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야기를 따라 한양 도성을 걷다 남산,숭례문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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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이야기 여행길에서 만나는 한양도성 스토리 100선


필자 소개 윤대헌 - 여행 작가, 현 스포츠경향 기자 저서 《대한민국 산책길》 《서울 사람들》 《맛골목 기행》 《서울 문학 기행》 등

장태동 - 여행작가 저서 《명품 올레 48》 《대한민국 산책길》 《서울 사람들》 《서울 문학 기행》 등

최갑수 - 여행작가 저서 시집 《단 한 번의 사랑》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행복이 오지 않으면 만나러 가야지》 《당신에게, 여행》 등

최창근 - 극작가 저서 희곡집 《봄날은 간다》, 산문집 《인생이여 고마워요》, 《종이로 만든 배》 등

김종한 - 만화가 겸 여행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저서 만화 《파이팅! 바람이》 《RPM》, 도서 《열도 유랑 12,000킬로미터》 등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이야기 여행길에서 만나는 한양도성 스토리 100선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발행일 2014년 2월

발행인 서울특별시장

발행처 서울특별시 관광정책과 (02-2133-2816)

온라인플랫폼 서울스토리 www.seoulstory.org

글 윤대헌, 장태동, 최갑수, 최창근

사진 윤대헌, 장태동, 최갑수, 이창재, 안정수

사진 협조 안동대학교 사학과 김희곤 교수, 서울역사박물관

일러스트 김종한

제작 (주)메타기획컨설팅

편집 트래블플러스

교정・교열 김지영

디자인 우드앤북(고준권), 안정빈

인쇄 소다그래픽스

ISBN 979-11-5621-039-9 03910

간행물 발간등록번호 51-6110000-000772-01 ※ 본 저작물의 저작권과 판권은 서울특별시에 있습니다. ※ 이 책의 모든 정보는 2014년 2월 7일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일러두기 1. 본문에 나오는 한양도성 관련 고유명사는 서울시의 ‘한양도성 용어 표기 사용 지침’을 따랐습니다. 사대문과 사소문의 명칭은 숭례문남대문, 돈의문서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등으로 표기했으며, 내사산內四山은 남산목멱산, 백악북악산으로 표기했습니다. 2. 본문에 사용된 역사·문화 유적은 모두 문화재청 등록 명칭으로 통일했습니다. 3. 이 책은 집필진 4명이 구간별로 집필했으며, 테마별로 작가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4. 테마별로 한양도성과 도성 주변길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배치했으며, 이야기 여행길의 추천 도보길 코스와 이야기 순서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5. 추천 도보길은 걷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해 실제 이동하는 거리를 최대한 실제 시간에 부합하도록 추정하여 표기했습니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이야기 여행길에서 만나는 한양도성 스토리 100선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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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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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 혜화문

남산 ・ 숭례문남대문 구간 > 목멱산

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테마 02. 일제가 남긴 남산의 아픈 상처 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테마 04. 남산 자락 딸깍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008

010 022 034 048

인왕 구간 > 돈의문 터 - 창의문 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테마 09.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의 문학·예술 이야기

백악 구간 > 테마 10. 테마 11. 테마 12. 테마 13. 테마 14. 테마 15.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성안 마을, 혜화동의 어제와 오늘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060 074 090 102 114

126 138 152 168 180 190

낙산・ 흥인지문 구간 > 혜화문 - 장충체육관

058

124

204

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206 218 230 242 256

서울 한양도성 개관과 역사적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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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부터 현재까지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도로 역할을 해온 서울을 다시 보게 만들었습니다. 사대문과 사소문에 담긴 선조들의 뜻, 내사산을 둘러싸고 만들 어진 도시 상징물과 삶의 흔적은 역사적 관념으로 존재하던 조선과 한양을 보다 생생한 현실의 관점으로 불러옵니다. 우리는 건축물로서 한양도성뿐만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서 한양도성이 축적해온 이야 기를 찾아내고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한양도성과 그 주변 지역 사람들이 간직한 이야기 를 발굴하여 아직까지 한양도성의 매력에 눈뜨지 못한 시민들에게 한양도성을 돌려주 고자 했습니다. 한양도성을 순성巡城하는 책들은 도성의 한 지점에서 시작하여 일주하는 방식으로 구성 된 것이 보통입니다. 이 책은 한양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을 기준으로 인왕·백악·낙산· 흥인지문·남산·숭례문 구간을 일주하되, 서울 도심 어디에서든 한양도성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서울의 여러 지역에서 출발하여 한양도성과 연결되는 길, 이야기 거점을 따라 이동하면서 반드시 한양도성과 만날 수 있도록 배치하여 한양도성 주변의 살아 있는 이야기를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20개 테마로 구성된 이야기는 한양도성 자체의 이야기이자, 서울이 품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한양도성은 역사적·유산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울 시민 들이 살아가는 터전으로 문화 자원의 가치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이 책을 통해 시민들과 서울을 찾는 방문객들이 한양도성을 더 자주 만나고, 이해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한양도성 스토리텔링 사업운영팀

006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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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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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터

남산목멱산・ 숭례문남대문 구간 >

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테마 02. 일제가 남긴 남산의 아픈 상처 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테마 04. 남산 자락 딸깍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소의문 터 숭례문

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장충체육관에서 남산목멱산과 숭례문남대문을 지나 돈의문서대문으로 이어지는 남산・숭례문 구간에는 조선 시대와 근대를 살아가던 한양 서민의 곡진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우리 역사를 오롯이 지켜보고 함께 호흡한 숭례문을 둘러싼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 그리고 충정로 인근의 1900년대 초반 풍경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소설의 걸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통해 보는 근대 서울역 묘사도 흥미롭다.

장충체육관

남소문 터

남산 자락으로 무대를 옮겨서는 더욱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다. 남산에 깃들어 살아가던 딸깍발이 이야기,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와 비견되는 1950~1960년대 명동의 풍경, 이태원이 탄생한 이야기 등 서울이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준다.

숭례문

소의문 터

돈의문 터


1>

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서울의 상징, 대한민국의 상징 숭례문과 주변 이야기 숭례문과 서울역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우리 역사를 오롯이 지켜보고 함께 호흡한 숭례문 지역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숭례문과 그 주변에 얽힌 조선 시대 양반과 서민의 이야기, 돈의문과 소의문 그리고 충정로 인근의 1900년대 초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한국 단편소설의 걸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통해 접하는 서울역 묘사도 흥미롭다.

