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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세상의 끝자락 플로 에지

겨울왕국의 여름

제387호 8월 10일~11일 값 1000원 http://sund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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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0~11, 2014. no.387. sunday.joongang.co.kr




CONTENTS editor’s 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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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WEEK PEOPLE 한국 대표 단편 소설 애니로 만든 안재훈 감독

판옥선의 비밀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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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을 보다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자연이 만든 겨울왕국 캐나다 북극권 캠핑 1박2일

우리 배가 화포를 쏘는데 왜선들은 왜 쏘지

PEOPLE

(沖破)’를 구사하면 우리는 피해가 없을까.

않을까. 왜선과 직접 부딪히는 전략 ‘충파 14

후손의 궁금증은 무식의 소치였습니다.

심청가 재해석 비빙 장영규 예술감독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은 바닥이

FOCUS

평평한 2층 배인 판옥선(板屋船). 명종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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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1555년) 제작된 이 배는 제자리에서

까르띠에 타임 아트전 자연이 만든 겨울왕국 캐나다 북극권

PORTR AIT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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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만들어 선체가 크고 단단했죠. 날렵

기생충 박사 서민

하긴 하지만 내구성이 약한 삼나무와 녹

COLUMN

슬기 쉬운 철못으로 만든 작은 왜선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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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

컬처#: 명량과 1000만 영화에 대한 오해

FOOD

가 왜선은 화포의 반동을 견딜만한 선체 내구력이 없어 3문 이상의 대포를 싣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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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판옥선에는 24문 이상의 화포를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41> 한남동 한식집 모이

REVIEW & PREVIEW

탑재할 수 있었죠. 사거리가 2km에 달하 는 현자총통(玄字銃筒), 로켓무기인 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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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神機箭), 대함 미사일인 대장군전(大將

뮤지컬 드라큘라

BOOK

軍箭)을 발사할 수 있는 지자총통(地字銃 26

국악 프로젝트 그룹 비빙의 장영규 예술감독

『미 비포 유』

SOUL-SEARCHING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충무공. “신은 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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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으니 감히 우리를 욕보이지 못할 것입 니다(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라는 편지 에서 하늘을 찌르는 자부심과 바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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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프린트 메이킹전

CONTE

영화 말미에 한숨 돌린 노꾼들의 대화가 30

나오죠. “나중에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PHOTO ESSAY

筒)이 대표적입니다. 판옥선에 각종 화포, 울돌목까지 활용해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 <19> 『잠자는 미녀』VS『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GALLERY

360도 회전이 가능하고 소나무와 나무못

개고생한 것을 알기나 할랑가?” “아~모르 면 호로새끼들이제.” 이제야 정신차린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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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식’들이 이순신 장군께 삼가 엎드려

조용철 기자의 마음 풍경

인사 올립니다. 까르띠에 타임 아트전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S MAGAZINE

표지 캐나다 북극권에 위치한 플로 에지 ©NickZantop

문화에디터 정형모 취재 기선민 이도은 유주현 사진 최정동 전호성 편집 임종일 디자인 전유진 통신원 최선희(파리) 김성희(밀라노) 광고 구명서 김진경 박본재 마케팅 박유선 최수인 이민주 이선우 기사제보 02-751-9000, 080-023-5002 광고문의 02-751-5555 / Fax 02-751-5806

1부 1000원 /월 5000원 정기구독문의고객센터 080-023-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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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WEEK PEOPLE

한국 단편소설 애니메이션 개봉하는 안재훈 감독

우리 문학의 맛 우리 손맛으로 스크린에 담아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를 이끄는 안재훈(45) 감독 은 손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2D 애니메이션 작가다. 디즈니의 ‘겨울 왕국’처럼 컴퓨터로 영상을 만드는 3D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부인 한혜진(44) 감독과 함께 만든 단편 ‘히치콕의 어떤 하루’(1998)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TV 시리즈 ‘아장 닷컴’(2001), 뮤직비디오 ‘관&운’(2004), 드라마 애니 ‘겨울연가’(2009), 극장용 장편 ‘소중한 날의 꿈’(2011) 등 다양한 작 품을 잇달아 내놓으며 한국 애니메이션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그

무렵 확신하게 됐다. 우리 애니메이션을 처음 보셨다는 어르신들이

리고 올해,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 김유정의 ‘봄·봄’, 너무나도 감동을 받으셨다고, 다른 작품도 빨리 만들어달라고 말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수채화 같은 영상으로 옮긴 ‘메밀꽃, 운

씀해 주셨다.”

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을 21일 극장 개봉한다. 6일 언론 시

-부인인 한혜진 감독과는 어떻게 역할을 분담하나.

사회를 가진 안 감독을 만났다(한 감독은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나는 시나리오·캐릭터·연출·음악을, 한 감독은 콘티·레이아웃·

고 안 감독이 전했다).

배경·색깔을 맡는다. 역할 구분이 명확한 편이다.” -외국인들이 스태프로 있다고 하던데.

-왜 단편문학인가.

“어릴 적부터 문학소년이 꿈이었다. 언젠가는 문학을 갖고 애니메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점점 줄어드니까 그런 것 같다. 레바논 사

이션을 만들겠다고 생각해 왔다. 요즘 교과서에서 우리 문학이 점점

람인 패트릭 스페르는 2년 전부터 메일을 계속 보내오다가 어느 날

줄어든다고 한다. 다문화시대, 한류 등으로 문화의 외연은 넓어지는

스튜디오로 들이닥쳐 일을 시작한 경우다. 인도에서 온 사람도 있

데 정작 우리 안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오던 가치는 점점 사라지

고 미국이나 독일에서 유학한 한국 학생들도 제법 있다. 여기서 열

는 느낌이다.”

심히 배우고 나가서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 우리 스

-뭘 보여주려 했나.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20~30년대 모습을 요즘 청소년들은 제대

튜디오가 애니메이션 허브가 되고 있는 셈이다.” -‘겨울왕국’의 대성공 때문에 창작 애니메이션계가 더 어렵지 않나.

로 상상하지 못한다. ‘소금을 흩뿌려 놓은 듯하다’는 메밀꽃밭에 대

“(그런 명성은) 100년 걸린 일이다. 우리의 제작 역사는 얼마 되지

한 표현이 과연 어떤 것인지, 또 식민지 시대의 경성이란 곳은 어떤

않는다. 호들갑부터 떨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관객 눈높이에 맞춰

느낌인지 책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강원도 봉평을 여러 번 가보고

가면서 계속 걸어가는 게 중요하다.”

또 다양한 일제 강점기시절 사진 자료와 외국인 방문기를 구해보았

-개봉 상황은.

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소설의 글맛을 우리 애니메이터들의 손

“극장 잡기가 쉽지 않다. 독립영화, 예술영화 전용관을 생각하고

맛으로 스크린에 담아내고 싶었다.” -언제 기획한 것인가.

“1960~70년대 우리 삶의 모습을 담아낸 장편 ‘소중한 날의 꿈(이

06 SUNDAY MAGAZINE

“‘소꿈’ 이후 신기하게도 세계 곳곳에서 연락이 많이 온다. 2D를

있었는데 다행히 CGV에서 많은 격려를 해주셨다. 메가박스도 관 심을 보였다. 40~50개 극장에서 시작할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은.

하 소꿈)’을 하기 전까지는 엄두도 못 냈다. 우리 관객이 우리 문학을

“내년 개봉을 목표로 ‘소나기’ ‘무녀도’ ‘벙어리 삼룡’을 만들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을 때 과연 관심이라도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극장용으로 창작 애니메이션 ‘웃어요’(가제)와 김동화 선생님

있었다. 그런데 '소꿈'이 극장 개봉관 축소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

의 ‘황토빛 이야기’를 기획중이다.”

면서 전국을 돌며 상영회 및 관객과의 대화를 하게 됐는데 2012년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연필로 명상하기



ISSUE

세상의 끝을 가다  북극에서 1박2일 야생 캠핑

눈부신 겨울왕국  외뿔 돌고래떼가 우릴 반겼다

1 플로 에지에서는 북극권 바다조류들을 만날 수 있다. 큰부리 바다오리가 떼지어 날아가는 모습. 2 마치 유니콘처럼 기다란 엄니를 지닌 일각돌고래들이 짝지어 헤엄치는 장면. ©NickZan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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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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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63만원짜리 잠자리가 1인용 텐트다. 더구나 먹거리는 파스타와 샐러드뿐이고, 샤워는커녕 수세식 화장실도 없다. 그럼에도 여행자들은 이 불편함을 기꺼이 만끽한다. 왜? 그곳은 바로 북극이기 때문이다. 서울 한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한 지난 6월, 캐나다 북극에 다녀왔다. 위도 72.5도 동쪽 최북단에 있는 ‘플로 에지((Floe Edge)’다. 그린란드와 마주한 바일롯(Bylot) 섬의 끝자락을 차지하는 이곳은 알래스카·옐로나이프 등 다른 북극권에 비하면 관광객들에게 덜 알려진 오지에 가깝다. 그런만큼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최고의 생태계를 자랑한다. 북극 여우와 순록 등 70여 종이 넘는 동식물이 서식하거니와, 이누이트족이 사냥하기에 최고로 꼽는 지역이기도 하다. 북극곰의 50%가 여기서 살고 있다. 초여름이라지만 플로 에지는 온통 하얀 하늘과 하얀 땅이 경계를 잃은 겨울왕국 그 자체였다. 허허벌판 빙하 캠핑은 자연을 향한 경이로움, 문명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 무엇보다 세상의 끝에 있다는 감동을 만끽한 최고의 순간이었다. 어딘가 고독한 천국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곳, 북극을 두고 하는 얘기일 터다. 플로 에지(캐나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캐나다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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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3 이누이트족의 전통 썰매를 개조한 스쿠터 썰매.

4 플로 에지에서 100m 안쪽으로 설치된 이글루 모양 텐트들.

5 전체 규모의 90%가 수심 아래에 있는 거대한 빙산. 투명한 에메랄드빛이 오묘한 광채를 자랑한다.

3

4

야영지까지 전동썰매로 세시간  텐트 1박에 63만원

런 것일까.

목적지인 바일롯 섬에 가기 위해선 일단 이웃한 바핀(Baffin) 섬으로

잠시 쉬어가는 시간. 그의 ‘강의’가 이어졌다. 눈 위에 지름 1m쯤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이누이트족의 자치 마을인 폰드 인렛(Pond

되는 물웅덩이를 가리키며 “북극곰이 바다사자를 잡는 지점”이라고

Inlet)이 관문이다. 이곳엔 공항이 있기도 하거니와 관광객을 위한 호 설명했다. “기포가 뽀르르 생기면 물 밑에서 그것이 숨쉬고 있다는 증 텔도 갖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야

거지요. 물 속으로 얼굴을 넣거나 사자가 올라오는 걸 기다렸다가 단

영을 시작한다.

번에 낚아챈답니다.”

