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 NICNT 고린도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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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면서도,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 타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1 Corinthians

ISBN 978-89-6092-548-9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55,000원


고린도전서

목차 ■ 편집장 서문 │ 8 ■ 초판 편집자 서문 │ 10 ■ 개정판 저자 서문 │ 12 ■ 초판 저자 서문 │ 14 ■ 약어 소개 │ 18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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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고린도 시와 시민들 | 35 Ⅱ.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 | 40 Ⅲ. 비평적 질문들 | 53 Ⅳ. 신학적 공헌 | 55

본문과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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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1:1~9) | 62 A. 인사말(1:1~3) • 63 B. 감사(1:4~9) • 73

Ⅱ. 교회 소식에 대한 답변(1:10~6:20) | 87 A. 분열된 교회-내부적으로 그리고 바울을 대항해서(1:10~4:21) • 88 1. 문제-지혜라는 이름 아래 지도자에 따른 분열(1:10~17) • 92 2. 복음-인간의 지혜와 모순(1:18~2:5) • 111 3. 하나님의 지혜-성령에 의해 계시됨(2:6~16) • 149 4. 성령 받음과 나뉨에 관해(3:1~4) •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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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5. 교회와 사역에 대한 잘못된 관점 교정(3:5~17) • 187 6. 문제의 결론-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3:18~23) • 214 7. 고린도 교인들과 그들의 사도(4:1~21) • 221 B. 부도덕과 소송: 권위와 복음의 위기 사례들(5:1~6:20) • 269 1. 근친상간한 자의 문제(5:1~13) • 271 2. 소송 문제(6:1~11) • 309 3. 창녀에게 가는 문제(6:12~20) • 336

Ⅲ. 교회의 서신에 대한 답변(7:1~16:12) | 358 A. 결혼과 관련 문제들(7:1~40) • 360 1. 결혼한 자들에게-그대로 지내라(7:1~16) • 364 2. 바울의 원칙-부르심 그대로 지내라(7:17~24) • 405 3. “처녀”에 대해(7:25~40) • 424 B. 우상에 바쳐진 음식(8:1~11:1) • 467

부록 • 473

1. 신자의 행동의 근간-지식이 아닌 사랑(8:1~13) • 475 2. 바울의 사도적 변호(9:1~27) • 509 3. 결론-이방 신전 참여 금지(10:1~22) • 567 4. 시장 음식을 먹는 문제(10:23~11:1) • 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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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C. 예배 가운데 여성과 남성(11:2~16) • 628 1. 문화와 수치에 대한 논쟁(11:2~6) • 636

부록 • 652

2. 창조로부터의 논증(11:7~12) • 655 3. 적절성에 근거한 논쟁(11:13~16) • 669 D. 주의 만찬 오용(11:17~34) • 677

부록 • 681

1. 문제-특권 없는 가난한 자들을 모욕함(11:17~22) • 683 2. 문제-주를 모욕함(11:23~26) • 695 3. 해결책-몸을 분별하라(11:27~32) • 710 4. 해결책-서로 기다리라(11:33~34) • 720 E. 영적 은사와 성령의 사람들(12:1~14:40) • 724 1. 기준-예수는 주시다(12:1~3) • 729 2. 다양성의 필요(12:4~31) • 739 3. 더 좋은 길(13:1~13) • 790 4. 공동체 모임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의 필요(14:1~25) • 824 5. 은사의 차례(14:26~40) • 868 F. 신자의 부활(15:1~58) • 903 1. 근거-그리스도의 부활(15:1~11) • 907 2. 부활의 확실성(15:12~34) • 930 3. 몸의 부활(15:35~49) • 977 4. 승리의 확신(15:50~58) •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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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 연보에 대해(16:1~11) • 1020 1. 연보를 위한 계획(16:1~4) • 1020 2. 여행 계획-바울과 디모데(16:5~11) • 1028 H. 아볼로의 방문에 대해(16:12) • 1036

Ⅳ. 결론적인 문제들(16:13~24) | 1039 A. 결론적인 권면(16:13~18) • 1041 B. 마지막 인사(16:19~24) • 1049 ■ 참고문헌 │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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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 편집장 서문┃

사도행전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가자 ( Gaza ) 로 가 는 길에서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의 만남을 계획하셨다. 그 에디오피아 사 람은 성경 사본의 일부를 가지고 있었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 다. 빌립이 그의 읽는 것을 듣고 “당신은 읽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 니까?”라고 물었고, 에디오피아 사람은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빌립이 내시에게 예수 에 대한 복음을 전했고, 그는 세례를 받아 새롭게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었 다 ( 행 8:26~40 ). 주석 작업에서, 성경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 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변화의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그들 곁으로 다가가는 것보다 더 시급한 명령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본 주석 ( NICNT ) 의 목적이다. 본 주석 ( 사실 본 주석 시리즈 전체 ) 이 제시하는 해석 작업은 이보다 더 나은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고, 이보다 더 나은 꿈을 추구할 수 없다. 이런 주석이 갖는 차별성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점으로, 우리는 성경 본문에 관심을 둔다. 이는 연구사와 학 자들의 논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학문적 논쟁이 아닌 본문에 주석을 제공하는 데 고군분투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본 작업의 핵심 은 독자들이 각주에서 풍부하게 제공하는 비평적 이슈 및 문헌과 소통하면 서 성경 본문을 이해하도록 안내해 주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비평 방법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거나, 본 시리즈 저자들에게 특별히 어떤 방법 8


만을 고수하도록 요청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방법도 수 용하면서, 본문의 중요성을 표명하고 우리의 작업을 도와주는 접근 방법을 추구한다. 둘째, 우리는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이 교회를 섬기며 세계선교의 관점에 서 성경을 읽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 생각한다. 교회를 섬기는 가 운데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소위 교회를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지지해 주 거나, 교회가 하고 싶은 말을 다만 흉내 내는 그런 특별한 해석을 보장하지 는 않는다. 성경해석의 역사 속에서 보면, 성경은 때때로 교회가 교회의 본 질적 소명으로 돌아오도록 도전하는 데 필요한 예언을 전해 왔다. 또 어느 때는 교회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따르고, 뜻을 이루시고 백성을 보응하 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서 그 정체성에 머물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비록 기도를 곁들인 연구와 교회의 예배 상황 속에서 성경을 가장 잘 읽 고 이해하겠지만, 우리는 성경 읽기를 교회가 선교로 참여하는 세상으로부 터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C. S. 루이스는 우리가 서 있 는 곳이 어느 정도 우리의 보는 것을 결정하고, 우리가 서 있는 세상은 우리 가 하는 해석 작업을 알릴 수밖에 없는 질문들로 우리를 괴롭힌다고 올바 르게 지적했다. 하나님이 한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사실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성령이 오늘날 교회에 무엇을 말씀하시 는지 계속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읽는 성경의 신학 적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그 메시지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마지막으로, 본 주석 시리즈는 무엇보다도 목사와 교사, 그리고 학생 모 두를 위해 쓰였다. 이는 번역되지 않은 헬라어와 아람어와 라틴어를 포함하 는 좀 더 비평적인 주석들과, 본문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말하는지 연구하는 설교학적인 주석들 사이에 본 주석이 위치한다는 의미다. 본 주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 선포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필요에 맞게 안내를 받고, 주석 작업을 배우는 사람들은 충분히 본받을 만한 가치 있는 예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조엘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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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 초판 편집자 서문┃

교정과 수정을 통해 최신간 발행을 지향하는 본 신약 주석 ( NICNT ) 의 정책 에 따라 고린도전서가 새로운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본 주석 시리즈에서 고린도전서 초판은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다. 암 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40년 넘게 재직한 네덜란드 출신 의 그로솨이드 ( F. W. Grosheide ) 박사가 1953년에 내놓았다. 작품이 처음 모습 을 드러낸 후, 한 세대가 지났다. 바울서신에서 가장 흥미로운 서신 중 하나 인 고린도전서 연구는 지금까지 역동적으로 계속되어 왔다. 새로운 문제들 이 제기되었고, 새로운 질문들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대해 오늘날 독자들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한다. 고든 피 박사야말로 이런 이슈와 함께해 왔고, 또한 도움을 제공하기에 적격인 분이다. 고든 피 박사는 신약학계에서 본문비평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지만, 사실 그의 목회서신 주석에서 보듯이 그의 주석적 재능은 그가 휘 튼 대학과 고든-콘웰 신학교, 밴쿠버의 리젠트 대학 등에서 수 년 동안 가 르치면서 지속적으로 발휘되었다. 고든 피 박사는 고린도전서를 구성하는 각 부분을 서신 전체의 발전과 논 쟁 측면에서 다룬다. 그는 서신 자체를 역사와 문화, 사회적 상황에서뿐 아 니라,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서신 교환이라는 상황 속에서 다룬다. 고 린도 교인들의 드러나지 않은 전제들, 곧 바울이 서신을 썼을 때 고려했을 전제들과 우리가 서신을 읽으면서 알아야 할 전제들에 대해 일부 난제들이 제기된다. 고린도전서는 실제 서신이다 ( 서신으로 가장된 문학 작품이 아니다 ). 서신에 10


서 바울은 생생하고 분명하며 논쟁적인 많은 사람과 교류한다. 고린도전서 를 오늘날 교회 질서를 위한 교본이나 공예배 안내서, 또는 교회법 요약을 위해 사용하려는 독자들은 서신의 핵심을 놓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독자 들도 고든 피 박사의 안내에 따라 서신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적 용할 수 있을 것이다. F. F. 브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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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 개정판 저자 서문┃

본 주석의 초판이 출간된 지 25년이 지났다. 저자 ( 본 주석 시리즈의 전편집자 ) 의 길게 자란 치아를 빼고는 사반세기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본 개정판 을 내놓는 두 가지 주요 이유가 있다. 첫째, 당초 본 주석이 근거로 삼았던 성경인 1978년판 NIV는 그 전체를 두고 볼 때, 아마 고린도전서가 어떤 곳보다 가장 빈약하게 번역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에 성경번역위원회 ( CBT, 회 ) 에

번역 자체에만 집중한 위원

참여하고서 나는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15명으로 구성된 위원

회 ( 당시

구약 9명과 신약 6명 ) 는

가능한 복음주의 단체를 중심으로 회합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여성 회원이 없었다. 재구성된 위원회는 칼빈 신학교 구약 교수인 존 스텍 ( John Stek ) 교수 ( 지금은 고인이 됨 ) 가 초기 20년 동안 좌장으로 있 었는데, 새로운 회원과 특별히 성경 연구에 새로운 경험을 했던 직설적 인 ( 정평이 난 ) 오순절 출신인 본인과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렇지만 이 모임은 나에게 오랜 우정을 선사했고, 위원회로 보내진 많은 제 안을 수집하고 분류하기 위해 가졌던 정기 모임은 내가 학자로서 가질 수 있는 훌륭한 경력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 모임의 회원이다 ( 현재는 나이를 이 유로 명예회원이다[위원회 자체가 지속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채용 정책으로 하기 때문에] ).

