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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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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석조전 소화기의 센스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불리던 시절, 덕수 궁에는 가을이면 국전을 보러가곤 했습니 다. 미술관 옆에 있던 석조전을 보면서 저 긴 뭘까 궁금해 하던 기억이 납니다. 대한 제국 광무황제(고종)의 공간으로 쓰기 위 해 1898년 영국인 J.R. 하딩이 설계한 멋 진 돌건물이죠.

08 ISSUE

14 ART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16 FOCUS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아름지기 기획전 ‘소통하는 경계, 門’

그 석조전이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새롭 게 태어납니다. 문화재청이 5년간 141억 원 을 들여 복원했습니다. 국호를 대한제국으 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한 사실을 선포한 1897년 10월 13일을 기념해 13일 개관식 을 할 예정입니다. 7일 기자 간담회를 마치고 먼저 둘러보았 습니다. 어수선한 사무실과 로비로 쓰이던 공간이 비로소 제모습을 찾았다는 생각에 안도했습니다. 가구와 벽지, 장식에까지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도 좋았지만, 제 눈 에는 소화기가 먼저 보였습니다. 보통 건

20 GALLERY

24 PEOPLE

22 STYLE

사진전 여는 이은주최시내 모녀

물 구석에는 어디나 시뻘건 소화기가 놓여 있게 마련인데, 여기는 달랐습니다. 베이

간송미술관 87회 정기전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06 THIS WEEK PEOPLE

32 BOOK

부활 꿈꾸는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

21 INSIGHT

34 ESSAY

가 돋보였습니다.

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이렇게 한 것이 소방법에 맞는 지까지는

지색 벽면과 같은 색으로 돌출 간판을 세 우고 그 뒤에 은색 소화기를 숨겼더라고 요. ‘여기 소화기가 있다’는 표식은 하되 너무 튀지않게 주변과 색을 맞추려는 배려

26 CARTOON

35 PHOTO ESSAY

만화로 보는 현대카드

케이티 김의 남과 여

라이브러리 걸작선 ◇10월 5일자 ‘접속! 미술과 문학’ 중

28 TASTE

“밀레이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더불어”를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이도은 기자의 ‘거기’

“밀레이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더불어”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성들여 복원한 근대식 공간에 시뻘건 소화기가 미관을

30 REVIEW & PREVIEW 국립오페라단 ‘로미오와 줄리엣’

바로잡습니다.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름의 대책을 마 련한 그 누군가가 고마웠습니다. 우리 국 민의 문화 의식도 이제 이 정도 수준에 올 라와 있었습니다.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표지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이 취임 후 자신의 첫 레퍼토리 ‘교향곡7번’과 ‘봄의 제전’을 선보인다.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문화에디터 정형모 취재 이도은 유주현 사진 최정동 김춘식 전호성 편집 임종일 디자인 전유진 통신원 최선희(파리) 김성희(밀라노) 광고 구명서 김진경 박본재 마케팅 박유선 최수인 이민주 이선우 기사제보 02-751-9000, 080-023-5002 광고문의 02-751-5555 / Fax 02-751-5806 1부 1000원 /월 5000원 정기구독문의고객센터 080-023-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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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trick Demarchelier

THIS WEEK PEOPLE

15년간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로 군림

부활 꿈꾸는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

하우스의 수장이 된 건 역사상 최초였기 때문이다.

하다가 하루아침에 쫓겨난 디자이너 존 갈리아

‘MMM’ 브랜드와 패션 철학 극과 극 어떤 작품 내놓을까

화려함이 깃든 역사주의, 판타지를 넘나드는 로맨

노(54). 그가 3년 만에 재기한다. 프랑스에 기반 을 둔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ㆍ이하 MMM)’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로서다. MMM을 소유한 OTB 그룹의 렌조 로소 회

틱한 감성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그만의 재능으 로 평가 받는다. 다만 이제부터 관전 포인트가 있다. 갈리아노 가 보여준 모든 것이 MMM이 추구해 온 성향과 정반대 지점에 있어서다.

장은 6일 “이론의 여지가 없는 천재 디자이너의 환

88년 벨기에 패션스쿨 앤트워프의 6인 중 하

상적인 패션 세계를 곧 다시 보게 되길 갈망하며

나인 마르틴 마르지엘라가 설립한 MMM은 여러

MMM이 그의 새 둥지가 되길 빈다”고 전격 발탁

면에서 남다르기로 이름난 브랜드다. 디자이너는

소식을 전했다. OTB그룹은 디젤·빅터앤롤프·마르

공개석상에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2009

니 등을 소유한 이탈리아 패션 재벌이다.

년 은퇴한 이후에도 누가 디자인팀을 이끄는지 밝

당초 그의 복귀는 쉽지 않아 보였다. 추락이

히지 않을 정도로 ‘신비주의’를 고수한다. 스타일

그만큼 곤두박질이었다. 2011년 2월 파리의 한 카

만 따져봐도 ‘단정치 못한’ 옷들이 대표적이다. 숨

페에서 술에 취해 있던 갈리아노는 시비 끝에 인

카 드 라 렌타와 협업한 컬렉션이 성공적이었음에

기고 감춰야 할 옷의 솔기와 지퍼를 드러내고, 깔

종차별적 발언 혐의로 고소 당했다. 여기에 프랑스

도 진전이 없자 그의 재기를 희망적으로 보는 이들

끔하게 마무리 돼야 할 끝단들을 모두 풀어헤치는

의 한 매체가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과거

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해체주의다.

동영상을 내보내며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디

하여 그의 부활은 놀랍고 또 반갑다. 영원한

반면 갈리아노는 디올의 컬렉션 때마다 우주

올은 즉각 해고 절차를 밟았고, 시그니처 브랜드인

악동, 최고의 천재를 응원하는 목소리가 패션계 여

인·드러머 등 각기 다른 컨셉트를 선보이며 보디가드

‘존 갈리아노’에서도 그를 쫓아냈다(이 레이블의 소

기저기서 들려온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갈리아

들과 함께 런웨이에 등장했다. 여성을 위한 우아함

노의 내공을 믿기 때문이다. 그가 1984년 런던의

이 지향점이다. 갈리아노의 추종자나 MMM의 열성

이후 그가 알코올 중독 재활 치료를 받고, 또

패션 스쿨 세인트 마틴을 수석 졸업한 건 자랑할

팬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숙하며 지낸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패션계의

축에 끼지도 못 한다. ‘올해의 영국 디자이너상’을

서로 극과 극인 이들의 궁합은 과연 어떤 결과를

반응은 싸늘했다. 인종차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

3차례나 수상하면서 96년 최고의 럭셔리 패션 하

빚을까. 궁금하다면 내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

는 패션계에서 유대인 모욕 발언은 악수 중의 악수

우스인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에 오른 일은 하나의

리는 오트 쿠튀르 컬렉션까지 기다리고 볼 일이다.

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난해 미국 디자이너 오스

‘사건’이었다. 영국 디자이너로서 파리 오트 쿠튀르

유주 역시 디올과 마찬가지로 LVMH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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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레퍼토리 선보이는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스트라빈스키와 베토벤 묶었더니 독일서도 놀래요

“지금껏 발레리나 강수진을 사랑해 주셨듯 이제 국립발레단 을 사랑해주세요. 스타 한 명이 아니라 단원들 하나하나가 빛 나는 발레단으로 만들겠습니다.” 지난해 12월 취임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강수진(47) 국립발레 단 신임 예술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주역 몇 명이 돋보이는 것 이 아니라 군무 무용수들까지 빈틈없이 하나가 될 때 최고의 발레단이 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었다. 국립발레단의 10월 공연 ‘교향곡 7번’과 ‘봄의 제전’(10월 16~1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은 그 다짐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

다. 올 2월 정식 취임한 지 8개월 만에 선보이는 강 감독의 첫 레퍼토리기 때문. 본인이 30년 가까이 몸담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주요 작품들을 가져왔다. 안무가 우베 숄츠의 ‘교향곡 7번’과 글렌 테틀리의 ‘봄의 제 전’은 각각 네오 클래식과 컨템포러리 스타일로, 이 두 작품을 묶어서 선보이는 건 세계 유수 발레단에서도 보기 드문 시도 다. 표현이 까다로워 공연권을 얻기도 어렵다는 두 작품을 애 써 함께 올리는 이유는 뭘까. ‘오직 단원들을 위해서’라는 것 이 강 감독의 대답이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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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예술의전당 내 국립발레단 연습실. 살색 삼각팬티에 가까운 연 습복 한 장 달랑 걸친 남성 무용수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 다.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의 역동적인 음악에 맞춰 현대 무용 에 가까운 격렬한 움직임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며 비지땀을 흘 리는 모습이 클래식 발레에서 우아하게 파드되를 추던 왕자님들 맞나 싶었다. 한바퀴 런스루를 지켜본 강수진 감독은 살짝 예민해 보였다. 독일에서 온 72세의 트레이너 브론웬 커리와 함께 무용수 한 명 한 명에게 직접 다가가 일일이 보완점을 지시했다. 이번 공연 준비로 여름 휴가도 반납했다는 그는 점심식사도 거른 채 잠시도 쉬지 않 고 분주히 발레단 구석구석을 누볐다. 하지만 “첫 레퍼토리라 긴장 되나”라는 물음엔 “전혀 아니다”라고 단호히 답했다. “이 작품으로 무용수들이 발전하는 게 중요하지, 뭘 보여주고 평가받으려는 게 아니니까요. 모르죠, 이 순수한 마음이 한국에서 어떻게 전해질지. 하지만 이 두 작품은 발레 세상에서 누구도 안무 나 음악을 감히 평할 수 없는 최고의 작품이에요.”

강 감독이 어떤 레퍼토리를 보여줄지 많이 궁금했습니다.

“단원들을 위해 고른 레퍼토리에요. 이걸 소화해내면 다른 수준으 로 올라가리라 믿으니까요. 색다른 스타일이고 굉장히 파워풀한 작품이라 연습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어요. 클래식 전막 공연은 한 사람 때문에 망치지 않지만 이 두 작품은 한 사람이라도 실력이 없 으면 안 돼요. 그래서 실력 있는 발레단에만 허락하죠. 허락해준 분 들은 나를 믿고, 나는 우리 국립발레단을 믿기 때문에 가져온 작품 들이에요.” 우리 관객에게 낯선 무대인데 살짝 소개한다면.

“베토벤 ‘7번 교향곡’은 음악 천재로 불렸던 안무가의 작품이에요. 무용수들의 몸이 그대로 악기가 되고, 움직임 자체가 악보가 되는 걸 느낄 수 있죠.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은 반대로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남자 무용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파 워풀해야 하니 이 작품을 하고 나면 모두 헤라클레스가 되죠.” 두 작품이 곧잘 같이 공연되나요.

“두 작품을 묶겠다고 하니 독일에서도 깜짝 놀라요. ‘무용수들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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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겠네’라면서. 힘들어도 끝내고 나면 자기 만족이 어마어마할 거 에요. 땀 흘리고 에너지 쏟은 후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그 느낌 때 문에 무용을 하는 거니까.” 우리 관객은 고전 발레나 드라마 발레를 좋아하죠.

