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이야기를 따라 한양 도성을 걷다 남산,흥인지문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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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

낙산・ 흥인지문 구간 >

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낙산

흥인지문

혜화문 - 장충체육관 광희문 장충체육관

혜화문 홍화문/동소문에서 흥인지문 동대문을 지나 장충체육관으로 이어지는 낙산・흥인지문 구간에서는 우리네 이웃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인력거꾼과 전차・전기수 이야기, 사뭇 달라진 청계천 천변 풍경, 광장시장과 서울풍물시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동묘공원에서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서민의 희로애락이다.

혜화문

주민이 대안적 재개발을 실천하는 다양한 모습의 마을도 만날 수 있다. 한양도성 아래 혜화동에는 현재로 이어지는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국의 밀레’라 불린 화가 박수근 이야기, 마로니에공원 이야기, 학림다방 이야기 등 성곽 아래에서 활짝 꽃피운 문화・예술을 만날 수 있다. 옛것을 보존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고종이 만든 장충단 이야기도 흥미롭다.

흥인지문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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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능선을 따라 물결치듯 굽어지는 인정의 숨결이여 혜화문에서 흥인지문에 이르는 길 쉼터가 될 만한 정자가 많아서 호젓한 탐방 길로 최적이고, 낙산의 능선을 따라 물결치듯 휘는 성곽과 멀리 한양도성의 북쪽 외곽을 두른 백악으로 지는 해를 감상하기에도 그만이다. 특히 낙산의 성벽과 남산이 어울린 야경은 한양도성에서 절경으로 꼽힌다. 성 안쪽 길을 따라 걸으며 도성 안팎의 풍광을 즐길 수 있고, 내사산의 흐름과 서울 도심의 풍경을 조망할 수도 있다. 혜화문을 출발, 장수마을과 낙산공원을 거쳐 창신동과 흥인지문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며 여유 있게 한양도성의 전체 모습을 살펴본다. 세상의 모든 풍경이 여기에 모여 있다.

글 최창근 사진 이창재

흥인지문 앞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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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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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4 > 16 > 082.

4 > 16 > 083.

도성 공사 실명제와 효녀 도리장 이야기

혜화문 밖 인력거꾼

한양도성길 낙산 구간 전경

혜화문 앞 전경

한양도성길 낙산 구간의 끝은 동대문성곽공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동대문교회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곽 끝자락에서 1706년숙종 32 것으로 추정 되는 각자성석을 발견할 수 있다. 부대 단위인 1패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일패두一牌頭’, 공사를 기획하는 일과 감독하는 일을 가리키는 ‘책응策應’과 ‘독역督役’이 적힌 돌이다. 한양도성 축성 당시 화제가 된 효녀 도리장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도리장의 아버지 는 전라도 장성 진원에서 도성을 쌓으러 한양에 왔다가 그만 병에 걸려 판교원이라는 구호소 신세를 졌다. 이 소식을 들은 도리장은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결심하고, 연약한 처녀의 몸으로 남장을 하고 추운 겨울날 천 리 길을 나섰다. 그녀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병으로 누운 사람이 있으면 아버지가 아닌지 반드시 확인해보았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판교원을 찾아 부친을 만났지만 그는 운명 직전이었다. 도리장이 정성을 다해 아버지를 간호하고 고향으로 함께 돌아오니 인근 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이 이야기 가 알려지자 태조는 도리장에게 옷감을 상으로 내려 효성을 치하했다.

혜화문은 한양도성 동북쪽에 위치한 사소문 중 하나지만,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 가도가 연결되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데다 항상 닫혀 있는 숙정문의 역할까지 대신 하다 보니 사대문 못지않았다. 혜화문의 원위치는 지금의 문 아래 있는 동소문로 언덕 이다.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해서 ‘동소문’이라고도 했다. 홍화문으로 불리던 혜화문 은 사대문과 사소문을 통틀어 가장 늦은 1994년에 복원되었다. 한양도성과 같은 시기인 1397년태조 6에 건축됐지만, 1928년 문루가 헐리고 신작로를 내기 위해 남아 있던 석축도 1939년 허물었다. 새들이 많은 혜화문 일대의 피해를 방지 하기 위해 문루 안 천장에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혜화문을 올려다보며 현진건의 소설 한 편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작가가 스물네 살 되던 1924년 발표한 단편소설 〈운수 좋은 날〉의 배경이 바로 여기 아닌가. 성 밖에서 인력거꾼으로 일하는 김 첨지는 돈벌이를 위해 빈사 직전의 아내가 나가지 말라고 애원하는데도 뿌리치고 일을 나간다. 겉으로는 비정하고 냉혹한 남편 같지만, 실은 허기진 배로 온종일 빗속을 철버덕거리면서도 아내에 대한 근심이 가득하다. 그래 서 인력거를 끌고 달리다가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하게 서 있기도 한다. 이상하게 손님이 많던 그날,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지만 아내는 죽은 뒤였다. 일제강점기 가난한 우리 민족, 특히 하층 계급에겐 행운의 기적도 있을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입증한 〈운수 좋은 날〉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참고 자료 《잊혀진 각석을 찾아가는 서울 성곽의 역사》(박계형, 2008) 《서울 한양도성 걷기》((사)한국의길과문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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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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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4 > 16 > 084.

성 밖 마을, 장수마을

옛 혜화문 앞 전경

대안 개발의 가능성을 남겨둔 장수마을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장이를 동광학교까지 태워다주기로 되었다.

혜화문에서 낙산공원까지 도성을 따라 걷는 길은 산이 낮고 경사가 완만해서 산책길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낙산은 내사산 중에서 가장 낮지만, 산봉우리는 제법 우뚝 솟았 다. 산책로 왼쪽으로 주민 참여에 따른 대안적 재개발을 실천하는 삼선동1가 장수마을 이 한성대학교를 끼고 맞춤하게 들어섰다. 장수마을에는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상경한 사람들이 터를 잡았다. 개발계획에 따라 집과 건물을 지은 게 아니라 대부분 무허가로 원래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집을 올리고 길을 냈다. 길은 좁지만 구불구불하고 낮은 담장으로는 저녁밥 짓는 향기 가 나는 근대식 자연 마을인 셈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노인층이고, 마을이 오랫동안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장수마을이란 이름을 붙였다. 남해 다랭이마을 이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Dubrovnik처럼 문화와 역사를 지키면서도 주민의 삶이 유지될 수 있는 대안 개발의 가능성을 남겨두기도 했다. 산책로 중간에 장수마을로 접어드는 길이 있고, 쉬어 가기 좋은 정자와 벤치가 놓여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며 걷기에 그만이다.

참고 자료 《서울성곽 걷기 여행 :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녹색연합, 2010) 《운수 좋은 날 : 현진건 중·단편선》(현진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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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참고 자료 《생태문화도시 서울을 찾아서》(홍성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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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4 > 16 > 085.

4 > 16 > 086.

낙산공원 홍덕이 밭

‘한국의 밀레’로 불린 화가 박수근

홍덕이 밭

장수마을에서 낙산공원으로 들어서는 암문

도성 밖 장수마을을 뒤로하고 암문으로 들어선다. ‘서울의 몽마르트르’라 불리는 낙산공원이 발밑으로 펼쳐진다. 낙산공원을 낀 한양도성은 도심에서 접근성이 좋고 고도가 낮아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다. 공원 놀이광장에서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홍덕이 밭.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효종을 따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궁녀 ‘홍덕’ 이 담근 김치 이야기와 함께 낙산 중턱의 채소밭이 ‘홍덕이 밭’이 된 배경이 생각나 슬며시 미소가 피어오른다. 나인 홍덕은 청나라 선양 瀋陽에서 김치를 담가 봉림대군에게 바쳤다. 대군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홍덕에게 포상으로 밭을 주고, 계속 그녀가 담근 김치를 먹었다고 한다. 낙산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가난한 사람들이 움막이나 판잣집을 짓고 살아 ‘토막촌’이라 불렸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피란민이 몰려 성벽을 허물고 집을 지어 심하게 훼손된 적도 있었다. 낙산공원 전망대는 서울 도심을 배경으로 지는 해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 들이 찾는다. 다른 사람들이 하듯 이 세상 빛깔이 아닌 석양을 카메라에 몇 컷 담아 본다.

동대문교회

낙산공원 팔각정에서 동대문성곽공원과 동대문교회를 거쳐 흥인지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오래된 동네 분위기를 맛볼 수 있어 정겹다. 이 산책로의 도성 밖에 해당하는 건너편 창신동은 ‘한국의 밀레’라 불리는 박수근이 가난한 생활 속에도 예술혼을 불태 운 곳이다.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裸木》에 등장하는 가난한 초상화가의 실제 모델 박수근. 살아 생전 예술적 재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가 사후에야 작품 세계가 재조명된 기구하고 비극적인 삶까지 진짜배기 예술가의 기질과 닮은 화가 중의 화가다. 머리에 함지박을 이고 가는 여인네들, 어린애를 업은 여염집 아낙, 시장에 쪼그리고 앉은 행상들, 나무 그늘에 담뱃대를 물고 앉아 담소하는 노인들, 낡은 시골 예배당, 다 쓰러져가는 산 밑의 초가, 벌거벗은 나무들이 박수근의 소박하고 서민적인 체취를 말해준다. 그는 진실하게, 열심히 사는 가난한 이웃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으리라. 단순하고 따뜻한 인생의 정경, 그 속에서 고독하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일궈가는 애정 어린 인간상이야말로 박수근이 꿈꾸던 창작 세계의 근원이다.

