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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4~25, 2014. no.389. sunday.joongang.co.kr

ISSUE

연극무대서도 반짝

http://sunday.joongang.co.kr

제389호 7월 24일~25일 값 1000원

82

늦바람 김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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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SUNDAY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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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MAGAZINE 39


CONTENTS editor’s letter

06

THIS WEEK PEOPLE 데뷔 60주년 공연하는 연극계 대부 임영웅

‘써니’의 희망가

ISSUE

08

이선희는 늙지도 않더이다. 폭발적이면서

중년 여성들의 로망 ‘돌아온 미코’ 배우 김성령

애절한 목소리는 30년 전과 똑같네요. 동 그란 안경 속에 눈망울이 반짝반짝하는,

HOT PLACE

단발머리 소녀의 수줍음도 전혀 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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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고요. 여기에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

FOCUS

에 선 누님’같이 주위를 보듬고 품게 된 원

16

숙미까지 배어나와 보기에 좋았습니다.

리움 10주년전 ‘교감’

지난주 토요일 밤 방송된 JTBC ‘히든싱

PORTR AIT ESSAY

20

배우 김성령

트럼펫 연주자 최선배

어3-이선희 스페셜’편은 J학원에서 ‘J에 게’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풀던 저의 30년

COLUMN

전 여름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함께 나온

21

후배 가수들과 노래와 덕담을 주거니 받

컬쳐#: 광주비엔날레 ‘세월오월’ 유감

거니 하는 모습도 훈훈했고요(임창정의 FOOD

22

‘소주 한 잔’을 부르는 이선희의 모습은 이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42> 이태리 레스토랑 파올로 데 마리아

WINE

미 유튜브에서 기록적인 조회 수를 올리 고 있습니다). 23

제가 놀랐던 것은 힐링이 될만한 노래를

김혁의 와인야담 <20·끝>

불러달라는 요청에 대한 이선희의 선곡이

REVIEW & PREVIEW

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구전가처럼 불

24

리던 ‘희망가’를 부르기 시작하더라고요.

서울시향·피아니스트 임주희 협연 핸드백 박물관 ‘백스테이지’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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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이냐 /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마음』

족할까 /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SOUL-SEARCHING

생각하니 / 세상 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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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로다.”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20·끝> 『분신』VS『절망』

GALLERY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

‘이 풍진’이라는 가사 첫 소절부터 왜 그리 콧날이 시큰해지던지요. 세상이 왜 이렇

29

게 점점 어수선해지고 험악해져만 가는

‘블루 & D장조’전

지 말입니다. ‘부귀와 영화’만 좇았던 결과 CONTE

30

가 이런 것인가요.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PHOTO ESSAY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다시 희망을 품 고, 또 사랑도 하며 살아가야 하겠죠.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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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풍진’ 세상일지라도 말입니다.

조용철의 마음 풍경 리움 10주년전 ‘교감’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S MAGAZINE

표지 최근 연극 미스 프랑스를 성황리에 마친 배우 김성령.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문화에디터 정형모 취재 기선민 이도은 유주현 사진 최정동 전호성 편집 임종일 디자인 전유진 통신원 최선희(파리) 김성희(밀라노) 광고 구명서 김진경 박본재 마케팅 박유선 최수인 이민주 이선우 기사제보 02-751-9000, 080-023-5002 광고문의 02-751-5555 / Fax 02-751-5806

1부 1000원 /월 5000원 정기구독문의고객센터 080-023-5005

04 SUNDAY MAGAZINE



THIS WEEK PEOPLE

연출 데뷔 60년, 연극계 대부 임영웅

“지구 어딘가에 사람이 사는 한 연극은 이어진다”

“호적이 잘못된 거지, 내 나이가 여든이에요. 2년 전에

좋은 연극이 한 사람의 인생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넘어져 한달 반 동안 입원을 했는데, 신기하게 앓았던

그의 믿음이다. “연극이란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 작

기억이 없어졌어요.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더 오래 살

품 속에 많은 인생이 있지만 ‘인생은 틀렸다’라는 연

것같아.”

이죠.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그런 일깨움을

키고 선 백발의 노 연출가는 행복해 보였다. 체력이 달

얻으면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격이라도 언젠

리지 않느냐 물으니 “내가 좋아서 하는데 누굴 원망

가는 사람 사는 세상이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느냐”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만드는 거에요.”

‘한국 연극계의 대부’ 임영웅(78)이 연출 데뷔 60주

85년 세운 산울림소극장은 지난 30년간 한국 연극

년을 맞았다. 그간 길러낸 후배들도 이제 각 분야를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며 순수연극의 대명사가 됐고,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신시 컴퍼니 박명성 대표, 배

현재 그의 두 자녀가 극장장과 예술감독을 맡아 대

우 손숙,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등이다. 이들 ‘임영웅

를 잇고 있다. “인건비 줄이려고 식구를 동원한 건데…

사단’이 뭉쳐 헌정 무대를 마련했다. 연극 ‘가을 소나

(웃음). 사실 딸은 그림을 그렸어요. 내 딴엔 연극 소품

타’(8월 22일~9월 6일, 대학로예술극장)다. 임씨가 연출을

만들라고 미술을 시켰는데, 어려서는 애비 일을 마땅

맡았다.

치 않아 하더라고. 만날 집에서 가구나 가져나가고 어

“60년 했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60년이나 좋아하는 연극을 할 수 있었다는 게 감사할 뿐이죠.” 1955년 동랑 유치진의 ‘사육신’으로 연출 데뷔했

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 같애.” 평생 별다른 계획을 세워 본 적이 없지만 오늘까지

연극반에 들어간 이래로 연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

연극을 하며 살 수 있는 건 기자 시절 만난 부인 오증

생을 걸어왔다. “따지고 보면 할머니 덕인 것 같아. 구

자(77) 서울여대 명예교수의 공이란다. “나한테 속아

경 다니는 걸 좋아하는 분이라 아이스케키 하나 사주

서 결혼한 거죠. 먹고 살려고 부업 삼은 게 신문기자

고 극장이며 영화관을 꼭 데리고 다니셨거든. 나중엔

였으니. 나중에 전업으로 나설 때는 자기가 교직에 있

불량학생이 돼서 혼자 돌아다니며 성인극까지 다 섭

으니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더군요. 그러지 말라고

렵했지만…. 허허.”

해도 했겠지만(웃음). 그때 반대 안 한 게 현명했지. 이

먹고 살기는 쉽지 않았다. 신문기자, 방송사 PD로 돈

놈은 연극 아니면 못 살겠다 싶었나봐요. 여하튼 덕 분에 맘놓고 매진할 수 있었어요.”

을 벌면서 연극판을 지켰다. 66년 국내 창작 뮤지컬 1

‘가을 소나타’는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

호 ‘살짜기 옵서예’, 69년 국내 초연 이래 45년간 공연

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 성취욕이 강한 피아니

되고 있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모

스트 모녀의 갈등을 그린 리얼리즘 드라마다. 베리만

두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다.

의 작품을 연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베리

“‘고도’를 멈추지 않는 건 20세기 최고의 희곡이기

만은 원래 스웨덴 국립극장 예술감독을 지낸 연극인

때문이죠. 연극이란 인간을 그리는 건데, 현대에는 하

이에요. 이 작품도 원래 연극이 먼저인데 한국에선 영

도 별 사람이 다 있으니 인간을 그리기가 아주 어려워.

화만 유명하지. 매체가 다양해졌지만 드라마의 시초

‘고도’는 현대인의 전형을 잘 담고 있어요. 인생이란 뭐

는 연극이란 걸 기억했으면 해요. 이제 냄새 나는 영

냐를 그만큼 상징적으로 그린 작품도 없는 것 같아요.

화까지 나온다는데, 그건 메커니즘일 뿐 드라마의 기

하면 할수록 그런 것 같아.”

본은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 지구에 사람이 사는 한

60년 연극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은 ‘사람이 사람

06 SUNDAY MAGAZINE

수선하니까…. 그런데 미국에 오래 살더니 동포들이 ‘산울림’을 다 알더라는 거에요. 아버지가 허망한 일을

지만, 중학시절 국어교사였던 조흔파 선생의 권유로

운명처럼 연극을 시작했지만 그 시절도 연극으로

연극 ‘가을 소나타’

극 봤나요? 좌절 속에도 어떤 일깨움을 주는 게 연극

지팡이에 의지한 채 무더운 여름 내내 연습실을 지

답게 사는 데 연극이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 한 편의

어떤 형태로든 연극은 건재할 겁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ISSUE

오십 코앞 ‘미코’ 김성령, TV영화연극 종횡무진

‘난 왜 안 될까’ 그를 키운 건 결핍이었다 인터뷰하는 동안 종종 들리던 “제 나이가 오십이 코앞인데…”라는 말이 참 생경했다. 배우 김성령. 1966년생들과 같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소위 ‘빠른 67’이니 과연 오십이 코앞이다. 하지만 TV와 스크린에서 보이는 그의 비율 좋은 몸매와 세심하게 관리한 스타일은 영락없이 시계바늘이 거꾸로 도는 모양새다. 드라마 ‘추적자’(2012) ‘야왕’(2013) ‘상속자들’(2013) 등을 거치며 그는 30대 여성들에겐 ‘저렇게 나이들고 싶다’는 로망을, 40대 이상 여성들에겐 ‘저렇게 나이들 수 없는데 어쩌나’하는 절망을 안겨줬다. 여세를 몰아 올해는 영화 ‘역린’(혜경궁 홍씨 역)과 ‘표적’(형사반장 역)에 출연했고 ‘표적’이 제 67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은 덕에 레드카펫에 서는 짜릿함까지 누렸다. 여기서 그쳤다면 팬들이 ‘소처럼 열심히 일한다’는 뜻의 ‘소성령’이란 별명까지 붙여주진 않았을 터. 재벌집 딸 혹은 사모님 역할을 내세운 화려하기 그지 없는 패션, ‘중년 여성들의 워너비(닮고 싶은 사람)’라는 수식어에 기대지 않고 그는 최근 무대 도전을 감행했다. 이달 막을 내린 연극 ‘미스 프랑스’에서 1인 3역을 맡아 석 달간 구슬땀을 흘린 것. ‘미스 프랑스’는 김성령의 열연에 힘입어 한 달 연장공연, 평균 객석점유율 80%, 관객 2만명 돌파라는 호응을 얻었다. 뒤늦게 찾아온 전성기를 즐기며 중년 여배우의 지평을 한 뼘씩 넓혀가고 있는 그를 20일 만났다.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JTBC·CJ E&M·롯데엔터테인먼트·SBS

08 SUNDAY MAGAZINE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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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그 나이에’ 무대에 선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연극 ‘아 트’(2005) ‘멜로드라마’(2008) 등을 하면서 청심환 을 날마다 먹었지만 객석만 바라보면 머릿속이 하얘 졌던 시절의 두려움. 그는 아직도 A4용지 한 장 반 분 량의 대사를 몽땅 잊어버렸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무대에 서보자고 결심한 건 연극이 제겐 너무나 겁 나는 분야였기 때문이에요. 영원히 잘할 수 없을 것 만 같은 두려움을 이번에야 말로 넘어서자 결심했어 요. 연습할 당시 극장 위층에선 이순재·나문희·신구 세 분 선생님이 ‘황금 연못’ 연습을 하고 계셨어요. 그

1인 3역을 한 연극 미스 프랑스.

