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이야기를 따라 한양 도성을 걷다 백악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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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백악 구간 >

테마 10. 테마 11. 테마 12. 테마 13. 테마 14. 테마 15.

창의문 - 혜화문

창의문자하문에서 숙정문 북대문/숙청문을 지나 혜화문 홍화문/동소문으로 이어지는 백악 구간은 한양도성의 주산인 백악을 품어 전망 좋은 곳이 많다. 백악의 정상 백악마루에서 바라보는 남쪽에 남산목멱산이 있다. 백악마루 아래 한양도성에 서면 산자락마다 마을을 품은 북한산삼각산의 넉넉하고 장쾌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창의문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성안 마을, 혜화동의 어제와 오늘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창의문

백악과 인왕산 골짜기에는 백석동천, 삼청동천, 청계동천, 수성동계곡 등 수려한 계곡이 흐른다. 삼청동천은 지금 상가가 밀집한 삼청동 거리 도로 아래로 흐르지만, 삼청공원 후문 쪽으로 가면 계곡이 남아 있다. 삼청동 국무총리공관 맞은편 병풍바위에 ‘삼청동문’이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병풍바위를 넘어가면 북촌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양반층 거주지의 신화가 깨지면서 서민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남아 있다. 숙정문에서 혜화문까지는 솔숲과 어우러진 도성길이 이어진다. 그 아래 창덕궁・창경궁과 조선 시대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자리하고 있다.

숙정문

혜화문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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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0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갤러리 천국 부암동 한양도성길에서 백악을 품다 부암동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숙정문, 삼청각까지 이어지는 길은 대한민국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다. 최근 데이트 코스로, 도심 나들이 코스로 연인과 가족이 즐겨 찾는 부암동에는 역사 유적과 근대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흘러 다닌다. 한양도성길을 따라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넘어가는 백악 구간은 일제강점기 안타까운 역사와 분단의 현실을 일깨우는 흔적을 만나는 곳이다. 1970~1980년대 격동기의 중심 무대가 된 삼청각은 전통문화 공연 체험을 위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해 도심 속 휴식처가 되고 있다.

글·사진 윤대헌

삼청각 동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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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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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10.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3 > 10 > 050.

뼈아픈 역사를 되짚어보며 조선 속으로 한양도성과 청운대

청운대

청운대에서 바라본 도심 전경

백악마루

간은 청와대를 에둘러 가는 길이다. 1968년 북한 무장 공비들의 침투로 폐쇄된 이후 지난 2006년 다시 개방됐다. 지금도 이 구간을 걷기 위해서는 신분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고, 사진 촬영도 까다롭다. 한양도성길에 오르면 무장 공비 침투 당시 흔적인 ‘1·21사태 소나 무’,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쇠말뚝을 박아놓은 ‘촛대바위’ 등 굴곡진 한국 근 대사의 잔재를 볼 수 있다. 자연을 체험하면서 역사 공부까지 할 수 있어 가족 단위로 즐 겨 찾는 코스다. 창의문에서 백악마루까지는 가파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자락에 자리한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사가 끝나는 곳에 백악마루해발 342m가 있다. 백악의 정상에 해당하는 백악마루는 최고의 도심 전망대로 꼽힌다. 경복궁은 물론, 세종로 일대와 멀리 여의도 63빌딩까지 눈 안에 든다. 백악마루를 지나 20분쯤 걸으면 청운대해발 293m다. 남쪽으로 발아래 경복궁과 세종로가 일직선상에 있다. 북쪽으로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도열한 모습이 장대하다. 한양도성의 외곽 부분이 잘 보이고, 멀리 촛대바위도 선명하게 잡힌다.

한양도성 백악 구간

걷기가 유행하면서 전국에 참 많은 길이 생겼다. 한양도성을 따라 걷는 도성길도 이중 하 나다. 한양도성은 말 그대로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곽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축조하도록 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과 사소문을 설치했는 데, 창의문은 한양도성 서북쪽의 소문이다. 한양도성은 조선 초기 축성된 이후 시대 마다 다른 방식으로 보수됐다. 한양도성길을 따라 걸으며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부암동 언덕의 창의문에서 시작해 백악마루, 청운대를 거쳐 숙정문으로 넘어가는 백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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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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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10.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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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0 > 051.

3 > 10 > 052.

무장 공비 만행을 온몸으로 겪은 1·21사태 소나무

백악을 밝히는 촛대바위

1·21사태 소나무의 총격전 흔적

촛대바위

한양도성을 따라 숙정문 방향으로 걷다 보면 몸통 군데군데 빨간 페인트가 칠해진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1·21사태 소나무다. 1·21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 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지금의 청운동까지 잠입해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사건이다. 당시 이들 은 한국군과 민간인 복장을 하고,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해 도발을 자행 했다. 이들은 자하문고개를 지나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정체가 드러나자, 총격전을 벌이 며 인왕산과 백악 방면으로 도주한다. 소나무에 찍힌 빨간 페인트 표시는 당시 교전으로 생긴 총탄 흔적이다. 잠입한 31명 중 28명이 사살됐고, 2명은 도주하고 김신조는 생포 됐다. 이 사건으로 백악은 완전히 폐쇄됐고,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1·21사태 소나무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20분 정도 발품을 팔면 촛대바위가 나온다. 촛대를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지만, 바위 앞에 마련된 전망 데크에서는 도대체 왜 촛대 바위라고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촛대 형상을 확인하는 장소로는 이곳보다 청운대 가 낫다. 청운대에서는 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촛대의 형상을 또렷이 볼 수 있다. 높이 13m에 달하는 바위는 웅장하면서도 날렵한 모양새다. 촛대바위에도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있다. 일제는 1920년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지맥을 끊기 위해 이 바위에 쇠말뚝을 박았다. 현재 그 자리에는 쇠말뚝을 뽑고 작은 돌을 세웠다. 일제는 촛대바위뿐 아니라 경복궁과 인왕산 등 곳곳에 쇠말뚝을 박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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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10.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3 > 10 > 053.

요정 정치의 산실 삼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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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각 천추당

삼청각 동백헌

촛대바위를 지나면 숙정문이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숙정문 아래 삼청 각이 있다. 지금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공간이지만, 1970~1980년대만 해도 대원각, 청운 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꼽힌 삼청각은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다.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 한일회담의 막후 협상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청운각은 1980년대 사라졌고, 성북동에 있던 대원각은 이전 주인이 1997년 법정스님에게 기부해 길상사로 새롭게 탄생했다. 삼청각은 여느 요정처럼 민간인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정부 기관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문 이 돌 정도였다. 특히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중앙정보부가 개입했고, 이 때문에 개업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물론 요원 수십 명이 참석했다는 풍문이 있었다. 서울에는 광복 이전에도 명월관, 국일관, 송죽관 등 이름난 요정이 많았다. 정치 운동가나 기업가, 상인들이 요정의 단골이었다. 삼청각은 경영난으로 1990년대에 일반 음식점으로 전환했다가 1999년 문을 닫는다. 한 건설업체가 이곳을 매입해 고급 빌라를 지으려고 했으나, 건물의 문화적 가치를 고려해 건축 허가가 보류됐다. 2000년 서울시가 삼청각 부지와 건물을 문화시설로 지정,

리모델링을 거쳐 2001년 전통문화 공연장으로 재탄생했다. 오늘날 삼청각은 세종문화회관이 운영하는 전통문화 예술 복합 공간으로 자리매김했 다. 취하당, 일화당, 청천당, 유하정, 천추당, 동백헌 등 과거의 건물은 그대로 유지되고, 이름도 변하지 않았다. 이중 규모가 가장 큰 일화당은 삼청각을 세상에 알린 건물이다. 1972년 7월 4일 남북이 최초로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공동성명 대표단 만찬 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가 그해 12월 삼청각에서 만찬을 즐긴 사실은 유명하다. 이후 1973년 남북적십자회담 만찬장으로 쓰이는 등 일화당은 1970년대 남북대화의 산실로 기능했다. 넓은 정원이 딸린 한옥 건물 일화당은 현재 전통 공연과 연회 공간으로 사용된다. 남은 건물과 야외 놀이마당에서는 명인들의 예술 공연이 이어지고, 체험 교육과 전시 등 다양 한 행사가 열린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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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10.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삼청각 유하정


3 > 10 > 054.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포개진 부암동

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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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정

부암동 거리 풍경

부암동이 많이 떴다. 카페와 갤러리 등이 들어서면서 연인은 물론, 나들이 삼아 나선 가 족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 인왕산과 백악을 에두르는 한양도성길이 뚫리면서 창의문안내소를 출발점이나 도착점으로 삼는 등산객의 모임 장소로도 인기다. 이러다 보니 곳곳에 숨어 있는 예술과 문화 이야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까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부암동은 오래전에 높이 2m 바위부암가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바위는 세검정 옆에 있었는데, 여기에 작은 돌을 문지르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주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였다고 한다. 이 바위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부암동은 인왕산과 백악의 북쪽 자락에 위치한 동네다. 두 산을 끼고 있으니 풍광이 수려하고 자연이 청명했을 터. 역사 속 유명 인물들의 별장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계정사라는 정자는 안평대군이,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이 이용하던 별장이다. 백사실계곡에는 추사 김정희의 별장이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암동을 구성하는 자연 마을에 무계동, 백석동, 삼계동처럼 바위나 계곡과 관련된 이름이 많은 것 역시 아름다운

주변 풍광과 무관하지 않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을 통해 관람이 가능하다. 2012년 8월 개관한 서울미술관은 자하문 터널 입구에서 부암동 쪽으로 언덕을 올라가면 된다. 이곳 3층 문을 나서면 석파정이다. 석파정은 조선 말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이 별서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훗날 흥선 대원군이 석파정이라 이름 붙이고, 자신의 호도 ‘석파’라 했다고 전한다. 청정한 계류가 흐르는 바위들을 앞에 두고 안채, 사랑채, 별채 등 가람과 정자가 점잖게 자리잡았다. 사랑채 서쪽 뜰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조선 시대 학자와 선비들의 기품을 대변하듯 우뚝 우뚝 서 있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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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10.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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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0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삼청각

촛대바위 홍련암

성북동

청운대 서울미술관 / 석파정

>

1∙21사태 소나무

도보 시간 약 2시간 30분

숙정문

서울미술관 → 도보 10분 → 부암동 → 도보 5분 → 창의문안내소 → 도보 60분 → 1∙21사태 소나무 → 도보 20분 →

말바위안내소

창의문안내소

청운대 → 도보 15분 → 촛대바위 → 도보 15분 → 숙정문 → 도보 15분 → 말바위안내소 → 도보 10분 →

창의문 삼청동

홍련암 → 도보 5분 → 삼청각 경복궁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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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도성 연결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버스(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를 타고

창의문안내소에서 출발해 숙정문 쪽으로 가면 1·21사태 소나무, 청운대, 촛대바위를

자하문터널 입구에 내리면 서울미술관이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3번 출구에서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숙정문안내소 아래 홍련사, 삼청각이 있다.

