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교회의 부흥과 개혁을 추구합니다. 부흥과개혁사는 부흥과 개혁이 이 시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조국 교회의 부흥과 개혁의 방향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든 교 회에는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나팔소리요, 깨어난 교회에는 부흥과 개혁의 불길을 지속시키는 장작 더미이며, 부흥과 개혁을 꿈꾸며 소망하는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주기 위한 깃발이고자 기독교 출판의 바다에 출항하였습니다.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임종구 지음
목차
❖ 약어
9
❖ 추천사
11
❖ 저자 서문
17
1부 서론 : 수원지 ( 水源地 )
24
1. 칼빈 연구의 시작 | 38 칼빈 연구의 위치 | 칼빈 연구와의 만남
水源地 2. 일반적인 칼빈 연구 | 46
연구 목적 | 연구 의의 | 연구 설정 | 연구 질문 | 연구 절차
3. 제네바 목사회 연구 | 69
제네바 목사회 연구의 역사적 평가 | 제네바 목사회 연구 학자와 연구 현황
4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留 滯 地
2부 선행 연구 : 체류지 ( 滯留地 )
84
4. 칼빈 | 88
칼빈 전기물 | 생애 | 저서
5. 제네바와 개혁파 도시들 | 155 16세기 유럽과 제국의 종교개혁 | 스위스 종교개혁과 개혁파 도시들
6. 제네바와 칼빈 | 185 칼빈 이전의 제네바 | 스위스 연맹과 제네바의 독립 | 제네바와 베른의 채무 관계 | 주교 시절의 제네바 재정 상황 | 제네바의 과도기 | 칼빈의 활동과 역할 | 제네바의 도시 구조 | 칼빈 사후의 제네바
7. 제네바의 4대 기구 | 207 제네바 목사회 | 제네바 치리회 | 제네바 아카데미 | 종합구빈원
8. 선행 연구의 결론 | 218 칼빈 | 제네바와 개혁파 도시들 | 제네바와 칼빈 | 제네바의 4대 기구
5
3부 제네바 목사회 : 정착지 ( 定着地 )
231
9. 목사회의 일반 | 234 목사회의 기원 | 목사회의 회집 | 목사회의 모임 | 목사회 회원 | 목사회의 운영 | 목사회의 기능 | 목사회의 회의록
10. 목사회의 실천 | 275 주요 분쟁 | 주요 신학 논쟁 | 목사회의 사역과 행정 | 교회 법령
定 地
11. 목사회의 신학 | 377 도시의 신학 | 이중의 통치에 있어서 위정자의 검 | 권징을 통한 열쇠의 사용 |
개인의 신념에 있어서 속박과 자유 | 교리와 윤리의 관계
12. 제네바 목사회 연구의 결론 | 456
着
목사회의 일반 | 목사회의 현장 | 목사회의 신학
6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終着 462
4부 결론 : 종착지 ( 終着地 ) 13. 요약정리 | 467
14. 최종 결론 | 473
地
15. 연구의 한계와 남은 연구 과제들 | 493 16. 결어 | 497
❖ 참고문헌
500
❖ Abstracts
526
❖ 부록 1. 교회 법령 비교
531
❖ 부록 2. 제네바 주요 인사
611
❖ Curriculum Vitae
615
❖ 색인
616
7
졸저를 부친 임진기 권사님과 모친 최계순 권사님께 그리고 정년을 맞으시는 은사 박건택 교수님께 헌정합니다.
8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약어
CL Letter of Calvin I~Ⅳ. Ed. Jules Bonnet, English Translation of I &Ⅱ, Edinburgh, 1835~1837, of vols. Ⅲ & Ⅳ. Philadelphia, 1858.
CNTC Calvin’s New Testament Commentaries, 12 vols. Eds. 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59~1972.
CO Ioannis Calvini opera omnia quae supersunt. Eds. G. Baum, E. Cunitz, et E. Reuss, 59 vols. Brunswick: C. A. Schwetschke, 1863~1900.
COR Ioannis Calvini Opera Omnia denuo recognita et adnotataone critica instructa notisque illustrata.
COTC Calvin’s Old Testamentarise Commentaries, 3 vols. Eds. D. W. Torrance and T. F. Torrance. Grand Rapids, Mich: Eerdmans, 1959~1972.
CR Corpus Reformatorum.
CSW Calvin’s Selected Works.
Herminjard Correspondance des Re' formateurs dans les pays de la
langue française. Ed. A.-L. Herminjard, 9 vols. Gene` ve/ Paris, 1866~1897.
약어
9
Inst.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2 vol. Eds. J. T. McNeil and F. L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OS Joannis Calvini Oprea Selecta. Eds. P. Barth, W. Niesel, and D. Scheuner. Munich: Chr. Kaiser, 1926~1864.
RCG Registres du Conseil de Gene` ve a` l’e'poque de Calvin, ́ embre 1536 ( volume 30, f. Tome I. du 1er mai au 31 dec 1~139 ). Gene` ve: Droz, 2003.
RCPG Registres de la Compagnie des pasteurs de Gene` ve au temps de Calvin, 1546~1553, Tome Premier. Ed. JeanFrançois Bergier. Gene` ve: Droz, 1964; The Register of
The Company of Pastors of Geneva in The Time of Calvin. Ed. Philip E. Hughes. Wipf and Stock, 1966.
RConsistG Registres du Consistoire de Gene`ve au temps de Calvin. Eds. Robert M. Kingdon et Watt, R. Jeffrey, Tome I, 1542~1544. Gene`ve: Droz,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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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추천사
서양 기독교 역사에서 칼빈의 위치는 오랫동안 주로 신학적인 측면으로 다뤄졌다. 칼빈 사후 제네바 개혁자에 대한 연구는 많은 점에서 교의학적인 방향으로 흘렀고, 결국 17세기 개혁파 정통 신학을 공고히 하는 데에로 귀결했다. 테오도르 드 베즈와 프랑수 아 튀레티니 ( 제네바
대학 ),
고마루스 ( 레이덴
대학 )
등의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칼빈 전통의 개혁 신 학은 미국을 거쳐 한국 장로교회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우리 는 이 과정에서 숱한 신학적 거성들을 만난다. 우리의 박형룡, 박 윤선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정통 개혁주의 는 정치적인 측면과 함께 어우러진 결과다. 즉 칼빈의 신학이 어 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신학이 어떻게 제네바 공화국의 통치 이념 으로 자리매김했는지, 그리고 개혁신학이 종종 칼빈주의의 이름 으로 어떤 역사적인 성공과 실패를 보여주었는지는 정치적인 정 황을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말이다. 한국 개혁주의 전통의 입장에서는 오늘날 칼빈의 유산이라고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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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수 있는 이것을 역으로 추적해 볼 수 있다. 개혁주의 신학과 윤리의 한국적 수용 과정에 대한 연구는 일면 한국의 기독교 전 래와 발전의 역사와 연결되며, 또 다른 면에서는 유럽 개혁교회 확장의 역사와도 맞물린다. 이 확장은 다른 말로 종교/신앙의 이 유에서 타 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던 유럽 개혁파 백인들의 민족적 인 종교가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앞선 세기에 이뤄진 가톨릭 유럽인들의 세계 정복과 같은 맥락에서 다뤄질 수 있는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진격이 북미와 남아공과 호주에서는 전 적으로, 또는 일부분 성공적이었으나,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동일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성패는 이주해 온 유럽인들이 그들 의 민족적 종교를 기반으로 한 식민지를 세울 수 있었는가의 여 부에 달렸다. 캐나다와 호주/뉴질랜드의 프로테스탄트는 영국의 식민지로서 성공했다. 미국은 혁명을 통해 개혁주의 전통에 입각 한 퓨리턴 정신으로 새 나라를 세웠다. 네덜란드 개혁파의 영향을 받은 남아공 개혁 세력은 잠시 성공을 거두었으나 결국 우리 시 대에 개혁주의 국가 설립의 부당성과 불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 준 사례로 남았다. 한국 교회의 개혁주의 수용은 유럽인들의 민족 이동을 통해 이 뤄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직접 공부[수입]해 온 것이다. 우 리는 개혁주의 유럽인들이 건너간 대륙의 나라들뿐 아니라 개혁 주의의 뿌리가 되는 유럽의 본토에서 그들의 역사와 신학을 체험 했다. 그리고 각기 연구해 온 바를 여과 없이 풀어 놓았다. 이렇게 우리는 서양의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 이동을 통해 종교를 지켜 낸 신앙의 선배들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뿌리로 여기는 종교개혁 자들의 나라들에서 여전히 보전하고 있는 전통의 보화들을 열렬 히 추종한다. 개혁주의 전통의 한국 교회는 이런 식으로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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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한 ( ? ) 매우 드문 비유럽권의 사례다. 한국에서 칼빈주의 개혁신학이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이곳은 이 질문에 답할 자리가 아니다. 어쩌면 칼 빈의 종교와 그의 신학적인 논쟁이 한국 지식인의 정서상 유교적 인 교리 논쟁과 맞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칼빈 신학에 들어 있 는 사회 ( 정치와 경제 ) 참여적인 요인이 매력적일 수도 있다. 위에서 밝혔듯이 전자가 교의학적 칼빈 이미지요, 후자가 근대적 ( 정치-경 제적 )
