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서 여인으로 ‘베리 굿 걸’ 다코타 패닝
마음을 훔친 지골로 캐릭터 6
‘제보자’ 임순례 감독 애니메이션 ‘고녀석 맛나겠다2:함께라서 행복해’원작자 미야니시 타츠야 제6회 DMZ국제다큐영화제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진모영 감독 ‘그리고 우리에겐 오늘이 없다’ 세바스티안 브람슈버 감독
괴상하지만 멋있어! 대체 불가능한 괴짜들 ‘프랭크’‘더블:달콤한 악몽’‘초콜렛 도넛’
ISSN 2288-1212
VOL.81
2014.9.26~10.2 2000원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슬로우 비디오’
차태현인 듯, 차태현스럽지 않게
2014 가을, 가장 지독한 치정 멜로!
기억할 만한 드라마와 에로티시즘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영화! - 필름 스테이지 Film Stage 정우성은 그의 필모 사상 가장 다양한 겹(layer)을 가진 인물을 훌륭히 연기했다 - 트위치 필름 Twitch Film
HOT ISSUE 고전 [심청전]을 [심청전]을 사랑과 욕망, 집착의 이야기로 비튼 신선하고 충격적인 스토리! 우리가 알던 정우성은 잊어라! 독해지고 야해진 배우 정우성 최초의 치정 멜로! 세계 4대 영화제! 2014 토론토 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학규 | 정우성 “ 덕아, 이제 나 기다리지 마 ” 사랑을 저버리고,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빠지는 남자
덕이 | 이솜 “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 버림받고 모든 것을 잃은 후, 그를 망가뜨리기 위해 다시 태어난 여자
홈페이지
http://madam2014.co.kr/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2014madam
치 정 멜 로
정우성 이솜 박소영 그리고 김희원
욕 망 에
|감독| 임필성 |제작| ㈜영화사
눈
멀 다 ,
동물의왕국 |제작·제공| CJ엔터테인먼트
집 착 에
눈
뜨 다
2 0 1 4년 10월 대개봉
이번 주 영화계 08 │ 지금 영화관에선 09 인터뷰 제6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만난 감독들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 12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진모영 감독 13 ‘그리고 우리에겐 오늘이 없다’ 세바스티안 브람슈버 감독 14
커버스토리 ‘슬로우 비디오’ 차태현인 듯, 차태현스럽지 않게 16 기획 우리들의 행복한 영화 시간,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22 괴상하지만 멋있어! 대체 불가능한 괴짜들 ‘프랭크’ 프랭크 28 │ ‘더블:달콤한 악몽’ 사이먼 30 │ ‘초콜렛 도넛’ 루디 32 배우 스무 살, 소녀에서 여인으로 ‘베리 굿 걸’ 다코타 패닝 34 │ 인터뷰 ‘제보자’ 임순례 감독 36 기획 마음을 훔친 영화 속 지골로 캐릭터 38 │ 애니메이션 ‘타마코 러브 스토리’ 큰일났다, 소꿉친구가 사랑을 고백했다 40 한국 최초의 아동영화 ‘수업료’ 발굴 42 │ 인터뷰 애니메이션 ‘고녀석 맛나겠다2:함께라서 행복해’ 원작자 미야니시 타츠야 43 지금 극장가에선 44 │ 디테일의 재발견 ‘펄프 픽션’의 음식 46 │ 드라마 보는 남자 웹드라마 ‘출중한 여자’ 우희 47 캐릭터가 만난 캐릭터 ‘씬 시티:다크히어로의 부활’ 아바 &‘타짜-신의 손’ 우 사장 48 10만원으로 즐기는 10월 문화생활 가이드 49 │ 올드독의 제주일기 50 표지 사진 10월 2일 개봉하는 ‘슬로우 비디오’의 주연 배우 차태현. 사진=전소윤(STUDIO 706)
시린 옆구리 아침 저녁으로 공기가 제법 쌀쌀해졌습니다. 여름내 덮고 뒹굴었던 얇은 홑이불이 이제는 너무 얇은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유독 가을을 타는 사람이라면 슬슬 경계 경보를 발령할 때입니다. 떠오르는 기분에 그냥 마음을 맡겨버리면 별별 생각에 다 빠져들고, 달력이 아직 두 장쯤 남아 있는데도 올해가 벌써 다 갔구나 지레 낙심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시인 황지우가 ‘뼈아픈 후회’라는 시에서 노래한 대로,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라는 처절한 자학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일수록 음악도 살짝 기분이 유쾌해지는 걸로 듣고, 볕 좋은 한낮에 야외 활동도 좀 즐기고, 맛있는 걸 챙겨먹으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사람이란 게 어디 그런가요. 일단 우울감에 빠져들면 경쾌한 음악이 오히려 짜증나고, 야외 활동은커녕 집안에서도 몸을 움직이기 싫어지고, 암만 맛좋은 제철 진미라도 식욕이 돋지 않기 십상입니다. 이게 다 가을 탓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계절의 관계는 나이를 먹을수록, 계절을 거듭 겪을수록 참 오묘하게 느껴집니다. 이럴 때 개인적으로는 잠깐씩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도움이 되곤 합니다.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는 대신 혼자 주변을 산책하며 거리 풍경을 관찰하거나, 늦도록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붙들고 씨름하는 대신 내일을 기약하며 일찍 퇴근해 혼자 영화 한 편을 보며 잘 만들었든 아니든 품평과 감상에 빠져드는 겁니다.
VOL.81 2014.9.26~10.2 발행인 송필호 편집장 이후남 취재 정현목 장성란 지용진 임주리 이은선 고석희 김나현 윤지원 편집 황혜민 이지영 디자인 이현민 김민선 광고문의 02-751-5555 FAX 02-751-5806 1부 2000원 발행주기 매주 금요일 등록일자 2012년 12월 14일 등록번호 서울중라00508
이번 호를 보시면 짐작하시겠지만 여름 성수기를 지난 요즘 극장가에는 참으로 다종다양한 영화가 개봉합니다. 지난 주말에는 이런 저런 행사로 여기 저기 외출하고 돌아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데도, 큰 맘 먹고 이불장을 뒤졌습니다. 얇은 홑이불 대신 제법 두툼하고 무게가 느껴지는 이불을 꺼내 빨아두었던 이불보를 씌웠습니다. 간밤에 그걸 덮고 잤더니 꽤 포근한 것이, 쌀쌀한 아침 공기가 그리 겁나지 않았습니다.
구독신청 02-2108-3456 발행처 서울 중구 서소문로 100 ●기사제보 및 의견은 m@joongang.co.kr로 보내주십시오. 02-751-5986, 5982
6
인간의 육체와 계절의 관계는 어쩌면 참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집장 이 후 남
이번주 이번 주영화계 영화계
박스오피스
외화의 반격, 주말 박스오피스 1위 탈환
이즈 러너’는 북미에서도 개봉 첫 주 주말 박 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메이즈 러너
72만
비긴 어게인
243만7000
3
타짜-신의 손
357만7000
4
툼스톤
시간이 지날수록 흥행세가 더욱 가팔라지
5
해적:바다로 간 산적
850만1000
6
인투 더 스톰
201만6000
고 있는 이 영화는 주말 사이 36만여 관객을
7
루시
192만7000
동원하며 누적 관객 수 250만 돌파를 눈앞
8
두근두근 내 인생
157만9000
9
마야
24만2000
10
명량
1757만1000
‘비긴 어게인’(8월 13일 개봉, 존 카니 감
란히 차지했다. 새로 개봉한 ‘메이즈 러너’
내내 극장가 흥행을 주도했던 한국영화를 제
독)은 2주 연속 2위 자리를 지켰다. 개봉 이후
(9월 18일 개봉, 웨스 볼 감독)는 금·토·일 주
치고 외화가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건
말 사흘 동안 전국 648개 상영관에서 63만
7월 3주차 ‘혹성탈출:반격의 서막’(7월 10일
에 두고 있다. 역대 다양성영화 흥행 순위에
이은선
블링블링 기자의
어사일럼의 뚝심
누적 관객 수(명)
2
올랐다. 누적 관객 수는 72만여 명이다. 여름
개봉, 맷 리브스 감독) 이후 9주 만이다. ‘메
9월 19~21일
순위 제목 1
모처럼 외화가 주말 박스오피스 1,2위를 나
1000여 명이 관람해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주말 박스오피스
12만6000
서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미야자키
※자료: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2014년 9월 21일 기준.
하야오 감독)을 제치고 2위로 뛰어올랐다.
자리를 내주고 3위로 두 계단 내려앉았다.
2주째 1위를 지켰던 ‘타짜-신의 손’(9월 3일
사흘 동안 22만2000여 명을 동원, 누적 관
개봉, 강형철 감독)은 ‘메이즈 러너’에 1위
객 수는 357만7000여 명이다. 고석희 기자
9월 24일 개봉하는 ‘샤크 스톰’의 포스터를 본 순 간, 죽지도 않고 또 돌아온 각설이를 만난 기분이 었다. 이 영화는 바다에서 갑자기 일어난 소용돌이가
토막 뉴스
그 부근에 있던 상어들을 빨아올리면서 ‘샤크 허리케인’이 된다는 황당무계
맷 데이먼, 본 시리즈 복귀
부산영화제 폐막식은 조진웅·문정희와 함께
한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상어로 가득 찬 허리케인은 자연재해의 끝판왕 같
액션영화 ‘본’ 시리즈(2002~)에 맷 데이먼
배우 조진웅과 문정희가 제19회 부산국제영
(사진)이 돌아온다. 1·2·3편에서 첩보 요원
화제 폐막식 사회를 맡았다. 조진웅은 올해
은 형태가 된다. 웬만한 블록버스터에선 감히 시도조차 않을 패기 넘치는 설
제이슨 본으로 시리즈를 이끌었던 그다. 4편
‘끝까지 간다’(5월 29일 개봉, 김성훈 감독)
정이다. 돌아온 각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샤크 스톰’을 만든 영화사가 이
‘본 레거시’(2012, 토니 길로이 감독)는 제레
‘군도:민란의 시대’(7월 23일 개봉, 윤종빈
런 부류의 비디오영화를 1년에 열 몇 편씩 내놓
미 레너가 새로운 주인공을 맡았다. 맷 데이
감독) ‘명량’(7월 30일 개봉, 김한민 감독) 등
는 미국 제작사 어사일럼(The Asylum)이기 때
먼의 복귀작이자 시리즈의 5편은 2·3편에
세 편의 흥행작에서 활약했다. 문정희가 주
서 그와 호흡을 맞췄
연을 맡은 ‘카트’
던 폴 그린그래스 감
(부지영 감독)도
(Mock)와 블록버스터의 합성어로, 언론에 의해 이름 붙은 장르다. 어사일럼
독이 메가폰을 잡는
개봉을 앞두고 있
은 1997년 저예산 호러 제작사로 출범했다. 2005년에 만든 저예산 SF ‘H G
다. 2016년 7월 북미
다. 폐막식은 10월
개봉 예정.
11일 영화의전당
문이다. ‘이런 류’란 바로 모크버스터(Mockbuster)다. 가짜라는 뜻의 모크
웰스의 우주 전쟁’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우주 전쟁’과 같은 시기에
에서 열린다.
공개되면서 뜻밖의 대박을 쳤고, 이후 모크버스터 전문 제작사로 방향을 틀
명필름영화학교 신입생 모집
조진웅
문정희
었다. ‘트랜스포머’(2007)를 바꾼 ‘트랜스모퍼’, ‘나는 전설이다’(2007)를 바
명필름영화학교가 10월 1~8일 신입생 원서
제7회 서울노인영화제 개최
꾼 ‘나는 오메가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를 바꾼 ‘에이지 오브 투모
접수를 진행한다. 입학 지원서·전공별 제출
서울노인영화제가 9월 24~27일 서울극장
서류는 필수이며, 희망자에 한해 포트폴리
에서 열린다. 단편 경쟁작 38편, 국내 및 해
오 두 작품을 DVD 파일로 제출할 수 있다. 극
외 초청작 19편을 선보인다. 이중에는 배우
영화 및 다큐멘터리 연출을 포함해 제작, 연
정우성이 연출한 ‘킬러 앞에, 노인’이 포함
4~6주, 촬영에 몇 주만 할애해 영화 한 편을 뚝딱 만드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기, 촬영, 미술, 편집, 사운드 분야에서 총 10
됐다. ‘수상한 그녀’(2014, 황동혁 감독)가
참고로 ‘샤크 스톰’은 원작(?)이 없다. 어사일럼은 가끔 순수 창작물을 내놓기
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신입생은 2015년 2월
개막작으로 선정됐고, 폐막작으로는 단편경
부터 2년간 현직 영화인들로 구성된 객원 교
쟁 부문 수상작이 상영된다. 영화 전문 인력
로우’ 등등 어사일럼이 만든 모크버스터는 수두룩하다. 신작 블록버스터를 몇 달 안에 모크버스터로 만드는 기동성이 끝내준다. 통상 시나리오 작업에
도 하는데, 이게 그중 한 편이다. 미국에선 이미 속편도 나왔다. 대충 봐도 포
수진의 무상 교육을 받고, 장편영화 제작비
을 만나는 마스터 클래스, 영화 속의 사진 및
스터가 1편의 것을 재활용한 티가 역력하다. 엉뚱한 짓도 꾸준히 하면 산업이
를 지원받는다. 자세한 정보는 명필름문화재
원화를 감상하는 특별 전시회, 노인영화 제
자 문화가 된다는 것을 훌륭하게 증명하고 있는 어사일럼의 뚝심에 박수를.
단 홈페이지(www.myungfilm.org) 참조.
작에 대해 묻는 포럼도 개최된다. 윤지원 기자
8
이 영화, 볼만해? ★★★★★ 걸작 탄생! 죽기 전에 꼭 보길 ★★★★ 훌륭하네. 강추할 만 ★★★ 이만하면 볼만하지 ★★ 안타깝네.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 헐! │ ☆= ★ 반 개
베리 굿 걸 감독·각본 나오미 포머 출연 다코타 패닝, 엘리자베스 올슨, 보이드 홀브룩, 클락 그레그 촬영 바비 버코우스키 편집 앤드류 하피츠 의상 데이비드 타버트 음악 제니 루이스 미술 리사 마이어스 장르 드라마, 멜로 상영 시간 9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일 9월 25일
줄거리 단짝 친구인 릴리(다코타 패닝)와 제리(엘리자베스 올슨)는 고교를 졸업하고 맞
로도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며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다. 극 중에서는 찰떡 같은 호흡을
이한 첫 번째 여름,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데이비드(보이드 홀브룩)에게 동시에 마음을
과시하며 각자 설레면서도 두려운 첫사랑의 복합적인 감정을 자연스럽게 소화해낸다.
빼앗긴다. 제리는 데이비드에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만, 정작 데이비드의 마음
제리를 연기하는 엘리자베스 올슨의 노래 솜씨와 통통 튀는 패션 스타일을 감상하는
은 릴리를 향해 있다.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것도 또 다른 재미다.
별점 ★★★ ‘허공에의 질주’(1988, 시드니 루멧 감독)로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받았던
인물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친절하게 설명하며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 내려는 연출
시나리오 작가 출신 나오미 포너의 감독 데뷔작이다.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가족과의 갈
도 섬세하다. 나오미 포너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로 활약하던 시절부터 성장과 가족이
등을 통해 성장해가는 스무 살 소녀의 이야기가 미국 뉴욕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
라는 소재를 감성적으로 풀어내곤 했다. 그 장기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이 연출 데뷔작
로 펼쳐진다. 그 중에도 릴리와 제리, 그리고 데이비드의 삼각관계를 둘러싼 로맨스가
에서도 빛을 발한다. 특히 다코타 패닝이 연기하는 인물인 릴리가 정신적 미숙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오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친구와 가족 등 주변 사람들과 한층 성숙해진 관계를 맺
설정 자체는 그리 새롭지 않다. 삼각관계 때문에 주인공이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고
어가는 과정이 매끄럽게 묘사된다. 극 중에서 모든 인물들은 오해와 갈등의 시간을 겪
뇌하는 모습은 그간 여러 성장영화에서 수도 없이 변주돼 온 것이어서 식상한 면도 없
게 되지만, 결국 누구 하나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원만한 화해를 이뤄간다. 그런 해피엔
진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빛나게 하는 건 다코타 패닝과 엘리자베스 올슨, 두 배우
딩이 편의적인 갈등 봉합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이 영화는 따뜻하고 배려 깊은 울
의 연기다. 어린 시절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두 배우가 연기자로서 얼마나 성장
림을 안겨준다. 마치 할머니가 첫사랑의 홍역을 앓는 손녀의 등을 도닥여주며, 위로의
해가고 있는지, 특히 이번 영화로 성인 연기자로서 신고식을 치르는 다코타 패닝의 내
말 한마디를 건네는 듯하다. 이 또한 거쳐가는 과정이라고.
면 연기가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을 준다. 두 배우는 실제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9
지금 영화관에선
나이팅게일 감독 필립 뮬 출연 리바오티앤, 양신이, 리샤오란, 친하오 장르 가족, 드라마 상영 시간 100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일 9월 25일
줄거리 쯔건(리바오티앤)은 오랜 세월 기른 새를 데리고 고향에 가려 한다. 이 여정에 손
녀 렌싱(양신이)이 합류한다. 일로 늘 바쁜 부모가 나란히 출장을 가게 되면서 렌싱을 돌 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에만 익숙한 렌싱은 불편한 시골 여행이 못마땅 해 할아버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지만, 어느덧 아름다운 자연에 조금씩 마음을 연다. 별점 ★★☆ 착하고 밝은 가족 드라마다. 소위 ‘막장’이라 부를 만한 자극적 요소는 하
나도 없다. 원작은 필립 뮬 감독의 전작 ‘버터플라이’(2002, 한국 개봉 2009)다. 나비를 수집하러 길을 떠난 할아버지의 여정에 멋대로 끼어든 옆집 꼬마의 이야기를 그린 영
늘 미안한 마음뿐이다. 아내의 곁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후회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
화다. 둘은 여행 동안 투닥거리기 바쁘지만 어느덧 흠뻑 정이 들고, 자연이 선사하는 여
다. 렌싱도 알고 보면 새장 같은 도시에 갇혀 지내다 보니 외롭게 삐뚤어진 아이다. 렌싱
유와 아름다움에 푹 빠져든다. ‘나이팅게일’은 이를 뼈대로 각본을 다시 써 만든 영화
에게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들판을 즐겁게 뛰어다닐 시간이 필요했다.
