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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명료한 이 책에서 미첼 체이스는 성경 증언 전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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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부활이 전체 성경 이야기의 틀 속에 엮여 있음을 보여 준다. 체이스는 부
활의 약속이 신약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우리의 소망은 내세 곧 부활한 몸으로 사는 것인데, 우리는 시의적절한 이 책에서 이런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임 을 상기한다.”
토머스 슈라이너, 서던 침례 신학교 신약 해석학 제임스 뷰캐넌 해리슨 석좌 교수
“지금까지 SSBT 시리즈에 가장 크게 공헌한 작품 중 하나인 이 책에서, 미첼
체이스는 복음 안에서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하면서
도 간결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새로워진 땅에서 몸을 가진 상태로 끝없이 누리
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삶으로서, 우리가 죽을 때 이 땅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
가에 육신 없는 상태로 존재하리라고 기대하며 천국에 가려는 소망 이상의 것
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책은 몸의 부활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이 구약의 이야
기와 예언에 어떻게 뿌리를 두는지를 보임으로써, 독자가 창세기에서 요한계
시록에 이르는 점들을 연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낸시 거스리, 성경 교사, 『에덴보다 더 나은』의 저자
“미첼 체이스는 ‘부활 소망이라는 주제는 내 마음에 소중하다’라고 말한다. 이
것은 내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이 땅에서 짧은 삶을 사는 동안 죄와 유혹
과 씨름하고 고통과 아픔을 견디며, 사랑하는 많은 사람과 죽음으로 이별을 고
할 때 나를 지탱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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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서문 ┃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면서 성경을 ‘방대하고, 깊고, 거대해’ 통과하기 불가능한 책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본
문을 단편적으로 읽고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영감의 금덩어리를 발
견하지만, 주어진 본문을 전체 줄거리 속에 넣지 못한 채 머물러 버
린다. 그러나 지난 몇 세대 동안 복음주의권의 성경 연구에 일어난
놀라운 발전 중 하나는 성경신학의 회복이다. 성경신학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서, 성경을 신학적으로 통일된, 역사에 기초한, 점진적으로 펼쳐지는 책으로,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죄악 된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
중심의 이야기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성경신학의 르네상스는 복이지만, 성경신학은 일반 기
독교인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SSBT ( Short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 시리즈의 목표는 학술적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성경신학의
시리즈 서문 7
인 제자라면 이 책들에서 혜택을 얻을 수 있다.
본 시리즈의 각 책은 성경 전체의 주제를 하나 취해서 그 주제를
성경 전체에서 추적한다. 이 방식으로 독자는 주어진 주제에 대해
배울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일관성 있는 책으로 읽는 방법을 알게 된다.
우리는 왜 본 시리즈를 출간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사랑
하고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학문 영역에서 일어나는
우리 편집자들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
의 은혜로운 구속 행위를 보여 주는 통일된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 보다,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증언하신 것처럼 성경 전체를 궁극적
으로 예수님에 대한 책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눅 24:27; 요 5:39 ) 인생
에서 더 흥미진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SSBT 시리즈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구원자를 자세히 살피는
것이며 그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목표는 성
경 전체가 어떻게 예수님을 가리키며 어떻게 무력한 죄인들을 은혜
롭게 구출하시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이 구원자를 자세히 살피는 것
이며, 생명을 주는 진리를 이해하는 신자의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데인 오틀런드·마일즈 반 펠트
있으나( 고후 4:16 ), 이것이 최종적인 말씀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은 사망의 패배를 가져올 것이다( 고전 15:54–55 ). 부활 소망이라는 주
제를 숙고하면서 글을 쓰는 작업은 개인적으로 유익했는데, SSBT
시리즈에 기고하는 것은 특권이다. 나는 이런 기회를 준 점에 대해
크로스웨이 출판사 및 시리즈 편집자 데인 오틀런드와 마일즈 반
펠트에게 감사한다. 나는 오틀런드와 반 펠트를 존경하는데, 이들의
격려는 복이었다.
