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
1964~2014
서강, 그사랑의 역사
1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총동문회 50년을 함께 만든 모든 동문들과 미래 50년을 만들 후배들에게 바칩니다.
서강, 그사랑의 역사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
1964~2014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발간사
사실상 최초로 업무 전산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총동문회 운영과 사업의
우리가 서강입니다 총동문회장 김덕용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동문 현황 파악에서 80% 이상을 달성, 유지 해온 것도 국내 대학 동문회들 중 단연 최고 수준입니다. 출범 초기부터 많은 공을 들여온 동문회지 <서강옛집>도 유례를 찾기 힘든 배포율을 기 록하며 동문들을 이어주는 든든한 가교架橋 구실을 해왔습니다. 동문회 재정자립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 개교 20주년 기념 학교 홍보 영화 제작과 기증, 배구단 지원 체육기금 모금, 개교 30주년 기념 알바트 로스탑 건립,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제정, 동문회관 건립, 개교 50주년 기 념 와인사업, 동문장학회 기명 장학금 조성. 이 밖에도 총동문회의 많은
서강 동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강대학교 총동 문회가 50주년을 맞이한 것을, 서강을 아끼고 사랑하시
돌이켜보면 이러한 많은 성과들 중에 쉽게 이룩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
총동문회장님들과 임원진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학교
다. 총동문회는 출범 초기부터 오랜 기간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동문
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김정택 이사장님과 유기풍 총장님께 존경과 감사
숫자도 타교他校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재정 여건이 취약해서
의 말씀을 드립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을 위해 땀 흘리시는 교수님들과 학
동문회의 독자적인 존립 기반 마련이 늘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서강대학
생 여러분께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리며, 교직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
교 총동문회가 걸어온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었으며 구절양장九折羊腸에 백
니다.
척간두百尺竿頭의 복잡다단한 험로였습니다.
1964년 2월 동문회가 처음 출범할 당시 동문회원은 60명이었습니다.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 역사는 길 없는 험한 산을 만나면 새로이
2014년 현재 그 숫자는 7만명을 넘어섰습니다. 50년에 걸쳐 1100배가
길을 뚫고, 다리 없는 세찬 물을 만나면 새로이 다리를 놓으며 전진해온
넘는 양적 성장을 이루어오는 동안 총동문회의 질적 성장도 눈부셨습니
역사입니다. 총동문회를 이끌어주신 역대 회장님들과 임원진 여러분이
다. 서강동문장학회는 지난 3월 2014년도 1학기 장학증서수여식에서 학
기울이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총동문회
부생 120명에게 장학금 2억4200만원을 지급했습니다. 1988년 2월 첫 장
의 위상과 역량은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동문
학금 지급액이 800만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창상滄桑의 변
들이 다시 한 번 깊은 존경과 감사의 뜻을 바칩니다.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1985년 5월 우리나라 대학 동문회들 가운데
4
있는 기여 그 자체였습니다.
는 모든 분과 함께 자축自祝합니다. 총동문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역대
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사업과 발자취는 동문 간 우애 증진은 물론이고 모교 발전을 위한 의미
이제 50주년을 맞이한 총동문회는 100주년을 향한 새로운 50년의 항 해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항해의 앞날에도 순풍의 축복과 풍파의
5 발간사
시험이 모두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제껏 만난 적이 없는 큰
보다 많은 동문 여러분께서 힘을 보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양한 인
파도를 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지난 50년 총동문회의 발자취를
연의 끈으로 서강과 관계를 맺고 계신 우리 사회 각계각층 여러분께도
돌이켜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서강대학교 총동문회의 돛을 처음 올
배님들이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총동문회의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
리고 힘차게 출항시킨 60학번 강일회江一會 선배님들께 각별한 존경과 감
우며 높이 지어 올리신 과정 하나하나를 기리며 되새겨야 하는 까닭이
사를 드립니다.
여기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취지와 의미를 담아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 역사를 다 각도로 조명하는 본 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어제를 비추 어 되새기고 오늘을 성찰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본 책 자의 발간 역시 총동문회 역사의 한 계기라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러 가지 모자란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대 해 동문 여러분의 넓으신 아량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자료 수집과 인 터뷰, 기고 등을 비롯하여 출간 과정에 도움을 주신 동문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누군가 서강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이제 우리 서강 동문들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강이다!’ 서강에서 배우고 꿈을 키운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냐 묻는다면 우리들 각자는 힘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서강이 나다!’ 또한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 역사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묻는다면, 우리 모두는 ‘사랑의 역사’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동문들이 서로를 아끼는 사랑의 역사였고, 모교 발전을 염원하며 기여해온 사랑의 역사였 습니다. 더 큰 사랑의 역사를 써나가기 위한 출발점에 서 있는 지금, 7만 여 동 문들의 뜻과 힘을 하나로 모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 다. 총동문회 앞에 놓여 있는 여러 도전적 과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서,
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7 발간사
축사
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특히 50주년 특집으로 발굴해 낸 ‘서
서강가족의 무한한 자부심 재단 이사장 김정택 신부 S.J.
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글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하고 발전시켜야 할 가 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실제로 경험한 바로 서강동문들은 학교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어 느 누구보다 더 크고 깊습니다. 학교 발전에 대해 깊은 관심을 지니고, 다양한 의견을 주시는 동문들도 많습니다. 총동문회 50주년을 계기로 모 교 발전을 위해 더욱 깊은 사랑과 관심을 보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 로 서강의 100년을 어떻게 맞이할지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변혁을 주도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깊은 숙고와 성찰, 그리고 젊은 패기를 더하여
서강대 총동문회 50년사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합 니다. 1964년 1회 졸업생 60명을 배출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 앞에 열려진 무한한 가능성에 함께 도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총동문회 50주년 슬로건 ‘우리가 서강이다, 서강이 나다’라는 표현은
50년이 흐른 2014년 지금 총 동문의 수는 7만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동안
공동체성과 정체성을 동시에 표방하고 있다고 봅니다. 공동체성은 보편
서강 동문들은 사회의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자랑스러운
적인 연대성을 의미하며 남들과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연대
서강인’으로 든든하게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저 역시 서강가족의 일원으
하고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이는 초창기 예수회 신부님들의 개개인에 대
로서 무한한 자부심과 가슴 벅찬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한 인격적 배려와 존중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 대학의 문화유전자 안에
사람의 나이로 50년은 ‘지천명’이라고 하여 하늘의 뜻을 아는 시기지
뿌리 깊이 내재되어 있는 가치입니다. 이러한 가치가 뒷받침된 공동체
만, 수백년 역사를 지닌 다른 예수회 대학들과 비교해 볼 때 우리 대학의
안에서 분명하고 확고한 서강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강동문
50년은 아직 가야 할 길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는 젊은 청년기라 생각
모두가, 영혼의 깊은 곳에서 확고하게 울려오는 신념으로 ‘우리가 서강
됩니다. 우리는 지금 변혁의 바람 앞에 마주 서 있습니다. 서강은 새로운
이다, 서강이 나다’라고 외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도전에 직면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나가고 있으며,
저도 이사장으로서 여러분들의 모교인 서강이 동문들에게 늘 열려 있
총동문회 역시 학교 발전을 위해 더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학교
고, 언제나 따뜻하게 여러분들을 맞이하여 서로 힘을 얻고 자랑스러워할
와 함께, 한 마음으로 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총동문회 50년사 발간을 진
그동안 모교와 동문과의 가교역할을 하며 모교의 소식을 전하는 <서강 옛집>을 발행하고, 장학금을 조성하여 학생들을 지원하고, 서강을 빛낸
심으로 축하드리면서, 서강 100년을 향해 희망과 열정을 지니고 함께 앞 으로 나아갑시다.
‘자랑스러운 서강인’을 발굴하는 등 많은 일을 해온 총동문회에게 이 자
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9 축사
축사
서강의 혼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서강을 만들고자 가
자랑스러운 서강을 향한 헌신 총장 유기풍
장 헌신하신 분들이 바로 동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강을 이끄는 총장 으로서, 늘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서강은 ‘서강 100년’을 향한 앞으로의 반세기를 새롭게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대학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하여 1960년대 와는 다른 21세기형 대학의 새로운 역할 모델을 창출하고 국내외적으로 서 강의 브랜드 파워를 극대화해 나가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서강동문 여러분! 7만여 서강동문이 이 책에 실린 교표의 의미부터 후배사랑의 선순환
서강대 총동문회의 창립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 합니다.
을 이룬 서강동문장학회에 이르기까지 모교를 아끼는 마음을 늘 간직하 여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서강대학교는 예수회와 서강가족 모두의 지혜와 헌신으로 이
또한 김덕용 총동문회장님을 비롯한 서강동문들의 서강 100년을 향한
룩된 것입니다. 500년 예수회 교육의 굳건한 전통에 따라 인생의 진정한
기운찬 도약을 응원합니다. 저는 수요자 중심의 열린 양방향 교육을 최
의미를 이해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수월성 교육, 남을 위해 봉사하는 교
고의 교육가치로 삼으며 예수회 교육이념을 실천하는 서강이 되도록 절
육을 지향해 왔습니다. 서강은 탁월한 교수진, 고전적 연구와 첨단 연구
차탁마의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의 조화, 선도적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대학교육 의 현대화를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해 왔습니다.
다시 한번 서강대 총동문회의 창립 50주년을 축하하며 총동문회의 무 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지난 53년 동안 모든 서강가족은 헌신과 열정, 수월성과 전위성으로 진정한 대학 모델을 제시해 왔습니다. 소수정예를 실천한 남다른 대학, 양적 성장보다 질적 비약을 추구한 서강의 학풍은 인문, 사회, 문화, 정 치, 경제, 과학 분야에서 독특한 학파를 형성했습니다. 한국 경제를 이끌 었고, 인문 교양을 선도했으며, 첨단 연구로 산학협력의 모범이 되었습 니다. 학자, 작가, 영화감독, 벤처사업가, 금융인, 언론인, 홍보·광고기획 가, 환경전문가에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자랑스럽게
1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1 축사
역대 총동문회장 “함께한 시간이 50년을 만들었습니다.” 13대, 14대 1982~1986 홍익찬(61 경제)
15대 1986~1988 양호(62 경제)
16대~20대 1988~1998 이우진(60 사학)
23대 2002~2004 정재관(60 영문)
24대~28대 2004~2013 김호연(74 무역)
1대, 2대 1964~1966 윤진호(60 경제)
3대 1966~1967 김암(62 경제)
4대 1967~1968 박병화(60 경제)
21대, 22대 1998~2002 김경해(68 영문)
5대, 6대, 10대 1968~1971, 1975~1978 김영천(60 경제)
7대, 11대, 12대 1971~1972, 1978~1982 박희윤(61 경제)
8대, 9대 1973~1975 김진헌(60 물리)
29대 2013~ 김덕용(76 전자)
1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3 역대 총동문회장
차례
3장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116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3
134
추억의 앨범 우리들의 80년대
172
4장 발간사 총동문회장 김덕용
4
축사 재단 이사장 김정택 신부 S.J. 총장 유기풍
8 10
역대 총동문회장
12
차례
14
1서강, 그 사랑의 역사 부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1964~2014) 서문
20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182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4
208
추억의 앨범 우리들의 90년대
234
5장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244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5
260
추억의 앨범 우리들의 2000년대
272
서강학개론 중간고사
280
2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부
1장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24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1
40
추억의 앨범 서강의 처음
52
2장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56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2
72
추억의 앨범 1970년대 서강 풍경
108
역대 동문회장 _ 동문회와 모교 발전의 견인차
290
동문회관 _ 10년 걸린 소중한 보금자리
303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_ 서강 최고의 명예로운 상
311
<서강옛집> _ 지면에 담은 7만 동문의 이야기
330
장학금 _ 총동문회 최대 역점사업
337
사무국 _ 음지에서 묵묵히 50년
347
15 역대 총동문회장
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부
1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교표, 교명, 로고체 서강 교육이념의 상징
366
교가 _ 아느냐 저 강물이 흐르는 뜻을
369
교훈과 표어 _ 서강의 드높은 자부심
371
본관(A관) _ 서강인의 첫 보금자리
373
초창기 대학생활 _ 엄격함 속의 자유로움
375
슈퍼컴퓨터 _ 국내 최초, 최고의 자랑
377
메리홀 _ 지성과 감성이 꽃피는 고품격 문화공간
379
<월인석보> _ 감정가 9,999,999,999원
381
노고산 _ 역사가 깃든 넉넉한 품
383
C관 _ 서강인의 땀과 희망이 서린 곳
385
R관 _ ‘과학 서강’의 요람
387
설립자 6인 _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389
김수환 추기경과 서강 _ “추기경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391
<서강학보> _ 그대 흘린 땀이 세상을 이기리라
393
록밴드 킨젝스 _ 서강대학교 실용음악과
395
독후감 _ ‘서강고등학교’ 별명의 진원지
397
사제관 _ ‘청빈한 삶’의 증거
399
로욜라 도서관 _ 자유롭되 빈틈없는 서강학풍의 밑바탕
401
서강연극회 _ 서강만의 독특한 힘과 매력
403
학과學科 변천 _ 다양성과 자율성이 숨 쉰다
405
명예박사 _ 서강,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407
산업문제연구소 _ 실천적 지성, 지성적 실천
410
배구부 _ 운동과 학업을 병행한 강스파이크
서강학파 _ 고도성장 시대의 경제정책 설계사
422
에밀레 _ 각별한 우정에서 싹튼 남다른 실력
424
수업종 _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426
경영전문대학원(MBA) _ 최고의 자부심으로
428
교문 _ “환영합니다. 여기부터 서강입니다”
430
대흥극장, 신영극장 _ 극장 안에서 흐른 청춘의 한 때
432
김의기 동문 _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434
커뮤니케이션센터 _ 서강의 영상문화 발전소
436
개강미사와 부활절휴가 _ 다양성 속의 일치
438
강미반 _ 서강에서 꽃핀 예술혼
440
역대 학장과 총장 _ 서강을 이끈 리더십
442
기숙사 _ 청년의 꿈이 숨 쉬며 자라는 곳
444
서강의 첫날 _ 1960년 4월 18일 날씨 맑음
446
등나무 벤치 _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장소
448
서강학개론 기말고사
450
4 기억과 풍경 부
하늘에서 본 서강
460
굴뚝의 추억
464
412
교문, 서강언덕의 시작
466
FA, 면담, 인문학 _ 서강이 서강인 이유
414
특별한 서강의 남다른 포스
468
사교춤과 프로미네이드 _ 시대를 앞서 간 동아리
416
알바트로스탑 24년
472
초창기 교수진 _ “스승님, 고맙습니다”
418
영화공동체 _ ‘서강대학교 예술대학 영화학과’
420
연표
474
1부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1964~2014)
1
서문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1 추억의 앨범 _ 서강의 처음
2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2 추억의 앨범 _ 1970년대 서강 풍경
3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3 추억의 앨범 _ 우리들의 80년대
4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4 추억의 앨범 _ 우리들의 90년대
5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5 추억의 앨범 _ 우리들의 2000년대
1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
서문
깨’ 위에서 큰 바다를 향해 비상飛翔했다. 그 비상은 서강동문장학회로 대
기승전起承轉의 발자취를 따라서
표되는 후배와 모교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총동문회의 역사가 사랑 의 역사라는 것을 예증하는 아름다운 비상이었다.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알바트로스의 기상을 상징조형물로 우뚝 세웠다. ‘자랑스러운 서강인’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총동문회의 숙원이 던, 동문들의 정겨운 고향집이자 동문회의 터전인 동문회관을 세웠다. 동문회관이라는 든든한 터전을 바탕으로 총동문회는 동문 네트워크 강 화와 동문장학회 발전에 가일층 힘을 쏟기 시작했다. 총동문회 홈페이지를 많은 동문들의 정보 교류와 친목 도모의 장으로 혁신시켰다. 개교 50주년 기념와인 사업, 동문회관 임대, 서강동문장학 회 기명 장학금 50개 조성 캠페인 등을 통하여 장학기금 확충에 최선을
서강은 개교 당시부터 단순한 하나의 대학이 아니었다. 서강은 서강이
다했다. 개교 50주년을 계기로 총동문회의 역량을 한껏 펼쳐나갔다. 선
라는 그 이름만으로 하나의 메시지 그 자체였다. 선진화된 대학 제도와
배들이 걸어간 가지런한 발자국을 길잡이로 따르면서, 또한 뒤따라올 후
시스템과 운영을 통하여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미래를 제시하는 메시지
배들을 위해 가지런히 바르게 걸었다.
였다. 학생과 교수 그리고 학생들 간 친밀한 우애友愛 공동체였다는 점에 서도 서강은 전혀 다르고 매우 새로웠다.
많은 동문들의 소중한 헌신과 희생적인 봉사의 한 걸음 한 걸음 바로 그
높은 곳으로 오르게 될 낮은 곳이었다. 크게 번창하게 될 작은 출발이었
것이다. 하나의 동문회 사업을 책임지거나 참여하더라도 결코 대충하지
다. 1964년 2월 작지만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 이후 동문회는 많은 어려
않고 최선을 다해온 자취다. 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후배들을 뒷받침하는
움 속에서도 깃을 다듬고 힘을 키우며 애쓰고 또 애썼다.
한 해 한 해가 쌓여서 도달한 50년이다. 그리고 모교 반세기와 총동문회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깨’를 만들어냈다. 동문 숫자도 많지 않았다. 독자적인 재정 기반도 없
이 글은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 역사를 속속들이 집대성하고 정리
었다. 지속적인 사업을 계획하고 펼치기가 어려웠다. 그 모든 어려움을
하는 통사通史가 아니다. 50년 역사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계기, 사건,
극복하며 동문회는 자생력을 키우고 독자성을 확립해나갔다.
사업 등을 비교적 간략하게 리뷰하면서 그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한 글이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개교 20주년, 25주년을 지나면서 ‘거인들의 어
20
고 미래 50년을 그려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총동문회 50년 발자취는
그 새로운 서강, 다른 서강이 길러낸 첫 인재들이 동문회를 세웠다. 드
그 결과, 더 먼 곳을 내다보며 더 높이 날 수 있는 바탕, 즉 ‘거인들의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이제 서강대학교 총동문회가 5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50년을 돌아보
다. 아무리 본격적인 통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반세기를 돌이켜보자면 시
21 서문
기 구분이 필요하다. 이 글은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총동문회의 출발인 1964년부터 1970년대 중후반 까지다. 세 번째는 1970년대 말부터 1987년까지이며 네 번째는 1988년 부터 2003년까지, 그리고 다섯 번째는 2004년부터 최근까지다. 최근 시 기에 대해서는 훗날의 정리와 평가에 남겨두어야 하기에 다른 시기에 비 해 상대적으로 비중을 줄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가 기起라면 세 번째 시기는 승承이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시기가 전轉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떨쳐 일어나起 그 기세 를 펼치고承 힘차게 획을 그어 도약한 과정轉으로 파악한 것이다. 물론 거 두어 끝맺는 결結은 없다. 서강의 발전, 총동문회의 발전에 맺음이란 없 겠기에 말이다. 다양한 자료를 상고相考하였으나 본의 아니게 남겨진 오류가 없지 않 을 것이다. 선후배 동문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앞으로 60주년, 70주년, 그 너머 100주년에 이르는 어느 시기엔가 완정完整한 통사通史 성 격의 총동문회사史가 시도된다면, 이 글이 그 작업에 작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서강은 서강이라는 그 이름만으로 하나의 메시지 그 자체였다.
1
장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군자의 도道는 비유컨대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고行遠必自邇,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출발하는 것登高必自卑과 같다. ─ <중용>中庸
서강대학이라면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오히려 많다. 오랜 역사를 갖 고 세계 각국에 교육기관을 비롯하여 각종 문화사업 기관을 설치해 온 가톨릭계 예수회에서 경영하는 대학이다. 시내 신수동(신촌 종점 근처) 에 현대식 본관을 짓고 금년 4월에 문을 연 동 대학은 현재 130여 명의 재학생(여학생 20여 명)에 8명의 외국인 교수를 포함한 20여 전임교수, 문리이학부육과文理二學部六科라는 새 살림이다.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서 관리하고 있는 서강대학은 든든한 재 단의 힘과 세계 각국에 산재한 산하 교육기관(대학만도 74개교)과의 유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 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
대를 바탕으로 수년 내에는 현대적 시설을 완비한 종합대학교로 비약할
─ 욥기 7장8절
계획을 추진 중이다. …(중략)… 현재 1학년뿐인 동 대학에서는 1, 2학 년 과정을 교양과목에 치중하고 3학년에서 비로소 전공과를 선택케 할
서강은 개교 당시부터 단순한 하나의 대학이 아니었다. 서강은 서강이라는 그 이름만으로 하나의 메시지 그 자체였다. 선진화된 대학 제도와 시스템과 운영을 통하여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미래를 제시하는 메시지였다. 학생과 교수 그리고 학생들 간 친밀한 우애友愛 공동체였다는 점에서도 서강은 전혀 다르고 매우 새로웠다. 그 새로운 서강, 다른 서강이 길러낸 첫 인재들이 동문회를 세웠다. 드높은 곳으로 오르게 될 낮은 곳이었다. 크게 번창하게 될 작은 출발이었다. 2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방침이라는 데, 그때에는 대부분 외국인 교수들이 강의하게 되므로 외 국어 실력 양성에 각별히 주력하고 있다. 출석이 지나치게 엄하고 숙제가 많으며 매일 시행되는 외국어 시험으 로 못살겠다고 재학생들은 즐거운 비명을 울리고 있다. 우리나라 사정 에 정통하고 우리나라 말에도 능숙한 현 학장 길로런 신부 이하 여러 외국인 교수와 국내 권위 교수들의 열의와 든든한 뒷받침은 멀지 않아 동 대학을 우리나라 교육계의 모범교로 발전시킬 듯하다.
25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1960년 12월 20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다. 기사 제목은 ‘가톨릭계의
연한 일이었다. 출발 때부터 서강은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새로운 모델과
엄한 학풍, 서강대학’이며 소제목은 ‘현재는 1학년뿐. 장서만도 6만여 권’
방향을 제시하면서 교육계 안팎의 각별한 주목과 기대를 모았다. 청렴하
이다. 엄격한 학사관리와 많은 숙제, 잦은 시험 등으로 대표되는 엄한 학
고 합리적인 재단과 실력 있는 교수들과 성실한 학생들이 그러한 기대가
풍. 첫 출발 때 세운 서강의 학풍이 반세기 넘도록 온전하게 이어지며 명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빠른 시간 안에 증명해내었다.
실상부한 전통이 되었다는 것을 이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적知的으로 우수한 인재를 그저 받아들이는 것에만 그치곤 하는 여
서강을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오히려 많은’ 상황이 격세지감隔世之 感의
대상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래는 예측하
타 명문대들과 달리, 지적으로 우수한 인재를 받아들여 지知와 덕德 모두
는 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서강은 적극적
에서 더욱 우수하도록 단련시켜 배출하는 서강의 전통은 그렇게 첫 걸음
으로 미래를 만들어나가면서 우리나라 대학 교육의 미래를 선취先取했다.
에서부터 확립되었다. 엄한 학풍 때문에 ‘못 살겠다고’ 내질러야 했던 당
‘우리나라 대학 교육의 미래를 보려거든 노고산을 보라’고 말하더라도
시 학생들의 비명이 꼭 즐거운 비명이었던 건 아니겠으나, 서강에서 갈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고 닦은 실력과 품성이 사회에서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을 졸업 후 몸소
1960년 서강대학의 첫 입학생은 159명이었고 그 가운데 60명이 1964
확인한 많은 동문들은 나중에라도 ‘즐거운’ 비명을 훨씬 더 크게 내질렀
년 2월 8일에 졸업하였다. 개교 당시에는 영어영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을 법하다.
수학과, 물리학과, 경제학과 등이 개설되었고 이후 1963년에 생물학과,
더구나 당대의 평균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탄탄한 외국어 교육과 실
경영학과, 독어독문학과가 개설되었다. 이들 3개 학과는 1회 졸업생들이
력, 출발할 때부터 이미 국제화되어 있던 학풍은 가장 늦게 문을 연 대학
4학년일 때 첫 신입생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1964년에 국어국문학과와
이면서도 가장 앞선 대학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 사
화학과, 1966년에 국제통상학과(1968년 무역학과로 명칭 변경), 1968년에
정에도 정통하고 우리나라 말에도 능숙한 외국인 교수들’은 초창기부터
신문방송학과가 신설되었다.
서강을 외국 제도와 문화가 단순히 이식移植되는 주변부적 변경으로 여기
대학 설립 인가 당시 모교의 교수진은 한국인 4명과 외국인 6명이었으
지 않았다. 그 분들이 만들고자 한 서강은 당시로서는 훨씬 더 앞서 있던
며 이 중 예수회 신부가 8명이었다. 두 자릿수에 겨우 이른 소수의 교수
서양의 고등교육 제도와 시스템을 한국 문화 및 현실과 융화시켜나가는
진이었으나 우리나라 대학 역사상 외국인 교수 비율이 이렇게 높은 경우
당당한 중심, 바로 그것이었다. 이로써 서강은 외국 대학 제도의 단순한
는 전무후무하다고 할 수 있겠다.
모방물이 아니라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주체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멀지 않아 동 대학을 우리나라 교육계의 모범교로 발전시킬 듯하다’
2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송주영(교수, 경제학) 이희명(부교수, 생물학)
는 시기적으로는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던 예언, 아니 내용상으로는
김태관(S.J., 조교수, 철학) 박고영(S.J., 조교수, 철학)
근거가 분명한 예측이 오래 지나지 않아 그대로 실현된 것은 어쩌면 당
테오도르 게페르트(S.J., 교수, 독일어) 클래런스 A. 헙스트(S.J., 교수, 영어)
27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존 E. 번브럭(S.J., 조교수, 영문학) 존 P. 데일리(S.J., 조교수, 영문학)
프랑스어 (3학점 : 강대영), 독일어 (3학점 : 게페르트)
바실 M. 프라이스(S.J., 조교수, 영어) 노버트 J. 트레이시(S.J., 조교수, 교육학)
위와 같은 교수진을 스승으로 모시고 첫 학기 21학점을 이수하며 대학 한편 설립 인가 당시 강사진은 한국인 10명과 외국인 3명으로 이뤄졌 으며, 이 가운데 2명이 예수회 신부, 3명이 예수회 수사였다.
생활을 시작한 노고산 언덕의 개척자들이 어느덧 동문회를 개척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제1회 졸업식 이틀 전인 1964년 2월 6일 목요일, 오후 4시 서울 날씨는 연일 계속되던 추위가 조금은 꺾인 영하 0.2도였다. 겨
강대영(불어, 신부) 구상(국어) 김용권(영문학) 김인자(체육)
울의 짧은 해가 서쪽으로 한껏 기울며 당인리 발전소 쪽 하늘을 물들이고
김정록(한문) 문영현(체육) 윤양석(S.J., 신학) 이필석(독일어)
있었다. 창으로 쏟아져 드는 겨울 햇살에, 영하의 바깥 추위에 조금씩은
진성만(S.J., 신학) 차하순(사학) 존 V. 데일리(S.J., 영어: 수사)
상기된 얼굴로 C관 라운지에 60학번 1회 졸업생들, 정확히 말하면 졸업
테렌스 W. 도일(S.J., 영어: 수사) 존 L. 미첼(S.J., 영어: 수사)
예정자들이 모였다. 당시 학교 건물은 본관(A관. 1959.11 건립), 예수회 사 제관(1962.12 건립), 그리고 제2교사로 불린 C관(1963.7 건립)이 전부였다.
60학번 1회 졸업 동문들이 신입생으로서 1960년도 1학기에 수강한 과
이들이 모인 것은 서강대학 동문회를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그 날 동
목들과 각 담당 교수는 다음과 같다. 필수 지정 18학점과 함께 교양과목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수강해야 했다. 심화된 전공 과정에 앞서 탄탄 한 교양 기반을 쌓아야 한다는 교육 방향이 반영된 과목 구성이었고, 영 어를 중심으로 어문교육이 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수 자연과학개론 (2학점 : 이희명), 국어 (3학점 : 구상·김정록) 영어회화 및 강독 (5학점 : 도일·미첼·헙스트·프라이스) 영어독해 (1학점 : 김용권), 호교론 (3학점 : 진성만·윤양석) 서양문화사 (3학점 : 차하순), 체육 (1학점 : 문영현·김인자)
교양 경제원론 (3학점 : 송주영), 종교철학 (3학점 : 김태관)
2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64년 2월 8일 열린 제1회 졸업식
29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문회가 결성됨으로써 60학번 1회 졸업생 전원이 총동문회의 파운딩 마더
문이다. 이렇게 초창기 동문회의 모든 사업과 발걸음은 그것이 비록 양
스와 파더스Founding Mothers and Fathers가 되었다. 50주년을 맞은 2014년 현
적 규모가 작고 보폭이 좁았다 하더라도, 이후 동문회 역사를 통하여 성
재 7만여 명에 달하는 총동문회의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이었다. 그로부
대하게 발전해나가는 씨앗이자 추뉴樞紐(중추적인 원리, 중심, 기준)였다는
터 이틀 뒤 2월 8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2시 50분까지 A관 401호에서
점에서 그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될
제1회 졸업식이 열렸다. 60명 첫 서강 동문들이 탄생하는 날을 축복하는
성부를 나무의 떡잎’이었다. 초대 동문회장 윤진호 동문은 ‘동문회를 조
눈이 내렸다.
직하며’라는 글(〈서강옛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역사적인 서강대학 동문회 창립 모임에서 사회는 임시 회장인 정 시환(경제) 동문이 맡았다. 결의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동문회 임원 선
모교의 장래와 명예를 건 우리들은 서로 희생 어린 협조심이 필요합니다. 협동이야
출과 사업 계획이었다. 임원진은 모두 6명으로 구성되었다. 초대 회장 윤
말로 모교를 건설하는 주축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서강 멤버는 이 협동정신을 실천
진호(경제), 부회장 정시환(경제), 총무 안우규(영문), 회계 문정재(사학),
할 줄 아는 젊은이일 것으로 믿습니다.
대의원 최원영(사학), 하문자(사학) 동문 등이었다. 윤 동문은 2대 회장까
3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지 역임했다. 60학번 동문들이 강일회江一會라는 이름 아래 지금까지도 끈
한편 <서강옛집>은 초대 학장 길로런 신부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바
끈한 우정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 서강 동문회를 출
탕으로 이미 1964년 1월에 제1호가 제작, 발행되었다. 글씨를 잘 쓰는 사
범시키고 역사를 개척해왔다는 자부심이 강일회의 결속과 우정을 뒷받
람이 직접 손글씨로 정서正書하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삽화도 그려 넣
침하고 있는 것이다.
어 등사기로 200부를 만든 것이 오늘날 400호를 바로 앞둔 <서강옛집>의
1회 졸업생으로 구성된 첫 동문회는 첫 사업으로 재학생에게 장학금
첫 모습이었다. 내용도 정원을 증원한 학교 소식과 취업 동문 소식, 입대
을 주자는 것, 학교와 졸업생 간 및 졸업생들 간 긴밀한 연락을 위해 동
한 동문 소식 등을 비롯하여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담아내어 정겨운 분위
문회보 <서강옛집>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자는 것 등을 결정했다. 후
기가 묻어났다.
배 사랑과 동문 간 소통 기반 확충이 동문회의 사실상 첫 사업이었던 것
함께 살다가 지금은 흩어져 사는 가족들의 갖가지 알콩달콩한 사연과
이다. 실제로 동문회는 1964년 2월에 당시 수석 합격 신입생에게 첫 동
추억들이 깃든 정겨운 집, 언제든 그립고 어디서든 생각나며 다시 한 번
문회 장학금을 지급했다.
찾아가고픈 집, 그야말로 ‘옛집’이었다. 2월에 발행된 제2호에 ‘<서강옛
졸업 직전에 출범한 동문회가 졸업 직후에 곧바로 후배를 위한 장학금
집>이란 이 월간지의 명칭을 더 좋은 이름으로 고칠 수 있으면 고칠 계획
을 모아서 지급했다는 사실, 그것이 사실상 동문회의 제1호 사업이었다
이오니 동문의 좋은 아이디어를 보내주십시오’라는 공고를 내기도 했지
는 사실은 결코 범상치 않다. 오늘날 총동문회 역할의 핵심이라고 할 수
만, 그 공고대로 실현되지 아니한 것이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윤진
있는 동문장학회의 든든한 뿌리가 바로 그때 내려졌다고 할 수 있기 때
호 초대 동문회장은 <서강옛집>에 실린 ‘창간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31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1964년 1월 발간된 서강옛집 창간호 1면
3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64년 1월 발간된 서강옛집 창간호 2면
33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서강옛집은 졸업생 귀하와 학교와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귀하와 사랑
하면서, ‘모교의 목 언저리에 장식될 진주목걸이의 한 알 한 알이 되어’
하는 모교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시작됩니다. 이 조그마한 월간지는
모교의 위상 제고와 발전에 기여해왔다.
졸업 후 귀하에게 계속해서 반갑고도 유익한 벗이 될 것입니다. 한국에
60명으로 출발한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학부 졸업생 기준으로 1971
서는 대학 졸업 때 주소록을 배부하고 이로써 졸업생 상호간 및 학교와
년에 1000명을 넘었고 1987년에 1만명을 넘었으며 2014년도에 학부 및
의 연락이 끊어지는 것이 통례지만, 서양에서는 근년부터 모교 발전을
대학원(일반·특수·전문 등) 졸업 동문을 모두 아울러서 7만 명 규모가 되
위한 Alumni 활동이 매우 활발해져서 정기 Alumni 회지 간행, 졸업생
었다. 이렇게 빠른 성장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또한 변하지 말아야
들과 교수들 간의 토론회, 개인사업 또는 사무능률을 올리기 위한 연구
할 것이 있다. ‘희생 어린 협조심과 협동’이라는 동문회의 초심初心이다.
협력, 친목회 등 그 활동의 폭이 넓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총동문회 사업과 동문들의 기여에서도 유효한 가치라 할
모교의 장래 건설은 오로지 졸업생의 성공적인 사회진출과 애교심에서
것이며, 실제로 서강 총동문회의 모든 사업을 통하여 실현되어왔다.
오는 협조에 달렸다고 해서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모교의 발전을 위해
모든 동문들이 서강을 생각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며 가슴 벅
서라도 회원 각자가 모교의 목 언저리에 장식될 진주목걸이의 한 알 한
차하게 되는 슬로건,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Be
알이 되어 빛나도록 노력하고 협조합시다. 귀하와 학교 간 및 졸업생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도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에 이용되기 위하여 창간되는 이 <서강옛집>은 여
월 <서강옛집> 창간호에 게재하고 초대 학장 길로런 신부가 제1회 졸업
러분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다하기 위하여 학교 보조로 매월 발간하여
식 축사에서 말함으로써 빠르게 널리 확산되었다. 당시에는 영문 문구가
여러분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소 달라서 ‘Be proud to be part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안우규(60 영문) 동문이 1964년 1
being part of you’였다. 동문회 창설 주역들은 그렇게 ‘희생 어린 협조심과 협동’, ‘애교심에서
학연을 유달리 중시하는 한국 사회 풍토에서 사회에 나가도 이끌어 줄
오는 협조’를 학교와 후배와 동문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이자 메
선배 하나 없는 신생 대학의 1회 졸업생들의 심정. 그 심정을 깊이 이해
시지로 내세웠다. 또한 ‘졸업생의 성공적인 사회진출’이 모교의 장래 건
하는 길로런 학장은 이 말을 통하여 졸업생들에게 서강인으로서의 자부
설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동문회의 존재 이유
심과 자긍심을 불어 넣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면에서 최상의 기준에 도
와 의미로서 이보다 마땅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달하는 서강 교육의 수월성秀越性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출발한 지 4년
총동문회가 50주년을 맞이한 지금, 동문회를 시작했던 첫 마음의 씨앗
여 밖에 되지 않은 ‘서강이 그대의 자랑’이라고 선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무럭무럭 자라나 깊고 튼튼한 뿌리가 되어 굵은 기둥을 만들고 수많
3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은 가지로 뻗어 튼실한 열매를 맺고 있다. 서강이 길러서 배출한 많은 인
한국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은데 6년 전에 신념을 가지
재들이 우리 사회의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과 리더십을 발휘
고 조용히 설립된 서강대학은 여러 면에서 대학의 모범적인 위치까지
35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올라서있다. 교수와 학생의 비율이 11대 1로 이상적인 기준을 실현하
와 명성이 설립 이후 불과 6년 안에 널리 확산되고 굳게 확립되었다는 것
고 있으며, 교수에 대한 우대도 이 학교의 자랑이다. 예수회에서 설립
을 알 수 있다. 서강은 일찍부터 동문과 학생 모두의 명실상부한 자랑이
한 서강대학은 그렇다고 종교의 강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었던 것이다.
모든 학생이 카운슬링을 통해 신상 문제까지 직접 교수와 상의하는 따
1964년을 즈음한 세상이 어떠했는지 잠시 돌이켜보면, 1963년 4월 이
뜻한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학교생활을 한다. 전공과목 이수 전에 교
만희 감독의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개봉하여 큰 인기를 모았다.
양과목을 철저히 이수함으로써 민주 시민으로서의 기본 능력을 양성하
같은 해 8월 미국 워싱턴D.C.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에게는 꿈이
고 있는 것도 이 대학의 특색이다. 등록금 분납제로 학생을 이해하면서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역사적인 연설을 했다. 9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
‘정말 공부하는 학생들의 대학’을 이룩하고 있다.
스턴트 라면이 출시되었고 10월에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당시 박 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이기고 당선되었으며, 11월에 미국의 케네디
경향신문 주최 1966년 제2회 경향교육상에서 서강대학은 ‘단체, 대학
대통령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
교육활동’ 부문에서 수상했다. 당시 경향신문 5월 7일자에 ‘한국 교육의
1964년 2월 가수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이 동명 영화의 주제가로서
산 지표들’이라는 제목으로 각 부문 수상 개인 및 단체가 소개되는 기사
영화와 함께 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5~6월에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에 서강은 위와 같이 소개되었다. ‘공부하는 학생들의 대학’이라는 평가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반대 시위(6·3시위)가 일어나 계엄령이 선포되었 다. 당시 서울 각 대학에서 이에 관한 모임과 시위가 열리는 가운데 서강 에서도 300여 명의 학생들이 5월 25일 난국타개 학생궐기대회를 가졌다. 9월부터는 의료진을 시작으로 베트남 파병이 시작되었다. 1964년 당시 필리핀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29달러였고 우리나라는 103달러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세계 15위권 경제 규모 및 전체적인 국력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격동激動하지 아니한 시기는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 만 서강이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동문회가 첫 출발하던 시기는 단연 격 동 그 자체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모든 것이 어려웠고 모든 것이 부족했 으며 모두가 가난했다. 그러나 가난했기에 더 나은 삶을 희망하며 노력 할 수 있었고, 부족했기에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며 풍요로운 내일을
1966년 제2회 경향교육상 수상 장면
3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기약했으며, 어려웠기에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
37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었다. 어려운 시대적 여건에서 격동하는 망망대해 세상 속으로 일엽편주의 첫 항해를 시작한 서강 최초 동문들이 노고산 언덕에서 꾸었던 꿈은 이 후 서강이 이루어나가고 후배들이 이루어나간 꿈, 또한 앞으로 서강이 이뤄나갈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원대한 꿈의 의미심장한 서막이었다. 7만 동문 규모로 성장하며 동문장학회를 비롯한 다양한 사업을 활발 하게 펼치는 오늘날 총동문회의 모습을 우리는 50년 전 그날 C관 라운지 에서 발견하게 된다. 후배들을 위해 장학금을 맡기는, 오늘날 많은 동문 들의 소중한 뜻을 50년 전 첫 동문 장학금에서 보게 된다. 바로 그 날, 바 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의 깊은 뿌리가 내렸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깊은 물이 솟기 시작했다.
1964년 2월 8일 제1회 졸업기념 사진
‘서울이라 서쪽에도 서강 언덕에, 젊은이들 푸른 꿈 피어오른다.’ (이희 승 작사, 안익태 작곡 교가) 서강의 첫 동문들이 꾸었던 푸른 꿈은 세월이 흘
서강이 우리에게 베푼 모든 가르침, 서강에서부터 쌓은 모든 우정, 서
러도 여전히 푸르게만 이어지기에, 서강의 첫 동문들이 모교를 향해 쏟
강의 발전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우리들 각자의 자랑이며 나를 이루는
은 애정은 시간이 지나도 후배들에게 면면히 이어지며 도무지 식을 줄
나와 불가분의 요소이기에 우리 모두는 주저하지 않고 ‘서강이 나다’라
모르기에, 서강은 영원한 ‘청년서강’이며 모든 동문들이 영원한 ‘청년서
고 말할 수 있다. 서강을 든든한 나침반 삼아 튼튼한 돛 삼아 세파世波를
강인’이다.
당당히 이기며 세상을 이끌어 온 우리 모두가 서강이라는 이름에 결코
‘아느냐 저 강물이 흐르는 뜻을, 바다를 그리면서 앞으로 간다.’ 50년
부끄럽지 않은 서강의 자랑이기에, 우리 모두는 ‘우리가 서강이다’라고
전 작은 물줄기로 흐르기 시작한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이제 양적, 질
외칠 수 있다.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주년을 맞이하는 7만 동문들의 하
적 측면에서 공히 하해河海를 이루었으며 그 흐름은 결코 쉬는 법 없이 앞
나 된 함성은 그래서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서강이다, 서강이 나다.’
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슬기의 바다, 덕성과 도량도 함께 넓히자.’ 그 하해 는 개인의 유덕有德한 삶과 공동체의 공동선共同善을 실현하는 슬기와 덕 성과 도량의 가르침, 서강에서 배우고 깨우친 그 가르침으로 더욱 깊어 지고 넓어질 것이다.
3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9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다이몬과의 만남 엄정식(60 철학)
세월이 갈수록 과거는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중에 어떤 것은 생생한 추억이 되어 바로 어제의 일인 것처럼 뚜렷하 게 남아 있다. 그 내용이 많이 퇴색되고, 어떤 점은 미화되었으며 또 어떤 점은 추상화되기도 하였으나 좀처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일이 더러
1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 부각되는 것들이 있다. 나는 1960년 봄 개교와 함께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고 4년 후 첫 졸업생이 되어 이 학교를 떠났다. 내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청년시절 을 이 학교의 교정에서 보낸 셈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상당히 많이 새 롭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공식적인 교과 과정을 이수 하는 동안 철학적 훈련과 다양한 독서를 통해 동서와 고금의 숱한 사조 를 만날 수 있었고, 저명하고 존경스러운 교수들로부터 세상에 대한 지 식뿐만 아니라 삶에 관한 지혜를 터득할 수 있었으며 여러 가지 과외활 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우정이 무르익어 가 기도 했었다. 이 모든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아름답고 애틋한 추억으로, 혹은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다이몬’과의 만남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할 무렵 나 자신과 자주 대화하는 버릇이 있었다. 학 년이 높아갈수록 이러한 버릇은 점점 더 고착되어 갔고 ‘나’는 점차 더욱 뚜렷하게 이분화 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다. 말하자면 나는 생각하는 ‘나’ 와 생각되는 ‘나’, 욕구로서의 ‘나’와 당위로서의 ‘나’, 현실로서의 ‘나’와
4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1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이상으로서의 ‘나’로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깊은 사
나의 사랑, 나의 자랑
색에 잠기며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나와 끊임없이
오인숙(60 영문)
대화를 나누고, 또 일기 형식으로 노트에 적어두기도 하였다. 나는 거의 모든 관심사에 대해서 솔직하고 명백하게 그 ‘나’와 의논하였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때로는 호소이기도 했고 절규이기 도 했으며 차분한 논증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대화의 상대가 구체화됨에 따라 나는 그 ‘나’에게 이름이 필요함을 느 꼈다. 소크라테스가 내면에서 ‘다이몬’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내가 60학번이니까 53년을 훌쩍 날아 어느새 70세가 넘었단 말인가! 수도원에서는 생일을 기억하지 않으니 나이를 잊고 살다가 이렇게 먼 대 학시절을 생각하려니까 참 오래도 살았다는 생각이 앞선다.
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는 그 ‘나’에게 선뜻 ‘다이몬daimon’이란
‘서강’에 대한 추억을 다시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온다. 대학교를 졸업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이래로 나는 서강대학교에서 다이몬을 애타게 부
하면 곧 취직을 해야 하니까 서울사대 입학원서를 준비했는데 가톨릭교
르며 보낸 4년을 “다이몬과의 방황”이라고 부른다. 나에게 노고산은 그
우인 급우가 서강대학교를 국내 최우수 학교라 홍보하며 내게 강력히 권
냥 완만한 언덕이 아니었다. 그곳은 동서와 고금의 사조가 격돌하는 ‘폭
했다. 자신은 실력이 부족해 못 간다고 아쉬워했다. 후에 성공회 사제, 주
풍의 언덕’이었으며 서로 좀처럼 접근하지 못하는 이질적인 두 개의 ‘나’
교님이 되신 분이 서강대학교를 강력히 추천하셔서 결국 처음 들어본 학
가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던 황량한 전쟁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로
교이지만 매우 이상적인 해외 유명대학과 동일하게 생각이 들어 결심을
거기서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 천착해온 나의 학문적 주제를 만났다. 그
하게 되었다.
것을 나는 ‘자아의 인식’이라고 부르지만, 결국 다이몬과의 관계를 다양 한 맥락에서 조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포구 신수동 1-1 주소만 듣고 수원에서 상경해 마포에 내려 철길을 따라 헤매었다. 간신히 학교를 찾아내어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직원들
내가 자아의 문제와 계속 씨름하고 있는 한 다이몬과의 만남은 애틋한
은 코트를 입고 일어나 퇴근하려는 찰나였다. 그날이 마감일인데 친절
추억이나 희미한 기억 속의 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현상과 달리
하게 입학원서를 내주었다. 서강대학교는 다른 대학교와 처음부터 차별
세월이 갈수록 생생하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며 더욱 깊은 의미
화 되었다. 160명 정원인데 커트라인에 이르지 못한 학생들을 합격시키
를 지니며 구체화된다. 그러한 의미로 서강대학 시절은 분명히 50여 년
지 않아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휴강이라는 것도 없고 꼼꼼히 출석을 체
전에 내가 경험한 과거의 일부이지만 다이몬과의 방황은 아직도 현재 진
크하는 철저한 강의와 거의 매일 아침 영어시험이 있어서 마치 고등학교
행 중이다. 나는 그 시절을 아직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생활의 연장인 듯싶었다. 강의가 끝나면 도서실에서 참고도서를 찾아 계 속 공부해야만 했다. 해뜰 때 등교하고 해진 뒤 하교하는 것이 일상이 되 어버렸다. 거의 경기, 이화, 서울, 경복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대부분이어
4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3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서 지방에서 온 유일한 시골아이는 고교 시절처럼 빛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교 생활은 즐거웠다. 원어민 교수님에게 영어, 독일어와
되어 화해와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 되어 감사했다. 2011년 12월 29일 고 인이 되신 신부님의 영혼이 편히 쉬시기를 기도 드린다.
영문학, 철학 강의를 들으며 배우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때로 주말에 교 수 신부님과 함께 산행을 하면서 노래도 많이 불렀다. 금요일 오후엔 당 시 길로런 학장신부님이 친히 지도하는 스퀘어 댄스를 배우며 교수와 학 생, 학생들 사이도 매우 친숙해졌다.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학교에서 터득한 신앙은 수도자가 되려는 나의 꿈을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공휴일이나 방학 때 신부님들이 지도하시는 피정기도에 참석하곤 했다. 이 세상을 정의롭고 평화를 이룩하는 화해공동체를 만들 어 가려면 수도생활이 꼭 필요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박고영 신부님은 “인류번성일랑 걱정 말고 모두 수도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데일리 총장신부님은 매사에 하느님의 현존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셔 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일인지 기도하며 선 택하는 습관이 생겼다. YWCA와 교회여성단체 활동에 참여하면서 인간 의 존엄성, 창조질서 회복, 성性평등을 위해 수도자로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힘은 같은 맥락에서 도움이 되었다.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일 본, 국내 등지에서 갖는 여러 국제회의에서도 ‘서강 언덕’에서 배운 영어 실력이 각광을 받았다. 많은 외국인들을 만나면서 소통에 불편이 없는 것은 모두 ‘서강’에서 기초를 잘 다듬었기 때문이리라. 프라이스 신부님 과 번브럭 신부님께 수업한 영어 스피치 훈련은 자신감을 갖고 대중 앞 에 서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었다. 2010년 서강대 설립 50주년 행사에 참석하러 한국을 방문한 데일리 총장신부님이 우리 수도원을 개인적으로 방문하시어 여성사제인 내게 축복을 해달라고 하신 요청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다. 학교 채플 미사 에 참석했을 때 성공회 교우인 내게 영성체를 베풀지 않으신 것에 관련
4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5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자랑스러운 江二會
간 친목, 어려운 후배 장학금 지원 등 선배 본연의 일을 꾸준히 해왔다.
홍범표(61 경제)
또, 10년 가까이 매월 산행과 점심모임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개교 50 주년 기념행사, 입학 50주년 홈커밍데이 행사 등 크고 작은 수많은 행사 를 개최했고, 여러 방면에 걸쳐 모교발전을 지원해 왔다. 뿐만 아니라 동 문으로서 모교에 조금이라도 도움될 만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몸과 마음
강이회江二會는 어느덧 어르신 대접을 받는 망팔望八세대의 61학번을 가
을 아끼지 않았다. 올해 2월 동문 대통령 퇴진 시국미사가 예수회센터 성
리킨다. 남녀회원 모두 100여명의 명단 중 20% 가까이 이미 고인이 되
당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된 동문
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30여명도 주로 북미에 흩어져 살고 있다. 국내에
대통령을 응원하자는 취지에서 몇몇 남자 동기들과 시국미사 규탄집회
있는 50여명 중에는 연락이 전혀 안 되는 동창이 몇 있어서 큰 모임을 가
에 참석하기도 했다. 모교 정문에서 만나 점심모임을 마치고 규탄집회에
질 경우에도 인원이 40명을 초과해본 일이 없다. 모든 학과를 다 합쳐도
참가한 뒤 ‘강이회 뉴스’로 국내외에 전했다. 참석 못한 동기들이 격려하
다른 종합대학의 일개학과 인원보다 적은 교우모임이 강이회다.
는 메일과 작금의 사태를 우려하는 전화가 한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졸업 후 동창회를 결성해서 역대회장들이 2년씩 꾸준히 활동해오다,
강이회는 국내외 동기들의 만남과 소통을 활성화하는 데 공을 들이는
2005년 10월 가을행사에서 새 회장단으로 지명된 뒤 아직까지 바통을
편이다. 적은 인원의 소수정예 소小공동체지만 해외거주 동문 비율이 비
넘기지 않고 자의반 타의반 고승범 동창과 번갈아 가며 장기집권 하고
교적 높다. 이들에게도 국내동문 근황, 모임안내, 선별한 유익한 자료 등
있다. 작년 12월 총회에서 임원개선을 제의하였으나 참석한 회원 모두가
을 이메일에 담아 정기적으로 전하는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국외 동
“후배 박근혜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아무 말 말고 그대로 연임하라”며
문들이 모금운동에 호응해 적극 참여하는, 서강다운 열성과 사랑을 보이
강권하는 통에, ‘가문의 영광을 계속 이어가겠노라’는 연임승낙 인사말
는 바탕이 된다.
을 ‘후딱’ 한 바 있다. 오래전 내가, ‘동창회에 관여할 것 같다’는 말을 넌지시 건네자 집사람
편한 서울 근교 등산을 즐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 탓에 산행 참가
이 “동기모임에 재정적 후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대답도 않고 ‘은
율이 떨어지고 식사모임에만 참석하는 친구들이 늘어난다. 노년기에 접
퇴 후 봉사활동 하는데 꼭 돈 있어야 직책을 맡느냐’는 생각을 내심 해본
어드니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일 게다.
기억이 난다. 많으나 적으나 모임을 지속하려면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 지만, 강이회는 연회비를 납부하는 일도 없이 여태껏 잘 운영되고 있다. 그동안 큰 행사가 있으면 국내외 두루 모금운동을 벌이거나 형편이 되 는 대로 십시일반 모아 계획한 대로 집행했다. 모교 발전, 국내외 회원
4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몇 년 전만 해도 산행과 식사모임에 많은 동기들이 참가했고, 오르기
요즈음 만나면, 건강 상태부터 묻는다. 주요 관심대상이 건강에 모아 진다. 그래서다, 살아온 횟수를 세지 말 것, 앞으로 만날 친구 수를 더 늘 일 것, 더 자주 만나 노년기를 행복하게 보낼 것 등을 강이회 모임의 비 전으로 삼았다.
47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이메일과 전화로 소통하고, 보고 싶을 때 수시로 만나면서 존경과 사
가장 소중한 인연
랑을 전하는 ‘보배 같은 학우들’인 61학번으로서 한 가지 소망이 있다.
김미자(64 국문)
더 나이 들기 전에 남녀동문들이 부부동반으로 해외성지 순례를 단체로 가는 것이다. 아니면 국내동문들이 해외동문들을 방문해 어울리면서 ‘추 억여행’을 함께하는 것이다. 강이회 동기들은, 모두 장수하되, 살아 있는 날까지 ‘서강가족의 돈독 한 우정’을 각별히 나눌 것이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2회 졸업생이다.
얼마전, 동문회 50년사 발간을 책임지고 있는 후배에게서 연락을 받 았다. 동문회 50년 역사에 22년을 일했으니 그래도 그 세월에 얽힌 이야 기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싶어 얘길 듣고 싶단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 고가다 문득 그 친구 하는 말, “그런데요. 일하셨던 당시의 〈서강옛집〉을 보면 거의 전부가 ‘돈’과 관계되는 것이 많았어요.” 순간 망치로 한 대 얻 어 맞은 듯 머리가 띵하다. 그랬었나? 그랬구나. 근무 20여년 넘던 그 시 간들이 촤르르 내 앞에 쏟아져 나온다. △ 85년 장학재단 설립 △ 90년 개교 30주년 기념 알바트로스탑 건립 △ 2002년 동문회관 완공 등등. 82년 처음 만났던 홍익찬(61 경제) 동문회장은 자수성가한 중소기업 사 장님다웠다. 허리띠를 조이고 조이며 기금 늘이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동문들의 모교 사랑을 키우기에 홈커밍데이 행사를 시작하기도 했다. 홍 회장의 4년은 동문회 종자돈 마련을 위한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86년 취임한 양호(62 경제) 회장은 뛰어난 국제적 감각과 추진력, 기획 력으로 동문회 위상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역할을 했고, 몇 번의 학교와 의 조율 끝에 동문회 자체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 완성시켰다. 물론 기금 을 마련하는 데는 수많은 동문들의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재단 설립을 위해 교육청으로 세무서로, 함께 뛰어 다니던 윤낙기 (72 경제) 당시 동문회 감사를 잊을 수가 없다.
88년 취임한 이우진(60 사학) 회장은 동문들에게 서강 정신과 애교심
4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9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을 심어 놓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기부한다는 것도 훈련입니다.
급에서 쪼개 내어 동문들이 보내 준 기금은 후배들의 학업에 힘이 되어
동문들이 모교를 위해 기부할 수 있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동문들
주었고, 모교와 동문회에 보내주는 사랑의 응원이기도 했다. 어떤 분들
의 모교사랑의 정신을 결집하는 것을 형상화하여 알바트로스탑을 건립
은 말하기도 했다. 다른 학교처럼 큰 기금을 내는 동문이 필요하다고. 하
했으며, 동문들의 쉼터는 물론 후배들에게 지속적인 장학금 지원을 위한
지만 서강은 작은 학교였고, 그래서 가족같은 분위기라 얘기들 했다. 이
재원이 될 수 있는 동문회관을 제안, 추진했다. 서강의 뿌리를 찾아 개교
젠 세월이 흘러 동문들 중엔 성공한 기업가, 대기업의 CEO, 뛰어난 예술
공신인 게페르트 신부의 동상, 초대 총장이셨던 데일리 신부의 동상 제
가, 언론인 등 상상할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졸업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
작, 추모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지만 아직도 서강의 핏줄 속에 ‘남을 위한 삶’이라는 소박하지만 가장 값
98년, 김경해(68 영문) 회장은 추진되어 오던 동문회관 건립을 위한 막
진 모토가 흐르고 있음을 서강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새로 임명된
바지 작업으로 모금에 박차를 가했으며, 그 당시 마지막 큰 기금을 희사
부회장단의 면면을 보며 새삼 그들이 동문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이었
해 줬던 김윤종(69 전자) 동문은 회관 완공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던지, 그 기억들이 새롭게 떠 오른다. 직장의 총무로, 갓 사업을 시작한
힘들던 상황에서도 대출까지 받아 거금을 희사했던 김덕용(76 전자, 현 동
병아리 기업가로, 언론사의 막내들로, 동문회가 귀찮게 했던 온갖 궂은
문회장), 두 동문에 대한 감사와 감동은 아마 내 평생 갖고 갈 선물일 것
일을 맡아 했던 사람들.
같다. 학교와의 모든 문제점들을 원만히 해결했지만 완공 당시까지 해결
“가장 비싼 고급인력을 무료로 쓰고 있는 곳이 동문회”라고 누군가는
되지 못한 학교측과의 자잘한 마찰들을 대기업 CEO 출신답게 깔끔히 마
말 했었지. 동문회라는 이름으로 참 많은 훌륭한 서강인들과 만났고, 그
무리한 정재관(60 영문) 회장은 2002년 동문회관의 완공식을 갖게 된다.
들의 도움으로 난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그 소중한 인연을 내 기억에
그 세월 동안 이 모든 것이 ‘돈’이었으니 어찌 ‘돈’ 얘기로 〈서강옛집〉
가득 담고 있어 아직도 ‘서강’은 내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곳인가 보다.
이 가득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이제 더 이상 동문들의 어려운 월급봉투를 쪼개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해진 재원의 기틀이 마련 되어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려운 환경에서 따듯한 나눔이 생겨나듯, 힘들고 어려웠던 동문회의 살림살이에서 눈물 겹도록 아름답던 마음들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한다. 장학재단 설립을 시 작하며 동문들에게 보낸 설립취지의 글과 협조의 글에 맨 먼저 도착한 소식은 지금은 대통령이 된 박근혜(70 전자) 동문의 50만원 기금 희사였 다. 그 다음 도착한 희소식은 전임 동문회장이었던 김호연(74 무역) 동문 의 현암장학금 희사 소식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조그만 월
5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51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추억의 앨범
서강의 처음
첫 학생 모집공고(한국일보 1960.2.21)
첫 합격자 발표(1960.3.28)
첫 합격생 등록(1960.4.12) 1960년 첫 입학 시험 국어 시험지
5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60년 첫 입학 시험 영어 시험지
53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1960년 60학번 학생증
첫 수업(1960.4.18)
1호 졸업장
1964년 2월 8일 첫 졸업식 안내 브로셔
첫 피크닉(1960년 5월 7일 북한산)
5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55 총동문회, 작지만 힘찬 첫 날갯짓
2 장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서강대학은 우리나라 대학에선 처음으로 카운슬러 제도를 엄격하게 실 시하고 있다. 학생들이 불과 300여 명밖에 안 되는 이 대학에선 20여 명
내가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 1676 년 아이작 뉴턴이 로버트 후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676년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의 난쟁이와 같아서, 우리 자신의 신체적 우월성이나 시력으로 멀리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인들의 거대한 크기로 높은 곳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의 전임교수들이 학생들을 10여 명씩 도맡아 ‘지성의 벗’이 되어주고 있 다. ‘대학은 학문의 방법뿐이 아니라 이지적理智的인 생활을 구체적으로 의논해주는 곳’이라고 여학생 카운슬러 담당 김인자 교수는 설명한다. 학생과 교수 사이의 서먹한 간격을 좁히기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피크 닉을 가기도 한다. 지성의 향기는 강의를 듣는 것으로만은 풍겨질 수 없다는 것. 길로런 학장은 학생들로 하여금 적어도 한 주일에 몇 차례
그렇게 멀리 보는 것이 가능하다.
씩은 카운슬러 교수를 찾아보도록 하고 있다. 전임교수들은 학생들과
─ 12 세기, 샤르트르의 베르나르Bernard de Chartres 12세기,
의 접촉을 갖기 위해 타교他校 출강을 삼가고 있다. 학생과 교수의 접촉 은 강의의 연속이라는 것이 서강대학의 이상적인 모토다.
1964년 2월에 고고성呱呱聲을 울린 서강대학교 동문회는 이후 10여 년 동안 ‘거인의 어깨’를 만들어나갔다. 동문 숫자도 많지 않았다. 독자적인 재정 기반도 없었다. 지속적인 사업을 계획하고 펼치기가 어려웠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문회의 자생력을 키우고 독자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오늘날의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먼 곳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던 당시 동문들에게 존경을 바친다. 5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62년 5월 9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교수는 지성의 벗으로서, 서강대 학 활발한 카운슬러’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이다. 서강을 형용하는 말 가 운데 ‘서강 가족’이라는 표현이 특히 자주 회자되는 것의 근본적인 이유 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학생 숫자가 많지 않고 개교 당시 기준으로 전 임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약 15.9명에 불과했으며 캠퍼스 규모도 크지 않 기에 학생들끼리, 그리고 학생과 교수들이 친밀하게 대면 접촉할 기회가
57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많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겠으나, 그러한 양적·물리적 조건만으로
에 종종 열린 야외 파티가 늦게 끝나기라도 하면 학장 신부가 직접 학교차
는 ‘서강 가족’으로 일컬어지곤 하는 서강인들의 친밀한 유대 관계와 각
를 운전해서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엄
별한 공동체성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정식(60 철학. 모교 철학과 명예교수) 동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많은 동문들이 회고하며 증언하듯이 초창기 교수들과 학교 측의 제도적 또는 비공식적 노력들이 서강인들을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서 마치 친형처럼 우리의 투정을 모두 들어주셨던 차하
가족으로 이어주는 탄탄한 끈이 되었고, 그러한 끈은 지금까지도 하나의
순 교수님과, 온몸으로 인격을 보여 주셨던 구상 교수님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중요한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초창기 서강은 학생들 간, 그리고 학생
당시 서강역 근처에 있던 차하순 교수님 댁은 학생들이 항상 모여 말씀 듣고 이야
과 교수 간 인격적 교류와 우애를 다져나가는 것이 대학 교육의 중요한
기 나누느라 밤늦도록 불이 꺼질 줄 몰랐어요. 입학식 날 길로런 당시 학장님이 서
축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툰 한국말로 ‘우리 학교는 여러분의 머리, 손, 발, 그리고 머리를 모두 가르칩니다’라
개강 및 종강과 더불어 진행한 미사를 비롯해, 부활절과 성탄절 미사
고 훈화한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성과 전문 기술뿐만 아니라 인격적 균형을
등 빈번하게 개최했던 가톨릭 관련 행사도 학생들 간 및 학생과 교수 간
갖춘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미였던 거지요. 당시 우리는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최
친밀한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됐다. 쉬는 시간이면 교수와 학생이 함께 배구
고의 교수님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겁니다.
를 즐겼다는 이야기, 본관 옥상에서 펼쳐진 신입생 환영 파티는 물론 주말 지성知性이란 단순히 지식을 연마하는 것만으로는 갖출 수 없으며, 타 인들과 활발하게 소통함으로써 쌓이는 인격이 함께할 때 비로소 온전한 지성의 지평이 열린다는 것. 대학에서 배우는 ‘큰 배움’大學이란 강의실과 강의실 바깥, 강의 교재와 강의 교재 외의 다른 책, 책 속의 지식과 책 바 깥의 인격, 학교 안의 생활과 학교 바깥의 삶, 이러한 것들을 두루 널리 익히고 균형 있게 경험하는 배움이라는 것. 초창기 서강에서 이 점을 몸 소 체험한 학생들은 졸업 후 동문회 활동에서도 그것을 실천해나갔다. 60학번 동문들이 졸업 직후인 1965년 1월 9일 시내 모 중식당에서 졸 업생 월례친목회를 열어서 길로런 신부와 존 E. 번브럭 신부를 초청한 것을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며, 1965년 5월 16일 동구릉에서 동문 회 야유회를 개최한 것, 1969년 8월 동해안 하조대 별장(학교 수련원)에서 1961년 동해안 물치에서의 여름수련회
5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여 명 졸업생들이 모여 ‘즐거운 재회의 기쁨과 여름을 만끽한 것’ 등도
59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6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이에 해당할 것이다. 길로런 신부는 1966년 2월 17일 한국 국민으로 귀
개교한 지 10년이 안 되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하여 활동하
화했는데(한국명 길로련吉路連),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국인이 한
는 동문들은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는 탄탄한 실력을 갖추
국에 귀화한 첫 사례였다.
었다는 점에서 큰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으로, 어느 분야에서든
동문들 간에는 물론이고 동문과 학교의 관계에서도 이 점은 예외일 수
학연이 유달리 중시되는 사회 풍토에서 선후배 간, 동문 간 유대를 강화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61학번 2회 졸업 동문들이 1965년 3월 약 200달
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을 법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이른바 ‘소
러 상당의 방송 기재를 학교에 기증한 것은 장학금 외의 ‘학교에 대한 최
수 정예’의 정예로운 실력이 동문 간 네트워킹을 통하여 한층 더 정예롭
초의 기부’이자 ‘최초의 현물 기부’라는 역사성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우
게 펼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동문들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리나라의 1인당 GNP가 100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
할 수 있을 것이다.
면 200달러는 막 대학을 졸업한 많지 않은 숫자의 동문들이 모으기가 결
1969년 4월에는 모교에 봉직하고 있는 40여 명 동문들로 구성된 ‘서
코 쉽지 않은 액수였다. 1966년 9월 김창애(60 사학) 동문이 장학금으로
강 재직 동문회’가 첫 모임을 가졌다. ‘전체 동문회 산하의 한 그룹 동문
50달러를 기부하고(김 동문은 1968년에도 100달러를 도서관에 기부), 이듬해 9
활동’으로서는 사실상 최초였다. 모교에 재직하고 있는 동문들이 모였기
월에는 박봉준(60 사학) 동문이 금일봉을 기부하여 장학금과 사학과 학생
에, 회원들 간 상호 친목과 유대라는 기본 목표 외에도 ‘모교 발전과 재
학비 보조금으로 지급하기도 했다.
학생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등을 원활히 한다’는 특징적이고 의미심장한
1968년 5월 14일에는 동문회 주최로 재학생과 졸업생 간 유대 강화를
목표를 세우며 출발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모교 재직 동문들은 각별
위하여 본관 301호에서 ‘학창 생활 중의 난제’, ‘직업 선택’ 등을 주제로
한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모교 발전에 직접 헌신하면서 총동문회 사업 추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이나 학교 발전을 위한 기부
진과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외에 훨씬 직접적이고 친밀하며 실질적인 교류와 기여를 시작했던 것이
위에서 언급한 몇몇 동문회 사업과 활동들은 오늘날 분야 별, 직능 별,
다. 1968년의 이 행사는 총동문회 역사에서 동문회, 재학생, 학교가 사실
기타 다양한 단위 별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강화되고 있는 동문
상 공동으로 협력하여 치러낸 최초의 행사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네트워킹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대학에 따라서는 그야말로 동문
1969년 12월 18일에는 1970년 2월에 졸업 예정인 재학생들이(66학번,
들끼리 똘똘 뭉쳐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하는 대학들도 있다. 학연으
7회 졸업) ‘사회 진출 준비 및 선후배 간 유대 강화’를 목적으로 선배 동문
로 뭉친 문자 그대로 학벌學閥이 사실상 이익 집단화화여 공공성公共性에
들을 초청하여 학교 식당에서 간담회를 열었다. 당시 동문회는 <서강옛
반하는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타락하기도 한다.
집>을 통하여, ‘많은 동문들이 이 자리에 참석하여 사회에 첫 발을 내딛
6.25전쟁, 급속한 도시화, 근대화 등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는 살아남
는 후배들을 격려하고 좋은 조언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으려면 출세하고, 성공하려면 남을 믿어선 안 된다는 풍토가 조성됐다.
뜻을 밝혔다.
공적 부문과 제도를 신뢰하기 힘든 상황에서 사회는 급변하고 혼란스러
61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운 가운데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혈연, 지연, 학연 등 연줄과 인
은 공정한 기준과 규칙에 따라 판단한 결과이기에 어느 누구도 납득할
맥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에는 사적私的이고 배타적인 연결망만을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무조건 서강’이 아니라 ‘다르니까 서강이고,
강화하려는 풍조가 만연해왔다. 학교 동문회들이 그러한 풍조에서 자유
서강이니까 다르다’이다.
로울 수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서강의 동문 네트워크는 학교 이름 하나만으로
부문과 제도에 대한 저신뢰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울타리를 치는 경우가 많은 다른 학교들의 동문 네트워크와 비교할 때,
선진화된 사회로 도약하기 어렵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오히려 더욱 튼튼하고 한층 더 신뢰할 수 있으며 지속 가능성이 뛰어난
서강대학교는 우리 사회의 그러한 일반적인 풍토 및 풍조와 거리가 있
‘고품질 네트워크’다. 그러한 고품질 네트워크가 하나둘씩 형성되면서
다는 것이 동문들은 물론 동문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중론이다. 무조건
점차 종류가 다양해지고 범위도 넓어지는 시기가 바로 동문회 초창기부
같은 서강 출신이라고 해서 밀어주고 끌어주는 법은 없다. 같은 직장이
터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약 10년이다.
