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의지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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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

하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한국 교회에 전문적, 체계적,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저의 꿈 가운데 하나 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사가 배출한 인물 가운데 성경 지식과 성령 체험, 신학 이론과 생활 실천,

예일대 결정판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목록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감정이 가장 탁월하게 균형 잡힌 인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의 글들이 오늘 우리 시대의 솜털처럼 가벼운 신앙과 왜곡된 체험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약

조나단 에드워즈

이며, 건강하고 성숙한 내일의 한국 교회를 위한 가장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우리 영혼의 먹거리요 영적

(Jonathan Edwards 1703 ~ 1758)

건강식품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이자 부흥 신학과 현대 복음주의의 아버지로

신앙감정론

( Religious Affections )

의지의 자유

( Freedom of the Will )

구속사

(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

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여러 사람의 평가를 들어 보면 이러한 제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

는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

원죄론

( Original Sin )

을 것입니다. 새뮤얼 데이비스는 “ 에드워즈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심오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신학자 ” 라

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

( The Life of David Brainerd )

고 생각하며, 페리 밀러는 “ 청교도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진수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주의의 정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다. 『신앙감정론』, 『의지의 자유』, 『구속사』,

삼위일체, 은혜, 신앙론

( Writings on the Trinity, Grace, and Faith )

수 ” 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로이드 존스는 “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 『부흥론』 등 수많은 저서와 설교로

부흥론

( The Great Awakening )

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

오늘날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일 대학교 출판부에서 에

윤리론

( Ethical Writings )

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 ” 이라고 극찬

교회론

( Ecclesiastical Writings )

합니다. 참으로 신학자, 목회자, 부흥사, 설교자, 선교사,

종말론

( Apocalyptic Writings )

철학자, 윤리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

모형론

( Typological Writings )

의 천의 얼굴을 가진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여러 분

과학 및 철학론

(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 )

성경주해

( Notes on Scripture )

여백성경

( The Blank Bible )

독서목록

( Catalogues of Reading )

자서전, 결심문, 일기, 편지

( Letters and Personal Writings )

신학묵상일기 1

( The “Miscellanies” a - 500 )

신학묵상일기 2

( The “Miscellanies” 501 - 832 )

신학묵상일기 3

( The “Miscellanies” 833 - 1152 )

신학묵상일기 4

( The “Miscellanies” 1153 - 1360 )

서 미국 교회가 배출한 최고의 신학자이며, 철학자다. 로이드 존스

의지의 자유

으로써 최근 에드워즈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T h e

야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과 통찰력을 남긴, 8,000 미터 이상의 고봉을 14개나 가지고 있는 히말라

옮긴이 | 김찬영

o f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와 한 신학생이 나눈 대화를 소개해 주고 싶습니다. “ 앞으로

( Sermons and Discourses, 1720 - 1723 )

설교집 2

( Sermons and Discourses, 1723 - 1729 )

“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 다음에는 무엇을 할

설교집 3

( Sermons and Discourses, 1730 - 1733 )

까요? ” “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 그

설교집 4

( Sermons and Discourses, 1734 - 1738 )

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

설교집 5

( Sermons and Discourses, 1739 - 1742 )

“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설교집 6

( Sermons and Discourses, 1743 - 1758 )

J o n a t h a n

설교집 1

교회사 최고의 깊이 있는 신학과 체험을 보여 주는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행진은

해마다 계속될 것입니다.

ISBN 978 - 89 - 6092 - 438 - 3 ISBN 89 - 88614 - 47 - X (전 27권)

E d w a r d s

백금산 목사의 발간사 중에서

VOLUME 2

게 하면 좋을까요? ” 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면 언젠가

업 ( M. Div.), 총신대학교 대학원 조직신학 전공 ( Th. M.), 현재 합동신

Freedom of the Will

셋, “ 좋은 목회자, 좋은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B. 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

WORKS

W o r k s

야 산맥과 같은 인물입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

드워즈 결정판 전집을 발간 ( 1957년에 시작해 2008년에 완간됨 )함

WORKS Freedom of the Will The

Works

of

Jonathan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2권

Edwards

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역서로 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칼빈과 복음주의 신학』, 『스위니 교 수의 에드워즈 핵심 강의 시리즈 2~5』, 『한 권으로 읽는 워필드 신학』, 『원죄론』  ( 이상 부흥과개혁사 ) 등 다수가 있다.

의지의 자유

폴 램지 편집 | 김찬영 옮김

www.rnrbook.com 값 35,000원

www.designzip.co.kr 521 - 1474


원작 표지


에드워드 전집 편집 위원회 페리 밀러, 편집장, 하버드 대학교 시드니 알스트롬, 예일 대학교 롤런드 베인튼, 예일 대학교 빈센트 대니얼스, 코네티컷 주, 그린위치 시드니 얼 미이드, 시카고 대학교 리처드 니부어, 예일 대학교 노먼 홈스 피어슨, 예일 대학교 폴 램지, 프린스턴 대학교 존 스미스, 예일 대학교 아모스 윌더, 하버드 대학교


c

o

n

4

원작 표지

5

편집 위원회

12

발간사

15

편집장 서문

t

e

n

t

s

『의지의 자유』 이해를 위한 길잡이 글

21

편집자 서문

23

1. 에드워즈가 『의지의 자유』를 저술할 때의 삶의 상황

31

2. 신학적 쟁점

34

3. 철학적 논증

83

4. 에드워즈와 존 로크

108

5. 에드워즈와 그의 반대자들

181

6. 본문에 대한 설명

195

7. 감사의 말

201

『의지의 자유』 본문 저자 서문 제1부 주제와 관련된 여러 용어와 문제에 대한 설명

211 1절. 의지의 본성에 대하여


2절. 의지의 결정에 대하여

217

3절. ‌ 필연성, 불가능성, 불능, 우연성의 의미에 대하여

228

4절. ‌ 자연적 필연성과 도덕적 필연성, 자연적 불능과

도덕적 불능의 차이에 대하여

5절. 자유와 도덕적 행위의 개념에 대하여

238 247

제2부 ‌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의지의 자유가 가능한지에 대한 고찰

1절. ‌ 의지의 자유가 의지의 자기결정력에 있다는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통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278

284

6절. ‌ 마음이 보기에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 것들에

270

5절. ‌ 이런 회피가 참이라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아주 모순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62