그래서

NIV 최신판 ( 2011 ) 이 출간되기 바로 전에, 나는 한 해 동안 고린도전서 본문 을 먼저 대할 수 있었다. 나는 최초 번역이 분명 잘못되어 출판된 초판에서 약 20개의 각주를 삭제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둘째, 고린도전서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 때문에 12


본 개정판에서 이 모든 자료를 참조할 수 있을 만큼의 여력이 없음을 밝혀 둔다. 사실 학문 저널에 실린 소논문만 보더라도, 참고문헌이 지난 25년 만 에 이전 200년의 모든 자료 대비 거의 세 배를 넘어섰다. 나는 최대한 점검 하려 노력했고, 모든 자료에 공정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의 작 품을 색인에서 발견해야 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이 자리를 빌려서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셋째,

( 아마 덜 중요하겠지만 )

초판 수정은 수년 동안 가르치고 논문을 쓰고 설

교를 들으면서 생겨난 또 다른 나의 열정과도 관련이 있다. 특별히 나는 “성경을 찾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1세기 저자에게는 완전히 이질적 인 “장과 절” 같은 언어 사용을 피하려 했다. 오늘날 기록 문화에서도 단락 을 요구하듯, 바울은 자신의 말을 문장 속에 담았다. 하지만 바울은 “절”이 라고 하는 본질적이지만 그렇다고 의도적이지는 않은 말을 사용하지 않았 다. 이런 말은 성경의 원저자를 이질적이게 만드는 실수를 범하게 한다. 그 래서 나는 그런 말을 주석 본문에 사용하기보다는 숫자로 괄호 안에 넣어 서 표현하려 애썼다. 이는 독자들이 나머지 성경 계시에 대해 “어떤 것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줌과 동시에, 또한 그 자체가 나로 하여금 바울에게 신실하도록 여러 번의 본문 읽기를 요구했다. 2012년 사순절 첫날(2월 22일)에 고든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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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 초판 저자 서문┃

고린도전서 주석을 쓰게 된 여러 계기를 언급하자면 길고, 여기서 일일이 되새길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나는 1970년 휘튼 대학에서 처음 고린도전서 과목을 가르칠 때부터 본서 주석을 시작한 셈이다. 그 후 휘튼 대학과 고든콘웰 대학교에서 거의 매년 가르쳐 왔다. 수년에 걸친 본문에 대한 면밀한 작업을 통해 기존 주석과 다른 관점을 필요로 하는 일련의 다른 주석의 필 요성을 생각했다. 1977년 여름에 국제통신협회 ( International Correspondence Insti­ tution, 브뤼셀 ) 에서

대학 수준 과목으로 『연구 가이드』 ( Study Guide ) 를 출판했을

때, 주석의 꿈은 더욱 현실화되었고, 서문에서 고린도전서 주석에 대한 나의 소망을 넌지시 비친 바 있다. 그 꿈은 1980년 8월에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 신약학자협회 ( Studiorum

Novi Testamenti Societas, SNTS )

정기모임 때 더욱 현실로

다가왔다. 본 주석 시리즈의 출판사가 일부 초기 작품들을 개정하는 과정에 있었고, 그 모임에서 나는 그로솨이드 교수의 고린도전서 주석을 개정해 달 라는 제안과 함께 브루스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나눈 대화로 본서를 집필해 달라는 어드만 주니어 ( Wm. B. Eerdmans, Jr. ) 의 제안을 받게 되었다. 본 주석과 관련하여, 본서는 일차적으로 목회자와 교수,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생각의 흐름과 신학적 연관성, 그리고 다양한 요소가 갖는 의미를 독자가 읽을 때 더 분명하게 알도록 적합한 주해를 제공하려 했다. 주석이 기본으로 하는 영어 번역보다 더 어려운 주석은 사실 배격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 는 내가 빚지고 있는 학자들을 잘 아는데, 이들이 본서와 논의하는 데 충분 14


한 가치를 발견하리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일에 오랫동안 종사한 터 라, 나는 수많은 문헌을 심도 있게 다루어 왔다. 이 일의 범위는 각주에서 발견될 것이다. 집필의 끝 무렵에, 고린도전서 영어 주석들에 대한 존 지슬 러 ( John Ziesler ) 교수의 논의가 엑스포지터리 타임즈 ( The Expository Times 97, 263~ 267, 1986 ) 에

실렸다. 나는 1986년 이전의 주석들 중 콘첼만 ( H.

작품이 고등 독자들에게 필수이지만, 바렛 ( C.

K. Barrett ) 의

Con­zelmann ) 의

작품이 최고라고

했던 지슬러 교수의 평가에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의식적으로 두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본 연구에 포함하려고 노력했다. 본 주석은 몇 가지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독자로 하여금 서신의 모 든 부분이 본질상 어떻게 개별 단락뿐 아니라 더 큰 단락의 역사적/문학적 상황에 어울리는지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이 부분에 주석적 중요성을 두고 기존 주석들이 보이는 상황 결핍을 불만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여기서 반대로 주석적 오류의 경향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모든 장 과 단락에서 역사적 배경을 재구성하고 바울 논쟁의 흐름을 추적하려 했다. 대부분 절들도 이런 식으로 다루었다. 첫 번째와 관련해 본 주석의 두 번째 특징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일관된 관점으로 고린도전서 전체를 주석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본 서신을 이해하는 나의 핵심 관점이며, 독자는 “고 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 부분의 서론에서 이 점을 발견할 것이다. 셋째, 나 의 전공 분야가 본문비평이기 때문에 주석에서 중요한 이문 ( 異文 ) 들을 놓치 지 않았고, 일부는 상당히 길게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주석 도중에 간간히 암시할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단락을 적용과 관련한 관찰로 결론을 맺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는 나의 신앙고백은 이런 특징에 반 영되었다. 나는 모든 주석을 개인적 주해와 수업 강의안 ( 다른 학자들이 언급한 대부분의 주장 들을 포함 ) 에

기초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과 꾸준히 논의하지 않는 것은 바

보스러운 일일 것이다. 때로 내가 생각했던 새로운 통찰들은 대개 본 서신 의 이전 주석에서 발견되었다. 물론 작품을 고려해서 부분들을 자주 수정했 다. 1953년 ( 그로솨이드의 주석이 출판된 해 ) 이후, 고린도전서에 대한 저술은 한 사 람, 특히 가르치는 자나 설교자로 부름 받은 이의 능력으로 섭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참고문헌만 해도 2,000건이 넘을 것이다. 나는 각주를 활 용해 중요한 대부분 자료에 관심을 가지려 했다. 본 주석이 영어권 독자들 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1986년 6월까지 발표된 자료를 포함하려다 보니 참고문헌의 부피가 다소 커졌다. 이런 자료는 “저자 색인”을 통해 확인할 15


고린도전서

수 있을 것이다. 본서의 분량상 더 완벽한 참고문헌을 포함하기란 어려운 일 이다. “선별된 참고문헌”에 소개된 자료는 주석들을 포함해, 고린도전서를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다룬 전문 자료다. 앞서 언급한 두 개의 주석 ( 바렛과 콘 첼만의 주석 ) 을 ss ) 의

제외하고 고뎃 ( Godet ), 핀들래이 ( Findlay ), 페리 ( Parry ), 바이스 ( Wei­

작품은 내게 많은 통찰을 제공했다. 분명 나는 많은 이에게 빚졌다. 내

가 간과한 학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이는 명백히 나를 곤혹스럽게 할 문제다. 내가 동의하지 않았던 학자들에게도 사과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단 순히 동의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자료와 관련된 일부 문제들이 때때로 내 게 큰 관심을 갖게 했지만 나의 반대 의견을 충분히 대변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본 주석의 가정에 대한 두 가지 소견을 덧붙이겠다. 첫째, 나는 오 랫동안 바울서신의 순서에 관해서, 한 세대 앞선 학자들이 오늘날 학자들, 특히 복음주의권보다 더 납득할 만한 이해를 가졌다고 믿었다. 특히 갈라디 아서의 경우에 그렇다. 나는 데살로니가전후서가 바울의 가장 이른 서신이 고, 갈라디아서가 고린도전후서를 뒤따른다는 전제를 가지고 본서를 쓰기 시작했다. 집필을 다 마친 후, 이 전제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이유로, 바 울서신에 관련한 자료들을 그와 같은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왜냐하면 자료 의 시기 문제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쓴 목회서신 주석에서 논의한 것 처럼, 정평이 난 난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서신들이 결국 바 울의 저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견해 역시 추후 논의에 잘 나타나 있다. 둘째, 주석 작업이 공허하게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변명하지 않고 내가 오순절과 복음주의 신학 배경을 가진 신자라는 사실을 밝혀 둔다. 앞 선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 신앙 노선에서 주석 작업을 진행했 다. 각각의 노선은 때에 따라 다른 노선에서 거부하는 통찰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석 과정에서 이런 관점들을 융합하려 최선을 다 했다. 특히 이런 노선들 대부분은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는 데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만일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돕고,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말씀에 더 순종하도록 준 비해 주지 못한다면, 굳이 왜 이런 주석을 쓰겠는가? 학자 그룹 외에 본 주석이 출간되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이에게 감사를 표한다. 무엇보다도 몇 해 전 이 작업과 관련해 연락하려 했으나 시간이 허 락하지 않아 끙끙대던 나를 곁에서 지켜봐 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 총장 인 나의 친구 웨인 크라이스 ( Wayne

Kraiss ) 를

언급하고 싶다. 서던 캘리포니

아 대학의 따뜻한 특별 기금 지원 덕분에 나는 1985년부터 1986년까지 고 16


든-콘웰 신학교로부터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고든-콘웰 신학교에도 심심 한 감사를 표한다. 특별히 그 기간 동안 나는 학교의 모든 시설을 편하게 사 용할 수 있었는데, 잘 알고 있듯이 그 해는 내가 고든-콘웰 신학교에 재직 하는 마지막 해였다. 나의 아내 모딘 ( Maudine ) 에게는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그 해는 14개월 동안 일주일에 6일, 그리고 하루 평균 12시간 이 상을 집필하는 데 쏟아부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모딘은 나 를 끊임없이 격려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꽤 난해한 본문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고견을 주기도 했다. 특별히 두 그룹의 사람들을 언급해야겠다. 첫 번째로, 내가 다니는 매사 추세츠 해밀턴의 구세주 교회 ( Church of the Redeemer ) 일부 구성원들인데, 그들 은 나와 이 작업을 위해 매일 기도해 주었다. 특히 이 기도모임의 인도자인 밥 맥매누스 ( Bob McManus ) 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두 번째로, 나의 친구 들과 동료들인데, 그들은 나의 작업이 위에 언급한 개요대로 잘 진행되는지 주석의 부분들을 면밀히 읽어 주었다. 여기에는 본서를 전부 읽어 준 전 학 생조교 페트릭 알렉산더 ( Patrick

Alexander ) 와

현 고든-콘웰 학생인 릭키 왓

츠 ( Rikki Watts ), 그리고 나의 동료 그레고리 빌 ( Gregory Beale ), 고든 ( T. D. Gordon ), 로저 니콜 ( Roger Nicole ), 그리고 웰스 ( D. Wells ) 가 있다. 색인 작업은 리젠트 대 학 강의 조교로서 버거운 작업을 맡아 준 토머스 ( G. Tompkins ) 에

Thomas ) 와

톰킨스 ( S.

의해 진행되었다.

내가 NIV 성경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NIV 번역이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부분을 “수정”해서 사용하도록 허락해 준 존더반 출판사에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작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본 주석 시리즈의 총 편집자 브루스와 시종일관 헤아릴 수 없는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어드만 출판사의 본 주석 편집자에게 감사드린다. 이 두 분은 내가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시리즈 형식에 변화를 허락해 주었다. 고든 피

17


고린도전서

┃ 약어 소개 ┃

본문비평 기호들은 NTG ( 27판 ) 의 네슬 ( E. Nestle ) 과 알란트 ( K. Aland ) 가 쓴 서 문을 보라.

AB

Anchor Bible

Abot R.Nat.

Abot de Rabbi Nathan

ACQ

American Church Quarterly

adj.

adjective

adv.

adverb

AGJU ‌ Arbeiten zur Geschichte des Antiken Judentums und des Urchristentums AJA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AJT

American Journal of Theology

AnBib

Analecta Biblica

ANF

The Ante-Nicene Fathers

ANRW H. Temporini, ed., Aufstieg und Niedergang der römischen Welt Apoc.Abr.