버스(1020, 1711, 7016, 7018번)를 타고 자하문터널 입구에 내려도 된다. 서울미술관에서 부암동주민센터 쪽으로 언덕을 오르면 그 일대가 부암동이다. 부암동의 창의문안내소를 이용하면 한양도성길에 오를 수 있다.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이어지는 백악 구간에 1·21사태 소나무, 청운대, 촛대바위가 차례로 있다. 한양도성길 말바위안내소에서 삼청터널 쪽으로 내려오면 홍련암이다. 홍련암 옆에 삼청각이 있다. 삼청각은 도심 주요 지점에 정차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광화문 교보문고와 경복궁 옆 현대갤러리 앞에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다(현통사에서 세검정로6길을 따라가면 세검정을 만난다. 소요 시간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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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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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10. 한양도성과 백악 아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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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1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한양도성의 주산 백악이 품은 북촌 이야기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구간으로, 한양도성의 주산인 백악과 그 아래 북촌을 돌아보는 코스다. 먼저 조선 시대 상위 1% 권문세가들이 살던 북촌을 돌아본다. 골목길을 걸으며 한옥이 밀집한 마을의 운치와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수직으로 솟은 건물 하나 없이 지붕 낮은 초가와 기와집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대한제국 시기 한양도성을 찾은 외국인에게 신비한 풍경이었다. 지금도 북촌에는 한옥 밀집 지역이 남아 기와지붕이 물결처럼 넘실대는 풍경을 볼 수 있고, 그 지붕 아래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소히 펼쳐진다. 북촌의 북쪽 삼청공원을 거쳐 말바위로 올라가면 한양도성길을 만나고, 숙정문을 지난다. 능선을 따라 걷는 길에서 백악의 정상 백악마루에 올라 서울을 굽어본다. 이 구간은 자하문으로 잘 알려진 창의문에서 끝나지만, 한양도성길은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글·사진 장태동

백악 정상을 지나 창의문 방향으로 가는 한양도성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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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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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1.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3 > 11 > 055.

말을 타고 올라 풍류를 즐기다 말바위

자하문으로 잘 알려진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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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북대문인 숙정문과 도성. 숲 속으로 도성이 이어진다

말바위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쪽 바위는 말바위의 일부다

삼청공원 안에서 한양도성을 등에 업은 말바위로 올라간다. 등산로 입구에서 말바위 까지 가는 길은 600m 오르막이다. 길은 말바위에서 한양도성과 만난다. 말바위는 엄청나게 큰 바위 여러 개가 봉우리를 이룬 형국이다. 그곳에 오르면 바위 능선 양쪽으로 서울시에서 만든 조망 명소가 있다. 한쪽 전망지에서는 남산 쪽 풍경이, 다른 쪽 전망지에서는 북쪽과 동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과 풍경이 좋으니 예부터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조선 시대에는 양반들이 이곳에 올라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말바위라고 부르지만, 옛 지도에는 부엉이바위 라고 표시되었다. 백악 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는 끝에 있다고 해서 말末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바위에서 숙정문으로 향한다.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한양도성길은 신분증이 없으면 출입이 불가능하다. 간단한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확인받은 뒤 숙정문으로 발길을 옮긴다.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쪽 정문으로 원래는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다. 연산군 때 성곽을 보수하면서 성문을 옮기도록 했는데,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숙정문은 사람이 출입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닫았다가 가뭄이 심할 때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다. 이는 1416년태종 16 만든 기우 절목기우제 시행 규칙에 따라 적용된 규칙이다. 북쪽은 음, 남쪽은 양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 숭례문을 닫고 음의 기운인 숙정문을 열 었다. 숙정문을 지나 백악 정상 백악마루에 오른다. 산길과 도성길을 올라오느라 수고했다고 바람이 땀을 닦아준다. 백악마루에 서면 남산과 서울 도심이, 그 아래 한양도성길에 서면 북한산이 마을을 품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는데 멀리 거대한 바위 봉우리가 보인다. 인왕산이다. 한양도성은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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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1.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숙정문


3 > 11 > 056.

도심 속 푸른 산책길 삼청공원

백악 정상 아래 한양도성길에서 본 풍경. 북한산 줄기가 시원하게 뻗었다

한양도성 말바위 아래 삼청동 초입에서 삼청공원으로 가다 보면 옛날 바위에 새긴 ‘삼청동문’ 글씨가 남아 있다. 국무총리공관 맞은편 건물 한 귀퉁이에 바위 절벽이 보인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건물 뒤에 우뚝 솟아 병풍처럼 늘어선 바위를 만난다. 이 바위에 삼청동문이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삼청동문’이란 삼청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란 뜻이다. ‘삼청’은 도교의 삼청태청, 상청, 옥청 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도교에서 말하는 삼청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이상향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은 산과 물이 맑고 인심이 좋아 삼청이라고도 불린다. 삼청동은 조선 시대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광해군은 1617년 삼청동 산골짜기에서 술 마시고 활 쏘는 것을 금지했다. 한겨울에도 술 마시고 사냥을 즐길 정도로 산세가 좋았다는 얘기다. 1619년 여름에는 삼청동계곡에서 어린아이들이 목욕을 했는데, 그들 또한 단속 대상이 됐다. 훈방으로 끝났지만 무더운 여름 삼청동계곡에서 물놀이하던 아이들이 당황한 표정이 눈에 선하다. 1659년에는 사대부 부녀들이 삼청동계곡으로 놀러 왔다가 단속에 걸렸는데, 그 책임을 가정을 소홀히 돌본 가장에게 물었다고 한다. 산세 좋은 곳에 사람이 몰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다르지 않았나 보다.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호랑이가 출 몰했다는 것이다. 1531년 삼청동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몰아낸 일이 있었다. 당시 호랑이는 삼청동뿐만 아니라 인왕산에도 가끔 나타났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일제강점기 삼청동에서 호랑이가 미인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서울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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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삼청공원에 있는 정몽주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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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퍼졌다. 삼청동은 소나무 숲이 좋았다. 여름이면 탁족 회나 복놀이 등으로 계곡에 모여 놀았다. 빨래하는 여인 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부터 빨래하러 모인 여 자들이 호랑이 얘기를 했다. 삼청동에서 숙정문으로 가 는 깊은 계곡에서 빨래하던 여자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서 죽었으며, 후환이 두려운 마을 사람들이 삼청동 약물 터 당집에서 산신굿을 올렸다는 소문이었다. 관할 파출소에는 그런 피해자 신고가 들어오지 않았고, 산신굿을 올렸다는 당집에 확인하니 그런 일로 굿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청동 호랑이 얘기는 인근 재동, 가회동, 종로 부근까지 퍼졌다. 이 무렵 삼청동계곡 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겼다. 소문의 진원은 끝내 밝히지 못했지만, 삼청동 빨래터에 다니던 어떤 미친 여자의 옷 이 호랑이가 여자를 물고 갔다는 바위 근처 나뭇가지에 찢긴 채 걸린 것을 보고 누군가 퍼뜨린 소문이라고 마무 리되었다.

테마 11.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3 > 11 > 057.

조선 시대 상류층이 살던 곳 북촌문화센터

놋쇠로 만든 조선 시대 주걱

1940년대 계동 장씨 집안의 혼수품, 은으로 만든 주전자 세트

북촌문화센터

쓰고 다녔다. 갈모는 갓모가 변한 말이다. 남자아이는 복건을, 여자아이는 아얌을 썼다. 여자 어른들은 장옷이나 쓰개치마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족두리, 아얌, 화관 등으로 머리를 장식했다. 조선 후기 북촌에서 해마다 정초에 가족끼리 모여 앉아 목木·화火·토土·금 金·수水 오행 점구를 던져 점괘를 보던 1년 신수점 놀이를 했다. 북촌 장씨 집안 며느리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간장 단지에는 간장 응고물이 있었다. 적어도 100년 이상 된 간장독에서 볼 수 있는 것이란다. 조선 시대 가회동 양반가에서는 놋으로 만든 주방 기구를 사용했다. 계동 김씨 집안에서 사용하던 오동나무로 만든 함지박은 아직도 충분히 쓸 수 있겠다. 1906년 호적 자료에 따르면 북촌 전체 인구 1만 241명1932호 중 양반과 관료가 43.6%를 차지하여 이때까지도 이곳이 상류층 동네였음을 알 수 있다. 상류층 주거지의 전형이 깨진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다. 일본은 북촌의 필지와 임야 등을 매입해서 중소 규모의 한옥을 지었다. 반상의 신분제도가 없어지고 상경한 사람들로 인구가 늘자, 북촌은 일반인의 소소한 삶으로 꾸며진다. 1940년대 계동 장씨 집안의 혼수에는 은으로 만든 주전자 세트도 있었다. 북촌생활사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부유층 혼수로 은제 주전자 세트가 유행했는데, 이는 조선 왕실에서 쓰던 은제 주전자를 본떠 만든 것이다. 신부 집에서 은제 주전자 세트를 준비할 돈이 부족하면 시댁에서 혼수 비용을 도와줘 구색을 맞췄다. 계동 이씨 집안에서 나온 물건 중에는 1950년대 장바구니가 있는데, 군용전화선 으로 얼기설기 만든 게 눈에 띈다.

한양도성 북쪽에 자리잡은 북촌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 북촌문화센터다. 북촌문화 센터는 1920년대 민형기가 살던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다. 사랑채 마당에서 문을 지나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 뒤에는 별당이 있다. 폐쇄적이지만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한옥의 운치가 물씬 풍긴다. 여러 건물 가운데 사랑채에 눈길이 가는 건 기와지붕에 덧댄 차양과 빗물받이, 비물통 때문이다. 빗물받이에 모인 빗물은 경사를 따라 비물통으로 흘러들어 마당으로 떨어진다. 비물통을 새 대가리 모양으로 만들고 눈을 그리니 비물통 양옆으로 치켜 올라간 빗물받이와 기와지붕이 새의 날개가 되고, 집 자체가 거대한 새 한 마리로 다시 태어났다. 한옥이 아니고는 완성할 수 없는 해학이다. 북촌은 조선 시대 상위 1% 권문세가들의 주거지다. 북촌 출신 인사를 잠깐 열거하자면 명성황후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좌의정 맹사성과 충절의 표상 성삼문이 이곳에 살았고 민정중, 박영효, 박규수, 이상재, 손병희, 김옥균 등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 조선 시대 선비는 여름에 새벽 3시, 겨울에는 새벽 5시 전후에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 8시 이전에 자기 몸을 돌보고,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8시 전후해서 아침을 먹고, 오전 시간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책을 읽었으며, 오후에는 집안일을 돌봤다. 북촌생활사박물관은 2009년 북촌에서 수집한 물건으로 특별전을 열었는데, 당시 전시품의 사진과 전시품에 얽힌 이야기를 책으로 묶었다. 그 책에 따르면 조선 시대 양반은 집 안에서 정자관을 쓰고, 외출할 때는 갓을 썼다. 비가 오면 갓 위에 갈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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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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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1.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3 > 11 > 058.

