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gazine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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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31~1, 2014. no.390. sunday.joongang.co.kr

http://sunday.joongang.co.kr

제390호 8월 31일~9월 1일 값 1000원

82

추석합본호

ISSUE

융복합 사상 담긴

최치원의 풍류


00

38 SUNDAY MAGAZINE


00

SUNDAY MAGAZINE 39


CONTENTS editor’s letter

06

THIS WEEK PEOPLE 제66회 에미상 여우주연상 ‘굿 와이프’의 줄리아나 마걸리스

ISSUE

새로운 만남을 위해 08

중앙SUNDAY S매거진이 지금처럼 잡지

최치원의 융복합 사상 풍류를 다시 보다

로 나온 것이 2011년 11월 27일자부터 입 니다. 그전까지는 신문이었죠. 이런저런 조

INTERVIEW

정을 거쳐 지금처럼 만들어온 지도 2년이

14

다 돼갑니다.

‘댄싱9’ 화제의 무용수 최수진·이윤희

그동안 보내주신 과찬에 힘입어 저희는 대

FOCUS

한민국 문화계에 소중한 역할을 해왔다고

18

자부합니다. 특히 고정 코너를 꾸며주신

‘화장’으로 베니스 영화제 가는 임권택 감독, 심재명 대표

‘최치원-풍류탄생’전

PORTR AIT ESSAY

22

권혁재 기자는 ‘불완벽 초상화’를 만들기

연출가 오태석<끝>

위해 인터뷰이와 매번 ‘접신’을 합니다. 가

COLUMN

23

장 힘들었던 점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제

스타일#: 패션은 명분 아닌 욕망

FOOD

대로 잡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와인 전문가 김혁 관장님은 지금까지의 내공을 ‘와인

24

야담’에 쏟아부었고, 통영 사는 정환정씨

정환정의 남녘 먹거리<22·끝> 남해의 ‘거대’ 해산물

는 오로지 발품으로 우리 이웃의 생생한

PEOPLE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26

고전을 꼭꼭 씹어 먹여준 박정태 대표, 문

유엔 후원으로 뉴욕서 전시 패션 사진작가 케이티 김

학사의 시간과 공간을 종횡무진 누볐던 로

BOOK

30

‘댄싱9’의 무용수 최수진·이윤희

쟈 이현우씨, 자연의 살아있음을 한 장의 사진에 압축한 조용철 선배에게도 새삼

『불황 10년』

고마움을 전합니다. 특히 매거진 개편 첫

SOUL-SEARCHING

호(100호)부터 지금까지 최고의 글솜씨를

32

보여준 김상득 부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

박정태의 고전 속 문장과 작가<66·끝> 톨스토이의『안나 카레니나』

GALLERY

분들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이 같은 지면은 꿈도 꿀 수 없었겠죠.

말씀을 올립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지만 이자정회(離者

33

定會)라고도 했습니다. 비록 연재는 마치

‘노 모어 아트’ 전

지만 인연까지 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CONTE

34

동안 보내주신 필자분들의 성원에 다시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끝>

PHOTO ESSAY

한번 감사 드리며 저희는 추석 연휴에 한 주 쉬고, 9월 14일자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

35

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조용철의 마음풍경<끝> 임권택 감독, 심재명 명필름 대표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S MAGAZINE

표지 박대성의 ‘풍류 II’(2014), 화지에 먹. 354 x 150 cm.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제공

문화에디터 정형모 취재 기선민 이도은 유주현 사진 최정동 전호성 편집 임종일 디자인 전유진 통신원 최선희(파리) 김성희(밀라노) 광고 구명서 김진경 박본재 마케팅 박유선 최수인 이민주 이선우 기사제보 02-751-9000, 080-023-5002 광고문의 02-751-5555 / Fax 02-751-5806

1부 1000원 /월 5000원 정기구독문의고객센터 080-023-5005

04 SUNDAY MAGAZINE



THIS WEEK PEOPLE

66회 에미상 여우주연상 줄리아나 마걸리스

식당일 하던 단역 출신 ‘굿 와이프’로 굿 라이프

2009년 미국 CBS 드라마 ‘굿 와이프(The Good Wife)’가 첫 방영됐을 때만 해 도 주연 배우 줄리아나 마걸리스(47)의 스타 등극을 점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 지만 섹스 스캔들로 망신살이 뻗친 일리노이주 지방검사장의 아내 알리샤 플로 릭이 순진무구한 전업주부에서 야심만만한 변호사로 거듭나는 내용이 진행되면 서 마걸리스는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 그는 골든글로브와 배우조합 (SAG) 여우주연상을 휩쓰는 파란을 일으켰고, 2011년엔 에미상 트로피를 거머 쥐었다. 25일(현지 시간) 로스앤젤레스 노키아 극장에서 열린 제66회 에미상 시상 식에서도 3년 만에 다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인기를 재확인했다. 이날 나르시소 로드리게즈의 검은색 드레스 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시즌당 에 피소드가 10개인 케이블과 달리) 22개나 되는 에피소드를 늘 놀라운 내용으로 써 내는 크리에이터(대표 집필자) 로버트 킹과 미셸 킹이 이 상을 받아야 한다”는 말 로 소감을 대신했다. 유대계인 줄리아나 마걸리스는 1966년 뉴욕 시티 인근의 스프링 밸리에서 태 어났다. 새러 로렌스 칼리지를 졸업한 후 스티븐 시걸 주연의 영화 ‘아웃 포 저스티 스’(1991)에서 단역을 맡을 때까지 식당에서 서빙을 하며 연극과 TV 출연을 병행 했다. 대중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건 94년 TV 시리즈 ‘ER’에서 고정 배역을 맡 으면서다. 조지 클루니의 상대 역인 간호사 캐롤 해서웨이 역이었다. 원래 해서웨 이 간호사 역은 시리즈 초기에 죽는 설정이었는데 마걸리스가 연기를 워낙 잘하 자 대본이 수정됐다. ‘ER’로 그는 95년 에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았지만 2000년엔 출연료 2700만달러(약 274억원)에 달하는 2년짜리 재계약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 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고스트 십(Ghost Ship,2002)’‘이블린(Evelyn, 2002)’등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지만 큰 재미를 보지 못하다 만난 작품이 출세작 ‘굿 와이프’다. 남편의 배 신이라는 아픔을 딛고 10대 자녀 2명을 돌보면서 업무강도 높기로 악명높은 로펌 세계에서 승소와 승진,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이어가는 알리샤는 마걸리스의 차 분하고 원숙한 연기 덕에 여성 시청자들의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알리샤 플로릭 의 실제 모델로 힐러리 클린턴, 엘리자베스 에드워즈(혼외정사 스캔들을 일으켰 던 존 에드워즈 전 상원의원의 아내), 실다 스피처(성매매 파문으로 낙마한 엘리엇 스피처 전 뉴욕 주지사의 아내)등이 거명되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랄프 로렌과 엘리 타하리로 시작해 마이클 코어스와 아르마니에 이르는 ‘변호 사 패션’도 방영 내내 주목을 받았다. 결코 독보적인 미모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정 장이 어울리는 단아한 이미지와 안정된 연기력은 그에게 뒤늦은 전성기를 허락 했다. 실생활에서도 마걸리스는 ‘굿 와이프’로 알려져 있다. 2007년 결혼한 하버 드대 로스쿨 출신의 훈남 변호사 남편 키스 리버설, 6살 아들과의 생활이 여러 차 례 여성지에 실렸을 만큼 단란한 가정을 자랑한다. 이들 부부는 25일 에미상 시상 식 레드카펫에도 나란히 올라 금슬을 과시했다. ‘굿 와이프’는 올초 시즌5까지 방 영됐고 다음 달 시즌6가 시작된다.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로이터=뉴시스 06 SUNDAY MAGAZINE



ISSUE

김양동의 ‘계원필경 중원제사(中元齊詞)’(2014), 화선지에 먹, 180 × 250cm

08 SUNDAY MAGAZINE


ISSUE

‘최치원-풍류탄생’전  10월 12일까지 예술의전당

융복합의 디지털 시대 최치원에게 길을 묻다

23일 열린 ‘인문학자와 예술가의 대화’ 참석자들이 작품 설명을 듣고 있다.

“풍류? 그거 술 먹고 춤 추고 노는 거 아냐?”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관에서 열리고 있는 ‘최치원-풍류(風流)탄생’전은 우리가 흔히 하는 ‘풍류’라는 말에 대한 이 같은 해석에 정색을 하고 딴지를 건다. “풍류야말 로 우리 인문·정신 문화의 원형질로, 식민지와 서구화로 점철된 근현대 100여 년의 역사 에서 단절되고 왜곡된 우리의 본 정신”(이동국 서예박물관 서예부장)이라는 것이다. ‘풍류’라는 말은 『삼국사기』진흥왕조 ‘난랑비’ 서문에 나온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는데, 실 로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 은 노자의 뜻이다. 악한 일은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토착사상인 무(巫)를 토대로 유(儒)·불(佛)·선(仙) 삼교의 소통을 ‘풍류’라는 틀로 녹 여낸 인물이 최치원(857~909?)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융·복합적 인물’이다. 전시는 이 ‘융·복합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기 위해 기획됐다. 서예·타이포그래피·서 화·회화·사진·설치·미디어 그리고 춤까지, 현재 대한민국 예술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 38명(작고작가 2명 포함)이 고운 최치원과 ‘풍류’에 연관된 작품 100여 점을 선보였다. 이 들 중 일부는 지난 5월 30일과 31일 이틀간 경주·지리산·가야산 등 1100년 전 선인의 족적을 따라나서며 영감을 얻기도 했다. 여기에 사산비명 탁본, 최치원 진영(眞影) 및 영당 현판,『계원필경』영인본 등 고운 선생의 흔적 50여 점까지 한자리에 그러모았다. 7월 30일 시작된 전시는 은근한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기간이 당초 9월 14일에서 10 월 12일로 늘어났다. 23일 오후 2시 서예박물관 3층에서는 작가들과 관객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21세 기 풍류를 말하다-인문학자와 예술가의 대화’가 열렸다. 풍류의 의미를 반추하면서 이를 문화융성의 기점으로 삼으려는 이날 자리의 뜨거운 토론은 예정된 두 시간이 지 나도 식을 줄 몰랐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SUNDAY MAGAZINE 09


ISSUE

문창후 최선생 진영. 조선시대(1830년). 98 x 70.6 cm. 삼베에 색. 쌍계사 소장.

‘최치원-풍류탄생’(7월 30일~10월 12일) -참여 작가는 총 38명. 작고 작가가 2명(백남준, 박생광)이다. 성인 5000원, 매주 월요일 휴관. 서예/타이포그래피: 권창륜 박원규 이돈흥 김영기 전정우 정도준 / 정병규 최창섭 서화: 박대성 김양동 김종원 노상동 문봉선 홍지윤 박병춘 회화/사진: 김종학 황재형 유승호 이강일 이길우 / 배병 우 이갑철 조용철 설치/미디어: 서용선 최정화 장인선 전성근 정종미 채우승 / 오윤석 한상아 필가묵무 : 홍승엽 + 김무호 백승민 최형주 허회태 -9·10월 각각 전시장 내에서는 부대 행사가 마련된다. 9월 20일 오후 5시 ‘풍류마당1-가무’에서는 김양동·황재형·최정화 작가와의 대화에 이어 김연(판소리)·박원규(북)·이애주(춤)가, 10월 4일 오후 5 시 ‘풍류마당2-동서’에서는 서용선·정종미·김종원 작가와의 만남과 함께 최인(클래식 기타)·원장연(대금·신디사이저)이 풍류 정신을 기리는 판을 벌인다. 10 SUNDAY MAGAZINE


ISSUE

김종원의 ‘고운선화산영(孤雲仙化山靈)’(2014), 한지에 주사, 먹. 210 x 150 cm.