참고 자료 《답사 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한국문화유산답사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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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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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그러나 또한 참으로 궁금한 것은 그 커다란 손등 위에서 같이 꼼지락거렸을 햇빛들이며는 그가 죽은 후에 그를 쫓아갔는가 아니면 이승에 아직 남아서 어느 그러한 장엄한 손길 위에 다시 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른 빨래를 하며 개며 들었을지 모르는 뻐꾹새 소리 같은 것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궁금한 일들은 그러한 궁금한 일들입니다. 그가 가지고 갔을 가난이며 그리움 같은 것은 다 무엇이 되어 오는지… 저녁이 되어 오는지… 가을이 되어 오는지… 궁금한 일들은 다 슬픈 일들입니다.

박수근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궁핍하던 1950년대 창신동 뒷골목과 산동네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 그 계단 위에 줄줄이 늘어선 판잣집이 떠오른다. 저녁노을이 낙산의 등허 리를 발갛게 물들일 무렵이면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일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집 앞에 나와 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밤이 늦도록 기다리는 남편은 돌아 올 줄 모르고 달그림자만 짙어질 때, 이윽고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올라오는 발자국 소 리.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아내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이윽고 사립문 을 열고 함박꽃처럼 맑고 선한 웃음과 함께 마당으로 들어서는 무능력한 가장. 그래도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주는 아내. 박수근은 일이 없는 날이면 집 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고 전해진다. 시인 장석남은 그 언어의 향기와 무늬와 빛깔로 박수근의 선량한 모습을 아름다운 시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궁금한 일 - 박수근의 그림에서〉

참고 자료 《옛이야기를 찾아서 1》(성북구청 문화체육과, 2009) 《젖은 눈 : 장석남 시집》(장석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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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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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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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6 한성대입구역

혜화문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혜화동 성당 혜화동로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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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시간 약 1시간

낙산공원 장수마을

혜화문 → 도보 10분 → 장수마을 → 도보 20분 → 낙산공원 홍덕이 밭 → 도보 10분 → 낙산정 → 도보 20분 → 흥인지문 낙산정 >

찾아가는 길

마로니에공원

한양도성길 낙산-흥인지문 구간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혜화동 성당 쪽으로 20m 걸으면 한양도성 낙산 구간으로 가는 나무 계단이 보인다. 도성을 따라 산책로로 한참을 오르다가 정자가 있는 곳에서 마을 길로 내려가 도성 밖 장수마을을 둘러보고, 도성 쪽으로 올라와 낙산공원으로 통하는 암문으로 들어선다. 공원 놀이광장에서 나무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홍덕이 밭. 옆에 있는 낙산공원 팔각정에서 다시 도성 쪽으로 올라가 동대문성곽공원과 동대문교회를 거쳐 흥인지문까지 계속 내려간다. 낙산도성길의 끝은 동대문성곽공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곧 철거될 동대문교회로 이어진다. 낙산에서 내려온 도성 끝자락에서 성벽 공사 당시를 기록한 책임자 명단의 흔적이 있는 각자성석을 발견할 수 있다.

동대문성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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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연결길

흥인지문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5번 출구에서 낙산공원으로 가는 03번 마을버스를 탄다. 공원 입구에서 하차하면 한양도성길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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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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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6. 한양도성 성 밖 마을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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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젊음은 오래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마로니에공원에서 낙산에 이르는 길 한양도성 안쪽 낙산 밑에 위치한 연극의 거리 대학로에는 극장뿐만 아니라 미술관과 박물관도 많다. 영원한 젊음의 상징 마로니에공원에서 출발해 대학로의 명소인 학림다방과 이화마을을 거쳐 낙산에 올라보자. 한양도성 낙산을 굽어보며 문화·예술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자. 청춘의 한 시절로 길을 나서자.

글 최창근 사진 이창재

마로니에공원에 있는 예술가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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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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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4 > 17 > 087.

낙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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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심검당

청룡사 대웅전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달픈 사연이 전해지는 청룡사

비우당

비우당 뒤뜰에 남아 있는 자주동천

한양도성의 동쪽 산인 낙산은 서쪽 인왕산에 대치되는 산으로, 산 전체가 화강암이다. 도성의 내사산 중 가장 야트막한 백악의 좌청룡에 해당하는데,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낙타산 혹은 낙산이라 했고, 궁중에 우유를 대던 유우소가 있어 우유의 옛말 ‘타락’을 따서 타락산으로도 불렸다. 예전에는 숲이 우거지고 약수터가 있어 산책길로 많이 이용됐고 왕족과 문인, 가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지만, 현재는 중턱까지 집이 들어서 산꼭대기에 남은 성벽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청룡사는 숭인동에서 낙산공원으로 가는 오르막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비구니 절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기 전날, 아내 정순왕후와 하룻밤을 지새웠다는 우화루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사찰이기도 하다. 정순왕후가 생계를 잇기 위해 고생을 감내하던 비우당庇雨堂 뒤뜰에 있는 자주동천을 찾아간다. 단종이 떠나고 청룡사 비구니가 된 정순 왕후가 댕기에 자줏물을 들여 생계를 이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방문객의 가슴을 친다. ‘비를 겨우 가릴 수 있는 집’ 비우당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청백리로 유명한 정승 유관 이 살던 초가삼간이다. 동대문 밖에 있던 그의 집은 밤이면 별이 보이고, 비가 오면 빗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고 한다. 비가 오면 집 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지낼 만큼 검소하고 청빈한 선비 유관은 조선 시대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의 외증조부다. 이수광이 훗날 세계정세와 천주교를 소개한 《지봉유설》을 이곳에서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고 싶은 사람들은 비우당에서

세속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바로잡고 추스를 일이다. 낙산에서 내려와 아르코미술관이 있는 마로니에공원 벤치에 앉는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긴 건축가 김수근은 평소 붉은 벽돌을 즐겨 사용하면서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샘터 사옥과 아르코예술극장처럼 아르코미술관 역시 그의 손길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아무리 급해 도 벽돌은 한꺼번에 쌓지 못한다. 한 장 한 장 단정하게 쌓아야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힘 을 받는다. 벽돌을 쌓는 과정은 인간이 되는 과정을 상징한다”는 그의 신조를 되새기며 ‘벽돌을 쌓는 과정’이라는 구절 대신 ‘예술가의 길’을 넣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참고 자료 《서울성곽 걷기 여행 :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녹색연합, 2010) 《건축가 김수근 : 공간을 디자인하다》(황두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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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4 > 17 > 088.

이화마을 이야기

이화마을의 아기자기한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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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마을로 올라가는 굴다리 입구의 전경

이화마을의 계단

좁은 골목이 굽이굽이 이어지며 곳곳에 탄성이 나올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창의적인 벽 화가 그려진 낙산공원 아래 이화마을은 외국인들 사이에도 유명한 동네다. 뜻있는 예술가들이 이화마을의 소외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낙산프로젝트를 추진, 작가 70여 명과 동네 주민이 참여해 다닥다닥 붙은 집의 삭막한 담벼락과 가파른 계단에 그림을 그리고 조형물을 설치했다. 이화동에서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로 접어든다. 저만치 이화마을을 상징하는 굴다리 가 보이고, 그 옆에 마을을 소개하는 안내문이 아기자기한 벽화와 함께 붙어 있다. 굴다 리에 올라서자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행자들이 여기저기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친구도 있고 연인이나 가족도 있다. 고단한 삶에 잠시나마 활기를 불어넣고 싶은 마음이 담긴 소나무 그림과 해바라기 계단 앞에서 사람들은 행복 하게 웃으며 추억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덕분에 이화동 골목길은 사시사철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봄의 골목’이 되었다. 이화마을에는 갤러리와 연구소, 공방이 촘촘하게 들어섰다. 이화살롱, 정 헤어숍, 508 슈퍼, 하늘분식 같은 이름이 정겹기 그지없다. 떡볶이나 라면, 비빔밥 등을 파는 하늘 분식에 들러 잠시 숨을 돌린다. 옆 테이블에 중국인처럼 보이는 여대생 둘이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수다를 떨며 팥빙수를 먹는다. 서글서글하고 맘 좋게 생긴 분식집 주인이 짓궂은 농담을 던지며 손님들의 피로를 풀어준다. 실내에 사람 냄새가 나는 훈훈 한 온기가 맴돈다. 하늘분식에서 나와 이화장길로 내려온다. 낙산공원에서 이화장으로 내려오는 입구에

간판만 봐도 배가 든든한 고향분식이 있다. 조선 중종 때 문신 신광한의 옛집이자, 훗날 영욕이 엇갈린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의 흔적이 있는 이화장서울특별시 기념물 6호. 조선 시대에 하얀 배꽃으로 뒤덮인 정자가 있어 이화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대문 앞에 ‘대한 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리승만 박사 기념관’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초인종을 눌러 관리인에게 관람 예약을 확인하고 마당으로 들어선다. 전체적으로 아담 하고 단아한 인상이다. 본채는 대통령 내외가 머물던 곳이고, 언덕배기에 있는 작은 건물은 대한민국의 초대 내각을 구상하던 조각당이다.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은 결국 모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프란체스카 여사는 1970년 귀국해 이화장에서 살다가 1992년 여생을 마쳤다. 자연은 순환하지만 인간은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 역사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참고 자료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5》(손정목, 2009)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이경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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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살던 이화장


4 > 17 > 089.