글·사진 최갑수

숭례문에서 이어지는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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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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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1 > 01 > 001.

국보 1호 숭례문의 우여곡절

세로로 달린 숭례문,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다

화재 후 복원된 숭례문의 늠름한 모습

숭례문에 있는 용 그림

태조 이성계는 1395년 한양도성 축성을 명한다. 그리고 1398년태조 7 9월 성 쌓는 일이 완료된다. 태조는 각 문의 이름을 지었는데, 유교의 나라답게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사대문 에 적용했다.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대문 은 슬기 지智와 개념이 유사한 맑을 청淸을 쓴 숙청문肅淸門으로 한 것이다. 숙청문은 나중 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었는데 그 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숙정문이 기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23년중종 18이다. 숙정문 외에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숭례문이라는 이름을 지은 데는 풍수지리설을 염두에 둔 점도 있다. 조선의 정궁 경복궁은 관악산과 마주하는데, 풍수지리상 관악산은 화기火氣가 매우 강하다. 경복궁의 방향을 약간 틀어 지은 것도 관악산의 화기에서 조금이나마 비켜 서기 위해서다. 경복궁 정문 광화문 양옆에 해태상을 세운 것도 관악산의 화기를 제압하려는 뜻이다. 해태는 물 기운을 몰아온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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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숭례문 역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이기기 위해 서는 더 센 화기가 필요한데, 숭崇자는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생겼고, 예禮자는 음양오행 상 불火에 속한다. 둘을 세로로 배열하면 활활 타오르는 불길 모양이 된다. 관악산의 화 기가 성안에 미치지 못하도록 맞불 작전으로 지은 이름이며, 불은 불로 다스린다以火治火는 논리다. 불에 대항하기 위해 지은 숭례문이 화마를 겪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고 자료 〈중앙일보〉 2012년 4월 6일자, 《순성의 즐거움》(김도형,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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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1 > 01 > 002.

1 > 01 > 003.

소의문과 그 주변 칠패 이야기

연못 하나 때문에 남인이 득세했다? 남지 터

옛 칠패 자리를 알리는 표석

한양도성길 답사를 나온 사람들이 소의문 표석 앞에 모여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 시대 한양도성 내에는 시장이 많았다. 동네 거리마다 시장이 들어섰다. 칠패는 서울의 3대 시장 가운데 한 곳이다. 숭례문 대한상공회의소 앞에서 염천교 쪽 으로 나가 만나는 통일로 일대가 칠패의 중심이었다. 이 부근에 칠패 터 표석이 있다. ‘칠패’라는 명칭은 조선 후기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한성부 지역을 8패로 나누어 순찰하던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패牌란 40~50명으로 구성된 가장 작은 부대로, 오늘날 소대와 중대 사이의 규모라고 보면 된다. 칠패는 용산, 마포와 가까워 어물 반입이 쉬웠다. 19세기 중엽 한양의 역사와 모습을 노래한 〈한양가漢陽歌 〉에서 “칠패의 생선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라고 읊으며 민어, 도미, 준치, 낙지, 소라, 조개, 새우, 전어 등을 판다고 묘사했다. 칠패는 매점·매석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옛 문헌에 “남문 밖 칠패 곳곳에 난전을 장황 하게 설치하고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지는데, 사람과 말이 숲을 이루어 무수히 난매亂賣함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고 나와 있다. 칠패 상인들은 지방에 내려가 어물 등을 직접 구입하거나, 지방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어물을 중간에 매점해 도매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물가를 마음대로 조정하여 시전 상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가짜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짜로 말하면 백동白銅을 가리켜 은 銀이라 주장하고, 염소 뿔을 두고 대모玳瑁라고 우기며, 개가죽을 가지고 초피貂皮로 꾸민다”고 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남지는 숭례문 앞에 위치했다

숭례문이 감당해야 했던 관악산의 화기. 이름을 숭례문이라 지은 것으로 안심할 수 없 어 문 인근에 ‘남지南池’라는 연못까지 만들었다. 남지는 숭례문이 관악산의 화기를 막다 가 화를 당했을 때에 대비한 의미도 있다. 하지만 남지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조선 초의 세도가 한명회는 “한양 정도 때 관악 산의 화기를 누르고자 숭례문 앞에 못을 파 남지라 일컬었는데도 불이 끊이지 않자 백성의 관심 밖에 나서 메웠다”면서 복원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남지는 당파 싸움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남지를 복원하면 남인南人이 성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순조 때 남지를 복원하자 “이전에 이 못을 복원했을 때 남인 허목이 득세하 더니 이번에는 누가 득세할꼬”라는 말이 나돌았으며, 결국 남인 채제공이 세를 얻었다 고 한다. 남지는 파고 메우기를 반복하다 일제가 서울역을 확장하면서 메웠다. 국보 1호 숭례문이 숯덩이로 변하자, 풍수가들 사이에서 이 장치들이 무장해제 된 탓이라는 풀 이가 회자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 〈중앙일보〉 2012년 4월 6일자,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김용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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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남지에서 바라본 옛 숭례문

참고 자료 《서울, 도성을 품다》(서울역사박물관, 2012), 《역사스페셜 7》(KBS 역사스페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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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1 > 01 > 004.

1 > 01 > 005.

어느 소설가의 눈에 비친 서울역 그리고 서울

로마네스크와 고딕이 어우러진 약현성당

약현성당 내부

소설가 박태원 역시 이 광장을 서성였을 것이다

약현성당의 측면 모습 문화역서울 284 외관

한때 서울역이던 문화역서울 284 지금은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에서 한국경제신문사 쪽으로 가면 서소문공원이 있고, 약현이라 불리는 언덕이 나온다. 한국경제신문사 앞 청파로를 따라 채소와 생선 좌판이 이어진 시 장이 제법 북적인다. 시장 중간에 있는 서소문로6길에도 채소 가게, 정육점, 기름집 풍경 이 계속된다. 약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있었기 때문 이다. 약현성당은 1892년에 세워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이다. 명동성당보다 6년 일찍 지어졌다. 성당 주위로 큰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숭례문이나 서소문로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언덕에 세워진 약현성당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약현성당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성당 건너편 서소문공원이 순교지이기 때문. 과거 소의문 밖 네거리는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처형당한 순교지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천주 교인 100여 명이 처형되었다.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집도 근처에 있었다. 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프랑스 신부 코스트E. G. Coste가 설계 를 맡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했다. 1998년 방화로 전소된 후 이듬해 제 모습을 찾아 지금은 본당사적 252호과 소의문순교자기념관,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 가톨릭출판 사 등이 들어앉았다.

