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담쟁이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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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에서 다시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 서울에서 왔고 성적이 좀 좋 다고 젊은 담임선생님이 반장을 시켰다. 어떤 날이었나. 담임선생님이 없고 반장인 내가

나는 왜 웃기는가?

담쟁이

아이들을 정숙 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반장놀이를 하고 있었다. 떠들었는 지 모르겠지만 한 애를 불러내서 자로 손바닥 두 대를 때린 기억이 난다. 손을 피하며 당황해하던 그 친구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심하게 웃겼던 일이

특별히 웃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살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었다. 그 친구는 뭘 하고 있을까? 착하게 살아야한다.

요즘 무슨 일인지 웃긴다는 얘기를 곧잘 듣곤 한다. 내가 정말로 웃기는지 나도 잘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서울로 왔다. 눈이 나빠져서 그때 유행했던 잠자리안경을 썼다.

이해가 안 간다. 그렇다면 과거에 내가 좀 웃겼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실마리가 풀릴

고등학교는 어머니의 염원대로 강남 8학군으로 배정받았다. 그때는 8학군 고등학교에

것이다.

다니면 뭔가 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실제는 되는 게 별로 없었다. 재미 반,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신지 1년 뒤인 4살배기 부산 화명동 유치원시절 난 부끄러

의미 반인 시간이 흘러갔다.

움이 많았던 키 큰 아이였다. 어머니가 가끔 유치원을 와서 창문으로 보곤 했는데

그러다 재수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80년대 말 민주화운동의 시기였었다. 나도 영향

창문에 있는 어머니를 목격할 때 마다 그때의 나는 몹시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 순

을 받기 시작했다. 나보다 대학을 먼저 가서 운동권이 된 친구와 관념론 유물론에 대한

간은 그냥 몸이 얼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서로 우기기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 시절 내가 어머니에게 한 얘기가 떠오른다. 사장

좀 웃겼다. 여린 어린 시절이었다.

의 월급과 가장 일을 잘하는 직원의 월급이 같아야 한다고 내가 주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다음은 서울로 유치원 전학 와서 지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이었다. 그때도 나는 키가 컸었다. 미아삼거리에 있는 숭인국민학교는 육상 꿈나무를 키웠던 모양이 다. 한 선생님이 전교생이 모인 첫날 운동장에 키 큰 애들을 남겼다. 무엇을 하라고 한다. 뛰라는 얘기인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이것이 바통을 넘겨받는 릴레이 달리기인

그때 어머니는 그럼 누가 사장을 하냐고 되물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정의에 대한 생각을 한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해진다. 재수생 시절 철모르는 아주 웃긴 얘기였다. 그런 데 이 말이 씨가 되었나? 난 지금까지 지나온 세 차례의 일터 모두 구성원들과 같은 급 여를 받으며 살고 있다.

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두 번째 주자 위치에 다른 한 학생과 대기했다. 첫 주자

그렇게 나는 나이를 한해 한해 먹어갔고 어제부터는 파마머리로 웃기고 있다. 마지막으

가 나를 향해서 달려오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옆에 있는 제2주자가 달

로 한마디 조언을 하고 싶다. 웃기고 싶은가? 그러면 담쟁이넝쿨처럼 살아라. 그저 하루

리는 것만 보고 바통 없이 나도 그냥 달려버렸다.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쓴웃음 지

하루 기어오르라. 그래서 그렇게 덮어나가라. 배움터길을……. 지금 이 순간도 자전거거

으며 교실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이건 좀 더 웃겼다.

치대 뒤 화단에서 담쟁이가 기어오르고 있다. 음음.


그래도 일단 비싼 등록금이 아까워 열심히 다녔는데 그 때 가장 열정적으로 빠져들었 던 것이 서양 복식사와 미술사였다. 일주일 만에 주, 부교재를 다 읽어버리고 그것도 모 자라 세계사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이것이 서양미술사에 빠지게 된 계기였 다. 덕분에 10년 뒤, 나는 배움터길에서 서양미술사를 힘겹게 가르치고 있다. 아무튼 뭐 라도 재밌는 것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복식사 수업에서 과제를 주었다. 영화를 보고 복식을 분석하 는 것이었다. 웃기게도 교수님이 보라고 하신 영화는 ‘금발이 너무해’였다. 개봉했을 때

이만큼 예쁘긴 어려워!