4절. ‌ 의지작용이 원인 없이 영혼의 본성적 능동성을

몇몇 회피 방법에 대하여

3절. ‌ 어떤 사건, 특히 의지작용이 원인 없이도

255

2절. ‌ 앞의 추론을 피할 방법으로 가정될 수 있는

개념은 명백한 모순이다

대한 의지의 결정에 대하여

7절. 중립성에서 성립한다는 의지의 자유 개념에 대하여

291 302


315

8절. ‌ 모든 필연성에 반대된다고 가정되는 의지의 자유에 대하여

320

331

351

374

392

9절. 지성의 지시와 의지 행위의 연결에 대하여 10절. ‌ 의지작용이 동기의 영향과 갖는 필연적인 연관성에 대하여 11절. ‌ 하나님이 도덕적 행위자의 의지작용들을 틀림없이 예지하신다는 증거에 대하여 12절. 하나님의 확실한 예지는 우연적인 의지작용과 모순된다 13절. ‌ 의지작용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유 개념을 무너뜨릴 만큼 필연적임에 틀림없다 제3부 ‌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의지의 자유가 도덕적 행위에 필수적인지에 대한 고찰

399

405

423

1절. ‌ 하나님의 도덕적 탁월성은 필연적임에도 덕스럽고 찬양받아 마땅하다 2절. ‌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은 필연적임에도 덕스럽고 찬양받아 마땅하다 3절. ‌ 타락한 사람의 죄는 도덕적으로 필연적임에도 책망받아 마땅하다


4절. 순종의 의무는 순종할 수 없는 도덕적 불능과 양립 가능하다

434

5절. ‌ 바람과 노력의 진실성은 선한 것들을 수행하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448

6절. ‌ 중립적 자유는 덕에 필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덕과 전적으로 모순된다

459

7절. ‌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관념은 도덕적 행위에서 동기 및 자극의 영향과 모순된다

470

제4부 ‌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펼치는 추론의 주된 근거에 대한 고찰

1절. ‌ 의지 행위의 덕스러움이나 악함의 본질은 그것의 원인이 아니라 그것의 성격에 있다

2절. ‌ 행위와 능동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념의 오류와 모순에 대하여

490

3절. ‌ 필연적인 것에 대한 칭찬이나 비난이 상식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하여

481

500

4절. ‌ 도덕적 필연성이 칭찬이나 비난, 보상이나 형벌과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은 상식에 부합한다

509


5절. ‌ 필연성에 대한 가르침이 죄를 피하거나 덕을 얻기 위한 모든 수단과 노력을

520

헛된 것으로 만든다는 반론에 대하여

6절. ‌ 우리의 가르침이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 및

529

홉스의 견해와 일치한다는 반론에 대하여

534

7절. 하나님의 의지의 필연성에 대하여

8절. ‌ 하나님의 의지작용의 도덕적 필연성에 대한

546

몇몇 추가 반론에 대하여

9절. ‌ 우리의 가르침이 하나님을 죄의 저자로 만든다는

563

반론에 대하여

584

10절. 죄가 세상에 처음 들어온 것에 대하여

11절. ‌ 칼빈주의 원리가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과

587

모순된다는 주장에 대하여

12절. ‌ 칼빈주의 원리가 무신론과 방종으로 이끈다는

594

추정에 대하여

13절. ‌ 칼빈주의 교리가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추론에

599 609

의해 뒷받침된다는 반대에 대하여 결론


[관련 편지들] 서문

627

『도덕과 자연종교의 원리들에 대한 논집』에 관한 논평

641

존 어스킨에게 보내는 편지, 1757년 8월 3일

659

색인

667


발간사

하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한국 교회에 전문적, 체계적, 종합적으로 소 개하는 것은 저의 꿈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사가 배 출한 인물 가운데 성경 지식과 성령 체험, 신학 이론과 생활 실천, 냉철 한 지성과 뜨거운 감정이 가장 탁월하게 균형잡힌 인물이라 믿기 때문입 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들이 오늘 우리 시대의 솜털처럼 가벼운 신앙과 왜곡된 체험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약이며, 건강하 고 성숙한 내일의 한국 교회를 위한 가장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우리 영 혼의 먹거리요 영적 건강식품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여러 사람의 평가를 들어 보면 이러한 제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새뮤얼 데이비스는 “에드 워즈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심오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신학자”라고 말하 며, 페리 밀러는 “청교도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진수요, 조나단 에드워 즈는 청교도주의의 정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 을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한다면, 조 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극찬합니 다. 참으로 신학자, 목회자, 부흥사, 설교자, 선교사, 철학자, 윤리학자, 심 리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의 천의 얼굴을 가진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여러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과 통찰력을 남김으로써 8,000미터 이상 의 고봉을 14개나 가지고 있는 히말라야 산맥과 같은 인물입니다. 셋, “좋은 목회자, 좋은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면 언젠가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설교자인 로 이드 존스와 한 신학생이 나눈 대화를 소개해 주고 싶습니다. “앞으로 목 회자가 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를 12

|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읽으십시오.”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요?”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 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 십시오.” 넷, 전체 27권의 분량으로 기획된 예일 대학교 출판부의 조나단 에드워 즈 결정판 전집은 1957년부터 시작되어 2008년에 완간되었습니다. 이 결 정판 전집은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의 획기적인 전환점과 비옥한 토양이 되어 앞으로 에드워즈 연구의 풍성한 열매를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 동안 조나단 에드워즈 탄생 300주년인 2003년을 조나단 에드워즈를 한 국 교회에 알리는 원년으로 삼고 에드워즈를 다방면으로 소개하고 있는 저희 부흥과개혁사는 이제 예일대 결정판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발간의 발걸음을 한 걸음씩 내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즈 전집의 완간까지 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멀고 험합니다. 독자들의 지속적인 기도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2016년 6월 에드워즈 연구의 새 아침이 한국 교회에 밝아 오기를 바라며 백금산 드림

