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NT 시리즈에 대한 추천의 글
요한서신
베이커 신약 주석은 신약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자들이 헬라어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적 설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자와 친밀한 주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 I. 하워드 마셜, 애버딘 대학교
요한서신
추천의 글 이번에 나온 BECNT의 신간은 주해만 신경 쓴 것이 아니라 설교가든 일반 독자든 이 시대를 향한 요 한서신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의도도 충분히 고려했다. 이 책은 본문비평만 아니라 헬라어 원문에 대해서도 상세하고 세심하게 연구하여 편지 구성의 모든 측면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도록 했다.
- 하워드 마셜, 애버딘 대학교
저자는 스스로 겸양하겠지만 요한서신을 다룬 주석 중에 이만한 책이 없다. 요한서신을 예수의 사역 이나 가르침의 여러 측면에 연결하고 고대의 본문뿐 아니라 최신의 요한서신 연구까지 모두 고려했 다. 노련한 학자이면서도 목회자의 심정과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깊은 관심으로 이 책을 집필 했다. 엄밀하면서도 지극히 읽기 쉬운 주석으로 학생이든 목회자든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크게 도움 이 될 것이다.
- 그레이엄 트웰프트리, 리젠트 대학교
이 책은 야브루의 역작으로 매우 참신하고 완성도 높은 주석이다. 요한이 쓴 용어의 용법이나 의미 에 대해 무척 유익한 논의를 제시하고, 주해 과정에서 요한서신에 대해 전반적으로 정경적인 접근을 유지했으며, 성경 본문의 폭넓은 신학적 함의를 전하려고 애쓴 점에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배울 것 이 많고 탐구욕을 불러일으키는 이 주석으로 독자는 성경 본문에 경건하게 다가가고 하나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열정을 얻게 될 것이다.
지은이
- 피터 오브라이언, 무어 대학
로버트 야브루 ( Robert W. Yarbrough )
사우스웨스트 침례교 대학(B. A.), 휘턴 대학 대학원(M. A.), 애버딘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다. 휘턴 대 학,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리버티 대학교를 섬기고 지금은 커버넌트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프리카, 동유럽, 홍콩, 호주에서 신학 교육에 참여하였고, 미국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했 다. 『전망의 충돌』, 『PNTC 목회서신 주석』 등을 저술했다. 옮긴이
로버트 야브루 지음 최병필 옮김
최병필
광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의 칼빈 신학교에서 신약학으로 신학석사 학
위를 받은 후에, 캐나다 온타리오의 맥매스터 신학교에서 스탠리 포터 교수의 지도 아래 누가복음으 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 한인 교회를 섬기고 있다. 역서로는 『NICNT 고린도전서』(부흥과개혁사)가 있다.
ISBN 978 - 89 - 6092 - 657 - 8 ISBN 978 - 89 - 6092 - 258 - 7 (세트) www.rnrbook.com
값 34,000원
로버트 야브루
지음 | 최병필 옮김
목차
시리즈 서문_ 8 저자 서문_ 11 약어 소개_ 17 지도_ 21
요한일서 요한서신 서론
25
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57
A. 권위와 목적 공지 ( 1:1-4 )
61
B. 서신의 주요 요지: 하나님의 속성 ( 1:5 )
81
C. 하나님의 속성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 ( 1:6-10 )
89
D. 독자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호소 ( 2:1-6 )
113
II. 주요 계명: 옛 계명의 말씀을 실현하라 ( 2:7-17 )
141
A. 말씀의 본질과 영향 ( 2:7-11 )
145
B. 말씀에 비춘 목회적 호소 ( 2:12-17 )
167
III. 필수 조언: 그의 기름부음 ( 진리 ) 안에서 거하며 영원한 생명을 받으라 ( 2:18-3:8 ) 201
A. 거하라는 조언에 담긴 세 가지 고려 사항 ( 2:18-21 )
205
B. 너희 안에 거하는 진리 ( 2:22-26 )
223
C. 거하라는 명령 ( 2:27-29 )
235
D. 거하는 자가 받을 영광 ( 3:1-8 )
247
IV. 핵심 가르침: 사랑, 행함, 신뢰 ( 3:9-4:6 )
271
A. 서로 사랑하라 ( 3:9-18 )
275
B. 사랑의 확정 ( 3:19-24 )
295
C. 선택으로의 부르심 ( 4:1-3 )
311
D. 선택의 확정 ( 4:4-6 )
321
V. 근본 명령: 하나님의 사랑 ( 4:7-14 )
329
A. 사랑을 위한 첫 번째 권고 ( 4:7-10 )
333
B. 사랑을 위한 두 번째 권고 ( 4:11-14 )
345
VI. 실례를 통한 호소: 새로워지고 확장된 사랑의 초대 ( 4:15-5:15 )
357
A. 주어질 보증을 곁들인 선언적 초청 ( 4:15-16 )
361
B. 사랑의 칭찬 ( 4:17-21 )
369
C. 믿음의 주관적 측면에 대한 칭찬 ( 5:1-5 )
383
D. 믿음의 객관적 측면에 대한 칭찬 ( 5:6-12 )
399
E.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을 칭찬: 확신의 기도 ( 5:13-15 )
417
VII. 마지막 훈계: 목회적 조언, 확신, 주의 ( 5:16-21 )
429
A. 죄인과 죄에 대한 조언 ( 5:16-17 )
431
B. 묶는 끈: 서로 공유하는 확신 ( 5:18-20 )
443
C. 마지막 목회적 호소 ( 5:21 )
453
요한이서 요한이서와 요한삼서 서론
461
I. 인사말: 요한의 진리 사랑 ( 1-3 )
467
II. 요한의 기쁨과 우려 ( 4-8 )
475
III. 요한의 경고 ( 9-11 )
487
보론: ‘호 프로아곤’을 향한 경고
493
IV. 요한의 마지막 인사 ( 12-13 )
497
요한삼서 요한삼서 서론
503
I. 가이오에게 문안 ( 1-4 )
509
II. 가이오에 대한 칭찬 ( 5-8 )
517
III. 디오드레베 문제 ( 9-10 )
527
IV. 마지막 권면과 칭찬 ( 11-12 )
535
V. 마지막 인사 ( 13-15[13-14b NIV] )
541
참고문헌_ 546
요한서신
| 시리즈 서문 |
BECNT 시리즈로 알려져 있는 베이커 신약 성경 주석의 핵심 관심사는 잘 알려진 복음주의 사상 체계 안에서 학문적 깊이와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 주석적인 세부 사실과 전체에 대한 안목, 비판적인 문제들과 신학적인 깨달 음을 결합시키는 주석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본문에 대한 깊이 있고 독립적인 검토에 주목하는 학자에서부터, 견고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강해를 갈망하는 생각 있는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 은 독자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석의 핵심 목적은 유일하게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 씀인 성경에 대한 설교와 강해에 직접 연루되어 있는 목사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있다. 이 점이 이 시리즈 주석의 직접적인 특징이다. 예 를 들어 진지한 성경 해설자는 난해한 질문들을 다루지 않는 피상적인 주석 에 의존할 수 없고, 또는 일어날 수 있는 문제는 모두 포함하려고 애쓰는 백 과사전과 같은 주석에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 ( 비록 도 ) 에
선별된 전문적인 사실들은 추가 주석 부분에서 따로 다루기는 해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이 주석의 목표다.
또한 주석 문제들을 그 자체의 유익을 위하여 다루는 것, 즉 전체적인 주장 의 취지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특별히 피하려고 노 력했다. 나아가 한 문단을 생각의 주요 단위로 다루는 강해를 위하여 한 절씩 강해하는 강해 방법을 포기하는 것도 ( 개별
저자들의 재량에 따름 )
이 노력의 일환
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주석들은 주장의 전개 과정을 강조하고, 명백히 각 8
시리즈 서문
본문을 이전 및 이후 본문과 관련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분명하게 문맥 속에 서 본문의 역할을 파악하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책임 있는 주석이라면 출처가 어디든 최근의 학문적 연구 결과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주의 신학 전통의 배경 속에 서 이런 시도를 하게 되면 얼마간 도전도 받게 되고, 과거의 결과가 반드시 추천할 만한 견해가 아닌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 복음주의 학자들 은 비판적인 학문을 참된 교류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깎 아내리려는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경우에는 이 교류 가 도를 넘어 신학적 차이들이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비판적인 학문과 동화되 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시 작한 연구의 결과가 아무 차이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 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전통적인 견해들을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 고, 성경 본문이 이 견해를 지지하든지 지지하지 않든지 간에, 본문을 정확히 설명하는 데 전념한다.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고수되어 온 견해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들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고 있는 한, 단순히 인기 있는 이론을 취하기 위하여 이 견해를 쉽게 포기하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 요한 것은 기고자들이 성경의 신빙성과 본질적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교회 일치 신조들이나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다양한 가르침들과 같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교리를 성경에 대 한 적법한 이해에서 나오는 것으로 판단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깊은 성경 해석을 위한 적절한 뼈대를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의심할 것 없이 이런 출발점에 따라 연구를 하게 되면, 때때로 본문에 대하여 생소한 견해를 낳기 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편견 없 이 본문에 접근하는 저자들은 절대로 이런 위험에 빠질 우려가 없다고 말하 는 것을 우리는 거부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적 전제들 ( 어쨌든 주석자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 을 성경 해석 의 장애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신학적 진공 상태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 하기 바라는 주석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의 전체 작품에 대한 철학적 준거 틀 없이 또는 그의 사상을 상황 속에 의미 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하 는 이차 철학적 범주들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은 오 류에 쉽게 빠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주석을 기고한 학자들은 다 양한 신학적 전통에 속해 있는 자들이고, 그들은 모두 이 일반 원리들을 적절 히 적용하는 데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결 론적으로 진정 중요한 것은 이 시리즈가 원래의 본문을 정확하게, 분명하게 9
요한서신
그리고 의미 있게 현대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제시하느냐의 여부다. 각 본문을 다룰 때 두드러진 부분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즉 서론적 주석, 구조에 대한 설명, 결론적인 요약이다. 헬라어 본문에 대한 사본들의 이문 ( 異文 ) 은 저자의 번역 속에서 관련 단어나 어구 둘레에 반 ( 半 ) 괄호 ( 예, 「Gerasenes」 ) 표시를 하고, 그렇 게 함으로써 독자가 사본 문제에 대한 설명을 보도록 강해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추가 주석”을 찾아보게 할 것이다. 자료 표기는 저자 - 연대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이 방식에 따르면, 기본적인 언급이 저자의 성+연도+면수 ( 面 數 ) 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Fitzmyer 1981: 297이다. 이 방식에 대한 유일한
예외로는 잘 알려진 참고문헌들이 있다 ( BAGD, LSJ, TDNT ). 참고문헌은 책 마지 막 부분에 들어 있다. 로버트 야브루 ( Robert Yabrough ) 로버트 스타인 ( Robert H. Ste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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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서문 |
오랜 기간 거듭 연구가 이루어진 성경에 대해 고된 연구가 녹아든 책을 또 한 권 내면서 굳이 그 정당성을 설득하는 과정은 주석가에게 으레 있는 일 이다. 요한서신 주석만 해도 교부 시대 이래 1980년대 초반까지 나온 것이 어 림잡아 백 권이 넘는다 ( Schnackenburg 1991: 306-309의 목록을 보라 ) . 그 이후에도 대 충 십수 권 이상이 늘었다. 탁월한 신선함, 전례 없는 풍성함, 타의 추종을 불 허하는 포괄성을 기대한다면 나는 이 책이 그렇다고 굳이 변호하려 들지 않 겠다. 서신서 길이 정도의 매우 짤막한 성경이라도 그것을 충분히 평가하려 든다면 평생 업으로 삼아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그럼에도 출판사는 작품 하나를 위해 평생을 기다리지 않는다 ( 그래도 베이커 아카데미는 욥의 인내로 이 책을 기다 려 주었다 ) .
내가 쓰는 것은 그 범위도 제한적이며, 시야가 넓은 것도 아니고, 통
찰력 또한 제한적이다. 아돌프 슐라터 ( 1852-1938 ) 는 은퇴를 앞두고 자신이 출 간한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살펴보고 낯이 뜨거운 것이 마치 범죄 현장처럼 보인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 Neuer 1995: 126 ) . 전문가가 이 주석을 본다면, 범죄 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수한 단점에 직면할 준비는 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석이란 것이 창작 소설이나 역사 소설이 아니어서 강해를 중심으로 두어 야 하기에, 주석이 갖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관찰과 서술을 통해 드러난 진 실을 전달하는 일에 있을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나는 더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변변찮은 사람이라도 복음을 증언하는 경우라면 그의 말에 하나님의 약속이 담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오덴 ( 2003: 83-96; 참고, Maier 1994: xiv ) 도
이 부분을 설득력 있게 강조한다. 거의 지구 전체가 말씀 중심 11
요한서신
의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일 정도로 기독교가 천문학적인 규모로 성장한 일이 바로 이 사실을 반증한다 ( Jenkins 2002; 2006; 서구 성경학계와 교회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친 후기 기독교 사상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과 관련해서 Shiflett 2005를 보라 ) .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해석가가 일구어 낸 주해의 결실처럼 지
금 내가 펴내는 이 책도 죄에 대해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려서, 성경의 지혜에 이끌린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아직은 예수를 내 눈으로 목격 하지 못했다. 그것은 1세기가 끝나기 훨씬 전에 예수를 따랐던 자도 마찬가지 였다 ( 참고, 벧전 1:8 ) . 그러나 그들은 엄혹한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살아 있는 신 앙 속에 내재한 분명한 확신을 잃지 않았다. 여러분은 내가 이 책 여기저기서 우리 시대에 이들의 모범을 재현하고 있는지 판단해 주기 바란다. 이 책의 중요한 강조점을 몇 가지 말해야겠다. 1. 예수의 사역이나 가르침이 갖는 여러 측면을 사도 요한의 기록에 연결 시킨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사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 수의 지상 사역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요 한이 수십 년 후 자신의 편지에 꽤 직접적으로 흔적을 남긴 것이라고 여겼다. 이보다 더 흔하게 이 세 편지는 “요한신학”의 분출 또는 구체 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에 최소한의 근거를 둔 공동체의 산물로 보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전통과 신앙 속의 예수”에 초점을 두고 요한서신을 신학적으로 연구하면 이것이 분명해진다.1) 보다 설득력 있 는 논지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뒤에 한 명 이상의 목격자 증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최근에 보컴 ( 2006 ) 이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2. 요한서신과 70인역 사이의 언어적 결속을 탐구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컴퓨터 보조프로그램을 사용했다. 이 정도로도 지금까지 나온 어떤 연 구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분명하게 70인역과의 평행을 다루었다. 3. 이 책은 본문 단위별 주석 끝에 소개하는 ‘추가 주석’에서 NA27에 나온 이독을 모두 다루었다.2) 이렇게 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a)
1) Lieu 1991: 71-79: 예수의 “오심, 죽음, 지속된 현존은 회고나 반추를 위한 과거 사건이 아 니다” ( 75 ) . “신앙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지속적인 실존을 진정으로 규정해 주는 하나님과의 관 계” ( 75 ) 와 더불어 “신자에게” 예수의 “현재성이 갖는 의미”에 대한 관심이 잦아들고 있다. 나는 요 한서신 저자에게 예수의 과거 현현은 현재 예수에 대해 갖는 확신뿐 아니라 충성을 요구하는 하나님 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규범적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요한일서 도입절도 주장하듯, 이 사실은 예수 와 예수의 생에 있던 많은 사건과 목격자 사이의 연관성에 크게 기여한다. 2) 본 주석 집필 준비 중에 요한의 세 서신 모두에 대해 전반적으로 상세한 본문비평적 분석이 등장 했다 ( Aland et. al. 2003a; 2003b; 2005a; 2005b ) . 주석 과정에서는 이런 자료를 활용했지만, 본문 이독 논의에서는 NA27 비평 장치와 거기에 인용된 사본에 국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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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이전에 어떤 책도 이렇게 다룬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b) 학생이 요한일서를 가지고 본문 주석 작업을 배우는 경우가 많다. 그 러면서 비평 장치를 접하고 곤혹스러워하다 이내 교수님에게서 이독 에 주목하라는 충고를 받는다. 하지만 주요 이독 부분을 제외하고는 실제 주석에 별로 도움을 느끼지도 못하고, 모든 이독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에도 수업 시간이 너무 짧다. 본 주석으로 초보 학생도 본문 이독까지 아우르는 세부적인 관심이 갖는 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바 란다. (c) 나는 사본 필사의 상당한 오류와 사본 집단 사이의 교차 수 정이 신약 성경 본문의 많은 부분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최근 주장 ( 신경 쓸 것이 못 된다 ) 에
한동안 관심을 집중했다. 요한서신에 나타난 모든 이
독을 살펴보면 ( 실제로 ) 대부분 분명히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요한서신의 저자가 쓰려고 했던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타당한 것인 지 의심할 합리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 신약 성경 본문의 무결성에 드 리워진 의심뿐 아니라 널리 애용하는 신약 성경 개론 ( Ehrman 421; 2004: 479-489 ) 에서
1997: 414-
학부생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러 가지 의혹도 분
명 과장된 부분이 있는데, 요한서신도 마찬가지다 ( Ehrman
2005과 Wallace
2006의 대응을 보라 ) .