드디어 첫날. 플로 에지에 가기 위해 스쿠터 썰매에 올랐다. 동화 속 에서 보던 개썰매를 은근 기대했지만 우리를 기다린 것은 이누이트족

사람의 사냥법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다큐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 발 딛고 선 자리에서 벌어진다니, 새삼 북극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의 전통 나무썰매인 ‘카모틱’에 전동장치를 더한 스쿠터 썰매였다. 캠 핑을 위한 많은 짐도 짐이지만 도착지까지 65km를 내달리기에는 이

멀리서 보면 빛깔 오묘한 빙산  1만년 전 얼음으로 갈증 해결

것이 현실적 대안이란다.

세 시간 달려 바핀 해협과 맞닿은 지점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끝 중의

한데 달리다보니 이상했다. 다 같은 눈밭인데 썰매는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표면은 얼어 있지만 아래는 슬러시처럼 녹아 있는 얼음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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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다. 이 바다를 건너면 그린란드다. 거기서 불과 100m 떨어진 안 쪽 지점에 눈밭에 점을 찍듯 일렬로 설치된 텐트가 보였다.

닥을 피해 다니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 가이드 중 이누이트족의 칼루

왜 꼭 여기일까 싶었는데 답은 이내 눈으로, 귀로 감지됐다. 바다 조

일라이자(70)가 앞장을 섰다. 유목 생활을 하다 1962년부터 정착 생

류들이다. 큰부리 바다오리, 호사북방오리, 참솜깃오리 등 북극에서

활을 해 왔다는 그에게 비결을 물으니 “그저 평생의 감”이라고만 하고

주로 서식한다는 새들이 떼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펼쳐졌다. 이들이

웃었다. 그러면서 “나침반이나 지도 없이도 북극성을 보고 집의 위치

사라질 무렵 바다에서는 바다사자의 울음이 들렸다. “히이~히이~”.

를 찾아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식이 경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게 이

수심 7m 아래에 설치한 확성 마이크폰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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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이렌처럼 설원의 정적을 깼다. 어떤 기계음으로도 만들 수 없

겼대요. 여인이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 뒤 자신도 일각돌고래로 변했

는 박자와 음색. 그 소리의 신비가 오감을 집중시킨다. 다음에는 또 뭐

답니다. 긴 앞니 역시 여인의 머리카락이 꼬인 형상이래요.”

가 나타나려나 싶었는데, 때맞춰 인솔자가 뜨끔한 소리를 했다. “북극

감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빙산을 앞에 두고

에서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어요.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다시 카메라 셔터를 쉴 새 없이 눌러댈 수 밖에 없었다. ‘빙산의 일각’

까요.”

이란 말, 그 자체다. 눈짐작만으로도 보이는 규모만 가로 80m, 세로

빙산을 보러 가는 길이 이를 증명했다. 예기치 않은 여행의 하이라

20m. 그런데 전체로 보면 10분의1 수준이란다.

이트, 일각돌고래의 출현이다. 표범처럼 거무튀튀한 가죽을 지닌 것

규모도 경이롭지만 에메랄드빛 색깔이 눈을 뗄 수 없게 오묘하다.

이 특징인 이 고래는 북극권에서도 자주 볼 수 없는 희귀 동물 중 하나

햇빛 중 파장이 짧은 푸른 빛 계열이 얼음 깊숙히 흡수되지 못하고 표

다. 수놈에게는 뿔처럼 보이는 긴 앞니가 있는데, 길이가 무려 4~6m

면에서 쉽게 산란되기 때문이다. 가까이 가 보면 분명 투명한데 멀리

나 된다. 약 7만5000여 마리가 존재하는데 먹이와 서식 조건이 까다

서 보면 색깔을 드러내는 기이함이다.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자니 누

로워 기후 환경 변화에 민감하다. 그 희귀성 때문에 한때 영국에선 같

군가 “한 번 먹어보라”고 부추겼다. 스틱을 내리쳐 맛보는 얼음-. 바닷

은 무게의 금보다 훨씬 값어치가 높았다고 한다.

물이지만 7000~1만 년이나 됐기에 짠 기운 없이 그저 차디찬 생수 같

선발대처럼 보이는 한 두 마리가 튀어 오르는 뒤에는 2~3마리가

았다. 실제 야영을 위한 식수를 여기서 얻는다고 한다.

짝을 지었다. 이렇게 100여 마리가 연달아 등장했다. “꾸르륵” 하는 듯한 울림도 함께 들리는데, 먹이를 충분히 먹고 내는 만족감의 표시 “언제 북극곰 나타날지 몰라요”  인솔자가 불침번 다.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된 ‘돌고래쇼’가 잠잠해 질 무렵, 인솔자 중 누

배꼽 시계가 저녁때를 알리건만 여전히 하늘은 한낮 같았다. 8월 초

군가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누이트족의 전설이다. “옛날 한 여

까지 여름 내내 24시간 어둠이 없는 북극의 백야다. 오후 9시가 넘어

인이 작살로 일각돌고래를 맞추려다 작살에 연결된 밧줄이 허리에 감

파스타와 샐러드로 끼니를 마친 뒤에도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페이 SUNDAY MAGAZINE 11


ISSUE

이누이트들, 캐나다구스 옷감으로 전통의상 제작 이번 북극 여행의 관문이 된 폰드 인렛은 이누이트족의 생활을 엿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이누이트족의 자치령인 누나부트 준주(準州) 소속으 로, 약 1500명의 원주민이 이곳에 산다. 350가구가 거주하며, 주수입원은 사냥. 먹거리를 나누고 한 해 23마리로 제한된 북극곰 포획은 특정 가구 에 쏠리지 않도록 공동체 생활을 유지한다. 캐나다 국민이지만 전통 문화를 지켜가는 이들의 모습은 특히 인상적 이었다. 학교에서는 영어를 배우지만 전통 언어를 고수한다. 목구멍에서 울림소리를 내는 ‘쓰로트송’을 하는 젊은 이도 많다. 고유의 의복도 일상에서 스스럼 없이 즐긴다. 여행 중 마을에서 만났던 여자들 대다수가 ‘아마우티크 (Amautik)’라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큰 모자가 뒤로 젖혀진 형태의 옷은 어린 아이들을 업고 다니기에 좋다고 한다. 다만 물자와 기술이 부족한 게 늘 문제였단다. 최근 이를 해결하는 계기가 생겼다. 아우터 의류를 생산하는 캐나다구스와 북극권 전문 항공사 ‘퍼스트 에어’가 이 들을 위해 작은 나눔을 펼치기 시작했다. 캐나다 북부 지역 주민들이 전통 외투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캐나다 구스 점퍼에 쓰이는 옷감·지퍼·단추 등을 제공하는 것. 2010년 누나부트의 주도 이칼루이트와 이곳에 이어 지난해엔 퀘백 쿠주아크와 누나부트의 랜킨 인렛에도 특별한 기 부를 진행 중이다. 6월 16일에는 폰드 인렛에서 행사가 열려 주민 대다수가 겨울용 의류 자재를 준비했다(왼쪽 사진). 폰드 인렛의 경우 재봉 기술은 누나부트 출신의 미카 아타루타크가 가르친다. 그는 토론토에 있는 캐나다구스 디자인 팀에서 20년간 일하면서 극지방에 맞는 파카 디자인을 도맡아 오다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기부 행사장에서 만 난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미소와 함께 답이 돌아왔다. “누군가 내 손길이 필요했으니까요. 그게 내가 공동체에서 살 아가는 방식이죠.”

캠핑의 가이드를 맡았던 이누이트족 일라이자. 빙하 상태를 긴 막대기로 감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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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6 바다와 마주한 플로 에지 풍경. 이 곳을 건너면 그린란드에 닿을 수 있다

7 수심 7m 깊이에 마이크로폰을 설치하고 심해의 소리를 감상한다.

8 이누이트족이 사냥한 고래. 북극곰의 먹이용으로 일부를 남겨놨다.

7

6

8

스북이나 메일 체크를 할 수 없으니 허전하기 그지 없다. 자연스레 거

등뼈 주변의 고기·지방 부위만을 가져갔다는 사실이다. 이유를 물었

실 역할을 하는 대형 텐트에 일행 10여 명이 옹기종기 둘러 앉았다.

더니 “북극곰이 먹으라고 남겨둔 것”이라 했다.

자정이 되면서 하나둘씩 텐트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잠시 인솔

순간 북극의 아름다움과 장엄함보다 그들이 보여주는 삶의 철학

자의 공지가 들려온다. “저희가 불침번을 설 거예요. 언제 북극곰이

이 더없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먹이사슬이라는 냉혹한 생태계 앞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텐트에 불을 켜두고 지켜볼 겁니다.”

에서 서로가 공존하는 법을 지켜 가는 그들 앞에서 문명과 문화의 우

겁먹지 말라면서, 곰들은 우리를 냄새 나는 무언가로 알고 다가올 뿐이라고도 한다. 콜라 광고에서 보던 북극곰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

월성을 내세우는 게 무슨 의미일까. 여행은 다름을 이해하는 기회라 는 말이 새삼 생각났다.

대와두려움속에두터운점퍼를입고침낭속으로들어가잠을청했다. 다음날 아침, 정작 섬을 누비며 북극곰을 찾아다녔건만 실패였다. 성공 가능성이 70~80%의 확률이라는 데 행운이 안 따랐다. 아무 것

플로 에지 가려면 투어의 시작과 끝은 폰드 인렛이다. 여기에 가려면 캐나다 오타와에서 비행기를 타고 누나

도 장담할 수 없는 여행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북극곰의 발자국을 발

부트 준주의 주도인 이칼루이트를 경유해야 한다. 항공사는 퍼스트 에어만 운행하며, 하루 한 번꼴로 있다(현지

견한 게 그나마 수확이다. 중간 크기의 어미와 아기곰이 함께 움직인

기준 오전 9시15분 출발, 오후 5시 40분 도착). 폰드 인렛의 기후는 극툰드라에 해당한다. 1~2월 한낮 기온이 영하 38도에 이를 정도로 춥지만 6~8월에는 최

흔적이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위로의 한 마디를 던진다. “이번에 못 봤 으니 여기 다시 올 이유가 생기네요.”

고 6도 안팎까지 오른다. 단 계절에 관계없이 바람이 강해 체감 온도는 이보다

폰드 인렛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닷가에 잠시 멈춰 섰다. 피를 흥건

플로 에지

이트 가족이 사냥을 하고 간 흔적이리라. 남다른 것이 있다면 가죽과

플로 에지 프로그램은 6~7월에 이뤄지며, 블랙 페더(www.blackfeather. com)를 포함해 누나부트 전문 여행사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폰드 인렛 체류

히 흘린 채 놓여 있는 흰고래 사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난 밤 아이 의 목소리와 총성이 울렸다는 일행의 얘기가 들려 왔다. 아마도 이누

더 낮은 경우가 많다. 눈의 반사가 심해 선블록과 미러 선글라스가 필수다.

