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칼뱅 총서 I - 기독교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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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 총서 I 기독교 강요 1541


1541년 제네바 Michel du bois 출판사에서 인쇄한 기독교 강요 프랑스어 초판


Institution Chrestienne


| 목차 |

발간사 | 8 역자 서문 | 10 저자 서문 : 이 책의 논지 | 33 헌정 서한 : 왕께 드리는 서한 | 36

1장 신지식 2장 인간지식과 자유의지

Jean Calvin 59 87

3장 율법

169

4장 믿음: 사도신경 해설

244

5장 회개

361

6장 이신칭의와 행위공로

419

7장 신구약의 유사점과 차이점

503

8장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537

9장 기도 - 주기도문 해설

595

10장 성례

643

11장 세례

660

12장 성찬

705

13장 성례라고 잘못 불린 다섯 가지 의식

752

14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792

15장 교회의 권세

806

16장 세속 정부

839

17장 그리스도인의 삶

871

부록 | 914 성경 색인 | 930 인명 색인 | 943


| 발간사 |

우리는 칼뱅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칼뱅은 1세대 종교개혁자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완성한 2세대 종교개 혁자의 대표로서 칼뱅의 저서를 읽는 것은 곧 개신교의 뿌리를 아는 것입니 다. 칼뱅은 개신교 가운데서도 루터파, 영국국교회와 구별되는 개혁파의 대 표적인 지도자이므로, 칼뱅의 저서를 읽는 것은 개혁파의 신학과 개혁파 교 회 목회의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칼뱅은 신학자로서 2천 년 교회사를 통틀어 초대 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 중세 교회의 토마스 아퀴나스, 현대 교회의 칼 바르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인물이므로, 칼뱅의 저서를 읽는 것은 보편 교회의 신학을 계승하고 발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칼뱅은 엄청난 양의 저서들을 남겼습니다. 칼뱅의 저서는 1863-1900년에 편집된 칼뱅 전집(Calvini Opera: CO) 59권 에 담긴 내용만 해도 22,000쪽에 이르는 분량입니다. 칼뱅이 이 모든 저서를 30년도 안 되는 목회 기간에, 목회 시기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매주 주일 2번의 설교, 격주로 매일 설교, 매주 또는 격주로 신학강의 3번, 매주 1회 당 회, 매주 1회 목회자 성경 연구 모임, 수시로 교인 심방, 종교개혁지도자로서 수많은 방문자와의 면담 등을 지속하면서 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경이롭습니 다. 더구나 수많은 대적자로부터 도덕적 반대, 신학적 반대, 정치적 반대를 받 으면서 편두통, 각혈, 늑막염과 결핵, 치질, 발열, 담석과 신장결석, 위장병과 장병, 관절염 등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이 런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불가사의합니다.

칼뱅은 다양한 장르의 저서들을 남겼습니다. 첫째, 16세기 판 교의학 또는 조직신학서인 『기독교 강요』입니다. 27세에 초판을 발간한 이래 23년 동안 5판에 걸쳐 증보한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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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최고, 개신교 최고, 개혁파 최고의 교의학 교과서입니다. 둘째, 성경 주 석입니다. 칼뱅은 요한 2, 3서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전체의 신약 주석 과 구약 전체의 2/3 정도에 해당되는 구약 주석을 남겼습니다. 칼뱅은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측면에서 간결하고 명쾌한 주옥같은 주석을 남긴 ‘주석가의 왕’입니다. 셋째, 설교입니다. 2,300편 정도로 속기된 칼뱅의 설교 가운데 남 아 있는 1,500편 이상의 설교로 구성된 설교집은 성경에 기초한 주해설교, 강 해설교의 본을 보여 줍니다. 넷째, 다양한 종류의 저서입니다. 칼뱅이 남긴 신 학논문, 로마가톨릭, 재세례파 등과의 논쟁서, 신앙고백서와 교리교육서, 교회 법 등의 주제와 관련된 수많은 작품은 16세기 종교개혁의 다양한 모습을 들여 다볼 수 있는 창문들입니다. 다섯째, 편지입니다. 평생 8,500통 이상의 편지를 썼을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현재 보존되어 있는 3.400통 정도의 편지는 칼 뱅의 초상화일 뿐 아니라 일종의 16세기 종교개혁 보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칼뱅의 전작을 읽어야 합니다. 칼뱅의 다양한 장르의 글을 통해 우리는 신학자 칼뱅, 목회자 칼뱅, 주석가 칼뱅, 설교자 칼뱅, 신학교수 칼뱅, 교리교육가 칼뱅, 교회법과 학교법을 제정 한 법학자 칼뱅, 종교개혁가 칼뱅, 이단과의 논쟁가 칼뱅, 인문학자 칼뱅 등, 참으로 다양한 모습의 칼뱅을 만나게 됩니다. 위대한 인물을 스승으로 삼기 위해서는 위대한 인물의 위대한 책 모두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칼뱅의 많 은 저서는 칼뱅 당대를 넘어서 그리스도께서 보편 교회에 주신 보물이며 선 물입니다. 칼뱅을 바르게 알고, 균형 있게 알고, 총체적으로 알기 위해 우리는 칼뱅의 전작을 읽어야 합니다.

부흥과개혁사에서 칼뱅 총서를 시작합니다. 칼뱅 전작 독서를 위해서는 칼뱅 총서가 필요합니다. 부흥과개혁사에서 발 간하는 칼뱅 총서는 칼뱅 원전의 번역과 소개에 있어 한국교회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총신대 교수이셨던 박건택 교수님의 여러 종류의 칼뱅 원전 번 역 작품을 기초로 합니다. 부흥과개혁사 칼뱅 총서는 칼뱅의 책들이 도서관 및 개인과 단체의 서재에 꽂혀 활용되기를 소망했던 박건택 교수님의 지난 30년간의 도전 정신과 열정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2018년 부흥과개혁사 창립 2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교회에 칼뱅 르네상스가 도래하기를 소망하며……. 백금산 목사

발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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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

1. 운명의 승부사 고등교육을 마친 칼뱅은 에라스무스(1466/69-1536)와 기욤 뷔데(14671540)를 목표로 두고 인생을 설계했다. 그러므로 칼뱅의 학교 교육과 사회 섬 김은 당연히 기독교 인문주의의 틀 속에 있었다. 칼뱅이 부친의 뜻에 따라 받 은 신학 예비 교육(콜레주 몽테귀)과 법학(오를레앙과 부르주 대학)은 정확 히 앞의 두 인물의 족적을 느끼게 한다. 에라스무스는 콜레주 몽테귀 출신이 요, 뷔데는 드물게 법학에 관심을 둔 인문주의자였다. 본래 기독교 인문주의의 방향은 한편으로 헬레니즘의 지혜를 추구하고 다 른 한편으로 유대-기독교의 계시를 파악해 저무는 중세 서구문명에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에라스무스는 오랫동안 이 영역에서 엄청난 작업을 수행 했는바, 키케로와 세네카의 전집뿐 아니라, 성경 원전 편찬을 말하지 않더라 도, 크리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서들을 편찬함으로써 그 방면에 타인이 손댈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칼뱅이 당시 인문주의 사회에 명함을 내 놓아야 했던 시기에 에라스무스는 죽음을 얼마 남겨 두고 있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 중 하나였던 네덜란드 인문주의자는 칼뱅이 따라가야 했던 이 정표 같은 존재였다. 칼뱅의 처녀작인 『세네카 ‘관용론’ 주석』(1532)은 저자가 대학 캠퍼스를 떠나면서 자신의 인생의 운명을 시험한 일종의 출사표였다. 그는 에라스무스 의 견해에 따라 세네카의 『관용론』을 선택해 자신의 운을 시험했다. 그는 이 야심작을 자비로 출판하면서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했다.1) 이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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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자신의 재정 상태를 만회해 보겠다는 의미의 의 지적 표현은 아니다. 물론 그 자신이 그런 뉘앙스를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 정적인 운명의 고사를 담고 있는 카이사르의 이 말을 경제적 궁핍의 타개를 꿈꾸는 젊은이의 다소 무모한 도전으로 본다는 것은 그간의 칼뱅의 학문적 형성 과정을 하찮은 수사학 연구로 전락시키는 일일 것이다. 설령 칼뱅이 친 구들에게 자신의 빚쟁이 처지의 긍정적인 전환에 대해 단순한 농담으로 암시 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도 그런 사실만을 인정하기에는 이 고사가 지니는 의 미가 너무 크다. 따라서 칼뱅의 이 말에는 그 이상의 더 큰 의미가 있다. 먼저, 칼뱅은 에라 스무스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당시 그 영역의 최고봉이 요구한 세네카의 『관 용론』을 주석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에라스무스는 『관용론』을 두 번씩 편찬해 내면서 누군가가 세네카의 이 책을 주석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 다. 사실 고전을 원문 고증본 형식으로 새롭게 소개하는 것은 그가 해 온 일 이지만 그것을 통속어로 번역하고 주석하는 일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 일 은 다음 세대 사람들의 몫,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 그의 뒤를 따르려는 열정적 인 인물들의 몫이었다. 한 세대도 훨씬 뒤진 칼뱅은 이 작업에 착수하면서 무 명의 지식인이 인문주의 세계에서 명성을 얻으려는 야심을 솔직히 밝힌다.2  )   다음으로 칼뱅은 네덜란드 인문주의자에게는 없는 무엇을 제시하고 싶었 다. 칼뱅이 에라스무스보다 뷔데를 더 강조하고 싶어 한 것은 사실이다. 그것 은 분명 프랑스 인문주의자가 네덜란드 인문주의자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도, 민족주의적인 정서 때문도 아니다. 물론 칼뱅에게는 1인자보다 2인자에게 관 심을 더 기울이는 성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에라스무스와 뷔데와의 관계 외에 그는 키케로보다 세네카를 위해 글을 썼고,3  )   훗날에도 아우구스티누스 보다 크리소스토무스를, 루터보다 멜란히톤을 심정적으로 가까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보다는 전자들에게 없는 것이 후자들에게 있었 기 때문에 그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학문적 공헌과 가능성을 타진하려 한 것이 그의 숨겨진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것이 지식 세계의 학문 방 법론이 아닌가? 그렇다면 에라스무스에겐 없고 뷔데에게 있는 것은 무엇일 까? 그것은 법학적 인문주의다. 세네카의 『관용론』을 주석하면서 칼뱅이 드 러낸 것이 바로 이것이다.4  )   1  )   『칼뱅 서간집 1』, 37. 2  )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헌정 서한, 『칼뱅 서간집 1』, 32. 3  )   칼뱅은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밝힌다(『칼뱅 서간집 1』, 33). 4  )   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솔로몬, 2013, 37-5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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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에게 법학적 문헌 연구가 약하다는 것은 그의 헤브라이즘 계시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엔키리디온』(1504)에서 기독교 가르침의 중심 을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둠으로써 앞 시대의 데보티오 모데르나의 영성 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영적 전투를 치르는 기독교 병사에게 일종의 지침서 로 제공한 이 책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목표로 삼고 나머지 모든 세상 사람 과 사물은 수단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목적과 수단의 뒤바 뀜이 온 기독교 세계의 재앙임을 지적한다. 또한 『우신예찬』(1511)에서 이 재 앙의 모습을 기독교 유물론으로 묘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먹고사는 수 많은 직종의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조롱했다. 그가 저물어 가는 중세 문명 에 치유책으로 제시한 것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다. 그는 유사 한 치유책을 헬레니즘의 지혜에서도 발견했다. 사실은 이 고전 읽기의 결실 이 먼저 선행되었다. 그는 고전에 나타난 지혜로운 글들을 통해 당대의 야만 을 깨우칠 목적으로 격언들을 모아 일종의 모음집을 출판했는바(『격언집』, 1500), 그의 의도는 맨 앞에 놓인 첫 번째 격언이 입증한다. 그것은 여러 현 자들이 공통적으로 한 말인 “친구들은 모든 것을 공유한다”이다.5  )   에라스무 스는 이 첫째 격언에서 6  )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고전의 동질성을 피력한 다. 모든 사람이 재산을 공동으로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말이다. 그 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가 원했던 사회라고 지적하고, 그를 따르는 그리스 도인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 엄청난 아이러니라고 여겼다. 한편 뷔데의 공헌은 시민법 자료집에 대한 문헌학적, 언어학적, 역사적 연 구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고대 자료에 담긴 경제사회적 실재들을 일종의 고고학적 관점으로 찾아내는 것이다. 당연히 칼뱅 은 이 연구에 가담했고 그 결과로 에라스무스를 문학의 두 번째 총아로 밀어 냈다.7  )   마지막으로, 칼뱅의 카이사르의 고사 인용에는 숨겨진 또 다른 야심이 있 다. 그것은 정치철학자 내지는 책사에 대한 야심이다. 오버만은 이 점을 잘 지 적한바 있다.8  )   하지만 이 야심을 성취하기에는 준비할 것이 더 있었다. 칼뱅 5  )   Erasme de Rotterdam, Les Adages, Paris, Les Belles Lettres, 2013, 50. 6  )   에라스무스는 총 4,151개의 격언을 모아 놓았으며, 그 가운데 50개의 격언 속에서 그리스도를

