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Nt
nicNt
on the NEW testame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히브리서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nicN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면서도,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 타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지은이 개러스 코커릴 (Gareth Lee Cockerill)
옮긴이 신윤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M. Div.) 및 성 서학(Th. M., Th. D.)을 전공했으며,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서울장신대학교 등 여러 신학교와 비블 리카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쳤다. 역서로 NAC 『신명기』, 『여호수아』, 『열왕기상하』, AOTC 『레위 기』, NICOT 『에스겔I』(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ISBN 978-89-6092-684-4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54,000원
신 | 윤수 옮김
서던 웨슬리언 대학교(B. A.), 애즈버리 신학교(M. Div.), 유니언 신학교(Th. M., Ph. D.)에서 공부했다.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웨슬리 성경 신학교에서 30년 넘게 성경 해석학과 성경신학을 가르쳤고 학장을 역임했다. 웨슬리언 교회 성직자로서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선교사로 봉사 했다. 『CBS 히브리서 주석』, 『하늘 도성으로 가는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를 저술했다.
개러스 코커릴 지음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히브리서 Hebrews 개러스 코커릴 지음 | 신윤수 옮김
목차 ■ 편집장 서문 │ 10 ■ 저자 서문 │ 11 ■ 약어 소개 │ 15
서론 I. 히브리서의 환경 | 30 A. 히브리서를 쓴 목회자 • 30 1. 저자와 정경성 • 31 2. 저자 후보 — 검토 • 35 B. 목회자의 설교 • 40 C. 목회자의 회중 • 45 1. 이 설교가 청중에 대해 알려 주는 것 • 45 2. 히브리서의 청중은 유대인인가 이방인인가 • 48 D. 목회자의 세계관 • 54 1. 목회자의 기독교 전통 의존 • 54 2. 목회자와 묵시 문헌의 천상적/미래적 종말론 • 55 3. 목회자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 59 E. 목회자는 언제 이 설교를 썼는가 • 65
II. 히브리서의 메시지 | 72 A. 설교의 구약 사용 • 72 1. 서론 • 72 2. 기본 가정 • 74 3. 시편과 관련 구절 —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 76 4. 모세오경 — 모세가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다”(3:5) •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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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사서(여호수아-느헤미야) • 81 6. 히브리서 3:7-4:11, 7:1-10, 12:18-24 • 82 7. 연속성과 유형론 • 84 8. 히브리서와 동시대 유대교의 구약 사용 • 86 9. 동시대적 관련성 • 89 B. 설교의 효과적 수사 구조 • 92 1. 서론 • 92 2. 히브리서 1:1-2:18과 12:4-29: 하나님이 산에서 말씀하셨다 • 95 3. 히브리서 3:1-4:13과 10:19-12:3: 약속된 본향으로의 순례 • 98 4. 히브리서 1:1-4:13과 10:19-12:29: 불순종하는 자들과 신실한 자들 • 101 5. 히브리서 13:1-25: 마무리 부분(및 편지 끝) • 103 6. 히브리서 4:14-10:18: 지성소에 들어가기 • 104 7. 히브리서의 수사적 구성과 구약 사용 • 107 8. 히브리서의 수사적 구성과 고대 수사학 • 111 C. 설교의 일관된 메시지 • 111 D. 설교 개요 • 114
본문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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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 118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 119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1:1-4) • 120 2. 영원하고 높아지신 아들의 비교할 수 없는 위엄(1:5-14) • 136 3.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한 계시에 유념해야 할 절박성 (2:1-4) • 154 4. 성육신하여 고난받는 아들의 결정적 중요성(2:5-18) • 163 B.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시험: 불순종하는 자들을 피하라 ( 3:1-4:13 ) • 196 1.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아들 예수를 생각하라(3:1-6) • 201 2. 믿음 없는 세대와 함께하지 말라(3:7-19) • 219 3. 믿음 없는 세대가 잃어버린 복을 구하라(4:1-11) • 243 4.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4:12-13) • 264
II. 아들의 대제사장 직분 — 인내를 위한 자원과 긴급성 (4:14-10:18) | 270 A. 믿음의 삶과 아들의 대제사장 직분 ( 4:14-5:10 ) • 273 1. 이 위대한 대제사장을 받아들이라(4:14-16) • 274 2. 새 대제사장과 옛 대제사장(5:1-10) • 283 B. 응답하여 그리스도가 주신 것을 잡으라 ( 5:11-6:20 ) • 308 1. 비정상적인 퇴행에서 돌아서라(5:11-6:3) •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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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교의 위험을 피하라(6:4-8) • 327 3. 배교를 피하고 신자 공동체를 받아들이라(6:9-12) • 340 4. 하나님의 맹세로 확증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6:13-20) • 346 C. 우리의 대제사장의 적법성과 영원성 ( 7:1-28 ) • 356 1.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크다(7:1-10) • 359 2.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이 아론을 대체한다(7:11-25) • 379 3. 이 제사장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제사장이다(7:26-28) • 407 D. 우리 대제사장의 완전히 충분한 희생: 세 악장의 교향곡 ( 8:1-10:18 ) • 417 1. 제1악장: 새 언약의 약속(8:1-13) • 421 a. 성소와 참 장막의 사역자(8:1-2) • 422 b. 다른 제물(8:3-6) • 431 c. 더 나은 언약(8:7-13) • 439 2. 제2악장: 낡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예표(9:1-22) • 447 a. 지상 성소의 한계(9:1-10) • 448 b.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한 충분성(9:11-15) • 465 c. 깨어진 언약의 정죄에서 해방됨(9:16-22) • 484 3. 제3악장: 새 언약의 설명(9:23-10:18) • 494 a. 성소 —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9:23-24) • 497 b. 희생 — “단 한 번”(9:25-10:4) • 503 c. 희생 — “하나님,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10:5-10) • 519 d. 희생 — “그는 영원히 앉으셨다”(10:11-14) • 534 e. 언약 — “죄 사함이 있는 곳에는”(10:15-18) • 543
III. 창조에서 완성에 이르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의 역사 (10:19-12:29) | 551 A. 인내하는 믿음의 삶과 아들의 대제사장직 ( 10:19-39 ) • 552 1. 이 위대한 대제사장을 놓치지 말라(10:19-25) • 556 2. 너희는 이 대제사장 때문에 책임이 더 크다(10:26-31) • 576 3. 신실한 자들에게 약속된 복을 구하라(10:32-39) • 592 B. 예수 이전 하나님 백성의 과거 역사 ( 11:1-12:3 ) • 614 1. 옛 언약의 신실한 자들에 합류하라(11:1-40) • 616 a. 창조에서 노아까지: 믿음의 토대(11:1-7) • 620 b. 아브라함, 최선의 믿음: 이방 세계에서의 인내(11:8-22) • 638 c. 모세, 압박받는 믿음: 저항과 승리의 이야기(11:23-31) • 672 d. 나머지 이야기 — “더 나은 부활”(11:32-38) • 698 e. “그들은 우리 없이는……”(11:39-40) • 711 2.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를 바라보라(12:1-3) • 716 C. 완성까지 하나님 백성의 현재 역사 ( 12:4-29 ) • 731 1. 하나님의 참 자녀들은 고난의 훈육을 견뎌 낸다(12:4-13) • 733 2. 에서와 같이 장자권을 팔지 말라(12:14-17) • 752 3. 하나님의 장자는 높아지신 예수를 통해 그의 임재에 들어간다 (12:18-24) • 764 4.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 때 “또 한 번” 말씀하실 것이다 (12:25-29) • 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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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위한 지침(13:1-25) | 799 A. 신자 공동체와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 13:1-6 ) • 803 B. 믿지 않는 세상과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 13:7-17 ) • 816 C. 편지로 보내는 설교 ( 13:18-25 ) • 840
■ 참고문헌 │ 855
히브리서
┃ 편집장 서문┃
나는 이 주석을
( 기쁜 마음으로 )
독자에게 소개하지만 상당히 복잡한 심경
이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본 주석 시리즈에 있어서 한 시대의 마감을 의미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2대 편집장 ( F. F. 브루스 ) 이 쓴 주석을 대체하는 것인 동시에 몇 권의 대체 주석이 준비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츠하이머병 발병으로 인해 이 과제를 포기해야 했던 3대 편집장의 마지막 편집 작품이 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개러스 코커릴과 아주 가깝게 일하는 특 권을 누렸고, 이 시리즈의 주요 독자층인 “바쁜 목회자”와 대학 및 신학대 학원의 성경 학도들에게 이 주석을 추천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 각한다. 독자들은 저자가 이 위대한 성경책에 대한 2차 문헌을 잘 알고 있 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의 저자와 그의 작품에 대한 깊은 사랑이 이 책 전 반에 걸쳐 빛을 발하도록 작업에 임해 왔음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 책 을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어 기쁘다. 고든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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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 저자 서문┃
히브리서는 1세기 헬레니즘 세계의 문학 작품이다. 그러나 이 주석이 채 택한 설명은 이 책을 마치 실험실의 표본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루지 않는다. 내 의도는 고대 문서를 그 자체의 맥락 안에서 해설하고 그다음에 현대 신자들을 위해 유사점을 이끌어 내는 것 그 이상이다. 내가 원하는 것 은 현대 독자들로 하여금 히브리서가 말하는 기독교 세계에 들어갈 수 있 게 하고 그 세계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듣기 위해 비록 고대 문서이지 만 언제나 관련이 있는 이 본문으로 나아오고, 아들이 제공하는 정화를 통 해 하나님 앞에 다가가며,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 안에서 순종과 신실함으 로 인내하는 사람들에게 이 주석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리처드 헤이스는 성경 주석의 목적은 성경 내러티브에 들어가서 그것이 독자의 관점과 행동 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교회에 상기시켰다.1 ) 이런 임무를 수 행하는 데 있어 히브리서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고든 피 교수는 이 책과 관련된 첫 대화에서 본 시리즈의 히브리서 주석 1 ) Richard B. Hays, First Corinthians, Interpretation (Louisville: John Knox, 1997), 173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근본적 목회 과제 중 하나는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회중이 자신 을 발견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우리의 교육은 이런 역량을 가르치는 데 참담하게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본문을 ‘관련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 이다. 바울은 본문을 관련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기보다는, 본문의 세계가 현재 공동체의 규범과 결정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독자들을 그 본문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것이 성경적 설교의 과제다.”
11
히브리서
을 새롭게 발간하는 것이 타당한 일임을 밝혀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고대 수사학 연구,
( 특히 담론 분석을 통한 )
히브리서의 구조 분석, 본문상호
간 ( intertextual ) 연구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룩된 발전을 고려할 때 그런 모 험은 충분히 해 볼 만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나는 그가 내 견해에 동의한 것 에 감사한다. 기독교 신자들을 위해 구약 성경을 이 책보다 더 부지런히 제 시하는 책은 없다. 이 책은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말씀하신 하나 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어떤 책도 히브리서보다 더 정교한 수사법을 보여 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자신의 연구 내용을 풍성하게 하려고 동원하는 모든 방법론을 수용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이 주석은 무엇보다도 히브리서의 구조와 수사학적 형태에 대한 새로운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각 개별 구절은 저자가 제시하는 진리를 청중이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전반적인 전략 내 에서 그것이 수행하는 역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해석된다. 자신이 좋아하 는 구절에 대한 주석을 읽기 전에 서론에 나오는 전반적인 구조 분석을 먼 저 숙지하는 것이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주석을 위한 각 단원 및 하위 단원은 살펴보고자 하는 본문의 특정 부분이 본문 전체와 관련하 여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단락으로 시작한다. 히브리서에 대 한 또 다른 구조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대담해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히브 리서 본문의 소리에 주의 깊게 귀 기울이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분석에서 얻은 모든 것을 심사숙고한 후에 비로소 이 분석을 겸허하게 제시한다. 나 의 분석이 히브리서 개별 구절과 전체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할 수 있 는가에 기초하여 독자 여러분이 판단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 주석은 또한 히브리서의 구약 사용에 대한 신선한 통찰을 제공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전 계시 사이의 관계 를 연속성과 성취의 관계로 이해한다. 저자의 접근 방식은 현대 기독교의 성경 해석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 많은 요소를 갖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한 나의 이해는 본 주석 서론에서 제시되고 있으며 뒤에 나오는 본문 주석 자 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내가 히브리서 주석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거의 언제나 “글쎄, 그 책을 누가 썼지?”라고 묻곤 했다. 확실히 히브리서는 1세기 상황 에서 연구할 수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 는 이용 가능한 증거가 불충분하여 저자의 이름을 확실하게 판단하거나 수 12
저자 서문
신자의 위치, 구체적인 신분, 상황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나치게 구체적인 히브리서 기원의 재구성에 근거를 두고 해석하 는 사람들은 그 제안의 특이성에 비례하여 이 책에 대한 이해를 왜곡할 가 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제안은 히브리서의 어떤 면을 강조한다. 따라서 서론 부분에서 이런 다양한 제안을 검토하는 것은 어떤 것이 올바 른지 판단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각 제안이 제공하는 통찰로부터 유익 을 얻기 위한 것이다. 번역, 본문 이독, 이차적 출처에 대해 한마디 할 필요가 있다. 나는 히브 리서를 직접 번역했기 때문에, 특정 번역을 비평할 의무가 없고, 영어 독자 들이 헬라어 본문의 문체적 특징과 다양한 강조점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 도록 했다. 본문 이독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을 제공하는 히브리서 주석은 많다. 나는 본문상의 문제가 해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때에만 그리고 별 도 단락이 아닌 주석 자체의 일부로 그것을 다루었다. 학술적 출판물이 크 게 늘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히브리서 관련 문헌을 모두 통달했다고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다. 나는 가능한 한 포괄적이 되도록 그리고 가장 도움이 될 것 같은 자료와 소통하려고 노력해 왔다. 피터 오브라이언의 훌륭한 주 석이 딱 맞춰 나와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다. 친구 데이비드 알렌의 주석이 너무 늦게 나온 것은 유감이다. 많은 사람의 도움과 격려에 감사해야 한다. 우선, 필자에게 이 기회를 준 데 대해, 특히 처음 몇 장의 초고에 대해 명확한 피드백을 준 것에 대해, 나 는 고든 피 교수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그 피드백으로 전체의 방향이 정해 졌다. 박사학위 멘토인 마티아스 리시 교수에 대한 감사를 빠뜨리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비록 이 책이 그가 쓰고자 했던 히브리서 주석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나에게 처음으로 히브리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불러일으켰 고 통찰력과 격려로 내 연구를 지도했다. 웨슬리 성경신학교의 전 총장과 학장인 론 스미스와 레이 이즐리에게 나의 일정을 잡아 주고 이 프로젝트 를 가능하게 해 준 다른 자원을 제공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웨슬리 성 경신학교의 도서관장인 댄 버넷은 도서관 상호 대출에 대한 나의 많은 요 청에 감사하게도 응답했다. 특히 미시시피주 잭슨 소재 리폼드 신학교 도서 관장 케네스 엘리엇과 출판국장 존 매카티에게 감사드린다. 그들은 나에게 이 프로젝트의 완성을 크게 용이하게 해 준 서지 자료와 연구실을 제공했 고 뛰어난 동료애를 보여 주었다. 어드만 출판사의 밀트 에센버그는 나 이 전의 다른 많은 주석가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마지막 몇 달 동안 나에게 13
