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야기를 따라 한양 도성을 걷다 인왕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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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 구간 >

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테마 09.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의 문학·예술 이야기

창의문

돈의문 터 - 창의문

돈의문 터

돈의문서대문에서 창의문자하문으로 이어지는 인왕 구간은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경복궁과 경희궁, 덕수궁을 품고 있다. 덕분에 이 구간엔 역사에 기록된 궁궐 이야기는 물론, 조선 왕조의 마지막 이야기,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에 담긴 예술가의 이야기 등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신궁을 지으며 남산에서 인왕산으로 옮겨온 국사당, 한양도성 경계 설정을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 등이 논쟁을 벌인 일화가 전해지는 선바위, 의관・음악가・화가 등 전문직 중인이 살던 부촌으로 시인 이상과 윤동주 등 근현대 예술가들의 일화가 남아 있는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화폭에 담긴 수성동계곡과 함께 꼭꼭 숨겨둔 서울의 마지막 비밀 정원 백사실계곡까지 이 구간에 남아 있는 역사 이야기는 지금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다.

창의문 돈의문 터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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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경희궁에서 덕수궁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덕수궁까지 이어지는 이 구간은 한양도성 내 5대 궁궐 중 두 곳을 돌아볼 수 있는 코스로,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때 걸어야 한다. 영조가 오래 머무른 경희궁을 돌아보고, 백범 김구 선생이 살다가 암살된 경교장과 한양도성 서쪽 정문인 돈의문 터를 지나 경향신문사 건물 앞 정동길로 접어든다. 노란 은행잎이 고운 길을 걸어 서울시립미술관에 이르면 퇴계 이황 선생의 집터가 여행자를 반긴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만난 덕수궁에도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단풍 빛이 예사롭지 않다. 이 길에 서린 역사 때문인지 단풍잎에도 가슴이 먹먹하다.

글·사진 장태동

희궁 경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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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 관람료는 없다. 관람 시간 오전 9시~오후 9시(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어른(25~64세) 1000원. 유료 관람 대상자 이외 관람객은 학생증, 청소년증,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등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돈의문 터에 세워진 시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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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2 > 05 > 020.

전철 때문에 무너진 돈의문

정동 경향신문사 앞 고갯마루에 돈의문이 있었다

돈의문 터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서쪽 정문으로, 흔히 서대문이라고 부른다. 1422년세종 4 완공됐고, 1915년 일제가 철거하여 205원쌀 17가마에 땔감용으로 팔았다. 원래 한양도성의 서쪽 문은 1396년태조 5 사직단 부근에 세워졌으나 1413년 폐쇄되어 사용 되지 않았고, 태종 때 ‘서전문’을 새로 지어 도성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1422년 도성을 고치면서 문의 위치를 남쪽으로 옮기고 돈의문이라 했다. 문을 새로 지었다고 해서 ‘새문’ ‘신문’으로 부르기도 했다. 경희궁에 머무른 영조는 궁과 가까운 돈의문으로 사람과 말이 다니면서 소음이 심해지자, 평소에는 문을 잠그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열도록 했다. 1920년대 풍경에서 돈의문 전차를 빼놓을 수 없다. 1899년부터 운행된 전차는 돈의문 과 청량리를 오갔다. 전차 종점이 있던 돈의문 인근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사람들 이 많이 탈 때는 밖으로 밀려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유명한 음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1920년대 후반 돈의문 밖 어디쯤에 유명한 색동빙수를 파는 집이 있었다. 팥빙수나 과일빙수의 원조 격인 색동 빙수는 얼음 위에 노란 물, 파란 물, 빨간 물 등을 친 것으로, 색소를 탄 설탕물이 아닐 까 싶다. 당시 빙수 집은 싸리 울타리를 둘렀고, 발을 쳐서 시원한 그늘도 만들었다. 일본 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돈이 없던 우리나라 상인들은 초가집에서 빙수를 팔기도 했다. 하지만 빙수 한 그릇 앞에 놓고 “아, 시원하다”를 연발하며 더위를 쫓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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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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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2 > 05 > 021.

백범 김구가 암살된 경교장 경교장 내부(2층 집무실)

경교장 내부(1층 선전부 사무실)

경교장 내부(2층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숙소)

한양도성의 서쪽 문이던 돈의문 터 부근에 경교장이 있다

돈의문 터를 알리는 시설물 뒤 강북삼성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가 기거하던 경교장이 나온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진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일본 천왕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그해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의거가 도처에서 벌어지자 일본의 탄압이 거세진다. 이에 1932년 상하이 임시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옮기고, 광복 이후 백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경교장은 김구 선생이 1945년 11월부터 머무른 곳이다. 최창학이 1938년에 지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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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집은 죽첨장이라고 불렀는데, 백범이 살면서 경교장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경교장은 이 건물 부근 ‘경교’라는 다리에서 딴 이름이다. 건물 1층에는 응접실과 식당이 있었고, 2층은 복도 양옆으로 일본식 다다미방을 만들었다. 김구 선생은 광복 후 3년 7개월 동안 이곳에 살다가 1949년 6월 26일 암살되었다. 백범 선생 서거 이후 이 건물은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 시설로 쓰였다. 휴전한 뒤에는 베트남 대사관저로 사용했고, 1967년 고려 병원에서 인수했다. 건물을 수리했지만 외관과 지붕은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경교장은 사적 46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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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2 > 05 > 022.

수난의 흥화문, 경희궁 경희궁 숭정전

경희궁 숭정문

경희궁 흥화문. 한양도성 궁궐 중 돈의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경희궁이 있었다

경희궁 자정전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에 짓기 시작해서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했다경희궁 완공 연도를 정확하게 기록한 자료가 없다. 1620년 이후에도 부속 건물을 이따금 짓는다. 보통 경희궁 완공 연도는 1620년 혹은 1623년으로 알려졌다 . 처음에는 영조 36 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고쳤다. 도성의 서쪽에 있어 경덕궁이라고 불렀는데, 1760년 ‘서궐’이라고도 했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의 원래 자리는 현재 구세군회관 빌딩 부근이었다. 구세군회관 건물 모퉁이에 흥화문의 원래 자리를 알리는 ‘흥화문 터’ 표석이 있다. 표석에서 서울 역사박물관 쪽을 바라보면 금천교가 보인다. 금천교는 홍예교로 아치가 두 개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를 지으면서 금천교가 땅에 묻혔는데 서울역사박물관 건립 당시 금천교의 옛 석조물이 발견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2001년 금천교를 복원했다. 경희궁의 원래 자리 배치에 따르면 흥화문을 지나 금천교가 있었고 금천교를 건너면 경현당, 양덕당, 지효합 등이 나타났다. 이 밖에 어조당, 용비루, 장락전, 봉상루, 상휘당, 융복전, 회상전, 집경당, 흥정당, 덕유당, 자정전, 숭정전, 태령전, 위선당, 숭정문, 흥원문, 숭의문, 개양문, 무덕문 등 건물이 많았다. 현재는 숭정문과 숭정전, 자정전 등이 복원됐다. 자정전은 경희궁의 편전으로 숙종이 승하했을 때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이다. 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열거나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벌어진 곳이다. 경종, 정조, 헌종 등이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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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에서 즉위했다. 흥화문 은 옛 자리를 잃어버리고 현재의 자리에 복 원되었다. 옛 흥화문 현판은 이신李伸이 썼는데, 안평대군의 글씨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명필 안평대군의 글씨가 밤에도 환하게 빛난다고 해서 그 앞을 야조현夜照峴이라고 했다는 전설이 있다. 하지만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은 1453년에 죽었으니 160여 년 뒤에 세워진 흥화문의 현판을 그가 썼을 리 없다. 흥화문은 역사의 풍파를 많이 겪었다. 흥화문 앞 안내판 내용에 따르면 흥화문은 1620년광해군 12 무렵에 건립되었다. 이후 흥화문은 일제강점기1915년 경성중학교 건립 당시 원래 위치에서 궁궐 남쪽으로 옮겼다.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박문사의 정문으로 쓰기 시작했고, 해방 이후 박문사 터에 지어진 영빈관의 정문으로 쓰이다가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기도 했다. 경희궁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보려면 궁궐 담장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자. 궐내 전각을 보고 숭정문으로 나오면서 좌회전, 계단을 올라서 궁궐 옆길로 걷는다. 기와 지붕이 겹쳐진 풍경과 곱게 물든 단풍이 어우러진 경희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 도심에서 즐기는 여유롭고 한적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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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2 > 05 > 023.

2 > 05 > 024.

