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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r a m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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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o c t r i n e
이 책은 성경(대본), 신학(극작술), 신학적 이해(상연), 교회(연극단), 목회자(감독)를 위한 새로운 은유를 제시한다. 교회는 복음의 연극단이요, 말씀과 성례의 연극단이요, 순교의 연극단이요, 화목의 연 극단이요, 거룩한 어리석음의 연극단이다. 교리는 구속 드라마, 다시 말해 삼위 하나님의 삶에 적 합하게 참여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성경에 뿌리를 두고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되어 온 기독교 지혜의 압축판이다.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성부 하나님은 이야기 전개의 극작가 겸 제작자요, 성자 하나
문화신학 케빈 밴후저 지음 | 윤석인 옮김 | 472쪽 | 18,000원
님은 그 이야기 전개의 절정이자 요약이다. 성령은 전 세계적 연출을 총관하시는 총감독인 반면,
T h e
교리의 드라마
지역 상연들을 감독할 일차 책임을 맡은 것은 바로 목회자다.
D r a m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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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o c t r i n e
교리의 드라마
지은이
케빈 밴후저 (Kevin J. Vanhoozer) 현재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 조직신학 연 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M. Div.)와
케임브리지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으
며,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신학부에서 8년 동안 부교수로 가르쳤다.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신학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문화라는 영역에서 신학적인 자세를 익히도 록 가르친다. 문화신학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
자로 꼽히는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안
케빈 밴후저 지음
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성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이다. 신학은 일
수를 받은 목사이자, 미술과 문학 애호가일 뿐
요일만을 위한 게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한 주 내내 예수님이 가
“ 케빈 밴후저는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한 신진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평
르쳐 주신 길을 걸어야 한다. 문화신학은 진리와 생명의 길을 따라
판을 훨씬 공고히 할 것이다. 이 책은 교리의 기원과 본질을 무게 있게 다루는데, 린드벡의 걸작인 『교리
아니라 뛰어난 클래식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의 본질』과 어깨를 견줄 정도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이 책은 교리의 본질과 미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이 텍스트
걷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윤석인 옮김
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에 의미가 있는가?』, 『제일신학』 (IVP), 『구약의
_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옥스퍼드 복음전도 및 변증학 연구소 소장
“ 이 책은 성경, 교리, 기독교적 관례를 드라마와 상연의 각도로 새롭게 생각하는 유력한 방법론을 제공한 다. 밴후저는 문화 - 언어적 모델을 유용하게 다시 손질해서 성경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며, 교회도 오류 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성부 하나님
신학적 해설』 , 『신약의 신학적 해설』 (CLC), 『문
주연
성자 예수님
화신학』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총감독
성령님
조감독
목회자
대본
성경
옮긴이
신학
극작술
윤석인
“ 이 책은 활발한 논의, 성경과 신학 문헌들과 철학적 해석학에의 몰두, 흘러넘치는 도발적인 착상들을 통
교리
상연 지도
해서 기독교 교리의 현대적 르네상스를 앞당기고 진척시키는 작품이다. 이 책은 생기 넘치고 관대한 정
복음의 연극단
_캐스린 태너, 시카고 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 교수
데이비드 웰스 시리즈
극작가 겸 제작자
교회
통 기독교 신학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훌륭한 시작점을 제공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을 졸업하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케 빈 밴후저 교수의 지도로 조직신학 석사 학위
신학 실종
김재영 옮김 | 459쪽 | 20,000원
거룩하신 하나님
윤석인 옮김 | 359쪽 | 16,000원
(Th. M.) 를
윤리 실종
윤석인 옮김 | 346쪽 | 16,000원
은 관심을 가지고 폭넓게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위대하신 그리스도
윤석인 옮김 | 470쪽 | 20,000원
있으며, 부흥과개혁사의 전문 번역위원으로 섬
용기 있는 기독교
홍병룡 옮김 | 366쪽 | 16,000원
기고 있다. 번역서로는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이용중 옮김 | 368쪽 | 18,000원
인가』 ,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교
_존 웹스터,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교 킹스 칼리지 조직신학 교수
받았다. 개혁신학과 청교도신학에 깊
핵심』 ,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 데이비드 웰스는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성 가운데 한
적과 의미』 , 『거룩하신 하나님』, 『윤리실종』, 『위
사람이다. 신학과 교회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 과학의
케빈 밴후저 지음 | 윤석인 옮김
여러 학문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우리 시대에 세속적 문화와 복음주의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의 솜씨 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ISBN 978-89-6092-469-7 www.rnrbook.com 값 38,000원
대하신 그리스도』 , 『문화신학』 (이상 등 다수가 있다.
부흥과개혁사)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_ 고린도전서 4장 9절
아버지 뒤마는 드라마를 만들려면 사람에게는 한 가 지 열정과 사방의 벽이 필요하다는 말로써 대원칙을 천명했다. _ 윌러 캐더, “가구 없는 소설”
신학은 논증적 습성이 아니라 현시적 습성이다. 연극은 생물이다. _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2막 2장)
4
교리의 드라마
목차
서언 ·9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17 무대 장치: 신학과 문화 - 언어적 방향 선회 ·21
논제: 정경 - 언어적 방법론 ·43
전망: 보편적 - 복음적 정통주의 ·59
구성: 간단 개요 ·67
1부: 드라마
1장 하나님 드라마로서의 복음: 신적 목소리와 신적 연기자 ·75
등장, 퇴장, 그리고 복음의 경륜 ·77
하나님 드라마: 신적 발화와 행위 ·86
2장 하나님 드라마에서 신학: 인간 목소리와 인간 연기자 ·109
하나님 드라마의 신학 : 인간의 언어와 행위 ·110
신학의 사명과 삼위 하나님의 사명 ·113
3장 교리의 본질: 드라마적 제안 ·141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 : 런던과 브로드웨이가 예루살렘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 ·143
교리의 특성 : 명제의 특성, 시의 특성, 관례의 특성 ·151
하나님 드라마의 지시로서의 교리 ·180
2부: 대본
4장 말씀과 교회: 언약 문서로서의 정경 ·205
“가자 도로” 체험 : “성경을 따라서” ·206
어째서 정경에 의지해야 하는가? 문제와 가능성 ·214
언약으로서의 정경 : 성경이 교회를 구성하는 방식 ·236
기준으로서의 정경 : 성경이 지배하는 이유 ·249
5장 성경과 전통: 두 종류 ( 또는 그 이상 ) 의 상연 해석 ·265
성경이 전통으로 되다 : 제일 신학으로서의 교회론? ·270
상연 Ⅱ: 해석 공동체가 저술하고 지도한다 ·288
삼위 하나님의 상연 : 신적인 정경 담론 ·307
상연 Ⅰ: 해석 공동체는 반응하고 상연한다 ·312
6장 예수님, 성령, 교회: 하나님 드라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성경과 전통 ·323
성령 수용의 해석학 : 성령의 상연으로서의 교회? ·327
코미시오: 정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권위 ·333
“성령에 감화된” 전통 식별하기: 정경적 효과들에 대한 역사로서의 교회 ·344
교회 권위의 양식 : 정경적인 것으로서의 신앙 준칙 ·349
7장 정경의 관례들 속에 나타난 성령의 작용 ·363
문학적 관례들 : 사회적 행위의 유형으로서의 장르 ·364
정경적 관례와 언약적 삶의 형식 ·371
예수님의 관례로서의 언약적 관례 : 성경을 모형적으로 읽기와 희구하기 ·378
성령에 감화된 관례로서의 정경 ·388
솔라 스크립투라의 관례와 전통의 역할: 사피엔티아적 기준으로서의 정경 ·397
3부: 극작술가
8장 극작술로서의 신학 ·413
극작술가 소개하기 ·414
극작술가로서의 신학자 ·418
드라마적 적합성으로서의 충실성 ·434
9장 정경 - 언어적 방법론, 1부: 스키엔티아 ·447
후기 명제주의 신학 ·448
후기 보수주의 신학 ·469
후기 토대주의 신학 ·492
10장 정경 - 언어적 방법론, 2부: 사피엔티아 ·517
산문적 신학 ·520
실천적 신학 ·546
선지자적 신학 ·597
4부: 상연
11장 교리, 역할, 사명: 연기자로서의 준비 ·611
정체성 연출법: 캐스팅 초청, 역할 연기, 자연스런 행동 ·613
“메소드 연기법”: 등장인물에서 믿음의 성장으로 ·621
교리에서 정체성으로 : 속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640
제자의 사명 : 진정한 자신이 되는 것 ·664
12장 교리와 교회: 복음의 연극단 ·673
극장으로서의 교회 : 빈 공간 ·677
말씀과 성례의 극장 : 그리스도의 몸 상연하기 ·686
“분장한 해석자들”의 공동체 : 코무니오로서의 소통 극장 ·697
속죄 상연하기 : 순교의 극장 ·719
아마추어 신학에 대한 호소 : 비유를 통해 연기하기 ·744
결론: 신조, 신앙고백서, 그리고 목회자 / 감독: 회중적 행위의 극장 안에서 교리와 신학 ·751
연극단 감독하기 : 목회 신학 ·753
명작 극장 : 신조 신학 ·757
지역 극장 : 신앙고백적 신학 ·760
지역 극장 : 회중적 신학 ·765
참고 문헌 ·772 인명 색인 ·797
서언
기독교의 중심에는 여실히 두드러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고, 그 사 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구성한다.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로운 자기 소통은 본디 드라마의 성격을 띤 다. 그러면 기독교 교리가 그와 반대로 크게 따분하다는 인상을 주는 경 우가 무척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교리는 따분할 뿐더러 힘도 없다. 종교 사회학자 앨런 울프 ( Alan Wolfe ) 는 최근에 자신의 책 『미국 종 교의 변화』 ( The
Transformation of American Religion ) 에서
교리가 일반 그리
스도인의 삶과 사상에서 더 이상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지옥, 정죄, 심지어 죄에 대한 이야기도 일방적 판단을 피하 는 이해와 공감의 언어로 대체되었다. 교리와 신학에 대한 논증들도 자 취를 감추었다. 아무리 애써도 루터와 칼빈의 차이를 떠올리지 못하는 신자가 대부분이라면, 그러한 종교개혁가들과 여타 종교 지도자들이 수 세기에 걸쳐 관여한 논쟁과 분립은 전연 쓸모가 없다.” 1 ) 이전 세대의
1 ) Alan Wolfe, The Transformation of American Religion: How We Actually Live Our Faith
(New York: Free Press, 2003), p. 3.