4. 지난 몇십 년 동안 요한서신은 역사상 수적으로 비교 불가할 정도로 많은 양의 주석을 보게 되었다. 그중 일부 ( Marshall
1978; R. Brown 1982;
Schnackenburg 1992; Strecker 1996; Painter 2002; Witherington 2006 ) 는
다양한 측면
에서 탁월하다. 다른 주석도 각기 주목할 만한 강점이 있다 ( Smalley 1984; 2007;3) Stott 1988; Loader 1992; Sloyan 1995; Burge 1996; Rensberger 1997; 2001; Kruse 2002; 2003a; Akin 2001 ) .
다른 작품 역시 관심을 가질 만한 기여를 내놓
았다. 이처럼 넘쳐나는 연구의 결실에 편승하여 최근에 놀라울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오는 배움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주석 시리 즈가 요구하는 지침을 지키면서 이 모든 내용을 통합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다른 연구와 교류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보컴 ( 2006 ) 과 카라구 니스 ( 2006 ) 의 획기적인 연구는 원하는 만큼 충분히 통합할 수 없었다. 두 작품은 본 주석의 출간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입수할 수 있었다. 5. 주석가가 대체로 최근 해당 분야의 원로를 토론의 주요 파트너로 삼는 것이 학계의 관례인 반면 나는 ( 우리 여 ) 시대와
시대가 보유한 지성과 중요한 발전을 고려하
문화를 넘나들며 다양한 사상가를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나
는 일정 부분 Ancient Christian Commentary on Scripture ( Bray
3) 1984년 출판된 스몰리의 주석 개정판이 2007년도에 나왔는데 본 주석에서 고려하기에 너무 늦었다.
13
요한서신
2000 ) 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 ( 요한
일서를 다룬 그의 여러 설교는 우리의 유산이다 ) 뿐
아니라 니케아 공의회 이전 교
부도 다양하게 살폈다. 집필 과정에서 루터 ( 1967 ) 와 칼빈 ( 1988 ) 은 늘 내 곁에 있었다. 홀츠만 ( 1908 ) 의 고전적 자유 노선을 탐구했으며, 슐라 터 ( 1950 ) 의 대조 주석도 연구했다. 그 결과, 이 주석은 더 최근에 학계 가 일군 풍성한 업적 ( 앞선
강조점을 보라 ) 과
취사선택하여 인정받은 주석
과 연구로 이익을 보려 한다. 네안더 ( 1852 ) 도 태어날 때 다피트 멘델 이라는 유대식 이름을 가졌으나 기독교로 개종하고서, 튀빙겐학파의 발전과 더불어 기독교 사상과 신앙고백을 향한 도전의 출현으로 인해 사분오열로 고군분투하던 독일 기독교에 힘과 영감을 불어 넣는 집필 활동을 했다. 좋든 싫든 이것으로 내 주석에 최근 발전한 후기 근대의 시대적 관심사뿐 아니라 고전에 나타난 기독교 관심사를 다루는 감각 을 얻을 수 있다. 에릭슨의 주장이 사실처럼 들린다는 것은 인정한다. “우리가 가진 신학을 현재의 대중적 견해와 더 밀접히 연계할수록, 특 별히 문화적 지적으로 변화 속도가 가속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대중적 견해는 더 빠르게 무의미해질 것이다” ( 2003: 26 ) . 나는 토론 상대를 선 정하면서 내가 요한서신에 접근한 방식이나 내가 요한서신에서 발견 한 내용이 보잘것없는 인생의 변덕스러운 생각 안에 지나치게 제한되 지 않도록 노력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주석은 영향사에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이것이 점점 건설적인 성경 해석을 위한 근간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 참고, Bockmuehl 2006 ) . 6. 독자가 이 주석에서 편협한 충성심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각주에서 드러나겠지만 참고문헌 구성은 북미와 영국 ( 즉,
서구 ) 학계가
주를 이
룬다. 1970년 초에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고, 1985년 이래 학문을 힘써 온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거의 이십 년 동안 무슬림, 아프리카, 동유럽 같은 곳에서 온 동료와 학생에게서 많은 것을 배 웠다. 북미라는 환경에서 아시아 같은 다른 국가의 해외 동료나 학생 과 함께 연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특권이었다. 내가 요한서신을 읽 으면서 솔직히 고백하는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추종하는 이들, 수십 년간 기독교에 정치적 공세를 가한 뒤 나라를 재건하려는 후기 마르크 스주의 국가의 시민, 싱가포르의 어느 목회자에 대해 과연 요한서신이 도드나 불트만의 직계 계승자처럼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크게 관심 을 가졌다는 점이다.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 신마르크스주의, 이슬 람주의, 아시아 전통 계급 사회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요한의 조언은 어떻게 간주해야 하겠는가? 자신이 고백하는 신앙을 위해 죽어가는 14
저자 서문
그리스도인에게 요한은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그것도 어느 정도는 요한서신 같은 기록에 근거를 둔 믿음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이런 질 문은 전형적으로 서구 학계가 다루지 않는 것이다. 서구 학계는 과거 “하나님”을 연구하던 것이 점점 고상한 “성경 연구”나 열정이 사라진 “종교”를 추구하는 양상으로 변모했다. 이 모든 것에 덧붙여, 나는 성 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고백을 가진 미국 장로교회 ( PCA ) 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런데도 나는 최근까지 성경 어느 부분이 여전히 사 실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주류 교단에 속한 한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세계적인 이유와 내가 직면하고 있는 지역적 인 이유 때문에라도 나는 요한의 메시지가 불변의 진리인가 하는 문제 를 매우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하고, 또한 여러 가지 증명 불가능한 주요 가설에 기반을 둔 역사 문헌 ( 그것들은 문학인가? 신학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 다른 무엇인가? ) 에
가능한 해석을 찾는 것은 목표로 하는 이론을 점검하고 실
행하는 것을 집필의 주안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위에 언급한 여섯 가지 강조점은 동시에 결점도 된다. 어떤 방향으로 향 한다는 것은 다른 방향은 탐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슈바 이처 ( 1989: 7 ) 가 한 말에 위로를 얻는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점점 뚜렷해진다. 그런데 이 통찰로 자유로워졌다. 이것 은 아내와 고심했던 수많은 의논으로 분명해졌고, 계속해서 거듭 떠오르는 생각이다.”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없 는 일을 하는 이에게 더욱 감사를 느낀다. 그리고 내가 가진 은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마음 편히 수용하는 법도 배우는 중이다.” 수년에 걸쳐 진행된 이 주석 집필 과정 여러 단계마다 나를 도운 조교 학생 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 그중에 특별히 존 번더 브루기, 제프 드라이든, 로이 크리스천스, 조 너선 데이비스, 둥워느그 한, 링 뤄, 마크 버콜즈, 칼 파크, 앤디 내슬리가 있다 ) . 나를
이 주석 시리
즈에 기고할 수 있도록 초대해 준 베이커 아카데미 전 편집자 짐 위버와 그 초대를 계속 유지해 준 현 편집자 짐 키니, 웰스 터너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 한다. 특별히 원고의 모든 부분을 꼼꼼히 점검하고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제안 을 아끼지 않은 웰스에게 감사한다. 실바에게 빚을 졌다. 그가 많은 실수를 교 정해 주며 명료한 진술이 나오도록 자료를 개선시켜 주는 도움을 베풀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긴 실수에 대한 책임은 내게 있다. 커버넌트 신학교 관계자와 안식년에 연구가 가능하도록 배려해 준 트리니 티 복음주의 신학교에 감사를 드린다. 이 작품을 휘턴 대학 ( 일리노이 ) 명예 교수 월터 엘웰과 줄리어스 스콧에게 바 15
요한서신
친다. 두 분은 약 25년 전 내가 가진 연구 능력의 한계를 과감하게 눈감아 주 면서 신약비평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가르침과 장학금과 많은 비용을 들여 은혜가 무엇인지 자주 보여 주신 그들의 헌 신 ( 1980년 가을 나는 대학원 조교로 메릴 테니를 도왔다 ) 은 휘턴 대학원생의 삶을 풍성하 게 했다. 이 주석 곳곳에서 그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묻어나길 바란다.
16
로도
로도
기아 브루
니케아
칼케돈
지중해
골로새
히에라볼리
(글라우디오) 라오디게아
아
밀레도
에베소
사데
두아디라
버가모
아시
그레데
에게해
드로아
무시아
비잔티움
흑해
버가
아
다소
아켈라이
살라미
안디옥
길리기아
갑바도기아
글라우디오 볼리?
더베
구브로
바보
아미소스
비두니아와 본도
(글라우디오) 이고니온 루스드라
밤빌리
비시디아
안디옥
디아 갈라 루가오니아
비두니온 글라우디오볼리
네오글라우디오볼리
아마스트리스
시노페
글라우디오 볼리?
지도
아
수리
21
요한일서
23
요한서신 서론
요한서신 서론 본 서론이 주로 요한일서에 초점을 두는 이유는 요한이서와 삼서가 교부 시대에 남긴 흔적이 훨씬 작기 때문이다. 세 편지가 하나로 묶인 후 1세기 넘 도록 기록 연대, 기원, 청중, 정경 수용 역사 같은 문제와 관련해서 토론할 구 체적 증거가 거의 없는 상태다. 요한이서와 삼서의 언어와 내용이 요한일서 처럼 요한복음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말할 수 있다 ( Weiss 1)
198에서 오래전에 증명한 것이다. Holtzmann 1908: 362도 보라 ).
1887-1888: 2. 186-187,
힐 ( Hill 2004: 450 ) 이 보여 주
듯, 1세기 말 이레네오 ( Irenaeus ) 보다 앞선 저술가 여섯 명이 요한복음과 세 편 지 중 적어도 두 편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2) 이는 세 편지가 구성되고 또 요한복음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일 것 이다. 정경 외 저술에 새겨진 요한 전통은 요한서신 저자가 자기 독자가 처한 상황에 무엇을 묘사하고 적용하려 했는지 그 생생한 기억으로 우리를 데려 간다.3)
본문 원본이 불확실한 고대 문헌을 해석할 때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기는 하나 실망을 느끼기 쉽다. 부분이든 전체든 요한서신은 파피루스 두 개를 포함하 여 ( Klauck 1991: 4 ) 육백여 개에 이르는 사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본문비평적 문제가 적은데”, 이에 대해 광범위하게 동의를 얻는 의견은 없다 ( 1991: 5, 8 ). 메츠거 ( Metzger ) 의 『헬라어 신약 성경 본문 주석』 ( Textual Greek New Testament ; Metzger 1994: 639-651 ) 은
Commentary on the
서른아홉 개 부분에서 본문 이형을
논한다.
1) 보컴의 관찰에 주목하라. 요한복음과 세 편지가 “한 저자의 ‘개인 언어’에 속하든 요한 학파 여러 저 자의 ‘집단 언어’에 속하든, 어쨌든 독특한 언어 사용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2006: 371). 2) 요한일서에 대한 교부 시대 자료와 인용 색인을 위해 B. Aland et al. 2003b: B98-B104를 보라. 요한 이서와 삼서에 대한 유사 자료로는 B. Aland et al. 2005b: B133-135를 보라. 3) 요한의 작품 사이의 상호 관계와 관련하여 더 심도 있는 논의로는 이 책의 여러 부분에서 아래 인용 된 작품과 요한서신 언어가 요한복음서의 언어와 공명한다는 점을 설명한 것을 보라(요한복음서 자 체 언어와 관련해 Lieu 2005를 보라). 요한서신을 관통하는 주요 쟁점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로는 주 석(Marshall 1978; R. Brown 1982; Smalley 1984: 2007; Schnackenburg 1992; Strecker 1996; Kruse 2000)과 기본 신약 성경 개론서(R. Brown 1997; Schnelle 1998; L. Johnson 1999; Carson and Moo 2005)를 보라.
25
요한일서
1:4(2회)
2:20
3:14
5:1
5:18(2회)
2:4
2:23
3:19(2회)
5:2
5:20(2회)
2:6
2:25
3:21
5:6(2회)
5:21
2:7(2회)
2:27
4:3(2회)
5:7–8
2:14
3:1
4:10
5:10(2회)
2:17
3:5
4:19
5:13
2:18
3:13
4:20
5:17
나열된 본문 이형 사례가 중요하다. 먼저 연합성경공회 ( United UBS )
Bible Societies,
편집위원회가 신약 성경을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하면서 이것을 성경 번역
시 꼭 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이형은 오늘날 학문 연구를 위한 표준 헬라어 본문이 어떻게 남았는지 결정할 때 그 논의의 중심 에 있었다 ( NA27=UBS4 ).4) 이 책이 이 같은 이형을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본의 편 차가 해석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풍부한 사본을 통해 모호함이 존재하는 모든 부분에서 확실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수십 년 전에 요한서신에 대해 UBS 편집위원의 노력이 있었지만 본문 연 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독일 뮌스터 대학교 신약 성경 본문 연구소 ( The Institute for New Testament Textual Research ) 가
자체적으로 연구 조사한 결과 요한일
서 ( B. Aland et al. 2003a; 2003b ) 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 ( B. Aland et al. 2005a; 2005b ) 에 서 발견한 인상적인 결과를 출판했다. 그들이 본문 결정에 중요하다고 여긴 것은 143개 사본이었다 ( 위에서 주목한 현존 600여 개 증거가 전부 본문 비평에 중요한 것은 아 니었다 ).
