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H E PI L L A R NEW T E S TA M E N T COM M E N TA RY
THE PILLAR NE W TESTA MENT COMMENTARY
마가복음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하는 『필라 신약 성경 주석』 ( PNTC ) 은
PN TC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본문을 명확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주석 시리즈의 저자들 경신학에 대한 민감한 안목으로 주해와 해석의 조화, 학문과 목회의 조화를 꿈꾼다. 필라 신약 성경 주석의 저자들은 헬라어 신약 성경을 기초로 성경 본문을 해설한다. 이들은 글 로 된 성경 말씀이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본문과 깊이 씨름하며, 독자로 하 여금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를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다. 이 시리즈가 취하는 접근 방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신 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 도인은 반드시 경외함, 두려움, 거룩한 기쁨, 순종함으로 응답해야 하는데, 이 주석 시리즈의 저자들 역시 같은 모습으로 응답하며 성경 말씀을 연구한다. 이렇게 집필된 『필라 신약 성경 주석』 ( PNTC ) 은 목사, 교사, 신학생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독자 모두에게 계속 환영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은 현재 가장 논쟁되는 주제를 다루지만, 지나치게 학술적인 내용은 피하면서, 성경 말씀과 성
지은이
제임스 에드워즈( James R. Edwards )
워싱턴 스포캔에 있는 휘트워스 대학교에서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히브리 복음서와 공관복음 서 전통의 발전』 (The Hebrew Gospel and the Development of the Synoptic Tradition), 『예수가 유일한 구주인가?』 (Is Jesus the Only Savior?)
옮긴이
등이 있다.
제임스 에드워즈
전용우
지음
서울대학교(B. E., M. E.)를 졸업하고 대학교 강사, 기업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개혁신앙과 신학에 매료되어 대신총 회신학교(M. Div.)에서 수학하고 합신대학원대학교(Th. M.)를 졸업했다. 현재 부흥과개혁사에서 번역 위원으로 섬 기고 있다.
ISBN 978 - 89 - 6092 - 541 - 0 ISBN 978 - 89 - 6092 - 448 - 2 (세트) www.rnrbook.com
THE PILLAR NE W TESTA MENT COMMENTARY
값 34,000원
전용우 옮김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제임스 에드워즈 지음 | 전용우 옮김
목차
■ 시리즈 서문
│
8
■ 저자 서문
│
10
■ 주요 약어
│
13
■ 참고문헌
│
26
서론
29
1. 마가복음 해석의 역사
|
30
2. 저자 및 저작 장소
|
32
3. 시기
|
36
4. 역사적 정황
|
39
5. 특징적인 문학적 성격
|
40
5.1. 문체
5.2. 샌드위치 기법
5.3. 아이러니
4
6. 마가복음에서의 예수
6.1. 예수의 권위
6.2. 주의 종
6.3. 하나님의 아들
7. 독특한 주제
7.1. 제자도
7.2. 믿음
7.3. 내부자와 외부자
7.4. 이방인
7.5. 침묵을 명함
7.6. 여행
8. 내러티브 구조
|
43
|
46
|
51
5
마가복음 주석
53
1. 복음이 인격으로 나타남(1:1-13)
|
54
2. 갈릴리 사역의 시작(1:14-45)
|
76
• 98
보론: 비밀 유지 주제와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자의식(1:34)
3. 권위들과의 충돌(2:1-3:12)
|
108
보론: 인자(2:12)
• 115
보론: 신인(3:12)
• 144
4. 내부자와 외부자(3:13-4:34)
|
150
5. 그가 누구이기에(4:35-6:6a)
|
192
6. 유대인에게 증언함(6:6b-7:23)
|
224
7. 이방인에게 증언함(7:24-8:9)
|
268
8. 장막을 제거함(8:10-9:29)
|
288
보론: 그리스도(8:31)
• 306
보론: 변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9:8)
• 329
6
9. 오직 제자도(9:30-50)
|
344
10. 유대를 통해 가는 길에서(10:1-52)
|
362
11. 열매를 맺지 않는 성전(11:1-26)
|
404
12. 예수와 산헤드린(11:27-12:44)
|
424
13. 고난과 승리를 경계하라(13:1-37)
|
464
14. 예수가 버림받으심(14:1-72)
|
494
보론: 마가복음의 여자들(14:9) • 502
15. 십자가와 빈 무덤(15:1-16:8)
|
542
보론: 본디오 빌라도(15:1)
• 543
보론: 하나님의 아들(15:39)
• 575
16. 마가의 더 긴 결말(16:9-20)
|
594
부록: 비밀 마가복음
|
608
7
| 시리즈 서문 |
모든 주석은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고 이 시리즈도 예외는 아니다. 진지한 목회자와 성경 교사를 위해 기획된 필라 주석 ( Pillar commentaries ) 은 무엇보다 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 본문의 뜻을 명확히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 주석을 집필한 학자들은 가장 중요한 당대의 최신 논의와도 소통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이상 은 성경신학 및 현대의 중요한 문제와 성경의 관련성에 유념하면서, 주석과 설교를 혼동하지 않고, 엄밀한 주해와 해설을 조합시키는 것이다. 이런 접근법을 채택하는 근본 이유는 ‘객관적 학문성’ ( 실현 망 ) 이라는
불가능한 헛된 희
환상이 실제로는 불경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을 알 고 있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적절한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며, 또한 그것은 자율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학자가 취하는 자세와는 확실 히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통제되지 않은 주관성에 은밀하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저자들은 본문에 대해서 편협하지 않은 개방성을 추구한다. 그것이 최선의 ‘객관성’이다. 만약 성경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경외심과 모종의 두려움과 거룩한 기쁨과 탐구하는 자세를 갖춘 순종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 다. 그리스도인의 글쓰기에는 아무쪼록 이런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가치관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필라 주석 시리즈는 목회자, 교사, 8
시리즈 서문
학생은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도 뜨거운 환영을 받을 것이다. *
*
*
정경 복음서에 대한 훌륭한 주석서는 쓰기 특히 어렵다. 이런 주석을 쓸 때 요구되는 것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정교한 역사적 감각과 신학적 원 숙함을 갖추어야 하고, 다양한 문학 장르를 다루어야 하고, 배경이 되는 유 대와 그리스-로마 세계를 완전히 알아야 하고, 방대한 이차 문헌들을 자유 자재로 활용하지만 이것이 주가 되거나 독자들에게 지엽적인 사항들이 끝 없이 넘쳐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임스 에드워즈 ( James R. Edwards ) 는
본 주석에서 이런 난제들을 훌륭히 만족시켰다. 에드워즈의 주석
은 그의 연구 인생과 정통하고 흔들리지 않는 판단력을 반영한다. 그는 이 모든 것에 더해, 성경 본문에 대한 적절하고 유익한 경외감을 조용히 표한 다. 이런 에드워즈의 마가복음 주석을 본 시리즈에 포함하게 되어 정말 기 쁘고 영광스럽다. D. A. 카슨
9
| 저자 서문 |
이 주석을 쓰는 것은 나의 학문 인생에 있어서 정말 ‘즐거운 작업’ ( Lie blingsarbeit ) 이며
나에게 참 소중한 일이었다. 이는 이 주석의 주제 자체뿐 아
니라 이 주제로 만나게 되었던 사람들 때문이다. 나는 30년 전 스위스 취리 히에서 열린 에두아르트 슈바이처 ( Eduard Schweizer ) 교수의 신약학 세미나에 서 처음으로 마가복음의 학문적 연구를 접하게 되었다. 슈바이처의 마가복 음 주석은 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와 즐겁게 나눈 대화, 특히 내가 그의 집을 자주 방문해 나눈 대화들은 내 인생의 값진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1970년대 중반 풀러 신학교 ( Fuller Seminary ) 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을 때 나는 감사하게도 다른 선도적인 마가복음 학자인 랄프 마틴 ( Ralph Martin ) 교수 밑에서 학업을 수행할 수 있었는데, 신약학을 폭넓고 세세하게 통달한 마틴 교수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나의 학위 논문을 완성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난 이 두 기독교 학자에게 갚을 수 없을 만큼 많 은 신세를 졌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마가복음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제임스타운 대 학 ( Jamestown College ) 에서 가르쳤고, 지금은 휘트워스 대학 ( Whitworth College ) 에 서 가르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나는 청년 생활 연구소 ( Young 콜로라도 풀러 신학교 ( Fuller