차 한 잔의 여유,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북촌한옥마을 한옥집이 밀집된 풍경

를 만나면 촌부가 됐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심성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맹사성이 고향 온양으로 가던 길에 장호원을 지났다. 현감은 좌의정이 자신의 고을을 지나간다고 해서 마중 나가기로 하고, 아랫사람들에게 길을 깨끗이 치우 고 정비한 뒤 백성들의 통행도 통제하도록 시켰다. 맹사성이 지나갈 시간이 훨씬 넘어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도롱이를 걸친 노인이 소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갔다. 포졸들이 노인 에게 다른 곳으로 돌아가라며 실랑이했다. 기어코 그 길을 가겠다던 노인을 끌고 관아로 왔는데, 알고 보니 맹사성이었다. 맹사성은 소를 즐겨 타고 다녔다. 소와 그의 만남도 인상적이다. 마을을 지나는데 어린 아 이들이 소를 괴롭히며 놀고 있었다. 이를 본 맹사성은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그 소를 집 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앙상하던 소가 건강해지자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는 데, 소가 맹사성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맹사성은 그 소를 보살피며 타고 다녔다. 그는 피리를 즐겨 불었다. 음악에 대한 조예는 임금이 인정했을 정도다. 태종이 맹사성을 풍해도 관찰사에 임명했는데, 하륜이 악보에 밝고 오음을 잘 어울리게 하는 사람은 맹사 성뿐이라며 악공을 가르치도록 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고, 태종은 마땅한 때 그렇게 하 겠다고 허락했다. 세종은 향악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맹사성과 상의하라고 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 ‘음률音律에 능하여 손수 악기를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어질고 예 와 음을 좋아한 그도 작은 단점이 있었으니, 큰일을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 약했다고 한다. 맹사성 집터 표석 부근에 있는 북촌동양문화박물관 1층에는 전시관 두 개와 고불서당 이 있고, 2층은 동양차문화관과 전망대다. 박물관만 볼 수도 있고, 2층에서 차만 마실 수 도 있다. 전시관에는 한국의 선비 문화와 중국의 문화에 얽힌 도자기, 가구, 글씨, 그림 등 이 있다. 2층 전망대에 나가 차 한잔 마시며 백악과 인왕산 풍경을 즐긴다.

맹사성 집터 표석 부근에 있는 북촌동양문화박물관 고불서당

한양도성의 북쪽 삼청동 언덕에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이 있고, 그 초입에 ‘맹사성 집터’ 표 석이 보인다. 표석에 조선 세종 때 정승을 지낸 청백리가 살던 집터고, 퇴청하면 이곳에 서 피리를 즐겨 불었다는 내용이 있다. 79세에 죽은 맹사성은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 다. ‘문文’은 충신忠信하고 예로써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말하고, ‘정貞’은 청백淸白하게 절조 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일생을 청렴하게 살았으니 죽어서 그런 시호를 받은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 창녕 부원군 성석린의 집이 맹사성의 집 아래 있었는데, 맹사성 은 선배 성석린이 죽을 때까지 이 집을 지날 때마다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또 좌의정의 신분으로 향리에서 첨지를 만나면 자신도 첨지가 되고, 진사를 만나면 진사가 되고, 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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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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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1.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3 > 11 > 059.

만민이 평등한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려던 김옥균 서울시립 정독도서관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날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날 밤 우정국에서 낙성식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 홍영식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도 우영사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 어떤 여러 명의 흉도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과 각궁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 김옥균 등이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에게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다.

정독도서관 정문 앞에 있는 성삼문 집터 표석

김옥균 집터

갑신정변은 이렇게 시작됐다. 개화당 세력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현재 계동 현대 사옥 자리으 로 피신시키고, 수구파 세력을 하나하나 처단했다. 거사 다음 날 수구 세력은 명성황후 에게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 청나라 군사의 도움을 받아 정국을 돌파하겠다는 내용 을 은밀히 전했다. 명성황후는 갖은 구실을 만들어 고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음 날 청나라 군사 1500명이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은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병력을 철수했다. 개화당 생도와 궁을 지키던 조선군 1000여 명이 감당하기 힘든 싸움이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던 개화당의 꿈은 3일 만에 사라졌다. 이를 ‘삼일천하’라고 부른다. 김옥균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중국 상하이 미국 조계 구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894년 상하이에서 수구 세력이 보낸 자객 홍종우의 손에 살해되었다. 청 나라는 김옥균의 시신을 배에 실어 인천 월미도 항구로 보냈다. 의금부에서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할 것을 주청하기도 했다. 김옥균은 죽었지만, 그해 갑오개혁으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잡자 예전의 벼슬을 회복 했다. 나중에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충달’이라는 시호를 받 았다.

한양도성 북촌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개다. 김옥균의 집터인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가는 길 중 풍문여고 정문 옆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길 이름이 감고당길이다. 감고당은 조선 시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친정이다. 숙종은 첫째 부인 인경왕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맞았으나, 장옥정장희빈을 가까이했다. 인현왕후는 당시 정국을 장악한 서인 집안 출신이다. 남인이 서인을 몰아낸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는 사가로 쫓겨났고, 희빈 장씨가 숙종 옆을 지켰다. 이후 서인이 다시 조정을 장악하면서 인현왕후도 왕후의 자리를 되찾았다. 덕성여고 정문 옆에 ‘감고당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덕성여고를 지나 더 올라가면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이 나온다. 도서관 정문 앞에 표석이 많다. 조선 시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비참하게 죽은 성삼문이 이곳에 살았다. ‘성삼문 집터’ 표석 옆에 조선 시대 총포를 만들던 화기도감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려주 는 표석도 보인다. 또 이곳은 1900년 고종의 칙령에 따라 건립된 경기고등학교가 있던 자리다. 즐비한 표석을 뒤로하고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으로 올라간다. 서울시립정독도서 관 건물 앞 잔디밭에 ‘김옥균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김옥균은 19세기 말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모든 백성이 평등한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고자 한 개화당의 일원이었다. 개화당의 목숨을 건 한 수는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수구 세력의 주요 인물을 제거 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던 ‘갑신정변’이다.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 《별건곤》 41호, 《북촌생활사박물관 2009년 특별전 자료집》, 《2012 삼청로 가이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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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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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1.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3>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백악

숙정문

삼청 터널

테마 11

성북동 말바위안내소

세검정

창의문 >

삼청공원 정몽주 시비

도보 시간 약 4시간 안국역 → 도보 10분 → 서울시립 정독도서관 → 도보 10분 → 북촌문화센터 → 도보 20분 → 북촌동양문화박물관 → 도보 5분 → 삼청동 국무총리공관 → 도보 15분 → 삼청공원 정몽주 시비 → 도보 30분 → 말바위 → 도보 20분 → 말바위안내소 → 도보 15분 → 숙정문 → 도보 70분 →

국무총리공관

백악마루 → 도보 50분 → 창의문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창덕궁

>

찾아가는 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우회전, 풍문여고 골목으로 직진하면 서울시립 정독도서관이 나온다.

앞에서 삼청로를 따라 올라가면 삼청공원이 나온다.

정문 앞에 성삼문 집터 표석이 있고, 도서관 건물 앞 잔디밭이 김옥균 집터다. 서울시립 정독도서관

삼청공원 정문으로 들어가서 후문 쪽으로 간다.

정문으로 나와서 재동초등학교 방향으로 간다(북촌한옥마을 골목길에는 마땅한 이정표가 없으니

일청교 앞에 있는 정몽주 시비를 보고 일청교를 건너서

서울시립 정독도서관 앞 관광안내소에서 북촌 지도를 받아 주요 경유지와 가는 길을 참고한다).

바로 우회전, 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르면

재동초등학교를 지나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북촌문화센터다.

말바위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서 나와 좌회전한 뒤 중앙고등학교 정문까지 간다. 정문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조금 올라가다가

말바위를 거쳐 말바위안내소, 숙정문,

왼쪽 골목길(북촌로12길)로 접어든다.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큰길(북촌로)이 나오고, 건널목을 건너

백악마루를 지나 창의문으로 내려온다.

돈미약국 골목으로 올라간다. 북촌로11나길로 접어들어 오른쪽 골목길에 들어서면 북촌의 넘실대는

북촌문화센터 북촌창우극장 광화문 방향

한옥 기와지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북촌로11나길로 다시 나와서 좌회전, 큰 회화나무 앞에서 좌회전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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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올라가다가 북촌로11길로 접어든다. 골목길 오르막에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이 있고,

>

그 초입에 맹사성 집터 표석이 보인다.

도성 연결길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직진 후 우회전, 조금 가다 보면 길 왼쪽 작은 이정표에

말바위 조망 명소에서 한양도성을 만난다.

‘돌계단 길’이라고 적혀 있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큰길(삼청로)이 나오면 건너 국무총리공관 앞에 선다.

창의문까지 한양도성길을 따라 걷는다. 창의문을 지나면

국무총리공관 맞은편 건물 한 귀퉁이 위에 ‘삼청동문’ 글씨가 희미한 바위 절벽이 보인다. 국무총리공관

한양도성은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서울시립 정독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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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1. 북촌을 중심으로 한 조선 시대 생활 이야기

➏ 인사동

안국역


3>

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겹겹이 쌓인 시간의 주름을 만지노라면 북정마을에서 마전터 표석에 이르는 길 여기 마을과 집과 그 집에 살던 예술가들이 있다. 1970~1980년대 서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북정마을이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가 살던 심우장이 있고, 예술가들이 모이던 이태준 작가의 수연산방이 있고, 마포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의 별장이 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들이 살던 성북동의 고택을 둘러볼 일이다. 간송미술관이 위치한 성북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가와 문인의 생활상을 살펴볼 일이다. 그들이 남긴 일화에 배어 있는 문학과 미술의 향기도 두루두루 맛볼 일이다.

글 최창근 사진 이창재

만해 한용운 심우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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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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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3 > 12 > 060.

한양도성 메주 마을, 북정마을 이야기

안내 표지판이 있는 이발소

을 다쳤다. 북정마을은 현재 예술가와 마을 주민들이 만들어가는 신명 나는 잔치가 상시적으로 열 리는 곳으로 변했다. 세대 간의 벽과 마음의 벽을 넘어 의미 있는 축제를 만들고 싶어 하는 연극인들이 찾아와 마을 입구 노인정에서 출발, 도성을 따라가면서 공연을 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는 재미있어. 내 집, 네 집이 따로 없다니까. 한마디로 믿음이 가는 동네야. 도둑이 없어서 대문을 열어놓고 지낼 수도 있고.” “공기 좋지, 녹음도 짙지… 서울 시내에 이만한 동네 없어. 새벽에 뻐꾸기 소리, 저녁에 소쩍새 소리가 들리는 게 얼마나 좋아.” 노인정 근처에 있는 북정슈퍼 간이 의자에 앉아 주고받는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는 북정마을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마을 주민이 담소를 나누는 북정슈퍼 앞

쌍다리길을 따라 한양도성 아래 있는 북정마을로 올라간다. 마을버스 종점인 북정노인 정 앞 공터에서는 오늘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구멍가게 앞에 삼삼오오 모여 시국을 논하는 어르신들이 눈에 선하다. 한양도성 아래 숨어 있는 정겹고 사람 냄새 나는 이 마을을 처음 발견한 것은 말 그대로 ‘산책’을 하면서다. 보름달이 뜬 봄밤,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조선 시대 왕궁의 메주를 만드는 권한이 있었다는 성북로29길 21 북정마을은 평소에 메주 쑤는 소리가 북적북적하게 들렸다는 재밌는 이야기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도성의 북쪽인 이곳에 작은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북정마을은 아주 오랫동안 재개발 이야기가 나돌아 주민이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구역이기도 하다. 다행히 오랜 역사가 숨 쉬는 집들을 허물고 한옥을 짓겠다는 재개발 논의는 취소됐지만, 그 일로 수십 년간 마을을 지켜오던 토박이 주민들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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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참고 자료 《옛이야기를 찾아서 1》(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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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3 > 12 > 061.