파피루스 2개 ( î9 [ 3세기, 요일 4장의 일부 절 포함]과 î74[7세기, 요한서신 많은 부분을 포
함] ),
대문자 사본 13개, 소문자 사본 117개, 성구집 11개 ( B.
B91 ).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본 37개는 배제했는데, “본문 역사에 그리 중요하
Aland et al. 2003b:
지 않기 때문이다”( 2003b: B91 ). 결국은 180여 개 사본을 다룬 셈이다. “요한일 서의 본문 이형”은 761곳에 나오는데, 대부분 오탈자, 어순, 부주의한 실수같 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되는 필사자의 가벼운 실수에 해당한다. 결국 “요한일서의 단순한 문체 덕분에 어렵고 심각한 이형을 만들어 내는 본문은 거의 없다.” UBS 편집위원처럼 뮌스터 연구소 학자도 요한일서에 논의를 필요로 하는 본문이 약 40군데 정도 된다는 것을 찾아낸다. 초기 UBS 위원회가 보여 준 사본의 안정성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확인하면서, 뮌스터 연구소는 다년간 막대한 시간의 수고를 더해 최근 NA27/UBS4 요한일서 헬라어 본문은 세 부분 4) 실바(Silva)가 (사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일부 이독(예, 예수 그리스도/그리스도 예수)은 번역상은 몰라도 주석과 신학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번역이 어려운 일부 이독은 주석이나 신학 에 사뭇 중요할 수 있다.
26
요한서신 서론
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 (1) 1:7의 ‘데’( δέ, “그러나”) 는 생략해 야 한다. (2) 5:10, ‘엔 헤아우토’( ἐν ἑαυτῷ, “자기 안에” ) 는 ‘엔 아우토’( ἐν αὐτῷ, “그 안에” ) 로
바꿔야 한다. (3) 5:18, ‘아우톤’( αὐτόν, “그를” ) 은 ‘헤아우톤’( ἑαυτόν, “자신
을” ) 으로
바꿔야 한다. 학계에서 신구의 학문적 협업으로 이룬 이 같은 성과는
매우 가치가 큰 보강 증거로 해석된다. 요한일서 본문은 무척 확실한 편이다. 손으로 필사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무수한 이독이 다양한 어휘의 잠재적 가능성을 만들어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원본이 정확히 무엇일지 알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서 비관론 에 빠질 여지가 없을 정도다. 요한이서에서 논의할 수 있는 본문 이독은 1, 3, 5, 8 ( 2회 ), 9, 11, 12, 13절 이다 ( Metzger
1994: 652-654 ).
모두 흥미롭지만 해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요한삼서도 마찬가지다. 메츠거 ( 1994:
655 ) 는
4, 9, 15절을 논한다. 이
들 이형은 요한이서와 삼서 각각 30여 개가 넘는 이형과 함께 이 책에서 소개 하고 논의할 것이다.
저자 주석의 첫 번째 관심이 해석할 본문의 진정성을 따지는 일이라면, 두 번째 관심은 가능한 한 본문의 저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내가 취하는 입장은 카 슨 ( Carson 2000: 132 ) 의 주장과 일치한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학자 대다 수의 견해에 비추어 볼 때 ( 오늘의 주류와는 맞지 않을지라도 ), 나는 사도 요한이 전통 적으로 자기 이름이 붙은 네 번째 복음서와 세 편지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 우 크다고 생각한다.” 요한서신의 저자를 요한복음서의 저자와 동일하며, 예수의 제자이자 세베 대의 아들인 요한이라고 보는 이 입장을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카 슨과 무 ( Carson and Moo 2005: 229-254 ), 키너 ( Keener 2003: 81-114 ) 5)가 쓴 신약 성경 개론이나, 단행본으로 블롬버그 ( Blomberg 2001: 22-41 ) 의 책을 보면 된다. 새롭게 부상하는 힐 ( 2004 ) 의 작품도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야리드 ( Yarid 2003 ) 는
요한일서와 다락방 담화 ( 요
13-17장 )
사이의 자세한 비교에 주목한다.
최근 독일학자 숄티세크 ( Scholtissek 2004 ) 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사이의 밀접 한 관계에 대해 썼는데, 요한일서가 네 번째 복음서에서 취한 요소를 편지에
5) 최근 세대의 다른 주석가나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요한의 저작성을 확증하려는 입장으로는 다음이 있다. Robinson 1985; Ridderbos 1997; Kruse 2003a. 이 관점을 유지하는 더 오래된 주석가(B. F. Westcott, E. Abbott, A. P. Peabody, J. B. Lightfoot, W. Sanday, H. P. V. Nunn)에 대해 Bauckham 2006: 413, n2을 보라.
27
요한일서
다시 썼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런 연구는 모두 확실한 자료를 인용한다. 마지막으로 보컴 ( Bauckham 2006: 358-411 ) 은 요한복음 과 요한서신의 목격자적 기원에 대해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다. 보컴은 요한 복음이 언급한 사랑받는 제자가 요한이며 결국 서신을 기록한 장로라고 생각 한다. 나도 보컴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다. 요한의 작품은 문학적 발명이나 경 건의 묵상이 아니라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불변의 진리에 대한 요한 개인의 역사적 회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저자 문제 쟁점의 본질 이 문제를 그냥 두어도 된다. 하지만 시리즈 서문이 명시하듯, 이 책은 “특 별히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을 설교하고 주해하는 데 연관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 이런 독자는 특히 본문이 말하는 것이 참인지 알고 싶 어 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고백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배척과 핍박 을 받는 나라에서 요한의 편지를 읽고 가르칠 것이다. 책임 있는 교사라면 누 구도 정확하지 않은 고문서에 근거해 사람을 위험과 죽음에 내몰기를 원하지 않는다. 요한일서 도입 부분은 저자가 예수의 생애를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렇다면 편지의 신뢰성은 상당히 향상된다. 요한이서와 삼서도 서로 의미가 밀접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 요한일서와도 ), 명확하게 그려진 편지 내용의 중요성이 극대화된다. 요한서신에서 전제하고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는 진지 하게 생각해서 개인적인 헌신을 바치기에 합당한 구주와 주인의 모습이다. 루터 ( Luther 1967: 219 ) 는 요한일서를 두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놀라운 편 지다. 이 편지는 고통당한 심령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더욱이 문체나 표현 방식이 요한의 것이다.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무척 아름답고 부드럽게 예수를 그려 주고 있다.” 슈트라우스 ( D. F. Strauss 1808-1874 ) 는 일반적으로 사복음서가 다룬 사건 정보 의 직접적인 출처로 사복음서를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복음서의 지위를 파괴하는 데 열심히 앞장선 최초의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6) 그 후로 복음서 비평 세대가 증언하듯 슈트라우스는 많은 이의 평가를 받으며 크게 성공 했다. 그랜트와 트레이시 ( Grant and Tracy 1984: 12 ) 는 “근대 비평 연구가 1세기 이 상 영향을 끼치는 바람에 예수의 사상을 해석하는 데 요한복음을 이용할 수 6) 이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주요 자료로 Dawes 1999를 보라. 슈트라우스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C. Brown 1985: 특히, 183-187을 보라. 심지어 오늘날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요한의 진실 성에 확신하지 못한 모습을 명랑하고 신랄하게 비웃는 Trueman 2005를 보라.
28
요한서신 서론
없게 되었다”라는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 ( 1972: 69 ) 는 “복음서가 일 차 목격자나 진술된 사건과 거의 동시대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성경 역사의 신빙성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논쟁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을 예수 사역의 일차 목격자가 기록했다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 코 반박되지 않았던 고전적 입장 중에 웨스트콧 ( Westcott lxvii ) 이
1881: v-xxxv, 1908: ix-
있다. 이와 관련한 웨스트콧의 주장은 실질적으로 확증되었고, 최근까
지 블롬버그 ( 2001 ) 나 이미 위에서 언급한 주석 등 여러 책에서 확장되었다. 라 임 ( Reim
2005: 101n15 ) 은
“분명한 것은 요한의 예수 담화에는 예수의 공관복음
말씀과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또는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 없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라고 분명히 밝힌다. 요한의 저술과 그것이 말하는 예수 와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추정되는 만큼 상당한 규모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많은 양심적 설교자와 학생과 사상가는 현저하게 많은 학술 문헌 이 요한 전통과 예수와 예수 시대 사이의 상당한 근접 가능성에 심각하게 역 행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 늘날 대다수의 합의를 매력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 기 위해 최근 수십 년간 요한신학이 어떻게 연구되었는지 그 특징을 짧게라 도 제시하려 한다. 나는 요한과 일차 목격자의 저작 가능성을 거부하는 합의 가 존중은 받지만 그것에 경의를 표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독자에게 보여 주 고 싶다. 이는 카슨, 쾨스텐베르거 ( Köstenberger ), 키너, 블롬버그, 힐, 보컴 등의 학자가 이루어 놓은 고단한 선험적 연구 ( 여기서 제언하거나 확대할 의도는 없다 ) 를 평 가 절하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들은 몇 가지 유리한 입장에서 합의의 문 제점을 지적했고, 더 신뢰할 만한 역사적 설명의 타당성을 수립했다. 반대 등 결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 최근 일부 지배적 입장을 볼 수 있는 보다 큰 배경 을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요점은 본문을 읽어 나가는 이 책의 출발점을 위해 타당성 ( 위에 언급한 학자의 작품에서 너무 경직된 타당성을 발견한다 ) 을 유연하게 제공 하자는 것이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 정경에서 제거 초기부터 이어지는 교회사 전체를 놓고 보면, 대체로 요한이라 불리는 예수 의 제자가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요한일서도 기록했다고 여겨졌다 ( 같은
견해
Witherington 2006: 394, 396 ). ( 요한이서와 삼서 같은 경우 편지가 짧고 한계가 있는 까닭에 초기 기독 교 역사에서 폭넓게 읽히고 승인을 받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오늘까지 대부분의 교회는 자기 성경에서 요
29
요한일서
한이서나 삼서 없이 평생을 지냈을 수도 있고 그것이 빠진 성경은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수 있다. )
렌스
버거 ( Rensberger 2001: 2 ) 는 “일찍이 2세기까지 기독교 전통은 요한서신의 저자 를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으로 규정했다”라고 설명한다.7) 기독교 초기 수 세기를 거쳐 에우세비우스까지 신약 성경의 이 책 다섯 권에 연루된 이는 이 요한 외에 없다.8) “매우 이른 시기부터……적어도 최종 형태 의 네 번째 복음서 저자가 요한서신을 쓴 사람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심 했다”라는 위더링턴 ( Witherington 2006: 395n5 ) 의 구체적인 주장은 설득력이 없으 며, 메르브의 이쇼다드 ( Isho‘dad of Merv, 9세기 ) 의 진술에만 의존한 듯 보인다. 이 와 비슷하게 퍼킨스 ( Perkins
2004: 19 ) 도
복음서 저자가 요한서신 중 최소한 한
권의 저자라는 생각이 4세기 후반에 발전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증 거는 정확히 그 반대를 증명한다. 일부 집단에 잘못된 정보가 침투하여 흥미 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계몽주의 시대 ( 18세기 ), 특히 독일에서 성경 연구에 혁명적인 접근법이 확립 되었는데, 여기서 루터파와 개혁파 학자의 성경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두드 러졌다. “19세기 독일에서 중요한 운동이 그 정점을 찍었다”( Grant 1984: 5 ).
and Tracy
이 운동은 가장 성공한 혁명 운동이었다. 그것은 이 운동이 뛰어나서
가 아니었다. 예수의 추종자가 예수의 인격과 메시지를 이해한 것에 대한 의 심, 회의, 적대감이 예수 생존 시부터 이미 악독했기 때문이었다. 신약 성경과 기타 자료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통해 ( 후기 ) 근대 서구 사회의 지적 신념 ( 의심, 회의론, 십자가의 메시지를 향한 적대감이나 최소한 무관심 ) 이
자랑하는 특징이 복원될 수
9)
있을 것이다. 힐 ( 2004: 204-293 ) 은 2세기 영지주의가 요한에게 어떻게 반응했 으며 또 어떻게 요한의 사상을 적대시하거나 파괴하는 방향으로 대응했는지 보여 준다. 기독교 주장에 대한 회의주의는 180년 무렵 그리스도인 ( 그리고 유대 인 ) 을
향한 켈수스의 강력한 “지적” 공격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 Hoffman 1987 ). 근본적인 의미에서 계몽주의 성경 연구는 지적인 승리만큼 이나 정치적 승리도 보였으나,10) 아직은 기독교 신앙을 향한 새로운 반대에 7) 하지만 렌스버거는 요한이 저자임을 부정한다. 브라운(R. Brown 1982: 14n26, 11)은 에우세비우 스(Eusebius)가 세 편지의 일반적인 요한 저작설을 거절한다고 언급하면서도 사도 요한이 세 개 모 두 기록했다는 에우세비우스의 주장을 인용한다(Demonstration of the Gospel 3.5.88). 8)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는 요한계시록의 저자 문제를 제기하며 다 른 요한일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복음서와 편지가 같은 저자의 손에서 나왔다는 자신의 확신 은 분명히 한다(Eusebius, Eccl. Hist. 7.24.7; 7.25.6-8). 9) 기독교 성경의 일부로 이해된 구약 성경의 구원 메시지와 신약 성경 사이의 상당한 연속성을 고려해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불신하는 많은 (후기) 근대주의 운동뿐 아니라 스스로를 드러내어 문제를 일 으킨 경우는 이미 구약 성경 선지서에서 잘못된 히브리/유대 신앙과 행동에 대해 비판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10) 성경 연구에서 계몽주의가 자랑하는 최고의 지적 성취는 역사적 해석 방법인데, 이를 통해 자신들 이 해석한다고 주장하는 성경에 대하여 교회의 해석학이 얼마나 불충한 것인지 보여 주려 했다. 이
30
요한서신 서론
이른 것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회자를 양성했던 유럽 개신교 대학 교에서 점차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고대의 불신으로 돌아가는 양상을 안착시 키도록 활력을 불어넣게 된다. 예를 들어, 슐라터 ( Adolf Schlater ) 는 1871년 스위 스 신학교에 등록했는데, 교구 목회를 준비하며 자신의 철학 교수 프리드리 히 니체 ( Friedrich Nietzsche ) 에게 수업을 들었다. 슈트라우스는 두 세대 전에 역 사적 기독교를 거부하는 교수에게 신약 성경을 배웠다. 그 교수 ( F.
