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gazine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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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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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프로는 반짝인다 14년째 신고 있는 구두의 밑창을 갈러 회사 근처 구둣방에 갔습니다. 얼마 전 우연히 ‘발굴’한 곳인데, 삼십대 중반 의 총각이 아주 열심히 닦아주는 덕분 에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 가끔 가는 곳 입니다. 신발이 반짝거리면 기분도 환 해지더라고요.

08 ISSUE

14 ART

16 FOCUS

빈에서 만난 클림트, 쉴레 그리고 훈데르트바서의 예술세계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DDP ‘문화 샤넬전’

“밑창 무늬가 이렇게 가로로 돼있으면 금방 찢어지더라고요. 제가 써보니 다 이아몬드 형 무늬가 제일 튼튼해요.” 새 밑창을 구두 모양에 맞춰 정교하게 오리더니 안쪽에서 검은색 통을 꺼냅 니다. “이거는 제가 직접 만든 접착제 에요. 어디 제품이 잘 붙나 연구하다가 아예 제가 섞어서 만들었어요.” 그는 구두를 닦을 때 두 종류의 광목을 씁니다. 구두약이 약간 묻은 것으로 초 벌닦이를 하고, 새 걸로 광을 내며 마 무리를 합니다. “이게 한 마에 5000원 이에요. 그래도 가죽이 상하지 않게 하 려면 이런 걸 써줘야 해요.”

21 INSIGHT

22 STYLE

26 CARTOON

게다가 구두약은 꼭 맨손으로 바릅니

이어령과 떠나는 지식의 최전선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만화로 보는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걸작선

다. “이래야 약이 (구두에) 잘 먹어요. 이거 아주 좋은 가죽인데, 불광은 절대 내지 마세요. 가죽 상해요.”

06 THIS WEEK PEOPLE

28 TASTE

피아니스트 김선욱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20 GALLERY 전준호 ‘그의 거처’

24 SCENE ‘최정화-총천연색’전

25 COLUMN 컬처#: ‘다작 배우’ 유감

“젊은 양반이 아주 꼼꼼하시네”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도은 기자의 ‘거기’

시골서 농사짓다 왔어요. 이 일도 농

30 REVIEW & PREVIEW

사와 똑같더라고요. 해야할 일을 제때

뮤지컬 ‘더 데빌’

꼼꼼히 하지 않으면 추수를 제대로 할

32 BOOK

수 없어요.”

『페이퍼 엘레지』

경험한 것을 분석하고, 더 좋은 것을

34 ESSAY

찾아 연구하고,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35 PHOTO ESSAY 케이티 김의 남과 여

하려는 모습. 저는 진짜 프로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표지 빈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의 ‘IRINALAND OVER THE BALKANS’(1969), Mixed media, 사진 KunstHausWien, Museum Hundertwasser, Vienna 문화에디터 정형모 취재 기선민 이도은 유주현 사진 최정동 전호성 편집 임종일 디자인 전유진 통신원 최선희(파리) 김성희(밀라노) 광고 구명서 김진경 박본재 마케팅 박유선 최수인 이민주 이선우 기사제보 02-751-9000, 080-023-5002 광고문의 02-751-5555 / Fax 02-751-5806

1부 1000원 /월 5000원 정기구독문의고객센터 080-023-5005



THIS WEEK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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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미처 경험하지 못했었다. 독일 음악을 연주하는 한국인의 피아노 연주 에서 그보다 더 자연스럽고 깊은 울림을 느껴본 적이 없다. 피아니스트 김선 욱(26). 그의 연주는 엄정하고 깊은 정통 독일 피아니즘에 가까웠다. 특유의 스타일을 견지하면서도 고답적이지 않았다. 차라리 발전하며 진화하는 유기 체에 가까웠다. 클래식 음악의 근간으로 음악 팬들의 뇌리에 너무도 선명하게 박혀있는 독일 피아니즘의 흔들리지 않는 실체, 그 떡갈나무 같은 존재감. 김 선욱은 그렇게 우리 피아니스트의 자산이자 잠재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선욱이 올 가을, 4년 만에 전국 순회 리사이틀로 돌아온다. 9월 14일 울산 을 시작으로 16일 여수,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1일 부산, 23일 대구, 24일 용인에서 펼치는 그의 독주회는 유럽 클래식 음악계의 궤도에서 순항중 인 김선욱의 현재를 조망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오랜 시간 베토벤 소나타에 천착했던 김선욱은 이번 리사이틀에서 바흐 파 르티타 2번, 프랑크 ‘전주곡, 코랄과 푸가’, 슈만 아베크 변주곡과 슈만 소나타 1번을 연주한다. 2006년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 18세의 나이로 우승을 거머쥔 김선욱은 세 계로 날아올랐다. 2008년 아스코나스 홀트와 전속계약을 맺고 런던으로 이 주, 유럽의 중심에서 활약한 그는 본고장 청중들 앞에서 더욱 노련해졌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 김선욱의 베토벤 소나타 전곡 시리즈는 애호가들 이 손꼽아 기다렸던 주옥편이었다. 독일 피아니즘의 장대하고 확고한 세계를 우리 곁으로 연착륙시킨 기획 연주회였다. BBC 프롬스 데뷔와 진은숙 협주 곡 초연과 DG 레이블 녹음으로 이후 김선욱은 다니엘 하딩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하는 등 국내외에서 바쁜 일정을 이어나갔다. 그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바흐를 연주하고 있다. 2013년에는 파르티타 4년 만에 전국 투어 나선 피아니스트 김선욱

잘 볶은 커피처럼 향긋쌉싸래한 피아니즘의 세계

1번을 독주회의 첫 곡으로, 올해는 파르티타 2번을 독주회의 첫 레퍼토리로 넣고 있다. 김선욱은 바흐 파르티타를 “내 자신을 위한(private) 연주”라고 말 한다. 고전적이면서 종교적인 프랑크 ‘전주곡, 코랄과 푸가’는 그가 무척 좋아 하는 곡이다.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은 유년기에 감동받은 작품이다. 독일 작 곡가이기도 한 슈만의 소나타 1번을 마지막으로 배치했다. 김선욱이 런던에 정착한 지도 만 5년이 지났다. 학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모 든 곡들을 부딪쳐서 스스로 해석해야 하는 나날들이었다. 피아니스트를 “평 생 연구하고 성찰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설명하는 김선욱은 예전보다 단단해 지고 확신이 생겼음을 느낀다. 베토벤 전곡 연주 이후 도전할 전곡 연주의 대 상도 이미 정해 놓았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이다. 개인적으로는 베토 벤보다도 기대가 크다. 나이답지 않게 그의 존재감은 묵직하다. 2012년 결혼해 비교적 일찍 꾸린 가정은 든든한 베이스캠프다. 올 봄에 벌써 아빠가 된 김선욱은 단단한 바닥 에 발을 딛고 충전을 거듭하기 때문일까. 연주는 나날이 강해지면서도 자유로 워지고 있다. 달콤하지 않지만 진지한 감동이 있다. 커피향이 향기로울 초가 을, 김선욱을 만날 시간이다. 잘 볶은 커피맛처럼 쌉싸래한 그의 피아니즘을 만끽하며 한 단계 더 성숙한 자기 자신을 맞이해보는 건 어떨까. 글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kinsechs0625@gmail.com, 사진 중앙포토



ISSUE

빈에서 만난 클림트, 쉴레 그리고 훈데르트바서의 예술세계

음악의 도시에서 미술에 취하다 훈데르트바서의 건축스타일이 돋보이는 쿤스트하우스 빈 전경. 2~3층은 훈데르트바서의 상설전시관, 4~5층은 기획전시관으로 쓰인다. © 2014 Namida AG, Glarus, Switz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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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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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로 빈(Wien), 영어로는 비엔나(Vienna). 수백년간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도시가 옛 영화를 떠올리며 꿈틀대고 있다. 2015년 완공을 앞둔 빈 중앙기차역은 서유럽과 동유럽을 연결하는 허브로서 유럽 철도 네트워크의 새 중심임을 자임하고 나섰다. 고풍스럽고 야트막한 도시 한 켠에 최근 우뚝 솟은 오스트리아 최고층 다뉴브시티 타워(58층·설계 도미니크 페로)는 마치 승천하는 푸른 용을 떠올리게 한다. 뉴욕·제네바·나이로비와 함께 UN본부가 위치한 4대 도시 중 하나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석유수출국기구(OPEC)같은 국제기구의 포진은 이 도시가 국제정치·경제의 주무대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하지만 빈은 무엇보다 예술의 도시다. 베토벤이 산책하며 교향곡을 썼고, 모차르트가 결혼식을 올렸으며, 슈베르트가 태어나고 슈트라우스가 왈츠를 작곡한 음악의 도시. 박물관과 미술관은 또 어떤가. 세계 최고 수준의 중세·근대 미술품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사 박물관,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돼 근현대 미술 전시장로 쓰이는 벨베데레 궁전, 도자기 컬렉션으로 유명한 호프부르크 궁전,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클림트와 쉴레의 작품들로 유명한 레오폴트 미술관, ‘자연주의 사상’을 그림과 건축으로 표현한 훈데르트바서를 기리는 쿤스트하우스 빈, 알브레히트 뒤러의 ‘토끼’ 등 6만여 점을 소장한 알베르티나 미술관 등 대충 꼽아도 벌써 이 정도다. 제대로 보려면 정말 한도 끝도 없어 보인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간, 중앙SUNDAY는 클림트와 쉴레, 훈데르트바서를 만나러 갔다. 빈(오스트리아) 글·사진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빈 관광청·벨베데레 궁전·레오폴트 뮤지엄·쿤스트하우스 빈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 빈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건축가, 환경운동가. 본명 은 프리드리히 슈토바서. 자연과 평화에 대한 의지 를 담아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100개 의 강’이라는 뜻으로 직접 개명했다. 빈 시영아파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와 슈피텔라우의 쓰레기 소 각장 겸 열병합발전소, 독일 뮌헨 근처 아브젠베르 크에 있는 ‘쿠흘바우어 탑’ 등이 대표작이다. 훈데르트바서의 ‘IRINALAND OVER THE BALKANS’(1969), Mixed media, KunstHaus W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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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와 쉴레의 강렬한 외침을 듣다

“온갖 고루함에서 벗어나라.” 구스타프 클림트가 권위적이고 매너리즘에 빠 진 빈 미술가협회로부터 벗어나 1897년 이른바 ‘빈 분리파’를 이끌기 시작했 을 때 에곤 쉴레는 고작 일곱 살이었다. 하지만 쉴레 역시 빈 미술아카데미를 도중에 그만두며 클림트와 동반자적 관계를 구축했다(클림트는 자신의 모델 중 하나였던 발리 노이칠을 쉴레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시대의 제약을 뛰어 넘고픈 열망을 누드와 섹스를 통해 공유했다. 클림트는 장식적이고 몽환적인 화풍으로, 쉴레는 거친 생명력을 발산하는 강렬한 화풍으로. 레오폴트 뮤지엄은 유화 41점과 드로잉 188점 등 쉴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다. 1950년대 초 의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던 청년 루돌프 레오폴 트가 쉴레의 진가를 알아보며 컬렉션을 시작한 것이 토대가 됐다. 특히 건물 4 층에는 쉴레와 클림트, 독일어로 유겐트슈틸(Jugendstil)이라 불리는 아르 누보 스타일의 작품이 집중 전시돼 있다. 쉴레의 ‘발리 노이칠의 초상’(1912)은 인상적이었다. 쉴레의 뮤즈였던 그녀 의 눈이 어찌 그리 파랗게 빛나던지. 부인을 그린 ‘줄무늬 드레스의 에디트 쉴 레’(1915)는 상대적으로 조신해 보였다. 어쩌면 작품보다 더 감명을 준 것이 4층 구석방 ‘파노라마 창’이었다. 벽면 구스타프 클림트의 ‘Death and Life’(1910/15), Oil on canvas, Leopold Museum

하나가 거대한 캔버스처럼 유리로 뚫려 있었다. 약간 어둑한 공간에서 소파에 앉아 찬란히 빛나는 옆 건물 지붕과 조각상, 미술사 박물관 옥탑까지 ‘관람’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Kiss’(1908/1909), Oil on canvas, © Belvedere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빈 근처 바움가르텐 출생. 부친은 보헤미아 출신 의 귀금속 세공사,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 섬세 하면서 화려한 부르크 극장 장식작업으로 황제 로부터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다.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모티브로 그린 벽화 ‘베토벤 프 리즈’를 비롯해 빈 대학 천장에 그린 ‘철학’ ‘의 학’ ‘법학’ 시리즈, 몽환적 화풍의 ‘키스’ ‘물뱀 II’ ‘다나에’ ‘유디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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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레의 작품은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었다. 여성 모델의 앞태 와 뒷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찡그린 얼굴까지 포착한 ‘거울 앞에서 누드’ (1910) 드로잉은 쉴레의 데생 실력을 실감케 했다.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경치’라는 뜻의 벨베데레(Belvedere) 궁전은 정 원부터 근사했다. 바로 이곳에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1908~1909)가 있었다. 약간 어둑한 조명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감상에 몰입하고 있다. 여인은 과연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일까. 전시장에 딸린 팔각형 방에서는 앤디 워 홀의 54분짜리 흑백 필름 ‘키스’(1963~64)가 상영되며 사랑의 감미로움을 전 하고 있었다. 벨베데레 궁전에는 흥미로운 작품이 하나 더 있었는데, 자크 루이 다비드 의 ‘성 베르나르 협곡을 넘는 나폴레옹’(1801)이었다. 중학교 참고서 ‘완전정 복’에 나왔던 그림 덕분에 잠시 추억에 빠질 수 있었다. 1918년은 묘한 해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11월 11일) 이 해에 클림트(1월 11일)는 세상을 떠났다. 그와 함께 빈 분리파의 일원으로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 함께 외쳤던 건축가 오토 바그너(4월 11일), 그 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만 모저(10월 18일)도 차례로 이별을 고했 다. 쉴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려 타계한 부인의 뒤를 따랐다(10월 31일). 한 시대는 그렇게 저물었다.

