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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Architecture Report 26 | 2012.3-4 | 엣지 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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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이상, 시적 주체의 윤리학
한국 문학사의 가장 문제적 텍스트, 이상(李箱) 시에 대한 가장 정치(精緻)하고 정치(政治)적인 분석! | 문학 평론가 함돈균 씨의 두 번째 저서 『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이상, 시적 주 체의 윤리학』이 출간되었다. 근대 문학가 이상(李箱, 1910~1937년)의 시를 유 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가장 총체적이자 깊이 있게, 그리고 새로운 시각 으로 분석을 시도한 연구서다 . | 이상의 시는 한국 문학사상 가장 많은 연구와 해석의 방법론이 축적된 텍스트 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논쟁과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상이 태어 난 지 100년이 넘었음에도 그의 시는 여전히 전위적이고 난해하게 여겨진다. 저자는 그 난해성에 도전한다. 이상 시의 부분이나 몇 개의 시어를 풀이해 나머 지를 유추하던 기존의 방법론을 과감하게 벗어나 시 한 편 한 편의 내적 논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따져 보고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 이 과정에서 이상 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형식을 저자는 ‘아이러니’로 풀이 한다. 라캉 등 서구의 정신 분석학 분야에서 이루어져 온 아이러니의 개념과 연구를 확장하여 이상이 시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읽어내고자 한 것 이다. 저자는 이 책을, 서구 이론의 단순한 적용이 아니라 그 이론 자체를 변형 하고 심화하여 우리 문학에 맞는 새로운 시학의 모델을 탐색하는 시도로 삼고 자 한다. 나아가 이상이 세계를 인식하는 시적 태도에서 기존의 사실주의 태도 를 넘어서는 시적 윤리학과 정치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읽어내고자 했다는 점 에서 흥미롭다.
| (함돈균 지음, 수류산방 펴냄, 492쪽, 152×250mm, 값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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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26 | 엣지 Edge
2012•03-04
IS SU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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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칼럼
내 마음 속의 예배당
김정동 026 이종건의 <COMPASS
23>
박정희 기념 점 도서관, 씻어낼 수 없는 원도시건축의 건축적 과오
이종건 028 와이드 포커스
‘중간지대 건축, 건축가들’에 대한 의문 그리고 롱 테일 The Long Tail 법칙이 통하는 건축 시장, 가능한가?
전진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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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와이드 칼럼
내 마음 속의 예배당 김정동 | 본지 운영고문, 목원대 건축학부 교수
며칠 전 몇몇 교우들과 이웃 답사를 한 적이 있다. 차가 가는 길은 봄 냄새가 터오고 있었다. 초록이 시작되고 있
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땅이다. 덕분에 나도 한참 눈 잔치를 했다. 그러나 그 흥도 잠시였다. 가는 곳마다 나무가 베어져 언덕들은 배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길을 새로 내고 무 슨 용도인지 모를 집을 짓는 데 정신이 없었다. 아직 간판을 달지 않아서 짓고 있는 건물이 음식점인지 러브 호텔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교회 건물 같았다. 이런 길가에 웬 큰 교회? 가슴이 턱 막혔다. 같이 간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왜 교회를 저기에 짓는담.”하고 눈을 돌리고 있었다. 오늘날 도시와 농촌 가리지 않고 둘째가라면 서러운 듯 들어서고 있는 것이 교회/성당/절집인 것 같다. 기독교계의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는 교회만 6만 개 정도라고 한다. 6만 개의 교회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일본인이 한 말이 기억난다. “한국에는 웬 교회가 그리 많습니까?” “글쎄요, 회개할 일이 많아 서?” 우리는 웃고 말았다. 사실 일본 사람들은 우리 나라 밤하늘에 솟은 교회 십자가를 보고 꽤나 놀란다고 한다. 그들의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리라. 듣자 하니, 지금 관광하러 밀려오는 중국인도 마찬 가지의 질문을 하곤 한단다. 1980년대부터인가 종교 건축물들은 상가 건물에 세든 형태 혹은 조립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른바 ‘상가교회’
이다. 지하 노래방, 1층 식당, 2층 교회, 3층 여관……. 이런 형태가 도심지에는 비일비재하다. 그럴 경우 신 도가 어디서 나오는지 잘 알 수 없다. 성직자는 물론이다. 개척교회의 그 어려운 사정이야 알겠지만, 담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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릇, 그릇 고유의 향기가 있는 것 아닐까. 몇 년 전에는 배를 형상화하는 것이 유행이었는지 ‘노아의 방주(方舟)’를 컨셉트로 한 ‘배형 교회’가 시골길 도로변에 들어선 것을 본 적이 있다. 언덕 위의 배!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모양새였다. 얼마 안 가서 레스토 랑으로 전락(?)했다지만……. 물론 절 같지 않은 절집도 비일비재하다. 성당마저 조립식으로 짓고 있는 실 정이다. 최근에는 절이 교회가 되고, 교회가 절이 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하여튼 성스러워야 할 종교 건축물들이 오히려 이 땅 여러 곳을 버리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귀한 땅이 도시
계획쟁이, 토목쟁이 그리고 건축쟁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욕보고 있는 것이다. 집을 짓는 데 돈을 많이 쌓아 놓고 짓는 성당/교회/절집은 고금에 없었다. 다 어려움 속에서 집을 지었다. 규 모만큼 정성으로 지었던 것이다. 유럽의 경우 한 세대, 두 세대에 걸쳐 짓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 건물들은 지 금도 오고가는 길손들을 부르고 있다. 성당이 관광 상품이 된 셈이다. 고색창연한 성당은 어두침침하나 문을 활짝 열어 놓아 너나없고 부담없이 관광객들을 드나들게 한다. 성당 안에서는 촛대를 팔았다. 그리고 성화, 책자, 여러 가지 장식품 등 온통 관광 상품이었다. 신부님의 모 습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시간마다 치는 종소리는 관광객의 마음을 두들기고 있었다. 교회 건축은 도시의 상징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좋은 교회 건물이 거의 없다. 우리에게 심금을 울릴 만한 종
교 건축물이 없는 것이다. 그냥 짓는 물량적인 교회들뿐이다. 100년된 교회는커녕 50년된 교회도 찾아볼 수 없으니 스스로 자긍심을 잃어버린 듯하다. 교회는 역사만 있지 오래된 교회 건물이 없으니 모두 다 새 교회 나 마찬가지이다. 모처럼 찾아온 사람도 반기지 않는 듯하다. 오래된 몇몇 성당들마저 지금 확장 중!에 있다. 교인들이 늘어난다고 더 큰 집을 짓고자 한다. 다른 이웃 교회 를 배려하지 않는다. 땅값이 비싸다면서 상가같이 빈틈없이 채우려 한다. 이것이 현재 우리 건축의 문제가 되 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 올바른 건축가(사)에게 <종교 건축 설계권>을 주어야 하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닌지. 교회는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규모가 크면 클수록 거리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물량 이 욕심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형 교회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도심의 어떤 교회는 거대한 체육 관과도 같다. 유리 장막(帳幕)이 번쩍번쩍한다. 얼비치기도 한다. 이처럼 큰 교회일수록 외부와는 담을 쌓 고 있다. 주일에 그 앞 도로변은 불법 주차장으로 전환된다. 거의 한 차선이 무단 점령 당하는 것이다. 그들 만의 잔치이다. 교회는 마음이 가난한 자, 마음이 여린 자가 목사님과 공간을 만나는 그런 곳이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 교회 는 모두 있는 자, 부유한 자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되어 가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어렸을 때만해도 종교 건축물들은 모두 단독 건물이었다. 교회만 봐도 예배당이 정갈하게 서 있고 그 앞에 흙 마당이 있고 정원에는 채송화도 심겨져 있는, 또 철 종탑이 덩그러니 서 있는……. 교회는 동네의 이정표였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집이었기에 길 찾는 데도 목표물이 되었었다. 교회는 지금 생 각해 보면 초등학교 교실 하나 정도 크기였지만 어딘가 정이 배어 있었다. 어쨌든 지금도 내 마음 속에 있는 교회란 작고 정감 있는 교회, 즉 예배당(禮拜堂)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것 이 되어 가고 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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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이종건의 <COMPASS 23>
박정희 기념 점 도서관, 씻어낼 수 없는 원도시건축의 건축적 과오 이종건 | 본지 편집고문, 경기대학교 교수
상암동 월드컵공원 맞은편에 있는 이것은, 건물 명칭이 우선 수상쩍다. 기념관도 아니고 도서관도 아니고, 우리말에 는 도무지 선례가 없는, 그렇다고 닷컴의 성격을 띤 것도 아니니, 참으로 희한하다 할 정체의 건물이다. 물론 사연
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누구나 인터넷 공간에서 알아낼 수 있으니 여기서 굳이 상술할 바는 아니고, 서울시 와 박정희 기념사업회 간의 타협의 산물이란 것만, 그러니까 반수반인처럼 두 다른 종의 이것과 저것이 어 쩔 수 없이 결합한 결과, 그래서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하이브리드의 존재로, 요즘 흔히 쓰는 말로 꼼수건축이라 일축하고 넘어가자. 꼼수라는 뜻이 그러하듯, 날치기 개관 이전부터 이미 우리 시대의 정치 전쟁의 요충지가 된(바야흐로 선거철이라, 이를 떡밥으로 삼은 여야 양측 진영 입후보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선 개관하자마자 하루이틀에 이렇게 핫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유례가 없는 이 건물은, 그 대단한 주목거리에 비해 여러모로 째째하다. 형식적으로는 도서관
55퍼센트와 기념관 45퍼센트라는 비례로 낙찰을 본 프로그램이지만, 도서관에 대해서는 여전히 양측이 동상 이몽 중이다. 땅을 내준 서울시는 공공도서관이라는 지역 문화 공간을 기대하고, 사업 주체자는 기념 공간의 연장이거나 뒷받침으로(그래서 박정희를 주제로 한 도서 열람 공간으로) 간주한다. 우선 기념관만 개관했으 니 결과는 두고 볼 일이기도 하고, 그것은 엄격히 말해, 물리적 공간이 이미 다 만들어진 후의 이견이니, 어 떤 것으로 채워지든 ‘건축적으로는’ 별 다를 바 없어 건축적 이슈는 아니다. 박정희라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탄생시킨 건축이니, 우리 건축쟁이는 이 째째한 건물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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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사건에 대해, 적어도 세 가지 이슈는 마땅히 거론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건물 모양새와 꼴에 비해 공사비
가 무척 수상쩍다. 총 공사비가 208억이라는 국민의 혈세를 합쳐 700억이라니, 평당 4천만 원이 넘는 셈인데, 전시물에 든 비용을 충분히 감안해 평당 천만 원을 잡아도 3천만 원이 넘는다. 국민의 돈이 들어갔으니, 국 민의 감사가 필수적이어야 하지 않은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앤 파크’(2만 5천 평의 총 공사비가 4,255억으로 나와 있으니, 평당 2천만 원이 채 안 된다)보다 센데, 이게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설계자는 원도시건축이다. 그런데, 이 또한 희한하게도 언론에 전혀 노출되어 있지 않다. 현대 건축사 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우리 건축 사회의 주축으로 행사해 온,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원도시건축이 이 정치 적으로 문제스러운 프로젝트를 떠맡은 이유를, 렘 콜하스의 중국 CCTV 본사 설계를 두고 건축 지식인들이 건축의 정치적 차원을 다각적으로 따지고 검토했듯, 공개적으로 따져 묻고 그 의미와 가치를 매겨 봐야 하고, 원도시건축은 따짐을 당하든 아니 당하든, 이미 프로젝트를 수행할 시점인 한참 전에 그러해야 했지만, 지금 이라도 자신의 입장을 표명해야 마땅하다. 셋째, 건축과 정치가 극명하게 교섭한 이 프로젝트가 출현한 시점 에, 건축의 정치적 차원을 숙고해야 마땅하다. 건축가가 정치성을 띨 수 있는 건축적 방도는 무엇인가? 혹은 정치적 차원에 개입할 건축적 장치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해 우리 건축가들은 거의 모두, 불행히도, 여전 히 아무 개념이 없는 듯하다. 그러니, 우선 이 이슈를 약술할 필요가 있겠다. 건축이 정치와 교차하는 지점을 맥레오드(Mary McLeod)는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건축의 경제적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 역할이다. 경제적 역할이란 궁극적으로 생산 과정의 개입인데, 예컨대 “건축이냐 혁명이
냐” 라는 선동적인 제목을 던져 놓고 결국 건축이 혁명을 대신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 한 르 꼬르뷔제의 언명처럼, 대중이라는 고객에 관심을 돌려 주거를 하나의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접근해서 표준화와 대량 생산을 주창한 성기(盛氣)의 현대건축의 핵심 이슈가 그것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문화적 역 할은, 주로 건축 형식의 문제와 연관된다. 건축의 형태(혹은 이미지)를, 구조나 프로그램의 결과로, 그러니 까 건축의 독립적 차원이 아니라 이차적 차원으로 접근한 모던 건축과 달리, 그것을 대중과 소통하는 건축의 핵심 차원으로 접근한 포스트모던 건축, 그리고 그 이후 새로운 인식론의 구도에서 중심 자리를 꿰찬 이미지 (오늘날 이미지보다 강력한 것은 없다)의 세상에서 작금의 건축은, 그것을 열렬히 이미지로 받아들여 건축의 핵심 성분으로 삼고 있다. 물론, 건축의 가촉적 성분, 그러니까 벤야민이 갈파했듯, 오랜 기간의 사용으로 지 각의 방식 곧 문화의 지형을 서서히 바꾸어 나가는, 공간의 특질과 구조라는 소위 느리게 날아가는 화살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축의 문화적 차원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급격하게 바뀌어 가는 ‘빨리빨리’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그 화살이 엉뚱한 쪽으로 빗나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논술할 바는 아니니, 주제로 돌아가 ‘박정희 기념 점 도서관’(간략히 박정희관이라 부르자)의 정치적 몸짓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박정희관으로 정치와 교섭하는 원도시건축의 건축적 수준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유치찬란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
다, 공간의 조직이 반시대적(혹은 퇴행적)이고 권위적이다. 전시 공간의 진출입에 높낮이가 발생할 때, 건축 가가 취해야 하는 지당한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청계천박물관처럼 관람자들을 기계 시설로 가장 높은 곳으 로 끌어올린 후, 점진적으로 하강하는 순로를 통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나가게 하거나, 장누벨의 아랍문화원 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진입시킨 후,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서 기계 시설로 출구에 이르게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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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박정희관은 이 순리에 역행하는데, 그것도, 강조된 열주를 통해 굳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게 하는(지금까 지는 관람객이 대부분 노인층에 몰려 있다), 고답적인 방식으로 기념성을 돋우고자 한 의도로 그러한 탓에, 원도시건축의 건축적 안목과 능력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할 정도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건축의 기 념성의 확보를, 심지어 부주(engaged column)라는 수법까지 동원해 기둥에 온통 의존한 형태, 그리고 영구 성의 대표적 재료인 화강석에 의존한 재료는 목하 ‘약한 사유’와 ‘비물질적 이미지’라는 거스를 수 없는 현금 의 도도한 문화의 장 안에서 1970년대에 만연한 건축 기법을 새삼 떠올리게 해, 씁쓸하기 짝이 없다. 건물의 접근은 자가용으로 주차장에서 이루어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건물 모서리 쪽으로 이루어지는데, 주차장 측에서는 투시도 효과와 모서리의 의도된 사선 처리로 인해 매우 날카로운 프레임을 채우는 높은 열 주가, 건물 모서리 쪽에서는 열주의 중첩이, 그리고 진입부에서는 휴먼스케일을 압도하는 기둥과 계단 너머 에 기다리고 있는 천창의 삼각형이 강한 중심을 형성한다. 어느 이미지든, 휴머니즘에 반한다. 게다가 순로 도 일방적이고, 관람하는 도중 휴식하고 사담을 나눌 내부화된 외부 공간 혹은 휴식 공간마저 없어, 돌아가 다시 보기도 어색하거니와, 잠시 쉬거나 전시물에 대한 인상이나 의견을 편히 소통할 빈 공간이 없어, 마치 군사독재자 박정희가 그토록 원했던 표현의 자유의 압살을 건축으로 옮긴 듯까지 하여, 우악스럽기까지 하 다. 사태가 이러하니 생산 방식의 개입으로 구축이나 이미지 생산을 달리 하려는 건축적 몸짓은 아예 없다. 박정희관의 정치적 촌스러움과 우악스러움, 좀더 정확히 말해 시대착오적인 유치한 건축적 몸짓에 대한 기 술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원도시건축으로서는 할 말이 당연히 많을 것이다. 불합리하고 소통하기 힘든(혹은 불가능한) 프로젝트 프로세스, 건 축주의 횡포, 전시 디자인을 포함한 협력 업체들의 협조 부족(혹은 결여), 이해타산과 정치 계산으로 얼룩진 갖가지 시공 문제, 혹은 심지어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얽혀 버린 정치적 덫 등의 희생자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 다. 그런데, 이 땅의 어떤 건축 프로젝트가 그렇지 않겠는가? 물론, 박정희관이 유독 심할 것이라 능히 짐작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 건축 사회의 막강한 문화적 입지를 점유한 원도시건축이 건축 적으로 극히 실망스러운 이러한 결과를 생산했다는 것은, 변명할 여지마저 주기 어렵다. 판단컨대, 이 정도의 패착은 팔자를 제대로 고칠 정도가 아니면 두기 어려운 악수라, 원도시건축이 챙긴 이익이 얼마였을지 문득 궁금하다. 영원히 씻어낼 수 없는, 이 건축적 과오를 원도시건축은 어찌 흡수해 낼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
Wide AR no.26 : 03-04 2012 Issue
이슈 | 와이드 포커스
‘중간지대 건축, 건축가들’에 대한 의문 그리고 롱 테일 법칙이 통하는 건축 시장, 가능한가? The Long Tail
전진삼 | 본지 발행인
중간 건축의 함정
