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_확신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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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is of Confidence: Reclaiming the Historic Faith in a Culture Consumed with Individualism and Identity

Copyright ⓒ 2012, 2024 by Carl R. Trueman

Published by Crossway, a publishing ministry of Good News Publishers Wheaton, Illinois 60187,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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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Korean edition copyright ⓒ 2025 by The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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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과개혁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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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위기

발행일 2025년 4월 20일

지은이 칼 트루먼

옮긴이 윤석인

펴낸이 김은주

펴낸곳 부흥과개혁사

편집 권대영 디자인 박슬기 기획 이승영 마케팅 권성직

인쇄소 영진문원

판권 Ⓒ부흥과개혁사 2025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서교동)

전화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http://rnrbook.com e-mail rnrbook@hanmail.net

ISBN 979-11-94295-59-4 (93230)

등록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 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감사의 글 11

서문: 옛 신조와 새 신조의 비교 12

서론 20

1장 신조와 신앙고백서에

2장 신조주의의 토대

3장 초대 교회

4장 고전적인 개신교 신앙고백서

5장 찬양으로서의 신앙고백서

6장 신조와 신앙고백서의 유용성

결론 283

부록: 신앙고백서의 개정 및 보완 288

추가 독서를 위한 자료 297

이 연구의 초판인 『신조의 필수성』( The Creedal Imperative ) 을 집필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준 크로스웨이의 앨런 피셔와 저스틴 테일러

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저스틴은 또한 북미 교회 문화와 내 연 구 결과를 반영해 2판을 제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년 간

나는 친구인 샌디 핀레이슨, 그렉 빌, 토드 프루이트, 데이비드 홀,

밥 갓프리, 케빈 드영, 매트 유시, 맥스 벤퍼와 함께 신앙고백주의의

본질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일에서 벗

어나 가정에서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아내 캐트리오나에게도 고마움

을 전한다. 이 개정판을 피터, 존, 로런, 에밀리에게 바친다.

┃서문┃

옛 신조와 새 신조의 비교

내가 2012년에 『신조의 필수성』( The Creedal Imperative ) 을 집필하

게 된 동기는 교리의 기본 요점을 십여 개 명시하는 것 이상의 신앙

선언문이 교회에 필요하다는 확신이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전체 경

륜의 요점을 간결한 형태로 제시하는 신앙고백서가 필요하다. 그리

고 나는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매우 경계하는 교회의 분파인 개신교

복음주의가 어쩌면 직관적으로 그토록 경계하는 바로 그 신앙고백 주의의 원칙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이 지극히 소중히 여기는 것( 성경

의 최고 권위 ) 을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신조의 필수성』이 출간된 지 10년이 지났으나 이 두 가지 점에

대한 내 확신은 변하지 않았다. 이 확신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달라

진 것은 현재 교회가 처한 더 넓은 환경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정통 개신교가 고대 신조들의 고전적 유신론과 종교개혁 신앙고백

서의 합의를 재발견했다. 지난 30년간 학계는 니케아 공의회의 기

독교 및 교부 시대, 중세, 종교개혁 시대,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 간

의 관계 모두에 대한 이해를 심화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개신교

확신의 위기

와 더 넓은 신학적 흐름과의 관계에 대해 이전 세대가 당연하게 여

기던 약간 극단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화한 생각보다 기독교 정통 신

학의 역사를 훨씬 더 심오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예를 들

어, 이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하나님이 “육체와 부

분과 정념이 없으시며,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극히 순전한 영”1)이라

고 주장할 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

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지난 몇 년 사이에 서구 문화에 근

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더 넓은 사회와 교회와의 관계가 변화했

으며, 2012년에 막 등장하기 시작했던 여러 문제와 관련해 교회가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와 더 넓은 세계와의 견해 차

이는 단순히 이적, 성육신, 부활과 관련된 기독교의 초자연적 주장

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전통적인 문제가 아니다. 주류에서 동

성 결혼과 젠더 이념을 수용하는 현상은 기독교 신학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인간론과 윤리마저도 불쾌하고 심지

어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세계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다. 세계와 교회의 광범위한 도덕적 가정이 거대한 공통 기반을 누리던 수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이런 가정이 종종 서로

정면으로 반대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이 우리 아이들에게 기독교의 도덕적 이상과 폭넓게 양립할 수 있는 도덕적

1)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hereafter cited as WCF) 2.1, in Creeds,Confessions,andCatechisms:AReader’sEdition, ed. Chad Van Dixhoorn (Wheaton, IL: Crossway, 2022), 188(이후로는 CCC로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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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키워 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기독교에는 교의, 규범, 예배가 있다. 교의는 하나님, 창조, 인간, 죄, 구속, 완성에 대한 교회의 신념을 명시한다. 교의는 실재를 설명

한다. 규범은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한 도덕적 이상을 제시한다. 하 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 이것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분명했으며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객관적 구원의 사역

을 훌륭하게 강조하면서도 그 사역이 신자에게 분명한 실천적 의

미가 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예배는 기독교인이 교의에서 기술하

고 규범이 그 성품을 반영하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식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모두 하나님의 실재에 근

거를 두고 있어서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교회도 어떤 기독교

인도 단순히 교의나 규범이나 예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 가지

는 모두 하나의 기독교 신앙에서 분리할 수 없는 측면이다.