유불선 아우르는 풍류의 세계

까. 젊은 화가 유승호씨는 ‘풍류’에서 영감을 얻자는

이날 행사가 열린 서예박물관 3층 맨 끝방은 선방(禪

컨셉트를 들었을 때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기쁘고

房) 같았다. 전시 기간 중 토요일 오후마다 현대무용

행복했다”고 털어놓았다. ‘도대체 한국적이란 게 뭔

가 홍승엽씨가 춤으로 관람객을 만나는 이 공간에 고

가’ 하는 화두를 오래 고민해 왔지만 잡히는 게 없었

동색 방석들이 얌전하게 놓여있었다. 서화를 하는 김

는데 자료를 찾으며 뭔가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라고

양동·김종원, 서예가 박원규, 설치 미술가 최정화·장

했다. “최치원 선생님이 (책 잘 안보는) 화가들에게 공

인선, 화가 유승호, 장일규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부를 많이 시키셨어요.”

방석 위에 정좌했다. 이동국 서예부장이 “도대체 풍류가 뭔지, 이 시대 에 왜 풍류가 중요한지”를 물었다.

설치미술가 장인선씨는 ‘조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 게 됐다고 들려주었다. “답사하면서 우리 강산 곳곳 에 남아있는 유불선의 조화로움을 새삼 느꼈어요. 다

“한반도의 풍류라는 게 화랑도를 통해 놀이, 유희

른 나라는 종교 때문에 전쟁을 하는데, 서울만 해도

개념과 접목됐습니다. ‘풍류남아’ ‘대풍류’가 그런

교회와 성당과 절과 무당집이 공존하고 있잖아요. 하

것들이죠. 중국 『예기』에 보면 ‘풍화유행’이라 해서

지만 우리는 이런 조화로움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죠.

‘풍속이 아름다운 쪽으로 변해서 흘러간다’는 말이 있

좀 더 크게 본다면 통일 문제도 풍류로 풀어낼 수 있

고, 일본에서는 섹시한 여성을 일컫는 뜻으로도 쓰입 니다. 그런데 최치원 선생은 풍류를 말할 때 ‘유불선

지 않을까요.” 장일규 교수는 “도당 유학생으로 귀국해 세계 문

을 아우르며 접화군생(接化群生)한다’고 했어요. 즉

화와 신라 문화를 아우르려고 노력한 최치원은 현학

인간이 생명체로 태어나 생명을 준 이 땅에 어떻게 동

적으로 살던 분이 아니다”라며 “시무십여조 등을 통

화되어 살 것인가, 이것을 터득하는 게 풍류라고 봅니

해 사회개혁안을 제시한 그의 열정을 오늘날 같은 국

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가적 재난에 아무런 수습도 못하고 있는 우리가 곱씹

있지요.”(김종원)

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좀 쉬울 것 같아요. 풍이 뭐고 류 가 뭔가. 바람과 물입니다. 그럼 바람이 뭐냐. 태양 에 너지에 의한 공기의 이동이지요. 즉 태양 숭배를 상징

한 관람객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풍류적인 해결이 란 어떤 것인가요.” 서화가 김종원씨는 “뒤섞인 것에서 본질을, 질서를

화한 것입니다. 빛과 같이 거침없는 광명의 세계를 뜻

찾아내는 것”이라고 답했다. “아까 말씀드렸듯 풍류

하지요. 류는 무애의 경지를 말합니다. 물과 같이 자

란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에 대한

재로운 흐름의 세계를 의미하죠. 다시 말해 풍은 천도

탐구가 있나요? 요즘 우리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 제대

(天道)이고 류는 지도(地道)인데, 천도와 지도를 합친

로 된 통찰 없이 표피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지엽말단

것이 인도(人道)입니다. 자연의 총체적인 융합사상, 그

에 집착하는 것은 풍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것에 상생하고 순응하면서 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질의응답 시간이 끝나고 이동국 부장이 자리를 정

이끌어가는 그 중심에 인간이 있다는 뜻이죠.”(김양동)

리했다. “정보화 사회, 문자 영상 시대의 키워드는 융

그런 풍류를 연구하며 예술가들은 무엇을 얻었을

복합입니다. 그런데 융복합은 이미 우리 역사 속에 이 SUNDAY MAGAZINE 11


ISSUE

최정화의 ‘신빨 용됐네’(2014), 스틸 프레임, 슬리퍼. 154 x 191 x 12 cm

박원규의 ‘풍류(風流)’(2014), 화선지에 먹, 296 × 203cm

최치원(857~909?) 신라 경주에서 육두품으로 태어나 12세(868년)에 당나라 국자감에 유학, 18세(874)에 외국인 최고 성적으로 빈공과에 급제했다. 25세(881)에 ‘토황소격문’으로 중국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28세 (884)에 귀국해 38세(894)에 ‘시무십여조’라는 사회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고 42세(898)에 주유천하를 시작했다. 52세(909) 이후로는 신발만 남긴 채 가야산의 신선이 되었다고 전해 진다.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는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처음 해낸 파천황의 큰 공을 세워 동방의 학자가 모두 종조로 삼는다”고 그를 기렸다. 조선 성종 때 ‘사리가 순수하고 바르며 치교에 도움이 되는’ 동방 문인의 글을 모아 『동문선(東文選)』 을 편찬할 때 『계원필경』 에 실린 370편의 시문 가운데 152편이 그대로 수록됐다. 12 SUNDAY MAGAZINE


ISSUE

오윤석의 ‘Hidden Memories-1403’(2014), 200 x 120 cm(10장), hand-cutting on paper, acrylic

루어져 있었죠. 그 융합DNA를 서구가 아니라 바로

화를 들은 한상아 작가는 ‘테이크 디스 왈츠(Take

우리 역사의 심연에서 끄집어 내 다양한 장르의 예술

this waltz)’라는 수묵 애니메이션으로 젊은 날 그의

언어로 시각화해보자는 것이 이번 전시의 취지입니

사랑을 그려냈다.

다. 그리고 이렇게 인문과 예술이 만나는 고리가 바로 서(書)인 것입니다.”

설치미술가 최정화씨의 ‘신빨 용됐네’ 앞에서는 다들 왜 슬리퍼가 용 모양으로 이어져 ‘작품’이 됐는 지 궁금한 눈치였다. 이동국 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신발만 남기고 사라진 고운  신선이 되었을까

“최치원에게 신발은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그는 가야

토론회가 끝나고 전시장 투어가 시작됐다. 전시장은

산 자락에서 신발만 남기고 종적이 묘연해졌죠. 사람

크게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토황소격문’으로 필

들은 그가 신선이 됐다고 믿었습니다. 이 작품은 거기

명을 얻은 중국 양주 및 신라 경주라는 출세의 공간

서 모티브를 따온 것입니다. 가야산을 지키는 용이 됐

을 지리산 및 가야산이라는 선계와 대비해 놓고 그

음을 암시하고 있죠. 옆에 ‘운룡도’를 함께 배치한 것

의 실존과 정신을 예술로 풀어낸 ‘최치원의 길을 따

도 그래서입니다.”

라-1000년의 대화’, 무(巫)와 유불선 삼도의 회통으

최정화 작가가 설명을 보탰다. “일상과 담을 쌓은

로 풀어낸 ‘풍류의 역사와 정의’, 시문과 글씨에 초점

것, 뭔가 비일상적인 것이 예술이라고 하죠. 저는 예술

을 맞춘 ‘가을밤 비는 내리고’, 그 옛날 가객(歌客)과

보다 일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상

묵객(墨客)이 한마당에서 어울렸듯 필가묵무의 공연

에서 본질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죠. 흔

을 펼치는 ‘솔바람 하늘을 닦고’다.

해 빠진 알록달록 슬리퍼로 작품을 만든 것도 그런 이

2층과 3층을 틔워 놓은 전시장 바람벽에는 각종 암벽석각과 영당 현판을 탁본한 글씨들이 시원시원

유입니다.” 관람객 사이에서 탄식이 들렸다. “아, 이게 그런 것이었군요. 그걸 몰랐네.”

하게 붙어있다. 그 앞에 장승처럼 서 있는 작품은 서

‘풍류’라는 두 글자를 아주 크게, ‘난랑비서’의 글

용선 작가의 ‘출세’와 ‘입산’. 최치원의 치열한 사회참

을 다양한 색깔의 먹글씨로 구현한 서예가 박원규씨

여와 개혁에의 좌절, 자연으로의 칩거를 돌무더기 위

는 제작 뒷얘기를 들려주었다. “이 종이가 원래 가로

목판 드로잉으로 구현했다. 황재형 작가는 “최치원이

6m, 세로 2m짜리입니다. 한 장에 50만 원이에요. 15

세월호 현장을 찾았다면 피가 거꾸로 솟았을 것”이라

년 전에 2500만 원 주고 중국에서 50장 사둔 것입니

며 뒤집혀진 초상화 위에 절규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다. 요즘은 이런 종이가 나오질 않아요. 만들기가 아

그려냈다. 작품 이름이 ‘새벽에 홀로 깨어’다.

주 힘들거든요. 그런데 작은 글씨는 왜 회색도 있고 붉

3층 입구에 널찍하게 펼쳐져 있는 작품은 정종미

은 색도 있느냐. 먹이 달라서 그래요. 청(靑)먹을 갈면

작가의 ‘풍류-흐르다’. 공중에는 쌍계사 진감선사탑

회색이, 주(朱)먹을 갈면 빨간색이 나오죠. 주먹은 몇

비 탁본 등을, 바닥에는 종이로 만든 연꽃을 띄워 놓

백만원 하는 것도 있어요.”

았다. 서체전문가 정병규는 테이프를 찢어 붙여가며 ‘추야우중’의 절절함을 글씨로 표현했다. ‘쌍녀분’ 설

작품 하나에 이야기 하나, 최치원은 그렇게 우리 곁 에 현신(現身)했다. SUNDAY MAGAZINE 13


INTERVIEW

14 SUNDAY MAGAZINE


interview

Mnet ‘댄싱9’서 인기폭발, 현대무용 최수진이윤희

“25년 간 춤춘 것 보다 TV 출연 2분 덕에 우리를 알아보네요”

현대무용수가 대중의 관심을 얻기란 쉬

‘댄싱9’ 무대에 선 이윤희(왼쪽)·최수진

진 건 최근이다. 학교 때는 최수진의 실력

운 일이 아니다. 발레라면 주역급 무용수

이 워낙 출중해 선배나 교수들과 공연 다

들이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지만, 스토리

니기 바빴다. 졸업 후 이윤희는 국립현대

없이 추상적 개념을 집단으로 표출하는

무용단에서, 최수진은 미국 시더 레이크

현대무용은 난해하다는 편견과 함께 무

컨템포러리 발레단에서 각자의 길을 걷

대 위 주조연의 구분도 모호해 스타가 나

다가 지난해 수진이 귀국한 뒤 함께 작업

오기 힘든 구조다.

적었다. 최수진이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춘다면, 하기 시작했다. 댄싱9도 수진의 설득으로 나오게 됐 이윤희는 역할에 빠져드는게 좋아 춤을 춘단다. 하지

다. 다른 팀이 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같은 팀이 돼

막을 내린 Mnet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댄싱9 시

만 촬영을 시작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가 되

서로 의지하며 힘을 얻었고, “같이 안했으면 큰일날

즌2’의 여파다. 발레·현대무용·스트리트·댄스스포츠

어 멋진 동작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프로였다.

뻔 했다”는 게 이들의 이구동성이다.