젊은 시절 퇴계가 살던 곳, 서울시립미술관 앞 작은 숲

단풍이 고운 덕수궁

서울시립미술관 건물 앞 정원이 퇴계 이황의 집터다

퇴계 이황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

러시아 대사관 부근으로 원래 도성길이 났는데 지금은 없다. 그 도성길 안에 퇴계 이황이 살았다. 서울시립미술관 앞 정원이 젊은 시절 퇴계 이황이 살던 집터다. 정동교회 앞 분수대 로터리에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들어간다. 서울시립미술관 건물은 등록문화재 237호로, 옛날에는 대법원 청사였다. 1928년에 지어 경성재판소로 사용한 이 건물은 조선 말엽까지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곳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 고딕식 건물이다. 서울시가 인수하여 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려고 개조 공사를 하던 중 약해진 부분이 드러나, 전면의 벽판만 보존하고 나머지는 새로 지었다. 서울시립미술관 앞 정원에 퇴계 이황 선생이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보인다. 1501년 경상북도 안동 도산면에서 태어난 퇴계는 20대 후반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고, 30대 중반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면서 관에 입문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고향에 내려가 삼년상을 치른 기간을 제외하면 젊은 시절 10년도 안 되는 동안 한양에서 살았다. 표석에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이 젊은 시절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할 때 살던 집터’라고 적혀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앞 정동교회 뒤편에 있는 이화여고 일부와 러시아 대사관, 배재고등학교 자리는 수렛골이었다. 관청의 수레들이 모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차동이라고도 한 이곳은 숙박 시설이 많았다. 돈의문 터 부근에서 덕수궁으로 이어지는 정동길은 구한말에 ‘서양인촌’으로 불렸다. 서양인들이 이곳에 산 것은 외국인 거류지로 지정되고, 각국 영사관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영사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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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덕수궁 대한문

한양도성 5대 궁궐 중 하나인 덕수궁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환도했는데 궁궐이 다 소실되어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집을 행궁으로 정하고 머물렀다. 당시 이름은 경운궁으로, 행궁 이외에 궐내 각사로 주변의 몇몇 집을 더 사용하기도 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명례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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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덕수궁 정문대한문 은 고종 때 인화문을 폐쇄하고 생겨난 것이다.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 이었다. 안 安자가 계집녀女에 갓을 씌운 글자고, 당시 대궐에 양장을 입고 모자를 쓴 배정자라는 여인이 자주 드나들어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이 많아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쳤다는 설이 전해진다.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정관헌

덕수궁 중화전은 1902년 2층 건물로 건립되었다. 1904년 화재가 나서 현재 모습으로 다시 지었다. 정관헌은 궁궐 후원에 세운 휴식처다.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건물로, 1900년경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 Sabatin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이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과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단풍이 아름다운 연못과 그 옆의 숲, 담장 너머 시청 앞 광장 일부가 궁궐 안 관청들이 있던 궐내 각사 터다. 국가의 군사권을 관장하던 원수부와 황실의 업무를 보던 궁내부 가 있었다. 이 밖에도 시강원, 태의원, 전화국 등 여러 관청이 있었으나 태평로를 만들 때 일부 전각이 사라졌고, 나머지 전각은 1933년 덕수궁 공원화 과정에서 철거됐다.

덕수궁 석조전 일원 은행나무 단풍

정원도 만들었다. 덕수궁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역사를 품고 있다. 을사년과 정미년의 모든 조약 문서도 덕수궁에서 꾸며졌다. 일제는 이후 덕수궁 출입을 통제하더니 공원으로 꾸며 개방한다. 일제의 비열함이 드러나는 곳이다. 서리 맞고 물든 단풍이 곱다던가. 덕수궁 단풍이 곱다. 곱고 화려한 빛깔 속에 박힌 서릿발 같은 역사에 가슴이 먹먹하다.

덕수궁 함녕전

덕수궁 덕홍전

함녕전은 1897년 고종의 침전으로 지어졌다. 1904년 화재가 난 뒤 복원했다. 고종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덕홍전은 함녕전 바로 옆에 자리한 편전이다.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신 경효전이 있던 자리인데, 1912년 개조해서 덕홍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국모의 신주를 모시던 신성한 자리를 일본인 통치자의 접견 장소로 사용하면서 바닥을 입식 구조로 바꾸었다. 석어당은 피란에서 돌아온 선조가 기거한 곳이며, 광해군 때는 인목대비가 유배된 곳이기도 하다. 고종 때는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인 준명당이 이 부근에 만들어졌다. 석조전 일원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서양식 궁전 건물로 지었다. 영국인 건축가 하딩J. R. Harding이 설계해서 1910년 완공했다. 1938년 서관을 증축하면서 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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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참고 자료 《조선왕조실록》, 《별건곤》 22~23호, 덕수궁 안내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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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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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세종로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홍화문 터

원각사 터

경희궁

광화문역

돈의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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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시간 약 45분

경교장

광화문역 → 도보 13분 → 경희궁 → 도보 5분 → 경교장 → 도보 2분 → 돈의문 터 → 도보 10분 → 서울시립미술관 → 도보 10분 → 덕수궁 → 도보 2분 → 시청역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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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

찾아가는 길

창덕여중 / 정동교회 옛 한양도성 흔적 서울시립 미술관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7번 출구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직진. 새문안교회 앞 원각사 터 표석을 지나 이황 집터

구세군회관 건물 모퉁이 흥화문 터 표석에 도착. 새문안로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경희궁이 나온다. 경희궁을 돌아보고 나와서 새문안로 고갯마루 강북삼성병원 안으로 들어가면 경교장이 있다. 경교장에서 나와 새문안로 고갯마루로 내려가다 보면 돈의문 터를 알리는 조형물과 안내판을 만난다. 돈의문 터에서 길을 건너 경향신문사 앞 정동길로 접어든다.

숭례문

정동교회를 지나 서울시립미술관을 돌아보고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가면 덕수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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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연결길 창덕여중 후문 쪽에 옛 한양도성 흔적이 일부 남았으나, 돈의문 터에서 덕수궁으로 가는 정동길과 떨어져 있다. 창덕여중 후문 쪽 도성을 보려면 서대문사거리 농협 건물 뒤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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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5. 사라진 성곽, 잊힌 이야기

시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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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조선의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걷다 무학대사의 탄식이 서린 선바위에서 고종의 탄식이 생생한 중명전까지 길은 무학동 선바위에서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로 내려와 정동으로 흘러든다. 다섯 시간 남짓 걸리는 이 길은 조선의 역사를 관통한다. 조선 건국에서 출발해 겸재 정선이 활동한 조선 후기를 지나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막을 내린 시기까지 훑는다. 일제강점기의 예술가들과 개화기의 씩씩한 여성들도 만날 수 있다.

글·사진 최갑수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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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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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2 > 06 > 025.

무학대사와 정도전, 태조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나

선바위에서 황학정으로 향하는 한양도성 구간

선바위는 멀리서 보면 스님 두 분이 참선하는 모습과 닮았다

국사당

선바위에서 내려오는 길. 한양도성과 서울 시내가 바라보인다

무학대사는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선바위를 반드시 한양도성 안에 두어야 했기 때문 이다. 대사는 어떻게 하면 선바위를 성안에 넣을지 고민이었다. 같은 시각 정도전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선바위를 한양도성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선바위는 단순한 바위가 아니다. 생김새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스님 두 분이 참선하는 모습과 꼭 닮았다. 달리 보면 고깔과 장삼 차림의 두 스님이 합장하는 것 같았다. 뒤에서 보면 도포 입은 스님이 떡하니 서 있는 듯했다. 눈이 내린 날은 조실스님이 나오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한양의 백성들은 선바위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믿었다. 특히 아이를 원하는 아녀자들이 많이 찾았는데, 이들은 작은 돌을 문질러서 바위에 붙이곤 했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단순히 바위 하나를 성안에 두느냐 마느냐를 두고 기 싸움을 벌 이는 것이 아니었다. 개국공신이자 거물인 정도전과 무학대사. 각각 유교와 불교를 대표 하는 이들은 조선의 통치 이념으로 유교와 불교 중 무엇을 기반으로 할지 팽팽한 기 싸움 을 벌이는 중이었다. 애당초 한양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성안에 둬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은 선바위를 성안에 두면 불교가 성하므로 유교 국가에서 안 될 말이라고 극구 반대했다. 태조의 심중은 선바위를 성 밖에 두는 것으로 기우는 듯 보였다. ‘선바위가 한양도성 밖으로 밀려나면 조선의 승려들은 어떻게 될까.’ 무학대사는 불교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선바위를 성안에 두고자 했지만, 패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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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짙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내 태조가 선바위를 성 밖에 두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학대사는 무릎을 치며 한탄했다. “이제 승려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니겠구나.” 그의 한탄처럼 승려와 무당은 조선 500년 동안 성안에 살 수 없었다. 조선은 고려 때 부터 전해오던 국사나 왕사 제도를 폐지하고, 242개를 제외한 전국의 절도 폐사했다. 조선은 선비의 나라가 되었다. 이성계는 그나마 무학대사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이런 꿈 이야기를 전했다고 한다. “꿈에 눈이 엄청 내렸는데 인왕산에 가보니 선바위 쪽은 그대로 쌓였고, 그 너머 쪽은 모두 녹았답니다.” 이성계는 눈 녹은 자리에 성을 쌓으라는 징조로 여겨 성을 쌓았고, 선바위는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서울 이야기》(김선남, 2012), 《서울, 도성을 품다》(서울역사박물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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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2 > 06 > 026.

