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NICNT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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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장 서문 │ 8 ■ 저자 서문 │ 10 ■ 약어 소개 │ 15 서론 19 I. 요한복음의 성격 │ 21 II. 요한복음의 저자 문제 │ 27 A. 고대 전승의 “요한” • 28 B. 찬반 전승 • 35 C. 그 제자 • 42 Ⅲ. 진리 주장 │ 51 Ⅳ. 요한복음과 다른 복음서 │ 55 Ⅴ. 요한복음의 구조 │ 60 VI. 장소와 날짜 │ 68 VII. 신학적 기여 │ 71 목차
본문과 주석 77 I. 전문: 빛(1:1-5) │ 78 II. 요한의 증언(1:6-3:36) │ 93 A. 요한과 빛(1:6-13) • 93 B. 우리의 증언과 요한의 증언(1:14-18) • 112 C. 요한과 예수(1:19-34) • 134 D. 예수와 요한의 제자들(1:35-51) • 162 E. 가나와 가버나움의 예수(2:1-12) • 188 F. 유월절 성전의 예수(2:13-22) • 208 G. 유월절의 예수와 니고데모(2:23-3:21) • 224 H. 요한의 고별 연설(3:22-36) • 271 III. 세상에 대한 예수의 자기 계시(4:1-12:50) │ 293 A. 예수와 사마리아인들(4:1-42) • 293 B. 다시 갈릴리의 예수(4:43-54) • 343 C. 예수와 예루살렘의 병자(5:1-18) • 361 D.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답변(5:19-47) • 385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E. 갈릴리 호수 저편에 다녀오심(6:1-21) • 425

F. 가버나움의 예수와 무리(6:22-40) • 450

G. 가버나움의 예수와 유대인(6:41-59) • 477 H. 가버나움의 예수와 제자들(6:60-71) • 505

I.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인가, 가지 않으실 것인가(7:1-13) • 523

J. 성전의 예수(7:14-36) • 538

K. 명절의 마지막 날: 예수와 바리새인들(7:37-8:29) • 571 여담(7:53-8:11) • 612 L. 명절의 마지막 날: 예수와 믿는 유대인(8:30-59) • 620 M. 예수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9:1-38)

O.
P.
Q.
R.
S.
T.
• 664 N. 눈먼 인도자들과 선한 목자(9:39-10:21) • 704
칭호와 사역(10:22-42) • 730
베다니로 가심(11:1-16) • 754
나사로를 일으키심과 그 결과(11:17-54) • 771
다시 예루살렘으로(11:55-12:19) • 810
영광 받으실 때(12:20-36) • 839
세상에 대한 판단(12:37-50) • 866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IV.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자기 계시(13:1-17:26) │ 882 A. 만찬의 예수(13:1-20) • 882 B. 유다의 배반(13:21-35) • 914 C. 네 가지 질문(13:36-14:31) • 933 D. 상호 내주와 사랑의 계명(15:1-17) • 979 E. 세상과 변호자(15:18-16:16) • 1001 F. 제자들의 반응(16:17-33) • 1029 G. 제자들을 위한 기도(17:1-26) • 1050 IV.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서 나타난 예수의 자기 계시 증명 (18:1-21:25) │ 1085 A. 체포와 심문(18:1-27) • 1085 B. 예수, 빌라도, 유대인(18:28-19:15) • 1121 C. 십자가형과 매장(19:16-42) • 1162 D. 빈 무덤과 첫 번째 나타나심: 예수와 마리아(20:1-18) • 1209 E. 예수의 두 번째 나타나심: 제자들과 도마(20:19-31) • 1233 F. 예수의 세 번째 나타나심과 시몬 베드로의 위임(21:1-25) • 1258 ■ 참고문헌 │ 1300

편집장 서문┃

널리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여러 학자와 학생들에게 요한복음 주석을 소 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 시리즈 편집장을 맡고 얼마 되지 않아 호주 뉴 사우스웨일스주 멜버른에서 레온 모리스 교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는 아흔 살이었다. 레온 모리스 교수는 1971년에 처음 출간했던 자신의 주석 개정 작업에 동의했고, 1995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개정”이 현실적이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모리스 교수 소천 후에,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램지 마이클스와 접촉해서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처럼 모리스의 요한복음 주석을 대체할 책을 집필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가 이에 동의해 준 덕에 이 탁월한 요한복음 주석이 나오게 됐다. 마이클스 교수를 이 시리즈의 기고자로 모시게 되어 개인적으로 특별히 기쁘다. 우리가 처음 인연을 갖게 된 것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 시 나는 앤드루 링컨과 함께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고든콘웰 신학교의 신약 학 교수진에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신약학 교수로 있던 램지 마이클스와 데이비드 숄러와 더불어 우리 네 사람 ( 과 배우자들 ) 은 5년 동안 놀라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고든콘웰 신학교로 옮기기 전에 휘턴 대학에서 요한복음을 가 르쳤지만, 이렇게 고든콘웰로 옮기면서 내 학문 연구의 주안점도 요한에서 바울로 옮겨 가게 되었다. 마이클스 교수가 요한 문헌을 무척 잘 다루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바울로 옮겨 가게 된 것도 마이클스 덕분이다. 이후 내가 연구한 분야가 ( 요한계시록 주석을 제외한다면 ) 신약학자로서 내가 쌓은 경력 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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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으로나 목회적으로 요한복음 주석이 더 필요한지 충분히 의심할 수 있겠지만, 이 주석을 읽거나 활용해 본다면 당연히 ‘그렇다’는 것을 쉽사 리 인정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목사나 학자에게도 한결같이 비범한 통찰과 도움을 줄 실질적이고 진정으로 참신한 작품이 나오게 됐다. 이 책은 저자 나 편집자가 모두 자신들의 영원한 상급을 받고자 떠난 후에도 상당히 오 랫동안 남을 책이다. 이 주석을 세심하게 읽거나 활용해 본다면, 요한복음 에 대한 통찰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통찰들을 ‘새롭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별나다’라는 말이 아니다. 이 통찰들은 요 한의 복음서에 오랜 기간 집중된 노력과 사랑의 결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주석을 누구에게나 기쁘게 추천한다. 고든 피

편집장 서문 9

┃ 저자 서문┃

NICNT에 기고하게 되어 기쁘다. 이 시리즈의 초대 편집장이었던 네드 스 톤하우스는 1950년대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1년 동안 멘토였으며, 현 편집장인 고든 피는 1970-80년대 10년 동안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동료 였다. 이 주석은 어느 정도는 첫 번째 시도 ( 1984, 1989 ) 1  ) 를 기초로 둔 두 번째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본문을 훨씬 상세히 주해하고자 했다. 내가 친 구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제대로 할 때까지 계속 시도한다는 것이다. 물 론, 이런 모험심이 가진 매력은 사람이 절대로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 에 있다. 게다가,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요한복음에 대해 책을 썼던 사람들 의 높은 치사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에드윈 호스킨스의 주석은 데이 비가, 라이트풋의 주석은 에번스가, 샌더스의 주석은 매스틴이, 에른스트 핸헨의 주석은 로버트 펑크와 울리히 부세가 마무리하고 편집했다. 그래도 도드가 위안이 된다. 도드는 요한복음에 대해 처음으로 썼던 위대한 책, 『요한복음 해석』 (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 을 예순아홉이었던 1953년 에 완성했으며, 두 번째 책인 『요한복음에서의 역사적 전승』 (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 ) 을 10년이 지난 후에 완성했다. 처음부터 이 주석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아는 것이 독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17년 전 어드만스 출판사와 처음으로 계약서에 서명한 이후 1  ) 나의 다음 주석을 보라. John: A Good News Commentary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84); John, NIBC 4 (Peabody, MA: Hendrickson, 1989). 1989년의 작업은 TEV나 GNB가 아니 라 NIV를 기초로 했다는 점에서만 1984년 작업과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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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 대해 나온 모든 책을 검토한 것은 아니다 ( 심지어 그 이전에 나온 책도 일부 놓쳤을지도 모른다 ). 오히려 나는 본문 자체에 몰두하려 했다. 반면에, ( 거의 최 고의 위치에 있는 ) 불트만, 슈나켄부르크, 브라운, 배럿 같은 시대를 초월하는 주 요 주석가와 소통하는 외에, NICNT 시리즈 전임자 레온 모리스, 웨스트콧, 호스킨스, 린다스, 링컨, 카슨, 비즐리머리, 키너, 멀로니, 젊은 시절의 나까 지 무수한 저술을 참고했다. 이 이름은 계속 늘어날 것 같다. 뜻밖에 나는 여러 좋지 않은 이유로 널리 칭송을 받는 루돌프 불트만의 주석이 무엇 보다 가장 유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트만의 자료, 편집, 전위 ( 轉位 ) 이론 은 살아남지 못했으며, 살아남아서도 안 된다. 그렇지만 세세한 것에 대한 불트만의 안목은 비길 데가 없으며, 본문을 있는 그대로 꼼꼼하게 읽는 것 은 심지어 불트만이 해당 본문을 버릴 때마저 직관과 깨달음을 준다. 불트 만이 요한복음을 ( 어느 정도 ) 바르게 해석했지만, 요한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해서 문제를 수정했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단순화 에 불과하다. 불트만의 위대함은 요한복음의 문제를 찾아내서 이를 수정 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을 바르게 해석했다는 점에 있다. 관련 정기간행물도 꽤 다루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망라한 참고문헌 같은 것이라면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키너의 책에 있는 167쪽 분량의 참고문헌이 시작하기에 좋은 최신의 자료다.2  )

둘째, 나는 유대교, 헬레니즘, 헬레니즘 유대교, 쿰란, 영지주의든 뭐든 요 한복음의 “배경”(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 에 시간을 많이 쓰지 않았다. 요한복음 에 대해서는 배경 설명에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관례지만, 다른 세 복음서 에 대해 그러지 않는 것은 요한복음에 나머지 복음서들과 공유하지 않는 독특한 “배경”이 어느 정도 있다는 가정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실 하지 않다. 내가 확신을 갖는 것은 다른 복음서처럼 요한복음도 그 배경이 혼합되어 있다는 점이고, 요한복음의 주요 구성 요소는 유대 경전, ( 팔레스타인 과 헬레니즘의 ) 제2성전 유대교, 원시 기독교라는 점이며, 해석가는 영지주의에 도 유사한 요소가 ( 전경으로든 배경으로든 )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내 생 각에는 “배경”에 대해서는 일반론보다는 구체적인 본문과 관련하여 평가하 는 것이 더 낫다. 셋째,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이 주석서 전체의 규모에 비해 서론을 상대적

2  ) Craig S. Keener,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Peabody, MA: Hendrickson, 2003), 2.1257-1409를 보라.

저자 서문 11

으로 짧게 썼다. 요한복음의 역사적・문화적 배경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의 자료 사용, 다른 복음서 및 신약 문서와의 관계, 요한복음의 문학 양식, 요 한복음의 기독론과 신학 등 이 모든 논제는 심지어 요한복음을 읽기도 전 에 책의 서두에서 다루기보다는 이들 전체 논제와 관련된 본문과 연결하여 거론할 때 다루기가 더 쉽고 좋다. 레온 모리스의 서론은 거의 60쪽이고, 레이먼드 브라운의 서론은 100쪽을 훨씬 넘으며,3  ) 배럿의 서론은 거의 150쪽, 슈나켄부르크의 서론은 200쪽을 조금 넘으며, 크레이그 키너의 서 론은 330쪽에 달한다! 그렇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불트만의 독일어 주석에 는 서론이 전혀 없고, 발터 슈미탈스가 1971년에 영어권 독자를 위해 서론 을 추가했을 때, 그것은 12쪽 분량이었다. 따라서 나는 대체로 저작성 문제 를 중심으로 다룬 서론이 비교적 짧은 것에 대해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어 쨌든, 나는 소위 “서론”이란 것이 본문 주석 앞이 아니라, 뒤에 와야 하는 건 아닌지 언제나 고민했다. 나는 서론을 제일 마지막에 썼다. 그래서 서론 을 읽는 것도 마지막에 읽는다면,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요한복음 본문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 사를 추적하기보다, 요한복음 본문이 우리에게 전해진 그대로 현존 형태 안 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요한복음 자료는 그것이 다른 복음서 한두 개든, 그 이면에 있는 구두 전승이든, 아니면 추측상의 “이적 자료”든, “계시 강화”든 부수적 관심사며, 간혹 각주에서 다룰 뿐이다. 말하 자면 과거의 자료에서 취해진 후 복음서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어떤 것이 복음서 기자가 복음서에 가한 편집 작업에 비하면 반드시 하찮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흔히 하는 말로, 여기서 취한 접근은 통시적이 아니라, 공시적이다.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요한복음이 일관된 문학 작품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요한복음을 일관된 것으로서 읽고자 시도 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독자에게 일관성을 전제로 읽는데 추정되는 어 려움에 대해 주의를 줄 때도 그러했다.4  ) 나는 간혹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3  ) 이렇게 말하는 것은, 브라운의 서론이 그의 사후에 356페이지짜리 책 한 권(Raymond E. Brown, An Introduction to the Gospel of John: Edited, Updated, Introduced, and Concluded by FrancisJ.Moloney, Anchor Bible Reference Library; New York: Doubleday, 2003)으로 확장된 까닭에, 브라운에게 별로 타당하지 않다.

4  ) 그러니까 이른바 ‘아포리아스’ 또는 어색한 전환, 전위 유발 이론(예, 5장과 6장의 위치가 바뀌 었다는 추정),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14:31)라는 말씀으로 고별 강화가 두 개로 분리된다는 이론, 타인에 의한 후대의 추가(예, 21; 6:52-58)든 아니면 이보다 앞서고 더 시원적인 공식화(예, 1:1-18의 여러 부분과 소위 “이적 자료”)든 요한복음에서 구체적인 본문을 분리하려는 시도 등을 말한다.

요한복음 12

정말로 한 말이 나오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내 대답은, 이 주석에서 명 백히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다음과 같다. “아마도 그렇다. 그러나 어떤 이 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자주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결론을 내 릴 때, 주석가로서 할 일은 그런 말씀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NIV ( TNIV ) 번역이나 사역 ( 私譯 ) 중에 선택할 수 있어서 사역을 싣기로 결정 했다. 기존 번역 성경의 특징을 놓고 변호하거나 논쟁하는 데 시간을 허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제시한 사역은 일부러 직역으로 정했다. 이 렇게 해야 헬라어를 모르는 독자도 원문의 구조와 구문을 알 수 있을 것 이다. 사역한 본문은 그대로 자족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두어도 안 될 것이다. 본문과 관련하여, 나는 전반적으로 네스틀레-알란트판 헬라어 신 약 성경 ( Nestle-Aland Greek New Testament ) 26판과 27판을 따랐다. 네스틀레-알 란트판을 따르지 않은 경우 ( 예, 1:15; 12:17 ) 간혹 무척 길더라도 그 이유를 제시 했다. 두 번째 시도인 이 주석은 대부분 은퇴 기간에 준비했다. 하지만 이것은 고든 신학교, 고든콘웰 신학교, 앤도버 뉴턴 신학교, 미주리 주립 대학교, 은퇴 후 파사데나와 시애틀의 풀러 신학교와 메인주 포틀랜드의 뱅거 신학 교 등의 교실에서 있었던 반세기에 걸친 가르침의 산물이다. 내가 가르쳤지 만,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이 모든 곳의 학생들에게 감사한다. 그중 세 분인 벤 위더링턴 ( 1995 ), 로드 휘태커 ( 1999 ), 크레이그 키너 ( 2003 ) 는 요한 복음에 대해 탁월한 주석을 썼다. 그레이스 신학교 교수였다 후에 학장까지 지낸 호머 켄트 역시 요한복음에 대해 훌륭한 주석을 썼다 (Light in the Darkness: Studies in the Gospel of John ). 켄트 교수가 1953년 봄 수업 중에 요한복음을 소 개한 것이 기억난다. 이 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켄트 교수의 강의는 구성 도 매우 좋았지만, 내 기억에 최고로 남는 것은 우리에게 ( 한 문제당 한 장씩 ) 숙 제로 내 준 21개의 “논란이 되는 본문”이었다. 내겐 바로 이것이 출발점이 되고 웨스트콧의 주석과 메릴 테니의 책 ( John: The Gospel of Belief ) 도 도움이 되 었다.