바일롯 섬

폰드 인렛

바핀 섬

를 포함해 8~9일 일정으로 짜여지고, 생태관찰·스키·카약 등의 체험을 제공 한다. 비용은 1인당 5995캐나다 달러(약 565만원) 수준이다(2014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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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전통의 현대화를 꾀하느냐고요? 남들이 안 해 본 걸 하려는 것 뿐입니다.” 또 하나의 새로운 판소리가 탄생한다. 국 악 프로젝트 그룹 ‘비빙’이 심청가를 재해석 한 ‘피-避-P project’(8월13~17일, 두산아트 센터 Space111)다. 비빙은 영화 ‘놈놈놈’ ‘타 짜’ ‘황해’ ‘도둑들’ 등의 음악감독으로 유 명한 작곡가 장영규(46)를 중심으로 2008 년부터 가야금·피리·해금·타악·소리 등 국 악 연주자들과 함께 새로운 음악형식을 모색 해온 그룹. 불교음악 프로젝트 ‘이(理)와 사 (事)’(2008)를 시작으로 가면극음악 프로젝 트 ‘이면공작’(2009), 궁중음악 프로젝트 ‘첩 첩’(2011)에 이은 네 번째 실험이 이번 판소리 프로젝트다. 흔히 말하는 ‘창작 판소리’의 하나지만 서 사와 반주, 무대장치에 새 옷을 입히는 수준 이 아니다. 기존 심청가의 음악적 구조 자체 를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본격적인 작업이다. 장씨는 판소리의 문법을 ‘다 버렸다’고 표현 했다. “요즘 창작 판소리가 많은데, 저흰 다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했어요. 남들이 하는 방식을 반복하는 건 비빙이 할 일이 아니니까요. 또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걸 찾다 보니 버 릴 수밖에 없었어요.” 시작은 ‘새로운 판소리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이었다. 창작 판소리 공연들이 이야기만 다를 뿐 다섯 바탕의 ‘소리길’에 머물고 있다 국악 프로젝트 그룹 ‘비빙’ 예술감독 장영규

판을 확 뒤집었다 판소리 새 길이 보였다

는 생각에서다. ‘새로운’ 판소리라면 핵심이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창작 판소리가 판 소리의 구조와 형식을 건드리지 않고 겉옷 만 갈아입는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지 않 을까요. 정말 새롭다 말하려면 가장 중요한 핵심을 뒤집어 봐야하지 않나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뭘 집어넣은 건 없어요. 노래 를 해체해 순서를 바꾸고 길이를 조절해 다 시 부릅니다. 전통이 수십 년 몸에 밴 사람 들에게서 나온 거라 아무리 뒤섞어도 다 그 들 것이지만, 제가 만지는 과정에서 새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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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2013 비빙콘서트 중에서

작업을 하는 팀이 아니에요. 전통의 여러 부

국악 연주자들과 함께할 길을 찾다가 전통을

비빙의 소리꾼 이승희는 판소리만들기 ‘자’ 분들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작업을 하려는 사

공부하면서 실험을 이어가자고 방향을 잡게

소속으로 이자람의 ‘사천가’를 함께 공연하

람들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판소리의 무엇을

됐죠. 국악을 어떻게 해보자는 거창한 뜻은

기도 했다. 장씨도 이자람밴드 음반을 프로

바꿔볼 건가 고민한 겁니다.”

없어요. 그저 이들과 할 수 있는 일을 재밌게,

이 나타나는 것이죠.”

기왕이면 좋은 작업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듀스하는 등 이자람과 개인적 친분이 있지만

그는 비빙의 작업이 ‘전통의 현대화’와는

그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한단다. “자

상관없다고 못 박는다. 다양한 월드음악 페스

국악을 재료로 전위적인 작업을 하는 목적

람씨 작업은 국악계에 꼭 필요한 작업이죠. 티벌에 초청받아 나가고 있지만 국악의 대중

이 ‘남들 하는 걸 하기 싫어서’라고 말할 정도

화, 세계화에도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음악이

로 대중성과는 담을 쌓았지만, 국내에 설 자

저는 그저 다른 방법을 찾고 있어요. 자람씨

는 ‘어떻게 만드나 두고 보겠다’고 하더군요. 국악조차 아니란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 ‘잘 돼가냐’고 묻는데 무 섭던데요(웃음).” 이번 공연은 완결된 서사를 갖춘 무대는 아

리가 없고 외국에서도 일회성 페스티벌 행사

“‘현대화’란 어떤 제안을 하는 일 아닌가요. 위주로 초청받는 현실에 대한 고민은 있다. 진 제 작업이 다른 이들도 같이 가야될 길을 여

정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안으로 들어갈 길

는 작업은 절대 아니에요. 여러갈래 길 중에

을 찾는다는 얘기다.

니다. 심청이 집을 떠나 인당수에 몸을 던지

아무도 안 간 길을 하나씩 건드려 보는 작업

“국내에선 우리가 기획하지 않는 이상 불러

기 직전까지의 대목에 집중했다. 이승희를 포

일 뿐이죠. 작곡방식도 음을 쓰는 방식이 전

주는 곳이 없어요. 밝고 신나는 음악이 아니

함한 소리꾼 3명이 심청과 심봉사, 귀신 역할

혀 국악과 상관없는 서양음악 방식인데, 단지

라 행사성 공연엔 별로 어울리지 않고요. 해

을 나눠 맡는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순

국악기를 썼다고 국악은 아니죠.”

외 페스티벌에 가면 외국인들은 좋아하죠.

간까지의 심각한 장면인 만큼 판소리 특유의

대표적인 아방가르드 밴드 ‘어어부프로젝

하지만 그들은 즐기는 게 생활이고, 뭐가 와

유머와 익살은 없고, 굳이 따지자면 ‘그로테

트’의 멤버이자 영화·무용·연극 장르를 넘나

도 보는 관객들이에요. 반응 좋다고 또 부르

스크한 느낌’이란다. 흔히 ‘심청가’하면 떠올

들며 가장 잘 나가는 음악감독이지만, 그는

지는 않죠. 관객들 위해서 계속 다른 걸 부르

리는 심봉사 눈뜨는 대목이 아니라 엉뚱한 대

음악 전공자도 아니다. 대학시절 취미로 밴드

니까. 그런 과정에 끼기보다는 음악으로 승부

목을 택한 이유는 음악적으로 흥미롭게 발전

를 하다 사촌 누나의 소개로 현대무용가 안

하고 싶어요. 정말 좋은 음악, 즐길만한 음악

시켜 볼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은미의 공연에 참여하면서 음악을 직업 삼

이라서 찾아오는…그렇게 접근할 수 있는 시

“서사보다는 음악적 실험이 먼저였어요. 전

게 됐다. 역시 안은미의 ‘심포카 바리’ 공연

장으로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

체 서사를 하기 위해서도 이 과정을 거쳐야

을 위해 모인 사람들끼리 뭔가 함께 해보고

다.”

하는 거죠.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는 모르겠

자 ‘비빙’을 결성했고, 멤버들이 다 국악기 연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어요. 대중적이지는 않겠죠. 비빙은 대중적

주자였을 뿐이란다. “국악 전공이 아닌 제가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두산아트센터 SUNDAY MAGAZINE15


FOCUS

상하이 ‘까르띠에 타임 아트-열정의 기술’ 전시회

시간은 예술을 낳고 예술은 명품을 낳았다

1 16 SUNDAY MAGAZINE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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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예술의 완벽한 만남, 손목시계. 정확함과 아름다움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매력은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매니어들을 열광시킨다. 그럼 최초의 손목시계는 어떤 모양이었고,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앞으론 어떻게 변해갈까? 지금 상하이에 가면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1904년 세계 최초로 기계식 손목시계를 만든 까르띠에가 상하이 최초의 현대미술관인 당대예술박물관(Power Station of Art)에서 백여 년 시계 제조의 역사와 현재, 미래까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Cartier Time Art Exhibition, 7월 19일~10월 12일). 2011년 스위스 취리히 벨레리베 뮤지엄의 월드 프리미어를 시작으로 2012년 싱가포르 아트사이언스 뮤지엄에 이어 중-불 수교 50주년 기념으로 상하이에 상륙한 월드 투어 전시다. 지난 7월 18일 밤 VIP 프리뷰 행사에는 실비 베르만 주중 프랑스대사, 영화배우 류더화 등 유명 인사와 취재진 1000여 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상하이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까르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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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치디자인 “The Gate” 를 통과하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컨셉 워치 IDone과 IDtwo. 까르띠에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상징물이다. © TOKUJIN YOSHIOKA INC 2 까르티에 타임 아트 전시가 열리고 있는 상하이 당대예술박물관. 3, 4 1880년에 제작된 옐로우 골드 워치-브로치를 시작으로 200여개의 역사적 걸작품들이 선보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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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5 5 Large “Portique” mystery clock(1923) N.Herrmann, Collection Cartier © Cartier 6 Mystery clock with single axle(1922) N.Herrmann, Collection Cartier © Cartier 7‘Chimera’ Mystery Clock(1926) N.Herrmann, Collection Cartier © Cartierr 8 Screen Mystery Clock(1923) N.Herrmann, Collection Cartier © Cartier 9 Mystery clock with ‘Deity’(1931) N.Herrmann, Collection Cartier © Cart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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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2010년 상하이 세계 엑스포 때 문을 연 당대예술박물관은 1897년 지

크 무브먼트라는 세련됨을 통해 최초의 손목시계 모델인 산토스-뒤

어진 발전소 건물을 개조한 초대형 전시공간이다. 우뚝 솟은 165m 굴

몽 워치를 재해석하고 있다.

뚝이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산업화와 근대화를 상

미스터리 클락을 손목시계에 적용한 ‘로통드 드

징하는 이 공간에서 정확히 같은 시대를 풍미한 까

까르띠에 미스터리 더블 뚜르비옹’도 마찬가지다.

르띠에 컬렉션을 펼쳐보인다는 것부터 흥미로워 보

‘미스터리’ 기법은 1912년 최초의 미스터리 클락이 나온 지 101년만인 2013년 최초로 손목시계에 구현

였다. 타임아트 전시는 일본 출신의 세계적 디자이너 도

됐다. 미스터리 클락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떠 있는

쿠진 요시오카(吉岡徳仁)의 아트 디렉팅으로 선보

듯한 바늘이 기계 장치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알

이고 있다. 요시오카는 에르메스, 아우디, 스와로브

수 없는 이 손목시계는 까르띠에의 기술과 예술이

스키 등 명품 브랜드와 협업하며 예술과 디자인의 영

결코 둘이 아님을 주장하는 듯하다. 첨단 기술이 적

역을 넘나들고 있는 작가. 수만 개 빨대로 거대한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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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글라스에서 받은 감동을 오직 크리스털 프리즘으로 표현한 ‘레인 보우처치’등사물의형상너머에깃든영혼을개념적으로표상해왔다. 전시는 1880년대 제작된 회중시계의 일종인 ‘옐로우 골드 워치-브 로치’로 시작해 최첨단 컨셉트 워치 ‘IDone과 IDtwo’로 끝난다. 초 기 빈티지 모델부터 컨템포러리 디자인에 이르는 손목시계와 탁상시 계 컬렉션 200여 점을 3개의 섹션에서 볼 수 있다. 100년이 흘러도 낯설지 않은 디자인

용된 이 컴플리케이션 워치들은 시계 내부가 실물 뒤로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3D 영상과 함께 전

풍을 일으킨 ‘토네이도’, 남프랑스 로제르 성당 스테 10 설치 디자인 “The Gate”.

