과하다. 이 서론으로 비록 모든 독자

를 설득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내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어 느 정도의 감각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오직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은혜로운 선물을 통해서만 하나

님을 알 수 있다는 바르트와 몰나르의 확신을 공유한다. 그러나 하나

님은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자신을 알게 하셨다고 나는 확신한다. 기

독교 신앙은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궁극적 계시라는 신념에 기초할

지라도 그리스도의 생명, 사역, 가르침들은 구약 성경 안에 기록된 이

스라엘 역사라는 뼈대 안에서만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스라엘의 신성한 본문을 의지하셨고, 아들의 성육

신한 생애에 대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이른 기록들은 그리스도

를 이 뼈대 안에서, 때로는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

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마 1:22 ) 와 같은 분명한 인용 공식을 통해, 때로는 마태가 예수를 새로운 모세인 것처럼 묘사할 때처럼 덜 직접적

인 언급을 통해 해석한다. 이 사실은 내가 두 가지 원칙을 붙들도록 나

를 자극한다. 첫째, 내가 다른 곳에서 영감의 원칙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이 성경 본문들을 단지 인간적일 뿐인 것을 초월하는 기록물로 간주할 것을 요구한다.16) 이 본문들이 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참으로

16) Butner, “Probing the Exegetical Foundations of Consubstantiality.”

인간적인 지식이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가지고 계신 원형적 지식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것이라면,17)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들이 영감

을 통해 하나님의 지식에 참여하는 것임을 하나의 신앙조항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18) 둘째, 예수가 이 오래된 본문들의 맥락 안에서 해석되

어야 한다는 사실은 정경의 원칙을 촉구한다. 다시 말해, 만약 이 책들

이 예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것들은 신학적 분석에 포함되어

야 하고 따라서 정경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반면 그리스도를 역사적

맥락 안에서 해석하는 데 동등하게 중요하지 않은 다른 본문들은 동등

한 권위를 갖지 못한다. 오직 정경만이 신학에서 완전히 규범적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대한 교의적 설명은 성경을 경전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즉, 인간 지식에 적합한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하

나님의 지식을 독특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특정 정경 책들

이다. 인간의 지식은 성경 정경처럼 형태가 다양하므로, 성경에서 삼

위일체를 도출하는 다양한 접근법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와일스의 유보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한 명

확한 명제적 주장을 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교의적 설명은 성경의 다

양한 명제를 체계화해 우리가 각각을 영감 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

게 해야 한다. 이런 체계화 작업은 단일 구절이나 단락에 대한 광범위

한 해석학적 분석의 형태를 취하거나, 광범위한 성경적 언어 유형을

조사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명제들은 우리 연구에 적

절한, 성경의 유일한 측면이 아니다. 인간의 지식 또한 다른 모든 것

17) 이 지식이 원형적 지식이다. 이 지식이 인간의 신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사적으로 참여하는 완전한 원본이기 때문이다.

18) 나는, 성경의 인적 저작권을 일종의 성화로 간주해야 한다는 존 웹스터의 말을 높 이 평가한다. “가장 간결한 형태로 말하면, 성화는 성령 하나님이 과정들을 창조적 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행위이자, 그 과정들을 창조 역사 안에서 계시의 담화에 이 바지하도록 사용하시는 행위다”(HolyScripture, 26).

삼위일체 교의학

중에서도 단어, 서사, 실천 및 경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책

의 다양한 지점에서 나는 단어 연구를 활용할 것이며, 성경의 서사적

구성요소와 함께 정경 전체의 가장 중요한 서사를 검토할 것이며, 역

사의 다양한 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전개한 다양한 성경 해석 방식

을 고찰하겠다. 삼위일체 교리의 모든 측면을 통합할 수 있을 단일한

접근방식은 없다. 이 책에서는 성경을 사용하는 데 있어 삼위일체 교

리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다양화한, 때로는 탄력적인 방법들이 분

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접근방식은 성경은 비록 신학적

인 임무에서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영감 된 책이며 주권적 권위를 가진

책이라는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전통 또한 적어도 적절하게 이해한다면 삼위일체를 아는 지식을 추 구하는 이 작업에서 역할을 한다. 일례로 말하면, 전통을 과거의 세대

들에서 계승된 메마르고 오래되고 낡은 것이라고, 즉 현대의 교회생활

과 정당한 사유에 대해 제한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평범한 수준에

서 취급하는 것을 종종 보아 왔다. 이런 시각은 전통을 비록 성경과 똑

같은 정도로까지는 아니지만, 전통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온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의 영감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삼위일체적 교의

학을 주제로 한 저술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러나 영감의 한 가지 모형

에 대한 간략한 고찰은 내 관점을 밝혀줄 수 있다. 저명한 미국 신학자 알렉산더 하지는 성경의 영감을 다음 네 단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과정

이라고 기술했다. 하나님은 섭리를 통해 성경 저자들을 적절한 역사적 순간에 데려오셨다. 성령이 주신 후속적인 영적 조명은 진정한 종교적 통찰을 확실하게 해 주었고, 그 그리스도인이 계시를 수용하도록 열어 주었고, 그런 뒤에 영감을 통해 정확하게 기록되었다.19) 삼위일체에 대

19) A. A. Hodge, PopularLecturesonTheologicalThemes, 85–87.

