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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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주의자로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도,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지평을 배경으로 성취한 예수와 성령의 협력 사역에 대한 강력한 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험적 및 교리적 이해로부터 분리되면 의미가 없다. 개인적인 전도, 대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스코트 스웨인 지음 | 전광규 옮김 | 276쪽 | 14,000원

화하는 기도, 헌신적인 성경 연구, 권위 있는 설교, 세계 선교, 구원의

성경신학자와 조직신학자의 공동 저작으로, 삼위 일체 교리에 가장 원초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요

확신은 모두 복음 안에 있는 삶이 삼위일체와 교제하는 삶이라는 것

한복음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에 대

을 전제한다……복음은 삼위일체적이며, 삼위일체는 복음이다. 기독

해 말하는 바를 개괄하고 종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성령·선교

교의 구원은 삼위일체로부터 나오고, 삼위일체를 통해 발생하며, 우

등 제4복음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의 주요 주제들을 자세하게 다룬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을 아는

리를 삼위일체에게 이끈다.” _서문에서

지식이 성도에게 복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T H E

D E E P

T H I N G S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복음 레이 오틀런드 지음 | 김태곤 옮김 | 184쪽 | 7,500원

“‌ 모든 교리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교리에 대한 실제적인 안내서가 마침내 나왔

복음은 교회와 관련해 복음 교리와 복음 문화의 두 차원을 가진다. 따라서 복음 교리를 강조하는

일상 경험의 살과 피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는 내부 골격이 되는지 보여 준

교회들이 정작 그 복음이 형성한 문화에 무관심

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지은이

프레드

샌더스 ( Fred Sanders )

바이올라 대학교의 토레이 명예 연구소에서 신학 교수 로 있다. 인기 있는 블로거이자 강연자인 샌더스는 수많 은 저널 기사를 기고했고, 『내재적 삼위일체의 형상』 (The Image of the Immanent Trinity) 을

포함해 여러 권의 책을 저

제럴드 브레이

조하는 교회들이 복음 교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함 때문에 아무런

비슨 신학교 연구 교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 책을 통해 복음 교리와

“‌ 이 책은 내가 알고 있는 복음주의적 신앙과 실천의 본질적인 삼위일체적 형태 에 대한 좋은 입문서다. 이 책을 읽고, 회복될 준비를 하라.”

이다. 프레드 샌더스 지음 | 임원주 옮김 옮긴이 프레드 샌더스 지음

해 위선의 문제에 빠지는 것도 문제이고, 복음의 인간적인 면을 강

대해 고민해 보자.

G O D

술했다. 그의 블로그는 www.scriptoriumdaily.com 다. 샌더스는 어떻게 삼위일체가 우리 신앙이 세워지는 본질적인 구조가 되고,

복음 문화 사이의 연결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교회에

O F

케빈 J. 밴후저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마이클 호튼 지음 | 윤석인 옮김 | 400쪽 | 16,000원

임 | 원주 옮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조직신학 연구 교수

임원주 안양 성결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에 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 ( 역사신학 ) 학위를 마친 후에 교회사와 교리사 분야를 강의했다. 평택 아름다운교회 의 공동 담임과 목동 진리교회의 설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과 특수 침례교회의 교회론 전통을 이해하고 확립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표 저서로 『순수교회의 회복』 (누가), 『종교권력을 버려라』 ( 가

복음이 축소되고 왜곡된 이 시대에, 마이클 호튼 은 대가다운 솜씨로 창조에서 시작해 종말에 이르

나다 ) 가

기까지 “구속사를 통해 펼쳐지는 은혜의 복음”이

질 』 ( 부흥과개혁사 ) 등 다수가 있다.

성경의 핵심이며 개혁주의 신학의 진수임을 보여 준다. 이 책은 복 음의 교과서, 구속사의 길잡이, 성경공부 개론서, 개혁주의 입문서 로서 독자를 훌륭하게 안내할 것이다.

ISBN 978-89-6092-433-8

www.rnrbook.com 값 18,000원

있고, 역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 『믿음의 본


추천사

“‌ 모든 교리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교리에 대한 실제적인 안내서가 마침내 나왔다. 샌더스는 어떻게 삼위일체가 우리 신앙이 세워지 는 본질적인 구조가 되고, 일상 경험의 살과 피에 형태와 의미를 부 여하는 내부 골격이 되는지 보여 준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제럴드 브레이, 비슨 신학교 연구 교수

“‌ 샌더스는 신학의 깊은 내용 ( 이

책에서는 삼위일체 교리 ) 을

너무 얄팍하

거나 단순화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하고 흥미롭게 만드는 재능이 있 다. 모든 복음주의자는 어떻게 복음이 삼위일체적이고 삼위일체가 복음의 총체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샌더스는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샌더스는 삼위일체 신학이라는 약이 그리스 도의 몸인 교회의 혈류 속으로 적당량 흡수됐을 때 이 약이 치료 하지 못할 문제가 북미의 복음주의 교회에는 없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그러니 이 약을 들어서 마시고, 회복될 준비를 하라.” 케빈 J. 밴후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조직신학 연구 교수