나 분야에서 업무상 자주 만나는 사이면서도 서로가 동문이라는 사실을
1970년 9월 26일 철학과 동문회 창립총회가 열려서 회장으로 엄정식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60) 동문, 부회장으로 신금진(64), 제희우(66) 동문이 선임되었다. 1971
그래서 적지 않은 동문들이 똘똘 잘도 뭉치는 대학들이 부러울 때가 있
년 1월 16일에는 생물학과 동문회 창립총회가 열려서 회장으로 황우성
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서강 스타일’은 건전한 상식과 합리적 판단에 따 라 행동하는 스타일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많은 동문들이 동의한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이 다만 ‘동문이니까’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 비판적, 무성찰적無省察的으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일종의 맹동盲動을 서강 인은 멀리한다. 같은 학교 출신들끼리 패거리를 지어 보이지 않는 장벽 을 쌓고 모종의 이익을 나누면서 타교他校 출신들을 부당하게 배제하는 학연 이기주의, 동문 독식주의로 우리 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저해하는 볼썽사나운 모습과 서강은 거리가 멀다. 서강 동문이 다른 동문을 이끌어준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강에서 쌓은 탄탄한 실력과 신뢰할 수 있는 품성을 일하는 과정과 실적에서 확 인했기 때문이다. 서강 동문이 다른 동문을 밀어주면서 ‘서강이니까’라 고 말한다면, 그것은 ‘서강이니까 역시 실력이 남다르다’는 말에서 뒷부 분을 생략한 경우일 뿐이다. 서강 동문이 서강 동문을 선택했다면 그것
6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71년 생물학과 동문회 창립총회
63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62) 동문이 선임되었고, 같은 해 2월 21일에는 독어독문학과 동문회 창
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이일영(63) 동문, 부회장으로 조황래(64), 안경숙 (65) 동문이 선임되었다. 역시 같은 해 2월에 ‘서강 졸업생이면 누구나 환
영’하는 서강OB산악회가 발족되어 회장으로 오수철(60 경제) 동문, 총무 선우관옥(62 물리) 동문이 선임되었다. 매년 2월 수석 입학생에게 동문회가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도 창립 때부터 꾸준히 이어져서 1971년에는 그 해 수석 입학생인 ‘전성빈(72 영 문. 모교 경영학과 교수) 양’에게 지급되었다. 1971년 2월까지 1~7회 졸업
생들이 기부한 ‘장학기금 희사액’은 모두 42만4000원이었다. 1971년 3 월 27일에는 존 P. 데일리 총장의 ‘서강을 위한 10년 노고’에 감사하기 위한 간단한 칵테일 파티를 학교 라운지에서 동문회장이 호스트가 되어
1970년 준공된 메리홀. 이곳에 처음으로 동문회 만의 사무실을 마련했다.
개최하기도 했다. 동문 간 우애와 동문과 교수 간 친애, 그리고 학교 발
가운데, 동문회는 개교 10주년이라는 계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
전과 후배 사랑이라는 초심에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지게 된다. 1969년 당시 김영천(60 경제) 동문회장은 <서강옛집>을 통하
1970년 10월 31일에는 동문회 역사에서 뜻 깊은 일이 있었다. 이때부
여 ‘서강 동문 제위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터 동문회가 교내에서 별도의 사무실을 확보했던 것이다. 당시 명칭으 로는 성모기념관, 그러니까 메리홀 안에 동문회 사무실이 마련되었다.
내년도 1970년 4월 18일은 바로 개교 10주년이 되는 해. 몇 번의 회합
1969년 7월에 착공하여 1970년 2월 23일에 준공식을 가진 메리홀에서
을 가졌으며 다음과 같은 윤곽을 확정지었습니다. ①그동안 이완된 동
는 1970년 3월 2일 종합대학 서강대학교의 개교식과 함께 존 P. 데일리
문회 조직을 강력히 재정비한다. ②개교기념사업의 추진을 위해 학교
초대 총장의 취임식도 열렸다. 이후 1980년 체육관이 완공되기 전까지
와 절충하여 동문들의 참여 범위와 활동 내역을 결정한다. ③임시변통
입학식, 졸업식, 각종 강연을 비롯한 거의 모든 학교 행사는 메리홀에서
으로 그동안 지급되던 동문회 장학금을 영구적인 장학금으로 전환시켜
진행되었으며 이냐시오관이 건립되지 전까지 2층에 자리한 성당은 미사
굳건한 장학기금을 확정시켜 모금키로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문 및 교직원들의 결혼식 장소로도 애용되었다.
6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앞서 언급했듯이 개교 10주년이 되는 1970년은 ‘서강대학’이 ‘서강대
개교 10주년을 계기로 ‘동문회 조직의 강력한 재정비’와 ‘지속성 있는
학교’로 새롭게 태어난 해였다. 1970년을 즈음하여 이미 살펴본 것과 같
굳건한 장학기금 확정과 모금’을 천명한 것이다. 어떤 단체든 조직과 재
은 학과 별 동문회가 속속 출범하면서 동문회 조직이 내실을 더해가는
정이 존립과 발전의 근본이다. 이는 곧 동문회의 자생력自生力 또는 자립
65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기반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 개교한 지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동
강옛집>조차 낼 수 없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문 숫자도 적으며 동문들의 연령대도 20대 후반~30대 초반인 상황. 이
지금 이곳 동문들은 서강 10주년 기념행사로서 장학기금을 걷고 있기
러한 상황에서 동문회의 자립 기반을 갖추어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
때문에 동문회비엔 신경이 안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국내에서는 장
다. 예컨대 1971년 동문회 결산자료를 보면 총 수입 100여 만원 중 회비
학기금을, 국외에서는 동문기금을 마련한다면 우린 조금 떳떳한 서강
징수 24만6350원, 총장 보조금이 12만원이었다. 1971년 2월 25일 <서강
의 졸업생으로써 마음 흐뭇할 것이 아닙니까. 해외에 계시고, 또 제가
옛집> 제46호에 실린 사뭇 간절한 호소가 당시 상황을 증언한다.
주소를 갖고 있는 80여 명이 모두 협조해 주신다면 30~100달러로 100 만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 장학기금은 1만원 정도 씩 내고 있
해외에 계신 동문 여러분. 이제야 겨우 우리 동문만의 사무실을(학교 도
습니다)
움이긴 하지만) 갖고 동문과 모교를 위한 조그만 일이라도 하려고 시동
하고 있는 참입니다만, 동문들의(대부분의) 동문회비에 대한 무관심 탓
1972년 5월 1일 사무 인계를 받은 8대 회장단은 부채 5298원의 장부
인지, 모두들 그토록 생활의 여유가 없는 탓인지 매해 동문회는 적자가
와 마주해야 했다. 당장 <서강옛집> 발행이 난항이었다. 발행이 중단될
나왔었고 올해도 예외일 순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매달 내는 <서
위기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은행 및 기업체 재직 동문들이 나서서 모은 돈 으로 겨우 위기를 넘기고 <서강옛집> 제60호를 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임시방편으로 발행중단 위기는 넘겼지만 지속성의 기반을 갖추는 일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에 1973년 10월부터 동문회는 <서강옛집> 발간의 지속성 확보와 동 문회 운영 안정화를 위하여 종신회비제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매년 연회 비 1000원을 내는 제도만 있었는데 한 번에 1만원을 종신회비로 납부하 는 제도를 추가한 것이다. 1971년 1000원이던 연회비는 2014년 5만원으 로 50배 올랐다. 우리나라 국민소득(1인당 GNI)은 1971년 291달러에서 2013년 2만6205달러로 약 125배 성장했다. 동문회는 만성적인 재정 불 안에도 불구하고 동문들의 부담을 가중시키지 않기 위해 동문회비 인상 을 가급적 최소화해왔다. 한편, 1973년 10월21일에는 제1회 동문 체육대회가 열렸다. 모교 재
1970년 3월 11일 열린 동문 정기총회
6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직팀, 실업팀, 금융팀, 교직팀으로 편을 나눠 축구 시합을 했다.
67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비를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1976년 5월 20 일 김영천 동문회장이 다시 한 번 총장과 면담하여 1976년도 1학기부터 등록금과 함께 매학기 1000원을 납부토록 하기로 합의했다. 동문회와 학 교 당국이 공동 관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납부된 회비는 인건비, <서 강옛집> 발간비, 동문록 제작 비용 등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기금으로 적립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동문회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자생력 확보를 위한 노력 을 기울이는 가운데, 학교를 위한 동문들의 기여는 꾸준하게 이어졌다. 1974년 2월 20일에 완공된 로욜라 도서관에 금융계 재직 동문회인 금강 회(金江會. 회장 변원지(61 경제))가 현판을 기증했고, 대한항공 재직 동문들 1973년 10월 21일 개최된 제1회 동문 체육대회
이날 경기는 날씨 탓으로 결승전을 치루지 못하고 모교 재직팀과 금융
(대표 전준석(64 경영))이 벽시계를 기증했다. 같은 해 5월 11일에는 60학번
동문들의 헌금을 바탕으로 로욜라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팀의 공동 우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1970년대 중반 동문회가 처한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동문회 출범 이 후 10년이 지나면서 동문 숫자가 2000명 선으로 늘어났지만 전반적인 운 영과 재정 측면에서 독자성과 자생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특히 재정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에 1975년 10월 10일 동문회 제5차 운영위원회에서 ‘동문회가 학교 당국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하나의 독립 적인 개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이 부 각되었다. 1975년 11월 당시 김영천(60 경제) 동문회장은 동문회 예산을 제도적으로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면서, 모교의 협조를 얻어 재학생 들로부터 영구회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구체적인 안을 제시했다. 그 해 11월 13일 동문회 회장단은 모교 총장실에서 M. 델마 스킬링스 태드 총장과 면담한 끝에 재학생 등록금에 동문회비를 포함시키기로 합 의하였다. ‘재학생 영구회비 납부제’였다. 그러나 등록금과 함께 동문회
6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74년 5월 11일 60학번 동문들의 헌금으로 세워진 이냐시오 로욜라 동상 봉헌식
69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1975년 5월에는 미국 보스턴 지역 동문들이 야유회를 갖고 개교 15주 년을 맞이한 모교를 위해 소액이나마 기여하자는 뜻을 모아서 150달러
사를 했고 각 학번 별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회장으로 김승안(60 경제) 동문을 선임했다.
를 동문회로 보내왔다. 이를 계기로 재미 동문회를 조직하기 위한 움직
기업체 재직 동문들은 수적으로 가장 많으면서도 매우 다양한 여러
임이 활발해졌다. 해외 동문회 결성 및 활성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
기업에 재직 중이라는 특성상 조직을 만들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
를 지닌 일이었다.
다.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실업계 동문회가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많
재미 서강대학교 동문회는 1977년 6월에 결성되었다. 당시 노버트 J.
은 기대를 모았다. 실업계 동문회의 첫 출발은 1974년 10월 20일에 열
트레이시 신부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거주하는
린 창단대회였다. 당시 창단대회에서 결성된 Sogang Alumni Business
동문 30여 명이 모인 것을 계기로, 재미 동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Group이 실업계 동문회의 모태였다.
로스앤젤리스 지역에 ‘재미 서강동문회’를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 시 회장은 이한일(60 경제), 총무는 황극만(62 경제) 동문이었다.
동문회가 출범한 1964년부터 1970년대 중후반에 이르는 10여 년 기간 은 인큐베이터에서 호흡과 영양을 공급받던 상황에서 벗어나, 독자적으
1975년 9월 4일에는 실업계 동문회가 창립총회를 가졌다. 삼성, 금호,
로 숨을 쉬고 영양을 취하며 활동을 펼치기 위해 노력했던 시기라고 할
럭키, 코오롱, 대한항공, 호남정유, 롯데 등 기업체에 재직하는 동문 모
수 있다. <서강옛집>만 하더라도 그 출발은 동문회 자체의 독자적인 발상
임이었다. 그 해 10월에 열릴 예정이던 체육대회에 참가할 ‘실업팀’을 정
은 아니었고 길로런 교수, 서정호 교수, 안우규(60 영문) 동문 등이 산파
비하기 위한 모임이기도 하였다. 당시 총회에서 스킬링스태드 총장이 축
역할을 했으며 창간 때부터 상당 기간 모교 학생처의 보조사업 개념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서강옛집> 발간을 비롯한 동문회 운영과 사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독 자적인 재정 기반을 마련하는 것. 1970년대 초중반 동문회의 노력은 바 로 그것에 집중되었다. 1979년 기준으로 누적 동문 숫자는 3914명이었 다. 그 가운데 동문회 운영 및 사업의 사실상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종신회비를 납부한 동문은 400명 남짓이었다. 그러나 그 400명이라는 숫자에 도달할 때까지 동문회장을 중심으로 한 동문회가 기울인 노력은 수적천석水滴穿石의 자세 바로 그것이었다. ‘물 방울로 바위를 뚫는다’는 것,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일 을 반드시 이뤄낼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자세와 신념으로 동문회 발전을
1970년대 동문회 총회
7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위해 헌신했던 그 시기의 동문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71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SGBS 서강방송 特期生 김성호(67 국문)
내가 칠십에 가깝도록 방송인으로서, 방송학자로서 살아올 수 있었던 토대는 서강대 방송반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SGBS 서강방송’은 나를 보듬은 보배로운 모체母體이며 가슴 설레는 귀향의 터전이다. 반세기 가 까운 세월 내내 지금까지 서강 언저리를 넘나들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2
큰 축복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방송인일 때에는 ‘언론고시’라는 신조 어를 만들어 후배들을 방송장이로 만들려 넘나들었고, 교수시절에는 강 의 차 들락거렸다. 지금은 제도권에서 멀어졌지만 여전히 이번 학기에도 언론대학원 강의로 이 바닥에서 노닐고 있다. 나는 1966년 늦가을 충남 솔뫼 근처 향리에서 가을걷이를 끝내고 허우 적대며 상경하여 버겁게 서강인이 됐는데, 입학식도 하기 전 1월부터 ‘서 강방송반원’이 되었다. C관 입구에 나붙은 방榜을 보고 찾아가 그날부터 방송 준비를 서둘렀다. 마침 지금은 없어진 ‘유엔군총사령부방송국VUNC’ 에서 기획한 ‘대학생 시간’에 격주로 참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 면 그때부터 서강방송은 내 숙명이었는지, 전 학년 내내 절절하게 활동 하다 4학년 2학기인 1970년 9월 30일 KBS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준비했던 ‘방송인되기’ 목표를 이뤘다. 무엇보다 감개무량 한 것은 입사하고 보니 그것도 서강인 1호 KBS맨이 된 것이다. 서강방송반의 본격적인 활성화는 아무래도 1968년 신문방송학과가 창 설되고 그 웅지의 인재들이 입학하며 싹트기 시작했다. 한때 “방송가에 서 서강 출신의 파워가 대단합니다”라며 여의도 한 켠에서 서강을 부러
7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73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워했는데, 대체로 서강 출신 68, 69, 70학번 등이 명 PD로 각광받던 시
지誌가 선정한 세계의 지도자 1위인 프란치스코 교황도 서강의 모체인 예
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 나는 서강방송 실무국장을 맡아 68학번을
수회가 낳은 성현이니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나는 곧잘 서강 후배나
추스르고, 69학번 신입요원을 선발하여 이들과 서강방송의 비상을 위해
제자들에게 “서강에서 한국의 대통령도, 세계의 대통령도 나왔는데 우리
밤낮으로 함께 뒹굴며 만리장성을 쌓아갔다. 특히 그때 미국인 신부님께
잘 해보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 절체절명의 호기에 전 서강인들이
서 본관에 라디오 스튜디오를 큼직하게 마련하셨고, C관 밑에 서강방송
자긍심을 북돋우어 서강을 세계 속의 대학으로 키워나가자. 정과 화합이
국 간판을 걸 수 있는 공간도 잡았으니 본격적인 날개를 단 셈이었던 것
넘쳐나는 서강 속에서.
이다. 이 시절에 본격적인 교내방송을 위하여 C관 천정과 운동장 언저리 에 스피커를 설치하며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기억이 저편에서 뭉게구름 처럼 피어오른다. 서강방송국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나를 ‘특기特期 선배’로 칭하여 부른 다. 신방과 1회 68학번부터 1기로 쳐서 아마 지금 47기까지 내려간 모양 인데, 이 호칭이 마냥 나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거기에다 연말 모임에 가 보면 <서강방송국 동문회보>에 ‘Since 1967’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자 못 심기가 불편하다. 내가 창시한 것도 아니고, 내 선배들도 있었는데 말 이다. 차라리 신방과가 창과된 1968년부터 하든가, 그러나 모두들 못들 은 척한다. 총동문회 창설 50주년에 동참하며 내 심신心身의 보금자리 서강방송국 도 반세기를 맞을 때가 다가옴을 확인한다. 이러한 계기에 ‘특별한 서강’ 을 복원하는 데 작은 도구가 될 것을 다짐해 본다. 어느 공동체이든 세월 과 변화 앞에 맥을 못 추는 법이라지만 서강공동체 구성원들이 힘 안들 이고 도약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 실천해 나가기를 제안한다. 그 첫 걸음은 서로 관심과 애정 갖기이다. 서강 내부에 “정情이 메말라 있다”든지, “서강 구성원은 모래알 같다”라는 막막함에서 탈출해야 하지 않을까. 주인의식의 결여도 문제 중의 하나일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서 강의 시대이다. 시대적으로 서강에서 나라의 1인자도 탄생하였고, 포츈
7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75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샛별처럼 빛나야 할 서강
・복합화의 파고가 쉼 없이 밀려오긴 했다. 그렇더라도 서강의 생동감이
이윤선(69 신방)
이리 쇠락하다니 어쩐 일인가? 이젠 더 휩쓸리지 말고 지난 50년을 뒤로 하고 향후 50년, 100년을 향해 다시 서강의 주춧돌을 새로이 놓아야 한 다. 총동문회는 이 일에 앞장서야 하고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사회, 대 학집행부와 함께 동문회는 서강 공동체의 3대 축이 아닌가? 그중에도 7
50년이 됐다. 대학이 문 연 지, 그리고 동문회가 결성된 지. 처음엔 참 으로 샛별처럼 빛났다. 맑고 밝았고 산뜻했다. 새로움이었고 신선했고
만 여명의 동문을 대표하는 통시적 대표 주체가 바로 동문회다. 그러니 동문회가 힘 있게 나서야 한다.
독특했다. 깐깐한 학사 운영, 엄정한 학사관리에 시대 선도적 국제 감각
이를 위해 먼저 동문회는 서강정신, 서강 스타일, 서강문화를 위한 견
만으로도 족히 구별되었고 다름 그 자체였다. 알맞게 작았고 한 울타리
인집단이 되어야 한다. 동문회가 이를 수렴, 정립하고, 다듬어 퍼뜨려 세
에 공동체적 연대감이 꽉 찼다. 모두의 눈빛이 또렷이 빛났다. 60년대 서
우고 퍼지게 해야 한다. 곧 동문회는 서강문화의 집결, 용해, 발신 거점
강의 긍지는 모든 구성원에게 공유되었던 ‘겸허한 차별적 수월성’ 그것
이 되어야 한다. 서강문화를 가다듬어 이끄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떠한가? 안타까움이요 답답함 아니 무 거움 바로 그것 아닌가? 대학평가 순위가 10위권대로 떨어졌음을, 한국
둘째로 동문회는 서강 공동체의 감시집단이 되어야 한다. 서강 공동체 를 이루는 다양한 구성 집단을 아껴 살피고 두드려 힘 돋우고 두루 건강 하게 아우르는 생명력 넘치는 활기찬 감시집단이 될 필요가 있다.
인 총장시대의 혼란과 부진을, 이사회의 모호한 존재감을, 동문회의 방
셋째, 동문회는 서강의 미래를 가늠하고 떠올려 디자인하는 창조집단
향감각 상실을 탓함이 아니다. 대학 구성 집단 모두의 수월성이 서강의
이 되어야 한다. 서강을 가장 사랑하여 보살피는 집단이 동문회여야 하
수월성을 이끌진대 그 어느 한 집단 탓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고 그러기에 서강의 미래를 중심적으로 보듬어 창조해 나가는 집단이 바
의 탓이요 잘못이요 책임이라 하더라도 도대체 50년간 쌓은 서강정신은
로 동문회여야 한다.
무엇이고 서강 스타일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이것조차 없거나 안보이면 서강은 그야말로 속빈 강정이다.
동문회는 단지 학연 집단이 아니며 친목단체가 아니다. 더욱이 수동 모방적이고 소극적인 관례적 기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서강정신이 결집
서강다움은 어디 갔는가? 서강스러움은 과연 있는가? 서강 혼은 살아
되고 서강문화가 피어나며 서강 스타일이 다듬어지는 <서강이즘Soganism>
있고 서강 이미지는 뚜렷한가? 50년이면 적어도 이런 것을 알고 느끼고
의 근원적이고 종합적인 발원지가 되어야 한다. ‘서강다움’을 살리고 세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워 다시 서강을 샛별처럼 빛나게 하는 것, 그것이 동문회 있음의 가치이
물론 이런 것을 느껴 드러내기에 지난 50년이 혼란스런 변곡의 시대였
고 몫이고 참이고 뜻일 게다.
기는 하다. 서구 지향 개방화,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다원・다양화, 융
7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77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1974년, 무너진 대학의 봄
상 군법회의 재판이 열렸다. 생사행방 모르는 가족들을 비롯해 외부와는
박석률(70 경제)
철저히 차단됐다. 당시 유신헌법에 의해서도 당연히 보장된 기본적 인권 조차 실종됐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인 접견권마저 원천 차단했 다. 비상 고등군법(2심) 재판정에서야 비로소 선임된 변호인은 “군법재판 1심에서 사실심리는 다 끝났다”는 재판장의 단 한마디 제지로 학생들에
그해, 대학의 봄은 무너지고 말았다.
대한 사실신문조차 거부당하는 초유의 억압 하에서 재판은 끝났다. 민청
1974년 3월 28일 서강대 시위가 있던 그날, 오후부터 다음 날에 이르
학련 사건 관련 당사자들은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기까지 중앙정보부는 서울문리대생 수십명을 비롯해 학생들을 사전 연
세상에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상고를 포기했으며 형이 확정돼 징
행해갔다. 이어 4월 3일. 대통령은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하며 특별담화
역을 살겠다고 작심한 학생들을, 끌려간 지 8개월 만에 처음으로 만나 접
를 발표한다. “작금의 전국적 학생 데모는 불순세력에 조종되고 이와 결
견한 가족의 인터뷰(1974년 12월 2일, 동아일보)로, 비로소 이 소식이 알려
탁하여 정부전복을 획책”하는 “인민혁명을 기도한 확증을 포착”했으므
졌다. 그해 가을, 일부 언론에서 ‘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어 이
로 “발본색원 엄단”해야 한다고 대통령이 선언한 날이었다.
폭압적인 겨울공화국을 빠져 나오려고 맞섰기에, 그나마 이 정도의 보도
이날 대통령 담화에 의해, 구체적인 수사를 할 것 말 것도 없이 폭력으 로 일제봉기를 획책한 불순세력으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나 중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약칭됨)이 규정되고 만다.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조차 봉쇄되어 발견되면 끌려 나와야 했다. 비상 군법회의 재판으로, 불순 공산주의 세력에 조종돼 정부 전복과 국
모를 일으킨 주동자들을 최고 사형에서 징역 5년에 이르는 중형에 처하
가 변란을 획책한 것으로 언론에 공표된 ‘민청학련 사건’ 관련 학생들은
며 법관이 발부한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여, 현역 군인들로 구성되는 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이 험악해진 세상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 사이 실직
상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게 한다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는 이 조치
을 당한 부모들을 대신하여 당장 생계현장에 나서야 했던 학생들은 기관
에 위반하여 수업을 거부한 자도 최고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한다.
원의 감시와 사찰로 막노동조차 못하고 쫓겨 다녀야 했다. 그야말로 사
상 군법회의에서 중형을 받았다. 서울대생 40명, 전남대생 14명. 서강대 생은 11명으로 3위를 차지했다. 한국사신론, 19세기사, 죤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공부하던 서강 언 덕. 대학의 봄이 무너진 그해 무더운 여름. 삼각지의 국방부 막사에서 비
78
1975년 2월 15일. 풀려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심지어
4월 3일에 이르기까지 유신철폐, 긴급조치 철폐를 외친 순수한 학생데
이날, 대학의 봄은 무너지고 말았다. 전국적으로 108명의 학생들이 비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라도 알려졌다.
회 최하층의 비참한 삶을 강요당했다. 서강 언덕에서는 수 십명의 학생들이 이후 또 다른 긴급조치 발동으로 유신체제가 종말에 이르기까지 고행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의 대학이 누리는 봄은 이렇게 해서 찾아온 것이니, 엄혹하던 시절 민주 화에 헌신한 이들의 아픔을 서강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79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동문회관 준공의 환희
친분이 있었던 동문들부터 시작하여 회관건립기금 모금에 조금이라도
염정순(70 수학)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문들을 찾아다녔다. 학부동문은 물론이고 경영대학 원과 최고경영자과정 동문들까지 서강인이라면 모두가 대상이었다. 광 주, 제주, 부산, 심지어 미국 남가주 등등 국내지부는 물론 해외지부까 지, 학번모임부터 직장모임까지 모임마다 쫓아다니며 염치없이 모금 이
서강은 나에게 오늘날 당당히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
야기를 꺼냈다. 때문에 많은 동문들이 나에게 부담을 느꼈을 것이고 또
해준 친정과 같은 곳이다. 학부재학 중에는 서강이 어떤 곳인지 또 서강
나를 좋아했던 분들도 의식적으로 나를 외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나에게 어떤 힘이 되어줄지도 모르고 그냥 떠밀려서 철부지처럼 학부
그때 본의 아니게 나에게 괴롭힘을 당한 많은 동문들께 지금이라도 죄송
생활을 마쳤다. 아마도 여학생이었기에 사회활동을 하리라는 생각을 하
스러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결혼 후 시작한 사업을 현재까지
어렵게 약정들을 받아 놓았지만 설상가상으로 생각지 않게 IMF사태를
35년째 운영해 오면서 학창시절 나도 모르게 배어 든 서강의 분위기에
맞아 동문회관 건립기금에 제동이 걸렸을 때 무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강동문들의 단합된 힘으로 셋방살이를 면할 수 있는 동문회관이 완공
엄격한 학사제도와 인성교육, 교수님들의 책임감 있게 최선을 다 하는
되었을 때, 모금하느라 힘들었던 4년여의 시간들이 드디어 해냈다는 뿌
가르침, 열심을 다하는 교우들, 이러한 것들이 기업을 오랜 동안 유지 할
듯함으로 그 미안함을 지울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좁은 교내에는 정말 많
수 있도록 나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준 것이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시작
은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내 눈길이 가는 곳은 역
하게 된 경영전문대학원과 최고경영자 과정STEP에서도 정말 많은 동문들
시 동문회관이다.
과 교수님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지금도 동문회관에서 모이는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많은 동문들의 마
그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받은 만큼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아직까지도
음이 모여서 만들어진 만큼 내 집같이 예쁘고 깨끗하게 오랫동안 잘 관
학교의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그중 가장 남는 기억은
리되고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또 동문회 발족 50주년을 맞아 동문회 발
제21기 회장단의 동문회관 건립기금 부회장을 맡아 모금을 책임지게 되
전에 더 많은 역할과 기여를 담당하는 생산적인 동문회관이 되었으면 더
었던 일이다. 학교부지가 좁아 교내에는 동문회관을 지을 수 없다는 학
욱 좋겠다는 바람이다.
교 측의 의견에 맞서 반드시 학교 안에 동문회관을 지어야 한다는 회장 님들의 포기하지 않은 노력으로 정말 어렵게 총장님의 허락을 받았을 때 는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그때 참 많은 동문들을 만났다. 동문회 김미자 사무국장님과 평소에
8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81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가을볕 야외수업
오늘 조금 깨달았다. 그들은 지식 조각들은 엄청 많이 확보하고 있지만,
정훈(70 신방)
그리고 학점과 취업에 극도로 적극적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 자기 존 중감에 무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면 깊숙이 자중자애를 바탕으 로 하지 않고서 진정한 타애他愛가 있을 수 있을까? 자기 부모를 어쨌거 나 존중하지 않고서 자기네 신혼부부가 희망을 심으며 출산할 수 있을
오늘 바깥에 나가 수업했다.
까? 자기를 세워나가는 성취 의욕과 직종 철학을 깨닫지 않고서 연봉과
후배들에게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데 학생 시절과 선생 경
무사안일 기준으로 취업전선에 매달린다면 무슨 미래가 있을까?
력 통틀어 야외수업은 처음이다. 장소는 로욜라 동산으로 정했다. 늦은 가을볕이 이른 찬바람을 이겼다.
모교는 르네상스를 목말라 한다. 전문가들이 여러 가지 대책들을 제시 하시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자기 존중, 자기 가족 소중함, 모교 정신’
밖에 나가 듣고 말하며 배달된 짜장면 먹길 참 잘했다. 나는 표현 기법
을 우리 역사와 함께 심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 선두에 서강에 몸담
보다 “먼저 인간이 되자”를 학기 내내 강조하므로 결국은 소통과 자존감
고 있는 교수진과 교직원 선생님들이 앞장서서 예수회 정신과 함께 가르
존중이 주제인 셈인데, 오늘 귀중한 교훈을 후배들로부터 얻었다.
쳐야 한다.
그 교훈이란 우리 후배들이 조국의 근현대사는 물론이고 모교의 창학
오늘 회초리를 실시한 다음, 영화 ‘미션’을 예수회 정신으로 설명하고
정신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전쟁 전후, 서강 창학 배경에 얽
청계천 철거 후 ‘복음자리 딸기잼’에 얽힌 꼬마 데일리와 제정구 선생 일
힌 스승과 선배님들, 심지어 바로 앞에 누운 김의기(76 무역) 선배도 모르
화를 들려줄 즈음 학생들 표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1년 전에 써
고 있었다. 너무 몰라서 학생들 전체를 대신하여 반장을 불러 체벌을 먼
놓은 ‘오래된 지금, 내가 만난 김의기와 김주숙’을 낭독하게 하고, 각자 1
저 실시했다(나는 강의 중에 회초리를 쓴다). 제자들을 데리고 이동하며 로욜
분 30초 스피치로 자기반성을 발표하게 하였다.
라 동산에 영면하신 게페르트, 프라이스, 김태관 신부님과 데일리 초대
학생들 자기반성 발표는 그 어떤 앞서의 스피치보다 진지해서 선생 잔
총장 그리고 길로런 초대 학장님, 꼬마 데일리(존 V. 데일리) 신부님과 제
소리가 필요 없었다. 비록 툭 터진 야외였어도 모두들 귀를 모아 듣고 있
정구 선생까지 설명하고 그 분들이 오늘날 우리 가슴에 어떻게 살아있어
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후배들의 문자가 왔다. “선생님, 가을볕의
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비타민 D가 몸 뿐 아니라 마음에 왔어요. 우리 학교를 사랑하게 되었고
대학생들이 근현대사와 서강정신을 모름을 발견한 것이 왜 교훈인가? 나는 여섯 학기 째 강단에 서면서 “도대체 요즘 학생들이 우리 때보다 영
자기반성하는 친구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짜장면이 이렇게 맛난지 몰랐어요.”
어도 잘 하고 스펙도 화려하고 해외여행, 봉사활동도 많이 하면서 왜 이 리 낯빛이 어두운가? 정말 청춘은 아파야 마땅한가?”하며 고민해왔다.
8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83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아느냐 저 강물이 흐르는 뜻을
강의 교육이 나의 경험과 배움이 나 자신의 것만이 아닌, 이 세상이 함께
이종수(73 경영)
나누어야 하는 것임을 알게 한 것이다.
아느냐 저 강물이 흐르는 뜻을 / 바다를 그리면서 앞으로 간다 / 보아 라 우뚝 솟은 저 산의 모습 / 하늘을 가리키며 버티고 섰다 나에게 서강은 뿌리이다. 서강이 아니었다면 현재의 내가 존재하지 않 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처럼 보였던 서강대 입학이었지만 그 이후에 내 앞에 전개되었던 인생의 기초가 서강 언덕에서 만들어졌다. 1974년 봄, 시위에 필요한 유인물을 등사하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서대문교도소 신세를 졌다. 육군본부에서 재판을
합창단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교가를 익숙하게 부를 수 있었다. 나이가 회갑이 되는 지금에야 그 강물이 흐르는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에 신영복 교수님께서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는 노 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글을 손수 써주셨다.
받을 때, 내가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었고, 복학이
그것을 보면서 서강의 교가가 떠올랐다. 그렇지. 대학을 졸업한 지 삼
어려운 나를 외국인 신부님들이 등록금까지 마련해 주면서 복교시켜 주
십여 년이 지난 후에야 ‘저 강물이 흐르는 뜻’을 알 수 있었다. 물은 모든
었다.
것을 품고 밑으로 흐른다. 흐르면서 목마른 대지를 적시고 농작물에 필
시대적인 아픔을 담은 울분 속에서 엄청나게 막걸리를 마신 기억. 깡
요한 자양분을 제공한다. 장애물이 있어도 다투지 않고 돌아 흐르면서
통 속에 피어오르는 연탄 위에 어묵을 올려놓고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목
여러 것들이 함께 섞인다. 그래서 결국 넓게 퍼지고 낮은 곳까지 가서 바
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면서 울분을 달랬던 기억들. 그리고 학생운동과
다를 이룬다.
전과자의 전력 때문에 취직이 되지 않아 선택한 직장이 신원조회를 하지 않았던 체이스 맨햇턴 은행. 이후 나는 외국으로 다니면서 은행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업무를 하게
이러한 물과 같은 금융이 사회적 금융이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발생하 는 많은 사회문제와 양극화로 인해 방치됐던 후생 사각지대에 자본을 물 처럼 흐르게 해 건강한 사회와 경제를 만드는 것이다.
되었다. 결국에는 인생의 2막에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서 사회연대은행
동문모임 ‘서강울림’의 활동을 하면서 서강의 선후배를 정기적으로
과 한국사회투자를 설립하였고,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금융의 기
만난다. 다른 어느 대학에서 볼 수 없는 우리 서강만이 가지고 있는 정겨
법을 활용하는 대안적인 금융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운 분위기. 그것이 서강의 멋이 아닐까? 그래 우리는 다 물이야. 물처럼
그 단초를 서강이 만들었고, 우연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연결고리가
살자.
모든 과정 속에 녹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도 와주신 문(매카슬린) 신부님을 비롯한 교수님들의 헌신적인 가르침과 서
8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85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서강옛집〉 편집인 10년 송영만(74 정외)
돌이켜보면 분명 나에겐 과분했고 호사(?)에 가까웠다. 20대의 까닭 모를 불만. 기운생동과 좌절의 연속인 30~40대. 서강에 대한 먼발치의 방관자적 감정에서 천형처럼 코가 꿰인다. “너의 불온한 네거티브 20년 을 앞으론 몇갑절 보상하며 살아라.” 참 수많은 동문들과 때론 얼굴도 붉 혀봤고 때론 박장대소하며 희희덕 거렸던 봄날같은 세월이었다. 한쪽으
편집인으로서 얼추 10년,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 역시 갑년을 맞아 머
로 치우치지 않은 편집위원들의 면면, 시니컬한 위트와 유머로 웃음기
리에 허옇게 서리가 내렸다. 긴 세월이다. 나의 오십대가 온전히 투영된
넘쳤던 편집회의, 이런저런 미디어에서 차출된 황금비율의 네트워크, 모
꼴. 파편적이고 분절적인 30~40대를 보내고 〈서강옛집〉에 안겨 성찰과
두 자랑스럽다.
반추의 10년을 보냈으니 일면 행복했다. 지천명에 근접도 못한 지리멸
오늘도 〈서강옛집〉의 이런 아이덴티티를 푼수처럼 자랑삼아 되뇐다.
렬의 내 나이 쉰, 출판 국제행사에 어쭙잖게 완장 차며 돌아다니던 시절,
출판도시의 무슨 회장을 하고 이런저런 공직에서 뭔 역할을 해도 이런
제 염통 스는 줄 모르고 어깨를 으쓱대던 그때, 동문회의 콜은 운명처럼
풍모, 이런 캐릭터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정치적 회오리가 몰
다가왔다.
아칠 때도 까칠한 이슈와 부박한 실용이 쓰나미처럼 몰려올 때도 〈서강
남들은 쑹덩쑹덩 여덟 학기에 마치는 학부과정도 뭐가 아쉽다고 한 학
옛집〉 편집위원들은 근본이 무엇이고 왜 존재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
기 더하며 질퍽였던 나. 그 퇴행적 트라우마 때문인지, 79년 대학졸업 후
고 고민했다. 단순하고 명쾌한 그 가치를 지키려 애쓴 지난 10년이었다.
한 10여 년은 신촌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노고산 언덕에는 눈길조
7만여 동문들로부터 사랑받는 〈서강옛집〉, 그 영원한 진리를 지켜나가려
차 멀리했다. 편집증적 증세는 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가 어느 날 대
부대끼고 호흡해온 편집위원들 모두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뜸 반전으로 치닫는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잉태할 준비가 되어있다
〈서강옛집〉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다. 포근한 어머니의 품이다.
는 역사의 명제는 가끔 한 개인에게도 파고든다. 몇 차례 글을 쓰고 인터뷰에 응했던 게 계기가 된 것인지 편집위원으 로 참여해달라는 전갈이 왔다. 2001년 봄이었다. 한술 더 떠 편집담당 부 회장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한 3~4년이면 되겠지….’ 그런데 웬걸, 총 장과 이사장이 서너 차례 바뀌는 데도 꼬리표는 아메바처럼 늘어났다.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심사위원장으로, 총장추천위원회 위원으로, 총동 문회장 청빙위원으로, 50주년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주렁주렁 인식표가 늘어만 갔다.
8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87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모두에게 특별한 교육
성 모두를 추구하는 교육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탁월성이란 장소와 상
심종혁(74 수학)
황, 그리고 거기에 개입된 구체적인 사람에 따라 결정되기에, 예수회 교 육기관으로서 서강대학은 그 교육이나 연구 활동에 있어서 우수해야할 뿐 아니라, 참다운 가치에 뿌리를 둔 봉사로서 진정 사회와 국가, 더 나 아가서는 전체 세계를 위한 교육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교육이 학생
8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74년 서강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서강의 노고산 언저리에서 학생으
개개인의 모든 차원을 가능한 최대로 개발시키도록 이끄는 데 있기에 참
로 예수회원으로 그리고 교수로서 일생을 살았다. 이런 나로서 자연스레
답고 영속적인 가치에 기반을 두고, 사회의 가난한 이들과 약자들의 필
서강 나름의 고유한 특성, 다른 대학들과의 차별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요를 우선으로 하여,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희생
을 많이 접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자문해보곤 한다. 우리 대학의 교육 특
정신, 타인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고 투신할 수 있는 탁월한 인간을 양성
성과 연관하여 가장 많이 듣는 용어는 ‘인격적 관심’cura personalis과 ‘탁월
하는 교육기관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성’excellency 등이다. 여기에서 ‘인격적 관심’이란 서강교육은 교수들이 학
그렇다면 지난 50여년을 돌아보면서 서강을 졸업한 각계각층의 서강
생 개개인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기에 학습 활동에서 학생들의 적극적 참
동문들이 서강교육이 지향하는 학문적, 도덕적, 인간적 탁월성을 자신의
여를 중시하여 평생 동안 성장을 향해 자신을 개방할 수 있는 자질을 함
삶과 활동의 영역에서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학자
양하도록 도움을 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는 학생
로서 교육자로서 세간에 이름이 알려진 동문이 많이 있다는 점은 학문적
의 지성적, 정서적, 영적 성장에 있어 점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움
탁월성에서 서강교육이 어느 정도는 성공한 대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을 주는 교수 내용을 구성해야 할 뿐 아니라 학생 각자에게 중점을 두어
리고 한편으론 언론매체에서 국민을 분노케 하는 커다란 부정부패 사건
개인의 역량에 맞는 속도와 개성의 특성에 준하여 이를 발전시키고 목표
들이 터질 때 그나마 서강 동문들이 거기에 많이 얽히지 않았기에 다행
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스럽지만, 또 한편으로는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많은 국민의 진심어
이런 학생 개개인에 대한 인격적 관심을 바탕으로 서강교육의 ‘탁월
린 존경이나 칭송을 받은 동문도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서강
성’이 세워지는 것이다. 흔히들 대학이 학문공동체이기에 연구와 교육의
교육이 얼마나 성공하고 있는가’는 한번이라도 깊이 성찰해 볼 만한 주
측면에서만 탁월성을 부각시키는 듯하다. 하지만 예수회 대학으로서 서
제가 아닌가 싶다.
강이 추구하는 교육은 근본적으로 가치 지향적이기에 현실적 지식뿐 아
지난 50년을 돌아보면 그나마 첫 30~40년은 서강대학이 그 독특한 학
니라, 진정한 자아에 대한 참다운 수용과 주변 사회와 이웃에 대한 애정
풍을 이어 대한민국의 교육을 선도하며 이끌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 못
어린 사랑을 지니도록 교육시키고자 한다. 즉 서강대학이 추구하는 탁월
하지만, 그 이후 서강의 교육이 선도적이었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대학들
성이란 3가지 측면, 학문적 탁월성, 도덕적 탁월성, 그리고 인간적 탁월
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새롭게 변화된 사회
89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가르침이 우선인 대학
와 국가 현실에 서강대학의 고유한 교육 특성이 창조적으로 새롭게 적응
한징택(75 생명과학)
되고 구현되기를 마음을 다해 기원한다.
서강은 내게 자랑이었고, 고마움이었으며, 감사와 그리고 미안함의 대 상이다. 1975학년도 대학 입학은 주로 본고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지금과 마 찬가지로 학생 수가 적은 서강대학교는 그때도 입시를 논할 때 크게 비 중 있게 언급되지 않는 작은 학교였다. 고등학교에서 막판 입시 준비를 할 때도 서강대를 지원하려면 어떻게, 어느 반에서 공부해야 하는지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S대를 가면 좋겠다는 -당시 서강대학의 등록 금이 국립대학의 10배에 해당하는 거금이어서-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 고,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장학금 받아 등록금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니 겠다’는 자신 없는 약속까지 하며 서강대 진학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서강대생이 되었다. 서강에 대한 구체적인 ‘특별함’은 알지 못했으나, 내 가 알고 있었던 서강은 이름 높은(?) 학교들과는 차별화된 교육을 한다 는 것과 전공하고 싶었던 생물학과의 교육수준이 대한민국 최고라는 소 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새로운 청춘을 그때까지 살았던 세상과는 무언가 다른, 새로운 세상인 서강에서 시작하고 싶었다. 40명이 함께 입학했으나 졸업을 한 것은 16명에 불과할 정도로 학사 경고로 제적을 당했던 친구들이 많았지 만, 그 과정을 거쳐 졸업한 동기들은 과연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다른 학교 친구들에게 ‘넌 그것도 모르냐?’라는 핀잔을 주며 자부심을 가
9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91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알바트로스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
지고 있었다.
김진영(76 전자)
난 지금 서강대학교 생명과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미국에서 서강대학 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통보를 받고 한국에 돌아올 때, 내가 서강에서 받았던 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감사했다. 만약 연구에만 전념하셨다면 세계적인 석학이 되셨을 은퇴하 신 명예교수님들께서 학부생 한명 한명의 실험을 지도하며 교육에 전념
학번과 전공을 막론하고 서강인들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것은 아마
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럴 때마다 교수님들에 대한 존경과 함께 서강
도 알바트로스, 즉 신천옹信天翁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가장 높이 나는 새
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학생교육임을 다시 한번 새기며, 학
로 알려져(과학과 연구의 발달로 인해 이제 가장 높이 나는 새가 신천옹이 아니란
생의 교육을 가장 우선적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것이 밝혀졌다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인재가 되자는 의미로 다
서강의 교육목표에 다음 같은 항목이 있다.
가오는, 말 그대로 서강인의 불멸의 상징이다.
‘교수진은 탁월한 자질을 갖추고 엄격한 학사관리는 물론…(중략)…
알바트로스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희귀조
교수 방법의 부단한 개발을 통하여 꾸준히 학문의 수준을 높이며, 자상
인 관계로 우리는 사진으로만 접할 수 있었고, 창공을 높게 나는 사진 속
하고 진지한 상담 등으로 면학 의욕을 고취시키고, 다양한 학습 방법에
알바트로스는 전부 홀로 나는 새였다. 그래서인지 외부에서 간혹 들려오
따라 학생들이 배운 지식을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던 ‘서강인은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나나 서강대생 사이의 결속력은 약하
요즈음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대학 평가의 지표가 가끔은 억울하고 실
다’라는 근거없는 속설이 어느덧 우리 서강인 사이에서도 자조 섞인 농
망스러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강은 특별한 가치를 지
담과 푸념으로 들려오는 횟수가 늘어난 것 같아 심히 개탄할 일이 아닐
향하며 차별화된 가치가 있음을 ‘서강 나눔터’를 운영하며 느낀다. 서강
수 없다.
에는 다른 대학교에서는 운영하려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나눔터가 있다.
동문의 수가 많을수록 결속력이 크게 느껴지고 수가 적을수록 반대의
학생들의 환경 교육의 실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여교수들이 만든 서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일종의 군집효과, 양떼효과의 일면일 뿐이다. 10
강의 아름다운 가게인 ‘서강 나눔터’가 9년째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이러
명 중 1명이 하늘을 바라볼 때 나머지 9명이 동조할 경우의 수보다 100
저러하게 서강과 인연을 맺은 분들이 서강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조건
명 중 10명이 동시에 하늘을 바라볼 때 나머지 90명도 이들을 따라 할 경
없는 봉사로 실천해 주고 계신 덕분이다. 서강은 앞으로도 쭉~ 자랑스
우의 수가 훨씬 크다. 퍼센티지로 따지면 동일한 10%임에도 불구하고
러운 학교가 되리라.
말이다. 결속력이 약하다는 이런 근거없는 루머는 졸업 후 몸담게 되는 사회에 서의 소속집단 안에 서강인이 필연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9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93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일 뿐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역시 동문 수가 많지 않은 타 대학들
만들어졌으나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경영체제를 확립했으며, 이에 따라
에서도 일반화된 속설이라고 하니 ‘서강인은 결속력이 없다’는 말도 안
짧은 기간동안 1000억원에 달하는 운영조합 규모를 자랑하는 중견 창투
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물
오히려 서강인의 끈끈하고 강인한 결속력을 증명하는 사례들은 수없 이 많다. 가까운 사례로는 서강대 최초로 현재 대한민국의 최고 수반을
론 서강대, 서강기술지주회사 및 동문기업들과 함께 항구적인 성장을 지 속할 것이라 확신한다.
당선시키는 데 음으로 양으로 발벗고 나선 수많은 서강인들을 본인은 잘
한마디만 더 하자면 사진 속에서 항상 홀로 날던 알바트로스는 실제
알고 있으며, 새로운 서강 100년을 향한 광개토 프로젝트의 성공적 진행
로는 떼지어 번식하는 무리생활을 한다고 한다. 육지에서는 함께 어깨를
역시 타 대학들 모두가 부러워하는(심지어 특혜시비로까지 트집잡기도 하는)
나란히 하고 굳게 두 발을 내디디며, 창공으로 비상하면 그 누구보다 높
최고의 사례이다. 누구보다 먼저 대학기술지주회사의 설립을 준비하는
이, 그리고 멀리 나는 알바트로스의 삶을 모든 서강인과 함께하자고 제
데 학교와 동문이 발벗고 나섰으며, 더불어 기술지주회사를 통해 탄생되
안한다.
고 육성 중인 자회사들의 숫자나 성장속도는 모든 서강인들의 강력한 결 속력과 유대감이 없다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본인이 CEO로 몸담고 있는 플랜티넷도 서강인의 강력한 결속력을 증 거하는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008년 서강기술지주회사의 태동과 더불어 유기풍 총장님과 장흥순(78 전자) 원장님 등의 제안 및 권고로 지 주회사 사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창업투자회사, 즉 벤처캐피탈 의 설립이 동문기업인들에 의해 준비되었다. 사실 전문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극대화된 수익을 꾀해야 하는 중소벤처기업의 입장에서 금융업, 특히 벤처캐피탈과 같이 초기기 업들의 투자를 진행하는 사업은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는 위험성이 큰 분 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엠더블유의 김덕용(76 전자) 동문, 엠텍비 젼의 이성민(82 전자) 동문과 플랜티넷의 대표이사인 김태주(81 전자) 동 문이 이에 적극 호응하여 발벗고 나섰으니 그 결과로 설립된 것이 바로 ‘알바트로스 인베스트먼트 주식회사’다. 알바트로스 인베스트먼트는 비록 서강대와 그 동문기업들의 출자로
9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95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내 비밀번호는 서강
였는데, 외국인들은 더 찾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사거리
박찬희(76 영문)
의 명칭을 ‘르네상스 호텔 사거리’로 바꾼 것이다. 그 지역 행사 등이 있 을 때마다 사거리의 이름이 주요 언론에 자주 거론되면서 광고 효과가 매우 컸다. 지금도 이 사거리를 지날 때마다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스타벅스에서 일할 때는 ‘정관헌에서 명사와 함께’라는 행사를 문화재
푸른 잔디밭이 언덕처럼 펼쳐졌던 교문 앞 오르막길, 삼삼오오 모여앉
청과 공동으로 기획해 시작했다. 정관헌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서양 양식
아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던 노고산 언덕….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서
이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된 건축물로, 고종황제가 커피를 즐겨 마시
강의 모습이다. 나무가 깊은 땅속 뿌리에서 자양분을 얻듯 서강에서 배운
던 곳이었다.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
지식, 친구들, 선후배들은 지금도 내 삶의 귀중한 밑거름이 되고 있다.
어서, 2009년부터 봄과 가을에 이어령 문화부 장관을 비롯해 고은, 신경
“실장님, 비밀번호가 ‘서강’이에요?” 언젠가 서강의 후배이면서 우리
숙 등 명사 60여 명과 일반인 200여 명을 초청했다. 아름다운 정관헌에
회사 직원이 우연히 내 비밀번호를 보더니 의아한 듯 눈을 반짝이며 묻
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하는 모습을 아직
는다. 보통 비밀번호는 생일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 등 의미 깊은 숫
도 잊을 수가 없다.
자나 단어를 사용한다. 서강이 내겐 그렇다. 늘 소지하는 핸드폰 장식품 조차 서강이니, 서강을 향한 그리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나 보다.
홍보는 예측할 수 없는 위기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해야만 하는 분야 이기도 하다. 전에 근무하던 월마트의 CEO는 ‘We are judged by our
요즘 나는 서강 교육의 특별함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특히 서강의 상
exception.’ 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대중은 위기 상황보다는 위기에 어
징 알바트로스를 떠올린다. 거대한 새 알바트로스가 폭풍 속을 질주하듯
떻게 대처했느냐를 더 오래 기억한다는 것이다. 불끄기 식의 홍보가 아
서강의 기상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강인함에 있는 것은 아닐까.
닌 불이 안 나도록 하는 것이 홍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은행
그 덕분인지 나는 지난 30여 년을 홍보인으로 외길을 걸어왔고, 지금 은 전력을 생산하는 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의 홍보실장으로 근무하고
에 돈을 저축하듯 신뢰를 저축해야 한다. 신뢰를 차근차근 쌓아놓아야만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바로 꺼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있다. 홍보인과 변호인은 비슷한 점이 있는데, 변호인이 논리를 개발해
그동안 홍보 업무를 하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것이 보너스라면
클라이언트를 보호한다면 홍보인은 치열한 여론의 법정에서 기업과 조
보너스인데, 그 가운데에는 서강을 통한 분도 많아서 서강은 내게 ‘인복’
직을 보호하는 것이다. 훈련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
의 근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어머니 같
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은 나의 모교, 서강. ‘서강 그대의 자랑이듯 그대 서강의 자랑이어라’라
르네상스 호텔 홍보실에 근무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르네상스 호텔을
는 모토는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찾다가 헤매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텔이 위치한 곳이 영동전화국 사거리
9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97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80년 봄 서강언덕 장영란(77 국문)
회’라는 종이 간판을 붙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대리를 본다지만 사실상 청와대 는 전두환이 계엄군으로 장악하고 차근차근 새로운 군사독재를 준비해 가고 있었다. 학교 측 역시 억지춘향 격으로 방만 내주고 나머지는 묶어 둔 채 지켜보고 있었다. 말하자면 대다수 시민들이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안 온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이런 생각 저 런 생각 끝에 1980년 봄. 삼십여 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간다.
마침 해마다 열리는 병영집체훈련이 돌아왔다. 유신시절 남학생은 체
다. 중1때 10월 유신이 일어나 십년 동안 유신독재 속에 살아 온 우리.
육 대신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훈련소에 들어
곧 대학 4학년이 될 우리들에게 독재자의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유신
가기도 했다. 총학생회의 첫 결정은 입영훈련 반대. 4월 19일 입영훈련
독재는 대학에서 학생회를 없애고 군사조직인 학도호국단을 두었다. 우
대상자 150여명은 학생회관에 모여 농성을 했다. 농성을 하려니 잠자리
리는 80년 봄 학기가 개강을 하면 학생회부터 부활시키기로 했다. 여기
가 필요한데 돈이 없으니 어찌 할 건가?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가마니를
서 ‘우리’는 나름 운동권이었던 77학번으로 모두 다 해서 넷이었나? 다섯
사왔다. 학생회관 홀에 볏짚으로 짠 가마니를 깔고 덮고…. 당시 학생회
이었나?
가 부활한 대학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다지 많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다.
이든 선배도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도서관 앞을 지나다 얼굴만
98
데, 다 모아 봐야 몇 명 안 되는 학생회는 어찌 해야 할 건가?
대학 3학년 늦가을, 천년만년 독재를 할 것 같았던 박정희가 암살당했
3월 2일 개강을 하니 유신으로 잘렸던 선배들이 복학을 했다. 제법 나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생업만 이어가고 있었다. 새로운 군사독재의 군화발이 눈에 훤히 보이는
학생 누군가가 나서서 학생회를 부활시키지 않으면 그냥 해 주는 건 아 니었으니까. 또 몇몇 대학은 부정부패한 재단이 가로막았다.
마주쳐도 반갑고, 학생식당에서 빵 하나를 나눠 먹어도 배가 불렀다. 학
4월 30일 그동안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계엄사령부가 ‘강력 대처’를
생회장 선거를 시작하려면 우리 가운데 한 명이 입후보를 해야 했다. 앞
선언한다. 여러 대학에서 ‘민주화 대행진’이 벌어지고 교수들의 시국선언
장 서는 건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었으니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겠나!
이 이어졌다. 5월 초 전국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였다. 학생회장 연석회의
그리 어렵게 결정했던 그 선거에 뜻밖에 입후보자가 여럿이었다. 메리
는 5월 14일 광화문에서 전두환의 집권을 반대하는 대회를 열기로 했다.
홀에서 입후보자 연설을 하니 한눈에 옥석이 가려졌다. 우리를 대표했던
학교 정문. 혼자서나 삼삼오오 친구들과 어울려서는 자유롭게 드나드
박성혁(77 영문) 후보가 학생회장에 당선된 뒤, 대의원회도 꾸려졌다. 유
는 문이지만, 학생들이 모여서는 드나들 수 없었던 금단의 선이었다. 그
신 시절 과대표는 알음알음 남자 선배가 물려받곤 했는데, 처음으로 같
학교 정문을 처음으로 학생대열이 열고 나가 내친 김에 서울역까지 갔
은 과 선후배가 다 모여 선거를 통해 과대표도 뽑았다. 학생들의 이런 기
다. 유신의 칼날 아래 십대 이십대를 보낸 우리는 광장에 모여 목소리 높
세에 학교 측은 학도호국단이 썼던 방을 내주어 거기에 ‘서강대 총학생
게 외치는 일도 처음 해 보는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99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15일에도 시위를 하면서 보니 시민들은 강 건너 불구경 마냥 지켜본다
상과 부조화하다 시골로 귀농했다. 80년 그해 봄을 함께 겪은 이들. 학생
는 걸 알아차렸다. 어떻게 해야 착착 다가오는 군사독재를 사라지게 할
회 부활을 함께 했던 소위 운동권만이 아니라 뒤에서 응원하고 지켜봐주
수 있을까? 17일은 가두시위를 하지 않고 학생회장 연석회의를 해 의논
었던 동기, 선배 후배들…. 모두 그립다.
하기로 했다. 나는 그때 과외선생을 해서 살았기에 과외를 하러 가 있다
땅 냄새 맡고 살아보니 우리 땅 참 좋은 땅이더라. 잘 가꾸어 가야겠
전화를 하니, 얼른 피하란다. 조짐이 심상치 않다고. 어디론가 가야했다.
다. 혹시 땅 냄새 맡고 싶으면 허위허위 오시라. 따스한 밥 한 그릇 지어
친구한테 전화를 하니 고맙게도 오라고 해 거기서 묵었다. 친구네서 하
드리리라.
룻밤 자는 사이, 학교는 계엄군이 점령했고 마지막까지 학생회를 지키려 학교에 남아있던 이들은 잡혀갔단다. 그리고 우리는 수배자가 되었다. 경찰은 부모님한테 딸내미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며 협박을 해 댔고, 밤에 자는데 쳐들어와 손전등을 비추었단다. 단지 학생회에 관 여했다는 이유만으로. 5월말 수상한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군대가 학생과 시 민을 죽였다는 이야기다. 76학번 김의기 선배는 5월 30일 그걸 알리려고 죽었단다. 젊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황에서 도망 다녀야 했다. 내가 잡 혀가 고생하는 것도 걱정이지만 내 입에서 나올 동료에 관한 정보가 무 서워서. 그런 상황에서 하룻밤 재워주고 먹여준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 광주항쟁을 묵사발 낸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협상을 했다. 학 생회 활동을 했던 이들에게 더 따져 묻지 않는 대신 경찰조사를 받으라 고. 조사를 받고 나오니 수배는 풀렸지만 바로 학사징계가 내려졌다. 퇴 학과 무기정학. 곧 이어서 남학생들은 그해 다 군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 었다. 80년 광주를 겪은 피비린내가 나는 호랑이 소굴로. 당연한 수순처 럼 보복의 칼날이 겨누어져 학생회장을 했던 친구는 군사재판에 올려졌 다. 죄목은 괘씸죄. 그 시절을 겪은 동기 선후배들은 한동안 사회에 적응하기 힘겨워 했 다. 십여 년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나 역시 세
10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01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상처 화해 감사
람을 한 두 달 뒤에 다시 도서관에서 만난 일이 있다. 대개는 아무 말도
성한용(77 정외)
하지 않았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경찰에서 조사받으며 두들겨 맞은 후유증이었다. 불법폭력을 국가가 자행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문과대학 입학생이었다. 1학년은 전공이 없었다. 서정호 교수님 의 법학개론을 들었다. 교수님은 말을 빙빙 돌렸지만 유신헌법이 국민의
내가 서강에 입학한 1977년은 유신의 광기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 였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짓밟았다. 대학가는 암울했다.
102
필요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세상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독서모임 가입을 권유 받았지만 확신
용감한 학생들은 도서관 앞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데모(당시에는 시위를
이 서지 않아 거절했다.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다. 나는 도망쳤다. 군에 자
데모라고 했다)를 했다. 유인물은 뿌려지자마자 곧바로 사복경찰과 교직
원입대했다. 내가 군복을 입고 있는 동안 세상이 바뀌었다. 박정희가 죽
원들이 거두어갔다. 당시에는 사복경찰이 교내에 상주했다. 나는 유인물
고 전두환이 집권했다. 문제는 하필 내 근무지 광주에서 5.18이 터진 것
한장을 얼른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데모대와
이었다. 80년 광주는 현지 계엄군이었던 나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곤 했다. 가까이 서 있다가는 데모에 참가한 것으로
1981년 가을에 복학을 했다. 대학 정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캠퍼스는
몰려 잡혀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비겁한 학생이었다. 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친구들이 모두 사라지고
인물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서 몰래 읽어보고 버려야 했다. 유인
없었다. 1학년 때 가까웠던 친구들은 대개 제적되거나 강제징집을 당했
물을 가지고 다니다가 경찰의 검문에 걸리기라도 하면 위험했다.
다. 학교는 북적였지만 나는 외로웠다. 죄책감 속에 정신없이 대학을 마
“자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자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쳤다. 나는 서강 출신이었지만 서강이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픔을 준
“우린 승리하리라, 우린 승리하리라”
그 시절이 싫었다.
“긴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기본권을 제한하는 잘못된 헌법이라고 비판했다. 그 정도에도 꽤 용기가
서강이 나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은 졸업을 한 뒤 한참이 지
당시 데모대가 부른 노래는 이런 것이었다. 학생들이 모여들면 스크
나서였다. 기자가 된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정치인, 관료, 기업인들
럼을 짠 데모대 50명 정도가 정문을 향해 출발한다. 하지만 20~30미터
이었다. 서강 출신들은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몇 안되는 서강 출신들은
도 전진하지 못했다. 데모대가 출발하자마자 힘 좋은 사복경찰 10여명이
다른 학교 출신들과는 많이 달랐다. 성실했다. 선배들이나 연줄에 의존
옆에서 달려들어 데모대를 언덕 아래로 밀었다. 스크럼에서 떨어져 나온
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으로 그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이었다. 사실은 그
학생들은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언덕 아래에 기다리고
게 바로 서강이 졸업생들에게 준 매우 소중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아는
있던 경찰들이 학생들에게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이렇게 사라진 몇 사
데는 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103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언론사에는 서강 출신들이 꽤 많았다. 대부분 유능한 언론인들이었다.
우리는 축복받은 아들딸
국회와 정당을 출입하면서 서강 출신 보좌관들을 만났다. 그들은 유능한
문영주(화요가족 총무 / 이화여대, 76 심리)
정치참모였다. 서강에서 교수를 했던 손학규 의원이 서강 출신 기자와 보좌진을 자주 불러모았다. 참 고마웠다. 서강 출신 언론인들이 만든 서 강언론인회(서언회)도 시간이 갈수록 활성화되었다. 나는 서강 출신 언 론계 동료들이 참 좋다. 그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다큐멘터리를 봤다. 예수회 출신으로 청
개인적으로 서강과 완전하게 화해했다고 생각했을 즈음 총동문회장에
빈, 소박, 검소하게 생활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실
게서 부회장으로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속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천하고, 원칙을 지키는 사제셨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
부끄러웠다. 이제 나는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게 또 한 분의 사제를 떠올렸다. 바로, ‘화요가족’의 아버지이자 정신적
라는 모토를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성실과 노력의 가치를 가르쳐준 서
기둥이셨던 그 분, Basil M. Price 신부님.
강에 대해 감사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서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 엇인지 열심히 찾고 있다.
많은 동문들이 아시다시피, 프라이스 신부님은 서강대 설립 주요 멤 버의 일원으로, 1957년 11월 한국에 와서 2004년 9월 이 땅에 묻히셨 다. 반세기를 서강대와 서강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그리고 산업문제연구 소를 설립해 일찍이 노동교육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셨다. 그런 신부님을 일주일에 한 번씩 뵈면서 일상사와 관심사를 챙기며, 30여년 만남을 이 어온 우리는 분명 신부님의 축복받은 아들딸들임에 틀림이 없다. 동문회 로부터 ‘화가(화요가족)’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처음엔 잠시 망 설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소박한 모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긴 세월을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프라이스 신부님이 계셨고, 그 분의 일관된 정신과 사랑이 있었기에 가 능했던 것이다. 그런 신부님의 정신이 서강의 후배들에게 이어지기를 바 라는 마음으로 ‘화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화가의 첫 모임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부님이 가지고 계셨던 화가 메모에는 첫 회원을 만나신 날이 1976년 9월 10일로 기록 되어 있다. 그 날이 바로, 강의실에서 프라이스 신부 교수의 일관된 자세
10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05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에 감명을 받은 한 복학생(정훈, 70 신방)과 그 학생을 눈여겨보았던 신부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일, 건강, 가족 등의 안부와 관심사를 거의 모두
님과의 긴 인연이 시작된 날이자 정기적 만남이 시작된 날이다. 그 후 회
메모하고 기억하고 챙기셨다.
원들이 늘어나고, 화요일 저녁마다 정규모임을 갖게 되면서 편의상 ‘화
2005년에 신부님 선종 1주기를 맞아, 신부님과 인연이 있었던 많은 분
요가족 모임’, 줄여서 ‘화가’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림
들의 도움으로 〈물처럼 공기처럼〉이란 제목의 추모문집을 발간하였다. 그
그리는 화가들의 모임’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때 많은 분들로부터 원고를 받고 놀랐던 사실은, 모두들 “나에게 특별한
해외에 가시거나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신부님은 화요일이면 어김없
분이셨다”고 회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랬다. 그가 베푼 사랑은 국적
이 산업문제연구소의 당신 방에서 우리를 기다리셨다. 그러나 우리의 30
과 종교인 여부, 출신 학교를 따지지 않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특별했다’.
여 년 간의 매주 화요일 만남은 목적이 없었다. 포교를 위한 것도 영어수
우리는 추모문집 발간과 함께 상반신 동상을 만들어, 신부님을 로욜라
업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과 대화가 좋아서 만나 처음엔 우리
동산에 모셨다. 그 뒤에 김태관 신부님, 데일리 전 총장님이 게페르트 신
말로 하다가, 영어가 필요한 후배들을 위해 기왕이면 영어로 말하자 했
부님과 함께 오셨고, 이제 그곳은 후배 재학생들이 수시로 와서 책도 보
던 것뿐이다. 그처럼, 신부님 또한 우리에게 신앙을 권유하신 적이 한 번
고 차도 마시면서, 서강의 창학 정신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요람이 되었
도 없었다. 성경 중에서 가장 문학적이라는 루가복음Luke을 가지고 공부
다. 청년들의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 발전의 토대를 이룰 수 있도록 먼 이
한 적이 딱 한번 있었을 뿐이다. 그 복음서를 마치기까지 3년이 걸렸다.
국땅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서강을 설립하고, 일생을 서강을 위해 살다
신부님은 미국에서 9형제가 있는 대가족의 아들이었으나, 우리나라에 오시어 우리 땅에 묻히실 때까지 우리 화가의 아버지였다. 화가의 자식 들에겐 푸근하고 인자한 할아버지였다. 우리는 아버지께 해드리듯, 생신 때나 크리스마스 때 가족들을 동반하고 조촐한 축하모임을 갖곤 했다. 신부님이 환갑, 고희, 그리고 여든이 되셨을 때도 화가의 자식들까지 3 대가 모여 기쁜 마음으로 축하잔치를 해드리며 신부님의 건강을 기원했
가신 프라이스 신부님의 서강사랑이, 그곳에서 ‘제2의 창학 정신’으로 거 듭나고 후배들에게 오래오래 기억되기를 빈다. 올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국에 오신다. 굳이 예수회 신부라는 소속감을 거론하지 않아도 그 청빈성, 검소함, 가난한 이웃에 대한 헌신,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을 바라보며, 우리 프라이스 신부님이 환 생하신 느낌을 받는다.
다. 산업문제연구소 기숙사 작은 방의 숙소 이부자리는 따스한지, 배게 는 편한지, 냉장고에 드실 간식은 있는지를 살피던 우리는 분명 가족이 었다. 화가 회원은 학연, 지연, 종교와 무관하게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서강동문이지만, 나처럼 다른 대학 출신도, 대학원만 서 강을 나온 회원도, 무신론자도, 개신교 신자도 여럿 있다. 신부님은 화가
10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07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추억의 앨범
1970년대 서강 풍경
1970년 3월 2일 메리홀에서 종합대학으로서의 서강대학교 개교식 및 총장 취임식을 가졌다. 초대 총장에는 데일리 신부가 취임하였다.
1970년 개교 10주년 기념 행사
10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70년대 교문 앞
매스컴센터의 방송제작 수업 장면
109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강의실 앞 군사훈련 모습
타자실에서 타이핑을 연습 중인 학생들
EnglishII(영어 커뮤니케이션) 수업. 서강대학교 영어교육 프로그램 중 가장 특색있는 과목 중 하나. 각 섹션은 20명 미만의 학생으로 구성되며 강의와 토론 모두 영어로 진행하였다.
11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70년대 사은회
111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신입생 환영식
졸업여행. 1970년대까지 4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졸업여행이 있었다.
이공대학 실험수업 장면
11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입학시험. 교복을 입은채 칸막이가 쳐진 책상에서 시험을 보고 있다.
줄지어 졸업식장으로 향하는 졸업생들
113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체육대회. 여학생들의 싸이클 경주
파트너와 함께
1971년 휴교령
1974년 본관 옥상에서 열린 4학년들의 파티
프라이스 신부 수업시간 1975년 개교 15주년 기념식
11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15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다
3
장
큰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가득 드리운 구름과 같다. 큰 바람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는데 그 날갯짓으로 일어나는 파도가 3천 리, 하늘로 불어 오르는 회오리바람이 9만 리라 한다.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중에서
15회에 걸쳐 총 3500여 명의 졸업생 배출. 이제 내적인 충실과 함께 외 적인 자기표현이 수반될 때 비로소 우리 서강은 제2단계의 도약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울러 서강의 업적과 우리 서강 동문의 현주소 를 하나하나 정리해볼 시기가 왔다. 동문회는 시청각 시대에 살고 있 는 현대인에게 가장 적합한 시청각 매체의 하나인 16mm 컬러필름 영 화를 제작하고자 한다. 취지는 다음과 같다. 서강동문의 결속을 공고히, 서강대학교 이미지 쇄신, 동문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재학생 사기 앙양, 대외적으로 서강 재인식, 서강의 미래를 제시하는 틀 마련, 그동안의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영원을 가로질러 자유롭고
서강 발자취를 종합 정리하는 역할.
행복하게 날아라.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소망할 때, 결코 끝나지 않는 하나의 축복 가운데서 만나게 되리라 ─ 리처드 바크 <갈매기의 꿈> 중에서
1978년 7월, 총동문회는 모교를 홍보하기 위한 영화를 제작하기로 하 고, 위와 같이 제작 취지문을 공표하면서 임시로 서강홍보영화 제작위원 회를 결성했다. 회장단은 홍보영화 제작의 재정적 바탕을 마련하기 위해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1964년 작지만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 이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깃을 다듬고 힘을 키우며 애쓰고 또 애썼다. 그 결과, 더 먼 곳을 내다보며 더 높이 날 수 있는 바탕, 즉 ‘거인들의 어깨’를 만들어냈다. 이제 개교 20주년, 25주년을 지나면서 총동문회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큰 바다를 향해 비상飛翔했다. 그 비상은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총동문회의 역사가 사랑의 역사라는 것을 예증하는 아름다운 비상이었다. 11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솔선하여 50만원을 기부했다. 9월 12일에 열린 제17차 운영위원회에서 정식으로 서강홍보영화 추진위원회를 결성한 뒤 각 소그룹 위원회를 만 들어 모두 70여 명의 동문들이 참여하기로 했다. 서강홍보영화 사업은 이듬해 1979년에 이르러 자연스럽게 개교 20주 년(1980)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1979년 5월 당시까지 240여 명
117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의 동문들이 뜻을 모아 264만원을 모금했다. 개교 20주년 준비를 위해
문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서강가족 간담회’가 열린 것도 1979년의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당시 박
라는 말도 있지만, 그렇게 꿰어서 만든 보배라 하더라도 널리 알려야 진
희윤(61 경제) 동문회장과 동문회 임원진, 모교 부총장, 학생처장, 교무처
정한 보배라는 생각을 많은 동문들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 총무처장, 기획실장, 재학생 대표와 서강타임스 기자 등이 참석함으
그런 가운데 모교의 입학정원이 1981학년도 입학생부터 660명에서
로써 동문회와 학교와 재학생이 함께 개교 20주년을 준비해 나갈 수 있
1770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1980년 9월 5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게 되었다.