“클래식을 좋아하는 건 취향이고, 거기에 대해서 뭐라 말할 순 없 죠. 하지만 치킨 샐러드를 좋아한다고 30년 동안 그것만 주면 몸에 좋지 않아요. 이런 작품도 있다고 소개하는 게 관객에 대한 의무라 생각해요. 클래식만 하면 우리도 편하지만 그래선 문화가 발전할 수 없어요. 단원과 관객이 같이 발전할 수 있는 작품을 계속 들여올 거에요.” 한국 발레는 아직 러시아 고전 위주인데, 외국 발레단은 어떤가요.

“큰 발레단은 다 해요. 고전만 하면 망하죠. 관객들 취향이 다양하 거든요. 고전이 베이스인 건 분명해요. 베이스가 돼야 다른 테크닉 도 소화하죠. 한국은 클래식 기초가 탄탄한데, 21세기 무용수는 많이 배워야 해요. 21세기 발레단은 모든 작품들을 다 소화할 수 있어야 퍼스트 클래스로 인정받죠. 러시아, 프랑스 어느 나라든지 머리가 깨질 정도로 다양한 스타일을 흡수하고 있어요. 우리도 내 년 라인업에 고전·스토리 발레·모던 발레 다 넣었어요.” 한국 발레에 창작 레퍼토리가 절실한데요.

“내년에는 단원들이 직접 안무해 보는 창작 이브닝도 계획중이에 요. 좋은 안무가로 탄생할 기회를 주는 거죠. 하지만 서두르면 안 돼요. 아무리 고디바 초콜릿을 갖다줘도 한꺼번에 왕창 먹으면 살 만 찌고 좋은 줄 모르듯, 퀄리티를 높일 시간이 필요하죠. 우리 피 속에 ‘빨리빨리’ 서두르는 성향이 있는데, 사실 우리가 못하는 게 없어요. 경제나 문화나 푸시를 많이 하는데, 결코 서두를 필요가 없 죠. 바깥에서 보는 결과만을 위해 눌려서 하는 건 좋지 않아요. 꾸 준히 간다는 게 중요하죠. 좀 늦더라도 100퍼센트 할 수 있는 상태 에서 힘을 모을 때 엄청난 에너지가 나올 거라 믿어요.” 무엇을 물어도 그의 답변은 ‘단원들’로 마무리됐다. 그만큼 온 신경이 단원들에게 집중돼 있고 단원들과의 스킨십을 소중히 하는 모습이었다. 이동 중에 부상으로 몇 달째 쉬고 있는 수석무용 수 이동훈을 만나자 안부를 챙기며 “우리 동훈씨가 이제 연습을 다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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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에서 주역을 맡은 국립발레단원들과 함께 한 강수진 감독.

시 시작했어요. 응원 좀 많이 해주세요”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느꼈어요. 흥미를 느낀 유일한 게 발레였고, 이제 내 선택으로 예술

“저는 단원들이 너무 존경스러워요. 예술이 없으면 슬플 거에

감독이 됐으니 나 이전에 발레단이 중요해요. 처음부터 확실했어요.

요. 이 각박한 사회에서 순수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잖아요. 예전엔

내 임기 동안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게 목표죠. 재미를 느끼면 그것만

보통이었던 느낌들이 이제 너무 귀해졌어요. 파트너랑 손잡고 땀

하고 싶어지지 않나요. 단원들도 그 기분을 알게 해주고 싶어요.”

흘려가는…. 그게 보통 사는 모습이었는데 이제 무용수에게나 가

너무 교과서적인 삶 아닌가요.

능한 일이죠. 다행히도 무용수라서 감사해요. 부대끼면서 서로 존

“더도 덜도 아니고 이게 그냥 내 삶이에요.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

중하는 자체가 아름답고, 숨 쉬는 이 느낌을 함께 하는 단원들이

되는 건 아니죠. 나는 좋아서 하는 거고. 내가 강해 보이는 건 그만

사랑스러워요.”

큼 죽도록 고생했기 때문이에요. 근데 거기에 감사하죠. 나의 가장 큰 장점이 단순하다는 거에요. 절대 복잡하게 생각 안 해요. 힘들고

30여 년만의 서울 생활에 적응이 잘 되나요.

“한국이 많이 변했어요. 모든 걸 디지털에 의존해 사는 것이 예술

죽고 싶은 날도 있지만 그 다음날 또 살아보는 거죠. 그 결과 지금

쪽에는 마이너스인 거 같아요. 유럽은 오히려 슬로로 가도록 자제

의 내가 있어요.”

하면서 인간성이 한꺼번에 없어지는 걸 경계하는데 우리는 너무

그는 얼마 전 2016년 7월 22일을 공식 은퇴 일로 정했다. 은퇴

빨리 가려 하죠. 예술 안에선 슬로로 가는 느낌이 좋아요. 바깥 세

작품은 ‘오네긴’. 무용수로서의 무대가 내년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상에선 기계적으로 사는 느낌이 들어 착잡한데 극장에 발 들여놓

의 내한공연과 은퇴 공연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갈수록 느는 작

는 순간 마음이 편해져요. 한국인만이 가진 특별한 정이 예술 안에

품이라 ‘오네긴’을 택했어요. 테크닉을 넘어 나이가 들어도 보여줄

서는 유지되는 것 같아서요. 우리는 순수한 영혼이 없으면 표현이

수 있는 게 많거든요. 은퇴작으로 가장 완벽한 작품이죠.”

안되니까. 후배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체가 행복이란 걸 새삼 느끼 고 있어요.”

은퇴 시점을 못박고 나니 아쉽지 않을까. 역시나 단호하게 고 개를 젓는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보세요. 난 오늘 죽어도 돼요. 오늘까지 제 삶, 요만큼도 후회 없어요. 실수에 대해서도 전혀 후회

여름 내내 휴가도 안 가고 뭐 했느냐 물으니 “일했다”고 간단

없어요. 실수가 없었으면 배우지 못했을 테니까요.”

히 답한다. 살면서 한 번도 휴가를 가본 일이 없고, 지금은 적응하

삼단같이 검은 머리, 나이를 잊은 외모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

는 단계라 무조건 발레단에 집중해야 한단다. 조금이라도 단원들

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찬 대답만 하는 이 사람, 문득 진짜 사람

에게 시간을 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인가 싶었다. 혹시 흰 머리도 안 생기느냐 물으니 정수리에 새치가

“전 놀 줄 몰라요. 놀아보지 않은 건 아니죠. 하지만 흥미를 못 ●

많아 꾸준히 염색을 하고 있단다. 왠지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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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7번’과 ‘봄의 제전’은 이런 작품

1부 우베 숄츠의 ‘교향곡 7번’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안무가였던 우베 숄츠가 베토벤 ‘교향곡 7번 A장 조’에 영감을 받아 안무한 작품. 숄츠는 20세기 무용사에서 ‘교향곡 발 레’ 장르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무용수들을 음표와 악기처럼 활용해 무 용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네 © 사진작가 최시내

오 클래식 스타일로 고전발레 테크닉이 대부분 포함되지만 형식을 해체 하고 신체 움직임 자체에 비중을 두고 있다. 수석무용수 김지영·김현웅· 이재우·이은원 등이 나선다. 국립발레단 관계자는 “발레 문외한도 각 무용수가 어떤 악기를 표현하는지 눈에 보일 것”이라며 “음악을 어떻게 춤으로 표현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관전 포인트”라고 귀띔했다

‘그림자 외조’하는 강수진 남편 ‘봄의 제전’ 연습실에서는 강 감독의 남편 툰치 소 크멘(54)도 나란히 앉아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었 다. 슈투트가르트 무용수 출신으로 은퇴 후 독일 에서 공연기획사를 운영하던 그는 강 감독이 국립 발레단장직을 수락하자 함께 내한, 발레단에서 무 보수 객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 감독은 최근 발간된 문화예술가 사진집 『동행 33』에서 남편에 대한 애정어린 소회를 담아

2부 글렌 테틀리 ‘봄의 제전’ 이제껏 국립발레단에서 볼 수 없었던 본격 컨템포러리 작품. 토슈즈도

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내 인생의 전환점은 발레

신지 않고 현대 무용과 같은 격렬한 움직임이 시종일관 이어지는 역동

단 경력이 꽃피웠을 때가 아니라 남편을 만났을 때”

적이고 감정적인 무대다.

라며 남편을 “사막 같은 삶 속에 나타난 오아시스”

1913년 니진스키 이후 다양한 버전으로 제작되어 온 ‘봄의 제전’은 봄

라고 표현했다. 남편으로서는 물론 전천후 요리사

의 신을 예찬하기 위해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슬라브족의 원시적인 제

이자 엄격한 매니저로서 하루 24시간 강 감독을

전을 형상화한 무용이지만, 글렌 테틀리 버전은 ‘슬라브족’의 이미지를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있는 소크멘은 오른쪽 팔뚝

탈피해 보편적 인류가 경험하는 봄의 태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 주

에 ‘수진’이라는 두 글자를 문신으로 새겼다. ‘몸

인공 ‘제물’도 처녀가 아닌 청년이다. 봄을 맞는 경외감, 공포 등 무용수

과 마음에 항상 수진을 갖고 산다’는 의미란다.

들이 온몸으로 표현하는 원초적 감정에 몰입하는 것이 관전 포인트. 김

“부부가 오래 같이 있으면 권태기도 오고 대화

윤식·신혜진·전호진·정은영 등 신예들의 파격적인 캐스팅이 눈길을 끈

도 적어진다지만, 우리 부부는 24시간 내내 붙어있

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으로 글렌 테틀리 레거시 트

어도 감동과 재미가 샘솟는다”는 강 감독은 “발레

레이너로 활동중인 알렉산더 자이체프도 ‘제물’역으로 출연한다.

를 하지 않았어도 그를 만났을 것”이라며 “그것이 운명이기때문”이라고 남편에 대한 애틋함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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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레드 히치콕(1899~1980) 감독은 영국과 미국

(1899~1982이하 알마)은 히치콕보다 5년 앞서 영

이어서 촬영된 ‘산독수리’를 함께 끝내고 영

에서 총 50여 편이 넘는 장편을 연출했으며, 초기

화계에 입문한 선배였다. 알마는 편집실에서 일을

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이 배를 흔들었는데,

무성영화와 컬러영화 시대까지 두루 경험하며 영

돕는 것 외에도 스크립트를 담당하거나 시나리오

알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침상에서

화사의 절반을 넘게 쓴 인물이다.

수정 집필도 했다. 편집기사와 시나리오 편집자 역

발작적으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릴 때, 객실

할을 한 셈이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히치가 들어왔어

그 의 이 름 에 서 따 온 ‘ 히치 콕 키언 (Hitchcockian)’이라는 단어는 공포감과 긴장을

히치콕은 ‘여자 대 여자’의 조감독과 시나리

자아내는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뉘앙스를 품고

오 작가에다 미술감독까지 겸하는 상황이 오자 도

있다. 어떤 이는 히치콕을 ‘사이코’로 대변되는 공

움을 청하기 위해 퇴사한 알마에게 전화를 건다.