한 우리 지식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를 두려 할 때, 우리는 전통

이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이유로 전통을 폐기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20) 알렉산더

하지의 이 네 단계의 영감 과정은 이것이 왜 실수인지를 보여 준다. 하

지가 대표하는 구 프린스턴 신학에서는, 조명을 “성령을 받아들인 모

든 그리스도인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예로, 요 16:13-15를

보라 ). 21) 하지는 “성령의 조명은 신앙적 시각의 눈을 열어 주고 명료하

게 해 준다”라고 썼다.22)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

경을 매개로 한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감각을 가지므로 성경 해석에서

서로를 인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제기

한 아직 명확하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을 사용

하는 방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전통은 성경이 무오한 방식으로는 무

오하지 않다. 전통은 성경처럼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므로 전통을 비판

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신교인들은 지혜

롭게도 전통을 주어진 해석의 진실성에 대한 시금석으로 사용해 왔다.

이성 또한 교의학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있다. 필수적으로 그러

하다.23) 성경 해석학을 다룰 때 이성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해석학과

철학의 경계를 명확하게 규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또한 철 학은 성경에서 도출된 결론을 언급할 때 명료성을 높여 주는 어휘를

많이 제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철학을 바라본

20) 분명히, 바르트는 전통에 대한 이 접근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21) C. Hodge, SystematicTheology, 1:155도 참고하라.

22) A. A. Hodge, PopularLecturesonTheologicalThemes, 86.

23) 더 성경적인 신학을 선호함으로써 이성을 스콜라주의적 방식으로 사용하기를 거 절했다고 종종 묘사되는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조차도 실제로는 전통 적인 스콜라주의적 방식을 많이 의존한다. 삼위일체를 다룰 때도 스콜라주의적 논 의방식을 많이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Helmer, The Trinity and Martin Luther, 53–59에 있는 논의를 살펴보라.

삼위일체 교의학

것처럼, 철학을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자원”으로 보아야 한다.24) 이

개념은 성경 본문에 이질적인 뼈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성경에 암시적으로만 표현되어 있던 것을 명시적으로 표현하

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바르트의

우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과 실체를 갖춘 세

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과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경험을 초월하신다. 이 진리는 우리의 지성적 능력에 대한 우리 의 자신감을 상당히 제어할 것이다. 하나님의 타자성이 낳는 충분한

파급효과를 탐색하는, 또는 하나님의 타자성에서 발생하는 철학적 난

점들을 해소하는 시도를 여기서는 하지 않겠다. ( 이런 문제들은 교의학의 다

른 논제에 훨씬 적절하다 ). 나는 이런 제어

적절히 이바지하는 하나

의 주요 교의적 약속에 주목해야 한다. 4차 라테란 공의회 ( 1215년 ) 에서

인준된 것처럼, 유비 교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다

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조물은 자신의 창조주와 관계를 맺고 있음

을 인정한다. 더 큰 차이 중에 있는 이 유사성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인간의 단어들과 개념들을 사용하게 되지만 창조된 실체들

보다는 하나님에 대해 사용될 때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를 항상 설

명할 필요가 있다. 캐서린 손더레거가 언급한 것처럼, 4차 라테란 공의

회가 “유사성에서 비유사성으로의 움직임”을 주장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 즉 하나님 자신을 구별하는 주권적 행위에 대한 스콜라주의적 표현”이다.25) 우리는 성경에 기초를 두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

암아 이성을 사용해 지식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 지식은 이사야의 환

상에 나타난 스랍들조차도 자신들의 눈을 가리게 만든 거룩하신 하나 님을 아는 그 지식 그대로 머물러 있다. 비록 우리 언어가 유비의 원칙

24) Anselm, Proslogion §1.

25) Sonderegger, SystematicTheology, 2:xxv.

으로 제한되어 있다 해도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 지식에

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보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거룩하심에 대

한 삼중적으로 반복하는 확언, 즉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

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3. 참고. 계 4:8 ) 를 통

해서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삼위일체 신학에서 인간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확실히 우리

는 인간의 경험이라는 기초 위에 삼위일체 신학을 세우지 못한다. 그

결과물은 인간의 주관성을 묘사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 묘사가 다

가갈 수 없는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일치한다고 믿을 근거는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풍자적인 왜곡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경험에 각

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목적은 과도한 주관주의적 신학을 피 하기 위함이다. T. F. 토런스는 이 내용을 “정통주의, 그리고 모든 스