언급한다(op. cit., v. 5, 245). 7  )   COR 편자는 alterum decus를 달리 해석함으로써 이 입장을 반대하지만, 뷔데의 학교에서 자신

의 학문을 성취한 칼뱅에게 이런 뉘앙스는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8  )   Cf. Heiko A. Oberman, “Initia Calvini: The Matrix of Calvin’s Reformation”, in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Calvin as Confessor of Holy Scripture, W. H. Neuser (ed.), Eedmans, 1994, 11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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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기독교 인문주의자로서 여전히 자신의 문명의 두 기원을 융합하려 했으 나 그의 종교/신학적 입장은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철학은 데보티 오 모데르나와 에라스무스를 잇는 『그리스도의 모방』 정치학을 수용할 수 없 었을 것이다. 칼뱅이 유대-기독교 계시에 대한 설명으로 방향 선회한 것을 세 네카의 『관용론』 주석의 성패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이유는 없다. 물론 그의 운명의 첫 승부수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야심이 꺾인 것은 아니다. 다만 유 명한 스토아 학자의 짧은 책의 주석만을 쓴 저자로서는 중세 기독교 문명의 위기 앞에서 세상을 바꿀 지식인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했을 뿐이다. 당시의 통치 이념인 종교와 신학을 다루지 않고서는 정치적 책사의 역할을 담당한다 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9  )   칼뱅은 자신의 문명의 다 른 쪽 기원을 살펴야 했다.

2. 계시의 해설가 칼뱅은 고전 읽기와 동시에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고전 읽기에는 법학이 있었고 이 학문의 영역 속에서 그의 신학 연구가 병행되었다. 따라서 칼뱅은 이미 루터의 사상이 프랑스에 스며든 오를레앙 시절 기독교가 무엇인 지에 대한 질문을 교회법 연구를 통해 던졌고, 부르주 시절의 로마법 연구를 통해 그의 정치 신학으로까지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후, 칼뱅은 이제 유 대-기독교의 계시에 대한 해설로 방향을 돌렸다. 그가 시도한 신학의 첫 작 업의 주제는 ‘죽음’으로서, 사후 영혼의 상태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가 쓴 『프 시코파니키아』 10  )  는 그의 첫 인문학적, 법학적 작품 출판 이후 2년 여 만의 결실이다(1534, 미출판). 이것은 루터의 개혁적 발견으로 볼 수 있는 종교개 혁 신앙으로의 회심과 상관없이 시도한 기독교 신학의 이해를 위한 조촐한 시도다. 칼뱅에게는 두 가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6세에 일 찍 여읜 어머니의 죽음과 영혼불멸 사상의 지지요, 다른 하나는 당시 무정부 주의를 대변하는 것 같은 재세례파의 입장에 대한 조사다. 따라서 정치의 주 변 학문인 법학 연구가로서 칼뱅은 신학적 확신에 따른 무정부주의자들에 대 한 입장을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에는 다양한 폭력적

9  )   칼뱅의 앞 세대에서 활동한 마키아벨리와 사보나롤라의 경우가 정반대의 경우를 대변한다. 10  )   이것은 『영혼 수면론 논박』으로 번역되어 『칼뱅작품선집 2』, 33-146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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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는 비폭력적 반체제 인사들이 있었다. 독일에서 일어난 농민들, 뮌스터 폭도, 천년왕국론자들과 스위스의 비폭력 재세례파에 대한 종합적인 인식이 아직 부족했던 칼뱅은 이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 그들의 신학적 입장 가운데 하나를 계시 이해의 일환으로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도 칼뱅은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충동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아마도 여러 사람에게 문의했을 그의 원고에 대한 평가는 오직 31세 연상인 볼프강 카피토(1478-1541)의 답신에만 남아 있다.11  )   이미 호세아 주석을 쓴 바 있는 이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는 칼뱅의 첫 번째 신학 저술에 대해 결코 호평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독일 사회에서 재세례파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이뤄졌음을 암시하면서, 출판을 자제하고 차라리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해설 로 방향을 돌리기를 권한다.12  )   신학 세계에 처음 머리를 내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초보 신학자에게 희망적인 언급을 잊지 않은 채 말이다. 칼뱅은 자신의 첫 신학 저서에서조차 실망스런 결과를 맛보고 말았다. 그럼에도 책 출판에 대한 그의 집념은 계속 이어지는데, 그는 이 작업을 『기독교 강요』와 함께 출 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13  )   하지만 그것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정작 그 책이 햇빛을 본 것은 1542년이다.14  )   칼뱅이 새로운 신학(루터의 신학)으로 갑자기 회심한 conversio subita 것은 그가 기독교 신학을 해설하기 위해 절차탁마하던 1534년 어느 때쯤으로 보인다.15  )   다른 여러 이론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에 칼뱅의 회심은 자유의지에 대한 기 성교회와 기독교 인문주의의 입장에서 루터의 개혁적 발견으로의 전환이다. 그가 자신이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에서 루터의 노예의지로 옮겨 가는 최종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두메르그가 말한 “인 종적인” subite 회심은 일리 있는 해석이다. 칼뱅이 콜레주 몽테귀 시절부터 겪 어야 했던 구원에 대한 내면적 갈등은 자신의 모든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고 오직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는 노예의지의 수용으로 결말을 짓게 된 것이다. 그래야 그의 『기독교 강요』의 인간 의지에 대한 루터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1  )   『칼뱅 서간집 1』, 63 참고. 12  )   칼뱅은 어쩌면 카피토의 조언을 매우 귀담아 들었다. 『왕께 드리는 서한』은 이 사실을 입증

한다. 13  )   『칼뱅 서간집 1』, 75 참고. 14  )   이 책은 종말론이 들어 있지 않은 『기독교 강요』 초판과 1539(L)/1541(F)년판의 일종의 보완