“‌ 복음 사역에 관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샌더스의 책을 읽을 필요 가 있다. 복음 사역자들은 사람들을 초청하여 기독교적 삶의 장엄 함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누리도록 그것을 선포하고 조성하는 데 힘쓴다.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깊은 부 분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얻도록 도와줄 것이다.” 마크 홉슨, 캘리포니아 스쿨 프로젝트 지역 담당자

“‌ 위대한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책에 있 는 성경적이고 실제적인 진리를 묵상함으로써 복을 받을 것이다. 지신의 지역 회중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기초를 가 르치기 원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책을 통해 성경적 깊이와 경 건한 통찰이라는 두 측면에서 도움을 받을 것이다. 샌더스는 우리 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는 것, 즉 ‘복음은 삼위일체적이고 삼위일체 가 복음이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모든 교회가 이 책을 읽 고 교회의 삶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경축하기 를 기도한다.” 스콧 카펜터, 캘리포니아 주 코스타 메사의 그레이스 펠로우십 교회 장로


“‌ 이 책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의적절한지 설명하는 데 사용할 충분 한 최상급이 정말로 없다. 샌더스는 삼위일체가 어떻게 복음의 핵 심이 되고 기독교적 삶의 토대가 되는지를 입증한다. 그는 뚜렷하 게 복음주의적인 목소리를 냄으로써 이 일을 해낸다. 그러나 이 책 은 추상적인 신학에 대한 책이 전혀 아니다. 샌더스의 작업은 생기 가 넘치고 매력적이고 이해하기 쉽다. 샌더스는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재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용 어로 설명함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을 격리된 학계의 장벽에서 끄 집어내어 삶의 현장에 가져다 놓는다.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탐구 하는 데 이 책보다 더 좋은 안내서는 내가 아는 한 없다. 이 책은 목회자, 신학자, 일반 성도 모두에게 똑같이 널리 그리고 진지하게 읽혀질 가치가 있다.” 매튜 리 앤더슨, 『몸은 중요하다: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새로운 영지주의 극복하기』  ( Body Matters: Overcoming the New Gnosticism of Young Evangelicals )의 저자

“‌ 복음주의의 풍부한 실천의 기저를 이루는 복음의 삼위일체적 심장 박동에 대해서,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탐구를 수행한다. 샌더스는 자신의 상당한 학식을 가볍게 입는다. 나는 나의 부모님과 나의 동 료인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이 책을 사 줄 계획이다.” 벤 로데스, 애버딘 대학교 킹스 칼리지 조직신학 박사 후보자


목차

표와 그림 목록

_8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_9

1.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둘러싸인 우리

_37

2. 삼위일체의 행복한 나라 안에서

_83

3. 이같이 큰 구원

_135

4. 복음의 형태

_177

5.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생명 속으로

_231

6.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

_267

7. 결을 따라 기도하기

_293

미주

_336


표와 그림 목록

표 1. 복음주의적 실천들의 암묵적 삼위일체론

_81

표 2. 성자와 성령의 사역

_196

그림 1. 구원의 논리

_101

그림 2. 신학의 논리

_103

그림 3. 교리의 관계

_104

그림 4. 내재적 삼위일체

_123

그림 5. 내재적 삼위일체가 갖는 기원 관계

_127

그림 6. 영혼의 요소들

_161

그림 7.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_163

그림 8. 예수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의 사역

_189

그림 9. 성부의 두 손으로서의 경륜

_192

그림 10. 구원의 경륜에서 성자와 성령

_208

그림 11. 영원한 발출과 일시적 사명

_214

그림 12. 삼위일체의 입양

_219

그림 13. 구원 역사와 경험에서의 하나님

_257

그림 14. 구원이라는 열차의 기관차, 객차, 승무원실

_258

8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어떻게 삼위일체가 모든 것을 복음주의 쪽으로 변화시켰는가 그리고 또다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 기 때문이요……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 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요한일서 2:21~24

종교 영역에는 돌보지 않아서 죽은 좋은 말들의 무덤이 가득하다……여 전히 이 좋은 말들은 우리 주변에서 죽어 가고 있다. “복음주의적”이라는 좋은 말이 있다. 이미 죽지는 않았더라도 분명히 빈사 상태에 있는 말이 다.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B. B. 워필드 (1916)

삼위일체 교리는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머리와 심장에서 고유한 위치 를 차지한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공손한 환대로 인정하긴 하지만, 어떤 특별한 열정으로 환영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삼위일체 교리를 온 마음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의 중심적인 관심사로 포용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 준다. 오늘날 그토록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냉담해지거나, 그 의미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거나, 그 중요성에 대해 어물쩍거리는 현 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삼위일체에 대한 견고히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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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삼위일체 교리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불청 객처럼 취급받는다. 삼위일체론이라는 바로 이 용어는 우리 귀에 어렴풋 하게 로마 가톨릭처럼 들려온다. 어쨌든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는 없고 중세 암흑시대 무렵에 고안된 라틴어가 아닌가? 그리고 ( 이야기가 이 런 식으로 흘러가면 )

삼위일체는 사도들이 아니라 명석한 신학자들이 짜 맞

춘 것인데다 논리의 견본으로서도 의심스러운 지위를 가진 단어가 아닌 가? 무엇보다도 복음의 진지한 직무에서 벗어난 공리공론이 아닌가? 이러한 의심은, 기독교인들이 파멸의 위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의무 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상기하는 것으로는 좀처럼 축출되지 않 는다. 아마도 당신은 다음과 같은 무서운 경고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 이다.