얘기를 듣는데 순간 눈물이 핑 돌았죠. 세상에, 그 연

관객들은 김성령의 실수에 특히 즐거워 했다. 의미와 맥락이 없는데 분량이

세에 그런 열정이라니. 그 분들이 모였다는 사실만으

워낙 많다 보니 대사가 입에서 엉켰다. “대사가 워낙 웃기니까 저도 종종 웃음을

로도 정말 감동적이잖아요. 거기서 힘을 많이 받았

못 참았어요. 그런데 제가 웃으면 객석에서 난리가 나요. 원래 배우가 실수를 하

죠.”

면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는데 의아할 정도로 관객들이 좋아하는 거에요. 나중

‘미스 프랑스’는 지난해 프랑스에서 히트한 코미디

엔 제가 실수를 안 하니까 오히려 안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제가 사

를 원작으로 했다. 김성령이 맡은 역할은 미스 프랑스

극에서 중전 역을 많이 해서 완벽하고 도도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출신으로 미스 프랑스 선발위원회 위원장인 플레르,

실수를 하니까 그게 더 친숙한 느낌을 줬던 것 같아요.”

플레르와 흡사하게 생긴 호텔 종업원 마르틴, 스트립

드라마 출연 제의를 물리치고 5개월간 연극에만 몰두하기로 한 건 극단 수현

댄서이자 플레르의 쌍둥이 동생인 사만다다. 이중 플

재컴퍼니 조재현 대표 때문이었다. “저한테 중년 여배우로서의 책임감을 강조

레르가 미스 프랑스들의 누드사진 촬영 사건으로 충

했어요. ‘네가 이번 공연을 잘 해내서 앙코르 공연 때 네 나이대 여배우가 무대

격을 받아 말을 잊어버리고 ‘외계어’를 하는 설정이

에 설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요. 그 말에 마음이 완전히 흔들렸죠. 사실 저랑

이 연극의 포인트. “옴니아 갤럭시 노트 쓰리 바카스

더블캐스팅된 이지하씨는 더블캐스팅될 레벨이 아니에요. 경력이 20년 넘는 중

나 비타오베크(비타500) 벨리댄스가 차차차”라든가

견 배우거든요. 그만큼 제 나이 또래 여배우가 할 역할이 없는 게 슬픈 현실인 거

“무좀에 라미실스, 에스티 로더 록시땅에 루이 뷔통 짝

죠. 마지막 공연 때 이순재 선생님이 보러오셨는데, ‘좋은 연극배우 하나 생겼어’

퉁이야”하는 식으로 브랜드 이름을 대충 조사와 섞

라는 덕담에 정말 뿌듯했어요.”

어 만든 기상천외한 대사인데 김성령의 천연덕스러 운 푼수 연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관객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얼굴이 아플 정도로 웃었지만 그에겐 고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가 가장 자랑스러울까” 생각 잘 알려진 대로 김성령은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대한민국 공인 미녀가 됐 다. 미스코리아의 주가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던 시절이다. 그는 곧 강우석

난의 행군이었다. 총 101회 공연 중 절반이 넘는 56회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주연으로 발탁됐고 대종상과 백상

가 그의 몫이었고 공연 시작 전 2개월을 온전히 연습

예술대상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눈부신 출발이었지만 이후 행보는 의외로 조용

에 바쳐야 했다.

했다. 드라마와 영화, 연극 출연을 꾸준히 이어갔지만 주연급으로 올라서진 못

“항상 정해진 연습시간보다 두세 시간 먼저 가서 발

했다.

성연습을 했어요. 연극을 전문적으로 하는 배우들 따

-처음부터 연기에 뜻을 둔 건 아니었나요.

라가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매일 10시간

“직업인로서 성공해야겠다는 욕심이 전혀 없었어요. 얼떨결에(?) 미스코리아

넘게 대학로에서 살았죠. 영화 홍보가 겹쳤을 때였는

가 됐으니까요. 일이 들어오면 막 짜증냈어요(웃음). 그땐 서른 살 되기 전에 결혼

데 메이크업 하면서도 중얼중얼, 대기하면서도 중얼

해서 현모양처로 살려고만 했죠. 결혼해서 남편이 사업을 하는 부산에 내려가 3

중얼, 자나깨나 대사만 외웠던 것 같아요.”

년간 시댁에서 살았는데, 첫 비행기 타고 서울 가서 촬영하고 마지막 비행기 타 고 내려오는 식으로 하는 게 너무 힘든 거에요. 그때 한 골프웨어 전속모델을 했 는데 재계약하자는 것도 거절하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몰라요.” -그때 열심히 할 걸 후회될 때가 지금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럼요. 그런데 그때 열심히 뛰었으면 지금 인기가 더 많을 텐데 하는 후회가 아니에요. 할 수 있었을 때 더 배우고 더 경험하지 못했다는 반성이죠. 외국 생활 도 1년 정도 하면서 외국어도 배우고 경험의 폭을 넓혔더라면 한 인간으로서 훨 씬 발전했을 텐데 그게 아쉬워요.” 10 SUNDAY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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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욕심이 본격적으로 생긴 건 언제부터인가요.

-그게 뭘까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쯤? 큰 아이가 지금 중학 1학

“가령 제가 실수하거나 푼수처럼 보일 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요. 예전엔

년, 작은 아이가 초등 4학년인데 애들이 크면서 내가

사람들이 저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는 걸 몰랐어요. 이건 계산한 게 아니거든

엄마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면 제일 자랑스러울까

요. 배우가 실수를 해도 관객이 웃어준다는 건 그 배우한테 실수를 눈감아 줄

를 고민하게 됐어요. 육아와 살림도 분명 값진 일이지 만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때부터 연

추적자

만한 친밀감을 느낀다는 거잖아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김성령만이 갖는 매력인 거죠. 그걸 알게 된 게 좋아요.”

기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죠. 대학도

-영화는 드라마에 비해 배역 비중이 비교가 안 되는데 꾸준히 하는 이유는.

편입하고(경희대 연극영화과) 석사 과정도 하고(한국

“비중이 아니라 역할이 기준이죠. 그리고 의미가 있으면 해요. 하정우 감독

외국어대 경영대학원 마케팅학).”

의 ‘허삼관매혈기’에 출연할 건데 두세 신 정도밖에 안돼요. 그래도 연출자 하정우가 어떨까 궁금해서 하기로 했어요.”

-욕심과 현실의 간격이 힘들진 않았나요.

“물론 사람이니 욕심이 앞서죠. 난 배우로 이게 끝인

상속자들

가 절박한 마음이 들 때가 왜 없었겠어요. 그렇게 매

집에선 몸빼 아줌마  아들이 폭로하겠다고 ‘협박’

달리다 보니 지치게 되고 어느 순간엔 다 내려놓게

-관계자들 얘기로는 무대에서 나오던 카리스마가 내려오면 ‘100% 동네 아줌마’로 바뀐다던

됐어요. 요새 사람들이 저한테 소속사 바꾼 다음부

데요.

터 잘 나간다, 쌍꺼풀(수술) 한 다음부터 떴다 이러는

“저희 아들이 ‘사람들한테 폭로하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집에선 편하게 지

데 솔직히 서운해요. 뭐가 됐든 뿌린 씨 없이 거두는

내요. 슬리퍼에 몸빼에 화장은 당연히 안 하죠. 예전에 친구들이랑 지방으로

야왕

건 불가능하다고 봐요. 법륜 스님이 ‘지금은 언젠가

여행을 갔는데 아침에 공원에 산책하러 갔어요. 저쪽에서 커플이 오더니 휴

를 위한 적금’이라고 한 것처럼요. 제대로 해봐야겠다

대전화를 건네려고 하길래 ‘어머, 지방에서도 날 알아보네?’ 속으로 우쭐했

고 맘 먹고 나서부터는 스케줄을 30분 단위로 쪼개가

는데 알고 보니 자기들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거에요. 내가 그래도 연

면서 살았어요. 작품도 2, 3편씩 하고 운동·발성·노래

예인인데….(웃음) 신데렐라 마차가 밤 12시 되면 호박으로 변하듯이 저도 드

안 배운 게 없어요. 제가 누구처럼 연기력을 타고난 배 우는 아니니까요. 어느 강의에서 들은 얘기인데, ‘운

레스 안 입고 헤어 메이크업 안 하면 그냥 보통 아줌마로 돌아가죠. 공효진이 역린

나 정려원 이런 친구들이 패셔니스타지 전 아니거든요. 오죽하면 얼마 전 만

칠기삼’이라는 말보다는 ‘복칠기삼’이 맞다고 해요.

난 남편 친구가 ‘제수씨, 화장한 거 함 들어갈 때 보고 처음 봤습니다’ 그러겠

운은 요행히 오는 거고 복은 자기가 쌓아둔 게 있어

어요.”

서 받는다는 거죠. 대학 편입이나 석사 학위도 그래요.

-‘중년 여성들의 로망’이라는 칭찬이 한편으론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나이 든다는 것에

누구나 시작은 할 수 있지만 끝내는 건 아무나 못하 잖아요. 이런 걸 하나둘씩 끝내는 과정에서 자신감이

대한 강박은 없나요. 표적

“저도 여자니까 주름 생기는 건 싫어요. 하지만 이젠 노화에 대해서도 조금

붙었고 제가 쌓은 노력 덕에 지금처럼 많은 분들이 저

씩 받아들이려고 해요. 그래도 배우는 내가 계속 아름답기 위해 노력하는 직

를 사랑해주는 결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업이니까 복 받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노력을 해야 돈 받고 할 수 있죠. 연기

-연기력을 타고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좌절한 적 은 없나요.

는 어떤 점에선 봉사라고 생각해요. 대중의 사랑을 받으려면 좋은 모습을 보 여야죠.”

“제 별명이 ‘자책’이에요. 동생(김성경 아나운서)이

-통신사·식품·약품·샴푸 등 다양한 분야의 광고를 최근 찍었는데 하고 싶은 CF가 있다면.

‘언니는 제발 자책 좀 그만 하라’고 늘 그래요. 재미있

“음…커피 광고? 요새는 원빈이나 조인성처럼 잘생긴 젊은 친구들이 커피

는 건 ‘난 왜 안 될까?’하는 부정적 마인드가 절 성장

광고를 찍던데 참 좋아보여요.”

시켰다는 거죠. 늘 제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

만약 미스코리아 선발 후 연기자로서 승승장구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에 대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나아지려고 하다 보니 어

달라졌을까. 김성령은 “아주 건방졌을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MC나 영화 주

느 순간 제가 가진 재능을 찾은 것 같아요.”

연을 한다는 게 얼마나 귀한 기회였는지를 몰랐어요. 그냥 주어진 거라고만 여겼죠. 돌이켜보면 데뷔 초엔 참 뻣뻣했어요. 젊은 혈기에 ‘할 말은 해야 한다’ 는 고집도 있었고요. 실력이 안 따라주니 금방 꼬리내렸죠. 그게 세상 이치라 는 걸 살면서 배웠어요.” 그는 50대를 앞둔 지금 자신의 모습이 편안하고 좋다고 했다. ‘김성령처럼 나이들고 싶다’는 사람들 얘기에 “부담스럽다”면서도 내심 기쁜 건 그래서다. 왕년의 미스코리아 진이라는 ‘왕관’의 무게를 연륜의 근육으로 견뎌내고 이 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듯한 김성령.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갈 그의 ‘인생 2 막’이 궁금해졌다. SUNDAY MAGAZINE 13


HOT PLACE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핸드백박물관 ‘백스테이지’

내가 만든 든든한 ‘백’ 명품 부럽지 않구나

1

‘잇백’의 종말은 오래된 얘기다. 가방에서 ‘대 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가치 소

수 있는지 등에 따라 선택의 폭이 넓다. 그 중에서도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핸드

죽 더미가 그득하다. 소가죽·양가죽은 물론

비’라는 말이 생겨나면서 내 멋에 고르고 내

백박물관 ‘백스테이지(Bagstage)’는 꽤 눈

이고 버펄로·악어·애너콘다 등이 망라돼 있

방식으로 메는 가방들이 거리를 누빈다. 나

여겨볼 공간이다. 이 건물은 해외 유수 명품

다. 종류로는 500여 가지, 물량으로는 4000

만의 가방을 직접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하

핸드백을 ODM(공급자생산)방식으로 만들

장쯤 된다고 한다. 말 그대로 가죽 백화점이

나둘씩 늘어나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하나

어 온 시몬느에서 세웠다. 오픈 당시 박은관

다. 그중에서도 아래층 벽면에 걸려있는 길이

더 보태자면 라이프스타일 분야 전반에 손맛

회장이 핸드백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

4m 짜리 애너콘다 가죽과 호랑이 무늬를 프

을 강조하는 DIY 바람이 분 것도 때를 같이

는 의지를 밝혔던 만큼이나 박물관·갤러리

린팅한 대형 소가죽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다.