『신조의 필수성』에서 나는 교의에,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이 세 가

지의 예배적 측면에 치중했다. 그 이후 몇 년 사이에 규범은 토론의

주제로서 훨씬 더 시급해졌다. 그리고 고전적인 공적 신조와 신앙 고백서도 교의나 예배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훌

륭한 자료다.

내가 다른 글에서 논증한 대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핵

심은 표현적 개인주의라는 현상이다. 표현적 개인주의는 오늘날 우

리가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과 관련된 조건을 설정하는 진언과 전례가 있는 현대의 교의다. 표

확신의 위기

현적 개인주의는 모든 사람이 일련의 내적 감정, 욕구, 정서에 의해

구성된다는 개념이다. 진정한 ‘나’는 내 몸 안에 살고 있는 그 사람

이며, 따라서 이런 내면의 감정에 따라 겉으로 행동할 수 있을 때

지극히 참으로 나 자신이다. 육체적·생물학적 성과 심리적 젠더 정

체성이 서로 대립할 수 있는 트랜스젠더 현상에서 이런 표현적 개

인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내 몸이 남성의 몸

이더라도 내가 스스로 여성이라고 생각하면 실제로 여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적 개인주의는 젠더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성적인 욕구나 그 밖의 다른 욕구로 자신을 식별할 때 그

들은 표현적 개인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이 표현적 개인주의가

우리 모두와도 관련이 있다. 현대의 자아는 표현적 개인주의의 자

아다.

표현적 개인주의가 규범이 되는 세상에서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더 넓은 문화에서 더욱 문제가 되고, 기독교인에게는 더욱 중요하

고 유용하다. 첫째, 급진적 주관주의로 점점 더 기울어지는 세상에

서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분명한 주장을 나타

낸다. 『신조의 필수성』에서 나는 이런 객관적 실재가 역사에서 우리

의 시간과 위치를 상대화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신앙고백서에 따르

기로 서약하고 공동 예배에서 신조를 낭독할 때, 우리는 우리 시

대가 모든 해답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우리가 교회로서 우

리 선조가 믿음으로 닦아 놓은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도적 신앙을 다음 세대에게 전수할 책임을

맡은 증인의 대열에서 가장 최근에 참여한 청지기일 뿐이라는 사실

을 상기시킴으로써 겸손을 장려하는 데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행위들이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각자가 개인으로서 누군

지를 상대화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신조와 신앙고백

서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삶의 의미가 무엇

이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

리는 우리가 누구며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결정짓

는 더 큰 주어진 실재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우리는 전능하

신 아버지, 천지를 지으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공언하는 것

은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내가 더 크고 객관적인 실재의 관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공언하는 것이다.2) 다른 교인들

과 함께 이 진술을 낭송하는 순간, 나는 내가 자율적이지 않고 창조

의 일부일 뿐임을 단언하고 고백하고 상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

단히 깊은 의미에서 보면, 내 정체성은 내가 구성하거나 선택하거

나 느끼는 것이 아니다. 친부모의 신원이 내 의지나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현실인 것처럼, 내 정체성도 내가 결정권이 없거나 통

제할 수 없이 주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텐데, 성경적 인간론, 성경적 윤리학, 성경적 예배, 교의, 규범, 예배 등은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둘째,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표현적 개인주의와 관련된 진실을 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오히려 그 진실에 대한

정당하고 가장 깊은 고민에 해답을 준다. 표현적 개인주의는 우리

2) Nicene Creed (CCC 17).

확신의 위기

내면의 삶, 즉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우리 정체성의 중요 요소로 이

해한다는 점에서는 옳다. 다만, 표현적 개인주의는 이런 감정에 압

도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그런 감정에 뒤따르는 외적 표현이 우리

를 ‘진정성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두 가지 구체적인 방식

에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정당한 우려와 잘못된 과잉 모두에 대해 말 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예로 들어 보자.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은 전체적으로 일인칭 단수형을 사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

나님의 행동에 근거한 소망과 확신에 대해 말하는 첫 번째 질문과

스스로 기도하는 바에 대한 우리의 소원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마지막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인간의 감정은 부정되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무시되지도 않는다. 그보다 인간의 감정은 하나님에

대한 더 넓은 이해의 맥락 안에 있다. 다시 말해, 신자의 감정은 교

리문답에 요약된 신학에 따라 형성된다.

이것은 오늘날 표현적 개인주의가 지극히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

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규범 및 사회 규범과도 연결된다. 정

서는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길거

리에서 누군가가 신체적 공격을 받는 모습을 보고도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감정

이 도덕성의 유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공 개적으로 밝힌 친구를 긍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나는 몹시 슬프고

죄책감마저 들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에 대한 내 감정이 상황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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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적 도덕성을 결정할 만큼 신뢰할 만한 지침이 될 수는 없다. 내

감정은 세상의 거대한 도덕적 구조를 기초로 형성되어야 하며, 설

령 내가 그런 슬픔과 죄책감을 모두 없애지 못하더라도 내 감정은

여전히 그 도덕적 구조에 종속될 필요가 있다. 신앙고백서는 내게

그 구조를 가리키며 나를 위해 그 구조를 요약해 준다. 신앙고백서

는 나 자신의 정서적 본능을 판단하는 데 유용한 규칙과 현실관을

제공하는데,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본능을 그 규칙과 현실

관에 순응시키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바로 규범과 예배가 만나는

지점이다. 찬양과 예배는 마음과 정신 모두에 영향을 미치므로 여

기서 매우 중요하다. 예배가 신조와 신앙고백서에 따라 형성되는

것처럼, 신조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신학은 내 정서까지도 형성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진정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나는 자율적

인 감정과 정서에 자유를 부여할 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

니라, 내면의 감정을 외부의 실재와 일치시켜 정당하고 교화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편이 하는 일이다. 시편은 공동 예배에서 우리의 정

서를 정당하게 표현하고, 전 인격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단어, 운율, 음악을 결합하는 동시에 이로써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반영

하는 방식으로 그런 감정을 전달한다. 우리의 신조적인 예배도 마 찬가지여야 한다.