C. Baur ) 는
젊은 시절 헤겔 ( Hegel ) 의 만유 내재 신론에 우호적이었다. 결국 이것은 튀빙겐 학파를 기반으로 영구히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매김했다 ( Harris 1975 ). 기독교 신 앙고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거나 사라진 사람에게 신학 교육을 넘겨주면서 그 영향은 후기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란 세대에게 고스란히 흘러 들어갔다. 물론 점차 확대된 합의는 최소한 기독교 진리에 대한 고대의 반대 정서에는 잠재하지 않았던 비판적 통찰력까지 제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계몽주의 시대에는 애당초 기독교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으면 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이 역사적 기독교의 신학적 통합 ( Oden 보라 ) 에
2003을
이르기를 거부했다. 거부를 정당화하고 다른 대체용 통합을 전개하기
위해 ( 영국의 이신론에서 발전한 ) 유럽의 합리주의, 헤겔의 종교철학, 리칠 ( Ritschl ) 의 자유주의, 소위 종교사학파의 교리학 같은 사상이 기독교 교리 안에 근본적 으로 내재된 역사적 근거를 점점 맹렬하게 공격했다.11)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주요 대학교와 신학교가 점차 후기 기독교의 교리를 기초로 성경을 가르 쳤다. 오늘날, 역사비평 ( 계몽주의가
지지하는 해석학적 접근을 편의상 가리키는 용어로 여전히
많은 성경학자 사이에 지배적으로 사용됨 ) 의
영향이 원칙적으로 신앙과 무관하다는 주
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 예, Culpepper 1998: 37; Schnelle 1998: 14; Ehrman 2004: 14 ),
성경 저자와 이질적인 신앙을 가진 자만 해당할 것이다. 성경 저자는 하
나님, 곧 세상을 창조했고, 역사를 주관하며, 물리적 시공간에 자신이 허락한 대변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에 성경을 유산으로 남겨 준 성경 저자 를 통해 명확하고 이해 가능하도록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예언의 근거로 삼았다 ( 참고, Grant and Tracy 1984: 3-4 ). 요한일서에도 이런 믿음의 고백이 많다. 요한일서 1장 1-3절의 역사적 근거가 그다음에 이어지는 십자 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요청하는 진술과 무관
들이 정한 역사적 정황 가운데 해석된 성경 본문의 철저한 조사에 신학 체계도 가져와 교리를 제거 하고 신학 체계를 수정하여 새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객이 전도되 었다. 몇 세대가 흐르면서 역사적 해석을 형성하는 교리(신학적 또는 철학적 체계)도 신선한 신학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가 왔다(Yarbrough 2004b를 보라). 최근 뜨고 있는 “성경의 신학적 해석”이 어느 정도 이를 설명해 준다. Cummins 2004; Vanhoozer et al. 2005를 보라. 11) 문학의 다른 분야와 함께 신약 성경신학 분야에서 발생한 이 과정을 자세히 보려면 Yarbrough 2004b를 보라.
31
요한일서
하다는 전제에 저자가 동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오늘날 2백 년 넘게 발전을 거듭한 후 이제는 여러 교육 기관에서 상당히 예측 가능하고, 전통적이며, 전문적으로도 의무가 된 관점12)은 학계에서 관례 적으로 저자 요한을 세베대의 아들 사도 요한과 분리하는 것이다 ( Schnelle 1998: 456; Ehrman 2004: 174; Witherington 2006: 395 ).
더욱이 네 번째 복음서를 쓴 “기자는
요한일서를 쓰지 않았다”( Perkins 2004: 21 ) 라고 주장한다. 이에 더해, (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는 )
요한의 편지 ( Holladay
2005: 521 ) 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한다 ( Schnelle 1998: 436-438; Rensberger 2001: 3 ).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심 지어 네 번째 복음서마저 예수를 따랐던 사람이 아니라 “포괄적인 전통에 근 거해 예수의 삶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여 자기 의사대로 진술한 후대 신 학자”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 Schnelle
1998: 474; 참고, Lincoln 2002 ).
이런 견해를 첨
단 학문의 대담하고 전위적인 발견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 세기 전 브레데 ( Wrede 1907: 230 ) 는 감탄할 정도로 솔직한 태도로 이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 요한의 ) 주요 의도가 실제 역사를 전승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면, 서사 에 등장하는 많은 특징이 우스꽝스럽고 터무니없게 된다. 역사적으로 말 하자면, 이어지는 특징 등 많은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뿐이다. 예수가 자 신의 처형이나 최후의 만찬에 대해 유대인과 소통했다는 것, 예수가 로마 핍박자와 요한신학을 논했다는 것, 예수의 간단한 말 몇 마디 때문에 무척 심각한 오해에 직면한 일, 예수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에서 교리 공식 이나 자기 청중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대한 반영을 사용했다는 것. 하지만 저자가 역사적 의도와 전혀 다른 의도에 이끌린 일은 누구나 안다. 그것은 바로 전해 받은 자료 ( 예, 구전 전통 ) 를 재구성하고 이상화 ( beseelen ) 하 며 그것에 많은 전승을 덧붙인 저자의 생각과 편견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 은 왜 그렇게 많은 정보가 우리에게 이상하고 기괴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인지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요한서신을 놓고 보면, 요한일서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세 서신 모두에도 사실로 간주된다. “의문의 여지없이, 쿰란 문서와
( 요한복음 ) 처럼
요한일서도
공동체 문서다”( Sloyan 1995: 44; 참고, Callahan 2005: 1-5 ). 이런 주장은 예수와 ( 요한의 편지가 독자로 하여금 믿고, 사랑하고,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 예
12) 참고, Grant and Tracy 1984: 5, “역사적 방법론은 여전히 살아 있다……역사적 방법론은 가장 열 렬한 옹호자를 통해 엄격한 신학자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경직성을 가지고 시작했다.”
32
요한서신 서론
수가 체현했던 하나님과 요한의 저술이 주장하는 내용 사이에는 침투 불가한 장벽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는 요한 전통 ( 요한복음 포함 ) 이 1세기 전반 기 기독교 ( 예수는 한다 ( Callahan
아니다 ) 에
2005: ix ).
대해 어떤 정보든 제시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최근 몇십 년 동안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새로운 탐구가
진척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개인적 친분을 가진 자, 곧 “예수가 사 랑하시는 제자”( 요 13:23; 19:26; 21:7, 20 ) 가 전하는 고백을 담은 저술의 명성을 회 복시키는 일은 답보 상태다. 사람들은 “요한의” 모든 저술을 후대, 기껏해야 예수 사후 몇 세대가 지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심지어 요한 저술의 기원을 2세기 중기나 후기로 볼 가능성도 있다. 그런 주장에 관심을 가진 슈트레커 ( Strecker 1996: xli-xliin79 ) 는 우리가 가진 본문 전통 이해에 의혹을 던진다. 이와 궤를 같이하는 슈미탈스 ( Schmithals 1992: 290-291 ) 는 기독교의 다양한 소집단이 마르키온의 경우를 따라 자기들의 정경에 보인 반 응을 설명한다. 이들 소집단은 필론의 영향을 받아 세 자료 모음집을 선호했 고,13) 이는 그들이 보기에 3이라는 숫자가 완벽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시 형태의 소규모 성경이 다양한 형태로 탄생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1)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2)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3) 에베 소서, 로마서, 폴리카르포스 ( Polycarp ) 의 편지에 대한 이그나티우스 ( Ignatius ) 의 짧은 교정본, (4) 요한의 세 편지. 클라우크 ( Klauck
1998: 261 ) 는
이런 기독교식
게마트리아를 확장시킨다. 한동안 베드로전서, 요한일서, 야고보서는 그 자체 로 널리 수용되었었다. 이후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가 추가 되고, 그 결과는 “우연이 아닌 숫자 칠”이었다. 바울서신 ( 히브리서도 바울서신에 포 함 )
열네 편을 더해 신약 정경의 미스터리한 구분은 “신약 성경 안에 3×7 편
지”가 되었다. 클라우크는 이렇게 노골적인 억지를 2세기 그리스도인에게 돌 리면서 비난한다. “이것은 전체 구조상 인위성을 강조할 뿐이다.” 오늘도 요한의 편지를 두고 익명설, 가명설, 공동체 저작설 등이 논의를 지 배하고 있다 ( 예, R. Brown 1982: 30n71, 요한의 작품에 저자 네 명이 참여했다고 생각하지만 해를 거 듭하며 변화; Schnackenburg 1992: 41; Sloyan 1995: 3; Strecker 1996: xxxv–liv; Culpepper 1998: 29– 27; C. Black 2000: 386n3; Ehrman 2004: 164–165 ).
위더링턴 ( 2006: 403 ) 은 저자를 사랑받
는 제자, 아마 나사로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로 저자에 대한 질문을 회피하 는 경우도 있다 ( Griffith 2002; T. Brown 2003 ). 캘러핸 ( Callahan ) 은 후기 근대주의 해 석학을 반영하며 “우리가 현재 요한서신이라 부르는 ‘본문 사이의 관계’ 는……‘요한서신 저자’ 문제와 무관하며 절대 이와 결부시킬 수도 없다”( 2005: 2 ) 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본문만 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측
13)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필론은 언급되지 않으며, 하물며 인용은 더욱 그렇다.
33
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II. 주요 계명: 옛 계명의 말씀을 실현하라 ( 2:7-17 ) III. 필수 조언: 그의 기름부음 ( 진리 ) 안에서 거하며 영원한 생명을 받으라 ( 2:18-3:8 ) IV. 핵심 가르침: 사랑, 행함, 신뢰 ( 3:9-4:6 ) V. 근본 명령: 하나님의 사랑 ( 4:7-14 ) VI. 실례를 통한 호소: 새로워지고 확장된 사랑의 초대( 4:15-5:15 ) VII. 마지막 훈계: 목회적 조언, 확신, 주의 ( 5:16-21 )
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요한일서는 단어, 개념, 교리적 암시로 가득 찬 미사여구로 문을 연다 ( 참고, Rensberger 1997: 45, “꽤 의도적” ).
전부는 아니라 해도 대부분 차츰 이 서신의 중심
주제로 떠오를 것이다 ( Schnackenburg 1992: 48 ). 머지않아 이 서신에 논쟁의 여지 가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질 것이다.1) 이 서신은 저자가 지지할 수 없는 신앙과 행위로 공동체를 떠난 사람 ( 2:19 ) 에게 닥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다루는 내용 으로 신앙 공동체에게 보낸 편지다. 다만 지금 요한은 그런 사람과 그들의 신 앙 방식의 적법성을 제거하는 사실적 토대인 하나님의 성품 ( 1:5 ) 을 마련하는 도입절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신은 잘 알려진 바울서신의 특 징과 연결점을 갖는다. 바울은 교리적 근거와 틀을 세우고 ( 가령, 롬 10-3 ), 4-6 ).
1-11; 참고, 엡
그것을 기초로 윤리적 명령문을 도출하는 추론을 만든다 ( 롬
12-16; 엡
요한의 접근 방식은 그것보다 복잡하지만, 그런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은
반드시 먼저 필요한 일이다. 요한이 딛고 서 있는 진리는 간단히 확증할 수 있지만 쉽게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암묵적으로 신앙을 반대하는 자에 대한 암시가 서신 내내 독자를 상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일서는 전체 담론을 논하기에 확실한 권위를 가진 저자의 자격을 확증하면서 시작한다 ( 1:1-4 ). 특별히 예수 가 선택한 다른 이처럼 ( 막 1:16-20; 3:13-19 ), 요한도 영원한 구원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것을 보고, 듣고, 만졌다. 그는 지금껏 어느 누구도 ( 아브라 함과 모세 같은 인물도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하지만, 요한의 스승 예수에 비교할 수 없다; 참고, 요 5:46; 8:56 )
아니 향후 어느 누구도 체현 못할 생명 ( 영원한 생명 ) 을 보았다. 다른 곳에서
상당히 불규칙적이어서 논쟁의 흐름을 추적하기 어려울 수 있었던 요한의 수 사학이 여기서는 시적이며 심지어 서사시적인 느낌까지 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의 초월적 우수성과 순수성, 완전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의 편지를 듣고 읽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님이 누구며 그가 베푸는 확실한 앎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상 기하기를 원한다. 또한 독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어울리지 않는 윤리 적 삶을 살지 않도록 경고의 깃발을 꽂으려 한다. 하지만 도입절의 웅장함 ( Schnackenburg 1992: 52 ) 과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강렬 한 빛 ( 1:5 ) 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당대의 달필가 ( Seneca ) 나 철학가 ( Epictetus ) 나
1) 하지만 R. 브라운(1982: 175)이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은 과장될 위험이 있다. “1:1에 감각적 경험에 대한 언급이 점점 커지는 것은 요한복음으로 생겨난 반대로 야기된 도전적인 분노를 반영하고 있다.”
57
요한일서
이론가 ( Juvenalis ) 가 아닌, 목회 상담가와 실용 신학자처럼 편지를 쓰고 있다. “이것은 사변적인 연습이 아니라, 목회적 돌봄과 관련이 있다”( Loader 1992: 3 ). 그리피스 ( Griffith
2002: 1 ) 의
종합적인 연구는 “요한일서가 기본적으로 논쟁적
이라기보다는 목회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요한은 수사2)나 심지어 교리에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위의 목차에서 보듯, 요한은 오히려 일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하나님의 중요성과 하 나님의 성품으로 빠르게 옮겨 간다 ( 1:6-10 ). 요한은 실제적 진리를 보물처럼 광 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신속하게 신앙 공동체에 주의 를 환기하는 명령처럼 그 진리를 독려하고 있다 ( 2:1-6 ). 유식하고 고상한 자리 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동료 신자 ( 예, 2:1, “나의 자녀” ) 를 위한 깊은 감 정을 거듭 천명하며 그렇게 한다. 첫 도입부에서 역사-신학적 진리 ( 또는 교리 ), 온전한 윤리, 따뜻한 관계의 삼중적 강조점이 등장한다. 나는 2장 1절 주석 부분에서 요한이 관심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식 에 담긴 세 가지 차원을 탐구할 것이다. 계속 보겠지만, 이 세 가지 강조점이 표제를 구성하는데, 서신의 다양한 단락과 논의는 그 표제 아래서 문맥상 온 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
2) 참고, 에드워즈(Edwards 1996: 38)는 왓슨(Watson 1989)의 주장에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고대 수사학을 요한일서의 문체를 이해하는 열쇠로 보기 어렵다.” 이와 반대로 Painter 2002: 87; Witherington 2006: 409-412를 보라.
58
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A.
권위와 목적 공지 ( 1:1-4 )
B. 서신의 주요 요지: 하나님의 속성 ( 1:5 )
C. 하나님의 속성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끼치는 영향 ( 1:6-10 )
D. 독자를 향한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호소 ( 2:1-6 )
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A. 권위와 목적 공지 ( 1:1-4 )
A. 권위와 목적 공지 ( 1:1-4 ) 첫 번째 단락의 담론은 구문론적으로 난해하지만1) 세 가지 시점을 가리키 는 것이 분명하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시점은 “태초”다 ( 1:1;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시 간, Sloyan 1995: 10 또는 선제했던 시간 ).