서언
9
사람들은 “성경이 교회 안에서 침묵하는 기현상” 2 ) 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을 테지만, 시급한 당면 문제는 울프가 “교회 안에서 교리가 사라 지는 기현상” 3 ) 이라고 말한 것이다. 비평가들은 울프가 내놓은 분석이 정확한지의 여부를 문제 삼을 것이 거의 틀림없다. 하지만 울프가 무언가를 알아챘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 시하는 일화 속 증거는 풍부하다. 많은 포스트모던주의자에게는 “느끼 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다. 자기 신념을 교리의 각도로 정식화하는 작업 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거나 분열을 부추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주류 교회의 교인들은 자신이 소속된 교파가 교리의 측면에서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명확히 표명하는 일을 갈수록 힘들게 느끼며, 대형 교회의 교 인들은 스스로를 탈교파주의자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4 ) 울프가 제 안하는 논증이 비록 결점도 있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개연성 있고 정신 이 번쩍 들게 만드는 그림을 그린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교리가 사라 진 것은 신입 회원을 유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주류 교회에서 교리가 사라진 것은 그처럼 줄어드는 기존 회원의 수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 이다.” 5 ) 『교리의 드라마』는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실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믿음의 이해를 실증하는 일만큼 시급한 과제가 교회 안 에 결코 없음을 논증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리의 드라마』 는 교리가 이해와 진실한 삶에 불가결한 조력자란 점도 논증한다. 교리 는 교회의 건강에 꼭 필요한 요소요, 동시에 교회의 공개 증언에 불가결 한 조력자다. 문제는 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는 교리에 대한 기억 ( 또는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기억들 ) 에 있다. 2 ) James D. Smart, The Strange Silence of the Bible in the Church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0)를 보라. 3 ) Wolfe, Transformation of American Religion, 3장을 보라. 3장 1항의 제목은 “보수적 기독
교에서 교리가 사라지는 기현상”(p. 67)이다. 4 ) 그런 사유로, Wolfe, Transformation of American Religion, p. 74. 5 ) 앞의 책, p. 87.
10
교리의 드라마
이 책은 신학 ( 극작술 ), 성경 ( 대본 ), 신학적 이해 ( 상연 ), 교회 ( 연극단 ), 목회 자 ( 감독 ) 를 위한 새로운 은유를 제시한다. 이 책은 교리가 생활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도리어 지혜로운 삶에 대한 기획 속에서 하나님의 영 광을 추구하도록 신자들을 지도함으로써 교회를 섬긴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교리를 무의미한 것으로 묵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사역자와 일반 신자 모두에게 납득시키는 일과, 교회의 필요를 등한시하지 말 것 을 신학자에게 권면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 책은 목회의 어린 양이 신학 의 사자와 함께 눕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기독교 교리는 우리를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에 현실을 위한 처방전이나 다름없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 자체는 나의 예상보다 훨씬 드라마적인 것이 었다. 나는 집필 과정에서 인격적 측면뿐 아니라 개념적 측면에서도 두 려운 순간이나 흥미진진한 순간과 수없이 맞부딪혔다. 나는 자신이 설 교하는 내용을 실천하는가? ( 충분히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 나는 복음적이거 나 정통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또는 그런 면모들이 얼마간 결합된 특 징을 보이는가?
( 그렇다. )
의미, 지식, 진리에 대한 문제를 주로 인간적
관례와 탐구의 역사라는 각도로 파악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성경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유지하는 일이 가능할까? ( 3부를 읽어 보라. )
나는 어느 지역 교회에 참석해야 할까?
( 장로교회. )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여전히 궁금증을 품고 있는 독자들을 위해서, 나는 말 이 나온 김에 이런 점들을 언급한다. 내가 어떤 이념적 노선을 지지하는 지를 알고 싶어 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현대 신학의 지도 위에 나의 위치를 표시하는 일은 참으로 이 책에서 해결해야 할 주된 과제 중 하나 다. 인격적인 동시에 신학적인 정체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서사의 형태 로 나타난다. 이 서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위될 때 드라마가 된다. 구상을 다층화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나 는 흔히들 말하는 시간의 압박은 문제 삼지 않더라도 소재 자체를 제한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는데, 왜냐하면 소재가 이따금씩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저자의 뜻에 저항하는 듯 보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서언
11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때때로 작가의 수중에서 순간순간 벗어난다는 말 을 종종 듣는다. 특정한 논증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나는 성경의 충족 성이란 그리스도인이 성경적인지의 여부에서 진짜 문제가 순종과 관계 있음을 의미한다고 어느 정도 확신한 상태에서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 했다. 우리는 자신이 듣는 말에 순종할 것인가? 나는 계속해서 우리의 신앙이 우리가 따르는 신학과 결정적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 경의 충족성이란 문제를 재고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내가 애초에 구상한 계획, 곧 다소 적은 분량의 책을 쓰고 싶다는 희망은 무산되고 말았다. 특히 한 장에서 다루고자 생각했던 것 ( 성경과 전통 간의 관계 ) 이 네 개의 장 으로 바뀌었고 실제로 2부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 이렇게 고쳐 생 각한 결과로, 나는 처음 기대한 것보다 더욱 긍정적인 역할을 “전통”이 나 “즉흥 연기하기”라는 개념에 부여하게 되었다. 우리는 가령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 냉전의 종식, 종교 다원주의 등과 같이 극적이면서도 실로 획기적인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신학에서도 유사하게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들을 목 격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만 해도 기독교 신학에서 “분산된 스펙트럼” 으로 불리던 것이 의미심장하게 융화되면서 새로운 수렴과 연합, 그리 고 심지어 치유를 위한 시기가 무르익고 있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양대 체계는 현재 발생 중인 현상을 설명하기에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하 는 인상을 준다. 20여 년 전에 조지 린드벡 ( George
Lindbeck ) 은
후기 자
유주의적이고 문화 - 언어적인 신학과 규정적 교리론을 옹호하는 모종 의 선언서를 작성했다. 이 책은 관례에 대한 린드벡의 강조를 보전하는 동시에 성경에 더 굳게 뿌리내린, 후기 보수주의적이며 정경 - 언어적인 신학과 지시적 교리론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교회 개혁에 직접 초점을 맞추지는 않지만 모종의 기대 지 평을 형성한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교리와 삶의 숙명적인 이분법을 극 복함으로써, 신학과 교회가 모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제공하 는 교리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새뮤얼 존슨 ( Samuel
12
교리의 드라마
Johnson ) 이
런던과
관련해서 말한 것을 신학과 연결시켜서 말하고 싶다. 교리에 염증을 느 끼는 사람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데, 왜냐하면 교리는 바로 삶의 내용 자 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번영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왜
냐하면 교리는 자신이 누구며 어째서 여기에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교리가 무미건조하고 따분하다는 고정관념은 근거가 박약하고 과장된 왜곡을 사실 ( 교리는 근사하고 상쾌한 것 이라는 사실 ) 에
버금가는 것으로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킨다. 교리는
화학이나 물리학에 알려진 것만큼이나 실질적이고 강력한 에너지와 사 건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와 사건들, 우리가 대사를 말하고 연기하는 배역을 맡은 참여자로 접붙여 지는 에너지와 사건들을 다룬다. 내가 이 책에서 전달하기를 바라는 에너지 중에는 이 책의 부피에 가 려져 무색해진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애초에 의도한 것은 간략 하면서도 건설적인 선언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분명 그런 선언서를 기대했을 테지만, 그 선언서는 지금 책의 형태로 여러분 앞에 놓여 있다! 여러분 가운데 다른 어떤 주제와 관련된 나의 견해보다도 내
가 제안하는 지시적 교리론과 관련된 내용을 읽는 데 더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1, 2부의 마지막 장들만 읽을 것을 권유한다. 1, 2부의 다른 장들은 현대적 신학 환경과 관련된 더욱 자세한 논의를 포함하는 데, 나는 그 논의에 비추어서 내가 제안하는 견해의 위치를 설정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안하는 논제를 파악하려면 3, 4부는 모든 부분을 정독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책의 모태가 된 신학 방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수 있도록 초청해 준 존 스택하우스와 그 강연을 책으로 출간하도록 권유해 준 캐 리 뉴먼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탄생하는 중요한 단계에서 책의 대요를 읽고 제언해 준 점에 대해서, 나는 노스사이드 신학 저녁 토론 모임의 회원들 ( 데이비드 커닝햄, 스티브 롱, 마크 매킨토시, A. K. M, 마거릿 애 덤스 ) 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는 또한 커먼 루트 프로젝트 ( 트리니티
서언
13
복음주의 신학교와 세인트 메리 대학교의 먼들라인 신학교의 신학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서 펼치는 토론 모임 ) 에서
복음주의 전통과 로마 가톨릭교 전통이 저마다
복음의 본질을 주제로 펼친 통찰력 있는 논의들을 통해서, 그리고 2004년 신학 교육에 관한 워드 상담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견해에서 많 은 유익을 얻었다. 제일 장로교회 ( 일리노이의
리버티빌 ) 가
주관한 평신도
학교에서 이 책의 내용을 6주에 걸쳐 다루는 강좌에 성실히 참석한 사 람들에게도 감사한다. 목회학 석사 과정의 학생들 중에서 J. T. 파시와 대니얼 맥클레인은 여러 차례의 대단히 활발한 모임을 통해 이 책의 처음 세 장을 나와 함 께 숙고하고 검토했다. 박사 과정의 학생들 중에서 이 책의 여러 부분에 대해 논평해 준 리사 성과 애덤 고, 그리고 중복된 부분들을 삭제하고 원고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마이클 슬리스먼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다. 슬리스먼의 작업에 감사할 독자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나의 동료인 더그 스웨니는 결론부의 초고를 읽고 논증에서 중요한 빈틈을 지적해 주었고, 나는 스웨니에게 지적을 받은 뒤에 그 점을 보완했는데, 그도 만족스럽게 여기기를 바란다. 내가 예전에 가르쳤던 두 사람에게 특별 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니얼 트라이어는 초고에 나타난 많은 문제들 에 대해 나의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저술 과정도 드라마적 성격을 띤 다는 점을 나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트라이어의 지속적 통찰과 비평 덕 분에 나는 자칫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논증을 시연하게 되었 는데, 트라이어는 언제 어느 대목에서 어느 정도로 비난하고 위로해야 할지를 잘 알고 있는 이상적인 목회자 겸 비평가다. 또한 새뮤얼 웰스도 출판사가 정식 출간하기 전에 미리 자신의 훌륭한 책 『즉흥 연기: 기독 교 윤리의 드라마』 ( Improvisation:
The Drama of Christian Ethics ) 의
원고를 공
유함으로써, 내가 즉흥 연기에 관한 나의 직관적 통찰을 안심하고 신뢰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나는 나의 두 딸 매리와 엠마에게 감사할 수 있 게 되어 특히 기쁘게 생각하는데, 내가 여러 가지 문장, 비유적 표현, 논 증을 이따금씩 그 아이들에게 시험 삼아 들려주면, 대단히 열성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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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드라마
청취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의 아내 실비에게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충실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시카고 지역에서 상연되는 많은 연극들을 관람할 때마다 늘 동행해 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보다 전체적으로, 나는 기독교 신학이 현대의 르네상스를 맞는 데 기 여한 수많은 친구와 동료들, 그중에서도 내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가 르치는 동안 주관했던 여러 차례의 교의학 회의에 참석한 분들께 특별 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신학 분야는 내가 대학생이던 한 세대 이전과 비교하면 훨씬 건강한 상태다. 그들이 쓴 책을 통해서 관대한 정통주의 의 입장을 견지한 상태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비생산적 교착 상 태를 넘어서는 법을 깨닫는 데 도움을 준 많은 신학자들 중에서, 앞서 거명한 사람들 외에도 게리 배드콕, 작고한 콜린 건튼, 브루스 맥코맥, 프랜시스 왓슨, 존 웹스터를 언급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나의 은사인 니콜라스 래시 교수님께 바친다. 래시 교수 님이 나의 케임브리지 박사 학위 논문을 훌륭하게 지도해 주신 덕분에, 나는 박사 과정의 학생들과 함께 큰 도움을 받았는데 래시 교수님의 논 설 “성경 상연하기”는 내가 박사 과정의 첫 해였던 1982년 10월에 가 을 학기 세미나 ( “D Society” ) 에서 소개되는 것을 처음 들은 이후로 내 마 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이후에 “영미 전통에서 포 스트모던 신학의 본보기” 6 ) 로 일컬어지게 될 사람과 함께 공부하고 있 다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했다. 래시 교수님이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동 의하시지 않을 것은 분명하지만, 교수님도 자신의 열정적인 치유 활동 이 없었다면 상황이 대단히 쉽게 더 악화될 수 있었음을 납득하실 수 있을 것이다.