마로니에공원 이야기

야외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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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공원 전경

〈오우가〉가 새겨진 고산 윤선도 기념 시비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날 오전, 마로니에공원 벤치에 앉는다. 평일 저녁에도 유동 인구 가 많은 대학로지만, 이 시간 이곳은 배드민턴을 즐기는 가족 한둘과 자전거를 타는 소년, 데이트를 즐기는 낭만파 연인 몇몇을 빼면 늘 한적한 고요가 빗물처럼 흐른다. 정면으로 아르코미술관이, 왼쪽에는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아르코예술극장, 오른쪽 에는 새 단장을 마친 예술가의 집이 보인다. 마로니에공원은 서울대학교 문리대와 법대, 예술대 미술부가 있던 자리로, 센Seine강 이라 불리던 대학천과 그 위 미라보 Mirabeau다리를 중심으로 캠퍼스의 아름다운 역사 가 잔잔히 흘러넘치던 곳이다. 서울대학교는 1975년 관악캠퍼스로 이전했지만, 교정 이곳저곳에 파리Paris의 강과 다리 이름을 붙여 부르던 옛 시절의 낭만은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도 마로니에공원은 연인들이 찾는 대표적인 명소로, 마로니에 열매를 ‘사랑의 열매’라고도 부른다.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인 꿈의 나무 마로니에는 칠엽수과에 딸린 갈잎큰키나무다. 이탈 리아나 프랑스에서 가로수로 많이 가꾸는데, 5~6월에 흰 바탕에 붉은 무늬가 있는 종 모양 꽃이 핀다. 아름드리 밑동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간 무수한 가지들과 풍성 한 잎사귀들의 자태가 고혹적이다. 서울 시민의 꿈과 낭만이 숨 쉬는 문화·예술의 터전으로 변신한 이곳에 ‘마로니에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예전 교정에 마로 니에 세 그루가 있던 데서 유래한다.

아마추어 가수들의 신선한 노래를 들을 수 있고, 골목 여기저기에서 춤추는 젊은이 들을 만날 수도 있으며, 초상화를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들의 아지트인 공원은 가을 이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환상적인 산책로로 변한다. 그리고 이곳은 시조 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가 살던 집터로, 물과 바위와 소나무와 대 나무와 달을 진정한 벗으로 노래한 그의 대표작 〈오우가五友歌〉가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참고 자료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서현, 1999) 《서울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심승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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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4 > 17 > 090.

학림다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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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다방 실내

학림다방 안에 걸린 50주년 기념 포스터와 예술인의 사인

여유로운 몽상에 한동안 취해 있다가 벤치에서 일어나 횡단보도 건너 학림다방으로 들어간다. 1956년에 문을 연 이곳은 대학로에 있는 가장 오래된 다방으로, 50년이 넘 는 세월 동안 수많은 문인과 예술인이 스쳐간 그리움의 터전이다. 커피 한 잔과 LP판 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을 곁들여서 1960~1970년대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으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애용됐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기 전, 입구 표지판에 새겨진 학림에 대한 추억을 담은 황동일 씨의 글이 인상적이다. “학림은 지금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현재의 시간 위에 과거를 끊임없이 되살려 붙잡아 매두려는 위태로운 게임을 하고 있다.” ‘1960년대 언저리의 남루한 모더니즘’이나 ‘1970년대 위악적인 낭만주의와 지사적 저항’이라는 구절과 ‘고립된 섬’이라는 단어도 눈에 띈다. 2006년 연말에는 학림다방이 대학로에 터를 잡은 5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과 연을 맺은 문화·예술인들이 초대되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작은 공연도 열었다. 언론인 홍세화, 춤꾼 채희완, 소리꾼 임진택, 화가 김정헌, 작곡가 김민기, 연극인 오종우, 시인 황지우 등 초대 손님들의 면면도 다양하고 화려하다. 이충열 대표의 말처럼 학림다방 은 시대가 변해도 지켜야 할 가치, 잊지 말아야 할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깨우쳐주는 대학로의 사랑방 역할을 해온 것이리라.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1985년 정부가 문화·예술의 거리를 조성하면서 ‘대학로’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다. 대학로는 옛 경성제국대학에 뿌리를 둔 서울대학교 교정이 자리

를 잡으면서 대학가 문화가 주를 이룬 곳이다. 대학이 옮겨간 자리에 신촌을 비롯한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문화단체와 극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2004년에는 인사동에 이어 두 번째 문화 지구로 지정되면서 서울의 문화를 대표하는 젊음의 거리로 거듭났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대학로는 언제나 들썩이는 거리였다. 주말과 휴일이면 차 없는 거리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은 거리 공연을 하고 스케이트보드를 탔으며, 한쪽 에서는 막걸리 판을 벌이기도 했다. 학생들의 지나친 음주와 집단행동 때문에 탈선과 퇴폐의 공간으로 지적받기도 했지만, 학생운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기도 했다. 서울 곳곳에서 모여든 학생들은 대학로에서 연합 행사와 집회를 열었고, 그 중심에 학림 다방이 있었다. 학림다방은 피 끓는 젊은이들의 2강의실이고, 휴식처이자 토론장이고, 대화의 광장이자 만남의 장소였다. 학림다방 소파에 앉아 창밖 마로니에공원을 보며 지그시 눈을 감는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참고 자료 《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홍성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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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학림다방 입구


4>

테마 17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혜화역 >

➌ ➋

도보 시간 약 1시간 30분 마로니에공원 → 도보 10분 → 학림다방 → 도보 20분 → 이화마을 굴다리 입구 → 도보 30분 → 낙산정 → 도보 20분 →

장수마을

이화장 → 도보 10분 → 마로니에공원

>

낙산정

마로니에공원

찾아가는 길

학림다방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새 단장을 마친 마로니에공원이다. 횡단보도 건너 맞은편에 있는 학림다방으로 들어간다. 학림다방에서 나와 큰길을 따라 이화사거리까지 내려와서 율곡로로 방향을

이화장

튼다. 율곡로를 따라 걷다 보면 중간에 이화마을 굴다리 입구로 접어드는 낙산공원 방향 푯말이 보인다.

한양도성길 낙산-흥인지문 구간

이화마을을 상징하는 굴다리를 끼고 올라가면 이화살롱, 정 헤어숍, 하늘분식 등 정겨운 이름들이 나타난다. 정 헤어숍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508슈퍼와 이화마을 텃밭이 나오고, 도성을 따라 낙산공원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서울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낙산 전망대가 있다. 낙산 전망대에서 낙산공원을 거쳐 하늘분식으로 돌아와 계단으로 내려오면 이화장이 보인다. 낙산공원에서 이화장으로 내려오는 입구에 어머니의 정성이 가득 담긴 고향분식이 있다. 이화장에서 설치극장 정미소까지 내려와 쇳대박물관 쪽으로

이화마을 굴다리

가다가 아리랑소극장과 도도야식당을 끼고 꺾어지면 마로니에공원이다.

>

도성 연결길 마로니에공원 뒤쪽에 낙산공원 정문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방송통신대를 끼고 돌면서 설치극장 정미소 골목으로 들어서는 이화장길로도 낙산공원에 오를 수 있다. 이화동의 이화마을 올라가는 굴다리 길도 애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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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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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7. 한양도성 성곽 아래에서 꽃피는 문화·예술


4>

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물 따라 세월 따라 대대손손 이야기는 흐르고 흥인지문에서 청계천 배오개다리에 이르는 길 흥인지문에서 출발, 오간수교를 거쳐 이간수문이 있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둘러보고 다시 청계천으로 내려오면서 전차가 다니던 흥인지문 일대의 옛 풍경과 청계천을 따라가며 책을 읽어주던 전기수를 떠올린다. 그 옛날 천변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과 현재 청계천의 모습을 비교하는 역사·문학 기행을 떠나보자.

