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NT
NICNT
ON THE NEW TESTAME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누가복음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NICN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면서도,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 타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지은이 조엘 그린 (Joel B. Green)
옮긴이 강대훈 경북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신약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에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흥과개혁사 번역위원으로 협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태복음 주석』 이 있고, 역서로는 『누가신학』, 『성경신학』, 『하늘』, 『PNTC 누가복음』(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ISBN 978-89-6092-610-3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62,000원
강 | 대훈 옮김
미국 캘리포니아주 풀러 신학교의 신약해석학 교수이자 고등신학연구센터의 부학장이다. NICNT 시리즈의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신약해석학 저널」의 편집자다. 텍사스, 스코틀랜드, 캘리포니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섬겼고, 현재 캘리포니아주 라캐나다의 라캐나다 연합 감리교회에서 교목사로 섬 기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신약성경 듣기』, 『누가복음 신학』, 『신약성경의 세계』 등이 있다.
조엘 그린 지음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누가복음 Luke 조엘 그린 지음 | 강대훈 옮김
목차 ■ 편집장 서문 │ 8 ■ 저자 서문 │ 11 ■ 보충 설명 및 그림 목록 │ 14 ■ 약어표 │ 15
서론 1. 누가복음 해석 | 33 1.1. “내러티브”(‘디에게시스’)로서의 누가복음 • 33 1.2. 누가-행전의 통일성 • 39 1.3. 누가복음의 해석 방법 • 44 1.4. 저자에 대한 질문 • 55
2. 누가복음의 목적과 신학 | 57 누가복음의 개관 | 62
본문과 주석 1. 프롤로그(1:1-4) | 70 2. 예수의 탄생과 소년 시절(1:5-2:52) | 85 2.1. 요한의 탄생 예고(1:5-25) • 104 2.2. 예수의 탄생 예고(1:26-38) • 128 2.3.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1:39-56) • 141 2.4. 요한의 탄생(1:57-80) • 159 2.5. 예수의 탄생(2:1-20) •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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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성전에 등장한 예수(2:21-39) • 200 2.7.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성장(2:40-52) • 217
3. 예수의 사역을 위한 준비(3:1-4:13) | 225 3.1. 요한의 사명(3:1-20) • 229 3.2.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 대한 소개(3:21-4:13) • 257
4. 예수의 갈릴리 사역(4:14-9:50) | 273 4.1. 예수가 유대 회당들에서 좋은 소식을 선언하다(4:14-44) • 282 4.2. 예수의 사명과 논쟁(5:1-6:11) • 311 4.3. 제자들을 가르치는 예수(6:12-49) • 348 4.4. 예수의 긍휼의 사역(7:1-50) • 379 4.5.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8:1-56) • 420 4.6. 예수의 정체와 제자도의 본질(9:1-50) • 464
5.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9:51-19:48) | 514 5.1. 제자도: 말씀을 듣고 행하기(9:51-10:42) • 521 5.2.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11:1-13) • 566 5.3. 비판받는 예수의 행위(11:14-54) • 581 5.4. 종말론적 위기에서의 경각심(12:1-13:9) • 612
5.5. 누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것인가(13:10-17:10) • 659 5.6.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응(17:11-19:27) • 777 5.7.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예수(19:28-48) • 856
6.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가르침(20:1-21:38) | 874 6.1.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충둘(20:1-21:4) • 876 6.2. 마지막의 도래: 파멸, 구속, 깨어 있음(21:5-38) • 914
7. 예수의 고난과 죽음(22:1-23:56) | 932 7.1. 마지막 만찬(22:1-38) • 937 7.2. 감람산의 예수(22:39-46) • 971 7.3. 예수가 체포하러 온 무리를 만나다(22:47-53) • 978 7.4. 대제사장의 관저에 있는 베드로와 예수(22:54-65) • 983 7.5. 예수의 재판(22:66-23:25) • 989 7.6. 예수의 십자가 처형(23:26-49) • 1016 7.7. 예수의 매장(23:50-56) •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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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예수의 승귀(24:1-53) | 1041 8.1. 빈 무덤(24:1-12) • 1045 8.2.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만남(24:13-35) • 1051 8.3.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24:36-49) • 1065 8.4. 예수의 승천(24:50-53) • 1075
■ 참고문헌 │ 1080
누가복음
┃ 편집장 서문┃
누가복음 주석의 새로운 대체본인 이 저서는 본 주석 시리즈 ( NICNT ) 의 또 하나의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본 주석 시리즈의 첫 번째 누가복음 주 석은 노벌 겔던하이스 ( 1951년 ) 가 맡았다. 이 책의 첫 번째 편집장이었던 네드 스톤하우스는 시리즈를 소개하는 전체 서문을 작성했다. 스톤하우스에 이 어 본 주석 시리즈의 두 번째 편집장을 맡은 F. F. 브루스는 특별히 겔던하 이스의 주석에 서문을 썼다. 두 개의 서문은 본 주석 시리즈가 어떻게 발전 해 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게 돕는다. 17권 ( 지금은
19권 ) 으로
계획된 주석 시리즈를 계획에 맞춰 “주기적으로 출
간하는” 작업은 여전히 실현되기 쉽지 않은 우리의 소망이다. 이 소망은 새 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최종 실현을 앞두고 있다 ( 마태복음, 목회서신, 베드 로후서/유다서는 탁월한 주석이지만 아직 작업 중에 있다 ).
본 시리즈의 저자들은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초기에 저술에 참여했던 네덜란드와 남아프리카공 화국 출신 저자들이 현재의 저자들 중에는 없다. 또한 스톤하우스가 구상한 개혁신학의 관점이 브루스가 편집 책임을 맡은 이후에는 의도적으로 약해 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본 시리즈에서 ( 요한서신을 집필한 I. 하워드 마샬과 더불어 ) 감 리교 신자에 의해 저술된 두 번째 주석으로, 20세기 후반에 발흥한 복음주 의 전통의 협력적이고 보편적이고 상호 신앙고백적인 특징을 보여 주는 의 미를 지닌다. 본 시리즈의 목표는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잘 유지되고 있다. 목표는 바로 “현재 학문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도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견지에서 진지한 신약 성경 학생들에게 주해 8
편집장 서문
를 제공하는 것이다”( 스톤하우스가 겔던하이스의 누가복음 서문으로 쓴 글 중에서 ). 본 주석과 관련해 우리는 서문에 두 가지 의미를 추가할 수 있다. 첫째는 겔던하이스의 주석에 담긴 목회적 측면이고, 둘째는 “현대 학문을 충실하 게 반영하는” 방식이다. 솔직히 말하면, 목회적 관심은 본 시리즈의 출간 이후 대부분의 주석에는 보이지 않았고 나의 고린도전서 주석 ( 1987년 ) 에서 다시 강조되기 시작했다. 나는 최근에 본 시리즈의 저자들에게 목회적 측면 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면서 집필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겔던하이스 ( 또는 고든 피 ) 에
비해 고정된 형식으로 목회적 측면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린
의 누가복음 주석은 목회적 측면을 잘 반영하고 있다. 두 번째 이슈는 본 주석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겔던하이스 와 그린은 각각 20세기의 중반과 마지막에 누가복음 주석을 저술했고 이런 이슈를 매우 다르게 다루지만 두 학자 모두 오랫동안 공관복음 연구를 주 도했던 파편적인 접근의 성과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했다. 브루스 교수는 자 신의 서문에서 겔던하이스가 학계의 “일부 비평적인 요소에 대해” “건강한 회의론”을 유지했다고 언급했다. 이런 입장은 당시에는 반현대적인 것으로 보였으나 브루스는 정반대로 평가했다. 그린 교수의 주석은 반현대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저자 누가에 대한 대부분의 공관복음 주석과 달리 전통적인 양식비평과 편집비평의 이슈에는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린 교수는 이런 방법론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지만, 독자들이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다른 주석을 통해 도움 받기 를 원한다. 그린의 관심은 신선하고 흥미로우며, 독자들이 누가의 시각에서 예수에 대한 누가의 내러티브를 파악하도록 돕는 데 있다. 그래서 본 주석 은 내러티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누가의 관심이 내러티브를 ( 사도행 전을 포함해서 )
시작부터 끝까지 어떻게 이끌고 가는지, 누가복음의 첫 번째 독
자로서 우리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을 비교하는 작업 없이 어떻게 읽어 야 하는지 볼 수 있도록 독자들을 돕는다. 그래서 나는 이토록 놀라운 누가 복음 해석을 본 주석 시리즈의 일차 독자인 목회자와 성경 교사와 신학생 뿐 아니라 학문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차 청중에게도 기쁨으로 추천한다. 본 주석을 읽고 배우고, 그래서 즐기기를 바란다. 조엘 그린은 새로운 세대의 복음주의 학자들 ( 더글러스 무의 로마서 주석에 있는 나 의 서문을 참고 바람 ) 에
속할 뿐 아니라 이와 같은 거대한 작업을 완성하기에 특
별한 능력을 갖춘 학자다.
( 스코틀랜드의 애버딘 대학교에서 )
1985년에 신약학 박사
를 마친 이래로 그린은 많은 연구, 특히 누가-행전 관련 연구물을 숨 가쁘 9
누가복음
게 쏟아 냈으며 ( 본
주석의 참고문헌에 있는 그의 글을 보라 ),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의
편집장 ( 또는 공동 편집장 ) 으로 수고하고 있다 ( 신학생을 위한 계간 신학 저널 Catalyst, 『예수 와 복음서 사전』[IVP], I. 하워드 마샬 은퇴 기념 논문집 등 ).
또한 그린은 뉴 칼리지 ( 버클리 ) 와
미국 서부 침례 신학교 ( 버클리 ) 에서 이미 탁월한 강의 강력을 쌓았다. 그린은 본 주석의 출간 ( 1997년 가을 ) 과 함께 애즈베리 신학교 ( 켄터키 ) 의 신약해석학 교 수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린은 학생과 교사로서 이런 학문 활 동을 하는 과정에서도 교회의 목회 사역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학문 을 향한 열정과 교회 생활이 융합을 이룬 결과가 바로 이 주석의 빛나는 결 실로 이어졌다. 고든 피
10
저자 서문
┃ 저자 서문┃
누가복음 연구에서 큰 전환점을 이룬 한스 콘첼만의 저서는 조셉 피츠마 이어의 두 권짜리 누가복음 주석이 1980년대에 출간되기까지 1950년대부 터 수십 년 동안 영향을 끼쳤다. 가장 최근에 누가복음의 영향력 있는 저술 을 남긴 학자들은 문학적 연구 분야의 로버트 탄네힐과 루크 존슨, 그리고 사회과학적 연구 분야의 할버 목네스와 필립 에슬러다. 누가복음의 깊은 연 구에 대한 나의 입장은 후자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며, 역사적 연구 ( 예, 역사비 평, 전승비평, 편집비평 등 ) 의
주도권이 약해지는 것과 이른바 “새로운” 접근 ( 예, 새
문학비평, 내러티브 비평, 새 역사주의 등 ) 의
인기를 특징으로 한다. 주석 집필을 생각
하는 것 자체가 방법론과 표현에 있어서 너무 많은 문제를 노정하는 것처 럼 보였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석 집필 자체를 신랄 하게 비판했다! 나는 교회 사역과 관련된 사람들이 전권 주석의 도움을 지 속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개인적인 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 주석을 집 필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주석은 근본적으로 성경 본문에 대한 경외심을 바탕에 두어야 하고, 학술적인 성경 연구에 학문적으 로 기여하고 교회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자가 저술한 것이어야 한다. 나는 또한 복음서 연구에서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막다른 골 목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으며, 최근에 이루어진 방법론의 발전이 누가복음 과 그 메시지를 현대 독자들에게 훨씬 더 생생하게 전해 줄 있는 결과를 만 들어 냈다고 믿는다. 때때로 거세고 언제나 흥미진진한 해석 방법론의 물줄기를 어떻게 항해 11
누가복음
할 것인지는 서론을 실제로 ( ! ) 읽는 사람에게는 명확해질 것이다. 본 주석도 마찬가지다. 책의 큰 부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가복음에서 제기될 수 있는 모든 영역의 질문을 거론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런 시도는 실제로 가 능하지도 않으며, 오늘날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는 내게 절망의 이 유가 아니라 기뻐하며 누가복음의 다양한 특징을 맛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누가복음은 역사적 교회와 전 세계 교회의 다양한 필요를 수많은 방 식으로 말해 줄 수 있다. 구름과 같은 증인과 참여자가 없었다면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의 가족인 파멜라, 애런, 앨리슨의 격려와 지원 을 특별히 감사한다. 누가복음으로 빨리 돌아오지 않는 우리 가족의 대화에 서 이 주석이 미래의 대화 주제로 환영받게 될 것이다! 나는 학생과 연구 조교인 길스 베켓, 미건 하울랜드, 케빈 앤더슨, 마이클 맥키버로부터 큰 도 움을 받았다. 나의 다양한 누가복음 강의에 참여한 모든 이들로부터도 도움 을 얻었다. 나는 뉴 칼리지 ( 버클리 ) 에서 처음으로, 최근에는 미국 서부 침례 신학교와 GTU ( Graduate Theological Union ) 에서 누가복음을 강의했다. 누가복음 에 대한 나의 관점은 상당 부분 지역 교회와 콘퍼런스에서 전하고 진행한 설교와 세미나 과정에서 발전되었다. 특별히 캘리포니아의 성 누가 감리교 회와 레드우드 크리스천 파크 교회의 친구들을 잊을 수 없다. 뉴 칼리지 ( 버 클리 ) 와
미국 서부 침례 신학교는 연구년마다 누가복음을 집중적으로 연구
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 1992년 신학부의 초빙학자로 선정해 준 더럼 대학교에 감사를 표하며, 특히 이 기간 동안 베풀어 준 제임스 던과 메타 던 의 환대와 섬김에 감사한다. 나는 연구년 기간 동안 연구비를 지원받았을 뿐 아니라, 가톨릭성서협회 ( CBA ) 는 나의 연구 프로젝트인 “일치 해석학을 위하여: 누가복음의 담화 이론과 사회학적 분석”( 1991-92 ) 을 위해 신진 학자 연구비를 지원해 주었다. GTU는 “누가-행전과 유대인” 연구 계획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학생-교원 파트너십을 위한 헨리 마요 뉴홀 장학회 의 이름으로 연구비를 제공했다. 또한 나는 본 주석 시리즈의 누가복음 주 석으로 기여할 기회를 먼저 제공해 준 프레드 브루스에게 감사를 전하며, 이후 편집장으로 부임해서 다양한 해석 방법을 활용할 수 있도록 인내심과 격려와 통찰력과 기쁨으로 인도해 준 고든 피 교수에게 감사한다. 본래 본 주석 시리즈는 미국 표준역 성경 ( ARV, 1901년 ) 을 사용했으나 이후 에는 집필자에 따라 다른 번역을 선택하기도 하고 직접 번역한 자료를 사 용하기도 했다. 나는 많은 번역이 급증하는 것을 원치 않고 교회에서 구할 12
저자 서문
수 있고 널리 사용되는 본문을 사용하기 원하기 때문에 본 주석에서는 NRSV를 선택했다. 대부분의 경우 나는 본문비평을 거의 다루지 않지만 필 요에 따라 NRSV을 사용하면서 본문비평과 번역의 이슈에 대해 번역위원회 와 다른 입장을 언급한다. 조엘 그린 1997년 고난 주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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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복음 해석