6 ) Brad Kallenberg and Nancey Murphy, “Anglo-American Postmodernity: A Theology
of Communal Practice,” in Kevin J. Vanhoozer,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Postmodern The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 26.
서언
15
T h e
16
D r a m a
교리의 드라마
o f
D o c t r i n e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태초에 빈 공간이 있다. 하나의 대사가 침묵을 깨뜨리고 하나의 우주 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세계가 시작된다. 더 많은 대사가 침묵을 깨뜨리면, 정체 모를 공간이 형태를 얻고 티끌에서 나온 형상들을 위한 장소가 된다. 무대가 갖추어진다. 연기 시작! 존재할 것인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인지는 질문도 아니고 우리의 선택도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 Martin
Heidegger ) 는
우리가 “존재에로
던져진다”라고 말한다.1 ) 우리는 그냥 세상 안에 있다. 우리는 많은 다 른 사람들과 함께 여기에, 무대 위에 있다. 도움 받지 않은 이성은 우리 가 여기에 있는 이유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없다. 하이데거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에게 제기되는 도전은 진정성을 성취 하는 것인데,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견해에서 보면 진정성은 사람이 자 기가 죽는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생명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알고 1 )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 trans. John Macquarrie and Edward Robinson
(Oxford: Basil Blackwell, 1980), p. 321.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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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고 생명 유지를 위한 기술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는 여전히 갈팡질팡한다.2 ) 우리는 은하계를 계측하 고 천문도를 작성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여전히 고심하 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지만, 아직도 자신이 누구 인지를 알아내고자 애쓰는 중이다. 우리가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연 기하고자 시도할 때면 지도가 필요하고, 다음에 말할 대사를 더듬거릴 때면 대사 일러 주기가 필요하다. 일정한 장소와 시간 ( 그리고 계층 ) 에 던 져지는 ( 태어나는 ) 것 자체가 어떤 초기의 방향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 다. 우리는 걸음마를 익히는 순간부터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 ( 남성이나 여 성,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나 뉴에이지 옹호자, 미국인이나 아시아인, 모던주의자나 포스 트모던주의자 ) 으로
사회화된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본성과 교육, 유전적 결정론과 사회적 세뇌, 형질 유전과 역사 중 어느 것이 인간 조건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지를 놓고 큰소리칠 권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지속적으로 경쟁한다. 우리 가 수행하는 역할이 우리의 생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우리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사실일까? 또 우리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관계없이, 자주적 결정 을 위한 우리의 자유와 능력에는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리가 사는 포 스트모던 기술 시대에 인간 존엄과 인격성을 보호할 마지노선은 어디 일까? 이런 질문들이 표현되는 방식 자체는 그것들을 제기하는 장본인이 인 간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드러낸다. 그런 질문들은 전 적으로 나와 관계있고 우리와 관계있으며, 철저히 인간중심적이다. 그 런 질문들은 그와 관련된 복음보다 포스트모던 서양 문화에 속한 것과 더 관련이 있다. 그런 질문들은 현대성의 전형적 특징인 신경증에 대한 2 ) 워커 퍼시(Walker Percy)는 Lost in the Cosmos: The Last Self-Help Book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1983)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 지만 그렇게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더 적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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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드라마
숨길 수 없는 징후들을 밝히 드러낸다. 폴 틸리히 ( Paul
Tillich ) 는
문화사
를 일련의 불안발작으로 해석한다. 고대 문명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겪 었고,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는 죄의식에 대한 불안을 겪었으며, 현대성 은 무의미성에 대한 불안을 겪고 있다. 만일 틸리히가 더 오래 살았다 면, 아마도 후기 현대성을 허위성에 대한 불안으로 특징지었을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성경적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으로 심사숙고한 결과물 로서, 이와 같은 각각의 문화적 - 영적 조건에 대응한다. 기독교 교리는 삶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복음을 비록 배타적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일차적 수단으로 사용하여, 실생활에서 직면하는 다양한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교리는 추상적 이론 이 결코 아니며 참으로 실생활의 내용이다. 실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 위치하는데, 교리가 추구하는 목적은 우리를 정확히 이 길로 이끄 는 것이다. 신학이 단순히 치유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로완 윌 리엄스 ( Rowan
Williams ) 는
신학의 다른 세 차원에도 올바르게 주의를 환
기시킨다. 첫 번째 차원은 기념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 시 작된다. 우리는 교의를 송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두 번째 차원은 의사소통이다. 신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교회 안팎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세 번째 차원은 비 판이다. 신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일에 대한 참 증언과 거짓 증언을 변별 하고자 애쓴다.3 ) 따라서 교리는 능숙하게 사용될 경우에 기념하고 의사소통하고 비판 하고 대처하는 데 유익하다. 이 책은 신학적 능력에 대한 설명을 제언하 는데, 신학적 능력은 학문적인 전문 지식보다 더 많은 측면을 수반한다.
3 ) Rowan Williams, On Christian Theology (Oxford: Blackwell, 2000), xiii. “Theology
deals with questions of meaning, truth, beauty, and practice”, Theology: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 17에서 데이비드 포드(David Ford)가 제시하는 유사한 사중의 직무 설명을 참고하라.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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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능력은 결국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여 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느 냐와 관련된 문제다. 신자 개인과 전 교회에 있어서 그러한 신학적 능력
을 달성하는 일만큼 중요한 과제도 없다. 신학적 능력을 달성할 수 있는 주요 수단 중 하나는 교리에 주의하는 것, 곧 교리가 성경에서 기원하며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발전된다는 사실에 주의하는 것이다. 교리는 교회가 자신이 어디로 “던져졌고” 그 안에서 어떤 배역을 맡 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교회는 하나님이 연출하시는 구속 드라마의 막간에, 곧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대에 살고 있다.4 ) 그 드라마에 포함된 각각의 막은 하나님이 취하시는 행동에 의해 시행 된다. 제1막은 창조 ( 창 1~3장 ) 로서, 앞으로 전개될 다른 모든 사건을 위 한 무대 장치다. 창세기 12장에서 시작하여 나머지 구약 성경을 통해 계속되는 제2막은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버리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행동과 관계있다. 중심이 되고 정점을 구성하는 제3막은 하나님의 최종 말씀/행위인 예수님이다. 제4막은 자기 영을 보내어 교회를 조성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시작한다. 마지막인 제5막은 종말, 모든 것의 완 성,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와 맺으신 관계의 극치다. 현재에 교회는 결정적인 예수님 사건과 종말의 마지막 사건 사이에서, 기억과 소망 사 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살고 있다. 올바른 교리 ( 권위 있는 가르침 ) 는 교회의 생존에 긴요하며, 이런 이유로 세계의 생존을 위해서도 극히 중요하다. 이것은 진부한 이야기가 절대 로 아니다. 그래도 교리는 다방면에서 귀찮은 문제로 취급받는다. 한편 으로 교리는 불화를 일으켜서 사랑과 화합에 장애가 된다. 다른 한편으 로 교리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무관한 듯한 경우가 너무나 잦아서, 일상 생활 속에서 직면하는 혼란이나 구체적 사안들과 그 어떤 긴요한 교류도 4 ) 구원 역사를 이렇게 드라마에 비유하는 심상은 톰 라이트(Tom Wright)에게서 빌려온 것
인데, 새뮤얼 웰스(Samuel Wells)도 이런 심상을 각색하여 사용한다. N. T. Wright, “How Can the Bible Be Authoritative?” Vox Evangelica 21 (1991), pp. 7~32와 Samuel Wells,
Improvisation: The Drama of Christian Ethics (Grand Rapids, MI: Brazos, 2004), pp. 53~5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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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드라마
전혀 유지하지 못한다. 유감이지만 이런 비난들은 모두 나름대로 일리 가 있다. 하지만 그런 잘못에 대한 책임은 올바른 교리에 있는 것이 아 니라, 올바른 교리를 잘못 다루고 올바른 교리가 지닌 본질과 목적을 그 릇되게 이해하는 태도에 있다. 교리에 대한 잘못된 그림이 우리를 사로 잡아 왔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무대를 설치하는 일로 시작하는데, 왜냐 하면 교리의 본질과 관련된 혼란, 교리가 지니는 권위의 소재와 관련된 이견들, 그리고 무엇보다 이론과 실천을 나누는 퇴행적 이분법에의 속 박으로 인해 올바른 교리가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 장치 : 신학과 문화 - 언어적 방향 선회 모든 새로운 기독교 세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지 않 으면 안 된다. 교회는 다른 어떤 인간 단체들도 이야기하거나 실행할 수 없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실행해야 하는가? 5 ) 자연과 사회는 모두 공백 을 극도로 싫어해서, 부동층의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고자 달려들기 위 해 항시 대기 중인 이념이나 문제들이 많다. 교회는 올바른 교리를 잃어 버린 상태에서 문화적 유행과 지적 동향이 이끄는 대로 휩쓸려 다닌다. 실로 이것은 현대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신 학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대체로 무방하다. 신학적 근육은 철학적 경 향과 문화적 경향에 지나치게 상관하고 순응한 결과로 위축되는 부작 용을 겪고 있다.6 ) 교회가 독특하게 이야기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은 철학이나 정치로 환 원될 수 없다. 교회에 부여된 독특한 책무는 복음을 선포하고 실행하는 5 ) John H. Leith, The Reformed Imperative: What the Church Has to Say That No One
Else Can Say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88), p. 14. 6 ) Michael Buckley, At the Origins of Modern Atheism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87); 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93); John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Oxford: Blackwell, 1990)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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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곧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라는 실재를 자신의 언어와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신학자에게 부여된 독 특한 책무는 교회의 언행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규범인 하나님의 말 씀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신학자 중에는 권위라는 개 념에 호소해도 좋은지, 또는 만일 권위라는 개념에 호소한다면 어디 서 (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성경 텍스트에서, 신앙 공동체에서 ) 그런 권위를 찾아 야 하는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전거와 규범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과 거짓 지식을 변별해야 하는 데,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한 분별없는 이야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를 힘쓰는 자들이 선택할 수 없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에 대한 호소는 사람의 마음을 크게 움직이기에 그냥 방치할 수 없다. 역사에는 자기 신념과 행위를 위한 근거로서, 또는 다양한 형태의 압제 와 심지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명분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단히 성급하게 호소하는 개인과 사회 ( 그리고
교회! ) 에
대한 사례가 매우 많다.