서구의 교회, 특히 미국의 교회는 낯선 신세계에 눈을 뜨고 있다.

그 세계에서 자기 위치에 대한 교회의 가정, 예를 들어 교회의 신학

은 본질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교회의 도덕성은

18 확신의 위기

사회 전체의 도덕성과 계속해서 광범위하게 양립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이 너무 갑작스럽게 다가와서 우리는 모두 당황하거나 절망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신

조와 신앙고백서는 우리를 역사 안에 고정하고, 하나님과 인간론과

윤리의 연관성을 생각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포괄적인 체계를 제공

하며, 무엇보다도 만물을 다스리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가리킨다

는 점에서 이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요약하면, 신조와 신

앙고백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어린양의 혼인이 이루어질 결론에

이르게 하실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우리가 생각하고 살아가 고 예배해야 법을 알려 준다. 오늘날 신조의 필수성이 10년 전보다

더 큰 이유는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가리키는 하나님이 이 시대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동일하시기 때문인데, 우리는 그 사

실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서론┃

내 동료는 자신이 자주 방문하던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

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 교회 목사는 설교단에 서서 오른

손에 성경을 잡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서 왼손으로 성경을 가리

키는 버릇이 있었다. 그 목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신조이자 유일한 신앙고백서입니다”라고 공언했다. 역설적

인 사실은 이 교회의 특징이 칼빈주의 5대 강령, 세대주의,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플리머스 형제회 모임을 기원으로 반영하는 정치의

한 형태를 포함한 가르침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유일한 신조

는 성경이었으나 삶과 가르침의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실제로 교회

역사상 다른 어떤 교회와도 거의 연결되지 않았다. 분명히 그 교회

는 은혜, 종말론, 교회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한 신조가 있

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기록하여 공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것뿐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내가 이후의 부분에서 논증하듯이 이것은

실제로 비성경적인데, 교회의 삶에서 성경의 고유한 지위를 보장하

는 접근 방식을 취하려는 이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이 보여 주는 ( 의

심할 여지 없이 ) 진지한 열망을 고려하면 역설적이면서도 약간 애석한

확신의 위기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교회의 현재

와 미래의 안녕에 필수적이라는 내 신념 때문이다. 성경만이 기독

교 신앙과 실천을 위한 유일하고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는 관념에 익숙한 복음주의자의 귀에는 아마도 이런 진술이 거슬릴

수 있을 것이다. 내 주장이 오직 성경이라는 관념의 핵심 자체를 공

격하는 것은 아닐까? 내 주장 때문에 내가 성경과 성경 밖의 어떤

것, 즉 일부 전통이 대등하고 잠재적으로 똑같은 권위가 있다고 여

길 수 있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시대적 제약이

있는 신조와 신앙고백서에 대한 헌신이 현대 사회에서 교회를 무의

미하게 만들 위험이 있지는 않을까?

사실 이렇게 우려하는 태도도 정당한데, 나는 이후의 부분에서 이

런 우려와 다른 우려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겠다. 하지만 여기

서는 내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고 싶다. 모든 저술가는 특정 관점에

서 글을 쓰며, 개인적인 헌신, 배경, 신념에 따라 어느 정도 논증을 형성한다. 따라서 독자들이 내가 말하려는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의 배경과 성향에 대한 통찰을 알리는 것이 매우 적 절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 인문대학의 교수이지만 신앙고백적 장로교 교단인 정통 장로교회의 목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나는 신앙고백적 장

로교 신자다. 이 용어는 기독교 교회와 헌신의 스펙트럼에서 내 위

치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하다.

후자의 용어를 먼저 설명하면, ‘장로교’는 장로회주의 형태의 교

서론 21 일이다.

회 정치에 헌신한다는 뜻으로서, 교회가 개교회 수준에서는 장로들

로 구성된 당회 또는 위원회에 의해, 지역 수준에서는 지역 내 교회

에서 선출된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노회에 의해, 국가 수준에서

는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선출된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총회에

의해 통치된다는 뜻이다. 내가 소속 교단의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가르치는 내용과 교회의 다양한 법정에 대한 존중 모두에서

이런 형태의 정치를 지지하기로 서약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내

용과 생활방식에 대해 이 교회 법정에서 설명할 책임이 있다.

이 책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적”이라는 형용사다. 이것은

내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명시된 장로교의 신앙고백적 입장

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칭의가 무엇을 의미하

는지 등과 같은 핵심 사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

는 관념에 헌신하고 있음을 뜻한다. 나는 목회자가 될 때 그런 취지

로 엄숙히 서약했다. 이것은 신앙고백적 신자가 된다는 것의 또 다

른 측면을 가리키는데, 내 서약이 내가 지키겠다고 서약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을 가르치는 것으로 드러나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교회 정치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경우 최악

의 상황에서는 내가 교회의 공직에서 해임될 수도 있다.