3 > 12 > 062.

옷감을 표백하는 성 밖 마을, 마전터

성 밖 마을 성북동의 부자 이야기

성북동 쉼터에서 경신고 가는 길에 남아 있는 한양도성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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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세워진 마전터 표석

수백 년 전 겸재 정선이 삼선교 위에서 묘사한 성북동은 물이 맑고 경치가좋으나, 땅에 돌이 많아서 농토가 전혀 없고 시장이 멀어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조선 영조 때 한양의 각 시장에서 파는 포목의 마전하는 권리를 이곳 사람들에게 주어서 생활을 유지하도록 했다는 마전터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터만 남은 마전터의 유래를 떠올릴 때마다 자주 아득해진다. 간송미술관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건너가면 한양도성과 이어진 성북동 쉼터가 나오 고, 성북 동 쉼터에서 혜화문으 로 내려가 는 좁 은 골목길이 나타난다. 사 월 초파일이면 어김없이 오색 연등이 걸려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만드는 골목으로 접어 들어 담장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경신고등학교 후문이 보인다. 경신고등학교는 1885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세워서 설립 당시 ‘언더우드 학당’이라 불렀다. 배재학당, 이화학당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립 학교다. 학교 담벼락으로 사용되는 한양도성의 흔적. 성을 쌓은 돌이 땅 밖으로 드러나고, 그 위로 콘크리트 담장이 쌓여 성곽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성북동 그늘에서 바라 보는 한양도성의 흔적은 여전히 살아 있는 오래된 미래다.

성북동 이종석 별장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10호은 수연산방 맞은편 교회 뒤에 숨어 있어서 관심 이 없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이 근사한 한옥은 마포 새우젓 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석이 70~80년 전 별장으로 지었는데, 나중에 대림산업 회장을 지낸 이재준이 사 들였다. 이종석처럼 1930년대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전국에 이어진 물길을 통해 톡톡 히 재미를 본 새우젓 장사 이야기는 식민지 경제에 철저하게 종속된 우리나라 근현대 사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금도 재벌의 저택이나 외국의 대사관저가 들어서서 사정은 마찬가지지만, 예부터 조선인 부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산수가 좋은 성북동 일대가 꼽혔다. 백만장자 의 별장이 수두룩해서 산책하는 길에 그 근처를 지날 때면 안방마님이 치는 피아노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낭랑하게 들려와 듣는 이의 심사를 묘하게 만든다는 일화가 각 별장의 소개와 함께 옛날 잡지에도 고스란히 실려 있다.

참고 자료 《겸재의 한양진경》(최완수, 2004)

참고 자료 《옛이야기를 찾아서 1》(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09) 《삼천리》 7권 5호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주말에 전통 혼례가 열리기도 하는 이종석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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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3 > 12 > 063.

도성에 기대어 활동한 성북동 거주 화가들과 간송 전형필

간송미술관을 알려주는 문패

그런가 하면 화가 김환기는 성북동 생활의 애착을 담은 수필 〈산방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데 불편한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 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 고 꽃이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산협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 그는 한국의 산수 외에도 우리 도자기에 매료되어, 성북동 집 마루엔 그가 수집한 그릇이 즐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체질적으로 강하고 날카로운 것보다 유하고 섬세한 쪽에 기울 어진 예술가다. 김기창·박래현 부부의 성북동 시절은 권진규나 김환기만큼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 만큼 유명하다. 두 화가는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성북동 작업실에서 다양한 작품 을 선보이며 예술 활동의 절정기를 맞았다. 성북동의 어떤 기운이 친한 동료이자 부부 인 그들에게 예술혼을 불태우게 만들었을까 곰곰이 헤아려본다.

간송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이 1938년 한국 최초로 건립한 개인 박물관 ‘보화각’을 확장 해서 1966년 세운 것이다. 간송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우리 나라의 국보를 가장 많이 보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간송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최고 갑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 지만, 개인적으로 소유하거나 후손에게 세습하려 하지 않고 해외로 반출될 위기에 놓인 우리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간송의 애틋한 사랑은 장안에 회자될 정도다. 해마다 봄가을에 한 번씩 미술관이 일반인에게 개방될 때면 김홍도나 신윤복, 장승업의 그림과 고려청자, 조선백자, 불상 등을 보러 평일 낮부터 늘어선 사람들이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한다. 생전에 성북동에 거주한 예술가 중에는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도 있다. 말 많고 소란스 러운 세상과 단절한 채 창작열을 불태우다 세상을 등진 그의 아틀리에에는 지금도 세인 의 발길이 잦다. 권진규는 자살로 마감한 비극적 생애와 함께 예술의 순수성이 영원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은 파멸과 고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충격 적이다. 그는 이상주의자였기에 파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은 파멸로 끝났지만, 그의 예술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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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간송 전형필 흉상

참고 자료 《권진규 : 베이식 아트 시리즈》(최열, 2011)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충렬, 2013) 《김기창·박래현 : 구름 사내와 비의 고향》(오광수,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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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3 > 12 > 064.

3 > 12 > 065.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독립 정신의 실천이 남아 있는 만해 한용운 심우장

〈성북동 비둘기〉 벽화가 있는 쉼터

북정마을에서 만해 한용운 심우장으로 가는 길목에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벽화가 있다. 벽화 아래 작은 벤치에 앉아 시인이 성북동에 정착한 내력, 시가 탄생한 배경과 유래, 시에 담긴 생각을 가만히 되짚어본다. 삶에 대한 관조와 인간의 의지를 표현한 작품으로 한국 시단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산 김광섭은 커가는 자식들을 위해 1961년 성북동 산기슭에 터를 사서 집을 짓고 기거한다. 성북구 성북로10길 30.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이 집에서 살다가 1965년 4월 고혈압으로 갑자기 쓰러져 투병 생활을 하는 와중에 〈성북동 비둘기〉가 탄생했다. 이 시를 쓰고 나서 그의 노년은 생의 예지로 한층 더 빛나고 원숙한 세계로 침잠한다. 쫓기는 비둘기를 통해 문명에 스러지는 삼라만상을 담담하게 노래한 격조 높은 문명 비판 정신이 작품의 행간에 배어 있는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영원한 법열의 세계에 눈을 뜬 시인의 절절한 심경이 반영된 듯하다. 시의 한 구절처럼 “하나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이.

만해 한용운의 숨결이 남아 있는 심우장

‘자신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의미처럼 북쪽을 향해 묵언 수행하듯이 자리를 잡은 만해 한용운 심우장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탁월한 승려, 가슴이 뜨거운 독립운동가로 살다 간 만해 한용운의 집이다. 그는 1933년부터 생을 마감한 1944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는데, 조선총독부와 마주 볼까 봐 산비탈의 북향으로 터를 잡았다는 일화는 전설로 남아 있다. 만해가 심었다는 향나무 그늘 밑에서 ‘심우장’이라는 제목이 붙은 서로 다른 시조 두 편을 떠올린다.

참고 자료 《이산 김광섭 시 전집》(김광섭,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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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참고 자료 《님의 침묵 외(시)》(한용운 문학전집 1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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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3 > 12 > 066.

도성 아래 예술가들의 아지트 상허 이태준 가옥

심우장 안 부엌

심우장 들어가는 길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쏘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소 찾기 몇 해런가 풀길이 어지럽구야. 북악산 기슭 안고 해와 달로 감돈다네. 이 마음 가시잖으면 정녕코 만나오리. 찾는 마음 숨는 마음 서로 숨바꼭질할 제 골 아래 흐르는 물 돌길을 뚫고 넘네. 말없이 웃어내거든 소 잡은 줄 아옵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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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심우장 안 전시관

이태준 가옥 입구

‘시에 지용, 소설에 태준’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이태준. 월북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어 1980년대 후반 해금되기까지 한반도의 남쪽에서 볼 수 없던 그의 산문과 소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청아하다. ‘수연산방’이라는 편액이 걸린 소박한 솟을대문 뒤쪽으로 자리 잡은 상허 이태준 가옥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11호 . 수연산방은 ‘한국의 모파상’이라 불리던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 까지 머물면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왕자 호동〉 같은 작품을 집필한 곳으로, 현재 그의 외종손녀가 고택을 개조해서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집을 지은 과정과 집의 내력이 소개된 것 또한 인상적이다. 이태준은 자신이 직접 쓴 성북동과 혜화동 집 이야기에서 건축에도 인격이 있음을 역설한다.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건축구조를 보이는 수연산방은 수령이 50년이나 되는 사철나무와 아름드리 수목이 우거진 안뜰을 배경으로 사시사철 고유의 멋을 뽐내며 손님과 방문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1930년대 잡지를 들추다 보면 성북동의 문인촌과 그곳에 거주하는 문학가에 대한

심우장 뜰 앞의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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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경관이 수려한 수연산방의 안뜰

이야기가 나온다. 동소문 밖 성북리는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공기가 맑기로 소문이 나서 성안 사람들이 많이 이사 오고, 한적한 근교인데다 오리 둥지처럼 지형이 아름 다워 예술을 벗 삼는 문인이 여럿 모여 살아 문인촌을 이룬다고 소개하면서, 그런 문인으로 시인 김안서, 여성 문사 김일엽, 평론가 김기진, 소설가 이태준을 들고 있다. 한편 이태준과 막역하던 동료 소설가 박태원은 태준의 집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행방불명됐는데, 나중에 월북한 사실이 밝혀졌다. 영화감독 봉준호가 박태원의 외손자 라는 점도 흥미롭다. ‘노시산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수필가이자 역사가 김용준과 이태준 의 관계도 재밌다. 김용준이 쓴 수필 〈노시산방기老枾山房記〉에는 성북동에서 살던 시절의 교우록이 세밀화를 보듯 촘촘하게 그려졌다.