여관방에 남은 한국의 근현대사

보안여관 주변의 골목. 이상의 〈오감도〉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천재 시인 이상도 보안여관과 인연이 깊다. 1934년, 경성이 시 한 편으로 난리가 났다. 이상이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난해시 〈오감도〉 때문이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 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라고 시작하는 시다. 시가 연재되자 신문사에는 항의 가 빗발쳤다. 신문사에 폭탄 테러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오감도〉는 8월 8일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신문사 문예부장 이태준은 사표까지 써서 품에 넣고 다니며 이 작품을 살려보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이상이 〈오감도〉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묘사한 곳이 보안여관 주변의 통의동 골목이다. 이후 소문이 나면서 지방에서 올라오는 문학인과 예술인이 보안여관에 장기 투숙하기 도 했다. 화가 이중섭도 단골손님이었다. 청와대와 가까워 1970년대에는 청와대 직원 이나 경호원의 면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건물이 속속 들어서고 여관 영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자, 2004년 문을 닫았다. 얼추 80년간 나그네들을 맞던 보안 여관이 새롭게 탄생했다. 뜻있는 사람이 갤러리로 꾸민 것. 이곳에 가면 꼭 들러볼 일이 다. 세월의 흔적과 문화의 향기를 흠뻑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수많은 문인들이 머물렀던 보안여관 세월이 흘러 여관은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936년 어느 날, 눈매가 날카롭고 입이 야무진 청년이 보안여관으로 불쑥 들어왔다. 스물두 살 서정주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는 구석진 방에 짐을 풀었다. 그가 온 뒤로 분위기가 비슷한 청년들이 들락거렸다.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이다. 그들은 방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문학을 논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 동인지 《시인부락》이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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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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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2 > 06 > 027.

2 > 06 > 028.

어두운 내 삶을 등불처럼 밝혀주세요

씁쓸한 현실을 달래는 고종의 쓰디쓴 커피 한 잔

대한민국 여성 교육의 산실 이화학당, 지금은 이화여고박물관이다

당시의 교실을 재현했다

고종이 머물렀던 러시아 공사관, 지금은 망루만 남았다

하란사河蘭史, Nancy는 한국 최초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여성이다. 본래 성은 김씨지만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하란사라 불렸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커서 학교를 알아보던 그는 이화학당에 입학을 청원했다. 하지만 그는 기혼녀라는 이유로 세 번이나 입학을 거절당했다. 하란사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어느 날 밤 그는 등불을 밝히고 이화학당으로 가서 학당장 프라이Lulu E. Frey 를 만났다. 프라이가 왜 왔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등불을 껐다. “아니, 어두운데 등불을 끄면 어떡합니까?” “내 삶이 이렇게 어둡습니다. 제발 밝은 학문의 빛을 열어주세요.” 감동한 프라이는 입학을 허가했고, 하란사는 이화학당에 들어갔다. 남편 하상기의 외조도 지극했다. 아내가 들어올 시간이 넘으면 하녀에게 마님의 진지를 가져다주라 했고, 하녀는 소반에 식사를 담아 학교까지 날랐다고 한다. 남편의 전폭 적인 지원으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하란사는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부가 개설되자, 유일한 한국인 교수가 되었고 기숙사 사감도 했다. 하란사는 호랑이 사감으로 소문 났는데, 그녀에게 욕먹지 않은 학생이 없었을 정도다. 박물관에서 이화학당 졸업식 풍경도 엿볼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이화학당 졸업식은 없 었다. 학업을 마칠 때쯤이면 학교에서 졸업생을 좋은 집안에 소개했는데, 혼인 증서를 써주는 것이 졸업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아관파천의 현장 러시아 공사관

고종은 잔을 들었다. 쓰디쓴 커피가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아픈 머리가 조금 개운해 지는 기분이었다.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씁쓸한 현실을 달래야 하다니….’ 고종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은 사사건건 조선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에 고종은 그동안 머무르던 경복궁을 과감히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하는 대신 금광 개발권을 요구하고, 미국과 프랑스 역시 철도와 전기 놓을 권리를 달라고 한다. 고종에게 유일한 위안과 낙은 커피였다. 남의 나라 공관에 얹혀 지내던 고종은 우연히 맛본 커피에 빠져 들었고, 이후 커피 애호가가 됐다. 함께 피신 온 세자와 마시는 커피가 유일한 즐거움 이었다. 옛 러시아 공사관은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이다. 정동에서 제일 높은 언덕배기 에 자리 잡아 경복궁과 경운궁덕수궁은 물론, 주변 여러 나라 공사관의 동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망루만 남았다. 그 시절 고종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백색 건물만 우두커니 서 있다. 참고 자료 〈동아일보〉 2009년 12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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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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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17일에는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대신들을 설득했으나 역시 찬성하는 이가 없었고, 황제에게 상주해 의견을 듣는 방법뿐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날 오후 일본은 러일전쟁 후 경성에 잔류한 1개 사단 병력을 왕궁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 배치 했고, 남산에서는 위협용 대포를 발사했다. 고종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궁내부대신을 보내 대신들이 조약에 반대한다며 협의의 확정을 유예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이토 가 달려와 알현을 요구했지만, 고종은 신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저녁 때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 사령관을 대동하고 무장 군인들과 함께 중명전으로 쳐들어갔다. 이토는 퇴궐하려던 대신들을 불렀고, 밤새 협박이 계속 됐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일일이 조약 체결에 찬성과 반대 의사를 물었다. 찬성자는 두 명뿐이었지만 이토는 이를 뒤집어 다수결6대 2 로 조약이 가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고종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일본인 관리와 병사를 보내 외부대신 직인을 탈취해서 조약문에 날인했다. 18일 오전 1시 30분이었다. 고종은 을사늑약 후 수교 국가들을 상대로 조약 무효화 운동을 조심스럽게 전개했다. 1906년 6월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를 ‘친서 전달 특별위원’으로 임명하 고, ‘1905년 11월 18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은 불법, 무효임을 선언한다’ 는 친서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대한제국과 우호 통상조약을 체결한 9개국 국가원수에게 전달하도록 밀지를 내린 사실이 나중에 알려진다. 중명전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1907년 6월 헤이그Hague밀사사건 때다. 고종은 이곳에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작전을 지휘했다. 그러나 헤이그밀사사건은 역풍을 불러 와 일제는 고종의 퇴위를 강요했고, 고종은 7월 20일 순종에게 양위하고 말았다.

2 > 06 > 029.

대한제국 역사상 가장 긴 하루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1905년 11월 15일, 고종은 중명전 2층 큰 방에서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거만한 자세로 앉아 말했다. “대한제국의 외교부를 폐지하고 모든 외교권을 일본에게 넘기시오.” 고종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나 열강의 식민지가 된 아프리카 토후국과 뭐가 다르겠소. 일본의 감독을 받는 한이 있어도 외교권을 행사 하는 독립국이라는 형식은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 점점 기울어지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종은 이렇게라도 말해야 했다. 하지만 이토 히로 부미는 단호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조약을 거부한다면 더 곤란한 처지에 놓일 것이라고 협박했고, 고종은 대신들의 뜻을 들어야 한다고 응수했다. 이튿날 이토는 대신들을 자신의 숙소인 대관정으로 불러 보호조약 체결에 찬성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무도 찬성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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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중명전 내부

중명전에 전시된 고종과 황실의 사진들

고종은 3년 가까이 머무르던 중명전을 떠나 덕수궁 함녕전으로 거처를 옮겼고, 중명전 은 역사의 무대에서 잊혀갔다. 러시아 공사관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작품 으로 추정되는 중명전은 1901년과 1925년 화재를 당했다. 1925년에는 피해가 심해 외벽 등 일부만 남았으나 새로 지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치다 2003년 정동극장이 사들였고, 중명전의 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문화재청이 2006년 12월 매입해서 복원 공사를 거쳐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참고 자료 〈한국일보〉 2010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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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2 > 06 > 030.