다. ‘버터플라이’가 중국에서 큰 사랑을 받자, 중국 측 제작사가 피터 뮬 감독에게 리메 이크를 제안해 중국과 프랑스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두 사람 앞에는 울창한 숲이, 너른 강이,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 길과 정겨운 농촌 마을이 펼쳐진다. 거기서 할아버지와 손녀는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
할아버지와 손녀 콤비는 유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잔망스러운 꼬마 렌싱은 할아버
을 열고 잠시 잊고 지냈던 평온함을 되찾는다. 어느덧 속이 깊어진 렌싱이 할아버지를
지 쯔건을 골탕 먹이며 못되게 굴기 바쁘고, 쯔건은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렌싱을
위해, 또 사이가 서먹해진 부모를 위해 깜찍한 꾀를 발휘하기도 한다. 가족의 화합을 이
챙긴다.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습에 집중하던 카메라는 점차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간
야기하는 명절 특집극 같은 분위기라 좀 심심하긴 하다. 따뜻한 작품이되 예측 가능한
다. 쯔건은 4년 전 렌싱을 데리고 나갔다 잃어버렸던 일 때문에 아들 부부와 손녀에게
드라마 이상을 기대하긴 어렵다. 이은선 기자 haroo@joongang.co.kr
피막 감독 반종 피산다나쿤 출연 마리오 마우러, 다비카 후네 장르 공포, 코미디 상영 시간 11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일 9월 25일
줄거리 임신한 아름다운 아내 낙(다비카 후네)을 두고 전쟁터에 나간 피막(마리오 마우
러)은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드디어 전우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만 아내는 묘하게 달라졌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피하기만 한다. 그럼에도 아내에게 점 점 더 집착하는 피막에게 친구들은 낙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마을을 떠나자고 한다. 별점 ★★☆ 공포와 코미디를 적절히 섞되 코미디에 좀 더 힘을 줬다. 영화로는 좀 낯선
태국 작품인 데다 오프닝이 왠지 어설퍼 보임에도 이 이야기를 계속 주시하게 하는 건, 과연 낙의 정체가 무얼까 하는 궁금증이다. 동네 사람들과 피막의 친구들은 낙을 귀신
서운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쉴 틈 없이 호들갑을 떤다. 말 그대로 몸을 아끼지 않는
이라 여기지만, 피막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젓는다. 이 충돌이 호기심을 유발
다. 그 모습이 배꼽 빠지게 웃길 정도는 아니어도 꽤 귀엽다.
하며 영화에 집중하게 한다. 문제는 이런 줄다리기가 중반부터는 좀 답답하리만큼 늘 어지는 점이다. 공포영화라면 으레 떠오르는 잔인한 묘사나 소스라치게 놀랄 장면이 없다는 건 장 점이자 단점이다. 누구나 유쾌하게 볼 수 있는 반면, 공포감을 안겨주는 인상적인 장면 이 하나도 없다는 건 아무래도 심심하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 주무대라 특별한 볼거리
어설픈 공포감과 슬랩스틱이 얽혀 진행되던 이야기는 갈수록 피막과 낙의 멜로 드 라마로 흘러가 따뜻하게 마무리된다. 재미있는 건,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여지는 에필로그다. 해피엔딩을 맞이한 피막과 낙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후일담이 빠르게 소 개되는데, 몇 분 안되는 이 장면들이 ‘피막’을 따뜻하고 유쾌하게 기억되도록 한다. ‘셔터’(2004) ‘샴’(2007) 등 공포영화로 그 가능성을 인정받은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
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갑갑하게 느껴질 때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게 하는 건 바
이 오랜 설화를 소재 삼아 만든 작품으로, 태국 개봉 당시 1000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로 피막과 그 친구들이 보여주는 몸 개그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피막의 친구들은 별 무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10
더블:달콤한 악몽
순천
감독 리처드 아요데 출연 제시 아이젠버그, 미아
감독 이홍기 출연 윤우숙, 차일선, 김종선 장르
바시코프스카 장르 드라마 상영 시간 93분 등
다큐멘터리 상영 시간 64분 등급 전체 관람가
급 15세 관람가 개봉일 9월 25일
개봉일 9월 25일
줄거리 컴퓨터 시스템 회사에 다니는 사이먼(제
줄거리 칠순의 윤우숙 할머니는 순천만에서 여장
시 아이젠버그)은 소심한 성격 탓에 친한 사람이
부라 불릴 정도로 실력과 배짱이 좋은 어부다. 50
하나도 없다. 어느 날 자신과 똑같이 생긴 신입
년간 바닷일을 하면서 남편과 자식들을 먹여살
사원 제임스(제시 아이젠버그)가 등장한다.
려온 할머니의 일상과 애환이 그려진다.
별점 ★★★ 흡사 분신 같은 존재가 나타난다
타마코 러브 스토리
별점 ★★☆ 윤우숙 할머니와 순천 갯벌에 서식
는 설정이 유독 어두운 색채의 화면 위로 펼쳐
감독 야마다 나오코 목소리 출연 스자키 아야, 타마루 아츠시, 카네코 유우키 장르 애니메이션 상영
하는 생물들을 대칭적으로 보여주며 자연과 인
진다. 장면과 장면이 툭툭 끊어지는 연결은 현실
시간 84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일 9월 25일
간이 한데 살아가는 순천만의 생태를 표현한다.
과 상상이 뒤섞인 듯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
줄거리 재래시장의 떡집 맏딸 타마코(스자키 아야)와 친구들은 고교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한다.
검게 탄 얼굴로 자연과 싸워왔던 할머니의 모습
다. 1인 2역을 해낸 제시 아이젠버그의 연기도 훌
소꿉친구 모치조(타마루 아츠시)는 짝사랑해 온 타마코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을 통해 생명의 억척스런 힘과 그 존엄함을 이야
륭하다. 두 역할이 완전히 다른 인물인 듯 느껴진
별점 ★★★☆ 뚜렷한 이야기를 내세우기보단, 열일곱 두 청춘남녀가 처음 사랑을 마주하기까지의 과
기한다. 한데 인물와 풍경을 담아내는 방식이 마
다. 사이먼의 정체가 밝혀지는 결말이 다소 급작
정을 세세하게 담아냈다. 부끄럽고, 설레고, 당혹스럽지만 절실한 감정의 결이 세세하게 묘사돼 그 떨
치 TV 다큐를 연상시키듯 다소 전형적이고 기계
스럽지만 인간은 그 자체로 모두 특별하다는 핵
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과정을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작품의 시선이 그들의 마음을 더 와 닿게 만
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성급하게 마무리되는 결
심만큼은 또렷이 전달된다. 윤지원
든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맑은 정서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안겨준다. 김나현
말도 꽤 아쉽다. 고석희
프랭크
좀비스쿨
히마와리와 나의 7일
플러스 원
감독 레니 에이브러햄슨 출연 마이클 패스벤더,
감독 김석정 출연 백서빈, 하은설, 김경룡, 김승
감독 히라마츠 에미코 출연 사카이 마사토, 나카
감독 데니스 일리아디스 출연 라이스 웨이크필
돔놀 글리슨, 매기 질렌할, 스쿠트 맥네이어리 장
환 장르 공포, 액션 상영 시간 87분 등급 청소년
타니 미키 장르 드라마 상영 시간 118분 등급 전
드, 애슐리 힌쇼, 수잔 덴젤, 콜린 덴젤 장르 SF,
르 코미디, 드라마, 미스터리 상영 시간 95분 등
관람불가 개봉일 9월 25일
체 관람가 개봉일 9월 25일
스릴러 상영 시간 95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급 15세 관람가 개봉일 9월 25일
줄거리 문제아 고교생 정식(백서빈), 혜나(하은
줄거리 유기동물 구조 업무를 맡고 있는 쇼지(사
개봉일 9월 25일
줄거리 뮤지션을 꿈꾸는 존(돔놀 글리슨)은 우연
설) 등은 외딴섬의 학교로 도피하듯 전학 간다.
카이 마사토)는 입양되지 않는 유기동물은 살처
줄거리 데이비드(라이스 웨이크필드)는 여자친구
히 5인조 밴드 ‘소론프르프브스’에 합류한다. 언
어느 날 교장(김경룡)은 학교 근처를 배회하는 돼
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딸과 소원해진다. 그의
질(애슐리 힌쇼)의 오해를 풀기 위해 파티장을 찾
제나 우스꽝스러운 탈을 쓰고 지내는 프랭크(마
지에 물린 뒤 좀비로 변해 교사와 학생들을 물기
앞에 떠돌이 개 히마와리가 나타난다.
는다. 정체불명의 유성이 그 시각 마을에 떨어지
이클 패스벤더)가 이끄는 밴드다.
시작한다.
별점 ★★★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은 개가 한 사
면서 조금 전의 과거가 현재에 공존하게 된다.
별점 ★★★ 겉모습만 보면 괴짜 같은데, 알고 보
별점 ★★☆ 좀비물과 학원물을 적절히 결합해 장
람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죽음의 문턱 앞에서 다
별점 ★★☆ 과거의 시간이 현재를 따라잡는다
면 자상한 성격과 천재적인 음악성을 지닌 프랭
르적 쾌감을 선보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좀비들
시 인간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단순한
는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등장인물들은 불과 몇
크. 그의 별난 매력을 어디까지 극대화하느냐가
이 기괴하게 튀어나오는 장면에서는 한국영화에
스토리지만 묵중한 울림이 있고, 여운도 길게 남
분전의 자신과 마주치고, 또 다른 자신을 없애야
이 영화의 관건인 셈이다. 전반부는 그렇다. 앨범
서 보지 못했던 신선함이 느껴진다. 아쉬운 건 학
는다. 인간과 반려동물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
한다는 이들의 불안과 갈등이 팽팽하게 그려진
녹음을 위해 합숙을 하면서 존은 점점 프랭크를
원 드라마 부분이다. 특히 극 초반 수학 교사(박재
는지, 나아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
다. 두 주인공의 로맨스도 잘 녹아들었다. 그러나
동경하게 된다. 한데 후반 들어서는 마치 다른 얘
훈)와 아이들이 대립하는 장면은 상당히 난폭하게
한 메시지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유기견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는 개연성 있는 설명 대신
기를 펼치듯 탈을 벗은 프랭크의 진짜 모습을 슬
그려지는데, 왜 그렇게 묘사되어야 하는지 이유가
살처분에 대한 묘사는 수많은 유기동물이 처한
엉성하게 넘어가려는 설정이, 조악한 특수효과와
프게 그려낸다. 그 흐름이 다소 어색하다. 장성란
불분명해 사족 같다는 인상이 강하다. 김나현
냉혹한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정현목
어설픈 액션이 아쉽다. 고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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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제6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만난 감독들
개막작 ‘울보 권투부’ 이일하 감독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줄곧 다큐를 전공했다. 그 시작이 궁금하다. “예전부터 사
무거운 현실도 유쾌하게
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왜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지?’ ‘나와 남들의 생각은 왜 차이가 날까?’ 생각하곤 했다. 대학 시절 영상 과제를 할 때면 이상하게 사회성 있고 비판적인 내 용만 찍게 되더라. 교수님이 간단하게 ‘너는 다큐야’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다큐인가 보
이기면 기뻐서 울고, 지면 분해서 운다.
다’했다(웃음).”
‘울보 권투부’는 인터하이, 즉 일본 고교 권투 선수들의 꿈인 전국대회를 향한
-재일 조선인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처음 다큐를 공부할 때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도쿄조선학교(이하 도쿄조고) 권투부 학생들의 도전을 다룬다. 2000년대 초부터
이 무거운 주제를 내가 영화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동안 감히 찍지 못했다. 재
일본에서 유학해 다큐멘터리를 공부한 이일하(40) 감독은 학생들의 투지와 열정을 밝고 명랑하게 담아내면서 일본 사회의 재일 조선인 차별 문제도 놓치지 않는다 고석희 기자 mulderfox@joongang.co.kr 사진= 김진솔(STUDIO 706)
일 조선인은 동북아시아 역사의 산 증인이다.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 한국·일본·북한의 정 치가 다 얽혀 있다. 세 나라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한다. 온갖 피해와 차별을 감수하면서도 4, 5세 대에 걸쳐 우리나라가 좋다는 그들에게 늘 미안하고 감 사했다. 그들의 울분을 권투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밝고 따뜻한 색감의 화면, 역동적인 카메라 움직임 등 공들인 촬영이 돋보인다. “나는 촬영을 잘하는 감독 이 되고 싶다. 요즘은 이야기 중심인 영화들이 영화 시 장을 잠식했지만 그 시작은 영상 그 자체다. 화면 안에 서 벌어지는 색깔의 조화나 구도의 변화, 물체의 움직임 등등이 영상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으로도 메 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그러니까 촬영 잘해야지(웃음).” -도쿄조고 권투부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권투 하나에 목숨을 건 아이들이다. 프로가 되기 위해 하는 건 아니다. 좋으니까 하는 거다. 한국 고등학생들은 매일 공부만 해야 하는 데, 이런 게 진짜 고등학교 생활 같았다. 코치 선생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다. 이십 명쯤 되 는 아이들의 펀치를 받느라 늘 손이 골절된 상태에서도 그걸 다 해낸다. 도쿄조고 교사의 급료는 고교생 아르바이트 수준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하는 거다. ‘우리 애들이 우리 말 배우겠다고 올라오는데, 내가 돈 조금 더 벌겠다고 다른 데 갈 수 없다’는 생각에.” -조선학교와 재일 조선인들의 차별받는 현실도 두드러진다. “일본의 모든 고등학교가 무상교육 혜택을 받는데, 조선학교는 일부러 예외 조항을 만들어서 뺐다. 조선학교 학생과 가족들은 똑같이 세금을 내는데도.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일본 사회가 갈수록 우경화 되고 있다. 다큐 첫 장면처럼 일본 우익세력이 거리에 나와 ‘조선인은 물러가라’고 위협하 는 게 현실이다. 학생들은 아직 잘 모른다. 지금은 학교가 보호해주니까. 졸업 이후가 더 중 요하다는 코치 선생님 말처럼, 졸업하면 혼자 일본 사회의 현실과 싸워가야 한다.” -무거운 문제를 밝고 유쾌하게 다뤘는데. “무겁고 보기 힘든 다큐는 나 역시 보기 싫다. 청춘물처럼 발랄하게 만들려 했다. 나는 데스메탈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팝 메 탈처럼 만들자는 느낌으로 찍었다. 소재도 무거운데 톤까지 무겁게 가면 힘드니까.” -관객들이 특히 눈여겨봤으면 하는 점은. “조선학교 아이들의 파릇파릇한 청춘을 느꼈 으면 한다. 자신의 불리함을 드러내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한때는 우리가 버렸던 사 람들을 좀 더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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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인물과 배경과 주제는 달라도 하나같이 속 깊은 이야기로 큰 울림을 주는 다큐 세 편이 있다. 감독들을 제6회 DMZ국제다큐영화제(9월 17~24일)에서 만났다.
한국경쟁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진모영 감독
진정한 부부의 의미를 담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 경력이 17년이다. 어떻게 첫 장편 다큐를 찍게 됐나. “10년 가 까이 제작사를 운영했다. 회사가 커지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계속 그렇게 살면 내 작 품을 만들기보다 남의 작품을 관리하는 일만 할 것 같았다. 창작에 집중할 생각으로 2011년 아예 회사를 그만뒀다.”
‘공무도하가’는 강물에 빠져 죽은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황망한 심정을 담은 고대 가요다.
-이 노부부의 사연은 앞서 TV에서 여러 차례 다
진모영(44) 감독은 그 마음이 단박에 와닿을 거란 생각에서 공무도하(公無渡河)를
뤄졌는데. “내 차기작인 ‘이방인’의 탈북자 잠수부도
우리말로 풀어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이 다큐의 제목으로 삼았다.
이미 미디어에 노출된 사람이다. 나는 연애할 때와
각각 98세, 89세로 76년 넘게 해로한 조병만 할아버지와 강계열 할머니가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 사계절의 풍광 속에 먹먹하게 그려진다.