Colorado ) 를
Life Institute ) 와
위한 세미나에서뿐 아니라 많은 학
회, 강의, 설교에서도 마가복음을 가르쳤다. 이번 마가복음 주석은 게 대단한 형식은 아니었지만 )
( 비록 그렇
강의 자료로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었다. 그때는 이
주석이 책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감사하게도, 각양각색이지만 10
저자 서문
자극을 주는 선생과 같은 학생들에게서 마가복음에 대해 계속 배워 갈 수 있었다. 수년 동안 나는 학생들과 교구민들의-그중에는 첫 학기를 시작한 신입생들과 80대 노인들도 있었다-놀라운 통찰에 대해 기뻐했다. 이들의 통찰력은 내가 마가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내게 배울 점들을 제공한 현명한 사람들과 더불어, 교실과 회중석에 있는 나의 친구들 의 목소리가 이 주석을 빚어냈다. 나는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틴들 하우스 ( Tyndale
House ) 에서
이 주석을
출판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게끔 썼다. 거기서 2000년 2월에서 8월까지 휘 트워스 대학이 나에게 관대하게 허락한 8개월의 안식 기간을 보냈다. 그곳 에서 나는 또다시 마가복음 덕분에, 나에게 자극을 주는 학자 무리를 만나 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들은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틴들 하우스의 워든 ( Warden ) 과 브루스 윈터 ( Bruce Winter ) 에게 감사하다. 이들은 내 가 신망 있는 학자들과 선망할 만한 도서관의 자료를 활용해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또한 틴들 하우스의 사서인 엘리자베스 매그 바 ( Elizabeth Magba ) 와 커스티 코리갈 ( Kirsty Corrigall ) 에게도 감사하다. 이들은 잘 못된 자리에 놓인 책들을 긴 시간 수고해 능숙하게 찾아 주었다. 그리고 컴 퓨터 기술에 있어서 특히 자주, 너그럽게 도와준 데이빗 인스톤 브루어 ( Da vid Instone Brewer ) 에게
고맙다. 한편 나는 피터 헤드 ( Peter Head ) 에게 특히 더 감
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는 자진해서 원고를 읽고 논평해 주었다. 틴 들 하우스의 동료 학자들인 조지 브렁크 ( George Klein ) 은
Brunk ) 와
랠프 클라인 ( Ralph
이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작업에 도움이 되고 격려가 되
었다. 틴들 하우스의 매력 중 하나는 전속 학자들과 마시는 아침 커피와 오 후의 차였다. 학자의 전문적 식견이나 문헌에 대한 정보나 즉석의 논평으로 신약 및 마가복음에 대한 나의 이해는 거의 매일 넓어졌다. 나는 나를 지켜 봐 준 더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는데, 그중 한 명은 필라 시리즈의 편집장 인 D. A. 카슨 ( D. A. Carson ) 이다. 그는 필라 시리즈의 한 부분을 맡도록 나를 받아 주었고 훌륭한 학자 및 편집자로서의 능력으로 나의 작업을 도와주었 다. 나는 또한 케임브리지에서의 안식 기간을 격려하고 재정을 도와준 익명 의 기부자에게 고맙다. 이 주석에 색인을 만드는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작 업을 훌륭히 해낸 스콧 스타벅 ( Scott
Starbuck ) 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다.
마지막으로 한결같이 헌신적인 아내 제인 ( Jane ) 에게 고마울 따름인데, 아내 는 잉글랜드 나들이와 여행을 제쳐 두고 이 주석을 저술하도록 배려해 주 었다. 11
저자 서문
누구보다도, 나는 정말 놀라운 방법으로 이 주석이 출판되게끔 섭리하신 주님께 겸허히 감사드린다. 오늘날 출간되는 수많은 신약 주석 시리즈 중에 서, 최고의 해석과 복음주의의 따뜻함을 추구하는 필라 신약 주석의 이상은 교회의 학자로서의 내 자신의 열망과 가장 가까웠다. 이 주석의 형식은 필라 시리즈의 다른 주석들의 형식을 따른다. 단 마가 복음과 관련된 핵심 용어에 대한 더 길거나 짧은 해설은 예외인데, 이런 용 어들은 고딕체로 강조해 놓았다. 또 주석에서 정해진 곳에 배치한 정말 중요 한 주제에 대한 더 긴 보론들도 예외다. 필라 시리즈의 편집자들과 발행인 들의 목적에 따라 이 책의 목표는, 마가복음의 유래에 대한 가설이나 다양 한 학파의 본문 해석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마가복음 본문을 주석하는 것이다. 신약 주석가, 특히 공관복음 주석가는 점점 많아 지는 해석 방법론들을 물려받는데, 곧 어떤 학자들의 역사적 방법, 다른 학 자들의 문학적 방법, 또 다른 사람들의 철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방법, 그리고 이에 더해 정치학적, 성과 관련된 방법들을 물려받는다. 나는 마가 복음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일 때 이런 방법론들을 활 용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이들 중 어느 것의 옹호자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 았다. 나의 우선적 목표는 마가복음에 대한 세 측면에, 즉 마가복음의 ‘역사 적’ 배경 및 내러티브와, ‘문학적’ 방법, 그리고 ‘신학적’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세 방향에 따라 논하면서 독자들의 지식을 과소평가하거 나 1세기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들의 지식을 과대평가하려 하지 않았으며, 오직 독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제자로서 그를 따를 수 있게 할 것 같은 방식으로 마가복음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제임스 에드워즈
12
서론
THE PILLAR NEW TESTA MENT COMMENTARY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29
The Gospel according to M ark
1. 마가복음 해석의 역사 마가복음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른 세 복음서보다 상당히 적은 관심을 받아 왔다. 탄탄한 신학을 담아낸 요한복음이나 내러티브 구조로 된 마태복 음에 비해, 또는 친근한 비유와 이야기들이 있는 누가복음에 비해, 마가복 음은 작품성 없고 단조로운 복음서로 종종 여겨졌으며, 학자들조차 이렇게 여겼다.1 ) 마가복음에 대한 이런 저평가는, 교부들 대부분의 의견에 따라 가 장 이른 복음서를 마태복음으로 여긴 2 ) 복음서 전승의 시초로 거슬러 올라 간다.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기사가 단 세 개 ( 막 4:26-29, 7:31-37, 8:22-26 ) 뿐이므로, 2세기 중엽 이후로 ( 예, Irenaeus, Adv. Haer. 1 ) 덴(G. Dehn)은 “마가는 역사가도 작가도 아니다. 마가는 자신의 자료를 아주 단순한 방식으 로 조직했다”라고 단언했다(Der Gottessohn. Eine Einfürung in das Evangelium des Markus [Hambrug: Im Furche-Verlag, 1953], 18). 불트만(R. Bultmann)은 “마가는 자신의 소재의 주인이 아니어서 스스로 체계적으로 구성해 써 나갈 수 없었다”라고 밝혔다(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tans. J. Marsh [New York: Harper & Row, 1963], 350). 트록메(E. Trocmé)는 마가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 “이것이 요점이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어느 문학사에서 도 언급할 가치가 없는 별 볼 일 없는 저자였다”라고 냉소적으로 말했다(The Formation of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trans. P. Gaughn [London: SPCK, 1975], 72). 2 ) 이레나이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에피파니우스, 히 에로니무스, 이 여섯 교부(파피아스를 추가하면 일곱 교부)는 마태의 가장 이른 기록은 히브리어 로 저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히브리어로 된 복음서 본문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또 한 이슬람의 하디스가 초기의 히브리어 복음서 전승을 보존하고 있다. “카디자는 친사촌 와라카 (Waraqa ibn Naufal ibn Asad ibn ‘abdul ‘Uzza)에게 [무함마드를 데리고] 갔다. 이 와라카는 이 슬람교가 창시되기 전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히브리 문자로 글을 쓰곤 했다. 그는 히브리어로 된 복음서에서 알라가 원하는 만큼 옮겨 적었다”(Sahih al-Bukahari 1:3).