삼위일체: 이해하려고 애써라 그러면 정신을 잃을 것이다. 1 )

부인하려고 애써라 그러면 영혼을 잃을 것이다.

이와 같이 혹독한 신학적 압력은 결국에는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구 두끈으로 더 단단히 조여서 맞춰 신는 것 정도의 쓸모가 있다. 이런 압 력을 느끼는 곳이 어디든 간에, 이 압력은 우리를 삼위일체를 태만하게 무시하는 자에서 삼위일체에 공포감을 갖도록 동기부여를 받은 자로 바 꿔 놓는다. 만일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삼위일체 교 리를 명백하게 부정하면 이단 분파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는 것 만큼은 알고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삼위일체에 대한 생각의 위험 부담은 지나치게 높아 보이고 이익은 지나치게 낮아 보인다. 그런데 우 리는 도박사가 아니다. “삼위일체적”이라는 단어가 복음주의의 신학적

10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특성을 묘사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용사 목록에서 현저하게 결여되 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의 많은 회중들이 자신의 신앙생활은 성자와 성령 안에서 성부와 나누는 교제라는 사실에 대해 단지 가장 애매한 이해를 품은 채 해마다 표류하는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가 복음주의자로서 우리 실존의 뿌리, 즉 우리의 삼위일체 적 뿌리로부터 이토록 멀어진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깊숙이 삼위일체적인 복음주의자들은 결국 삼위일체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뿌리는 깊숙이 뻗어 내려간다. 복음주의 운동의 역사 속으로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실재 속으로도 내려간다. 복음주 의적 기독교인들이야말로 깊숙이 삼위일체적인 자들로서, 우리가 경험 하는 인격적 구원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성자 하나님을 통해 이 행되는 성부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증언하는 사람 들이다. 결과적으로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교회 역사에서 가 장 철저하게 삼위일체적인 기독교인들이었다. 이것은 강력한 주장이면 서도 최근에는 자주 들리지 않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통해 이 일을 멋지게 해내고 싶다. 복음주의의 특징적인 신념, 책임, 실천, 전 제는 모두 영적 혁명에 의해,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신앙생활에 대해 갖는 연관 관계를 기독교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용된 삼위일체 신학에 의해 생성된 것들이다. 복음주의자로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도,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지평을 배경으로 성취한 예수와 성령의 협력 사역에 대한 강력한 경험적 및 교리적 이해로부터 분리되면 의미가 없다. 개인적인 전도, 대화하는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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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헌신적인 성경 연구, 권위 있는 설교, 세계 선교, 구원의 확신은 모 두 복음 안에 있는 삶이 삼위일체와 교제하는 삶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삼위일체를 잊어 보라. 그러면 우리가 행하는 것을 왜 하는지 잊게 된 다. 복음적 기독교인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잊게 된다. 어떻게 해서 지 금의 우리가 되었는지를 잊게 된다. 이 책의 중심 주장은 삼위일체 교리가 본질적으로 복음 자체에 속한 다는 것이다. 단지 삼위일체 교리는 지혜로운 지성들이 복음을 옹호하 는 데 필수적이라고 인식한 교리이거나,2 ) 또는 논리적 추론 과정은 복 음을 믿는 것에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단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거 나, 또는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복음의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계시하는 것 역시 무엇이든지 믿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이 모든 진술이 참이지만 충분한 진술은 아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와 복음 사이에는 그런 느슨한 연결 고리가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한 연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와 복음은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할 만큼 하나로 묶인 꾸러미 정도가 아니다. 삼위일체와 복음은 내적으로 서로를 지향하도록 형성되었다. 이후에 전개할 여러 장에서 충분한 논 증을 펼치기 전에 오해를 야기할 위험을 무릅쓰면서 가능한 간결하게 말하자면, 복음은 삼위일체적이며 삼위일체는 복음이다.3 ) 기독교의 구 원은 삼위일체로부터 나오고, 삼위일체를 통해 발생하며, 우리를 삼위일 체에게 이끈다. 복음은 삼위일체적이기 때문에, 복음의 사람으로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든 안 하든 정의상 삼위일체의 백성이다. 이것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이라면 기독교인들의 가장 일관적이며 자의식적으로 삼위일체적인 운동은 자신의 이름을 복음 ( ‘에반겔’ ) 을 따라 지은 운동, 즉 복음주의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듣 는 판에 박힌 지혜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서론을 시작한 그런 종류의 한탄,