옛 서울역의 역사는 경성역으로 시작한다. 1925년 9월 지은 경성역은 광복 후 서울역이 되어 근현대사의 질곡을 견뎌냈다. 경성역은 지어질 당시부터 화제였다. 건물은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구성됐다. 중앙 건물엔 비잔틴식 돔을 얹고, 그 앞뒤 네 곳에 작은 탑을 세 웠다. 역사 처마에는 지름 1m가 넘는 시계가 걸렸다. 2층에 들어선 식당은 한국 최초의 양식당이다. 경성역이 지어질 당시 모습과 주변 풍경은 박태원의 단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자세히 묘사되었다. 1930년대 어느 날 경성 거리를 쏘다니던 ‘구보씨’의 발걸음은 경성역 3등 대합실까지 미 친다. 이곳에서 구보씨는 지게꾼과 유랑민, 노파 등 고독하고 쓸쓸한 이들과 조우하고, 예 쁜 여자와 함께 있는 중학 시절 열등생 친구를 만나 강렬한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소설 가 박태원의 눈에 비친 일제강점기 경성역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물질에서 소외된 비루 함이 북적거리며 공존하는 곳이다. 이제는 경성역도, 서울역도 없다. 한때 경성역, 서울역으로 불리던 건물은 지금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해 ‘문화역서울 284’라고 불린다. 참고 자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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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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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1 > 01 > 006.

신비의 명약, 이명래고약

충정각 현판은 고암 정병례의 작품이다

이국적인 충정각

벨기에 영사관으로도 사용된 충정각

지하철 5호선 충정로역 주변에 자리한 중림동 길은 언제 걸어도 정겹다. 아직도 옛 골목 풍경이 오롯이 남았고, 골목마다 예쁜 카페도 있다. 중림동 골목에서 걸음을 멈추는 이들이 많다. 충정각 앞에서다. 충정각은 1910년대 독일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유럽식 주택이다. 한때 벨기에 영사관으로 사용되었고, 현재 충정각은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갤러리 겸 카페로 변신했다. 현판은 고암 정병례 선생의 작품이다. 충정각에서 골목을 걷다 보면 이명래고약이 있던 건물이 나온다. 지금은 호프집으로 바뀌었다. 특유의 냄새가 인상적인 이명래고약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국민 상비약’이었다. 기름종이에 까만 고약을 펴 바르고 고약을 성냥불에 달군다. 고약 봉지에 담긴 발근고拔根膏를 조금 떼어 가운데 놓고 온기가 있는 고약을 종기에 붙인 뒤 하루 이틀 지나면 부어오른 종기에 구멍이 뻥 뚫리고 피고름이 빠지며 상처가 아물었다. 1920년대 사사키라는 일본군 대령은 목숨을 위협하던 악성 종기를 이명래고약으로 단번에 치료한 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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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충정각은 카페로 변신했다

이명래고약집에서 난 세 번 놀랐다. 첫째는 가게가 너무 더러웠고, 둘째는 치료비가 무척 쌌다. 셋째는 아주 잘 낫는다는 점이다.

이명래는 공세리성당에서 프랑스 선교사 드비즈Emile Devise 신부에게 한방 의서를 물려받 아 이를 원전으로 고약을 만들었으며, 거지들을 상대로 임상 실험을 했다. 하지만 이제 는 전통 방식으로 만든 고약을 접할 수 없다. 2002년 명래제약이 도산하며 약국에서 이명래고약은 모습을 감췄다. 이를 인수한 다른 제약사가 밴드 형식으로 개량한 고약을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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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1>

테마 01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경찰청

시청역

>

도보 시간 약 1시간

서소문근린공원

숭례문 → 도보 5분 → 남지 터 → 도보 10분 → 서소문・칠패 터 → 도보 20분 → 충정각 →

충정각

도보 15분 → 약현성당 → 도보 15분 → 서울역

숭례문

아현동

남대문시장

서소문・칠패 터 약현성당

>

남지 터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회현역이나 1·2호선 시청역을 이용하면 숭례문이다. 숭례문 건너편 우남빌딩 앞 보도에

'남지 터' 표석이 있다. 남지 터에서 서울역 방면으로 가면 연세봉래 빌딩이 있는데, 빌딩 앞에 '칠패 터'를

회현역

알리는 표석이 있다. 여기에서 경찰청 방면으로 걸어가 서소문 고가 아래 길을 따라가면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이고, 3번 출구 쪽 골목으로 가면 충정각이 나온다. 지하도를 건너 중림동 방면으로 약 10분 걸어가면 약현성당. 이곳에서 서울역과 서부역이 지척이다. >

도성 연결길 숭례문에 한양도성을 복원했다. 숭례문에서 대한상공회의소 가는 길에 도성 흔적이 있다.

서울역

공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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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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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방향

테마 01. 서울의 대문 숭례문과 그 주위에 살아가는 사람들


1>

테마 02

일제가 남긴 남산의 아픈 상처

남산에서 숭례문까지 수난의 현장을 걷다 수려한 풍경 뒤에 숨은 질곡의 역사 남산목멱산은 조선 시대부터 서울의 주산이었다. 남산에 신을 모시는 국사당을 세우고, 국가가 직접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들어 국사당을 허물고 조선신궁을 짓는 등 엄청난 수난과 탄압을 당한다. 해방 후에도 남산의 수난은 계속됐고, 지금까지 당시의 상처가 선연하다. 이 길은 남산 수난의 현장을 고스란히 돌아보는 구간이다. 남산을 내려와 남대문시장에서 엿듣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남대문시장의 역사 이야기가 그나마 식민 시절의 아픔을 위로해준다.

글·사진 최갑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자리한 안중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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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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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2. 일제가 남긴 남산의 아픈 상처


1 > 02 > 007.