물이다. 15  )   Psychopannychia를 쓰기 전인지 후인지, 그가 그동안 받아온 성직록을 포기한 날(1534년 5월

4일) 이전인지 이후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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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독교 강요』의 출판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칼뱅은 지식 세계나 정치 주변 세계에서 아직 명성을 얻지 못했고 아버지와 유사한(아버 지보다는 더 높은 지위지만) 직업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16  )   유대-기독교 계 시의 해설자가 되는 것과 그의 회심 경험은 별개의 일이다. 기독교 인문주의 자로서 칼뱅은 비록 에라스무스에게 없는 뷔데의 법학적 인문주의를 제시하 긴 했지만, 에라스무스에게 있는 기독교 계시 해설을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칼뱅의 종교 경험은 계시 해설서를 준비하면서 얻어진 것으로 보인 다. 신앙의 본질을 다루라는 카피토의 권면을 어쩌면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칼뱅은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했고 그 회심 내용을 담은 계시 해설서를 내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는 그 신학의 내용이야 어찌됐건 간에 사회의 변화 를 촉구하는 어느 회심한 기독교 인문주의자의 치국을 위한 탕평책이다. 인 문주의 세계에는 이런 시도를 한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이 추구한 지 식에는 인문학, 법학, 신학이 모두 포함되었다. 물론 『기독교 강요』가 우선적 으로 계시의 해설서임에 틀림없으나 그 안에는 칼뱅이 생각한 계시와 법학적 인문주의와의 융합이 뚜렷이 들어 있다. 이런 점에서 미에의 말은 올바른 지 적이다. “1534-1535년에 작성된 1536년의 라틴어 『기독교 강요』 초판에 나 타난 이[신학] 지식은 과연 전적으로 새로운 독학 문화를 매우 빨리 형성한 한 회심자의 독서가 가져온 결과일 뿐일까? 분명 아니다. 교육 과정(법학은 그 중 하나일 뿐임)의 인문주의적인 개혁은 나름대로 모든 분야를 포함하며 거기에는 신학도 들어 있다. 신학은, 새로운 이상적인 웅변술(이것이 국가와 교회와 대학을 동시에 갱신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의 함양을 목적으로 삼 은 일반(뷔데가 말했듯이 “백과사전적”) 교양 교육을 위해, 고대 언어들의 연 구를 돕는 교육 과정의 일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17  )   모든 것이 이 과정 속 에 자리 잡았고, 바로 이것이 당시 고대 질서의 옹호자들을 조급하게 만들던 것이었다.” 18  )   칼뱅은 교회법 연구를 통해 신학을 했고 그 신학은 사색적이라 기보다 실천적이고 수련적인 경향이 강했다. 비록 칼뱅이 멜란히톤의 『신학 총론』(Loci communes, 1521)을 통해 얼마간 스콜라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기독교 강요』 초판들은 여전히 인문주의적인(심지어 르네상스 인문주 의적인) 개혁의 색채가 짙다.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저물어 가는 문명에서 인 16  )   젊은 날의 절친인 프랑수아 다니엘은 칼뱅에게 주교 밑에서 법률 일을 맡을 것을 조언했다

(『칼뱅 서간집 1』, 55 참고). 17  )   칼뱅이 히브리어를 공부한 곳은 뷔데가 창설한 콜레주 루아얄에서다. 18  )   O. Millet, “Introduction.” F/1541/M,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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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형성의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이념을 중시하는 고대 문화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3. 소명에 “응답하는 자아” 앞에서 보았듯이 칼뱅의 종교 경험은 다음 두 가지 것과 관련한다. 즉 자신 을 의롭게 할 자유의지의 완전 부인과 직업적 소명의 선택이다. 칼뱅의 갑작 스런 회심은 그의 내적 삶과 외적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가 훗 날 『시편 주석 서문』(1557)에서 설명하는 이 회심의 의미는 결국 기독교 세 계를 개혁하라는 예언적이고 목회적인 소명으로 귀결한다. 개혁자가 되라는 이 특별 소명에 응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 은 당시 칼뱅 자신에게도 모호했을 것이다. 그 앞에는 앞서 활동했거나 하고 있는 많은 개혁자가 있었다. 아주 멀리는 마키아벨리와 사보나롤라, 얼마 전 까지는 에라스무스와 뷔데, 그리고 근자에는 루터, 부처, 카피토, 그리고 일찍 죽은 츠빙글리 같은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응답하는 자아”는 이 당대 의 예언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성경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미래의 제네바 개혁 자의 예언자적 자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리쾨르의 “명령받은 자아”라는 표현 을 끌어오는 것이 부당하지 않을 것이다.19  )   20세기 프랑스 철학자의 부름 받 은 그리스도인의 자아상에 대한 분석은 어쩌면 16세기 제네바 개혁자에게서 “자신에 맞서는 칼뱅”, “불안한 두 칼뱅”, “자기성찰의 칼뱅”을 찾아내고자 시도한 역사가들의 노력을 지지할 것이다.20  )   리쾨르의 분석을 이용하자면 칼 뱅의 갑작스런 회심에는 선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아, 그리스도의 형상에 로의 초대, 내면의 스승 그리고 양심의 증언이 들어 있다. 이처럼 칼뱅의 내면 성을 관통하는 초심으로의 회귀와 직업적이자 목회적인 소명에 따른 외적 삶 사이에는 평행적 삶 parallel life 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칼뱅의 책사로서의 면모는 초기 『기독교 강요』의 출판 과정을 통해

19  )   Gifford Lectures X(1986)의 제목은 “Le soi mandaté: O My Prophet Soul!”이다. Ricoeur는

앞선 Gifford Lectures IX에서 리처드 니버의 Responsive Self라는 표현을 차용했고 이제 이어 지는 강연에서 그는 “명령받는 자아”라는 자신의 표현으로 소명에 응답하는 양심에 대한 4단 계를 전개한다. Cf. Paul Ricoeur, Amour et justice, Paris, 2008, 43-110. 20  )   Suzanne Selinger, Calvin against Himself. An Inquiry in Intellectual History, Hamden, 1984;

Wi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th Century Portrait, Oxford, 1988; Denis Crouzet, Jean Calvin. Vies parallèles, Paris, Fayard,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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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그는 이 책을 프랑스 왕에게 헌정함으로써(“헌정 서 한”, 1535) 박해받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의 변호인으로 자처했다. 칼뱅은 자신을, 자신이 발견한 참된 종교/경건 21  )  을 선량한 프랑스인들에게 교육하 는 자임을 밝히고, 그런 경건한 사람들이 당하는 박해에 대해 관용을 베풀기 를 탄원한다. 이것은 명백히 그가 세네카의 책을 주석하면서 의도했던 것과 동일하다.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은 지금은 국가의 종교적 통치 이념에 손 대고 있다는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 국가에서 매우 기독교적인 왕에게 가장 기독교적인 교리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연의 맹목적인 빛, 자유의지, 구원을 위한 공로로서의 행위”를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 를 보내 주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강조한다.22  )   칼뱅의 『기독교 강요』 초판(1536)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더 체계적으 로 밝혀 줌으로써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쓰였다. 하 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루터 이단”에 대한 옹호의 수준이다. 십계명, 사도 신경, 주기도문을 해설하고, 바른 성례와 그릇된 성례를 구별하며, 세상의 권 세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명한 것이 전부다. 다시 말해 칼뱅은 율 법과 복음(그리스도)의 관계, 믿음의 의미와 대상, 세례와 성찬 외에 잘못된 5가지 성례들을 주 내용으로 삼아 교리 전반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이런 바른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로워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국가의 권세 앞에서 어 떻게 살아야 할지를 지적한 것이다. 다음으로, 칼뱅의 처녀작의 실패와 비교할 때 상당한 성공을 거둔 이 교리 소책자는 저자로 하여금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제네바에 사역자가 되게 해 주 었다. 27세의 나이에 겨우 책 두 권을 쓴 젊은이가 종교개혁 진영으로 갓 넘 어온 인근 자유 도시의 종교 교육 담당자가 되었다.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의 저자가 한 주교의 법무 관리인 정도의 직무에 등용될 가능성을 열었을 뿐 이었다면, 『기독교 강요』의 저자는 한 도시의 보조 책사로 부름 받은 것이다. 물론 20세 연상의 파렐이 주도했지만 활동의 무게는 점점 칼뱅 쪽으로 기운 다. 게다가 이 젊은이가 상대해야 할 종교개혁 진영의 당시(1536-1538) 주 역들은 대부분 연륜도 깊었고 지원 세력도 많았다. 당장 제네바를 포함한 프 랑스어권 스위스 지역은 대부분 베른(탁월한 인물은 없으나 정치적으로 막 강한)의 영향권에 있었고, 프랑스 내에 이 새로운 복음 운동을 지지해 줄 군 주는 발루아 Valois 가문의 남매(프랑수아 1세와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정도였