서론의 첫 번째 부분에서는 본 주석의 해석 방법을 제시하고 설명하며, 다소 적은 분량이긴 하지만 이 방법의 타당성을 입증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본 연구가 최근 제시되고 있는 모든 연구 방법의 장점을 총동원해서 누가 복음을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모든 방 법을 총동원해서 해석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본 연구는 내가 다른 저술에 서 “담화 분석”( discourse analysis ) 이라고 부른 연구 방법을 사용한다. 이 방법 은 문화-비평적 접근과 내러티브 접근을 결합하는 것이다.1 ) 독자들은 이런 방식의 접근을 통해 누가의 문학적 기교뿐 아니라 내러티브 신학 ( 예, 신학, 윤 리, 영성 ) 을
심도 있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은 현대의 독자들이
누가복음을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재의 관심을 대변하는 작품 으로 재구성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도울 것이다.2 )
1.1. “내러티브”(‘디에게시스’)로서의 누가복음 저자는 누가복음의 서문 ( 1:1-4 ) 에서 자신의 저술을 ( 교회의 전통에서 이후에 붙여진 1 ) 특히 다음 글을 보라. Green, “Discourse Analysis”; idem, Gospel of Luke, 1장. 방법론의 흐름 에 대해서는 다음 책에 들어 있는 “담화”와 관련된 두 논문을 보라. The Johns Hopkins Guide
to Literary Theory and Criticism : de Beaugrande, “Discourse Analysis”; and G. L. Dillon, “Discourse Theory.” 2 ) “표현의 문제”에 대한 우스노의 논의가 끼친 방법론적 영향은 본 작업에서 핵심이다(Wuthnow, Communities of Discourse,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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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복음”이 아니라 )
“내러티브” 혹은 “순서에 따른 이야기”로 범주화한다. 이 용어
는 독자들에게 “내러티브”에 걸맞게 복음서를 읽도록, 특히 “순서”를 중요 시하면서 읽도록 요청한다.3 ) 1세기 당시 책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를 고려 하면, 이 서문은 당시의 독자들이 누가복음의 문학 형식 혹은 장르에 매우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누가의
( 서사시와 대조되는 )
“내러티브”를 이해했을 가
능성을 보여 준다. 일반적으로 고대 로마에서 “내러티브”를 선택한 장르는 역사서, 전기, 소설이다. 역사서는 일어난 사건에, 전기는 살았던 사람에 초 점을 맞추고, 소설에는 역사적 자료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최근의 연구가 보여 주는 것처럼,4 ) 장르를 결정하는 작업은 소통의 과정 을 시작할 때와 해석할 때 모두 중요하다. 저자와 독자는 둘 다 반복 가능한 말의 패턴을 따른다. 예컨대 저자는 의미와 목적에 대한 예상을 때로는 가 능하게 하고, 때로는 뒤집기도 한다. 장르를 결정하는 작업은 실체를 시각 화하는 방법, 경험의 구체적인 양상을 표면화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장르를 더 정확하게 밝히는 작업이 “누가복음 읽기”라는 과제를 수행할 때 흥미롭고 중요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접근에 대해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 고 있다. 왜냐하면 내러티브로 읽는 관점에서는 역사적 내러티브와 비역사 적 내러티브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더 많이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 내러티브가 역사적 타당성을 제시하지 않기 ( 또 는 본문과 관련된 역사 자료를 갖고 있지 않기 )
때문이 아니라, 역사를 내러티브로 표현
하는 작업이 원래 “편파적인” 특징을 항상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사건들을 편파적으로 선별해서 전개하는 것을 의미하고, 해석학적으로 유 리한 관점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5 ) 역사서는 중요하게 다룰 사건들을 선별할 때, 그리고 시간과 인과관계에 따라 이런 사건들의 순서를 배열할 때, 경우에 따라서 “실제 일어난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때로는 더 적은 내용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6 ) 그러므로 역사서 ( 혹은 전기 ) 를 읽는 사람이 수 행할 첫 번째 핵심 과업은 역사서를 내러티브 본문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의 내러티브의 장르를 분석하는 논의가 쓸모없거나 부적절하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의 저술을 이해하기 위해 장르를 밝히는 작 3 ) 특히 Genette, Narrative Discourse; idem, Narrative Discourse Revisited를 보라. 4 ) J. L. Bailey, “Genre Analysis,” 특히 197-203에 있는 요약은 도움이 된다. 5 ) 참고, Clifford, “Partial Truths,” 6-7. 6 ) 해석의 단계에서 소설과 역사서 사이의 관계를 인정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W. Martin, Recent Theories, 또한 de Certeau, Writing of History를 보라. 더 구체적으 로는 Iser, Fictive and the Imaginary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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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누가복음 해석 1.1. “내러티브”(‘디에게시스’)로서의 누가복음
업의 의미를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누가복음의 장르. 누가복음의 서문에 대한 헨리 캐드베리의 선구적인 연
구 이후,7 ) 학자들은 거의 그의 연구에 근거해서 누가복음 1장 1-4절이 정 확히 고대 역사서 문학 전통에 속한다는 사실에 전반적으로 동의한다.8 ) 서 문뿐 아니라 누가복음의 다른 본문도 그리스-로마 역사학의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계보의 기록 ( 3:23-28 ), 교육을 위한 식사, 여행 내 러티브, 설교, 서신, 극적인 에피소드 ( 나사렛에서 예수가 배척당하고[4:16-30] 바울이 폭풍 속에서 항해를 하고 파선을 경험한 사건[행 27:1-28:14] )
등이 이런 특징에 해당한다.9 ) 이
자료와 다른 자료에 근거해 학자들은 누가-행전을 역사서로 규정하고, 누가-행전과 가장 근접한 역사 서술의 종류를 세부적으로 분류하는 시도를 했다. 예를 들어, 오니 ( Aune ) 는 누가-행전을 “총사”로 분류함으로써 고대 역사서라는 더 넓은 틀 안에 누가-행전의 위치를 설정했다. 여기서 총사는 “기원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단일 민족의 중요한 역사의 경험……”을 서 술한 것이다.10 ) 이 경우 누가의 “민족적 자의식”은 “그 도”를 따르는 사람 들 ( 행 9:2; 19:9, 23; 22:4; 24:14, 22 ) 의 기원을 인정하며, 이들은 1세기 유대교 내에 서 구별된 분파였다. 캘런 ( Callan ) 역시 누가-행전의 본질을 역사서로 규정 하는 시도를 했다. 이를 위해 캘런은 누가의 작품을 역사의 형식을 갖춘 첫 사례 중 하나로 이해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무엇에 대한 참된 설명을 하는 것”에 관심을 두며, 이런 형식의 역사는 BC 1세기에 기록되기 시작 했다.11 ) 이런 합의와 흐름이 누가를 “역사가”로12 ) 부르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 도 움을 준 것은 맞지만, 누가-행전을 일반적인 의미의 역사서로 규정하고 누가복음 1장 1-4절을 구체적으로 그리스-로마 역사서에 나타나는 서문으 로 규정하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누가를 역사가 7 ) 특히 Cadbury, “Commentary”, 또한 idem , “Knowledge Claimed”; idem , “‘We’ and ‘I’ Passages in Luke-Acts”를 보라. 8 ) “그의 서문과 헌정은 둘 다 당시 헬라의 역사가들로 분류되는 것을 의미한다”(Cadbury et al.,
“Greek and Jewish Traditions,” 15). 9 ) Aune, Literary Environment, 120-131. 10 ) Aune, Literary Environment, 88; 77-153을 보라. 11 ) Callan, “Preface”; 누가-행전 외에 캘런은 이 목록에 다음 작품을 포함시킨다. Sallust, On the Conspiracy of Catiline ; Josephus, Jewish War ; Tacitus, Annals ; Arrian, Anabasis of Alexander; Dio Cassius, Roman History; Herodian, History of the Empire. 12 ) 예, Barrett, Luke the Historian; Gasque, History of the Interpretation; Hengel, Acts; Marshall,
Luke: Historian and Theologian; Hemer, “Luke the Historian”; idem, Acts; Lüdemann, “Acts of the Apo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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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로 간주하기에는 그가 신학적 의제에 지나치게 동기 부여를 받는다고 생각 한다. 이는 한때는 그럴듯했으나 지금은 타당성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왜냐 하면 저술 동기가 신학적이든 변증적이든 교육적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 이든 간에, 동기 없이 저술한 고대 역사가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를 신학에 반하는 것으로 설정하는 현대의 이분법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철학적 ( 그리고 특히 인식론적 )
주장에서 나온 것이며,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거부되고 있다.13 )
또한 누가의 서문은 그리스 사가들의 서문과 형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 사가들이 더 긴 서문으로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누가의 헬라어 서 문은 매우 짧은 편이다. 단 한 문장이다. 누가복음의 서문에서 내러티브로 의 전환이, 문체에 있어서나 내러티브의 시작인 1장 5절에 도입부를 제공 한다는 점에서, 놀랄 정도로 갑자기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른 사가들과 달 리 누가는 그의 선행자들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 사가들에게는 일반적이었던 도덕적 교훈을 누가는 시작 부분에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 때문에 알렉산더 ( Alexander ) 는 헬라식 서문 작성의 문학 형식을 완전히 새로 평가했고, 연구 결과 누가복음 1장 1-4절을 비교 분석할 수 있 는 자료를 광범위하게 제공했다. 알렉산더는 누가의 서문 구조와 헬라식 서 문 작성에 나타난 구조를 분석한 결과 누가복음 1장 1-4절과 가장 유사한 형태를 “과학 전통”에서 찾는다. “과학 전통”은 의술, 수학, 공학, 기술 등의 분야에 대한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글쓰기를 말한다.14 ) 알렉산더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와 초기 기독교 운동에 대한 누가의 내러티브 서술은 “과학적” 이다. 즉 이 주제에 대한 축적된 가르침의 전통을 전수하는 데 관심을 두는
13 ) “놀라울 수 있겠지만, 역사의 개념을 객관적 의미로, 즉 과거 사건들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것은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Fornara, Nature of History, 91; 참고, 91-141). 역사학에서의 중요 한 방향을 보라. 예, Cook, History/Writing; de Certeau, Writing of History; Stock, Listening
for the Text; Veyne, Writing History; White, Content of the Form. 캐드베리의 주장에 따르 면, 누가-행전이 그리스-로마의 역사서와 일치하는 것은 누가가 로마의 당국자들에게 기독교 운 동을 변호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추론을 지지한다(Cadbury, “Commentary,” 490; 참고, idem, Making of Luke-Acts, 303-16; 그리고 누가가 로마를 호의적으로 묘사한다는 과장된 주장을 참 고하라[Wengst, Pax Romana, 89-105]). 캐시디의 두 연구를 계기로(Cassidy, Jesus, Politics, and Society와 Society and Politics) 누가-행전을 기독교 운동의 선한 속성이나 로마 정부의 선 한 속성을 위한 변증으로 이해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그런 읽기는 눅 1:1-4에서 원하는 것은 아니며, 알렉산더의 주장과 달리(Alexander, “Luke’s Preface,” 50) 그런 읽기가 타당하지 않다고 해서 누가의 서문을 역사서의 전통으로 규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표시로 주장하지는 말아 야 한다. 14 ) Alexander, Preface; idem, “Luke’s Preface”; idem, “Preface to 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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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누가복음 해석 1.1. “내러티브”(‘디에게시스’)로서의 누가복음
측면에서 과학적이다. 알렉산더가 과학 전통과 유사한 점을 제시하지만, 누가복음을 “과학적” 문서로 입증할 정도에 미치지는 못한다. 과학 전통에 나타난 핵심 요소를 누가복음의 내러티브에 적용할 때 중대한 불일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과 학 전통과 누가복음의 내러티브가 형식적, 문법적 특징을 공유한다고 해서 이런 불일치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누가복음과 과학 전통이 유사성을 보인다고 해도 누가복음 1장 1-4절과 누가-행전을 그리스-로마 의 역사서로 규정하는 견해가 쉽게 부정되지는 않는다. 첫째, 누가-행전이 그리스-로마 역사서의 일반적인 특징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 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장르를 규정할 때는 유연성이 존재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누가는 구약과 후기 유대 역사서로부터 내러티 브 신학을 형성하기 위해 역사의 순서를 사용하는 영향을 받았다.15 ) 예수전승이 이미 전기의 형태로 존재했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알 렉산더가 주장하는 것처럼 누가는 예수의 의미를 재현하는 다양한 방식을 접할 수 있었고 그런 방식이 누가 당시에 “전통적”이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내러티브를 기록하고자 의도했으며, 저술을 내러티브로 묘사함에 있어서16 ) 많은 사건으로 구성된 긴 내러티브의 이야기로 자신의 저술 계획을 규정 한다. 이런 형태의 저술 원형은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초기 그 리스 역사였다.17 ) 셋째, 누가-행전의 문학적 요소 ( 예, 등 ) 를
토론, 여행 내러티브, 연설
고려하면 누가의 저술과 그리스-로마 역사서는 여러 면에서 유사
하다.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장 1-4절을 그리스-로마 역사서에 나타난 서 문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몇 가지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어려 움은 다음 내용을 알게 되면 해소될 수 있다. (1) 누가복음 이전의 이스라 엘과 유대 역사서 대부분은 저술의 목적과 절차를 본문 안에 포함하지는 않았으며, (2) 누가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서문 ( 1:1-4과 1:5-2:52 ) 을 포함시 킨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실상 누가의 실제 본문이 시작하는 지점은 1장 5절-2장 52절이며, 이 본문에 들어 있는 내러티브의 사건들은 앞으로
15 ) 전기 선지서(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후기 선지서, 마카베오 문헌의 예를 보라. 누가 복음의 연설과 그리스-로마, 구약/70인역, 헬라적 유대 역사서에 있는 연설 사이의 미묘한 차이 에 대한 논의로는 Soards, Speeches in Acts, 134-161을 보라. 16 ) διήγησις(눅 1:1). 17 ) Hermogenes Progymnasmata 2; 참고, Lucian De Hist. Conscrib. §55: “역사의 모든 내용은 간 단히 말해 긴 내러티브다”(διήγησις μακρά); Aristotle Rhetoric 1.1360A35; Quintilian Inst. orat.