칼빈 이미지다. 한국에서 칼빈 연구물들은 대체적으로 교의
학적 칼빈으로 기우는 편이고 근대적 칼빈 연구는 미약한 편이다. 이것은 서양의 칼빈 연구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20세기에 나온 칼빈에 대한 출판 문헌들을 분석해 보면, 초반부터 신학 연구 부 분이 단연 강세를 보이고, 이어서 칼빈과 근대 문명의 관계 연구 가 중후반을 장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세기 말에는 역사 적 칼빈 연구가 그의 내면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상 당수의 새로운 칼빈 전기물들-이런 입장을 지지하건 반대하건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칼빈에 대한 심리학적인 접근은 말할 것도 없고 정 치적 접근조차 아직 미진하다. 우리에게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을 가지고 민족 이동한 유럽인들의 대륙 정착 과정을 정치적인 측 면에서 더욱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는 일이 요구되며, 나아 가 칼빈의 제네바 활동을 다각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보다 근원 에 속한 일이다. 이런 차제에 임종구 박사의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 연구는 이 부분에 대한 갈증을 얼마간 해소해 줄 청량제와도 같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 체제와 그 운용이 크게 실망스러운 오늘 우 리의 교회 정치 상황에서 개혁[장로] 교회의 요람이었던 제네바 교회의 목사들이 그들의 모임을 어떻게 만들고 이끌어 갔는지를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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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 연구는 『기독교 강요』가 말할 수 없었던 목회신학의 일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제네바를 포함한 스위스 자유도시[국가]들은 그 전체를 개혁해 야 했기에 도시의 개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 개혁은 성직자 중심의 통치 체제를 세속 국가 지도자 ( 귀족 ) 중심의 통치 체제로 바꾼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성격을 띤다. 물론 개혁의 주체는 도시 의 지도자들 손으로 넘어갔다. 이점에서 루터는 결정적이었다. 문 제는 이전의 가톨릭 신학을 대체할 종교 이념을 어떤 것으로 삼 느냐다. 루터의 신학을 온전히 따를 수 없었던 스위스의 각 자유 도시는 이 이념을 제공할 수 있는 책사 ( minister ) 를 원했고 그럴 수 있는 인물들이 도처에 있었다. 뒤늦게 이 대열에 합류한 제네바 시는 파렐의 소개로 칼빈을 만났다. 그리고 10년이 흐르고 나서 야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이 기록되기 시작한다. 그 사이 한 번 실 패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새로운 책사로서의 준비를 마치 고 귀환하여 얼마간 안정을 찾았다. 제네바 시당국의 책임자들이 수시로 바뀌는 동안 종교적 책사 는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의 제네바 시와의 연합적인 활 동은 종교적인 영역을 뛰어넘었다. 그는 제네바 공화국의 헌법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돕는 구빈원, 교육을 위한 제 네바 아카데미를 세우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그는 교회가 도시에 게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를 바랐다. 이는 필연적으로 시당국의 개입과의 마찰로 이어지기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치리회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논문의 저자는 개혁파 종교개혁의 특징인 도시의 개혁 과 제네바 4대 기구를 “체류지”라는 제목으로 잘 정리하고 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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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적으로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을 분석한다.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에 따른 칼빈은 위대한 책 한 권을 쓴 신 학자도 아니요, 성경을 해설한 단순한 설교가/주석가도 아니며, 마냥 논쟁을 즐기는 거친 싸움꾼도, 욕망에 사로잡힌 정치꾼도 아 니다. 그는 자신의 개혁적인 종교 이념의 승리를 위해 제네바 시 당국과 때로는 대화하고 타협하며, 때로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목회신학자다. 이렇게 그는 초기 정치 철학자에서 목회신학 자로 이동한 셈이다. 많은 자료를 소개하는 것도 저자의 장점이지만 『기독교강요』의 신학과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의 신학을 비교한 것도 큰 공헌이 다. 칼빈의 교의학과 목회신학의 미묘한 차이를 드러낼 가능성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칼빈의 교의학과 설교신학이 얼 마간 서로 다른 양상을 띠는 것과 유사한 상관관계를 지적한 셈 이다. 칼빈의 목회신학은 한편으로는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교회의 입 장과 관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교인의 외적, 내적 신앙생 활에 대한 교회의 영적 지도와 관련한다. 『기독교강요』가 일반적으로 개혁된 교회의 국가관을 일관성 있 게 주장한다면,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은 칼빈의 정치 철학의 제 네바 적용이라는 현실 목회의 단면을 보여 준다. 시민에 대한 위 정자의 권한과 교회의 권징은 시당국과 목사회 사이에서 심한 줄 다리기 게임처럼 나타난다. 치리회 ( Consistoire ) 가 중간 심의 기관 으로 만들어졌으나 최종 심의 기관은 시당국이다. 수찬 정지로 대 변하는 권징 권한을 지켜 내는 일은 제네바 교회의 최후의 보루 였고, 이것은 거의 교회의 표지와도 같았다. 『기독교강요』 초판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항목을 교회와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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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 묶어 큰 틀에서 다뤘다. 게다가 라틴어 2판 ( 1539년 ) 과 프랑스 어 초판 ( 1541년 ) 은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바로 연결시켜 보 다 그 범위를 넓혀 놓았다. 하지만 최종판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본래의 모습만을 간직한 채 구원론의 일부로 축소되었다. 이것은 일면 칼빈의 제네바 2차 사역이 가져다준 결과일 수도 있고, 다른 일면 칼빈의 신학과 윤리가 갈 수밖에 없는 균형 잡힌 중용의 길 로 여겨진다.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은 분명 자유와 관용보다는 질서와 불관용의 측면이 매우 강하다. 자유는 질서 안에서만 얻어 진다. 그것을 얻는 방식 역시 질서를 따라야 한다. 물론 이 질서는 공화국의 질서다. 이것은 결국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시의 책임자 가 되느냐에 따라서, 역으로 종교적 이념을 제공하는 목사회의 수 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칼 빈 ( 후에
베자로 이어짐 ) 이
긴 시간 수장으로 있었던 제네바 목사회는
이 줄다리기의 한쪽 밧줄을 단단히 쥔 채 이겨 내거나 아니면 균 형을 이루고자 애썼다. 하지만 정통 시대가 끝나는 17세기 후반에 시당국과 목사회의 책임자들은 달라진 사회 질서를 따라야 했다. 아무튼 정리하기 쉽지 않은 이런 내용들의 비교를 논문의 저자 는 힘들게 해 냈다. 이 결과물을 책으로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 책은 학문적으로도 칼빈 연구 분야에 공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제네바 교회가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와 어 떻게 다른지를 수없이 인용된 원자료를 통해서 누구나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양지의 깊은 산골에서 여러 차례 즐겁게 나눈 학문적이고 목회적인 대화를 회상하며 기꺼이 이 책을 한국 교계에 추천한다. 2015년 7월 30일 박건택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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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저자 서문
