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NAC 창세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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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리즈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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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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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어 소개

| 12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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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 창세기를 주석하는 것

23

2. 창세기 문학

25

3. 창세기와 정경

46

4. 창세기의 신학

60

5. 창세기 해석

71

6. 창세기 1~11장과 고대 문헌

98

7. 창조와 현대 해석

118

I. 하늘과 땅의 창조(1:1~2:3)

|

133

1. 창조주와 창조 (1:1~2)

148

2. 창조의 6일 (1:3~31)

171

3. 제7일-성별의 날 (2:1~3)

211

II. 에덴 안과 밖의 인간(2:4~4:26)

|

221

1. 에덴의 남자와 여자 (2:4~25)

226

2. 남자와 여자가 에덴에서 추방되다 (3:1~24)

273

3. 에덴 바깥의 아담과 하와의 가족 (4:1~26)

314


GENESIS III. 아담의 가계(5:1~6:8)

|

361

1. 서론: 창조와 강복 (5:1~2)

373

2. 아담에서 노아까지 “하나님의 형상” (5:3~32)

376

3. 결론: 번식과 변절 (6:1~8)

392

IV. 노아와 노아의 가족(6:9~9:29)

|

427

1. 의로운 노아 (6:9~10)

435

2. 타락한 세상 (6:11~12)

438

3. 임박한 심판과 약속의 방주 (6:13~7:10)

440

4. 심판의 파도 (7:11~24)

457

5.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다 (8:1a)

467

6. 구원의 바람 (8:1b~14)

468

7. 방주에서 나옴 (8:15~19)

476

8. 예배와 약속의 말씀 (8:20~22)

477

9. 새로운 세상과의 언약 (9:1~17)

486

10. 노아의 아들들과 미래의 강복 (9:18~29)

504

V. 국가들과 바벨탑(1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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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1. 국가 목록 (10:1~32)

528

2. 바벨탑 (11:1~9)

567

VI. 셈의 혈통(11:10~26)

|

595

1. “홍수 이후”의 셈 (11:10~11)

600

2. 셈의 아들들 (11:12~26)

604


시리즈 서문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상은 시대마다 변한다. 이 런 변화에 학자들의 새로운 발견들과 복음 메시지에 대한 새롭고 다양한 도 전들이 더해지면서, 각 세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주고 적용해 줄 것을 요구받고 있다. 뉴아메리칸 주석 ( NAC ) 은 20세 기와 21세기를 잇는 교량이 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 시리즈의 주된 목적 은 목사, 교사, 학생들이 성경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힘 있게 선포할 수 있도 록 만드는 것이다. NAC는 성경 주해와 신학 해설의 풍부한 유산을 잇고 있기에 어떤 의미에 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40권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의 명칭은 19세기 말 에 앨버 허비 ( Alvah

Hovey ) 의

편집으로 출간되었던 아메리칸 주석이라는 중

요한 주석 시리즈와의 연속성을 보여 준다. 아메리칸 주석 시리즈를 구성하 는 중요한 주석들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존 브로더스 ( John dus ) 가

A. Broa­

집필한 마태복음 주석인데, NAC 시리즈를 펴낸 브로드먼 ( Broadman )

출판사의 이름이 바로 이 존 브로더스의 이름 일부를 가져와서 만든 것이 다. 아메리칸 주석 시리즈는 성경의 무오성을 수용하는 학자들에 의해 집필 되고 편집됨으로써 NAC 시리즈를 위한 견고한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이런 전통을 따라서 NAC의 저자들은 모두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고, 무오 하며, 완전히 참될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음을 단언한다. NAC 의 관점은 타협 없이 고백적이며 복음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다. 주석은 교회나 학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해 주고자 하는 강해자와 교사에게 필수적인 도구이므로, NAC는 성경 각 권의 신학 구조와 내용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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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서문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 시리즈의 집필진은 성경의 역사적 의미와 현 대적 의미를 모두 밝히려 한다. 기독교 공동체에 NAC만이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수행하기 위해 NAC는 두 가지 사항에 중점을 둔다. 먼저, 이 주석 시리즈는 성경 각 권의 각 부분 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를 강조함으로써 독자가 성경 각 권 및 전체로서 의 성경이 지닌 신학적 통일성을 알게 한다. 그러나 이 시리즈의 집필진은 성경이 본질적으로 풍성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둘째, NAC는 성경이 주로 교회에 속한다는 확신을 갖고 만들어진다. 우리는 성경 을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초가 학자들과 학교들 을 통해 제공된다고 믿지만, 이 시리즈의 편집자들과 저자들은 학계의 연구 를 통해 발견된 내용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방법으로 전달하 려 했다. 따라서 이 주석 시리즈는 실천적이고 적용 가능한 해설을 제공하 면서 신학적 주해에 전력한다. NAC가 제시하는 신학적 초점을 통해 독자는 성경의 각 부분들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경 각 권은 저마다의 내용, 정황, 문학 유형, 문체를 갖고 있다. NAC의 편집자들과 저자들은 성경이 지닌 이런 다 양성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장소, 정황, 문화에 따 라 교리적 강조점과 성경의 사용이 달라진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을 위시한 여러 사항들을 고려해서, 편집자들은 저자들에게 성경 각 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학계의 논쟁들을 다룰 수 있게 했으며, 서론을 집 필할 때 적합한 형태와 분량을 정할 자유를 주었다. 이뿐 아니라, 각 주석의 저자는 자신이 맡은 성경의 기본 구조와 현대적 의미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 합한 방식의 주석 구조를 개발했다. 현대 학계의 논쟁들과 문법 및 구문론 에 대한 전문적인 사항들은 주석의 본문 부분에서는 다루지 않고 대개 각주 부분에 편성했다. 이런 형태를 취함으로써 이 주석은 목사, 일반 성도, 학자 및 교사, 신학생들과 같은 다양한 수준의 독자들에게 유익을 준다. 이런 형 식을 적용한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특권과 책임이 있다 는 것과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읽기 편한 최신 주석을 만들려는 취지에 부합하게 편집자들은 이 주석의 표준 성경 본문을 NIV ( New International Version. 한글 번역본은 개역개정 ) 로 채택했다. NIV를 채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NIV가 성경 원어에 충실할 뿐 아니라, 세련 되고 읽기 편한 문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주석의 저자들은 NIV의 번역과 의견을 달리하는 곳에서는 헬라어와 히브리어 본문을 사역해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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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할 수 있다. NAC에는 1987년에 성경의 무오성을 고수하며 고전적 기독교 전통에 충 실함을 보여 줄 새로운 주석 시리즈를 요구했던 브로드먼 출판사 운영진의 비전과 리더십이 반영되어 있다. 이 주석의 명칭에 ‘아메리칸’( American ) 이라 는 말이 사용되긴 하지만, 미국 외의 국가들을 대표하는 저자들이 이 주석 에 국제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시리즈의 집 필진에는 20여 대학 및 신학교의 학자, 교사, 운영자뿐 아니라 목사, 선교사 일반 성도 등 다양한 부류가 포함되어 있다. NAC 시리즈의 편집자들과 저자들은 이 주석들이 다양한 환경에서 하나 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목사와 교사, 학자와 학생, 교회의 남녀에 게 유익과 도움을 주길 소망한다. 우리는 이 주석이 교회를 세우고, 순종을 독려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쓰임받을 것을 믿는다. 무엇보 다 우리는 우리를 은혜롭게 구속하시고 거룩한 말씀 가운데 자신을 신실하 게 계시하신 우리 주님이 NAC를 통해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되시기를 기도 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편집자 일동


저자 서문

196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우주인 프랭크 보어먼 ( Frank Borman ) 은 달 궤도 를 돌던 우주선 아폴로 8호에서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읽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 보어먼은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누구보다 더 위대한 능력을 가진 분이 있 어야 한다는, 하나님이 계셔야 함을, 실제로 태초가 있었다는, 우리가 창세 기를 읽기로 한 것조차 아무렇게나 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엄청난 느낌을 받았다.” 바츨라프 하벨 ( Vaclav Havel ) 체코 대통령은 1994년 7월 4일 필라델 피아의 독립기념관에서 자유의 메달 ( Liberty Medal ) 을 받으면서 이렇게 연설했 다. “국제 포럼에 참석한 정치인들은 새로운 세계 질서의 기초는 인권에 대 한 보편적 존중이 되어야 한다고 수천 번을 되새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무의미해지지 않으려면 존재의 기적, 우주의 기적, 자연의 기적, 우리 실존 의 기적 등에 대한 존중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218년 전 바로 이 건 물에서 독립선언문은 창조주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선언했다. 인간 은 자신에게 이 자유를 허락한 분을 잊지 않아야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 이다.” 우리 세대는 인간이 지식의 정수를 성취한 것과 70여 년간 서아시아와 동유럽의 수백만을 지배했던 소비에트 제국의 압제가 붕괴된 것을 경험했 다. 나는 우리에게 통찰을 주고 교회로 하여금 이 세상에 성경 최초의 말씀 을 선포하게 하는 모세의 첫 번째 책에 대한 주석을 펴내려 한다. 우리가 거 대한 하늘을 일주하고 있든지 지상의 혼란에 얽혀 있든지 우리는 “하나님 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으로서 우리를 만드신 분과 올바른 경험을 갖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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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갈구한다. 창세기는 창조주에 대해 첫 번째 말씀을 전하며, 창조주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여 우리가 창조주를 알게 되기를 원한다. 나는 창 세기를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말하면서도 하나님은 개별 인간의 삶에 큰 가치를 두셨다는 것 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문명이 끝나는 때, 세계 인구의 절반이 텔레 비전 화면 앞에 앉아 다른 절반이 굶어 죽는 장면을 지켜보게 되는 때를 경 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점차 풍요를 누리는 전문가 집단과 필사 적인 절대 권력이 세워지는 세상 속에서 창세기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려 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신실한 의도에 대한 하나님의 첫 말씀이다. 눈에 보 이지 않는 인공위성이 우리 집 안방에 지구촌 소식을 전해 주고 있음에도, 인류는 인종과 종교의 분열을 지속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창세기는 우리 가 단일의 인간 가족이라는 것과 우리가 서로 “인간성”의 품위를 존중할 때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와 존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을 말하는 첫 말씀 이기도 하다. 하지만 창세기는 또 우리가 죄인이며 선한 세상을 망쳐 놓았 음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다른 말씀, 곧 충만한 마지막 말씀이면 서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위해 기쁨을 통한 인류 창조의 복을 홀로 성취 하는 분을 우리에게 가리킨다. 본서에 담긴 글이 첫 번째 말씀에 영광을 돌 리고 마지막 말씀이 인정할 만한 글이 되기를 바란다. 교계에서 창세기라는 말은 논란거리라는 의미로 통한다. 창세기 1~11장 을 지뢰밭에 비유한 사람도 있었다. 지뢰 탐지병의 도움 없이 지뢰밭을 통 과하려 하는 사람은 사지가 잘린 채 낙오되고 만다. 본문과 주해와 신학에 서 문제되는 것을 상세히 검토하는 일에 내게 은혜를 베푼 복음주의 기독교 의 오랜 해석 전통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가 이 창세기 주석서를 저술하 는 일에 대해 말하자 한 신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책들이 이미 많이 있 지 않나요?” 고대뿐 아니라 최근에도 논제를 명확히 다루는 일에 애쓰고 건 전한 주해의 근거도 갖춘 여러 복음주의 주석서들이 본문을 성경으로 경건 하게 다루어 온 것은 사실이다. 필자의 창세기 연구도 지난 2천년 동안 기 독교회의 발전을 확고히 했던 복음주의적 결론에 합치되는 결론을 냈다. 창 세기는 독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창세기 저자의 관점에 동의한다면, 창세기 의 앞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다는 것, 주 하나님이 그 전능하신 말 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것과 아담과 하와를 특별하게 만드신 것과 에덴 동 산의 타락 사건과 노아의 세대 및 그 후세대가 바벨에서 스스로를 음란하게 드러냈던 죄악의 참혹한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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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의 사도들과 초기 교부들과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창세기 앞부분에 대해 상술하고 명확하게 했던 것은 이에 대한 오해가 아니라 창세기의 유기적 통 일성과 정경 계시의 전개였다. 이 책을 저술하고 펴내는 데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내 아내이자 절 친인 디아 매튜스 ( Dea G. Mathews ) 에게 변함없는 격려에 감사드린다. NAC의 편집 주간 E. 클렌드넨 ( E. Ray Clendenen ) 에게 특별히 감사를 전하는 것은 그 가 유익한 추가분을 만드는 데 애를 썼고 그의 우정이 이 작업을 더 수월하 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브로드먼 앤 홀먼 ( Broadman & Holman ) 의 원고 편집자 들인 린다 스콧 ( Linda Fulton ) 의

L. Scott ),

마크 졸리 ( Marc

A. Jolley ),

트리나 풀턴 ( Trina

전문적인 지원으로 원고의 언어와 책의 형태가 개선되었다. NAC

의 구약 편집자인 동료 L. 부시 ( L. Russ Bush ), 두에인 개럿 ( Duane A. Garrett ), 래 리 워커 ( Larry

L. Walker ) 가

유익한 조언을 해 준 것에도 감사한다. 조언을 해

주신 분들이 더 있다. 비슨 신학교 ( Beeson

Divinity School ) 의

친구이자 동료인

프랭크 틸먼 ( Frank Thielman ) 과 과거 크리스웰 대학 ( Criswell College ) 의 동료였던 커크 스펜서 ( Kirk Spencer ), 도움을 준 학생들로 로버트 후토 ( Robert Hutto ), 앤서 니 추트 ( Anthony Chute ), 제프리 무니 ( Jeffrey Mooney ) 가 있다. 자료를 구하는 일 에는 샘퍼드 대학교 ( Samford University ) 데이비스 도서관 ( Davis Library ) 의 발랄하 고 유능한 직원들, 특별히 제나 해밀 ( Jana M. Hamil ) 에게 감사한다. 비슨 신학 교의 친구이자 학장인 티머시 조지 ( Timothy George ) 도 언급하고 싶다. 그는 이 작업에 종사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충실한 지지를 해 주었다. 케네스 매튜스 ( Kenneth A. Mathews )