참고 자료 《삼천리》 5권 10호 《삼천리》 7권 8호 《근원수필(새)》(김용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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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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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3>

테마 12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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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시간 약 40분 한성대입구역 → 버스 10분 → 북정슈퍼 → 도보 1분 →

삼청터널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벽화길

상허 이태준 가옥 (수연산방)

숙정문 간송미술관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벽화길 → 도보 5분 → 만해 한용운 심우장 → 도보 10분 → 만해 한용운 심우장

수연산방 → 도보 5분 → 성북동 이종석 별장 → 도보 10분 →

성북동 이종석 별장 마전터 표석

간송미술관 → 도보 5분 → 마전터 표석 → 도보 5분 → 성북동 쉼터 삼청동

북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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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쉽터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로 쪽으로 10m 올라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03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북정노인정 앞)에서 내린다. 북정노인정 앞 북정슈퍼에서

경신고등학교

성균관대 북촌

만해 한용운 심우장으로 가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골목 어귀 담장에 김광섭 시인의

혜화문

〈성북동 비둘기〉 벽화가 있다. 벽화가 있는 작은 쉼터에서 ‘심우장’ 푯말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한용운의 거처 만해 한용운 심우장이 나타난다.심우장을 둘러보고 골목의 담장을 따라 내려오면

혜화동

성북로가 나온다. 한성대입구역 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성북구립미술관 왼쪽에 ‘수연산방’이라는 편액이 걸린 솟을대문 한옥이 보인다. 성북동 이종석 별장은 수연산방 맞은편 덕수교회 뒤에 숨어 있다. 성북동 이종석 별장에서 한성대입구역 쪽으로 더 내려오면 왼쪽에 성북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이 보이는데, 초입에 간송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간송미술관에서 나와 대각선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면 길옆에 마전터 표석이 있고, 맞은편에 한양도성과 이어진 성북동 쉼터가 나타난다. >

도성 연결길 성북동 쉼터에서 한양도성길로 올라가면 숙정문으로 갈 수 있고, 경신고등학교 후문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따라가면 혜화문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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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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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2.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고택, 예술가들의 이야기

➏ 한성대입구역


3>

테마 13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맑고 향기롭고 고즈넉한 풍경 속으로 길상사에서 혜화문에 이르는 길 한국가구박물관 아래 있는 길상사에 가보았는가, 성락원에서 꿩이 홰치는 소리를 들었는가, 조지훈의 집터를 가로지르며 춤추는 여인을 만났는가, 선잠단지를 꿈틀거리며 지나가는 누에를 만져보았는가, 최순우 옛집에 들러 차 한잔 마셨는가. 이제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이 잘 모를 수도 있는 옛 자취가 있는 터를 찾아 떠날 시각이다. 옛 문화와 관련된 문화 유적을 어루만지며 성 밖 마을 성북동의 역사·문화 이야기 여행을 떠날 시각이다.

글 최창근 사진 이창재

한양도성에서 바라본 성북동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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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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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3.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3 > 13 > 067.

3 > 13 > 068.

한양도성과 관련된 조선 시대 순성

도성 기슭에 기댄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

와룡공원에서 성북동 쉼터로 가는 한양도성길

조선 시대에는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이를 ‘순성巡城’이라 했다. 조선 후기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한경지략》에는 “봄과 여름이 되면 한양 사람들은 도성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경치를 구경했는데,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나온다. 유득공의 《경도잡지》에는 순성을 일러 ‘도성을 한 바퀴 빙 돌아서 도성 안팎의 풍경을 구경하는 멋있는 놀이’라 명하고 있다. 순성은 일제강점기까지 서울 시민에게 사랑받는 전통 행사로 이어졌다. 1916년 5월 14일 자 〈매일신보〉에는 순성장거한양도성 순성을 위한 장대한 계획를 알리는 기사 〈금일은 순성하세〉가 실렸고, 출발 시간과 장소 공지도 게재되었다. “고대하시던 순성장거는 오늘 14일 오전 7시 30분 남대문소학교에 모였다가 8시 숭례문에서 출발하는데, 회비도 필요 없고 점심 만 휴대하면 어느 누구라도 마음껏 참가할 수 있습니다.” 이틀 뒤 5월 16일자 〈매일신보〉 에는 〈성벽순회城壁巡回의 기記〉라는 기사에 오전 7시 40분에 남대문소학교를 출발한 일행 이 오후 3시가 되어 숭례문에 도착했다고 기록됐다. 명맥이 끊긴 순성이 서울에서 다시 시작된 건 2011년 가을 한 시민 단체에서 일주 코스 와 단기 코스로 나누어 행사를 마련하면서부터다. 하루에 걷는 600년 서울 ‘순성’은 새롭게 떠오르는 서울 시민의 즐거운 나들이 문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성북동 최순우 가옥

전 국립박물관장이자 미술사학자로 한국 미술사에 큰 자취를 남긴 혜곡 최순우 선생 의 옛집은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으로 지켜 낸 소중한 공간이다. 이곳은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선생은 1976년부터 198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대문에 들어서면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주는 감나무, 단풍나무, 생강나무, 향나무가 좋고, 뒤뜰 쪽마루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햇볕이 내려앉는 장독대와 산수유를 비롯한 꽃들을 넉넉하게 바라보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다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오는 오후의 한적함과 고즈넉한 풍경이 좋다. 성북동 최순우 가옥은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ㄱ자형 본채와 ㄴ자형 행랑채가 마주 보면서 대문까지 더해 ㅁ자형 구조를 띤다. 집필 공간으로 쓰인 사랑방에는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는 선생의 글씨가 붙어 있는데, ‘문을 닫으면 이곳이 곧 깊은 산중’이라는 뜻이다. 사랑방 뒤쪽 문에는 ‘낮잠 자는 곳’이라는 뜻의 ‘오수당吾睡堂’이 단원 김홍도의 글씨로 적혀 있고, 건넌방에는 ‘매화 같은 마음을 품은 집’이라는 뜻의

참고 자료 《순성의 즐거움 : 서울성곽 600년을 걷다》(김도형,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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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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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3.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3 > 13 > 069.

누에 신을 모신 곳 선잠단지 ‘매심사梅心舍’ 현판이 추사 김정희의 필체로 쓰여 있다. 성북동 최순우 가옥에서는 봄가을 시 낭송회를 비롯해서 음악 공연, 강연회 등 시민을 위한 행사를 마련한다. 최순우 선생의 산문집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에 실린 수필 〈달빛 노니는 창살 이야기〉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 짓는다. “비몽사몽간에 어디선가 유량한 교향악이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눈을 뜨고 동쪽 미닫이를 바라보면 휘영청 밝은 달빛에 일렁이는 배나무 그림자가 창문 가득히 그림처럼 비치고 있었다. 낙엽 져서 성긴 잎 사이로 열매 그림자가 동화 속에서처럼 신기로웠다. 눈을 감으면 다시 음악 소리가 다가오고, 꿈인 양해서 또 눈을 떠보면 툇마루에 두 발을 얹고 방 안의 동정을 살피는 바둑이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이어지는 음악 소리, 나는 이 아름다운 꿈에서 깰까 봐 다시금 눈을 감아 꿈을 청하곤 했다.” ‘한국 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의 영향을 받아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밝힌 주옥같 은 글을 열정적으로 발표하면서 우리 문화의 가치를 널리 알린 최순우 선생은 화가 김환기와도 인연이 깊다. 수화 김환기는 최순우에게 성북동으로 이사 오기를 권하고, 적당한 집을 찾아 보여주기도 했다. 도자기나 목공예의 진가를 알아보고 소중히 여긴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환기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성북동에 이웃하여 살진 못했지만, 최순우의 성북동 집 사랑방에는 김환기가 그린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어 두 사람의 각별한 인연을 떠오르게 한다. 성북동 생활에 만족한 김환기는 성북동에 대한 애정을 담은 수필 〈산방기〉의 첫 단락 에서 최순우와 관계를 은연중에 일러준다. “집을 구하는 친구마다 나는 성북동으로 오기를 권한다. 그러면 대개는 성북동은 안 좋아하는 모양이다. 심한 친구는 성북동은 못 살 곳으로만 안다. 교통이 불편한 것으로 첫째 흠을 잡는다. 실은 성북동이 좋다는 것은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선잠단지로 올라가는 계단

길옆에 뽕나무 몇 그루를 배경으로 잡귀의 출입을 막는다는 홍살문이 서 있는 선잠단 지는 처음 누에치기를 했다는 중국 고대 황비 서릉씨를 누에 신으로 모시고 제사 지내 며 누에농사가 잘되기를 빌던 곳이다. 다시 말해 뽕나무가 잘 커서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해달라고 기원을 드리던 곳이다. 조선 시대 임금은 친경親耕이라 하여 선농단 에서 손수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고, 왕비는 친잠親蠶이라 하여 선잠단에서 누에를 치는 모범을 보였다고 한다. 1908년 잠신이 의지할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그 터만 남았다. 지금은 성북구에 서 1993년 복원하여 매년 5월 선잠제를 재현하는 문화 행사를 연다.

참고 자료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최순우, 2002)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아름다움을 전한 혜곡 최순우》(이혜숙, 201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환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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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참고 자료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 역사지리학자의 서울 걷기 여행 특강》(이현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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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3.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3 > 13 > 070.

백석 시인과 연인 이야기 길상사

조각가 최종태의 관세음보살상

극찬을 받은 ‘모던 보이’ 아닌가. 박목월과 유치환이 경상도, 서정주와 김영랑이 전라도, 정지용과 오장환이 충청도, 김동환과 이용악이 함경도 지역의 말로 향토색을 여지없이 드러낸다면, 백석은 한국 시단에서 평안도 방언을 가장 능수능란하게 구사한 토속 시인 으로 평가받는다. 1930년대 한국 시단에서 임화, 설정식, 권환으로 대표되는 리얼리즘이나 이상, 김기림 같은 모더니즘 시인들이 판을 잡고 있을 때 유독 그는 도시 생활과 거리가 먼 고향의 풍물을 그렸다. 그가 즐겨 다루는 세계는 눈 내리는 겨울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는 신화나 전설, 민담의 세계다. 그 아득하고도 신비한 설화의 세계는 근대화의 뒷전으로 밀려난 고향의 정든 풍경이자 따뜻한 인간애가 살아 숨 쉬는 원형의 공간이다. 월북 시인이기에 평안도 사투리로 쓴 토속적인 시 세계에 대한 평가가 오랫동안 미뤄 졌지만, 이제 시인뿐만 아니라 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의 시는 자주 인용되고 오르내린다. 백석이 자신의 연인을 염두에 두고 쓴 시 한 편을 읊조리며 길상사를 조용히 빠져나온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길상사

길상사 가는 길, 하늘은 맑고 뭉게구름이 평화롭게 떠다닌다. 날씨가 참 좋아 오히려 한숨이 나온다. “한때의 우슴꽃이 또 한때의 눈물일 줄 / 어느 뉘 알앗으리 가신 님도 모르실 걸 / 이지음 내 홀로 가며 옛 성터에 웁네다”로 시작되는, 1930년대에 쓰인 성북동에 관한 시 한 구절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시의 내용과 현재 마음의 행로가 어쩌면 그렇게 잘 어울릴까, 중얼거리며 경내로 들어섰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고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들르는 길상사는 자연의 아름 다운 심상을 닮은 절집이다. 게다가 극락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주치는 조각가 최종태 의 관세음보살상은 방문객의 마음을 한없이 푸근하게 만든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이곳에 소녀 같은 성모마리아의 자태를 연상케 하는 관음보살상을 세워 종교 간의 벽을 허무는 계기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길상사에 얽힌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 1960~1980년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최고급 요정이던 대원각이 길상사의 전신이다. 대원각의 주인 고 김영한법명 길상화 여사가 대지 9920여 ㎡와 건물 40여 동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1997년부터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고 절집이 되었다. 김영한 여사는 한국의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백석의 연인이었다. 열여섯 살 때 권번에 들어가 파인 김동환이 발행하던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한 문학기생 자야. 기명은 진향, 자야는 백석이 붙여준 이름이다. 김영한 여사가 스물두 살이던 1936년, 일본 유학에서 갓 돌아와 첫 시집 《사슴》을 발간한 스물여섯 백석과 나눈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화창한 날 떠올리기 그만이다. 백석이 누군가. 소월 이후 평안북도가 낳은 천재 시인이자 ‘우리 문학의 북극성’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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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관세음보살상 옆 보살 조각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참고 자료 《동광》 17호 《내 사랑 백석 : 백석 시인과 자야 여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김자야, 1995) 《갈매나무의 시인 백석》(이숭원, 2012) 《백석 전집》(개정증보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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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3.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3 > 13 > 071.

