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담쟁이 VOL.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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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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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공포 fear

* 두렵고 무서움


담쟁이

귀신을 물리치다.

10년 전 쯤 이따금 가위에 눌린 적이 있었다. 가위에 눌릴 때 그 무력감을 아는가? 몸 을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는 그 순간은 영 거시기 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좌절감이라고나 할까? 뭔가 해결방법이 없을까? 해결책을 찾으려면 원인을 알아야한다. 왜 가위에 눌리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문득 생각난 정보가 있다. 가위가 눌려진다는 것 은 귀신이 이종격투기의 풀마운틴 자세 - 상대방을 완전히 깔고 앉아 제압하는 자세 - 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참 묘한 이야기였다. 이를 생각한 순간 나는 일종의 섬뜩함 과 일말의 호기심이라는 두 가지의 감정이 들었다. 이른바 귀신에 대해서는 누구나 이 두 가지 감정이 들지 않을까? 이 무렵 같이 활동하는 한 친구의 얘기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 친구는 경기도 모처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 다. 이른바 투잡인 것인데 예전에 1층 한 방에 투숙한 한 손님이 방에서 자살을 한 사건이 있 었단다. 그래서 이후에는 가급적이면 손님에게 이 방을 권하지 않았단다. 이따금 방이 꽉 찰 때면 어쩔 수 없이 그 방을 내주곤 했는데 이상한 사건이 발생했단다. 투숙객이 자고 있다가 뭔가 이상해서 눈을 떴는데 침대 끄트머리에 누군가가 앉아 흐느끼고 있더란다. 술자리에서 친 구에게 이 얘기를 듣고 나는 그 여관방에 가서 자고 싶다고 호기를 부렸지만 실제 행동에 옮 기지는 못했었다. 그때는 호기심보다는 두려움과 귀찮음이 더 우세했다. 이제 때가 왔다. 며칠 뒤 내가 생각해낸 묘안은 이렇다. 다음에 가위에 눌릴 때 나의 저항에너지를 몸부 림에 쓰지 않고 눈을 뜨는데 쓰는 방안이다. 나는 일명 '귀신과의 조우' 프로젝트를 시작하 고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나는 가위에 눌렸다. 그래 좋다. 눈을 뜨자. 눈을 뜨자. 눈을 뜨자. 두려움에 맞선 의지가 조금씩 생겨났다. 순간 눈이 천천히 떠졌다. 실눈으로 난 보고야 말았다. 그때 내 방은 중앙에 킹사이즈 매트리스가 놓여있고 벽으로 책을 빙둘러 쌓아놓은 구조 였다. 누운 내 발 앞쪽으로 일종의 검은 형체가 방문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 다. 순식간에 있었던 일이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한다. 이상한 것은 그 다음부터 나는 가위눌린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눌렀던 귀신을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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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차

제목이 없는 글.

흰 가운을 입은 간호사 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팔에 고무줄을 감았다. 그리고 매우 크고 찬 주사바늘을 내 팔에 찔러 넣었다. 어리고 작았던 나는 도망을 갈수도 그녀를 밀쳐 낼 수도 없었다. 눈물만 뚝 뚝 흘릴 뿐. 내 팔에서는 검붉은 피가 계속 빠져나갔고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길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등 뒤에서 손을 흔들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왔 던 길을 되돌아 가보아도 아무도 없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 모든 것이 낯설어졌 다. 앞만 보고 달렸다. 처음 우리가 있던 그 곳으로. 다행히도 그 곳에는 우리가 함께 타고 왔던 차가 있었고 한참을 그 곳에 쪼그리고 앉아 누군가 나를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렸다. 혼 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혹은 그들이 나를 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물도 나오 지 않았다. 빨간 마스크, 홍콩할매귀신, 영구와 드라큘라, 강시,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오후 7시, 그가 올 시간이다. 오지 않는다. 오늘도 그는 어디에선가 유쾌하고 웃고 떠 들고 있나보다. 밤 9시, 여전히 그가 오지 않는다. 두렵다. 11시, 멀리서부터 들리는 자동차 소리, 마당으로 들어온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다. 그리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 를 기울인다. 소리가 잦아들고 불이 꺼지면 그때야 마음을 놓고 잠을 청한다. 띵동, 누구세요? 아무 말이 없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정말일까? 진짜 택배 아저씨가 맞을까? 5살, 죽음의 문턱에서 찾은 병원,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100여일 중 유일한 장면. 8살, 부산 어린이대공원. 그날 주차장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 어떤 모습일까? 10살, 나를 잠 못 이루게 하던 단어들. 12살, 차라리 이혼을 하라고. 30살, 사람이 제일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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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

삶공포.