내 아내 스테이시가 초고를 읽고 제시한 의견과 문장 덕분에 이
책이 훨씬 나아졌다. 나는 아내가 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돌보는
중에도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한 짬을 어떻게 낼 수 있었는지를 도무
지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내 친구 조나단 케첨, 패트릭
었다.
부활 소망이라는 주제는 내 마음에 소중하다. 나는 이것을 주제로
서던 침례교 신학교에서 박사 논문을 썼으며, 여러 해 동안 이 주제
로 글을 쓰고 설교하는 기회를 얻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소
망이 큰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구주께서 크시기 때문이요, 우리의
구주에 대한 소망이 확실한 것은 우리의 구주께서 친히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 『부활의 소망과 죽음의 죽음』을 앤드루 피터슨에게 바 친다. 나는 피터슨의 음악을 거의 20년 전에 알았는데, 피터슨의 앨
범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와 내 가족에게 더 많은 의미로 다가온다.
피터슨이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는 소망으로 가득한데, 피터슨의 많
은 가사는 죄와 부패와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뻐한다.
여러분은 “부활 편지”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같은 피터슨의
앨범을 듣거나 윙페더 사가 시리즈를 읽으면 믿음, 소망, 사랑의 능
력에 대해 듣게 될 것이다. 피터슨은 어둠을 밝히기 위해 책을 쓰고
노래를 부른다. ‘피터슨 당신이 세상에 제공한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음악과 책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습
니다.’ 바울은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삶을 위해 만들어졌을까? 여러분이 이 질 문에 답변하기 전에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여러분의 첫 조상 아담
과 하와가 반역하기 이전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담과 하와
의 존재 상태는 첫 번째 질문에 답변하기 위한 단서와 암시를 제공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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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현된 삶. 아담과 하와는 몸을 가진 상태로 생명과 하나님의 선
한 창조를 경험했다. 태초부터 그랬다. 아담과 하와는 몸이 있기 전
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양식은 성경의 마지막에 사망이 없어질 때
긍정되고 입증되는데, 죽은 자가 일으킴을 받기 때문이다.
파괴자 죽음 하나님의 계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면, 우리는 체현된 삶이
선하고
에서 우리는 외면적으로 쇠약해진다. 우리 생명의 호흡은 어느 가
까운 순간이나 먼 순간에 멈출 것이다.
그렇지만 성경 저자들은 본질적으로 사망에 대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망의 줄에 매인 자가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 성도는 죽지 않는 몸으로 살면서 자신이 만들어진 목적인 생명, 곧 에덴동산의 영광마저 능가하는 존재를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않는데 우리도 마찬가지다.
살아난 소망
사나 죽으나 죄인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 소망은
그리스도의 승리한 인격과 사역에 기초한다. 그리스도는 사망의 줄
을 끊으셨으며, 마침내 우리가 소유할 생명의 첫 열매로 살아 계
신다. 예수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신원을 받고 높아지는 것
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다.
예수와 관련된 좋은 소식은 예수의 동정녀 수태, 죄 없는 삶, 죄를
담당한 죽음을
정적인데, 부활이 없으면 복음은 능력을 잃는다. 바울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무력하고 우리의 소망도 헛되다고 말한다( 고전 15:12–19 ).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썩을 것이 썩지
않는 것을 입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썩지 않는 것을 입으셨으므로
우리도 그럴 것이다. 우리의 소망이 살아났으므로 우리의 소망은
확실하다. 예수는 결코 다시 죽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적 조망
예수의 부활은 신약에서 전해지지만, 부활 소망은 빈 무덤보다 더
오랜 것이다. 부활 소망과 같은 민감한 주제를 고찰하려면 성경 전
체가 필요할 것이다. 성경의 모든 장르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
이다. 많은 성경 저자는 부활 소망이 어떻게 성경 전반에 걸쳐 펼쳐
지는지를 구상할 때 관여할 것이다.