신학의 전거와 규범에 관한 질문으로 거듭해서 되돌아가야 하는 이유 도 바로 하나님 이야기가 대단히 쉽게 남용되기 때문이다. 신학의 본질 : 예비 단계
교리를 연구하는 주요 역사가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고백하는 바에 따르면, 교리는 정의하는 것보다 설명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7 ) 교리는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 연구를 성공적으로 마칠 때에 도달하는 것과 관계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 교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실행하고자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도적 증언에 담긴
7 )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vol. 1, The Emergence of the Catholic
Tradition (100~600)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1), 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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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드라마
의미를 믿음으로 연구한 끝에 얻게 되는 보상이다.8 )
믿음의 사람은 자신이 고백하는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무엇에 의 지해야 할까? 소발이 욥에게 던진 질문은 우리에게 도발로 돌아온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겠느냐”( 욥 11:7 ). 천재 철학자 는 자기 이성의 영역 안에 있는 것만 발견하지만, 요한 사도는 자신이 궁리한 결과물이 아닌 하나의 교훈, 진리를 선포한다. “태초부터 있으 며 우리가 들었고 눈으로 본 그것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요일
1:1~3 ).9 )
하나님을 직접 목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제기되는 도전은 접근의 도전 이다. 신적 계시는 이제 어디서 발견될 수 있을까? 적어도 네 가지의 선 택 가능한 대상이 있다.10 ) 1. 성경에 기록된 명제
성경에 기록된 주장이나 진술을 진리가 담긴 언어에 대한 유력한 사 례로 여겨서 신적 계시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여기서 교리는 “객관적 실재들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명제 또는 진 리” 11 ) 의 역할을 한다. 많은 신학자, 특히 신학 분야에서 보수 진영에 속 한 복음주의자들도 베뢰아에 살았던 유대인처럼 성경이 실제로 가르치 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행 17:11 ) 성경을 주의해서
8 ) 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관해 이야기할 때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라는 표제로 언급된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합시킬 목적으로 그렇게 한다. 따라 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9 ) Søren Kierkegaard, “On the Difference between a Genius and an Apostle,” in Walter
Lowrie and Alexander Dranda, eds., The Present Age and Two Minor Ethico-Religious
Treatie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0)를 보라. 10 ) 일반 계시에 대한 문제는 이 책이 다루는 범위를 넘어선다. 내가 연구하는 초점은 기독교
신학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차적으 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그렇다고 다른 것은 배제하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은 아니다). 11 ) George Lindbeck, 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84), p. 16. 이것은 린드벡이 그 견해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인데, 린드벡은 개인적으로 그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다.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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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연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나타나는 다양한 언어 형식들을 평서문과 명제로 환원하는 듯한 방식에 대해 곤혹스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명제주의”는 다양한 성경 텍스트, 특히 인지 적 특성만 아니라 심미적 특성이나 정서적 특성과 관련된 텍스트를 감 안하면 불충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로, 단순히 “정보 전달”의 각도 로만 이야기하는 태도로는 하나님과 성경 간의 복합적 관계를 제대로 공정하게 다루지 못한다. 셋째로, 성경적 명제주의는 철저히 현대적 형 태의 인식론, 즉 토대주의를 전제로 삼는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12 ) 2. 그리스도의 인격
칼 바르트 ( Karl
Barth ) 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성경 텍스트가 결부되
는 방식과 관련해서 더욱 역동적인 두 번째 개념을 제안한다. 성경 탐색 이 다시 한 번 중심 사상인데, 그것은 한 번 참이면 늘 참인 명제들을 캐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 이 곧 예수님에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 요 5:39 ) 이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독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사람의 말이 가리키는 올바른 지시 대상, 곧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게 함으로써 자신을 낮추셔서 알리실 때에만 하 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이미 “그 스스로인 것”,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형태가 “된다.” 명제주의 견해가 하나님이 과거에 성경 말씀을 사용하신 것 ( 예를 들어, 영감 ) 을
강조한다면, 바르트는 하나님이 현재에 성경 말씀을 사용하시는
것 ( 예를
들어, 조명 ) 에
주의를 환기한다.13 ) 바르트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12 ) 명제와 명제주의에 대한 문제는 9장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13 ) Bruce McCormack, “The Being of Holy Scripture Is in Becoming: Karl Barth in
Conversation with American Evangelical Criticism,” in Vincent Bacote, Laura Miguelez, and Dennis L. Okholm, eds., Evangelicals and Scripture: Tradition, Authority, and
Hermeneutic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4), pp. 5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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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드라마
성경이 예수님의 실재를 성례와 유사한 방식으로 매개하는 것이 텍스 트 자체에 담긴 축자적 의미와 어떤 식으로 연관되느냐는 것이다. 초기 비평가들 중에는 바르트가 주관적 계시 사건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객 관적 텍스트를 손상시킨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오로지 이 말씀들만을 사용하시리라고 바르 트가 기대했다는 것은 확실히 의미심장하다. 명제주의자가 계시에서 인 격적 요소를 부정하길 바라지 않듯이, 바르트도 명제의 역할을 부정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3. 기독교 경건
종교적 체험도 신적 계시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는 제3의 자리다. 이 선택 방안은 처음 두 방안들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데, 왜냐하면 성경 에 기록된 말씀을 인간이 개인이나 공동체의 종교적 체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각도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적 주관성이 흔히 직 접적이고 비언어적인 계시의 자리가 된다. 이런 입장을 옹호하는 대표적 인물은 현대 신학의 아버지인 프리드리 히 슐라이어마허 ( Friedrich
Schleiermacher ) 다.
“기독교 교리는 그리스도인
의 신앙 감정을 언어로 피력하는 설명이다.” 14 )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은 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감지한 중요성을 말로써 나타내고자 했 던 바를 표명한다. 하지만 적절한 신학적 진술들이 언제나 “하나님은 나에게 ~한 분이다”는 형식을 취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대단히 불
만족스럽다. 모든 지식은 칸트가 말하듯이 경험으로 시작할 수도 있지 만, 만일 거기서 끝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상 충된 견해들을 중재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15 ) 14 ) Friedrich Schleiermacher, The Christian Faith, ed. H. R. Mackintosh and J. S. Stewart
(Edinburgh: T. & T. Clark, 1928)의 15항의 표제(p. 76). 15 )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순수이성 비판』 2판 첫 행은 다음처럼 기록한다.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에는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trans. Norman Kemp Smith [London: Macmillan, 1933], p. 41).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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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체험 자체는 대단히 다양하고 믿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 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판정하는 궁극적 기준의 역할을 할 수 없다. 4. 교회 관례
최근 들어 많은 신학자는 교회론을 “제일 신학”으로, 이해를 추구하 는 믿음이 따라야 할 전거와 규범으로 떠받든다. 자신의 신학적 제일 원 리를 교회론에서 끌어내는 사람들은 우리가 “문화 - 언어적 견해”라고 부르는 입장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렇게 교회 자신의 말하기와 행동 하기 습관에로의 방향 선회는 환영할 만하고 오랫동안 기다려 온 변화 다. 신학은 현대성이 장악한 많은 시간 동안 주로 철학에서 끌어온 원리 에 속박되었고, 그 결과 교회는 “아테네” 유수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상 태에 놓이게 되었다. 교회 자체의 언어와 문화를 기반으로 신학을 시작 하는 것은 어떤 중립적 방법론으로 시작하는 현대적 경향과의 관계를 철저히 청산하는 것이다.16 ) 이 네 번째 관점에서 보면, 믿음이 추구하는 이해는 교회의 핵심 관례 속 에 함축되어 있다. 존 밀뱅크 ( John Milbank ) 는 신학이 “기독교 관례를 명확 히 표명하는 문제” 17 ) 라고 단언한다. 신학은 새로운 공동의 생활방식 ( 문화 ),
16 ) 서론(신학을 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중대 관심사
가 된 것은 계몽주의 이성이 계시에 대한 주장들을 검증하는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이요, 성경이 권위가 있다고 동의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권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는 의 견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진보에 의해 고무된 현대의 기대는 만일 모두가 똑같이 확실한 방식을 사용한다면 보편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현대성 속에서 신학 서론은 일차적으로 이성이 자리한 장소 어딘가에서 계시에 어울리는 집을 찾는 일과 관계있었다. 이 작품이 전제로 삼는 것은 서론 자체가 정확히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인 데, 그것은 신학의 내용이 신학 방법을 특징지어야 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17 ) John Milbank, “Postmodern Critical Augustinianism: A Short Summa in Forty-two
Responses to Unasked Questions,” in Graham Ward, ed., The Postmodern God: A
Theological Reader (Oxford: Blackwell, 1997), p. 267. 밀뱅크는 내가 “강경한 문화-언 어적 신학”이라고 부르게 될 입장을 지지한다. 나는 조지 린드벡이 설명하는 텍스트 내적 방법론을 “온건한 문화-언어적 신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공통점은 신앙 공동체의 관례에 초점을 맞춘다는 데 있다. 주된 차이는 린드벡의 경우에 그런 규칙들은 성경 서사에서 생 겨나지만 밀뱅크의 경우에는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적 삶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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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드라마
곧 교회가 지닌 고유의 “논리”를 명료하게 피력한다. 교리에 내용과 의 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교회의 삶과 언어의 형식이다.