비가 그치고 날이 개듯 벗의 병도 깨끗이 나았으면

인왕산의 그림 같은 풍경. 겸재 정선이 사랑한 풍경이다

자네와 나를 합쳐놔야 왕망천이 될 터인데 / 그림 날고 시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하네 /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진 보이누나 / 강서에 지는 저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보네

1751년 윤5월 25일. 엿새 동안 비가 내렸다. 겸재 정선은 이달에 날씨가 유난히 이상하 다고 생각했다. 초하루부터 열여드레까지는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에 맑고, 아침에 맑다가 저녁에 비가 내리는 등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열아흐레부터는 일주일 동안 비가 왔다. 이레째 되는 25일 아침까지 내리다가 오후에야 개었다. 겸재는 집 마루에 앉아 종이를 펴고 붓을 들었다. 인왕산 아래부터 피어난 안개가 길게 띠를 이루며 위로 번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겸재는 큰 붓을 들어 화강암 덩어리 인왕산을 쓱쓱 그렸다. 안개와 집, 소나무를 그렸다. 이 그림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겸재는 붓질 하나하나에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그림을 그리며 사천 이병연이 쾌차하기 를 빌었다. 큰비가 온 뒤 맑게 개듯 벗이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인왕제색도’는 인왕산에 큰비가 온 끝에 갠다는 뜻이다. 인왕산 아래에서 태어난 겸재와 사천. 둘은 어릴 때부터 가까이 살며 돈독한 우정을 나누 었고, 자라서는 각각 화가와 시인이 된다. ‘그림에 겸재, 시에 사천’으로 불릴 만큼 조선 최고의 화가와 시인이었다. 사천은 겸재보다 다섯 살 위지만 늘 벗을 자처했다. 성인이 되어 둘이 떨어지자 겸재는 친구에게 그림을 보냈고, 사천은 그림에 맞는 시를 전했다. 이들은 시와 그림으로 교류하며 한강 주변 경치 33점을 담았고, 이를 《경교명승첩》 으로 남겼다. 겸재는 양천 현령으로 부임할 때 이병연이 써준 전별시를 간직하고 있었다. 겸재는 잠시 붓을 놓고 편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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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편지를 읽는 겸재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가슴이 뭉클했다. 겸재의 간절한 마음과 달리 나흘 뒤29일, 60년 지기 사천이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날 겸재는 자신의 반쪽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꼈다. 겸재는 북받치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며칠 전 그리다가 만 화첩을 꺼내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인왕제색도’를 완성하는 것이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어두운 비구름이 걷히듯 그가 낫기를, 인왕산의 웅장한 모습처럼 다시 강건한 모습으로 일어서기를 바랐지만 그는 떠나고 없었다. 붓을 든 겸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참고 자료 《순성의 즐거움》(김도형,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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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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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욕하는 데 고생 많으니 이 쌀을 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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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쓸쓸해 보이는 효자동 신익희 가옥

효자동 신익희 가옥으로 가는 길

3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둔 1956년 5월 10일 새벽. 전주로 가는 호남선 기차에서 한 정치인이 급서했다. ‘사사오입 개헌’을 하고, 다시 대선에 출마한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라이벌 민주당 신익희 후보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은 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고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없애는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했다. 중국에서 20여 년간 독립운동을 마치고 광복 후 국내에서 정치 활동을 하던 해공 신익희 선생은 사사오입 개헌에 충격을 받고 ‘호헌동지회’를 결성했다. 이어 1955년 9월 18일 호헌동지회 회원과 재야 정치인들을 규합해 민주당을 창당, 대표가 됐다. 이듬해 3월 18일 민주당 대표로 지명된 그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들고 대통 령 선거에 출마했다. 5월 2일 한강 변에서 펼쳐진 그의 유세에는 3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익희 선생은 호남 지역 유세를 위해 밤차로 전주에 가던 중 서거했다. 국민들은 그에게 애도의 185만 표를 던졌고, 5월 23일 국민장이 치러졌다.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에 자리한 효자동 신익희 가옥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선거 유세를 하던 중 갑자기 숨지기까지 1년 9개월간 머무른 집이다. 유품으로 목판, 고서, 휘호 등이 보존되었다. 그는 국회의장 시절 공관에서 머물던 때를 빼면 평생

하숙을 하다 1953년 이름을 알 수 없는 독지가에게서 이 집을 받았는데, 이것이 그의 명의로 된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다. 주변 사람들은 해공을 ‘거목’ ‘태산’ ‘큰 숲’이라고 했다. 숲에는 아름다운 꽃은 물론, 포악 한 짐승과 독을 품은 해충도 있다. 선생이 이를 모두 포용했다는 뜻이다. 이런 일화도 있 다. 어느 날 해공을 모략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해공은 그에게 전하 라며 쌀 한 가마를 내주었다. 그리고 “나 욕한다는데 고생 많다. 가족 부양도 힘쓰라”고 전하라 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자신을 모함하는 사람에 대해 “왕도 자리에 없으면 욕하 는데 그럴 수 있다”며 웃었다. 해공의 정적 중에는 그의 성품에 반해 해공의 사람이 된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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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2>

테마 06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효자동 신익희 가옥 경복궁 보안여관 선바위

황학정 국사당

영추문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 >

도보 시간 약 2시간

세종로

선바위 → 도보 60분 →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 → 도보 5분 → 보안여관 → 도보 5분 → 효자동 신익희 가옥 → 도보 30분 →

독립문역

이화학당 → 도보 10분 → 러시아 공사관 → 도보 5분 → 중명전

독립문 >

경희궁

찾아가는 길

종로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1번 출구로 나와 약 50m 가면 무악경로당이 나오고, 이곳에서 국사당과 선바위로 가는 길이 있다. 국사당에서 한양도성길을 따라 이화학당

황학정까지 약 40분. 황학정에서 사직공원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을 지나 영추문까지 약 20분이 걸린다. 영추문 인근에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과 보안여관,

배재학당

효자동 신익희 가옥 등이 있다. 효자동 신익희 가옥에서 광화문을 지나 정동으로 가면 이화여고박물관. 정동길에 러시아 공사관과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 >

충정로

도성 연결길

러시아 공사관

선바위에서 인왕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선바위에서 20분 정도 걸린다.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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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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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6. 조선에서 대한민국 근대까지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걷다

시청역


2>

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조선과 근대의 흔적 따라 대한 독립까지 광화문에서 시작해 서대문 독립공원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대한민국 근대의 암흑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코스다. 광화문은 조선 최대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여전히 위풍당당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제자리를 잃고 강제로 옮겨지는 수모를 겪었다. 조선 시대 성역으로 여겨지던 사직단 역시 일제가 공원으로 조성한 뒤 그 위상이 격하됐다. 사직터널 위에 자리한 서양식 2층 가옥 ‘딜쿠샤테일러 가옥’에서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생생한 기록이 전 세계로 전해졌고, 독립문과 독립공원에는 근대 암흑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과 절실함이 오롯이 스며 있다.

글·사진 윤대헌

딜쿠샤 (테일러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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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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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2 > 07 > 032.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딜쿠샤(테일러 가옥)

권율 도원수 집터

인왕산으로 이어진 한양도성길에 오르면 오밀조밀 자리 잡은 가옥 사이에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이층집이 눈에 띈다. ‘딜쿠샤’라 불리는 이 집은 지하 1층, 지상 2층 구조다. 남루하긴 해도 묵직한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것이 주변의 여느 가옥과 다른 인상이다. 실제로 이 집은 일대에서 처음 세워져 90여 년을 견딘 근대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3·1운동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진 진원지다. 사연은 이렇다. 딜쿠샤는 1923년 미국인 기자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지었다.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던 그는 1919년 UPI통신사 서울 특파원으로 활약하며 3·1운동을 뉴스로 타전해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그는 이 일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현재 독립공원에 갇히기도 했다. 앨버트는 출소 후 딜쿠샤를 짓고 1942년 일제에 추방될 때까지 머물렀다.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온 그는 ‘조선’을 고향이라고 여겼다. 그는 경성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어느 날 인왕산의 한양도성길을 걷다가 산속에서 커다란 은행나무를 발견한다. 나무가 예뻐 그 옆에 지은 집이 딜쿠샤다. 앨버트가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사연도 흥미롭다. 그는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가 태어난 날, 아기와 아내를 만나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갔다. 당시 이 병원에선 독립 선언서 인쇄가 한창이었다. 일본 경찰이 이를 간파하고 병원에 들이닥치자 간호사들이 브루스의 요람 밑에 독립선언서를 숨겼고, 앨버트가 이를 발견했다. 이날이 3·1운동 하루 전이다. 그는 일경의 눈을 피해 독립선언서를 빼돌리고 이를 보도했다. 그는 딜쿠샤에 살며 경성에 거주하던 외국인 선교사와 사업가들을 초대해 모임을 열고 정세 를 논의했다. 앨버트는 강제 추방당한 뒤 1948년 미국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유언에 따라 한국의 양화진에 묻혔다. 브루스 테일러는 2006년 한국을 방문해 아버지의 무덤 이 있는 양화진과 딜쿠샤를 둘러봤다. 그 전에 딜쿠샤는 〈대한매일신보〉 사옥이라거나 선교사의 집이라는 등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의 방문으로 딜쿠샤의 실체가 밝혀졌다. 건물 맞은편에는 권율 장군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가 당당한 자태로 서 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을 권율 장군의 집터로 추정한다.