NAC 창세기 1

| 서론 개관 |

1. 창세기를 주석하는 것 2. 창세기 문학 ( 1 ) 구조 ( 2 ) 내용 ( 3 ) 결론 3. 창세기와 정경 ( 1 ) 제목 ( 2 ) 창세기와 모세오경

모세오경의 상호 의존성

모세오경의 구조

모세오경의 주제

( 3 ) 창세기와 모세 공동체 ( 4 ) 창세기와 기독교의 선포 4. 창세기의 신학 ( 1 ) 족장의 약속

강복

( 2 )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 ( 3 ) 인간 ( 4 ) 죄 ( 5 ) 문명 ( 6 ) 언약

20


21

5. 창세기 해석 ( 1 ) 성경 내적 해석 ( 2 ) 유대교의 해석 ( 3 ) 기독교의 해석 ( 4 ) 모세오경 비평

자료

양식사와 전승사

수정론의 유행

전통적인 입장

문학적 읽기

정경

결론

6. 창세기 1~11장과 고대 문헌 ( 1 ) 창조와 인류

애굽

메소포타미아

( 2 ) 에덴 ( 3 ) 족장의 장수 ( 4 ) 홍수 7. 창조와 현대 해석

GENESIS ( 1 ) 창조주의와 자연주의 ( 2 ) 해석상의 문제

성경과 지식

역사냐 스토리냐


서론

창세기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 행 20:27 ) 을 선포하는 일의 의의에 있어 더 할 나위 없이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창세기는 성경 전체에 문학적 신 학적 각인을 새겨 놓았다. 창세기가 없는 성경은 기초가 없거나 회반죽도 없이 그냥 벽돌만 쌓아 올린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 근원이 제 역할을 하게 두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인 유산도 언제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확신 할 수 없다. 창세기의 첫 절은 형이상학적 전제를 표명한다. 이것은 초월적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존재해서 전체 성경의 계시에 대한 철학적 초석으로 역사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십자가 없이 복음도 없듯이, 모세의 첫 번째 책에 나온 신성한 사건 없이 그 어떤 구원의 역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강복의 수납자로 부르심 ( 12:1~3 ) 에 대한 강조 를 담은 선조 기사 ( ancestral

account ) 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1~11장에

나오는 태고의 역사를 통해서도 진리가 된다. 하나님을 구세주만이 아니라 창조주로도 믿었던 이스라엘의 믿음은 “하나님과 세계와 이스라엘과 개인 에 대한 모든 담론을 위한 근본적이고 총체적 근원을 이루는 전포괄적인 체 계” 1  )  를 허락한다. 우리 기독교의 소망 선포는 창세기에서 최초로 들었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세 가지 기대라는 신학적 토양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 1 ) 하나님은 인간 가족에게 출산과 지배의 복을 줄 것이다 ( 1:26~28 ). ( 2 ) 하나님은 인류 의 대적에 대한 승리를 성취할 것이다 ( 3:15 ). ( 3 )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아 브라함의 후손, 곧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것이다 ( 12:1~3 ). 창세기 에서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계획의 초기 단계 를 발견할지라도,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서 역사적 이스라엘과 그 위대한

1  )   R. Rendtorff, Canon and Theology , trans. and ed. M. Kohl (Minneapolis: Fortress, 1993 [1991]), 107~108.

22


23

서론

아들, 나사렛 예수, 우리의 살아 있는 주님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키우고 분명해지게 만드는 일은 남아 있다. 이 시작의 책은 출발부터 완결된 성서 모음집을 통해 우리가 알고 보고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을 허락한다. 이어지는 성경책들 가운데 하나님과 인간 본성과 세계와 구원의 역사에 대해 전해지는 것은 이미 이 창조와 강복의 책에 축소판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나머지 책은 명료하게 만들고 구체화시 키며 해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선구적인 조명이라는 “해 아래 에는 새 것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창세기 없이 율법과 복음을 이 해할 수 있을까? 창세기의 족보 없이 마태와 누가의 복음 역사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바울의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아담과 아브라함에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창세기의 목가적인 과거라는 이미지 없이 요한의 묵시에서 미래의 에덴을 볼 수 있겠는가? 2  )   어떤 공동체에도 그 첫 부모가 없을 수 없듯이 “창세기” 없는 기독교 세계와 세계관은 없을 것이라는 말은 아무리 많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답을 구하는 모든 삶의 문제를 수용하는 일관성 있는 중심을 가 진 복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은 우리가 사는 다원주의 시대에 긴요한 일이 다. 이 복음은 이질적인 관념의 혼합체가 아니라 역사의 통일된 계시로서 거룩한 성경을 통해 해설된 것이다. 이 복음은 우리 구세주의 십자가와 부 활에 그 절정을 두는데, 구세주는 자신의 인격 안에 홀로 만물을 붙든다 ( 골 1:16~17 ).

창조주와 피조물, 현재와 미래, 생과 사, 잃어버린 에덴과 되찾은 에

덴, 미덕과 악덕, 가족 연대와 국가 연대, 이 모든 것들, 아니 그 이상이 최 초의 책의 신학적 질료인 것이다. 현 세대의 끝에서 다음 세대를 바라보면 서 우리가 형제들에게 믿음과 소망으로 견뎌 낼 수 있도록 함께 창세기의 언어로 이 과거의 일을 선포하도록 하자.

1. 창세기를 주석하는 것 창세기를 다루는 학술 문헌은 “군대”( Legion ) 로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 다. 이 단원에서는 창세기 1~11장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역사 비평적 문제

2  )   예. L. E. Cooper, Ezekiel, NAC (Nashville: Broadman & Holman, 1994), 349에 나오는 도표 “Restoration of Edenic Ideals”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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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중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주석가들뿐 아니라 비평가들도 창세기에 흥미를 갖게 만드는 주해적 신학 적인 관심사를 접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본문 자체가 강조하는 바를 밝혀내 려는 목적을 가지고 창세기 저술상의 특징에 의지하여 문학적이고 신학적 인 주해에 초점을 둘 것이다. 성경 주해는 본문 ( 그 내용이나 외형 모두 ) 으로 하여 금 그것이 가진 의미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성경 저작 의도가 진술되는 경 우는 드물어서 추론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정표로 문법 구조와 내러티브 구조에 의존해야 한다. 본문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고대 저 자의 의도를 분간해 낼 수 있다. 현존하는 본문의 형태를 통해 정경 계시에 본문이 신학적으로 기여하는 바를 끌어내서 이를 조직화된 철학적 범주가 아니라 본문 자체의 언어를 통 해 표현할 것을 제안한다. 게다가 흔한 창세기 주석서처럼 실제적이거나 추 정되는 문헌 자료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산만해지지는 않을 것이 다. 자료가 신학적 관심사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필요한 경우에만 문헌 자료 에 대해 간단히 언급할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상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의 최종 상태의 창세기가 사려 깊고 일관된 신학을 보여 주는 응집 단위라는 점에 만족한다. 이 점을 입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근본적으로 창 세기를 만든 단일의 정신이 존재하고 그것이 바로 모세였다고 믿는다. 그래 서 이 정신을 “저자”라고 편하게 말하지만, 어느 정도 자료 편찬이 개입되 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저자/편찬자”( author/compiler ) 라고 말할 것이다. 성서학자들이 본문의 정경 형태에 대해 새롭게 갖는 관심에 기뻐하며 이 평 가가 교회로 하여금 창세기의 총체적 메시지를 파악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소망한다. 그래서 본서의 목표는 창세기 거시구조의 조명을 통해 저술상의 문학적 이고 신학적인 윤곽을 그려 내는 것이다. 창세기가 독립된 저술이 아니라 모세의 “책”( 모세오경 ) 을 시작하는 것임을 잘 알기에, 본서는 또 창세기의 의 미와 이 의미가 내는 메시지가 모세 공동체 내에서 수행한 역할에 대한 정 보를 얻기 위해 토라가 갖는 보다 큰 정경적 맥락도 끌어낼 것이다. 또한 우 리가 가진 것이 창세기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이기에 신약의 해석이 인도 하는 대로 본문이 기독교 공동체에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지적할 것이다. 그래서 본서는 해석적인 의미를 드러내면서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국면의 신학적 맥락 안에 모든 본문을 위치시킬 것이다. 그 순서는 ( 1 ) 창세기와 이스라엘의 토라, ( 2 ) 창세기와 기독교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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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본 서론에서는 독자에게 주석상의 논의를 위해 필수적인 구체적 문제에 대해 알리려고 한다. 본 주석서가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관심에 중심을 두고 있기에, 본 서론은 성서의 문학적 창조로서 창세기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특징에 대해 말할 것이다. 창세기 주석은 3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창 세기가 과거에 어떻게 읽혔는지 검토할 때는 몇 안 되는 가장 결실이 많았 던 시대만 강조할 수 있겠다. 창세기가 고대의 산물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제외하고 창세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부합되는 고대의 정황을 고려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창세기를 우리가 속한 현 시대의 정황 속에 결부시키기 전에 창세기의 원 청중이 속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 속에 창세기를 두고 시작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우월하다. 물론 현대 과학의 배 경 가운데 창조 기사를 읽을 때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포괄적 인 기독교 세계관을 형성해야 한다면 그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성경 의 책과 자연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킨다.

2. 창세기 문학 창세기의 문학적 구성은 건물을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진 건축상 의 특징과 비슷하다. 관찰자는 먼 거리에서 유리창을 전체적으로 보고 그림 속에 서술되는 장면이나 인물의 정체성을 분간하게 된다. 하지만 유리 콜라 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배열된 조각들 ( 모양이나

크기, 색이 서로 다른 ) 의

복잡한

디자인이 드러나 멀리서는 알아채지 못한 선들이 눈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창세기는 대칭을 이루는 통일체로 된 복합적인 문학 저술이지만 거기에 담 긴 장르는 다양하다 ( 예. 내러티브, 족보, 서정시 ).3  )   이 문학 단편 중 일부는 이미 기 록된 것이고 또 일부는 저자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서 저자/편찬자가 하나 3  )   궁켈(H. Gunkel)의 양식 비평과 그 계승인 전승사에 따라 창세기를 수많은 소부분인 문학 단 편들로 다듬고 각 장르를 묘사하며(예. 영웅담이나 잡다한 “기록”) 저작 배경을 상상하고 기록 에 이르게 된 구전의 역사를 더듬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 예로 G. W. Coats, Genesis: With an

Introduction to Narrative Literature, FOTL 1 (Grand Rapids: Eerdmans, 1984)를 보라. 이 방 법론은 심각한 도전을 받아 왔고 개별 단위에 부여된 양식 범주는 시기에 맞지 않거나 무의미 한 것으로 드러났다. B. K. Waltke, “Oral Tradition,” in A Tribute to Gleason Archer, ed. W. Kaiser and R. Youngblood (Chicago: Moody, 1986), 17~34; R. N. Whybray, The Making of the Pentateuch: A Methodological Study, JSOTSup 53 (Sheffield: JSOT, 1987) 133~219; D. Garrett, Rethinking Genesis: The Sources and Authorship of the First Book of the Pentateuch (Grand Rapids: Baker, 1991), 35~50을 보라.


NAC 창세기 1

26

로 묶은 것이었는데, 저자/편찬자가 이들을 조합한 것이 언제나 우리를 만 족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틀림없이 일관되고 통일된 줄거 리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요셉 스토리 ( 37~50장 ) 는 그에 앞선 족장 내러티브와 수사적 문 체가 달라서 독립되고 자립적인 담화 ( discourse ) 로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요셉 스토리는 창세기의 구조를 이루는 장치 ( 37:2의 석 ) 에

‘톨르돗,’ NIV는 “account”로 해

힘입어 전체 구조에 통합될 수 있었고 이로써 필연적으로 창세기의

중요 주제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 부분은 족장들의 가나안 귀환 이후 야곱 가족이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가족과 맺은 약속을 보 존하여서 야곱 씨족의 “70 인물”( AV, 창 46:27; 출 1:5 ) 을 애굽에 두었는지를 보 여 준다. 또한 요셉 내러티브 안에 유다와 다말의 기사 ( 창 38장 ) 를 끼워 넣은 것에 대해서도 고려할 수 있는데 이 기사는 이어지는 플롯의 내러티브 흐름 에 이질적인 것으로 읽혀진다. 이 기사를 여기에 위치시킨 것은 편찬자가 자료를 묶는 과정에서 이런 괴리에 반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두 가지 문학 요소가 결합되었던 것이다. 본래의 요셉 스토리 ( 37장; 39~48장 ) 와 4  )

것이다.

야곱과 그 가족의 대규모 내러티브 ( 38장;

49~50장 ) 가

결합되었던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야곱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추

가한 것이 아니다.5  )   이는 오히려 요셉 발췌구 ( pericope ) 내에 담긴 약속의 신 성한 승계라는 창세기의 주제를 이루는 관심을 열어 간다. 38장은 황량함의 모티프를 담아내고 ( 하지만

여기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의 잘못 때문이다 ),

이는 아브라함

의 씨족 ( 아브라함 - 사라, 이삭 - 리브가, 야곱 - 라헬 ) 에서 잃어버린 후손에 대한 트라우 마가 되풀이됨을 반향한다. 유다 - 다말 스토리는 과거에 대한 또 하나의 반 향으로 종결되는데,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에서와 야곱 ( 25장 ) 을 생각나게 하 는 쌍둥이의 출생 투쟁이다. 이 형제간 경쟁의 패턴은 다말의 태에서 손이 먼저 나온 세라를 그 쌍둥이 형제 베레스가 대신하면서 나타난다. 이는 족 장의 승계에서 되풀이되는 문제를 표면화한다. 야곱의 첫째 아들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는 아버지를 속인 것으로 인해 야곱을 계승할 지위를 4  )   이 두 요소를 확인한 R. E. Longacre, Joseph, A Story of Divine Providence: A Text Theoretical

and Textlinguistic Analysis of Genesis 37 and 39–48 (Winona Lake: Eisenbrauns, 1989), 22 를 보라. 롱에이커는 저자가 유다-다말 스토리에 둔 인클루지오(inclusion)는 어느 정도 플롯의 흐름에 긴장감을 둔 때문이라고 본다.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잠시나마 궁금해서 답답해지게 만든 다. 바로 이 순간에도 가족들 모두 13년간 요셉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몰랐다”(p. 26). 5  )   같은 견해로 C. Westermann, Genesis 37~50: A Commentary, trans. J. Scullion (Minneapolis: Augsburg, 1986 [1982]), 49.