12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즉 복음주의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해 기껏해야 불안정하고 모호한 이해 를 가지고 있다는 한탄을 들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이런 한탄과 경고가 지닌 설득력은, 우리가 삼위일체론자로서 최근에 거둔 변변찮 은 실적이 삼위일체와 교제하는 기독교인으로서 갖는 우리의 현실적 인 실존에 이처럼 두드러지게 모순을 일으킨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복음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삼위일체적이어서 그렇게 비 ( 非 ) 삼위일체적 이라니! 복음주의자가 깊숙이 삼위일체적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아는 것 은 아니지만, 이 사실이 완벽한 비밀인 적은 없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복음주의가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가장 충실하고 논리 정연하게 주장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제럴드 브레이 ( Gerald Bray ) 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

아 ( 엡 2:6 ) 하나님의 내적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공유한다는 믿음은 복 음적인 기독교의 구별되는 가르침이다.” 삼위일체 교리가 현대 복음주 의자들의 자기 이해에서 아무리 비기능적이 되었더라도, 확고하게 삼위 일체적인 구원관은 역사적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 즉 브레이의 표현대 로 “구별되는 가르침”이었다. 사실상 이 교리에 대해 우리가 거드름을 피우거나 의기양양할 근거는 전혀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특징적으로 복음주의적인 삼위일체적 뿌리를 명확하게 증언해야 한다.

다른 형태의 기독교에 맞서 우리 자신의 전통이나 편견을 자 랑하는 것 없이 우리가 확실하게 선포해야 하는 것은, 성령을 보내는 성자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성령이 인 쳐 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대한 경험이 사람에게 알려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깊고 더 만족스러운 믿음이라는 것이다……복음주의적 개신 교인들은 다른 전통에 속하는 기독교인들이 향유하는 것보다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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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더 깊고 더욱 활기차게 경험한다는 주장은 틀리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았다. 우리는 우 리가 아는 그리스도를 사람들의 유일한 주님이자 구원자로 인 4 )

정하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브레이는 관념들의 역사를 추적한다. 그래서 복음주의의 역사를 긴 안목으로 바라본다. 브레이가 복음주의적 경험은 “사람에게 알려진 다 른 어떤 것보다 더 깊고 더 만족스러운 믿음”에 의해 두드러진다고 말할 때, 그는 가장 최근의 50년이 아니라 500년의 기간이 보여 준 증거를 염 두에 두고 있다. 최근의 사건들이 아니라 역사를, 오늘 자 신문의 기사 제목들이 아니라 개신교의 훌륭한 서가를 가득 채우는 수많은 영적인 신학 서적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유사하게도 이 책의 주장은 복음 주의가 비록 표면적인 외형은 전도가 유망해 보이지는 않더라도 깊숙이 삼위일체적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점: 우리는 얕고, 약하게 삼위일체적이다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의 표면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교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심오한 삼위일체론과 마주칠 가능성이 없다. 비록 이 책의 대부분은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잘하는 것에 대한 것일 테지만, 아마도 어떤 관찰자라도 확인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 발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첫째, 복음주의자들은 현재 자신들의 삼 위일체 신학으로 유명하지 않다. 둘째, 복음주의 운동은 신학적 및 영적 얕음으로 인해 혼란스럽게 되었다. 첫째, 삼위일체에 대한 복음주의의 냉담함이 존재한다. 위에서 나는

14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복음주의에 관한 모든 것이 복음적인 삶은 삼위일체와 교제하는 삶이라 는 것을 전제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일 삼위일체를 잊는다면 우리가 행하는 것을 왜 하는지, 복음적 기독교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를 잊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척도에 대한 망각은 가능할 뿐 아니라 광범위하다. 우리의 복음주의 적 약속과 실천의 근원을 망각할 때, 우리의 교회는 우리가 행하는 것들 을 왜 그렇게 하는지를 망각하는 위험에 지속적으로 처하게 된다. 우리 의 신념과 실천은 모두 삼위일체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전제는 너무나 오랫동안 표명되지 않았다. 명시적이기보다는 암묵적이었고, 천명되고 가르쳐지기보다는 그저 당연시되었다. 우리의 조직신학 책들은 하나님 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러나 조직신학 책에 서 이 사실은 목록에 올라 있는 하나의 항목, 즉 성경을 요약할 때 작성 하는 많은 긍정명제 가운데 하나처럼 보인다. 복음주의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암묵적 삼위일체론을 틀림없이 적당한 말로 꾸며내고 진술하고 고백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일관되게 삼위일체적인 기독 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삼위일체론을 모르면서 철저한 삼위일체론자로 계속 머물러 있다면 별로 유익하지 않다. 우리 삶의 기반인 실재를 우리 의 말과 행위로 부인하는 위험에 처한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에 미치지 못하는 실천과 신념에 빠져들 위험에, 마치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성부 와 성자와 성령이 아니라 단지 비인격적인 신성에 불과한 존재를 섬기 는 듯이 처신할 위험에 처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깊은 것들에 이르도록 부르실 때 얕은 것들에 머물러 있을 위험에 처한다. 둘째, 이것은 우리를 얕은 복음주의로 이끈다. 복음주의 운동이 크게 유행하고 있지만, 폭은 10km이고 깊이는 1cm인 복음주의 운동으로 보 일 때가 자주 있다. 이런 얕음은 단지 복음주의 종교를 경멸하는 문화인 들이 외부에서 바라볼 때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문제만은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15