딜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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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권율 도원수 집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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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2 > 07 > 033.

2 > 07 > 034.

성스러운 제단이 공원이 된 사연 사직근린공원

자주독립의 기치를 높인 독립문

신의 영역에서 공원으로 탈바꿈한 사직근린공원

광화문에서 경복궁 돌담을 따라 왼쪽으로 파고들면 사직근린공원이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헤집고 발걸음을 옮기면 반듯한 사각형 담장이 나오고, 이 안에 정갈한 사각형 제단이 있다. 조선왕조의 사직단이다.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이라면, 사직단은 토지신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사직은 나라의 길흉과 운명을 관장한다고 여겨졌다. 한양에 도읍을 정한 태조 이성계는 1395년 경복궁을 완공하고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 궁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세웠다. 제단은 동쪽과 서쪽에 한 개씩 세웠다. 동쪽 것이 토지신을 위한 사단, 서쪽 것이 곡식의 신을 위한 직단이다. 제단이 사각형 인 데는 이유가 있다. 예부터 ‘천원지방’이라고 해서 원은 하늘을, 사각형은 땅을 상징 한다고 여겨졌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은 지금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뒤에 있다. 오늘날 사직단은 사직근린공원으로 잘 알려졌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역이 공원 으로 전락한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일본은 1908년 사직단의 제사를 강제로 금지 했다. 1911년에는 사직서의 건물과 사직단 일대의 대지를 조선총독부에 귀속했으며, 1922년 사직단 주변에 도로를 내고 공원을 조성했다. 이 과정에서 인왕산 자락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사직단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만다. 지금은 사직단의 부속 건물 중 재궁으로 쓰인 안향청과 정문만이 오롯이 남았다. 사직공원에는 도서관과 몇몇 공공 건물, 활터인 황학정과 단군성전,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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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여전히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독립문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케 하는 독립문은 그 자태가 다부지다. 실제로 독립문 건립을 주도 한 서재필은 개선문 사진을 보고 직접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문은 조선 후기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해 독립협회 주도 로 세워졌다. 독립협회는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과 만백성에게 알릴 목적으로 1896년에 만들어진 조직이다. 1897년 11월 독립협회는 영은문과 모화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지었 다. 독립문 전면에는 영은문이 서 있던 기둥 돌이 남아 있다. 비용은 국민 모금 행사를 통 해 충당됐다. 당시 화폐로 공사비 3825원이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독립문 현판을 한일병탄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완용이 썼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이완용 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명필가이자, 아관파천을 계기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외부 대신, 농상공부대신 서리 등을 지냈고, 한때 독립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계급을 초월 한 대중의 참여를 이끌어낸 독립협회의 활동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적 모습으로 평가 된다. 현재 독립문은 1979년 서대문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원래 자리에서 70m 북쪽으로 옮겨 졌다. 독립문 옆에는 독립협회가 활동하던 독립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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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2 > 07 > 035.

도심 속 시민의 휴식 공간 독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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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부

독립공원

독립공원에서 바라본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독립문 뒤편은 독립공원으로 조성되어 도심 속 휴식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독립문과 함 께 독립공원에서 눈에 띄는 곳이 서대문형무소다. 대한제국 말에 일제의 강압으로 지어 진 뒤 광복의 순간까지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 탄압 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곳이다. 혹자는 일제 만행의 상징이 지금은 볼 수 없는 조선총독부 청사라면, 40여 년 동안 일제의 억압을 견디고 저항한 민족운동의 상징이 서대문형무소라고 얘기한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개소했다. 당시 규모는 전국 최대였다. 1912년 마포 공덕동에 대규모 감옥이 신축되자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23년 서대문형무소가 됐다. 개소할 때 1600㎡ 규모였던 서대문 형무소는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면서 1930년 5만 1200㎡로 30배 이상 확대됐다.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상범’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방증이다. 특히 1908년에 지어진 옥 사는 일제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투사를 가둔 곳이다. 옛 옥사는 1920년 유관순이 고문 끝에 숨진 곳으로 알려졌다. 서대문형무소는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붉은 벽돌로 만든 높은 담장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역사 전시관을 비롯해 옥사, 중앙사, 나병사, 추모 비, 사형장, 지하 옥사 등이 있다. 특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 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독립운동가들이 붙잡고 울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 앞에 서면 코 끝이 찡하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연간 수십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특히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 의 관심이 높다고 한다. 가족이나 친구와 산책 삼아 길을 나선 이들도 만날 수 있다.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097

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2 > 07 > 036.

제 모습을 되찾은 광화문

광화문

옛 광화문

광화문은 언제 봐도 위풍당당하다. 웅장하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축조 방식이 섬세하 지만 화려하기보다 고상하고 우아한 멋이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외관이 아름 답다. 좌우에 상상 속 영물 해치해태를 거느린 자태도 중후하고 멋스럽다. 경복궁은 대궐 중 제일 큰 대궐이고, 광화문은 경복궁 문 가운데 제일 큰문이다. 경복 궁의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은 왕족과 척신戚臣, 상궁들이 드나들었다. 대궐에 열병閱兵을 위한 비상의 첩종疊鐘이 울리면 왕을 직접 모시던 시신들이 모여 명령을 기다리던 곳이 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단단한 모습 뒤에는 굴곡진 사연이 있다. 광화문이 제 모습, 제자리를 찾은 것은 불과 3년여 전이다. 광화문은 난리를 제일 많이 겪은 궁궐의 문이다. 임오군란을 비롯해 갑신·갑오·을미년의 큰 난을 겪는 동안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1395년 경복궁 완공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건춘문 북쪽으로 강제 이전됐다가 2010년에야 본래 자리로 돌아온다. 당시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098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해체했다. 일제는 1915년 경복궁의 전각 중 약 90%를 철거했다. 1917년 창덕궁에 화재가 나자 창덕궁 내전을 짓기 위해 경복궁의 남은 전각을 철거 했다. 광화문을 이전하고, 1926년에는 경복궁을 대표하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명실상부한 조선 최대 법궁을 철저히 해체함으로써 왕권을 무력화하겠 다는 의도다. 경복궁 복원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던 조선 총독부 건물이 헐리고, 광화문도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육조 관아들이 늘어서 ‘육조 거리’로 불리던 광화문 앞에 조성된 광장은 서울 시민의 휴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에 여념이 없는 관광객을 사시사철 만날 수 있다. 각종 공연이나 문화 행사도 열린다. 참고 자료 《별건곤》 23호

099

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2>

테마 07 경복궁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경복궁역

광화문

사직근린공원 딜쿠샤 (테일러 가옥) >

독립공원

도보 시간 약 1시간 30분

사직터널

광화문 → 도보 20분 → 사직근린공원 → 도보 20분 →

세종로

한양도성길 → 도보 15분 → 딜쿠샤(테일러 가옥)∙권율 도원수 집터 → 도보 30분 → 독립문 → 도보 5분 → 독립공원 금화터널

독립문

>

찾아가는 길

광화문역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리면 광화문광장이다. 광장 끝에 광화문과 경복궁이 있다. 광화문을 앞에 두고 사직터널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사직근린공원이다. 사직근린공원 뒤쪽 인왕산로를 따라 인왕산 산책로 쪽으로 2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길 인왕산 구간 입구가 나온다. 입구 아래쪽 길을 따라 사직터널 위쪽으로 내려가면 딜쿠샤다. 딜쿠샤 바로 옆에 권율 도원수 집터가 있다. 충정로

딜쿠샤에서 사직터널 입구 쪽으로 내려가면 서대문사거리에 독립문이 있다. 독립문 뒤쪽에 독립공원이 조성되었고, 공원 안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오면 독립공원이다.

>

도성 연결길 사직근린공원 뒤 인왕산로1길을 따라 인왕산 산책로(광화문 아트홀) 쪽으로 1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길에 닿는다.