우리는 부활 소망에 대해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신약에 의지할지
모른다. 이것도 이해할 수 있는데, 부활 소망은 신약에서 크고 생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이미 구약에서 커지기 시작했으
므로 우리는 구약에서 시작할 것이다.
예수께서 활동하실 당시의 구약은 율법, 선지서, 성문서의 세 부 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책은 1-3장에서 각 부분을 다룰 것이다.
그 뒤에 4-7장은 신약을 조사하면서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
한계시록을 다룰 것이다. 성경적 조망은 광대하지만, 이런 조망은
부활 소망의 광대한 본질에 어울린다.
부활 목격담 예수의 부활 및 사망에서 해방될 것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구약
에서 예견되고 예시된다. 다니엘 선지자는 사람이 죽음에서 일어나
일부는 영원한 생명을, 그리고 일부는 영원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
고 말한다( 단 12:2 ).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의 추방과 귀환을
집단적 사망과 부활로 묘사한다( 겔 37장 ). 요나는 사흘 뒤에 바닷가
에 올라오기 전에 물고기 안에서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욘 2장; 참고.
마 12:40 ).
시편 기자는 구덩이에서 나오는 것, 사망의 손아귀에서 건져 냄을
받는 것에 대해 노래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의 소망을 전한다. 이런 노래는 죽어 가는 자의 땅에서 살
아가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시편 기자는 살아 있는 자의 미
래 땅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글을 쓴다. 고통받고 슬픔을 겪는 시
편 기자는 마치 죽음이 끝이 아니며 이 땅의 삶보다 더 큰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글을 쓴다.
부활의 소망과 죽음의 죽음
간 사실을 잊지 말자( 왕하 2장 ). 불의 회오리바람이 엘리야를 땅 위로
데려갔는데, 여러 세대 전에 에녹의 경우처럼 불현듯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육체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사람도 하나님의 능력이 죽
음보다 더 크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기 2천
년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신들과 동행한 종들을 남겨 두고 제
사를 드리기 위해 산에 올랐다( 창 22장 ).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자신
과 자기 아들이 예배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노령의 족장은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이삭이 아직 자녀를 낳지 못했
더라도 하나님이 이삭을 통해 자손을 줄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실
것임을 알았다( 21:12 ). 아브라함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삭을 주
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또한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
으키는 것임도 틀림없다. 아브라함의 부활 신앙은 타당한데, 아브라
함은 하나님이 약속에 대해 진지하시고 약속을 달성할 능력이 있으
심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21:1–2 ).
영원한 치료 구약과 신약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법이 부활임을 증언한다. 성
경의 줄거리는 창세기의 체현된 첫 인류에서 새 창조의 영화로워진
성도에게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망을 이긴 주체는 사망을 지배하시
는 분이다. 무덤은 이분이 열리라고 말씀하실 때 열릴 것이다( 요
5:28–29 ).
서론
구약에서 불멸의 존재를 경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께서 부
활을 통해 이루신 것은 이전의 성경 저자들이 단지 예기만 했던 생
명일 뿐 아니라 새로운 것이기도 하다. 부활 이야기는 이 땅의 생명
으로 회복되었다가 나중에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예수는 셋째
날에 빈 무덤에서 나오셔서 사망의 문제에 대한 영원한 해결책인
영광스러운 불멸을 체현하셨다.
첫 아담은 영광스러운 형상 소유자로 존재하지 못했으나 마지막
아담은 그랬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난 형상 소유자일지 몰라
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날 것인데,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그리스
도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므로 우리도
지금 살아 있고 장래에도 살아 있을 것이다.
부활 소망이 중요한 이유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많고 고려할 가치가 있는 주제도 많다. 여
러분은 왜 구약의 소망에 대해 읽어야 할까? 여기에는 다섯 가지 이
유가 있다.