콜라주의의 유혹은……하나님 말씀의 진리들을 합리화된 목적물로 전

환시킴으로써 자기 주관성에 빠지는 것이다”라고 웅변적으로 요약

한다.26) 인간 언어의 문화적 뿌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명제적 설

명이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를 왜곡할 수 있음을 의미하며, 우리 자신

의 가정을 드러내기 쉬운 체계 뒤에 객관적 진리를 숨길 수 있다. 이것

이 바르트로 하여금 스콜라주의에 나타난 명제적 정통에 약간 회의적

이게 만들지만, 나는 계시자, 계시, 계시성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설

명이 문화적 영향에 덜 얽매여 있다고 볼 이유가 없다.27) 신학을 하게

되면 인간의 어떤 문화들과 경험에 반드시 묶이게 된다. 바르트처럼, 좋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객관성을 중심에 놓으려 애를

26) T. F. Torrance, Karl Barth, 101.

27) 이것은 비서구적 삼위일체 신학자들에게 특히 분명하다. 이들은 바르트에게서 나 타난 서구 문화를 훨씬 더 쉽게 파악한다. 다음을 보라. Kombo, Doctrine of God, 106–114, 119; Miyahira, Towards a Theology of the Concord of God, 3장.

쓴다. 내가 볼 때,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문화적 위치, 철

학적 가정, 개인적 경험이 자신과 상당히 다른 신학자들의 글을 폭넓

게 읽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현대 미국의 백인 남성 신학자의 자격으로 글을 쓴다. 세상에

대한 내 경험을 구성하는 이런 ( 그리고 다른 ) 차원들은 항상 역사와 문화

에 따라 구체화하고 경계가 구획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내 이해

를 왜곡할 수 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성령으로 말

미암아 은혜롭게 공급된 계시보다는 문화 또는 개인적 경험에 더욱 의

존된 신학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다른 문화

적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신학적 관점들을 전략적으로 참고 하겠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신학적 가정이나

주장이 달라질 수 있는 경우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통해 독

자들이 자신의 가정을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 방법이 신

학적 지식에 객관성이 결여해 있음을 암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류를 공통의 물리적·사회적·문화적 위치로 인해 필연적으로 결정

론적인 방식으로 동질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일련의 인간 집단으로 나

누려는 의도도 없다. 아다 마리아 이사시-디아즈는 여기서 “공유된 경

험”과 “공통의 경험”을 유용하게 구별한다. 공통된 경험이라는 개념

은, 어떤 인종적 또는 문화적 그룹에게 “경험은 오직 하나라고 표현하

는 것, 즉 차이를 숨기는 것처럼 보인다.”28) 실제로, 히스패닉 여성들,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 또는 가난한 사람들의 보편적이며 단일한 목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정 문화, 성별 또는 인종 그룹의 특 정 저자의 목소리는 같은 집단 내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맥락에서 성경과 전통을 이해하려 노력했을 때, 이런 범주에 속하는 구성원들에

28) Isasi-Díaz, MujeristaTheology, 67.

게 주어진 조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그들의 경험은 같

은 집단 내의 다른 사람들이 공유할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기 때문

이다. 우리가 더 구체적인 목소리를 들을수록 전 세계 교회 또는 그 교

회의 하위 집합의 관점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29) 또한 나와 다른

문화적 또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저자들의 신학적 관점을 내 목적을

위해 도구화할 수 있는 호기심으로 축소할 생각은 없다. 그런 많은 저

자를, 단지 문화적 배경장식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저술이 갖는 장점

에 근거해 인용하고 참고하겠다. 30) 그러나 내 경험에서 나타날 수 있

는 신학의 왜곡 가능성에 주목하려면 주기적으로 내 신학과 다양한 방

식으로 나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을 비교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지금까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인간의 능력과, 이 지식을 적절

하게 나타내는 증거를 피상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는 삼위일체 교리

에 대한 설명을 전개할 방법을 다루겠다.

이 책의 구조

기껏해야 서론적인 수준으로든 최고의 학술적 형태로든 삼위일체

교리를 소개하는 많은 본문은 통시적으로 진행한다. 즉, 삼위일체 교

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한 방법을 탐구한다.31) 이런 본문들은

전형적으로, 삼위일체의 성경적 기초를 서론으로 다룸으로써 시작한

후에, 니케아신경 ( 325년 ) 과 콘스탄티노플신경 ( 381년 ) 에 전개된 보편교회

의 신조로 귀결된 교부들의 논의를 탐구하고, 그다음에 이 기본적인

29) Isasi-Díaz, En la Lucha, 63.

30) 다른 때라면 내가 틀림없이 쉽게 인정하겠지만, 내 문제는 다른 저자들의 문제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내 답변에 반영될 것이다.