이 시점이 그다음 두 번째 시점인 요한일서
저자 같은 목격자가 육체적으로 예수와 마주했던 시기로 이어진다. 세 번째 시점은 요한이 이 서신을 작성한 시점이다. 혹자는 네 번째 시점으로 독자가 이 서신을 읽고 반응하는 시점 ( 1:4 ) 을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한은 이런 시나리오를 깔끔하게 순차적으로 선형으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끊어 읽는 방식을 선택하는데, 그것이 서술문보다 더 함축적이 고, 흐름을 차단하며, 되감았다가 다시 도약한다. 아래 제시한 나의 번역은 명 확성을 높이기 위해 복잡하지 않은 논리 진행을 따르려 했다. 위첨자로 표시 한 숫자는 해당 절이 재배치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이 책에서만 볼 수 있 는 것이다. 다만 요한이 다소 공들여 전달하고자 했던 원본의 굽이치는 의미 전개는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요한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더 단도직입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이 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미묘하게 베일에 가려진 주어다. 첫 번째 단 어 ‘호’( ὅ ) 는 남성이 아닌 중성 관사로, 그 함의에 2) 예수도 포함되지만 동시 에 더 확장된 범위를 아우르기 위해 예수를 넘어선다 ( 참고, Caragounis 2006: 236-237 ).
Loader 1992: 5;
3)
요한은 확고한 기독론적 설명으로 시작하고 그 의미
는 신학적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서신이 가지고 있는 풍성한 실제 적 가르침과 겉보기에 사랑이나 믿음 같은 기독교의 기본 은혜에 대한 평범 하고 반복적인 강조점이 오히려 독자를 안심시킬 수 있고, 서신의 권면이 단 순히 종교심4)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획기적이고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 1) 수 세기에 걸쳐 주석가가 관찰한 것처럼, 칼빈(Calvin 1988: 233)은 이 단원을 “갑작스럽고 혼란스러 운” 부분이라 부른다. 하우프트(Haupt 1879: 2)는 도입 단어가 “문법적 해석에 다소 어려움”을 유발 하기에 충분히 복잡하다고 말한다. 홀츠만(Holtzmann 1908: 327)은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 불투명 하다”라고 언급했다. 또한 렌스버거(1997: 45)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문법”이라고도 언급한다. (Thompson 1992: 35도 보라. 슈트레커(1996: 7)는 요한 학파에서 논의한 “결과물을 엮은 것”이라 고 지적한다. R. 브라운(1982: 152)도 이에 동의한다. 2) 참고, BDF §138.1: “중성형은 그것이 개별 대상이 아니라 강조를 위한 일반적 속성을 나타낼 때는 가 끔 사람을 지시하기도 한다.” 에이킨(Akin 2001: 51n13)은 “관념적 중성으로 성육신 전 그리스도의 ‘관념적 신성’을 지칭한다”라고 제안한다. ‘호’(o[)가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는 위더링턴의 제 안(Witherington 2006: 440)은 확신이 없다. 3) 참고, Haupt 1879: 1, “신약 성경의 어느 저자도 사도 요한만큼 서두에서 이처럼 기독론적 묘사로 강 렬한 인상을 심어 주는 사람은 없다.” 4) 호프만(J. C. K. Hofmann 1886: 317; 참고, 327-328)은 요한일서가 “가장 근본적인 표현에 이른 사
61
요한일서
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망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 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 요한이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폭로는 요한 개인의 측면이 있는 것은 사 실이나 공동적 성격이 있다 (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우리”에 주목 ). 요한의 주장은 요한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요한은 자기 증언만 따로 격리되었더라면 끼쳤 을 영향력보다 훨씬 강력한 공동의 증언을 가진 보다 큰 집단에 속했다.5) 요 한은 사도이고 독자는 그렇지 않은 까닭에 ( 요한의 “진정성 있는 증언으로서의 우리”에 대 해, Bauckham 2006: 370-383을 보라 )
독자가 있던 위치와 구별된 측면이 있지만, 요
한이 사용하는 “우리”는 요한이 서 있는 곳이 단순히 무인도가 아니라는 사 실을 잘 보여 준다. 이 서신은 다분히 교회적이다. 요한이 “영적 복음”6)을 쓰는 것으로 명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의 출발은 철저히 역사적이다 ( 참고, Alexander 1901: 88-98 ). 그리스도는 왔으며, 역사 적 변천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영원 ( “영원한
생명” ) 을
보게7) 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행한 것은 증인에게 전달되어야 했고, 도입부 세 문장 의 초점은 그리스도인이 고백해야 할 것이다. 세 문장은 하나님의 속성과 그 의미를 다루는 단락 ( 1:5-2:6 ) 의 핵심 주장에 필요한 서론을 형성해 준다. 본 단 락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목격자의 특권과 선포 ( 1:1-3 ) a. 성육신에 대한 사실 ( 1:1 ) b. 목격자 증언의 타당성 ( 1:1-3 ) c. 성육신이 드러내는 것 ( 1:1-2 ) d. 성육신의 참됨과 중요성 ( 1:1-3 ) e. 선포의 목적 ( 1:3 ) 2. 목회적 소망: 기쁨 공유 ( 1:4 )
도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이런 잘못된 생각을 전달하는 데 치중한다. Witherington 2006: 424도 보라. 그는 요한이 전하는 교리를 윤리적 행위에 종속시킨다. 5) 사도의 예수 이해가 가진 통일된 특징에 대해 Bauckham 1998을 보라. 6) 이 구절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게서 유래했고, 에우세비우스(Eccl. Hist. 6.14.7)가 인용한 것 이다. 슐라터(1999: 124)는 서신에 포함된 “영적”(도덕적 뿐만 아니라) 윤리에 주의한다. 7) 이곳 외에 마귀의 일을 멸하는 그리스도를 말하는 다른 본문(예, 3:8)에서, 요한은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설명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연상하게 한다. “그리스도 예수……그는 사망을 폐하시 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62
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A. 권위와 목적 공지 ( 1:1-4 )
| 주해 및 설명 |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
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
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 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 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 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 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 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 목격자의 특권과 선포(1:1-3)
[With this letter] we report to you, ⌜too⌝, what we have seen and heard, so that you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indeed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1 [We report] what was from the beginning— something we heard and saw with our eyes, something we beheld and our hands felt concerning the word that bestows life. 2 This life was revealed, and ⌜ ⌝ we have seen and testify and report to you the eternal life that was with the Father and revealed to us. 4 These things we write ⌜to you⌝ so that ⌜your⌝ joy may be complete. 3
요한일서 1장 1-3절의 초점은 “우리”( 위에서 번역한 대로 세 절에서만 “우리”, “우리의”, “우리를”이 열한 번 나온다 ) 를
구성하는 무리와 더불어 저자가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심지어 실제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있다. 저자는 이제 자신이 경험한 “영원한 생명”( 1:2 ) 에서 얻은 확신을 독자와 나누려 한다. 당면한 목표는 분명하다. 한 편으로 기자와 그가 대변하는 무리 사이의, 다른 한편으로 기자와 독자와의 사귐을 증진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사귐은 단순히 대인 관계로 끝나지 않 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까지 확대된다 ( D. Smith 1991: 37 ). 이런 장엄한 주장은 저자가 만드는 수사적 복잡성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캔들리 시 ( Candlish 1866: 9 ) 는 “이것은 대단한 ( 다시 말해, 고결한 ) 생각이다. 누가 이것을 이 해할 수 있을까?”라고 탄성을 질렀다. 서신은 저자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지만, 헬라 시대 서신 양식에서는 저자 이름이 전형적인 요소다 ( R. Brown 1982: 788-789; Stowers 1986 ). 하지만 저자는 자기 독자에게 이미 잘 알려진 사람이다. 저자가 세베대의 아들 요한 ( 서론을 보라 ) 이라는
점을 지지하는 증거가 풍성하다.
발신인은 1인칭 복수로 말한다 ( 1:1-3 ‘추가 주석’을 보라 ). 여기서 가장 분명하고 가능한 대상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고 예수의 지상 사역 동안
63
요한일서
함께했던 내부자다 ( Marshall
1978: 106 ).8)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예수를 모퉁잇
돌로, 이런 자들을 교회의 터로 묘사한다 ( 엡 2:20 ).9) 요한도 그들 중에 속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가 넘겨지던 날 밤 분명한 위임을 받았다 ( 요 13-17; Ridderbos 1988 ).
요한이 “우리”, “우리의”, “우리를”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분명 자신과 함께했던 자, 곧 예수의 지상 사역 목격자를 염두에 두었음이 분 명하다.10) 이 복수는 사도만 가진 특권을 묘사하는 독단적인 복수라기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특권과 존엄을 나눌 때 사용하는 미덕”의 복수일 것이다 ( Grotius, Alexander
1901: 98에서 재인용 ).
이런 사도 집단의 일원인 요한은 편
지를 시작하는 처음 세 절에서 다섯 가지 요점을 제공한다.
a. 성육신에 대한 사실 ( 1:1 ) 첫 번째 요점은 영원하고 초월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명백하게 내 재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한은 성육신을 확증하고 있다. 초월성 또는 영원성은 “태초부터 있는”이라는 말에 암시되어 있다 ( 1:1 ).11) 70인역에 자주 등장하는 ‘아프 아르케스’( ἀπ᾿ ἀρχῆς ) 는 태초 또는 그 이전까지 확장된 의미로 사용된다 ( 지혜서
6:22; 9:8; 집회서 16:26; 사 43:13 ).
님……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 ‘아프
아르케스’ )
70인역 하박국 1장 12절은 “하나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라고 묻
는다. 우상에 대해 지혜서 14장 13절은 “우상은 태초부터 ( ‘아프
아르케스’ )
있은
것도 아니고 영원히 있을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 은 태초부터 ( ‘아프 아르케스’ ) 있었고, 하나님의 존재는 피조 세계의 시간을 초월 한다. 구약 성경의 메시아 예언은 약속된 자의 근본은 “상고에 ( ‘아프
아르케스’ )
8) 요한서신은 예수의 부활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지만(Smalley 1948: 8),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살 아 있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고 있다는 보편적인 가정에서 부활을 전제한다. 부활은 요한복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요한복음은 명사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보다 동사 ‘아니스테 미’(ἀνίστημι)를 선호한다. 동사는 8회, 명사는 4회 등장한다. 9) 참고, 히 2:3-4에 반영된 이해: 구원의 메시지는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 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NASB). 10) 요한일서의 저자가 역사적 목격자인지와 관련한 전체 논의로 Schnackenburg 1992: 51-56을 보라. 참고, Bauckham 2006: 358-411. 요한의 관심이 역사가 아닌 종교에 있다는 슈나켄부르크의 주장(1992: 52)은 자기 생각에 낯설게 보이는 요한에게 칸트의 이분법을 투영한다. R. 브라운(1982: 158)은 요한 학파의 언급에 찬성한 것으로 위에 언급한 견해를 일축한다. 서신의 통일된 문체, 추정 저자의 단일한 목소리,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저자라는 통일된 교부 증언이 이를 반대한다. 크루 즈(2000: 53-56)는 결정적으로 “요한 학파”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알려진 다양한 고대 문서에 대한 브라운의 주장을 단호히 반박한다. 페인터(Painter 2002: 129-130; 참고, Rensberger 1997: 47)는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모두 목격자에 근거하여 사실을 확고히 하려는 데 관심이 전혀 없다”고 진 술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일종의 무언 논법이며, 요한일서 서론이나 요 1:14; 19:35; 21:24 같은 분 명한 주장을 적절히 고려하지 않는다. 11) 요한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칼빈의 관점(1988: 233)은 너무 제한적이다. 미
안(Mian 1988)은 “태초부터 있는”을 1:1-5 전체와 연결 지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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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A. 권위와 목적 공지 ( 1:1-4 )
그리고 영원에” 있다고 말한다 ( 미 5:2[5:1 마소라 본문/70인역] ). 요한은 예수 존재의 역사성을 최소화하지 않고12) 서신을 시작하면서 영원의 영역을 환기시켜 준다 ( Akin 2001: 52n16; Witherington 2006: 442 ).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 의 근원으로 되돌리는 신적 본질의 충만함과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심, 이 모든 것을 요한은 나누지 않고 하나로 생각했다”( Neander 1852: 21 ). 하지만 영원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육체로 구체화하는데, 분명 요한이 감각 의 언어로 초월자를 그리기 때문이다. 요한은 은유로 말하거나 영적으로 말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며 ( 반대,
Origen, Against Celsus 1.48 ),
“태초부터 있는 것”을
듣고, 보고, 만진다는 동사를 사용해서 문학적으로 표현을 확장하고 있다.13) 요한은 영이 육체가 된 물질적 실체를 “우리의 눈으로” 보고, “우리의 손”으 로 만졌다는 언급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 요일 1:1 ). 요한은 영원한 천상의 신적 존재가 스스로 육신이 되어, 자신과 다른 이 곁에서 분명한 역사가 되었다는 것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강조한다. 이 서신에서 요한의 메시지가 무엇이 든지 요한의 글쓰기는 복음서에서 들려주었던 같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 ).14) 독자는 요한의 진술이 성육신 교리와 관련하여 노골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신 후반부에 가서야 알게 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요 일 2:22 ) 을
부인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 4:2 ) 을 부인하
는 것이다. 요한이서 7절도 유사한 주제를 꺼낸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 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2세기 교회 지도자 이레네오 ( Ag.
Her. 1.26.1 ) 는
케린투스 ( Cerinthus ) 라는 선생을 언급하
는데, 케린투스의 견해는 요한이 거절한 사람에게 대답한다. 우리는 요한서신 이 케린투스의 입장을 취했는지 정확히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도입부에서 본질상 인간과 육체로 현존하는 영원한 존재에 대한 요한의 강조는 케린투스 등이 수용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12) R. 브라운(1982: 158; 참고, 167)은 “태초부터 있는 것”은 틀림없이 예수의 “인격, 말, 행동”을 의미 하는데, 이것들은 “예수가 세례받은 후 제자에게 보여 준……자기 계시”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하 지만 그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면서 예수와 요한의 신학적 의식을 보여 주는 구약의 신념에 약간의 변화를 준다. 많은 주석학자가 “태초부터”를 천지창조 이전이 아닌 성육신을 의미한다고 본다. 13)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On the Soul 17)는 플라톤주의자가 감각에 의한 인식을 폄하한다는 점 을 지적한다. 그는 이 점에 대한 플라톤의 불합리성을 반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감각적 인지를 증 명해 주는 많은 신약 성경 본문을 인용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인용에서 정점은 요일 1:1이다. 14) 1:1-3과 요한복음 서문 사이의 추가 비교와 관련해서 Gryclewicz 1958을 보라. 더 종합적인 논의 로는 R. Brown 1982: 176-180을 보라. 더 간결한 논의로는 Westcott 1883: 3을 보라. 웨스트콧은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의 서문 사이의 평행이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부터 논의되었다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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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b. 목격자 증언의 타당성 ( 1:1-3 ) 요한일서 도입절이 우선 성육신을 언급하는데, 두 번째 강조점도 이와 밀접 히 연관되어 있다. 요한을 비롯한 사람들이 성육신의 목격자로서 증언할 수 도 있고 실제로 증언하고 있다고 한다. 슈나켄부르크 ( 1992:
53-54 ) 는
이 절의
언어가 누군가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건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사람들” 가운 데 속한 이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현대 독자는 흔히 일반 인의 판단에 과학에 의해 확립된 것으로 인정된 사실, 공적으로 경험할 수 있 는 사실에만 익숙해져 있기에, 이 주장에 담긴 중요성이 쉽게 사라진다. 과학 이 성취한 것은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인상적이고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하 지만 과학의 성취는 불행히도 사회에 영향력을 크게 끼치는 집단 속에서 자 연주의 형이상학을 최고의 가치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15) 자연주의의 시 각에서 특별히 과거 비서구권 문명에서 나온 것이면 그것이 목격자의 증언 이라 해도 지배적인 자연주의의 확실성에 대한 신념에 역행하는 것이라면 거 의 의미를 상실한다.16) 요한의 관점에서 볼 때 진리가 오늘날 자연과학이 긍정하는 것과 많은 부 분에서 반대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해도, 진리에서 환원주의적 성향이 사라지는 것은 두드러질 것이다. 진리란 하나님이 말씀과 행동으로 창조와 구속 가운데 계시한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관찰하고 추론한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시와 겸손한 인간의 추론이 함께 작동하는 것이다. 그 렇게 작동할 때, 충만한 진리가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요 한은 여기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인간의 수용이라는 동시 발생을 말하고, 그것을 “증언 또는 증명”하고 있다. 구약 성경 시대의 어떤 사건을 두고 둘 이상의 진지한 목격자 증언은 사실 입증을 위해 하나님이 정한 작동 원리였다 ( 민 19:15를 인용하면서 )
35:30; 신 17:6; 19:15 ).