발간사 |

13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Freedom of the Will

14

|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편집장 서문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편집 위원회는 폴 램지가 편집한 『의지의 자유에 대한 근래 유행하는 관념에 관한 주의 깊고 철저한 연구』를 예일대 결정 판의 첫 번째 책으로 출판하는 바이다. 볼링엔 재단의 관대한 지원으로 착수된 이 계획은 에드워즈의 출판된 모든 저술을 재출판할 뿐만 아니라 에드워즈의 가장 심오하고 우수한 저술들이 담겨 있는 방대한 원고들을 출판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의지의 자유』를 전집의 첫 권으로 출판하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의지 의 자유』는 시간상으로는 에드워즈의 첫 번째 저술이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 에드워즈의 명성이 가장 널리 퍼졌고, 소문으로만 이 책을 접한 많 은 사람에게도 그의 명성이 알려졌다. 우리는 비록 이 대단한 과업에 존중심을 갖고 다가가지만, 모든 연구자 가 에드워즈의 관점을 동일하게 해석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 고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주길 바란다. 에드워즈는 너무나 장엄한 인물이라 모든 사람에게 단일하고 단순한 의미를 줄 수 없고, 에 드워즈는 스스로에 대한 비평이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무비판적인 굴종 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로, 편집 위원회는 각각의 책을 서로 다 편집장 서문 |

15


른 편집자에게 맡겨서 편집자 자신이 해설하고 평가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여러 편집자들이 다양하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해석을 내놓는 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와 같은 결과를 에드워즈의 사상의 폭과 심오함 을 입증하는 것으로 환영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편집진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은 편집의 진실성뿐이 다. 즉 우리의 목표는 원래 본문에, 출판된 것이거나 자필 원고이거나, 오 늘날 판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세심하게 충실하자는 것이다. 몇 가지 일반적인 편집 원칙을 제외한다면, 각 편집자가 자신이 맡은 본 문의 요구에 따라서 스스로가 판단하여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 계획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 종교사뿐 아니라 지성사에서도 에드워즈의 중요성에 대한 평가가 20세기 중반에 와서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아주 제한된 전문적인 신학자 그룹을 제외하 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를 불쾌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지옥불과 유황에 대해 설교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사실, 조나단 에 드워즈를 시대착오적이고 시대에 역행하는 인물로 무시하려는 경향이 일 반적이었다. 그런데 의심할 바 없이 최근의 역사적 사건들이 그와 같은 자 기만족적 가정을 극적으로 재고하도록 자극해 왔다. 이런 역사적 촉구로 인해서든 또는 지적 발전의 논리 때문이든, 오늘날 우리는 에드워즈가 매 우 용감하게 붙잡고 씨름했던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가장 중심적인 문 제들에 대면해서 재해석해야 할 새로운 절박함 가운데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에드워즈가 주장했던 바로 그 교리들이 에드워즈가 사용한 언어로 광범위하게 부활되었거나 부활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 다. 사실 에드워즈가 주장했던 교리를 널리 알리는 것은 이 예일판의 목 적을 벗어나는 것이다. 『의지의 자유』가 저술된 배경과 유래, 그리고 『의 지의 자유』와 관련된 방대한 문제들에 대한 램지 교수의 설명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에드워즈는 지금까지 미국을 빛내고 있는 가 장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이기에 그에게 귀 기울일 가치가 충분하고 마 16

|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땅하다. 우리가 에드워즈를 위해 세워 주겠다고 제안할 때 에드워즈가 관 심을 가질 유일한 기념비, 곧 에드워즈가 오랫동안 기다린 유일한 기념비 는 에드워즈 자신의 사상을 분명하고 공정하게 제시하는 것이리라.

페리 밀러

편집장 서문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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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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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자유』 이해를 위한 길잡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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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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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Freedom of th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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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편집자 서문

새뮤얼 홉킨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를 처음 엮어 낼 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에드워즈 학장은, 경탄하고 아첨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 같은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로 공정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는 사 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 이 말은 이 책 『의지의 자유에 대한 근래 유행하는 관념에 관한 주의 깊고 철저한 연구』 ( A Careful and Strict Inquiry into the Modern Prevailing Notions of the Freedom of Will ) 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책

이 에드워즈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저작이라고 불려 온 데는 충분 한 이유가 있다. 이 책은 1754년에 처음 출판되었는데, 이때는 에드워즈 가 매사추세츠 주 스톡브리지에서 지역 교회 목사 및 인디언 선교사로 사역한 6년 가운데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이 『연구』 2)를 읽는 독자는 누 구나 “이 위대한 신학자가 인디언 아이들에게 교리 문답을 하고 영어 철

1) Samuel Hopkins, The Life and Character of the Late Reverend Mr. Jonathan Edwards (Boston, 1765) in The Works of President Edwards (8 vols. Worcester, 1808, 이후로는 우 스터판으로 표기), 1, p. 9. 2) 『연구』(Inquiry)는 에드워즈 자신이 『의지의 자유에 대한 근래 유행하는 관념에 관한 주의 깊고 철저한 연구』를 지칭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한 약어였다(한글 번역본에서는 『연구』 대신 『의지의 자 유』라는 약어를 사용한다-옮긴이).

편집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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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를 가르치는 동안, 책의 많은 장들이 일시적으로 미뤄져야 했다는 것 을 명심해야 한다” 3)는 것이 참이라면, 독자들은 이 현실을 상기시키는 결 함 ( 어떤 결함이 있을진대 ) 이외의 다른 결함을 이 책에서 거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의지의 자유라는 주제는 에드워즈가 예일 대학에서 과학과 철학 과 신학을 배울 때부터, 그리고 그때 로크의 영향을 처음 받고, 예일 대학 의 교수로 선출되고, 삼십 년이 지나 『의지의 자유』를 출판할 때까지, 심 지어 부흥과 다른 소란들이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시기에도, 즉 생애 내내 자신이 가진 지성 능력의 상당 부분을 기울인 주제였다. 에드워즈는 이 주제의 중요성을 갈수록 더 크게 인식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가 세 워진 이래 종교와 도덕에서 발견되는 부패가 교리의 쇠퇴에 기인한다는 확신과 결합된 자신의 지적 예리함 전부를 이 책을 저술하는 데 쏟아부 었다. 에드워즈는 비탄이 종교 문제의 근본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드워즈의 단순 명료한 삶, 고도의 사고 ( 思考 ), 축적된 경험, 그리고 아 주 생생한 열정의 산물이 바로 『의지의 자유』다. 『의지의 자유』는 에드워 즈가 우연성 및 자기결정과 싸우도록 출전시킨 초대형 전함이었다 ( 스웬슨 이 키에르케고르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를 칭송할 때 쓴 말을 빌린다면 ).