본서는 한국에서의 근대적 칼빈 연구의 작은 성과물로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조금 수정 보완하여 출판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신학계에서 칼빈과 종교개혁이 주목을 받았고 이 분야의 연구에 의미 있는 진전들이 있었다. 특히 한국 선교 130년을 기점 으로 칼빈 연구에도 새로운 변화가 시도되고 있는데, 이른바 ‘근 대적 칼빈 연구’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서의 칼빈 연구는 개 혁자의 주저를 중심으로 한 교리적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 신학 연구 방법론에서 역사적 비평, 본문 비평, 교리적 비평을 기본 플 랫폼으로 상정할 때, 그동안의 칼빈 연구는 오히려 교리적 비평만 이 선행되고 고착됨으로써 개혁자가 지닌 다면적 성향을 드러내 는 데 한계를 가졌다. 그러나 서간문과 설교, 주석, 소논문들과 제 네바의 각종 회의록과 같은 자료들에 접근이 허용됨으로써 그의 신학과 실제를 비교할 수 있는 연구의 기회가 늘어났다. 본서는 지금까지의 이런 칼빈 연구의 흐름과 달리 제네바의 현장을 주요 무대로 삼아 칼빈의 신학이 제네바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추적하면서, 개혁자가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드러낸 그의 이미지와 정체성, 신학과 실천 등을 분석하려고 한다.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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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년에 출생해서 1564년에 죽기까지 칼빈은 생애의 전반부 28년을 제네바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보냈고, 나머지 생애의 후 반부 28년을 제네바에서의 교회 건설에 투신했다. 불시착과도 같 았던 1536년의 첫 체류는 추방, 복귀, 투쟁, 건설이라는 굴곡진 연 대기를 형성했지만, 이 프랑스 망명 지식인의 분투는 르네상스를 받침으로 삼아 근대 사회를 여는 ‘촉진제’가 되었다. 개혁자는 유 년 시절 모친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유학생활을 통해 인문 주의의 모유를 먹고 성장했으며, 인문주의자이자 신학자로 교회 건설을 위한 싸움터에서 거대한 종교 권력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도시의 건설을 위한 용기 있는 생애를 살았다. 그러나 개혁자의 신학과 업적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근대를 열었던 개척자로 평가되는가 하면 제네바의 독재자라는 일방적 인 시선으로 조명되기도 한다. 그는 지나치게 숭상되기도 하고 때 로 가혹하게 폄하되기도 했다. 이 제네바의 사람은 책사이자 목사 였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 자유와 관용, 신학과 윤리에서 개혁자 의 이상과 제네바의 현실은 그의 고단했던 교회 건설의 딜레마를 보게 한다. 그렇다면 개혁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무엇인가? 그 의 신학과 사상은 오늘 현대 사회와 교회를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 소위 ‘칼빈주의’가 한국 교회에서 스콜라주의로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더 넓은 개혁주의의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한 대안이자 균형 잡힌 연구로서 제네바 목사회 ( CPG ) 의 회의 록 ( RCPG ) 연구는 필연적 요청이었다.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은 급박했던 이 도시의 개혁과 투쟁을 조간신문처럼 적나라하게 보도하고 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사건들과 긴박했던 기소문과 공개 질의서에서 『기독교강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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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와는 다른 현장의 긴박감과 칼빈 텍스트에 길들여졌던 이들에게 는 다소 당혹스런 현실들이 전개된다. 『기독교강요』가 제네바의 신학이라면 『목사회 회의록』은 제네바의 현장이라고 할 것이다. 이 연구는 칼빈의 생애와 사역을 여정이라는 관점에서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전개된다. 제1부 서론: 수원지 ( 水源地 ) 에서는 이 연구에 대한 의도와 구도
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칼빈과 제네바의 연표, 연구를 위한 각종 용어와 명칭에 대한 정리와 함께 이 분야의 학자들과 연구 현황 을 제시하고 있다. 제2부 선행 연구: 체류지 ( 滯留地 ) 는 본격적으로 주제를 다루기
전에 논문과 관련된 항목들을 심층 연구하고 그 배경을 추적했다. 1. 칼빈에서는 그의 생애와 저서, 신학과 평가를 간략하게 다루었 는데, 특히 그의 생애를 ‘죽음’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전개했다. 2. 제네바와 개혁과 도시들에서는 신앙속지주의에 따라 각 도시가
어떻게 개혁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나갔는지를 인물 중심이 아 닌 도시 중심으로 전개했다. 3. 제네바, 4. 제네바의 4대 기구, 5. 칼빈과 제네바에서는 개혁자의 무대였던 제네바에 대한 정치, 경
제, 사회, 종교에 대한 일반적 개요를 다루었다. 제3부 제네바 목사회: 정착지 ( 定着地 ) 에서는 이 연구의 중심 주
제로서 1. 목사회의 일반, 2. 목사회의 실천, 3. 목사회의 신학으로 나누어 전개했다. 이 연구의 핵심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장은 칼빈의 『기독교강요』 ( 1559년
최종판 ) 와
『제네바 목사회 회의
록』을 상호 비교하면서 그의 신학과 현장을 다섯 가지 항목으로 분석했다. 첫째, 도시의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 특히 개혁파 도시들의 개혁에 대한 성찰의 결론으로 제네바에서의 신학은 곧 도시의 정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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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자 외교였으며, 이것은 칼빈이 도시를 신학의 터전으로 바라 본 긍정적 시각으로서 도시의 신학은 곧 도시의 이익과 함께 도 시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이런 시각에서 목사회의 신학은 도시를 위해 봉사했다. 둘째, 칼빈의 국가론에서 언급되는 이중의 통치에 있어서 ‘위정 자의 검’에 대한 적용은 칼빈이 권징과 교회의 질서를 위해 국가
의 물리적인 힘을 수용한 것으로 이해되며, 제네바 목사회의 성격 을 국가에 소속된 종교 기구로 규정짓는다. 셋째, 권징을 통한 열쇠의 사용은 일종의 ‘교회론’으로서 이중 통치의 상황에서 교회가 가진 최종적 권한인 파면권을 수호하고 교회의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소개한다. 넷째, 개인의 신념에 있어서 속박과 자유는 일종의 ‘자유론’으로 카스텔리옹, 볼섹, 세르베투스의 사건을 신학적, 교리적 차원이 아닌 개인의 신념의 문제로 접근하여 16세기 개혁 도시에서의 속 박과 자유의 문제를 다루었다. 다섯째, 신학과 윤리의 관계는 제네바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 의 출발이 표면적으로는 신학적, 교리적 문제들로 보이지만, 각 사건이 종결되는 과정에서는 모두 윤리 문제로 귀착되는 것을 보 여 준다. 이런 측면을 중심으로 종교개혁 도시에서의 신학과 윤리 의 관계를 분석했다. 제4부 결론: 종착지 ( 終着地 ) 는 이 연구에 대한 요약과 최종 결론,
연구의 남은 과제들을 다루었다. 아울러 9년간 쉬지 않고 사당동을 오르내리며 때로 육체에 내 상을 입을 만큼, 또 시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던 고통스러운 순 간도 있었지만 학위를 받고 또 곧이어 출간까지 앞둔 시점에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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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자가 표현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할렐루야!” 이 표현이야말로 이 순간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리라! 1987년 처음으로 거룩한 학문에 입문한 이래 끝없이 오르고자 했던 고봉 에 도달하기까지 이 부지깽이 같은 자를 붙들어 주시고 노정에서 지치지 않게 힘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다함없는 영광 을 올려 드린다. 특히 본격적인 학문으로서의 진입이 이루어졌던 2006년은 나의 목회 여정에서도 가장 고단하던 때였다. 그러나 연속된 두 번의 예배당 건축으로 영육이 곤비할 때 거룩한 학문 은 청년 에스겔을 비상시켰던 것과 방불하게 오히려 목회의 가장 힘든 때를 이기게 해 주었다. 대구에서 첫 열차를 타고 교정으로 향했다가 공부를 마치고 마지막 열차를 타고 돌아오던 일정은 육 신의 한계를 넘나드는 노역이었지만 무지를 깨치는 희열이 더 컸 었다. 나의 학문적 여정은 대신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종호, 김덕신과 같은 분들에게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경 산에서 백천까지 개울을 건너다녔고, 점심을 먹고 뒷산에 올라가 기도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양지에서 신대원 시절은 결 혼과 교회 개척이라는 인생사와 맞물렸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깊 은 골짜기를 지나야 했다. 그러나 차영배, 김세윤, 박아론, 김희보 의 강의를 들었고 깊은 독서의 시간을 가졌지만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서지는 못했다. 이렇게 교정을 떠나고 나는 꼬박 10년 을 목회의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불혹을 맞을 즈음 잊혀진 열정 이 나를 다시금 교정으로 이끌었고, 그때 나는 역사신학 전공으로 총신대학교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세 번째 주어진 배움 의 장은 가장 진지하게 학문에 접근했던 순간이었다. 정원래, 김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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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 안인섭, 박영실, 박희석, 김정우, 문병호, 류응렬에게서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은사 박건택 교수를 만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이상웅, 정성욱, 김인환, 이경실 교수의 격려와 조언를 받았고 함께 수학하던 정대훈, 황인 섭, 이영식, 이승연과 같은 동지들이 용기를 주었다.