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NSBT 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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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BT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할례 성경신학 칼 디닉 지음 | 김귀탁 옮김 | 356쪽 | 20,000원

죽음과 내세의 중요한 측면들이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성경에서 할례라는 주제가 중요함에도 지금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폴 윌리엄슨은 우선 현대 문화와 성경 세계의 관점을 조사

할례의 성경신학을 상세히 다룬 작품이 거의 없 었다. 이 책은 그 공백을 든든히 메워 준다. 칼

한 다음,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복음주의자들이 점점 양극화되

디닉은 신구약 성경의 할례 이해에서 의와 믿음

어 가는 문제들에 집중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논란이 되는 주제들, 곧 죽음

이 핵심임을 보여 준다. 의와 믿음은 흠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전개되면서 하나로 결합하는데, 그

직후에 일어나는 일, 육체적 부활, 최종적이고 보편적인 심판, 마지막 날에 하

의 희생을 통해 약속된 의가 마침내 도래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

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 운명, 종말론적 하늘에 대한 성경적

으며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그 의를 누리게 된다.

개념 등을 탐구한다. 윌리엄슨은 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레위기 성경신학 L. 마이클 모랄레스 지음 | 신윤수 옮김 | 471쪽 | 26,000원

이 책은 레위기의 내러티브 문맥과 문학적 구

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NSBT

NSBT

N e w S t u d ie s in B ibl i c a l T he olo g y

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지은이

폴 윌리엄슨 (Paul R. Williamson)

영국 북아일랜드의 퀸스 대학교 벨파스트에서 박사학위 를 받았고, 호주 시드니의 무어 대학에서 구약과 히브리 어와 아람어를 가르치고 있다. IVP의 『성경신학 사전』과

가장 중요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구절들을 통해 작업한다. 윌리엄슨은

『구약성경 사전』에 글을 기고했으며, NSBT 시리즈의 『맹

궁극적 질문에 대한 성경의 관점

죽음과 내세에 대한 전통적인 복음주의 이해에 상당한 주석학적 지지가 있음 을 보여 주며, 인기가 높아지는 다른 이해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세로 봉인함』(Sealed with an Oath), 『죽음과 내세 성경신 학』(Death and the Afterlife)을 저술했다.

조, 신학 등을 탐구한다. 저자는 레위기의 드라 마적인 이동을 따라가면서 성막 제의와 대속죄 일을 검토하고, 시내산의 성막에서부터 시온산의 성전까지, 나아 가 지상의 시온산에서부터 신약 성경에 나오는 천상의 시온산까지 그 발전을 추적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떻게 우주 창조의 원래 목표였는지, 또한 구속과 새 창조의 목표가 되었는지 보여 준다.

근동 지역과 그리스-로마 세계 배경을 주의 깊게 이해하고자 신구약 성경

Death and the Afterlife

의 강조점을 개관하고, 가장 중요한 관련 본문들을 상세히 고찰한다. 본서

Biblical Perspectives on Ultimate Questions

“영원을 인정하는 관점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은 성경이 생명, 죽음, 심판, 부활, 지옥에 대해 실제로 말하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폴 윌리엄슨이 택한 길이다. 윌리엄슨은 성경 문서들이 기록될 당시 고대

옮긴이

총신대학교 신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아세아연합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 학했다. 기독교 고전과 양서의 번역을 통해 한국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많은 책을 번역했다. 대표

는 죽음과 내세 주제를 시리즈로 설교하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D. A. 카슨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스코트 스웨인 지음 | 전광규 옮김 | 276쪽 | 14,000원

요한복음은 교부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지식과 교리와 예배에 중

폴 윌리엄슨 지음 김귀탁 옮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적인 역서로는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신약성경신학』, 『구약신학』, 『신현』(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폴 윌리엄슨 지음 김귀탁 옮김

요한 원천 역할을 해 왔다. 이 책은 성경신학자 와 조직신학자의 공동 저작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 에 대해 요한복음이 말하는 바를 개괄하고 종합하면서 예수 그리

시리즈 편집 D. A. 카슨

스도, 성령, 선교 등 제4복음서에 나타난 중요한 삼위일체 주제들 을 자세하게 다룬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복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ISBN 978-89-6092-611-0 ISBN 978-89-6092-430-7 (세트)

www.rnrbook.com 값 16,000원

김귀탁


| 목차 |

| 시리즈 서문 | 저자 서문

6 8

| 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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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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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후, ‌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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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관점에서 본 죽음과 내세 | 고대인의 관점에서 본 죽음과 내세 | 고대 근동 지역의 죽음과 내세 | 그리스-로마 세계의 죽음과 내세 |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죽음과 내세 | 현대 복음주의 진영의 논쟁 속에 나타난 핵심 문제들 | 결론

2장 죽음: 궁극적 분리?

55

서론 | “인간은 무엇인가?” 성경적 인간론과 영혼 문제 | 구약 성경에 나타 난 죽은 자의 상태와 사후 실존 문제 | 사후 실존 및 사자의 영역에 대한 구 약 성경의 묘사 | 신구약 중간기 유대교 문헌에 나타난 죽은 자의 상태와 “중간 상태” 문제 | 신약 성경에 나타난 죽은 자의 상태와 중간 상태 문제 | 결론

3장 부활: 궁극적 수선?

101

서론 | 고대 세계에서 “부활” 주제는 어떻게 사용되고 이해되었는가 | 부활 교리에 대한 구약 성경의 관점 | 부활 교리에 대한 신약 성경의 관점 |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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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4장 심판: 궁극적 판결?

147

서론 | 구약 성경에 나타난 종말론적 심판과 신적 보응 | 신구약 중간기 문 헌에 나타난 종말론적 심판과 신적 보응 | 신약 성경에 나타난 종말론적 심 판과 신적 보응 | 역설에 대한 해결책? | 결론 | 부록: 로마서 2장 12-16절에 나타난 율법을 지키는 이방인의 영적 지위

5장 지옥: 궁극적 대학살?

195

서론 | 구약 성경에 나타난 악인의 운명 |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 나타난 악 인의 운명 | 멸망 전망을 언급하는 책들 | 사후 고난/고통을 언급하는 책들 | 기독교적 요소가 스며든 후기의 책들 | 신약 성경에 나타난 악인의 운명 | 결론

6장 하늘: 궁극적 목적지?

243

서론 |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늘” 개념과 미래의 소망 | 신구약 중간기 문헌 에 나타난 “하늘”과 “낙원” 개념 | 신약 성경에 나타난 “하늘” 또는 미래의 기업 개념 | 새 우주 | 새 예루살렘 | 새 에덴 | 결론

| 결론

286

| 참고문헌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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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서문

“성경신학의 새 연구”( NSBT ) 는 성경신학 분과의 핵심 쟁점을 다루 는 단행본으로 이루어진 시리즈다. 이 시리즈에 들어 있는 책은 다음 세 영역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에 초점을 맞춘다. (1) 다른 분과 ( 예를 들 어 역사신학, 석의, 조직신학, 역사 비평, 내러티브 신학 ) 와의

관계를 포함하여 성경신

학이 갖는 성격과 지위, (2) 특정한 성경 저자 또는 성경 문헌에 대 한 사유 구조의 표현과 설명, (3) 성경 전체 또는 일부를 관통하는 성경적 주제에 대한 묘사. 무엇보다 이 단행본들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주려는 창의적 시도다. 이 시리즈는 교육하고 덕을 세우는 동시에 현재의 문헌과 상호 소통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 향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지성과 감성 이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합쳐 놓으 신 것을 나누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주해는 최고의 학술 문헌과 상호 소통하지만, 본문은 음역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하고 전 문용어의 사용은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이 시리즈의 책들은 고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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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복음주의의 틀 안에서 집필되고 있지만, 관련 문헌을 철저하게 조사 하려는 시도를 언제나 보여 준다. 그리스도인은 한때 잘 죽는 법을 알고 있던 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오늘날 서양 사회에서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주변 문화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죽음과 죽음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말하기가 힘들어 졌다. 우리가 지켜 온 신조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고, 그리스도 를 믿고 장차 임할 심판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기독교의 목소리에 가담하여 “그럴지라도 오소서, 주 예수 여!”라고 외치지 않고, 때때로 실천적 무신론에 굴복하고 만다. 영원 을 인정하는 관점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은 성경이 생명, 죽음, 심판, 부활, 지옥에 대해 실제로 말하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폴 윌리엄슨이 택한 길이다. 윌리엄슨은 성경 문서들이 기록 될 당시 고대 근동 지역과 그리스-로마 세계 배경을 주의 깊게 이해 하고자 신구약 성경의 강조점을 개관하고, 가장 중요한 관련 본문들 을 상세히 고찰한다. 본서는 죽음과 내세 주제를 시리즈로 설교하도 록 자극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더 중요하게도, 본서는 독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복된 약속과 위로를 소중히 여기며 영원을 염두 에 두고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잘 살다 잘 죽도록 자 극할 것이다. D. A. 카슨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시리즈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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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본서의 내용은 원래 2016년 무어 대학 연례 강좌로 전해졌다. 이 강좌의 강사로 초대해 주고 정규 강의 책임과 연구 과제에서 벗어나 특정 주제에 대해 연구할 기회를 준 것에 대해 학장 마크 톰슨 ( Mark Thompson )