2.4.2; van Unnik, “Luke’s Prologue,”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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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행전에서 전개될 내용을 예고하는 기능을 한다.18 ) 알렉산더의 연구 외에도, 누가-행전을 역사서로 분류하는 것에 반대 목 소리를 내는 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그리스-로마 전기에 나타나는 독특 한 요소에서 유사점을 찾는다.19 ) 전기는 역사서에서 나온 장르이며, 역사처 럼 역사적 자료를 담고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을 전기로 분류하는 작업은 성공하기 어렵고, 사도행전을 포함해서 따져 보면 전기로 분류하는 것은 성 립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누가복음은 주 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오래전에 세우신 목적이 성취되는 것에 초점을 맞추 기 때문에, 복음서의 장르를 예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 전기로 분류하는 것은 누가복음의 이차적인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누가복음의 내러티 브가 갖고 있는 첫 번째 목표를 생각한다면,20 ) 그리고 전기 장르로 분류하 는 작업이 누가-행전 둘 다의 특징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누가복음을 전기로 규정하는 것은 거부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사실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는 누가가 그리스-로마의 문학 형 식, 특히 전기 장르와 관련된 문학 형식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외의 문학 형식의 특징, 그리고 누가의 내러티브가 하나님의 목 적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은 누가-행전을 “전기” 또는 “연속되는 전기 내러 티브”로 규정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21 ) “전기” 장르 또는 어느 정도는 “역사서”의 장르에 유연성이 있었다는 점은 저술의 고유 형식을 실제로는 유연성 있게 취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22 ) 18 ) 참고, Fitzmyer, Luke the Theologian, 29-30. 역사가들이 시작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Said, Beginnings, 50을 보라. 19 ) 최근의 예를 보라. Talbert, Literary Patterns; idem, What Is a Gospel? ; Robbins, “Prefaces.” 20 ) 스콰이어는 그의 연구(Squires, The Plan of God in Luke-Acts)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누가
의 중요한 기여는 내러티브를 역사서와 조화시키는 것이다. 버릿지의 동사 주어 분석(Burridge, What Are the Gospels? )은 예수를 누가복음에서 최고의 주연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분석은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 능력을 입거나 사명을 받아 역할을 하는 행위의 주체 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봉사하기 위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버 릿지의 분석은 “신적 당위성”, “성경”, “하나님의 목적”의 개념과 같이 누가-행전에서 언급하는 표현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버릿지의 분석은 타당한 근거 없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장 르를 분류하는 목적을 위해 서로 분리될 수 있고 분리되어야 한다고 가정한다. 무엇보다 누가복 음의 관심을 한 인물, 예수에 둔다고 해서 복음서를 역사서로 규정하는 입장이 실패하는 것은 아 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후대 로마 제국의 등장으로 역사서는 개인에게 집중하는 경향을 띠게 되 었다(참고, Fornara, Nature of History, 34-46). 21 ) 다음의 주장을 보라. Aune, Literary Environment , 78-79; Barr and Wentling, “Classical Biography.” 홀츠버그(Holzberg, Ancient Novel, 22-23)는 사도행전과 고대 소설 간의 소설을 닮은 유사성을 언급한다. 22 ) 복음서의 장르를 전기로 보는 견해를 비판한 연구로는 Aune, “Genre of the Gospels”; Guel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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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누가복음 해석 1.2. 누가-행전의 통일성
우리가 누가-행전을 고대 역사서로 규정하면 내러티브에 나타날 현상을 예상하게 된다. 누가가 서문에서 밝힌 저술의 목적 외에도 ( 눅 1:1-4 ), 우리는 내러티브에서 당대의 역사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인과론과 목적론의 이 슈가 특히 강조되고, 설득적이고 열정적인 가르침을 위해 철저한 연구가 나 오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장르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이미 등장 했다. 이제 이 질문을 직접 다루어야 한다. 이 질문은 바로 누가복음과 사도 행전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로, 지금도 논쟁이 되는 주제다.
1.2. 누가-행전의 통일성 현대 독자는 주로 신약 정경에서의 배열 위치 때문에 누가-행전 ( 두 권이지 만 한 이야기 ) 의
통일성을 쉽게 간과하고 넘어간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각
각 따로 완성되었고 대중에게도 그렇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주후 2세기에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함께 “네 복음서”를 구성하게 되 었다.23 ) 사도행전은 예수의 이야기와 바울의 사역을 잇는 교량으로서 네 복음서와 서신서 사이, 즉 현재 정경의 자리에 배열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경의 위치상 누가의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은 바울 전통을 이해할 수 있 는 틀을 제공하고,24 ) 누가의 첫 번째 책은 당당히 “복음서”로 불리게 되 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당시에 “복음서”라는 문학 장르가 존재하지 않 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런 장르가 없었던 것이 거의 확실하 므로 누가가 “복음서”를 저술할 마음을 먹었다거나 독자들이 저술의 장르 를 복음서로 이해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25 ) 누가는 앞선 기록을 “복음서”가 아니라 “내러티브”로 일컫는다. 그리고 누가의 저 술 목적이 예수의 이야기를 먼저 쓰고 나서 초기 교회에 대한 내용을 추가 하는 것이었다는 식으로 연역적으로 추론할 근거는 없다. 누가가 쓰고자 했 던 “내러티브”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저술 목적에 따라, 예수의 지상 사역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초기 교회를 통해 예수의 선교가 계속되는 이야기 “Gospel Genre”; Dihle, “Evangelien”; Hurtado, “Gospel (Genre)”을 보라. 23 ) Bruce, “Canon,” 95; Koester, Ancient Christian Gospels, 242-244. 24 ) 또한 Wall, “Canonical Context”를 보라. 25 ) 책의 제목으로 “복음”(εὐαγγέλιον, ‘유앙겔리온’)을 사용한 예로는 Justin Dial . 10.2; 100.1; 1 Apol. 66을 보라. 쾌스터(Koester, Ancient Christian Gospels , 1-43)는 ‘유앙겔리 온’(εὐαγγέλιον)이 마르키온 이전에 책을 묘사할 때 사용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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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로 발전했다.26 ) 누가복음 1장 1-4절에 있는 서문의 내용과 사도행전 1장 1-2절에 있는 두 번째 서문의 내용 때문에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 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추정해 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책 이 공통 저자의 저술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27 ) 또한 일반적으로 학자 들은 사도행전이 누가복음의 속편이라는 점에도 동의하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에 근거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28 ) 예를 들어, 사도행전 1장 1절 은 “첫 번째 책”( 개역개정-“먼저 쓴 글” ) 이라고 할 뿐 아니라 책의 주제를 “예수 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 시작한 모든 것”으로 칭한다. 이 표현은 누가복 음을 명료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예수의 사역이 말씀과 행위로 구성된 사실 을 알린다. 그리고 말씀과 행위의 등식에서 한쪽으로 치우칠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이 요약은 “시작했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사역 이 연속될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그의 이름을 부를 것이기 때문에 ( 예, 행 2:21; 9:21; 15:17; 18:15; 22:16 ) 두 책의 연속은 실망을 안 겨 주지는 않는다. 주의 이름은 생명을 온전하게 하려고 예수가 계속해서 임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 예, 행 3:6, 16; 4:7, 10, 12, 17, 30; 8:12; 9:15, 34; 10:43; 16:18 ). 따라서 누가-행전이 두 권으로 나누어진 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두 번째 책에서 새로운 주제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29 ) 고대 저자들은 물리적 편의성 때문에 긴 작품을 “여러 책들”로 나누었고, 각 책은 하나의 파피루스 두루 마리에 알맞은 분량이었다.30 )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최대 길이는 약 10미터 정도였다.31 ) 신약에서 가장 긴 누가의 두 책은 각각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26 ) Marshall, “Luke and His ‘Gospel’,” 291-294를 보라. 27 ) Parsons and Pervo, Rethinking the Unity , 7-8을 보라. 동일 저자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을 저술했는지 여부, 특히 문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찬성: Argyle, “Greek of Luke”; 반대: (Argyle의 주장을 반박한) Beck, “Common Authorship.” 최근에는 문체의 특징에 대
해 도세이는 어떤 의미로 누가-행전의 내러티브 통일성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 한다(Dawsey, “Literary Unity”). 28 ) 이 견해는 파슨스와 퍼보(Parsons and Pervo, Rethinking the Unity) 역시 인정하는 것이다. 그 러나 이들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신학적인, 내러티브의 통일성은 낮은 것으로 이 해한다. 또한 Pervo, “Same Genre”; Parsons, “Unity of the Lukan Writings”; idem, “Christian Origins”를 보라. 29 ) Alexander, “Preface to Acts,” 78-79, 92-94를 보라. 30 ) 파피루스에서 종이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Pliny Naturalis Historia 13.21-27 §§68-89를 보라. 편리하게도 이 자료를 요약한 내용이 Finegan, NT Manuscripts, §§ 5-6; Gamble, Books and Readers, 44-45에 있다. 31 ) 참고, Metzger, Manuscripts , 16; Kenney, “Books and Readers,” 18; 특히 Gambl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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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누가복음 해석 1.2. 누가-행전의 통일성
완전히 채우는 분량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책의 크기에 있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대략 같다. 누가복음은 약 19,400단어, 사도행전은 약 18,400단 어여서, 대략 같은 길이의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누가복음 과 사도행전을 같은 크기로 나눈 방식은 당시 저자들이 책의 크기를 균등 하게 나누기 원했던 것과 일치한다.32 ) 달리 말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술 계획은 두 책을 비례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두 내러티브는 예루살 렘에서 시작한다. 예수의 승천 소식과 관련된 사명 내러티브는 누가복음의 끝이고 사도행전의 시작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각각 약 30년의 기간 을 다룬다.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마지막 며칠 ( 19:28-24:53 ) 과 바 울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고 로마에 도착한 여정 ( 행 21:27-28:31 ) 을 각각 25%의 분량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누가는 여러 방식을 사용해 의도적으로 누가복 음의 예수와 사도행전의 제자들 사이의 공통점을 발전시켰다.33 ) 우리가 누가-행전의 “내러티브 통일성”을 인정하기 위해 통일성의 개념 을 더 확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내러티브”의 개념을 어떻게 생각하느 냐에 대한 것이다. 내러티브의 개념은 논쟁이 되는 주제다.34 ) 내러티브의 핵심 요소에는
(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작, 중간, 결말로 언급한 )
시간의 순서와 목적이 포
함된다. 내러티브에서 “사건”( event ) 은 시간 관계와 인과관계로 구성되며, 이 관계를 학자들은 “내러티브 사이클”로 이해한다. 간단한 내러티브 사이 클은 “가능성”, “실현”, “결과”의 순서와 전개 과정으로 구성된다.35 ) 요한 의 탄생에 대한 누가의 설명에서 약속, 실현, 결과의 순서로 내러티브 사이 클이 전개되는 것과 같이 ( 1:5-25,
59-80 ),
내러티브 사이클은 내러티브 안에
등장할 뿐 아니라, 전체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역할도 한다. 과연 누가-행전 전체를 단일 내러티브 사이클의 산물로, 즉 하나의 내러티브 목적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36 )
and Readers, 45-47; Kenyon, Books and Readers, 51-52. 32 ) Morton and Macgregor, Structure, 12-17; 참고, Diodorus Siculus 1.29.6; 1.41.10; Josephus Against Apion 1.35 §320. 33 ) Green, “Internal Repetition”; Aune, Literary Environment, 119; O’Toole, Unity, 3장을 보라. 34 ) Toolan, Narrative, 5-9에 있는 도입부 논평과 W. Martin, Recent Theories를 보라. 35 ) Bal, Narratology, 19-23에 있는 “내러티브 사이클”에 대한 논의를 보라. 36 ) 이 질문은 일부러 만들어 본 것이다. 우리는 저자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저자가 내러티브 의 통일성을 의도했는지 결정 내릴 수 없다. 대신 우리는 누가-행전의 내용과 형식이 누가-행전 의 특징을 내러티브 통일성으로 보는 관점과 일치하는지(그리고 그런 특징을 지지하는지) 여부 를 질문할 수 있다. 덧붙여서, 우리는 누가복음이 사도행전 안에서 연속되고 있는지, 다시 말해 사도행전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내러티브의 요소가 누가복음에도 제시되는지 질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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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내러티브 분석이라는 거대한 캔버스에서 누가-행전을 보게 되면, 캔버스 전체에 걸쳐 넓은 붓으로 그려진 하나의 내러티브 사이클을 보는 것이 가 능하다.37 )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충만함을 주시는 하 나님의 계획이 내러티브 사이클을 구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민을 위 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1장 5절-2장 52절에서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예 고하는 것이며, 이 목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정에서 태어난 요한과 예수