위에서 내가 서약한 것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가 성경의 가르

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지, 웨스트민스

터 표준문서가 성경을 보완하거나 성경과 무관한 가르침을 나타 낸다고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데 주의하라. 그보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성경 자체에 이미 있는 내용을 요약한다.

확신의 위기

그런데 이 입장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가 성경을 끼워 맞추는 일종의 선험적 체계가 되는 일을 어떻

게 피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에

는 꼬리가 개를 흔드는 위험, 즉 요약본을 내가 성경을 읽는 기준으

로 삼는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과 이와 비슷한 질문들은

나중에 다시 다루겠다. 이 시점에서 내 목적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말하는 관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가 어떤 견해를 취하고 있는지

를 알려 주려는 것뿐이다. 요약하면, 나는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교

회에 유익하다고 믿을 뿐 아니라, 서약을 통해 특정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이것은 신조와 신앙고백서의

지위가 내게 단순히 지적 관심사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인격적 차

원에서 이 관념에 깊이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나는 신앙고백적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늘날 대다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과 충돌하게 된다. 이것은 역설적인 사실인데, 그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가 어떤 형태의 신조, 신앙고백서 또는 교리 선언문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을 정의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 루터교, 개혁교회, 성 공회에 모두 적용되는 사실이다. 침례교의 일부 교파에도 신앙고백

서가 있으며, 오늘날 스스로 신앙고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많은

독립 교회도 자신이 누구며 무엇을 믿는지를 정의하는 간단한 신앙

선언문이 있다. 더욱이 내가 나중에 논증하는 대로, 신조와 신앙고

백서라는 관념 전체를 거부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도 암묵적인 신조

를 토대로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실에서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

더라도 최소한 의도에 있어서는 반신앙고백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고 말하는 것은 옳다. 이것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예는 “오

직 성경”이라는 개신교의 원리가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필연적으로

거부하도록 요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이 유일한 권위인데 추가적인 문서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리고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고 어떻게 그런 문서에 권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런 주장은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나

는 1장과 2장에서 반신앙고백주의의 이유가 다양하더라도 그중 상

당수가 너무 많은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문화적 영향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반면에 이런 영향력을 인식

한다고 해서 거기서 자동으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기회는 얻을 수가 있다.

나는 여기서 기독교인이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보유한 사람과 그

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

보다 기독교인은 ‘작성되어 공적인 문서로 존재하고 공적인 조사,

평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공적인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보유한 사

람’과 ‘종종 즉흥적이고 기록되지 않아 공적인 조사 대상이 아니고

평가의 영향도 받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성경

을 통해 그것이 참인지를 시험할 수 없는 사적인 신조와 신앙고백

을 보유한 사람’으로 나뉜다.

복음주의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반신앙고백주의는 실제로 전통을

거부하는 그들의 성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많은 사람에게는 “오

확신의 위기

직 성경”이라는 원리가 교회의 전통이 교회의 삶이나 사고에 어떤

건설적인 역할을 한다는 모든 관념과 반대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

은 이것을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의 주요 통찰 중 하나로 여긴다. 로

마 가톨릭교에는 전통이 있고, 개신교에는 성경이 있다는 식이다.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은 권위에 대한 투쟁이었고, 교회 전통은

성경의 우위와 서로 대립하는 것이며, 현대 복음주의자는 이 문제

에서 자기들의 개신교 선조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만 생각해 보면 개신교인이 전통이 아니라 성경을 가

지고 있다는 주장이 대단히 오해의 소지가 있고 실제로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는 일반적으로

번역 성경을 사용하며 여기에는 새 국제판( NIV ), 개정 표준판( RSV ), 영어 표준판( ESV ), 킹 제임스 역본( KJV ) 등이 있는데, 이런 번역본들

은 성경 번역, 언어학, 사전 편찬학 등의 기존 전통 안에서 생겨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런 번역본의 밑바탕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이 있으므로 본문 이해의 전통도 이런 번역본의 근간이며, 히

브리어와 헬라어에 익숙한 언어 천재에게도 이런 다양한 전통은 본

문 선택, 언어 학습 방식, 모호한 문법, 구문 및 어휘 문제에 대해 이 루어지는 선택의 종류를 구체화할 것이다. 따라서 “오직 성경”은 그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진공 상태에서 접근하는 성경을 의미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전통에 대한 이런 성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모든 개신교 목사는 심지어 가장 근본주의적인 목사라 해도

능력이 조금만 뒷받침된다면 사전, 주석, 신학 서적의 도움을 받아

25

설교를 준비할 것이다. 책장에서 이런 서적 중 하나를 꺼내 읽기 시

작하는 순간, 물론 그 목사는 교회 전통에 긍정적으로 의지하는 것

이다. 목사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

군가가 성경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 단어, 문장, 단락을 사용해 해

당 말씀에 대해 제시하고 표현한 생각과 묵상을 읽는 것이다. 실제

로 목사는 설교단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성경이

아닌 전통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실은 전통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전통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 전통

이 성경과 연관되는 방식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실제로 문제의 핵

심이다. 참으로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과 전통 간의 투쟁이 아

니라 서로 다른 유형의 전통 간의 투쟁이었다. 가톨릭 종교개혁의

주역인 사돌레토 추기경과 종교 개혁가 존 칼빈이 나눈 유명한 대

화에서, 사돌레토는 개신교가 교회 전통을 버렸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해 칼빈은 도리어 개신교가 참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에서 멀어진 것은 가톨릭교회라고 반박했다. 요점은 간단하고

명쾌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대대로 전수한 전통은 개신교

에 속한다는 것이다.