비슷하게 소재에 꽂히곤 한다. 해보고 싶은 소재가 생기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생각하는 식이다. 소재는 물과 같다. 담는 그릇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 두 분의 생활을 ‘인간극장’(2000~, KBS1)은 희극적으로 그렸고, ‘짝’(2011~2014, SBS) 에서는 예능으로 녹였다. 내 목표는 세상의 부부들 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것이었기에 그들이 사별하는 과정에 집중했다.” -촬영 기간은. “2012년 10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1년 2개월에 걸쳐 찍었다. 두 분의 집 과 가까운 교회에서 숙식하며 생활했다. 시골은 새벽 여섯 시면 일어나니까 아침에 두 분 이 뭘 하는지 들여다보고 밤늦게 그 집에 불이 꺼질 때까지 찍으면서 사계절을 보냈다.” -두 사람의 금슬이 어찌나 좋은지 연기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게 본 모습이 냐 아니냐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카메라에 좋게 나오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할머니 는 손자뻘 되는 사람이 서울에서 내려와 찍겠다는데 뭔가 도와줘야겠다는 책임감도 있었 다. 할머니가 상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 할아버지와 산나물을 캐러 갈 수도 있는 일이다. 거기다 대고 ‘연기처럼 보이니 그러지 마세요’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두 분을 오래 보다 보면 원래 저런 사람들이란 걸 알 수 있을 거다.” -다큐 초반이 노부부의 단란한 일상을 그린다면, 후반부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준 비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따라간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찍겠다고 따라다니진 않 았다. 할머니에게 ‘여행은 언제 가십니까’ ‘병원에는 언제 가보실 생각이세요’ 등등을 묻고 촬영 스케줄을 잡았다. 대화가 굉장히 많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1년 365일 주 인공을 따라다녀야 하니까. 찍는 사람은 그럴 수 있지만 주인공은 힘들어서 죽을 거다. 의미 있는 장면을 놓치지 않게 미리 의논해야 한다.” -노부부를 통해 가장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라면. “부부의 이야기다. 나는 첫 결혼 에 실패했다. 불화나 이혼 과정이 사람을 참 피폐하게 만들더라. 물론 그 과정도 인생이다. 그렇지만 부부로 사는 동안 서로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모범은 있을 수 있다. 두 분은 나이 들어서도 서로 반말하지 않고 존대했고, 마지막까지 상대를 챙겼다. 행복한 노부부 의 모습에서 힌트를 하나라도 얻었으면 좋겠다.” -할머니도 영화제에 오시나. “할머니와 가족들이 올 수 있게 차편과 숙소도 준비해 놓았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 영정 사진도 챙겨오시라고 말씀드렸다. 사람들에게 처음 영화를 보여주는 자리이니 할아버지도 함께 앉아서 보시라고.” 고석희 기자 13
인터뷰│제6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만난 감독들
국제경쟁 ‘그리고 우리에겐 오늘이 없다’ 세바스티안 브람슈버 감독
-이전에 실험영화 작업을 했다고 들었다. “문학으로 치면 고전보다 현대문학에 가까운
역사를 모르는 10대들에게
영화가 좋다.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영화학교가 아닌 예술학교에서 무대 미술을 전공했다. 영상 푸티지를 재조합하는 실험영화를 계속 만들다 보니 늘 컴퓨 터 앞에만 앉아 있는 게 답답했다.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욕망에 다큐를 찍
‘그리고 우리에겐 오늘이 없다’(영제 And There We Are, in the Middle)의
게 됐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탐구한다는 측면에서 나와 꽤 잘 맞는 장르다.”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나치의 포로 수용소가 있었던 오스트리아의
-이 다큐의 출발점은 5년 전 사건이 안긴 충격이다. “이 마을에선 매년 포로 수용소 희
작은 마을 에벤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바스티안 브람슈버(33) 감독은
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2009년 5월 추모 행사 도중 복면을 쓴 10대들이 난입
이 마을에 사는 10대들의 일상을 차분하게 따라가며 5년 전 벌어진 사건이 이 마을과 오스트리아 사회에 남긴 후유증을 섬세하게 짚는다.
해 나치 구호를 외치며 플라스틱 탄환이 장전된 공기총을 쐈다.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 만, 사건의 주체가 10대들이다 보니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 게 됐는지, 원인이 무엇인지 탐구하다 이 다큐를 만들게 됐다.” -사건의 어떤 부분에 끌렸나. “일단 에벤제는 내 고향과 매우 가까운 곳이라서 애착이 갔다. 흥미로웠던 건 이 마을이 그 사건에 대처하는 방식이 전쟁이 끝난 뒤 오스트리아가 나치 문제를 대한 방식과 굉장히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그 런 악마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직시하기 싫은 거다. 내 할아버지와 증조 할아버지 도 전쟁 당시 나치의 편에서 싸웠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던 분이다. 그런 극악무도한 집단에 연루됐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사건을 재구성해 보여주는 대신 아이들이 이를 기억하는 방식에 주목하는데. “5년 전 사건을 기점으로 아이들의 삶을 유추해보고 싶었다. 오스트리아에선 아직도 역사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취직·진학 등 여러 생각이 많은 10대들이지만 어떻 게 과거를 기억해야 할지 누군가 짚어주지 않는다면 이 사회의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 얼마 나 힘든지 얘기하고 싶었다. 나치에 협력한 할아버지를 둔 나도 10대 시절 학교에서 나치의 악행에 대해 배우며 평생 죄의식을 갖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힘든 경험이었지만 10대 시절이라면 그릇된 역사 의식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역시 인터넷을 중심으로 극우적 역사관을 지닌 젊은이들의 도를 넘은 언행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 상황은 잘 모르지만, 인격이 성숙하지 못한 10 대들은 늘 뭔가를 도발하려 한다. 어떤 행동들은 결 코 용납될 수 없다는 걸 아이들에게 확실히 일러주는 게 사회의 역할이다. 부모나 가족의 역할이 무척 중요 하다. 예컨대 나치에 우호적인 할아버지가 식탁에서 ‘미국 놈들이 우릴 죽였어’라고 하면 그 말은 아이에 게 깊게 각인된다. 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받더라도 이 미 형성된 이미지는 사실을 압도한다.” -적극적인 설명 없이 몇 발자국 떨어져서 관찰하는 느낌이라 관객마다 읽어내는 메시지가 다를 것 같다. “어느 한 쪽으로 관객을 몰거나 가르치는 영화는 아니다. 생각할 거리는 제공하되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는 관객의 몫이다. 한국 관객들은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킬 수도 있을 것 같 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해외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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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희 기자
커버스토리
‘슬로우 비디오’
차태현인 듯,
평범한 외모에 비범한 능력을 지닌 남자가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마치 느린 화면처럼 볼 수 있는 이른바 동체 시력의 소유자인 여장부(차태현)다. ‘슬로우 비디오’(10월 2일 개봉, 김영탁 감독)는 남들과 다른 능력 때문에 세상에서 고립된 삶을 살던 여장부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용기를 내어 점차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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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태현스럽지 않게
‘헬로우 고스트’(2010)에서 호흡을 맞춘 김영탁 감독과 차태현(38) 콤비의 두 번째 영화다. 동화 같은 영상미와 포근한 정서 그리고 경쾌한 웃음이 이 영화의 삼박자다. 무엇보다 차태현의 변화가 보인다. 그동안 코믹한 이미지에 몰두해 온 그가 이번에는 절제된 연기를 시도했다. ‘차태현스러움’을 살짝 내려놓고, 새로운 역할에 도전한 그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볼 시간이다. 지용진 기자 windbreak6@joongang.co.kr 사진= 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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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슬로우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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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우 고스트’에 이어 김영탁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췄는데. “탁 감독이 나와 코드가 잘 맞는다(차태현은 김영탁 감독을 ‘탁 감독’이라 부른다. ‘김 감독’
은 너무 많다는 게 이유다. 두 사람은 동갑이다). 조금 마이너리티한 감성도 그렇고, 따뜻한 감성도 잘 통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모습이라면. “지금까지 상업영화를 해오면서 주로 코믹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관객들은 ‘차태현스러
움’을 ‘코믹함’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이번에 맡은 여장부라는 인물은 그동안 연기해 온 ‘차태현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독특한 소재도 마음에 들었고.”
-설정이 독특하다. 여장부가 동체 시력, 즉 어떤 찰나를 마치 느린 화면처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점이 신선하다. “배우로서 욕심
났던 대목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동체 시력이라는 증상을 앓고 있는 남자의 멜로다. 하지만 최루성 멜로도, 밝고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도 아니다. 분명한 건,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훈훈한 웃음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는 점이다.”
-극 중 여장부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등장한다. 눈을 제외한 표정과 절제된
말투만으로 인물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을 것 같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연기를 해야 하니 표정을 짓는 데도 한계가 있고, 말을 할 때도 불
편했다. 무엇보다 관객들이 선글라스 낀 모습을 답답하게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장부가 주변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선글라스가 꼭 필요한 장치라고 봤다.”
-몇몇 장면은 마치 동화의 한 페이지 같다. 동체 시력의 장점을 살려서 떨어지는 은행잎을 붙잡아 짝사랑하는 봉수미(남상미)에게 주는 모습도 그렇고.
“배우들은 상황을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읽곤 하는데, 그 장면이 유독 인상에 남았다. 한 남자의 순수함 같은 것도 보였고. 이 영화의 미덕 중 하나가 바로 그런 따스한 정서다. 출연을 결심한 것도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과 연기하면서 어떤 힐링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촬영을 하면서 힐링이 됐나. “사실 촬영 전 술자리에서 탁 감독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나리오가 엉망이면 출연 안 하겠다고. 다행히 시나리오
가 엉망은 아니더라(웃음). 무엇보다 화면을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몇몇 장면들이 아주 예쁘게 나올 것 같았다. 연기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의리’로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 건 무슨 이야기인가. “‘바보’(2008, 김정권 감독)를 만들었던 제작진이 다시 뭉쳐 ‘슬로우 비디오’를 만들었다. ‘바보’가 개봉
하고 그 제작진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배우로서 해줄 게 없었다. TV 드라마는 시청률이 바로바로 나오니 결과가 좋지 않으면 식사를 대접하는 등 뭐라 도 할 게 있지만, 영화는 촬영을 마치고 개봉 때까지 기다리면서 배우로서 할 게 별로 없다. 그래서 흥행 성적이 좋지 않으면 제작진에 미안한 마음이 크다.” -‘슬로우 비디오’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 이십세기폭스의 자회사인 폭스인터내셔널프러덕션이 투자한 영화다. 혹시 이 영화가 할리우드 진출의 발판이 되진 않을까. “솔직
히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직까지 다른 아시아 지역 진출도 버겁다(웃음). 예전에는 주연 배우가 목표였다면 이제는 죽을 때까지 연기하는 게 목표다. 할리우드 진출은 너무 머나먼 얘기다. 영화 시작 전에 이십세기폭스의 로고송이 흐르는 게 신기하긴 했다(웃음).”
-악역을 맡은 적이 없다. 기회가 없었던 건가. “캐릭터 변화를 요구
하는 시나리오가 안 들어 온 건 아니다. 물론 악역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형적이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스타일리스트 엄호정 헤어 지경미 메이크업 이다영 의상 협찬 andew, the lab, 워모, 미소페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코믹한 역할만 해도 좋다. 예전에 극장에 무대 인사를 하러 간 적이 있는데, 어느 관객이 그러더라. ‘차태현 씨는 영화 속에서 안 웃기면 존재감이 없다’고.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과연 캐릭터 변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이라면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아직은 관객들이 원하는 연기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게다가 ‘슬로우 비디오’는 차태현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조금 은 변화를 준 셈이다(웃음).”
-잠재된 새로운 모습을 끄집어내는 건 배우에게 숙명 아닌가. “맞다. 하지만 때가 있는 것 같다. 친한 배우들 모임에 나
가면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어디에 속한 걸까. 잘생긴 배우? 연기파 배우?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때는 박중훈 선배 라인이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웃음). 내가 독특한 길을 걷고 있는 건 분명하다. 영화에 출연하면서 ‘해피선데이-1박 2일 시즌3’(KBS2)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도 출연하니.”
-올해가 데뷔 20주년이다. 감회가 남다르겠다. “그렇다고 하더라(웃음). 그동안 정상에 오른 적도 있고, 바닥으로 미끄러진 적도 있다.
정상에 올랐을 때, 바닥으로 내려가더라도 의연해지자고 다짐했는데 막상 상황이 닥치니 쉽게 안 되더라. 하지만 많은 것을 경험해 본 지금은 나에게 또 다른 시점이다. ‘슬로우 비디오’가 배우 차태현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시작이 되면 좋겠다.” 19
커버스토리 │‘슬로우 비디오’
“요즘 감수성이 풍부해진 것 같다. 울어야 할 타이밍이 아닌데 벌컥 눈물이 날 때도 많다.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점점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보다. 하하하. 웃는 일도 많아졌다. 오글거리는 상황도 그냥 웃어 넘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 감수성이 풍부해진다더니, 지금 딱 내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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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우리들의 행복한 영화 시간
ASIA
베트남 과 이라크 ,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희망
온순한 여인
마르단
키엣 르-반│베트남, 미국│100분│아시아영화의 창
바틴 고바디 | 이라크 | 114분 | 아시아영화의 창
도스토옙스키의 단편 ‘온순한 여인’을 베트남 현실에 맞춰 각색했다. 자살한 어린 아내
마르단은 이라크에 사는 쿠르드족 경찰이다.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짓눌려 있다. 어
린의 시신 곁에서 남편 티엔은 둘의 첫 만남부터 현재까지 돌이킨다. 부모님을 여의고
릴 적 괴한들의 공격으로부터 동생을 버리고 도망친 기억 때문이다. 마르단은 한 남자
이모들의 구박 속에서 힘겹게 살던 린은 시계방 사장 티엔의 청혼을 받아들지만 행복
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자신과 비슷한 일을 저지른 남성을 발견하
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티엔은 린이 자신의 돈만 보고 결혼한 것인지 의심하고, 린
고 예전 기억을 되돌아본다.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인 바틴 고바디 감독은 마르단이 트
은 점점 교회에 집착한다. 린의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긴장을 만드는
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의 과정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샅샅이 드러낸다. 다양한 인물
연출이 돋보인다. 덕분에 다소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가 흡인력 있게 다가온다. 베트남
들이 등장해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숨은 진실이 밝혀지면서 긴장감이 차곡차곡 쌓인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다. 마르단을 연기한 호세인 하산은 무표정한 얼굴 위로 어두운 내면을 그려넣는다.
김지석 프로그래머 “사랑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한 단면을 그린 작품.”
김지석 프로그래머 “트라우마 극복 과정을 능숙하게 풀어나가는 연출력이 일품.”
개막작
폐막작
군중낙원 도제 니우│대만│133분
갱스터의 월급날 리포청│홍콩│97분
‘군중낙원’은 1960년대 대만 군대에 있던 병
갱스터가 주인공이지만 비장한 액션 대신 코
영 내 공창을 이르는 말이다. 주인공인 신병 파
미디와 멜로가 돋보인다. 갱단 두목 웡캄퀘이
오는 공창 부대 ‘831’에서 매춘부 관리 업무
와 그가 좋아하는 식당 여주인 메이, 반대파
를 맡게 된다. 영화의 큰 줄기는 매춘부들과 사
조직에 살해당하는 부하 렁의 이야기가 펼쳐
랑에 빠지는 파오와 그 동료들의 이야기다. 그
진다. 메이 앞에서 수줍어하는 웡캄퀘이, 메이
속에 당시 대만과 중국의 관계, 군대 문화, 여성과 성에 관한 도덕 관념 등의 주제가 어우러진다.
의 가게에서 시시한 일을 돕는 부하들 등 귀엽고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이 전형적인 갱스터영
배우 출신 감독으로 흥행작 ‘맹갑’(2010)을 만든 도제 니우의 네 번째 장편영화다. 사적 경험을
화와 전혀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젊은 시절부터 홍콩 쇼브라더스 스튜디오에서 일했던 리포청
통해 대만의 근대사를 돌이킨다는 점에서 1980년대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감독이 그에게 익숙한 홍콩 갱스터영화를 변주해 독창적인 재미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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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1일 열리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는 79개국에서 온 314편의 영화를 선보인다. 그중에도 가장 주목할 것은 역시나 아시아 감독들, 특히 신진 감독들이다. 올해는 베트남·이라크 등 영화 산업이 비교적 덜 발달한 아시아 나라들에서도 눈에 띄는 작품을 여럿 발굴했다. 한국일본중국 등 아시아영화의 전통 강국도 건재하다. 유럽에서는 거장 감독들의 신작이 대거 초청돼 영화팬을 즐겁게 한다. magazine M 기자들이 미리 보고 확인한 추천작을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눠 소개한다. 프로그래머들의 한 줄 추천사도 곁들인다. 김나현·윤지원 기자 respiro@joongang.co.kr
* 감독 | 국가 | 상영 시간 | 섹션
여전히 건재한 일본 과 이란
식녀 쿠이메
테헤란의 낮과 밤
미이케 다카시│일본│94분│아시아영화의 창
락샨 바니에테마드│이란│88분│아시아영화의 창
‘착신아리’(2003) ‘크로우즈 제로’ 시리즈(2007~2009) 등 공포영화에서 남다른 연출력
하나로 모아지는 굵직한 이야기 대신 독특한 구성으로 이란 사회의 풍경을 세밀하게
을 선보인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신작. 남자 배우 코스케와 그의 애인 미유키는 일본의
그려냈다. 택시 손님, 택시 기사, 기사의 어머니 등의 순서로 여러 인물이 꼬리에 꼬리를
괴담을 각색한 연극의 주연을 맡아 연습 중이다. 각각 사무라이 이에몬 역과 그에게 버림
물며 등장한다. 택시 기사에게 몸을 팔려는 미혼모, 공장의 임금 체불에 관한 탄원서
받은 처 오이와 역을 맡았다. 그런데 둘의 관계도 점점 연극 내용처럼 변해간다. 코스케
를 내려는 문맹 할머니, 사회 복지 시설에 수술비를 신청하지만 거절당하는 전직 공무
는 신인 여배우와 가까워져 미유키를 멀리하고, 미유키는 자신을 오이와라 생각한다. 연
원, 남편의 학대로 얼굴에 화상을 입고 쉼터에 숨어든 여성 등이 그들이다. 이 사연들
극과 연극 바깥의 상황을 넘나드는 구조를 통해 미유키가 미쳐가는 모습이 섬뜩하게 그
의 조각에는 여성복지인권 등 이란의 여러 사회 문제가 녹아 있다. 이란의 여성 거장
려진다. 신체를 기괴하게 훼손하는 감독 특유의 묘사 역시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감독 락샨 바니에테마드가 사회를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이 돋보인다.
김지석 프로그래머 “미이케 다카시 공포영화의 진수.”
김지석 프로그래머 “테헤란의 인간 군상을 담아낸 바니에테마드 감독의 최고 걸작.”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허안화 감독 황금시대 허안화│홍콩, 중국│178분
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10년 동안 100권의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샤
1960년대부터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며 홍콩
오홍은 천부적인 글 솜씨로 루쉰 등 당대 최고 작가들과 우정을 나누며
영화 황금기를 주도한 여성 감독 허안화. 홍콩
자유롭게 살았지만 동시에 평생 외로움을 느낀 사람이기도 했다.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
허안화 감독의 예민하고도 사려 깊은 시선은 인간 샤오홍의 상
한 그는 특히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춰 왔다.
처 어린 내면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창작을 향한 열정을 불
‘여인사십’(1994) ‘스턴트 우먼’(1996) ‘심플
태우는 작가 샤오홍의 모습을 고루 조명한다. 시나리오 집
라이프’(2011) 등에서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특유의 섬세한 시선으로 그려내 아시아의 대표적
필에만 2년 6개월이 걸린 데다 연기파 배우 탕웨이가 주인
인 여성 거장으로 꼽혀왔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를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로 선정하
공 샤오홍을 맡아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올해 베니스국제
면서 신작 ‘황금시대’를 함께 초청했다. 1930년대 격변기 중국에서 촉망받던 여류 작가 샤오홍
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선보였다. 허안화 감독 23
기획│제19회 BIFF 추천작
올해도 부산영화제는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 유럽 거장들의 화제작을 여럿 선보인다. 그중에는 새로운 스타일과 함께 돌아온 거장도, 극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 거장도 있다.