최근에, 고든콘웰의 고든 피 ( 현재 이 책의 편집장 ), 미주리 주립 대학교의 찰리 헨드릭, 풀러 신학교의 고 ( 故 ) 데이비드 숄러를 포함한 동료들과의 교제를 통해 유익을 얻었다. 더 최근, 그러니까 이 책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작 은 규모의 미국 침례교회 소속 예닐곱 분 ( 이 중에는 나의 목사님도 계신다 ) 으로 이 루어진 뉴햄프셔 성직자 후원 그룹에서 격려를 많이 받았다. 우리는 대개 사례 연구를 함께했다. 이것을 통해 나는 대형 교회의 궤도 밖에서 시골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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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목사가 무엇을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기도에 감사한다. 나는 이 주석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를 바란다. 그들 이야말로 내가 이 주석을 쓰는 대상인 바로 그 청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 아내 베티도 있다. 베티는 내가 처음 요한복음을 알게 되었던 1953년 봄 이래로 늘 나를 사랑해 주었고, 나도 그녀를 사랑한다. 나의 사 랑 베티에게 이 책을 바친다.

램지 마이클스

요한복음 14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서론
John

요한복음의 성격

에밀리 디킨슨 ( Emily Dickinson ) 에 따르면, 하나님은 “멀리 있는-엄위한 연 인”으로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구애한다. “대리 구혼.” 디킨슨은 그 것을 이렇게 부른다. 마치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 Henry Wadsworth

Longfellow ) 의 유명한 시에서 자기 대신 존 올던 ( John Alden ) 을 보내 “어여쁜 프 리실라”( Priscilla ) 에게 구애하게 했던 마일스 스탠디시 ( Miles Standish ) 처럼 말 이다. 디킨슨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그 사람 어여쁜 프리실라”가 잘 못해서 “공사를 선택하고 신랑을 퇴짜 놓지 않게” 해야 한다. 스탠디시는 “짓궂게 과장하여 ‘마일스’와 ‘존 올던’은 동의어였다고 단언한다.”1  ) 요한 복음에 열심 있는 독자라면 여기서 요한복음 13장 20절 (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 이 반영되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다른 복음서처 럼 ( 마 10:40; 눅 10:16을 보라 ), 예수는 이 요한복음에서도 실로 하나님의 대사다. 하지만 어떤 다른 복음서에서도 예수를 자기를 보낸 아버지와 “하 나”( 10:30 ) 인 분, 아브라함 이전에 존재하셨던 “내가 있느니라”( 8:58 ) 인 분,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한 분이고 유일한 분인 하나님”( 1:1, 18 ) 이었 던 “말씀”이라고 이렇게 확실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 수는 잊을 수 없는 분이며, 그리하여 성부 하나님은 어떤 이들이 보기에 신

1  ) The Complete Poems of Emily Dickinson (ed. T. H. Johnson; Boston: Little, Brown, n.d.), 169-70을 보라. 흥미롭게도, 디킨슨은 이 시를 1862년에 썼다. 롱펠로우가 「마일스 스탠디시의 구 애」(TheCourtshipofMilesStandish)를 쓰고 나서 불과 4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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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약신학에서 “무시된 요소”가 되는데, 특히 이 복음서가 그렇다.2  ) 사실, “대 사를 선택하고 신랑을 퇴짜 놓고” 싶은 유혹이 들지만, 이것은 저항해야 할 유혹이며, 사실상 이 복음서의 페이지마다 이런 유혹에 단호히 저항한다. 거듭 반복해서, 예수는 그의 청중에게 아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 며, 자신이 하는 말은 성부에게 받은 말이고, 자신의 사역은 성부가 자신에 게 하도록 지시한 것일 뿐임을 상기시킨다. 예수의 권위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의 뜻에 대한 그의 온전한 순종 안에 있다. 아마도 자기주 장과 겸손의 혼합, 즉 하나님과의 동등성과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라는 이 매력적인 혼합 때문에,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수 세기에 걸쳐 요한복음의 예 수, 그 결과로 요한복음 자체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요한복음의 모든 독자가 똑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요한복음은 누구 나 선호하는 복음서는 아니다. 복음서의 문체와 관련해서, NAB 번역자들은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요한복음은 특별한 사례다. 그의 반복 어법 기교를 절대적으로 따 른다면, 우리말을 쓰는 사람의 귀는 폭행을 당하는 셈이지만, 단어나 구절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음향효과를 부드럽게 만들어 버리면, 그의 시가 갖는 효과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절충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가 의도적으로 사용한 반복이 한편으로 우리말을 읽고 말 하는 사람들에게 문체가 심각하게 손상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에는 이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다. 헬라어 원문에 친숙해야 요한의 시가 얼 마나 가혹한 북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3  )

이런 주장에 대해 훌륭한 영어 문체를 잘 아는 데이비드 대니엘 ( David Daniell ) 은 이렇게 답한다. “이 사랑의 복음서를 악기처럼 다루는 데에는 아 무 막대기나 써도 된다.”4  ) 여기에 일치된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내용과 관련해서 이 복음서 안에서 예수의 자기주장만 들을 뿐, 그의 겸손에 대해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

2  ) Marianne M. Thompson, The God of the Gospel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2001)을 보라. 톰프슨은 이런 오해를 바로잡으려 한다.

3  ) The Catholic Study Bibl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Preface to the New American Bible First Edition of the New Testament.”

4  ) TheBibleinEnglish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3), 754.

요한복음 22

Ⅰ. 요한복음의 성격

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14 ) 라는 요한복음의 강령 ( 綱領 ) 같은 주장 앞에 서, 다음과 같이 묻는 사람들이 있다.

물 위를 걷고, 닫힌 문을 통과해 걸어오며, 자신의 대적에게 붙잡히 지 않고,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피곤하여 마실 것을 구하며, 그럼에도 물을 마실 필요가 없고, 자기 제자들이 찾는 양식과 다른 양식을 가진 분은 어떤 의미에서 육체인가? 그는 사람들에게 속을 수 없다. 그는 심지어 사람들이 말하기 전에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생각까 지 알기 때문이다. 그는 하늘과 땅의 간격만큼 무한한 차이가 있는 관 점에서 사람들과 논쟁한다. 그는 모세나 세례 요한의 증언이 필요 없다. 그는 마치 유대인이 자기 소유가 아닌 것처럼 유대인과 관계를 끊는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만나면서도 어머니에게 주인으로 행세 한다. 그는 나사로를 무덤에 나흘 동안이나 누워 있게 만들어서 나사 로의 부활 기적을 더욱 인상적으로 보이게 한다. 마지막에 요한의 그 리스도는 승리하여 자발적으로 자기의 죽음을 향해 간다. 복음서 기 자가 이 예수가 언제나 아버지의 품에 있으며, 아버지와 한 분인 그에 게 천사들이 내려오고, 그에게서 다시 올라간다고 말한 것은 과잉에 가깝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그는 자기 영광을 보 고 들을 수 있다. 복음서 프롤로그나 도마의 입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 적으로도 그는 자신을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 는 것을 듣는다. 이 모든 것이 실제 성육신 이해와 얼마나 일치하 는가?5  )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6 ) 라 는 복음서의 전형적인 선언 앞에서, 유대인 신약학자 아델 라인하츠 ( Adele Reinhartz ) 는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여기서 주는 선물은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믿 음을 통한 영생의 약속이다. 내포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선물은 독자가 임의로 자유롭게 받거나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느낄 정도로 우

5  ) Ernst Käsemann, The Testament of Jesus (Philadelphia: Fortress, 1968), 9.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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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히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 들로 믿음으로써 이 선물을 받는 것은 예수가 보기에 나 자신을 위해 지극히 중요하다. 이 선물을 받아들이면 영생에 이르게 된다. 이 선물 을 거절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독자의 반 응에 대해 보이는 깊은 관심은 이어지는 3장 19-21절 본문에서도 전 해지는데, 여기서 이 선물은 윤리적 용어로 재구성된다……그러므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내가 그의 선물을 거절한다면, 즉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를 거부한다면, 나를 “악 하다”라고 판단한다. 반대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내가 예수를 구원 자로 믿는 믿음으로 그의 선물을 받아들이면, 나를 “선하다”라고 판 단한다. 본문의 언어가 일반화하는 언어여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것을 총체적으로 보고 이 선물이 나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았거나 앞으로 영원히 살게 될 모든 독자에게 제공된 것임을 강조한다. 동시 에, 나를 비롯한 모든 독자는 이 선물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따라 판 단을 받을 것이며, 우리가 선택한 결과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내포 저자인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자기의 제 안에 무척 큰 무게를 두며, 독자들에게 똑같이 하도록 강권한다. 이는 생사와 선악의 문제다……이 복음서와 복음서의 내포 저자도 두 유형 의 사람들, 즉 빛으로 오는 사람과 오지 않는 사람, 악을 행하는 사람 과 행하지 않는 사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생명을 얻을 사람 과 얻지 못할 사람을 인정한다. 내포 저자인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선 을 행하는 믿는 자와 악을 행하는 자를 분리함으로써 자기 독자들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 이렇게 할 때,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이 복음서를 직접 매개로 삼아서 증언하는 무리로서 한 무리를 자신과 연계시키고, 다른 모든 무리에게는 “다른 이”의 역할을 부여한다.6  ) 이 설명은 이런 “다른 이”7  ) 의 역할을 몸소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요한복음이 어떤 책인지에 대한 놀라울 정

6  ) Adele Reinhartz, Befriending the Beloved Disciple: A Jewish Reading of the Gospel of John (New York: Continuum, 2001), 24-25. 7  ) 라인하츠는 요한복음을 읽는 네 가지 방법을 탐구한다. 사랑하시는 제자를 “멘토”로 보는 “순응 자”의 독법, 사랑하시는 제자를 “적대자”로 보는 “저항자”의 독법, 사랑하시는 제자를 “동료”로 보 는 “공감적” 독법, 사랑하시는 제자를 “타인”으로 두는 “참여적” 독법. 라인하츠는 그의 유대적 관 점에서 마지막 독법을 자신의 관점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인정한다.

요한복음 24

Ⅰ. 요한복음의 성격

도로 지각력 있는 설명이며,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이 필연적으로 같

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를 하나님의 말씀 으로 보면서도 그럼에도 라인하츠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반체제적이며 종 파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기독교 신약학자 로버트 건드리의 다음과 같 은 말처럼, 때때로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함께 간다. 요한은 세상을 예수의 기도와 사랑, 신자들의 사랑의 범위 밖에 두 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요한은 또한 세상을 죄로 가득 차고, 하나 님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 무지하고, 예수의 죽음 을 기뻐하고, 사탄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으로 묘 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대해 부 분적으로만 긍정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악한 성격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였고,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 죽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부분적인 긍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고 한 것이다.8  )

이 복음서가 의심할 것 없이 그 시대에 “반체제적”이고, 심지어 “종파주 의적”이긴 했지만, 이런 성격에 있어 이 복음서가 다른 복음서보다 더, 또는 1세기의 어떤 기독교 공동체보다 더 심했다는 데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 이다.9  ) 그렇지만 건드리가 인정하듯이, 우리 시대에 이 복음서는 반체제적 이기도 하며, 종파주의적이기도 하다.10  ) 이 복음서는 기독교의 자유주의적 형태만 아니라 보수주의적 형태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포용”을 가치 있게 여기고, 그래서 그들의 교회가 더욱 “포용적”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교회가 더욱 작아지는 것을 목격하는 이들에게 맞서서, 요한복음은 오히려 “위로부터 태어나는” 그래서 세상과 충돌하는 참된 신자들의 공동

8  ) Robert H. Gundry, Jesus the Word According to John the Sectarian (Grand Rapids: Eerdmans, 2002), 63-64.

9  ) 예, The Gospels for All Christians:Rethinking the Gospel Audiences (ed. Richard Bauckham; Grand Rapids: Eerdmans, 1998)를 보라. 특별히 Bauckham, “John for Readers of Mark,” 147171을 보라. 또한, 산상수훈(전반적으로 마태복음도)이 요한복음 못지않게 “종파주의적”이라는 카 슨의 간략하지만 결론적인 논증을 보라(John, Jesus, and History, Volume 1 [Atlanta: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7], 157).

10  ) 건드리는 다음 책의 3장에서 이 점을 다소 길게 지적한다. Jesus the Word According to John the Sectarian, “A Paleofundamentalist Manifesto for Contemporary Evangelicalism, Especially Its Elites, in North America,” 71-94.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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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라고 하는 “배타주의적” 전망을 제공한다. 요한복음의 유산 중 하나가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 ( 일부 영역에서 특정 정치 운동가를 나타내는 암 호가 된 문구 ) 임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은 이런 운동을 별로 격려하지 않는다. 이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나 그의 제자들과는 매우 다르게, ( 모두는 아니더라도 ) 대부분의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무척 편안하게 느낀다. 이들은 세 상의 결점을 일부 알더라도 세상에 충분한 가치를 두기에 요한복음 저자라 면 절대로 원하지 않을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할 뿐이다. 요지 는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운동이 요한 의 관념에서 “위로부터 난” 것과 거의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 진 심으로 요한의 복음서에 대해 깊은 감사, 또는 심지어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경우 그들의 감사가 그들의 이해를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주석을 쓰는 일은 매우 구체적인 일이다. 주 석가의 일은 요한복음을 “팔거나” 시장에 내놓는 것,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설득해서 요한복음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신자 는 이미 눈치가 빨라서 요한복음을 자기들이 좋아하는 복음으로 삼았다. 헌 신적인 신자들이 아닌 경우 요한복음을 더 많이 이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요한복음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이것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똑같이 극 히 투명하게 요한의 복음을 대면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 빛이나 어둠, 진 리와 거짓, 생명이나 죽음 같은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극명한 선택과 나사렛 예수를 대변하는 요한복음의 평범치 않은 주장에 대해 스스로 마음을 정할 수 있다. 아주 간단히 “그것이 사실인가?”라고 하면, 요한복음의 짧은 답변 은 “그렇다, 그것은 사실이다!”다. 요한복음의 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 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1:24 ). 이 주장은 내러티브 안에 나오는 예수의 주장을 반영한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 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5:32 ). “내가 나를 위 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8:14 ).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 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18:37 ). 복음 서 저자와 그를 보증하는 이들은 예수가 증언하는 “진리”에 대해 예수 못지 않게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누구인가? 그의 진리 주장 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26

요한복음의 저자 문제

성경 독자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보통 성경학자들은 사복음서 모두 저자 를 알 수 없다고 본다. 그래도 사복음서를 계속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 복음, 요한복음”으로 부른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네 번째 복 음”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요한복음”을 다른 세 복음 서보다 저자 불명일 확률이 더 크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 복음서 중에 저자 불명인 책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바울이 자신의 서신을 시작하면서 매번 아주 분명하게 자신 을 밝히듯이, 또는 베드로, 야고보, 유다가 각자 서신에서 자신을 밝힌 것이 나,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그렇게 했듯이 이들 복음서의 저자가 기록된 본 문 어디서든 자기 이름을 드러낸 경우가 없다는 의미에서는 저자 불명이라 는 말이 맞다. 하지만 마치 “누가”의 저자가 자기의 독자에게 알려진 것처 럼 그렇게 자신에 대해 1인칭으로 말하고, 심지어 자기 수신자의 이름을 말 하는 것처럼 ( 눅 1:3 ), “요한”의 저자도 복음서의 끝에서, 이름이 아니라 “예수 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21:20-24 ) 로 드러나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저자 불 명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서 사본 모두 각각 “마태에 따른”, “마가에 따른”, “누가에 따른”, “요한에 따른”이라는 표제 또는 머리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저자 불명이 아니다.11  ) 이런 표제가 복음서 저자들이 11  ) “……에 따른”은 ‘카타’(kata,)다. 4세기의 두 사본인 바티칸 사본(B)과 시내산 사본(¥)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이것은 흔히 가장 초기 형태의 표제로 판단된다. 대부분의 후대의 증거들(심지어 요한복음의 상당히 초기인 P66과 P75조차)은 조금 더 긴 형태인 ‘유앙겔리온 카타……’(euvagge,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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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직접 쓴 복음서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만, 이 표제들 이 아마도 2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복음서 모음집 형태로 “출판 된” 복음서에 속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추정하건대, 이름이 언급 된 네 사람의 증언에 “따라”( ‘카타’ ) 네 가지 형태로 보존된 하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식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이유로, 고대 교회에서는 우리가 논하는 복음서를 쓴 것으로 여겨지는 “예수께서 사랑하 시는 그 제자”의 이름을 ( 거의 만장일치로 ) “요한”이라고 생각했다.