예수는
( 신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이 법칙을 지키도록 충고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15) 존슨(P. Johnson 1995: 7-8)은 다음과 같이 주목한다. “우리 시대 가장 훌륭한 대학교에서 자연주 의(‘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이라는 원리)는 사실상 자연과학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지적 작업의 기저를 이루는 확실한 전제다.” 그는 계속 말한다. “자연주의가 참이라면, 인류는 신을 창조한 것이 된다(그 역이 아니라). 그 경우 합리성은 우리가 창조자를 항상 존재해 왔던 가상의 존재로 인식하 게 하며, 또한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자연의 물질세계처럼 실재하는 것만 의존할 것을 요구한다. 가 상의 초자연적 존재에게 인도받기를 의존하는 것을 미신이라 부른다.” 과학이 갖는 한계에 정곡을 찌르는 관찰(종종 과학자가 인지하지 못함)과 관련해 Maki 1999와 Collins 2006을 보라. 16) 과학의 주류 관점에서 볼 때, “자연주의 확신”은 사실 어법상 모순인 것 같다. 심지어 과학적 방법에 근거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늘 그랬던 것처럼, 추론과 분석을 위해 현재 이용 가능하고 유용한 정보에 기초해 임시로 확보한 사실이지 결코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McLeish 1995: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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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중심 요지: 하나님은 빛이다 ( 1:1-2:6 ) A. 권위와 목적 공지 ( 1:1-4 )
하라”( 마
18:16 ).
예수는 친히 뽑은 제자에게 자신의 “증언”을 받들도록 위임
했다 ( 눅 21:13; 행 1:8; 2:32; 3:15 ). 복수 증인을 규정한 법은 초기 수십 년 동안 고린 도 ( 고후 13:1 ) 또는 요한이 거주하기 전 에베소 등 신생 교회에서 지켜졌다. “장 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딤전 5:19 ). 결과적으로 요한이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요일 1:2 ) 라고 쓸 때, 대화를 하 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증언에 서명하는 것이다 ( Thompson 1992: 34 ). 오늘날 상 황에서 성육신 같은 신앙 문제와 사실 또는 진리에 관련한 문제는 동일시할 수 없으며 ( Pfeiffer 1951의 고전적 표현과 Gilkey 1961을 보라 ), 후기 근대주의 시대에는 어 떤 분야에서 심지어 확인이 어렵지 않은 진리마저 논쟁의 대상이 되지만, 요 한의 입장에서는 목격자의 다중 증언도 공인된 놀라운 인간 인식이라는 실제 에 근거가 되며 증언에 구속력을 부여한다. 다음 목록은 요한일서 1장 1-3절 에 등장하는 인식 동사다.17) 동사(요한일서)
번역
신약 성경과 70인역 평행
ἀκηκόαμεν ‘아케코아멘’(1:1, 3)
“우리가 들었다/들은 적이 있다”
요 4:42; 수 2:10; 9:9; 슥 8:23
“우리가 보았다/본 적이 있다” ἑωράκαμεν ‘헤오라카멘’(1:1, 2, 3)
요 3:11; 20:25; 창 26:28; 민 13:28, 32, 33; 신 1:28; 삿 13:22; 집회서 43:32
ἐθεασάμεθα ‘에데아사메다’(1:1)
“우리가 보았다”
요 1:14, 32; 요일 4:14; 마카베 오2서 3:36; 마카베오3서 5:47
“(우리의 손이) 느꼈다”
눅 24:39; 행 17:27
ἐψηλάφησαν ‘엡셀라페산’(1:1)
듣는 것 ( ἀκηκόαμεν,
‘아케코아멘’ ) 은
요한이 인용한 것인데 가장 쉽게 무시되는
인식 작용이다. 이것은 심지어 고대 감각 기관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렇다. 필 론은 어떤 사람이 “눈으로 믿는 것은 사실이나 듣는 것은 거짓이라는 이유” 때문에 들은 것을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 QE 1993: 884를 보라 ).
2, 단편; Yonge
세네카는 전해 들은 말 이상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맹신은 해
악의 원인이기 때문에……우리는 우리 눈으로 확인한 것을 사실로 믿어야 한다. 그러면 실수하지 않고……믿기를 더디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On Anger 2.24 ).
반론의 여지가 있지만 듣는 것은 하나님이 행한 구속 사역을 이해
하는 데 분명 충분한 것 같다. 위의 표에 소개된 유사성이 다양하게 보여 주
17) R. 브라운(1982: 161)이 따르는 로우(Louw 1975)는 이 목록에서 모든 완료와 부정과거는 완료 시 제의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67
요한일서
고 있다.18)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 42절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 우물에 있 던 여인의 증거를 들은 후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 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라고 말한다. 70인역 유사구는 각각 하나님을 시인하게 하는 보고를 들은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유익하다. 듣는 것 자체는 결정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다른 것을 더 할 경우 확실성은 더욱 보장될 것이다. 바울의 선언이 떠오른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 요한은 보는 것 ( ‘헤오라카멘’ ) 도 말한다. 여기서 사용된 1인칭 복수 형태는 이 맥락에서 세 번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두 번 이렇게 신약 성경에서 총 다섯 번 등장한다. 복음서의 사례를 보면, 지금까지 본 것은 그리스도 ( 요 3:11 ) 와 그리스 도의 부활 ( 요 20:25 ) 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아 사역의 핵심이다. 70인역 용례도 이와 비슷하게 제한적이고 암시적이다. 일곱 번 중 네 번은 정탐꾼이 가나안 에서 본 것과 연관이 있다. 반면 창세기 26장 28절은 아비멜렉이 자신과 함께 한 자가 “여호와께서 너 ( 이삭 )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증언한다. 사사기 13장 22절에서는 삼손의 부모가 두려움에 떨며 “우리가 하 나님을 보았으니”( θεὸν ἑωράκαμεν, ‘데온 헤오라카멘’ ) 라고 외친다. 성경의 용례에서
이 표현은 특별히 하나님의 존재나 사역을 진지하게 증언하는 기능을 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포터 ( Porter 1989: 249; 참고, Painter 2002: 121-122 ) 는 요한일서 1장 2절 ‘헤오라카멘’이 암시하는 “일차 목격자”는 현재 시제 동사 ‘마르튀루 멘’( μαρτυροῦμεν ) 과 ‘아팡겔로멘’( ἀπαγγέλλομεν ) 을 통해 “뒤따르는 증거에 근거” 를 마련해 준다고 주장한다. 1장 1절에 “우리의 눈으로”라는 말은 “목격자의 개인적 특징”을 강조하고, 본 것은 문자 그대로이며 역사적인 것이지, “영혼 내면”의 환상이 아니다 ( Westcott 1883: 6 ). 동사 ‘에데아사메다’( ἐθεασάμεθα ) 는 NIV/TNIV에서 단순히 “보았다”라고 번 역되었다. 하지만 토속 미국식 영어 서사에서 “보았다”라는 말은 종종19) 이어 지는 행동이나 일어나는 일에 부차적이고 보조적인 서두 역할을 하는 행동을 함축한다 ( “우리는 차를 사기로 결정하기 전 며칠 동안 차를 여러 대 보았다” ). 하지만 ‘에데아 사메다’의 의미는 목격한 것에서 특별히 추론한 것을 충분히 보고, 생각하고,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위의 표에서 신약 성경 두 사례는 확실히 더 강화된 의미를 수반한다. 70인역 사례가 1인칭 복수는 아니지만, 동사 어 18) BDF §342.2는 문맥상 “듣다”와 “보다”의 완료 시제가 “주어에 끼치는 영향”을 강조한다고 제안 한다. 앞서 일어난 것이 지금 요한의 증언에 계속된다. 19) 당연히 예외는 있다. 모이세스 실바는 (사적인 연락을 통해) 명령 상황에서 이것이 꼭 들어맞는 것 이 아닐 수 있음을 지적한다. 말하자면 마치 부모가 아이를 훈계하면서 “나를 봐!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라고 말하는 경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의미론적 상황은 이런 것과는 다
르다.
68
요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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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와 요한삼서 서론
요한이서와 요한삼서 서론 정경 배열과 헬라어 사본에 제목으로 붙인 요한의 이름과 별개로, 요한일서 처럼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도 충분히 어휘와 어법에 있어 동일 저자가 저술 했다는 합리적인 추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 R.
Brown 1982: 755–756; 1997: 395; Painter
2002: 336; Thielman 2005: 536n1; Witherington 2006: 396, 564 ).1)
존슨 ( 1999: 560-561 ) 은 요한
의 세 편지가 하나로 묶여 전달되었고, 요한이서와 요한삼서가 그 일부였기 때문에 원본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요한삼서가 이 단일 편지 의 전달자 데메드리오 ( 요삼
12 ) 를
가이오에게 칭찬하며 천거하는 편지였다고
본다. 요한이서는 가이오의 교회에서 큰소리로 낭독했다. 존슨에 따르면 요한 일서는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권면을 담은 한편의 설교였다 ( 1999: 562 ). 이런 주장은 모두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세 편지가 하나의 묶음으로 되어 있었다 는 이론 ( 모든 편지라는 것도 논란 ) 은 세 편지의 기원과 전달 과정의 사정을 단순화 한다. 이 이론은 편지의 구성과 청중과 관련한 다른 많은 이론만큼 사변적이 지 않으면서 개연성은 더 크다. 이것은 아래 주석에서 대충 전제로 두기에 적 절한 각본이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의 저자는 자신을 “장로”( 요이 약 시대와 속사도 시대에 단어 “장로들”( πρεσβύτεροι,
1; 요삼 1 ) 라고
부른다. 신
‘프레스뷔테로이’ ) 은
지역 공
동체의 목회 지도자를 의미했을 것이다. 이 말은 사도행전 11장 30절에서 40년대 중반 ( 연대와 관련해 Carson and Moo 2005: 369를 보라; Schnabel 2004: 2.1019-1029는 44년으로 본다 )
예루살렘의 교회 지도자 ( 목회자 ) 를 말하며, 호칭으로는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이 세운 교회의 다음 몇 년간의 사역 을 위해 감독자와 사역자로 장로를 세웠다 ( 행 14:23 ). 장로는 대략 49년 정도에 사도와 함께 예루살렘 회의를 주재했다 ( 행
15:2, 4, 6, 22, 23; 16:4 ).
거의 10년 후
바울은 분명히 에베소 등지의 교회 목회자를 장로라고 부른다 ( 행 20:17 ). 바울 이 3차 전도 여행이 끝나던 무렵 교회에 돌아와 보고할 때 ( 행 21:18 ), 예루살렘 에서는 장로 여럿이 큰 장로 야고보 ( 다른 곳에서는 사도라고도 불림; 갈 1:19 ) 와 함께 있 었다. 누가가 이 모든 것에 시대착오적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면, 그의 증언은 에베소 지역의 목회 지도자를 가리켰던 “장로”라는 칭호가 요한이 요한이서
1) 요한이서 학계의 논의에 대해 “요한서신 서론”을 보라. 요한일서 저자가 예수의 제자요 세베대의 아 들인 요한으로 1세기 마지막 수십 년 무렵 또는 거의 90년대 후반 무렵에 에베소에서 편지를 썼을 것 이라는 나의 결론을 “요한서신 서론”의 “배경과 시기” 단원에서 보라.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의 메시지 를 요한일서와 함께 보아야 한다는 생각은 “요한서신 서론”의 “요한의 편지가 갖는 중요성” 단원을 보라.
461
요한이서
와 요한삼서를 쓸 때까지 대략 20년에서 40년 동안에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예루살렘뿐 아니라 거리가 멀었던 에베소 같은 곳에서도 초대 교회 당시 널 리 적용되었음을 보여 준다.2) 베드로는 에베소 ( “아시아” ) 와 주변 다른 지역 (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비두니아; 벧 전 1:1 ) 에
흩어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자신을 다른 “장로들”( ‘프레스뷔테로이’ ) 과
“함께 장로 된 자”( 5:1: συμπρεσβύτερος, ‘쉼프레스뷔테로스’ ) 라고 칭한다. 이것은 이 용 어가 지정학적으로 널리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어떤 면에서 교회의
기둥이며 초대 교회 처음 수십 년을 목회자로 또 지역 교회를 담당한 직분자 로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은 사도와 유동적인 관계를 가졌음을 시사한다. “사도들”( 야고보, 베드로, 요한 ) 이라 불린 사람도 목회적 재량을 발휘하며 섬겼다. 바울은 결코 자신을 “장로”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바울의 목회적 정체성과 역 할은 부인할 수 없다 ( P. Beasley-Murray, DPL , 654-658; Schreiner 2001: 38; 하지만 슈라이너 가 보기에 바울의 선교적 정체성이 지배적이었다 ). 일꾼” ) 로
바울은 자신을 ‘디아코노스’( διάκονος, “종,
이해했다. 그는 이 개념을 에베소 목회자 디모데에게 적용한다 ( 딤전
4:6; 참고, 살전 3:2 ).
이 용례와 세 서신이 갖는 문학적 동일성을 고려해 볼 때, 세 서신의 저자 는 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는 요한을 “장로”로 칭하며, 베드로전서 5장 1절에서 베드로가 그랬듯이 장로는 스스로 목회자로 이해하면서 공적 정체성도 가졌다 ( 참고, Akin 2001: 219 ). 그렇다고 해서 이 칭호로 인해 베드로나 요한이 예수의 제자나 사도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 은 아니다 ( 참고,
Holtzmann 1908: 364 ).