1. 개인적. 여러분은 죽음을 겪을 것이다. 이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은 이 사실을 종종 충분히 숙고하지 않을 때
도 있을 것이다. 부활 소망은 여러분에게 죽음에 대해 망상 없이 분
명하게 생각할 기회를 준다. 여러분은 천하무적이 아니다. 여러분은
나이가 들수록 타락한 세상에서 노화와 관련된 아픔과 고통에 직면
할 것이다. 여러분은 죽음을 겪을 것이므로, 죽음에 닥쳐서도 자기
의 소망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2. 관계적. 여러분이 아는 사람들은 죽음을 겪을 것이다. 여러분은
심지어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이들의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
은 늙어서 죽는 사람이나 젊을 때 죽는 사람을 알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와 소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을 큰 특권으로 여겨야 한다. 부활 소망은 우리가 나누어야 하는
소식의 일부다. 우리가 부활 소망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우리의 가
르침은 더 올바르고 유용할 것이다.
3. 기독론적. 예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예수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대상이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이루신 것에 대해 아
는 데 헌신해야 한다. 예수의 승리의 부활과 영화로워진 몸은 다른
모든 면에서 확고한 믿음에 대한 추가 사실이 아니다. 예수께서 체 현하고 약속하시는 부활 소망을 여러분이 부정한다면, 지키거나 전
할 가치가 있는 복음은 전혀 없다.
4. 신학적. 부활 소망은 다른 성경적 교리들과 교차한다. 부활 소
망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가령 창조의 선함, 인간의 본
질, 죄의 문제, 만물의 최종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성경의 많은 교훈을 종합하려 할 때, 부활 소망에 대한 연
구는 필수적이고 유익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5. 송영적. 부활의 소망은 하나님께 대한 기쁨과 찬양을 불러일으
켜야 한다. 부활의 약속은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고 하나님의 신실 함을 드러내어 하나님 이름에 영광을 돌린다. 기독교인은 마음이
경배로 불타오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우리는 이 불꽃을 일
으키고 부채질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기뻐해야 한다. 부활 소망에
대해
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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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나타난 부활 소망
부활 소망의 뿌리는 깊다. 오래전에 이사야와 다니엘 같은 선지자
는 죽음을 넘어선 내세의 소식을 외쳤는데, 이 소망의 씨앗은 비옥
한 토양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번 장에서는 율법( 창세기에서 신명기
까지 ) 이 부활 소망을 자극하고 토대를 놓는 방식을 살펴보겠다.1)
우리는 율법 또는 토라를 따라 걸을 때 에덴동산에서 시작할 것
이다. 그다음에는 홍수를 통과해 족장들의 삶을 들여다보겠다. 우리
는 애굽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따라갈 것이며 그 뒤에는 위
대한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떠날 것이다. 구속받은
1) 일부 학자는 단 12:2(아니면 아마도 사 26:19)보다 더 빠른 부활 소망의 사례를
찾기를 꺼린다. T. D. 알렉산더는 이 주제와 관련해 비평 학계를 다음처럼 요약 한다. “구약이 내세라는 주제와 관련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고 제안하는 진술을
만나는 일은 드문 편이 아니다. 또한 성경이 거의 전하지 않는 것도 대개 상당히 부정적인 용어로 평가된다”(T. D. Alexander, “The Old Testament View of Life After Death,” Themelios 11, no. 2 [1986]: 41).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므로, 우리는 생명
의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과 함께 거하시는지를 볼 것이다. 구속받
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의지할 수 있으므로, 이 특
성(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 ) 은 사망이 죽을 것이라는 소망에서 중심이 된다.
취하여 먹고 영원히 살라
태초에 하나님은 몸을 가진 형상 소유자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흙
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에게서 하와를 만드셨다( 창 2:7, 21–22 ).
이 첫 인류는 그들의 육체적 형태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
은 이들의 몸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이 몸은 하나님이 만드신
다른 모든 것처럼 보시기에 좋았다( 1:31 ). 2)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았다. 먹
을거리가 풍부했으므로, 아담과 하와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하나님
의 창조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라는 신성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
었다( 1:28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리는 자가 되어 하
2) 켈리 카픽의 견해에 따르면, “플라톤의 철학과 달리, 성경의 진술은 원래의 인간
의 육체성은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존재에 본질적인 선물이다……다르
게 표현하면, 하나님과 다른 인간과의
Theological Meditation on Pain and Suffering [Downers Grove, IL: IVP
2017, 『고통의
CLC
2021], 46).