김성홍(서울시립대) 교수는 그의 저서 『길모퉁이 건축』과 전시 도록 서문 ‘한국 건축의 새로운 지평’에서 흥 미로운 명제를 던졌다. ‘건설 한국을 넘어서는 희망의 중간 건축’이라는 부제를 단 그의 저서 말미에서 집중 적으로 거론한, 현 단계 한국 건축의 고단한 정황을 넘어설 수 있는 자생력을 중간지대 건축, 건축가, 건축사 사무소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글의 요체를 중심으로 한 전시 도록의 서문은 지난해 말 일본 요코하 마에서 개최된 한일건축교류전에서도 발표되는 등, 한국 건축의 지형도를 압축 정리하여 국내외 건축의 시 선을 교차시키는 데에 김 교수의 주장은 나름 무게감 있게 전달된 듯한 인상이 짙다. 그는 ‘중간 건축’이 중앙과 지방의 정치인들이 구호로 쓸 만큼 화려하지 않고, 그래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 는 한편 잡다하고 소소한 민원 덩어리라는 데서 불온한 태생적 한계를 갖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형 건설사 나 건축사사무소 또한 공들이는 것 이상으로 시장성과 상품성을 만족시키지 못함으로 대형 조직의 시장 운 용 논리에 반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군의 스타 건축가들에게도 확인할 수 있는 데, 영세한 프로젝트 규모로 인해 새로운 형태와 기술을 실험하기가 여의치 않은 까닭임을 주장한다. 요약하 자면 그가 말하는 중간 건축의 다른 이름은 ‘일상의 건축’으로 바꿔 부를 만한데 국토해양부의 통계 자료를 인용한 그의 시선은 중간 건축이야말로 건축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 가치가 분명함에도 건축계는 물론 사회 전반의 시선을 모으지 못하고 있는 것을 경계하고 있음이다. “전국의 총 650만 개 건물 중에서 1층이 64.3%, 2~4층이 31.4%, 5층이 1.8%로 5층 이하가 전체의 97.5%를 차지한다. 서울도 크게 다르지 않다. 66만 개 건물 중 1층이 24%, 2~4층이 65%, 5층이 6%로, 5층 이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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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 95%이다.”(김성홍, 2011) 얼마 전 격주간 <건축문화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2011년 소규모 건물(연면적 2,000m2 이 하) 기준, 서울 지역 개업 건축사 68.2%(약 2,700여 명)가 프로젝트 수임 건수 “0”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 실상의 “건축 설계 시장 붕괴”를 의미한다고 신문은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0.7%에 해당하는 100인 이상의 대규모 사무소의 매출 규모가 전체 매출액의 38.7%를 차지한다 는 건축 설계·엔지니어링 산업 동향 조사 결과(2009,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 비추어 소규모 건물 설계 시장 의 생존 경쟁이 얼마나 처절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신문은 경고하고 있다.(건축문화신문, 2012년 2월 1일 자 참조) 김 교수가 위기의 한국 건축 설계 시장의 탈출구를 중간 건축, 즉 소규모 건물로 적시하고 있는 반면 현장에 서는 그마저 상위 30% 건축사들에 국한된 일감이라고 빈축을 사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소위 중간지 대 건축가들마저도 정작 상위 10~30% 범주 내에 속해 있는 선택 받은 부류라는 점은 그가 제기하는 명제 가 지닌 허점이기도 하다. 그가 주목하는 바는 95%에 달하는 허접한 소규모 건물들에 대한 애정이기보다 비판적 사유를 통한 새로운 건축 환경을 만들자는 데에 있다. 돌아보면 지난 30년 동안 이를 문제 삼아 재개발, 재건축, 뉴타운 조성이라 는 대형 사업으로 일관했던 행정 당국과 건설사들의 횡포가 우리 도시의 표정을 획일적으로 바꾸고, 지역 원 주민을 몰아냈으며, 지역 문화를 훼손하는 공급자 위주의 개발 방식을 앞세운 채 포식자의 덩치에 비례하는 주거 단지와 도시화로 치달아 왔던 것을 그가 경계하고 있음이다. 관속(官屬) 건축가와 신종 인력 회사
‘젊은건축가상’의 제정을 통해 젊은 건축가들을 주시하고 응원하는 문화관광부, ‘서울형 공공건축가’ 제도를 통해 여러 계층 중 하나로 젊은 건축가에게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서울시 등 중앙과 지방 정부 단위에서 건 축가들을 향한 제스처가 예사스럽지 않다. 건축가들의 분류 체계를 각급 정부가 쥐고 있는 듯한 양상에 거부 감 없이 따르는 작금의 상황은 저간의 건축계가 마땅히 대접받지 못해 온 과거지사에 대한 반사 효과를 기대 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 해도 관에서 기회를 찾는 건축가의 표상이 지금 우리 시대 건축의 슬픈 자화상이 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의 인정을 매개로 하는 건축가와 건축 집단의 공공적 지위에서 역한 냄새가 난다. 민간 시장이 얼어붙은 지 오래인 현실 세계에서 그나마 관급 공사 및 발주되는 여러 유형의 공공 부문 용역 사업으로부터 건축의 허기 를 채워온 근년의 설계 시장 풍토는 건축가들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할 사회 현상에 대한 저항 의지를 송두리째 지워 버린 채 먹이를 주고, 머리털을 쓰다듬어 주는 주인 앞의 충견처럼 권력에 줄을 대고 서 있는 듯한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건축가협회가 주관하여 김정철건축문화상의 1회 수상자로 전임 문광부장관 Y씨가 선정되었다 가 상 제정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후원 단체인 정림건축문화재단의 반발로 취소된 사태는 상 징적인 사건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전 시기에 국가 공무원에게 공로패와 표창장을 남발해 온 건축 단체들은 공복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온 그들에게 시상을 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정부 부처 실무자들과의 관계 유지, 공공이 발주하는 용역 사업의 수행, 공적 지원금 수혜에 따른 사전 기름을 발라 놓는다는 차원에서 어
Wide AR no.26 : 03-04 2012 Issue
처구니없는 일을 당연하다는 듯 자행해 온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그러므로 최근의 서울형 공공건축가의 경우도 77인 ‘더블 행운’의 숫자가 상징하듯 이 시대, 서울시를 대표하 는 ‘건축가 77특무 부대원’의 위상을 갖게 된 그들만의 리그를 마냥 반길 것은 못 된다. 서울시 도시 건축 행정 에 일정 이상 개입하며 말할 수 있는 기회와, 특정 사업에 대하여 그들만의 제한된 설계 경기의 기회를 제공받는 다는 등 긍정적 효과가 집중 부각되고 있지만 기실 공공건축가라는 서클(인력풀)을 만들어 놓고 서울시의 입맛 에 맞춰 자원을 수급하겠다는 것은 전문화된 고급 인력 회사를 저들이 헐값에 운용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난 반세기 현대 건축의 전령으로 전문가 집단의 이념을 사회에 전파해 온 건축 단체와 건축 언론사가 발굴 또는 응원해 온 각종 건축상의 수상자들이 누려온 현실은 사실상 권위를 부여받기보다 건축가의 이력서에 한 줄을 보태고, 사무소 내부 공간을 상패로 장식하는 정도의 초라한 모습을 연출해 왔다. 과잉 생산된 건축 가 세우기 제도로 인해 어지간한 작가 정신으로 무장한 채 건축사사무소 10년만 운영하면 사무소 전시장과 벽면이 모자랄 만큼 쌓이는 상장, 상패, 위촉장, 위촉패, 감사장, 감사패가 이를 입증한다. 속되게 말하여 건 축을 해온 것이 아니라 장식장을 꾸며온 것이다. 건축 단체 등에서 남발한 실속 없는 건축(상)제도로 말미암아 일군의 건축가들이 바라는 것이 부상(副賞)으 로 주어지는 실제 프로젝트의 기회 부여와 동급의 사회적 지위 획득(각종 관제 심의위원 등)에 연연해 할 수 밖에 없었던 듯하다. 정황이 이러할진대 전술한 김 교수의 중간 건축가라는 정위가 얼마나 위태롭고 안이한 건축가군을 지칭하는 것인지 의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일정 정도의 권익을 옹호받고 있는 그들이 자칭 타칭 중간 건축가라면 그 바깥에 무리를 짓고 있는 70% 이상의 건축가들의 여집합이 너무나 크다. 작금의 건축계 전반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경기 침체의 터널 안에 묶여 있는 형세이고, 대형 건설사와 건축사사무소가 장악한 경직된 시장 성향으로 95% 이상의 중간지대를 점유하고 있는 열악한 건축의 상황을 위기 극복의 탈출구로 삼아야 한다는 김 교수의 혜안은 충분히 납득되고 응원하는 바이지만, 정작 95%의 중 간지대 건축을 책임질 건축가들이 또다시 제한된 서클 안에서 자신들만의 리그를 준비하는 것처럼 비추이는 작금의 현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나마 한일건축교류전에 참가한 16인의 건축가(팀)조차도 김 교수가 글 속에서 지칭하는 ‘중간 건축가’를 순전하게 이해하고 동참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으니 이 또한 허명이 아닐 수 없다. 건축가 그룹을 특정 명제로 정위시키는 일은 쉽지만, 그것이 진정성을 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젊은건축가포럼코리아의 이름하에 30~40대 신진 건축가들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이들을 엮게 된 배경이 문광부 제정 ‘젊은건축가상’ 수상자들의 모임이라는 동질성에 기인하는 한계가 있고, 건축의 이념형에 대 한 공동의 투지가 부재한 특정 세대 건축가로 그루핑되는 모양새가 부각되어 바람직하게 보이진 않는 데다 한두 차례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이미지 건축’의 행보가(그것은 마치 현금의 정치판이 휩쓸려 가고 있는 ‘이미지 정치’ 와 오버랩되어) 다소 불안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이므로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고자 한다. 건축가의 집단성이 계충의 이기주의로 번지거나, 집단 보호주의를 연상시키거나, 허명과 관제화에 연연할 때 당장의 기회는 열릴지 몰라도 미래가 밝지는 못하다. 김 교수의 중간 건축가가 지시하는 것의 정체가 일 상의 공간에서 건축가 자신들의 역할을 찾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중소규모 도시 건축의 표정이 바뀌고, 효 과적으로 일감이 늘어나고, 마침내 건축가의 사회적 신망이 증대되는 순환적 프로그램의 완성에 있다는 것 을 환기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하여 건축 설계 시장에서의 롱 테일의 법칙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참고문헌 | 김성홍, 『길모퉁이 건축』, 2011,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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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 4
t Depth Repor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건축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 Talking Architect
036 영화와 기억 사이에서 선생을 기리다 강병국 | 040 말과 흙, <말하는 건 축가>와 보낸 시간들 한선희 | 044 이 사람은 누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건 축을 했는가? 정재은 감독 인터뷰 | 056 자기를 찍는 기록 함성호 | 060 정기 용이 남긴 고민거리 이종건 | 066 기적의 도서관과 공공 건축 | 070 정기용 연 보 | 074 정기용을 부르는 이름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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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기용 선생의 마지막 1년 여의 시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가 개봉됐다. 이 영 화는 대장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한국 건축의 문제를 지적하고 인간과 자연과 건축의 조화로운 삶을 꿈꾸는 선생의 말들을 담아 건축인들로 하여금 이 시대 건축의 가치는 어디로 정향되어야 하 는지, 또 건축가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자문하게 만든다. 이에 본지는 영화 속 메시지를 통해 정기 용 선생의 건축적 유산을 되새겨 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개봉되기 전 이 기획의 논의를 위해 본지 발행편집위원 중심으로 조촐한 시사회를 가졌다. 이 속에서 오고간 대화들로 기획 방향이 설정됐 음을 밝힌다. 진행 | 정귀원(본지 편집장)
정기용(1945~2011.3.11.) 정기용은 서울대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와 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하고 1972년 프랑스 정 부 초청 장학생으로 도불해 1975년 프랑스 파리 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1978년 프 랑스 파리 제6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정부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 1982 년 다시 프랑스 제8대학 도시계획과를 졸업했다. 1975~1985년 프랑스 파리 소재 건축 및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했으며, 1986년 기용건축을 설립했다. 2004년 베니스비엔날 레 국제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했다. 성균관대 건축과 석좌교수, 문화재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도시건축집단 ubac에서 작업했다. 2010년 일민미술관에서 <감응 : 정기 용 건축>전을 가졌다. 2011년 3월에 작고했다. ⓦ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68 혁명 직후 프랑스로 건너가 오랫동안 거주한 뒤 서울의 봄 직후 귀국한 그는 한국을 안팎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이중 시선을 지닌 건축가였다. 그 러나 이러한 자신의 독특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국내 건축 문화의 중심부에서 활동해 왔다. ⓦ 그는 인간적으로도 무척 흥미롭다.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지적 호 기심과 어린이와 같은 천진무구한 낭만성을 가지고 있으며, 건축을 천직으로 삼아 살 아 왔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집은 지어 본 적이 없는 검소한 건축가다. <무주 프로젝트> 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그의 건축 작업은 한국 현대 건축의 가능성 이자 한계로 평가되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건축의 사회적 양심을 역설했으며, 건축 제 도의 개선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고 건축을 통해 공동체성을 회복하기를 열망했다. 또 한 인위적이거나 자연 환경에 반하는 건축을 거부함으로써 ‘흙건축의 대가’ ‘생태 건축 가’로 불려 왔다. ⓦ 정기용은 평생에 걸친 자신의 건축 철학을 ‘감응(感應)’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그에 따르면 건축에 있어서 ‘감응’이란 하나의 지형과 땅이 가진 잠재력과 그 땅을 쓰고자 하 는 사람들이 이루어내는 작용과 반작용이 감성적으로 일어나는 데서 건축의 이미지나 형상이 싹트게 되는 과정이다. 그는 어떤 지역의 기후/역사/문화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풍토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개별 단위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로 건축이 나 도시를 이해하는 풍경의 결합을 늘 강조했다. 실제로 선생은 <무주 공공 프로젝트>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 건축의 선례를 남겼다. 그 중 후자는 ‘시민 운동 에 의해 사회가 생산한’ 건축이란 점에서 더욱 마음을 사로잡는다. ⓦ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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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뎁스리포트 |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영화와 기억 사이에서 선생을 기리다 글 | 강병국 본지 자문위원, 동우건축 소장 선생을 닮은 영화 건축의 외관과 겉치장에 집착하는 요즘, 그 속에서 살
람들이 내 말은…….”
아가는 ‘사람’과 눈을 맞추는 건축가, 머리가 아니라
영화의 시작, 쉰 목소리의 이유부터 늘어놓는 정기용
가슴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노력하는 건축가, 그런 건
선생을 뵙자마자 여러 가지 상념이 밀려오면서 영화
축가를 담은 짧은 이야기가 다큐 <말하는 건축가>다.
몇 분을 놓치고 말았다. 정기용 선생이 우리 곁을 떠
물론 영화는 정기용 선생의 모든 것을 보여 주지는 않
난 지도 벌써 1년, 그의 목소리처럼 영화도 어렵사리
는다. 아니 보여 줄 수도 없다. 선생을 아는 지인들에
세상에 나왔고, 그래서 고맙고 반갑고 기쁘고, 또 그
겐 건축적인 메시지도, 진정성도 부족할 수 있다. 영화
래서 영화는 꼭 그를 대하는 듯하다.
도 건축처럼 제한된 예산, 그 답답한 예산 안에서 감독
정기용이란 이름으로 검색되는 그의 작품들, ‘기적의
이 전하는 표현이고 기록이라면 이해가 될까?
도서관’, 12년간의 ‘무주 프로젝트‘, ’노무현 전대통령
“원래는 아주 매력적인 목소리였는데……, 그래서 사
의 사저’, 그러나 그에겐 춘천의 ‘자두나무 집’이 더 잘
영화 스틸 컷 ─ 자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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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말하는 건축가 어울린다. 가을 햇살이 따스한 어느 날, 선생은 딸을
영화는 그의 마지막 짧은 행적 2~3년을 담고 있다. 전
가슴에 묻은 주인 정상명 화백을 위해 설계한 자두나
개상 일민미술관에서의 전시 <감응, 정기용 건축_풍
무 집에 도착했다.
토, 풍경과의 대화>는 영화의 중심축처럼 무겁다. 그
“여기는 시간이 머무는 집인 것 같어…….”
건 이 다큐가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의 1960년대식
“도시에는 시간이 다 도망가 버리는데…….”
계몽주의가 아님에도, 선과 악으로 이원화된 구성 속
시간이 머문다는 것, 이미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선
에서 착한 편을 들어야 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은 아닌
생에겐 애절하고, 그래서 우리의 가슴은 먹먹하다. 피
지…….”
곤한 몸을 침대에 뉘이고 잠이 든다. 편안한 시골 고
전시의 성공 여부와 바쁜 일정만을 앞세운, 상업적 속
향에 온 것처럼.
물주의자로 비춰진 일민미술관 큐레이터로부터, 투병 생활로 많이 수척해진 아니 이미 고인이 된 정기용 선
영화 스틸 컷 ─ 자두나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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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받는 대우 앞에서, 우리의 자존감도 상처로 얼룩
자처한 악역으로 선생의 선하고 지리한 일상만을 담
지고 찢겨져서 분개한 마음을 억누르고 다스릴 길 없
아내던 모노톤의 필름도 순간 변주를 기대할 수 있게
었으니 말이다.
된다. 또 그런 역할이 없었던들 선생의 느긋한 천성이
그러나 선생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
일정에 맞추어 가속을 내기란 처음부터 쉽지 않았을
이 누구이며, 앞으로 어떤 과정이 전개되리라는 것
터. 영화는 좋고 예쁘고 선한 것만 채워서 완성되고 또
을……. 답답한 목소리를 가진 ‘말하는 건축가’는 그
그렇게 관객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렇게 기록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민미술관이
영화 스틸 컷 ─ 일민미술관에서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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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조성룡 선생 정기용 선생 곁에는 형제처럼 붙어다닌 동지 조성룡
런 행보는 계속되고……. <말하는 건축가>에서 조성
선생이 있다. 돌이켜보면, 두 분의 아웅다웅하는 모습
룡 선생의 등장이 드문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은 주변 사람들을 언제나 즐겁게 했던 것 같다. 두 분
암 선고가 전하는 무게감, 혼자 감내해야 하는 절망감,
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조성룡 선생이 학생들과
선생의 긍정적인 천성과 항암 치료로 회복되는 듯 구
크리틱으로 여념이 없는 설계실, 문이 빼꼼히 열리니
원의 손길이 다가올 즈음 다시 암은 전이되고, 성대 결
모든 시선이 그리로 향한다. 조용히 들어오려던 정기
절과 복수라는 부작용으로 상처와 절망은 더 깊어졌
용 선생의 한마디, “끝나면 조 선생이랑 차를 같이 타
을 텐데, 그 어둡고 슬픈 고독을 누가 알아주었을까?
고 가려고. 난 신경 쓰지 말고 수업 계속해!” 들어와
그럼에도 선생의 농은 여전했다. 5년 전인가 필자는
구석에 다소곳이 앉는다. 그러나 채 몇 분 이 지나지
정기용 선생의 결절된 목소리를 처음 듣고 그 이유를
않아 정기용 선생은 설계 스튜디오 여기저기서 학생
여쭈어 본 적이 있다. “홍대 앞에 그 유명한 노래방 있
들과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든다. 이따금 조성룡 선생
잖아? 거기서 노래하다 그랬지!” 또 선생은 인생의 소
을 의식해서인지 큰소리로 한마디하면서. “난 그냥 조
중한 마지막 시간을 절망하고 원망하며 보내지 않았
성룡 선생 조교니까, 내 말은 그냥 참고만 해!”
다. 전시를 준비하고 영화를 촬영하며 바쁜 시간을 보
쉬면서 잘 다스려야 할 아픈 몸으로 다큐멘터리 촬영
내는 것에 감사해 했고, 그 덕분에 사람들이 멋진 전
에, 또 괄시와 수모가 동반되는 일민미술관 전시회까
시를 만나고, 이처럼 아름다운 영화를 보게 되니 그 소
지,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의 친구는 반대다.
중한 기회에 감사해 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바람,
친구니까. 고통스런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했던 친구
햇살, 나무가 있어 감사합니다.” 선생의 목소리가 들
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 선생의 고집스
리는 듯하다. ⓦ
영화 스틸 컷 ─ 조성룡 선생과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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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뎁스리포트 |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말과 흙, <말하는 건축가>와 보낸 시간들 글 | 한선희 <말하는 건축가> 프로듀서 hansunhee@gmail.com 건축을 좋아한 영화인 <말하는 건축가>의 정재은 감독과 맺은 인연에 대해서
‘건축’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던
말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는 십여 년
대다수 영화인들과 달리, 어느 행사장에서 만난 정재
전부터 친구들을 통해 정재은 감독과 멀찌감치 알고
은 감독은 나의 홍보 엽서를 받아들고 “네가 이런 것
지내던 사이였다. 그러다 정재은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도 하느냐”며 유난히 눈을 반짝였다. 그에 힘입어 나
<태풍태양>(2005)의 제작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는 서울로 돌아와 정재은 감독에게 영화제 트레일러
기회를 가졌다. 잠실을 중심으로 서울의 공간들을 카
(영화 상영 직전에 나오는 짧은 예고편) 제작을 부탁
메라 앵글에 담는 정재은 감독의 취향과 감식안이 눈
했다. 부족한 예산에 제작비는 많이 못 드리지만 건축
길을 끌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나 마이클 만의
영화제에 상영되는 작품들을 공짜로 보게 해주겠다는
영화들처럼, 나는 공간과 건축물을 잘 다루는 감독들
달콤한 말로 부추겼다. 정재은 감독은 사비를 들여 가
의 영화를 무조건 좋아하곤 했다. 그런 맥락에서 <태
며 젊은 남녀 무용수가 춤을 추다가 몸을 이용해서 일
풍태양>은 내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고 지지하는
종의 건축적 구조물을 이루는 우아한 트레일러를 만
청춘 영화로 남았다.