Apocalypse of Abraham

Apoc.Mos.

Apocalypse of Moses

Appian Maced.

18

Macedonian Affairs (History of Rome)


Apuleius Met.

Metamorphoses

Aristides or.sac.

Oraculae Sacrae

Aristophanes Thes.

Thesmophoriazusae

Aristot. Aristotle Pol.

Politica

Artemidorus Oneir.

Oneirocriticus

As.Mos.

The Assumption of Moses

ASNU

Acta seminarii neotestamentici upsaliensis

ASV

American Standard Version

ATANT Abhandlungen zur Theologie des Alten und Neuen Testaments ATR

Anglican Theological Review

ATRsuppl

Anglican Theological Review supplementary series

Aufl.

Auflage, edition

AusBR

Australian Biblical Review

AUSSDS ‌ Andrews University Seminary Studies Dissertation Series b.Abod.Zar.

Babylonian Talmud, tractate Aboda Zara

Abot.

Aboth

B.Mes.

Baba Mesiah

Ber.

Berakot

Git.

Gittim

Hul.

Hullin

Ketub.

Ketuboth

Moed Qat.

Moed Qatan

Pes.

Pesahim

Qidd.

Qiddusin

Rosh.Hash. Rosh Hashanah Sabb.

Sabbath

19


고린도전서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34


Ⅰ. 고린도 시와 시민들

I 고린도 시와 시민들

고린도의 환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요인들은 고린 도 교회에 보내진 바울의 서신을 이해하는 데 신약의 어떤 성경 못지않 게 ( 대부분보다 더 많이 )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본토를 이 어 주고 사로니코스만과 고린도만을 나누는 5,950m 지협의 전초기지로서 고린도의 전략적 위치는 장엄한 역사를 가능하게 했다.1  )   고린도는 이탈리 아와 아시아 사이의 육상 상업로를 관장했는데, 구간 대부분이 안전해서 사 람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돌아가는 것보다 이 “내륙” 경로를 편리하게 이용했다.2  )   고린도의 역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헬라 도시로서 고린도는 아테네의 황금기 ( BC 5세기 ) 를 전후로 융성하게 되었다. BC 2세기 중엽에 아카이아 동 맹의 리더로서 로마와 갈등을 빚어, 결국 BC 146년에 로마 집정관 루키우

1  )   고린도는 해협의 남쪽 통로 테라스에 위치해 고린도만으로부터 약 3.2km, 해발 575m 아크로 폴리스(Acrocorinth) 자락에 위치해 있다. 도시에 대한 설명을 위해, 특히 도시에 대한 묘사는 Strabo, Geography 8.6.20~23(약 BC 7세기 기록)과 Pausanias, Description of Greece, Book

II: Corinth (약 AD 170년)를 보라. 이 둘뿐 아니라 많은 다른 자료를 Murphy-O’Connor, Corinth 가 다룬다. 로마 시대 고린도의 역사를 보려면 J. Wiseman, “Corinth and Rome I:228 B.C.-A.D. 267,” in ANRW VII/1, 438~548을 참고하라. 2  )   참고, Strabo, Geography 8.6.20: “고린도는 상업적 특성 때문에 ‘풍요’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지 협에 위치해 두 개의 만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Cenchreae] 곧바로 아시아로 이끌었 고, 다른 하나는[Lechaeum] 이탈리아로 이끌었다. 또한 매우 먼 두 나라 간의 상업 유통을 쉽게 해 주었다……그리고 펠로폰네소스의 수출과 수입에 있어서 세금의 열쇠를 고린도가 쥐고 있었 다”(Loeb, 4:189~191).

35


고린도전서

스 뭄미우스 ( Lucius Mummius ) 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백 년 동안 휴면 상태 에 있다가, BC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 속국으로 재건되었 다.3  )   고린도 재건 이유에는 아마도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 스트라보가 언급했듯이 ) 고린도의 상업을 위한 전략적 위치가 도시의 재건 을 서두르게 했을 것이다. 모든 경제 활동에 필요한 요소들이 이곳에서 가 능했다. 즉 아크로폴리스는 천예의 방어벽이 되었고, 수원지로부터 적절한 물이 공급되었고, 로마와의 관계, 동서 상업을 잇는 두 개의 만을 관장했으 며, 올림픽 다음으로 인기가 있었던 이스미안 ( Isthmian ) 경기들을 주관했 다 ( 9:24~27을 보라 ). 둘째, 스트라보 ( 8.6.23c ) 에 따르면 고린도는 로마 자유인들 로 인해 인구 밀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지위가 노예보다 높았던 자유인들 로 4  )   인해 로마의 인구가 종종 과잉되었다. 자유인들의 이주가 한편으로는 로마가 가진 잠재적 문제를 해결하는 손쉬운 방안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 로는 자유인들이 사회 경제적인 출세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스트라보가 약 50년 후에 아주 분명히 묘사한 것처럼, 풍요가 고린도에 금세 찾아들었다. 사체에 파리가 끄는 것처럼 돈 많은 사람이 몰리기 시작 했고, 고린도에 인구 유입은 동서로부터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5  )   모든 사람 이 부를 얻었지만 성장으로 인해 도시는 병들어 갔다. 로마인들이 지배적이 었고, 그들에 의해서 법과 문화와 종교가 전해졌다. 그러나 로마 세계 전체 가 헬라화되었다. 고린도는 역사적으로 헬라 지역이기 때문에 헬라 세계와 종교, 철학, 예술 등의 연결고리를 지켜 왔다. 동쪽으로부터 이집트, 아시아 의 신비 종교와 유대 회당이 들어왔고, 단일신을 믿는 “독자적” 신앙이 생 겨났다. 고린도에 영주 귀족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독립적 형태의 부유한 귀족 이 생겨났다. 하지만 모두가 부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수천 명의 예 술가와 노예들이 많은 무리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풍요는 여전히 이런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을 것이다. 이런 중심지에서 늘 그렇듯이, 타락과 종교가 나란히 꽃을 피웠다. 옛 고 린도는 아리스토파네스 ( Aristophanes,

약 BC 450~385년 ) 가

만든 동사 ‘코린티아

3  )   사실 라틴어는 당시 공식 언어로서 바울 시대까지 넘어 사용된다. Murphy-O’Connor, Corinth, 5

를 보라. 4  )   7:22의 논의와 참고문헌을 보라. 5  )   최근까지 고린도 인구 조사를 위한 과학적 시도는 없었다. Murphy-O’Connor, Corinth, 31~32를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로마 제국의 세 번째 도시가 되 려고 경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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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고린도 시와 시민들

조’ ( “고린도인처럼 성적 행동을 하다”, 예컨대 간음 ) 에서 보듯, 성적 타락을 상징하는 불 명예를 갖게 되었다. 현재 고린도 박물관에 있는 아스클레피우스 ( Asclepius ) 방은 과거 고린도의 삶의 단면을 침묵으로 증언해 준다. 한쪽 벽에는 성병 으로 병든 몸을 치료받기 위해 신에게 바친 진흙으로 만든 수많은 인간 생 식기가 놓여 있다. 하지만 이런 고린도의 삶의 모습이 신약학자들에 의해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 전에서 성을 파는 수천 명의 신전 매춘부에 대한 스트라보의 주장 ( 분명히 잘못 된 ) 을

근거로 삼는다. 옛 고린도에 대한 스트라보의 첫 언급만 보더라도 그

의 주장의 신뢰성을 더욱 의심케 한다.6  )   성적 타락은 분명 성행했다. 그러 나 남녀 모두가 이용할 수 있고 돈이 자유롭게 오가는 항구에서나 그런 성 매매가 가능했을 것이다. 고린도의 종교적 색채는 인구만큼이나 다양하다. 파우사니아스 ( Pau­ sanias ) 는

고린도전서 8장 5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다신” ( 로마-헬라

다신교 ) 과

“주신” ( 신비 종교 ) 을 섬기는 신전이 적어도 26개나 된다고 주장한다. 파우사 니아스는 비문과 회당 상인방에서 “히브리인들의 회당”같은 구절이 발견되 기는 하나 유대인들의 회당은 언급하지 않는다.7  )   비록 여기에 직접적인 증 거는 없지만, 장인들과 무역 상인들을 매료시켰던 풍요는 필시 후원자를 찾 는 고린도 예술가들과 철학자들까지 유혹했을 것이다. 철학자의 무리에는 순회 설교자나 허풍선이들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8  )   이런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보면 바울 시대에 고린도는 마치 이 시대의 뉴 욕, 로스앤젤레스, 라스베이거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 고린도전서, 로마서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은 고린도 교회가 다 방면에서 당시 도시의 거울이었음을 시사한다.9  )   한때 ( 12:13 ) 바울은 한 몸이 되어야 하는 다양한 많은 사람 ( 유대인, 헬라인, 노예, 자유인 ) 을 강조하려고 자신의 논증 흐름을 잠시 중단한다. 이런 다양한 환경의 많은 사람을 다른 방식으 로도 입증할 수 있다. 실명이 거론된 사람들 중에 비록 라틴 이름을 가졌지 만 적어도 세 명 ( 아굴라, 브리스길라, 그리스보 ) 은 유대인이었다. 라틴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세 명 ( 혹은 네 명 ) 은 아마도 로마인 ( 브드나도, 아가이고, 구아도, 디도 유스도 ) 이 6  )   H. Conzelmann, “Korinth und die Mädchen der Aphrodite. Zur Religionsgeschichte der Stadt

Korinth,” NAG 8 (1967~68), 247~261이 이런 문제를 논의했다. 참고, Murphy-O’Connor, Corinth, 55~57. 7  )   참고, Murphy-O’Connor, Corinth, 78~80. 8  )   이 부분의 중요성은 1:10~17과 9:3~14를 보라. 9  )   행 18:1~8; 고전 1:10~17, 16:15~17; 롬 16:23.