팔각정에서 듣는 남산의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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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팔각정

옛 일본 공사관

남산 팔각정에 서면 서울 도심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경관은 좋지만 팔각정에 설 때마다 남산의 수난사가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한 왕조와 국가가 유린당한 역사가 남산 자락에 고스란히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팔각정은 도심을 조망할 수 있는 평범한 정자에 불과하지만, 그 내력은 간단치 않다. 이곳 은 조선 태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남산의 산신을 모시려고 지은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국사당은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사당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대표 민속신앙 터인 국사당은 일제강점기에 쫓겨나고 만다. 일본 토착 신앙의 대표인 신궁에 밀려 인왕산으로 옮겨진 것이다. 일제는 1925년 “일본 최고신과 살아 있는 신 천황을 모시는 신궁에 식민지 나라의 굿당이 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국사당을 500년 동안 있던 자리에서 내쳤다. 지금은 시민 공원으로 변한 남산. 한때 작위까지 받은 조선과 왕실의 상징 남산은 온갖 수난을 겪었다. 특히 남산의 수난은 일본과 많은 관계가 있다.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남산 기슭에는 일본 사신이 머무른 동평관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진을 치기도 했다.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 왜장이 살았다고 해서 왜장터왜성대라 불렸는 데, 그들의 진지는 지금의 정동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884년에는 남산 기슭에 다시 영사관을 지었고 일본 공사관과 통감부, 총독부가 속속

들어섰다. 지금의 예장동, 주자동, 충무로1가를 아우르는 진고개 일대가 일본인 거주지 였는데, 진고개를 거점으로 숭례문과 회현동, 명동, 을지로 쪽으로 주택가와 상가가 확장되었다. 북촌에 사는 조선인이 남촌의 화려한 일본인 상가를 동경했다고 한다. 서울유스호스텔은 일본 공사관과 통감관저,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통감부와 총독관저 가 있던 곳이다. 남산은 경복궁 안에 총독부와 총독관저를 지어 옮겨가기까지 일본 식민 통치의 심장부였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남산순환버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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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2. 일제가 남긴 남산의 아픈 상처


1 > 02 > 008.

삼순이계단의 진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촬영지 표지

2005년 방영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남녀 주인공이 입맞춤하는 마지막 장면으 로 유명해진 삼순이계단. 이곳은 원래 여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다. 청일전쟁 후 타이완을 점령해 타이완신궁을 세운 일제는 1912년 조선신궁 설립을 위한 조사에 착수, 1919년 남산에 66만 1160㎡를 확보하고 1920년 공사를 시작해 1925년 완공 했다. 조선신궁은 일본열도를 창조했다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明治 천황 을 모신 일본 신사의 총본부로, 해방 당시 전국 1141개에 이르던 일본 신사의 우두머리다. 일본의 성지를 조성하기 위해 남산이 깔아뭉개졌다. 숭례문에서 조선신궁 입구까지 참배 로를 닦고, 숭례문에서 남산을 잇는 한양도성 성곽을 부순 뒤 찻길을 냈다. 지금의 소월길 이다. 시내에서 전차가 신궁 밑을 지나갈 때는 모든 승객이 일어서서 묵념을 올려야 했다. 신사 입구에서 본전이 있는 넓은 터까지 능선에는 돌계단 384개를 놓았는데, 이것이 우리 가 아는 삼순이계단이다. 조선신궁의 역사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끝났다. 총독부는 그해 8월 17일 신궁 에 신물神物로 둔 거울을 비행기에 실어 일본으로 옮기고, 건물을 해체했다. 해방 후 조선신 궁 터에는 1956년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세워졌다가 1960년 4·19혁명 이후 파괴됐다. 19 58년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에 있던 국회의사당 이전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터를 닦는 도중에 무산되었다.

삼순이계단

참고 자료 〈동아일보〉 2009년 2월 6일자, 《서울성곽 걷기 여행》(녹색연합,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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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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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2. 일제가 남긴 남산의 아픈 상처


1 > 02 > 009.

독립 영웅 안중근 의사를 만나다

다양한 유물을 전시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경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

남산을 산책하다 보면 자연스레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닿는다. 많은 사람들이 남산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리고 대부분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서지만, 생각보다 알찬 전시 내용에 보람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인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1909년 10월 만주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1879~1910을 기리는 곳이다. 1970년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 에서 세웠으나 철거하고, 2010년 10월 26일 새 기념관을 개관했다. 입구에 들어가면 중앙홀에서 안중근 의사의 좌상과 약지 혈서 태극기를 마주한다. 이 태극기는 안중근 의 사가 약지를 잘라 흘린 피로 ‘대한 독립’이라는 글자를 적은 것이다. 역사를 모른다고 생활에 큰 불편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남산에 가는 김에 들러볼 만하다.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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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자녀가 있는 집이라면 꼭 들러보길 권한다. 자녀의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 이 될 것이다. 기념관을 관람하다 보면 그동안 모르던 사실을 발견한다. 지금껏 안중근 의사가 손가락 을 깨물어 혈서를 쓴 줄 알았는데, 사실은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받아 붓으로 쓴 것 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공적으로 삼고, 하얼빈에서 의거를 일으킨 모습 은 3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3층으로 들어서면 왼쪽 유리창 속에 하얼빈 의거 상황을 재현한 전시물이 있다. 사람이 들어서면 동작을 감지해 소리가 나며, 인형이 움직인다. 조 금 더 들어가면 하얼빈 의거 후 안중근 의사 재판 모습이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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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2. 일제가 남긴 남산의 아픈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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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장의 어제와 오늘 남대문시장 이야기