들어 주었다. 정 감독은 영화제 상영작을 모두 관람했
우리가 건축에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고,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 상영 때는 한 젊은 음악가
을 확인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 2009년 나는
를 데려왔다. 훗날 <말하는 건축가>의 아름다운 테마
제1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건축과
곡을 작곡하고 정기용 선생이 즐겨 듣던 바흐의 골드
영화의 첫 만남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하는 작업을 했
베르크 변주곡 아리아를 직접 피아노로 연주한 강민
다. 홍보 엽서를 들고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서 영화인
국 음악 감독이 바로 그였다.
들을 만나 새로운 영화제가 생긴다며 알리고 다녔다.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감독, 프로듀서를 만나다 그 영화제를 계기로 정재은 감독은 건축 다큐멘터리
는다는 뜻이었을까. 이윽고 정재은 감독은 나에게 이
를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얼마 후 정
프로젝트의 프로듀서를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마침
감독이 『감응의 건축』을 읽고는 무주에 답사를 간다는
나는 이런저런 불편한 이유로 건축영화제 프로그래머
소식을 들었다. 건축가 정기용에 대한 다큐멘터리 촬
일은 더이상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그리고
영을 시작한다고도 말했다. 나는 다른 일들로 인해 촬
정기용 선생이 돌아가셨다. 정재은 감독은 혼자 고군
영에 동행하지는 못했다. 정 감독이 지리산 실상사 불
분투하고 있었다. 돈 한 푼 없이 과연 영화가 완성이
사 건축 관련 세미나에 동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
나 될 수 있을지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어린 조감
고, 영화 제작 지원 기금을 신청하기 위해 만든 짧은
독과 300여 시간의 촬영분을 편집하고 있었다. 촬영이
예고편을 모니터했다. 여름부터 나는 다시 두 번째 건
80% 정도 완료된 상태였다.
축영화제를 준비했고 정재은 감독은 일민미술관의 정
영화 프로듀서는 작품 제작의 전 과정에서 감독과 의
기용 건축전을 위해 기적의 도서관을 촬영하고 다녔
견을 나누며 고민하고, 작품의 완성을 위해 제작비를
다. 마침 그해 11월 11일은 제2회 서울국제건축영화
구하며,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적의 방법을 찾아 영화
제 개막일이자 정기용 건축전 개막일이기도 했다. 나
가 관객과 만나도록 하고, 더 많은 언론과 관객들의
는 잠시 극장을 빠져나와 6밀리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
관심을 유도하도록 기획하는 일을 한다. 가장 먼저 필
고 일민미술관으로 향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요한 것은 영화의 방향을 잡고 기획서를 쓰는 일이었
모르는, 암투병 중인 정기용 선생의 공개 강연을 반드
다. 정재은 감독은 나에게 14시간으로 압축된 촬영분
시 찍고 싶었다. 정기용 선생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을 보여주었다. 무주 프로젝트 답사 내용, 기용건축의
수척했으나 그 강연은 놀라울 정도로 힘이 있었다. 정
서울 구로구 항동 아파트 프로젝트, 지리산 실상사 프
재은 감독의 촬영팀과 다른 위치에서 일종의 B카메라
로젝트, 일민미술관 건축전 준비과정과 오프닝, 자두
역할을 했던 나는 그때 이미 <말하는 건축가>의 제작
나무집 방문 과정, 성균관대 강의실 풍경, 정기용 선생
진이 되어 있었다.
과의 길고 긴 인터뷰 내용 등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2011년 1월 2일 정재은 감독과 문자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정기용 선생이 직접 촬영한 영상물과 과거 방
“언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는 언니의 해가 될
영되었던 TV 영상 자료도 보았다.
거예요 화이팅!” “너만 믿는다 ㅎㅎ” 나의 무엇을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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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커를 닮은 말과 흙의 건축가
정재은 감독은 정기용 선생이 마치 록음악을 연주하
아상, 마치 미이라 같은 쇠잔한 육체로 도시공간론을
는 ‘록커’ 같다고 했다. 주류와 타협하지 않고 어떤 면
강의하던 정기용 선생의 뒷모습, 그리고 영결식장의
에서는 제멋대로이며 어디로 튈지 모르고 때로는 연
추모객들이 다시 함께 노래했던 ‘봄날은 간다’.
기에도 능하지만 투철한 자존심을 가진 예술가이자
나는 이 편집본에서 정기용이 우리 건축에 자신의 방
지식인. 나는 정재은 감독의 묘사에 충분히 공감하지
법론으로 제시한 것은 ‘말과 흙’이라고 생각했다. 중의
는 못했지만, 14시간짜리 그 압축본은 느낌이 좋았다.
적인 의미에서 말과 흙은 정기용과 <말하는 건축가> 모
이 프로젝트가 좋은 작품이 될 거라는, 관객들의 호응
두를 품어 내는 요소이다. 정기용은 우리 건축 문화에
을 얻어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특히 인간과 환경의
적절한 언설, 담론, 혹은 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신의
서정적이고 시적인 풍경, 도처에 깔려 있는 죽음의 이
건축 철학을 말로써 표현하고 설득하려 했던 인물이
미지들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현재 완성된 영화에는
다. <말하는 건축가>는 그런 그의 ‘말’에 주목한다. 정
담기지 않은 장면들이 있다. 무주 등나무 운동장에서
기용은 건축 재료의 측면에서 흙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정기용 선생이 즐겨 불렀다던 ‘봄날은 간다’를 연주하
실현하려 했던 인물이다. <말하는 건축가>는 인간 정기
던 색소폰 할아버지, 무주 추모의 집 죽은 아내의 납
용이 ‘흙’으로 돌아가기 전 1년여의 시간을 다루는 작
골함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흐느끼던 젊은 사
품이다. 여기서 말과 흙은 건축 활동의 수단인 동시에,
내, 자두나무집 마당에 묻힌 집주인의 딸과 성모마리
인간 존재와 사멸의 토대인 것이다.
영화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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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의 다큐가 되기까지
투자자를 찾아 건축계와 영화계의 문을 두드렸지만
로, 영화가 특정한 정치적 지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건축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막이 관객들의 이해를 도울
양자에게 모두 생소한 것이었다. 건축계는 영화 작업
수는 있겠으나 복합적인 해석과 자유로운 감상을 방
에, 영화계는 건축 소재에 낯설어 했다. 건축계는 역
해할 거라 여겼다. 말하자면 정재은 감독은 다큐멘터
사를 기록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방법으로서 영화의
리 장르의 관습적이고 상식적인 장치들을 거부했다.
힘에 무지했고, 영화계는 건축을 다큐멘터리로 만드
처음에는 의아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창작자로서
는 일에 반신반의했다. 다행히 젊은 건축가들이 우리
정재은의 스타일이며 그의 과거 작품들과 일맥상통하
의 뜻에 공감했다. 심원문화사업회의 제작비 지원이
는 것임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극영화를 만들
결정되고 후반 작업이 급물살을 탔다. 동대문운동장
던 감독이 다큐멘터리에도 자신의 작가적 서명을 일
프로젝트에 대한 추가 촬영, 정기용과 한국의 건축에
관적으로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긴 상식
대한 추가 인터뷰 촬영이 진행되었다. 비록 95분의 상
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시각으로 상식의 지평을 넓히
영시간 안에 그 인터뷰들을 다 넣을 수 없었고, 인터
는 것이 예술가가 하는 일이 아니던가.
뷰 삭제에 대해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했으나, 이 글
영국의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1초에 24번의 죽음』이
을 빌어 도움을 주신 건축가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
라는 에세이집에서 영화 매체가 삶과 죽음을 다루는
의 말을 올린다.
방식에 대해 분석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시간을 정
영화의 완성 과정에서 다양한 제목이 거론되고 수많
지시키는 사진 매체와는 달리 영화는 움직임을 통해
은 편집본이 나왔다. 나는 상식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
생명과 삶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1초
의견을 제시했다. 정기용의 과거에 대해 좀더 많은 정
에 24프레임의 정지, 혹은 죽음의 찰나들이 연계되어
보를 넣자, 정기용의 건축 작업 자체를 좀더 보여 주
이루어지는 일종의 환영에 다름 아니다. 영화는 죽음
자, 정기용의 정치적 입장을 좀더 명확히 하자, 관객
을 본질로 하는 매체이지만 죽음조차 살려 낸다. 반면
들의 이해를 위해 자막을 좀더 넣자 등등. 정재은 감
건축은 삶을 본질로 하는 매체이면서도 영화와 마찬
독은 나의 말을 주의 깊게 듣긴 했으나 다 받아들이지
가지로 죽음조차 살아 있게 한다. 죽음에 다가가던 정
는 않았다. 정 감독은 과거의 사실들이 아니라 영화적
기용이 살아 냈던 시간들을 기록한 <말하는 건축가>는
시간 안에서 관객이 정기용을 느끼기를 바랐다. 정기
나에게 삶과 죽음, 영화와 건축의 아이러니를 생각하
용이 설계한 건축물들에 관객이 직접 가보지 않은 채
게 한다. 정재은 감독이 제안했던 <말하는 건축가>의
영화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또다른 제목 중 하나로 ‘살림의 건축’이 있었다. 나는
정기용이 “정치는 빼버리라”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
그 제목을 더 좋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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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뎁스리포트 |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정재은 감독 인터뷰 2011년 2월 21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말하는 건축가> 정재은 감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개봉(3월 8일) 전이라 사전에 스크린을 받아 본지 발행편집위원들과 조촐한 시사회를 가졌고, 그 속에서 오 고간 의견들을 정리하여 질문지에 담았다. 정 감독으로부터 ‘건축 다큐’에서 ‘정기용 선생’에 이르기까지 다 양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이 자리에는 본지 편집위원인 최춘웅 교수(고려대)와 이 영화의 기획자인 한선 희 프로듀서가 동석했다. 정리 | 정귀원 본지 편집장
이 사람은 누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건축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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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의 인터뷰 1. 기용건축의 정기용 선생과 조성룡도시건축의 조성룡 선생이 ‘도시건축집단 ubac’란 이 름으로 공유하거나 서로 다르게 이해한 내용과 방식들은 한국 건축에서 개진되어야 할 문제들을 새롭게 확 인하기 위해서라도 드러날 필요가 있다. (김영철 본지 편집위원) 정재은 안녕하세요. 아, 최춘웅 교수님은 조성룡 선생이 설계한 <지앤아트스페이스>에서 처음 만났었죠. 그때 만 하더라도 정기용 선생과 조성룡 선생 두 분의 관계가 영화의 주요 스토리였거든요. 취재하느라 조 선생님을 많이 따라다닐 때였어요. 최춘웅 사실 첫 장면부터 조성룡 선생과 함께 등장하셔서 두 분 이야기가 어느 정도 나오겠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의의로 한두 장면 빼고는 거의 등장하시지 않더라고요. 정재은 처음에는 두 분의 한옥 리모델링 작업에서 시작했어요. 첫 장면도 집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의논하기 위해 집터를 보러 가는 장면 이었고요. 그런데 그 일이 연기가 된 거예요. 이후 이야기의 맥락을 잡지 못하고 거의 8개월을 흘려보냈죠. 그 러다가 선생의 건강이 악화되고 일민미술관 전시가 결정되면서 전시를 준비하는 건축가의 이야기로 가닥이 잡 힌 겁니다. 조성룡 선생과의 관계 조명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중단이 됐고요. 그래도 두 분이 함께 하는 시간 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카메라 안으로 들어오게 됐죠. 감독과의 인터뷰 2. 영화의 주인공은 대개 자기 목표가 뚜렷하다. 그것은 강력한 주인공이 되기 위한 조건인 데 그런 면에서 정기용 선생은 확실히 강력한 주인공이다. ‘건축은 문화다’ 라는 평생의 소신과 건축가의 사 회적 역할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정재은) 와이드 처음부터 정기용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염두에 두셨던 건가요? 정재은 주제와 스토리에 많은 변화가 있 었어요. 원래는 하나의 건축 프로젝트가 건축가, 건축주, 시공자, 감리자 등의 이해와 입장 속에서 완성되는 과 정을 담고 싶었죠. 누가 만든 빌딩을 찍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정기용 선생을 소개받은 거고요. 최춘웅 표정과 몸짓과 복장까지, 영화를 보면서 정말 최고의 배우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재은 첫 대면부터 배우를 캐 스팅하는 방식으로 접근했어요. 캐릭터로서 매력이 있는가, 또 다큐멘터리 주인공으로서 자기 삶을 스스로 연 출하고 표현할 능력이 있는가. 그런데 정기용 선생은 제가 볼 때 정말 훈련된 배우였어요. 매력이 넘치고 대중 매체와 친화력도 좋고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이 분을 선택할 수 밖에 없 었어요. 와이드 영화에는 또 한 명의 강력한 조연 배우가 등장하지요? 일민미술관 큐레이터 강성원 선생이 악 역을 자처한 느낌이던데, 너무 세서 혹시 연출된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웃음) 정재은 강성원 선생 과는 초면이었어요. 어느날 회의를 하기 위해 미술관 큐레이터가 올 거란 정보만 받았는데, 그분의 등장에 촬영 감독과 얼마나 기뻐했는지…….(웃음) 드디어 영화에 갈등을 담당할 중요한 캐릭터가 등장했기 때문이죠. 사실 강성원 선생과 정기용 선생은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사이였어요. 선생에게 바로바로 직언할 수 있을 만큼 친밀한 관계였고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성원 선생 역시 자기 목표가 뚜렷한, 강력한 조연이었습니다. 그런 강 력한 두 분이 충돌하니까 영화적인 갈등 구조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와이드 마치 문화와 자본의 권력 을 대변하는 사람처럼 비춰졌는데요. 영화를 미리 보시고 편집을 요구하진 않던가요?(웃음) 정재은 작품 전체 를 볼 줄 아는 분이에요. 작품이 좋으면 본인이 악역으로 나와도 인정하겠다, 그런 입장이셨죠. 작품을 보고 나 서도 크게 개의치 않아 했고,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해 주실 것 같아요.(웃음) 감독과의 인터뷰 3. 인간 정기용과 그의 건축 세계, 그리고 “죽음을 대면하며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의연한 태 도”.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은 달라진다. 더구나 균형을 잡지 못하면 객관성을 상실한 채 자칫 감상에 빠지거나 왜곡된 모습을 그려낼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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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웅 촬영 초반에는 정기용 선생의 건강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을 텐데, 촬영 도중에 고인이 될 거라곤 예 상 못하셨을 것 같습니다. 정재은 예상 못했죠. 진행한 지 중반 정도 됐을 무렵에 선생이 절 부르더라고요. 영화 를 그만 찍으면 어떻겠냐고 해서 이유를 여쭸더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는데 만약 더 진행하다가 영화를 못 만 들게 되면 넌 어떻게 하느냐, 그런 얘기였어요. 활동을 왕성하게 할 정도로 건강을 되찾은 거라 생각했고, 그렇 기 때문에 설마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선생에게 그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 건강이 더 나빠지더라 고 그것도 영화의 일부라고 말씀드렸죠. 최춘웅 선생의 마지막 시간들이 더해지면서 영화가 좀더 감동 휴먼 스 토리에 맞춰진 것 같습니다. 물론 투병 생활이 아니라 선생의 활동을 바라보고 있지만요. 만약에 선생이 고인이 되지 않았다면 영화가 달라졌을까요? 이를 테면 좀더 건축 이야기에 집중을 한다든가……. 정재은 영화에 건축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담으려고 했어요. 건축 자체에 대한 것보다 건축을 행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지요. 그 래서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드라마로 접근했고요. 그랬기 때문에 감정과 갈등을 담는 것에 비중을 뒀어 요. 결과적으로 더 영화적인 건축 다큐멘터리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감독과의 인터뷰 4. 정기용 선생은 건축가의 생각을 대중에게 전할 기회가 생기면 어떤 자리든 마다 않고 달 려가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선생의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달려간는 것. 아티스트가 자기를 뚫고 사회로 나오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정재은) 최춘웅 어쩌면 관객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이런 인간적인 내용을 다룬 부분이 아닐까 해요. 정재은 선생은 굉장 히 독특하고 창조적인 주인공이죠.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씬, 시나리오 작가들도 생각해 내기 힘든 씬을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서 만들어 냈어요. 마지막에 가족과 직원들을 불러서 봄나들이 가는 장면은 보통 사람들로 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선생다운 퍼포먼스에요. 갑자기 가게 된 거라 아이폰으로 촬영했는데, 저는 이것을 촬영 하면서 과연 이런 장면을 창조할 수 있는 캐릭터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어요. 물론 선생에겐 마지막으로 나무 를 보는 게 중요한 일일 수도, 혹은 어떤 의도를 담은 일종의 자기 연출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뭔가 보여 줄 수 있는 주인공이란 점에서 아주 특별하죠. 최춘웅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과거 영상들이 흥미롭기도 하고 또 가 슴 짠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아들과 차 안에서 직접 촬영하신 영상이 굉장히 인상 깊었고요. 정재은 선생 의 방에 비디오 자료가 대략 20개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 쓸만한 씬은 몇 컷 없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아들 씬은 꽤 괜찮은 영화적 장면 중 하나였어요. 비디오 카메라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아버지와 아들의 디테일한 일상을 스스로 포착한 것이죠. 그러한 장면은 우리가 카메라를 계속 들이댄다고 해서 건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더군다나 선생이 새롭게 공개할 내용도 아니에요. 선생의 과거 모습과 현재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점도 의 미가 있을 것 같았고요. 최춘웅 어떻게 보면 선생이 건축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가능한 영화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한편으론 정기용의 건축 이야기, 이를 테면 그가 어떻게, 왜 건축을 했는지를 통해 한국 건축의 단면 이라든가 공공건축이 뭔지,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인간애의 표현으로 건축이 좋은 수 단이 될 수 있는지, 등등 건축적 메시지에 대한 직접적 표현을 기대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 부분을 기대하고 본 사 람들에겐 좀 아쉬운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정재은 애초 생각했던 스타일리시한 건축 다큐멘터리가 결과적 으로는 한 건축가의 마지막 여정을 기록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곳에 와 있는 데요. 사실 주인공의 인생은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지지 않거든요.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주인공의 삶을 취재하 고 찍어 나가는 과정이 다큐멘터리라 볼 수 있죠.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정리해도 언제나 달라지는 상황이 처 음에는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선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담으면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삶을 얘기하는 다 큐멘터리의 잠재력과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더욱 영화적인 다큐멘터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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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최춘웅 교수, 정재은 감독, 한선희 프로듀서.