37


고린도전서

었을 것이다.10  )   이들 중 적어도 한 사람 ( 혹은 둘: 가이오, 디도 유스도 ) 은 부유층에 속했다. 그 외 헬라식 이름을 가진 이들 ( 스데바나,

아가이고, 에라스도 ) 이

있는데,

이들 중 아마도 스데바나와 에라스도 역시 유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반부 언급에 따르면, 그들 중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 1:26 ). 실제로 그다음에 등장하는 본문 ( 7:20~24 ) 은 일부가 노예였음을 보여 준다. 스데바나 집 ( 1:16 ) 에 대한 언급은 그 가족을 제외하고 노예들과 자유인들이 그곳에 포함되어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 16:15~17을 보라 ). 만일 주의 식탁을 오 용한 데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 11:17~34 ), 공동체 내에 부유층과 빈곤층 간의 어떤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11  )   비록 공동체 내에 일부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서신은 유대 배경에 관해 거의 침묵한다.12  )   적어도 세 본문 ( 6:10~11; 8:7; 12:2 ) 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과거 에 우상숭배자였음을 분명히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그들 대부분이 이방인임 을 의미한다. 다른 곳에서도 이런 점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신전 축제에 올라가는 전반적 문제 ( 8:1~10:22; 특히 8:10을 보라 ), 결혼을 죄로 여기는 태도 ( 7장 ), 유대주의와 심지어 헬라파 유대인의 정서적 불일치, 판결을 위해 총독이나 법정을 찾는 것 ( 6:1~11 ) 등은 고린도 내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의 보통 정서임 에 반해 유대인들은 판결을 위해 이방인에게 묻는 것을 금했다. 매춘부에게 가는 권한에 대한 논쟁 ( 6:12~20 ) 과 장래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 ( 15:1~58 ) 등 은 유대적이기보다는 헬라적인 정서에 더 가깝다. 따라서 전체적인 그림으로 볼 때, 고린도 교회는 두서너 부유한 가정이 있기는 했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방인 공동체였을 것 이다. 이들은 과거 이방인으로서 헬라 세계관과 윤리적 삶의 태도를 기독교 10  )   어떤 이는 가이오 디도 유스도가 한 사람 이름 전체라고 여긴다. 1:16의 각주 71을 보라 11  )   참고, Theissen, 69~174의 전반적 주제는 비록 그가 부자들 사이의 경쟁을 좀 더 자세히 보긴 하

지만 이런 긴장이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근본적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12  )   때로 어떤 이들은 이에 대해 논쟁한다. E.g. J. M. Ford,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or the First Epistle to the Hebrews,” CBQ 28 (1966), 402~416(다른 자료는 색인을 보라), 그리고 J. B. Hurley의 학위 논문을 보라(참고문헌). 참고, 필로의 배경에 대한 B. Pearson, R. A. Horsley 와 J. A. Davis의 논증은 아래를 참조하라. 이런 주장은 서신의 분명한 증거로부터 제기된다. 특히 Hurley의 논문은 학문적 논리로서는 흥미롭지만 설득적이지는 않다. 사실 고린도전서가 유대인에게 보내졌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신자들이 이방인이라는 증거는 있다. Hurley 의 주장은 두 가지다. (1) 서신 내의 분명하거나 암시적 언급들이 반드시 이방 공동체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이 점이 Hurley의 불분명한 점이다). 그리고 (2) 유대 청중을 가정하면 서신 내에 다양한 요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주장에서 Hurley는 어떤 본문(예컨대 11:2~16) 보다 다른 본문(6:12~20, 7:1~40, 8~10)에서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 신약에서 가장 헬라화된 도시 고린도에 쓰는 서신에 바울의 자증인 “이방인의 사도”라는 표현에도 불구하고 서신의 대상 이 흩어진 유대 공동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무리인 것 같다. 모든 증거는 달리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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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고린도 시와 시민들

신앙 앞에 두었다. 하지만 고린도에 위치한 기독교회로서 신자들의 삶의 태 도와 행동에는 여전히 대수술을 필요로 하는 고린도적인 모습이 잔재했다. 고린도전서가 바로 이 수술을 목적으로 한다.

39


고린도전서

II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

A. 문제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AD 51~52년부터 13  )   약 3년 후 본 서신을 기록한 시기 사이에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상황을 다루는 아주 특별한 서신이다. 이 서신에는 교회 상황의 특징을 결정하는 데 기본적인 어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구두와 서신으로 상황을 접한 바울은 적어도 열한 가지의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문제들을 진술한다. 그중 열 가지는 행동에 대한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 문제만이 엄밀하게 신학적 인 문제이며 ( 15장 ), 바울은 거기서 윤리적 경고 및 명령 ( 33~34, 58 ) 과 함께 주 요 부분을 결론짓는다. 하지만 바울은 행동에 대한 문제를 일일이 다루면서 주요 관심을 그의 신학적 입장에 두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삼중적 어려움에 봉착한다. (1)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갖는 상호 관계를 발견하는 것, (2) 바 울과 교회 공동체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 (3) 신자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선택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변호하게 하는 어떤 고린도 “신학”의 영향/입장 을 결정하는 것. 대부분 역사적으로 이런 문제들 ( 적어도

언급된 ) 을

고린도 교인들의 부족한

13  )   이는 신약에서 몇 안 되는 비교적 확실한 연도다. 여기서부터 바울서신의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연도가 거의 확정적인 이유는 갈리오 비문(Murphy-O’Connor,

Corinth, 141~152를 보라)과 약 50년과 52년 사이 어느 시점에 고린도에 있었을 바울과 갈리오 를 언급하는 행 18:12를 통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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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 A. 문제

부분이나 방황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바울이 정보를 제공하거나 교정하려 했다는 관점으로 해결해 왔다. 본 서신을 교회의 당파 분열에 대한 답변으로

서 이해해 왔는데, 그 점에서 바울은 한쪽 ( 때로는 바울이 양쪽 모두를 말함 ) 에 맞서 서 다른 한쪽의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는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다. (a) 세 본문이 교회 내부에 특정한 분열이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 1:10~12, 3:4~5, 11:18~19 ).

주의 식탁의 오용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이 분열이 사회 경

제적 지위에 따른 분열임을 보여 준다 ( 11:17~34; 참고, 1:26; 7:20~24; 12:13 ). 하지만 분열이 영적/신학적 입장에서 비롯되는지는 침묵한다. 여하튼, 바울은 그들 의 서신에 답변하는 서신 후반 3분의 2에서 당파 분열은 언급하지 않는 다 ( 7~16장 ). 사실 고린도 교회를 당파 분열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14  )   왜 냐하면 서신 자체에서 분파에 대해 어떤 암시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15  )   (b) 두 본문 ( 7:1~40,

11:2~16: 여기서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관점과 맞선다 ) 을

제외하

더라도, 고린도전서의 언어와 그 형식은 특히 수사적이고 전투적이다. 바울 은 거의 매번 그들을 언급한다. 바울이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교정하 고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신 바울은 문학적 무기고로부터 가 능한 모든 무기를 동원해 그들을 공격하고 또한 도전하고 있다. 만일 고린 도전서가 직면한 문제를 바울에게 조정해 달라는 교회의 서신에 대한 답장 이라면, 우리는 바울이 그들의 서신을 상당히 잘못 읽고 있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c) 서신 전체가 고린도 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지, 바울이 어떤 그룹에 말하다가 또 다른 그룹에 말하는 식의 서신이 아니다. 일부 특별한 사람을 이인칭 단수로 언급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을 이인칭 복수로 표현 한다.16  )   만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있는 이견들을 해결하고 있다 면, 어떤 이들은 적어도 그런 효과를 위한 바울의 일부 언급을 기대할 것이 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이런 증거는 전통적 해석이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4  )   이 점에 있어서 1:10~4:21의 서론과 1:12 주석을 보라. 참고, 교회 자체 내에서 “그룹들”을 설명

하고자 할 때 부적절해 보이는 또 다른 예로서 2:6~16과 12~14에 대한 서론을 보라. 그러나 사 실 바울은 그룹의 종류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 본문 주석은 각각 상당히 다른 주제를 보여 준다. 15  )   고전 8~10장에 등장하는 “약한 자”와 “현명한 자”를 1:11의 분당에 속한 그룹으로 으레 이해했 다. 하지만 이는 상당히 의구심을 유발한다. 분명 교회가 내부적인 문제 때문에 분열되었다는 어 떤 암시도 8~10장에서는 보여 주지 않는다. 주석을 보라(8:1~11:1 서론). 16  )   4:7을 보라. 참고, 7:21, 27, 8:9~10, 14:16~17, 15:36~37.

41


고린도전서

모든 요소를 함께 고려하면서 좀 더 일관된 구조로 서신을 볼 수 있는 방법 이 필요하다.

B. 재구성 제안 본 주석의 기본 입장은 고린도의 역사적 상황이 교회와 교회 설립자 간의 갈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교회가 내부 분쟁에 직면하고 있다

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바울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교회 전체를 끌 고 가는 일부 교인들과 바울 사이의 “분열”이라는 더 큰 문제가 있음을 논 의해야 한다. 이런 갈등은 바울에게 그의 권위와 복음에 대한 이중적 위기 를 가져온다. 더욱이 바울과 그들 사이에 이 두 가지 위기를 야기하는 핵심 문제는 “신령한” ( ‘프뉴마티코스’= 영적인 사람들 ) 의 의미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관 련 있다.

1. 고린도전서의 상황 본 서신은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세 번째 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이 관계 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가 둘 사이 교환된 세 번째 서 신이라는 사실이다. (i) 바울과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은 사도행전 18장 ( 약 AD 49~51 ) 에 체류 기 간을 소개한 상당히 독특한 요소를 지닌 교회 설립 방문 때였다. 비록 사도 행전 18장과 고린도전서가 그 공동체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 해 주지만, 교회의 규모나 장소, 모임 시간, 리더십의 본질 등을 말하고 있 지는 않다. (ii) 몇 년 후에, 바울은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그가 본 서신 ( 5:9 ) 에서 언급 한 것처럼 교회에 보내진 “이전 서신”라 불리는 서신을 기록했다. 그 서신 이 이야기하는 바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바울은 거기서 성적 부 도덕에 대한 문제를 일부 다루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간음하지 말 것을 당부했고, 이를 통해 성적 타락에 빠진 형제들과 연합하지 않도록 경 계하고 있다. 간음 외에, 바울은 계속 탐욕과 도둑질과 우상숭배를 언급한 다 ( 5:10 ). 바울은 이전 서신에서 이런 문제도 다루었을까? 가장 좋은 추측은 아마도 “그렇다”이다. 적어도 우상숭배 문제만큼은 그렇다. 왜냐하면 바울 42


Ⅱ.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 B. 재구성 제안 1. 고린도전서의 상황

이 이전 서신에서 언급했다면, 우상숭배 문제는 매우 타당한 방식에서 본 서신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본 서신에 나오는 이슈들 중 적어도 두 가지 ( 간음과 우상숭배 ) 를 이전 서신에 서 다루었다면, 분명 그 서신은 일종의 고린도 교회 상황에 대한 답변 목적 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바울의 첫 번째 서신을 오해했다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5장을 통해 분명해진다. 아마도 그들은 그 서신을 무시했을 것이다 ( 5:9~11을 보라 ). (iii) 그때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가져온 서신이 ( 16:15~17 ) 바 울로 하여금 고린도전서를 쓰게 했는데, 앞선 서신을 읽은 그들에 대한 반응 으로 평범한 상황에서 이해될 만한 서신이다.17  )   바울의 반응이 상당히 전 투적으로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져온 서신에서 그들은 바울의 입장과 금지령 일부를 상당히 예외적인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바울이 그들의 서 신 내용을 의심했지만, 글로에의 집에서 온 신자들과의 만남 ( 1:11 ) 을 통해, 이제는 확실하게 고린도 교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 서신과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더욱 악화 되었다. 글로에 사람들의 도움으로 바울은 적어도 그들 서신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18  )   바울은 서신을 쓸 때 두 가지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위기에 처 한 교회 상황에서 그의 권위를 거듭 주장해야 했다. 이는 바울이 교회 리더 십의 모델로서 사용한 종의 이미지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 3:5~9, 4:1~5 ). 종 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고 그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해야 했을까? 19  )   둘째, 바울은 그들의 신학과 삶의 태도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 로 설득해야 했다. 마치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화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 럼 그들은 복음을 위협하는 태도로 돌진했기 때문이다.

17  )   비록 바울과 고린도 교회 간의 관계 개선이 상당히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Hurd가 이 점을 매우 그럴듯한 역사적 가능성으로 고려한다는 점은 그의 장점이다(특히 50~58을 보라). 대부분 주석 은 바울의 첫 번째 서신과 바울에게 보내진 서신 사이의 관계를 간과한다. 18  )   물론 사건의 순서는 명확히 증명할 수 없지만, 정보는 분명하다. 이는 실제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

난 일과 서신에 소개된 “공식적” 입장 사이의 분명한 모순(예컨대 11:2처럼)을 이해하는 데 도움 을 준다. 19  )   특히 4:14~21을 보라.

43


고린도전서

2. 반대 유용한 정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사도행전 18장 18절에 기록된 것처 럼 바울이 교회를 떠날 때부터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바울과 고린 도 교회 사이에 점점 “적개심”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런 긴장은 바울의 예기치 않은 방문에서 분명히 듣게 된다 ( 고후

2:1~4 ).