『의지의 자유』에서

에드워즈는 아무 필연성도 없는 중립적 ( indifference ) 자유에 대해서 지금까 지의 비판 가운데 가장 철저하고 완전히 분쇄하는 비판을 제시했다. 설령 에드워즈가 반대한 견해 가운데 어떤 형태의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확 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책 하나만으로도 미국을 빛낼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

3) Clarence H. Faust and Thomas H. Johnson, Jonathan Edwards (New York, American Book Co., 1935). p. xiv. 에드워즈 자신의 저술 환경에 대해서 『의지의 자유』 안에 나타나는 유 일한 내적 증거라고는 (에드워즈가 “주정뱅이”를 예로 든 것이 저술 환경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 는다면) 모호크어에 대한 언급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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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1. 에드워즈가 『의지의 자유』를 저술할 때의 삶의 상황 만약 우리가 에드워즈의 전기 작가 세레노 드와이트의 말을 신뢰할 수 있다면, 에드워즈가 의지의 자유에 대해서 쓸 계획을 드러내 보인 첫 기 록부터 이 계획의 달성까지 7년이 흘렀다. 드와이트는 말하기를, 스코틀 랜드 교회의 목사 “존 어스킨과 에드워즈의 서신 왕래”가 1747년에 시작 되어 에드워즈가 죽을 때까지 10년 이상 지속되었다고 한다. 에드워즈는 1747년 여름 어느 때 어스킨에게 쓴 첫 번째 편지의 추신에서 막 출간된 『신앙감정론』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 자신의 다음 주저 ( 主著 ) 로 마음에 둔 논문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을 언급했다. “저는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에 대해 상세하고 포괄적으로 써서 여러 쟁점에 대한 각각의 논문들을 잇달 아 출판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의지의 자유와 도덕적 행위에 대한 논 문을 맨 처음 시작할 생각인데, 자유와 필연, 도덕적 불능과 물리적 불능, 유효적인 은혜, 그리고 덕과 악의 근거, 상벌의 근거, 비난과 책임의 근거 에 대한 문제들을 이성적 피조물의 경향 및 행위와 관련해 완전히 그리고 철저히 설명하고 논하려고 합니다.” 4)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논쟁하기로 계획했는데, 다 름 아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장 큰 힘에 근거해,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중요성에 근거 해 아르미니우스주의와 논쟁하기로 계획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 이

명칭

은 네덜란드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 Jacobus Arminius, 1560~1609 ] 에게서 비롯되었 다 ) 는

칼빈주의의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에 대한 일종의 반대 운동이었다.

초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사람이 성령에 의한 중생이나 선행하는 은 혜 없이는 구원 얻는 믿음이나 참으로 선한 어떤 것도 행할 수 없다고 여 전히 주장하면서도 하나님의 작정이 조건적이라고, 즉 하나님의 예정은 4) Sereno E. Dwight, The Life of President Edwards, in The Works of President Edwards (10 vols. New York, 1829), 1, p. 250.

편집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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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가질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한다고 가르쳤고, 그리스 도의 속죄는 각 사람의 구원을 실제로 이룬 것이 아니라 가능하게 만들 었을 뿐이라고 가르쳤다. 초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신자의 삶에 매 순간 은혜가 필수적이지만, 은혜는 불가항력적이지 않다고 믿었다. 초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시험을 능히 계속 이기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으나, 이 확신을 성도의 “필연적인” 견인으로까지 표현하 는 것은 거부했다. 불가항력성이 칼빈주의의 구별된 특징이라면, 아르미니 우스주의의 구별된 특징은 조건주의였다. 비록 17세기 초반의 아르미니우 스주의자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하나님 쪽을 크게 강조했을지라 도,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할 수 있다는 그들의 가르침은 이후의 아르미니 우스주의자들 가운데 도덕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강조가 더욱 심 화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보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강조하는 펠라기우스주의로 쉽게 변했고, 도덕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하는 이신론이나 자연종교로 쉽게 변했다. 이렇 게 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의 냉엄한 교리들에 상처받은 도 덕적 본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불평을 지칭하는 그저 느슨한 용어가 되 었다. 18세기에 웨슬리의 부흥에서 새로운 힘과 열기를 갖고 나타난 회복 된 ( 아르미니우스의 )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에드워즈가 반대한 어떤 “아르미니 우스주의자들” 사이에 있는 공통점보다, 에드워즈가 옹호하는 정통과 그 회복된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에 있는 공통점이 필시 더 많았을 것이다. 어쨌든 에드워즈는 의지의 자유와 사람의 행위나 도덕적 책임에 대한 “근 래 유행하는 관념”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 그리고 제대로 이해되기만 한다면 도덕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 대한 어떤 것도 하나님의 통치에 대 해 느슨한 관념을 채택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이 견해를 논박하기로 계획했다. 이 계획은 에드워즈의 생애 대부분의 고난이 응축된 일련의 주목할 만 한 사건들에 의해서 중단되었다. 첫 번째 사건은 에드워즈의 둘째 딸 제 24

|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루샤의 약혼자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죽음이었고, 곧이어 제루샤도 18살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에드워즈는 노샘프턴에서 1748년 8월 31일에 어스킨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의 섭리가 제 길에 예기치 않게 놓은, 그래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일처럼 보이는 다른 일, 즉 동봉된 제안서에 어느 정도 설명되어 있는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출판 하는 일로 인해서, 당신에게 귀띔한 어떤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들을 반대 하는 뭔가를 출판한다는 계획에서 저는 현재 떠나 있습니다.” 5) 다시 에드

워즈는 1748년 10월 14일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제껏 저는 아르 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하는 글을 쓰는 일에 현저한 방해를 겪어 왔습니다. 그래서 출판할 만한 것을 준비하기까지는 필시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 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도우신다면 저는 이 계획을 수행할 작 정입니다. 그러니 이 계획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 랍니다.” 6) 『고 ( 故 )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목사의 생애 이야기』 ( An Account of the Life of the Late Reverend Mr. David Brainerd ) 는