박사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6개월이라는 넉넉한 연구 휴

가를 갖게 해 준 톰슨 학장과 이사회에 특별히 감사하다. 또한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대신 책임을 감당해 준 동료 교수들과 필요할 때 마다 자료를 적절히 제공해 준 무어 대학 도서관 직원들에게도 감사 하고 싶다. 강의에 직접 참석하거나 온라인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많 은 질문을 통해 더 깊이 사고하도록 도전을 주었고, 그때 받은 피드 백으로 이후에 교정과 출판을 서둘러야겠다는 자극을 받았다. 본서에 남아 있는 결함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하지만 미리 초안 을 읽고 비판해 준 사람들에게 특별히 감사하고 싶다. 필립 컨 ( Philip Kern ),

피터 오브라이언 ( Peter

O’Brien ),

앤드루 셰드 ( Andrew

Shead ),

배리

웹 ( Barry Webb ) 의 사려 깊은 지적이 없었다면 여러 번에 걸쳐 내용을 고치고 발전시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필립은 구두 발표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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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해 작성된 글을 간결한 산문으로 다시 작업할 때 헤아릴 수 없는 큰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본서를 NSBT 시리즈에 포함시켜 주고, 출 판 원고를 준비하기까지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은 시리즈 편집자 D. A. 카슨 교수에게 특히 고맙다. 또한 IVP의 신학 서적 기획편집장 인 필립 듀스 ( Philip Duce ) 도 원고 제출에서 출판까지 많은 단계를 거칠 때 각별한 격려와 도움을 주었고, 엘도 바르쿠이젠 ( Eldo

Barkhuizen ) 은

능숙하게 원고를 교정해 주었다. 물론 가장 큰 빚은 하나님께 졌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 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셨다 ( 벧전 1:3-4 ). 하나님이 은혜를 지속적으로 베풀어 주신 것 과 친구와 가족들의 지원을 넉넉히 준비해 주신 것이 정말로 감사 하다. 두 아들 매튜와 앤드루는 아버지의 연구와 저술 작업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종종 신학 연구에 대한 긴장감을 풀고 기분 전환을 하도 록 함께 운동하는 시간을 가져 주었다. 아내 카렌은 끊임없이 나를 독려했고, 그렇지 않았더라면 마감에 쫓겨 심하게 압박감을 받았을 것이다. 사랑과 애정을 담아 아내에게 이 책을 헌정한다.

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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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을 제외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비유를 만들어 낸 최초의 인물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아니 었다.1) 하지만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 현대 속담에 끼친 공로는 인정 받을 만하다. 확실히 이 속담의 타당성에 이의를 제기할 자는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은 세금 징수원을 잠시 피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잡 히고 만다. 이것이 죽음의 사자의 경우에는 더 확실한 사실이다. 어 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죽음을 오래 기다릴 수 있으나 우리 가운 데 아무에게도 죽음은 결국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통계적으로 한 명 가운데 한 명이 죽는다. 현재 매년 약 5천 6백만 명이 죽는다. 시간당 6천 명 이상, 분당 1백 명 이상, 초당 거의 두 명이 죽는다. 주

1) 벤저민 프랭클린은 장-밥티스트 르루아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새 헌법은

이제 제정되었고 영속성을 보장하는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죽음과 세금을 제 외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Smyth 1907: 69).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는 이보다 50년 전에 비슷한 말을 했다. “죽음 및 세금과 같이 확실한 일은 굳게 믿을 수 있다”(1726: 269). 참조, “죽음과 세금 외에 어느 것도 확신을 가질 수 없다”(Bullock 1716). “죽음과 세금, 이 두 가지는 확실하다”(Ward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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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님이 지체하시는 동안 우리 역시 이 냉정한 통계의 일부가 될 것 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본서의 주제, 곧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너 머에 있는 것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본서는 죽음의 본질 과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죽음이 갖는 중요성을 확실히 다루기는 하 지만 일차 초점은 내세에 맞추어져 있다. 곧 알렉 모티어 ( 2008: 1 ) 가 완곡하게 “삶 2: 후편”으로 지칭한 것에 주로 초점이 있다. 특히 성 경이 내세에 대해 말하는 내용을 검토할 작정이다. 그러나 성경 밖 자료에 나타난 관점들도 주목하고, 이 관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어 떻게 알려 주는지, 또 성경의 가르침과 어떻게 비교되거나 대조되는 지 고찰할 생각이다. 그러나 먼저 이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아주 많 은 문헌에 또 하나의 책을 더하게 된 근본 이유를 설명하겠다. 젊어서 갓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처음 읽은 책 가운데 하나가 윌 리엄 헨드릭슨 ( William

Hendriksen ) 의

1959, 새순출판사 역간 ) 이었다.

『내세론』 ( The

Bible on the Life Hereafter,

나는 이 책을 읽고 신학 지식을 많이 얻

었다. 특히 개인 종말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개 인 종말론”의 주요 주제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나 논란이 많은 일부 주제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오늘날 논쟁 상대자의 수만 큼 다양하다. 헨드릭슨은 그 책에서 대체로 “여호와의 증인”2)과 같 은 이단이나 컬트 집단이 주장한 관념을 반대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제시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통적인 “정통 사상”을 반대하는 자가 단순히 컬트 집단이나 비-복음주의자가 아니다. 오늘날은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도 종종 반론이 제기된다. 그런데 대부분 이 학자들은 과 거에 다양한 색깔과 전통을 가진 복음주의자들이 서로 동의했던 문

2) 명백히 여호와의 증인의 주관심사는 세대주의자의 관점에 있었다.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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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전통적인 정통 사상에 도전하는 자는 성경의 영감에 대해, 또는 믿음과 실천 문제에 있어 성경이 갖는 최 고의 권위에 대해 불편한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이 성경에 대한 정통적 견해를 인정하고,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성 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자기들의 개인 종말론 견해가 확고하게 성경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확신하고, 복음주의자가 전통적으로 자기들의 견해를 오해했다고 본다. 따라서 이어지는 장들에서 현대 복음주의자가 죽음과 내세에 대해 설명할 때 대두되는 몇 가지 논쟁을 탐구할 작정이다. 1장은 우리 현 대 문화의 관점과 과거 성경 세계의 관점을 제시하고, 이어서 성경의 관점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강조하고 최근에 복음주의자들 간에 더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이후 장들에 서 다루게 될 논쟁 문제 각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검토할 작정 이다. 2장은 우리가 죽은 직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문제 를 다룰 것이다. 이때 중간 상태 관념과 점차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몸과 분리된 영혼 관념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겠다. 3장은 육체의 부 활 문제를 검토할 것이다. 이때 이 중대한 사건의 시기와 본질에 특 별히 초점을 맞추겠다. 4장은 최후의 보편적 심판 문제를 탐구할 작 정이다. 이때 “이신칭의”( 믿음으로 얻는 의 ) 와 “행위에 따른 심판” 사이의 관계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겠다. 5장은 버림받은 자 곧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인정의 받지 못하는 자의 종말론적 운명을 탐구할 것이다. 이때 성경이 종결 처벌 견해 ( 조건적 불멸 사상 또는 절멸주의 ) 가 아니라 전통 적 지옥 교리 ( 영원한 의식적 고통 ) 를 지지하는 사실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 겠다. 긍정적인 결론으로 끝맺는 6장은 종말론적 “하늘”에 대한 성 경의 개념을 탐구할 것이다. 이때 이 낙원을 어디서 경험하고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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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경험할 것인지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겠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일차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다양한 견해의 지 지자가 내세울 수 있는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말하 는가?”라는 선제 질문이다. 확실히 우리는 누구나 나름대로 신학적 전제를 갖고 성경에 다가간다. 따라서 자신의 방법이 객관적으로 성 경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단순히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태 도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내용을 왜곡하거나 비틀어 놓는 신학적 전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나 다른 사람이 우리의 주 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성경 본문을 다룰 때는 본문을 주의 깊게 검토하되, 이 본문이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관념에 어떻게 들 어맞는지 알아보려고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관념과 신념이 이 본문 에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알아보려고 해야 한다. 관련 성경 본문 외에도 신구약 중간기의 적합한 문헌 곧 제이 성전 시대 유대교의 종말론적 기대를 표현하는 신구약 중간기 문헌의 본 문도 고찰해야 한다. 이런 신구약 중간기 문헌은 성경과 같이 영감을 받거나 권위가 있거나 하지는 않지만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의 죽 음과 내세 견해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고, 따라서 최소한 어느 정도는 신약 성경의 개인 종말론을 알려 주는 첫 세기 사상에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유다는 분명 히 에녹1서 본문을 인용하는데 ( 유

1:14-15 ),

이것은 유대교의 비-정경

문헌이 신약 성경 저자들의 종말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음을 증 명한다. 그리고 아래에서 살펴볼 것처럼, 이것이 유일한 사례가 아 니다. 물론 이처럼 문학적으로 비-정경 문헌에 긴밀하게 의존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가 있다는 사실은 이 런 자료가 신약 성경 종말론에 대해 갖고 있는 중요성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영감 받지 않은 이 유대교 문헌을 구약 성경보다 우선시하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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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잘못이지만 이런 문헌이 신약 종말론 해석에 갖고 있는 중 요성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도 똑같이 잘못이다. 따라서 이런 신구약 중간기 문헌이 본서에서 다루는 문제에 어떤 빛 을 던져 주는지 파악하기 위해 이런 문헌의 본문에 담긴 의미와 중 요성도 살펴보겠다. 신학적 영향뿐 아니라 목회에 미치는 중대한 파급 효과까지 고려 하면,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다 진지하게 사고하고 성경에 따라 주의 깊게 숙고할 것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설명이 성경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자극하고, ( 단순히 전통적 교의가 아니라 ) 성경의 가르침을 굳 게 고수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를 위하여”( 유 1:3 ) 힘써 싸우도록 독자를 이끌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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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1장

사후,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우리는 죽음의 본질과 죽음 너머에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까? 죽음은 단순히 삶의 중단이자 우리 실존의 끝인가? 아니면 어떤 지속적 실존이나 내세가 있는가? 물론 이 문제는 현대 세계에서 견 해가 다양하게 갈라져 있다.1)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 죽음과 내세 여론 조사에 따르면, 죽음과 내세 문제에 대해 현대인이 견지하는 주요 입장은 세 가지가 있다.