히브리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대학원 시절부터 친구인 데이브 스테블린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그의 격려가 없었다면 결코 이 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딸 앨린과 두 사위 인 캐리 빈잔트와 데이비드 오도넬에게 감사하고 싶다. 캐리는 문장가와 신 학자의 눈으로 이 주석의 원고를 읽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색인을 준비 했다. 앨린과 데이비드는 참고문헌 작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세 딸 앨린, 지니, 캐시가 지난 수년간 격려해 준 것에 감사하고, 무엇보다도 “주석 이 후” 시간을 위해 최근 몇 년간 인내와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온 사십 년 넘 은 아내 로사에게 감사한다. 이 책을 아내, 딸과 사위들, 손주들, 데이브에 게 바치고자 한다. 개러스 코커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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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rews
서론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서론
이 서론의 목적은 히브리서와 뒤에 나오는 주석을 더 깊고 포괄적으로 이 해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히브리서의 환경”이라는 제목의 1부는 히브 리서의 기원과 그것이 기록된 문화, 언어, 문학, 종교 세계의 관련 특징을 다룬다. 따라서 이 첫 부분은 “히브리서를 쓴 목회자”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저자의 정체성에 대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된다. 1부 에서 그 뒤에 이어지는 네 부분은 다음과 같다. “목회자의 설교”, “목회자의 회중”, “목회자의 세계관”, “목회자는 언제 이 설교를 썼는가?” 1부에서는 저자의 기량, 배경, 가치, 목표뿐 아니라 수신자의 상황과 그들에 대한 저자 의 관심의 성격에 대해 히브리서가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지에 세심한 주 의를 기울인다. 2부 “히브리서의 메시지”를 이루는 네 부분은 히브리서의 구약 사용, 수 사학적 형태, 일관된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첫째, “설교의 구약 사용”이라는 제목이 붙은 부분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계속 해서 관련이 있는 구약을 그리스도가 어떻게 성취했는지에 대해 저자가 철 저하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다음 부분인 “설교의 효과적 수사 구 조”는 히브리서의 구조와 고대 수사학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당시 융성했던 문학에 의지한다. 이 부분은 자신의 독자/청중이 “큰 대제사장”( 4:14 ) 인 그 리스도의 공급을 통해 믿음과 순종으로 인내하도록 영감을 주기 위해 저 자가 히브리서를 구성한 방식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뒤에 나오 는 주석 부분은 이런 구조 분석을 사용하여 각 구절을 해설하기 때문에 독 29
히브리서
자는 이 부분을 숙독함으로써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주석의 각 주요 부분 서두에 나오는 개요도 도움이 된다. 2부는 “설교의 일관된 메시지”와 “설교 개요” 부분으로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미 제시된 구조 분석 을 바탕으로 명확한 개요를 추출하는데, 이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주석의 기초 역할뿐 아니라 독자에게 유용한 지도 역할을 한다. 이런 제목에서 “목회자”와 “설교”와 같은 용어가 사용된 것은 히브리서 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반영한다. 히브리서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도 현대 독자들이 이 자료에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 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나보다 앞서 이 과제를 수행했던 많은 훌륭한 해석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했고 그들의 통찰로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로워졌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게 주어진 통찰을 독자들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I. 히브리서의 환경
A. 히브리서를 쓴 목회자 히브리서 본문은 저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지만 그의 능력과 관심사, 그가 상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보여 준다.1 ) 저자는 고대 세계에서 가르친 대로의 수사학과 구두 설득의 원리를 이해했던 우아한 헬라어의 대가였다. 저자는 구약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에 비추어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 었다. 저자는 수신자들의 과거 역사를 잘 알고 있었으며 ( 2:3-4; 13:22-25 ),
6:10; 10:32-34;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공적 신앙고백에서 그들이 인내하지 못
할까 심히 걱정했다 ( 3:1; 4:14; 10:23 ). 그러므로 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을 붙드는 데 있어서 느슨하거나 부주의하지 말 것이며 ( 2:1-4;
5:10-14; 6:1-3 ),
1 ) 히브리서 저자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남성 대명사가 사용될 것이다. 이것은 편의상이기도 하지 만, 저자가 11:32에서 자신을 남성 분사 ‘디에구메논’(dihgoÖmenon, “말하다”)으로 묘사하기 때문 이다. Ruth Hoppin, Priscilla’s Letter: Finding the Author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Fort Bragg, CA: Lost Coast Press, 1997)는 브리스가가 저자라는 하르낙의 제안(Adolf von Harnack, “Probabilia über die Adresse und den Verfasser des Hebräerbriefes,” ZNW [1900]: 16-41)을 되살리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Mitchell, 5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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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I. 히브리서의 환경 A. 히브리서를 쓴 목회자
믿지 않는 세계로부터의 유혹 ( 12:14-17 ), 특히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의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 3:7-4:11;
10:32-39; 12:1-3 ).
하
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속적인 무관심과 불경건한 자들의 반대 앞에서의 묵 인이 결합되면 배교로 이어질 수 있다 ( 6:4-8; 10:26-31; 12:14-17 ). 하나님의 백성 의 유능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충만함은 이런 위험에 대한 저자의 해독제다. 그리스도는 죄를 결정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에, 미래 의 영원한 “도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며 현재의 인내를 위한 하 나님의 능력은 실제적이다 ( 4:14-16;
10:19-25 ).
이렇게 구세주와 대제사장으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이며 ( 1:1-4 ) 옛 질서가 기대 했던 모든 것을 성취한다. 저자는 직접적인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자기 청중의 신앙고백으로 인정된 복음과 구약의 권위를 자신의 호소의 근 거로 삼는다.2 ) 청중의 영적 건강에 대한 깊은 관심, 구약에 대한 헌신, 자신 의 책을 설교 형태로 구성한 것 ( 뒤의 40-45쪽 참고 ) 을 고려할 때 우리가 저자를 “목회자”라고 지칭하는 것은 정당하다. 히브리서의 저자를 신약의 어떤 인물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증거 부족 으로 인해 아무리 해도 결론이 나지 않을 사안임이 분명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결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3 ) 첫째, 교부 시대 동안 저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히브리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문제와 밀접 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승인된 신약 책 목록에서 히브리서의 위치를 이해하려면 교부들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저자를 확인하 려는 시도는 신약 책 중 히브리서의 독특성을 강조하여 현대 독자에게 교 회의 복음 이해에 대한 히브리서의 독특한 공헌을 상기시킨다.
1. 저자와 정경성 AD 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울 서신집인 î46에서 히브리서는 로마 서와 고린도전서 사이에 있다. 이 사본에는 “히브리인들에게”라는 제목이 이미 나타난다.4 ) 4세기와 5세기의 필사본인 코덱스 바티카누스, 코덱스 시 2 )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고백”(3:1; 4:14; 10:23)에 대해서는 Scott D. Mackie, Eschatology and Exhortation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WUNT 223; Tübingen: Mohr Siebeck, 2007), 226229 및 227, n. 54에 인용된 것들을 보고, 마찬가지로 Scott D. Mackie, “Confession of the Son of God in Hebrews,” NTS 53 (2007): 125-128, 특히 126, n. 44를 보라. 3 ) Ellingworth, 3은 총 13명의 제안된 저자를 열거한다. 4 ) 바울 서신의 제목들과 유사하게 히브리서에 이런 제목이 붙었을 것이다(Bruce, 3). 히 13:22-25의
31
히브리서
나이티쿠스,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에서 히브리서는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들과 개인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들 사이에 들어 있다.5 ) 6세기의 코 덱스 클라로몬타누스로 시작하여 히브리서는 현대 영어 성경에서와 같이 바울의 다른 편지들 다음에 나온다.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히브리서 는 정경이지만 더 이상 바울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히브 리서는 “공동서신”(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1·2·3서, 유다서 ) 의 첫 번째 책이 되 었다. 아래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위치에 있어서의 이런 변화는 저자 와 정경성에 대한 동방과 서방의 차이를 반영한다.6 ) 또한 그 변화는 바울 저작에 대한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가 최종적으로 정경에 수용된 것과 부합한다.7 ) 히브리서는 서방 로마 제국에서 가장 먼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세기 말경 로마에서 기록된 클레멘스1서는 이 책을 인용하고 상기시 킨다.8 ) 폴리카르포스 ( AD 69-155년경 ) 에서도 히브리서의 반향이 나타나며, 이 레나이우스 ( AD 200년경 ) 가
180년경 ),
테르툴리아누스 ( AD 9 )
이 책을 인용한다.
155-220년경 ),
로마의 가이우스 ( AD
그러나 이 저자들 중 어느 누구도 히브리서
를 정경으로 인용하거나 바울에게 돌리지 않았다. 히브리서는 무라토리 정 경 ( AD
175년? 무렵 ) 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히폴리투스 ( AD
236년경 사망 ) 는
자
신의 다니엘서 주석에서 히브리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지만, 공인된 13개 의 바울 서신에서 제외함으로써 이 책의 정경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10 ) 이 자료들 가운데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해 유일하게 언급 한 것은 테르툴리아누스인데, 그는 이 책을 바나바의 것으로 돌린다.11 ) 이 편지 결론은 바울과의 연관성을 암시했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또한 이 제목으로 히 브리서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Eusebius, Hist. eccl. 6.14.3-4). 5 ) 사본 C, H, I, K 및 P에서도 그렇다. 일부 사본에서는 히브리서가 고린도후서와 갈라디아서 사이에 나타나기도 한다. Weiss, 117-118, 특히 nn. 13, 14를 보라. 6 ) î46, 코덱스 바티카누스, 코덱스 시나이티쿠스,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의 기원은 동방이며 코덱스 클라로몬타누스는 서방이다. 7 ) 1750년까지의 히브리서 해석에 대한 유용한 개관은 Koester, 19-40을 보라. 8 ) 뒤의 65-72쪽, “목회자는 언제 이 설교를 썼는가”를 보라. 9 ) Phil. 12:2에서 폴리카르포스는 그리스도를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부른다(참고, 히 6:20; 7:3). 이레나이우스와 로마의 가이우스의 히브리서 사용에 대해서는 Eusebius, Hist. eccl. 5.26.3; 6.20.3 을 보라. 테르툴리아누스에 대해서는 Pud. 20을 보라. 참고, S. J. Kistemaker, “The Authorship of Hebrews,” Faith & Mission 18/2 (2001): 58. 10 ) Kistemaker, “The Authorship of Hebrews,” 58. 참고, Hippolytus, Haer. 6.30.9. 11 ) Pud. 20에서 테르툴리아누스는 바나바를 “사도들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사도들과 함께 가르친” 사람으로 묘사한다(Kistemaker, “The Authorship of Hebrews,” 59). 그 후 바나바 저작설에 대 한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다가 Jerome, Epist. 129, Vir. ill. 5.59는 누군가의 제안이라며 바나바에
32
서론 I. 히브리서의 환경 A. 히브리서를 쓴 목회자
런 침묵은 서방 교회가 히브리서를 바울의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것을 사도적이며 정경적인 책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시사 한다.12 ) 그러나 동방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위대한 교리 학교를 세운 판테누스 ( AD
180년경 ) 는
2세기 말에 히브리서가 바울의 것이며
정경적이라고 주장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확언은 î46이 히브리서를 로 마서와 고린도전서 사이에 배치한 방식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판테누스 는 히브리서에 바울의 통상적인 머리말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설명이 필요 한 걸림돌이라 여겼다. 즉 바울이 자기 이름을 넣지 않은 것은 자신은 오직 이방인의 사도였고 “주님”이 유대인의 “사도” ( 히 3:1 참고 ) 였기 때문이라는 것 이다 ( Hist. 200년경 ) 는
eccl. 6.14.4 ).13 )
판테누스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AD
가능한 반대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바울 저작과 정경적 지위
에 대한 전통은 확고하게 고수했다 ( Hist . eccl . 6.14.3 ). 클레멘스는 바울의 이름 이 빠진 것은 바울 자신이 이 편지의 수신자인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클레멘스는 바울이 히브리어로 글 을 썼고 누가가 그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바 울의 머리말이 없는 것과 히브리서 문체와 바울 서신 문체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클레멘스의 후계자인 오리게네스 ( AD 185-254년경 ) 는 몇 가지 이유로 유세비 우스가 기록한 그대로 인용할 가치가 있다 ( Hist . eccl .
6.25.11-14 ).
먼저, 오리게
네스는 일부 사람이 히브리서의 저자 후보라고 생각하는 두 명의 다른 인 물이 로마의 클레멘스와 누가라고 밝힌다. 둘째,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서의 정경 지위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바울 저작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한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사상은 사도의 것이지만, 용어와 어법은 사도 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스승이 말한 바를 여유가 있을 때 받아 적어 두 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가 이 서신이 바울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대해 언급한다. 바나바 저작설을 지지하는 오래된 주석들에 대해서는 Spicq, 1:199-200, n. 8을 보라. 12 ) David Alan Black, “Who Wrote Hebrews? The Internal and External Evidence Reexamined,” Faith & Mission 18/2 (2001): 19; Andrew T. Lincoln, Hebrews: A Guide (London/New York: T&T Clark, 2006), 3. 13 ) Kistemaker, “The Authorship of Hebrews,”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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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그러나 누가 이 서신을 썼는지 사실은 하나님만 아신다. 우리보다 앞 서 간 사람 중 어떤 사람들은 로마의 주교인 클레멘스가 이 서신을 썼다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썼다 했다.14 )
4세기 무렵에 서방은 히브리서의 바울 저작과 정경적 권위 모두를 확인 하면서 동방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히브리서 1장 3절과 13장 8절은 아리우스 논쟁에서 정통 기독론을 입증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다.15 ) 따라 서 아타나시우스의 영향력 있는 AD 367년의 절기 편지가 히브리서를 포함 하고 있고 이것을 시내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과 부합하게 데살로니가후서 와 디모데후서 사이에 위치시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푸아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 ( AD 315-67년경 ) 는 히브리서의 바울 저작 및 정경성 모두를 확언함 으로써 서방이 동방과 동일 노선을 걷는 데 도움을 주었다.16 ) 아우구스티 누스 ( AD
354-430년경 ) 와 17 )
지지했다.