1749년에 출판되었으나, 바로 그 해에

성찬의 자격에 대한 노샘프턴 교회 회원들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 쟁은 에드워즈로 하여금 해당 주제에 대한 글을 쓰게 만들었고, 결국 에 드워즈는 노샘프턴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미 니우스주의를 반대하는 글을 쓰려는 에드워즈의 목적이 얼마나 확고했는 지는 에드워즈가 고별 설교를 한 지 5일밖에 안 된 어수선한 와중에 어 스킨에게 쓴 1750년 7월 5일 편지에서 볼 수 있다. “당신이 제게 보내 준 책들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아르미니우스주의 논 쟁에 대해서 착수한 연구를 속행할 기회를 제게 주신다면, 그 책들 가운 데 일부가 저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7) 동일한 편지에서 에드워즈는 자

5) Ibid., p. 251. 6) Ibid., p. 270. 7) Ibid., pp. 405~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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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반대하는 대표들 가운데 한 사람인 “내 외할아버지의 손자이자 내 이모의 아들” 조셉 홀리를 “어떤 본질적인 사항들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 자들에게 동의하는, 신앙에서 느슨한 원리들을 가진 사람”으로서 “신앙 에서 아주 개방적이고 과감하다”고 묘사할 때, 에드워즈 자신이 노샘프턴 교회에서 쫓겨난 일이 단순한 성찬의 자격보다 더 근본적인 교리적인 불 일치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확신을 내보인다. 에드워즈가 보기에, 교회의 한낱 형식적인 회원 자격의 위험은 “젊은 세대가 아르미니우스주 의에 의해 홍수에 휩쓸리듯 휩쓸리게 될 가장 큰 위험”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주민들이 이런 상황 가운데서 에드워즈의 후임자를 선택할 때 “은혜의 교리에 확고한 목사를 정하기 위해서가 아니 라 성찬의 조건에서 내 원칙과 상반되는 원칙을 가진 목사를 정하기 위 해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일 것 같다”는 두려움을 나타냈다. 이런 방해들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의지의 자유를 주제로 한 연구 를 내내 깊이 해 왔고, 자신의 노트에 적어 왔음에 틀림없다. 이 동일한 편지에서 에드워즈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런 어려움들로 인해 서 제가 전에 몰두한 연구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하는 글을 쓰는 계 획이 현재 중단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들이 저를 이 계획에서 떼어 놓기 전에는 이 계획을 위해 많이 준비해 왔고, 이 계획 수행에 아주 몰두했었 습니다. 만약 언제든 하나님이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저는 이 일을 다시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말하자면 세상의 망망대해에 내동댕 이쳐져 있고, 저와 부양할 많은 가족들이 어찌 될지 알지 못합니다.” 8) 8) Ibid., p. 410~411. 스코틀랜드의 또 다른 목사에게 쓴 1750년 7월 6일 편지, “아르미니우스주의 와 펠라기우스주의가 몇 년 사이 이상하리만치 번성했습니다.” 교회 회원 자격 문제에서의 스토다 드주의(Stoddardism)의 승리(에드워즈 자신이 바로 이것의 희생자였다) 때문이라기보다는, 부흥 논쟁을 통해서 신앙적 리더십에 구멍이 나면서 벌어진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번성이 미국의 18세 기 중반 신앙생활이 직면한 주된 위험이라는 에드워즈의 인식은 옳았다. 에드워즈는 (1750년 6월 22일 교회 회의의 의결 이후 7월 1일에 행한) 고별 설교에서 교회 회중들에게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최근 7년 사이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들이 이 나라에서 번성 했는데, 이 번성함은 이전 어느 때보다 훨씬 더 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들 은 여전히 번성하고 있고, 이 나라 거의 모든 지역에 침투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만약 이 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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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1751년에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로 이주했고, 거기서 후사토닉 인디 언들을 가르치고 설교했는데, 그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원와논 페쿠운논트가 통역자로서 도왔다.9) 거기서 에드워즈는 자신이 청년 때, 1724년 6월 6일 토요일 밤에 일기장에 쓴 지혜로운 말을 다시 체득했 다. “지금 내게는 세상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확신할, 그리고 이런 세상 은 다른 성격의 세상이 결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많은 이유가 있 다.” 10) ( 당시의

이런 침울함은 이때가 에드워즈가 예일 대학에서 교수직을 시작한 주였다는 데

서 어쩌면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

인디언 선교에서 새로운 할 일과 행정적인 문

제를 발견할 때마다 방해가 뒤따랐다. 또한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에서도 성찬 자격 논쟁과 관련해 자신의 펜을 멈출 수 없었다. 에드워즈는 솔로 몬 윌리엄스에 대한 답변을 작성해야 했다. 에드워즈는 1751년 7월 1일에 스코틀랜드의 토머스 길레스피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저는 요전의 논쟁 이 있기 이전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반대하는 글을 쓰는 데 착수했 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윌리엄스가 성찬 자격에 대해서 저에게 응수 하는 책을 썼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제 자신이 이 책에 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1)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에드워즈가 모든 주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긴 주제로 그의 생각이 어찌나 빨리 돌아갔는지를 에드워즈가 1년 후에 어 스킨에게 쓴 1752년 7월 7일 편지에서 볼 수 있다.