쌍문동 단칸방에 온가족이 살았던 다섯 살, 그 때의 나에게는 그 단칸방이 공포의 온상 이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일어나면 아무도 없었다. 부모님은 일 나가시고 언니는 학교에 갔으니 성능 낮은 냉장고 소리조차 무섭기 그지없었다. 지금이야 다섯 살이 면 한글도 떼고 어린이집도 다니지만 나의 다섯 살은 그렇지 않았다. 남의 돈 버느라 사는 게 녹록치 않았던 그 시절 부모님의 생활고를 떠올리면, 어린 아이 홀로 집에 있는 것 말고 는 최선의 보호나 양육은 없었으리라. 기억은 없지만 더 어릴 적에는 엄마를 찾겠다고 대문 을 나서다가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었고, 오토바이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단다. 이러한 염려들이 쌓여 내가 기억을 인식하기 시작할 쯤의 대문 밖이란 이미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다. 나의 다섯 살은 그저 단칸방과 마주하고 또 단칸방을 견디는 그런 날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혼자 있는 것, 혼자라는 느낌을 무섭게 여긴다. 일곱 살이 되고 근처의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다. 하나는 부모님 방, 그리고 또 하나는 언니와 내가 쓰는 방이었다. 생각해보면 고작 유치원생인데 책상도 있었고 전자 피아노도 있었다. 젊은 엄마가 로망으로 품던 공주들의 방이 투영된 그런 공간이었다. 좀 더 아늑한 공간에서 훨씬 다양해진 나의 것들과 마주할 수 있었지만, 일곱 살의 나는 여전 히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체감하기로는 혼자 지내는 것은 무서운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일이 되고야 말았다. 2년 더 살았다고 공포의 대상이 급격하게 늘어났나보다. 일곱 살의 내가 가장 무서워하던 것은 따로 있다. 혼자서 유치원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 것이다. 그 때의 나는, 일단 울고 시작했다. 심심하면 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가 아프면 화장실을 가면 되는데 일단 울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찾으면 되는데 일단 울었다. 그런 식이었다. 예상 경로를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일단 울고 봤다. 운다고 달래주는 이 하 나 없고 알려주는 이 하나 없는데 말이다. 눈물이 다 될 때까지 한참을 있다가 내 멋대로 유치원에 등교하는 날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수완 없고 성실하기만 한 부모님은 참 열심히도 살아주셨지만 자식들이 다 자라도록 집이 단 칸, 두 칸, 단 칸, 두 칸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때때로 단칸조차 없었을 때도 있었으니 내 학창시절이 얼마나 불우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라다 보니 내가 나를 다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공포가 아닌 숙명으로 느껴지는 때의 나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공포가 아닌 숙명으로 느껴지는 것이 공포로 다가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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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중반 무렵 천지가 귀신이라던 공연장이나 녹음실을 전전하며 다닐 때가 되서야 팔뚝에 닭살이 솟구치듯 오싹하기는 했지만, 잘 곳이 마땅하지 않으면 견딜 수밖에 없었던 밤들이었기에. 공포를 주제로 하는 월간담쟁이를 두고 지난 내 삶보다 더 아찔한 것은 도무 지 떠오르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이제 그만 무섭고 싶다. 세상 무서울 것 없다고들 말하는 그 시기의 나는 하다못해 내 자신조차 무서웠다. 만으로 스물일곱 살이 된 지금의 나는 무엇을 무서워할까. 일단 세슘이 제일 무섭다. 그리고 생존하기 바빠 외면했던 역사들, 이웃들의 소식이 무섭다. 이렇게 적고 보니 삶공포 를 무진 이겨내고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내일만을 걱정하던 어제가 아닌, 내가 이미 죽고 없어진 뒤의 내일을 그리고 싶은 요즘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어쩌면 그러한 일말의 희망만이 무서움을 달래주던 유일한 친구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상관없다. 나를 지금까지 살게 해주었던, 그것들을 나는 내공이라 여기며 무섭게 살 아가고 싶다.