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에 대한 연구는 석사과정 때 지도해 준 안 인섭 교수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연구의 주제가 제네바 목사회로 뚜렷해졌을 때 박건택 교수와의 만남은 연구의 종착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칼빈 원전 번역에 평 생을 보낸 은사는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 ( RCPG ) 에 깊은 관심을 보 이며 나의 연구 방향을 이끌어 주었다. 특히 오랜 원전 번역에 심 혈을 기울였던 내공으로 명칭, 인명, 지명의 음역까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점검하며 근대적 칼빈 연구로서의 작은 학문적 도전을 응원해 주셨다. 논문의 전개와 방식에 있어 역사신학의 기본적 연 구 방법을 참고하되 필자 자신의 방식을 가질 것을 주문하셨고, 무지와 오류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도전과 성실에 대해서는 후한 칭찬으로 이끌어 주셨다. 한편 논문 심사의 부심으로 수고해 주셨 던 안인섭, 박경수, 김요섭, 이정숙 교수의 아낌없는 조언과 세밀 한 지도는 논문을 더욱 발전시켜 주었고, 시대의 대가들에게서 들 은 균형 잡힌 평가는 이제 막 학자의 길에 들어선 나에게는 과분 한 것이었다. 감사하며 꼭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먼저는 아내 이기열 의 헌신이다. 신대원 시절 아내는 나의 학비를 위해 학교를 그만 두고 공장을 다녀야 했다. 그리고 삼남매를 키우며 내조를 다했 다. 평생을 갚아야 할 사랑과 헌신이다. 그러나 올해 결혼 2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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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을 맞으며 남편이 논문을 마칠 즈음 아내도 자신의 논문을 마쳤 다. 우리 부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또 담임목사의 연구를 위해 지원해 준 푸른초장교회 양필홍, 조만노, 정연준, 심 상학 장로와 교우들에게 감사드린다. 교회에서는 학비와 도서비, 논문 작성을 위해 안식월까지 배려해 주었다. 지난 여름 사당동에 서 공부할 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랑의교회 박 준혁 집사 내외와 자료 정리와 복사, 교정을 위해 수고해 준 최승 철 전도사와 현승원 강도사, 정보라, 카트린 집사에게도 깊은 감 사를 드린다. 지난 늦가을, 사당동 신관 610호실에서 진행된 논문 방어식에 서 학자로서 다시 걸어가야 할 길을 보았고, 내 생애 가장 길었던 그 세 시간은 학자 됨과 학문함에 대해 단장의 고통 같은 성찰로 다가왔다. 모든 인생이 자기 어머니의 피를 흘리는 사랑을 통해 출생되듯이 모든 학자 역시 은사의 사랑이 없으면 세워질 수 없 는 법이다. 지식에 일천한 자를 포기하지 않고 노경에 낳은 자식 으로 여겨 끝까지 이끌어 준 은사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자 한다. 또한 필자의 논문을 선뜻 출판하기로 결정해 준 부흥과 개혁사의 백금산 목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제네바 사람들이 하나님과 복음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던 해에 자신들의 주화에 새겨 넣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나 또한 나의 심 비에 새기고 살아갈 것이다. “Post Tenebras Lux”( 어둠 후에 빛 )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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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 AND THE COMPANY OF PASTORS IN GENE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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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1부 서론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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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 源 地
수원지
종교개혁은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할 기회를 제공하는 복합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으로 학자들이 마음껏 논지를 펼치기 에 충분히 관용적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 1 ) 는 루터의 등장을 하나의 시대적 요청으로 보고 “그는 마땅히 이 세상에 오지 아니 하면 안 되었다”( Luther musste kommen ) 고 말하며 종교개혁을 필연 적 사건으로 설명한다. 2 ) 또 종교개혁을 정치적 역학으로 조망하 는 이들은 라틴족에 반기를 든 튜튼족의 항거로, 혹은 프랑수아 1세 ( François I ) 와 칼 5세 ( Karl V ) 의 갈등으로 본다. 사회적 조망으로 보는 이들은 경제적 착취에 대한 분노, 혹은 사회 계급의 운동으 로 보기도 한다. 3 ) 또한 종교개혁을 종교의 문제만으로 볼 것이
1 )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객관성을 역사 기술의 정신으로 생각했던 랑케
(Leopold von Ranke, 1795~1886)는 역사가의 사명을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 (wie es eigentlich gewesen)를 밝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교 회개혁의 역사』에서 루터의 출현을 의도된 거사로 보지 않고 종교개혁을 역사의 필 연적 요청으로 보았다. 2 ) 이상규는 자신의 책 1장에서 랑케를 비롯한 종교개혁의 다양한 관점을 소개한 후
종교개혁을 원시 그리스도 교회의 회복 운동이자,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 으로 정의한다. 이상규, 『교회개혁사』 (서울: 성광문화사, 1999), p. 16. 3 ) 롤란드 베인튼(Roland H. Bainton)은 자신의 책 서론에서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종교의 부흥 운동이며, 가톨릭 교회의 단일 체제를 무너뜨린 중세의 파괴자로 설 명한다. 롤란드 베인튼, 『16세기 종교개혁』, 홍치모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pp. 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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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아니라 다면적으로 추적하려는 시도는 『여성과 종교개혁』을 썼던 키르시 스티예르나 ( Kirsi
Stjerna ) 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복수형
으로 “종교개혁들”이라는 용어를 쓸 것을 주장하는 카터 린드버 그 ( Carter
Lindberg ) 의
주장 4 ) 에 찬동하며 종교개혁의 포괄성을 주
장했다. 5 ) 한편 박건택은 메를 도비네 ( Merle
dʼAubigne′ ) 와
에밀 두
메르그 ( Emile Doumergue ) 를 인용하면서 혁신과 자유의 측면에서 종 교개혁이야말로 근대적・진보적 자유 6 ) 며, 자본주의를 열면서 펼 쳐낸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새로운 문명 7 ) 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연구에서 필자는 종교개혁을 제국에서의 상황과 스위스 개 혁파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상황으로 구분해 전개해 나갈 것이 다. 8 ) 박건택은 자신의 주저 『칼뱅의 자유사상』 9 ) 에서 칼빈에게 4 ) 카터 린드버그(Carter Lindberg)는 2판 서문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 책
의 제목은 여전히 ‘종교개혁들’을 말한다. 내가 아는 한 이 책의 초판이 나올 당 시 ‘종교개혁들’이라는 복수형의 사용은 독특한 일이었다(Ryrie 2006a; Matheson 2007: 7-부제: 종교개혁이 아니라 종교개혁들〔Reformations, Not Reformation〕 등). 비록 논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나는 종교개혁 시기를 계속해서 ‘복수적인 개혁 운동들’의 시기로 보고자 한다.” 참고. 카터 린드버그, 『유럽의 종교개혁』, 조영천 역 (서울: CLC, 2010), p. 13. 5 ) 키르시 스티예르나, 『여성과 종교개혁』(Women the Reformation), 박경수 역 (서 울: 대한기독교서회, 2013), p. 16. 6 ) 스위스 역사학자 메를 도비네(Merle d’Aubigne' )는 칼빈의 종교개혁을 “근대적 자 유”로 해석하며, 에밀 두메르그(Emile Doumergue)는 경제적 영역과 정치적 영 역에서의 자유까지를 포함시키고 있다. 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서울: 솔로몬, 2013), pp. 19~20. 7 ) 에밀 레오나르(Emile G. Leonard)는 칼빈의 종교개혁을 ‘한 문명의 창설’로 설명
하고 있다. 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p. 2. 8 ) 많은 학자가 종교개혁을 ‘도시 운동’으로 이해하는 데 동조하고 있다. 패트릭 콜린
슨(Patrik Collinson)은 “종교개혁은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패트릭 콜린슨, 『종교개혁』, 이종인 역 (서울: 을유문화사, 2005), p. 2. 또한 중세 도시를 연구한 에디트 엔넨(Edith Ennen)은 국가 형태로 발전하기 이전에 중세는 도시 중심으로 발전했고, 이 중세 도시가 종교개혁에 동력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에 디트 엔넨, 『도시로 본 중세 유럽』, 안상준 역 (서울: 서울아카데미, 1997), p. 125. 9 ) 박건택, 『칼뱅의 자유사상』, p. 22.