지난주에 윌리엄스에게 저의 답변을 보냈습니다. 만약 이 답변 이 제 생전에 출판된다면, 스코틀랜드에 있는 당신과 다른 몇몇

들이 신앙의 명성이 왕년에 아주 오랫동안 자자했던 다른 도시[보스턴]에서 최근 크게 번성한 것 처럼 이 도시에도 크게 번성한다면, 이 도시의 지금 세대와 장래 세대는 영적이고 영원한 멸망의 위험에 직면할 것입니다”(Ibid., pp. 649~650). 9) Ibid., p. 452. 10) Ibid., p. 103. 11) Ibid., p.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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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꼭 보내겠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에 대한 글 을 쓰는 저의 계획을 재개할 틈이 이제 조만간 나리라 생각됩니 다. 저는 논쟁의 전 부분을 한꺼번에 다 저술할 생각을 갖고 있 지 않습니다. 제가 첫째로 쓰려고 계획한 주제는, 하나님의 뜻이 라면, “자유의지와 도덕적 행위”인데, 도덕적 행위자를 도덕적 통 치, 도덕적인 명령, 충고, 초청, 동기, 설득, 약속이나 위협, 칭찬 이나 비난, 그리고 상벌의 진정한 대상으로 만드는 ( 도덕적 행위자의 ) 자유의 성격을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빈틈없이 고찰하고, 이런 자유의 성격에 대한 근래 관념들을 철저히 검토해서, 이런 자유의 성격에 대한 근래 관념들이 아주 명백한 모순이고 터무니없는 것 임을 증명하고, 또 이를 근거로 해서 칼빈주의 신학에 대한 최근 의 큰 반대와 항의를 아주 엄밀한 추론으로 시험해 보는 것입니 다. 특히 근래 저자들이 가장 탁월한 신학자들을 극도로 모욕하면 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극도로 모욕하면서 심히 우쭐 해하고 오래도록 득의양양하게 반대한 바로 그 반대, 즉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견해가 인류의 상식에 반한 다는 반대를 아주 엄밀히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 논문을 쓸 때 휘트비와 처브의 저술들에, 그리고 비록 엄밀히 보면 펠라 기우스주의자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도 아니지만 의지의 자유에 대한 관념에서는 동일한 체계에 대체적으로 동참한 다른 몇몇 사 람의 저술들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생각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 가 생전에 이 계획을 실행한다면, 제 계획이 이루어진 후에 제 계 12)

획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을 당신에게 편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때쯤 에드워즈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논박할 저술들에 대한 선정과

12) Ibid., pp. 49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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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Freedom of th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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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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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자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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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Freedom of th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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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지의 자유


저자 서문

종교적 견해가 서로 다른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 구별된 이름을 붙이 는 것, 특히 해당 견해의 주창자나 옹호자로 유명한 특정인의 이름을 따 라 일컫는 것을 크게 문제 삼는 사람들이 많다. 이를테면 아르미니우스를 따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 아리우스를 따라 “아리우스주의자”로, 소 치누스를 따라 “소치누스주의자”로 부르는 따위의 일들을 크게 문제 삼 는다. 이들은 다음 이유 때문에 이런 호칭이 그 자체로 부당하다고 생각 한다. 이런 호칭은 유명한 주창자의 이름이 붙여진 사람들이 해당 주창 자에 대한 존중과 의존 때문에 해당 교리들을 받아들였다는 시사를 주 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위대한 머리와 척도로 존경하 고 의존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처 럼 마치 해당 주창자를 자신들의 척도로 삼은 것 같은 생각과 암시를 준 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일파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이것 은 부당하고 근거 없는 오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 이들은 말하기를 ) 아르 미니우스주의라고 일컬어지는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는 주요 신학자들이 이 교리 체계를 아르미니우스가 믿었기 때문에 더욱더 믿을 것이라는 생 각은 근거가 전혀 없다. 그들이 이 교리 체계를 믿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저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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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정직하고 편견 없이 연구하고, 자신들을 이런 이름으로 부르는 어 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별과 정직함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탐구 했기 때문이다. 이 신학자들은 진리를 추구하고, 자신들이 아르미니우스 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개의치 않고, 게다가 이 신학자들 은 아르미니우스와 어떤 점에서는 실제로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특정 주창자의 이름을 따라 일컫는 이런 관행은 이렇게 이름 붙여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에 실제 있는 차이보다 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차이가 너무 커서 완전히 다른 족속인 것처럼 생각하게끔 자연스레 이끌기 때문에 정말 해로운 관행으로 간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관행은 사랑이 없고, 편협하고, 옹졸한 마음에 서 생겨난 것이라고 반대하는데, 대개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선한 것을 전부 자기 자신과 자기 파당에 한정해 놓고, 자기편과 다른 이들을 완전히 구분하고, 자기편이 아닌 이들을 혐오스런 이름으로 낙인찍는 경 향이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런 관행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런 구 별된 이름표를 계속 고수하는 것은, 모든 점에서 같은 생각을 가질 순 없 다고 할지라도, 우애와 사랑 가운데 모두 하나 되는 것이 마땅한 그리스 도인들 가운데 거리감과 반감이 지속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상 호 적대감을 계속 부채질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리고 구별 된 명칭을 붙이는 방식에 몇몇 좋지 못한 결과가 뒤따른다는 것과 사람 의 연약함 및 악한 성향이 이런 방식을 자주 악용한다는 사실을 나는 부 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삼가 생각하건대, 구별된 명칭을 붙이는 것을 반대하는 이런 주장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다. 대개 사람들 은 자신과 종교적 견해가 다른 이들에게 많이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무 정하고 비판적이고 신랄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마음의 이런 악한 성향은 그 자체로는 무해하고 유용하고 필수적인 많은 것들을 기회로 삼 아 발휘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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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명칭으로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무자비한 분열의 영에 대부분 기인 한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생각을 밝히거나 말할 기회가 잦은 대상들이 주어질 때,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명칭들의 적절한 용도와 목적 가운데 언어의 이점을 활용하는 인류 안에 있는 성향 ( 하나님은 언어에 대한 능 력과 성향으로 인류를 특별히 구별하셨다 ) 에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이것으로 말미암

아 인류는 모호하고 난해한 에두른 표현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손쉽고 편리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 문제에서 견해가 다른 사 람들을 이렇게 구별하는 것 자체는 이들의 종교적 견해에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자주 유의하고 언급할 필요가 있을 만큼 차이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고 가리킬 뿐이다. 자주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이 름이 필요하다. 이 경우에 이름 대신 묘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언어 는 결함 있는 언어다. 프랑스의 지배자와 신민이고 프랑스의 고유한 언어 를 말하는 프랑스의 옛 거주자들의 후예를, 스페인 말을 하고 스페인 사 회에 속한 스페인 거주자들의 후예와 구별해서 말할 때가 종종 있다. 이 때 우리는 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별된 이름이 정말 필요하고, 즉 이들을 구별하는 말인 “프랑스인”과 “스페인인”이라는 이름 이 매우 편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구별하는 이름을 통해서 의미가 우 리 머리에 신속하고 수월하게 와 닿고, 표현을 틀림없이 아주 번거롭게 만들 장황한 묘사를 계속 반복하는 짐에서 해방된다. 전반적인 신학 체계에서 유명한 두 사람 곧 칼빈과 아르미니우스에 동 의하는 사람들 간의 견해 차이가 자주 언급되는 문제라는 것은, 전자 ( 칼빈 에 동의하는 사람들 ) 에