삐뚤빼뚤, 울퉁불퉁  시선 꽉 잡는 훈데르트바서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아직 낯설다. 하지만 그 의 작품은 한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을 정도다. 각이 잡히고 획일화된 직선 구스타프 클림트의 ‘Judith ll(Salome)’(1909), Oil on canvas

은 그의 작품 속엔 없다. 대신 울퉁불퉁, 삐뚤빼뚤한 곡선과 나선이 시선을 붙 든다. 알록달록한 원색과 금은빛의 반짝거림까지 더해지면 더욱 그렇다. 1977년 오스트리아 정부와 빈 시가 그에게 의뢰해 10년 만에 완공했다는 시영 아파트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를 찾아가는 길. 이미 한 무리의 관광객들 로 거리가 시끄럽다. 다양한 색상과 모양의 타일로 만든 거리 분수를 누군가

‘Kiss’를 소장하고 있는 벨베데레 궁전.

가리켰다. “분수 주변은 왜 이렇게 튀어나왔을까. 마치 작은 언덕 같네.” 자연 의 일부로 살고자 했던 그의 철학은 길거리에 이미 반영돼 있었다. 건축가 요제프 크라비나와 페터 펠리칸이 가세했다는 건물은 외관부터 독 특했다. 일반 건물의 흔적이 살짝 남아있는 가운데 흰색·노란색·빨간색·파란 색을 번갈아 칠해 집들을 구분해 놓았다. 창문 크기는 제각각, 테라스 역시 불 규칙적으로 설치했다. 맨 윗층 집은 거리 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다. 옥상의 나무는 작은 숲을 이뤘고, 벽면을 가린 담쟁이들이 연륜을 말해주는 듯 했다. 내부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건너편 기념품 가게로 갔다. “그는 자 연채광을 좋아했어요. 건물 안에서는 식물과 함께하는 삶을 실천했죠. 재활 용품도 많이 이용했어요.” 자세히 보니 의자 다리가 죄 다르다. 쇠 용수철로 만 든 게 있는가 하면 파이프를 우그러뜨린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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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스트하우스 빈은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역시 한눈에 다른 건물과 구 별되는 외관이다. 2층과 3층은 훈데르트바서 상설전시관, 4층과 5층은 기획 전시관이다. 2층은 작가 약력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는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 정책의 피 해자다. 친척 69명이 떼죽음 당했고 그는 어머니와 게토로 강제 이주됐다. 이 때의 악몽 같은 체험이 그를 평화주의자로 만들었다. 전시장에는 자화상과 드로잉, 특히 나선형으로 화려한 물결을 연상시키는 작품이 차례로 진열돼 있다. 그에게 나선형은 생명과 죽음의 상징이다. 돌고도 는 자연의 순환에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외관 벽면 일부를 유리로 만들어 자연 채광이 되도록 한 점이 인상적이었 다. 곳곳에 배치한 화분도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바닥은 목재(좀 심하게 삐걱 댄다)와 돌조각으로 굴곡지게 처리해 언덕길을 걷는 느낌이 들게 했다. 3층에서는 건축물 미니어처들이 관람객을 맞았다. 가장 눈에 띈 것은 ‘In the Meadow’(1989). 약 가로 6m, 세로 2m 크기에 이상향을 압축해 놓았다. 집들은 산자락의 실루엣에 맞춰 튀지 않게 지어져 있고 지붕 위로는 초원이 이어져 소와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 그는 직선을 싫어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지론이었다. 물 흐르는 듯한 에곤 쉴레의 ‘Self-Portrait with Chinese Lantern Plant’(1912), Oil and opaque colour on wood, Leopold Museum

곡선이 그의 화두였다. 자를 휘어보이고 있는 초상 사진에서 그런 소신이 느껴 졌다. 곳곳에 붙어있던 그의 어록 가운데 하나는 이랬다.

에곤 쉴레(1890~1918) 빈 근처 툴른 출생. 16세 때 빈 미술학교에 입

“자연과 예술, 창조는 하나다. 오직 인간만이 그것을 분리하려 한다. 만약 우리가 자연 속에 있는 창조성을 부인하거나 우리 안의 창조성을 파괴한다면,

학했지만 보수적인 학풍에 환멸을 느끼고 3년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오직 자연만이 우리에게 창조를 가르쳐

여 만에 학교를 나온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관

줄 수 있으며, 인간은 할 수 없다.”

능에 대한 욕망이 뒤섞인 화풍을 통해 표현주 의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여인과 소녀를 모델로 한 누드화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자화 상’(1910), ‘추기경과 수녀’(1912), ‘죽음과 소녀’ (1915), ‘가족’(1918) 등이 있다. 에곤 쉴레의 ‘The Embrace, Lovers ll’(1917), Oil on canvas, © Belvedere, W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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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의 뮤즈였던 발리 노이칠의 초상화. 그녀는 클림트의 모델이었다. 에곤 쉴레의 ‘Portrait of Wally Neuzil’(1912), Oil and opaque colour on wood, Leopold Museum

레오폴트 뮤지엄 맨 윗층 구석방. 유리창 너머 풍경이 한 폭의 그림같다.

빈에 관한 몇 가지 새 소식

“마차로 모셔요” 쇤브룬 궁전에 황제 스위트룸

체인 호텔인 오스트리아 트렌드는 지난 6월

‘슈니첼’을 비롯해 ‘카페 센트럴’에서 맛보는 비엔나 스타일의 커피 ‘멜랑쥐’, ‘자허 호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인 쇤브룬 궁전

텔’ 카페의 초콜릿 케이크 ‘자허토르테’, 다뉴브 강가에서 즐기는 소시지 구이 등은 빈

동쪽 끝 맨 위층에 스위트룸을 새로 오픈했다

을 대표하는 먹거리들.

(사진). 2개의 침실과 2개의 욕실, 거실과 살롱,

택시를 제외한 대중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각종 할인혜택도 받을 수 있는

주방으로 구성돼 있다. 실내는 모두 장인의 수

‘비엔나 카드’는 72시간 이용권이 21.9유로(약 3만원)다. 평소엔 티켓을 체크하지 않지

공예품으로 꾸며졌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걸

만 불시단속에서 무임승차가 발

어 올라가야 하지만 짐은 모두 들어다 준다.

각되면 50배의 벌금을 문다고

창문을 열면 탁 트인 왕궁 정원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황제처럼, 공주처럼 대접받을

한다.

수 있다”는 것이 호텔 측 설명이다. 총 4개의 패키지가 있다. 공항부터 공항까지 24시간

대한항공이 10월 25일까지 주

리무진 서비스, 인근 호텔에 체크인 후 마차로 이동하는 서비스, 24시간 집사 서비스,

3회(수·금·일) 직항편(261석 규

게스트 요리사에 의한 만찬이 포함된 ‘황제 스위트 패키지’의 경우 하루 숙박 비용이

모·B777)을 띄우고 있다. 그 이후

4900유로(약 650만원)다. www.thesuite.at

로는 인천~빈~취리히~인천 노선

얇게 다진 소·돼지·닭고기에 빵가루를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

으로 병합운행(화·목·토)한다.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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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어쩐지 프랑스적

었다. 하지만 아버지 그림들의 존재는 항상 느끼고

하는 여인들’을 위해 금발의 모델을 찾고 계셨는

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있었다.”

데, 어머니가 ‘니스 회화 아카데미’에 신청해 데데

(Pierre-Auguste Renoir·1841~1919)와 장 르누

아버지의 그림이 장에게 실질적인 보탬이 된 것

를 발견하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르(Jean Renoir·1894~1979) 때문인지도 모른

은 나중의 일이다. 두 번째 작품 ‘나나’를 준비할

이 사연은 질 부르도스가 연출한 프랑스 영화

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오귀스트는 프랑스

때 그에게 100만 프랑이 필요했다. “나의 개인 재

‘르누아르’(2012)에 등장한다. 뼈가 굳는 병으로

인상주의를 이끈 화가, 아들 장은 프랑스 영화사

산은 주로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그림들로 이루어

거동이 불편해진 화가의 집에 데데가 찾아온다.

의 가장 앞자리에서 20세기 영화의 전반부를 이

졌기 때문에, 영화 만들기는 나의 분신과도 같은

르누아르는 그녀를 기꺼이 캔버스 앞에 세운다. 그

끈 상징적 인물이다.

유화들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으로 특징 지워졌다.

리고 얼마 뒤 전쟁에서 다리를 다쳐 제대한 장이

그것은 마치 아버지와 나 사이의 대화가 영원히

아버지의 작업 과정을 도우며 데데와 말을 나누기

단절되는 것과도 같았다.”

시작한다. 아버지의 뮤즈였던 데데는 자연스럽게

장은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영화』에서 장은 스스로가 “못 말리는 아이” 였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애정을 듬뿍 안겨 준 것

아들 영화의 여배우가 된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은 화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나의 머리카락을

아들 영화의 배우가 된 아버지의 뮤즈

이 오귀스트 르누아르도 아니고 장 르누아르도 아

즐겨 그리셨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나의 금발 곱슬

장이 물려받은 것은 제작비만은 아니었다. ‘나나’

닌 ‘르누아르’인 것은 한 여인을 통한 두 명의 르누

머리에 대한 아버지의 애착은 나를 절망에 빠뜨렸

는 아버지의 친구인 에밀 졸라의 원작을 각색한

아르 사이에 흐르는 예술 유전을 담았기 때문이다.

다. 많은 사람들은 여섯 살의 나를 (바지까지 입었

영화였다. 게다가 나나 역을 맡은 카트린 에슬링은

사랑에 빠진 장과 데데는 1919년 아버지 르누

는데도) 여자아이로 착각했다.”

원래 아버지의 모델로 잘 알려진 여인이었다. “내

아르가 타계하고 4년 뒤에 결혼을 한다. 그리고 두

장은 아버지의 그림을 달가워하지만은 않았다.