글 최창근 사진 이창재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입구에 있는 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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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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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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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만들어지기까지 이간수문

야외 유구전시장

공원 안에서 만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한양도성 아래 오간수교를 거쳐 이간수문이 있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향한다. 지금은 모형으로만 남아 있는 오간수문이 인왕산과 백악 등에서 흘러온 물을 보내는 수문이라면, 이간수문은 남산 방면에서 내려온 물을 내보내는 수문으로 사람이 도성 안에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나무 창살이 끼워져 있었다. 동대문운동장이 동대문역 사문화공원으로 바뀌기까지 역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1925년 일제가 일본 왕세 자의 결혼을 축하·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동대문운동장은 처음에 ‘경성운동장’으로 불리다가 1945년 광복과 동시에 ‘서울운동장’으로 바뀌었고, 1984년 잠실종합운동장 이 만들어지면서 동대문운동장이 되었다. 철거에 반대하는 의견에도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까지, 오랜 세월 각종 체육대회와 행사 장소로 국민에게 많은 추억을 안겨준 곳이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들도 이곳을 스쳐갔다. 운동장이 준공된 이듬해1926년에는 대한 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노제가 거행됐고, 1930년에 열린 경성과 평양의 ‘경평 축구전’ 도 볼 만한 행사였다. 해방 이후엔 민족 지도자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노동절엔 좌익과 우익 세력의 집회가 동시에 열려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한국 야구 최초의 홈런이 탄생했고, 축구 황제 펠레Pele가 그라운드를 누볐으며, 독일로 떠나는 차범근 선수의 환송 경기가 열렸다. 운동장이 철거되고, 외국의 유명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미래 도시의 우주선 모형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건축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이 들어서면서 추억은 사라졌다. 스포츠 시설로 수명을 다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화 유적이 발굴되어 이제는 역사와 문화, 전통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장소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측면에서 작은 위안을 얻을 뿐. 적을 관측하고 접근한 적을 정면과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곽의 일부를 각이 지게 밖으로 돌출시킨 치성도 그런 유적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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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동대문운동장 시절 조명탑

동대문역사관 내부

발굴 당시 한양도성의 잔존 구간과 함께 복원된 이간수문도 만나볼 수 있다. 이 문화유적 은 동대문운동장이 헐리기까지 80년 넘게 땅속에 묻혀 있었으리라. 공원 입구에서 해치해태 여섯 마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전통적인 수호 동물 해치가 플라스틱 빈병을 이용해서 카우보이, 슈퍼맨 등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다시 태어난 모습이 이채롭다. 공원은 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디자인갤러리, 유구전시장, 이벤트 홀 등으로 구성된다. 동대문운동장에서 발굴된 조선 시대 건축물 유구를 그대로 옮겨놓은 유구전시장이 눈길을 끈다. 왜 모든 폐허 위의 흔적은 보는 이의 마음을 쓸쓸하게 만들까. 어스름이 깔리는 공원 벤치에 앉아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경기용 조명탑을 바라본다. 야간 조명탑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경기하는 선수들과 그 모습에 환호하는 관중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참고 자료 《서울 100배 즐기기(2012~2013)》(권현지·윤혜진·장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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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4 > 18 > 092.

동대문 전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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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으로 사라진 흥인지문 앞 전차 (사진 제공 : 서울역사박물관)

위 - 전차의 운행을 구경하는 사람들 / 아래 - 돈의문 앞 전차 (사진 제공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 종로구 종로 288.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로 나오면 보이는 곳. 이른 저녁을 먹고 느지막이 산책을 나와, 언제부터인가 패션의 메카로 변신한 한양도성의 동대문에 해당하는 흥인지문보물 1호 앞에 서본다. 소박하고 섬세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이 반영된 흥인지문은 1396년태조 5 다른 문들과 함께 축조됐는데, 당시 이름은 흥인문이 다가 1869년고종 6 흥인지문으로 바뀌었다. ‘인仁을 북돋우는 문’이라는 뜻의 흥인지문은 다른 성문의 이름보다 한 글자가 많아 현판도 세로 두 줄로 쓰였는데, 속설에 따르면 좌청룡인 낙산과 흥인문이 있는 곳이 지세가 낮아 이를 보완할 목적으로 지之자를 넣었다고 한다. 성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에워싼 옹성을 둔 것 또한 외부의 침략을 받기 쉬운 서울의 ‘서고동저’ 지형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패션 상가로 북적이는 거리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낡은 성문과 마주하면서 숙연한 느낌에 빠져든다. 지나간 서울의 역사를 되짚어보다가 생뚱맞게도 그 옛날 이 거리를 누비던 전차를 떠올린 것이다. 땅 위를 느릿느릿 달리는 전차는 유지비 가 엄청나게 들어서, 근대 초기 문명의 향수를 자극하는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세계 어느 도시에 가도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아직 전차가 남아 있는 곳은 아이 러니하게도 전차의 운행 자체가 그 지역의 볼거리로 사랑받는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우리에게도 전차가 운행되던 시기가 있었다.

1898년 한성에 설립된 한성전기회사는 고종황제가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에 행차할 때마다 많은 신하들이 동행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면서 전차 가설을 부추겼다. 이듬해 일본은 도성의 일부를 헐고 전차선을 설치했다. 미국의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해 제작됐기에 개통식장엔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걸렸다. 사대문 안의 새로운 교통수단이 된 전차는 돈의문에서 종로, 흥인지문을 거쳐 청량리까지 운행됐다. 하지만 전차비가 아까워 종로통을 걸어 다 니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전차는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와 오욕의 세월을 함께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운행이 중단된 서울의 전찻길에는 사람 키만큼 자란 갈대와 잡초가 우거져서 폐허의 쓸쓸함과 참담함을 더했다고 한다. 1968년 11월 30일 자정을 기해 전 노선이 운행을 멈춤으로써 전 차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참고 자료 《한국 근대사의 풍경 : 모던 조선을 거닐다》(노형석,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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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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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을 빼놓는 이야기꾼, 전기수 이야기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에서 볼 수 있는 전기수 (좌측 하단 추정) 〈출처 : 공공누리에 따라 문화재청의 공공저작물 이용〉

강담사story teller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잡사를 재담으로 풀어내는 일반적인 이야기꾼 이고, 강창사singer of tale는 강담사보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예능인으로 판소리 광대를 칭 했다. 그러니까 전기수는 오늘날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에 가까운 존재다. 전기수는 1960년대 초반까지 있었는데, 마지막 전기수 정규헌 옹의 증언에 따르면 주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시장 바닥이나 담배 가게 앞에서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홍길동전》 《전우치전》 《조웅전》 《장끼전》 같은, 표지가 아이들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된 데서 유래한 딱지본 육전소설을 들려줬다고 한다. 전기수가 소설을 낭송하다가 주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말을 멈추면 사람들은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돈을 던졌는데, 이를 요전법이라 불렀다. 정규헌 옹도 요전법으로 톡톡히 재미를 봤다는데, 연구자들은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교환가치가 높아진 경제 상황을 자연스럽게 반영한 것이 요전법이라고 해석한다. 전기수와 더불어 책을 읽어주는 여자책비, 책을 읽어주는 남자책쾌도 서민에게 환영받았 다. 특히 책쾌는 양반이나 중인 출신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던 지식인 유형, 지식인은 아니지만 책 장사를 전문 직업으로 삼아 문화 전파의 관계망을 구축·확장한 전문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수는 ‘읽는 소설’에서 ‘듣는 소설’의 시대를 열었다. 최근 일반화된 낭독 문화는 그 옛날 장바닥을 무대 삼아 이야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전기수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요즘 전국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에 가면 책 읽어주는 할머니 들을 만날 수 있는데, 이 또한 현대판 전기수라 부를 수 있으리라.

'전태일 다리'로도 불리는 버들다리

조금은 삽상해진 가을 저녁의 바람을 안고 마음을 추스르며 청계천으로 터벅터벅 걸어 간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물에 발을 담근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운다. 오간수교에서 ‘전태일다리’로도 불리 는 버들다리로 간다.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전태일은 상징과도 같은 존재지만, 스물둘 젊은 나이에 자기 몸에 불을 지른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다. 전태일 동상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자기 또래의 봉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살신성인의 길을 택 한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본다. 예수나 석가처럼 그 역시 인간에 대한 연민이 크지 않았 을까. 전태일이 자신의 삶과 맞바꾼 평화시장 앞에서 다시 부끄러워진다. 나래교를 거쳐 광장시장으로 이어지는 마전교와 수풀이 무성한 새벽다리를 지나 배오개다리로 간다. 그 옛날 동대문에서 청계천의 다리를 오가며 활동하던 전기수들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알까. 전기수는 강독사講讀師처럼 청중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주던 전문 직업인이다. 강독사는 강담사 혹은 강창사라고도 불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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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참고 자료 《사라진 직업의 역사》(이승원, 2011) 《전기수 이야기(2007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이승우 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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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4 > 18 > 094.

천변 풍경, 청계천 이야기

배오개다리에서 바라본 청계천

청계천에 나와 쉬는 서울 시민들

백 환씩 구문이 생기니… - 그저 불쌍허긴, 돈 없구 수단 없구 헌 우리지… 넨장헐 돈 한 가지 있담야 지금 세상에 정승 판서 부럴 거 있나? - 옳은 말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청계천 복원 사업을 떠올리며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에서 만날 수 있는 옛날 청계천에 살던 인간 군상의 삶을 상상해본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은 빨래터 풍경이다. 옛 도성 주민의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하 천이던 청계천. 물속에 반쯤 잠긴 빨래판 모양의 돌과 그 앞에 정겹게 놓인 징검다리를 보면 어디선가 동네 아낙네들의 수다와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청계천 변은 1930년대 조선인 중심 상업지역인 종로와 일본인 중심 상업지역인 본정통 사이에 위치한, 근대와 전근대가 섞인 지역이었다. 해 뜨고 가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빨래터 위 골목 모퉁이 집 문간에서 샘터 주인과 칠성 아범이 주고받는 대화를 떠올린다.