EUROPE
거장의 귀환
이 땅의 소금
퀸 앤드 컨트리
빔 벤더스, 훌리아노 리베이로 살가도 | 브라질, 이탈리아, 프랑스 | 109분 | 와이드 앵글
존 부어만 |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루마니아 | 115분 | 월드 시네마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종횡무진으로 오가며 독특한 영화적 세계를 구축해 온 빔 벤
‘서바이벌 게임’(1972) ‘비욘드 랭군’(1995) 등의 대표작으로 존 부어만을 기억하는 관
더스 감독. 쿠바 음악에 관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1999), 무용가를 다룬 ‘피나’
객이라면 ‘퀸 앤드 컨트리’가 다소 의아할 수 있다. 폭력과 공포, 현실 비판을 주로 다뤘
(2011)에 이어 이번에는 사진이다. ‘이 땅의 소금’은 그가 존경한 브라질 사진작가 세바
던 전작과 달리 뚜렷한 적의 존재도, 갈등을 유발하는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
스티앙 살가도를 주인공으로 삼은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는 살가도가 촬영한 사진과
화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다. 자신의 유년 시절을 그린 ‘희망과 영광’(1987)의 주인공
그 사진을 설명하는 살가도의 내레이션으로 구성된다. 살가도는 이미지의 힘을 거듭
빌이 이번에는 20대로 등장한다. 배경은 1950년대 영국. 영국군의 교육병 빌은 동료 병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얻는 것”이다. 남미·아시아·
사 퍼시를 만나 우정을 쌓는다. 당시 영국군은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다. 하지만 이 영화
아프리카 등 여러 대륙을 오가며 촬영한 그의 사진은 그 자체로 누군가의 일상이자, 세
가 주목하는 건 참혹한 전쟁의 상황보다는 냉전시대의 이념전을 바라보는 젊은이의
계사의 일부분이다. 살가도의 사진첩 속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역사 여행을 하는 기분
회의감, 그리고 사회적 격동기에도 사랑과 낭만의 꿈을 잃지 않는 청춘의 감성이다.
이 든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을 수상했다.
박도신 프로그래머 “전작과 달리 부어만 감독이 힘을 빼고 만든 영화. 코믹적 요소까지
박진형 프로그래머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드라마로 가득한 살가도의 사진들.”
겸비한 점이 인상적.”
조지아 특별전:여인천하 - 조지아 여성 감독의 힘 조지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한 국가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구소련 연방에서 독립했지만 2008년 러시아와 군사적 충돌 을 겪은 후 현재까지도 심각한 경제적 후유증을 겪고 있다. 조지아영화는 이런 시대 상황을 영화에 녹여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영화계는 이를 ‘조지아 뉴웨이브’란 하나의 현상으로 포착한다. 흥미로운 점은 조지아영화를 주도하는 감독이 모두 여성이란 사실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소개하는 열두 편 역시 모두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다. 루수단 츠코니아 감독의 ‘미소는 나의 것’은 조지아 마더 미인대 회에 출전한 극빈층 여성들을 다룬다. 대회 당일까지 연이어 터지는 각종 스캔들은 경제적 고통과 성차별이란 이중고를 겪는 조지아 여성 의 현실을 풍자한다. 티나틴 카즈리슈빌리 감독의 ‘신부들’은 남편이 교도소에 수감된 뒤 남은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다. 자전거 절도로 14
미소는 나의 것
년 형을 선고받는 등 사법 체계가 무너진 조지아의 현실이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3대에 걸쳐 연출가로 활동하는 조지아의 여성 영화 감독 3인의 작품도 만나 볼 수 있다. 조지아 의 최초 여성 감독 누차 고고베리제의 ‘부바, 라차산 봉우리에서’, 그의 딸 라나 고고베리제의 ‘낮은 밤보다 길다’ 그리고 손녀 살로메 알렉시의 ‘펠리시타’가 그것이다. 나나 에크브티미슈빌리와 시몬 그로스 감독의 ‘인 블룸’은 두 소녀의 우정을 다룬 작품으로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예술영화관연맹상(CICAE)을 수상했다. 24
물론 유럽영화의 미래를 책임질 신예 감독이나 새로운 거장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흐름을 보여줄 영화들을 미리 보고 소개한다.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조지아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는 터키영화 특별전도 눈여겨볼 것. 유럽영화의 미래를 부탁 해
리바이어던
이것이 룰
안드레이 즈비야진체프 | 러시아 | 141분 | 월드 시네마
오그넨 스빌리치츠│크로아티아, 프랑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78분│월드 시네마
지금 세계 영화계가 가장 주목하는 러시아 감독을 꼽으라면 이 사람, 안드레이 즈비야
교외에서 한적한 삶을 보내는 이보와 마야 부부. 둘의 조용한 일상은 고등학생인 외아
진체프일 것이다. 그는 2003년 데뷔작 ‘리턴’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
들 토미카가 또래에게 폭행을 당하고 돌아오면서 깨진다. 며칠 뒤 토미카는 불시에 쓰
았다. 이후 발표한 세 편의 장편 모두 칸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 ‘리바이어던’은 올해 칸
러져 의식을 잃고 입원한다. 부부는 속 타는 마음을 누르며 토미카의 친구, 경찰서 등
영화제 경쟁 부문 각본상을 받은 작품이다. 자동차 수리공 니콜라이의 땅을 시장 바딤
을 찾아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려 하지만 아들은 이틀 만에 숨져버린다. 이 모든
이 강압적으로 압류하려고 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민들을 ‘벌레’라고 부르는 바딤
과정이 무척 건조하고 객관적으로 표현되어 극의 긴장감을 묵직하게 끌어올린다. 부당
은 권력지향적 면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현 푸틴 정권의 부
한 일이 생겼을 때 병원도, 경찰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아 당사자는 속수무책으로 있어야
패와 비민주적 행태를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감독의 의중을 느낄 수 있다. 니콜라이의
하는 답답한 현실이 특히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올해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에
집 뒤로 펼쳐지는 러시아 북부 지방의 광활한 풍경은 가슴이 시리도록 차갑고 아름답다.
초청돼 호평을 받은 작품.
박진형 프로그래머 “페레스트로이카(1980년대 고르바초프 정권이 실시한 개혁 정책)
이수원 프로그래머 “사회 비판적 시선이 돋보이는, 크로아티아영화의 높은 수준을 말
이후 현대 러시아 사회의 잔인한 초상.”
해주는 작품.”
터키 특별전:뉴 터키 시네마-21세기의 얼굴들 올해는 터키영화 탄생 100주년의 해다. 부산영화제는 이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마련했다. 올해 터키영화는 특히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의 ‘윈터 슬립’이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면서 그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터키영화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 았다. 재현과 이미지 숭배를 금하는 이슬람 문화는 영화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됐다. 본격적으로 터키영화가 성장한 것은 1960년부터. 이후 20년 동안 약 300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영화 산업이 꽃을 피웠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에 등장한 터키 감독들의 작품 일곱 편을 상영한다. 우구르 유젤 감독의 ‘콜드’는 뛰어난 영상미가 돋보이는 영화다. 철도원 발라베이가 러시아 매춘 부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러시아 매춘부들의 삶과 남편에게 학대받는 터키 여성의 처지가 실감나게 펼쳐진다. 이외에도
콜드
중산층의 허세를 꼬집는 코미디 ‘젤랄 탄과 그 가족의 극단적인 비극’(오누르 운루 감독)과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도플갱어를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나는 그가 아니다’(타이푼 피르셀리 모글루 감독), 술집이 문을 닫기로 결정하자 단골 손님들이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드라마 ‘블랙 앤 화이트’(아멧 보야치오글루 감독) 등 다양한 소재의 영화가 포함됐다. 올해 칸과 베를린에 소개된 ‘윈터 슬립’과 ‘희생양’(쿠툴룩 아타만 감독)은 월드 시네마 부문에서 만날 수 있다. 25
기획
괴상하지만 멋있어! 대체 불가능한 괴짜들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프랭크’(원제 Frank, 9월 25일 개봉,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 ‘더블:달콤한 악몽’(원제 The Double, 9월 25일 개봉, 리처드 아요데 감독) ‘초콜렛 도넛’(원제 Any Day Now, 10월 2일 개봉, 트래비스 파인 감독)은 모두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괴짜를 주인공으로 한 영 화들이다. ‘프랭크’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탈을 벗지 않는 프랭크(마이클 패스벤더), ‘더블:달콤한 악몽’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자신의 분신과 사랑의 경쟁자 가 되는 사이먼(제시 아이젠버그), ‘초콜렛 도넛’에서 홀로 남은 다운증후군 소년을 입양하려 하는 게이 루디(알란 커밍). 이들은 괴짜라 불리지만, 알면 알수록 우 리와 다름없으며, 오히려 더 매력적이고,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소중한 그 무엇을 깨우친다. 이 매력적인 괴짜들의 진면목을 들여다봤다.
직업 ‘소론프 르프브스 ’의 리더 작사·작 . 곡과 보컬 을 겸함.
5인조 밴 드
출신 미국 캔자스 블러프시티.
음악 성
실제 모델 영국의 뮤지션이자 코미디언이었던 크리스 시에비(1955~2010)가 무대 위에서 내세웠던 페르소나 ‘프랭크 사이드보텀’. 탈의 모양이 매우 흡사하다. 단, 이 영화의 내용은 허구로 꾸며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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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프랭 크’
어떤 주제로든 훌륭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양탄자에 일어난 작은 보풀도 그에게는
프 랭 크
이상한 탈에 감춘, 모두의 솔직한 얼굴
굉장한 음악적 영감이 된다.
프랭크가 어슴푸레한 무대에 올라 이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신이여, 정비소로 돌아간 부서진 포드를 도우소서 / 성장 환경 자기 얼굴을 드러내길 꺼리고 정신병이 있는 걸 보니, 가정 환경이 불우했을 거라고? 천만의 말씀.
장어 젤리, 터질 듯한 배, 가리비 구이, 주름진 피부….” 그것도 우스꽝스러운 탈을 쓴 채 뭐에 홀린 듯한 목소리로. 영국 의 바닷가 마을에서 홀로 뮤지션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존(돔놀 글리슨)이 프랭크에게 맨 처음 눈길을 주게 된 건 그 의 별난 겉모습과 행동 때문이다. 프랭크가 이끄는 ‘소론프르프브스’란 이상한 이름을 한 밴드의 작은 공연. 갑자기 빠 진 키보드의 빈자리를 메운 것이 인연이 되어 존은 이 밴드에 합류한다. 그가 프랭크의 특별한 능력을 알아본 건 그 다음이다. 정확히는 밴드 멤버 모두가 1년 가까이 시골 별장에 갇혀 앨범
그의 가정은 화목했다.
녹음에 매달리면서다. 밴드의 중심은 단연 프랭크다. 작사·작곡은 기본, 녹음의 전 단계를 지휘하는 것뿐 아니라 밴드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다.
오히려 활기를
프랭크를 이상하게 여긴 존이 밴드의 매니저 돈(스쿠트 맥네이어리)에게 프랭크의 탈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자 돈이
잃게 했다”는 게
말한다. “프랭크는 괴짜지만 믿을 수 있어. 누구보다 정신 똑바로 박힌 멋진 친구라고.” 마음이 비뚤어진 건 프랭크가 아
프랭크 어머니의 말씀.
니라 다른 사람들이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마음을 다잡아주는 것이 프랭크의 몫이다. 돈의 자살을 막은 것은 물론, 다른 밴드 멤버들에게 무시당하는 존에게 ‘넌 이 밴드에 꼭 있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해주는 프랭크. 변변찮은 노래만 작곡하는 존에게 프랭크의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하찮
특징
은 사물을 보고 훌륭한 노랫말을 만들어내고, 양동이에 물 떨어지는 소리를 음악으로 승화시키고,
절대 탈을 벗지 않는다. 신원 조회를 거칠 때도.
존이 만든 멜로디에 몇 가지 손길을 더하더니 근사한 노래로 탈바꿈시키는 프랭크. 존은 이제 프랭
정신병원에 있을 때는 탈을 벗기려는 간호사와
크를 닮고 싶어 한다.
몸싸움을 한 적도 있다. 왜냐고? 프랭크의 답은 이러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말에서 프랭크가 처음 존의 눈에 비친 대로 별난 괴짜도, 모두가 탄복할 만
“매끈한 피부, 구멍처럼 패인 눈, 혹 같은 코,
한 천재 음악가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건 존이 프랭크에게 걸었던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탈을 벗은
상처의 딱지 같은 입술로 이루어진 얼굴은 너무 이상하니까!”
프랭크의 모습은 그 기대에 전혀 부합하지 못한다. 존의 생각처럼 불우한 가정 환경도 아니고, 탈을 썼을 때만큼 자신만만하게 행동하지 못하며, 전처럼 훌륭한 음악을 작곡할 줄도 모른다. 그렇다. 프
랭크 역시 존과 우리처럼 나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무슨 탈을 쓰든, 그 탈이 무슨 마법을 부리든, 그것이 우 리의 진짜 얼굴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 슬픈 진실을 이 영화는 노래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솔직한(Frank) 얼굴이라
성향 닭고기 , 수프 고, 아무리 비참해도 그 얼굴을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고. ,새등 이 등장 하는 추 상적인 노랫말 이 어우 러진 사 이키델 릭록 음악.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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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체 불가능한 괴짜들
‘더블:달콤 한 악몽’
사 이 먼
인간 관계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인기남. 입사 첫 날부터
조금 찌질해도, 나의 모자람을 채워줄 남자
상사들은 젊은 천재라고 치켜세운다. 저질스러운 농담도
사이먼은 아침마다 회사 앞에서 안절부절못한다. 이 회사에서 7년을 일했지만 경비원이 그를 몰라보는 탓에 출입이 금
그가 하면 반응이 좋다.
지되곤 해서다. 매일 입고 다니는 베이지색 정장은 그의 인상을 더욱 평범하게 만든다. 말은 중언부언하고, 목소리는 기
퉁명스러운 레스토랑
어들어가며, 어깨도 축 처져 있는 그에게서 눈길을 끄는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사이먼이란
종업원도 유독
이름을 스탠리로 혼동하거나 7년째 신입사원으로 착각한다. 그에게 무관심이란 공기와 같은 일상이다. 그 역시 자신을
그에게만 친절하다.
“뻥 뚫린 투명인간” 같다고 말한다. 사이먼이 다니는 직장에 제임스가 입사한다. 그런데 웬걸. 제임스의 얼굴이 사이먼과 똑같다. 사이먼은 실신하기 직전 인데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다. 애초에 사이먼을 기억도 못하는 데다 둘의 성격이 180도 달라 같은 얼굴이란 걸 모르는 눈치다. 제임스는 직장 상사에게도 귀여움과 칭찬만 받는다. 자신감에 찬 그에게서 여자들은 성적 매력을 느낀다. 식당 에 없는 메뉴도 그가 주문하면 가져다 줄 정도다. 어딜 가도 주목받는 제임스는 사이먼이 동경할 만한 인물이다. 그가 상 상 속에서 그려봤던 완벽한 분신일지 모른다.
직업 사이먼이 다니는 회사의 신입 사원. 예전 직장에서 ‘바퀴벌레도 살아남지 못한’ 정리해고 때 유일하게 일자리를
하지만 제임스에겐 양면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이용해 이기적인 행동을 한다. 상사에게 예쁨 받기 위
지킨 바 있다.
해서라면 남이 쓴 보고서를 훔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양다리 걸치는 일은 예사다. 사이먼은 제일 큰 피해자다. 제임스는 사이먼의 짝사랑 상대 한나(미아 바시코프스카)의 마음을 훔치는 한편, 다른 여자와 섹스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 해 사이먼의 아파트 열쇠까지 빼앗는다. 상사의 딸과 하룻밤을 지내놓고는 사이먼이 한 일이라며 누명을 씌우기도 한다. 위기의 순간, 사이먼의 참모습이 드러난다. 제임스의 바람기 때문에 상처받은 한나를 군말 없이 돌보아 준다. 한나가 흐 느낄 때면 같이 눈물을 흘린다. 사이먼은 제임스가 모르는 한나의 슬픔까지 알고 있다. 파티장에선 대화에 끼지 못해 나 무 인형처럼 얼어 있고, 집에서도 홀로 밤잠을 설칠 만큼 극심한 그녀의 외로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이먼은 늘 외로운 사람 곁에 있었다. 치매 걸린 노모를 극진히 보살피고, 직장 상사의 딸이자 사춘기 반항아 멜라니(야스민 페이지)의 말동무를 해준다. 고독을 아는 사이먼에게 타인의 외로움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다른 이의 아픔을 만져줄 만큼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다. 설령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그는 부지런
고 다말 을먹 밥 . 기 꼬이 여자 미 취
게 자에 블여 이 옆테
. 정도 던질 를 추파
히 고독한 사람 곁을 맴돌았다. 결말에서 한나가 제임스가 아닌 사이먼의 손을 붙잡는 것도 충분히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모자람을 채울 완벽한 분신을 상상한다. 하지만 감독은 말한다. 주변을 돌아보라고. 세상엔 불 완전한 사람 그래서 고독한 사람, 잊히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손을 붙잡지 않겠 느냐고. 이제 이 물음에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윤지원 기자 knjesus@joongang.co.kr
성격 솔직하다. 예쁜 여자가 보이면 일단 말부터 걸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주먹을 날릴 정도로 배짱도 두둑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모함하거나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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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특징
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는다.
사이먼과 똑같은 얼굴에 옷, 머리 모양,
이상하게 그가 타기만 하면 회사 엘리베이터가 고장난다.
목소리까지 같다. 단, 시원시원한 말투와 자신감에 찬 걸음걸이는 사이먼과 정반대. 고장난 엘리베이터도 그가 타면 작동한다.