있다고 가정되는 모순되고 해로운 견해에 대해 자신들

의 강연과 저술에서 자주 논평하는 후자 ( 아르미니우스에 동의하는 사람들 ) 의 관 행 자체가 시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구별된 이름을 붙이는 것 을, 그들이 지적한 것과 같은 안 좋은 원인에서 비롯됨에 틀림없는 것으 로 반대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이런 구별된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자주 언급하는 사물들을 어떤 구 저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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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된 이름으로 표현하는 능력과 성향을 고려할 때, 사정상의 필요와 사 물의 자연적 경향 이외의 다른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정하지 않고도 손쉽게 설명될 수 있다. 칼빈주의자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는 구별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유사한 경우에서 우리가 보는 대 로, 비난받을 여지가 전혀 없는 이유에서 비롯되는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나는 이 논문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 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큰 곤란을 초래 하리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다. 즉 내가 의도하는 대상을 적절하게 그 리고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명칭 대신 장황한 표현을 자주 반복하는 것은 내 논문에 큰 지장을 주리라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처음 결심을 바꾸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내 논문에서 내가 “아르미니우스주 의자”라는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 것에 대해, 이런 문제로 쉽사리 걸 려 넘어지는 이들에게는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고백하건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든 치욕스런 이름으로 낙인을 찍거나 실제보다 더 혐오스럽게 보이게끔 하려는 의도가 내게는 추호도 없다. 만약 내가 “아르미니우스주 의자”라고 흔히 불리는 신학자들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을 때 아르미 니우스주의자라고 호칭하는 대신에, 휘트비 박사가 칼빈주의 신학자들을 부를 때처럼 “저들”로 부른다고 해서, “저들”이라는 호칭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더 좋은 감정이나 태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여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 로 대접했다. 그러나 오늘날 “칼빈주의자”라는 용어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자”라는 용어보다 훨씬 더 불명예스런, 아니 가장 불명예스런 용어다. 비 록 나는 내가 칼빈에 기댄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또는 칼빈이 믿 고 가르친 교리들이기 때문에 내가 그 교리들을 믿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그리고 내가 칼빈이 가르친 대로 전부 다 믿는다는 비판도 정 당할 수 없지만, 구별을 위해서 내가 칼빈주의자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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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여기서 다음 사실을 말해야겠다. 비록 내가 이 책에서 반박하는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에 관한 가르침 을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로 일반적으로 지칭할지라도, 자유의지와 도덕 적 책임에 대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를 지지하는 것으로 언급한 모 든 신학자나 저자들을 보통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고 불리는 진정한 아르 미니우스주의자로 내가 주장한다고 생각하지 말길 바란다. 여기서 내가 언급한 이들 가운데는 보통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지나친 주장을 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여기 언급된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부패한 교리들을 모두 견지했다고 비판하 려는 것도 아니다. 가령 내가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 전반을 처브와 같은 저자와 나란히 놓는다면 이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일 것이다. 비록 의지의 자유에 대한 처브의 견해 1)가 아 르미니우스주의 체계와 대부분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처브가 주장한 몇몇 교리를 아주 혐오하리 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비록 나는 의지의 자유 개념이 아르미니우스주의 체 계에서 가장 주된 항목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들의 의지의 자유 개 념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나머지 모든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에 자연스 럽게 도달하거나 그것이 참으로 도출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의지의 자유 개념을 견지하는 모 든 이들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 몰아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교리 의 실제 귀결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귀결을 눈치 채지 못하거나 인정하 지 않으면서 그 교리를 견지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언급하는 모든 신학자가 자신이 공언한 교리의 진정한 모든 귀결까 지 믿고 주장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여러모로 부당한 비판이 될 것이다.

1) [앞에 있는 편집자 서문, Pt. 5, no. 1을 보라.]

저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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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어질 내 논문에서 『하나 님과 피조물의 의지의 자유에 대한 소론』 ( An Essay on the Freedom of the Will, in God and the Creature ) 의

저자 2)를 자주 언급할 것인데, 나는 이 저자의 의

지의 자유 개념에 반대하지만 그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라고 부를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이 저자는 의지의 자유 교리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과 일치하고, 칼빈주의자들의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견해와 다르다. 만약 이 책의 저자가 흔히 여겨지는 바로 그 사람이라면, 그는 아르미니우스주 의자라는 이름을 얻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러나 이 저자는 여러모로 훌륭한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장하는 이 특정한 아르미니우스주의 교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교리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다. 또한 이 때문에 이 저자가 주장하는 의지 의 자유 교리를 반박할 필요성은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커진다. 이 교 리는 잘못된 교리이고 본질적으로 나쁜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가정 할 때, 그와 같은 명성과 성품을 지닌 신학자가 이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 으로 인해 해로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내가 아래 쓴 글에 공정하고 차분하게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부탁 말 고는 서문에서 독자에게 더 할 말이 없다. 의지의 자유라는 주제는 주의 와 아주 철저한 검토가 요구되는 아주 중요한 주제다. 사람이 얻을 수 있 는 지식의 종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며 우리의 행복이 달려 있 는 우리의 주된 과업인 종교가 우리를 만든 창조자와 우리의 교제에 있 는 한, 종교의 토대는 하나님의 본성과 우리의 본성, 그리고 하나님과 우 리의 상호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은 참된 신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함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대한 지 식은 인간 본성의 주된 두 기능인 지성 ( understanding ) 과 의지 ( will ) 를 올바

2) [앞에 있는 편집자 서문, Pt. 5, nos. 13, 14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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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게 이해하는 데 주로 달려 있다. 지성과 의지에 대한 지식 둘 다 매우 중요하지만, 의지에 대해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왜냐 하면 모든 덕과 종교의 더 직접적인 좌소가 바로 의지이고, 따라서 모든 덕과 종교는 무엇보다 의지의 올바른 행위와 경향에 있기 때문이다. 의지 의 자유라는 이 중대한 문제는 의지를 이해하는 데 주된 요점이다. 그러 므로 이 주제는 아주 중요하기에, 그리스도인들과 특히 신학자들은 이 주 제에 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나는 단언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이 주제를 다루는 내 방식으로 인해 독자는 내가 쓴 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제넘게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독자 로서의 예의를 기대한다고 털어놓는 바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말한다면 내 주장이 다소 왜곡될지도 모른다. 내가 쓴 이 글에 대해 비난할 의향이 있는 독자라면, 비난하기 전에 먼저 내 말에 충분히, 끈기 있게, 제대로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겸허히 요청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내가 풍성히 받도록, 그리고 성령의 복되고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 아 세상에서 진리가 승리하도록, 진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기도에 함께해 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저자 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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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Edwards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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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주제와 관련된 여러 용어와 문제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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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Freedom of the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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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의지의 본성에 대하여