이 일화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으나, 중요한

포물의 대가로 이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옥수수

이즐링턴에서 함께 일한 적은 있지만 같은 작품에

건 히치콕의 로맨스 영화에서는 늘 풍랑이나 폭풍

밭에서 비행기가 엄습하는 스릴러의 긴장감을 떠

서 호흡을 맞춘 것은 처음이었다.

같은 위험한 환경이 바로 연인들을 맺어주는 핵심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히치콕의 가장 오랜 관심사

요.” 그리고 히치콕이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 요?”

요소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해외특파원’과 ‘구명

중에 ‘히치콕적인’ 것에 포함되지 않은 요소가 있

위험한 환경에서 탄생하는 연인들

선’에는 바다 위에서의 청혼이 등장하고, ‘리치 앤

다. 그것은 히치콕의 영화가 남녀 ‘로맨스’의 모험

첫 연출작 ‘쾌락의 정원’의 촬영이 1925년 5월에

스트레인지’, ‘찢어진 커튼’에도 선상 로맨스가 등

을 즐겨 다뤘다는 점이다.

시작됐다. 초보 감독 히치콕은 당대 인기 여배우였

장한다. 특히 ‘리치 앤 스트레인지’는 히치콕 부부

히치콕은 런던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1920

던 버지니아 발리를 바라볼 때 식은땀을 흘리기도

의 진짜 로맨스에 기초한 영화이기도 했다.

년 영화사에 입사해 자막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했다. “그녀에게 연기를 지시할 때는 너무 겁이 났

바다와 폭풍우를 벗어나면 위기에 처한 연인

그러다 곧 미술감독을 맡게 되었고, 어느새 시나리

습니다. 내 미래의 아내에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들이 커플로 맺어지는 순간은 ‘39계단’, ‘북북서로

오 작가와 조감독을 오가며 직접 연출까지 하게 된

지를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릅니다.”

진로를 돌려라’, ‘이창’, ‘새’에서도 반복된다. 영화

촬영이 끝날 때마다 히치콕은 매번 알마에게

속 주인공들처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히치콕과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알마가 고개를 끄덕이면,

알마는 26년 12월 2일 런던 브롬튼 성당에서 결혼

비로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서약을 했다.

다. 영화사에서 미술감독이 연출작가가 된 경우는 드물다. 이 무렵 히치콕의 눈을 사로잡은 알마 레빌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3> 감독 히치콕과 부인 알마 레빌

부인이 OK해야 다음 장면 찍었던 초보 감독 히치콕

감독 히치콕과 부인 알마 레빌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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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현장 이끌던 부인 알마의 존재감

랑 왜 온종일 붙어 다녀?” 히치콕의 신경질에 알마

에는 처벌과 광기가 도사린다. 영화 속 히치콕은

그런데 위기에서 맺어진 커플은 결혼 후에는 어떻

가 분노에 찬 대답을 한다. “지난 30년간 당신의 모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이 작품에서 눈을 떼지

게 변할까? 히치콕이 TV와 영화를 오가며 전성기

든 영화에 그랬듯이 첫 시사 때마다 당신은 내 의

못하잖아!”

를 누리던 1960년에 완성한 ‘사이코’의 현장은 이

견을 물었고 평이 좋으면 함께 웃고 나쁘면 함께 울

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사차 제바시 감독이 2012

었죠. (…) 사람들 눈에 보이는 건 오직 위대한 천재

결혼 생활에 대한 불안이 영화로

년 선보인 영화 ‘히치콕’은 스티븐 레벨로가 쓴

앨프레드 히치콕뿐이니까! 그런데 수십 년 만에

알마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제작한 히치콕의 영

『히치콕과 사이코』를 원작 삼아 ‘사이코’ 제작 당

처음으로 히치콕의 작품이 아닌 딴 작품을 한다고

화들은 처음부터 결혼생활에 대한 불안을 깔기

시의 히치콕 부부를 등장시킨다(히치콕 역에는 앤

당신한테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해요? (…) 잊었나 본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다이얼 M을 돌려라’는 아내

서니 홉킨스, 알마 역에는 헬렌 미렌, 그리고 야심

데, 난 당신 아내 알마 레빌이에요. 당신이 그 ‘독특

가 옛 동창이자 추리소설가인 마크와 사랑에 빠지

작’사이코’의 여주인공인 자넷 리 역은 스칼렛 요

한’ 연기 지도로 괴롭히는 금발 여배우가 아니라

고 사업조차 곤경에 처하자 아내의 유산을 노리고

한슨이 맡았다).

고!”

청부살인을 계획하는 남편을 묘사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제작기가 아니라 히치콕 부

영화 ‘히치콕’은 히치콕을 대신해 현장을 지

물론 ‘사이코’의 마리온처럼 여주인공을 난

부의 미묘한 감정싸움이 테마다. 히치콕은 알마에

휘하는 알마 레빌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그녀야말

도질하는 경우는 드물기는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게 접근하는 멋진 중년 시나리오 작가 휘트를 경

로 히치콕의 진정한 숨은 작가였고 히어로였다. 하

진정한 충격은 난도질이 아니라, 여주인공이 시체

계하는 한편, 새로운 영화 ‘사이코’를 제작하겠다

지만 최대 히트작 ‘사이코’는 결혼생활에 혐오를

로 변해 중반부 이후론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 선언한다. 여배우를 물색하던 히치콕은 자넷 리

느끼는 한 정신이상자의 엽기행각과 불륜과 권태

그것이야말로 위기를 극복한 모험가 커플조차 피

를 만나 은근히 추임새를 던지고, 알마는 그런 히

를 둘러싼 히치콕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된 작

해갈 수 없었던 진정한 불화의 판타지이자, 히치콕

치콕의 태도에 신경질을 내며 화장실로 달려간다.

품이다. 시작은 샘과 희생자 마리온이 대낮에 호

이 탐구했던 중년의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영화 ‘히치콕’은 거장 부부의 뒷모습과 권태에 빠

텔에서 은밀하게 만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들의

진 일반 부부의 현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은 살인마 노먼이 거주하는 베

“당신, 휘트랑 바람피워? 그 재능 없는 머저리

이츠 모텔로 이어진다.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 뒤

영화 ‘히치콕’

S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 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 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FOCUS

최욱의 작품. 문의 형태가 열고 닫는 행동과 시야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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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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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지기 기획전 ‘소통하는 경계, 門’전을 가다

낯설게 보고 새롭게 봤더니 새로운 문이 활짝

흔히 이중적 속성을 지닌 자를 ‘야누스’라 한다. 야누스는 로마 신화에서 문(門)의 수호신으로, 앞뒤로 향한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된 다. 고대 로마인들은 문에 앞뒤가 없다고 생각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실 문은 ‘두 개의 얼굴’만이 아니라 그 성질 자체가 대조적이다. 생명체로 치자면 암수동체다. 행동에서는 열었다 닫는 것이요, 상태로 보면 트였 다 막힌다. 공간과 공간을 구분 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되, 그 쓰임은 경계를 건너려는 통로에 둔다. 10월 8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리는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의 기획전시 ‘소통하는 경계, 문門’은 이런 문의 속성을 새롭게 조명해 보는 행사다. 아름지기는 2004년부터 매년 의식주와 관련된 전통문화 중 하나를 골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벌여왔는데, 올해는 네 번째 주 (住)생활 전시로 ‘문’에 주목했다. 재단 측은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문을 통과하면서 공간과 공간의 경계에 서 있다. 무의식적으로 겪는 일이지만 그 경계들과 소통 속에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로 전시의 의미를 피력했다. 이번 행사에는 전통건축 전문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이 함께 참여해 전통 부문 한 섹션과, 현대 부문 두 섹션을 꾸몄다. 그들은 뻔하게 여겨지던 문 을 낯설게 보고, 달리 생각하고, 새롭게 바꿔 놓았다. 과거와 미래의 문은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었다. 수많은 문의 얼굴들이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 들었다.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아름지기 S


FOCUS

여닫는 방식도 소재도 새롭게

재활용 합판을 붙이는 방식이다. ‘디자인한 것도

서울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1층에 들어서면 하얀

디자인하지 않은 것만 못할 수 있다’는 기발한 생

천이 천장부터 드리워져 시선을 압도한다. 동선이

각으로 재료 고유의 느낌을 살렸다.

없어도 자연스레 ‘문이 어디 있는지’를 찾게 되는

네임리스 건축(나은중, 유소래)팀은 ‘보일 듯

상황이다. 전시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 제법

말 듯한’ 전통 문의 경계성을 재해석했다. 창호지

그럴듯하다.

의 반투명성과 격자 나무살에서 모티브를 얻어 반

‘건축가의 문’이라 명명한 이 섹션은 건축가 4

투명 실리콘으로 문을 만들어냈다. 닫힌 상태에서

개 팀이 참여해 저마다 ‘문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도 빛과 실루엣이 전달되는 문의 소통력이 전해지

펼쳐냈다. 아파트라는 획일화된 주거 문화에서 당

는 아이디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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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히 문도 판에 박힌 모양일 수 밖에 없다는 현실 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다.

동궐도 속 문을 현대적으로 해석

가장 먼저 마주하는 문은 최욱(ONE O ONE

야외인 2층 전시 마당으로 올라오면 두 번째 섹션

Architects)의 작품이다. 그 모양새가 특이해서

‘동궐도에서 다시 찾은 잊혀진 경계들’이 펼쳐진다.

어떻게 열어야 하나 잠시 생각하게 된다. 양쪽 문

‘동궐도’란 창덕궁과 창경궁의 19세기 초반의 모습

짝 중 한쪽에는 꼭대기에서 중간까지 나무 봉 손

을 담은 그림.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의 전문가들

잡이가 달려 있다.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내보니 자

이 이를 바탕으로 현대에 보기 힘든 다양한 문의

연스럽게 열린다. 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진짜 재밋거리는 반대쪽에 있다. 나무 손잡이

순서다. 바로 계단 끝에 동궐도를 재현한 ‘취병’과

봉이 문짝 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옆이 아닌 앞뒤로

‘취병문’이 자리한다. ‘취병’이란 관목류나 덩굴성

밀게 돼 있다. 힘을 줘 보면 반전이 나타난다. 문과

식물 등을 심고 가지를 틀어 올려 병풍모양으로 만

직각으로 마주한 벽까지 움직인다. 벽이 문이고,

든 울타리, 취병문은 이와 연결된 문을 말한다. 이

문이 벽이다. 열고 닫는 동작과 구조를 달리한 문.

들은 안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들어갈 수는 없는

우리의 행동을, 공간의 풍경을 바꿔 놓는다.

오묘한 경계를 만들어낸다. 본래 울타리 골격은 대

최문규(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가 작업한

나무로 만들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철제 강관을 이

두 번째 문 역시 발상의 전환이 돋보인다. 언뜻 보

용했고, 또 현장에서 조립이 가능하도록 현대화를

면 평범하다. 하얀 문짝에 흔히 보는 동그란 철제

꾀했다.