1부 서론 : 수원지 ( 水源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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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자유와 개인주의의 총아인 근대성을 추적해 온 트뢸치 ( Ernst Troeltsch ),
에밀 두메르그, 베버 ( Max
Weber ),
비엘러 ( Andre
Biélér ) 를
등장시키면서 칼빈이 가지는 의미를 “근대로의 통로”로 파악한 다. 그렇다면 근대를 여는 것은 필연적으로 지식의 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도시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고, 칼빈은 실제로 자신의 생 애 대부분을 도시에서 살아가며 도시에 자신의 신학을 구축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 Alister McGrath ) 는 종교개혁을 도시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말하면서 이런 의미에서는 제후가 다스리는 복잡하지 않았던 북부 독일의 시골 지역을 개혁하면서 농부들을 기반으로 한 반봉건 상태의 농업 경제에 초점을 맞춘 루터는 모든 개혁자 를 대표하기에 미흡하다고 주장한다. 10 ) 와타나베 노부오 ( 渡鈐信 夫 )
역시 칼빈을 통해 이룬 학문의 위대함을 오늘에 적용하려는
고민 가운데 발견한 결론이 ‘도시 교회’였다고 말하면서 종교개 혁 교회가 출발 당시 도시에 있었으며, 도시에서 초기 훈련을 받 았다는 사실이 적절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11 ) 치리회를 연구했던
10 ) 알리스터 맥그래스,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박규태 역 (서울: 좋은씨앗, 2005),
pp. 186~187. 맥그래스는 이 책의 6장에서 “도시라는 주제는 종교개혁 영성에서 중심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데, 이는 특별히 종교개혁이 도시에서 일어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16세기 많은 저술가에게 제네바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을 지 키는 성채였으며, 지금보기에도 유럽에서 너무나 어두운 곳이었던 그곳에 봉화대 가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맥그래스,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p. 187. 11 ) 와타나베 노부오는 독일의 북부와 남부에서 전개된 종교개혁의 차이를 흥미로운 시각에서 전개한다. 독일 북부는 도시가 적고 영토가 넓은 농촌에 많은 연방을 지 배하는 제후가 있었고, 종교는 루터파나 가톨릭이었던 반면, 독일 남부는 프랑스 어와 독일어권 도시를 중심으로 그 지역의 목사들이 모여 토론을 거듭한 끝에 테 제(These)를 발표하고, 이런 신학적 주장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결합체를 만들어 갔는데 이들은 루터파와는 달리 ‘개혁파(Reformed)’라 불리는 그룹으로 결성되 어져 갔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도시는 지적 자극이 많았고 가까운 목사들의 모 임도 빈번했는데 이것이 신학과 교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또 종 교개혁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환상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도시 국가의 자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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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이정숙은 칼빈의 제네바 사역을 엘시 맥키 ( Elsie
A. Mckee ) 가
주장
했던 ‘다원적 목회 사역’ 12 ) 으로 보아 4중직이 각각의 기구 ( 목사-목 사회, 장로-치리회, 교사-아카데미, 집사-구빈원 ) 를
통해 사역한 “종합적
목회”로 파악하고 있다. 한편 셀더하위스 ( Herman J. Selderhuis ) 는 13 )
그동안의 칼빈 이해가 교회의 조직체적인 측면 14 ) 만 강조했다고 평가하고, 칼빈의 교회를 “일종의 노상에서 진행 중인 공연”이라 고 표현함으로써 교회의 정적이고 경직된 모습보다는 역동성을 부각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종교개혁을 도시의 사건으로 보려는 시 도를 제국에서의 종교개혁과 구분하여 스위스 개혁파 도시들에 제한시켜 다루려 한다. 아울러 종교개혁 도시마다 목사들과 학자 들, 심지어 여성을 비롯한 평신도가 모여 성경과 신학을 토론하고 정립해 나갔던 ‘콩그레가시옹’ ( Congre′ gation ), 즉 목사회가 오늘의 근대 국가 및 근대 교회에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15 ) 목사회는
가져왔고, 이 도시들은 대학의 설립을 통해 인재를 모았고 이 모든 것이 근대 국가 로 나아가는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와타나베 노부오, “도시의 종교개혁,” 『갱 신과 부흥』, 개혁주의학술원 (2013): Vol. 13, pp. 41~49. 12 ) E lders and Plural Ministry: The Role of Exegetical History in Illuminating John Calvin’s Theology (Geneva Droz, 1988), Lee Jung-sook, “Calvin’s Ministry in Geneva: Theology and Practice,” in John Calvin and Evangelical Theology Legacy and Prospect, ed. Sung Wook Chung (Colorado Springs: WJK, 2009), p. 200. 13 ) 이정숙, “칼뱅의 제네바 목회로부터 ‘종합적 목회’ 배우기,” 『종교개혁과 칼뱅』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10), p. 255. 14 ) “엄격한 교회법과 예전 그리고 권징과 교리를 가지고 있는 건물”(building with
rigid laws and rigid liturgy, with discipline and doctrine). Herman J. Selderhuis, “Church on Stage: Calvin’s Dynamic Ecclesiology,” in Calvin and the Church: Papers Presented at the 31th Colloquim of the Calvin Studies Society, ed. David Foxgrover (Grand Rapid: CRC, 2002), p. 63; Lee Jung-sook, “Calvin’s Ministry in Geneva: Theology and Practice,” p. 201. 15 ) 근대 국가를 중세 말기, 봉건 국가와 근세 절대주의 국가가 무너진 뒤, 근대에 성
1부 서론 : 수원지 ( 水源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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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통치 이념을 제공하는 신학 연구소이면서 특히 칼빈을 중 심으로 정통 교리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또 제네바 목사 전원과 각 의회에서 선출된 12명의 장로로 구성된 치리회는 치리와 상담 을 통해 제네바를 촘촘하게 통제하며 참된 교회 건설을 위한 이 차적 표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런 측면에서 목사회는 단순 히 제네바의 목회자 친교 그룹을 넘어서 제네바 개혁의 핵심이자 18세기 계몽주의의 여명을 던져 주었다고 할 것이다. 16 ) 또한 칼 빈의 신학 ( 기독교강요 ) 과 칼빈의 현장 (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 ) 사이의 간 극을 추적하고 논평하는 것을 필자에게 주어진 과업으로 여긴다. 이 이론과 실제의 간극은 칼빈의 목회신학과 설교신학을 형성시 켜 주었다. 이런 연구는 지금까지 종교개혁사 연구의 주류를 형성 해 온 개혁가들의 저서와 신학 사상들을 연구해 온 것과 마찬가 지로 의미 있는 작업이기에 필자는 이 학문적 도전에 초청되어졌 다고 여긴다. “종교개혁은 도시의 사건이었다” 17 ) 라고 말한 베른트 묄
립한 국가 또는 근대적 특징을 갖춘 국가, 혹은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 와 평등을 보장하며 의회 정치를 통한 국가라고 할 때 칼빈이 1536~1564년에 걸 쳐 제네바에서 펼친 사역은 근대 국가 발전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제 네바 시민법은 근대 국가의 법체계에서 중요한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지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는 칼빈을 일컬어 “근대 공화주의 입법가들 중 가장 탁월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David W. Hall, The Legacy John Calvin (Philipsburg: P&R Publishing Company, 2008); 『존 칼빈의 유산』, 김현수 역 (서 울: P&R, 2012), p. 14. 16 ) 프레드 그래함은 두 명의 혁명가를 소개하면서 프랑스인 존 칼빈이 제네바를,
제네바인 장 자크 루소가 프랑스를 개혁시켰던 것을 언급하고 있다. W. Fred Graham, The Constructive Revolutionary John Calvin (Atlanta Georgia: John Knox Press, 1971); 『건설적인 혁명가 칼빈』, 김영배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6), pp. 15~17. 17 ) 베른트 묄러의 책(아래 주 참고)에서 디켄즈(A. G. Dikens)가 인용한 말이다. A. G. Dickens, The German Nation and Martin Luther (New York: Harper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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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러 ( Bernd
Moeller ) 의
말은 종교개혁에 대한 담론에 새로운 빛을 던
져 주었다. 16세기의 도시들은 수많은 정보를 축적한 지식의 도서 관이었다. 또한 인문주의의 발달, 특히 고전어 연구는 사유의 지 평을 넓혀 인식과 신념의 근육을 강하게 했고 이렇게 도시는 집약 된 지식을 기반으로 발전해 나갔다. 16세기 유럽인들의 종교성이, 팽창하던 도시의 상업과 결탁하여 종교 권력이 주도하던 시대에 서 지식 세력이 주도하는 시대로 확장되어 나아갔다. 당시 독일 인구의 10퍼센트만이 도시에 거주했지만 도시인들은 종교개혁의 강력한 추종 세력이었다. 18 ) 이런 면은 스위스 개혁파 도시에서 더 욱 특징적이었다. 취리히는 길드와 같은 조합으로 이루어진 조직 사회였고, 바젤과 같은 경우는 인쇄업이 도시 최고의 산업이어서 개혁가들의 사상이 전달되고 확산되는 최적의 환경을 가지고 있 었다. 제네바 역시 교역의 중심지에 금융업이 도시의 주요 산업이 었다. 또 도시 간의 연맹과 동맹, 대의회와 소의회 등의 의회 제도 는 신앙과 교리의 결정을 개인이 아닌 도시 공동체에게 부여하고 통제하게 함으로써 신앙고백서와 교리 교육 등의 일치와 결정을 빠르게 진행시켰다. 특히 루터의 신학이 개인에 더 큰 강조를 둔 반면 도시 개혁가들은 공동체에 더 큰 비중을 둠으로써 19 ) 종교개 Row, 1974), p. 182. 18 )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작성된 황제 기록문은 “제국 자유의 도시들”이라는 제목