아니다. 이런 얕음은 복음주의자들이 자신의 교회와 영적 생활을 어떻 게 느끼고 있는지를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많은 복음주의자는 회심 순간을 제외하고는 무엇인가가 없다는 느낌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복음주의자들이 회심자들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자신에게 질문하 기를 중단할 때,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이 그곳에 도달하면 거기에 “그 곳”이 존재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의 더 깊은 교제로 부르시는 것을 느낄 때, 그들은 장차 이 교제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결국 이 복음주의자들은 구원받았다는 것 이 상의 구원을 받지 못한다. 신중한 사고방식을 가진 복음주의적 기독교 인들이 교리나 경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는 갈망을 느낄 때, 그들은 전형적으로 자신들 고유의 복음주의적 자원을 제쳐 두고 다른 자원에 눈을 돌린다. 애정 ( affections ) 에 이상한 소외가 발생한다. 복음주 의자들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찾아다니 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구하게 만든다. 애 초에 그토록 기쁘고 좋은 소식처럼 들린 것 ( 그리스도 서! ) 이

안에 있는 값없는 죄용

진보적 학문에 이르는 길에서 뒤떨어진 초보적 교훈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처음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때 지혜의 총체로 받아들 인 것 (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교회에 다님으로써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깊게 하는 것” ) 이

올바른 질문에 단 한 번도 정답을 제대로 맞힌 적이 없는 주일학교 답변 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복음주의가 외부에서 볼 때 얕아 보일 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얕다고 느낀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이 두 가지 문제점, 즉 삼위일체에 대한 망각과 얕다는 느낌은 직접적 으로 연관된다. 이 두 문제점의 해결책은 복음으로 수렴한다. 복음 ( ‘에반 겔’ ) 에서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유래했고, 복음은 우리가 측량할 수 있는

것보다 언제나 더 깊은 것이다. 우리에게 크게 시급한 것은 이미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가장 깊은

16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필요를 충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깊은 자아로부터 나오 는 것일 정도로 매우 깊다. 복음에서 선포된 구원은 하나님이 부차적인 계획으로 간주한 기계적 활동의 일부가 아니다.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 다가 이제는 나타내신……신비”( 롬 16:25~26 ) 이다. 즉 “창세 전에”( 엡 1:4; 벧 전 1:20 )

작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속 깊은 것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의 신비

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때, 하나님은 신성한 자원들 곧 하 나님을 이 과업에 인격적으로 끌어들이는 자원들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셨다.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헌신의 깊이를 탐구하고 이해하면 할 수록 우리는 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그만큼 더 많이 이해할 수밖에 없다. 복음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갈수록 그만큼 더 깊이 삼위일체의 신 비 속으로 들어간다. 청교도 신학자인 토머스 굿윈 ( Thomas Goodwin ) 은 복 음 선포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보물처럼 간직한 신비를 “표출하는 것”이며 “복음에 속하는 것들은 깊은 것들……곧 하나님의 깊은 것들” 이라고 가르쳤다.5 )  만일 약한 삼위일체론과 얕음이라는 두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면 해결 책도 하나뿐이다. 즉 복음 그 자체를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복음의 표면에 머무르면서 복음이 제공하는 직접적인 혜택과 장차 주어질 복에 대한 약속으로 만족하는 대신에, 우리는 복음의 진수를 깊이 들여다보 고 그 속에 담긴 훨씬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분명코 기쁜 소식의 깊은 것들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될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 님의 성품이다. 복음이 얼마나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인지를 명심할 때, 우리는 복음주의라는 운동을 일으킨 하나님과 만남의 깊은 것들에 이르 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더욱 깊이 삼위일체적이 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삼위일체적으로 깊어질 것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우 리가 된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이 진리를 더욱 확고하게 파악하고, 삼위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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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라는 강력한 이름을 우리 자신에게 묶을 때이다.6 )