손잡이가 달려 있다. 하지만 열고 들어오는 순간

마당 한가운데 설치된 ‘이문(二門)’ 역시 새

알게 된다. 문은 마치 납작한 직육면체로 변해 있

롭기는 마찬가지다. 높고 낮은 두 문이 나란히 한

다. 게다가 반대쪽 문짝은 흑빛, 손잡이도 직각의

쌍을 이루는 ‘이문’은 문의 이중성을 다시금 일깨

모양이다. “크기도 색도 재료도 다른 문을 통해 문

워준다. 높은 문으로는 왕족이, 낮은 문으로는 궁

의 안과 밖이 정말로 다른 세계인 것 같은 문을 만

인들이 출입했다는 추측이 지배적인데, 높은 문

들고자 했다”는 작가의 제작 의도에 고개가 끄덕

은 문짝을 달아 줄곧 닫혀 있지만 낮은 문은 문짝

여진다.

없이 휘장을 쳐서 줄곧 열려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다른 문을 만들었지만 재료가 독특하다. 나무 각

다른 소재와 형태로 만든 최문규의 작품.

2층으로 올라오자마자 뒤를 돌아보는 것이

은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서다.

조병수(BCHO Architects) 역시 안과 밖이

문의 양면을

재활용 건축 자재를 활용한 조병수의 작품.

이문은 거의 닫혀 있고, 거의 열려 있는 문을 나란 히 배치해 그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문과 연결된 ‘판장’은 일종의 이동식 파티

재 위 한쪽에는 재활용 골강판을, 다른 한쪽에는 ●

불투명한 실리콘을 이용해 창호지의 느낌을 낸 네임리스 건축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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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적으로 공간을 분리시키기 위해 쓰였던 판장과 판문. 전통 기법과 달리 상부를 나무살로 처리해 안과 밖이 통하도록 했다.

션이다. 궁궐 영역 내부를 구획하기 위해 가변적으 로 설치됐기에 경계의 가벼움을 대변해 준다. 그리 고 그 경계에 ‘판문’이 결합돼 있다. 이번 작업에서 는 전통 방식과 달리 판장 상부를 살로 제작해 밖 이 보이도록 해 숨통을 트이게 한 것이 특징이다. 마당을 가로질러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디자이너들의 감성이 돋보이는 ‘제 3의 문’이 관람객을 반긴다. 이 섹션은 공예 디자이너 최정유 와 산업 디자이너 김종환이 현대 생활방식에 유용 한 또 다른 문을 제안하는 코너다. 최씨의 경우 아시아 각국의 전통 공예를 현 대화하는 ‘아시아 공예디자인 프로젝트’ 참가자 중 하나. 그래서 이번에도 베트남 호이안에서 영감 을 받은 색과 이미지, 그곳만의 재료와 제작기법을 활용한 오브제를 만들었다. 공간과 공간의 심리적 경계를 흐리하게 만드는 핸드페인팅 기법의 실크 발, 골풀이라는 현지 소재로 만든 매트와 바구니 등은 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생활 소품으로 제시 된다. 김씨는 산업 디자이너답게 가격과 생산성, 실 용성 등을 염두에 두고 현관문 방충망을 제안한 다. 한복 안감으로 쓰이는 노방을 이용하면서 조각 보 문양을 방충망에 옮겼다. 드나듦에 불편함이 없도록 가운데를 잘라 자석으로 탈부착시킨 아이 디어 역시 돋보인다. 숫자가 아닌 이름을 새긴 문패 는 문 고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 이다.

문의 높낮이와

일상에서 문 대신 활용할 수 있는 발과 방충망.

개폐 형식이 서로 다른 이문.

최정유·김종환 디자이너의 작품들이다.

S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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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설만산(積雪滿山)’, 지본, 27 x 22.9 cm. 추사 난법(蘭法)의 요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가을 추사를 만나는 기쁨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87회 정기전 주제는 ‘추사정화(秋史精華)’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주인공이다. ‘추사체’가 어 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장대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을 따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서화 세계 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진시황의 ‘태산각석(泰山刻石)’ 연구에까지 이른다. 그 과정에서 나온 정수가 바로 추사체인 것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부설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은 “여간한 천재성과 열성적인 노력이 아니고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주문”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는 줄을 서는 대신 인터넷(www.kansong.org) 혹은 전화로 예약해야 볼 수 있다. 내년에는 리모델링 공사로 1년간 문을 닫 을 예정이다. 무료. 글 정형모 기자, 사진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 87회 정기전 10월 12∼26일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070-7774-2523, 070-4217-2524 ●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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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5>ASIA와 亞細亞

‘아시아’라는 말의 기원 3000년 전 설형문자에 기록 본래 뜻은 ‘비유럽’인데 

막판에 북한의 벼락 손님들까지 방문

“저는 한자말 ‘亞細亞’를 영어로

해 화제가 된 아시안 게임으로 이야기

표기한 것이 ASIA인줄 알았습니다.”

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에도 의외의

“그 반대지. 마테오 리치

질문이 돌아왔다. “정 부장, 아시아란

(1552~1610)가 선교사로 중국에 와 있

말이 무언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을 때 한자말로 번역한 것이지. 서양 사

아시아. 영어로 Asia. 한자로는 亞

람들이 이름 붙여주고 애프터서비스까

細亞. 그 이상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대

지 한 셈이야.”

답을 하지 못했다. 변명이 아니라 다들

유럽을 구라파(歐羅巴)로, 우리가

그랬을 것이다. 지구촌 인구의 65%를

지금도 사용하는 기하(幾何)란 말도

차지하는 아시아인 중 인천 아시안 게

그가 다 번역한 한자어란 것이다.

임이 열리는 동안 아시아란 말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 뜻이 무엇인 지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정 부장. 아세아라는 말에는 ‘가늘 세(細)’자가 들어 있는데 대명이든 대청이든 대(大)자 좋아하는 그들이 그걸 자기

“아시아라는 말은 기원전 3000년 설형문자에도 찍혀 있었지.”

네들 사는 땅 이름이라고 생각했겠어? 아세아라는 오랑캐 땅의

“그렇게 오래됐나요?”

서양 이름으로 알았겠지. 거기다 일본 사람들 역시 근대화를 하면

“아카드(Akkad)말의 아슈(ASU)는 해가 뜨는 동쪽 땅을

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으니 그들에게도 아시아란 없지.

의미하는 말이었어. 그게 그리스로 흘러들어가 아시아란 말이 됐지. 해가 지는 서쪽 땅은 에레브(EREBU)야. 그게 오늘의 유럽 (Europe)이 된 것이고.”

침략 대상으로의 대동아가 있었을 뿐이지.” 결국 아시아란 말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럽 땅을 제외한 모 든 지역을 두루뭉수리로 확대 재생산한 말이니 아시아인의 정체

놀라워하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렇 게 말한다.

성이 생길 리 만무하다. 아시아는 유럽인의 가슴과 머리에만 있고 막상 아시아인의 염통에는 없는 말인 셈이다. 기자 본능으로 한국

“별거 아냐. 구글에 들어가 몇 초만 두드리면 다 나와. 당장 쳐 봐요. 헤카타이오스(Hecataios)라고, 왜 그리스의 유명한 지리학 자이자 여행가 있잖아. 화상검색도 해봐요. 옛날 지도가 나올테니.”

의 메달 수만 셈하던 머릿속에 또 다시 벼락이 떨어진다. “정 부장, 비행기 몰 줄 알아?. 나침판 바늘을 동남아 방향으 로 놓고 날아가 봐. 타이가 아니라 타히티가 나올 걸.”

정말이다. 2300년 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세

이번엔 웃음 대신 부아가 치밀었다. 한국에서 보면 동남아는

계 지도를 복원한 그림이다<사진>.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위에

분명 서남쪽에 있는데 왜 동남아라고 불러야 했나. 스포츠란 것도

는 ‘EUROPE’ 아래에는 ‘ASIA’라는 말이 선명하다. 유럽과 아

따지고보면 희랍에서 온 것이 아닌가.

시아를 동서가 아니라 남북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 다를 뿐이다. ‘LIBYA’란 말도 나와 있다. 아프리카 대륙일 것이다.

룩(Look) 아시아!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신의 높이 뛰기, 기술의 빨리 뛰기, 부정의 장애물 넘기-.

아, 그 옛날부터 이 지구에 유럽과 대치되는 아시아라는 것이

“이 경주에서 이기려면 젊은이들이 독수리의 눈과 개미의 눈

있어 왔구나. 그런데 아시아인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다.

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해. 우리가 무심히 쓰고 있는 작은 단어

그들이 그렇게 부르고 멋대로 말뜻을 확장해 오늘의 아시안 게임

하나에도 앞으로 우리의 운명이 걸릴 수 있거든.” 이 교수의 결론

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이었다.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위키피디아 S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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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3> 전진현의 공감각 숟가락

미각 뒤덮는 촉각 숟가락이 이토록 에로틱했나

살다 보니 내게도 TV에 출연할 기회가 주어졌다. 디자인과 예술을 아우르는 토크 프로 ‘디어헌터’

는 상태를 공감각(Synesthesia)이라 이해하자. 전진현(33)이란 디자이너가 만든 숟가락은 출

의 공동패널이 몫이다. 미녀 도예가와 세상이 다

연자 모두를 경악케 했다. 음식을 뜨기 위해 쓰는

아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디자인 잡학다신으로 불

숟가락에 움푹 패인 부분이 없다. 꼬리를 단 듯한

리는 평론가와 함께 펼치는 입담의 재미는 쏠쏠했

손잡이에 달린 둥그런 공이 전부다. 남성의 정자

다. 더 재미있는 일은 프로를 진행하며 만났던 이

혹은 여성용 성인 용품인 딜도를 연상시키는 물건

들이다. 도대체 이런 디자인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숟가락이란다. 그나마 움푹한 것은 입속을 매끄

감탄은 당연하다. 이전에 없던 새로움을 만들어내

럽게 드나들어야 할 표면에 껄끄러운 돌기를 달았

는 아티스트들로 세상은 풍요로워진다.

다. 바닥엔 기괴한 굴곡까지 있다. 눈앞에 놓인 숟

추위로 벌벌 떨며 녹화한 날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물건을 만났다. 공감각 숟가락이다. 숟가락을

가락들은 엽기, 변태 성향의 인간들이 쓰는 의식 용품 같았다.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비아냥거리지 말기 바란다. 공감각이란 단어의 뜻을 먼저 알아두는 게 예의다.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인간은 독립적이면서 서로 연결된 감각을 지녔다.

내용을 모르고 디자이너가 열심히 만든 작품을 엽

음악을 들으면 풍경이 연상되고 살갗의 감촉이 엉뚱

기와 변태로 오해하면 실례다. 직접 사용해 보기로

하게 음식의 맛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떠올려 보라.