히에로니무스 ( AD
342-420년경 ) 는
모두 이런 움직임을
히포 공의회 ( AD 393년 ) 와 카르타고 공의회 ( AD 397년 ) 는 히브리서
를 포함시켰지만, 13개의 바울 서신 뒤에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이라 는 제목으로 실었다. 제5차 카르타고 공의회 ( AD
419년 ) 는
추가적인 설명 없
이 히브리서를 바울의 14번째 편지로 정경에 통합시켰다.18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6세기의 코덱스 클라로몬타누스에서 나타나는 위치와 동일하다. 바울 저작 여부에 대한 망설임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 리서는 사도적이고 정경적인 책으로 인정되었다. 위에서 인용한 오리게네 스의 말에 히에로니무스의 증언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진 서신은 많은 사람이 그것을 바나바나 클레 멘스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동방 교회뿐 아니라 우리 시대 이전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모든 교회 작가들에게도 사도 바울의 14 ) D. L. Allen, “The Authorship of Hebrews: The Lukan Proposal,” Faith & Mission 18/2 (2001): 27에서 재인용된 것이다. 15 ) Athanasius, Four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1.4.12; 1.36; 2.48; Gregory of Nazianzus, Oratio in laudem Basilii 38.1; Cyril of Jerusalem, Catechetical Lectures 12.17; Heen and Krey, 232-234; O’Brien, 3; Johnson, 6을 보라. 16 ) De Trinitate 4.11. 참고, Kistemaker, “The Authorship of Hebrews,” 58. 17 ) Augustine, Christian Instruction 2.8.12-13; Civ. 10.5; 16.22; Jerome, Vir. ill. 5; Epist. 53.8; 129.3, 7을 보라. 18 ) Black, “Who Wrote Hebrews?”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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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I. 히브리서의 환경 A. 히브리서를 쓴 목회자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 서신은 성직자에게서 온 것이고 교 회에서 매일 낭독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Epist. 129)19 )
히브리서에 대한 증언은 서방에서 처음 나왔지만 ( 클레멘스1서 ), 서방은 4세 기가 되어서야 동방의 영향 아래 그것을 바울의 서신이며 정경으로서 받아 들인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서의 저자와 관련하여 로마의 클레멘스, 폴리카 르포스, 이레나이우스, 히폴리투스의 침묵의 의미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 아 있다. 그들은 저자가 누구인지 몰랐을 수도 있고, 히브리서가 바울이 아 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쓰였다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히브리서를 바울의 서신인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박해로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 해 이 서신을 사용했던 몬타나주의자들에 비추어 전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지는 의심스럽다. 심지어 그런 회복에 반대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사용한 테 르툴리아누스 ( Pud . 20 ) 조차 바울 저작이나 정경 지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서방이 히브리서를 받아들이기를 주저한 것이나 동방에서 중간에 서기관이나 번역자가 있었다고 상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음은 모두 이 책 의 성격이 바울의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바울 저작설을 옹호한 것이 히브 리서의 정경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고대 교 회의 가장 위대한 성경학자들 ( 오리게네스,
히에로니무스 ) 은
바울 저작에 대한 의
구심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의 가치와 정경 지위를 확고히 했다.
2. 저자 후보 ― 검토 히브리서의 뚜렷한 기여는 바울 서신과 비교할 때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바울과는 대조적으로 독자들의 상황에 대한 히브리서의 일차적인 그림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고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향해 순 례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한 히브리서의 설명 은 바울에게서는 유사한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들을 깨끗하게/거룩하게 하는 그 19 ) Kistemaker, “The Authorship of Hebrews,” 59. Vir. ill. 5.59에서 히에로니무스는 바울이 원래 히브리서를 히브리어로 썼다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처음 제안한 것을 반복한다. 아퀴나 스도 히브리어로 된 바울의 원래 편지의 번역자로 누가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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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하는 점에서 바울과 다르다.20 )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은 순례자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인내를 위한 은혜와 최종적으로 하나 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확신을 제공한다. 히브리서는 전체적으로 기록되었다는 표현이 아니라 말씀하셨다는 표현으로 구약을 인용하는데, 이런 습관은 바울에게는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성이나 즉시성을 느끼 게 한다. 바울과 히브리서는 모두 새 언약에 대해 언급하지만 ( 고후 8:6-13; 10:15-18 ),
3:4-11; 히
히브리서의 구약과 신약 비교는 이 주제에 대한 바울의 접근
법과 다르다. 이런 기본적 관점 차이는 문체 차이로 더욱 뒷받침된다. 예를 들어, 목회 자는 바울과 달리 강해와 권면을 뒤섞는데, 이는 청중이 그리스도 안에 있 는 자신들의 것을 그들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인내할 수 있게 인도하기 위 해서다.21 )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논증법은 그 당시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바울도 때때로 사용하지만 ( 롬 5:12-21 ), 히브리서가 옛 언 약과 새 언약을 연관시키는 방식에서는 이 논증법이 기본이다.22 ) 이러한 주요 차이점은 이미지 ( 예, 2:1의 배, 6:19의 닻 ) 와 어휘 ( 히브리서는 신약의 다른 곳에는 나오 지 않는 169개의 단어를 사용함 )
면에서의 많은 차이로 뒷받침된다.23 )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서도 복음을 받지 않았다 ( 갈
1:12 ).
히브리서의 저자와 수신자는 모
두 주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로부터 복음을 받았다 ( 히
2:3 ).24 )
따라서
히브리서는 문체, 어휘, 내용에서 바울의 편지들과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바울 저작설은 받아들이기 거의 불가능하다.25 ) 데이비드 앨런 블랙은 바울과 히브리서의 현저한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 수정판 바울 저작설을 주장해 왔다. 블랙은 바울이 누가에게 히브리서를 받
20 ) O’Brien, 6. 21 ) 이와 달리 Black, “Who Wrote Hebrews?” 4; 롬 6:12-14와 갈 4:12-20은 이렇게 강해와 권면 을 뒤섞어서 히브리서의 본론을 구성하는 방식과 실제적인 유사점을 보여 주지 않는다. 22 ) 이와 달리 Black, “Who Wrote Hebrews?” 4는 롬 5:12-21을 히브리서와 유사한 것으로 인용 한다. 23 ) 히브리서와 바울의 용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Ellingworth, 7-12; Attridge, 2-3을 보라. 24 ) Clare K. Rothschild, Hebrews as Pseudepigraphon: The History and Significance of the Pauline Attribution of Hebrews (WUNT 12/235; Tübingen: Mohr Siebeck, 2009)는 편지의 결말과 바울의 글과의 다른 유사점을 근거로 1세기 후반의 히브리서 저자가 자신을 바울로 표 현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가 2:1-4에서 자신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과 그가 사도적 권위를 주장하지도 않고 심지어 암시하지도 않는 방식은 로스차일드의 주장을 옹호할 수 없게 만든다. 상세한 비판은 Douglas Moo, Review of Hebrews as Pseudepigraphon: The History and Significance of the Pauline Attribution of Hebrews, BBR 20 (2010): 295-296을 보라. 25 ) Attridge, 2-3; Ellingworth,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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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I. 히브리서의 환경 A. 히브리서를 쓴 목회자
아쓰게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런 차이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누가는 바울 이 말한 것을 기록함에 있어서 표현 방식의 자유를 상당히 허락받았다는 것이다.26 ) 블랙은 앞서 인용한 “그러나 이 서신을 누가 받아썼는지 사실은 하나님만 아신다”는 오리게네스의 말이 이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주장 한다.27 ) 따라서 “누가 받아썼는가”라는 오리게네스의 말은 저자가 아니라 바울의 말을 받아쓴 필기자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리게네스가 받 아쓴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28 ) 오리게네스는 어떤 사람들 은 클레멘스나 누가가 나중에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기억했던 것을 바탕으 로 히브리서를 썼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목회자가 잘 짜인 설교를 하려고 헬레니즘 수사법의 원리를 완벽한 솜씨로 사용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뒤에 서 논할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한 뛰어난 정신에 의해 매우 밀접하게 결합 되어 있어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29 ) 히브리서는 번역 헬라어가 아 니다. 문체, 어휘, 신학의 차이로 인해 바울이 저자일 가능성은 직접적으로 나 간접적으로나 거의 없다.30 ) 클레멘스1서와 히브리서는 문체와 내용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로마의 클 레멘스가 히브리서를 썼다는 제안에는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두 책이 구약을 사용하고 아론 계통 제사장직을 이해하는 방식 을 살펴보면 이 둘을 서로 구별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31 ) 그러나 그 당 26 ) 블랙은 바울과 히브리서 사이에 인정된 많은 중요한 차이점을 완화하기 위해 유사점을 보여 주 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점의 대부분은 표면적이거나 매우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엡 6:17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칼”과 히 4:12-13에서의 칼의 용례 사이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전 자에서 칼은 신자가 착용하고 사용해야 하는 갑옷의 일부다. 후자에서 칼은 하나님이 인간 영혼 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과 관련된다(다른 견해로는 Black, “Who Wrote Hebrews?”). 또한 바울과 히브리서 모두 알파 접두어가 붙은 부정어와 독립 속격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큰 의미는 없다(다른 견해로는 Black, “Who Wrote Hebrews?” 4-16). 27 ) Black, “Who Wrote Hebrews?” 20(참고, 18)은 분사 실명사인 ‘호 그라프사스’(Ê gr}yav)를 “쓴 사람”이 아니라 “받아쓴 사람”으로 번역한다. 28 ) Black, “Who Wrote Hebrews?” 20의 견해와는 달리, 롬 16:22에서 바울의 비서인 더디오에게 ‘그라포’(gr}fw) 동사를 사용한 것은 이 단어가 저자뿐 아니라 받아 적은 사람에게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이 헬라어 동사는 영어 단어 “write” 와 같은 의미 범주를 갖고 있다. 받아 적은 사람을 언급할 때 종종 ‘그라포’의 복합 형태를 선호 하는 유세비우스에서 오리게네스의 진술이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다(예를 들어 Mitchell, 2-4를 보라). 29 ) Kistemaker(“The Authorship of Hebrews,” 61)가 관찰했듯이, 바울은 종종 문장 중간에 말을 끊거나 다른 데로 말을 돌린다. 그러나 목회자는 “모든 문장이……완전하고 그의 주장의 흐름에 기여하도록” 히브리서를 구성했다. 30 ) 바울 저작설을 되살리려는 다른 시도는 E. Linnemann, “A Call for a Retrial in the Case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Faith & Mission 19/2 (2002): 19-59를 보라. 31 ) 클레멘스는 기독교 제사장 계층 구조의 모델로 아론 계통 제사장 제도를 사용한다(참고, 1 C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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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시에 오리게네스가 시사한 누가가 저자라고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고, 테르 툴리아누스가 시사하고 히에로니무스가 언급한 바나바가 저자라고 지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바나바가 바울 그룹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 바나바라는 이름 (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 ) 이 “위로의 말”( 13:22, 개역개정 “권면의 말” ) 이라는 히브리 서의 용어를 반향한다는 사실, 그리고 바나바가 레위 사람이었다는 사실 외 에는 바나바를 저자로 볼만한 이유가 거의 없다. 물론, 히브리서와 비교할 만한 바나바의 진정한 글은 없다. 바울이 불러 준 것을 누가가 받아썼다는 데이비드 앨런 ( Alan ) 블랙의 제안 은 앞에서 논의했다. 반면에 데이비드 앨런 ( Allen ) 은 누가가 직접 히브리서 를 썼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언어적 증거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히브리서와 바울에 특유한 어휘가 56개인 것과 비교하여 히브리서와 누가의 글에 특유한 어휘가 49개라는 사실이 누가 저 작설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32 ) 히브리서 어휘의 67.6%가 누가복음-사도 행전에 나오는 것은 두 저자 모두 교양 있는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약 책 중 사도행전과 히브리서만이 예수를 “개척자”( Pioneer ) 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 행 33 )
개역개정은 차례대로 “주”, “임금”, “창시자”, “주”로 번역함-역자 주 ),
3:15; 5:31; 히 2:10; 12:2,
이 용어는 누가가 기
록한 설교들에서 나타나고 그의 글에서 더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주제어 중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하 나도 없다. 누가 저작설을 반박하는 결정적 논거는 히브리서의 문학적 형식 이다. 히브리서는 뛰어난 설교다. 앞서 언급했듯이 누가는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기록했지만, 누가복음-사도행전에는 누가 자신이 의미 있는 설교 사역을 했다는 어떤 암시도 나타나지 않는다.34 ) 히브리서의 저자가 아볼로라고 말한 교부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에 만족하지 못한 마르틴 루터는 저자 후보로 아볼로를 제안했다.35 ) 사도행전 18장 24절-19장 1절에 나오는 아볼로에 대한 설명은 히브리서를 40:5; Ellingworth, 13). 32 ) Allen, “The Authorship of Hebrews,” 29는 히브리서와 누가에게만 공통으로 나타나는 단어가 53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53개에는 4개의 고유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히브리서와 바울 에게만 공통으로 나타나는 56개의 단어에 고유한 이름은 제외되었다. 33 ) 행 5:31과 히 2:10에서 ‘아르케고스’({rqhgËv, “개척자”)는 ‘소테리아’(swthr¾a, “구원”)와도 관 련된다. 34 ) George H. Guthrie, “The Case for Apollos as the Author of Hebrews,” Faith & Mission 18/2 (2001): 50. 35 ) Guthrie, “The Case for Apollos as the Author of Hebrews,” 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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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I. 히브리서의 환경 A. 히브리서를 쓴 목회자
쓴 것과 같은 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훌륭한 교육을 받았 음은 그의 수사학 능력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볼로처럼 성경에 조예가 깊었고 그 의미를 탁월하게 해설했다. 히브리서는 자신의 회 중에게 깊은 목회적 관심을 가진 강력한 설교자의 작품이다. 구약에서 그리 스도가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아볼로의 능력은 목회자의 기독론적 설명과 부합한다.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아볼 로의 능력은 수신자들의 배경에 있는 유대 기독교적 요소와 잘 어울 린다.36 ) 아볼로는 필로의 고향인 알렉산드리아 출신이지만, 아볼로 저작설 이 소위 히브리서의 신플라톤주의 성격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37 ) 히브리 서의 수사학적 정교함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면서 아볼로가 저자라는 주장 이 힘을 얻게 되었다.38 ) 아볼로가 저자라고 제안하려면 히브리서의 연대는 AD 70년의 성전 파괴 전이라야 한다. 신약에서 아볼로는 에베소와 고린도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 서 아볼로 저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러한 도시를 수신지나 발신 지로 제안한다. 예를 들어, 아볼로는 바울이 죽은 후 박해로 인해 낙담하게 된 에베소 교회의 부유한 유대인 그룹에게 로마에서 히브리서를 써서 보냈 거나,39 )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유대파 기독교인에게 히브리서를 써서 보냈거나,40 ) 골로새서가 말한 것과 동일한 이단에 대응하기 위해 고린도에 서 리쿠스 골짜기에 히브리서를 써서 보냈거나,41 ) 바울이 죽은 후 성전 파 괴 전에 로마에 히브리서를 써서 보냈다는 식이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이 달리야에서 온 자들”( 13:24 ) 의 안부를 전한 이유가 이것이라는 것이다.42 ) 히 브리서가 리쿠스 골짜기의 이단을 반박하고 있다는 제안은 히브리서 1장 4-14절에 나오는 천사들과의 비교가 변증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가정하지 만 그럴 것 같지 않다. 에베소 교회의 부유한 소수 유대인에 대한 다른 증거 36 ) Guthrie, “The Case for Apollos as the Author of Hebrews,” 50-52. 37 ) 히브리서와 필로의 관계에 근거하여 Spicq, 1:209-219보다 더 강력하게 아볼로를 주장한 사람은
없다. 본 서론은 히브리서가 필로의 신플라톤주의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음을 뒤에서 주장할 것 이다. 히브리서는 필로 작품의 특징인 우화적 해석도 사용하지 않는다. 38 ) Ellingworth, 21; Hagner, 23; Pfitzner, 26. 39 ) F. W. Howard,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t 5 (1951): 80-91. 40 ) Francesco Lo Bue,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JBL 75 (1956): 52-57. 41 ) T. W. Manson, “The Problem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of Manchester 32 (1949-50): 1-17. 42 ) Guthrie, “The Case for Apollos as the Author of Hebrews,” 44는 로마가 수신지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Lenski, Lane, Ellingworth, Hagner, Pfitzner, 자기 자신을 열거한다.