30
1. 마가복음 해석의 역사
3.1.1 )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에 미치지 못하는 축약판으로서 정경에서 두 번
째 ( 때로는 네 번째 ) 자리에 배치되었다. 교부 시대 내내 복음서 인용은 마태복 음이나 요한복음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다음으로 누가복음이 훨씬 적게 인 용되고, 마지막으로 마가복음이 정말 드물게 인용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는 마가복음에 대해 “마가는 추종자 ( 라.
‘페디세쿠우스’ ) 처럼
마태를 모방했으
며, 따라서 마태의 요약자로 여겨진다”라고 단언했다.3 ) 이런 아우구스티누 스의 단정은 이전 교부들의 판단뿐 아니라 계몽주의 시대까지 이르는 이후 의 관점도 대표했다. 교회는 이런 견해의 영향으로 역사 내내 예수에 대한 묘사들을 마태복음에서 주로 취했다. 마태복음이 신약 정경의 제일 처음에 나오고 예수의 구약 성취를 강조하므로, 교회는 열일곱 세기가 지나는 동안 마태복음을 제일 먼저 기록되고 가장 신뢰할 만한 복음서로 간주했다. 주일 과 축일에 읽는 성경 본문은 마태복음이었고, 다른 복음서를 읽는 때는 오 직 마태복음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였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가치에 대한 견해는 19세기 전반에 급격한 반전을 맞 이한다. 학자들이 4 ) 세 복음서를 세심하게 연구한 것에 근거하여, 마가복음 이 마태복음을 독창성 없게 따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이른’ 복음서 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우선적으로 참고한 자료라는 가설을 제기한 것 이다. 이런 재평가는 마가복음에 대한 학문적 관심에 급진적 영향을 끼쳤 다. 이런 변화로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마가복음은 명성을 누릴 만큼 관심의 대상이었고, 결과적으로 이 두 번째 복음서에 대한 학문은 아주 융성하여 어느 학자도 마가복음을 전부 해석했다거나 홀로 통달했다고 말할 수 없었 다. 마가복음 우선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를 포함하여 오늘날 다수의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네 복음서의 관계,5 ) 특히 앞 세 복음서의 관계는 연구 역사에서 아주 난해한 문제 중 하나며 본 주석에서 는 다룰 수 없다. 본서에서 마가 우선설에 대해 최대한으로 다룰 수 있는 것 은, 마가복음이 다른 공관복음보다 먼저 저작되어 이것들에, 특히 마태복음 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상당히 많은 구 3 ) De Consensu Evangeliorum 1.2.4. 4 ) K. Lachmann, 1835; C. H. Weisse and C. G. Wilke, 1838; H. J. Holtzmann, 1863; B. Weiss, 1886; B. H. Streeter, 1924. 5 ) H.-H. Stoldt, History and Criticism of the Marcan Hypothesis (Macon, Ga.: Mercer University
Press/Edinburgh: T. & T. Clark, 1980), 1: “복음서 자료의 비평적 분석은 마땅히 사상사에서 가 장 어려운 연구 주제 중 하나로 여길 수 있다……사상사에서 어떤 연구도 같은 정도의 학문적 연 구를 요하지 않는다.”
31
서론
절에 주목해 보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전념한 최근의 다발적인 연구들은 마 가를 솜씨 없고 볼품없는 저자라고 무시한 이전 학자들의 판단을 계속 잠 재워 오고 있다. 이 주석에서 제시하는 견해는 마가는 숙련된 문예가며 신 학자라는 것이다. 마가의 문체는 높은 문학성을 보인다기보다는 일상적 헬 라어 구어체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은 문학적 의도와 구 성에서 상당히 복잡함을 보여 준다. 이는 마가복음의 샌드위치 기법, 아이 러니 사용, 내부자-외부자라는 특별한 소재, 침묵 명령, 여행에서 잘 나타 난다. 두 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권위 있지만 고통당하시는 예수에 대한 심 오한 신학적 개념을 그려 내기 위해 이런 문학적 장치들과 다른 문학적 장 치들을 활용했다.
2. 저자 및 저작 장소 정경의 다른 복음서들처럼, 마가복음은 복음서 어느 곳에서도 저자를 확 인해 주지 않으며, 심지어 누가복음 ( 1:1-4 ) 이나 요한복음 ( 20:30-31 ) 의 경우와 는 달리 저작의 계기도 알려 주지 않는다. 교회의 전통에 근거해 붙은 네 복 음서의 제목들은 2세기 전반에 나타난다. 보통의 명명은 “마태에 의한 복음 서” ( 헬.
‘유앙겔리온 카타 마타이온’ ),
“마가에 의한 복음서” ( 헬.
등이다. 복음서 전승에 대하여 초대 교회는 “복음” ( 헬.
‘유앙겔리온 카타 마르콘’ ) ‘유앙겔리온’ ) 이라는
단
어를 보통 단수로 사용했고, 복수로는 드물게 사용했다. 이는 계승되는 복 음을 통일체로, 즉 “하나의” 복음이 네 가지 형태로 존재함을 이해했다는 것을 가리킨다.6 ) 두 번째 복음서의 저자와 상황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소아시아 히에라폴 리스의 주교인 파피아스의 저술 『주님의 예언에 대한 주해』 ( Exegesis Lord’s Oracles ) 에서
나온다 ( 이
of the
작품은 그가 죽은 해인 AD 130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쓰였다 ).7 )
이후 이 작품은 소실되었지만 파피아스의 증언은 유세비우스를 통해 보존 되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6 ) M. Hengel, Studies in the Gospel of Mark , trans. J. Bowde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5), 64-69; M. Hengel, The Four Gospels and the One Gospel of Jesus Christ, trans. J. Bowden (Harrisburg: Trinity Press International, 2000), 34-115. 7 ) W. R. Schoedel, “Papias”, ABD 5.140은 파피아스의 저술 활동을 AD 110년경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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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자 및 저작 장소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가 되어 베드로가 주님이 하신 말씀이나 행동 에 대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정확히 기록했는데, 사실 두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가는 주님에게 직접 듣거나 주님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나중에 베드로를 따라다녔으며, 베드로는 필요한 대로 마가에게 가르침 을 주었지만 이를테면 주님의 말씀들을 잘 정리해 주지는 못했다. 이에 마가는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올바른 요점들을 써 내려가며 오류를 범하 지 않았다. 마가가 주의를 기울인 한 가지는 그가 들은 것을 빼먹지 않는 것과 잘못된 진술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 Hist. Eccl.