A.

고대 전승의 “요한”

“요한”과 그의 복음서에 대한 교회 교부들의 축적된 증거는 인상적이다. 2세기 후반 안디옥의 테오필루스 ( Theophilus of Antioch ) 는 복음서의 표제에 동의 해서 적어도 복음서의 처음 몇 구절을 “요한”에게 돌리는데, 테오필루스는 요한을 “성경”의 권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권위를 지닌 “성령을 지닌 사 람” 중 한 명이라고 부른다.12  ) 그러나 테오필루스는 나아가 이 “요한”이 “세 베대의 아들”이라거나, “사도”라거나, “주님의 제자”라고 밝히지는 않는다. 테오필루스의 증언은 단순히 “요한에 따른”이라는 표제에서 온 것뿐이었다. 2세기 말에 가까운 이레네우스 ( Irenaeus ) 는 다른 세 복음서의 전승을 상술 한 후 “그 후에 주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주님의 제자 요한은 직접 아시아의 에베소에 거하는 동안 복음을 출판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13  ) “아시아의 에베소”란 언급은 계시록과 일치한다. 이곳에서 “요한”이란 이름의 어떤 이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아시아 일곱 교회에,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 계 1:4; 2:1을 보라 ) 서신을 쓴다. “주 님의 제자”라는 이레네우스의 표현은 “그가 그의 가슴에 기대기도 했다”라 는 말로 보충 설명되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처음 소개되었던 복음서의 설명을 반영한다 ( 13:23을 보라 ). 이레네우스는 우리에게 이 “주님의 제자”가 사실은 “요한”으로 불렸다고 말한다. 이레네우스가 세 베대의 아들 요한, 즉 열두 제자 중 요한이라 불리는 유일한 사람을 가리키 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마 10:2//막 3:17//눅 6:14를 보라 ) . 마태, kata,… ; 각각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따른 복음”)로 나온다. 12  ) ToAutolycos 2.22 (see ANF, 2.103). 13  ) Against Heresies 3.1.1 (ANF, 1.414).

요한복음 28

Ⅱ.요한복음의 저자 문제 A. 고대 전승의 “요한”

마가, 누가에 따르면 ( 마 4:21//막 1:19//눅 5:10 ), 요한은 자기 형제 야고보 외에 베 드로, 안드레 형제와 더불어 처음 부르심을 받은 네 제자 중 하나였다. ( 베드 로와 안드레와는 달리 ) 야고보와 요한은 복음서 전승에 함께 나타난다. 요한복음 에서, 이들은 딱 한 번 이름이 아니라 “세베대의 아들들”( 21:2 ) 로만 언급 된다. 예수는 마가복음에서 심지어 이 두 사람에게 하나의 공동 이름, 즉 “우레의 아들들”로 번역되는 “보아너게”( 막 3:17 ) 를 준다. 이들은 심지어, 하 늘에서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내리도록 허락해 달라고 구할 때 ( 눅 9:54 ), 또 는 예수의 영광의 때에 한 사람은 예수의 우편에 다른 한 사람은 좌편에 앉 게 해 달라고 할 때 ( 막 10:37 ) 에도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모두 야이로의 딸을 일으킬 때 ( 막 5:37//눅 8:51 ) 와 변형될 때 ( 마 17:1//막 9:2//눅 9:28 ) 감람산 ( 막 13:3 ) 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 마 26:37//막 14:33 ) 베드로 ( 간혹 안드레 ) 와 함께 등장 한다. 사복음서 전체 전승에서 단 한 번,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홀로 말하거 나 행동한 적이 있다. 그것은 요한이 예수에게 “스승님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눅 9:49; 막 9:38도 보라 ) 라고 말하고서, “ ( 그를 ) 금하지 말라 너희 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9:50; 막 9:40도 보라 ) 라는 말씀을 들을 때다. 여기서도 “우리가 보았나이다”( ‘에이도멘’ ) 라는 동사에는 그의 형 제 야고보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에서 요한이 자기 형제 야고보 와 함께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아직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 와 함께 있으며, 베드로는 두 사람을 대표해서 말한다 ( 행 3:4-6, 12:26; 4:8-12, 1920; 8:20-23을 보라; 비교, 눅 22:8 ). 이레네우스가 “요한”을 “세베대의 아들”이나 “제자”라고 지칭하지는 않 지만, 이 “요한”이 “주님의 제자 요한”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레네우스가 의 미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외의 다른 곳에서 이레네우스는 이 사람에 대해 매우 명시적이다. 이레네우스는 플로리누스 ( Florinus ) 라는 로 마 장로에게 발렌티누스 ( Valentinus ) 파 영지주의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편지 를 쓰면서, 다음을 상기시킨다. 제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저는 폴리카르포스의 집이 있는 저지대 아시아에서 당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궁정에서 높은 지 위의 사람이었고, 폴리카르포스의 호감을 얻으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일을 최근에 일어난 일보다 더 분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는 복자 폴리카르포스가 앉아서 논쟁했던 장소, 폴리카르포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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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어떻게 들어오고 나갔는지, 그의 삶의 특성, 그의 외모, 그가 사 람들에게 했던 강론들, 그가 요한과 주님을 목격한 다른 사람들과 나 눈 교류에 대해 어떻게 보고했는지, 그가 그들을 말을 어떻게 기억했 는지, 주님의 이적과 가르침을 포함하여 그가 그들에게서 주님에 대 해 들었던 것이 무엇인지, 폴리카르포스가 생명의 말씀의 목격자들에 게서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성경에 일치하 게 보고했는지 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14  )

이레네우스는 또한 2세기 서머나 감독이었던 같은 인물 폴리카르포스에 게서 “주님의 제자인 요한이 에베소에서 목욕하러 갔는데, 안에 케린투 스 ( Cerinthus ) 가 있는 것을 알고서 목욕을 하지 않은 채 목욕탕 집에서 뛰쳐 나오며 ‘진리의 적인 케린투스가 안에 있어서 목욕탕 집이 무너질 수 있으 니 여기서 나갑시다’라고 외쳤다”라고 하는 전승을 전해 준다.15  ) 최소한 암 묵적으로라도 여기에 “바울” 못지않게 “요한”도 실제로 사도였다는 증언이 있다. 후에 이레네우스는 다시 “주님의 제자 요한”을 인용하는데, 그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한복음의 첫 줄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 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을 귀속시키면서 케린투스 등 여러 이단을 논 박한다.16  ) 놀랍게도 이레네우스는 자기의 『이단 논박』이 대상으로 했던 발렌티누스 파 영지주의 저술가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 ( Ptolemy ) 가 같은 “주님의 제 자 요한”에게 우리가 아는 복음서의 첫머리를 돌린 것을 인용한다 ( 요 1:1-5, 10-11, 14 ). 17  ) 해석상 그들의 차이가 무엇이었든 이레네우스와 그의 대적자들 모두 “주님의 제자, 요한”의 증언을 가치 있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 마이오스는 또한 이후 교회 교부를 근거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3 ) 라는 말씀 을 “그 사도”의 말씀이라고 인용하는데,18  ) 프톨레마이오스가 “사도”와 “주

14  ) Eusebius, EcclesiasticalHistory 5.20.5-6 (LCL, 2.497-99).

15  ) Irenaeus, Against Heresies 3.3.4 (ANF, 1.416).

16  ) Irenaeus, Against Heresies 3.11.1 (ANF, 1.426).

17  ) Irenaeus, Against Heresies 1.8.5 (ANF, 1.328).

18  ) Ptolemy, Letter to Flora, from Epiphanius, Panarion 3.33 (see R. M. Grant, Gnosticism, 184).

요한복음 30
님의 제자”를 서로 바꾸어 사용한다는 것이 시사되고 있다. 따라서 “요한” 은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적인 이레네우스에게도 “주님의 제자”와 동일시

Ⅱ.요한복음의 저자 문제 A. 고대 전승의 “요한”

되며, 프톨레마이오스는 명시적으로, 이레네우스는 적어도 암시적으로 “그 사도”와 동일시한다. “사도”란 칭호가 바울과 공관복음에서 사도로 확인되 는 열둘에게만 엄격하게 제한된다면,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이자 야고보 의 형제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결론은 이따금 2세기 말 에베소 감독이었을 폴리크라테스 ( Polycrates ) 의 증언을 기초로 도전을 받았다. 폴리크라테스는 부활절을 고정된 날짜에 지 킬 것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 감독 빅토르 ( Victor ) 에게 서신을 쓰면서, 같은 생각을 가졌으나 에베소에 묻힌 “위인들”을 인용했다. 그들 가운데 “주님 의 가슴에 기댔던, 흉패를 걸친 사제, 순교자, 교사였던 요한이 있는데 그는 에베소에 잠들어 있다.”19  ) “요한”을 복음서에서 언급된 “예수께서 사랑하 시는 그 제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 요 13:25를 보라 ). 하지만 이 “요한”은 명시적으로 “사도”나 “주님의 제자”로 불리지 않고, “순교자” 와 “교사”, 매우 놀랍게도 “흉패를 걸치는 사제”로만 불린다. 유대 대제사 장만이 “흉패”, 즉 “미트레”20  ) 를 착용했으며, 세베대의 아들 요한, 또는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의 제자 중 누구든 유대인 대제사장으로 섬겼다고 생각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폴리크라테스가 예수의 제자 중 한 명 ( 일부 해석에 따르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 이 “대제사장에게 알려져 있 었다”( 요 18:15, 17; 개역개정,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 ) 라고 하는 복음서의 언급으로 성 급한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또는 아마도 폴리크라테스가 “그리스도인 순교자요 교사”인 “요한”을 “대제사장 안나”와 “가야바……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 행 4:6 ) 과 더불어 언급된 유대 제사장인 “요한”과 혼동했 을 수도 있는데, 이들은 바로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성전 문 앞에서 고친 후에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한 자들이었다. 리처드 보컴에 따르면, 폴리크라테스는 이 두 명의 요한을 혼 동할 수 없었다. 둘 다 같은 내러티브에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폴리 크라테스는 에베소에 살다가 그곳에 묻힌 또 다른 “요한”을 염두에 두었음 에 틀림없다.21  ) 그러나 이런 주장은 빈약하다. 왜냐하면 일단 그런 혼동의 가능성이 인정된다면 그런 혼동의 가능성이 두 “요한”을 혼동하는 것에만

19  ) 이것은 다음에서 인용되었다.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5.24.3 (LCL, 1.507); 또한, 3.31.3 (LCL, 1.271).

20  ) to. pe,talon, ‘토 페탈론.’ “미트레”는 3.31.3(LCL, 1.271)에 있는 번역어다. 보컴(R. Bauckham) 의 다음 책에 있는 긴 (설득력 있는) 논의를 보라. TheTestimonyoftheBelovedDisciple, 4150.

21  ) Bauckham, TestimonyoftheBelovedDisciple, 50.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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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폴리크라테스는 거의 동시에 사도 빌립을 사도 들을 대신하여 섬기도록 임명된 일곱 명 중 하나인 집사 빌립과도 혼동 한다 ( 행 6:5 ). 상황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폴리크라테스의 은사에는 한계가 없는 듯하다. “요한”이 필연적으로 세베대의 아들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은 소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 감독이자, 폴리카르포스와 프톨레마이오스와도 동시대인인, 훨씬 이른 시기의 파피아스 ( Papias ) 의 증언을 기초로 도전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 파피아스는 우리가 요한복음이라고 부르는 복음서의 저자 문제에 대 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22  ) 하지만 파피아스는 ( 프톨레마이오스와 이레네우 스처럼 ) 분명하게 “요한”을 “주님의 제자”라고 언급한다. ( 4세기에 에우세비우스를 통해 우리를 위해 보존된 ) 파피아스의 증언은 상당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다. 나는 내가 일찍이 장로들에게서 배운 모든 것을 이 해석에 첨부하 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해석이 참되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 이다. 대부분의 사람과 달리, 나는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 리를 가르치는 이들을, 다른 사람들의 교훈을 설명하는 이들이 아 니라, 주님이 믿음에 부여한 것들 그리고 진리에서 나온 것들을 반복 한 이들을 기뻐했기 때문이다. 그 장로들23  ) 을 따라다녔던 어떤 이가 오면, 장로들, 즉 안드레나 베드로나 빌립이나 도마나 야고보나 요한 이나 마태나, 또는 주님의 제자 중 다른 누가24  ) 무엇을 말했는지에 대해, 주님의 제자들25  ) 인 아리스티온과 장로 요한26  ) 이 무엇을 말했 는지에 대해 물었다. 책에 나오는 정보는 생생하고 살아 있는 목소리 에서 나오는 말씀만큼 나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 문이다.27  )

에우세비우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22  ) 복음서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파피아스의 논의는 우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를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자료에서는 마가와 마태로 제한된다(Ecclesiastical History 3.39.1516; LCL, 1.297을 보라).

23  ) toi/j presbute,roij, ‘토이스 프레스뷔테로이스.’

24  ) tw/n tou/ kuri,ou maqhtw/n, ‘톤 투 퀴리우 마데톤.’

25  ) tou/ kuri,ou maqhtai,, ‘투 퀴리우 마데타이.’

26  ) o` presbu,teroj vIwa,nnhj, ‘호 프레스뷔테로스 이오안네스.’

27  ) Eusebius, EcclesiasticalHistory 3.3-4 (LCL, 2.291-93).

요한복음 32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본문과
주석

전문: 빛(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 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 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 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 지 못하더라

1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2 He was with God in the beginning. 3 All things came into being through him, and apart from him not one thing that has come into being was made. 4 In him was life, and that life was the light of humans, 5 and the light is shining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did not overtake it.