1936년 8~10월 《조광》에 연재된 박태원의 세태소설 《천변풍경》은 어느 해 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벌어진 일과 서민의 다양 한 생활상을 작가의 주 관적인 개입을 배제하고 영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카메라처럼 객관적으로 담아낸다. 세태소설이란 한 사회의 풍속과 관습을 작가의 가치판단 없이 객관적으로 묘사한 소설을 일컫는다. 그럼에도 1930년대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경성의 모습과 세태를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반영한 소설의 장면 장면을 떠올려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이 피부로 느끼는 살림 살이의 팍팍함은 변한 게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배오개다리 밑 징검다리에 앉아 가로등이 켜지는 청계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만인이 걱정, 근심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까.

- 요새 금값이 자꾸 올라간다는군그래. - 그저 돈 있는 사람은 을마든지 돈 벌어먹기루 마련된 세상이지. - 하여튼, 새면 둘러봐야 금점꾼이로군 그래. 그저 금광 거간… - 아, 그게 헐 만허니까 그렇지. 어떡하다 꿈이나 한번 잘 꾸어, 노다지나 하나 얻어걸리는 날엔, 최챙액이 부럽지 않으니까… - 허지만, 그것도 얼마간 밑천이래두 있어야 말이지. 그저 겅깽깽이루야 말이 되나? 뭐, 등기만 허는 데두 백여 환이 든다지 않어? - 그러기에 없는 사람은, 또 수단대루 거간이래두 해서, 그저 매매계약 하나만 되면

참고 자료 《천변풍경》(박태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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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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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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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8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동대문성곽공원 >

도보 시간 약 1시간 흥인지문 → 도보 10분 → 청계천 오간수교 → 도보 10분 → 동대문역사문화공원 → 도보 10분 → 청계천 오간수교 → 도보 10분 → 흥인지문 동대문역 버들다리 (전태일다리)

버들다리(전태일다리) → 도보 20분 → 청계천 배오개다리 마전교 >

배오개다리

찾아가는 길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로 나오면 흥인지문이다. 흥인지문에서 청계천 오간수교를 거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향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오간수교로 돌아와 나래교를 거쳐 광장시장으로 이어지는 마전교와 수풀이 우거진 새벽다리를 지나 배오개다리로 간다.

나래교

오간수교

새벽다리

>

이간수문

도성 연결길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동대문성곽공원을 따라 낙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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➏ ➐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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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8. 전기수와 천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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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흥인지문과 그 주변에 깃든 다채로운 이야기 임꺽정과 고종 그리고 건축가 김중업, 성곽길 걸으며 만나는 인물들 흥인지문에서 장충단으로 이어지는 길은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코스다. 흥인지문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한 일본인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흥인지문을 희미한 흑백사진으로 볼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청계천에 설치된 오간수문이 아니었다면 의적 임꺽정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공사에 동원된 백성의 고단함, 성문 밖 사람들의 애환과 설움, 흥인지문 성곽과 광희문, 한국 현대건축의 대가 김중업의 작품, 장충단 건립에 깃든 고종의 에피소드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만나보자.

글·사진 최갑수

흥인지문의 늠름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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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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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4 > 19 > 095.

임진왜란 승전의 상징 흥인지문이 살아남은 까닭은?

옛 흥인지문 모습

지금의 흥인지문 주변은 패션 중심지다. 고층 건물들이 우뚝하다

흥인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나갔다는 이유로 헐리지 않았다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는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사 라진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조선을 대표하는 성문인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지켜야 했다. 그가 조선의 성문을 지키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조선의 것이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찬란한 역사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나카이 기타로는 인맥을 총동원했다. 철거론자인 하세가와 요세미치 사령관과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 공사에게도 적극적으로 로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흥인지문을 보존 해야 할 근거를 대라고 닦달했다. ‘도대체 어떤 논리로 그들을 설득해야 할까.’ 나카이 기타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 던 어느 날 밤 그의 머리가 갑자기 환해졌다. ‘그래, 바로 이거야.’ 다음날 아침 그는 두 사람을 찾아가서 말했다. “숭례문은 그 옛날 조선 정벌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빠져나간 문입니다. 고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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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흥인지문을 통해 경성으로 진격했습니다. 일본 승전의 관문! 이것만으 로도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남아야 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그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남길 만하군요. 이 문을 없애면 조선 정벌의 이야 기가 사라지겠어요.” 흥인지문과 숭례문이 조선 땅에서 몸을 보전한 운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일제와 아무 런 인연이 없던 돈의문과 소의문, 혜화문 등은 속절없이 철거되고 만다. 일본의 장군의 지나갔다는 이유로 보존된 숭례문과 흥인지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고 자료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 정책〉(오타 히데하루[太田秀春], 2002년 서울대 석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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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4 > 19 > 096.

임꺽정이 탈출한 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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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줄기가 한양도성과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이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 복원된 이간수문

야심한 시각에 전옥서가 소란스러워졌다. 습격이었다. 횃불이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함성 이 들렸다. “임꺽정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 도둑. 요즘 한양 이곳저곳 을 들쑤시고 다니며 도적질을 일삼았다. 하지만 북촌의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주어 의적이라고 불렸다. 임꺽정은 옥에 갇힌 가족을 구출해 청계천 쪽으로 도망갔다. 관군이 급히 뒤쫓았지만, 그는 흥인지문 인근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주변을 이 잡듯 뒤졌으나 임꺽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임꺽정의 신출귀몰한 도망은 오간수문 때문에 가능했다. 오간수문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계천 물줄기가 한양도성과 만나는 지점에 만든 문이다. 홍예문윗부분만 아치 모양으로 만든 문 이 다섯 개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수문은 창살로 막혀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못한 다. 오간수문 남쪽에는 이간수문도 있다. 도성 밖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진 또 다른 지류 가 흘러 나가던 물길이다.

임꺽정은 오간수문의 창살을 꺾고 빠져나가 수문 뒤편 갖바치 마을에 숨었다. 그곳에서 며칠 머물다 배오개로 도망갔다. 민심을 얻은 도적이다 보니 배오개 사람들은 그를 신고하지 않았다. 오간수문과 주변 성벽은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1907~1908년 헐었다. 대신 그 자리에 다리를 놓았으나 그마저 청계천 복개 공사 때 사라졌다. 현재 오간수문은 2004년 재현한 것이다. 이간수문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오간수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참고 자료 〈중앙일보〉 2012년 4월 6일자,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김용관, 2012) 《서울성곽 걷기 여행》(녹색연합, 2010), 《순성의 즐거움》(김도형,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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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4 > 19 > 097.

“ 한양에 가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 오너라”

옛 광희문

“죽어가는 아이들을 집에서 치료해야지 왜 성 밖으로 몰아냅니까?”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가로젓던 스크랜턴은 결국 한 아이를 데려와 치료하고, 이화학당 에 다니게 했다. 조선 시대에는 도성 안에 무덤을 조성할 수 없었다. 성안에서 생을 마감한 이는 무조건 성을 나가야 했다. 이때 시신은 소의문서소문과 광희문수구문으로 나갈 수 있었다. 광희문을 시구문屍軀門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광희문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많다. 시구문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던 때가 있 었다. 지방 사람들이 한양에 간다고 하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 오라”는 말까지 했다 고 한다. 이는 세상 어떤 병이라도 시구문이 겪은 고난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미신에서 나온 것이다. 1907년에도 큰 사건이 있었다. 일제가 조선 군대를 강제로 해산했으나, 이에 불복한 조선군과 결국 시가전을 벌였다. 조선군의 패배로 전투가 막을 내리자 일제는 조선군 시신 120여 구를 광희문 밖에 늘어놓고 가족에게 찾아가라고 했는데, 며칠간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광명의 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우여곡절이 담긴 서글 픈 문이다.

광희문은 ‘광명의 문’이라는 뜻이다

1880년대 후반 한양도성 내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되어 하루에도 수백 명이 죽어 나갔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이화학당을 세운 선교사 스크랜턴Mary Scranton 이 어느 날 광희문으로 갔다가 수많은 아이들이 광희문 밖에 버려진 것을 보았다. 스크랜턴이 조선인 안내원에게 물었다. “아이들이 성문 밖에 버려진 까닭이 무엇입니까?” 안내원이 대답했다. “이 아이들은 콜레라에 감염되었습니다. 죽음이 가까워 성 밖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스크랜턴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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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졌다

참고 자료 〈중앙일보〉 2012년 4월 6일자, 《순성의 즐거움》(김도형,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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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4 > 19 > 098.