그런데 요즘 현대무용의 인기가 치솟았다. 8월15일

등 온갖 장르에서 선발된 최고의 춤꾼들이 실력을 뽐 내는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댄싱9’은 숨은 아마추어를 발굴하는 오디션 프로 그램이 아니다. 각 분야에서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프 -최고 실력 예술가들인데 방송에 출연한 계기는.

독보적 움직임을 가진 현대무용수들의 활약이었다. 로들이 ‘크로스오버 콜라보’ 무대로 승부하는 팀리

이: 방송에선 수진이가 꼬셨다고 얘기했는데, 제 의

‘대한민국에 이런 무용수들이 있는지 몰랐다’는 반응

그 포맷이다. 9명씩 드림팀을 꾸린 ‘레드윙즈’와 ‘블루

지도 없지 않았어요. 올해 서른인데 지금 아니면 언제

중에서도 등장과 동시에 포털사이트 실시간검색어

아이’ 가운데 올해는 ‘블루아이’가 승리해 총 5억원

이런 기회가 있겠어요.

순위에 오르며 폭발적 인기를 누린 두 여인이 있다. 9

상당의 상금과 갈라공연권을 가져갔지만, ‘레드윙즈’

회(8월 8일 방영분) 마스터매치에서 모던발레 스타일

에 속했던 두 친구는 전혀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의 흑조 vs백조 컨셉트로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던 최 수진(30)·이윤희(30) 콤비다. 현란한 테크닉과 소름끼치는 표정연기로 무대를

“졌지만 정말 잘 나간 것 같아요. 저희 춤의 좋은 느 낌을 많은 사람에게 선보일 수 있었으니까요.”(최) “마지막까지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

최: 주변의 권유로 시즌1때부터 고민했는데, 그때

는 사실 걱정이 더 많았어요. 그런데 시즌1 이후 많은 분들이 춤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고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제가 나름 외국에서 활동했지 만 무용계에서나 알지 일반인들은 모르잖아요. 저를

휘어잡는 흑조와 가만히 서 있어도 우아함 그 자체인

어요. 들어가기 전에도 좋은 경험하고 즐기자는 마음

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무용수로서 이만큼 열심히

백조. 두 ‘절친’은 실제 모습도 그랬다. 최수진이 똑부

이었거든요.”(이)

해온 걸 제일 좋은 모습으로 보여드릴 수 있는 시기인

러지게 대화를 리드한 반면 이윤희는 수줍고 말수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동기인 두 사람이 친해

것 같아서요. SUNDAY MAGAZINE15


INTERVIEW

‘댄싱9’ MVP로 뽑힌 ‘블루아이’ 김설진과 결승전 믹스매치 무대를 꾸민 최수진

-개인의 기량보다 콜라보레이션 팀웍으로 평가를 받는 시스

어요. 같은 장르끼리는 서로가 장점을 너무 잘 알기

템에 불만은 없었는지.

때문에 일단 잘 하는 걸 하고, 다른 장르는 서로 양보

최: 하면서 점점 레드와 블루의 성향이 도드라졌

하고 이해해야 좋은 작품이 나올수 있거든요.”

는데, 레드가 저랑 맞았어요. 블루는 스트리트 성향 이 강하고 레드는 클래식 비중이 컸는데, 관객 쪽에는

인터뷰 내내 둘의 휴대전화는 2~3분 간격으로 정

스트리트가 화려하고 자극적이라 많이 어필되지만

신없이 울려댔다. 대부분 지인들의 축하문자나 인터

우리는 화려함은 없어도 여운이 남는 클래식의 매력

뷰 섭외란다. 밖에서도 알아보고 “마치 연예인 본 것

을 잘 보여준 것 같아요.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우

처럼 좋아해 준다”며 다소 상기된 표정이다. “25년 열

리만이 할수 있는 성숙한 무대였거든요.

심히 했던 것보다 단 2분 만에 제 춤을 본 사람들이 더 많아져버렸다”는 것이 최수진의 말이다.

-크로스오버 무대가 음악으로 치면 관현악단 연주자와 밴드 뮤지션이 뒤섞인 격인데. 최: 재밌었던 건 우리는 경쟁이 너무 부담되는데 스

최수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졸업,

이번 시즌엔 루마니아 국립오페라발레단 출신 윤 전일, 비보이 그룹 갬블러크루의 박인수·김기수 등 세

트리트는 배틀 문화라 서로 경쟁하는 걸 즐기고 자부

뉴욕 앨빈 애일리 스쿨(Alvin Ailey School) 졸업

계 무대에서 활약한 춤꾼들이 많았다. 아직 대중에

심도 느낀다는 거에요. 춤에 점수가 바로 나오고 평가

2008∼2012 미국 시더 레이크(Cedar Lake)

알려진 이름들은 아니다. 사실 웬만한 무용공연은 관

받는 것 자체에 상처도 받았는데, 그런 걸 스트리트

컨템포러리 발레단 단원

계자나 가족으로 채워지기 일쑤다. 결승전 MVP로

쪽에서 융화시켜주더라구요. 우리가 승패에 부담느

2007 동아콩쿠르 은상, 2007 서울국제콩쿠르 1등상·심사위원 특별상 수상

뽑힌 김설진은 수상소감에서 “한국에 대단한 댄서들 이 많은데, 그 댄서들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했다.

끼고 있으면 그쪽이 ‘질 수도 있다, 그런데 이기면 된

“우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무대에 서는 거

다!’고 감싸줬어요. 이: 춤추는 사람들은 대개 순박해요. 가족같은 분

을 배려하며 개인기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바

니까,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위기로 무대까지 갔죠. 관계가 불편하면 같이 춤 출

람에 ‘받쳐주는 김설진과 돋보이는 최수진’이라는 프

힘이고 보람이죠. 외국에선 10회 공연을 해도 전석 매

수 없어요. 춤에선 다 드러나거든요.

레임까지 생겼다.

진이 되고 모르는 이들에게도 박수받고 인정받았는

“현대무용 매력은 자유로움”

“제가 욕심쟁이 같은데…각자의 개성과 철학에 따

데, 그 짜릿함을 한국에선 느낄 수 없었어요. TV를 통

라 즐길 수 있는 요소가 아주 다양한 게 현대무용의

해 우리 춤이 사람들에게 각인됐다는 것이 굉장한 선 물같아요.”(최)

사실 이들과 함께 댄싱9의 인기를 견인한 건 ‘블루아

묘미에요. 설진 오빠랑 비교되는 기준점이 없어요. 발

이’의 김설진이었다. 벨기에 피핑톰무용단 소속의 김

레는 규정된 테크닉에서 비교가 가능하지만 우리는

“국립현대무용단조차도 공연 때 자리가 많이 비거

설진은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과 남다른 예술성으로

워낙 개인을 중요시하니까요. 저는 주로 현대무용팀

든요. 친척이나 가족들이 자리를 채워주죠. 방송에

초반 급부상했지만, 콜라보 무대가 거듭될수록 주변

으로 유닛을 꾸리고 오빠가 타 장르랑 많이 한 것도 있

나가니 팬들이 생기고 촬영장에 찾아오더군요. 불과

16 SUNDAY MAGAZINE


interview

‘댄싱9’에서 현대무용수 김경일과 함께 한 이윤희

몇 분이시긴 했지만, 감사했어요. 앞으로 공연장에도

활약할 시기가 올 거라는. 그런데 그 시기가 3년만에

많이찾아주셨으면좋겠어요.”(이)

왔어요. 그 찰나에 충분히 활동하고 얻을 걸 다 얻었

“제게 ‘마스터’라는 호칭이 주어졌지만, 댄서분들

죠. 현대무용이란 자기 춤을 춰야하기 때문에 거기서

이 저에게 ‘마스터’인 것 같다”는 이용우 마스터의 고

아무리 잘해도 수진 최 보다는 시더레이크 무용수로

백처럼, 이번 시즌엔 워낙 최고 수준의 프로들이 출전

서 활동하는 거니까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빨리 내

해 드래프트와 멘토링을 맡은 마스터나 심사위원들

춤을 시작하고 싶었어요.”

이 여타 서바이벌 프로그램처럼 날카로운 평가와 독

두 사람은 댄싱9 갈라쇼(9월9~14일 유니버설아트센터)

설을 날릴 수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전문성이 떨어지

우정출연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쉬지 않고 다양한 무

는 멘트를 들으며 자존심 상하지 않았나 물으니 “그

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최수진은 올해가 가기 전에 댄

게 대중의 눈이구나” 깨달았단다. “워낙 무용계는 우 리를 잘 아니까요. 어떤 모습을 보여드려도 ‘걔는 원

이윤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졸업,

래 어떻다’는 선입견으로 본다면, 이런 반응은 오히려

성균관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새로웠어요. 전문적 지적보다 ‘멋있다’‘잘한다’는 단

2011~2013 국립현대무용단 단원

순한 감탄사에 내가 이런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구

2007 전국 신인무용콩쿠르 수석상 수상

나 싶고,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최)

싱9에 함께 했던 스트리트팀과 공동으로 재미난 프 로젝트를 계획중이라고 귀띔했다. “이제 무대로 보답 해야 할 것 같아요. 좋은 무대로 TV보다 더 가깝게 춤 을 같이 나누는 게 목표에요.” -어떤 춤이 그렇게 나눌 수 있는 좋은 춤일까. 최: 서로가 아는 이야기를 해야겠죠. 춤도 상대방

에게 전달하는 것이니까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 “무대에서 현대무용 더 가깝게 나눌 것” -둘다 발레로 시작했는데 왜 현대무용으로 바꿨는지.

어야겠죠. 그렇게 만들면 자꾸 보러가고 싶고 얘기하 빠져들어 한다면 현대무용은 내 삶과 내 생각, 모든

고 싶고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런 작업을 해보려 고요.

이: 저는 일찌감치 선생님이 토슈즈보다 맨발이 유

것을 녹여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자

리할 거라고 권해주셨어요. 발레를 기본으로 하되 틀

존감이 세서 생각이 많고, 그걸 몸으로 표현하는 게

이: 현대무용이 난해하고 우리가 봐도 의아한 작품

에서 벗어나는게 어울릴거라구요. 현대무용은 자유인

가장 즐겁고 행복하거든요. 제 생각과 모든 것을 더 오

많아요. 그래서 대중도 어렵다고 외면하죠. 그런 것 말

것 같아요. 정답이 없는 게 매력이죠. 발레는 각도고 뭐

래오래 표현하면서 살 수 있겠다 싶었던 것 같아요. 주

고다같이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고 다 정답이 있잖아요. 현대무용은 자기가 추고 싶은

역이 없다지만 현대무용은 작품이 곧 주역이에요. 자

게 답이죠. 움직임 자체가 그냥 춤인 게 매력이에요.

기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하는 거니까요.