차차

만 해도 콧방귀를 뀌며 뭐 저런 시시껄렁한 영화를 돈 주고 영화관에서 보냐며 잘난 척 을 했더랬지. 어쨌든 비디오를 빌려다가 집에서 혼자 보았는데 다 보고 나니까 왠지 기 분이 이상했다. 뭔가 울렁거렸던 것 같다. 그리고 일주일을 그냥 방구석에 처박혀있었 다. 학교도 안가고 전화도 꺼놓고. 그리고 일주일 뒤에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나’라니. ‘나’라니. ‘나’라니. ‘나’라니. ‘나’라니. ‘나’라니. ‘나’라니. ‘나’라니.

“엄마, 나 여기 그만 둘래.”

그랬더니 쿨하디 쿨하신 엄마는 “얼마나 생각했는데?”

쉬운 주제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정말 쓰기가 싫다. ‘나’라니. ‘나’ ‘나’ ‘나’ ‘나’

“일주일” “그래, 그럼. 니가 많이 생각하고 결정했겠지.” 그리고 다음 날 자퇴서에 도장

그래서 생각해봤다. ‘나’는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을 찍었다. 헐~ 그때 내 친구들은 거의 다 나더러 미친X이라고 했다.

어째서 ‘나’는 이 좋은 봄날, 대한민국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823-3번지 2층 구석에 앉 아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윈드러너’에 열을 올리고 있을까?

사실 나도 뭔가 확신에 가득 차서 앞날을 계획하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그냥 이건

그러다 문득. 10년 전 이맘 때 했던 아주 중요한 결정이 생각이 났다.

아닌 것 같다는 생각 하나였고 영화는 그런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겁이 난다고 해

그때만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서 아닌 걸 참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망해봤자 지금보다 나쁘겠어? 뭐 그런 객기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영화는 생각지도 못하게 다른 선물까지 덤으로 주었다.

당시 나는 모 대학 디자인과에 재학 중인 파릇파릇한 신입생이었고 생애 첫 MT를 다

이전의 나는 남의 시선을 엄청 많이 의식하고 살았다. 그래서 겹겹의 가면을 쓰고 있었

녀왔고 첫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었다. 마냥 좋기만 할 줄 알았던 내 대학생활은 기대와

는데 이후에는 그것에서 점차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덕분에 지금처럼 살이 뚱뚱 쪄도,

는 달리 그냥 그저 그랬다. 패션디자인과에 다니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다지 재미가

그것 때문에 애들이 아무리 놀려도 상처를 받지 않는 뻔뻔함을 얻었다. 이만큼 찌고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관심은 건축과 아님 사학과였는데, 건축과를 가기엔 내

이만큼 예쁘긴 어려워! 크핫. 물론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신경이 쓰인다.

고등학교 시절 방황의 결과가 매우 참담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것이 패션디자

그래도 영화를 보고 혼자서 칩거한 일주일은 처음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던 시기

인과였기 때문이다. 건축과를 못가면 실내디자인과를 가라는 선생님의 꼬드김에 비싼 돈

인 것 같다. 멋있게 그 시간을 정의한다면 뭐. 나와의 첫 대면. 정도로 할래. 어라! 한

주고 입시미술을 배우고 하루 열두 시간 기계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내 방황의 결

장 채웠다. 근데 사실, 그렇게 결심하고 바로 뭔가를 막 열심히 한 건 아니다. 또 방탕

과물로 갈 수 있는 대학에는 실내디자인과가 없었다. 젠장! 어쩔 수 없이 패션인이 되어

하게 석 달쯤은 놀았나보다. 사람이 영화 한 편 봤다고 막 변하고 그럴 순 없다. 그냥

버렸다.

놀게 내버려둔 엄마에게 감사한다. 결론이 참 이상하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한 편과

그런데 나는 지금 생각해도 예쁜 집을 만들고 싶지, 절대로! 예쁜 옷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저 예쁜 옷을 많이 사 입고 싶을 뿐.

순간의 결정이 내 인생을 지금 여기로 데려왔다. 그날로부터 5년 반 뒤에 나는 선생님이 되었다.