을 하게 되었죠. 물론 부족한 부분도 많고, 특히 저와 카메라의 거리보다 현장 상황 때문에 포기한 부분도 있고요. 감독과의 인터뷰 5.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인천이라는 도시를, <태풍태양>에서 잠실 풍경을 영화의 배경으로 그려 내어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인권 영화 옴니버스 <여 섯 개의 시선> 중 정 감독의 에피소드는 정말 건축적이다. <말하는 건축가>에도 전작들에서 볼 수 있는 정재은 감독만의 색깔이 묻어난다. 정재은이 만든 정기용에 관한 영화니까. (한선희) 와이드 그러고 보니, 건축과 건축가를 다룬 한국 최초의 극장용 건축 다큐멘터리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한선희 극장은 TV와 본질적으로 다른 매체예요. 방송용 다큐멘터리는 주제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급급한 편이죠. 정보 위주고 해설적이라면, 극장용 다큐멘터리는 (생략과 상징으로) 시각적 측면이 강하고 그 안에서 감정과 드 라마가 훨씬 중요하지요. 개인적으론 건축을 보여주는 데 후자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와이드 정 감독님 은 <고양이를 부탁해>, <태풍태양> 등의 극영화를 만들다가 처음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신 건데요. 그것도 건축 을 가지고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정재은 건축에 대한 관심은 원래 많았지만,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쓰면 서 건축적 해결 때문에 건축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다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사실 좀더 실질적인 계기 는 한선희 PD를 통해서예요. 한 PD가 제1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의 프로그래머를 맡게 됐는데, 그 때 제가 리더 필름을 만들었어요. 그때 많은 건축 영화들을 보면서 건축이란 카테고리로 이렇게 영화를 묶을 수도 있구나, 또 하나의 영역으로 발전시켜 봐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전에 건축 장르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제 나 름대로 도시나 환경에 대한 관심은 많았거든요. 마침 방안에서 시나리오를 쓰는 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와 현실을 만나고 싶은 생각도 좀 있었고, 또 형식적으로는 극영화만 계속 해 왔으니까 다큐멘터리도 한번 해 보자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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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은 감독.
도 있었고……. 이렇게 시작이 된 거예요. 최춘웅 크랭크인이 2010년 2월이니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분량 을 촬영하셨을 텐데요. 편집에 어려움이 많았을 듯합니다. 어떤 생각으로 편집 작업을 하셨는지도 궁금하고요. 정재은 촬영한 것 중에서 이야기로 사용될 수 있고, 잘 찍혔고, 또 그 안에 제가 생각하는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 는 것들을 추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약 400시간부터 시작해서 200시간, 80시간, 50시간, 25시간 이렇게 된 거 지요. 10시간까지 줄였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10시간 버전이 제일 감동적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아시다시피 촬영 소스뿐만 아니라 선생의 방대한 자료들을 선별해 90여 분 안에 다 담을 수는 없지요. 펼쳐 놓 은 선생의 삶 속에서 몇 가지를 선택하여 골라내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나중에는 선생한테서 찾지 않고 오히려 제가 받은 느낌에서 찾으려고 했는데, 그래서 가능했던 일 같아요. 감독과의 인터뷰 6. 이 영화에는 내레이션이 없다. 그래서 정기용이란 건축가에 대해 , 또 그의 건축관에 대 해 이 영화가 가진 생각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영화 속 선생의 말에 극도로 집중하여 독백과도 같은 그의 말들을 대화로 이끄는 것이다. 정재은 내레이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을 많이 했어요. 결론적으론 해설없이 감독의 생각을 너무 드러내지 않는 방향이 됐고요. 저는 선생의 삶에 대한 어떤 답을 가지고 이 영화에 접근한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이 걸어온 인생을 다 알지도 못하고, 또 제가 만난 선생과 다른 사람이 만난 선생은 다를 수 있고요. 그런 측면에서 내레이 션으로 선생을 해설하기에는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냥 관객들에게 선생의 삶을 펼쳐 놓고 스스로 보게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레이션 부분이 생략되니 선생에 대한 별도의 해설이 필요했죠. 뒤 늦게 힘 있는 전문가들의 인터뷰가 추가 촬영됐고, 이런저런 인터뷰를 하는 중에 선생이 돌아가셨어요. 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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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 선생이 생전 지향한 바를 고려한다면 건축 전문가들의 얘기보다 사용자의 얘기가 많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전문가들의 인터뷰가 상대적으로 많아 보인 이유가 있었네요. 정재은 사실 처음에는 사용자의 이 야기가 큰 파트였는데 이후 건축가에 포커스를 맞추는 바람에 비중이 작아졌어요. 특히 선생의 작업이 많은 무 주에 머물면서 다양한 사용자들의 인터뷰를 찍었죠. 무주 프로젝트 중에서 제일 좋았던 곳은 <추모의 집(무주공 설납골당)>이었는데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어떻게 공간에 반응하고, 또 공간은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촬영했어요. 무척 아까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선희 저도 <추모의 집> 사용자 인터뷰 부분이 굉장히 좋았 고, 95분짜리 1차 편집본에는 그 부분이 있었어요. 그것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정기용 개인에게 좀더 초점을 맞 추자고 해서 두 번째 편집본에는 전문가 인터뷰가 더 많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감독과의 인터뷰 7. 말과 글은 건축의 개념들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다. 암묵적으로 담겨 있는 건축 적 생각들이 다른 이들과 공유되고 건설적인 토론으로 발전되기 위해서 건축가는 말과 글로 그의 생각들을 정리하고 전달해야 한다. 언어로 승화된 개념들은 대화와 소통을 유도하고, 나아가서 건축인들 사이에 지식 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만나는 정기용은 독백보다 대화를 하고 있다. 그의 설계 과 정은 말하기 보다 듣기에 집중하는 대화와 교류의 과정이다. 정기용의 공공건축은 건축을 통해 사람과 사람 이 교감하고, 건축과 사람이 감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구한다. 일방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전개하기보다 상 대방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공공건축의 주인이 될 주민들을 배려하는 정기용의 모습은 공공건축을 설계하는 건축가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안겨 준다.(최춘웅) 와이드 선생은 생전에 건축가의 삶과 생각을 사회적 발언과 교육을 통해 말로써 남겼고, 또 힘든 투병 생활 중 에 전시 준비를 하고 책을 내고 영화를 찍으면서 한국 사회, 특히 한국 건축 사회에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 로 전했습니다. <말하는 건축가>라는 제목도 이러한 선생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정재은 제목을 정할 때 저는 비교적 단순한 의도를 가지고 결정하는 편이에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진짜 고양이를 부탁하 는 걸 보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 저한테 너무 많은 말을 하시는 거예요. 그것도 한번 시작하면 한 시간 이상씩……. 처음에는 열심히 들었지만 나중에는 힘이 들었죠. 그런데, 알고 보 니 선생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많은 말을 하시는 분이었어요. 한편으론 사람들이 선생의 말을 듣기 위해서 찾아오는 것을 보고 정기용 선생은 주변 사람들한데 말로써 힘을 주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선 생에 대한 제 정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제목도 <말하는 건축가>라고 붙였고요. 선생은 너무 직설적인 제목 아니냐, ‘밤의 건축가’가 어떠냐고 말씀하셨지만요.(웃음) 최춘웅 영화 안에서도 많은 말을 하십니다. 그런데, 보통 다큐멘터리에서는 카메라가 거의 제 3자의 입장으로 서 있던가, 아니면 구체적이고 확실한 대상이 되어 주 잖아요. 이 영화에서는 감독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고 선생의 독 백은 아니거든요. 누구와 대화하는 것인지 궁금했어요. 정재은 병세가 악화되어 더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선생은 구술로 책을 쓰셨다고 해요. 선생에게 ‘말하기’란 ‘글쓰기’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특 별히 저나 카메라를 향해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진 않고요. 바깥을 향해 더 많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거 지요. 최춘웅 그래도 무주 안성면사무소 목욕탕에서 목욕하는 장면이나 명륜동 집에서 햇살을 받아내는 장면은 굉장히 친밀감이 있거든요. 정재은 아, 그 장면들은 촬영 감독의 역할이 컸어요. 저는 말을 거는 대신 조용히 선 생의 행동을 지켜보자는 입장이었지만 촬영 감독의 생각을 달랐어요. 선생의 얘기를 계속 끄집어내고 끊임없이 소통하고 친해지면 어느 순간에 또 다른 뭔가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었죠. 특히 명륜동 집에서 햇빛 을 받는 장면은 전적으로 촬영 감독과의 교감을 통해서 이루어진 장면이에요. 워낙 마음이 따뜻한 분이어서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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텝들에게 무지 잘해 주셨어요. 저희들 또한 선생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고요.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겁게 일했던 것 같습니다. 감독과의 인터뷰 8. 정기용이 말한 건축가의 정의는 지식인이다. 기술직도 전문직도 아니다. 건축을 통해 세 상을 이해하고,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사람이 건축가다. 그에게 건축가로 산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었고, 건축은 세상을 바라보는 해석의 틀이었다. 그렇다면 건축 가는 어떤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하며, 그것은 제도적 교육 자체가 가능한 것일까? <말하는 건축가>가 관객 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정기용의 건축과 그의 일생을 통해 한 지식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고, 또한 건축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 기 때문이다. 건축을 단순한 직업으로 국한하지 않고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의 틀로 받아들일 때 건축가들은 사회의 창의적 지식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최춘웅) 와이드 선생이 일민미술관 전시를 통해 건축이 무엇인지, 건축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보여 주고 싶었던 것 처럼 감독님도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그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요. 정재은 건축가는 자신의 이름을 걸 고 작품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정기용 선생 뿐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에게 해당되는 정의겠죠. 저 는 선생이 걸어온 길이 독립적인 자기 작품 세계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더 잘할 수 있게 환경을 바꿔 나가 는 일에 애써 온 과정이라고 봐요. 그러한 한 사람의 초상이 모든 영역의 예술가들에게 더 보편적인 의미로 다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요. 시스템이 대형화되고 견고해지면서 건축이든 영화든 모든 분야에서 자기 이름 을 걸고 홀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어려워졌어요. 이 영화가 한 건축가의 초상을 통해 저기도 그렇구나, 드 라마 속의 화려한 건축가의 모습이 다가 아니구나, 이런 것을 알게 되고, 어렵지만 저 사람이 저렇게 버티는 것을 보니 나도 힘이 난다, 그런 것들이 좀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와이드 <말하는 건축가>라는 제목대로
영화 스틸 컷 ─ 안성면 공중목욕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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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 컷 ─ 무주 공설운동장에서.
선생의 말과 행동에 좀더 집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에 쉰목소리로 강연하시는 모습이라 든가, 안성면사무소와 무주 공설운동장에 태양열 집열판이 건축가와 상의없이 설치된 것을 보고 분노하는 모습이 라든가, 혹은 <감응(感應) ─ 정기용 건축, ‘풍토, 풍경과의 대화’>전에서 도시 관련 전시(서울전)를 두고 미술관측 과 갈등을 드러내는 장면 등에서 사회를 향한 선생의 절망과 분노를 느꼈고, 또 그것이 영화 전반에 걸쳐 관통되 기를 바랬거든요. 후반부에서 좀 김이 빠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재은 2009년 12월에 뵙기 전까지 저는 선생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물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선생을 잘 아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그들이 보는 정기용은 또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차이들은 누구도 완벽하게 선생을 알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을 것 같고요. 자기가 기억하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기준으로 비슷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찾을 수도,정말 변했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아무튼, 건축가의 동의 없이 설치된 태양열 집열판 때문에 옆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격 노하는 선생에게 너무 심하게 화를 내시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수긍을 하시더라고요.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제가 원하는 선생의 모습을 보여 주시겠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고……. 저도 그렇게 불의를 참지 못하 는 선생의 모습을 찍고자 했고, 그렇게 조금씩 서로 타협해 들어간 것 아닌가 해요. 그러다가 후반에는 거의 화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지셨고요. 감독인 저와 주인공인 캐릭터 사이에 차이가 드러나면서 저는 선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어요.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한국 건축가의 현실, 여전히 문화가 아닌 건설 토목으로 인식되는 한국의 건축, 그리고 그것에 무관심한 대중들……. 선생이 전력을 다해 역설하고 어려운 모험을 강행하면서 사회적 건축가로 살아온 이유더라고요. 와이드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디자인 플라자는 한국 건축의 단면을 좀더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선생은 외국 건축가의 프라이드를 위해 터무니없는 공사비가 지불되는 우리 현실을 비판하고, 국내의 참여 건축가들은 새로운 계획이 주변 컨텍스트에 부합하고 역 사적인 장소성을 유지하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감독으로서 이 장면을 통해 특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정제은 무엇보다 정기용 선생의 공공 건축과 대비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그 대비를 통해서 분명히 뭔가를 보여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제가 그것에 대해 정확히 말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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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 컷 ─ 제주 기적의 도서관.
이 다음 편인 <말하는 건축가2>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건축 3부작을 생각하고 있는데,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는 아마 속편에도 계속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못 다한 얘기들이 거기서 좀더 다뤄질 수 있겠죠. 와이드 극영화가 아닌 건축 다큐멘터리를 연작으로 제작하려는 이유가 있는지요. 정재은 제 스스로가 좀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건축과 건축가를 좀더 알고 싶고, 좀더 이해하고 싶고……. 궁극에는 단순히 한국 건 축 혹은 한국 건축계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한국의 사회를 보고 싶은 거겠죠. 와이드 건축은 여전히 일반 관객 들에겐 조금 낯선 주제일 수 있겠는데요. 이번 영화도 그렇고……. 반응들이 어떤가요? 정재은 앞서도 언급했 지만, 내레이션이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불친절한 영화일 수 있어요. 반면 건축인들은 대략 누가 누구고, 또 무엇으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알지요. 예를 들어 일반인들은 1991년 대전 청사 현상 설계 작업 부 분이 과거인지 현재인지도 잘 구분 못해요. 그런데 건축가들은 그 장면에서 너무 반가워하죠. 정기용 선생과도 이야기했지만, 누구도 조망하지 않았던 한국 현대 건축의 여러 중요한 순간들과, 지금은 중견이 된 건축가들의 젊은 시절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경쟁했고, 또 현재에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일 은 매우 흥미로워요. 이것들을 엮어 간다면 한국 건축의 풍경들을 보다 많이 접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어요. 감독과의 인터뷰 9.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사람을 바꿀 것인가 환경을 바꿀 것인가,라는 고민은 사회적 변 화가 얼마나 본질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말하는 건축가>라는 제목에서 중요한 단어는 ‘말하는’ 이지 ‘건축가’가 아니다. 정기용이 추구한 변화는 땅과 사람이 갖고 있는 내면의 힘을 통해 유도되었고, 그 는 건축을 수단으로 삼아 더 큰 목적을 위해 일했다. 그의 건축은 말과 글만으로 할 수 없었던 또 다른 소통 의 매체로서 사용되었고, 포괄적인 목표는 자연과 사람의 교감,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감응이었다.(최춘웅) 최춘웅 정기용 선생은 <영월 구인헌>, <춘천 자두나무집>, <제천 간디학교 생활관> 등 일련의 흙건축을 남기셨 어요. 물론 선생의 흙건축은 그것의 기술적인 측면보다는 오래된 가치의 복원이란 측면으로 이해해야겠지만요. 영화에서는 <자두나무집>에서의 하루를 촬영하셨지요. 동측의 논을 정원 삼아 자연에 동화된 집의 영상이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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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장면 중에서는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정재은 완성도는 <구인헌>이 더 있다고 하는데 선생은 그보다 <자 두나무집>을 더 좋아하셨어요. 그 이유는 건축주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해요. 좀 아이러니한 것이, <자두 나무집>을 비롯해서 특히 자연 속에 앉은 선생의 작품을 보면 평생 파이터로서 목소리를 높이고 실천하며 살아 온 건축가의 모습과 다르다는 거예요. 오히려 자연 속에 납작하게 엎드려 숨어 있는 형태를 보면서, 사실 이 분 의 내면에는 숨어 있기 좋아하는, 소녀와도 같은 감성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본성대로 살 수도 있었겠지만, 스 스로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면서 살았던 것은 아닌가 싶은 게 짠할 밖에요. 이 집에서 깜짝 놀란 것은, 집이 자 연 안에 묻혀 있어서 잘 보이지 않고, 사는 사람과 집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에요. 번잡한 곳에서 벗어나 조용히 자연과 교감을 하면서 꿈꾸고자 하는 한 개인의 정신이 느껴졌달까. 문득 선생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황금빛 벌판의 좋은 계절에, 좋은 날씨에 선생도 저도 너무 행 복했습니다. 와이드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기도 하시는데요, 잠깐 동안이지만 그 집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은 듯했습니다. 정재은 참 슬픈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이 집 참 좋지? 그래서 너무 좋아요, 했더니 이 집에서 몇 개월만 쉬면 정말 병이 다 나을텐데,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평생 공공을 위해 힘든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베 풀고 나눠 주며 살았지만, 정작 자신의 아픈 몸을 뉘일 만한 공간은 없다는 말이잖아요. 그때 정말 절실하게 마 음에 와 닿았어요. 건축주에게 이 집을 몇 달만 선생에게 빌려주면 안 되겠냐고 얘기해 보고 싶더라고요. 와이 드 선생의 작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고 노무현 대통령 사저>도 기억될 만한 작품이지요. 영화에서도 선생 이 정치는 빼, 라고 말씀하시는데 혹시 의도적으로 빼신 건가요? 정재은 그렇진 않아요. 선생은 보여 주고 싶어 하시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저를 촬영하거나 드러내는 건 가족에 대 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어요. 정기용 선생과 정치에 대해서는, 분명한 것은 선생이 건축가로서 어떤 권력 이든지 가리지 않고 일을 하는 분은 아니라는 거예요. 좋은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건물, 또 그 속에 좋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건물이라면 하셨겠죠.
영화 스틸 컷 ─ 정읍 기적의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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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의 인터뷰 10. <말하는 건축가>에서 만나는 건물들이 성공적인 건축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설 계 과정에서 건축가와 주민 사이에 따뜻한 감응이 있었고, 건물과 땅 사이에도 비슷한 현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건축 작업의 성공 여부를 지어진 건물을 통해 드러나는 미학적 가치나 과학적 효율로 제한하는 것은 지극히 소극적인 시각이다. 정기용이 건축을 바라보았던 시각은 차원적으로 달랐다. 건물의 조형미나 마감 의 완벽함, 또는 재료의 세련미는 그의 건축에서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최춘웅) 와이드 정기용 선생의 이론에는 감성적 세계관, 장소의 개념, 특별한 인간관(인간에 대한 이해) 등이 있지만 구 체적 건축의 형식 언어에 대한 탐구와 개진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전문가의 인 터뷰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있고요. 정재은 저는 위대한 건축가의 영화를 찍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 니다. 또 제가 정기용 선생의 활동과 작품을 일일이 다 쫓아다니지도 못했고요. 다만, 과연 저렇게 열심히 산 사 람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영화도 그렇고 건축도 그렇고, 누가 어떤 기준으로 보 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는 전혀 다를 수 있다고 보고요.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헐리웃 영화를 기대하 진 안잖아요?(웃음) 한선희 이건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영화 쪽에서는 좋은 영화에 대한 일종의 어떤 컨센서스 (consensus)가 형성됩니다. 평단에서도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요. 그런데 서울국제건축영화제 프로그래밍을 2 년 하고, 이번 영화 작업을 같이 하면서 건축에는 그러한 컨센서스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어요. 아마도 제도나 정 책, 비평의 역할과 관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영화에서는 제도들이 열려 있고 공론화되고, 또 아카이브로 축적 이 되지요. 그런데 건축은 개별 작업들이 공적인 차원에서 아카이빙화되진 않죠. 사실 그런 것들이 축적되면서 과거의 것에 대한 판단과 합의가 생기고, 또 그것이 전수/교육되는 건데 그런 과정 자체가 우리나라 건축계에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정재은 어쩌면 그런 측면에서도 이번 영화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작업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중요한 이슈라고 생합니다. 반복되는 얘기 같지만, 독립적이고 주체 적인 한 사람의 개인이 작가로서, 건축가로서, 영화감독으로서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그러한 운명끼리 서로의 작업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서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를 찾아보는 일은 중요하겠죠. 저희 쪽에 서는,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볼 땐 어떤 기준이 있어요. 그의 상황과, 그가 만든 영화에 대한 정보, 그의 장점, 또 그가 이미 만든 영화를 통해 형성된 틀거리 등을 배경으로 영화를 보게 되지요. 블록버스터 영화를 볼 때 는 또 그것의 배경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고요. 건축가들은, 글쎄요, 잘 모르겠더라고요.(웃음) 최춘웅 건축 문화 전반적인 수준이 아직은 영화에 미치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말하는 건축가>를 통해 우리가 한 사람의 건축가를 추억하고 그의 건축을 논해 볼 수 있다는 것, 또 남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되새겨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한 일이에요. 와이드 일반인으로 하여금 건축의 의미를 다시 묻고 위상을 제고할 수 있게 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보고요. 정재은 저도 막연하게 건축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딱히 건축이 뭔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학교나 사회 안에서 건축이 무엇인지 교육 받거나, 그것을 즐기는 방법을 배워 본 적이 없죠. 저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 한편 건축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공부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요. 제가 공부한 만큼 관객들도 공부하는 거라고 보고요. 구체적으로, 건물이 건축과 어떻게 다른지, 건축가는 집 을 만들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겠죠. 또 건축가 중엔 꼭 이런 사람만 있을까, 그러면 건축 가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고요. 공공건축도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부분인데, 공공건축이 무엇이고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관심 가지고 지켜볼 수도 있어요. 아무튼 이를 계기로 건축가와 대중이 서로 에 대해 알게 되고, 소통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와이드 영화를 본 관객들이 적어도 정기용이란 이름 석자는 기억하지 않을까요. 정재은 그럴 수 있겠죠. 우리에게도 건축가의 표상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사 람들이 영화감독이나 소설가의 이름만큼 건축가의 이름과 건축적 활동에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목적 없는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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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 컷 ─ 엔딩 장면.