시돼 역시 미스터리 클락의 개념을 잇고 있었다.

도쿠진 요시오카 특유의 미학으로 관객들에게 시각적으로

미래에서 타임머신 타고 온 듯한 IDone과 IDtwo

강한 충격을 선사한다.

전시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설치 디자인 ‘더 게이트(The Gate)’다.

© TOKUJIN YOSHIOKA INC

11, 12 컨셉워치 IDone과 IDtwo. 미스터리클락처럼

도쿠진 요시오카 아트디렉팅의 진수가 집중된 것도 바로 이 구역이다. 어두운 조명을 벗어나 갑자기 대낮처럼 환한 공간으로 들어서면 천장

허공에 붕 떠 있는 듯

에서 내려오는 국수 면발처럼 촘촘하고 가느다란 실 커튼의 장막 속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으로 들어가야 한다. 역사를 관통해 미래로 이어지는 까르띠에의 브

크리스털 원반 앞뒤로 고정되어 있다.

랜드 정신을 마주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인 셈이다. 공기나 바

리 부스에 고전적인 방식으로 1910~20년대 역사적인 초기 제품들

크리스털 원반에 관람객들의

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삶 속에 쉼없이 리듬을 부여하는 시간에

이 진열돼 있다. 1911년 상용화된 최초의 손목시계 ‘산토스-뒤몽’과

모습이 왜곡되게 투영되어

대한 은유랄까.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빛 줄기 속으로 들어가는 듯

입구로 들어서면 고대 유물 전시관 같은 느낌의 어둑한 조명 아래 유

1920년대 이미 멀티플 컴플리케이션을 갖춘 포켓 워치 등의 디자인 은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신비한 느낌을 더한다. © TOKUJIN YOSHIOKA INC

한 몽환적 상태로 신비로운 장막을 헤쳐가다 보면 마침내 ‘타임아트’ 의 종착지에 도달한다.

손목시계 컬렉션과는 별도로 전시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것이 탁

대형 유리부스에 버티고 선 크리스털 원반 한가운데 무언가 둥

상시계인 미스터리 클락. 산토스, 탱크 등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 속

실 떠 있다. 바싹 다가가 살펴보면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에 정확한 기술을 추구해 온 손목 시계와는 대조적으

듯한 시계 두 개가 원반의 앞뒤로 고정되어 있

로 까르띠에의 예술성을 키워 온 것이 바로 ‘미스터리

다. 컨셉트 워치 ‘IDone’과 ‘IDtwo’다. ‘ID’란 ‘Innovation+Development’. 판매용이 아니라 미

클락’의 역사다. ‘미스터리’라는 명칭은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이 무

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모델이다. 2009년 개발

브먼트와 연결된 부분 없이 허공에 떠있는 듯 보이기

된 최초의 컨셉시계 ‘IDone’에 이어 2012년 개발

때문에 붙여졌다. 1912년 ‘모델A’에서 시작된 이 마

된 ‘IDtwo’는 에너지 효율성을 개선해 무려 32일의

술 같은 기법은 시계 장인 모리스 쿠에가 유명 마술

파워 리저브를 갖춘 역사상 첫 진공시계다.

사 로베르-우댕의 추시계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바

몽환과 환각으로 포장된 첨단기술이랄까, 최고

늘을 무브먼트에 직접 연결하지 않고 가장자리에 톱

의 기술이 구현된 컨셉트 시계들이 마술 같은 디스

니가 달린 유리 디스크 두 개에 고정시켜 착시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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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 안에서 예술이 돼버렸다. 100년 전 미스터리 클락에서 비롯된 ‘기술과 예술의 결합’에 대한 오

를 이용한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기술로 예술적 감 동을 유발하는 구조다. 1점 제작에 1년이 걸릴 정도

마주에 다름 아니다. 요시오카는 “까르띠에는 끝없

로 귀한 미스터리 클락 17점은 이집트, 인도, 중국, 일

는 아름다움의 추구 속에서 시간을 창조하며, 장인

본 등에서 영감을 얻은 동양적 모티브로 장식성을 극

들이 만들어낸 완벽한 하모니가 시간을 예술로 제

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까르띠에 창시자인 앙리 까르

련한다. 그 독자적 아름다움은 긴 역사와 미래를 향

티에의 아들 삼형제가 당시 세계여행에서 경험한 감

한 아방가르드 정신이라는 두 극단의 결합에서 나

흥을시계에반영한결과라고알려져있다.

온다”며 “물건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물 리적 형태를 초월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 나는 그것

제작 공정과 함께 전시된, 최신 기술과 예술이 적 용된 2000년대 신제품들도 초기 모델의 전통적 디자 인을 계승하고 있다. 2010년 제작된 ‘산토스-뒤몽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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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화려한 겉모양을 넘어서는 명품 브랜드의 정신

켈레톤’은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혁신을 추구해온 까르띠에의 디자인

은 도쿠진 요시오카의 투명한 크리스탈 속에서 형상 이면의 도도한

철학이 즉물적으로 제시된 예다. 매커니즘 내부를 드러내는 오픈워

가치를 내뿜고 있었다. SUNDAY MAGAZINE 19


PORTRAIT ESSAY

권혁재 기자의 不-완벽 초상화

희망 전도사 서민 <기생충학 박사>

“아주 돋보이는(?) 얼굴 생김 덕에 지독한 놀림을 받았습니다. 친구도 없었습니다. 자존감 자체가 없을뿐더러 심지어 세상에 백해무익한 존재라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은 먼지 같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백해무익이라는 이유로 박멸의 대상이었던 기생충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기생충도 세상에 쓸모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생충을 연구하는 저 또한 세상을 위해 쓸모가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제 존재 의미가 보였습니다.”

20 SUNDAY MAGAZINE


COLUMN

컬쳐#: 1000만 관객 영화의 조건

파죽지세 ‘명량’  소문난 잔치엔 먹을 게 있다

자고 일어나면 세포분열 하듯 관객 수가 100

도’라는 게 있다. 구매 행위를 할 때 소비자가

만 명씩 늘어난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얼마나 고민하느냐 하는 거다. 이에 따라 고

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 얘기다. 이대로라

관여 제품과 저관여 제품으로 나뉜다. 예컨

면 관객 1000만 명은 당연지사에, 1500만 명

대 BMW는 고관여 제품이고 모나미 153 볼

을 넘어 한국 영화 흥행사를 다시 쓸 거라는

펜은 저관여 제품이다. 관여도가 높다는 건

게 업계의 우세한 관측이다.

해당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얘기다. 그

아무리 온 국민이 1년에 4편씩 영화를 본

렇다면 티켓 한 장에 1만원이 안 되는 영화

다고는 해도 인구 5000만 명인 나라에서

는? 당연히 저관여 제품일 것 같지만 문화예

1500만 명이 한 영화를 본다는 건 놀라운 일

술 상품의 경우 동반되는 사전·사후 행위가

이다. 소위 ‘1000만 영화’는 전통적으로 ‘일

있기에 제품 가격만 놓고 말하기는 어려운 면

간지 문화면에서 사회면으로 관련 기사가 옮

이 있다.

겨가는 시점’에 탄생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데이트하는 커플이 영화를 본다면 관람료

개봉 일주일 만에 700만 명을 넘긴 ‘명량’엔

2만원, 커피 2잔에 1만원, 관람 후 식사 2만∼

이 같은 속설을 적용할 수가 없다.

3만원이다. 도합 5만∼6만원에 평균 5시간

그러다보니 2003년 ‘실미도’ 이후 ‘1000

이 소요되는 고관여 구매 행위인 영화를 아

만 영화’가 나올 때마다 벌어지는 해묵은 논

무 정보 없이 극장 가서 내키는 대로 볼 거라

13척으로 330여 척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

쟁도 되풀이된다.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많

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원동연 리얼라이

만큼 (투자자를 설득하고 관객을 끌어들일)

이 볼 영화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일종의 작

즈 픽쳐스 대표, 영화 ‘광해’ 제작자) 요컨대

강력한 한 줄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고 표현

품성 논란인 셈인데, 가령 배우 최민식이 연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영화에는 이유가 없어

한 데서 알 수 있듯 대표적인 하이 컨셉트 영

기한 이순신 캐릭터를 비롯해 다수의 등장인

보여도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상당한 수준의

화다. 이런 영화는 단순하고 명쾌한 게 특징

물이 후반 61분에 집중된 해전 스펙터클을

신중함이 구매 행위에 수반되기 때문이다.

이자 미덕이다. 관객층 최대화를 위해 보편성

위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쳤다, 마

사실 ‘명량’엔 그 어떤 역대 흥행작보다 소

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휴머니즘과 애국심, 리

치 ‘관객들에게 내 속마음을 알리지 말라’라

비자의 관여도를 높일, 즉 관심을 끌 만한 요

더십, 진정성 등이다. 보편성에 기대다보면 아

는 장군의 영이라도 내려진 듯 이순신의 내면

소가 많아보인다. 이순신 장군이라는 흠잡을

무래도 영화가 ‘엣지’있어보이지는 않는다.

이 입체적이지 못했다는 등의 비판이다. 상당

데 없는 ‘성웅’의 존재는 노년층에겐 향수의

단순하고 직설적이다보니 종종 작품성과는

부분 동의한다.

대상이다. 청소년들에겐 역사교육 교재로 맞

거리가 있는 것처럼 오인받는다. 하지만 이것

그런데 ‘명량’에 대해 ‘그렇게까지 사람들

춤해 보인다. 게다가 ‘명량’은 우리가 이기는

은 작품성을 정의하는 잣대가 달라 받게 되

이 많이 볼 영화냐’라고 하는 사람들이 잘못

얘기 아닌가. 그것도 해방 이후 한결같이 불

는 오해일 뿐이다. 제대로 잘 만든 하이 컨셉

알고 있는 게 있다. ‘이렇게까지 많이 볼 영화

편한 존재인 일본한테 말이다. ‘흥행의 가늠

트 영화가 작품성이 떨어지는데 흥행한다는

는 아닌데’라는 생각엔 그 영화가 ‘(사람들

자’로 불리는 포털 사이트 평점이 개봉 후에

건 불가능하다.

이 많이 볼 만큼) 작품성이 뛰어나지 않다’는

도 8점 후반대를 유지하는 건 이런 심리를 이

대세가 이럴진대 포인트를 잘못 짚은 입씨

무의식적 전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이런 전

영화가 61분의 스펙터클로 꿰뚫었기 때문일

름은 부질없는 일. 그보다는 극장가를 한 영

제는 ‘1000만 영화’에 몰리는 사람들은 남들

것이다.