사이먼
인간 관계 애인, 친구, 가족 누구 하나 친한 사람이 없다. 직장 동료는 그를 두고 “없는 사람 같다”고 말한다.
직업 정보처리 시스템 을 개발
하는 회사에 7년째 근무 중.
제임스
성격 트리플 A 소심남. 텅 빈 지하철에서 굳이 자리를 빼앗으려는 남자에게 군소리 없이 자리를 내어줄 정도.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기절한다.
취미 앞 건물에 사는 직장 동료이자 짝사랑 상대 한나를 망원경으로 훔쳐보기. 쓰레기통을 뒤져 한나가 버린 종이 조각을 맞춰 보관한다. 애잔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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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대체 불가능한 괴짜들
성격 엄청 급하고, 아주 심한 다혈질. 마르코를 데려가지 말라며 다짜고짜 소리를 지를 때는
꿈
눈에 광기가 어린다. 그러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따뜻하다.
사랑하는 연인 폴, 친자식 같은 옆집 아이 마르코와 셋이서 함께 알콩달콩 사는 것.
폴에겐 애교 만점이고,
초콜릿 도넛을 좋아하는 마르코의 건강이 상할까 늘 노심초사다.
잠자리에 든 마르코에겐 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다른 꿈은 밤무대를 벗어나 제대로 된 무대에서 멋지게 노래하는 가수가 되는 것.
사랑이 큰 만큼 질투심도 강하다. 폴이 이성애자인 척하며
마르코의 진짜 아빠가 되기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다른 여자와 즐겁게 얘기하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한다.
배경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에서도 목이 달아나던 시절이다.
직업
장 추는 여 래하고 춤 노 서 게이바에
실제 모델 시나리오 작가 조지 아서 블룸이 이웃에 살던 게이 남자 루디의 사연에 영감을 받아 이 이야기를 썼다. 입양과 소송에 대한 부분은 허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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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초 콜렛 도넛’
루 디
내 아이에겐 따뜻한, 다혈질 게이 가수 루디는 오늘도 클럽에서 요란하게 공연 중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남자를 꼬이고 있다.
특징
그가 눈을 마주치고 윙크를 날리면 백발백중, 남자들이 휙휙 쓰러진다. 루디는 매사에 자신
스타일도 요란하지만 행동은 더 요란스러운 동성애자.
감이 넘치다 못해 약간 미친 듯 보일 정도다. 오늘밤도 한 명 걸렸다. 멀쑥해 보이는 훈남 검사
특히 여장을 하고 무대에 설 때가 최고다.
폴(가렛 딜라헌트)이다. 첫눈에 반한 둘은 뜨거운 밤을 보낸다.
그럼에도 묘하게 사람을 홀린다. 무엇보다 근거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루디를 기다리고 있는 건 집세를 내라는 집주인의 독촉뿐이다. 주
자신감이 넘친다. 너무 큰 코가 콤플렉스일 법도 한데,
변에선 루디가 가난한 데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은근히 멸시하는 눈치다. 그런 루디의 눈
정작 자신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에 옆집 사는 소년 마르코(아이작 레이바)가 들어온다. 늘 약에 찌들어 마르코를 방치해 온
애인과 함께 음란한 짓을 하다 경찰에 걸렸을 때도
엄마가 약물 때문에 경찰에 잡혀간 날, 루디는 마르코를 가만 바라본다. 인형을 꼭 끌어안은
주눅 같은 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총 맞을 뻔한다.
채 누구와도 말을 섞지 못하는 작고 뚱뚱한 다운증후군 아이. 루디는 연인이 된 폴과 함께 마르코를 돌보기 시작하고, 세 남자는 어느덧 가족이 된다.
이 행복은 마르코 엄마가 갑자기 친권을 찾겠다고 나서면서 산산조각 나고 만다. 루디와 폴은 지난한 양육권 소송을 시작하지만, 세상은 이들이 동성애자 커플이란 이유로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약물 중독자인 친엄마보다 훨씬 따뜻하게 마르코를 보듬는 이들인데도 말이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루디는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마르코가 혼자 고통 받아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자기 잘못도 아닌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세상은 루디 커플을 ‘미친놈’ 취급하고 이들의 고통은 더 깊어진다. 꼭 그만큼 루디는 점점 더 재능 노래를 정말 잘한다. 립싱크 공연만 하기엔 솔직히 아깝다. 어렸을 적 얘기를 해달라는 폴의 부탁에 이야기 대신 노래를 해줄 정도로 센스 넘친다. 그러니 그의 마지막 무대를 꼭 눈여겨 볼 것. 밥 딜런의 명곡 ‘아이 쉘 비 릴리즈드(I Shall Be Released)’를 부르는 모습에 눈물 흘리게 될 테니.
빛난다. 그는 게이인 사실을 끝까지 숨기려는 연인에게 스스로를 인정하라며 이렇게 말한다. “마틴 루터 킹이 당신 같았 으면 흑인 차별은 여전했겠지.” 루디는 악의적인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과는 눈을 똑바로 마주친다. “당신들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나쁜 부모는 아니야!” 그는 묻는다. 과연 진정한 부모의 자격이란 무엇이냐고. 당신들의 시선으로 ‘미친놈’ ‘가난한 게이’일지 몰라도 누구 보다 마르코를 사랑하는 건 바로 자신들이라고. 그건 사실이다. 마르코의 특수학교 선생님이 “루디와 폴처럼 다정한 부 모는 보지 못했다”고 할 정도니까. 그리고 그의 물음은 편견과 증오와 차별이 여전한 지금 우리 사회에도 유효하다. ‘초콜렛 도넛’은 처음부터 끝까지 루디의 매력으로 웃기고 울리는 영화다. 그런 루디가 보는 이의 가슴에 온연히 스며 드는 건, 단연 배우 알란 커밍의 공이다. 트래비스 파인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루디는 위험하면서도 섹시하고 영리하고 재미있는 인물이다. 알란 커밍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가 결말을 향해 달려갈 때쯤이면, 관객도 폴의 말을 빌려 루디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질 터다. “당신은, 두려움이라는 게 없는 남자 같아. 정말 멋진 사람이야.”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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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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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굿 걸’ 다코타 패닝
스무 살, 소녀에서 여인으로 첫사랑은 누구나 거쳐가는 홍역 같은 것이다. 아무런 예고 없이 다가와, 잔잔한 마음에 회오리를 일으키고선 슬그머니 떠나 가 버린다. 릴리의 첫사랑도 마찬가지다. 깨질 듯 연약한 소녀의 마음에 격정의 흔적을 남긴 채 갑작스레 작별을 고한다. 하지 만 첫사랑을 앓은 모든 이들이 그렇듯, 릴리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아팠던 만큼 그의 내면은 더욱 단단해진다. 그렇게 소녀 는 여인이 돼가는 법이다. 화려한 아역 스타로 출발해 방황하는 청춘의 아이콘 시절을 거친 다코타 패닝(20)도 그렇다. ‘베리 굿 걸’(9월 25일 개봉, 나오미 포너 감독)에서 그는 서툴지만 설레는 첫사랑을 겪는 스무 살 소녀 릴리를 연기하며 성인 연기자로서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아이 엠 샘’(2001, 제시 넬슨 감독)에서 일곱 살이란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야무진 연기를 선보였던 그가 어느덧 사랑이란 감정을 다룰 줄 아는 여배우가 된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는 성장영화의 전형적 문법을 따라간다. 한 남자를 동시에 좋아하는 두 소녀, 갑자 기 닥쳐오는 불행한 가족사,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등등. 틀에 박힌 듯한 얘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다코타 패닝의 섬세한 내면 연기다. 릴리는 제리(엘리자베스 올슨)와 둘도 없는 단짝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맞이한 첫 번째 여름, 이들은 뉴욕의 해변에서 마주친 데이비드(보 이드 홀브룩)에게 동시에 마음을 빼앗긴다. 제리는 적극적으로 데이비드에게 마음을 표현하지만, 정작 데이비드의 마음은 릴리를 향한다. 릴리 역시 데이비드를 향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든다. 하지만 둘의 교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제리의 감정 또한 더욱 깊어져간다. 릴리는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을 느낀다. 다코타 패닝은 성숙해진 외모와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스무 살 릴리를 완 벽히 소화해냈다. 낯설고 당황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첫사랑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첫키스와 첫경험의 느낌을, 패닝은 소녀의 내밀한 일기장을 펼쳐보이듯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패닝이 이 영화를 찍은 건 2년 전. 극 중 릴리처럼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였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나 또한 릴리와 비슷한 인생의 국면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공감 이 갔다. 나뿐 아니라 모든 소녀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릴리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패닝의 말이 다. 패닝은 릴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청춘의 시간을 필름에 새겨 넣었다. 패닝은 과감한 노출과 러브신까지 소화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도입부에서 릴리와 제리는 대낮에 넓은 해변에서 사람 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체로 바다에 뛰어든다. 자유를 갈구하는 청춘의 도발적인 모습이다. 릴리와 데이비드의 러브신 은 극 중 긴장이 가장 고조되는 대목이다. 릴리는 자신의 집 앞 창고에서 데이비드와 첫경험의 통과의례를 치른다. 릴리의 시 선으로 그려지는 러브신은 서툴고 어색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첫경험의 순간을 흡인력 있게 포착해낸다. 다코타 패닝은 올해 초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러브신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제 노출 연기가 허락되는 나이가 됐다. 사실 민감한 문제였 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과감하게 도전했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사진= 영화사 빅
나오미 포너 감독은 질렌할 남매의 어머니 ‘베리 굿 걸’로 감독 데뷔를 하기 전까지 나오미 포너(68)는 다양한 성장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성장영화의 표본, 청춘영화의 걸작이라 불리는 ‘허공에의 질주’(1988, 시드니 루멧 감독)로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수상한 게 대표적이다. ‘위험한 여인’(1993, 스티븐 질렌할 감독) ‘모정’(1995, 스티븐 질렌할 감독) ‘다섯 번째 계절’(2005, 스콧 맥게히·데이비드 시겔 감독) 등은 그가 시나리오를 쓴 작품들이 다. 섬세한 감성과 표현력, 가족 문제를 파고드는 예리한 시선이 그의 장기다. 배우 메기 질렌할(37)과 제이크 질렌할(34)의 어머니 이자, 진보적 정치 이념을 가진 영화인으로도 유명하다. ‘베리 굿 걸’ 역시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자신의 성(性)에 대해 궁금 해진 소녀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에서 풀어내고 싶었다”는 게 그의 기획 의도다.
다코타 패닝(왼쪽)과 나오미 포너 감독(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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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거짓을 밝히는 건 언론의 몫 진실을 지지하는 건 국민의 몫
‘제보자’(10월 2일 개봉)는 임순례(54) 감독의 건재
‘제보자’ 임순례 감독
미를 고루 빚어낸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2005년의 이른바 황우 석 사태를 모티브로 삼아 사건의 핵심을 짚어내는 분석력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연출이 긴장과 재
사진= 라희찬(STUDIO 706)
-워낙 논란이 컸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2012 년 말에 영화사 수박의 신범수 대표가 연출을 제안했다. 그때 보여준 시나리오는 복잡한 사건을 압축하기만 한 것이어서 거절했다. 단, 이 영화만의 초점과 시각을 살려 시나리오를 다시 쓰면 괜찮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워낙 여러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건 아닌가. 논문을 조작 했던 과정, 황우석 열풍을 부추겼던 언론, 실체 없는 진실 에 열광했던 한국 사회 등등.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2011, 김석윤 감독) ‘의뢰인’(2011, 손영성 감독)을 썼던 이춘형 작가가 시나리오를 완전히 다시 쓰면서 사건 의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인의 이야기로 윤곽이 잡혔다.” -사건의 핵심을 꿰뚫는 키워드가 언론이라고 봤다는 얘기인가. “그 사건의 여파가 그렇게까지 컸던 건, 줄기세 포 복제에 성공했다는 거짓말에 속아 엄청난 세금이 그 연구와 사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 어나지 않으려면 국민들이 거짓된 진실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 거짓을 밝히는 것까지는 언론의 책임이다. 그 너 머의 책임은 국민에게 있다. 거짓 보도에 현혹되지 말고 진짜 진실을 전하는 언론을 믿고 지지해야 한다.” -왜 지금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나. “그때나 지금이나 거짓을 진실처럼 보도하는 언론이 있 고, 그걸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그 때문에 한국 사회 가 점점 분열되고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만들 어지는 것 같다. 논란의 사건을 모티브로 한 극영화를 연 출한다는 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 다. 이 영화를 통해 진실을 대하는 언론과 국민의 태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질 수 있다면, 그 부담을 껴안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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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건은 2005년의 일인데, 극 중 시대 배경은 모
할을 되새기게 하는 동시에 공익 제보의 의미를 널리 알
호하게 처리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장면도 나오고.
렸으면 좋겠다.”
“실제 사건을 재연하는 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거
-빠르고 치밀한 전개가 계속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
짓이 뿌리가 되어 여론을 호도하고, 몇몇 언론이 그 사
다. “워낙 무겁고 진지한 사건을 다룬 이야기라, 상업영
건의 진실을 밝히려 하는 모습을 2014년 한국 사회에
화로서 어떻게 관객을 만족시켜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대입해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건의 특수
우선 이야기가 빨리 달려야 분위기가 처지지 않을 것 같
성보다는 보편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았다. 또 윤민철 PD의 직장 동료들인 조연출 김이슬(송
-고비마다 새로운 쟁점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연출이
방송사 상사들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요령
하윤), 팀장 이성호(박원상), 김 국장(권해효) 등을 비교
인상적이다. “준비 기간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시나리오
도 부릴 줄 알고.”
적 밝고 재미있게 그리는 것으로 극의 무거운 분위기를
를 여러 번 고쳤다. 실제 사건의 어떤 부분을 넣고 뺄까,
-윤민철과 제보자 심민호(유연석)는 물론 논문 조작
상쇄하려 했다.”
이런 저런 허구를 더하는 것이 실존 인물들에게 누를 끼
사건의 핵심인물 이장환 박사(이경영)에 대해서도 섣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이후 13년 만에 박해일
치지는 않을까, 하는 문제에 신경을 가장 많이 썼다. 실제
른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황우석 박사가 황우석 사태
과 다시 만났는데. “박해일씨의 영화 데뷔작인데, 주인
사건 자체에 자극적인 요소가 정말 많다. 당시 황 박사 지
의 유일한 책임자는 아니다. 학계언론계정치계국민 모
공 네 명 중 성우(이얼)의 고교 시절을 연기한 아역이었
지자들 중에는 논문 조작에 대한 취재를 그만하라며 분
두에게 잘못이 있다. 어떤 등장인물도 완전히 나쁜 사람
다. 해일씨가 스물네 살이었고, 나머지 아역은 전부 10대
신음독한 사람들도 있고, 자신들의 난자를 제공하겠다
으로 그리지 말자는 게 감독으로서 내 신조이기도 하고.
였다. 다른 아역들이 악기 연습을 빼먹고 놀러 다니기도
고 나선 여성들이 황 박사 연구실 건물에 진달래꽃을 뿌
열차에 올라탔는데, 그 열차가 너무 무서운 속도로 달리
한 모양인데, 해일씨가 무슨 반장처럼 잘 통솔해 연습을
리며 시위를 한 적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흥미를 끌 수
자 거기서 도저히 뛰어내릴 수 없게 된 상태. 황 박사도
못 빠지게 하더라(웃음). 이후 해일씨가 배우로 승승장구
는 있겠지만, 영화 전체의 분위기나 주제에 맞지 않겠다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최종병기 활’(2011, 김
고 판단해 제외시켰다.”
-이장환 박사의 연구팀이었던 심민호의 제보가 진실
한민 감독) 같은 상업영화와 ‘짐승의 끝’(2011, 조성희 감
-실제 사건과 가장 다른 부분이라면. “실제 제보자의
을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데. “공익 제보라는 게
독) 같은 독립영화, ‘경주’(2014, 장률 감독) 같은 작가영
부인이 황우석 박사 연구팀에서 일했던 건 맞는데, 영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 영화를 준비하며 알아
화에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면서 작품 고르는
와 달리 희귀병을 앓는 딸은 없다. 그분들의 양해를 얻어
보니 공익 제보자 대다수가 이후 아주 힘든 삶을 살고 있
눈이 남다른 배우라고 생각했다. ‘제보자’로 다시 만나보
각색한 부분이다. 극 중 제보자 심민호의 부인(류현경)이
다고 하더라. 제보를 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잘리고, 가
니 그 사이 알찬 배우가 됐더라. ‘와이키키 브라더스’ 때
복제 줄기세포를 손에 넣는 과정도 실제와 다르다. 실제
정 경제가 파탄 나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에 정상적으
만 해도 어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동료로 느껴진다. 역
는 쓰레기통에 버려진 걸 주운 것이었다.”
로 복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개인적 삶까지 피폐해지
할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진중하다.”
-논문 조작을 추적하는 방송사 PD 윤민철(박해일)
는 거다. 가장 건강한 시민 의식을 지닌 사람들인데. 황우
-마지막 장면은 좀 아쉽다. 한 인물에 기대지 않고 언론
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나. “기본적으로 언론인으로
석 사태의 제보자 역시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다행히
과 대중에게 고루 질문을 던지던 영화가 그 모든 공로를
서 직업 정신이 투철한 인물이라고 봤다. 취재를 하거나
지금은 새 직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영화가 언론의 역
윤민철 한 사람에게 돌리는 느낌이다. “원래 생각한 결말 은 재판을 받게 된 이장환 박사가 여전히 사람들을 현혹 하는 말로 열변을 토하고, 윤민철이 그 지지자들의 원망스 러운 눈빛을 받으며 법원을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그걸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묵직 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실제로 이 장면을 찍기도 했다. 한데 후반 작업 단계에서 관객 반응을 미리 살피는 모니터 시사 결과를 보니, 관객들은 마지막에 사건이 어떻게든 해 결되기를 바라는 것 같더라. 그래서 지금의 결말을 다시 찍 었다. 감독으로선 아쉬운 부분이다. 본래 취지와 상업성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계 속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37
기획
우리가 뻔한 제비족으로 보이니? 마음을 훔친 지골로 캐릭터 6 지골로(Gigolo)는 단순하게는 제비족,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몸 파는 남자를 뜻하는 단어다. 그렇다면 ‘지골로 인 뉴욕’(원제 Fading Gigolo, 9월 25일 개봉, 존 터투로 감독)은 적나라한 섹스로 점철된 작품일까? 아니다. 뜻밖에도 지골로를 통해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 속 휘오라반테를 시작으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지골로 캐릭터들을 소환했다. 이제 보니 꽤 다양한 매력의 소유자들이다. 이은선 기자 haroo@joongang.co.kr
‘지골로 인 뉴욕’ 휘오라반테 원석을 알아
며 부추긴 덕분에 한 사람은 일감을 물어오고, 또 한 사람
아픈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져주는 것. 함께인 순간만큼은
보는 머레이(우디 앨런)의 눈이 아니었다
은 성실하게 일하는 기묘한 파트너 관계가 체결된다. 함께
정말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한가득 선사하는 것. 이러한
면, 휘오라반테(존 터투로)는 그저 꽃집의
일하던 서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자 하릴없이 수입이 줄
휘오라반테의 ‘영업 ’에 빠진 아비갈은 말한다. “당신은
평범한 파트타임 직원이나 꼼꼼한 배관 수리공 정도로만
어든 두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돈벌이는 없다. 멀대같이
고독한 영혼에 마법을 불어넣어요.”