행위는 사라질 수 있다고 보고요. 저는 이번 영화를 진행하면서 건축 집단 안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좋은 이야기 들이 많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이야기들이 건축 바깥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것 같아요. 감독과의 인터뷰 11. 선생이 목욕탕 앞에 앉아서 할머니들과 담소를 나누며 봄날의 나른함을, 혹은 봄날이 주 는 어떤 선물 같은 것을 느끼는 장면은, ‘그가 우리에게 이런 사람으로 남고 싶어 했다’라는 결론을 뒤늦게 찾아내어 만든 것이다. 이 장면으로 ‘정기용 선생은 우리에게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 같아서 더 이상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었다.(정재은) 와이드 영화는 봄나들이를 끝으로 제자의 고별사를 통해 선생의 소천을 알립니다. 그리곤 장면이 안성면사무소 공중목욕탕 앞에 앉아서 고즈넉한 시선으로 할머니들을 바라보는 선생의 모습으로 옮겨 갑니다. 정말 가슴 먹 먹해지는 장면이에요. 정재은 영화 전체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가 결론 부분에 나오게 되는데, 엔딩을 만드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선생의 부재가 영화가 끝일 수는 없죠. 그래서 ‘정기용은 무엇을 한 사람 인가’, ‘이 사람은 어디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었나’, ‘이 사람은 궁극적으로 누구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건축 을 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됐어요. 그래서 찾은 장면이에요. 사실은 잘 못찍은 장면이라 일찌감치 버려서 13시간 버전에도 누락됐었는데. 한선희 저희는 이 장면을 두고 ‘베를린 천사의 시’에 빗대어 ‘안성면 천사의 시’ 라고 하지요.(웃음) 편집본을 하도 봐서 거의 무감한 상태가 됐는데도 나중에 극장에서 볼 때 이 엔딩 부분에서 다시 울컥하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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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뎁스리포트 |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자기를 찍는 기록 ─ 영화와 건축과 기록에 대해 글 | 함성호 본지 자문위원, 시인, 건축가 사실이냐, 진실이냐 감시 카메라와 기록 영화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기록
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영화의 객관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항상 진실이냐,
논리적으로 사실은 진실의 요소 명제가 될 수 있다.
사실이냐, 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기록 영화는 사실을
진실은 참과 거짓을 사실을 바탕으로 추론한다. “사
기록하는 것일까? 진실을 기록하는 것일까? 이 질문
람은 모두 죽는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죽는다”는 앞
을 좀더 주관적으로 바꾼다면, 이렇게 된다. 기록 영
의 두 문장이 참이므로 참이다. 그러나 “비가 오면 땅
화는 사실을 기록해야 할까? 진실을 기록해야 할까?
이 젖는다. 땅이 젖었다. 그러므로 비가 왔다”는 문장
앞의 질문은 기록 영화의 정의를 묻는 질문이고, 뒤는
은 세 개의 사실로부터 참이 아닌 거짓 결론이 나온
기록 영화를 찍는 태도에 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경
다. 이 추론의 진리표를 만들어 보면 일부만이 참이라
우의 수로 놓고 보면, 이런 이상한 망설임이 나타난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건을 긍정함으로써 전건을 긍
1. 기록 영화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진실 또한 놓쳐서
정하는 형식이다. 이것을 ‘후건 긍정의 오류’라고 한
는 안된다. 2. 기록 영화는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그렇다
다.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
고 사실이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나머지 두 경우는
므로 땅이 젖지 않았다” 이것은 앞과 달리 세 개의 사
이런 단호함이다. 3. 기록 영화는 사실만을 추구해야 한다.
실로부터 참이 아닌 거짓 결론이 나온다. 전건을 부
4. 기록 영화는 진실만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곁가
정함으로써 후건을 부정하는 형식이다. 역시 진리표
지가 있을 수 있다. A. 사실만을 추구함으로써 진실이 드러
를 만들어 보면 일부만이 참이다. 이것을 ‘전건 부정
나게 한다. B.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사실을 (관객에게) 이해시
의 오류’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이 참(진실)
켜야 한다.
은 아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순전히
사실 A는 1과 같아 보이지만 보다 객관적이다. 진실은
논리적으로, 기록 영화의 정의와 태도에서 우리가 취
드러나는 것이지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의지
할 수 있는 경우는 3과 4밖에 없다. 기록 영화는 사실
가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실이 무엇이
이냐, 진실이냐,다.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감시 카메라와 기록 영화의 차이
그러나 기록 영화는 엄연히 영화적 현실에 놓여 있다.
그러나 기록 영화는 <기차의 도착>에서부터 배우를 썼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이 갈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다. 카메라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없애기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감시 카메라는 기록 영
위해 뤼미에르 형제는 친척과 친구들을 동원했다. 심지
화와 무엇이 다른가? 감시 카메라는 공간을 찍고, 기
어 어느 전쟁의 기록 영화는 전투가 끝난 후에 도착한 촬
록 영화는 (앞의 논리적 결과를 반영하여) 사실이나 진
영 기사를 위해 전투장면이 재현되기도 했다. 강태호의
실을 찍는다. 이것이 감시 카메라와 기록 영화의 차이
논문 「다큐멘터리의 주관성과 신빙성」에 따르면, 1930
다. 기록 영화는 극영화와 같이 특정하게 제시된 파블
년대 대표적인 기록 영화 감독이자 영국 기록 영화 운동
라(fabula), 즉 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행위자에게
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어슨( John Grierson)조차도
일어나는 경험의 연속인 스토리(story)를 가지고 있
기록 영화를 현실의 사실적 재현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
다. 아무 의미없이,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의 전
는 플레허티(Robert Flaherty) 이후의 다큐멘터리를,
이에 주목하는 감시 카메라와는 크게 다르다. 다시 앞
‘자연적인’ 재료에 토대를 둔 영상물들, 곧 주간 뉴스나
의 논지와 연결하자면 감시 카메라는 사실이 아닌, 사
교육 영화 등, 기록 영화 발생 이전의 기록 영상물과 구
건(event)을 기록할 뿐이다. 따라서, 순수한 의미의 다
분하면서 초기 기록 영상물 형태로부터 본래 의미의 기
큐멘터리는 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상물뿐이고 그 외의
록 영화로의 이행은 자연적인 재료들에 대한 단순한 나
모든 다큐멘터리는 일정한 의미에서 보면 조작된 것이
열로부터 그것들의 정돈, 재배치, 그리고 창조적 형상화
며 주관적, 예술적인 작업에 해당된다
는 말은 반은
로의 이행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1960, 70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감시 카메라는 ‘기록’일 수도 없
년대 독일 텔레비전 기록 영화 분야의 대표적인 감독 클
고, ‘기록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사건을 ‘기록하
라우스 빌덴한(Klaus Wildenhahn)은 기록 영화 작가
는’ 일 뿐이다. 감시 카메라는 결코 ‘기록’이라는 명사로
나 감독은 코멘트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는 작업을 할 수가 없다. 기록 영화는 ‘기록’한다.
촬영된 자료의 몽타주를 통해서 이야기한다고 말한 바
기록은 인식 주체의 주관적인 작업이다. 이 인식 주체가
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기록 영화는 편집된 사실이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
라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기록 영화는 감시 카메라와
하면 우리의 감각이 철저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주관
더 확연히 갈라진다.
(각주1)
적이라는 것은 선택한다는 행위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는 말이다. 이 선택에 인식의 작용이 없을 수 없다. 따라 서 기록 영화가 추구하는 사실과 진실은 선택적으로 구 별되고, 편집되며, 왜곡된다. 그러한 사실을 반영하듯이 요즘에는 극영화와 기록 영화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 고 있다. 극영화와 기록 영화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것 은 사실의 반영으로서 기록 영화의 신빙성이 점점 떨어 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위기감에서 나온 것인지 칸초 크는 기록 영화의 신빙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해당 사건 또는 사태가 실제로 존재했어야 한다. 2) 촬영된 상황이 실제로 있었어야 한다. 3) 관찰 가능한 사건이나 상황이었어야 한다. 4) 그것이 당대의 것이어야 한다, 등이다.
영화 스틸 컷 ─ 전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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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건축가
최근 한국 독립영화계의 특징은 기록 영화의 약진이
영화 감독이 기록 영화를 들고 오랜만에 나선 것이다.
다. 이러한 기록 영화의 약진은 우선 다양한 소재를 잡
3편의 작품을 두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정재
아내고 그것을 끈기있게 파헤치는 실력있는 다큐 영
은 감독은 기본적으로 등장인물, 혹은 극의 상황, 심
화감독들의 성장이 가장 큰 이유지만, 비판 의식이 사
지어는 카메라가 머무는 시간에까지, 일일이 자기의
라진 채 정권의 나팔수로만 전락한 주류 언론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감독이다. 그 집요하고 정확한
관객의 반발도 한 이유가 되고 있다.
<말하는 건
시선이 성공한 예가 <고양이를 부탁해>이고, 가끔 혼
축가> 역시 그런 다양한 소재 중의 하나로 건축가에 대
자 뜨거워지다가 놓친 시선이 <태풍태양>이다. 정재은
한 기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감독으로서는 아마도 세 번째 작업의 돌파구를 찾다
받고 있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를 정재은 감독은
가 불현듯 기록 영화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재은 감독의 영화에 있어, 인용한 서술처럼, 건축이나
“나는 오랫동안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간 내 영
도시공간은 중요한 모티브였음이 틀림없다. <고양이
화에도 건축이나 도시 공간은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였다. 2009
를 부탁해>에서는 인천이라는 도시 사회학적인 의미
년 서울에서 열린 건축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면서 건축 다큐멘
가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
터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가운데, 주인공이 있어야
이 아닐 정도였다. 그러나 <태풍태양>에서는 역동성은
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접촉할까 알아보던 중 정기용 선
얻었는지 모르지만 공간을 잃었고, 동시에 시선도 잃
생님을 추천 받고 그의 책인 『감응의 건축』을 읽은 뒤 무주 프로
었다.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에서는 다시 감독의 시
젝트를 둘러보러 갔다. 무주의 공공건축은 그간 내가 생각했던
선이 나타난다. 그런데 갸우뚱하다. 너, 누구니? 감독
건축과 매우 달랐다. 대개 멋있고 화려한 빌딩을 짓거나 유니크
이 모르는데 관객이 알 리가 없다. 결국 이 갸우뚱한
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건축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의 작
시선은 기록 영화답게 내내 포장되거나 편집되지 않
업은 좀 평범하고 보잘것없었다. 대체 이 건축가는 왜 이런 일
고 기록 대상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다.
(각주2)
을 그토록 열심히 했는가. 그를 만나 보고 싶었다.”
왜 ‘이런 일’을 그토록 ‘열심히 했을’까,란 의문이 이 영화의 동기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말하는 건축가> 는 ‘이런 일’과 그 일의 의미를 인간 정기용을 드러냄 으로써 찾는다. 영화에서는 낮은 데로 스며야 한다는 건축가의 선언과, 건축가 자신의 엘리트 의식이 모순 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자연과 건축에 대한 감상주 의도 여과없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이 영 화를 보는 내내 건축가 정기용에게 빠져들었다기보다 는 화면에서 맴도는 감독의 시선에 내내 붙잡혔음을 고백해야겠다. 정재은 감독은 2001년 영화로서는 드물게 스테디셀 러의 반열에 오른 <고양이를 부탁해>, 그리고 2005년 <태풍태양>을 만든 후 7년만에 <말하는 건축가>를 들 고 극장 나들이를 했다.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극
영화 스틸 컷 ─ 전시 준비 모임.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Direct Cinema와 Cinéma Vérité
기록 영화의 현장성에 대한 강조는 1960년대에 들어
다는 진실에 갈등하는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더 사랑
서면 들고 찍기(hand-held camera)의 발전과 동시
하고, 사실 보다는 사실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더 사랑
녹음이라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다. 따라서 칸
한다. 단적으로 ‘영화의 현실’이야말로 정재은 감독이
초크가 말한 기록 영화의 신빙성이 한층 높아지게 되
사랑하는 현실일는지도 모른다. 이 사랑이 이루어지
었고, 아울러 제작하는 사람들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지 않을 때 감독은 여지없이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있었다. 이렇게 진보된 기기에 힘입어 기록 영화에는
그에게 기록 영화는 너무 버거운 짐이었을까? 정재은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은 정기용을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 이 영화가 따뜻하
현실’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던 그룹들을 우리는 Direct
지 않고 안간힘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Cinema라고 부른다. 그에 반해 Cinéma Vérité는 대
1995년 3월 코펜하겐에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그
상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의 동료들은 기록 영화가 극영화와 구분이 안되게 변
정재은 감독은 냉정한 관찰자는 아니다. <말하는 건축
형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기록 영화의 순수함으로 돌
가>에서 대상과 카메라가 마치 무관한 듯 일정한 거리
아가자고 선언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여기서
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감독의 시선은 자꾸 대상을 만
(Hier und Jetzt)의 촬영’을 원칙으로 하는 이 도그마
지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끝내 대상과 밀착하지 못
필름(Dogma-Film)을 비롯한 기록 영화의 순수성을
한다. 결국 정재은은 건축가 정기용을 꿰뚫는데 실패
강조하는 모든 운동들이 기록 영화의 불가능성을 역
했고, <말하는 건축가>는 그 실패의 기록이다. 기록 영
설적으로 말해 주는 듯하다. 정재은의 기록 영화는 이
화가 꼭 대상을 완벽히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
미 극영화에서부터 있었다. 단지 정재은은 촬영의 ‘지
서 이 영화는 자기의 기록이다. 감독 자신의 기록일 수
금 여기’가 아니라 영화의 현실로서의 ‘지금 여기’를
도 있고, 건축가 정기용 스스로의 기록 일 수도 있다.
보여 준다. 그가 끌어안을 수 있는 대상들을 진심으로
무엇이든, 이 영화는 자기 자신들을 열심히 찍었고, 관
끌어안았을 때 그는 빛이 난다. ⓦ
객들은 실제 상황인 죽음 앞에서, 그것 앞에서 관용적 인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끌어내어 충분히 공감했다. 한편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정재은 감독에게 는 아무것도 아닌 현실과 동의어다. 정재은 감독에게 는 사실이나 내면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다. 그에게는 오히려 진심이 중요한 것 같다. 그것은 영화로 드러내려는 진실이나 리얼리티 같은 게 아니 다. 그것은 영화 자체에 대한 진심이다. 그는 진실보
각주 1. Vgl. Ortrud Rubelt: Soziologie des Dokumentarfilms. Gesellschaftsverständnis, Technikentwicklung und Filmkunst als konstitutive Dimensionen filmischer Wirklichkeit. Frankfurt a. M. 1994, S.188. 각주 2. 「한국 다큐 영화의 ‘진실’을 만난다」, 임동현 기자, 20120308, <한국인터넷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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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뎁스리포트 |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이 남긴 고민거리 ─ 영화 속 메시지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 글 | 이종건 본지 편집고문, 경기대학교 교수 왜 정기용인가? 우리 건축 사회에는 유독 말을 잘하는 사람이 둘 있다.
의 모습이다. 그러니, 정재은 감독이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과 승효상이다. 물론 방식은 다르다. 정기용은
라 붙인 영화 제목은, 정기용 다큐멘터리로 정곡을 찌
형식과 내용의 두 측면 모두에서 공히 달변가고, 승효
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상은 형식은 어눌하지만 설득력이 상당히 뛰어난, 조
정재은은 오래 전부터 건축에 유별난 관심을 가졌고,
영남식의 달변가다. 둘 다 인문학에서 예술, 정치, 심
그로 인해 나와 접촉할 일이 잦았는데, 어느 날 커피를
지어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전 영역에
마시면서 문득 건축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 그랬
해박하다. 당연히, 이미지 또한 다르다. 정기용은 편
다. 망설임 없이 정기용을 추천했다. 왜 정기용인지 물
안한 옆집 아저씨 같은 선생님의 모습이고, 승효상은
어 즉답을 하곤, 글로 정리해 달라는 부탁에 다음의 글
번뜩이는 재능을 지닌 다소 범접하기 어려운 예술가
을 보냈다. 그 때 보낸 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긴다.