화가 온통 점령해 다른 영화 보기가 당최 어

이 많이 본다니까, 혹은 극장에서 그 영화만

또 하나, 이런 오해는 대개 하이 컨셉트 영

려워진 이유는 무엇인지, 그게 바람직한 일인

상영하니까 (작품성에 신경 쓰지 않고) 대충

화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하이 컨셉트’ 지를 따져묻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영화를 고른 거라는 짐작으로 이어진다.

란 한 줄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획영화를 뜻한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다. ‘명량’은 20년 넘는 경력의 한 영화인이 “

사진 CJ E&M

과연 그럴까. 마케팅 개념 중 ‘소비자 관여

SUNDAY MAGAZINE 21


food

1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41> 서울 한남동 한식집 ‘모이’

알아서 내주는 계절 메뉴 느긋하게 즐기는 게 손님 몫

전해지고 확산되는 ‘초고속 정보사회’가 되면 서 그 시간이 아주 짧아졌다. 덕분에 실력 있는

이 되었겠구나 싶었다. 이곳은 김희(39) 사장이 직접 요리를 하면서

맛집인데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문을 닫고야

운영하고 있다. 원래 광고를 전공하고 마케팅

마는 불상사가 일어날 확률은 많이 줄어들었

일을 했던 분이다. 요리와 맛있는 음식을 좋아

다. 생긴지 얼마 안 되는 식당이라고 하더라도, 해서 아예 직접 음식점을 시작한 것이 벌써 10 외진 곳에 있어서 잘 눈에 띄지 않더라도 맛이

년이 다 되었다. ‘모이’를 개업한 것은 2013년

있다면소문이돌고어느새사람들이줄을선다. 12월. 특별한 메뉴를 전문으로 하지는 않고 그 한남동에 ‘모이’라는 한식당이 있다. 큰 길

저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제철에 따라 만

가도 아니고 이면 도로에 있다. 2층이어서 눈

들어 낸다. ‘모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가 있

에 잘 띄지도 않는다. 생긴지도 이제 겨우 7-8

는 것은 아니고 우연히 짓게 됐다고 했다.

개월 밖에 안되었다. 그 동네에 사는 미식가 부

‘모이’에서는 여러 단품 메뉴들이 있기는 하

부에게서 소개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이미 알

지만 나는 그저 ‘알아서’ 내어주는 세트 메뉴

‘낭중지추(囊中之錐)’.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만한 맛객들에게는 소문이 짜한 곳이었다. 이

가 더 좋다. 그때 그때 구하는 좋은 재료들을

중국 고사성어다. 주머니 속에 송곳을 담으면

렇게 외진 곳에 있으면서도 짧은 시간 동안에

이용해서 거의 매일 메뉴 구성을 바꾸기 때문

끝이 뾰족하기 때문에 밖으로 튀어나오기 마

유명해진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몇 번 찾아

에 매번 가더라도 오늘은 또 어떤 요리가 나올

련이다.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나 존재는 가

가 보았다.

까 기대하는 즐거움이 있다. 점심과 저녁에 각 각 세트 메뉴가 있는데 저녁 메뉴 같은 경우에

만히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이 알 아보게 되어있다는 뜻이다.

22 SUNDAY MAGAZINE

화려하진 않지만 정성 듬뿍 담긴 밥상

는 포스트 잇에 그날의 메뉴 구성을 손으로

식당의 경우도 그렇다. 요리사의 실력이 뛰

과연, 소문이 날 만한 집이었다. 좋은 재료를

써서 손님들에게 알려 준다. 식사를 포함해서

어나고 음식이 맛있는 집은 사람들이 알아서

사용해서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고 양도 넉

9~10가지의 요리들이 차례로 나오기 때문에

찾아온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다. ‘발 없는

넉히 준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식당의 기본

술 한잔 곁들여 가면서 여럿이서 느긋하게 저

말’이 천 리를 가는 것은 맞지만 그 속도가 느

요소를 잘 갖춘 셈이다. 음식이 모두 다 맛깔스

녁 식사를 즐기기에 딱 좋다.

려서야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 알려지기를 기

럽고 밑반찬을 포함해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이곳 음식은 맛이 편안한 것이 특징이다. 마

다리다 지쳐서 쓸쓸히 사라져간 좋은 식당들

없다. 화려한 음식들은 아니지만 어느 가정집

늘이나고춧가루같은것들도최소한으로사용

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에 초대받아 갔다가 아주 공들여 차려 내오는

해서 맵거나 자극적인 음식이 없다. 재료의 맛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인터넷과 스마트

밥상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러니 그 짧

을 잘 살려 요리하는 음식들이 대부분이어서

폰을 통해서 거의 모든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은 시간에 이미 다들 인정하고 찾아오는 맛집

맛이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깔끔하다. 김 사장


WINE 김혁의 와인야담 <19>

럭셔리 와인 여행의 ‘악몽’ 명사 몇 분과 럭셔리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양복 입은 기사가 모 는 차를 타고, 개조한 성이나 아 주 전통적인 저택에서 자고, 미 슐랭 스타급 레스토랑에서 식 2

사를 하는 환상의 코스였다. 그러나 여행의 진짜 재미는 이런 화려함과 풍요보다 예상치 못한 배고픔과 모자람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 여행을 통해서 알았다. 물론 경제적인여행을하는동안한두번풍족한상황에놓이게되는것도마찬가지리라. 프랑스 론 지방, 정확히 샤토네프 듀 파프 지역을 여행할 때였다. 포도밭이 그림 처럼 내려다보이는 성을 개조한 호텔에서 잠을 자고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와인 성 을 방문했다. 천연 바위 속에 공간을 만들어 와인을 숙성시켜온 멋진 곳이었다. 이 곳에서 우리는 많은 종류의 화이트와 레드 와인을 시음했고 모두 기분이 좋았지 만 서서히 배가 고파 왔다.

3 1 석쇠 불고기, 사태 편채 샐러드, 해풍 고등어 구이, 성게알 가리비 찜, 단새우회 등 모두 세트 메뉴에 나오는 음식들이다. 2, 3 식당 모습. 사진 주영욱

하지만 점심 약속 때문에 자동차로 40분가량 떨어진 지공다스라는 마을로 가 야만했다. 지공다스 와이너리의 오너는 자신들이 늘 즐기는 전통적인 간단한 점심 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적당히 배가 고픈 우리는 전통 점심에 대해 기대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와이너리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정원 테이블 위에는

의 어머니가 직접 제주도에서 담가서 올려 보

두툼한 호박 크기의 시골 빵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젊은 오너는 “시간이 늦었으니

낸다는 된장, 조선 간장의 맛은 깊고 구수하다.

우선 식사부터 하고 와이너리 구경은 그 다음에 하자”고 했다. 정말 반갑고 고마워 서 만세라도 부를 지경이었다.

기본에 충실  된장간장, 제주서 담가 공수

첫 코스로 내온 것은 토마토 샐러드. 프로방스 태양 볕 아래 새빨갛게 익은 토마

성공한 음식점들을 살펴보면 그 비결이 생각

토에 신선한 올리브유와 레몬 소스를 곁들였다. 오너가 만든 북부 론 지역의 비오

보다 거창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

니에 화이트 와인과 정말 잘 어울렸다. 문제는 양이 너무 적었다는 것. 우리는 접시

다. 대부분 기본을 잘 지키는 것이었다. 좋은 재

에 남겨진 소스를 빵으로 박박 훑어 깨끗이 비우고 메인 요리를 기다렸다.

료를 사용해서 정성껏 음식을 만들면 고객들

그런데 오너가 가져온 것은 이 지방 전통 소시지 달랑 하나였다. 그는 이것을 3

은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다가 양까지

㎜정도 두께로 잘라가며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한 바퀴 돌아 다시 차례가 오기

푸짐하면 두말할 것도 없다. 빛의 속도로 정보

까지 지루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들 ‘좀 더 두껍게 잘라주면 좋을 텐데’라

가 날아다니는 세상이니 알려지지 못할까 봐

고 생각했다. 때마침 집안에서 울린 전화 벨소리가 우리를 구했다. 오너가 들어가

걱정할 필요도 없다.

자마자 필자가 총대를 메고 좀더 두껍게 잘라 배분했다.

이렇게 하면 짧은 시간에도 성공할 수 있다

모두 좋아했지만 문제는 빵이었다. 하나를 다 먹은 우리는 남은 빵에 손을 댈 수

는 것을 ‘모이’는 보여준다. 그런데도 개업하는

없었다. 세 종류의 치즈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 빵은 치즈를 위

음식점 10곳 중에서 9곳이 망한다는 통계가

해 남겨 놓아야겠지요?”하자 모두 수긍은 했지만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나오는 것을 보면 기본을 지킨다는 것이 참 힘 든 일인 모양이다. 하긴 살아가면서 사람으로 서 기본을 지킨다는 것이 참 어려운 것을 보면 남 얘기할 때가 아닌 것 같기는 하다.

오너가 돌아왔을 때 이미 소시지는 거의 남지 않았다. 누구도 그 상황을 설명하 려 하지 않았다. 다만 어제까지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음식 대신 와인을 좀더 많이 마셨다. 더 먹지 못하면 마시기라도 해야 했 기 때문이다. 치즈와 남은 빵이 모두 사라지자 우리의 희망도 사라졌다. 바로 그때, 오너는 프랑스에서는 꼭 후식을 챙긴다며 가져오겠단다. 모두의 입

**모이: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30-1 전화: 02- 790-

가에 다시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그렇지 여기서 끝낼 수가 있을까 하는 분위기

7784. 점심 세트 메뉴 3만원, 저녁 세트 메뉴 5만원.

였다. 하지만 오너가 전통 후식이라며 가져온 것은 모과를 설탕과 와인에 재워 젤

최소 3일 전에는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토요일에는

리처럼 만든 것이었다. 한마디로 허탈했다. 새끼손가락 크기로 베어주는 양에 더

저녁만하고 일요일에는 쉰다.

허탈했다. 다만 맛은 기가 막혔다. 어쨌든 그날 우리는 쓰러지지 않고 방문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와이너리를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 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 전문가이자 여행전문가.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 대표. yeongjyw@gmail.com

나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요기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와인 평론가·포도 플라자 관장 www.kimhyuck.com SUNDAY MAGAZINE 23


review & preview

뮤지컬 ‘드라큘라’ 7월 17일~9월 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공포에서 사랑으로  드라큘라의 재탄생

공하는 셈이다. 둘째, 강력한 스타 캐스팅으로 초반 기선

프로듀서 신춘수 등 꼭 10년 전 베스트셀러

을 제압했다. 출연작마다 전석매진 신화를 이

뮤지컬로 등극한 ‘지킬 앤 하이드(이하 ‘지

어가고 있는 최고의 스타 김준수를 기용한

킬’)’ 팀이 다시 뭉쳤다.