아래에 전체 85개 도시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그 중의 50개 이상의 도시들은 16 세기에 어떤 식으로든 종교개혁을 인정했다. Bernd Moeller, Imperial Cities and the Reformation: Three Essay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2), p. 41. 19 )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루터와 칼빈을 비교하면서 “루터가 지역의 토호 귀족들의 변덕에 맞서 씨름했다면, 칼빈은 전문 직업인으로 자수성가하고 개인의 노력을 통 해 지위를 얻었던 이들과 부딪히고 있었다. 16세기 초기의 절대 왕정 시대의 도시 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독일과 스위스의 도시들은 두드러진 특징을 가 진 많은 군대, 정치, 사회, 경제 사상들이 탄생하게 될 도가니였다. 루터의 신학이 눈에 띠게 개인주의적인 색채를 띠지만, 칼빈의 신학은 제네바시(市)라는 특정 공
1부 서론 : 수원지 ( 水源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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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의 2세대들이 도시 공동체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해 나가게 되 었다. 존 칼빈의 생애와 사역 역시 도시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곳, 그가 체류한 도시와 그가 정착한 도시에 대한 이해는 그의 생애와 신학을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그는 55년의 생애를 살면서 한 번의 개종 ( 회심 ) 과 한 번의 추방, 한 번의 사별과 한 번의 국적 변경을 경험한다. 또 113권의 논문을 포함한 저서와 34권의 주석, 10편의 성경 강의, 32편의 설교집을 포함 189권의 책을 저술했다. 3개의 국가를 여행하고, 15개 도시를 방문하고, 5개의 종교회의에 참석하고, 687개의 서신을 교환한다. 그의 인생 은 제네바를 기점으로 분수령을 이룬다. 그는 1536년 처음 제네바 에 도착하기까지 전반기 생애 28년 ( 1509~1536년 ) 을 한 도시를 위 해 준비되어 왔고, 그의 남은 후반기 생애의 28년 ( 1536~1564년 ) 을 한 도시를 위해 투신했다. 20 ) 우리는 칼빈의 정체성 21 ) 을 다양하게 말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동체가 필요로 하던 것들을 지향하고 있었다.” 맥그래스, 『종교개혁시대의 영성』, p. 188. 20 ) 칼빈을 ‘제네바의 사람’이라고 할 때 소위 ‘국제적 칼빈’에 대한 설명에는 한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생애에서 분명 제네바는 가장 중요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특히 그의 생애를 제네바를 중심으로 생애 전반기, 제네바 이전의 28년 (1509~1536년), 그리고 생애 후반기, 제네바에서의 28년(1536~1564년)으로 나 누는 것은 본서에서 필자가 칼빈의 생애를 조명하는 특별한 구분이다. 21 ) 칼빈 학자들은 누구나 칼빈의 이름 앞에 자신이 성찰한 모습을 드러내는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윌리엄 몬터(William Monter)와 엘시 존슨(Elsie M. Johnson)은 칼빈을 ‘제네바의 사람’(The Man of Geneva), ‘칼빈의 제네바’(Calvinʼs Geneva) 로 각각 묘사하고 있다.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묘사는 엠마누엘 스티켈베르거 (Emanuel Stickelberger)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점으로 나온 칼빈 관련 출판물에서는 칼빈의 다방면을 탐색하는 묘사들이 주를 이룬다. 대표적으로는 헤르만 셀더하위스이다. 그는 칼빈을 ‘고아’, ‘순례자’, ‘이 방인’, ‘피난자’, ‘설교자’, ‘희생자’, ‘홀아비’, ‘환자’, ‘항해자’, ‘군인’으로 묘사하 고 있다. Herman J. Selderhuis, John Calvin: A Pilgrimʼs Life (Downers Grove: InterVarsity, 2009); 『칼빈』, 조숭희 역 (서울: korea.com, 2009),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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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그는 제네바의 목사였다. 그는 제네바 목사회의 회장 ( moderator ) 으 로 목사회를 대표하여 치리회에 참여하고, 시의회를 방문하며, 아 카데미를 세우고, 공적 구제 시스템인 종합구빈원과 민간 구제 시 스템인 프랑스 기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의 활발한 활동은 다 양한 명칭을 부여하게 하지만 결국 모든 명칭은 그의 최종적이고 본질적인 직분인 제네바의 목사로 돌아오게 한다. 물론 칼빈의 활 동 영역과 칼빈 사후에 그의 저작과 종교개혁을 위해 기울인 모 든 활동이 가져온 변화는 그를 단순한 한 사람의 목회자에만 머 물게 하지 않는다. 필자는 이 연구의 주제인 제네바의 목사회에 초점을 두고 거시 적으로는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파 도시들을, 미시적으로는 제 네바와 칼빈 시대의 제네바 목사회를 다룰 것이다. 특히 필자가 이 연구의 주요 논거로 삼으려는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 ( The Register of Company of Pastors of Geneva ) 은
연구를 위한 자료를 과분하게 제
공하고 있다. 필자는 할 수 있는 대로 회의록을 다루되 『치리회 회의록』 ( Registers
of The Consistory of Geneva ) 과
『시의회 회의
록』 ( Registres du Conseil de Gene` ve a` lʼe′ poque de Calvin, Tome I ), 그리고 각 종교개혁가와 각 종교개혁 도시로 오고 간 서간문을 종합적으 로 면밀히 분석하여 제네바 목사회를 통해 칼빈의 제네바에서의 사역과 신학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연구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상황을 개혁파 도시들을 중심으로 살펴 본 후, 연구의 중심 무대인 제네바에 점착하여 칼빈의 목회와 신학 사상이 출토 된 배경을 근대적 칼빈 연구의 방도로 규명하고, 이런 연구의 배 경을 토대로 이 연구의 주제인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을 중심으 로 고찰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존 칼빈의 생애를 제네바 이전과 제네바 이후로
1부 서론 : 수원지 ( 水源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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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하고 제네바를 분수령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순차적인 방식 으로 전개될 것이다. 칼빈의 생애에서 수원지는 제네바에 도착하 기 이전의 생애, 즉 모친의 부재로 인한 결핍을 인문주의의 모 유 22 ) 로 공급받아 개혁자로 준비된 기간으로, 그가 거쳐 온 모든 체류지는 제네바에서의 사역을 완성으로 이끌기 위한 준비과정 으로, 그리고 정착지는 인문주의의 투사로 헌신했던 제네바로 설 정할 것이다. 이에 본서에서는 그의 족적을 수원지 ( 서론 ), 체류 지 ( 선행 연구 ), 정착지 ( 제네바 목사회 ), 종착지 ( 결론 ) 로 설정하고 그 흐 름을 따라 이 연구의 논지를 전개할 것이다. 전개될 각 장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부에서는 이 연구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이 연구 주 제의 학문적인 위치와 교회사 연구 차원에서의 가치와 의미를 살 피고, 연구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명칭과 개념, 연표와 상황을 설 정할 것이다. 특히 용어와 관련되어 정리되지 않고 다양하게 불리 고 서술되는 것들의 형편을 살피고 바람직한 용어와 개념을 제시 할 것이다. 2부에서는 이 연구 주제의 배경을 이루는 몇 가지, 즉 칼빈의 생애,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도시들, 특히 제네바에 대한 예비적 고찰을 할 것이다.
22 ) ‘인문주의 모유’는 칼빈의 생애에 대한 고찰에서 나온 필자의 표현으로 유학생활
을 통해 그가 철학, 신학, 법학을 전공하는 과정을 통해 인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면서 동시에 르페브르를 비롯해서 볼마르, 올리베탕 등의 영향으로 성경과 종교개혁 사상을 접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 즉 회심을 위한 배경으로 칼빈에게 있 어 모유는 성경이며 유모는 인문주의였다고 할 것이다. 헤르만 셀더하위스 역시 칼빈의 생애를 다루면서 첫 장을 “고아”로 시작하고 있다. Herman J. Selderhuis, John Calvin: A Pilgrim’s Lif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9); 『칼빈』, 조숭희 역 (서울: KOREA.COM, 2009),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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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1. 칼빈의 생애를 ‘죽음’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칼빈의 생애를 추적할 때, 거대한 죽음의 공포 23 ) 가 이 개혁자의 삶에 어떤 영향 을 미쳤는지, 또 개혁자가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 자신에게 부과 된 교회 건설의 사명을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지를 살필 것이다. 이어서 칼빈의 생애가 제네바를 분기점으로 양분되는 것으로 보 고, 그의 생애를 제네바 이전의 생애와 제네바에서의 생애로 살펴 볼 것이다. 24 ) 2. 16세기 유럽의 국가별 종교개혁의 상황을 살핀 후에 이 연구 의 주안점 중의 하나인 도시가 어떻게 종교개혁을 수용하고 적응 하고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다룰 것이다. 각 국가별 종교개혁 도시 를 고찰할 것이다. 3. 제네바에 대한 전체적인 개요에서 각 분야별 상황을 전개할 것이다. 특히 1536년 이전의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주교에 의해 서 통치되던 시절의 제네바의 상황과 제네바가 개혁을 받아들이
23 ) 칼빈의 생애에서 ‘죽음’은 그의 삶을 결정할 정도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그 자신의 신앙을 통해 극복했다. 그의 생애에서 첫 죽음의 경험은 유년기 에 경험한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이 죽음이 불러온 부재를 유학생활을 통해 공급 받은 ‘인문주의의 모유’로 극복한다. 그리고 그는 그 모유의 힘으로 자신의 어머니 인 교회를 돌본다. 그의 두 번째 죽음은 거대한 공포의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출교 와 형의 파문을 통해 본 죽음은 칼빈의 오랜 습관적 신앙에 대한 기초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이제 그는 종교가 죽음을 가져올 수 있고, 그것이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본서의 2부의 4장 칼빈, 생애 부분을 참조하라. 24 ) 칼빈의 55년의 생애를 제네바라는 개혁 도시를 분기점으로 접근하려는 것은 필자 가 본서에서 다루는 주요한 아이디어다. 종교개혁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도시 공 동체의 차원에서 성찰하고 이 개혁자의 생애 역시 1536년에 제네바에 첫발을 내 딛는 순간부터 그의 생애에 있어서 제네바는 숙명처럼 점착된다. 그는 이 도시에 서 추방되고 다시 받아들여지며 자신의 생애의 불꽃이 다 타들어 가기까지 이 도 시를 위해 헌신한다. 1536~1538년의 짧은 1차 체류와 1538~1541년의 스트라스 부르의 체류를 제네바에서의 28년으로 편입하려는 필자의 의도는 2부의 4장 칼 빈, 생애 부분을 읽으라.