1. 죽음을 현실적으로 대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 활 발히 활동하는 그의 현장을 생생하게 포착할 시간이 우리에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둘째,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자는, 형식과 수사에 보내는 시간을 극소화한 채 자신 이 살고자 하는 삶의 본질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2. 이중 시선을 지닌 건축가다. 첫째, 서울대 미대를 다니고 프랑스에서 건축 공부 를 하였으며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거주한 후 귀국한 까닭에 한국을 안팎에서 조망 할 수 있을 이중 시선을 지니고 있다. 둘째, 한국에서 학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형성 되는 건축 영토를 지니지 않은 까닭에, 건축의 안팎을 조망할 수 있을 이중 시선을 지니고 있다. 건축가로서 대중 매체와 가장 오래되고 넓은 접면을 가져,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라는 이중 시선을 지니고 있다. 3. 한국 건축의 중심부를 볼 수 있다. 자신의 독특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건축 문화의 중심부에서 활동해 왔다. 한국 건축 사회의 유일한 문화 마피아라 할 수 있을 권력체인 서울건축학교 집단 ‘안에서’ 활동해 온 까닭에, 그의 이력을 따라가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면 한국 현대 건축의 핵심 덩어리가 적나라하게 출현한다. 4. 건축과 정치/사회의 접면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가장 정치적 성향을 띤 건축 가인 그는, 프랑스 특유의 사회주의적/좌파적 성향으로 인해 권력 바깥에서 문화적 비판 세력의 일부로 살아온 까닭에 타 문화와 연대하는 방식을 읽어낼 수 있고, 노 무현 정권 당시 정치권력의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자신의 건축을 실천하려고 도모 한 까닭에 건축과 정치가 결합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한계와 가능성을 읽어 낼 수 있다. 5. 정기용은 인간적으로도 무척 흥미롭다. 죽음을 자신의 일상의 부분으로 살아가 는, 게다가 60대 중반의 연령에서는 찾아보기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지적 호기심 과 어린이와 같은 천진무구한 낭만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그리고, 건축을 천직으로 삼아 살아온 건축가가 정작 자신의 집은 지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 그리하 여 이제 죽음을 앞두고 죽기 위해 살아야 할 역설적 상황의 자신의 집은 어떻게 그려 낼지, 그리고 노무현의 집을 설계한 이력도 범상치 않은 이야깃거리다. 따라서, 정기용의 건축을 하나의 문화 대상으로 접근할 때, 다음의 몇 가지를 염두 에 둬야 할 것이다. 1) 그의 건축은 곧 한국 현대 건축의 가능성이자 한계다. 따라서, 그의 건축이 보여 주는 가능성과 한계를 그려 내어야 한다. 2) 그를 통해, 건축과 정 치적/사회적 차원이 교차하는 지대를 정확히 읽어 내야 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의 건축 이력을 통해, 건축과 얽혀 있는 다층적 층위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을 절 묘하게(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핵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3) 죽음을 앞둔 상 황에서 하루하루 여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최초이자 최 후가 될 자신의 집은 과연 어떻게 그려 낼지 담아내어야 한다. 4) 마지막으로, 한평 생을 마감하는 건축가가 후학들에게 꼭 남기고 싶어 하는 자신의 건축적 유산이 무 엇인지 드러내어야 한다. 결국 정재은은, 나의 예상을 비웃듯, 상당한 결과물을 생산했다. 개봉관이 이 정도가 될 줄 전혀 예상치 않 았다. 섣부른 판단이지만, 호응도 성공적인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영화와 건축 모두 혹은 둘 중 한 영역 에서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워낙 헝그리 정신 으로 혼자서 맨손으로 덤벼든 것이라, 극심한 경제적 제약이 가장 큰 인자라 여기지만, 우리의 관심은 역 시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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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진짜 말은 생략된, 그럼에도 고맙고 기쁜 영화 정기용 다큐를 본 첫 소감은 즉각적인 실망이었다. ‘왜
<말하는 건축가>는, 애초의 기획 의도와 달리 궁극적
정기용인가’에 대한 제언이 영화에 거의 비치지도 않
으로는 감동 휴먼 다큐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인간극
았거니와, 무엇보다도, 영화에 비친 정기용이 ‘말이 별
장 영화판으로 회자될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건축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정기용
그 한계 안에서 정기용의 건축 메시지를 ‘크고 분명히’
은, 영화 밖의 정기용과 말하기라는 측면에서 현격하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적으로 그리 실망할 것은
게 다르다. 정기용이 말이 많은 이유는, 그가 우리 사
아닌 듯도 싶다. 죽기 직전까지 건축가 정기용이 그토
회에 대해 아마 상당하리라 여기는 분노의 에너지, 그
록 꾸준히 힘겹게 말하고자 한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
리고 거기에 따른 교설의 욕망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대면할 수 없는 불귀
영화에서는 그것이 지나치게 생략되고 약화되었다. 모
의 건축가가 되었으니, 이에 대한 대답은 전적으로 우
든 영화가 그러리라 생각하는데, 결과물은 빙산의 일
리의 몫이다. 그리고 나의 견해는 이러하다. 그의 건축
각일 것이다. 분명, 훨씬 많은 내용들을 확보했을 터인
에 대해 <와이드AR>을 통해 이미 세 차례 게재한 바
데, 어떤 이유에선지 편집되고 말았고, 나는 그것이 적
있으니, 여기서는 간략히 두 가지만 적시한다.
잖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적으로 어떠하든, 정재은의 건축영화는 우리 건축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척 고맙 고 기쁜 사건이라 확신한다. 건축을 돈을 벌기 위한 수 단으로 삼지 않는 우리 건축가들이 마주치는 가장 큰 벽은, 건축에 대한 대중의 지나치게 낮고 잘못된 인식 인데, 정재은이,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건축가 정 기용이, 그것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죽음을 불과 몇 개월 앞 둔 상태에서, 엄 청난 여생의 에너지를 바친 자신의 건축 전시회에서 그가 진실로 이루고 싶었던 것 또한 바로 그것이지 않 았던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모 든 것을 헌신하는 자신의 개인 전시회를, 그는 자신의 에고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건축 문화 인식의 제고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지 않았던가?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메시지 1. 신토불이 민중 건축
첫째,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은 ‘신토불이 민중
그에게서 건축이 빠져나가는 얄궂은 문제를 품고 있
건축’을 주창한다. 우리 건축은, 우리의 땅과 민중을
다. 건물이 들어설 맥락(그것을 둘러싸는 물리적, 지
따르고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에 따라 말하
리적,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환경)
면, 우리 건축의 문제도 이 땅에 있고, 그에 대한 해법
을 고려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심지어 건축을 전
도 이 땅에 있다. 물론, 여기서 땅이란 물리적인 땅을
공하는 학부생도 다 익히 아는 초보적인 건축 지식이
뜻하는 것이 아니라, 땅과 땅에 터를 잡고 사는 백성과
다. 그리고 프로젝트 의뢰자의 요구나 건물 사용 방식
그들이 땅에서 살아온 삶의 역사적 흔적과 궤적을 포
(건물의 용도)에 주목하고 배려하는 것 또한 건축 작
함하는 더 큰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엄청난 돈이 동
업의 기본이다. 물론, 르 꼬르뷔제처럼 자연과 대립하
원되는 스펙터클한 자본주의 건축, 오래 전에 이미 일
거나 자연을 지배하는 형식의 건축을 도모하는 건축
상적인 삶의 공간인 집뿐 아니라 심지어 예술 작품을
가도 있다. 때로는 현대성이라는 삶의 조건을 받아들
담는 미술관마저 그 스스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되어
여, 때로는 인간의 새로운, 그러니까 더 낫다고 판단
버린 작가주의 건축 곧 서구 건축을, 그는 완강히 배
한, 미래의 삶의 방식을 조직하기 위해 그렇게 하기
격한다는 말이다. 그가 건축의 물리적 측면들, 그중에
도 한다.
서도 특히 시각의 질에 무심한 것은, 바로 그 까닭이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에 국한되기보다 동양의 자
라 생각한다. 그가 뱉고 쓴 무수한 말들은 얼추 모두,
연관이라 부를 수도 있을 텐데, 자연주의 태도가 유독
‘건축이란 곧 삶의 조직’이라는 언명으로 수렴되는데,
정기용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 전통을
그가 말하는 삶이란 1퍼센트가 아니라 99퍼센트가 살
떠받들거나 존중하는 사람 혹은 소위 한국성 또는 한
아 내는 삶이다. 그리고 여기서 99퍼센트가 마땅히 살
국적 가치의 확보를 화두로 삼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아야 한다고 그가 믿는 삶이란, 자연의 품 안에서 자
그러하다는 데 있다. 정기용에게는 자연주의를 건축
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야말로 자연을 닮은 민초의
적으로 어떻게 해석해 내어야 할지, 그리고 현대성이
삶이다. 우리의 땅과 우리의 민중은, 그의 건축이 감
라는 작금의 삶의 조건에서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
응하고 순응해 가야 할 하나의 절대적인 궁극적 지향
지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다. 자연과 교섭하는 그의 건
점으로서, 아이디어나 영감만 받고 빠져나오거나, 그
축적 방식은, 그저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것, 그러니까
에 대응해 해결하거나 맞추어 주는 것으로 끝나는, 그
덩어리를 가급적 낮추는 것밖에 없다. 그의 건축적 신
러한 건축의 일차적 대상/조건을 능가하는 거의 종교
념이 형태, 스케일, 재료, 공간과 빛이라는 건축 언어
적 수준에 이르는 어머니 같은 존재다.
로 드러나지 않는 한, 그에게는 건축적이라 부를 만한
이러한 확신에 찬 그의 건축적 태도는, 바로 그로 인해
탐구와 실천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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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2.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 둘째 이슈는 건축가의 사회적 역할이다. 그리고 이것
사회적 인식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친 의식을 교육
은, 정기용이라는 한 개인을 넘어, 그를 포함하여 한
시키고 싶어 하기 때문이라 여긴다.
국 현대 건축의 제3세대에 속하는, 환갑에 이르렀거나
건물은 벙어리인 탓에 말은 ‘사회적’ 소통에 필수적이
넘긴 건축가 집단과 연관된 이슈이기도 하다. 이 집단
다. 건축가의 사회적 지위가 유독 낮은 우리 사회의 상
은 건축을 거의 페티시로 대한다. 건축으로 우리의 삶,
황에서는 특히 절실하다. 추상적이고 전체론적인 것
그러니까 사회적 삶을 넘어, 심지어 우리까지 (좋거나
보다 즉물적인 것과 요소적인 것에 주목하고, 기껏해
나쁜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들
야 “아름답다”거나 “멋지다”라는 형용사 정도밖에 표
은 거의 한결같이 자신의 건축 세계를 프리젠테이션
현할 언어가 없는, 그리고 공적인 것의 중요성에 대한
할 때, 인문학을 동원한다. 그러니 그들의 언어가 건
의식과 감각이 지나치게 희박한 우리 대중들에게, 하
축을 오직 문화적 대상으로 삼고, 그래서 덜 사회적인
나의 시작(poesis)으로서든 가장 공적인 속성을 띤 영
혹은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주로 구축의 기술과 기법
역의 작업으로서든, 건축이 지닌 다종다양한 의미와
에 주목하는 그들 다음 세대에 비해 지나치게 형이상
가치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말하기는 결코 피할 수
학에 경도되어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이들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사실 건축학자, 건축 이론
자신의 건축 작품이나 건축 세계를 소개할 때 대개 건
가, 건축 비평가들이 맡는 것이 더 적절하고 더 유리
축 사회에서 소위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을 넘어선 ‘캐
하다. 건축가라는 이유로 말하기 능력이나 효력이 열
치프레이즈(빈자의 건축, 비움의 건축, 채나눔 건축,
등할 이유야 전혀 없겠지만, 건물과 공간을 만들어 내
감응의 건축)’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그러니 <말하는
는 데 일차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떠맡는 건축가는,
건축가>라는 이름은 실상 정기용에 국한되는 것이 아
말과 사물 간의 간극, 괴리, 모순 등에서 자유롭지 못
니라 이들 집단에 붙일 수 있는, 이 세대 건축가의 공
하고, 그것을 해소하려 애쓸 때 자칫 그 둘 간의 본질
통적 특성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들이 처
적인 이질성, 비상동성, 불가역성, 번역 불가능성을
한 독특한 사회적 환경 탓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망각함으로써, 적어도 둘 중 하나는 망칠 우려가 농후
해외 건설에 기대어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그래서 건
하다. 정기용의 건축이 건축적으로 건져 낼 가치가 별
설과 건축을 구분하지 않았던, 그리고 박정희 군사 독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말하
재 정권에 분연히 맞서 휴머니즘이라는 삶의 가치와
기와 건축하기 간의 부정합성 혹은 단절이나 오류 또
저항이라는 올곧은 삶의 양식을 몸소 실천한 함석헌,
한, 인문학에 지나치게 경도된 그의 불균형성 탓이라
문익환, 김동길 등의 사회적 스승을 지녔던 사회 환경
생각한다. 매몰차게 말하자면, 그는 분명 공의로운 건
말이다. 이 세대가 유독 말 욕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축가이자 우리 사회의 멋진 멘토이긴 하지만, 그의 건
것은, 그들 또한 사회적 스승으로 자처해 건축에 대한
축은 보잘 것이 없다.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 선생의 건축적 유산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남긴 건축적 유산이 형편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그의 앞 세대 건축가들이 남 긴 것보다 더 귀한 고민거리를 우리에게 남겼는데, 몇 가지만 성급히 짚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시각적으로 매끄럽고 근사하지 않은 건축을 거침이나 무작위성의 미학 혹은 타자 의 미학으로,•몸 낮추기 건축을 페미니즘이라는 글로벌 담론이나 자생풍수론에 편 입시켜 우리 식의 여성적인 건축으로,•그가 내세운 감응의 건축이라는 키워드를 감통(empathy)이나 기(氣)의 건축으로,•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쓰임에 주목 하는 사용 가치의 건축을 대항 자본주의 건축으로, 발전시키는 것 등, 그리고•그의 가장 큰 덕목인 건축의 윤리성과 공공성의 차원을 그가 별 고민하지 않았거나 무시 한 것으로 보이는 후기자본주의 포스트모던의 세계 안에서 어떻게(무소유의 건축?) 계승할 수 있을 것인가 등이 그러하다. 3월 11일은 나의 기억에 참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있는 건축가 정기용의 첫 기일(忌日)이다. 생전에 그 와 치열하고 통렬한 건축 대화 한 번 변변하게 나누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쉽고 그립다. 생전의 그를 은막에서 만나, 자신의 건축적인 욕망과 꿈을 이 땅과 이 땅의 민초들을 위해 기꺼이 내준 그의 삶의 방식을 찬찬히 곱씹어 가며 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 더불어 나의 건축적 삶의 내용과 방식을 다시금 상념해 볼 귀한 시 간을 가질 것이다.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처 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자신의 개인전에서 마지막 강의 를 힘겹게 하던, 몰골이 앙상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 며 지금 이 시간 삼가 조의를 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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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뎁스리포트 |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기적의 도서관과 공공 건축 공공에 대한 몇 가지 에피소드 영화를 보고 | 고 정기용 선생의 1주기 즈음하여 건축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가 개봉됐다. 낯선 소재의 다 큐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일주일이 지난 지금 일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이 영화에 대한 건축인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우선, 스크린으로 대중에게 건축(가)를 알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에 무엇보 다 감사해 하고, 선생과의 추억으로 눈물짓기도 하며, (공공) 건축가로서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맨다. 한편으로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는 건축가에 집중되다 보니 건축 이야기가 부족한 것에 아쉬움을 드러내고, 사회를 향한 선생의 통렬한 비판이 나 거센 분노가 죽음 앞에 산화된 듯하여 못내 가슴 아파한다. 아픈 몸으로 끝까지 일을 놓지 않았던 선생이 지 금도 원망스러워 아직 헌사를 나눌 준비가 안 된 지인들도 있다. <도시건축집단 ubac>란 이름으로 함께 공간을 나눠 쓰고 일을 공유해 온 조성룡 선생과의 관계 조명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각자의 영역이 구축된 두 분 이 이루는 독특한 관계 속에서 정기용 선생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두 분은 성균건 축도시설계원을 출범시키고 건축 및 도시 공공 영역의 발전을 함께 도모해 오고 있었다. 정기용의 공공 건축 | 비록 영화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나 이 영화가 건축인들로 하여금 먼저 간 선배를 기억하 고 그가 남긴 메시지를 서로 나누게 하는 데 기여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특히 정기용 선생이 그저 ‘말만 하는 건 축가’라기보다 ‘실천하는 건축가’라는 것에는 대부분 공감하는 듯하다. 물론 <말하는 건축가>란 제목처럼 정기 용 선생은 스스로 믿는 세상을 위해 필요한 곳이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많은 말을 했고, 많은 글을 남겼다. 하지 만 말하는 건축가가 어찌 선생뿐이랴. 게다가 그 말이란 것도 어떻게 보면 기본이고 당연한 것일 수 있다. 하지 만 그의 말은 늘 밖을 향해 있어서 독백이 아니고, 실천을 전제로 했기에 공허한 울림이 없다. 누구를 향한, 무엇 을 하기 위한 말이었을까. 최전방 공격수에 워낙 활동 반경이 넓어 꼭 하나만 집기가 외람되지만, 도시 공간이 거대 자본의 건축으로 뒤덮이는 것을 경계하고, 오히려 시민과 공공의 영역으로 되돌려져야 한다는 메시지에 주 목하고 싶다. 실제로 선생은 <무주 공공 프로젝트>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 공공 건축의 선례를 남 겼다. 그중 후자는 ‘시민 운동에 의해 사회가 생산한’ 건축이란 점에서 더욱 마음을 사로잡는다. 기적의 도서관 | “공공 건축 얘기를 하면서 ‘기적의 도서관’을 제외하고 갈 수는 없습니다. 공공 건축은 건축가 혼자, 관청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진정으로 결합할 때 비로소 힘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지점은 사회가 요청하는 건축을 누가 대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서관이 없는 나라가 나라냐”며 시민 단 ←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은 동홍동 문부공원 끝자락에 위치한다.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땅은 남쪽을 향하여 경사져 있다. 처음 대지 를 답사하였을 때, 시 관계자는 노인들을 위한 크리켓 운동장 옆쪽으로 도서관을 지어야 하는데 소나무들이 열댓 그루가 있어서 소나 무들을 제거한 다음 그 자리에 건립하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소나무를 베지 않고 설계하겠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가 능한지 의아해 했다. 열댓 그루 소나무는 중정에 의해 보호되고 어린이 도서관은 소나무들을 에워싼다. 도서관 중심에 돈 안들이고 소 나무 정원을 갖게 된 셈이다. 남쪽으로는 가급적 창을 작게 하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창을 열었다. 물론 실내에서는 중정을 향해 채광 창들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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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가 불을 지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는 십여 년 동안 작은 공간에서 홀로 도서관을 운영해 온 봉사자들과, 땅 과 공사비의 절반을 책임진 관청과, 사회적 동의와 공감대를 이끈 방송 매체와, 어린이 교육에 열의를 가진 지역 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획득한 공간이다. 이 프로젝트는 2003년 순천을 시작으로 서귀포, 진해, 제주, 정읍 도 서관 등이 차례로 개관했다. 기적의 도서관은 개념, 재료, 구조, 공간 그리고 진행 방법 등에 있어서 몇 가지 기 본적인 합의 아래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다양한 행위와 공간 활용이 가능한 창고 이미지를 가질 것, 재료는 재 활용이 가능한 철골조일 것. 각각의 도서관은 이를 설계하는 건축가 각자의 언어들이 풍부하게 묻어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등이다. 무엇보다 기적의 도서관은 건축가와 시민 단체, 지역민들이 공모하여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소위 ‘내러티브 건축(narrative builing)’의 전형을 보여 준다. 그것은 기능만을 만족시키는 집이 아니라 (또 멋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무궁무진한 맛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집이다. 그래서 이 기적 같은 도서관들은 건축가의 손을 떠나면 어이없이 변경되거나, 프로그램의 부재로 생명력을 잃고 마는 공간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순천 기적의 도서관을 포함하여 기적의 도서관 건립 운동은 공공 건축이 더 이상 건축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줬다. 입안하고 사용하고 운영하는 모든 사람들이 협력하여 공공 건축을 생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 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럴 때에만 공공 건축은 예산의 낭비가 아니라 주민들이 사랑하는 건축물이 될 것이 다. 이것을 협치의 건축, 거버넌스의 건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공의 시대 | 공공 미술이나 공공 디자인, 공공 건축 등이 화두가 되는 시대이다. 