21  )   Religion과 piété는 칼뱅이 종종 혼용하는 용어다. 22  )   본서 “헌정 서한”, 40-4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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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독일 지역과 독일어권 스위스는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개혁가들의 명성도 높았다. 26세와 12세 연상의 루터와 멜란히톤(이상 독일) 은 말할 것도 없고, 18세와 31세 연상의 부처와 카피토(이상 스트라스부르), 14세와 21세 연상의 그리나이우스와 미코니우스(이상 바젤), 츠빙글리의 후 광을 입은 4세 연상의 불링거(취리히)가 그들의 면면이다. 이들은 통치자를 섬기며 생계를 유지하는 단순한 교사들이 아니었다. 이들 은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함께 이 진영 전체의 통치 이념을 꿈꾸는 자들이 었다. 이런 연합은 1529년에도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에서 시도된 바 있다. 비 록 실패로 끝났지만 프로테스탄트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지역적으로 나뉘지 않고 가톨릭 동맹에 대항할 수 있는 일종의 제국적인 종교가 되기를 원했다. 이제 칼뱅도 이 반열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일단 자신이 몸담고 있 는 자유 도시에 종교적 통치 이념을 제공해야 하는 책사가 된다. 우리는 칼뱅 의 명령받은 자아상이 선지자적 소명과 개혁자로서의 직업적 소명을 동시에 아우르는 것으로 여긴다. 그의 삶을 “평행적 삶”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정치-종교적 책사: “언약의 교섭자” 1536년 5월 14일 이후 스위스 종교개혁 진영은 루터적인 입장인 비텐베 르크 일치를 수용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일주일 후 제네바는 파렐과 더불 어 종교개혁 진영으로 넘어오기로 결정하고 몇 달 후 지나가는 칼뱅을 붙들 었던 것이다. 스위스 개혁 도시들은 루터교회와의 연합을 놓고 수많은 회의 를 거듭하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 신학자들은 비텐베르크 신조를 프로테 스탄트의 공통 신조로 삼고자 노력했다. 칼뱅도 그의 포섭 대상이었다. 칼뱅 의 초기 루터적인 성향이 부처를 만족시킨 듯하다.23  )   하지만 칼뱅은 훨씬 협 소한 문제로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피에르 카롤리와 심한 교리 논쟁 을 벌여야 했다. 『기독교 강요』 초판은 교리적으로 좀 모호했던 모양이다. 카 롤리는 베른을 등에 업고 칼뱅을 아리우스자로 몰았다. 칼뱅은 서둘러 『기독 교 강요』 초판의 프랑스어 번역을 시도했다. 비록 완역이 아니라 요약 번역 이지만, 거기서 그는 자신의 삼위일체 신학을 온전히 표현했다.24  )   비록 이 신

23  )   『칼뱅 서간집 1』, 89-90 참고. 24  )   『칼뱅 서간집 1』, 13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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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논쟁이 칼뱅에게 힘겨운 시련을 가져다주고 법정 소송을 거쳐 승소하며, 훗날 세르베투스 사건으로까지 이어지지만, 당시 제네바의 더 긴박한 일들에 비하면 이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칼뱅은 프랑스어로 된 이 『제네바 신앙교육 서』(1537)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의혹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라틴어로 재 번역하고(『카테키스무스』, 1538), 그 헌정 서한을 통해 제네바가 어떤 종교적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할지를 밝혀 주어야 했다. 칼뱅은 “제네바 목회자들의 이름으로 복음을 존중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 는 헌정 서한에서 목회자가 단순한 설교자가 아니라 “도시의 종교”에 관여 하는 직무의 수행자임을 밝힌다.25  )   그는 파렐이 작성한 『제네바 신앙고백서』 를 도시의 모든 시민이 서약하도록 시의회에 제안하고 성례를 통해 엄격한 훈련을 시키려 했다. 칼뱅은 여기서 제네바 사람들의 세례와 구약의 언약 사 상을 연결시켰다. 이스라엘 백성의 할례 언약은 모세, 요시야와 아사, 에스라 와 느헤미야로 이어지면서 갱신된다. 이런 언약의 갱신은 고대 국가에서도 서약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바 어떤 국가도 종교적 기반 없이 건설될 수 없었 다. 이렇게 칼뱅은 갓 태어난 제네바 공화국의 종교를 새 『신앙고백서』와 『신 앙교육서』의 토대 위에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제네바 시의회가 이를 받아들 였으며, 이 구약적인 통치 계약을 반대하는 이는 곧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 되었다. 이렇게 칼뱅과 파렐은, 제네바 시의회와 더불어, 하나님과 제네바 백 성 사이에 언약 갱신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들 자신을 “언약의 교섭 자” internuncii foederis 라 불렀다.26  )   하지만 이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칼뱅은 1538년 부활절을 계기로 수찬 정지를 통한 사도적인 훈련을 실시하고자 했으 나 시당국의 반대에 부딪혀 오히려 도시를 떠나야 했다. 『기독교 강요』 초판의 성공은 얼마간의 돈과 명성에도 있겠지만 그보다 저 자에게 책사의 길을 제공했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 활동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한 도시국가의 제반 문제를 아우를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신학은 다방면으로 보충될 필요가 컸다. 잠시 사역을 멈춘 칼뱅은 바젤에 머물며 조용한 연구 생활을 구상했다. 칼뱅에게는 명성을 얻 고자 하는 야심과 동시에 평온한 은둔적 삶의 욕구도 있었다. 어쩌면 후자가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칼뱅은 평생 자신이 원하는 도시를 스스로 선택한 경 우가 거의 없었다. 스트라스부르 역시 그랬다. 25  )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간에 분명 우리는, 잘 손질한 설교로 하루 일과를 마쳐야

만 할 정도로, 우리의 직무가 작은 목적에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칼뱅 서간집 1』, 177). 26  )   『칼뱅 서간집 1』,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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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이 책의 논지

1  )

독자들이 이 책에서 더 나은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나는 독자들이 취해야 할 유익을 간단히 보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방향에 목적을 맞춰야 할지를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 다. 비록 성경이 거기에 아무것도 첨가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가르침을 담 고 있다- 우리 주님이 거기에서 자신의 지혜의 무한한 보화들을[잠 2:2-4] 펼 치고자 하셨기 때문에-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매우 정통하지 못 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거기서 무엇을 찾아야 2  )   할지 알기 위해, 또한 이리저 리 방황하지 않고 확실한 방법을 붙들기 위해, 그리고 성령이 자신을 부르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모종의 안내와 기교가 필요하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하나님의 풍부한 조명을 받은 사람들 3  )  의 직무란 이 영역에서 단순 한 사람들을 돕고, 말하자면, 그들에게 손을 빌려 주어 하나님이 그분의 말 1  )   Argument du présent livre. 이 프랑스어판 저자 서문은 그 후 모든 프랑스어판들에 나타나다

가 마지막 판(1560)에서는 사라진다. 한편, 1539년 라틴어판의 저자 서문에 해당되는 Epistola ad Lectorem(CO 편집자들이 이것을 Ioannes Calvinus lectori라고 쓴 것은 잘못이다[CO, 1, 255-256])은 1559년판의 Ioannes Calvinus lectori에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분량만 배로 늘었 다(CO, 1, 23-24; OS, III, 5-7). F/1560의 저자 서문은 L/1559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이를 확인해 줄 것이다. 2  )   cercher(F/1541/M)는 chercher(F/1541/P)의 피카르디 사투리로서 칼뱅 프랑스어에 종종 등

장한다. 3  )   1541년 제네바에 세워지는 교회의 네 직분 가운데 하나인 교사는 박사와 같은 단어다. 칼뱅은

성경 주해의 권위를 교회 박사들에게 주는 가톨릭 체제를 따르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성경 해석 의 능력이 누군가에게 은사로 주어지는 것을 인정한다. 당시 하나님의 교회에서 박사의 칭호가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 칭호의 정당성을 볼프강 카피토가 인정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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씀으로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의 요점 4  )  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을 통해 기독교 철학 5  )  에 내포되어 있는 중요하고 으뜸가는 주제들을 취급함으로써만 더 잘 이뤄질 수 있다. 사실 이것을 이해 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이 3개월에 얻을 유익을 하루에 얻 을 준비가 될 것이다. 이는 그가 각 말씀 sentence 을 어디에 관련시켜야 하는지 를 대강 알며 자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측정할 잣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의 교리로 가르침을 받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을 이런 방식 으로 돕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보면서, 주님이 내게 주신 능력을 따라 이 일에 힘껏 전력했고 바로 이런 목적으로 이 책을 작성했다. 나는 먼저 이 책을 라틴어로 썼는데,6  )   이는 어떤 민족에 속했건 이 책이 연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다음으로 나는 우리 프랑 스 민족에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뭔가를 전달하길 바라면서, 이 책을 또 한 우리의 언어로 번역했다.7  )   나는 감히 이 책을 지나치게 크게 칭찬하지 않 으며 또 이것을 읽고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밝히지 않겠다. 이는 내가 내 작품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 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과 같이 약속할 수는 있다. 그것은 이 책 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성경을 제대로 바르게 이해할 통로를 제공하는 하나의 열쇠요 시작과도 같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8  )

4  )   somme=sommaire. 멜란히톤은 기독교 교사의 의무란 성경에서 출발해 기독교 교리의 요점을

일반 신도에게 제시하는 데 있음을 지적하고 그 방법의 모델로 루터의 『대소 요리문답서』를 들 었다. 5  )   칼뱅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니콜라 코프의 파리 대학 총장 개강 연설(『칼뱅작품선집 2』,