31) 다음을 보라. Holmes, QuestfortheTrinity; O’Collins, TripersonalGod

윤곽을, 중세 시대의 유럽, 비잔틴 제국, 종교개혁에서 있었던 소규모

논의들을 보충 서술한다. 그러고는 현대의 삼위일체 사상이 그 이전

시대의 이 범주들을 수정한 방법을 분석함으로써 결론을 맺는다. 삼위

일체 교리의 역사적 발전은 분명 중요한 이야기이며, 언급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서론적 본문을 이런 방식으로 구조화하는 것은 단점이

있다. 앞의 여러 장에서 적절한 성경적 내용을 다루면, 뒤쪽에 수록되

는 교리적 논의들은 적절한 해석학적 논의와의 연계가 끊어질 수 있다. 영원한 출생, 동일본질 또는 불가분의 사역과 같은 그런 개념들

은 성경의 면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후대 철학의 부산물이라는 인상

을 줄 수 있다.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 라는 원칙에 대한 내 신념

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식의 접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나는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토대가 점점 더 정교한 교리적 공식으로 전개되는 방식을 탐구하는 발견의 방식과, 더 기본적이고 논

리적으로 이전의 개념에서 더 복잡한 개념으로 나아가는 가르침의 방

식을 구분하고 싶다.32) 가르침의 방식은 다양한 시대의 개념을 동시에

고려하기 위해 통시적인 역사적 진행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수업용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삼위일체 교

리의 핵심 개념을 가장 명확하게 소개한다고 생각되는 진행 방식에 따라 구성했다. 각 장은 삼위일체 교리의 교리적 논제 하나를 탐구 한다. 첫 장의 논제는 동일본질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동일본질

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논리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문 제를 해결하는 것 이상의 많은 문제를 제기하는 논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발출들 ( 본문에서는 “이중적 나오심”으로도 표기했다-편집자 주 ) 과 하나님의 단순성과 같은 점층적으로 복잡한 주제로 나아가면서 명료

32) 이 구별의 기원은 중세지만 최근에 Lonergan, Triune God, 63, 67에서 발전되 었다.

화가 요구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각 위격과 독특한 방

법으로 교제를 나누는 방법을 다루는 8장에 도달할 즈음에는, 그 이전

에 다룬 모든 내용을 알고 있다고 전제하겠다.

동일본질 교리로 이 책을 시작하기로 선택하면 현대 신학의 아주 전

형적인 반론, 즉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시작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수성

을 배제하기 위한 무대를 미리 마련해 놓았다는 반론에 즉각적으로 노

출된다. 현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하는 전형적인 서

구적 접근방식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주장해 왔다. 예를 들

면, 콜린 건튼은 서구의 신적 존재에 대한 강조가 위격들을 논리적으

로 선행하는 기저의 존재 내의 관계로 축소하며, 이 존재는 더 이상 아

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 위격적 교제와 동일시되지 않는다고 주장

한다.33)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반론에 동의하지 않는데, 그중 하

나는 이것이다. 즉, 삼위일체론에서 동방과 서방이 분명하게 나뉜다는

개념은 서방이 하나님의 위격들에 대한 진정한 구별 및 교제를 잃어버

렸다는 늘상 따라붙는 비난과 함께, 단순화된 역사적 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이 개념은 9세기의 짧은 기간의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할 뿐, 그 이후에 동방과 서방의 구별은 더욱 복잡해

졌다.34) 게다가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단일성( oneness ) 을 먼저 구약 성 경에서 소개한다. 그런 뒤에 신약 성경의 기독론 및 성령론으로 내용

이 복잡해진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발전시

켰다.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시작하는 것을 문제시해 자동으로 배제해 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는 아버지와 어떤 식으로든 연합

되어 있다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으며,

33) Gunton, PromiseofTrinitarianTheology, 10, 41.

34) 나는 이 입장을 Butner, “For and against de Régnon,” 399–412에서 논증한다.

이 책 2장과 4장에서 이 주제를 좀 더 폭넓게 다루겠다.

교의학

그 깨달음은 결국 신적 동일본질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고 확신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이신 한 가지 방식

에 대한 장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동시에 나는,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는 신학자가 신적 위격들의

단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든지, 아니면 위격들의 구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든지 하는 위험에, 즉 하나라는 것 또는 셋이라는 것 가운데 어

느 한쪽을 선호해 다른 쪽을 손상하는 위험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 위험성을 잘 알고 있으므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

리우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 위험성을 완화할 전략을 택했다. 그레 고리우스는 “나는 단일성을 생각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의해 조명 을 받는다. 셋이라고 구별하는 즉시 하나이심으로 되돌아간다”라고

썼다.35) 그러므로 몇 개의 장에서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하나님의 삼

위성을 교대로 강조하겠다. 1장에서는 단일성에 대한 논리적으로 근

본적인 개념으로서의 동일본질을 탐구한다. 그다음 장에서는 신적인

발출들에 대해 다룬다. 단일성 뒤에 복수성을, 그리고 복수성 뒤에 단

일성을 놓아 상쇄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 책을 구성하는 것 외에, 각각의 장에서 하나님의 하나이심과 셋이심 사이의 관계성을 보여 주

려고 시도하겠다. 하나님의 단일성의 측면이 탐구되는 곳마다, 이 단

일성에 대한 교의적 설명은 하나님의 복수성에 대한 충실한 헌신으로

써 규범화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삼위일체가 개별적인 신적 단일체라

는 관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유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복수성을 논의하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단일성이 복수성에 대한 설명을 통제함 으로써 다신론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이런 전략을 염두에 둠으로써,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교리적 설명을

35) Gregory of Nazianzus, OrationonHolyBaptism §41.