전통의 내용에 대한 칼빈의 주장이 진실한지를 여기서 논할 수는

없지만, 칼빈이 종교개혁을 성경 대 전통이 아니라 성경적 전통 대

비성경적 전통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 당시와 그 이후로 사려 깊은 개신교인은 종교 개혁가들이 성경

에 의해 규범화된 전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쳤다고 이해했다. 다시 말해, 개신교인은 자신이 성경에서 명시적

확신의 위기

으로 찾을 수 없는 언어와 개념 용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

지만, 그런 표현이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는 사

실과, 그런 표현이 이 작업에 부적절하거나 심지어 성경과 모순되

는 것으로 밝혀질 때는 수정하거나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서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교 회가 확언하는 바에 따르면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전통이 가장 농축

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서는 종종 종속 규범 또는 라틴어 로 ‘노르마 노르마타’( 규범화된 규범 ) 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르마

노르만스’( 규범화하는 규범 ), 즉 근본 규범인 성경과는 대조된다. 다시

말해,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특정 교회나 교단이 성경에서 가르친다

고 믿는 바를 종합의 형태로 밝히는 공적 선언문이라는 것이다. 여

기서 말하는 ‘종합’은 마치 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면이 아닌 나

일론 같은 합성 섬유처럼 ‘거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여

기서 말하는 ‘종합’은 단순히 성경 구절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주제별로 요약하는 제시 방식을 뜻한다.

그래서 니케아 신조에는 하나님의 정체성을 성부·성자·성령으로

설명하는 진술이 있는데, 이 진술은 삼위일체라는 주제에 대해 가

르치는 성경 전체의 내용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주

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이런 진술이 공적인 성격을 띤 것이어서 성

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공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진술은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으며,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수정하거나 명료하게 할 수 있는데, 그런 변경의 상황과 수단은 다

른 곳에서 논의하겠다. 여기서는 다만 독자 여러분이 그런 문서들

의 종합적이고 공적인 성격에 주목하길 바라는 것뿐이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현대 문화 속에

서 신조와 신앙고백서라는 개념 자체를 약간 불신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강력한 몇 가지 조류를 살펴보겠다. 복음주의자의 반대를

그런 세속적 영향력의 단순한 종교적 표현으로 축소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런 영향력을 이해하면 현재에 신앙고백주의를 옹호하

기가 어려운 이유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장에서는 언어의 중요성, 인간 본성의 실체와 통일성, 그리고 교

리, 장로 직분, “옳은 말의 형식”, 인간 정체성과 상호 의존성, 전통

에 대한 바울의 강조 등 여러 가지 관련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을 살펴보겠다. 내 결론은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성경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타당할 뿐 아니라, 바울이 실제로 그런 것들을 사도 이후

교회의 정상적인 삶의 일부가 되리라고 가정한 듯이 보인다는 것

이다. 다시 말해, 성경 자체가 신조의 필수성을 가르치는 듯이 보

인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성경 외에는 신조가 없다는 주장이 사리

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또한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바울에게

중요한 또 다른 요점을 구현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

이 함께 소속해 있으며, 그 소속의 중요한 부분이 개인이 아닌 한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군지를 정의하는 공통의 신념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헌신이라는 것이다.

3장에서는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옹호하는 근거와 관련된 교회론

적 발전을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특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확신의 위기

451년 칼케돈 공의회 사이에 이루어진 삼위일체론 논의와 기독론

논의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또한 사도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조도

다루겠다. 내가 이번 연구를 통해 얻은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은 교리

의 복잡성과 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교리의 복잡성과 관련

해, 역사는 많은 기독교 교리가 비교적 복잡한 관련 교리 연계망 안

에서만 안정적인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에는 지울 수 없는 복잡성이 어떤 형태로든 항상

있는데, 이 사실은 단순하고 매우 간략한 신앙 선언문을 선호하는 현대 복음주의의 성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교회론과 관련해,

이단과 같은 용어가 특정 신앙고백서를 가진 교회와 연관될 때만

유의미한 내용이 있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한 사 실이다.

4장에서는 개신교 신앙고백의 주요 표준인 성공회의 신조와 강

론, 루터교의 일치 신조서, 세 일치 신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1689년 침례교 신앙고백서를 다룬다. 이 4장은 필연적으로 매우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개신교는 방대한 양의 신앙고백 자료를 생

산해 왔으므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신앙고백서에 초점을 맞추 기로 했다. 이 신앙고백 자료들을 선택하면서 아르미니우스주의, 일

반 침례교, 재세례파 등은 신앙고백서가 없거나 신앙고백적일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런 전통에 속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신앙고백주의의 원칙이 단순히 내가 언급한 신앙 고백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길 바란다.