를 통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누가의 탄생 내러티브에 따르면 하나님의 목적 은 반대 없이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의 준비하는 사역과 예수의 생 애, 죽음, 승귀를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명을 받고 약속대로 능력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온 백성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확장하는 행위 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은 실현된다 ( 눅 3장-행 1장 ). 예수 자신이 온 세상을 위 한 선교의 길을 준비한다. 예수가 많은 이방인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예수 는 오래전부터 놓여 있는 장벽과 그 결과로 생긴 인종, 남녀, 어른과 어린 이, 빈부, 의인과 죄인 등의 분리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선교의 길을 준비 한다. 예수의 사역에서는 갈등조차도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 아래 주어지는 것이며,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며, 예수의 승귀는 그의 사 역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사건인 동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구원을 줄 수 있게 만든 하나님의 강력한 행위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속편의 이야기는, 특히 사도행전 2-15장은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본문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평등 공동체를 이 루는 선교를 진행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목적이 보 여 주는 결과 ( 행 16-28장 ) 는 기독교 운동에 대한 유대인의 적대감은 점점 더 강해지고, 역설적으로 교회는 점점 더 이방인으로 채워질 것을 강조한다. 내레이터에 따르면 이런 흐름도 내레이터가 그의 대변인 바울을 통해 ( 그리고 바울, 성경을 통해 )
말하는 하나님의 목적이다. 물론 유대인 가운데서도 모세와
선지자들을 메시아가 예수임을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한다.38 )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하나의 연속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39 ) 누가복 37 ) 다음 내용은 대부분 Green, “Beginning,” 62-63에서 온 것이다. 38 ) 이는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 유대인 선교에 목표를 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며, 사도행전의 마
지막 구절이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버리는(또는 결정해 버리는) 것도 아니다. 바울은 아직 (예상되는) 재판을 받지 않았으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는 (약속된 것이지만) 아직 돌아 오지 않았다. 39 ) 이미 Augustine De cons. 4.8에 나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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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가복음의 목적과 신학
나는 누가의 신학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의 신학』 ( 1995 ) 에서 자세히 다루 었으므로,69 ) 본 주석에서는 내러티브 신학의 큰 그림만 간략하게 스케치하 고자 한다. 이 스케치는 주로 주석에서 사용하는 접근에 의해 결정된다. 왜 냐하면 내러티브 접근은 내러티브의 “주제”에 대한 질문에 집중하기 때문 이다. “주제”는 내러티브의 “목적”을 말하며, 내러티브의 목적에 동의할 가 능성 ( 목적의 “조력자들” ) 과 반대할 가능성 ( 목적의 “반대자들” ) 이 존재한다.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이, 누가복음의 장르는 저자가 적법성과 변증에 관 심을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우리는 누가-행전의 내러티브 통일성을 논의하면서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의 중심은 만민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강조했다. 갈등이 심했던 1세기 지중해의 세계에서, 특히 더 넓은 유대 세계 내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만민의 구원으로 이해하고 이 목표가 기독교 운동을 통해 실현된다고 이해한 사람들이 분쟁과 불확실성의 원인 이 된 것은 당연하다. 이런 배경에 따르면 누가-행전의 목적은 반대에 직면 한 기독교 운동에 힘을 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누가-행전은 (1) 구속의 목적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해석과 경험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2)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신실하게 증언하도록 요청한다. 따라서 누가-행전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교회론적
69 ) Joel B. Green, The Theology of the Gospel of Luke , NTT 3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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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이다. 말하자면, 누가-행전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특징짓는 행위, 공동체의 적법성을 위한 기준에 관심을 두며,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 하도록 초청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누가-행전의 목적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누가-행전의 핵심적인 신학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의 학자들은 누가-행전의 핵심 주제는 “구원” 이라고 주장하며, 이 주제는 내러티브 내에서 다른 본문의 특징을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고 이해한다.70 ) 구원이 핵심 주제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구원의 주제가 어느 정도까지 교회를 강건하게 하는 전반적인 목적 과 관련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의 핵심적인 신학적 관심을 몇 가지 언급할 수 있다. 누가복음의 초기 연구에서는 완전히 분석되지 않았지만, 누가의 내러티 브는 본질과 초점에 있어서 신학적이다. 말하자면, 내러티브의 중심은 하나 님이다. 이 말은 내러티브 안에 하나님이 등장인물로 자주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다. 분명히 말해, 하나님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내러티 브의 진전을 이끄는 계획, 존중을 받거나 반대에 직면하게 되는 목적이 바 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목적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구원이 누가복음 의 중심 주제라면,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내용으로는 가장 이른 지점 에 나타나는 것이, 마리아가 하나님을 “하나님 내 구주”( 1:47 ) 로 부르는 것임 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히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거친 여행을 다루는 누가복음의 중심 섹션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 님에 대한 관점을 교정하고자 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아버 지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열망은 은혜로운 선물로 그들을 품에 안으시는 것 임을 알도록 가르친다 ( 예, 11:1-13; 12:32 ). 하나님의 목적이나 관점은 내러티브에 직접 드러나기도 한다. 하나님이 세례를 받는 예수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이런 예에 해당한다 ( 3:21-22 ). 그러 나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하고 해석하는 가장 전형적인 방법은 성경의 본 문을 사용하는 것, 하늘의 메신저들을 통하는 것, 하나님의 계획을 표현하 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 예, “목적”, “해야 한다”, “결정하다” 등 ), 하나님이 연출하시는 사건의 예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배후에는 성령이 계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효력 있게 만드는 힘이다. 누가는 하나님의 목적을 강조함으로써 교회론적 관심과 해석학적 관심을
70 ) Prince, Narrative as Theme, 3-7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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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2. 누가복음의 목적과 신학
나타낸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고, 특히 성경 은 읽지만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 사람들과 충돌했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 난 하나님의 오랜 의제와 예수의 사역이 일관성을 보인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사실상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과 유대 제도와 충돌한 것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해석의 문제다. 누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 는가? 누가 성경을 신실하게 해석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누구의 해석을 인 정하시는가?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합법성은 누구에게 있는가? 누가의 대답 은 명료하다. 예수의 오심은 고대의 언약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예 수의 사명은 하나님의 목적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 예수 의 일생이 성경의 방식을 따른 것으로 입증되고,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통 해 하나님이 예수를 신원하신 것으로 입증된다. 누가의 서술에 따르면 이야기의 의제를 끌고 가는 주체는 하나님이지만, 누가복음의 주인공은 예수다. 누가의 내러티브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달리 누가의 청중이 복음서의 시작부터 예수의 정체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차지하는 예수의 역할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큰 복이다. 예수는 선지자로 묘사되지만, 선지자보다 더 큰 인물이다. 예수는 오랫동안 기다린 다윗 계 통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왕적 선지자의 운명을 성취한다. 선지자인 예수에게 죽음이 필요하지만 죽음이 마지막은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보다 는 예수가 어떻게 그의 역할을 이룰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묘사된 대부분의 장면에서 세상에 대한 제자들의 관점은 관습적이다. 복음 서의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메시아로서 높여질 예수 의 신분과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연결하지 못한다. 복음서의 초반부터 예수는 구주로 밝혀진다 ( 2:11 ). 예수는 구주의 역할을 다양한 방식으로 성취해 간다. 예수가 치유의 기적을 행하고, 식탁 교제를 확대하는 것은 가장 눈에 띄는 장면에 해당한다. 누가는 치유와 식탁 교제 를 강조하는데, 두 행위는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사실을 표현하는 것 이다. 예수는 식사와 치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주로 사회의 주변 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임해 있음을 전한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자들 에게 전해진 복음”( 4:18-19 ) 이다. 당연히 예수의 이런 행위는 그가 전한 말씀 과 일치하며, 예수의 가르침은 누가복음의 핵심 섹션들, 특히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 초점을 맞추는 중앙 섹션을 가득 채운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지향점이 “적합한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59
누가복음
새롭게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반영하는 세상의 질서를 새 롭게 이해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보여 주었으며, 사람들을 위해 ( 만일 그들이 듣기만 한다면! )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 그리고 하나님에게 옳게 반응
한 태도를 가르쳤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로의 부르심은 근본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도록, 그리 고 하나님 편에 함께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위해서는 관심의 초점을 상속된 지위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받아들였음을 행동을 통해 보여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참 “아브라함의 자 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삶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 특 히 궁핍한 사람들을 향해 손을 벌려 긍휼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예 수는 자신이 행동하는 것처럼 살 것을 사람들에게 요청한다. 이런 삶은 로 마 세계에서는 전형적이었던 명예와 신분을 중시하는 분위기에 나타난 전 투적이고 경쟁적인 삶의 형태와 대조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김에서 비 롯되는 행위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하게 대하라. 호의에 보답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환대하라. 되받 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주라.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력히 경험 함으로써 성품과 신념과 헌신이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누가복음에서 이런 삶을 가로막는 핵심 경쟁자는 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돈은 돈 자체라기보다는 돈의 다스림을 말한다. 이 경쟁자는 사회의 칭송을 갈망하게 하고, 그래서 낮은 지위의, 가난한, 잃어버린, 소외된 사람들과 권 력과 특권을 지닌 사람들을 차별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능력을 신실하게 구현하는 데 있 어서 여전히 부족함을 보인다. 제자들과 달리 내러티브에서 거의 존재감이 없는 이들은 충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예상과 달리 하나님의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모범적인 태도로 예수의 메시지에 반응한다. 세 가 지 예를 언급해 보면, 예수에게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 ( 7:36-50 ), 부자 세 리 ( 19:1-10 ), 십자가에 달린 강도다 ( 23:39-43 ). 이들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 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를 배우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이 가져오고, 전하고, 예고하는 새로운 세상의 질서에 따라 새로운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모두 제자들이 사도행전에서 증인의 역할을 수행할 때 필요 하다. 60
서론 2. 누가복음의 목적과 신학
제자들이 예수가 제시하고 본을 보인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아간다. 예수에게 적대적인 이들은 하나님 의 목적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평가하며, 예수의 사역을 자신들의 지도력을 위협하고 현재의 질서를 장악하고 있는 제도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간단히 말해, 이들은 예수를 하나님 ( 즉 이들이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는 하나님 ) 을 반대 하는 세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막아야 할 대상 으로 이해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목적을 반대한다. 누가의 관점에서, 사람 들을 억압하는 귀신의 세력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유대 지도자들을 포함해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목적을 섬기는 자들이다. 적개심의 강 은 흘러넘치게 되고, 결국 강둑을 넘어 예수에게 고통을 가하고, 드디어 그 를 버려 십자가에 처형해 버린다. 적개심의 모티프는 누가의 내러티브를 높 은 긴장감으로 몰고 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러니의 방식으로 하나님 의 목적을 실현하고 반대를 극복하며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게 만드는 도 구가 되기도 한다. 누가의 내러티브는 구원에 초점을 맞춘다. 구원은 누가복음에 반복적으 로 등장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주제에 해당한다. 구원은 저 세상의 것만도 미래의 것만도 아니다. 구원은 오늘의 삶을 존중하고, 인 생을 온전히 회복하며, 인간 공동체를 생동감 있게 만들고,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며,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공동체 가운데 실현하 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장하게 한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사회적 구원과 영 적 구원, 또는 개인의 구원과 공동체적 구원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접근을 거부한다. 구원은 인생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구원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활동과 같이 삶 전체를 포괄한다. 누가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하나 님은 최고의 은인이다. 이 하나님의 구속 목적은 예수의 생애를 통해 나타 나고, 하나님의 메시지는 최고의 은인이 베푸는 은덕이 세상에서 새로운 삶 을 영위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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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의 개관