했다. 공 모양의 숟가락은 꿀 같은 찐득한 액체를

한 감각의 자극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고 확장되

묻혀 빨아먹는 용도다. 한 입 가득 물린 숟가락은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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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한 감촉으로 입천장, 입술과 치아의 안쪽을 농

각이나 후각이 예민해 진다. 모든 인간이 원래부

락했다. 쭉쭉 빨면 빨수록 입안은 에로틱한 자극

터 가지고 있었던 감각의 상호보완 능력이다. 아이

으로 넘쳤다. 아니다. 어머니의 젖꼭지를 입안 가득

들은 눈을 감고도 온몸으로 느낀다. 본연의 공감각

히 물고 오물대며 젖을 빨던 어린 시절의 충족감이

이 활성화된 상태인 까닭이다. 커 가며 인위적 생활

다. 지금까지 왜? 숟가락을 떠먹는 데만 사용했을

습관으로 필요한 감각만을 사용하게 된다. 쓰지

까. 이상한 반성은 자연스럽다.

않는 더 많은 부분은 당연히 퇴화되게 마련이다.

또 다른 숟가락으로 국물을 퍼먹어 보았다.

공감각 숟가락은 먹는 것에 집중되어 가려진

끝 부분을 둔덕으로 처리했다. 솟아오른 만큼 용

촉각을 부활시켰다. 밥 퍼먹는 도구에 머물렀던 기

적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가득 채워도 다 차지 않

능을 뒤집어 스스로 감각의 대상이 되고 다른 자

는 숟가락은 대신 입속에 더 오래 머문다. 둔덕이

극을 전하는 메신저가 된다. 이들 숟가락은 낯설고

장애물로 변해 숟가락이 쉽게 빠지지 않는 탓이다.

때론 불편하며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이전에 없던

국물의 맛이 혀 안에 퍼지는 동안 봉긋한 굴곡은

물건이니 당연할지 모른다. 새로운 디자인은 지금

윗입술의 안쪽과 언저리를 자극한다. 맛과 눌러지

까지 익숙했던 먹는다는 행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는 압각의 동시 반응은 의외로 신선하다. 국물을

주문한다.

퍼먹는 내내 입술은 낯선 감촉과 질감으로 색다른 놀이를 벌이는 중이다. 이제 먹는 즐거움은 미각만

“호기심으로, 다르게 생각했을 뿐”

으로 모자란다.

전진현을 만났다. 당찬 젊은이의 총기는 대단했다.

숟가락 자루도 둥근 것, 불룩한 것, 움푹 패인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을 자신의 작업으로 옮기는 일

것, 까칠한 것으로 다양하다. 상전이 배부르면 종

이 특기다. “호기심으로 세상을 보라.” “다르게 생

들 배고픈 줄 모르는 법이다. 입이 상전이면 손가락

각하라.” 세상을 앞서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 종이다. 먹는 즐거움에 동참하지 못했던 손가락

공통의 조언이다. 젊은 디자이너는 이 말을 흘려버

은 그동안 억울하게만 살았다. 숟가락 자루는 이제

리지 않았다. 감각의 실체를 알기 위해 스스로 호

사 배려의 몸짓을 취했다. 닿는 부분의 돌기와 움

기심을 향해 다가섰고 익숙함에 의심을 보냈다. 판

푹 패인 홈은 손가락 몫이다. 돌기의 자극과 굴곡

에 박힌 지시와 결과를 예측하고 던지는 명령에 익

의 홈에 닿은 엄지손가락은 잊었던 쾌감의 복원으

숙한 국내에선 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굴

로 강렬해진다. 남자가 잡으면 여자의 그것 같고 여

레를 벗어버린 홀가분함에서 공감각이란 낯선 분

자가 잡으면 남자의 그것 같다. 촉각의 성적 대치

야가 관심으로 떠올랐다.

는 미각의 즐거움을 손가락까지 나누어주는 평등

그것은 인간의 쾌감을 위한 장치가 가장 촘 촘한 나라 네덜란드의 영향이다. 세계에서 마약이

을 실천한다.

합법적으로 인정되고 섹스를 산업으로 발전시킨 입속의 소외된 부분을 자극하는 아이디어

흔치않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프리랜서 디자

인간의 감각에 우열이 있을 수 없다. 형을 형이라

이너로 활약 중인 배경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

환경과 분위기가 인간의 사고를 성장시키는 사례

동의 입장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그동안 보고 듣고

인 때문이다. 한국에서 수줍음을 타던 처녀 디자

피부로 느끼고 냄새 맡고 맛보는 일차적 오감만이

이너가 거리낌 없이 성적 연상이 짙은 공감각 숟가

우선이라 생각했다. 얼굴의 감촉에 가려 소홀했던

락을 만들어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자

목 부분은 버려두어도 되는 것일까. 맛이 중요하다

유로움과 개방성의 힘이다. 스스로 피실험자가 되

면 혀 이외의 입천장과 잇몸, 입술은 왜 배려하지

어 내면의 감각을 일깨우고 적용했던 시간의 결과

못했을까. 수 없이 잠자리에 들면서 허벅지와 무릎,

물은 훌륭했다. 곧 세계의 사람들이 전진현의 숟

등 부분은 왜 무시하고 내버려 두었을까. 주워온

가락을 입에 물고 쭉쭉 빠는 일상의 모습을 보게

자식 취급했던 나머지 감촉도 소중한 자식이긴 마

되지 않을까.

찬가지다. 새로운 숟가락은 그동안 묻혀있던 감각 의 회복을 되짚어 보게 했다. 눈을 가리면 보이지 않아 불편하다. 대신 촉 S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 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PEOPLE

24

진 최 작가는 지금까지 주로 공연 사진을 찍어왔다. 집과 현장에서 항상 사진 이야기를 나누던 모 녀가 “같은 길을 걸어가는 다른 가족들의 모습을 찍어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은 그래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분 야별로 배분하는 일이 그랬고, 부부·형제자매·부 모자식으로 구분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일 정이 안 맞고 가까스로 맞춰 놓아도 ‘펑크’나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2년 가까이 흘렀다. “모델을 찾아가면 엄마와 제가 사진을 같이 찍 어요. 그리고 좋은 사진을 고르는 방식으로 작업 했죠. 약간 배틀 느낌이랄까? 그런데 현장에서 서 로 의견이 다를 때가 많아요. 그럴 땐 일단 시키는 대로 하고 나중에 제가 하고 싶은걸 찍는게 저만 의 노하우죠.” 그렇게 문화예술계 33가족 78명의 ‘문화 DNA’를 사진으로 해부한 전시가 바로 ‘동행 33’ (10월 7~13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이다. 전시 도록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같은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모 델’들의 다양한 소회가 있어 눈길을 끈다.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은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와의 인연에 대해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 서 만나 오늘까지 62년이나 같이 왔더니 이따금 날 때부터 함께 있은 느낌”이라며 “수레를 같이 끌 며 사는 게 동행”이라고 말한다. 시인 김초혜는 소 설가 조정래와의 ‘동행’에 대해 “같이 가되 한 집 을 둘이 짓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집을 지으면 서 가는 길”이라고 설명한다. 연극연출가 김정옥씨는 딸 김승미 교수(서

‘같은 길 가족’ 사진전 여는 이은주최시내 모녀 각기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한 사진작

울예술대 연극과)에게 “우리의 목적지는 어떤 장

가 이은주(69)·최시내(38) 모녀는 전사(戰士)처럼

소나 지위가 아니라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보였다. 험한 세상에서 서로 등을 기댈 수 있는, 서

며 “너와 더불어 갈 수 있어 더욱 아름다운 광대의

로에게 든든한.

길”이라고 들려준다. 김용란 김안과병원장은 아버

엄마는 노하우로 딸은 감각으로 2년 간 ‘찰칵 궁합’

“이제는 혼자 일하러 가면 솔직히 불안해요.

지 김희수 건양대 총장에게 작은 고백을 한다. 항

아무래도 젊은 애가 준비도 잘하니까 의지하게 되

상 새벽 3시에 일어나 병원 라운딩을 하는 아버지

더라고요. 딸애는 번득이는 감각이 있고 저는 노

를 보고 ‘나이 들어 새벽잠이 없어서 일찍 일어나

하우와 지혜가 있으니 궁합이 잘 맞는 셈이죠.”

시나 보다’라고 생각했다는 것. 하지만 ‘이를 악물

이 작가는 1981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고 일어나 환자들을 보고 병원 시설물들을 점검하

서 사진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래 ‘이은주가 만난

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나중에 듣고 철없

108 문화예술인’(2003), ‘이은주가 만난 부부 이야

는 딸의 무심함을 반성한다.

기’(2008), ‘백남준 5주기 추모전’(2011) 등 선보여

그래서 이 전시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세상 모

온 베테랑.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한민국 문화

든 가족들의 자화상이다. 웃고 울며 지지고 볶으면

예술계를 눈으로, 카메라로 한결같이 지켜봐 왔다.

서도 서로 사랑하는 우리의 얼굴이 그 속에 있다.

2010년 성남아트센터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이은주·최시내 작가


PEOPLE

25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과 딸 김영아 삼성출판박물관 부관장

연극 연출가 김정옥과 딸 김승미 서울예술대 연극과 교수

박기옥 쉼박물관 관장과 딸 남은정 조각가

안숙선 명창과 딸 최영훈 거문고 연주자, 손녀 최수영 해금 연주자, 외손녀 박서영 가야금 연주자

소설가 조정래와 시인 김초혜

S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강인숙 영인문학관 관장



S


TASTE

28

앞줄부터 시계 방향으로 텃만꿍(다진 새우 튀김) , 커무톳(돼지고기 튀김), 똠얌꿍(매운 새우 스프)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45>

옛것과 새로운 것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취향에 따

던 차에 알게 된 곳이 바로 서래마을에 있는 ‘디 안

서래마을 ‘디 안다만’

라 재미있는 여행을 할 수 있다. 물가가 저렴한 편이

다만(The Andaman)’이다. 현지화를 하기는 했

공장 소스 안 써요~ 현지보다 맛있는 한국적인 태국 맛

어서 누구나 그럴듯하게 누리는 여행을 할 수 있고,

지만 그 적정선을 잘 지켜서 정통의 맛을 잃지 않

언제나 사람들의 따뜻한 미소가 반겨주는 곳이다.

은 곳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음식이 아주 맛있다.

이곳은 스위스 호텔학교에서 만난 서른 여

태국은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있는 인도차이

섯 동갑내기 동창생 차성제, 아마릿 아이관니치

나 반도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나라다. 양대 음

(Ammarit Aikwanich) 두 사람이 동업으로 운

식 강국에서 발전된 음식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영하고 있다. 학교 졸업 후 각각 한국과 태국에서

비옥한 평야·바다·고원지대 등에서 풍부하게 나오

직장 생활을 하다가 우리나라에서 함께 태국 음식

는 음식 재료를 바탕으로 다채롭고도 화려한 요리

점 비즈니스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 아마릿씨의

의 세계를 만들었다. 태국 요리는 조리법이 간단한

아버지가 푸켓에서 레스토랑을 오랫동안 운영했

“가장 추천해줄 만한 여행지는 어디인가요?” 자칭

대신 바질·레몬그라스·민트 같은 허브와 라임·마

는데 그 레스토랑의 수석 요리사 중 가장 실력이

타칭 여행 전문가이다 보니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

늘·생강·정향 같은 향신료를 많이 사용해 맛이 다

좋은 두 사람을 초빙해 주방을 맡겼다. 그중 한 사

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은데 어디 딱 한 군데만

양하고 풍성한 것이 특징이다. 사철 더운 나라답게

람은 경력이 무려 40년이 넘은 최고 베테랑이다. 그

고른다는 것은 사실 유명 미인대회 입상자 중에서

맵고, 짜고, 신 자극적인 맛이 중심이 됐다. 처음 먹

리고 2013년 9월 문을 열었다.