불가지론자 약 26%의 현대인이 죽음과 내세 문제에 대해 불가지론 입장을 취

1) 2011년도 세계 여론조사(Rey 2011을 보라)를 보면, 세계 인구 가운데 51%는 내세가 있다

고 믿지만 23%는 죽으면 단순히 “존재를 멈출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약 4분의 1(26%) 은 사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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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들은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확실히 모른다. 사실은 이 문제는 죽을 때까지 진실로 알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이론적 으로 이런 불가지론자는 “임사 체험”을 통해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 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다른 생각도 인간의 잠재의식의 한 현상이나 뇌의 잔류 전기 활동으로 간주함으로써 완전히 무시되고 만다.2) 어 쨌든 진정한 불가지론자는 일반적으로 모른다고 주장한다. 한 블로 거가 “나의 ‘불가지론’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 른다는 것이라고 난 생각해”라고 말하자 다른 블로거가 재빨리 “오, 난 그것도 모르겠어”라고 대답했다.3)

회의주의자 다른 현대인은 죽음은 단순히 우리의 모든 생명 활동의 영원한 중 단, 곧 우리가 삶으로 부르는 생물학적 과정의 불가피한 종결이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우리의 실존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본다. 우리는 죽고, 그래서 우리는 죽어 있다. 이때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애틋 한 추억과 썩어 가는 시체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본질상 죽음 으로 우리는 존재를 멈추었다. 스티븐 호킹 ( Stephen Hawking ) 이 말한 유 명한 말과 같다. “나는 우리의 뇌가 고장 나면 멈추는 컴퓨터와 같다 고 본다. 고장 난 컴퓨터에게 천국이나 내세란 없다. 그것은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다”( 샘플 2011 ). 또는 다르게 말하면 다 음과 같다. 나는 죽을 때 곧 내가 죽고 없을 때 나의 의식적 삶은 끝나고,

2) 신경생물학적 비판과 반증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Clarke 2015: 168-175를 보라. 3) <https://www.reddit.com/r/agnostic/comments/vgln8/what_are_some_of_you_

agnostics’_theories_on_the_“afterlife”>를 보라. 2017년 1월 27일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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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관계도 끝나며, 나는 단순히 없어질 것 이라고 항상 느꼈다……나의 내세는 나를 알던 자, 나를 사랑했 던 자, 나를 가슴에 품고 있던 자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 는, 곧 나 자신은 존재하기를 멈춘다. (설리번 2010)

“신자” 그러나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죽음은 그토록 냉엄한 일이 거의 아 니라고 본다. 죽음은 우리 실존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즉시 또는 최 소한 궁극적으로 생존을 이어가는 경험이다. 휴머니스트와 합리론자 의 격렬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현대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죽 음 이후에 지속되는 어떤 실존이 있다고 아직도 믿는다. 물론 우리가 죽음 이후의 실존을 이해하는 방식은 무척 다양하다. 어떤 현대인은 내세를 환생이나 영혼의 윤회로 생각한다. 즉 결국에는 어떤 해방이 나 깨달음이나 초월에 이르는 일련의 재탄생으로 생각한다. 다른 현 대인은 죽음을 사별한 사랑하는 자가 계속 산 자와 교통하거나 심지 어는 죽은 자가 자기 자신을 나타낼 수도 있는 초자연적이거나 형이 상학적인 영역으로 이동하는 사건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또 다른 현 대인은 죽음을 임시 거처 곧 어떤 중간 상태로 이동하는 사건으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죽음을 통해 죽은 자가 미래의 부활과 최후의 심 판이 있을 때까지 잠정적으로 기쁨이나 고통을 겪는 곳으로 옮겨 진다고 생각한다.4) 물론 사랑하는 자와 사별했을 때 죽은 자가 별이 나 천사가 된다고 상상하는 현대인도 있다. 얼마 전에 반투명 차창에 붙은 한 스티커에 눈길이 갔다. 흔히 보는 핵가족 스티커가 아니

4) 이것은 이슬람교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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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두 부모와 세 자녀와 애완견이 그려진 스티커였다. 그런데 스 티커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메리 존스, 1955-2015: 하늘 은 천사 하나를 얻었다.”5) 어떤 현대인은 할리우드를 통해 대중화된

이 개념을 어쩌면 진지하게 믿는 것 같다. 곧 죽은 자가 실제로 천사 가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현대인은 내세에 대해 자기만의 쾌락주의적인 개념을 갖고 있었다. 곧 그들은 하늘[천국]을 일종의 천상의 휴양지로 간주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이 크리켓이든 축구든 또는 어떤 오락이든 간에, 자기의 욕망을 만족 시키고, 개인적인 이득을 마음껏 추구한다. 그리고 엄격한 천국 관념 을 가진 자는 지옥을 두려운 곳이 아니라 회사에 출근하러 가는 곳 정도로 본다. 분명히 말해 이런 관념을 가진 모든 현대인이 내세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어떤 현대인 은 내세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런 대중적 생각으로 헛된 위 로를 얻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에 대해 말한다면, 현대 세계에는 죽 음과 내세 문제에 대해 무척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심지어는 내세 를 믿는 현대인 사이에도 견해가 서로 다르다. 어쩌면 이제 살펴볼 고대 세계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될 것이다.

고대인의 관점에서 본 죽음과 내세 여기서는 이스라엘/유대 문화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다른 문화들 로 고찰을 제한하고, 이어서 죽음과 내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 펴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먼저 고대 근동 지역의 죽음과 내세에 대한

5) 이름과 연대는 바뀌었으나 나머지는 정확히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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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를 다루고, 이어서 그리스-로마 세계에 나타난 태도를 다루겠다.

고대 근동 지역의 죽음과 내세 사후 생존을 인정하는 관념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흔했다. 존 월 튼 ( 2006: 324 ) 이 지적하는 것처럼,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에게 문제는 “사후의 삶이 있는가?”가 아니었다. 사후의 삶을 의심하는 자는 실제 로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문제는 “내세의 상태는 어떠하고, 내세에 서 더 바람직한 상태를 어떻게 높이거나 이룰 수 있는가?”에 있었다. 대체로 고대 근동 지역의 내세 개념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세는 괴물과 마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런 비관적 상황을 극복하고 더 나은 내세의 삶을 얻으려면 온갖 어려 움을 극복해야 했다. 아울러 산 자의 도움도 크게 받아야 했다.

이집트 잘 알려진 것처럼, 고대 이집트에서 죽음과 내세는 무척 중요한 문 제였다. 사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과 내세 문제에 거의 사로잡혀 있 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이 죽음 자체에 병적으로 집착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행복한 내세 를 원했기 때문이다. 즉 고대 이집트인은 현세에서 소중히 여겼던 것 을 내세에서도 그대로 누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죽음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 관심이 다른 어느 고대 문명 사람들보다 강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의 이런 신념은 세월이 흐르자 발전하고 바뀌었다. 확 실히 고대 이집트인의 죽음과 내세 관념은 어느 시기에도 일률적으 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고대 이집트인의 종교도 고대 근동 지역의 다른 종교들과 같이 “체계적 신학”이 없었다. 이것 때문에 고대 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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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인의 “종말론”의 핵심 관념을 요약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간단히 요약해 보자. 고대 이집트인의 인간론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곧 사람은 다양한 요소로 결합되어 있고,6) 이 모든 요소는 행복한 내세를 누리기 위해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하나라도 손상되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이 요소들 가운데 두 가지 곧 생명력 ( ‘카’ ) 과 인격 ( ‘바’ ) 이 지하 세계 ( ‘두아트’ ) 로 내려간다고 생각되었다. ‘카’ 곧 생명력은 죽은 뒤에 도 존속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현재의 삶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 을 다 먹고 마시고 맡을 수 있었다. ‘카’와 마찬가지로 ‘바’ 곧 인격도 주기적으로 몸으로 돌아가고, 실제로 몸 없이는 존속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시신은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야 했다. 그래서 미라 관습 이 생겼다.7) 나아가 유해는 떠도는 제2의 자아 ( ‘바’ ) 가 알아볼 수 있어 야 했다. 그래서 무덤에 신원을 표시한 비문을 세워 놓았고, 죽은 자 의 얼굴도 종종 미라의 머리 덮개에 그려 넣었다. 그러나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고 신원 확인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 인 이런 단계뿐 아니라 실제 물건이든 단순히 이 물건의 그림이든 내세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물품을 무덤 속에 넣어 두 었다.8)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다양한 주문 ( 呪文 ) 이 죽은 자 가 지하세계를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여행에 필수 요소로 간주되 었다는 점이다. 죽은 자가 가는 지하세계는 사악한 존재와 무서운 상 황들로 에워싸인 위험 지역으로 생각되었다. 기본적으로 지하세계를 6) 자연적[육의] 몸, 신령한 몸, 심령, 원령, 심신, 유령, 영혼, 명망. 야마우치(1998: 28)가 인용

한 것처럼 버지(1960: 81)도 그렇다. 7) 몸의 썩는 부위(간장, 위장, 허파, 내장과 같은)는 적출되어 몸과 함께 (단지에) 매장되었다.