이 선택 방안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제안하는 약속이 두드러진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객관성을 염원하거나 객관성을 갖춘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없다. 그와 반대로, 신학자가 수행해야 하는 과제는 특정 교회의 관점 안에서 사태의 추이를 기술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여러 세기에 걸친 역동적 과정, 곧 전통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된다. 이런 구 조 안에서는 성경이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정보를 담은 교과서라기보 다, 오히려 해석 공동체를 위해서 권위 있는 경전의 역할을 수행하며, 그 해석 공동체 안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발휘하는 정체성 서사에 더 가 깝다.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공동체의 이야기와 생각을 지배하는 내재 적 문법 규칙들에 대한 표현이다.18 ) 그렇지만 관련된 질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 러한 방법론이 그와 관련하여 신학보다는 사회학의 영향을 더 받은 것 은 아닌지, 또는 그러한 방법론이 기독교 공동체의 성원들이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기술하는 데 불과한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만일 교회 관례가 신학을 위한 전거와 규범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적 격의 관례와 기형적 관례를 어떻게 변별할 수 있을까? 캐스린 태 너 ( Kathryn
Tanner ) 는
그 문제를 정확히 진술한다. “일차적 관례의 내부
논리를 기술하는 것에 대한 후기 자유주의의 담론은 이차적 신학이 단 순히 그러한 관례들 자체에 내재된 논리를 찾아내는 역할만 할 뿐임을 강하게 시시한다.” 19 ) 신학이 다루는 소재 ( 하나님,
복음 ) 에는
단순한 “지
역 관습”으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무언가가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위에서 제시한 각 사례에서, 교리는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명제든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Milbank, Theology and Social Theory, pp. 385~386를 보라. 18 ) 이것은 린드벡의 “규정적” 교리론을 설명하는 한 방식이다. 19 ) Kathryn Tanner, Theories of Culture: A New Agenda for Theology (Minneapolis, MN:
Fortress Press, 1997), p. 74. 태너는 린드벡이 제안하는 방법론에 내재된 다양한 문제들, 특히 기독교 관례에 내재하는 논리가 단지 하나뿐이라는 린드벡의 전제를 검토한다.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27
예수님의 인격이든 기독교 경건이든 교회 관례든 간에 “일차적인” 무엇 에 대한 “이차적인” 정식화다. 따라서 교리는 의존적인 것으로 나타난 다. 다시 말해, 교리는 이층에서, 말하자면 창고 위에서 산다. 하지만 우 리가 방금 살펴본 것처럼, 신학이 정말 어디서 살지를 결정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면 합치점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각 집에는 성경을 위한 공간 이 꽤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20 ) 네 가지 선택 방안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경은 계시와 동연적인 것이거나, 계시에 대한 증언이거 나, 개인의 계시 체험에 대한 표현이거나, 교회의 언어와 삶에서 비롯된 소산과 응축물이다. 교리의 규범: 솔라 스크립투라인가 “성경 사용”인가?
신학적 권위가 어디에 소재하느냐는 것은 결코 새로운 쟁점이 아니 다. 교회는 모든 세대마다 그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유력한 후보 대 상 ( 이성,
체험, 성경, 전통 ) 이
거듭 종합되고 신학적으로 동원되어 왔다. 정
말 새로운 것은, 성경 주석과 신학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적 기획의 타당
성 여부를 이른바 이성이라는 보편 기준의 척도로 판결하려는 계몽주 의의 위세와 현대성의 경향이 약화되고 있는 현상이다. 2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주석가와 신학자들은 이성과 종교적 체험이라는 진흙과 짚 으로 교리의 벽돌을 만들도록 강요받았는데, 이성과 종교적 체험은 현 대 지식의 문지기들에게 인정받는 유일한 두 가지 전거였다. 다채로운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의 비평에 힘입어서, 우리는 이제 현대성이 추구한 기획이 문화적으로 대단히 상대적이고 역사적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으 며 이념에 크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참으로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현대 성경학과 신학의 많은 측면이 크게 현세적인 성격을 띤다는 사실 도 깨닫게 되었다. 주석가들은 성경을 “여느 다른 책처럼” 읽었다 ( 벤저민 20 ) 데이비드 켈시의 용어를 사용하면, 성경은 기독교 신학에서 “분석적” 성격을 띤다.
Proving Doctrine: The Uses of Scripture in Modern Theology (Harrisburg, P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9), p. 89를 보라.
28
교리의 드라마
조엣 ).
그러는 동안, 신학자들은 신학을 이런저런 철학의 각도로 재구성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요약하면, 비신학적 체계들이 신학 문제를 결정 했고, 그렇게 됨으로써 치명적 결과들이 발생했다. 성경은 인간 역사로 격하되었고, 전통은 인간적 체험으로 오그라들었다.21 ) 신학적 권위가 어디에 소재하느냐는 것은 에릭 피터슨 ( Erik son ) 과
아돌프 폰 하르낙 ( Adolf 22 )
로운 편지의 주제였다. 경 ) 의
von Harnack ) 이
Peter
1928년에 주고받은 흥미
하르낙은 솔라 스크립투라 ( sola scriptura , 오직 성
원리가 더 이상 책임성 있게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23 ) 성경
이 하나님에 의해 계시된 진리들을 담고 있다는 개념이 권위의 자리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는 하지만, 하르낙은 그런 개념을 신학적으로 고지 식한 것으로 여겨서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르낙은 교회가 따르던
21 ) Gerard Loughlin, “The Basis and Authority of Doctrine,” in Colin Gunton,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Christian Doctrin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p. 42. 또한 Jowett, “On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 Essays and Reviews (London: George Routledge and Sons, 1860)를 보라. 여전히 많은 자유주의자나 신자유 주의자에게는 특정 유형의 경험(예를 들어, 여성이나 가난한 자나 억압당하는 자들의 해 방에 도움이 되는 경험)이 신담론과 성경 해석을 위해서 타당한 기준의 역할을 한다. 주된 문제는 그러한 방법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의 무언가를 신앙과 삶을 위한 규범 으로 만드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한 규범들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는 다소 자의 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런 비판들이 제기됨에도 불구하고, 교리의 본질에 대한 나의 이 해에서 경험에 아무런 역할도 전혀 부여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경험이 수행하는 역할 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우리가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의 생태 환경 안에서 경험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 22 ) Michael Hollerich, “Erik Peterson’s Correspondence with Adolf von Harnack:
Retrieving a Neglected Critique of Church, Theology and Secularization in Weimar Germany,” Pro Ecclesia 2/3 (1993), pp. 305~332를 보라. 라인하르트 휘터는 그 언쟁 에 관해 10쪽에 걸쳐 이야기하면서 신학의 본질에 관한 자신의 중요한 연구를 시작한 다(Suffering Divine Things: Theology as Church Practice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0], pp. 5~15). 또한 Carl Braaten, “The Role of Dogma in Church and Theology,” in Victor Pfitzner and Hilary Regans, eds., The Task of
Theology Today (Edinburgh: T. & T. Clark, 1999), pp. 28~34를 보라. 23 ) 모든 것은 솔라 스크립투라의 원리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경우, 어원
은 단지 절반의 이야기만 들려준다. 더 흥미로운 질문은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이 이 구호를 어떻게 사용했느냐는 것이다. 나는 솔라 스크립투라의 구호가 사실상 특정 유형의 관례에 대 한 약칭이라는 점을 7장에서 논증할 것이다.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29
권위의 원리가 상실되었다고 슬퍼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 사실을 크게 기뻐하면서, 교회가 마침내 순수한 종교로 그리고 순전하고 비계층적인 복음의 메시지, 곧 형제애로 회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에릭 피터슨의 경우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 “얼마간의 교리적 권위가 없다면, 교회는 결코 존립할 수 없다.” 24 ) 마르틴 루터와 함께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중대한 지적, 사회적, 윤리적 문제와 관련해서 그 어떤 입장이나 견해도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로 서 있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교리에 대한 권한을 빼앗길 경우, 교회는 그 밖의 다른 인간 단체처럼 무력해지 고 일관성을 상실하게 된다. 하르낙은 예수님의 도덕적 생활방식을 권장하려는 자신의 기호를 노 골적으로 대변하는 방안만을 인정했다. “사람들은 개신교의 기원을 그 리스 정교 또는 로마 가톨릭교에서 찾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신교의 기 초를 완전무결한 성경문자주의에서 찾는다.” 25 ) 하르낙의 견해에 따르 면 이런 선택 방안들은 모두 현대성에 의해 차단되었는데, 왜냐하면 현 대성은 성경과 전통의 기원이 역사의 영향을 받는 것 ( 따라서 문화적으로 상 대적인 것 ) 으로
통감하기 때문이다.
피터슨이 당대의 개신교 신학과 관련해서 내린 진단, 곧 개신교 신학 이 주로 학자들의 관심사며 교회의 삶에서 단절되었다는 평가가 지금 까지도 진실처럼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개신교가 가톨릭교의 밑천에 의존해 연명한다는 피터슨의 주장은 참으로 오늘날의 상황에 꼭 들어 맞는 것처럼 들리는데, 왜냐하면 적어도 주류 교파들 사이에서는 개신 교 예전이 가톨릭교 미사와 유사하고 개신교 신앙고백은 고대의 신조 들에 가까워지며 개신교 신학의 개념들은 아퀴나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을 똑같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신교가 자양분을 제공받던 24 ) Erik Peterson, “Correspondence with Harnack and an Epilogue,” Pro Ecclesia 2/3
(1993), p. 334. 25 ) Hütter, Suffering Divine Things, p. 7에 인용된 하르낙의 진술.