기억됐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머레이는 지골로로 일해 볼
키만 크고 딱히 매력적인 구석도 없어 보이던 휘오라반테
휘오라반테는 존 터투로가 연기한 모든 역할을 통틀어 거
는 보란 듯이 여자들을 휘어잡기 시작한다. 꽃이라는
의 최상급으로 멀쩡하고 멋진 인물이다. 외모만 조금 아쉬
연약한 생명을 섬세하게 다뤘던 손길로 여자를
울 뿐 성품 면에서는 단점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침착한
능한 지골로를 소개해주지 않겠냐는 은밀
부드럽게 매만지고, 말수는 적지만 타고난 센스
말투로 머레이와 주고받는 몇몇 대화에서는 지성미마저 넘
한 제안을 받은 참이다. “전 꽃미남이 아
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결국 그는 사방에
친다. 외로움을 안기는 존재는 사람이지만, 그 극복 역시 사
닌데요”라는 휘오라반테의 말에 머레이가
벽을 만들듯 폐쇄적으로 살았던 유대인 미망인
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지골로 휘오라
“믹 재거가 꽃미남이었어? 밤의 황제였지”라
아비갈(바네사 파라디)마저 변화시킨다. 지치고
반테. 몸보다 뇌와 진심이 섹시한 인간적 매력의 소유자다.
섬세한 지골로
것을 권한다. 마침 머레이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섹시 한 여의사 파커(샤론 스톤)로부터 ‘쓰리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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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지골로’(1980, 폴 슈레이더 감독) 줄리앙 이토록 완벽하
패션왕 지골로
게 멋졌던 지골로는 드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쑥한 줄리앙(리처 드 기어)은 아르마니 수트를 입은 남자의 모범 답안 같은 캐릭터다. 고급
호텔에 살며 벤츠 컨버터블을 몰고 예술품 수집에도 조예 깊은 남자. 서랍 안에 잘 정리된 셔츠와 넥타이를 일일이 매칭하며 신중하게 옷매무새를 살피는 남자. 그가 팬티 바 람으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단련하는 모습은 지금 봐도 코피가 쏟아질 듯한 명장면이다. 그런 줄리앙이 누명을 쓰고 살인 사건 용의자가 됐을 때, 그를 구원한 것은 잘난 외모나 뼛속 깊은 직업적 자부심이 아니다. 사랑이다. “진
쓸쓸한
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얼마나 멀리 돌아왔던가.” 그렇게 말하는 줄리앙
지골로
의 공허한 표정에 모성애를 느끼며 쓰러진 여성 팬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이다호’(1991, 구스 반 산트 감독) 마이크 스콧(키아누 리브스)은 인상적 인 캐릭터였다. 하지만 긴 여운은 역시 마
이크(리버 피닉스)의 몫이다. 그에겐 길에서 몸을 파는 생활이 스콧처럼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자 일탈일 수 없 ‘해피 투게더’(1997, 왕가위 감독) 보영
‘듀스 비갈로’(1999, 마이크 미첼 감독)
었다. 마이크에겐 그것이 삶 그 자체였다. 스콧을 사랑하
듀스 비갈로 멍청하지만 순박한 듀스 비
지만 그와 자신이 속한 세계가 너무 다름을 체감한 마
조위)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
갈로(롭 슈나이더). 물고기를 너무나 사랑
이크의 눈에는 쓸쓸함이 일렁인다. 남자끼리 사랑하는
은 전적으로 보영의 탓이다. 그는 늘 멋대로 떠나갔다가
해서 수족관 청소원으로 일하던 그는 민망한 사건으로
것은 불가능하다는 스콧의 말에 머뭇머뭇 마음을 내비
“우리 다시 시작하자”는 간단한 말을 앞세워 아휘를 찾
해고된 것도 모자라 남의 개인 수족관을 박살 내버리기까
치던 마이크의 한마디, 거기엔 순수하고도 가련한 순정
아온다. 그때마다 화가 나지만 묵묵히 그를 다시 자신의
지 한다. 수족관 주인이 마침 지골로였던 인연으로 엉뚱하
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 돈을 받지 않고도.
품으로 받아주는 아휘. 그에게 보영의 존재는 끊을 수
게 지골로로 변신한 이 남자, 고도 비만의 흑인 아줌마부
널 사랑해. 그리고… 돈 안 내도 돼.” 그리고 언제나처럼
없는 약이다. 아휘의 곁에 있으면 행복할 텐데, 보영은
터 쉴 새 없이 욕을 뱉는 투렛 증후군 환자까지 별별 희한
기면증 때문에 길 위에서 쓰러져버린 마이크의 마지막
계속해서 남자들에게 몸을 팔며
한 고객들을 접대하기 시작한다. 따뜻한 마음씨를 무기로
모습. 그건 당장 다가가 일으켜 세우고 꼭 안아주고 싶을
돈을 벌고 느끼지도 않는 행복
뜻밖에 승승장구하는 듀스 비갈로의 지골로 행세는 속
정도로 고독한 몸뚱이였다.
을 연기한다. 늘 누군가의 손길
편까지 이어졌다. ‘듀스 비갈로:유로피안 지골로’(2005,
이 필요한, 연약하기 그지없는
마이크 비겔로 감독)는 더욱 황당한 일들로 가득하다.
안쓰러운 지골로
오랜 연인인 보영(장국영)과 아휘(양
웃기는 지골로
인물. 동시에 사랑을 받는 법도, 받
섹시한 지골로
은 것을 돌려주는 법도 모르는
‘에이. 아이.’(2001, 스티븐 스필버그 감 독) 지골로 조 주드 로
어린아이 같은 인물. 제멋대 로이지만 늘 슬퍼 보이는 보
의 미모가 빛을 발하던 시절, 여성을
영의 얼굴은 배우 장국영
기쁘게 하는 섹스 로봇으로 프로그
의 젊은 날의 초상 같
래밍 된 지골로 조(주드 로)는 바라
은 모습이 됐다.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캐릭터였 다. 섹시함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태. 상대 여성에 따라 스
한 국 영화 에도 지골로 가 있다
타일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한국영화에서 지골로, 즉 제비족이라는 직업군을 따져보면 그 역사가 꽤 깊다. 대표적인 영화는 ‘자유부인’(1956, 한형모 감독).
점에서 판타지를 극대화해놓은 인
양품점에서 일하게 된 평범한 주부 선영(김정림)에게 접근해 춤을 가르치는 대학생 춘호(이민)
물이었던 셈이다. 외모도 외모지
가 등장한다. 씨름 선수였던 과거를 뒤로하고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남자가 된 일봉(임성민)
만, 진짜 인간이 되고 싶은 소년 로봇 데이비드(할리 조엘 오스먼
이 주인공인 ‘장사의 꿈’(1985, 신승수 감독)도 있다. 청담동 호스트바를 배경으로 하는 ‘비스 티 보이즈’(2008, 윤종빈 감독)는 더욱 직설적으로 지골로를 다루는 경우. 반면 극 중 그 활약(?)
만추
트)의 여정에 함께하며 그를 살뜰
이 두드러지게 보이진 않지만 직업이 명백한 지골로였던 인물도 있다. ‘만추’(2011, 김태용 감독)의 훈(현빈)은 미국에서 교포 부인
하게 보살피는 자상함으로 확실
들을 대상으로 몸을 파는 남자다. 1966년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동명 원작에서는 지골로가 아닌 위조 지폐범이었던 캐릭터다.
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23
기획
큰일났다, 소꿉친구가 사랑을 고백했다
애니메이션 ‘타마코 러브 스토리’
애니메이션 ‘타마코 러브 스토리’(9월 25일 개봉, 야마다 나오코 감독)는 일본의 고교 3학년생 타마코(스자키 아야목소리 출연)의 첫사랑 이야기다. 타마코와 친구들은 졸업을 앞두고 진지하게 진로와 진학을 고민한다. 많은 것이 변해야 하는 상황. 타마코는 갑작스레 소꿉친구 모치조(타마루 아츠시목소리 출연)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고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열일곱 살 아이들이 삶의 변화 앞에서 갈팡질팡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내 지난 4월 개봉한 일본에서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에 성공했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40
타마코는 재래시장인 우사기야마 상점가에 있는 타마야 떡집의 장녀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도와 매일 떡을 만든다. 자나 깨나 일 생각뿐인 그에게 진로는 사실 큰 고민이 아니다. 지금처럼 우사기야마의 이웃들과 함께 생활하 며 떡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동아리 친구들도 “역시 떡 변태”라고 놀리면서 그의 오랜 꿈을 인정할 정도다. 타마코의 친구이자 이웃 떡집 아들 모치조도 이미 진로 를 결정했다.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실력을 살려 도쿄에서 영상을 공부할 작정이 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그건 바로 타마코. 오랫동안 타마코를 짝사랑해 온 모치조는 고민한다. ‘고백해야 할까, 그랬다가 사이가 어색해지면 어떻게 하지.’ 그의 가족들조차 “도쿄에 가게 됐는데 타마코는 어쩔거냐”고 묻는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 는 상황. 그는 용기를 내기로 한다. 서 홀로 고함을 터트린다. 이 작품은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먼 곳에서 바라만 보듯 고 TV 시리즈에서 극장판으로
요하게 담아낸다. 젊음의 치기를 과장하지 않되, 마음의 작은 동요까지 어루만지며 그
‘타마코 러브 스토리’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타마코 마켓’(2013, Tokyo MX)에
려낸다. 타마코가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타마코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서 인물과 배경 등 기본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타마코 마켓’은 우사기야마 상점가
사랑을 고백하며 불렀던 음악 테이프를 찾아 들으며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낀
에 말하는 새 데라가 날아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다. 여기에 상
다. 그러던 중 테이프 끝부분에 녹음돼 있던 어머니의 답가를 발견하고, 모치조의 마음
점가 사람들, 타마코와 친구들의 따뜻한 일상이 잔잔하게 그려져 한국 애니메이션 매
을 받아들이는 법을 깨닫는다.
니어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특히 실제 교토에 있는 데마치 상점가를 고스란히
청춘의 성장통을 그리는 성숙하고 사려 깊은 태도는 상점가 찻집 주인의 입을 통해
옮긴 듯한 우사기야마 상점가가 화제를 모았다. ‘타마코 마켓’은 교토에 자리한 제작사
뚜렷이 드러난다. 홀로 찻집에 앉아 고백을 후회하며 한숨 쉬는 모치조에게 그는 이렇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이다. 그동안 원작 만화가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온 이 제작사
게 말한다. “젊음이란 조급함이다. 설탕 한 스푼이 녹는 것도 못 기다리지. 후회의 쓴맛
의 첫 창작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은 뭔가를 했다는 증거야. 하나하나 음미하도록 해.” 그의 말처럼 ‘타마코 러브 스토리’
극장판에서는 타마코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다. 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열일곱 살
는 사랑이 시작되기 전 부끄럽고, 설레고, 답답하고, 후회되지만 다시 용기 내는 모든
여자아이로서의 타마코에 집중해 그의 내면을 깊이 있게 파고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과정을 천천히 되새기게 한다. 결말도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타마코와 모치조가 어떤
“타마코는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 하기 위해 스스로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한
사랑의 결실을 맺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라고, 바로 그 순간들이 반짝거리
아이다. 말하자면, 성장 과정을 뛰어넘은 것이다. 타마코가 진짜 어른이 되는 모습을 신
는 청춘의 풍경이라고.
경 써서 그려보고 싶었다.” 타마코의 현실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려는 의도에서 극장판 은 TV 시리즈의 만화적이고 코믹한 느낌을 덜어냈다. 화면 구성도 사실감을 높이는 방 향으로 바꿨다. 평면적이었던 레이아웃과 캐릭터 배치, 색감 등을 입체적이고 심도 있 게 변화시켰다. 결과적으로 TV 시리즈의 따뜻하고 일상적인 정서는 유지하고, 그 위에 타마코의 성장담을 더하는 방식으로 ‘타마코 러브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교토 애니메이션 이끄는 여성 애니메이터 3인방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타마코 러 브 스토리’와 ‘타마코 마켓’의 주요 제작진은 모두 여성이라는 것. 남성 감독 위주의 일본 애 니메이션계에서 보기 드문 일이다. 연출을 맡은 야마다 나오코(30), 시나리오를 담당한 요시 다 레이코(47),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호리구치
청춘,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
모치조는 타마코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노닐던 징검다리 위에서 마음을 고백한다. 그 의 마음을 전혀 몰랐던 타마코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다. 집에 돌아와 떡을 뜻하는
유키코(31)가 그들이다. 셋이 처음 뭉친 작품은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케이 온!’(2009~2010). 역시 교토 애니메이션의 작품이다. 동명 만화를
일본어 ‘모치’를 자기도 모르게 ‘모치조’라고 발음할 정도다. 이제 길에서 모치조를 만
원작으로 네 명의 밴드부 여고생 이야기를 다뤘
나면 어색하게 도망가 버리기 일쑤다. 타마코에게 모치조는 너무도 익숙한 존재라 관
다. 방영 당시 엄청난 흥행을 거둬 지금은 관련
계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타마코는 어린 시절을 되짚으며 모치조의 존재를
캐릭터 상품 시장 규모만 150억 엔에 달할 정도다. ‘케이 온!’ 시리즈와 ‘타마코’ 시리즈 모
다시 생각하고, 모치조가 없는 우사기야마가 얼마나 허전할지 상상한다. 혼란스러운
두 여고생의 일상 풍경을 산뜻하게 담아내 호평받았다. 두 시리즈 모두 세 여성 애니메이터
마음은 바통 체조 연습 때도 드러난다. 바통을 던지고 받는 동작에서 타마코는 번번이
가 저마다 장기를 발휘해 시너지를 냈다. 감독 나오코는 발의 움직임만으로 소녀들의 예민
바통을 놓쳐 괴로워하다가 친구 미도리(카네코 유우키목소리 출연)에게 말한다. “어
한 감성을 포착해냈고, 작가 레이코는 잔잔하되 생동감 있는 이야기와 소녀들의 귀여운 말
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어. 바통도 그리고… 모치조도.” 속이 타는 건 모치조도 마찬
투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일러스트레이터 유키코의 동글동글하고 예쁜 그림체가 화
가지다. 자신을 슬슬 피하기만 하는 타마코를 보며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공터에
룡정점을 찍었다. 더 큰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조합이다.
케이 온!
41
기획
현존하는 해방 이전의 극영화들 작품명
연도│제작사│감독
청춘의 십자로
1934│금강키네마│안종화
미몽(죽음의 자장가)
1936│경성촬영소│양주남
심청 군용열차
1937│기신양행│안석영 1938│성봉영화원·일본 도호영화 합작│서광제
어화 수업료
1939│극광영화제작소│안철영 1940│고려영화사│최인규·방한준
집없는 천사 지원병
1941│고려영화사│최인규 1941│동아흥업사 영화부│안석영
반도의 봄
1941│명보영화사│이병일
그대와 나
1941│조선군 보도부│허영
망루의 결사대 조선해협
1943│일본 도호영화│이마이 다다시 1943│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박기채
젊은 모습 1943│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도요타 시로 병정님
1944│조선군 보도부│방한준
사랑과 맹세 1945│사단법인 조선영화사│최인규·이마이 다다시
식민지 조선 소년의 서글픈 성장담
한 국 최초 의 아 동영화 ‘수업료’ 발 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수업료’(1940, 최인규·방한준
영상자료원 정종화 수집부장은 “‘수업료’가 1940년 조
영상자료원 이병훈 원장은 “‘수업료’는 조선 영화계의 대
감독)는 한국 영화사에서 최초의 아동영화로 꼽히는 작
선 경성과 일본에서 개봉한 뒤, 일제가 중국 동북지방에
표적인 영화 제작사인 고려영화사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품이다. 필름이 유실되어 그동안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
세운 만주국에서도 상영된 것 같다”며 “당시 만주영화협
영화사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던 일제 강점기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영화가 개봉된 지
회가 갖고 있던 필름이 장춘 촬영소를 거쳐 중국 전영자
70여 년 만에 발굴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료관으로 흘러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수업료’는 경성일보의 ‘경일 소학생신문’ 공모에서 조선총독상을 받은 광주 북정 소학교 4학년 학생 우수영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 이하 영상자료원)은 이
중국 전영자료관에서 입수한 ‘수업료’의 35㎜ 프린트
이 쓴 작문을 바탕으로 했다. 일본인 시나리오 작가 야기
영화를 중국 전영자료관에서 발굴했다. 그동안 영상자료
복사본은 전체 8롤(상영 시간 80분) 분량으로, 양호한 상
야스타로가 각색했고, 작가 유치진이 한국어 대사를 맡
원은 중국 전영자료관에서 2004년 ‘군용열차’(1938, 서
태였다. 대사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섞여 있고, 한국어 대
았다. 부모가 행상을 떠난 뒤 병든 할머니와 살고 있는 소
광제 감독), ‘집없는 천사’(1941, 최인규 감독) 등 4편을,
사에는 일본어 세로 자막이 붙어있다.