이 복음서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1:6 ) 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내 뒤 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섰다”( 15절; 또한, 30절을 보라 ) 라고 세례 요한 자신이 진술한 원리에 따라 그 앞의 다섯 절을 서문이나 전문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복음서의 처음 열여덟 절을 “프롤로그”로 구분하는 데 익숙한 독자 세대에게 낯설 것이다. 처음 열여덟 절을 “프롤로그”로 간주하지 않고 첫 다섯 절을 “전문”으로 간주하는 것은 전통과의 단절이며, 이 본문의 중 심 주제를 “말씀”이 아닌 “빛”1  ) 으로 강조하는 것도 전통을 벗어난다. 요한 1  ) 대문자 표기는 하나님이나 예수에 대한 헬라어 호칭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문제가 된다. 선한 목 자, 포도나무, 떡, 하나님의 어린양 같은 은유나, 말씀, 빛, 생명, 아들, 심지어 아버지 같은 용어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이 독자에게 이 표현들이 신에 대한 은유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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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복음은 전형적으로 그 말씀 ( ‘호 로고스’ ) 의 복음으로, 요한복음의 기독론은 다 른 신약 기독론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로고스” 기독론으로 기억된다. 그 러나 예수를 나타내는 칭호로서 “말씀” 또는 로고스의 의미는 그것의 의 미가 참되다 할지라도,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말씀”이란 단어 는 복음서에 네 번만 나오며, 1절에서 세 번, 14절에서 한 번 나오고, 이후 에는 절대로 다시 나오지 않는다.2  ) 반면에, “빛”은 적어도 복음서 전반부를 관통하는 지배적 이미지다.3  ) 전문이 “그 말씀”( 1절 ) 으로 시작하고, “빛”( 5절 ) 이라는 승리의 분위기로 끝남으로써 시작 부분에서 이야기의 결말 이 어떻게 될지를 드러내며, 복음서 기자가 인식하는 세상을 간략하게 묘사 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고 있으며, 어둠이 그것을 능가하지 못하더라”( 개역 개정, “깨닫지 못하더라”; 개역개정 본문주, “이기지 못하더라” ). 요한복음은 계시에 대해 말 한다. 텍스트는 들을 수 있는 계시 ( “말씀” ) 로 시작해서, 볼 수 있는 계 시 ( “빛” ) 로 나아가며, 그다음에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서 ( 예수의 표적들과 강화 안에서 구체화되면서 ) 이 둘 사이를 오간다. 1-2절 사복음서는 저마다 충분히 적절한 모종의 시작 표시로 시작한다. 마가복음의 첫머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 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마 1:1; 개역개정,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 로 연다.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 들”( 눅 1:2 ) 의 전승을 인정한다. 요한복음의 “시작”( ‘아르케’ ) 은 만물의 시초다. 요한의 전문에서 사용한 어휘가 결정적으로 창세기를 여는 절들로 구성되 기 때문이다. 해석가들은 그 이유를 두고 수 세기 동안 어리둥절해 했다. 요 한복음은 창조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요한복음도 다른 복음서처럼 계 시, 구속, 새 창조에도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출발부터 모든 시초의 시 초인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렇게 하는 의도가 옛 창조를 깎

타내는 한 가지 방편이다. 그럼에도 성격상 본래 인격적이지 않은 용어를 가지고 대문자 표기 여부 를 결정하는 것은 다소 주관적인 결정일 수 있다. 2  ) 더 온전한 표현인 “하나님의 말씀”(o` lo,goj tou/ qeou/, ‘호 로고스 투 데우’)이 10:35에 나오지만, (대부분의 독법에서) 예수와 관련되지 않는데, 이 표현은 또한 계 19:13에서 심판 때 임하는 백마 를 탄 자(분명 승리의 예수)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 이 용어는 요한계시록에 서 이보다 앞에 나온 언급을 반영하는데, 그런 경우 이 용어가 분명하게 기독론적인 것은 아니다 (예, 1:2, 9; 6:9; 20:4; 또한, 19:9도 보라). 3  ) 예수는 8:12의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는 말씀에서 자신을 분명하게 빛으로 밝힌다. 다음의 말씀 과 비교하라.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 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3:19-21도 보라). 빛에 대한 모든 언급이 처음 열두 장 안에 나온다는 것은 아마도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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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린 기독교 운동의 중심이나 변두리에 있는 어떤 집단 ( 영지주의가 바로 떠오 른다 ) 을 논박하기 위한 것인지 여부는 우리가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해석가로 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잠시 판단을 미루고, 복음서에서 이어지는 증거가 복 음서 기자가 이런 식으로 시작한 이유를 밝힐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어쨌든, “태초에”4  ) 라는 단어는 확실하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 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반영한다. 그러나 비슷한 점보다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유일한 창조자인 반면, 요한복음에서 창 조는 하나님과 그 말씀의 공동 사역이다. 더욱이 창세기는 단순히 전제일 뿐인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이 천 지를 만들었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은 존재에 초점을 맞추며, 세 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2) “그 말씀이 하 나님과 함께 있었다”, (3)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다.”5  ) 아마도 창세기가 행 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창세기의 하나님을 소개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 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확고하게 전제로 둘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것이 요 한복음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 말씀은 확인되어야 하며, 오직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관련해야 확인할 수 있다. 이 절은 첫 구절에서 “그 말씀”을 소개한 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교차 대구 형태로 “그 말씀”( ‘호 로고스’ ) 과 “하나님”( ‘호 데오스’ ) 사이의 상호 작용을 나타낸다. 즉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6  ) 헬라어 본문 순서를 따르자면, 하나님은 그 말씀이었다.7  ) 말씀, 말씀, 하나님, 하나님, 말씀의 엄숙한 반복은 요한을 다른 세 복음서와 직접 구별하는 시적 또는 송가적 성질을 언어에 부여함으로써 처음부터 독자의 주목을 끈다. 이런 성질이 요 한복음 전반의 전형은 아니므로, 요한복음이 실제보다 더 심하게 다른 복음 서들과 다를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4  ) evn avrch/|, ‘엔 아르케.’ 5  ) “이었다”는 헬라어로 ‘에’(h=)인데, 세 번 반복되며 “이다”의 미완료형이다. 70인역 창 1:2에서 동 사 “이었다”(‘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 위를 운행하기를 기다리는 정지되고 모양 없는 비어 있음의 땅을 가리킨다.

6  ) ‘프로스’(pro,j)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다(Moloney, 35를 보라; 브라운[1.3-5]은 “하나 님의 임재 안에”를 제안한다). “하나님과 함께”라는 번역은 “함께”를 나타내는 더 흔한 헬라어 전 치사, 즉 여격이 오는 ‘쉰’(su,n)이나 ‘파라’(para,) 또는 속격이 오는 ‘메타’(meta,)를 전제하는 것으 로 보인다. 그러나 ‘프로스’(pro,j)를 “……에 통달하다”나 “……에 가깝다”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면, 전통적 독해를 지지할 만한 정당성이 있다(Abbott, Johannine Grammar, 273-76을 보라; 또 한, BDAG, 711, pro,j, III, 7). 7  ) 헬라어로는 다음과 같다. kai. o` lo,goj h=n pro.j to.n qeo,n, kai. qeo.j h=n o` lo,goj, ‘카이 호 로고스 엔 프로스 톤 데온, 카이 데오스 엔 호 로고스.’

요한복음 80

그렇다면 그 말씀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 둘이 먼저 구별된 존 재자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 어떤 면에서 서로 동 일시된다는 점에서 (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다” ) 신호가 섞여 있다. 첫 번째 예시에 서 “하나님”에는 헬라어 정관사가 있는데 ( ‘호 데오스’ ), 영어에서는 유대 하나 님이나 기독교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정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번째 예시에서 “하나님”은 정관사 없이 쓰이고 있다.8  ) 그러나 “하나님”, 즉 ‘데오스’를 그 절의 제일 앞에, 즉 동사 앞에 두고 있다는 것9  ) 은 확실하 게 ‘데오스’를 한정해 주며, 우리에게 ‘데오스’를 단순한 형용 표현으로 환 원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10  ) 동시에, 정관사의 부재는 독자에게 “그 말 씀”과 “하나님”이 서로 밀접하고 친밀하지만 서로 대체 가능한 것은 아님 을 일깨운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그 말씀 이상이다.11  ) “하나 님”이 절 안에서 먼저 나오긴 했지만, “하나님”은 이 절의 주어가 아니라 술어 명사다. “하나님이 그 말씀이었다”가 아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이 었다”다 ( 4:24의 “영이 하나님이시다”[개역개정은 순서가 반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이시다”와 비교 하라 ). 주어가 앞에 올 때조차, 주어 ( 하나님 )와 술어 ( 빛, 사랑 ) 를 구분하기 위해 주어에 정관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요한1서 1장 5절 ( “하나님은 빛이 시다” ) 과 4장 8절 및 16절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이 그렇다.12  ) 이들 다른 본문에

8  ) 어떤 이들은 창 31:13에 대한 필론의 해설에서 비슷한 경우를 보았다. 여기서 필론은 정관사가 있 는 ‘데오스’(qeo,j)와 없는 ‘데오스’를 구별한다. 정관사가 있으면 “진실로 하나님이신 분”을 가리 키며, 없으면 “그의 주요한 말씀” 또는 ‘로고스’(lo,goj)를 가리킨다는 말이다(On Dreams, 1.22930). 필론이 성경 언어를 주석하는 가운데, 요한복음이 독자적인 내용을 형성하는 것을 고려하면, 이런 유사구를 사용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한다. 요한이 “진실로 하나님”이며,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분에 대해 1:18에서 정관사 없이 ‘데오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라.

9  ) qeo.j h=n o` lo,goj, ‘데오스 엔 호 로고스.’

10  ) “동사에 선행하는 한정적인 술어 명사에는 보통 정관사가 없다”라며 콜웰(E. C. Colwell) 이 제안한 전형적인 원리를 보라(“A Definite Rule for the Use of the Article in the Greek New Testament,” JBL 52 [1933], 20). 요한복음에 있는 이 본문에 대해서는 P. B. Harner, “Qualitative Anarthrous Predicate Nouns: Mark 15:39 and John 1:1,” JBL 91 (1973), 84-86을 보라.

11  ) 배럿이 지적하듯, “관사가 없는 것은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의미지만, 하나님만 유일하게 말씀 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호 데오스’(o` qeo,j)가 쓰였더라면, 이것은 삼위의 제2격 외에 신적 존 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함의였을 것이다”(156).

12  ) 각각 ‘호 데오스 포스 에스틴’(o` qeo.j fw/j evstin)과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o` qeo.j avga,ph evsti,n)이다. 그 말씀과 관련한 하나님과 사랑과 관련한 하나님 사이에 부분적인 유비가 존재 한다. 요한1서 저자는 한편으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니”(h` avga,ph evk tou/ qeou/ evstin, ‘헤 아가페 에크 투 데우 에스틴’, 4:7; 개역개정,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 할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o` qeo.j avga,ph evsti,n, ‘호 데오스 아가 페 에스틴’; 4:8, 16)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유비는 완벽하지 않다. 이 유비가 끌어내는 결론은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다” 처럼) “사랑이 하나님이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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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전문: 빛(1:1-5)

서 영과 빛과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듯, 본문의 단락에서도 “하나님”은 사 실상 말씀의 속성이다. 어떤 이에게, 이것은 ‘데오스’를 거의 형용사로 만들 지만 ( 제임스 모펫[James Moffatt]의 “그 로고스는 신성했다”라는 번역처럼 ), 13  ) “영”이나 “빛” 이나 “사랑”이 형용사가 아니듯이, ‘데오스’도 형용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며, “하나 님은 사랑이라”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랑을 베푼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이다. 마찬가지로, “그 말씀이 하나님이었다”라는 말은 “그 말씀이 신 성했다”라는 말을 능가한다. “그 말씀이 신이었다”는 가능하겠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들려서 엄밀히 대응하는 소득도 없이 “그 말씀이 하 나님이었다”가 갖는 단순성과 스타일을 상실한다.14  ) 하나님은 이 복음서에서 “아버지”로 나타나며, 그 말씀도 아버지의 “유일 한 아들”로서 ( 14, 18절을 보라 ), 또는 단순히 “그 아들”로서 나타날 것이다. 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이후의 기독교 신학은 “본성”과 “위격”이라는 헬라 의 개념을 도입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으로 공통 본성을 공유하는 구 별된 두 위격이다. 전형적인 “요한의” 복음서 시작이면서 이후 기독교 신학 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시작은 “태초에 아들이 계시니라 이 아들이 아버지 와 함께 계셨으니 이 아들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아버지와 함 께 계셨고”로 보인다. 그런데 그 대신에 복음서 기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 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1:6 ) 라는 인물의 출현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내러티브가 시작할 때까지, “그 아들”과 “그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를 미루었다. 이것이 적절한 것은 복음서 전승의 다른 곳에서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상황에서 정확히 그 아버 지가 아버지로 그 아들이 아들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 막 1:9-11과 평행 본문 ). 전문 에서 다른 어휘를 선택함으로 인해, 첫 다섯 절뿐만 아니라 흔히 프롤로그 로 알려진 1-18절의 상당 부분을 요한 이전, 아마도 기독교 이전의 송가로 보는 현대 학자 가운데 널리 퍼진 ( 그러나 의심스러운 ) 견해가 생겨났다.

13  ) 브라운(1.5)은 이 번역을 “지나치게 약하다”라고 부른 것이 맞는데, “결국, 헬라어에는 ‘신적 인’(‘데이오스’)을 가리키는 말로 저자가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형용사가 있다”라고 덧붙인다.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삼위일체를 배경으로 두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 독자가 보기에 ‘하나님’이 ‘하나님 아버지’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다. 이런 독자가 보기에 ‘말씀이 하나님이었다’라는 번역은 옳은 번역이다.”

14  ) NEB와 REB의 번역인 “하나님이 되는 분이 그 말씀이기도 했다”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하나님” 과 “그 말씀” 외에 세 번째 존재자를 함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번역은 헬라어 어순을 보존하는 이점이 있지만, 더 좋은 선택은 “하나님은 그 말씀도 되는 분이었다”일 것이다.

요한복음 82

1절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 ( “태초에 그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 으니” ) 은 2절에서 응답송처럼 더욱 간략하게 울린다. “그는……태초에 하나 님과 함께 계셨으니.”15  ) 요지는 말씀이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의 협력자 였다는 것이다 ( 3절을 보라 ). 복음서 기자는 “태초”와 창세기 1장 1절을 대충 지나치지 못하게 할 것이다. 2세기 중반에 가장 이른 요한복음 주석가로 알 려진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르케’를 기독론적 칭호의 지위로 상승시켰다. 프 톨레마이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의 제자 요한은 아버지가 만물을 만들었다는 우주 기원에 대해 말하려는 열정으로 구체적인 태초 ( ‘아르켄’ ) 를 상정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처음 생산한 것이었다. 이를 요한은 유일하게 출생한 아들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안에서 아버지가 만물을 생식적으 로 ( spermatically ) 방출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로고스가 방출되었으며, 이 태초 안에 이온 ( Aeons ) 의 모든 실체가 있었다. 로고스가 친히 후에 이 이온을 형 성했다……우선 프톨레마이오스는 셋, 즉 하나님, 태초, 로고스를 구별한다. 그다음에 프톨레마이오스는 그것들, 즉 아들과 로고스 각각의 방출을 개시 하기 위해, 아들과 로고스 상호 간의 하나 됨과 이 둘이 아버지와 하나 됨을 개시하기 위해 다시 이 셋을 결합한다. 왜냐하면 아버지 안에 아버지로부터 태초가 있기 때문이며, 태초 안에 태초로부터 로고스가 있기 때문이다.”16  ) 창세기에서는 한 신적 존재자, 하나님 ( ‘엘로힘’ ) 의 사역이지만, 요한복음에서 는 둘 ( 하나님, 말씀 ) 의 사역인 창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안에서는 셋 ( 하나님, 태초, 말씀 ) 의 사역이 된다. 이런 식으로 발렌티누스파 영지주의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삼위일체 교 리가 교회를 지배하기 오래전에 요한복음의 시작 부분에서 일종의 “삼위일 체”를 만들어 냈다. ‘아르케’가 1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미 소아시아에서 예 15  ) AD 110년 무렵 트라야누스(Trajan)에게 보낸 플리니우스(Pliny)의 편지가 이와 관련해서 종종 인용된다. 플리니우스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플리니우스에게 “자신들은 정해진 날에는 날이 밝 기 전에 모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때 신에게 바치듯 그리스도에게 송가를 바치며 소절별로 번 갈아(‘인비켐’) 노래를 불렀다”(Epistles 10.96; Theron, 15도 보라)라고 했다는 것이다. 많은 학 자가 이 “신에게 바치듯, 그리스도에게 바친 송가”가 응답송의 형태였으며, 요한복음의 이른바 “프롤로그”나 프롤로그의 기반이 되는 원천이었다고 추측했다. 이런 이론은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16  ) 이 번역은 로버트 그랜트의 번역이다. Robert M. Grant, Gnosticism (New York: Harper & Brothers, 1961), 182. 그랜트는 ‘아르케’(avrch/|)의 대체 번역으로 “원리”를 제안한다. 이 헬라 어 본문이 다음에서 인용된 것과 같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1.8.5 (Harvey, 1.75-76; W. Völker [ed.], Quellen zur Geschichte der christlichen Gnosis [Tübingen: J. C. B. Mohr/Paul Siebeck, 1932], 93-94도 보라). 더 온전한 논의는 Elaine Pagels, The Johannine Gospel in Gnostic Exegesis (SBL Monograph Series 17; Nashville: Abingdon, 1973), 26-2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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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전문: 빛(1:1-5)

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칭호가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프톨레마이오스 의 해석은 겉보기만큼 그렇게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17  ) 그럼에도 프톨레마이오스는 창세기의 세계에서 너무 멀리 가버려서 설득력이 없다. 창세기 1장의 “태초”18  ) 는 분명 시간적인 의미로 의도되었다. 요한복음 1장 1절도 마찬가지다. “태초부터”( 즉, ‘아프 아르케’ ) 역시 신약 성경에서 일관되게 시간적이듯이 말이다.19  ) 그러나 요한복음은 먼저 “하나님이 이르시 되”20  ) 라는 후렴구 ( 창 1:3, 6, 9, 11, 14, 20, 24, 26, 29 ) 를 명사인 “말”, 즉 ‘로고스’로 변형시킴으로써,21  ) 둘째, “말”을 “그 말씀”으로 의인화함으로써 자신의 방 식으로 창세기를 넘어섰다. 의인화는 대명사 “그”22  ) 보다는 ‘로고스를’ 인 격적 존재로 이해되는 “하나님”으로 특정하는 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요 한1서에서 말씀이 인격적이라면, 독자는 말씀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 도라는 것을 알 것으로 기대되지 않겠는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소개될 때 ( 1:16 ) , 이 이름이 설명이나 팡파르 없이 당연한 것으로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마 그럴 것이다. 더욱이 “예수”가 이야기 속 에서 자신을 살아 있는 인물로 드러낼 때, 예수는 너무도 돌발적으로 “예수 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는”( 1:29 ) 세례 요한의 눈을 통해 그렇게 행 한다. 분명히 독자는 예수가 누구인지 안다. 그러므로 십중팔구 이야기가 처음부터 예수에 대한 것임을 안다. 예수는 먼저 “말씀”( 1-3, 14절 ) 이며, 그다 음으로 “빛”( 4, 5, 7-8, 9-10절 ) 이고, 그다음으로 “독생자”( 14, 18절 ) 이며, 마지막 으로 복음서의 나머지 대부분에서 “아들”이다.23  ) 17  ) 골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avrch/|, ‘아르케’)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계 3:14,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아르케’) 이신 이가 이르시되”(비교, 계 21:6; 22:13)를 보라.