고종은 왜 장충단을 그곳에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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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은 지금 공원으로 꾸며졌다

장충단공원에 있는 장충단비

‘새로운 국가 체제로 외세에 대응해야 한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국가 체제 혁신을 단행했다. 경운궁을 국사 수뇌부의 행정처로 조성하고, 떨어진 국가의 자존을 회복하기 위해 원구단을 세웠다. 고종은 국내 전란에 희생당한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떠올랐다. 한 나라의 국모를 그토 록 잔인하게 살해하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고종은 당시 일본인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순사한 훈련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을 비롯한 장졸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짓기로 했다. 그렇다면 사당을 어디에 지어야 할까. 지도를 살펴보던 고종은 무릎을 쳤다. 바로 여기다! 고종이 장충단 건립 장소로 택한 곳은 정치적으로 절묘한 수였다. 남산 지도에서 현재 장충단공원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남산을 끼고 회현동이 나오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하던 왜장대倭將臺다. 1900년 당시에는 일본 공사관이 위치한 곳이며, 일본인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한양에서 일본의 입김이 가장 강한 곳이기도 했다. 고종은 일부러 이곳 을 골라 명성황후 시해 당시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장충단을 지은 것이다. 1900년 9월이라는 건립 시점도 큰 의미가 있다. 한 달 전인 8월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北京 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 8개 열강 군대에 함락되었고, 이로 인해 의화단운동 이 실패로 돌아갔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하고 동북아에서 막강 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시점에 지어진 장충단은 일본의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고종의 의도를 눈치 챈 일제는 1920년대 후반부터 장충단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만드는 등 의도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한다.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박문사博文寺’라는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박문사는 안중근 열사에게 저격된 한일병탄의 주역 이토 히로

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이다.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은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명명했다. 춘무는 이토 히로부미의 호다. 이토 히로부미의 23주기인 1932년 10월 26일에 열린 낙성 식에는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외에 친일 부역자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이 대거 참석해 이토의 혼령에 머리를 숙였다. 이토를 포함해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 한일병탄 공로자를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 기도 했다. ‘장충奬忠’의 의미는 완전히 지워졌다. 광복 후 박문사는 철거되었고, 한국전쟁 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 건물이 파괴되면서 장충단비만 남았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장충단 터를 알리는 표석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1967년 가수 배호가 부른 ‘안개 낀 장충단공원’ 노랫말에도 나오듯이 장충단이라고 새겨 진 비석은 일제가 뽑아버렸지만, 광복 이후 찾아서 영빈관현 신라호텔 안에 세웠고, 1969년 지금의 자리인 수표교 서쪽으로 옮겼다.

참고 자료 《개벽》 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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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4 > 19 > 099.

한국의 르코르뷔지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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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자궁을 모티프로 한 구 서산부인과 건물

구 서산부인과 건물은 한국의 르 코르뷔지에로 불리는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이다

1965년 건축가 김중업이 산부인과 건물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산부인과 건물이라… 이 건물을 어떻게 설계해야 산부인과처럼 보일까?’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드디어 펜을 들고 설계에 들어간다. 고민 끝에 탄생한 설계는 파격 그 자체였다. 1922년 평양에서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중업은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1939년 요코하마橫濱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 드문 파리 유학파 출신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 교수를 만나 고전 건축이 기저에 깔린 건축관을 형성한다. 1941년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중업은 광복 이후 월남해 서울로 터전을 옮긴다. 그리고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에서 열린 ‘1회 국제예술가회의’에서 세계적인 건축 명장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만난다. 김중업은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그의 건축 연구소에 들어가 1955년까지 3년간 사사한다. 1956년 2월 귀국한 그는 한국의 대표 건축가로 성장해간다. 입지를 탄탄하게 굳혀가던 중 서울의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 서병준에게서 건물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의도가 무엇입니까?” 설계도를 본 서병준이 물었다. “산부인과 건물이라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자궁을 모티프로 설계했습니다. 건물의 램프 부분은 남성의 성기 형상이고, 각 실은 자궁 형상입니다.”

김중업의 설명에 서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건물은 시공에 들어가면서 김중업의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당시 기술로는 실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설계도에 따르면 이 건물은 노출 콘크리트로 되어 있으나, 국내에 거푸집을 만들 합판 이 존재하지 않아 목재를 이어서 벽체를 만들어야 했다. 지금도 이 건물을 자세히 보면 목재의 각질이 남아 있다고 한다. 광희문 사거리에 있는 서산부인과 건물은 이후 용도가 바뀌었고, 현재 디자인 사무소 가 입주했다. 지금 봐도 유려한 외형은 50년 전에 지은 건물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세련되었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참고 자료 〈경향신문〉 2011년 6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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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구 서산부인과 건물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건축디자인이다


4>

테마 19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청계천

동대문역

흥인지문

오간수문 터 >

도보 시간 약 40분 흥인지문 → 도보 5분 → 오간수문 터 → 도보 10분 → 구 서산부인과 → 도보 3분 → 광희문 → 도보 20분 → 장충단 이간수문 >

신당동

찾아가는 길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7번 출구로 나온다. 흥인지문에서 오간수문 터까지는 청계천으로 내려가

구 서산부인과

3~5분 걸으면 닿을 수 있다. 오간수문 터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방면으로 걸어 광희문 사거리에 이르면 구 서산부인과와 광희문이 있다. 광희문에서 장충단까지는 광희동 사거리를 지나 동대입구역 방면으로 가면 된다.

광희문

>

도성 연결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 복원된 한양도성을 이간수문과 함께 볼 수 있다. 광희문에 성곽 일부가 있다.

장충단 옥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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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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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19. 흥인지문 밖 조선 시대 서민의 생활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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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시장에서 만나는 서민의 삶과 애환 “ 골라, 골라…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광장시장에서 청계천을 따라 동묘공원을 지나 서울풍물시장까지 걷는다. 이 길은 언제나 활기차다. 떠들썩한 시장 상인들의 외침을 듣다 보면 걸음에도 힘이 들어간다. 광장시장에서 빈대떡이며 마약김밥을 맛보고, 동묘공원에서는 멋진 옷을 단돈 1000원에 산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광장시장과 여자 농구 대표팀의 살가운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새 미소가 일고, 동묘에 중국 장군 관우의 위패가 모셔진 까닭을 알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글·사진 최갑수

서울풍물시장을 찾은 여행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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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4 > 20 > 100.

광장시장 갑동이, 을동이를 아시나요?

광장시장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빈대떡이다

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던 날, 광장시장 상인들도 선수들과 함께 울었다. 광장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상설 시장이다. 1905년 광장주식회사가 창립되면서 첫발을 떼었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 장악당한 남대문시장 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며 동대문 포목상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시장이다. 광장시장을 이야기하면서 ‘정치 깡패’ 이정재를 빼놓을 수 없다. 1950년대 광장시장 상점 사장이던 이정재는 상가연합회를 조직하고, 폭력 조직을 동원해 광장시장을 통치 하다시피 했다. 권력을 등에 업은 그는 ‘동대문시장 황제’로 군림했으며, 광장시장을 현대식으로 정비했다. 그때 조성한 시장의 외형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1960~1970년대는 광장시장의 전성기다. ‘나일론 시대’를 맞으며 광장시장은 직물과 의류 전문 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손바닥만 한 점포만 있어도 부자 대접을 받던 시절 이다. 극장을 소유한 상인이 있는가 하면, 라이프그룹도 광장시장에서 탄생했다. 전국 의 중소 의류 상인들이 전세 버스를 타고 와서 새벽을 낮같이 밝힌 것도 1970년대다. 당시에 상가 전속 DJ도 있었다고 한다. 광장시장에 다니다 보면 생소한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건, 차, 여, 정, 인, 교, 백, 태, 욱, 로광’이다. 언제부터 쓰였고 어디서 유래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광장시장 상인 사이에서는 아라비아숫자 1~10을 의미한다. ‘갑동이, 을동이, 연아치, 쎄봉’은 구매 유형이나 손님 유형을 뜻하는 은어다. ‘갑동이’는 회갑을, ‘을동이’는 결혼식을 뜻한다. ‘연아치’는 좋은 원단이나 좋은 손님, ‘쎄봉’은 나쁜 원단이나 나쁜 손님을 의미한다. 지금 광장시장은 1층 통로에 펼쳐진 먹거리 가게와 좌판으로 유명하다. 특히 빈대떡과 김밥이 입소문 났다. 좌판에서 어른 두 명이 빈대떡만 한 완자 석 장한 장에 2000원이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횟집도 꽤 모여 있는데, 2인 모둠회가 2만 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30~40년 전 서울로 돌아간 듯한 광장시장, 보는 재미와 먹는 재미가 가득한 곳이다.

광장시장에서 맛보는 칼국수도 별미다

1960년대 말 광장시장 상인들과 여자 농구 대표팀이 광장시장의 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간단하다. 광장주식회사의 김철환 전무가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만남은 어색했다. 상인들의 눈에는 성인 남자보다 큰 여자 선수들이 낯설었다. 박신자·주희봉 선수는 175cm, 신항대 선수는 174cm였다. “여자가 어떻게 허벅지랑 장딴지를 훤히 내놓고 뛰어다니느냐”며 혀를 끌끌 차는 상인 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기가 익고 술잔이 돌면서 상인과 선수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상인들은 대표팀의 후원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양품점들은 양장을 맞춰주고, 한복집들은 한복 을 지어주고, 식품점들은 영양식을 챙겨줬다. 어떤 상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구공을 잡은 선수들이 딸처럼 보인다고 했다. 대표팀이 1967년 체코 세계여자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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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얼마나 맛있으면 마약김밥이라고 했을까

참고 자료 《광장시장 이야기》(김종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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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4 > 20 > 101.