1. 프롤로그 ( 1:1-4 ) 2. 예수의 탄생과 소년 시절 ( 1:5-2:52 ) 2.1. 요한의 탄생 예고 ( 1:5-25 )
2.1.1.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한 소개 ( 1:5-7 )
2.1.2. 요한의 탄생에 대한 예고 ( 1:8-23 )
2.1.3.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엘리사벳의 반응 ( 1:24-25 )
2.2. 예수의 탄생 예고 ( 1:26-38 ) 2.3.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 ( 1:39-56 )
2.3.1. 문안하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 1:39-45 )
2.3.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 ( 1:46-55 )
2.3.3. 엘리사벳의 집에 더 머무는 마리아 ( 1:56 )
2.4. 요한의 탄생 ( 1:57-80 )
2.4.1. 아들의 탄생 ( 1:57-58 )
2.4.2. 아이의 할례와 작명 ( 1:59-66 )
2.4.3. 사가랴의 예언 ( 1:67-79 )
2.4.4. 아이의 성장 ( 1:80 )
2.5. 예수의 탄생 ( 2:1-20 )
2.5.1. 베들레헴에서 탄생 ( 2:1-7 )
2.5.2. 천사의 메시지와 목자들 ( 2:8-20 )
2.6. 성전에 등장한 예수 ( 2:21-39 ) 62
서론 누가복음의 개관
2.6.1. 예수의 할례와 드림 ( 2:21-24 )
2.6.2. 예수를 만난 시므온 ( 2:25-35 )
2.6.3. 예수를 만난 안나 ( 2:36-39 )
2.7.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성장 ( 2:40-52 ) 3. 예수의 사역을 위한 준비 ( 3:1-4:13 ) 3.1. 요한의 사명 ( 3:1-20 )
3.1.1. 요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 ( 3:1-6 )
3.1.2. 요한이 좋은 소식을 선포하다 ( 3:7-18 )
3.1.3. 요한의 투옥 ( 3:19-20 )
3.2.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에 대한 소개 ( 3:21-4:13 )
3.2.1. 기름부음 받은 예수 ( 3:21-22 )
3.2.2. 예수의 계보 ( 3:23-38 )
3.2.3. 예수의 시험 ( 4:1-13 )
4. 예수의 갈릴리 사역 ( 4:14-9:50 ) 4.1. 예수가 유대 회당들에서 좋은 소식을 선언하다 ( 4:14-44 )
4.1.1. 예수가 갈릴리로 돌아오다 ( 4:14-15 )
4.1.2. 나사렛에서의 좋은 소식 ( 4:16-30 )
4.1.3. 가버나움에서의 좋은 소식 ( 4:31-44 )
4.2. 예수의 사명과 논쟁 ( 5:1-6:11 )
4.2.1. 첫 제자들의 부르심 ( 5:1-11 )
4.2.2. 나병환자의 치유 ( 5:12-16 )
4.2.3. 치유하는 능력, 용서하는 권위 ( 5:17-26 )
4.2.4. 식탁 관습/식탁 대화 ( 5:27-39 )
4.2.5. 안식일 논쟁 ( 6:1-11 )
4.3. 제자들을 가르치는 예수 ( 6:12-49 )
4.3.1. 열두 제자의 부르심 ( 6:12-16 )
4.3.2. 예수 공동체의 신분과 행위 ( 6:17-49 )
4.3.2.1. 몰려오는 무리 ( 6:17-19 )
4.3.2.2. 복과 화 ( 6:20-26 )
4.3.2.3. 주는 것과 받는 것에 대해 ( 6:27-38 )
4.3.2.4. 제자의 헤아림 ( 6:39-49 )
4.4. 예수의 긍휼의 사역 ( 7:1-50 )
4.4.1.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는 예수 ( 7:1-10 ) 63
누가복음
4.4.2.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예수 ( 7:11-17 )
4.4.3. 예수와 요한 ( 7:18-35 )
4.4.4. 예수, 바리새인, 죄를 지은 여자 ( 7:36-50 )
4.5.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 ( 8:1-56 )
4.5.1. 하나님 나라의 복음 ( 8:1-3 )
4.5.2. 진정으로 들을 필요성에 대해 ( 8:4-21 )
4.5.3. 예수의 능력에 반응하기: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 8:22-56 )
4.5.3.1. 광풍을 잠잠하게 만든 예수 ( 8:22-25 )
4.5.3.2.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를 고치는 예수 ( 8:26-39 )
4.5.3.3. 아픈 여자를 치유하고 죽은 소녀를 일으키는 예수 ( 8:40-56 )
4.6. 예수의 정체와 제자도의 본질 ( 9:1-50 )
4.6.1. 열두 제자의 사명 ( 9:1-17 )
4.6.2.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제자도의 본질 ( 9:18-27 )
4.6.3. 예수의 변모 ( 9:28-36 )
4.6.4. 제자들의 오해 ( 9:37-50 )
5.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 9:51-19:48 ) 5.1. 제자도: 말씀을 듣고 행하기 ( 9:51-10:42 )
5.1.1. 예루살렘을 향해 떠남 ( 9:51-62 )
5.1.2. 72명의 사명 ( 10:1-20 )
5.1.3. 제자들의 복 ( 10:21-24 )
5.1.4. 긍휼이 많은 사마리아인의 비유 ( 10:25-37 )
5.1.5. 예수를 환영하는 태도 ( 10:38-42 )
5.2.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 11:1-13 )
5.2.1. 제자들의 기도 ( 11:1-4 )
5.2.2. 기도를 가르침 ( 11:5-13 )
5.3. 비판받는 예수의 행위 ( 11:14-54 )
5.3.1. 무리에 대한 예수의 반응 ( 11:14-36 )
5.3.1.1. 다양한 견해 ( 11:14-16 )
5.3.1.2.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11:17-26 )
5.3.1.3. 순종의 복 ( 11:27-28 )
5.3.1.4. 요나의 표적 ( 11:29-36 )
64
5.3.2.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에 대한 예수의 반응 ( 11:37-54 )
서론 누가복음의 개관
5.4. 종말론적 위기에서의 경각심 ( 12:1-13:9 )
5.4.1.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과 핍박 ( 12:1-12 )
5.4.2. 소유에 대한 신실함 ( 12:13-34 )
5.4.3.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의 신실함 ( 12:35-48 )
5.4.4. 다가오는 위기를 인식하기 ( 12:49-59 )
5.4.5. 회개와 결실에 대한 경고 ( 13:1-9 )
5.5. 누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것인가 ( 13:10-17:10 )
5.5.1. 은밀하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 ( 13:10-21 )
5.5.2.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 13:22-30 )
5.5.3. 예수와 예루살렘의 뒤엉킨 운명 ( 13:31-35 )
5.5.4. 하나님 나라와 연회 ( 14:1-24 )
5.5.4.1. 예수는 타오르는 갈증을 치유한다 ( 14:1-6 )
5.5.4.2. 식사 예법의 재설정 ( 14:7-14 )
5.5.4.3. 부자 주인과 초청 명단 ( 14:15-24 )
5.5.5. 제자도의 조건 ( 14:25-35 )
5.5.6. 잃어버린 것을 찾은 기쁨 ( 15:1-32 )
5.5.6.1. 예수를 비방하는 식사 손님들 ( 15:1-2 )
5.5.6.2. 잃어버린 자의 회복을 기뻐함 ( 15:3-10 )
5.5.6.3.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반응 ( 15:11-32 )
5.5.7.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 ( 16:1-31 )
5.5.7.1. 친구를 사귈 목적으로 부를 사용하기 ( 16:1-9 )
5.5.7.2. 부의 지배력 ( 16:10-13 )
5.5.7.3.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 ( 16:14-31 )
5.5.8. 신실한 섬김 ( 17:1-10 )
5.6.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응 ( 17:11-19:27 )
5.6.1. 외국인 나병환자의 감사 ( 17:11-19 )
5.6.2. 인자가 올 때의 신실함 ( 17:20-18:8 )
5.6.2.1. 하나님 나라는 언제 임하는가 ( 17:20-21 )
5.6.2.2.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 17:22-37 )
5.6.2.3. 소망과 신실함 ( 18:1-8 )
5.6.3.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가 ( 18:9-19:27 )
5.6.3.1. 자만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 ( 18:9-14 ) 65
누가복음
5.6.3.2. 어 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는 것 ( 18:15-17 )
5.6.3.3. 권력과 부의 문제 ( 18:18-30 )
5.6.3.4. 예수가 겪는 고난의 신비 ( 18:31-34 )
5.6.3.5. 보지 못함의 아이러니 ( 18:35-43 )
5.6.3.6. 누가 아브라함의 아들인가 ( 19:1-10 )
5.6.3.7. 왕을 거부하는 사람들 ( 19:11-27 )
5.7.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예수 ( 19:28-48 )
5.7.1.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 ( 19:28-40 )
5.7.2. 예루살렘을 보고 우는 예수 ( 19:41-44 )
5.7.3. 가르침을 위한 성전의 준비 ( 19:45-48 )
6.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가르침 ( 20:1-21:38 ) 6.1.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충둘 ( 20:1-21:4 )
6.1.1. 예수의 권위에 대한 질문 ( 20:1-8 )
6.1.2. 예루살렘의 신실하지 않은 지도자들 ( 20:9-19 )
6.1.3. 카이사르의 권위 ( 와 성전의 우선권 ) 에 대한 질문 ( 20:20-26 )
6.1.4. 모세의 권위에 대한 질문 ( 20:27-40 )
6.1.5. 메시아의 권위에 대한 질문 ( 20:41-44 )
6.1.6.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독재적 권위 ( 20:45-21:4 )
6.2. 마지막의 도래: 파멸, 구속, 깨어 있음 ( 21:5-38 ) 7. 예수의 고난과 죽음 ( 22:1-23:56 ) 7.1. 마지막 만찬 ( 22:1-38 )
7.1.1. 음모 ( 22:1-6 )
7.1.2. 유월절을 위한 준비 ( 22:7-13 )
7.1.3. 유월절 식사에서 가르치는 예수 ( 22:14-38 )
7.1.3.1. 유월절의 기념과 성취 ( 22:14-20 )
7.1.3.2. 식탁의 배반자 ( 22:21-23 )
7.1.3.3. 섬김과 왕적 권위 ( 22:24-30 )
7.1.3.4. 다가오는 시련 ( 22:31-38 )
7.2. 감람산의 예수 ( 22:39-46 ) 7.3. 예수가 체포하러 온 무리를 만나다 ( 22:47-53 ) 7.4. 대제사장의 관저에 있는 베드로와 예수 ( 22:54-65 ) 7.5. 예수의 재판 ( 22:66-23:25 ) 66
서론 누가복음의 개관
7.5.1.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 ( 22:66-71 )
7.5.2. 빌라도의 심문 ( 23:1-5 )
7.5.3. 헤롯의 심문 ( 23:6-12 )
7.5.4. 예수에 대한 선고 ( 23:13-25 )
7.6. 예수의 십자가 처형 ( 23:26-49 )
7.6.1. 십자가 처형으로 가는 길에서 ( 23:26-31 )
7.6.2. 십자가에 못 박히고 조롱받는 예수 ( 23:32-43 )
7.6.3. 예수의 죽음 ( 23:44-49 )
7.7. 예수의 매장 ( 23:50-56 ) 8. 예수의 승귀 ( 24:1-53 ) 8.1. 빈 무덤 ( 24:1-12 ) 8.2.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의 만남 ( 24:13-35 ) 8.3.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 ( 24:36-49 ) 8.4. 예수의 승천 ( 24:50-53 )
67
1 프롤로그(1:1-4)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
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 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 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 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 하가 알고 있는1) 바를 더 확실하게 하 려 함이로라
Since many have undertaken to set down an orderly account of the event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 2 just as they were handed down to us by those who from the beginning were eyewitnesses and servants of the word, 3 I too decided, after investigating everything carefully from the very first, to write an orderly account for you, most excellent Theophilus, 4 so that you may know the truth concerning the things about which you have been informed. 1
문학 작품에서 첫 번째 문장이 차지하는 역할은 고대에는 오늘날보다 훨 씬 더 중요했다. 현대의 책 표지, 목차, 제목 페이지와 동일한 용도였던 글 의 첫 단락, 심지어 첫 문장은 고대에는 영향력이 더 컸다. 그리스-로마 세 계에서 “책”은 말아 올린 두루마리 형태였으므로2 ) 책의 접근 방식, 장르, 주제 등을 파악하기 위해 간단하게 훑어보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책의 시작을 알리는 첫 문장은 책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이 전체 서술을 예상할 1 ) NRSV: “배운”. 2 ) 구체적으로 “책”(헬. βιβλίον ‘비블리온’; 참고, 눅 4:17, 20)을 가리키는 로마의 용어는 uolumen, “두루마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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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1:1-4)
수 있도록 돕는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했다.3 ) 책의 시작 부분은 독자들이 외부 세계에서 본문의 세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고대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에 따르면 구두 연 설에서 서문은 청중에게 연설 전체를 듣고 싶은 열망을 심는 기능을 했다. 이를 위해 서문은 잘 배열되고, 관심을 집중하게 만들고, 배우고 싶은 마음 이 생기도록 구성되어야 한다.4 ) 수사학적 훈련이 고전적 교육 일반에서 핵 심이었던 사실과 5 ) 읽는 것보다는
( 공적인 읽기를 통해 )
다수의 청중을 위해서
듣도록 문학 작품을 의도한 사실을 고려하면, 문학 작품의 각종 서문이 퀸 틸리아누스와 같은 수사학자들의 조언을 따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 니다.6 )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 AD
2세기 ) 에서,
루치아누스는 청중은 역
사가들의 저술이 분명히 “중요하고, 필수적이고, 인격성이 있고, 유용할” 경우에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웅변가처럼 역 사가는 청중에게 그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을 주 어야 한다.7 ) 어떻게 흥미가 생기고 저자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 있는가? 내 러티브에서 내레이터는 전형적으로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가 “사실이다”는 점을 전달하는 데 관심을 둔다.8 ) 누가의 책과 같은 저술에서 이런 사실성 은 특정 주제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한 지식으로, 즉 전통에 대한 친숙 함뿐 아니라 연구나 개인적 경험을 통해 해결될 수 있었다.9 ) 또한 책의 도입부는 이미 알려진 다른 저술을 배경으로 삼으며, 기존의 작품과 연결망을 형성하고, 여러 작품과의 유사성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한다. 문학의 시작 부분은 “의미를 의도한 저술에서 첫 번째 단계로서”10 ) 이미 존재하는 저술과의 연속성이나 비연속성을 알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 때로는 흐릿한 ) 기대감을 갖고 책을 읽도록 초대한다. 3 ) 참고, D. Earl, “Prologue-form,” 856. 더 일반적인 측면에서 시작 부분의 중요성을 검토하려면 Said, Beginnings를 보라. 4 ) Quintilian Inst. orat. 4.1.5. AD 1세기 후반에 저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문 또는 엑소디움 (exordium)에 대한 퀸틸리안의 분석은 전통적이다. 참고, Aristotle Rhetoric 3.14. 5 ) Kennedy, Art of Rhetoric, 318-321을 보라. 또한 Aune, Literary Environment, 83-84에 있는 역