특히 건축에서는 최근 서울 시내 공공 건축 또는 도시 계획 분야 등 건축 정책 전반에 대한 자문과 디자인 기획/총괄 및 조정 역할을 맡는 ‘서울형 공공 건축가’ 77명의 민간 전문가 인력풀이 구성됐다. 선정의 기본 원칙은 ‘디자인 역량’을 우선으로 하 되 출신 대학 및 근무처, 학계, 여성 비율, 중소 규모 업체 균형 등도 적정하게 고려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공 의 시대, 정기용 선생의 공공 프로제트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종호 교수 는 정기용 선생과 관련해서 공공 건축을 이야기하려면 가장 근본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건축이 하는 기능이 무 엇이냐, 라는 질문부터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공 건축을 수행하는 건축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 자질을 갖 추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음은 이종호 교수와의 대화를 글로 정리한 것이다. 공공, 공공 건축, 공공 건축가 ─ 이종호와의 대화 수상한 ‘공공’ | 정기용 선생과 관련해서 얘기를 시작한다고 그러면 가장 근본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건축이 하 는 기능이 뭐냐, 이런 질문까지는 하고 볼 일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에서 얘기되는 것은 아마도 그 수준까 지 넘나들지 못하는 것 같다. 공공이란 단어를 오염시킨 가장 큰 주범은 공공 디자인이다. 거기서부터 혼돈이 오 기 시작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함께 봐야 할 디자인은 모두 공공 디자인인데, 퍼블릭 디자인이 번역되어 수상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공공 디자인의 정의는 기껏해야 공공에서 발주하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 민간에서 발주한 것은 그 범주가 아닌가, 그래서 괜찮은 건가, 예를 들어 민간 발주처가 공공의 이익을 감안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라는 심각한 질의와 대면한다. 사실 디자인이 공공을 논할 때는 한두 걸음 뒤로 물 러서서 성찰이 필요한데 그러지를 못했다. 아마 건축쪽도 공공 건축, 공공 건축가에 대한 성찰이 없기는 마찬가 지가 아닐까, 싶다. 공공 건축가의 지구력 | 정의가 뭐가 됐든지 ‘공공’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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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도서관 산지천을 건너는 다리 쪽에서 바라본 도서관은 여러 개의 매스로 분절되어 있으면서 각기 다른 색상으로 분절이 강조 되어 있다. 특히 도서관의 기반이 되는 부분은 제주도의 토속적인 흑색 현무암을 상징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 일에 관여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의 공공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 나갈 수 있는 태도와 지구력 등이 문제 가 된다. 정기용 선생이 공공 건축가로서 실천해 나가려고 했을 때 부딪혓던 수많은 일들은 그의 ‘지구력’에 의해 해결됐다. 그러므로 공공 건축을 해 나갈 때 우리 나라 형편이 어떻고 관의 태도가 어떻고 주민들의 의식이 어떻 고 그런 것을 따지지 말고, 그럼 당신은 그런 공공적 과제를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그 속에서 돌파하고 견딜 수 있 는 힘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의지라도 있는가? 이것을 물어야 한다. 공공 건축가란 관에서 공공적으로 발주되는 일을 그래도 해낼 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그 능력이 무엇인지는 제대로 묻지 않는다. 요즘은 우리 나라에서도 자기가 믿는 공공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소위 더 넓어진 전선을 상대해야 한 다. 대화해야 할 상대들이 더 늘어났다는 얘기다. 서구 사회처럼 각종 위원회가 많아졌고 지방 자치제 아래 주민 들의 입김은 더욱 세졌다. 자연히 민선 자치단체장들도 이러저러하게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규방 vs 미시 정치 | 나는 자본을 배경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집을 짓는 행위를 규방적 건축이라고 부르기도 하 는데, 그러한 건축은 건축이 존재하는 한 영원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뛰어난 건축은 대 체로 패트런이 지대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모든 건축가가 규방적 건축의 방향을 고집하면 될까?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과제들은 누가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는 건축가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늘어나는 듯하다. 그러면 결국은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단어를 정리하면) 지구력을 우리가 갖추었는가, 대화해 나가는 능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이 문제를 고민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언젠가 ‘마이크로 폴리틱’이란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점점 더 현대 사회로 옮아 갈수록 건축은 규방의 영역이 아니라 미시 정치 의 영역으로 모여 드는 것 같다. 뭔가를 얻기 위해서. 그런데 그 얻고자 하는 일들이 대개는 공공성일 때가 많다. (물론 개인적인 욕심이 개입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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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건축과 지속성 | 공공 건축에서 지속성이란 무척 어렵고 중요한 문제이다. 공공 프로젝트일수록 작동 프 로그램이 내장되어 있지 않으면 황폐화되기 쉽다. 더구나 사회 변동이 빠른 시대에는 니드(need)도 빠르게 변 한다. 그런데, 그 프로그래밍도 건축가가 아니면 누가 할까, 싶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그것도 건축가의 몫이라 고 얘기한다. 변형에 잘 순응하거나, 잘 맞아 들어가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하는 힘이 건축에 있을 것 같다. 공공 건축가의 건축적 능력 | 원래 좁은 의미의 공공 건축가는 개인적인 건축적 활동을 접고 중립 지대로 들 어가서 건축가와 관과 주민들 사이를 교섭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네덜란드나 프랑스에는 작은 자치 단체 마다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씩 있다. 임기 중에 자신이 속한 자치 단체에서 벌어지는 퍼블릭 프로젝트들을 발 주부터 완성까지 관장한다. 구제척인 프로젝트는 또 다른 전문가들에게 의뢰를 하는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 울형 공공 건축가 제도는, 물론 M.P.란 분야가 따로 있긴 해도, 원래의 취지에는 안 맞는 면이 있다. 그러한 조 정 능력, 미시 정치라고 근사하게 얘기했지만, 결국 코디네이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며, 그밖에 ‘건축가의 건축적 능력’은 또 다르게 요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조정도 결국은 프로젝트 자체의 퀄리티, 공 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해결이 난다. 다시 말해 건축적 해결 능력, 그것으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건축의 감동은 건축가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정기용 건축이 주는 정서적 기쁨 이나 행복감일 수도 있고(그의 건축이 섬세하게 고민하고, 선한 방향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진정 성이 읽힌다고 할까),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지난 3년 간 마로니에 공원 프로 젝트를 진행했었다. 이제 착공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의 공공 프로젝트도 웬만한 전투력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각종 위원회와 주민들을 상대해야 하고 구청장과 담당자의 교체로 보다 폭넓은 사람들, 세상의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
↑“순천 도서관 순천시 금당지구내 근린공원과 초등학교 사이에 순천 기적의 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왼편의 강당과 오른편의 진입 공 간 사이에 납작 엎드린 도서관 몸체가 서로가 강하게 대비되면서 공원 끝자락에서 소나무 사이에 잘 어우러져 있다. 강당의 외피는 드라 이비트로, 진입 공간은 목재로 마감되어 있고 몸체의 경사진 지붕은 징크로 덮여 있으면서 내부 공간의 영역을 정직하게 외부로 전달하 고 있다. 크게 세 개의 공간이 하나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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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뎁스리포트 |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1945 - 2011. 3. 11)
연보 1945
주요 저서 단행본 『정기용 건축 작품집 1986년부터 2010년까지』, 현실
충청북도 영동 출생
문화연구, 2011.
방산초등학교—미동국민학교—경기중학교—검정
『기억의 풍경』, 현실문화연구, 2010.
1964 -1968 서울대 미술대학 응용미술과
『기적의 도서관』, 현실문화연구, 2010.
1968 -1971 서울대 대학원 공예과
『감응의 건축』, 현실문화연구, 2008.
1971
고시
『사람 건축 도시』, 현실문화연구, 2008.
1972 -1975 파리 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서울 이야기』, 현실문화연구, 2008.
1975 -1979 파리 제6대학 건축과
공저
『건축가가 말하는 건축가』, 부키, 2011.
1978 -1985 파리 소재 건축 및 인테리어 사무실 운영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책보세, 2009.
1979 -1982 파리 제8대학 도시계획과
『상상하다』, 한국문화관광 정책연구원 편, 2006.
1986
『건축가는 어떤 집에서 살까』, 서울포럼, 2005.
1987 -1990 기용건축 운영, 창조건축 상무
『건축이란 무엇인가』, 열화당, 2005.
1988 하싼 화티 <이집트 구르나 마을 이야기> 번역 출간,
『문화도시 서울 어떻게 만들 것인가』, 시지락, 2002.
『이미지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생각의 나무, 1999.
프랑스 정부초청 장학생 선발
귀국, 기용건축 설립
흙건축 한마당 개최 1992 -1994 민족건축협의회 회장
역서 『이집트 구르나마을 이야기』(하싼 화티 저), 열화당,
1997 - 2009 서울건축학교(SA) 운영위원
2000. 도록 『City of the Bang』, 제9회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
1996 -2008 무주 공공 프로젝트 30여 개 2003 -2011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 2004
국관 도록, 2004.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
『감응:정기용 건축』, 일민미술관, 2010.
2005 -2008 문화연대 대표, 문화재 위원 2010
성균관대학교 건축과 석좌교수, 기용건축 대표
2010
일민미술관 개인전 <감응 : 정기용 건축>
수상 경력 1982 프랑스 노동성 주관 ANACT(노동환경개선 설계경기) 3
2011. 3. 11 대장암으로 타계
위 입상
제3회 교보환경문화상
2000 한국건축가협회 특별상 2004 서귀포건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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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건축상
순천시건축상
한국건축가협회 우수상
주요 프로젝트 1987 천주교 서울교구 공항동 성당 신축 공사
천주교 서울교구 길동 성당 신축 공사
1988 프랑스 문화원 인테리어 서울 쿤스트디스코 88 건축 설계 서초동 안나빌라.
1989 대전운송빌딩 신축 공사 1990 의왕 계원조형예술대학 본관 신축 공사
프랑스대사관 상무관 리노베이션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 전시관
1991 교보문고 인테리어
대전 정부청사 설계 경기
수원 선경도서관 계획 설계
1998 무주 안성면 청사
1992 강릉 종합터미널 계획 설계 영국대사관 사택 리노베이션
이태원 C씨 주택
계문사 사옥 계획 설계
무주 예술인 마을
무주 부남면 청사
무주 적상면 청사
무주군청 리모델링
1999 영월 남면 흙집 구인헌
강릉 종합터미널.
춘천 서면 흙집 자두나무집
무주 서창 향토박물관
무주 공설운동장
프랑스대사관 숙소 설계 경기
무주시장 현대화 계획
무주 마을회관
무풍면 주민자치센터
무주군청 안마당
무주 농업인회관
무주 버스정류장
동숭동 무애빌딩 신축 공사
효자동 사랑방
프랑스대사관 증축 계획 설계
효자동 사랑방
1994 가락동 근린생활 시설
일진 스포츠타운 계획 설계
수원 이영미술관 계획 설계
1995 진주동명중고등학교 신축 공사
계원조형예술대학 마스터플랜
서울예전 드라마센터 리노베이션
수유동 빌딩
관훈동 가나화랑 계획 설계
의왕 청계동 주택 신축 공사
부천 다가구 주택
프랑스학교 증축 공사
죽산 웃는돌
1997 무주 안성면 진도리 마을회관
서초동 안나빌라
은산학교 설계 경기
파주 연산다리 흙집
내유동 주택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무주 공설운동장.
춘천 자두나무집.
1993 계원조형예술대학 산업조형관 증축
동빙고동 동락당.
무주 안성면 진도리 마을 화단.
2000 파주 은하출판사
2004 동빙고동 독락당
무주 설천면 소방서
무주 보건의료원 리모델링
2005 김제 지평선중학교 기숙사/목공실 신축 공사
무주 이동 이동된장공장 신축 공사
2001 논현 코리아나 아트센터 스페이스 C
무주 종합사회 복지관
2006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 사저 신축 공사
무주 청소년 수련관
정읍 기적의 도서관 신축공사
무주 청소년 문화의 집
제천 간디학교 생활관 신축 공사
무주 예술창작 스튜디오
세종시 첫마을 기본 계획 설계 경기
무주 가로계획
무주 반딧불이 환경테마공원 조성 공사
무주 산머루 운동장
고창 노인요양원 신축 공사
2002 계원조형예술대학 정보관 제주 4·3 평화공원 설계 경기
분당 아거스 사옥
성북동 주택
영암 녹색대학
제천 간디학교.
제주 4・3 평화공원 설계 경기
2003 순천 기적의 도서관
서귀포 기적의 도서관
진해 기적의 도서관
2007 광주 주말주택 신축 공사
제주 기적의 도서관
2008 김해 노무현 대통령 생가 복원 및 쉼터 신축공사
무주 추모의 집
무주 노인전문 요양원
2009 김해 기적의 도서관 신축 공사
무주 무주읍 주민자치센터
파주 열림원
2010 김해 봉하마을 마스터플랜
김제 지평선 중학교 본관 신축 공사 김해 노무형 대통령 추모의 집 신축 공사
김제 지평선 중고등학교 도서관 신축 및
특별교실 신축 공사
수유동 조계종 삼성암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기숙사 신축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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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뎁스리포트 |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을 부르는 이름들 글 | 이종호 건축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수식과 역설
직 남아있는 흙집, 담 등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그것 을 만들었던 과정을 물어물어 채록했다. 하회마을 북 촌 댁 창고에서는 오랫동안 동네의 흙 담을 만들어 왔 던 판축 틀을 찾아내기도 했다. 결국에는 직접 살림집 과 학교들을 흙집으로 설계하고 만들어 냈다. 그러니 ‘흙 건축’의 그 이름이 그를 따라다니는 것이 결코 무 리는 아니다. 다만 스스로 썩 내켜 하지 않을 뿐이다. ‘건축계의 공익 요원’. 위트 넘치는 이 말은 건축 이
흙 건축의 대가, 생태 건축가, 건축계 공익요원 그리고
론가 김봉렬의 칼럼에서 시작되었다. 그에 의하면 우
기적의 도서관을 만든 건축가. 모두 다 세상이 건축가
리나라의 어떤 건축가들, 자신이 믿는 바 세상을 만들
정기용을 부르는 이름들이다.
기 위해 시간을 쪼개야 하는 그런 건축가들은 일이 있
‘흙 건축의 대가’란 이름은 그가 우리에게 소개한 책,
든 없든 정말 바쁘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말을 돕고
『구르나 마을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 건축가
글도 써야 한다. 그런 건축가들을 일컬어 ‘건축계의
하싼 화티. 그가 온전히 흙만으로 7000명이 살 집과 마
공익 요원’이라 부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정기용
을을 빚어내려 했던 40년대의 기록이 정기용이 파리
이 가장 심하다는 이야기이다. 공익 요원 건축가들에
에 처음 도착한 그때 마침 출간되었다.(Architecture
게는, 때로 나서서 행동해야 할 상황도 있다. 쉬운 일
for the poor, 1973) 책의 영향력은 컸다. 1968년의
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정기용은 앞으로 나선
혁명이 뿜었던 뜨거운 열기가 아직 남아있던 때였다.
다. 용산 기지 반환 운동, 공간 정의 활동, 문화 헌장
특히 점점 더 일상을 지배하려 하며 점점 더 세상을 획
제정 등이 그랬다.
일화시키려 하는 거대한 자본주의적인 생산 방식에
정기용을 부르는 말들은 그 뿐이 아니다. ‘공간의 시
대해 대안을 목말라 하던 때였다. 건축계의 상황 또한
인’. 바슐라르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 호칭은 왜일까?
다르지 않았다. 모더니즘의 끝자락에서 ‘국제주의 양
그의 공간들이 ‘시’와 같아서일까? 그러나 ‘시’적 감흥
식’ —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라는 정체 모를 현상들이
에 젖어 돌, 나무, 바람과 같은 자연의 ‘위대함’을 말
지역과 역사의 차이를 무시한 채 전 세계를 도배하던
하는 건축들은 적지 않다. 다분히 자폐적이다. 그에게
그때 그 무렵이었다.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그런 자폐적 부류와는 다르다.
그러나 그 번역본 한 권으로 ‘흙 건축’의 이름이 나온
계관의 호칭 ‘공간의 시인’은 오히려 그의 강고한 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그의 일관된 태도, 인식
계적 사고와 관련된다. 건축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람
과 실천 사이에 괴리를 남기지 않는 그의 태도가 있었
과 자연 사이를 이어주고 그것들의 의미와 그것들 사
다. 하싼 화티의 책을 접한 이후 그는 우리 주변에 아
이의 관계를 응축해 내려 한다. 그의 작업을 두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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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말해진다면 그것은 현실에 깊게 뿌리를 내렸음에
에게 이처럼 많은 수식어를 붙여 불렀던 일이 있었을
도 다시 다듬어 울림으로 전달시키는 그의 감성이 이
까? 아니, 달리 보면 한 명의 건축가를 묘사하는 데 왜
끌어 낸 말일 것이다.
이리도 많은 말들이 필요한가? 그 많은 말들이 어쩌
현실에 뿌리박힌 그를 두고 많은 이들은 그를 ‘사회
면 건축가라면 들어서 마땅하고 또 당연한 말들임에
적 건축가’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행동 때문만은 아
도 그 이름들이 왜 그에게로만 쏟아지고 있는가? 참
니다. 그의 생각과 작업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으로 특별하다. 물론 그 특별함 들은 그가 보여 주고
건축을 넘어 도시와 환경 전반에 걸친 그의 발언들 때
있는 작업, 활동, 언사를 포함한 전인격의 총체 때문
문이기도 하다. 건축 또한 세상에 속한 일이며, 건축가
이리라.
역시 사회적 존재라는 믿음이 그에게는 확고하다. 그
하지만 문득 해석의 틈을 다른 종류의 생각이 비집고
에게는 인간의 사회적 역할과 그 역할 속에 놓인 사회
들어선다. 이런 것이다. 세상이 그를 부르는 그 수식
적 조정자로서의 건축가의 역할은 애초 나누어질 수
의 이름들이 실은 정기용 그를 향한 것만이 아닐 수도
있는 일이 아니다.
있다는 생각 말이다. 오히려 세상이 그를 핑계로 해
가장 최근의 수사는 ‘감응의 건축가’다. 십년 넘어 진
서 오늘 이 사회를 함께 살고 있는 건축가들에게 요
행된 무주의 프로젝트를 정리하며 그가 스스로 이름
구하고 싶은 것들, 하지만 다른 건축가들로부터는 충
붙인 책 『감응의 건축』 때문이다. 그의 의인화법을 빌
족되지 못하고 있는 희망들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그
어 보자. 어느 날 마주한 무주 땅 안성면이 말을 걸었
렇게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역설의 생각, 의
다. “나 안성면이 한반도에 마지막 남은 땅 ─ 살아 있
혹 말이다.
는 생활이 산과 들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 인데 너 잘 만났다. 날 좀 지켜다오.”라고 말을 걸어 왔단다. 그래서 그 요청에 진솔하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 했다. 그 결과 그 지역과 지역의 사람들, 그들의 생활들 그리 고 그 곳의 군수 김세웅과의 사이에 다차원적 감응들 이 일어났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땅, 식물, 별 빛 그리고 바람 등과도 감응을 주고받게 되었다는 것 이다. 그렇게 응답하고 주고받으며 그 땅에 꾹꾹 눌러 만들어 온 그의 건축들에 대해 써 내려간 글이 그 책이 되었다. ‘감응의 건축가’. 어쩌면 스스로 만족해 하는 유일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많은 이름들이다. 이제껏 세상이 어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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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우리 사회의 건축가 정기용
건축가. 참으로 오래된 단어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는 일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그 단어의 정의가 언제나 고정 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집을 짓 는 일, 그 집을 짓는 자의 의미는 언제나 변화되어 왔다. 15세기 르네상스기의 이론가 알베르티는 “건축가는 목수나 벽돌공이 아니며 다른 여러 과학의 위대한 대 가와 동일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기원전 1 세기, 비트루비우스가 서술한 『건축 십서』의 체계를 기본으로 자신의 건축론을 펼쳤다. 하지만 1,500년을 사이에 둔 두 시대의 차이만큼 알베르티의 생각들은 비트루비우스의 그것과는 조금씩 그 표현이 달랐다. 특히 비트루비우스의 시절엔 인식될 수 없었던 ‘시민 을 위한 도시’ 그리고 ‘공공건축의 사회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알베르티는 이제 막 무르익고 있었던 이탈 리아 르네상스와 그 속에 한껏 열리고 있었던 시민 사 회 속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다시 말해 그 시대의 요구를 정확히 읽어 내고 또 비 껴가지 않았다. 산업혁명의 시기 또한 그랬다. 건축가들은 한편으로 뛰어난 기술자여야 했다. 공장과 철도역을 위해 전에 볼 수 없었던 커다란 공간을 신속히 만들어야 했고, 보다 긴 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는 섬세한 사회학자여야 했다. 급격하게 팽창하는 도 시의 인구를 수용하고 도시민들의 건강한 생활에 대 해 고민해야 했다. 새로운 상황 속에 새로운 요구들이 새로운 기술과 함께 넘쳐났다. 그 기술의 적극적 수용 자인 동시에 급변하는 사회에 대응하는 환경 기획자 로서 건축가들은 반응하고 움직였다. 그뿐인가? 우리 가 알고 있는 근대 건축(Modern Architecture)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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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비록 실패와 오류로 결론이
그렇다. 역설의 생각, 의혹은 사실로 드러난다. 결국
내려진 것들이 다수이지만 내딛는 한 걸음마다 그 시
정기용을 부르는 많은 이름들이란 이 시대가 요구하고
대에 대한 깊은 고민과 대응이 깃들어 있지 않은 것
싶은 건축가의 초상들에 다름 아니다. 특히 한국 사회
이 없었다.