가 미래의 카트린 에슬링을 만난 것은, 니스 근처

사람은 숙명적으로 영화에 빠져든다. “내가 영화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우

에 있던 부모님의 소유지 레 콜레트에서 휴가를

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순전히 내 아내를 스타

리 아파트 벽에 걸려 있던 아버지의 그림들은 내

보내던 때였다. 당시 그녀의 이름은 ‘데데’였다. 데

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조그만 삶의 배경을 이루는 중요한 한 부분이었

데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 선사한

1924년 직접 만든 영화 ‘물의 소녀’부터 장은 카

다. (…) 나는 아버지의 그림들을 바라보는 일은 없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버지는 대형 그림인 ‘목욕

트린과 함께 무성영화 시대를 통과한다. 영화비평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1>

화폭에서 은막으로  한 여인에게 투영한 르누아르 부자 예술혼

영화감독이 된 아들 장 르누아르(사진 왼쪽)와 화가인 아버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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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앙드레 바쟁은 장의 초기 영화를 이렇게 설명

다. 자니 마레즈는 룰루라는 여인의 역할을 열연

머물던 말년의 아버지가 앵그르와 같은 과거의 예

한다. “장 르누아르의 무성영화는 사실상 여배우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 낸다(하지만

술 작품에 경도되었던 것처럼, 장 역시 인상주의

카트린 에슬링에 의해 지배된다. 그의 아내이자 총

촬영이 끝나고 2주 후 교통사고를 당하며 ‘암캐’

에 새로운 인장을 새기기 시작한 것이다. 마네의

애하는 배우였던 카트린에 대한 장의 찬사를 우리

는 유작이 돼버렸다. 이래저래 말이 많았던 ‘암캐’

회화 제목을 가져온 ‘풀밭 위의 점심’은 데데를 처

도 공유해야만 할까? 커다랗게 빛나는 눈 주위를

는 큰 성공을 거두며 세간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음으로 만났던 레 콜레트에서 촬영됐다. “내가 이

검게 칠한 인형 같은 도발적인 얼굴과, 인상주의

영화를 찍으며 누렸던 큰 기쁨은, 아버지께서 자

그림에 나올 법한 불완전하면서도 기이하게 분절

아버지의 터치를 카메라에 담아낸 아들

주 그림을 그리셨던 올리브 나무들을 필름에 담았

된 신체를 가진 이 경이로운 여인에게는 과연 기계

하지만 이 영화의 성공은 아내를 향한 배신처럼

다는 것이다.”

적인 것과 생생한 것, 동화 같은 것과 관능적인 것

여겨졌고, 카트린은 결국 장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런 고백이야말로 르누아르 집안이 프랑스 예

이 여성스러움의 구현 속에서 당혹스러우리만큼

영화의 성공이 초래한 결과는 이혼만이 아니었다.

술을 대변할 수 있는 큰 이유가 된다. ‘풀밭 위의

뒤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르누아르

이 시기부터 장은 초기 영화에 드리워진 인상주의

점심’은 여인들의 발그레한 뺨을 칠했던 아버지의

는 그녀를 감독으로서보다는 화가로서 바라본 것

이미지와는 다른 사실주의에 집중하면서 ‘게임의

터치처럼, 따사로운 카메라의 눈길 아래 관능을

이다.”

규칙’ ‘위대한 환상’ 같은 걸작을 만들어 낸다. 40

향한 긍정성을 선사한다. 그것은 떼어낼 수 없는

맞는 말이다. 장이 한 예술가로 성장하게 된 것

년대에는 할리우드로 건너가 몇 편의 범작을 만들

예술의 유전이자 자연의 예찬론이었다. 캔버스 위

은 그를 지배하던 아버지의 유산과 거리를 두면서

며 방황하지만 인도의 지원 아래 촬영한 ‘강’은 장

의 인상주의는 화가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지만,

다. 장은 31년 ‘암캐’라는 영화를 준비하는데, 제

르누아르의 새로운 걸작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한

인상주의의 아들이자 프랑스 영화의 중심이었던

작자들의 요청과 시험을 통과한 그에게 뜻하지 않

곳에 머무르는 감독은 아니었다.

장을 통해 또다시 피어난 것이다.

은 상황이 벌어졌다. 여주인공 역할에 응당 카트린

50년대 초반 프랑스로 돌아온 장은 새로운 행

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작자들은 “여배우 자니

보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영화 ‘프렌치 캉캉’이나

마레즈가 빌랑쿠르 스튜디오에 전속되어 있다”는

‘풀밭 위의 점심’은 인상파 화가들이 파리를 누비

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이유로 여주인공에 대한 선택권을 그녀에게 주었

던 시절의 도시와 시골을 담고 있다. 남프랑스에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

그림 '목욕하는 여인들'(1918~1919)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자신의 뮤즈 '데데'를 모델로 그린 유작이다. 데데는 이후 아들 르누아르와 결혼하게 된다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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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까지 열리는 DDP ‘문화 샤넬전’

샤넬의 영감, 그 흔적을 따라

인생 여정-.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1883~1971)의 삶은 기나긴 여행이었다. 어디론가 떠났다 머물렀고, 익숙해질 때 쯤 다시 짐을 꾸렸다. 여정은 프랑스 소뮈르에서부터 오바진·물랭·도빌을 거쳐 베니스·할리우드·뉴욕·파리로 이어졌다. 매번 다른 그곳에서 그는 영원히 기억될 패션 아이콘을 하나 둘 탄생시켰다. 8월 3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문화 샤넬전-장소의 정신’은 전설적 디자이너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전시다. 머물렀던 장소 중 의미있는 10곳을 골라 ‘공간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이를 위해 각 장소에 걸맞는 회화·조각·사진·동영상·책·소품 등 500여 점이 동원됐다. ‘문화 샤넬전’은 샤넬을 다양한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전시 프로젝트다. 2007년 이래 모스크바·베이징·상하이·파리를 거쳐 올해 서울에 왔다. 샤넬의 인생은 여든 여덟으로 막을 내렸지만 자유와 다름에 천착했던 그의 이야기는 또다른 방식으로 여행 길에 올라 있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샤넬

파리 캉봉가 31번지 샤넬의 아파트 거실에 있는 초상 사진(1957) ⓒ Mike de Dulmen/All rights reserved

고아처럼 자랐던 수녀원이 스타일의 원천

꼼꼼히 보려면 두 시간도 모자라겠지만 처음과 두 번째 코너가 가장 눈여

DDP의 M3와 A1 행사장에 들어서는 순간, 일단 분위기에 압도된다. 널찍한

겨 볼 만하다. ‘유년기의 인상’은 그가 태어난 소뮈르가 배경이다. 당시 농촌은

공간에 아무 장식 없이 검정색 단상으로 구분된 10개의 코너. 그곳엔 환하진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점차 몰락해 가고 있었다. 샤넬 역시 농민 출신 부모를

않지만 따뜻하게 느껴지는 황금빛 조명 뿐이다. 샤넬 하면 떠오르는 절제된

뒀다. 이런 연유로 그는 땅에 대해, 밀이삭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그의

우아함을 그대로 차용하는 듯하다.

파리 캄봉가 31번지 아파트에 놓였던 다양한 밀이삭 장식품, 살바도르 달리가

각기 다른 장소를 구분짓는 상징은 딱히 없다. 도슨트 프로그램도 따로 없

1947년 선물했다는 밀이삭 그림이 이를 증명한다. 금빛 밀이삭 자수가 들어간

기 때문에(휴대전화 QR코드 오디오 해설은 가능) 전시를 즐기려면 그의 삶

블랙 드레스(1960년 S/S 오트 쿠튀르)까지 보고 나면 그의 영감이 패션으로

에 대해 간단히 알고 가는 게 좋다. 열두 살 때부터 수녀원에서 성장한 뒤 카페

어떻게 가시화됐는지 확실히 감잡을 수 있다.

의 무명 가수가 되고, 모자 디자이너를 거쳐 당대 여성들의 스타일을 바꿔 놓

두 번째 코너인 ‘오바진의 규율’ 역시 전시 의도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오바

는 전설이 되기까지의 일련의 스토리 말이다. 그를 늘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던

진은 샤넬이 자란 수녀원이 있던 지역. 전시품을 보면 그곳의 거의 모든 것이

유럽 귀족·부호 남성들과의 스캔들까지 알아두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녀원 작업복을 본뜬 하얀 칼라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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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를 블랙으로 통일시키고 부분 조명으로 음영을 강조한 전시장 내부. 관람객 시선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투명 진열장으로 전체를 꾸몄다. 샤넬 제공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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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블랙 드레스, 묵주에서 영감을 얻은 진주 목걸이, 십자가 모양 펜던트 등은 밀밭을 배경으로 샤넬 수영복을 입은 베하티 프린슬루(2007)

샤넬의 절제된 취향이 그 당시 형성됐음을 일러 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수녀원 기도실에 있었다는 12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일

ⓒ Camilla Åkrans

부다. C자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가 겹쳐져 있는 이 작품은 샤넬의 더블C 로고

Elite Paris/Elite Paris

가 어디서 탄생했는지를 단박에 알려준다.

오바진 수도원 바닥의 별 문양 디테일화(2014) ⓒ François Boisrond

권태가 마음에 똬리 틀 때 항상 길 떠난 샤넬

샤넬이 어떻게 밀리터리 재킷을 디자인하게 됐는가는 세 번째 코너에서 알 수 있다. 샤넬이 수녀원을 나와 독립했던 물랭은 바로 군대가 주둔하며 축제와 파티로 흥청대던 소도시였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인연은 다음 코너로 이어진 다. 물랭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만난 마주(馬主) 에티엔 발장을 따라 샤넬 은 르와알리유 성에서 살게 되고, 이후 말의 안장에서 영감을 받아 특유의 퀼 트 핸드백 무늬를 디자인하게 된다. 이 시기 남성 승마복을 입고 찍은 샤넬의

샤넬 오트 쿠튀르 투피스를 입은 도로테아 맥고완(1960) ⓒWilliam Klein/Courtesy Polka Galerie/All rights reserved

사진 한 장은 여성이 바지를 입게 되는 ‘패션 혁명’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본격적인 디자이너로서의 활동은 다섯 번째 코너(‘파리에서의 독립’)에서 부터 나타난다. 영국 신사 보이 카펠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모자 공방을 열게 된 샤넬은 당시 유행과 다른 극도의 단순한 디자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다 양한 모자 스케치 중 놓치지 말아야 할 사진 한 장이 있다. 거리의 여성들을 찍은 모습인데, 샤넬 스타일의 옷을 입고 샤넬을 그린 삽화집을 거리에서 보 고 있는 이들을 통해 샤넬이 또래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도빌의 장신구 가게(1913) ⓒ Bibliothèque des Arts Décoratifs/ photo Suzanne Nagy

샤넬은 영감의 자양분을 해외로까지 넓혀간다. 보이 카펠의 사망 뒤에 찾 아간 베니스(여섯 번째 코너)에서 그는 도시의 상징인 사자 조각상(샤넬의 별 자리이기도 하다)은 물론, 비잔틴 시대 전통 장식들을 향후 주얼리 컬렉션과 단추 문양에 그대로 차용한다. 1차 세계대전 중 사교계 인사들이 피서차 모인 비아리츠(일곱 번째 코너)에 서는 러시아 황제파 귀족사회와 인연을 맺고, 여기서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를 소개받는다. 향수 ‘넘버5’를 만든 인물이다. 연인이었던 영국 최고의 부호 웨

베니스 산 마르코의 사자상(14-15세기) ⓒ2014 Fondazione Musei Civici di Venezia/ photo Archives

스트민스터 공작을 따라 도버 해협을 건넌 뒤에는 그의 옷을 트위드 재킷이 나 캐시미어 카디건 등의 여성복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여덟 번째 코너). 각 코너마다 스토리에 딱 맞는 전시품과 회화·의상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대 미술과의 교류와 상업적 성공에 터전이 됐던 뉴욕(아홉 번째 코너)을 거쳐 전시의 마무리는 샤넬의 모든 것이 집약된 파리 캄봉가 31번지 그녀의 아 파트다. 부제 역시 ‘샤넬 정신’이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수많은 오브제로 장 식했고, 한 편의 연극 무대처럼 꾸며 놨다. 사자상과 성모상, 십자가 외에도 거 울로 만든 계단은 익히 화제가 됐던 사실. 전시에서는 이를 사진으로 감상할

웨스트민스터 공작 2세

수 있다.

초상 사진(1903) ⓒ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방대한 규모의 전시를 보고 나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있다. 누구보다 드 라마틱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샤넬. 그럼에도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냐는 거다. “나는 항상 길을 떠났다. 권태가 마 음속 깊이 똬리를 트는 게 느껴질 때면, 나는 떠났다.” 회고록 한 권 남기지 않 은 그이지만 생전의 한 마디가 답을 대신하는 듯싶다. ▶문화 샤넬전: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www.thereservation.kr에서 빠른 입장 예약 가능. 무료.