27

서론

박탈당했다 ( 34:18~31; 35:22 ). 37장에 나오는 요셉의 꿈이 요셉을 야곱의 계승자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 으로 보일지라도, 38장은 유다의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가 기묘하게 출생한 것을 통해 유다 - 베레스의 계보가 야곱의 전통을 이어 갈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유다에 대한 야곱의 축복 ( 49:8~12 ) 에서 확인되는데, 이 축복에는 유 다 - 다말 기사에 대한 암시가 담겨 있다.6  )   그래서 결국 유다는 야곱 가계의 출중한 아들임을 증명할 것이다. 게다가 이 스토리에서 유다의 비도덕적인 행위는 이들의 영적인 유산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 아들의 도덕적 결함을 창 세기가 전개하고 서술하는 데 기여한다. 애굽 체류는 이 쇠퇴를 어느 정도 저지시킨 셈인데, 이들을 맞이한 애굽의 주인이 히브리인을 차별했기 때문 이고 ( 43:32 ), 이러한 차별로 인해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선조 아브라함의 영적 유산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점을 고려해서 유다 - 다말 기사를 읽는다면, 이 기사는 요셉 내러티브의 목적에 전혀 무관하지 않게 된다. 그 래서 서구인들에게 이상해 보일 만한 것이라도 성경 저술 작업에 방해되지 는 않았는데, 성경 저자는 자료를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과 조화를 이루게 해서 보다 풍부하고 복합적인 문학적 질감을 만들어 낸 것이다.

(1) 구조 창세기에 드러나는 것처럼 족보와 스토리의 복합체에 대해 다양한 구조 분석이 이루어지는 것에 놀라지 말아야겠지만, 학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 합 의점은 존재한다. 1~11장의 내용이 12~50장에 나오는 족장 스토리와 구별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고 있지만, 이른바 “태고의 역사”( Primeval History ) 가

정확히 어디서 끝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1~11장에서도

여러 족보를 담은 기사 네 개를 파악할 수 있는데, 이는 창조, 에덴 안과 밖 의 인류 ( 아담/하와;

가인/아벨 ),

노아의 홍수, 바벨탑이다. 족장 기사 가운데에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의 세 가지 내러티브 모음집이 있다. 이삭 고유의 모음 집이 없는 것은 자기 아버지 ( 아브라함 ) 와 아들 ( 야곱 ) 의 그늘에 가려 전환적 인 물이라는 주변적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또 ‘톨르돗’( NIV는 AV는 “세대”[generations]로 번역 )

“기사”[account],

표제와 족보가 창세기의 광범위한 구조상의 개요

6  )   J. Goldin, “The Youngest Son or Where Does Genesis 38 Belong?” JBL 96 (1977): 27~44와 개럿(Garrett)이 요셉 내러티브의 통일성을 논증한 Rethinking Genesis, 173~77를 보라.


28

NAC 창세기 1

에 결정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바다. 표면적인 차원에서 창세기의 중요한 문학적 장치는 족보 지시문인 “족보 는 이러하니라”( NIV는

“이는 ~의 기사라”[this is the account of], AV는 “이들은 세대들이라”

[these are the generations] ) 다.

이것이 창세기에 나타났다는 점은 창세기 이전 자

료의 가능성 ( 예. 5:1 ) 이나, 창세기의 거시 구조에서 볼 때 족보가 갖는 중요성 을 보여 주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7  )   일반적으로 “세대”를 뜻하는 히브리 단 어 ( ‘도르’ ) 가 아니라 ‘얄라드’( “출산하다, 들” ) 이라는

낳다” ) 에서

파생된 ‘톨르돗’( “자식을

만든 일

단어를 사용했다. ‘톨르돗’은 창세기뿐 아니라 창세기 바깥에서

도 후손의 목록이나 종족의 족보를 소개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8  )   흔 히 ‘톨르돗’이 지시하는 대상에는 간략하게 전기 ( biograph ) 나 역사를 묘사한 것 ( 예. 6:9의 노아 ) 도 있다. 이런 지시문은 수메르 왕의 목록처럼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으로 족보나 왕의 목록에 사용된 것으로 입증된 것이다. 하지만 2장 4절과 37장 2절에서는 ‘톨르돗’ 구절에 바로 이어 대규모 내러티브가 나온 다. 번역본들은 이 난점을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이 경구 ( catchphrase ) 속에 있는 ‘톨르돗’이 내러티브 “기사”( 2:4; 37:2 ) 나 “가족 스토리”( “story of the family”; NRSV, 37:2 ) 를

의미하는 “세대”보다 더 넓게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

지만 2장 4절은 창세기에 드러나는 ‘톨르돗’ 언어를 모방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이것의 목적은 창조 가운데 있는 어떤 계승을 보여 주어서 2장의 “땅”으로 관심을 좁히려는 것이다 ( 주석을 보라 ). 창세기 37장 2절은 야곱 족보 의 시작이 되는 ‘톨르돗’ 형식구로 설명할 수 있으며, 야곱 족보는 요셉 내 러티브에 이어 46장 8~27절에 나온다. 야곱 족보를 요셉 문서 뒤에 위치시 킨 것은 요셉 에피소드가 요셉의 아들들이 가나안 바깥인 애굽에서 태어난 경위 ( 46:26~27 ) 를 설명하려는 것이기에 적절하다.9  )   37장 2절에 나오는 별도 의 ‘톨르돗’은 앞에 나온 족장 사이클 ( 11:27; 25:19 ) 처럼 요셉 스토리의 경계를 표시하면서 족장 내러티브에서 ‘톨르돗’이 사용된 것과 균형을 이룬다. ‘톨르돗’ 구절을 창세기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따 른다면 ‘톨르돗’ 구절은 창세기를 12개의 단원으로 나누게 되고 첫 번째를 제외한 모든 단원이 ‘톨르돗’ 형식어구로 시작하는 셈이다.

7  )   2:4; 5:1; 6:9; 10:1; 11:10, 27; 25:12, 19; 36:1, 9; 37:2. 창세기의 이런 정형화된 구절 외에도 ‘톨

르돗’(tOwdVlOwT)은 창 10:32과 25:13에 나온다. 창세기 외에 베엘레 톨르돗(tOwdVlOwT hL,aew>, “족보는 이러하니라”)이 나타나는 경우는 민 3:1, 룻 4:18이 있다. 대상 1:29도 참고하라. 8  )   예. 창 5:1; 10:1; 11:10; 11:27; 25:19; 36:1, 9; 출 6:16; 민 1:20; 3:1; 대상 1:29; 5:7. 9  )   같은 견해로 Garrett, Rethinking Genesis, 100.


29

서론

단원 I

하늘과 땅의 창조 ( 1:1~2:3 )

단원 II

땅의 가족 ‘톨르돗’( 2:4~4:26 )

단원 III

아담 계통의 ‘톨르돗’( 5:1~6:8 )

단원 IV

노아의 ‘톨르돗’( 6:9~9:29 )

단원 V

노아의 아들들 ( 셈, 함, 야벳 ) 의 ‘톨르돗’( 10:1~11:9 )

단원 VI

셈의 ‘톨르돗’( 11:10~26 )

단원 VII

데라 ( 아브라함 ) 의 ‘톨르돗’( 11:27~25:11 )

단원 VIII

이스마엘의 ‘톨르돗’( 25:12~18 )

단원 IX

이삭 ( 야곱 ) 의 ‘톨르돗’( 25:19~35:29 )

단원 X

에서와 가족의 ‘톨르돗’( 36:1~8 )

단원 XI

에서의 ‘톨르돗’( 36:9~37:1 )

단원 XII

야곱 ( 요셉 ) 의 ‘톨르돗’( 37:2~50:26 )

창세기의 구조와 가능성이 있는 창세기 이전 자료에 대해 ‘톨르돗’ 구절 이 갖는 의의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톨르돗’ 구절의 출현 으로 야기된 문제 중에 많은 것들은 만족스러운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10  )   때때로 이 표제가 선행 자료와 더 관계가 깊은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 예. 5:1의 아담 ),

경우에 따라서는 거명된 인물이 해당 단원의 주제인 경우도 있으

며 ( 예. 6:9의 노아 ), 또 표제가 이어지는 자료의 주제가 되는 후손의 아버지 이 름을 말한 경우도 있다 ( 예.

11:27의 데라 ).

모든 경우마다 ‘톨르돗’의 위치가 가

장 조리에 맞는 지점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이 지시문을 통한 구분으로 보면 하나로 묶여 있어야 할 것이 나뉘기도 하 고 ( 예. 36:1과 36:9에서 에서의 족보가 두 번 나뉜다 ), 셋의 족보 ( 5:1~32 ) 부분의 내러티브 결론 ( 6:1~8 ) 처럼 별도의 단원에 속해야 할 것 같이 보이는 것들이 같은 머리 글 아래 나오는 경우도 있다. ‘톨르돗’ 단원의 내용도 길이나 성격에서 상당 히 다양하다. 예를 들어 일부는 주로 족보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에 ( 예. 11:10 ),

주로 내러티브인 경우도 있다 ( 2:4;

37:2 ).

5:1;

이와 결부된 문제는 ‘톨르돗’

머리글이 족보로 여겨지는 가족 기록에 대한 창세기 이전의 기록 자료 ( 5:1a

10  )   최근에 이루어진 시도 가운데 T. D. Andersen, “Genealogical Prominence and the Structure of Genesis,” in Biblical Hebrew and Discourse Linguistics, ed. R. Bergen (Dallas: Summer Institute of Linguistics, 1994), 242~266이 있다. 안데르센은 ‘톨르돗’ 단원(즉 하늘과 땅, 노아, 데라, 이삭, 야곱)이라는 스토리에 일관된 내적 구조가 있음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렇게 제안하 는 패턴에 예외가 많고 모든 경우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30

NAC 창세기 1

의 “적은 책” ) 를

가리키는 것인지 여부다. 기록된 형태로 된 일련의 가족 기록

으로 받아들인다면 창세기에는 등록부/스토리 전체가 나온 것인가 아니면 일부만 나온 것인가? 게다가 이 형식어구가 새로운 단원을 시작하는 것인 지 아니면 앞의 자료를 종결짓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꽤 논쟁이 있다. ‘톨르돗’ 단원 사이에 뚜렷한 패턴이 나오지만, 이 단원들이 완벽하게 대 칭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세 명의 족장 모음집 ( 아브라함,

야곱, 요셉 ) 에

족보가

담겨있다.11  )   셈의 ‘톨르돗’: 11:10~26 아브라함 내러티브 ( 데라의 ‘톨르돗’ ) : 11:27~25:11 이스마엘의 ‘톨르돗’: 25:12~18 야곱 내러티브 ( 이삭의 ‘톨르돗’ ) : 25:19~35:29 에서의 ‘톨르돗’: 36:1~8; 36:9~37:1 요셉 내러티브 ( 야곱의 ‘톨르돗’ ) : 37:2~50:26

하지만 이런 배열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36장 1절과 36장 9절에서 에서를 두고 ‘톨르돗’ 구절이 혼란스럽게 반복되는 것을 무시하고 이 둘을 하나로 합쳐 놓아야 한다. 하나의 단일체로 다루고 있는 창세기의 앞부분을 추가한 다면 족보가 교차하는 4중 배열이 드러나게 된다. 1. 창조와 최초 인류 ( 1:1~11:9 )  셈의 족보 ( 11:10~26 )  2. 아브라함 스토리 ( 11:27~25:11 )  이스마엘의 족보 ( 25:12~18 )  3. 야곱 스토리 ( 25:19~35:29 )  에서의 족보 ( 36:1~8; 36:9~37:1 )  4. 요셉 스토리 ( 37:2~50:26 )

이 배열도 에서 족보를 생략하고 5장 1~32절과 10장 1~32절에서 족보 를 구분하는 머리글이 되는 ‘톨르돗’ 경구를 확실히 무시해야 한다. 다른 대

11  )   G. Wenham, Genesis 1–15, WBC (Waco: Word, 1987), 248에 언급된 것.


31

서론

안은 선역사와 족장 내러티브 모두를 다섯 개의 단위로 묶는 것이다.12  )   하늘과 땅: 1:1~4:26

데라 ( 아브라함 ) : 11:27~25:11

아담: 5:1~6:8

이스마엘: 25:12~18

노아: 6:9~9:29

이삭 ( 야곱 ) : 25:19~35:29

노아의 아들들: 10:1~11:9

에서 - 에돔: 36:1~37:1

셈: 11:10~26

야곱 ( 요셉 ) : 37:2~50:26

이는 반복되는 ‘톨르돗’ 패턴을 일반적으로 따른 것이지만, 역시 에서 목 록을 생략한 것이며 노아와 야곱 기사를 각 부분의 중심 에피소드로 인정하 는 이점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난점은 2장 4절의 ‘톨르돗’ 구절 을 무시해야 한다는 점인데, 이 구절은 창조와 에덴 내러티브를 구분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창세기 1~11장과 바벨론의 기원 신화인 아트라하시스 ( Atrahasis ) 사이에 내용상의 유사성을 최소한 어느 정도 인정해 왔다. 키카와다 ( I. Kikawada ) 와

퀸 ( A. Quinn ) 은 창세기 1~11장과 바벨론 신화 사이에 고대의 문

학적인 관습을 반영하는 주제와 구조상의 유사성을 제시했다.13  )   바벨론 신 화는 인류의 창조와 인류가 신의 세 가지 위협에도 살아남은 것에 대해 말 하는데, 이 위협 부분에는 두 가지 위협 외에 세 번째 위협으로 홍수가 나온 다. 이 신화는 인류의 인구 증가에 제한을 가하면서도 그 보존은 보장하는 신들 사이의 타협으로 끝맺는다. 그렇다면 그 개괄적인 개요는 세 가지 움 직임을 갖게 된다 ( 창조,

위협, 해소 ).