3.39.15 )
이 증언은 4세기 초에 기록한 것이지만 원 출처는 두 세기 전의 자료며, 매우 신뢰할 만한 전승에 해당한다. 유세비우스는 위와 같은 전승을 파피아 스뿐 아니라 존경받는 2세기 교부 이레나이우스에게서도 가져온다. 유세비 우스는 파피아스의 증언에 긴 서문을 덧붙였는데, 파피아스는 사도들에게 직접 듣지는 않았으나 복음 전승의 기원을 면밀히 조사해, 그리고 사도 요 한의 제자로서 사도의 직접적인 승계자인 장로 요한과 어느 아리스티 온 ( Aristion ) 을 통해 위와 같은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 이 사실은 파피아스 전승을 AD 90-100년에 이르게 한다. 유세비우스가 수록한 인용의 신뢰성 은, 파피아스가 믿을 수 있는 출처라고 비판 없이 단정하지 않는 그가 이번 파피아스의 증언은 기꺼이 신뢰하고자 한 것에 의해 더 증가한다.8 ) 파피아스 전승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두 번째 복음서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 베드로가 하는 증언의 충실한 번역자인 마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 이다. 게다가 파피아스는 마가가 정확히 기록했으며 잘못된 진술을 하지 않 으려고 애썼다는 점을 밝혀 주었다. 즉 마가는 그가 기억하는 모든 것을 적 어 내려갔다. 하지만 완전히 연대순으로 기록하지는 않았다. 이 마지막 문 구는 파피아스가 마가가 예수의 생애와 관련해 상이한 연대를 보인 것에 대해 적어도 어떤 집단에게 비판받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런 비판은 아마 마가의 연대가 몇몇 특정한 경우에 요한복음과 어긋난다는 사 실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파피아스의 제자들은 요한을 신봉했다. “필요에 따라 가르쳤다”라는 베드로에 대한 언급은 유세비우스의 계속되
8 ) 유세비우스는 어떤 경우에는 파피아스를 “이 자의 책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정말 지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일축했다(Hist. Eccl 3.39.13). 유세비우스가 마가복음과 관련한 파피아스의 전 승을 기꺼이 믿고자 한 것은 그에 대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 낸다. 전체 논의에 대해서는 Hist. Eccl. 3.39.1-17을 참조하라.
33
서론
는 증언에서 상술된다. 그는 증언의 요지가 2세기 말의 교부 알렉산드리아 의 클레멘스의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공개적으로 말씀을 설교하고 성령에 의해 복음을 선포했을 때, 거기 있던 상당히 많은 사람은 마가에게, 베드로를 오랫동 안 따라다니고 베드로가 한 말들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베드로가 말한 복음을 기록하라고 간곡히 권했다. 마가는 사람들의 권고대로 했으며 자 신에게 요청한 사람들에게 그 기록을 나누어 주었다. ( Hist. Eccl.
6.14.6-7 )
이 진술에 2세기 중엽 이레나이우스의 뒷받침하는 진술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베드로와 바울이 설교하고 로마에 교회의 토대를 놓은 후에 “베드로의 제자며 통역자인 마가가 베드로가 전한 것을 기록하여 남겼다” 라고 진술한다 ( Adv.
Haer. 3.1.1 ).
베드로가 마가복음의 주요 출처라는 전통은,
즉 두 번째 복음서가 여러 점에서 “베드로의 기억들”이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한 초대 교회에서 이의가 없는 일치를 보았다.9 ) 따라서 우리는 1세기 말부터 계속되는 다양한 전승에서, 두 번째 복음서의 저자는 베드로의 통역 자인 마가며 그가 로마에서 이 복음서를 썼다는 것을 보강해 주는 증언을 보게 된다. 우리가 고려하는 마가는 분명 마리아라는 여인의 아들인 요한 마가며, 그 녀의 집은 예루살렘에서 초대 교회가 모이는 곳이었다 ( 행 12:12 ). 동일한 장소 가 아무래도 최후의 만찬이 있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 행 1:13-14; 막 14:14 ).10 ) 9 ) The Anti-Marcionite Prologue; Justin Matyr, Dial. Trypho 106; Irenaeus, Adv. Haer. 3.1.1; Hippolytus, on 1 Pet 5:13; Clement of Alexandria (cited in Eusebius, Hist. Eccl. 6.14.6); Origen (cited in Eusebius, Hist. Eccl. 6.25.5); Jerome, Comm. in Matt., Prooemium 6. 이에 더 하여 Eusebius, Hist. Eccl. 2.15; 5.8.2 참조. 또한 V.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8; W. Grundmann, Das Evangelium nach Markus 22-23; H. Koester, Ancient Christian
Gospels: Their History and Development (Philadelphi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2), 289-90 참조. 위의 증언들에 또한 AD 170-190년 로마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책들을 포함하던 무 라토리 정경의 진술이 추가될 수 있다. 그런데 무라토리 정경의 시작 부분은 소실되었으며 마가복 음에 대한 마지막 진술 한 조각만 포함하는 정도로 남았다(“그런데 그는 거기에 있었고 그래서 그 것을 내려놓았다”). 이 문서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위의 문구는 파피아스, 이레나이우스, 유세 비유스에 의해 보존된 진술에서처럼, 베드로의 설교 때 마가가 수행한 것을 언급한 것이라고 타당 하게 설명된다. 즉 “그런데 마가는 베드로가 설교하는 곳에 있었고 설교를 기록해 놓았다”를 뜻하 는 문구라는 것이다. 10 ) 그룬트만(Grundmann)은 막 14:13에서 물병을 옮기던 젊은이는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였다고 제안한다(Das Evangelium nach Markus, 21). 이 흥미로운 제안을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추가 적 증거는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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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내러티브 구조
마가복음 주석
THE PILLAR NEW TESTA MENT COMMENTARY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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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spel according to M ark
제1장 복음이 인격으로 나타남(1:1-13)
마가복음의 열쇠(1:1) 고대의 저술은 대개 책의 목적을 기술하는 형식을 갖춘 헌정사나, 논할 첫 주제를 다루는 여는 말로 시작한다.1 )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공식적인 도입은 전자의 패턴을 따른다. 마가복음은 후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 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 1:1 ) 로 시작한다. 마가가 자신의 복음 서가 제목을 갖기를 원했다면 바로 이 구절이 제목이 된다. 창세기, 호세아, 요한복음처럼 마가복음의 첫머리는 단순하게 “시작”이다. 마가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 단어를 역사에 섭리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떠올리게 하는 것으 로서 선택했다. 즉 태초에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복음 시대 역시 하 나님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되면서 나타난다. “시작”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르케’는 시간상의 처음, 또는 기원이나 원리상의 처 음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질 수 있다. 이 단어가 1장 1절에서 사용된 것은 후자의 의미에서다. 마가는 단지 복음서의 도입부가 아니라 전체 복음이 ‘아르케’에 의해 통합되기를 의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작”은 복음을
1 ) H. Koester, Ancient Christian Gospels (Philadelphi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London: SCM Press, 199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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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마가복음 열쇠(1:1) 1 : 1
시작하는 말로서 복음이 나오게 하는 권위는 곧 바로 모든 것의 저자며 기 원자인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힌다.2 ) 로마이어 ( Lohmeyer ) 는 “시작”이 “하나 님의 영원한 말씀의 실현”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점에서 옳다.3 ) 마가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등장은 결코 세상의 창조보다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 아니 다. 바로 예수에게서 새 창조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가가 말하는 복음은 마태와는 ( 마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기록[헬. ‘비블로스’]” )
달리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이야기다. “복음”에 해당하는 단 어 ( 헬.