(머리통을 채우는 “솜” 정도로 생각된) 뇌는 콧구멍을 통해 적출되어 종종 버려졌다. 심장은 사람의 생명력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로 원래 위치에 그대로 놔두거나 목 근처에 두었다. 8) 죽은 자가 공감적이고 마법적인 관계를 통해 이런 물품에서 유익을 얻는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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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게 통과하도록 보장하는 주문이 피라미드 벽에 새겨졌다 ( BC 2350년경 ).9)

이 주문은 나중에 “장례 문서”( Coffin

Texts ) 로

발전했다. 곧

관과 무덤 벽에 비문을 새기는 문화가 발전했다. 고대 이집트인은 파 피루스 판에도 주문을 새겼고, 이것은 결국 현재 『사자의 서』라는 제 목이 붙여져 있는 약 200“장”에 달하는 유명한 전집으로 만들어 졌다.10) 영화 “미라”나 이 영화의 할리우드 속편 영화들을 보았다면 그것을 잘 알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의 관점에 따르면, 사람이 지하세계에서 맞이하는 최고의 시련은 “죽은 자에게 임하는 심판”이었다. 죽은 자는 지하세 계에서 심판받기 위해 자칼 머리를 가진 아누비스의 호송을 받아 오 시리스의 법정으로 들어갔다.11) 개인적인 무죄 주장 곧 죽은 자가 각 종 죄를 저지르거나 금기를 어기지 않았음을 변론하는 주장 ( 소위 “죄를 부정하는 자백” ) 이

있은 후에, 죽은 자의 마음은 저울 위에 놓이고 거기서

“진실의 깃털”과 비교 측량되었다.12) 죽은 자의 마음이 진실의 깃털 보다 더 무거우면, 그 마음은 죽은 자의 몸 전체와 함께 저울 옆에 앉 아 있던 굶주린 잡종 괴물에게 잡아먹히거나13)

( 다른 문서에 따르면 )

정죄

9) 이것이 왕들만 내세를 누렸다는 원래의 믿음을 반영하는지, 또는 단순히 이런 주문이 이때

부터 존속하게 된 것을 반영하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후자라면 “죽음의 민주 화(democratization)”가 이집트 고왕국이 멸망한 이후에 일어났다는 주장은 약간 빈약한 전제 위에 세워지게 된다. 참조, Hays 2015: 74-76. 10) 고대 이집트인 자신은 이런 주문(어떤 두 책도 똑같지 않고, 관련 주문을 다양하게 담고 있 으며, 그 가운데 많은 주문이 공통 요소를 가졌다)을 “낮에 출발함”의 책(the Book of ‘Going Forth by Day’)으로 불렀다. 이런 주문은 죽은 자에게 죽음을 극복할 마술적 힘 을 주어, 이를테면 갈대의 밭에서 신에게 안전한 여정이 이루어지게 한다고 믿어졌다. 11) BC 3000년경에 아누비스는 죽은 자의 최고신이자 죽은 자의 내세의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 자였다. 그러나 이 역할은 결국 오시리스의 차지가 되었고 아누비스에게는 비중이 작은 역 할이 주어졌다. 오시리스 신화에 따르면, 오시리스는 질투하는 자기 형제에게 살해당했고, 이후에 몸이 열네 부분으로 분할되어 도처에 흩어졌다. 그러나 오시리스의 남매이자 아내인 이시스가 이 흩어진 몸을 다시 모아 붙였고, 마술적으로 임신에 성공해 호루스를 낳았다. 죽음을 물리치고 후계자를 낳은 오시리스는 지하세계로 내려가 지하세계의 왕이 되었다. 12) 진실의 깃털은 완전한 ‘마아트’, 곧 적절한 윤리 행위의 우주적 질서와 규약을 구현했다. 13) 아무트/아마메트(고블러)는 일부는 악어, 일부는 하마로 이루어진 잡종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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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자는 끝없는 어둠과 침체가 지배하는 장소로 끌려가거나 던져 졌다. 그곳에서 죽은 자는 거꾸로 걷고, 오줌과 똥을 먹으며, 불과 뱀 에게 괴로움을 겪는다. 어떻게 보든, 즉 지하세계의 이 “바깥 흑암” 장소로 추방되거나 단순히 절멸되거나 간에, 이 두 번째 사망은 상상 할 수 있는 최악의 운명이었다. 반면에 복되게 죽은 자 ( 마음이 진실의 깃털보다 무겁지 않은 자 ) 는 사공의 인 도를 받아 강을 건너 오시리스 및 라 ( Ra ) 가 다스리는 지복 구역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오시리스 및 라와 영원히 연합하게 된다. 밤에는 지하세계 속으로 내려가 완전한 성취와 안식 상태에서 오시리스와 연합한다. 낮에는 신들의 주요 본거지인 하늘에서 산다. 이 하늘에서 그들은 각자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는 풍성한 수확이 있는 땅을 차 지하고, 그곳에서 헤아릴 수 없는 풍족함과 즐거움을 누리도록 되어 있다 ( 이곳은 다양하게 “갈대의 밭”, “제물의 밭”, “의인의 섬”, “큰 성”으로 지칭된다 ). 고대 이집트인의 내세관에 따르면, 죽은 자가 이처럼 행복한 내세 로 가는 여정을 돕기 위해 살아 있는 가족들이 막중한 책임을 짊어 져야 했다. 우선 가족들은 시체를 적절히 보존하는 조치를 취하고, 장례식에 요구된 모든 일을 철저히 수행해야 했다. 여기에는 죽은 자 가 지하세계를 성공적으로 여행하도록 보장하고자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일과 앞서 말한 마술적 주문을 새기는 일이 포함되었다. 또 미라의 “입을 벌리는” 매우 중요한 의식도 행해야 했다. 이 의식은 미라가 음식 제물뿐 아니라 보호의 영을 받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 었다. 죽은 자에 대한 이런 세심한 관심은 무덤과 사자를 계속 보살 피는 일로 지속되어야 했다. 이런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죽은 자 의 유령의 분노를 사게 되고, 이 유령이 산 자의 사건들 속에 악의적 으로 개입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가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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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해를 끼치거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도 두려워했다.14) 이와 같이 고대 이집트인에게 죽음은 불길한 징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대비하고 돕고 특별히 마술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행복한 내세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15)

시리아-팔레스타인 이집트보다 북쪽에 위치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내세 전망 도 확실히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곳 원주민들의 종말론 정보는 주로 20세기 초 ( 1929년 ) 에 키프로스 맞은편 시리아 해안에 위치한 청동기 도시국가 고대 우가리트 ( 현대의 라스 삼라 ) 16) 유적지에서 발굴된 문서들 을 통해 수집된다. 우가리트에서 죽음은 다산의 신 바알뿐 아니라 인간들도 삼켜 버 리는 채울 수 없는 심연으로 인식된 모트 신으로 의인화되었다. 우가 리트 신화에 따르면, 이 두 신 ( 즉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는 ) 사이에 지속적 싸 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싸움은 땅에서 겪는 계절의 순환 속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모트와 바알은 주기적으로 지하세계에서 돌아오 지만 죽음은 이 두 신보다 더 강한 세력으로 나타나고, 내세에 대해 서는 긍정적인 암시가 거의 없다. 우가리트 관점에 따르면, 죽을 때 사람의 “영”( ‘나파쉬’; 참조, 히브리어 ‘네 페쉬’ ) 이

코를 통해 바람처럼 몸을 떠난다고 믿어졌다. 죽은 자의 유해

는 공동묘지에서 하나나 하나 이상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몸을 떠난 영이 내려가는 지하세계는 방대한 지하 동굴로 인식되었고, 그곳에 14) 이에 대한 더 깊은 설명은 Hays 2015: 76-83을 보라. 15) 그러나 BC 1000년경부터 비관적인 태도가 등장한다. 16) 헤이스(2015: 99)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가리트 종교를 가나안 종교와 동일시하는 것은 약

간 잘못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언급된 “가나안”은 우가리트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남 부 팔레스타인 국가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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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왕으로 군림하는 자는 신적 존재나 “신”( ‘일름’ ) 으로 묘사되었다.17) 그리고 이 신들은 태양의 여신 ‘샤파쉬’의 지배를 받았다. 우가리트 문서들은 또 지하세계에 거주하는 신격화된 조상이나 영웅들을 ‘라 피우마’로 지칭한다. ‘라피우마’라는 말은 일부 구약 본문에서 죽은 자의 영이나 “망령”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 ‘레파임’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 예, 사 26:14 ).18) 대다수 고대 근동 지역과 마찬가지로 우 가리트에서도 현세에서 복을 받고자 헌주와 헌물을 죽은 조상에게 “바쳤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 학자는 우가리트 단어 ‘마르지후’( 참조, 히브리어 단어 ‘마르제아’ ) 를

죽은 조상들을 위한 장례식 연회로 이해하고,19)

소위 사자숭배의 한 표현20)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죽은 자와 관련되 어 있다면, 어쩌면 이것은 아일랜드 밤샘 축제와 더 비슷한 단순한 술잔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 참조, 암 6:7; 렘 16:5-9 ). 어쨌든 우가리트의 내세 개념에서 사람이 바랄 수 있었던 가장 긍 정적인 일은 사람이 신과 함께 먹고 마실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기회도 살아 있는 친족이 적절한 의식을 수행하 고 희생제물을 바쳤을 때에만 가능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내세 개념과 비교해 보면 매우 낙관적이었다.