누가 가장 예쁜가를 골라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을 때는 맛이 좀 강해서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지

맛있는 음식의 기본은 신선함이다. 이곳에서

다. 다 나름대로 매력이 있으니까.

만 한두 번 지나면 그 이국적인 맛의 향연에 매료

는 냉동하거나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을 쓰는 것이

되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라 신선한 재료를 이용해서 직접 만든다. 음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그 리고 그 지역을 동남아로 한정한다면 가장 먼저 꼽

우리나라에도 태국 식당이 꽤 있는 편이다. 그

에 들어가는 소스도 시중에서 파는 것을 쓰는 것

화려하고 독특한 맛이 그리워질 때면 일부러 찾아

이 아니라 모두 만들어서 사용한다. 그래서인지 소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찾는 여행지 중 하

가곤 한다. 하지만 내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곳은

스의 향은 풍성하고, 음식들은 다 맛이 잘 살아있다.

나여서 약간 식상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태국 본토식이

내가 태국 음식 중 가장 좋아하는 ‘똠얌꿍

태국은 여전히 멋진 곳이다. 오래도록 지켜온 수준

면 맛이 강했고, 너무 한국인 입맛으로 바꾼 음식

(Tom Yam Goong)’을 예로 들어 보자. 새우를

높은 문화와 역사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가 있고,

은 느낌이 약했다. 그 중간 수준이면 좋을 텐데 하

넣고 끓인 매운 스프인데 세계 3대 스프 중 하나로

는 곳이 있다. 바로 태국이다.


29

이도은 기자의 ‘거기’ <3> 가로수길 문어치킨

치킨 깔고 앉은 문어 한마리 자꾸만 손이 가는 색다른 궁합

야외 데크 자리

“2만원 안팎이면 4인 가족의 배가 부르고도(삼

압박이 단점이라

겹살로 4인 가족이 배를 채운다고 생각해 보

면 단점이지만

라), 입맛에 따라 ‘후라이드 반, 양념 반’, ‘간장

일단 3~4명

치킨’,’파닭’, ‘오븐구이’, ‘불닭’을 시킬 수도 있

이라면 크게

다. 조금 비싼 브랜드 치킨도 있지만 요즘은 세

아까 울 일

트 치킨인 ‘두 마리 치킨’ 가게도 많아서 양은

도 아닌 듯싶

걱정할 것 없다. 어른들은 취향에 따라 맥주나

었다. 한 접시에

소주를, 아이들은 콜라를 곁들여 먹을 수 있다. 치킨과 문어 외에 내부 모습

치킨이야말로 끼니-안주-간식의 삼위일체를 이

도 웨지 포테이토와 샐러

룰 수 있는 유일한 메뉴, ‘치느님’이다. 다양한

드가 곁들여서 제법 양이 많기 때문이다.

메뉴 고르기도 귀찮다면 한마디만 외치면 된다. ‘반반 무 많이!’ “

신종 메뉴의 힘은 대단해서 옆자리·앞자 리 둘러봐도 테이블마다 문어 치킨만 보였다.

몇 달 전 출간된 『대한민국 치킨전』중

해산물의 신선도나 문어의 씹히는 맛을 중시하

유명하다. 이곳에서는 코코넛 밀크에 레몬그라스

이 대목을 읽고 무릎을 쳤다. 딱히 닭고기를 좋

는 이들에게는 별로이겠으나, 문어 한 마리를

를 갈아 넣고 라임, 고추 등을 이용해 국물을 직접

아하지 않으면서도 왜 치킨을 자주 먹나 싶었는

가위로 쓱쓱 잘라 칠리 등 3종 소스에 찍어 먹

만든다. 공장에서 만든 파우더를 쓴 것과는 비교

데, 그 이유를 조목조목 밝혀놔서다. 최대 다수

는 색다름에 자꾸 손이 갔다. 카푸치노처럼 거

가 안 될 정도로 맛이 좋고 생생했다. 새우살을 다

의 최대 행복을 고려한 음식이 바로 치킨인 것

품이 올라간 프로즌 맥주는 여기에 안성맞춤이

져서 돼지고기 살과 함께 버무려 튀겨낸 ‘텃만꿍

이다.

었다.

(Tod Mun Goong)’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의 경우에서

게다가 골목길과 맞닿은 야외석은 그야말

러우면서 고소하게 씹히는 감칠맛이 일품이다. 매

다. 멤버는 트렌드에 민감한 여자 넷, 장소는 브

로 왁자지껄한 포장마차나 다를바 없는데(테이

일 재료를 준비해서 만들어 내기 때문에 팔 수 있

런치 식당과 디저트 카페가 몰린 서울 신사동

블·의자도 편의점 앞에 흔히 보이는 플라스틱

는 양이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 신선한 재료를 중요

가로수길, 시간은 그냥 집에 갈 수 없는 금요일

제품들이다) 안주와 술은 프리미엄급이라니-.

하게 여기는 요리사의 철학이 느껴져서 더욱 신뢰

밤-. 치킨의 삼위일체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한 끗’이 다른 치맥은 그런 것이었다.

가 갔다.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모두가 ‘아무데나 좋아’

그날 여자 넷 역시 어렵게 자리를 잡고 나

베테랑 태국인 쉐프가 만들어내는 태국 음

라고 말하지만 ‘특별한 곳을 원해’라는 걸로 이

서는 그 성취감에 겨워 자정을 넘기게 됐다. 목

식을 맛보고 싶은 분이라면, 태국 여행에서의 이국

해하는 사람들끼리 갈 곳은 치맥, 그 이상이어

소리를 높이는 수다는 끝이 없었고, 우스꽝스

적인 음식들이 생각나는 분들이라면 이곳이 좋은

야 했다.

러운 표정으로 때아닌 단체 사진까지 감행했다.

선택이 될 것 같다. 굳이 태국까지 가지 않아도 충

서울 신사동 ‘문어 치킨’은 여기에 해법이

이 모든 것이 ‘불금’을 함께 보내는 동지애가 아

분하다. 아니다… 아마도 공연한 여행 ‘뽐뿌’ 때문

될 만하다. 일단 메뉴의 신선함. ‘문어 치킨’이

니었나 싶다. 하여 ‘오늘 먹을 치킨을 내일로 미

에 태국 생각이 나서 벌써 비행기 표를 알아보려고

대체 뭘까 싶어 주문한 메뉴는 바싹 튀긴 치킨

루지 말자’라는 메뉴판의 글귀에 새삼 눈길이

클릭을 시작한 분들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위에 까무잡잡한 문어 한 마리가 올려져 있었

갔다. 상술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어쩐지 그 말이

▶디 안다만(The Andaman): 서울시 서초구 반포4동 95-12

다. 문어 치킨은 대구에서 시작된 화제의 메뉴

우리의 자발적이고도 집단적인 유흥을 치킨에

전화 02-537-1997. 월요일은 휴일이다.

라는데, 강남역을 시작으로 이제 서울 곳곳에

빗댄 것이 아닌가 내심 찔렸으니 말이다.

푸켓이 안다만 해에 있어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 똠얌꿍 1만

서 인기를 끌고있다. 3만2000원이라는 가격의

dangdol@joongang.co.kr

7000원, 텃만꿍 1만5000원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 대

▶문어치킨: 서울 강남구 신사동 514-4, 02-540-0156, 오후 5시부터 오전 4시까지, 스위트 간장 순살 크리스피 1만

표. yeongjyw@gmail.com

8000원, 바삭 오리지널 크런치 치킨 1만7000원, 프로즌 비어 4000원 S


30

국립오페라단 ‘로미오와 줄리엣’

원근법 살린 무대 르네상스 느낌 물씬

오늘날 좋은 오페라 공연 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출력이다. 가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19세기 전반기까지의 풍토나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에 주목한 다음 시기와 비교하면 극적 인 완성도와 새로운 드라마투르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셈이다. 경험이 풍부한 관객들은 가수와 지휘 자의 이름만큼이나 누가 연출한 프로덕션인가를 고려해서 오페라하우스에 간다. 오페라를 창안한 16세기 말의 피렌체 지식인들의 ‘음악과 극의 균형’ 이라는 이상에 접근하고 있는 셈이다. 엘라이저 모신스키는 특히 영어권 관객들이 신뢰하는 최고의 연출가 중 한 사람이다. 1975년 로열 오페라에서 첫 연출을 시작한 이래 오페라 와 연극을 오가며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무대와 의상, 조명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편이므로 실험적 연출을 기피하는 보수성향의 관 객과 무대 위의 미술 효과에 주목하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대가인데, 이런 비싼 연출가를 불러올 수 있는 국내 단체는 국립 오페라단밖에 없다.

2015 봄·여름 서울패션위크, 10월 17~22일

국내 대표 디자이너들의 무대인 서울패션위크가 17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및 서울 시내 일대, 02-547-6030

일부터 6일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국내 대표 디자이너 총집합 개막 행사선 52개팀 참여 갈라쇼

다. 이번 행사에서는 중진들의 무대인 서울컬렉션과 신진들을 위한 제네레이션 넥스트 등 모두 89회의 패 션쇼 무대가 마련된다. 또 디자이너와 바이어가 직접 만나는 박람회 형식의 서울패션페어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패션쇼 외 부대 행사도 다채롭게 준비됐다. 17일에는 개막 행사로 서울컬렉션의 52개팀이 참가하는 ‘프리뷰 갈라쇼’가 펼쳐진다(오후 8시 30분, 알림 1관). ‘구름 위를 걷는 소녀’를 컨셉트로 삼아 마치 구름 속에서 모델들이 워킹하는 듯한 무대를 연출한다. 18일에는 ‘아시아 패션 블루밍 나이트’를 진행한다(오후 10시, 알림 2 관). 아시아 대표 신진 디자이너 3인과 한국 대표 신진 디자이너 2인이 함께 꾸미는 행사로 패션쇼와 공연, 파티 가 동시에 열린다. 자세한 일정은 www.seoulfashionweek.org 참고.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REVIEW & PREVIEW

31

모신스키는 ‘로미오와 줄리엣’(10월 2~5일 예

은 조금 지루했다. 조도를 뚜렷하게 조절하면서 시

이리나 룽구는 아름다운 외모와 어두운 고품

술의 전당)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베로나

간의 흐름을 상징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에

격 음색이 특기인데, 전반부에서는 의도적으로 밝

라는 원작의 배경을 충실히 살리면서 새로운 포인

로틱한 면모를 배제하고 진지한 연극적 연기에 머

게 불러서 사랑에 빠진 소녀답게, 후반부에서는

트를 강조했다. 액자형 프로시니엄을 원근법적으

문 것도 예상하지 못한 잔재미를 느낄 수 없어 아

원래의 어두운 음색으로 줄리엣의 비극을 효과적

로 겹겹이 배치한 무대는 르네상스 시대임을 보여

쉬웠다.