100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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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7.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근대사 이야기


2>

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고이 잠든 후궁, 언덕에 올라 조선을 보다 조선 시대 한양도성 안팎의 옛이야기를 따라 걷는 코스다. 후궁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에서 시작해 민족 시인 윤동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공원에 올라 한양도성을 걷는다. 인왕산의 옹골찬 풍광을 가슴에 담고 한양도성 사소문 중 하나인 창의문을 거쳐 백사실계곡으로 내려선 뒤 ‘서울의 마지막 비밀 정원’을 둘러본다. 거대한 반석을 깔고 앉은 현통사에서 혼탁한 마음을 씻고, 연산군 시절 세워진 세검정에서 마무리되는 이 길은 조선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옛이야기가 유유히 흐른다.

글·사진 윤대헌

추사 김정희 별장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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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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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2 > 08 > 037.

2 > 08 > 038.

서울 시내를 한눈에 품고 가는 한양도성길

한양도성 사소문 중 하나 창의문

한양도성길

창의문과 한양도성길 초입 창의문

윤동주문학관에서 찻길을 건너 ‘최규식 경무관’ 동상과 ‘청계천 발원지’ 표석 사이로 난 길을 따르면 한양도성길 초입이다. 청계천 발원지 표석에는 ‘이곳에서 북동쪽 백악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고 적혀 있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자 창의문이 늠름한 자태를 뽐낸다. 창의문 오른쪽으로 흙길을 밟으면 한양도성길이 시작된다. 떡 벌어진 남자의 어깨처럼 화강암으로 뒤덮인 백악은 산세가 옹골차다. 백악 아래는 고려 숙종 때 남쪽의 수도인 남경의 궁궐이 있던 자리다. 당시에는 백악을 ‘면악’이라 불렀고, 조선 시대에는 ‘백악’이라 불렀다. 백악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발 342m 백악은 삼각형으로 우뚝 솟았다. 멀리서 봐도 도드라지는 형상이다. 무학 대사는 이 산을 두고 ‘왕가의 기운을 받은 명산’이라 칭송했다. 산 아래 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이 들어섰고, 오늘날 청와대가 자리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능선을 따라 옛 성벽의 원형을 잘 간직한 한양도성길은 숙정문 방향으로 백악 자락에 길게 뻗었다. 창의문에서 숙정문을 거쳐 혜화문까지 4.6km 거리다.

창의문 월단 봉황 한 쌍

‘자하문’으로도 불리는 창의문은 1396년태조 5 한양도성을 쌓을 때 사대문 사이에 만들 어진 사소문 중 하나다. 이후 1413년태종 13부터 문이 닫혀 왕명이 있을 때만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했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적 해석 때문 이다. 반듯한 자태로 백악에 앉은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들은 “1623년 인조반정을 도모한 이괄과 이귀가 세검정에서 칼을 씻고 이곳창의문을 거쳐 궁궐로 들어갔다”며 “무지개 모양 월단月團 맨 위에 봉황 한 쌍이 새겨졌는데, 창의문 밖에 지네가 많아 천적인 닭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현재의 문루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이다. 석축은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 같은 양식 이고, 그 위에 단층으로 세웠다. 겹처마를 인 창의문은 가파르지 않은 물매가 유려 하다. 겸재 정선은 백악, 솔숲, 골짜기, 부침바위와 함께 창의문을 그려 산수의 일부로 표현했다. 그 옛날 창의문은 북한산성과 양주로 통하는 교통로였지만, 풍수지리설에 따라 수백 년간 문이 닫혔다. 1506년중종 원년에 다시 문이 열려 왕래가 시작됐다. 지금은 문 서쪽 으로 난 도로가 통행로로 이용되어 여전히 닫힌 문이나 다름없다. 인적이 끊긴 문은 ‘창의彰義’란 이름 그대로 의롭게 앉아 서울을 굽어보고 있다. 참고 자료 《서울특별시사 - 고적편》 《서울 600년사 - 문화사적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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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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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2 > 08 > 039.

2 > 08 > 040.

김류, 이귀가 인조반정 후 칼을 씻은 세검정

요절한 천재 시인을 만나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세검정의 옛 모습

윤동주문학관

백악을 끼고 창의문로를 따라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오른다.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 무 르익는데, 가는 여름이 아쉬운 듯 길게 늘어진 가로수마다 초록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고개에 이르자 자그마한 백색 건물이 오롯이 앉았다. ‘윤동주문학관’이다. 수도 가압장과 물탱크를 리모델링한 문학관이 아기자기하다. 3개 전시실에는 윤동주 시인의 생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전시실시인채은 시인의 시심을 상징하는 순백의 공간에 사진 자료와 친필 원고 영인본이 전시되었다. 2전시실열린우물은 물탱크의 윗부분을 개방해 만든 작은 뜰이고, 3전시실닫힌우물 은 사색을 위한 공간이다. 문학관에서는 시인의 일생과 시 세계를 담은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고, 전시실 위쪽 ‘별뜨락’은 관람객 휴식 공간이다. 이곳에서 시 낭송 강좌 를 비롯해 문학 체험 행사를 무료로 운영한다. 문학관 왼쪽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공원에는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가 백악과 마주하고 있다. 사방으로 트인 조망이 시원하다. 언덕에 오르면 동쪽으로 창의문과 백악, 서쪽으로 서시정과 인왕산이 눈 안에 든다. 시인이 생전에 이곳을 거닐며 〈서시〉와 〈별 헤는 밤〉을 썼다고 전해진다.

1977년 복원된 세검정

백악과 마주하고 있는 세검정은 세검정로6길을 따라가면 만난다. 연산군 시절 탕춘대의 부속 정자로 세워진 정자는 광해군 때 김류, 이귀 등이 인조반정을 성공하고 칼에 묻은 피를 씻었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세검은 ‘칼을 씻었다’는 뜻. 1941년 화재로 탄 것을 1977년 복원했다. 정자가 있는 지역은 한성의 북방 인후목구멍가 되기 때문에 조선 영조 때 총융청을 이곳 으로 옮겨 도성의 방비와 북한산성 수비까지 담당하게 했다.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기 면서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지은 정자가 세검정이다. 당시 총융청 감관 김상채가 쓴 《창암집》에 “육각정으로 1747년영조 23에 지어졌다”고 적혀 있다. 《한경지략》에는 “정자 앞의 판석은 흐르는 물이 갈고 닦아서 인공으로 곱게 다듬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여염 집 아이들이 붓글씨를 연습하여 돌 위는 항상 먹물이 묻어 있고, 넘쳐흐르는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고 했다. 과거 서울 시민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던 정자는 지금 백악에서 흘러온 계류만 흰 반석을 어루만지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서시〉를 읊조리며 백사실계곡으로 든다.

참고 자료 《궁궐지》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서울의 전통문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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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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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2 > 08 > 041.

서울의 마지막 비밀 정원, 백사실계곡

도심 속 청정 지역인 백사실계곡

백악 뒷자락에 숨어 있는 백사실계곡은 ‘서울의 마지막 비밀 정원’으로 불리는 청정 계곡 이다. 도심 복판에 있으면서도 숲과 계류는 강원도 못지않게 맑고 깨끗하다. 명승 36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사대문 안에서 유일하게 도롱뇽 이 서식하고, 가재와 버들치를 볼 수 있다. 숲으로 들어가면 물고기가 떼지어 다니는 계류가 흐른다. ‘이곳에 도룡뇽이 숨쉬고 있다’ 고 적힌 팻말을 지나면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이다. 여기에 ‘백석동천’이란 글씨가 또렷 하게 새겨진 바위가 있다. 아래로 내려서면 추사 김정희의 별장 터가 숲에 파묻혀 있다. ㄱ자형 건물 터에는 초석 과 주춧돌 10여 개만 남았다. 연못을 끼고 앉은 별장 터는 한쪽에 작은 육각정을 세운 흔적이 있다. 정자 반대편으로 높은 지대에 연못과 정자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사랑채 를 짓고 그 뒤편에 널찍한 안채를 둔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조선조 별장의 전형이다. 정자 터 맞은편 산 중턱 큰 바위에 ‘월암月巖’이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아름드리 물푸레 나무가 울창한 연못 옆 벤치에 앉아 잠시 발품을 쉬어 간다. 인적 뜸한 숲에 새소리만 요란하다.

‘백석동천’ 암각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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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암’ 글씨가 새겨진 바위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부암동에서 바라본 백악의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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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2 > 08 > 042.

2 > 08 > 043.