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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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샤넬전’ 큐레이터 장-루이 프로망

이번 전시 역시 큐레이터 장-루이 프로망(Jean-Louis Froment사진)

미래 향한 에너지가 샤넬의 정신

이 기획을 맡았다. 모스크바의 푸쉬킨 미술관(2007), 상하이 현대 미술 관(2011)과 베이징 국립 예술 미술관(2011), 그리고 지난해 광저우 오페 라하우스와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행사를 치른 그는 “내로라하는 많은 명소에서 제안이 있었지만 서울의 DDP를 주저 없이 택했다”고 밝혔다. 8월 28일 전시 오픈을 앞두고 서울에 온 그를 중앙SUNDAY 가 만나 좀더 얘기를 들어봤다.

문화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그가 당대 유명 작가나 예술가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문 화란 이전에 없었던 것, 존재하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거라 생각한다. 그 런 점에서 샤넬 앞에 이 말을 썼다. 샤넬은 꼭 죄는 코르셋으로부터 여 성을 해방시켰고, 숄더백을 만들어 두 손을 자유롭게 해줬다. 여성의 행 동 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 온 패션의 창조 자체가 문화라고 여겼다.” 전시가 연대기가 아닌 컨셉트로 진행되는데.

“우리 인생이 연대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이라는 건 오히 려 순서와는 무관해 보인다. 서로 다른 공간과 시대에 있지만 어떠한 사 고가 끊임없이 겹치고 이어지고 접하며 하나의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나. 이 전시는 그걸 보여주고 싶었다. 연대기적 시간이 아닌 ‘창조의 시간’을 따르려 했다.” 서울에서 전시를 여는 취지는.

“이미 샤넬의 인지도가 높은 서울에서는 샤넬의 창조력을 말하고 싶었 다. 샤넬이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제작됐는지 보여주자는 거다. 물론 칼 라거펠트(현 수석 디자이너)가 이를 잘 재해석하고 있지만, 디자이너의 삶과 만남과 풍경과 그가 읽은 책들을 통해 ‘샤넬은 바로 이런 것’임을 보여준다. 나는 그 여정에서 안내자 역할을 자처했다.” 전시의 키워드를 꼽자면.

“미래라는 말을 쓰고 싶다. 샤넬의 창조성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간다는 의지에서 나왔다. 그리고 DDP라는 미래적 공간이 이를 잘 드러낸다.” 그것을 ‘서울의 정신’에 대한 답으로 여겨도 되나.

“그렇다.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정신이다. 한국에 오면 미래에 대한 강 력한 의지를 느낀다. 사람들이나 길거리에서 힘찬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 정신을 다른 어느 도시보다 높이 평가했다.” 문화 샤넬전을 맡기 전과 후의 달라진 관점은.

“샤넬의 일생을 연구하면 할수록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이 어우러져 서 내면의 세계를 발견한다. 여사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생각을 볼뿐 아 니라 그 시대에 대한 재발견을 하게 된다. 솔직히 문화 샤넬전을 시작할 땐 제품에 비중을 두었지만 이제는 창조성에 초점을 둔다. 내게는 또 하 나의 여정이다.” 앞으로 더 할 수 있는 주제는.

“샤넬의 역사는 하나의 악보와 같다. 악보를 바탕으로 여러 템포로 다 양한 음악을 만든다. 이번 전시에서도 어떤 템포를 가지고 연주를 하고 있다. 차기 전시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글 이도은 기자,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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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나 거울속 나

‘마지막 장인’(2012~14), Sophora japonica wood, mirror installation, a novel, 31(H) x 70(W) x 116(L)cm , 35(H) x 480 x 415.6cm(좌대)

작가 전준호(45)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자신만의 기법으로 독해해 왔다. 2012년 문경원 작가와 공동작업으로 카셀 도큐멘타에 참가했으며 그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여하는 ‘올해의 작가상’을 받았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된 그가 국내에서 6년 만에 개인전을 한다. 전시장 1층에 설치된 ‘마지막 장인’은 거울 위에 엎드려 기도하는 목조 해골상과 작가가 직접 쓴 소설로 구성돼 있다. 소설에는 해골을 깎는 장인과 아이디어를 내는 현대미술가가 등장하는데, 이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새로운 마리아주라 부를 만 하다.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갤러리현대

전준호 ‘그의 거처’ 8월 29일~9월 28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 신관, 문의 02-2287-3500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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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지식의 최전선 <1> 프롤로그

그의 책상 위엔 촉각 곤두세운 일곱 ‘고양이’가 있다

지난해 팔순잔치를 치른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 장관)는 여전히 바쁘다. 그

이 교수는 수잔 블랙모어 교수의 최신 미메틱스 인터넷 강연이 크라우드

는 오늘도 지(知)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야전(野戰)사령관이다. “선생님

컴퓨팅으로 정리되어 한 편의 논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

의 서재엔 어떤 신무기가 있나요?” 매번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에 감탄을

의 컴퓨터에는 마인드젯 말고도 ‘더브레인’, 국내 앱으로 ‘씽크와이즈’도 있

하면서 비결을 물었더니 “고양이 일곱 마리”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었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 그리고 그 발톱으로 화면의 자료를 긁어 재빨리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을 찾았다. 서재로 들어갔더니 3m가 넘는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가 무려 여섯 대나 보였다. “고양이는요?” “저게 바로 내 고양이들이지.”

DB를 구축해 가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컴퓨터를 고양이라고 부른 것이 실 감이 났다. 이렇게 자료로 모은 파일은 아래아한글로 변환시켜 드롭박스로 보내 저

컴퓨터를 사과(apple)라고 부르는 것은 보았어도 고양이라고 하는 것

장한다. 그러면 일곱 대 아니 수십 대의 다른 컴퓨터에서 바로 불러내 원고

은 처음 본다. “컴퓨터로 하는 설계를 캐드(CAD)라고 하잖아. Computer

쓰기가 가능해진다. 해외 여행을 하는 경우도 서재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과

Aided Design. 이건 내 사고(思考)를 도와주니 ‘Computer Aided

다를 것이 없다.

Thinking’, 줄이면 캣(CAT)이지 뭐. 아무리 슈퍼 컴퓨터라고 해도 사람의 생각을 대신해 줄 수는 없어요. 사고의 주체는 인간이고 컴퓨터는 그 사고를 도와줄 뿐 대신해 줄 수는 없지. 그런데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고의 해결사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고양이가 여섯인데요?” “그래, 작은 고양이는 내 안방 침대 곁에 있지.” 그는 노트북을 작은 고양이라고 불렀다. 아마 잠자리에서도 노트북으 로, 전자책으로, 메일도 보내고 메모도 하는 것 같았다.

‘새끼 고양이’들은 무릎에도 올라와 있다. 책상 맞은편 안락 의자 옆에는 아이패드, 갤럭시 노트, 킨들 같은 모바일 기기들이 나란히 꽂혀있었다. 그가 자주 찾는 사이트는 ‘와이어드’ 전자판(www.wired.com). 일주일 에 적어도 한 번은 꼭 들어가 본다고 했다. “논문이나 책이 되기 이전에 지식 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취재한 기사들이지. 이미 나온 책을 보고 생 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같이 생각해가는 시대거든.” 디지로그나 생명자본주의와 같은 말은 인터넷을 검색해도 안 나오던데

‘고양이’가 일곱 마리나 필요한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컴퓨터 전원

그게 바로 이 같은 글로벌 지식의 싱크로나이즈에서 나온 것일까. 그는 이렇

을 차례로 켰다. “자, 이 컴퓨터에서는 인터넷을 열어놓고 TED 동영상을 들

게 말했다. “자본주의의 배와 함께 침몰할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지금 뗏

으며 중요한 내용은 마인드젯(mindjet)의 앱으로 정리를 합니다. 다른 컴퓨

목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이렇게 지식의 최전선이 형성됐는데, 정작 지식인

터에는 에버노트(evernote)의 DB를 검색하면서 중요 자료를 긁어 마인드

들이 후방에만 앉아 있으면 되겠어요?”

젯의 메모 노트에 갖다 붙이고.”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STYLE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1>

좋음이란 감동과 재미 그리고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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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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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파리와 비엔나를 거쳐 런던까지 이어진 꽤

로 불과 물로 비유될 둘의 성격은 불화하지 않았

바랐다. 살아온 시간과 보잘것없는 흔적이 세상

긴 여행을 다녀왔다. 팔자 좋은 아저씨의 한가한 유

다. 불을 꺼트리는 건 물 아니던가. 성질 급한 사람

에 유용하게 쓰이는 영광스런 명예를 갖고 싶다.

람이 아니다. 친구인 문화심리학자 김정운과 단둘

이 먼저 앞장서기 마련이다. 어지간해서 꼼짝하지

별 볼일 없는 삶을 펼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바

이 벌이는 뒤늦은 공부 때문이다. 2년 후쯤에나 펴

않는 나를 보다 못해 주방정리일이며 청소를 도맡

로‘좋음’을 저버리고 살았기 때문이다. 일상이 재

낼 책을 위한 탐사와 취재 일정은 벅찼다. 현대문명

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일은 적당히 폼 잡으며

미없고 감동 느낄 일이 없으면, 남긴 업적이 쓸모

의 출발을 연 유럽의 힘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두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면 그만이다.

없는 내용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나이 먹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루 종일 도시의 곳곳을

김정운은 연신 궁시렁 거렸다. 난 눈 하나 까닥

수록 잘 살아야 한다. 자칫 추한 모습으로 비쳐질

누볐다. 멀쩡한 차가 있었지만 타지 않았다. 걸음만

하지 않았다. 갑자기 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

개연성 때문이다. 좋음의 상태를 공감한다면 셋

큼의 속도로 보고 이해될 만큼의 양만 기억하기로

젠 나보다 행동 빠른 ‘얼리 어답터’의 물건 때문이

중의 하나라도 제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

했다. 그동안 서너 번 정도 들렀음직한 각 도시는

다. BOSS사의 블루투스 스피커다. 우습게 보이

다. 어렵지 않다. 세 개의 요소는 밀접하게 연결되

처음 와본 것 같은 신선함으로 넘쳤다.

는 필통 크기의 바는 어떤 스마트 기기라도 모두

어 있는 덕분이다. 재미있게 살다 보면 누구에게

우린 긴장과 각오로 돌진하는 비즈니스맨이 아

대응한다. 자그마한 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부

라도 감동을 줄 일이 생긴다. 감동이 쌓이면 저절

니다. 가만히 있으면 직원들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

한 음량에 놀랐다. 눈이 귀를 믿지 못하는 경우가

로 쓸모를 만들어가게 된다. 다행히 사람들은 좋

는 여행객도 아니다. 편한 호텔 대신 시내의 아파트

벌어졌다. 아저씨들 사이로 끼어든 음악은 삭막한

은 것을 귀신처럼 찾아내고 즐긴다. 아무리 복잡

를 단기 임대해 숙소를 삼았고 주민처럼 지냈다. 아

분위기를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7080세대의 익

해도 눈에 뜨이는 재주는 차라리 본능이다.

침엔 동네 사람들이 가는 빵집에서 갓 구운 빵을

숙한 노래들이 이어졌다. 현경과 영애의 ‘그리워

샀다. 앞집과 건너편 빵집의 빵 맛이 달랐다. 우리

라’, 양병집의 ‘타복네’를 들었다. 낯선 동네, 낯선

좋은 물건은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매개물

가 매일 먹는 밥맛의 차이를 구분하듯. 맛있는 빵

시간에 뜬금없는 추억을 들추어낸 음악소리에 두

7년 전 중앙SUNDAY 창간과 함께 ‘윤광준의 생

집 앞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이 몰리

아저씨는 동시에 울컥했다. 스피커 하나로 연결된

활명품’ 연재를 한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또 한

는 덴 이유가 있다. 똑같은 바게트 빵이라도 차진

감동은 작지 않았다.

번의 기회를 통해‘좋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물건

정도와 노릇함이 달랐고 부드러운 식감이 입맛을

산다는 것은 이토록 번거로운 일과 소소한 물

에 얽힌 ‘좋음’의 상태를 공유하고 싶은 속내다.

당겼다. 감탄은 당연하다. 더 맛있는 바게트를 찾아

건을 끌어안는 일이다. 대의와 멋진 구호도 일상

앞만 보고 살았던 남자들이 주 독자층이 될 것이

파리의 골목을 뒤지는 재미는 각별했다.