방침에 따라 ‘학과별 최소졸업정원제’를 문교부가 발표하면서 이른바 졸
1979년 6월 5일에는 <서강옛집>이 지령 100호를 맞이했다. 모교 M.
업정원제도가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졸업 정원보다 30% 정도
델마 스킬링스태드 총장이 축사를 보내왔고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동
더 많은 신입생을 선발하는 대신 졸업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후 여러
국대 등 각 대학교 동문회장들이 축사를 보내왔다. 재정 문제 탓에 제 날
부작용이 생기자 1985년부터 학생초과 모집비율 30%를 대학 자율에 맡
짜에 발간되지 못하고 연기되거나 발간 자체가 불확실해질 때도 있었던
김으로써 유명무실해졌다.
<서강옛집>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동문회는 <서강옛집>에 늘 많은 노력
1981년도부터 입학생이 거의 3배 가까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모교는
을 쏟아 부었다. <서강옛집>이야말로 동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이라
세 자릿수 입학생 시대에서 네 자릿수 입학생 시대로 진입했다. 이것은
는 엄연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과 노력, 그리
해마다 졸업을 통해 배출되는 동문 숫자 역시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고 무엇보다도 많은 동문들의 관심과 성원 덕분에 100호를 기록할 수 있
것을 뜻한다. 입학생 및 재학생 숫자 증가가 동문회원 숫자 증가로 이어
었으니 <서강옛집>은 동문 모두의 자랑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지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모교와 동문회 모두 전례 없는 양적 팽
홍보영화는 1980년 여름에 기증식을 갖고 1981학년도 신입생 홍보용
11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창을 경험해야 했다.
으로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1979년 10.26과 12.12, 1980년 5월 광주민주
그런 가운데 모교는 1980년 10월 24일 체육관 개관 이후 배구단 창단
화운동으로 이어진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에 기증식을 무기한 연기할 수
을 본격화하여 배구단창설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1월 7일 교무회의에
밖에 없었다. 결국 그 해 10월 25일에 동문, 교수, 재학생 등 400여 명이
서 창단을 최종 확정했다. 동문회는 1981년 5월 제16차 정기총회에서
참석한 가운데 시사회를 갖고 모교에 기증했다. 동문회가 제작한 이 홍
1980년도 사업계획을 확정하면서 배구단 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서강체
보영화는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모교를 홍보할 때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육회를 발족하기로 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모금 활동을 펼쳤으며 1982년
재정은 물론 영화 제작 과정 자체에 많은 동문들이 참여하여 학교 발
6월에 배구부 감독 이근삼 교수에게 1차로 후원기금 150만원을 전달하기
전을 위해 이룩해낸 일이라는 점에서, 서강홍보영화 제작 및 기증은 매
도 했다. 모금 초기에는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기도 했으나 모교에 정
우 뜻 깊은 일이었다. 다른 측면을 보자면, 이 일은 모교가 학교를 정확
식 운동부가 생겼다는 사실에 많은 동문들이 성원을 보내주었다. 모교 배
하게 널리 알리는 홍보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많은 동
구단은 1983년 12월 제11회 체육부장관기 쟁탈 전국대학배구대회에서 4
119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동문들의 기대와 성원에 부응했다. 서강동문록을 발간한 것도 1980년대 초 동문회 사업에서 빼놓을 수 없 는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동문회 출범 초기부터 동문 연락처를 수록한 수첩 등을 제작, 배포해오기는 하였으나, 1981년 3월 15일에 발간한 서 강동문록은 국판 304페이지에 1964년 2월부터 1981년 2월까지 졸업한 동문 4883명을 졸업년도별, 전공별로 수록하고 직종별 동문명단 및 교수 명단도 게재하였다. 그 체제와 규모 면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동문록이었 다고 할 수 있는 것이며, 동문들에게 동문록을 판매한 것도 이때가 처음 이었다. 동문록은 동문 연락처 정보를 담고 있는 책자라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동문록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로와 방법을 통하여 동문 1981년 창단한 모교 배구단. 동문회는 1981년 5월 배구단 지원을 위해 서강체육회를 발족했다.
들의 연락처와 현황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 자체가 의미를 지닌 다. 더구나 정확한 동문 정보는 동문회 조직 활성화와 사업 추진의 밑바 탕이 된다는 점에서 동문록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인구주택총조사가 국가 운영과 정책 방향 설정에서 매우 요긴하고 필수적인 것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동문회 발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 또 하나 있었다. 1981년 5월에 열린 제16차 정기총회에서, 대학원 졸업생들도 동문회원 으로 받아들이는 안이 채택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동문회 회장단은 대학 원 및 경영대학원 측과 협의에 나섰다. 1981년 5월 당시까지 대학원 졸 업생은 석사 245명, 박사 6명 등이었다. 지금은 일반대학원, 특수대학원, 전문대학원 등을 통틀어서 다양한 분 야의 대학원 과정이 설치되어 있으며 해마다 배출되는 동문들도 매우 많 다. 그러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모교 대학원 동문 숫자는 소수였다.
배구단을 응원하고 있는 응원단
12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당시 대학원 졸업 동문들을 동문회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은 동
121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문회의 미래 발전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판단이었다. 1982년 10월에는 동문회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동문회 역 사상 처음으로 ‘서강동문 가족잔치’, 즉 홈커밍데이 행사가 10월 23일에 치러졌던 것이다. 그 날 오후 2시 30분부터 4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모교 전역에서 펼쳐진 행사는 다채로웠다. 동문들로 구성된 극단 서강이 <맹물작가>를 대극장에서 공연했고 합창단 공연이 있었으며, 오픈카페에 서 재학생들에게 음료를 판매하고 모교 배구부와 금성사 배구부의 교환 경기도 펼쳐졌다. 열기는 밤으로도 이어져서 ‘서강의 밤’ 행사가 열리며 킨젝스 공연과 캠프파이어 등이 이어졌고 기념 배지와 기념 타월이 배부 되었다. 개교 이후 그리고 동문회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린 대규모 동문 행사 이자 성대한 잔치 한마당이라는 점에서 많은 동문들이 성원하며 관심을
서강동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홈커밍데이인 ‘서강동문 가족잔치’가 동문회 창설 18년만인 1982년 10월 23일 개최되었다. 사진은 제2회 행사를 알리고 있는 정문 앞 모습.
아끼지 않았다. “동문 간 우의를 다지고 더욱 단합하기 위한 계기가 되었 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으며 “내년이 더욱 기대된다”는 반응이 많았다.
교의 변화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60.6%가 바람직하지 못
첫 홈커밍데이는 행사 그 자체로도 뜻 깊었지만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한 방향으로 변했다는 의견을 보였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큰 행사를 준비하면서 동문회
동문회는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1980년대 이후 모교의 양적 팽창이
의 전체적인 역량이 총 결집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역량을 결집시켜
자칫 질적 수준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동문들의 우려가 반영된 것으
서 행사를 하나하나 준비해나가는 경험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로 해석했다. 모교의 홍보 활동에 대해서도 비교적 많은 동문인 41.5%
동문회가 해낼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한 단계 넓어지고 역량이 한 단계 높
가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이러한 결과는 모교에 대한 질책이라기보다
아졌던 것이다.
는 모교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애정 어린 우려라고 할
이렇게 동문회의 역량이 높아지면서 모교 발전에 대한 관심 수준과 열
12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수 있을 것이다. 애정이 없으면 우려도 비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도 한층 더 높아졌다. 1982년 10월에 동문회는 동문들을 대상으로 모
모교의 홍보 활동에 대한 적지 않은 동문들의 우려는 제31차 동문회
교에 대한 의식을 설문조사했다. 800부를 송부하여 296부를 회수한 당
이사회에 반영되었다. 우수 신입생 유치를 위한 모교 홍보PR 활동이 더
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모교에 대한 동문들의 긍지(자부심)는 10점 만점
욱 적극적으로 펼쳐져야 한다는 의견이 모였던 것이다. 동문회는 이러한
에 8.7점으로 나타났으며 모교에 대한 관심도는 6.8점으로 나타났다. 모
이사회의 뜻을 모교에 전달하며 적극적인 홍보PR 활동을 촉구하기로 했
123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으며, 동문회도 독자적으로 홍보PR 활동에 힘을 쏟기로 했다. 이것은 학
념리셉션에서, 현실적인 제반 여건을 고려하여 동문회관 건립을 보류하
교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이라면 동문회가 적극적으로 제언해야 한
고 그보다 먼저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장학재단에 관
다는, 그리고 제언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였다.
한 큰 원칙은 ‘현실적으로 모교와 후배들에게 충분히 도움을 준다는 것’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 있는 동문들의 활발한 활동 자체가 모교를 홍
으로 정하고 구체적인 방법은 회장단에 일임하기로 하였다.
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동문 한 사람 한 사람이 ‘서강 홍보맨’
제37차 이사회에서는 동문회원 자격을 학부 졸업생에서 대학원 졸업
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동문 한 사람 한 사람이 서강 교
생으로 확대하는 안도 최종 확정되었다. 이미 1981년 5월에 열린 제16차
육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건강한 결실을 보고 뿌리와 줄기의 튼
정기총회에서 채택된 사안이었지만 많은 준비와 관련 논의 및 협의가 필
튼함을 짐작할 수 있다. ‘서강을 짐작하려거든 서강 동문을 보고 짐작하
요했던 일이기에 3년 뒤인 이때에 비로소 최종 확정되었던 것이다. 이러
라’는 말은 결코 빈말일 수 없다.
한 최종 확정에 따라 1984년 8월 29일 MBA동문회가 첫 모임을 조찬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빠르게 성장 발전하던 동문회는 1984년에 동
형식으로 열렸다.
문회관 건립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7월 7일자 <서강옛집> 제128호 ‘신임
격월간으로 발행되던 <서강옛집>을 월간으로 증간키로 한 것도 당시
회장단 출범에 부쳐’라는 제목의 사설에 이에 관한 의견이 다음과 같이
이사회의 주요 결정 사항이었다. 계속해서 발행할 수 있을지 여부마저
제시되었다.
불확실했던 초기의 불안정한 상황과 비교하면, 동문회의 전반적인 역량 이 얼마나 커졌는지 알 수 있다. 재정은 물론이고 취재, 편집을 비롯한
신임 회장단이 제시한 사업계획을 일견一見하니 우선 동창회관 건립에
모든 측면에서 <서강옛집>은 괄목상대할 만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관한 대목이 크게 와 닿는다. 현재 동문회의 힘으로 적지 않은 예산이
당시 이사회에서는 동문회 업무 전산화에 관한 구체적인 안도 확정되
드는 동창회관을 세우는 일은 벅찬 사업임에 분명하다. 반면에 독립된
었다. 1984년 8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하여 1985년 초부터
동창회관을 갖출 시기가 되었음도 누구나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완벽한 실시 단계로 들어간다는 일정 계획이 나왔다. 모교 컴퓨터센터
다. 동문회 숙원인 이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더 많은 동문들의 의견을
에 동문회 사무실용 터미널을 설치하고 자료를 입력시킨 다음 시험을 거
수렴하고 모든 동문의 힘을 결집할 수 있는 묘방을 마련해 주길 바란
쳐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1983년 10월에 여자동문회(회장 하문자,
다. 동창회관 건립이야말로, 십시일반이란 옛말이 새로운 사업이기 때
60 사학)가 기금 205만원을 조성하여 동문회에 기부했으며, 1984년 6월
문이다.
부터 동문회전산화소위원회(위원장 하정자, 63 영문)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2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동문회관 건립은 1984년 7월 제37차 이사회에서 그 추진이 최종 확정
이듬해 1985년 5월, 동문회 업무의 전산화 시대가 드디어 열렸다. 동
되었다. 그러나 1985년 4월에 열린 제20차 동문총회 겸 개교 25주년 기
문회원 인적자료 입력이 모두 끝나고 관련 시스템이 완성됨에 따라 우편
125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물 발송, 동문 현황, 각종 보고서 및 통계자료 등을 전산으로 즉시 처리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 동문회들 가운데 사실상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전산화를 이룬 것이기도 하였다. 전산화로 동문회 업무 처리 의 정확성과 신속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으며, 이는 결국 동문들을 위 한 빠르고 정확하며 편리한 서비스가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전산화 완료 이후로는 예를 들어 각종 동문 모임 개최 시 학번, 학과, 동아리, 출신 고등학교 등 다양한 기준으로 데이터를 활용하여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각 분야별 재직 동문 파악, 해외 출국 시 현지 동문 정보 입수 등에서도 데이터 활용도가 높아졌다. 동문회는 보유 데 이터와 전산 시스템을 기반으로 동문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사실상 맞 춤형으로 무료 제공하기 시작했다. 1984년 모교 교정에서 열린 공인회계사 동문 모임
동문 숫자의 빠른 증가에 따라 출신 고교, 직능, 기업, 각종 기관단체, 지역 등 다양한 단위 별로 동문 모임 또는 동문회가 결성되는 것은 자연 스러운 일이자 꼭 필요한 일이었다. 예컨대 1985년 12월 28일에는 대 구·경북 지역 동문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동문회는 대구·경북 지역 동 문회 결성이 ‘전국적인 지역 동문회 결성 움직임을 앞당기는 촉매제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한편 1985년 4월 15일자 <서강옛집> 제135호는 개교 25주년 기념 특 집호로 발간됐다. 당시 특집 기사는 ‘서강동문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였다. 당시를 기준으로 동문은 경영대학원 61명, 대학원 759명, 학부 7729명 등 총 8549명으로 파악되었다. 졸업정원제 실시 이후 첫 대상인 81학번 동문을 포함한 22회 졸업생 857명이 사회에 진출함으로써 향후 매년 1000여 명씩 동문 숫자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었다. 전체 동문의 70%가 일반기업체, 금융계, 해외 유학 및 거주, 교직, 대
1984년 대전화학단지를 방문한 동문회 임원진
12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학원, 연구기관에 소속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중 일반기업체가 31.2%
127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전체적인 균형 면에서 볼 때 관계官界 등 국가 기관에 종사하는 동문은 전체의 0.8%인 74명으로, 종교 기관을 제외하고 가장 적은 수를 차지 하였다. 모교에 고시 위주의 교육 풍토가 자리 잡지 못한 측면도 있으 나 행정학, 법학과 등 관련 학과가 없다는 점도 요인일 듯하다. 일반 기 업에서 직장 동문 규모 1위는 삼성그룹 311명, 금융 기관 중에는 외환 은행이 60명으로 가장 많았고, 해외 거주 동문이 가장 많은 지역은 미 국 캘리포니아로 194명이었다.
1985~86년은 동문회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시기, 획기적인 시기였 다. 동문회의 중요한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며 오늘날 동문회 사업의 핵 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업, 즉 서강동문장학회를 탄생시킨 시 1984년 3월 금융권 재직동문 재발족 모임
로 가장 많았고 해외 거주 및 유학이 14.8%였으며 여성 동문 중 60% 정
기이기 때문이다. 1985년 4월에 열린 제20차 동문총회에서 장학재단 설 립 추진이 결정된 이후 6월 14일에 장학재단 설립 및 장학기금 모금을
도가 직업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7년 3월 25일자 <서강옛집> 제154호에도 동문록 발간을 계기로 ‘서강동문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다. 동문록을 직종별로 분류한 결과 일반기업체, 금융계, 개인사업, 외국인 기업체에 약 45%의 동문이 종사하고 있었다. 초창기부터 해외 거주 및 유학 동문이 많다는 점이 서강의 특징으로 회자되곤 했는데 실제로 1987년 통계에서도 해외 거주 동문이 15.7%, 1470명으로 나타났다. 초중고대학 등 교육계 종사 동문 8%, 대학원 5.6%, 연구기관 3.3% 등으로 교육계 및 연구기관 종사 동문이 17%에 달한다는 점도 서강 동문의 특색으로 나타났다. 당시 기사의 일부를 보 면 다음과 같다. 1985년 6월 교수회의실에서 열린 장학재단 발기인 대회
12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29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위한 취지 설명 및 준비 모임이 회장단과 모교 총장 초청으로 열렸다. 이 모임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는 동문, 직장동문회의 총 무, 각 서클 출신 동문들이 참석하여 재단 설립에 적극 참여할 것을 다짐 했다. 당시 세운 계획은 장학기금 모금 목표액을 총 3억원으로 하고, 이를 3 차년도에 걸쳐 모금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1차년도(1985.7~1986.8)에 장 학재단 설립을 위한 기본 선인 1억원을 모금하기로 하고. 당일 즉석에서 2786만원을 신입申込 모금했다. 계획대로 모금할 수 있을 것인지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장학재단 설립을 통하여 후배를 돕고 학교 발전에 기여 하며 결과적으로는 동문회 발전에도 기여한다는 취지에 많은 동문들이 기대와 공감을 나타냈다. 그야말로 때가 된 것이었고 참으로 시의 적절 한 것이었다.
1986년 5월 장학재단 설립에 대한 설명회를 겸한 15기 임원진 회의
1985년 9월 12일에는 장학재단 설립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추천 을 통해 총 389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운영위원장은 홍익찬(61 경제) 동문
한 설립을 위해 박차를 가하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까지 장학기금은 총
회장이 당연직으로 맡았다. 동문회 고문과 이사들도 운영위원에 당연직
신입액申込額 1억1980만원, 총납입액 4642만원으로 전체 동문의 약 10%
으로 선임되었다. 운영위원들은 졸업년도 별로 각 학과나 학번 모임을
가 참여하고 있었다. 재단 설립에 따른 구체적인 사항과 출연진 선임권
대표할 수 있는 동문, 재학 시절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동문, 직장
등은 회장단에 위임하기로 의결했고, 장학재단 자본금 1억원 확보를 위
대표나 직장 단위 동문회의 회장 또는 총무, 기타 기금 협조에 도움을 줄
해 동문회 기금을 전용하는 의안을 통과시켰다.
수 있는 동문 등이었다.
바로 다음 달에 장학재단 정식 명칭을 ‘재단법인 서강동문장학회’로
이듬해 1월 초에 장학기금 조성 조직을 확정하여 위원장은 당연직으
결정했으며, 이사장은 당시 양호(62 경제) 동문회장이 겸임하기로 했다.
로 홍익찬 동문회장이 맡았고 자문위원 44명을 위촉하고 총괄수석 부위
그로부터 두 달 뒤인 1986년 9월 22일에 드디어 서강동문장학회 설립을
원장으로 김복웅(63 경제) 동문을 선임했다. 1986년 6월 26일에는 장학재
인가받았다.(아래는 이 소식을 전하는 1986년 9월 27일자 제150호 <서강옛집>
단 설립을 위한 임시 이사회 및 축하 리셉션이 열려서 당시 서인석 총장,
기사)
안병태 재단 이사장, 70여 명의 동문회 이사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동문들은 독자적인 장학재단 설립을 최종 결의하고 조속
13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서강동문장학회가 지난 22일 교육위원회의 인가를 얻음으로써 재단설
131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1986년 6월 26일 장학재단 축하 리셉션
1986년 동문회와 동문장학회 사무실 현판
립이 확정되었다. 장학재단 설립은 지난 1985년 개교 25주년을 기념하
시까지 기금 모금에 참여한 동문은 졸업생 1만835명 중 17.4%인 1893
여 동문회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사업의 일환으로 그동안 전 동문의 전
명이었다.
폭적인 지지를 받아 기금을 모금해왔다. 현재 장학재단 재산으로 등록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 했다. 서강 동문들은 서로
된 금액은 1억원이며, 이는 그동안 장학기금으로 모금한 6000만원과
를 진실로 믿었고 서강을 굳게 믿었다. 서강 동문들은 모교와 동문회가
동문회가 자체기금으로 조성한 4000만원을 합친 금액이다. 동문회 기
발전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금의 재단 전용은 지난 6월 정기 이사회의 추인을 받은 바 있다. 장학재
믿음과 소망을 바탕으로 모교에 대한 사랑, 후배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
단은 현재 등기절차만 남겨놓고 있는데, 법 절차에 따라 인가 후 1년 뒤
다. 그래서 서강대학교 총동문회의 역사는 곧 사랑의 역사다. 그 사랑의
부터 장학사업에 기금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역사에서 일어난 기적 아닌 기적이 바로 서강동문장학회였다.
서강동문장학회는 설립 이듬해인 1987년 9월 총신입액 2억1037만원, 총납입액 1억5206만원을 달성했다. 1985년 6월 처음 모금을 시작한 뒤 1년 만에 약 1억원, 2년 만에 약 2억원을 모금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
13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33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좁은 서강이 만들어내는 자유 이기진(80 물리)
나는 물리학과였지만 동아리 후배들은 문과가 대부분이었다. 자연스 럽게 물리학과에서는 안 놀고 사학과, 불문과, 국문과, 철학과, 신방과 후배들과 지내면서 다른 학문에 기웃거리면서 놀 수 있었다. 철학과 선 배와 어울려 다니다 시집도 하나 내기도 했다. 무슨 용기로 그런 일을 했
3
는가 싶기도 하다. 사실 그 당시 물리학과 다니는 놈이 시집을 낸다는 것 은 좀 맛이 간 또라이 정도로 취급을 당하기는 했지만 뭐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일들을 하면 ‘융합’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 시절 서강에서 융합이라면 융합적인 일들이 학부생들 사이에서 가 능했던 이유가 뭘까? ‘학교가 작아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 다. 입학하고 몇 개월 지나면 한 다리 건너면 다 알게 되는 사이가 되고 건물도 몇 개 없어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게 되는 사이가 되다 보면 자연 스럽게 다른 학과의 일도 알게 되고 관심사가 많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당시 강미반江美班 후배 중에 불문과 후배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나 도 불어를 한 번 배워 볼까 하고 불문과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두 학기 정도 듣다가 그만두긴 했지만 그 시간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준 것 같다. 그때의 어설픈 경험이 프랑스 문학에 관심을 갖게 하고 30년이 지난 후 파리에 대한 책 〈파리 꼴라쥬〉 도 쓸 수 있는 배경이 된 것이다. 당시 물 리학과에서만 처박혀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내 후배가 출판부의 학부조교를 하고 있었다. X관 3층에 사무실
13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35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이 있었는데 시간이 비면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당시 출판부는
에서 양자역학까지 직접 대가에게 배운 느낌과 비슷했다고 생각된다.
국문과 김학동 교수님이 담당하셨다. 교수님은 가끔 오셨는데 너 무슨
사실 그 시절 서강에서 사소하게 지낸 일들이 지금 생각하면 다 씨가
과냐, 이런 말은 물어보시지도 않고 소파에 앉으시면 이런저런 말씀을
되고 뿌리가 되었던 것 같다. 자유스럽게 물리학 이외에 다른 학문의 즐
해주셨다. 정지용 시인의 집에 다녀온 이야기라든지 정지용 시인이 살던
거움을 배울 수 있었던 좁디 좁았던 세상 서강을 생각하면 융합 학문을
동네 사진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교수님에게 인생을
외치는 지금의 현실에 당시 서강의 정신이 너무 앞서 나가지나 않은 것
사는 방법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웠던 것 같다. 내가 몇
인지 생각이 된다.
권의 책을 내고 여기저기 잡문을 쓸 수 있게 된 배경엔 당시 출판부 사무 실에서 소탈하게 대해주시던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 아니었나 하는 생 각이 든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시 생각해봐도 학교가 좁기 때 문이었던 것 같다. 하나 더 이야기 하자면 당시 사학과 후배 중에 박물관에서 조교로 근 무했던 후배가 있었다. 당시 박물관장은 이종욱(66 사학) 교수님이었다. 후배는 박물관장 사무실에서 근무를 했다. 사무실과 전시실은 도서관 입 구에 있었다. 당시 후배가 근무하는 박물관장 실에 커피를 얻어 마시러 자주 갔다. 당시 박물관장실에 이종욱 교수님이 불시에 오시곤 했다. 오 시면 말씀은 안 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셨던 것 같다. 가끔 커 피를 얻어 마시는데다가 룸펜처럼 사무실에서 머물던 우리를 바라보던 교수님의 눈초리도 있고 해서 먼지가 쌓인 유물창고 정리를 도와준 기억 이 난다. 당시 도서관 입구에 있는 박물관 전시실의 유물은 최고였다. 물리학자 지만 지금 골동에 취미를 가지고 뭔가 설說을 풀 수 있는 기초를 마련 한 것은 당시 박물관에서 커피를 얻어 마시고 놀던 때의 가락이 아닌가 생 각이 된다. 최고의 물건을 창고에서 정리하면서 직접 볼 수 있었던 경험 은 대단했다. 창고정리를 하다가 선사시대 유물부터 신부님들이 수집하 신 근대유물을 직접 보면서 손으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경험은 뉴튼 역학
13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37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첫발은 사회·인류학과
학교에서는 ‘사회학과 설립’으로 신청을 하는 대신 설립될 서강대 사회
박문수 신부
학과의 특성으로 교수진 중에 인류학 박사도 포함하고 인류학 필수 과목 도 개설할 것을 분명히 했다. 그 특성은 사회학과 인류학의 상호 보완성 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학은 현대 사회에 대한 분석력이 좋고, 인 류학은 고대 인류와 원시사회와 현재 문화에 대한 지식으로 사회학을 보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설립 계획은 1972년부터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 예수회 소속 William E. Biernatzki 수사가 서강대학교에서 인류
인류학 과목을 포함하는 사회학과로서의 특성에 따라 초창기 멤버로
학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미국 세인트 루이스 대학교 사회・인류학
서 사회학 박사인 박상태 교수와 인류학 박사인 조옥라 교수가 함께 와
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서강대학교에도 이렇게 사회학과 인류학
서 사회학과의 교수진을 구성했다. Biernatzki 교수는 선사 인류학 분야
이 합쳐진 사회・인류학과를 설립하고자 했다. 당시 사제서품을 준비하
를, 조옥라 교수는 문화 인류학과 경제 인류학 분야를, 나는 인구와 개
고 있던 예수회원인 나는미국 본명: Francis X. Buchmeier 사제서품 후 어떤 방
발, 그리고 도시 사회학 분야를, 박상태 교수는 인구학 이론과 정책과 사
향으로 대학원 공부를 할 것인가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학교 책임자들이
회조사 분야를 맡으며 학과의 구성이 시작되었다.
Biernatzki 수사의 계획에 동의하는 뜻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도록 권하였
이 과정에 그 시대의 남녀차별 시각을 보여주는 주목할만한 이야기가
다. 같은 예수회원 Dennis L. McNamara도 1976년 이후에 사회학 박사
있다. 1980년 학과신설에 따른 교수 임용 공고에서, 서울대 출신으로 젊
과정에 들어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당시 예수회 안에서
은 나이에 벌써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박사 후 연구를 하고 있
사회학과 설립에 대한 관심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 세계 가톨
던 조옥라 교수가 당시 책임자의 시각에서 볼 때 아주 좋은 자격을 갖춘
릭 교회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루어졌는데, 그
것으로 먼저 선발되었는데, 서강대 여러 원로 교수들이 여교수가 사회학
공의회 정신에 따라 천주교회가 선의를 가지는 모든 사람들과 협력해서
과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 그래서 다시
제 3세계 국가들의 개발과 냉전 상태에서의 무장경쟁을 막고 평화를 이
교수를 선발하며 조정해서 전남대에서 재직하다 오신 박상태 교수가 한
룩하도록, 정의와 평화가 깃들인 세계 건설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던 것
학기 먼저인 1981년 2학기부터, 그리고 조옥라 교수는 1982년 1학기부
과 관련이 있었다고 하겠다.
터 사회학과 교수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1984년 1학기에 독일에서
내가 1979년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가을학기부터 서강대에서 사회 학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1980년에 서강대가 사회학과 설립에 대
13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완해준다고 하는 관점이었다.
사회사를 전공한 故 최재현 교수가 임용되었고, 1987년에 역시 독일에서 사회정책과 산업사회학을 전공한 故 윤여덕 교수가 임용되었다.
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고 교육부의 인준을 구하였다. 당시 교육부는
예수회원인 McNamara 신부가 1983년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사회
사회학과 인류학이 합쳐진 사회・인류학과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이어서
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가끔 서강대 사회학과에서 특강을 했지만, 미국
139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Washington D. C에 위치한 예수회 대학, 조지타운 대학교 사회학과 교
아카시아 향기 가득한 서강
수가 되었다.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발전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해인(석사 82 종교)
McNamara 교수는 연구에 집중하고자 했는데, 1980년대 5공시대의 한 국대학교 분위기에서는 연구에 집중한다는 것이 힘들겠다고 판단했다. 1981년에 사회학과가 신설되고 신입생을 모집했지만, 그 해엔 사회 정외계열로 학생들이 계열별로 입학한 후 2학년부터 학과를 선택했고, 1982년부터 입학과정을 학과별로 했기 때문에 1982년 1학기에 81·82학
40주년에 축시를 쓴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주년이 되었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번 학생들이 함께 새로운 학과를 시작했다. 초기 조교는 정외과와 신방
내가 여중에 다니던 소녀시절 예수회 지망생이던 어느 기자분이 한참
과의 대학원생들이 하였지만, 1학년과 2학년 학생 수가 60명 미만이고
신축중인 서강대학교에 나를 데려가서 갓 입국한 미국인 수사들에게 나
선배도 없는 상태에서 교수와 학생들의 관계도, 학생들 간의 관계도 권
를 인사시킨 일도 있다. 학교이름을 장안대학으로 할지, 서강대학으로
위적이지 않고 탐험자 정신으로 서로서로 도전해주고 부딪치고 친해지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는데 반 세기가 훌쩍 지난 지
는 분위기를 이루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개성이 강하거나 친화력이 있
금 서강대학이 명문으로 자리잡은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나 또한 수도자
거나 사상이 뚜렷한 사람들이 각각 쉽게 리더십을 잘 발휘할 수 있었다.
가 된 후 서강언덕에서 배움의 기회를 가진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연유로 현재 서강대학교 동문회 안에서도 사회학과 81학 번과 82학번들이 활성화되어 있다.
부족한 내가 수년 전에는 ‘자랑스러운 서강인상’도 받게 되어서 그 다 음엔 더욱 서강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서강옛집> 기사도 빼놓지 않고 보며 해외에 나가도 서강 동문들을 일부러 찾아서 만나곤 하였다. 대학 교 치고는 캠퍼스가 너무 작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나는 수도원 처럼 소박하고 아담한 모습의 서강 건물을 좋아하였다. 1982년에 국문학 과 강의를 이수하다 대학원(종교학과)에서 5학기 동안 열심히 공부한 시 간들은 두고 두고 내 인생에 뜻깊고 풍요로운 양분을 채워주었다. 대학원 시험 볼 때 영어해석 문제가 어찌나 어려웠던지 쩔쩔맸는데 그 때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남학생이 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 르치는 사제교수가 되었다. 같이 공부했던 이들이 누구는 수도원장이 되 고, 누구는 출판사 대표가 되고, 누구는 방송인이 되고, 누구는 유능한 학 자가 되고…, 다들 열심히 각자의 길을 가고 있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14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41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학부수업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열규 교수님의 국어 강의는 좋았
물)이 암으로 투병하다 며칠 전 저 세상으로 떠났다. 교회의 전통대로 매
지만 의무적으로 써내야 하는 20개의 독후감 숙제가 어찌나 부담스러웠
년 11월에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간 동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미사를 봉
는지 모른다. 나름 글을 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조교들이 늘 점수를 짜게
헌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죽은 동문들의 사진이 실린 학교
주어 한 번도 A를 받지 못하고 B에만 머물러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종
신문을 보면 늘 마음이 찡해오곤 한다.
교학 리포트를 잘 썼다고 담당교수가 나를 다른 학급까지 순회강의를 하
오늘의 서강이 있기까지 알게 모르게 희생하면서 밑거름이 되어준 많
게 한 일은 지금도 즐거운 추억이다. 예수회 사제들 외에도 김승혜 교수,
은 이들을 기억하며 50주년을 축하하고 기뻐한다. 모교의 더 큰 발전을
길희성 교수, 정양모 교수, 서인석 교수, 서공석 교수 등등 대학원의 종
기원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봉헌해야지. 또 다른 50주년을 향하여 희망으
교학과의 교수진은 훌륭하였다. 늘 엄격하게 수업을 진행하는 학교 분
로 전진하게 될 서강의 모든 것을 나는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어느 날
위기에 우리는 ‘고등학생 같다’며 곧잘 투덜대기도 하였으나 돌이켜보면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서강 어머니’는 나를 가끔씩 기억해 주겠지 하
그 때의 충실했던 수업 덕을 지금도 많이 보고 있다. 종교학을 공부하면
는 푸른 믿음으로 두 손을 모은다. 아카시아 향기 가득한 서강 동산에서
서 타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도 한결 넓어지고 주변 사람들과 세상을 보
만났던 정다운 옛동무들도 기억하면서.
는 안목도 객관적이 된 자신을 발견할 적마다 서강에서의 시간들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과 도서실을 열심히 들락거리며 그룹 스터디를 했던 일, 메리홀 성당에서 매일 미사에 참여하며 동아리 학생들과도 대 화를 나누었던 일, 아카시아 향기 날리는 동산에서 도시락을 먹던 일, 소 풍을 갔던 일, 모두가 다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딸 이름이 해인이 라서 나와 더욱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국문학과의 시인 김승희 교수, 지 금은 고인이 된 영문학과의 장영희 교수와의 친분으로 졸업 후에도 종종 서강에 가는 일이 좋았는데 지금은 내가 부산에 살고 있으니 학교에 가 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다.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라는 말을 되새겨보면 서 나 역시 자랑스러운 서강인으로 내가 선택한 수도의 길을 더욱 성실 하고 겸손하고 아름답게 열매 맺을 수 있길 소망해 본다. 우리 수녀원에도 서강 동문이 4명 있는데 그 중 후배 한 명(김영희 74 생
14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43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아프리카에서 동문회관까지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2002년 가을, 회관이 완공되어 강당에서 처음으
전준영(82 불문)
로 동문들이 결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떠난 동문회. 그렇게 난 〈서강옛 집〉에서 동문회관으로의 여정이 마무리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40대 후반에 불어권 국가로 진출을 준비 중인 한 건설회사에 취직을 위해 인터뷰를 하는데, 졸업 후 건설과 관련된 경험이 나타나 있
80년대 후반 나름 모험심을 갖고 떠났던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은 낯설
지 않아 난감할 때, 3년 반의 동문회관 건축경험을 예로 들면서 무사히
기 그지없었다. 언어와 문화, 모든 것에 빠른 시일 내에 적응해야 했던
마치는 바람에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지금은 남미로 나가려고 준비하며
당시에, 나는 어느 날 예상치도 않게 우편사서함에서 한 뭉치의 〈서강옛
그 회사에 몸담아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이 또한 고마움 중의 하나일 것
집〉을 발견(?)했다. 그것이 어떻게 아프리카 조그만 나라까지 도착했는
이다.
지는 수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 때의 감동이란!!! 어느 것 하나 한글로 활자화 되지 않은 나라에서 맞게 된 낯익은 글씨 체 〈서강옛집〉. 동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겪었을 FA, 학사경고, 나는 여기에 더해
동문회관은 회관기금을 위해 따로 적금을 들었다가 만기가 되는 날 사 무국에 전달하는 분도 있었고, 약정된 기금을 약정된 기간에 내야 한다 면서 대출까지 받아 납부한 동문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의 정성이 오롯 이 모인 곳인가?
교내음주 때문에 생긴 정학위기, 중도 휴학, 낮은 학점 등으로 취직도 쉽
이런 동문회관은 동문들의 ‘내 집’이다. 거기 모여 학창시절 좋았던 추
지 않았기에 학창시절은 그저 잊고 싶었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일이
억을 떠올려도 좋고, 지나가던 길에 잠시 들러 후배들의 파릇함도 보고,
급선무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오지에서 만난 서강의 소식은 참으로 큰
후배들은 동문회관을 방문한 선배들에게 사회생활도 미리 익히고, 배우
위로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매개체였다.
자와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런 곳이기도 하다.
수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서 처음으로 찾은 곳도 동문
아프리카로 날아온 한 뭉치의 서강옛집이 동문회관의 작은 벽돌 하나
회 사무실이었다. 〈서강옛집〉을 거기까지 보내준 동문회에 뭔가 기여를
가 되었다. 다시는 보기 싫다던 내 모교를 나로 하여금 애정으로 바라보
하고 싶어 내놓은 성의를 흔쾌히 받아주신 당시 사무국장 김미자 선배님
게 한 〈서강옛집〉과 그를 잉태한 동문회와 회관. 난 이렇게 아직까지도
은 “아프리카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어렵게 번 돈을 어찌 다 받을 수
모교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있냐며, 반만 내라고….” 그것마저 고마울 따름. 그 인연으로 8년이 흐른 어느 날 동문회 사무국 간사로 동문회관 건설 과 관련된 일을 맡기에 이르렀고, 3년 반 동안 동문회관 기금모금과 건축 에 힘을 보탰던 경험을 직접 모교에서 할 수 있었으니 행복한 동문 중의
14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45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뱀장사와 에밀레
를 기다리던 관객석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미처 입장을 못하
심재경(83 신방)
고 돌아간 관객을 위해 앵콜 공연까지 해서 두 번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 치고 그 다음해 에밀레는 정식 동아리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했었 죠.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에밀레는 정말 창의적인 모임이었습니다. 메 리홀에서 2시간 짜리 공연을 10명이라는 소수 인원으로 한다는 것은 발
14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서강 언덕에 첫발을 들이던 때가 벌써 30년이 훌쩍 넘어 버렸네요. 사
상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죠. 이것이 가능한 데에는 에밀레 최초 제안
실 전 서강을 기억하면 띵까띵까 놀았던 기억이 워낙 강한 사람이라 학
자이신 김광엽(78 영문)선배의 오랫동안의 준비와 뛰어난 기획력이 있었
업과 사회 참여에 충실했던 대다수 동문들께는 다소 죄송하기도 합니다.
습니다. 노래 부르는 사람들 이외에 공연에 필요한 핵심 스탭들을 연극
그 띵까띵까의 운명은 1983년 2월 부여 유스호스텔에서의 오리엔테이
반(조명), 방송반(음향), 스쿠버(무대장치) 등에서 재주꾼들을 모아 무대를
션에서 시작됩니다. 그때 과별 장기자랑에서 생물과가 단체 1등, 신방과
기획하고 사목실의 도움으로 스폰서를 확보하는 등, 지금도 어떻게 대학
2등. 근데 제가 ‘애들은 가. 한마리 만 잡솨바’ 로 시작하는 ‘뱀장사’ 연기
생의 머리에서 그런 조직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로 개인 MVP(최우수연기상)를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연기 지도를 했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던 선배가 나중에 영화 미지왕의 감독 김용태(82 신방) 선배니까 어쩌면
지금도 에밀레는 봄, 가을로 열리는 공연 때면 많은 동문들이 자리를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었죠. 어찌됐건 그 후로 여기저기 환영행사 마다
함께 합니다. 객석에서는 관객 입장에서 무대를 즐기고 뒤풀이 자리에서
저는 순전히 타의에 의해 뱀을 팔아야 했고 그래서 얻은 대학에서의 첫
는 비평가 입장에서 재학생들에게 공연에 대한 평가도 하고 대학생활에
번째 별명이 뱀장사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알아줘서 나쁠 건 없었는데
대한 조언도 해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재학생들로부터 자기가 꾸었던
‘야, 뱀!’이라고 자꾸만 불러서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도 들었죠.
꿈을 회상하고 젊은 후배들로부터 젊은 에너지를 무한으로 받아갑니다.
그런 뱀장사의 기억을 한방에 시원하게 날려준 게 1983년 MBC 대학
에밀레 졸업 환송식에서 후배들에게 “나는 환갑이 되어도 계속 에밀레로
가요제였습니다. 교문 근처 솔밭에서 10여 명이서 함께 시작한 노래 동
함께 할꺼야”라는 말을 한 기억이 있는데 이제 그날도 몇 년 안 남았네
아리(그 땐 서클이라 했었는데) 에밀레, 모임이 만들어지자 마자 출전한 대
요. 세월 참 무섭습니다.
학가요제에서 정말 운 좋게도 우리는 대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당시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요즘에까지도 듣는 질문, ‘너는 왜 그때 가
의 대학가요제의 인기는 어마어마했었죠. 학교로 팬레터도 오고 방송 출
수 안했니?’ 저는 대답합니다. 그때는 사실 가수보다는 에밀레가 더 재미
연 제의도 쇄도하고 그랬는데 정작 우리의 관심은 에밀레의 첫 공연이었
있어서 안 했고 그 후에는 할라 그래도 못한 거라고. 그래서 제가 최근에
습니다. 전 아직도 에밀레의 첫 공연 시작 때 무대 안에서 천천히 열리는
미래에셋생명에서 보험설계사 일을 하면서 짬짬이 준비해오던 노래를
커튼으로 메리홀 750석 전 좌석을 메우고 복도에 두 줄씩 앉아서 우리
모아 개인 첫 번째 독집음반을 출반했습니다. 나이 50에 1집 가수가 된
147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다는 생각이 참 무모할 수도 있지만 더 늦어지면 해보지도 못하고 나머
서강+동문회=인생
지 인생 살며 후회할 것 같은 생각에 용기를 내었습니다. 대학 때 진작에
정명숙(83 불문)
노래를 발표할 걸 하는 회한이 있었는데 이제야 원을 풀었습니다. 이번 음반의 노래들은 제 어릴 적 고향 안동에서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은 곡들입니다. 안동 초등학교 선후배 동문들과 매주 모여 합창을 하 면서 자연스레 나눈 어릴 적 추억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 잘 쓰지 않던
누군가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시절을 꼽으라고 한다면 주
안동 사투리, 여름철 빨가벗고 놀던 낙동강, 겨울에 놀던 스케이트장, 동
저 없이 ‘서강동문회’에서 일했던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에서
네를 주름잡던 거지,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먹던 가락국수 등 동시대를
‘서강동문회’는 양적으로는 ‘절반 이상’, 질적으로는 ‘3분의 2’를 차지한
살았던 사람들이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노래로 엮어 보았습니다.
다. 나는 수도자는 아니지만 동문회에서 맡은 일은 성소聖召였다고 지금
유투브를 통해 노래를 듣고 코끝이 찡해지며 감동을 받았다는 애기를 들
도 굳게 믿고 있다. 다른 동문들처럼 크게 기부할 형편도 못되고 사회적
을 때면 ‘지금에라도 나의 노래를 만들고 발표하길 정말 잘했구나’라는
으로 성공하여 모교를 빛낼 능력이 없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
생각이 듭니다.
어진 동문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밖엔 없었다. 적어도 내겐 동문회 사무
치열하고 처절했던 80년대의 대학 시절에도, 그래도 함께 고뇌하던 친 구들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고 훌륭한 장을 제공해준 서강 에 무한 감사를 표합니다.
국에서 일했던 것이 단순한 직업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내가 동문회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학년 때인 1983년이었다. 그 당시 동문회 사무실은 학생회관(C관) 2층에 있었는데 <서강학보> 수습기 자였던 나는 가끔씩 맞은편의 동문회 사무실로 청소도구를 빌리러 갔었 다. 그곳에서는 30대 후반의 젊은 간사 선배님과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이 동문들의 현황 확인 전화를 걸거나 <서강옛집> 발송을 위해 일 일이 누런 띠지에 주소와 이름을 적고 풀칠하곤 했다. 그리고 차를 마시 고 담소를 나누다 가는 졸업 선배님들도 가끔씩 마주치곤 했었다. 당시 1 회 졸업생이라고 해봐야 40대 초반이었고 동문수도 얼마 되지 않아서인 지 선배님들은 동문회 일과 행사에 열심히 참여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나는 선배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문이라면 학교와 동문회 일에 열 심이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배웠던 것 같다. 청소도구를 빌리러 갈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에 언제부턴가 <서
14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49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강옛집>의 모교소식 기사를 제공하기 시작했고 그 인연으로 나는 졸업할
거부한 내게 전임 동문회장께선 ‘죽을 힘을 다해 6개월만 해보라’고 ‘인
때까지 <서강옛집> 학생기자로 활동했다. 그 기간 동안 학생 신분으로 많
생에 큰 경험이 될 거’라고 밀어붙이시고 잠시 사무국장 대행을 했던 선
은 선배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졸업 후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큰 자
배님은 ‘네가 사무국장 역할을 할 만하니 시켰을 것’이라고 한번 해보라
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동문회 행사를 도와주거나 <동문록> 교정작
고 격려해주시며 내 의사와 상관없이 사무국장으로 임명해버렸다. 그 이
업을 도와주면서 선배님들의 활약상에 마음 뿌듯했던 기억도 있다. 그랬
후 동문회를 퇴직할 때까지 5년 동안 가끔은 살얼음 밟듯, 가끔은 어둠
기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명예기자로 활동하게된 것은 자연스
속을 헤매듯 또 가끔은 큰 바위에 짓눌리듯 사무국장 역할을 맡았다.
럽고도 당연한 일이었고 명예기자라는 직함은 피곤한 직장생활의 활력 소가 되었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 지 꼭 4년 후, 나는 서강옛집 전담기자가 되었다.
쁨, 즐거움으로 행복하고 신나게 일할 수 있었다. 특히 동문회 일을 열심히 도와주었던 동문들이 승진해 임원이 되었다
문회관 건립사업을 시작하면서 동문회관 완공 때까지로 바뀌었다. 건립
는 소식을 알려줄 때, 어렸던 선배님들의 자녀들이 어느덧 성장하여 내
기금 모금을 위해서 직원이 더 많이 필요했고 2년, 길어야 3년 정도면 완
게 중매를 부탁하거나 청첩장을 보내고 손자손녀를 보셔서 자랑하실 때
공된다는 말에 모교와 동문회를 위한 마지막 봉사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
는 나도 덩달아 즐거웠다. 열심히 사업해 돈을 많이 벌어서 장학금을 보
였다. 그러나 동문회관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발의한 지 거의 11년 만
내올 때는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고 그 장학금 받은 학생들이 사회에서
에 완공되었고 그 이듬해 나는 뜻하지 않게 동문회 사무국장이 되었다.
잘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마치 내가 그들의 부모가 된 듯 왠지
그것도 전임 선배 사무국장보다 10년 넘게 이른 40이란 나이에….
모를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다. 또 재기에 성공한 동문들 이야기, 동문
지 기억에도 없는 30대를 막 통과하며 갑작스럽게 받아든 사무국장이란
150
발 벗고 나서서 일 해주는 후배들 덕분에 처음의 걱정과 달리 보람과 기
처음엔 담당 직원을 뽑을 때까지 몇 달 도와주기로 하고 시작한 것이 동
동문회관 기금 모금과 〈서강옛집〉 발간이란 일에 치여 어떻게 보냈는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그러나 열심히 도와주시는 동문들과 묵묵히 격려해주시는 선배님들,
회 도움으로 일이 잘 풀려 고맙다는 이야기, 어렵게 취직한 이야기, 결혼 이야기 등은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타이틀은 부담감으로 나를 짓눌렀다. 나이 어린 사무국장에 우려를 갖고
그런가하면 잘 살던 동문부부가 이혼하여 원수가 되었고 누구는 갑자
계실 수많은 선배님들을 안심시켜야 했고 이제 막 지은 동문회관을 잘
기 몹쓸 병에 걸려 하느님 품으로 갔고, 누구는 하던 사업이 망해 잠적했
운영하여 수익도 창출해야 하지만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고 내 인생
다는 둥 좋지 않은 소식이 들릴 때면 내 일인 양 가슴도 많이 아팠다.
계획에도 없었던 ‘동문회 사무국장’이란 자리를 갖게 된데 대해 나 자신
그러는 사이 동문회 생활은 훌쩍 17년을 넘겼고 <서강옛집> 학생기자
을 납득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짧은 기간 내에 많
3년, 명예기자 4년, 편집위원 5년의 기간을 거치며 ‘서강’과 ‘동문회’에서
은 변화를 겪어 놀라고 당황했을 후배 직원들을 다독이고 혼란에 빠진
모아진 작은 퍼즐 조각들이 내 인생이라는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 왔
사무국을 수습해야 했다. 겁이 덜컥 나 사무국장 자리를 받을 수 없다고
다. 물론 이 작품은 아직도 작업 진행 중이다.
151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동문회의 옛집
호국단(마지막 민주호국단이었다)이 중심이 돼 배정을 논의했는데 학보사의
박주필(83 정외)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C관 맨 아래층 학도호국단 자리로 가는 분위 기였다(여기에 지금은 아마 커피숍이나 서점이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 곳은 방도 클뿐더러 외부에 문이 나 있어 건물 관리에서 독립돼 있었고 숙원 사업이던 암실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그런데 그 방 배정을 약
1983년, 나는 서강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서강학보사에 입사했다. 그
속했던 호국단이 마지막에 자기들이 써야겠다며 일을 틀었다. 독립성이
리고는 나의 대학생활은 곧 학보생활이 되었다. 학보사 맞은편에 동문회
라는 장점을 놓치기 싫었던 것 같다. 우리는 별 수 없이 2층에서 조금 넓
사무실이 있었다. 동문회가 이사를 가고 난 뒤 서클룸(내가 4학년이 됐을 때
어진 옆방으로 이사할 뿐이었다. 그 때쯤 학군단이 후문 근처에 독립 건
쯤 서클을 동아리로 부르기 시작한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서클이란 이름이 익숙하
물을 지었다. 2층짜리 아담한 건물이었는데 우리는 언젠가 군사정부가
다)으로 사용할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그곳에서 김미자(64 국문) 간사님
물러나 학군단이 폐지되면 저 건물이 학보사 건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
과 여직원 한 분이 동문회 일을 하고 있었다.
다(학군단 동문들은 이해하시라. 그저 학창시절의 짧은 생각일 뿐이니까). 그렇지
학보사 기자로서 우리는 국장실이 별도로 있거나 심지어 신문사 건물 이 따로 있는 다른 학교 신문사를 늘 부러워했다. 수습기자는 자리가 없
우리가 C관 옆방으로 옮길 때 동문회는 A관으로 이사갔고 다시 더 넓
한 학우들은 오히려 학보사의 크기를 부러워했다. 심지어 서클룸을 배
은 공간으로 옮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동문회관을 지어 학교의 가장 잘
정받지 못한 기독교 동아리는 여름 방학을 이용해 학보사에서 기도회를
보이는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 두 명이 근무하던 동문회에는 제법 사무
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일도 있었다. 둘러보니 학보사가 가장 넓
실 규모로 보이는 숫자가 일하고 있다. 격세지감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다는 것이 이유였다. 또 학생이 이용하는 공간 중에 학보사와 헤럴드에
아무튼 학보사가 30년 넘게 제자리를 맴도는 사이 동문회는 무럭무럭 자
만 전화가 있었기 때문에 C관 2층에 있는 서클 학우 중에는 주변 사람들
랐다.
에게 학보사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 번호로 전화해서
아파트 평수가 삶의 기준이 되는 나라에서 공간에 대한 집착은 그때나
아무개 서클의 아무개를 바꿔달라고 해놓는 일이 있어 그런 전화를 바꿔
지금이나 남달랐다는 생각도 든다. 학보사나 동문회 뿐 아니라 학교 자
주는 것도 귀찮은 일 중에 하나였다.
체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광활한 캠퍼스와 넓은 공간에 대한 집착
의 기대도 컸지만 학보사 역시 기대가 컸다. 방 하나를 헤럴드와 나눠쓰 는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C관을 나누는 일이다보니 학도
152
때 이사 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 회의 탁자에서 원고를 쓰는 실정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서클에 가입
그해 여름에 C관이 증축됐다. 서클룸이 태부족이던 시절이라 학생들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만 그런 기대는 이뤄지지 않은 채 학교를 졸업했고 학보사는 여전히 그
이 있었던 것일까. 학교는 클 필요가 없다는 신부님들의 이야기가 야속 할 뿐이었다. 동문회가 발행하는 신문 이름은 〈서강옛집〉이다. 참 예쁜 이름이란 생
153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각이 드는데 선배 동문들은 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건물이라곤 A관
대학 최초 TV방송국
밖에 없던 시절이라 지은 이름일까. 아니면 모교에 대한 그리움은 다른
김덕영(84 철학)
무엇보다 교사校舍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까. 동문회가 무럭무럭 자라는 사이 학교도 많이 변했다. 사회계열 학과와 함께 건물을 쓰던 경영학과가 그 사이 두 개의 건물을 지을 만큼 학교에 는 많은 건물이 새로 들어섰다. 우후죽순이란 느낌마저 든다. 그 곳에서
1990년대 후반 대학 방송가에는 주목할 만한 새로운 현상이 하나 있
옛집이란 단어를 떠올리긴 쉽지 않다. 가끔 학교를 갈 때마다 그 사이 학
었다. 종래의 라디오 방송만을 해오던 대학 방송국들이 영상을 전문으로
생 수도 별로 늘지 않은 것 같은데 저 많은 건물은 어떻게 사용되는 것일
하는 TV방송국으로 개편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기존의
까 하는 궁금증도 든다. 어쨌든 무럭무럭 자란 동문회가 50주년을 맞았
라디오 방송국에 TV제작시스템을 추가하면서 발전한 것과 달리 우리 대
다니 83년의 그때 그 동문회의 옛집이 떠오른다.
학교에서는 아주 색다른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명성을 잃지 않고 있는 대학 최초 TV방 송국 ‘서강TV’를 설립하기 위해 땀흘렸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 다. 당시 나를 비롯한 서강TV 원년 멤버들은 그 누구의 지원도 없이 서 강TV를 만들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 우리는 그 당시 카메라 한 대조 차 없었다. 아는 사람을 찾아가 카메라를 빌리고, 책을 읽어가며 방송의 기본을 스스로 배워나갔다. 개국 선포와 함께 첫번째 서강TV의 방송 D데이로 우리는 1990년 2월 에 있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잡았다. 편성이라 할만 한 것이 고작 보도부문의 뉴스 하나, 제작부의 뮤직비디오 몇 편이 전부였다. 그래도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일했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우리에게는 가장 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 것은 편집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고민 끝에 나는 당시 A 관 3층에 있던 서강커뮤니케이션 센터를 찾았다. 그 당시 우리는 그곳을 컴센터라고 불렀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방송제작 실습용으로 갖춰진
15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55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ENG 카메라 몇 대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규모도 크고, 전문적인 장비들 이 우리를 압도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맞춰 방송 국의 개국을 하고 싶은데, 편집장비들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강TV의 첫방송을 무사히 내보낼 수 있었다. 지금도 불이 꺼진 A관 복도를 지나 노을이 지는 서강 언덕을 내려가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서강TV는 그런 정신으로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
그 당시 컴센터를 지키고 계시던 분은 우리 얘기를 듣고 어안이 벙벙
리를 소리높이 외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청년 서강만이 갖고 있
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아쉽게도 난 그분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
던 패기만만한 도전정신이었던 것 같다. 난 서강에서 적어도 그것 하나
하진 못한다. 그저 양선생님이라고 그를 불렀다. 양선생님은 일단 학교
만큼은 확실하게 배웠던 것 같다.
측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어색하게 자리를 뜨셨다. 그날 이후 우리는 편집실을 구하기 위해 이러저리 또 뛰어다녔다. 지 금이야 프리미어를 비롯해서 영상 편집장비들이 보편화되었지만 그 때 만해도 촬영이나 편집에는 어려움이 많이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 다. 양선생님으로 전화가 왔다. 학교에서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쁜 마음에 한 걸음에 컴센터로 달려갔다. 양선생님은 테이블 위해 두 개의 VCR 데크를 올려놓고 계셨다. “학생들이 쓰는 편집기는 사용할 수 없고 이거라도 이용하고 싶으면 쓰도록 해….” 영상 편집을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잠깐 부연 설명을 하나 하겠다. 보통 우리가 TV에서 보는 영상은 1초에 30프레임의 사진영상이 있다. 컷트와 컷트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바로 그 30프레임 중에서 하나를 골라서 다른 30초 프레임 중의 하나와 연결을 시켜야 한다. 그래 야 전체적인 흐름이 튀거나 끊어지지 않는다. 그날 우리 앞에 높여 있던 두 대의 VCR 데크는 그런 편집용 기능이 없는 단지 두 대의 비디오 데크 였다. 그래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밤을 새우며 편집을 했다. 남들이 하 루 이틀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일을 비록 우린 보름 정도나 걸려서 마무리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해 겨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서
15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57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 조강희(84 화학)
이 시기에 정립된 나의 사회적 의식과 세계관은 이후 삶의 방향이 되 었고, 나침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한동안 그 경험을 잊어야 하는 역설의 궤적을 만들고 말았다. 서강과 함께 했던 시기는 나의 삶의 방향에 중요한 계기를 주었지만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시에 서강은 나의 경력에서 사라져야 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이 사회를 근본
사람들은 누구나 현재 자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그래서 가
적으로 바꾸어보겠다고 결심하고 선택한 방향은 졸업과 동시에 노동운
슴속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기가 있을 것이다. 혹자는 어떤 사건 또는
동 현장이었다. 용접 노동자로 취업하려고 대학 다닌 것을 숨겨야 했고,
특정한 시절에 정립된 가치관에 의해 삶의 방향의 틀이 잡히는 이 시기
행동거지도 바꾸어야 했던 위장취업자에게는 대학 경험은 해고의 원인
를 ‘구월의 이틀’이라고 칭하며 그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그 시
이 될 뿐 도움이 되질 못했다.
기는 주변에 들어나든 그렇지 않든 당사자들은 그 때가 본인들의 인생에
이렇게 부정해야 했던 서강의 경험은 그 이후 환경운동을 하면서도 이
서 가장 중요한 때였고, 지금의 삶의 토대가 되었던 순간임을 알고 있다.
어졌다. 비록 대학 졸업논문으로 쓴 ‘환경과 공해 연구’는 20년간 환경운
그렇다면 나의 그 시절은 언제였을까? 되돌아보면 그 시기는 서강과 함
동을 하게 된 또 다른 계기와 밑거름이 되었지만 말이다. 오로지 자본의
께 했던 20대였음임이 분명하다.
논리로 출발하는 무분별한 개발은 항상 천혜의 자연생태계의 배제를 전
1984년 2월, C관 2층 벽에 붙은 합격생 명단을 확인하면서 서강과의
제할 수밖에 없었고, 그 현장에서 저항하는 환경운동은 일상적으로 개발
인연은 첫사랑의 두근거림처럼 설레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업자와의 마찰이 불가피하다. 더구나 개발업자에게는 사업 추진을 위해
당시의 대학은 현실과 거리를 둔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는 상아탑의 현장
물리력과 더불어 학연을 이용한 교활한 압박이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
으로 머물러 있기에는 주변여건이 넉넉하지 않았다. 대학의 진리탐구의
던 시기였다.
자유조차 국가가 쳐놓은 울타리 속의 자유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사회 모든 것을 통제하는 위압적인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15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어느덧 서강을 떠난 지 25년이 흘러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지 천명知天命이 되었다. 지천명이 하늘이 만물에 부여한 원리를 안다는 것이
많은 학생들은 강의실과 도서관보다도 서클룸과 광장에서, 설익었지
라면, 하늘이 사람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각기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
만 열정적으로 민중의 아픔과 군사독재의 부당함을 토론하는 운동권으
는 뜻을 게다. 머리가 좋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노래를 잘하면 음악을
로 나서기 일쑤였다. 우리는 대학생활 내내 개인학업과 사회참여라는 가
하고, 몸이 건강하면 운동을 열심히 하듯이 각자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녀린 줄타기를 하였고, 그 중 일부는 시국사범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
따라 이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이제 서강과의 인연
도 하였다. 비록 정도의 차이만 있었지 역사적 흐름을 함께 한 대학의 사
은 매번 보내주는 동문회보 <서강옛집>을 통해 간간히 소식을 전해 듣고,
회참여는 87년 민주화라는 국민승리의 결과를 가져왔다.
작지만 가끔 동문회비를 내는 것으로 소박하게 그 끈을 이어가고 있다.
159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서강출신의 현 대통령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는
나에게 서강은!
서명운동도 모른 척 했던 이유도 단순히 서강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무
임원현(84 경영)
언가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 삶 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큰 영향을 준 서강이었지만, 그렇기에 지금의 간 극에 만족한다. 서강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거절하기 어려운 벗의 부탁을 받고, 한동
나에게 서강은 은인이며 종교(?)이다. 나는 경북의 시골에서 초등학교
안 서강이라는 이름을 잊고 살아왔는데 서강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쓸
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후 서강대 경영학과에 입학하
수 있을까,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다. 되돌아보면 비록 한동안 서강을 잊
여 재학중 공인회계사에 합격하여 국내 최고의 회계법인인 삼일회계법
어 왔지만, 알게 모르게 내 인생에 커다란 한 축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인에서 24년간 근무하였다.
없다. 그리고 내 가슴속 깊이 정말 잊지 않고 있는 서강시절의 기억은 권
고등학교 3학년 때 상업과목을 가르치신 서강대 출신 선생님이 서강대
위적 국가폭력에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대항했던 그
학교와 회계사라는 직업을 소개하여 주셨고, 이 때부터 서강대 경영학과
당시 패기다. 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 시청광장에서 나를 지켜주는 사
에 입학하여 회계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다행히 학력고사
람은 전투경찰이 아니라 다수의 함께 한 시민들이었다는 기억이다. 민주
성적이 서강대에 입학할 정도가 되어서 주저없이 서강에 입학하여 지금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라는 구호를 애써 무시하며 홀로 시험공부 한
까지 학부(84학번), 경영대학원(41기), 최고경영자과정(39기)까지 모두 서
다며 도서관에 앉아 있던 내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그 당시의 기억, 이를
강에 학적을 두었다. 여러 공부 과정을 거치기는 하였어도 대학은 서강
잊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만을 고집한 것이다. 서강출신의 상업과목 선생님 덕분에 서강에 들어오게 되었고, 서강에 서의 배움 덕분에 공인회계사에 합격하여 나름 만족스러운 사회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강에 대하여 무한대의 봉사를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서강과 관련된 모임에 참여하거나 그곳에서 봉사하는 직책을 제안받은 경우에 대부분 주저없이 수락하였으며, 한 때 는 10개 이상의 서강 관련 모임에서 회장 또는 기타의 직책으로 봉사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주위의 동문 또는 외부의 사람들 이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으
16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61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청년서강, 장년서강
나 나의 확실한 신념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전문환(86 신방)
서강은 나의 종교이므로 기독교에서 십일조를 내야 하는 것처럼 가능 하면 많은 기부를 하려고도 노력하였다. 나의 기부액이 소득의 10%에 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소득과 재산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앞으로도 금전적으로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나의 경제적 환경도 좋아지면 좋겠다.
지천명知天命. 인간이 오십 세에 이르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공자
서강에서 어떤 보상을 바라고 기부금을 내고 서강모임에 참여하는 것
의 말씀이다. 서강이 1960년에 개교하여 졸업생을 배출한 지 50년이 되
은 결코 아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이미 과거에 서강에서 받은 많
었으니 인간의 인생에 빗대자면 서강은 이제 ‘천명天命’을 알게 되는 50년
은 은혜’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보람과 기쁨이
연륜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는 그 어떤 보상보다 큰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나 자신의 환경에 대하여 감사할 따름이다. 서강 동문들이 20%만이라도 학교와 재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행 동에 나선다면 서강은 지금보다 훨씬 발전할 것이다. 동문 선배들의 작
나는 1986년에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서 1998년에 석사를 마치고 서 강을 떠났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당시 나 또한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 쟁의 과정에서 5년 가까운 수배와 투옥의 시간으로 잠시 서강을 떠나 있 었지만, 운 좋게도 나의 청춘은 온전히 ‘청년 서강’과 맞물려 있었다.
은 관심과 정성은 재학생들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많이 경험
아직도 86년 원서를 내러 처음 들어섰던 서강의 모습이 선명하다. 정
하였다. 학교의 예산 집행에는 법률적인 제약이 따르는 만큼 동문 선배
문에는 도르래가 달려 밀고 닫던 철 대문이 있었고, 눈이 다 녹지 않은
들이 공식적인 예산으로 집행하지 못하는 학과 또는 동아리의 활동을 챙
캠퍼스는 누런 흙탕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이래서 서강고등학교(?)
겨주면서 멘토링의 기회도 가진다면 정말 멋진 ‘서강가족’의 완성이 가
라고 하나?’ 하지만 약간의 실망감은 대학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삶의 분
능하리라 믿는다.
주함으로 곧 잊혀졌다. - 운동장 한 켠 간이식당이었던 일명 ‘개집’의 정말 고무줄 같은 탄성 력을 가지고 있는 짜장면과 무지 짜고 딱딱한 단무지. - C관 식당에서 식판 하나로 가위바위보해서 밥 타오는 순서 정하기. - 독후감 마감시간에 이르러 각 건물의 라운지에서 친구들의 독후감을 베끼거나, 독후감에 써 넣을 한자漢子 그리기. - 영컴시간에 십 여명 정도가 둘러앉아 전국 각지의 사투리가 섞인 영 어 단답형 단어를 듣고서는, 귀신같이 이해함과 동시에 나도 한마디라도
16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63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더하기 “쏘우…아이, 아이…버트, 버트…, 움, 움, 움…” - 미팅장소 알아내서 고학생인 양 껌 한통에 1000원씩 팔아 군자금을 만들고, 제일 맘에 드는 여학생 앞에 비집고 들어가서 같이 ‘썸’타기.
164
러했듯 수배받고, 검거되고, 재판받고, 감옥 살고, 석방되고, 복학해서 졸업하고, 불같은 내 청춘을 보듬어 주었던 노고언덕을 떠났다.
어디 이뿐이랴! 어둠이 내리면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막집, 잉
떠나보니 알게 되었다. 작고 보잘 것 없던 서강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
어집, 레떼, 물레야, 육교집, 포시즌, 동해횟집, 노고산숯불갈비, 카스타
이었는지. 정문 왼편에 봄바람,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던 솔밭이 그립고,
운, 광성고 철길 근처 포장마차 그리고 놀기에 24시간이 모자란 우리를
동네 언덕 같던 청년광장. 엄마의 치맛자락 같던 삼민광장, 다른 대학과
또 기다리고 있는 부림장, 노고산 여인숙 등등.
는 달리 줄 하나 쳐놓지 않은 잔디밭 아무데나 들어가 누우면 그야말로
정말 노고언덕 그 작은 공간에서 당시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분주하고
파란 하늘이 다 내거였다. 서강은 그런 곳이었다. 그저 조용히 나를 보듬
재미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우리네 사람 사는 색깔과는 다른
어주는 곳, 나의 존재를 일깨워 주는 곳, 살아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
전혀 다른, 뭔가 무시무시한 추억들이 더 선명하다.
닫게 해주는 곳.
운동장에서 마치 군 병영장 마냥 런닝 입고 족구하던 전경들, 갑자기
서강을 떠나, 나도 어느새 불혹의 나이를 넘어 50을 바라보게 되었다.
교정 구석에서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터져 나오던 낯익은 목소리 그
그동안 서강도 더 성장하고 더 커지고, 이제 정말 꽉 들어찬 건물들로 발
리고 창공에 뿌려지는 누런색의 유인물들, 무서운 총성과 함께 하얀 연
디딜 틈조차 없다. 그리고 첫 여성대통령까지 배출한 가장 전성기를 보
기를 내뿜는 최루탄, 장갑차를 연상시키는 페퍼포그 등등. 헬멧에 방독
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하는 이 시점에서 우
면을 쓰고 총과 진압봉을 들고 서서, 우리의 지성을 가로막고 자유를 감
리는 이러한 외형보다도 진정 앞으로 서강이 품고 나아가야 할 뜻이 무
시하고 억누르고 탄압하던 그 어둡고 칙칙하고 무거운 압박감이 서강을
엇인가를 잘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가 너무 큰 걸 탐하지는 않는지, 너무
짓눌렀다. 무섭고, 두려웠다.
강해지려 하는 건 아닌지, 과연 서강이 우리에게 가르쳤던 정의, 진리,
과연 대학이 이런 곳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 혼자 힘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고 당시의 총학생회장이라면 누구라도 그
자유를 실천하고 있는지….
으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도 많은 자괴감, 무력감, 비
서강을 한낱 인간의 짧은 인생사에 비유한 건 억지인지도 모른다. 분
겁함…. 하지만 이에 맞서 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또 다른 정의
명 서강은 앞으로 훨씬 더 오래 존재할 것이고, 역사 속에서 지금보다
감, 사명감, 투쟁심과의 충돌.
도 더 해야 할 사명이 많을 것이다. 이제 서강은 풋풋한 젊은 후배들을
그리고 맞이하게 된 박종철, 이한열 등 숱한 고귀한 넋들의 희생으로
잘 가르치고 키워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창조적인 자유인으로 세상에 내
일어난 1987년 6월항쟁, 서강은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언제나 그렇듯
놓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사회 곳곳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작지만, 조용히, 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길로 타올랐고 나도 어느새 그 현
‘서강인’들은 사회의 어둠을 비추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
장의 한가운데 서서 내 스스로에게 던져진 물음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
로 서강에 지워준 ‘하늘의 뜻’이 아닐까!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학창
165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A관 잔디밭, 그리고 명작
시절 듣기만 해도 내 가슴속을 울리게 했던 말.
김민아(87 신방)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이 두 문장이 후배들의 심장과 맥박을, 여전히 고동치게 할 것을 기대한다.
지난 4월 13일 끝난 SBS 오디션 프로그램 ‘K팝스타 시즌3’의 우승자 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온 버나드 박이었다. 팝송을 주로 불러오던 버나 드 박은 ‘말하듯이 자연스러운 가요감성을 들려달라’는 심사위원들의 미 션을 받고 고故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불렀다. 열창에 감동한 친 구는 페이스북에 이 노래를 올렸다고 했다. 유재하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가 이내 떠나버린 1987년을 떠올리면서. 그해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는 남자 35명, 여자 12명 등 47명이 입학 했다. 스무살 우리들은 젊고 푸르렀다. 세상은 달랐다. 1월에 발생한 서 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이미 시민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일체의 개헌논의를 거부하는 ‘호헌 조치’를 발 표하면서 이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 단이 박종철군 사건의 은폐 축소 사실을 폭로한 것을 계기로 야당과 재 야 정치권, 종교계, 학생, 노동자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왔다. 6월 10 일 ‘박종철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전국 20 여개 도시에서 열린 것을 시작으로, 전두환 정권이 6·29 선언으로 백기 를 들기까지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외침은 계속됐다. 한국 현대사를 바꿔놓은 ‘6월 항쟁’이었다. 87학번들에게 대학 새내기로서 겪은 6월 항쟁은 잊지 못할 경험으로 남았다.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 탰다는 ‘승리의 체험’은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중요한 정신적 자
16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67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산이 되고 있다.