고린도전서는 그 문제

가 이미 바울의 “고통스러운 방문” 전에 발생했음을 말하고 있다. 문제는 고린도전서를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 상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이다. (i) 고린도후서 및 갈라디아서와 대조적으로, 고린도후서 마지막 부분에 언급된 ( 10~13장 ) 외부인들의 교회 침투에 대한 증거는 고린도전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실 고린도전서 ( 9:12 ) 에서 고린도 교인들과 일을 함께 나 누는 “다른 이들”에 대한 언급이 외부인들에 대한 가능한 예라고 할 수 있 지만, 본문의 상황은 꼭 그런 이해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바울의 “적대자 들”을 단어의 통상적 의미로서 외부 선동가들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다.20  )   오히려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 ( 15:12; 참고, 4:18 ) 이 적대감을 조성했다. (ii) 바울은 고린도전서 중반부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상황은 좋지 않았 다. 바울과 교회 사이의 관계가 눈에 띄게 악화되었지만, 분명 노골적인 적 대감은 아직까지 초래되지는 않았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전히 서신을 통해 서 바울과 대화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선명한 반바울 적 감정이 고조되었다. 소수로부터 시작된 21  )   이 감정은 거의 전체를 감염시 켰다.22  )   그러므로 비록 공동체 안에 분명한 분열이 있긴 하지만 가장 심각 한 형태의 “분열”은 바로 공동체 다수와 바울 자신 사이의 분열이다. 그들 은 거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바울과 뜻을 달리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바울의 권위를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그들만의 기준으로 바울이 ‘프뉴마티코스’ ( 영적인 사람 ) 인지 선지자 ( 참고, 14:37 ) 인지 상당히 의심하고 있는 판국에 이제 바울은 이전 서신에서 그랬듯이, 어떤 권리로 그들에게 말을

20  )   이에 대해 Ellis, 103은 “고린도전서에……적대자들은……없다”라고 올바로 주장한다. 하지만 Ellis는 서신 전체에서 반대에 대한 인식을 너무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21  )   1:12, 4:3, 6, 18~20, 9:3, 10:29~30, 14:37, 15:12을 보라. 22  )   이와 관련해, 비록 공동체 안에서 그를 대적하는 무리를 자주 언급하지만(예컨대 4:18~20,

9:3), 서신 자체는 교회의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쓰인다. 그리고 두 경우를 제외하고(7:1~40, 11:2~16), 그들은 집중포화를 받는다(참고, 1:10~4:21, 아이러니, 수사학, 풍자를 섞어가며; 또는 5:1~13과 6:1~11에서 바울은 범법 집단[특히 6:5에 가시 돋친 풍자]으로 교회 전체를 다룸; 또 한 8:1~11:1에서 모든 논쟁 형식을 동원해서 그들을 따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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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비평적 질문들

III 비평적 질문들

일반적으로 고린도전서는 놀랍게도 위의 표제에 어울리는 질문들은 없 다. 여러 논의는 일반 개론서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서신의 기록 연대 는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시기 ( 행 18:18 ) 와 그가 에베소에서 머문 기간에 근 거해, 약 AD 53~55년 봄경으로 어렵지 않게 정할 수 있다. 중요한 이슈는 서신의 통일성 유무다. 다양한 이유로 몇몇 학자들은 바울의 서신 ( 고린도후서 와 함께 ) 을

고린도에 보내진 여러 개의 서신으로 나누려 했다.39  )   출발점은 바

울이 고린도전서 5장 9절에서 언급한 이전 서신이다. 이는 고린도후서에서 도 일부 확인될 수 있다. 고린도전서의 일부 부분들 사이의 제기된 모순들 을 기초로 서신은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이런 이론들은 다음 네 가지 요점과 관련 있다. (1) 이론들 사이에 합의점 이 적다는 사실은 그것을 믿도록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라 서신의 구성이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2) 제기된 모순들은 주석을 통해 예외 없이 풀 수 있다. 예를 들어, 본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우상의 음식”을 다루는 본문의 시작과 결론 사이의 나타나는 긴장 ( 8:1~13, 10:23~33 ) 은 바울이 비록 관련은 있지만 서로 다른 두 이슈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이와 관련해 이론들은 서신의 기본 논쟁 형식인 “A-B-A” 패턴을 놓치고 있 다.40  )   첫 번째 “A” 부분의 경우 비교적 크고 일반적인 신학적 관점에서 문 39  )   특히 Hurd, 43~47의 논의를 보라. 40  )   1~3장, 7:25~40, 8~10장, 12~14장을 보라. 참고, J. Collins, “Chiasmus, the ‘ABA’ Pattern and the Text of Paul,” in Studia Paulinorum Congressus Internationalis Catholicus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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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제를 다룬다. “B” 부분은 일종의 설명을 곁들인 일탈이지만 전체 논지에 매 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번째 “A” 부분은 가까운 문제에 대한 특별한 답변 이다.41  )   (4) 누군가 우리 앞에 놓인 본 서신을 완벽히 이해할 때, 이런 이론 들은 입증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허드의 결론처럼, “이론들이 항상 지니 는 증명의 부담을 단박에 떨쳐 버리는” 확실한 증거가 늘 부족한 것 같다.42  )

1963), vol. 2, 575~584. 41  )   따라서 (a) 8:1~13/ (b) 9:1~27/ (a) 10:1~22; (a) 1:10~2:5/ (b) 2:6~16/ (a) 3:1~23; (a) 7:15~28/ (b) 29~35/ (a) 36~40; (a) 12/ (b) 13/ (a) 14. 42  )   Hurd,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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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신학적 공헌 A. 종말론

IV 신학적 공헌

비록 고린도전서가 바울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제외하고 자주 논의되 지 않지만, 서신의 신학적 공헌은 교회 역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본 서신 에서 바울은 장터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바울에게 복음의 진리는 까다로운 상황에 처한 일상의 긴박함 속에 마침내 탈출구로 역사하는 능력이 되었다. 할 말이 많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들 을 세 부분으로 제안하려 한다. 이것들은 서신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A. 종말론 다른 서신처럼,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사상 중 뚜렷하게 눈에 띄는 것은 종말론적 틀이다. 바울에게 종말론적 사상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사건, 즉 그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은사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시 대의 전환점을 가져왔다. 종말론적 성령의 뒤이은 은사는 종말의 시작을 알 리는 명확한 증거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소멸되어 가는 육체 ( 15:49~53 ) 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부활 후 주님의 재림 ( 15:20~28 ) 이 장래에 있다는 사실 은 시작된 것이 아직 완성에 이르지 않았다는 증거다. 따라서 바울에게 신 자는 이미 시작된 미래적 실재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고 좌우되는, 그러면서 아직 마지막 영광을 기다리는 확실한 종말론적 백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55


고린도전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다. 이런 종말론적 틀은 철저히 바울 안에 내재해 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보 다 생생한 곳은 없다. 이것은 바울의 언어 (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는 지금[4:20]과 아직 [6:10~11, 15:50]의 상태에 모두 속한다 ) 와

기대 ( 예를 들어, 은사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 주 예

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1:4~8]과 주님의 식탁에서 그가 올 때까지 그의 죽으심을 선포한다[11:26]는 표 현 ) 에서

보이며, 현재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그의 이해이기도 하

다. 한편으로 미래가 이미 행동을 개시했기 때문에, 신자의 모든 현재 실존 은 미래의 실재 ( 7:29~31 ) 가 결정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닌 것처럼” ( “as if not” )

산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없어질 현재 질서에 지배받으며 살지 않

는다. 이런 관점은 모든 삶에서 바울의 윤리 강령을 지배한다. 신자들은 서로 를 이방인의 법정에 세우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종말론적 실존에 서 누군가의 불만을 시정하는 것은 그저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 다 ( 6:1~6 ). 그리스도인은 이방 신전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과거에 우상을 향한 심판이 말세를 만난 자를 경고하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 10:11 ). 하나 님이 모든 인간의 가치와 행동을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하셨다. 현재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 1:26~28, 7:13 ). 그러므로 신자들은 현재에서 내적 심판을 연습한 다 ( 5:12~13 ). 교회는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옛 누룩을 걷어 치워야 한다 ( 5:7~8 ). 다른 한편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절대적으로 현재 실존을 지배하는 미래 는 여전히 마지막 완성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런 미래는 현재 삶처럼 확실 하다. 부활이 그 보증이다. 하나님이 주님을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일 으키실 것이다 ( 6:14,

15:1~28 ).

그리스도는 첫 열매이고, 추수 때를 위한 하나

님 자신의 보증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그가 죽은 자를 일으키시고 산자를 변화시키실 것이다. 이뿐이겠는가? 이런 사건들로 말미암아 그리스 도가 마침내 대적 마귀를 죽음 그 자체로 파괴할 것이다 ( 15:24~28, 54~57 ). 그러나 미래나 현재에서 경험되는 종말론적 실존의 그 어떤 실재도 이미 완전히 도래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망은 우리 것 ( 3:22 ) 이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죽는다 ( 11:30 ). 현재나 미래도 우리 것 ( 3:22 ) 이지만, 현재 윤리 적 삶의 모범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다 ( 4:10~13 ).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역설이고 긴장을 갖고 있는 분명한 모순이다. 약속은 현재 상황이 아 닌, 현재 삶의 실존을 이미 결정한 미래의 절대적 확실성에 있다. 우리는 고 린도전서 전체를 이런 분명한 틀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 ( 4:1~5; 15:12~28, 35~38을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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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 7:29~31;


Ⅳ. 신학적 공헌 B. 복음과 윤리적 삶

B. 복음과 윤리적 삶 그리스도인이 존재의 규범으로서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바울의 주장은 방금 언급한 종말론적 틀과 관련 있다. 만일 로마서와 갈라디 아서가 율법에 복종해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명백히 선언한다면, 고린도전 서도 구원받은 자에게 “하나님의 계명” ( 7:19 ) 과 “그리스도의 율법” ( 9:22 ) 에 복 종하며 사는 삶이 요청된다고 명백히 선언한다. 인간의 복종이 믿음 안에 들 어가는 데 필요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믿음의 표현으로서 복종이 요구된다. 바울은 기독교 윤리를 고린도전서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 ( becoming what you are ) 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어떤 사 람이 되라는 명령을 결코 주저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상황에서 그 명령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 도 교인들에게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옛 누룩을 던지라고 명령한다. 유월 절 어린 양인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새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 5:7~8 ). 그들의 몸이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리스도를 위해 구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음행을 범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주님과 함께 한 영이 되었 다 ( 6:14~17 ). 그들은 이전의 이교적 삶을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아울러 그들은 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와 성 령으로 살지 않는 자들이 있음도 상기해야 한다 ( 6:9~11 ). 이런 윤리에는 어떤 절대적인 것들이 있다. 어떤 죄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성적 부도덕-6:12~20, 신전 축제에 참 여-10:14~22 ).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권리를 얻는다는 측면에서 율법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 행동은 하나님의 성품과 절대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절대적이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종교적 거리낌 ( 예를 제물[9:9~13, 10:23~30] ) 은

들어 할례[7:19]나 시장의 우상

신자와 무관하다. 그것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폐

지되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는 그런 행동으로 누군가 실족할 때이 다 ( 10:31~33 ). 그리스도의 삶이 사도의 삶을 통해 연결되었기에 ( 4:16~17, 11:1 ) 그리스도는 모든 삶의 본이 된다 ( 11:1 ). 그러므로 복음이 율법이 된 것이 아니고, 율법의 진정한 응답이 파기된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은혜를 통해 그리 스도를 본받을 수 있게 하는 성령이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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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C. 교회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고린도전서의 가장 큰 신학적 공헌은 아마도 교회 의 본질 ( 특히 지역적 표현 속에 내재된 ) 에 대한 바울의 이해일 것이다. 복음 자체가 고린도 교인들의 신학과 삶이 걸린 문제라면, 복음의 가시적 표현은 구속받 은 백성의 지역 공동체가 걸린 문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린도전서야말 로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바울의 어떤 서신보다 더 많이 포함하고 있다. 두 가지 훌륭한 이미지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첫째, 지역 교회는 고린 도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 3:16~17 ). 성전 이미지로 바울은 몇 가지 요점 을 전한다. (a)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신자들은 이방 신전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 삶의 방식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이 부분은 정확히 서신 전체에 흐 르는 관심사로서, 고린도에서 구별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고린도 교인들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 준다 ( 참고,

5:1, 6:7, 10:32, 14:23 ).