4 > 20 > 102.

대한민국 베이킹의 메카 방산시장

한국에 들어온 중국 군신 관우

각종 포장지를 파는 가게가 늘어선 방산시장

카페 관련 용품도 판매한다

베이킹 마니아들에게 방산시장은 천국이다. 밀가루를 비 롯해 설탕, 버터, 다양한 빵틀 등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빵을 배우기 시작한 초 보부터 베테랑 제빵사까지 빵을 만드는 모든이들이 찾는 곳 이 바로 방산시장이다. 견과류를 비롯해 초콜릿, 버터 등 다양한 유제품, 계량 저울과 거품기 같은 기구까지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곳이 바로 방산시장이다.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마들렌을 만드는 빵틀도 방 산시장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다. 마들렌은 밀가루와 설 탕, 버터 등을 반죽해서 조개껍데기 모양 틀에 넣고 오븐 에 굽는 프랑스식 디저트다. 지하철 2·5호선 을지로4가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와 쭉 걷다 보면 방산시장 간판이 보인다. 방산시장은 블로거 사 이에서 ‘베이킹의 메카’로 통한다. 원래는 각종 비닐과 포장 부자재, 용기와 종이 등을 취급했지만, 5~6년 전 DIY 붐이 일면서 베이킹 특화 시장으로 진화했다. 베이킹 재료뿐만 아 니라 원래 취급하던 포장지까지 있으니, 직접 베이킹을 하 는 사람들에게 이 시장은 올인원all-in-one이다.

《삼국지》의 명장 관우를 모신 동묘

임진왜란 초기,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고 있었다. 한양과 평양이 속속 함락되었고, 선조는 압록강 변 의주까지 몽진했다.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해야 할 형편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하지만 명에서 군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의주 땅 천막에서 노심초사하던 선조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아직 조선을 버리지 않았구나.” 영접사가 의주 국경까지 명나라 군대를 마중하러 나갔다. 이때 총대장으로 군대를 끌고 온 이여송 장군이 영접사에게 물었다. “귀국의 군신은 누구를 모시느냐?” 영접사는 대답을 망설였다. 문만 숭상하고 무를 경시한 조선은 군신을 모신 일이 없었 기 때문이다. 주저하는 영접사를 본 이여송이 재촉했다. 이때 명나라에 다녀온 사절 가 운데 한 사람이 관운장을 모신다고 답해버렸다. 중국인이 관운장을 모시니, 이렇게 대답하면 이여송 마음에 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답을 들은 영접사 는 당황했다. “이여송이 사당에 참배하겠다고 하면 그야말로 낭패다.” 영접사는 급히 조정에 연락해 관운장의 사당을 설치하라 했고, 임진왜란 전후로 동묘 가 세워지고 관왕의 위패가 모셔졌다. 이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명에 감사하는 마음이 명나라 군대가 숭배하는 관우의 사당을 건립하는 행위로 표현된 것은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는 평양을 탈환함으로써 조선을 망국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고, 전쟁 국면을 일거에 바꿨다.

방산시장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베이킹 재료들

참고 자료 〈동아일보〉 2008년 11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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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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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4 > 20 > 103.

서울의 보물 창고에서 옛 추억을 만나다 서울풍물시장

중국식으로 꾸며진 동묘

동묘공원 앞은 구제 의류를 파는 좌판으로 북적인다

조선이 명에 감사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죽하면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 再造之恩 ’라고 표현했겠는가. 조선 말기까지 동묘는 조선과 중국 우호의 상징이었다. 중국 사신들 역시 조선에 올 때마다 이곳을 참배하며 시문을 남겼다. 그러나 근대 이후 한국과 중국이 역사의 격랑 에 휩쓸리면서 이곳은 관심에서 벗어났고, 냉전 시대를 거치는 동안 돌보는 이 없이 황폐해졌다. 지금은 동묘보다 그 주변에 형성된 벼룩시장을 찾는 이들이 많다. 동묘 시장에서 파는 구제 의류는 대부분 수출을 목적으로 무역 회사 창고에 쌓아두거나, 고물상에서 판 것 중에 가져온 입을 만한 옷이다. 쓸 만한 헌 옷이라 저렴한 값에 판매 된다. 벼룩시장에서는 티셔츠 한 장에 1000원은 기본, 가죽이나 무스탕도 3만 원이 넘지 않아 잘 고르면 1만 원짜리 한 장으로 여러 벌도 살 수 있다.

참고 자료 〈매일경제〉 2008년 6월 5일자 서울풍물시장에서는 손때 묻은 다양한 물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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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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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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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추억을 더듬기 좋은 서울풍물시장

옛날 우표도 구할 수 있다

LP판, 꼬질꼬질 헌 옷, 고가구와 골동품으로 가득 찬 시장. 좁디좁은 골목을 거닐다 보면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1970년대만 해도 황학동 벼룩시장은 보물 창고였다. 새 책 한 권 값으로 중고 책 서너 권을 살 수 있었다. 시장을 거닐다 보면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하는 부모님들을 쉽게 만난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엿들어본다. “아빠, 벼룩시장이 뭐야?” 아이가 물었다. “응, 여기서 파는 물건들이 누군가 사용하던 중고품이라 벼룩이 나온다고 해서 벼룩 시장이라고 부른단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다는 듯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세월이 흐르며 벼룩 시장도 참 많이 변했다. 흥인지문 뒤편 청계천 변에 펼쳐진 황학동 벼룩시장은 서울의 명물이었다. ‘탱크만 빼고 완전무장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2004 년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청계 고가도로가 헐리고 청계천 주변이 정리되면서 황학동 벼룩시장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밀려났다. 2006년 ‘디자인 서울’ 사업으로 동대문디자 인플라자 설립이 추진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의 자리에 정착했다. 이름도 서울 풍물시장으로 바뀌었다.

초입에 들어서면 경쟁하듯 “무조건 1000원”이라고 외치며 손님을 이끄는 주인은 여전 하다. 1000원짜리를 주고받으며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도 옛날 그대로다. 하지만 취급 하는 품목은 조금 달라졌다. 예전에는 골동품과 잡동사니를 주로 팔았는데, 요즘에는 골동품보다는 인근 동대문에 사는 서민을 대상으로 옷과 신발, 가방 등 구제 물건을 판다고 한다. 어느 LP판을 파는 중고가게 앞. “아빠, 이게 뭐야?” LP판을 고르는 아빠를 바라보며 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묻는다. “응, 이걸로 음악을 듣는단다.” CD와 MP3로 음악을 듣는 아이는 LP판이 마냥 신기한 모양이다. 서울풍물시장은 아빠의 ‘그때 그 시절’을 들려주며 한나절 아이와 함께 시간 여행을 하기 좋은 곳이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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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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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0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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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시간 약 45분 광장시장 → 도보 3분 → 방산시장 → 도보 15분 → 흥인지문 → 도보 15분 → 동묘공원 → 도보 10분 → 서울풍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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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 8번 출구와 지하철 2·5호선 을지로4가역 4번 출구로 나오면 광장시장이다. 광장시장에서 방산시장까지는 5분 거리. 청계천만 건너면 된다. 방산시장에서 흥인지문까지는 한양도성 낙산 - 흥인지문 구간

동대문종합시장 방면으로 걸어가면 된다. 흥인지문에서 동묘시장까지는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7번 출구 앞 삼거리에서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 방면으로 걸어간다. 동묘공원에서 서울풍물시장까지는 신설동 방면으로 걸어간다.

동묘

종로5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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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연결길

광장시장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면 흥인지문과 만난다.