의 구질구질함을 뛰어넘어야 가능해진다. 일상

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답답함을 부

우중충한 아저씨 둘이 살림을 해야 했다. 살림은

을 잘 살아야 행복의 에너지가 채워진다. 삶이 대

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열심히 살았던 시간만큼

예쁜 여자와 함께 차리는 것이다. 결정은 되돌리지

단하다면 하루하루의 충족으로 쌓여진 자신감의

지금부터 즐기면 되는 까닭이다. 날 때의 순서는

못한다. 아침상을 차려야 한다. 바게트를 먹기 좋게

실천일 것이다. 돌이켜보니 살아온 이력은 좋은

갈 때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바로 지금, 그 자리에

자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느 나이프를 쓰면 빵이

것을 탐했던 과정이었다. 좋은 것을 알기 위해 온

서 벌이는 자신만의 축제가 소중하다. 아무도 자

뭉개지므로 톱날 달린 것이 필요하다. 버터와 치즈

갖 허튼 짓도 해 보았다. 가져보고 버렸으며 아직

신의 삶을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

를 바르는 나이프는 손잡이보다 칼날이 밑으로 처

도 찾고 있는 중이다.

좋은 물건은 일상의 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어주

져야 쓰기 편하다. 살라미를 자르기 위해선 예리한

좋은 것은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며 삶을 관

는 매개물이다. 화려한 명품과 값비싼 물건이 관

나이프가 제격이다. 빵 한쪽 먹기 위해 이렇게 많은

통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좋은 것의 상태를 정확

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를 갖지 못한다고 해서 주

나이프가 필요한지 제대로 실감했다. 세상에 쓸모

하게 알아야 혼선이 없다. 좋음(GOODS)이란 재

눅 들 이유도 없다. 소중한 것은 스쳐가는 욕망이

없는 물건이란 없는 법이다. 현재를 살기 위해선 필

미, 감동, 쓸모다. 이렇게 명쾌한 정리를 해준 사람

아니다. 제 곁에 오랫동안 남겨질 의미의 양이 우

요에 의해 만들어진 물건의 다양성을 숙명처럼 여

은 2400여 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

선이다. 좋은 것은 흔들리지 않는다. 과정을 겪고

겨야 옳다.

토텔레스다. 좋은 것을 밝히고 살았지만 ‘좋음’의

남은 정신의 잔재들이기 때문이다.

근본을 이보다 정확하게 꿰뚫을 재주가 없다. ‘좋 소소한 물건, 번거로움 끌어안는 게 삶

음’의 추구는 목표로 삼을 만하다. 그동안 “오늘

깔끔하고 까칠하기로 소문난 김정운이다. 난 지저

이 재미없으면 무효”란 말을 떠벌이고 살았다. 사

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

분하지만 까다롭지 않은 마초 스타일이다. 예상대

람들에게 한 말과 펴낸 책이 감동으로 전달되길

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


SCENE

문화역서울 284 ‘최정화-총천연색’전

예술이 별건가 소쿠리든 밥상이든 느낌이 중요하지

‘꽃의 속도-폐허’

24

옛 서울역사 앞에 구경거리가 생겼다. 촌스럽다 싶

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을 정도로 선명한 싸구려 총천연색 플라스틱 소쿠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이맘때의 서울역 광장은

리를 층층이, 겹겹이 쌓아 만든 7m 높이의 탑들이

반가운 이를 보내고 맞이하는 훈훈한 풍경을 목

다. 밤이 되면 불이 켜져 훤히 빛나니 당최 눈에 띄

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과는 딴판이다. 광장

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구는 부처님 오신 날 연등

에선 ‘불신지옥’ 플래카드를 앞세운 종교단체 집

을 떠올리기도 하고 누구는 아기 돌잔치에 올라

회가, 한쪽에선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의 시

온 모조 떡을 연상하기도 한다. 무엇을 생각하든

위가 벌어지기 일쑤다. 이유야 제각기 있겠지만 확

자유다. 작가에 따르면 “당신의 마음이 곧 나의 예

성기를 앞세운 공해 수준의 소음, 일방통행식 의사

술(Your heart is my art)”이기 때문이다. 현란한

전달 방식 탓에 오가는 이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

색감과 분방한 예술관에서 전방위 아티스트 최정

애물단지가 돼버린 서울역 광장이 어떻게 하면

화(53)의 이름을 떠올렸다면 전시장 발품깨나 팔

달라질 수 있을까. 최 작가의 설명은 쉽고 명쾌하

아본 사람이다.

면서도 엉뚱하다.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

옛 서울역사를 개조한 문화공간 ‘문화역서울

는 작품으로 공간을 채워보자는 생각이었다. (내

284’에서 10월 19일까지 열리는 ‘최정화-총천연

가 해보니까 작품은) 사진발, 조명발, 화장발 좋은

색’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작가인 최정화

게 최고더라.” 농담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꽃’

라는 이름을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가벼운 마음

을 주제로 밥상·소파·의자 등 온갖 ‘잡동사니’를

으로 놀러가도 볼 거리는 적지 않다. 문화체육관

모아놓은 전시장은 그 자체로 보는 재미가 쏠쏠하

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이 주관

다. 1층에 전시된 ‘꽃의 속도-폐허’는 자칫하면 공

하는 이 전시는 제목 그대로 총천연색으로 된 꽃

사 현장인 줄 알고 지나칠 뻔했다. 역사(驛舍) 개조

들의 잔치다. 1600여㎡(500평) 규모의 전관을 처

과정에서 나온 폐자재를 바닥에 깔고 천장엔 누

음으로 개인이 메운, 최 작가로서도 처음 여는 국

가 봐도 ‘최정화표’임이 분명한 샹들리에를 달아

내 최대 규모의 개인전이다.

늘어뜨렸다. 폐허에서 만개한 꽃의 이미지가 눈부

민병직 전시감독에게서 기획 의도를 들어

시다.

봤다. “근대와 현대가 이질적이고 혼란

에어 펌프로 작동돼 마치 꽃이 숨 쉬는 듯한 느

스럽게 공존하는 서울역이 ‘폐허’에

낌을 주는 ‘꽃등’, 원숭이 등 갖가지 탈을 쓴 수많

서 꽃처럼 피어나 생명을 갖는 공간

은 부처상이 놓인 ‘유연한 꽃-레이디스 앤 젠틀

‘꽃의 뼈

‘꽃의 매일’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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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다작 배우’ 유감

‘도둑들’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최동훈 감

이번에도 이경영? 창의적 캐스팅에 관객은 목마르다

독이 최근 차기작 ‘암살’의 캐스팅을 발표했다. 하정우·전지현·이정재 등 초호화 주연급에 당 연히 관심이 쏠렸지만 네티즌들이 입방아를 찧은 이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배우 이경영이 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트위터 등 SNS에 오른 반응 중 하나가 “최동훈 감독도 ‘이경영 쿼터

제’를 지켰구나”다. 말인즉슨 한국 영화에 배우 이경영이 출연하는 일정 비율(쿼터) 이 존재하는데, ‘암살’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다. 그런데 ‘뼈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최근 이경영이 출연한 영화들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줄줄이 개봉돼서다. ‘군도-민란의 시대’(군도 무리 의 지도자 땡추 역), ‘해적-바다로 간 산적’(해적 선장 소마 역), ‘타짜2-신의 손’(하 우스 사장 꼬장 역사진) 등이다. 게다가 하반기엔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 포 조작을 다룬 ‘제보자들’과 용산 참사를 소재로 한 ‘소수의견’, 스릴러 ‘은밀한 유혹’ 등이 이어진다. 내년 초 공개될 하정우 감독의 ‘허삼관 매혈기’에도 이름을 올렸다. ‘꽃궁’

그가 부쩍 바빠진 건 2011년부터다. ‘최종병기 활’‘부러진 화살’에 이어 2012년 ‘신세계’ ‘베를린’ ‘남영동 1985’ ‘26년’, 지난해엔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 ‘더 테러 라이브’ ‘관능의 법칙’에 출연했다. TV에서도 재벌 회장님 하면 김용건, 엄마 하면 김해숙이 떠오르듯 특정 배우에

맨’, 비닐로 된 장바구니 수십 개를 탑 모양으로 쌓

게 출연 제안이 몰리는 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수요와 공급의 불

은 ‘꽃의 여가’, 반짝이 왕관을 수도 없이 갖다놓

균형이다. 지난해 한국 영화 개봉작은 183편. 콘텐트는 많고 (잘하는) 배우는 한정

은 ‘임의 꽃’ 등이 이어진다. 전시장 창문 너머 야

돼 있다. 잘한다 싶으면 내 작품에 출연시키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이 글을 쓰기

외에는 ‘당신도 꽃.입니다’가 휴대전화 촬영을 기

전 한 중견 제작자에게 “이경영씨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그는

다리고 있다. 고가도로와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잘하니까”라고 대답했다. 우문현답이다. 이경영은 ‘카리스마 있는 보스’ 역할에

고무로 된 마징가제트가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

딱이다. 배우 입장에서도 ‘너무 자주 출연하는 것 같아서’라며 거절할 이유는 없다.

한다. 1994년작 ‘갑갑함에 대하여’를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가져왔다.

그런데 그의 겹치기 출연이 캐스팅하는 주체들의 상상력 부족에서 오는 거라면 그건 다른 얘기가 된다. 혹시 시나리오에서 ‘카리스마 있는 보스’ 캐릭터를 보자마

‘당신의 마음’을 ‘나의 예술’로 만드는 건 시민

자 다른 누구를 고려할 것도 없이 “이건 딱 이경영이네!”라고 단정짓는 건 아닐까.

참여를 끌어들인 데서 정점을 이룬다. 광장의 ‘꽃

겹치기 출연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엇비슷한 역할을 반복 재생산하는 건 관객도,

의 매일’을 위해 노숙인들이 8600여 개의 소쿠리

배우 본인도 지루하다. 아마추어 관객도 금세 떠올릴 수 있는 게으른 캐스팅이 아

이어붙이는 작업에 동참했다. 노숙인 자활을 돕기

닌, 발품 팔기와 상상력이 더해진 전문가다운 캐스팅이 아쉽다.

위한 대중문화 잡지 빅이슈코리아와 연계했다. 2

연기력이 검증된 일부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투

층의 ‘꽃의 만다라’는 플라스틱 뚜껑으로만 이뤄

자자 설득과 리스크 분산을 위해 굵직한 배우들을 떼로 기용하는 소위 멀티 캐스

진 거대한 설치 작품이다. 전시 기간 중 관람객들

팅이 트렌드가 되면서다. 현재 ‘제 2의 이경영’으로 꼽힐 조짐을 보이는 유력 후보

이 갖고 오는 크고 작은 플라스틱 뚜껑이 계속 더

(!)는 조진웅이다. 그 역시 올 여름 ‘군도’와 ‘명량’으로 비슷한 시기에 ‘두 탕’을 뛰

해져 30만 개를 채우는 게 목표다.

었고 최동훈 감독의 ‘암살’과 강제규 감독의 ‘장수

이 모든 것에는 최정화 특유의 ‘직설법’이 있다.

상회’에 캐스팅됐다.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예술이 별거냐”는 자신만만한 목소리 너머에는

만 더. ‘명량’에서 왜장 역의 류승룡과 조진웅은 창

관람객과 통(通)하고자 하는 작가의 간절함이 느

의력 부족한 캐스팅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잘하

껴진다. 의도적인 인공과 모조의 느낌에 “조악하

는 배우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비중으로 보

다”며 눈살을 찌푸리든, “재미있네”라며 ‘인증샷’

나 뭘로 보나 꼭 그들을 그 역에 쓸 필요는 없었다.

을 찍든 모든 건 관람객 마음이다. 무료.

누구 말처럼 ‘쿼터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문화역서울 284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만화로 보는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걸작선 <1> 내셔널지오그래픽 1화 ‘발행의 추억’

26

글그림 김재훈



TA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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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곰탕은 국물에 밥을 ‘토렴’해서 말아준다. ‘국물 반 고기 반’이다. 수육도 일품이다. 입에서 살살 녹는 느낌이다.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43> 나주 하얀집

104년 맛의 깊이 국물 반 고기 반 진짜 나주곰탕

사회다. 한 번도 대대적인 외세의 침략을 받은 적

를 도와 고기 사오는 심부름을 하기도 하고, 틈틈

이 없었던 안정적인 사회 환경 덕분이다. 반면에 우

이 일을 거들면서 고기 손질하는 법, 끓이는 법 등

리나라에서는 단 두 곳뿐이다. 2012년 농림수산식

가업을 익혀왔다. 부친이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

품부(현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결과다. 근대

시게 될 무렵에 명예 퇴직을 하고 ‘하얀집’을 물려

에 들어와서 격변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한 자

받게 되었다.