3 > 13 > 072.

‘꿩의 바다’로 불린 성락원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시인 조지훈 집터

조지훈 집터 표석 성락원으로 들어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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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때 고위 관료 최사영의 고택으로, 당시 최고위층의 가옥 양식을 대표하는 기와집 십주원. 그 십주원 바로 밑에 있는 한옥이 성락원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대표 적인 별서 정원인 성락원은 조선 순조 때 별장으로 조성됐고, 철종 때는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으로, 의친왕 이강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의친왕 이강은 대한제국의 황자로,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일제 강점 이후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독립운동가들을 가까이하면서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하기 위해 상복 차림으로 변복하고 만주까지 갔다가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소환된 비운의 인물이다. 1919년 11월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남아 있다. 그 후에도 끝까지 일본을 배척하여 일제가 형식적으로 남아 있던 공의 지위까지 박탈했다. 왕족으로서 마지막 의기를 보인 그는 만년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성락원에 머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부터 꿩이 많아 ‘꿩의 바다’로 불린 이곳에서 꿩들을 동무 삼아 망국의 시름을 달랬을까, 아니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밤마다 술에 취해 연못과 정원 사이를 헤매고 다녔을까. 역사는 침묵 속에서 도도히 흐른다.

‘성북구 성북동 60번지 44호.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1946년 순수시의 본보기를 제시한 《청록집》을 내면서 청록파라 불린 시인 조지훈이 30년 동안 살던 곳이다. 조지훈은 경북 영양에서 출생, 동국대학교의 전신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지조론〉이라는 수필로도 유명한 조지훈은 해방 후 민족시인으로 활약하면서 꼿꼿한 선비 정신을 지켰다. 그의 수필 〈돌의 미학〉에 성북동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성북동은 산골 맛에 사는데 내 집은 산 밑이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천석泉石은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일대한사 一大恨事라고 언급하면서 근처에 바위와 숲이 있어 성북동이 좋다는 시인은 “혜화동 고개에 올라서서 성城돌에 앉아 우이동 연봉을 바라보는 맛, 삼선교에서 성북동 뒷산을 보며 황혼 길을 걸어오는 맛은 동양화의 운치가 있다”고도 했다. 자연 친화적이고 관조적이며 고전적인 품격에 회고적인 내용과 전아한 가락을 담은 시를 독자적으로 개척한 시인의 대표작 〈승무〉가 춤추는 여인을 배경으로 표석에 새겨졌다.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는 시구가 유난히 눈에 들어와 시인이 헤쳐 나간 시대와 삶의 자세를 새삼스럽게 짐작해본다.

참고 자료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이장희, 2013) 《의친왕 이강》(박종윤, 2009).

참고 자료 《지조론》(조지훈 전집 5, 2007)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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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3.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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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3 >

도보 시간 약 1시간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한성대입구역 → 버스 10분 → 길상사 → 도보 20분 → 성락원 → 도보 10분 → 시인 조지훈 집터 → 도보 5분 → 선잠단지 → 도보 5분 → 성북동 최순우 가옥 → 도보 10분 → 경신고등학교 후문 → 도보 10분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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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길상사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지선(초록)버스 정류장을 지나 동원마트 앞에서 길상사행 셔틀버스를 탄다. 길상사에서 선잠단지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세븐일레븐에서 꺾어져

성락원

조금만 올라가면 성락원이다. 이곳에서 내려와 오뉴월갤러리와 첼시아플라워 사이 골목으로 걷다 보면 왼쪽으로 아크릴판에 〈승무〉가 새겨진 시인 조지훈 집터 표석이 있다. 조지훈 집터에서 성북로로 나와 삼청각 가는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뽕나무 몇 그루를 배경으로

시인 조지훈 집터

선잠단지

홍살문이 들어앉은 선잠단지가 보인다. 선잠단지에서 건너편으로 발걸음을 옮겨 원화패션과 제일클리닝세탁소 건물 사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성북동 최순우 가옥이 있다. 성북동 최순우 가옥에서 오던 길을 따라가면 골목 끝에 계단이 보이고, 계단을 오르면 오박사네왕돈가스가 나온다. 오박사네왕돈가스 골목을 끼고 내려가면

성북동 최순우 가옥

경신고등학교 후문이 보이고, 그 길 따라 직진하면 혜화문이다.

경신고길 노선버스 >

북촌

성균관대

➎ 혜화문

도성 연결길

경신고등학교 뒷길을 따라 혜화문으로 연결된다.

한성대입구역

혜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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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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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3. 한양도성 성북동 마을과 문화 유적 이야기


3>

테마 14

성안 마을, 혜화동의 어제와 오늘

발아래 펼쳐진 세상을 돌아보니 혜화역에서 숙정문에 이르는 길 성곽 아래 혜화역에서 출발, 혜화동로터리를 거쳐 현대시박물관, 장면 가옥, 한무숙문학관을 둘러보고 성북동 쉼터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다가 와룡공원에 도착한 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숙정문으로 향하면서 도성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본다. 여유 있게 성곽 안팎을 살펴보고 자연이 베푸는 무한한 색의 향연을누리며 잠시 속세의 혼탁함을 잊는다.

글 최창근 사진 이창재

장면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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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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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4. 성안 마을, 혜화동의 어제와 오늘


3 > 14 > 073.

숙정문 음풍 이야기와 북정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숙정문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말바위 전망대

와룡공원에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산행. 길이 평탄해서 말 그대로 산책이다. 오솔길과 나무 계단으로 이어진 한적한 길을 걷다 보면 신선이 노니는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다. 게다가 사시사철 다르게 펼쳐지는 발아래 풍광을 접하다 보면 마음속 걱정 근심과 온갖 시름을 잠시나마 내려놓고 자연이 선사하는 경이로움에 빠져든다. 오래된 성곽과 수목이 어우러진 다채로운 색의 축제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말바위안내소에서 출입증 을 받고 10분 정도 걸어 숙정문 앞에 도착해 이마에 맺힌 땀을 씻는다. 숙정문은 한양도성 사대문 가운데 도성의 북쪽 정문으로, ‘예를 숭상한다’는 숭례문과 대비해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이고,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1413년태종 13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청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는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아 북쪽은 음, 남쪽은 양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했다. 원래 숙정문은 항상 닫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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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한양도성길 아래 도로

와룡공원에서 바라본 성북동

한양도성길 옆 소나무

숙정문 전경

문 아닌 문이었다. 숙정문을 열어두면 도성 안에 부녀자의 풍기를 문란하게 만드는 음풍淫風이 들어온다고 해서 닫았다고 한다. 숙정문 밖 쌀바위 이야기는 서울을 대표하는 민담 가운데 하나다. 이 바위에서는 기이 하게도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에 걸쳐 꼭 한 되1.8ℓ가량 쌀이 나왔다고 한다. 처음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나무꾼 노인인데, 그는 매일 여기에서 가져온 쌀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이 생긴 노인이 쌀바위 옆에 하루 종일 서서 쌀자루가 가득 채워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한 달을 계속하니 쌀이 나오던 바위틈에서 쌀 대신 끈적끈적한 물만 흘러 나왔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이 일로 말미암아 그 바위를 미암米岩, 즉 쌀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행운에 만족하지 못해서 일을 그르치고 마는, 밑도 끝도 없는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이야기다.

참고 자료 《서울 이야기》(정기용,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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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4. 성안 마을, 혜화동의 어제와 오늘


3 > 14 > 074.

3 > 14 > 075.

용이 누워 있는 곳, 와룡공원

혜화동, 장면 가옥의 내력

와룡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와룡공원 옆 도성길

와룡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한양도성으로 올라가는 출발점인 성북동 쉼터 장면 가옥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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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 집과 마전터, 용마루 등 유명한 식당들이 몰려 있는 한양도성으로 올라가는 성북동 쉼터. 성북동 쪽에서 한양도성으로 올라가는 출발점은 늘 여기다. 성북동 쉼터에서 성곽을 따라 부지런히 올라가면 와룡공원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와룡공원은 공원의 능선이 용이 누운 것처럼 평지에 가깝게 뻗어 있다. 한양도성은 이 공원의 긴 능선을 따라 혜화문으로 내려간다. 성곽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도성 밖 성북동, 오른쪽 이 도성 안 명륜동이다. 이곳에서 성북동을 바라보면 부촌과 빈촌이 눈앞에 펼쳐진다. 와룡공원 옆에는 배드민턴장이 있다. 밤늦게까지 운동을 하러 나온 동네 주민들이 애 용하는 곳이다. 사실 와룡공원의 백미는 야경에 있다. 전망대에서 멀리 N서울타워를 중 심으로 서울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때로는 전망대 옆 돌계단에 앉아 가로등이 반짝이는 성북동 산동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왠지 서글프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 지는 마을의 불빛이 아늑하고 정답다. 그러니까 와룡공원은 연인들이 늦은 밤 호젓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공간이자, 사는 일이 힘겹고 우울할 때 올라가서 위안을 받고 내려오는 치유 공간이다. 와룡공원에 오를 때마 다 자연은 위대하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4∙19혁명으로 들어선 2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은 평화와 공존의 원칙을 천명하고 청렴과 정직으로 잔잔하게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정치인이다. 장면 가옥은 한국과 일본, 서양의 건축양식이 혼재된 보기 드문 가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길옆에 있는 아담한 가옥으로 들어서니 앞마당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마중물을 넣고 새 물을 받아쓰던 뜰 앞의 펌프와 뒤꼍에 놓인 장독대가 가을볕을 받아 반짝거린다. 장면 가옥은 한옥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욕실과 화장실을 안에 두고 대청을 거실처럼 꾸민 1930년대 주택 개량 운동과 새로운 주거 문화 운동의 영향이 드러난 주택으로, 근대 주거의 역사를 연구하는 자료적인 가치도 높다. 그가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한 1937년 건립하여 1966년 서거할 때까지 30년 남짓 거주한 곳으로, 일제강점기 교육·문화 운동과 광복 후 정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2공화국의 초대 내각이 구성 된 반도호텔과 신문로 민주당 소장파 본부, 총리 가옥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곳이라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온 이야기와 현재의 모습을 함께 돌아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서울·수도권)》(김영록·박미경, 2013)

참고 자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서중석, 2013)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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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4. 성안 마을, 혜화동의 어제와 오늘


3 > 14 > 076.