나님의 대리자, 하나님의 왕적 대사로 하나님을 대표할 것이다. 아
담과 하와의 육체는 자신들이 다스리고 위임받은 사명을 달성하는
방식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 소유자의 몸은 죽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에 대해 경고하
셨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2:17 ). 이 말씀에서 죽음
의 개념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길은 생명의 길이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별한 나무가 에덴동산에 있었는데, 이것은 생명나무
였다( 2:9 ). 이 나무는 생명 유지 이상을 의미했다. 이 생명나무의 열
매는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역한 형상 소유자를 에덴에서 내쫓으실 때 하신
말씀 때문이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
생할까 하노라”( 3:22 ).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썩을 몸으로 동산을 떠
났는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경험할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생명나무는 육체적 불멸의 소망을 약속했으며, 이 불멸은 아담과
하와에게 없었으나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진 목적이었다.3) 죄의 문
제가 하나님의 선한 구상을 훼손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 밖에서
죽었다. 이 생명나무에 다가가지 못하게 된 아담과 하와의 몸은 결
국 흙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죄인에게 문제는 이것인데,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 죽지 않는 육체적 삶의 소망이 결국 성취되느
냐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충만함 속에서, 부활 생명은 죄인이 에덴동산의 생
명나무에서 열매를 경험하게 될 방식이다. 죽지 않는 육체적 삶의
소망은 영원히 상실된 것이 아니다.4)
사망의 권세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오로지 심장과 호흡이 멈추는
의미하지만, 성경에서 죽음은 이것 이상이다.
부활에서 완전하게 경험될
말한다(Bruce Waltke, An Old TestamentTheology:AnExegetical,Canonical,andThematicApproach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7, 『구약신학』, 부흥과개혁사
2012], 257).
Michael Morales, Exodus Old and New: A Biblical Theology of Redemption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20, 『ESBT
부흥과개혁사
2021], 3).
락한 세상에서 눈에 보이며 활동 중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성경의 묘사가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끼치게 허용해야 한다. 해석자는
죽음이 다른 구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주목하지 않으면 부활
소망이 특정 구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의 작용은 다양한 형태를 띤다. 생명을 억제하거나 해치거나
파괴하는 모든 것이 일종의 죽음이다.5) 성경 저자들이 회복하거나
자유를 주거나 치료하거나 다시
5) 모랄레스는 다음처럼 말한다. “따라서 에덴의 문을 통한 추방의 길은 생명에서
사망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조화에서 역기능과 다툼으로, 건강에서 질병으로, 안 전에서 폭력으로, 긍휼에서 무자비로, 온전함에서 분열로,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적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삶에서 소외로 가는 길이다”(Exodus Old and New, 9).
6) 존 레벤슨은 다음처럼 설명한다. “히브리 성경에서 죽음과 삶은 종종 관계적 사
건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살아 있거나 죽은 것으로 묘사되는 사람의 개
인적 상황과 분리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렇게 자주 나타나는 성경
적 의미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단순히 특정한 물리적 상태로 존재하
는 것 이상을 수반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또한 땅과 생산적이고 안정적으로 결
합된 상태로 거주하는, 번성하고 지속적인 친족 집단 안에 속해 있음을 의미
했다. 이와 반대로, 과부가 되거나 자식을 잃거나 추방 상태에 있다는 것은 필연
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 모든 상태(심지어 죽음)와 다른 상 태(특히 건강이나 질병)는 다른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유발되는 조건을 위한 제
유법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Jon Levenson, Resurrection and the Restoration of Israel:The Ultimate Victory of the God of Life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6], 154–155).
들의 증언에서 두드러진 특징이기 때문이다.