최: 그땐 그저 현대무용이 더 즐거웠어요. 돌이켜보

면 발레는 정해진 스토리와 캐릭터가 있어서 거기에

최, 이: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되겠죠.(웃음)

-수진씨는 미국에서 한창 주목받을 때 귀국했는데.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분명한 목표가 있었어요. 5년이면 제가 타이틀로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CJ E&M SUNDAY MAGAZINE17


focus

18 SUNDAY MAGAZINE


focus

영화 ‘화장’으로 베니스 초청 받은 임권택 감독과 제작자 심재명

50년 내공 임 감독 남다른‘촉’심 대표 그 조합에 쏠린 눈

102번째다. 정작 본인은 남들이 몇 번째라고 헤아리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다. 그래도 숫자가 갖는 무게와 권위는 어쩔 수 없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시작해 50년 넘게 영화를 만들어온 임권택 (78오른쪽 사진) 감독. 그의 102번째 영화 ‘화장’은 국내 최고의 영화제 작사로 손꼽히는 명필름(대표 심재명)과의 만남으로 더욱 주목된다. ‘건축학개론’‘마당을 나온 암탉’‘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소위 역발 상적인 기획을 번번이 흥행시켜온 명필름인지라 이번에야 말로 임 감 독이 ‘예술영화’나 ‘거장’ 등의 타이틀을 잠시 옆에 놔두고 대중과의 접점을 넓힐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더한다. ‘달빛 길어올리기’(2011) 이후 3년 만의 신작인 ‘화장’은 27일 개막 하는 제 71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아 9월 3일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앞두고 있다. 비경쟁 부문이긴 해도 현역 감독 중 세계 최고령 인 106세의 마뇰 드 올리베이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둠 속의 댄서’의 라스 폰 트리에,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지중해’의 가브리엘 살바토레 등 함께 초청된 거장들의 면면에서 이 영화의 예술적 성취에 모인 관심을 짐작할 만하다. 베니스에 이어 토 론토·밴쿠버·부산 등 유수의 영화제 상영도 줄줄이 예약돼 있다. 출국을 앞둔 25일 임 감독과 심 대표를 만나 새 영화 얘기를 들었다. 주연배우는 임 감독과 ‘취화선’ ‘축제’ ‘태백산맥’ ‘안개마을’ ‘만다 라’ 등을 함께했던 안성기다. SUNDAY MAGAZINE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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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륜의 힘으로 인간 내면 깊숙이 응시 ‘화장’은 소설가 김훈의 동명 단편이 원작이다. 뇌종양 탓에 하루하루 고통에 몸부림치며 시들어가는 아내(김호정)와, 이와 대조적으로 꽃 처럼 활짝 피어나는 아름다운 여직원(김규리)을 바라보는 화장품 회 사 중역(안성기)의 심리를 따라간다. 제목은 죽은 이를 불살라 장례 치른다는 뜻과 여성이 얼굴을 곱게 치장한다는 뜻 모두를 의미한다. 10년 전 제 2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 이 단편을 읽고 영화를 만들 고 싶었다는 심재명 대표가 임권택 감독을 연출자로 떠올린 이유가 궁금했다. “읽는 순간 인간의 삶과 죽음, 육체에 대한 지독할 정도로 집요한 묘 사에 압도됐었어요. 좋은 영화가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죠.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임권택 감독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어요. 칸 영화 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무르’(2012) 같은 작품도 있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50대 중년 남성의 욕망과 절망,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라는 묵직한 주제를 연륜으로 돌파해낼 적임자라고 생각했어요. 중년 남성 이 주인공인 ‘어른들의 영화’라는 점에서도 제작자로서 새로운 시도 와 모험이라는 의미가 있었고요.” 심 대표의 모험에 임 감독은 반갑게 동참했다. 한지(‘달빛 길어올리 기’)나 판소리(‘서편제’‘천년학’), 한국화(‘취화선’), 고전(‘춘향뎐’)등 우리 옛 문화의 아름다움이라는 그의 ‘전공’과는 사뭇 다른 이야깃 감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 반했지만 예산 문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기억도 있던 터였다. “오랜 기간 영화를 하다 보니 영화는 감독 자신이 살아온 세월만큼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특히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이 해의 깊이는 일정한 나이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 되 는 구석이 있지요. 이제 내 나이가 이쯤 됐으니, 조금은 감당할 수 있 는 주제가 아닐까 용기를 냈어요. ‘화장’은 누구나 마음속엔 있지만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부끄러운 감정을 그립니다. 하루하루 죽어가 는 환자, 죽음을 지켜보는 남편, 죽음과 관계 없이 빛나는 젊음, 속에 품었지만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부끄러운 감정들…. 이런 우리의 일 상이 거짓 없이 담긴다면 지금까지 제가 만든 영화와는 전혀 다른 영 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알려진 대로 김훈은 문장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글쟁이다.『칼의 노 래』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쓸 때 ‘꽃이’와 ‘꽃은’ 사 이에서 수도 없이 고민을 거듭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화장』도 그 런 성정대로 대단히 섬세하게 쓰인 작품이다. 특히 ‘공감각적’이란 표 현이 떠오를 만큼 병자의 육체가 무너져가는 과정, 이를 지켜보는 남 편의 복합적인 감정의 출렁임 등을 둘러싼 오감을 파고드는 묘사가 영상 못지 않게 압도적이다.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 이들의 생각도 비 슷했던 듯하다. 하지만 좋은 원작이 (영화화하기에) 쉬운 원작은 아니 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훈의 문장과 씨름하느라 한 달을 앓았어요” “김훈 작가의 원작엔 문장이 주는 엄청난 힘이 있어요. 그걸 온몸으로 받아내는 듯한 감흥을 스크린에서 느끼게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 지요. 힘들겠다는 짐작을 못 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시작을 해보니 20 SUNDAY MAGAZINE


focus

을 꼭 받고 싶다는 욕심 그런 건 없어요. 영화제에 초청됨으로써, 대중 에게 알려짐으로써 영화가 얻게 되는 소득이 굉장히 크거든요. 그건 제작자한테 가는 소득이에요. 극장 잡기가 쉬워지고 홍보하기가 좀 더 나아지는 거죠. 그걸 못해줬으니 면목이 없을 수밖에요.”(임) 심 대 표는 “일정이 빠듯해 후반작업을 한 달도 채 못하고 칸에 출품한지라 아쉬움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고심 끝에 재편집 제안  임 감독께서 흔쾌히 수용” 위계질서가 강한 우리 풍토에서 손아래 제작자가 한참 위인, 그것도 세계 영화계의 공인을 받은 감독과 일하는데 심리적 부담은 없었을까. 아니, ‘거장’이란 호칭은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때론 거 장 자신에게도 장벽이 되진 않았을까. 임 감독은 “심 대표가 좋은 의 미에서 나를 많이 괴롭혔다”며 웃었다. “촬영을 마치고도 뭔가 분명하지 않은 느낌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 가 있었어요. 제가 그토록 고심했던 애초의 의도가 제대로 담기지 못 한 것 같아 만족스럽지가 못했어요. 그러던 차에 심 대표가 ‘다시 새 롭게 편집을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어요. ‘화장’ 이전까지 는 단 한 커트도 그 어떤 변형을 가하는 걸 받아들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작품을 완전히 새롭게 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겠다 는 생각이 들었어요. 편집을 다시 한 걸 보고 제가 연출부들한테 그랬 어요. ‘심 대표, 감독 해도 되겠다’고요. 제가 본 제작자들 중 그렇게 냉 정한 시선을 가진 사람이 없어요. 이래서 명필름이 그렇게 많은 영화 를 성공시켰구나, 실감했지요.”(임) “제 딴에는 밤잠도 설쳐가며 고심 끝에 얘기한 건데 흔쾌히 답을 주 셔서 참 감사했어요. 자신의 영화에 대해 ‘무한책임’을 느끼는 감독님 이기에 그런 결정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아마 그렇게 책임감이 크시 니 평소 다른 사람들이 감히 이런저런 말을 못했겠구나 싶기도 했고 요.”(심) 안성기김호정김규리 주연의 영화 화장

“‘국민감독’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아주 죽겠어요. 사람들이 내 영 화를 많이 봐야 국민감독이지…. 흥행이 안 되니 투자가 안 따라오는 게 참 자존심 상해요. 이번에 내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낸 것도 그런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102편을 찍었다고 대단한 노하우

정말 힘이 많이 들었어요. 단편인데다 뚜렷한 기승전결을 갖추지 않

가 있는 것도, 더 나은 작품이 나온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았다는 점 탓만은 아닌 것 같아요. 3쪽짜리 장편(掌篇)소설로 ‘짝코’ 그저 열심히 허우적대면서 최선을 다해 찍을 뿐이지요.”(임) (1980)를 찍어보기도 했으니까요. 촬영하면서 한 달을 앓았어요. 꼭

이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 영화를 100편 넘게 찍은 감독에게도, 20

누구한테 한 방 크게 얻어맞아 타격을 입은 것처럼 몸이 견디지를 못

년 가깝게 숱한 흥행작을 기획한 제작자에게도 ‘쉽게 찍히는 영화’란

했어요. 지금까지 영화를 그렇게 많이 찍으면서도 이런 적이 없었는

애초에 없는 듯하다. 심 대표는 “제작자로서 바라는 게 ‘화장’의 상업

데….”(임)

적 성공만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촬영 시작 전엔 막연한 설렘이 있었어요. 제가 20대 때 영화인의 꿈

“감독님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사실상 유일한 현역이

을 키우게 해줬던 많은 작품들, 그 작품들을 만든 바로 그 감독님과의

잖아요. 해외에선 클린트 이스트우드, 우디 앨런, 장 뤽 고다르, 로만

작업이었으니까요. 시작하고 보니 설렘이 고통으로 바뀌더군요. 50쪽

폴란스키처럼 지금도 영화제에 나오고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노장

짜리 단편을 100분 장편영화로 만든다는 게 과욕이었나 싶었을 정도

들이 많아요. 감독님은 한국 영화계의 상징적 존재인데 그런 분 작품

로 감독님이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걸 지켜봐야 했지요.” (심)

이 대기업 투자를 받기 힘든 게 안타까운 현실이죠. 이 영화로 중견·노

‘화장’은 올 초 칸 영화제에 출품됐지만 경쟁 부문에 오르진 못했다. 장 감독들이 새로운 도전을 통해 동시대 관객들과 끊임없이 소통할 임 감독은 소식을 듣고 심 대표에게 “면목이 없다”는 휴대전화 메시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합니다.”

를 보냈다고 한다. “칸 영화제에 가지 못해 섭섭하다는 실망감이나 상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명필름 SUNDAY MAGAZINE 21


PORTRAIT ESSAY

권혁재 기자의 不-완벽 초상화 <끝>

오태석의 현실과 무대 사이 <연극 연출가>

“열한 살 때 6·25를 겪었습니다. 와세다 대학 나온 변호사였던 아버지, 붉은 완장 두른 군인들에게 끌려갔습니다. 제게 ‘현실’이란 그렇게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불안한 존재가 됐습니다. 현실의 삶, 믿을 수 없었습니다. ‘허구’인 연극, 외려 편안했습니다. 허구 속에 들어가는 시간을 되도록 길게 잡고 살아왔습니다. 평생 연극이란 놀이터가 제 삶터가 된 까닭입니다.”

22 SUNDAY MAGAZINE


COLUMN

스타일#: 노앙 티셔츠와 철릭 원피스의 흥행 코드

한글이든 한복이든 욕망 자극 패션은 뜬다

근래 본 최고의 공연을 꼽으라면 단연 뮤

이뿐 아니다. 한복에서도 눈길을 끄는 트

지션 정재일과 소리꾼 한승석이 펼친 무대

렌드가 있다. 일명 ‘철릭 원피스’의 유행이다.