‘유앙겔리온’ ) 는
문자적으로 “좋은 소식”을 뜻한다. 구약과 헬라의 문학
에서 ‘유앙겔리온’은 보통 전쟁터에서의 승리를 보고하는 것에 대해 쓰였 다. 블레셋이 사울의 군대를 길보아에서 이겼을 때 “[그들은] 백성에게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 ‘유앙겔리제스다이’ )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냈다” ( 삼상 31:9. 또한 삼하 1:20, 18:19-20, 대상 10:9 ). 승리의 보고를 가져오는 전령 은 “좋은 소식” ( 삼하 4:10, 18:26 ) 을 전달하는 자다. 헬라인들에게 이 어구는 전 투에서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다른 좋은 소식에 대해서도 쓰였다. BC 9년, 즉 예수가 탄생하기 전 10년 안의 시기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 BC 63-AD 14년 ) 의
생일은 ‘유앙겔리온’ ( 복수형 ) 으로서 축하되었다. 그는 신으로 추앙되
었기 때문에 그의 “생일은 세상에 대해 좋은 소식을 나타내었다.” 4 ) 그리 스-로마 세계에서 이 단어는 항상 복수형으로 나타나며, 여러 좋은 소식 중 한 가지를 뜻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유앙겔리온’은 오직 단수형으로 나타 나며 예수로 오신 하나님에 대한 ‘이’ ( the ) 좋은 소식을 가리키며 이 소식 외 에 다른 좋은 소식은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5 ) 그런데 “좋은 소식”의 개념 2 ) R. P. Martin, New Testament Foundations (Grand Rapids: Eerdmans, 1975), 1.27. 3 ) E. Lohmeyer, Das Evangelium des Markus , 10. 4 ) 프리에네(Priene)의 달력 비문에서 취해진 것으로 A. 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East, trans. L. Strachan(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27), 366 인용. 그리스-로마 세계는 영 웅들을 신 같은 지위까지 끌어올려 숭상하였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숭배자들은 특히 이런 점이 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유명한 전설에 따라 뱀(신의 수호자를 상징함)에 의해 잉태되었다 고 사람들은 믿었다(Suetonius, Lives of Caesar, “The Deified Augustus”, 94 참조). 아우구스
투스의 통치는 다음의 찬사처럼 황금시대를 이루었다고 칭송되었다. “영원하며 영존하는 만물의 본성이 훌륭하고 선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사람들에게 선한 행위를 풍성히 하여 이들이 인 생의 번영을 누리게 하였다고 감사하며 인정한다. 그는 제우스에게 물려받은 신성한 고향 로마 의 아버지며, 민중의 구원자다. 그의 선견지명은 모든 사람의 열망을 충족시킬 뿐 아니라 이를 뛰 어넘으며, 땅과 바다를 평화롭게 하고 도시들을 질서와 조화와 좋은 시절로 꽃피우게 한다. 그로 인해 생산력은 흡족하며 전성기에 있다. 미래에 대한 즐거운 희망과 현재 동안의 선한 의지가 모 든 사람을 채워, 이들이 기쁘게 제물을 바치고 찬양하게끔 한다”(H. Kleinknecht, ΠΑΝΘΕΙΟΝ: Religiöse Texte des Griechentums [Tübingen: Mohr, 1959], 40 인용). 5 ) G. Stanton, Inaugural Lecture as Lady Margaret’s Professor of New Testament, Cam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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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복음이 마가복음 1 : 1 인격으로 나타남(1:1-13)
은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승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지서 이사야에서 하 나님의 백성이 평화와 좋은 소식과 압제에서의 해방을 듬뿍 누리게 될 때,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친히 최종적인 구원 역사를 행하시는 것으로 번역 된다 ( 사 52:7, 61:1-3 ). 마가가 볼 때 예수가 오심으로써 이사야가 예고한 “좋은 소식”이 성취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저작된 복음서가 마가복음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만약 이런 가설처럼 마가가 정말로 첫 복음서 저자라면, 그는 “복음”이란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적용함으로써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한 것이 다.6 ) 마가에게 복음은 때가 되어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 ( 사 52:7, 61:1 ) 을
가리켰다.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출현으로,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
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마가가 쓴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 자체가 복 음이라 불린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일어나신 바로 이 예수가 지금은 교회와 세상을 위해 일하는 살아 있는 주이시며, 복음을 믿도록 사 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마가가 이해하기에 복음은 진리나 신념들의 모 음 이상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인격’이다.7 ) 하나님의 왕 국은 나사렛 예수로 실체적으로 현존한다. 히브리어로 “예호슈아” ( 영. “Joshua” ) 의 이형인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를 뜻하며, 이런 이름을 가진 예수는 마가의 프롤로그에서 “그 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된다. ( 8:29의 ‘그리스도’에 대한 보론과 15:39의 ‘하나님 England, 27 April 2000. 6 ) “복음”(헬. ‘유앙겔리온’)은 마가가 가장 선호하고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마가복음에서 7회 나온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서는 단 4회 쓰였으며,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가정된 어록 자료 Q에서 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마가는 “복음”의 이해를 예수에게 처음으로 적용했을 뿐 아니 라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묘사하는 “복음”이라는 문학 장르를 고안했다. Martin, New Testament
Foundations, 1.23-27 참조. 7 ) 막센(W. Marxsen)은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과 바꿔 쓸 수 있으며, 더욱이 마가의 의미에서 “복 음”은 세례에서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예수의 전체 내러티브에 대한 제목이나 기술이라고 정확 하게 말했다(Mark the Evangelist, trans. J. Boyce, D. Juel, W. Poehlmann, and R. Harrisville [Nashville/New York: Abingdon Press, 1969], 130-31 참조). 마가는 예수의 말들을 발췌한 것 이나(예, 가설적 구전 자료 Q), 예수를 단지 지혜의 선생으로 묘사하는 것을(예, the Gospel of Thomas 또는 Nag Hammadi의 영지주의 문서들) 결코 자신이 공관복음서 전승에 도입한 의미로 서의 “복음”이라 여길 수 없었다. 이는 ‘하나의’ 복음에 대한 기록들인 네 복음서(예, “마태를 따 른 복음”, “마가를 따른 복음”)를 가지고 있던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다(M. Hengel, Studies in the Gospel of Mark, trans. J. Bowden [London: SCM Press, 1985], 130-31 참조). 라이트(N. T. Wright)는 이 점과 관련해 예수 세미나를 비판하면서 “[Thomas와 Q를] ‘복음들’이라고 부르 는 것은 이들과 네 복음서간의 명백한 차이를 모호하게 흐려 놓는다”라고 바르게 지적했다(“Five Gospels but No Gospel: Jesus and the Seminar,” in Authenticating the Activities of Jesus, ed. B. Chilton and C. Evans, NTTS 28/2 (Eiden, Boston, Koln: Brill, 1999),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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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예수의 마가복음 예비자(1:2-8) 1 : 2-3
의 아들’에 대한 보론을 참조하라 ).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아보다 예수의 인격과 사명
을 더 완전히 드러내는 칭호며, 마가복음에서 복음의 대동맥과도 같은 예수 에 대한 제일가는 칭호다.8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은 프롤로그며 참으로 마가복음의 주제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과 떨 어뜨리지 않는 한, 2절에서 세례 요한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마가복음의 제 목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1절에서 마가는 ‘유앙겔리온’, 즉 “복음”의 본질 적인 내용을 선포한다. 이리하여 마가복음은 독자가 의미를 풀기 위해 여기 저기서 단서 조각을 모아 맞추어야 하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아니며, 목적이 나 의미가 결여된 날짜와 장소에 대한 진부한 연대기가 아니다. 또한 단지 어떤 사상 체계로 환원될 수 있지도 않다. 오히려 마가는 발단에서부터 복 음의 내용이 그리스도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인격인 것을 알려 준다. 복음의 내용은 믿음의 간명한 고백이며, 믿음의 의미는 마가복음이 예수를 나타내는 것을 독자들이 따라가면서 드러날 것이다.