1986년, 엄마의 일기에요. 딸을 ‘또’ 낳은 주제에 친정까지 가려 하느냐는 시 댁의 억압에 친정아버지를 마음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엄마를 보면서, 나에게 생일이란 그저 엄마가 많이 아픈 그런 날이었지요. 몸조리를 제대로 못해서 때 마다 몸이 아프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음도 아프고. 친정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마음이 태중에서부터 저에게 전달되었던 탓인지, 저 또한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합니다. 엄마의 일기가 각별함을 보탠 것도 사실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마다 엄마의 일기를 봅니다. 나 한 사람 태어나는 것은 누군가의 아픔이 수반 되는 것이라는 인식은 저에게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아버지와 바꾼 아이라며,

엄마의 일기

레미

평화의 이름이라며 내 이름이 꾸욱 눌러 적힌 종잇장을 마주할 때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았지요. 불행과 고난의 아이를 뱃속에 품고

선주를 낳고 모두들에게 아쉬움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던가. 남들은 두 번째 딸을 낳고 실망부터 했을지 모르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아, 이 아기가 나의 아기구나- 싶은 희열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마음속으로부터 내 아이라고 와 닿는 아이가 선주다. 첫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다는 것에 두려움만 있었을 뿐이다. 선주를 낳고 난 후의 기분은 무엇인가에 억누를 길 없는 불안에 쌓여있었다. 갈 수만 있다면 평택 친정으로 가고 싶었지만 가고 싶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불안한 기분은 아버지와 아이 둘 중에 하나를 잃을 것만 같은 불 길한 예감이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적중했다. 친정아버지의 죽음으로 나의 예감은 맞아 들어간 셈이다. 그 이후 선주에 대한 나의 마음은 각별하다. 아버지와 바꾼 아이. 내 아버지처럼 자상하고 정이 많은 사람으로 선주가 건강하고 곱게 자라 주 길 간절히 바랄뿐이다. 우리 복덩어리 작은 딸 선주 이름으로 우리 모두의 평화가 오길늘 기도해 본다.

도 이것 또한 사랑이라 가르치던 엄마의 넓은 마음을 발판 삼아 이만큼 자랐 다고 고백합니다. 발걸음이 배움터 길 자락에 닿아 ‘교사’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레미’가 되었습니다. 엄마의 일기장을 덮으면서, 소외된 이웃들에게 감동이 되는 마음 을 나누리라 다짐했던 지난날의 꿈들이 이곳에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진 풍파에 울타리가 되어주던 엄마의 사랑이 만나는 모든 인연들의 마음에 닿아, 또 다른 세계가 곳곳에 움터서 퍼져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감히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들의 삶을 응원합니다.


어린 시절 나는 어리광이나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어리광을 부리지 못할 환경이라 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잘 살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눈물’을 모른 척 했다. 우는 친구들을 가소로이 봤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부러 웠을까.... 이십대 후반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눈물샘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에게 눈물은 졸음과 재치기와 마찬가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나의 감정을 억누르고 포장해 나까지 속여 온 그 시절에 대한 보상인 셈인가. 어김없이 겨울 방학식날 학년별 인사를 하는데 또 터지고야 말았다. 위로해주러 다가온 이강! ‘단비 머릿속에는 물이 가득 차 있나 봐요!’

망설이다

단비

눈물은 불완전한 나를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 상징이자 시간의 수많은 의미를 담아내서 표현해주는 액체이다.

눈물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눈물이 없는 아이’였다. 가장 친한 친구도 내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은 공식적으로 울 기회가 많다. 선생님 께 혼이 나면 울고, 친구와 싸우다 울고, 슬픈 영화를 보고 주르륵주르륵, 졸업식 때는 분위기상 훌쩍이고, 수련회 때에는 슬픈 음악을 틀어놓고 울어라울어라 하 고... 이런 기회에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때론 위로도 받고 우는 것이 미 덕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 시기 ‘우는 것’을 어린 것이라 얕잡아 보고 눈물이 나 오려 해도 꾹 참았다. 간혹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면 얼른 닦았으니 나의 가장 친한 친구도 내 우는 모습을 못 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런 ‘눈물 없는 아이’가 서른이 넘어 ‘울컥 단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건조 한 회의 시간에 울컥, 제자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할라치면 울컥, 졸업식 때마다 울컥 울컥 울컥...마음 놓고 울어도 되는 기회를 다 놓쳐버리고 이제 와서 이게 웬 망신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제 그만 하고 싶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과천으로 이사 오면서 난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했는데 그때에는 갑작스레 바뀐 학교 환경이 굉장히 낯설었고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과천과 사당은 그리 멀지 않는 지역이었지만 그 당시 내 또래 아이들이 보여주는 문화는 굉장히 멀어보였다. 자연스럽게 말수가 적어지고 웃는 얼굴보다는 무표정한 얼굴이 익숙해져갔는데 아마도 그런 상태로 내 청소년기를 보냈던 것 같다. 삼수를 해서 연극영화과에 간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연극이라는 매체가 인간의 근