17) 현존 문서들은 보통 사람(즉 왕이나 영웅이 아닌 자)으로 죽은 자의 신격화에 대해서는 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발굴된 문서들이 거의 엘리트 집단에 출처를 두고 있기 때문 일 수도 있다(Hays 2015: 115). 18) 구약 성경에서 ‘라피우마’라는 말은 민족적 의미로 이스라엘이 정착하기 전 가나안 거민들 과 관련하여 사용되고(창 15:20), 특히 매우 위압적인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 사용된다(민 13:33; 대상 20:4). 구약 성경에서 이 말이 내세 개념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중요성에 대해서 는 본서의 다음 장을 보라. 19) 이렇게 이해하면, ‘마르지후’ 식사는 죽은 자를 매장할 때에 또는 죽은 자에 대한 후속 기 념행사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20) 헤이스는 이것을 “죽은 자의 능력을 가정하고 죽은 자를 지속적으로 보살피는 것”으로 유 용하게 정의한다(2015: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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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냉혹하고 부정적인 내세 개념으로 말할 것 같으면, 메소포타미아 의 내세 개념을 필적할 고대 근동 지역이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는 죽음이 모든 인간의 필연적 운명으로 간주되었고 불멸성은 가망 없는 희망이었다. 이 요점은 길가메시21) 서사시에서 강조된다. 홍수 에도 살아남은 노아와 같은 인물인 우트나피쉬팀은 불멸성을 받았 지만, 그의 후손인 영웅 길가메시는 불멸성을 받지 못했고 원기를 회 복해 회춘할 기회마저 박탈당했다.22) 연약한 인간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명확해 보인다. 메소포타미아의 내세 관점에 따르면, 사람은 죽을 때 숨을 멈추고 유령 ( ‘에테무’ ) 이 되었다. 죽은 자의 몸은 때때로 멀리 떨어진 무덤이 아니라 자기들이 살았던 집의 특별한 공간에 장사되었다. 다른 고대 근동 지역 문화에서처럼 메소포타미아 문화에서도 장자는 죽은 자 에게 음식과 음료와 다른 물품을 제공하는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23) 장자는 또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잊히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죽 은 자의 이름을 주기적으로 선포해야 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산 자가 죽은 조상을 초대하여 죽은 조상에게 복을 구하는 ‘키프수’ 잔치였다. 다른 고대 근동 지역의 사상처럼 메소포타미아 사상도 산 자는 ( 영매나 점쟁이를 통해 ) 죽은 자와 접촉할 수 있었고, 죽은 자의 유령

21) 우르크의 왕 길가메시는 BC 2600년경에 통치했다. 길가메시 서사시 본문에 대해서는

Pritchard 1969: 72-98을 보라. 22)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쉬팀의 지시를 받아 이처럼 원기를 회복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는 압

수(Apsu, 의인화된 물)에서 자란 물속 식물을 얻는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그 식물을 그만 뱀에게 도둑맞고 만다. Yamauchi 1998: 33을 보라. 23) 헤이스(2015: 38)가 지적하는 것처럼, 왕들의 경우를 보면, 이집트의 왕들만큼 아주 많이 바쳐졌을 것으로 보이는 이 물품들이 내세에서 안전한 여행을 하도록 보장하는 물품이었 는지, 아니면 지하세계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는지(또는 둘 다였는지) 여부는 불분명 하다. 초기(BC 3000년경)에는 이 물품에 제물로 바쳐진 종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BC 1000년경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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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산 자의 상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안주하지 못하고 떠돌 아다니는 유령은 특히 악령으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특별히 두려움 의 대상이 되었다.24) 따라서 모방 마술25)과 수많은 주문이 이런 악령 이나 귀신들26)을 물리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이런 존재들은 밤에 사람들을 성적으로 공격한다고 생각되었고,27) 또는 우리가 유아 돌 연사 곧 유아 급사 병으로 지칭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지하세계 자체가 통상적으로 “큰 성”, “큰 지 하”, 또는 “돌아오지 못하는 땅”으로 불렸다. 지하세계는 3층으로 이 루어졌다고 믿어졌다. 최하층은 지하세계 신들의 법정이고, 중간층 은 물의 신 압수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지표면 바로 아래에 있는 마 지막 최상층은 “사람들의 영의 거처”였다.28) 지하세계 입구는 서쪽 에 있다고 알려졌고, 샤마쉬 ( 태양의 신 ) 가 밤에 그쪽으로 내려가 다음 날 아침 동쪽에서 다시 떠오를 때까지 땅 아래를 여행했다고 믿어 졌다. 죽은 자가 지하세계로 가려면 사공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너야 했다. 추측컨대 사공 ( “급히 떠남”으로 불리는 ) 은 자기 일을 빨리 할수록 자 기에게 그만큼 더 좋았을 것이다! 지하세계의 음울한 현실은 길가메

24) 야마우치(1998: 35)에 따르면, 이처럼 안주하지 못하는 유령에는 장례식에서 제물을 바치

지 않은 자, 자살한 자, 사산아나 기형아, 난산으로 죽은 여자,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젊은 이가 포함되었다. 25) 예컨대 유령의 대체 형상을 만들어 강에 던져 넣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탐무즈(풍요의 신) 가 지하세계로 내려온다고 믿어진 달(6-7월)에 출몰하는 유령을 탐무즈와 함께 지하세계 로 내려 보낼 수 있었다. 26) 죽은 자의 유령은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 신격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불행하거 나 비참하게 죽은 자는 귀신 세계의 일부가 되어 귀신과 동일시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역 설적으로 죽은 자는 어떤 면에서 약해졌으나(다시는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죽은 자의 유령은 물리 세계에 상당한 힘과 영향력을 행사했다. 27) 흥미롭게도 이런 남성(‘릴루’) 또는 여성(‘릴리투’) 유령이나 귀신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동 격 단어가 사 34:14(‘릴리트’)(개역개정은 이 말을 “올빼미”로 번역함—옮긴이)에 나타난다. 28) Yamauchi 1998: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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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서사시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한번 들어가면 아무도 나올 수 없는 집이네. 그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있어도 나오는 길은 없네. 그 집에 거하는 자는 빛을 빼앗겼네. 거기서 그들의 밥은 먼지이고 그들의 음식은 진흙이네. 그들은 새처럼 치장하고 옷 대신 날개를 갖고 있네. 어둠 속에 거하기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네. (프리차드 1969: 87)

다른 본문들은 영혼을 먹고 사는 해충과 벌레에 대해 말한다. 이때 영혼들은 새 같이 된다.29) 지하세계에는 빗장과 자물쇠와 사악한 문 지기가 있는 일곱 문이 있고, 이것은 도망칠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어떤 부분을 보면, 용감한 자나 덕스러 운 자, 그리고 많은 아들을 둔 자에 대해 약간 더 나은 시나리오가 주 어진다. 이것은 아마 죽은 자가 산 자를 통해 충분히 존중을 받도록 보장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30) 어쨌든 메소포타미아 사상에서는 무덤에서의 해방 관념31)이나 이집트의 “갈대의 밭”이나 그리스의 29) 이런 묘사는 고대 근동 지역의 내세 전통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주제로, 이사야서에도 언급

되었다(참조, 사 8:19; 29:4). 30) Heidel 1949: 191-192를 보라. 하이델은 남자가 전투에서 죽으면 부모는 죽은 아들을 도

와주고, 따라서 아들을 “위로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더 많은 자녀를 둔 부모는 지하세계에 서 그렇지 못한 부모보다 더 큰 특권(심연의 가죽부대에 담긴 떡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과 영예를 누렸다고 지적한다. 31) 과거에는 이런 부활 개념이 이난나/이슈타르가 지하세계로 내려오는 신화에 반영되어 있다 고 생각되었다. 이때 지하세계에 내려온 하늘의 여왕(수메르어, ‘이난나’; 아카드어, ‘이슈타 르’)은 지하세계의 여왕인 자기 자매 에레슈키갈에게서 지하세계 왕국의 지배권을 빼앗으 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후에 죽음에서 다시 소생하자 지하세계 에서 자기 자리를 대신할 대리자를 찾아내야 했다. 남편 탐무즈가 자신의 죽음에 별로 관 심이 없음을 알자 탐무즈를 지하세계로 데리고 가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았다. 지하세계에 서 탐무즈의 영이 올라와 죽은 자에게 바쳐진 제물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이전 에 생각되었던 것과 같은 부활이 아니었다. 다른 본문(루드룰 벨 네메키, BC 1600-1200년