요한의 목회 방식과 관심사는 요한일서에
전반적으로 분명히 드러났다 ( 요한일서 서론 “요한의 편지가 갖는 중요성”을 보라 ). 요한은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자신을 “장로”로 불렀다. 그 이유는 분명 본인의 모 습이 그랬고 또 편지를 쓰던 당시 해당 지역 ( 에베소? ) 에서 스스로 그렇게 이해 했기 때문이다. 친숙한 어조와 수많은 1인칭 동사로 인해 요한이 독자에게 충 분히 알려졌음을 시사하는 요한일서에서 왜 그렇게 분명하게 스스로 “장 로”라고 칭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요한은 요한일서가 단일 교회 를 넘어 회람되도록 의도했을 것이다. 먼저 요한이서의 “택하심을 받은 부녀” 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한은 다른 교회가 보기에 “목회자”가 아니었고, 그래 서 널리 회람을 목적으로 구성한 문서에서는 자신을 목회자로 칭하지 않았던 2) 페인터(2002: 339)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평행 부분을 무시한 채 “사도행전이 장로를 언급하기는 하 지만 ‘그 장로’는 아니다”라고 본다. 이 주장은 침묵 논법일 뿐 아니라, 사도 요한이 에베소로 가서 새 로운 목회적 책임을 지기 전까지 스스로 “장로”라고 부르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우 리는 30-62년을 다루는 사도행전에서 그 이후에 해당하는 요한 시대에 사용된 언어 용례를 요구할 수 없다. 장로/목사라는 직책이 유대적 기원을 두고 있다는 강조와 함께 그 기원과 등장에 대해 Beck 2003을 보라.
462
요한이서와 요한삼서 서론
것이다. 에우세비우스는 파피아스의 글에서 사도인 “장로 요한”을 발견하며 신뢰 를 얻었던 인물이다 ( 서론을
보라 ).3)
에우세비우스는 사도가 초대 교회 초기 세
대에 장로로 불렸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에우세비우스가 인용한 파피아스 의 글 ( Eccl. Hist . 3.39.3-4 ) 에서는 “장로”라는 개념을 안드레, 베드로, 빌립, 도마, 야고보, 요한 ( 사도 무리의 모든 구성원 ) 을 포함한 예수를 가장 먼저 따랐던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했다. 에우세비우스가 설명하려 했던 방식을 거부하며 사도 등 다른 “장로” 집단을 굳이 만들어 낼 정도로 뚜렷한 해석학적 근거는 없다. 에우세비우스는 나중에 장로와 사도를 동일시하여 자신의 주장을 거스 른다 ( 3.39.4 ). 에우세비우스의 설명에서 파피아스는 당시 여전히 생존하며 말 하고 있는 ( λέγουσιν, ‘레구신’ ) 아리스티온 ( Aristion ) 이나 요한 같은 후임 장로를 말 한다. 하지만 이미 설명한 것처럼, 오리게네스의 무천년주의를 추종하는 다른 이처럼 에우세비우스도 천년왕국 책인 요한계시록의 저자로 만들 초기의 요 한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디오니시우스가 요한계시록의 언어에 집중한 반면, 에우세비우스는 파피아스의 언어를 확대 해석한다. 브레이 ( 2000: xx ) 는 오늘날 연구 성과가 이 모든 것에서 그리 많은 진전을 이 루지 못했음을 통찰력 있게 관찰한다. 디오니시우스와 에우세비우스가 제시 한 “문학적 고찰”이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의 “전통적인 저작권을 부인하는 사 람에게 여전히 강력한 논거가 되고 있다.” 반면 요한 저작을 “방어하는 자들 은 우리가 전통적인 입장을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대체 설명이 없다는 역사적 논거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전통 ( 소위 역사적 증거 ) 은
문학적 이론화를 반대하는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의 저작권을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의 저자
인 요한에게 돌리는 데 더 크게 무게를 둔다. 요한이서는 신약 성경에서 요한삼서 다음으로 가장 짧다. 여행자는 운전하 면서 간혹 눈을 깜박거리다 놓쳐 버린 마을을 두고 농담을 하곤 한다. 공동서 신 독자는 베드로전후서와 요한일서에서 요한이서를 놓치고 바로 유다서와
3)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Eusebius, Eccl . Hist . 7.24.7, 7.25.16에서 재인용)는 다른 요한이 요 한계시록을 기록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디오니시우스는 이 다른 요한을 절대로 “장로”라고 부르지 않는다(이 부분은 에우세비우스의 의견). 디오니시우스는 요한의 존재를 증명할 중요한 역사 적 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디오니시우스의 주장은 요한계시록의 언어에 근거하는데, 그것은 요한의 다른 문서와 사뭇 다르다(계시록의 장르와 다루는 주제를 고려하면 극단적으로 다른 것은 아 니다).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증거는 풍문일 뿐이다. 디오니시우스는 다른 요한이 존재했다고 “생각 했다.” 왜냐하면 에베소에 요한의 것이라 불리는 무덤이 두 기 “존재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250년 무렵부터 시작된 이런 추측은 억측에 불과했다. 이것은 누군가 천년왕국을 말하는 책인 요한 계시록의 저자로 여길 만한 인물을 고대에서 찾아내는 일에 필사적이었다가 겨우 생각해 낸 미봉책 일 뿐이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당시 천년왕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동시에 이에 대한 의욕을 상
실했다.
463
요한이서
요한계시록으로 넘어가기 쉽다. 요한이서는 NA27의 형식으로는 한 페이지 안 에 여덟 줄로 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편지의 간결함을 고려할 때 얼마나 많 은 내용을 다루느냐다. 단어 수로만 보면 저자가 왜 굳이 이 글을 쓰려 했는 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독자는 글자마다 품은 무게감을 느끼게 되 면, 사실상 저자가 모든 절에 더 시간을 두고 내용도 확장하여 살을 붙여 주 기를 바랄 것이다. 요한이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서신서를 읽는 것 과는 전혀 다르게 보아야 한다. 요한이서는 보통의 서신서보다 훨씬 제한된 조건에서 해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만큼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 제한되었다는 말이다. 보통의 서신에서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한쪽의 얘기 에 확신을 가지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들을 수 없는 상대방의 입장에 대해서 는 제대로 확실하게 감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가 아닌가.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독자를 염려하는 일에 애정을 쏟고 있 는 목회자라는 것이다. 애정은 “사랑”( 처음
여섯 절에서 네 번 등장 ) 을
표현하는 동
사나 명사에서 표면으로 대두된다. 처음 네 절에서 진리를 다섯 번이나 언급 하는데, 거기에 요한의 주된 관심사가 반영된다. 이어지는 거짓 가르침과 교 사를 언급하는 관점을 볼 때, 진리에 대한 관심은 저자의 우려를 반영한다. 편 지를 받을 교회는 상당히 크게 잘못될 위험에 처해 있다. 저자가 곧 그곳을 방문할 것이기에 그리 길게 쓸 필요가 없었다 ( 요이 12 ). 그럼에도 짧게나마 편 지를 쓸 필요성은 분명 있었다. 일단 사정이 악화하기 시작하면 공동체 안에 서 모든 것이 빠르게 타락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요한일서와는 다르게 요 한이서를 쓴다. 이 편지는 두드러진 형식 측면에서 장르가 분명한 서신이다. 인사말, 덕담, 본론, 결론 ( R. Brown 1982: 788-795 ). 다음과 같이 서신을 구분할 수 있다. I. 인사말: 요한의 진리 사랑 ( 1-3 ) II. 요한의 기쁨과 우려 ( 4-8 ) III. 요한의 경고 ( 9-11 ) IV. 요한의 마지막 인사 ( 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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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인사말: 요한의 진리 사랑 ( 1-3 ) II. 요한의 기쁨과 우려 ( 4-8 ) III. 요한의 경고 ( 9-11 ) IV. 요한의 마지막 인사 ( 12-13 )
I. 인사말: 요한의 진리 사랑 ( 1-3 )
I. 인사말: 요한의 진리 사랑 ( 1-3 ) 요한일서도 마찬가지지만 공관복음에 비해 요한복음에서 지배적이었던 요 한의 사랑 언어는 요한이서 첫 번째 절부터 독자의 마음을 자극한다. 하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난제이긴 하다. “택하심을 받은 부녀”( KJV,
ESV, NRSV ),
“하나님이 선택하신 부녀”( TNIV, NEB ), “매우 특별한 여인”( CEV ), “친애하는 부 녀”( TEV ) 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 여자”는 짐작건대 알려졌을 테지만, 오늘날 해석가에게는 확실하지 않은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자녀를 가졌다고 소개 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인가 아니면 비유인가? ( 이 논제에 대한 간단한 토론으로 Akin 2001: 200n4를 보라 )
이런 질문을 넘어 정작 두드러지는 것은 열렬한 애정과 동시
에 진리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저자다. “심지어 저자는 그들에게 복을 바라 면서 진리와 사랑이라는 두 가지 위대한 요소를 인용한다. 이 둘은 모두 진정 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구성하는 표시다”( Schlatter 1950: 115 ). 이것은 구체적인 틀 안에 있는 진리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며 등장하는 “은혜”, “긍휼”, “평강” 같은 몇 가지 주요 개념은 저자의 강한 신학 의식을 보여 준다. 애정이 많은 인간이자 목회적으로 확신을 가진 후견인인 저자는 우리가 대체로 볼 수 없는 상황을 두고 개인적 방문에 앞서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긴박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 주해 및 설명 | 1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 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 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 로 말미암음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 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 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Second John⌝ The elder, [writing] to an elect assembly and to its children, whom I love in truth— and not I alone but also all who have come to know the truth. 2 ⌜For the truth⌝ ⌜abiding⌝ among ⌜us⌝ will also be with ⌜us⌝ forever. 3 Grace, ⌜mercy⌝, peace ⌜will be with us⌝, from God the Father and ⌜from⌝ Jesus Christ ⌜the Son of the Father⌝, in truth and love. 1
위에서 설명했듯이 “장로”는 요한일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을 쓴 바로 그 요한으로 볼 수 있다. 슬로이언 ( 1995: 61 ) 은 “요한복음과 친숙한 공동체”가
가진 특징과 함께 세 요한서신에 추정되는 상황이 비슷한 점에 주목한다. 그 467
요한이서
러나 여기서 요한은 분명히 목회적인 역할인 “장로”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초대 교회에서 지역 공동체의 감독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요한이서 13절을 보면, 그는 한 “자매 교회”에서 편지를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요한은 누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가? 수신자 ‘에클레크테 퀴리 아’( ἐκλεκτῇ κυρίᾳ, “선택받은 여인” ) 에서 “택하심을 받은”이 수식어이고 “퀴리아”가 이름인가? ( R. Brown 1982: 653은 ‘에클레크타’가 당시 고유 명사로 쓰였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음 을 지적한다. ) 2000: 231 ) 로
이 관점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개요』 ( Adumbrations 거슬러 올라가며 시리아어 역본 ( Westcott
주석가 중에는 알렉산더 ( 1901:
283-286 ) 가
1883: 224 ) 에도
4; Bray
등장한다.
이 입장을 취한다. 알렉산더는 훌륭
한 상상력을 동원해 이 여인을 영웅적인 지위를 가진 외롭지만 고귀한 미망 인으로 그린다. 마셜 ( 1978: 60n5 ) 은 이 입장을 따르는 상당히 오래된 학자를 인 용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로마서 16장 13절일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 τὸν
ἐκλεκτόν, ‘톤 에클레크톤’ )
루포와……문안하라”라고
쓴다. 그러나 요한이서에서는 “택하심을 받은” 앞에 관사가 없기에 로마서 16장 13절은 좋은 비교 사례가 아니다 ( Painter 2002: 340 등 여러 학자 ). ‘에클레크테’나 ‘퀴리아’ 모두 고유 명사가 아니라면, 유명한 그리스도인 자 매를 가리킬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로더 ( 1992: 84-85 ) 가 이 가능성을 거론해서 거부한 것이 타당하다. 두 단어가 이런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과 별개로, 서신 안에서 진행되는 담화는 아주 빈번히 2인칭 복수로 바뀌며 내용도 대부 분 개인이 아닌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 두 단어는 십중팔구 공동체를 의미할 뿐이다. “이 호칭이 자매 교회를 의미 한다는 데 오늘날 일반적인 동의가 있다”( Culpepper 1)
654-655; O’Day 1992: 375; Witherington 2006: 563-564 ).
1998: 276; 참고, R. Brown 1982:
톰프슨 ( 1992: 151 ) 은 성경에서 이
스라엘이든 교회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게든 그리스도에게든 신부 등 여성으로 자주 등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 사 4:25-26; 엡 5:22; 계 18-19 ).
54:1, 6, 13; 렘 6:2; 31:21, 32; 요 3:29; 갈
베드로전서는 “택하심을 받은”( ἐκλεκτοῖς,
‘에클레크토이스’ )
흩어진 나그네를 지칭하는데, 저자는 “바벨론”( 5:13; 로마처럼 ) 에 있는 “택하심을 함께 받은”( συνεκλεκτή,
‘쉰에클레크테’ )
공동체 안에서 편지를 쓴다. 여기서 ‘에클
레크테’는 지역 교회를 의미할 수 있다 ( R. 성” ) 도
Brown 1982: 655 ).
헬라어 ‘퀴리아’( “여
복수의 집단으로 구성된 도시 조직 단위를 의미할 수 있다 ( ἐκκλησίαι, ‘엑
클레시아이’; 신약 성경에서 대개 “교회”로 번역된 단어의 복수형 ).2)
요한은 ‘퀴리아’를 비유가
1) 드물지만 최근에 캘러핸(2005: 2, 11)은 요한이서가 어느 여성 개인에게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 만 그는 다만 프리메이슨의 프린스 홀 분파에 속한 이스턴 스타 교단의 여성 다수가 이 관점을 지지 한다는 것 외에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2) Strecker and Schnelle 1996: 2.1442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와 아리스토파네
468
I. 인사말: 요한의 진리 사랑 ( 1-3 )
아닌 실제 지역 공동체를 가리켜 사용했을 것이다. 이 공동체는 초기의 다른 기독교 저술에는 확인되지 않은 공동체다. 여하튼 여기서는 단순히 “택하심 을 받은 공동체”다. 무리의 “자녀”( τέκνα, ‘테크나’; 요이 4, 13; 요삼 4를 보라 ) 는 교회 일원일 것이다. 요 한일서에서 이 개념은 늘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는 데 사용되었다 ( 3:1, 5:2 ).