허허실실

허실

본적인 부분을 공부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는 학문이었기 때문에 연극을 공부하면서 자 연스럽게 나에 대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콤플렉스, 성격, 취미, 삶의 태도

재작년이었나- 교사들을 대상으로 TCI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TCI검사는 풀어 설명

등 소주 한잔에 세상을 기울이고 소주 두 잔에 나를 기울이면서 제법 많은 고민을 했던

하면 ‘기질성격검사’ 정도로 볼 수 있는데 학교 부모님 중 연수를 받은 분이 계셔서

것 같다. 자아성찰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때의 고민덕분에 지금의 엉뚱하고 조금

무료로 검사를 받아볼 수 있었다. 그 때 나온 정확한 결과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

은 긍정적인 내가 존재할 수가 있었다.

만 대충 기억나는 것은 나의 기질과 성격이 정반대로 나왔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 타고나는 기질은 상대적으로 차갑고 냉정했던 인물로 나왔던 반면 후천적으로 습득 되는 성격 부분에서는 배려 잘하고 이해심 많은 따뜻한 캐릭터로 나왔던 것이다. 이 런 결과에 대해서는 보통 어떻게 해석을 해주시느냐고 검사를 진행해주신 부모님께 물어보니 웃으시면서 딱 한 마디로 정리해주셨다. “어머님이 가정교육을 잘 하셨네요.”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렸을 때의 나를 기억해주시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마

그래서 나에게는 두 개의 ‘나’가 존재한다. 조금은 극단적인 양면의 모습이 존재하는데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어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보고 ‘지킬 앤 하이드’와 비슷한 것 같다는 표현을 자주 쓰곤 했다. 예전에는 지킬의 ‘나’가 진 짜 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에는 하이드의 ‘나’가 진짜 나 인 것 같기도 하다. 사실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성숙한 인간이 된다면 이 둘이 합쳐질 수 있겠지 싶어 지 금은 그냥 조금 열심히 살고 싶어졌다.

도 난 엄청난 개구쟁이였던 것 같다. 몇몇 기억의 단편들을 더듬어 보면 학교 친구 들과 교실 뒤편에 삼삼오오 모여서 같은 반 여자 친구들에게 어떤 장난을 칠지 고민

삼십이라는 나이가 이런 건가? 요즘에는 열정과 권태가

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때는 고가의 ‘하이테크’펜이 아이들 사이에서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열정이 큰 만큼 권태도

유행이어서 그것을 문방구에서 몰래 훔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 역시 그 흐름에

크게 찾아온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 어떤 단계에서 주춤거

동참해서 적극적으로 망을 봐주기도 했다. 언젠가는 내 보물상자를 뒤지다가 초등학

리고 있는 걸까? 올해는 제법 추운 겨울을 보내고 나니 조

교 때 찍은 학급 단체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맑고 순수한 영혼들 틈 사이에서 난

금은 성숙해진 나를 발견하게 되어 즐겁기도 하다.