다. 바리공주의 설화를 모티브로 한 ‘바리 ‘철릭’이란 고려말부터 조선까지 무관이 주로 abandoned’라는 타이틀을 단 공연은 천재

입던 일종의 포. 저고리와 치마가 분리되며

피아니스트 정씨와 판소리의 대가 한씨가 2

치마 쪽에 잔주름이 잡혀 있는 것이 특징인

년여 준비 끝에 완성한 걸작. 처음엔 그저 동 이 전통 한복을 ‘차이킴’의 김영진 디자이너 서양 음악이 만나는 퓨전 국악이겠거니 싶었

는 가슴 아래부터 퍼지는 단아한 원피스로

지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 신들린 듯한 건반

새롭게 고안했다. 여밈을 풀어 헤치면 가벼운

연주와 절제되지만 호소력 있는 음색이 주거

롱재킷으로, 원피스 위에 모시 치

니받거니, 드라마틱하게 긴장을 이어가는 묘

마를 덧입으면 풍성한 드레스로

한 만남이 이뤄졌다. 이를 크로스 오버라는

바뀌는 스타일링을 연출할 수도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해서, 그건 그냥 어디

있다. 혼수·돌 말고는 딱히 특수

에도 없던 새로운 장르라고 해야 할 것 같았

라고 할 게 없는 한복 시장에서 지

다. ‘국악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구나’라

난 석 달 새 300여 벌이 팔렸다는

는 것도 새삼 실감했다. 전석 매진이라는 흥

데, 이런 인기 때문인지 최근엔 비

행은 물론이거니와 공연 뒤 이어진 환호와 기

슷한 디자인의 철릭 원피스가 다

립 박수를 생각해 보면 혼자만의 찬사가 아

른 브랜드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김씨는 “특히 20대 젊은 여성들이

허나 이것이

이 비슷한 감흥을 최근 패션계에서도 연이

철릭 원피스에 대해 한복에 대한

최선의 해법은

어 발견하고 있다.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 노

거부감은커녕 해외여행에서 입고

아닐 터다. 멋

앙이 선보인 티셔츠가 그 하나다. 디자이너가

찍은 사진을 보내올 때 놀랍고 뿌

지게, 재미있게,

배우 유아인과 협업해 만들었다는 티셔츠는

듯하다”고 말했다.

님을 증명한다.

누구나 처음 보면 무릎을 칠 만하다. 가슴팍

한글 디자인이든 한복이든 모두가 우리의

아름답게 만드는 것. 그래서 지갑을 열고 갖 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하는 게 순리라는 생

과 등판에 도시 이름을 찍은 건 꽤 익숙한 디

소중한 전통 문화 유산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각이다. 남들 입은 게 괜찮아보이니 나도 한

자인. 하지만 그 모양이 좀 특이해서다. 한글

그런데 지금껏 희한하게도 가까이하고자하

번 따라 입고 싶고, 동시대적 감각을 그대로

과 영문을 조합해 서울은 ‘ㅅEOUL’, 파리는

면 더 멀어지기만 했다. 자주 접하지 않으니

보여주는 옷이라면 거기에 전통이라는 의미

‘PAㄹIS’ 식으로 기발한 표기법을 사용했는

잘 모르겠고, 모르니까 재미없고, 재미없으

는 굳이 보탤 이유가 없다. 옛 것이라서, 우리

데, 한 자씩 읽으면서 슬쩍 미소를 짓게 하는

니 더 안 찾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국

것이라서가 아니라 일단 예쁘지 않다면 외면

위트다. 보는 이마다 비슷한 매력을 느낀 것

경일이나 명절 때나 한 번쯤 다루게 되는 ‘달

받는 게 당연하다. 패션은 계몽이 아닌 욕망

인지 이 티셔츠는 한 백화점 팝업스토어에서

력 기사’ 아이템이 됐다. 그때마다 우리 것을

으로 승부하는 냉정한 세계 아닌가. 신개념

연일 완판되며 2억 원의 매출을 달성했고, 올

지키고 사랑하자는 교훈과 계도의 메시지가

한글 티셔츠와 철릭 원피스의 흥행은 이를

최고의 ‘국민 티셔츠’로 불리기도 했다. 지금

함께했다.

신랄하게 증명해 보이고 있다.

껏 한글을 응용한 디자인이라고 하면 국가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를 상징하는 홍보물 내지는 ‘한국적’이라는

사진 노앙·차이킴

꼬리표를 다는 제작 의도가 분명했던 바, 소 비자의 관심과 호응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 분명하다. SUNDAY MAGAZINE 23


food

세 번째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영에서 여름을 보낸 게 벌써 세 번째다. 사실 나는 통영에서 살고 싶은 생 각이 없었다. 이 역시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곳은 몰라도 통영에서만은 살지 않을 것’이라 다짐을 했던 적이 있다. 다름 아닌 여름 때문이었다. 2004년이었던가. 촬영 때문에 8월 중순 즈음 통영 에 내려와 민소매 셔츠를 입고 1박 2일 동안 돌아다닌 후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내 어깨 위로 수포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뜨거운 햇살에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케냐에서 탄자니 아로 향하던 때 외에는 처음이었기에, 내게 통영의 여 름은 적어도 아프리카와 동급으로 인식됐다. 그런 곳 에서 벌써 세 번째 여름을 보냈다. 게다가 게스트하우 스를 운영하며 아기를 키우느라 두 번의 여름은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올 여름도 비슷하게, 하지 만 큰 사건사고 없이 지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일이 었다. 나와 아내가 시장을 찾아 ‘오늘 나온 것들 중 무 조건 가장 큰 생선’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열심히 두 리번거린 것도 바로 무사히 여름을 보낸 것을 자축하 기 위함이었다. 클 만큼 큰 자연산 생선, 맛은 상상 초월 우리가 먹는 식재료 중 자연적으로 나고 자라는 것들 은 모두 제철이 있다. 가장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가 장 맛이 진해지고 가장 구하기 쉬워지는 그 시기가 바 로 그것을 먹어야 할 시기다. 모든 상품이 매뉴얼에 따라 진열되는 마트에서는 잊기 쉬운 제철의 가치를 1

나는 이곳 통영에 내려와 살면서, 많은 시장을 돌아 다니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하지만 물기 가실 날

정환정의 남녘 먹거리 <22·끝> 남해의 참맛

이 없는 좌판에 그날 가장 자신 있는 무언가를 내놓

해산물 맛 제철 만난 큰 놈이 최고

고 팔고 있는 아주머니들로부터 배운 것은 단지 제철 에 대한 것 뿐만은 아니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굴과 물메기, 대구를 살 때도 그 랬고 쑥국을 끓일 때 쓸 도다리를 찾을 때도 그랬다. 뜨거운 햇볕 아래 감성돔을 구경할 때도 마찬가지로 듣는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큰 게 맛있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는 이곳 남해로 삶의 터전을 옮기며 그동 안 알고 있던 바다에서 나는 것들의 ‘원래 크기’를 알 게 되었다. 통영에 살지 않았다면 굴과 대구, 삼치, 도 미, 광어가 얼마나 큰 것들인지 나는 영영 알지 못한 채 살았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클 수 있는 만큼 다 큰 것들의 맛이 얼마나 풍부한 것인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큰 것들이 대부 분 자연산이라는 사실 역시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고.

24 SUNDAY MAGAZINE


food

큰 것들 대부분이 자연산인 것은 아주 간단한 이 유 때문이다. 양식을 하는 모든 것들에게는 출하시점

1 처음 보는 사람은 보고도 믿지 못하는 대형 삼치

2 서울에서는 대형으로

이 존재하는데, 이는 사료를 아무리 먹여도 성장이 정

분류되겠지만

체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즉 경제성으로 판단했을 때

이곳에서는 적당한 크기로

클 만큼 컸다 판단되는 때가 바로 시장에 풀리는 시 기라는 것이다(다만 굴의 경우 종패에 자연적으로 포자가 달라붙어 플랑크톤을 먹으며 스스로 자라는 것이기에 양식이 아니라 수하식이라 부른다). 하지만 드넓은 바다에서 클 수 있을 만큼 자란 것

불리는 대구들

3 싱싱한 도미는 왜 바다의 왕자라 불리는지 온몸으로 증명한다

2

4 올리브오일과 바질, 레몬즙을 한 데 섞은 후 농어의 몸 구석구석에 바른다

들은 그저 ‘운 없이’ 사람에게 잡혔을 때야 시장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 나와 아내가 특정한 생선을 정 하지 않고 그저 가장 큰 것을 목적으로 한 것 역시 그 날 무엇이 잡혔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큼직한 농어, 올리브 기름 발라 포일에 싸서 구우면  우리 부부가 시장에서 사온 것은 큰 농어 한 마리였 다. 우리가 고른 농어보다 더 무게가 나가 보이는 참 돔과 삼치가 있었지만 아직 바다가 차가워지지 않는 시기이기에 여름이 제철인 농어에게 프리미엄을 조

3

금 얹어준 결과였다. 게다가 농어라면 여름을 보내는 소박한 파티에 어울리는 요리도 가능한 터였다. 국내에서는 농어를 보통 회나 찜, 탕으로 많이 먹 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스테이크 재료로 사 용한다. 고급 레스토랑의 메인 디시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급 어종이라는 뜻이다. 하지 만 우리는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산뜻하게 먹기로 했 다. 농어와 몇 가지 허브, 올리브 오일과 레몬, 후추만 있으면 준비가 끝난다. 미리 대가리와 내장을 제거한 농어는 적당한 크기 로 잘라 속을 잘 씻은 후 전체적으로 올리브 오일을 발라준다. 이후 안쪽에 취향에 맞는 허브와 레몬, 후 추를 넣고 요리용 포일이나 종이에 싸서 오븐에 넣고

4

구워주면 그것으로 요리는 끝이다. 아내는 집 마당에 서 키우고 있는 로즈마리와 바질을 뜯어 속을 채웠는 데, 시간이 지나며 농어가 익어갈수록 향긋한 향이 집안을 조금씩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 향기를 감상하 며 우리는 지난여름 내내 애썼던 서로에게 수고했다

게 허브향은 좋은 자극이 됐던 모양이었다.

럼 자라길 바랐다. 좁디좁은 가두리 양식장에서 주어

하긴 여름 내내 이 작은 사람도 결코 쉽지만은 않

진 먹이만 먹으며 누군가 정해놓은 일정에 따라 삶이

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나대로 매일 오가는 손

은 시간을 보냈다. 수족구를 두 번이나 앓았으며 더

결정되는 게 아니라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살아

님들을 맞이하느라, 아내는 아내대로 마감이 코앞에

운 날씨 때문에 땀띠를 떨치지 못하고 지낸 날이 많

가는 자연적인 사람이 되길 바랐다. 물론 그게 결코

닥친 책의 편집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지

았다. 초보 부모가 바쁘기까지 했으니 양껏 놀지 못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나와 아내는 잘 알고 있었다.

난여름은 유독 힘이 들었다. 그런데 평소에 잘 경험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제가 참을 수 있을

하지만 양식이 아무리 발달해도 여전히 자연산을 만

하지 못한 향기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단 우리뿐이

만큼은 잘 참아준 고마운 녀석에게도 우리는 은빛

날 수 있는 것처럼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다는 것 역

아니었다. 나와 아내의 품을 오가며 놀던 아기도 문득

고운 자연산 농어를 맛보여줬다. 그리고 아기는, 바닷

시 잘 알고 있었다. 이 역시 이곳 통영에 내려와 우리

고개를 들고는 부엌 쪽을 가리키며 “저거! 저거!”하는

가에서 태어났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도 받아먹었다.

가 배운 아주 놀라운 사실이니까.

소리를 냈다. 누굴 닮았는지 맛과 향에 민감한 녀석에

그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는 녀석이 자연산 어종처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저자 SUNDAY MAGAZINE 24


PEOPLE

UN 관련 단체와 맨해튼서 패션 사진전 여는 케이티 김

패션사진음악이 준 가르침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어요

26 SUNDAY MAGAZINE


PEOPLE

1

인생만사 다 새옹지마다. 살면서 한 번이라도 위기를

“역삼동 한 디스코텍에서 DJ 보조를 하고 있었는데

제 2막, 패션과 사진

겪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어려움을 자신에게 유리한

거기에 외국인 여자 DJ가 나왔어요. 말이 통하는 사

클럽을 찾던 연예인, 모델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

기회로 만드는 게 진짜 능력이다. 패션 사진작가 케이

람이 저밖에 없다 보니 저하고만 얘기를 했는데, 어느

겼다. 그들의 해외 촬영에 통역으로 다니면서 그는 패

티 김(KT KIM·한국이름 김경태·53)도 그런 사람이

날 그러더라고요. 조선호텔에서 DJ를 구한다고, 한번

션 사진가들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영국

다. 그는 자신의 삶을 덮친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가보라고.”