키카와다와 퀸에게 창세기의 앞부분도 비

슷하게 이해되었으나, 세 가지 위협은 강복 약속과 관련되며, 두 번째는 이 중적 위협, 세 번째로 노아의 홍수에 대응된다. ( 1 ) 아담의 범죄, 과 아벨,

( 2b )

( 2a )

가인

라멕의 도발, ( 3 ) 홍수. 해소에 대응하는 창세기 부분은 10장

1절~11장 32절로 여기에는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는 것이 담겨 있다. 키 카와다와 퀸이 1~11장을 배열한 것도 족보를 설명하는 것이고 이로써 결 론적으로 우리가 앞서 본 것처럼 내러티브를 가로지른다.14  )

12  )   같은 견해로 J. Blenkinsopp, The Pentateuch: An Introduction to the First Five Books of the

Bible (New York: Doubleday, 1992). 13  )   I. Kikawada and A. Quinn, Before Abraham Was: A Provocative Challenge to the Documentary Hypothesis (Nashville: Abingdon, 1987), 36~53. 14  )   같은 책 60. pp. 47~48에 나오는 두 사람의 플롯 개괄에 부분적으로 성구가 언급되어 있다.


32

NAC 창세기 1

A B C C’ D E

창조 ( 1:1~2:3 )  족보=하늘과 땅 ( 2:4 )  아담과 하와 ( 2:5~3:24 )  족보=하와의 아들들 ( 4:1~2 )  가인과 아벨 ( 4:3~16 )  족보=가인의 계보 ( 4:17~22 )  라멕의 도발 ( 4:23~24; 4:25~26? )  족보=아담/셋 ( 5:1~32 )  노아의 홍수 ( 6:1~9:29 )  족보=국가 도표 ( 10:1~32 )  흩어짐 ( 11:1~9 )  족보=셈의 계보 ( 11:10~26 )

우리가 즉각적으로 받는 인상은 4장 1~2절과 4장 17절에서 하와의 아들들 의 족보와 가인의 계보에 ‘톨르돗’ 경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톨르돗’ 표지를 수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완전한 성공을 보지 못한 것이다. 개 럿 ( D. Garrett ) 은 자신의 『창세기를 다시 생각함』 ( Rethinking Genesis ) 에서 키카와다 와 퀸의 분석을 개선하여 1~11장의 창조 - 위협 - 해소 구조가 아브라함 자손 의 보존과 관련된 위협을 통해 창세기 전체에 지침으로 기능한다고 본다.15  )   프롤로그

태고의 역사

1:1~11:26

전이

족보

11:27~32

위협

아브라함 사이클

12:1~25:11

전이

족보

25:12~18

위협

야곱 사이클

25:19~35:22b

전이

족보

35:22c~36:43

위협

요셉 사이클

37:1~46:7

전이

족보

46:8~27

해결

애굽 정착

46:28~50:26

키카와다 - 퀸의 저술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흔히 시도된 이론상의 양식

15  )   Garrett, Rethinking Genesis, 123.


33

서론

과 전승사에 대한 재구성에 반하여 그 기원에 대해 확립된 고대 근동의 양 식 ( ‘아트라하시스’ ) 에 창세기를 연관지으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개럿의 제안이 유익한 것은 창세기에서 가장 분명한 편집 요소 ( ‘톨르돗’ ) 를 가지고 작업하려 고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히 홍수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스토리라도 위협과 최종 해결이라는 관념을 담을 수밖에 없다고 여길 이유 는 충분하다.16  )   키카와다와 퀸은 조로아스터의 설화에서 비슷한 모형을 발 견하고 이를 다윗과 밧세바, 출애굽기 1~2장, 마태복음 1~3장 등 창세기 1~11장과 같은 플롯을 따르는 성경의 다른 몇 가지 스토리에도 적용시킨다. 최근에 창세기에서 구조상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또 하나의 시도는 렌즈 버그 ( G. Rendsburg ) 의 『창세기의 편집』 ( The Redaction of Genesis ) 이다. 렌즈버그는 평행 구조와 교차대칭 구조 같은 편집 과정에서의 구조 형성에 호소한다. 족장 사이클 ( 아브라함, 야곱, 요셉 ) 은 교차대칭 구조를 가지고 있고 태고의 역사 는 구조가 평행적이다. 렌즈버그가 족장 사이클을 다룬 것은 몇 가지 유용 한 것이 있지만,17  )   창세기 전체의 포괄 구조는 제시하지 못한다.18  )   렌즈버 그가 1~11장을 분석한 것은 새손 ( J.

Sasson ) 의

초기 저작에 의존한 것인데,

이 저작은 각각 10세대를 포괄하는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두 개의 평행을 이루는 순서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 I ) 창조에서 네피림까지 ( 1:1~6:8 ) 와 ( II ) 홍수에서 셈의 족보까지 ( 6:9~11:26 ) 가 그것이다. 다음은 렌즈버그가 제시 한 것으로 두 개의 열이 평행을 이루고 있다. A 창조,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A’ 홍수,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1:1~3:24)

(6:9~9:17)

B 아담의 아들들(4:1~6)

B’ 노아의 아들들(9:18~29)

C 인류의 기술 발전(4:17~26)

C’ 인류의 종족 발전(10:1~32)

D 아담에서 노아까지 10세대(5:1~32)

E’ 몰락: 바벨탑(11:1~9)

E 몰락: 네피림(6:1~8)

D’ 노아에서 데라까지 10세대(11:10~26)

두 열이 완전히 대응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의할 수도 있지만 ( D와 E’, 그리고 E

16  )   P. K. McCarter, “A New Challenge to the Documentary Hypothesis. Have Modern Scholars Failed to Appreciate the Overall Structure of Genesis 1–11?” BibRev 4 (1988): 34~39를 보라. 17  )   예. 렌즈버그(Rendsburg)는 족장 기사의 통일성을 파악했다. G. W. Coats, “Redactional Unity

in Genesis 37–50,” JBL (1974): 15~21과 M. Fishbane, “Composition and Structure in the Jacob Cycle (Gen. 25:19–35:22),” JJS 26 (1975): 15~38, rev. in Fishbane, Text and Texture (New York: Schocken, 1979), 40~62를 보라. 18  )   Garrett, Rethinking Genesis, 115~121에 나오는 비평을 보라.


NAC 창세기 1

와 D’ ) ,

34

11장 10~26절의 족보가 보다 큰 구조 안에서 바벨탑 에피소

드 ( 11:1~9 ) 와 국가들이 흩어진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되는 인물인 아브 라함의 출현 ( 11:27~25:11 )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기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함정은 이 분석이 ‘톨르돗’ 장치를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톨르돗’ 장치는 태고 역사의 저술상 구성에서 가장 뚜렷한 편집 상의 특성이다. 우리는 창세기의 편집 장치 ( ‘톨르돗’ ) 에 의지함으로써 더 단순한 과정을 고 수하면서 본문에 표시된 것에 따라 단원들을 파악하기로 했다. ‘톨르돗’ 언 급을 창세기를 저술하면서 가졌던 관심에 따라 이용하고 수정했던 창세기 이전 자료의 증거로 여기는 것이 최선이다. 앞서 저자/편찬자가 이 경구를 사용함에 있어 맹목적이지는 않았음을 보았다. 2장 4절에서 저자의 창작은 족보의 나열이나 가족 기록에 드러나는 표제를 모방한 것이다. 창세기 5장 1~2절은 내러티브를 하나 보충하는데, 이는 형식적인 족보상의 나 열 ( 5:3~32 ) 에 대한 서두로서 앞에 나온 창조 내러티브를 의도적으로 반향하 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룬다 ( 주석을 보라 ). 노아의 가족과 관련하여 셋의 족 보에 나오는 마지막 단락의 마무리 ( 5:32 ) 는 홍수 스토리의 개입으로 지연되 었다가 9장 28~29절에서 마무리된다. 비슷한 패턴을 가진 5장과 11장 사 이의 관계는 불확실하다. 두 장은 서로 다른 자료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 면 하나의

( 기록 )

자료에서 나왔으나 11장이 수정을 거친 것일 수 있다. 두

장은 창세기의 ‘톨르돗’ 구절 사용에서 드러나는 융통성을 훌륭하게 그려낸 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창세기에서 이 형식어구에 이어지는 것이 반드시 원 자료에서 나온 소재인 것은 아니다.19  )   그래서 두 장의 근원과 내용을 가지 고 창세기 이전 자료를 자신 있게 재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톨르돗’ 구절을 사용함에 있어 이런 유연성 때문에, 이 구절이 현재의 본 문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논란이 있다. 대다수는 이 반 복구가 족보를 수반하든 내러티브를 수반하든 아니면 둘 다이든 이어지는 단원의 내용을 시작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반대로 와이즈먼 ( P. Wiseman )

J.

등은 ‘톨르돗’ 구절이 종결부 문장에 속한 것으로서 그 앞에 나온

내용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20  )   이를 지지하는 외적 증거는 점토판 ( ta­

19  )   같은 견해로 Garrett, 같은 책, 97~100, 102~103. 20  )   P. J. Wiseman, New Discoveries in Babylonia about Genesis (London: Marshall, 1936), D. J. Wiseman, ed., Ancient Records and the Structure of Genesis (Nashville: Nelson, 1985)로 재 간행됨. R. K. Harriso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69)


35

blet ) 의

서론

필경자나 소유자의 이름을 적거나, 그 날짜를 적고, 점토판의 제목을

다는 간기 ( colophon ) 로 점토판을 마무리하는 설형 문자의 관습이다. 해리슨 ( R. K. Harrison ) 판을 따르면 창세기의 원 자료는 현존하는 1~36장에 드러나는 대로 열한 개의 점토판이었다. 편찬자 ( 모세 ) 가 이 점토판을 순서대 로 이어 거의 다 모았던 것인데, 편찬자는 아마도 요셉의 마지막 스토리는 구전 자료에서 끌어왔을 것이다 ( 37~50장 ).21  )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선별적 인 내적 증거가 이 재구성을 지지할 수 있지만,22  )   이 제안은 책 전체에 대 해서는 설득력이 없고 ‘톨르돗’이라는 용어의 분명한 의미에도 영향을 미치 는데, ‘톨르돗’은 무언가 태어나거나 생산된 것, 즉 뒤따르는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다.23  )   간기 ( colophon ) 에서 이름이 명명된 사람도 실은 이어 지는 족보 기록에 나오는 첫 번째 이름이며 ( 5:1~3; 10:1~2; 11:10; 25:12~13; 36:1~2 ), 이는 확실히 독자에게 이어질 내용을 지시한다. ‘톨르돗’ 형식어구가 기능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일에 이것이 창세기 바깥 인 민수기 3장 1절과 룻기 4장 18절에 나오는 것에서 도움을 받는다 ( 대상 1:29을 비교하라 ).

민수기 3장 1a절은 아론 후손의 혈통을 소개한다. “아론과 모

세가 낳은 자는 이러하니라.” 이것이 민수기에서 갖는 역할은 창세기의 경 우와 같다. 즉 이것은 선택받은 자들로 초점을 좁히고, 족보를 시작하며, 후 손을 기대한다 ( “창세기와 정경” 단원을 보라 ).24  )   이것의 앞부분은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에 대한 것으로 ( 민 1~2장 ), 레위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를 열거하는데, 도 보라. 수정본은 D. S. DeWitt, “The Generations of Genesis,” EvQ 48 (1976): 196~211에 나온다. 드위트(DeWitt)의 개정판은 이 이론을 개선하고 이 재구성에 대한 일부 반론에 답하고 있다. 21  )   DeWitt, “The Generations of Genesis”은 10개의 점토판을 주장하면서 앞면은 “결정적인 역사” 를 담고 있고, (일부 점토판의) 뒷면은 족보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톨르돗’은 선행 역사 와 후행 족보를 지시하는 것이다. 22  )   예. 간혹 간기(colophon)에서 언급되는 사람과 관련한 주요 정보가 선행하며(예. 5:1의 아담; 또 한 25:19; 37:2), 대부분의 경우 후손에 대한 언급은 간기(colophon) 앞에 나온다. 때로는 ‘톨 르돗’(tO w dV l O w T )을 “기사”(“account,” NIV)나 “스토리”(“story,” 예. 37:2의 NRSV)로 번역하 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것은 10:1과 11:10만 내러티브의 개입 없이 족보 도표를 시작하기 때 문이다. “책”(5:1의 ‘세페르’[rRpEs]; 2:4a의 70인역, “하늘과 땅의 근원에 대한 책”[‘비블로스,’ <βίβλος>]을 참고하라)을 언급한 것은 문서로 기록되었음을 지시한 것이다. 23  )   M. H. Woudstra, “The Toledot of the Book of Genesis and Their Redemptive-Historical Significance,” 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5 (1970): 184~189, esp. 187을 보라. 그리고 V. Hamilton, The Book of Genesis Chapters 1–17,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0), 9의 비평을 보라. 창세기에서 ‘톨르돗’(tOwdVlOwT)을 사용한 것과 설형문자의 관습 사이에 명확한 유사성이 없는 것은 이름이나 날짜가 붙은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24  )   D. T. Olson, The Death of the Old and the Birth of the New: The Framework of the Book of Numbers and the Pentateuch, BJS 71 (Chico, Cal.: Scholars Press, 1985), 83~125를 보라.