리에서 무언가를 끈기 있게 오래 할 수 있을 만큼

이곳은 나주곰탕이라는 이름 자체를 만들어 낸

전혀 안정적이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머

곳이니 그야말로 원조인 셈이다. 평야 지대여서 농

무르기보다는 움직이고 변신해야 했다.

사를 짓느라 소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쇠고기를 이

100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온 귀한 두 곳은 바로

용한 곰탕을 만들어 팔게 되었는데, 음식 이름을

서울의 ‘이문설렁탕’과 전라남도 나주에 있는 나

뭐라고 붙일까 고민하다가 지역 이름을 따서 나주

주곰탕집, ‘하얀집’이다. 두 곳 모두 좋아하지만 이

곰탕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중에서도 특히 ‘하얀집’은 내가 오랫동안 단골로

‘하얀집’에서 곰탕을 먹으면 가장 먼저 드는 생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부러운 것이 하나 있다. 역

아끼는 곳이다. 멀어서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그래

각은 국물이 진짜 끝내 준다는 것이다. 기름기가

사가 아주 오래된 음식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100

도 그 지역에 갈 때면 일부러 들리곤 한다. 그쪽을

거의 없고 아무 잡미가 없이 깔끔한데 그 맛이 깊

년 정도 된 곳은 쉽게 눈에 띄고, 200년, 300년이

여행하는 분들에게도 항상 추천 1순위다.

이가 있다. 마치 우리 입맛에 맛있고 몸에 좋은 성

넘었다는 집들도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100년

나주는 원래 물산이 풍부한 전라남도의 중심지

분만을 골라서 농축시킨 듯 하다. 비어있는 부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음식점이 무려 1만5000개에 이

였다. 그래서 나주관아 앞에서는 예로부터 ‘매일

전혀 없는 완벽한 국물 맛이 구수하고 감칠 맛이

른다고 하니 말이다.

장’이 열렸다. 이 장터에서 고 원판례 할머니가 자

넘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 비우도록 만드는 매력

리를 잡고 곰탕을 끓여내기 시작한 것이 1910년의

이 있다. 부드럽게 잘 삶아서 두툼하게 자른 고기

일이다.

는 적당히 쫄깃거리면서 입안에서 풍성하게 씹힌

이런 곳은 오랜 세월 동안 손끝으로 전해져 온 내공이 있어서 뭐가 달라도 다르다. 아주 작은 부 분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반응하고

그러다가 4대를 내려와서 지금의 길형선(54) 사

차이를 느낀다. 역사와 세월의 두께가 만들어 낸

장이 맡게 된 것이 딱 백 년이 지난 2010년이다. 길

아우라가 주는 감동은 덤이다.

사장은 원래 국영 공공기관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길 사장이 얘기하는 맛의 가장 큰 비결은 신선

했던 분이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아버지

한 쇠고기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루 전에 도축한

일본은 전통적으로 대를 잇는 것을 당연시했던

다. 양도 푸짐해서 거의 ‘물 반 고기 반’이다. 이러 니 이 지역에 오게 되면 안 들릴 재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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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은 기자의 ‘거기’ <1> 한남동 윤세영 식당

편안한 이탈리아 가정식 수다 떨기도 분위기 편안

하얀집 외부. 입구는 수수하고 작지만 안에 들어가면 넓다. 하얀집 외부. 입구는 수수하고 작지만 안에 들어가면 넓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레스토랑·카페·베이커리

소리 대신 테라스의 적당한 생활 소음-지나가

가 넘쳐나지만 우리는 콕 짚어 ‘거기’에 간다.

는 이들의 말소리, 자전거의 차임벨 소리 같은-

그 순간에, 그 상황에, 그 사람들과 함께하기 좋

이 더 끌렸다. 파란 문을 통해 들고 나는 손님

은 곳이니까. 결국 ‘거기’란 맛으로만 재단될

들 구경하는 재미 역시 쏠쏠했다. 동네 주민 같

수 없는, 최대한의 만족도를 이끌어 내야하는

은 애기 엄마나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가 익숙

고차원 방정식의 답이다. 하여 ‘거기’는 ‘어디

한 움직임으로 자리를 찾았다.

서 만날까’라는 간단하고도 까다로운 문제를 내부. 항상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내부. 항상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빈다.

고기를 확보해 국물을 끓이는데 그렇게 해야 맛도

풀어보려는 작은 시도다. <편집자 주>

메뉴를 살피기도 전에 A는 햄버그라이스 를 강추했다. “이 집에선 이걸 먹어야 해”라면

둘만 따로 약속 잡고 만날 땐 특히나 장소의

서. 평소와 다른 강권이었다. 샐러드 두 종류,

힘이 크다. 오래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편

파스타, 라이스 두 종류밖에 없는 단출한 선택

안한 자리, 먹기에 번잡스럽지 않은 음식, 뭣보

이라 딱히 고집을 부릴 이유도 없었다.

다 대화가 끊기지 않는 편안한 분위기가 필요

왜 이렇게 늦지 싶을 때쯤 식사가 나왔다. 밥

하다. 서울 한남동 ‘윤세영 식당’은 그런 만남

위에는 단호박·양파·당근 등 구운 채소와 삶

에 어울리는 공간이다.

은 계란, 드레싱을 버무린 샐러드, 두 가지 치즈

신선하고 오래 끓일 수 있다고 한다. 도축한 지 며

디자이너 A와도 둘만 종종 보곤 했다. 그런

를 솔솔 뿌린 햄버거 스테이크가 올라갔다. 비

칠이 지나게 되면 이미 육질이 물러져 짧게 끓일

데 어느 날엔가 이유 불문하고 “윤세영 식당으

주얼로나 맛으로나 딱히 자극적일 게 없는 가

수밖에 없고, 그러면 깊이 있는 국물 맛이 안 난다

로 오라”고 했다. 최근 사무실을 이 동네로 옮

정식 덮밥. 데미그라스 소스는 달지도 짜지도

는 것이다. 맑고 깔끔한 맛의 국물을 내기 위해서

긴 A의 새 아지트였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인

않았다. 그래서 왠지 더 건강해질 것 같았고,

는 함께 삶는 고기 부위들의 비율을 잘 맞추고 사

줄 뒤늦게 알았지만 당시엔 ‘김순자 꼼장어’나

열심히 숟가락을 놀렸다.

골을 함께 끓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매일 새

‘김옥순 할매찜닭’과 비슷한 친근감이 있었다.

담백한 음식을 앞에 두고 A와의 수다 역시

로 국물을 끓여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고기를

식당은 한남동 주택가 골목에 있다. 그 한

꾸밈이 없었다. 근황부터 시작해 각자의 고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 손질하는 것, 그리고 끓이

적한 분위기가 지척에 있는 한남오거리 골목

을 나누는 시간으로까지 이어졌다. 뜨끔한 충

는 과정 전체를 길 사장이 매일 직접 하고 있다. 앞

이나 가로수길·홍대앞과는 딴판이었다. 테라

고와 조언도 기분 좋게 주고 받았다.

선 선대 분들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스 테이블에서 앉아 있던 그는 반갑게 손을 흔

자리를 일어설 때가 돼서야 나는 뜬금없이

100년의 내공이란 역시 대단한 것이다. ‘하얀

들어 줬다. 자신의 집을 제대로 찾아온 친구를

물었다. 윤세영이 누구냐고. A는 자신있게 카

집’의 완벽한 곰탕 맛이 증거해 준다. 말이 쉽지 한

맞는 표정으로. 배경도 그럴듯했다. 새파란 차

운터를 지키던 단발머리 여자 매니저에게 눈

세기를 지내온 것이다. 농림부 자료에 따르면 2019

양과 문, 통유리창. 뭣보다 초가을 햇살이 반

길을 줬다. 한데 계산을 하며 물었더니 짐작이

년에 세 번째 집이 나온다. 그리고 또 계속 나올 예

짝 빛났다.

틀렸단다. 매니저는 손가락으로 카운터 옆 키

정이다. 100년 되는 해를 맞춰서 친구들과 그 식당

창을 통해 본 내부 역시 분위기가 비슷했다.

들을 한 번씩 찾아가 봐야겠다. 느낌도 다르고 재

마루 바닥에 나무 테이블이 놓인 모양새가 북

미도 있을 것 같다. 벌써 기대가 된다.

유럽 스타일인지 일본식 인테리어인지 모호했

우리는 그냥 웃었다. 다음엔 진짜 윤세영을

지만, 어쨌거나 문 옆 옷걸이나 아래로 길게 뺀

만나보자면서. 다시 만날 핑곗거리가 그렇게

4292. 첫째, 셋째 월요일은 쉰다. 휴일에는 줄을 서서 좀 기다려

백열등 조명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만 아늑

만들어졌다.

야 할 수도 있다. 나주곰탕 8000원, 수육 3만원.

했다. “안으로 들어갈까” A가 물었지만 음악

dangdol@joongang.co.kr

▶하얀집: 전라남도 나주시 중앙동 48-17 전화: 061-333-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맛

친을 가리켰다. “저기 혼자 음식 해대는 청년 하나 있어요.”

▶윤세영 식당: 서울 용산구 한남동 795-1, 02-795-3375, 오전 11시 30분~오후 10시(일요일은 오후 9시까지, 월요일은

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 전문가이자 여행전문가. 경영학 박사.

휴무, 쉬는 시간 오후 4~5시). 주요 메뉴는 리코타치즈 샐러드(1만1500원), 햄버그라이스(1만5500원), 아스파라거스오

베스트레블 대표. yeongjyw@gmail.com

일 파스타(1만8500원).


REVIEW & PREVIEW

30

뮤지컬 ‘더 데빌’ 11월 2일까지 연강홀

한해 2500편이 넘게 쏟아지는 뮤지컬 시장에서 여

현장 같은 열기를 끌어 낸다. 600석 규모의 결코 크

토종 록 뮤지컬로 재탄생한 파우스트

전히 대세는 라이선스다. 창작 뮤지컬은 대학로 소

지 않은 무대에 마이클 리, 한지상, 차지연 등 최고

품들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고는 하나 눈에 띄

가창력의 배우들이 동원된 이유는 극이 무르익을

는 화제작은 한동안 없었던 게 사실. 그런데 올 들

수록 확연해진다.

어 대표적인 뮤지컬 연출가들이 각자 명예를 걸고

스토리 전개가 아닌 심리적 갈등 폭발에 포커스

창작 뮤지컬 제작에 나섰다. 상반기 왕용범 연출의

를 두는 만큼 배우의 캐릭터 해석이 관건. 이지나 연

‘프랑켄슈타인’과 노우성 연출의 ‘셜록홈즈2: 블러

출은 배우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부여해 매회 캐스

디게임’에 이어 최근 개막한 이지나 연출의 ‘더 데

팅에 따라 전혀 다른 무대를 뽑아냈다. ‘파우스트’

빌’과 10월 개막 예정인 윤호진 연출의 ‘보이첵’ 등

3명, ‘X’ 4명, ‘그레첸’ 2명으로 총 24가지 주인공

이다.

조합이 나오는 멀티캐스팅의 미덕을 극대화한다면

면면을 보면 ‘한국적’이라는 소재의 굴레를 벗고 ‘유럽 따라잡기’로 방향을 튼 모양새다. ‘프랑켄슈

‘헤드윅’ 못지않은 중독성 롱런 효과를 내다볼 만 하다.

타인’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유럽 뮤지컬의 문법을

1987년 10월19일 블랙먼데이. 월스트리트 최악

복기했고, ‘셜록홈즈2’는 스릴러뮤지컬의 공식을

의 주가 대폭락으로 주식 브로커 존 파우스트는 나

새로 썼지만 여전히 19세기 유럽이 무대다. 요절한

락에 떨어진다. 절망 속에서 파우스트는 파격적인

독일의 천재작가 게오르그 뷔히너 원작의 ‘보이첵’

제안을 하는 X의 유혹에 ‘악마와의 계약’을 맺고

도 공개된 자료상 원작의 시공간에 머물 예정이다.