혜화동에 살던 예술가 이야기

혜화동로터리의 터줏대감 동양서림

숨어 있는 한무숙문학관은 선생이 1953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40년 동안 가꾸고 다듬은 한옥을 전시 공간으로 꾸며 육필 원고와 저서, 생활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 한 사람, 생전에 ‘야인野人’ ‘기인奇人’ ‘장인匠人’의 삼인으로 불린 화가가 있다. 감동적인 화 가는 ‘예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을 깨닫게 해준 장욱진. 그는 어린 아이 같이 천진난만한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찬 소탈하고 순수한 삶으로, 일찍부터 자연 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한 예술인이다. 자연을 응축하고 단순화하는 조형 방법론에 천착한 그의 작품에는 해학과 웃음이 넘쳐난다. 혜화동 문인의 거리 골목에 자리 잡은 현대시박물관은 한국 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 기 위해 2008년 11월 1일 개관했다. 만해 한용운의 생애를 도자로 만들어 열람한 전시 실에서는 유명 시인의 육필 원고와 초상화를 만날 수 있다. 돌에 새겨진 고은 시인의 짧은 시 〈꽃〉이 마당에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려갈 때 / 보았네 / 올라갈 때 / 보지 못한 / 그 꽃.’ 신발을 벗고 현관으로 들어서면 ‘시의 집’이라고 쓰인 액자가 먼저 들어온다. 2층으로 이어진 전시실 벽엔 〈귀천〉의 시인 천상병과 피천득, 김수영, 신동엽, 김춘수, 마종기 등의 육필 원고 족자가 걸렸다. 영화감독 임권택의 축사가 쓰인 북과 화가 김환기의 판화, 김수환 추기경의 십자가 그림, 시인 김종삼을 기리는 기념 조각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혜화동로터리 전경

혜화역 4번 출구 앞. 쉼터 바로 옆에 연극에 관한 모든 정보를 구할 수 있는 서울연극센터 가 보이고, 눈앞으로 대학로 먹자골목이 펼쳐진다. 이 거리는 조선 시대 성균관 유생들 이 풍류와 여가를 즐기던 반촌길인데, 지난 2000년 대명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먹자 골목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혜화동로터리로 접어들면 천상병 시인의 며느리가 운영 한다는 동양서림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동양서림은 배우들이 공연할 때 밥을 받아놓고 먹는 가정식 백반집 송현식당,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소문난 중국집 금문, 연극인들이 자주 가는 카페 엘빈과 더불어 혜화동로터리를 오랫동안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혜화역과 혜화동로터리 부근에 살던 예술가 중 얼른 생각나는 사람은 시인 조병화와 소설가 한무숙이다. 생전에 빵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채 혜화동로터리를 자주 어슬렁 거렸다는 조병화는 쉬운 일상 언어로 소시민의 자아와 고독과 사랑, 허무를 노래해서 문학을 아끼는 독자 들의 열렬한 지지와 호응 을 받았다. 〈의자〉 〈추억〉 〈남남〉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밤의 이야기〉 〈하루만의 위안〉 〈해마다 봄이 되면〉 등은 일반인에게도 애송된다. 시인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자택이 있던 혜화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도 인상적이다. 동료와 후배에게 너그러웠다는 작가 한무숙은 소설가 한말숙의 언니다. 가톨릭적인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치밀한 심리묘사와 정확한 언어 구사로 한국인의 정체성과 역사 의식을 고취했다. 한국 현대문학의 초창기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장편소설 《역사는 흐른다》와 단편소설 〈감정이 있는 심연〉 〈생인손〉 등을 남겼다. 혜화동 골목 어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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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현대시박물관 입구

참고 자료 《조병화 시 전집》(조병화문집간행위원회, 2013) 《한무숙 작품집》(한무숙·김진희, 2010) 《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그림산문집》(장욱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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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4. 성안 마을, 혜화동의 어제와 오늘


3>

테마 14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

도성 연결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지선(초록)버스 1111번이나 2112번을 탄다. 종점에서 내려 삼청각 쪽으로 10분 걸어가면 한양도성 숙정문으로 연결된다. 숙정문 삼청터널

말바위안내소 성북동 쉼터 삼청동

와룡공원 북촌

한무숙 문학관

➎ 혜화문

>

도보 시간 약 1시간 혜화역 → 도보 5분 → 혜화동로터리 → 도보 5분 →

장면가옥

현대시박물관 → 도보 5분 → 장면 가옥 → 도보 5분 → 한무숙문학관 → 도보 10분 → 와룡공원 → 도보 20분 → 말바위안내소 → 도보 15분 → 숙정문

현대시 박물관

혜화동로터리

혜화역

>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에서 혜화동로터리 쪽으로 간다. 혜화동로터리에서 우체국과 주유소를 사이에 끼고 조금 걸어가면 나온씨어터 입구에 장면 가옥이 보인다. 장면 가옥을 관람하고 가던 길로 더 올라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서울과학고등학교와 경신고등학교 정문으로 통하는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돈가스로 집과 마전터, 용마루 등 유명한 식당들이 나타나고, 한양도성으로 올라가는 성북동 쉼터가 보인다. 한양도성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와룡공원이 있다. 와룡공원에서 푯말을 보고 오솔길과 나무 계단을 따라 한참 걷다 보면 말바위안내소가 나온다. 거기에서 출입증을 받고 조금 더 걸어가면 눈앞에 숙정문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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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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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4. 성안 마을, 혜화동의 어제와 오늘

한성대입구역


3>

테마 15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아름다움 안에서 걷다 성북동 쉼터에서 성균관에 이르는 길 한양도성 성북동 쉼터에서 출발, 와룡공원과 성균관대학교 후문을 거쳐 북촌의 유서 깊은 학교와 극장을 지나 궁궐을 돌아보며, 조선 시대 궁 안팎의 이야기를 알아보는 코스다. 원조 한류 바람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를 방문할 수 있고, 외국인을 위한 맞춤형 한옥 게스트 하우스도 만날 수 있다. 서울의 현재 모습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조선 시대의 옛 자취를 더듬어본다.

글 최창근 사진 이창재

창덕궁 창덕궁 후원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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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월과 9~10월 오전 9시~오후 6시, 6~8월 오전 9시~오후 6시 30분, 11~1월 오전 9시~오후 5시 30분에 관람 가능하다(매주 월요일 휴궁). 관람료는 어른 3000원, 24세 이하 65세 이상 무료다. 2~5월과 9~10월 오전 10시~오후 5시 30분, 6~8월 오전 10시~오후 6시, 11~1월 오전 10시~오후 5시에 관람 가능하다(매주 월요일 휴원). 관람료는 어른 5000원, 어린이·청소년 2500원, 6세 이하 무료다. 2~5월과 9~10월 오전 9시~오후 6시, 6~8월 오전 9시~오후 6시 30분, 11~1월 오전 9시~오후 5시 30분에 관람 가능하다(매주 월요일 휴궁). 관람료는 어른 1000원, 24세 이하 65세 이상 무료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성균관 명륜당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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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5.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3 > 15 > 077.

역사의 소용돌이를 품다, 중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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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고등학교 교정

교정에 세워진 6·10만세기념비

성북동 쉼터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와룡공원을 거쳐 성균관대학교 후문 쪽으로 내려 가는 길은 산책하기에 참 좋은 코스다. 한양도성을 둘러보거나 와룡공원으로 놀러 가는 사람 외에는 인적이 드물고, 그만큼 조용하고 한가롭기 때문이다. 중앙고등학교 후문으로 들어선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녹색 잔디가 깔린 축구장 에서 주말 오후를 즐기는 동네 축구단의 활기가 멀리서도 전해진다. 축구장 앞쪽으로 장편소설 《탁류》를 쓴 채만식의 문학비와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시비가 보인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동관과 서관사적 282호으로 간다. 1923년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설계한 이곳을 지나면 건축가 박동진의 설계로 1937년 완공된 본관사적 281호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본관은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학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딕식 중앙탑이 있는 2층 석조 건물이다. 이 학교는 3·1운동이 싹튼 곳으로, 순종 황제의 장례식이 있던 1926년 6월 10일에는 학생들이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교정에 있는 3·1운동기념관과 6·10만세기념비가 일러주듯 일제강점기에 민족 교육의 나아갈 바를 제시한 요람이자,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한 곳이다.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경기도와 충청도 출신 우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기호 학회에서 출발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됨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급해지자, 선각자들은 후학을 양성하고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여러 학회와 학교를 세웠다. 중앙고등학교도 그 산물이다. 몇 차례 경영난에 처한 학교 를 정식으로 인수한 사람이 3·1독립선언에 참가한 김성수인데, 훗날 그는 친일 경력으로 곤욕을 치렀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참고 자료 《서울 이야기 여행》((사)한국여행작가협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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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5.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3 > 15 > 078.

3 > 15 > 079.

성균관 은행나무 이야기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 극장

전통 예술 공연의 산실, 북촌창우극장

오래된 목욕탕과 이발소, 문방구 사이로 작은 공방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어 어느 시골의 곁길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계동 토박이 골목. 낯익은 드라마의 촬영지 임을 알려주는 일본어 표지판. 가회동과 계동과 원서동이 이웃해서 한군데 몰려 있는 북촌에는 옻칠 공방과 카페를 겸한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의 가옥등록문화재 84호을 지나 창덕궁로를 따라가다가 극장 앞 에 다다랐다. 북촌창우극장은 북촌에 남은 유일한 극장이다. 마당극과 창극, 축제의 선구자이며 한국 전통 연극을 대표하는 연출가 허규 선생이 1993년 개관해서 창작극과 전통 예술 공연의 산실을 꿈꾸며 출발한, 그의 예술혼이 깃든 곳이다. 극장의 명칭 중 ‘북촌’은 조선 시대에 경복궁과 창덕궁 주변에 있던 삼청동, 팔판동, 계동, 가회동, 원서동 같은 동네를 가리키고, ‘창우’는 고려 시대 이후의 예능인을 일컫던 말이다. 우리 전통에 남다른 애정을 품고 창극의 무대화에 헌신한 허규 선생은 명인, 명창을 꿈꾸는 젊은 음악가들에게 역량을 펼칠 마당을 마련해주려는 뜻으로 지금의 국립 국악원이나 명륜동 성균소극장에서 하는 것처럼 전통음악 상설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북촌창우극장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 속에 새로운 공연 양식을 만들기 원하는 모든 예술가의 텃밭인 셈이다.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로도 이름이 높은 허윤정씨가 휴관 중이던 극장을 인수해서 리모델링 후 2008년부터 다시 문을 열었다. 극장 대표 이자 예술감독이기도 한 그녀는 다른 극장과 차별화된 〈천차만별 콘서트〉 〈북촌 우리 음악 축제〉 〈창우 월드 뮤직 페스티벌〉 같은 공연을 만들면서 부친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성균관 명륜당 앞 은행나무

성균관대학교 안에 있는 성균관사적 143호, 보물 141호은 조선 시대 최고 교육기관으로, 유학을 집대성한 공자를 모시는 문묘이기도 했다. 문묘는 공자를 포함해서 유학에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이 배향되던 곳이자, 음양오행에 관련이 있는 음양학 학자들이 양성되던 곳이다. 신라의 최치원과 설총, 고려의 정몽주와 안향, 조선의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 문묘에 모셔진 유학자 18분을 ‘해동 18현’이라 부른다. 성균관 문묘는 공자를 모신 대성전, 유생들이 학문을 닦던 명륜당, 제사를 지내던 동무와 서무,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된다. 공자 탄신일과 기일에 석전제가 열리고, 주말이면 성균관 마당에서 전통 혼례가 치러지기도 한다. 명륜당 앞에 우뚝 선 은행나무는 원래 열매를 맺는 암나무였다고 한다. 가을에 열매가 맺힐 때면 명륜당 전체에 고약한 냄새가 퍼지는 게 다반사였다. 게다가 은행을 줍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자, 유생들은 시끄러워서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묘책을 생각해낸 끝에 성균관 어르신이 수나무로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려 나무의 성을 바꿨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인지 깊어가는 가을 오후에 보는 은행나무는 더 무성하고 신비롭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마당에 떨어진 은행잎을 주워 읽던 시집 사이에 끼웠다.