19-31)에서 philosophia Christi는 이미 에라스무스가 기독교 교리의 본질로 지칭한바 있다 (Paraclesis, 1516). 산상설교에 초점이 맞춰지는 이 철학은 스콜라 신학의 합리적 추상에 맞서 삶의 지혜로 귀결한다. 칼뱅의 경우 기독교 철학은 산상설교의 범위를 넘어 구약을 포함한 성 경의 통전적인 이해를 통해 바른 경건을 세우는 데 있다. Cf. V. Mellinghoff-Bourgerie, “De la philosophie du Christ d’Erasme à celle de Calvin”, in Erasme et les théologiens réformés, 2005, 99-126). 6  )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totam fere pietatis summam et quicquid est in doctrina salutis

cognitu necessarium complectens, Basilae, 1536. 7  )   칼뱅은 1541년 프랑스어판 제목으로 라틴어 초판 제목 앞부분을 그대로 번역했다.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 en laquelle est comprise une somme de piété et quasi tout ce qui est necessaire à congnoistre en la doctrine de salut, Genève, Michel Du Bois, 1541. 『기 독교 강요: 구원 교리에 있어 알아야 할 필수적인 거의 모든 것과 경건의 요체가 내포됨』. 8  )   칼뱅은 1538년에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집의 프랑스어 번역을 시도했다가 중단했는데(『칼뱅 서간집 1』, 262 참고), 이는 아마도 번역의 대상을 자신의 1539년 『기독교 강요』로 돌렸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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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우리 주님이 몇 가지 주석을 쓸 수 있는 기회와 방식을 주셨기 때 문에,9  )   나는 할 수 있는 최대의 간결함을 사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여 기서 기독교에 속한 거의 모든 신조를 추론한 이상, 길게 주제를 벗어날 필요 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진리와 건전한 교리가 하나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진대, 나는 감히 이 책을 통해-실로 칭송이 그 분께 돌려져야 마땅하기에, 이 책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 면서-내가 생각한 것을 대담하고 소박하게 표명하겠다. 그것은 내가 주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읽고 부지런히 기억에 새겨 두라고 권면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먼저 기독교 교리의 요점을 갖길 바라고 나아가 신구약 성경 읽기에서 큰 유익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말이다. 이렇게 한다 면 그들은 내가 그들을 말로 결코 속이려 하지 않았음을 경험으로 알 것이다. 누구든 [이 책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한 구절이 다른 구절을 더 쉽게 설명해 줄 것이라고 소망하면서 낙담하지 말고 더욱 전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내가 인용하는 성경의 증언들을 살피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라 고 권해야 할 것이다.10  )

9  )   바젤의 인쇄업자 오포리누스(1537년 3월 25일 칼뱅에게 주는 편지)에 따르면 칼뱅은 이미 제

네바 초기 사역 때 로마서를 주해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당신이 거룩한 바울 서신을 큰 칭송 과 유익으로 강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칼뱅 서간집 1』, 118). 칼뱅은 1539년 라틴어판 『기독교 강요』 서문을 쓴 지(1539년 8월 1일) 두 달 후 로마서 주석을 출간했다. 10  )   칼뱅은 난외주(MN)에 성경 구절을 적어 두었는데 역자는 일러두기에서 말했듯이 그것을 본

문 해당 구절로 이동하고 특별한 경우에만 각주 처리했다.

저자 서문: 이 책의 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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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서한: 왕께 드리는 서한

1  )

1. 박해받는 자들을 위한 변호 2. 프로테스탄트 신앙 변증 3.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 및 관습 4. 진정한 교회 5. 결론적 충언

매우 고귀하고 매우 권세 있고 매우 저명한 군주이시며, 매우 기독교적인 프랑스의 왕이요 군주이자 최고 통치자이신 프랑수아 [폐하]께 장 칼뱅이 하 나님 안에서 평화와 안녕을 기원합니다.

[박해받는 자들을 위한 변호] 매우 고결하신 왕이시여, 제가 이 책 2  )  을 쓰는 일에 전념하던 초기에는

1536

폐하께 바칠 뭔가를 쓰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의도 는 조금이라도 하나님에 대해 선한 마음을 품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기본 골 격을 가르쳐서 그들을 참된 경건으로 교육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저는 저의 이 수고를 통해 우리 프랑스인들을 돕고자 했는바, 그들 중 많은 수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굶주리고 목말라하는 것과, 그분에 대해 바른 지 식을 받아 본 자들이 거의 없음을 보고 있습니다.3  )   이러한 제 생각은 이 책에 서 쉽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순한 교육 형식에 알맞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하의 왕국에서 부당한 자들의 포학함이 너무도 커서 모든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여지를 남겨 두지 않을 정 도임을 보면서 저는 이 책을, 먼저는 제가 가르치고자 의도했던 사람들에 대

1  )   이 헌정 서한은 여러 사본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텍스트는 F/1541/P의 뒤부아 판이

다. 최근에는 보르도 사본에 근거한 텍스트도 출판되었다(F/1541/M). 별도의 책으로 출판된 사본(S: Epistre au roy de France, Genève, 1541) 외에도 여러 이본(異本)이 있으나 번역상 크 게 문제가 되는 것만 언급하겠다. 2  )   “기독교 강요라는 제목의 제 책”(S). 3  )   “프랑스는 거의 전역에서 심하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선생을 갖지 못한 채 부

지런히 진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1525년 1월 20일 자로 Lambert d’Avignon이 작센의 선 거후에게 보낸 편지, Cf. Herminjard, I, 113). 1534년에는 파렐이 이미 10여 년 전에 출판한 Summaire et briefve declaration의 재판을 찍어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알고자 갈망하 는 모든 이들에게” 헌정했다(Pann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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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육용으로, 또한 폐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 합하다고 여겼습니다. 오늘날 폐하의 왕국을 불과 칼로 어지럽히는 자들이 맹렬하게 분노에 치를 떠는 이 교리가 어떤 것인지, 폐하는 아셔야 합니다. 저는 이 교리의 요점을 이 책에 거의 포함시켰다고 고백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투옥, 추방, 재산 몰수, 화형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이 교리, 그들이 육지와 바다 밖으로 쫓아내야 마땅 하다고 외치는 이 교리 말입니다. 물론 저는 그들이 어떤 무서운 고발 4  )  로 폐 하의 귀와 심장을 채워 우리 입장을 매우 가증스럽게 만들었는지를 잘 압니 다. 하지만 폐하께서 관용과 아량으로 생각하셔야 할 것은 만일 누구든 기소 되기에 충분하다면 말이나 행동에서 무죄로 남을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 입니다. 설령 누군가가 제가 폐하께 설명 드리고자 애쓰는 이 교리에 대해 증 오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미 그것이 모든 신분 5  )  의 공통의 합의에 따라 정 죄되었고 재판에서 여러 번의 패소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해도, 분명 그 는 이 교리가 부분적으로는 적대자의 권세와 음모로 난폭하게 꺾였으며, 부 분적으로는 그들의 거짓과 속임수와 중상과 배신으로 말미암아 악랄하게 제 압되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교리가 변호되기 도 전에 잔인한 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억압이요, 폭력입니다. 이 교리가 이유 없이 반란과 해독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만이요, 배신입니다. 매우 탁월한 왕 이시여, 누구도 우리가 이것들에 대해 부당하게 하소연한다고 생각하지 않도 록, 이 교리가 얼마나 그릇된 중상으로 매일 비방되는지 폐하께서 친히 증인 이 되어 주십시오. 즉 그들은 이 교리가 모든 통치와 정부가 파괴되고 평화가 흔들리며 법이 폐기되고 영지와 재산이 분산되는 것, 즉 간단히 말해 모든 것 이 혼돈으로 뒤죽박죽되는 것을 지향한다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폐하는 극히 적은 부분만 듣고 계십니다. 사실 민중 가운데는 이 교리 에 대한 가공할 이야기들이 퍼져 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온 세상은 그 교리와 주창자들이 천 번 화형을 당하고 천 번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부당한 중상을 믿을진대, 그 교리가 그토록 온 세상의 미움 을 받는다 해서 놀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에서 모든 신분이 일치해 우리와 우리 교리에 대해 정죄하기로 담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

4  )   F: raportz, L: delatio. 쿠시(Coucy) 칙령(1535년 7월 16일)은 밀고자들에게 포상을 약속했다

(Cf. Isambert, Recueil général des anciennes lois, XII, 409). 5  )   F: estats, L: ordinum. 이 용어는 여기서 파리 신학대학과 파리 고등법원을 지칭한다(Millet).

헌정 서한: 왕께 드리는 서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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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를 재판하기 위해 구성된 사람들은 이런 열광적이고 빗나간 감정으로, 그 들이 집에서 가져온 견해 6  )  를 판결문으로 선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백이 나 확실한 증거로 입증된 자들 외에 아무에게도 사형 판결을 내리지 않는 한,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매우 잘 수행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무슨 범 죄인가요? 그들은 정죄된 이 교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교리는 어떤 법에 7  )   따라 정죄되나요? 이 교리를 부인하지 않고 참된 것으로 주장하 는 것이 변호의 요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는 입을 여는 것이 허락되 지 않습니다. 따라서 매우 저명하신 왕이시여, 제가 폐하께서 이 소송의 전모 를 알고자 하시는지 묻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지금껏 절제와 법적 진 중함보다는 아무런 법질서 없이 맹렬한 열정으로 황당하게 이끌려 온 이 소 송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태어난 나라로의 귀환을 청원하기 위해 여기서 애써 제 사적인 변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8  )   비록 제가 그 나라에 대 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는 그런 마음을 품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사정이 이렇게 된 이상 저는 그 나라를 빼앗긴 것을 크게 슬퍼하지 않습니 다. 오히려 저는 모든 신자의 공통된 소송 cause 이자 바로 그리스도의 소송을 맡고 있습니다. 오늘날 폐하의 왕국에서 너무도 온통 찢기고 9  )   짓밟혀 절망적 으로 보이는 이 소송 말입니다. 그것은 폐하의 의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분 명 몇몇 바리새인의 10  )   폭정에 의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여기서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됐건 이 소송은 매 우 어려운 상태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리스도의 진리가 사라져 없어 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적대자들의 권세가 그것이 수 치스럽게 감춰지고 매장되도록 만들었으며, 게다가 가련한 교회는 잔인한 죽 음으로 쇠약해지거나 추방으로 내쫓기거나 또는 위협과 공포로 놀라 감히 말 한마디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자기들이 흔들어 놓은 벽을 허물고 자기들이 시작한 파괴를 완성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익숙해진 분 6  )   F: conception, L: praeiudicia. 7  )   칼뱅은 왕의 칙령들과 루터를 정죄한(1521) 파리 신학대학의 준거, 그리고 고등법원의 기소 등