구성하는 작업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어휘가 매우 전문적이므로

이 책 끝부분에 용어 해설을 덧붙였다. 용어가 본문에 처음 등장할 때

고딕체로 표기한다. 독자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있는 분석을

원할 수도 있으므로, 각 장을 마무리할 때 제시한 주석을 단 참고문헌

을 통해 다양한 과목과 장의 주제에 대한 심층 독서를 제안한다. 내 바

람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영원토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한

하나님에 대한 견고하고 성경적이며 정확한 교리적 설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소망은 오직 빛을 비추어 주시는 성령이라는, 아버지의 은

혜로운 선물로 말미암아, 아들을 통해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하므로,

이 선물이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심화학습을 위한 추천도서

삼위일체와 성경 관련 도서

Bates, Matthew W. The Birth of the Trinity: Jesus, God, and Spirit in New Testament and Early Christian Interpretations of the Old Testamen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이 책은 프로소폴로지컬 주해( prosopological exegesis: 인물대화식 주해 ) 를

영어권 학자들과 고등교육을 받은 평신도 청중에게 소개함으로써 성

경에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더 탄탄한 분석을 가능하게 했다.

Hill, Wesley. Paul and the Trinity:Persons,Relations,and the Pauline Letters. Grand Rapids: Eerdmans, 2015.

힐은 이 책을

존재로 여겨지는지를 탐구하는 ‘높은 기독론과 낮은 기독론에 대한 토론’이

아들과 성령 사이의 관계들을 다루는 더욱 중요한 본문들을

놓친다고 주장한다. 힐은 바울서신에서 이런 관계들을 삼위일체를 위

한 기초로서 능숙하게 탐구한다.

Pierce, Madison. Divine Discourse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The Recontextualization of Spoken Quotations of Scriptur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피어스의 기술적 분석은 히브리서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적 프로소 폴로지컬 주해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준다. 피어스는 보너스를 덤으로

주듯이, 영원한 출생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 본문인 히브리서 1장에 대 한 면밀한 해석을 포함했다.

Wainwright, Arthur W. The Trinity in the New Testament. London: SPCK, 1969.

비록 오래된 책이지만 여전히 웨인라이트의 이 개괄적 저술은 신약

성경의 삼위일체에 대한 역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소개하는 최고의

입문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웨인라이트는 신약 성경이 체계적인 신 학적 답변을 요구하는 ‘삼위일체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를 역사적으로 다룬 주요 도서

Ayres, Lewis. NicaeaandItsLegacy:AnApproachtoFourthCentury Trinitarian Theolog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니케아에 대한 에이레스의 연구는, 니케아 공의회 이전과 이후에 있 었던 삼위일체 신학의 많은 측면을 해석하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다. 나는 이 책 전체에 걸친 친( 親 ) 니케아, 반( 反 ) 니케아, 비( 非 ) 니케아 신 학이라는 에이레스의 도식에 크게 의존한다.

Muller, Richard A.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The Rise and Development of Reformed Orthodoxy,ca.1520 to ca. 1725. Vol. 4, The Triunity of Go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3.

개혁파 스콜라주의 사상을 다룬 멀러의 이 저술은 아직 번역되지 않

은 많은 신학자의 개념들을 소개하는 역사 자료집으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삼위일체 관련 현대 서구 주요 도서

Barth, Karl. Church Dogmatics.Vol.I/1,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Edited by G. W. Bromiley and T. F. Torrance. Translated by G. W. Bromiley. Edinburgh: T&T Clark, 1936.

이 책은 방법론에서는 20세기 삼위일체 신학의 풍경을 지배한 독보

적인 저술이다. 독특하게도, 삼위일체를 계시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소개했다.

Emery, Gilles. The Trinity: An Introduction to Catholic Doctrine on the Triune God. Translated by Matthew Levering.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11.

이 책의 서론은 보편교회 신조들을 신학적으로 확장해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히 강력하다. 그리고 이런 성격을 가진 많은 저술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Sonderegger, Katherine. Systematic Theology. Vol. 2, The Doctrine of the Holy Trinity: Processions and Persons. Minneapolis: Fortress, 2020.

삼위일체 교의학

최근에 출판된 책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이 책과 씨

름하지 못했다. 이 책은 삼위일체에 대해 신학적 의견일치를 이룬 많 은 논점에 도전한다. 틀림없이 많은 토론을 일으킬 것이다.