(b)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들을 둘러싼 말 못하는 우상 들과 대조하여, 성령은 그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로 만드셨 다. 예언적 선포를 통해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나타나셨을 때, 이방 인들의 마음이 폭로되고 심판받아서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 14:24~25 ). (c) 성전을 파괴한 자들, 곧 다툼과 세상 지혜로 사는 자들을 하나님이 멸하신다는 바로 그 성전은 하나님께 신성한 곳이다 ( 3:17 ). 능력의 성령을 통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자의 존재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고린도전서 5장 1~13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교회는 근친상간한 자를 내쫓아 순결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내쫓긴 그는 교회가 취한 행동을 통해 구원 ( “주 예수의 날에”, 5:5-역자 주 ) 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분 명 공동체로부터 출교는 그의 회개를 이끌 것이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 10:17, 11:29, 12:12~26 ). 몸의 이미지를 통해 바 울은 두 가지 요점을 강조한다. (a) 이 이미지가 강조하는 것은 연합의 필요 성이다. 성전 이미지처럼, 연합의 핵심은 신자들의 공통된 성령 체험이 다 ( 12:13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가 성령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분명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 에, 부유한 자들은 주의 식탁 교제에서 가난한 자들 멸시하기를 멈춰야 한 다 ( 11:22, 29 ). 그리고 좀 더 보는 자는 덜 보는 자에게 “우리가 너를 쓸 데가 없 다” ( 12:21~26 ) 고 말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지체가 서로를 위해 필요하 도록 그렇게 몸을 조성하셨다. (b) 몸의 이미지에서 바울의 더 큰 관심은 다 58


Ⅳ. 신학적 공헌 C. 교회

양성에 대한 공존의 필요성에 있다. 고린도 교인들이 중시하는 획일성이라 기보다는, 바울은 한 성령의 다양한 표현에 대해 그들이 인식할 필요가 있음 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몸은 없고 괴물만 남을 것이다 ( 12:15~20 ). 그런데 이런 문제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체제에 대한 바울의 가 르침이 없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빌립보서 1장 1절에서처럼 “장로들” 또는 “감독들”이나 “집사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더욱이 예배를 위한 그들 의 모임의 성격이나 시간, 그리고 리더십에 대한 암시조차 없다. 예배에 관 해 두 가지 표현이 등장한다.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에 따르면, 신자들 은 주님의 만찬을 나누는 공동 식사를 위해 같은 장소에 모인다. 하지만 우 리는 그들이 얼마나 자주 모여 먹었는지, 또한 고린도전서 14장 26절이 의 미하는 음성 예배 ( vocal worship ) 의 특징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가 없 다. 모임에서 예배 후에 공동 식사를 했는지 ( 아마도 ), 그 자체가 분리되어 진 행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어떤 경우든 바울은 그런 예배가 가지는 진실한 연합체의 본질을 강조한다. 규정은 “각자”가 지킬 수 있게 만들어져야 한 다. 그 결과 몸 전체의 신앙이 함양된다. 그런 예배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한 편으로는 찬송과 기도와 감사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 11:13, 14:14~17 ), 다른 한편 으로는 다양한 선포가 공동체에 선언되고, 그 결과 공동체가 세워져 간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가 오늘날 교회에 던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언 급하려 한다. 도시와 교회의 세계화, 많은 일탈 행동으로부터 기인하는 불 쾌한 개인주의, 신앙에 그들만의 지식을 곁들인 오만함, 수많은 방식으로 둘러싸인 문화에 순응된 복음 등을 포함한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많은 특 징들은 오늘날 교회 앞에 걸려 있는 거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약 함” ( 4:9~13 ) 을 모델 삼는 제자도의 필요성,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미 덕 ( 13:1~13 ), 예배를 목적으로 하는 은사 ( 14:1~33 ), 성적 부도덕의 본질을 들여 다볼 수 있는 안목 ( 5:1~13, 6:12~20 ), 깨지지 않는 결혼에 대한 기대 ( 7:1~40 ) 등 을 포함한 다른 많은 것들은 처음 소개받은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 니라, 오늘 우리와도 모두 관련 있다. 부디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 주석을 통해 성령에 영감 된 바울의 목소리를 더욱 분명하게 듣는 데 도움을 얻기 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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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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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신학적 공헌 C. 교회

1 Corinthians

본문과 주석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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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I 서론(1:1~9)

그리스-로마 시대의 대부분 서신들은 발신자 이름, 수신자, 문안 인사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인사말로 시작한다.1  )   그다음 등장하는 부분은 감사 또는 수신자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신들에게 드리는 기도다.2  )   바울서신들 은 이 표준 형식을 따른다. 하지만 바울의 손에서 이런 형식적 요소들마저 구별된 기독교 서신이 되도록 복음으로 감동된다.

1  )   전형적 인사말이 없는 요한3서는 제외하고, 신약의 모든 “서신서”는 이 방식을 따른다(행 15:23~ 29에 등장하는 야고보의 서신도 포함). 파피루스로부터 수집된 인사말 모음의 예로는 F. X. J. Exler, The Form of the Ancient Greek

Letter of the Epistolary Papyri (3rd c. B.C.~3rd c. A.D.) (Chicago, 1923), 23~68을 보라. 2  )   바울은 대개 감사 부분을 포함하는데, 거기에 기도까지 포함된 서신도 있다(예컨대 살전 1:2~5; 빌 1:3~11). 신약에서 실제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가장 가까운 예로는 요한3서 2절을 보라. “사랑 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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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1:1~9) A. 인사말(1:1~3)

A. 인사말(1:1~3)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1)

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2) 성 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 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

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

Paul, called to be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nd our brother Sosthenes, 2  To the church of God in Corinth, to those sanctified in Christ Jesus and called to be his holy people, together with all those everywhere who call on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 their Lord and ours: 3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1

노라

바울은 그의 앞선 두 서신 ( 데살로니가전후서 ) 에서는 인사말의 세 요소를 그리 정교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본 서신의 인사말이 보여 주는 정교함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 바울의 마지막 서신까지 등장한다. 각각의 정교한 내용들은 서 신에서 진행될 그의 관심사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다. 심지어 인사말에서 교회를 형식적으로 언급할 때도, 바울의 마음은 곧 다루게 될 중요한 행동 과 신학적 문제에 이미 돌입했음을 보여 준다. 1절 데살로니가전후서는 단순하게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시작한

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의 동역자 “우리의 형제 소스데네”와 함께한 다. 하지만 소스데네의 이름을 언급하기 전에, 바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1  )   어떤 이른 사본들(‫ א‬A b)과 후기 사본들은 어순이 뒤바뀌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KJV을 보 라). 하지만 이는 바울이 이름으로 우리 주를 언급할 때 거의 등장하지 않는 어순이다(항상 똑같은 어순으로 등장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준 형식은 제외). 예외로 2:2와 3:11을 보라. 그 러나 두 경우에서 강조점은 지상의 예수와 그의 십자가 죽음에 있지, 그의 사도를 임명하는 고양된 주의 이름에 있지는 않다. 2  )   가장 이른 최고의 사본들(동방 사본과 서방 사본 모두: P46 B D F G b m; Ambrosiaster)은 어려

운 어순을 가지고 있다. ἡγιασμένοι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τῇ οὔσῃ ἐν Κορίνθῳ. Zuntz, 91~92와 Metzger, 543은 이런 독법을 원독법으로 보기에는 “본질적으로 너무 어려운” 그리고 너무 “비바 울적”이라고 보고, “한두 구절의 우발적 생략 그리고 잘못된 위치에서의 뒤따르는 재서론”이라 주 장한다(Zuntz). 하지만 이 경우에 “더 어려운 독법”이라는 기준에 따라 원독법으로 봐야 할 것이 다. 어떤 이들은 이런 기이한 표현을 초기 필사자들의 생략과 수정의 결과라기보다는 후기 필사자 들이 바울의 거친 표현의 어순을 수정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바울의 원독법에 가까운 독법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고, 이것이 나타난 좀 더 이른 변형들이 어떤 형태로도 살아남 지 않은 반면, 이중 오류로 초래된 이런 “변형”이 동방과 서방의 지배적 독법이 될 수 있는지를 어 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더 자세한 논의는 To What End Exegesis? 43~4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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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어순을 통해 볼 때, 소스데네가 사도일 가능성은 확실히 배제된다. 그러나 바울이 이 말을 삽입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설립자와 불 화 가운에 있는 교회다. 설립자를 판단하고 ( 4:1~5 ), 그의 사도권을 시험하 고 ( 9:1~23 ) 있다. 바울이 나중에 ( 4:15, 9:1~2 ) 그의 사도권 ( 교회를 설립, 부활하신 주를 봄 ) 에

대한 증거를 좀 더 진술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교회가 사도권을 의

심하기 때문에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주장하며 서신을 시작한다.3  )   대개 이 런 주장이 불필요했을 텐데 (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 고린도 교 인들과 바울 사이에 심각한 긴장이 있었다면, 그들은 바울의 주장하는 바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4  )   바울은 이 주장에서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한다. 첫째, 그의 사도권은 신적 “부르심” ( 다른

예로, 오직 로마서에서 등장 ) 의

결과다. 비록 헬라어 본문에는 “to

be” ( ~되기 위해, ~되도록 ) 가 없지만, 병렬된 두 단어 “부름 받은 사도”로 어떤 것 을 의미할 수는 없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가 사도로서 권리를 가졌다는 것 을 보여 주기 위한 칭호로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사도라 불리는 바울” ( 참고, 15:9, 여기서 이 용법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됨: 그는 사도라 불리기에 부적절하다 ) 에서처럼

사용되

는 칭호로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다음 2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들” 이 되는 것이 마치 그들의 부르심에 대한 확증인 것으로 주장하듯, 바울은 이것이 그의 “부르심”, 곧 그의 신적 소명이라 주장하고 있다.5  )   둘째,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를 덧붙여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강조 한다.6  )   이런 추가 어구는 그의 부름 받음을 묘사하는 데 장황한 표현 같아 3  )   Godet, 38은 달리 생각한다. 여기서 “사도권을 부정하는 분당들을 대항하는 논쟁적 의도”는 없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고린도전서와 비교해 보면, 바울의 주장은 분명 교회에서 일어난 최근 사건에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4  )   참고, 서신에 진술되는 문제의 일부로서 바울의 사도권을 문제 제기하고 있는 또 다른 서신인 갈라 디아서의 유사한 표현. 5  )   고린도전서에서 “소명”으로서 부르심과 “선택”으로서 부르심의 개념이 다소 모호하다. 1:1과 1:2 에서 “소명”의 개념이 지배적이다. 1:9와 24절에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가족”에로의 신적 초대 다. 확장된 용례로서 7:15~24에는 의미하는 바는 덜 분명하다. 부르심은 신자가 되는 첫 번째 현상 이지만, 본질적으로 삶에서 신자의 지위나 상태의 의미도 가진다. 이때는 단순히 “소명”, 즉 그가 무엇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이런 의미들은 바울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하나님이 “그의 아 들의 교제 안에” 신자를 부르신다(1:9). 이런 부르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1:2)으로 부름 받 은 의미대로 삶을 사는 것을 말하고, 또한 존재와 소명을 포함하는데, 존재와 삶에 하나님의 부르 심을 받은 자로서 그가 어떤 자이며 무엇을 하는 자인가를 포함한다(1:1, 7:15~24). “고린도 교회 거룩한 자들(‘프뉴마티코이’)에게 반응으로 바울의 부르심 신학”에 대한 추가 논쟁으로 Bartchy, 127~159를 보라. 6  )   헬라어 “효과적 동인”(BDAG A3d)을 표시하는 속격과 함께 διά. 참고, 이 구절이 서두에서 독립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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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1:1~9) A. 인사말(1:1~3)