39
히브리서
는 없다. 히브리서는 세속 지혜와 영적 은사에 매료되어 승리감에 취한 고 린도 사람들보다는 낙담한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다.43 ) 또한 히브리서 13장 19절이 고린도에 가기를 거부한 사람을 묘사하는 것 같지는 않다 ( 고전 16:12 ). 그러나 수신지에 대한 그런 추측은 앞에 제시된 아볼로 저작설에 대한 상 당한 증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볼로가 저자임을 확인할 수는 없다.44 ) 그러나 사도행전 18장 24절-19장 1절에 묘사된 사람이 히브리서 의 저자였을 수도 있다는 단순한 제안은 독자의 관심을 이 책을 형성한 수 사적 기술과 목회적 관심사로 향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히브리서의 문학 장르로 넘어간다.
B. 목회자의 설교 동시대 학자들의 더 유익한 노력 중 하나는 히브리서의 구술적 성격에 대 한 관심이었다.45 ) 영어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편지에 머리말이 없는 것, 1인칭 복수 대명사 ( 우리는,
우리의, 우리를 ) 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말
하다”와 “듣다”를 뜻하는 동사가 많이 쓰이는 것 ( 2:5; 5:11; 6:9; 8:1; 11:32 ) 을 알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의 청중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고 주제들 을 완전히 다루기에 앞서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주제들을 미리 제시한다 ( 예, 2:17-18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
목회자는 청중의 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강해와
권면을 함께 엮는다.46 ) 이런 구술 특성을 인식한 많은 사람이 히브리서를 아리스토텔레스, 퀸틸리아, 키케로가 가르친 헬레니즘 수사법 및 “회당 설 교”라 불린 것과 비교했다.47 ) 히브리서는 화려하게 구성된 도미문 ( 掉尾文, 43 ) L. D. Hurst, “Apollos, Hebrews, and Corinth: Bishop Montefiore’s Theory Examined,” SJT 38 (1985): 505-513. 44 ) Attridge, 4는 1세기 교회에 아볼로와 같은 사람이 더 있었을 수 있다는 견해를 반대한다. 더 설 득력 있는 것은 Bruce, 12가 던진 다음 질문이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알렉산드리아의 아볼로가 작가였다는 것을 잊었던 것일까? 45 ) 히브리서의 구술적 성격에 대해서는 David Aune, The New Testament in Its Literary Environ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1987), 212-214를 보라. Steve Stanley, “The Structure of Hebrews from Three Perspectives,” TynBul 45 (1994): 248-250도 보라. 46 ) O’Brien, 21; Johnson, 10. 47 ) C. Clifton Black II, “The Rhetorical Form of the Hellenistic Jewish and Early Christian Sermon: A Response to Lawrence Wills,” HTR 81 (1988): 5는 다음을 인용한다. Aristotle, Rhet. 1.2.1358b; Cicero, Inv. 2.3.12-13; 2.51.155-158, 176; 2.58.176-177; Quintilian, Inst. 3.4.12-16; 3.7.1-28; 3.8.1-6; 3.9.1.
40
Hebrews
본문과 주석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 (1:1-4:13)
목회자는 호소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청중에게 시내산 주위에 다시 한번 모인 하나님의 백성을 그려 보고 ( 1:1-2:18 ) 그들의 광야에서의 반역을 회상 하라고 요청한다 ( 3:1-4:13 ). 시내산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그의 아들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며, 이로써 이전에 천사가 중재한 계시가 기대했 던 ( 1:1-2:18 ) “큰 구원”( 2:3 ) 을 이루었다. 3장 1-6절에서 아들과 모세의 비교/ 대조는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하는 말씀의 우월성을 강화하고 모세가 이끄 는 광야 세대의 시내산 이후의 반역으로 화제를 전환시킨다 ( 3:7-4:13 ). 하나 님의 말씀을 그의 아들 안에서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말씀 앞에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로서 ( 4:12-13 ) 그 세대가 상실한 “안식”에 들 어가기 위해 ( 4:1-11 ) 그 세대의 불순종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 3:7-19 ). 따라서 특권을 누렸던 이 광야 세대는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했음에도 불 구하고 믿음과 순종으로 살기를 거부한 사람들의 역사를 상징한다. 그들의 경험은 목회자의 독자들에게 반역에 동참할 때의 끔찍한 결과를 보여 준다. 현 세대의 책임이 더 큰 이유는 하나님이 이제 자기 아들 안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10장 19절-12장 29절에 그 역사가 상세 히 나오는 신실한 자들과 연합할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가능성을 열 어 주는 “큰 구원”( 2:3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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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 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이 두 장에서 목회자는 하나님 ( 1:1-14 ) 과 그의 아들 ( 2:5-18 ) 사이의 대화를 들어 보도록 회중을 초청함으로써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 ( 1:1-4 ) 를 소개한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사용하여 그가 영원한 아들임을 확인하고 모든 권능 의 자리인 자신의 우편으로 그를 초대함으로써 아들에게 말씀하신다 ( 1:5-14 ). 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자신의 신분을 확언하고, 자신의 신실함을 확인 하며,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임으로써 응답한다 ( 2:5-18 ). 아들이 시내산 계 시의 중재자인 천사들보다 우월함은 그가 영원한 아들로 높아졌다는 사 실 ( 1:5-14 ) 과 그가 구세주로서 높아질 수 있게 한 육신의 순종 ( 2:5-18 ) 모두를 통해서다. 영원하고 높아지신 아들에 대한 최초의 강조는 2장 1-4절의 경고 에서 즉각적으로 적용된다.1 ) 이 경고는 2장 5-18절에 설명된 바와 같이 아 들이 이같이 “큰 구원”( 2:3 ) 을 베푼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또 그것으로 강화 된다. 이 첫 두 장은 히브리서의 주요 주제, 곧 영원한 아들이 완전히 충분 한 능력이 있는 대제사장임을 선언하는 2장 17-18절 격려의 말에서 절정에 달한다. 요컨대, 아들은 하나님의 구약 계시의 성취다 ( 1:1-4 ). 아들은 옛 언약 계시의 매개자인 천사들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 ( 1:5-14 ), 아들의 중보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주목하는 것이 급선무다 ( 2:1-4 ). 아들은 육신의 순종과 죽음을 통해 이 구원을 이루어 내고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 ( 2:5-18 ).
1 ) 따라서 1:1-2:4에는 엄격한 일관성이 존재한다(Cynthia Long Westfall, A Discourse Analysis of the Letter to the Hebrews: The Relationship between Form and Meaning [LNTS 297; London: T&T Clark, 2005], 89-99를 보라). 그러나 2:5-18이 어떻게 2:1-4를 강화하고 1:5-14 를 완성하는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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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
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 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 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 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 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 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 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 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 니라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 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At various times and in various ways of old God spoke to the fathers by the prophets, 2 but at the end of these days he has spoken to us by one who is Son, whom he established as heir of all things, through whom he also made the worlds. 3 A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God’s very being, and as the one who bears all to its intended end by the word of his power, the Son, by making purification for sins,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4 Thus he became as much superior to angels as the name he has inherited is more excellent than theirs. 1
히브리서 1장 1-4절은 1장과 2장의 필수 부분이면서 목회자의 설교를 소개하기 위해 신중하게 구성되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내용의 기본이다.1 ) 목회자는 자신의 기본 전제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 작한다. 그 전제는 아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이전 모든 계시의 절정이자 성취라는 것이다. 이 전제는 아들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해 목회 자가 하고자 하는 말과 신실한 인내에 대한 그의 긴급한 권면에 대한 확고 한 토대가 된다.2 ) 목회자는 이 구절에서 수사적으로 뛰어난 문체를 사용함 과 동시에 하나님이 이제 자기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 장차 드러날 것 임을 기대하게 함으로써 청중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 1:2 ). 1장 5-14절의 성 1 ) 이 설교에 대한 도입부 또는 소개인 히 1:1-4에 대해서는 Walter G. Ü belacker, Der
Hebrä erbrief als Appell: Untersuchungen zu Exordium, Narratio und Postscriptum (Hebr 1–2 und 13,22-25) (Coniectanea Neotestamentica or Coniectanea Biblica: New Testament Series 21; Stockholm: Almqvist & Wiksell, 1989), 106; A. Vanhoye, Situation du Christ: Épî tre aux Hé breux 1–2 (Paris: Cerf, 1969), 52-54; Thompson, 18-19; Koester, 174-175에 인용된 주석 들; 본 주석 서론(95, 111쪽)을 보라. Koester는 1:1-2:4를 도입부로 식별함으로써 1:1-4의 고유 한 특성과 1:1-2:4와 2:5-18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모두 고려하지 않는다. 2 )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제사장직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여전히(다른 견해로는 Westfall, Discourse Analysis, 98-99)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의 도입부 역할 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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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경 인용문을 통해 하나님은 아들의 영광을 확인함으로써 이 전제의 중요성 을 친히 증명한다. 1-2a절은 아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구약 계시의 성취이 며, 따라서 그것과 연속성을 갖는다고 설명한다.3 ) 이 구절은 하나님이 “아 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는 선언에서 절정에 이른다. 2b-3절은 아들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보여 주고 구원 사역의 절정 으로서의 그의 높아지심/앉으심을 확인함으로써 계시의 궁극성을 강조 한다. 3절은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에서 절정에 이른다. 4절은 아들의 궁극적 위대함이 천사들과의 비교를 통해 더 욱 정교하게 묘사되는 전환점을 제공한다 ( 5-14절 ). 콩의 두 반쪽처럼, 위에서 언급한 두 절정 진술, 곧 (1)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1:1-2a ) 와 (2)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 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3 ) 는 목회자 의 신학적 비전의 씨앗이다.4 ) 이렇게 죄를 정결하게 하고 그 후 우편에 앉 은 것은 대제사장 직분 관점에서 설명될 것이다. 이것은 아들에 대한 완전 한 계시이며 따라서 아들이 중보하는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계 시다.5 ) 목회자의 의도는 높아져서 하나님 우편에 앉은 이 아들과 그가 제 공하는 은택에 자신의 청중이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 8:1; 12:1-3 ). 1-2a절 영어 번역 성경으로도 1-2a절 안에 있는 두 구절이 균형을 이루고
있고 간결하게 압축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구절은 시내산에 초 점을 맞춘 하나님의 구약 계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 3 ) G. R. Smillie, “Contrast or Continuity in Hebrews 1.1-2?” NTS 51 (2005): 543-560는 몇 가 지 중요한 관찰을 한다. 한편으로 목회자는 이 서두 부분에서는 자신이 다른 곳에서 대조를 나 타내기 위해 능숙하게 사용하는 단어들(예, {ll}, ‘알라’, “그러나”; kre¾ttwn, ‘크레잇톤’, “더 좋 은”; me¾zon, ‘메이존’, “더 큰” 등, Smillie, “Contrast or Continuity,” 550-552)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선지자와 아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연속성을 확언하는 다른 특징들도 있다 (Smillie, “Contrast or Continuity,” 552-556). 이 중 대부분은 뒤의 주석에서 설명한다. 이 사실들 은 1:1-4에서 대조 요소가 종종 지나치게 부각되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목회자는 2-3절 에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대리인으로서 아들을 고양된 어법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모든 대조를 제거 할 수는 없다(Smillie, “Contrast or Continuity,” 558). 성취를 연속성에 대한 확언으로 볼 때, 역 사 전체에 걸친 하나님 말씀의 통일성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신 것의 우월성 및 최종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과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모두 계시로서 유효하지만, 후자는 전자가 예표했던 “큰 구원”(2:3)을 제공했다. 본 주석 서론에서 “설교의 구약 사용”을 보라(72-92쪽, 특히 84-86쪽). 4 ) 이 진술의 중요성은 “그가 말씀하셨다”(1:2)와 “그가 앉으셨다”(1:3b)가 헬라어 본문에서 각각 1-2절 및 3-4절의 주동사라는 사실로 강조된다(Lane, 1:3-9). 5 ) 참고, Vanhoye, Situation, 5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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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사이의 연속성을 확인함으로써 모든 건전한 성경신학의 토대를 분명히 밝 힌다. 동시에 이 두 구절은 곧 구체적으로 설명될 내용을 예상케 한다. 그리 스도는 하나님의 이전 계시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이처럼 이전 계시와의 연속성 및 이전 계시에 대한 종말론적 우월성에 최초로 초점 은 맞춘 것은 목회자가 청중의 인내를 촉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충분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의 근본이다. 따라서 이 서두에서 목회자는 자신의 설 교를 특징짓는 신실함에 대한 호소의 기초를 놓는다. 1장 1-2a절에서 비 교가 되는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늘어놓고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옛적에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6 )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2. 하나님이 ( 그가 ) 3. 말씀하셨다 ( spoke )
말씀하셨다 ( has spoken )
4. 조상들에게
우리에게
5. 선지자들을 통하여
아들을 통하여
2-4번 항목은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곧 하나님의 한 백성 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같은 하나님이 “조상들 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두 번 말씀하셨다. “조상들”이라는 용어는 옛 언 약의 하나님 말씀을 받았던 사람들과 이제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직면한 사람들 사이의 가족적 연결을 확인시켜 준다.7 ) 아들 안에서 하나님 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구약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후손이다. 후자 중 일부는 실패한 것이 사실이지만 ( 3:7-16 ), 다른 일부는 끝까지 신실했다 ( 11:1-38 참고 ).