삼위일체 관련 세계 주요 도서

Bingemer, Maria Clara Lucchetti. A Face for God. Translated by Jovelino Ramos and Joan Ramos. Miami: Convivium, 2014.

이 책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정치적 및 페미니스트적 해석을 포함 해, 삼위일체에 대한 현대의 일반적인 개념들의 뉘앙스를 살려 제시 한다. 또한 독특하게도 운문을 실질적인 방식으로 통합한다.

Boff, Leonardo. Trinity and Society. Translated by Paul Burns. Maryknoll, NY: Orbis Books, 1996.

삼위일체를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다룬 이 책은 다수 세계에서 삼위

일체 교리를 다룬 가장 유명한 저술일 것이다. 보프의 방법론 및 결론

은 혁신적이며 경쟁적이다.

Kombo, James Henry Owino. The Doctrine of God in African ChristianThought:TheHolyTrinity,TheologicalHermeneutics and the African Intellectual Culture. Leiden: Brill, 2007.

콤보는 하나님은 주권적 본질이라는 개념, 주권적 주체라는 개념, 통 일성을 이룬 신성한 공동체라는 개념은 문화에 따라 형성된 것임을 예 증한다. 그다음에는, 아프리카 문화를 통해 형성된 삼위일체 표현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를 탐구한다.

동일본질

삼위일체를 가시적으로 표현한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는 아

브라함을 방문한 세 천사가 마므레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모습

을 그린 성화다( 창 18:1-15 ). 러시아 정교회 수도사이며 성화 제작자 안

드레이 루블레프( Andrei Rublev ) 가 1392년과 1427년 사이에 제작한 것

이다.1) 세 천사가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아 있는 장면이다. 창세

기 서사의 차원에서 볼 때, 이 장면은 빵과 발 씻을 물을 제공하겠다는 아브라함의 제안을 수락한 뒤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세 방문객을 묘사

한다( 3-5절 ). 하지만 신학적 차원에서 볼 때, 이 세 방문객은 삼위일체 의 세 위격을 나타낸다. 탁자의 왼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저택을 배경

으로 삼고 푸른 빛이 도는 자주색 옷을 입고 있다. 이 인물은 아버지, 즉 영원한 왕이며 신자들에게 나누어 줄 방이 많은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요 14:2 ). 아들은 가운데에 앉아 있다. 아들이 입고 있는 빨간 옷과 파란 옷은 성육신을 가리키는 전통적 상징이다. 빨간 옷은 성육신의 인성을 나타내고, 파란 옷은 하늘에 속한,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을 나

1) Strezova, HesychasmandArt, 189.

타낸다. 중앙의 이 인물 뒤에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생명나무와 십자

가의 나무를 상징한다.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성령이다. 이 인물이 입

고 있는 옷의 의미와 색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 하지만 뒤에 있

는 산은 신앙의 향상을 가리키는 중용한 상징일 것이다. 신앙의 향상

은 성령을 통해 가능해진다.3) 세 인물 자체는 시각적으로 구별되는 특

징들이 빠져 있다. 단지 자세와 옷으로만 구별된다. 이것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드러낸다.4) 이 아이콘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원 안에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그 셋이 하나로 결합해 있다는 것과, 이 셋의

날개와 후광과 손의 곡선이 앞에 놓인 성배로 수렴되는 동심원을 형성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5) 성찬의 연합은 분명하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가 그리스도가 성례전에 임재함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세 위격과 마

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할 것이다. 탁자 자체는 관찰자에게 개방

되어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찬양으로 경배함으로써 거룩한 세 위격

에 참여하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이 유명한 초상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루블레프, 그리고 루블레

프 이전의 많은 주석가와 초상 제작자들은 어째서 아브라함의 세 방문 객을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성한 세 위격으로 해석했는가? 창세기

18장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는 본문의 흥미로운 특징 몇 가지에 주목 할 것이다. 첫째,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 18:1 ) 을 세 인물

의 나타남과 동일시한다( 18:2 ). 6) 둘째, 빅터 해밀턴이 주목한 것처럼,

2) Podles, “The Trinity by Andrei Rublev,” 54.

3) Strezova, HesychasmandArt, 196.

4) Strezova, HesychasmandArt, 201.

5) Strezova, HesychasmandArt, 189. 스트레조바가 시사하는 것은 이 원들은 페리 코레시스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페리코레시스에 대해서는 5장에서 다룬다.