말고도 DIY 수업을 마련했다. 손재주 없어도, 가격대도 3만 원대 양가죽부터 100만 원대

메가트렌드까진 아니어도 핸드백 DIY는

공예엔 생판 초짜라도 환영이란다. 세상 어디

악어가죽까지 천차만별이다. 이 모든 것이 전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는 중이다. 불과 2~3년

에도 없는 핸드백을 만들겠다는 의지만 있다

문 업자가 아니고서야 쉽게 보지 못할 광경인

전만 해도 문화센터 위주로 개설됐던 강좌가

면 말이다.

데 이유가 있다. 시몬느는 27년간 DKNY·마이클 코어스

이제는 개인이 운영하는 가죽공방 곳곳에서 마련된다. 심지어 인터넷에선 동영상 강좌를

14 SUNDAY MAGAZINE

확연히 드러내 준다. 벽면마다, 선반마다 가

500여 종 가죽 중 마음대로 골라 제작

등 수많은 브랜드 제품을 도맡아 생산하고 있

보며 혼자 만들 사람들을 위한 키트도 판다. 건물 깊숙이 지하 3~4층을 튼 복층 공간에

다. 그러다 보니 공장에서 쓰고 남은 자투리

가방 제작 경험이 있는지, 원하는 디자인이

서 들어서면서부터 후각이 분위기를 압도한

조각이 남게 마련. 공방은 그것들을 공수해

정해져 있는지, 시간과 비용을 얼마나 쏟을

다. 각종 동물 가죽 냄새가 장소의 정체성을

일반 고객들에게 판매한다. 수강생의 경우 어


HOT PLACE

3

4

5

2

떤 가방을 만들 것인지 결정하면, 그 다음으

회, 3시간씩) 안에 만들 수 있을까 싶다. 물론

1 DIY 공방에 전시된 해외 빈티지 핸드백. 2 bagstage’ 건물 지하 3~4층을 터서 만든 가죽샵과 DIY 공방. 3 이 곳에선 500여 종 가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4 DIY 강좌에서 샘플이 되는 핸드백들. 5 2~4명이 참여하는 강좌는 거의 일대일 강습이다.

제작해 붙인다. 가죽 재봉의 경우 손으로 ‘한

로 여기서 가죽을 바로 고른다. 다른 어느 공

가죽 공예에는 아무 경험도 없다는 가정에

땀 한 땀’ 바느질하려면 펀칭으로 구멍을 내

방보다 자신의 취향에 꼭 맞는 가죽을 택할

서다. 30여 년간 핸드백 제작 현업에서 일해

고 다시 꿰매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작

수 있고, 초보자의 경우 직접 성수동·신설동

온 송덕구 실장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웃

업이다. 송 실장은 “처음 배우는 이들도 80%

등 가죽시장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게 공방

었다. 클러치는 1회 수업에도, 쇼퍼백은 3회

의 완성도를 보인다”면서 “직접 만드는 재미

측의 자랑이다.

정도면 충분하단다. 패턴과 장식이 간단하기

도 재미지만 핸드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때문이다.

를 아는 기회도 된다”고 설명했다.

가죽 끝단 처리가 가방의 완성도 결정 수업에 앞서 가장 궁금한 건 어떤 가방을 만

핸드백은 크게 네 가지 단계로 제작된다.

수강생은 대부분 주부와 인근 직장인, 그

우선 패턴을 용지에 따라 그리는 것이 첫 단

리고 패션 전공 학생들이다. 남성 수강생도

들 수 있는가다. 보스턴백부터 쇼퍼백·클러치· 계. 그 다음으로 이를 가죽에 대고 다시 본뜬

10% 정도 되는 데 주로 여자친구나 아내에게

호보백·서류가방·백팩 등 모두 15가지의 샘

다. 안감도 여기에 맞춰 같은 작업을 반복한

깜짝 선물을 해주려고 오는 이들이 많단다.

플 중 하나를 고르게 된다. 초보자 과정이기

다. 커팅할 땐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 여분을

주말 수업의 경우 한 달 전부터 예약이 꽉 찰

때문에 기존 패턴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이다. 넉넉히 두는 것이 포인트. 세 번째 단계로 가

정도로 인기다.

몇몇 공방에서 해외 브랜드의 카피 제품을 만

죽 연결 부분들을 붙인 뒤엔 가죽 끝단을 처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드는 것과 달리 이 곳의 샘플들은 시몬느 디

리한다. 얇은 붓으로 약물을 바르는 과정인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자인팀에서 별도 제작한다고 한다.

데, 이를 얼마나 매끄럽게 하느냐에 따라 완

● 1개월 과정으로 하루 3시간, 일주일에 한번 수업이 진행되며 수강료는 20만원.

성도가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가방 손잡이를

5명 이상 신청시 20% 할인이 가능하다. 문의 02-3444-0739

샘플들을 보다 보면 과연 이걸 한 달(주 1

SUNDAY MAGAZINE15


FOCUS

삼성미술관 리움 개관 10주년전 ‘교감’ 가보니

시대를 넘어 공간을 넘어 예술은 通한다

1 16 SUNDAY MAGAZINE


FOCUS

삼성미술관 리움(Leeum)은 2004년 서울 한남동 약 8000 ㎡ 대지에 연면적 약 3만 ㎡ 규모로 들어선, 한국 고미술과 국내외 현대미술의 보고(寶庫)다. 저명 건축가인 렘 쿨하스, 마리오 보타, 장 누벨이 설계 한 이곳은 고미술 전시실인 ‘뮤지엄 1’, 현대미술 전시실인 ‘뮤지엄 2’, 기획전시실인 ‘블랙 박스’ ‘그라운드 갤러리’와 로비 공간으로 구성 돼 있다.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아 시작한 ‘교감(Beyond and Between·8 월 19일~12월 21일)’은 미술관이 문을 연 이후 최초의 전관(全館) 전 시다. 덕분에 상설전시실도 10년 만에 처음으로 개편해 눈길을 끈다. 2년 여의 준비를 통해 고대와 현대, 한국과 세계, 예술과 관객을 ‘교감 (交感)’이라는 코드로 묶고 여기에 걸맞는 작품 230여 점을 선보였다. 18일 오후 우혜수 학예연구실장과 함께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동 선은 간결했고 임팩트는 컸다. 연대기적, 지역별 구성 대신 서로 다른 장르와 시공을 섞어 ‘포인트’를 준 덕분이다.

2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삼성미술관 리움, 김현수 작가

현대미술, 고미술의 손을 잡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면 ‘뮤지엄1’이다. ‘시대교감(時代 交感)’전이 시작되는 곳이다. 청자(4층), 분청사기와 백자(3층), 고서 화(2층), 불교미술과 금속공예(1층)로 이루어진 기존 전시실 구성은 유지하되, 층마다 현대미술 작품을 함께 배치해 힘을 주었다. “박제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우리 옛 미술을 새롭게 보여드리고자 했다”는 게 우 실장의 설명이다. 초입에 있는 비디오실에서 김수자의 명상적 영상작품 ‘대지의 공 기’(2009)가 상영중이다. ‘지수화풍’ 시리즈 중 흙에 관련한 영상으 로 도자기와의 연결성을 꾀했다. 4층의 포인트는 청자양각운룡문매 병(12세기) 뒤로 바이런 김의 회화 연작 ‘고려청자 유약’(1995) 2점을 나란히 설치했다는 점. “청자의 오묘한 비색을 그림과 도자기, 한국과 미국이라는 고리를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했다”는 얘기다. 어두운 전시실을 나와 환한 로툰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가운데 화사한 길이 18m 짜리 설치작품이 눈에 띈다. 분홍·주황·투명·노랑 플라스틱 소쿠리를 이어붙여 동아줄처럼 늘어뜨린 최정화 작가의 ‘연금술’(2014)이다. 다시 3층 전시장으로 들어가니 이번엔 분청사기와 백자의 공간이 다. 전시장의 한가운데에는 ‘달항아리’라 불리는 백자호(白磁壺)가 있다. 국보 제 309호로 키가 44.5cm에 달한다. 18세기에 제작된 것으 3 1 보물 제 1385호인 청자양각운룡문매병(고려 12세기)과 바이런 김의 유화 ‘고려청자 유약 #1, #2’(1995~1996). 설치 컨셉트 설명을 위해 두 작품을 그래픽 처리했다.

2 이불의 ‘심연’(2014). LED 조명이 현란한 거울방 속으로 들어가면 마치 깊숙한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3 올라퍼 엘리아슨의 ‘중력의 계단’(2014). 계단 벽면과 천장에 거울을 붙이고 반원의 조명과 설치물을 부착, 빛으로 가득 찬 우주 행성계를 연출했다.

로 추정된다. 그 옆에 이수경의 작품 ‘달의 이면’(2014)이 보였다. 깨진 도자기를 이어붙이는 작업을 하는 그는 함경도 회령 지역에서 만들어진 흑자 (黑磁)와 옹기 편을 수집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 “함경도 회령은 흔하 지 않은 흑자의 산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분단 이후 잊혀져 있었는데 이번에 흑자 파편들로 마치 달항아리의 그림자처럼 만들어 냄으로써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지요.” 2층 고서화실에는 서도호의 부조 작품 ‘우리 나라’(2014)가 있다. SUNDAY MAGAZINE 17


FOCUS

4 18 SUNDAY MAGAZINE


FOCUS

5 4 에르네스토 네토의 ‘심비오인테스튜브타임-향기는 향꽃의 자궁집에서 피어난다’(2010). 관객들은 길다란 모기장 텐트 같은 작품 속을 거닐며 시각·후각·촉각이 총동원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5 아이웨이웨이가 중국 남부 산악지역에서 수집한 고목으로 만든 ‘나무’(2009~2010). 무자비한 도시화로 다양성을 잃어버린 현대 도시의 인공적 풍경을 은유한다.