사와 수사학에 대한 평가를 보라. 6 ) 그리스-로마 역사서에서 서문의 저술이 수사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그리스-로마의 역사서가 수사학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AD 5세기에 이미 헤로도투스와 투키디데스는 서문의 형식을 만들었다. 참고, D. E. Smith, “Beginnings,” 1-3. 7 ) Lucian De Hist. Conscrib. §53. 8 ) 참고, Chatman, Story and Discourse, 227-228. 9 ) 참고, Alexander, “Luke’s Preface,” 71; Callan, “Preface.” 10 ) Said, Beginning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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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는 내러티브의 맨 앞에 헬라어 문체의 서문을 배치한다. 이런 식으로 누가는 이미 알려진 방법을 따랐고, 그리스-로마 세계에 이미 널리 펴져 있 었던 문학 관습을 사용했다. 당시의 다양한 작품, 즉 매우 문학적인 작품부 터 전문적이고 비문학적인 작품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종류의 서문을 활 용했다. 이런 작품을 남긴 작가들은 모두 고대 수사학의 전통으로부터 다양 한 수준에서 영향을 받았다. 서문은 공통된 요소를 포함할 때가 자주 있다. 공통의 요소란
( 주로 )
저자의 이름, 헌정 또는 의뢰, 특정 주제에 대한 표현,
선정한 주제의 중요성과 함의, ( 종종 잘 언급되지는 않지만 ) 이전 작가들에 대한 표 현, 적합한 방법론, 작품 자체와의 교량 역할 등이다. 누가복음의 프롤로그는 누가의 저술을 “내러티브”로 지칭한다. 프롤로그 의 네 구절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내레이터를 만나게 된다. 누가복음의 프롤 로그의 예와 달리 사도행전의 후반부에서 내레이터는 자신을 내러티브 밖 에 있지 않고 안에 등장하는 인물로 밝힌다.11 ) 그러나 이런 경우가 누가복 음에는 생기지 않는다. 내레이티 ( 이야기가
전해지는 대상-옮긴이 ) 도
누군지 언급
된다. 그는 데오빌로다 ( 참고, 우리는 내레이터를 누가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12 ) 누가복음의
내러티브가 누가에 의해 데오빌로에게 전달됨에
도 불구하고 프롤로그의 형태 자체는 내러티브가 더 넓은 대중에게 전할 목 적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 아래 3절의 주석을 보라 ). 내레이터 ( narrator ) -내 러티브 ( narrative ) -내레이티 ( narratee ) 사이의 관계에 대해 우리는 세 가지 주장 을 할 수 있다. 첫째,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책의 신뢰성을 주장한다. 누가복 음을 시작하는 첫 문장은 내러티브가 믿을 수 있는 글임을 공감하게 하고 강조할 목적으로 구성된다. 이를 위해 누가는 연구의 표준을 철저히 따랐음 을 제시하고, 그래서 청중으로 하여금 듣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든다. 11 ) 행 16:10-17; 20:5-15; 21:1-18; 27:1-28:16을 보라. 다른 복음서도 참조하라. 막 13:14에서 내 레이터는 이상적인 독자를 2인칭으로 표현한다. 요 1:14-16와 21:24에서 내레이터는 1인칭으로 말한다. 누가-행전의 “내레이터들”에 대해서는 Kurz, Reading Luke-Acts를 참조하라. 12 ) 내러티브 비평 학자들은 전형적으로 내포적 독자와 내레이터를 구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Powell, Narrative Criticism , 25-27; Bal, Narratology , 119-120을 보라. 도세이는 누가복음에 서 저자는 내레이터와 대조적으로 예수와 동일시한다고 주장한다(Dawsey, Lukan Voice). 그러 나 대부분의 내러티브 비평 학자들은 내포적 저자의 관점과 누가복음의 내레이터 사이의 긴장 을 인정하지 않는다(Powell, Narrative Criticism, 26; 도세이의 논지에 대해서는 Moore, Literary Criticism , 30-34; Darr, Character Building , 181-82n.18을 보라). 로빈슨은 누가복음 프롤로 그와 사도행전의 “우리-본문”에서 말을 하는 내레이터를 “각인된 저자”로 언급한다(Robbins, “Social Location,” 308-312). 그러나 내러티브에 나타나는 관점과 관련해서 로빈슨은 누가-행 전의 내포적 저자, 내레이터, 각인된 저자를 대립 관계로 설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를 구분하 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는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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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1:1-4)
둘째, 우리는 내러티브를 전개하게 될 각도를 미리 파악할 수 있다. 내러 티브의 음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거의 확보하지 못하지만, 몇 가지 특 징을 식별하는 것은 가능하다. (1) 우리가 기록된 본문을 대하고 있다는 자 체가 이미 무언가를 암시한다. 우리는 1세기 로마 세계에서 문맹률이 어떠 했는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지만 “농업 사회에서 제한된 사람만 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13 ) 이런 특징과 누가복음 1장 1-4절의 어휘
와 문체를 함께 고려하면, 내레이터는 부를 소유한, 교육을 받은, 아마도 도 시 출신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2) 누가복음 1장 1-4절과 “과학적 전통” 사 이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누가의 관점은 전문적이거 나 직업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계층 출신이다.14 ) 이런 관점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높은 지식층” 작가들은 장인 계층을 경멸 의 눈초리로 볼 때가 많았기 때문이며, 최근의 연구는 초기 기독교에서 그 런 사람들, 즉 자유 장인들과 소상공인들의 존재를 강조하기 때문이다.15 ) (3) 내레이터가 예수와 예수 운동과 관련해서 어느 시기에 활동한 사람인 지 파악하는 것은 프롤로그 자체로는 가능하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 절에 누가가 “제3세대”, 즉 목격자들과 예수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수집하 고 해설한 세대에 속하는 증거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16 ) 그러나 프롤로그 에서 진술하는 내용에 따르면 누가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한 시도가 있은 후에 이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진술할 뿐이다. 누가는 기독교 저술가들 중에 서 첫 세대에 속하지 않으며, 또는 자신이 서술하는 사건들 중 일부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 반면 누가는 사도행전의 내레이터로서 일부 본문에서는 자신이 해설하는 사건에 직접 참여했음을 명시적으로 밝힌다. 프롤로그는 누가가 “우리” 중 한 명이었음을 전한다. 다시 말해서, 누가는 더 큰 공동체 에 속한 구성원이며,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누가가 서술하고자 하는 사건 들에 의해 삶이 형성된 사람들이다. 누가는 “그 도의 백성” 중 하나, 즉 “그 리스도인”으로 글을 쓴다. 셋째, 누가는 “진리” 또는 “확실성”을 언급하며, 데오빌로를 확신으로 이
13 ) Lenski, Power and Privilege, 207-208. 14 ) Alexander, “Luke’s Preface.” 15 ) 적어도 바울의 공동체에서는 그렇다. Atkins, Egalitarian Community ; Meeks, First Urban Christians, 51-73; Judge, Social Pattern, 49-61을 보라. 16 ) Conzelmann, “Luke’s Place,” 305; Fitzmyer, 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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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끌게 될 첫 번째 요소는 내러티브의 순서임을 암시한다. 누가의 목적은 기 독교의 메시지를 위한 역사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분명 아니었다. 후대의 저술가들은 케뤼그마 ( 선포 ) 와 역사의 관계를 놓고 고민했는데, 이는 누가에 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가에게 있어서 내러티브는 선포 의 근거가 아니라, 서술 ( narration ) 자체가 곧 선포다.17 ) 누가에게 있어서 “순 서에 따른 이야기”( “내력”-개역개정 ) 는 무엇보다도 설득에 관심을 둔다. 누가는 사건의 의미를 드러내고 데오빌로를 설득할 목적으로 내러티브의 사건들을 “순서로 배열”했다. 데오빌로의 관심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가?”의 이 슈가 아니라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 사건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 는가?”와 같은 질문이었다. 누가는 예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를 보다 완벽하게 설명함으로써 데오빌로가 살아 있는 믿음을 갖기를 소망 한다. 구조와 문체와 관련해서 누가복음 1장 1-4절은 도미문 ( 掉尾文, 주절의 술부가 문장의 끝에 나와 글을 완성하는 문장-옮긴이 ) 으로,
다섯 개의 절이 균형 잡힌 통합체를
18 )
이루는 완전한 문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작했다 — 나도 결정했다 순서에 따른 이야기를 적으려고 — 순서에 따른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사건들을 — 모든 것을 시작부터 — 맨 처음부터 그들이 우리에게 전달해 준 대로 — 여러분이 알도록
이처럼 우리는 1-2절의 구들과 3-4절의 구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 있 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런 균형은 누가복음의 프롤로그를 해석하는 데 도움 이 된다. 1절 누가는 저술을 위한 상황 ( 1a절 ) 과 저술의 내용 ( 1b절 ) 을 설명한다. 첫 번
째 구는 원인절이지만,19 ) 저술을 위한 동기보다는 저술의 정당성에 더 관심 을 둔다. 누가는 순서에 따른 이야기를 저술한 다른 시도를 언급한다. 이는
17 ) 1:3의 주석을 보라. 참고, Dillon, “Luke’s Project,” 208-209; idem, Eyewitnesses, 269-272. 18 ) BDF §§458, 464를 보라. 신약에서 도미문은 드물게 사용된다(참고, 행 15:24-26). 19 ) Ἐπειδήπερ(‘에페이데페르’, “대하여”)는 “전적으로 인과적”(MHT 3:318)이고 신약에서 이곳에 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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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1:1-4)
앞선 저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20 ) 자신의 저술 계획도 그런 저술에 포 함되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누가가 추구하는 저술 목적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이 도래했다는 이전의 내러티브적 전개와 같고, 그런 식의 전 개를 재현하는 것이다. 누가는 단순히 전통의 보존자가 아니다. 예수의 의 미를 내러티브 방식으로 해석한 전통을 벗어난 소설가도 아니다. 누가는 자 신만의 기여를 하고 있으며, 내러티브 방식의 해석 전통을 따라 글을 전개 할 것이다. 누가는 자신이 드러낼 특정 주제의 가치를 확실히 하기 위해, 그 리고 비슷한 흐름의 후속 저술을 위한 길을 열어 놓기 위해, 순서에 따른 내 러티브를 전개한 다른 시도에 관심을 둔다. 이처럼 누가는 앞선 문학 작품이 있었던 사실을 전제로 하며, 이런 작품 을 그의 청중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21 ) 안타깝게도 누가의 청중이 공유했던 지식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가는 자신보다 앞서 저술한 작품이 20 ) 많은 주석가들은 누가가 앞선 사람들에 대해 평가한 “신중하고 진지한 비평”(Bovon, 1:34)을 누가의 프롤로그에서 본다. 이 비평은 누가가 또 다른 내러티브를 저술하기로 결정하게 된 이 유다. 이 주장에 따르면 누가의 내러티브는 더 완전해야 하고, 더 정확해야 하고, 질문이 제기 되는 사건들을 다루어야 하고, 더 나은 순서로 서술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Fitzmyer, 1:291; Klostermann, 2를 보라. 그러나 동사 ἐπιχειρέω (‘에피케이레오’, “손을 대다, 착수하다”, “붓을 들다”-개역개정) 자체 에는 실패의 의미가 없다. MM 250-251; Plummer, 2(와 이후의 주석 대부분)를 참고하라. 이와 반대로 유세비우스(Eusebius Hist. Eccl. 3.24.15)는 이전의 시도를 “경솔한” 것으로 간주했다.
아우구스투스(Augustine De cons. 4.8)는 “시도하는 것”은 “완성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참고, Bede, Acts, 4-5). 오리게네스(Origen Hom. in Luc. 1)는 외경 복음서들에 대 한 비판을 본문에서 찾았고, 외경 복음서들은 저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 신들이 일방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한 것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이 동사의 주어를 지 칭하기 위해 3인칭으로 사용할 경우 이 동사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었다(예, Josephus Life 9 §40; 65 §338). 클라인은 행 9:29; 19:13에 있는 용례(둘 중 어느 구절도 문학적 의도의 문 맥 안에 있지는 않음)에 근거해서, 눅 1:1-4에 나오는 누가의 전임자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고 주장한다(Klein, “Lukas 1,1-4,” 195-196). 그러나 우리는 관련-본문을 고려해 이 동 사를 이해해야 하며, 이전의 시도들에 자신의 저술을 의도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이전 시도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배제한다. 굴더(Goulder)는 (누가의 자료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순서가 불일 치하는 데서 생긴 문제점을 암시하는 내용이 서문의 배후에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는 명 확히 불협화음을 보이는 복음서 전승이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데오빌로에게 확신시킬 목적으 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조화시키려고 저술하고 있다”(1:200). 그러나 굴더의 해석은 누가복 음의 프롤로그에 대해 누가의 선행자들을 너무 세부적으로 설정하고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문제 를 드러낸다. 그뿐 아니라 이 해석은 1세기의 저술에 나타난 내러티브 순서를 옳지 않게 재구성 하고 있다. 2세기에 타티아누스의 디아테사론이 저술되기 이전에 복음서 순서의 불일치가 골칫 거리였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도 예수가 나사렛 설교와 기름부음 받은 장면과 같 은 이야기의 배열을 고려할 때, 과연 우리는 무슨 의미로 마태와 마가의 순서에 나타나는 불일치 를 누가가 해결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논리대로라면 오히려 누가가 두 장면을 배열하면서 새 로운 문제점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21 ) ἐπειδήπερ(‘에페이데페르’)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의미한다(BDF §4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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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신약 복음서 중 하나 또는 하나 이상을 포함하는지 알리지 않는다. 누가가 사용한 “많은”은 구두 전통과 기록된 전통의 시작 부분에 널리 사용된 관례 를 따른 용어다. 도입부의 “많은”은 수사적 효과를 위해 사용되며, 반드시 “많은 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22 ) 그러므로 이 용어는 본문에서 수사 적 가치를 지니며, 이는 누가의 저술이 전통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저술의 가치를 보증한다.23 ) 누가는 자신의 저술을 이전의 저술과 긴밀하게 연결하기 때문에24 ) “순서 에 따른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학자 들의 주장에 따르면, 누가는 수사학적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많은 사건들 로 구성된 긴 내러티브”에25 ) 관심을 가졌으며, 사건들은 “중요한 전개와 방식에 따라” 배열된다. 다른 학자들은 『어떻게 역사를 쓸 것인가』에 있는 루치아누스의 논의를 결정적인 것으로 발견하고, “내러티브는……역사가의 저술을 잘 구성하고 다듬은 결과물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라고 결론을 내 린다.26 ) 이 제안은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또한 누가가 동일한 의미 의 동사인 “서술하다, 관련짓다, 설명하다”를 사용한 점을 강조해야 한다.27 ) 이 동사는 누가가 하나님의 강력한 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독특하 게 사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9장 27절에서 바나바는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어떻게 주를 만나게 된 것인지 예루살렘의 제자들에 게 서술했다 ( ‘디에게사토’ ). 그리고
( 누가처럼 )
바나바는 3인칭으로 서술한다. 여
기서 바나바는 사울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구체적으로 바나바의 서술은 목 적과 효과에 있어서 설득력이 있다. 바나바가 설득을 위해 주께서 행하신 것을 먼저 강조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사울이 주의 제자가 된 것을 바나바의 보고에 근거해 확신한다 ( 참고, 9:28-29 ).28 ) 누가에게 있어서
22 ) 참고, 예, 행 1:3; 24:2, 10; 히 1:1; 시락서 1:1; Dionysius De orat. 1.1; Demosthenes Third Phil. 110. 23 ) 참고, J. Bauer, “POLLOI,” 263-266. 24 )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다”(1절)는 “차례대로 이야기를 쓰다”(3절)와 평행 관계를 이룬다. 25 ) Tannehill, Narrative Unity, 1:10. 26 ) 참고, van Unnik, “Luke’s Prologue,” 12-13. 특히 우닉은 Lucian De Hist. Conscrib. §§47-48을