1부 서론 : 수원지 ( 水源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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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 정치・경제・사회적 원인들을 다룰 것이다. 4. 교회의 4대 직분과 제네바의 4대 기구를 관련시켜 목사회, 치리회, 아카데미, 구빈원의 개요에서부터 활동과 영향들을 다룰 것이다. 5. 칼빈과 제네바를 중심으로 칼빈 이전의 제네바, 칼빈 시대의 제네바, 칼빈 사후의 제네바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3부에서는 이 연구 주제로 돌아가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 25 ) 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목사회의 개요와 칼빈과의 관계, 목사회 의 출판, 기록, 기능, 영향 등을 다룰 것이다. 1. 제네바 목사회의 일반적인 개요인 회집, 회원, 기록, 출판, 기 능 등을 다룰 것이다. 2. 회의록에 나타난 목사회를 다루면서 다른 기구의 회의록과 의 관계, 교회 법령 26 ) 등을 다룰 것이다. 3. 목사회와 권징의 문제, 특히 목회자 권징의 문제를 중심으로
25 ) 이 연구 주제인 ‘제네바 목사회’의 주요 1차 자료는 회의록으로서 프랑스어로 출
판된 Registres de la Compagnie des pasteurs de Genè ve au temps de Calvin T.Ⅰ〜T. XIII’가 있다. 이 회의록은 로버트 킹던(Robert M. Kingdon), 장-프랑수 아 베르지에(Jean-François Bergier), 알랭 뒤푸(Alain Dufour)에 의해 편집되고 드로즈(Librairie Droz)에서 1964년에 제1권(1546~1553)이 출판된 이래, 2001 년에 와서 제13권(1617~1618)이 출간되었다. 한편 목사회의 회의록이 영어판 으로 편집된 것은 1966년의 필립 휴즈(Philip E. Hughes)가 번역, 편집한 “The Register of Company of Pastors of Geneva in the Time of Calvin”이 있다. 필자 는 프랑스어판 회의록 전권을 구입했지만 그 언어의 접근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러나 이 연구를 위해 필립 휴즈(Philip E. Hughes)의 책을 완역하고 프랑스어판과 대조하면서 연구를 진행해 나갔다. 26 )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법령이다. 필자는 본서에서 편의상 회의록에 실려 있는 1541년의 교회 법령을 표준 법령으로, 1561년의 교회 법령을 최종 법령으로 명칭을 부여했다. 또 1537년 제출된 교회 설립 시안은 기 초 법령으로 1538년의 타협안을 수정 법령으로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1546년의 시골 교구에 대한 법령을 비교할 것이다. 교회 법령의 변천사를 통해 제네바 교회 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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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다룰 것이다. 4. 목사회 회의록의 기록을 중심으로 제네바 목사회의 신학에 대해 다루면서 주요 결정과 논쟁을 다룰 것이다. 4부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정리하고 결론을 서술할 것이다.
1부 서론 : 수원지 ( 水源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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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빈 연구의 시작
칼빈 연구의 위치 오늘날 기독교 세계와 근대 사회의 형성에 있어서 16세기 제네 바에서 활동한 존 칼빈 1 ) 의 영향을 언급하는 것은 대체로 교회사
1 ) 존 칼빈은 그의 변화무쌍한 삶만큼이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509년 누아용에
서 태어났을 때 그에게는 장 코뱅(Jean Cauvin)이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파리로 유 학 온 이후로는 요아니스 칼비누스(Ioannis Calvinus)라는 라틴어 이름을 사용하면 서 비로소 존 칼빈(Jean Calvin)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1533년 뒤 티에의 집으로 피신하면서 샤를 데스프빌(Charles dʼEspeville)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는데, 1533 년 파리 남부 생통주를 여행할 때와 1536년 2월 루이 뒤 티에와 이탈리아를 여행 할 때, 1553년 10월 12일에 목사회가 프랑스로 보낸 편지를 비롯해서 많은 서신 에서 이 가명이 사용된다. 바젤에 머물 때와 서신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니우스 (Martianus Lucanius)라는 라틴어 가명을 사용하고, 베자와 칼빈의 서신 왕래에서 는 카롤루스 파셀리우스(Carolus Passelius)라는 가명으로 서명하기도 했다. 1526 년 『세네카 관용론 주석』을 장 칼비누스(Jean Calvinus)란 이름으로 출판했다. 또 『기독교강요』의 재판을 인쇄할 때는 가톨릭 지역으로 배포하기 위해 알쿠니우스 (Alcunius)라는 가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알쿠니우스, 즉 Alcuin은 Calvin의 철 자 순서를 바꾼 것이다. 또 1541년 3월 교황 바울 3세(Paulus Ⅲ, 1534~1549 재 위)가 칼 5세에게 충고한 것을 반박하는 글을 출판할 때 유세비우스 팜필리우스 (Eusebius Pamphilius)라는 가명을 사용한다. 그러나 1536년 9월 5일 공식적인 제 네바 시의회 회의록에는 ‘프랑스 사람’(ille Gallus)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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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연구와 일반 역사의 서술에서도 용인되는 사실이다. 칼빈 연구는 그의 탄생 400주년 2 ) 과 500주년 3 ) 을 기점으로 주목받았고, 이 제 다시 종교개혁 500주년 4 ) 을 앞두면서 16세기 종교개혁 도시 와 종교개혁가들에 대한 연구와 칼빈 연구 역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칼빈에게 수여된 다양한 수식어 5 ) 가운데 필자는 ‘교회의 사 의 생애에 사용된 마지막 이름은 ‘J. C.’라는 간결한 약자로 제네바 외곽 농경지 플 랭팔레(Plainpalais) 묘지에 새겨진다. 2 ) 칼빈 탄생 400주년은 1909년으로, 칼빈 탄생 400주년과 제네바 대학 350주년을 기념하여 종교개혁 기념비(Reformation Wall)를 세웠다. 1917년에 제네바의 옛 성 벽에 만들어진 이 기념상은 길이 100m의 벽에 “Post Tenebras Lux”라는 글과 함 께 파렐, 칼빈, 베자, 녹스의 상이 서 있다. 기념비적인 저작으로는 칼빈의 사상과 생애에 관련된 니젤의 작품이 있다. 또 화가 마이든(H. de Muydon)이 칼빈 탄생 400주년 기념 칼빈 생애 펜화시리즈를 남겼다. 한국 칼빈신학 연구회는 칼빈이 죽 은 지 400년이 되던 1964년에 회장인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영락교회에서 4일 간에 걸쳐 칼빈 사상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했다. 매일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 했을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50여 년 전에 그 정도의 규모로 4일이나 연속 강 연회를 했다는 것이 지금도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이듬해 1965년에 영락교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묶어서 『칼빈 서거 400주년 기념논문집』을 출간했다. 이것은 한 국에서의 칼빈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 이정표였다. 책자에 수록된 저자와 논 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 이종성, “칼빈의 생애와 그의 위치,” 한경직, “목회자로서 의 칼빈,” 김정준, “성서학자로서의 칼빈,” 한철하, “칼빈 신학에 있어서의 경건,” 토렌스(T. F. Torrance), “칼빈에 있어서의 신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말의 문제,” 니젤(W. Niesel), “최근에 발행된 칼빈 설교집의 신학적 내용,” 드루리(C. Drury), “장로교의 근원.” 비록 132쪽 분량의 작은 논문집이지만, 한국의 대표적 칼빈 연 구가들뿐 아니라 세계적인 칼빈 학자들의 글까지 망라되어 있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책이다. 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발행된 책값은 200원이었다. <http://www. kcalvins.or.kr/history> Accessed 19 Oct. 2014. 3 ) 칼빈 탄생 500주년은 2009년으로 한국에서는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 회”가 조직되어 다양한 기념사업을 전개했다. 2009년 6월 21에 기념 예배를 드리 는 것으로 시작하여 심포지엄과 칼빈길, 칼빈 우표, 문진 제작, 칼빈 흉상 제막 행 사가 있었다. 4 ) 2017년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Refo500이 조직되어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
에 있다. 5 ) 오토 베버(Otto Weber)는 칼빈을 ‘교회의 형성자’라고 묘사했고, 프레드 그래함
(W. Fred Graham)은 ‘건설적인 혁명가’로 묘사하고 있다.