3D 프린터로 만든 1.5cm 짜리 무수히 많은 인물상으로 중국 대륙과

전시는 해외 현대미술과 한국 현대미술을 댓구 형식으로 붙여 놓

거대한 한반도, 그리고 부속 도서를 만들어 놓았다. 정조의 대규모 행

았다. ‘인간 내면의 표현’이라는 소주제를 가진 2층에서는 2차 대전

차 속 인물들의 분주함을 세밀하게 그려낸 그림 ‘환어행렬도(還御行

이후 불안한 사회의 울분을 어지러운 화면으로 표현한 장 뒤뷔페나

列圖)’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아쉴 고르키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과 한국 전쟁 이후 저항적 예

1층 불교미술실은 고려 시대 불화, 불상 및 불구(佛具) 등으로 구

술정신을 통해 한국적 앵포르멜을 구현한 박서보, 윤명로, 정창섭을

성돼 있다. 그 가운데 설치된 마크 로스코의 검붉은 유화 작품 ‘무제’ 비교하는 식이다. 서체적 표현으로 한국화의 현대화를 이룬 서세옥· (1969)와 비쩍 마른 부처님 체구를 지닌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디에

이종상,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임옥상 등을 통해

고 좌상’(1964-65)은 깨달음과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부처님의 길을

포스트 모더니즘의 궤적을 보여준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여주는 듯했다.

1층에는 ‘근원으로의 회귀’라는 주제로 1960년대 서양의 미니멀 리즘과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를 비교해 놓았다. 엘즈워스 켈리와

한국 현대미술의 좌표를 세계속에서 찾다

도널드 저드의 간명하고 단촐한 작품들이 로니 혼의 투명한 조각 ‘열

현대미술 전시실인 ‘뮤지엄2’로 가기 위해 다시 계단으로 나오면 갑자

개의 액체 사건’으로 이어진다면, 한국에서는 정상화·윤형근·하종현·

기 헉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중력의 계단’(2014)

김환기가 단색 화면의 진수를 선보인다.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자연의 장엄함을 구현해온 그는 이

지하 1층은 팝아트 이후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확장과 혼

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별로 크지도 않은 공간의 한쪽 벽면

성, 경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묶어냈다. 앤디 워홀 이후 대중문화와

과 천장을 거울로 처리함으로써 빛으로 가득찬 장엄한 우주 공간을

고급문화, 일상과 예술이 서로의 경계를 넘게 된 지점에 초점을 맞췄

연출해 냈다.

다. 특히 제 3세계여성대중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재구성했다.

‘동서교감(東西交感)’이라는 주제를 내세운 ‘뮤지엄 2’를 관통하는 화두는 ‘표현(Expression)’이다. 우 실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외부

관객과 함께 손잡고

세계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기획전시실은 ‘관객교감(觀客交感)’을 주제로 소통과 참여를 극대화

맞추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현대 미술이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기다란 모기장 텐트 같은 에르 이같은 현대 미술 사조를 보여주면서 연관성 있는 한국 미술을 함께

네스토 네토의 작품과 각종 퍼포먼스를 할 수 있도록 리크릿 티라바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외국의 아류 혹은 모방이 아니라 우리 만의

닛이 목재로 만든 원형 무대, 사람이 지나가면 소리가 울려퍼지는 재

맥락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닛카디프&조지뷰어스밀러의72개스피커작품을차례로볼수있다. 리움의 소장품 ‘금은장식쌍록문 조개’를 소재로 한 문경원·전준호 감독의 영상작품 ‘q0’에는 영화 배우 소지섭과 정은채가 등장해 시 공을 초월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블랙 박스로 올라오면 아이웨이웨이의 작품 ‘나무’가 위용을 과시 한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른 집단들이 단일한 이상국가를 이루기 위해 억지로 짜맞춰진 것이 지금의 중국이라는 풍자를 담고 있다. 리암 길릭의 알록달록한 알루미늄 작품 ‘일련의 의도된 전개’

삼성미술관 리움 개관 10주년 기념전 ‘교감(8월 19일~12월 21일)’

(2013)로 장식된 카페에 앉아 나와 코헤이의 구슬 작품 ‘픽셀-중첩된

관람료 성인 1만원. 오전 10시30분~오후 6시. 다양한 특별공연과 관객 참여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사슴 #6’을 보며 차라도 한 잔 마시면 리움의 이번 ‘미술 특강’은 비로

매주 월요일·1월 1일·설날 및 추석 연휴 휴관. 문의 02-2014-6901 www.leeum.org

소 마무리 된다. SUNDAY MAGAZINE 19


FOCUS

5 4 에르네스토 네토의 ‘심비오인테스튜브타임-향기는 향꽃의 자궁집에서 피어난다’(2010). 관객들은 길다란 모기장 텐트 같은 작품 속을 거닐며 시각·후각·촉각이 총동원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5 아이웨이웨이가 중국 남부 산악지역에서 수집한 고목으로 만든 ‘나무’(2009~2010). 무자비한 도시화로 다양성을 잃어버린 현대 도시의 인공적 풍경을 은유한다.

3D 프린터로 만든 1.5cm 짜리 무수히 많은 인물상으로 중국 대륙과

전시는 해외 현대미술과 한국 현대미술을 댓구 형식으로 붙여 놓

거대한 한반도, 그리고 부속 도서를 만들어 놓았다. 정조의 대규모 행

았다. ‘인간 내면의 표현’이라는 소주제를 가진 2층에서는 2차 대전

차 속 인물들의 분주함을 세밀하게 그려낸 그림 ‘환어행렬도(還御行

이후 불안한 사회의 울분을 어지러운 화면으로 표현한 장 뒤뷔페나

列圖)’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아쉴 고르키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과 한국 전쟁 이후 저항적 예

1층 불교미술실은 고려 시대 불화, 불상 및 불구(佛具) 등으로 구

술정신을 통해 한국적 앵포르멜을 구현한 박서보, 윤명로, 정창섭을

성돼 있다. 그 가운데 설치된 마크 로스코의 검붉은 유화 작품 ‘무제’ 비교하는 식이다. 서체적 표현으로 한국화의 현대화를 이룬 서세옥· (1969)와 비쩍 마른 부처님 체구를 지닌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디에

이종상,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임옥상 등을 통해

고 좌상’(1964-65)은 깨달음과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부처님의 길을

포스트 모더니즘의 궤적을 보여준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보여주는 듯했다.

1층에는 ‘근원으로의 회귀’라는 주제로 1960년대 서양의 미니멀 리즘과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를 비교해 놓았다. 엘즈워스 켈리와

한국 현대미술의 좌표, 세계속에서 찾다

도널드 저드의 간명하고 단촐한 작품들이 로니 혼의 투명한 조각 ‘열

현대미술 전시실인 ‘뮤지엄2’로 가기 위해 다시 계단으로 나오면 갑자

개의 액체 사건’으로 이어진다면, 한국에서는 정상화·윤형근·하종현·

기 헉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중력의 계단’(2014)

김환기가 단색 화면의 진수를 선보인다.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자연의 장엄함을 구현해온 그는 이

지하 1층은 팝아트 이후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확장과 혼

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별로 크지도 않은 공간의 한쪽 벽면

성, 경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묶어냈다. 앤디 워홀 이후 대중문화와

과 천장을 거울로 처리함으로써 빛으로 가득찬 장엄한 우주 공간을

고급문화, 일상과 예술이 서로의 경계를 넘게 된 지점에 초점을 맞췄

연출해 냈다.

다. 특히 제 3세계여성대중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재구성했다.

‘동서교감(東西交感)’이라는 주제를 내세운 ‘뮤지엄 2’를 관통하는 화두는 ‘표현(Expression)’이다. 우 실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외부

소통과 참여 극대화한 ‘관객교감’

세계를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기획전시실은 ‘관객교감(觀客交感)’을 주제로 소통과 참여를 극대화

맞추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현대 미술이 출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기다란 모기장 텐트 같은 에르 이같은 현대 미술 사조를 보여주면서 연관성 있는 한국 미술을 함께

네스토 네토의 작품과 각종 퍼포먼스를 할 수 있도록 리크릿 티라바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외국의 아류 혹은 모방이 아니라 우리 만의

닛이 목재로 만든 원형 무대, 사람이 지나가면 소리가 울려퍼지는 재

맥락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닛카디프&조지뷰어스밀러의72개스피커작품을차례로볼수있다. 리움의 소장품 ‘금은장식쌍록문 조개’를 소재로 한 문경원·전준호 감독의 영상작품 ‘q0’에는 영화 배우 소지섭과 정은채가 등장해 시 공을 초월한 드라마를 보여준다. 블랙 박스로 올라오면 아이웨이웨이의 작품 ‘나무’가 위용을 과시 한다.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른 집단들이 단일한 이상국가를 이루기 위해 억지로 짜맞춰진 것이 지금의 중국이라는 풍자를 담고 있다. 리암 길릭의 알록달록한 알루미늄 작품 ‘일련의 의도된 전개’

삼성미술관 리움 개관 10주년 기념전 ‘교감(8월 19일~12월 21일)’

(2013)로 장식된 카페에 앉아 나와 코헤이의 구슬 작품 ‘픽셀-중첩된

관람료 성인 1만원. 오전 10시30분~오후 6시. 다양한 특별공연과 관객 참여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사슴 #6’을 보며 차라도 한 잔 마시면 리움의 이번 ‘미술 특강’은 비로

매주 월요일·1월 1일·설날 및 추석 연휴 휴관. 문의 02-2014-6901 www.leeum.org

소 마무리 된다. SUNDAY MAGAZINE 19


PORTRAIT ESSAY

권혁재 기자의 不-완벽 초상화

‘왼손’의 기적, 최선배 <트럼펫 연주자>

“트럼펫 연주자로 한창인 삼십대 중반,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재즈를 위해 독학으로 이룬 연주가의 꿈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여덟 살 꼬맹이 때부터 들어왔던 재즈. 삶의 전부였기에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제겐 왼손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섬세한 감각이 필수인 연주, 오른손 못지않은 왼손이 될 때까지 익히고 익혔습니다. 일흔이 넘은 지금에도 트럼펫과 함께하는 제 왼손, 대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20 SUNDAY MAGAZINE


COLUMN

컬처# : 광주비엔날레 ‘세월오월’ 전시 유보 유감

작품은 작가 몫 평가는 관객 몫 아직도 모르나

한때 세계 자동차 산업의 본산이었지만 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가 완성된 1933년 디

금은 시에서 파산 신청을 할 정도로 쇠락한

트로이트도 조용하진 않았다. 보수주의자들

미국 중서부 도시 디트로이트. 그래도 아직

에게 ‘빨갱이’나 다름없던 리베라가 자본주

까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

의의 상징 격인 디트로이트에서 작업을 한다

는 디트로이트 미술관(Detroit Institute

는 것부터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시의 성직

of Arts, DIA) 덕이 크다. 그 DIA에서도 미

자들은 “신성모독”이라며 들고 일어났다. 갓

술학도와 애호가들이 순례자처럼 들르는 곳

태어난 아기가 부모의 입회 하에 의사로부터

이 2층 리베라 코트다. 멕시코 민중미술 화

예방접종을 받는 장면이 문제였다.

가 디에고 리베라(1886∼1957)가 그린 초대

문제는 그림 속 아기의 금발머리였다. 이것

형 벽화 ‘디트로이트 인더스트리(Detroit

이 일종의 후광처럼 보였기에 성직자들은 이

Industry)’가 있는 방이다.

아기가 예수이고 부모는 요셉과 성모마리아

이 작품은 1930년대 포드 자동차 공장 컨

라고 생각했다. 성(聖)가족이 부적절하게 묘

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모습

사됐다고 여긴 성직자들은 이 그림을 상스럽

을 그린 프레스코화다. 대형 패널 27개가 거

다고 비난했다. 평론가들도 벽화 속 누드에

대한 방 전체를 둘러싼 규모도 물론이거니와

대해 “포르노”라고 지적했으며 일부 보수층

20세기 초 자동차 산업 현장의 모습이 생생

은 흑인이 그림에 들어간 데 경악했다. “미국

하기 그지없어 그림 앞에 서면 ‘압도된다’는 표현 외에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디트로이트 미술관의 벽화 디트로이트 인더스트리(Detroit Industry)’. 홍성담 화백의 걸개그림 ‘세월오월’.