한다.
하지만 고백건대, 청춘으로서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스무살, 우리는 어른인 척 했으나 실은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치기 어
운동권이든 비운동권이든 최루탄 냄새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학교에 나
린 아이들이었을 뿐이다. 학회에서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민중의 삶을
오면 선배나 동기 가운데 누군가가 경찰에 끌려갔다는 우울한 이야기를
공부하며 열변을 토했지만, 집에 돌아오면 부치지도 못할 연애편지를 썼
들어야 했다. 데이트를 하거나 멋내는 일, 학점을 잘 받아 장학금 타는
다. ‘상림’이나 ‘물레야’에서는 ‘우리들의 사랑법’이나 ‘너를 부르마’ 같은
일이 죄스럽게 느껴졌다. 개인적 행복을 기대하는 것이 사치로 여겨지던
민중가요를 불렀으되, 마음이 더 쏠린 쪽은 이문세의 감미로운 노래였
시절이다.
다. 그래서 청춘이었을 게다. 미숙하고 불안정했기에, 흔들리고 방황했
질식할 것 같던 청춘들에게 그나마 숨을 쉬게 해준 곳은 A관 앞 경사 진 잔디밭이었다. 신방과 전공 강의가 주로 열리던 K관과 구내식당이 위
기에, 좌표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믿었기에 젊음이었을 게다. 이제는 돌 아오지 못할 87년을 기억하며 유재하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다.
치한 C관을 잇는 요충지에 있었기에 이내 새내기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어떤 친구는 기타 치며 낮은 목소리로 노래했고, 어떤 친구는 낯을 붉히 며 첫사랑을 털어놨다. A양과 B군이 캠퍼스커플이 됐다거나, C군과 D양 이 헤어졌는데 중간에 끼어든 E군 때문이었다는 등의 믿거나 말거나 식 연애담도 빠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다른 과 남녀 학생들을 훔쳐보며 인 물평을 하기도 했다. 햇살 따스한 날, 말없이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학교에서 신촌로터리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음악다방 ‘명작’이 있었 다. 500원짜리 커피 한 잔 주문하면 몇 시간이고 앉아 있어도 눈치 주지 않는 ‘착한’ 곳이었다. 여기서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이나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청해서 듣고 또 들었다. 이제는 두 곡 모두 한국 가 요의 전설이 되었지만 87년 발표 당시에는 처지가 달랐다. ‘사랑이 지나 가면’이 수록된 이문세 4집 앨범은 285만장이 팔리면서 당시 최다 음반 판매 기록을 뒤집었다. 반면 ‘사랑하기 때문에’가 담긴 유재하 1집은 발 표 직후에는 ‘기존 가요와 다르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 다고 한다. 87학번 사이에서도 이문세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던 걸로 기억
16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69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넉넉한 상징, 알바트로스탑 주원준(87 경영)
런 것을 하는구나. 이제 묵묵히 서 있는 탑의 시대는 건너간 것일까. 상징은 세대를 나눈다. 알바트로스탑을 모르는 선배들은 어쩌면 ‘양희 은’이나 ‘문성근’이나 ‘박근혜’라는 상징으로 서강을 기억할지 모른다. 탑 을 경험한 세대라도 ‘박찬욱’이나 ‘개집’이나 ‘FA 제도’에 더 꽂힐지도 모 르겠다. 가장 우수한 인재를 사심없이 뽑던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을 아
그날 이후 교문에 들어서면 날렵하고 선명한 알바트로스탑이 우리를
쉬워 할 수도 있다. 나는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의 미래를 제시하던 선진
맞는다. 나는 23년 전 알바트로스탑 개막식의 사회자였다. 몇몇 후배들
적 사제들을 떠올린다. 한편, 서강이 건물의 숲이 되기 전의 모습을 그리
과 작당해서, 총장님과 총학생회장 등을 분수대에 빠뜨리는 것으로 개막
워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서울에 아파트가 솟아나기 전에는 A관 앞에서
식을 마무리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잠수(?)에 참가한 일부는 분수대의
탁트인 시야로 한강을 응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노고 언덕은 탑보
노즐에 찔려 살짝 피도 났다. 이렇게 알바트로스탑이 ‘물과 피로’ 세례(?)
다 높은 건물로 둘러 싸여 간다. 그러고보니 알바트로스 탑은 노고 언덕
를 받은 해는 1990년. 그날은 개교 30주년 대동제였다.
에 가장 낮은 지대에 서 있다.
그런데 동문회는 왜 저 탑을 만들어 주었을까. 서강인은 왜 저 탑을 저
상징은, 집단의 기억에 선명하게 생존하는 소수의 아이템만이 누릴 수
기 두었을까. 잠시 그때를 떠올려 본다. 당시 사람들은 서강이 상징이 없다
있는 특권이다. 하지만 상징은 독점하지 않는다. 상징은 옳고 그름을 따
고 말하곤 했다. 상징을 세우자고 했다. 그만큼 상징에 배고픈 서강이었다.
지지도 않는다. 알바트로스탑은 각자의 기준대로 보고 나름대로 사랑해
서강에게 상징은 요긴했다. 졸업 후에도 동문들은 그 탑을 이야기했
도 되는 넉넉한 상징이었다. 마이크와 함성에 익숙하든, 도서관에 익숙
다. 탑의 세례식 사회자로서, 탑에 얽힌 이야기를 어찌 흘려 들을 수 있
하든, 연애의 추억에 가득한 학창시절을 보냈든, 아르바이트로 학교를
겠는가. 술자리에서든 식사를 하든 차를 마시든,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
다녔든, 우리의 과거는 서로 어울려 역사로 남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뒤
으며 감탄했다. 참 다양한 기억이 서려 있었고, 내가 경험한 서강인의 사
에 나올 상징은 선배의 상징을 딛고 성장한다. 지금의 후배들은 언젠가
연은 하나 하나가 새삼스럽고 착했다. 배고픈 청춘의 사연이 수없이 알
다시 새롭고 신선한 자극으로 선배를 제칠 것이다. 그런 당연한 소망을
바트로스탑을 향해 깃들었던 시절,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신학적
진심으로 희망한다.
관심 때문에 결국 종교학과 대학원을 택했다. 개인적으로는, ‘전과자轉科 者’(?)가 되기까지, 몸과 마음이 앓던 기억이 서린 탑이기도 했다.
17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그러고보니 교문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탑의 나이는 이제 겨우 20 대 초반이다. 그만큼 서강은 아직 청년이다. 그리고 더욱 젊은 상징을 찾
서강은 하나의 상징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상징을 생산했다. 학
고 있다. 쓰여야 할 상징은 아직 수두룩하다. 우리를 맞을 새로운 미래를
창시절 함께 소리지르는 기억이 아쉬웠던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화려한
향해, 새로운 상징의 세례식을 향해, 건물보다는 사람이 쑥쑥 크는 서강
응원단이 생겼다고 들었다. 조금 충격적이고 나름 신선했다. 우리도 그
을 향해, 힘내자, 서강.
171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추억의 앨범
우리들의 80년대
게시판에서 시험과목과 기간을 확인하려는 학생들 1980년 5월 후문 앞 가두시위
1985년 대동제의 주요 행사인 탈춤과 마당극 故 김의기(76 무역) 열사. 1990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17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73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대동제 기간에 열린 서강 주점
영어커뮤니케이션 수업 모습
신촌판화공장의 판화 입학원서 지원현황판
17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75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교문 앞 시위장면 강의실 수업 모습
신입생들의 도서관 오리엔테이션
교정의 벤치
17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77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1981년 5월 테레사 수녀가 서강을 방문하여 두 차례 강의를 하였다. 테레사 수녀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호소했다.
1982년 4월 신입생의 날
17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83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1983년 11월 제7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로 대상을 차지한 에밀레
179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1988년 입학식 1984년 5월5일 한국 가톨릭 교회창립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때 교황은 서강을 두 차례 방문하여 한번은 체육관에서 종교인과 만났고 또 한번은 강당에서 지식인과 시간을 가졌다.
1987년 4월 총학생회 선거를 위한 유세 장면
18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89년 4월 중간고사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 줄을 서있는 학생들
181 큰 바다를 향해 날개를 펴다
4
장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백 리 먼 길을 가는 사람은 구십 리를 절반으로 여긴다. 行百里者 半於九十 ─ <전국책>戰國策에 인용된 시詩 구절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어디서나 언제나 우리의 가슴 불타게 하자
1988년은 위와 같은 가사로 많은 국민들에게 사랑받은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가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로 기억되는 한 해, 서울 올림픽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인지도가 사상 최고로 높아진 해였다. 사
‘거대한 날개로 자유롭게 활공하며 생애의 대부분 시간을 비행하면서 보낸다.
회적, 국가적으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우리 사회 거의 모든 분
아주 먼 거리까지 여행하기도 하는데 기록에 따르면
야에서 민주화 열기가 사뭇 뜨거웠다. ‘한강의 기적’으로도 일컬어지는
를 날기도 한다.’ 12일 동안 6000km 12일 6000km를
60, 70년대 고도 경제성장과 산업화에 이어서 민주화라는 또 하나의 기
─ 알바트로스에 관한 백과사전의 설명 중에서
적(1951년 10월 1일자 영국 더타임스 사설 문장,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를 상기해보더라도)을 이뤄낸 시기
초창기 동문들이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만들어 낸 ‘거인들의 어깨’를 바탕으로 큰 바다를 향해 날아오른 서강대학교 총동문회의 전진에는 결코 쉼표도 마침표도 없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명감, 원대한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중단 없는 전진의 동력이었다.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알바트로스의 기상을 상징조형물로 우뚝 세웠다. ‘자랑스런 서강인’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총동문회의 숙원이던, 동문들의 정겨운 고향집이자 동문회의 터전인 동문회관을 세웠다. 18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였던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격변기가 아니었던 적은 없으니 1980년대 후반도 그 러했다. 그러한 격변 중에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많은 동문들이 ‘손에 손잡고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으로, 어디서나 언제나 서강 사랑의 가 슴을 불타게 하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88년 4월 9일 제23차 정기총회에서 이우진(60 사학) 동문이 제16대 동문회장으로 선출 되었다. 상임 부회장 3인을 선임하여 동문회 기본 사업, 조직 활성화와
183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한 모습을 드러낼 상징조형물 건립은 지난 동문 정기총회에서 최종 인 준을 받아 현재 추진위를 중심으로 구체화 작업에 돌입했다. 예산 규모 는 1억2000만원. (1989년 5월 31일자 제173호 <서강옛집>)
본 동문회는 서강 개교 30주년을 맞아 내년 4월 18일 상징탑과 만남 의 광장을 건립할 예정이다. 지출 예산은 조형물 건립에 1억 2000만원, 동문록 제작에 3500만원 등 총 1억5500만원으로 잡고 있다. 이에 필 요한 수입은 동문록 판매대금 1억1000만원을 주로 하고, 동문록 광고 비 5000만원을 포함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광고비는 이미 예산을 돌파했다. 동문록 대금은 권당 2만원이지만 추가로 지불할 수도 있다. (1989년 10월 17일자, 제176호 <서강옛집>) 1988년 4월 9일 제23차 정기총회에서 이우진(60 사학) 동문이 제16대 동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행사 등을 맡게 된 것이 새로운 회장단 사업 추진의 특징이었다. 신임 회
1990년 3월 15일, 30주년 기념사업추진위 홍보분과(위원장 임항순, 69
장단은 동기회 조직, 직장 동문회 조직, 지방 지부 조직, 취미 서클 등 다
신방)는 1989년 7월부터 5개월간 실시한 명칭 공모 설문조사 결과를 종
양한 조직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중점 목표로 정하고 개교 30주년(1990
합하여 30주년 기념 상징탑 명칭을 ‘알바트로스’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년) 기념사업에도 만전을 기하기로 했다.
이 명칭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거주하고 있는 강여규(72 영문) 동문이
개교 30주년 기념사업과 관련하여, 모교 교정에 기념 조형물을 건축하 자는 의견이 동문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었다. 개교 30주년 기념사업분
제안한 것이었다. 알바트로스 탑 제막식은 4월 17일에 열린 개교 30주년 모교 방문의 날(홈커밍데이) 행사에서 거행되었다.
과위원회(위원장 변원지, 61 경제)를 중심으로 사업 계획을 검토해온 결과,
세상에서 가장 높이, 가장 멀리 나는 새 알바트로스의 의미심장한 상
모교 교육이념과 발전 방향 등을 상징할 수 있는 기념 조형물을 세우는
징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005년 영국 남극 연구소는 사우스조지아
것이 좋다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1989년 4월 1일에 열린 회장단 회의에
섬에서 기른 회색 머리 알바트로스의 몸에 5년 전 장치를 부착, 18개월
서 이에 대한 1차 심의를 마쳤고, 학교 당국과 협의하면서 각계 동문들의
동안 추적한 끝에 이동 경로와 습성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연구 대상
의견을 더욱 폭넓게 수렴하여 구체적으로 진행키로 하였다.
알바트로스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경이로운 여행을 했으며, 그 중 가장 빠른 수컷 한 마리는 46일 만에 2만2500킬로미터를
본 동문회 기념사업으로 개교 30주년 기념일인 내년 4월 18일 그 장엄
18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일주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매일 서울~부산 간 거리를 날아간 것
185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를 상징하였다. 총동문회 내의 다양한 조직들을 활성화시킨다는 중점 목표는 착착 실 현되어 갔다. 1988년 5월 20일에는 해운업계 재직 동문 30여 명이 모여 해운업계 재직 동문회인 해강회海江會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당시까지 70여 명 동문들이 해운업계에 재직 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5월 29 일에는 부부동문회(대표 김석진, 63 철학)가 모교 체육관에서 제1회 서강대 학교 부부동문회를 개최했다. 당시 20여 쌍 동문 부부들이 참석한 가운 데 이우진 동문회장, 서인석 총장, 안병태 이사장, 헙스트 신부 등이 격 려사를 했다. 서강의 유달리 가족적인 분위기 때문일까? 노고 언덕에서 남녀 선후배나 동기로 만나 인연을 싹 틔우고 사랑의 줄기가 자라나 열 매를 맺는 경우, 문자 그대로 ‘서강 가족’이 되는 경우가 타교에 비해 많 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동문들의 뜻을 모아 모교에 기증한 상징탑 ‘알바트로스’. 모교에 대한 동문들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이다. 모교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원뿔형 수직 형상으로 하늘 향해 솟아 있 는 알바트로스 탑은, 공자가 나이 서른 때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를 확고 하게 세웠다는 삼십이립三十而立과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교 30주년을 맞이한 모교에 대한 동문들의 자부심의 표현이자 모교 발 전과 총동문회 발전을 향한 자신감의 표출이었고, 땅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으되 드높은 하늘을 향하는 서강 지성, 과거에서 배우고 현재를 직시 하며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서강 지성,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 을 결코 외면하지 않되 멀고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서강 지성의 예기銳氣
18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88년 5월 개최된 제1회 부부동문회
187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같은 해 6월 26일에는 모교 강당에서 가톨릭학생회 총동문회 창립총 회가 개최되었다. 10월 26일에는 군산·이리(현재 익산) 지역 동문회가 동문 8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11월 20일에는 ROTC 동문회, 즉 서강학군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서강 ROTC는 72년 제12기부터 배출하 여 당시 26기까지 약 600여 명의 회원이 있었다. 창립총회에는 100여 명 동문들이 참석하여 배기주(70 신방) 동문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12월 19일에는 전주에서 전북 지역 동문회가 출범하여 동문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초대 회장으로 김희철(경제대학원 3기) 동문이 선출되었다. 1989년 10월 27일에는 서강기업인동우회가 발기위원회를 구성하여 14회에 걸친 준비 모임을 가진 끝에 발족되었다. 당시 회장은 강신영(61 경제) 동문이었다. 이밖에도 동문들의 취미를 살린 서강동문 등반대회가
1988년으로 3년째를 맞이하며 꾸준한 참여가 이어졌으며, 그 해 10월 26
1988년 10월 제3회 서강동문 등반대회
일에는 동문회장배 골프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양한 동문 모 임과 조직들이 활성화되면서 서강대학교 총동문회의 네트워크는 빠르게 확장되어갔다. 단순히 양적 확장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강도 도 높아져갔다. 다양한 동문 모임과 조직들이 총동문회를 중심으로 유기 적으로 활동하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던 것이다. 총동문회는 그러한 유기적 네트워크를 강화할 수 있는 기반으로 동문 록 발간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문록 발간을 위해 반드시 필요 한 동문 현황 파악을 위하여, 사실상 사무국 전 직원이 전력을 기울이며 아르바이트생들도 힘을 보탰다. 당시 1989년 4월 동문회 사무국의 분위 기를 <서강옛집>(제172호)은 이렇게 전한다. ‘요즘 동문회 사무실 분위기가 마치 전신전화국 교환실을 방불. 서강 동문록 현황 파악하느라 1만 4000여 동문가족들의 현황을 일일이 전화 로 확인하다 보니 전화에 불똥이 튈 판.’
18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88년 10월 26일 제1회 동문회장배 골프대회
189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89 서강동문록> 준비와 발간에는 사무국 직원 6명, 아르바이트생 11
것에도 연유한다. 서강옛집은 국내외 1만 부 내외를 배포하는데 이는
명 등 연인원 17명이 참여하였고, 컴퓨터 1대를 동문록 준비 전용으로 가
거의 모든 동문에게 발송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동문 숫자 대 동문
동시켰다. 1989년 10월 중순에 일단락된 동문 현황 파악 결과 전체 약 1
회보 발송 비율을 따지면 타 대학의 추종을 불허한다.
만5000명 동문들 가운데 1만2000여 명 동문들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 다. 이는 전체 동문의 80%에 달하는 숫자였는데, 동문 현황 파악이 80%
동문 현황 데이터베이스는 동문록을 제작할 때만 축적하는 것이 아니
선에 이른 것은 국내 대학 동문회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처음 발의한 이
다. 총동문회는 평소에도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하여 동문들의 현황
후 10개월에 걸친 작업을 거쳐 1989년 12월 4일에 <89 서강대학교 동문
변동 사항을 상시적으로 업데이트해왔다. 그렇게 해서 꾸준히 수정, 보
록>이 출간되었다.
완하는 동문 현황 데이터베이스는 총동문회 사업의 중요한 바탕이 되는
다른 주요 대학들에 비해 동문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는 점,
것은 물론이고, 각종 동문 모임 활성화를 위하여 엄격한 관리 속에 제공
역사가 상대적으로 길지 않다는 점 등이 동문 현황 파악에서 유리한 점
되고 있다. 나아가 모교의 발전기금 모금을 비롯하여 모교 발전을 위한
이라 하겠지만, 대학 동문회들 가운데 사실상 최초로 업무를 전산화하고
일에도 총동문회와 학교 측의 제휴, 협력에 따라 요긴하게 활용된다.
동문 현황 파악에 주기적으로 사무국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 노력을 기
사실 총동문회와 학교는 ‘따로 또 같이’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학교 발
울였다는 점이 이러한 성과의 주된 요인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총동
전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일에 대해서는 뜻을 합하여 협력해나가는 관계
문회는 <89 서강동문록> 준비 초기 단계였던 1989년 2월에 다음과 같이
다. 동문들로서는 학교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늘 걱정하면서 또
평가하였다. (<서강옛집> 제171호)
한 학교를 성원해마지 않는다. 때로는 학교 발전 방향에 관하여 건설적 인 의견을 제기하기도 하고 애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학교로서
19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64년 2월 첫 동문 62명이 동문회를 발족, 25주년 시점에서 1만4000
도 총동문회 발전이 결국 학교 발전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명에 육박하는 대가족으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동문들의 현황을 파악
때문에, 총동문회와 협력해나가고자 한다.
하는 업무로 소공업적인 단계에서 전산화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동
이런 측면에서 볼 때 1989년 6월 20일에 열린 제1회 서강 기업인·
문회는 지난 81년 최초로 동문록을 책자형식으로 출판한 이래 83년, 87
경영인 간담회는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당시 이우진 동문회장과 기업
년에 각각 동문록을 제작했으며 올해도 제작할 계획이다. 동문회에는
인·경영인 동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 측에서는 박홍 총장과 최창섭
현재 파악하고 있는 동문현황의 정확도를 70% 안팎으로 보고 있는데
(60 영문, 모교 명예교수) 기획실장 등이 참석하였다. 이는 총동문회 역사
이는 타 대학에 비해 매우 높은 현황이다.
상 최초로 모교의 현황과 발전 방향을 놓고 총동문회와 학교가 심도 있
이는 모교가 개교 30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체계적인 준비가 된 연유
게 의견을 교환한 자리였다. 당시 모임에서 동문들과 학교 측은 모교 발
도 있지만 사무국에서 끈질긴 노력으로 동문의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전을 위해서는 재정 확충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사항이라는 데 의견을
191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모았고, 동문들이 적극적으로 학교 후원에 나서기로 했다.
서강 동문들에 대하여 이지적理智的이고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열정은
돌이켜보면 총동문회의 출발은 학교 측의 지원에 힘입어 가능했다. 초
부족한 게 아니냐는 동문들 자신 및 바깥의 평가가 있기도 하지만, 취지
창기 동문회는 재정, 사무 등 여러 측면에서 학교를 일종의 인큐베이터
가 올바르고 목적이 훌륭한 일이라면 서강 동문들의 열정은 늘 뜨겁다.
로 하여 서서히 자생력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이후 총동문회가 자생력
서강동문장학회의 출범과 발전이 그 예증이라 할 것이다. 서강동문장학
과 독자성을 확립해나가면서 총동문회와 학교의 관계는 화이부동和而不
회는 1990년도 2학기에 재학생 19명에게 장학금 1400여만원을 지급하
同,
즉 서로 화합하여 협력할 것은 협력하되 어디까지나 각자의 정체성과
면서 총 지급액 1억원을 돌파했다. 당시까지 서강동문장학회는 모두 206
기능에 충실한 관계로 발전해왔다. 제1회 서강 기업인·경영인 간담회는
명 재학생에게 1억1180만원에 달하는 장학금 혜택을 준 것으로 집계됐
바로 그러한 화이부동 관계를 확인시켜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1991년도부터는 해외연수 장학제도 Sogang Fellow를 신설하여 1기
그런 가운데 같은 해 9월에는 서강동문장학회의 장학기금 납입액이 3 억원을 돌파했다. 1986년 9월에 기본 재산 1억원으로 출발하여 3년만에
장학생으로 박현도(85 종교), 이규봉(85 영문), 서동호(86 경영), 김은희(88 사학) 동문(당시 학생)이 선발되었다.
4억원 규모의 기금을 보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1989년 당시까지 전체 동
1990년에 들어와 총동문회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업이 첫 발을
문의 약 20%, 그러니까 동문 5명 중 1명이 참여하고 있었으니 높은 참여
내딛었다. 바로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이 제정된 것이다. 1990년 2월에
율이라고 할 수 있다.
총동문회는 이에 관하여 ‘사회에 이름을 떨쳐 서강을 널리 알린 사람, 모 교를 지원하여 학교 발전에 기여한 사람, 좋은 글이나 뛰어난 학문적 업 적이 있어 서강의 이름을 알린 사람’ 등으로 수상 대상 및 선정 기준을 정 하였다. 각계 동문들의 추천을 바탕으로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운영위원 회가 최종 결정한 제1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수상자들은 다음과 같았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 전 모교 경제학 교수. 2013년 작고) 존 V. 데일리 (John V. Daly 한국명 정일우, 모교 일반과정부 교수·2014년 작고) 김규원 (60 물리, 용문고 교사. 1990년 작고) 안정효 (61 영문, 소설가 및 번역문학가)
제1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시상식은 1990년 4월 17일 30주년기념 상 1991년 선발된 서강펠로우 1기와 동문회 임원진
19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징탑 알바트로스 제막식 직전에 거행되었고, 수상자들에게 상징탑 모형
193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의 상패가 전달되었다. 자랑스런 서강인상은 이후 회를 거듭하면서 명실
없는 것이 <서강옛집>의 혁신이다. 1990년 8월 9일 제184호부터 <서강
상부하게 서강 최고의 영예로 자리잡아 갔다. 역대 수상자들 가운데 몇
옛집>을 16면으로 혁신하여 표지를 컬러로 인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명의 소감을 돌이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강옛집〉은 1964년 1월 창간 이후 1976년부터 타블로이드 격월간 4면 (86호~121호)으로, 1983년부터 격월간 8면(122호~131호)으로, 1985년부
‘서강에서 배운 정직, 성실, 배려를 실천하여 지금보다 더 자랑스런 서강인이 될 수
터 월간 8면(132호~183호)으로 발행되어 왔다. 제184호부터 현재 동문들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낙회, 70 신방)
이 만나는 <서강옛집>의 체제가 갖추어진 셈이다. 한편 1991년 1월 17일에 공표된 신년사에서 이우진 동문회장은 서강
‘초급장교 시절 서강에서 배운 학문과 나눔의 이치는 오늘의 저를 있게 만든 소중한
대학교 총동문회 역사의 중대한 획을 긋는 사업 구상을 다음과 같이 밝
밑거름입니다. 공동체 발전에 헌신하는 참 인재들을 양성하는 서강 학풍이 우리 사
혔다.
회를 훨씬 성숙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김태영, 73 독문) 서강인에게 작은 꿈이 있다면 그것은 동문장학빌딩을 세우는 일입니다. 주지하시는 ‘선생님은 생전에 서강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셨어요. 누구보다 서강과 학생들을 위
바와 같이 여러분께서 희사해 주신 장학기금은 3억원 정도인데, 날로 돈의 가치는
해 열심히 연구하고 고민하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 이 뜻 깊은 수상을 하늘에
하락하고 있기 때문에 부동산화 하고 이를 운영하여 생기는 이익금으로 장학 사업
서 보시고 매우 흐뭇해 하시며 앞으로도 서강 발전을 위해 기도해 주실 거라 생각
을 해야 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동문회는 이 사업을 올해 착수하려고
합니다.’ (故 장진 명예교수를 대신하여 수상한 부인 김종숙 여사)
합니다.
‘영화를 사랑하게 된 것도,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모두 서강에서 보낸 꿈 많
총동문회는 1991년 3월 14일 제54차 정기 이사회에서 회관 건립안을
은 시절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서강에서 보낸 날들은 문화인이 되어가는 과정 그 자
통과시킨 뒤, 모교 이사회에 학교 소유 마포구 신수동 소재 264.08평에
체였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는 영화감독이 되겠습니다.’ (최동훈, 90 국문)
대한 사용 허가를 요청했다. 이에 학교 이사회는 1991년 10월 14일에 사 용 허가를 통보해왔다. 소요 비용은 총 34억원으로 추산되었으며 자금
‘서강은 곧 제 인생입니다. 서강 MBA 입학 후 17년간 여러 면에서 늘 서강과 함께
조달 계획은 장학기금 전용 4억, 임대보증금 20억(추정), 회관건립 기금
해왔으니까요. 서강에서 지낸 시간이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많
모금 10억(목표) 등이었다.
은 동문 여러분들도 서강이 곧 인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방성석, MBA 22기)
1991년 12월에 이우진 동문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박홍 총장이 명예위 원장을 맡아 장학회관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듬해 1992년 1월 13
1990년대 초에 이루어진 동문회 발전에서 중요한 계기로 빼놓을 수
19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일에는 장학회관 건립 사업을 추진을 위한 동문 임시총회가 개최되어 동
195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학회관을 운영해 얻은 수익은 후배를 위한 장학사업, 모교를 위한 재정 적 지원에 쓰입니다.
1992년 4월에 장학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 신입액이 3억원을 돌파했다. 1992년 7월 10일에는 서강장학회관 건립기금 모금잔치가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동문 및 학부모, 각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우진 동문회장, 박홍 총장, 이한빈 서강발전후원회장 외에도 당시 김 대중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김동길 국민당 의원, 김상현 국회의원 등 많 은 내외빈들이 궂은 날씨에도 참석해주었다. 동생이 서강 동문인 가수 노사연 씨, 어려웠던 시절 서강대 정문 앞에서 우산을 팔기도 했다는 가
1992년 1월 13일 개최된 장학회관 건립 사업 추진을 위한 동문 임시총회
문회장이 건립 취지를 발표하고 모금 활성화 방안을 비롯한 다양한 의견 이 개진되었다. 1월 24일에 열린 신년하례식도 서강장학회관(가칭) 건립추진위원회 발 대식을 겸하여 진행되었으며, 당시 즉석 기금 모금에 신입申込 및 납입된 총액이 1억2540만원에 달했다. 건립추진위원회는 위원장 이우진, 집행 위원장 전금홍, 그리고 건축분과, 홍보분과, 기획분과, 총무분과, 모금분 과 등으로 조직을 갖추었으며 각 학번 및 학과 별로 추진위원 800여 명 을 위촉하였다. 건립 취지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2만 서강가족의 관심과 기대 속에 서강장학회관 건립이 시작됩니다. 동 문회에서는 학교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자 92년 말까지 10억원을 모 금, 총 34억여 원을 들여 93년 말까지 장학회관을 지을 계획입니다. 장
19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92년 1월 24일 열린 서강가족 새해 인사의 밤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박홍 총장
197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1994년 7월에는 여성 동문 3000여 명 전원에게 돈 넣는 구멍 3개가 나 있는 빨간 저금통을 소포로 우송했다. 3개의 동전 구멍마다 각각 ‘사랑하 는 아내를 키워주신 서강을 위하여’, ‘우리 엄마를 키워주신 서강을 위하 여’, ‘나를 키워주신 서강을 위하여’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한꺼번에 목돈을 마련하기 어려운 여성 동문들에게 동전을 모아 장학회관 기금을 준비할 수 있게 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우리 서강인은 다른 일류대 졸업생들과는 판이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 습니다. 즉 모범적인 중산층이 대부분입니다. 특별히 거대한 기업인이 나 일부 고소득층이 없이 비교적 평등한 사회인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 두가 단결하여 이번 장학회관을 성공리에 건축한다면 한국에서 또 하 1992년 7월 10일 장학회관 건립기금 모금잔치에서 노래하고 있는 노사연 씨
나의 기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 태진아 씨 외에도 이승철, 김완선 씨가 노래를 불러주었고 이경규 씨
1996년 1월 6일자 <서강옛집>에 실린 ‘동문장학회관 건립의 해를 맞
가 사회를 맡았다. 이는 방송 프로듀서 송창의(70 신방) 동문의 노력으로
이하여’라는 제목의 위와 같은 글이 장학회관 건립의 의미를 잘 말해주
가능했다. 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잔치를 계기로 총동문회는 모금 활동에
고 있다. 1996년 2월 말 기준으로 60학번부터 90학번까지 총 졸업생 2만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720명 중 4197명이 장학회관 건립 기금모금에 참여하여 20.3%의 참여
1992년 12월부터는 장학카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비씨 장학카드를 발행했으며 국민카드와 위너스카드도 이어서 발행했다. 장 학카드는 물품 구입이나 현금 서비스 같은 신용카드의 일반 용도로도 사 용하면서, 이용한 카드이용 대금의 일정액이 모교 장학기금으로 전환되 는 공익카드 성격을 지녔다. 비씨 장학카드의 경우 회원이 카드를 이용 하면 이용대금의 0.1%를 카드사에서 적립하여 모교에 장학기금으로 출 연하는 방식이다. 기금은 카드사 이익금에서 충당하기 때문에 회원의 부 담은 전혀 없었다.
19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92년 12월부터 발행된 동문 장학카드
1994년 7월 여성 동문 전원에게 소포로 우송한 빨간 저금통
199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납입액은 9억1625만원이었으며 이는 동문 1인당 4만4000원 꼴이었다. 60년대 학번 동문들의 1인당 참여 액 수가 가장 높은 가운데, 70년대 학번 동문들이 그 다음을 뒷받침하고 숫 자가 가장 많은 80년대 학번 동문들이 참여 동문의 과반을 넘어 티끌을 모아 태산을 만드는 개미군단이 되었다. 이렇게 장학회관 건립을 위한 많은 동문들의 뜻과 정성이 두터워지는 가운데 1996년 5월 27일에는 국회의원 당선 동문 축하모임이 열렸다. 이 우진 동문회장과 상임부회장들, 박홍 총장, 서정호 부총장, 이우용 경영 대학원장, 신대진 최고경영자과정 동문회장 등이 참석하였다. 당시 4월 11일에 치러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동문은 다음과 같이 12 명이었다. 김석원(64 독문, 신한국당 대구 달성), 정한용(74 경제, 국민회의 구 1996년 6월 20일 열린 학과별·학년별 조직대회
로갑), 이신행(경대원 7기, 신한국당 구로을), 김상현(STEP 1기, 국민회의 서대문 갑), 이동복(STEP 1기, 자민련 전국구), 신기하(STEP 3기, 국민회의 광주동), 박
장학회관 건립은 총동문회의 모든 역량을 결집시키는 일이었다. 모금
상규(국민회의 전국구), 서상목(STEP 4기, 신한국당 강남갑), 조종석(STEP 6기,
활동을 통해 기금을 모았고, 조직 개편을 통해 사람을 모았다. 동문회는
자민련 충남 예산), 박명환(STEP 7기, 신한국당 마포갑), 서청원(STEP 8기, 신한
정관을 개정하여 1994년 1월1일부터 기존 이사회가 아니라 새로 선출된
국당 동작갑), 박범진(STEP 9기, 신한국당 양천갑) 동문이 국회에 진출했다.
대의원이 동문회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대의원은 학번, 학과, 동아리,
최고경영자과정 출신 동문들이 다수를 이루었고 개교 이후 36년 만에 처
직종, 직장, 지역 등 동문회를 이루는 각종 단위별 대표자로 구성되었다.
음으로 학부 졸업 동문 국회의원 2명이 탄생한 선거였다. (박근혜(70 전자)
또한 1996년 6월20일에는 동문회 역사상 최초로 각 학과 학번 대표 160
대통령은 2년 뒤 1998년 4월 2일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하여 15대 국회에 진출)
여명이 참여하는 ‘학과별, 학번별 조직대회’가 열렸다. 동문회관 기금 모
학부 졸업 동문 역대 국회의원은 15대 국회에 진출했던 박근혜, 김석
금을 위한 조직화이기도 했지만 단위 동문회 강화가 전체 동문회의 발전
원, 정한용 동문 외에 서병수(71 경제), 김호연(74 무역), 부좌현(77 철학),
이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 이날 학과별 학번별 대표들은 다음과 같
권택기(84 경영), 장성민(86 정외) 동문 등이다. 학부 졸업 동문 역대 지방
은 결의문을 발표했다.
자치단체장은 서병수(71 경제, 부산광역시장), 나소열(77 정외, 충남 서천군
20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수), 유영록(81 철학, 경기 김포시장), 우호태(79 정외, 경기 화성시장), 이해식
결의문 : 국제화 및 자유경쟁 시대에 돌입한 오늘날 모든 도전을 극복하고 모교인
(82 철학, 서울 강동구청장), 이제학(83 국문, 서울 양천구청장) 동문 등이다.
서강대학교와 동문회의 발전을 위하여 서강대학교 동문회는 금일 학과대표 및 학
201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번 대표 조직대회를 개최하며 다음의 사항을 결의한다. 1)조직을 강화한다. 2)조직 강화의 구체적 방법으로 학과별 및 학번별 조직을 다진다. 3)각 조직이 동문회 운영 에 적극 참여하는 방법을 찾는다. 4)학과 발전을 위한 의견 교환의 시간으로 학과별 회장과 동문회 이사진은 1년에 2회씩 총장 및 학교당국과 의견 교환 모임을 갖는다. 5)동문회관 건립에 대하여 100% 동문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하며 개인당 헌 금 하한선은 30만원으로, 납입완료는 향후 2년까지로 한다. 6)동문회 집행진은 학 과별 학번별 동문회에 동문회관 모금액을 배정한다. 1996.6.20. 서강대학교 학과별 학년별 대표일동
흩어져 있던 동문들이 단위 동문회 별로 다시 모이게 되자 전체 동문 회는 뿌리가 튼튼한 큰 나무로 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 동문들의 참여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동문회관
1999년 2월 6일 동문회장단 제주동문회 방문
건립은 1997년에 들어와 뜻밖의 난항에 부딪혔다. 당시 신임 총장이 동 문회관 교내 건립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총동문회에 전했던 것이다. 이에 총동문회는 5월 19일 대의원 회의를 소집하여 동문회관 건립안이 1995 년 12월 학교, 학교법인, 동문회 3자가 합의한 사항임을 재확인하면서 동 문회관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학교 측과 다시 협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98년 1월 8일에 열린 대의원 총회에서 동문장학회관 교내 건 립을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1998년 상반기 중 매입을 원칙으로 서울 시 내 기존 건물을 매입하여 동문장학회관으로 한다’는 안을 통과시켰다. 동문회관 건립을 둘러싸고 학교 측과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대립이 커지 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던 것이다. 1999년 총동문회의 중요한 성과로 지부 순방, 즉 지역 동문회 순방을 들 수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동문들은 총동문회 활동이나 행사 참여 등 에서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부 순방은 그런 소외
20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99년 6월 24일 동문회장단 광주동문회 방문
203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감과 거리감을 완화시키면서 전국적으로 지역 동문회 조직을 활성화시 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제주, 부산, 춘천, 청주, 광주, 대전 등으로 이어 진 순방에는 모교 총장이나 보직 교수들이 동행할 때도 있었고 지부 현 판을 제작하여 전달하기도 하였다. 지역 동문들의 열띤 호응 속에, 순방 을 계기로 지부가 정식으로 창립되는 경우도 있었다. 동문회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동문회관 건립 기금 모금 사업이 전개 되고 단위 동문회가 강화되면서 총동문회는 대규모 행사를 지양하고 하 부 동문회 지원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총동문회는 1998년 6월18일 열 린 ‘제1회 만남의 동문회’가 그 시작이었다. ‘만남의 동문회’는 승진, 당 선, 수상 등 영예로운 활동을 한 동문들을 전체 동문회 차원에서 축하하 는 자리였다. ‘만남의 동문회’는 2001년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동문회관 건립은 1999년 4월 이한택 총장 취임 이후 상황이 급변
2000년 10월 19일 동문회관 기공식
했다. 사실상 무산되었던 학교 내 건립이 재추진될 수 있는 분위기가 무 르익었던 것이다. 그해 12월 27일 김경해 동문회장이 이한택 총장과 조 찬 회동을 갖고 동문회관 교내 건립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을 얻 었다. 이듬해 2000년 5월 동문회관 교내 건립이 확정되었고 10월 19일에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기공식에는 박근혜 자문위원, 김경해 동문회장, 이한택 총장, 전주희 재단 상임이사, 설계사 대표 부대진(MBA 1기) 동문, 시공사 현대건설 임건우 부사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착공 2년 만인 2002년 10월 31일, 발의한 지 10년 만에 동문회관이 완 공되었고 12월 23일에 준공식이 열렸다. 그것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동문들의 사랑과 정성의 결정체 바로 그것이었다. 100여 차례의 관련 회 의, 200여 차례의 지역, 직종, 직장별 모임, 8개 해외 도시 순방과 11차 례의 지부 방문, 50여 차례의 개별 동문 방문 등이 동문회관 건립 추진을 위해 이루어졌다. 발의를 시작하여 물꼬를 트고 모금을 비롯한 추진 과
20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02년 12월 23일 동문회관 준공기념식
205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정을 힘 있게 이끈 이우진 동문회장의 리더십, 구체적인 건립 착수에서 마무리까지 세심하게 관리하며 결실을 이뤄낸 김경해 동문회장과 정재 관 동문회장의 노고를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서강인은 혼자서 빠르게 날기보다 더불어 높이 날고자 한다. 서강인은 혼자서 빠르다는 사사로운 자만심이 아니라 더불어 높다는 공번된 자부 심을 느낀다. 높은 곳에서 먼 곳을 내다볼 때 정확한 항로航路와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일 때 서로의 힘 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혼자서 가는 ‘어리석은 빠름’ 이 아니라 더불어 가는 ‘지혜로운 느림’이 서강의 속도다. ‘천천히 서둘 러라!’Festina lente!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행동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깊이 생각하는 것이 서강 스타일이다. 바로 그 속도와 스타일이 총동문회 역 사의 중대한 이정표라 할 동문회관을 가능케 하였다.
20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인생드라마 후반생의 무대 방성석(MBA 22기)
지방 사람들의 눈물겨운 상경기로 케이블방송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사회적 이슈의 배경이 되었던 1994년, 바로 그해에 나는 서강MBA를 졸업했다. 내 나이 딱 45세였으니 후반생 의 시작이었다. 이후 세계를 휘저으며 대박의 비즈니스를 꿈꿨고 수많은
4
이슈를 생산했다. 역시 촌놈 상경기에 다름없던 나에게 과연 1994의 응 답은 무엇일까? 서강총동문회가 결성된 지 50년이다. 그 절반의 세월인 25년을 서강 의 여러 동문회와 함께 했으니 이름뿐인 동문이 아니었다. MBA원우회 장, MBA동문회장, STEP동문회장 그리고 총동문회 대의원, 부회장까지 서강의 인연은 나에게 그림자 같은 운명이었다. 그래서일까? 특수대학원 동문을 서자庶子 취급한다는 지적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어떤 졸업생이 든 모교와 동문회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동문이 바로 서강 의 적자嫡子일 것이다. 사실 서강과의 만남은 시작부터 엉킨 실타래 같았다. 해외출장길 기내 에서 보게 된 MBA 모집광고가 내 영혼을 일깨웠다. ‘사업이 어려울 땐 차라리 공부로 내일을 준비하라’는 가르침이 떠올랐다. 어렵사리 영어 시험과 면접시험을 거쳐 수학했던 주경야독은 고행의 시간이었다. 그러 나 등록금고지서에 찍혀온 건 학점미달 ‘학사경고’였다. 어쭙잖은 자존 심에 이때 서강과의 인연은 끝날 뻔 했다. 하지만 만학의 결과는 엄청난 output을 가져왔다. 공부했던 MBA 커리큘럼의 생생한 지식들이 그대로
20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9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20년째 답사 중
input 되었고 그 결과는 사업인생에 방점을 찍어 주었다.
박찬희(88 사학)
무엇보다 서강네트워크의 일원이 된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최고 의 MBA답게 실력파 동문, 교수님들과의 교류는 나의 지적수준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다. 동기 중 절반 가까이 박사과정을 수학하는 모습은 나의 잠재된 향학열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개교 50주년 ‘특별한 서강’ 비전발표 등과 같은 모교와 동문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해서 공유하 는 지식과 정보의 장은 시사의 아고라agora였고 인생의 공부방이었다.
사학과에 입학한 1988년 어느 봄날이었다. 교수님을 모시고 선배들과 함께 문화재를 찾아 답사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답사 갈 날만 손꼽아
그 결과 졸업논문을 지도하셨던 지용희 교수님의 권유로 출간된 〈국제
기다렸다. 수업을 빠지고 놀러간다며 부러워하던 다른 학과 친구들에게
입찰을 잡아라〉는 해외 정부조달 전문가로서 활동과 연구에 몰입하게 되
“이게 사학과의 특권이지”라며 으스대기도 했다. 답사 당일 산속에 숨어
었다. 한술 더 떠 교수님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상임이사로서 만 10년의
있는 문화재를 찾아 험한 길을 오를 때는 왕가의 계곡을 찾는 탐험대가
세월을 투입했던 ‘(사)이순신리더십연구회’는 다니엘 레비틴Daniel Levitin의
된 듯 흥분했고 눈앞에서 문화재를 봤을 때는 감동에 겨워 몸을 떨었다.
‘일만 시간의 법칙’을 증명하듯, 〈위기의 시대, 이순신이 답하다〉를 출간
밤에는 선배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답사 내내 즐
했다. 이제는 이순신연구가로서 인생 이모작을 하고 있으니 과연 내 후
거웠다.
반생 드라마의 무대는 역시 서강이다.
그로부터 7년 후, 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봄 ‘아우라지’라는 답사 모임
50주년을 맞는 서강총동문회의 발전을 기원하며 그 네트워크의 일원
을 시작했다. 두 갈래 물이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그 이름처럼 하늘같은
임이 자랑스럽다. 특별히 총동문회가 수여해 준 2008년 ‘자랑스러운 서
선배부터 이제 막 졸업한 나까지 나이는 다양했지만 비슷한 시대를 살았
강인’은 모든 과정의 동문들에게 그 존재와 가치를 인정하고 역할을 존
다는 공감 앞에서 이 점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95년 봄 포천과 철
중하는 대大 서강만이 할 수 있는 대범한 모습이었다. 다만 내가 서강의
원으로 첫 답사를 갔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자랑이라면, 서강이 나의 자랑이도록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부끄럽
낮에는 펄펄 날아다니고 밤에는 날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선후배
다. 그러나 분명한 응답 1994는, ‘내 인생의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
들은 이제 눈이 침침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젖먹이 때부터 답사를 함께
다’ 는 것이다.
다닌 선배의 아이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나와 친구의 아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어떻게 20년을 했지?” “선배들이 열심히 해서 그래.” 친구들과 만나면 늘 나오는 이야기다.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답사를 가
21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11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자고 먼저 연락하는 선배,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과 함께 답사를 가는 최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만들려는 노력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큰 힘이
고참 선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비용이 턱없
었다고 믿는다.
이 모자랄 때는 조용히 부족한 비용을 채워 넣은 사람들 역시 이들이었
가끔 왜 답사모임을 하는지 스스로 궁금해질 때가 있다. 문화재를 찾
다. 만약 이러한 선배들이 없었다면 답사는 몇 번 가지 않아 흐지부지 없
아가는 일이라서. 그것도 한 부분이다. 현장에서는 책이나 컴퓨터 화면
어졌을 것이다.
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받으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 때문
그런데 답사를 가자는 연락이 늘 즐거운 건 아니다. 답사자료를 쓰고 현장에서 설명을 하는 게 답사에서 내 역할이다.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 가끔 이러저런 푸념 을 늘어놓으면 선배들로부터 “그러니까 후배를 키웠어야지”라는 농담을
이다. 좌충우돌하던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들과 지금까지 만나고 있고 만날 수 있으니까. “아빠 하고 같이 답사 갈래? 아빠와 학교 같이 다녔던 아저씨 아줌마 도 같이 가.”
듣곤 한다. 그러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어린 딸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모임이, 사람들이 있다는 게 뿌
인데”라는 생각이 들면 힘이 솟는다. 현장에서 “역시 설명을 들어야 눈
듯하다. 언젠가는 딸아이가 답사를 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겠지만 그때에
에 보여”라는 격려를 들으면 뿌듯하다. 하라고 해서 하는 것과 하고 싶어
도 우리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며 문화재를 찾아 이 땅을 누빌 것이다.
서 하는 일은 그만큼 달랐다. 사실 답사를 가기는 하지만 모두가 문화재에 대한 열의가 넘치는 건 아니다. 적당한 관심과 적당한 무관심이 조화롭게 섞여있다고 해야 할 까. 물론 건물 이름에 붙는 ‘전殿’과 ‘각閣’의 차이나 문화재의 역사적 배 경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보 다 소중한 것은 문화재가 있는 곳에서 설명을 듣고 질문을 던지고 이야 기를 나누며 함께 어울린다는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십여 년 전 경주에 갔을 때였다. 오후 4시에 출발하기로 했으나 한 사 람 두 사람 늦어지더니 결국 7시가 넘어서 출발했다. 대왕암이 있는 경주 감포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시간에라도 도착한 게 다행이라며 즐거워했다. 그때 약속을 지키지 못했 다는 것을 예민하게 여겼다면 “이 분위기 어쩔 거야”라는 말이 나올 정 도로 답사는 착 가라앉았을 것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져 탓하기보다
21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13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6월 북한산행과 호상가족
재까지 지속되어 왔는데, 이 산행은 호상장학회와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
이동훈(88 영문)
은 여러 동문들이 만남을 지속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산행은 구파발 쪽 북한산성 휴게소에서 시작하여 동북쪽 방향으로 북 한산 계곡을 끼고 경사가 완만한 등산로를 따라 북한산 대동문까지 오른 후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코스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충분히 같이 할 수
1988년 2월 16일 입학과 함께 서강가족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어제 일
있는 평탄하고 쉬운 왕복 3시간 정도의 가벼운 산행길입니다. 산행이 끝
처럼 그때의 기억이 또렷합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가 입학
나면 출발지 근처에서 해물파전과 도토리묵을 안주로, 막걸리를 나누며
하기 보름 전인 같은 해 2월 1일 서일호(66 경제), 박상환(69 무역) 두 선배
늦은 밤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개인 사정상 낮 산행에 같이 하
께서 매 학기 200만원을 모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
지 못한 동문들은 뒷풀이 장소로 와서 반가운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기 위해 ‘이상은 높게, 생활은 낮게’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호상장학 회를 시작하셨습니다.
작하여 네 시간만에 대동문 너무 수유리 4.19 국립묘지 방향으로 산을 내
환 선배를 처음으로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학비가 모자라 이불 짐을
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어두운 산행길을 염려하여 야간산행을
다시 싸서 힘들게 기차 타고 고향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
만류하였지만 서 선배와 함께 야간산행을 감행하였고, 드디어 무사히 북
어 정말 힘들게 공부하는 후배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도움을 주고 싶다”,
한산 야간횡단에 성공하였습니다. 산행 중 대동문에 다시 올랐을 때, 고
“목마른 사람에게 한 바가지의 물을 떠주는 마음으로”라는 두 선배의 따
요한 적막 속에서 달빛이 내리비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앉아 쉬
뜻한 마음에서 서강대 최초의 개인 장학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장학생
었던 멋진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니다.
214
늦은 밤 손전등을 밝히며 다시 대동문으로 향해 어두운 산길을 걷기 시
1992년 호상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이때 장학금을 주신 서일호, 박상
선발은 정진자(61 철학), 김미자(64 국문) 두 선배께서 수고를 맡아 주셨습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11년 산행의 뒷풀이가 끝나고, 집 방향이 같은 서일호 선배와 함께
6월 정기 산행에서 정영애(75 신방), 김서현(80 경영), 이갑섭, 한성원, 김상균(이상 86 경영), 유춘근(86 경제), 한대희(94 경제), 김해룡(98 경제),
졸업 후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이어서 결혼하고 아이들 낳아 키우느라
안경옥(91 영문), 배은성(04 경영) 동문들이 그 동안 함께 하였고, 호상장
정신이 없어 대학교 때 소중하고 뜻 깊은 호상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학회 운영의 실무를 맡아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는 총동문회 이창섭(84 국
부끄럽지만 까맣게 잊고 지냈습니다. 2003년 6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2
문) 사무국장과 정영미(02 사학) 동문이 정기 산행에 함께해 주었습니다.
시 호상장학회의 북한산 정기 산행이 박상환, 김미자 선배와 주윤철(89
올해 6월 산행이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개인 사정 때
철학) 동문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호상장학회 총무를 맡고
문에 지방에 내려가느라 지난해 산행을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있는 주 동문이 애를 써준 노력 덕분에 매년 6월 북한산 정기 산행이 현
올해 산행이 더욱더 기다려집니다. 산행에서 만날 호상장학회 가족들을
215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대동문에서 시원한 수
모두를 채워준 서강
박을 나누어 먹기 위해 올해는 오랜만에 다시 수유리에서 수박 한 덩어
장현우(88 법학)
리 준비하여 산에 오를까 합니다.
서강대학교. 나의 모교, 얼마 전 법조 동문회 행사가 있어서 찾아간 학 교는 또 다른 변화를 꿈꾸고 있었다. 테니스장 일부에 우정관이라는 건 물이 터파기를 하며 신축 공사중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였기 에 시간이 남아 학교를 잠시 걸어보았다. ‘참 많이도 변했구나.’ 잠시 눈 을 감고 대학교 1학년 꿈 많던 시절 학교에서의 나를 떠올려 보았다. 1988년 법학과 1기 새내기 시절이 내 기억속을 지나간다. 서울올림픽 이 개최되는 들뜬 분위기, 당시 88학번은 올림픽 꿈나무 학번으로 불리 우며 선배들의 사랑을 받았다. 수업시간 지각하여 뛰어 올라가던 서강의 언덕은 왜 그리 가파르기만 하였는지,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지정 좌석제, FA제도, 독후감 등 다른 대학교 친구들이 신기해 하던 서강에서 의 생활이었다. 미팅에서도 여학생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나뿐만 아니라 서강으로 서도 거의 처음 가는 길이었다. 사법 고시반에서 공부하며 꿈을 키워 나 갔고,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미스 김의 목소리에도 좌절하지 않 았고(자동응답 시스템상의 합격자 안내 목소리를 우리는 ‘미스 김’이라고 불렀다), 합격생의 합격 안내 멘트를 공중전화기 수화기로 돌려가며 듣고 축하하 고 울었던 고시반 생활이었다. 총동문회 후원으로 진행되던 사법고시 특 강을 듣고 자신감을 키워가곤 하였다. 서강의 시스템은 성실한 인재를 키워낸다. 신림동 고시원, 사법연수 원, 변호사 생활에서도 주위에서 빠지지 않은 평가가 서강대학교 출신들
21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17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은 인원은 적지만 성실하고 강하다라는 평가이었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
신촌역 6번 출구
서도, 서강이 심어준 성실과 근면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법정
안광복(89 철학)
에서의 변론을 하면서, 준비서면을 작성하면서, 의뢰인과 상담을 하면서 문득 서강에서의 시간이 생각난다. 변론을 하며 영어커뮤니케이션 시간 의 영어로 하는 발표가, 준비서면을 작성하며 독후감을 끙끙대며 작성하 던 시간이, 의뢰인과 상담을 하면서 청년광장에서 논쟁하던 때가 생각난 다. 나를 키워주고 채워준 서강이다. 서강 언덕을 다시금 천천히 걸어보며 웃으며 지나가는 후배들의 얼굴 에서 옛날의 나를 찾고, 친구들을 찾아본다. ‘서강이여 영원하라’.
대학시절, 등교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지하철 신촌역 3번 출구와 6 번 출구, 전철에서 내린 학생들은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3번 출구는 연 세대 방면, 6번 출구는 서강대 쪽이다. 아침마다 겪는 이 광경에는 트라 우마를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당시 서강은 ‘SKY를 노렸으나 조금 부족 한 학생들이 가는 학교’라는 인식이 강한 학교였다. 신촌역 3번 출구로 나가는 학생들의 등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복잡했던 이유다. 물론, 나에게 서강은 정말 가고 싶은 대학이었다. 가장 좋아하던 김승 희 시인이 나온 학교였을 뿐더러, ‘공부하는 학교’라는 이미지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생각 없이 치열하기만한 입시 풍토도 싫 었다. 너도 나도 SKY를 가고 싶다고 외치는 분위기, 나까지 그러고 싶지 는 않았다. 영혼 없는 속물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그럼에도 대학시 절, 나는 우리 사회의 강고한 학벌 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6번 출구 로 올라올 때마다 생각이 어지러웠던 이유다. 세월이 흘러 나는 고3 담임이 되어 있다. 서강은 여전히 입시계에서 ‘SKY를 노리나 조금 부족한 학생들이 가는 학교’다. 물론, 나처럼 처음 부터 서강이 좋아서 가고 싶다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좀처 럼 내 제자들에게 서강을 권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서강은 결코 가기 쉬운 대학이 아니다. 수능 백분위 상위 99% 내외여 야 합격을 안심할 만큼 성적이 높을뿐더러, 무엇보다 선발 인원이 적다. 그래서 같은 성적이라면 규모가 훨씬 큰 이웃 대학이 서강보다 들어갈
21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19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정갈한 그리스의 밥상
확률이 높은 경우도 많다.
서동욱(90 철학)
그러나 제자들에게 서강을 함부로 권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 다. 신촌역 3번 출구가 아닌, 6번 출구의 대학을 택하는 아이들에게는 특 별한 무엇이 있어야 한다. ‘소수정예’가 닉네임이다시피 한 대학답게, 서 강 출신은 어디나 많지 않다. 서강대 졸업생이라고 하면 학벌 사회에서 무시당하지는 않겠지만, 학벌 때문에 덕 볼 일도 크게 없다. 때문에 서강
돌이켜보면 무엇이 가장 중요했을까? 서강대 신입생으로 시작해서 지
출신으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실력을 갖추어 도전하는 과정의 연속이
금 서강 대학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내 삶을 지키고 키워 온 것은 무엇인
다. 대학 졸업 후 나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가?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서강을 함부로 권하지 않는다. 서강은 ‘점수
처음 입학했을 때 대학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너무 신기하고 좋아 3월
만 되면 아무나 가는 대학’이 아닌 까닭이다. 서강을 가고 싶다는 아이가
학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학교에 나가곤 했다. 새로운 학교에서 가장 나
있다면 성실함과 치열함을 갖추었는지, 그럴싸한 ‘대학 간판’에 기대어
를 사로잡았던 것은 도서관이었다. 개가식 도서관으로의 입장은, 마치
편하게 살아보려는 성품은 아닌지를 꼼꼼히 따진다. 서강은 예나 지금이
정연하고 엄정하게 질서 잡힌 고요한 진리가 나를 그 일원으로 허용하는
나 공부 좋아하는 도전적인 학생들에게 어울리는 학교다.
듯한 감격적인 체험을 매번 하게 했다. 오래된 숲이 방문자에게 비밀스
대학 졸업 후 20년이 흐른 이제, 나에게 신촌역 6번 출구는 정겨운 자
러운 말을 건네듯 서가는 그 앞에 선 이를 깜짝 놀라게 하며 한 번도 들
부심으로 다가온다. 서강에 어울리는 성품을 가진 학생들이 많아질수록
어보지 못한 낯선 낱말들을 들려준다. 그 낱말들은 숲 속에서 발견하는
우리 사회는 바람직하게 바뀌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새알처럼 하얗고 아름답다. 그리고 이후 늘 기억하게 되는 환시 같은 체험이 찾아온다. 겨울의 저 물 무렵, 도서관의 높은 창을 본 일이 있는가? 거기엔 투명한 항아리 가 득 담긴 붉은 술 같은 찬란한 일몰이 있고, 붉은 빛 속에서 새와 바람이 지나가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도서관의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서 떠났고, 나도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인문학자 가 되었다. ‘서강’과 ‘인문’처럼 서로 잘 어울리는 말들도 없을 것 같다. 내게는 서 강의 ‘인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 기록하고 있는 이야기다. 물리적인 크기와 부富에 있어서 그리스와 비교
22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21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가 안 되는 페르시아의 침입을 격퇴한 후 그리스인들은 이런 장난을 쳤
사라진 길, 살아있는 추억
다고 한다. 바로 페르시아 식의 호화로운 밥상을 차려놓고 그 옆에 그리
노의성(92 화학)
스의 가난한 밥상을 놓아둔 후, 서로 비교하며 페르시아의 패배를 비웃 는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물리적 규모와 돈은 그리스의 가난한 밥상을 이기지 못했다. 대학들이 화려하게 규모를 키우고 돈의 논리에 따라 일희일비할 때마
최근 ‘응사’,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열풍이 뜨겁다. 이제 막 ‘마흔
다, 나는 서강이 그리스인의 밥상과도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서강은
즈음’에 이르러 부를 노래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1990년대 학번들의 가슴
페르시아의 밥상이 보여주는 물리적인 크기도 부도 가지지 않았을지 모
을 쿵쾅거리게 하는 듯하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 ‘본방사수’도 불가능
른다. 그러나 그 정신은 너무 커서 어떤 호화로운 밥상의 위용도 넘어서
하고, 어둠의 경로를 뒤질 만큼의 에너지는 없는지라 어쩌다 포털이나,
버린다. 그 정신이 바로 서강의 뿌리에서 함께 자라온 인문 정신, 대학
유투브 등에 걸리는 동영상 클립들에 잠시 눈을 줄 뿐이지만, 한 하숙집
본연의 진리 탐구의 가치 속에서 학자들과 학생들의 열의를 존중하고 그
을 무대로 사투리를 난사하며 알콩달콩 사랑을 키워 가는 예닐곱 명의
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주려고 애쓰는 정신이다.
주인공들을 보고 있자면, 꼭 20년 전으로, 학교 근처 선후배 하숙집과 술
그 정신이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의 파도 속에 휩쓸려 내가 어디 있는 지 방향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 때마다 나를 붙들어 주었고, 커다란 금고 를 재화로 가득 채워주듯 마음속을 자부심으로 채워주었다.
집들, 그리고 동아리 방을 전전하며 살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드라마 속 하숙집처럼 깨끗하지도 않고, 그렇게나 친절한 하숙집 주 인도 본 적은 없지만, 그리고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귀여운 사
서강의 그 정신은 지금 위협받고 있는가? 신이 초라한 나그네의 모습
랑을 한 적도 없지만 그때 학교 캠퍼스를 둘러싼 대흥동, 노고산동, 창천
으로 찾아올 때가 있듯 정신도 헐벗은 손님처럼 우리 곁에 머물 때가 있
동, 신수동의 하숙집들과 자취집들의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 속에서 나도
다. 소란스러운 잔치를 벌이는 이들은 자기 옆에 앉은 못난 손님이 누구
친구들과 청춘 시대를 보냈다. 그 네트워크는 요즘과 같은 인터넷 망이
인지 관심도 없지만, 다른 편엔 반드시 손님의 신분을 알아보는 이들이
아니라 골목길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 퀴퀴한 골목길에서 사랑
있으며 그렇게 늘 서강의 정신을 지키는 이들도 있다.
도 하고 싸움도 하고 투쟁도 하고 공부도 했다.
문득 깜짝 놀라며 깨어날 때면 나는, 내가 보던 책장의 하얀 표면을 점
학교 밖 골목길들이 사적이고, 좀 퀴퀴하고, 좀 은밀하고, 좀 더 낡고,
점 짙어지는 따뜻한 붉은 빛으로 물들이며 도서관의 거대한 창문 속으로
전근대적이며 무질서했다면,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길들은 좀 더
들어서던 저녁 아래 다시 한 번 꼭 앉아있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저도 모
밝아지고, 좀 더 공개적이고, 좀 더 현대적이며, 질서 잡힌 것으로 바뀌
르게 탄식했다.
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톨릭 지성의 상징인 예수회가, 말 그대로 노고산 의 양달에 세워 놓은 학교의 공간은 밝고 아름다웠다. 1990년대 초반의
22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23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응사’라 할 ‘우리들의 천국’, ‘남자 셋 여자 셋’의 무대가 아니었던가!
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그들이 앉았던 자리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바오
그러나 그때에도 학교 캠퍼스 곳곳에는 은밀한 길들이 여기저기 숨어
로 경영관과 가브리엘관 사이 옛날에 있던 오솔길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
있었다. 지금은 마태오관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구체육관에서 메
문이다. R관 뒤 은행나무 길도 이제는 없다. 사제관 뒤 물탱크 옆 길도
리홀로 넘어오는 솔밭 사이 작은 오솔길, 자연대가 있던 R관 뒤 은행나
이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길들이 이었던 네트워크
무 길, 사제관 뒤 물탱크에서 로욜라 도서관 뒤로 넘어오던 산길이 있었
들, 기억들, 관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옛 길들처럼 사라졌을 수도 있
고, 길 곳곳에는 학교 창립 당시부터 그 자리를 지켰을 것 같은 낡은 벤
고, ‘응사’ 같은 드라마를 계기로 우연히 되살아날 수도 있겠지.
치들이 풀숲 사이에 있었다. 나는 그 길들을 좋아했고, 완전히 철들지 않 은 호기심은 그 길들을 찾아다니게 만들었다. 구체육관 동아리방에서 R 관 실험실로 갈 때나 도서관을 갈 때, 아니면 C관 학생 식당을 찾아갈 때 나 도서관과 X관 사이에 있던 개집 식당을 갈 때 그런 길들을 애용했다. 한번은 밤에 실험 수업이 있어 구체육관 동아리방에서 R관으로 가고 있었다. 메리홀과 솔밭 사이 오솔길로 급하게 올라가는데, 솔밭 벤치에 껴안고 있는 한 커플을 봤다. 사회 분위기가 1980년대에 비하면 많이 자 유로워지고 개방되었을 때이지만, 공공 장소에서의 애정 표현을 그리 많 이 볼 수 없던 시절, 한덩이가 되어 뜨겁게 입맞춤을 하던 커플은 내 눈 을 잡아끌었다. 부럽고, 내가 다 부끄럽고, 민망하기까지 했지만, 별 수 있나. 그냥 점잖게, 조용히, 소리 내지 않고 지나가야지. 그로부터 2시간 정도 뒤 실험을 끝내고 동아리방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 이런, 그 두 사람은 아직도 한덩이를 이루고 있지 않나! 심지어 아 직도 키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서둘러, 모르는 척 그 옆을 스쳐 지나 갔다. 내가 해 본 것과 내가 본 것을 모두 포함해 가장 긴 키스였다. 20년이 지났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 사랑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간만에 괜한 호기심이 솟는다. 그들은 서강 동문이었 을까? 옛 구체육관 자리 앞에 새로 생긴 바오로 경영관의 커피숍에서 이 글
22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25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염전에서 만난 후배
구해낸 인권침해 피해자들을 우리 사회 안에서 보듬지 못해 다시 섬으로
조병찬(95 국문)
되돌아가게 하는 악순환의 현실을 고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안을 모 색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언론인으로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10년 넘게 활 동을 해오면서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경험했다. 후에 기사를 읽어보 았는데, 매우 잘써주어서 고맙고 앞으로 훌륭한 언론인으로 성장해가기
우연히 동문 후배를 만났다. 얼마 전 온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 던 일명 ‘염전 노예’ 사건 때문이다. 섬 한가운데서 피해자 실태조사를
작년에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후속작이
위해 파견된 민간 조사원인 나와, 사건 취재를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기
전작을 뛰어넘어 보기 드문 인기를 누렸다. 신촌이라는 지역에서 동시대
자로 만났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리 동문을 만나는 일은 특정 분야를
의 경험을 공유했던 나는 “아, 맞아. 저땐 그랬어” 하는 추억 팔이 손님
제외하고는 사실 어려운 일인데, 우연한 만남이 반가움보다는 낯설었다.
노릇에 작은 감동을 느끼기도 했지만, 현재의 내가 그때를 추억할 만큼
등에 메고 온 배낭은 자신의 몸을 다 집어넣어도 여분의 공간이 남을 정
세상이 많이 변했을까? 많은 이들이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소소한 변화가
도로 바리바리 싸들고 거대한(?) 노트북을 손에 들고 동료와 선착장에 들
가져온 흐름은 추억 속의 우리들이 기대한 변화와는 사뭇 다르다고 생각
어서는 모습이란, ‘서울 촌놈’이 따로 없었다. 동문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하지 않을까. 우리가 선택한 것은 자칫 다른 것을 포기한 결과는 아닐까.
섬을 나오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며칠째 이어지는 조사에 바짝 말라버
밤을 지새우며 사회 문제를 토론하고, ‘행동’과 ‘실천’을 위해 거리로
린 정서에 잠깐이나마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226
나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수많은 청춘들은 여전하고, 이러한 정당한
일명 염전 노예 사건은 개별 사건 그 자체로도 충격적인 일이지만, 복
문제의식을 문제로 인식하는 사회는 그대로인데 나만 늙어가는 것은 아
지 담론의 중요한 의제로서 ‘적극적 복지’의 범위를 사회적으로 합의해
닐까? 유쾌하지 못한 이 질문에 동문 후배와의 만남은 추억으로 멈췄던
나가는 필연적 과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현재 50명 가까
기억들을 다시금 유쾌한 해답으로 돌려주었다.
이 밝혀낸 염전 노예 피해자들 중 대부분은 장애인 등록이 되지 않은 상
섬을 나와 같이 뭍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문 후배에게 물었다. “독후감
태였으며, 심지어는 주민 등록조차 말소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른 바
여전하지?”라는 질문에 “그럼요. 여전하죠. 지하철 안에서 파란 원고지
‘사회적 안전망’이 현저하게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도 있는 제도
붙잡고 있는 사람은 다 우리 학교였어요”라고 답했다. ‘어쩌다가 그게 정
조차 해당 관청, 경찰, 지역주민, 피해자 가족들이 자신들의 편리와 이익
체성까지 대변하게 됐냐? 부푼 꿈을 안고 입학한 신입생한테는 당장 없
을 위해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수십
어지고 근절해야 할 패악이고 악습인데….’ 그럼에도 한 잔 가득 담은 술
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잔을 기울이며, “독후감 포에버!”를 외칠 수 있는 뻔뻔한 동문 선배 중
동문 후배는 이러한 상황을 사회적으로 알리고자 했을 것이다. 겨우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를 바란다.
하나가 된 내가 사회 변혁을 이야기하다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227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장영희 교수님의 이메일 김재곤(96 영문)
애착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루는 교수님이 1장짜리 프린트물을 가져와 나눠주셨다. 굳이 제목 을 붙이자면 ‘장영희에게 추천서를 받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쯤 되겠다. 사연인즉슨 ‘학교 다닐 때는 살갑게 굴며 졸업 후에도 1년에 열두 번씩 찾아올 것처럼 굴던 제자들이 막상 졸업한 다음엔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교수님을 처음 만난 건 강의실이 아닌 군대 초소에서였다. 병장 진급 을 목전에 두고 초반의 긴장과 두려움이 무료와 권태로 물들어가던 어느 봄날, 건빵 주머니 한쪽에 최신판 ‘샘터’를 꽂고 낮 보초를 서러 나갔다.
유학 갈 일이 생겨야 추천서 써달라며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여 앞으로 추천서를 받고 싶으면 여기에 적힌 사항들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스무 개 남짓 됐던 항목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1년에 한 번 이상
탄약고 초소 사각지대로 몸을 숨긴 뒤 초소 한쪽 벽에 기대 책장을 훑
반드시 안부를 전할 것’이란 조항이다. 졸업 후 한동안 백수로 지내면서
어 내려갔다. 필자 목록에서 ‘장영희’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수업을
내심 이 조항이 맘에 걸렸다. 교수님과 지켜야만 할 약속 같았는데 번듯
들은 적은 없었지만 입대 전 X관을 오가며 봤던, 목발에 의지해 힘겨운
한 직함도 없이 연락을 드리자니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2003년 가을
듯 익숙하게 계단을 오르내리시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킹콩의 눈’.