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의 법과 대조하려 한다. 8  )   칼뱅이 결정적으로 고향 누아용을 떠난 것은 1536년 초다. 쿠시 칙령은 귀환과 철회의 조건으

로 이단을 용납했다(Cf. Ordonnances des rois de France, Règne de François Ier, VII, 15331535, 248). 9  )   descirée(F/1541/P), deschirée(F/1541/M). 10  )   이신칭의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의 방편으로서 선행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을 이

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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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그런 광포에 맞서 변호하지 않습니다. 혹 진리에 매우 호의적으로 보이길 원하는 몇몇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 미숙한 11  )   사람들의 경솔함과 무지를 다소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합니 다.12  )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매우 확실한 진리를 경솔함과 무지라고 부르고, 우리 주님이 그분의 하늘 지혜를 전달해 주실 정도로 귀히 여기신 자들을 미 숙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면서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정도입니다. 매우 자애로우신 왕이시여, 이토록 정당한 변호에서 폐하의 귀와 마음을 돌 리지 마소서.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서 어떻게 유지될지, 그분의 진리 가 어떻게 영예와 존엄을 얻을지, 그리스도의 나라가 어떻게 온전히 머물지 와 같은 매우 중대한 문제에서 말입니다. 오, [이 얼마나] 폐하가 듣기에 합당 하고, 폐하가 결정하기에 합당하며, 폐하의 왕좌에 합당한 문제인지요! 왜냐 하면 자신의 왕국을 통치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의 참된 사역자임을 인식한다 면, 바로 이 인식이 진정한 왕을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 광을 위해 섬긴다는 목적으로 다스리지 않는 자는 통치가 아닌 강도짓을 행 사하는 것입니다[롬 13:3]. 하나님의 규, 즉 그분의 거룩한 말씀으로 다스려 지지 않는 나라에서 오랜 번영을 기대하는 자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이 없으면 백성이 흩어진다”(잠 29:18)고 기록된 하늘의 칙령 은 거짓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우리를 업신여기는 이 13  )   경 멸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관심 밖의 보잘것없 는 사람들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비 참한 죄인이요,14  )   사람들에 대해서는 멸시받고 버림받은 자들이며, 심지어 세 상의 오물과 쓰레기며, 아니면 더 비열한 어떤 말로 명명될 수도 있습니다.15  )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바, 하나님 앞 에서는 오직 그분의 긍휼-이것으로 우리는 아무런 공로 없이 구원을 받았습 니다-외에는 없으며(고후 10:17-18),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의 약함-즉 모두가 큰 수치로 여기는 것-외에는 없습니다(딛 3:5; 고후 11:30; 12:5, 9). 11  )   F: simple, L: imperitos. 12  )   왕의 누이인 Margurite de Navarre는 벽보 사건 때 많은 복음주의자들을 옹호했는바, 여기에

는 급진 세력들도 들어 있었다. 13  )   본래의 se는 [c]e(F/1541/P)와 le(F/1541/M)로 수정됨. 14  )   pecheus(F/1541/P), pecheurs(F/1541/M). 15  )   고전 4:13에서 끌어온 이 표현(excrementa mundi et omnium rejectamenta)을 부처는 파리

신학대학과 맞선 복음주의자들에 비유했으나, 칼뱅은 이것을 박해받는 성도들을 위해 사용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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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리는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 너머 높 이 무적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이 그리스 도를 왕으로 세우셔서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강물들에서 땅 끝까지 지배 하게 하셨으며(시 72:8), 그분의 입의 막대기로 땅을 내리침으로써(사 11:4) 그분의 힘과 영광으로 그것을 질그릇처럼 산산이 깨뜨릴 정도로 지배하게 하 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언자들은 그분의 통치의 위대함에 대해 예언하면서, 그분이 철과 청동처럼 단단하고 금과 은처럼 빛나는 나라들을 꺾으시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시 2:9; 단 2:32). 물론 우리의 적대자들은 우리가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운다고 비난하면서 반박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말씀을 사악하게 부패시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친히 우리의 고백을 읽으 심으로써 이 비난이 얼마나 사악한 중상일 뿐만 아니라 얼마나 뻔뻔스러운 파렴치인지 폐하의 분별력에 따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신앙 변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께 이 고백을 읽는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뭔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성 바울은 모든 예언이 신앙의 유추와 유비 16  )  에 부합되 길 원했을 때(롬 12:6), 성경의 모든 해석을 검증하는 매우 확실한 규칙을 말 합니다.17  )   만일 우리의 교리가 이 신앙의 규칙에 따라 검증받는다면, 승리는 우리 손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옷 입기 위해 모든 능력 을 벗어 버린 자들이라는 것, 그분으로부터 채움을 받기 위해 모든 재화를 비 운 자들이라는 것, 그분으로 말미암아 해방되기 위한 죄의 노예라는 것, 그분 에 의해 눈이 떠지기 위한 맹인이라는 것, 그분에 의해 다시 일어서기 위한 못 걷는 자라는 것, 그분의 지탱을 받기 위한 나약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외에, 그리고 그분만이 영화롭게 되고 또한 그 안에서 우리가 영화롭게 되 도록 우리의 모든 영광의 소재를 제거하는 것 외에 신앙에 더 잘 부합하는 것 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이런 유사한 것들을 말한다면, 우리의 적대 자들은 18  )   자연의 맹목적인 빛, 가식적인 준비, 자유의지, 의무 이상의 선행을

16  )   F: analogie et similitude de la Foi, L: fidei analogiam.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rationem

fidei(Vulgata). 10장 4.14.5. 부분과 11장 4.15.14. 부분 참고. 칼뱅은 이 말로 신앙의 본질을 의미하기도 한다(『칼뱅 서간집 1』, 64 참고). 17  )   mis(F/1541/P), mise(F/1541/M). 18  )   명백히 가톨릭 적대자들인 J. Cochlaeus(De libero arbitrio adversus locos communes Phil.

Melanchthonis, 1525)와 J. Eck(Enchiridion locorum omnium adversus Lutheranos, 1526)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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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신지식 1.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 2. 일반계시에 따른 신지식 3. 하나님의 일반섭리 4. 하나님의 특별섭리 5. 성경의 권위 6. 성경과 성령 7. 신지식의 목적

[신과 인간에 대한 지식]  참되고 확실한 지혜라 불리기에 합당한 우리 지혜 1  )  의 모든 총화는 거의

1536

다음 두 부분에 포함된다. 즉 하나님  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2  )

이다. 1539 그 첫 번째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분이 모두에게 숭배되고 경배 되어야 할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분이 모든 진리, 지혜, 선, 의, 공평, 긍휼, 권세, 거룩함의 원천임을 입증하는 것인바[바룩 3:12-14; 약 1:17],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그분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며, 나아가 그것들이 그분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잠 16:4] 을 찬송과 감사로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3  )   그 둘째인 우리 자 신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어리석음, 비참, 헛됨, 그리고 수치를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한 증오와 불신과 겸비 4  )  로 이끌어 가며, 이어서 하나 님을 구하는 열망을 우리 안에 불태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텅 비어 없는 우 리의 모든 복이 그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앞서서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지 식별하기 란 용이하지 않다. 사실 인간에게는 매우 비참한 세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악에 대한 지식으로 충격을 받고 찔림을 받아 즉시 눈을 하나님께로 들어올리며 적어도 얼마만큼 그분에 대한 지식에 이르지 않는 한, 우리는 우 1  )   sacrae doctrinae(1536), sapientiae(1539). 2  )   Dieu. 칼뱅은 Dieu를 창조주인 엘로힘의 개념으로 사용하며 따라서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의 신

을 언급할 때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 또는 신으로 번역한다. 3  )   “그 첫 번째인……하기 위함이다”까지가 1536/L에 일부 들어 있다. 4  )   F: dejection, L: seriam humilitatem.

1장 신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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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리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보잘것없음과 무지, 허영, 심지어 부패와 타락이라는 감정에 의해 우리는 참된 위대함, 지혜, 진 리, 정의 그리고 순전함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우 리의 비참을 통해 주님 5  )  의 복을 생각할 마음을 갖게 되며, 우리 자신을 전적 으로 싫어하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그를 열렬하게 갈망할 수 없다. 사실 사람 들 중에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또한 자신을 망각하면서 잠시라도 그 자신의 능력에 만족해 자신의 재앙을 보지 못하는 동안 스스로 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가? 따라서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 을 통해 하나님을 찾도록 부추겨질 뿐 아니라, 말하자면 손에 이끌리어 그분 을 발견하는 데로 인도된다. 1.1.2.