6) 이 구절에 대한 유대교적 해석의 역사는 흥미롭다. 세 천사를 동시에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탈굼의 옹켈로스에서부터, 이 장면은 한 분 하나님이 삼중 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믿는 필로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다. 이에 대한 논의는

삼위일체 교의학

“단수와 복수를 교대로 사용한다.”7) 때때로 대화는 마치 아브라함이

한 분 하나님께 말을 하는 것처럼 진행한다( 18:10, 13, 17-21 ). 그러다가도

마치 아브라함이 세 방문객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진행될 때도 있다

( 18:5, 9 ). 해밀턴의 주장에 따르면, 이 모호성은 창세기와 구약 성경의

다른 본문들 전체에 걸쳐 발견되는 “하나님과 천사들 사이의 더 큰 유

동성”의 일부다( 창 21:17-18; 삿 6:7-24; 13:1-25 ). 8) 현대 학자 가운데는, 하

나와 셋이 교대로 사용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이야기를, 즉 단수의 나

그네가 아브라함을 방문한 이야기 하나와 아브라함이 세 개별자를 대

접한 다른 이야기를 후대에 편집하며 조합한 증거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오직 후대의 어떤 편집자만이 이 이야기를 하

나님의 현현 증거로 인정한다.9) 현대의 다른 주석가들이 이 구절에서 확인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두 천사를 대동해 아브라함을 만났고, 아

브라함은 점진적으로만 방문객들의 정체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10) 역

사비평학적 구약 성경 연구의 원로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이 해법에

대해 회의적이다. 두 종이 초대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주인과 함께 만

찬을 나눈다면 이는 괴이한 장면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 18:8 ). 폰 라 트는 세 방문객이 이구동성으로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18:8 ) 라

Wainwright, TheTrinityintheNewTestament, 27–29를 보라.

7) Hamilton, Book of Genesis, 6에 다음과 같이, “2절에서는 사람 셋, 3절에서는 단 수, 4절에서는 2인칭 복수, 5절에서는 다시 2인칭 복수, 9절에서는 복수, 10-15절 에서는 단수, 16절에서는 복수, 17-21절에서는 단수, 22절은 복수로 시작하지만 단수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22절 두 번째 부분과 23절에서는 단수”로 되어 있다고 확인한다.

8) Hamilton, Book of Genesis, 6–7.

9) Westermann, Genesis, 135를 보라.

10) Speiser, Genesis, 131과, Wenham, Genesis 16–50, 53–54를 보라. 이런 해 석이 전형적으로 참고하는 본문은 창 19:1이다. 이 본문에서 두 천사가 아브라함 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세 번째 방문객은 틀림없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고 질문한 것에 주목하고는 “어떤 사람은 차라리 여호와가 셋 모두에

게서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11) 폰

라트는 본문의 문자적·역사적 의미에 의존하는 학자이지만 이 본문

의 세 방문객과 삼위일체를 연결하는 것은 거부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시대의 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의 인간 저자들이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고 가정하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손을 뻗으면 신앙적인

차원에서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움직임은 결국 루블레프의 초상 배후에 놓인 관념에 도달한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교리적 설명을 루블레프로 시작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루블레프는 하나님의 하나이심과 셋이심을

동시에 묘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인식하기 위한 무대를 설정 한다. 루블레프가 시각적으로 유사한 세 인물이 동심원들에 의해 조화

를 이루는 형태로 시도하는 것을, 조직신학은 이 장의 주제 곧 동일본

질과 같은 기술적인 용어들을 통해 시도한다. 독자는 그림에서 기술적

인 어휘로 전환한다고 해서 결과적으로 더 쉬운 과업이 되는 것이 아

니라는 경고를 받게 하자. 우리 상황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완전한

신비에서 부분적으로 이해가 되는 쪽으로 이동한다면 이 용어들은 쓸

모 있게 공헌한 것이 될 것이다. 내가 루블레프로 시작하기로 선택한

두 번째 이유는, 루블레프가 창세기 18장을 의존한 것은 어떤 본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예시하는 것이다. 종종 이런 해석은, 원래의 인간

저자들 또는 청중이 이해했을 것이라고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이런 해석들은 성경을 구성하는 배후에 있는 신

11) Von Rad, Genesis, 204에 따르면, 폰 라트는 창세기 18장을 19:1에 비추어 해석 하는 것을 거부한다. 폰 라트가 보기에, 이 두 이야기는 각기 다른 자료에서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폰 라트는 이 서사는 “구약 성경에서 낯설고 독특하여 이 전통의 특이성에 오직 이 전통에만 속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인정한다(205).

성한 저자의 의도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한에서는 참되고 타당한 의미들

이다. 건강한 영감 교리가 요구하는 것은, 역사문법적 의미에 반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역사문법적 의미를 뛰어넘는 영감 된 의미의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셋째이며 마지막으로, 루블레프는 천사 중재자들을 그려 넣고 예배

를 의지해 삼위일체를 묘사한다. 중재자들과 예배, 이 두 가지 모두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동일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적 차원에서, 창세기 18장은 하나님의 중재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어떤 모호성을 의존한다. 바로 그 모호성이 예수와 성령에 대한 신약 성경의 묘사에 들어 있다. 이 모호성은 초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삼위일체적 방식으로 예배하도록 이끈다. 종국에는, 이 모호성을 이해 하는 용어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루블레프의 성화는 창세기 18장의