출애굽을 통한 죽음
하나님은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음에 이를 것이라고 경
고하셨으나( 창 2:17 ), 아담과 하와는 물리적으로 즉시 죽지 않았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했다( 3:7–
13 ). 죄는 소외와 수치심을 일으켰다. 결혼과 출산의 복은 영향을 받
을 것이며( 3:16 ), 노동과 생업의 특권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3:17–19 ).
우리는 창세기 2장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경고를 실현되지 않
은 위협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해 하나님
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죽음에는 물리적 사망 이상의 것이 있다.
에덴은 하나님의 현존과 풍부한 섭리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에덴은
생명의 영역이었다. 에덴에서의 추방은 하나님이 두신 곳에서 떨어
짐을 의미했다. 하나님은 에덴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과 생명나무에
다가가는 것을 금하셨으므로, 아담과 하와의 추방은 일종의 죽음이
었다. 성스러운 공간과의 분리는 생명에서 멀어지는 것을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공간에서 아담의 추방( 따라서 모든
사람의 추방 ) 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생명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을 죽은 자의 영역에서 끄집어내실까? 추방에서의 귀환,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이동은 부활이 될 것이다.8) 에녹의 데려감
에덴동산의 바깥에서 세대들은 죽음을 겪는다. 널리 퍼져 있는 죽
음의 진실은 창세기 5장의 계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죽음의 리
듬은 구절마다 나온다. 이 양식은 특정 인물의 이름, 후손, 향년 및
“그가 죽었다”라는 보고로 이루어진다. 이 양식의 반복이 죽음에 대
한 기대를 일으키므로, 에녹과 관련된 말씀은 독자를 충격에 빠뜨
린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
에녹의 데려감은 죽음을 수반하지 않았다. 창세기 3장 이후의 세
상에서 인간의 죽음이 시작된 이후로 모든 사람이 죽음을 겪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불가사의하게도 에녹은 수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
행한 뒤에 데려감을 당했다. 에녹은 자신이 생겨난 흙으로 돌아가
지 않았다. 그보다 하나님은 에녹을 죽음에서 건져 내셨다. 이 황홀
한 보고는 죽은 자들의 어두운 배경에 비치는 소망의 빛이다. 8) 모랄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생명과 존재의 원천인
하나님이 누군가를 죽음 이전에 건지신다면 죽음 이후에도 누군
가를 건질 수 있으실까? 생명의 하나님이 창세기 5장에서 세대들
사이에 퍼져 있던 죽음의 리듬을 중단시킬 수 있으시다면 그 밖에
무엇을 할 수 있으실까? 에녹의 사례는 믿는 자가 이 땅에서 죽음을
겪기 전에 건져 냄을 받을 것이라는 어떤 보증을 제공하기 위해 의
도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죽음보다 더 크심을 보여 주는 것도
사실이다. 죽음은 결코 천하무적이 아니었다. 죄인에 대한 죽음의
권리 주장은 기각될 수 있었다.
땅의 역창조와 재창조
창세기 5장의 계보는 노아의 가족과 함께 끝난다( 창 5:32 ). 그리고
죄의 영향이 끔찍한 규모와 범위에 이른 것도 바로 노아의 시대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언하신다( 6:13 ). 창세기 6–7장에서 땅을 삼킨 대홍수는 창조에게 물의 죽음이지만, 창조는 창세기 8장에서 심판
에서 벗어난다.
역창조와 재창조라는 용어는 창세기 1장의 심상에 비추어 하나님
의 심판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물에서 땅을 내
시고 그 뒤에 동물과 사람으로 땅을 채우셨다( 1:9–10, 24–31 ). 하나
님이 홍수로 말미암은 물로 사람과 짐승과 땅을 덮으셨을 때, 독자
는 역창조를 그릴 수 있다.
하나님은 노아와 방주에 있는 모든 대상을 기억하셨다( 8:1 ). 하나
님의 바람이 지상에 불자 물이 줄어들었다.9) 땅이 다시 한번 드러났
는데, 방주는 비워지고 땅은 채워졌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생명
을, 심판을 통해 구원을 일으키셨다.