18  ) 창세기 1장의 70인역에 있는 ‘엔 아르케’(evn avrch/|)와 히브리어 성경의 ‘브레쉬트’(tyvarB).

19  ) 이것은 문제가 되고 있는 “태초”가 만물의 창조이든(마 19:4, 8; 24:21; 막 10:6; 13:19; 요 8:44; 벧후 3:4; 요일 3:8), 아니면 기독교 운동의 시작이든(눅 1:2; 요 6:64; 15:27; 요일 1:1; 2:7, 13, 14, 24; 3:11; 요이 5, 6; 행 11:15에 있는 ‘엔 아르케’와 비교하라) 사실이다.

20  ) 히브리어로 ‘바요메르 엘로힘’(~yhla rmayw) 또는 헬라어로 ‘카이 에이펜 호 데오스’(kai. ei=pen o` qeo,j).

21  ) 이것은 이미 히브리어 성경에서 발생했다. 시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hwhy rbdB, ‘비드마르 아 도나이’; tw/| lo,gw| tou/ kuri,ou, ‘토 로고 투 퀴리우’)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를 보라.

22  ) “그”는 ‘후토스’(ou-toj)로 문자 그대로 “이 사람”이지만, ‘로고스’(lo,goj)가 남성 명사이기 때 문에 어쨌든 불가피하다. 멀로니(35)는 예수에 대한 복음서 내러티브를 내다보고 ‘후토스’ 를 “이 사람”으로 번역할 가능성을 고려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요한이 공식적으로 최초의 “사 람”(a;nqrwpoj, ‘안드로포스’)으로 소개된다는 것은 그런 가능성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로고스’ 의 남성이 ‘후토스’의 성을 완벽할 정도로 적절하게 설명해 준다. 23  ) 하나님이 말하는 것에서 아들이 말하는 것으로 전환을 이루는 다른 방법에 대해서는 히 1:1-2,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lalh,saj, ‘랄레사스’)

요한복음 84

I. 전문: 빛(1:1-5)

3-4절 말씀이 소개되자마자 “이었다”는 창세기 이야기의 70인역에서 두 드러진 동사인 “왔다” 또는 “존재하게 되었다”( ‘에게네토’; 개역개정, “되니라” ) 로 바뀐다.24  ) 신적 존재가 신적 행위로 넘어가면서 세계 창조가 시작된다. 바 로 이 동사를 복음서 기자가 창조 ( 3, 10절 ) 뿐 아니라, 세례 요한이 “하나님께 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 6절 ) 으로 등장하는 것에 대해, 말씀이 친히 예 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온 것에 대해 ( 14절 ),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은 혜와 진리”( 17절 ) 에 대해 사용했다. 창조에 대해 수사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같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처음에는 긍정으로 다음에는 부정으로 말한다. “만물”이 말씀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가 없이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25  ) 여기서 “그를 통하여”와 “그가 없이”, “만물”과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강한 대조가 소개되는 것을 제외하고, 3절의 구조는 1절의 구조와 비슷한데, 1절에서 반복되는 “말씀, 말씀, 하나님, 하나님, 말 씀”은 ( 때로 “계단식 평행”으로 알려진 ) 비슷한 연쇄 형태로 사상을 진전시킨다. 이 절의 전형적인 문제는 외견상 불필요한 구절 “존재하게 된 것”( ‘호 게고 넨’; 개역개정, “지은 것” ) 때문에 균형이 무너진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번역은 이 불필요한 어구의 의미를 아주 충실히 전해 준다. “만물이 그를 통해서 만들 어졌다. 만들어진 것은 어떤 것도 그가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RSV ), “그 를 통하여 만물이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것은 그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다”( NIV ). 그러나 모든 번역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번역은 이 와 달리 고대의 선례를 따라 이 구절을 3절의 아쉬운 마무리로 보지 않고 4절의 시작으로 읽는다. 예를 들어, “만물이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그가 없이는 하나도 존재하게 되지 않았다. 그의 안에서 존재하게 된 것은 생명이었다. 그 생명은 모든 사람의 빛이었다”( NRSV ). “그를 통해 만물이 있 게 되었다. 단 하나도 그가 없이는 창조되지 않았다. 있게 된 모든 것은 그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evla,lhsen, ‘엘랄레센’)” 를 보라. 24  ) 창 1:3, 5, 8, 9, 11, 13, 15, 19, 20, 23, 24, 30절에 나오는 ‘카이 에게네토’(kai. evge,neto, yhyw, ‘바 예히’)의 반복에 주목하라.

25  ) 두 번째 절의 처음 두 요소(‘코리스 아우투’[cwri.j auvtou/]와 ‘에게네토’[evge,neto])는 첫 번째 절 의 마지막 두 요소(‘디 아우투’[di vauvtou/]와 ‘에게네토’)에 상응한다. 사슬처럼 대비되는 평행은 ‘판타’(pa,nta, “모든 것”)와 ‘우데 헨’(ouvde. e[n, “하나도……하지 않다”)의 더 날카로운 대비로 형 성된다. 헬라어 어순은 구조의 대칭을 보여 준다. pa,nta, ‘판타’ / diV auvtou/, ‘디 아우투’ / evge,neto, ‘에게네토’/ kai. cwri.j auvtou/, ‘카이 코리스 아우투’ / evge,neto, ‘에게네토’ / ouvde. e[n, ‘우데 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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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명으로 살아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NEB ). 26  ) 이런 식 으로 절을 나눈 것은 쿠르트 알란트 ( Kurt Aland ) 가 지지한다. 알란트는 이미 30년 전에 고대 역본과 교부 인용문을 가지고 이미 2세기와 3세기 초에 이 독법이 거의 보편적으로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27  ) 알란트의 독법이 옳은가?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28  ) 지금은 그렇다 고 확신하지 못하겠다. 이것은 브루스 메츠거가 연합성서공회 ( United Bible

Societies ) 판 『헬라어 신약 성경』 ( Greek New Testament, 이하 UBS ) 을 편집한 위원회 와 의견을 달리했던 드문 사례다. UBS 편집 위원회는 알란트의 주장에 맞 게 ‘호 게고넨’을 4절에 포함시켜 읽었지만, 메츠거는 자신의 책 『본문 주 석』 ( Textual Commentary ) 안에 자신의 소수의견을 정리하면서, 이 관계사절이 3절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29  ) 메츠거가 알아차린 기괴함은 NRSV에서 드 러난다. “그의 안에서 존재하게 된 것은 생명이었다. 그 생명은 모든 백성 의 빛이었다.” 여기서 완벽하게 정확히 번역한 “존재했던 것”에는 “생명 이다”가 필요해 보인다.30  ) 실제로 현재 시제인 “이다”( ‘에스틴’ ) 가 4절에 몇 몇 고대 사본과 역본에 이독으로 나온다.31  ) 그러나 메츠거는 이번에는 UBS

26  ) 4절의 비슷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창조된 모든 것은 그로부터 자기 생명을 받았다. 그의 생명은 각 사람에게 빛을 주었다”(CEV). “그를 통해 있게 된 것은 생명이었다. 이 생명은 인간의 빛이 었다”(NAB).

27  ) K. Aland, “Eine Untersuchung zu Joh 1:3-4: Über die Bedeutung eines Punktes,” ZNW 59 (1968), 174-209. 비슷한 견해에 대한 최근의 변론으로 E. L. Miller, Salvation-History in the Prologue of John: The Significance of John 1:3/4 (Leiden: Brill, 1989)를 보라. 예를 들어, 이것은 오리게네스(Origen)의 독법이었는데, 오리게네스는 이독을 전혀 알지 못한 것으로 보 인다(예를 들어, 그의 다음 주석을 보라. CommentaryonJohn 2.112-32 [FC 80.124-29]).

28  ) J. R. Michaels, John, NIBC 4 (Peabody, MA: Hendrickson, 1989), 25.

29  ) A Textual Commentary on the Greek New Testament (London/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1), 195-96. 메츠거는 “요한이 문장을 ‘엔’(evn)과 지시 대명사로 시작하기를 좋아 한다는 점”(비교, 13:35; 15:8; 16:26; 요일 2:3, 4, 5; 3:10, 16, 19, 24; 4:2 등)에 호소하면서 다 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호 게고넨’(o` ge,gonen) 다음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이 단락의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요한의 교리뿐만 아니라(비교, 5:26, 39; 6:53), 요한의 반복 문체와도 더 일치한다”(196). 메츠거의 가장 강력한 요지는 “‘호 게고넨’(o` ge,gonen)을 뒤에 오는 4절과 함께 취함으로써 의미를 끌어내고자 하는 주석가들의 단호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단락은 참 을 수 없을 정도로 조잡하고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 이 절을 ‘엔 아우토 조에 엔’(evn auvtw/| zwh. h=n)과 연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려움 중 하나는 ‘게고넨’(ge,gonen)의 완료 시제가 ‘엔’(h=n)대신 에 ‘에스틴’(evstin)을 요구하리라는 것이다(196, 각주 2). 30  ) 대안은 미완료 ‘엔’(h=n, “……이었다”)을 한정사로 만들어서 ‘호 게고넨’(o` ge,gonen)을 대과거로 읽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의 안에서 존재했던 것은 생명이었다.” 이것은 개선된 것일 수 있지만, 여전히 기괴하다.

31  ) 이것들에는 ¥과 D 외에 옛 라틴어 사본, 다른 여러 고대 역본, 교부의 인용이 포함된다. 증거에 대해서는 The Greek New Testament (4th rev. ed.; Stuttgart: United Bible Societies, 1993), 312를 보라.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는 이 독법에 대해 알고 있으며, 이것을 “아마도 신빙성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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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위원회와 의견을 같이해서, “어려움을 덜기 위해……동사 시제가 미 완료에서 현재로 바뀌었다”라고 주석한다.32  ) 피터 코히 ( Peter Cohee ) 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불필요해 보이는 이 구절은 원문이 아니며 “주해로 본문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라고 주장 한다.33  ) 설혹 ‘호 게고넨’이 주해라 하더라도, 같은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호 게고넨’이 3절의 끝에 추가된 것인가? 아니면 4절의 시작에 추가되었 는가? 우리가 코히의 결론에 동의하든 안 하든, 코히의 답변은 유익하다. ‘호 게고넨’이 3절에 대한 주해라면, 코히는 “3절의 절대적 진술이 필멸의 피조 영역에 적용되지만 ( 최소한 하나의 ) 창조되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추론한다.34  ) 사실상 코히는 이 주 석을 필사자에게 귀속시키는데, 요한복음 1장 3-4절에 대한 이 필사자의 해석은 정확히 프톨레마이오스의 해석과 일치했다. 이레네우스는 프톨레마 이오스가 “‘만물’이 그것을 ‘통해’( ‘디 아우투’ ) 존재하게 되었지만, 생명이 그 것 ‘안에’( ‘엔 아우토’ ) 있었다. 그러므로 생명은 그것 안에 존재하게 됨으로써, 그것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 것들보다, 그것 안에 더 가까이 있다”35  ) 라고 주 장하는 것으로 인용한다. “존재하게 된 것”이란 구절을 주해로 보고 제외하 기를 지지하는 본문상의 증거도 전혀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위험 하다.36  ) 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 것 같다(CommentaryonJohn 2.132 [FC, 80.129]).

32  ) 그러므로 메츠거는 “‘헤 조에 엔 토 포스’(h` zwh. h=n to. fw//j)에 있는 두 번째 ‘엔’(h=n)이 첫 번째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근거에서 이 독법을 거부한다(TextualCommentary, 196).

33  ) “John 1.3-4,” NTS 41 (1995), 470-77. 코히는 한편으로 “요한이 ‘우데이스’(ouvdei.j), ‘우데 헨’(ouvde. e[n), ‘우덴’(ouvde,n)으로 한 구절을 끝내기를 좋아한다는 점”, 다른 한편으로 (메츠거를 인용하며) “요한이 어떤 문장이나 절을 ‘엔’(evn)과 지시 대명사로 시작하기를 좋아한다는 점”에 호소한다. 코히는 전자를 가지고 3절을 ‘호 게고넨’(o` ge,gonen)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고, 후 자를 가지고 ‘호 게고넨’을 4절과 함께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코히가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호 게고넨’(o` ge,gonen)이 후에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34  ) 코히는 ‘호 게고넨’을 4절에 대한 주해로서 “3a절의 전치사 ‘디아’와 4a절의 ‘엔’ 사이에 있는 대 조를 강조하고, 이 절들의 각 동사를 같게 하려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단순히 생 명이 말씀 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진술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만물처럼 생명 역시 창조되었지만, 다른 만물과는 달리 생명은 말씀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주석하기 위해 이 관계사절 을 추가한 것이다”(Cohee, 476).

35  ) 이 번역은 다음에서 온 것이다. Grant, Gnosticism, 182-83. 이 헬라어 본문은 Irenaeus, Against Heresies 1.8.5 (Harvey, 1.75-76)에 나온다. 코히는 이 본문을 인용하지만(474), 프톨레마이오 스는 언급하지 않으며, 이것이 이레네우스의 해석을 나타낸다는 함의인 것으로 보인다.