으로 소화했다. 다만 능숙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준다. 원근법은 르네상스 회화에서 비롯되어 당대

하지만 막과 장을 표시하지 않고 장소와 사건

의 무대에도 구현된 바 있다. 게다가 프로시니엄

중심으로 표시한 것은 효과적이었다. 사실은 똑같

을 이용한 것은 극장에 와 있다는 느낌을 더욱 강

은데도 흐름이 원활하게 느껴졌고 3막 중간에 인

하게 했다. 그림을 사용한 몇몇 배경은 베로나라는

터미션을 갖는 것에 부자연스러움이 없었다.

공간적 정보도 확인시켜 주었다.

는 아니어서 왈츠풍의 아리아 ‘꿈속에 살고 싶어’ 에서는 화사한 맛이 덜 살아났다. 국립오페라단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이런 멋지 고 국제적으로 통용될 만한 프로덕션을 외국 팀

A팀 캐스팅인 프란체스코 데무로(로미오)와

하나와 국내 팀 하나의 주역 캐스팅으로 끝내고 언

조명을 시종 깊은 푸른색으로 한 것은 모신스

이리나 룽구(줄리엣)는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제 다시 무대에 올릴지 기약이 없다는 점은 아쉽

키가 이 오페라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어린 나이에

가수들이다. 최근 활약상이 돋보이는 데무로의 경

다. 시즌제를 채택하든지 해서 더 많은 레퍼토리를

어울리지 않는 두 주인공의 현학적이고 상징적인

우 보기 드문 정통 리리코로서 유려한 울림이 인상

더 여러 번 공연해 국내 제작진과 가수들에게 충

대사는 에로틱한 해석을 유발하는 것이 상례이지

적이었다. 감정의 굴곡을 넘나드는 유연함이나 연

분한 기회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만, 모신스키는 적어도 이들끼리는 ‘성스러운 사랑’

기의 자연스러움이 보태졌으면 더 좋았겠다.

글 유형종 클래식평론가 divino@hanmail.net, 사진 국립오페라단

을 체험 중이라고 본 것이다. 누구나 경험했겠지만 진짜 사랑에 빠지면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다 른 이들의 사랑과는 격이 다른 숭고한 것으로 생 각하지 않는가. 푸른색은 바로 성모마리아의 상징이다. 한편 으로 푸른색은 밤을 나타낸다. 오페라에서 대부 분의 사건은 저녁이거나 깊은 밤이거나 새벽, 아니 면 적어도 자연 조명이 거의 없는 실내에서 벌어진 다. 예외는 야외에서 벌어진 두 집안간의 시비와 결투 장면뿐이다. 모신스키는 여기에서만 베로나 광장의 밝은 배경그림을 사용해 블루 톤을 희석시 켰다. 사실 같은 색조를 두 시간 반이나 이어간 것

‘아리랑, 혼으로 타오르다’, 10월 12일 오후 5시

아리랑의 유네스코 등재 2주년을 기념한 아리랑 한국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2-580-1300

예술가곡 대축제는 삶의 소리 아리랑이 예술가곡과

예술 가곡과 만난 삶의 소리 아리랑 선율, 한국 넘어 세계로 

만나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기 위한 행사다. 한국가곡연구소가 ‘아리랑’ 세계화의 일환으로 발 행한『KOREAN ART SONG 외국인을 위한 아리 랑한국예술가곡집 인터내셔널 에디션』 에 수록된 이

탈리아 작곡가 위촉곡을 포함해 민요 아리랑과 창작 아리랑을 기반으로 작곡한 아리랑 예술가곡을 선보인다. 서 울대 성악과 앙상블이 부르는 ‘아리랑 아카펠라 8중창’, 문경 아리랑과 경상도 아리랑, 정선엮음 아리랑을 모은 ‘소프라노를 위한 세 개의 아리랑’ 등이다. 안숙선 명창을 비롯해 최근 국립오페라단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연으로 호평받은 소프라노 손지혜와 테너 신 동원, 베이스 손혜수 등 실력 있는 성악가들이 출연한다. 황수경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고 국악기를 포함한 오케 스트라 반주가 함께한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한국가곡연구소

S


BOOK

32

책 당신의 두 번째 재즈 음반 12장-보컬 저자: 황덕호 출판사: 포노 가격: 1만6000원

『당신의 첫 번째 재 즈 음반 12장-악기 와 편성』을 통해 재즈 듣는 법을 소

저자: 고규홍 출판사: 휴머니스트

개했던 저자의 두 번째 시리즈. 냇 킹 콜, 엘

가격: 봄여름편 3만2000원, 가을겨울편 2만7000원

라 피츠제럴드, 빌리 홀리데이 등 낯익은 재 즈 보컬이 어떻게 자신의 목소리를 악기 반 열에 올려놓았는지를 들려준다. 앨범 발매

보였다. 그다운 욕심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소개가 아

당시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라이

웃음 많고 장난 잘 치던. 그런데 회사에서 갑자기 짐을

니라 그런 다양한 식물들이 ‘천리포수목원’에서 어떻

너 노트(음반 해설) 전문을 충실히 우리말

꾸렸다.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있을 거라고 했다. 부인도

게 자라고 있는지에 대한 친절한 해설이었다. 특히 꽃

있고 아들도 있는 멀쩡한 가장이었다. 훌쩍 떠난 뒤

과 나무의 생생한 모습을 포착한 사진만으로도 보는

고규홍이란 사내를 좀 안다. 아니 안다고 생각했다. 늘

재미가 쏠쏠했다.

문득 전갈이 왔다. 천리포수목

그 뒤로 그의 글이 조금씩 보였다. 풀과 나무에 관한 글이 었다. 몇 년 전 시내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머리가 허옇게 셌는 데 눈은 더 반짝반짝했다. “아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가을의 대명사 단풍이 궁

원에 있다고 했다. 그게 15년 전 이었다.

로 옮겼다.

『천리포 수목원의 사계』

바닷가 식물나라 풀과 나무마다 사연이 있었네

저자: 이주헌 출판사: 아트북스

금했다. 이곳에는 200종류에

가격: 1만5000원

가까운 단풍나무가 있다. 그중 단풍이 들지 않아도 아름다운

‘우리’의 시각으로

단풍나무 얘기가 흥미로웠다.

조명해 보는 서양 미술사. 저자가 17

‘실핏줄단풍’이라 불리는 시기 타추사와단풍나무다. 햇살이

년간의 미술 강의 를 통해 정리한 ‘우리와 다른 세 가지 서양

그대로 통과할 만큼 얇은 잎사

미술의 특징’을 살펴 본다. 신들까지 사람

그랬다. 1만 5000여 종의

귀에 잎맥이 선명했다. 다음 쪽

의 형상을 띠는 인간 중심적 성격, 사물을

나무가 있다는 그곳에서 그도

에 바로 그 사진이 나와 이해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실주의적 성격, 시

주 도인이 되셨구랴.”

한 그루의 나무가 됐다. 걸어다니는 나무. 사람들은 그

쉬웠다. 그는 수목원 정문 앞에 있던 아름다운 센카키에

를 ‘나무 인문학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신간 중에 그의 이름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디스버리단풍나무에 대한 추억을 회상했다. 처음엔

아름다운 수목원의 꽃과 나무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

노란색에 가까운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해 가을이 깊

어있는 두 권의 책은 단단했다. 봄여름편이 600쪽, 가

어지면 유난스럽다할 정도로 빨간 빛깔의 단풍을 보

을겨울편이 500쪽이 넘었다. 그는 서문에서 “몇 종류

여주는 모습이 수목원에서도 으뜸이었다고 했다. 나

의 나무 이야기를 모아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무 아래에는 앉을 만한 낮은 돌담이 있어 쉼터의 지

각적 쾌감을 추구하는 감각적인 성격이 그 것이다. 책은 세 축을 뼈대 삼아 풍부한 사 례로 살을 붙여 나간다.

베스트셀러

자료=교보문고

순위 책명

작가·출판사

다른 나무가 눈에 밟혀 또 한 편의 글을 덧붙이기를

붕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이 나무는 2011년 가

숱하게 되풀이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책

을 가뭄에 병들어 죽고 말았다. “눈 감으면 베어낸 단

에 포함하지 못한 숱한 천리포수목원의 다른 식물들

풍나무가 잎을 후드득 털며 일어설 듯 눈에 선하다”고

03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 요나스요나손열린책들

에게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적었다.

04 원피스 75

어느 해 겨울, 홀연 그가 있는 수목원에 간 적이

책은 계절별, 월별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

01 여자없는 남자들

에이치로 오다 대원씨아이 조해너 배스포드 클

06 어떤 하루

신준모 프롬북스

07 김우중과의 대화

신장섭 북스코프

있다. 겨울 바다가 차가웠지만 나무들은 씩씩했다. 그

쳤다. ‘바람꽃’ 이야기가 시작됐다. 변산바람꽃·바람

는 말했다. “봄에 오면 좋아. 아니, 언제와도 다 좋아.”

꽃·호북바람꽃·대상화·아네모네에 대한 내용이었다.

올 가을엔 나무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09 싸드

글 정형모 기자

10 버티는 삶에 관하여

토마 피케티 글항아리

05 비밀의 정원

는 꽃과 나무 이야기를 담았다. 가을하고도 10월을 펼

학명까지 작은 글씨로 적혀 있어 얼핏 백과사전처럼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02 21세기 자본(양장본)

08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장하준 부키 김진명 새움 허지웅 문학동네


GUIDE & CHART

영화

33

공연

클래식

전시

노벰버 맨

오페라 ‘나부코’

트리포노프 독주회

정찬부 개인전 Artificial Spectrum

감독: 로저 도널드슨

기간: 10월 16~18일

일시: 10월 14일 오후 8시

기간: 10월 1~14일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 올가 쿠릴렌코

장소: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장소: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장소: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

등급: 15세 관람가

문의: 1577-7766

문의: 02-541-6234

문의: 02-730-1144

‘노벰버 맨’이라 불리는 전직 CIA 최고

매년 완성도 높은 자체 제작 오페라를

다닐 트리포노프는 현재 세계적으로

정찬부 작가가 주목한 재료는 평범한

요원 피터(피어스 브로스넌). 은퇴 후

선보이고 있는 고양문화재단이 베르디

‘핫’한 23세의 러시아 피아니스트다.