‘공포의 공동묘지’의 뒤늦은 불편함

단비

중학교 때 우리 집에 비디오 재생기 VTR이 들어왔다. 영화를 좋아했던 우리 아빠는 귀가 가 늦어 주말 영화를 보지 못하자 가족들에게 ‘녹화’ 심부름과 함께 기계를 들고 오셨다. 기 계에 어두운 엄마와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1990년대 VTR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행복한 선 물이 되었다. 지금은 비디오를 녹색가게에서도 받지 않는 폐기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서태지의 컴백 무대를 녹화해서 보고, 보고 또 보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아도 ‘예약녹화’ 라는 마술 같은 기능을 통해 김원준 오빠가 나온 몰라카메라를 다시 볼 수 있는 VTR! 지금 이야 보고 싶은 해외 드라마와 구하기 어려운 다큐도 인터넷을 뒤지면 구할 수 있고 위성TV 로 결제만 하면 몇 시간 전 방영 프로그램도 볼 수 있지만 그 당시 정규 편성 시간에 하지 않는 TV프로그램은 오전에 유선이 나오는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특권이었다. VTR이 생기고 이 특권을 가득 누린 것은 세상의 좋고 멋진 오빠와 남자들에 홀릭하고 있던 나와 언니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아이돌 가수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KBS 드라마 ‘느낌’ 등 꽃미남 들이 나오는 수많은 드라마와 실업 농구계를 위협한 대학 농구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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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 여름방학 언니와 나는 오빠들이 아닌 다른 세계의 영상으로 빠져들었다. 싼 가격에 지나간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준 비디오대여점의 수많은 영화들! (유난히도 무뚝뚝했던 비디어 대여점 사장님을 10여년 전 대안학교 학부모로 만나게 되었다. 하하하) 그 중 잠옷을 입고 총총 거리며 빌려온 공포영화!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다 문득, 늦은밤 골목길에서 무서워서 달 리다가도 ‘오, 으, 으악, 악!!!’ 공포 영화는 대여점에서 한동안 빌려 보던 즐거움이었다. 우리 가 처음 빌려본 공포 영화는....그냥 ‘공동묘지’도 아닌 바로 ‘공포의 공동묘지’였다. 으.... 저녁을 먹고 우리 가족은 앉아서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줄거리는 한 가족이 이사를 오면서 시작된다. 평화스러워 보이던 동네에는 사람들이 절대로 가지 말라는 공동묘지가 있었 다.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고야 마는 영화의 오랜 패턴처럼 이 가족은 죽은 고양이를 이 묘 지에 묻게 되고 고양이는 다시 살아서 가족에게 돌아온다. 외형적으로는 같은 고양이지만 이 고양이는 공동묘지에서 악마의 영혼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 생명체다. 으악!!!!! 악!!! 악!!!! 그 고양이는 이런 저런 집안에 사건과 사고를 만들다 5살 정도의 여자아이를 죽게 만든다. 너무 슬퍼한 부모는 공동묘지의 진실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딸을 보기 위해서 그 묘지에 묻게 되는 데.... 사람들은 눈이 크면 겁이 많다고 얼굴의 생김이 성격을 결정짓는 것처럼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지만...눈이 큰 나는 유난히 겁이 많다. 콩닥콩닥...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면 엄마 아빠는 다시 살아돌아온 아이를 보고 눈물 흘리며 기뻐하며 아이를 재우고 방으로 들어간다. 새벽.... 아이가 침대에서 일어난다. 아장아장 일어나 주방에 가서 칼을 찾는다. 키가 작은 아 이는 어렵게 구한 칼을 들고 부모님 방으로 가는데...콩콩콩.... 이 순간 엄마는 과일을 들고 거실에 앉으셨다. 그리고 브라운관을 응시하시며 한마디 하 셨다. ‘아, 아기 걷는 것봐라. 이쁘네’ 으하하하! 그 순간 모든 가족들은 가장 무서운 이 영화 의 클라이막스를 놓쳐지만 모두가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처럼 크게 웃었다. 두고두고 이 이야기는 우리 가족에게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었지만 지금 이 글을 쓰게 되 면서... 불편해진다. 매일 5개의 도시락을 싸고 4개의 교복셔츠를 빨던 우리 엄마에게 영화 한 편 볼 시간이 있었을까? 자식 세명과 남편, 시아버님까지 모시고 살며 그날도 어김없이 엄마 는 저녁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내일 찬거리를 준비하고 과일을 들고 오셨을 것이다. 스토리를 알리 없는 엄마는 과일을 내어주며 아장거리는 아이를 보고 뱉은 말... 이 해프닝이 엄마의 고 된 가사노동에서 초래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포영화는 내 눈이 작아지는 그날까지 영화관에서 볼리는 없을 것 같고, 따뜻한 영화를 엄마와 보러 가야 겠다. 쌩유, 방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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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좁은 방 아주 조금이라도 원하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떠올릴 때 경고하는 목소리가 소름처럼 돋아난다