고려 때 세워진 천년 고찰, 현통사

일곱 후궁의 영원한 안식처, 육상궁

육상궁〈출처 : 공공누리에 따라 문화재청의 공공저작물 이용〉

현통사

죽은 자는 말이 없다던가. 종로구 궁정동에 자리한 서울 육상궁사적 149호 기왓장엔 따사 로운 가을 햇살이 한가롭게 노닌다. 청와대 영빈관 서쪽과 맞닿은 이곳의 원주인은 숙빈 최씨다. 일곱 살에 무수리로 궁에 들어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어머니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온갖 풍상을 겪은 인물이다. 숙종과 숙빈 최씨의 인연은 애틋하다.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한 숙종이 어느 날 궁을 거닐다 한 궁녀가 폐비 민씨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모습을 본다. 이에 감동받은 숙종이 그날 밤을 같이 보내고, 무수리 최씨는 아들을 얻는다. 그 아들이 조선 21대 왕 영조다. 숙종이 만든 법으로 인해 끝내 왕비에 오르지 못한 숙빈 최씨는 1718년숙종 44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724년영조 원년 영조가 사당을 지어 숙빈묘라 했고, 1744년영조 20 육상묘라고 올렸다가 다시 1753년영조 29 육상궁으로 승격했다. 1882년고종 19 화재로 소실 된 건물은 이듬해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른다. 1968년 일반인 관람이 금지되었다가 2001년 11월 다시 개방된 육상궁은 흔히 ‘칠궁七宮’ 으로 불린다.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아들이 왕위에 오른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셨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 분산된 제궁을 합설合設한 것은 1908년이다. 이때 옮겨진 제궁은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추존 원종의 생모,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경종의 생모,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추존 진종의 생모 와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 고종의 후궁 엄씨영친왕의 생모다. 육상궁에는 묘궁 5동을 비롯해 건물 24동이 엄숙하고 소박하게 들어섰다. 육상궁 일곽의 왼쪽에는 묘우 4동이 있고, 재실을 거쳐 정문이 우뚝 서 있다. 연호궁과 덕안궁 사이에는 냉천정冷泉亭이 냉천이라는 우물을 끼고 앉았다. 육상궁은 청와대와 함께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으니, 무궁화동산에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

현통사 앞 동령폭포

현통사에 이르자 물소리가 세차다. 현통사는 서울에서 유일한 자연 폭포인 ‘동령폭포’를 끼고 있다. 거대한 백색 암반을 어루만지며 2단으로 타고 넘는 계류가 멋스럽다. 절이 처음 세워진 건 고려 때다. 현재의 건물은 전란으로 소실됐다가 1970년대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대웅보전, 산신각, 칠성각, 제월당, 독성각, 범종각이 전부인 소박한 절집이 백악 자락에 아늑하게 안겨 있다. ‘삼각산현통사’라고 적힌 일주문으로 들어서자 딴 세상이다. 마을에서 50m 남짓 떨어졌 을 뿐인데, 무릉도원이 연상될 만큼 고즈넉하다. 동국대 교수가 썼다는 ‘제월당’ 현판의 서체가 독특하다. 절집은 한적하고 고요하다. 대웅전에서 흘러나온 독경 소리만 청아하 다. 세속에 찌든 범부의 마음이 이내 연꽃처럼 맑아진다.

참고 자료 〈중앙일보〉 2012년 4월 6일자,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김용관, 2012)

현통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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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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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2>

테마 08 세검정

부 암 동

백 석 동 천

김 정 희

별 장

현통사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

도보 시간 약 1시간 45분

능금마을 / 백사실계곡 입구

경복궁역 → 도보 20분 → 육상궁 → 도보 20분 → 윤동주 시인의 언덕 → 도보 5분 → 한양도성길 → 도보 20분 → 백사실계곡 → 도보 20분 → 현통사 → 도보 20분 → 세검정

북악 스카 이웨 이 >

찾아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창의문로를 따라 15분 정도 가면 출발 지점인 육상궁을 만난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청와대를 끼고 창의문로를 따라 20분 정도 발품을 팔면 고개 정상 왼쪽으로 윤동주문학관이 있고, 뒤쪽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언덕에서 찻길을 건너 왼쪽으로 오르면 창의문이 나오고, 오른쪽 언덕을 따르면 한양도성길이 시작된다. 창의문에서 부암동으로 내려선 뒤 동양방앗간과 환기미술관을 거쳐 산복길을 따라 10분쯤 오르면

산모퉁이카페

산모퉁이카페가 나오고, 언덕배기 갈림길에서 왼쪽 길을 따라 능금마을로 내려서면 백사실계곡 초입이다. 창의문에서 계곡 초입까지 30분 남짓 걸린다. 동양방앗간

계곡 초입에서 ‘백석동천’이라 새겨진 바위를 찍고 아래로 내려서면 추사 김정희의 별장 터다.

창의문

여기에서 계곡 끄트머리 현통사까지 5분 거리. 계곡 초입에서 현통사까지 쉬엄쉬엄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 현통사에서 세검정로6길을 따라가면 세검정을 만난다. 소요 시간 20분.

창의문안내소 >

도성 연결길 널 문터 자하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창의문로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창의문 - 숙정문 방면 한양도성길이 시작된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육상궁(칠궁)

경복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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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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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8. 한양도성 인왕산 아래 역사 이야기


2>

테마 09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의 문학·예술 이야기

임 떠난 곳에 예술혼만 오롯이 과거 중인의 터전이던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은 조선 시대 문인을 찾아가는 코스다. 추사 김정희와 겸재 정선, 청풍계 문인을 비롯해 중인층 시회 송석원시사 등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근대문학을 꽃피운 문인들이 예술혼을 불태우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천재 작가 이상의 옛집, 윤동주가 머무르던 하숙집 터가 있다. 이상범, 박노수, 이중섭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도 이곳에 터를 잡고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산책하기 좋은 가을, 골목골목 비집고 다니며 문학과 예술에 취해보자.

글·사진 윤대헌

이상범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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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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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9.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의 문학·예술 이야기


2 > 09 > 044.

2 > 09 > 045.

가사 문학의 대가, 시비만 홀연히 정철 생가 터

기구한 운명에 풍요로운 한때를 보낸 윤동주 하숙집

윤동주 하숙집 터

송강 정철 시비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겸재 정선의 ‘수성동’

누상동 9번지에 이르면 윤동주 하숙집 터를 만난다. 현재는 새 집이 들어서 옛집은 볼 수 없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1941년 5~9월 이곳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 생활을 했다. 당시 이 집은 소설가 김송 선생의 집이었다. 옆집에 사는 토박이 할머 니는 “몇 년 전만 해도 하숙집이 그대로 남아 일본 방송국에서 촬영하기도 했다”고 말 했다. 광복을 코앞에 두고 28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윤동주의 삶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연희전문학교 시절이 절정이었다. 대표 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 없이 순수하게 살아가려는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윤동주가 이곳에 머문 기간은 짧지만, 다사다난한 그의 삶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작품 활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과거와 현재 사진을 비교하면 하숙집 자리에는 지금 빌라가 들어섰지만, 전봇대만큼은 같은 자리에 세워진 것이 이채롭다. 여기에서 주택가를 따라 위쪽으로 조금 더 오르면 수성동계곡이다. 물소리가 아름답기 로 유명한 이 계곡은 1971년 옥인동 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계곡 암반이 콘크리트로 덮였다. 2008년 아파트 철거 과정에서 이곳의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되어 2012년 7월 자연 상태로 돌려져 시민에게 개방됐다. 복원 사업의 근거는 겸재 정선의 그림 ‘수성동’ 이다. 그의 그림에 담긴 크고 둥근 바위와 미점법크고 작은 점을 찍어 형태를 묘사하는 기법으로 그린 수풀, 계곡물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그림 속 선비들이 걸어 다니던 기린교麒麟橋도 복원 됐다. 다리는 一자형으로 화선지를 누르는 서진書鎭처럼 생겼다. 시멘트에 묻혀 있던 것을 정으로 쪼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렸다.

정철 생가 터 표석

한양도성길 아래 자하문로에는 송강 정철 생가 터가 있다. 정철이라고 하면 대개 전남 담양 창평을 고향으로 알지만, 그는 이곳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에서 태어났다. 고조부 가 병조판서를 지냈고, 아버지 정유침은 정5품 돈녕부 판관 벼슬을 했다. 한마디로 집 안이 좋아 상류층으로 잘 살았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정철의 큰누이가 인종의 둘째 부인 귀인 정씨인데, 인종이 보위 8개월 만에 죽자 정철 집안은 대윤에 속해 풍비박산된다. 아버지는 함경도 전평부 로 귀양을 갔다가 영월에 머문다. 이후 전남 창평으로 아버지를 따라간 송강은 고봉 기대승의 문하생이 된다. 하서 김인후의 제자가 되면서 양송천과 임석천에게서 학문을 이어받는다. 훗날 송강은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고, 45세1580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 관동팔경을 유람한 뒤 〈관동별곡〉을 지었다. 그는 말년에 강화도에서 불행한 나날을 보내다 58세에 세상과 이별했다. 청운초등학교 앞 대로변에 송강 정철 시비가 있는 곳이 생가 터다. 가로 2m, 세로 1m 크기 오석 다섯 개에 〈관동별곡〉 〈사미인곡〉 〈성산별곡〉 〈훈민가〉, 한시 두 편을 새겼다. 비석은 학교 담장을 따라 길게 이어진다. 가사 문학의 대가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비석만 세운 것이 왠지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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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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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9.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의 문학·예술 이야기


2 > 09 > 046.