세례 요한: 예수의 예비자(1:2-8) 2-3절 마가복음은 로마 이방인들을 위해 쓰였다. 분명히 보이는 것처럼 마가는 구약 인용을 거의 하지 않는데, 히브리 예언서의 증거 본문들이 유 8 ) “메시아”는 인간 행위자를 지칭하는 반면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 는 더 완전한 형이상학적 용어라고 밝히는 O. Hofius, “Ist Jesus der Messias? Thesen,” JBTh 8 (1993): 117 참조. 즉 여기서 호피우스(Hofius)는 이렇게 말한다. ‘형이상학적’ 칭호인 “하나님의 아들”은 신약에서 예수를 높이는 칭호로 등장하는데, 예수와 하나님의 기원적이고 본질적인 연합 을 전제하며, 이런 연합과 더불어 선재한 예수의 신성(Gottsein)을 전제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두 개의 비중 있는 언셜 사본인 시나이 사본(AD. 4세기 중반)과 코리데티(Koridethi) 사본(AD 9 세기 중반)에는 빠져 있다. 순전히 사본의 수와 다양함, 비중으로는 1:1에 “하나님의 아들”이 포 함될 것이 뒷받침되지만 말이다. 필사자들이 종종 책의 제목과 준 제목을 늘리고 싶은 유혹에 굴 복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원문에 있었다는 것에 반하는 증거가 된다. 게다가 만일 이 칭호가 원래 있었다면 필사자가 왜 이런 중요한 칭호를 빠뜨렸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한편 이 칭 호가 원래의 것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선행하는 네 단어의 속격 어미로 인해 필사상의 간과 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제시된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은 마가의 기독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마가복음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나온다(세례, 1:11; 귀신을 쫓음, 3:11; 5:7; 변형, 9:7; 예수 에 대한 재판, 14:61; 특히 백부장의 고백, 15:39). 모든 사본의 증거와 마가복음의 목적은 1:1에 “하나님의 아들”이 원래 있는 것임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Metzger, TCGNT, 73 참조. 페 린(N. Perin)은 “만일 [이 칭호가] 표제의 일부분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일부분이 되어야 했는데, 이 칭호를 최초로 추가한 필사자는 명의상 마가 공동체의 일원은 아닐지라도 마가의 취지를 따 르는 자였다”라고 말한다(“The Christology of Mark: A Study in Methodology,” in A Modern Pilgrimage of New Testament Christology [Philadelphia: Fortress, 1974],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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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복음이 인격으로 나타남(1:1-13) 마가복음 1 : 2-3
대 독자에게 권위를 갖는 정도만큼 로마 독자에게는 권위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구약을 인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무엇 보다 주목할 만하다. 이 인용은 그리스-로마 세계와 유대 세계 모두에서 권 위적인 공식구인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It is written”, 헬. ‘카도스 게그랍타이’, 개역개 정 “기록된”[3절] ) 로
시작된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 공식구는 흔히 법적 효력
을 전달하는 법령이나 선포의 서두에서 등장한다. 구약에서 이 구는 하나님 이나 토라, 왕, 선지자의 권위를 가리키며 청자나 독자에 대한 규범적 영향 력을 주장한다.9 ) 1장 2-3절에서의 인용은 선지서 이사야에서 온 것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이 인용은 사실 구약의 세 구절이 조합된 것이다.10 ) 2절에서 사자를 보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출애굽기 23장 20절과 말라기 3장 1절의 앞부분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2절 뒷부분 (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 에 해당하는 구절이 구약에 없다. 이 조합의 더 중요한 부분은 3절에 있는데, 이사야 40장 3절을 거의 그대로 재사용한다. 이사야 40장 3절은 네 복음서 모두에서 예수의 예비자 인 세례 요한과 관련해 인용된다 ( 마 3:3; 막 1:3; 눅 1:76; 요 1:23 ). 3절의 이사야 인 용은 인용의 조합을 특징짓는 요소로 생각되었다.11 ) 따라서 인용 전체가 가 장 위대한 선지자로 여겨진 이사야에게 돌려진다.12 ) 이사야의 권위는 초대 교회에서 출애굽기나 말라기의 권위를 대신했다. 마소라 본문 ( MT ) 과 70인역에서 “사막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곳을 가리킨다. 즉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 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 사 40:3 ). 이런 이해를 따라 사해 사본 ( DSS ) 은 “죄의 사람” ( =예루살렘 ) 에서 떨어져 초원이나 사막에 토라 공동체를 세운 것 이 정당함을 보이는 데 이 구절을 인용한다 ( 1QS
8:14 ).
그런데 마가는 “광야
에서”와, 하나님의 준비 장소가 아닌 예고를 결합해 (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요 단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한 것에 일치시킨다. 이런 인용은 세례 요한 을 “네 앞에 보내진 사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한다 ( 1:2-3 ). 9 ) G. Schrenk, “graphō ,” TDNT 1.747-49. 10 ) 많은 언셜 필사본(A K P W Π)이 2-3절에서의 인용을 이사야로 특정하여 돌리기보다는 “선지 자들”에게 돌린다. 이런 변화는 2-3장의 인용이 합성이므로 나중의 필사자들이 서두의 공식구를 더 포괄적이게 하려는 의도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인용을 이사야에게 돌리는 것이 더 설득 력 있게 입증된다. Metzger, TCGNT, 73; E. Hoskyns and N. Daney, The Riddle of the New
Testament (London: Faber and Faber, 1958), 44-46 참조. 11 ) Str-B 2.1. 12 ) 2-3절의 구약 인용에 대하여 이 합성된 인용이 마가에게서 나온 것임을 주장하는 J. Marcus, The Way of the Lord (Edinburgh: T. & T. Clark, 1992), 12-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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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예수의 마가복음 예비자(1:2-8) 1 : 2-3
요한의 임무는 이어서 올 그 자 ( the One ) 를 위해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3장 20, 23절에서 백성을 이끌 “사자”는 인간 안내자도, 심지어 모세도 아닌 여호와의 신적 사자다. 이 본문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한 것은 마가가 요한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 이상을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말라기 구절 ( 말
3:1; 또한 4:5-6 ) 은
길을 예비하는 자를 엘리야라 밝힌다. 엘리야는 열
왕기하 2장 11절에 따르면 죽지 않고 불수레 속에서 하늘로 올려졌다. 유대 교에는 엘리야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왕국의 예비자로서 돌아 올 것이라는 널리 퍼진 기대가 있었다.13 ) 마가가 여기서 세례 요한과 동일 시하는 엘리야는 메시아의 예비자일 것이라고 종종 상정된다. 그러나 구약 과 중간기 문헌에 보존된, 기독교 이전의 유대 자료들에서, 엘리야는 메시 아가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는 것을 예표한다.14 ) 이 사실은 1장 2-3절에서의 구약 인용의 중요성을 상당히 높여 준다. 이 인용에서 몇 개 의 대명사와 “주를 위한 길”은 하나님과 관련 있다. 하지만 마가는 이 본문 을 ‘예수’와 관련해 적용한다. 이는 세례 요한이 단순히 메시아를 예고하는 자가 아니라 바로 나사렛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예고하는 자라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1장 2-3절은 요한을 신적으로 임명된 선도자로, 예 수를 하나님의 현시로 소개한다. 여기서의 인용은 나아가 예수의 생애와 사 역을 구약과 관련짓는 효과를 낸다. 예수는 마치 이전의 구원 계획이 빗나 간 것처럼 하나님이 뒤늦게 내신 추가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하나 님이 이스라엘에 행하신 역사의 연속선상에 서 계시며, 율법과 선지서를 완 전하게 하는 자이시다 ( 마 5:17 ). 서두의 구약 인용 태피스트리는 예수의 인격 과 사역을 구약에서 선행된 하나님의 계시와 불가분하게 연결할 뿐 아니라,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이 구약의 계시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게 한다. 이 런 점은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신약과 구약을 독특하고 끊을 수 없게 통 합한다. 복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시작하신 그 무엇의 완성으로 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인이 구약의 중요성을 일축하거나 줄일 수 없게 하며, 복음에서 유대적 기원과 정황을 “걷어 내는” 것을 시도할 수 없게 한다. 인용 태피스트리의 두 번째 효과는 예수의 인격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 13 ) 말 3:1; Sir 48:10; Ps.-Philo, Bib. Ant. 48:1; 4 Ezra 6:26; Sib. Or. 2:187-189; Apoc. Elijah 5:32-33; 4Q558. 14 ) M, Öhler, “The Expectation of Elijah and the Presence of the Kingdom of God,” JBL 118 (1999), 64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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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복음이 마가복음 1 : 4 인격으로 나타남(1:1-13)