문자적 의미를 뛰어넘어 삼위일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데까지 이

르렀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 ( 323년 ) 와 콘스탄티노플 1차 공의 회( 381년 )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철학에 호소함으

로써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에 의존해 묘사했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 어의 의미를 이 책에서는 “동일본질”이라는 같은 의미의 단어로 나타

낸다. 이 장은 예수와 성령을 가리키는 신약 성경의 묘사들이 제2성전

기 유대주의에서 하늘의 중재자들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과 얼마

나 조화로운지를 탐구하겠다. 예배에 대해 말하자면, 신약 성경은 예

배의 중심을 아들과 성령에 둠으로써,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떻게 서로를 확인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함께 예배를 받을 수 있는지

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그 당시의 다른 본문들을 뛰어넘는다. 나는 교회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동일본질 교리를 가지고 어떻게 역사 적으로 답변했는지를, 가이사랴의 바실리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 고 이슬람과 씨름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일본질 교리를 어떻게 설

명하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설명하겠다. 또한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동일본질에 대한 현대의 분석적 취급이 어떻게 문제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설명하겠다.

동일본질의 성경적 뿌리

루블레프가 창세기 18장에 의지해 삼위일체를 묘사하는 바로 그 방

법에서, 신약 성경의 저자들 가운데 다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 제2성전기 문헌에 있는 중재자들12)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

안을 과장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만,13) 신약 성경 저자들이

이런 중재자들을 전개하는 방식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해석학적 기

초를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중재자들이라는 용어

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가? 제임스 다빌라의 설명에 따르면, 중재자

들은 ( 아래에서 고찰해 보겠지만 ) 지혜와 같은 “의인화된 신적 속성들”, 에

녹이나 아담처럼 그 지위가 높아져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간 “고귀한

남녀 족장들” 및 제2성전기 문헌에서 발견되는 신비로운 메타트

론 ( Metatron ) 처럼, 하늘의 천사들 중에서도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다

고 일컬어지는 “주요한 천사들”을 포함할 수 있다. 또한 카리스마적인

선지자들을 닮은 또는 다윗왕과 같은 “이상적인 인물들”을 닮은 좀 더

현세적인 인물들도 포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재자들이 과거와 현

재 또는 미래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떤 면에서

12) 때로는 이 용어보다는 “하나님의 대행자들”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기도 한다. McGrath, OnlyTrueGod, 14에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13) 이런 모습을 Bates, Birth of the Trinity, 19–26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베이츠 는 이 접근방식의 타당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중재자 접근방식 그 자체만으로는 “긴급한 보완을 요구한다”는 것에 올바르게 주의를 기울인다(26).

교의학

하나님을 하나님 백성에게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14)

지혜라는 신적 속성을 의인화했다는 것은 제2성전기 문헌 속에 있

는 더 큰 흐름을 유용하게 예증한다. 제럴드 오콜린스가 요약하는 것

처럼, “의인화된 지혜 또는 소피아가 창조, 섭리, 구원이라는 신적 사

역에 점점 더 관련을 맺게 되고, 위엄과 능력이 더 커진다.”15) 우리는

욥기 28장에서 지혜를 처음 만난다. 욥기 28장에 따르면, 지혜는 창조

당시에 굳게 세워진다( 28:27 ). 후대의 본문인 잠언 8장과 9장에서 지혜

가 의인화되고, 청중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자신은 땅이 형태를 갖추

기 전에 생겨났고, 하나님 곁의 ‘우두머리 장인’( 8:30, 개역개정은 “창조

자” ) 으로서 창조 사역에 동참했고 여호와에게서 오는 은총을 얻게 해

준다고( 8:35 ) 주장한다. ( BC 180년경의 ) 집회서 24장과 같은 신구약 중간

시대의 문헌은 의인화된 지혜를 계속 높이고, 지혜를 편재와 같은 신

적 속성들과 연결한다.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후대의 책에 도달하게

될 무렵에, 여전히 지혜는 “전능하다, 전지하다, 편재하다”라고 언급

된다( 지혜서 8:1, 4-5 ). 이제 지혜는 창조와 연결될 뿐 아니라( 9:9 ), 하나

님의 구원 행위와도 연결된다. 이 구원 행위에는 아담을 죄악들로부터 구원하는 것( 10:1 ), 애굽에서 요셉을 섭리적으로 인도하는 것( 10:13-14 ),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강력하게 해방하는 것( 10:15-19 ) 을 포함 한다. 간단히 말하면, 지혜는 하나님의 구원을 전달해 주는 매개자일 뿐 아니라 “전능자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다( 7:25b ). 16) “확실히 이것

은 성경적 전통 안에서 저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매우 대담한 언 어다”라고 데이비드 윈스턴이 언급하는데 정말 그렇다. 피조물과 창조

14) Davila, “Of Methodology, Monotheism and Metatron,” 5–7.

15) O’Collins, TripersonalGod, 24.

16) O’Collins, TripersonalGod, 24–30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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