대홍수와 죽음 및 부활과의 연관성은 이후의 성경에서 확인된다.
베드로는 세례가 심판의 물을 통한 백성의 구원과 상응한다고 말
한다( 벧전 3:20–21 ). 세례는 죄에 대한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
명을 묘사하는 새 언약 규례다( 롬 6:3–4 ). 구속을 이루시는 왕과의 연
합에서, 우리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게 된다( 엡
하시고 의로운 심판자며, 악인이 자기의 반역 속에서 영원히 견디
지 못할 것임을 확증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새 하
늘과 새 땅을 의미할 것이다( 벧후 3:8–13; 계 21:1–5 ). 만물을 새롭게
하는 일은 우주적 규모로 창조를 영화롭고 영원한 상태로 부활시킬
것이다. 아이를 배지 못하는 태
세계적인 대홍수라는 배경에서 벗어나, 아이를 갖지 못하는 개인
9) 창 8:1에서 “바람”이라는 단어는 “성령”으로 번역할 수 있다. 물 위에 부는 성령
에 대한 표현은 창조와의 또 다른 연결점이다(1:2를 보라).
의 난관에 초점을 맞추자. 세대의 증가는 생명의 진척을 의미했지
만, 아이를 배지 못하는 태는 가문의 죽음을 의미했다.10) 라헬이 남
편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
노라”라고 말했을 때( 창 30:1 ), 라헬의 진술은 절박한 울부짖음 이상
의 의미가 있었다. 야곱과 라헬 이전에 이삭과 리브가도 아이를 갖
지 못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25:21 ). 이삭과 리브가 이전에도 아브라
함은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와 혼인했다( 11:30 ).
성경 저자는 심지어 이런 난관도 극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
려고 족장의 아내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불임의 현실을 강조
한다. 하나님은 죽은 태에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임신하는데, 이삭과 리브가도 임신하며 야곱과 라헬도 임신한다. 아
이를 배지 못하는 태가 임신하는 것은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다.11)
이 여자는 더 이상 불임이 아닐 뿐 아니라, 가문의 활력도 태어날
자손을 통해 계속된다.
사라가 창세기 21장에서 임신할 때, 성경 저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다”( 21:1 ). 이
10) 레벤슨은 다음처럼 말한다. “히브리 성경에서 개인 정체성의 구성을 고려할 때, 불임과 자녀의 상실은 죽음과 동등한 기능적 역할을 한다. 이 두 가지 형태 중 하나 또는 양쪽 모두로 자식이 없는 상태가 창세기에서 족장들의 각 세대 및 그다음 세대의
the Restoration of Israel, 119–120).
11)
보라. Stephen G. Dempster, “From Slight Peg to Cornerstone to Capstone: The Resurrection of Christ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WestminsterTheologicalJournal 76 (2014): 386–387.
구절에 함께 함축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관념( 여호와께서 “행하
신” 것 ) 과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관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 이다. 하
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
냐”라고 물으셨다( 18:14 ).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한 전체 논의에서 핵 심이다. 죽음은 강하다. 그리고 무덤은 대단히 불가피하고 아무도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의 날은 다한다. 그러나 하나
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며 자신이 약속한 바를 이룰 능력이 있으 시다. 이삭이 건져 냄을 받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이삭에게서” 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창 21:12 ), 이삭에게 자손이 있기도 전에 한 산에서 이
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22:2 ). 아브라함은 이 명령에 순
종해 여행하면서 자기 아들과 몇몇 종을 함께 데리고 간다. 지정된
장소에 당도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라고 말한다( 22:5 ).