한편 인간이 먼저 주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그분을 주시한 뒤 내려와 자신 을 바라보지 않는 한, 자기 자신에 대한 명백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오만이 우리 안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즉 명백한 징표로 우리가 불의하고 거짓되며 어리석고 불결한 것이 판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의롭고 참되며 지혜롭고 거룩하게 여긴다 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우리만을 바라보고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경우, 우리가 이런 존재라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주님은 이 판단이 필히 부 합되는 유일한 규범이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본래 위선에 기울어지는 경 향이 있기 때문에 진리 대신 정의의 공허한 외양이 우리를 만족시키며, 우리 주변에 크게 오염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정신을 온전히 오염된 우리 인성의 한계에 가둬 두는 한, 약간 덜 더럽혀진 것도 우 리에게는 매우 깨끗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는 마치 검은 색깔의 사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이 칙칙한 백색이나 절반은 회색인 백색의 것을 세 상에서 가장 희다고 판단하는 것과도 같다. 영혼의 능력을 평가함에 있어 우 리가 얼마나 잘 속는지는 육적인 시각의 비유를 통해 더욱 분명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낮에 땅을 바라보거나, 우리 주변에 있는 사 물들을 응시하면서 매우 확정적이고 명백한 시각을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 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곧바로 태양을 향해 들어올린다면, 땅에 드러나는

5  )   Seigneur. 우리가 주님으로 번역하는 이 말은 주로 아도나이[여호와/야훼]의 개념이다. 올리베

탕은 그의 프랑스어 성경에서 아도나이를 L’Eternel(우리는 영존자로 번역함)로 번역하기도 했 다. 현대에 와서 Louis Second은 올리베탕의 전통을 따른다. 엘로힘과 아도나이는 창조주와 이 스라엘의 신을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같은 하나님이면서도 그 역할은 다르다. 칼뱅 역시 하나님 의 이 두 이름을 때론 같은 의미로 때론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그는 주님이 구약에 현현한 그 리스도로 인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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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이 너무도 큰 빛으로 눈이 부시고 불명료해서 우리는 지상의 사물들을 고찰하기 위한 우리의 좋은 시력이 태양을 바라보기에는 6  )   무척 약하고 나약 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영적인 능력을 숙고함에서도 동 일한 현상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각이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 는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능력에 매우 만족하면서 스스로 아첨하며 박수 를 치고, 우리를 거의 절반의 신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 리의 생각을 한번 주님께로 들어올려 우리가 따라야 할 그분의 의와 지혜와 능력의 완전함이 어떤 것인지 인식하게 된다면, 이전에 정의의 이름으로 우 리를 기쁘게 했던 것은 매우 큰 부정으로 더럽혀져 보일 것이며, 지혜의 미명 아래 놀랍게 우리를 속였던 것이 극도의 어리석음으로 드러날 것이며, 능력 의 모습을 가졌던 것이 비참하게도 허약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 게 매우 완전하게 보이는 것조차도 하나님에게 있는 순수함에 일치하기는커 녕 그 반대다. 이로부터 공포와 동요가 생기는바, 성경은 종종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 를 느낄 때마다 공포와 동요로 충격 먹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재 시에는 확고하고 보장된 듯 있던 자들이 주께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시는 즉시 너무도 흔들리고 기겁해 마치 절반이 죽음의 공포로 삼켜지고 거 의 무로 돌아갈 정도임을 볼 때, 우리는 인간이란 그가 하나님의 존엄에 소환 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으로 충분히 충격 먹지 않음 을 알 수 있다. 이런 공포에 대한 여러 사례는 사사기와 선지서들에 있는바,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므로 우리는 죽을 것 이다” 7  )  라는 말이 매우 흔했을 정도다. 이런 이유에서 욥기는 인간들을 그들 의 어리석음과 연약함과 오염으로 두들기기 위해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와 능 력과 순수함에서 주된 논지를 끌어낸다. 그리고 이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왜 냐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가 주님의 영광을 응시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갈 수록 어떻게 더 잘 자신이 흙이요 먼지임을 인식했는지(창 18:27)를 알며, 어 떻게 엘리야가 맨 얼굴로 주님의 임재를 맞이할 수 없었는지(왕상 19:13)를 본다. 그만큼 그는 주를 바라보길 두려워했다. 스랍들도 큰 두려움과 존경으 로 그들의 얼굴을 가릴진대, 한낱 벌레와 썩을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어쩔 것 인가(사 6:2-6)? 이런 이유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만군의 주께서 다스리실 때

6  )   플라톤의 동굴 신화 암시(Platon, Politeia, 7, 514). 7  )   MN: 수[삿](본문에는 사사기[Juges]로 썼으나 여백 주에는 여호수아[Josue]로 잘못 기재함),

13:22, 6:22; [겔 1:28] 등[사 6:5].

1장 신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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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해가 부끄러워하고 달이 당황할 것이라고 말한다(사 24:23). 다시 말해 주님 이 그분의 광채를 들어올리고 드러내실 때 그것 때문에 매우 빛을 발했던 모 든 것이 빛을 잃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에 대 한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서는 우리가 하나님 에 대한 지식을 먼저 언급하고 이어서 8  )   후자로 내려오는 것을 요구한다.

[일반계시에 따른 신지식] 1.3.1.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의 정신에는 본성적인 성향으로 어떤 신성 의 씨가 있어서 누구도 자신의 무지를 핑계할 도피처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 한다. 주님은 자신의 존엄에 대한 어떤 지식을 모든 사람에게 불어넣어 주셨 는데, 이는 그들이 그분이 한 분 하나님이요 자신들의 창조주이심을 깨달은 후 그분을 영예롭게 하지 못할 것과 자신들의 삶을 그분의 뜻을 행하는 데 바 치지 못할 것에 대해 적합한 증거로 정죄받게 하기 위함이다. 분명, 만일 인 간들 사이 어디선가 하나님이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그런 무지가 발견된다 면, 그런 사례는 십중팔구 예절과 인성에서 매우 거리가 멀고 매우 조약한 민 족들 외에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들도 고백하듯이 9  )   어 떤 신 Dieu 이 있다는 인상을 마음에 갖지 않을 만큼 그렇게 미개한 민족이나 야 만적인 족속은 없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 야수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자들 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어떤 종교의 씨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보 편 개념은 모든 정신에 뿌리를 박았고 모든 마음에 고정되어 있을 정도다. 그 러나 태초 이래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지역이나 도시나 심지어 어떤 가 문도 없었기 때문에, 이 점에서 우리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신성의 의 식 sentiment 이 있다는 것을 무언의 고백으로 간직한다. 심지어 우상숭배도 우리 에게 이 사상을 매우 풍부히 논증해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 자신이 원 하지 않게도 얼마나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신에 비해 다른 피조물들을 얼마 나 존중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갖지 않고 있다는 평판을 듣기보 다 나무와 돌을 공경하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신성의 존엄 Majesté 이라는 이 인상이 얼마나 강한지가 명백하며, 그것은 인간 정신에서 지워질 수 없고 차 라리 본성의 기질을 잘라 내는 편이 더 쉬울 정도다. 왜냐하면 인간이 신을 경배하기 위해 자신을 그의 교만과 자만에서 땅의 가장 비천한 피조물 밑으

8  )   칼뱅은 2장에서 인간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9  )   Cicero, De natura deorum , 1, 16. 키케로는 본성 자체가 인간 정신에 신에 대한 선개념

(prolepsis)을 각인시킨다는 에피쿠로스의 개념을 차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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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기꺼이 낮출 때, 본성의 기질이 잘려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 10  )  과 더불어 종교란 몇몇 사람의 계략과 술책에 의해 옛 적에 날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다. 즉 다른 사람들을 부추겨 신 을 공경하게 하는 자들이 신성에 대한 어떤 상상력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무지한 민중을 얌전하게 억제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나는 이방인들 사이 에서 어떤 명민하고 교활한 사람들이, 무지한 백성에게 두려움을 주고 양심 의 가책을 낳게 하기 위해, 그리고 백성을 명령에 더 잘 순종하게 하기 위해 종교에 관한 많은 것을 만들어 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먼저 인간의 정신에 게 어떤 신이 있다는 단호한 확신이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 관점을 얻어 내 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신에 대해 회자되는 것을 믿는 모든 성향이 이 근원에 서 유래한다. 심지어 종교의 미명 아래 매우 무지한 자들을 속이는 자들에게 신이 있다는 이 생각이 전혀 없이 결핍되어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 면 예전에는 일부 사람이,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11  )   모든 신성을 부인하지 만, 그럼에도 그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들이 무시하고자 하는 것을 부단 히 의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로마 황제 카이우스 칼리굴라보다 더 대범하 거나 오만하게 신을 경멸한 자가 누가 또 있는지를 읽어 본 적이 없다.12  )   그 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무슨 징후가 나타날 때면 언제나 매우 비 참하게 떨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이 그가 갖고 있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칼리굴라는 그가 고의적으로 애써 경멸하고자 한 신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여러분은 그와 동류인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는 신에 대한 매우 대범한 경멸자여서 나 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어도 쉽게 놀라기 때문이다. 존엄한 신께서 그들 이 신에게서 도피하고자 애쓰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양심을 놀라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같은 일이 어디서 오겠는가? 그들은 신 의 면전에서 숨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은신처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그들의 정 신 entendement 에서 신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애쓰나, 그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 건 어쩔 수 없이 [그 기억에] 묶여 있다. 때로 그 기억이 잠시 사라진 듯 보이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항상 돌아와 이전보다 더 새롭게 그들을 압 박하며, 따라서 설령 그들이 양심의 불안에서 약간의 휴식을 갖는다 해도 그 10  )   Cicero, De natura deorum, 1, 42. 이성이 다스리지 못하는 자들은 종교로 다스려야 한다는 정

치가들의 발상. 11  )   『스캔들론』(『칼뱅작품선집 6』, 473-630) 참고. 16세기 무신론에 대해서는 Cf. François

Berriot, Athéismes et athéistes au XVIe siècle en France, Paris, 1984. 12  )   Suetonius, Caligula, 51.

1장 신지식 |

63

1.3.2.