131

| 창세기 1장 1절~11장 26절의 개관 |

I. 하늘과 땅의 창조 ( 1:1~2:3 )  1. 창조주와 창조 ( 1:1~2 )  2. 창조의 6일 ( 1:3~31 )  3. 제7일—성별의 날 ( 2:1~3 )  II. 에덴 안과 밖의 인간 ( 2:4~4:26 )  1. 에덴의 남자와 여자 ( 2:4~25 )  2. 남자와 여자가 에덴에서 추방되다 ( 3:1~24 )  3. 에덴 바깥의 아담과 하와의 가족 ( 4:1~26 )  III. 아담의 가계 ( 5:1~6:8 )  1. 서론: 창조와 강복 ( 5:1~2 )  2. 아담에서 노아까지 “하나님의 형상”( 5:3~32 )  3. 결론: 번식과 변절 ( 6:1~8 )  IV. 노아와 노아의 가족 ( 6:9~9:29 )  1. 의로운 노아 ( 6:9~10 )  2. 타락한 세상 ( 6:11~12 )  3. 임박한 심판과 약속의 방주 ( 6:13~7:10 )  4. 심판의 파도 ( 7:11~24 )  5.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다 ( 8:1a )  6. 구원의 바람 ( 8:1b~14 )  7. 방주에서 나옴 ( 8:15~19 )  8. 예배와 약속의 말씀 ( 8:20~22 )  9. 새로운 세상과의 언약 ( 9:1~17 )  10. 노아의 아들들과 미래의 강복 ( 9:18~29 )  V. 국가들과 바벨탑 ( 10:1~11:9 )  1. 국가 목록 ( 10:1~32 )  2. 바벨탑 ( 11:1~9 )  VI. 셈의 혈통 ( 11:10~26 )  1. “홍수 이후”의 셈 ( 11:10~11 )  2. 셈의 아들들 ( 11:12~26 )

서론


NAC 창세기 1

132

| 단원 개관 |

I. 하늘과 땅의 창조 ( 1:1~2:3 )

1. 창조주와 창조 ( 1:1~2 )

( 1 ) 태초에 ( 1:1 )

( 2 ) 땅이 ( 1:2 )

2. 창조의 6일 ( 1:3~31 )

( 1 ) 창조의 제1일 ( 1:3~5 )

( 2 ) 창조의 제2일 ( 1:6~8 )

( 3 ) 창조의 제3일 ( 1:9~13 )

( 4 ) 창조의 제4일 ( 1:14~19 )

( 5 ) 창조의 제5일 ( 1:20~23 )

( 6 ) 창조의 제6일 ( 1:24~31 )

3. 제7일—성별의 날 ( 2:1~3 )


I 하늘과 땅의 창조(1:1~2:3)

창조의 신비와 창조를 만든 자는 우리에게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움 직이며 존재하는” 1  )   유일자를 알기를 청한다. 창세기의 시작 단원은 창조주 를 소개한다. 창조주는 창세기, 심지어 모든 성경의 주인공이다. 창조 기사 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피조물을 중심으로 두지 않는다. 창조 기사의 목적은 창조 질서의 장엄함을 통해 창조주를 찬미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본문은 영광의 찬가이면서 교훈적이고, 찬송이면서 역사다. “하나님”은 첫 번째 문장 ( 1:1 ) 의 문법상 주어이며 계속해서 창조 기사 전체 를 통해 주제를 이루는 주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는 반복되는 요소로서 1장 1절~2장 3절에 하나님이 주요 행위자가 된다는 것으로 응집력을 부여 한다. 이 때문에 사도신경의 확언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 지”가 이 첫 단원의 제목으로 사용된다. 문학적 구조 이 첫 번째 단원의 문학적 윤곽을 두고 학자들이 논쟁하고

있다. 일부 번역본과 여러 주석가들은 2장 4절을 나누어서 1장 1절~2장 4a 절의 창조 기사를 끝내면서 또 후반부는 2장 4b절~3장 24절의 두 번째 창 조 기사를 시작하게 한다 ( 예. NRSV, REB, NJPS ). 이런 재구성은 창세기가 두 개 의 구별되고 독립적이고 서로 기원이 다르고 신학적 관점끼리 충돌을 빚는 창조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제안과 관련되고 있다. 말하자면 1장 1절~2장 4a절을 이른바 제사장 전통 ( P ), 2장 4b절~3장 24절을 소위 옛 서사시 전통, 즉 야휘스트 ( J ) 의 것으로 여긴다. 반복구인 “이것이 ~의 내력이니”( 전통적으로 “이것이 ~의 족보[‘톨르돗’]니라” ) 는

창세기에서는 P자료 특유의 용어 사용으로 여

겨진다. 2장 4a절에 나온 것은 선행 내러티브에 속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P 문장이 기원을 다루는 J기사를 시작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2장 4a절의 언어가 1장 1절과 분명하게 비슷하기에 2장 4a절을 선행 내러티브의 요약

1  )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인용한 Epimenides, Cretica (행 17:28).

133


창세기 1:1~2:3

134

으로서 문학적으로 인클루지오를 형성하면서 제사장 스토리의 시작과 끝을 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2장 4절을 이런 식으로 나누는 것을 막는 문제가 있다. 첫째, 2장 4a절의 ‘톨르돗’ 형식어구는 요약으로 받아들일 경우 이는 이 형식어구가 창세기에서 흔히 획일적으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족보나 내러 티브에 대한 것으로 사용된 용법과 다른 것이 된다.2  )   ‘톨르돗’ 지시문은 묶 는 역할을 하는 장치나 경첩 역할을 하는 절로 보는 것이 최선이고 ( 서론을 보 라 )

언제나 이어지는 것을 가리키지만 두 단원 사이의 연결을 이루기 위해

선행하는 단원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둘째, ‘톨르돗’으로 시작하는 족보나 내러티브는 흔히 가족의 대표가 아니라 ‘톨르돗’에서 이름이 언급되는 부모 나 가족을 승계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다시 2장 4a절을 1장 1절~2장 3절과 묶어서 취급한다면 ‘톨르돗’ 용례 일반과는 맞지 않게 되는데 이 단 원이 창조 ( “하늘과 땅” ) 의 기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창조가 장차 어떻게 될 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 2장 4a절과 2장 4b절이 이 루는 교차대칭 구조 3  )  는 절 전체가 이어지는 내용의 시작으로서 갖는 통일 성 ( 2:4에 대한 논의를 보라 ) 을 유지하는 것에 합치된다. 더구나 1장 1절~2장 3절은 2장 4a절이 종결부로 취급될 경우 어색한 첨 가물이 될 수밖에 없는 균형 잡히고 응집력 있는 단위로 여겨졌던 것이다.4  )   1장 1절에 대응하는 것은 2장 4a절이 아니라 2장 1~3절인데, 여기서 일곱 번째 날은 이 기사의 내러티브 진행에 만족스러운 대단원으로 기능한다. 1장 1절의 핵심 용어는 ‘바라’( “창조하였다” ) 와 ‘엘로힘’( “하나님” ) 과 ‘핫샤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하늘과 땅” ) 이며 이들은 2장 1~3절에서도 반복되지만 순서 는 역전되어 있고 이는 2장 1~3절이 불필요한 2장 4a절 없이 첫 번째 단원 2  )   이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런 부조화를 용인한다. 그래서 2:4a이 원래 첫 번째 창 조 기사의 표제로 1:1 앞에 위치했다고 제안해 왔다. 그렇다면 현재 위치로 옮겨졌던 것은 후대 의 편집자에 의한 것이 된다(참고. S. R. Driver, The Book of Genesis, rev. [London: Methuen

& Co., 1926], ii, 19.d). 이보다 최근에 학자들은 이런 생각을 버리고 이와 달리 창조 스토리를 P의 구조와 신학에 맞추기 위해 2:4a을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여겼던 것인데, P는 창조와 역사 를 족보의 틀 안에 위치시킨다. G. von Rad, Genesis: A Commentary, OTL, rev. ed.; trans. J. H. Marks (Philadelphia: Westminster, 1973), 63, 70, and C. Westermann, Genesis 1–11: A Commentary, trans. J. J. Scullion (Minneapolis: Augsburg, 1984), 81을 보라. 3  )   이것이 연쇄를 이루는 요소들 두 무리의 용법인데, 두 번째 연쇄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첫 번째 연 쇄를 역전된 순서로 반복하거나 반영한다. 4  )   예. B. W. Anderson, “A Stylistic Study of the Priestly Creation Story,” in Canon and Authority, ed. G. Coats and B. Long (Philadelphia: Fortress, 1977), 148~162; G. Wenham, Genesis 1–15, WBC (Waco: Word, 1987), 5~6을 보라.


135

창세기 1:1~2:3

을 끝내는 인클루지오를 형성함을 보여 준다.5  )   2장 3절의 마지막 단어 세 개 ( ‘바라

엘로힘 라아소트,’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행하기 위해 창조하였다” ) 도

1장의 주요한

어휘적 신학적 용어를 반복함으로써 그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다. 1장 1절과 2장 1~3절에서 “일곱”과 그 증가가 이루는 용법에서 놀라운 유사성도 나 타난다. 1장 1절~2장 3절은 전체적으로 일곱의 무리가 갖는 성향을 보여 주는데 이는 1장 1절~2장 3절이 포괄적인 단원임을 암시한다.6  )   본문 배열은 서론과 일곱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론은 창조주와 창조를 밝힌다 ( 1:1~2 ). 여섯 개의 단락은 창조의 날 여섯 개로 분할되어 있 다 ( 1:3~31 ). 마지막 단락은 절정을 이루는 일곱째 날인 성별의 날에 대한 것 이다 ( 2:1~3 ). 각 창조의 날을 제시하는 것은 예측가능한 순서를 따른다. ( 1 ) “하나님이 이르시되”, ( 2 ) 명령, ( 3 ) 창조 사실, ( 4 ) 하나님의 평가, ( 5 ) 창 조된 요소의 경계, ( 6 ) 의미. 이 패턴은 정확히 유지되지 않는다. 기사에는 변형도 있지만 이 때문에 창조가 최고의 감독자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일반 적 패턴이 주는 감동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2절에서 땅의 상태인 “황무지이며 공허한”( 이는

‘토후 바보후’의 문자적 의미다 ) 7  )

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계획을 알려 주는 토대를 제시한다. 땅 ( ‘에레츠’ ) 에 생명이 없기에 하나님은 땅을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창조하기 시작하고 ( 즉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는 황무지가 아니도록 )

6일 또는 각 3일로 이루어진 두 개의 평행

을 이루는 날 동안 거주하게 ( 더 이상 비어 있지 않게 ) 했던 것이다.8  )   제3일과 제 6일은 각 부분을 종결짓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인 “하나님이 이르시 되”( 9, 11, 24, 26절 ) 와 하나님의 평가인 “좋았더라”( 10, 12, 25, 31절 ) 의 반복으로 강 5  )   참고. M. Greenberg, Ezekiel, 1–20, AB (New York: Doubleday, 1983), 198. 6  )   “이 단원의 구조는 수의 조화 체계에 기초하고 있다. 숫자 칠은 주요 주제에 근본적일 뿐 아니라 세부 내용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결정짓는다……이 수적인 균형은 말하자면 이 단원의 모든 부 분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그 통일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로 기능하는 황금실인 것이다”(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 Vol. 1. From Adam to Noah, Genesis I–

VI:8, trans. I. Abrahams [Jerusalem: Magnes, 1961], 12). 7  )   NIV는 각운을 이루는 ‘토후 바보후’(WhboDw WhTo)라는 2행 연구(couplet)를 “formless and empty” (형체가 없고 공허한)로 번역한다(1:2에 대한 논의를 보라). 일부는 이를 이사일의(hendiadys)인 “형체가 없는 공허”(formless void; NRSV, NJB)나 “형체가 없는 황무지”(formless wasteland; NAB), “거대한 불모지”(vast waste; REB)로 해석한다. 8  )   D. T. Tsumura, The Earth and the Waters in Genesis 1 and 2, JSOTSup 83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1989), 42를 보라. 이와 달리 6일에 대한 일반적인 도식적 패턴은 6일을 땅 의 “무형체”와 “공허”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보여 준다(Anderson, “A Stylistic Study of the Priestly Creation Story”를 보라). 전반부의 3일은 세 가지 “구분”으로 땅에 형체를 부여하고 후반 부의 3일은 “공허”의 문제를 해결하여 하늘의 신체와 생명 형태를 가지고 재구성된 우주를 채운 것이다.