아브라함의 말은 부활 신앙을 입증한다. 아브라함은 가는 것, 예
배하는 것, 돌아오는 것을 표현하려고
자손을 약속하신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삭이 산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면, 이삭은 또한 산에서 일으킴을 받을 것이었다. 제사에
앞서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멈추라고 말
했다( 22:11–12 ). 이삭은 건져 냄을 받을 것이다. 이후의 건져 냄과 함
께 확립될 더 큰 양식의 첫 시작으로, 이삭은 “셋째 날”에 구원받
는다( 22:4 ).
히브리서 저자는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산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
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
이라고 말한다( 히 11:19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
의 능력을 확신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서 자손이 나올 수 있도록
이삭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셨다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드
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는 분이 되실 것이다. 부활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임
을 증명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한 이유 중 일부는 이삭의 임신
을 경험했기 때문인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은 죽은 태에 생명을 불
어넣으셨다. 이삭이 증거였다! 하나님이 죽은 태에 생명을 불어넣
을 수 있으시다면, 죽은 아이에게도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으실 것
이다. 아브라함이 확실하게 아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이삭을
통해 자손을 주려는 신성한 약속을 어기지 않으시리라는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산으로 함께 올라갈 것이며 또한 산에서 함께
내려올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19절이 거의 드려질 뻔한 이삭의 제사에 대해 인
유할 때, 저자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
데서 도로 받았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사망의 위협과 임박함이 이
세상에서 사망의 권세에 대한 실질적인 징후임을 확증한다.12) 비유
적인 부활이 모리아의 한 산에서 일어났다. 이삭이 산에서 물리적
으로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죽음에서 건져 냄을 받았다.
그리고 죽음에서의 건져 냄은 부활이다.
요셉의 일어남
독자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쳤다( 창 37:19–20, 26–28 ). 애굽인의
했으며( 39:7–19 ) 요셉의 주인은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다( 39:20 ). 구
덩이와 감옥은 요셉의 내려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요셉이 어디에
12) 바이런 휘턴은 다음처럼 말한다. “히 11:19는 부활에 대한 인유를 위해 구약의
다른 이야기들을 읽기 위한 여러 가지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첫째, ‘희생
자’는 모종의 사형 선고를 받은 상태다. 둘째, 집행 과정은 진행 중이다. 셋째, 인간의 구조 가능성은 전혀 없어서 끝이 임박한 상태다. 넷째, 죽어 가는 과정은 초자연적으로 극복되어 희생자는 다시 살아난다. 다섯째, ‘부활은 희생자와 그 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가져온다”(Byron Wheaton, “As It Is Written: Old Testament Foundations for Jesus’ Expectation of Resurrection,” WestminsterTheologicalJournal 70 [2008]: 248).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다( 39:21–23 ).
요셉의 일어남은 감옥에서 시작되었다. 바로는 꿈을 해몽하는 요
셉의 능력을 알게 되었으며 요셉은 애굽 왕을 도왔다( 41:1–36 ). 이
결과로 바로는 요셉이 국가 행정에서 섬기기를 원했다. 요셉은 온 애굽에서 바로 다음으로 높은 통치자가 되었다( 41:40–44 )
하나님은 요셉을 압제의 세력과 종의 상태에서 신원하셨다. 비유 적으로 말하면( 히 11:19를 보라 ), 하나님은 요셉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
으키셨다. 요셉이 받은 신원은 다른 사람에게 복과 생명을 가져 왔다. 요셉의 형들은 식량이 필요해 애굽으로 왔는데, 요셉은 그들
을 부양한다. 야곱의 온 가족이 가나안에서 고센 땅으로 이주할 때, 요셉은 이들의 번성을 준비한다( 창 46–47장 ). 요셉의 일어남은 요셉
과 연합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복을 의미했다.
가나안에 뼈를 묻다
창세기의 결말은 이국땅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자손에 대해 말하지
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창 12:7; 15:18–20;
17:8 ).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이 약속을 되풀이하셨다( 26:3–5; 28:13–15 ). 하지만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세 족장이 이 땅을 소유하기
전에 죽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며 믿음 안에서 죽었다. 족장들의 믿음은 그들의 매장 결정에서 입증된다. 아브라함은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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