1장 사후,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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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엘리시움] 낙원”과 같은 복된 내세에 대한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페르시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려진 고대 근동의 마지막 지역인 페르시아 문화에는 훨씬 긍정적인 종말론이 나타난다. 조로아스터교 사상32)에 따르면, 이슬람 시대 이전 페르시아의 주요 종교에서 인간은 눈에 보 이는 유형적 부분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 몸 을 갖고 있다. (1) “생명” 또는 “생명력”, (2) “영혼”, (3) “빛”, (4) “영”. 페르시아 사상에 따르면, 영혼은 사후 셋째 날에 심판받기 위 해 땅 중앙에 있는 신화적인 산으로 올라간다. 여기서 영혼의 선하고 악한 생각, 말과 행위가 저울에 달린다. 만약 선한 것이 악한 것을 능 가하면, 영혼은 성공적으로 “분리대의 다리”를 건너 하늘로 올라 간다. 그러나 악한 것이 선한 것을 능가하면, 이 넓은 분리대의 다리 는 급격히 좁아지고 영혼은 마귀가 응분의 처벌을 주관하는 끔찍한 지하세계로 던져진다.33) 이후에 복 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의 몸이 다 부활하고, 떠나간 영들 경)을 보면, 바벨론의 신 마르둑은 “죽은 자의 생명을 회복시키고” “무덤에서 생명을 회복 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조기 사망에서의 건짐이 아니라 “소생” 가능 성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런 부활 심상이 바벨론과 앗수르 역사 전체에 걸쳐 계속 유효했 던” 것은 분명하지만(Hays 2015: 55),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또는 현존하는 본문들에는 왜 별로 나타나지 않은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32) 이슬람 이전 시대 페르시아의 주요 종교에 대한 많은 현존 성문 자료(예, 아베스타와 팔레 비 본문)가 페르시아 제국 멸망 이후로 AD 첫 천 년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 나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된 종말론이 BC 4세기 중엽에 그리스의 한 역사가(테오폼푸 스)를 통해 증명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예, 육체 부활)이 조로아스터 자 신의 가르침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33)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주요 신이 있었다. 지음 받지 않은 영원한 존재 아후라 마즈다는 완전히 선하고 지혜롭고 자애롭다. 그러나 아후라 마즈다와 공존하 는 지음 받지 않은 또 하나의 존재 앙그라 마이뉴는 완전히 악하고 무지하고 해롭지만 결 국은 멸망할 운명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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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이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해 몸과 다시 결합된다. 이 때문에 녹은 금 속이 산에서 흘러나와 불의 강을 이룰 것이다. 몸과 다시 결합된 죽 은 자의 영혼은 물론이고, 그때 살아 있는 자의 영혼도 불이 흐르는 이 강을 통과해야 한다. 선한 자는 신적 개입을 통해 구원받게 되지 만 악한 자의 몸과 영혼은 불에 타 소멸되거나 온갖 부패에서 정화되 거나 한다.34) 따라서 이 불의 강은 지옥으로 흘러들어 가고, 지옥은 마귀와 그의 사악한 무리를 멸함으로써 정화되며, 악은 최종적으로 근절된다. 반면에 복 있는 자는 그들의 몸을 불멸의 존재로 만드는 식사에 참여하고, 그리하여 완전하게 된 땅 곧 봄에 꽃이 만발한 정 원 ( 낙원 ) 과 비슷한 땅에 세워진 신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게 된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죽음과 내세 고대 그리스의 죽음과 내세 관념을 살펴보면, 다양한 자료를 접하 게 되고 한 자료 안에서도 상충되는 견해가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35) 어떤 학자는 이것이 저자들이 내세 관념을 별로 진지하게 받 아들이지 않았거나 독자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랐거나 한 것을 암시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마 내세 심상을 문 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였을 것이다. 즉 지하세계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보여 주는 정확한 묘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저자 들이 독자가 특히 현세의 삶에 대해 주는 교훈과 관련하여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는 암시가 도처에 존재한다.

34) 전자는 보이스(1992: 1170)의 주장이다. 그러나 야마우치는 이렇게 주장한다. “저주받은

자의 죄는 혹독한 시련을 통해 다 타 버리고 악인이 정화될 것이다”(1998: 42). 추측컨대 이것은 다양한 자료 속에 의견 차이가 있었음을 반영한다. 35) 이런 자료에는 신화적인 서사시, 철학 및 종교 작품, 고고학 유적이 포함된다.

1장 사후,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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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세기에는 플라톤주의 사상이 매우 흔했으나 그렇다고 당시의 모든 시민이 종종 이원론적 인간관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플라톤의 사상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확인한 사실로 보아 분명한 것처럼, 가멸적인 육체와 불멸적인 “영혼”과 같은 요소를 구 분하는 사상은 전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 철학자들이 새로 창 안해 낸 견해가 아니었다.36)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이원론적 인간관을 플라톤주의의 잔재로 간주하고 무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어 쨌든 모든 그리스 철학자가 플라톤의 영혼의 불멸성 견해를 받아들 인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37)와 같은 일부 철학자는 오늘날 “물리주의자”나 “유물론자”로 불리는 자와 사상이 훨씬 더 가깝다. 따라서 이런 철학자는 죽음을 종결 ( terminal ) 로 보았다. 오늘날 우리 시 대의 많은 무신론자와 같이 이런 철학자도 죽음을 단순히 인간 실존 의 끝으로 이해했다. 이번에는 로마 시대의 죽음과 내세 개념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로마인은 그리스인의 개념을 계속 따랐다. 어떤 로마인은 하데스 또 는 플루토를 몰락한 영웅들을 비롯해 대다수 사람들의 사후 목적지 로 보았다. 다른 로마인은 죽음을 불멸의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해 방되는 사건으로 보는 플라톤의 죽음 개념을 받아들였다. 또는 고상 한 인생을 산 자는 그 보상으로 하늘에 영원한 본향을 갖게 되리라 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어떤 로마인은 개인의 사후 생존 관념을 무조건 무시하고 죽음을 단순히 절멸로 보았다.

36) 시걸(2004: 205)에 따르면, 플라톤 철학에서 혁신적 요소는 “영혼의 불멸을 증명할 수 있

고, 영혼에 행복을 주며, 실존의 자연적 목표로 간주되는 급진적 이원론”이었다. 37) 비록 한 본문에서 정신(영혼의 합리적 요소)은 사후에도 존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

럼 보이기는 해도,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사후 존속 관념을 부인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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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끝으로서의 죽음 내세를 거부하는 사상은 에피쿠로스학파 및 스토아학파와 다 관련 되어 있다. 물론 스토아학파는 내세에 대한 견해가 일률적으로 통일 되어 있지 않기는 하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대체로 내세를 무조건 거 부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이 존재할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죽음]은 산 자 나 죽은 자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산 자에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그들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 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10.125. 시걸 2004: 222에서 인용)

에피쿠로스학파는 죽음을 분명히 실존의 완전한 끝으로 보았고,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어쨌 든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내세도 없고 사후 고통이 나 형벌도 없다. 정말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 아마 이런 사상을 표현 하는 한 사례를 든다면, 한 무덤 비문에 다음과 같이 적힌 내용일 것 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 걱 정이 없다.”38) 다른 이들은 이런 극단적인 견해 대신 다른 입장을 취했다. 곧 그 들은 에피쿠로스학파와 같이 영혼의 존속을 철저히 부인하거나 플라톤주의자와 같이 영혼의 존속을 철저히 인정하거나 하지 않 38) 라틴어 문장은 다음과 같다. non fui, non sum, non curo(종종 n.f.n.s.n.c.라는 약어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 비문들은 원래 의미를 거의, 아니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않 고 사용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원래 죽은 자의 영혼이 내세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R. I. P.[라틴어 requiescant in pace라는 말의 약어-옮긴이]라는 기도문이 종종 오늘날 단순히 몸이 무덤에서 안식하는 것을 묘석에 적는 데 사용되는 경우처럼).

1장 사후,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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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예를 들어, 많은 스토아학파 사람들이 영혼은 유형적이지만39) 모든 영혼 ( 최소한

지혜로운 영혼 ) 이

사후에도 존속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주와 달리 영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운명 속에 있었다. 따라 서 영혼은 우주를 주기적으로 재창조하는 ( 끝없이 순환하는, ‘팔링게네시스’ ) 것 으로 이해된 대화재 ( ‘에크퓌로시스’ ) 사건으로 말미암아 존속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사후에 살아남은 영혼은 대화재 사건에서 신적 영혼 속에 다시 흡수되고, 새 창조로 구성 요소가 다시 분배된다. 따라서 인간 영혼의 사후 존속을 인정하는 스토아학자들에게도 영혼의 사 후 존속은 단순히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죽음은 결 과적으로 인간 실존의 끝이었다.

별의 불멸성 또는 신격화로서의 죽음 반대편 극단에는 별의 불멸성 및 신격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 관념은 사람이 죽으면 별이나 신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의 일부 신비 전통은 이 관념에 따라 죽은 자가 통상적인 죽음 을 겪지 않게 된다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해석을 보면 다음 과 같이 묘사된다. 비탄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이 그는 갔다. 정말로 놀라운 끝이었다.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1663-1665)

그러나 1세기경에 이 관점은 영혼이 사후에 하늘로 이동한다는 관 점으로 바뀌었다. 39) 초기 스토아학파는 몸과 영혼이 다 유형적이라고 믿고, 둘 사이의 긴밀한 상호 관계를 주

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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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복되게 죽은 자를 별로 간주하는 관념은 별이 사실은 신 또는 다른 신적 존재라는 신념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런 별의 불멸성 관념이 엄밀히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BC 5세기경에 이미 흔하게 나타났다. 아테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 Aristophanes, BC 446-386년경 ) 는

“우리가 죽으면 곧바로 별이 된다는 사람들의 말”을 조

롱했다 ( 아리스토파네스, 『평화』 832-834 ). 이런 조롱에도 불구하고, 이 관념은 헬레니즘 시대의 수많은 비문이 증명하는 것처럼 큰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40) 로마 철학자 키케로 ( Cicero, BC 1세기 ) 에 따르면, 덕 있는 영혼 의 본향은 은하수의 별들 속에 있다. 조국에 충성한 정치가들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별들 속에 마련되어 있다.41) 영웅이나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관념이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흔 했다. 놀랍지 않게도 알렉산더 대왕이 이런 신격화를 받은 것으로 생 각되었다. 로마 황제들도 이 관념을 쉽게 채용했다. 일부 로마 황제 는 “성급하게도” 이런 신적 지위를 사후가 아니라 생전에 주장하기 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신격화는 사후 의식을 거쳐 인정되었 고, 화장터 꼭대기에 비치한 새장에서 독수리를 날려 보내는 일과 같 이 다양한 상징들로 반영되었다. 독수리 등에 업혀 하늘로 올라간다 는 관념이 예컨대 티투스 개선문 중앙에 그려진 그림에 나타나 있다.42)

40) 이 언급들에 대해서는 Lehtipuu 2007: 68, n. 78을 보라. 41) 키케로는 형벌이 주로 더 힘든 길을 가야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악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다. 키케로는 사후 고통 사상을 명백히 무시한다. 키케로 는 타계에서 겪는 괴로움 이야기는 단순한 우화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런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한다(Tusc. 1.5-6을 보라). 그러나 “폭넓은 청중을 대상으로 한 그의 일부 연설을 보면, 키케로는 사후 형벌을 죄의 억제책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Lehtipuu 2007: 90, n. 195).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케로의 주된 초점은 덕 있는 자의 운명에 있었다. 42) 시각적 상징에 대해서는 Cartwright 2013을 보라.