목회자가 우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중보하는 말씀에 대해 그가
말해야 하는 것을 듣는 모든 사람이 전자가 아니라 후자와 같다는 점 이다.8 ) 6 ) 반호예는 “다양한 시간에 다양한 방식으로”는 “옛적에”와는 별개이며 평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Vanhoye, Situation, 56-57. 이 단어들을 포함하면 “옛적에”를 설명하는 이 도입구는 음절이 11 개가 되며 따라서 “이 날들의 마지막에”로 시작하는 상응하는 대구의 음절이 10개인 것과 잘 어울 린다. 7 ) 아마도 î12를 포함한 몇몇 사본에는 ‘파트라신’(patr}sin, “조상들”) 뒤에 ‘휘몬’(Õmån, “우리의”) 이 붙어 있어서 “조상들”과 현재 기독교 독자 사이의 연관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한정어 없이 “조상들”을 사용하는 것은 “교회 전체에 대한 ‘조상들’의 관계를 나타낸다”(Weiss, 138 [나 의 번역]). 참고, Vanhoye, Situation, 57-58. 8 ) 목회자는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보족어 분사인 “말씀하셨던”(having said, lal©sav, ‘팔레사스’)을 사용하지만(1:1), 아들과 관련하여서는 정동사인 “말씀하셨다”(has said, ›l}lhsen, ‘엘라레센’)를 사용한다(1:2a). Übelacker, Appell, 79를 보라. 대부분의 영어 번역 은 분사를 상호 보완적인 것으로 번역하지만, 목회자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말씀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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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1, 5번 항목은 아들에 대한 자기계시의 궁극적 본질을 강조함으로써 하나 님의 계시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1절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라 는 문구를 강조하면서 시작한다 ( 헬라어 원문에서 이 두 단어가 문두에 와서 강조된다-역자 주 ).
이 표현은 각각 하나의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이 두 단어는 발
음이 비슷하게 들리며 의미를 거의 분간할 수 없다.9 ) 목회자는 낭랑하게 들리는 이 두 단어의 조합으로 하나님의 구약 계시에 사용된 다양한 시간, 장소, 방식, 방법의 풍요로움을 아우른다. 더욱이 “옛적에”라는 문구는 그 고대성을 확증하고 따라서 고대의 사고로는 성경의 완전성을 확인시켜 준다.10 ) 그러나 하나님의 구약 계시의 풍부한 다양성과 존경할 만한 권위 를 설명하는 바로 이 용어들은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2절 ) 에 하신 마지막 말씀과 비교될 때 그 불완전하고 예비적인 역할을 드러낸다.11 ) “아 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인해 옛 계시의 다양성과 단편성이 부 각되고 끝이 났다. 다음 장들에서 설명하겠지만, 옛 계시는 그가 베푼 “큰 구원”( 2:3 ) 을 예표하고 예견한 것으로 나타났다.12 ) “날들의 끝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70인역에서 하나님의 다가오는 심판 과 구원의 예언된 시간을 기술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몇 가지 관 련 문구 중 하나다.13 ) 많은 사람이 이 문구는 한정하는 명사인 “날들의”가 주 개념인 히브리어 표현 형식을 반영한다고 가정하고 따라서 “끝의 날들” 이나 “마지막 날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14 ) “이”( these ) 를 덧붙임으 로써 히브리서 저자는 현재가 예언이 성취되는 때임을 확인시켜 준다. 이
것에 있다. 이 분사를 한정 용법으로 해석하는 NKJV(“God, who spoke……”)와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는 NASB(“God, after he spoke……”)를 비교하라. 9 ) 이 두 단어, ‘폴뤼메로스’(polumeråv)와 ‘폴뤼트로포스’(polutrËpåv) 모두 ‘폴뤼’(polu)라는 형 태소로 시작한다. 현존하는 2세기 이전의 다른 어떤 저자도 이 둘을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 ‘팔라 이’(p}lai, “옛적에”), ‘파트라신’(patr}sin, “조상들”), ‘프로페타이스’(prof©taiv, “선지자들”) 역시 ‘p’ 소리로 시작하여 이 절 전체에는 청각적 통일성이 나타난다. 10 ) Josephus, Ag. Ap. 1.29; 1.37-42를 보라. 참고, Mitchell, 35, 41. 11 ) 불완전함으로서의 다중성에 대해서는 7:23-24, 27; 9:25-28; 10:1-3, 11-14; Bénétreau, 1:66; Riggenbach, 5를 보라. 그리스도 이전에는 풍성하다고 생각되었을 법했던 것이 이제는 예비적 계시로 간주된다. 12 ) Hughes, 36. 다른 견해로는 Ellingworth, 91. 13 ) 렘 23:20; 49:39의 ‘에프 에스카투 톤 헤메론’(›p’ ›sq}tou tån ¨merån)과 이독 형태인 ‘에프 에스 카토 톤 헤메론’(›p’ ›sq}tæ tån ¨merån, 신 4:30) 및 ‘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p’ ›sq}twn tån ¨merån, 렘 30:24, 겔 38:16, 단 2:28, 단 10:14, 호 3:5, 미 4:1)을 보라. 이 구절은 히브리어 ~ymyh tyrxab(“날들의 끝에”)를 번역한 것이다. 14 ) Ellingworth, 93은 속격 명사를 형용사로 사용하는 것은 히브리어 구문의 영향을 나타낸다고 말 한다. Riggenbach, 3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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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마지막 날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아래 “받침”이 될 때인 그의 재림으로 끝날 것 이다 ( 1:13 ).15 ) 또한 이 날들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신실할 것과 아들 안 에서의 하나님의 구속의 은택을 누릴 것을 촉구받는 시간이기도 하다.16 ) 그러나 더 문자적으로 보면 “이 날들의 끝에”라는 문구는 그리스도가 예언 을 통한 계시의 날들을 끝내면서 임하는 사건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 킨다.17 ) 아들 안에서의 계시는 “시대의 완성”이다 ( 9:26 ). “다양한 때와 다양한 방법으로”( 개역개정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 로
시작한
이 첫 문장은 “아들”이라는 단어에서 절정에 이른다. 아들 안에 있는 하나 님의 말씀은 이전에 단편적으로 주어졌던 계시들이 예기했던 구원을 성취 함으로써 그것들을 통합한다. NRSV의 “한 아들”( a Son ) 은 헬라어 원문에 정 관사가 없음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이 생략은 아들 신분이라는 특질을 강조 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름 아닌 바로 그의 “아들”을 통해 주어 진다. 목회자는 구약의 타당성과 예견적 성격을 모두 확언하기 위해 구약 계시 전체가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18 ) 선지자를 통 한 하나님의 말씀을 라디오를 통해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에 비유한다면, 아들 안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말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단지 선지자들에 “의해서”( by ) 가 아니라 그들 “안에서”( in ) 그리 고 현저하게, 특별히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19 ) 예레미야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보여 준다 ( 렘 12:1-4 ).
호세아의 삶은 그의 메시지를 구현했다 ( 호
1:2-11 ).
8:18-9:3;
바로 그들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청중에게 말씀하셨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에서 하 나님의 계시는 아들의 인격 안에 있었다. 목회자가 앞으로 보여 주듯이, 아 들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우리의 완전한 구세주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궁
15 ) Bénétreau, 1:65-66. 16 ) Weiss, 139. 17 ) 이 해석에서 히브리서가 더 일반적인 70인역의 복수형인 ‘에스카톤’(›sq}twn)이 아닌 단수 ‘에스
카투’(›sq}tou)를 사용한 것은 의도적이다. 벧전 1:20 ‘에프 에스카투 톤 크로논’(›p’ ›sq}tou tån qrËnwn, “시대의 끝에서”)과도 비교해 보라. 18 ) 눅 24:25 및 요 6:45 참고. 모세(클레멘스1서 43:1)와 다윗(행 2:30)도 선지자라 부를 수 있다. 19 ) 여기서 제3곡용 형태를 취한 전치사 ‘엔’(›n)은 행위자를 나타내는 도구격(“선지자들에 의한” /“아들에 의한”)이라기보다는 영역을 나타내는 처소격(“선지자 안에서”/“아들 안에서”)이다. 저자의 헬라어 특징을 볼 때 ‘엔’을 히브리어 전치사 ‘브’(b)의 의미로 제한해야 하는 것은 아 니다(Riggenbach, 4). 또한 Braun, 19의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의 영이 인격을 대체한다는 헬레 니즘적 추론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Weiss, 13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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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극적 계시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 특히 뒤의 2:5-18 참고 ).20 ) 목회자는 하나님의 아들 계시의 최종성을 서로 맞물려 있는 두 가지 방식 으로 사용할 것이다. 믿음으로 인내할 것을 촉구할 때는, 아들 안에서의 하 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책임이 이전 계시를 받은 사람들의 책임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청중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 2:1-4; 10:26-31; 12:25-29 ). 그리 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대해 설명할 때는, 그리스도는 옛 언약 질서의 역 할이 구원이 아니라 예표임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구원을 마련했다고 주장 할 것이다 ( 4:14-10:18 ). 이 구원의 최종성은 결국 긴박한 인내를 위한 은혜를 제공하고 긴박한 인내를 뒷받침한다 ( 10:19-31 ). 2b-3절 이 구절에서 목회자는 아들이 중보하는 계시의 중요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세 개의 관계절을 사용해서 이 “아들”( 2a절 ) 의 위대함을 설명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설명적 분사구가 붙어 있는 이러한 관계절은 익숙한 찬송가나 신앙고백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제안했다. 이런 종류의 구문은 전 례문이라고 알려진, 그리고 아들의 선재와 성육신과 높아지심에 대해 말하 는 다른 신약 본문들 ( 빌 2:6-11; 골 1:15-20; 딤전 3:16 ) 의 스타일과 유사한 시적 스 타일에 반한다. 목회자의 세련된 어휘는 찬송가나 신앙고백에 적합하다.21 ) 그러나 이 구절은 목회자가 썼을 가능성이 크다. 독특한 용어는 “광채”와 “정확한 각인”( exact
imprint, 개역개정 “형상” ) 으로
번역된 단어뿐이다. 이 표현들
은 그의 어휘가 <솔로몬의 지혜>와 필로로 대표되는 세련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환경을 반영하는 방식과 완전히 일치한다.22 ) 목회자의 표현은 신약 의 유사 본문들과는 사용 어휘에 있어서도 다르고 아들의 선재와 성육신과 높아지심을 설명하는 순서에서도 다르다.23 ) 마지막으로, 이 관계절들은 목 회자가 성경 인용문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그것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 인용문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목회자의 논증에 필수
20 ) Spicq, 2:58. 21 ) 찬송가를 사용했다고 단언하는 연구로는 Koester, 178-179를 보라. 22 ) John P. Meier, “Symmetry and Theology in the Old Testament Citations of Heb 1,5-14,” Bib 66 (1985): 524-528; J. Frankowski, “Early Christian Hymns Recorded in the New Testament: A Reconsideration of the Question in the Light of Hebrews 1,3,” BZ 27 (1983): 183-190. 23 ) 클레멘스1서 36:1-6은, J. C. O’Neill, “‘Who Is Comparable to Me in My Glory?’ 4Q491 Fragment 11 (4Q491C) and the New Testament,” NovT 42 (2000): 33-35이 주장한 바와 같 이, 히브리서와 클레멘스1서 둘 다에 인용된 어떤 기존 전통에 대한 증언이 아니다. 클레멘스1서 의 히브리서 의존에 대해서는 서론과 거기에 인용된 문헌을 보라(65쪽 각주 144).