강조적인 복음주의 이 서론을 이런 질문으로 시작했다. “오늘날 그토록 많은 복음주의자 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냉담해지거나, 그 의미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거 나, 그 중요성에 대해 어물쩍거리는 현상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만일 실제로 복음주의가 깊숙이 삼위일체적이고 삼위일체의 복음과 깊이 만 난 것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면, 복음주의가 이 삼위일체라는 근원으 로부터 멀어진 것은 특히 당혹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것은 복음주의의 주된 특징들 가운데 하나, 즉 복음주의에는 강조가 있다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적 신앙과 교리의 위대한 전통에 서 있 다. 즉 기독교를 기독교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들인 하나의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를 증언하는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현대의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아무리 흠이 많더라도 이 교회들로부터 19세기의 위대하고 대담한 복음주의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 궤적을 따라 웨슬리의 부흥 운동과 청교도를 거쳐 종교개혁과 중세 기독교라는 터전에 도달할 수 있다. 더 올라가서 사도들의 첫 상속자들, 즉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게 이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다. 복음주의는 어떤 교파적 형태로 나타나든 저 위대한 전통의 표현이 다. 절대적으로 독특한 어떤 것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그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주의에는 강조가 있다는 점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적 신앙의 충분성을 표 현할 때 강조해야 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선택해 왔다.

18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영국 성공회의 리버풀 주교인 라일 ( J. 교”( Evangelical

Religion ) 라는

C. Ryle )  은

“복음주의적 종

소논문에서 이 구별되는 특징을 지적하려고

시도했다. 첫째로 라일은 영국 성공회 전통의 복음주의적 측면을 특징 짓는 다양한 교리들, 즉 성경의 수위성, 죄의 깊음, 그리스도 사역의 중 요성, 성령의 내적인 사역과 외적인 사역의 필요성을 나열했다. 그러나 둘째로 라일은 “복음주의 진영 바깥에 있는” 많은 성공회 신자들이 “방 금 내가 거론한 다섯 가지 요점들에 대해서 만일 여러분이 하나씩 하나 씩 받아들인다면 대체로 건전하다”라고 인정했다. 라일 주교에 따르면, 놓치고 있는 것은 강조점이었다.

이 다섯 교리를 믿어야 할 요점들로서 개별적으로 제안하라. 그러면 성공회 신자들은 이 교리들을 일일이 인정할 것이다. 그 러나 그들은 이 교리들에 우리가 부여하는 중요성, 지위, 등급, 우선순위, 품위, 우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우리 와 그들 사이에 있는 몹시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본다. 우리가 이 교리들에 부여하는 지위야말로 복음주의 신학의 커다란 특 성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이 다섯 교리들이 기독교에서 첫째 가는, 일차적인, 최고의, 주요한 교리들이라고 담대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 교리들의 지위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좋은 취지를 가진 많은 목회자의 가르침을 망치고 훼손하는 것 7 )

이라고 담대하게 말한다.

특히 종교적 불확실성의 시대에 강조점이야말로 모든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근본주의 총서』 ( The

Fundamentals ) 를

편집한 복음주의적 평신도들

은 이 사실을 알았다. 내로라하는 저자들이 팀을 이뤄 현대의 중요한 교 리적 논쟁점을 83개의 장으로 출판한 이 총서의 열두 번째이자 마지막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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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그들은 복음 전도자 린더 문할 ( Leander W. Munhall ) 의 “성공적 복음 전도에서 반드시 강조해야 하는 교리들”( The Doctrines That Must Be Emphasized in Successful Evangelism ) 이라는

논문을 출판했다.8 ) 문할의 목록은 환원주의

적이지 않았다. 이 목록에는 죄, 구속, 부활, 칭의, 중생, 회개, 회심, 믿 음, 순종, 확신이 포함되었다. 문할은 이 열 개의 강조점을 넘어서는 다 른 많은 위대한 것들을 분명히 믿었고, 모든 논적들에 맞서 공격적인 방 식으로 이것들을 옹호할 태세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단번에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문할은 초기의 근본주의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할 때, 우 리가 늘 내렸던 가장 전략적인 결정이 강조할 것에 대한 결정이라는 사 실을 알았다. 복음주의는 기독교 메시지의 어떤 요소들을 강조하는 데 항상 관심을 기울여 왔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계시의 주요 부분이자 하나님의 음성이 규범적으로 들리는 곳인 성경을 강조한 다. 우리는 예수가 행한 모든 것이 구원의 능력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중대한 ( crucial ) 하나의 사건, 즉 십자가를 강조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인생 여정 전체를 통해, 곧 최초 의 어슴푸레한 자각으로부터 영적 생활의 모든 우여곡절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백성에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영적 경 험의 중심점인 회심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부터 흘 러나오는 혜택이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커다란 것 하 나, 즉 하늘을 강조한다. 성경, 십자가, 회심, 하늘. 이것은 마땅히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 나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본래 포함되어 있던 진리의 더 욱 커다란 본체를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는 정확히 그것의 한쪽에는 그리스도의 선재 ( 先在 ) 와 성육신과 지상 사 역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있기 때문에 구속