5장에서는 기독교 신조의 송영적 기원을 공정하게 다루고 그런

신조가 교회 생활에서 수행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중요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 신조와 찬양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이런 문서들의 유일한 목적이 마치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 무미건조한 설명만 해 주는 데 있을 뿐인

것처럼 이런 문서들을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와는 반대로, 신조는 기독교 송영에서 중심이다. 더욱이 앞

서 제시한 주장을 바탕으로, 나는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우리 모두

를 하나로 묶는 방식으로 기독교인의 예배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 한다. 예배는 자기표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및 하나님의 실

재에 대한 공동의 표현에 대한 것이다.

6장에서는 교회 권력의 제한부터 교회 생활을 위해 적절한 교육

적 구조에 이르기까지 신앙고백서의 여러 가지 이점을 강조함으로

써 신앙고백서의 유용성을 옹호한다. 결론 다음에는 신앙고백서 개

정의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한 성가신 질문을 다루는 부록을 첨부 한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신앙고백적 기독교가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의 매우 중요한 측면을 담고 있다고 확신하는 한 사람으로서

내 주제에 접근한다. 나는 수년 간 비신앙고백적 복음주의자였다.

30대 초반에 신앙고백적 장로회주의를 발견한 것은 해방감을 주는 경험이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신앙고백주의를 옹호하는 많은 저

술가가 신앙고백주의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을 경멸과 조롱의 시

선으로 내려다보는 좀 불쾌하고 죄악스러운 경향이 있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내가 그런 정신으로 이 책을 쓰지 않았다고 믿는다.

확신의 위기

그보다 나는 신앙고백주의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성경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고백주의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대단히 소중한 것을 더 잘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득하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

이 되길 바란다.

현명한 독자라면 이제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성경만이 계시와 권위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신념과 철저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나는 여기

서 조금 더 나아간다. 나는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실제로 교회의 안

녕을 위해 필수적이며,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없다고 주장하는 교회

는 나이 든 바울이 어린 제자 디모데에게 조언할 때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옳은 말의 형식을 고수하는 데 있어 영구적인 불이익을 당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참으로 그런 교회는 종종 성경의 권위를 수

호하려는 가장 고상한 의도를 동기로 삼지만, 그 일은 신조와 신앙

고백서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 이 후자의 요점과 관련해, 나는 신조와 신앙고백서의 필요성이 교회에 있어 실천적 의무일 뿐

아니라 성경적 의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적어도 성경을 근거로 논 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조와 신앙고백서에

반대하는 문화적 주장

서론에서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조와 신앙고백

서에 대한 표준적이고 즉각적인 반응, 즉 그런 문서가 성경의 고유

한 지위를 대체하고 전통을 성경과 동등하거나 심지어 성경보다 우

월한 위치에 두며, 따라서 진정한 복음주의 개신교의 권위 개념을

훼손한다는 견해를 간략하게 언급했다. 이 반대 노선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나는 모든 기독교인이 신앙고백을

종합하는 데 참여하며 단지 차이가 있다면, 공적인 조사의 대상이

되는 공적인 신앙고백서를 고수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본성상 그

런 조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적인 신앙고백을 고수하는가 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신앙고백서의 사용과 유용성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오늘날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이렇게 의심받는 다른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일은 가치가 있다. 신조와 신앙고백서

에 대한 반대는 종종 성경의 권위를 위해 질투하는 듯한 언어로 포

장되지만,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는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진술

들을 고수하는 견해에 반대하는 강력한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금붕어가 자신이 헤엄치는 물의 온도와 맛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와 문화를 가장 강력하게 형성하는

영향력은 종종 우리가 너무 익숙해,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심지어 성경이 최고이자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

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까지도 형성하는지를 기

능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다. 진심으로 성경에 충실하려는 대단 히 많은 사람이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거부하는 것이 신실한 행동이

아니라 시대정신에 무의식적으로 항복하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

것은 비극적인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장에서는 이런 시대정신

을 형성하는 몇 가지 영향력에 대해 다루려 한다.

네 가지 가정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건강하고 성경적인 교회 생활을 위해 필요

한 좋은 부분이라는 내 확신은 다양한 주장과 신념에 기초하지만, 근본적으로 신앙고백서가 바른 것이 되기 위해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네 가지 기본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감정에 의해 정의되는 자유롭고 자율적인 피조물이 아

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며, 항상 하나님과 다

문화적 주장 33

른 인간과의 외부적 관계에 근거해 정의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고

립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고 우

리가 원하는 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재료’, 즉 일종의 우주적

점토에 불과한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

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

는 권위가 있고, 우리가 누군지를 결정하는 관계망 안에 놓여 있다

는 사실로써 결정된다. 요약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우

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객

관적인 성격에 대해 익힐 때 배우는 것이다.