적대적 M&A전문가로 부활한다. 오랜 연인 그레첸

‘더 데빌’의 경우는 좀 다르다. 독일의 대문호 괴

은 물신숭배로 치닫는 파우스트를 걱정하지만 파

테의 『파우스트』가 원작이지만 유럽 옛날이야기

우스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외로움과 신에 대한

가 아니다. 무대는 20세기 말 뉴욕 증권가. ‘파우

공포로 미쳐가던 그레첸은 X에게 겁탈당한 후 X의

스트와 악마의 거래’는 황금만능 자본주의 세상을

아이를 잉태하고,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관계는 파

무심히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은유다.

국으로 치닫는다.

군더더기 없이 딱 3명의 주인공이 이끄는 록 뮤지

그런데 ‘파우스트’는 늘 어렵다. 원작의 얼개

컬. ‘헤드윅’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등 화

와도 사뭇 다른 존과 X, 그레첸의 삼각구도는 더

제작을 만들었던 이지나 연출의 내공이 고스란히

욱 혼란스럽다. 기존 뮤지컬의 직설적 문법에 익숙

드러난다. 단출한 4인조 라이브 밴드와 4명의 코러

한 눈과 귀로 은유와 상징이 넘치는 무대를 읽어

스가 담당하는 음악은 강렬한 록 비트와 유려한 멜

내기가 녹록치 않다. ‘Sanctus Domini Kyrie

로디가 어우러진 웅장한 사운드로 흡사 록 콘서트

Eleison(거룩하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름지기’ 대중 강연-우리나라의 新종교

아름지기 재단(이사장 신연균)이 ‘동양 사상 속 우리

9월 18일 오후 7시 대림미술관 02-741-8375

의 길찾기’라는 큰 주제 아래 전통 사상과 철학에서 삶

우리 땅에서 우리가 세운

의 시사점을 찾아보기 위해 대중 강의를 개최한다. 상

새로운 종교의 세계

반기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때: 인(仁)의 리더십’에 이어지는 하반기 대중 강연이다. ‘우리나라의 신(新) 종교-동학과 원불교’를 주제로 최준식(사진·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가 나선다. 19세기 말 우리 민족이 세운 종교인 동학과 원불교에 대해 다룬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는 인내천 사상을 강조하며 사회 개혁을 꿈꿨던 동학,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등 전통 불 교를 합리적으로 재해석한 원불교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다. 무료. 9월 23일엔 조선 사상의 중심인 서원을 탐방하는 국내 답사가 열린다. 조선시대 필북의 정신 세계(10월 16일 ), 실 학 사상의 주체인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10월 23일) 등을 다루는 소규모 강좌도 이어진다. 신청은 홈페이지 (www.arumjigi.org)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아름지기


REVIEW & PREVIEW

31

같은 라틴어를 포함해 기도문처럼 들리는 시적이 고 관념적인 노랫말은 강렬한 록 사운드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찬찬히 읽어도 어려운 파우스트에 숨겨진 함의를 빠르게 흘러가는 노래 속에서 파악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1막이 끝나니 극장 로비 는 대체로 ‘접수 안된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2막 들어 무대의 에너지가 절정으로 고 조되자 분위기가 반전됐다. X와 그레첸이 ‘Mad Gretchen’ ‘피와 살’ 등 폭발하는 노래로 한치의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서니 객석에도 ‘접신’이 일어난 것. 여전히 노랫말을 온전히 음미할 순 없지만 마 치 종교집회에서 뜻 모를 복음성가에 감화되어 눈 물을 흘리듯 이해를 넘어선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수수께끼 같았던 X와 그레첸의 관계를 천사와 악 마로 분열된 자아의 알레고리로 체감한 건 그저 본 능이었다. 대중적인 뮤지컬에서 기대하는 달콤하거나 애 달픈 사랑이야기는 없다. 사랑이 얼마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그 불편한 진실의 강요가 있 을 뿐. 호불호가 분명한 매니어 뮤지컬의 탄생을 점 치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흡사 순수연극을 보듯 집 중력과 상상력을 요구받다가 종국엔 호소력 넘치 는 음악의 에너지만으로 감화받고 돌아서는 발걸 음이 제법 상쾌했다. 순수 우리 창작진의 도전이라 더욱 그랬는지 모르겠다. 기존 문법을 철저히 파괴 한 괴물같은 작품이란 평도 있지만, 이젠 우리 관 객들도 이런 ‘초록 피’를 수혈받을 때가 됐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클립서비스

국립무용단 ‘토너먼트’

한국 무용과 현대 무용을 대표하는 두 안무가가 실력을

9월17~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2280-4114

겨룬다. 한국적 춤사위를 기본으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장

한국무용 고정관념 깨는

르로 변신을 시도중인 국립무용단의 윤성주 예술감독과

댄스배틀

현대무용가 안성수가 한 무대에서 전혀 다른 두 스타일로 맞붙는다. 최근 국립무용단의 화제작 ‘단’‘묵향’을 연출 한 디자이너 정구호가 대본과 무대디자인을 맡아 젊은 세

대를 겨냥한 화려한 볼거리와 댄스배틀 형식을 차용한 연출로 한국 무용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 주력했다. 천상을 정복하려는 인간들과 이를 막으려는 수호자들의 전쟁을 컨셉으로 한 ‘판타지 무용 활극’. 두 진영에서 개성 넘치는 의상으로 무장한 무용수들의 춤 배틀이 펼쳐진다. 체스와 장기판을 모티브 삼은 무대에서 파가니 니의 바이올린 선율 vs 한국 전통 타악, 여성 vs 남성, 솔로 vs 군무 등의 다양한 대비가 선명하다. 기존 한국 무 용 공연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신선한 소재와 새로운 형식에 우리 춤만의 매력을 녹여 무용 공연에 익숙하지 않 은 관객까지 포용하는 대중지향형 무대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무용단


BOOK

32

책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

『페이퍼 엘레지』

저자·삽화: 선현경 출판사: 예담

인간은 종이를 만들고 종이는 인간을 만들고

가격: 1만3800원

어느 것 하나 버 리질 못했던 저 자가 365일 ‘1일 1폐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옷·모

간만에 책상 정리를 했다. 노트북 양 옆 그득히 쌓인 자료와 메모들. 그 안

자·액세서리·장

에 내 몇 달간의 행동 반경이 담겨 있었다. 버리지 못해 쌓아뒀지만 굳이 남

난감 등을 날마

겨둘 이유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싹 치우고 나니 어딘지 아쉬운 마음이 동

다 버리면서 그

했다. 빨리 새 것들로 공간을 채워야할 것 같았다. 때마침 만난 『페이퍼 엘레지』가 그 뜻 모를 아쉬움의 정체를 밝혀줬다.

을 풀어 놓는다. 버림으로써 여백이 생겨나 고, 거기에 삶의 더 소중한 것이 채워진다

을 섣불리 외치는 사람들에게 분연히 맞서는 ‘종이 영생론’이다. 코믹 미스

는 깨달음도 전한다.

과 진화’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에 입체적으로 접근했다. 이메일의 창궐로 손 편지를 쓰는 사람은 확 줄었지만 우편함은 더 많은 가격: 1만8000원

과 사연, 그리고 그날그날의 자잘한 일상들

정보 기술의 발달로 종이 책과 종이 신문이 사라지는 시대, ‘종이의 죽음’

터리 소설로 유명한 저자는 미스터리의 독특한 형식을 빌려 ‘종이의 탄생

저자: 이언 샌섬 출판사 : 반비

것에 얽힌 추억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저자: 이훈범 출판사: 올림 가격: 1만5000원

고지서와 광고 전단으로 넘쳐나듯, 21세기에 종이 소비량은 오히려 늘었다. 일간지에서 10

저자의 말대로 우리 모두는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들이기에 결코 종이를

년 가까이 칼럼

떠날 수 없다. 물티슈에서 건축물까지, 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니스 트 로 활동

그건 마치 공기 없는 지구처럼 죽은 상태나 태어나지 않은 상태와 같다.

한 저자가 학교

종이는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궁극의 맥거핀’이다. 저자가 이 책을 단순한 종이의 역사책으로 쓰지 않은

에서는 가르쳐

것도 그래서다. 종이를 매개로 지도·책·돈·예술·장난감·전쟁의 역사까지 들여다본 이 ‘종이의 문화사’는 종이의

주지 않는 ‘잘 사 는 법’에 관한 이

위대한 생명력과 끈질긴 내구성을 직설하지 않고도 그 존재감을 웅변한다. 범인의 자백 없이도 사건 현장이 범행

야기를 들려 준

전모를 말해주는 것처럼.

다. 세상살이에

인간은 종이 위에 지도를 그리면서 세상을 알게 됐다. 종이로 책을 만들어 지식과 사상, 나아가 역사를 세웠다.

나서는 청년들에게 정답이 아닌, 정답을 찾

현대 경제가 탄생한 것도 지폐의 등장과 함께였다. 건축도 종이와 더불어 발전했다. 종이에 도면을 그리면서부터

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2010~2011

예술과 철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건축가가 됐다. 새로운 예술도 종이로 인해 가능했다. 피카소의 판지 모형은 조

년 중앙일보에 연재됐던 ‘미래 세대를 위

각의 혁명을 이루고 20세기 예술의 표준이 됐다. 종이는 전쟁 무기로도 쓰였다. 18세기 앤 여왕은 전쟁 비용을 대

한 세상사 편력’을 고치고 다듬었다.

기 위해 종이에 세금을 매겼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심리전 전담부대는 이동식 인쇄기를 갖추고 선전용 전단을 살 포해 나치에 대응했다. 가장 단순한 장난감도 종이다. 어린 시절엔 종이 한 장으로 딱지도 접고 인형 놀이도 했다.

THIS WEEK CHART

처음 만나는 극장도 종이 극장이었다. 찰스 디킨스 같은 위대한 작가들도 종이 극장에서 상상력을 키웠다. 종이는 나를 증명하기도 한다. 해외여행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더라도 여권을 깜박하면 국경을 넘을 수 없 다. 신분 증명은 개인을 넘어 어떤 집단이나 국가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다. 신분 증명서의 역사는 국가가 세금을 거두고 법률을 강제하고 병역을 부과하며 교육을 통제해 온 역사기도 하다. 민족 국가는 종이로

베스트셀러 순위 책명 01 여자없는 남자들

자료=교보문고

작가·출판사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02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요나스 요나손 열린책들

세워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영적 세계까지 종이에 빚지고 있다. 멀리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텐부르크 성당 정문

03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에 붙인 종이조각에서 시작됐음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종이 부적이 나를 지키고 신성한 장소는 종이 끈을 꼬아

04 싸드

만든 금줄로 구분한다.

05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장하준 부키 김진명 새움 존 그린 북폴리오

06 어떤 하루

신준모 프롬북스

07 김우중과의 대화

신장섭 북스코프

없는 존재.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읽는 책이, 내 책상에 쌓인 자료가 나를 말해준다. 아니 나를 만드

08 미 비포 유

조조 모예스 살림

는 것이 그 ‘종이’들이다. 오래된 책 한 권, 작은 노트 하나 버리기 힘든 것도 그래서인가 보다.

09 한번은 독해져라

김진애 다산북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10 두근두근 내인생

김애란 창비

이렇게 보니 종이란 인류의 그림자다. 평소 있는지 없는지도 의식하지 않지만 절대 인류 역사에서 떼어놓을 수


GUIDE

영화

33

공연

클래식

전시

메이즈 러너

2014 예술이 흐르는 그린웨이

박혜윤ㆍ바이타스 듀오

마류밍

감독: 웨스 볼

기간: 9월19~20일

일시: 9월 18일 오후 8시

기간: 9월 2일~10월 5일

배우: 딜런 오브라이언, 이기홍, 윌 폴터

장소: 강동아트센터 바람꽃마당

장소: 금호아트홀

장소: 서울 삼청로 학고재갤러리

등급: 12세 관람가

문의: 02-440-0500

문의: 02-6303-1977

문의: 02-720-1524

기억이 지워진 채 거대한 미로로 둘러싸

아름다운 산책로를 품고 지역 명소로 떠

ARD 콩쿠르 2009년 우승자 박혜윤(사

마류밍(馬六明·44)은 중국 현대 미술계

인 낯선 공간에 떨어진 토마스. 그는 그

오른 강동아트센터가 가을밤 무료 야외

진)과 안티에 바이타스가 바이올린 2중

에 퍼포먼스 예술을 처음 선보인 인물이

곳에서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을

공연을 펼친다. 상주 단체 세컨드네이처

주를 들려준다. 바이타스는 베를린 한

다. ‘신체 해방’을 주제로 만리장성을 나

만나게 된다. 이들은 매일 밤 살아 움직

댄스컴퍼니가 현대무용 공연을, 모스틀

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교수로 박혜윤의

체로 걷는가 하면 역시 나체로 의자에 앉

이는 미로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음의

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영화·뮤지컬

스승이다. 두 연주자는 르클레르 소나

아 잠을 청한 뒤 관객을 옆자리에 앉게 해

존재들과 대립하고, 빠져나갈 탈출구를

음악을 선사한다. 다국적 탱고밴드 코아

타, 베리오 이중협주곡, 바르토크 듀오 등

그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회

찾아 지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모러스의 탱고 음악도 들을 수 있다.