36  ) ‘호 게고넨’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인정해서 일부 비잔틴 사본에서 문제가 되는 ‘호 게고넨’ 절 의 양쪽에 점이 있다는 코히의 호소(476)는 설득력이 없다. 특히, 여기에 “이독이 전혀 없고,” “서로 다른 편집적 선택을 가리키는 다양한 구두점을 지닌 한 가지 독법만”(470)이 있다는 것을 코히 자신이 인정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없다. 기껏해야 후대 사본에 나오는 점은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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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전문: 빛(1:1-5)

이 관계사절이 주해가 아니라 원 텍스트에 속했다면, “창조되지 않은 것 들이 ( 적어도 하나가 ) 있었다”라는 견해에 대한 코히의 언급은 추가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것이 후대 필사자의 견해일 수 있듯이 복음서 기자 자신의 견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복음서 기자가 “만물이 그를 통해 존 재하게 되었으며”, “그가 없이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쓰자마자, 복음서 기자의 머릿속에는 어떤 것은 존재하게 된 것이 전혀 아니라,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다.37  ) 이렇게 언제나 존재해 온 것 중에 이 시작 절에서 당면한 관심거리 두 가지, 즉 영원한 “생명”과 사람들 의 “빛”이 있다. 다른 예로는 하나님의 지혜, 진리,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것들은 하나님 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존재한다.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 는 “존재하게 된 것”이란 표현을 한정 어구로 추가해야 했다. “만물이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가 없이는 존재하게 된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강조는 나의 것 ). 38  ) 만물이 다 창조된 것은 아니지만, 창조된 모든 것 은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 여기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생각대로 말씀을 통해 창조된 것과 말씀 안에서 창조된 것 사이에 대조를 두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통해 존재하게 된 것과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었던 것 사이에 대조가 있다. 후자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말씀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 속성 중 첫 번째가 “생명”, 아마도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 창 1장에 따르면 육체적 생명은 창조되었다 ), 영적 생명, 즉 요한복음이 다른 곳에서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국, “영원한”의 한 가지 정의는 끝이나 시작이 없는 것 이다. 여기서 복음서 기자는 “생명”에서 재빨리 빛의 주제로 넘어가는데, 이 주제는 이어지는 절에서 더욱 상세히 전개될 것이지만, 요한1서에서는 “생명”이 처음부터 중심 무대를 차지했다. 거기에서 “생명의 말씀 ( 또는 메시 지 ) ” ( 요일 1:1 ) 을 언급한 후, 기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 생명이 나타내 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 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요일 일찍부터 해석가들이 이 절들을 다르게 구분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37  ) ‘판타’(pa,nta)를 다소 비슷하게 한정한 경우로 고전 15:27을 보라. 이곳에서 바울은 시 8:6인 “만 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바로 그다음에 “만물”에는 그것을 복종케 하 는 이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덧붙인다. 38  ) 적어도 최근의 한 역본은 이런 전통적인 절 구분으로 돌아섰다. REB는 NEB에서 멀어지면서 다 음과 같이 번역했다. “그를 통해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가 없이는 어떤 창조물도 존재하게 되지 않았다. 그의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인류의 빛이었다.”

요한복음 88

1:2 ). 39  ) 분명, “생명”은 창조된 어떤 것이 아니라, 말씀처럼 처음부터 하나님 과 함께 있었다. 요한1서의 끝에 이르러 기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 린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 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1-12 ). 요한복음은 첫 주요 단원의 끝에서 똑같은 것을 지적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생을 얻지만,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을 보지 못할 것이 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 요 3:36 ). 여기 4절에서 “생명”과 “빛”은 같은 표현으로 구원을 말한다. 당분간 빛이 주목을 받 는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라고 진술 할 때,40  ) 복음서 기자는 자기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생명”에 대한 잠재적 정 의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구원은 계시나 지식으로 정의되는 데, “빛”은 계시나 지식의 어떤 부분을 나타내는 매우 적절한 상징이다. 우 리는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마지막 기도에서조차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 라는 말씀을 읽게 될 것이다. 이 복음서 안에 있는 생명은 빛, 즉 “사람 들의 빛”이다. 다시 한번, 물리적 빛을 의미하지 않는데, 창세기에서 물리적 빛은 모든 창조물 중 제일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 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창 1:3 ). 41  ) 이와 달리, 우리의 본문에서, “사람들의 빛”은 창조된 어떤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의 핵심이며, 그러므로 영원 하다.42  ) 요한복음에서 “빛”은 거의 언제나 은유다.43  )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이

39  ) 요한복음이 말씀에 대해 말하는 반면, 요한1서는 생명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씀이 “하 나님과 함께”(pro.j to.n qeo,n, ‘프로스 톤 데온’, 요 1:1) 있었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 와 함께”(pro.j to.n pate,ra, ‘프로스 톤 파테라’) 있었다. 그 결과, 요한복음 영역 성경에서 “말씀” 을 대문자로 표기하는 반면, “생명”은 소문자로 남겨 두고, 요한1서에서 “생명”은 대문자로 표기 하는 반면, “말씀”은 소문자로 남겨 두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40  ) “생명”(zwh,, ‘조에’)이 4절에 처음 나타나는데, 정관사 없이 나온다. 하지만 두 번째 나올 때는 정 관사가 있다(h` zwh,, ‘헤 조에’). 이것은 “저 생명”(방금 언급된 생명)이란 번역을 시사한다.

41  ) 70인역에서, 문자적으로, “그리고 빛이 있게 되었다(kai. evge,neto fw/j, ‘카이 에게네토 포스’).” 창세기에서, 빛은 “있게 된” 것 중에 속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빛이 단순히 “있었던”(h=n, ‘엔’) 것 중에 속한다. 42  ) 바울은 조금 다르게 물리적 빛에서 영적인 빛으로 전환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 던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추셨 느니라”(고후 4:6). 43  ) 빛이 은유가 아니라, 물리적 빛을 가리킬 때, 저자는 그러한 취지의 한정 어구를 추가한다(즉, “이 세상의 빛”,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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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전문: 빛(1:1-5)

은유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창조의 나머지와 구별해 주는 지성적이거나 감정적인 빛이나 더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세상의 그 빛”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다 ( 8:12를 보라 ). 이 질문은 아마도 1장 9절 ( “그 빛은 세 상에 오는 각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이었다” ) 과 3장 19절 ( “이것이 심판이다. 곧 빛이 세상에 왔으 나, 그들의 일들이 악하기 때문에 그들이 빛이 아니라 어둠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 을 고려한 후에 야 확실하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9절은 4절에 대한 일반적이거나 보편적 인 이해를 가리키며, 3장 19절은 더 구속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의 앞에서 빛에 대하여 어떤 구체적인 “옴”을 말하는 것이 전혀 없으므로, “사람들의 빛”이란 문구에는 적용 가능성을 가장 넓게 열어 두는 것이 현명하다. “사람들의 빛”은 출생 시에 모든 인간이 받는 사 랑과 지성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나님에 게서”( 1:13 ) 또는 “그 영으로”( 3:6 ) 또는 “위로부터”( 3:3 ) 라는 또 다른 출생에 대한 요한의 강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4절의 증언은 물리적 출생 역시 하나 님에게서 오는 “빛”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증명의 부담은 달리 주장 하는 이들에게 놓인다. 5절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에서 현재로 바뀐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다”( ‘파이네이’ ). 태초를 보고, 어떻게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3절 ) 를 본 후, 복음서 기자는 자기 시대와 자기 세계로 돌아간다. 주목할 만한 것은 복 음서 기자가 침묵으로 “성경의” 기간 전체 (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고 부르는 것 ) 를 건너뛴다는 것이다. 일부 현대 해석가는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았고, 그래서 1-5절이든44  ) 6-13절이든45  ) 아니면 둘 다든 창세기 1장 외에 구약에 대한 암시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암시 추정은 설득력이 없다. 이 책은 구속 역사에 대한 개관이 아니라 복음서다. 말씀을 위해 창조 된 모든 질서 ( 오로지 암시적일 뿐이지만 암시적으로 성경의 과거 역사 전체 ) 에 대하여 간략 하고 단호하게 주장한 다음 기자는 계속해서 복음 이야기, 즉 예수에 대한 좋은 소식을 말한다. 우리는 독자라서 긴장이 없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행 44  ) 브라운(1.27)은 4절을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연결시키며, 5절을 타락과 관련하여 빛과 어둠 사 이의 싸움과 연결시킨다. 45  ) 찰스 도드(Interpretation, 270-71)는 4, 9-10절에서는 토라가 이스라엘 역사 내내 세상에 있 었다는 개념을, 11절에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임 했으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거절했다”라는 주장을, 12-13절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친 히 나중에 요 10:35절에서 인용하는 시 82[81]:6뿐만 아니라, 출 4:22; 신 14:1; 호 1:10을 인용 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일부 사람들에게 “아들들”의 지위를 주었다는 암시를 발견한다. 이 것은 본문의 증거를 크게 넘어 행간을 읽는 것이다.

요한복음 90

복한 결말로 끝나게 될 것임을 바로 알아차린다. 우리는 “빛이 어둠에 비치 고 있다”라는 말을 듣는다. 계속해서 비친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지 금 비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무언가가 일어났기 때 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듣지 못한다. 신약의 나머지에 친숙한 그 리스도인 독자는 이미 알고 있으며, 아마도 복음서의 원독자도 알았을 것 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시적으로 듣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둠”은 빛을 “덮치지”( ‘카텔라벤’; “깨닫지” ) 못했다.46  ) 이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어둠”( ‘스코티아’ ) 에 대해 듣는 것이며, 복음서 기 자는 “만물”이 말씀을 통해서 창조되거나 말씀 안에 존재했다면, 어둠은 어 디서 왔는지 묻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일을 멈추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요 한복음 전반의 관점은 “어둠”이 “세계”( ‘호 코스모스’ ) 와 같다는 것을 시사하 며,47  ) 복음서 기자는 10절에서 “세상이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라는 것을 분명히 할 것이다. “만물”이 “세상”을 포함한다면, 만물에 “어둠” 역 시 포함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마도 공정할 것이다. 어떤 역자들은 ( 아마도 어둠과 세상 사이의 유비를 염두에 두고서 ) ‘카텔라벤’ 동사를 10절 ( “세상이 그를 알지 못 했다” ) 을 예상하면서 “알다”나 “이해하다”로 번역했다.48  ) 다른 이들은 나처 럼 동사 “덮치다” 또는 “이기다”로 번역함으로써 갈등 개념을 강조한다.49  ) 또 다른 이들은 한편으로 깨달음 개념과 다른 한편으로 대결 개념을 결합 함으로써 “습득하다”, “파악하다”, “통달하다” 같은 대안을 제안했다.50  ) 이 동사는 아마도 어둠의 이미지에 속한 것으로 “덮치다”로 읽어야 할 것이다. 밤이 위험을 가져오는 곳에 너무 오래 머무는 이들을 “덮치면서”, 밤이라는 물리적 어둠이 재빨리 임하게 된다. 똑같은 것이 무지와 불신앙의 영적 어 둠에도 적용된다.51  )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말하게 될 이야기, 즉 결국에 나 46  ) 여기서 요지는 요일 2:8의 요지와 거의 같은데, 요일 2:8에서 독자들이 들었던 옛 계명은 “어둠이 지나고 있으며, 참 빛이 벌써(h;dh, ‘에데’) 비치고 있기 때문에” 새 계명이라고도 불린다.

47  ) 요일 2:8(“어둠이 지나가고”)을 2:17(“이 세상도……지나가되”)과 비교함으로써 이것을 알 수 있다.

48  ) NIV와 같다. “그러나 어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교, 예컨대 Schnackenburg, 1.246-47; Bultmann, 47-48; Beasley-Murray, 11.

49  ) 같은 입장으로 RSV, NRSV, NEB. 비교, Westcott, 5; Morris, 75-76.

50  ) REB와 같다. “그리고 어둠이 결코 그것을 통달하지 못했다.” 배럿(158)에 따르면, “어둠은 빛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빛을 끄지도 못했다.” 비교, Hoskyns, 143.

51  ) 이것은 요 6:17의 어떤 헬라어 사본들(¥과 D)의 독해에서 예증된다. “그들이 배를 타고서 호수 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 중이었지만, 어둠이 그들을 덮쳤으며(kate,laben, ‘카텔라벤’),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않았다.” 비슷한 이미지지만, 물리적 어둠보다 영적 어둠을 고려하는 것에 대 해서는 12:35를 보라.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이 너

I. 전문: 빛(1:1-5) 91

중에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복음”, 즉 좋은 소식으로 전해진 이야기 안 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처음에 빛과 어둠 사이의 대결이 단번에 영 원히 일어났고, 빛이 승리자로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하다. 빛은 계속 어둠 속을 비춘다. 이제 복음서 기자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계속해 서 말할 것이다.

희를 덮치지(katala,bh|, ‘카탈라베’) 못하게 하라.”

요한복음 92

요한의 증언(1:6-3:36)

전문 다음에 복음서의 첫 세 장은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다양한 증언 으로 그 틀이 형성된다 ( 1:6-8, 15-16, 19-36; 3:22-36 ). 요한의 지속적 등장은 이 장들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처음에는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지배하고, 그다음에 예수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하면서 ( 3:11-21 ), 요한은 독자에 게 작별을 고하고 ( 3:30 ), 예수의 증언을 확증하는 가운데 중심 무대를 “위로 부터 오시는 이”( 3:31-36 ) 에게 양보한다.

세상에 계셨으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

A. 요한과 빛(1:6-13) 1  ) 또는 “그 빛은 세상에 들어와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된 [빛]이었다.”

6 A man came, sent from God. John was his name. 7 He came for a testimony, to testify about the light, that they all might believe through him. 8 He was not the light, but [he came] to testify about the light. 9 The light was the true [Light] that illumines every human being who comes into the world. 10 He was in the world, and the world came into being through him, and the world did not know him. 11 He

93
II
하고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 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 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 10 그가

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

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

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

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came to what was his own, and his own did not receive him. 12 But to as many as did receive him he gave authority to become children of God, to those who believe in his name, 13 who were born not of blood lines, nor of fleshly desire, nor a husband’s desire, but of God.

마가복음 내러티브처럼 ( 1:4 ), 요한의 내러티브도 세례 요한, 또는 단순히 “요한”( 6절 ) 으로 알려진 세례자와 함께 시작한다.2  ) 이미 보았듯이 복음서의 가장 초기 사본 중에 있는 “요한에 따른”3  ) 이라는 표제에 곧이어 “요한”4  ) 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 때문에 일부 독자는 이 세례 요한이 복음서의 저 자거나 주요 인물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며, 실제로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적어도 복음서의 처음 세 장에서는 주요 목소리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정 도다. 요한의 세례 사역은 처음에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 25절에 가서야 언급된다 ), 그 대신에 요한은 “증언을 위해서, 곧 그들 모두가 그를 통해 믿도록 빛 ( 즉, 4, 5절에서 언급된 그 ‘빛’ ) 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서 온”( 7절 ) 자로 확인된다. 그러 나 거의 즉시, 이야기가 요한을 다루게 될 것이라는 추정을 모면하려는 듯 내러티브가 중단되고, 내레이터는 잠시 멈춘 채 요한이 빛이 아님을 설명하 고 나서 ( 8절 ), 그다음에 이 빛의 정체 ( 9절 ) 와 이 빛이 사람이 되어 ( “그것”이 아 니라 “그”로서 ) 세상에 온 것에 대해 고찰한다. 그리스도인 독자는 이 빛이 예 수라는 것을 알 것이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그”는 여전히 익명 상태다. 우 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요한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창조한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라는 것과 “그의 소유가 영접하지 아니 하였다”라는 것,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그를 영접했으며,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린다는 것을 안다. 요한과 “빛”에 대한 요한의 명시적 인 증언은 나중에 나올 것이다 ( 15-16, 19-34절; 3:27-36을 보라 ). 간단히 말해서, 복

2  ) 요한복음에서는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bapti,jwn, ‘밥티존’) 있다고 한다(1:28; 3:23). 하지만 오 직 예수만이 사실상 “그 세례자”(o` bapti,jwn, ‘호 밥티존’1:33)로 불리며, 게다가 물세례가 아닌 성령세례와 관련 있다.

3  ) kata. VIwa,nnhn, ‘카타 이오안넨.’

4  ) “요한”(문자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한 이름 요한”)이란 이름에 대한 강조는 이상하게도 누가복 음에 있는 출생 내러티브를 상기시킨다(눅 1:13, “그리고 너는 그 이름을 요한이라 부를 것이라”; 1:60, “아니라 그는 요한이라 불릴 것이라”; 1:63,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를 보라).