20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역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한다. 이런 일들이 없다면, 십자가 위에 서 그리스도가 수행한 사역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 러나 이런 일들을 좌우에서 거느린 십자가야말로 복음을 설명할 목적으 로 관심의 초점이 될 필요가 있다. 계시의 전체 영역 안에 있는 성경에 대해, 종교적 경험의 영역 안에 있는 회심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혜택 가운데 하나인 하늘에 대해 이와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각각은 올바른 전략적 강조점이다. 단지 각각의 강조점이 정당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그렇게 만드는 어떤 것이 있을 때이다. 슬프게도 최근 수십 년 동안 경험한 것처럼, 복음주의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빈혈 상태에 빠진다. 강조점들이 기독교 진리의 본체에서부터 분리되고, 강조점들이 핵심 요점이라기보다는 마치 전체 이야기인 것처 럼 다뤄진다. 빈혈에 걸린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구상 전체 ( 성육신, 치유와 가 르침의 사역, 십자가에 못 박힘, 부활, 승천, 재림 ) 를

가르치는 대신에 한 가지 강조점

을 점점 더 크게 (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 소리친다. 그러나 기독교 진리의 전 체 모체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십자가는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는 다. 오로지 십자가만 전하는 메시지는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환원 주의적인 것이다. 그 모체의 나머지 부분 역시 중요하다. 즉 예수의 죽음 은 구원을 주는데, 부분적으로는 죽음 이전에 살았던 삶 때문이고, 확실 하게는 죽음 이후에 살았던 새 생명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예수가 영원 한 아버지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영원한 배경 때문이다. 당신이 항상 이 모든 것을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만, 당신이 말하는 것의 배후에 있는 이 런 것들의 힘을 감지할 필요는 있다. 이런 감지된 인식이 존재하지 않거 나 다음 세대로 어떻게든 전달되지 않을 때, 강조적인 복음주의는 환원 주의적 복음주의로 전락한다. 강조적인 복음주의는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환원주의적 복음주의 로 변형되고, 그 다음에는 자기 영속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환원주의적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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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하는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매우 당혹스 러운 방향 감각 상실로 고통을 받는다. 이들은 “성경, 십자가, 회심, 하 늘”을 기독교 메시지 전체로 알고 성장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감지한다. 성경에서 이 “더 많은 것”을 얼핏 보 지만, 이것들이 어디에 속한 것인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이들은 찬송 가에서 “더 많은 것”을 듣지만, 익숙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이 “더 많은 것”이 들리지 않는다. 이들은 연배가 높은 저자들이 이 “더 많은 것”을 길게 논의한 것을 알게 되지만, 바로 이 저자들이 그들을 줄곧 둘러싸 온 내용을 강화하기도 한다. 즉 기독교 메시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 경, 십자가, 회심, 하늘이라고 말한다. 환원주의적 복음주의 내부에서 당 신이 듣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전적으로 잘못 된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강조적인 복음주의가 환원주의적 복음주의로 전락할 때 그 내 용이 올바른 강조점을 여전히 보유하지만 오로지 강조점으로만 축소되 었기 때문이다. 어떤 메시지의 전체가 강조점일 때, 모든 것이 똑같이 중 요해서 당신은 줄곧 소리를 질러 댄다. 당신의 집중력은 강조를 지속적 으로 일제 사격하기 때문에 피로해진다. 다른 문제점은, 네 개의 요점으 로 축소된 복음은 만일 더 넓은 맥락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면 의 미가 통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성경은 예수가 죽었다고 말한다. 그 래서 당신은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진술은 멋진 출발점이며 올바른 강조점이고, 복음을 인식할 수 있는 진술이다. 단, 이 진술을 뒷 받침해 주고 설명해 주는 다른 많은 진리 속에 확실하게 자리 잡는다는 조건에서 그렇다. 기독교 메시지의 포괄적인 진리는 이런 강조점들을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날카롭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강조점들 은 그것 자체에 맥락을 제공해 줄 기독교 메시지의 포괄적인 진리를 필 요로 한다.

22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기독교의 메시지를 단순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강조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대단한 기량이다. 이것은 요점으로 직행하기 위해 세부 내용을 모 조리 성급하게 쳐내거나 미묘한 의미 차이를 부인하거나 하는 그런 것 이 아니다. 오직 핵심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모든 것은 내버려도 된 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반 ( 反 ) 지성주의가 있다. 분명히 이런 종류의 반지 성주의를 복음주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이것은 참된 이상에서 벗어난 일탈 행위다. 강조적 접근 방식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 증언에 대한 강조적 접근 방식은 다른 충동을 가지고 있다. 어 떤 것을 강조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엄밀하게 그대로 두는 것임을 알고 있다. 가장 능숙하게 의사 소통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요점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것 을 생략하고 있는지를 항상 알고 있고, 주의를 전면으로 끌어낼 때 배경 속에 남겨진 것을 지속적으로 자각하고 있다. 배경의 그늘 속에 남겨진 상호 연관된 관념들의 거대한 연결망 전체는 우리가 주의력을 집중시키 는 멋진 대상을 매우 현격하게 돋보이도록 만들고, 다른 모든 것의 의미 가 통하도록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총체적인 진리를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의사소통을 가장 잘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언제나 강조하는 솜씨가 뛰 어난 이들이었다. 예를 들어 존 웨슬리 ( John