1장 사후,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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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화 개념은 일반적으로 선택받은 소수로 한정되었지만43) 별의 불멸성 관념은 훨씬 폭넓은 대상에 적용된 것 같고, 따라서 이것은 별의 불멸성 관념이 폭넓은 호소력을 갖고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었 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분명히 누구나 신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 었다. 그러나 최소한 모든 사람이 별이 되기를 바랄 수는 있었다.

영혼의 지하세계 이동으로서의 죽음 죽음을 영혼이 지하세계로 이동하는 사건으로 보는 “고전적인” 내 세관은 보통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유명한 작품들은 죽음과 내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태어날 때 몸 안에 들어온 ‘프쉬케’ 곧 영혼은 죽을 때 한 줄기 바 람처럼 몸을 다시 떠나고, 죽은 자는 적절히 장사되는 한 지하세계로 내려간다.44) 죽은 자는 지하세계에서 아무 힘이나 낙이 없이 자기들 의 과거 자아의 비실체적인 “그늘” 또는 “그림자”로 존재한다.45) 통 상적으로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영역에 거하는 것으로 제한되었지만, 간혹 산 자에게 붙어 산 자를 늘 따라다니거나 산 자와 소통할 수 있 는 유령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 지역에서와 같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도 죽은 자를 적절히 보살피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확실히 죽은 자를 적절히 보살피지 못하면 죽은 자의 유령 이 다시 돌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자를 괴롭혔다. 왜냐하면 그리스

43) 그러나 피타고라스학파는 이 불멸성이 모든 덕 있는 영혼에게 주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격화가 황제들의 배타적 특권이라는 관념을 반대했다. 44) 후기 그리스 전통에서는, (죽은 자를 동반하고 땅과 지하세계를 분리시키는 강을 건너는)

헤르메스와 함께 시작된 이 여정에 시체의 입에 물린 금화의 답례로 죽은 자의 “형상”이나 “유령”을 스틱스(Styx) 강 건너 편에 있는 하데스로 이동시켜 주는 사공(카론)이 포함된다. 그러나 호머의 글은 이 후기 전통들보다 훨씬 더 허술했다. 45) 죽은 자의 영은 분명히 생전 자신의 육체적 모습을 기억했다. “신체적” 특징으로 누군지 확 인할 수 있었고, 최근에 죽은 자는 죽을 때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Segal 2004: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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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신화를 보면 장사되지 못한 시체는 하데스 ( 음부 ) 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46) 하데스는 어둡고 음침하고 희망이 전혀 없는, 땅 속 아 주 깊은 곳에 있는 심연으로 묘사된다. 대부분47) 죽은 자는 다 사회 적 계급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똑같은 경험을 한다. 이것은 분명히 행 복한 경험은 아니었다. 영웅으로 죽은 자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는 “지하세계의 힘없는 모든 죽은 자의 주인보다 땅의 가난 한 농부의 고용된 종이 더 낫다”는 유명한 말을 한다 ( 『오디세이』 11.489491 ).

그러나 음부는 형벌이나 응보의 공의가 지배하는 곳으로 간주되

지 않았다. 오히려 단순히 모든 사람이 불가피하게 참여해야 할 냉혹 하고 음울한 목적지였다. 죽음에서 되돌아올 희망은 추호도 없 었다.48) “불멸성”을 얻는 유일한 희망은 유명해지는 것에 있다. 유명 해지면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 합하면, 죽음과 내세에 대한 호머의 견해는 거의 완전히 부정적이다. 음부의 보편적 소환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이를테면 “복 있는 자의 섬”49)에 들어가 신적 호의를 받고 죽음을 피한 극소수의 영웅들이 46) 예컨대 아킬레스는 전투하다 죽는 바람에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친구 파트로클로스

의 불행한 유령이 밤에 자기를 찾아온 것을 본다(Segal 2004: 207을 보라). 위에서 살펴본 다른 고대 문화와 마찬가지로, “통상적으로 그리스인도 적절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 죽은 조상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데 유효하다고 보았고, 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죽은 자를 적 절하게 기념하면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생생히 유지하고, 그 기억을 공동체 안에 사회화 하며, 동시에 앙심을 가진 유령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Segal 2004: 209). 그러나 고대 근동 지역의 유령과 달리, 그리스 문화에서는 죽은 자의 영이 땅에서 일 어난 일에 대한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 산 자에게(예, 죽은 자가 의식, 기억, 그리고 심지어 는 육체적 모습까지 보존할 수 있도록 산 자가 피를 헌주로 바치는 것), 그리고 죽어서 (하 데스에) 새로 “도착한 자”에게 의존했다. 그러므로 파트로클로스의 유령이 아킬레스의 죽 음을 예언한 사건은 정말 특이했다. 47) 선택받은 소수(탄탈루스, 티티오스, 시지푸스)가 신들을 거역한 죄로 형벌을 받고, 메넬라 오스와 같은 사람들에게 (엘리시온 낙원에서) 복이 주어진 것은 예외다. 48) 아킬레스는 프리아모스에게 죽은 자의 영역에서 다시 돌려보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음 을 유념하고 아들 핵토르의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49) 예, “그의 아내 헬레네의 성폭행으로 그가 겪은 영예의 실추만큼 스파르타 왕으로서의 그 의 지위도 상실된”(Segal 2004: 206) 메넬라오스가 엘리시온 낙원에 간 것(『오디세이』

1장 사후,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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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리스 신화도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소수의 인물들을 언급하 지만 이것은 일반적으로 불멸성을 가진 존재로 부활하는 것이 아 니라 머잖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 단순히 소생하는 것으로 이 해된다.50) 호머 시대와 플라톤 시대 사이에 내세 사상의 중대한 발전이 이루 어졌다. 오르페우스교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사후에 영혼은 대기 밖 공간 곧 대기권 상층부로 돌아간다. (2) 인간은 환생하기 전 각자의 삶에 대해 처벌받는다. (3) 삶 속에서 적절한 결정들이 있 었다면 사후에, 비록 많은 환생이 있은 후일지라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51) 유명 수학자의 이름을 딴 집단과 깊은 관계가 있는 피타고라스학 파52)도 이와 비슷한 내세관을 가졌다. 피타고라스학파 역시 환생과 영혼의 윤회를 믿었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은 아마 플라톤 ( BC 430-340년경 ) 이

자신의 유력한 작품들 속에 반영한 일부 핵심 관념들

의 중요 원천이었을 것이다. 호머와 달리 플라톤은 죽음을 두려운 일로 보지 않고 도리어 환영 할 일로 보았다. 어쨌든 죽음이 임하는 순간에 불멸의 영혼은 그동안 자기를 가두고 있었던 몸에서 해방된다. 플라톤은 참된 자아를 물질 적인 몸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불멸의 영혼으로 보았다. 따라서 플라 톤의 사상에서 죽음은 바람직한 사건이었다. “소크라테스”와 나눈

4.561-565). 또한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BC 750년경)에서, 전투하다 죽임을 당한 영웅들을 위한 “행복한 자의 섬”(슬픔, 고통 또는 죽음이 전혀 없는 전원적인 농촌 낙원) 개념도 참조하라. 50) 그러나 이것은 도전을 받았다(Finney 2016: 13-15를 보라). 51) Segal 2004: 220. 52) 유명한 직각삼각형 정리(피타고라스 정리)의 저자인 피타고라스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하지만 피타고라스는 아마 BC 750년과 500년 사이 어느 시기에 생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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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문학적 “대화”53)를 보면, 플라톤은 호머의 견해보다 훨씬 긍정적인 내세관을 제시한다. 곧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땅에서의 삶에 대해 더 나은 보상을 받는다.54) 플라톤 시대에는 호머 시대에 성행했던 엘리 시온[엘리시움]이나 타르타로스와 같은 개념 ( 참조,

헤시오도스의 용례 ) 이

더 깊이 전개된다. 참된 땅은 다음과 같은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55) 엘리시움, 타르타로스, 형벌의 들판, 아스포델로스 들판. 이 상향인 엘리시온 낙원은 선한 삶을 살고,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 는 경건한 자를 위해 마련된다. 이것은 그리스인의 “경건”( 유세베이 아 ) 에

대한 핵심적 표현이다. 반면에 타르타로스는 두려운 고통의 장

소로, 특히 악하고 방탕한 인생을 산 자에게 주어졌다. 형벌의 들판 은 타르타로스에 갈 정도로 극악하지 않은 자를 위해 마련되었다. 그 리고 아스포델로스 들판은 한편으로는 엘리시움에 갈 자격은 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형벌의 들판에 갈 만큼 악하지는 않은 자를 위해 마련되었다. 따라서 플라톤은 인간이 삶 속에서 내리는 결정들 이 영속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본다. 곧 최소한 다음 환생이 있을 때 까지 사람의 영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본다.56)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혼이 몸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사건이다.