년 우영달(정찬조)이 수업료를 내지 못해 겪게 되는 고생
2005년 ‘미몽’(1936, 양주남 감독) 등 3편을, 그리고 2006
영상자료원은 올해 6월부터 3개월 여에
담이 큰 줄거리다. 영달은 결국 큰어머니의 도움으로 수
년 ‘병정님’(1944, 방한준 감독)을 각각 발굴한 바 있다.
걸쳐 영상 및 사운드 복원을 마친 뒤, 9
업료를 마련하고, 마침 학급 친구들도 영달을 위한 성금
이후에도 영상자료원은 일제시대 한국영화를 찾기 위해
월 16일 언론과 영화 관계자를 대상으
을 모금한다. 주변의 도움으로 형편이 나아진 영달에게
꾸준히 중국 전영자료관 측과 접촉해왔는데, 중국 측의
로 시사회를 가졌다. 이날 자리에선 최
추석을 맞아 부모님이 돌아오는 해피엔딩이 더해진다. 당
해외 자료 정리와 목록화 작업이 끝나길 기다려야만 했
근 일본 와세다대 연극박물관에서 발
다. 지난해 10월 영상자료원은 중국 전영자료관의 목록화 작업이 완료됐다는 것을 알게 됐고, 11월 ‘한국’을 검색어
굴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도 공개됐다.
영화 ‘수업료’의 시나리오.
이로써 ‘수업료’는 ‘청춘의 십자로’
시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 도 충분하다. 일본을 조국으로 여겨야 했던 당시 소학교 아이들의 일상, 추석을 맞은 마을 농악대의 모습 등이 수
(1934, 안종화 감독) ‘미몽’(1936, 양주남 감독) ‘심청’
원화성의 화서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숲 속 길을 홀로
비(Tuition Fee)’라는 제목을 발견한 영상
(1937, 안석영 감독) ‘군용열차’(1938, 서광제 감독)
걷다 무서워진 영달이 앳된 목소리로 일본 군가를 부르
자료원은 이 영화가 ‘수업료’임을 직감
‘어화’(1939, 안철영 감독)에 이어 현존하는 극영
는 장면에선 식민지 조선의 슬픈 풍경이 고스란히 겹쳐
화 중 6번째로 오래된 작품이 됐다. 해방 이
진다. ‘수업료’는 10월 25일과 3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로 한 영화 목록을 건네받았다. 그 중에서 ‘학
했고, 필름 실사와 오프닝 크레딧 이미지를 통해 이 영화가 ‘수업 료’임을 확인했다. 42
전 제작된 157편의 한국영화 중 현존하는 작품은 ‘수업료’를 포함해 15편뿐이다.
시네마테크 KOFA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인터뷰
육식·초식 공룡 모두가 친구 한·일 합 작으 로 만드는 ‘고녀석 맛나 겠다 2 : 함께라서 행복해’ 원작 자 미야니시 타 츠야 일본 애니메이션 ‘고녀석 맛나겠다’(2010, 후지모리 마사야 감독)의 속편이 나온다. 내년 3월 개봉 예정인 ‘고녀석 맛나겠다2:함께라서 행복해’ (최경석·노나카 카즈미 감독, 이하 ‘고녀석2’)는 전편과 달리 한·일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전편이 아기 초식 공룡을 보살피는 육식 공룡의 육아 이야기였다면, 속편은 새 주인공인 꼬마 공룡 ‘미르’가 아버지 ‘제스타’의 뜻을 이어 초식과 육식에 관계없이 모든 공룡을 하나로 묶는 과정을 담는다. 원작은 베스트셀러 그림책 시리즈 고 고 녀석 맛있겠다 맛있겠다. 12권의 시리즈 중 전편은 1·3·4권을 합쳐 만들었고, 속편은 7·8권을 합쳐 새로운 공룡들이 등장한다. 원작자이자 일본의 인기 동화 작가 미야니시 타츠야(58)는 속편의 각본 감수를 맡았다. 9월 15일 서울에서 열린 제작발표회 참석차 방한한 그는 “전편을 재밌게 봤다면 절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고석희 기자 mulderfox@joongang.co.kr 사진= 김진솔(STUDIO 706)
-젊은 시절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동화 작가가 됐나. “일본 에서 그림 동화 작가가 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유명 작가의 제자로 들어가 는 것, 두 번째는 상을 받는 것, 세 번째는 내 그림책을 들고 직접 출판사를 찾아가는
제스타
발드
미르
“티라노사우루스 무리의
“제스타의 자리를 호시탐
“보통 어린이 같으면서도
우두머리이자 미르의 아버
탐 노리는 악당이다. 미움·
꿈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지다. 최고 권력자임에도 매
질투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인공이다. 미르를 통해 많
우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
느끼는 심리를 가졌다. 관
은 어린이들이 희망을 잃지
거다. 나는 유명 작가도 몰랐고, 상을 받기까지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1년 동안 출판사
다. 한국의 아버지들도 그
객이 가장 유심히 봐줬으면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를 찾아다닌 끝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늘 상냥함과 배려가 있는 이
마음을 닮았으면 좋겠다.”
하는 캐릭터다.”
얻었으면 한다.”
야기를 쓰려 한다. 독자가 내 책을 읽고 ‘재밌다’는 감상보다 ‘마음 이 놓인다’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원작자 미야니시 타츠야가 말하는 ‘고녀석2’ 속 공룡들
-원작인 그림책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는 어떻게 탄생했 나. “주변에서 사람들이 늘 ‘부자는 훌륭하다’ ‘좋은 집에 살고 있 는 사람은 대단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 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상징 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늑대도 호랑이도 아닌,
-원작과 애니메이션 모두 더불어 사는 삶을 그린다. 특히 이번 속편은 한국 제 작진과 협업으로 만들어지는데. “한국과 일본은 문화·언어·사고방식 등이 전 혀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같은 마음가 짐으로 작품을 함께 만든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한국 측이
공룡 중에서도 가장 강한 티라노사우루스가 그것이다. 그
먼저 작품을 같이 만들자고 내게 손 내밀어줬으니 당연히
와 함께, 가진 것이라곤 착하고 상냥한 마음씨뿐인 아기
그 손을 잡고 함께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을 본
초식 공룡 ‘맛나’ 캐릭터를 등장시켰다. 그 둘이 만났을
한국과 일본의 아이들 역시 서로를 존중하고 함께 잘 지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독자는 어느 쪽을 더 대단하다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낼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 같다.” -어떤 작품을 기대하는가. “내 그림책은 아이도, 어
-전편은 부성애가 두드러졌다. 속편 ‘고녀석2’는 어
른도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각자 보고 느끼는 것은 전
떤가. “부모의 사랑을 크게 그리되 동료나 친구와의 우
혀 다르다. 아이들이 알 수 있는 것들과 어른들이 알
정 같은 다양한 사랑을 표현했다. 갈등 관계에 있는 악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이 작품
당도 나름의 사정과 장점이 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을 진짜 재미있게 봤는데, 어른이 돼서 보니 이런 내용
것 같다. 고민도 많고, 살아가며 증오심도 생기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그게 해결되기도 한다. 전편보다 훨씬 깊이 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도 있었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는, 오래도록 사랑받는 애 니메이션이 됐으면 좋겠다. 한일 양쪽에서 흥행해 속 편을 더 만들게 된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 43
뉴스
이토록 기발한 광고, 본 적 있나요 영화관에서 만나는 올해 칸국제광고제 수상작
박해일·유연석이 직접 말하는 ‘제보자’
메가박스에서 칸국제광고제 ‘2014 칸 라이언즈’ 의 수상작을 상영한다. 세계에서 인정받은 기발 한 광고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기회다. 1953년 창
두 배우와 임순례 감독이 함께하는 9 월 의 메 가 토 크
설된 칸국제광고제는 클리오광고제, 뉴욕페스티
●언제 9월 30일 오후 7시 30분(영화 관람+토크) ●어디서 메가박스 코엑스점 M2관
벌과 함께 세계 3대 광고제로 꼽힌다. 이번 상영회
메가토크는 개봉 예정작을 미리 관람하고 감독·배우와 함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메가박스만의 프로그램.
에서는 칸 라이언즈 필름과 필름 크래프트 부문
메가토크가 9월에 선택한 영화는 2005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줄기세포 논문 조작 스캔들을 모티브로 만든
의 수상작 약 90편을 선보인다. 배우 장 클로드 반
‘제보자’(10월 2일 개봉, 임순례 감독)다. 세계 최초로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복제한 이장환(이경영) 박사의 연구 논문
담이 출연한 볼보 트럭 광고 ‘장대한 스플릿(Epic
이 실은 조작됐다는 제보를 받은 TV 시사 프로그램 PD 윤민철(박해일)이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하
Split)’, 영국 백화점 하비 니콜스가 크리스마스를
는 과정을 다뤘다.
맞아 선보인 캠페인 ‘미안, 나를 위해 썼어(Sorry I
연출을 맡은 임순례 감독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등에서 사회에 대한 날카로
Spent It on Myself)’ 등 흥미로운 광고들을 볼 수
운 통찰과 따뜻한 시선을 고루 보여준 바 있다. ‘제보자’에서는 진실의 가치와 언론의 자유에 초점을 맞췄다. 윤민철 역
있다. 각 작품은 자막해설과 함께 상영되어 광고
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13년 만에 임순례 감독과 손잡은 박해일이 맡았다. 그는 이번 영화에
종사자나 관련 분야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이
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민 끝에 줄기세
해하고 즐길 수 있다.
포 논문 조작에 대해 제보하는 연구원 심민호는 유연석이 연기한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상영회는 메가박스 코엑스점과 신촌점에서 10
(2013, tvN)에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칠봉이와는 또 다른 섬세하고 심도 깊은 내면 연기
월 3일부터 10일까지 8일간 진행되며, 티켓 가격
를 선보인다.
은 1만원이다. 코엑스에서는 상영회와 더불어 10
메가토크는 메가박스 코엑스점 M2관에서 9월 30일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하는 영화 상
진행을 맡는다. 메가토크 티켓 가격은 성인 1만1000원, 청소년 1만원이다. 자세한 사항 은 메가박스 홈페이지(www.megabox.c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임순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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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라희찬(STUDIO 706)]
영에 이어 진행된다. 임순례 감독과 배우 박해일유연석이 참석하며, 신지혜 아나운서가
월 3일부터 3일간 수상작 전시회와 포럼, 스크린 세미나가 열린다. 자세한 사항은 메가박스 홈페 이지나 칸 라이언즈 한국 사무국 홈페이지(www. canneslions.co.kr)에서 확인하자.
디테일의 재발견
‘펄프 픽션’의 음식 ‘모던 클래식’이라는 표현이 있다. 고전영화는 아니지만, 비교적 최근에 나왔음에도 이후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고전처럼 숭배되는 영화들이다. 20년 전 영화계를 뒤흔들었던, 대표적인 모던 클래식인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오랜만에 다시 본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푸드 무비’였다.
퀴즈 하나. 타란티노의 데뷔작인 ‘저수지
야기하는데 거기엔 블루베리 파이가 있
의 개들’(1992)과 두 번째 작품인 ‘펄프
다. 부치가 “아침부터 파이를?”이라고 묻
픽션’(1994)의 공통점은? 여러 가지가 있
자 파비엔느는 침대에서 뒹굴며 “파이는
겠지만, 두 영화는 모두 식당에서 시작한
언제라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답한
다(타란티노는 “식당은 대화 장면을 찍는
다. ‘파이(Pie)’가 여성의 그 부분을 뜻하
데 가장 이상적인 장소”라고 말한다). 게
는 속어라는 걸 감안하면, 꽤나 섹슈얼한
다가 ‘펄프 픽션’은 식당에서 시작해 식
장면이다. 한편 미아는 쉐이크를 먹은 후
당에서 끝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펄프
(사진 5) 마약 과용으로 쓰러지고, 허니 버
픽션’을 구성하는 93개의 신 중 83개의
니는 ‘호손 그릴’에서 커피에 프림을 대
신에 음식이나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등
량으로 넣어 마신 후 갑작스레 총을 빼 든
장한다. 일상적인 소재이기에 그럴 수 있
다. 절제되지 못한 욕망이다. 1
는 것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타란티노는 이를 매우 의도적으로 사용하며,‘펄프 픽
결국 이 영화에서 음식은 인물 그 자체 다. 펌프킨과 허니 버니는 물론이고, 부치
션’의 음식은 캐릭터와 주제를 드러내는
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나를 ‘코크’에서
피인데, 커피는 뒤엉킨 시간대를 고정하
와 파비엔느도 서로를 ‘슈가 팝’ ‘레몬 파
중요한 요소다.
‘펩시’로 바꾸셨지.” 줄스는 육식에 대해
는 핀처럼 사용된다. 펌프킨(팀 로스)과
이’ ‘젤리 빈’ 같은 애칭으로 부른다. 보
영화 초반부 빈센트(존 트래볼타)와 줄
비판하며, (버거가 아닌) 머핀을 주문한
허니 버니(아만다 플러머)가 커피를 마신
스 마셀러스는 복서 부치에게 “권투 선수
스(사무엘 L 잭슨)는 보스의 가방을 되찾
다(사진 2). 캐릭터의 변화를, 온통 음식으
후 ‘호손 그릴’에서 총을 빼 들고, 마셀러
는 와인처럼 숙성되는 것이 아니라 식초
기 위해 브렛(프랭크 웨일리)의 아파트로
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스는 미아(우마 서먼)의 부탁으로 커피를
처럼 변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줄스는
간다. 이때 줄스는 차 안에서 맥도날드 빅
‘펄프 픽션’은 여러 시간대가 뒤엉켜 있
사러 가고, 지미(쿠엔틴 타란티노)가 빈
‘코크’에서 ‘펩시’로 변했으며, 변하지 않
맥과 버거킹 와퍼에 대해 이야기하고, 브
는 영화인데,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때
센트와 줄스에게 커피를 따라주는 건(사
은 빈센트는 결국 총에 맞아 죽는다. 그가
렛의 아파트에서 빅 카후나 치즈 버거와
먹는 음식’으로 표현된다. 줄스가 햄버거
진 4) 모두 같은 날 아침에 일어난 일들. 이
부치에게 죽을 땐, 토스터에서 튀어 오르
스프라이트를 마신다(사진 1). 줄곧 햄버
를 먹는 시간은 아침 7시 30분이다. 마약
사건들은 ‘커피’라는 공통분모를 지니며,
는 페이스트리가 신호가 된다. 무심코 지
거라는 음식으로 줄스를 표현하는 셈이
상 랜스(에릭 스톨츠)는 저녁에 시리얼을
영화는 줄스가 자신의 커피가 다 식었다
나치기 쉬운 음식이라는 일상적인 소재
다. 이후 총격전이 일어나고, 줄스는 죽음
먹는다(사진 3). 울프(하비 케이틀)는 마셀
는 걸 알면서 끝난다.
를 이토록 절묘하게 사용하는 영화감독
을 빗겨 나가는 기적을 경험한 뒤 갱스터
러스(빙 레임스)에게 아침에 전화를 받는
음식은 욕망이기도 하다. 파비엔느(마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그는 ‘호손
데, 그때 그는 칵테일 파티에 있다. 이 영
리아 드 메데이로스)는 연인 부치(브루스
이용해서 말이다.
그릴’에서 자신의 회심에 대해 빈센트에
화에서 유일하게 ‘제때 먹는 음식’은 커
윌리스)에게 ‘잘 차려진 아침’ 메뉴를 이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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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 있을까? 그것도 온통 정크 푸드를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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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보는
남자
능력은 출중해? 연애는 출출해
영화 ‘한공주’(4월 17일 개봉, 이수진 감독)를 통해 눈도장을 확실
는 입술, 고급스런 목걸이와 팔찌…. 우희의 외모와 직업은 부족할 게
히 찍은 배우 천우희가 웹드라마 ‘출중한 여자’(윤성호·전효정·박현
없지만, 직업 바깥의 영역에서 그는 모든 것이 출출한 인물이다. ‘출
진·백승빈 감독)로 돌아왔다. 그동안 ‘한공주’만 아니라 영화 ‘마더’
중한 여자’는 바로 그 점을 익살스러우면서도 애잔하게 그려 보인다. 특히 자신의 생일날, 자기 집에서
(2009, 봉준호 감독) ‘써니’(2011, 강형철 감독) 등에서 줄곧 센 캐
웹드라 마 ‘출 중한 여자’ 우희
조촐한 파티를 하려고 그럴싸한
릭터를 맡아 섬세한 감정 연기를
음식을 만들고, 예쁜 드레스를 차
보여줬던 그다. ‘출중한 여자’는
려입은 우희. 갑작스런 폭우로 결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웹드라마
국 초대한 사람들 중 아무도 오지
‘출출한 여자’(윤성호·이병헌·이
않게 되자, 혼자 텔레비전을 멍하
랑·달재·박현진 감독)와 맥이 닿
니 쳐다보며 만들어 놓은 음식을
는 작품. ‘출출한 여자’의 제갈재
한데 비벼 먹는 우희의 모습은 외
영(박희본)이 배도 사랑도 무엇보
로움이 하늘에서 주룩주룩 내리
다 사람이 고픈 싱글녀의 애환을
는 비처럼 느껴진다. 그 모습이 영
잘 보여줬다면, ‘출중한 여자’는
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샤
또래 여성들의 선망을 받는 패션
론 맥과이어 감독)의 브리짓 존스
지 기자 우희(천우희)가 주인공이
(르네 젤위거), 드라마 ‘내 이름은
다. 주로 사연 많은 인물을 연기해
김삼순’(2005, MBC)의 김삼순
온 배우 천우희의 새로운 매력을
(김선아)을 떠올리게 한다.
진명현 새벽에 노트북으로 드라마 다운받아 보는 남자. 낮에는 KT&G 상상마당 영화사업팀장. 사람들이 악역이라 부르는 캐릭터에 곧잘 애잔함을 느낀다.