보인다.7  )   하지만 바울은 이 구절과 함께 그의 “부르심”에 대한 역사적 인 식을 넘어, 그것의 궁극적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목적에 사도권의 근거를 둔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구원을 다른 이들에게 공표하는 사도권이 그런 것처럼 ( 참고, 갈 1:4; 엡 1:3~11 ), 바울에게 구원 자체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시작 점과 확실성을 갖는다. 바울은 하나님의 행동이 항상 이 모든 것에 우선함 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사역뿐 아니라 그의 위치는 하나 님의 뜻의 표현인 부르심에 근거들 둔다.8  )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기초 한 부르심의 이해는 사역에 충만한 자신감을 채워 준다. 이는 또한 수많은 현대인들이 바울에게 발견하는 명백한 이중성으로 이끈다. 한편으로 바울 은 자신의 인성이나 역할에서 전적으로 겸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그의 사역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단호할 수 있었다. 후자는 바울의 사도권이 그가 선택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통해” 주 어졌다는 그의 확신에서 기인한다. 셋째,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서 그의 소명의 본질을 묘사한다. 바울은 이미 그의 앞선 서신 ( 살전

2:7 ) 에서

이런 표현을 자신과 동역자들에

대한 칭호로 사용했다. 고린도전서에서 몇 번의 예들은 이 표현이 교회 내 에서 이미 어떤 권위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고정된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9  )   이 그룹은 분명 열두 사도를 포함하지만 또한 현저하게 그들을 넘어선다 ( 15:5~7 ). 사도라는 용어가 직무나 지위뿐 아니라 기능적 의 미를 갖는다는 것이 일종의 문제다. 즉 사도는 본래 그리스도가 복음을 위 해 “보낸” 어떤 이들과 관련된다 ( 참고, 1:17 ).10  )   하지만 보냄 받은 자들, 특히 으로 나타나는 예: 골로새서,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7  )   사실 Héring, 1은 “‘부름 받음’이……‘하나님의 뜻’과 중복되었고, 그래서 아마도 후자는 삭제되어 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바울의 더 폭넓은 용법을 놓친 결과다. 8  )   “하나님의 뜻을 통해”가 “부름 받은”을 수식하는지, 바울의 사도권을 수식하는지 일부 논의가 있 었다(예컨대 Barrett, 30~31). 둘 다 수식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바울은 사도가 되게 하기 위해 부르심 받았다. 하나님의 이전 뜻이기 때문이다. 참고, Conzelmann, 20. 9  )   이 용어와 “직무”의 본질에 대한 작품은 많다. 어떤 작품보다 K. H. Rengstorf, TDNT 1:407~445 를 보라. H. von Campenhausen, Ecclesiastical Authority and Spiritual Power in the Church of the First Three Centuries (ET, Standord, 1969; 1st Ger. ed., 1953), 12~29의 2장을 보 라. R. Schnackenburg, “Apostles before and during Paul’s Time,” in Apostolic History and the Gospel (ed. W. W. Gasque and R. P. Martin; Grand Rapids, 1970), 287~303; J. A. Kirk, “Apostleship since Rengstorf: Towards a Synthesis,” NTS 21 (1974/75), 249~264. 그 기 원에 대한 작품 개관은 F. H. Agnew, “The Origin of the NT Apostle-Concept: A Review of Research,” JBL 105 (1986), 75~96을 보라. 10  )   사도들의 종말론적 역할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서 A. Fridrichsen, The Apostle and His Message (Uppsala, 1947)를 보라. 참고, P. R. Jones, “1 Corinthians 15:8: Paul the Last Apostle,” Tyn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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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복음 전파의 결과로 교회를 세웠던 자들도 마찬가지로 지위의 의미에서 고 유함을 지닌 칭호로서 사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 특히 그리스도와 그의 지상 사역에 직접 관련 있는 사람들 ).

바울에게서 기능적인 예와 지위적인 예는 거의 함께 나

타난다. 이 경우 강조점은 분명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에서 그의 권위 있는 지위에 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 또한 다른 교회들 ) 를 세우도록 그리스도가 보 낸 자로서 그 지위는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에 기초한다. 따라서 “그리 스도 예수의”라는 구절은 소유격 형태이지만 그리스도에게 속함을 의미하 기보다는 바울의 사도권의 기원을 강조하는 주격적 소유격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우리의 형제 소스데네” ( 문자적으로, “소스데네 그 형 제” ) 의

이름을 더한다. 비록 바울은 자주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다른 이들과

함께 언급하지만 ( 모두

8번 ),

고대에서는 드문 현상이다. 그래서 이것이 의미

하는 바를 확신할 수는 없다.11  )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는 실라와 디모데가 포함되는데, 전반적인 동사와 대명사들이 일인칭 복수인 점을 고려할 때, 아마도 실제 서신 작성에 그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 “우리가 감사하며”, “우리 를 본받으라”[참고, 고전 4:16!] 등 ).

고린도후서 역시 그렇지만, 기록에 소스데네가

참여했는지 여부는 전혀 말해 주지 않는다.12  )   소스데네는 고린도후서나 다 른 서신에서 바울의 동료나 동역자로 더 이상 언급되지도 않는다. 비록 고 린도전서의 경우에 그가 서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그가 동역자 로 생각되는 것은 “그 형제”에서 이를 독립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 참고, 16:12, 고후 1:1 등 ).13  )   아마도

이 표현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소스데네가 잘 알려

진 바울의 현재 동역자 중 하나라는 것을 지칭하는 방식일 것이다.14  )   고린 36 (1985), 3~34. 11  )   이러 현상에 관해 중요한 논의로는 Murphy-O’Connor, Keys, chap. 1을 보라. 참고, 더 이른 간결한 논의는 G. J. Bahr, “Paul and Letter Writing in the First Century,” CBQ 28 (1966), 476~477. 서신의 복수 저자의 유일하게 알려진 예로 Cicero, Att. 11.5.1. 12  )   1:23과 2:6~16에 대한 주석을 보라. 13  )   이와 관련해 Ellis, 13~18과 C. H. Dodd, “New Testament Translation Problems I,” BibTrans 27 (1976), 301~311을 보라. 14  )   비록 “형제/자매”라는 표현이 이방인의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삶에서 나타나지만(BDAG 2a를 보라), 초기 기독교에 형식적 배경을 제공하는 유대주의에서 역시 이 표현의 역사를 가지고 있 다(H. F. von Soden, TDNT 1:145~146을 보라). 물론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는 예수가 하나님 에 대한 전형적 부름인 ‘아바’(“사랑하는 아버지”-예수 자신의 독특한 아들 됨을 표현)를 사용 하고, 그의 제자들 역시 그를 따라 같은 부름을 사용하도록 권하면서 그 중요성이 확대되었다(눅 11:2; 참고, 갈 4:6; 롬 8:15). 그리스도 예수가 가져온 새로운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에서 이전의 모든 사회적, 성별적, 인종적 장벽은 무너졌다(갈 3:28).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서 “태어”났고, 동일하게 형제자매가 되었다. 이 칭호는 바울에게서 동료 신자들을 지칭하는 예 로 약 130회 정도 발견되고, 고린도전서에서는 39회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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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1:1~9) A. 인사말(1:1~3)

도전서에서 소스데네는 아마도 바울의 비서 ( 참고, 16:21 ) 로 섬겼을 것이나, 이 역시 추측일 뿐이다. 소스데네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은 불확실한 문제다. 아마도 그는 누가가 언급한 고린도 회당의 리더로서 갈리오 앞에서 매를 맞은 소스데네일 것이 다 ( 행 18:17 ). 만일 그렇다면 그는 당시 고린도에서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이 제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이 소 스데네를 적어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바울이 그를 단순히 “그[나의/우리의?] 형제”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2절 표제 부분 ( 1절 ) 이 고린도의 상황을 한층 더 섬세히 보여 줬다면, 수신

자 역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 회”에 보내진다. 앞선 두 서신에서 바울은 하나님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의 교회에 보낸다. 여기서 수신자는 고린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다. 교회 는 하나님께 속해 있지 ( 참고, 3:9 ), 그들이나 바울 ( 또는 아볼로 ) 에게 속한 것이 아 니다. 바울은 수신자에서 이런 약간의 변화를 통해 시작부터 고린도 교인들 의 태도 중 하나 ( 스스로 너무 거만한 ) 를 인정하지 않는다.15  )   고린도전서는 분당이나 당파들에 대한 언급 없이 교회 전체에 보내진다. 더욱이 빌립보서에서 지도자들을 언급한 것 ( 빌 1:1; 4:3 ) 과 달리 16  )   교회 지도 자들을 언급하지도 않으며, 서신 본론에서조차 그들에게 어떤 요청도 하지 않는다. 대신 교회 공동체 전체가 수신자이며, 서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들 모두에게 전해진다. 이들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지칭하는 “교회” ( ‘에클레시아’ ) 라는 용어는 그들 에게 안성맞춤이다 ( 참고,

살전 1:1, 2:14 등 ).

이 용어는 70인역에서 이미 회집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을 지칭하며 ( 신 4:10과 다수의 다른 자료들을 보라 ), 헬라 세계에 서는 도시의 행사를 시행하기 위해 모인 정치적 통일체에 사용되었다 ( 따라서 행 19:39는 합법적 단체로 ‘에클레시아’를 의미 ).

지역 교회 공동체에 대해 이 용어를 사

용할 때, 강조점은 그들이 회집된 공동체 ( 참고, 5:1~5, 11:18, 14:23 ) 라는 데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의 오심을 기다리

15  )   이런 변화가 물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모면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바울과 그

의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것을 말해 준다. 16  )   M. Guerra는 πᾶσιν τοῖς ἐπικαλουμένοις이 공동체를 이끌 책임을 가진 운영진을 의미하고, ἐν παντὶ τόπῳ가 그들의 “지위”를 의미한다는 것이 문헌학적 또는 상황적 증거로 지지받을 수 없 다고 주장한다(“1 Cor 1,1-3. Los ministros en la comunidad de Corinto: Analisis filológico y traducción de protocolo de la Primera Carta a los Corintios,” Scripta Theologica 9 [1977], 76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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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교회 소식에 대한 답변(1:10~6:20)

II 교회 소식에 대한 답변(1:10~6:20)

아마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보낸 서신을 받은 이후에 1  )   글로에의 집 으로부터 어떤 이들이 바울에게 당도했겠지만, 그들로부터 받은 소식은 바 울이 그들의 문제되는 행동들을 맨 먼저 다룰 정도로 심각한 내용을 포함 하고 있다. 그 서신에 답변하기에 앞서, 특별히 네 가지 문제가 바울의 관심 을 곧바로 사로잡았다. 처음 두 가지 문제 ( 1:10~4:21과

5:1~13 ) 는

바울도 구두

보고를 통해 ( 1:11과 5:1 ) 이미 알고 있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두 가지 문제와 5장 및 7장에 나오는 문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를 보라.