플라스틱 빨대다. 2년 만에 열리는 개

평범하게 살던 그에게 자신의 전 여자

의 걸작 오페라 ‘나부코’를 현대적 감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인전에서 그는 약 17만 개의 빨대를 사

친구이자, 차기 러시아 대통령의 비밀

각으로 재창작했다. 연극계 블루칩 김

1위를 했다. 두 번째 내한인 이번 무대

용해 빛의 스펙트럼 형태로 뻗어나가

을 알고 있는 수행원을 무사히 빼내오

태형 연출이 구약성경에 바탕한 원작

에서는 바흐 환상곡, 베토벤의 마지막

는 듯한 타원형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을 물질 문명과 정신 문명의 대립으로

소나타,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을

‘2013 가송예술상’의 대상 수상자 지

의문의 저격으로 살해당한다.

풀어내며 우리 시대의 정신을 담았다.

들려준다.

컬러풀 웨딩즈

연극 ‘월남스키부대’

임선혜 독창회

변웅필 개인전 ‘옥림리 23-1’

감독: 필립 드 쇼브홍

기간: 10월 5일~2015년 1월 31일

일시: 10월 15일 오후 8시

기간: 10월 16일~11월 7일

배우: 프레데릭 벨, 엘로디 퐁탕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3관

장소: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장소: 서울 강남구 UNC 갤러리

등급: 12세 관람가

문의: 1544-1555

문의: 02-580-1300

문의: 02-733-2798

프랑스 순혈 혈통의 클로드 부부는 딸

입만 열면 뻥을 쏟아내는 허풍쟁이 김

소프라노 임선혜가 미국ㆍ한국ㆍ독일

변웅필의 자화상 시리즈는 외모 지상

들이 아랍인, 유태인, 중국인과 결혼

노인과 그의 아들·며느리, 그리고 물

의 노래를 고루 들려준다. 번스타인으

주의 사회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다. 강

원 전시이기도 하다.

하게 되면서 집안에 매일같이 문화적

건 훔치러 왔다 김 노인의 입담에 휘말

로 시작해 김순남ㆍ정회갑을 부르고

화로 터전을 옮긴 작가는 이제 주변

충돌로 인한 소소한 다툼과 갈등이 일

리는 허당 오지랖 도둑의 입심 대결을

헨델의 오페라 아리아로 끝맺음하는

공간과 일상 속 소소함에서 영감을 얻

어난다. 유일한 희망은 막내딸이 평범

그린 코미디. 다양한 연령대를 아우르

프로그램이다. 임선혜는 프랑스의 유

는다. 이미지가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한 프랑스인과 결혼하는 것. 하지만 막

는 따뜻한 메시지와 유쾌한 웃음이 가

서깊은 음반사 아르모니아 문디에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는 그

내딸마저 흑인 남자친구를 데려온다.

득하다. 이한위·최재원·서현철 출연.

동양인 최초로 독집음반을 발매했다.

가 담아내는 이미지는 곧 이야기다.

영화 예매

공연 예매

클래식 음반

자료=풍월당

가요 음원

자료=가온차트

음반사

순위 노래

가수

자료=맥스무비

순위 영화명

주연

자료=인터파크

순위 공연명

출연

01 마리아칼라스:스튜디오 Warner Classics

01 그게 나야

02 슬로우 비디오

차태현 남상미 오달수

02 뮤지컬 레베카

오만석 엄기준 옥주현

02 코렐리: ‘아시시’ 소나타

02 틈

03 제보자

박해일 유연석 이경영

03 뮤지컬 라카지

정성화 김다현 이지훈

03 바흐: 푸가의 기법

04 연극 프라이드

01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신민아 조정석

04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

01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순위 음반명

조승우 류정한

Glossa Hyperion

03 손대지 마

김동률 소유 권순일 박용인 에일리

이명행 정상윤 오종혁

04 리히터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Melodiya

04 소격동

아이유

05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 안재욱 임태경 팀

05 젤렌카: 레퀴엠 & 미제레레 Supraphon

05 내 사람

김동률

06 파워레인저 VS고버스터즈 공룡 대결전!

06 뮤지컬 조로

06 하이든: 사계

06 고백

김동률

07 비긴 어게인

07 연극 옥탑방고양이

이대일 김선호

07 시네마 세레나데

08 뮤지컬 헤드윅

조승우 송용진

08 13개의 왈츠

05 메이즈 러너

08 애나벨 09 마담 뺑덕 10 맨홀

루크 에반스 딜런 오브라이언 키이라 나이틀리

애나벨 월리스 워드 호튼 정우성 이솜 박소영 정경호 정유미 김새론

김우형 휘성 양요섭

PHI SONY La Dolce Volta

07 신촌을 못가 08 청춘

09 연극 라이어

공찬호 김연철 박중근

09 매트너&라흐마니노프:피아노 Hyperion

09 당신만이

10 뮤지컬 그날들

유준상 이건명 최재웅

10 하이든 & 모차르트: 피아노

10 동행

S

ERATO

포스트맨 김동률 곽진언 김필 임도혁 김동률


ESSAY

34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페북 ‘좋아요’에 담긴 9가지 뜻

깜빡 졸다가 떨어뜨린 스마트폰 ‘좋아요’ 자동 발사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페이스북에 새 글을 올려본다. 1분, 2분, 3분…. 기다

손에 힘이 풀린다. 탁, 코뼈를 정면 강타한 휴대전화의 충격에 놀라 깨어보니

려도 알림 창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라이크(좋아요)를 기다리는 이 시간

나도 모르게 라이크 한 표가 눌러져 있다. 최근 페북 유명인사가 되어 굳이

은 심지어 지나간 내 인생마저 되돌아 보게 만든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회

내 라이크 한 표를 아쉬워하지도 않을 것 같아 라이크를 자제해왔던 페친의

한이 몰려든다. 나는 그때 왜 페친을 만난 술자리에서 그의 격정적 토로에 시

글이다. 속으로는 라이크를 취소하고 싶지만 이미 그걸 보고 기뻐했을 페친

비를 걸었던가. 그가 기껏 애써서 올린 글에 질투심으로 라이크를 눌러주지

의 흐뭇함을 떠올리면서 참는다. ‘그래, 나는 널 질투하지 않아.’

않았던가. 나의 글에 도대체 무슨 문제라도 있단 말인가. 그래, 마음을 다잡

아마도 오래가지 않아 옥스퍼드 대사전을 비롯한 영어 사전들은 ‘라이

자. 라이크 숫자 몇 개 따위가 내 인생의 가치를 말해줄 순 없는 거야. 꿋꿋하

크’의 정의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라이크에는 어쨌든 설렘이 담겨있고, 부

게 뚜벅뚜벅. 나의 길을 가는 거지.

러움이 있고, 동의가 있으며 때로는 위로가 있다. 심지어 지성의 과시, 당신의

그러나 초조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정치노선, 자제된 질투심, 차마 말로 할 수

그것을 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글을 둘러

페북 ‘좋아요’가 의미하는 9가지

본다. 엄중한 감식안과 까다로운 비평가의

그리고 어처구니 없는 졸음의 실수까지 들

1. 쪼아요!

눈으로 라이크를 엄선해서 누르겠다던 어

어있다. 페친이라는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된

2. 나도 그거 알아.

젯밤의 결심은 이미 눈 녹듯 사라지고 나는

3. 세상에 뿌리는 나의 사랑 한줌

가장 너그러운 박애주의자가 된다. 세상에

4. 이땅의 정의를 위하여!

서 가장 쉬운, 원클릭으로 뿌리는 한 줌의 사

사람들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내는, 이 모든 희 로애락을 담고 있는 그 두루뭉술하면서도 미묘한 라이크라는 표현, 참 좋지 아니한가.

5. 썸 혹은 설렘

랑이 사방에 흩어진다. 태어나서 40여 년 쌓

없는 슬픔의 공감 혹은 댓글달기의 귀찮음

그때 드디어 켜지는 빨간 불빛 1! 누군

6. 난 너를 질투하지 않아.

아왔던 나의 공감능력이 최대치로 치솟는

7. ....(댓글달기 귀찮아)

때다.

8. 당신의 슬픔을 위로합니다.

마흔이 넘어 얻은 페친의 아기 사진과

9. 앗! 나의 실수

고양이 사진, 이유가 없다. 아휴 쪼아요! 매일

가 내 글에 라이크를 눌러 줬다는 표시다. 아, 나는 아직 죽지 않았구나. 그 짧은 사이 오가는 절망과 희열의 간극. 숫자 1이 더해질 때마다 되살아나는 나의 자긍심. 내가 누른

같이 음식 사진을 올려대 짜증났던 페친에

라이크는 그저 아무렇게나 뿌려 댄 의미 없

게도 그래, 정말 맛있겠다. 너의 포만감이 나

는 것이겠지만 친구들이 눌러준 라이크에

의 행복인 거지. 꾹.

는 어쩐지 나의 글에 감동받은 진심이 뚝뚝 묻어나는 것만 같다. 절망의 심

단풍이 물든 설악산에서 새로 산 셀카봉으로 등산 생중계를 하는 동창 의 잇단 셀카를 보면서도 십년전 보았던 단풍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라이 크 한 표. 약간의 너그러움을 품은 라이크는 무한정 확대된다. 내가 꼭 라이크를 하나 눌러줄 때만 나에게 라이크를 눌러주는 엄격한 호혜 평등주의자인 얄미운 페친에게도 이번만큼은 할 수 없다. 울리히 벡, 지

연을 알지 못한 기쁨이 어떻게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라이크는 우리를 중독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페북 라이크의 빅 데이터를 분석하면 그 사람의 성별과 이념 취향과 IQ까지 90% 이상을 알아 낼 수 있다는 학계의 발표를 들으면 이 유리감옥 속에서 발가벗겨지는 기분 이지만 그것쯤 감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문트 바우만 같은 몇 번 못 들어본 서양 학자들의 현대 사회 분석론을 링크

그래, 라이크가 내 현실의 우울함을 막아주는 쨍쨍한 햇빛은 될 수 없

한 박사 선배의 글에도, 이름이 비슷해서 친척인가 싶은 구스타보 두다멜의

겠지만 적어도 온라인 세상에서 날 버티게 해주는 비타민 D는 되어주는 거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연주 동영상에도 어쨌든 “맞아요 나도 이거 알아요”

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좋아요’라 말하며 내 소식에 귀기울여주고 있

표시를 내고 싶어 라이크를 고이 누른다.

다는 느낌을 일상 생활 속에서 얼마나 자주 받겠는가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음악을 듣다 보니 스르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휴대전화를 든

라이크에 좋아요 한 표 주고 싶다.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


PHOTO ESSAY

35

케이티 김의 남과 여

인간 지퍼

China 2009

컬러풀한 지퍼가 지그재그 채워졌다.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한 인상여강의 무대와 무희들이 꼭 그랬다. 남자와 여자들은 장난감 병정들을 핀셋으로 집어 착착 세워놓은 듯했다. 모두를 만나 사는 이야기라도 들어보면 좋으련만, 애석하게 나도 그들도 매우 바쁜 듯하다. 그리하여 나는 카메라로 이렇게 그림을 그린다.

사진작가. 패션계의 힘을 모아 어려운 이들을 돕자는 Fashion 4 Development의 아트 디렉터로 뉴욕에서 활동 중.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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