요한복음 94

II. 요한의 증언(1:6-3:36)

A. 요한과 빛(1:6-13)

음서 기자가 요한의 증언이 함의하는 것을 상술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고, 그 과정에서 몇 마디 말로 복음서 전체를 요약함에 따라서 ( 10-13절을 보라 ), 전 문 ( 1-5절 ) 이 내러티브를 방해한다. 6절 “요한”이 세상에 온 것은 창조와 함께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의 지속 을 나타낸다. 만물이 말씀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듯”( 3절 ), 요한은 “하나 님에게 보내심을 받은” 자로 “왔다.”5  ) 아마도 저자의 입장에서는 의도적이 겠지만, 이 용어는 오해를 일으킨다. 요한이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았다 면”, 요한은 하나님의 사자거나 일종의 천사인가? “사람” 또는 “인간”( ‘안드 로포스’ ) 이란 용어의 사용은 이런 가능성을 배제하지만, 전체 이야기에 친숙 한 독자들은 예수도 “사람”이었다는 것과 자신 ( 8:40 ) 과 다른 이들 ( 예, 1:30; 4:29; 9:11, 16; 19:5를 보라 ) 에 의해 사람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 한은 예수가 보냄을 받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냄을 받았는가” 저자는 마치 요한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나 집단을 아는 것처럼 글을 쓰며, 자기 독자들이 잠시라도 그런 가능성을 직면하기를 원한다.6  ) 그러나 저자는 재빨리 요한이 오직 “증언을 위해서, 빛에 대해 증언하기 위해”( 7절 ) 보냄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후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을 예수와 비교하기 시작할 때, 요한은 “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 3:28 ) 라고 주장할 것이다. 요한은 순전히 인간적 사명, 즉 자신보다 더 큰 분에 대해 증언하는 사명을 지닌 인간 대표로서7  ) “하나님에게 보냄을 받았다.” 7-8절 전문과 내러티브의 시작은 문체 및 내용 모두 연결되어 있다. 문체 상으로 7-8절은 1-5절에서 명백히 나타나는 동일한 순서의 반복이나 “계 단식 평행”을 드러낸다. “증언, 증언하다, 빛, 빛, 증언하다, 빛”의 반복은 1절에 있는 “말씀, 말씀, 하나님, 하나님, 말씀”이나 4-5절에 있는 “생명, 생명, 빛, 빛, 어둠, 어둠”의 반복을 상기시킨다. 소위 프롤로그의 배후에 있 는 송가적 원천을 옹호하는 이들이 1-5절을 대개 시로 간주하고, 6-8절을 산문 가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두 단락 사이 5  ) “존재하게 되었다”와 “왔다”는 헬라어로 둘 다 ‘에게네토’(evge,neto)다. 6  ) BDAG(756)에 따르면, “세례 요한은 예수처럼 하나님 앞에서 보냄을 받지 않았고, 요한이 오게 된 것은 하나님에 의해 생긴 일이었다.”

7  ) 요한이 “보내어졌을”(avpestalme,noj, ‘아페스탈메노스’)지라도, 요한의 사명은 하늘에서 오는 예수 의 사명보다는 아마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권력자들이 예수에게 보낸 대표단의 사명과 비슷할 것이다(1:19, 24; 24절의 분사 ‘아페스탈메노이’[avpestalme,noi]에 주목하라). 요한의 사명과 예수 의 사명의 구별은 3:31-36에서 더욱 상세히 탐구할 것이다.

95

의 유사성이 주목할 만하다. 내용과 관련해서, 여기에 소개된 새로운 요소 는 “증언”( ‘마르튀리아’ ) 이다. 요한의 세례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요 한은 오직 “증언하기 위해”( 7, 8절 ) 왔으며, 요한의 증언은 4-5절에서 언급된 “빛”과 관련되어 있다. 후에 우리는 요한이 사실, 다른 복음서처럼,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1:25-26, 33; 3:23 ). 하지만 세례는 요한의 진 정한 사명에 부수적인데, 요한의 진정한 사명은 모든 백성, 특히 자기 제자 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드는 7-8절에서 앞으로 요한에 대해 기술될 내용이 상당 부분 예측되 는 것을 발견한다. 요한이 “증언하러……빛에 대해 증언하려 함이라”( 7a 절 ) 라는 진술은 1장 19-34절에 있는 요한의 기록된 증언을 예측하는 반면,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해서 믿게 하려 함이라”( 7b절 ) 라는 목적은 1장 3537절에서 실현된다. 요한의 증언에서 요한 자신은 “빛이 아니요”( 8a절 ) 라는 사고는 1장 19-28절의 주제를 제공하는데, 이곳에서 강조는 주로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 즉,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다, 20-21절 ). “빛에 대해 증언하는 것”( 8b절 ) 의 긍정적 측면은 1장 29-34절에서 표현되는데, 이곳에 서 요한은 마침내 예수를 보며,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 29절 ), “하나님의 아들”( 34절 ) 이라고 말한다.8  ) 여기서 도드가 우리에게 저자의 실제 계획적인 의도를 제시하는지, 아니면 단순히 유용한 교육 기재를 제시하는지는 불확 실하다. 그러나 도드의 통찰은 ( 아마도 우연히 ) 자기 이름을 가진 복음서에 나 타난 세례 요한의 설명 속에 나오는 “증언”, 즉 ‘마르튀리아’가 중심임을 강 조한다. 요한의 증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해서 믿게 하려는” 것이다. “그 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다”( ‘피스튜에인’ ) 라는 동사가 여기에 처음 나오며,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또는 누구를 믿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한다. 합리적 추론은 그들이 “빛을” 믿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의 처음 열두 장에 구체적인 균형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공적 사역 마지막에 이르러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무리에게 했던 마지막 말씀은 “아직 잠시 동 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 이 되리라”( 12:35-36 ) 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요한과 예수는 8  ) Dodd, Historical Tradition, 248-249를 보라. 도드는 3:22-30과 10:41-42에서도 이 두 구절에 대 한 반영을 발견한다.

요한복음 96

II. 요한의 증언(1:6-3:36)

A. 요한과 빛(1:6-13)

복음서 기자 역시 공유한 공통 목적과 사명을 갖고 있었는데, 복음서 기자 의 목적은 “너희가 믿도록”( 19:35; 20:31 )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공유된 사명의 범위는 우주적이었다. “만물”이 말씀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듯 이 ( 3절 ), 요한은 “그들 모두” 또는 “모든 백성”이 믿도록 증언한다 ( 7절 ). 9  ) “어둠”에 대해 5절에서 지나칠 정도로 언급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불신앙 이라는 완고한 실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 사이의 전형적으로 요한다운 대조에 대한 암시는 아직 전혀 없다. 요한이 “이 빛이 아니요”( 8절 ) 라고 부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이것은 왜 이런 부정이 필요했는지에 대해 명백한 질문을 야기한다. 저자는 예수가 아니라 요한을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여기는 독자나 잠재 적 독자를 알았던 것인가? 우리는 후대에 그런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10  ) 이것은 저자가 “요한을 본래 그의 자리에 두고자” 하고,11  ) 예수, 오직 예수만을 말씀 ( 1-2, 14절 ), 참 빛 ( 4-5, 9절 ), 하나님의 독생자 ( 14, 18절 ) 로 높 임으로 그런 무리의 견해를 논박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몇 가지 암시 중에 처음 나온 것이다. 둘째, 이 부정은 내러티브를 곁길로 빠지게 함으로써, 이 내러티브가 처 음에 시작한 대로 관심의 초점을 요한과 요한의 증언에서 떠나 다시 요한이 증언한 “빛”으로, 즉 다시 전문으로 그리고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그 것을 덮치지 못한”( 5절 )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절대적 질문으로 돌 아가게 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6절에서 시작한 내러티브는 요한이 아니라 빛의 중요성에 대해 일련의 신학적 고찰을 위해 중단된다. 이런 고찰과 더 불어 전체 이야기는 복음을 아름답게 요약하고 ( 6-13절 ), 그다음에 믿음의 공 동체에서 나오는 반응을 언급한다 ( 14-18절 ). 본격적인 내러티브가 질서 잡힌 가운데 적절히 보조를 맞추고 19절에 가서야 예루살렘에서 온 제사장과 레 위인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상세히 이야기하는 것으로 재개된다. 9절 빛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나의 사역에서는 “빛”을 주어로 형 용사 “참된”을 실사적 술어로 취했다. “그 빛은 참 ( 빛 ) 이었다.” 주어가 표현 되지 않은 채 두고 명확한 선행사도 없이 둘 다 술어로 취하는 것 역시 가 9  ) 비교, 12:32. 여기서 예수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그들을 모두(pa,ntaj, ‘판타스’) 내게로 이끌 것 이다”라고 약속한다. 10  ) 3세기 Pseudo-Clementine, Recognitions 1.54에 따르면, “훌륭한 제자로 보였던 요한의 제자 중 일부가 스스로 사람들을 벗어났으며, 자기네 스승을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ANF, 8.92). 요 한은 또한 후대의 만다야 문헌에서도 주요 메시아 인물이다.

11  ) 1:19-28; 3:27-30; 5:33-36; 10:40-42를 보라.

97

능하다 ( “저것[또는 그]은 참된 빛이었다.” 이런 번역은 표현하지 않은 주어를 “말씀”으로 보는 추정에 근거해서 자주 나오지만,12  ) 4절 이후로는 말씀이 묵시적으로도 나오지 않는다.13  ) 설혹 주어가 ( “저것” 이나 “그”로서 ) 표현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지라도, 저것은 선행사가 아니라 그 술어에 의해서 요한이 8절에서 증언하는 “빛”으로 규정된다. 9절의 요지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그 빛, 즉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빛”이 어떤 “거짓 된” 또는 오도하는 빛과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빛, 예를 들어 “이 세상의” 물리적 “빛”( 11:9 ) 이나, 요한의 사역으로 방출되는 영적인 “빛”인 “켜서 비추이는 빛”( 5:35 ) 과 대조하여 “참된” 빛이라는 것이다 ( 요일 2:8을 보라 ). 요한이 증언한 그 빛은 자신의 빛이 아니라, 최고의 보편적인 “세상의 빛”( 8:12 ), “세상에 들어오는 각 사람을 비추는” 빛이었다. 처음으로, “빛”이 적절하게 대문자로 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그 참된 빛”이 인격적 존재자라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번역에서 분사형인 “오고 있는”이나 “오는 자”( ‘에르코메논’ ) 는 이것 에 바로 선행하는 어구인 “각 사람”과 함께 취하여, 불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관용 표현인 “세상에 오는 각 사람”이 된다 ( 비교, KJV ). 이 문구는 관용적인데, 왜냐하면 “세상에 오는 각 사람”이란 표현은 랍비 문헌에서 “모든 사람”을 나타내는데 흔히 쓰는 표현이기 때문이다.14  ) 하지만 이 표 현은 랍비 고유의 표현이 아니라 불필요한 표현이다. 랍비식 표현의 경우 “사람”이나 “인간”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15  ) 불필요한 단어는 단순히 “사람들의 빛”( 4절 ) 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고, 이 “사람들의 빛”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으로 규정된다.

12  ) 예, Bultmann, 52; Schnackenburg, 1.253.

13  ) “4절에서 ‘포스’(fw/j)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며, ‘로고스’가 아니라 ‘포스’가 형식적으로 9-12절에 서 나오는 전치사들의 주어다”라는 도드(Interpretation, 268)의 주장이 옳다.

14  ) 빈번하게 인용된 한 가지 평행이 Leviticus Rabbah 31.6(“당신께서는 지상의 존재들과 세상으 로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뿐만 아니라 천상적 존재에게도 빛을 주시나이다”) 안에 있다(Midrash Rabbah: Leviticus [London: Soncino, 1961], 401). 일반적으로 ‘콜 바에 하올람’(~l[h yab lk) 이란 표현에 대해서는 Strack-Billerbeck, 2.358을 보라. 15  ) 그렇지만 레온 모리스(83)가 말하듯이, “어떤 주장도 ‘안드로폰’(a;nqrwpon)의 출현에 기초해 서는 안 된다. 요한은 ‘안드로폰’을 불필요할 정도로 매우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다”(모리스는 2:10과 3:1, 27을 인용한다. 다른 예로는 다음이 있다, 5:5; 7:46; 8:40; 9:16; 11:50). 루돌프 불 트만(52)이 요한 본문에서 ‘안드로폰’을 “(번역자의) 설명적 주해”로 보고 잘라 내는 것은 “인 위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Schnackenburg, 1.255), 누가 추가한 설명적 주해인지의 문제를 야 기한다. 불트만에게 (요한 이전 송가 원자료의) “번역자”는 다름 아닌 복음서 저자다. 그러나 저 자가 그것을 썼다면, 왜 이것이 주해로 평가되어 제거되어야 하는가?

요한복음 98

II. 요한의 증언(1:6-3:36)

A. 요한과 빛(1:6-13)

현대 번역가들은 이 표현이 불필요한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만 아니라, 이 런 해석에 근거할 때 빛이 세상에 오는 것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할 여 지가 전혀 남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부분의 주석가나 현대 영어 번역자가 채택한 대안은 그 분사적 표현을 “각 사람”이 아니라 “빛”에 연결해서 읽는 것이다. 예를 들어, REB를 보라. “각 사람에게 빛을 주는 참된 빛이 그때까지도 세상에 오고 있었다”( RSV, NRSV, NIV, NEB를 보라 ) 그러나 이런 번역에는 어려움이 있다. 동사 “있었다”가 처음 열세 절에 나 온 일곱 용례처럼 그 자체로 쓰이는 대신에, 분사 “오는” 곁에서 조동사로 쓰이게 되어 우회적인 표현 ( “오고……있었다” ) 을 만들게 되는데, 이는 요한다운 문체는 아니다.16  ) 더욱이 우회적 표현은 빛이 세상에 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 기껏해야 하나의 과정이라는 인상 을 준다.17  ) 헬라어 원문에는 없지만 REB 번역에서 추가된 “그때까지도”라 는 표현은 실제 역사 속에서, 즉 6-8절에서 기술된 요한의 사역 안에서 이 과정에 배경을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가 빛을 예수 로 생각한다면, 빛의 도래는 요한의 사역 동안 지속되고 있는 과정이 아 니라, 단순한 사건, 즉 예수의 출생이다. 예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답하면 서 직접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내가 왕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위 해 태어났으며 , 이것을 위해, 곧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나는 세상에 왔다 ) ” ( 18:37, 강조는 나의 것 ). “태어나는 것”과 “세상에 오는 것”이 동일한 표현 이라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빛”이 인간 존재자라면, 그때 빛은 다른 인 간처럼, 어떤 종류의 지속적인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 출생으로 “세상에 온다.” 특히 요한의 사역 동안에는 아니다. 또 다른 대안은 “세상에 오는”을 일종의 뒤늦은 생각이나,18  ) “빛”을 수식 하는 괄호 속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상, 콤마가 ( 네스틀레판 헬라어 본문처럼 ) “각 사람”과 “세상에 오는” 사이에 놓여 있다. 이것 역시, 위에서 언급한 우 회적 표현처럼, 하나의 과정으로 읽을 수 있거나,19  ) 단순히 빛을 특징짓는 16  ) 요한복음에 우회적 표현도 있긴 하지만(1:28; 2:6; 3:23; 10:40; 11:1; 13:23; 18:18, 25), 그중 어느 것도 본문처럼 분사가 관계사절로 인해 조동사와 분리된 경우는 없다(Schnackenburg, 1.254를 보라; 슈나켄부르크는 여기에 있는 우회적 표현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관계 사절의 삽입으로 독특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17  ) 요한복음의 다른 두 곳에서 빛이 “세상에 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이 오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성취된 사건이다(‘엘렐뤼덴’[evlh,luqen, 3:19]에서 “빛이 세상에 와 있다”; ‘엘렐뤼다’ [evlh,luqa, 12:46]에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와 있다.”

18  ) Schnackenburg, 1.255.