53) 플라톤은 사실 자기 자신을 소크라테스의 대화 상대자 가운데 하나로 전혀 말하지 않

는다. 플라톤이 말하는 소크라테스가 역사적 인물인 그의 실제 스승과 과연 얼마나 닮았 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불가능하다. 54) “소크라테스”/플라톤의 견해에 따르면, 영혼은 불멸이므로 우리 삶의 행동은 영원한 결과 를 갖는다. 55)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땅은 엄청나게 방대하고 알려진 세계는 단지 물과 안개가 모인 많은 빈 장소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참된 지표면 곧 순수한 공간은 우리보다 훨씬 위에 있다. 보석과 풍성한 금은으로 만들어진 산이 있는 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역에서 사는 자는 모든 면에서 우수하고, 하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신들과 공유한다. 56) 『에르의 신화』(Myth of Er)에서 플라톤은 영혼은 다시 태어나기 전에 망각의 강에서 나온 물을 마시기 전까지 천 년 동안 지복 아니면 고통을 겪는다고 말한다.

1장 사후,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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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길리우스(BC 1세기) 로마 시대에 베르길리우스는 지하세계를 매우 폭넓고 상세하게 설 명했다.

( 예수가 탄생하기 20여 년 전에 저술된 )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는 호머의 『오디세이』의 플롯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사실은 플라 톤의 영향을 받아 호머의 다양한 개념을 당대의 사상에 맞게 조정 한다. 따라서 영웅은 죽은 친구 및 친족과 대화하려고 지하세계로 내 려가지만 지하세계의 지형은 다양한 영역으로 나누어지고, 죽은 자 의 구체적 운명은 그들의 땅에서의 삶에 따라 좌우된다. 불의 강으로 에워싸인 타르타로스는 악인이 고통을 겪고 괴로움에 울부짖는 장 소로 묘사된다. 반면에 엘리시움은 풍요롭고 행복한 장소로, 오르페 우스가 수금으로 세레나데를 연주하는 동안에 영혼들은 씨름하고 춤추고 축제를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플루타르코스(AD 1세기 말) AD 1세기 말에 저술된 플루타르코스의 종말론 신화는 영혼의 불 멸성, 덕 있는 자와 악한 자의 차별화된 운명을 비롯해 대체로 플라 톤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지하세계의 상 태를 더 깊이 묘사하고, 특히 악인의 끔찍한 형벌을 상세히 다룬다. 예를 들어, 플루타르코스는 영혼들이 뒤집혀 “산 채로” 껍질이 벗겨 지고, 다양한 금속 호수에 던져졌다 다시 꺼내지고, 어떤 영혼은 이 글거리는 불길에 휩싸여 있고 다른 영혼은 추위에 얼어붙어 있으나 모든 영혼이 이런 극단적 상황에 노출되어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다 고 묘사한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다른 곳에서는 이런 관념을 조롱하고, 음 부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는 것을 “시시한 미신”으로 무시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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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하다.57) 아마 여기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육체적 죽음은 영혼과 정신을 몸에서 분리시키지만 두 번째 죽음은 정신을 영혼에 서 분리시키고, 그 결과 참된 행복이 가능해진다는 플루타르코스의 주장일 것이다.58) 나는 플루타르코스의 두 번째 죽음 개념이 요한계 시록의 둘째 사망 관념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안전하게 결 론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고대 근동 세계와 그리스-로마 세계의 죽음 및 내세 관념 을 간략히 살펴본 결과, 분명히 아주 많은 견해들이 난립했다. 그러 나 이 고대 개념 가운데 많은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대립 한다 ( 예, 환생 대 부활 ). 하지만 다른 개념들은 크게 대립하지 않는다 ( 예, 몸 에서 떠난 영혼이 육체적 죽음 후에도 생존한다는 관념 ).

그리고 어떤 개념은 성경의

종말론과 매우 긴밀하게 대응을 이루는 것 같다 ( 예, 최후의 심판, 상이나 처벌 의 구별된 장소 관념 ).

이제 성경에 나타난 종말론을 살펴보자.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죽음과 내세 나는 엄밀하게 말하면 성경적 관점들 ( perspectives ) 이라는 말을 사용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수형 “관점”( perspective ) 을 사용하면, 성경의 모든 증거가 하나의 통일된 개념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 있 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살펴볼 것처럼, 몇 가지 성 경의 핵심 주제를 더 상세히 검토해 보면, 개인 종말론에 대한 하나 님의 계시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더 밝게 드러났다. 따라서 구약 57) De Superstitione 167a (Lehtipuu 2007: 96에서 인용함). 레티푸는 플루타르코스의 이런

일관성 없는 묘사를 사상의 변화나 다른 저자의 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플루타르 코스는 사후 형벌을 반드시 부인하지는 않으나 이 형벌이 일으킬 수 있는 과도한 두려 움(“미신”)을 비난한다고 주장한다. 58) Plutarch, Moralia: The Face of the Moon 942-943.

1장 사후, 무엇인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궁극적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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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BT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할례 성경신학 칼 디닉 지음 | 김귀탁 옮김 | 356쪽 | 20,000원

죽음과 내세의 중요한 측면들이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성경에서 할례라는 주제가 중요함에도 지금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폴 윌리엄슨은 우선 현대 문화와 성경 세계의 관점을 조사

할례의 성경신학을 상세히 다룬 작품이 거의 없 었다. 이 책은 그 공백을 든든히 메워 준다. 칼

한 다음,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전통적 이해와 복음주의자들이 점점 양극화되

디닉은 신구약 성경의 할례 이해에서 의와 믿음

어 가는 문제들에 집중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논란이 되는 주제들, 곧 죽음

이 핵심임을 보여 준다. 의와 믿음은 흠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전개되면서 하나로 결합하는데, 그

직후에 일어나는 일, 육체적 부활, 최종적이고 보편적인 심판, 마지막 날에 하

의 희생을 통해 약속된 의가 마침내 도래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

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 운명, 종말론적 하늘에 대한 성경적

으며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그 의를 누리게 된다.

개념 등을 탐구한다. 윌리엄슨은 고대 근동과 그리스-로마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레위기 성경신학 L. 마이클 모랄레스 지음 | 신윤수 옮김 | 471쪽 | 26,000원

이 책은 레위기의 내러티브 문맥과 문학적 구

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NSBT

NSBT

N e w S t u d ie s in B ibl i c a l T he olo g y

죽음과 내세 성경신학

지은이

폴 윌리엄슨 (Paul R. Williamson)

영국 북아일랜드의 퀸스 대학교 벨파스트에서 박사학위 를 받았고, 호주 시드니의 무어 대학에서 구약과 히브리 어와 아람어를 가르치고 있다. IVP의 『성경신학 사전』과

가장 중요한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구절들을 통해 작업한다. 윌리엄슨은

『구약성경 사전』에 글을 기고했으며, NSBT 시리즈의 『맹

궁극적 질문에 대한 성경의 관점

죽음과 내세에 대한 전통적인 복음주의 이해에 상당한 주석학적 지지가 있음 을 보여 주며, 인기가 높아지는 다른 이해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세로 봉인함』(Sealed with an Oath), 『죽음과 내세 성경신 학』(Death and the Afterlife)을 저술했다.

조, 신학 등을 탐구한다. 저자는 레위기의 드라 마적인 이동을 따라가면서 성막 제의와 대속죄 일을 검토하고, 시내산의 성막에서부터 시온산의 성전까지, 나아 가 지상의 시온산에서부터 신약 성경에 나오는 천상의 시온산까지 그 발전을 추적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어떻게 우주 창조의 원래 목표였는지, 또한 구속과 새 창조의 목표가 되었는지 보여 준다.

근동 지역과 그리스-로마 세계 배경을 주의 깊게 이해하고자 신구약 성경

Death and the Afterlife

의 강조점을 개관하고, 가장 중요한 관련 본문들을 상세히 고찰한다. 본서

Biblical Perspectives on Ultimate Questions

“영원을 인정하는 관점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은 성경이 생명, 죽음, 심판, 부활, 지옥에 대해 실제로 말하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폴 윌리엄슨이 택한 길이다. 윌리엄슨은 성경 문서들이 기록될 당시 고대

옮긴이

총신대학교 신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아세아연합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 학했다. 기독교 고전과 양서의 번역을 통해 한국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많은 책을 번역했다. 대표

는 죽음과 내세 주제를 시리즈로 설교하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D. A. 카슨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스코트 스웨인 지음 | 전광규 옮김 | 276쪽 | 14,000원

요한복음은 교부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회의 지식과 교리와 예배에 중

폴 윌리엄슨 지음 김귀탁 옮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적인 역서로는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신약성경신학』, 『구약신학』, 『신현』(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폴 윌리엄슨 지음 김귀탁 옮김

요한 원천 역할을 해 왔다. 이 책은 성경신학자 와 조직신학자의 공동 저작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하나님 에 대해 요한복음이 말하는 바를 개괄하고 종합하면서 예수 그리

시리즈 편집 D. A. 카슨

스도, 성령, 선교 등 제4복음서에 나타난 중요한 삼위일체 주제들 을 자세하게 다룬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복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될 것이다.

ISBN 978-89-6092-611-0 ISBN 978-89-6092-430-7 (세트)

www.rnrbook.com 값 16,000원

김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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