17~20세기를 아우르는 음악을 들려준다.

화 23점, 사진 17점 등 총 48점이 나온다.

60만번의 트라이

뮤지컬 레베카

타악 듀오 모아티에

이형구 개인전 MEASURE

감독: 박사유, 박돈사

기간: 9월6일~11월9일

일시: 9월 21일 오후 2시

기간: 9월 2일~10월 19일

배우: 문정희(내레이션)

장소: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장소: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장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 스케이프

등급: 12세 관람가

문의: 02-6391-6333

문의: 1544-5142

문의: 02-747-4675

오사카조선고급학교 럭비부 아이들은

지난해 초연 당시 강렬한 음악과 긴장감

타악기 주자 김은혜ㆍ한문경의 듀오 ‘모

200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이

60만 재일교포의 꿈을 안고 전국대회 우

넘치는 스토리로 각종 상을 휩쓴 뮤지컬

아티에’는 프랑스어로 반(半)이라는 뜻

형구는 예술의 상상력과 과학적 지식의

승을 목표로 매일같이 구슬땀을 흘린다. ‘레베카’가 돌아왔다. ‘모차르트!’’엘리

이다. 연주료 절반을 적립해 기부를 할 계

결합을 즐긴다. 이번 신작 ‘MEASURE’

하지만 책임감 강한 주장 관태가 예기치

자벳’의 미하엘 쿤체, 실베스터 르베이

획이다. 이번 무대에선 현대 음악 5곡을

를 통해 말과 인간의 신체에 대한 엄격하

못한 부상을 입고 선수들 사이에는 크고

콤비가 히치콕 감독의 동명 영화를 모티

들려준다. 피아니스트 김규연과 함께 류

고 객관적인 지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은 오해가 쌓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오

브로 삼았다. 오만석·엄기준·옥주현·리

재준 작곡의 ‘타악기와 마림바, 피아노

유쾌하게 풀어낸다. 말의 보법에 몰입해

사카 시의 학교 보조금 지급도 중단된다.

사 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를 위한 음악’도 연주한다.

창조한 자신만의 박자와 동선을 선보인다.

영화 예매

자료=맥스무비

공연 예매

자료=인터파크

순위 영화명

주연

순위 공연명

출연

클래식 음반

01 타짜: 신의손

최승현 신세경 곽도원

01 뮤지컬 시카고

최정원 아이비 이종혁

01 젤린카: 미사 보티바

02 루시

스칼렛 요한슨 최민식

02 뮤지컬 레베카

오만석 엄기준 옥주현

02 레오니드 코간: EMI 레코딩 전집

03 비긴 어게인

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

03 뮤지컬 조로

자료=풍월당

순위 음반명

가요음원 순위 노래

Carus

01 너를 사랑해

윤미래

02 I Swear

씨스타

Warner

김우형 휘성 양요섭

03 상냥한 프랑스- 프랑스 가곡과 샹송 Naive

03 공허해

04 해적: 바다로 간 산적 김남길 손예진 유해진

04 뮤지컬 프리실라

조성하 조권 김호영

04 라자르 베르만: CBS  SONY CLASSICAL

04 예뻐졌다

05 두근두근 내인생

05 연극 옥탑방고양이

이대일 김선호 최수영

05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Pentatone

05 A Real Man 06 어려운 여자

06 인투 더 스톰

강동원 송혜교

08 씬시티 09 스텝업:올인 10 마야 (애니메이션)

가수

WINNER 박보람 스윙스, 에일리

06 연극 라이어

공찬호 김연철 박중근

06 마르티누, 시벨리우스 & 무스토넨

최민식 류승룡 조진웅

07 뮤지컬 위키드

김선영 김소현 남경주

07 바흐: 건반과 바이올린을 Warner Classics

07 L4L (Lookin’ For Luv)

조셉 고든 래빗 에바 그린

08 뮤지컬 헤드윅

김다현 손승원 김동완

08 리히터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08 H.E.R

블락비

라이언 구즈만

09 연극 프라이드

이명행 정상윤 오종혁

09 물망초 앨범-페루치오 탈리아비니

09 Touch My Body

씨스타

10 사랑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람

장범준

리처드 아미티지 사라 웨인

07 명량

자료=가온차트

음반사

10 뮤지컬번개맨의비밀3‘스페이스번개맨’(부산)

BIS Melodiya

10 카를로스 클라이버: 관현악 녹음 전집

RCA DG

장범준 BOBBY


ESSAY

34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신 문어체구어체 열전

북유럽 트렌드 프리미엄 한복 도대체 누가 찾나요 한가위 명절에 아이 한복 입힐 기회를 놓쳐 내년 설빔을 고려하고 있는 분이

21세기 대한민국의 새로운 문어체와 구어체는 극단의 예의와 무례를 오

라면, 올 가을 최첨단 ‘북유럽 트렌드’ 한복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간다. 알바로 근근이 연명하는 젊은이들과 TV 아이돌 가수들은 “커피가 나

‘북유럽 트렌드를 모던함에 빛날 수 있도록 우리 전통의 감성을 담아낸 프리

오셨어요”“‘주차장은 이쪽이십니다”“사장님 전화가 오셨어요”라며 사물에

미엄 한복’으로, 대형마트나 백화점뿐만 아니라

게까지 깍듯이 극존칭을 쓴다.

전통시장의 한복가게까지 내세운 영국 리버티

그러나 88만원 세대의 힘든 세상살이 때문인

사 원단의 ‘플로랄 패턴’ 한복이다. 영국이 북유

2014년 대한민국 언어 트렌드

럽인가 같은 지리적 의문은 살짝 덮어두자. 입고 보니 1970~80년대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 가 입었던 잔잔한 ‘꽃가라 뽀뿌린’ 한복과 별다 를 게 없어 촌스러운 북한 옷 같다는 고민도 잠 깐만 접어두자. 주부들의 의식주 트렌드를 휩쓸

지 온라인에서 그들의 언어는 돌변한다. 종종 벌 레라고도 불리는 어떤 젊은이들은 우리가 알고

오뜨 꾸뛰르체: 아티스틱한 감성 꾸띄르 적인 디테일의 언어 인문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도 모른다면 포기할 것 사물 존대체: 홍익인간의 개념을 사물에까지 확대 감수성 돋음체: 길이(X), 길이감(O) 원단(X), 원단감(O) 짐승체: ㅆ, ㄲ, ㅃ 경음과 격음의 무한 콜라보

고 있는 북유럽 감성이 우리의 ‘트래디셔널한 라

있는 각종 쌍시옷, 쌍기역, 쌍비읍 그리고 신체 특정부위와 특정 지역·특정 색깔·특정 인물·특 정 생선까지 총동원, 무시무시한 상상력의 콜라 보레이션을 펼치는 ‘(인간이길 포기한) 짐승체’ 를 쏟아놓는다. 애국심의 순정에서 비롯됐다는

이프스타일’과 만난 이 옷을 입고 최근 이민 트

맞춤법 파괴체: 내가 너보다 ‘낳다’고 우겼다가 ‘명예 회손’당함

그들의 말은 말에서 끝나지 않고 단식시위하는

렌드로 급부상한 북유럽으로 이민 가는 가족이

줌마체: 우리 ‘랑이’처럼 이뿐 말만 쓰기로 해영.

사람들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폭식하는 행동까

늘어나다 보면, 이 꾸미지 않은 듯 ‘박시한 빈티

지 밀어 붙이는 엄청난 용기의 원천이다. 강한 척

지풍 레트로 아이템’이 ‘세계 스트리트 패션의

하지만 가련한 이 존재들의 언어는 그들이 속으

트렌드’를 이끄는 ‘시크한 런더너 핫 스타일’로 자리 잡아 패션 한류에 이바

로 애타게 원하는 관심을 한껏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송과 수백만 원대의 벌금을 물지도 모른다는 부작용이 있다.

특정 잡지 이름을 따 ‘V체’ 혹은 ‘G체’로도 불리는 이 ‘오뜨 꾸뛰르’스타

새 문법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홈쇼핑에서 비롯한 ‘감수성 돋음체’다.

일 문체는 결국 패션 센스뿐 아니라 현실 속의 우리 한복까지 바꿔놓을 수도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은 모두 느낌으로 치환된다. 바지의 적

있다는 걸 알게 해 준다. 한글 파괴의 우려와 ‘병신체’라는 극단적 비아냥에

당한 길이는 롱한 ‘길이감’으로, 얼굴에 착 달라붙는 화장품은 쿨한 ‘발림

도 나날이 번성하는 이 말투 덕분에 곧 스칸디나비아 감성의 청국장과 북유

감’으로, 썩 잘 맞는 한 벌의 옷은 뛰어난 ‘핏감’으로. 뛰어난 원단감과 직조

럽 인테리어식 한옥이 등장할 날을 기대해봐도 좋을 듯 하다.

감, 직물감, 소재감까지 모든 것을 느낌으로 만나보실 수 있는 이 세계는 상

시니피앙(기표)과 시니피에(기의) 같은 외국어 전문용어로 가득한 인문

상력과 감수성을 자극하며 나의 오감을 활짝 열어젖히게 만든다.

학 책의 인문체, 광고체 역시 한데 묶여 조롱받는다. 하지만 외국어 전문 용

그러나 역시 부작용을 각오해야 한다. 그 몽환적이며 아스트랄한 느낌의

어의 사용이 그 세상의 소속감을 다져주는 그들만의 우아한 세상에 당신이

세계에서 한껏 뻗어나간 감성의 촉수는 처음 드리는 가격적 혜택에 남아있

편입되는 순간, 그건 곧 당신의 일상용어가 될 것이다. 젖먹이 때부터 영어

는 시간대가 째깍째깍 줄어들고 매진 인장이 찍히기 시작하면 수화기를 들

조기교육과 유학에 몰두한 이 땅의 교육 트렌드가 가져온 글로벌 감성의 필

고 싶다는 초조감으로 바뀌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주문이 몰려 상담원과

연적 결과일 수도 있다. 몇 년 외국 생활한 필자도 고객들의 ‘니즈’를 반영한

의 통화가 어렵다”는 불행은 일찌감치 쫓아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만

최첨단 패션이 가져다주는 ‘힐링’의 효과를 한국말로 바꿔놓았을 때의 그

만나보시는 혜택을 즐기다 보면 월말엔 카드 값의 압박감이란 감성이 당신

디테일한 뉘앙스 차이를 포기하고 싶진 않다.

을 만나러 오실지도 모른다.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PHOTO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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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풍의 아가씨가 노숙자 남자에게 말을 건다. 따라가서 양해를 구하고 물었더니 역시나 먹을 걸 갖다줄 거라고 한다. 곱슬머리 금발의 아가씨 이름은 데이지. 올 가을 뉴욕 패션위크에 참가한 메이크업 전문가다. 홈리스 젠틀맨의 이름은 애드리안. 뉴욕의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엄마에게 가고 싶다고 했다. 사진을 찍으며 ‘마릴린 먼로가 환생해서 선행을 하는군’ 정도로 생각했는데, 초상권 허락을 얻을 겸 남자에게 다가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마릴린 먼로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먼로가 먼로를 불렀다.

케이티 김의 남과 여

먼로를 부른 먼로

사진작가. 패션계의 힘을 모아 어려운 이들을 돕자는 Fashion 4 Development의 아트 디렉터로 뉴욕에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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