19  ) 예, 에드윈 애벗(Edwin Abbott): “(처음부터) 빛이, 참(빛)이 있었으며, 그 빛은 세상에 (계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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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서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NASB의 “참된 빛이 있으니 이는 세상 에 와서 각 사람을 계몽한다”나, TEN의 “이것은 진정한 빛이었다. 이 빛은 세상에 와서 온 인류를 비춘다”가 그렇다. ( 예수를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인 ) “하나 님의 그 떡”이나 “생명의 그 떡”이 “하늘에서 오는” 떡이듯이 ( 6:33, 50 ), 이 빛은 “세상으로 오는” 종류의 빛이다. 예수가 하늘에서 오면서 “세상에 생 명을 주듯이”( 6:33 ), 이 빛은 세상에 오면서 “각 사람을 비춘다.”20  ) 이 견해는 첫 번째 대안의 어려움을 피한다. 그래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세상에 오는”이란 표현이 여전히 “각 사람”과 관련된다 는 전통적 해석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으로 남아 있다. 이런 독해에 따를 경우, 절대로 “빛”은 “세상에 온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 우 리가 기대했을지도 모르나 놓치고 있는 것은 “빛”이 “왔다”( ‘에게네토’ ) 라는 단순한 확언인데, 이것은 옛 창조와 대비하여 새 창조를 선언하는 70인역 창세기 1장 3절을 반영한다. 그 대신에 저자는 14절에 와서 다시 빛의 자리 에 “말씀”( ‘로고스’ ) 을 넣어서 단순히 이렇게 확언한다. “그리하여 그 말씀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왔다 ( ‘에게네토’; 개역개정, “육신이 되어” ).” 이 절들을 어떻게든 실제 연대순으로 배치할 방법은 전혀 없다. “비치다”( 5절 ) 란 동사처럼, “비 추다”( 9절 ) 라는 동사의 시간 언급은 현재, 즉 저자가 복음서를 쓰는 때다. 이 미 5절에서, 다시 9절에서 저자는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 도의 인격 안에서 “빛이 세상에 왔다”( 3:19 ) 라는 것 또는 “그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1:14 ) 라는 것을 추정하고 있다. 두 동사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비 추다”( ‘포티제이’ ) 가 타동사지만, “비치다”( 파이네이 ) 는 자동사라는 것이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세상에 태어나는 각 사람을 “비춘다” 또는 각 사람 위에 비친다. 요지는 빛이 각 사람의 출생 시에 ( 즉, “세상에 올” 때 ) 각 사람 을 비춘다는 것이 아니라,21  ) 단지 빛이 세상에 있는 각 사람을 비춘다는 것 이다.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 “참 빛”, 즉 “사람들의 빛”이 창조 이래로 각 사람을 비추었다는 믿음에서 자기 용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 오고 있음에도(evrco,menon, ‘에르코메논’) 불구하고, 각 사람을 비춘다”(Johannine Grammar, 221)를 보라. 에드윈 애벗은 후에 이곳의 ‘에르코메논’과 11절에 있는 부정과거 ‘엘덴’(h=lqen) 사이를 날카롭게 구분함으로써 요지를 강조한다. “이 단락은 먼저 빛이 인류에게(보다 구체 적으로 선지자들과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오고’ 있었으며, 그다음에 성육신 안에서 확실하게 ‘왔다’”(367).

20  ) 이것은 위 각주 1에서 제시한 번역처럼, “세상에 오는 것으로”라는 도구적 의미를 갖게 된다.

21  ) 이런 이유로, 모리스의 의역인 “그의 출생의 때에 각 사람”(83)이란 번역은 여기서 제시된 견해 를 요약했지만, 잘못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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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요한의 증언(1:6-3:36) A. 요한과 빛(1:6-13)

9절에서 저자의 구체적인 요지는 이 빛이, 이 복음서에서 전개될 계시 사건 때문에, 이제 각 사람을 비춘다는 것이다. 10절 “세상에 오는”을 “빛”과 관련하여 읽는 이들은 흔히 자신들의 해석 을 지지해 주는 근거로 10절을 지적한다. 빛이 “세상에 오고 있었다”( 9절 ). 그 결과 “세상 안에 있었다”( 10절 ). 22  ) 그러나 이 두 진술은 서로 너무 가까워 서 연결 고리가 설득력이 없다. 빛이 “세상에 오고 있었다”( 9절 ). 그다음에 거의 동시에 빛이 “세상에 있었다”( 10절 ) 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그러니까 과정을 말하다가 끝나 버린다. 독자는 “이게 뭐지? 빛이 오고 있 던 거야? 아니면 사실은 빛이 와 버린 거야?”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10절이 이 문제를 해결한다. 빛이 “세상에 있었다.” 그래서 시간적 틀은 6-9절과 같다고 추정하는 것이 아마 타당할 것이다. 요한의 사역이 진행 중인 동안, 예수의 사역이 막 출발한다. 저자의 단어 반복에 대한 집착이 10절에서 다시 표면으로 드러난다. 9절 말미에서 “세상”이란 표현을 선택 해서 서로 다른 세 구절에서 세 번 반복된다. 9절처럼 주제는 “빛”이지만, 점차 인간의 모습을 띤다. 첫 번째 구절에서, 빛이 “세상에 있었다”라는 개 념은 “사람들의 빛”( 4절 ) 이나, “각 사람을 비추는 빛” 같은 문구에 비추어 볼 때 의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 빛”은 “그것”이었는가? 아니면 “그”였 는가? 두 번째 구절은 “세상이 그것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다”로도 “세상 이 그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었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만물이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즉, 말씀을 통해서, 3절 ) 와의 유비는 후자를 지지한다. 4-5, 7-9절의 “빛”은 이곳 1-2절에서 언급한 “말씀”과 같아진다. 마지막으로, 10절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구절인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에서 남성 대명사 “그를”( ‘아우톤’, 5절의 중성 ‘아우토’와 비교 ) 은 “그 빛”이 “말씀”과 함께 교체 가능한 한 위격라는 것을 이제 확실하게 한다. “세상이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10절 ) 와 “만물이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 3절 ) 사이의 평행은 놀라울 정도다.23  ) 10절에서 복음서 기자는 우리에게 창조와 모든 창조 질서가 이제는 더 나아가 “빛”으로 밝혀진 ( 번역에서 적절하게 대문자로 표기된 ) “말씀”을 통해서 존재 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어 한다. 그 취지는 새로운 확언이 지닌 아이러니와 비극을 고조시키려는 것이다. “그리고 ( 그럼에도 ) 세상은 그를 알

22  ) 예, Brown, 1.10; Barrett, 160. 23  ) pa,nta diV auvtou/ evge,neto, ‘판타 디 아우투 에게네토’, 3절; o` ko,smoj diV auvtou/ evge,neto, ‘호 코스 모스 디 아우투 에게네토’,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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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24  ) 아마도 처음에 창조로 시작한 그 이유, 또는 적어도 한 가지 이 유가 예수의 이야기 안에 있는 이 최고의 아이러니를 위한 기초를 세우는 것이었는지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라는 진술은 복음서 이야기에 있는 갈등 또는 거절에 대한 두 번째 암시인데, 첫 번째는 어둠이 빛을 “덮치지 못했다”라고 하는 5절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갈등을 암시하는 목적은 예수를 세상의 빛으로서 정말로 “아 는” 어떤 믿음 공동체와 “세상” 사이에 이원론을 세우는 것이 ( 적어도 지금은 ) 아니다. 이 장 안에서 세례 요한은 “나조차도 그를 알지 못했다”( 1:31, 33 ) 라 는 것을 인정하면서, 자기에게 질문하는 자들을 처음으로 “너희가 알지 못 하는” 이로서 예수에게 소개할 것이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어떤 이들은 예수를 “알게” 될 것이며, 어떤 이들을 그렇지 못할 것이지만, 당분간 “세 상”은 지식과 무지, 신앙과 불신앙 모두에 대한 잠재성을 자신 안에 포괄함 으로써 구별되지 않은 전체로 있게 된다. 11절 단어 반복은 계속된다. “자신의”, “자신의”, “영접했다”, “영접 했다.”25  ) 빛의 거절이라는 반어가 두 번째로 표현되고 있으며, 훨씬 명시적 으로 표현된다. “그가 자기 소유 ( ‘에이스 타 이디아’, 중성 ) 에게 왔다. 자기 소유 ( ‘호 이 이디오이’, 남성 ) 는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10절에서 “세상”이 구별되지 않 은 전체였듯, 여기서도 “자기 소유인 것”과 소유가 아닌 것 사이 또는 “자 기 소유인 백성”( 예, 유대인들 ) 과26  ) 빛에 속하지 않은 다른 이들 사이에 전혀 구별이 없다. 오히려, “자기 소유인 것”은 단순히 “만물” 또는 “세상”이라 고 말하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한 반면, “자기 소유”( 남성 ) 는 일반적 으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 4절 ) 또는 “각 사람”( 9절 )을 가리킨다.27  ) 저자는

24  ) 동사 “알다”(e;gnw, ‘에그노’)는 부정과거다. 즉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전혀 배우지 않았듯 이, 세상은 빛을 “알게 되지” 또는 “아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비교, 17:25).

25  ) ta. i;dia … oi` i;dioi … pare,labon … e;labon, ‘타 이디아……호이 이디오이……파렐라본…… 엘라본.’

26  ) 브라운(1:10)은 ‘타 이디아’(ta. i;dia)를 “‘세상’에서 특별히 자기 소유인 것, 즉 이스라엘의 유 산인 약속된 땅 이스라엘이라고 여기며” ‘호이 이디오이’(oi` i;dioi)를 출 19:5(“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 가 될 것이라”)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여긴다. 비즐리머 리(Beasley-Murray)에 따르면, “복음서 기자는 거의 확실하게 이 표현을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 에 저항하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12-13). 모리스 역시 마찬가지다. Morris, 8586. 27  ) Bultmann, 56. 불트만이 여기서 “구원 역사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우주론적 언급”을 보고 있다 는 것을 근거로, 브라운은 “불트만의 해석은 프롤로그가 본래 영지주의적 찬송이었다는 불트만 의 전제에서 나온다”(1.10)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것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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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요한의 증언(1:6-3:36) A. 요한과 빛(1:6-13)

“선지자가 자신의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4:44 ) 라고 하면서, 복음 전통을 통해서 배운 원리를 가능한 가장 넓은 용어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 로 보인다.28  ) “그가 자기 소유인 집에 왔다”라고 하는 RSV 번역은 4장 44절과 요한복음에서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다른 두 곳 ( 16:32과 19:27 ) 에 호소 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이 표현은 예수 제자들의 집을 가리킨다.29  ) 그럼에 도 “세상”( 10절 ) 이 어떻게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2절 ) 있었던 말씀에게 “집”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는 알기가 어렵다.30  ) 오히려, 이 표현은 “세상이 그를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라고 10절에서 상기하는 말씀에서 나온다.31  ) 세상은 그의 창조라는 의미에서 “그의 소유”이며, 따라서 기원 장소나 영구 거주 장소라는 의미에서 그의 “집”이 아니라, 그의 재산이나 소유라는 말 이다.32  ) 빛, 또는 말씀이 세상에서 전혀 영접받지 못한다는 개념은 지혜가 이스라 엘이나 예루살렘에서 집을 찾는다는 유대의 가르침과 날카롭게 대조 된다.33  ) 이 개념은 지상에서 영구 거처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는 에녹의

지주의든 다른 어떤 것이든 어떤 가정된 송가적 원자료가 그랬던 것만큼이나, 예수의 사역을 우 주론적 틀 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8  ) 다른 형태의 언급이 막 6:4//마 13:57b; 눅 4:24; 도마복음 31에 나온다. 하지만 요 4:44만 1:11의 언어를 반영하는 “그의 소유인”(patri,j, ‘파트리스’, 즉 “고향”과 함께 불필요한 th/| i;dia|, ‘테 이디아’)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29  ) 모리스는 매우 단호하다. “말씀이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는 낯선 자로 오지 않았다. 그는 집에 왔다.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에 왔다. 그가 다른 나라에 왔다면, 그것은 정말 문제였겠지만, 이 스라엘은 특별히 하나님의 소유인 백성이었다. 그는 집에 왔으며, 백성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알 아보았어야 했다”(85). 30  ) 예, 8:23을 보라. 이곳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또한, 17:14를 보라. 이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 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한다.

31  ) 비교, The Odes of Solomon 7.12, “그는 자신의 소유인 자들에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기들을 만든 그를 알아보고 자기들이 제 힘으로 왔다고 생각하지 않게 했다”; The Odes of Solomon:TheSyriacTexts (ed. J. H. Charlesworth; Missoula, MT: Scholars Press, 1977), 36.

32  ) Bultmann, 56; Schnackenburg, 1.259.

33  ) 예, 집회서 24:3-12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으며……나는 높은 하늘에서 살았고 내가 앉는 자리는 구름기둥이다. 나 홀로 높은 하늘을 두루 다녔고 심연 의 밑바닥을 거닐었다. 바다의 파도와 온 땅과 모든 민족과 나라를 나는 지배하였다. 나는 이 모 든 것들 틈에서 안식처를 구했으며 어떤 곳에 정착할까 하고 찾아다녔다. 온 누리의 창조주께서 나에게 명을 내리시고 나의 창조주께서 내가 살 곳(kataskh,nwson, ‘카타스케노손’)을 정해 주시 며, ‘너는 야곱의 땅에 네 집을 정하고 이스라엘에서 네 유산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셨다……그분 이 계신 거룩한 장막 안에서 나는 그분을 섬겼다. 이렇게 해서 나는 시온에 살게 되었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이 도읍에 나의 안식처를 마련하셨고,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다. 주님께서 고르시어 차지하시고, 영광스럽게 만드신 그 백성 안에 나는 뿌리를 내렸다”(바룩서 3:35-4:2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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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전승에 더 가깝다.34  ) 그러나 이야기는 같지 않다. 요한복음에서 “말 씀”이나 “빛”은 유대교에 있는 지혜나 묵시 전승의 “지혜”가 아니다. 결정 적 차이는 지혜의 경우처럼 “그녀”가 아니라 “그”가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 즉 나사렛 예수라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10, 11절의 주어는 빛이지만 ( 9절을 보라 ), 저자는 실제 주어가 예수라는 것을 알고, 독자들이 이것을 알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17절에 가서야 예수의 이름이 언급될 것이며, 29절에 가 서야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 10절보다는 ) 11절이야말로 예수와 예수 의 지상 사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므로, 이 맥락의 보편성을 인식하 고 있는 이들조차 이스라엘 및 유대 백성과 관련하여 11절이 적절하다는 것도 동시에 알아차리기가 쉽다. 배럿은 주어에 대해 양면적 입장을 취하는 반면,35  ) 호스킨스는 여기서 “이스라엘과 세상,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를 종 국적으로 전혀 구분하지 않는 이 땅 전체와 이스라엘에 대한 이중적 언급” 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창조로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며……예수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니라 세상에 있었다.”36  ) 요지는 여기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없는 특별한 의미로 예수 “자신의” 소유로 여겨진다는 것이 아 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이 예수가 온 세상의 대표자로, 유대나 예루살렘은 예수가 세상과 대결하는 드라마가 발생할 수 있는 무대로 고려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12절 11절의 “자신의”가 배타적이지 않고 포괄적인 의도를 가졌다면, “그 를 영접하는 자 모두”( 12절 ) 는 예수의 소유가 아닌 다른 이들 ( 예, 유대인과 대조되 는 이방인 ) 로 이루어져 있는 다른 무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소유”에 속한 부분 집단이다. 이것은 일종의 수사적 대조나 심지어 모순을 설정한다. 예 수의 “소유는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예수를 영접했다. “영접하다”를 나타내는 두 단어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 하지 않으면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11절 ( ‘파렐라본’ ) 과 12절 ( ‘엘라본’ ) 의 34  ) “지혜는 스스로 거할 곳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한 장소가 (지혜에게) 발견되었다. 그때 지혜는 백성의 자녀와 함께 거주하기 위해 나갔으나, 지혜는 거처할 곳을 전혀 발견하지 못 했다. (그래서) 지혜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으며, 지혜는 천사들 가운데 영구적으로 정착했다”(에 녹1서 42.1; Charlesworth, OTP, 1.33). 35  ) 배럿은 “예수가 온 ‘집’은 이스라엘이었으며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로서 속한 삶의 체계에 이르 렀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면서도 “예수를 거절한 것은 바로 세상이었다”(163)라고 결론을 내 린다. 배럿의 이중적인 입장은 크리소스토모스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크리소스토모스는 이 본 문이 “유대인을 예수의 특별한 백성 또는 아마도 예수에 의해서 창조된 인류로서 ‘자기 소유’라 고 부른다”라고 보았다(Homily 9.1; NPNF, 14.32). 36  ) Hoskyns,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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