천우희는 이 드라마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천연덕스러운 코미디 연기를 선
극 중 우희(천우희)는 전 남자 친구 천관(조정치)과 친구 재홍(안재홍), 연하의 힙합 가수 주승(이
보이는 것은 물론, 출중하면서도 출출한 여자 우희가 느끼는 온갖 감
주승) 사이에서 갈지자를 그린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썸’과 연애
정을 손에 잡힐 듯 섬세하게 연기한다. 그 연기에 힘입어 그 어떤 낭
사이에서, 미련과 애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출중한 능력과
만도 설렘도 모조리 걷어낸 ‘출중한 여자’는, TV 드라마와는 또 다
미모를 지닌 우희는 안타깝게도 연애에 있어서는 조금도 출중하지
른 영역에서 지금 이 시대 20~30대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의 감정, 그
않다. 먼저, 남 주기엔 아깝고 내가 사귀기엔 뭔가 부족한 오랜 친구
속살을 비추는 데 성공한다.
재홍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뻥 차버린다. 결국 재홍은 우희보 다 더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다. 천관은 우희와 헤
우희의 출출함을 대변하는 백마콜 명함
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집에 다른 여자를 끌어들인다. 이번에는
김유신에게 주인의 마음이 가는 대로 발굽을 내딛었던 말이 있었다면, 우희에게는 ‘백마콜’이 있다.
연하의 인기 래퍼 주승과 번개 같은 키스를 나눈 우희. 그런데 이게
술 취해 비틀거리며 대리 운전 서비스 ‘백마콜’에 몸을 맡긴 우희. 그가 도착한 곳은 전 남자친구 천관의 집.
웬걸. 저돌적인 모습이 남자답다 여겼던 그는 사실 남들 눈을 너무
해장을 위해 사온 팥빙수가, 제집인 듯 문을 열자마자 풀어헤친 하얀 블라우스가, 번질 대로 번진 화장이
의식하는 ‘연예인 병’에 걸린 어린애일 뿐이다.
마주하는 ‘마주해서는 안 될 풍경’. 천관의 집 거실 소파에서 자다 깨
‘출중한 여자’가 그리는 우희의 사연은 마치 친구가 전화로 그날
소스라치게 놀라는 우희. 그야말로 웃픈, 웃기고도 슬픈 광경이다.
겪은 일이라며 시시콜콜 들려주는 이야기 같다. 세련되게 말아놓은
이 순간 그의 손에는 백마콜의 명함이 들려 있다. 우희의 이름이 박힌 출중한
머리카락, 마스카라를 예쁘게 칠한 속눈썹, 립스틱이 은은하게 빛나
패션지 기자의 명함만큼이나 그의 출출함을 잘 설명해주는 명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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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가 만난 캐릭터
남자를 유혹하는 법? 빨간 립스틱만 걸치고 누워 있어봐 다 넘어 온다니까
우 사장 자긴 누구? 강남에서 못 봤는데? 아바 난 아바라고 해. 그리고 동네에선 안 놀아. 부패한 도시 ‘씬 시티’ 정도는 돼야지. 우 사장 자기가 모르나본데, 강남 넓~다? 강남 하우스 물은 또 얼마나 좋은데. 여기 호 구도 많고, 판돈도 상당히 돈다니까? 아바 작업 환경도 별로야. 좁은 테이블에 앉아서 담배 연기 마셔 가며 패 돌려야 하잖 아. 화장실도 제때 못 가고. 난 주로 침대에 누워서 편하게 작업하고 크게 건지는 편이지.
너무 벗으면 질려 화투 치다가 슬쩍 보여주는 게 아슬아슬하고 딱 좋아
우 사장 흥! 나도 여기서 남자들 뒤통수 쳐서 몇 십억 원씩 꿀꺽 하는 실력파야. 아바 그래? 난 요즘 드와이트라는 사진가에게 육탄공세 중인데. 내 옛날 애인이야. 내 가 배신 때리고 부자 남편과 결혼했는데 아직도 나한테서 헤어 나오질 못하네. 우 사장 무슨 기술을 쓴 거야? 아바 한밤중에 그 남자 침대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지. 빨간 립스틱만 걸치고. 그리고
‘씬 시티:다크히어로의 부활’
부탁했어. 날 괴롭히는 남편에게서 구해달라고. 그랬더니 게임 끝! 드와이트가 남편을
에바 그린
해치우면 난 남편 재산을 독차지해서 엄청난 부자가 될 거야. 우훗~.
극 중 이름:아바
우 사장 너무 흔해빠진 기술 아냐? 내 기술이 훨씬 정교하네. 난 요즘 강남 하우스에서 막 떠오르는 타짜, 함대길한테 작업 중이야. 손기술과 모험심이 아주 탑인 아이지.
‘타짜-신의 손’ 이하늬 극 중 이름:우 사장 스타일 백치에 호구인 척하는 사기꾼형 미녀.
스타일 인정사정없이 사악한 요부형 미녀.
아바 오우~ 그 오빤 강남 스타일?
특기 악녀인데 아닌 척하기. 알몸으로 수영하기.
우 사장 아직 촌스런 스타일이야. 내가 ‘호구의 꽃’이라 불리는 돈 많은 과부인 줄 알거
화투 치다 슬쩍 속옷 보여주거나
란제리 차림으로 워킹하기. 그 외 각종 과한 노출.
든. 화투판에서 만날 잃기만 하니까. 실은 다른 설계자, 선수들과 짜고 그러는 건데. 대
아예 속옷만 입고 화투 치기.
작업 대상 한 번 배신했던
길이한테 “만날 나만 져. 으앙~~ 나도 화투 가르쳐줘!” 하면서 넘어오게 만든 다음에
작업 대상 강남 하우스에서 타짜로 성장 중인
옛 연인 드와이트(조시 브롤린).
“자기 나 사랑해?” 이러면 끝!
작업 목적 드와이트를 이용해
아바 그게 먹혀?
현재 남편(마튼 초카스)을 죽이고
우 사장 당연하지. 날 안쓰럽게 여긴 대길이 결국 날 돕게 될 걸. 그럼 걔 때문에 나랑 내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일당들이 그 하우스 돈을 다 쓸어가게 되는 거야.
진정한 애인 돈과 권력.
아바 어디를 가나 그런 순정파들이 진짜 호구야. 내 별명이 ‘살인을 해서라도 얻고 싶
특기 화투 못 치는 척하기.
함대길(최승현). 작업 목적 설계된 판에서 돈을 따기 위해. 진정한 애인 화투 패.
은 여자(A Dame to Kill for)’잖아. 나한테 걸리면 순애보도 죄가 되는 거지. 우 사장 잘난 척은. 근데 대길이는 나한테 순정을 바치는 척하더니, 진짜 사랑은 촌구석 에서 만난 허미나(신세경)라는 어린 여자애랑 하더라? 기막혀. 아바 그럼 다시 유혹해. 한밤중에 외롭다고 전화하고, 찾아오면 란제리 워킹, 알몸 수영 하면서 S라인 과시하고. 각종 과도한 노출 해주면 바로 노선 바꿀 거야. 우 사장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벗으면 질리는 거 몰라? 화투 치다가 속옷 슬쩍 보여주거 나, 아예 속옷만 입고 화투 치는 정도가 아슬아슬하고 딱 좋아. 근데 아우 짜증! 다같 이 벗고 치면서 보니까 미나 그 계집애 뒤태가 나보다 예뻐! 아바 그럼 앞태로 승부해. 난 앞태, 뒤태, 옆태, 다 자신 있어. 우 사장 됐거든. 역시 믿을 건 그저 화투 패 뿐이야. 이게 내 애인이지. 아바 내 애인은 돈과 권력. 그것 말고 날 훼방 놓는 것들은 다 저 세상으로 보낼 거야. 우 사장 근데 우리 기술이 언제까지 통할까? 글쎄, 내 각선미에 안 넘어오는 남자가 있 더라니까. 답십리 장 사장(곽도원). 그 인간 고자인 게 분명해!
우 사장 당장은 곤란해. 어린 것들이 자꾸 치고 올라오니까 연합해야 한다고. 근데 자 기, 지금 입은 브라 협찬받았니? 혹시 V 브랜드 제품 아냐? 에이, 그거 내가 다 설계해 놓은 건데. 48
김혜 선 방송작가. 영화 보다가 허리가 휘는 여자. 기능성 의자가 정신적·육체적 지주.
일러스트=신용호
아바 어떻게든 패가망신 시켜버려.
송원섭의 문화가이드
10만원으로
매년 하반기의 낙이라 할 수 있는 추석 연휴 가 칠천량해전에 나간 원균의 함대처럼 속절 없이 무너져 내렸겠지? 남은 건 송편이랑 갈
즐기는
비찜 때문에 찐 살과 가족들 선물 산 카드 값 밖에 없다는 건 잘 알겠어. 그래도 포기하지
10월
마. 10월엔 아직 개천절과 한글날이 충무공 의 열두 척처럼 남아 있으니까. 사즉필생!
문화생활
10월의 공연 전시 리스트를 보다가 ‘이건 봐야 해’ 하는 느낌이 딱 오는 이벤트가 있었 로스 로메로스
어. 바로 10월 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가이드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로스 로메로스 내한 공연이야. 세계적인 스패니시 기타리스트 셀
이 2만원짜리 A석이라는 건 감동적인 보너
무 뻔한 선택이라 탈락. 뭐 이미 보신 분도 많
레도니오 로메로가 창설한 로스 로메로스(눈
스지. 다만 곡의 심도 있는 이해를 위해 니체
을 테고.
치챘겠지만 ‘로메로 가족’이란 뜻이야)는 스
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꼭 읽
그래서 고른 이달의 책은 조시 베이젤의 비
패니시 기타의 콰르텟 스타일을 처음으로 만
고 오라고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 이 곡을 유
트 더 리퍼. 뭐 이 코너를 지켜보신 분이라면
로스 로메로스 내한 공연
든 팀이지. 세월이 흘러 셀레도니오의 둘째
명하게 한 영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
잘 아시겠지만 어쨌든 모토는 ‘재미있는 책’
S석 7만원
아들이며 아버지를 능가하는 명성의 페페 로
이스 오디세이’(1968)도 끝까지
이야. 그리고 대략 취향도 파악됐
메로가 리더 역할을 이어받았고 두 손자가 멤
보려면 힘들 수도 있어. 무리하지
을 거야. 깜찍발랄한 소설 참 좋
코리아 심포니
버로 들어와 팀이 3대째로 접어들었어. 가을
말고 그냥 음악만 들으러 와.
아해. 비트 더 리퍼는 병원 인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석 2만원
밤의 스패니시 기타 소리. 네 명의 기타 명인
자, 다음은 ‘리움 미술관 10주
피터의 일상에서 시작해. 그런데
이 연주하는 알베니스의 ‘전설(Austurias)’.
년 기념전-교감(Beyond and
사실 피터는 평범한 의대생이 아
어때,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지? 물론 다 좋
Between)’이야. 이미 8월 21일부
니고 전직 마피아의 킬러였어. 그
리움 미술관 10주년 기념 전시-교감
지만 문제는 가격. 11만원짜리 R석과 7만원
터 열리고 있는 전시인 데다 워낙 유명하지
것도 천재적인 킬러. 그런데 과거를 씻고 FBI
1만원
짜리 S석밖에 없어. 고민되지만 이럴 때 한번
만 그래도 1만원에 이만한 효용의 전시를 볼
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새로운 인생
질러 보는 거지 뭐. IBK챔버홀은 그리 크지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거야. 제목에서 알 수
을 개척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한 거야. 킬러
조시 베이젤 비트 더 리퍼
않아서 굳이 11만원짜리까지 욕심 낼 필요는
있듯 우리 고전 미술 작품과 국내외 현대 미
출신 인턴, 멋지지 않아? 하지만 그러던 어느
약 7000원
없을 것 같아. 자, 7만원 투척.
술 작품 간의 대화를 상징하는 전시야. 혹시
날, 예전에 알던 마피아 멤버 하나가 환자로
다음은 지난달 ‘카르미나 부라나’에 이은,
가봤는지 모르겠지만 지난 8월의 추천 전시
병원에 나타난 거야. 그리고 요구하지. “내가
‘들으면 다 아는데 쉽게 연주되지 않는 곡’
였던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의 ‘백자예찬’
죽으면 (너의 비밀을 폭로할 테니) 너도 죽는
시리즈 2탄이야. 10월 31일 예술의전당 콘서
과 비슷한 컨셉트의 전시라고 볼 수 있겠네.
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도 나를 살려라.” 어
트홀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
물론 리움의 소장품이 등장한다면 더 말할
때? 재미있을 것 같지? 2011년 출간된 책이
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연주돼. 네이버
게 없겠지. 12월 21일까지니까 여유 있게 들
라 가격도 싸. 7000원대 가격으로 살
지식인에 ‘둥당둥당 둥당둥당 밤~ 빰~ 빰~
러 봐.
수 있어. 그러니 늘 당부하지만,
≒10만7000원
신작에 목매지 말라고. 그
빠밤으로 시작하는 클래식 곡 제목이 뭐죠?’
이달의 책. 전 세계적으로 ‘사 놓고 안 읽
라고만 물어봐도 누군가가 답을 알려 줄 만큼
는 책 1위’라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럼 이달은 여기까지. 11월
유명한 곡이지. 하지만 실제 연주를 들어볼
을 추천해서 여러분도 그 대열에 동참하게 하
에 만나.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아. 이번 연주는 스타 지
거나(책값만 3만원…), 저 책을 읽은 척할 수
휘자 임헌정이 올해 초 코리아심포니 음악감
있는 최선의 가이드로 알려진 피케티의 21
독으로 부임한 뒤 내놓은 기획이야. R석이 5
세기 자본 바로 읽기를 추천할 생각은 없어.
H.40 D.8.3(mouth) 14(base)㎝
만원인 데다, 1층 사이드와 2층 대부분 좌석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도 너
보물 1385호.
송 원섭
청자양각운룡문매병 / 고려 12세기 리움
블로그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운영자. 모든 종류의 구경과 참견이 삶의 보람. ‘오지라퍼’라는 말을 만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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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제주일기
집이 살아 있다
공사다망하여 3주간 제주도를 떠나 있다 돌아왔다. 남의 돈으로 몰디브에 다녀왔고,
화초들은 속절없이 말라 죽었다. 동백 씨가 여물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마당 한쪽에
성묘와 차례 등등 추석 세리머니에 참석했으며, 미뤄둘 수밖에 없었던 업무상 만남을
심은 바질과 애플민트는 거의 허리께까지 자라버렸다. 바질은 또 바질페스토를 만들
대거 처리했다. 낙지·게·새우·대합·맛조개·명태 등 각종 해산물의 크나큰 희생 속에 어
어 두면 한동안 유용할 것이었지만, 애플민트의 경우엔 모히토의 계절이 지난 지금 아
머니 생신 만찬이 성대하고 화기애애하게 열렸다가 광란의 밤으로 마무리되었다. 보고
무리 차를 끓여 마셔도 자라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았다. 흙이 모여 쌓인 옥
싶었던 친구 중 몇몇을 만나서 놀았다. 조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이어
상 구석은 동네 고양이들의 새 화장실이 되어 있었다. 불안감을 안고 현관문을 열자 퀴
트는 실패로 돌아갔고 최후 저지선을 무너뜨린 체중은 보란 듯이 훌쩍 늘어버렸다.
퀴한 냄새가 번졌다. 곰팡이가 쉬이 피는 제주도이니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
서울(과 분당)에 살 때는 며칠 이상 집을 비울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일이든 놀이
었지만 좀 색다른 퀴퀴함이었다. 지난번 한 달간 집을 비웠을 때 고양이들이 내 침대를
든 또는 그 밖의 어떤 신변잡사든 대부분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예외
애용했던 일이 생각났다. 나 없는 동안 고양이들 간에 침대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졌던
라면 이따금 여행을 떠나는 경우 정도였다. 여행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는 이미 내가 가
것일까? 우승자는 침대, 준우승자는 소파, 아차상은 거실 러그 하는 식으로 잠자리를
진 것, 곁에 너무 오래 있어서 감흥이 무뎌져 버린 것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효능이 아
나눠 가졌지만 꼴찌 고양이는 끝내 깊은 부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디 부엌이나 욕실
닐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귀갓길의 설렘과 집에서의 일상이 가져다주는 안온함은 여
바닥 같은 데서 형편없이 죽어버린 것일까?
행을 마무리 짓는 달콤한 디저트다. 헌데 거기에는 케이크 아래의 단단한 과자 시트처
CSI 그리섬 반장님처럼 신중한 자세로 집안을 둘러보았지만 죽어 있는 건 다행히도
럼 항상 전제된 게 하나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집이 꼼짝 않고 내가 떠
작은 날벌레들뿐이었다. 냄새가 강해지는 방향을 따라 킁킁대며 걸음을 옮긴 곳은 다
난 때의 모습 그대로 나를 맞아 주리라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물론 보안 시스템이 잘
름 아닌 냉장고 앞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노쇠한 누전차단기의 스위치가 내려가 있었
갖추어진 저택에도 도둑이 들곤 하는 마당에 간신히 문단속이나 해놓은 집이 무탈하
고, 냉장고를 연 다음의 사연은 너무 참혹해서 차마 글로 적을 수가 없다. 먹이를 찾아
리라는 보장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비록 요행에 기댄 것일지라도, 서울에서 집의 ‘항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하이에나가 만약
상성’에 대한 나의 믿음의 경도는 모스경도계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다이아몬드까진
제주도에 서식하고 있었더라면 열쇠 수리공을 불러서라도 우리 집 문을 따고 들어왔
못 되어도 석영이나 황옥쯤은 되었던 것 같다.
을 거라는 점만은 장담할 수 있겠다. 현재 집의 항상성에 관한 나의 믿음은 글쎄, 모스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맨 처음 나를 반긴 것은 새빨간 꽃무릇이었다. 지난해보다 추석이 빨라 아직은 꽃이 좀 덜 피어 있었다. 마당의 잔디와 잡초도 수북이 자랐다. 하 귤은 크기가 주먹만해졌고 감도 이제 노랗게 익는 단계만 남겨둔 채였다. 화분의 작은 50
경도계에서 가장 무른 활석 밑으로 한참 처박혀 연두부 근처 어디쯤을 서성이고 있는 것 같다. (낡은) 집은 살아 있다. 올드독 개 뒤집기와 화초 죽이기에 능한 만화가. 아직은 제주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