조금이라도 더, 원하는 방식을 쫓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자 다짐할 때 경고하는 눈빛이 거리 위로 달려간다

조금이라도, 원하는 방식으로 살기를 포기할 때

'너무 욕심을 내면 안돼.'

속삭이며 밀려오는 안도감 이 황홀한 안도의 끝에 있을지 모르는 좁은 방 무감각하지 않고서는 다리를 뻗고 가로누울 수 없는,

그런 좁은 방에 길들여지는 것이 그 좁은 방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공포는 목소리에, 눈빛에,

그리고 좁은 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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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나는 지금도 귀신이 싫다.

어릴 때는 무서운 것이 정말 많았다. 강가 절벽에서 다이빙하고 나무에 기어올라가고 벌집을 망하고 얼음 구멍에 빠지고 커브에서 자전거를 한계까지 몰아보는 것들은 하나도 무 섭지 않았다. 간혹 아니 자주 사고가 났고 다치기도 많이 했지만 조금 놀랄 뿐 무섭다고 느 낀 적은 없다. 하지만 화장실 귀신이나 도깨비는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이를테면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1시간을 들어가는 산골 할머니댁에 갈 때는 날이 조금 만 어두워져도 어머니 치마 속에 숨어서 갔다. 산에 숨어 사는 문둥이들이 어린애들을 간지 럼태워 죽여서 간을 빼어 약으로 먹는다고 형들이 말했기 때문이다. 노적가리가 나타날 때 마다 뒤에서 문둥이가 튀어나올까봐 식은땀이 흐르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동생 업고 짐 을 이고 가는데 아무리 혼을 내도 자꾸 기어들어와서 힘드셨다고 한다.(나병 환자들께 죄송 한 말씀을 전한다.) 자려고 누우면 눈앞에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들만 엮인 파노라마가 펼 쳐졌다. 전설의 고향(내가 어릴 때 나왔던 텔레비전 프로그램) 시그널 뮤직은 지금도 잊혀지 지 않는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이불 뒤집어쓰고 보게 되는 것은 또 왜였을까. 주말의 명화에서 본 죠스는 몇 년 갔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무서움이 많다는 것을 몰랐 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만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은 중학교 1학년 때다. 당시에는 시험이 끝나면 왜 그런지 전교생에게 단체 영화관람을 시켜주었다. 중간고사 가 끝나고 간 단체영화관람. 지금은 없어진 아세아극장. 영화는 영 블러드와 강시선생이었 다. 아이스하키를 소재로 하고 당시 청춘스타 로브로우와 패트릭스웨이즈가 주연한 영블러 드는 정말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걸어다니는 시체를 소재로 한 강시선생. 어째 내용이 좀 불안하다 싶었지만 포스터도 코믹하게 나오고 해서 괜찮을 줄 알았다. 아니 괜찮았다. 극장 이 다 떠나가도록 전교생이 깔깔대며 배꼽을 잡고 굴렀으니까. 나만 빼고. 다른 애들은 다 죽겠다고 웃는데 나는 창피해서 티도 못 내고 손에 땀을 쥐면서 보았다. 집에 와서는 대나무 대롱을 구하려고 애를 쓰다가 끝내 못 구했다. 그래서 적당한 크기의 PVC 파이프를 구해서 한동안 끼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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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포에 관한 짧은 소설들

돌고래

1. 이번엔 좀 달라야 했다. 아니 다르기를 기도했다. 내심 작은 기대도 있었다. 무대 아래 계단을 내려오는 발은 허공을 짚은 듯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땀도 어느새 말라버렸다. 한기가 몰려온다. 페르소나, 배우생활 10년 기념공연이라는 포스터 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시선을 돌려 무대를 본다. 여전히 무대는 나에게 한 치의 틈도 허락 하지 않는다. 내일 정박사의 상담소는 찾지 않을 것 같다.