적이지 않다”“디트로이트에 대한 모욕이다” “공산주의 선언이다”. 비판은 차고 넘쳤다.

올해 초 직접 볼 기회가 있었던 디에고 리

인상적인 건 당시 DIA의 두 주요 인물이

베라의 벽화를 떠올리게 된 건 광주 비엔날

대응한 태도다. 한 명은 당시의 보수적 분위

레 20주년 기념전을 둘러싼 잡음 때문이었다. 기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모험을 시도한 윌리

을 판단하는 건 관객 몫으로 남겨뒀어야 한

잡음의 내용은 이렇다. 특별전에 참여한 홍

엄 발렌티너 DIA 관장이다. 다른 하나는 전

다. 홍 화백의 직설적이고 적나라한 그림이

성담 화백이 걸개그림 ‘세월오월’에서 박근

문가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인 DIA의 주요

갖는 미학적 가치에 대해선 미술계 내부에서

혜 대통령을 김기춘 비서실장과 박정희 전 대

후원자 에젤 포드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도 의견이 엇갈린다. ‘세월오월’이 논란 없이

통령의 허수아비로 묘사했다.

아들 에젤은 벽화 공개 후 벌어진 엄청난 논

그냥 전시됐다면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했을

란에 이 한 마디로 대응했다. “나는 리베라의

거라고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 지

작품을 존경한다.”

금도 늦지 않았으니 그림을 원래대로 전시하

홍 화백은 이미 2012년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닮은 아기를 출산하는

고 평가는 관객에게 맡기면 어떨까. 이유가

장면을 그려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놀란 주최

논란은 이내 수그러들었고 DIA엔 벽화를

측은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홍 화백은 박 대

보기 위해 하루 1만 명이 넘는 기록적인 관람

있으면 앞으로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이고

통령이 그려진 위에 테이프로 닭 그림을 그려

객이 몰려들었다. 80여 년이 흐른 지금, 벽화

그렇지 않다면 잊혀질 일이다. 누가 관객에게

붙였다. 그림이 수정된 후에도 전시 여부를

는 DIA의 간판스타로서 이곳을 찾는 수많은

서 작품을 평가할 자유를 빼앗는가.

놓고 회의가 열렸고, 책임 큐레이터가 사퇴했

세계인에게 독특한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고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뉴시스

다. 사실상의 검열 소식에 국내·외 작가들은

있다.

작품을 철수하겠다고 나섰다. 광주비엔날레

‘세월오월’ 파문의 쟁점은 표현의 자유가

재단은 다음달 공청회를 열어 전시 여부를

아니다.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행사에서 관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파장은 쉽사리 수그러

객이 작품을 보고 평가할 자유를 주최 측이

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알아서’ 빼앗았다는 게 진짜 문제다. 예술성 SUNDAY MAGAZINE 21


food

1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42> 한남동 파울로 데 마리아

진짜 이탈리아 맛 서울에도 있었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외국 음식 식당은

출신이다. 2004년 한국에 왔다. 미슐랭 스타

중식당, 일식당, 그리고 이탈리아 식당이다. 중

레스토랑을 포함해서 30년에 가까운 요리 경

식당이나 일식당은 그 나라 출신 사람들이 운

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와서 요리사로 일을

영하거나 요리하는 곳이 꽤 많다. 그런데 이탈

하다가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차리게 된 것이

리아 식당의 경우에는 거의 보기 힘들었다. 물

2009년이다. 그동안 TV 음식 프로에도 출연

론 나는 당연히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기 때문

을 하고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책도 출간하는

에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맛 감각이 그렇게 예

등 활발한 활동도 함께 해왔다. 부인인 지니 대

민하지도 않고, 우리나라 셰프들의 실력만으

표는 호텔크루즈 같은 곳에서 오래 일을 해온

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 편이다.

접객 전문가다. 파올로 셰프와 역할을 분담해 서 이 식당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기본 재료 공수, 본토인이 직접 요리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한식을 먹고 싶을 때가 하지만 내가 한국 요리사가 해주는 한식을 먹

맛의 현지화 거부  정통의 맛에 충실

있다. 언어도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 속에 으면서 차이를 느끼듯 이탈리아 사람들도 같

여기는 정통 이탈리아 식당의 모습을 모두 갖

서 지내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쉽게 피 은 경우에서 그 차이를 느낄 것 같은데 그것이

추고 있는 곳이다. 우선 음식들이 한국 현지화

곤해 진다. 그 보상 심리 차원에서 저절로 익숙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일부러 물어서

가 되지 않았다. 정통의 맛을 지키기 위해서 살

한 음식을 찾게 되는 모양이다. 이럴 때면 한식 찾아간 곳이 바로 한남동에 있는 ‘파올로 데 당을 찾아 나서게 된다.

이곳은 같은 이름의 이탈리아 사람인 파올

치즈나 올리브, 밀가루 등은 이태리에서 수입

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문제는 가끔 로 데 마리아(46) 오너 셰프가 한국인 부인 지

한 것을 사용한다. 피자도 정통 장작 오븐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곳들이 있다는 점이다. 분명 니 데 마리아(Genie De Maria, 한국 이름 최

구워내고, 갖춰 놓은 와인리스트도 모두 이탈

히 간판도 한글로 되어 있고 메뉴도 한식인데 진경·43) 대표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정식 이

리아 와인뿐이다.

요즘은 웬만한 외국 대도시에서는 한식당

맛이 좀 이상하다. 그래서 알아보면 틀림없이 주인이 한국 사

탈리아 레스토랑인 리스토란테(Ristorante)

이탈리아 음식의 특징은 단순한 재료를 사

라기 보다는 약간 캐쥬얼한 음식을 하는 파인

용하지만 만드는 방법이 복잡하고 섬세하다

람이 아니고 요리하는 사람도 한국 사람이 아 트라토리아(Fine Trattoria) 형식이다. 30%

는 것이다. 이곳에서 만들어 내는 파스타 중에

가 넘는 고객들이 이탈리아 사람들이고 이탈

서 ‘이탈리아 치즈 퐁듀를 곁들인 바르베라 와

없이 한국 음식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 리아 대사관에서도 케이터링(catering)을 통

인 파파델레 파스타’를 보자. 모양도 아주 소박

만 우리 같은 ‘본토 사람’들 입맛에는 뭔가 부 해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하고 간단해 보이는 파스타 요리이지만 그 과

닌 경우였다. 그 나라 사람들에게야 별 문제가

족하고 아쉬운 맛이다. 22 SUNDAY MAGAZINE

마리아(Paolo De Maria)’라는 곳이다.

라미프로슈토 같은 소시지류 들도 직접 만들 어서 사용하고, 직접 만든 생면 파스타를 쓴다.

파올로 셰프는 피에몬테(Piemonte)지방

정은 간단치 않다.


WINE 김혁의 와인 야담 <20·끝>

쟈크송 샴페인과 돼지 족발의 하모니 샴페인만으로 전식에서 후 식까지 전체를 서비스하는 경우는 드물다. 샴페인은 식 전주로, 화이트는 전식에, 그 리고 메인 요리에는 레드 와 2

인을 마시는 것이 통상적인 순서다. 필자도 이런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 생각이 깨진 것은 프랑스의 샴페인 지역 을 여행하면서 한 샴페인 하 우스의 저녁 초대를 받고나 서부터다. 샴페인 하우스들은 격식 과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다. 샴페인 자체가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격에 맞는 수준 높은

3 1 이탈리아 치즈 퐁듀를 곁들인 바르베라 와인 파파델레 파스타(오른쪽)와 갑오징어를 이용 한 전채요리(왼쪽). 2, 3 식당 내부 사진 주영욱

테이블과 식사를 제공한다. 유명한 성에서 열린 그날 행사에는 미국 각 주에서 그 회사 샴페인을 가장 많이 판 샵 오너 20여 명이 초대됐다. 드레스 코드는 정 장이었다. 테이블에 앉기 전 식전주부터 샴페인이 시작됐다. 호스트가 정해주는 자리에

피에몬테에서 나는 바르베라(Barbera) 와

앉은 다음 전식으로 랑구스틴(작은 바다가재)요리가 나왔고 조금 진한 샴페인이

인을 먼저 약한 불에 오래 졸인 다음에 밀가루

나왔다. 아주 잘 어울렸다. 이어 셰프가 큼지막한 생선을 통째로 들고나와 테이블

와 섞어서 파스타를 반죽하고, 4~5가지 이탈

을 돌며 보여주더니 일인용 접시에 담아 내왔다. 와인은 역시 샴페인이었다. 메인

리아 치즈를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와인과 섞

요리로는 샴페인 지방에서 주로 먹는 사슴고기가 나왔는데 이번에는 로제 샴페

어 녹인 퐁듀를 만들어서 요리를 한다. 기술시

인이 함께 등장했다. 보통 그랑 크뤼 샴페인과도 잘 어울린다는데 레드 와인을 대

간정성이 모두 들어간 훌륭한 요리다.

신해 로제 샴페인으로 궁합을 맞춘 듯했다. 후식으로 드미 섹(Demi-Sec)이라는 조금 달콤한 샴페인이 대미를 장식했다.

간단한 파스타도 ‘고향의’ 맛’ 되살려

그 후에는 시가와 코냑을 즐기면서 긴 밤을 즐겼다.

이렇게 만든 파스타는 그 맛도 섬세하다. 와인

필자에게 최고의 감동을 준 샴페인과 음식의 조화는 작은 샴페인 하우스를 취

의 상큼한 맛과 향기가 느껴지는 넓적한 파파

재하면서 이루어졌다. 부티크 샴페인으로 연간 생산량이 35만병(보통 큰 회사는

델레 파스타가 진하고 풍미가 있는 치즈 맛과

100만 병 이상 생산한다) 정도인 쟈크송(Jacquesson) 샴페인 하우스를 방문 했

어울려서 잘 조화를 이룬다. 생면이어서 쫄깃

을 때다. 오너가 포도밭과 오래 된 지하 셀러를 보여주고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에

거리는 식감도 아주 좋다. 이곳에 오는 이탈리

페르네 마을 중심부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이 레스토랑은 1년 전까지 미슐랭 스

아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파스타라고 하는

타였지만 오너 셰프가 괴팍하게 행동해 이듬해 별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주인 부

데 ‘본토의 맛’이 과연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

부가 주방과 홀을 책임지고 있어 가족 경영이라고 볼 수 있는 레스토랑인데, 별은

도로 맛이 깊고 독특하다. 과연 이탈리아 출신

잃었지만 그 동네에서는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셰프가 아니고서는 내기 어려운 맛이 아닐까

이 곳에서 쟈크송 오너는 “이곳의 돼지 족요리가 우리 샴페인과 가장 잘 어울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나라 요리사가

다”고 귀띔했다. 잔뜩 기대를 갖고 작은 앞다리 족을 통째로 요리한 것을 몇 점 발

아니면 김치찌개의 깊은맛을 만들어 내기가

라 먹고 있는데 오너가 테이블로 오더니 “그만 먹으라”며 가져가 버리는 것이 아닌

어렵듯이. 역시 ‘정통’의 힘이라는 것은 무시하

가. 순간 당황했지만 셰프는 “조금 기다리면 더 좋은 요리를 주겠다”고만 했다.