30
교리의 드라마
뿌리에서 끊어진 상태에서 신학적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단 세 가지뿐 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곧 믿음을 이성에 대한 보편적 진리로 바꾸 어 표현하거나 ( 이성주의 ) 종교적 체험이 나타내는 탁월성에 호소하거 나 ( 신비주의 ) 사랑과 정의의 행위로 진리를 입증하는 것 ( 행동주의 ) 이다. 이 모든 선택 방안이 노출하는 문제는, 거기에 뚜렷이 기독교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무엇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하르낙이나 피터슨 중 어느 누구도 개신교 종교개혁가들이 규범적인 것으로 인정한 원리인 솔라 스크립투라에 의존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26 ) 성경의 권위는 심지어 피터슨이 개신교를 위 한 선택 방안으로 생각한 것들 중에 포함되지도 않는데, 특히 성경의 권 위라는 개념이 모두 ( 즉, 모든 교파나 신도 ) 가 “각기 소견대로 하는” 분파주 의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개봉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 다. 그리하여 개신교 교회는 온당한 “공적” 교회로서의 위상이 실추되 는 위험에 봉착한다.27 ) 피터슨도 직접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로 마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성경문자주의가 정말 확연히 드러내는 취약점을 감안하면, 성경과 전 통 간의 관계가 문제로 떠오를 경우에는 심지어 개신교 신자에게도 그 어떤 실질적 선택이 없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개신교의 미래는 피터 슨이 제기하는 이의에 우리가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달려 있다. 디트리 히 본회퍼 ( Dietrich Bonhoeffer ) 의 말을 빌리면, 문제는 “교회에서 교황권과 세속 권력과 결별한 뒤에, 어떤 권위가 교회 안에 확립되어 오직 말씀과 신앙고백서에만 기초할 수 있는지의 여부” 28 ) 다. 하르낙과 피터슨이 현대성의 절정기에 논쟁했던 문제는 현대성이 26 ) 피터슨의 설명에 따르면, 심지어 바르트가 주장하는 형태의 성경 원리도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런 원리는 다시 한 번 “엄격한 축자 영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 다(Hütter, Suffering Divine Things, p. 6에서 인용). 27 ) 이것은 적어도 휘터가 Harnack-Peterson 언쟁에 대한 자신의 관찰에서 얻은 교훈이다.
Suffering Divine Things, pp. 11~12를 보라. 28 ) Hütter, Suffering Divine Things, p. 13에서 인용.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31
막바지에 다다르자 훨씬 더 절박한 것이 되었다. 철학에서 나타난 이른 바 언어적 방향 선회는 잘 알려져 있다.29 ) 그러한 방향 선회는 경험과 이성이 언어에 의해 “혼합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부수하여 언어 외부 의 지식과 진리를 위한 정당화의 기준이 상실되는 것과 관계있다. 언어 적 방향 선회는 현대성이 우대했던 두 가지 인식론적 기준인 이성과 경 험이 위신을 잃고, 공동체의 습관적 관례로 이해되는 전통이 위신을 되 찾는 결과로 이어졌다. 조지 린드벡이 쓴 『교리의 본질』 ( The Nature of Doctrine ) 은 1984년에 발 표되었는데, 이로써 “문화 - 언어적” 방향 선회가 신학 분야에서 첫 선 을 보이게 되었다. 린드벡이 시도한 후기 자유주의적 제안이 처음에는 권위의 무게 추를 성경 텍스트로 되돌리는 듯 보였다. 하지만 좀 더 자 세히 조사하면 린드벡이 권위를 교회로, 다시 말해 성경이 그 안에서 그 리고 오직 그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는 단일 “문화”로 이전시킴을 알게 된다. 린드벡은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수용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의미가 사용의 기능이며 언어적 용 법이 사용자가 깃들이는 삶이나 관례 ( 곧
문화 ) 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다
고 이해했다. 따라서 린드벡이 염두에 두는 핵심 전제는 다음과 같다. 개별 인간 주체의 경험과 추론은 언제나 언어 사용의 전통 ( 즉,
문화 ) 에
의해 이미 형성되어 있다.30 ) 따라서 문화 - 언어적 방향 선회는 자율적 인식 주체에 대한 현대성의 전제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적 성격을 띤다. 근본 문제는 1928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그것은 개신교가 어느 방 향으로 나아가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의 지배적 기류는 29 ) Richard Rorty, ed., The Linguistic Turn: Recent Essays in Philosophical Method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Richard Rorty,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1)를 보라. 30 ) 린드벡은 특별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과 클리퍼드 거츠의 문화 인류학에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 덕분에 신학 서론이 마땅히 신학적이어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정확히 신학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궁금증이 생긴다.
32
교리의 드라마
솔라 스크립투라에서 전통 쪽으로 부는 중이다. 모든 것에 두루 통용되 던 보편적 이성이라는 현대주의의 신화가 해체되자, 심지어 철학자들도 “전통에 기초한 이성”의 측면에서 말하기 시작했다.31 ) 포스트모던주의 자들은 보편적 이성의 완전한 객관성 그리고 개인적 선호의 완전한 주 관성이라는 현대주의의 양극단을 대체할 방안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곧 비교적 완전한 상호 주관성, 한마디로 공동의 전통에 속한 권위다. 우리
에게 남아 있는 정당성의 기준은 특정 전통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문화 - 언어적 방향 선회가 신학 분야에서 노출하는 모호성을 가장 흥 미롭게 보여 주는 사례 중 하나는 한스 프라이 ( Hans
Frei ) 가
쓴 작품이
다. 어쩌면 프라이가 자신의 책 『성경의 서사성 상실』 ( Eclipse Narrative ) 에서
of Biblical
성경 비평가들이 성경을 신구약 텍스트나 기독교 신앙보
다 오히려 과학과 역사와 철학에서 끌어온 의미 구조와 진리 기준에 따 라 해석하게 된 경위를 어느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논증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32 ) 프라이는 성경이 이해 가능한 것이 되기 위해서 어떤 다른 개념성으로 재포장되거나 환언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프라이 가 몸소 보여 준 직관은 성경 서사가 독자적 방식으로 진리를 의미하고 주장하도록 허락하는 것이었다.33 ) 하지만 성경이 스스로 말하는 바를 의미한다는 프라이의 논제는 이후 의 작품에서 문화 - 언어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누가 보더라도 프라이는 단순히 “성경이 스스로 말하는 바를 의미한다”고 단언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못하다고 믿게 된 것이 분명했다. 문자적 의미를 “고 정하는” 방법과, 문자적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의 귀속적 주제로
31 ) 이를테면 Alasdair MacIntyre, 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 (London: Duckworth,
1988)를 보라. 32 ) Hans Frei, The Eclipse of Biblical Narrativ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74). 33 ) 프라이에게 “독자적 방식으로”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은 어느 정도 논란의 대상이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프라이가 사실상 그 문제를 명쾌하게 밝힌 적이 전혀 없다고 생각 한다.
서론 진리의 길, 삶의 내용
33
T h e
72
D r a m a
교리의 드라마
o f
D o c t r i n e
1부
드라마
1부는 하나님 드라마라는 주요 은유를 매개로 삼아, 신학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들 ( 하나님,
성경, 교리, 교회 ) 을
무대 위로 가져와서 조화시킨다.
논증에 따르는 과제라면, 신학의 소재 ( 복음, 사역으로 실행하신 구원의 말씀/행위 ) 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학의 방식을 형성해야지 거꾸로 되
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드라마 모델은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와 하나님 의 의사소통 행위에 맡겨진 중심적 역할 모두에 초점을 맞춘다. 복음과 거기에 이어지는 신학 작업은 말과 행동을 수반하지만, 신적 발화와 행 위가 인간의 반응보다 선행하며 우선한다. 하나님 드라마의 초점은 성경과 신학 간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드라마의 이야기 전개에서 명실상 부한 부분이다. 성경에서 인간 이야기는 삼위 하나님의 의사소통 행위 에 완전히 휩싸여 있어서 복음의 경륜으로 불러도 좋은 것에 참여하는 데, 복음의 경륜은 계시와 구속을 매개한다. 성경과 신학이 똑같이 추구 하는 목적은 교제를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의사소통 행위로 끌어들 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복음, 성경, 신학의 개념은 교리의 본질과 관련 해서 새로운 견해를 제안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한다. 3장은 지시적 교리 론을 소개하고, 지시적 교리론이 “서사시적” 교리론이나 “서정시적”
서론 진리의 길, 1부: 삶의 드라마 내용
73
교리론보다 우월함을 변론하며, 지시적 교리론을 적 성격을 띠는 문화 - 언어적 교리론과 구별한다.
74
교리의 드라마
( 거의 )
똑같이 드라마
1장 하나님 드라마로서의 복음 :
신적 목소리와 신적 연기자
극장에 부여된 특별한 사명이 “말하기가 곧 행동하기”요 “행동 하기가 곧 말하기”라는 이런 직관의 결과들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옳다.1 )
드라마는 일종의 행위 ( doing ), 곧 상연이다.2 ) 드라마는 극장이라는 환 경 안에서 일련의 행동들을 표시하는데, 극장은 관객이 발생하는 사건 들을 목격하는 장소다. 고전 극장에서는 연기자의 연기가 극장 바깥의 실재를 모방했다. 그래서 중세 드라마에서는 세계 자체가 하나님의 행 동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극장이었으며, 하나님의 행동은 천국과
1 ) Ross Chambers, “Le Masque et le miroir: Vers une théorie relationelle du théâtre,”
Etudes Litéraires 13 (1980), p. 402. 2 ) 헬라어 동사 ‘드라오’(“~을 하다”)에서 유래함. 드라마는 기록된 “대본”이 기록 과정에
서 보전하고 “상연”이 재현하는 일련의 이야기 전개다. 나는 드라마 이론가들이 이 용어들 을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안다. 예를 들어, Richard Schechner, “Drama, Script, Theatre and Performance,” in Essays on Performance Theory 1970~1976 (New York: Drama Book Specialists, 1977), pp. 36~61를 보라.