125
히브리서
적이다.24 ) 2b-c절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전례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구절들과 비교해 보면, 목회자는 아들의 선재 또는 창조의 대리인으로서 그 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했다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목회자는 상속자로 시작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수사적으로 효과적 이기도 하고 아들 신분의 의미를 결정함에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속자로 시작하는 것이 수사적으로 효과적인 것은 주저하고 있는 목 회자의 청중의 주의를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와 궁극적 관심사 모두에 집중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25 ) 여기서 히브리서의 중심 주제와 궁극적 관심 사란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높아지신 아들/대제 사장 ( 8:1; 12:1-3 ) 및 아들을 통해 인내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기다리고 있는 기 업의 큰 가치다 ( 참고, 1:14; 6:12, 17; 9:15 ).26 ) 그러나 목회자가 이렇게 시작하는 가 장 중요한 이유는 기업과 아들의 관계 때문이다. 기업은 아들 신분의 논리 적 확장이자 결실이다.27 ) “그가 만유의 상속자로 삼으신 이”는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3d ) 와 교차대구 구조에서 상 응한다.28 ) 우주적 상속인으로서 아들의 신분은 하나님 우편에 앉음으로써 완성되었다. 아들이 그 기업을 완전히 행사하고 있음은 “그의 원수들이 그 의 발등상이 될 때”( 1:13; 2:5-10; 9:28 ) 인 그의 재림 때 분명해질 것이며, 신실한
24 ) Meier, “Symmetry,” 524-528. 또한 Thompson, 33을 보라. 25 ) John P. Meier, “Structure and Theology in Heb 1,1-14,” Bib 66 (1985): 176-177. 26 ) 참고, Bénétreau, 1:66-67; Spicq, 2:5; Vanhoye, Situation, 62-64; Koester, 178. 27 ) Bénétreau, 1:66; Riggenbach, 6; Thompson, 39. 28 ) Daniel J. Ebert IV, “The Chiastic Structure of the Prologue of Hebrews,” TJ 13 n.s. (Fall 1992): 163-179와 Meier, “Structure,” 168-189도 동의한다. 에버트는 다음과 같이 교차대구 구 조에서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곧 1:1-2a의 선지자들/아들과 1:4의 아들/천사들; “만유의 상속 자로 세우시고”(2b절)와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3d절); “그 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2c절)와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3d절). 중 심 초점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 시며”에 있다. 에버트의 가장 약한 연결 고리는 1:1-2a와 1:4 사이의 관계다. Meier, “Structure,” 188-189는 2b절에서 시작하여 이 문제를 회피한다.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는 “높은 곳 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와도 평행을 이루고 천사들에 대한 아들의 우월 성(4절)과도 평행을 이룬다. 1:2b의 “상속자”와 1:4의 “상속받다”(개역개정 “기업으로 얻으심이 니”)에 주목하라.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2b절)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 며”(3b절)와 상응한다. 중심적인 강조점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에 있다. 마이어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3d절)를 적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에버트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po¾hsen, ‘에포이에센’)”와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 을 하시고(poihs}menov, ‘포이에사메노스’)”를 연결한 것은 고려할 가치가 있다(Ebert, “Chiastic Structure,” 170-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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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자들은 그와 함께 그들의 기업에 들어갈 것이다 ( 1:14 ).29 ) 그러므로 히브리서 는 영원한 아들이 성육신, 지상의 순종, 자기희생, 높아지심을 통해서만 아 들이자 상속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완전히 충분 한 능력이 있는 그의 대제사장 직분과 그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 5:9 ) 이 되 기 위해 했던 모든 일은 “아들”로서의 그의 신분 안에 내재되어 있다.30 ) 아 들은 모든 기대를 뛰어넘어 시편 2편 8절에서 다윗의 상속자에게 주어진 우주적 지배권에 대한 약속을 성취한다.31 ) “그가 만유의 상속자로 세운” 이에게 “그로 말미암아 그가 모든 세계를 지은” 이가 되는 것보다 더 적합한 것은 무엇일까? “세계”로 번역된 헬라 어 ( 참고,
11:3 ) 는
또한 “시대들”( ages,
6:5; 9:26, 개역개정 “세상” ) 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세상의 현세적인 세계의 시대들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 곧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NLT ) 을 창조했다.32 ) 아들 안에 서의 하나님의 계시가 최종적인 것은 그 계시가 하나님이 정한 우주적 상 속자일 뿐만 아니라 창조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인 분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 이다. 창조와 궁극적 주권 모두 아들에게 귀속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고 유한 정체성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러한 기능은 다른 29 ) Riggenbach, 6-8. 30 ) “저자는 대제사장 직분이 아들로서 예수의 역할의 일부라고 가정한다”(Harold S. Songer, “A Superior Priesthood: Hebrews 4:14–7:27,” RevExp 82 [1985]: 348는 Robinson, 59-60을 지 지하며 인용한다). 또한 “……그를 통하여 세상이 만들어진 분, ‘그 본체의 형상’이신 분은 ‘영 원한 아들’이 아니라(만약 그것이 성육신에서 취할 인성으로부터 정체성이 나온 아들을 의미 한다면), 만유의 상속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미 정체성이 확립된 아들이다”(Bruce L. McCormack, “‘With Loud Cries and Tears’: The Humanity of the Son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and Christian Theology, ed. Richard Bauckham et al. [Grand Rapids: Eerdmans, 2009], 59)도 참고하라. 31 ) 뒤의 5절에서 인용된 시 2:7과 삼하 7:14, 8-9절에서 인용된 시 45:6-7, 13절에서 인용된 시 110:1에 주목하라. 이 절들은 다윗의 상속자에게서 성취되지만 다윗은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참여하는 높아지신 아들에게 직접 귀속된다. 이 누락은 히브리서가 왕권과 밀접 하게 관련된 지상 제도인 땅,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는 Pamela Eisenbaum의 관 찰과 부합한다(Pamela Eisenbaum, The Jewish Heroes of Christian History: Hebrews 11 in Literary Context [SBLDS 156; Atlanta: Scholars Press, 1997], 여러 곳). 히브리서는 “천상의” 집, “천상의” 예루살렘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곳은 성자가 만물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천상의” 지성소와 동일하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명확히 확인되는, 성자에 대한 내용 은 이러한 천상의 실재를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이런 맥락에서, 목회자는 예수가 아론 과 같은 제사장이자 다윗과 같은 왕이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32 ) Vanhoye, Situation, 66. ‘아이오나스’(a¼ånav)는 “‘시간으로 나타나는 기간’의 합을 가리키며 그 것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Westcott, 8). 많은 사람이 다가 올 영원한 구원의 세계도 여기에 포함시키곤 한다. Ellingworth, 96; Hughes, 40, n. 10; Koester, 178; Meier, “Structure,” 178, n. 40을 보라. 그러나 “만들었다”는 어구는 현세적 피조 질서를 가 리키는 것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하는 반호예가 아마도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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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사람에게는 절대로 위임되지 않는 신성한 특권이다.33 ) 3절 대부분의 영어 번역과 마찬가지로 T/NIV는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아
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니……”라는 새로운 문장으로 3절을 시작 한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3-4절은 2b-c절에서 시작된 아들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는 하나의 긴 관계절이다. 1-2절에서 확언된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3-4절에서 묘사된 대로 아들의 인격과 사역으로 성취된다.34 ) 따라서 3절 을 좀 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영광의 광채이자 그의 본체의 형상이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죄를 정결하게 하 며,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한 분의 우편에 앉은 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자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로서의 아들에 대한 이 묘사의 핵심이다.35 )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본성의 계시이며 ( 레 9:23; 민 14:21-22; 사 40:5 ), 종종 눈부시게 빛나는 것으로 묘 사된다 ( 출 24:16-17; 40:34-35; 왕상 8:11 ).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서의 아들은 하 나님이 실제로 누구인지 “빛을 발산하는” 분이다. 당시 용례의 증거는 결정 적이지 않지만, 즉각적인 맥락에서 아들을 하나님과 밀접하게 동일시하는 것을 보면 “광채”( radiance ) 를 단지 “반사”( reflection, NRSV )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36 ) “정확한 표상”( exact
representation, 개역개정 “형상” ) 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도장을 찍어 남은 자국과 동전에 새겨진 “인상, 재생, 표현”에 사용되
33 ) Richard Bauckham, “The Divinity of Jesus Christ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and Christian Theology , ed. Richard Bauckham et al. (Grand Rapids: Eerdmans, 2009), 15-18. “모든 것”(만유)과 “세계”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나머지 실체 와 구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된 유일신론적 언어다”(Bauckham, “Divinity,” 21). 34 ) 본문이 지지하지 않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서두에서 하나님 중심이라는 토대를 관찰하는 Wider는 옳다. David Wider, Theozentrick und Bekenntnis: Untersuchungen zur Theologie des Redens Gottes im Hebräerbrief, ed. Erich Grässer (BZNW 87; Berlin and New York: Walter de Gruyter, 1997), 12-13. 35 ) Ebert, “Chiastic Structure,” 167-174, 및 Meier, “Structure,” 188-189. 앞의 126쪽 각주 28에 서 그들의 논거 요약을 보라. 36 ) Braun, 25; Bénétreau, 1:68-69. 헬라어 ‘아파우가스마’({paÖgasma)는 능동의 의미로 “광채”, 수동의 의미로 “반영”을 뜻할 수 있다. 필로의 Spec. Laws 4.123와 Creation 146에서는 능동의 의미지만, Planting 50에서는 수동의 의미다. 지혜가 “영원한 빛의 광채/반사({paÖgasma, ‘아파 우가스마’)”인 지혜서 7:26에서 ‘아파우가스마’는 능동의 의미인지 수동의 의미인지 구분하기 어 렵다. 7:25의 “전능자의 영광의 순수한 발산”(NRSV)은 능동의 의미를 지지하고, 7:26b의 “하나 님의 역사의 흠 없는 거울”(NRSV)은 수동의 의미를 지지한다. 오리게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바실 리우스, 테오도레투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아리안주의 논쟁 동안의 정통 교부들이 그랬던 것 처럼 능동의 의미를 확언했다. Spiceq, 2:6과 Hughes, 42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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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었다.37 ) 이 용어는 도장 자국과 그 자국을 남긴 도장 사이의 정확한 일치를 의미한다.38 ) 따라서 아들은 하나님의 “본체”의 완전한 “각인”이다.39 ) “하 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하나님의 본체의 정확한 각인”이라는 이 두 가지 보완적인 표현40 ) 은 아들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그의 계시의 최종성은 그가 계시하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동질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언한다.41 )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라는 표현 또한 아들과 하나님의 긴밀한 동질성을 확증한다. 우주적 상속자이자 창조의 대리인은 우주를 지 탱하는 분이기도 하다. 중성 복수형 “만물”( all ) 은 아들이 물려받은 “만물”( 개 역개정 “만유” )
또는 그가 창조한 “세계”만큼 포괄적이다 ( 1:2 ). “그의 능력의 말
씀으로”, 또는 더 매끄럽게 표현하면 “그의 강력한 말씀으로”42 ) 는 아들의 주권을 강화한다. 아들은 세상을 창조한 말씀과 동일한 말씀으로 세상을 지 탱한다 ( 11:3과 비교 ). 그것이 아들의 말씀인지 하나님의 말씀인지에 대한 모호 성은 둘 사이의 밀접한 동질성을 부각시킬 뿐이다. 아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계와 시대들을 창조하셨고 ( 1:2a ) 아들이 하는 일 은 그것들을 “지탱하는 것” 이상이다. 아들은 또한 그 시대들이 하나님이 의도한 목표를 향하도록 “붙들고” “지도한다.”43 ) 목회자는 추상적인 예정 교리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즉각적인 맥락은 아들이 죄를 정결케 함으로써 이어서 하나님 우편에 앉음으로써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을 성취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그의 재림도 포함될 것 이다.44 ) 37 ) 참고, Philo, Drunkenness 133. 38 ) Bénétreau, 1:69. 39 ) ‘카라크테르’(qarakt©r, “정확한 각인”)에 대해서는 BDAG, 1078, 2를 보라. ‘휘포스타시 스’(ÕpËstasiv)는 히 3:14; 11:1에서는 달리 사용될 수 있지만, 여기서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 또 는 실체를 가리킨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40 )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하나님의 본체의 정확한 각인”은 모두 분사 ‘온’(ën, “being”)의 보 어가 되므로, 이들은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Spicq, 2:8). 41 ) Bénétreau, 1:70. Braun, 26-27. Hughes, 44에 따르면 첫 번째 문구는 하나님의 본성과의 동질 성을 강조하고 두 번째 문구는 아들의 인격의 분리성을 강조한다. Spiceq, 2:6-9는 반대 입장을 취한다. 둘 다 과잉 해석한 잘못이 있다. 그러나 Koester, 180의 견해와는 달리, 아들 안에서의 계시의 최종성은 하나님과의 동질성에 달려 있다. 42 ) “그의 능력의 말씀”은 속격인 “힘”이 형용사로 사용되고 “그의”가 “말씀”을 수식하는 히브리 어 법이다(Bénétreau, 1:72). 43 ) Hughes, 45, n. 22; Westcott, 13-14; Meier, “Structure,” 182. Ellingworth, 100-101은 이 용례 를 지지하는 당대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하지만 Spicq, 2:9-10은 70인역, 필로, 랍비 문헌에 서 예를 찾는다. Hughes, Westcott, Spicq는 교부 문헌을 인용한다. 44 )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시 110:1을 인용하는 히 1:13)에서 재림이 언급 되고 있음에 주목하라. 뒤의 2:5-9에 인용된 시 8:4-6의 주해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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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밀접하게 관련된 두 현재 분사인 “being”( 개역개정 “~이시라” ) 과 “bearing”( 개 역개정 “붙드시며” ) 45 ) 이
문장의 주동사인 그가 “앉았다”와 어떤 관계인지 검토
할 필요가 있다. ESV는 이 두 분사를 그의 앉으심과 관련짓지 않고 영원한 아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번역하는 많은 영어 번역의 전형이다. “그는 하나 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의 본성의 정확한 각인이며, 그는 그의 능력의 말씀 으로 만물을 지탱한다.” 그러나 쾨스터는 이 두 분사는 아들이 하나님 우편 에 앉아서 행하는 일을 설명하고 따라서 높아지신 아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정반대의 극단에 선다. 쾨스터는 아들은 “그의 영광의 광채 와 그의 본체의 각인으로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한 분의 우편에 앉았고, 그 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한다”로 번역한다.46 ) 진실은 이 양극단 사이에 있다. 아들은 영원부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였으며 창조 이래로 “자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하는” 분이 었다.47 ) 이 분사들이 부정과거 분사에 의해 주동사에서 분리된 것, 이 둘이 서로 밀접하게 결합된 방식,48 ) 창조에서 아들의 역할에 대한 이전 언 급 ( 1:2c ), 그 뒤에 이어지는 그의 영원성에 대한 확언 ( 1:10-12 ) 모두는 이것이 영원한 아들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임을 확증한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하는 것”은 신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묘사이며 아마 틀림없이 높아지신 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사가 붙지 않은 이 분사들은 또한 “그가 앉았다”를 수식한다.49 ) 아들에 대한 3ab절의 “특정한 시간을 표시하지 않는” 묘사는 3cd절에서의 단번의 속죄 행위 및 높아지심과 관련된다. 인과 관계로 보자는 리겐바흐의 제안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였기 때문에……높은 곳에 계신 존엄한 분의 우편에 앉았다.”50 ) 위에 주어진 번역은 그렇게 구체 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자 그의 본체의 형상이기 때문에 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기 때문에……그는 앉았다.” 아들의 영 원한 존재와 속성은 그의 높아지심과 앉으심에서 결실을 맺고 온전히 표현 45 ) 앞에서 언급했듯이 Ebert, “Chiastic Structure,” 167-174는 이 두 분사구를 1-4절의 중심 초점 으로 본다. 46 ) Koester, 176, 178. 47 ) Meier, “Structure,” 182-183. 48 ) 이 분사들은 불변사 ‘테’(tŸ)로 묶여 있다(Riggenbach, 8). 49 ) Weiss, 144-145에 따르면, 아들에 대한 이 묘사는 “시간을 초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 의 밑바탕이 된다. 50 ) Riggenbach, 8. Lane(1:5)이 “비록 그는……광채였고 모든 것을 지탱했지만”이라고 양보를 나타내 는 것으로 옮긴 것은 계시자이자 지탱자로서 아들의 역할을 그의 높아지심과 맞붙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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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높아지신 아들에서 하나님 본성의 완전한 계시를 본다.51 ) 세 번째 분사구인 “죄를 정결하게 하며”는 일반적 묘사를 나타내는 현 재라기보다는 특정 행위를 나타내는 부정과거다. 이 분사가 도구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희생으로 우편에 앉았다고 말하는 많은 구절에서 입증된다 ( 히 9:11-14; 9:23-10:4; 10:11-14 ). “죄를 정결하게 함으로써” 아 들은 하나님 우편에 그의 백성의 대제사장으로 앉으셨다. “정결하게 함” 이라는 단어는 죄의 오염과 지배로부터 내적 정화를 제공하고 ( 9:13-14 ) 그 결 과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키는 장벽을 제거하는 ( 9:23-24 )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설명을 예상한다.52 ) 중간태인 “having made”는 이 정결하게 함이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암 시하며, 따라서 그의 희생의 토대를 마련한다. 몇몇 후대 사본은 “그 자신 을 통해서”를 덧붙여서 후대 필사자들이 본문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했음을 시사한다.53 ) 하나님이 그를 통해 세계를 “만든”( made, 2c절 ) 이는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정화를 “만든”( made ) 분이다.54 ) 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이 서문은 영원한 아들이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한 분의 우편에”앉았다는 선언에서 절정에 이르는데 지금까지 이 서문은 이 절정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 진술은 이 설교의 핵심 구절인 시편 110편 1절을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55 ) “그는 앉았다”라는 문구는 아들 의 앉으심의 최종성을 강조한다. “우편”은 궁극적인 권위의 장소다. 여기서 아들은 하나님의 “한계 없는 능력을 공유하지만, 주는 것은 하나님이고 이 51 ) Spicq, 2:8. Lane의 다음 평가에 주목하라. “예수는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성 육신과 희생적 죽음과 그에 따른 높아지심 덕분에 아들이 되는 경험의 새로운 차원에 들어 갔다”(Lane, 1:26). 52 ) 참고, BDAG, 488, 3, b, c; Friedrich Hauck and Rudolf Meyer, “kajarËv, kajar¾zw, kaja¾rw, kajarËthv,” TDNT 3:412-426. 53 ) uncial 0243과 minuscules 6, 424(수정됨), 1739, 1881(원문)에는 t«v dun}mewv aÔtoØ, kajarismÌn tån |martiån poihs}menov(‘테스 뒤나메오스 아우투, 카다리스몬 톤 하마르티온 포이에사 메노스’, “죄를 정결하게 한 그의 능력의”) 대신 t«v dun}mewv, di’ œautoØ kajarismÌn tån |martiån poihs}menov(‘테스 뒤나메오스, 디 헤아우투 카다리스몬 톤 하마르티온 포이에사메노스’, “그 자신을 통해 죄를 정결하게 한 힘의”)로 되어 있다. î46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만 ‘디 헤아우 투’(di’ œautoØ) 대신 ‘디 아우투’(di’ aÔtoØ)로 읽는다. 54 ) “그를 통해 그는 세계를 만들었다(›po¾hsen, ‘에포이에센’)”를 “정결을 만들었다(poihs}menov, ‘포이에사메노스’)”와 비교해 보라. Ebert, “Chiastic Structure,” 170-171은 목회자가 이 평행법 을 위해 마지막 절에서 더 일반적인 ‘카다리조’(kajar¾zw, “정결하게 하다”)를 의도적으로 ‘카다 리스몬……포이에사메노스’(kaj}rismon . . . poihs}menov)로 대체했다고 주장한다. 55 ) 앞의 서론, 107-111쪽에서 “히브리서의 수사적 구성과 구약 사용”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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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최고의 지위를 받는 것은 아들이라는 사실에는 종속 개념이 항상 내포되어 있다.”56 )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한 분”( 개역개정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 ) 은 경 외심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방식이며 따라서 아들 지위가 최고로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57 ) 목회자는 자신의 청중이 그들을 믿음 안에서 붙들어 줄 유일한 사람으로서 이 높아지신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이 설교를 구성했다 ( 12:1-3 ). 목회자는 시편 110편 4절 ( 히 5:6, 10; 6:20; 7:1-25 ) 의 도 움을 받아 이 높아지신 이에게 고유한 충분성을 대제사장 직분의 관점에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2장 1-4절은 이 서두에서 아들에 대한 장 엄한 묘사를 하는 즉각적인 목적을 제시한다. 곧 목회자는 자신의 청중이 하나님의 아들의 무한한 위대함을 명심하여 순종과 깊은 이해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자기계시에 유념하기를 원한다. 4절 4절은 3d절에서 확언하듯이 아들이 하나님 우편에 “앉았을” 때 그에