하는 것이다. 이 인용은 원래의 히브리 문맥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여호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예수에게 적용된다. 마가의 이 여는 인용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의 실현을 절묘하지만 직접적으로 예수에게 옮긴 다. 이미 1장 2-3절에서 마가복음 전체에 걸쳐 예수의 탄생을 밝히고 특징 지을 사전 작업이 적절히 이루어진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겸손하지만 권 위 있게 자신의 길과 하나님을 길을, 자신의 사역과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 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을 통합하신다.15 ) 마지막으로, 인용 태피스트리는 예수의 사역의 성격에 대한 단서를 준다. 1장 2-3절에서 “길”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 에 대한 ) 복음” ( 1:1 ) 을 가리키는 것이 따라서 ‘길’이다 ( 참고, 행 9:2 ). 시작부터 예수 이야 기는 독자들을 형이상학과 신비주의로 향하게 하지 않으며, 윤리 규칙과 체 계로도 향하게 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신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구원의 ‘길’로 향하게 한다. 마가복음의 후반부에서 이 주제는 다시 나와 정 교하게 제시될 것이며, “길에서”가 예수와 제자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서 의 예수의 사역의 완수로 다가가게 한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의 ‘길’은 궁 극적으로 예수가 십자가로 가시는 길이다. 4절 인용에 이어 1장 4절에서 세례 요한이 접속사도 없이 등장한다.16 ) 요한의 등장이 즉각적인 것은 그가 예수를 예비하는 사자인 것을 확인해 준다. 요한에 대한 4-8절의 기술은 다른 복음서들의 묘사보다 집중적이고 특징을 잘 밝혀 준다.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빠진 것들이 있는데, 요한의 출 생과 관련한 기이한 사건 ( 눅 1장 ), 유대교를 신봉하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에 벼락같이 도전한 것 ( 마 3:10-14 ) 이
3:7-10; 눅 3:7-9 ),
그리고 사회적 개혁에 대한 외침 ( 눅
빠져 있다. 마가는 요한에 대한 묘사를 하나의 주제에, 즉 요한을
엘리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보다 능력 많으신 이” ( 1:7 ) 의 예비자로서의 역할을 성취하는 자로 묘사하는 것에 제한한다. “능력 많으신 이”는 요한이 그의 신발 끈 푸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 15 ) 마커스(Marcus)는 여는 구약 모음(mosaic)이 내포한 기독론적 의미를 정확히 견지한다(The Way of the Lord, 31-41). “주를 위한 길”은 일차적으로 윤리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로 갑자기 나타나심을 가리킨다. 따라서 마가는 하나님이 전에 일한 곳에서 예수 가 현재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16 ) 사본 전승이 4절에서 ‘밥티존’(“세례하는”)에 관사가 있는지 또는 없는지에 따라 나뉜다. 즉 ‘밥
티존’이 “세례자” 요한에 대한 칭호인지, 아니면 광야에서 “세례하고 있는” 그에 대한 기술인지 에 따라 갈린다. 후자가 선택될 만한 독법인데, 이유는 (1) 더 확실하고 다양한 사본들이 지지 하고 (2) “세례자”는 6:25와 8:28 같은 구절에 맞춘 동화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Metzger, TCGNT, 7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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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예수의 예비자(1:2-8) 마가복음 1 : 4
엘리야처럼 ( 왕상
17:2-3 ),
요한은 바람과 열기에 메마른, 유다의 광활하고
척박한 불모지인 광야와 관계있다. 광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회개의 장소를 나타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를 대표한다.17 ) 이스 라엘의 시작부터 광야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구원을 가져오시는 장소인데, 출애굽 후의 시내 광야가 첫 사례 ( 출 15:22 이하 ) 며 이후 선지자들이 외친 희망 의 상징적인 광야가 그러하다 ( 렘 2:2-3; 호 2:14 이하 ). 요한이 광야에 등장한 것 은 모세오경과 선지서의 원형들을 성취한다. 즉 이는 출애굽 때 일어난 이 스라엘 역사의 첫 사건을 재현한 것이며, 요한이 자주 나오는 “요단강 부근 각처” ( 눅
3:3 ) 는
정확하게 엘리야와 연관된 지역이므로 ( 왕하
2:6-14 )
선지서의
약속들도 성취한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도시에 거주하는 편안한 일상에서 벗어나, 특히 법으로 정한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권에서 벗어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로 나아올 것을 요구한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윤리적, 영적 중생의 상징으로 세례를 받으라 한다. “세례”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완전히 적시는 것, 가라앉히거나 담그 는 것”의 의미가 있으며, 어근은 ‘밥테인’이다. 고대 근동 전체에 종교적 목 욕 의례와 의식적 씻기가 알려져 있었지만 세례의 정확한 기원은 모호하 다.18 )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백성을 정화하실 종말 전에 회개해야 하는 것에 동의한다 ( Jub. 기 ) 은
1:22-25 ).
유대교의 중요한 요소였지만 ( m. Miqwa
참조 ),
‘미크바옷’ ( 예배
전 제의적인 씻
그리고 유대교에서의 개종
자의 세례에 대한 증거가 있지만, 유대교의 제의적 씻기의 주요한 사례는 사해 부근 쿰란의 언약 공동체에서 나온다. 이곳에서 날마다 하는 재계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정화를 상징했다. “[하나님은] 모든 속임의 혐오와 부정 한 영의 오염에서 ( 그를 정화하기 위해 ) 그에게 깨끗이 하는 물과 같은 진리의 영 을 뿌릴 것이다” ( 1QS 4:21-22 ). 요한의 세례가 이런 다양한 기존의 물 의식을 반영하는지 여부와, 또 얼 마나 반영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요한의 세례는 우리가 개종자 세례와 쿰란의 씻기에 대해 아는 것과 다르다. 요한 의 세례는 스스로 씻는 제의적인 ‘미크바옷’과 쿰란의 목욕과는 다르게, 회 개하는 자에게 두 번째 당사자인 요한이 시행했다. 게다가 개종자 세례와 쿰란의 씻기는 믿음 공동체에 입회하는 의식이었지만, 요한의 세례는 도덕
17 ) U. W. Mauser, Christ in the Wilderness, SBT (London: SCM Press, 1963), 46-52. 18 ) A. Oepke, “baptō”, TDNT 1.5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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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복음이 마가복음 1 : 4 인격으로 나타남(1:1-13)
적이고 영적인 갱신을 의미했다. 학자들은 요한이 쿰란 거주지 인근에서 세 례를 베풀었다고 추정하면서 보통 요한이 에세네파와 관계가 있거나 이들 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19 ) 하지만 우리가 가진 빈약한 증거 들에서 요한은 요단강을 따라 훨씬 북쪽인 갈릴리 근처에서 세례를 준 것 으로 보인다 ( 각주 23 참조 ). 또한 신약에는 요한이 쿰란과 관련 있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으며, 요한이 쿰란과 관련이 있었더라도 그의 사역에서 쿰란의 관 습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요한의 세례와 유대의 제의적 씻기의 전반적 차이들을 고려해 볼 때, 과연 요한의 세례가 쿰란 에세네파에서 어 떤 직접적 방식으로 나왔을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보다는 요한의 세례 가 하나님이 시내에서 이스라엘과 세우시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이 되라고 전체 백성을 부르신 ( 출
19:6; 23:22; 또한 벧전 2:9 )
언약을 상기시키고
되살리고 있다는 것이 더 개연성 있어 보인다. 이는 단지 아론에게서 내려 오는 제사장들의 이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온’ 이스라엘의 독 특하고 고유한 이상 ( NIV. “보물 같은 소유”, 히. ‘세굴라’ ) 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시 내 언약으로 들어가기 전에 옷을 빨고 자신들을 성결하게 해 ( 출 19:10 ), 하나 님과의 언약 관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런 씻음은 하나님과 의 언약 관계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도덕적, 영적 변화를 상징했다. ( 단지 종교 엘리트가 아니라 )
모든 유대인을 향한,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원래의 시내 언
약에서 주의 날을 예비하는 이런 필수적인 요소에 부합한다. 요한의 세례를 이해하는 열쇠는 그의 세례가 ‘선포된다’는 것이며, 이는 그의 세례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을 뜻한다.20 ) 이 세례는 회개를 통해 실현되는 신적 은혜며 기회다. “회개” ( 헬.