1장 하나님 드라마로서의 복음:신적 목소리와 신적 연기자
75
지상과 지옥을 묘사하는 삼단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연기자와 관객 간 의 경계는 선명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연기자였다. 현 대 극장은 하나님을 더 이상 관객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관객도 상연의 일부라는 개념을 회복했다.3 ) 이 책은 하나님과 인간이 교대로 연기자 요 관객이라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삶이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 극장이 며, 신학은 하나님이 세계를 위해서 말씀하고 실행하시는 것과 우리가 거기에 감사로 반응하여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좋겠다. 비극은 파국 ( catastrophe ) 을 다루지만 신학은 톨킨 ( J. R. R. Tolkien ) 이 명 명한 선한 파국 ( eucatastrophe ) 과 관계있는데, 선한 파국이라는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격변적 사건을 가리킨다.4 ) 좋은 소식 ( euangelion. 음 ) 이
복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례적으로 어떤 선한 일을 하셨기 때
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 셨느니라”( 고후
5:19 ).
이것이 하나님 드라마에서 중심에 자리하는 신적
행위다. 따라서 복음을 드라마로 간주하는 것은 어떤 이질적 체계를 성 경 텍스트에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 텍스트에 암시된 내 용을 뚜렷이 드러내는 것이다. “신학 자체는 이런 [드라마적] 형식을 필 요로 한다. 그것은 신학 안에 내재하는 어떤 것임에 분명하다.” 5 ) 관객 이 누군지 그리고 관객에게 맡겨진 역할이 어떤 것인지의 문제는 이어 지는 장들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번 장에서 염두에 두는 목표는, 하나님 이 세계 역사의 무대 위에서 실행하시는 일, 곧 복음이라는 별칭으로 불 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세부적으로 상술하는 것 이다. 3 ) 이를테면 Susan Bennett, Theatre Audiences: A Theory of Production and Reception , 2nd
ed.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7)을 보라. 4 ) J. R. R. Tolkien, “On Fairy-Stories,” in C. S. Lewis, ed., Essays Presented to Charles
Williams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6), p. 81. 5 ) Hans Urs von Balthasar, Theo-drama: Theological Dramatic Theory , vol. 1,
Prolegomena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88),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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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드라마
등장, 퇴장, 그리고 복음의 경륜 드라마가 지니는 신학적 특징은 동작과 역동작에 있다. 하나님 은 동작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으로 내려오셨다……가장 오래 된 드라마, 곧 세계를 규정하는 드라마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만 나는 드라마다.6 )
신학의 방식은 하나님 드라마의 소재에 적합해야 한다. 바르트는 신 학의 “원리”가 신적 계시의 내용 자체,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실 행하고자 뜻하신 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바르트의 이런 주장은 옳은 것이다. “복음적 신학은 복음에 의해 발생되고 지배되고 판단되는 신학이다.” 7 ) 그와 동시에, 우리는 계시 행위와는 별도로 내용만 간직할 수 없다. 계시는 단지 하나님에 관한 진리들의 소통만이 아니다. 더 중 요한 것은, 계시가 행위와 말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소통이라는 점이다. 만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셔서” 하나님 드라 마의 막을 올리시지 않으면, 신학은 하나님께 속한 어떤 것도 전혀 알지 못한다.8 ) 따라서 신적 계시의 내용과 과정은 모두 본질적으로 드라마 적 성격을 띤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일련의 의사소통적 조치 ( 언어로 이루어지는 조치도 있고 많은 사건들로 이루어지는 조치도 있음 ) 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데, 그 모든 조치들은 궁극적으
로 구속적 성격을 띤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이처럼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일련의 계시적이고 구속적인 사건들의 정점인데, 그 사건들은
6 ) Gerardus van der Leeuw, Sacred and Profane Beauty: The Holy in Art (New York: Holt,
Rinehart & Winston, 1963), p. 111. 7 ) John B. Webster, “The Self-Organizing Power of the Gospel of Christ: Episcopacy and
Community Formation,” International Journal of Systematic Theology 3 (2001), p. 69. 8 ) 예수님이 숨을 거두신 순간에 발생한 성전 휘장의 찢어짐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
로운 접근 방법을 상징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을 온전히 쏟아부으시는 사건에서 하나 님이 가장 충분히 계시됨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1장 하나님 드라마로서의 복음: 신적 목소리와 신적 연기자
77
언약을 초점으로 삼는 동시에 전 우주에 미치는 단일한 구속 드라마를 공동으로 기술한다.
따라서 “복음적”이라는 수식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역사와 역사와 미래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성경에서 스스로를 계시하 시는 “복음의 하나님”을 알고자 전력하는 그런 신학을 가리킨다.9 ) 복 음적 신학은 무엇보다 성경, 곧 구약과 신약을 공인된 형태의 구속 드라 마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실행하신 일들을 올바로 이해 하는 데 꼭 필요한 환경으로 다룬다. 교회가 성경을 자신의 권위 있는 경전, 곧 이례적이고 유일무이한 복음에 대한 규준으로 올바르게 받아 들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복음적 신학은 다른 복음이 없고 ( 갈 1:7 ) 복 음의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도 없으며 복음이 나타내는 것 외에 다른 진실도 없다고 믿는다. 유앙겔리온 ( euangelion.
“복음” ) 에
부합하여 수행되는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공동으로 구성하는 두 가지 신적 조처를 강 조하는데, 하나는 행동하시는 하나님 ( 어떤 일이 실행되는 경우에만 소식이 존재 함 ) 이며
다른 하나는 말씀하시는 하나님 ( 실행된 일을 누군가가 전하는 경우에만
소식이 존재함 ) 이다.
복음적 신학은 이런 신적 조처들을 신학이 시작하는
두 가지 소여로 받아들인다. “복음적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인간의 믿음이나 반응이나 체험보다 우선시하는 형태의 기독교를 가리 킨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 기록되고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에 대한 동의 어로서의 )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를 상대로 지니는
우위성과 권위를 뜻한다.” 10 ) 여기에 이어지는 결과는 복음에 대한 기발 한 해석이라기보다, 더 나은 용어가 없기에 “순전한 복음주의”로 지칭 9 )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역사”(prehistory)라고 말할 때, 하나님이 창조에서 그리고 특별
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실행하신 모든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도 복음의 하나님에 대한 권위 있는 증언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미 래”라고 말할 때,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적 환상을 염두에 둔다. 10 ) Bernard Ramm, The Evangelical Heritage: A Study in Historical Theology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73), p. 13.
78
교리의 드라마
가능한 것을 궁리하려는 시도다. 복음은 “지금껏 상연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드라마요……하나님이 희생자인 동시에 영웅인 가공할 만한 드라마다.” 11 ) 드라마는 말과 행위 의 복합체여서, 행위의 전달이 말을 압도하기도 하고 말이 행위를 전달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하고자 뜻하 신 일은, 창조와 언약이라는 구약의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과 사역을 파악하는 성경적 대본에 따라야만 궁극적으로 이치에 닿는 다. 우주적 무대와 언약적 구상이 존재하고 갈등이 존재하고 절정이 존 재하고 대단원이 존재한다. 복음적 신학은 이질적 부분들로 구성된 개념 과 정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신적 행위들, 곧 모든 것을 아우르는 우주 적 드라마를 다루는데, 이 우주적 드라마는 하나님의 등장과 퇴장을 보 여 준다.12 )
등장 복음적 신학이 내세우는 첫 번째 전제는, 하나님이 세상과의 관계로 들어오실 수 있고 실제로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복음의 하나님은 자신 이 기뻐하는 대로 자유로이 출입하신다. 이것은 어떤 독단적 전제가 아 니라 오히려 성경 서사를 바탕으로 도출된 필연적 결과인데, 성경 서사 는 하나님을 모든 시공간적 집합체의 창조주로 따라서 주권자로 묘사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종종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그런 방식으로 인간 사의 과정에 관여하시는 것으로 기술한다. 하나님은 어려운 때에 신적 용사로 나타나시며, 다른 때에는 말씀의 전달자로 나타나신다.13 ) 하지 만 하나님이 자신이 기뻐하는 대로 자유롭게 세상에 들어오신다고 주 장하는 결정적 근거는 성육신인데, 삼위 하나님 중 둘째 위격이 인류에 11 ) Dorothy Sayers, Creed or Chaos?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 1949), 1장. 12 ) 나는 “서사”라는 범주보다 “드라마”라는 범주가 더 우월하다는 입장을 이 장 후반부에 변
호할 것이다. 13 ) 그러한 사유로 Terence E. Fretheim, The Suffering of God: An Old Testament
Perspective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84), pp. 80~81.
1장 하나님 드라마로서의 복음: 신적 목소리와 신적 연기자
79
게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14 )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 ( 요
1:1, 14 ) 으로
소개한다. 이 영원한 말씀이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 과 예수 ( “주께서 구원하신다” ) 로 불린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닌데, 왜냐하면 이런 신적 등장은 하나님이 자신 의 언약 백성을 위해 최종적으로 승리하시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퇴장 모든 드라마가 그렇듯 복음도 등장과 퇴장을 모두 동반한다. 복음에 는 “출애굽”( 문자적으로는
탈출 )이
있는데, 출애굽기에는 “복음”이 있다.
각각의 경우, 하나님의 능하신 구원 행위는 “퇴장”의 형태를 취한다. 출 애굽기와 복음서들은 주제의 초점이 동일하다.15 ) 출애굽기와 복음서들 은 모두 장차 언약 중재자로 오실 인물의 언어와 행위를 자세히 진술하 는데, 언약 비준에 대한 기사들을 기록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출애굽기에서 책의 후반부는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 간에 맺어진 언 약 제도를 기록한다. 복음서들에서는 자세한 수난 서사들이 거의 같은 방식으로 역할을 수행한다.16 ) 끝으로, 각 언약 중재자는 하나님을 위해
14 ) 이런저런 신적 등장들에 관해서 정확하게 생각하는 방법은 물리학, 철학, 심리학 등의 관
점에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성경의 증언을 기초로 결정되어야 한다. 복음적인 신학은 복 음의 진리 주장이 다른 모든 신념을 제어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 는다면, 그것은 의미, 진리, 타당성에 대한 정경적 구성이 아닌 문화적 구성에 맞게 복음 을 변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샬이 자신의 책에서 명확히 표명하는 “인식적 의존 논제”의 기본 골자이다(Bruce D. Marshall, Trinity and Tru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 127). 15 ) 그러한 사유로 Meredith G. Kline, The Structure of Biblical Authority, 2nd ed.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2), p. 175. 16 ) 클라인은 복음서에 기록된 수난 서사들이 변형 기사(마 17:1~13; 막 9:2~13; 눅
9:28~36)로 시작하여 광채 나는 얼굴(마 17:2; 출 34:29)로 완결되는데, 그것은 모세가 산 정상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출 19~34장)과 확실히 유사하다고 진술한다. 모세가 예수님과 더불어 모습을 드러낸 것(마 17:3)은 독자들이 그 두 사람을 연관시키는 것을 심 지어 더디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모세의 행적에 필적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끝으로, 성찬은 출애굽기 24장 11절에 기록된 언약 비준 만찬과 닮 은 점이 있다.