학기에 졸업했으니 마감시한은 이듬해 12월 말일까지였다.
그날 읽은 1999년 샘터 6월호에 실린 교수님 글의 제목이다. 샘터에 연
굼벵이 구르는 재주가 동했는지, 마감시한을 보름쯤 남겨놓고 지금 다
재된 교수님의 첫번째 수필이자 훗날 〈내 생애 단 한번〉이란 제목으로 묶
니는 신문사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 사이 교수님은 암이 재발해 두
여나온 에세이집集 맨 마지막에도 실렸다.
번째 항암치료를 받고 계셨다. 그 해 마지막 날 교수님께 미뤄뒀던 안부
대학원 시험 면접관으로부터 ‘왜 우리 대학원에 지원했나요’라는 평 범한 질문 대신 ‘우리 학교는 장애인은 안 받아요’란 통보를 받았을 때의
와 함께 군대에서부터 시작됐던 교수님과의 인연을 처음으로 적어 이메 일로 보냈다.
심정을, 교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었던 킹콩
바로 다음날 교수님이 답장을 보내오셨다. 아래에 당시 받은 편지 전
의 애처로운 눈빛에 빗댔다. 인생의 변곡점이 된 순간을 담담하게 묘사
문全文을 싣는다. 교수님의 유작遺作을 허락 없이 소개하는 것이 마음에
했지만 읽는 이의 마음은 금세 먹먹해졌다. 이 날을 계기로 매달 부대로
걸리지만, 누구보다 서강을 사랑했던 교수님이시기에 하늘나라에서 예
샘터가 배달될 즈음이면 편지 오기만을 기다리던 훈련소 시절의 설렘이
의 천진난만한 미소로 화답해 주시리라 믿는다.
되살아났다. 교수님을 강의실에서 만난 건 그로부터 4년 뒤, 졸업 학기가 돼서야
-----------------------------------Re: 교수님, 이제야 연락을 드립니다.
수강한 ‘19세기 미국소설’ 수업을 통해서다. 글과는 사뭇 다르게 말이 빠 르고 때로는 덤벙대는 듯한 교수님의 평소 언행과 제자들에 대한 남다른
22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재곤아, 소식 너무 고마워. 네 글을 읽으면서 조금 눈물도 났고, 그리
229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후배들과 동행, 멘토링
고 마지막엔 하하 웃었지. 그래, 내가 아마 수업 시간에 이야기했는지 몰라. Frost 시에 나오는
장윤호(02 컴퓨터)
말인데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Home is a place you don’t have to deserve’란다. 무슨 자격이 있어야 찾아올 수 있는 게 학교가 아니고 높 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선생을 찾아올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네가 교수 건 암환자건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주듯이, 나도 마찬가지지.
제가 4학년 때 취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제가 하고 싶은
아직 외출을 자주 못하고, 백혈구 칫수와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그 외
일을 하는 선배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시간을
에는 그런대로 잘 견디고 있단다. 다음 학기에는 한 두 과목 가르치려고
내주실지에 대한 고민을 하다 인터넷에 써진 댓글에 만족을 했습니다.
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정신적으로도 더욱 나을 것 같아서.
내가 평생 다녀야 할 일터의 평가를, 확인되지도 않은 글들로 정한다는
재곤아, ‘장영희에게 추천서 받는 강령’을 지켜 준 사람은 너 하나인 것 같다. 물론 네가 내 추천서 받으려고 그런 것 아니라는 거 알구. 너무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졸업을 한 지 5년 정도가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저와 같은 방법으로 직장을 평가하곤 합니다.
고마워. 어느 학생이 ‘선생님 꼭 나아 주세요.’라고 썼더구나. ‘주세요’라
2012년부터 시작한 멘토링은 이무섭(94 경영) 동문이 하고 있던 일을
는 말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나아 달라는 말 같아서 감동했단다. 그런
물려받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던 일들이
모든 힘이 다 내 힘이 되어서 곧 툴툴 털고 일어날 거야.
막상 혼자 내던져지니 쉽지 않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멘토링 비용 모금,
봄학기 학교 나가면 한 번 놀러 와라. 백혈구 칫수 올리려면 우선 살이 쪄야 된다고 해서 살이 많이 쪘으니 뚱보 선생님 볼 각오하고…. ^^ 새해 에 더욱 정진하고 네게 좋은 일만 많이 생기기를….
참여 멘토 모집 등등. 쉽지는 않았지만 멘토링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양 한 직종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선배들과의 만남과 궁금한 점을 해결할 수 있었던 학생들의 감사편지들이 그것이었습니다. 운영하면서 아직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많은 멘토분들이 지적해주셨듯 이 멘토링 자체가 단발성 만남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바쁜데 시간을 쪼개서 온 선배들은 후배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다가가기 편한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의 적극성이 아쉬운 측 면이 큽니다. 제가 바라는 멘토링은, 참여했던 후배들이 훗날 멘토들이 되면서 점점 커져나가는 유기체적 조직을 꿈꿨는데 이런 부분에 제가 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3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31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소셜마케팅에는 1:9:90이라는 법칙이 있습니다. 1명이 글을 작성하고 9명이 그 글에 댓글을 달아주고 90명은 글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동문들끼리의 모임에서 제가 보낸 멘토링 초대 메일이 이슈라고 합니다. 보는 눈이 많아진 만큼 이제 걸음마를 뗀 멘토링이 더 먼 동행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직장을 다니면 직장 이외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적어집니다. 멘토링을 통해서 단순히 봉사뿐만 아 니라 서강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끝으로 한 회사를 이끌어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항상 학생들, 졸 업생들을 위해 좋은 말씀을 해주는 이우현(87 화공) 선배께 감사드립니 다. 회사에서 부장님을 만나면 뻣뻣해지는데 선배님은 그보다 높은 위 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선배님께서 항상 낮은 자세로 저희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부족하지만 선배님을 본받아 올바른 방향 으로 발전하는 멘토링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3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추억의 앨범
우리들의 90년대
X관 라운지
C관 앞 농구코트
1996년-교정
23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농촌봉사활동. 영양 봉화 의성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펼쳤다.
235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91학번이 준비한 故 김의기 열사 추모제
1990년 7월 1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된 개교 30주년 기념 백두산등정에 42명의 동문, 교수, 학생, 교직원이 함께했다.
1992년 12월 28일 93학번 합격자 발표
23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37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1994년 2월 24일 입학식 93학번을 맞이하기 위한 1992년 11월 신입생 입학 원서 접수
1993년 5월 15일 개최된 ‘제2회 서강인의 날’. 총동문회와 재학생, 학교가 함께 준비한 이 행사에는 1000여명이 참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23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94년 창단한 서강오케스트라
239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1995년 졸업식 및 1996년 입학식 1995년의 5.18 관련 집회
1995년 입학식
1996년부터 학교 홍보를 위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발간되고 있는 계간지 ‘알바트로스’
24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41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1997년 로욜라 도서관 3관 신축 이후 도서관은 종합정보센터로의 위상을 정립했다. 이제 도서 검색도 PC를 이용하게 되어 카드목록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다. 1997년 7월 본관에 신설된 종합봉사실. 학생들은 이곳에서 휴복학을 비롯한 모든 행정 업무를 일괄 처리할 수 있었다.
1997년 교내 전산망이 구축되면서 해외대학과의 동시 원격 수업이 개설되었다.
24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99년 속리산 유스호스텔에서 열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243 높이 나는 드높은 자부심으로
5
장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2004년 5월 27일 제43차 대의원 정기총회에서 김호연(74 무역) 동문이 제24대 동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개교 이래 첫 70년대 학번 동문이 동 문회장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김호연 회장은 6월 14일 회장단 상견례
설립 이래 추구해 온 진리에 순종하라는 각별한 사명을 완수하고
를 겸한 첫 회의에서 ‘개교 50주년을 바라보면서 동문, 학교, 후배들과의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 위하여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방
새로운 세기에도 최선을 다하여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1904~2002)), 모교 설립자·초대 이사장 ─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1904~2002
눈을 뚫고 들판 걸어갈 때 어지러이 가지 못하네 오늘 아침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爲後人程
1771~1853))의 ‘야설’野雪 ─ 이양연(李亮淵 1771~1853
동문회관이라는 든든한 터전을 바탕으로 총동문회는 동문 네트워크 강화와 동문장학회 발전에 가일층 힘을 쏟기 시작했다. 총동문회 홈페이지를 많은 동문들의 정보 교류와 친목 도모의 장으로 혁신시켰다. 개교 50주년 기념와인 사업, 동문회관 임대, 서강동문장학회 기명 장학금 50개 조성 캠페인 등을 통하여 장학기금 확충에 최선을 다했다. 개교 50주년을 계기로 총동문회의 역량을 한껏 펼쳐나갔다. 선배들이 걸어간 가지런한 발자국을 길잡이로 따르면서, 244 또한 뒤따라올 후배들을 위해 가지런히 바르게 걸었다.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04년 6월 21일 김호연(74 무역) 동문(사진 맨 왼쪽)이 제24대 동문회장으로 취임했다.. 개교 이래 첫 70년대 학번 동문회장이었다.
245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향을 밝히면서 ‘24기 회장단의 구성도 그런 차원에서 직능별 뿐 아니라 전체 학과 동문을 대표하는 학과 회장들로 회장단을 구성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문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 강화는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에 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에 따라, 2004년 하반기부터 동문회는 대대적 인 홈페이지 개편에 착수했다. 단순히 ‘홈페이지가 있다’는 수준에서 여 러 단계 진일보시켜서 다양한 정보와 추억을 제공할 수 있는 활기찬 홈 페이지, 많은 동문들이 방문하는 홈페이지를 만든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동문회가 보유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사용자 친화적으로 정리, 배치하면 서 전문성이 높은 업체를 선정하여 진행한 끝에, 2005년 2월부터 전혀 새로운 홈페이지를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2005년 초에는 많은 동문들이 깜짝 놀란 일이 일어났다. 1월 10일 서
13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룬 2005년 1월 10일 신년하례식
울 강남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 동 문 1300여 명이 참석하였던 것이다. 참석 예상 동문 숫자의 3배를 훌쩍 뛰어넘는 규모였다. 좌석이 부족하여 적지 않은 동문들이 선 채로 참석 해야 했다. 그간 많은 동문들이 이런 성격의 대규모 행사를 기대해왔다 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듬해 2006년부터는 사전예약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행사에도 동문 730여 명이 참석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고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손학규 경기도지사, 특별 초대 손님 바 가반디 전 몽골 대통령 등이 주요 내빈으로 참석했다. 2005년은 모교에 큰 변화가 일어난 한해였다. 개교 이후 45년 동안 이 어진 가톨릭 신부 총장 전통이 바뀌었던 것이다. 당시까지 최근 3대째 총 장들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징크스 아닌 징크스가 거듭되면서 선출 방 식에 관해서도 논란이 증폭되어오던 터였다. 결국 총장직 대외 개방이 이루어졌지만 선출 방식을 둘러싼 학교 구성원 간 이견이 상충했다. <서
24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05년 9월 13일 2005학년도 2학기 장학증서 수여식
247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강옛집>을 통한 설문조사 결과 동문 다수는 총장직 대외개방에 대해 바
2000년대 이후 학교와 동문회의 관계는 협력을 바탕에 깐 ‘생산적 긴
람직한 결정으로 판단했다. 2005년 6월 27일 제12대 손병두 총장이 임
장 관계’에 가까웠다. 대내외적 고등교육 환경이 급변하는 가운데 대학
명됨으로써 서강은 개교 45년 만에 처음으로 신부가 아닌 총장이 이끌게
들 간 무한경쟁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모교가 처한 상황이나 모
되었다.
교의 위상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양적 규모 확장을 기반으로 내실까
1986년 1억원 규모로 설립되어 20년을 앞둔 서강동문장학회는 2005
지 다지는 많은 대학들 사이에서 모교가 과연 ‘소수 정예의 추억’만으로
년에 어느 해보다 풍성했다. 11월 20일에 가진 2005년도 2학기 장학증서
경쟁력을 유지, 강화시켜나갈 수 있겠느냐 우려하는 동문들이 많아졌다.
수여식에서 재학생 60명에게 9702만2000원을 전달하였던 것이다. 당시
서강의 특색과 전통을 지켜나가면서도 변화하는 환경에 훨씬 더 적극적
동문회는 서강동문장학회의 발전 방향을 기명記名 장학금 활성화로 정했
으로 대처해야 서강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다. 기업체별 장학금을 비롯하여 다양한 개인이나 동문 모임, 조직들이
동문회는 동문들의 우려와 다양한 의견을 <서강옛집>을 비롯한 다양
장학금을 개설하여 서강동문장학회에 기탁하는 것이 동문장학회 발전을
한 경로를 통하여 표명하고 학교에 전달했다. 서강은 그 누구의 서강이
위하여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문회는 2010년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서강이며 동문, 재학생, 학부모, 교수, 교직원, 재단
개교 50주년을 더욱 뜻 깊게 기념하는 차원에서도 ‘후배사랑 장학금 50
등 서강 가족 모두가 서강의 주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010년 개
개 만들기’를 중요한 사업으로 추진해나갔다.
교 50주년을 몇 년 앞둔 시점에서 서강은 분명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 당
2006년 12월 11일에는 동문회 이사회와 학교 간 간담회가 열렸다. 당 시 학교 측은 모교 발전계획을 자세히 설명하였고 가톨릭 의대와의 통합
24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시 많은 서강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모교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을 지 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의 말을 떠올려 본다.
문제, 송도캠퍼스 추진 현황, 국제화와 영어 교육 등 당시 현안에 관하여
‘서강대학교의 교육 이념을 구현하면서 구체적 목표를 달성해 내기 위
의견을 교환했다. 손병두 총장은 취임 1년 여를 회고하면서 학교 발전에
해서는 서강 가족의 성실한 자기역할이 요구된다. 학생, 교수, 직원, 동
동문들의 관심과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밝히고 특히 재정
문, 예수회원 모두가 지적, 도덕적, 영적 쇄신을 통하여 상호 신뢰와 일
확충을 위한 노력에 동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 줄 것을 당부했다.
치를 이룬다.’
돌이켜보면 동문회와 학교의 관계는 시기에 따라 그 모양새나 상황이
‘성실한 자기 역할’ 그리고 ‘상호 신뢰와 일치’라는 말이 서강 가족 모
달랐다. 전반적으로는 서로 협력할 일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관계였
두에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서강 가족들 간 또는 동문 간에 때로
지만 때로는 어떤 사안을 놓고 의견이 엇갈리거나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
는 의견이 서로 다를 수도 있지만 ‘성실한 자기 역할을 바탕으로 상호 신
다. 물론 그러한 의견 차이나 갈등은 부부 싸움과 비슷해서 결국은 ‘칼로
뢰를 쌓아나가면서 일치에 도달하는 것’이 서강 가족다운, 서강다운 자
물 베기’임이 드러나곤 했다. 그만큼 동문회와 학교는 불가분 관계이거
세이자 미덕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는 말이다. 서강이 반세기 역사를 통하
니와,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알콩달콩하기도 아웅다웅하기도 한다.
여 한국의 고등교육계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서강대학교 동문회가
249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고비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문들의 뜻을 실현해올 수 있었던 것도 바
장학금으로 조성되었다. 2007년 10월 3000병을 수
로 그러한 자세와 미덕을 지켜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입하여 그 해 말까지 2300병을 판매하여 3000만
2007년 1월 25일에는 작지만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는 결정이 이루어 졌다. ‘서강대학교 동문회’가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로 이름을 바꾸었던
로 1차 판매가 5개월 만에 종료되는 성과를
것이다. 국내외 지부 동문회들과 각종 직능별, 직장별 조직, 기타 매우
올릴 수 있었다. 2009년 10월부터 제3차로
다양한 동문 조직과 모임들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 여기에 전문대학원과
‘세븐힐 셀러스 컬리지 레드 2006’ 판매를
특수대학원, 그 밖에도 다양한 특수과정 별로 동문회들이 활동하고 있는
개시하고 2011년 4차, 2012년 5차, 2013년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모든 동문회와 조직과 모임들을 통틀어
6차 판매 등으로 이어지며 기념와인 사업은
아우르는 의미를 ‘총동문회’라는 새로운 명칭에 담고자 했던 것이다. 비
장학금 조성에 꾸준히 기여해왔다.
록 ‘총’總이라는 한 글자만 더한 명칭 변경이었지만, 그 한 글자는 동문회
서강동문장학회의 장학금 지급 규모도
가 출범 이후 40여 년이 지나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상전벽해桑田碧
커져서 2007년도 2학기의 경우 장학생 93
海라는
말이 합당할 정도로 성장, 발전해왔다는 것을 함축한다. 동문회원
명에게 1억6000만원을 지급했다. 당시 KBS
숫자는 2006년에 5만 명을 넘어섰고 2007년 당시 5만3805명 규모였다.
동문장학금, 씨티은행 동문 장학금, 푸르덴
수없이 많은 물줄기들이 모이고 모여 큰 강을 이루었으니, 이제는 동문
셜 동문 장학금, ROTC 동문 장학금 등이
회가 큰 강물을 다 담을만한 큰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의 표현이
신설되었다. 이후 2008년도 1학기 장학생
바로 ‘총동문회’라는 이름이었다.
72명에게 1억6603만원, 2008년도 2학기 장
2007년 2월 27일에는 개교 50주년을 향한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개
학생 88명에게 1억6275만원, 2009년도 1학
교 50주년 기념와인 선정식을 열어서 세븐힐 셀러스 쉬라즈를 최종 선정
기 장학생 65명에게 1억4300만원 등을 지
했던 것이다. 선정식에는 학교 측에서도 총장과 이사장, 보직 교수들이
급했다. 2010년 3월에는 삼정 KPMG 재직 동문들이 조성한 ‘삼정 KPMG 재
다. 특히 호주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와이너리의 와인이 선정됨으로써
직동문 장학금’이 서강동문장학회에 등록됨으로써 동문장학회 기명 장
서강 설립의 의미와 개교 5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 매우 적합한
학금 50개가 조성되었다. 이로써 2005년도부터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취지에서 총동문회가 추진한 기명 장학금 50개 조성 캠페인은 목표를 달
임 및 선물용으로 판매되었으며 판매수익금은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250
50주년 기념와인으로 선정된 세븐힐 셀러스 쉬라즈의 라벨
참석하였고 예수회 한국 관구장 신부 및 교육사도직 신부들도 참석하였
기념 와인은 이후 개인 판매는 물론 모교와 동문회 행사, 각종 동문 모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원 수익을 올렸으며 동문들의 뜨거운 성원으
성했다. 2014년 2월 현재 기명 장학금 숫자는 90개에 달하며, 장학금 지 급액은 2013년 1년간 249명에게 5억원을 지원할 정도로 성장했다.
251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장학증서 수여식은 일반적인 수여식 행사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장학 금 기탁자와 후배 장학생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하며 담소를 나누고 게임 등 여흥 순서까지 마련되어, 선후배들이 도타운 정을 쌓을 수 있도록 하 였다. 총동문회는 동문회가 가장 크게 관심을 갖고 주력해야 할 사업은 장학사업이라고 판단했다. 모교가 발전하려면 우수한 졸업생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우수한 후배들을 길러내도록 돕는 것이야말 로 동문회가 해야 할 가장 큰 역할이라는 것이다. 후배들을 위한 기여는 비단 장학금뿐만이 아니다. 2008년 3월부터 총 동문회는 모교 당국과 공동으로 서강커리어멘토링 프로그램을 실시했 다. 재학생이 목표로 하는 진로를 정하면 해당 분야에 진출해 있는 동문 이 유익한 조언과 도움을 주면서 경력코칭을 한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
2013년 10월 멘토링의 날
다. 제1기 커리어 멘토링은 마케팅 및 해외영업, 국내 금융 및 재무, 엔터 테인먼트 등 분야에 걸쳐 헌신적인 멘토 동문들의 노력과 선배들에게 하
나라도 더 배우려는 후배들의 열성으로 순항했다. 2013년 제6기까지 이 어졌다. 2007년 10월에는 동문회관 11층에 스카이라운지가 입점 오픈하여 기 금 확충을 위한 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동문장학회 기명 장학금 50개 조성, 개교 50주년 기념와인 사업, 동문회관 공간 임대 수익 증대 노력 등은 결국 더 많은 후배들에게 더 많은 장학금을 지급하기 위한 기 금 확보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1월에 총동문회는 동문회관 403 호(195.3㎡)에서 402호(89㎡)로 사무실을 이전했는데, 사무실 공간을 줄 인 만큼 임대 수익을 늘려 조금이라도 더 장학기금을 확충하기 위한 노 력이었다. 총동문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 활동 목적이 장학기금을 증대시키고 서강동문장학회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고 해도 지나 친 말이 아닐 것이다.
2009년 실시한 장학생 MT의 한 장면
25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그런 가운데 2009년 5월 16일에 서강대학교 미주총동문회가 창립되었
253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다. 이미 북미의 다양한 지역에 동문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고, 북 미 지역 동문회들을 명실상부하게 아우르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데 많은 동문들이 공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남가주, 북가주, 필라델피아, 댈러 스, 뉴욕, 보스턴, 시카고, 애틀랜타, 휴스턴, 토론토, 밴쿠버 등 북미 14 개 지역 동문회가 로스앤젤리스 코리아타운의 월셔프라자 호텔에서 창 립대회를 갖고 하나로 뭉쳤다. 초대 회장에는 나재순(69 무역) 남가주 동 문회장이 선출되었고 초대 이사장은 한창수(66 무역) 동문이 맡았다. 2010년 4월 17일 모교 교정에서 역사적인 개교 50주년 기념식이 열렸 다. 2010년 기준으로 동문 숫자는 처음으로 6만 명을 넘어 6만1410명을 기록했다. 화창한 날씨 속에 동문들은 재학생 도우미가 나눠주는 기념 버튼을 가슴에 달고 교정을 둘러보며 등록 데스크가 마련된 운동장으로 향했다. 이날 국문과, 사학과, 영문과, 신방과, 전자공학과, 컴퓨터학과, 경영학부, 경영전문대학원 등 학과 동문회와 탈반, 합창단 등 동아리 OB 모임 및 79학번 동기회, 73학번 경상대, 74학번 경상대, 77학번 경상대, 2010년 4월 17일 김호연 총동문회장이 기증한 50주년 시계탑 제막식
기업은행 재직동문회, 별가람 등 동문회는 교정과 강의실에서 회합을 갖 고 뜻 깊은 하루에 동참했다. 개교 50주년 행사는 기념미사를 시작으로 공식적인 막이 올랐다. 미사
25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원, 김호연 총동문회장 등은 ‘서강 발전!’을 외치며 시계를 가리고 있던 천을 걷었다.
는 오후 1시 30분 이냐시오 성당에서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와 예수
오후 4시 거행된 기념식은 이규영(75 독문) 모교 기획실장과 이정민(98
회 사제단이 공동으로 주례를 맡아 열렸다. 특히, 3~4대 총장을 역임한
불문) MBC ESPN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은 가운데 진행됐다. 조현철(77
스킬링스태드 M. 델마 신부와 5대 총장을 역임한 존 D. 메이스 신부 등
전자) 교목처장은 ‘사랑으로 따뜻하게 하고 진리로 세상을 밝히는 학교가
이 50주년을 맞아 서강을 방문한 자리에서 함께 집전한 까닭에 감격이 더
되기를 희망’하는 내용으로 50주년 기념 기도를 올렸다. 조긍호 교학부
했다. 존 P. 데일리 신부와 존 V. 데일리 신부 등도 기념미사에 참석했다.
총장은 모교 약력을 소개했다. 이어 이종욱 총장은 기념사를, 이사장 유
기념 미사 이후에는 김호연(74 무역) 총동문회장이 기증한 50주년 시계
시찬 신부와 김호연 총동문회장은 환영사를 전했다. 신원식 예수회 한국
탑 제막식이 열렸다. 오후 3시 20분 본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위치한 시
관구장과 예수회 총원장 자문역 및 아·태지역담당 보좌관 다니엘 황 신
계탑 설치 장소에서 유시찬 이사장, 이종욱(66 사학) 총장, 박근혜 국회의
부는 축사를 했다. 특히 다니엘 황 신부는 아돌포 니콜라스 예수회 총원
255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장 신부가 모교에 전하는 축하편지를 대독했다. 4,000여 석을 가득 채운 열기에 힘입어 개교 50주년 특별상인 서강 희 년상禧年賞 시상이 진행됐다. 존 P. 데일리 신부, 박찬욱(82 철학) 영화감 독, 이성민(82 전자) 엠텍비젼 대표이사, 윤경병 모교 화학과 교수 등 수 상자에게는 조각가 박충흠 선생이 서강의 비상을 상징하며 제작한 청동 조형물 기념패가 주어졌다. 영화 촬영 일정 탓에 불참한 박찬욱 동문을 제외한 모든 수상자들이 직접 수상했다. 존 P. 데일리 신부는 “굉장한 영광이다. 50년 전 가난했던 한국이 지 금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 때문이라 생각 한다. 세계로 나가서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는 서강의 동문이 가장 자랑 스럽다”고 수상 소감을 대표로 남겼다. 이어 박근혜(70 전자) 당시 국회의 원에게 명예정치학박사학위가 수여됐다. 개교 50주년에 모교에서 50번
2010년 4월 17일 50주년 기념식
째로 명예박사학위를 받게 된 박 동문은 “서강이 인증한 정치인은 역시 다르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정치하겠다”고 학위수락 연설을 했다. 이후 무대에 놓인 커다란 박을 터뜨려 알바트로스 모양 흰 풍선과 오
참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동문도 있었다. 이승현(63 경영) 동문의 딸인 바
색 풍선이 하늘 위로 날아갔고, 재학생들이 손도장을 찍어 서강 100주년
이올리니스트 이상희 씨의 축하 연주와 가수 신해철(87 철학), 박하영(05
을 기다리는 취지로 제작한 ‘SOGANG 2060’ 대형 통천이 엠마오관 위
전자) 동문의 공연도 환호 속에 펼쳐졌다. 해가 저문 이후 날씨는 쌀쌀해
로 펄럭였다. 그 뒤 참석자들은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운동장 주변에
졌지만 대부분 참석자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마련한 바비큐 만찬과 동문 기업체가 마련한 음료 등을 즐겼다. 식사 이
이날 모교에서 열린 개교 50주년 기념식과 행사들은 ‘다양성 속의 일
후 기념공연은 이기상(91 신방) 동문의 사회로 펼쳐졌다. 서강동문합창단
치와 일치 속의 다양성’이 무엇인지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세대도 학번
이 가톨릭대학교 오케스트라단과 함께 선사한 ‘한국 환상곡’은 큰 박수
도 학과도 하는 일도 각기 다른 많은 동문들이 모였지만 그 모두는 ‘서
갈채를 받았다.
강’이라는 이름 아래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 반세기 역사를 통하여 대한
이어 1970년대 언더그라운드 음악계를 주름잡은 혼성 포크 그룹 해바 라기 1기 멤버로 활약한 배화순(71 영문), 강성학(73 정외), 장상태(73 영 문) 동문 등이 공연을 펼쳤다. 이들이 김민기의 ‘친구’를 부를 때 무대 양
25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옆 스크린으로 서강의 초기 모습을 담은 흑백 사진들이 흐르자 뭉클함을
민국을 대표하는 지성의 전당으로 우뚝 서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서 강, 그 서강에 대한 자부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한편 2012년 12월 19일에 치러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동
257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문이 당선되어 이듬해 2월 25일 취임식과 함께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으로서 임기를 시작했다. 모교 홍보 광고에 모델로 나서고 기금 모금에 도 참여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2월 6일에 열린 서강대학교 비전 선포식에 영상메시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모교 발전을 기원했다.
‘서강대는 혁신과 도전정신으로 반세기 만에 명문사학으로 성장했습니 다. 앞으로도 서강대가 여러 도전을 극복해 가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세계 속의 서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믿습니다. 서강대의 새로운 미 래를 열어가는 위대한 여정에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강인들의 건 승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제24~28대 총동문회장을 지내며 총동문회
2013년 5월 31일 김덕용(76 전자) 동문이 제29대 총동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와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김호연 총동문회장에 이어, 2013년 5월 31 일에 열린 제53차 총동문회 대의원총회에서 김덕용(76 전자) 동문이 신임
발자취가 압축되어 있다. 그 50년 발자취는 많은 동문들의 소중한 헌신
제29대 총동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덕용 총동문회장은 다음과 같이
과 희생적인 봉사의 한 걸음 한 걸음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동문회 사업
포부를 밝혔다.
을 책임지거나 참여하더라도 결코 대충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온 자취다. 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후배들을 뒷받침하는 한 해 한 해가 쌓여서 도달
‘선후배님들의 소중한 헌신과 희생적인 봉사로 일궈온 총동문회를 앞
한 50년이다. 그리고 이제 지난 50년을 돌아보고 미래 50년을 그려보아
으로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
야 할 때가 왔다. 모교 반세기와 총동문회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나 성격상 무엇을 일단 맡으면 대충하지 않기에, 최선을 다해서 학교
향한 새로운 발걸음이 이미 시작되었다.
발전에 기여하는 총동문회를 만들겠습니다. 2014년이면 총동문회가 50 주년을 맞는 까닭에, 지난 5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데 필요한 시간도 갖고자 합니다.’
김덕용 총동문회장의 위와 같은 포부에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의
25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59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서강을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서강’의 이름으로 만날 인연 김슬아(04 중국문화)
도서관에 가면 저마다 선호하는 나만의 자리가 있다. 한 시간에 한 번 씩 담배를 피워야 하는 창열이는 오가기 편한 복도자리를 원했고, 익환 이와 진석이는 주위가 시끄러우면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는다며 구석자 리를 찾아가 앉았다. 물론 특별한 이유 없이 예쁜 여학생 근처면 환영이
5
라는 희섭이와 대환이도 있다. 나는 유독 로욜라 1관 3층, 열람석이 좋았 다. 높은 천정과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이 내가 꿈꾸는 서재와도 같았다. 그 곳에서 리포트를 쓰고 시험공부를 하고, 토익 문제집을 풀었으며 목 적 없이 책을 늘어지게 읽기도 했다. 졸업 후의 세상은 로욜라에서 보던 책 속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공부한 만큼 성적을 받을 수 있었던 학교와는 달랐다. 노력해도 되 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걸 알았다. 진실함보다 적당한 가식이, 성실함보 다 요령이 이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날마다 투쟁이지만 어지러운 사회 생활에서 버티는 힘을, 나아갈 용기를, 상황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키워준 곳은 서강이다. 얼마 전 학교 소식지 <SFC WEEKLY> 인터뷰에서 지난 대학 생활의 키워드를 ‘사춘기’라 답했다. 진로 문제, 가치관에 대한 고민. 혼탁과 혼 란 속에 울기도 아프기도 많이 했다. 그런 내게 전공과 인문학 수업들은 그 자체로 치유였다. 대학생은 자기 신념에 회의를 갖게 되는 시기이며 동시에 다양한 가치체계를 받아들이는 시기라던 최진석 교수님의 말씀 이 큰 위로가 됐다. 당연하고 거쳐가야 할 과정이니 괜찮다며 다독여주
26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61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끼 살려준 열린 교육
시는 것 같았다.
박해영(05 전자, MOT대학원 1기)
책과 수업에만 배움이 있는 건 아니었다. 친구들과 또는 선배들과 술 잔을 기울이며 삶의 의제에 대해 고민했던 시간들이 나를 키웠다. 한때 우리 친구들의 술자리에서 ‘홀망천’이라 읊조리는 게 유행(?)했던 적이 있다. 도연명의 <連雨獨飮(연우독음)> 중 한 구절로, 試酌百情遠(시작백정 원 : 한잔 마시니 온갖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重觴忽忘天(중상홀망천 : 두 잔
남들보다 다소 늦게 들어간 대학이었습니다. 고3 때 원서를 넣었다가
마시니 홀연히 하늘도 잊네)라는 뜻이었다. 김근 교수님의 ‘중국문학입문’
고배를 마시고 다시 도전해 들어간 서강대 전자공학과. 전자과 밴드를
수업에서 배운 구절인데, 그 홀망천의 경지가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
하며 1학년 생활을 마친 저는 시애틀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고, 현지에
다. 물론 시답잖은 농담과 별 일 없는 이야기를 안주 삼은 적이 훨씬 많
서 영어 레벨테스트를 통과하여 대학에서 전공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
았지만.
니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던 저는 현지인들과 음악 수업을 들으며 재즈
3학년 즈음인 것 같다. 학교 소식지를 보는데 한 귀퉁이에 실려 있던
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서강언론동문회’ 동정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알게 된 ‘서언회’에는 신문
자유로운 땅에서 미국인 친구들과 재즈밴드를 구성하여 직접 만든 곡
과 방송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서강 선배들이 있었다. 언론사
으로 극장 등을 빌려 공연을 하고 다니며 낯선 문화를 만끽하였고, 이듬
에 입사하면 꼭 입회하겠다 다짐한 서언회. 수험생활에 동기부여가 돼줬
해 귀국한 저는 끼를 주체 못하고 MBC 가요제에 나가 수상을 하였습니
고, 서언회 선배들이 들려줬던 이야기는 취업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이
다. 마침 TV를 보신 서강대 관계자 분께서 저를 첫 학교 행사에 초대해주
됐다.
셨고, 그 후로 저는 모교와 관련된 각종 행사에 초대가수로 서게 됩니다.
신방과를 전공한 것도, 방송반 동아리 활동을 한 것도 아니라서, 서언
2008년 3월. 서강 SIAT 창립 기념 행사에 초대되어 공연을 하고 지금
회 선배들로부터 듣는 경험담 하나하나는 방송생활의 이정표가 되고 있
은 총장님이신 유기풍 당시 공학장님을 처음 뵙게 되었습니다. 노래를
다. 선배들의 신념을, 영향력과 겸손을, 글 솜씨와 유머를, 넓은 시야와
하는 학생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저의 활동에도 교수님들께서는 학교에
시대감각을 배우고 싶다. 선배들의 품격 속에 느껴지는 열정과 따스함을
이런 학생도 필요하다며 제 꿈을 적극 지지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학교의
따라가고 싶다. 그렇게 나 또한 후배들에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고 싶
지원 아래 저는 남은 대학생활을 실컷 음악활동을 하며 보낼 수 있었습
다. 서강에서 만나고, 서강이란 이름으로 만날 모든 인연들에 감사한다.
니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제게 많은 자극이 되었던 것은 노래를 하면서 만난 서강 출신의 CEO 선배님들이셨습니다. 도전적이고 성취감 을 맛볼 수 있는 경영의 매력을 멀리서나마 지켜본 저는 경영에 대해 좀
26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63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더 배우고 싶다는 마음으로 마침 졸업하는 해에 생긴 MOT 대학원 1기로
순수와 열정의 시간들
입학하게 됩니다. 그 곳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창업경진대회를 통해
주정숙(05 사회)
잠시나마 사장이 되는 기쁨도 누려볼 수 있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저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자동차 전장(전기제어 장치)을 담당하는 현대오트론 영업팀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 조직생 활을 시작하며 학교 다닐 때가 좋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히든싱어
총동문회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저에게도 50주년을 맞이
제작진이 서강대 홍보팀을 통해 출연 제의를 해왔습니다. 업무 스트레스
하는 2014년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사회학과 05학번으로 입학해
를 풀기 위해 출연한 ‘히든싱어 백지영편’에서 예상치 못한 이슈를 만들
서강과 인연을 맺은 지도 내년이면 벌써 10년이 됩니다. 대학시절 정말
고 본의 아니게 입사한 지 몇 개월만에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하며 즐거웠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습니다.
지날수록 대학시절의 추억과 동기, 선후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함께했
이렇게 남들보다 조금 다른 대학생활, 그리고 다소 튀는 회사생활을
던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시간 때문일 것입니다.
하면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서강대학
개강날이면 한 학기를 보낼 좋은 좌석을 맡기 위해 치열한 자리경쟁을
교의 열린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제게 밑거름이 되어주고
하게 한 ‘지정좌석제’, 매달 독후감을 제출하기 위해 X관 계단에서 원고
늘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서강이 있었기에 남들과 다른 대학생활도 외롭
지를 채워 내려갔던 기억, 모두를 떨게 한 ‘FA’.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지 않았습니다. 20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라는 따스한 울타리에서만 보
대표적인 서강인의 문화일 것입니다. 수업마다 있었던 조모임으로 ‘도라
내다 첫 사회로 내딛은 발걸음 가운데 이렇게 총동문회 50주년 기념 책
지(도서관 라운지’)와 ‘엑스라지’(엑스관 라운지)’를 오가고, 공강 때면 삼삼
자에 글을 싣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오 몰려있었던 ‘삼민광장’, 새벽까지 있어야 ‘소수정예’로 마지막 3차
마지막으로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만난 서강 경제 03학번 학우와 2014
때 갈 수 있었던 동해횟집부터 카스타운, 레이더스가 있는 ‘개골목’에서
년 4월 결혼을 했습니다. 서강이 제게 준 또 다른 선물인 그 사람과의 앞
의 왁자지껄했던 시간과 2005년의 캠퍼스 라이프가 새록새록 기억에 남
날도 지금처럼 잘 헤쳐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서강 동문 50주년에 서강
습니다.
동문과 결혼을 하게 되어 학교와 남다른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
대학시절 내내 학과, 동아리 활동을 하며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습
로도 모교에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함께하는 동문이 되겠습니다. 동문
니다. 신입생 때는 사회과학대 섹션활동에 많이 참여했습니다(청년서강
파이팅!
전진사단 차돌 C섹!). ‘한국정치연구회’라는 학회활동은 갓 고등학교를 졸
업한 저에게 신선함을 주었습니다. 매주 세미나를 통해 학문적인 배움을 넘어서는 하나의 소규모 공동체로서 정말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
26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65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다. 정치학과 연례행사인 ‘모의국회’에 참여하며 시사이슈에 대해 연극
사회학에 대한 생각 등을 공유할 수 있는 강의를 만들고 있습니다. 50주
을 통해 보여주며 함께 고민해 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년을 맞이해 교수님들을 비롯해 선후배, 동기들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
세계적으로 유명한 박찬욱(82 철학), 최동훈(90 국문) 감독 같은 영화감독
는 기회가 자주 생겼으면 합니다. 재학중인 후배들과 졸업한 동문들이
을 꿈꾸는 영화소모임 ‘영사기가 있는 다락’에서는 시나리오도 쓰고, 직
함께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생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접 연기도 하며 15분 남짓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여름방학 내내 촬영하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 50주년을 기념하며
고 편집하면서 머리를 싸매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목요일 아침, 텅빈
언제나 서강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학교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선후
경춘선 열차타고~♬”. 생소했던 민중가요를 따라 부르게 했던 노래패
배, 동기들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이쁜 소리’. 지금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대학시절의 꽃이었던 동아리 활동으로 자주언론의 기수, ‘서강학보사’ 에서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현장에서 선후배들과 부대끼며 캠 퍼스 생활의 정점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동문회보 〈서강 옛집〉 기자로 활동을 하면서 손정은(01 정외) 아나운서를 비롯해 전공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자랑스러운 선배들을 만날 수 있 었습니다. 서강에서 가장 큰 배움은 ‘인성’과 ‘사람’이었습니다. 서강에서 만난 사람들, 함께했던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저를 있게 합니다. 학과, 동아 리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협동심과 소통, 함께 조율 하면서 일하는 법을 배웠고, 사회생활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아쉬 운 점은 졸업하고, 선후배, 동기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점입 니다. 이제는 1년에 한두 번 있는 경조사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으 며 대학시절을 그리워합니다. 학보사에서는 매년 체육대회가 있어 60년 대 학번부터 다 함께 한자리에 모여 서강인이라는 공감대로 함께하는 자 리가 있습니다. 사회학과 동문들은 재학생을 위한 매월 1만원 장학금을 진행하고, 사회에 나가 활약 중인 선배들의 생생한 현장경험과 학창시절
26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67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심리학과 1회 동문회
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대표자리도 후배에게 물려준 뒤에도 뜻이 맞
장하늘(06 심리)
는 사람이 모여 심리학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교내 준동아리로 승격되기 도 했습니다. 군대에 다녀오니 동아리 방까지 있었던 심리학회는 없어졌지만 심리 학과 내에서 새로운 학회가 만들어져 타 대학 심리학과와 연합활동도 하
아직 예비 동문인 학부생 입장에서 다른 동문들을 제치고 이곳에 글을 쓰게 되어 작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동시에 심리학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많은 영광을 느끼며 이 글을 적어내려 갑니다.
그러다 06학번도 07학번도 조금씩 졸업하는 모습을 보며 심리학과 1 기 모임에서 우리도 이제 슬슬 동문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
은 것이 그 해에 새로 생긴 학과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학
가 나왔습니다. 그때까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언젠간 형성되
과 선배가 없는 정도로만 생각하다가 한해동안 타과 행사에 불려가 참여
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 다들 농담으로 처음 과대표를 맡았던 제
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 졸업하면 동문회를 만들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이, 같은 과 친구들도 모르는 상태로 대학생활을 마무리해야 하나?’
그러다 제가 총동문회 사무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타과 동문회 모임도, 동문 선배가 후배에게 도
기말고사를 앞두고 문득 든 생각에 친한 학과 친구들의 응원을 받으며
움을 주고 도움을 받은 후배가 다시 선배가 되어 후배를 돕는 그런 역사
당시 학과장이셨던 최해림 교수님을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이후 기말
를 보니 우리 학과도 기다릴 때가 아니라 이제는 동문회를 만들어야한다
고사가 끝나는 날 교수님의 도움으로 2006년 2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날
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심리학과 첫 학생들과 교수님이 모인 그 자리를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입니다.
268
며 심리학과도 이제 자리를 잡았다며 친구들과 굉장히 기뻐했습니다.
처음 2006년에 사회과학부로 입학해서 심리학과에 대해 처음으로 들
‘학과생들의 모임을 갖는 타과생이 부럽다’, ‘이러다가 학과 모임 없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고 있고, 교수님과의 관계도 예전보다 원활하게 바뀌어 있는 모습을 보
하지만 아직 졸업생 신분이 아닌 제가 주도해서 사람을 모을 수 없어 동기들과 이야기를 계속 나누던 중 신정돈(06 심리) 동문이 나서서 동문
그 이후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신입생 환영회도 준비하고, 당시 총
회를 만들겠다는 의견을 주었고, 총동문회에서 얻은 조언으로 우선 1기
학생회의 신생학과에 대한 배려로 오리엔테이션에서 유일하게 단일 학
동문들이 주도하기로 하고 선거를 통해 신정돈 동문을 회장으로 한 심리
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심리학과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개강 이
학과 동문회를 결성하였습니다.
후에는 선거를 통해 정식으로 초대 과대표로 선출되어 처음으로 들어온
학과가 처음 생겨 모임을 갖게 될 때도 절차적인 문제나 학과모임 운
후배들과 첫 과MT, 영화분석학회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MT참가자가
영에 대해 이해미(97 정외) 동문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번에도 총동
적어 학생들이 교수님과 1:1 대면을 할 수 있을 정도인 적도 있었지만 나
문회 사무국에 계시는 선생님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잘 모이고
269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잘 운영되는 동문회의 특성에 대한 조언을 주셔서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맞는 것으로 고쳐 계획해 나갈 수 있었고, 연락처를 알 수 없는 동문을 찾는 도움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동문회장 선거를 진행하고, 결과를 교내에 알리는 것 까지만 도우려는 생각이었지만, 동문회장의 부탁으로 여러 가지 의견을 같이 나누고 타 동문회에 대한 정보를 찾아주기도 했습니다. 서로가 다들 사회초년생이라 바쁜 와중에도 동문회를 구성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신정돈 동문과 동문회 부회장인 이세정(06 심리) 동문에겐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 동문회가 결성되고 반년 동안 준비를 하여 얼마전 동문회 첫 오프모임 도 가졌는데, 저는 그 모임에 참여할 수 없어 장소 수배에만 도움을 주어 아쉬웠습니다. 이제 곧 저도 심리학과 동문회에 합류할 입장에서 우리 동문회가 더욱 발전하여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모범이 되는 동문회가 되고, 서강대라는 이름 아래에서 우리가 다른 학과 선배님들께 받은 은 헤를 다시 후배에게 내리사랑으로 나눠주는 동문회가 되길 바랍니다.
27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추억의 앨범
우리들의 2000년대
2004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학생홍보대사 하늬가람
2004년 5월 29일 열린 서강문화축제
2005년 자전거대행진
2004년 모교 설경
27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73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2007년 축제 2009년 봄 캠퍼스
2007년 졸업앨범에서 중국문화과
27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09년 입학식
275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2009년 축제의 한장면
2009년 도서관
27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10년 5월 15일 개교 50주년 기념 홈커밍 행사에서 펼쳐진 거리축제 미라클의 한장면
2010년 제1회 서강대-죠치대 한·일 정기전(영문명 SOFEX, Sogang-Sophia Festival of Exchange)
277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2010년 지정좌석 체크
2013년 졸업식
2012년 5월 졸업사진 촬영장면
2010년 개교 50주년 기념 광고
27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13년 학교 홍보 광고
279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서강학개론 중간고사 4. 모교의 독후감 제도에 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① 제출마감 기한을 지켜야 한다 ② 모든 학생이 이수해야 한다 ③ 한자漢字는 쓰지 말아야 한다 ④ 일정 기준 미달 시 조교와 면담한다 5. 모교 교표에 있는 ‘IHS’는 무엇을 뜻합니까? 1. 총장(학장)을 역임하지 않은 분은 누구일까요?
① International High School
① 케네스 E. 길로런
② Jesus의 Jes에 해당하는 희랍알파벳
② 존 P. 데일리
③ Ignatius Holy Saint
③ 클라렌스 A. 헙스트
④ Innocent Holiness Sanctus
④ M. 델마 스킬링스태드 6. 모교가 국내 대학교육 역사상 최초로 실시한 것이 아닌 것은? 2. 현재 기준으로 서강대학교의 정확한 주소는?
① 최초 교수안식년 제도 도입
①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수동 산1
② 최초 텔레비전 강의 실시
② 서울특별시 마포구 백범로 35
③ 최초 완전 개가식체제 도서관
③ 서울특별시 마포구 노고산동 1
④ 최초 성적상대평가 실시
④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흥동 1 7. 모교 학과 변동 관련 사항으로 틀린 것은? 3. 모교 특유의 학사제도인 FA는 무엇의 줄임말일까요?
① 정치외교학과의 처음 명칭은 외교학과였다.
① Failure because of Absences
② 경영학과는 회계학과와 함께 설치되었다.
② Failure from Absences
③ 신문방송학과는 보도예술학과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③ Fallacy of Absences
④ 무역학과의 처음 명칭은 국제통상학과였다.
④ Fallacy of Apprentice
28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81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8. 모교는 몇 년도에 종합대학 서강대학교가 되었을까요?
13. 현재 모교에 설치되어 있지 않은 전공과정은?
① 1968년
② 1973년
① 중국문화
② 행정학과
③ 1970년
④ 1980년
③ 국제한국학
④ 생명과학
9. 모교 건물에 부여된 가톨릭 성인 이름이 아닌 것은?
14. 현재 모교에 설치되어 있지 않은 특수대학원은?
① 토마스 모어
② 곤자가
① 정보통신대학원 ② 경제대학원
③ 정하상
④ 엠마오
③ 언론대학원
④ 행정대학원
10. 서강대학교의 ‘서강’ 한자와 영문 표기가 모두 올바른 것은?
15. 서강 출신 작가(시인·소설가)가 아닌 사람은?
① 西江 - Seogang
① 안정효
② 성석제
② 瑞江 - Sogang
③ 김승희
④ 김경주
③ 西江 - Sokang ④ 西江 - Sogang
16. 서강 출신 영화감독이 아닌 사람은?
11. 모교 건물 이름이 먼저 지어진 순서대로 올바르게 배열된 것은?
① 박찬욱
② 전계수
③ 봉준호
④ 최동훈
① 본관 - 사제관 - 메리홀 - X관 - 체육관 - C관 - K관
28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② 본관 - 사제관 - C관 - 메리홀 - X관 - 체육관 - K관
17. 서강 출신 배우가 아닌 사람은?
③ 사제관 - 본관 - 메리홀 - C관 - X관 - K관 - 체육관
① 조희봉
② 문근영
④ 사제관 - 본관 - 체육관 - 메리홀 - C관 - K관 - X관
③ 정한용
④ 고주원
12. 모교에서 공식 휴강이 아닌 때는 언제일까요?
18. 서강 출신 대중음악인이 아닌 사람은?
① 로욜라 성인 시성일
② 개교기념일
① 양희은
② 전태관
③ 개강미사
④ 부활절
③ 유재하
④ 신해철
283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19. 모교의 동아리(서클)가 아닌 것은?
24. 기업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건물은?
① 킨젝스
② 강미반
① 프란시츠코관(F) ② 가브리엘관(GA)
③ 에밀레
④ 얄라셩
③ 바오로경영관(PA) ④ 아담샬관(AS)
20. 모교의 개교기념일은?
25. 예수회 대학이 아닌 곳은?
① 3월1일
② 2월20일
① 샌프란시스코대학교 University of San Francisco
③ 4월18일
④ 1월10일
② 아테네오 데 마닐라대학교 Ateneo de Manila University ③ 보스턴 칼리지 Boston College ④ 루뱅가톨릭대학교 Catholic University of Louvain
21. 모교 교가의 작사, 작곡자는? ① 조지훈-안익태
② 이희승-안익태
③ 이희승-현제명 ④ 유치환-윤이상 22. 모교 교가의 가사가 아닌 것을 골라주십시오. ① 아느냐 저 강물이 흐르는 뜻을 ② 젊은이들 우정이 익어만 간다 ③ 보아라 우뚝 솟은 저 산의 모습 ④ 보아라 노고산 힘찬 정기 23. 총동문회 연회비-영구회비 액수는?
28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① 1만원-10만원
② 3만원-30만원
③ 5만원-30만원
④ 5만원-50만원
285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서강학개론 중간고사 정답과 해설
12. ① 13. ② 14. ④ 15. ② 성석제(연세대 법학과)
16. ③ 1. ③ 케네스 E. 길로런 초대 학장, 존 P. 데일리 2대 학장 및 초대, 2대 총장, M. 델마 스킬링스태드 3대 총장
2. ② 3. ① 4. ③ 5. ② 6. ④ 7. ② 1963년 경영학과 설치, 1966년 국제통상학과 설치(1968년 무역학과로 개 칭), 1976년 회계학과 설치, 1981년 경영학과, 무역학과, 회계학과를 경영학 과로 통합.
8. ③ 9. ④ 엠마오는 예수님이 부활한 뒤 두 제자를 만난 곳.
10. ④ 11. ②
봉준호(연세대 사회학과)
17. ② 문근영(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18. ③ 유재하(한양대 작곡과)
19. ④ 얄라셩(서울대 영화동아리)
20. ③ 1960년 4월 18일 개교
21. ② 22. ④ 23. ② 24. ④ 포스코 프란시츠코관(F), 삼성 가브리엘관(GA), 금호아시아나 바오로경영 관(PA)
25. ④
본관(1959.11), 사제관(1962.12), C관(1963.7), 메리홀(1969.12), X관 (1976.9), 체육관(1980.3), K관(1984.8)
28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87 반세기를 넘어 100년 서강을 향하여
2부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역대 동문회장 동문회와 모교 발전의 견인차 동문회관 10년 걸린 소중한 보금자리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서강 최고의 명예로운 상 <서강옛집> 지면에 담은 7만 동문의 이야기 장학금 총동문회 최대 역점사업 사무국 음지에서 묵묵히 50년
28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89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역대 동문회장 동문회와 모교 발전의 견인차
가는 동문들은 물론 모교에도 늘 관심사였다. 동문회장이 바뀔 때마다 동 문회에서는 어김없이 전에 없던 큰 사업을 시작하고 이루어왔으며 그 결 과들은 늘 동문회는 물론 모교와 후배들에게 풍성한 열매를 안겨주었다.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는 제1회 졸업식 이틀 전인 1964년 2월 6일, C관 라운지에서 1회 졸업생들 60명이 모여 결성되었다. 당일 창립 모임에서 윤진호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들은 첫 사업이자 향후 동문회의 핵심 사업 이 될 ‘후배 장학금 지원’과 학교와 졸업생 간 및 졸업생들 간 긴밀한 연 락을 위한 ‘동문회보 <서강옛집> 발간’을 결정했다. 이후 5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총동문회는 7만 명의 동문에 29대 회장
총동문회를 이끌어가고 그 누구보다도 동문회의 빛나는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동문들을 꼽으라면 단연코 동문회장이다. 총동문회
을 맞을 만큼의 연륜을 갖게 되었고 초창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 큼의 수많은 사업들을 펼쳐왔다.
가 ‘동문 간의 친목 도모’ ‘모교 발전 후원’ ‘후배 지원’이라는 자기 역할
이러한 사업들이 추진될 때마다 동문회장들은 때로는 밀어붙이고 때
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스스로의 위상을 높여오는 동안 동문회장은 늘
로는 격려하고 호소하면서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으로 동문회 사
그 구심점이었다.
업들을 이끌어왔다. 동문회장들의 모교와 후배를 향한 사랑과 열정이 없
동문회장은 분명 전 동문들을 대표하는 명예로운 자리이기도 하지만
었다면 오늘날의 동문회도 없을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지난
두 어깨에 동문회의 온갖 무거운 짐들을 짊어져야 하는 짐꾼이자 모교
50년간 29대 13명의 동문회장들이 동문들과 힘을 모아 펼쳐온 사업들을
발전을 위해, 후배들의 지원을 위해 제일 앞장서 달려 나가야 하는 선두
살펴보자.
주자이기도 하다. 서강이 짧은 역사 속에서 사학 명문으로 자리 잡기까지 학교 관계자는 물론 동문회에도 수많은 역할과 과제가 주어졌다. 다른 대학 동문회에
1대, 2대(1964~1966) 윤진호(60 경제)
비해 상대적으로 이끌어줄 선배도, 함께 힘이 되어 줄 동문 수도 많지 않
3대(1966 ~ 1967) 김암(62 경제)
은 상황에서 지난 50년 동안 동문회를 이끌어 온 29대 13명의 동문회장
4대(1967 ~ 1968) 박병화(60 경제)
들은 모교의 나이테 마디마디마다 주어진 과제들을 원활히 풀어내야 하
5대(1968 ~ 1969) 김영천(60 경제)
는 능력을 요구 받았고 그 누구보다 과제들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초기 동문회는 동문 수도 적고 사회진출이 막 시작되던 때라 아직 제
때문에 누가 동문회장이 되어 어떤 색깔로 동문회를 이끌어나갈 것인
29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년대 1960년대 1960
대로 된 동문회의 틀을 갖출 수는 없었지만 여느 대학동문회보다 가족적
291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이고 의욕적이었다. 이 시기 동문회장들은 사회에 진출한 선배가 없는
교 10주년이 되는 1970년 모교가 종합대학교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때
상황에서 동문 간의 상호 교류 및 유대 강화를 최우선으로 하여 부족한
맞춰 동문회도 교내(메리홀)에 별도의 사무실을 확보하고 독자적 조직으
재정 속에서도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과 기증사업, 재학생을 위한 강연
로서 동문회의 기틀을 다져나간 시기였다. 조직 강화는 물론 장학금 확
회 등을 추진했다.
충과 모교로부터의 재정적 독립을 위해 동문회비 모금에 박차를 가한 것
여느 대학동문회보다 먼저 동문회지인 <서강옛집>을 1964년 창간했
도 이 시기였다.
으며 1965년 1월부터 졸업생 월례친목회를 열었던 것, 1965년 5월 동구
무엇보다 재정 자립과 안정적인 〈서강옛집〉의 발간을 위해 김진헌 회
릉에서 동문회 야유회를 개최한 것, 1969년 8월 동해안 하조대 별장(학교
장은 1973년부터 종신회비(영구회비)제를 도입했다. 독자적 조직으로서
수련원)에서 졸업생들이 모여 ‘하계수련회’를 가진 것 등이 이에 해당할
의 동문회를 강조했던 김영천 회장은 메리홀에 별도의 동문회 사무실을
것이다.
확보하고 재정 확충에 힘쓰는 한편 〈서강옛집〉이 제대로 된 신문형식을
후배들의 학업 지원을 위해 수석 입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했으며 2 회 졸업생들이 1965년 약 200달러 상당의 방송 기재를 학교에 기증했고 1968년 김창애(60 사학) 동문이 100달러를 도서관에 기부했다.
갖추도록 1976년부터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격월간 4면 타블로이드판 으로 변형하는 등 〈서강옛집〉 발간체제를 대폭 개선했다. 또한 동문 간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박희윤 회장은 1972년 동문주소
후배들의 진로 선택에 도움을 주고 동문회, 재학생과 졸업생 간 유대
록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부산, 대구 등 지방에 지부를 결성하고 학과
강화를 위하여 1968년 5월에 ‘학창 생활 중의 난제’, ‘직업 선택’ 등을 주
별, 학번별은 물론 언론계, 금융계를 비롯한 직장별 조직과 그룹별 조직
제로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1969년 12월에는 1970년 2월에 졸업 예정
을 결성하는 등 조직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인 재학생들(7회 졸업) 초청으로 ‘사회 진출 준비 및 선후배 간 유대 강화’ 를 목적으로 학교 식당에서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철학과 동문회를 비롯해 생물학과, 독문학과, 화학과, 국문학과, 물리 학과, 전자공학과 동문회(서전회 :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 동문회) 등 학과 동 문회와 ‘금강회(금융계 동문 모임)’ ‘Sogang Alumni Business Group(기
29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년대 1970년대 1970
업 재직 동문회)’ ‘서강 재직 동문회’ ‘서강 해군 동문회’ 등 직업별 동문
6대(1970 ~ 1971) 김영천(60 경제)
회, ‘서강OB산악회’ 같은 그룹별 동문회 그리고 LA지역의 ‘재미 서강동
7대(1971 ~ 1972) 박희윤(61 경제)
문회’ 등이 속속 출범하면서 동문회 조직이 내실을 더해가기 시작한 것
8대, 9대(1973 ~ 1975) 김진헌(60 물리)
도 이 시기이다.
10대(1975 ~ 1978) 김영천(60 경제)
이 기간 중에는 동문 수가 1000명을 넘어선 가운데 동문 모임도 활발
11대(1978 ~ 1980) 박희윤(61 경제)
해져 김진헌 회장은 1973년 봄 축제 기간 중 처음으로 ‘Home Coming
이 시기는 아직 재정적으로 힘들고 학교에 의존하는 형편이었지만 개
Party’를 열어 재학생과 동문들 간의 유대를 도모하고 같은 해 가을엔
293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제1회 동문체육대회’를 시작하였으며 ‘추계 동문 야유회’ ‘동문 하계 수 련대회’ 등도 계속 이어나갔다.
모교의 팽창은 곧 동문회의 팽창을 의미했다. 입학자 수가 늘면서 자 연 동문 수가 늘어났고 1984년부터 대학원 졸업생들도 총동문회 가입이
한편 동문들의 기증사업도 더욱 활발해져 9회 동문들이 기증한 스피커
시작되면서 동문 수는 1986년에 1만명을 돌파하게 되었다. 동문들의 진
를 통해 서강 캠퍼스 곳곳에서 방송실에서 내보내는 뉴스와 음악을 들을
출 분야 또한 금융계, 교육계, 학계 등을 넘어서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
수 있게 되었으며 1974년 로욜라 도서관 개관식에 맞춰 금강회가 도서관
다. 활발한 업종별 동문회의 조직이 이를 잘 말해준다.
현판을 기증했고 1회 동문들은 도서관 앞 로욜라 동상을 건립했다. 이에
또한 동문회 조직도 종으로 횡으로 촘촘히 짜여져 개교 20년 만에 처
뒤질세라 2회 동문들은 개교 15주년 및 2회 동문 졸업 10주년 기념으로
음으로 여자 동문회(회장 하문자, 60 사학)가 결성되었으며 직장별, 지역별,
은행나무 350그루를 학교에 기증해 이후 후배들은 교내 곳곳에서 선배
업종별 동문회는 물론 해외지부의 신설이 줄을 이었다. 이 기간 동안 신
들이 심은 은행나무 그늘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설된 해외지부만도 미국에서 중서부, 남가주, 뉴욕, 북가주, 컬럼버스,
또한 박희윤 회장은 개교 20주년 기념사업으로 그동안의 서강 발자취
필라델피아, 세인트루이스, 조지아 지부가 생겨났고 그 외 지역에서 리
를 종합 정리하고 재학생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며 모교의 대외 이미지를
야드 동문회, 동경지부, 재독 서강동문회, 재영 서강동문회, 브라질 동문
쇄신하는 차원에서 1978년부터 ‘서강홍보영화’ 제작을 추진하여 1980년
회, 캐나다 동문회, 재싱가폴 동문회가 설치되었다.
모교에 기증했다. 동문회가 제작한 이 홍보영화는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국내에서도 지역별로 청주, 여수, 포항, 군산, 이리, 제주, 전북지부가
완성된 1시간 30분짜리 16mm 컬러 필름으로 1981년도부터 고등학교를
새로 발족했으며 학과 동문회로 화학공학과, 영어영문학과 동문회가 신
대상으로 모교를 홍보할 때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설되었다. 또 업계별로도 호서회(호텔업계 재직 동문), 매스컴 재직 동문회 (신문 방송 광고 잡지계에 종사하는 동문 모임), 해강회(해운업계 재직 동문회),
년대 1980년대 1980
서강출판인동문회, 카드업계 재직동문회, 서강기업인동우회가 추가로
12대(1980 ~ 1982) 박희윤(61 경제)
결성되었다.
13대, 14대(1982 ~ 1986) 홍익찬(61 경제) 15대(1986 ~ 1988) 양호(62 경제)
29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이러한 모교와 동문회의 성장은 동문회장으로 하여금 다양한 사업 추 진과 더 많은 재정 확보를 위한 능력을 요구했다.
이 시기는 동문회가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으로 팽창하며 본격적으로
박희윤 회장은 1981년 배구부 창단을 계기로 ‘서강체육회’를 발족시키
모교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시작하는 시기였다. 모교는 1981학년도부
고 1000만원이 넘는 기금을 조성했으며 과거 10년 동안 변함없던 동문
터 졸업정원제 도입으로 입학생 수가 세 배 가까이 늘어나고 특수대학원
회 종신회비를 현실에 맞춰 2만원으로 인상하고 동문록 판매를 통해 동
이 속속 신설되면서 모교에서 공부하는 학생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문회 재정 확보에 나섰다. 이같은 사업들은 재임기간 이루어진 5400여
또한 여러 학과 신설로 개교 당시 6개였던 학과가 20개로 늘어났다.
동문 개개인의 신상과 종신회비 납부 여부 등 동문 관련 사항이 담긴 동
295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문현황카드 목록의 완성으로 뒷받침되었다. 또한 1981년부터 졸업하는 신입 동문들이 도서관 장서의 확충을 위해 졸업비의 일부를 도서기금으로 기증하는 전통이 시작되기도 했다.
보센터’를 개설해 후배들의 사회 진출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동 센터는 이후 학생처에 이관되어 현재까지 후배들의 사회 진출을 돕는 창구 역할 을 하고 있다.
홍익찬 회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문회 주요 사업의 기초를 놓았
한편 동문회 행사를 더욱 알차고 다양하게 갖기 위해 동문회 연례 행
다. 재임시 제일 중요한 업적은 누가 뭐래도 개교 25주년 기념사업으로
사인 ‘모교 방문의 날’은 봄 행사로 전환하고 대신 가을에 ‘서강동문 등
장학재단 설립의 기반을 마련해놓은 일. ‘장학재단 설립 운영위원회’를
반대회’ 연말에 ‘서강가족 송년의 밤’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구성해 재단 설립의 기초 자본인 1억원의 모금을 시작했다. 또한 1984년에 대학 동문회 최초로 사무 전산화를 추진, 날로 늘어가 는 동문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게 됐으며, 우편발송 작업을 원활하게 처
16대 ~ 20대(1988 ~ 1998) 이우진(60 사학)
리하게 되므로써 〈서강옛집〉의 월간 8면 발간이 용이해졌다. 홈커밍데이
이 시기는 거의 이우진 회장의 독무대라고 표현하는 편이 적절할 것
행사인 ‘서강동문 가족잔치’ ‘서강 송년가족잔치’, 동문들의 평생교육을
같다. 전임 회장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재임 10년 동안 동문회의 활동을
위한 ‘동문정기세미나’ 등을 통해 동문들은 모교와 더 가까워질 수 있었
활짝 꽃피운 시기이기 때문이다.
고 사목실과 공동으로 ‘작고한 서강가족을 위한 위령미사’를 시작함으로 써 학교와의 협력사업도 더욱 다양해지게 되었다.
상징 조형물 ‘알바트로스탑’을 건립해 모교에 헌정했으며 대학 동문회 사상 최초로 모교를 빛낸 서강인에게 수여하는 ‘자랑스런 서강인상’을
회비는 동문회 입회비로 전환하고 〈서강옛집〉 발간보조비 명목으로 연
제정했다. 또한 서강옛집의 16면 증면 및 컬러화를 위해 기존의 발간보
5000원의 연회비를 신설하는 한편 장학기금, 체육기금 조성을 위한 수익
조비를 연회비(1만원)로 하는 한편 영구회비(10만원)제를 신설하고 홈페
사업으로 <83 서강동문록>과 <서강달력>을 제작, 판매함으로써 재정 확
이지를 개설해 온라인 동문회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다양한 장학사업에도 손을 대 해외연수 장학금인 ‘서강펠로우’
양호 회장 재임시 가장 큰 성과는 동문회 핵심사업 중 하나인 장학사
를 신설하고 고시반 특강 지원, 상담실 지원, 재학생 동아리 지원으로 장
업을 뒷받침할 ‘서강동문장학회’의 설립이다. 동문회는 1986년 그동안
학사업을 확대했으며 ‘서강꽃심기’를 통한 모교 환경 개선 사업도 재임
장학기금으로 모금한 6000만원과 동문회가 자체 기금으로 조성한 4000
기간 중의 주요 사업이었다.
만원 등 1억원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함으로써 동문회가 명실상부한 모교 의 울타리가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재학생 및 동문의 취업, 부직 알선을 지원하기 위해 ‘직업정
296
개교 30주년을 맞아 모교의 교육이념과 발전 방향을 상징할 수 있는
아울러 동문회 조직 확대로 인한 운영난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종신
충을 도모했다.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년대 1990년대 1990
특히 명문 사학 동문회다운 조직을 갖추기 위해 동문이면 누구나 참여 해 매번 참석자가 일정치 않은 ‘총회’를 폐지하고 대표성을 갖춘 ‘대의원 총회’를 신설해 최고 의결기구화하는 등 조직 개편에 착수했다. 이와 동
297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시에 각 과정의 동문들이 함께 모여 친목을 다짐은 물론 힘을 모아 발전
이 시기 북가주동문회는 이상수(78 전자) 동문 주도로 미주지역 동문들
해 가는 서강의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서강동문협의회’를 구성해
이 기부한 장학금의 세금 공제 혜택을 위한 비영리 법인 ‘미주서강동문
동문 조직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수차례에 걸쳐 열린 ‘원로초빙 조찬회’
장학회’를 개설해 장학금 모금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또한 미주 14
는 서강동문협의회의 주요 사업이었다.
개 지역 서강 동문회가 하나로 뭉쳐 ‘서강대학교 미주총동문회’가 창립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업적은 동문들의 숙원사업이었던 동문회관
되는 뜻 깊은 시기이기도 했다.
건립을 발의하고 추진해온 일이었다. 10년에 걸쳐 진행된 동문회관 건
김경해 회장은 중단되었던 동문회관 건립사업을 재개해 해외지부 순
립사업은 동문회의 보금자리 마련은 물론 지속적인 수익사업을 통해 장
방, <개교 40주년 기념 동문록> 제작 판매, ‘1000만원 클럽’ 결성 등으로
학금을 확대하고 교수연구비 지원, 학교시설 확충 등의 재원을 마련하기
부족한 기금 모금활동은 물론 동문회관 건설의 첫 삽을 뜨게 했다.
위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여성동문들의 참여를 확대하고자 ‘여성동문 배움의 동문회’
이우진 회장은 회관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설명회를 갖는
를 마련하고 ‘만남의 동문회’를 통해 동문들의 성취를 격려하고 축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기금을 모금해 회관 건립의 주역이 되
자리를 마련해 자긍심을 높였다. 또한 동문회 조직의 재정비 및 조직 강
었으며 추진 과정에서 학과별, 학번별, 직장별, 업종별 조직 강화, 해외
화, 지방 동문과의 유대 강화를 위해 각 지부에 현판을 전달함으로써 지
및 지방지부 순방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부를 공식화하고 근조기, 축하기를 지원해 동문들의 경조사에 활용하 도록 했으며 동문수가 제일 많은 80년대 학번 동문들만을 위한 송년회
년대 2000년대 2000 21대, 22대(1998 ~ 2002) 김경해(68 영문)
하는 한편 개교 4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 3만2906명의 명단이 학번과 가
24대 ~ 28대(2004 ~ 2013) 김호연(74 무역)
나다 순서에 따라 1월부터 12월까지 빼곡히 담긴 <2000년 서강달력>을
이 기간은 우여곡절 끝에 숙원사업이었던 동문회관을 완공하게 되어
제작한 것도 이 시기의 특색사업이었다.
으로 시작되는 시기이다. 동문회관은 동문들의 결속을 다지는 공간일 뿐
298
동문 교류의 장, 의견 교환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홈페이지를 개설
23대(2002 ~ 2004) 정재관(60 영문)
동문회 역사에 새 지평을 연 시기이자 바야흐로 새로운 사업들이 본격적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01 송년 옛집으로의 초대’를 개최해 커다란 호응을 받았다.
연회비는 1만원에서 2만원으로, 영구회비는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인상하여 동문회 재정 확충을 도모한 것도 이 시기이다.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수익사업을 통해 안정적이고 든든한 재정 확보는
정재관 회장은 마침내 동문회관을 완공하여 2002년 12월 23일 준공식
물론 다양한 사업들을 자신있게 펼쳐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며 이로
을 가짐으로써 동문회의 새시대를 열었고 동문회관 개관과 때를 같이하
써 한국예수회 50주년, 개교 50주년에 이은 동문회 50주년 기념 사업들
여 동문회 홈페이지를 새롭게 단장해 실시간으로 동문회관 예약 현황 검
을 적극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색이 가능하도록 했다.