휴식은 술 취한 자나 미친 자가 잠드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바, 이들은 심 지어 자면서도 평온하게 쉬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서운 꿈과 환상에 부단히 시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불의한 자조차 우리에게는 신지식이 모든 인간의 마음에 어떤 효력 vigueur 을 갖는다는 사례가 된다. 1.2.2a.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신지식은 우리 마음에 어떤 종교의 씨를 심어 주 는 이 효과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는 첫째로 신에 대한 경외와 존경으로 우리를 교육하기 위함이며, 그 안에서 모든 선을 찾아야 함과 감사가 그에게 돌려져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다. 신에 대한 무슨 생각이 어떻게 너의 13  )   판단력으로 들어올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너는 즉시 (네가 그의 제 작물이라는 이유로) 창조의 권한 때문에 14  )   그의 지배에 굴복하고 종속된다 고 판단하는가? 15  )   어떻게 너의 삶은 그를 섬기는 데 몰두해야 하는가? 어떻 게 네가 제안하고 말하며 행하는 모든 것이 그에게 보고되어야 하는가? 만일 이런 질문이 사실이라면 너의 삶은 그것이 그의 거룩한 뜻을 순종하지 않는 한, 악하게 부패했다는 결과가 뒤따른다. 한편, 네가 그가 모든 선의 샘이요 근원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너는 그를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고찰에서 그와 결합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의 호의에 대한 신뢰가 발생한다. 인간의 판 단력이 그의 부패로 말미암아 바른 조사에서 후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러나 우리 모두의 기가 막힌 헛됨과 무지가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1.4.4b.

신을 향한 지속적인 순종이 우리 평생에 유지되기는커녕, 우리는 우리의 모 든 활동에서 그에게 저항하면서 다만 약간의 적은 보속 16  )  으로 그의 노를 누 그러뜨리고자 할 뿐이다. 거룩함과 마음의 순결로 신을 만족시키기는커녕, 우 리는 그를 즐겁게 하길 바라면서 뭔가 모를 허망한 예식과 잡동사니를 만들어 낸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신뢰를 그에게 고정시키기는커녕 우리나 다른 피 조물들에게 둔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너무도 숱한 오류와 사악한 견해에 휩싸 여 우리의 길을 밝혀 신의 존엄을 응시하도록 이끄는 진리의 광채가 가려지고 꺼지고 말아, 결국 그것은 바른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지 못한 채 다만 결코 온 전히 뽑아낼 수 없는 그 최초의 씨-다시 말해 어떤 신성이 있다는 지식-로 남는다. 그런데 이 씨 역시 너무 부패해 매우 나쁜 열매를 생산할 뿐이다.

13  )   여기서부터 몇 줄 이어지는 2인칭 화법은 1인칭으로 바꿔 읽으면 의미가 더 확실해진다. 실제

로 1560년판에는 nous라는 1인칭 복수형으로 바뀌었다. 14  )   creation que tu…(F/1541/P)는 creation tu(F/1541/M)로 수정됨. Millet는 현대 구문론에 맞

춰 que를 생략했다. 15  )   repute(F/1541), reputes(F/1560). 16세기에는 2인칭 단수 동사 어미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16  )   satisfaction: 기도나 금식 등의 행위로 죄의 대가를 치르는 속죄.

64 | 기독교 강요


이 점에서 사람들은 주로 두 가지의 죄를 짓는다. 첫째는 가련한 인생들이

1.4.1.

신의 진리를 찾기 위해 그에 합당한 방식대로 본성을 넘어서지 않고 그들의 조약한 지각에 따라 그의 위대성을 측량할 뿐이며, 그가 자신을 알도록 내주 는 방식대로 그를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의 자만을 통해 그를 만들어 내는 식 으로 그를 상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심연 17  )  의 문을 여는 데, 이것이 열리면 그들은 그들이 어느 쪽을 향하건 필히 영벌에 떨어지고 만 다. 그들이 뭔가를 애써 행하고 이어서 신을 섬긴다 해도, 그들은 신과 계산 관계에 18  )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 신 그들 마음의 상상력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이 그들의 미신을 변명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주장하는 헛된 핑계는 무너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종교 감정은 그것이 어떤 것이 건, 심지어 과도할 때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참된 종교란 신 의 기쁨-영원한 규칙으로서-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 이다. 뿐만 아니라 신은 언제나 그 자신과 유사한 존재로 남아 있지 각 사람 의 욕구에 맞춰 변형되는 유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미신이 19  )   신을 만족시키려고 애쓰면서 얼마나 헛된 착각으로 신을 농락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미신은 신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증언하는 것들만을 취함 으로써, 신이 명한 것들과 또 자신에게 수용될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들을 무 시하거나 심지어 공개적으로 거부한다. 하지만 신을 공경하기 위해 그들의 정신에서 만들어진 종교들을 세우는 사람은 모두 그들 자신의 몽상을 숭배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저 자신의 공상에 따라 신을 만들어 내지 않고 서는 감히 신에게 경솔히 대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사람들이 신 에 대해 갖고 있는 불확실하고 터무니없는 견해는 신에 대한 무지라고 가르 친다. “너희가 신을 알지 못하던 때 너희는 본질상 신 Dieux 이 아닌 것들을 섬 겼다”(갈 4:8). 다른 구절에서 사도는 에베소 교인들이 바른 신지식에서 떠나 있을 때 신 없이 살았다고 말한다(엡 2:11-12).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이 하 17  )   goufre[=gouffre]: abîme와 동의어로 Bouwsma가 제안한 불안한 칼뱅의 두 이미지(다른 하나

는 labyrinthe) 가운데 하나다(Cf. W.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nth Century Portrait, Oxford Univ. Press, 1988). 18  )   luy mettre en compte=le mettre sur le compte de Dieu. 19  )   칼뱅이 말하는 미신이란 “단지 종교적 경건을 악으로 왜곡시키는 남용이 아니라, 공상의 산물

을 바른 예배로 대체함으로써, 그리고 신의 영광을 공격하고 신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그 죄를 드러내는 인간의 특성”이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미신을 종교의 남용에 의한 악으로 규정 하여 미신과 우상숭배를 동일시하는 중세 전통을 따른다. 한편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제도 들 속에서 미신적 요소들을 구분한다(Millet).

1장 신지식 |

65

1.4.3.


나의 신이나 여러 신을 상상하는 경우와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참된 하나 님은 언제나 버려지고 포기되어 더 이상 끔찍한 우상숭배로밖에는 남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락탄티우스 20  )  와 더불어 진리와 결합되지 않은 어떠 한 적법한 종교도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1.4.4b.

인간들이 저지르는 두 번째 죄는 그들이 그들의 의지에 반대해 억지로 신 을 고려하는 데로 이끌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의 존엄에 대한 공경에서 유 래하는 두려움으로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서워하는 그의 심판 의 공포로 인해 충격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음에 도 불구하고 그것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다. 한 이교 시인이 말한 것은 불경 에 적절하게 어울린다. 이 불경에만 말이다. 즉 “두려움이 최초로 신에 대한 공경을 세상에 끌어 온다”는 것이다.21  )   하나님의 정의에서 떠난 마음을 가진 자들은 모두 이 정의에 대한 위반을 처벌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그 의 보좌 Trosne 가 뒤집어지길 갈망한다. 이런 욕구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심판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신과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들에게 불가피함을 알고, 또 그 힘을 쫓아내거나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힘 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그들은 신의 존엄을 완전히 경멸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도록 어떤 종교의 방식에 따라 의무를 행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온 갖 종류의 악덕에 오염되며 죄에 죄를 쌓되, 주님의 거룩한 법을 온전히 어기 고 그분의 모든 정의를 날려 버리기까지 한다. 아니면 적어도, 성령의 지배로 육체를 억제하기보다 그 육체의 무절제의 고삐를 느슨하게 하길 더 좋아하고 헛된 기대를 가짐으로써, 상큼하게 22  )   그들의 죄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이 위 장된 두려움에 의해 제압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종교라는 헛된 그 늘 umbre (간신히 그늘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한)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 직 신자들의 마음에만 불어넣어져 있는 특별한 신지식이 무엇인지, 또한 그 에 뒤따르는 경건의 성향 affection 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밝혀야 한다.

1.2.2b.

먼저 신실한 마음[신자]은 제멋대로의 신을 만들어 내지 않고 유일하고 참 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바라보며, 또한 자기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그분에 게로 돌리지 않고 대범한 자만에 의해 자신의 의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날 마다 부지런히 조심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제시하는 그대로 그분을 소유하 20  )   F: Lactance, L: Lactantius. 4세기 초 활동한 라틴 교부이자 기독교 변증가다. 칼뱅이 언급하는

내용은 그의 책 Institutiones divinae(1, 1 et 25; 4, 2 et 3)에 들어 있다. 락탄티우스는 종교와 진리를 연결시킴으로써 “땅의 철학”에 맞선다. 21  )   Statius, Thebais, III, 661: primus in orbe Deos fecit timor. 22  )   seulement(F/1541/P)은 souefvement(F/1541/M) 으로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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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발 행 일 | 2018년 12월 1일 지 은 이 | 장 칼뱅 옮 긴 이 | 박건택 편 집 인 | 신상균 표지 디자인 | 김광휘 본문 디자인 | 임선경 펴 낸 이 | 김은주 펴 낸 곳 | 부흥과개혁사 판권 Ⓒ부흥과개혁사 2018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양화로6길 9-20, 2층( 서교동 ) 전화 | Tel. 02) 332-7752 Fax. 02) 332-7742 홈페이지 | http://rnrbook.com

e-mail | rnrbook@hanmail.net

ISBN 978-89-6092-539-7 978-89-6092-538-0(세트) 등록 | 1998년 9월 15일 (제13-548호)

값 50,000원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 ( CIP ) 은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 홈페이 지 ( http://seoji.nl.go.kr ) 와 국가자료종합목록시스템 ( http://www.nl.go.kr/kolisnet ) 에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 CIP제어번호 : CIP2018035503 )


칼뱅 총서 I 기독교 강요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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