1. 칼빈 연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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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그의 생애는 교회와 분리할 수 없는 삶 이었다. 칼빈이 제네바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그의 나이 28세가 시작되던 해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후반기 생애 28년을 제네 바 교회의 건설을 위해 바친 제네바의 사람 6 ) 이었다. 1509년 7월 10일, 고향 피카르디의 주교 도시 누아용에서 태어나 1564년 5월 27일 제네바의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생애는 참된 교 회의 건설에 투신되었다. 그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유럽 사 회를 비롯한 개신 교회와 근대 사회가 그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은 자신에게 부과된 고통스런 교회 건설의 사명을 회피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은 결코 고상하거나 미화될 정도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치욕스러운 72시간 내의 추방 의 기억과 불우했던 가족사, 그 자신이 가졌던 연약함, 그리고 격 렬하게 분출되었던 16세기의 다양한 목소리는 칼빈에게 언제나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또 프랑수아 1세와 칼 5세의 권력 구도에 서 비롯된 베른, 취리히, 바젤,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인접한 개혁 도시들과의 미묘한 역학 관계, 끝나지 않는 교리 논쟁과 도시 팽 창이 불러온 사회적 문제들이 참된 교회 건설이라는 정착지를 향 한 여정을 험난하게 했다. 그렇다면 마침내 칼빈은 자신에게 부과된 생애 가운데서 참된 교회 건설에 도달했는가?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한 이 지 상의 어떤 시대와 어떤 교회도 교회의 창설자 앞에서 이것이 신 이 설계한 교회라고 출품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읽고 있는 칼빈의 저작들은 확신으로 넘쳐난다.
6 ) Elsie M. Johnson, The Man of Geneva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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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그리고 그의 서간문과 회의록에서는 저서에서는 절제되었던 칼 빈의 민얼굴이 드러난다. 필자가 서간문과 회의록에서 파악한 칼 빈의 이미지는 투사다. 그것도 인문주의의 투사 7 ) 였다. 그는 격 렬한 전투를 즐기듯이 방황하는 군중을 향하여 뛰어든다. 종교회 의의 교리 논쟁에서 그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리고 무지와 집단적 과오를 징벌하고 권력가들과 자본가들을 촘촘한 법령으로 묶어 둔다. 민중을 향해서는 오랜 종교의 관습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 을 문답과 설교를 통해 등을 두드린다. 광적인 정도로 쓰고, 보내 고, 발표하고 논쟁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교회가 연합될 수 있다면 열 개의 바다라도 건너가겠다’ 8 ) 고 말하면서도 교리의 미 세한 부분에서도 타협으로 돌아서기보다는 차라리 분리를 선택 했다. 그러나 그런 개혁자의 삶의 배경에는 거대한 종교 권력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길고 지루한 삶의 연단이 있었다. 이제 우리 시대에 남아 있는 칼빈 연구의 미답지는 무엇인 가? 9 ) 16세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중세와 스콜라철학을 연구
7 ) 필자가 칼빈의 이미지를 인문주의의 투사(fighter of humanism)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개혁자를 폭도나 재세례파와 같은 선상에서 조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헤르만 셀더하위스의 설명과도 같이 ‘칼빈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글’이었다. 글은 인문주 의자들의 무기였다. 그는 주석을 왕과 통치자들에게 헌정했고 종교회의에서는 물 러서지 않고 토론하고 논쟁했다. 혼란은 법령을 통해 안정되었다. 폭도가 칼과 창 을 사용하고 무력과 폭력을 사용했다면 칼빈은 글, 책의 출판, 설교와 토론, 서신, 법령, 수사학을 사용했다. 셀더하위스는 이런 칼빈의 이미지를 ‘군인’(soldier)이라 고 표현하고 있다. 셀더하위스, 『칼빈』, pp. 328~331. 8 ) 칼빈은 영국의 크랜머(Thomas Cranmer)에게 편지하면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분리되어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필요하다면 나는 열 개 의 바다라고 해도 기꺼이 건널 것입니다”라고 했다. John Calvin, Letters of John Calvin, vol. 2, ed. Jules Bonnet (New York: Burt Franklin, 1972), pp. 347~348. 9 ) 현재 국내에는 제네바 목사회(The Company of Pastors in Geneva)에 대한 논문이 전무하다. 몇몇 논문에서 이 주제에 대한 의견이 부분적으로 개진되고 있지만(이정 숙, 박경수, 이은선), 이 주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발견할 수 없는 실정이다.
1. 칼빈 연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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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핸드북 ( The Calvin Handbook ) 헤르만 셀더하위스 엮음 | 김귀탁 옮김 | 1072페이지 | 값 50,000원
칼빈 연구 전문가들이 참여해 칼빈의 모든 작품에 대한 포괄적인 개관을 제공하는, 칼빈을 깊이 연구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서론과 출발점 및 준거 틀이 될 책이다. 칼빈에 대한 최근의 연구에 기반해 칼빈의 생 애, 저술, 영향과 반응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제공하는 종합 자료집이다.
한국 교회의 개혁주의 수용은 유럽인들의 민족 이동을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직
칼빈 이해의 길잡이 ( The Cambridge Companion to John Calvin )
접 공부[수입]해 온 것이다. 우리는 개혁주의 유럽인들이 건너간 나라들뿐 아니라 개혁주의의
도널드 맥킴 엮음 | 한동수 옮김 | 592페이지 | 값 26,000원
뿌리가 되는 유럽의 본토에서 그들의 역사와 신학을 체험했다. 이렇게 우리는 서양의 근대화 과
칼빈 연구의 세부 주제를 가장 탁월하게 논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기고
정에서 민족 이동을 통해 종교를 지켜 낸 신앙의 선배들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뿌리로 여기는
한 이 책은 칼빈의 삶과 신학, 오늘날까지 전해진 유산 등을 소개한다.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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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렘 판 엇 스페이커르 지음 | 박태현 옮김 | 300페이지 | 값 14,000원
네덜란드의 세계적 칼빈 학자 스페이커르가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
와 그의 신학적인 논쟁이 한국 지식인의 정서상 유교적인 교리 논쟁과 맞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칼빈 연구의 교과서로, 풍부한 자료와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간결
아니면 칼빈 신학에 들어 있는 사회 ( 정치와 경제 ) 참여적인 요인이 매력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고 명쾌하게 서술되었다.
교리·예배·삶의 균형을 추구한 사람, 칼빈 ( John Calvin: A Heart for Devotion, Doctrine, and Doxology )
물들은 대체적으로 교의학적 칼빈으로 기우는 편이고, 근대적 칼빈 연구는 미약한 편이다. 이런 차제에 임종구 박사의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 연구는 이 부분에 대한 갈증을 얼마간 해소해
하나님이 칼빈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특별히 칼빈의 저서를 통해 교회
줄 청량제와도 같다. 한국 장로교회의 정치 체제와 그 운용이 크게 실망스러운 오늘 우리의 교
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을 평범한 독자들이 이해하고 감동을 받도록 도와
회 정치 상황에서, 개혁[장로] 교회의 요람이었던 제네바 교회의 목사들이 그들의 모임을 어떻
주는 책이다.
게 만들고 이끌어 갔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 연구는 『기독교강
칼빈: 순례자와 목회자
요』가 말할 수 없었던 목회신학의 일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 John Calvin: Pilgrim and Pastor ) 로버트 갓프리 지음 | 김석원 옮김 | 284페이지 | 값 13,000원
- 박건택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 교수의 추천사 중에서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3대 총장인 교회사학자 로버트 갓프 리가 21세기 현대인을 위해 쓴 칼빈 입문서로서, 쉽고 평이한 문체로 칼 빈의 순례자적 삶과 목회 사역 및 개혁주의 신학을 묘사했다.
임종구 지음
버크 파슨스 편저 | 백금산 외 19인 공역 | 384페이지 | 값 17,000원
칼빈의 집 창문에서 바라 본 전경
( La vue du lac, vue prise des fenêtres de la maison de Calvin )
전자가 교의학적 칼빈 이미지요, 후자가 근대적 ( 정치 - 경제적 ) 칼빈 이미지다. 한국에서 칼빈 연구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
출처: 케네스 브라우넬, 『 존 칼빈과 떠나는 여행 』 (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 72쪽.
지은이
임종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를, 동 대학의 일반대 학원에서 신학 석사 ( 역사신학 ) 를 마치고, 2015년에 박사 학위 ( 역 사신학 ) 를
취득했다. 현재 대구 푸른초장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섬기면서 푸른초장 공공도서관의 관장을 맡고 있고, 교회갱신 협의회 목회분과 위원 및 제자훈련 목회자 네트워크 ( CAL - NET ) 사무총장이기도 하다.
칼빈과 복음주의 신학
임종구 지음
( John Calvin & Evangelical Theology ) 정성욱 편저 | 김찬영 옮김 | 480페이지 | 값 20,000원
“칼뱅의 소유의 개념과 경건사상”( 신학 석사 )
역사적 칼빈에 대해 더 밝은 빛을 비춰 줄 뿐 아니라, 오늘날 계속되는
“ 제네바 목사회 ( 1536~1564 ) 에 따른 칼뱅의 활동과 신학에 관한 고찰”
칼빈의 유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앞으로의 복음주의 운동을 비 춰 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논문
ISBN 978-89-6092-398-0 www.rnrbook.com 값 30,000원
( 철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