‘메타노이아’ ) 는
“마음을 바꾸는 것”이나 “이해를 달리하는 것”을 뜻하는 합성어로서 감정 적 느낌보다는 합리적 결정과 의지적 행동을 함축한다. 그러나 요한이 회개 라 부르는 것의 진의를 알아보려면 “회개”의 헬라어 어원 연구가 구약에서 의, 특히 선지서에서의 회개와 회심 개념에 의해 보강될 필요가 있다.21 ) 회 19 ) 쿰란이 요한에게 끼친 영향에 대한 찬반양론이 O. Betz, “Was John the Baptist an Essene?” BRev 6/6 (1990): 18-25에 논의되어 있다. 베츠(Betz)는 요한이 쿰란에서 자라면서 쿰란의 영 향을 많이 받았지만 나중에 유대의 더 큰 공동체에게 설교하기 위해 쿰란을 떠났다고 생각한다. 쿰란과 요한의 연관은 추정에 머무르는데, 어쨌든 요한과 에세네파 간의 차이점이 이들의 유사 점보다 훨씬 많으며 두드러진다. 20 ) 신약에서 동사 ‘케뤼세인’(“선포하다”)의 목적어가 하나님의 행위라 주장하는 Lohmeyer, Das
Evangelium des Markus, 13-15; Marcus, The Way of the Lord, 18-31 참조. 21 ) ‘메타노이아’와 ‘메타노에오’는 70인역에서는 드물게 나타나는데, 대개 “후회함”이나 “깊이 뉘우 침”을 뜻하는 ‘나함’의 번역으로서 나타난다. 요한이 회개를 전파하는 상황은 특히 마 3:7-10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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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 예수의 예비자(1:2-8) 마가복음 1 : 5
개는 한 단어로 줄어든 세례자의 메시지다. 회개는 4절에서의 마가의 간단 한 보고에 의하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마태복음 3장 8절과 누가복음 3장 8절에 의하면 표시나 “열매”, 즉 아마 물의 세례를, 더 중요하게는 도덕적 변화를 수반한다. 무엇보다도 요한이 회개를 외친 것은 선지자들의 외침보 다 긴급하다. 즉 회개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비하는 데 필요한 유일 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회개를 외친 것에는 어떤 구분이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은 사람의 인생 전체에 대한 요구며, 단지 악한 죄인 ( 눅 3:12-13 ) 이나 이 방인 ( 눅 3:14 ) 에게만이 아닌 의로운 유대인에게까지 ( 마 3:7-10 ) 향한 요구다.22 ) 요한의 세례에 대한 신약 밖의 유일한 언급으로서, 요세푸스는 요한이 세례 를 외치는 것에 들어 있는 개심의 의도를 강조한다. “[요한은] 유대인에게 의로운 삶을 살고 이웃에게 정의를 실천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할 것을, 그 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세례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 ( Ant.
18.116-18 ).
이렇게
도덕적 갱신의 측면이 있는 세례는, 마가의 말대로 “죄 사함”을 이룬다. 5절 마가는 요한이 요단강을 따라 정확히 어디서 세례를 베풀었는지를 말하지 않지만, 몇 가지 요인이 갈릴리 바다의 남쪽까지 이른다고 간접적으 로 제시한다.23 ) 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요한에게] 나아 가”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이라고 명시한 이런 언급은 요한의 사역이 예루 살렘에서 성전의 지배 엘리트에게뿐 아니라 온 유대 지방에서도 주목을 이 끌어 냈음을
( 그리고 아마도 사람들을 개종시켰음을 )
나타낸다. 20-30년 후인 AD
55년경, 사도 바울은 멀리 에베소에서 요한의 제자들을 만났다 ( 행 19:1-7 ). 그 리고 AD 1세기가 끝날 무렵의 문헌에서 요세푸스는 예수보다 요한에게 주 의를 기울인다 ( Ant.
18.116-19 ).
다시 말해 요한의 흡인력과 영향은 역사에 남을
눅 3:7-9에 의해 보존된 것처럼, 마소라 본문(MT)에서 천 번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슈브’(“돌 이키다”)를 더욱 연상시키는 패턴을 드러낸다. 22 ) H. Merklein, “metanoia,” EDNT 2.415–19; J. Behm, “metanoeō”, TDNT 4.1,000–1,001. 23 ) 요한의 세례가 행해진 정확한 장소는 확실하지 않다. 마가(1:5)와 마태(3:6)는 단순히 요한이 요 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말한다. 눅 3:3은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라고 기록하는 데, 이는 요한이 강의 하나 이상의 장소에서, 그리고 아마 요단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들에서 세례를 주었음을 암시한다. 누가의 기술을 단서로 취하여, 픽스너(B. Pixner)는 엘리야와 연관 된 여러 장소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제안한다(With Jesus Through Galilee, 19-20). 요한복음은 요한이 세례를 베푼 장소에 대해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요 3:23)고 말한다. 살렘과 애논 모두 요단강 서쪽에 인접하며, 갈릴리 바다에서는 약 40km 남쪽 에 있다. 이는 요한이 세례를 준 곳이 갈릴리에서 가까운 데가볼리임을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한 완전한 논의에 대해서는 R. Riesner, “Bethany Beyond the Jordan (John 1:28): Topography, Theology and History in the Fourth Gospel,” TynBul 38 (1987): 29–63 참조. (단 리즈너[R. Risner]가 주장하는 갈릴리 바다 남동쪽의 바타네이아[Batanaea]는 아마 너무 추측에 근거했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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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H E PI L L A R NEW T E S TA M E N T COM M E N TA RY
THE PILLAR NE W TESTA MENT COMMENTARY
마가복음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하는 『필라 신약 성경 주석』 ( PNTC ) 은
PN TC
무엇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본문을 명확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주석 시리즈의 저자들 경신학에 대한 민감한 안목으로 주해와 해석의 조화, 학문과 목회의 조화를 꿈꾼다. 필라 신약 성경 주석의 저자들은 헬라어 신약 성경을 기초로 성경 본문을 해설한다. 이들은 글 로 된 성경 말씀이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본문과 깊이 씨름하며, 독자로 하 여금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를 삶에 적용하도록 돕는다. 이 시리즈가 취하는 접근 방식은,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신 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 도인은 반드시 경외함, 두려움, 거룩한 기쁨, 순종함으로 응답해야 하는데, 이 주석 시리즈의 저자들 역시 같은 모습으로 응답하며 성경 말씀을 연구한다. 이렇게 집필된 『필라 신약 성경 주석』 ( PNTC ) 은 목사, 교사, 신학생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독자 모두에게 계속 환영받을 것이다.
마가복음
은 현재 가장 논쟁되는 주제를 다루지만, 지나치게 학술적인 내용은 피하면서, 성경 말씀과 성
지은이
제임스 에드워즈( James R. Edwards )
워싱턴 스포캔에 있는 휘트워스 대학교에서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히브리 복음서와 공관복음 서 전통의 발전』 (The Hebrew Gospel and the Development of the Synoptic Tradition), 『예수가 유일한 구주인가?』 (Is Jesus the Only Savior?)
옮긴이
등이 있다.
제임스 에드워즈
전용우
지음
서울대학교(B. E., M. E.)를 졸업하고 대학교 강사, 기업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개혁신앙과 신학에 매료되어 대신총 회신학교(M. Div.)에서 수학하고 합신대학원대학교(Th. M.)를 졸업했다. 현재 부흥과개혁사에서 번역 위원으로 섬 기고 있다.
ISBN 978 - 89 - 6092 - 541 - 0 ISBN 978 - 89 - 6092 - 448 - 2 (세트) www.rnrbook.com
THE PILLAR NE W TESTA MENT COMMENTARY
값 34,000원
전용우 옮김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제임스 에드워즈 지음 | 전용우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