것. ‘만인의 연인’ 김준수는 드라큘라가 ‘공

‘지킬’이 유독 한국에서만 대박이 난 것처

포의 아이콘’에서 ‘사랑의 아이콘’으로 거듭

럼 ‘드라큘라’ 역시 브로드웨이에서는 크게

나는데 한몫했다. 그간 가창력과 퍼포먼스,

흥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해외 성공작을 그대

카리스마에서 고른 점수를 받아온 그가 유

로 수입해 재미보는 일은 이제 드물다. 원작은

일한 물음표로 남았던 연기력을 검증받은 덕

재료일 뿐, 토착화가 관건인 셈이다. ‘포스트

이다. 마늘·십자가·성경책 3종 세트를 물리치

지킬’을 꿈꾸며 우리 입맛에 맞게 재구성한

는 초월적 액션과 함께 질투에 몸을 떨며 사

이번 무대는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으로 대중

랑을 갈구하는 인간적인 연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400년을 버텨 온 드라

밀착형 전략을 택했다. 예술적 성과를 논하

셋째, 와일드혼 특유의 폭발하는 음악이

큘라 백작. 그토록 긴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긴 어렵지만 20~30대 여성팬이 회전문을 도

다. 한국 공연을 위해 3곡의 신곡까지 추가

기다려 온 걸까? 영원한 삶을 위해 남의 피를

는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롱런할 요소로 두

해 시종일관 강한 비트로 긴장감을 유지했다.

빨아먹는 잔인한 존재로 오랜 세월 ‘공포의

루 무장하고 있다.

‘Loving You Keeps Me Alive’ ‘If I Had

아이콘’으로 각인된 이 400살 노인이 올 여름

첫째, 스릴러를 가장한 판타지 러브스토리

Wings’등 서정적인 멜로디로 시작해 화끈한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간담 서늘하게 하는 날

다. 사실 2001년 한국 뮤지컬 역사를 다시 쓴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며 가슴 후련한 상승감

카로운 송곳니를 감추고 감미로운 사랑 노래 ‘오페라의 유령’ 이후 ‘지킬’ ‘잭더리퍼’ ‘엘

을 주는 주요 넘버들은 ‘지킬’의 ‘지금 이 순

를 불러 여심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단다.

24 SUNDAY MAGAZINE

프로덕션. 와일드혼을 비롯해 ‘한국인의 감 성을 가장 잘 아는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과

리자벳’ ‘레베카’ 등 대히트작들은 어느 정

간’만큼이나 중독성과 호소력을 갖췄다.

19세기 말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가

도 스릴러의 요소를 갖췄다. 강렬한 스펙터클

넷째, 이제껏 본적 없는 웅장한 무대다. 클

쓴 원조 공포소설 ‘드라큘라’가 뮤지컬 무대

로 무대만이 줄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전율

래식 느낌 물씬한 오페라극장에 맞춤한 듯

에 올랐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뮤지컬 작곡

을 전달하기에 스릴러만한 장르가 없기 때문. 어울리는 고딕성채는 그 자체로 공들인 흔적

가’ 프랭크 와일드혼 작곡으로, 2001년 초연 ‘드라큘라’는 스릴러인 척 판타지 러브스토리

이 역력했다. 여기에 국내최초 4중 턴테이블

후 2004년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스위스·오

에 방점을 찍었다. 안개 자욱이 베일에 싸인

을 이용한 현란한 장면전환 기술로 순식간에

스트리아·영국·일본 등 세계를 순항중인 작

고성의 비밀이 400년을 기다려온 어마어마

빈틈없이 구성되는 다양한 공간들은 간만에

품이다. 2014년 한국 버전은 원작을 독창적

한 사랑이었다니, 일상을 잊고파 극장을 찾

스케일 있는 대작을 만난 실감을 완성해주고

으로 재해석한 논레플리카(Non-Replica)

는 뮤지컬 팬들에게 ‘++’급 현실도피처를 제

있었다.


review & preview

앱으로 만나는 에르메스 ‘타이 브레이크’

남자의 넥타이와 스카프, 그 이론과 실제

매일 아침 똑같은 타이 연출이 지겨운 남자들을 위한 어플리케이션이 등장했다. 에르 메스가 8월 새롭게 선보인 ‘타이 브레이크(Tie Break!)’다. 브랜드측은 여성들의 스 카프 연출법을 알려주는 앱 ‘실크 노츠(Silk Knots)’를 출시한 데 이어 이번엔 남자들 의 액세서리로 영역을 넓혔다. ‘타이 브레이크’ 앱은 타이와 스카프의 기본 연출뿐 아니라 지금껏 남성들이 쉽게 시 도하지 못했던 다양한 스타일링 팁을 제시한다. 또 현재 착용하고 있는 셔츠에 직접 타이를 매치해 볼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도 특징. 에르메스 타이 컬렉션, 동영상, 타이 패턴 이미지에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패턴 모티프를 활용한 게임까지 깨알 같이 재 미있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애플 및 안드로이드 앱 검색창에서 ‘Hermes Tie Break’

대형 기획사가 스타 마케팅을 내세운 초연 작에 대한 관점이 제각각인 탓인지, 평가는

로 검색하면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다(3G/4G, LTE 다운로드 가능).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에르메스코리아

엇갈리는 편이다. 스토리 전개가 엉성하고 드 라큘라와 미나의 사랑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드라큘라의 러브스토 리를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뮤지컬 무

한상일 피아노 독주회 8월 11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문의 02-580-1300

독일의 자연속에서 터득한 클래식 선율

대는 뻔히 아는 이야기를 시청각적으로 증폭 시켜 감동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 400년 묵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대진

드라큘라의 사랑에 구차한 사설은 필요 없다.

교수를 사사한 피아니스트 한

가슴 뛰는 음악만으로 공감을 불러야 정석

상일(30·사진)이 2006년 독일

이다. ‘나를 살게 한 힘이 오직 너에 대한 사랑’

뉘른베르크 국립음대 최고연주

이라며 뭉클한 멜로디로 호소하는 절절한 발

자 과정에 입학했을 때 볼프강

라드를 외면할 여심이 있을까? 갈대 같은 미

만츠 교수는 그의 숙소를 학교

나의 마음에 객석도 덩달아 요동친다.

에서 2시간 떨어진 시골로 잡아

한 해 백여 편의 신작 뮤지컬이 쏟아지는

주었다. “한국 사람들과 어울리

시대. 전세계에서 들어오는 온갖 검증미필 뮤

지 말고 자연이 있는 전원마을

지컬의 홍수에 무엇을 봐야할지 어지럽다. 대

에서 한번 살아보아라. 그게 너

부분 재연을 점칠 수 없는 씁쓸한 완성도에

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는데도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마치 IMF 직전

도움이 될 것이다.”

주식시장처럼 실체 없는 거품이 잔뜩 낀 느낌

오후 6시면 마지막 버스가 도착

이다. 대형 기획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예

하는 깡촌에서 그는 2년간 자

정작이 줄줄이 취소되는 사태가 불길한 예감

신과 대화하며 책을 읽고 음악

을 부추기는 요즘, 오랜만에 만난 묵직한 신

을 연구했다. 그리고 상상력과

작이 그나마 한국 뮤지컬의 굳건한 펀더멘탈

영감을 통해 자신만의 소리와 색깔을 내는 실마리를 찾아냈다. 이번 독주회에서 그는

을 확인해 주는 듯해 다행스럽다. ‘드라큘라’

한층 진전된 내공을 선보일 예정이다. 드뷔시의 ‘Images, book 2’, 프로코피예프 소

의 집요한 사랑에 박수치는 또 다른 이유다.

나타 No.7 in B flat Major, Op.83, 그리고 슈베르트 소나타 in B flat Major, D.960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을 들려준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예술의전당

사진 오디뮤지컬컴퍼니 SUNDAY MAGAZINE 25


BOOK

베스트셀러 깊이 읽기:『미 비포 유』

죽으려는 남자, 말리려는 여자

사업가 윌 트레이너는 몇 번의 자살 시도 이

부터 내리 베스트셀러

후 오랜 설득 끝에 가족들의 동의를 얻어낸다. 놓는다. 안락사 논란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

차트 톱을 달리더니 아

여자는 이를 모른 채 만난다? 그런 우연은 없

는 한편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인생인가’라

직도 톱텐이 상위

다. 환자의 간병인이 그다. 하루아침에 일자리

는 화두를 던지는 대목이다.

권에 꿋꿋이 남아

를 잃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느리고 에피

있는 생명력이다. 에게 찬밥 더운 밥 가릴 게 없다. 간병인이 된

소드는 밋밋하다. 숨막히는 장면은 기대하지

이 정도 뒷심이면

지얼마안돼남자의예고된죽음을알게된다.

않는 게 낫다. 그럼에도 책을 놓긴 힘들다. 결

누가 읽어도 ‘괜찮

그래서인지 이 두 남녀는 동서고금의 러브

국 ‘사느냐 죽느냐’ 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성

다’라는 중간 이상

스토리가 안전하게 차용하는 ‘신데렐라 콤플

패가 아닌 삶과 죽음의 문제다. 그리고 적어

의 점수를 준다는 얘기. 영국 50만 부니, 독일

렉스’를 비껴간다. 잘 생기고 돈 많은 남자에

도 자의적 죽음을 택한 주인공의 최종 결단은

100만 부니 하는 숫자의 인증은 둘째치고 영

게 치명적 결점을 안기고, 가난하고 꿋꿋한

백혈병 환자를 되살려내는 드라마 결말과는

화화까지 결정됐다니 일단 책을 펴들지 않을

여자에게는 섣불리 미모를 허락하지 않는다. 뭔가 다르리라는 기대로 그 궁금증은 배가

수 없다. “왜 인기야?”라는 물음에 답하자면 한 마 디로 ‘탄탄한 지반 위에 조금 색다른 집을 지

저자: 조조 모예스

어느 편에 쉽게 설 수 없을 만큼 고민을 던져

벌써 다섯 달째다. 4월

되레 결정적 순간마다 남자의 도움을 필요로

된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라는

하는 민폐형 대신 실수와 고생을 온몸으로

안도와, 비현실적 동화에 질려버린 냉소를 오

떠 안는 돌쇠형에 가깝다.

가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소 게임

어 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험난한 남

무엇보다 보통의 로맨스와 달리 이들에겐

이다.

녀의 사랑이 뼈대라는 점은 뻔하지만 소재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까지의 밀당, 제 3자

그래서일까. “당신에게 티슈 한 상자가 필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까지, 기존에 줄곧 봐

를 향한 질투 같은 것도 생략이다. 남자는 스

요할 것이다” “거실에서 아기처럼 울고 말았

온 로맨스와는 차별화를 둔다. 이를 더 정확

스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공언하며 유언장을

습니다” 같은 광고 문구는 사실 과장으로 느

히 말하자면 현실성인데, 비운의 러브스토리

만들고 있고, 여자는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껴진다. 책을 덮고 나면 가슴 속엔 슬픔이라

가 빠질 수 있는 무리한 상황 설정은 아예 제

마지막 변수다. 남녀의 유일한 말다툼과 갈등

기보단 담담한 사색이 자리한다. 오늘이 어제

로에 가깝다.