80
교리의 드라마
“집”을 세우고 ( 모세의
경우는 성막, 예수님의 경우는 교회 )
후임자를 지명한
다 ( 모세의 경우는 여호수아, 예수님의 경우는 성령 ). 출애굽 (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지신 사건 ) 은
구약 성경에
서 가장 위대한 구원 사건이다. 출애굽은 극적 장면이 연출된 사건이며, 과거에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오랜 기다림 끝에 성취 된 사건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시며 자기 약속을 근거로 구원하신다. 따라서 출애굽은 다른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확인 시키는 단막극이 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0:2 ).
출애굽은 하나님 드라마에서 매우
중요한 전개다. “출애굽기 저자가 발휘하는 역사적 상상력은 ‘평범한’ 역사를 칼빈이 명명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극장 ( theatrum gloriae Dei ) 으로
변모시킨다.” 17 ) 애굽에서의 구원은 그 규모와 세부 내용에 있
어서, 그리고 특히 그 자체를 넘어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더한층 위 대한 해방”을 예표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에서 “연극적 성격”을 띤다.18 )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예루살렘에서의 “별 세”( 문자적으로는
탈출 exodos ) 로
말씀하신다.19 )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출애굽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출애굽기와 복음서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더욱 강화시킨다.20 ) 예수님의 외형이 변모되는 기 사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출애굽”이 언급된 것은 결코 우연 의 일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사건으로 도입되는 수난 서사 17 ) Francesca Murphy, The Comedy of Revelation: Paradise Lost and Regained in Biblical
Narrative (Edinburgh: T. & T. Clark, 2000), p. 79. 18 ) Max Harris, Theatre and Incarnation (London: Macmillan, 1990), p. 8. 19 ) Michael Parsons, The Departure of Jesus in Luke-Acts, JSNTSS Suppl. 21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7)를 보라. 20 ) 모형적 또는 예표론적 읽기는 두 삽화 사이에서 고유한 정경적 연관성을 완성한다. 예수님
의 출애굽과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안된다. 다음은 그 가운데 중요한 세 가지 가능성이다. 첫째는 이스 라엘 자손이 애굽을 떠난 것과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떠나신 것, 둘째는 이스라엘이 홍해의 물을 통과한 것과 예수님이 고난이라는 세례의 물을 통과하신 것(눅 12:50), 셋째는 이스 라엘이 홍해의 물에서 나온 것과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1장 하나님 드라마로서의 복음: 신적 목소리와 신적 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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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부분” 21 ) 을 상징한다. 이 새로운 출애굽도 이전의 출애굽과 마찬가지 로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이다. 예수님의 극적인 퇴장이 성취한 것은 무 엇일까? 베드로전서 1장 14~20절 내용에 따르면, 예수님의 피가 죄의 속박에서 “구해 낸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의 세례에서 예시되었 고, 홍해 구절에 나타나는 물의 시련이라는 상징도 예수님의 세례에서 새로워졌으므로 ( 고전 10:1이하 참고 ), 우리는 성경의 예법대로 예수님도 모 세처럼 사망의 바다를 건너는 때에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22 )
복음의 경륜과 경륜적 삼위일체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눅
24:34 ).
헬라어에서 한 단어로 된 이 문
장은 구속 드라마의 절정을 기쁨으로 선포한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 다”는 진술은 수 세기에 걸쳐서 고조된 극적 긴장, 곧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약속들을 이행하실 것인가, 하나님이 언약을 깨뜨린 자들과 어떻 게 언약을 유지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모든 민족에 복을 주실 것인가 등과 같은 의혹의 해결을 요약적으로 내 포한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이 진술은 대단히 압축적이어서 사 색과 “다층적 서술”이 요구된다. 이 문장에서 명시된 주어는 예수 그리 스도이지만, 함축된 주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아버지 하나 님이다. 그리고 명시된 서술어는 부활이지만, 함축된 서술어는 예수님 의 십자가 죽음이다.23 )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부활은 새 창조를 시작하는 사건인 만큼 대단히 이례적이고 유일무이하다. 하지만 부활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주 어와 서술어를 분석하는 것 이상의 작업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부활 21 ) Kline, Structure, p. 183. 22 ) 앞의 책, p. 189. 23 ) 젠슨도 유사하게 말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복음의 주어이며 “예
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의 술어라고 단언한다(Robert W. Jenson, Systematic
Theology, vol. 1, The Triune Go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194).
82
교리의 드라마
사건을 정경적 맥락 안에 두어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 대로” 발생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와 바울이 각각 사복음서 와 사도행전과 여러 서신에서 한결같이 전하는 가르침이다 ( 눅 24:44~46; 행 2:22~32; 고전 15:3, 4 ).
정경적 맥락은 바르트의 주장대로 부활을 성부
하나님의 “판결”로 소개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하나님 의 아들로 입증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서명된 새 언약을 받아들 이셨음을 알림으로써 요한복음의 법정극을 해소하는 판결이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복음은 신적 등장과 퇴장, 그리고 귀환을 동반하는 이야기다. 예수님의 “퇴장”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뿐 아니라 아버지께로의 승천도 포함한다. 실로 복음을 신적 희극으로 만 드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승천인데, 승천은 상승과 하강의 주기에 서 그렇게 하듯이 “하늘과 땅의 결합”을 완성한다.24 ) 부활과 승천 ( 예수 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귀환”하신 사건 ) 으로
또 하나의
등장이 가능해지는데, 그것은 곧 성령의 등장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 별강화에서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하 리라”( 요 16:7 ). 예수님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구속 사역을 완료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실 수 있는 위치에 오르신다. 결국 예수님의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는 뜻인 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누리는 삶이다.25 )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 부활이 이례적 사건이지만 자의적 사건은 결코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헬라어 명사 오이코노미아를 언 급할 필요가 있다. 오이코노미아 ( oikonomia , “경륜”, “정해진 계획” ) 란 “집안 관 리”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장기간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24 ) 예수님의 승천 교리가 지니는 중요성을 위해서는, Douglas Farrow, Ascension and
Ecclesia: On the Significance of the Doctrine of the Ascension for Ecclesiology and Christian Cosmology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99)를 보라. 25 )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신학대전』에 나타나는 병렬 구조에 유의하라. 『신학대전』도 “나
감”과 “돌아옴”에 기초한다.
1장 하나님 드라마로서의 복음: 신적 목소리와 신적 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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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 케빈 밴후저 지음 | 윤석인 옮김 | 472쪽 | 18,000원
님은 그 이야기 전개의 절정이자 요약이다. 성령은 전 세계적 연출을 총관하시는 총감독인 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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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상연들을 감독할 일차 책임을 맡은 것은 바로 목회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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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의 드라마
지은이
케빈 밴후저 (Kevin J. Vanhoozer) 현재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 조직신학 연 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M. Div.)와
케임브리지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으
며,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신학부에서 8년 동안 부교수로 가르쳤다. 가장 주목받는 차세대 신학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문화라는 영역에서 신학적인 자세를 익히도 록 가르친다. 문화신학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
자로 꼽히는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안
케빈 밴후저 지음
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성적이고 실제적인 작업이다. 신학은 일
수를 받은 목사이자, 미술과 문학 애호가일 뿐
요일만을 위한 게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한 주 내내 예수님이 가
“ 케빈 밴후저는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한 신진 신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평
르쳐 주신 길을 걸어야 한다. 문화신학은 진리와 생명의 길을 따라
판을 훨씬 공고히 할 것이다. 이 책은 교리의 기원과 본질을 무게 있게 다루는데, 린드벡의 걸작인 『교리
아니라 뛰어난 클래식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의 본질』과 어깨를 견줄 정도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이 책은 교리의 본질과 미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이 텍스트
걷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윤석인 옮김
라면 누구나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다.”
에 의미가 있는가?』, 『제일신학』 (IVP), 『구약의
_알리스터 맥그래스,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옥스퍼드 복음전도 및 변증학 연구소 소장
“ 이 책은 성경, 교리, 기독교적 관례를 드라마와 상연의 각도로 새롭게 생각하는 유력한 방법론을 제공한 다. 밴후저는 문화 - 언어적 모델을 유용하게 다시 손질해서 성경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며, 교회도 오류 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성부 하나님
신학적 해설』 , 『신약의 신학적 해설』 (CLC), 『문
주연
성자 예수님
화신학』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총감독
성령님
조감독
목회자
대본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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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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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활발한 논의, 성경과 신학 문헌들과 철학적 해석학에의 몰두, 흘러넘치는 도발적인 착상들을 통
교리
상연 지도
해서 기독교 교리의 현대적 르네상스를 앞당기고 진척시키는 작품이다. 이 책은 생기 넘치고 관대한 정
복음의 연극단
_캐스린 태너, 시카고 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 교수
데이비드 웰스 시리즈
극작가 겸 제작자
교회
통 기독교 신학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훌륭한 시작점을 제공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을 졸업하고,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케 빈 밴후저 교수의 지도로 조직신학 석사 학위
신학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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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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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 M.) 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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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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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부흥과개혁사의 전문 번역위원으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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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있다. 번역서로는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이용중 옮김 | 368쪽 | 18,000원
인가』 , 『사도신경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기독교
_존 웹스터,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교 킹스 칼리지 조직신학 교수
받았다. 개혁신학과 청교도신학에 깊
핵심』 ,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 데이비드 웰스는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성 가운데 한
적과 의미』 , 『거룩하신 하나님』, 『윤리실종』, 『위
사람이다. 신학과 교회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 과학의
케빈 밴후저 지음 | 윤석인 옮김
여러 학문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우리 시대에 세속적 문화와 복음주의 교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등의 솜씨 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ISBN 978-89-6092-469-7 www.rnrbook.com 값 38,000원
대하신 그리스도』 , 『문화신학』 (이상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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