제법 사악하게 웃고 있기도 했다. ‘훗’


숨을 참았다가 파하-하고 내뱉듯이 그렇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 날은 세 수를 하지 않은 얼굴이 으레 그렇듯이 퍼석거리고 피부에 먼지가 잔뜩 낀 것 만 같은데 정신상태도 유쾌할 리가 없다. 아침의 시린 빛에 눈알은 따갑고 정 신은 혼미하기만 한데 서늘한 아침에 내리쬐는 빛에 콧속으로 밀려드는 공기 는 내가 좋아

하는 그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몇 번 크게 숨을 쉬었더니 내

머리는 각성제를

들이부은 것처럼 맑아졌다. 몸은 만신창이 같은데 머리

만은 맑았다. 두 가지 느낌이 그렇게 어울리진 않았지만 썩 괜찮은 기분이었 다. 이럴 땐 사람도 어두운 탄광에서 캐낸 반짝이는 물체 같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인간적인 존재

이리

분명한 것은 빛이 만들어낸 온기, 비와 안개에 젖은 허공, 흩날리는 바람 같은 것에 나를 흔드는 냄새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예민한 쪽으로 분류 될 나의 감각은 언제나 그런 것들 때

나는 봄이 오기 바로 몇 일전 늦은 저녁시간에 목적 없이 거니는 것을 좋

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이상한 상태를 감지한다. 이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사

아한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비로소 거리에 발을 들이고 얼굴을 파묻으면

람은 밖에 있는 동안 늘 성가신 감정에 시달리게 된다. 좋은 쪽으로든 싫은 쪽으로

차가운 공기에 스민 은근한 봄의 기운 때문에 코끝이 찡해진다. 둔해진 감각

든. 그래서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에게 어떤 날은 잊혀지지 않는다. 나에게도 그런

도 순간 감동하여 목이 살짝 메는데, 늘 그렇게 목이 멜 수 있다는 사실이 나

날이 있었다. 그날은 비가 내린 후 밤안개가 모든 허공을 차지하고 정지해버린 그

로서도 미스터리다. 다행히 그 정도로 눈물을 뚝뚝 흘린 적은 없지만 그 심정

런 날이었다. 2010년 9월 7일. 비에 젖은 거리의 냄새가 내 목덜미에 스며드는 것

때문에 내 모든 감상은 갑자기 따뜻하게 위로받는 처지가 된다. 그런 위로가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는데 그날 팔에 돋았던 소름마저 기억난다. 안개에 젖은 채

되는 저녁은 도저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순히 저녁공기로부터 그와

몸을 꿈틀대며 고인 물을 차고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자니 누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거리로 나서

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분명히 생각나는 사람은 있었지만 전화기를 만지

게 되었다. 약간의 온기에 반응하는 후각, 붕 뜬 감각이 느껴지는 다리의 혈

는 손이 축축해져서 포기해버렸다. 버스가 도착했고 울적한 기분도 함께 버스에 올

관, 그리고 자꾸만 목이 메게 하는 심장의 스위치를 켠 채로.

라탔다. 그럴 때면 수첩을 꺼내어 끄적인다. 뭐라도 쓰지 않으면 내가 존재하지 않 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때론.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나란 존재는 분명히 감각이 예민한 쪽으로 분 류될 것이다.

비에 젖은 흙냄새가 밤안개와 뒤섞였다

한번은 단체 숙소에서 잠을 자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나는 마음에 든 사람에게

수다 소리에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어 엄숙하고도 사뭇 비장하게, ‘해가 밝

이 감상에 대해 설명하고 싶지만

는 즉시 이 소굴을 뛰쳐나가리라!’ 속으로 중얼거리며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시도하려는 순간 이 냄새를 전할 수 없을 것 같아진다

물론 실제로도 날이 밝자마자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도망치듯 짐을 챙기고는

단어들이 껍데기가 되어 흩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라는 동굴, ‘나’라는 그늘, 그 그늘 때문에 힘들었던 날들, 그 그늘로 힘들었을 사람들... 어쩌면 난 이 그늘을 하나의 옷과 표정인양 입고 살아왔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제는 그 옷을 벗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옷 아닌가? 그게 나는 아닌 것. 이제 다른 옷을 입어도 되지 않을까? 여러 옷을 입어도 된다. 옷은 옷일 뿐. 내가 아니다.