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렇게 또 배운다. **파올로 데 마리아 : 서울 용산구 한남동 657-115. 전

잠시 후 다른 요리가 나왔다. 돼지족의 부드러운 살과 젤라틴을 발라 라이스 페 이퍼에 담아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고 이것을 다시 먹음직스럽게 튀긴 것이었다. 뼈

화 02-599-9936. 일요일에도 영업한다. 쉐프가 권

를 다 제거해 먹기 편했고 겉면이 파삭한 식감과 담백하고 부드러운 돼지 족의 어

하는 세트 메뉴 1인분 6만원. 파파델레 파스타 2만

울림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여기에 효모 향이 기분 좋게 올라오는 쟈크송 729(매

8000원.

년 번호가 바뀐다)를 마시자 샴페인의 묵직하면서도 상쾌한 맛이 일품이었다. 먹 고 마시는 순간마다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분’이 오셨던 것이다.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 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 전문가이자 여행전문가.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 대표. yeongjyw@gmail.com

그날 필자는 한없이 행복했고 아마 눈물도 흘렸는지 모르겠다. 와인 평론가·포도 플라자 관장 www.kimhyuck.com SUNDAY MAGAZINE 23


review & preview

서울시향 유럽투어 프리뷰 콘서트, 16일 예술의전당

색다르게 베토벤 해석한 14세 임주희 ‘맹랑 피아노’

강렬한 음계였다. 16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 서울시립교향악단, 지 휘자 정명훈과 함께 무대에 선 14세 피아니스트 임주희는 베토벤 협 주곡 3번 1악장의 도입부를 거대한 소리와 무게로 표현했다. 사실 이 선율은 단순하다. c 단조의 기본 음계 ‘도레미파솔라시도’다. 협주곡은 오케스트라 홀로 시작한다. 3분 이상 오케스트라만 연주 하다가 피아노가 나온다. 베토벤은 오케스트라가 포르테시모(ffㆍ매 우 크게)로 서주를 끝내도록 했다. 그리고 피아노가 포르테(fㆍ크게) 로 되받으며 c 단조 음계를 연주한다. 소리가 한 단계 작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임주희의 첫 음계는 오케스트라를 압도할 만큼 큰 소리였 다. 수많은 피아니스트가 이 곡을 연주ㆍ녹음했지만 이처럼 도발적으 로 등장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특히 이 작품은 베토벤의 ‘괴팍한’ 성 향이 본격화하기 전의 음악이다. 규격화된 고전 양식의 틀 안에 아직 있고, 말하자면 얌전한 곡에 속한다. 하지만 임주희는 이 곡을 좀 더 자유롭게 봤던 모양이다. 시작 음계 만이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없이 혼자 연주하는 카덴차 부분은 낭만 주의 시대의 리스트ㆍ라흐마니노프를 방불케 했다. 그만큼 화려하고 장식적이었다. 무엇보다 소리의 박력이 줄어들지 않았다. 부드러운 선 율을 강렬하게 살려냈고, 패시지마다 의미를 부여해 ‘센’ 음악을 만 들었다. 카덴차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트릴은 마치 베토벤 말년의 피 아노 소나타에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3악장에서도 임주희는 자유롭게 내달렸다. 악보에는 첫 악장처럼 ‘알레그로(Allegroㆍ빠르게)’ 로 지시돼 있다. 경쾌한 느낌은 있지만 기품 있는 빠르기다. 하지만 임주희는 오케스트라보다 조금 빠른 호 흡으로 노래했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음악을 주고 받는 과정에 서 약간씩 속도가 당겨졌다. 힘이 넘치고 자유분방한 피아니스트가 오케스트라를 재촉하는 모양새였다. 급기야 맨 뒷부분은 ‘프레스토 (Prestoㆍ매우 빠르게)’에 가까운 템포가 돼버렸다. 청중의 호흡이 가 빠질 정도였다. 3악장은 사실 피아니스트가 장기 자랑을 하기 좋은 부분이다. 단 순히 말해 음표가 매우 많다. 빠른 손놀림, 정확한 리듬감을 뽐낼 수 있다. 수많은 음표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순발력도 필요하다. 따라서 젊은 피아니스트가 유리하다. 재기 넘치는 14세 연주자로서는 신나 게 연주할 수 있는 물을 만난 셈이다. 14세라면 잘 와닿지 않지만, 임주희는 2000년생으로 중학교 2학 24 SUNDAY MAGAZINE


review & preview

‘홍순명전: 스펙터클의 여백’ 6월 28일~8월 28일 경기도 파주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문의 031-955-4100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나머지’의 재탄생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한 홍순명(55) 작가가 2004년부터 선보이고 있는 ‘사이드 스케이프(sidescape)’는 중심이 아닌 주변의 풍경이다. 풍경화를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는 예쁜 풍경보다 세상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수많은 보도사진을 보면서 사건의

년 나이다. 현재 홈스쿨링을 하며 연주에 주력하고 있다. 피아노 학원

주제가 되지 못한, 즉 화면 안에 있지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은 ‘나머지’에 주목했다.

선생이던 어머니에게 3세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6세부터 장

그리고 “이런 풍경을 화면의 중심으로 가지고 와 ‘실존’ 시키는 것이 내 작업”이라고

형준 서울대 음대 교수를 사사했다. 전환점은 2010년 지휘자 발레리

말한다.

게르기예프를 만났을 때다. 게르기예프는 지인에게 받은 연주 DVD

이번 전시는 여수 아쿠아리움의 흰 고래를 캔버스 91개에 나누어 담은 ‘아쿠아리

를 보고 임주희를 백야 페스티벌 협연자로 발탁했다. 같은 해 두 번 더

움-1402’를 비롯, 지난 10여 년 간 그려온 2700여 점의 풍경화, 각종 사건 현장에

협연자로 불렀다.

뒹굴던 물건을 수집해 오브제로 만든 ‘메모리스케이프’ 연작 등을 선보인다. 성인

이처럼 임주희는 러시아 음악계 제왕의 지지를 받고 있다. 2012년 게르기예프는 런던 심포니와의 한국 공연에서 그를 깜짝 게스트로

5000원. 매주 월요일 휴관.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

초청해 예정에 없던 라벨 협주곡 1악장을 연주하기도 했다. 사실 이날 임주희의 연주는 완벽했다고 볼 수는 없다. 군데군데 실 수도 있었다. 의욕이 앞서 음이 뭉개졌던 탓이다. 정통적이거나 세련 된 해석도 아니었다. 요즘은 어려운 곡을 정확하게 연주하는 어린 피

‘문화 샤넬’전 8월 30일~10월 5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문의 02-2153-0700

샤넬의 향기, 어디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아니스트 숫자를 세기도 힘들 정도다. 그런데 왜 게르기예프, 정명훈과 같은 지휘자가 그녀를 낙점했을 까. 바로 완벽이란 틀을 버렸기 때문이다. 흠잡을 데 없는 신동은 많 다. 피아노 테크니션들이다. 그러나 개성을 탐색하는 꼬마 피아니스 트의 숫자는 미지수다. 임주희는 그래서 독특했다. 어린 피아니스트 가 선배들의 전례(前例)를 참고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표현했다 는 점이 청신호다. 음악 패시지를 밀고 당겨보는 실험, 감정을 폭발시 켰다가도 수그러뜨리는 조절 능력은 맹랑했다. 잘 치는 피아니스트를 넘어 좋은 음악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임주희는 6월에야 베토벤 협주곡 3번의 악보를 처음 읽었 다고 한다. 세 악장 악보를 보고 소화시킨 후 외워 무대에서 연주하는

2012년 ‘리틀 블랙 재킷’ 사진전으로 큰 호응을 얻었던 샤넬이 다시 한 번 서울에서

데 고작 두 달이 들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체격도 좋다. 알맹이 있는 소

큰 행사를 연다. ‘문화 샤넬전: 장소의 정신’이다. 전시는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리로 몇 시간이고 무대를 이끌기 좋은 조건이다. 여러모로 스타성을

Chanel)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장소들을 되돌아 본다. 오바진의 규율, 파리에서의 독

갖췄다.

립, 러시안 패러독스, 베니스의 보물 등 10개의 테마로 나뉜 공간에서는 각각의 장소

현재 국내 젊은 피아니스트의 층은 두텁다. 20대 후반의 손열음

가 샤넬 여사의 인생에서 어떻게 상상력의 지평을 넓혔고, 또 패션 작업에 영향을 미

(28)ㆍ김선욱(26), 이제 약관이 된 조성진(20)이 주는 각각의 무게감이

쳤는지를 조명한다. 이와 더불어 샤넬의 패션·주얼리·시계·향수 등의 창작품들과 함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임주희는 몇 년 후 이들과 같은 수준의 무대에

께 500점 이상의 다양한 사진·책·오브제·원고 등을 감상할 수 있다. 2007년부터 문

서 경쟁하게 될 것이다. 연주를 즐기는 타고난 ‘꾼’ 손열음, 모든 작품

화 샤넬전을 기획해온 장-루이 프로망이 큐레이팅을 맡았다. 패션 디자이너를 넘어

을 건축적으로 해체·조립하는 김선욱, 단번에 드러나는 독특한 개성

서 시대의 아이콘,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남은 샤넬 여사의 삶을 가까이에서 느껴

을 가진 조성진 사이에서 임주희는 어떤 위치를 가지게 될까. 채워야

볼 기회다.

할 빈칸이 많다. 그런 만큼 지켜보는 일 자체로 즐거우리라.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샤넬

글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사진 서울시립 교향악단 SUNDAY MAGAZINE 25


BOOK

강상중 소설 『마음』

삶의 묵직한 의문에 답하다

가상의 인물에, 명의 희생자 사연을 한 줄기에 엮으려는 틀로

분들의 뜻을 받아 살아갈 힘을 얻었기 때문입

그것도 다른 나

이해된다. 그래서 허구는 허구이되 자전적 경

니다. 그 때 돌아가신 분들의 죽음도 빛나게

라를 배경으로

험을 녹여낸지라 논픽션으로 느껴질 정도다.

됩니다. 그분의 죽음이 빛나는 듯 영원이 되

한 이야기가 마

작품 속에서 그는 실명으로, 교수로 등장

는 것이기에.”

치 우리를 염두

한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와 편지를 건네는

생사와 함께 다른 축을 이루는 것은 타인

에 두고 쓴 책 같

대학생 나오히로(直広, 이 역시 아들의 실명

과의 관계다. 저자는 액자식 구성으로 네 남

다. 130일 전 벌

이다). 둘은 이를 계기로 e-메일을 주고 받기

녀가 나오는 괴테의 소설 『친화력』을 끌어

어진 세월호 참

시작한다. 청년은 자신을 얽매고 있는 다양

들인다. 통속적인 이야기를 나오히로의 주변

사-. 294명의 무

한 고민들, 예컨대 갑자기 백혈병으로 떠난 친

설정에 녹이면서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화학

고한 희생자를 만들었고, 아직도 10명이 시신

한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괴로

적인 감정 반응을 이야기한다. 불안과 두려움,

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라 더

움, 왜 나는 살아남았는가에 대한 자책감, 더

의문과 죄의식으로 관계맺기에 허우적대는

그렇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엄청난

불어 동일본 대지진 현장에서 시신 인양에 참

청춘에 대한 다독임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적

죽음, 인생에 대한 무기력으로까지 이어지는

가하며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깨우쳐 가는

이고 묵직한 주제들이 숨가쁘게 지나가지만

우울함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 됐다. 영원히

과정도 고백한다. 그런 나오히로를 작품 속 강

해법의 키워드는 결국 ‘포용’이다. “우리는 어

기억할 수도, 잊혀질 수도 없는 채 말이다.

교수는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한다.