2. 남편이 실직일 때는 전에도 있었다. 일자리를 옮길 때 한 두달씩 쉬곤 했다. 우리 세 식 구는 모처럼의 시간들을 잘 써왔다. 공원의 햇볕을 즐기고 동물원 나들이에, 도서관에서 온종 일을 보내기도 했다. 집안 곳곳에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각자만의 놀이에 빠지기도 했다. 통 장잔고가 줄어들고 날아오는 고지서가 신경 쓰여도 그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왠지 불안하고 춥다.

3. 아흔 아홉 번째 생이다. 이번 생은 1960년대 한국,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의 수사가 어떨 까 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반란을 주동하다 마친 지난 생의 격렬함과 피로감을 잠시 내려 놓고 한적한 곳에서 신과의 대화를 핑계로 혼자만의 생을 즐길까 한다. 그나저나 100번째 삶 은 또 어떻게 선택할지 싶다.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4. 게스트하우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맞은 편 거리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지나간다. 가이드 임난은 계속 전화를 받지 않는다. 돌아갈 티켓을 먼저 구한 일행들을 델리공항에 데려다 주고, 마지막 인사까지 마치고 돌아와도 충분할 시간이었 다. 천장의 팬은 더운 공기를 일으키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비행기 티켓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가방을 연다. 앞으로 10시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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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실

학교괴담.

초등학교든 중학교든 어렸을 적 ‘학교’라는 공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 번쯤은 학교 괴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초딩 시절부터 ‘이순신 동상이 밤에 걸어다닌다더라’, ‘밤 12시만 되면 어린이 동상이 피눈물을 흘린다더라’ 류의 괴담을 많이 듣고 컸는데,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올 법한 이야기들을 그 때에는 엄청 진지하게 믿었 다. 그런 것을 보면 학교괴담은 괴담 그 자체보다는 괴담을 여기저기로 실어 나르는 다수의 사 람들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것 같다. 배움터길에 처음 왔을 때 그런 괴담은 없었다. 일반적인 학교의 형태가 아니었기에 동상도 없었고 괴담이 될 만한 꺼리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현재의 학교로 이사 오고 나서 는 깨끗한 건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괴담이 등장하기에는 너무나 깔끔한 동네 분위기 덕분 에 괴담은 명함도 내밀기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진짜 ‘괴담’이다. 지금이야 일찍 집에 가는 날이 많아졌지만 배움터길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3년 가까이는 매일 10시까지 늦게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가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밤을 새기도 했는데 가끔 화장실을 갈 때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몇날 며칠 밤을 새도 이상한 일이 없기에 금세 무뎌졌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다시 일 때문에 학교에서 밤을 새고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 학년 아 침열기를 마친 다음이었다. 그 때에는 1층 계단 및 창고가 따로 없었고 몇 가지 물건만 놓여 있는 상태였는데 그 앞 1층 로비에는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침 열기가 끝나고 수업시간이 되었을 때 때마침 공강이었던 난 그 소파에 누워 잠시 잠을 청했다. 약간의 렘수면 상태였을까- 뭔가 이상한 기운에 살짝 눈을 떴는데 계단 밑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난 바로 가위에 눌렸다. 그 여자는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마치 무협지의 절대 고수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로 내 귀에 이렇게 속삭였 다.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여…” ‘죽어’였는지 ‘죽여’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무튼 그 당시 섬찟한 느낌은 글을 쓰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 이후로 1층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발목이 근질근질했지만 계단 밑으로 창고가 생기면서 그런 느낌은 점점 사라져갔다. 그런데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아직도 그 자 리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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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터길.교사회.수다지

월간.담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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