않고 어떻게 해서든 그 위에 올라타려고 노력했다. 그

이미 장안의 쟁쟁한 DJ 여럿이 지원한 상황. 노래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의 흑백 사진에 마침 감동을 받 고 있던 차였다.

와 가수를 골라 외우고 커닝페이퍼까지 만들었다. 그

“저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92년

런데, 오디션 도중 그만 쪽지가 발각됐다. 이제 끝이구

4월 도쿄에 출장갔다가 카메라를 처음 샀어요. 콘탁

제 1막, 영어와 클럽 DJ

나 싶었다. 영국인 DJ가 그에게 따졌다. “이거 당신이

스 167MT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유명한 사진가 밑

국민학교 3학년 때 폴 앵카의 ‘파파’를 즐겨 흥얼거리

썼어?” “…예.” “가수 이름, 노래 제목을 스펠링 하나

에 조수로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건

던 소년은 아버지가 무슨 날이나 돼야 장롱 속에서 꺼

안 틀리고 적은 건 처음 본다.”

남의 기술을 훔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책을 사서

의 ‘인생 서핑’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이유다.

내던 사진기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경기고에

그렇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호텔에서 방도 주고, 독학을 시작했어요. 외국 사진기자들과 친하게 지내 며 새로운 기법을 배우기도 하고요.”

입학한 뒤 사진반에 들고 싶었지만 경제적 부담이 너

밥도 주고, 옷까지 세탁해주었다. 이름도 KT KIM이

무 컸다. 대신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본을 불었다. 클래

됐다. 이곳에서 그는 쌍코피가 날 정도로 일했다. 호

식 곡을 중심으로 한 연주였다.

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영어 듣기평가에서 1등 ‘잉크’의 만복이, 부활 등의 레코드 재킷 사진도 찍었

소방차 멤버 김태형의 솔로 앨범을 비롯해 심신, 다. 그렇게 8년 여를 사진에 미쳐 지냈지만 뭔가 아쉬

“고3 때 집에 빨간 딱지가 붙었어요. 한 대학 국문과

도 했다. 무엇보다 전세계 디스코텍을 관리하는 영국

에 합격했는데, 입학금 36만5000원을 구하지 못해

회사에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선곡하

웠다. 나만의 것이 없었다. 자신만의 정체성에 대한 고

는 요령, 분위기 띄우는 방법, 당시 첨단 기술이었던

민이 시작됐다.

결국 대학을 포기했죠.” 그의 유일한 낙은 영어였다. 훈육주임 영어 선생님

레이저 조명 작동법까지. 방한한 영국 회사의 사장은

은 교실에만 들어오면 첫 마디가 “50번 김경태, 읽어” 그의 재주를 보고 본사 직원으로 발탁, 40일간 유럽 였다. 그 스트레스가 재미가 됐고, 어느새 재주가 됐

연수까지 시켜줬다. 견문이 확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나는 표준렌즈만 쓴다’ 고 한 얘기가 떠올랐어요. 대가들 말을 믿어보자고 생 각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표준렌즈만 씁니다.”

다. ‘대학은 못 가도 영어는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에

“88올림픽을 전후해 이태원 등지에 첨단 장비를 도

초점을 ‘패션 사진’으로 잡은 그는 2001년 한국 패

틈나는 대로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읽곤 했다. 스무

입한 클럽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르망을 한 대 사서 기

션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쿠바에 들어갔다. 친하게 지

살 때 길거리 캐스팅돼서 CF도 좀 찍었지만 수입은

사를 두고 차에서 김밥 먹으며 DJ하러 다녔습니다. 내던 패션 피플과 브랜드의 협찬을 받아 마련한 브랜

신통치 않았다.

최대 7군데까지 뛰었죠. 그때 돈 좀 벌었습니다.”

드 의류를 거리 캐스팅한 모델에게 입히고 실제 거리 SUNDAY MAGAZINE 27


PEOPLE

2

3 1~5 케이티 김의 사진작품들

28 SUNDAY MAGAZINE


PEOPLE

4

에서 색다르게 찍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이

제 3막, 봉사 그리고 나눔

5

라는 회사도 차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또 다

름하여 ‘스트리트 스마트’. 이렇게 찍어온 사진들이

2005년 서울 청담동 더 컬럼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른 일이 맡겨졌어요. 패션계의 힘을 모아 세계의 발전

한 패션 잡지에 고스란히 실리면서 그는 비로소 국내

위해 디스플레이를 마친 그는 비로소 병원으로 향했

을 도모하자는 취지의 UN 단체 ‘패션 포 디벨럽먼트

패션 사진계에 이름을 올렸다. 김희선송혜교 등 국

다. 부쩍 피곤하던 차였다. “신장암 2기입니다. 수술

(Fashion 4 Development, 이하 F4D)’의 아트 디렉

내 톱 스타들과의 작업이 이어졌다.

생존 가능성은 50%입니다.”

터로 일하게 됐습니다.”

“2003년에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디자이너 톰 포드 의 백스테이지 취재 허가를 동양의 포토그래퍼로는

청천벽력이었다. 모든 스케줄을 취소했다. 주변에 는 “그냥 간단한 수술이야”라고만 했다.

F4D의 아트 디렉터로서 그는 오는 9월 맨해튼에 서 두 가지 커다란 행사를 벌인다. 하나는 유엔의 모

처음으로 얻어냈습니다. 당시 찍은 사진 2장은 이듬

“잡지사 팀과 회의를 하는데 문득 ‘내가 그동안 너

자보건 프로젝트 ‘Every Woman Every Child’를

해 톰 포드측으로부터 회고록 『TOM FORD』에 쓰

무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후원하는 패션 사진전 ‘R.S.V.P’를 9월 9일 맨해튼

겠다는 연락을 받았죠. 리처드 아베든, 애니 레보비치, 드는 거에요. ‘이런 것을 매일 보는 축복 속에 살았는

세인트 레기스 호텔에서 개최하는 것. 자신의 패션 이

부르스 웨버, 마리오 테스티노, 스티븐 마이젤 같은

데, 이걸 두고 가야하다니…’. 견딜 수 없었죠. 살고 싶

거물 사진 작가들과 함께 였어요.”

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어요. 저를 살려주시

그의 사진의 강점 중 하나는 순간포착이 강하다는

면 꼭 좋은 일을 하겠다고.”

미지 사진을 내놓는다. 다른 하나는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각국 유엔 대 사의 부인들을 초청해 F4D가 9월 23, 25, 26일 맨

수술 후 식생활을 철저하게 조절하고 자전거 타기

해튼 피에르(Pierre) 호텔에서 개최하는 ‘F4D’s

었을 정도다. 군악대에서 트럼본을 불던 방위병 시절, 등 운동에 몰입했다. 단식원에 들어가 생야채 위주로

FIRST LADIES’다. F4D의 에비 에반겔로우 회장과

점이다. 밥 먹을 때도 항상 어깨에 라이카를 메고 먹 사단장으로부터 “사격이란 이런 것”이라는 칭찬과 함 께 포상휴가를 받았을 정도로 과녁지를 걸레로 만든

먹으면서 몸무게도 15kg이나 줄였다. 그리고 2011년, 그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UN이

빠른 손놀림과 날카로운 눈매는 그가 자신만의 ‘점· 지정한 ‘월드 말라리아 데이’와 관련, 말라리아로 고 선·면’을 구성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인적이 드문 달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독 특한 구도로 잡아낸 고양이 시리즈는 금세 입소문을

기문 유엔사무총장 부인인 유순택 여사, 세계적인 디 자이너 도나 카란 등 저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다.

통받는 아프리카로 모기장을 보내는 운동 ‘Fashion

“이제는 제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

Net’s Go!’를 후원하는 국내 행사의 기획 및 총감독

고 싶어요. 한인 2세와 3세들이 아티스트로 재능을

을 맡았다.

키우는데 패션과 사진, 음악과 관련된 저만의 노하우

탔다. 특히 지붕에서 지붕으로 점프하는 ‘날아가는

“UN재단에서 감사장을 받고 나서 ‘덤으로 사는

고양이’를 비롯한 사진들은 2002년 월드컵 당시 일본

인생, 더 좋은 일을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아내(김나

최고의 고양이 잡지 ‘네코’에 두 차례에 걸쳐 실렸고, 연· 현대무용 의상디자이너)와 상의해 지난해 뉴욕 세계적인 사진잡지 ‘비저네어’에도 소개됐다.

이탈리아 보그의 편집장 프랑카 소차니를 비롯해 반

으로 거쳐를 옮기고 ‘온더리스트(ON THE LISZT)’

를 가르쳐 주고 싶어요. 사진을 어떻게 하면 잘 찍는 지도 책을 통해 공유할 생각입니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ON THE LISZT SUNDAY MAGAZINE 29


BOOK

『불황 10년』

30대를 위한 ‘10년 불황’ 탈출법

일본의 장기 불

정할 수 있는 나이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황을 일컫는 말

30대를 향한 메시지는 한 마디로 ‘어떻게

‘잃어버린 10년’ 든 버텨라’이다. 내수 진작이나 국민소득 증

기에 얼마 되지도 않는 목돈을 가지고 약간의 높은 이자율이나 고수익률을 따라가는 공격 은 불을 따라가는 불나방과도 같다.”

이 남 얘기가 아

가 같은 건 나랏님이나 정치인이 머리 싸맬 문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대부분 공감하면서

니다. 경제 호황

제다.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고 근근이 현상유

도 ‘정말 그럴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 사

이란 말이 과연

지를 해갈 수 있는 방도부터 찾아야 한다는

회의 가장 복잡하고 비이성적인 문제, 교육

있기는 한가 싶

거다. 돈을 벌고 굴리는 게 ‘공격’이라면 장기

때문이다. 집값과 가계 지출 모두가 사교육과

게 경제 지표도, 불황에 필요한 전략은 가진 돈을 지키는 ‘방

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다. 아니나다를까.

어’와 ‘수비’라는 논리다.

책 맨 마지막 장은 교육 얘기다. 저자는 사교

체감 경기도 나 아질 기미가 없다. 새로 취임한 경제 부총리부

하여 ‘생활경제 안내서’라는 부제를 단 책

육과 선행학습이 불황의 터널을 지나며 점차

터가 “일본의 1990년 초 상황을 밟고 있다”고

은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재

줄어들 것이라 예견한다. 다만 영어는 고등학

말하는 걸 보면 상황이 더 분명해 진다.

테크 기사나 서적에서 흔히 보던 조언들, 가령

교 때부터 배워도 된다거나 아빠를 사교육 대

젊었을 땐 고수익 고위험 금융상품에 분산투

체 요소로 제시하는 부분은 다른 장에 비해

경제의 쏠림 구조 때문이다. 그네들처럼 내수

자를 하라거나 괜찮은 수도권 아파트를 노려

유독 논리보다 당위가 앞선다.

기반이 탄탄하길 한가, 지방 경제가 분산돼

보라는 식의 얘기와는 정반대다. ‘1가구 1주

‘국가따위 필요 없어’ ‘내 경제는 내가 지킨

있나. 중산층은 급격히 줄어들고 빈부의 양극

택’의 패러다임도 거부한다. 집을 사 주는 다

다’는 각오로 읽히는 글은 개인적이고 뭣보다

화는 눈에 띄게 두드러져 간다.