136

창세기 1:1~2:3

조된다.9  )   창조 행위는 8회 나오는데 두 번씩 나오는 제3일과 제6일 외에 각 날에 한 번씩 나온다. 제3일은 지구를 생산적인 곳이 되는 일에 착수하 여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식물을 생산해 내게 한다. “땅 ( ‘에레츠’ ) 이 풀과…… 내니”( 11절 ). 제6일은 그 첫 거주자를 묘사한다. “땅 ( ‘에레츠’ ) 은 생물을……내 라”( 24절 ). “땅”( ‘에레츠’ ) 이 하나님의 중재자인 식물이나 동물의 경우와 달리 제6일에 일어난 두 번째 창조 행위 ( 인류 ) 는 하나님이 직접 이룬다 ( 26~27절 ). 비생산 상태에서 생산 상태가 됨

비거주 상태에서 거주 상태가 됨

제1일 빛과 흑암

제4일 천체

제2일 궁창과 물

제5일 어류와 조류

제3일 a. 뭍과 바다

제6일 a. 짐승

b. 식물

b. 인간: 남자와 여자

이는 제7일에 절정을 이루는데 이 날은 대응하는 날이 없고 여러 방면으 로 앞에 나온 6개의 날과 달라 쉼과 성별의 날로 구별된다. 주해로 들어가기 전에 1장 1절~2장 3절에 나오는 주요 신학적 확언과 이 본문이 전체 성경의 정경적 형태에 부합되는 방식을 간단히 개괄할 것이다. 이 서론적 논의가 주제를 벗어난 것이 아닌 이유는 본격적인 역사적 신학적 방향 설정 없이는 현대 독자들에게 창세기 메시지의 설득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와 역사의 여호와 창조 기사는 모세오경의 서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자기 백성에게 언약을 내리시는 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 주임을 선포한다.10  )   시작하는 절은 진정한 성경적 종교가 신학적으로 상정 하는 바다. 언약의 주님과 창조의 하나님은 한 분이고 같은 분이다.11  )   이 태 초의 스토리는 창세기뿐 아니라 모세오경 전체의 주제를 이루는 관심을 소 개한다. 이 스토리는 하나님이 “땅”을 창조한 것과 하나님의 “강복”과 “씨”( 자손 ) 에 대한 약속을 말한다.12  )   이 세 가지 모티프는 우주의 역사 ( 1:1~ 9  )   Wenham, Genesis 1~15, 6~7을 보라. 10  )   C. Barth, God with Us: A Theological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 ed. G.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91), 9~11의 논의를 보라. 11  )   시 74:12~17; 77:13~20(14~21); 89:5~13(6~14); 135:6~12; 136:5~22; 사 42:5~6; 렘

10:12~16을 참고하라. 12  )   R. J. Clifford, “The Hebrew Scriptures and the Theology of Creation,” TS 46 (1985): 52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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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 와

창세기 1:1~2:3

족장 기사 ( 11:27~50:26 ) 를 중요한 ‘톨르돗’ 지시문 아래 통합시킨다.

모세오경은 이 세 가지 모티프의 체계를 따라 발전하고 이 점에 대해 계속 되는 주요 역사 ( Primary History; 창세기~열왕기하 ) 도 같은 관심사를 반영한다. 주요 역사는 아브라함의 씨가 하나님을 향한 충실함에서 어떻게 흔들리며 자신 들의 복을 박탈당하고 조상들의 땅에서 추방을 당하는지를 말해 준다. 땅과 씨에 대한 하나님의 강복 약속은 창조에 그 시작을 두고 ( 1:10, 22, 28 ) 이에 따 라 보편적인 약속이 “하나님의 형상”( 1:26~27 ) 으로 창조된 모든 것에 부여된 다. 창세기 1~11장은 보편적인 강복이 특별한 혈통을 통해, 즉 셋과 그의 후손 셈의 자손을 통해 실현되는 방식을 보여 준다 ( 5장; 11장 ). 더욱 그럴 수밖 에 없는 것은 족보가 한 사람 아브라함에게로 좁혀지는데 ( 11:26 ), 이 아브라 함은 특별히 하나님의 강복을 받는 자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 12:1~3 ). 그 래서 창조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의도를 수반하여 인간의 역사에서 그 실현 과정을 설정하고 인간의 반복되는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 의 지명된 씨를 통해 자기 약속을 보존하는 방식 ( 11:27~

50:26 ) 을

보여 주는

후속 기사 ( 2:4~11:26 ) 를 마련한다. 앞에서 창조 기사가 전하는 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유일하고 비할 자 없는 유일하게 진정하신 창조주임을 선포하고 입증하도록, 틀이 짜여 있음 을 서술했다. 이 이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 창조에 대한 서술은 이 스라엘이 자신들의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깨닫게 되었던 바로 가득 차 있는데, 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형성했고 이들의 삶을 시내에서 구원받은 공동체로 지시했던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의 의심할 수 없이 분명한 말씀을 통해서 만물을 존 재하도록 명하고 만들의 설계와 목적을 지시했던 자율적인 주인 ( autonomous Master ) 으로

기술되고 있다. “말씀”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하는 창세기의 확

언에 대한 탁월한 모티프다.13  )   애굽의 멤피스 신학 ( Memphite Theology ) 은 창조 를 신 프타 ( Ptah ) 의 말에 의한 것으로 두지만 생명을 발생시키는 마술적인 발화일 뿐인 반면에 히브리의 우주론에서 하나님의 명령은 초월적인 말씀 이다 ( 서론을 보라 ).14  )   말씀으로 인한 창조는 메소포타미아의 우주 생성론과는 13  )   “하나님이 이르시되”는 1:3, 6, 9, 11, 14, 20, 24, 26, 28, 29에 10회 나온다. 참고. 시 33:6, 9; 158:5~6, 여기서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술된다. 14  )   N. H. Sarna, Understanding Genesis (New York: Schocken, 1970), 12; G. Hasel, “The

Significance of the Cosmology in Genesis 1 in Relation to the Ancient Near Eastern Parallels,” AUSS 10 (1972): 1~20; J. P. Allen, Genesis in Egypt: The Philosophy of Ancient Egyptian Creation Accounts , YES 2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8), 36~38,


창세기 1:1~2:3

138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고대 근동의 신화적 이야기에서 정돈된 우주는 그 존재가 질서에 저항하는 괴물을 이겨 낸 영웅 신의 충돌을 통한 승리의 결 과로 “코스모스”( cosmos ) 가 생겨나는 우주 생성론적 쟁투의 존재에 의존한 다.15  )   창조의 신들 자체가 태초의 생성적 소재의 산물이었다.16  )   우주 생성 론의 이야기들은 창조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는 바가 없으나 신들의 기 원 ( theogony ) 에 초점을 두고 있다.17  )   창조의 신들은 물질을 창조한 것이 아 니라 주로 통제가 안 되는 태고의 물질을 다시 정리하는 것으로 서술된다. 게다가 우주 생성론적 신화는 기능과 목적에 있어 사회학적인 것으로 기존 의 사회 체계에 대한 신적, 코스모스의 해명이나 패턴을 제시한다.18  )   고대인들의 기원에 대한 이해는 자연계에 대해 이들이 가졌던 현존의 개 인적인 이해에 결부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연을 신적인 “너”( Thou ) 로 믿었지 비인격적인 “그것”( It ) 으로 믿지는 않았고 자연 현상은 신들의 행동과 관계 있다고 믿었다. 하늘에서 발생한 것과 땅에서 일어난 일 사이에 신비로운 대응관계가 존재했다.19  )   예를 들어 가족, 짐승, 작물의 번식은 신들 사이의 성관계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생식의 신들이 고대 종교의 사고에 중심이 었다. 생명의 존재와 행복은 어떤 면에서는 신들의 행동과 호의에 의존했던 것이다. 고대 근동 민족들 사이에서 생식의 신들은 그 이름과 상관없이 우 주의 생식력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20  )   58~59. 15  )   M. K. Wakeman, God’s Battle with the Monster: A Study in Biblical Imagery (Leiden: Brill, 1973). 16  )   예.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서 신들은 태고의 물인 압수(Apsu)와 티아마트(Tiamat)의 자 식이다. 여러 애굽 우주 생성론 가운데 창조의 신인 아툼(Atum)은 태고의 언덕이 물에서 발생한 후에 자기 창조를 통해 구체화되거나 태고의 물인 눈(Nun)에서 나온다. 멤피스 신학에서 아툼은 최초의 원리인 프타(Ptah)의 생각(thought)과 말(speech)에서 나온다(ANET, 3~4). 17  )   예. 애굽에서 창조의 신은 입에서 침을 뱉거나 수음(masturbation)을 통한 방출로써 하급 신들 을 생산했다. 18  )   예.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 체계의 사회 구조는 바벨론 창조 신화에 반영되어 있다(T. Jacobsen, “Mesopotamia: The Cosmos as a State,” in The Intellectual Adventure of Man [Chicago: University Press, 1946], 125~184를 보라). “고대의 우주 생성론은 주로 보호자인 신 들과 예배 체계, 신이 지명한 왕이나 지도자, 친족관계, 혼인 제도로 조직된 사회의 출현에 흥미 를 가졌다”(Clifford, “Cosmogonies in the Ugaritic Texts and in the Bible,” Or 53 [1984]: 186~187). 19  )   메소포타미아 창조 신화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유브라데) 하류 체계의 수위 상승과 파괴적인 비라는 계절적인 위협을 반영한다. “혼돈(chaos)과 코스모스(cosmos) 사이의 경쟁은 우주의 연 례적 순환이 갖는 또 하나의 측면일 뿐이다. 이것은 자연으로 하여금 겨울 폭풍우로 인한 파괴 이후에 새롭게 꽃을 피우게 한다”(S. Moscati, The Face of the Ancient Orient [Garden City: Doubleday, 1962], 79). 20  )   예. 바알(Baal) 사이클의 주요 모티프가 왕권이었을지라도 가나안의 바알-모트(Baal-Mot)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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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2:3

고대 신화는 풍요를 위협하는 이들 자연의 많은 세력 간의 쟁투라는 계속 되는 패턴을 반영한다. 문학적 신화라는 수단은 신들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세계의 과정에 대한 이런 이해를 표현했던 것이다. 신화는 재미를 주는 우 화가 아니었다. 신화는 땅에 대한 천상의 모방을 담았는데, 이는 지상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것을 반영하는 코스모스의 거울 같은 것이었다.21  )   신화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신으로 가장한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신들은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과 감정이 갖는 속성을 갖는다. 사랑, 결혼, 출 산, 싸움, 전쟁. 신들은 사실 인간의 피조물인 것이다. 그래서 고대 신화는 신들이 자비로 사회를 두고서 가동시킨 위협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고대 종교는 신들을 기념하면서도 제의적 의례를 통해 신들을 통제하려고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창세기는 성경 계시의 독특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 다. 실제로 “계시”는 그 미신과 변덕스러운 신들의 놀이터로 보였던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고대성을 해방시킬 것이 요구된다. “이스라엘이 경배한 하나님은 자연의 주인이지만 자연의 정신은 아니다.” 22  )   성경의 종교는 하 나님이 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자연을 초월하여 자연을 다스리는 주권자 인 주님이지 창조의 과정에 매여 있지도, 삶과 죽음 풍요와 기근의 순환에 생식의 참여자도 아니라는 것을 그 근본 전제로 둔다.23  )   히브리에는 신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없다. 배우자도 없다. “말씀 을 통한 창조라는 관념은 무엇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가장 근본적인

기나 바알이 배우자 아트타르트(Athtart)나 아나트(Anat)와 갖는 관계에서 생식의 주제는 분명 하게 드러난다. 바알이 지하 세계에서 모트에게 포로로 잡힌 것은 인간 세계에는 재앙을 낳았다. 엘(El)은 소리 지른다. “바알이 죽다니! 이 민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곤(Dagon)의 아들이 죽 다니! 이 무리는 어찌될 것인가?”(ANET, 139). 하지만 아나트의 도움으로 모트의 손아귀에서 벗 어난 바알은 세상을 위해 생명과 생식력을 다시 한 번 얻는다. 엘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 늘의 기름이 비로 내리고, 와디에는 꿀이 흐르는 구나. 이제 알겠다. 권력자 바알이 살아 있다는 것을! 군주가 현존하도다! 땅의 주인이!”(ANET, 140). 21  )   “간단히 말하면 지상의 실재는 천상의 실재에의 참여다”(W. Harrelson, “The Significance of Cosmology and the Ancient Near East,” in Translating and Understanding the Old Testament: Essays in Honor of Herbert Gordon May [Nashville: Abingdon, 1970], 241). 22  )   B. W. Anderson, Creation Versus Chaos: The Reinterpretation of Mythical Symbolism in the Bible (Philadelphia: Fortress, 1987), 32. 23  )   “야훼가 폭풍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고 거룩한 전쟁에서 기상 현상과 관련 있을지라도 야훼는 신적인 전사 바알이나 마르둑, 제우스와 달리 이런 것들과 떨어져 이것들을 지켜보고 있다”(L. Clapham, “Mythopoetic Antecedents of the Biblical World-View and Their Transformation in Early Israelite Thought,” in Magnalia Dei, The Mighty Acts of God: Essays on the Bible and Archaeology in Memory of G. Ernest Wright [Garden City: Doubleday, 1976], 116).