음주 유발 글쓰기

돌고래

월간담쟁이삼월호원고마감오늘밤까지비포장에올려주세요. 수준이다거기서거기니부담없이써주기바랍니다. # 넬, 멀어지다 담쟁이한테 독촉 문자가 온다. 아, 오늘도 자긴 글렀나보다. 계속 해서 미루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글을 쓸 상태가 아닌 거다. 그렇다. 우린,

어떻게 하면 될까? 새로운 옷을 입으려면... 자유자재로 옷을 입고 벗으려면... # 넬, SECOND 2012년 5월30일 광저우 하늘에서 이 생에 받은 아이템을 충분히 익혔다면 이젠 즐겁게 게임을 할 차례다. 비록 아이템이 후지고 넘어야 할 퀘스트가 험난해도 즐겁게 감사하며 나란 사람의 양식에 걸맞게 롤플레잉 게임을 하자. 적어도 전보다는 덜 심각하고 덜 진지하게 긴장을 풀고 억울해 하지 말고 흥겹게 매 순간을 만나자. 우주가 준 모든 것을 충분히 누리고 쓰면서... 비록 신용카드와 주민등록증과 현금 백오십 달러를 잃어버렸지만 난 무사히 델리에서 광저우를 경유해 집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고만고만한 그 수준에서 살아가고 있고 거기서 거기인 하루가 가고 있는데

# 에피톤 프로젝트, 새벽녘

나는 아직 글을 보내지 못하고

참으로 할 말 없고 당연한 ‘나’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선 알코올이 필요하긴 하다.

하루를 붙잡고 있다.

40여 년을 지지고 볶고 함께 살아온 나, 이제는 나 자신에 대해 관심이 좀 없어졌음 좋겠다.

# 넬, GO

‘나’라는 거대한 착각에서 놓여나

2012년 5월28일 인도 자이푸르

그냥 살아가고 싶다.

낮잠에서 깬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좋다.

점심때 먹은 것 때문인지 배는 아픈데

점점 좋아지고 있다.

내 눈 앞에선 내가 살아온 인생이 정말 말 그대로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그러면 가끔 어떤 평화가 찾아온다.

영화를 보듯이 인. 생. 이. 지. 나. 가. 고. 있. 다.

내일은 나를 더 많이 좋아할 것 같다.

어쩌겠는가...


나는 영원의 우주에 한 순간 명멸하는 푸른 빛남입니다. 나는 숱한 빛남으로 가득한 우주 속에 한순간 존재합니다. 이 영겁의 시공간 속에 나는 정말 찰나 에 벌어지 는 현상입니다. 마치 여름밤 허공을 긋는 반딧불이의 한 번 반짝임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숱하고 흔하게 무한히 깔려있는 빛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전 우주적 에너지의 발 현이자 우주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우주가 벌이는 한 번의 실험이자 시도입니 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마라톤의 한 걸음이기도 하고 마라토너의 생명이 걸린 한 번의 호흡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미 세하고 하찮은 쪼가리이면서 우주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나는 하나의 빛, 하나의 현상입니다. 빛은 그 자체로는 공(空), 무(無)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태양이 아무리 밝게 빛나더라도 지구에 도달하기 전 우주 공간 속에서는 그저 어둠입니다. 빛은 반사체가 있어야 그 빛깔이 드러납니다. 반사체를 만나기 전 에는 그것이 노란색인지 푸른색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빛의 존재조차도 알 수 없습 니다. 그것은 반사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나는 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배고파

않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우주는 빛과 반사체로 가득합니다. 나는 당신이라는 빛에 비추어 나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모양과 빛깔

‘나는 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을 알아가고 내가 하나의 반사체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당신은 또 나라는 빛에 비추 이겠지요. 그렇게 당신을 비추면서 나는 내가 하나의 푸른 조명이라는 것, 하나의 반

이것은 미야자와 겐지의 봄과 수라라는 시집, 서문의 첫 문장입니다. 이 구절은

짝임이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이 글을 쓰는 순간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의

나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나의 실체, 본질, 삶의 목적, 방향 이런 근본

팔뚝을, 소매를 걷어붙여 드러난 맨살을 봅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에게 드러나게 된,

적인 것들에 대해서 말이지요. 일본어를 번역한 것이라 그 의미가 한 눈에 드러나

광대하고 전우주적인 팔뚝입니다.

진 않습니다. 푸른 조명이라니까 어디 조명가게에서 파는 색전구가 우선 연상되기 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파란색 에나멜이 칠해진 채 소켓에 꽂혀 전기로 빛을

여기까지 쓰고 나니 가슴이 벅차올라 고백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습니다.

내는 발광체를 뜻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보다 좀 더 세밀하게 말해, 그 발광체가 뿜어내는 빛 자체를 일컫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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