대한민국 최대의 시장 남대문시장

갈치조림 집들은 무를 깔고 고추장, 다진 마늘 등 양념을 넣은 갈치를 조려서 내놓는다. 여기저기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보글보글 담겨 나온 갈치조림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 다. 비닐봉지에 대충 싼 듯한 김과 달걀찜은 서비스다. 흔히 간장게장을 밥도둑이라 하지만, 남대문 갈치조림을 맛본 이들에게 밥도둑은 갈치조림이다.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4길에 자리 잡은 남대문시장은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전통시장이 다. 하루 유동 인구가 35만 명, 취급 품목은 1700여 종에 이른다. 남대문시장의 역사는 1414년태종 1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정이 감독하는 시장으로 문을 열었다가, 1608년 대동미와 대동목, 대동포의 출납을 관할하던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되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저잣거리가 형성되었다. 좌판들이 합법적으로 상품을 판매할 권리를 얻은 것은 정조 때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감독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철폐하면서부터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소유한 중앙물산주식회사에서 남대문시장을 경영했으나, 지금은 남대문상인회조합이 만들어져 조합을 중심으로 시장이 운영된다. 시장 모습은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언뜻 보면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은 것 같다. 늘 어난 외국인 관광객 덕분에 상인들은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가 필수다. 가게 앞을 지나 다 보면 가끔 일본말이나 중국말로 흥정하는 상인도 있다. 지금은 외국 관광객이 매출 의 70%를 차지한다고 한다. 장사 경력 20년은 신참 취급을 받고, 30년은 돼야 선임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이곳의 법칙이다. 평소에는 가족보다 친한 상인들이지만, 지나가는 손님 앞에서는 ‘우리 집 모시기’ 작전 때문에 안면몰수가 기본이라고.

온갖 먹거리로 가득한 남대문시장

꼭 장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나태해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찾아볼 만한 곳, 바로 남대문시장이다. “골라, 골라… 무조건 1000원!” 손님을 부르는 상인들의 시끌벅적한 외침을 들으며 활기찬 시장을 걷다 보면 삶의 의지가 샘솟는다. 맛있는 먹거리도 남대문시장 여행을 한층 즐겁게 해준다. 갈치조림, 칼국수, 호떡, 빈대떡, 순대, 김밥 등 수많은 먹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음식 을 꼽으라면 단연 갈치조림이다. 남대문시장 한쪽에 갈치 골목이 있다. 골목에 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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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콤한 갈치조림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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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2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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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도보 시간 약 50분 남산 팔각정 → 도보 20분 → 삼순이계단 → 도보 10분 → 안중근 의사 기념관 → 도보 20분 → 남대문시장

충무로

명동 >

찾아가는 길

숭례문

남산 팔각정까지는 남산 산책로를 따라 걷거나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

남대문시장 회현역

➎➌ ➍

지하철 4호선 명동역과 5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남산순환버스를 탈 수 있다. 남산 팔각정에서 삼순이계단까지는 한양도성 도성길 1구간을 따라 내려간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 앞 삼순이계단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걸어서 5분 거리.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지하철 4호선 회현역 방면으로 걸어가면 남대문시장이다.

서울역 한양도성 도성길 1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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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순이계단

도성 연결길 팔각정에서 삼순이계단 가는 길까지 한양도성 도성길 1구간이 이어진다.

널 3호터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팔각정

N서울 타워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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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2. 일제가 남긴 남산의 아픈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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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서울, 서울, 서울… 낭만 도시 서울과 만나다 명동 지나 N서울타워 거쳐 이태원까지 서울의 낭만을 느끼다 명동은 서울 낭만의 중심지다. 60년 전 명동 역시 지금과 다르지 않게 휘황찬란했으며, 정취가 넘쳤다. 명동에서 시작해 남산 자락을 걸어 N서울타워까지 가본다. 울창한 남산 소나무 숲을 걸어도 좋고, 케이블카를 타도 좋다. 목멱산 봉수대에 오르면 서울의 전경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N서울타워는 연인들의 성지. 저녁이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로 붐빈다. 이태원이 전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보자.

글·사진 최갑수

가족과 함께하기 좋은 남산 산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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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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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의 정기를 비축한 남산 소나무를 만나다 남산에 남아 있는 한양도성

남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

남산 가는 길. 한양도성을 따라 오른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하늘에는 솜털 같은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다. 소나무 숲 사이를 빠져나와 이마에 닿는 바람이 상쾌하고 시원하다. 남산은 사대문 안 어디에서나 고개만 들면 보이는 산이다. 해발 262m에 불과한 야산이 지만, 한 나라의 수도를 상징하는 산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 서울이 남경으로 승격되면 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한 뒤, 조선 시대 들어 태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역사 의 전면에 등장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애국가에 등장하는 남산 소나무. 껍질은 애국가 가사 그대로 ‘철갑을 두른 듯’ 딱딱하 고 단단하다. 남산 하면 소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남산의 소나무는 조정에서 적극적으 로 관리했다. 왕들은 풍수지리상 남산에 소나무가 무성해야 왕조의 정기가 비축된다고 믿었다. 1411년태종 11에는 장정 3000여 명을 동원해 20일간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때는 남산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관료와 산지기를 두었다. 《경국대전》에 는 도성 사방 산에 입산 금지표를 세우고, 벌목과 채석 등을 금하는 내용이 명문화되기 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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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남산 소나무 숲은 외세 침략과 개발 정책으로 크게 훼손됐다. 임진왜란 당시 예장동 일 대에 왜군이 주둔하며 남산의 소나무 벌목이 시작됐다. 구한말에는 이곳 ‘왜장터’에서 소나무를 베어낸 뒤 신궁과 신사를 지었다. 소나무 대신 벚나무를 심었고, 인근에는 통감 관저가 들어섰다. 요즘 들어서도 남산의 소나무는 점점 사라진다. 남산에는 여전히 3만 그루에 가까운 소나 무들이 있지만, 지구온난화와 토양의 산성화 때문에 그 수가 줄어든다. 울창한 소나무 숲도 머지않아 그 모습이 달라질지 모른다.

참고 자료 〈서울신문〉 2009년 11월 27일자, 《서울성곽 걷기 여행》(녹색연합,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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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1 > 03 > 012.

작위까지 받은 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울

구한말 조선을 찾은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도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이란 책에 서 “아름다운 남산부터 산에 둘러싸인 서울이 가장 잘 보인 다”고 말했다. 이런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남산은 조선 왕실에 의해 국토 와 왕경을 수호하는 진산鎭山으로서 작위를 가지고 제사를 받 는 위엄스럽고 성스러운 신산神山으로 대접받았다. 1395년태조 4 12월 백악북악산을 백악산신의 진국백으로, 남산을 목멱대왕으 로 봉작해 나라에서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이다. 남산 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가을에 초제를 지내던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목멱신사가 도성의 남산 꼭대기에 있고 소사小祀로 제사 지낸다”고 했다. 남산 꼭대기에 자리한 목멱신사는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 하여 ‘국사당’이라고도 했다. 이 국사당 건물은 일제의 조선신궁 건립으로 헐려서 인왕산으로 옮겨졌다.