참고 자료 《그래도 나는 서울이 좋다 : 흔적과 상상 건축가 오기사의 서울 이야기》(오영욱, 2012) 《극장 이야기 : 예술가와 관객이 알아야 할 극장의 모든 것》(김승미, 2011)

참고 자료 《조선조 성균관 교육과 유생 문화》(장재천,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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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백악구간(창의문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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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5.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규모와 품위를 두루 갖춘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보물 383호은 이상하게 푹 주저앉은 느낌이 든다. 순종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드나들기 좋게 한다며 일제가 아스팔트를 깔아 돈화문의 월대를 묻어버렸는데, 이를 복원하느라 문 앞이 주변 도로보다 낮아졌다는 설이 있다. 돈화는 《중용》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온 말로 큰 덕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감화한다는 뜻인데, 오늘날 어지럽고 혼탁한 정치 현실에 비추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 하겠다. 돈화문 주변에는 300~400년 된 회화나무 여덟 그루천연기념물 472호가 가지를 뻗고 있다. 회화나무는 문 앞에 심어두면 잡귀의 접근을 막고 집안을 평안하게 만든다고 해서 예 부터 양반가나 궁궐 앞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홍예문 교각에 새겨진 귀면의 돋을새김 이 뚜렷한 금천교 보물 1762호를 지나, 그 옛날 백성들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던 신문고가 달려 있던 진선문을 거쳐,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인정전국보 225호에 이른다. 경복궁 근정전에 비하면 다소 소박하지만, 왕의 즉위식이나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이 거행되던 곳답게 자못 화려하다. 인정전을 지나면 파란 기와지붕이 관람객의 시선을 끄는 선정전보물 814호에 도착한다.

3 > 15 > 080.

창덕궁 이야기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인정전 뜰

북촌창우극장을 나와 옆에 자리한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창덕궁사적 122호은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별궁으로 지어졌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나중에 지어진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로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함께 소실됐다가 광해군 때 재건된 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지기까지 조선의 정궁으로 사용되었다. 화재 때문에 조금 씩 보수공사를 했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큰 손실 없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옛날 신문고가 달려 있던 진선문

단청 없는 궁궐 낙선재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이자 내시와 사관이 왕을 그림자처럼 모시던 곳으로, 청와대를 제외하면 현재 유일하게 남은 청기와 건물이다. 광해군 당시 아라비아에서 들여온 유리 유약으로 만든 청기와는 비용이 많이 들어서 신하들에게 큰 질책을 받았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이야기도 재미로 듣고 넘길 일은 아니다. 정조의 손자 효명세자의 개혁 정치에 대한 꿈이 서린 희정당보물 815호, 순종이 마지막으로 머무른 침전이자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개화기 서양 문물의 흔적인 마룻바닥과 붉은 양탄자가 비치된 응접실이 특이한 대조전보물 816호을 둘러본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창덕궁의 으뜸은 후원이 아닌가.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 배어 있으나, 궁궐인데도 단청이 없는 건물이 왠지 서글픈 낙선재를 뒤로하고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후원으로 들어선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비원〉을 통해 알게 된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만든 왕실의 휴식처다.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자 우거진 숲 사이로 한 폭의 그림같이 어우러진 주합루보물 1769호와 부용지가 보인다. 부용지는 자연에 우주를 담아내려 한 대표적인 한국 정원으로, 정조대왕이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성대하게 치르고 돌아온 뒤 흐뭇한 마음으로 규장각 신하들과 함께 낚시를 즐겼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연못이다. ‘천지 우주와 통하는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창덕궁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의 가장 오래된 궁궐 이다. 조선 후기의 왕들이 주로 창덕궁에서 생활했을 정도로 뭇 왕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이곳에서 경술국치를 당했고, 영친왕과 그의 비 이방자 여사, 고종의 딸 덕혜옹주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창덕궁 낙선재보물 1764호 에서 기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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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천 소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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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5.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후원에 있는 대표적인 정원 부용지

규장각을 품고 있는 부용지 주합루

집’이란 뜻의 주합루는 정조가 즉위한 1776년 창건된 2층 누각으로, 아래층에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이 있다. 세종대왕이 경복궁의 집현전에서 학문 출발의 뜻을 펼쳤다면, 정조는 주합루의 규장각에서 학문 번성의 꿈을 펼쳤다. 학문에 뜻을 둔 두 왕은 조선의 성군으로 후세에 기억된다. 부용지에서 불로문을 지나 군자와 선비의 성품을 닮은 애련지로 간다. 새 정자의 이름 을 지은 까닭을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숙종이 떠올라서인지 애련한 눈길로 바라 보는 애련정이 눈부시도록 푸르고 시리다. 동판을 씌운 지붕과 도르래식 차양이 이국 적인 서재 선향재를 품은 연경당보물 1770호을 지나 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옥류 천으로 향한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을 벌이던 옥류천 청의정 앞에는 왕이 몸소 벼를 베던 작은 논배미가 있다. 가을걷이를 하고 볏짚으로 지붕 을 얹은 청의정 초가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한가위 보름달을 맞이하듯 푸근하게 만든다. 창덕궁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피천득의 〈비원〉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꾀꼬리 우는 오월이 아니라도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우산을 받고 비원에 가겠다. 눈이 오는 아침에도 가겠다. 비원은 정말 나의 비원이 될 것이다.”

참고 자료 《서울의 고궁 산책》(허균, 2010) 《인연》(피천득 문학 전집 1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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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5 > 081.

창경궁 이야기

국왕이 정무를 보던 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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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세자빈이 생활하던 경춘전

창경궁 정전인 명정전

춘당지

창경궁사적 123호은 성종이 살아 계신 대비 세 분을 모시기 위해 지은 이궁으로, 자연미와 왕실 생활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 정사를 돌보는 외전보다는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내전으로 많이 이용됐기 때문에 왕실 비화가 얽힌 곳이기도 하다. 궁궐의 품위를 보여주는 정문 홍화문보물 384호으로 들어선다.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 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왔는데, 백성이 홍화문 앞까지 나와 길을 가득 메우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홍화문으로 들어가 도깨비 얼굴이 새겨진 옥천교 보물 386호를 건너면 중앙에 정전인 명정 전보물 226호이 보이고, 그 왼쪽에 국왕이 정무를 보던 문정전이 자리 잡고 있다. 문정전 앞뜰에서 벌어진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커다란 뒤주에 갇혀 한여름 더위와 허기로 8일 동안 신음하던 세자는 스물여덟 짧은 생을 마쳤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를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지만 늦은 후회였다. 부모 자식 간의 불화로 갈등을 겪는 이들은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왕비나 세자빈이 생활하던 경춘전에서 조선 후기의 현군 정조대왕이 태어난 이야기, 왕실의 생로병사가 이어진 환경전에서 효명세자의 빈궁 설치와 화재 이야기, 정조독살

설이 퍼진 후궁들의 처소 영춘헌 이야기는 사극의 단골 소재로 사용된다. 그중에서도 내전의 중심 전각인 통명전보물 818호과 연관된 장희빈의 저주에 관한 일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회자되었다. 궁녀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된 후, 왕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까지 오른 뒤 급기야 왕비가 된다. 그러다가 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자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 주위 에 묻었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는다. 수많은 풍문을 남긴 채 43세에 생을 마감한 것 이다. 창경궁은 고종을 강제 폐위하고 순종을 즉위시킨 일제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동물원과 식물원을 짓고, 주변에 벚꽃을 심어 이름도 창경원이라 깎아내린 만행을 저지 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창경궁은 여전히 살아 있다. 서울의 여러 장소를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능력이 탁월한 홍상수 감독의 최근작 〈우리 선희〉의 무대로도 창경궁은 매력 만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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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서울의 궁궐 건축》(김동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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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5.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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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쉼터

테마 15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삼청동

와룡공원 한성대입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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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 문묘

도보 시간 약 2시간 한성대입구역 → 버스 5분 → 성북동 쉼터 → 도보 20분 → 와룡공원 → 도보 30분 → 중앙고등학교 후문 → 도보 20분 → 북촌창우극장 → 도보 5분 → 창덕궁 → 도보 30분 → 창경궁 → 도보 20분 → 성균관대학교

중앙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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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찾아가는 길

혜화동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지선(초록)버스 1111, 2112번을 타고 성북초등학교 앞에서 내린 뒤 횡단보도를 건너가면 성북동 쉼터가 나온다. 성북동 쉼터에서 와룡공원을 거쳐 성균관대학교 후문 쪽으로 내려간다. 성대 후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길이 갈라지는 곳에 중앙고등학교 후문이 있다. 학교를 둘러보고 정문으로 나오면 오래된 목욕탕과 이발소, 문방구 사이로

북촌창우극장

작은 공방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계동 토박이 골목이 펼쳐진다. 원서동 쪽으로 발길을 돌려 창덕궁로를 따라가다가 춘곡 고희동 가옥에서 꺾어져 공간 사옥 쪽으로 내려오면 북촌창우극장 앞에 닿는다.

안국동

창덕궁은 북촌창우극장 옆에 있고, 창경궁은 창덕궁에서 바로 이어진다. 창경궁을 나와 큰길 따라 혜화동로터리 쪽으로 가다가 성균관대학교 입구에서 꺾어져 쭉 올라가면 성대 정문이 나오고 정문 옆에 성균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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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연결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로 나와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성균관대 후문에서 내린 뒤 걸어서 10분(혹은 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와 08번 마을버스를 타고 명륜3가에서 내린 뒤 걸어서 10분)이면 와룡공원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숙정문까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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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5. 한양도성 안 궁궐과 학교 이야기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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