은 삶에 관한 의지다. 예전처럼 살 수 없는 인

와 다를 수 있다는 교훈은 차치하고라도, 각

역자: 김선형

남자는 6개월 뒤 죽음을 앞뒀다. 시한부 인

생은 이미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남자, 있는

자의 선택으로 행복해지는 사랑이 있음을 제

출판사: 살림

생? 아니 되레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한다. 어

그대로의 삶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득하는

시해주는 제3의 로맨스임은 분명하다.

가격: 1만5000원

느 날 불의의 사고로 사지 마비환자가 된 젊은

여자. 그 둘 사이의 핑퐁 대화는 읽는 이에게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신간 안내

효자손으로도 때리지 말라

재즈-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저자: 임철순

저자: 에릭 홉스봄

저자: 김갑수

출판사: 열린책들

역자: 황덕호

출판사: 오픈하우스

가격: 1만2800원

출판사: 포노

가격: 1만8000원

평범한 일상에서 ‘위트

26 SUNDAY MAGAZINE

가격: 1만5000원

분노와 갈등이 지배하

있는 단상들’을 골라 엮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

는 우리 사회의 탈출구

은 에세이집. 누리꾼들

로 꼽히는 에릭 홉스봄

로서 클래식 음악을 제

이 즐겨 쓰는 문자 개그

(1917~2012). 그는 생전

시하는 책. 음악가별로

의 숨은 의미, 언어 유희 속에 숨은 우리 사회의

재즈 평론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 책

곡을 소개하는 ‘가이드북’ 형식을 깨고 고전음

세태, 다양한 음주 풍습이 빚어낸 에피소드 등

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출간을 허락한 유

악부터 현대음악까지 광범위하게 다룬다. 클래

을 소개한다. 40년간 신문기자로 일해 온 저자

일한 저서로, 역사·사회·문화를 아우르는 폭넓

식 매니어인 저자가 음악과 인생에 대한 단상,

의 예리한 관찰력이 100편의 짧은 글 속에 녹아

은 시각에서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위대한 재

뮤지션들의 과거 비화, 추억을 되살려 주는 명

있다.

즈를 만들어 갔는지를 이야기한다.

곡 등을 소개한다.


GUIDE

금주의 문화행사 영화

전시

클래식

공연

해무

스펙트럼-스펙트럼

김대환 바이올린 독주회

유니버설발레단 ‘돈키호테’

감독: 심성보

기간: 7월 24일∼10월 12일

일시: 8월 12일 오후 7시30분

기간: 8월 15~17일

배우: 김윤석, 박유천, 한예리

장소: 삼성미술관 플라토

장소: 경기도문화의전당 아늑한소극장

장소: 충무아트홀 대극장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문의: 1577-7595

문의: 02-523-7787

문의: 02-2230-6631

1998년 전남 여수. 낡은 어선 전진호의

2001년부터 5회의 전시에서 신진작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 해설자·칼럼

현란한 테크닉과 한바탕 유머의 향연,

선장 강철주는 배가 폐선되는 것을 막

48명을 배출한 삼성미술관 리움의 프로

니스트로 활동하는 김대환(사진)이 모

최고의 희극발레 ‘돈키호테’를 정통 마

기 위해 위험한 일에 뛰어든다. 중국에

그램 ‘아트스펙트럼’전을 모티브로 한

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21번과 베토벤

린스키 버전으로 만난다. 망토를 휘날리

서 밀항자들을 실어 나르기로 한 것이다.

리움 개관 10주년 기념전. 출신 작가 7명

바이올린 소나타 ‘크로이처’를 들려준

는 투우사들의 춤과 정열적인 집시춤 등

그러나 전진호는 걷잡을 수 없는 사건에

이 신진작가 7명을 추천하는 방식으로

다. 서정성과 기교를 모두 보여줄 수 있

스페인 정취 물씬한 무대다. 이동탁, 김

휘말리게 되고 선원들은 제각각 다른 생

진행된다. 김범과 길종상가(사진), 지니

는 선곡이다. 이번 독주회는 피아니스트

태석 등 유니버설의 차세대 주역 무용수

각을 품기 시작한다.

서와 홍영인 등이 참여한다.

이설의와 함께 한다.

들이 활약한다.

비긴 어게인

판타스마고리아

서울시향 유럽투어 프리뷰 콘서트

연극 ‘데스트랩’

감독: 존 카니

기간: 8월 5일∼17일

일시: 8월 16일 오후 8시

기간: 7월 9일~9월 21일

배우: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장소: 인사아트센터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장소: 서울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등급: 15세 관람가

문의: 02-736-1020

문의: 1588-1210

문의: 1588-1555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그레타는 남자친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 다섯 명이 선보이

8월 말 유럽 4개국의 여름 음악축제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코믹 서스펜스

구 데이브가 미국의 메이저 음반회사와

는 콜라보레이션. 작가 김남표와 마리킴

서 연주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서울

연극.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롱런한 연

계약을 맺게 되자 그를 따라 뉴욕으로

(사진), 영화감독 민병훈, 뮤지션 휴 키

에서 미리 무대에 선다. 지휘자 정명훈

극 중 하나지만 국내 초연으로 선보인다.

온다. 하지만 음악적 파트너였던 데이브

이쓰와 위아더나잇 등이다. ‘영화를 감

(사진)과 함께 드뷔시 교향시 ‘바다’와

유명 극작가 시드니 브륄과 그의 제자

는 성공의 열매를 맛보자 바람을 피운다.

상하는 동시에 그림이 들리고 음악이 보

라벨 ‘라 발스’를 연주한다. 14세 피아니

클리포드 앤더슨이 희곡 ‘데스트랩’을

충격을 받은 그레타는 클럽에서 우울하

이는’ 전시로 음악가들의 공연은 매주

스트 임주희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차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죽음의 덫을 놓

게 노래를 부르다 댄을 만나게 된다.

목·금·토 저녁에 펼쳐진다.

3번을 협연한다.

는 이야기.

THIS WEEK CHART 베스트셀러

자료=교보문고

순위 책명

영화 예매

01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 요나스 요나손 열린책들 01 명량 02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03 불륜

자료=맥스무비

작가·출판사 순위 영화명

자료=인터파크

최민식 류승룡 조진웅 01 뮤지컬 시카고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03 드래곤길들이기2 (애니메이션) 신준모 프롬북스 04 명탐정 코난: 이차원의 저격수(애니메이션)

05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살림 05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클래식 음반

자료=풍월당

출연 순위 음반명

음반사

최정원 아이비 이종혁 01 레오니드 코간: EMI 레코딩 전집

장하준 부키 02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김남길 손예진 유해진 02 뮤지컬 캣츠 오리지널 내한공연

04 어떤 하루 06 나의 한국 현대사

공연 예매

주연 순위 공연명

02 클라리넷 협주곡집

Warner

Warner Classics

03 뮤지컬 헤드윅

송용진 김다현 손승원 03 슈만: 교향곡 전곡 Berliner Philharmoniker

04 뮤지컬 드라큘라

김준수 류정한 조정은 04 모차르트: 레퀴엠 현악사중주 버전 Challenge

크리스 프랫 05 뮤지컬 위키드

김선영 박혜나 김소현 05 클래식 앨범 - 카라얀과 함께한 협주곡(3cd) DG

유시민 돌베개 06 허큘리스 드웨인 존슨 이안 맥쉐인 존 허트 06 뮤지컬 번개맨의 비밀3 ‘스페이스 번개맨’

06 젤린카: 미사 보티바-룬, 바우어

Carus

07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 요나스 요나손 열린책들 07 군도: 민란의 시대

하정우 강동원 이성민 07 연극 라이어

공찬호 김연철 박중근 07 물망초 앨범-페루치오 탈리아비니

08 마법천자문 제29권 올댓스토리 아울북 08 해무

김윤석 박유천 한예리 08 연극 옥탑방고양이

이대일 김선호 최수영 08 파이널 컷-네 대의 기타로 연주한  Chando

09 해커스토익 보카  데이비드조 해 커스어학연구소 09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귀욤 고익스 앤 르니 09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 박한근 임병근 송원근 09 스코틀랜드 환상곡: 홈커밍 10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문학동네 10 뛰뛰빵빵 구조대 미션 : 둥둥이를 구하라!(애니메이션)

10 연극 데스트랩

김도현 김재범 전성우 10 클래식 카라얀: 에센셜 컬렉션

RCA Decca DG

SUNDAY MAGAZINE 27


soul-searching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 <19>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 vs.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아흔 살 되는 날, 뜨거운 밤을 내게 선사하고 싶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かわばたやすなり, 1899~197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Gabriel Garcia Marquez, 1927~2014)

1968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마술적 사실주의’를 확립한 콜롬비아 소설가.

수상했다. 작품 『설국』 은 한국 독자도 사랑하는

『백년의 고독』 『콜레라 시대의 사랑』 등으로

소설 가운데 하나다. 34년 한국인 무용가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라틴아메리카 대표 작가로

최승희의 일본 데뷔 무대를 보고는

198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자서전 3권을

당시 최고 신진 여류무용가로서 그녀를 꼽았으며,

기획했지만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장편소설 『무희(舞姬)』에서 그녀의 예술을 소개했다.

1권만 출간하고 완성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올 봄 세상을 떠난 마르케스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마지막 작품은

구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잠에 빠져 있는 아가씨와의 교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2004)이다.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

에서 ‘허무한 결핍’을 느낀다. “이 요부 같은 아가씨의 눈을 보고 싶다.

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잠든 아가씨를 손으로 더듬기

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중편의 구상은 20여 년이나 거슬러 올

만 하는 유혹은 에구치에게 그리 강렬하지 않고 오히려 비참한 생각

라간다. 1982년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우연히

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과 나란히 앉게 된다.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면서

『잠자는 미녀』의 에구치 노인이 삶의 허무를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평생 본 여자 중에 가장 멋진 여인’이라고 생

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노인은 사정이 좀 다르다. 이 소설에

각했던 여인이다.