게 일어난 일을 말해 준다는 점에서 1-3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58 ) 또한 4절은 5-14절의 아들/천사들 비교/대조로 연결되는 다리이기도 한다.59 ) 이 대조는 1-3절에서 이미 제시된 아들의 우월성에 대한 그림을 구체화하 고 확장하며, 따라서 2장 1-4절의 목회자의 호소에 무게를 더해 준다. 3절은 아들이 영원부터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하나님의 본체 의 정확한 표상”이었으며, 창세전부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 고 있다”고 막 설명했다. 4절은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았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 3d절 ). 곧 아들이 “기업으로 받은 이름은 그들의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그는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조 의 대리인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어떻게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게 “될” 수 있는가? 이 모호함은 이미 영원한 “아들”로 묘사된 이가 이제 기업 으로 얻는 “이름”이 5절에 비추어 볼 때 “아들” 이외의 것일 수 없다는 점 을 깨달을 때 깊어진다.60 ) 56 ) Ellingworth, 103. 아들이 우편에 앉은 것에서 그가 하나님의 존엄과 위엄을 공유한다는 것이 절 대적으로 명확하게 된다. Riggenbach, 12 및 Spicq, 2:11을 보라. Bauckham, “Divinity,” 32는 아들이 하나님 옆에 있는 두 번째 보좌에 앉지 않고 “하나의 하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을 독자 들에게 상기시킨다. 57 ) 참고, Bénétreau, 1:73; Weiss, 151; Attridge, 46, n. 139. 58 ) 분사 ‘게노메노스’(genËmenov, “having being”, 4절)는 정동사인 3절의 ‘에카디센’(›k}jisen, “그가 앉았다”)을 수식한다. 59 ) George H. Guthrie, The Structure of Hebrews: A Text-Linguistic Analysis (repr.; Leiden: Brill, 1994; Grand Rapids: Baker, 1994), 100-102. 60 ) Bauckham, “Divinity,” 21-22는 아들이 “아들”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헬라어 구약에서 ‘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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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저자가 조화되지 않는 다양한 전통, 즉 영원한 아들 관계를 확언하는 전 통과 승천 때 입양으로 아들이 되었다고 확언하는 다른 전통을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 없다.61 ) 목회자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면 이 모순처 럼 보이는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뒤의 2장 5-18절 주해 는 이 서두에서 이미 예견된 것, 곧 성육신과 죽음과 높아지심으로 영원한 아들은 그의 백성의 완전한 구세주가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 줄 것이다. 천 사들에게는 그런 구원 능력이 없다 ( 1:14
참고 ).
이처럼 천사들보다 우월했던
영원한 아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해 줌으로써 높아지실 때 새 로운 방식으로 그들보다 우월하게 되었다.62 ) 이와 동시에, 앞서 주장했듯이, 높아지심은 영원한 아들이 항상 지녔던 신분을 실현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 우편에서 아들 신분을 완전히 행사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중요성이 그의 백성에게 드러나게 된다.63 ) 따라서 아 버지가 자신의 우편에 앉은 아들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 았다”( 1:5 )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며 언어의 제한이나 결함을 보여 주 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하는 높아지신 아들은 또한 영원 한 아들이다. 솅크와 몇몇 다른 사람이 제안했듯이, 영원한 아들에 대한 묘 사를 아들의 신분에 대한 비유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헬레니즘 자료에서 지혜의 의인화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의 선재는 단지 기능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것이다.64 ) 목회자는 지혜 문학 전체에 흩 스’(kÖriov, “주”)로 번역된 신명인 YHWH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제안을 뒷받침하는 것은 시 110:1의 첫 구절인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이다. 이 중요한 시편 구절은 히 1:3에서 암시되 고 1:13에서 인용된다. “주”는 빌 2:9-11에서 높아지신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칭호이기도 하다. 참고, Johnson, 73. 그러나 내 판단에 이 해석에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다. 첫째, Bauckham은 시 2:7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의 “오늘”을 시대를 초월한 “오늘”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Bauckham, “Divinity,” 33-34). 둘째, 다음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천사들 과 대조된다. 특히 5절을 보라. 그럼에도 마이어가 “……onoma[이름]를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명백한 것을 피하려는 시도다”(Meier, “Structure,” 187)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것 같다. 61 ) 다른 견해로는 Attridge, 54-55; Braun, 32-33; Pfitzner, 39. 62 ) 그는 “더 나은” 제사장직(7:18-19)과 언약(7:22; 8:6)을 확립한 “더 나은” 제물을 제공함으로 써(9:23) 완전히 효과적인 구세주가 되었기 때문에 천사보다 “더 낫게” 되었고 이로써 신실한 자 들은 “더 나은”(즉, 하늘의) 본향에 들어간다(11:16). 이 본문들에서 “더 나은”은 ‘크레잇톤’의 한 형태로 히브리서에서는 정도가 아니라 종류에 있어서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63 ) Hughes, 54-55. 64 ) 솅크는 히브리서가 아들의 인격적 또는 실제적 선재를 믿지 않은 것은 히브리서가 의존하는 지 혜 전통이 “지혜”의 인격적 또는 실제적 선재를 확언하지 않은 것(잠 8:22-31; 집회서 24:1-22; 지혜서 6:1-9:18, 특히 7:12, 22; 8:4-5; 9:1-9)과 같다고 주장한다. 아들은 하나님의 기능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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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어져 있는 지혜에 대한 언급을 연상시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65 ) 그러 나 면밀히 조사해 보면 히브리서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해 온 이런 자료들 과 언어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증거를 보여 주지 않는다. 관련 지혜 구절에서 눈에 띄는 유일한 언어적 반향은 히브리서 1장 3절 ( 참고, 솔로 몬의 지혜 7:26 ) 에
나오는 “광채”라는 단어다. “지혜”는 하나님이 가장 먼저 창
조하신 것이며 그의 동반자였다 ( 집회서 24:9; 잠 8:22-30 ). 히브리서는 창조를 아 들에게 직접 돌릴 수 있다 ( 1:8-12 ). “지혜”는 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지만 ( 솔로몬의 지혜 9:4 ), 아들은 시편 110편 1절을 성취하 여 하나님의 보좌에 우편에 앉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공유한다. 지 혜 문헌은 결코 “지혜”를 구속의 대리인이나 만물의 궁극적인 상속자로 묘 사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나머지 부분은 지혜 공론에 관심을 보이지 않 는다.66 ) 목회자는 지혜 공론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지혜 문학이 공유하는 헬레니즘 환경에서 가져온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목회자는 이 언어를 사용 하여 창조주, 주권자, 구속의 대리인으로서 아들의 역할을 확인함으로써 하 나님의 정체성 안에 아들을 포함시킨다.67 ) 히브리서 1장 8-12절과 같은 구 절은 아들의 선재를 분명히 확인하고 그의 영원성을 피조물의 일시성과 대 비한다. 히브리서 5장 8절과 10장 5-10절은 성육신 이전의 아들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68 ) “천사보다 낮아지셨던”( 2:9 ) 이는 선재하는 아들이었다. 히
“선재”했다. Kenneth Schenck, “Keeping His Appointment: Creation and Enthronement in Hebrews,” JSNT 66 (1997): 115; Kenneth Schenck, Understanding the Book of Hebrews: The Story behind the Sermon (Louisville and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2003), 17, nn. 24-25를 보라. 솅크의 논증 방식은 환원주의의 전형적 사례(곧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설명은 새로운 맥락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계에서 의미했던 것만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라는 점을 지 적할 수 있을 것이다(참고, Vanhoye, Situation, 65-70; 참고, 112-117). 65 ) “흩어져 있는”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야 한다. 바룩 3:37에 따르면 지혜는 땅에 살았고, 에녹1서 42:1-2에 따르면 지혜는 하늘로 높아졌고, 지혜서 9:4에 따르면 지혜는 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 아 있다. 이런 종류의 진술들은 각각 개별적인 맥락에서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 데 기여하며 이것 들이 모여서 의인화된 “지혜”에 대한 포괄적인 그림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지혜 문헌의 관련 본 문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보라. Craig R. Koester, The Dwelling of God: The Tabernacle in the Old Testament, Intertestamental Jewish Literature, and the New Testament (CBQMS 22; Washington, DC: The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 1989), 108-112. 66 ) 이 주제에 대해서는 Daniel J. Ebert IV, “Wisdom in New Testament Christology, with Special Reference to Hebrews 1:1-4” (Ph.D. diss.,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1998), 40-111 (O’Brien, 53, n. 64에 인용됨)을 보라. 참고, Gordon D. Fee, “Wisdom Christology in Paul: A Dissenting View,” in Way of Wisdom: Essays in Honor of Bruce K. Waltke, ed. J. I. Packer and Sven K. Søderlund (Grand Rapids: Zondervan, 2000), 251-279. 67 ) Bauckham, “Divinity,” 22, n. 13을 보라. 참고, Johnson, 68-69. 68 ) Meier, “Structure,” 186, n.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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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1.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 1:1-4 )
브리서 1장 2절은 창조에서 아들의 선재하는 역할이 우주적 상속자로서의 역할만큼 실제적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은 오랜 역사를 가 지고 있으며 이 역사는 영원하고 성육신하여 높아지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 서 성취되었다. 이러한 확언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안에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목회자는 성급하게 답변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 그는 아들의 존엄함에 대해 청중에게 계속 역설해야 했다 ( 1:5-14 ). 이것은 아들 신분의 실현으로 성취되고 계시된 “큰 구원”( 2:14 ) 에
청중이 올바른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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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2. 영원하고 높아지신 아들의 비교할 수 없는 위엄 ( 1:5-14 )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
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 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 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 리라 하셨느냐 6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 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 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 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
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 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
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 한 규이니이다 9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 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 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 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 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 심이 아니냐
For to which of the angels did God ever say, “Son of me you are; today I have fathered you,” or again, “I will be to him a Father, and he will be to me a Son?” 6 And again, when he introduces the Firstborn into the world, he says, “Let all God’s angels worship him.” 7 And on the one hand in regard to the angels he says, “The one who makes his angels winds, and his ministers a flame of fire.” 8 But on the other hand to the Son he says, “Your throne, O God, is forever, and the scepter of uprightness is the scepter of your kingdom. 9 You have loved righteousness and hated lawlessness; therefore, O God, your God has anointed you with the oil of gladness beyond your companions.” 10 And “You, from the beginning, Lord, founded the earth, and the heavens are the works of your hands. 11 They will perish, but you remain, and they will all wear out like an article of clothing, 12 and as a cloak you will roll them up, and as an article of clothing they will be changed. But you are the same, and your years will never cease.” 13 And to which of the angels has he ever said, “Sit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your enemies a stool for your feet.” 14 Are they not all ministering spirits sent out for service on behalf of those who are about to inherit salvation? 5
천사들과의 비교는 1장 1-4절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아들의 우월성과 하 나님과의 동질성을 입증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따라서 아들 안에 136
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2. 영원하고 높아지신 아들의 비교할 수 없는 위엄 ( 1:5-14 )
서의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순종을 확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 2:1-4 ).1 ) 그 누구도 감히 아들과 비교될 수 없었다. 많은 사람이 천사들 은 하나님의 천상 보좌를 둘러싸고 경배하고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시종으 로 그를 섬기고 있다고 믿었다.2 ) 하나님은 그들에게 열방의 통치를 맡겼고 그들을 통해 자연의 힘을 다스렸다.3 ) 어떤 사람들은 천사들이 다가올 세계 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4 ) 더욱이, 사람들은 천사들이 시 내산에 중재자로서 함께 있었다고 믿었다.5 ) 따라서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 를 구현하는 아들을 이전 계시의 중재자인 천사들과 대비하는 것은 자연스 러운 일이었다. 고대 연설가들이 통치자를 과거의 위대한 통치자들과 비교 함으로써 칭송했듯이, 목회자는 아들을 천사들과 비교함으로써 영화롭게 한다.6 ) 이러한 대조는 아들의 영원성과 주권과 높아지심을 입증한다. 이것 은 2장 5-18절에서 계속되어 아들의 성육신과 죽음이 구원에 대해 갖는 중 요성을 확증한다. 목회자는 성경의 권위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서 이처럼 비교한다. 그가 인 용한 성경 구절 중 두 곳 ( 신 32:43; 삼하 7:14 ) 을 제외하면 모두 시편에서 왔다 ( 시 2:7; 시 104:5; 시 45:7-8; 시 102:25-27; 시 110:1 ).7 ) 신명기
32장 1-43절 또한 “모세의
노래”라 불리는 시이며 헬라어 구약에서는 시편에 합쳐진 열네 개의 송영 중 두 번째 것으로 반복된다.8 ) 이 인용문의 대부분 ( 시 110:1 ) 은
2:7; 45:7-8; 102:25, 27;
자기 아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아들 자신은 예배와 찬양
이라는 시편 언어의 대상이 된다.9 ) 1 ) Bénétreau, 1:95; Weiss, 158-160. 2 ) 참고, 1 Enoch 39; 2 Enoch 17, 20–23; 3 En. 1:12; 27:2; Jub. 2:2; T. Levi 3:5; 1QSb 25–26; 4Q400 (4QShirShabba) (cited in Scott D. Mackie, Eschatology and Exhortation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WUNT 223; Tübingen: Mohr Siebeck, 2007], 214, n. 5). 3 ) 참고, 신 32:8-9; 단 4:10, 13, 20; Sir 17:17; Jub. 35:17; 1 En. 20:5. 4 ) 뒤의 7절에 대한 주석을 보라. 5 ) 행 7:53; 갈 3:19; Jub. 1:27, 29; 2:1; Josephus, Ant. 15.136. 6 ) Thompson, 41. M. Goulder, “Hebrews and the Ebionites,” NTS 49 (2003): 393-399의 견해와 는 달리, 히브리서에는 반(反)천사 변증이 없다. 1:14, 2:5, 12:22에서 천사에 대한 긍정적 언급에 유의하라. Weiss, 158-160; Meier, “Symmetry,” 522, n. 56; Koester, 199-200을 보라. 히브리서 가 천사 숭배와 싸우고 있다는 징후는 없다(Mackie, Eschatology and Exhortation, 214-215). 7 ) 따라서 Koester, 197이 말하듯이 이러한 인용문들이 “구약 문헌의 주요 범주에서 각각 인용한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8 ) 70인역이 이 두 번째 찬송에 “신명기의 모세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전례에 사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복제한 것임을 보여 준다. Lane, 1:28을 보라. 9 ) 이 구절 중 일부는 원래 왕/메시아에게 주어진 것이다. 시 2:7 및 삼하 7:14는 쿰란의 메시아 증거 본문 모음인 4QFlor에 나타난다. John N. Allegro, “Fragments of a Qumran Scroll of Eschatological Midrāšîm,” JBL 77 (December 1958): 350-354. 시 2:7; 13:33-34(계 2:27;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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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히브리서 1장 5-14절은 5-6절, 7-12절, 13-14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럽다. 5-6절과 13-14절에서 저자는 아들 ( 5, 14절 ) 로
13절 ) 에서
천사 ( 6,
이동한다. 두 쌍의 구절 모두 “천사들 중 누구에게”라는 문구로 시 10 )
작한다.