2, 10;
요한은 독자를 일곱 번이나 “자녀”라고 부른다. 물론 ‘테크나’가 아닌 ‘테
크니온’( τεκνίον, “어린 아이”; 요일 2:1a주석을 보라 ) 을 사용한다. 요한은 독자를 향한 사랑을 바로 보여 준다. 과장된 수사는 어색하지만 우 아하다. “사랑”과 “진리”가 요한의 진술 앞부분에 위치한다는 면에서는 우아 하다 (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은 꾸밈이 없는 말이다. Akin 2001: 220-221 ). 반면 단락 끝부 분에서 이 두 단어가 위치를 바꿔 등장한다 ( 요이 3: “진리와 사랑” ). 분명 이 단원의 표현에 처음과 끝을 사랑으로 장식하고 거기에 “진리”를 곁들인 것에서 전반 적으로 수사적 표현의 우아함이 돋보이며, 중간에 당시 신앙 공동체에서 사 용했던 인사인 “은혜, 긍휼, 평강”도 이를 보강한다. 동시에 다소 어색함도 있다. 네 번에 걸쳐 등장하는 “진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순이 조금 독특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τὴν ἀλήθειαν τὴν μένουσαν ἐν ἡμῖν καὶ μεθ᾿ ἡμῶν
ἔσται ( ‘텐 알레데이안 텐 메누산 엔 헤민 카이 메드 헤몬 에스타이’, “그 진리, 거할,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있을” ).3)
그리고 인사말에 바울 문헌에 자주 나오는 ‘에이미’( εἰμί ) 의
가정법 ( 가령 롬 1:7; 고전 1:3; 고후 1:2; 빌 1:2 ) 이나 베드로의 인사말에 나오는 ‘플레뒤 노’( πληθύνω,
“많아지다” ) 의
기원법 ( 벧전
1:1; 벧후 1:2 ) 을
쓰지 않고 ‘에이미’의 미래
직설법 ‘에스타이’( ἔσται ) 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일서가 보여 준 장 엄한 언급과 조금 특이한 어투의 조합이 비슷하게 요한이서 도입부에도 나 온다. 하여간 요한은 독자를 “진리 가운데” 사랑한다 ( 요이 1 ). 이것은 단순히 “참으 로”( 개역개정 ) 또는 “진정으로”( 참고, Turner 1963: 178은 “진리”가 특별히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는 체르비크의 제안을 인용한다 ) 를
의미할 수도 있다. 또는 “드러난 계시가 요구하는
대로”( Zerwick 1992: 734 ) 를 의미할 수도 있다. 브라운 ( 1982: 655-656 ) 은 이 문제를 둘러싼 “핵심 논의”를 말하면서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진리인 예 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사랑”을 의미한다고 결론 내 린다. 요한 홀로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다. “진리를 아는 모든 자”( =그리스
스(Aristophanes)의 글에서 발췌한 글에 주의를 요한다. 참고, Sloyan 1995: 62-63; 다른 참고문헌 은 Strecker 1996: 221을 보라. 3) 체르비크(1994: 375)는 요한계시록에 비유 구문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주의를 요구한다. BDF §442.6는 ‘카이’(καί)를 사용하여 이 구절을 다음 구절과 연결시킨 것을 “히브리풍(이면서 어설픈 토 착어)”으로 본다. BDF §468.3을 보라.
469
요한이서
도를 아는? ) 가
요한과 연결되어 있다. 우선 요한이 편지를 쓰는 대상인 동료 신
4)
자 를 가리키며,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과 그 너머에 퍼져 있던 초기 기 독교 운동에 참여한 “모두”까지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말은 혼자만 의 말이 아니며,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서신에 담긴 권면의 무게를 한층 더 한다. 요한의 확신은 현재 그들과 함께 “거한” 진리가 다만 현재뿐 아니라 영원 까지 있기 때문에 강렬한 효과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진리가 무엇인 가?”라고 물었던 빌라도의 질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요 18:38 ). 요한서신 은 ‘알레데이아’( ἀλήθεια, “참된” )
“진리” ),
‘알레데스’( ἀληθής,
“참된” ),
‘알레디노스’( ἀληθινός,
등의 개념이 강조하는 실질 ( 요일 1:6, 8; 2:4, 8, 21[2회]; 3:18, 19; 4:6; 5:6; 요이 1[2회],
2, 3, 4; 요삼 1, 3[2회], 4, 8, 12 ) 에
대한 언급을 많이 담고 있다. 하나의 정의로 모든
사례를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언급 ( 모두
요한복음에서 연관됨 ) 은
다음 범주로 분류
할 수 있다. 1. 진리인 성령으로 ( 요일 4:6; 5:6; 요삼 12; 참고, 요 14:17; 15:26; 16:13a ) 말미암아 진 리를 소유하고 받는다 ( 요일 2:20 ). 2. 진리는 하나님이 계명으로 보여 준 것처럼 자기 백성을 위해 세운 윤 리적 기준을 의미한다 ( 요일 1:6; 2:21a; 3:18; 요이 4; 요삼 3b, 4; 참고, 요 3:21에 “진리 를 행함”; 8:32; 14:15, 23; 15:10, 14 ).
3. 진리는 하나님이 인격으로 계시된 거룩하게 하는 임재다. 하나님은 신 자에게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등 하나님의 성품이 가진 특성을 반영 할 능력을 준다 ( 요일 1:8; 2:4, 21b; 참고, 요 1:14, 17; 4:23-24; 8:23; 16:7; 17:17a, 19 ). 4. 진리는 만물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지혜 가운데 존재하는 방식에 순 응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 요일 2:8; 참고, 요 5:33; 8:40, 44a, 45, 46 ). 5.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복음이 가진 의미이자 영생에 속한 영역이다. 복음은 그것을 수용한 자를 그 영역 안으로 인도한다 ( 요일 3:19; 요이 1b, 2, 3; 요삼 1, 8; 참고, 요 14:6; 16:13b; 17:17b; 18:37a ).
이 같은 분류가 유효하다면, 요한이서 도입절은 독자에게 진리로 말미암아 더욱 안정적이며 영원하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준다. 이는 독자가 복음의 메시 지를 믿음으로 자기 영혼을 위탁한 진리인 그리스도가 독자 안에 살아 있기
4) 완료 분사 ‘호이 에그노코테스’(οἱ ἐγνωκότες, “아는 사람들”)는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분명히 전한 복음의 메시지에 감동한 자 안에 자리한 확신을 묘사할 것이다. 더 긴 보론으로 Strecker 1996: 222-
226을 보라.
470
I. 인사말: 요한의 진리 사랑 ( 1-3 )
때문이다 ( 참고,
요 14:6 ).5)
요한이 ‘에스타이’( ἔσται ) 를 사용해서 요한이서 2절의
이런 확신을 확증하는데, 곧바로 인사말의 핵심인 3절 시작을 같은 단어로 한다. 요한은 바울에게 전형적인 독자를 향한 기원 ( 대개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 을 소 개하는 대신 장래에 대한 확신을 진술하는 미래 직설법을 사용해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한다. 2절에 “진리”가 독자 안에 거하고 또 영원히 “거할 것”이기에, “은혜와 긍휼과 평강” 역시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은 이런 식으로 “진리”가 의미하 는 것을 어느 정도 풀어낸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라는 삼중 표현이 다소 관습적일 수 있겠으나 ( 딤전 1:2; 딤후 1:2; 참고, 유 2 ), 세 용어 중 어느 것도 요한서신 에서 흔한 개념은 아니다. “은혜”( χάρις, ‘카리스’ ) 는 요한 문헌에서 요한복음 1장 14, 16 ( 2회 ), 17절, 요한계시록 처음과 끝 ( 1:4; 22:21 ) 에만 등장한다. “긍휼”( ἔλεος, ‘엘레오스’ ) 은
요한 문헌에서 여기만 등장한다. “평강”( εἰρήνη, ‘에이레네’ ) 도 무척 드
문데, 열한 제자를 향한 예수의 마지막 말씀 ( 요 14:27[2회]; 16:33 ), 부활하신 그리 스도의 문안 인사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19, 21, 26 ),
밧모섬의 저자 요한의
문안 인사 ( 계 1:4 ), 붉은 말 탄 자의 고난 묘사 ( 계 6:4 ), 가이오를 향한 마지막 축 복 ( 요삼 15[14b NIV] ) 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 푸는 과분한 호의, 기꺼이 백성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의지, 복을 베푸는 변치 않는 손길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단어는 오랫동안 열망해 온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보여 준다 ( 참고, 민 14:18; 사 26:3 ). 에이킨 ( 2001: 222 ) 은 어순의 중요 성을 찾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우선한다. 긍휼과 평강은 은혜에서 흘 러나온다.”6) 요한은 이 같은 삼중 표현의 기원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지적한다 ( 요이
3 ).
복음의 메시지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같은 하나님에게서 천상의 영원한 은혜를 가능하게 한다. 그 하나님을 요한 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호소했다. 요한일서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리스 도 중심의 강조점이 여기서도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요한이 중요하 게 여기는 성령이 암묵적으로 함께한다는 사실도 볼 수 있다. 요한은 삼위일
5) 렌스버거(2001: 110)는 진리를 대체로 “장로와 그의 공동체가 생각하는 예수에 대한 특별한 이해”로 축소시킨다. 요한이서가 내부 당파주의를 폭로하고 있다고 본다면 말이 된다. 6) 렌스버거(2001: 109)는 이것을 “초기 기독교 편지에 등장하는 표준 문구”라고 본다. “그래서 각각 구 별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핵심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요한이 이 용어를 일반 용법에 따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Kruse 2000: 206이 지적; 또한 Strecker 1996: 227). 요 한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형식적인 말이 아닌 실제의 기쁨으로 보고, 이런 문구를 단순 히 차용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확신과 사도의 창의성을 나타내는 참신한 표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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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
체를 믿으면서도 이를 현학적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특별히 성령의 임무가 아들과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일 때 그렇다 ( 요 16:14-15 ). “진리와 사랑 가운데” 는 하나님의 지혜에 바탕을 둔 신학적 규범 ( “진리” ) 이 있다는 요한의 확신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존재에 내재된 아가페적 성질 ( “사랑” ) 로 가득 차 있다 ( 요일 4:8 ). 아버지와 아들의 진리와 사랑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안에 하나님의 은혜, 긍휼, 평강이 작동하게 하는 틀을 만들어 준다. 요한은 이 틀을 확신한다. 요한이 이것에 근거해 그다음 기쁨을 표현하는 것 ( 하지만 우 려도 곁들임 ) 으로
옮겨 가는 것은 당연하다.
추가 주석 제목/표제. 사본 대부분 “요한의 두 번째 서신”이라는 제목이 나오며, K와 소문자 사본 614는 “공동”( Catholic ) 이라는 말을 추가한다. 대부분은 후대 사본에 속한다. 049의 독법 “동일인 ( 요한 ) 의 두 번째 서신”은 입증할 필요 없이 무시해도 된다. 대문자 사본 L에서 발견 되는 “신학자 거룩한 사도 요한의 두 번째 서신”이라는 제목은 무척 드문 경우다. NA27은 짧은 독법 ‘이오안누 베타’( ΙΩΑΝΝΟΥ Βʹ, “요한의 두 번째” ) 를 선택한다. 네 개의 대문자 사본 중 048만 정확하게 이 독법을 따른다.
2 절 . 대여섯 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문자 사본과 극소수 역본과 카시오도루 스 ( Cassiodorus ) 의 라틴어 역본은 Y 을 따라 전치사구 ‘디아 텐 알레데이안’( διὰ τὴν ἀλήθειαν ) 을 생략한다. 이 독법은 외적 증거가 약하다. 이런 오류는 유사문미 때문일 수 있다. 또는 필사자가 그 부분이 반복된 것은 자기 이전 필사자의 실수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문장을 조금 향상하느라 그 부분을 생략했을 것이다. 2절. NA27은 독자 안에 “거하는”( μένουσαν, ‘메누산’ ) 진리로 읽는 반면, 대문자 사본
둘 ( A, 048 ) 은 ‘에노이쿠산’( ἐνοικοῦσαν, “거하는” ) 으로 읽는다. 이것은 설득력 없는 외적 증
거다. 그 외에 동사 ‘에노이케오’( ἐνοικέω, “거하다” ) 형태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에게만 제한 된다 ( 롬 8:11; 고후 6:16; 골 3:16; 딤후 1:5, 14 ). 소수 소문자 사본과 콥트어 역본은 ‘우
산’( οὖσαν ) 으로 읽지만, 다른 이문처럼 ‘메누산’( μένουσαν ) 을 생략한다. 이 독법은 NA27 독 법이 가진 우세함과 개연성에 실제적인 도전이 되지 못한다.
2절. 소수 사본 ( P와 81 포함 ) 은 “우리 안에”( ἐν ἡμῖν, ‘엔 헤민’ )가 아니라 “너희 안에” 거
하는 진리로 읽는다. 이것은 인칭 대명사 1인칭과 2인칭 복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혼동 사례다. 2절. 소문자 사본 81과 불가타 사본은 NA27의 “우리와 함께” 대신 “너희와 함께”( μεθ᾿
ὑμῶν, ‘메드 휘몬’ ) 로 읽는다. 이것은 명백한 필사자의 실수다.
3절. 인칭 대명사 ‘헤메이스’( ἡμεῖς ) 와 ‘휘메이스’( ὑμεῖς ) 사이의 혼동은 왜 두 개의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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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NT 시리즈에 대한 추천의 글
요한서신
베이커 신약 주석은 신약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자들이 헬라어 본문에 대한 세밀한 주석적 설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독자와 친밀한 주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 I. 하워드 마셜, 애버딘 대학교
요한서신
추천의 글 이번에 나온 BECNT의 신간은 주해만 신경 쓴 것이 아니라 설교가든 일반 독자든 이 시대를 향한 요 한서신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의도도 충분히 고려했다. 이 책은 본문비평만 아니라 헬라어 원문에 대해서도 상세하고 세심하게 연구하여 편지 구성의 모든 측면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도록 했다.
- 하워드 마셜, 애버딘 대학교
저자는 스스로 겸양하겠지만 요한서신을 다룬 주석 중에 이만한 책이 없다. 요한서신을 예수의 사역 이나 가르침의 여러 측면에 연결하고 고대의 본문뿐 아니라 최신의 요한서신 연구까지 모두 고려했 다. 노련한 학자이면서도 목회자의 심정과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깊은 관심으로 이 책을 집필 했다. 엄밀하면서도 지극히 읽기 쉬운 주석으로 학생이든 목회자든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크게 도움 이 될 것이다.
- 그레이엄 트웰프트리, 리젠트 대학교
이 책은 야브루의 역작으로 매우 참신하고 완성도 높은 주석이다. 요한이 쓴 용어의 용법이나 의미 에 대해 무척 유익한 논의를 제시하고, 주해 과정에서 요한서신에 대해 전반적으로 정경적인 접근을 유지했으며, 성경 본문의 폭넓은 신학적 함의를 전하려고 애쓴 점에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배울 것 이 많고 탐구욕을 불러일으키는 이 주석으로 독자는 성경 본문에 경건하게 다가가고 하나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열정을 얻게 될 것이다.
지은이
- 피터 오브라이언, 무어 대학
로버트 야브루 ( Robert W. Yarbrough )
사우스웨스트 침례교 대학(B. A.), 휘턴 대학 대학원(M. A.), 애버딘 대학교(Ph. D.)에서 공부했다. 휘턴 대 학,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 리버티 대학교를 섬기고 지금은 커버넌트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아프리카, 동유럽, 홍콩, 호주에서 신학 교육에 참여하였고, 미국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목회 활동을 했 다. 『전망의 충돌』, 『PNTC 목회서신 주석』 등을 저술했다. 옮긴이
로버트 야브루 지음 최병필 옮김
최병필
광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의 칼빈 신학교에서 신약학으로 신학석사 학
위를 받은 후에, 캐나다 온타리오의 맥매스터 신학교에서 스탠리 포터 교수의 지도 아래 누가복음으 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핼리팩스 한인 교회를 섬기고 있다. 역서로는 『NICNT 고린도전서』(부흥과개혁사)가 있다.
ISBN 978 - 89 - 6092 - 657 - 8 ISBN 978 - 89 - 6092 - 258 - 7 (세트) www.rnrbook.com
값 34,000원
로버트 야브루
지음 | 최병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