서 ‘나’는 독신이며 학교 교사로서, 그리고 신문의 편집자와 칼럼니스

어떤 인연이 이어졌을까? 대단하진 않다. 아름다운 여인은 승무원

트로서 일생을 보냈다. 평생 어떤 여자와 잠을 자든 돈을 주지 않은 적

에게 물 한 잔 갖다 달라고 하더니 수면제 두 알을 먹고는 여덟 시간이

이 한 번도 없었다. 오십 줄에 들어설 때까지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한

넘는 비행시간 내내 잠만 잤기 때문이다. 등을 돌린 채 태아의 자세로

번 이상 잠을 잔 여자는 총 514명이었다. 이제 아흔에 이르러 그는 생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평온하게 잠든 여인을 보면서 마르케스는 그

이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고 예감하고 ‘풋풋한 처녀’와의 뜨거운 밤을

녀의 마력에 빠진다. 그리고 대서양 2만 피트 상공에서 잠자는 미녀

자신에게 선물하고자 한다. 이십 년 만에 연락을 받은 단골집 포주 로

를 애타게 관찰하는 자신의 상황이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사는 ‘나’의 요구를 어렵사리 들어준다. 생일날 밤늦게 찾아간 유곽

작품 속 상황과 유사하다는 걸 발견한다. 가와바타가 1960년대에 쓴

에는 한 소녀가 자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알몸으로 누워 자고 있는 소

말년작 『잠자는 미녀』(원제 『잠자는 미녀의 집』) 말이다.

녀를 바라보면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

마르케스는 1968년 가와바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때 그를 처

날 밤 나는 욕망에 쫓기거나 부끄러움에 방해받지 않고 잠든 여자의

음 알게 되었다. 그 후 일본 작가들과 교분을 갖게 되면서 일본 문학

몸을 응시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는 쾌락이라는 사실을 알

에 몰입, 가와바타는 물론 미시마 유키오, 엔도 슈사쿠, 오에 겐자부

았다.”

로, 다자이 오사무 등의 작품을 섭렵했다. 그러면서 일본 소설과 자신

문제는 이 경험이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게 해 주었

의 소설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걸 확인하지만, 마르케스가 진짜 쓰

다는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여인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형식의 칼럼을

고자 했던 건 『잠자는 미녀』 같은 작품이었다.

쓰기 시작했고, 아흔 살에 비로소 첫사랑의 감정을 느꼈으며 사랑의

“짓궂은 장난일랑 하지 말아 주세요. 잠들어 있는 아가씨 입에 손가

고통에 신음했다. “오, 가련한 나, 이것이 사랑이라면, 얼마나 고통스

락을 집어넣는다거나 하는 것도 안 돼요, 라고 여자는 에구치 노인에

러운가!” 같은 시 구절을 비로소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뒤

게 다짐을 받았다.” 『잠자는 미녀』의 서두다. 에구치 노인은 예순일

늦은 건 아닌가?

곱이고 친구의 소개로 ‘잠자는 미녀의 집’에 처음 들러 여주인에게

하지만 놀랍게도 마르케스의 인생관은 가와바타와 전혀 다르다.

주의사항을 듣는다. 바닷가에 있는 이 유곽에서는 남자로서의 능력

아흔 번째 생일을 보낸 ‘나’는 인생이 그렇게 다 흘러가 버렸다고 생

을 상실한 노인들을 상대로 알몸으로 잠든 앳된 처녀들과 하룻밤을

각하는 게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

보내도록 해 준다. 여자들은 특수한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든 상태라 아

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한다! 가와바타 소설

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가씨는 단지 돈이 필요해서 잠들어 있는

의 허무주의는 마르케스의 소설에서 강력한 인생 예찬으로 변모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돈을 지불하는 노인들에게 이런 아가씨 옆

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

에 눕는 것은 이 세상에 더 없는 기쁨임에 틀림없다.”

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소설에서 에구치는 이 집을 다섯 차례 찾아 잠자는 미녀들과 밤을 보내며 지난 60여 년 동안 자신이 만난 여자들을 떠올린다. 그는 아직 남성으로서의 능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이 집을 찾아오는 다른 노 인들의 진정한 슬픔이나 기쁨을 통절하게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에 28 SUNDAY MAGAZINE

자기 작품과 일본 소설들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한 말은 마르 케스의 농담인지도 모르겠다. 필자 이현우는 서울대 대학원(노문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GALLERY

이서미의 하늘의 양식(2012), 90.9 x 72.7cm, 한지에 모노타입

보고 느끼고 체험  판화의 모든 것 판화는 판을 만들어 종이 등에 찍어내는 예술이다. 찍어내는 원리에 따라 볼록판·오목판·평판·공판 등 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이 네 가지 기법에 따라 제작한 판화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김홍식, 윤명로, 이서미, 앤디 워홀, 파블로 피카소 등 국내외 작가 27명이 참가한다. 8월부터는 판화 공방도 체험할 수 있다. 이메일(skyart63@hanwha.com)이나 홈페이지(11일부터, www.63. co.kr)를 통해 접수할 수 있다.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며 비용은 1인당 5만원(입장료 포함). 입장료 성인 1만

3000원, 어린이청소년 1만1000원. 연중무휴.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63스카이아트 미술관  테블릿 PC 중앙 SUNDAY APP에서 더 많은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프린트메이킹(Printmaking)’전 7월 12일~11월 30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내 63스카이아트 미술관, 문의 02-789-5663

SUNDAY MAGAZINE 29


CONTE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아들의 밤 문화

남편은 아내와 아들을 볼 때면 30년 전에 본

환한 아들의 밤은 화난 아내의 밤을 만든다. 그래도 한번 잠들면 깊게 자는 편인 아내

스트를 인용하며 선생은 이렇게 썼어. “낮이

에게 아들의 밤은 차라리 견딜만하다. 아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는 아들의 낮을 더 힘들어한다. 아내에게 그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것은 일종의 고문이다. 여름 낮의 길이는, 긴

자아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아들이 낮에 자

여름 낮 침대에 길게 누운 183cm 아들의 길

고 밤에 깨어있는 것은 상상력의 시간을, 창

이는. 그것은 아내의 신경을 가늘고 길게 잡

조적 자아의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오직 밤

아당긴다. 아홉 시쯤 남편이 퇴근해 돌아올

에만 깨어나는 영감이 있다. 라디오에서도 오

때까지.

후 2시에 틀어주는 음악과 새벽 2시에 들려

영화 ‘레이디호크’가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남편이 손을 씻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주는 노래가 다르지 않느냐. 아들은 새벽 2시

추기경은 질투에 눈이 멀어 자신이 사랑하

식탁에 앉자마자 아내는 붙들고 있던 끊어

의 노래 같은 사람이다. 밤과 낮은 서로 문법

는 여인 이자보와 그녀가 사랑하는 호위대

지기 직전의 신경을 한숨과 함께 풀어놓는

이 다르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장 나르바에게 마법을 건다. 낮에는 이자보

다. 사람이라면 밤에 잠자고 낮에 활동하는

아내는 배신자 바라보는 눈으로 남편을 노

가 매로 변하고, 밤이면 나르바가 늑대로 변

게 맞지 않는가. 기업에서도 밤에 일하는 사

려본다. 아내가 낮이고 아들이 밤이라면 남

해서 두 연인이 사람인 상태로는 영원히 만

람에게 돈을 더 많이 주지 않느냐. 왜 그러겠

편은 저녁 같은 사람이다. 남편은 밤중에 아 들에게 다가가 낮의 세계가 요청하는 말을

날 수 없도록 말이다. 아내와 아들도 마법의

는가? 당신 아들을 한번 봐라. 점점 몸이 마르

주문에 걸린 연인처럼 둘 다 깨어있는 상태로

고 야위지 않는가. 사람이 햇빛을 받아야지. 그러나 밤의 문법으로 전해주었다.

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아들이 잠들 때 아내

뱀파이어도 아니고 왜 햇빛을 싫어하는 거야.

역시 효과가 있었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

는 깨어나고 아내가 자고 있을 때 아들은 활

밥도 별로 안 먹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

에 오니 아들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낮이

동한다.

리기도 하고 땀을 흘려야 밥맛도 있지. 누굴

아니라 밤에. “이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되었

아들의 밤은 아내의 낮보다 밝다. 아내가

닮아 저렇게 운동을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네.” 4학년인데 본격적인 취업준비도 해야 하는

쓰고 음악을 듣는다. 화장실에 가고 부엌을

거 아닌가. 남들은 1학년 때부터 한다던데. 이 “아빠 오셨어요. 오늘따라 늦잠을 좀 잤네. 밥

들락거린다. 새벽에는 라면을 끓여먹기도 한

건 모두 아빠인 당신 책임이다. 아빠로서 아

다. 커피도 내려 마신다. 노트북으로 영화나

들에게 알아듣게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남편은 아들을 변호해본다. 당신도 읽었을

아들의 밤은 아내의 한낮보다 밝고 분주하다. 거야, 황현산 선생의 『밤이 선생이다』. “낮

30 SUNDAY MAGAZINE

그때다. 아들이 일어나 나오면서 인사한다.

잠든 밤에 아들은 깨어있다. 책을 읽고 시를

스포츠 경기를 보고 게임을 한다. 그러느라

들숨날숨

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 괴테의 파우

안 먹어요?”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 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 『슈 슈』를 썼다.

어떤 운명이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생선가게 안에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고

▶“자신의 인생을 들여다보라. 그것도 자세

▶“어떤 운명을 타고나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 아주머니는 고양이

히. 현재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을 말이다. 어

는 방법은 존재한다. 행복의 논리는 간단하

들을 쫓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생선을 먹이로

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당신

다. 행복해질 수 있는 행동을 하면 된다.(중략)

던져주었습니다. (중략) ‘고양이에게 생선가

은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평가하라. 장수하고

행복은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아는 태

게를 맡긴 격’. 우린 살면서 이 말을 수없이 하

싶다면 행복을 점검해 본 후 삶의 행복 지수

도’에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맛있는 과자를

거나 듣습니다. 그러나 이 가게 안의 모습을

를 높일 수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라. 내가

손에 쥐고 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때

보며 제가 알고 있는 상식이 한번에 무너졌습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인 제임스 코든은 이

문에 그렇지 못한 현실이 불행하다고 여기고,

니다.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들, 많이 가지지는

렇게 말했다. ‘뭔가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더욱 이기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들은 이런

않았지만 작은 것이라도 베풀고 사는 사람

차이는 뭔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오판을 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해 버

들이 있어 아직도 세상이 아름다운 게 아닐

하라(너무 심각하게는 말고. 그러면 멋이

린다. 천천히 단계를 밟아야 행복을 얻을 수

까요?”

없다).”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해질 수는 없다.”

-알렉스 김

-자일스 브랜드리스

-가토 다이조

『행복하라 아이처럼』

『인생은 불친절하지만 나는 행복하겠다』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photo ESSAY

조용철 기자의 마음 풍경

바람의 손짓 밤새 바람이 몹시 불었습니다. 잠 못 이룬 밤을 달려 들녘에 섰습니다. 마음을 흔들어 놓는 바람의 실체를 보리라. 알 수 없는 설레임으로 벌판을 응시했습니다. 멀리 버드나무에 걸린 바람이 손짓하더군요. 그 바람의 근원은 무엇일까 다가서 보니 내 마음이 나뭇가지에 걸렸네요. -인천 소래습지공원

조용철 기자의 포토에세이 ‘마음 풍경’은 세상의 모든 생명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경이로운 삶의 의지에서 내일의 꿈과 희망을 찾습니다.

SUNDAY MAGAZINE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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