➋ ➊ ➑

서울풍물시장 흥인지문

방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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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낙산・흥인지문 구간(혜화문 - 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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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20. 장터와 사람 이야기


서울 한양도성 개관과 역사적 의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나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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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의미

도성의 축조와 위상

성城은 일정한 영역 안의 생활인들이 외적의 침입이나 자연재해에서 평안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만든 인위적인 시설물을 말한다. 성은 성곽이라고도 하며, 그 자체로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나라 국國이라는 한자 가 인민口이 일정한 울타리口 안에서 토지一를 경작하며 무기戈를 가지고 그 생산물과 사회 안정을 지키는 뜻으로 풀이해볼 때, 바로 그 울타리가 성외성, 국경이다. 도성은 한 나라의 도읍지를 에워싼 울타리로, 시대와 위치에 따라 국가의 상징인 왕권 등 절대 권력을 표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가의 중심이자 왕권의 상징인 궁성과 도성 이 이중으로 축조되었다. 같은 성격으로 각 고을에서는 평화로운 생업과 생활을 위해 평지 읍성을 쌓았으며, 외적이 침입했을 때 지형의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기 위해 산성 을 쌓고 샘을 찾고 식량을 비축하는 등 시설물을 축조했다. 이렇게 도성은 대내외적 으로 나라와 정권을 상징하고, 지배 집단이 피지배 집단을 통치하는 상징이 되기도 하며, 외적을 방어하는 국력을 표현하고, 완강하고 횡포한 내외의 적대 세력을 물리 치는 구실을 한다. 조선 태조는 ‘포악함을 막아 백성을 보호한다’고 한양도성 축성 목적과 의미를 제시했 다. 대외적으로는 외적의 공격을 막는 관방 기능을 하고 국토를 지키는 시설물로서 나라의 안정과 주권을 수호하는 상징으로 삼았으며,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위엄과 국가 의 권위를 보여주어 통치 체제의 안정을 꾀했다. 한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문무왕에게 당나라 세력을 축출 한 뒤 성을 쌓는 것에 대한 의견을 전했다. “나라의 정교政敎가 바르면 비록 풀만 난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하여도 인민들이 감히 이것을 넘지 못하기에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실로 밝지 못하면 장성長城이 있다 하여 도 재해를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성곽이 외적 방어는 물론 내란이나 기층민의 반란에 대비하여 왕권을 상징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수단도 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나라를 지키는 진정한 힘은 정교 를 밝게 하여 인민들이 평안하고 풍요롭게 산다면 그 자체가 국력이고 방어력이지, 인민들의 노역을 강요하여 시설물을 축조한다고 국가와 왕권이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런 도성 체제와 정치권력의 관계는 오늘날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도 변함 없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의 한양 천도 직후 태조 연간에 농한기를 이용해 전국의 민정을 동원하여 축성했고, 세종 때 이르러 토성 부분을 모두 석성으로 축조했으며, 성문과 문루를 완성하여 완전한 도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존하는 성 돌의 표면에는 축성을 담당한 관원의 이름과 직책,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등 민정이 동원 된 군현의 이름이 새겨져 공사 실명제에 따른 축성의 실상을 보여준다. 이런 전통은 조선 후기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삼군문의 군인들에 의해 성 돌의 규격화를 꾀하여 수축·개축할 때도 잘 계승되었다. 한양도성이 축조되면서 한양은 왕도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었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 과 사소문을 내고 사통팔달하는 도로망을 형성하여 전국으로 통하게 했으며, 그 안에 명당수가 흐르고 좌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의 산세가 에워싼 명당에 5대 궁궐과 종묘, 사직단, 원구단 등 나라를 상징하는 시설물을 조성했다. 상징 시설물 외에 관아, 학교, 주거, 시전 등 도성 안팎의 시설과 거주하는 인민들을 감싸 안은 한양도성은 유교적 정치 이념인 애민과 민본이 정치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성 의 의미는 수도 방위에서 나아가 왕을 비롯한 지배계급을 넘어 전 인민의 생명과 재산, 자연을 보호하는 것으로 그 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문, 문루 등 대규모 시설로 도성이 보여주는 웅장함은 일반 백성에게 절대 권력의 전제 왕권을 상징하는 의미가 컸던 듯하다. 도성을 축조한 본연의 목적이 자수自守 : 스스로 방어 구실을 함에 있었던 것인데, 조선 시대 한양도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옥쇄를 전제로 한 방어 전을 치르는 역사를 보여주지 못했다. 한편 한양도성은 풍수지리에 대한 인식을 바탕 으로 자리 잡았다. 도성 안 중앙 북쪽에 궁궐이 자리하고, 좌묘우사左廟右社 : 동쪽에 종묘, 서쪽에 사직을 배치 와 전조후시前朝後市 : 궁궐 앞에 관아, 뒤에 장시를 배치. 한양도성은 배산임수의 지형에 따라 장시를 종로 거리에 배치로 축조했다. 이런 풍수지리는 오늘날의 인문 지리와 같은 성격으로, 바람 잘 통하고 햇볕 잘 드는 기후와 지형 조건을 이용한 삶의 지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도성은 문안과 문밖을 구분 짓기도 했다. 신분에 따라 도성 안팎의 사람을 구분했으며, 행정구역상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한양의 범위로 포함했다. 도성 안은 양반 귀족의 정치·행정 중심지로, 성 밖은 이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조달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즉 성 밖 농경지는 남새밭으로 채소를 조달하고, 마포와 서강, 용산 등은 바다에서 올라온 생선과 농작물 등을 조달하는 곳이 되었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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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개관과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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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축조 연혁과 기능

세계 문화유산 등재 추진

고려 말 전쟁 경험이 많은 태조 이성계는 한양도성을 쌓으면서 일시에 대규모 성곽을 축조했다. 토성전체의 약 7할 위주로 쌓고, 지형이 험하거나 지반이 약하거나 경사가 심하여 붕괴가 염려되는 곳에는 석성전체의 약 3할을 쌓았다. 그리고 세종 때 도성을 수축하면서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여 전체가 석성이 되었다. 이어 숙종·영조·순조 연간에 많은 보수공사와 개축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산성과 평지성도성·읍성이 혼합된 방어 체제로 구성된 특징을 보인다.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때는 평지에서 농경을 비롯한 생업에 종사하고, 전쟁 이나 내란이 일어났거나 도적의 무리가 횡행할 때는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 체제를 구축했다. 평지성과 산성 체제는 도성을 보호하고, 왕을 비롯한 지배 집단의 피란, 농성 고수를 위한 군사적인 목적에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징은 지리적인 환경을 잘 활용한 전통으로, 고구려·백제·신라의 도성제 전통을 이어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계승되었다. 18.627km에 이르는 한양도성은 궁궐을 에워싼 내사산백악·낙산·남산(목멱산)·인왕산을 잇는 형태 로, 산지와 평지의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주산인 백악의 산줄기는 동쪽으 로 좌청룡을 이루는 응봉과 낙산을 솟구쳐 흥인지문 동대문에 이르고, 서쪽으로 우백호 인왕산을 거쳐 돈의문과 숭례문남대문의 낮은 구릉을 지나 남산목멱산을 솟구치며 흥인지 문 쪽으로 이어졌다. 백악을 잉태한 산줄기와 백악에서 뻗어나간 산세가 서울의 지형 지세이자 한양도성의 지형지세다. 그리고 인왕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 하나는 부암동 무릉계 위에서 탕춘대성서성으로 이어져 홍지문한북문·향로봉·비봉을 지나 문수봉 에서 북한산성으로 이어진다.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으로 이어진 도성 방어 체제 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의 지향점인 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보장하며, 세계 어느 성곽과도 비교되지 않는 가치를 보여준다. 한양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은 성문 이름에 유교 덕목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오행의 방향 에 따라 붙여서 왕조의 정치 이념을 만백성에게 알렸다. 특히 인의로 대비된 흥인지문 과 돈의문에서 보듯이 ‘인’은 사랑하는 마음자애으로 부드러움온화을 나타내는 반면, 의는 옳지 않음을 물리치는 절도결단 있고 올바른 행동제재으로 표현되는 강함으로 나타 난다. 이렇게 ‘인의’로 조화를 이룬 가치관이 실행되는 사회를 기원한 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다.

서울 한양도성은 ‘Seoul City Wall’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잠재 등록되었고, 2015년까지 정식 등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Seoul City Wall은 한양도성의 요새 기능으로 표현된 ‘Seoul Fortress’의 개념을 넘어, 600년 역사 도시의 성곽이라는 개념을 표현한 것이다. 또 근대화 100년 역사를 포함하여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간직한 문화 경관을 총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제 한양도성은 세계 문화유산 등재 기준인 도시 유산으로서 진정성과 완전성을 입증 해야 한다. 따라서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성 축조의 경험과 운용을 배경으로 다음과 같이 세계 인류 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부각해야 한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첫째, 한 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에 이르는 삼중 성곽 방어 체제의 고유성과 특수성. 둘째, 조선 후기 개성-강화-수원-광주의 4유수 체제에 따른 수도 방어 체제. 셋째, 좌 청룡·우백호·남주작·북현무의 4신사神砂와 명당수로 구성된 풍수지리 체제, 동·서·남·북·중앙의 5방 체제에 따른 우주 질서를 반영하여 인의예지신 오상五常의 정치 이념을 표방한 사대문과 사소문 체제. 멸실된 성곽 유적의 보존과 복원 문제, 1975년부터 현재까지 복원 공사에 따른 진정성 과 완전성 문제, 유산 구역과 경관지구 등도 다시 한 번 검토해야 한다. 한양도성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 과정은 우리나라 역사 문화의 유구함을 세계에 알리고, 외세에 의해 왜곡된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작업이다. 또 아직 남아 있는 터전 위에 옛 모습을 다시 봄으로써 수도 서울의 역사와 문화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시민의 자긍심 을 북돋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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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개관과 역사적 의미



서울 스토리텔링 관광명소화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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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2000년 역사를 간직한 문화도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온 삶의 공간입니다. ‘서울 발견’은 이 소중한 도시의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고 이어가기 위한 서울시의 새로운 스토리텔링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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