2. 과거는 중요하며 우리에게 긍정적인 교훈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있다.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거의 정의상 과거의 어느 시점에 작성된

문서인데, 대다수의 경우 지난주나 작년이 아닌 먼 과거에 대해 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

로 진리를 전달하거나 특정 교회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외부 세

계에 명확히 하는 측면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

장하려면 과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고 믿어

야 한다. 따라서 과거가 지식과 심지어 지혜의 원천도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약화하거나 희석하는 문화적 영향력은 신조와 신앙고백서

의 관련성을 훼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3. 언어는 시간과 지리적 공간을 넘어 진리를 안정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어야 한다. 신조와 신앙고백서는 신학적 진리

를 주장하는 문서다. 하지만 이것이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하는 역

할의 전부라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많은 교회 예전에서 사도신

확신의 위기

경과 니케아 신조의 역할은 그것이 교육학적·신학적 역할뿐 아

니라 교리적 역할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신조와 신

앙고백서는 하나님 및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진리 주장에

기초하고 그 주장을 표현하는 신학적·교리적 진술 그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있어도 결코 그 이하가 될 수는 없다. 물론 신조와 신앙고

백서는 말을 수단으로 삼아 이런 작업을 수행한다. 그래서 이런 주

장이 스스로 주장하는 것, 즉 언어 너머의 실재에 대한 진술이 되려

면 언어 자체가 이 작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매체여야 한다. 따라

서 정보를 전달하거나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는 매체로서 언어에

대한 일반적인 신뢰를 훼손하는 모든 영향력은 신조와 신앙고백서

의 타당성을 공격하는 영향력이기도 하다.

4.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권위 있게 작성하고 시행할 수 있는 단체

또는 기관이 존재해야 한다. 이 단체 또는 기관이 바로 교회다. 이어

지는 장들에서 이 사실의 중요성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신앙고백서가 사적인 문서가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이해하는 일

이 중요하다. 신앙고백서가 중요한 이유는 교회가 신앙에 대한 공

적인 선언으로 채택한 것이기 때문인데, 이런 의미에서 신앙고백서

의 기능은 교회적 성격과 맥락에서 분리될 수 없다. 이 전체 개념은

기관과 기관의 권위 구조가 단순히 제도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나쁘거나 악하거나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외부 권위나 기관의 권위라는 관념을 전복하거나 훼손하는

모든 문화적 영향력은 신조와 신앙고백서가 개인의 교화를 위한 단

순한 교리 요약 외에 다른 것으로 기능할 수 있는 구조를 효과적으

문화적 주장 35

로 제거한다.

방금 말한 내용이 신앙고백주의의 전제라면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 네 가지 기본 전제가 모두 현대 생활의 일

반적인 조류에 반대되는 심오한 반문화적 태도를 나타내기 때문

이다. 오늘날 서구 문화는 표현적 개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데, 표

현적 개인주의는 우리가 내면의 감정에 의해 정의되고, 우리와 타

인과의 관계가 우리에게 본성적 또는 필수적 의무를 부과하지 않으

며, 우리가 우리의 정서적 필요에 따라 그런 관계를 고르고 선택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이런 개념은 개인의 자율성 및 타인을 위해 우

리 자신을 어느 정도 희생하도록 요구하는 외부 권위( 또는 적어도 전통

적인 외부 권위 ) 에 대한 거부라는 일반적인 문화적 주장에 영향을 미

친다. 부모에게 반항하는 자녀든 자기 신체의 성별에 반항하는 개

인이든 간에 오늘날에는 자율성과 개인적 욕구가 왕인데, 이런 것

들은 우리가 누군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에 대해 외부에서 알려 주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그다음으로, 과거

는 긍정적인 지식의 원천이라기보다는 당혹감의 원천인 경우가 더

많으며, 유용하다고 여겨질 때는 대개 현재를 위한 진리보다는 하

지 말아야 할 일이나 결함이 있고 후진적인 사고의 예를 제공하는

경우다.

셋째, 언어도 마찬가지로 의심스러운데, 거짓말, 부정직한 정치인, 무자비한 마케팅의 세계에서 언어는 종종 조작적이거나 기만적이

거나 완전히 사악한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실제로도 종종 그렇지만, 투명하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경우는 드물다.

확신의 위기

끝으로, 다국적 기업에서 정부에 이르기까지 기관들은 자기 영속성,

괴롭힘, 통제를 위한 통제라는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 인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으

로 여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표현적 개인주

의가 문화적 기반을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 강화될

뿐이다. 따라서 신앙고백주의의 네 가지 대전제는 현대 문화의 가

치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인데, 신앙고백주의자가 반격을 가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반격은 전시 지도자부터 고교 육

상팀 코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공적인 운동가가 제시하는 단순 진

리, 즉 자기의 적이 누군지를 아는 일에서 시작된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의 적을 아는 일은 우리가 성경의 고유한 권위를 옹호할 때 우

리 주변 세상의 숨겨진 영향력이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역사적

삶과 실천보다 그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표현적 개인주의

현대 문화의 다양한 경향은 서구 사회에서 표현적 개인주의를 규

범화하는 데 일조했다. 종교개혁의 도래와 함께 모든 사람에게 종 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견고하고 안정적인 기관으로서 교회의 권

위는 종말을 고했다. 종교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개인적 선택의 문

제가 되었고, 그렇게 되면서 기관으로서 교회의 권위가 쇠퇴하는

동안에도 개인적 선택의 권위는 더욱 커졌다. 이런 발전과 함께 개

인적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내적 심리에 대한 강조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요약

되는 지식과 확실성의 철학을 제시한 르네 데카르트는 아마도 이런

경향에 대한 가장 유명한 표현을 제시한 것이겠지만, 내면으로 향

하는 이런 움직임은 인식론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과학 철학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1) 장 자크 루소, 프리드리히 실러, 낭만주의자의