299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또한 공사비 잔액의 마무리를 위해 각 기업체 동문회와 지부를 방문해 협조를 당부하는 한편 ‘1인 1회비 납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모교 설립자인 故 게페르트 신부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학교, 예수회와 공동으로 게페르트 신부 동상(입상 1점, 흉상 1점)을 제작해 모교에 기증 했다.
시작한 ‘서강 커리어 멘토링’ 프로그램도 장학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되어 재학생들의 호응 속에 주요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더불어 이 기간에는 연회비를 2만원에서 3만원으로, 영구회비는 15만 원에서 30만원으로 각각 인상해 동문회 재정 안정을 도모했다. 젊은 회장답게 역점사업으로 동문회 홈페이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
김호연 회장의 재임 기간은 동문회관 사업의 마무리를 비롯해 그간의
고 웹기반 온라인 동문회를 활성화해 회비납부 조회는 물론 동문 현황이
성과들이 열매를 맺으며 동문회가 한 단계 도약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
나 소식, 동문회 관련 내용을 동문회를 통하지 않고도 홈페이지를 통해
는 한국예수회 50주년, 서강 개교 50주년 등 중요한 사건들이 잇따랐으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게 했으며 모임과 경조사 알림 서비스를 시작해
며 동문회는 그간 쌓아온 자신감을 바탕으로 위의 행사들을 적극 지원할
동문들의 피부에 와닿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게 했다. 또한 〈e-서강
수 있었다.
옛집〉을 발간해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만 있으면 동문회 업무처리는 물론
이를 반영하듯 동문회 명칭도 국내외 지부 동문회를 비롯해 전문대학
서강옛집 구독이 가능해져 비용 절감에도 한몫했다.
원 및 특수대학원, 특수과정 동문회 등 현재 활동 중인 산하 동문회들을
서강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화합과 전진을 다짐하며 새해를 맞이하
모두 아우르는 의미에서 2007년 1월부터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로 변경
는 의미로 개교 이래 최대인 1300여명의 서강인이 모여 ‘신년하례식’ 행
했다.
사를 치러냄으로써 동문회의 가장 큰 연례행사로 자리잡게 했으며 ‘서강
김호연 동문회장의 선출은 개교 이래 첫 70년대 학번 회장으로 젊은
가족을 위한 재즈 콘서트’ ‘세계 음악여행 콘서트’ ‘2008 서강가족 한마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에 부응하듯 재임 9년 동안 다양
당, 가을 콘서트’ ‘2009 서강가족 한마당, 동문음악회’ 등의 문화 행사와
한 사업을 전개했다.
‘서강가족을 위한 재무설계 세미나’도 동문들의 관심 속에 진행된 이 시
임기 중 핵심 사업은 장학사업으로 개교 50주년을 맞아 기명 장학금
기의 주요한 사업으로 손꼽힌다.
50개 이상 조성을 목표로 기금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개교 50주 년 즈음엔 기명 장학금이 50개를 넘어섰고 개교 50주년 기념 와인인 예
년대 2010년대 2010
수회 ‘세븐힐 셀러스’ 판매를 통해 얻은 1억원의 수익금으로 개교 50주년
29대(2013~) 김덕용(76 전자)
기념 장학금을 조성했다. 동문회관을 이용한 수익사업도 장학기금의 큰
이 시기는 동문회 창립 50주년이 시작되는 때로 막내 김덕용 회장에겐
축을 담당했는데 동문회가 이용하는 기존의 4개 층(1~4층) 외에 1개 층
동문회의 제2의 도약이라는 짐이 얹혀져 있다. 어떤 빛깔로 어떤 그림을
(11층)을 추가로 확보하여 수익사업을 확대했다.
그릴지 회장의 행보가 주목되는 가운데 우선 동문회관 수익사업의 재정
모교 취업지원팀과 공동으로 재학생들의 경력관리를 지원하기 위해
30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비부터 착수할 예정이다. 기존의 수익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롭게 시
301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작될 수익사업에 동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으며 지령 401호부터 신문 〈서강옛집〉의 잡지로의 변신도 기대된다. 올해 6월 14일 개최하는 총동문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는 김
동문회관 10년 걸린 소중한 보금자리
덕용 회장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2002년 12월 완공된 동문회관
동문회관은 △동문들에게 애교심을 고취하고 △졸업생으로서의 자부 심과 긍지를 갖게 하며 △동문들을 위한 문화 및 서비스 공간을 제공하 고 △후배들의 복지 공간을 제공함과 동시에 △장학금을 위한 재원을 마 련한다는 취지로 1992년 발의되어 10년만인 2002년 완공된 동문들의 소
30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03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중한 보금자리다.
사업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발의 당시 2만 동문의 힘으로 적지 않은 예산이 드는 동문회관을 세우
이후 1988년 이우진 동문회장이 취임하면서 동문회관 건립사업은 다
는 일은 벅찬 사업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동문 수가 동문회관을 가진 여
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바야흐로 동문회관 건립 논의가 시작될 시점이
타 대학들의 5분의 1에서 10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과연 동
무르익은 것이다.
문들의 모금만으로 회관 건립이 가능할 것인가 이의를 제기하는 분위기 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동문회의 독립 건물을 갖겠다는 꿈을 이루기까지의 10년 여정 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당장 기금을 모으는 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
그러나 명문사학으로서 독립된 동문회관을 갖출 시기가 되었고 짧은
지만 학교 측의 반대로 교내 건립이 무산되면서 동문회관 건립사업은 표
역사에도 명문으로 우뚝 선 서강인의 의지로 본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류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교내 건축 합의를 이루고 건물이 완공
는 의견이 모아진 가운데 보유한 장학기금 3억원으로는 지속적이고 다양
되기까지 동문회장의 사의 표명과 반려, 학교 측과의 갈등 등 많은 생채
한 장학사업의 진행이 곤란하다는 현실적 상황도 반영되어 건립을 추진
기가 있었다.
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건립 결정 이후 모금을 위해 10년간 100여 차례의 회의와 200여 번의 지역별, 직종별, 직장별 동문들의 모임, 8개 해외 도시 순방
당초 동문회관 건립 사업은 홍익찬 동문회장 재임 때 개교 25주년 기
과 11번의 국내 지부 방문, 50여 회의 개별 동문 방문 등 엄청난 노력이
념사업의 일환으로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하여 1984년 7월 제37차 정
투입되어 완공 당시 3만8000명 동문의 25%에 가까운 9600여 동문이 참
기 이사회에서 그 추진이 최종 확정되었다. 1984년 7월 7일자 〈서강옛
여한 가운데 33억4000만원이 모금되어 발의된 지 10년 만에 꿈을 이루
집〉의 ‘신임 회장단 출범에 부쳐’라는 사설의 한 대목은 이러한 동문들의
게 되었다.
기대를 여실히 보여준다. “현재 동문회의 힘으로 적지 않은 예산이 드는 동창회관을 세우는 일
동문회관 건립사업은 1991년 3월 열린 동문회 이사회에서 건립 안을 발
은 벅찬 사업임에 분명하다. 반면에 독립된 동창회관을 갖출 시기가 되
의한 후 모교 이사회에 학교 소유의 마포구 신수동 소재 264.08평의 사
었음도 누구나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동문회 숙원인 이 사업을
용 허가를 요청하고 학교 이사회 측이 1991년 10월 14일 사용허가를 통
추진함에 있어 많은 동문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모든 동문의 힘을 결집할
보해옴에 따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 있는 묘방을 마련해주길 바란다.”
30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동문회관 건립 발의부터 완공까지의 10년 여정을 천천히 따라가 보자.
소요 비용은 총 34억원(추정)으로 건축자금은 장학기금 전용 4억원, 임
그러나 1985년 4월에 열린 제20차 동문 정기총회 겸 개교 25주년 기
대보증금 20억원(추정), 회관건립 기금 모금 10억원(목표) 등으로 조달할
념 리셉션에서 현실적인 제반 여건을 고려하여 동문회관 건립을 보류하
계획이었으며 이를 위해 동문회는 이우진 동문회장을 위원장, 박홍 총장
고 그보다 먼저 장학재단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동문회관 건립
을 명예위원장으로 하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92년까지 10억원을
305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30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모금해 1993년 말까지 동문회관을 완공한다는 계획 아래 각 학번, 학과
동문회관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학교 측과 협의를 계속해 나가기로
별로 추진위원 800명을 위촉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했다.
이어 1992년 1월 13일 모교 교수식당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동문
이후 동문회관 건립사업이 소강상태에 들어간 가운데 1998년 1월 열
회관 건립사업을 추인하는 한편 1월 24일엔 14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린 대의원총회에서 동문회관의 교내 건립 대신 시내의 기존 건물을 매입
신년하례식 겸 서강장학회관(가칭) 건립추진위 발대식을 갖고 즉석에서
키로 결정했다. 동문회가 한발 물러서서 모교 발전을 위해 소신껏 일하
모금을 시작, 당일 1억2540여만원의 기금이 신입 및 납입되었다.
는 신임 총장의 의지를 지원하는 의미로, 또한 동문회관 문제로 학교 측
이우진 회장을 위원장, 전금홍 부회장을 집행위원장으로 하여 건축,
과 동문회가 접촉하는 과정에서의 사소한 오해가 동문회와 모교가 심각
홍보, 기획, 총무, 모금분과 등 5개 분과로 조직을 구성하고 3월부터는
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면 이는 모교에 누가 되고 3만 동
동문들의 이해를 돕고 모금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직장 대표자 모임을
문 누구나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개시했다. 이후 3년간 직종별 ,직장별, 지역별, 학번별, 동아리별 모임을
그러나 답보상태가 지속될 것 같았던 동문회관 교내 건립 문제는 의외
통해, 적금으로, 분납으로, 일시납으로, 저금통으로 쉼 없이 모금을 진행
로 일찍 풀렸다. 1999년 3월, 무리한 서해안 캠퍼스 추진문제로 갈등을
했고 ‘회관 건립기금 모금 잔치’를 비롯해 동문록을 제작해 판매하는 등
빚던 전임 총장이 해임되고 새로 취임한 이한택 총장이 ‘서강 발전계획’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되다시피 했다.
을 통해 경영관, 기숙사 및 동문회관 등에 대한 향후 건립 계획을 발표하
이에 힘입어 1996년 정문 수위실 옆 부지에 동문회 20억원, 학교 40억
면서 동문회관 교내 건립에도 청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원을 부담하여 총 60억원으로 건물을 짓고 투자한 금액 만큼의 지분을
20세기가 저물어가던 1999년 12월 27일 김경해 동문회장과 이한택 총장
갖되 동문회관으로서의 상징성을 감안해 건물의 명칭을 <서강옛집>으로
은 조찬회동을 통해 “후배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동문회관의 교내 건립도
하자는 데 합의, 건축이 가시화될 듯 했으나 1997년 5월 학교 측이 학교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예정이며 개교 40주년 기념사업을 공동으로 추진”
부지에 동문회관을 짓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고 통보해 건립 계획이 무
하는 데 합의, 동문회관의 교내 건립 추진이 마침내 급물살을 타기 시작
산되었다.
했다.
이상일 총장이 취임하자마자 발표한 개교 40주년 기념 ‘서강 르네상스
새천년은 동문회 역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해가 되었다. 2000년 3월,
를 위한 발전계획’에 따라 교내 캠퍼스 활용 방안의 하나인 건축안과 관
동문들의 숙원사업이던 동문회관의 교내 건립이 승인되었다. 서강빌딩
련해 동문회관의 독자적인 건립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동문회에 전달
과 체육관 사이 도로변에 지하 1층 지상 6층 총 1200평 규모의 건물이
해 왔던 것이다.
지어져 4개 층은 동문회가 2개 층은 학교가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동문회는 5월 19일 대의원총회를 소집하고 이우진 회장이
동문회관의 교내 건립이 확정되어 20억원 정도의 추가 건축비 투입이
사임의사를 밝히는 등 불편한 감정이 표출됐으나 사의를 반려하는 한편
예상됨에 따라 22대 동문회(회장 김경해, 68 영문)는 동문회관 완공에 역
307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점을 두고 나머지 건축비의 모금을 위해 기금 분과 활동을 강화, 회관 건
이듬해인 2001년 1월에 학교 측의 요청으로 회관 규모는 지하 1층 지
립 설명 및 기금 모금 참여를 독려했다. 홍보용 소책자를 제작해 배포하
상 11층 총 2548평으로 최종 결정되었으며 9월 21일 상량식을 거쳐 마
고 회관건립기금 ‘1000만원 클럽’을 조직하는가 하면 <개교 40주년 기
침내 2002년 12월 23일 준공식을 가짐으로써 10년을 끌어온 동문들의
념 동문록>을 제작해 10만원 이상에 판매하고 회관기금을 납부한 동문들
숙원사업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의 이름을 회관벽면에 새겨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현재 동문회관 4층에
동문회관은 동문들의 모금으로 지어진 단순한 빌딩을 넘어 모교에 대
가면 동문회 사무실 입구 벽면에서 당시 모금에 참여한 동문들의 이름을
한 열정과 후배들에 대한 사랑, 정성이 10년 동안 오롯이 모아져 이뤄진
찾아볼 수 있다.
결정체인 셈이다.
특히 회관 건립 설명 및 기금 모금을 위해 재개한 미주지부 방문에서
동문회관은 모교의 전통에 따라 ‘아루페관’이라는 가톨릭 이름을 갖게
LA에 거주하던 김윤종(미국명 스티브 김, 69 전자) 동문이 5억원이라는, 당
되는데 명명된 베드로 아루페 신부는 스페인 출신으로 예수회 총장을 역
시 최고의 금액을 기부하기로 해 관계자들을 고무시켰고 동문회는 회관
임하였으며 1954년 7월 한국 방문 당시 노기남 주교와 만나서 한국에 서
완공 후 2층의 다목적 홀에 그의 이름(스티브 김 홀)을 붙여 고마움에 보답
강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던 ‘서강의 산파’다.
했다. 이후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9월 22일 동문회관 시공사 선정을 공 개 입찰에 부친 가운데 1, 2차 모두 최저가인 46억2300만원으로 응찰한 현대건설로 낙찰되었다. 입찰에 앞서 열린 현장 설명회에는 대창기업, 마루건설, 삼성건설, 쌍용건설, 풍림산업, 현대건설 등 국내 굴지의 6개 건설사가 참여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설계는 다산관, 이냐시오관 등 모교 캠퍼스 내에 많은 건물을 설계해온 진아도시건축설계(대표 부대진, MBA 1기)가 맡았다.
동문회관 건축의 첫 삽을 뜬 10월 19일은 동문회 10년 대역사의 서막 을 알리는 날이었다. 기공식에서 김경해 동문회장은 “동문 상호간의 우 정을 나누고 선후배 만남의 장소가 되어 새천년 서강 발전을 위한 토대 가 세워질 곳”이 되길 기대했고 이한택 총장은 “동문들의 정성으로 지어 지는 이곳에서 60년대 서강을 발전시켜온 정신이 다시 살아나길 기대한 다”고 말했다.
30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동문회관 건립에 정성을 모은 동문 명단 현판. 동문회관 4층 로비에 있다.
309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동문회관 건립 일지 1992.1.13. 동문회 임시총회에서 동문회관 건립 발의, 모금 시작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서강 최고의 명예로운 상
1.24. 신년하례식에서 동문회관 건립 발기대회 3.18. 회관 건립기금 모금 위한 직장 대표자 모임 개시 7.10. 회관 건립기금 모금 잔치 1993.1.16. 지방 동문회 순방, 회관 건립 설명회 8.27. 학교 부지 사용 허가 1995.11.30. 학교, 재단, 동문회로 구성된 7인 위원회에서 교내 건립 및 자금 계획 확정 1996.6.20. 학과별, 학년별, 조직대회에서 회관 기금 모금 등에 관한 결의문 채택 1997.5.
동문회관 교내 건립 무산
1998.1.8. 제34차 대의원총회에서 동문회관 정책 변경, 외부 건물 구입 검토 1999.9.
동문회관 교내 건립 추진 위해 학교와 협의 개시
2000.3.
동문회관 교내 건립 승인. 지하 1층 지상 6층 1200평 규모
일환으로 모교와 동문회에 기여하거나 빛낸 서강인을 선정해 시상하고 기리기 위해 국내 동문회 사상 최초로 제정되었다. 이 상은 1990년 4월 17일 개교 기념일을 맞아 모교 알바트로스 광장에 서 열린 홈커밍데이 행사에서 첫 수상자를 시상한 이래 매년 서강을 빛
4개 층은 동문회가 2개 층은 학교 용도에 따라 사용
낸 서강인을 발굴해 시상함으로써 서강인들에게는 매우 권위있는 상으
위치는 서강빌딩과 체육관 사이 도로변
로 자리 잡았다. 선정 대상은 모교 동문이거나 교수, 예수회원 등 서강과
8.2. 미주지부 탐방 개시, 회관 건립 설명 및 기금 모금 참여 독려 9.22. 동문회관 시공사 공개 입찰, 현대건설로 결정 10.19. 동문회관 기공식 2001.1.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은 1990년 개교 30주년을 맞아 그 기념사업의
관계 있거나 과거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면 누구나 가능하다.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선정위원회는 각계 동문들의 추천을 받아 수차 례의 심사를 거쳐 대상자를 선정하는데 초기에는 ①사회에서 이름을 떨
학교 측 요구로 건물 증축 합의. 지하 1층 지상 11층 2548평 규모
쳐 서강을 홍보한 사람 ②모교를 지원하여 학교 발전에 기여한 사람 ③
동문회 4개 층, 학교 7개 층 사용
좋은 글, 뛰어난 학문적 업적으로 서강의 이름을 알린 사람 등 ‘서강’을
9.21. 동문회관 상량식 2002.12.23. 동문회관 준공식
기준으로 수상자를 선정했으나 최근에는 후보 자격으로 ①탁월한 업적 으로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한 서강인 ②사회적으로 높은 경륜과 모범 적인 덕망을 갖춘 서강인 ③모교와 총동문회의 발전에 공헌한 서강인으 로 기준 범위를 ‘서강과 사회’로 확대했다. 2014년 새롭게 출범한 선정위
31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11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원회(위원장 장종현, 69 무역)는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을 서강이 수여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상으로 재출범시키자고 뜻을 모으고, 선정 기준을 ① 서강대학교 교육 이념을 구현한 서강가족 ②서강 출신임을 사회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는 서강가족으로 확대했다. 수상자에게는 상패가 전달되는데 초기 상징탑 모형의 상패에서 최근
남덕우
정일우
김규원
안정효
에는 교표가 새겨진 상패로 변경되었다.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은 그간 18회에 걸쳐 동문 30명, 예수회 신부 6
남덕우 전 교수는 초창기 서강 경제학과의 기틀을 다졌고 ‘서강학파’
명, 교수 5명, 단체 1곳 등 총 41명과 1개의 단체에 수여되었으며 고인故
의 출발점으로서 뒤를 이은 이승윤, 김만제 전 교수와 함께 서강학파를
人에게 수여한 경우도 있다.
이끈 기수역할을 했다. 1969년 경제 각료로 입각한 후 최장수 재무장관
이 상은 서강인에게 수여되는 명실공히 최고의 명예로운 상으로 서강
(4년 11개월), 최장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4년 3개월)으로 있으면서
인의 날이나 총동문회 송년의 밤, 혹은 신년하례식 등 서강인이 제일 많
경제개발계획에 참여, 서구식 경제근대화 모델을 토대로 경제 성장을 추
이 참여하는 거교적 행사에서 시상함으로써 전 서강인들의 귀감이 되도
진해 ‘한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그의 저서인 <가
록 하고 있다. 또한 수상자들의 프로필에서도 큰 몫을 차지할 만큼 수상
격론>은 60~70년대에 미시경제학계를 풍미했다.
자들 역시 이 상 수상을 명예롭게 여기고 있으며 많은 서강인들이 이 상 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제정은 이후 다른 대학 동문회에도 영향을 미 쳐 각 대학 동문회마다 이를 본 딴 상이 제정되는 데 모범이 되었다. 제1회부터 현재까지 ‘자랑스러운 서강인’에 선정된 서강인은 다음과 같다. 프로필은 선정 당시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정일우 신부는 1967년 모교 일반과정부 교수로 부임한 이래 청계천 등 지에서 빈민운동을 통해 실천하는 성직자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1975년 부터 지금까지 경기도 소래읍 ‘복음자리 마을’에 정착하여 빈민들과 함 께 철거 때마다 옮겨 다니고 싸우면서 생활해오고 있는 복음자리 마을 대부이다. 1986년 제정구씨와 함께 ‘막사이사이 지역사회지도자상’을 공 동 수상하여 세간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규원 동문은 강원도 춘천의 성수중고등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은
31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년) 1990년) 제1회(1990
이래 일선 중고교 교단에서 서강 이미지를 심고 모교의 장점을 폭넓게
남덕우 전 모교 경제학 교수 겸 전 국무총리
소개해왔다. 1973년부터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사 동문들을 중심으로
정일우(John V. Daly) 예수회 신부
‘서강교직동문회’를 만들고 회장으로 취임하여 ‘제자 서강인 만들기·우
김규원(60 물리) 용문고 교사
리 후배 만들기’ 운동으로 우수 신입생 유치를 위한 모교의 홍보활동을
안정효(61 영문) 작가 겸 번역문학가
적극 지원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동문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동문회
313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개교 25주년 기념사업 추진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안정효 동문은 최근 직접 영역한 <하얀전쟁White Badge>으로 한국과 미
년) 1993년) 제3회(1993 서정호 모교 부총장
국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1975년 노벨상 수상작인 가브리엘 마
최창섭(60 영문) 모교 신방과 교수
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번역하여 번역가로, 1983년 <실천문학>
이영익(67 생명) 유전공학센터 분자유전학실 실장
에 장편 <전쟁과 도시>(후에 <하얀전쟁>으로 개제)를 연재하면서 작가로 데 뷔한 이래 100여 권의 번역서와 16권에 이르는 영어소설을 써냈다. “어 떻게 하면 영어를 잘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번브럭 신부는 늘 “안 군 처럼 하면 되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꽤 유명하다. 서정호
년) 1991년) 제2회(1991 헙스트(Clarence A. Herbst) 예수회 신부
최창섭
이영익
서정호 부총장은 모교 설립 초기인 1962년에 부임하여 30여 년간 영 어영문학과, 정치외교학과, 법학과에서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학생처장, 총무처장, 기획실장 등의 보직을 두루 역임하여 모교 발전에 지대한 공 헌을 하였고 1988년 법학과 개설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오랫동안 학 교 행정을 맡아 모교 사정에 밝을 뿐 아니라 동문들에게 ‘아버지’ ‘오빠’ ‘선배’ 같은 가장 친근한 이미지의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헙스트
최창섭(60 영문) 교수는 언론대학원장으로서 언론 인재들의 양성에
서강의 2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서강의 역사가이자 기록보관자archivist
힘을 쏟고 있으며 20여 권이 넘는 저서 발간과 한국언론학회 회장을 맡
로서 모교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고 모든 걸 일일이 기록했으
아 한국언론 이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각종 방송 관련 단체 요직
며, ‘Sogang the Archives’ 책임자로서 개교 이래 서강에 관한 모든 기
들을 두루 맡아 국내 방송 언론 발전에 공헌하였다. 강단에서, 방송계에
록과 사진자료를 정리했다.
서 한국 방송이론의 정수를 수립한 학자이며 실무이론에 밝은 언론 전문
또한 초대 도서관장을 맡아 개관 당시 도서관이 소장한 6만여 권의 책 을 분류하고 편목編目했다.
가이기도 하다. 이영익(67 생명) 동문은 한국 유전공학계의 거목으로 성장이론을 근 본적으로 뒤바꿔 놓았을 뿐 아니라 국민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공헌한 과학자이다. 1987년부터 유전공학센터에 근무하면서 세계에서 세 번째 로 성장촉진제를 개발, 작은 신체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으
31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15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며 AIDS 진단 시약, B형 및 C형 간염 진단 시약 및 백신 개발로 국민 건 강 증진에 기여했다. 국내는 물론 국제 특허 출원, 국내외에 20여 편의 논문 발표 등 왕성하게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리에 올랐다. 최현무 동문은 소설가, 문학비평가, 불문학자로도 활동하며, 번역가로 서 이청준의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해외에 소개하는 등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고 그 위상을 높였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의 비극을 다룬
년) 1995년) 제4회(1995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
김만제 포항제철 회장
면서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1992년 <회색 눈사람>으
최무섭(62 영문) 애경산업 사장
로 ‘제23회 동인문학상’, 1994년 <하나코는 없다>로 ‘제18회 이상문학상’
최현무(72 국문) 모교 불문과 교수
을 수상하였다.
년) 1998년) 제5회(1998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예수회 신부 진성만 예수회 신부 김만제
최무섭
최현무
김만제 포항제철 회장은 1965년부터 1970년까지 모교 교수로 재직했 으며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서강학파 트로이카’ 중 한 명이다. 우리나 라 경제개발계획의 산실인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대원장으로 11년간 재 직하면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본방향을 마련하는 등 경제개
게페르트
발과 관련된 연구를 이끌어왔다. 재무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
게페르트 신부는 한국이 전쟁의 폐허 위에 앉아있던 1954년, ‘한국예
관으로 일하면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공헌한 공로로 선정되었다. 최무섭 동문은 ‘애경산업’ 사장으로서 국내 기업 최초로 세제부문 1000만불탑을 수상했다. 최 동문은 원래 고등학교 영어교사였지만 중동
31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진성만
수회의 설립과 한국에서의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사명을 띠고 한국 에 왔다. 게페르트 신부가 한국에 도착한 이듬해인 1955년, 일본에 있던 진성만 신부도 게페르트 신부와 합류하기 위해 귀국했다.
붐이 한창이던 1977년, 애경그룹의 입사 제안을 받아 수출과 창립멤버로
진성만 신부는 1940년 일본 예수회에 입회해 1949년 한국인으로서는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교직도 보람 있었지만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심과
처음으로 예수회 사제가 되었다. 진 신부는 1956년 게페르트 신부가 설
수출산업 역군으로 일하며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싶어서였다. 무역 파트
립한 한국예수회 첫 공동체에 첫 번째 회원으로 합류했고 함께 서강대학
1년 이익금의 80%를 최 동문이 벌고 있었을 만큼 열심히 일해 사장 자
의 설립 준비에 착수했다. 두 신부는 수십 필지로 나누어져 있고, 땅 주
317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인만도 100여 명이었던 노고산 부지를 하나하나 구입해 가며 캠퍼스 부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던 보모처럼 살고 싶어 성공회 성가수녀원 수
지를 조성하여 1957년 서강 설립의 첫 삽을 떴다.
녀가 되었다. 이후 줄곧 사회사업에 몰두해왔으며 1984부터 성공회대학
서강 개교 후 게페르트 신부가 초대 이사장, 진성만 신부가 3대, 4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서강을 위해 한국에서 가장 앞선 교과과정을 마련하
교에서 교양영어 교수로 일했고 1988년부터 1995까지 8년간 성가수녀 원 원장을 지냈다.
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우수한 교수단과 학사행정 시스템
년) 2000년) 제7회(2000
을 마련했다. 모교의 교훈인 ‘진리에 순종하라Obedire Veritati’는 게페르트 신부가 갈라 디아서 5장 7절부터 12절 사이의 성경 구절을 인용해 만든 것이다.
김호연(74 무역) 빙그레 회장 이철우(STEP 12기) 남양지업 대표이사
년) 1999년) 제6회(1999 정재관(60 영문) 현대종합상사 대표이사 오인숙(60 영문) 성공회대학교 교수 김호연
이철우
김호연 동문은 모교에 대한 감사표시와 모교와 후배들의 항구적인 발 전과 도약을 바라는 뜻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 해 오고 있으며 다양한 행사를 지원해왔다. 한양유통 대표이사를 거쳐 정재관
오인숙
정재관 동문은 1977년 현대상사에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유럽지역과 미주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출역군으로 일해왔다. 현대종합상사 홍
책임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이철우 동문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
장 등을 거쳐 대표이사에 오른 입지전적 상사맨이다. 의사결정이 빠르며
을 포기하고 30여년간 종이 판매업 외길을 걸어왔으며, 근검절약으로 마
업무추진력이 강한 전형적 현대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4년 2대
련한 경기 가평군 현리 일대의 시가 55억원에 달하는 농장 5만여 평을
중국한국상회 회장을 지냈을 만큼 중국통이다,
“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써 달라”며 1999년 모교에 기증했다. 모교는 이
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모교를 졸업한 직후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318
서도 우량기업으로 탈바꿈시킨 유능한 오너 기업가로서 기업인의 사회
콩지사장, 현대그룹 중국총괄본부장, 현대종합상사 영업총괄담당 부사
오인숙 동문은 한국전쟁 당시 부모를 잃고 동생과 함께 성공회가 운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92년 한화그룹에서 분리된 부실덩어리 기업 빙그레를 IMF를 겪으면
철우 동문이 부인과 함께 직접 나무를 심는 등 ‘친자식처럼 가꿔온’ 기증 부지에 인성, 영어, 컴퓨터 교육관련 시설을 지을 계획이다.
319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한편, 동문회는 ‘잊지 못할 서강인’에 모교를 설립하고 발전시킨 故 길 로런 초대학장(1988년 작고)을 선정했다.
늘’을 발표하며 등단해 자연과 삶의 따뜻한 모습, 수도자로서의 바람 등 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내 혼의 불을 놓아> 〈민들레의 영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엄마와 분꽃> <외딴 마을의
년) 2001년) 제8회(2001
빈집이 되고 싶다> 등 다수의 시집과 <두레박> <꽃삽> <사랑할 땐 별이
이덕훈(67 수학) 한빛은행(우리은행) 행장
되고> 등의 수필집을 간행했다. 1997년부터 수녀원 내에 ‘해인글방’을 열
장흥순(78 전자) 터보테크 사장
어두고 문서 선교를 하고 있다.
이해인(석사 82 종교) 수녀, 시인
년) 2004년) 제9회(2004 故 베이슬 프라이스(Basil Price) 예수회 신부 박찬욱(82 철학) 영화감독
이덕훈
장흥순
이해인
이덕훈 동문은 1981년 한국개발연구원KDI 금융팀 연구위원으로 사회 에 첫발을 디딘 후, 경제기획원 장관 자문관, 금융개혁위원회 멤버로서 한국 금융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초석을 다졌다. 상업·한일은
故 프라이스
행 합병추진위원회 부위원장, 대한투자신탁 사장을 거쳐 본인이 합병을
故 프라이스 신부는 모교 설립의 주역 가운데 한명으로 1960년 개교와
주도한 한빛은행(우리은행으로 개명) 은행장, 우리금융지주 부회장으로 취
함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해 40년간 헌신적으로 모교와 학생들을 위
임한, 이론과 경험을 갖춘 금융전문가다.
해 헌신했다. 모교 총장보로서 교환학생 파견 및 해외 자매학교 체결 등
장흥순 동문은 이론과 전문기술을 겸비한 원조 벤처기업인이다. 카이
모교의 대외관련 업무를 도맡아 했을 뿐 아니라 사회운동에 적극 뛰어들
스트 박사과정 중이던 1988년 28세의 나이로 NC공작기계 전문기업인
어 1966년 교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문제 전문연구소인 ‘산업문제연
터보테크를 창업해 이목을 끌었으며 2000년에 벤처기업협회 회장에 취
구소’를 열어 노동자들에게 노동법, 노동조합 조직과 활동, 단체교섭 방
임해 벤처기업 활성화 및 벤처기업인 지원사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1998
법 등을 가르쳤으며 신용협동조합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년 세계경제포럼 선정 ‘차세대 지도자 100인’에 선정되었으며 올해 한국 경영학회가 주는 ‘올해의 한국경영자 대상’을 수상했다. 이해인 동문은 수녀이자 시인으로 1970년 가톨릭 잡지 <소년>에 ‘하
32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박찬욱
박찬욱 동문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다. 또한 뛰어난 예 술성과 작품성을 바탕으로 흥행성도 보장받는 감독이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이후 복수극 〈올드보이〉로
321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청룡영화상 감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감독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라이트 초결정 연구로 모교의 명예를 높여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의 로욜
대종상 감독상에 이어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까지 수상하며 큰 반향을
라상을 받았다.
불러모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수상 뿐 아니라 독특한 창의력과 자기만의 스타일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주목 받고 있다.
년) 2006년) 제11 회(2006 11회 문애란(72 신방) 웰콤 대표이사
년) 2005년) 제10 회(2005 10회
이성익(72 물리) 포항공과대학 물리학과 교수
장영희(71 영문) 모교 영문과 교수 이우진(60 사학) 16~20대 총동문회장(특별상) 윤경병 모교 화학과 교수(로욜라상)
문애란
이성익
문애란 동문은 1975년 제일기획 공채 1기로 입사, 국내 여성 카피라이 터 1호로서 여성광고인 시대를 열었다. 문 동문의 유명 카피들은 아직도 장영희
이우진
윤경병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정도. 1982년 중앙광고대상 카피상, 1998년 매경
우리말 만큼 영어를 잘 다루는 사람 중 하나, 마음이 따뜻한 영문과 교
광고대상 광고인부문 대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은 물론 1987년 공동 설립
수이자 번역가, 수필가, 교육부 검정 초중고교 영어교과서 집필자, 서강
한 웰콤은 짧은 기간에 업계 5위 안에 들었으며, 1999년 세계 3대 광고
을 가장 사랑한 여자, 그리고 장애인. 그러나 시종 당당하고 긍정적이며
제 중 하나인 칸 광고제에서 국내 최초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사람. 장영희 동문이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일상
이성익 동문은 기초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초전도체 개발 및 개념 확립
에서 건져낸 경쾌하고 명랑한 글,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글을 써오며 연
을 통해 우리나라 초전도 연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한국 과
예인 못지 않게 수많은 팬들로부터 사랑받아왔다.
학사에 남을 과학자이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6년 ‘한국의 노벨
이우진(60 사학) 16~20대 총동문회장은 1988년부터 1998년까지 10년
상’으로 불리는 ‘한국과학상’ 물리학 부문상을 수상했다. 초고속 기기 개
간 회장을 맡으며 동문회 활성화에 앞장섰다. 특히 ‘자랑스러운 서강인
발에 쓰일 수 있는 세계 최고의 MgB2(이붕소마그네슘) 초전도 박막을 세
상’을 제정하고 대의원 총회를 신설해 조직개편을 추진했으며 동문회관
계 최초로 제작해 2001년 Science지에 발표했던 논문은 피인용 횟수가
건립을 발의하고 기금모금에 나서는 등 총동문회를 튼튼한 반석에 올려
수백 편에 이르는 등 MgB2 박막 연구의 고전이 되었다.
놓았기에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의 특별상을 받았다. 윤경병 교수는 제올
32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23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년) 2007년) 제12 회(2007 12회
호하고 교육을 지원하는 ‘희망의 공부방 만들기’ 사업으로 공부방 환경
황우진(75 영문) 푸르덴셜생명 대표이사
개선을 지원했다. 또한 사회적 기업의 활성화 및 지원 사업에도 역점을 두고 사회적 기업의 창업 지원 및 경영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 방성석 동문은 대한상사중재원의 무역중재인과 대외무역분쟁조정위 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무역 진흥에 앞장서며 국내 중소무역업 체들이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했다. 또한 MBA 재학시
황우진
절 총원우회장, 졸업이후엔 7, 8대 MBA 총동문회장으로 23, 24대 서강 대 총동문회 부회장으로서 모교와 동문회 발전에도 기여했다.
황우진 동문은 ‘인간 사랑’이란 확고한 보험철학을 바탕으로 영업맨부 터 세계 굴지의 보험회사인 푸르덴셜생명의 대표이사에 오른 보험업계
년) 2009년) 제14 회(2009 14회
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소원 성취를 지원하는 ‘메이크 어 위시 한국재단’
김태영(73 독문) 국방부 장관
이사장으로서 전 임직원과 함께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는 기업의
민유성(74 경영) 한국산업은행 은행장
사회적 책임을 통해 동문들 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널리 귀감이 되어 왔다.
년) 2008년) 제13 회(2008 13회 이종수(73 경영) 사회연대은행 대표
김태영
민유성
방성석(MBA 22기) 이글코리아 대표이사
제42대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김태영 동문은 2009년 9월 22일 육군 대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36년간 우리나라 국방을 지켜온 군인이었다. 인 문학적인 소양을 지닌 따뜻한 장교로서 야전 뿐 아니라 행정에도 능하다 는 평가를 받아왔으며 제1야전군사령부 사령관,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사 령관, 합동참모본부 의장 등을 지냈다.
이종수
32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방성석
민유성 산업은행 은행장은 투자은행업계의 전문가이다. 시티은행을
이종수 동문은 저소득층에게 창업 자금을 무담보로 대출해 주는 ‘마이
비롯해 쟈딘 플레밍 증권, 리먼 브러더스, 모건 스탠리, 환은살로먼스미
크로 크레딧’사업을 실시해 빈곤 탈출에 기여했고 저소득층 자녀들을 보
스바니 증권 둥 다양한 외국계 금융기관에서 일해온 국제 금융인으로 우
325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년) 2011년) 제16 회(2011 16회
리금융지주 재무총괄 부회장을 지냈다.
故 장진 모교 생명과학과 명예교수
년) 2010년) 제15 회(2010 15회
김낙회(70 신방) 제일기획 대표이사
박문수 예수회 신부 송창의(70 신방) CJ 미디어 제작본부 본부장 나소열(77 정외) 서천군수
故 장진
김낙회
故 장진 명예교수는 모교의 교육목적인 학문의 질적 수월성을 추구하 는 데 헌신했다. 독일에서 생물학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들과 어깨를 나 박문수
송창의
나소열
란히 하는 과학자로서 입지를 다져나가던 중 1964년 좋은 연구 여건을
박문수(귀화 전 미국명 Francis X. Buchmeier) 신부는 모교 사회학과 교
마다하고 모교에 부임했다. 당시 미국과 독일에서 현재 교과서에 나오는
수 재직시절인 1985년 ‘천주교 도시빈민회’에 가입해 가난한 사람의 벗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했으며, 현대 생물학인 신경생물학 관련 연구를 국
이 되기로 하면서 빈민운동과 주거권운동을 계속해왔다. 2010년 2월 예
내에 들여와 최첨단 현대 생물학인 인지과학과 뇌 연구로 발전시켰다.
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를 발족하고 소장을 맡으면서 사회운동을 위한 연구와 정보관리 및 국내외 연대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김낙회 제일기획 사장은 1976년 제일기획 공채 2기로 입사해 2007년 제일기획 최초 공채 출신 사장에 오르기까지 35년간 광고 분야에서 한길
송창의 동문은 평생 현역 오락 프로듀서이다. 1977년 MBC에서 프로
을 걸어온 정통 실력파 광고인이다. 대한민국 광고대상과 국민포장을 수
듀서로 시작해 3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방송현장을 지켜온 우리나라의
상했으며, 한국광고업협회 회장과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간판 프로듀서로서 그가 만든 작품은 늘 관심과 인기를 모았으며 이후
국내 광고산업은 물론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를 한 단계 도약시키는 데
다른 작품들의 모델이 되어왔다. ‘송창의’라는 이름 석 자는 즐거움의 대
힘써왔다.
명사다. 나소열 동문은 1990년 정치에 입문한 이후 20년 이상 농촌의 정치인 으로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농어촌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기 위 해 노력해 서천이 충청남도 행정평가 종합 1위와 복지부 주관 전국 232 개 지자체 평가 사회복지 분야 전국 1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일궈냈다.
32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27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년) 2012년) 제17 회(2012 17회
년) 2013년) 제18 회(2013 18회
호상가족
오공단(67 국문) 미국 국방연구원 동아시아 담당 책임 연구원
최동훈(90 국문) 영화감독
양희은(71 사학) 가수, 방송인 권혁빈(92 전자) ㈜스마일게이트 홀딩스 대표이사
호상가족
최동훈 오공단
양희은
권혁빈
호상장학금은 서일호(66 경제), 박상환(69 무역) 동문이 1988년 2월 1
오공단 동문은 한반도와 북한정책, 미·일 안보 등 아시아 태평양 지
일 서강동문장학회 내에 설립한 기명 장학금이다. 학창시절 장학금을 받
역안보와 국제관계 전문가다. 미국 국방연구원 동아시아 담당 책임 연구
은 동문들이 졸업 후 장학기금 기탁에 합류하면서 호상가족으로 발전했
원으로서 우리나라가 통일국가로서 아시아의 지도자급 역할을 할 수 있
다. 첫 장학금 지급 이후 25년 동안 호상장학금 모임이 이어지고 있으며,
기를 희망하며 지속적인 연구와 실천에 헌신하고 있다.
1960~2000년대 학번이 매달 장학금 기탁자로 참여하고 있다.
양희은 동문은 가수이자 방송인으로 44년 동안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
최동훈 동문은 2004년 〈범죄의 재구성〉으로 영화감독에 데뷔한 이래
라가 근대적 발전에 박차를 가하던 70년대와 80년대에 아름다운 가사가
〈타짜〉 〈전우치〉를 비롯해 개봉 70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302만 명을 돌
돋보이는 노래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면서 인생과 이웃은 물론, 세상과
파, 한국 영화사상 최다 관객 수 동원을 기록했던 〈도둑들〉 등 선보이
시대를 돌아볼 수 있도록 감동과 각성을 얻게 했다.
는 작품마다 흥행에 성공하며 대한민국 대표 감독 반열에 올랐다. 특히
권혁빈 동문은 창업 DNA를 갖춘 공학도로서 세계적인 게임회사 ㈜스
2007년 제6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각본・각색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탄탄
마일게이트를 일궈냈다. 나아가 게임업계 글로벌 투자 및 콘텐츠 유통으
한 각본 실력을 지니고 있다.
로 업무 영역을 확대하는 한편, 우리나라 벤처산업 육성과 서강대 재학 생을 비롯한 청년 창업을 아낌없이 후원하고 있다.
32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29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서강옛집> 지면에 담은 7만 동문의 이야기
껏 써내려간 동문회보가 전해졌다. 제호는 <서강옛집>이었다. 옛 고향집 처럼 몸은 떠났어도 마음은 항상 모교를 생각하며 학창시절의 우정을 가 꿔나가자는 취지였다. 그 후로 50년 동안 <서강옛집>은 서강동문들이 그 리운 소식을 나누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는, 서강정신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서강옛집> 발간은 애초 학교 소관이었다. 故 길로런 전 학장과 서정 호 명예교수(당시 학생처장), 안우규 동문(60·영문, 당시 학생처 조교)이 첫 획을 그었다. 학교의 재정 지원으로 발간되던 <서강옛집>은 1970년 동문 회가 직접 제작과 발송을 맡게 되면서 재정문제가 불거졌다. 동문의 수 가 늘어난 데다 더 잘 만들려고 하다 보니 매번 비용충당이 쉽지 않았다.
<서강옛집>은 동문회 스스로의 발상은 아니었다. 길로런 교수, 안우규 (60 영문) 동문, 서정호 교수 등 세 분이 모여서 동문회를 만들기로 결정
하였다. 당시 학생처장실에 근무했던 정경숙(62 사학) 동문이 창간 이후 상당 기간 동안 학생처의 보조 사업으로 해왔다. 동문회가 자기 출비로 시작된 것은 1970년 김영천(60 경제) 동문이 5회 동문회장으로 되고난 다음부터다. 동문회가 학교의 보조를 받아 겨우 이어나가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동문회 사무실과 전화도 갖추어진 상 태에서 <서강옛집>을 발간하기로 하여 이때부터 동문회비를 걷기 시작 했다. 이리하여 1970년 10월 존 피 데일리 신부의 호의로 동문회 사무 실을 제공받고 이에 따라 길윤숙(64 영문) 동문이 사무 및 편집을 맡았 서강옛집 300호
“이 조그마한 월간지는 졸업 후 귀하에게 반갑고도 유익한 벗이 될 것 입니다.” 1964년 1월 서강대학교 1회 졸업생들에게 손글씨로 한 자 한 자 정성
33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다. 일반 신문인 타블로이드판으로 발간된 것은 1976년 8월 16일 86호 부터다. <서강옛집>은 동문들이 내고 있는 종신회비로 발간된다. 3800 명 중 400명 밖에 안내고 있어 기금이 부족하다. 전속 기자를 둘 수 없 어 8면은 벅차고 4면 발행이 불가피하다. 양은 적어지지만 끊임없이 노
331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력할 것이다(1979년 6월 100호 발간 기념 ‘서강옛집 발자취’ 에서)
들이 많이 들어왔다. <서강옛집>에 ‘해외에서 온 편지’라는 고정 코너가 있을 정도였다.
이 문제는 1974년 학교 측의 협조로 재학생들에게 동문회비를 걷고 졸업동문들이 십시일반 연회비와 구독료를 내놓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편지해 준 동문들 수가 많아서 일일히 답장을 보내지 못해서 지면을
찾았다. 무엇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보는 <서강옛집>의 묘미가 동문
통하여 사과의 말씀 올립니다(1964년 4월호)
들의 관심과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냈다.
“동문들이 보내주신 편지 구절들을 엮어 보았읍니다.(1971년 12월호)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서강옛집>은 발간되었습니다. 상사의 눈을 피
<서강옛집>은 이러한 동문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하며 하루의 업무를 끝낸 차분한 마음으로 펼친다는 옛집. 비록 몇 장
손글씨로 써서 등사기로 밀어내던 레터지 형식의 회보는 1976년에 타블
되지 않지만 동문들의 소식을 전하고 미약했지만 여러 동문들의 유대
로이드 판형의 격월간 4면 신문으로 바뀌면서 제대로 된 신문회보의 모
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1973년 12월호)
습을 갖추게 되었다(86호). 이후 1983년 격월간 8면(122호), 1985년 월간 8면(132호), 1990년 월간 16면으로 증면(184호)되면서 컬러화 하는 등의
동문회 사무국은 매달 1일 신문이 나올 때면 일주일간 빗발치는 전화 로 늘 분주했다. 다른 동문들은 <서강옛집>을 받았다는데 왜 나에겐 아직
과정을 거쳐 2014년 5월 현재, 연간 10회, 4만5000부를 발행하여 국내 외 동문들을 찾아가고 있다.
도 발송이 안 되었는지 혹은 주소가 잘못 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동문도
<서강옛집>에 대한 동문들의 관심은 제호題號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많았고 기사 제보나 인터뷰 제안도 꽤 있었다. ‘동문동정’난의 오자(특히
다른 대학 동문회보와 달리 창간 시부터 고유한 이름을 가진 〈서강옛집〉
전화번호)를 찾아내어 항의하는 동문도 있었는데 연락이 뜸했던 반가운
은‘옛집 이라는 이름에서 시골 초가집 같은 촌스러움이 풍긴다’는 의견
선후배, 친구의 소식이 실려서 모처럼 전화를 걸었더니 오자로 인해 전
부터 ‘왠지 작아 보이는 부정적 이미지가 연상된다’, ‘국제화시대에 맞지
화 연결이 안 되어 몹시 서운했던 것이다.
않게 과거로 퇴보하는 느낌이 드니 바꿔야한다’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동문들에겐 발송비용 문제로 두 달에 한 번씩
오죽했으면 제2호부터 개명까지 거론될 정도였을까.
두 달 치를 묶어서 보내는데 자주 받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욱 컸다. 한글로 된, 그것도 그리운 내 모교와 내 친구들, 선후배들의 소
“<서강옛집>이란 이 월간지의 명칭을 더 좋은 이름으로 고칠 수 있으면
식이 담긴 <서강옛집>엔 손꼽아 기다려지는 첫사랑과의 재회 같은 기대
고칠 계획이오니 동문의 좋은 idea를 보내주십시오.(1964년 2월 2호)
와 설렘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외로 <서강옛집>이 발송되는 달에는 해외의 동문들로부터 감사의 마음과 기쁨이 가득 담긴 예쁜 엽서와 편지
33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그럼에도 대부분의 의견은 ‘정겹다‘, ‘고향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로
333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모아져 <서강옛집>이란 이름은 지금까지 살아있다. <서강옛집>의 제자題
관한 아이템이었다. 1970년대 ‘명강 순례’, 1990년대 ‘잊을 수 없는 스
字도
승’, 2000년대 ‘다시 듣는 은사님 명강의’, 그리고 2010년대의 ‘내가 기
변모를 거듭한 끝에 하태규(77 경영) 동문이 쓴 서체를 기본으로 굵
기와 길이가 변형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럼 서강옛집을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초창기 회보 시절에는 주로 학생처와 동문회에서 근무하던 동문들이 헌신했다. 1976년 타블로
정신을 일군 전설의 스승들이 동문들을 아련한 추억의 길로 안내했다. 한편 2007년 4월(341호)부터 2013년 9월(393호)까지 6년 4개월간 실
편집에 직접 참여하여 매체로서 세련미를 더해갔다. 1985년에는 동문회
린 ‘서강인이 꼭 알아야 할 50가지’는 동문들에게 가장 오래 사랑받은 연
내에 <서강옛집> 편집국을 두고 의욕적으로 명예기자를 모집했으며(133
재물이었다. 1회 ‘교표’부터 50회 ‘동문장학회’까지 서강정신이 집약된
호) 1988년의 경우 학과, 동아리, 직장 등 동문모임 별로 인선작업을 거
아이콘들을 통해 서강동문의 정체성을 돌아보고 자부심을 키웠다는 평
쳐 명예기자 129명을 임명하기도 했다(167호).
가를 받았다. ‘서강인인 꼭 알아야 할 50가지’는 결국 ‘서강이 뿌듯한 이 유 50가지’였다.
면 증면과 더불어 지면을 컬러화하면서 본격적으로 서강옛집 전담기자를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서강옛집>이 배달되면 동문들이 가장 먼저 펼
채용하고 편집위원회와 논설위원회를 구성해 제대로 된 신문 체제를 갖
치고 제일 꼼꼼히 들여다보는 지면이 ‘동문동정’이다. 우리 친구, 우리
춰나가기 시작했다. 1991년(196호)부터는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 우리 후배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
여성동문을 대상으로 명예기자를 모집하여 이들을 취재의 전면에 배치해
번 인사이동에서 누가 승진하고 또 누가 개업을 했고 누가 결혼하고 누
내용이 훨씬 풍부해졌다. 동문들을 편집의 중심에 세운다는 <서강옛집>
가 죽고 상을 당했는지가 늘 제일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의 방침은 1996년 편집위원회 체제로 이어져(249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곳은 몰라도 ‘동문동정’난에 오자가 생기면 제일 큰 실수로 여겨지며 여
<서강옛집>은 기획부터 취재, 인터뷰, 기사작성, 디자인, 조판, 그리고
기저기서 항의를 받곤 했다. 기금난도 마찬가지인데 누가 얼마의 기금을
평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편집과정에 서강동문들이 참여하고 있다. 전담
냈는지 살펴보면서 기금 낸 사람의 동정과 현황을 가늠해보기도 하고 내
직원은 물론 편집위원들, 재학생 기자들이 7만 동문들에게 반갑고 유익
가 낸 기금은 잘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는 영수증 대용이 되기도 한다.
한 벗이 되기 위해 불철주야 아이디어를 짜내고 현장을 누빈다. 이런 노
그래서인지 동문들이 사회에서 성공했거나 화제의 인물이 되었을 때
력은 지면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동문회 소식, 모교소식, 동문동정, 장학
가장 실리고 싶어 하는 곳이 <서강옛집>이며 다른 곳보다 <서강옛집>에
사업 등 동문들이 꼭 알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연재물과 연
자신의 인터뷰가 실리는 게 제일 부담스럽고 떨리면서도 자랑스럽다고
중기획, 특집기사를 통해 서강정신을 담는 데 앞장서왔다.
한다. 나의 과거를 가장 잘 알고 나의 성취를 가장 기뻐해주고 축하해 줄
<서강옛집> 지면에 가장 자주 등장했던 연재물은 학창시절의 스승에
334
송주영, 이흥천, 이기백, 프라이스, 존.P.데일리, 김열규, 서정호 등 서강
이드 신문으로 전환한 다음부터는 전문성을 갖춘 언론출판계 동문들이
<서강옛집> 발간은 1990년 들어서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억하는 명강의’에 이르기까지 50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변주돼 왔다.
사람이 동문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335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이처럼 동문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내고 ‘졸업 후 계속해서 반갑고도 유 익한 벗이 되고자 했던 <서강옛집>은 지난 50년 동안 모교와 동문회와 함께 성장해왔다. 개교 20주년, 30주년, 50주년 등 굵직한 계기가 있을
장학금 총동문회 최대 역점사업
때마다 연중기획과 특집기사로 서강의 이념과 학풍, 문화와 위상 등을 냉철하게 진단했고 모교의 비전을 함께 찾기 위해 동문들의 뜻을 모으고 공감대를 넓혔다. <서강옛집>에 담긴 그리운 소식, 아련한 추억, 뿌듯한 자부심은 그래서 서강의 역사이자 미래이다. 이제 그 <서강옛집>이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신을 시도 하고 있다. 2014년 9월 발간할 <서강옛집> 401호부터 기존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잡지로 형태가 바뀌고, 지면 수도 기존 16면에서 최소 48면으 로 늘어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50년을 향해가는 동문회의 새로운 얼굴이 될 <서강옛집>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에 기 대가 모아지고 있다.
총동문회 설립과 함께 시작되어 동문회 50년 역사와 함께해 온, 가장 역점을 둔 사업 중 하나가 후배를 돕는 장학사업이다. 처음 장학사업을 시작할 때는 부족한 재원으로 수석 입학생을 격려하 는 차원이었고 개교 10주년을 계기로 일시적이 아닌 영구적인 장학금으 로 전환시켜보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아직 총동문회 역사도 짧고 동문들 의 역량이 부족하여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동문들이 장학사업에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 니었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장학사업을 전개하진 못했지만 ‘모교 사 랑, 후배 사랑’이란 마음으로 개별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꾸준히 참여 하고 기여해왔다. 매년 수석 입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도 꾸준히 이어왔지만 후배를 위한 기자재와 학교 시설물 등 현물 기부도 잇따랐다. 1965년, 61 학번 2회 졸업 동문들이 방송 기자재를 학교에 기증한 것을 필두로 1972 년, 9회 졸업생들은 스피커를 기증해 후배들이 캠퍼스 곳곳에서 방송실 에서 내보내는 뉴스와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또 1974년 로욜라 도 서관이 개관하자 금융계 재직 동문회인 금강회가 로욜라 도서관 현판을,
33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37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대한항공 재직 동문들이 도서관 벽시계를 기증했고 60학번 동문들은 도
실 지원 등의 사업을 추진했고 몇 년전부터는 장학생 대상 1박2일 캠프,
서관 앞 로욜라 동상을 제작해 기증했다. 1981년에 졸업하는 동문들부터
재학생의 진로 상담을 위한 멘토링 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후배들을 위한 도서 구입비로 도서관에 도서기금을 기부하기 시작해 전 통으로 이어졌으며 배구단 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서강체육회’를 발족하 기도 했다.
2005년, 동문회 회장단 회의에서 김호연 회장은 △총동문회 사업 중 가장 의미있는 것이 장학사업이며 △어려운 후배를 돕는 장학기금을 모
에게 충분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장학재단 설립이라는
으는 일이야말로 총동문회가 서강공동체에 이바지할 수 있는 최대사업
데 의견을 모으고 재단 설립 작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6년
이라고 강조하고 개교 50주년을 준비하면서 ‘기명 장학금 50개 조성’사
장학재단 설립을 목표로 1985년 7월부터 재단 설립의 기초 자본인 1억
업을 제안했다. 그 자신이 이미 1985년부터 선친의 호를 딴 ‘현암 장학
원을 모금하기 위해 사회 각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문들을 대상으로
금’을 기부해본 경험이 있는 김 회장의 제안은 이후 동문들의 뜻이 모아
모금을 독려해 20%에 가까운 동문들의 모금 참여로 마침내 1986년 9월
지고 뭉쳐지면서 아름다운 사연에 의미있는 이름표를 단 장학금으로 속
‘재단법인 서강동문장학회’가 출범했다.
속 탄생하게 되었다. 개교 50주년 기념 50개 기명 장학금 조성 목표는 이
면서 서강동문장학회는 1988년 1학기부터 처음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기
미 달성되어 동문장학회를 구성하는 학과별, 동아리별, 직장별, 국내외 지역별 장학금이 90개를 넘어섰다.
시작했다. 첫 번째 장학금은 800만원으로 이중 400만원은 학생장학금으
대표적인 기명 장학금은 서일호(66 경제), 박상환(69 무역) 동문이 각자
로, 400만원은 근로장학금 및 우수신입생장학금, CPA반, 고시반 지원금
의 이름 가운데 한자씩 따서 지은 ‘호상장학금’으로 1988년부터 운영해
으로 충당되었다.
온 최장수 장학금이다. 장학금 수혜자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한
이후 28년 동안 서강동문장학회는 발전을 거듭해 현재 기본재산 18억원
편 수혜자들이 다시 장학사업에 참여하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지며 기명
과 보통재산 7.5억원을 보유하는 등 규모면에서 큰 성장을 이뤄냈고 2013
장학금의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다. 박상환 동문은 호상장학금의 경험을
년에만 249명에게 5억원의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그동안 가정 형편이 어
바탕으로 어머니의 세례명을 붙인 ‘바울라 장학금’도 운영하고 있다. 이
려운 후배 2688명에게 49억원을 전달했을 만큼 질적으로도 깊어졌다.
장학금은 어머니께 매달 지급되는 전사한 선친의 유족 연금의 일부를 장
양적으로 질적으로 발전하는 사이 장학금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장학
338
기도 하다.
그러다가 개교 25주년을 맞아 지속적이고 현실적으로 모교와 후배들
법에 따라 인가 후 1년 뒤부터 장학사업에 기금을 활용할 수 있게 되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또한 장학금 기탁 형태 및 종류도 다양해졌고 갖가지 사연이 담겨 있
학금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업의 기본 목적인 가정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의 학업 지원은 물론 1991
김윤심(75 철학) 동문이 출연해 시작한 ‘글라라 장학금’과 김재혁(82 불
년에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해외연수장학금인 ‘서
문) 동문이 지원하고 있는 ‘스테파노 장학금’, 김경자(60 철학) 동문이 장
강펠로우’가 신설되었으며 고시반 특강 지원, 재학생 동아리 지원, 상담
애인 학생들을 위해 지원하는 ‘김로사 장학금’, 그리고 ‘장재도(60 경제)
339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장학금’ 등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조성한 장학금이라면 이조안(64 영문)
‘KBS 재직 서강동문회 장학금’ ‘LG 생명과학 재직동문 장학금’ ‘SK 대
동문이 모교 초대 학장이자 남편의 이름을 붙인 ‘길로련 펠로우’, 유인식
덕 동문 장학금’ ‘국민은행 재직동문 장학금’ ‘기업은행 재직동문 장학금’
(75 경제) 동문이 부친의 이름을 붙인 ‘태성 장학금’, 91학번 여성 동문이
‘씨티은행 재직동문 장학금’ ‘현대엔지니어링 재직동문 장학금’ ‘현대해
딸의 이름을 딴 ‘시은 장학금’ 또 다른 여성 동문이 역시 딸의 이름을 붙
상 재직동문 장학금’ ‘3M 재직동문 장학금’ ‘하나대투증권 청담센터 재
인 ‘지안 장학금’ 등 가족의 이름으로 조성한 장학금도 있다.
직동문 장학금’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외에도 과거에 만들어졌다 형편
이쯤해서 김로사 장학금을 좀더 자세히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2010 년 4월 18일 김경자(60 철학, 세례명 로사) 동문은 1회 졸업생 모임인 강일
또 자신의 회사 이름을 붙이거나 같은 업종에 재직하고 있는 동문들이
회江一會 주최 홈커밍데이 행사에 참석해 10억원의 장학금을 동문장학회
명명한 장학금도 있는데 고영수(69 생명) 청림출판 대표가 조성한 ‘청림출
에 쾌척했다. 김 동문은 “한 사람의 장애인에게 희망을 주었던 서강의 고
판 장학금’, 홍지전(98 철학) 한솔인터컴 대표가 조성한 ‘한솔 장학금’, 김
마움을 이제 후배들에게 전하고자 한다”며 “(본인처럼) 장애를 앓는 후배
문수(70 무역) 한국 하트스캔 고문이 조성한 ‘하트스캔 장학금’이 전자라
들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쓰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서강사랑, 후배사랑
면, 보험업계에 종사하는 동문 모임인 ‘강보회 장학금’ 서강금융인모임인
의 진정성이 오롯한 뜻대로 동문장학회는 2014년 1학기까지 7학기 동안
‘서금회 장학금’ ‘서강금융인포럼 장학금’이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다.
27명의 장애학생에게 6457만원을 장학금으로 지원했다. 이밖에 ‘장영희
학창시절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스승을 기리며, 함께했던 친구
프로젝트’로 작명한 지원책을 마련, 이공계 학생 가운데 가정형편이 어
에 대한 그리움으로, 선배에 대한 추억으로 조성한 장학금도 있다. 故 안
렵지만 성적이 우수한 장애학생을 선발해 해외유학을 포함한 큰 폭의 후
병태 신부를 기리며 강구철(72 경제) 송희숙(74 독문) 부부 동문이 조성한
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다.
‘알퐁소 장학금’, 미주동문회에서 조성한 ‘존 P 데일리 장학금’, 이상인
또 학과별로 모은 돈을 기부하는 학과동문회 장학금, 학번별 장학금도
(77 전자) 동문과 임교수 가족이 지원하는 ‘故 임태순 교수 추모 장학금’
81학번 영문과 동문들이 시작한 ‘한결 장학금’을 비롯해, 제2회 졸업생
과 선후배, 동기들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고인을 기리며 만든 ‘故김
모임인 ‘강이회 장학금’ ‘국문과 76학번 동기회 장학금’ ‘경영학과 장학
의기(76 무역) 추모 장학금’ ‘故정재경(82 사학) 장학금’, 그리고 조성진(89
금’ ‘전자공학과 77학번 동문 장학금’ ‘전자공학과 78학번 동문 장학금’
경영) 동문이 동아리 친구를 기억하며 만든 ‘전 수산나(89 영문) 장학금’
‘84사학 장학금’ ‘영문과 장학금’ ‘독문과 장학금’ ‘불문과 장학금’ ‘사학
등이 그것이다.
과 동문회 장학금’ ‘사회학과 장학금’ ‘전자공학과 장학금’ ‘컴퓨터공학과
동아리 선배들이 동아리 후배를 위해 조성한 장학금으로는 ‘서강 아
장학금’ 언론대학원 신문출판 전공 졸업생과 재학생 모임인 ‘서강출판포
마추어 오케스트라 장학금’, ‘서강학보사 장학금’, ‘서강산악회 장학금’
럼 장학금’ 등이 있다.
‘ROTC 장학금’ ‘경영대 풍물패 연 장학금’ ‘해동검도 장학금’ ‘대학생 성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문들이 모여 만든 재직동문 장학금도 있는데
34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에 맞춰 지금은 사라진 많은 재직 동문 장학금이 있다.
경 읽기 선교회UBF 장학금’, 고향 선배가 고향 후배를 위해 조성한 장학
341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금으로는 ‘밀양 장학금‘ ‘서목회(서강목포동문회) 장학금’이 있고 내가 공
장학금, 해외지부 동문 장학금이다. ‘미주지역 총동문회 장학금’(존 P 데
부했던 캠퍼스, 강의실이 그저 좋아서 혹은 어려웠던 시절의 꿈을 키워
일리 추모장학금으로 변경),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동문회 장학금’ ‘홍콩동
온 그 시절을 기억하며 조성한 장학금도 있다. 김재민(71 물리) 동문이 조
문회 장학금’ ‘재중 화동동문회 장학금’ ‘재인니 서강대 동문회 장학금’
성했던 ‘리찌 장학금’, 김학수(67 생명) 동문이 지원하는 ‘샬롬장학금(평안
‘사이공 동문회 장학금’ ‘뉴욕 동문회 해외연수 장학금’ 등 미국, 중국, 독
하라)’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모 동문이 기탁한 ‘서강 가톨릭 장학금’ 이와
일, 베트남, 인도네시아, 홍콩 등 외국에서 활발한 동문 모임을 갖는 해
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취미를 함께하는 동문들이 모여 조성한 ‘서강
외지부들은 송년회나 신년회를 열 때마다 장학금을 모아 장학회로 보내
미술가회 장학금’도 있다.
오고 있다. 특히 미주동문회는 동문 수도 많은 만큼 기금 모금에 늘 선구
또한, 재학생 응원단 동아리 ‘TRIPATHY’를 후원해 모교와 죠치 대학 교 한일정기전Sogang-Sophia Festival of Exchange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342
‘재미 서강 동문장학회’ 조직을 위한 움직임이 있어 왔으며 각 지역마다
함께 공부했던 동문 부부들이 조성한 장학금도 있다. 정근호(67 사학),
자체적인 기부를 진행해온 끝에 2004년, 북가주지부 회장이었던 이상
박순옥(73 사학) 동문 부부가 기탁한 ‘Marian Family(성모님 가족) 장학
수(78 전자) 동문의 헌신적 활동에 힘입어 비영리법인인 ‘Sogang Alumni
금’, 노상범(73 국문), 이인영(74 영문) 부부가 기탁하는 ‘LITE 장학금‘이
America’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주지역 동문들은 손쉽게 장학
그것이다. 또한 모교에 재직 중인 여교수협의회가 재활용물품 판매로 조
사업에 동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제혜택도 받을 수 있다.
성하는 ’서강나눔터 장학금‘은 배움이란 지식 습득에만 그치는 것이 아
이러한 동문들의 적극적인 장학사업 동참에 동문회 임원진들도 이에
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인성교육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
질세라 발 벗고 나섰다. 29대 회장단은 ‘총동문회 29대 회장단 장학금’을
주고 있다.
조성했고 ‘총동문회 26기 대의원 장학금’ ‘총동문회 28기 대의원 장학금’
참고로 LITE장학금은 2014년 1학기까지 4.3억원의 장학금을 조성해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적이어서 1975년부터 이미 보스턴지역 동문회의 130달러 기부를 필두로
도 힘을 보태고 있다.
이중 2.9억원을 후배 101명에게 지급해, 학업 중도 포기를 막는 든든한
장학금 기탁자 위주로 구성된 동문장학회이사회도 마찬가지다. 각 이
버팀목이 되었다. 더욱이 미국에 거주하는 동문부부는 2012년과 2014년
사들이 기명 장학금 조성자 혹은 참여자이며 장학금 마련을 위해 다양한
에 장학생 후배들을 격려하고자 두 차례 방한해 저녁식사 자리를 마련하
아이디어도 쏟아내고 있다. 동문장학회 감사 중 한명인 이무섭(94 경영)
고, 후배들에게 학업이 힘들더라도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회봉사
동문이 2006년부터 개인적으로 시작했다가 뜻을 함께하는 참여자가 늘
에 나설 것을 부탁해 장학금 이름처럼(light를 발음에 맞게 철자화한 lite) 사
면서 구체적인 사업의 모습을 갖춘 ‘방울토마토 장학금’이 대표적이다.
회의 빛이 되기를 희망했다.
만화영화 캐릭터 같은 깜찍한 이름을 가진 이 장학금은 토마스모어관에
후배 사랑 실천이 꼭 가까이 있는 동문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
서 사법고시, 행정고시, 공인회계사CPA, 외무고시, 변리사 시험 준비 및
실을 일깨우는 장학금도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는 가까워지는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재학생과 법학전문대학원 재학생들에게 격려
343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메시지와 함께 과일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장학사업을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동문이 정성태(75 영문) 동문장학회 이사. 한 학기 장학사업의 시작과 끝은 정 이사가 없으면 결 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오랫동안 장학회 감사로서 장학생 선발을 맡아왔던 최권수(71 경영) 동문에 이어 기꺼이 이 일을 맡아 봉사하고 있 다. 서강동문장학회의 장학금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 위주로 선발 하다 보니 신청 사유서와 여러 가지 서류를 제출하게 되는데 이 자료들 을 일일이 읽고 검토하여 더욱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후배들을 선발해 야하기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또한 선발을 장학회에 일임하 는 경우도 있지만 기탁자가 원하는 요건에 어울리는 장학생을 선발해야 할 경우도 많아서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 자신도 수 천 만원에
는 해외지부들은 송년회나 신년회를 열 때마다 장학금을 모으면서 ‘서
달하는 장학금을 기탁하며 사명감을 갖고 이 일을 오랫동안 행복하게 해
강’과 더욱 가까워짐을 느끼고 있다. 장학금이 동문모임의 구심점 역할
온 정성태 이사가 있었기에 동문들은 동문장학회를 신뢰하고 장학금을
을 하고 있음은 물론 모임을 새로이 만드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셈
기꺼이 기부한다.
이다.
또한 익명으로 모교와 동문회에 거액을 기부해온 김상수(81 경제) 동문
또한 장학금은 참여하는 동문에겐 모교의 교육이념인 ‘남을 위한 삶’
을 비롯해, 하선주(72 사학), 서창적(73 물리), 장순란(74 독문), 김창완(75
을 실천하는 자긍심을, 수혜 후배들에겐 사랑받는 서강가족의 일원임을
무역), 한징택(75 생명), 김홍달(76 경영), 송세광(76 화공), 김환균(80 경제),
다시금 일깨워주는 훌륭한 인성 교육의 장도 되고 있다. 선배들은 단순
김성진(82 경제), 박윤우(83 철학), 남궁훈(91 경영), 박형민(98 경제) 동문
히 1회성 장학금 지원에 그치지 않고 후배들을 꾸준히 만나고 조언해주
등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기부를 이어준 동문들이 있었기에 장학회의 오
는 멘토로서의 역할도 자임하며 후배들은 그런 선배들을 본받아 다시 장
늘날이 있었다.
학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선배들의 사랑에 보답하고 서강인은 한 가족이
물론 장학사업은 단순히 장학금 전달에만 그치지 않았다. 장학사업으
34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13년 호상가족 25주년 행사
라는 사실을 공감하게 된다.