1  )   본 주석의 서론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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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A. 분열된 교회-내부적으로 그리고 바울을 대항해서 (1:10~4:21) 바울이 서신 초반에 진술하는 문제는 많은 문제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1  )   더욱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교회 분열의 문제, 특히 교회 내에서 야기되는 다양한 고통스러운 다툼이기에 본능적으 로 우리 마음이 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서신에 암시된 두 가지 심층적인 정보를 통 해 만들어진 매우 복잡한 이슈다.2  )   (i)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첫 번째 내용인 까닭에, 일반적으로 1~4장의 관점에서 서신의 나머지 부분 을 읽는다. 즉 모든 이슈의 이면에 ( 예를 들어, 7:1~16 또는 8:1~11:1 ) 고린도 교인들 이 분당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3  )   다른 한편으로, 서신의 나머지 부분은 분당의 실제 존재 여부에 대해 거의 침묵한다.4  )   또한 그런 분당을 결집시키는 중심축으로 알려진 아볼로나 게바에 대해서도 서신의 나머지 부분은 어떤 언급을 하지 않는다. (ii) 동시에 고린도 교인들이 지도자들을 두고 서로 싸우지만 ( 1:10~12 ), 서신 을 여는 첫 번째 논쟁에서는 신자들이 이런 문제들 때문에 심각하게 나누어 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1  )   이는 신약 외에서 언급된 가장 이른 바울서신의 특별한 요소다(1 Clem. 47:1~4 [ca. AD 95]). 2  )   학자들 사이의 이견은 상당히 폭넓고 서신의 다른 어떤 이슈보다 더 다양하다(Hurd, 95~107을 보

라). 얼마나 많은 방법으로 서신 전체를 보느냐의 문제는 바로 이 이슈에 대한 접근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3  )   이와 관련해 영향력 있는 연구로는 M. M. Mitchell, Paul and the Rhetoric of Reconciliation: An Exegetical Investigation of the Language and Composition of 1 Corinthians (HUT 28; Tübingen, 1991)를 보라. 그러나 특별히 J. Munck, Paul and the Salvation of Mankind (ET, London, 1959), 5장, “The Church without Factions: Studies in 1 Corinthians 1~4”도 보라. 비 록 Munck가 이 경우를 약간 과도하게 주장하지만 교회 안에서 실제 분당들의 역할을 축소한 점은 옳다고 본다. 참고, Hurd의 주장: “이제 당혹스러운 문제는 고린도전서 나머지 부분[5~16장]이 바 울이 초반에 관심을 두었던 네 개의 분당으로 나누는 문제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울은 분명 하나의 다소 통일된 적대적 관점을 고린도전서에서 진술한다”(96). 사실, 바 울의 논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학자들 사이의 불일치나, 그것에 대한 부족한 이해는 본 서신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이슈에 이같이 “전부 아니면 전무”의 접근과 관련해 상당한 주의를 불러일으킨 다. 추가 논의는 이미 다룬 서론을 참조하라. 4  )   어떤 부분에 신앙 공동체 내에 일부가 다른 이들의 유익을 남용하거나 취했지만(예를 들어 6:1~11, 7:5, 8:10, 11:2~16, 20~22), 어떤 어려움도 당파와 연계되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 명하다. 사실 누구든지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된 문제들 중 실질적으로 공동체 내에 심각한 차이점 (가장 분명한 것은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는 부유한 사람과 관련됨)이 있다는 추측으로부터 야기 되는 문제는 아주 적다(아래 8~10장과 12~14장을 보라).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서신의 나머지 부 분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입장이지 바울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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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교회 소식에 대한 답변(1:10~6:20) A. 분열된 교회-내부적으로 그리고 바울을 대항해서(1:10~4:21)

다만 전체 단락 ( 1:10~4:21 ) 에서 어떤 것도 속 시원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 이다. 더욱이 분열의 문제가 교회 안에 분당과 연루되어 있다는 전제를 바 탕으로 서신을 읽는 사람은 늘 바울의 대답에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느낌 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답변의 거의 대부분이 분파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서신 초반에 야기된 문제가 고린도 교회의 다른 문제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는지, 준다면 얼마나 주는지 등의 문제 는 계속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서신 전체 단락을 주의 깊 게 읽어 보면 적어도 네 가지 관련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5  )   (1) 세력의 중심축이었던 고린도 교회 교사들과 함께 신자들 사이에 “다툼”과 “분열” 이 있다. 몇 가지 분명한 진술 ( 1:10~12, 3:3~4, 21 ) 과 교사들의 처우에 대한 간 접 진술 ( 3:5~9, 4:1~2 ) 이 이를 지지해 준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교사들 스 스로가 다툼의 당사자라는 암시는 조금도 없다. 사실 서신 초반 ( 3:5~9 ) 과 마 지막 ( 16:12 ) 에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이중적 증언은 정반대를 지지해 준다. (2) 다툼은 어떤 면에서 “지혜”라는 이름 아래 다루어진다. 헬라어 단어 군 ‘소피아’/‘소포스’ ( “지혜”/“현명한” ) 는 고린도전서 1~3장에 걸친 논쟁의 주 된 내용을 이룬다. 자주 등장하지 않는 단어군이 서신 초반에 빈번히 등장 한다는 점과 6  )   덧붙여서 그 단어가 대개 비난조로 사용된다는 점은 이 단어 를 사용하는 방식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식이지 바울의 방식이 아님을 분명 히 보여 준다.7  )   (3) 고린도 교인들의 “자랑” ( 1:29~31,

3:21, 4:7 ) 과

“교만” ( 4:6,

18~19 ) 에

대한

바울의 반복된 언급도 앞의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된다. 그들의 싸움은 분명

5  )   참고, 각주 N. A. Dahl, “Paul and the Church at Corinth according to 1 Corinthians 1:10~4:21,”

in Christian History and Interpretation, Studies Presented to John Knox (ed. W. R. Farmer, C. F. D. Moule, and R. R. Niebuhr; Cambridge, 1967), 313~335의 분석. Dahl은 똑같은 네 가지 이 슈를 관찰하지만 약간 다르게 이야기한다. 6  )   이 어군은 바울의 처음 열 개의 서신(목회서신에 하나 추가)에서 44번 등장한다. 그중 28번이 고 린도전서에, 그것도 26번이 1~3장에 등장한다. 나머지 16번 중 10번은 복음으로부터의 일탈에 대 한 특별한 특징으로 그런 언어를 사용하는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 본문에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이 “지혜”에 관해 복음이나 그리스도를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즉 문제 는 고린도에서 일어났고 그 문제가 바울 자신의 언어를 받아쓰게 했다. 7  )   Ellis, 44~62는 고린도전서가 “적대 신학, 즉 그의 반대자들의 생각을 수정하고 방향을 재설정해 주면서 그들을 끌어안은 신학적 사상”(46)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거절한다. 그리고 그는 2:6~16 과 12:8을 근거로 “지혜”가 신령한 자들(모든 고린도 교인들이 아니라, 은사 받은 일부)에게 속한 은사로서 바울에게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해의 배경은 구약의 예언 과 유대 묵시문학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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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지혜라는 미명 아래 인간을 자랑하는 형태를 띤다 ( 3:18~21;

참고, 4:6 ).

하지만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뭉크 ( Munck ) 가 관찰한 것처럼, “지혜의 교사로서 기독교 지도자들을 생각한 고린도 교인들의 관점은 그들의 자기 높임에 분명히 도움이 된다. 그들이 위대한 이름들을 자랑삼아 스스로를 자 랑한 것은 사실이다.” 8  )   (4) 중반에 ( 3:5~23 ) 바울 자신과 아볼로에 대한 개인적 적용은 제외하더라 도, 나머지 바울의 답변은 결정적으로 상당히 변증적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 고린도 사역을 방어하면서 ( 1:16~17, 2:1~3:4 ), 그들과의 현재 관계 또한 방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울을 “판단” ( 4:1~21 ) 하고 있기 때문 이다. 단락의 끝부분에서 ( 4:18 ) 어떤 이들은 바울을 대항해서 “교만”했고, 그 앞에 ( 4:6 ) 또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 ( 아마도 바울 ) 을 대적하고 누군가 ( 여기서는 분 명, 아볼로 ) 를

위해 “교만”했다는 바울의 신속한 진술을 통해 볼 때, 지도자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다툼은 단지 아볼로와 게바를 위하다가 생긴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결정적으로 바울에 맞서는 다툼인 것이다.9  )   하지만 이 네 가지 요소가 어떻게 하나의 이슈를 대변하느냐가 문제다. 비록 대답은 다소 이론적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좋은 추론은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해석자들은 바울의 내용이나 형식으로부터, 또는 둘 다를 통해서 지혜를 강조하는 것은 아볼로의 사역에 대한 고린도 신자들의 반응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10  )   이는 아주 인상적이면서 충분 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서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대적 배경이 고린도 교 회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11  )   이 문제를 헬라적 영향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된다.12  )   이 경우, 핵심은 내용의 중요성보 다 세련된 웅변에 관심을 두었던, 상당수가 궤변가인 많은 순회 철학자들의 헬라 세계에 있다.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 ( 만일

그가 교회를 방문했다면 ) 의

출입과 그들 사이의 내용과 형식의 뚜렷한 대조는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8  )   Paul, 157. 9  )   1:10~4:21의 변증적 특징은 Dahl의 논쟁에 기본 주제다. 이런 입장은 서신의 양식에 주목하고 주 장을 펼치지만 덜 설득적이다. J. B. Chance, “Paul’s Apology to the Corinthians,” PRS 9 (1982), 145~155. 또한 아주 좋은 견해로서 Hurd의 책 Origin 개정판 서문을 보라. 10  )   이는 전통적 방식의 이해이며 R. A. Horsley(참고문헌을 보라)가 반복해서 주장한다. 11  )   본 주석의 서론을 보라. 12  )   만일 지혜가 알렉산드리아 유대주의로서 아볼로로부터 왔다면, 예를 들어 필로에서 모세와 플라

톤의 결합은 분명 유대주의가 아닌 플라톤과 헬라주의를 선호한다. 여기에 대한 질문에 Munck 는 옳게 대답한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복음을 받은 헬라적 환경을 말해 준다. 하지만 그 환경 은 복음을 왜곡한 어떤 요소들이 복음 안에 소개되어 있다”(Paul,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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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Nt

NICNT 시리즈는 여러 나라의 신약 학자들의 뜻을 모아 1940년대 후반부터 저술된 주석 시리즈로서, 목사, 신학생, 학자들에게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틀 안에서 성경적인 학문성 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정통 주석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 주석 시리즈는 헬라어 본문에 대한 철저 한 연구를 반영하면서도, 주석의 서론과 해설에서는 헬라어 언급을 최소화하며, 성경 본문에 나 타난 중요한 주제들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뛰어난 신약 학자였던 네드 스톤하우스(웨스트민스터 신학교), F. F. 브루스(맨체스터 대학교), 고든 피 (리젠트 대학)를

거쳐 현재는 조엘 그린(풀러 신학교)의 책임 편집 아래 집필되어 온 NICNT 시리즈

는, 동시대의 학문에 정통한 새로운 주석이 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개정되거나 신판으로 대체되 기도 했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수사법, 시대적 상황, 신학적 중요성 및 적용에 주의 를 기울이는 이 시리즈는 독자로 하여금 성경 본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이다.

1 Corinthians

ISBN 978-89-6092-548-9 978-89-6092-457-4(세트)

www.rnrbook.com

값 5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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