Wesley ) 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수십 권의 책을 저술하고 포괄적인 기독교 총서를 편집하고 출판해서 누가 보더라도 많은 책의 사람이지만, 자신은 “한 책의 사 람”( homo unius libri  ) 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말로 성경의 충분성을 강 조했다.9 ) “한 책의 사람”이라는 말은 성경을 강조하는 표현이지, 성경 이외의 모든 책은 불필요하다는 반 ( 反 ) 지성주의를 옹호하는 구호가 아 니었다. 깊이와 강조 사이에서 올바르게 균형 잡은 가장 좋은 본보기는 사도

서론: 복음주의자, 복음, 그리고 삼위일체

23


“‌ 복음주의자로서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도,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지평을 배경으로 성취한 예수와 성령의 협력 사역에 대한 강력한 경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험적 및 교리적 이해로부터 분리되면 의미가 없다. 개인적인 전도, 대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스코트 스웨인 지음 | 전광규 옮김 | 276쪽 | 14,000원

화하는 기도, 헌신적인 성경 연구, 권위 있는 설교, 세계 선교, 구원의

성경신학자와 조직신학자의 공동 저작으로, 삼위 일체 교리에 가장 원초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요

확신은 모두 복음 안에 있는 삶이 삼위일체와 교제하는 삶이라는 것

한복음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에 대

을 전제한다……복음은 삼위일체적이며, 삼위일체는 복음이다. 기독

해 말하는 바를 개괄하고 종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성령·선교

교의 구원은 삼위일체로부터 나오고, 삼위일체를 통해 발생하며, 우

등 제4복음서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의 주요 주제들을 자세하게 다룬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을 아는

리를 삼위일체에게 이끈다.” _서문에서

지식이 성도에게 복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T H E

D E E P

T H I N G S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

복음 레이 오틀런드 지음 | 김태곤 옮김 | 184쪽 | 7,500원

“‌ 모든 교리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교리에 대한 실제적인 안내서가 마침내 나왔

복음은 교회와 관련해 복음 교리와 복음 문화의 두 차원을 가진다. 따라서 복음 교리를 강조하는

일상 경험의 살과 피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는 내부 골격이 되는지 보여 준

교회들이 정작 그 복음이 형성한 문화에 무관심

다. 강력하게 추천한다!”

지은이

프레드

샌더스 ( Fred Sanders )

바이올라 대학교의 토레이 명예 연구소에서 신학 교수 로 있다. 인기 있는 블로거이자 강연자인 샌더스는 수많 은 저널 기사를 기고했고, 『내재적 삼위일체의 형상』 (The Image of the Immanent Trinity) 을

포함해 여러 권의 책을 저

제럴드 브레이

조하는 교회들이 복음 교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함 때문에 아무런

비슨 신학교 연구 교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 책을 통해 복음 교리와

“‌ 이 책은 내가 알고 있는 복음주의적 신앙과 실천의 본질적인 삼위일체적 형태 에 대한 좋은 입문서다. 이 책을 읽고, 회복될 준비를 하라.”

이다. 프레드 샌더스 지음 | 임원주 옮김 옮긴이 프레드 샌더스 지음

해 위선의 문제에 빠지는 것도 문제이고, 복음의 인간적인 면을 강

대해 고민해 보자.

G O D

술했다. 그의 블로그는 www.scriptoriumdaily.com 다. 샌더스는 어떻게 삼위일체가 우리 신앙이 세워지는 본질적인 구조가 되고,

복음 문화 사이의 연결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교회에

O F

케빈 J. 밴후저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마이클 호튼 지음 | 윤석인 옮김 | 400쪽 | 16,000원

임 | 원주 옮김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조직신학 연구 교수

임원주 안양 성결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대전 침례신학대학교에 서 목회학 석사와 신학 석사 ( 역사신학 ) 학위를 마친 후에 교회사와 교리사 분야를 강의했다. 평택 아름다운교회 의 공동 담임과 목동 진리교회의 설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과 특수 침례교회의 교회론 전통을 이해하고 확립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표 저서로 『순수교회의 회복』 (누가), 『종교권력을 버려라』 ( 가

복음이 축소되고 왜곡된 이 시대에, 마이클 호튼 은 대가다운 솜씨로 창조에서 시작해 종말에 이르

나다 ) 가

기까지 “구속사를 통해 펼쳐지는 은혜의 복음”이

질 』 ( 부흥과개혁사 ) 등 다수가 있다.

성경의 핵심이며 개혁주의 신학의 진수임을 보여 준다. 이 책은 복 음의 교과서, 구속사의 길잡이, 성경공부 개론서, 개혁주의 입문서 로서 독자를 훌륭하게 안내할 것이다.

ISBN 978-89-6092-433-8

www.rnrbook.com 값 18,000원

있고, 역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 『믿음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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