2 > 09 > 047.

대표작 ‘도원’ ‘길 떠나는 가족’ 탄생지, 이중섭 가옥

과거와 현재가 오롯이 공존하는 창의궁 터

이중섭 가옥 입구

이중섭 가옥은 윤동주 하숙집 터와 직선거리로 200m 남짓 떨어져 있다. 옥인6가길 48-44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 골목으로 올라간 뒤 인왕넥스빌5차 빌라 부근에서 좁은 골목 계단을 찾으면 된다. 도로명 주소는 옥인6가길 44-11이다. 이중섭은 서구 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고, 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다. 비좁은 골목길 끄트머리에 있는 이 가옥에서 그는 1955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인 미도파화랑 전시회를 준비하기도 했다. 선배 정치열이 소유한 이 목조 기와집 2층에서 대표작 ‘도원’ ‘길 떠나는 가족’을 그리다가 이종사촌 이광석의 집으로 옮겨 전시회 마무리에 몰두했다고 전해진다. 이중섭 가옥은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86호로 지정됐지만, 번지수를 잘못 등록해 현재는 해제된 상태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 와 형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소를 사랑한 그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프랑스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돌아온 임용련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화가로서 꿈을 키 웠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인 화가로 주목받았다. 그의 일생에 첫 사건은 1945년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일본 여자 와 결혼하면 패륜아나 매국노로 취급받던 시절이지만,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녀의 한국 이름은 이남덕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중섭은 원산을 탈출해 제주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으나,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이후 그는 부산과 통영 등지를 떠돌며 막노동을 전전했다. 하루에 국수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며 그림을 그리던 그는 1953년 밀항했지만, 장모의 냉대에 다시 귀국했다. 이중섭은 가족과 살기 위해 개인전을 열었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결국 40세가 되던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적십자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그가 집착한 그림 소재가 ‘가족’이라는 점이 가슴에 남는다. 골목길에 둘러싸인 집은 다른 집들 사이에 박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봐야 한다.

세종대왕 나신 곳 표석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자하문로를 따라 북쪽으로 150m 정도 걸어가면 도로변에 ‘창의궁 터’라고 쓰인 표석이 박혀 있다. 창의궁은 조선 21대 왕 영조의 잠저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로, 효종의 4녀 숙휘공주의 남편인 인평위 정제현의 옛집을 숙종이 사서 연잉군영조에게 준 것이다. 숙빈 최씨가 이곳에서 죽었고, 영조의 세자 효장세자와 화순 옹주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창의궁 일부를 화순옹주에게 줬지만, 옹주는 월성위 김한신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에게 시집가 적선동 월성위궁에서 살았다. 월성위궁은 김정희 의 집터로도 알려졌다. 1754년에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의 사당의소묘을 짓고, 1870년 에는 정조의 왕세자인 문효세자의 사당문희묘을 안국방에서 창의궁으로 옮겼다. 그래서 영조와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자주 찾은 곳이다. 창의궁은 1900년 폐궁되고, 일제강점 기에 건물이 팔려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 등이 들어서는 비운을 맞는다. 여기에서 찻길 건너 대로변에는 ‘세종대왕 나신 곳’이란 표석이 반긴다. 《세종실록》 1권에 “1397년태조 6 정축 4월 임진에 한성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준수방은 ‘뛰어난 인재가 있는 지역’이란 뜻이다. 적선방현 적선동과 통의방현 통의동, 순화방현 옥인동 , 인달방현 체부동 등 4개 방을 말하는데, 현재는 통인동으로 돼 있다.

참고 자료 〈중앙일보〉 2012년 4월 6일자,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김용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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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추사 김정희 집터와 창의궁 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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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9.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의 문학·예술 이야기


2 > 09 > 048.

2 > 09 > 049.

한국화 대가의 소박한 보금자리 이상범 가옥

한·중·일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박노수 가옥

이상범 가옥

이상범 가옥 행랑채

누하동 청운자동차공업사 옆 골목에 이상범 가옥 등록문화재 171호이 자리한다. 근대 한국화 의 대가 이상범의 집은 양팔을 벌리면 닿을 만큼 좁은 골목 끝에 있다. 한옥은 그가 살 던 집이고, 바로 옆 양옥은 작품 활동을 하던 화실이다. 이 화백은 1930년대에 지은 도 시형 한옥에서 43년 동안 살았다. ‘청전화숙靑田畵塾’으로 불리는 화실은 시멘트 벽돌로 지은 27㎡ 남짓한 단층 양옥이다. ㄱ자형 가옥은 단출하고 정갈하다. 입구에 손님을 맞는 방과 사랑채를 지나 안채로 들어서면 부엌과 마주한다. 오른쪽이 대청과 안채다. 마당 한쪽 장독대와 화단이 앙증 맞다. 이 화백은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43년간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가옥과 맞 붙은 화실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산수도’ ‘모연도’ ‘초동도’ ‘설로도’ ‘고원귀려 도’ ‘창덕궁 경훈각 벽화’ ‘원각사 벽화’ ‘금강산일우’ ‘유경’ 등을 남겼다. 현재 화실에는 이 화백의 넷째 며느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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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박노수 가옥

통인시장 서쪽 출입구 맞은편은 옥인공원으로 향하는 골목길과 마주한다. 이 골목에 화가 박노수 가옥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1호이 숨어 있다. 박노수 가옥 뒤쪽에는 추사 김정희가 문인들과 풍류를 즐기던 것을 기념해 ‘송석원松石園’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필운대로에서 중앙학원을 끼고 큰 골목으로 들어서 200m 남짓 발품을 팔면 오른쪽 작은 골목에 박노수 가옥이 반듯하게 들어앉았다. 인왕산 자락에 바짝 붙어 있는 집은 조선 말기 문신이자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가옥의 전형을 보여준다. 한식과 양식, 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2층 건물에는 온돌과 마루, 마루방, 벽난로가 설치되었다. 집은 인왕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며, 집을 빙 둘러 조성한 정원이 멋스럽다. 박노수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동양화가로, 1972년부터 이 집에 살다 2013년 2월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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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9.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의 문학·예술 이야기


2>

테마 09

세검정 방향

한양도성 이야기 여행길

창의문

윤동주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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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시간 약 1시간 30분 경복궁역 → 도보 10분 → 창의궁 터 → 도보 10분 → 이상범 가옥 → 도보 15분 → 박노수 가옥(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 도보 5분 →

정철 생가 터

윤동주 하숙집 → 도보 10분 → 이중섭 가옥 → 도보 15분 → 정철 생가 터 → 도보 30분 → 윤동주 시인의 언덕∙한양도성길∙창의문 >

찾아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자하문로를 따라 인왕산을 바라보고 가면 ‘창의궁 터’ 표석을 만난다.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이곳에서 찻길을 건너면 ‘세종대왕 나신 곳’ 표석이 있다. 그곳에서 찻길 건너 청운자동차공업사 옆 윤동주 하숙집

골목으로 들어서면 막다른 길 끝이 이상범 가옥이다. 골목을 빠져나와 좌회전한 뒤 200m쯤 가면 찻길 건너편이 통인시장 입구다. 그 자리에서 시장을 등지고 중앙학원 옆 골목으로 들어선 뒤 300여 m 오르면 오른쪽 작은 골목에 박노수 가옥이 있다.

세종대왕 탄신지

이중섭 가옥

골목을 빠져나와 우회전한 뒤 수성동계곡 쪽으로 약 150m 오르면 왼쪽 빌라 담장에 자그마한

이상 시인 출생지

옛 사진을 붙여놓은 집이 윤동주 하숙집이다. 이중섭 가옥은 박노수 가옥 맞은편 길로 들어선 뒤 중원빌라와 마주한 길을 따라가다 왼쪽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된다.

창의궁 터

이중섭 가옥에서 정철 생가 터까지는 통인시장을 거쳐 자하문로에서 인왕산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향한다. 청운초등학교 앞 대로변에 송강 정철 시비를 세운 곳이 생가 터다. 정철 생가 터에서 맞은편 자하문로28길을

이상범 가옥 / 화실

따라가다 창의문로로 갈아탄 뒤 오른쪽으로 북악산을 끼고 오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경복궁역 >

도성 연결길

서대문 방향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찻길 건너 ‘청계천 발원지’ 표석 옆길로 오르면 창의문과 한양도성길 초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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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걷다 / 인왕구간(돈의문 터 -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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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09. 경복궁 서측 한옥마을의 문학·예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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