첫 번째 쌍은 그리스도의 아들 신분으로 시작하고 천사들의 순종
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그의 높아지심으로 시작하고 섬기는 자로서의 천 사들의 본성이 이어진다. 이 평행 배열이 아들의 본성 ( 5절 ), 천사의 위 치 ( 6절 ), 아들의 위치 ( 13절 ), 천사의 본성 ( 14절 ) 과 같이 전체의 틀을 이룬다.11 ) 7-12절의 비교는 하나님이 천사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 ( 7절 ) 으로 시작하 고 아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 ( 8-12절 ) 이 이어진다. 이 부분은 아들의 신성과 신성한 주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들에게 적용된 첫 번째 구절인 시편 45편 6-7절은 구약에서 왕/메시아에게 주어진 것이고, 두 번째인 시편 102편 25-27절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이 모든 인용문은 히브리서 1장 2-4절을 입증하고 명확하게 하며 다음 주장을 준비하기 위해 신중하게 선택되고 배열되었다.12 ) 예를 들어, 5절에 인용된 시편 2편 7절은 1장 2절에서 “아들”로 지명된 것에 대한 성경적 뒷 받침을 제공하고, 1장 3d절에서 이미 언급된 시편 110편 1절은 아들의 높 아지심/앉으심에 대한 성경적 정당성을 제공한다.13 ) 저자는 자신의 목적에 맞게 5-14절을 신중하게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4QFlorilegium에서 19:15 참고)은 행 4:26-27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고 세례 때에 암시되었다(마 3:16-17; 막 1:10-11; 눅 3:21-22). 이 구절들의 메시아적 사용에 대해서는 Spicq, 2:16 및 Koester, 199를 보 라. 4QFlor 1:1-19와 히 1:5-13의 자세한 비교는 H. W. Bateman, “Two First-Century Messianic Uses of the OT: Heb 1:5-13 and 4QFlor 1.1-19,” JETS 38 (1995): 11-27 및 Herbert W. Bateman IV, Early Jewish Hermeneutics and Hebrews 1:5-13 (American University Studies, Series VII: Theology and Religion 193; New York: Peter Lang, 1997), 149-206을 보라. 서론에 서 “히브리서의 구약 사용”에 대한 부분을 보라(72-92쪽, 특히 76-77쪽). 10 ) ‘티니 가르……톤 앙겔론’(T¾ni g~r . . . tån {ggŸlwn, 5절)과 ‘프로스 티나 데 톤 앙겔론’(prÌv t¾na d¡ tån {ggŸlwn, 13절)은 의미가 비슷한 변형 문체다. 두 번째 구절로 인한 강조에 대해서는 뒤의 13절 주석을 보라. 11 ) 목회자가 아들과 천사의 본성과 지위를 아들의 본성, 천사의 지위, 아들의 지위, 천사의 본성, 즉 교차대구 구조로 미묘한 층을 이루어 제시한다는 점에서 세심한 독자들은 여기서 또 다른 형태의 요소에 주목할 것이다. 12 ) Meier, “Symmetry,” 523은 1:2b, 5-6에서 높아지심을, 1:2, 7에서 창조를, 1:3a, 8bc에서 “선 재, 신성, 영원한 통치”를, 1:3b, 10-12에서 창조와 지배를, 그리고 1:3d, 13에서 다시 높아지심 을 찾아낸다. 그는 3c와 9절은 생략한다. 그가 1:7에서 아들을 창조주로 해석한 것은 부자연스 럽다(Meier, “Symmetry,” 511-513). Koester, 197과 Weiss, 156은 1:5-14와 1:1-4가 전반적으 로 일치한다고 확언한다. 13 ) 저자가 시 110:1의 중요성에 어떻게 초점을 맞추는지에 주목하라. 그는 이 구절을 1:3에서 암시 하고, 1:13에서는 인용문 목록의 절정에서 인용하며, 2:5-9에서는 시 8편의 도움을 받아 설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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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불순종한 하나님 백성의 아주 짧은 역사(1:1-4:13) A. 시내산 회고: 하나님은 영원하고 성육신하고 이제 높아지신 아들 안에서 말씀하셨다 ( 1:1-2:18 ) 2. 영원하고 높아지신 아들의 비교할 수 없는 위엄 ( 1:5-14 )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목록에서 이러한 인용문들을 가져왔을 가 능성은 거의 없다.14 ) 이제 우리는 아들 ( 5절 ) 과 천사들 ( 6절 ) 사이의 첫 번째 비교/대조 및 가장 중요한 이름인 “아들”을 그리스도가 기업으로 받은 것을 정당화하는 인용 문으로 넘어간다. 5절 5절의 중심 초점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시편 2편 7절과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언급한 사람 사이에 확립된 아버지/아들 관계다. 이 결합 인용문 은 아들의 신분 ( “너는 내 아들이다” ) 에서 아버지의 신분 (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 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신분 (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에서 아들의 신분 ( “그는 내게 아들이 될 것이다” ) 으로
옮겨 간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아들”로 시작하고 “아
들”로 끝난다. 먼저 귓가에 울리는 것은 “아들”이고, 저자가 청중의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것도 “아들”이다. 1장 1-4절에 묘사된 아들은 하나님의 구 약 친자 관계 선언의 참된 수령자다.15 ) 아들 안에서 시편 2편 7절과 사무엘 하 7장 14절은 성취되며, 그것은 다윗의 인간 후손과 하나님의 관계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이 성취의 중요성은 하나님이 천사들에게는 그런 아들 신분을 결코 선언 한 적이 없다는 사실로 강조된다. 단수 형태인 “천사들 중 누구에게”가 중 요한다. 때때로 천사들은 한 무리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렸다.16 )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한 천사를 지목해 서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적이 결코 없다.17 ) 그리스도의 친자 관계의 중요성과 천사들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그것의 우월성은 6절에서 천사들 의 순종으로 강조될 것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에 대해서는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해석자에 따라 이 “오늘”을 성육신의 “오늘”로 보기도 하고, 높아지심/앉으심의 날 또는 재림의 날로 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들의 영원한 세대로서의 14 ) Meier, “Symmetry,” 530을 보라. 클레멘스1서 36:1-6은 히브리서를 인용하고 있으므로 이 인용
문들이 전통적인 목록에서 파생되었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클레멘스1서의 히브리서 의존에 대해서는 서론과 거기 인용된 문헌을 보라(65쪽 각주 144). 15 ) 참고, Vanhoye, Situation, 139, 143-144. 16 ) “하나님의 아들들”은 MT에서 창 6:2, 4; 시 29:2; 89:7-8; 욥 1:6; 2:1; 38:7에 나온다. 신 32:8에 서는 원래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로 수정되었다. 70인역은 창 6:2, 4와 시 29:2와 89:7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유지하지만, 신 32:8과 욥기에서는 “하나님의 천사들”(욥 38:7, “나의 천사들”)로 대체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상적 존재의 부류에 대해 쓰일 때는, “신성한 아들들”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7 ) Vanhoye, Situation,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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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오늘”이라고 제안함으로써 이 용어를 탈시간화 하려 했다.18 ) 그러나 3절 과 4절은 이 “오늘”을 높아지심/앉으심과 동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 하면 아들이 “아들”이라는 우월한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그가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이의 우편에 앉았을 때”였기 때문이다.19 ) 다윗의 후손 에게 주어진 시편 2편 말씀은 그리스도의 하늘 즉위에서 궁극적으로 성취 된다.20 ) 더욱이, 높아지심에서의 아들 신분 선언은 청중의 눈을 하나님 우 편에서 높아지신 아들에게 고정시키고자 하는 목회자의 열망과 일치 한다 ( 8:1; 12:1-3 ). 높아지심의 “오늘”은 청중이 “그의 음성을 들으라”( 3:7, 13, 15; 4:7 ) 고
요청받고 있는 “오늘”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 4절 ), 아들
은 높아지심과 앉으심에서 아들로서 자신의 기업을 받고 항상 자신의 것이 었던 아들 신분의 결실을 맺었다. 그의 정체성이 모두를 위해 드러난다. 6절 천사들의 순종은 시편 2편 7절에서 하나님이 아들 신분을 선포한 데
따른 것으로, 천사들과 아들을 분리시키는 범주적인 구별을 확고히 한다. 따라서 천사들이 아들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것은 높아지심/앉으심21 ) 의 때 이지 성육신22 ) 이나 재림23 ) 의 때가 아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천사들은 이 18 ) Vanhoye, Situation, 139-142의 논의를 보라. 19 ) Attridge, 53-55; Bénétreau, 1:79; Bruce, 54; Braun, 35; Ellingworth, 114; Hughes, 54; Lane, 1:24-26; Koester, 191; Westcott, 21; Weiss, 160-161; Meier, “Symmetry,” 504-505; Vanhoye, Situation, 142-143. 20 ) Spicq, 2:23은 원래 다윗 자손이 왕위에 올랐을 때 주어졌던 시 2:7과 110:1 말씀의 성취로 아들 이 천상의 왕으로 즉위한다고 주장한다. Westcott, 3은 히브리서의 이 서두에서 아들은 선지자, 제사장, 왕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Braun, 31은 다윗 왕권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
음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아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계시로서 보좌에 앉는 것은 대 제사장으로서다. 21 ) Lane, 1:26-27; Attridge, 55-57; Weiss, 162; Ellingworth, 117; O’Brien, 69; Vanhoye, Situation, 155-157. 22 ) NKJV와 같은 번역은 “이끌어”에 “다시”를 덧붙임으로써(“그러나 그가 맏아들을 세상으로 다시 이끌 때”) 세상에 다시 들어온다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어 성육신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없게 만 든다. ‘데’(dŸ, “그러나”)는 항상 문장의 첫머리에 있는 것처럼 번역되기 때문에, “그러나 다시”라 는 결합 표현은 아마도 “그가 이끈다”가 아니라 “그가 말한다”를 수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다. “그러나 다시(d¡ p}lin, ‘데 팔린’) 그가 말한다……‘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이 그에게 경배하 게 하라’”는 5절의 “그리고 다시(ka¿ p}lin, ‘카이 팔린’),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될 것이며……’” 와 평행을 이룬다. Meier, “Symmetry,” 509, 및 Bénétreau, 1:82를 보라. 따라서 “다시”는 성 육신할 때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명한 것으로 이해하는 데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 느 쪽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성육 신에 대한 것이라는 주장을 옹호하는 Spicq, 2:17; Montefiore, 45-46; Moffatt, 10-11을 보라. Bateman IV, Early Jewish Hermeneutics, 222는 목회자는 예수의 세례를 하나님이 그를 “세상 에” 들어오게 한 때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라고 제안하는데 이는 자신의 해석을 위한 맥락을 히브 리서가 아니라 공관복음서가 제공하도록 하는 것이다. 23 ) Riggenbach, 19-20; Braun, 37; Michel, 113. 때때로 제안되는 것과는 달리, ‘에이스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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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nicNt
on the NEW testame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히브리서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nicNt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면서도,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 타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지은이 개러스 코커릴 (Gareth Lee Cockerill)
옮긴이 신윤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M. Div.) 및 성 서학(Th. M., Th. D.)을 전공했으며,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서울장신대학교 등 여러 신학교와 비블 리카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쳤다. 역서로 NAC 『신명기』, 『여호수아』, 『열왕기상하』, AOTC 『레위 기』, NICOT 『에스겔I』(이상 부흥과개혁사) 등이 있다.
ISBN 978-89-6092-684-4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54,000원
신 | 윤수 옮김
서던 웨슬리언 대학교(B. A.), 애즈버리 신학교(M. Div.), 유니언 신학교(Th. M., Ph. D.)에서 공부했다.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웨슬리 성경 신학교에서 30년 넘게 성경 해석학과 성경신학을 가르쳤고 학장을 역임했다. 웨슬리언 교회 성직자로서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선교사로 봉사 했다. 『CBS 히브리서 주석』, 『하늘 도성으로 가는 순례자를 위한 안내서』를 저술했다.
개러스 코커릴 지음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히브리서 Hebrews 개러스 코커릴 지음 | 신윤수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