로 인해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들은 장학금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모교가 발전하려면 훌륭한 졸업생이 많이 배출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장학회가 지난 28년 동안 2688명의 가까운 후배들에게 49억원을 전달하
우수한 후배들을 길러내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동문회가 해야 할 가장 큰
는 동안, 장학금을 계기로 동문 모임이 더욱 많아지고 결속력은 더욱 단
역할이라는 전임 동문회장들의 말처럼 장학사업이야말로 동문회가 모교
단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모교 및 동문회와 멀리 떨어져 있
의 울타리로서 가장 크게 관심 갖고 주력해야 할 최대 역점 사업이다.
345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사무국 음지에서 묵묵히 50년
총동문회가 설립된 이후 50년을 맞는 지금까지 사무국의 역할은 하나 도 변한 게 없다. 회비 납부 독려, 동문 현황 파악, 행사 지원, 동문 민원 2014년 글라라 장학생 모임
서비스, 영업 등등. 이 모든 게 총동문회 사무국 업무의 알파Alpha요 오메 가Omega인 일들이다.
“정기회비(동문회) 아직 잊고 안 내신 분 우편환으로 꼭 냅시다. 동문회 일도 자금 없으면 곤란하니까” (1964년 2월 서강옛집) “1년에 500원 동창회비를 12월 말까지 청산해 주셔야겠습니다. 직접 학교로 갖다 주셔도 좋고 연도별, 그룹별, 직장별로 모아서 갖다 주셔도 좋습니다. 자신이 언제 까지 납부하셨는지 모르시는 분은 학교 학생처장실로 문의하십시요.”(1969년 서강 옛집) “운영위원회는 연말보너스가 풍성한 12월을 동문회비 납부의 달로 정하였습니다.” 2014년 LITE 장학생 모임
(1971년 12월 서강옛집) “서강옛집은 동문여러분들이 정성껏 보내주는 동문회비로 발간되고 있으나, 앙등하 는 물가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동문회비는 일년에 천원” (1975년 3월 서강옛집)
34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47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서강옛집은 동문여러분의 지혜와 협조로 만들어집니다. 서강옛집 발간 보조비는 연1만원입니다.’ (1990년 6월 서강옛집) “현재 전체 동문 가운데 동문회비를 내주시는 분들은 5%도 채 되지 않아서 현재
1983년(1만원), 1987년(1만원), 1989년(2만원), 1995년(5만원), 2000년(10 만원) 등 6차례 발간되어 내지에 삽입된 유료광고와 함께 총동문회의 굵
직한 사업에서 늘 가장 큰 재원이었다.
의 회비 수입으로는 서강옛집을 매월 발행하는 것도 힘에 부친 실정입니다. 그렇지
수익사업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큰 재원이었던 만큼 동문록 발간사업
만 총동문회는 동문들의 사랑과 지원을 앉아서 기다리기보다는 더욱 뜻깊고 다양
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심지어 2000년 5월에는 동문록 제작을 위해 〈서
한 행사들을 준비하기 위해 뛰고 있습니다.”(2007년 1월 서강옛집)
강옛집〉 임시호가 발간되기도 할 정도였다. 재원도 재원이지만 동문록 발간사업은 동문 현황의 재정비와 업데이트를 위한 기초 작업이기도 해
총동문회 기본 업무 중 하나는 회비 납부 독려이다. 회원들의 의무이
서 동문록이 한번 발간될 때마다 몇 달간 사무국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기도 하지만 동문회의 모든 사업 모든 행사들, 심지어는 사무국 운영도
동문 개개인에게 확인 전화는 물론이고 직장별로 동아리별로 학과별로
재정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동문회가 생긴 이래로 사무국
주소록을 수집하고 입력하고 최소 3차례의 교정을 거쳐 동문록이 발간되
은 회비를 징수하기 위해 협조 요청도 애원도 협박(?)도 해보았고 수많
는데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광고 영업도 해야 한다. 문제
은 노력을 기울여도 보았지만 회비 징수 실적은 영 나아지지 않았다. 그
는 발간 이후인데 제작된 동문록을 판매하기 위해 다시 전화가 시작되고
래서 중요한 사건들, 예컨대 개교 10주년, 20주년, 동문회 10주년, 20주
판매 대금을 회수하기 위해 또 전화기를 들어야 한다. 겨우 한숨 돌리고
년 등 10년 단위로 끊는 ‘00주년 기념’이나 ‘장학재단 설립’ ‘동문회관 건
나면 또 다음 동문록이 기다리는 악순환(?)의 후유증으로 동문록 발간 후
립’ ‘개교 50주년 장학금 50개 조성’ ‘홈커밍 데이’ 등의 프로젝트가 생
누군가는 사직을 할 정도였다. 동문록 발간 사업은 개인정보 유출 문제
기면 재원 확보를 위해 총동문회 사무국은 비상이 걸린다. 목적 사업 성
로 2000년도 판 발간 이후 중단되었지만 늘 수익사업 1순위로 손꼽히곤
공을 위해 조직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하므로 회장단은 회장단대로
한다.
최선을 다하지만 실무를 떠안은 사무국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 다. 달력도 만들어 팔고(1982년, 1999년), 도자기 컵도 팔고(1985년), 기념
‘서강 동문록 발간 후 동문모임 매우 활발 : 발행부수 2000권 중 반가량이 넘는
모자도 팔고(1995년). 품목도 세월 따라 진화해서 몇 년전부터는(2007년)
1047권 판매’(1981년)
와인도 판다.
34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판매 물품의 백미는 ‘동문록’이다. 전가傳家의
‘서강동문록 발간 : 긴밀한 연락망 마련과 이를 통한 동문 간의 유대강화를 도모코
보도寶刀처럼 수익사업 품목에서 결코 빠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 수
자. 600여 페이지에 동문들의 최근 현황을 수록’ ‘동문 여러분의 협조와 기대 속에
익사업 1순위였다. 1964년 동문회 설립 때부터 ‘동문 수첩’으로 시작된
83년도 서강대학교 동문록 발간 작업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지 딱 195일
동문록은 1981년부터 유료판매로 전환되었다. 동문록은 1981년(1000원),
걸렸습니다. 정확한 주소록을 만들기 위해 동문회는 전 직원을 투입, 전화확인 작업
349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에 들어갔고 3차례 이상 조회 끝에 비로소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수두룩’
‘1인 1 동문록 갖기 운동 전개-후배들이 찾아갑니다. 동문회에서는 회사별로 단체
(1983)
구입하거나 개인별로 주문 구입하는 것 외에 재학생 아르바이트생을 고용, 이들이 직접 동문들을 찾아가 주문을 받아오면 동문회에서 주문자에게 직접 우송하는 방
‘87 서강동문록은 지난해 8월부터(6개월간) 소재 확인 및 변경작업에 착수, 각 직
법을 강구하고 있다’(1995년)
장, 지역, 개인별로 확인을 거친 결과 전체 동문 90%선의 정확한 내용을 담았다. 동 문회 관계자는 이번 동문록이 지난 83년 동문록 발간 이후 4년 만에 발간되어 상
‘3만8000여 동문정보 수록 ‘2000 동문록 발간, 10개월간의 작업, 1, 2권 1360쪽. 1
당부분이 수정되었으며 현재 서강동문의 위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소장
권 인명편, 2권 직종편’, ‘동문회에서는 사전 양해 없이 동문록을 배포하게 된데 대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1987)
해 동문들의 양해를 구하고 적극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2000년)
‘요즘 동문회 사무실 분위기가 마치 전신전화국 교환실을 방불. 서강동문록 현황 파
그러는 사이 동문회 담당 직원은 직장 총무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된
악하느라, 1만4000여 동문가족들의 현황을 일일이 전화로 확인하다 보니 전화에
다. 동문록 사업은 직장 총무들의 협조 없이는 결코 추진될 수 없기 때문
불똥이 튈 판. 자술 현황 파악 엽서 한 장씩이라도 보내는 게 어떨는지’(1989년)
인데 주소록을 취합해서 보내주는 사람도 동문록을 판매하거나 대금을
‘89 서강동문록 발의에서 출간까지 연인원 17명 참여(사무국 직원 6명, 아르바이트
회수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이들이기 때문이다. 사무국에선 미안해
생 11명), 컴퓨터 1대로 풀가동. 약 10개월에 걸친 작업, 동문 총 수의 80%선인 1만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총무에게 전화를 자주 걸어 독촉할 수밖에 없는
2000여 명의 정확한 현황 수록’(1989년)
상황이고 총무들은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며 티를 내지 않고 도와주어야 하므로 이래저래 고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회사 업무도 잘하고 동
‘동문록 받으셨지요. 동문록 재판 찍어 총 5468부 판매되어 모교 30주년 기념사업
문회도 잘 도와주는 총무는 반드시 남들보다 먼저 승진한다고 스스로 위
과 상징탑 건립기금으로 요긴하여 쓰였다. 그런데 1065부의 미수분이 발생. 1300
로하곤 하는데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는 게 정설이다. 〈서강옛집〉 기사는
만원 적자. 아직 동문록 대금을 납부하지 않은 동문들께 동문록 대금(2만원 이상)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납부를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 (1990년 10월 서강옛집) ‘노고가 큰 직장 동문 초청 간담회 : 동문록 판매에 협조해 준 각 직장 대표와 총무 ‘서강동문록 마침내 발간, 10월 5일 오후 7시 다산관에서 출판기념회 개최. 94년 5
를 초청 노고를 치하하는 만찬’(1990년 3월호)
월부터 1년6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 4×6배판 1000 페이지 분량. 2만여 명의
35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모든 동문현황과 직장별 동문현황, 인덱스 등 수록. 서강옛집을 통해 2차례나 연락
‘동문록 완성에는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동문 개개인에 대한 현황 파악은 한
이 단절된 동문을 찾는 광고 게재’(1995년)
번씩 거쳤지만 아직도 재직 동문 주소록이 들어오지 않은 직장이 있습니다. 번거로
351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우시더라도 주소록을 보내지 않은 각 직장 대표들과 총무들은 5월 20일까지 주소
1) 70학번 각 학과에서 현황이 없는 동문을 사칭, 학과 대표라고 하며 주요 일간지
록을 꼭 보내주시기 바랍니다.’(2000년 5월 서강옛집 임시호)
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구독을 강요, 특히 학과 기금을 모금한다고 강조하며 반말을 사용, 사례2) 후배라고 사칭, 취직을 못했으니 도와주십사 애걸하는 형, 특히 여자의
동문록 판매 대금이 어느 정도 회수되고 나면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
경우 남자선배들에게 취직 못한 여자후배를 도와달라고 부탁.
지만 또 다른 골칫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동문록을 이용한 ‘가짜 서강 동
* 동문 여러분, 동문록이 동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
문’들에 의한 피해사건으로, 소위 동문을 사칭해 동문들에게 물건을 강
합시다.(1996년 5월 서강옛집)
매하거나 돈만 받고 물품을 주지 않은 채 연락을 끊는 바람에 피해 동문 들이 사무국으로 전화를 걸어 항의하곤 한다. 물론 서강동문 사칭은 어
동문 사칭방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동문을 대상으로 동
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강이 개교한 이래로 ‘가짜’ 서강대 동문은 늘
문임을 사칭해 물건을 강매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비동문 특히 여성
있어왔다.
들을 대상으로 동문임을 사칭해 사기를 치는 경우이다. 비동문 대상 사 칭은 주로 여름 바캉스 시즌과 연말 연시에 자주 일어나서 그 시기가 지
‘가짜 서강인 주의요 : 근간 신원 미상의 사람들이 모교 졸업생임을 사칭하고 동문
나고 나면 피해 여성들이 사무국으로 동문 확인을 위해 전화하거나 찾
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있다고 한다. 동문회에서는 미심쩍은 점이 있으면 즉시 동
아와서 앨범 열람을 요청하기도 했다. 사기에 등장하는 주요 학과는 ‘행
문회로 문의하여 확인해 주기 바라고 있다.’(1978년 11월 서강옛집)
정학과’ ‘체육학과’ ‘일문학과’ ‘미술대학’ ‘음악대학’ ‘의과대학’ 등 모교 에 설치되지 않은 학과들인데 조금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을 피
그러나 초기엔 동문 수가 워낙 적어 적발이 쉬웠기 때문에 자주 일어
해 여성들은 믿으려 하지 않아 사무국에선 해명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
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80학번대 입학생들이 졸업하여 동문 수가 대폭 늘
다. 심지어는 동문회 사무국으로 찾아와서 있지도 않은 동문을 찾아내라
어나는 90년대부터는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동문록이 발간되고 나
며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사기 당하고 자살을 시도한 딸 때문에 시골에
면 몇 달 동안 집중적으로 일어나곤 해서 사무국에서는 피해 동문의 항
서 아버지가 상경하여 울며 하소연하기도 하지만 사무국으로선 있지도
의전화에 시달리며 가짜 동문 적발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않은 가짜 동문을 찾아낼 도리가 없어 늘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외에도 동문 사칭 사례는 수없이 많다. 그럴 때마다 동문회는 현황
알림 : 동문 여러분 조심하십시요. 최근 들어 동문 아닌 사람이 동문을 사칭하며 책
파악을 더 꼼꼼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동문 사칭은 주로 현황 파악이
이나 회화 테이프를 판매, 동문들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특히 현황이
되지 않은 동문의 이름을 빌리기 때문인데 파악이 안 되므로 확인도 할
파악되지 않은 동문을 사칭하고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라며 동문 여부가 의심이
수 없다.
되는 경우 동문회로 문의하십시오. 동문회에 접수된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례
35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동문 현황 파악은 회비 모금과 함께 사무국 업무의 양 날개이다. 정확
353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한 동문 현황이 파악되어야 조직도 만들고 회비도 모금할 수 있고 다양
바랍니다. 최종적으로 확인된 주소를 바탕으로 7월말 동문록이 완성될 예정입니다.’
한 행사나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동문 현황 파악이야말로 사
(1995년 7월 서강옛집)
무국 업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동문회의 가장 큰 자산 은 동문이기 때문이다.
‘동문 현황 파악, 8년 만에 실시 : 2000년 동문록 작성을 위해 실시한 현황 파악 이 후 8년 만에 진행. 5만6000여 명에 달하는 동문의 연락처와 현황 등을 파악하는
‘1월 현재 취직이 알려진 졸업생들/이영민 동문 1월초 육군 입대-군대 주소를 알려
게 목표. 동문들이 교류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고 서강옛집 배송을 비롯한 다양한
주시오/학교 간행물, 귀하에게 필요한 또는 활동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요구하
방식으로 모교와 동문들의 이야기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취지. 재학생 20명과 함
면 제공합니다.’(1964년 1월 서강옛집 창간호)
께 동문회관 4층 전시실에서 실시.’(2008년 7월 서강옛집)
‘전체 동물들의 연락처 및 현황 파악을 위하여 새로이 카드제를 실시키로 하여 이
본격적이고 대대적인 동문 현황 파악은 동문록 제작 준비로부터 시작
미 현황 카드는 인쇄가 끝났습니다. 빈 공간을 메우시어 학교로 우송해 주시면 됩니
되지만 동문회의 일상은 늘 동문 현황 파악으로 이루어진다. 동문들의
다.’(1969년 서강옛집)
소식으로 서강옛집을 만들고 동문들의 유대를 위해 서강옛집도 발송하 고 행사도 기획하고 서비스도 준비하며 동문들로부터 회비도 모금하기
‘동문현황파악 어디까지 왔나 : 동문회 연륜 25년째. 1964년 2월 첫 동문 62명이 동
위하여, 동문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동문들의 현재
문회를 발족, 25주년 시점에서 1만4000명에 육박하는 대가족으로 성장. 이에 따
를 알 때만이 동문회는 모든 것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문의, 동문
라 동문들의 현황을 파악하는 업무로 수공업적인 단계에서 전산화로 눈부신 발전.
에 의한, 동문을 위한 동문회.’ 동문은 동문회의 존재 이유이고 동문회의
동문회에서는 지난 81년 최초로 동문록을 책자 형식으로 출판한 이래 83년, 87년
모든 것이다. 사무국 업무는 동문들의 편의를 위해 진화해왔다 해도 과
에 각각 동문록을 제작했으며 올해도 제작할 계획. 동문회에서는 현재 파악하고 있
언이 아니다.
는 동문현황의 정확도를 70% 안팎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타 대학에 비해 매우 높 은 현황. 이는 모교가 개교 30주년의 짧은 역사 속에서도 체계적인 준비가 된 연유
‘1973년,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서강옛집>은 발간되었습니다. 상사의 눈을 피하며
도 있지만 사무국에서 끈질긴 노력으로 동문의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 서강옛집
하루의 업무를 끝낸 차분한 마음으로 펼친다는 옛집. 비록 몇 장되지 않지만 동문들
은 국내외 1만부 내외 배포, 이는 거의 모든 동문에게 발송된다고 볼 수 있는 것. 동
의 소식을 전하고 미약했지만 여러 동문들의 유대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1973
문 수 대 동문회보 발송비율로 따지면 타 대학의 추종 불허.’(1989년 2월 서강옛집)
년 12월 서강옛집)
‘광고 : 숨겨진 서강인 찾기 - 동문회에서 주소를 확인할 수 없는 동문의 명단입니 다. 이 가운데 혹 연락처를 알고 계시는 동문이 있다면 동문회 사무실로 연락주시기
35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동문회, 대학 동문회 중 최초로 전산화 시작. 정확한 주소를 컴퓨터에 : 동문회 사무
355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전산화의 첫 작업으로 전 동문의 직장 및 자택주소를 컴퓨터에 입력시키기로 했습
‘김미자 동문 동문회 새 간사로 : 김미자(64 국문) 동문은 앞으로 동문회 안살림을
니다. 정확한 주소를 입력시키고자 하오니, 주소변동이 있거나 잘못 기재된 동문이
맡아 하게 되며 동문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서강옛집 제작, 모금 활동에 실무진으
있으면 빠른 시일 내에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1984년 9월 서강옛집)
로서 적극 뛰게 된다’(1982년 6월 서강옛집)
‘동문회에서 전산시스템을 확충하고자 합니다. 각종 정보의 폭주로 인한 시대적 요
‘개교 40주년을 앞두고 동문회 조직의 재정비 및 조직 강화, 지방 동문과의 유대 강
청에 따라 동문회에서도 전산시스템의 확대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2만 명의 회원
화를 위해 올해 역점 사업 중 하나로 추진해온 지부 순방 상반기 일정이 대전지부
을 관리하기가 벅차. PC A형 1대 386CPU, PC B형 2대 286CPU’(1990년 9월 서강
탐방을 마지막으로 일단락되었다. 특히 지부 현판 전달식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
옛집)
가 크다. 지부에 동문회에서 제작한 현판을 전달함으로써 지부의 존재를 대내외에 공식화하는 한편 현판을 통해 총동문회와 지부 동문회 간의 연결고리가 맺어지고
‘동문회 홈페이지 새 단장 오픈. www.sg-alumni.org. 2002년 10월 완공된 동문회
유지된다.’(1999년 7월호 서강옛집)
관의 모습을 플래시로 볼 수 있다. 동문회관의 개관과 때를 같이하여 오픈한 홈페이 지라 동문회관 예약 현황도 실시간 검색이 가능’(2002년 11월 서강옛집)
‘총동문회는 서강옛집 발간뿐만 아니라 홈페이지 및 동문회관 운영, 신년행사 개최,
‘동문회 홈페이지 어떻게 달라졌나 : 동문검색, 마이페이지, 나의 관심 동문, 모임 경
매월 재무설계 세미나 개최, 생일축하 문자 발송, 경조사 및 모임 이메일, 문자 메시
조사 알림, 회비납부 조회 서비스’(2005년 2월 서강옛집)
지 공지, 국내외 지부 동문회 순방, 각종 동문회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5월 5일에는 전 동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홈커밍데이도 준비 중입니다.’(2007년 1월
이 현황을 바탕으로 동문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점점 다양해져왔다.
서강옛집)
사무국의 기본적인 역할은 그대로지만 더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고, 제 공 방식과 종류가 좀더 세분화되고 새로이 추가된 서비스가 생겨났기 때 문이다.
이러한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업무 외에 학교에서 요청하는 업무들은 별도로 쳐도 개별 동문들을 위한 서비스가 만만치 않다. 모임을 위한 데
매년 진행되는 ‘신년하례식’ ‘홈커밍데이’ ‘송년회’ 등 행사의 기획은
이터 제공에서부터 모임 공지 요청, 졸업 및 성적증명서 발급 대행, 어려
물론 준비, 경품 협찬 요청, 티켓 판매 등이 고스란히 사무국 몫이고 장
운 동문들을 위한 후원 요청, 심지어는 주례 교수 섭외 및 학점 잘 나오
학금 모금에서 선발, 관리, 동문회관 운영 역시 사무국이 관리하고 있다.
는 과목을 추천해달라는 학부모 요청까지 다양하다.
〈서강옛집〉도 발간하고 홈페이지도 운영한다. 직종별, 지역별 동문회, 학 과별, 학번별 동문회의 행사 지원도 사무국 몫이다.
‘동문회 다양한 전산 서비스 : 동문회는 전산화 작업을 완료, 다양한 자료를 구비하 고 동문, 재학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각종 모임 개최시 동문회의 학번, 학
35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57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과, 서클, 출신 고등학교의 데이터 활용이 가능하며 각 분야별 재직 동문 파악, 해외
장이 되어버렸다.
출국 시 사전정보 입수 등이 용이하다. 아울러 각종 증명서(졸업, 성적) 신청을 대행 하고 있어 모교를 찾기 어려운 동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동문회에서는 각 종 동문 모임을 갖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필요한 자료를 언제든지 무료로 제공하고 있으며 많은 이용을 바라고 있다.’(1986년 9월호 서강옛집)
1964년 1월 : 학생처장실에 근무했던 정경숙(62 사학) 동문이 서강옛집 창간 이후 상당 기간 동안 학생처의 보조사업으로 발간 1970년 10월 31일 : 존.P.데일리 신부의 호의로 성모기념관(메리홀) 안에 동문회 사 무실을 개관하고 길윤숙(64 영문) 동문이 사무 및 편집을 맡게
‘식사 한 끼로 한 동문의 생명을! ㅇㅇㅇ동문이 백혈병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은 서 강옛집 보도를 통해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밀린 병원비 4200여만원과 앞으로의 수술비 2000만원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1999년 3월호 서강옛집)
됨(6개월) 1971년 4월 30일 : 길윤숙 동문께서 그만두어 정태실(67 국문) 동문이 사무를 맡게 됨(2개월) 1971년 6월 30일 : 정태실 동문이 그만두시게 되어 앞으로는 정금철(67 국문) 동문
‘동문 여러분 도와주세요. 뇌졸증으로 투병중인 ㅇㅇㅇ동문, 백혈병으로 투병중인 ㅇㅇㅇ동문’(2000년 9월 서강옛집)
이 맡아주기로 함(9개월) 1972년 4월 1일 : 정금철 동문이 사임하고 이종순(67 국문) 동문이 대신하게 됨(6개 월)
‘동문회 도서관 출입증 발급 : 도서관에서 발급해오던 도서관 출입증을 오는 4월부 터 동문회에서 발급하게 된다.’(2003년 1월 서강옛집)
1972년 10월 1일 : 이종순 동문의 전직으로 윤순자(67 국문) 동문이 사무를 담당하 게 됨(5개월) 1973년 3월 : 윤순자 동문께서 광희중학교로 발령을 받으셔서 조국희(67 사학) 동
이처럼 다양하고 과중한 업무와 요구에도 동문회 사무국 직원들은 빛
문께서 맡아보게 됨(2년 3개월)
나지 않은 그 일들을 묵묵히 해내왔다. 도움을 주는 사람, 도와주어야 할
1975년 6월 : 조국희 동문이 결혼하여 정광희(70 독문) 동문이 맡게 됨(4년)
사람 모두 선배이고 후배이며 동기들이기에 기꺼이 그들을 돕고 도움을
1979년 4월 1일 : 동문회 간사로 수고해 온 정광희 동문이 사직하게 되어 새 간사에
요청하는 일이야말로 모교와 동문회를 위한 길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김순옥(71 국문) 동문 임명(9개월)
그러나 이 지점에 함정이 있다. 동문이란 이유와 재정 부족으로, 오랜 기
1980년 1월 : 윤영희(74 신방) 동문 새 간사(2년 6개월)
간 동문회 사무국 직원의 신분은 제대로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직업이
1982년 6월 30일 : 윤영희 동문의 후임으로 김미자(64 국문) 동문 새 간사로
아닌,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잠시 거쳐 가는 임시적인 자리였다. 덕분에
1998년 1월 8일 : 김미자 간사가 초대 사무국장으로 승진, 발령
동문회 사무국은 ‘아마조네스 군단’ ‘여인 천하’라고 불리며 40년 가까운
2003년 7월 31일 : 김미자 사무국장 퇴임(21년 1개월)
기간 동안 남성 동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성 동문들만 근무하는 직
35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59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이 전통은 전준영(82 불문) 동문이 합류하면서 깨져버리는데 동문회
(82 사회), 왕혜정(83 종교), 김영아(87 독문), 유진아(98 영문), 이영미(98 사
관 건축이 진행되면서 현장을 오가며 관리할 남성 직원이 필요했기 때문
학), 이승진(99 경제), 이지숙(02 화학) 동문과 현 사무국의 막내 정영미(02
이었다. 이후 이경재(75 경제) 동문이 김미자 사무국장 후임으로 잠시 일
사학) 동문, 동문은 아니지만 열악한 사무국에서 열심히 일해 준 직원들
한 이후 정명숙(83 불문) 사무국장 재임시절 정범석(96 국문) 〈서강옛집〉
한경희, 고미숙, 설영주씨 그리고 지금도 일하는 조서연 팀장, 감사합니
기자와 남경태(99 영문) 장학회 담당 직원, 김성중(01 신방) 홈페이지 담
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이 곧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입니다.
당 직원을 채용하면서 동문회 사무국은 비로소 남녀 성비가 동등하게 되 었고 현재는 이창섭(84 국문) 사무국장이 6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재직 중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이다. 이는 동문회관 수익사업으로 동문회 재정이 많이 단단해졌고 젊은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
남성 동문들이 보람을 갖고 일해 볼 수 있는 직장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
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기 때문일 것이다.
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멀다. 동문들과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일이라
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면 네 일 내 일 없이 A부터 Z까지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무한 능력이 요
(윤동주의 <별을 헤는 밤> 중에서)
구되는 사람들, 그러나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들, 그들 동문회 사무국 직원들이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되는 날은 언제쯤일까.
총동문회 사무국장
묵묵히 동문회 50년 역사를 받쳐온 사람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1998년 1월 8일 ~ 2003년 7월 31일 : 김미자(64 국문) 초대 사무국장
동문회가 있다. 특히 20년 넘는 세월을 동문회에서 일하며 장학재단 설
2003년 8월 1일 ~ 2003년 12월 31일 : 이경재(75 경제) 2대 사무국장
립부터 동문회관 건립까지, 개교 25주년 기념 행사부터 40주년 행사에
2004년 2월 20일 ~ 2008년 8월 31일 : 정명숙(83 불문) 3대 사무국장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뛰어다닌 전임 김미자 사무국장의 노고는 이루 말
2008년 8월 18일 ~ 현재 : 이창섭(84 국문) 4대 사무국장
할 수 없다. 동문회 역사의 절반 가까이가 김미자 동문의 손길을 거쳐 갔 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의 이름에 경의를 표한다. 총동문회는 창립 50 주년 기념식(6.14)에서 단 1명의 동문에게 수여할 ‘잊을 수 없는 이 분’ 감사패를 김미자 동문에게 드렸다. 또한 이름 없이 단순히 ‘사무국 직원’으로만 불려왔던 사람들, 여기 그
김미자
이경재
정명숙
이창섭
들 한명 한명의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본다. 오랫동안 사무국을 지켜왔던 한남희(86 영문) 동문과 한 때 사무국에서 일했던 김종희(81 경영), 곽은석
36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61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총동문회 사무실 1964년 1월 : 학생처장실 1970년 10월 : 성모기념관(메리홀) 안에 사무실 개관 1975년 3월 : 과학관(R관) 367호로 이전 1975년 11월 : 과학관(R관) 373호로 이전 1977년 2월 : 학생회관(C관) 209호로 이전 1984년 8월 : 본관(A관) 303호로 이전 1985년 8월 : 본관(A관) 301호로 이전 1997년 2월 : 이냐시오관(I관) 303호로 이전 2002년 12월 23일 : 동문회관(아루페관) 4층 입주(403호) 2010년 1월 : 동문회관(아루페관) 402호로 이전
36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63 주제로 보는 총동문회 50년
3부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교표, 교명, 로고체 서강 교육이념의 상징
산업문제연구소 실천적 지성, 지성적 실천
교가 아느냐 저 강물이 흐르는 뜻을
배구부 운동과 학업을 병행한 강스파이크
교훈과 표어 서강의 드높은 자부심
FA, 면담, 인문학 서강이 서강인 이유
본관(A관) 서강인의 첫 보금자리
사교춤과 프로미네이드 시대를 앞서 간 동아리
초창기 대학생활 엄격함 속의 자유로움
초창기 교수진 “스승님, 고맙습니다”
슈퍼컴퓨터 국내 최초, 최고의 자랑
영화공동체 ‘서강대학교 예술대학 영화학과’
메리홀 지성과 감성이 꽃피는 고품격 문화공간
서강학파 고도성장 시대의 경제정책 설계사
<월인석보> 감정가 9,999,999,999원
에밀레 각별한 우정에서 싹튼 남다른 실력
노고산 역사가 깃든 넉넉한 품
수업종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C관 서강인의 땀과 희망이 서린 곳
경영전문대학원(MBA) 최고의 자부심으로
R관 ‘과학 서강’의 요람
교문 “환영합니다. 여기부터 서강입니다”
설립자 6인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대흥극장, 신영극장 극장 안에서 흐른 청춘의 한 때
김수환 추기경과 서강 “추기경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의기 동문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서강학보> 그대 흘린 땀이 세상을 이기리라
커뮤니케이션센터 서강의 영상문화 발전소
록밴드 킨젝스 서강대학교 실용음악과
개강미사와 부활절휴가 다양성 속의 일치
독후감 ‘서강고등학교’ 별명의 진원지
강미반 서강에서 꽃핀 예술혼
사제관 ‘청빈한 삶’의 증거
역대 학장과 총장 서강을 이끈 리더십
로욜라 도서관 자유롭되 빈틈없는 서강학풍의 밑바탕
기숙사 청년의 꿈이 숨 쉬며 자라는 곳
서강연극회 서강만의 독특한 힘과 매력
서강의 첫날 1960년 4월 18일 날씨 맑음
학과(學科) 변천 다양성과 자율성이 숨 쉰다
등나무 벤치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장소
명예박사 서강,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36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6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교표, 교명, 로고체 서강 교육이념의 상징
육기관인 서강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도 하겠다. 아래 부분의 왕관은 대학의 목표인 모든 지식과 학문의 면류관, 의미상으로는 최고의 예지叡智를 뜻한다. 한편, 1960년 1월경 재단법인 한국예수회는 대학 설립계획을 완료했 다. 그러나 대학설립인가를 신청하고 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명을 공식적으로 정하지 못한 채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학교소개 팸 플릿 <장안대학 일람>을 발간하였다. 당시 예수회원들이 서소문동 주택 에 머무는 동안 가톨릭교회와 대학원생들에게 영어·프랑스어·철학· 서양사 등을 가르치던 소규모 학회 이름이 장안문화원長安文化院이었다.
교명로고
헙스트 신부의 비망록에 따르면 1959년 6월에 장안長安·서강西江·광 화光化·성지聖智·명덕明德·명도明道 등을 후보로 투표를 했다. 여기에서
서강대학교 교표의 방패 색깔 주홍색은 서강대학교의 교색校色으로 충
장안이 선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늦어도 1959년 9월 무렵에는 잠정
성과 승리를 상징한다. 중앙의 삼각형 은색 도형은 ‘서강’의 첫 자모字母
적으로 ‘장안’으로 정해져 대외적으로 알려졌으나 뜻이 좁고 평범하다는
‘ㅅ’을 도안한 것이며, 서강 지성의 굳센 기백을 나타낸다. 아울러 지성
등의 이유로 반대에 부딪혀 1960년 1월 2일과 30일에 교명을 정하기 위
의 전당 구실을 하는 학교 공간과 건물도 상징한다. 머리 부분의 ‘IHS’를
한 모임이 열렸다.
두고 많은 서강인들이 엄격한 학사관리로 유명한 서강의 별명 ‘서강고등 학교’International High School의 약자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페르트, 김태관, 헙스트, 프라이스 신부 및 도일 수사 등 예수회 관계자
Students’라는 억측(?)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IHS(ι아이오타, η에타, σ시그
들까지 15명이 참석했다. 장안長安, 서강西江, 광화光化, 성지聖智, 성지誠智,
마)는 희랍문자 IHΣOrΣ(예수)라는 모노그램을 라틴문자화 한 것이다.
명덕明德, 명도明道, 상지上智, 진단震旦, 진성珍聖, 대건大建, 명진明珍, 경서京西,
이는 이미 4~5세기경부터 그리스도교 신앙과 진리의 상징으로서 사용
한성漢城 등 14개 이름이 후보로 거론되었다.
강 교표는 1500년 넘는 역사를 담고 있는 셈이다.
366
모임에 이해남 교수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회 관련 인사들과 길로런, 게
외모가 출중한 학생들이 많다 하여 ‘International Handsome
되었고 교회 미술과 전례典禮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 본다면 서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서소문동 성모의 집에서 1월 30일 오후 2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열린
장안과 서강이 최종 후보에 올라 투표 끝에 서강으로 결정되었다. 1960년 2월 14일자 <가톨릭시보>의 ‘개교를 기다리는 예수회 대학’ 기사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400년 전 예수회를 창설하면서 이 유서 깊은 상
에서 ‘장안대학(가칭)’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아, 2월 초까지 이 사실은 널
징을 예수회의 정신을 집약하는 휘장으로 제정하였다. 따라서 예수회 교
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 2월 11일자 <한국일보>에는 서광西光
36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대학으로 표기되었다. 예로부터 서강은 마포와 양화진 사이의 한강을 가 리키는 지명이었고 봉원사 계곡에서 발원한 봉원천이 흘러 서강과 만나
교가 “아느냐 저 강물이 흐르는 뜻을”
는 지점에 서강나루(일명 서강진)가 있었다. 학교와 동문회의 모든 공식 인쇄물에 사용되는 서강대학교 교명校名 로고체는 한국화의 대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선생(1912~2005)의 작품 이다. 월전 선생은 ‘나는 천생 환쟁이요, 글쟁이는 아니지만 오랜 친교 를 맺어온 김태관 신부의 청으로 70년대 초 종합대학 승격에 맞춰 특별 히 서강대학교의 로고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딸과 사위가 서강 동문이 기에 스스로 서강 가족임을 자처하셨던 월전 선생은 ‘서강대학교 로고가 눈에 띌 때마다 매우 각별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안익태 선생의 교가 친필 악보
이희승 선생의 교가 친필 원고
교가의 곡은 안익태(1906~1965) 선생의 작품이고 가사는 국어학자 이 희승(1897~1989) 선생이 지었다. 김인자 모교 명예교수에 따르면, 개교 후 첫 번째 교수회의에서 길로런 학장이 교가 제정을 발의하고 이희명 교 수가 안익태 선생에게 의뢰할 것을 제안했다. 안익태 선생은 “예수회 신 부들이 운영하는 신생 명문 서강대의 교가를 만드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
36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6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한다”며 흔쾌히 수락했고, 작곡 후 모교를 방문하여 박고영 신부의 지휘 로 합창단이 교가 부르는 것을 직접 지켜 볼만큼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교훈과 표어 서강의 드높은 자부심
특히 마지막 부분은 장엄한 느낌으로 길게 불러 달라 주문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모교 교가의 처음 두 단 선율은 <한국환상곡>의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부분과 비슷하고, 셋째 단과 넷째 단 선율 도 ‘화려한 강산 한반도’ 부분의 선율과 비슷하다. <한국환상곡> 마지막 단은 넷째 단 선율을 약간 변형시킨 것이어서, 전체적으로 <한국환상곡> 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준다. 안익태 선생의 작품 중 원본 악보가 남아 있는 것은 짧은 행사용 작품 까지 포함하여 열 곡 정도에 불과한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모교 교가 원 본 악보다. 교가 원본 친필 악보와 가사 친필 원고는 박고영 신부가 직접 보관해 오다가, <서강옛집> 취재를 계기로 재발견되어 모교 도서관 기록 보존실에서 보관하게 되었다. 양호한 상태로 소중하게 보관해 온 박고영 신부에 동문과 학교가 큰 고마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김인자 명예교수는 모교 재직 중 안익태 선생의 사진을 모아 도서관에 기증하고 추모 사진전을 열기도 했으며, 안익태 선생 묘역(1977년 유해 봉 환, 국립묘지 제2유공자 묘역 안치)을 학생들과 함께 참배하기도 했다. 김 교
수는 “원본 악보를 교내의 적합한 장소에 전시하여 학생들이 학교에 대 한 자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밝혔다.
동문이면 누구나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Be as proud of Sogang As Sogang is proud of you’라는
문구에 가슴이 벅차오른 적이 있
을 것 같다. 이 문구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모교의 교훈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한 조직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목표의식
37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7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을 높이는 데 쓰이는 문구를 ‘모토Motto’, 우리말로는 ‘표어’라고 한다. 이 러한 정의에 따라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는
본관(A관) 서강인의 첫 보금자리
서강대학교의 표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문구는 안우규(60 영문) 동문이 1964년 1월 〈서강옛집〉 창간호에 게 재하고 모교의 초대 학장 길로런 신부가 1964년 2월 제1회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에게 서강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도록 격려하기 위해 졸업식 축 사에서 한 말이다. 학연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사회에 나가도 이끌어줄 선 배 하나 없는 신생新生 대학의 1회 졸업생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길로 런 신부는 “그대 서강의 자랑이듯, 서강 그대의 자랑이어라”라고 말하면 서 졸업생들에게 서강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북돋아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서강대학교의 교훈은 무엇일까? 대학의 이상理想이자 본연의 책무는 학문의 자유를 기본 이념으로 하여 진리를 추구하며 창조적·비 판적 지성을 길러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많은 대학들이 진리 추구를 교 훈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 예컨대 ‘진리는 나의 빛’(서울대), ‘진리가 너희 를 자유케 하리라’(연세대), ‘자유, 정의, 진리’(고려대) 등이다. 모교의 교훈은 ‘Obedire Veritati’Obey
the truth이다.
발음하자면 ‘오베
디레 베리타티’ 정도가 되겠다. 이는 ‘진리에 순종하라’는 뜻의 라틴어 로 신약성서에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회 교육 기관으로서 서강대학
서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본관(A관)은 대한민국 현대
교는 인간과 신의 진리를 총체적으로 탐구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건축을 이끌었던 김중업(1922~1988) 선생의 작품으로 1959년 11월 연건
있으며 교훈인 ‘Obedire Veritati’는 이러한 가톨릭 신앙과 예수회의 교
평 1,266평, 4층으로 완공되었다. 김중업의 초기작 중 작품성 측면에서
육 이념을 담고 있다.
손꼽히는 건축물로,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으로 보이는 격자 형태 외부 차양막이 눈길을 끈다. 서향인 탓에 오후가 되면 건물 내부로 파고드는 햇빛을 막기 위해 설치했다. 정교하게 계산된 차양막 각도 때문에 내부 에서 시시각각 빛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하늘로 치켜선 얕은 지붕을 각 기둥에 걸치듯 띄워 건물을 바라볼 때 시선이 흩어지지 않도록 했다.
37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7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본관 봉헌식은 1960년 5월 28일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예수회 위스 콘신 관구장 번즈 신부, 장면 박사,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 등이 참석
초창기 대학생활 엄격함 속의 자유로움
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최신식 최고급 건물이었던 본관에 대한 서강인들 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특히 화장실은 국내 대학 중 최초이자 유일한 수 세식 화장실이었다. 언제나 두루마리 휴지가 채워져 있는 본관 화장실은 서강인들의 큰 자랑이었고 한편으로는 유혹이었을 터. 실제로 두루마리 휴지를 몰래 집으로 가져가는 학생들이 제법 있었다. 여학생들은 2층 여학생 화장실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경우도 있었다니, 본관 화장실에 대한 초기 서강인들의 기억은 각별하기 만 하다. 뿐만 아니라 본관은 다른 대학에서는 엄두도 못 내던 난방 장치 까지 갖추고 있었다. 1960년 11월 말에 완공된 본관 굴뚝은 1994년 10 월 2일 철거될 때까지 많은 서강인들에게 학창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주 는 명소였다. 본관 건물의 옥상은 종종 교수와 학생들의 야외 파티 장소로 활용되
조정반
면서 초기 서강의 큰 특징인 ‘교수와 학생들 간의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갔다. 지금도 여전히 세련되고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본관은 서강인의 영원한 자랑이자 ‘서강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키워 낸 보금자리로 기억될 것이다.
펜싱반
서강의 초창기인 1960년대의 대학생활은 어땠을까? 최근에는 교내에 커피전문점이 들어서 많은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는데, 당시에도 ‘구내 다방’ 설치는 대다수 서강인의 최대 관심사였다. 여학생들은 여학생 휴 게실, 스쿨버스, 매일 미사, 음악실 설치 등을 건의한 반면, 남학생들은
37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7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결석 제한 완화, 자신들에 대한 고등학생 취급 불가 등을 건의했다. 미국인 신부들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학교였기 때문인지 학생들은 자
슈퍼컴퓨터 국내 최초, 최고의 자랑
연스레 미국 유학에 관심이 많았다. 2회까지 졸업생 수가 130여명에 지 나지 않았는데 미국 유학을 떠난 졸업생 수가 17명에 달했다. 유학생들 은 서강에서 혹독한 영어수업을 받으며 미국식 대학교육 시스템에 익숙 해져 있었기 때문인지 미국 생활에 쉽게 적응했다고 한다. 학생활동은 학생회 외에 학생 언론사와 클럽, 그리고 학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클럽활동 가운데 특히 연극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65년 4 월 19일부터 23일까지 학교 소강당에서 퀴어리 신부가 각색·작곡하고 32명의 배우와 합창단이 출연한 영어뮤지컬 코미디 ‘춘향가’는 내·외국 인 관람객만 2500명이 넘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앙코르 공연까지 했다. 서강연극은 대학연극운동의 기수로 기억될 만큼 전문적이고 세련되었 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 성모기념관(현 메리홀)이 개관되면서, 서 강 연극의 내용은 더욱 풍성해졌고, 연극부 출신 중 졸업 후 전문연극인 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1969년 공식 등록된 클럽은 모두 24개였는데, 조정반, 펜싱반 등의 체 육클럽, 고전 무용반, 서예반, 꽃꽂이, 묵화반이 있었던 점이 눈에 띈다.
1968년 5월 29일, 국내 대학 최초로 슈퍼컴퓨터UNIVAC SS80-1가 리찌과
하지만 다른 대학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도 엄격한 학사제도
학관(R관)에 도착했다. 1970년대에도 그런 전자계산기는 정부기관, 연구
때문에 학생들이 클럽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다. 그때나 지금
소 등 몇몇 특수 기관들만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며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이나 FA와 학사경고는 큰 부담 중 하나였으니 ‘서강 고등학교’라는 말이
는 점을 감안하면, 1960년대 말 모교의 슈퍼컴퓨터 설치는 획기적인 일
그냥 생긴 말은 아닌 듯하다.
이었다. 서강대학교 후원회를 통해 미네소타 대학에서 기증한 슈퍼컴퓨터는 R 관 116호에 미국 기술자들에 의해 설치됐다. 14톤 넘는 무게로 운송에만 3개월이 걸렸고 내려놓는 작업만 2시간이 걸렸다. 당시 설치 현장에 트 레이시 교학처장, 최상업 교수, 반병길 교수 등이 참석하여 기쁨을 감추
37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7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지 못했다. 슈퍼컴퓨터가 설치된 것을 기점으로 1968년 12월 전자계산연구소와
메리홀 지성과 감성이 꽃피는 고품격 문화공간
전자공학과가 설치돼 운영됐고, 학생들은 새로운 ‘학문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우선 1969년 1학기부터 개설된 전자계산기 프로그래밍과 디 지털 컴퓨터 디자인 과목에서 실습이 가능해졌다. 또한 경제경영문제연 구소와 사회문제연구소 등이 계량경제 분야 위탁업무와 회귀분석 등을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이는 많은 학생들이 전자공학을 부전공으로 택하게 함으로써 컴퓨터 관련 분야로 진로를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업무 전산화가 생소하던 시 절 졸업생들이 기업체와 금융기관의 전산화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 하게 된 것이다. 1972년 2학기부터는 학과등록 사무, 학생성적 산출, 급 료지급, 채점 등에 전산화를 도입함으로써 국내 대학에서 이 부문의 효 시로 또 한 번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슈퍼컴퓨터의 완전한 기능을 가동하기까지는 2년이란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운영이 만만치 않았다. 사전 준비 없이 기증받았 기 때문이었다. 전자계산 연구소 소장 김만제 교수와 2명의 엔지니어들 이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완전히 자체적으로 조정, 수리할 수 있었다. 모교의 메리홀Mary Hall은 1969년 모교가 ‘서강대학 확충 5개년 계획’의 하나로 강당 건립을 발표한 것이 그 시작이다. 건축가 유희준 씨가 설계 한 메리홀의 처음 명칭은 ‘성모기념관(마리아홀)’이었다. 1972년 건축잡 지 <공간> 6월호에 메리홀은 “성당과 강당의 양면이 잘 조화된 대학 강 당”으로 소개됐다. 당시는 지하층을 갖춘 2층 건물로 744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내부에는 성당과 다목적 무대장치가 마련됐다. 메리홀에는 서강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 종합대학교가 되어 1970년 3 월 2일에 열린 개교식에서 존 P. 데일리 초대 총장John P. Daly S.J. 취임식이
37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7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메리홀에서 열렸다. 1980년 체육관이 완공되기 전까지 입학식, 졸업식, 각종 강연을 비롯한 사실상 모든 학교 행사가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이
<월인석보> 감정가 9,999,999,999원
냐시오관이 건립되기 전까지 강당 2층에 자리한 성당은 미사뿐만 아니라 모교 교직원과 동문의 결혼식 장소로도 애용됐다. 연극과 음악 등 각종 무대 공연도 메리홀에서 활발하게 펼쳐졌다. 예 컨대 모교가 배출한 정한용(74 경제), 문성근(72 무역), 조희봉(90 경제) 동문 등 유명 배우들도 메리홀 무대에서 땀 흘렸다. 우리나라 대학 연극 을 선도하던 연극반의 공연이 주로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1970년 2월 23일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낸 이후 올해로 38년의 역사 를 자랑하는 메리홀은 2004년 5월 현대식 건물과 최상의 설비를 갖춰 재 개관했다. 문화예술 발전소로 거듭난 셈이다. 자유롭고 독창적인 무대연 출이 가능하고 최신 조명기기와 음향기기가 완비돼 있어 유명 가수들의 공연장으로도 인기가 높다. 메리홀은 단지 폼 나는 공연장이 아니라 지성 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고품격 문화공간이다. 앞으로도 모교의 자랑인 메리홀에서 서강의 문화, 대학의 문화가 더욱 활짝 꽃피기를 기대한다.
월인석보에 수록된 훈민정음 언해본
2007년 3월 4일 KBS 1TV ‘TV쇼 진품명품’을 통해 모교가 소장한 보 물 제745호 <월인석보>月印釋譜가 공개됐다. 월인석보 1, 2권이 1983년 보 물로 지정된 이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선보인 순간이었다. 손병두 총장 이 직접 가지고 나간 자리에서 감정가는 9,999,999,999원으로 책정됐다. 전광판이 표시할 수 있었던 최고 금액이자 그때까지 선보인 감정품 가운 데 최고가였다. 감정단은 “정말 소중한 우리 자산이기에 가격을 책정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38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8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세조 5년(1459)에 편찬한 것으로, 조선 전기 훈민정음 연구와 불교학 및 문헌 연구에 귀중
노고산 역사가 깃든 넉넉한 품
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다. 15장 30쪽으로 이루어진 ‘훈민정음 언해본’은 여러 판본이 현존하는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모교가 소장하고 있는 <월인석보> 첫머리에 실려 있다. <월인석보> 외에도 모교는 1,8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 다. 이들은 현재 동문회관 6층에 자리한 박물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주 요 소장품은 조선시대 서화류와 민속품 등이다. 모교의 박물관은 문화 재 수집가로 유명했던 손세기 선생이 기증한 고서화 200여 점을 토대로 1974년 개관됐다. 모교 박물관 소장품 가운데, 조선 후기 문인화의 전개에 중요한 위치 를 차지하고 있는 조영석(1686~1761)의 대표작 ‘유음납량도’柳陰納凉圖는 일본에서 발간된 ‘세계미술대전집’에 실릴 만큼 가치가 높다. 이후 유물 기증이 이어져 1974년 12월 23일 최구 선생이 ‘청자상감국화문소병’을 비롯한 청자 21점을, 1987년에는 이문원 선생이 민속품 539점을 기증했 다. 1990년에는 개교 30주년을 맞아 원곡 김기승 선생이 서예 작품 37 점을 기증했다. 모교가 지닌 보물과 유물을 통해 ‘살아 있는 역사교육’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50년 넘게 모교를 품에 안아 온 노고산은 천주교회 역사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 스탕 신부가 처형된 뒤, 신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묻은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용산 철교와 인도교 사이 이촌동에 있던 새남터에서 많은 천 주교 신자들이 처형됐는데, 가족이나 동료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시 신을 수습하여 노고산 언덕에 가매장한 경우가 많았다. 한국 천주교 사 상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영환 방지거도 1839년 9월 12일 옥사했고, 옥졸들이 시신을 노고산 밑에 버렸다.
38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8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노고산은 6.25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이후 서울 수복에 나선 미 제5해병연대와 우리나라 해병대가 안산, 와우
C관 서강인의 땀과 희망이 서린 곳
산과 105고지로 불리던 노고산 탈환 작전에 나섰던 것. 1950년 9월 21일 아침부터 격전을 벌인 끝에 오후 5시경에야 노고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노고산’이라는 명칭은 한강 서쪽 끝에 있어서 한미산漢尾山이라 불리다 가 할미산으로 불리게 되었고, 한자로 노고산老古山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 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한미산을 노고산으로도 부르는 것이 비슷한 예 가 되겠다. 노고산은 글자 그대로 풀면 노고산老古山 또는 老姑山은 노인산, 늙은 시어미 산, 늙은 어미 산, 늙은 아낙 산 등이 된다. 대흥동 일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오늘날 숭문고교 옆 서낭당 주변 마을에 많은노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고을 원님이 마을 노 인들을 산에 갖다 버리라 명했다. 이에 산신령이 나타나 “마을에 큰 재앙 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면서 언덕 위의 집 한 채를 알려주었다. 그 집에 서 한 노인이 나타나 원님을 꾸짖었다. 이에 원님은 노인을 산에 버리는 일을 중단했고, 그 노인은 마을 사람들이 바치는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 그 뒤로 서낭당 뒷산을 노고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다. 1960~1980년대, 모교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을 꼽으라면 C관 (Classroom Building·학생회관)이 으뜸이었다. 해질 무렵 라운지에서 내
려다보이는 낙조 풍경이 압권이었다. 완공 당시 신新 교사, 혹은 제 3교사 敎舍라
불린 C관은 건축가 김정수가 설계했다. 1961년 착공해 1963년 2
월 26일 완공되어 같은 해 5월 4일 열린 봉헌식에는 노기남 서울대교구 장 대주교, 로마교황청 사절, 장면 전前 총리 등이 참석했다. 초창기 C관에는 물리·생물학과 실험실, 영어 실습실, 교수 연구실 5 개, 강의실 18개, 시청각 교실, 식당, 휴게실, 매점, 서점 등이 있었다. 당 시 국내 최고 시설을 자랑했던 어학 실습실은 7명으로 구성된 6개의 학
38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8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급이 서로 다른 방송을 교재 삼아 동시에 수업할 수 있었다. 또한 마스터 콘솔 덕분에 학생들의 학습 상황을 개별적으로 모니터할 수 있었고 실시
R관 ‘과학 서강’의 요람
간 대화도 가능했다. 학생식당과 라운지도 인기 장소였다. 1963년 5월 10일 발행된 <서강 타임스> 제15호에 ‘C관은 그 시설의 우수성으로 모든 모교생들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있는데, 특히 식당과 라운지의 존재는 더욱 환영받고 있다’고 나와 있다. 1976년 진행된 개보수 공사를 시작으로 소강당, 바둑실, 다 방, 카운슬링센터, 보건실 등이 설치됐다. C관은 1980년대부터 학생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1984년 8 월, 기존 연구실과 강의실이 신축된 K관(김대건관)으로 이전하면서 C관 에서 강의는 진행되지 않게 됐다. 이후 여러 차례 개보수 공사를 거쳤고 1988년에는 부족한 과방과 학회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증축공사를 시 행했다. 이로써 4층 규모로 학회실 20개와 단과대실 4개가 마련됐다. 권 위주의 체제 시절 C관은 학생들의 투쟁집결지였고, 1990년대에는 금연 과 청결을 모토로 한 생활문화 운동도 전개됐다. 오늘도 본래 자리를 지 키고 있는 C관에는 많은 서강인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꿈과 희망이 서 려 있다.
자연과학부 및 공학부가 사용해온 리찌과학관(이하 R관)은 2006년까 지만 해도 아담샬관 서쪽에 있는 건물로 통했다. 하지만 2006년 말 아담 샬관과 김대건관 사이 경사지에 들어선 건물이 ‘신R관’이라는 명칭을 얻 으면서 R관은 ‘구R관’으로 불리다가 2010년 3월 말에 철거되었다. 지은
38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8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지 40여 년이나 흘렀지만 R관은 리모델링 시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튼튼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설립자 6인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R관은 1967년 8월 1부 완공을 시작으로 1968년 9월 2부, 1971년 9월 3부 건물이 완공됐다. 1982년 11월 과학관 별관(RA관)이 부속 건물로 건 립됨으로써, 연건평 4806평에 달하는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이 됐다. R 관이라는 명칭은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찌를 기념한 것이 다. 리찌는 1583년 명나라에 입국해 27년간 체류하며 서양역법을 소개 했다. 또한, 유클리드 기하학을 번역한 <기하원본>, 세계 지도 위에 천문 학과 지리학적 설명을 붙인 <곤여만국전도> 등을 저술하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R관은 과학도들을 위한 공간에 어울리는 이름인 것이다. R관은 완공 당시 최신식 시설과 튼튼함을 자랑하는 국제적인 수준의 건물이었다. 70년대에 지방에서 올라온 수험생이, 난생 처음 본 R관의 수세식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는 방법을 몰라 당황한 나머지 모교 입시에 서 떨어졌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다. R관이 완공되자 학생회관(C관) 아래 자리 잡고 있던 화학과 실험실은 R관으로 옮겨졌다. 구 실험실은 총대의원회와 여러 클럽이 사용하게 됐 다. RA관이 완공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 부족문제가 다소 해결됐고, 학 생회관 강의실은 점차 동아리방으로 개조되기 시작했다. 한편, R관 각층의 계단은 모두 11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오르고
모교 설립을 위해 헌신한 ‘서강의 아버지’가 6명 있다.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길로런Kenneth E. KIlloren, 헙스트Clarence Herbst, 진성만, 프라이스Basil M. Price
신부와 데슬렙스Arther E. Dethlefs 수사다. 게페르트 신부는 ‘숨은 영
내릴 때 다리가 피로하지 않도록 과학적으로 설계한 것이라 한다. 요즘
웅’이었다. 1954년에서 1961년까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수도원장, 재무
지어지는 건물들 대부분이 계단을 한 층마다 11개로 만들고 있는 것을
관, 도서관장, 영신지도자, 교육자, 그리고 사제직 등의 직무를 수행했다.
보면, 모교의 R관이 얼마나 앞섰던 건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57년 로마 예수회로부터 한국 예수회 대학교 원장에 임명된 길로런 신 부는 모교 설립책임자였다. 초대 학장으로 취임해 모교 창립과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초대 도서관장 헙스트 신부는 개관 당시 6만여 권의 책을 분류하고 편
38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8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목했으며 모교의 모든 문서기록과 사진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냈다. 한 국인 최초 예수회 사제가 된 진성만 신부는 1940년 5월 15일 일본 예수
김수환 추기경과 서강 “추기경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에 입회했다. 이후 ‘한국예수회 설립과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사명 을 가지고 귀국해 모교 설립에 참여하고 제3대와 4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프라이스 신부는 국제협력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써 모교의 국 제화에 기여했다. 이후 외국 서강 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산업문 제연구소장으로 헌신했다. 예수회관과 체육관을 비롯한 초기 모교의 모 든 시설은 데슬렙스 수사의 손을 거쳤다. 건축 감독을 맡은 데슬렙스 수 사는, 물자부족에서 오는 위기와 건축 기술상의 어려움, 근로자들을 이 끄는 문제까지 원만하게 처리했다. 모교의 특징인 교수와 학생의 친밀함은 초창기 교수의 상당수가 예수 회원이었던 점에서 기인한다. 빈번하게 개최됐던 가톨릭 관련 행사들이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 형성에 도움을 줬다. 1961년 여름에는 강원도 동해 물치에서 길로런, 헙스트 신부 등과 27명의 학생들이 9일간 휴가 를 함께 보냈다. 길로런 신부와 데슬렙스 수사의 노력으로 지은 하조대 별장으로 떠났던 여름 휴양도 빼놓을 수 없다. 모교를 세운 ‘서강의 아버
2003년 7월 13일 게페르트 신부 동상 제막식 추모미사에 함께한 김수환 추기경
지’들은 개교 50주년 기념 와인 ‘세븐힐 셀러스 쉬라즈’의 라벨에도 등장 해 서강 발전을 돕고 있다.
고故 김수환(1922~2009) 추기경과 모교의 인연은 깊다. 모교 이사를 역임했기(1978~1982) 때문만도, 1974년 모교 최초로 명예 문학박사 학 위를 받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김 추기경은 모교 발전의 중요한 계기마 다 방문해 축복을 빌며 언제든 힘을 보탰다. 김수환 추기경은 모교 설립 자 고故 게페르트 신부와 깊이 교감했다. 김 추기경은 2003년 7월 13일 모교를 방문해 게페르트 신부 1주기 추모미사 주례를 맡은 자리에서 이 렇게 회고했다. “일제 강점기에 제가 일본상지대학교에 유학하고 있을 때, 일본 수도
39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9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자와 민족 문제에 관해 언성을 높이며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를 보신 게 페르트 당시 예수회 기숙사 사감신부님께서 ‘너는 이 다음에 어떤 사제
<서강학보> 그대 흘린 땀이 세상을 이기리라
가 되고 싶으냐’ 물으셨습니다. 저는 ‘조선을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겠 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게페르트 신부님께서는 ‘한국의 사제이기 이전에 하느님을 위한 사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울분을 느끼며 일본 학도병으로 끌려가야 했을 때, 게페르트 신부님 은 제 마음을 달래주시려는 듯 강복을 주시기 위해 머리 위에 두 손을 얹 어 놓으셨습니다. 그 때 신부님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아! 이 분이 나를 위해 우시는 구나’ 느꼈습니다. 얼마나 강렬하게 나를 염려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지 체험했습니다. 서강대학교를 설립하신 신 부님의 눈물과 간절한 기도 덕분에 제가 성직자의 길에 충실할 수 있었 습니다.” 추기경은 모교가 종합대학으로 개교하며 초대 총장 취임식이 열린 1970년 3월 2일 모교를 찾아와 축하했다. 1970년 10월 23일 산업문제연 구소 준공식, 1974년 2월 22일 로욜라도서관 개관식, 1984년 8월 22일 김대건관 준공식 등에도 참석해 축성했다. 미국 위스콘신 관구에 속해 있던 한국예수회가 독립해서 1985년 한국지구를 설치하게 됐을 때, 추기 경은 모교 이사장 직무 대행을 맡았다. 학교재정 확보와 대학발전 장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서강후원회 초대 고문까지 맡았다.
낡은 현판과 더불어 50여 년 동안 학생회관(C관) 215호를 지키고 있 는 동아리가 서강학보사다. 두 번의 폐간 조치, 수많은 투쟁과 굴곡의 역 사를 지닌 <서강학보>는 모교가 개교하던 1960년 서강인과 처음 만났다. 〈서강학보〉의 전신은 <서강타임스>다. <서강타임스>는 아카데미즘을 바 탕으로 진보 담론, 학내 소식 등을 전하는 매체였다. 서강타임스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아픔을 겪었다. 전두환의 등장을 비 꼰 만평 등으로 신군부 검열기구의 눈 밖에 나면서 서강학보사는 1980년 7월 마지막 날, 라디오 뉴스로 폐간소식이 전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복간
39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9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결정이 내려진 이후, <서강타임스>는 1981년 3월 17일 <서강학보>라는 새로운 제호로 문화공보부에 등록하며 4월 16일 제145호를 발간했다.
록밴드 킨젝스 서강대학교 실용음악과
1980년대 중반 <서강학보>는 매체혁신을 단행했다. 사회 변혁운동을 위한 진보적 학생매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학생기자들은 편집회의가 끝나면 1차 물레야(육교집), 2차 포시즌 등으로 이어지는 ‘주점탐방 코스’ 를 거치며 시대를 아픔을 논하고 끈끈한 우정을 다졌다. 1991년 봄, <서 강학보>는 또 한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가 학생기자를 배제한 채 신 문을 발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생기자들은 ‘편집자율권과 건전광고 게재’ 등을 요구하며 학교 와 충돌하기도 했다. “1993년 새롭게 신문을 꾸리게 됐지만, 그 시간동 안 입었던 상처, 무너진 전통을 복구하기엔 상당히 버거운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시련은 1993년 1월 사규를 일부 개정하는 것으로 일단락됐지 만, 당시 학생기자였던 장영권(91 사학) 동문이 <서강학보> 제500호 특집 호에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말에서 안타까움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월요일 아침이면 <서강학보>를 고이 챙겨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던 과거에 비해 애독자 수는 줄었지만, <서강학보>는 여전히 학 생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공기公器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록 밴드 킨젝스Kinsechs의 이름은 ‘별 또는 영리한’을 뜻하는 라틴어 ‘킨’Kin과 ‘여섯’을 뜻하는 독일어 ‘젝스’Sechs를 합친 것이다. 1975년 창단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학 그룹사운드로 명성을 누려왔다. 1년에 4 월과 11월 정기공연을 열고 모교 축제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등의 행사 는 물론 외부 공연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불우이웃 돕기 옴니버 스 콘서트도 연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동아리인 만큼 킨젝스 출신 동문들의 활약도 활발하 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드러머 전태관(82 경영),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 다’, ‘말죽거리 잔혹사’, ‘과속스캔들’, ‘추격자’ 등의 영화 음악을 맡은 음
39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9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악감독 김준석(93 철학), 영화 ‘선생 김봉두’로 우리나라 최연소 음악감 독으로 데뷔한 뒤 ‘일지매’, ‘추격자’ 등의 음악감독을 맡은 최용락(95 신
독후감 ‘서강고등학교’ 별명의 진원지
방), 뮤지컬 배우이자 영화 ‘싱글즈’, ‘과속스캔들’의 삽입곡을 부른 홍민
정(00 중국문화) 동문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많은 동문들이 킨젝스 활동을 계기로 뮤지션의 길을 걷고 있 기에 ‘서강대학교 실용음악과’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수상 경력 도 풍부하다. 1992년 17기의 ‘너의 그림’, 1993년 18기의 ‘아직 늦지 않 았어’, 2005년 30기의 ‘스물 한 살’은 대학가요제 본선에 진출한 곡들이 다. 그 밖의 다양한 음악 페스티벌 수상 경력은 셀 수 없을 정도다. 킨젝스의 꾸준한 성과는 체계적인 운영체제와 축적된 음악적 노하우 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같은 학번으로 이루어진 각 기수는 포지션별로 한 명씩, 총 5~6명만 선발한다. 1학년 때는 연습만 하며 실력을 쌓고 2 학년이 되면 ‘활동기수’라 불리며 1년 동안 무대에 오른다. 3~4학년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킨젝스’라는 이름으로 공연에 참가할 수 없고, 후배 양성에 매진한다. 1~2학년 내내 ‘킨젝스’ 소속으 로 열과 성을 다해야만 비로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셈이다. 선배는 후 배에게 그 동안 쌓은 음악적 노하우를 전수하고, 후배들의 정기공연을 돕기 위해 연출과 기획을 맡아주는 전통도 킨젝스의 특징이다.
독후감 제도는 모교가 ‘서강고등학교’라는 별명을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작성방식이나 제출방법 등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독 후감 제출 장소인 X관 2층 수거함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전에 는 제출시간(오전 9시나 10시)이 가까워지면 수거함 근처 계단에 앉아 독 후감 마무리를 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제출시간
39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9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이 되면 수거함 주위를 둘러싸는 독후감 조교와 독후감을 제출하려는 학 생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질 정도였다.
사제관 ‘청빈한 삶’의 증거
심지어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급하게 독후감을 쓰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교수에 따라 사이버캠퍼스에 제출하거나 수업시간 전 까지 X관 2층 수거함에 넣으면 되기 때문에 이러한 풍경을 찾아보기 어 려워졌다. 예전에는 독후감에 한자를 섞어 원고지에 손으로 작성해야 했 다. 현재는 중핵필수 과목인 ‘읽기와 쓰기(1학기)’와 ‘계열별 글쓰기(2학 기)’를 수강하면서 한 학기에 독후감 4편을 써야 한다. 각 반 별로 교수가
독후감을 쓸 책을 정해주면, 수강생은 정해진 날까지 독후감을 써서 제 출하면 된다. 독후감은 A, B, C 등급으로 성적이 매겨지고, 늦게 제출할 경우 Late 처리가 돼 감점된다. 독후감 성적이 A가 나오지 않으면 독후감 조교와 면담해야 한다. 조교 가 면담 시간과 장소를 공지하면, A를 받지 못한 학생들은 강의실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하지만 이는 2007년까지만 해당되는 이야기 다. 2008년부터는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면담을 실시하고 있다. 이제는 조교와의 면담도 흔한 풍경이 아니다. 독후감 작성과 제출방식도 변했다. 2007년까지는 원고지에 자필로 독 후감을 써야 했지만, 이후부터 컴퓨터 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이용해도
본관 좌측에 위치한 사제관은 정식 명칭이 서강대학교 예수회공동체
된다. 인터넷을 활용해 제출해도 무방하고, 원고를 출력해서 X관 2층 수
다. 사제관은 1961년 9월 16일 착공했다. 데슬렙스 수사의 감독 아래 학
거함에 넣어도 된다. 또, 텍스트는 기존의 소설이나 비문학뿐만 아니라
교 당국이 직접 자재를 구입해 건립했다. 총 600평에 달하는 건물에는
영화를 관람하거나 시를 읽고 나서 감상문을 써도 된다.
32개의 방이 마련됐다. 건물은 외면이 벽돌과 타일 및 콘크리트로 단장 됐다. 총공사비는 1억8000만원이 들었다. 1962년 8월 22일 낙성식에는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와 교황사절 대리 찰스 무통 주교 등이 참석했다. 이 건물이 완성되기 전까지, 서소문의 예수회 건물에서 서강으로 옮겨
39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39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온 예수회원들은 현재 한국예수회 본부가 위치하고 있는 전 예수회 신학 원 자리의 한옥과 목공소 겸 체육관에서 생활했다. 이 건물은 1964년 2
로욜라 도서관 자유롭되 빈틈없는 서강학풍의 밑바탕
월 예수회가 수련원을 건립할 때까지 학생기숙사로도 쓰였다. 사제관의 공간 활용은 설계 당시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가 없다. 지하 1 층~지상 3층 건물인 사제관은 지하 1층이 입구다. 지하 1층에는 안내실, 응접실, 보일러실, 체력단련실, 세탁실 등이 있다. 식당, 침실, 휴게실 등 이 자리한 1층은 본관 2층 건물과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다. 식당은 100 명을 수용할 수 있다. 2층에는 성당이 있다. 3층에도 소성당이라고도 일 컫는 경당이 있는데, 오전 7시께 시작하는 미사에 불참했거나 한국어 미 사가 불편한 외국인 신부들이 찾는다. 2층과 3층에도 침실이 있다. 화장실은 공동으로 쓰며 샤워실은 공동화 장실 옆에 있다. 사제관 각 방 안에 세면대가 있다. 한국인 최초 예수회 원이며 모교 초대 이사였던 김태관 신부님을 방문한 제자들이, 방에 널 린 낡은 속옷을 발견하고 눈시울을 붉혔던 적도 있다. 당신의 속옷무늬 가 희미해질 정도로 손빨래를 해 입으셨던 청빈한 삶을 확인했기 때문이 다. 예수회원들은 새벽 5시쯤 기상해서 1시간 남짓 운동하거나 기도한다. 사제관은 원칙적으로 금녀禁女의 공간이지만, 사목 활동을 위해 지하 1층 안내실 맞은편 응접실까지는 여성의 방문이 허용된다.
개교 당시에는 본관 2층이 도서관으로 쓰였다. 본관 201호가 참고 열 람실과 정기 간행물실이었고, 202~208호는 서고와 정리실이었다. 학생 들은 2층 복도에 놓인 책상을 이용해 공부했다. 1967년 과학관 준공 이 후, 과학관으로 이전해 1층 일부를 서고로 사용했다. 2층은 정기간행물
40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0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실, 참고열람실, 도서열람실, 도서관 사무실 등으로 썼다. 1970년 종합대학으로 변모하면서 독립된 도서관이 필요해졌다. 1971
서강연극회 서강만의 독특한 힘과 매력
년 8월, 존 P. 데일리 총장이 도서관 독립건물 신축 계획을 밝히면서 건 립이 가시화됐다. 1972년 9월 공사를 시작했고, 도서관 이름은 예수회 창설자인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이름을 따 ‘로욜라 도서관’으로 지어졌 다. 타 학교 학생들이 도서관을 흔히 ‘중도(중앙도서관)’라 부르는 것과 차별되는, 서강의 독특함이었다. 1974년 2월 22일에 열린 개관식에는 당시 모교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수환 추기경과 자블럭 미국 하원의원, 주한 독일 및 필리핀 대사 등도 참석했다. 로욜라 도서관 본관(현재 제1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완전 개가식 체제를 구축했고, 국내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았을 만큼 깨끗하고 우아한 내부 시설을 자랑했다. 덕분에 서강인들은 도서관에 친밀감을 느끼면서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정영애(75 신방) 수서관리팀장은 “완전 개가식이 가능했던 것은 초창기 모교 신부님들의 책에 대한 남다른 철학 때문입니다. 신부님들은
1965년 ‘Chun yang song’의 한 장면
책을 관리의 대상이 아닌 공유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 1982년부터 모교 입학생 정원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나자, 1982년 신관
예술관련 학과가 없음에도 연극과 영상 분야에서 서강 동문들의 활약
(현재 제2관)을 신축해 부족한 공간문제를 해결했다. 1986년 3월 국내 대
은 눈부시다. 서강연극회는 1960년대 신파조가 유행하던 국내 연극계에
학도서관 최초로 전산화된 대출시스템을 구축했고, 1991년부터 바코드
활력을 불어넣었다. 1960년 12월 ‘Hangs Over The Head’를 시작으로,
시스템과 도난 방지 시스템 운영을 시작했다. 도서관은 1997년 제3관 개
1965년에는 판소리를 영어로 각색한 국내 최초 본격 뮤지컬 ‘Chun yang
관을 통해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제1관은 종교·철학·총류관, 제2관
song’을 선보였다. 재공연을 요청받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1969년 국
은 이공관·인문관, 제3관은 사회과학관 등으로 운영함으로써 각 관마다
립극장에서 상연한 ‘올리버 트위스트’는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이룰 만큼
주제별로 도서가 배치된 주제관 체제를 확립했다.