등장으로, 감정과 정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

으로 점점 더 강조되었다. 그리고 감정과 정서가 부상하면서, 과거

에 누렸던 그런 권위를 외부 기관에 부여하는 것에 대한 저항도 생

겨났다. 이것을 약간 단순화하더라도 오해의 소지가 없게 표현하면,

사람을 망치는 것은 사회와 그 사회의 전통 및 제도라는 생각이 현

대 세계의 뿌리 깊은 신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 경향에 기술의 영향을 추가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에

서 논의할 과거에 대한 평가절하에서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특

징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기술이 표현적 개인주의의 핵심에 자리한

자율성을 강화한다는 사실에 주의할 가치가 있다. 기술은 우리에게

힘의 감각을 심어 주고 세상이 우리 자신을 순응시켜야 하는 대상

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에 따라 극복하거나 굴복시킬 수 있는 대상

이라고 느끼게 한다. 가장 뚜렷한 예는 생물학에서 찾을 수 있다. 과

거에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던 질병도 이제는 간단하게 항생제만

1) 다음을 보라. René Descartes, Principles of Philosophy, trans. Valentine Rodger Miller and Reese P. Miller (Dordrecht: Kluwer Academic, 1982), 5.

확신의 위기

투여해도 치료할 수 있다. 과거에는 성적인 난잡함이 피할 수 없는

성병이나 원하지 않는 임신의 위험을 수반했다. 의학의 발달로 이

런 위험은 크게 완화되었고, 우리는 자신이 성적인 영역에서 주권

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라고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비단 생

물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저렴한 교통수단의 발달과 ‘줌’이나

‘스카이프’와 같은 기술의 등장으로 지리적 거리의 중요성이 줄어

들었다. 이런 기술들은 우리가 개인으로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

는 생각에 힘을 실어 준다. 자연은 과거에 누리던 권위를 상실했다.

이 책에서 표현적 개인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기관의 권

위라는 관념에 어떤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표현적 개

인주의는 기관의 권위라는 관념을 극적으로 약화한다. 개인이 스스

로 되고 싶은 사람, 또는 스스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

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기관은 형성의 장에서 수행의 장으로 바

뀐다. 기관은 더 이상 외부의 권위가 있는 장소가 아니라, 그보다 ‘나’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특정한 이상을 제시하는 장소인데,

나는 내 내면의 감정에 적합하고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기관

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내 자신의 자아실현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

지 않는 기관이나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의무가 없다. 이것은 내가

누군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것에 비추어 내가 어떻게 예배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장

소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을 완전히 믿을 수 없게 만든다.

과거에 대한 평가절하

과학

현대 문화에는 과거가 유용한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모든

관념을 약화하는 수많은 영향력이 있다. 아마도 가장 뚜렷한 것은

과학의 지배일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과학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전구부터 암 치료에 이르기까지 삶을 영위할 수 있

게 하는 거의 모든 것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우 과학을 적

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과학주의가 아니다. 그보다는 과학이 육성하

고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종류의 문화적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 이다.

과학은 그 본성상 현재가 과거보다 낫고 미래가 현재보다 더 나

아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가정이 그 자체로 나

쁜 것은 아니다. 이런 가정은 과학자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중요한

돌파구를 끌어내는 칭찬할 만한 호기심의 원동력 중 일부임이 분명

한데, 현재가 과거보다 낫다는 사실에 대한 많은 증거도 실제로

있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역사에서 어느 시대에 살

았다면 가장 즐거웠을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학생들에게서

자주 받는다. 내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바로 이 시대, 즉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이다. 나를 약골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지만, 나는

진통제가 생소하고, 의학이라고는 개인위생이 의심스러운 주름진

노파가 만든, 죽거나 낫거나 둘 중 하나인 엉터리 약을 삼키는 것이

전부며, ‘위생시설’은 마을 어귀 땅바닥에 파놓은 구멍에 불과했던

확신의 위기

이전 시대보다는 진통제, 항생제,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시대에 사

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과학은 그와 관련된 분야

에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증거가 모두 일방적

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는 과학이 생명을

증진하기보다는 파괴하기 위해,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사용된 한

가지 사례다. 그러나 대체로 과학은 의학에서 식기세척기에 이르기

까지 엄청난 이득을 가져왔다.

문제는 과학에도 특정한 철학적 편견, 다시 말해 위에서 언급한

대로 과거가 현재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과학

에는 모든 것, 적어도 거의 모든 것이 계속 더 나아진다는 진보의

서사가 내장되어 있는데, 문제는 이것이 다른 분야에서도 같은 종

류의 기대를 적용하는 광범위한 문화적 태도를 심어 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진화와 같은 개념이 더해지면 과거가 열등

하다는 가정에 기초해 미래를 지향하는 문화적 중력이 작용하게 된다.

이런 과학적 진보의 서사는 단순히 과거와 비교한 현재의 우월성

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재의 독특성에 대한 믿음도 심어 준다. 우

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거보다 훨씬 더 풍부한 지식이 있고 훨

씬 더 정교하고 훨씬 더 복잡하다. 그래서 과거는 결과적으로 현재

의 문제나 쟁점을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며, 현재

와 과거 사이의 차이는 너무 크다. 예를 들어, 정유공장에서 주유소 로 연료를 운반하는 과정에는 말과 수레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터진 맹장을 제거하는 법을 찾기 위해 17세기 수술 교

반대하는 문화적 주장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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