조선 시대 외적의 침입을 알린 목멱산 봉수대

봉수대에는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을날이다. 가느다 랗고 하얗게 피어오른 연기는 어느덧 구름에 맞닿아 하늘로 사라졌다. 남산 자락에서 벼 를 베던 농부도, 청학동 정자에서 글을 읽던 선비도 그 연기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봉수는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에 알리거나 중앙의 긴급 사항을 알려 위기에 신속히 대처하도록 한 통신수단이다. 총 다섯 개로 구성되는데, 평상시에는 연기가 하나 올라가 고, 적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둘,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셋, 적이 경계를 침범하면 넷, 전 투가 시작되면 다섯 개가 올라간다. 팔도에서 올리는 봉수대의 종착점, 남산. 봉수대 다섯 개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흰 연기가 태평성대를 의미했다. 평화롭게 피어오르 는 연기를 보며 백성은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남산의 군사적 가치를 일찌 감치 알아본 태조는 외적을 방어하는 방패로 삼기 위해 1396년 남산에 도성을 쌓고 보수했다. 봉수대를 설치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은 1406년태종 6이다. 조선 시대에는 남산에 오르면 도성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봉수대를 지키는 수문장

참고 자료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I. B. 비숍,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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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03 > 013.

서울의 영원한 데이트 명소 N서울타워 출생의 비밀을 엿보다 연인들이 매단 사랑의 열쇠

N서울타워를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N서울타워 5층의 회전 레스토랑. 젊은이들에게 프러포즈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으로 꼽힌다. 1시간 40분 동안 앉은 자리가 천천히 360° 돌면서 서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인뿐만 아니라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민도 고단한 삶을 잠시 잊고 아름다운 서울 전망에 취해볼 수 있다. 서울 북쪽의 백악, 동쪽의 낙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 중심을 둘러싼 남산. 그곳 정상에 우뚝 솟은 N서울타워 는 사계절 남산의 절경과 서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서울의 랜드마크다. N서울타워는 예전에 남산타워라 불렸다. 처음 세워진 것은 1975년. 당시 방송 송출 전파탑으로 세워진 이래 1980년부터 일반인에 공개됐다.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2005년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N서울타워는 해발 262m 남산 정상에 자리하여 타워의 높이236.7m까지 더하면 약 480m에 달한다. 일본 도쿄타워333m만 비교해도 아시아 최고라 할 만하다. 남산은 1980년대에도 데이트 명소였다. 갓 결혼한 부부가 지금의 ‘리무진’이라 할 수 있는 시발택시1950~1960년대 미군 지프를 개조해 만든 택시로 남산 주변 길을 돌며 서울의 번영을 확인 하는 것이야말로 호사스러운 ‘허니문 투어’였다. 지금도 펜스에 걸린 사랑의 자물쇠가 데이트 명소임을 증명한다. MBC-TV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2PM의 닉쿤과 에프엑스의 빅토리아가 부부로 출연, 사랑의 자물쇠를 거는 모습이 방영되면서 사랑의 자물쇠 붐을 일으켰다. 타워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V자 모양 커플 벤치 ‘하트 의자’ 역시 큰 인기다. 가운 데가 움푹 파여 자연스럽게 바짝 붙어 앉는 의자에서 탁 트인 서울을 바라보는 것은 연인들에게 색다른 즐거움과 추억으로 다가온다.

N서울타워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서울의 상징 N서울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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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1 > 03 > 014.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낭만 1번지 명동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최고의 번화가 명동

첫 발표회나 다름없는 모임이 동방살롱 앞 빈대떡집에서 열렸다. 박인환은 벌써부터 흥분이 되어 대폿잔을 서너 잔 들이켜고, 이진섭도 술잔을 든 채 악보를 펼쳐놓고 손가락을 튕기는가 하면, 그 몸집과 우렁찬 성량을 자랑하는 임만섭이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문 앞으로 모여들거나 말거나 곁에 앉은 손님들이 보든 말든 이들 세 사람 입에선 샹송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 눈물 난다. 인환이 어쩌려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 빈대떡집 젊은 마담이 야무진 사투리로 박인환의 어깨를 치기도 했다.

명동은 일본인과 중국인 등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극작가 한운사는 이날 밤을 두고 “젊음과 낭만과 꿈과 산다는 것의 슬픔을 그이진섭가 타고난 재간으로 융합한 이 순간은 명동이 기억해둘 영원한 시간”이라고 묘사했다. 오늘날엔 중국과 일본 관광객이 점령하다시피 한 명동이지만,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세대에게 명동은 해방구와도 같았다. 탤런트 최불암의 모친이 운영하던 ‘은성’이라는 술집은 가난한 문화·예술인의 집결지였다. 그곳엔 언제든 외상을 주는 넉넉함이 있었 다. 청년 실업가 김동근이 동방문화회관이라는 다방을 연 건 1955년이다. 1층 다방, 2층 집필실, 3층 회의실로 구성된 일종의 복합 문화 공간이다. 공초 오상순을 중심으로 가톨릭 계열 문인이 모이던 청동다방, 박수근과 박항섭 등 서양화가들이 드나들던 금꿩다방, 연극인이 단골이던 은하수다방도 이름을 날렸다. 조병화와 이진섭은 물론, 시인 박인환·김수영·조지훈, 작가 전혜린 등이 진을 치고 맥주와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셨다. 주머니 사정이 괜찮은 날엔 조니워커 위스키로 호기를 부렸다. 외국 관광객이 넘쳐나는 대한민국 최고 유행의 거리, 명동. 지금의 명동은 이런 사연 들을 간직하여 더욱 풍요로운 게 아닐까.

1956년 봄 서울 명동의 어느 선술집, 막걸리를 마시던 시인 박인환이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애심씨, 노래 한 곡 불러주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애심씨 노래가 있어야지.” 하지만 나애심은 정중히 거절했다. “오늘은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니에요. 마땅히 부를 노래도 없고요.” 박인환은 그 자리에서 뭔가 끼적였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 사랑은 가고 / 옛날은 남는 것… 라틴음악과 샹송에 조예가 깊은 시나리오작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악보를 만들었고, 마침 술집에 들어선 테너 임만섭이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명동 백작’으로 불리던 신문기자 겸 작가 이봉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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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젊음과 유행의 거리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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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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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겼을까?