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

저자는 한국인으로 처음 도쿄대 교수에

특히 죽음과 삶의 문제를 두고 오가는 끝

다면 있는 그대로를 전부 받아들여서 적어도

임용돼 화제를 모았던 강상중(64) 일본 세이

없는 대화는 줄을 쳐 두고 몇 번 곱씹어도 좋

서로 상처를 입히는 일 없이 살아간다, 그것

가쿠인(聖學院)대 교수다. 책은 지금껏 우리

을 문구들로 가득하다.

이 통째로 받아들이라는 것 아닌지요?”

가 애써 묻지 않는 묵직한 의문들에 친절히

“죽은 이의 몸은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문답으로 이어지는 소설은 저자의 과거 인

답하고 논하며 한 편의 답안지를 완성해 냈

망가집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터뷰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인생은 던져지

다. 다만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 이는 존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

는 물음에 하나씩 답해가는 과정’이라 말했

등 삶의 이정표를 찾아갔던 전작 에세이와 달

순한 물체로 전락해 버린 그 하나하나에, 죽

던 그다. 그렇다면 빠른 길도, 도착점도 없는

역자: 노수경

리 소설의 형식을 빌렸다. 실제 극도의 신경증

음 바로 직전까지 그 사람만이 간직하고 있던

긴 여정임이 분명할 터. 이 책을 잠시 동반자

출판사: 사계절

을 앓다 삶을 비관했던 아들의 자살, 그리고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로 삼아도 좋겠다.

가격: 1만3000원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목숨을 잃은 2만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신간 안내

사과 여행

저자: 강상중

26 SUNDAY MAGAZINE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다는 것은 돌아가신

문화의 안과 밖 1·2·3

골프야 놀자

사진: 신현림

저자: 김우창 외 13명

저자: 조상현

출판사: 사월의눈

출판사: 민음사

출판사: 오션북스

가격: 2만원

가격: 각 2만원

가격: 1만6000원

2011년 사진책 『사과밭

네이버 강연 ‘열린 연단:

오랫동안 신문과 인터넷

사진관』으로 사과 사진

문화의 안과 밖’이 책으

에서 골프 칼럼을 연재

시리즈를 선보인 저자

로 나왔다. 인문학·사회

해 온 저자의 골프 입문

가 두 번째 시리즈를 엮

과학·자연과학의 한국

안내서. 특히 골프를 비

었다. 여섯 나라를 돌며 찍은 일상을 배경으로

대표 석학들이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제에 가

즈니스로 활용하고 싶은데 방법을 몰라 고민하

한 사진들에는 인물을 프레임 밖에 둔 채 사과

려졌던 우리 사회의 문화적 위상을 돌아본다.

는 초보 골퍼들에 초점을 맞췄다. 실전에서 유

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일상과 초현실의 경

한국은 과연 살 만한 사회인가. 그렇지 않다면

효한 비즈니스 골프 에티켓과 골프 매너 외에도

계를 되묻는 낯선 작업을 페이지마다 만나볼 수

왜 그런가 등에 관한 탐구다. 내년 초 8권이 완

인생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노하우

있다.

간된다.

가 담겨 있다.


GUIDE

금주의 문화행사 영화

전시

클래식

공연

닌자터틀

조성호 예술장신구 초대 개인전

바순과 사진의 콘서트

연극 ‘the LOST’

감독: 조나단 리브스만

기간: 8월 25일~9월 3일

일시: 8월 27일 오후 8시

기간: 8월 22일~9월 9일

배우: 메간 폭스, 피터 플로스잭

장소: 서울 삼성동 갤러리 보고재

장소: 올림푸스홀

장소: 대학로 수현재씨어터

등급: 12세 관람가

문의: 02-545-0651

문의: 02-6255-3488

문의: 1544-1555

악당 슈레더와 그가 이끄는 조직 풋 클

서울대와 뮌헨 미술대에서 공부한 장신

바순 연주자 이지현이 사진작가 구승회

조재현의 수현재컴퍼니가 예산부족으

랜이 장악한 이후 뉴욕은 무법도시가

구 작가 조성호의 여섯 번째 개인전. 금,

와 함께 어둠과 빛을 주제로 공연한다.

로 사라져 가는 우수작품을 지원하는

됐다. 열정적인 방송기자 에이프릴은 카

다이아몬드, 상아는 물론 재활용 플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

‘위드 수현재’시리즈 첫 작품. 한국예술

메라맨 번과 함께 슈레더 일당의 음모

스틱과 가죽, 합판, 금속 병뚜껑 등을 활

장, 베토벤 9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 등을

종합학교 출신 작가들로 구성된 창작집

를 파헤치려 한다. 하수구에 살던 돌연

용해 상업 장신구와 예술 장신구의 경계

작곡가 김영재가 편곡해 주제에 맞게 나

단 독의 공동창작극이다. 크리스마스

변이 ‘닌자터틀’ 레오나르도, 도나텔로,

를 넘나드는 반지 80여 점을 선보인다.

눴다. 이지현씨는 바순 앙상블 ‘분 더 바

다음날 오후에 벌어지는 여덟 개의 에피

라파엘, 미켈란젤로도 나선다.

www. vogoze.com

순’의 멤버다.

소드가 ‘상실’이라는 테마로 수렴된다.

찰리 컨트리맨

환기미술관 공간프로젝트

비엔나 악파 시리즈

NT Live 코리올라누스·리어왕 연속 상영

일시: 8월 28일 오후 8시

기간: 8월 30~31일

감독: 프레드릭 본드

‘Site Whanki Wave’

배우: 샤이아 라보프, 에반 레이첼 우드

기간: 8월 23일~12월 31일

장소: 금호아트홀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장소: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

문의: 02-6303-1977

문의: 02-2280-4114

어머니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진 찰

문의: 02-391-7701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사진)와 피아

영국 국립극장의 대표작 2편을 스크린

리 컨트리맨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로

시각예술과 음악, 영상, 과학이 만나는

니스트 김재원이 비엔나를 중심으로

으로 만난다. 셰익스피어 비극을 본고장

충동적인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비행기

종합프로젝트. 로빈 미나드, 김치앤칩

활동한 악파의 작품을 조명한다. 18~19

연극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코리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스, 캐틀린드 브라운 & 웨인 개럿, 배정

세기 모차르트ㆍ베토벤ㆍ슈베르트, 20

올라누스’(사진)는 영국 최고 연기파 배

중년 남자가 비행 중 심장마비로 돌연

완 작가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꽃

세기 쇤베르크를 모두 들려준다. 금호아

우 톰 히들스턴의 연극 복귀작으로 주목

사하면서 그의 여행은 꼬이기 시작한다.

별 & 조용욱, 박경소, 김오안의 퍼포먼

트홀이 기획한 비엔나 악파 시리즈의 12

받은 작품. ‘리어왕’은 영화 ‘아메리칸

찰리는 그의 딸 개비를 만나러간다.

스도 때로 준비된다.

번째 순서다.

뷰티’의 샘 멘더스 감독이 연출한다.

THIS WEEK CHART 베스트셀러

자료=교보문고

순위 책명

영화 예매

자료=맥스무비

작가·출판사 순위 영화명

01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요나스 요나손 열린책들 01 명량 02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03 불륜

최민식 류승룡 조진웅 01 뮤지컬 시카고

장하준 부키 02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김남길 손예진 유해진 02 뮤지컬 조로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03 해무 조조 모예스 살림 04 안녕, 헤이즐

04 미 비포 유

06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요나스 요나손 열린책들 06 더 기버: 기억전달자 07 나의 한국 현대사

자료=인터파크

브렌튼 스웨이츠 06 뮤지컬 위키드

유시민 돌베개 07 비행기2: 소방구조대(애니메이션) 존 그린 북폴리오 08 내 연애의 기억

07 뮤지컬 황태자

09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문학동네 09 드래곤길들이기2 (애니메이션) 김애란 창비 10 매직 인 더 문라이트

09 뮤지컬 더데빌

콜린 퍼스 엠마 스톤 10 뮤지컬 드라큘라

자료=풍월당

음반사

최정원 아이비 이종혁 01 파이널 컷-네 대의 기타로 연주한 

Chandos

김우형 휘성 양요섭 02 레오니드 코간: EMI 레코딩 전집

Warner

남경주 김영호 03 슈만: 교향곡 전곡 Berliner Philharmoniker

오만석 엄기준 민영기 04 모차르트: 레퀴엠 현악사중주 버전 Challenge 이대일 김선호 최수영 05 3 클래식 앨범- 안네-소피 무터, 카라얀 DG 김선영 박혜나 김소현 06 클라리넷 협주곡집

Warner Classics

루돌프 안재욱 임태경 팀 07 카를로스 클라이버: 관현악 녹음 전집 DG

강예원 송새벽 08 뮤지컬 번개맨의 비밀3 ‘스페이스 번개맨’

10 두근두근 내 인생

클래식 음반

출연 순위 음반명

김윤석 박유천 한예리 03 뮤지컬 브로드웨이42번가 쉐일린 우들리 안셀 엘고트 04 뮤지컬 레베카

신준모 프롬북스 05 비긴 어게인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05 연극 옥탑방고양이

05 어떤 하루

08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공연 예매

주연 순위 공연명

08 젤린카: 미사 보티바-룬, 바우어 Carus

마이클리 한지상 차지연 09 클래식 카라얀: 에센셜 컬렉션

DG

김준수 류정한 조정은 10 라자르 베르만: CBS  SONY CLASSICAL SUNDAY MAGAZINE 27


soul-searching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 <20·끝> 도스토옙스키의 『분신』 vs. 나보코프의 『절망』

철석같이 믿었던 ‘분신’에게 배척 당하는 ‘진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1821~1881) “오로지 영혼의 재료로만 빚어낸 작품” (버지니아 울프)으로 20세기 사상가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니체는 “내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라고 말했고, 프로이트는『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을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평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899~1977)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상속자였으나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는다. 1919년 유럽으로 건너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롤리타』 로 전 세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나비 수집가로도 유명하며 미국에 귀화해 코넬대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쳤다.

『롤리타』를 쓴 나보코프는 망명 작가였지만 러시아 문학의 적통임을

에 가서 ‘가장 저급한 문학 형식’인 일기로 전락한다. 결국 게르만은

자임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영어 소설을 러시아어로 직접 옮기는

자신의 실패작에 ‘절망’이란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다. ‘뛰어난 역량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보코프가 러시아어로 쓴 소설을

을 갖춘 작가’라는 자기 선언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처음 영어로 옮긴 소설은 베를린 시절에 쓴 『절망』이다. 그런데 이 번

게르만의 실패 원인은 무엇일까? 작중 인물로 게르만의 초상화를

역본은 판매도 부진한 데다가 재고는 전쟁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유

그리기도 하는 화가 아르달리온은 게르만을 ‘음울한 도스토옙스키

실돼 희귀본이 되었다. 『롤리타』의 성공으로 막대한 인세 수입이 생

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라고 일컫는데, 이것은 작가 나보코프의 의중

기자 미국 생활을 접고 스위스로 이주한 나보코프는 『절망』을 다시

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나보코프에게 도스토옙스키는 터무니없이

손봐서 영문 개정판을 낸다. 두 번역본, 즉 ‘젊은 나보코프’와 ‘늙은 나보코프’ 사이에는 30년

과대평가된 작가이며 너절한 감상주의와 쓸데없는 장광설만 늘어놓 는 이류 작가의 대명사다.

의 시차가 있다. 『절망』을 아예 다시 썼다는 늙은 나보코프는 개정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렇게 인색한 평가를 내놓은 나보코프조차

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는 젊은 날의 서투른 신예 작가에게 짜

예외적으로 높이 평가한 작품이 있었으니, 바로 『분신』(1846)이다.