혹자는 “의지”라는 말이 그것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다른 말만큼이 나 일반적으로 잘 이해되는 말이기 때문에, “의지”를 정의하고 설명하고 자 그리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철학자들, 형이상학 자들, 그리고 논쟁을 좋아하는 신학자들이 의지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말한 것들로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의지를 정의하고 설명하 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모호하고 혼란스럽게 된 상황에서는 의지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는 것이 유익하고, 이어질 논설을 더 선명하게 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소견으로는,

( 형이상학적으로 다듬지 않고 표현한다면 )

의지란 마음이 바로

그것으로 말미암아 뭔가를 선택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의지의 기능은 어 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기능이나 능력, 또는 마음의 원리다. 즉 의지의 행위는 선택 행위 또는 선택과 같은 것이다. 만약 혹자가 “의지란 영혼이 바로 그것 ( 의지 ) 으로 뭔가를 선택하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것이다”라는 정의를 의지에 대한 더 완전한 정의로 생각 한다면, 나는 이 정의에도 찬성한다. 그러나 나는 “영혼은 의지로 선택한 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지의 모든 행위 1절. 의지의 본성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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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

하나, 조나단 에드워즈를 한국 교회에 전문적, 체계적,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것은 저의 꿈 가운데 하나 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사가 배출한 인물 가운데 성경 지식과 성령 체험, 신학 이론과 생활 실천,

예일대 결정판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목록

차가운 지성과 뜨거운 감정이 가장 탁월하게 균형 잡힌 인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의 글들이 오늘 우리 시대의 솜털처럼 가벼운 신앙과 왜곡된 체험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약

조나단 에드워즈

이며, 건강하고 성숙한 내일의 한국 교회를 위한 가장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우리 영혼의 먹거리요 영적

(Jonathan Edwards 1703 ~ 1758)

건강식품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이자 부흥 신학과 현대 복음주의의 아버지로

신앙감정론

( Religious Affections )

의지의 자유

( Freedom of the Will )

구속사

(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

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여러 사람의 평가를 들어 보면 이러한 제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

는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

원죄론

( Original Sin )

을 것입니다. 새뮤얼 데이비스는 “ 에드워즈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심오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신학자 ” 라

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

( The Life of David Brainerd )

고 생각하며, 페리 밀러는 “ 청교도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진수요, 조나단 에드워즈는 청교도주의의 정

사람”이라고 평한 바 있다. 『신앙감정론』, 『의지의 자유』, 『구속사』,

삼위일체, 은혜, 신앙론

( Writings on the Trinity, Grace, and Faith )

수 ” 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로이드 존스는 “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 『부흥론』 등 수많은 저서와 설교로

부흥론

( The Great Awakening )

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

오늘날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일 대학교 출판부에서 에

윤리론

( Ethical Writings )

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 ” 이라고 극찬

교회론

( Ecclesiastical Writings )

합니다. 참으로 신학자, 목회자, 부흥사, 설교자, 선교사,

종말론

( Apocalyptic Writings )

철학자, 윤리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 등

모형론

( Typological Writings )

의 천의 얼굴을 가진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여러 분

과학 및 철학론

(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 )

성경주해

( Notes on Scripture )

여백성경

( The Blank Bible )

독서목록

( Catalogues of Reading )

자서전, 결심문, 일기, 편지

( Letters and Personal Writings )

신학묵상일기 1

( The “Miscellanies” a - 500 )

신학묵상일기 2

( The “Miscellanies” 501 - 832 )

신학묵상일기 3

( The “Miscellanies” 833 - 1152 )

신학묵상일기 4

( The “Miscellanies” 1153 - 1360 )

서 미국 교회가 배출한 최고의 신학자이며, 철학자다. 로이드 존스

의지의 자유

으로써 최근 에드워즈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T h e

야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과 통찰력을 남긴, 8,000 미터 이상의 고봉을 14개나 가지고 있는 히말라

옮긴이 | 김찬영

o f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와 한 신학생이 나눈 대화를 소개해 주고 싶습니다. “ 앞으로

( Sermons and Discourses, 1720 - 1723 )

설교집 2

( Sermons and Discourses, 1723 - 1729 )

“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 다음에는 무엇을 할

설교집 3

( Sermons and Discourses, 1730 - 1733 )

까요? ” “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 그

설교집 4

( Sermons and Discourses, 1734 - 1738 )

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

설교집 5

( Sermons and Discourses, 1739 - 1742 )

“ 조나단 에드워즈를 읽으십시오.”

설교집 6

( Sermons and Discourses, 1743 - 1758 )

J o n a t h a n

설교집 1

교회사 최고의 깊이 있는 신학과 체험을 보여 주는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행진은

해마다 계속될 것입니다.

ISBN 978 - 89 - 6092 - 438 - 3 ISBN 89 - 88614 - 47 - X (전 27권)

E d w a r d s

백금산 목사의 발간사 중에서

VOLUME 2

게 하면 좋을까요? ” 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면 언젠가

업 ( M. Div.), 총신대학교 대학원 조직신학 전공 ( Th. M.), 현재 합동신

Freedom of the Will

셋, “ 좋은 목회자, 좋은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B. 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졸

WORKS

W o r k s

야 산맥과 같은 인물입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

드워즈 결정판 전집을 발간 ( 1957년에 시작해 2008년에 완간됨 )함

WORKS Freedom of the Will The

Works

of

Jonathan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제2권

Edwards

학대학원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역서로 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칼빈과 복음주의 신학』, 『스위니 교 수의 에드워즈 핵심 강의 시리즈 2~5』, 『한 권으로 읽는 워필드 신학』, 『원죄론』  ( 이상 부흥과개혁사 ) 등 다수가 있다.

의지의 자유

폴 램지 편집 | 김찬영 옮김

www.rnrbook.com 값 35,000원

www.designzip.co.kr 521 - 1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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