외국 배낭여행객 1번지 이태원

이태원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이태원은 화려하다. 한국인지 외국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거리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 이 많다. 유럽인도 있고 아랍인도 있다. 중앙아시아인과 동남아시아인, 인도인이 어울려 활기찬 풍경을 빚어낸다. 가게 간판도 한국어보다 외국어가 많다. 영어와 중국어, 타이어 등 생경한 글자로 쓰인 간판이 가득하다. 휴대폰 매장 앞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쓰인 입간판이 있고, 아랍어가 적힌 노래방도 있다. 먹거리도 가지각색이다. 시큼하면서도 매콤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 이태 원. 조선 시대의 이태원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외국인이 한강을 통해 도성에 들어 오건 숭례문을 통해 도성에서 나오건, 이태원을 거쳐야 했으니 이태원은 조선 시대부터 이방인의 집결지였다. 도성과 한강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 이태원은 끊임없이 외세에 시달리는 숙명을 타고 났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하던 왜군 15만 명이 주둔한 곳이 이태원이다. 구한말인 1882년 조선의 구식 군대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과 차별 대우받는 것을 참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킨 임오군란 때, 구식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에 온 청나라 부대가 주둔한 곳도 이태원이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태원은 서울에 주둔한 미군 기지가 정착하면서 군사 지역의 색채가 짙어졌고, 미군을 위한 각종 가게와 주점 등이 들어서면서 미군 위락 지대로 바뀌었다. 1960년대에는 이태원과 인근 한남동을 중심으로 외국 공관이 자리 잡았고, 1970년대에는 섬유산업이 호황을 누리며 이태원은 색다른 쇼핑이 가능한 곳이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공급지 역할도 했다. 그리고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을 거치며 글로벌 관광지로 떠올랐다. 지금 이태원의 모습에서 조선 시대, 배 밭이 많은 동네라고 배나무 이梨자를 써 이태원梨泰院 이라 불린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에 귀화해 살았다는 뜻으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왜란 중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여서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院이란 이름을 붙였 다는 슬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분명한 것은 과거에도 현재도 이태원이 ‘두 가지 얼굴’을 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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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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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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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3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명동역

➍ ➌➋

케이블카승강장 >

도보 시간 약 1시간 명동 → 도보 15분 → 남산 남측 산책로 → 도보 10분 → 목멱산 봉수대 터 → 도보 3분 → N서울타워 → 도보 30분 → 이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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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산책로

찾아가는 길

목멱산 봉수대 N서울타워

지하철 4호선 명동역 3번 출구로 나온다. 약 700m 가면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 여기에서 남산길이 시작된다. 남산 계단길을 따라가면 봉수대가 나온다.

호터널 남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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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연결길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N서울타워까지 한양도성길이 이어진다.

이태원2동

잠수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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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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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3. 개화기 낭만과 현대의 낭만이 어우러지다

남 산 2호 터 널

N서울타워에서 녹사평대로를 따라 내려오면 이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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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4

남산 자락 딸깍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남산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한양도성, 그 길을 따라 흐르는 이야기 남산이 들려주는 그때 그 시절 남산은 한양을 지키는 요새이자 서민의 생활 터전이었다. 수려한 명성으로 청학동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던 곳. 딸깍발이라 불리는 서생들이 살았고, 도둑이 은신하던 곳이기도 하다. 남산을 지나는 한양도성 구간에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이야기와 장충체육관이 전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사진 최갑수

남산골 한옥마을의 양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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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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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4. 남산 자락 딸깍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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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문으로 알아보는 한양도성 성곽 이야기

버티고개 너머 남소문으로 가는 길

한양도성의 암문

남소문이 있던 자리. 지금은 표석만 덩그러니 남았다

한양도성을 걷다 보면 숨겨놓은 듯한 자그마한 문을 발견할 수 있다. 성벽에 누각 없이 만든 문이다. ‘이걸 왜 만들었을까?’ 이리저리 살펴보니 예사 문이 아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이 문은 암문이라고 부른다. 작은 문이지만 다양한 이야기가 깃든 것을 알 수 있다. 암문은 일종의 비밀 문이다. 전쟁 때는 군사들의 이동과 전시 물자 수급에 이용됐다고 한다. 적병이 대·소문 밖에 진을 치고 있을 때는 비상구 역할도 했다. 그러나 한양도성에는 암문이 없었다. 무너진 성곽을 넘어 통로가 생긴 뒤 복원하면서 통행의 편의를 위해 설치된 것이다. 한양도성 축성에 얽힌 재미있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태조는 1396년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성을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구간별로 군현을 지정하여 그 지역 사람들이 성을 쌓게 했다. 구간마다 천자문 순서대로 성을 쌓은 돌에 글자를 새기기도 했다. 백악 정상에서 하늘 천天으로 시작해 낙산, 남산, 인왕산을 지나 마지막에는 천자문 97번째 조상할 조弔로 끝나는 것이다. ‘각자’라는 것도 있었다. 성을 쌓을 때 공사를 맡은 지역,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공 사 일자 등을 돌에 새긴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사 실명제’로, 성벽이 무너질 경우 이를 책임지게 했다.

남소문은 문자 그대로 남쪽의 작은 문이라는 뜻이다. 1457년 세조는 교통 편의를 위해 남 산에 남소문을 만들도록 했다. 한강나루인 한남동에서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이 험한 산 길이라 광희문까지 진입하기가 보통 까다롭지 않았다. 남소문은 광희문을 보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사람이 운명을 타고나듯 문에도 운명이 있나 보다. 남소문은 태어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 이었다. 음양가들은 남소문을 만들 때 극렬히 반대했다. 음양설에서 손방巽方 :동남쪽은 ‘왕가 의 황천皇天’이라며 불길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음양가들은 문을 만들면 나라에 흉흉 한 일이 생길 거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나라의 일을 어찌 음양가들의 호사에 맡길 수 있을까. 결국 문은 세워졌고, 백성들은 한층 편하게 성을 넘나들었다. 그렇지만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가 왕위를 물려받기도 전에 병사하면서 남소문은 지어진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 굳게 닫혔고,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이 문이 어 디에 있었고, 언제 없어졌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참고 자료 〈동아일보〉 2011년 12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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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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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4. 남산 자락 딸깍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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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지조는 있다, 남산 딸깍발이 이야기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는 짚신 삼기 등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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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한옥마을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는 우리 한옥의 그윽한 정취를 접할 수 있다