증이 나서 얼굴을 찌푸릴 뿐이다.” 젊은 날의 자신에게조차 짜증을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열광적인 환영에 고무된 젊은 도스

낼 정도로 엄격한 예술관의 소유자가 바로 나보코프였다.

토옙스키가 야심작으로 내놓았지만 혹평에 시달린 작품이었다. 예

흥미로운 건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 이러한 주제, 곧 작가를 참칭하

기치 않은 반응에 낙심하지만 그는 작품에 대한 애착 때문에 20년 후

는 얼치기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진정한 작가(나보코프)로부터 응징

개정판을 발표한다. 『분신』역시 하급관리 골랴드킨이 자신과 꼭 닮

당하는 이야기가 다뤄진다는 점이다. 젊은 나보코프가 러시아어로

은 분신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골랴드킨은 자신의 은

쓴 『절망』에서 주인공 게르만은 자화자찬으로 서두를 뗀다. “나는

인 올수피 이바노비치의 딸 클라라의 생일파티에 찾아가지만 초대받

뛰어난 역량을 갖춘 작가다. 더없이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해 내는

지 않은 손님으로 문전박대 당한다. 자신도 남들 못잖은 인간이라는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자부심으로 뒷문을 통해 들어가 보지만, 결국 무참한 모멸감만 확인

서른 중반의 게르만은 베를린에 온 지 10년째인 초콜릿 사업가. 가 정부를 거느리고 아내와 함께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주말이면 카페

한 채 길거리에 내던져진다. “골랴드킨 씨는 지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에 가는 중산층이다. 사업차 프라하에 갔다가 교외 풀밭에 누워 자고

그렇게 절망하고 있는 골랴드킨에게 그의 분신이 나타난다. 외모

있던 펠릭스와 우연히 마주치고는 펠릭스가 자신과 똑 닮았다고 생

는 물론 이름까지 똑같은 ‘젊은 골랴드킨’으로 ‘늙은 골랴드킨’과는

각한다. 펠릭스가 부인함에도 그의 믿음은 철석같다. “내가 본 그는 나의 분신, 즉 육체적으로 나와 동일한 존재였다.” 완벽한 분신의 발견은 게르만을 완전 범죄에 대한 구상으로 이끈

누가 진짜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처음엔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가짜’는 차츰 ‘진짜’를 무시하고 배척한다. 결국 피해망상증에 사로 잡힌 골랴드킨이 정신병원에 이송된다.

다. 파산 직전에서 탈출구가 필요했던 게르만은 펠릭스를 자신으로

분신이 등장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절망』과 『분신』은 전혀

위장해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낸 아내와 재결합해 새 인생을 시작하

다른 이야기다. 하지만 나보코프가 『분신』을 일컬어 “도스토옙스

려고 계획을 꾸민다. 그리고 이 범행 과정을 한 편의 소설로 쓰고자 한

키의 최고작이자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고 평한 사실은 『절망』을 읽

다. 완전범죄는 곧 그에게 완벽한 예술 작품에 대한 인증과도 같다.

을 때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주인공 게르만은 완벽한 소설을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그의 계획은 치명적인 실수 때

쓰는 데 실패하지만, 그 실패를 조롱하면서 작가 나보코프는 ‘완벽한

문에 얼크러진다. 펠릭스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한 것 자체가 완전

예술 작품’에 도달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뭇 달라 보

한 착각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게

이는 외양임에도 『분신』과 『절망』은 서로를 꼭 닮은 ‘분신’이다.

르만은 곧 살인범으로 지목돼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완전범죄 가 실패한 것처럼, 완벽한 예술 작품을 목표로 했던 그의 소설은 막판 28 SUNDAY MAGAZINE

필자 이현우는 서울대 대학원(노문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GALLERY

전시회 컨셉트는 두 가지다. 블루와 사운 드. 여름을 상징하는 색인 블루를 사용 한 작품 2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 우환의 ‘선으로부터’, 김춘수의 ‘울트라 마린 1307’, 푸른색만으로 오드리 헵번 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강형구 작가의 ‘헵번 인 서프라이징 아이즈’ 등이다. 특이한 것은 미술 작품에 ‘맞는’ 클래식 음악을 소개한다는 점. 컬러리스트 최지 은씨에 따르면 색깔에도 파동이 있는데, 블루와 동일한 파동은 D음(레)이라는 것. D장조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푸른색 의 작품을 보면 서로 에너지 파동이 같기 에 심신이 훨씬 편안해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시장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등 D장조 음악 8곡이 쿠르베 스 피커를 통해 작품과 공간을 휘감고 있다. 매주 월요일 휴관.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일주·선화갤러리  테블릿 PC 중앙 SUNDAY APP에서 더 많은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문범의 ‘slow, same, # 5005’.

내 마음 속 블루는  ‘들리는 현대미술 보이는 클래식_블루&D장조’전 7월 18일~9월 5일 서울 새문안로 흥국생명빌딩 3층 일주·선화갤러리, 문의 02-2002-7777

SUNDAY MAGAZINE 29


CONTE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나도 모르는 나

은 다시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가 아내에게

주는 곳도 다 있느냐며 나는 투덜거렸다. 매

들켜 책과 함께 쫓겨난 적도 있다. 문지르면

니저는 죄송하다며 이렇게 나를 달랬다. “손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삼중당 문고판

님, 다른 식당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저희

하나 버리는 일도 쉽지 않은데 에어컨을 버린

식당에서는 현금서비스를 해드릴 수 없습니

단 말인가?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벽걸이

다. 죄송합니다.”

형 에어컨을. “에어컨을 버릴 거라고?”

을 믿을 수 없다. 단어를 헷갈리거나 잊어버

“당신이 버리자고 했잖아.”

리는 정도가 아니라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

“내가? 내가 언제?”

전체를, 문장들로 이루어진 말을, 그리고 말

“아, 미치겠네. 당신 혹시 치매 아니야? 오래

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전부 잊어버리는 것

되었고, 이삿짐도 줄여야 하고, 떼었다 달았

은 믿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믿기

“이사비용 견적이 너무 높게 나왔어요. 우리

다 하면 또 돈 들고, 올 여름에 한 번도 사용하

어려운 것은 우유부단하고 심지어 선택장애,

이삿짐이 책 말고는 별로 없잖아. 식탁도 옆집

지 않았고, 앞으로도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

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내가 그처럼 단호하게

에서 가져 가기로 했고, 아이들 책상도 안방

이 높은데 뭐 하러 가져갈 거냐고 당신이 그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주장을 할 때

에 있던 낡은 책장 세 개도 내어놓을 거고, 여

렇게 말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내가 언제?

그 이유나 근거를 조목조목 댈 정도로 나는

기 에어컨도 버릴 거고.”

라니.”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그건 내 능력을 한참

9월에 이사를 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전세

아내가 치매를 의심할 정도로 요즘 내 기억

넘어서는 일이다. 아내 말이 맞는다면 그렇게

가 너무 올라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같은 평수

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

말한 나는 누구일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로는 마땅한 집을 구하지 못해 결국 이사할

낱말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앙리 베르그송

시간에 살고 있는 그 논리적인 남자는 누구

곳의 평수를 줄여야 했다. 공간이 1/3 정도 줄

의 말처럼 “단어들은 문법적인 질서에 따라

일까? 나는 그 남자가 어떤 필요에 의해서 만

어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짐을 1/3만

사라진다. 즉, 고유명사가 먼저, 그 다음은 보

든 하나의 페르소나 같은 것일까?

큼 줄여야 한다. 가구도, 옷도, 신발도, 책도

통명사, 맨 마지막에 동사가 사라진다.” 내 경

그만큼 줄여야 한다. 그래도 공간은 비좁을

우 고유명사는 이미 사라졌고 지금은 보통명

것이다. 사람을 1/3만큼 줄일 수는 없으니까.

사들이 사라지는 중이다. 얼마 전에 나는 식

애호는 그것을 가질 때 알 수 있지만 애착

들숨날숨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나는 아내의 말

아내가 내 앞으로 바싹 다가온다. “그래서 에어컨 어떻게 할까요?” 페르소나는 토끼 눈을 하고 아내를 본다.

당에서 밥을 먹고 계산하면서 현금영수증을 “갑자기 에어컨은 왜?”

은 그것을 버릴 때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책

좀 해달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식당 매니저는

을 중고서점에 팔고, 팔리지 않는 책을 내다

난처한 표정으로 애써 웃으며 그건 좀 곤란

버리면서 몇 번이나 나는 망설였다. 어떤 책

하다는 것이다. 아니, 요즘 현금영수증 안 해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 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 『슈 슈』를 썼다.

우리 삶의 갈등은 종종 오래된 가족적 갈등의 연장이다

30 SUNDAY MAGAZINEㅅ

▶“우리는 누구나 상처를 받는다. 우리 삶의

▶“구글 지도가 또렷이 드러나려면 시간이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할 때, 미련 없

갈등은 종종 오래된 가족적 갈등의 연장이

필요한 것처럼, 당신의 감정도 선명하게 드러

이 떠날 수 있는 마음. 혹여 운명의 장난스러

다. 우리의 삶에서 해결되지 않은 주제들은

날 시간을 줘야 한다. 하지만 막상 그러기가

움으로 인해 떠난 그곳에서 떠나왔음을 후회

필연적으로 우리 자녀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두렵다. 정말로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지만 때

하는 순간이 올 때마저도, 지금의 나는 언젠

가족의 정서적 유산을 간단히 물리칠 수 있

로는 귀찮아서 그러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

가 다시 찾고 기대게 될 생의 한 지점을 만들

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유산을 의식적으

를 ‘믿지 못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자각하는 일. (…) 나떠

로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믿지 않아서’ 그러는 경우도 있다. 두려움도

나고 기억하고 받아들일 것. 어떤 고통의 순

삶 안에 통합시킬 수는 있다. 우리가 가족의

구별된다. 두려워서 회피하는 경우와 두렵기

간도 피하지 않으며, 이 모든 순간들은 먼 훗

어두운 면과 똑바로 대면하고 금기와 비밀들

때문에 먼저 공격하는 경우도 생긴다. 둘 다

날 꼭 필요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임을 믿는

을 밝히는 순간 그것들이 지닌 위력과 공포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반응의 차이만 있을 뿐

것. 여행이란,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

는 힘을 잃고 사라진다.”

이다.”

을 정직하게 버리는 것.”

-산드라 콘라트 『나의 상처는 어디에서 왔을까』

-김형기 『버럭 하는 남편, 묻어두는 아내』

-장연정 등 외 『어떤 날5/여행사용법』


photo ESSAY

조용철의 마음 풍경

몽골의 가을 문턱 몽골의 초원은 벌써 가을빛입니다. 봄인가 싶으면 가을인 초원엔 풀꽃들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긴 겨울이 오기 전에 봄 여름 가을 꽃이 앞다퉈 꽃을 피우니까요. 몽골의 초원과 산에 유난히 야생화가 많이 피는 이유입니다. 강을 따라 걷다가 강물 위에 핀 하얀 꽃을 보았습니다. 한반도에선 모내기 전에 피는 매화마름 꽃이더군요. 가을의 문턱, 귀한 봄 꽃을 만나는 호사를 누렸네요. 알 수 없는 먼 조상들이 머물렀음직한 땅에서…. -몽골 헤를렌강

조용철의 포토에세이 ‘마음 풍경’은 세상의 모든 생명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경이로운 삶의 의지에서 내일의 꿈과 희망을 찾습니다.

SUNDAY MAGAZINE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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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SUNDAY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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