언급한다. 또한 Bovon, 1:34를 보라. 27 ) 명사 διήγησις(‘디에게시스’)는 신약에서 눅 1:1에만 등장하고, 동사 διηγέομαι(‘디에게오마이’)는 누가-행전에 다섯 번, 마가복음에 두 번, 히브리서에 한 번 등장한다. 28 ) 이런 뉘앙스는 눅 8:39에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설명하다”는 “전하다”와 가까이 붙어 있다. 또한 눅 9:10; 행 12:17을 참고하라. 동사 διηγέομαι는 행 8:33의 사 53:7 인 용(70인역)에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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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1:1-4)
“내러티브”는 선포다.29 ) 누가는 예수와 초기 교회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설득력 있게 해석하고 선포하기 위해 역사를 사용한다. 선포의 수단은 내러티브적인 이야기이며, 내러티브의 “순서”는 우리가 해석을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하다. 내러티브를 통한 선포가 전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누가가 “사건들”을 강 조한 것은 우리가 전기문적인 서술보다는 역사서적인 서술에 관심을 갖도 록 이끈다. 전기문에서는
( 심지어 )
예수, 베드로, 스데반, 바울과 같은 등장인
물도 거대한 내러티브 순서 안에 위치한다. 이런 내러티브의 순서는 개인의 행위보다 더 큰 것에 관심을 둔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표현 은30 ) 누가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서술된 사건들을 하나님의 일로 이해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첫째, 이는 누가가 진술하는 사건들이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고 더 넓은 해석의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내러티브 순서를 강조하는 저자라면 당연히 도입부를 적절하게 배열하기 위해 고민 해야 한다. 도입부는 이어지는 내용이 내러티브를 통해 어떻게 전개될 것인 지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누가는 앞으로 서술할 사건들을, 구약과 하나님 의 백성의 역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목적과 그 목적의 절정에 대한 내용 으로 자신이 이해하고 있음을 도입부의 문학적 표현을 통해 알린다.31 ) 누가의 이런 이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생애, 죽음, 부활, 기독교 선교의 모습과 진전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32 ) 그러나 우리는 누가가 하나님의 목적이 이 사건들을 통해 실현되는 것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지나치게 “선지자적 성취”의33 ) 의미를 누가의 프롤로 그에 부여할 필요는 없다.34 ) 둘째, 누가가 서술된 사건들을 하나님의 일로 29 ) Du Plessis, “Luke’s Prologue,” 262-263; Dillon, “Luke’s Project,” 208-209를 보라. 30 ) πληροφορέω(‘플레로포레오’)는 누가복음에서 이곳에만 사용되고 πληρόω(‘플레로오’)의 동 의어다. 누가는 ‘플레로오’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성경의 성취(4:21; 24:44; 행 1:6; 3:18; 13:27), 시간이 지나감(행 9:23; 19:21; 24:21), 채우는 과정이나 결과(2:40; 3:5; 행 2:2, 28), 사명과 일의 완결(행 12:25; 13:25; 14:26)을 의미한다. 본문의 용례처럼 하나님의 목 적을 성취하는 사건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1:20; 9:31; 21:24; 22:16). 대안적 번역인 “이루어 졌다”(예, RSV)는 너무 약하다. πίμπλημι(‘핌플레미’)의 사용을 참고하라(1:23, 57; 2:6, 21, 22). 31 ) 이에 대한 관심은 1:5-2:52에 명확하게 나타난다(참고, Green, “Beginning”). 32 ) 예, 행 1:16; 3:18; 10:1-11:18; 13:27, 46-47; 15:6-9, 12-18, 28 등. 33 ) 캐드베리와 에반스는 누가가 1:1에서 성경의 성취에 관심을 둔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거부 한다(예, Cadbury, “Commentary,” 495-496; C. F. Evans, 124). 34 ) 참고, Bovon, 1:35. 다른 접근을 시도한 딜런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과 이 사건들이 “결
실을 맺는 것”을 구분했다. 즉 “메시아 인식의 표시”로 적절히 해석하고 받아들였다(Dil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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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이해하는 것은 “이루어진”이라는 수식어 배후에 있는 주체가 하나님인 것 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틀 안에서 이 사건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건 의 성취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 1절의 “우리” 가운데 ) 있는 이들은 예수의 사역에 참여하고 부활의 예수를 목격한 첫 세대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누가가 자신을 “우리” 안에 포함하는 것은 이 사실을 보증한다. 사 실 더 중요한 것은 동사의 시제다. “이루어졌다”는 완료형 동사로 완료된 행위의 지속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누가는 기독교 공동체를 세대를 넘어서 유기적 연합체를 형성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35 ) 2절 누가가 하나님의 일을 서술하기 위한 근거로 삼는 전통은 내러티브
를 수집하고 엮은 “많은 사람들”( 1절 ) 이 아니라 “목격자들과 말씀의 일꾼 들”이라는 새 그룹이다. 누가는 이들에게서도 자료를 얻었다. 누가는 목격 자들과 말씀의 일꾼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다시 한 번 자신을 앞에서 언급한 내레이터 안에 포함시키고, 그의 저술 방법론이 이미 존재하는 내러티브를 단순히 수집하는 것 이상을 뜻함을 의미한다. 누가는 “전해 준 것”의 과정을 설명하려고 전통의 전달과 관련된 전문 용어 를 사용하지만,36 ) 권위 있는 교리를 만들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 참고, 고전 15:3-5 ). “어떤 정보를 잊지 않고 보존하려고 구두나 기록을 전달하는 것”이 본문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에 더 가깝다.37 ) 누가가 전통의 근거가 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목격자들과 말씀의 종들이었다는 정보와 더불어 “전해 준” 과정을 강조하는 것은 전통과 고대성을 강조하기 위함 이다. 역사서의 전통과 과학적 전통은 둘 다 고대성에 근거한다. 저자는 자 신의 저술을 과거의 시도와 연결하며, 이는 전통을 향한 존중을 의미하고, 고대성에 근거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정당성을 확보한다.38 ) Eyewitnesses, 270-272; “Luke’s Prologue,” 211-217). 우리는 이 접근을 “성취” 또는 “결실” 이 (분사의 완료 시제가 의미하는) 지속적인 함의를 가짐을 알기 위해 이 접근을 시도할 필요는 없다. 참고, Klein, “Lukas 1,1-4,” 196-199; Du Plessis, “Luke’s Prologue,” 263-264. 어느 경 우든 간에 딜런이 근거로 삼는 본문들은 예수의 이야기가 “모세와 모든 선지자”(24:27) 또는 “모 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24:44; 참고, 16:31)과 관련될 때 명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35 ) McClendon, Ethics, 31-32의 비슷한 관점을 참고하라. 굴더가 고전 10장, 히 11:40에 있는 “우 리”의 유사한 용례를 거론한 것은 도움이 된다. 참고, Josephus Ant. 1.2 §5. 36 ) Büchsel, “παραδίδωμι,” 171-173; 행 6:14를 보라. 37 ) van Unnik, “Luke’s Prologue,” 14; 참고, Nolland, 1:8; Bovon, 1:36. 38 ) 그러므로 “처음부터”는 “요한의 세례 때부터”(참고, 행 1:1, 21-22; 10:37-39), 또는 “요한과 예 수의 탄생부터”(참고, Laurentin, Truth of Christmas, 315-318; Du Plessis, “Luke’s Prologue,” 266; O’Fearghail, Introduction, 89-93)를 말하는가? “처음부터”의 정확한 시기를 찾는 시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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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1:1-4)
누가는 내러티브를 저술했던 사람들과 목격자들과 말씀의 사역자들 사이 의 유사성을 알고 있다. 후자가 “이루어진 사건들”의 전통을 전해 준 것처 럼, 전자도 “마찬가지로” 이 사건들의 내러티브를 엮었고, 이 내러티브를 일관성 있게 배열했다.39 ) 여기서 누가가 사용한 “목격자들”( eyewitnesses ) 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거 론할 필요가 있다. 첫째, 누가는 사람들을 “증인들”( witnesses ) 로 지칭하는 것 을 선호하며, 본문에 사용된 “목격자들”은 누가-행전 어디에도 나오지 않 는다.40 ) 둘째, 일반적으로 어떤 사건을 직접 목격한 사람에게 “목격자”의 단어를 사용하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항상 그런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 니다.41 ) “목격자”는 역사서에 중요한 개념이며, 실제로 역사를 기록하는 과 정에서 첫 번째 단계를 설명하는 사람이다. 역사가가 일어난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다면 대단한 행운이겠지만,42 ) 사실상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 미 리 알려질 수는 없는 일이며,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매우 이례적이다. 역 사가는 역사적 사건의 타당성 있는 장소들을 검토하고, 그 사건을 처음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한다. 누가는 “목격자들”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 역사서의 전통과 과학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목격자들”이라는 용어 를 프롤로그에 사용하지만, 두 전통에 사용된 것보다 더 많은 또는 더 적은 것을 의미한다. 누가는 역사를 기록하거나 자료를 직접 목격한 것을 강조함 에 있어서 자신을 첫 번째 단계를 묘사하는 목격자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 는다. 정반대로 누가는 “목격자들”을 사용할 때 “증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목격자는 후대에 증인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증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사람 들이다 ( 행
4:20 ).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엠마오 이야기가 보여 주는 것처럼
모두 표적을 벗어나게 된다. “처음부터”는, 3절에 있는 유사한 표현(“근원부터”)과 더불어, 가치 판단을 불명확하게 전달하는 표현이며, 전통의 오랜 세월을 강조한다. 39 ) 이는 καθώς(‘카토스’, “~처럼”)의 모호한 용례를 취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보인다. 이 용어의 불 명확성에 대해서는 C. F. Evans, 125를 보라. 40 ) 실제로 αὐτόπτης(‘아우토프테스’)는 헬라어 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한다. Μάρτυς(‘마르튀스’)는 누가가 선호하는 용어다(예, 눅 24:48; 행 1:8, 22; 2:32; 3:15; 5:32; 10:39, 41; 13:31; 22:15, 20; 26:16). 누가는 법정 상황에서 μάρτυς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일반적인 용례를 따른다(행 6:13; 7:58). 41 ) MM 93-94를 보라. 판 우닉(van Unnik, “Luke’s Prologue,” 11-13)은 적절한 자료를 인용하지 만, 그가 제시한 예들에서 “사건의 발생 후 역사적 사건의 장소를 직접 조사하는 것”과 “사건을 직접 관찰하는 것” 사이에 내재하는 차이를 간과한다. 타당성 있는 자료는 Alexander, “LukeActs,” 101-104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42 ) 참고, Josephus Ag. Ap. 1.10 §§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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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눈이 열리지 않는다면 “보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 눅 24:13-35 ). “목격자들”과 “말씀의 사역자들”은 동일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표현 이다.43 ) 누가가 사용하는 “말씀의 일꾼들”은 사도행전에 중요하게 등장하 는 “말씀”뿐 아니라, 사도행전의 “하나님의 말씀”과 “주의 말씀”에 포함된 “말씀”을 떠올린다.44 ) “말씀”은 종종 “기독교의 메시지, 좋은 소식”을 가리 키지만 ( 예, 행 10:36; 15:7 ), 이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선교적 활 동에 토대를 두며 ( 참고, 10:37-38 ), 부활 이후의 선교와 예수의 제자 공동체에 말씀이 끼친 결과도 포함한다 ( 예, 6:7; 12:24; 19:20 ). 사도행전 1장 21-22절에 따 르면 목격자들과 말씀의 일꾼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과 부 활한 예수가 만난 사람들이지만, 이 목록은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와 바울과 초기 교회의 다른 일꾼들과 같은 사람들로 확장될 수 있다.45 ) 3절 누가는 순서에 따른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자신이 믿
을 만한 저자임을 언급하고 저술의 특징을 간단히 말하면서, 내러티브의 수 신자를 데오빌로로 밝힌다. 이 저술은 데오빌로에게 전달될 목적으로 기록 되고 헌정된다. 누가의 설명에서 핵심은 두 개의 부사, “자세히”와 “차례대로”다. 첫 번 째 부사는 일반적으로 동사 “조사하다”와 함께 사용되며 ( 예,
NRSV ),
이는
43 ) 두 명사 αὐτόπται(‘우토프타이’, “목격자들”)와 ὑπηρέται(‘휘페레타이’, “일꾼들”) 앞에 하나의 정관사 οἱ(‘호이’)가 나오기 때문에 다른 두 대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딜런 은 누가의 언어에 따르면 원목격자들은 말씀의 일꾼들이 되기 위해 목격자의 과정을 “졸업했다” 고 주장하며, 다음의 번역을 제안한다. “처음부터 목격자들이었고 말씀의 종들이 된……”(Dillon, “Luke’s Prologue,” 214; 214-217; Marshall, 42; Nolland, 1:4, 7-8을 보라). 그러나 이 견해는 “목격자들”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다. 놀란드는 이와 같은 두 단계의 해석이 행 1:8에 내포된 단 계를 설명해 줄 수는 있으나 제자들은 목격자들로 사는 것에서(만) 졸업한 자들이 아닌 “증인 들”(μάρτυρες)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44 ) “말씀”만 사용한 본문은 행 2:41; 4:4, 29; 6:4; 8:4, 21; 10:36, 44; 11:19; 13:26; 12, 25; 15:7;
16:6; 17:11; 18:5; 20:7을 참고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행 4:31; 6:2, 7; 8:14; 11:1; 12:24; 13:5, 7, 46; 17:13; 18:11을 참고하라. “주의 말씀”은 행 8:4; 13:44, 48, 49; 15:35, 36; 16:32; 19:10, 20을 참고하라. 45 ) 트리테스(Trites, Witness , 128-153; 특히 136-139)는 눅 1:2의 목격자들은 “분명히 ‘처음 부터’ 예수와 함께 있었던 사도들”이라고 주장한다(136; 참고, Schürmann, 1:9; S. Brown, “Prologues,” 103-104). 트리테스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의 공생애에 일어난 사실들을 알고 있으며, “나사렛 예수의 실제 생애 가운데 일어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보증한다.” 그러 나 행 1:8; 2:32; 3:15; 5:32; 13:30-31; 22:15; 26:16(ὑπηρέτην καὶ μάρτυρα)을 보라. “사도들” 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지냈던 제자들만 지칭하는 용어는 분명히 아니다. 누가에게 있어서 바울 은 “일꾼과 증인”이지만 “사도”는 아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더불어, 행 14: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 사도로 기록된 유일한 본문에서 이 용어는 누가가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보냄 받은 것을 언급할 때 비전문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목격자들과 말씀의 일꾼들”은 사도행전에서 “목격 자”의 개념에 상응한다는 트리테스의 제안이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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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1:1-4)
누가가 연구를 어떻게 또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했는지 보여 준다. 그러나 “자세히”는 주동사 “쓰다”를 수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46 ) 아무튼 누가가 저술한 문학 작품의 “정확성”을 주장하는 기능을 한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다른 문맥, 특히 아볼로의 이야기에서 “자세히”와 관련된 단어를 사 용한다 ( 행 18:25 ),