녹사錄事 : 조선 시대 중앙·지방 관서의 행정 실무를 맡은 서리 는 저물 무렵 남산 기슭으로 찾아들었다. 급한 일이라 말을 탔다. 이행李荇 정승에게 꼭 전해야 할 기별이 있었다. ‘지금쯤 이행 정승께서 식사하고 쉬고 계실 거야.’ 녹사는 말고삐를 잡아챘다. 이행의 처소까지는 조금 더 올라가야 했다. 바삐 움직여 청 학동 동구에 다다랐을 때, 허름한 옷에 나막신을 신고 어린애와 함께 나와 있는 노인 이 보였다. 녹사는 필시 이행 정승 댁에서 일하는 노인이다 싶어 말에 탄 채 점잖게 물 었다. “이보게 노인, 댁에 지금 이 정승이 계신가요?” 노인은 이 말을 듣더니 껄껄 웃었다. “아니, 이 노인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할 것이지 왜 웃기만 한단 말이오? 정승께 급히 전해야 할 기별이 있단 말이오.” “허허허… 내 급보가 있을 줄 알고 여기까지 나왔소. 내가 바로 이행이오. 무슨 일인 지 어서 말해보시오.” 녹사는 깜짝 놀라 말에서 내리려다가 그만 떨어져 나뒹굴고 말았다. 남산의 북쪽 기슭 청학동에는 조선 시대에 ‘청학도인靑鶴道人’이라 불리던 용재 이행이 살았다. 여기에 용재 서옥容齋書屋이 있었는데, 많은 학자들이 드나들었다. 이행은 중종 때의 상신이다. 1495년 연산군 원년 에 등제하여 1515년중종 10 박상, 김정을 벌하라고 주장하다 물러났다.

초야에 묻혀 지내다 기묘사화 이후 다시 영의정이 된다. 그는 김안로를 소인小人으로 몰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려다가 귀양 가기도 했다. 이행은 남산에 살 때 처소 입구 좌우에 갖가지 나무를 심고, 허름한 차림으로 지팡이를 끌고 산책을 즐겨서 내로라하는 정치가 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고 한다. 조선 시대 궁궐과 가까운 가회동, 삼청동, 안국동, 계동 일대에 권문세가가 들어선 북촌이 형성되었다. 반면 몰락한 양반 집안이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들은 남산 기슭 필동 과 예장동 일대에 모여 살았다. 세상 물정은 모르면서 자고 나면 글만 읽는 이들을 ‘남산 골 샌님’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워낙 가난해서 비가 오는 날이나 추운 겨울이나 나막신만 신고 다니다 보니 딸깍딸깍 소리가 나서 ‘남산 딸깍발이’라고도 했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참고 자료 〈서울신문〉 2013년 9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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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4. 남산 자락 딸깍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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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 선수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장충체육관

한양도성 장충동 구간

장충동 족발

한국 근현대사를 품은 장충체육관. 지금은 리모델링 공사 중이다

1966년 6월 25일에는 프로 복서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Nino Benvenuti를 15회 판정으로 꺾고, 사상 처음 세계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장충체육관 앞에 족발 골목이 조성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사람들은 장충체육관에서 레슬링 경기에 열광하고, 족발 집에서 경기를 복기했다. 장충체육관은 1963년 국내 최초의 돔 경기장으로 개관했다.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 으로 잘 살던 필리핀의 기술 지원으로 건립됐다는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 다. 장충체육관은 체육관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1972년 12월, 1978년 7월 과 전두환 전 대통령1980년 8월, 1981년 2월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네, 어금니를 깨물고 다시 일어서는 김일 선수! 상대방을 향해 돌진합니다. 아, 드디어 나온 김일 선수의 박치기! 일본 선수는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나뒹굽니다….” 체육관은 자욱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찼고, 관중의 함성과 돌아다니며 오징어와 소주를 파는 행상의 호객 소리로 어지러웠다. 김일의 주 무기는 박치기. 하지만 김일은 박치기를 아꼈다. 그에게는 타고난 쇼맨십이 있 었다. 반드시 공격을 당한 뒤 역습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역전승처럼 아슬아슬하고 흥분 되며 통쾌한 경기가 어디 있겠는가. 김일은 피를 철철 흘리며 비틀거리다가 어느 순간 원기를 되찾아 상대 이마에 필살의 박치기를 꽂았다. 김일이 상대 이마를 한 손으로 잡고, 자기 몸을 활처럼 젖히면 관중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반들반들하고 피 로 범벅이 된 이마가 상대방에게 꽂히는 순간, 장충체육관도 뒤로 넘어갔다.

참고 자료 〈세계일보〉 2013년 6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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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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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4. 남산 자락 딸깍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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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4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동대문 명동 >

도보 시간 약 1시간 50분

➌➍ ➏ ➎

남산골 한옥마을

장충체육관 → 도보 20분 → 암문 → 도보 30분 → 남소문 터 → 도보 5분 → 남산 북측 산책로 → 도보 55분 → 남산골 한옥마을

동대입구역

장충체육관 >

찾아가는 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장충단공원이다. 장충단공원에서 신라호텔 방면으로 가면 장충체육관이 있는데, 지금 리모델링 공사 중이다. 장충체육관에서 한양도성길 표지판을 찾을 수 있다. 한양도성길을 따라가면 운동기구가 설치된 공터가 나오고, 암문이 있다. 국립극장

암문에서 남소문 터에 가려면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방면으로 가야 한다. 반얀트리 정문에서 한남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남소문 터가 있다.

암문

남산(목멱산)

보도 옆에 자그마한 표석이 있으니 유심히 살펴야 한다. 국립극장을 지나 남산 북측 산책로를 걷다 보면 남산골 한옥마을로 가는 길이 있다. N서울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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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산 2호 터 널

장충단공원에서 신라호텔 방향으로 가면 한양도성길이 시작된다.

터널 1호 남산

도성 연결길

약수동

남소문 터

한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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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남산(목멱산)・숭례문 구간(장충체육관 -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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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4. 남산 자락 딸깍발이를 만나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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