음 세대가 없는 시기가 올 거라며 차라리 월

삐딱하다. 정치가 실패한 나라에서 택할 수

그나마 일본은 낫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

저자도 그런 비관론자 중 하나다. 2007년

밖에 없는 ‘약은 해법’이라는 게 저자의 항변

세에 살라고 권한다.

이다.

『88만원 세대』 를 통해 20대 비정규직의 문제

가계 관리 전략 역시 흥미롭다. 극단적 거

를 지적했던 그는 “이제 전 업종에 파견직을

품 빼기다. 일단 이유 불문, 방법 불문하고 1년

그럼에도 책을 쓴 속내가 엿보인다. “과잉

허용하는 더 안 좋은 상황”이 됐음을 인정한

치 생활비를 확보하라고 ‘강요’한다. 빚이 있

과 잘못을 없애야 하는데 어려운 상황, 여기

다. 2010년 이후는 ‘뭘 해도 안 되는’ 시대라

더라도 갚지 말고 먼저 목돈부터 모으란다. 에 시장이 스스로 불황이라는 과정을 만들

고 못 박는다. 그러면서 또다시 세대론으로 해

빚은 어쨌든 갚아 나갈 터. 당장 고용이 어찌

어 조정하는 자기조절 메커니즘이 될 수 있다.”

저자: 우석훈

법을 제시한다. 90년대 학번, 30대로 시선을

될지 모르는 불황 시대의 비상금이자 심리적

불황 10년을 이겨내는 진짜 힘, 어쩌면 이런

출판사: 새로운현재

옮긴다. 20대보다 그나마 절약할 돈이라도 있

안정제로서의 용도다. 더구나 그걸 1년짜리

희망이 아닐까 싶다.

가격: 1만5000원

는 세대, 4050보다 재빨리 직업의 궤도를 수

정기예금에 묵혀두는 게 옳다고 한다. “불황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신간 안내

뉴스킷 수도원의 강아지들

건축가 함인선, 사이를 찾아서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저자: 뉴스킷 수도사들

저자: 함인선

저자: 백성호

역자: 김윤정

출판사: 마티

출판사: 판미동

출판사: 바다출판사

가격: 1만5000원

가격: 1만5000원

가격: 1만3800원

30 SUNDAY MAGAZINE

첫 작품인 성락교회로

행복은 무엇이고, 어떻

1966년 뉴욕 근교 산 속

주요 건축상을 수상했

게 생겨나는 걸까. 이 근

에서 한 무리의 수도사

던 저자가 ‘건축가란 누

원적 질문에 대해 내로

들이 공동체를 시작한

구이고, 건축가는 이 사

라하는 17명의 인문학

다. 소박하고 검약적인 생활을 구현하는 ‘뉴스

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

고수들이 답한다. 지난해 중앙일보에 실린 동

킷’이다. 이들은 근엄한 일상 대신 개를 키우며

는다. 그는 우리 사회에 소통의 부재가 있음을

명의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펴냈다. 국립생태원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애견 훈련법을 개발한

지적하고, 인문학의 가치를 공학적으로 계산해

장 최재천 교수, 세계 과학철학계의 석학 장하

다. 책은 그 과정에서 깨닫는 동물과 인간의 관

물리적 형태로 빚어내는 건축가가 이상형임을

석 교수, 이나미 융심리학자 등의 각 분야 대가

계에 대한 통찰을 담아낸다.

제시한다.

들이 인터뷰에 응했다.


GUIDE

금주의 문화행사 영화

전시

클래식

공연

루시

박선기 ‘Point of view - illusion’

드보르자크 ‘슬픔의 성모’

연극 ‘즐거운 복희’

감독: 뤽 베송

기간: 8월 28일~9월 27일

일시: 9월 1일 오후 8시

기간: 8월 26일~9월 21일

배우: 스칼렛 요한슨, 최민식, 모건 프리먼

장소: 서울 청와대로 갤러리 인

장소: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문의: 02-732-4677

문의: 02-587-9277

문의: 02-758-2150

루시(스칼렛 요한슨)는 어느 날 남자친

작가의 납작한 조각은 보는 위치에 따

서울 오라토리오 합창단이 드보르자크

극작가 이강백이 ‘제 2의 데뷔작’으로

구의 부탁으로 어떤 물건을 배달하다가

라 일그러지는 묘한 느낌을 준다. “진실

의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 슬

선언한 정치적 우화극. 호숫가 펜션마을

조직폭력 보스 미스터 장(최민식)에게

과 거짓, 실체와 허상과 같은 ‘애매모호

픔의 성모)’를 연주한다. 자녀들의 갑작

사람들이 장삿속을 차리려 만들어낸 이

납치된다. 몸 속에 강력한 합성약물을

함’에 대한 고찰”이다. 최수앙(조각), 김

스러운 죽음 후 작곡한 대규모 합창곡으

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현실의 인간

넣은 채 끌려가던 루시는 갑작스런 외부

나이(무용, 안무)작가와 협업한 퍼포먼

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는 성모를 그

에게 비극을 강요한다. 스토리텔링이 넘

의 충격으로 몸 속 약물이 체내에 퍼지

스(9월 2일 오후 4시, 6시30분)도 흥미

리고 있다. 지휘 최영철, 소프라노 신지

쳐나는 시대, 우리가 믿는 이야기들이 과

면서 초인적인 능력을 갖게 된다.

롭다.

화, 알토 문혜경, 테너 성영규 등 출연.

연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타짜-신의 손

MEXIMA

김소옥 바이올린 독주회

뮤지컬 ‘조로’

감독: 강형철

기간: 9월 5일~10월 31일

일시: 9월 3일 오후 8시

기간: 8월 27일~10월 26일

배우: 최승현, 신세경, 유해진, 곽도원

장소: 서울 종로구 평창동 키미아트

장소: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장소: 충무아트홀 대극장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문의: 02-394-6411

문의: 1544-5142

문의: 1577-3363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김소옥이 4

2011년 초연 당시 호평받았던 뮤지컬

‘타짜’(2006)에 이어 허영만 화백의 원작

‘KiMi For you’ 공모작가 4인전. 목적 없

만화 2부를 옮긴 속편. 삼촌 고니를 닮아

는 움직임에 천착하는 이성민, 인간의

년 만에 독주회를 연다. 15세에 런던 심

‘조로’가 올해 더뮤지컬어워즈를 수상한

빼어난 손재주와 승부욕을 지닌 대길(최

몸과 심리변화에 주목하는 임시호, 평

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데뷔한 연

왕용범 연출과 이성준 음악감독 콤비로

승현)은 타짜의 길로 들어선다. 한 순간

범하고 익숙한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

주자로, 고전부터 현대음악까지 폭넓게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새로 추가된 곡

에 모든 걸 잃은 대길은 미나(신세경)와

라보는 권선영, 개인적인 기억에서 끄집

다룬다. 이번 무대에서는 베토벤 소나타

들로 원작의 집시킹스 음악과는 또 다

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전설의 타짜 아

어낸 감정을 상상적 요소로 표현하는 이

8번, 브람스 소나타 2번 등에서 바이올

른 풍부한 뮤지컬 음악을 선보인다. 가수

귀(김윤석)와 목숨을 건 승부를 벌인다.

채원이 각자의 예술세계를 펼친다.

린 음악의 시대적 발전을 보여준다.

휘성이 뮤지컬 무대에 처음 도전한다.

THIS WEEK CHART 베스트셀러

자료=교보문고

순위 책명

영화 예매

자료=맥스무비

작가·출판사 순위 영화명

공연 예매

01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요나스 요나손 열린책들 01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김남길 손예진 유해진 01 뮤지컬 시카고 02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자료=인터파크

주연 순위 공연명

장하준 부키 02 명량

클래식 음반

자료=풍월당

출연 순위 음반명

음반사

최정원 아이비 이종혁 01 라자르 베르만

SONY CLASSICAL

최민식 류승룡 조진웅 02 뮤지컬 번개맨의 비밀3 ‘스페이스 번개맨’(전주) 02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

BIS

03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북폴리오 03 인투 더 스톰 리처드 아미티지 사라 웨인 콜리스 03 뮤지컬 번개맨의 비밀3 ‘스페이스 번개맨’(대구) 03 레오니드 코간: EMI 레코딩 전집 Warner 신준모 프롬북스 04 비긴 어게인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04 뮤지컬 레베카

04 어떤 하루

조조 모예스 살림 05 닌자 터틀

05 미 비포 유 06 칼의 노래(개정판) 07 불륜

김훈 문학동네 06 해무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07 안녕, 헤이즐

08 싸드

김윤석 박유천 한예리 06 연극 옥탑방고양이 쉐일린 우들리 안셀 엘고트 07 연극 데스트랩

김진명 새움 08 브릭 맨션: 통제불능 범죄구역

09 뉴스의 시대 알랭 드 보통 문학동네 09 더 기버: 기억전달자 10 나의 한국 현대사

오만석 엄기준 민영기 04 파이널 컷- 네 대의 기타로 연주한 Chandos

메간 폭스 윌리엄 피츠너 05 뮤지컬 번개맨의 비밀3 ‘스페이스 번개맨’(부산) 05 슈만: 교향곡 전곡 Berliner Philharmoniker

폴 워커 08 뮤지컬 조로

브렌튼 스웨이츠 09 뮤지컬 드라큘라

유시민 돌베개 10 비행기2: 소방구조대(애니메이션)

이대일 김선호 최수영 06 마르티누, 시벨리우스 & 무스토넨: 첼로  BIS 김도현 김재범 박호산 07 리히터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Melodiya

김우형 휘성 양요섭 08 카를로스 클라이버: 관현악 녹음 전집

DG

김준수 류정한 조정은 09 라벨 & 쇼스타코비치: 스메타나  Supraphon

10 뮤지컬 브로드웨이42번가

남경주 김영호 10 젤린카: 미사 보티바-룬, 바우어

Carus

SUNDAY MAGAZINE 31


soul-searching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66ㆍ끝>『안나 카레니나』와 레프 톨스토이

행복이란 순간순간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

What am I? Where am I? And why am I here?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는가?

톨스토이는 나이 쉰을 경계로 그 이전과 그

복을 발견한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실 여주인공 안나의

이후로 나뉜다. 쉰 살 이전의 톨스토이가 위

행복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은 『안나 카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연애소설이 아니

대한 작가라면 쉰 살 이후의 톨스토이는 위

레니나』 곳곳에서 드러난다. 내가 제일 좋

다. 안나는 제 7부에서 자살하지만 번역본으

대한 교사다. 부유한 백작 가문 출신으로 자

아하는, 레빈이 풀베기하는 장면을 보자. 레

로 100페이지가 넘는 제 8부가 이어진 다음

신보다 열여섯 살이나 어린 예쁜 신부를 얻어

빈은 ‘지주 나리’지만 농부들과 호흡을 맞춰

에야 소설은 끝난다. 잡지에 연재될 당시 삭

자기 소유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자

온몸에 땀을 적신다. 그는 심지어 풀을 베면

제됐다가 톨스토이가 책으로 내면서 다시 쓴

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며 살던 사람이 갑자

서 무아지경에 빠져들 정도다.

마지막 부분은 그래서 다소 지루하더라도 꼭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기 변했다. 죽을 때까지 인간의 운명과 인류

“그럴 때는 손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

의 고통을 생각하며 오직 양심에 따라서만

라 낫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

안나의 마지막 모습은 이렇다. 기차가 덮쳐

산 것이다.