18:24-28 ).47 )
데오빌로처럼 아볼로도 정보를 얻게 되지만 ( 눅
1:4; 행
아볼로에게는 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두 번째 부사 “차례대로” 역시 중요하다. 이 단어도 사도행전의 용례를 검토하는 것으로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이 용어는 “순서 대로” 또는 “잇따라”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용어가 어떤 종류의 순서를 의 미하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48 ) 루치아누스는 수집한 자료를 “표현, 비 유, 리듬의 매력”으로 향상되는 “미”( 美 ) 를 이야기에 가미하는 목적으로 배 열하도록 역사가들에게 조언했으며, 사건들을 적절히 배열함으로써 이 사 건들을 “될 수 있는 한 생생하게 설명하도록” 요청했다.49 ) 이런 가르침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사건들의 순서나 배열에 따라서 독자들에게 교육 46 ) Παρηκολουθηκότι ἄνωθεν πᾶσιν ἀκριβῶς καθεξῆς σοι γράψαι(‘파레콜루테코티 아노텐 파신 아크 리보스 카텍세스 소이 그랍사이’, “정확하고 차례대로 쓰기 위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살핀”). 캐 드베리는 이미 부사의 모호한 위치를 언급했고, 부사가 두 동사와 부분적으로 함께 가야 하지 않 을까 생각했다(Cadbury, “Commentary,” 504; cf. Kürzinger, “Lk 1,3,” 254-255; van Unnik, “Luke’s Prologue,” 17). 47 ) 행 24:22에서 벨릭스는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자이지만, 23:15, 20에서 물어보는
척한 것은 바울의 소송건에 대한 더 정확한 정보 때문이었다. 48 ) 초기 주석가들은 누가복음을 “시간의 순서”(예, Plummer, 5; Godet, 1:65)를 의미하는 것 으로 자주 이해했고,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가능한 주장이다(Marshall, 43). 뮈브너(Mußner, “Καθεξῆς”; idem, “Gemeinde,” 386-389)는 누가가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는” 측면에서 “완 전한”의 의미를 의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누가복음(참고, 공관복음 전통)과 사 도행전(의 내러티브의 순서는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와 같이 더 이상 서술하지 않는 추가적인 사건들이 많이 있었을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에 해당하지 않는다. 푈켈(Völkel, “Exegetische Erwägungen”)은 누가의 자료와 성경 외의 자료를 분석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καθεξῆς(‘카텍세스’)는 표현 양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시간의 정확성이나 실제적 완료의 형태 로 나타나는 사건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구성 요소를 가리 킨다. 그러므로 καθεξῆς는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인 의미를 지닌다”(294). 푈켈의 주장 을 많은 학자들이 따랐다. 이들 중 일부는 순서의 본질이 무엇인지 매우 상세히 분석했다. 예를 들어, 쉬나이더(Schneider, “Bedeutung”)는 약속-성취의 구원사적 순서에 특히 집중했다. 피츠 마이어(Fitzmyer, 1:299)는 “……이스라엘 시대, 예수의 시대, 초기 교회의 시대와 관련된 감춰 진 내용”을 주장한다. 그러나 중심되는 질문은 기간 설정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순서”를 강조 함으로써 누가가 무엇을 원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Dillon, “Luke’s Project,” 219-233; Tannehill, Narrative Unity, 1:10-12를 참고하라. 딜런은 “논리적” 순서를 강조하는데, 이는 전혀 도움이 되 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러티브 연구에서 “논리”는 원인-결과의 순서를 가리키기 때문이며(예, 어 떤 등장인물은 정해진 장소에 나가기 전에는 그곳에 도착할 수 없다), 이는 누가의 이야기에 나 타난 순서를 설명하는 것이 분명히 아니기 때문이다. 49 ) Lucian De Hist. Conscrib. §§48, 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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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의 효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오래전부터 내러티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의미의 효력은 “순서”에 있으며, 순서를 통해 의미가 독자나 청중 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인식해 왔다.50 ) 사도행전 11장 4절에 있는 “순서” 또는 “차례”는 누가복음의 “순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차례대로”는 누가가 다른 곳에서도 사용하지만,51 ) 사도행전 11장 4절은 평행되는 문맥, 즉 하나님이 행하신 일 이 나타난 사건들을 서술하는 문맥에 들어 있다. 이 본문이 포함된 전체 문 단, 즉 10장 1절-11장 18절에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난 이야기와 예루살 렘에서 이 만남을 사람들에게 보고하는 내용은 두 차례 서술된다. 우리는 이 내용을 처음에는 누가의 관점에서, 그다음에는 베드로의 관점에서 파악 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사건들이 두 내레이터에 의해 “순서대로 배 열”된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52 ) 두 관점을 비교해 보면 “차례대로”는 “시 간의 순서에 고정될” 수 없고, 단순히 “잇따라”의 의미가 될 수도 없다. 베 드로가 이야기를 “차례대로” 배열하는 것은 순서대로 그가 설명하는 사건 들에 나타난 자신의 관점을 그의 청중에게 설득하기 위한 목적이다 ( 참고, 행 11:18 ).
그래서 “설득적인 순서”의 개념이 누가의 관심에 잘 들어맞는다.
데오빌로는 누구인가? 어떤 학자들은 내러티브 수신자의 이름에서 상징 적 청중을 찾았다. 이는 어원적으로 “데오빌로”가 “하나님에게 소중한” 또 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53 ) 이 접근은 누가가 분 명히 희망했을 좀 더 일반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지지하기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 아래를 보라 ),54 ) 이와 같은 상징적인 이해는 다음의 이 유를 생각할 때 타당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1) 데오빌로는 당시에 흔한
50 ) 순서를 정하는 것은 어떤 이야기의 위치를 배열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이기 때문에, 시간의 순 서를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다. 내레이터는 어떤 요소를 이야기의 이후 다 른 지점에 가서 생각나게 하려고 전개되는 이야기에 포함되는 그 요소를 제외할 수도 있다. 또 한 다른 요소들이 이야기의 시간 순서에 끼어들어 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은 완성 되지 않은 형태로 들어올 수 있고, 미래와 관련된 단서나 알림이 주어질 수 있고, 동시에 발생하 는 사건들이 평행 관계로 설명될 수도 있다. 순서의 내러티브적 의미에 대해서는 특히 Genette,
Narrative Discourse; 예, Powell, Narrative Criticism, 36-38; Bal, Narratology, 37-43, 51-68을 보라. 51 ) 눅 8:1; 행 3:24; 18:23. 52 ) 당연히 우리가 “베드로의 순서”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베드로의 순서에 대한 누가의 순서”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료 비평과 상관없이 내레이터인 누가는 내러티브의 형태에 대한 최종 책임 을 지기 때문이다. 53 ) 참고, Nolland, 1:10. 54 ) 참고, Bede, Acts,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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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1:1-4)
이름으로 이미 BC 3세기의 파피루스와 비문에도 발견된다.55 ) (2) 어원적 접근으로는 “각하”의 칭호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3) 상징적인 헌정은 누가의 문학적 배경에서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렵다. 따라서 누가가 어느 “데오빌로”를 생각하는지 결정할 만한 증거는 없다. 주로 로마의 정치 관료에게 사용된 칭호인 “각하”는 단순히 명예를 뜻하는 존칭일 수도 있다.56 ) 어느 경우이든 간에 데오빌로는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누가는 데오빌로의 역할이 자신의 저술을 위한 영감을 제공 하거나 적어도 저술을 위한 자극을 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누가는 특히 데오빌로의 추천과 친구 관계를 통해 이 책이 넓은 청중을 확보할 것으로 생각한다.57 ) 누가의 프롤로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데오빌로의 이 런 역할은 누가가 수신자 데오빌로를 넘어 더 많은 대중을 독자층으로 삼 기를 원하는 의도를 드러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58 ) 결론적으로 우 리가 데오빌로에 대해 정보를 알 수 있다면 누가의 저술 목적을 해결할 단 서를 제공받을 수는 있을지라도, 데오빌로가 누가가 바라는 유일한 청중이 거나 데오빌로가 누가의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추정하지는 말아야 한다.59 ) 4절 프롤로그의 마지막 절은 누가의 저술 목적을 알린다. 데오빌로는 적
어도 “우리 중에 일어난 사건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이 사 55 ) MM 288; Hemer, Acts, 221n.1. 56 ) 예, Josephus Life 76 §430; Ag. Ap. 1.1 §1. 참고, 행 23:26; 24:3; 26:25에 있는 용어의 고유한 용례를 보라. 57 ) 데오빌로가 누가의 문헌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일 때가 자주 있으며, 현대의
출판 산업을 1세기 로마 세계로 분사시키는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누가의 작품과 같은 어떤 작 품의 “출판”은 책의 복사판을 많이 만들어서 분배하는 것과는 관련이 거의, 전혀 없었다. “출판” 은 책의 사용과 해석에 대한 통제를 저자가 풀어 놓는 것, 어떤 작품을 대중에 맡기는 것, 작품 을 복사할 수 있는 권한을 전적으로 허락하는 것이었다(E. J. Kenney, “Books and Readers,” 4, 10-22; Easterling, “Books and Readers,” 19-21). 따라서 누가-행전을 데오빌로에게 헌정하고 데오빌로를 문헌의 후견인으로 명명하는 데 있어서 누가는 “출판 비용”을 위해 금전적인 후원을 구하거나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데오빌로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해 보면 누가가 데오빌로를 저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 같지는 않다. Gold, Literary Patronage을 보라. 골드는 문헌의 후견인은 로마 사회에 있었던 후원 체계의 일반적인 형태와 달랐다는 흥미로운 주 장을 추가한다. 왜냐하면 출판을 위한 후원은 되받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저자는 은인에 게 빚을 진 “피보호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는 당시의 후원 체계를 집 중적으로 비판하기 때문에 우리의 주장은 중요하다. 58 ) 따라서 우리는 누가-행전에서 내레이터와 내포적 저자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내레이터와 내포적 독자는 구분할 수 있다. 59 ) 반대 예로는 Creech, “Theophilus”를 보라. 크리치는 데오빌로가 누가의 내포적 독자를 의미 한다고 너무 성급하게 가정하며, 이 논지에 근거해 데오빌로가 어떤 사람으로 알려졌는지 식별하 고자 한다. 도움이 되는 글로는 Tyson, Images of Judaism, 19-41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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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건들의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헬라어 본문에서 “확실함” 또는 “사실”은 강조를 목적으로 길고 복잡한 문장의 마지막 단어로 등장한다.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누가가 내러티브의 역사적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60 ) 누가가 여기서 이런 용어를 사용한 것은 그가 “표현한 내용을 확신시키는 특징”61 ) 또는 “이런 일들의 확실성”을 의미한다.62 ) 그래서 기독교의 메시지는 이 메시지 의 기원 및 전개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과 분리될 수 없으며, 누가가 “일 어난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63 ) 누가에게 필수적 인 것은 바로 해석의 문제다. 누가는 데오빌로가 자신이 들은 것을 확신하 기를 원하며,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이 해석”을 받아들이기 원한다. “이 해 석”은 누가가 내러티브를 통해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64 ) 데오빌로가 누가복음을 읽기 전에 얼마만큼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학자들은 데오빌로를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식적인 신 앙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한다.65 ) 다른 학자들은 기독교 운동과는 비 교적 거리가 먼 외인, 즉 예수와 초기 교회에 대한 간단한 소문 정도만 들었 을 것으로 이해한다.66 ) 첫 번째는 공식적인 교리 과정을 통과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주장으로 사도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67 ) 누가는 “알리다, 가르치다”를 이처럼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68 ) 사도행 전 18장 25절에 따르면 아볼로는 “주의 도”를 배웠으나 여전히 “요한의 세 례만” 알고 있다. 아볼로는 추가적인 설명을 듣고 나서야 “성경으로써 예수 는 그리스도”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 ( 18:24-28 ). 유추해 보면, 우리는 데오빌 로가 예수의 사역과 초기 기독교 운동에 대해 배웠고, 심지어 예수를 따르 는 제자들의 공동체에 붙어 있었을 것이지만, 핵심 요소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한다.
60 ) 참고, van Unnik, “Purpose”; Plummer, 5. 61 ) 참고, Xenophon Mem. 4.6 §15; C. Brown, “ἀσφάλεια,” 663. 62 ) 참고, 행 2:36; 25:26. 63 ) ἀσφαλής(‘아스팔레스’)는 행 21:34; 22:30에서 소송 건에서 “사실들”을 의미한다. 64 ) 참고, Hall, Revealed Histories, 171-208; Darr, Character Building, 특히 53-55. 65 ) 예, Schürmann, 1:15. 66 ) 참고, C. F. Evans, 136; van Unnik, “Luke’s Prologue,” 18. 67 ) Green, Death of Jesus, 176-182. 68 ) 참고, 행 21:2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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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NICNT
ON THE NEW TESTAME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누가복음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NICN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면서도,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 타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지은이 조엘 그린 (Joel B. Green)
옮긴이 강대훈 경북대학교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신약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에 영국 브리스톨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흥과개혁사 번역위원으로 협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태복음 주석』 이 있고, 역서로는 『누가신학』, 『성경신학』, 『하늘』, 『PNTC 누가복음』(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ISBN 978-89-6092-610-3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62,000원
강 | 대훈 옮김
미국 캘리포니아주 풀러 신학교의 신약해석학 교수이자 고등신학연구센터의 부학장이다. NICNT 시리즈의 편집장을 맡고 있으며 「신약해석학 저널」의 편집자다. 텍사스, 스코틀랜드, 캘리포니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섬겼고, 현재 캘리포니아주 라캐나다의 라캐나다 연합 감리교회에서 교목사로 섬 기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신약성경 듣기』, 『누가복음 신학』, 『신약성경의 세계』 등이 있다.
조엘 그린 지음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누가복음 Luke 조엘 그린 지음 | 강대훈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