창세기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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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 구별을 담고 있다. 창조는 아주 조금이라도 하나님에게서 방출이라 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창조는 어떻게든 하나님의 존재, 즉 하나님의 신적 인 본성이 넘친다거나 반영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격적인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24  )   고대 신화는 흔히 세력 간의 쟁투와 관련하여 창조를 그려낸다고 말했는 데, 이 쟁투에서 창조의 신들은 자신의 코스모스적 대적들을 지배하여 혼란 에서 정돈된 우주를 끌어낸다. 이 질서와 혼돈이라는 근본적인 생각은 말씀 의 이미지를 사용함을 통해 성경 안에 반영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훨씬 많은 것이 있다.25  )   단순히 하나님이 거주 불가능한 땅을 통제한다는 의미가 아 니다 ( 1:2 ). 오히려 히브리 우주론은 만물의 존재가 하나님의 자유롭고 확고 한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선포한다.26  )   이는 1장 1절에 명시적으로 진술되고 있으며 기사 전체를 통해 암시되고 있다. 저자는 발전된 야훼이즘을 만족시 키기 위해 이교의 형식을 역사화시키는 모방자는 아니었다. 분명히 설득력 이 있어 단호하게 성경 기사를 논쟁적이라고 주장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 은 저자에게는 이교의 이데올로기가 전혀 필요치 않았고 저자는 신중하게 성경적 우주론과 이교의 오해를 구분했다는 점이다.27  )   저자는 당대의 관습 적인 언어를 택했지만 관습적인 사고를 하지는 않았다. 성경 전통에서 우주 는 무에서의 창조 ( creation ex nihilo; 1:1~2에 대한 논의를 보라 ) 다. 게다가 언제나 변함 24  )   von Rad, Genesis, 51~52. 25  )   이들 하나님의 대적들은 라합(예. 시 87:4; 89:10; 사 30:7; 51:9: 욥 9:13; 26:12)과 리워야단(욥

3:8; 41:1 [40:25]; 시 74:14; 104:26; 사 27:1), 바다 괴물 또는 ‘탄닌’(!yNIT;; 욥 7:12; 시 74:13; 사 27:1; 51:9; 겔 29:3; 32:2)으로 불린다. 시편 기자나 선지자들은 이것들을 신이나 코스모스의 세력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단순히 이들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비유적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물리 적인 힘이나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대적들(예. 애굽인들)을 묘사한다. 창세기 1장의 저자가 말하 듯이 선지자와 시인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했고 특히 선지자들은 경쟁하는 신들이라는 이런 이교 적 개념을 경멸했다. 또한 창조 기사에 나오는 “깊음,” “흑암,” “큰 바다 짐승들”(!yNIT;)은 물리적 성질을 가진 것들이지 의인화된 괴물은 아니었다(1:2, 21). 26  )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 신화에서 발견되는 전투 모티프의 경우와 같은 개념상의 틀이 흔한데, 이는 1:1~2:3의 저자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제사장 저자가 보기에 하나님은 우주를 완전히 통 제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 가운데 우주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두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중 요한 일이었다. 이것은 창조에 대해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 전부였다. 우리는 철학적으로 선행하 는 단계 하나를 추가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만물을 무에서(ex nihilo) 존재하게 했기에 이 모든 것이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이 우리의 것보다 신학적으로 열등한 것인가? 일 부가 나타내려 했던 것처럼 그렇게 불가능한 관점은 분명히 아니다”(W. R. Lane, “The Initiation of Creation,” VT 13 [1963]: 73). 본서가 주장하는 바는 오히려 이 본문이 때때로 고대의 개념 상의 틀에 나오는 언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돌리고 창조 사건을 역사적인 틀에 넣음으로써 기존의 틀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27  )   예. G. Hasel, “The Polemic Nature of the Genesis Cosmology,” EvQ 46 (1974): 81~10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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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역사 바깥에 독자적으로 위치하는 이교 신화와 구별되는 가운데 성경 의 창조는 역사를 시작한다 ( “태초에” ).28  )   창조는 인간 역사의 ‘톨르돗’( “기 사” ) 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2:4에 대한 논의를 보라 ).

하나님의 권위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효능으로 입증된다. 창조의 패턴 은 그 응답으로 실행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권한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빛 이 있으라”라고 명령했고 본문은 “빛이 있었다”( 1:3 ) 라고 말한다. 반복되는 선포인 “그대로 되니라”( 1:7, 9, 11, 15, 24 ) 는 창조하게 하는 말씀이 갖는 지배력 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남겨 두지 않는다. 게다가 하나님의 권위는 창조된 질서의 구성 부분에 이름을 짓는 행위로 드러난다 ( 1:5, 8, 10 ). 이름을 짓는 세 가지 행위는 세 가지 구별 행위와 관련 있는데, 낯과 밤 ( 5절 ), 궁창 ( 8절 ), 뭍과 바다 ( 10절 ) 가 그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어떤 실체에 이름을 짓는 것은 그 존 재를 의미하고 규정했던 것이다.29  )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피조물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의 존재를 인증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한다.30  )   둘째, 6일에 하루를 더하는 ( 7일 ) 문학적 배치는 하나님을 생명을 부여할 뿐 아니라 구조와 경계를 설정하는 권위를 가진 설계자로 묘사한다. 이 모 든 것은 안식의 날이 주는 만족에서 절정을 이룬다. 또한 내러티브는 “7”과 7의 배수, 그리고 이에 이어 빈번하게 “3”과 “10”의 배수도 반복하여 사용 한다.31  )   7일의 거시구조는 분명하지만 첫 번째 절은 단어가 7개, 두 번째 절은 14개 ( 7×2 ) 다. 마지막 단원 ( 2:1~3 ) 은 제7일에 관련된 것으로 35개 ( 7×5 ) 단어로 이루어져 있고 “제7일”이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온다. 날들은 각각 서 로 대응하는 세 개의 평행을 이루는 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 제 7일은 대응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열 번 말씀하는데 일곱 번은 창조와

28  )   Anderson, Creation Versus Chaos , 11–42; J. Grønbæk, “Baal’s Battle with Yam—A Canaanite Creation Fight,” JSOT 33 (1985): 36을 보라. 29  )   에누마 엘리쉬는 “위로 하늘의 이름이 없었을 때,/아래로 땅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ANET,

60~61).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늘과 땅이 이름이 없었던 것은 하늘과 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신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의 한 문헌은 창조 전 의 세상을 기술하면서 아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어진 이름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W. Beyerlin, ed., Near Eastern Religious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1978], 7를 보라). 하지만 흑암을 “밤”이라고 이름 지은 것(1:5)은 존재하게 되었 다는 의미를 표현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흑암”은 이미 최초의 창조의 힘을 갖는 말씀 이 있기 전에도 존재했기 때문이다(2절; 같은 견해로 Cassuto, Genesis, 27). 30  )   사람, 아이, 도시의 이름을 짓는 관습은 근원이나 명령이나 지도력을 표현하는 것이다(예. 창 2:19~20, 23; 4:17; 5:2; 17:5; 32:28~29). 특별히 시 147:4과 사 40:26을 참고하라. 여기서 하나 님은 별에 이름을 붙인다. 31  )   Cassuto, Genesis, 12~15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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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에 대한 명령이고 세 번은 인류에 관련된 선포다.32  )   “좋았더라”라는 하나님의 평가는 일곱 번 나온다 ( 일곱 번째는 “심히 좋았더라” ).33  )   이 수의 반복은 내러티브의 문학적 통일성을 말하고 하나님이 끝낸 창조에서 완벽과 완결 의 관념을 강조한다. 이 도식적 배치는 창조된 질서의 조화와 균형을 특징짓는다. 설계자가 창 조에 제한을 둔 것이다. 궁창과 땅과 바다는 자기 있을 곳을 안다. 이것들은 자기 주인의 언명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들에게 부과된 경계를 넘어서지 않 는다. 식물을 포함한 생물은 자기 “종류”에 맞는 제한 안에서 번식하도록 지시받고 있다 ( 11~12,

21, 24절 ).

하나님도 하나님의 세계도 변덕스럽지 않다.

하나님은 질서 잡히고 예측할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낸 다. 또 하나님도 사람도 난폭한 물이나 압도적인 흑암, 가득한 괴물의 위협 을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연에 속도를 유지한 리듬과 순서를 두었다. 그래서 세계는 “선”하고 그 전체가 “심히 좋았다.” 세계는 우호적이고 가치 있으며 두려움 없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삶의 선한 질서”가 있 어 34  )   인간이 창조주와 함께 누리게 된 것이다. 게다가 창조 기사는 창세기의 연대기적 ‘톨르돗’ 구도에 결속되어 하나님 이 창조주로서 자신의 계시와 행위의 무대인 역사를 창설함을 지시한다. 성 경 우주론에서 창조는 사건으로서 종말론적 “주의 날”에 절정을 이룰 역사 의 시작이다.35  )   이교의 우주 생성론은 흔히 영원한 현재를 되풀이하는 것 과 관련되지만 36  )   1~11장에 나오는 기원에 대한 말에는 연대기가 틀로서

32  )   일곱 번의 명령은 간접명령(Jussive)이고 마지막 세 개는 다른 동사형태로 표현된다. 또 “그대 로 되니라”는 일곱 번 나오며 하나님은 일곱 번 이름을 붙이고 복을 준다(B. K. Waltke, “The Literary Genre of Genesis, Chapter One,” Crux 27 [1991]: 5; H. Blocher, In the Beginning:

The Opening Chapters of Genesis, trans. D. Preston [Leicester: IVP, 1984], 33를 보라). 33  )   참고. 1:4, 10, 12, 18, 21, 25, 31. 34  )   W. Brueggemann, Genesis, IBC (Atlanta: John Knox, 1982), 30. 35  )   예. 사 24~27장; 65장; 암 5:18~20; 계 21장. 36  )   하지만 수메르의 전통에서는 수메르 왕의 목록이 포함되어 기원에 대한 “신화-역사적” 문학 장 르를 형성한다(같은 견해로 T. Jacobsen, “The Eridu Genesis,” JBL 100 [1981]: 520). 고대의 역사가들이 역사와 신화를 통합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세계를 신화적인 틀로 보아서 과거를 현대에 대해서는 신화적인 연속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버벡(R. E. Averbeck) 은 수메르 전통과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창세기 1~11장이 이스라엘에게 이데올로기적인 틀을 부여하여 이를 통해 자기 자신과 그 기원에 대해 보도록 만들었다고 한다(“The Sumerian Historiographic Tradition and Its Implications for Genesis 1–11,” in Faith, Tradition, and History, ed. A. R. Millard et al. [Winona Lake: Eisenbrauns, 1994], 79~102). 하지만 이교의 세계관과 달리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신화론적인 틀에서 보지 않고 오히려 역사적인 것으로 보아 신화의 전용이나 문학적인 말하기만이 히브리의 시각에 이질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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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2:3

지배하고 있다. 야훼가 역사 가운데 행위한다는 이스라엘의 관념은 이교 국가 사이에 필 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37  )   이교 신들이 역사적 사건과 교차하여 국가적 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는 그 동기가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고 역사에 대해 포괄적인 계획을 가졌던 역사의 주인 하나님이라는 이스라엘의 관념과 같지 않다. 이교의 신들은 신화적 관심을 동인으로 하고 지속적으로 신화적 세계와 더불어 행동하지만 성경의 종교는 야훼가 언제 나 자연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38  )   1~2장이 신학적인 스토리로서 역사에 대응하는 것이 없는 경우라면, 창 조 기사는 역사 가운데 뒤얽힌 코스모스나 언약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말 하지 않는 셈이다.39  )   수메르와 바벨론 전통에서 창조는 신들을 찬양하는 시적 찬송시와 짝을 이루고 어떤 경우에는 주문과 성전 제의에 관련된 다.40  )   이런 신화는 창조의 신에 대한 찬양을 이끌어 내도록 고안된 것이었 다. 그럼에도 창세기가 내러티브로 배치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메소 포타미아의 신화시와 다르다. 창세기가 일부 찬송시를 반향하는 면모를 보 이지만 1장 1절~2장 3절의 표현은 역사적 틀에 맞추어져서 인간이 겪는 일 주일과 비슷하고 서술적 찬양 장르는 아니다. 창세기는 의심할 바 없이 이 스라엘로 하여금 그 창조주를 찬양하도록 암시적으로 요청하고 있지만 이 는 분명한 찬송 요구가 들리는 시편에 나온다 ( 예. 시 19편; 104편 ). 이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에 결부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 대적에게서 구원했다 ( 예. 시 107:32~37; 사 40~48장도 참고하라 ). 생명을 부여하는 말씀에 관련한 확언이 후대의 이스라엘에게 경험의 중

37  )   B. Albrektson, History and the Gods: An Essay on the Idea of Historical Events as Divine Manifestation in the Ancient Near East and Israel (Lund: CWK Gleerup, 1967); R. Gnuse,

Heilsgeschichte as a Model for Biblical Theology: The Debate Concerning the Uniqueness and Significance of Israel’s Worldview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9)를 보라. 38  )   B. T. Arnold, “The Weidner Chronicle and the Idea of History in Israel and Mesopotamia,” in Faith, Tradition, and History, ed. A. R. Millard et al. (Winona Lake: Eisenbrauns, 1994), 129~148을 보라. 39  )   R. H. Moye, “In the Beginning: Myth and History in Genesis and Exodus,” JBL 109 (1990): 577~98을 보라. 족보가 역사와 융합되어 내러티브 내에서 역사화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모예의 본문 이전의 분석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모예의 논증 전개는 현존하는 본문이 창조 기사를 족장 기사와 통합하여 하나의 전진하는 역사적 기사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40  )   “에누마 엘리쉬는 마르둑에게 경의를 표하는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찬송가다”(A. Heidel, The Babylonian Genesis: The Story of Cre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42], 3, 49, 53,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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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2:3

심이었다. 하나님은 물질세계를 초월하지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스스로 결정하는 관계의 측면에서만 알려진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 라”( I

AM WHO I AM ),

곧 스스로 존재하는 유일자이지만 ( 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 I

AM ),

3:14 )

이스라엘에게

곧 스스로를 족장들에게

계시한 분이요 자기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할 분이라는 점이다 ( 출 3:15 ).

그래서 하나님은 주로 그 백성의 입장에서 구원 행위를 통해 알려진

다. 비슷하게 1장 1절은 하나님이 세계와 갖는 관계의 측면에서 알려진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고대인들의 우주 생성론적 사고나 현대인들의 철 학적 범주 안에서 규명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만나 고 이 역사는 주로 역사적 담화를 통해 전해진다.41  )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삶의 방식도 선지자 모세를 통해 전해진 대로 하나 님의 말씀에 의해 지시된다. 십계명과 언약법 전통을 하나님이 말씀하고 모 세가 들었던 것은 산이나 회막에서 이루어졌다.42  )   하나님의 계명은 “헛된 말”이 아니라 이 공동체에게 생명의 근원이었다 ( 신

32:47 ).

“사람이 이를 행

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레 18:5 ). 이 말씀은 공동체와 번영의 약속을 위 해 보증된 지시였지만 이 말씀은 또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던 순종하는 자들 에게는 심장의 박동이었는데 이들의 심장은 할례를 받았던 것이다 ( 신

30:6,

11~14 ).

신약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구원자이며 하나님이 스스로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드러내셨음을 깨달았다. 바로 이 동일한 하 나님이 관계 가운데 창조주와 언약의 주로 알려진 요한의 로고스이며 굳이 우리 안에 성육신했던 것이다 ( 요 1:14 ). 이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서, 또 만물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그들의 근원으로 알려진다 ( 요 1:15~17 ).