큰 인기를 얻었으며, <한국일보>는 ‘영화연극 특별상’을 제정해 수여했을 정도였다. 극예술 전통이 노고 언덕에 뿌리내리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지
40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0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나, 1980년대에도 서강연극회는 밤을 지새우며 연습에 열중했다. 배우들 은 밧줄에 매달려 발성연습을 할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거쳤다. 이론과
학과學科 변천 다양성과 자율성이 숨 쉰다
실제를 접목시키기 위해 연기법, 발성법, 무대매너, 연출작업, 대본 선정 법, 무대배치 등의 종합 학습이 이뤄졌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1년에 여섯 차례씩 공연할 정도로 열성
모교는 1960년 개교 당시 6개 학과로 출발했다. 총 입학 정원은 160명
이 있었고, 관객들의 호응도 대단해서 300~400여 명의 학생들이 매번
으로 영문학과 40명, 사학과 20명, 철학과 20명, 수학과 20명, 물리학과
객석을 꽉 메울 정도였다. 1990년대도 서강연극회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
20명, 경제학과 40명 등이었다. 개교 이후 학과 증설에 총력을 기울인 결
다. 오전에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직접 후원까지 얻었다. 연습 장소가 없
과 새로운 학과가 꾸준히 증설됐다. 1963년 독어독문학과, 생물학과, 경
어서 휑한 빈터에서 목이 쉬도록 연습했던 기억도 있다.
영학과 증설을 시작으로, 1964년 국어국문학과와 화학과가 생겼다. 1966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비해 한 발 앞서가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지
년 무역학과, 1968년 보도예술학과(現 신문방송학과), 1969년 전자공학과
향해온 서강 연극이, 노고 언덕에 서강의 정신을 채색해나가며 연극의
등이 연이어 설치됐고, 꾸준한 학과증설에 힘입어 1969년 12월 마침내
세계를 맘껏 펼쳐 온 지도 반세기다. 그동안 이어온 강인한 연극인의 정
종합대학이 됐다.
신력은 고스란히 남아, 오늘도 서강연극회는 기성연극과는 다른 독특한 힘과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종합대학 승격 이후 모교 학과는 더욱 다양해졌다. 1972년 외교학과, 1976년 회계학과와 화학공학과가 증설됐다. 회계학과의 경우 우리나라 최초로 시도된 경우로 모교를 포함한 8개 대학이 인가신청을 냈으나 유 일하게 모교만이 승인을 받았다. 이후 1981년 사회학과·종교학과·불 어불문학과·전자계산학과(現 컴퓨터 공학과), 1988년 법학과가 증설됐 다. 이후 외교학과를 정치외교학과로 이름을 바꾸고 경영·무역·회계 학과 등을 경영학과로 통합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1993년 기계공학과, 1999년 미국문화학과·중국 문화학과가 증설됐으며 2006년 심리학과가 생겼다. 학과의 종류만 다양 해진 것이 아니다. 모교는 ‘다전공 제도’를 통해 학생들이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다전공 제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강인이라면 누구나 연계전공을 신청할 수 있다. 연계 전공에는 한국 학, 여성학, 교육문화, 철학종교학신학, 정치학경제학철학, 미디어공학,
40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0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스포츠경영, 일본학, 공통과학, 바이오융합기술 등이 있다. 2004년부터 시행된 학점교류 제도로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연세
명예박사 서강,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대, 이화여대, 대구가톨릭대학 등에서도 수강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대구 가톨릭대를 제외하고 3학기에서 7학기에 해당하는 학생 누구나 한 학기 6학점 이내로 교류대학 수업을 들을 수 있다. 모교는 이렇게 다양하고 자 유로운 학과제도 덕분에, 학과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점을 극복하고 융합 적인 인재들을 배출해왔다.
모교는 1972년 10월 2일 문교부에 신청한 대학원 학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설치했다. 1974년 김수환 추기경을 시작으로, 40년간 총 52명에 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각 인물마다 순번, 성명, 학위종별, 수여 연도, 수여 당시 직책 순으로 다음과 같다.
1. 김수환 문학 1974 추기경 2. Clement J. Zablocki 문학 1974 미국 하원의원 3. Gottfried Dossing 문학 1974 독일 주교 4. Wilfried Sarrazzin 문학 1975 주한 독일대사 5. Herve Carrier 문학 1975 그레고리안대학 총장
40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0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6. John Roger Lucey 문학 1975 예수회 미국 사무총장
31. Joseph Pittau 문학 1996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교 총장
7. 이태규 이학 1977 한국과학원 명예교수
32. Thomas Patrick O’ Malley 문학 1996 Loyola Marymount 대학 총장
8. 이기백 문학 1985 한림대학교 교수
33. Horst M. Teltschik 정치학 1997 BMW 주식회사 사장
9. 윤공희 문학 1985 대주교,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34. 류중더 문학 1998 중국 문화부 장관
10. Theodore Geppert 문학 1985 일본 상지대학교 명예교수
35. 정진석 법학 2000 대주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11. John P. Daly 문학 1988 예수회 신부
36. Natsagiin Bagabandi 정치학 2001 몽골 대통령
12. 지학순 문학 1990 주교, 천주교 원주교구장
37. Heinrich von Pierer 경제학 2002 독일 지멘스 회장
13. 박용학 경제학 1990 (주)대농 명예회장
38. 이명박 경영학 2004 서울특별시장
14. 정주영 정치학 1990 현대그룹 명예회장
39. 정경태 경영학 2004 (주)르미에이르 회장
15. 조중건 경영학 1990 대한항공 대표이사
40. Otto Schily 법학 2004 독일 내무장관
16. M. Delmar Skillingstad 문학 1990 서강대학교 前 총장
41. 김정태 경영학 2004 前 국민은행장
17. 강영훈 정치학 1991 前 국무총리
42. 윤후정 문학 2005 이화학당 이사장
18. 김남조 문학 1991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43. Anton Rauscher 문학 2005 독일 가톨릭 사회과학연구센터 소장
19. 김석원 경영학 1991 쌍용그룹 회장
44. Klaus Christian Kleinfeld 공학 2006 독일 지멘스 회장
20. Islam A. Karimov 경제학 1992 우즈베키스탄공화국 대통령
45. Edmund Stoiber 정치학 2007 독일 바이에른 주 총리
21. Alan J. Stone 문학 1992 미국 Alma대학 총장
46. Alvin Toffler 경영학 2007 미래학자
22. 오웅진 문학 1992 신부, 꽃동네 회장
47. Heidi Toffler 경영학 2007 미래학자
23. Donald P. Gregg 정치학 1992 주한 미국대사
48. 김덕용(76 전자) 공학 2008 (주)KMW 대표
24. 윤대병 이학 1993 서울산업대학장
49. 스티브김(김윤종, 69 전자) 경영학 2009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25. Leo J. O’ Donovan 문학 1993 미국 Georgetown대학 총장
50. 박근혜(70 전자) 정치학 2010 국회의원
26. 김영일(김지하) 문학 1993 시인
51. 신영균 문학 2011 영화인총연합회 명예회장
27. 김승연 경영학 1994 한화그룹 회장
52. 박순호 경영학 2012 세정그룹 회장
28. 야마기시 아키라 경영학 1994 前 일본노동조합 의장 29. Lech Walesa 정치학 1995 폴란드 대통령 30. 강우일 문학 1996 가톨릭대학교 총장
40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0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산업문제연구소 실천적 지성, 지성적 실천
명의 수료생을 배출한 뒤, 제4기 교육과정을 진행 중이던 1967년 11월 13일 ‘산업문제 연구소’로 개칭되며 모교 부속기관으로 편입된다. 1969년부터는 독립 건물 건축을 추진해 1970년 5월 독일 정부로부터 15만 달러를 원조 받기에 이른다. 같은 해 10월 23일, 산업문제연구소 신 축 건물 준공식이 김수환 추기경, 서독대사 및 관계 인사, 노총 산하 간 부 등 100여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산업문제연구소는 국내 노동운동자들을 위해 출범했지만, 전적으로 노동자의 입장만을 대 변하지는 않았다. 산업문제연구소의 마지막 소장을 지낸 김어상(61 경제) 교양학부 교수 는 “노동자, 사용자, 정부 등 3자의 입장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시각으로 수업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래서 경찰 간부, 사용자 측 간부들도 함께 수 업을 들었다”며, “그렇기에 유신정권 시절이던 당시에도 산업문제연구 소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척박했던 국내 노동운동에 씨앗을 뿌린 산업문제연구소는 2001년 4월 문을 닫는다. 민주화가 본격화된 이후 노조교육기관이나 노동문제 연구
서강을 이야기할 때 1960~70년대 개발경제를 주도한 서강학파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서강에서 개발경제를 뒷받침하는 연구만 이
기관들이 많아졌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산업문제연구소의 2층 건물 이 있던 자리에는 제2경영관인 바오로관이 솟아있다.
뤄졌던 것은 아니다. 급속한 경제개발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을 연구하 는 기관도 있었다. 바로 산업문제 연구소다. 국내 노동자들이 권익을 제 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본 프라이스 신부는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1966년 6월 ‘산업문제연구원’이라는 이름의 노동문제 연구기관 을 본관 1층에 설립했다. 이곳에서는 책임 있는 노조활동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 육성과 산업사회에서의 인간관계 해결방안 제시 등 당시 어 떤 대학도 하지 못했던 교육과 연구를 진행했다. 산업문제교육원은 100
41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1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배구부
생들과 똑같이 학사규정을 지켜야 했다. 덕분에 선수들은 합숙훈련을 하
운동과 학업을 병행한 강스파이크
면서도 대학원에 재학 중인 선배들로부터 공부 지도를 받아야 했다. 서강 배구부 출신 박주점(84 경영, 前 한국도로공사 여자배구부 감독) 동 문은 <서강옛집> 352호 인터뷰에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이를 악 물고 노력했다”고 회상하며 “팀을 운영하고 선수들은 지도하면서 그 당 시 경영학을 공부한 덕을 보고 있다. 모교에서 공부한 경험이 오늘의 위 치까지 올 수 있었던 발편이 됐다”고 덧붙였다. 서강배구부는 창단 첫해부터 좋은 성적을 올렸다. 제36회 전국 종별 배구선수권 대회 대학부 3위를 시작으로, 1983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8회 전국남녀종별 배구연맹전에서 다시 3위를 차지했다. 배구부는 창 단 3년 만에 전국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다. 1983년 12월 16일부터 20일 까지 열린 제11회 체육부장관기쟁탈 전국대학배구선수권대회에서 4전 전승으로 우승한 것이다. 지적 활동과 스포츠 활동을 조화시켜 대학스포츠의 새로운 풍토를 조
1983년 4월 서울대학교와 친선경기를 펼치고 있는 배구부
성한다는 취지 아래 창단된 서강대 배구부의 우승은 학업과 운동을 병행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값진 성과
1981년 서강배구부가 창단됐다. 1985년 들어 해체되면서 ‘전설’로 남
였다.
아버렸지만, 서강배구부는 전국대회 우승까지 차지할 정도로 우수한 기 량을 뽐냈다. 당시 총장 스킬링 스태드 신부는 재학생들의 애교심과 자 부심을 고취하고 단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구부 창단을 결정했다. 그 해 3월 28일 창단식을 열고 감독에 이근삼 교수, 코치에 이용관(前 국가대표) 씨를 임명했다. 창단 당시 일부 학생들은 기존 대학 스포츠의 폐단이 서강에도 전염되 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는 거액을 들여 선수를 스카우 트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교칙에 의한 예외 조항을 제외하고는 일반 학
41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1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FA, 면담, 인문학
다. 이렇듯 FA 제도와 면담 시간, 그리고 인문학 교육의 강조는 모두 예 수회 교육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요즘은 많은 학교에서 면담 시간을
서강이 서강인 이유
별도로 두고 있고, 출석을 강조하며 인성 교육 강조까지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이들 모두의 시작이 사실상 서강이었다는 자부심은 변함이 없다. 서강인이라면 누구나 수업 시간에 늦지 않도록 아침부터 교정을 뛰어 다닌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결석과 지각이 전체 수업 시간의 6분의 1을 초 과하면 가차 없이 F학점이 내려지는 서강의 전통 FAFailure because of Absence 제도 때문이다. 사실 FA 제도는 미국의 예수회 대학에서 들여온 제도다. 조현철(77 전자) 전 교목처장은 “예수회 대학인 서강은 설립 초기 대부분 의 학교 시스템을 미국 예수회 대학에서 차용했는데, 그 중 하나가 FA 제 도였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학사규칙을 보면 FA와 유사한 AF 제도 가 있다. ‘허가 받지 않은 수강철회와 초과 결석으로 인한 낙점’Failure due to unauthorized with drawal or excessive absence을
뜻한다. 조 전 교목처장은 “지
역에 따른 차이가 있겠지만, 대다수 예수회 대학은 기본적으로 FA제도와 유사한 형태의 제도를 가지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FA 제도는 ‘학문적 탁월성과 올바른 인성 함양’을 목표로 하는 예수 회 교육철학에서 비롯됐다. 엄격한 학사제도를 통해 예수회 교육철학을 구현하는 인재를 만든다는 취지인 셈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과 취지에서 시행되어 온 제도가 면담 시간 활용이다. 학생과 교수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전인적全人的 인성人性 교육을 펼친다는 취지다. 조 교목처장은 “지금 은 대다수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지만 1980년대까지도 별도의 면담 시간 을 운영했던 학교는 거의 없었다”라고 말했다. 설립 이후부터 줄곧 인문학을 강조해온 교육도 예수회 대학의 특징이 다. 풍부한 교양 수업을 통해 인격적으로 올바른 인재를 기른다는 취지
41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1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사교춤과 프로미네이드 시대를 앞서 간 동아리
학교 학생들이 배우러 올 정도였다. <동아일보> 1979년 7월 11일자에 ‘대 학 서클을 찾아’라는 제목으로 특집 보도될 정도였다. 기사는 “젊은이들 은 우리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적인 것을 지향한다. 서강대의 사교춤을 배우는 모임인 프로미네이드는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 히 있을 법한 서클이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여학생 회원 모집이 어려웠다.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문 제를 해결하려다가 다른 문제가 생겼다. 1979년에 다른 학교와 연합해서 여학생 회원을 충원했다. 연세대와 한양대 무용과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당시 다른 학교와의 연합 동아리는 금지돼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우호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프로미네이드는 1980년 들어서 역사 속으로 사라 졌다. 암울한 사회 분위기도 사교춤 동아리를 용납하지 않았다. 어떤 의 미에서 프로미네이드는 시대를 앞서 갔던 셈이다. 구철회(74 물리) 동문 이 1979년 <동아일보> 기사에서 한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잘못 보급
1964년 제1회 졸업 앨범에 남학생과 여학생이 손을 맞잡고 춤추는 사
된 사교춤을 바르게 보급할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다.”
진이 실려 있다. 대학가는 물론 사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교춤 동아 리가 모교에 있었다. 프로미네이드Promenade다. 프로미네이드는 외국인 신부들이 학생들에게 사교춤을 가르치면서 시작됐다. 1979년 프로미네 이드 회장을 역임한 이봉기(77 수학) 동문은 “동아리 이름은 ‘거닐다’, ‘산책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신부님들이 춤을 연상시킨다는 뜻 으로 지은 것이라 알고 있다”라며 “사교춤을 부정적으로 보던 상황에서 프로미네이드가 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인 신부님들 덕분이다”라고 말했다. 신입생 환영회나 축제 때면 무대에 올랐고, 메리홀에서 단독 공연도 펼쳤다. 방학이면 하루 8시간씩 집중연습을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다른
41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1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초창기 교수진 “스승님, 고맙습니다”
에 있던 차하순 교수님 댁은 학생들이 항상 모여서 말씀 듣고 이야기 나 누느라 밤늦도록 불이 꺼질 줄 몰랐다”라고 회고했다. 1960년 4월 18일 159명의 입학생과 모교 탄생 순간을 함께 했던 서강 가족이 있다. 바로 23명의 교수 및 강사진이다.
<교수진> △ 한국인 : 송주영(교수, 경제학), 이희명(부교수, 생물학), 김태관(조교수, 철학 : 예수회 신부), 박고영(조교수, 철학 : 예수회 신부) △ 외국인 : 게페르트(Theodore Geppert S.J., 교수, 독일어 : 예수회 신부), 헙스 트(Clarence A. Herbst S.J., 교수, 영어 : 예수회 신부), 번브럭(John E. Bernbrock S.J., 조교수, 영문학 : 예수회 신부), 데일리(John P. Daly S.J., 조교수, 영문학 : 예수회 신부), 프라이스(Basil M. Price S.J., 조교수, 영어 : 예수회 신부), 트레이시(Norbert J. Tracy S.J., 조 교수, 교육학 : 예수회 신부)
초기 서강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친밀하기로 유명했다. 개교 당시
<강사진>
기준으로 전임교수 1인당 학생 수가 약 15.9명에 불과했던 데다가 개강
△ 한국인 : 강대영(불어, 신부), 구상(국어), 김용권(영문학), 김인자(체육), 김정록
및 종강과 더불어 진행한 미사를 비롯해 부활절과 성탄절 미사 등 다양
(한문), 문영현(체육), 윤양석(신학, 예수회 신부), 이필석(독일어), 진
한 행사도 친밀한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됐다. 쉬는 시간에 교수와 학생이
성만(신학, 예수회 신부), 차하순(사학)
함께 배구를 즐겼다는 이야기, 옥상에서 펼친 야외파티가 늦게 끝나기라
△ 외국인 : 데일리(John V. Daly S.J., 영어 : 예수회 수사), 도일(Terence W.
도 하면 학장신부가 직접 학교차를 운전해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기
Doyle S.J., 영어 : 예수회 수사), 미첼(John L. Mitchell S.J., 영어 : 예
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다.
수회 수사)
엄정식(60 철학) 모교 철학과 명예교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 서 마치 친형처럼 우리의 투정을 모두 들어주셨던 차하순 교수님, 온몸 으로 인격을 보여 주셨던 구상 교수님”을 떠올렸다. 또한 “서강역 근처
41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1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영화공동체
모교 영화공동체는 영화라는 예술장르에 대해 보다 폭넓고 깊은 이해
‘서강대학교 예술대학 영화학과’
를 위해 만든 모임이었다. 초창기 회원들은 에이젠슈타인이나 베르톨루 치의 초기 작품을 함께 감상하고 외국 영화이론서를 읽으며 세미나를 열 었다. 당시 시중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들었던 외국 영화 및 관련 자료를 대거 보유하고 있던 커뮤니케이션센터 덕분에 영화공동체 구성원들의 지식수준은 상당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영화 필름과 영화 관련 원서 를 보기 위해 영화공동체를 찾아올 정도였다. 해마다 개최해온 영화제도 남다르게 운영했다. 1994년 무삭제 영화제 나 일본 영화제가 대표적이다. 일본 영화라면 선정성과 폭력성만 가득한 것으로 인식되던 시절, 영화공동체는 일본 영화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 키는 데 앞장섰다. 나아가 영화를 통한 문화 교류를 제시하는 한편, 대학 문화에 대한 고민으로도 이어나갔다. 박찬욱(82 철학) 동문은 영화공동체 창립 멤버다. 이정향(83 불문), 윤 태용(83 경영), 임경수(86 경영), 최동훈(90 국문) 감독 등도 영화공동체가 배출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소영(80 영문), <젊은 남자>의 시나 리오를 쓴 배병호(82 신방), 법무법인 세종의 변호사이자 한국문화산업법
2000년대 영화공동체 동아리방
률연구소장과 인투더필름 대표를 맡고 있는 임상혁(88 영문) 동문도 영화 공동체 출신이다. 지금도 영화공동체는 매주 모임을 갖고 영화 이론 및
모교에는 영화를 공부하는 학과가 없지만 여느 학교의 영화 관련 학과 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명성이 높은 영화 동아리, ‘영화공동체’가 있다.
비평 스터디를 진행한다. 방학이면 단편영화제작워크숍을 진행하고 직 접 영화도 만든다.
영화공동체의 시작은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려면 대출자 카드에 이름을 적어야했던 시절, 로욜라 도서관의 영화 관련 서적 대출자카드들에는 순서만 다를 뿐 같은 이름들이 자주 등장했 다. 경쟁하듯 영화 관련 서적을 탐독하던 학생들은 서로를 궁금해 했다. 이들이 1985년 영화공동체를 탄생시켰다.
42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2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공 미국 유학 1세대 가운데 3분의 1을 교수진으로 끌어들였다.
서강학파 고도성장 시대의 경제정책 설계사
1965년 국내 경제학과 교수들 가운데 미국 박사학위 소시자는 모교 3 명, 연세대 2명뿐이었고, 1971년에도 모교 5명, 연세대 3명, 서울대 2명 이었다. 남 전 총리가 1999년 발표한 ‘서강경제학의 의미와 역할’이라는 글은 서강학파의 성격과 지향점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다음은 그 일부다. ‘개방경제 시스템에 중점을 둔 성장전략을 추구했다. 자유경제체제 내 지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저축과 투자 증대를 통한 성장을 꾀했으며, 수출과 기술도입에 중점을 둔 전략을 택했다. 정부 역할과 시 장 원리 사이의 충돌이 신진 정책 담당자들의 고민이었고, 그들이 통제 할 수 없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의 제약 아래서 시장경제 원리를 수호하 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서강학파는 1997년 금융개혁위원회 박성용 위원장과 김병주 부위원 장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사의 한 시대가 IMF 체제
서강학파의 산실 k관
와 함께 막을 내리는 시점이었다. 서강학파의 공과功過에 대해 여러 견해 가 있지만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적다.
1969년 10월 20일 남덕우 서강대 교수의 화곡동 자택을 같은 대학 이 승윤 교수가 방문했다. 청와대에서 남 교수를 급히 찾고 있다는 것. 두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적 소명을 책임지는 신新서강학파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교수는 택시를 타고 청와대로 향하던 중 라디오에서 ‘재무장관 남덕우’ 라는 뉴스를 들었다. 서강학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71년 이승윤 교수와 김만제 교수가 각각 금융통화운영위원과 한국개발연구원 원장이 됐다. 서강학파 ‘빅3’ 또는 트로이카의 탄생이었다. 재무장관과 총리로 박정희 정권 시절 10년 가까이 경제정책을 이끈 남 전 총리의 뒤를 이어 김만제, 이승윤 교수도 경제부총리까지 지내며 5, 6공화국 경제정책을 이끌었다. 2000년 개교 4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모교 김경환 교수가 발제한 내용에 따르면, 모교 경제학과는 경제학 전
42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2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에밀레
코르가 끊이지 않을 만큼 성황을 이뤘고 이를 계기로 정식동아리가 됐다.
각별한 우정에서 싹튼 남다른 실력
출범 초기 에밀레는 통기타로 대표되는 당시 대학문화의 특성을 반영 해 포크송 위주로 노래를 불렀다. 이후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순수음 악을 추구하는 동시에 재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다. 그래 도 순수 창작곡을 발표한다는 원칙은 여전했다. 1983년에 이어 1995년도 에도 MBC 대학가요제에서 ‘살아가며’라는 곡으로 대상을 수상했고, 유 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도 1998년과 2002년 모두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검증된 실력을 자랑하는 에밀레지만 이들은 이미 수상한 경력에 머물 지 않고 꾸준히 선보이는 공연에 더욱 매진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여는 정기공연은 선후배 간의 정을 확인하는 자리로도 유명하다. 정기공연마 다 모든 기수의 선후배가 모여 친목을 다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 (김혜연 86 영문)도 에밀레에서 만났다”라는 1기 심재경(83 신방) 동문은
“따로 동아리 모임을 갖기보다 정기공연 때마다 만나 옛 추억을 나누고 후배를 응원하는 게 커다란 즐거움이다”라고 말했다. 김신효(10 기계) 전前 에밀레 회장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에게 도 형이나 누나라고 부른다”라며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선배님에게 1983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에밀레
도 형이나 누나라고 부르다보면 친근함이 훨씬 커진다”라고 유달리 돈독 한 선후배 관계의 비법을 밝혔다.
1977년 시작된 MBC 대학가요제는 대학생들이 창작곡으로 음악적 기 량을 겨룬다. 이 대회를 통해 신해철, 심수봉, 노사연 등 많은 뮤지션이 배출됐다. 모교 순수음악 창작 동아리 ‘에밀레’는 수준 높은 이 대회에서 두 번이나 대상을 차지했다. 에밀레는 1983년 포크 음악을 사랑한 서강 합창단 단원 몇몇이 소모임 형식으로 의기투합해 출발했다. 함께 모여 곡 을 쓰고 첫 공연을 기획하다가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이들은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라는 곡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가진 첫 공연은 앙
42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2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수업종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작을 알렸다는 뜻이다. “수업종은 서강이 엄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서강의 특징이다”라는 구자은(06 영문) 동문의 말에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수업종이 울리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1998학년도 2학기부터 2006학년도 2학기까 지다. 당시 토요일 수업이 폐지되면서 수업 시간이 월·수·금요일은 50 분 수업으로 화·목요일은 75분 수업으로 달리 운영됐기 때문이다. 수업종은 2007년 3월 2일 오전 9시에 다시 울려 퍼졌다. 월·수·금 요일 이뤄지던 50분 수업이 없어지고 모두 75분 수업으로 통일됐기 때문 이다. 당시 4학년이었던 김새봄(04 국문) 동문은 “그때 모교가 왜 ‘고등학 교’로 불리는지 이유를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많은 동문들이 수업종을 긍정적으로 추억한다. 석기용(87 철학) 동문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계 속 들어왔기에 처음부터 거부감이 없었다”라고 말했고, 조광현(88 경제) 동문도 “다른 대학교에서는 종을 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 랐다”라고 말했다. 한편, 개교 초기 초인종 소리였던 수업종은 1980년대 ‘따르르릉’하는 소방종 알람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것이 1993년부터 ‘딩동댕’ 멜로디로 바뀌었고, 요즘에는 ‘딩동댕동’하며 부드러운 멜로디를 갖게 됐다. 세월 에 따라 소리는 달라져왔지만 ‘서강고등학교’라는 별명을 얻게 해 준 수
오전 8시 58분, 학생들이 교실로 뛰어든다. 9시 정각이 되자 ‘딩동댕
업종은 현재진행형이다.
동’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윽고 지각체크가 시작된다. 어느 중·고등 학교에서 벌어지는 풍경이 아니라 2014년 서강 캠퍼스의 모습이다. 모교 의 수업종은 FA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엄정식(60 철학) 모교 명예교수는 “FA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출결이 명확해야 하고, 수업 시작이 정확해야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시계가 없어 수업 시간을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수업종을 통해 수업 시작과 끝, 그리고 지각 체크 시
42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2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경영전문대학원MBA 최고의 자부심으로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모교 MBA의 강점은 무엇보다 엄격한 학사관리에 있다. 개원 초기부 터 일정 횟수 이상 결석 시 가차 없이 FA를 적용하고 있다. MBA 동문회 장을 지낸 임원현(41기) 동문은 “개원 초기 선배님들은 FA제도뿐만 아니 라 무척 엄격했던 학사관리 때문에 30% 정도만 졸업했다고 들었다”라며 “학구적 분위기 때문에 꾀부릴 생각 하지 못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했기 에, 졸업 이후 MBA에서 익힌 공부가 경력 개발 및 자질 향상에 커다란 도움이 됐다고 한다”고 말했다. 한편 졸업식에서 모교 MBA의 특별한 전통이자 선물이 기다리고 있 다. 바로 동문 가족에게 수여되는 명예학사학위다. 졸업하기까지 묵묵 히 지원해준 부모나 배우자 역할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 노고를 기 리는 취지로 마련된 따뜻한 제도다. 졸업 이후에도 끈끈함을 이어나가고 있다. MBA 동문회가 매 분기 저명인사 초청 세미나를 여는 게 대표적이 다. 골프, 축구, 등산, 와인 등 동호회 모임도 활발하다. 30년간 지속된 소모임도 있을 정도다. 이외에도 매년 봄에 열리는 가족한마당, 12월 열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이하 MBA)은 1981년 야간 MBA 석사과정
리는 송년행사 등을 통해 동문과 재학생 간 교류도 활발하게 이뤄진다.
입학생 300명으로 개원한 모교 최초의 전문대학원이다. 이후 주말 MBA 과정, 주간 MBA 과정, 컨설팅 MBA 과정, 서비스시스템경영과정, 박사 과정 등 다양한 학위 과정이 개설됐고, 최고경영자과정, 서강관리자과 정, 가톨릭경영자과정 등 다양한 비학위과정도 마련됐다. 모교 MBA는 높은 수준의 교수진과 뛰어난 학업성취도로 정평이 나 있다. 2009년에는 국내 상위 5개 MBA 가운데 유일하게 BK(두뇌한국)21 사업단과 WCU(세계적 수준의 연구 중심대학) 육성사업을 유치해 우수성 을 입증했다. 또한 2010년 3월 완공한 ‘금호아시아나 바오로 경영관’ 덕 분에 소프트웨어는 물론, 교육공간과 학습환경 등 하드웨어 측면에서도
42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2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교문 “환영합니다. 여기부터 서강입니다”
번듯한 정문을 세우려는 움직임은 1980년대 후반에서야 일어났다. 1988년 11월 7일 발행 <서강학보> 226호에 따르면, 교문 신축 설문조사 에서 재학생 83.4%가 신축에 찬성했다. 현재 교문이 낡고 초라해서 학 교의 위신이 떨어지므로 교문을 신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1988 년 제18대와 1989년 제19대 총학생회는 개교 30주년을 맞아 정문 신축 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어 ‘청년서강 3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위원 장 86 정외 김종기)’를 조직해 신축을 주도했다.
1989년 7월부터 두 달 동안 1067명으로부터 2650만원을 모금했고, 정 문 도안 공모에 나섰다. 강수영(84 경영), 이상혁(86 종교) 동문이 응모한 안이 선정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IHS’를 형상화한 정문이었 다. 오른쪽 기둥에 십자가 모양을 넣었고, 십자가 가운데에 교표와 ‘서강 대학교’를 세로로 새겨 넣었다. 1990년 4월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정문 이 설치되었다. 한편, 모교 후문은 빠른 등교를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등장했다. 1976년 9월 하비에르관 건립 이후, 상당수 학생들이 하비에르 관으로 가기 위해 리찌과학관(구R관) 뒷담을 넘었다. 이에 학생들은 후문 건립을 건의했고 1979년 봄 도로 공사와 함께 후문이 완성됐다. 2008년 곤자가 국제학사 건립 이후에는 후문으로 차량은 통행하지 못하게 되었 개교 당시 모교 교문은 달랑 벽돌 기둥과 철문으로만 이뤄져 있었고,
다. 이밖에 2002년 아루페관(동문회관)을 건축하면서 체육관과 김대건관
철문 가운데 교표를 달아놓은 게 전부였다. 1969년 봄이 되어 다듬을 기
사이로 남문을 만들었다. 2006년 건립한 리찌과학관과 올해 신축한 정하
회가 생겼다. 당시 캠퍼스 앞에서 진행된 도로 공사가 기회였다. 학교 측
상관을 통해서도 모교 출입이 가능하다.
은 길이 12미터에 달하는 아치형 지붕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완성된 정 문은 예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낡은 철문을 교체하고, 문에 달렸던 교표 를 없앤 다음 정문 기둥에 ‘서강대학교 SOGANG UNIVERSITY’ 현판을 건 정도였다.
43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3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대흥극장, 신영극장 극장 안에서 흐른 청춘의 한 때
열악한 필름상태 탓에 스크린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그 위로 담배 연 기가 흩어졌다. 그렇게 한낮의 극장 안에서 청춘의 한 때가 흘러갔다. 동 시상영, 재개봉관이라고 하면 에로물과 액션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대흥 극장의 상영 영화들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대흥극장은 영화나라라는 이름으로 신장개업하기도 했지만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득세하면서 문을 닫았다. 우리나라 영화산업 변천사의 축도인 셈. 한편 신촌 로터리에서 이대입구역 방향으로 조금 가면 나오던 신영극 장을 기억하는 동문들도 많다. 용산의 금성극장, 영등포의 명화극장, 연 흥극장, 미아리의 대지극장 등과 더불어 서울 중심부 바깥 극장계의 한 축을 이뤘던 극장이다. 특히 1970년대 신영극장에서는 쇼 공연이 열릴 때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신영극장 길 건너편에 하숙집들이 집중되어 있어 신영극장을 찾는 서강인들의 발길이 잦은 편이었다. 신영극장은 1980년대 말 미국 UIP사 직배영화 상영에 대한 영화계의 반발 속에서 ‘뱀 소동’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일부 영화인들이 뱀 장수 에게 돈을 주고 직배 영화를 상영하던 명동 코리아극장과 신영극장에 독 이 없는 뱀을 풀어놓게 했던 것. 사연 많던 신영극장도 2003년 8월 멀티 플렉스 상영관을 포함한 복합문화공간인 아트레온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에 D관이 있었다. 현재 법학전문대학원이 들어선 다산관 말고 지금은 사라진 D관이다. 학교 후문을 나서 이대입구역 쪽으로 향하 다 길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D관, 아니 대흥극장이 정식 명칭이다. 김대건관을 K관이라 약칭하듯 대흥극장은 D관으로 불렸다. 대흥극장은 시내 주요 극장에서 이미 개봉, 상영된 영화를 뒤늦게 상영하는 재개봉 관이자, 한 번의 티켓팅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동시상영관이기 도 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대흥극장에서는 극장 내 흡연이 가능했다.
43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3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김의기 동문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고언덕에 뿌리 내린 고인의 뜻은 이제 각양각색의 얼굴로 서강인을 만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장학회가 만들어졌다. “김의기 정신을 이어 받아 더 열심히 살겠다”라는 어린 후배의 소감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고인 의 삶을 조명하게 해준다. 재학 시절 그는 유네스코학생회KUSA, 기독청년 협의회EYC 등에서 활동하며 이웃을 위해 봉사했다. 그 나눔의 씨앗들이 후배들의 삶터 곳곳에서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자라나고 있다. 의기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학번 동문들이 함께 준비하여 치러지 고 있다. 의기제도 의기제지만 서로 다른 시대에 학교를 다닌 선후배들 이 허물없이 각자 보고, 듣고, 느낀 시대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고인 을 추억하며 세대와 세대, 역사와 역사가 교감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생 각만 해도 기분 좋은 만남이다. 아마 그도 후배들 곁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지 않을까? 고인이 떠나간 지도 어언 30년이 넘었다. 그러나 김의기 정신은 나이 를 거꾸로 먹는다. 해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신입생들과 함께, 자신의 영 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후배들과 함께 언제나 젊음이다. 서강의 청년정
1980년 5월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 흩
신 역시 그와 함께 늘 푸르다.
뿌려졌다. 뒤이어 고故 김의기(76 무역) 동문이 봄날의 햇살 속으로 자신 의 몸을 날렸다. 신군부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던 당시, 그는 목 숨을 던져 광주항쟁의 참상을 전했다. 그리고 두려움에 숨죽인 사람들에 게 물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80년대 고인의 후배들은 독재정권과 치열하게 맞부딪혔다. 감시의 눈초리가 번뜩이는 교정에서, 최루탄 연기 자욱한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이들 가운데 ‘김의기’라는 이름에 대한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사 람은 없었다. 그 한 목숨은 민주화의 제단에 스스로 바친 숭고한 희생이 었다.
43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3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커뮤니케이션센터 서강의 영상문화 발전소
‘외침과 속삭임’ 등 해외 고전 명작들을 상영했고, ‘뉴 아메리칸 영화제’ 와 ‘뮤지컬 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도 개최했다. 1985년 일본 감독 구 로사와 아키라가 ‘란’亂을 발표했을 때 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입수해 상 영한 곳도 컴센터였다. 컴센터에는 영화에 흥미를 가진 재학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많은 영화인을 배출했다. 김동원(74 신방) 감독의 첫 영화는 1986년 컴센 터 소장 커스튼 신부의 요청으로 제작한 ‘야고보의 5월’이었다. 박찬욱 (82 철학) 동문은 “(1984년 컴센터 겨울 상영 프로그램이었던) ‘알프레드 히
치콕 영화제’의 상영작 중 ‘현기증’이 내 인생을 완전히 결정지었다. 영 화를 보는 중간에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라고 말했다. 컴센 터 조교였던 배병호(82 신방), 김용태(82 신방) 동문은 히치콕 자료집을 내며 주목받았고 이정향(83 불문) 동문도 컴센터에서 실력을 쌓았다. 컴센터는 2004년 시작한 국내 유일 데뷔작 영화제 ‘서강영화제’와 다 양한 제작 수업을 통해 미래 인재를 지원하는 동시에, 2010년 개교 50주 년을 맞아 선보인 거리축제 성서극 ‘미라클’과 뮤지컬 ‘에브리맨’을 개최 모교 커뮤니케이션센터(이하 컴센터)는 1963년 3월 ‘매스컴센터’라는
하는 등 문화 예술 발전소 역할을 충실히 수행중이다.
이름으로 창립했다. 이후 1974년 3월 ‘시청각실’, 1981년 10월 ‘커뮤니 케이션센터’, 1999년 5월 ‘미디어영상문화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2004년 3월 다시 ‘커뮤니케이션센터’로 확대 개편했다. 주요 시설은 TV 및 라디오 스튜디오, 편집실, 메리홀, 영상자료실 등이다. 이 가운데 스 튜디오와 편집실에 갖춰진 다양한 최신 장비들은 방송 인재 배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메리홀은 대학 연극을 선도한 ‘서강 연극’의 요람이자 다양한 공연을 소화하는 공연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영상자료실은 1980년대 컴센터의 명성을 높여주었다. 귀한 자료를 보 유했던 컴센터는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43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3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개강미사와 부활절 휴가 다양성 속의 일치
죽음, 부활을 기념하는 기간이다. 모교는 성삼일 가운데 평일인 목, 금요 일을 휴가로 지정하고 모든 수업과 학교행정을 쉰다. 모교는 이를 통해 성삼일과 예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는 셈이다. 가톨릭대학교, 광주가톨릭대학교, 목포가톨릭대학교 등 대부분의 가 톨릭 관련 대학들은 예수 부활 대축일 다음 날인 월요일 하루를 부활절 휴가로 지정하고 있다. 부활절 휴가와 더불어 ‘개강미사’도 다른 학교와 구별되는 행사다. 매 학기 개최하는 개강미사는 개강한 다음 주 목요일 오전 10시 30분 이냐시오 성당에서 봉헌한다. 모교는 개강미사가 열리는 시간인 2교시(오전 10시 30분~11시 45분)와 3교시(낮 12시~1시 15분) 수업을 휴강 처리함으로써 재학생들이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물론 참석 여부는 자율이다. 가톨릭 신앙인 이나 가톨릭에 관심 있는 재학생에게 미사 참석 기회를 제공하고, 비신 자 재학생에게는 개강 초 바쁜 일정에서 잠시 숨 돌릴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모교는 채플이나 미사 등 종교의식 참여나 종교 관련 과목을 ‘의무’로 규정한 다른 종교 재단 학교들과 달리 사실상 모든 것을 자율에 맡긴다.
2003학년도 2학기 개강미사
부활절 휴가와 개강미사에는 ‘가톨릭 예수회’라는 서강의 뿌리와 함께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육 철학이 담겨 있다.
모교는 개교기념일은 물론 축제 당일에도 예외 없이 수업을 진행하며, 학사일정도 다른 대학들에 비해 긴 편으로 ‘서강고등학교’라 불리곤 한 다. 그런 모교지만 이틀 동안 부활절 휴가로 쉰다. 더구나 부활절을 앞둔 목요일과 금요일을 휴가로 지정했기에 황금연휴 비슷해졌다. 부활절 휴가는 교회력의 ‘성삼일’聖三日에서 비롯했다. 성삼일은 ‘춘분 春分
후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째 일요일’로 지정된 ‘예수 부활 대축
일’ 이전인 목, 금, 토요일 3일을 가리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43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3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강미반
외부 전시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창작 활동과 더불어 유명 화가 연구, 미술사 공부, 전시회 관람 등 미술 전반에 대한 학문 활동도 병행한다.
서강에서 꽃핀 예술혼
실기와 이론을 함께 아우르는 전통의 강미반 덕분에 모교는 미술학과 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인 동문을 많이 배출했다. 미국 조지타운대 교 수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펼치는 문범강(73 신 방), 미술품 복원 전문가로 ‘미술품 보존 복원 연구소 Art C&R’을 운영하
는 김주삼(80 화학), 모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동화작가 겸 삽 화가로 활동하는 이기진(80 물리) 동문 등이 대표적인 강미반 출신이다. 1980년대에는 시대상을 반영한 판화 제작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신촌판화공장’도 강미반 동문들이 주축이었다. 현재 동문과 교직원이 참여해 정기전을 개최하는 서강미술가회에서도 강미반 출신이 다수 활 동 중이다. 오늘날에도 강미반은 개성 강한 선후배들끼리 활발하게 교류 하며 각자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데 여념이 없다. ‘미술 강미반 시화전
은 내적 세계를 표현하고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이라는 정신 아래 강미반 전통은 지금도 쌓이고 있다.
‘뭉크 그림처럼 고독과 불안이 가슴 한구석 어디엔가 내재된 대학생 활. 강미와 함께 한다면 반 고흐 그림처럼 강렬하고, 클림트 그림처럼 아 름답고, 피카소 그림처럼 개성 있고, 밀레 그림처럼 푸근한 인상이 있습 니다.’ 강미반은 미술을 공통분모로 한서강인 모임으로, 모교 유일의 순수 아 마추어 미술동아리다. 1967년 첫 전시회를 개최하며 존재를 알린 강미반 은 다양한 미술 작품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유서 깊은 동아리로 자리 잡 았다. 강미반은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전을 열어 미술 작품 감상 기회를 제 공한다. 지금까지 정기전만 80여회를 개최했고, 소규모 소품전, 특별전,
44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4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역대 학장과 총장
인으로까지 확대됐다. 이후 제13대 총장 이종욱(66 사학) 교수를 거쳐 제 14대 유기풍 총장이 재임 중이다.
서강을 이끈 리더십
<서강대학 학장> 제1대 케네스 E. 길로런(Kenneth E. Killoren) 1960.2~1963.6 제2대 존 P. 데일리(John P, Daly) 1963.7~1970.2
<서강대학교 총장> 제1, 2대 존 P. 데일리(John P, Daly) 1970.3~1974.3 / 1974.3~1975.7 제3, 4대 M. 델마 스킬링스태드 (Marvin Delmar Skillingstad) 1975.7~1979.7 / 1979.7~1983.7 제5대 존 D. 메이스(John D. Mace, 정대권) 1983.7~1985.1 제6대 서인석 1985.1~1989.1 제7, 8대 박홍 1989.1~1993.2 / 1993.2~1997.1 제9대 이상일 1997.1~1999.3 초대학장 길로런
제10대 이한택 1999.4~2002.3 초대총장 존 P. 데일리
제11대 류장선 2002.3~2005.5
1960년 4월 개교 이래 학장 2명과 총장 11명이 모교를 이끌어 왔다.
제12대 손병두 2005.6~2009.6
초대 학장은 케네스 E. 길로런, 2대 학장은 존 P. 데일리 신부였다. 데일
제13대 이종욱 2009.6~2013.2
리 신부는 1970년 3월 종합대학 승격 이후 ‘서강대학교’ 초대 총장과 제
제14대 유기풍 2013.3~현재
2대 총장으로 일했다. 델마 스킬링스태드(제3, 4대) 신부와 존 D. 메이스 (정대권, 제5대) 신부를 거쳐 서인석 신부(제6대)가 최초의 한국인 총장이
되었다. 이후 박홍(제7, 8대), 이상일(제9대), 이한택(제10대), 류장선(제11대) 신부가 총장직을 수행했으며, 제12대 손병두 총장부터 신부가 아닌 일반
44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4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교정 밖 서강빌딩 맞은편에 세워졌다. 지하 1층~지상 9층 규모로 최대
기숙사 청년의 꿈이 숨 쉬며 자라는 곳
수용인원은 330명이다. 식당, 매점, 휴게실, 체육관에서부터 기도실까지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알로이시오 곤자가 성인의 이름을 딴 곤자가 국제학사는 2008년 후문 인근에 세워졌다. 14층 규모로 9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곤자가 국제학사 는 BTO(Build-Transfer-Operate, 민간이 건설하고 일정 기간 운영함으로써 민간사업자가 수익을 거두는 방식)로 건설돼 운영 중이다. 비용이 벨라르미
노 학사에 비해 다소 비싸지만, 다양한 편의시설과 2인 1실 구성 및 ‘국 제학사’라는 이름답게 외국인 교환학생들과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다. 학사의 가장 큰 특징은 기숙 가능성을 타진할 때 거리에 따른 차등이 적다는 점이다. 거주지가 멀수록 입사에 유리한 다른 학교들과 달리, 모 교는 통학이 어려운 거리에 있는 재학생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준 다. 따라서 입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성적이다. 학사 입사에서까 곤자가 국제학사
지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강조하는 셈이다. 두 학사 모두 평소에는 외부 인 출입을 금지하지만, 특별한 날을 정해 외부 개방과 함께 파티를 열어
모교가 운영한 최초의 기숙사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지금의 김대
수익금을 기부하는 전통이 있다.
건관 뒤편에 자리했던 가건물처럼 생긴 3채의 단층 건물이었다. 예수회 입회 수련생이 한 채를 사용하고, 재학생이 한 채를 썼다. 남은 한 채는 식당이었다. 당시 기숙사 캡틴이었던 안우규(60 영문) 동문과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박희윤(61 경제) 동문에 따르면 재학생 20여 명이 머물 수 있었 고 2층 침대를 사용했다. 침실에는 난방이 안됐지만 독서실로 쓸 수 있는 별도 공간은 밤 12시까지 난방을 했다. 요즘 지방에서 올라온 재학생 가운데 학사(기숙사) 입사를 원하는 학 생들은 ‘벨라르미노 학사’와 ‘곤자가 국제학사’ 중 한 곳에 입사 할 수 있 다.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성인의 이름을 딴 벨라르미노 학사는 2003년
44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4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서강의 첫날
에서 버려지는 하수가 흐르는 냄새나는 개천, 바람 부는 날이면 흙먼지 와 연탄가루 풀풀 날리고, 비가 오면 진창이 되어 버릴 이 길. 이곳에서
1960년 4월 18일 날씨 맑음
푸른 꿈을 펼칠 수 있을까? 노고산 밑에 단아하게 자리 잡은 4층 건물이 위안이 된다. 희망이 생긴다. 신입생은 159명. 72%가 서울 소재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많은 수의 학생들이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에 살고 있다. 장래 희망은 학자가 가 장 많고 실업가, 경제정책가, 은행가, 기술자, 관광사업가, 성직자 등 다 양하다. 입학 당시 가장 많이 지망한 과는 경제학과, 다음으로 영문학과, 물리학과, 철학과, 사학과, 수학과 순이다. 1년 등록금은 12만7000환, 1 학기 등록금으로 7만2500환을 냈다. 세 차례로 나누어 낼 수 있는 분납 제가 있어 다행이었다. 1학기에는 모두 11개 과목이 개설되었다. 총 21 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오전 8시 수업종이 울렸다. 서강을 여는 첫소리다. 3분 전부터 강의실 에서 대기하고 있던 외국인 신부님이 교탁에 섰다. 서강의 첫 수업, 헙스 트 교수님의 5학점 ‘영어회화와 강독’이 시작됐다. 1948년 9월 한국 가톨 릭교회가 교황 비오 12세에게 한국 가톨릭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청원 서강의 첫날
1960년 4월 18일 1교시
한지 11년 8개월 만에 맞이한 순간이다. 오늘은 1960년 4월 18일 서강의 첫 날. 내일, 청년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떨쳐 일어선 첫 날이 되리
하늘은 맑았다. 평균 기온 8.7도. 기분 좋은 시원한 봄날이다. 도로는
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오늘이 흐른다.
이대까지만 포장되어 있고 신촌로터리까지는 비포장이다. 로터리부터 학교 앞까지는 좁고 마른 흙길. 길 양쪽으로는 가난한 판자집과 목로주 점이 늘어서 있다. 그 사이로 ‘왕자 다방’과 ‘왕자 당구장’도 눈에 띈다. 저 멀리 오른쪽으로 삼표 연탄이 보인다. 증기기관차가 경의선을 따라 서강역에 옮겨놓은 석탄더미가 대학생이 된 첫날의 설렘을 누른다. 더 멀리 당인리 발전소의 그을음 연기도 마찬가지다. 공덕동과 아현동 일대
44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4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등나무 벤치 지금은 사라진 추억의 장소
장소는 단순한 공간과 다르다. 장소에는 기억과 의미와 가치와 삶이 묻어 있다. 장소가 ‘삶의 장소’라면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다. 장소는 지 나온 삶의 추억을 소환하고 공간은 앞으로 기대되는 활용가치를 환기시 킨다. 등나무 벤치는 기능과 효율 면에서는 그대로 두기 아까운 공간일 지 모르나 삶의 장소성 측면에서는 없애기 안타까운 장소다. 장소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 즉 사건과 불가분이다.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 빈곳’, 즉 지금 있는 것들을 지워 없애고 뭔가를 세워 올려 만들 수 있는 곳이다. 장소는 자꾸만 사라진다. ‘공간이 부족 하기 때문’이라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인가. 학교 측은 등나무를 옮겨 심는 것을 검토했지만 워낙 고목인데다가 중 심부 심재心材가 비어 있는 탓에 옮겨심기 어렵고, 옮겨 심더라도 제대로 뿌리내려 살아남기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등나무 벤치의 장소성이 깃들 수 있는 장소는 이제 우리의 아스라한 기억뿐이다. 세월은 장소를 먹으면서 속도가 빨라진다.
학교 정문에서 오른쪽 길로 잠시 오르다 체육관 쪽 길로 방향을 틀면, 길 오른쪽에 테니스코트가 있고 왼쪽 위에 등나무가 무성한 벤치들이 있 었다. 그 등나무 벤치가 아래쪽 농구코트와 함께 없어졌다. 신축건물 ‘우 정관’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등나무 벤치에 관한 추억은 다양하다. 연인과 정담을 주고받았는가 하 면, 최루탄에 눈물 콧물 쏟다가 바람결 강한 등나무 벤치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혼자 있고 싶을 때 벤치에 앉아 아래쪽으로 바삐 지나가는 학우 들을 쳐다보며 바래지는 꿈을 새삼 되새겨보았다. 여름날 등나무 벤치에 책 베개 하고 누우면 1분 안에 땀 식고 3분 안에 꿈나라로 갔다. 밤이면 아주 가끔(?) 남녀 학생 간 스킨십 장면이 보일 듯 말 듯했다.
44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49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서강학개론 기말고사 5. 모교의 본관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누구일까요? ① 김수근
② 이광로
③ 김중업
④ 강명구
6. 예수회 설립자 이냐시오 로욜라는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① 이탈리아
② 독일
③ 프랑스
④ 스페인
1. 1985년에 해체된 모교의 정식 운동부 종목은 무엇이었을까요? ① 농구
② 배구
7. 모교가 소장하고 있는 대한민국 보물은 무엇일까요?
③ 축구
④ 육상
① 월인석보
② 훈민정음 해례본
③ 개국원종공신녹권
④ 제왕운기
2. 2014년 초 기준으로 일반·특수·전문대학원 졸업생을 포함한 전체 동 문 숫자는?
45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8. 1960년 개교 당시 모교에 설치되었던 학과가 아닌 학과는?
① 약 7만1000명
② 약 6만5000명
① 경제학과
② 국어국문학과
③ 약 8만명
④ 약 5만3000명
③ 물리학과
④ 사학과
3.‘예수회’의 영문 표기로 올바른 것은?
9. 모교 건물에 그 이름이 부여된 인물들 중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사람은?
① Association of Jesus
② Jesus Society
① 김대건
②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③ Society of Jesus
④ Jesus Christ Superstar
③ 마테오 리치
④ 토마스 모어
4. 모교 설립 준비기에 잠정 결정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던 교명校名은?
10. 동문회관 건물의 정식 명칭은 무엇일까요?
① 마포대학
② 장안대학
① 아루페관
② 떼이야르관
③ 서울예수회대학
④ 서울로욜라대학
③ 최양업관
④ 엠마오관
451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11. 모교의 한국인 최초 총장은 누구일까요?
17. 1986년 서강동문장학회 설립 이후 지금까지 지급한 장학금 총액은?
① 박홍
② 이상일
① 25억
③ 이한택
④ 서인석
② 49억 ③ 35억
12.‘진리에 순종하라’는 뜻의 라틴어 표현으로 올바른 것은?
④ 15억
① Obedire Veritas ② Veritas Lux Mea ③ Obedire Veritati
④ Obedivi Veritati
18.‘서강대학교’ 로고타입은 누구의 작품일까요? ① 일중 김충현
13. 모교의 제2캠퍼스 조성이 추진되고 있는 지역은 어디일까요?
② 소전 손재형
① 파주
② 남양주
③ 월전 장우성
③ 수원
④ 김포
④ 여초 김응현
14. 모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지 않은 인물은 누구일까요?
19.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해외 지부가 결성되어 있지 않은 나라는?
① 앨빈 토플러
② 김수환 추기경
① 중국
③ 빌 클린턴
④ 레흐 바웬사
② 러시아 ③ 터키
15. 모교와 스포츠·문화 정기 교류전을 열고 있는 해외 대학은?
④ 미국
① 일본 조치上智대 ② 미 조지타운대 ③ 중국 칭화대
④ 미 보스턴칼리지
20. 모교가 자리하고 있는 노고산의 한자 표기로 올바른 것은? ① 老古山
45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6. 서강 동문이 역임하지 않았거나, 재임하고 있지 않은 직위는?
② 老姑山
① 대통령
② 장관
③ 盧固山
③ 차관
④ 해외 주재 대사
④ 勞苦山
453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21. 모교 강의실에서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25. 모교 캠퍼스에 세워져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① 십자고상
① 존 P. 데일리 신부 흉상
② 학생사물함
②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 동상
③ 수강생 좌석표
③ 김의기 추모비
④ 수업종
④ 교황 비오 12세 동상
22. 총동문회에서 동문들에게 제공하지 않는 서비스는 무엇일까요? ① 도서관 열람증 발급 ② 동문모임소식 알림대행 ③ 동문 현황정보 제공 ④ 특수대학원 등록대행 23. 모교를 방문한 적이 없는 해외 인사는? ① 테레사 수녀 ②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 ③ 나차긴 바가반디 전 몽골대통령 ④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4. 모교의 수련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① 강원도 양양군 하조대수련원 ②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수련원 ③ 경기도 양평군 서종수련원 ④ 인천광역시 강화수련원
45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55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서강학개론 기말고사 정답과 해설
11. ④ 1985년 2월, 한국인 최초로 서인석 신부가 제6대 총장에 취임.
1. ② 2. ① 3. ③ 4. ② 1959년 9월 무렵 교명이 잠정적으로 ‘장안’으로 정해져 알려졌으며, 1960년 2월 14일자 <가톨릭시보>의 ‘개교를 기다리는 예수회 대학’ 기사에서도 ‘장 안대학(가칭)’으로 소개되었다.
5. ③ 6. ④ 로욜라는 1491년 12월 24일 북北에스파냐의 바스크 지방 로욜라 성주의 아 들로 태어났다.
7. ① 보물 제745호 <월인석보>
8. ②
12. ③ 13. ② 14. ③ 15. ① 16. ④ 박근혜 대통령(70 전자), 김태영(73 독문) 전 국방부장관, 고故 이봉조(73 정외) 전 통일부차관.
17. ② 18. ③ 19. ③ 20. ② 21. ② 22. ④ 23. ② 테레사 수녀(1981년 5월 4일), 바가반디 대통령(2001년 2월 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84년 5월 5일)
24. ① 25. ④
개교 당시 설치 학과는 영문학과, 사학과, 철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경제학 과. 국어국문학과는 1964년에 화학과와 함께 설치됨.
9. ③ 10. ①
45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57 서강인이 알아야 할 ‘서강’
4부
기억과 풍경
하늘에서 본 서강 굴뚝의 추억 교문, 서강언덕의 시작 특별한 서강의 남다른 포스 알바트로스탑 24년
45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59
하늘에서 본 서강
1961년 착공한 C관이 건립되고 있다.
1960년대 A관 뿐인 서강언덕
1970년대 메리홀 앞 솔밭과 A관. 뒤편 남산타워가 선명하다. 1960년대 A관. 왼쪽에 구체육관이 보인다.
46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61 기억과 풍경
1985년 갓 완공된 K관이 체육관 옆에 가지런하다.
2000년대 다산관, 리찌과학관, 엠마오관, 도서관 3관이 건립됐고 삼민광장이 온존한 모습
1990년 개교 30주년을 맞아 건립한 알바트로스탑이 A관 앞 중앙에 섰다. 2010년대 동문회관이 우뚝 솟았고 남문이 생겼다.
46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63 기억과 풍경
굴뚝의 추억
1960년 11월 서강언덕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A관 굴뚝
1973년 굴뚝에 올라가 졸업사진을 찍은 전자공학과 동문들
46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1974년 A관과 C관 사이 굴뚝 축대 위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모습
1994년 10월 2일, 34년만에 철거되는 장면
465 기억과 풍경
교문, 서강언덕의 시작
1990년 새롭게 단장한 모습. IHS를 형상화했다. 1967년 모습. 교표를 달았다.
1970~1980년대 모습. 기둥에 서강대학교 동판을 새겼다.
46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2009년의 모습. 십자가 모양 오른쪽 기둥의 교표와 교명을 더 크게 만들었다.
467 기억과 풍경
특별한 서강의 남다른 포스
1971년 남해바다로 떠난 졸업여행 중 선상에서
정문 앞에 선 1960년대 초. 동문들의 위풍당당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기념촬영을 한 독문과 동문들(1975년)
1968년 졸업하는 경영학과 동문들이 V자 대형으로 섰다.
1977년 졸업하는 사학과 동문들. 손에 든 담배가 눈길을 끈다.
46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69 기억과 풍경
1985년 졸업하는 신방과 여자동문들의 경쾌한 걸음걸이
화학과 동문들의 ‘응답하라 2001’. 자판기 커피 한잔에도 포스가 묻어난다.
2010년 개교 50주년 당시 선배의 귀향을 환영하는 재학생
1985년 사제관 앞에서 다리를 치켜든 영문과 동문들
470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에밀레 출신 4인조 동문밴드 ‘404 Error’의 풋풋한 2009년 포즈
1990년 정문을 돌파해 청년서강의 깃발을 높이 세웠다.
471 기억과 풍경
알바트로스탑 24년
전자공학과 87학번 동문들이 탑 분수대에서 기념촬영한 장면
1990년 개교 30주년을 기념해 세운 알바트로스탑 건립 과정(왼쪽), 준공된 뒤 초기의 주변 모습(아래 왼쪽), 원형극장 형태로 주위를 정비한 현재 모습(아래 오른쪽)
모교로 돌아옴을 상징하는 알바트로스탑 앞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동문 화살추 위에서 찍은 2010년 졸업사진
472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73 기억과 풍경
연표
◦ 1973년 10월 21일 제1회 총장배쟁탈 동문 체육대회 개최 ◦ 1975년 10대 동문회장 김영천(60 경제) 동문 취임 ◦ 1975년 9월 4일 실업계 동문회 창립총회 개최 ◦ 1976년 3월 재학생 영구회비 납부제 실시 ◦ 1976년 8월 서강옛집 타블로이드판으로 변경 ◦ 1977년 6월 재미 서강대학교 동문회 결성 ◦ 1978년 9월 30일 제1회 서강가족 체육대회 개최
◦ 1964년 1월 서강옛집 창간
◦ 1979년 6월 5일 서강옛집 100호 발행
◦ 1964년 2월 6일 동창회 결성
◦ 1980년 10월 25일 개교 20주년 기념 홍보 영화 모교 기증
◦ 1964년 2월 8일 제1회 졸업식 ◦ 1964년 2월 수석 합격 신입생에게 첫 동문회 장학금 지급
◦ 1981년 배구단 지원 체육기금 모금
◦ 1964년 2월 20일 동문회 주최 첫 행사, 사은회를 도와준 교직원들과 영
◦ 1981년 3월 15일 <81 서강동문록> 발간
화 ‘나바론’ 관람
◦ 1982년 4월 13대 동문회장 홍익찬(61 경제) 동문 취임
◦ 1965년 3월 61학번 2회 졸업 동문들 200달러 상당 방송 기자재 기증
◦ 1982년 6월 30일 동문회 직통전화 715-5494 개설
◦ 1966년 3대 동문회장 김암(62 경제) 동문 취임
◦ 1982년 10월 동문회 달력 제작
◦ 1967년 4대 동문회장 박병화(60 경제) 동문 취임
◦ 1982년 10월 23일 동문회 역사상 처음으로 ‘서강가족잔치’, 즉 홈커밍
◦ 1968년 5대 동문회장 김영천(60 경제) 동문 취임 ◦ 1969년 4월 서강재직동문회 첫 모임 개최(동문회 산하 지부 모임으로는
사실상 최초) ◦ 1970년 10월 31일 성모기념관(메리홀) 안에 동문회 사무실 개관
데이 개최 ◦ 1983년 10월 22일 <83 서강동문록> 발간 ◦ 1984년 8월 대학 동문회 중 최초로 전산화 시작 ◦ 1984년 9월 회칙 개정으로 대학원 졸업생도 동문회 정회원에 포함 ◦ 1985년 개교 25주년 기념 장학기금 모금사업 전개
474 서강, 그 사랑의 역사
◦ 1971년 7대 동문회장 박희윤(61 경제) 동문 취임
◦ 1985년 9월 12일 장학재단 설립 운영위원회 구성
◦ 1972년 학부 졸업 동문 1000명 돌파
◦ 1986년 15대 동문회장 양호(62 경제) 동문 취임
◦ 1973년 8대 동문회장 김진헌(60 물리) 동문 취임
◦ 1986년 9월 22일 서강동문장학회 설립 인가
◦ 1973년 10월 동문회비 종신회비제 시행
◦ 1986년 10월 26일 제1회 서강동문 등반대회
475 연표
◦ 1987년 국가고시 준비반 지원 시작
상 시상식
◦ 1987년 2월 14일 <87 서강동문록> 발간
◦ 1994년 1월 1일 최고 의결기구 대의원총회 신설
◦ 1987년 9월 12일 60~69학번 모교 방문의 날
◦ 1994년 3월 15일 첫 대의원정기총회 개최
◦ 1987년 12월 18일 서강가족 송년의 밤 개최
◦ 1995년 서강동문장학회 장학금 지급액 5억원 돌파
◦ 1988년 2월 서강동문장학회 설립 이후 첫 장학금 지급
◦ 1995년 5월 5일 제3회 서강인의 날 개최 / 제4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 1988년 4월 9일 16대 동문회장 이우진(60 사학) 동문 취임
시상식
◦ 1988년 5월 29일 부부동문회 개최
◦ 1995년 10월 5일 <95 서강동문록> 발간
◦ 1988년 6월 25일 70~76학번 모교 방문의 날
◦ 1996년 인터넷 서강옛집 개설
◦ 1989년 12월 4일 <89 서강동문록> 발간
◦ 1996년 6월 20일 학과별, 학번별 조직대회
◦ 1990년 4월 17일 개교 30주년 기념 알바트로스탑 건립
◦ 1998년 1월 8일 98년도 신년 하례식 및 제5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시
◦ 1990년 4월 17일 제1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시상식
상식
◦ 1990년 7월 1일 개교 30주년 기념 백두산 등정(~ 11일)
◦ 1998년 4월 25일 21대 동문회장 김경해(68 영문) 동문 취임
◦ 1990년 8월 서강동문장학회 장학금 지급액 1억원 돌파
◦ 1998년 6월 18일 제1회 만남의 동문회 ◦ 1999년 5월 총동문회 홈페이지 개설
◦ 1991년 해외연수 장학제도 ‘Sogang Fellow’ 신설
◦ 1999년 10월 개교 40주년 기념 달력 제작
◦ 1991년 4월 13일 제1회 서강 꽃심기 행사. 철쭉과 대왕 1천 그루 식수
◦ 1999년 12월 13일 99년 송년 만남의 동문회 / 제6회 자랑스러운 서강인
◦ 1991년 9월 28일 제1회 서강인의 날 개최 / 제2회 자랑스러운 서강인
상 시상식
상 시상식 ◦ 2000년 9월 <2000 서강동문록> 발간
◦ 1992년 1월 13일 장학회관 건립사업 추진을 위한 임시총회 개최
◦ 2000년 10월 19일 동문회관 기공식
◦ 1992년 1월 24일 서강가족 새해 인사의 밤
◦ 2000년 12월 28일 2000 송년 만남의 동문회 / 제7회 자랑스러운 서강
◦ 1992년 2월 동문회 입회비 5만원으로 인상
인상 시상식
◦ 1992년 3월 17일 서강옛집 200호 발간 ◦ 1992년 7월 10일 서강장학회관 건립 기금을 위한 모금 잔치 개최
◦ 2001년 서강동문장학회 장학금 지급액 10억원 돌파
◦ 1992년 12월 장학카드 발급 개시
◦ 2001년 12월 8일 80년대 학번 동문들의 홈커밍데이 ‘2001 송년 옛집으
◦ 1993년 5월 15일 제2회 서강인의 날 개최 / 제3회 자랑스러운 서강인
476 서강, 그 사랑의 역사
로의 초대’ 개최
477 연표
◦ 2001년 12월 27일 2001 송년 만남의 동문회 / 제8회 자랑스러운 서강
◦ 2009년 5월 16일 미주총동문회 창립 ◦ 2010년 서강동문장학회 장학금 지급액 30억원 돌파
인상 시상식 ◦ 2002년 6월 19일 23대 동문회장 정재관(60 영문) 동문 취임
◦ 2010년 1월 6일 총동문회 사무실 이전
◦ 2002년 9월 10일 서강옛집 300호 발간
◦ 2010년 1월 11일 2010 총동문회 신년 하례식 / 제14회 자랑스러운 서
◦ 2002년 12월 23일 동문회관 준공식
강인상 시상식
◦ 2003년 3월 17일 동문 도서관 열람증 발급 개시
◦ 2010년 4월 김경자(60 철학) 동문 동문장학회에 10억 원 기탁
◦ 2004년 5월 27일 24대 동문회장 김호연(74 무역) 동문 취임
◦ 2010년 5월 15일 개교 50주년 기념 홈커밍데이
◦ 2004년 5월 29일 제1회 서강문화축제 개최
◦ 2010년 6월 동문장학회 기명 장학금 50개 조성
◦ 2005년 1월 10일 서강가족 신년하례식 / 제9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 2011년 1월 10일 2011 총동문회 신년 하례식 / 제15회 자랑스러운 서
시상식 ◦ 2005년 3월 2일 동문회 홈페이지 개편
강인상 시상식
◦ 2006년 1월 9일 2006 신년 하례식 / 제10회 자랑스러운 서강인상 시상식
◦ 2011년 3월 서강가족카드 발급 개시
◦ 2007년 서강동문장학회 장학금 지급액 20억원 돌파
◦ 2012년 서강동문장학회 장학금 지급액 40억원 돌파
◦ 2007년 1월
‘서강대학교 동문회’에서 ‘서강대학교 총동문회’로 명칭
변경 ◦ 2007년 1월 동문회비 인상(연회비는 2만원에서 3만원으로, 영구회비는 15
만원에서 30만원으로) ◦ 2007년 1월 8일 2007 SG New Year Gala / 제11회 자랑스러운 서강
인상 시상식
◦ 2012년 1월 9일 2012 총동문회 신년 하례식 / 제16회 자랑스러운 서강
인상 시상식 ◦ 2013년 1월 7일 2013 총동문회 신년 하례식 / 제17회 자랑스러운 서강
인상 시상식 ◦ 2013년 5월 31일 29대 총동문회장 김덕용(76 전자) 동문 취임 ◦ 2014년 6월 14일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주년 기념식 개최
◦ 2007년 2월 27일 개교50주년 기념와인 선정 ◦ 2008년 1월 7일 2008 총동문회 신년 하례식 / 제12회 자랑스러운 서강
인상 시상식 ◦ 2008년 3월 서강커리어멘토링 실시 ◦ 2009년 1월 8일 2009 총동문회 신년 하례식 / 제13회 자랑스러운 서강
인상 시상식
478 서강, 그 사랑의 역사
479 연표
서강, 그 사랑의 역사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50년(1964~2014) 발행인 김덕용 발행처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발행일 2014년 6월 14일 편찬위원회 조광현(책임 편집, 88 경제) 표정훈(대표 집필, 88 철학) 정명숙(83 불문) 이창섭(84 국문) 진행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사무국 이창섭(사무국장 84 국문) 조서연 정범석(96 국문) 김성중(01 신방) 정영미(02 사학) © 2014 서강대학교 총동문회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백범로 35 동문회관 402호 전화번호 02-705-8243 이메일 alumni@sogang.ac.kr 홈페이지 www.sogang.net 디자인 김진디자인(02-323-5377) 인쇄 우행TMS(02-498-1580)
우리가서강이다 We are Sogangs
482 서강, 그 사랑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