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술에 걸리기라도 한

오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오싹한 공포를 느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와

아무리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지만 그에

것처럼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며 묻는다. “여긴 어디지? 난 뭘 하는 걸까? 무

더불어 러시아를 대표하

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슈테판 츠바

데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가

엇 때문에?” 그러고는 “하느님, 모든 것을 용

이크의 말처럼 “거대한 허무”를 본 것일까. 그

는 것이었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서해주십시오!”라고 중얼거리면서 생에 마

고, 젊은 시절 잠시 방탕

러니까 인간 내면의 저 어두운 밑바닥을 들

었다.”

침표를 찍는다. 그런데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는 대문호.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에서 자랐

여다보고 죽음을 의식하게 된 것일까. 그가

이처럼 행복이란 그저 순간순간 삶의 의미

수 있는 레빈 역시 똑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24세 때 『유년시절』을

우리 나이 오십에 완성한 『안나 카레니나

를 느끼는 것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

던진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발표해 주목받기 시작했

(Anna Karenina)』를 읽으면 그 즈음 그가

두가 행복하길 원하지만 행복은 인생의 목표

있는가? 무엇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는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작은 단서를 얻을 수 있다.

도 아니고 목적지도 될 수 없다. 돈도 명성도

레빈은 자살 충동까지 느끼지만 마침내 인

저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이다. “모든 행복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도 행복을

생이 무엇이고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는

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가져다 주지 못한다. 완벽을 바랄수록 오히려

다. 그에게 이것은 특별한 믿음 때문도 아니

그 불행한 모양이 저마다 다르다.” 소설은 안

만족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 경이로운 순간도 아니다. 갓 태어난 아이

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의 외도로 인해 엉망

대저택에서 마음껏 사치를 부리며 자신만

가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하고, 아내가 시아

이 된 집안 이야기로 시작된다. 불행한 가정이

을 사랑하는 젊은 애인과의 로맨스를 즐기

주버니를 배려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선

다. 그리고 오빠와 올케언니 돌리를 화해시키

는 안나, 그녀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사람들

(善)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

기 위해 안나가 도착한다. 성실한 남편과 사

의 따가운 시선이나 이혼 문제는 둘째치고 몸

나 카레니나』의 핵심은 안나가 아니라 레빈

랑스러운 아들, 매혹적인 외모까지 갖춘 안

이 불까봐 임신도 하지 못한다. 애인의 사랑

이 삶을 깨우쳐가는 과정이다.

나는 아주 행복하게 보인다.

이 식은 것 같아 밤에는 모르핀이 없으면 잠

톨스토이는 안나를 아주 냉정하게 죽였다.

을 이룰 수 없다. 반면 키티와 돌리는 안나에

그는 쉰 살 이전의 자기를 죽인 것이다. 그리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안나는 불륜을 저지

다. 『전쟁과 평화』 『참 회록』 등 평생 90권의 저작을 남겼다.

르고 괴로워하다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하지만 행복을 느낀다. 고 다시 태어났다. 레빈의 모습으로. 그리고

다. 안나를 사랑했던 매력적인 청년 장교 브

키티는 자기 젖이 띵띵 붓자 아기가 배고플 것

론스키도 죄책감에 시달리다 죽음을 향해

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마음씨 착한 남편

물론 현실은 소설처럼 쉽지 않았다. 모든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

전쟁터로 떠난다. 반면 바람둥이 남편으로

을 생각하며 아이에게 말한다. “그래, 아가야

재산을 내놓았지만 아내의 반대로 뜻을 이

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

인해 고민하던 돌리, 안나에게 사랑하는 연

너도 그저 아버지 같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루지 못했다. 직접 밭을 갈았지만 성과는 별

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

인을 빼앗겼던 키티, 브론스키로 인해 실연의

한다!” 세상에,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진짜 행

로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양심에 눈을 떴다. 그

아픔을 겪었던 레빈은 이따금 고만고만한 행

복한 것이다.

러면 된 것 아닌가?

32 SUNDAY MAGAZINE

그렇게 남은 생을 살았다.

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 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GALLERY GALLERY

김중만의 Oriental i(2013), Print on Korean paper. 226.3x161cm

오감으로 느끼는 근현대 미술 청담동에서 서울숲 갤러리아 포레 지하 2층으로 이전한 더 페이지 갤러리의 재개관전은 독특한 체험을 선사한다. 근 대 코너로 들어가면 추억의 골목이 펼쳐진다. 이상이 운영했던 제비다방, 이중섭의 1평짜리 제주집도 그 속에 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박수근이나 나혜석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배우들과 이야기도 나눠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백남준의 10m 짜리 대작 ‘M 200’의 위용을 보면서 현대 코너로 넘어오면 데미언 허스트의 ‘새로운 종교’ 시리즈와 피터 줌터 의 의자, 쉬빙의 재기발랄한 문자 작품, 김중만의 한지로 프린트한 사진 작품이 보는 이를 놀래킨다. 성인 1만원. 월요 일 휴관.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더 페이지 갤러리

 테블릿 PC 중앙 SUNDAY APP에서 더 많은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근·현대미술 체험전시 ‘No More Art’ 7월 3일~9월 28일 서울 왕십리로 85 더 페이지 갤러리, 문의 02-3447-0049

SUNDAY MAGAZINE 29 33


CONTE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끝>

떠날 때는 말 없이

쓰고 나면 항상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메일을 모아둔 것이다. 내가 그 메일들을 따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조금 늘었을지도 모 르겠네요. 처음엔 글자 수 900자로 출발했는

때 그 메일들이 다른 메일과 함께 삭제되지

데 지금은 1600자를 쓰고 있으니까요.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 메일들은 ‘마지막

칼럼을 쓰는 내내 막막했습니다. 제가 생

34 SUNDAY MAGAZINE

인사’니까.

각해낸 소재는 글로 옮기기엔 너무나 보잘것

나는 체조경기, 가령 뜀틀경기에서 도약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것을 글로 써도

한 선수가 멋지게 공중회전을 한 다음 약간

안녕. 6년 가량 이곳에 글을 썼지만 첫 문장

괜찮을까, 뭔가 메시지를 담아야 하지 않을

불안정하게 착지했을 때, 그 때 자세를 가다

을 이렇게 시작하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까, 지면이 아깝지 않을까 싶은 적이 한두 번

듬어 양다리를 모으고 양팔을 펼쳐서 취하

2009년 2월 5일 오후가 생각나네요. 평소와

이 아니었어요. 비관하고 낙담하면서 시간만

는 마무리 포즈를 좋아한다. 그 포즈에는 ‘착

다름없던 그날 오후가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보내다 마감에 쫓겨 가위 눌린 경우도 많았

지가 다소 불안했지만 여전히 멋진 선수라는

5시쯤 휴대전화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입

습니다. 이러다 결국엔 펑크를 내고 말겠다

사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선수의 마음

니다. 중앙SUNDAY S매거진에 짧은 글을

싶은 절망감에 이 시공간에서 사라지고 싶은

이 담긴 것 같아서다.”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는. 코너가 실릴 위치

충동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제 마음 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쓴 글

가 맨 끝이라 원래는 해외 유머 같은 걸 실을

이렇게 말하면 그동안 참 힘들었겠구나 생

에는 수준 미달인 글도 있었고, 새로움도, 재

까 했는데 전에 본 김 부장 글이 웃겼던 게 생

각하시겠지만,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니지만

미도, 메시지도, 감동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지

각나서 연락한다는.

즐거움도 많았습니다. 사실 기쁨이 더 컸어

못한 글도 많았겠지만 여전히 일요일 오전의

정형모 에디터의 제안을 받고 그날 저녁을

요. 수많은 독자들이 매주 일요일 아침 제 칼

다정한 웃음을 준 칼럼으로 기억해주길 바

어떻게 먹었는지 잠은 제대로 잤는지 모르겠

럼을 읽는다는 생각은 생각만으로도 기쁜 일

라는 마음입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정말 체

습니다만 다음날 원고를 보냈습니다. 2월 8일

이죠. 분에 넘치게 격려도 많이 받았습니다. 조선수의 마무리 포즈를 하고 있어요.

자에 실릴 첫 칼럼 원고를 말이죠.

한번은 어떤 여성이 팬이라며 사인을 청한 적

글은 꾸준히 많이 쓰면 는다고 말하잖아

들숨날숨

로 보관하는 이유는 가끔 메일함을 정리할

도 있었어요. 정말 한번이었지만.

요. 저는 2009년부터 만 5년 7개월 동안 거의

언젠가 이곳에 ‘마지막 인사’라는 제목의

매주 한 편씩 대략 270편의 글을 썼지만 보시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그 글의 일부는 이렇습

는 것처럼 조금도 늘지 않았습니다. 정상까지

니다.

밀고 올라간 바위가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보

“내 메일함에는 ‘마지막 인사’라는 폴더가

며 매번 산을 내려가는 시시포스처럼 한 편을

있다. 퇴사하는 동료들이 마지막으로 보내온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중앙 SUNDAY 독자들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안녕, 이라는 인사는 헤어질 때도 만날 때도 하는 참 재미있는 인사 같습니다. 안녕.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 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 『슈 슈』를 썼다.

시간 흐른다고 모든 슬픔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군대는 끝내거나 퇴각하지 않는단다. 우리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먼저 고

▶“슬퍼하는 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우

는 ‘통합’하고 ‘재편’하고 ‘작전 역수행’을 하

독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고독은 나에게 많

리는 정해진 일정에 맞춰 슬퍼하고 흐느끼는

지만 절대로 ‘끝내거나 퇴각하지’ 않는다. 작

은 신비를 체험하게 만들었다. 벤치에 홀로

게 아니다. 슬픔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전 역수행과 퇴각의 차이가 뭐냐고? 태도란

앉아 눈을 뜨면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상이

것도 아니다. 애완동물을 잃은 슬픈 감정은

다. 만약 타이타닉호에 육군 대대가 타고 있

보였지만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을 하면 까

서서히 줄어든다. 그 자리에 따뜻하고 즐거운

었다면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을 때도 나는

마득히 멀어져간 내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재

추억이 남아 마음속에서 점점 확장되어 나간

곧바로 뛰어들어 갑판 위 의자들을 재배열하

현되었고, 돌아가신 어머님과 아버님을 만날

다. (중략)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

라는 명령에 몰두했을 것이다. 배가 가라앉

수 있었으며, 먼발치의 예수님을 볼 수 있었

지만 단순히 시간이 흘러간다고 슬픔이 모두

는 마당에 내 태도는 실제로 보기 흉할수도

다. 평소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우리 편으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뭔가를 하는

하고, 이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구경

만들어야 한다. 시간에 맞서기보다는 그것이

게 더 좋다.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을 더

할 수 있었다. 종종 드넓은 우주가 눈앞에 펼

우리를 새로운 삶의 순환으로 이끄는 길에

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쳐지기도 했다.”

함께 발맞춰 나아가야 한다.”

-마크 웨버 『힘들 때 꺼내 보는 아버지의 편지』

-이백만 『두번째 방황이 가르쳐준 것들』

-개리 코왈스키 『굿바이, 프렌드』


photo ESSAY

조용철의 마음 풍경 <끝>

들꽃의 눈물 남녘에 비가 참 많이도 내렸습니다. 도시가 물에 잠기고 불행한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세월호를 집어삼킨 거센 바다의 악몽을 떨치기도 전에. 들꽃에 맺힌 빗물이 요즘 제겐 눈물로 보입니다. 못다 핀 꽃봉오리 같은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아서요.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슬픔뿐이라고 하더군요. 진정으로 같이 슬퍼하고 위로해도 모자랄 때입니다. 모든 생명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요. -강원도 태백

조용철의 포토에세이 ‘마음 풍경’은 세상의 모든 생명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경이로운 삶의 의지에서 내일의 꿈과 희망을 찾습니다.

SUNDAY MAGAZINE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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