이력 ( biography ) 이라는 것이 없는 하나님은 한 분을 사용하여 인간

역사를 구원할 수 있게 했다 ( 갈 고 ( 요

1:1~3; 골

1:18 ),

4:4 ).

그분 홀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설명하

그분에게 믿음으로 올바르게 관련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

로 태어난 것이다 ( 요 1:12 ). 기독교 공동체가 만물의 창시자인 하나님에 관련 된 히브리 전통을 확언했고 ( 예.

행 4:24~30; 롬 11:36 ),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관계를 가진 성육신 창조주요 구원자로 규정했던 것이 41  )   같은 견해로 G. Trenkler, “Creation,” in Encyclopedia of Biblical Theology, ed. J. B. Bauer (New York: Crossroad, 1981), 147. 42  )   예. 출 20~24장, 특히 24:12; 레 1:1; 민 1:1. 모세의 신명기 법제정은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다(예. 신 26:16).


145

창세기 1:1~2:3

다 ( 요 1:3; 히 1:2; 골 1:15~16; 고전 8:6 ). 더 중요한 것은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초 점과 절정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만물을 자기 주 권 아래 두었다는 것이다 ( 엡 1:9~10; 빌 2:6~11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새 로운 피조물이고 ( 고후

5:17; 갈 6:15 ),

그리스도는 왕의 영광을 가지고 “새 하늘

과 새 땅”( 계 21:1 ) 을 도래하게 할 것이다 ( 계 21:1 ). 사도 전통도 율법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 공동체의 사회적 작용을 초월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왜냐하면 의인이 율법에 따라 살았고 그 율법은 의로움을 세운 율법 안에서 확언되는 믿음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복음은 주 예수를 “마음으로……시인하는” 자는 누구나 얻게 되었던 것이 다 ( 롬

10:5~10 ).

기독교인의 목소리는 창조 언어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 요

1:4 ) 이라고

선포한다. 그

래서 세상을 존재하게 만든 이 창조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 예. 43:15 )

이스라엘의 삶을 지시하고 신자들이 죄의 흑암에서 해방되는 믿음의

복음을 선포하는 바로 그 말씀이다. 하나님 백성의 반응 창조 기사에서 인간은 명시적으로 지상 세계를 보살

필 임무를 부여받는다 ( 1:28; 참고 2:15, 20 ). 하나님의 백성의 올바른 반응은 번식 과 책임 있는 말과 탐구를 통해 창조된 질서를 지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선한” 땅을 지배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 었고 이스라엘은 땅을 차지한 자로서 이 땅과 그 백성이 고통을 겪지 않도 록 거룩함 가운데 행동할 것을 요구받았다 ( 레

25~26장; 신 28장 ).

하지만 죄의

효과가 사람에게 죽음만이 아니라 창조가 타락에서 해방될 것을 기다리면 서도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을” 겪어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의미했음을 우 리는 안다 ( 창 3:17~19; 롬 8:18~25 ). 인류가 구원받아야 할 것처럼 창조도 구원받 아야 한다. 바울이 선포한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일어날 일이며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우리의 필멸인 육신을 구원할 것이고 창조를 변화 시킬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이 지배는 마지막 아담을 통해 성취될 것 이며 이 아담은 하늘과 땅을 무릎 꿇게 하고 마지막에는 범죄로 인한 저주 의 속박에서 풀어 줄 것이다 ( 히 2:5~9; 빌 2:10 ). 그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다 ( 사 65:17; 66:22; 벧후 3:10, 13 ). 지금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즐기면서도 우리 의 충만한 유산이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창 조가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이고 “여호와의 날”까지는 완전한 해방에 이르 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지식과 기술에서의 인간의 진보에 의해


창세기 1:1~2:3

146

가능해지는 책임 있는 청지기직을 통해 현재 세계의 지배를 위해 노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온 세상이 최선의 상태에서 최선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을 고집하지도 않고 세상을 마귀에 속한 것으로 평가하지도 않 을 것이다.” 43  )   창조주인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순종적인 신뢰와 예배였다. 앞서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율적인 통치자로서 자연을 초월 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되돌릴 수 없는 계명을 통해 존재하게 했 다고 이해했음을 말했다. 우주는 체계적이고 점진적으로 구분과 제한을 통 해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조직되었다. 하나님의 통치 작용은 권한의 위임을 통해 하나님의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에 부과되었다. 우주는 본질적으로 가 치와 기능의 위계질서를 가지고 있다. “코스모스의 질서는 우주의 요소 가 운데 분명한 경계를 유지함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빛과 흑암, 물과 마른 땅, 윗 세상과 아랫 세상 사이에 구분을 유지한다.” 44  )   따라서 인간은 위로 하나님과 아래로 동물과 구별되었다. 공동체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 인간 사 회 내의 분할과 구별과 위계질서를 존중했다. 성적 성향, 음식 규정, 제의와 관련한 거룩함에 적용되는 무수한 “계층화”가 존재했다. 이스라엘에게 자 신들의 삶을 지배했던 언약법의 위반은 코스모스의 질서를 동요시키고 자 신을 향한 하나님의 응보를 유발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응보하시는 하나님 의 무기는 홍수, 가뭄, 역병 같이 환경을 동요시키는 힘이었다. 후대 이스라 엘에게는 언약법에 대한 세심한 준수를 통해 창조주요 구원주인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의무였다. 일부는 1장을 제의적인 본문으로 추정했지만 이스라엘에서 이런 창조 제 의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1장에 드러나는 고 대 근동의 신화 제의적 관습에 반하는 반박적인 취지는 1장 저술을 제의적 으로 해설하는 것을 방해한다. 더구나 시인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돌려 이스 라엘이 어떻게 창조 신학을 예배 생활 속에 통합시켰는지 발견해야 한 다.45  )   시편 기자는 모든 백성에게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을 예배하라고 간 43  )   F. F. Bruce, “The Bible and the Environment,” in The Living and Active Word of God: Studies in Honor of Samuel J. Schultz (Winona Lake: Eisenbrauns, 1983), 29. 44  )   T. Frymer-Kensky, “Biblical Cosmology,” in Backgrounds for the Bible (Winona Lake: Eisenbrauns, 1987), 236, 특히 236~239. 45  )   흔히 서술적인 찬양으로 인정되는 찬송은 시 8편; 19:1~6; 29편; 33편; 104편; 148편이다. 시

9, 24, 36, 74, 90, 93, 96~99, 139, 147, 149편도 참고하라. 히브리인들은 해마다 신년 축일에 창조를 기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변 민족들과 달랐다. 이렇게 제의적 신화가 없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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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2:3

청하고 ( 시 150:1~6 ), 그 만드신 분이 자신의 힘 있는 말씀과 행동으로 이 세계 를 유지시켰다고 한다 ( 시 33:6~12; 103:19~22; 113:4~5; 145:10~13 ). 이는 하나님이 우 주에 질서를 주었고 ( 104:1~9 ) 하늘이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증명하기 때문 이다 ( 시

19:1~6[1~7] ).

그러므로 모든 백성은 도덕적 올바름을 통한 순종으로

응답해야 한다 ( 19:7~14[8~15] ).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창조를 유지하는 일에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공급하는 일에 실패하지 않는다 ( 104:27~30 ). 시편 기자는 하늘과 땅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 에 하나님의 가장 우월한 창조 결과인 남자와 여자도 하나님의 도덕적 계율 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추론했다. 창조 신학은 또한 이스라엘의 지혜 전통에서 중요한 사색의 근원이기도 했다. “창세기 1장 1절은 모든 성경적 지혜 전통을 후원” 46  )  하고 이 성경의 지혜 전통은 인간의 행실로 인해 창조 질서에 초래된 결과를 비평적으로 고 찰한다 ( 예. 잠 14:31; 17:5 ). 성공적인 삶의 성취는 코스모스에 내재한 질서에 순 응함으로써 이루어지지만 이런 삶의 방식은 “여호와를 경외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이 주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으로 홀로 삶에 대한 지혜를 가지셨던 것이다 ( 잠

8:22~31 ).

이는 특별히 욥의 의문에 대해서도 진

리인데, 여기서도 코스모스의 질서와 인간사에서의 하나님의 정의 사이의 연결이 전제되어 있다.47  )   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욥에게 욥이 자연 세 계를 설계할 권능이나 지혜가 없는 것만큼이나 인간사의 도덕적 질서를 관 리하는 데 필요한 이해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였던 것이 다 ( 38:1~41:34 ). 하나님만이 홀로 코스모스를 만들고 설계한 분으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하나님만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세계의 미 약한 측면에 균형을 유지할 자격이 있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만이 홀로 도덕 질서를 작동시킬 수 있고 이것도 징벌적 정의의 기계적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덕적 진실성을 따라 성취하는 것이다.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주님이 심판주이면서 동시에 구세주임을 탁월하게 입증한 것이다. 사악한 이스라엘과 교만한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

은 이스라엘이 창조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강조한다. 창조는 역사를 시작했던 일회적 사건으로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서문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G. J. Brooke, “Creation in the Biblical Tradition,” Zygon 22 [1987]: 235를 보라). 46  )   D. Garrett, Proverbs, Ecclesiastes, Song of Songs, NAC (Nashville: Broadman, 1993), 53. 47  )   F. I. Andersen, Job: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OTC (Downers Grove: IVP, 1976), 287, and N. C. Habel, The Book of Job, OTL (Philadelphia: Westminster, 1985), 65~66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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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1~2

역자들에게 정의로운 응보를 가하는 창조주의 역할에 근거하고 있다.48  )   이 사야의 위로와 회복의 신학 ( 40~66장 ) 은 창조주인 하나님과 유일한 주님에 뿌리내리고 있다. 하나님이 만물의 주님이기에 이스라엘을 위해 “새 일”( 43:15, 18~19; 45:21; 48:3, 6~8 ) 을 창조할 자유가 있다. 우주의 주님으로서 하 나님 홀로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 40:12~31 ) 이방 신들이 구원을 줄 수 없는 우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43:10~13; 엘을 창조했고 ( 42:5;

43:1 )

44:6~20; 45:11~20 ).

하나님은 이스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옛 것을 “새 하늘

과 새 땅”으로 변화하게 할 것이다 ( 60:5~14; 62:6~9; 65:17~18 ).

1. 창조주와 창조 (1:1~2) 성경의 첫 번째 말씀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선포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역사의 “언제”와 “어디”와 관련하여 스스로를 계시한다. 개념상으로 이는 백성들이 스스로를 자신들이 속한 세계에 향하 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작과 끝의 측면에서 스스로를 시간 속 에 위치시킨다. 우리의 개인사는 공간의 측면에서도 윤곽이 드러난다. 그래 서 우리가 스스로를 우리가 가진 유한성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규정하는 것 처럼 무한한 유일자는 같은 측면 ( 시간과 공간 ) 에서 자신의 존재를 선포함으로 써 자신을 낮춘다. 하나님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 이면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알고 경험할 수 있는 분이다. 성경의 시작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배우라고 청한다. 그럼에도 알려지지 않은 분의 완전한 자기 표명은 성육신한 말씀을 기대했던 것인데 이 말씀은 아들로서 “그 본체의 형상”(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히 1:3 ) 이다.

(1) 태초에(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1

1:1 “태초에”( ‘브레쉬트’ ) 는 시작을 표시하고 ( p. 161의 보론 “1장 1~2절 번역하기”를 보

48  )   참고. 렘 4:23~26; 31:22, 35~37; 겔 28:13~15; 암 4:12~13; 5:5~9.


NAC

AMERICAN COMMENTARY

성경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힘 있게 선포하도록 돕기 위해 기획된 뉴아메리칸 주석 (NAC)은 끝없이 변화하는 이 시대의 다양한 도전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도록 돕는다. 성경 각 권의 신학적 구조와 내용을 전달하고 각 부분 의 상호 작용을 다룸으로써 성경의 역사적 의미와 현대적 의미를 모두 밝히는 이 주 석 시리즈는 성경 각 권 및 전체의 신학적 통일성을 밝히며, 목사와 신학자 및 모든

창세기

THE NEW

성도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세워지도록 돕기 위해 학문적 주해를 바탕으로 하 는 실천적 해설을 제공한다. 뉴아메리칸 주석은 성경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으로서, 복 음주의 신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인 신학 저술로 대표되며, 설교와 성경 공부를 준비하 는 데 적합하다. 성경의 무오성을 바탕으로 성경 각 권의 고유한 신학 및 주해의 문제 를 다루는 이 주석 시리즈는, 신학적 뿌리가 깊고 성숙한 신앙을 지닌 교회를 세우도

1

NAC

창세기 1

록 이끌 것이다.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샘포드 대학교 비슨 신학부에서 구약학, 히브리 어, 성경해석학을 가르치고 있다. NLT 성경의 레위기를 번역했으며, 처음으로 고대 히브리 레 위기 사해 사본(11 Qpaleolev) 전체를 연구했다. 저서로는 『 NAC 창세기1, 2 』, 『 PTW 레위기』, 『 TTC 여호수아』 등이 있다.

옮긴이 권대영 총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B. A.), 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거쳐(diplom), 일반대학원에서 구 약신학을 전공했다(Th. M.). 독일 쾰른 대학교에서 법학을 수학하고, 주로 주석서 번역가로 활 동하고 있다. 역서로는 『구원계시의 발전사』, 『 NIV 적용주석: 베드로후서·유다서』, 『 WBC 예레미야(상)』, 『 WBC 사무엘하』 등이 있다.

ISBN 978-89-6092-502-1 978-89-6092-501-4 (세트)

www.rnrbook.com

값 35,000원

케네스 매튜스 지음 |권대영 옮김

지은이 케네스 매튜스 (Kenneth A. Mathews)

GENESIS 케네스 매튜스 지음 | 권대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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