의 현실이 만나고 또 불러내고 싶은, 그러나 발견되기
세상사가 펼쳐진 가운데 건축과 건축가가 있는 것이
어려운 건축가의 모습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들을 통해
지 어디 누에고치와 같은 자폐성 속에 가두어진 건축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건축가 정기용은
과 건축가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건축가는 누구
그와 같은 요구들, 즉 ‘지금 여기’의 호명에 가장 먼저
인가라는 물음과 답이 시대의 요구와 관계하면서 끝
그리고 바르게 응답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없이 확장되고 변화해 왔던 것은 그렇듯 당연한 현상
우리는 차라리 그러하지 못하는 다수의 건축가들을 위
이었다.
해 다음과 같은 수식어들을 준비하는 것이 더 옳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는 퇴행의 시간들이 함께
규방에 갇혀 담장 밖을 보지 않는 건축가’, ‘함께 나눌
한다. 또 그 퇴행이 다음의 진보를 위한 동력이 되기도
가치들에 무심한 건축가’, ‘건축의 내적 논리와 자율
한다. 건축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퇴행의 시간들이 삽
성만을 굳게 믿는 근친 교배 건축가’, 그리하여 ‘자신
입되어 있다. 자본과의 연루가 가장 극심하고 건축이
이 몸담은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건축가’
라는 울타리 내에서의 자폐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등등.
지금이 바로 그 퇴행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퇴행의 끝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 많은 수식어들을 버리고 그를
은 다음과 같은 묵시록이다. 건축의 역사에 우선해야
그저 ‘이 시대 우리 사회의 건축가 정기용’이라 부르
할 살아있는 역사, 꿈틀거리는 삶이 대상화된다. 대상
면 충분한 일인 것이다.
화된 삶은 건축 속에서 자리잡지 못한 채 추방되고, 그 자리를 상품, 권력, 유희 등의 욕망들이 대신한다. 건 축은 이제 그것들을 위한 포장술로, 관심 전환의 스펙 터클로 봉사한다. 이슈를 상실한 건축은 ‘건축계’라는 동네 속에서 근친상간을 거듭해 나갈 일밖에 남지 않 는다. 그러는 사이 외부 사회와 호흡하지 못하는 열성 의 유전인자들만 쌓여 나간다. 도시를 포함한 건조 환 경 전반의 변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기울일 능력도 없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끝없이 확장되고 변 화해 온 건축과 건축가의 정의, 그것에 대해 되물을 권 리와 의무 모두를 상실해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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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바깥을 사유하는 일
에, 그 특이점에 척박한 땅 한국에서 그가 방금 도착 했던 것이다. ‘역사적 경험을 나누는’ 세대 개념을 따로 ‘코호트(cohort)’라 부른다. 연령에 의한 세대 구분보다는 경험 을 함께 나눈 공유치 또한 더욱 중요하다는 이유 때문 이다. 1940년대의 출생 세대지만 이후 인류 역사상 유 례없는 급변을 겪어 온 한국 현대사의 코호트 중 한 명 이 유럽의 ‘68세대 코호트 무리 속에 포개어졌다. “3
‘이 시대의 건축가 정기용’에게 오늘 또 다른 다수의
선 저지, 독재타도”의 구호 속으로부터 “금지하는 것
건축가들과 차이를 갖게 만드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을 금지하라”, “너를 파괴하는 것을 파괴하라” 등의
그의 삶에 어떤 특이한 지점들이 있는 것일까?
낯선 구호들 속으로 이동했다. 불합리한 체제와 권위
그가 농담으로 자주 던지는 이야기다. “일제 치하 열
에 대한 도전은 동일했으되 전선의 폭과 넓이는 생소
흘 동안(그는 8・15 해방 열흘 전에 태어났다)의 압박
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체 게바라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
과 설움 속에서 태어나…….” 그렇게 시작된 그의 삶
망과 옆구리에 달고 사는 모택동 어록은 낯섦을 넘어
은 6・25와 부친의 납북, 민주를 가장한 공화국들의
충격이었다. ‘68이라는 서구 역사의 거대한 특이점 속
점철과 마침내 유신을 거쳤다. 고스란히 한국 현대사
에서의 생생한 경험들이 한국에서 만들고 지녀 온 또
의 압축이다. 하지만 같은 세대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
다른 독특한 경험들과 화학적인 결합을 이루어 그 누
는가. 특별히 진한 개인사가 들어 있기는 해도 그것들
구보다도 강도 높고 밀도 높은 그 자신의 특이점을 이
이 그의 삶, 실존의 양태를 규정했다고 말할 수는 없
루고 말았다.
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하나의 특이점은 1972년 10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언제나 그렇듯 ‘68의 현장 또한
월에 있었던 유신 직후, 그때 그가 이 땅을 뒤로하고
혼돈이었다. 모든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에 있었다.
도착한 그 장소, 프랑스 파리다. ‘68 혁명 직후의 그
근대와 후근대,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 포디즘과
시공간이다.
포스트 포디즘 모두 분화 직전 최고조의 상태로 한데
사회학자 월러스타인이 말했다. 인류 역사에 지대한
뒤엉켜 있었다. 그처럼 넘치는 ‘혼돈의 자양분’ 속에서
영향을 끼친 혁명은 둘 밖에 없다고. 하나가 1848년의
필요한 것은 그것들을 꿰뚫는 통찰과 그 통찰을 가능
프랑스 대혁명이며, 다른 하나가 바로 1968년의 그 혁
케 하는 지혜, 지혜를 위한 사고의 균형 등일 것이다.
명이라고. ‘68이라 부르는 그 혁명은 현실 정치는 물
그러나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더구나 먼 나라로부
론 사상과 문화 그리고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 앞과 뒤
터 건너와 어렵게 자리잡은 이들에게 말이다. 그와 동
를 명확히 가르는 당대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현장
시대에 유럽이라는 같은 공간을 경험하고도 그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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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 속에 젖어버리고 만 사람들, 결국 ‘탈식민지 시대
말해 페이사쥐는 총체적인 대상과 관계하여 내가 품
의 지식인’이 되지 못한 채 지식의 수입상이 되어 버린
게 되는 어떤 주관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 뿐이 아니
많은 이들을 우리가 알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한 상황
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총체적인 대상 스스로도
속에 그는 대체 무엇을 붙잡아 그들과 다를 수 있었으
어떤 의미를 발한다. 특히 도시와 건축으로 만들어지
며 오히려 그 시공간들이 그 자신의 독특한 특이점들
는 인공의 풍경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기에 페이
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사쥐는 때로 자신 스스로의 생성과 변화를 통해 ‘권력
무엇보다도 그에게는 떠나온 땅, 그 땅의 기억이 생생
의 풍경’을 보여 주기도 한다. 정기용이 말하고 싶은
하게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땅으로부터 끊임없이 들
페이사쥐 역시 그 속에 변하지 않는 것, 변하면 안 되
려오는 소리들이 있었다. 아니 그 소리들을 들으려 애
는 것, 변해야 하지만 이유 있게 변해야 하는 것들을
썼다. 떠나온 땅에 대한 지속되는 연민, 그리고 쌓이
묶어 말하는 전체로서의 페이사쥐 ─ 풍경이다. 애당
는 분노가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를 치열하게 내몰
초 그의 풍경 속에는 건축만이 홀로 존재하지 않았다.
았다. 당시의 그곳 건축계가 그러했듯 그 또한 건축에
건축을 포함한 모든 것들의 총체로서의 전일적 페이
서 도시로 학습을 확장하였다.
사쥐 ─ 풍경이었다.
1978년 그는 불쑥 서울로 돌아왔다. 이곳은 이미 1970
다시 돌아간 파리와 떠나온 한국 사이의 거리는 좋은
년대 후반의 새마을 운동이 온 국토에 영향을 미치던
긴장이었다. 한국의 땅, 집, 생활, 그 모든 것을 품은
시절이었다. 운동이 몰고 온 일들 가운데 삶의 풍경
한국의 풍경에 대한 학습은 멈춰지지 않았다. 이듬해
에 가해진 물리적 폭력에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것
유신이 저물었다. 유신이 저문 풍경이 못내 궁금했던
을 확인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묻고 또 물
그는 다시 ‘서울의 봄’ 속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전
었다. 한국의 산하가 지금 어찌되고 있는지, 어찌 되
국으로 순례길에 나섰다. 이 무렵이 문화 동네가 처음
어야 하는지.
그를 발견하고 서로 소통을 시작한 때였다. 소통의 재
그가 즐겨 쓰는 표현 가운데 페이사쥐(paysage)라는
료는 많았다. 회화로 시작하여 도자기를 거쳐 건축과
말이 있다. 랜드스케이프, 경관과도 같은 말일 터이
도시에 도달한 그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양태의 다양
지만 풍경이라 부를 때 뜻이 더 잘 통한다. 페이사쥐,
한 변모를 보여 왔지만 그것은 단지 그의 실존이 드러
즉 풍경은 관찰의 대상이 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나는 통로의 다양함일 뿐, 그의 실존, 그 실존이 드러
있는 산, 강, 바다 등의 자연이거나 도시와 건축 등의
낸 다양한 양태들은 이 땅에 녹아 있는 전체로서의 풍
인공물들, 때로는 그 둘의 총합이 이루는 모습 전체
경을 지향하고 있을 뿐, 그러기에 그 양태들은 언제
를 말한다. 하지만 페이사쥐는 그렇게 객관적으로 그
나 그에게 건축의 바깥을 사유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곳에 존재하고만 있지 않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한
동력을 얻으려 했을 뿐, 건축에 갇히지 않는 일, 그것
다. 변화하는 동시에 관찰자인 ‘나’와 관계한다. 다시
이 그가 가진 특이점이 만든 힘, 차이의 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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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와 계몽
건축에 갇히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그에게는 끊임없이 유지되는 어떤 속성, 항성이 있다. 항성의 한 축은 ‘거 주’에 얽힌 이야기들이며 다른 한 축은 ‘계몽’에 얽힌 어떤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는 그런 읽기가 타당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의 실존의 특이점이었던 ‘68 혁명 직후의 그 때 그 곳은 분명 모든 것이 착종의 상태로 엉켜 흘러가고 있 던 곳이었다. 그 특이한 지점에서의 생생한 경험 때문 인지 그에게는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 영원한 것 과 순간적인 것, 엄숙과 유희, 합리와 상징 등 서로 함 께하기 어려운 대립적인 항목들이 교차하며 나타난 다. 한편으로 그러한 모순들의 합이 건축가 정기용만 의 특이한 아우라(aura)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사실 이다. 그 아우라 속에 자리하며, 또 그것을 정기용 특 유의 것으로 지속시키는 힘을 인식의 차원에서 일컬 어 ‘거주’라 부르려 하고 태도의 차원에서 일컬어 ‘계 몽’을 말하려 할 뿐이다. 오래 전 문화 도시 서울을 만드는 일에 관한 연구가 있 었다. 그 속에서 그는 문화 도시의 정의를 이렇게 시작 했다. ‘문화 도시를 위한 접근이 문화적인 도시’, ‘삶이 문화가 되는 도시’, ‘공공성이 확장되고 보장되는 도 시’,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도시’ 그리고 마지막 으로 ‘기본이 바로 선 도시’. 도시에서 ‘기본’이 언급되 었다. 도대체 우리 도시에서 얼마나 그 기본이 모자라 다 보았기에 그토록 절절한 언사가 필요했던 것일까? 아니 도시에서 기본이라 말해질 그 어떤 것들이 있기 는 있는 것일까? 그 말로 인해 논쟁이 만들어질 수도 있는 지점이다. 기본이라는 발화 자체가 지극히 계몽 적이다. 무엇인가를 절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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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궁금한 지점이기도 하다. 수차 말했듯이
오랜 사건들이었다.
그가 몸담았던 그 특이점은 중심/이성, 정신, 남성이
그 사건들 모두를 관통하고 있는 그의 인식 저 밑바탕
기울고 변방/감성, 몸, 여성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
에 바로 ‘거주’에 대한 그의 희망이 자리하고 있다. 스
던 그때였다. 뿐만 아니라 전단계의 온갖 근대적 인식
스로 적은 많은 글들 속에서 읽혀진다. 그 곳인 동시에
들이 공유했던 도구적 합리성과 그것이 낳은 짙은 그
이 곳이기도 한, 근대의 변모에 의해 뿌리 뽑히는 우리
늘들이 비판적으로 분석되던 그 때였다. 그 곳에서 어
들의 삶을 그 대지에 붙들어 매려 한다. 현재 벌어지
떻게 오래된 이름 “계몽”이 그에게 남겨지고 키워졌
고 있는 ‘생활 세계(lewenswelt)’ 전반을 존중한다. 그
던 것인지.
스스로도 그 안에 함께 ‘거주’하고 싶어 한다. 그 욕망
그러나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 해방의 시공간 속에
의 힘으로 긴 시간 여러 ‘거주의 장소’들을 실천해 내
서도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향 땅이 있었다. 그리고
려 한 것으로 읽혀질 수밖에 없다.
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대화의 이름을 빌린 비합 리, 난폭함에 대한 분노와 긴장이 유지되고 있었다. 해 서 제대로 완성되어야 할 우리 사회의 근대성이 그의 인식 속에 꾸준히 자리하고 있었다. 후에 이야기될 미 완의 근대, 성찰의 근대는 하버마스와 기든스에 앞서 고향을 벗지 못하는 정기용에게 더 절실한 일이었다. 하기에 ‘68의 코호트 세대에게는 새삼스럽고 낡은 이 야기일 수도 있는 ‘계몽’의 태도가 이후 그의 항성으로 작용되었다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 ‘거주’를 말해 보자. 모두가 알고 있듯 건축 가 정기용의 생각, 작업, 태도 모두를 가장 총체적으 로 드러나게 만들었던 것은 무주의 사건들에서다. 오 랫동안 그가 설파한 가치들, 이 시대 이 땅을 향해 던 져 왔던 그의 이야기들, 선언과 당위와 계몽을 포함하 고 넘어서는 모든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는 사건들이 었다. 그 땅을 살아가는 또는 죽어 혼으로 남은 사람 들에 대해, 산과 내와 들을 포함한 자연에 대해, 그 땅 을 작동시켜 온 사회 조직 모두에 대해 진심 어린 존 중과 세심한 관찰을 쏟아 그것을 작업으로 실천해 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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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들이다. 21세기 전반을 살아가는 건축가들에게 계몽 은 점점 낯설고 거주의 실천은 기대하기 어렵다. 선언 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 사이, 당위와 전략 사이를 채워 야 하는 과제들이 그들 앞에 수도 없이 널려 있다. 또 한 ‘기본이 바로 선 도시’라는 표현, 어딘가 있을 절대 적 기준을 우회하여 좋은 도시와 건축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의 모색도 과제로 남는다. 남겨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과제들을 이미 알기라도
2010년 11월, 준비 과정의 여러 일들로 볼 때 그리 해
한 듯, 정기용은 지혜로운 명제를 덧붙이고 있다. ‘차
서는 안 된다고 보았던 전시회가 열렸다. 특히 그 전
이와 반복’. 건축의 변화 가운데에서도 지속되며 변치
시회가 정기용의 건강을 더 위협할 수도 있다는 사실
않을 어떤 위대한 속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동시에
에 참을 수 없어 했다.
그 속에서도 그 시대의 요구에 항상 깨어 있으라는 명
어쨌든 그의 인식과 행동 그리고 실존의 치열함이 다
제다. 어쩌면 이 명제는 그 자신에게도 유효한 힘으로,
시 한 번 강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 시대의 건축가
스스로 가진 항성이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살아 거듭
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동시에 성찰을 요구한다.
나도록 만드는 충분한 힘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쉬운
꽤나 부담스럽다. 왜 건축을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건
일은 아니다.
축을 해 나가야 하는지에 새삼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상 안에서 반복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반복의
왜, 어떻게 건축을 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이
이념을 가능하게 해 주는 조건들을 넘어서지 못할 것
미 답하고 있다. 세상이 그를 부르는 많은 단어들이
이다. 그러나 주체 안에서 변화를 고찰한다면 우리는
그것이다. 그는 그가 받은 그 단어들을 다시 모아 ‘이
이미 이 조건들을 넘어서서 차이의 일반적 형식 앞에
시대 건축가의 초상’을 한꺼번에 보여 주려는 듯하다.
서게 된다.” ─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서
후학들에게도 역시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거주의
평생을 지속했던 그의 실천이 오늘 우리 사회 속에서
실천과 계몽을 함께 가로지르려 하기에 남겨지는 것
그토록 위대한 이유다. ⓦ
일민 전시 도록을 위한 글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한다. 일민 전시 도록에는 ‘차이와 반복’ 부분이 누락된 채 인쇄되어 3개월 후 해당 페이지만 재인쇄하여 삽입, 배포한 바 있다.
Wide AR no.26 : 3-4 2012 Depth Report 이 시대 건축가의 초상 ① | 정기용 그리고 <말하는 건축가>
와이드 AR 26 | Wide Architecture Report 26 | 2012. 3-4
3-4
트 2012•03-04 -
트 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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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건축 탐사 26 | 손장원> 안동에서 만나는 근대
088 ⓦ <사진 더하기 건축 06
| 나은중+유소래>
사진은 사진이 아니다 Photograph is not a photograph —백승우Back Seungwoo 094
ⓦ 전진삼의 FOOTPRINT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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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 근대 건축 탐사 26
안동에서 만나는 근대 손장원 | 본지 자문위원, 재능대학 실내건축과 교수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건축물과 양반 문화를 간직한 안동에서 근대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생뚱맞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안동을 잠깐만 살피면 그러한 생각이 그릇된 것임을 금방 깨닫게 된다. 오히려 안동은 경상북도 내륙 개발을 위한 철도 교 통의 거점이 되면서 도시 발달이 지체되었고, 많은 문화재가 망가지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 전통 도시 안동이 근대 도시로 바뀌면서 안동대도호부가 위치해 있던 동부동 과 그 인접 지역인 서부동, 신세도 일대가 안동의 중심부로 변모했다. 이곳에는 군청 과 세무서와 같은 관공서가 들어서 도심부를 형성해 나갔고, 근처에 위치한 안동역을 통해 물자가 오갔다. ⓦ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요 활동 공간은 도심부 주변에 위치한 법상동을 기반으로 했으며, 안기동, 안막동 일대는 초가집이 밀집된 생활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안동의 산업은 1922년을 기점으로 크게 변모했다. 일본인이 동부동, 서 부동, 신세동 일대에 영남양조, 안동주조와 같은 양조 회사를 세워 술을 생산하기 시 작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자동차 회사도 세웠다. 1925년에는 안동전기가 세워져 안동 지역에도 전기가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경제 활동에 비 해 다소 늦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우리나라 사람들도 근대적 형태의 회사를 설 립했다. 1928년에는 동부동에 경안양조가 세워졌고, 1930년에는 누룩 공장도 등장했 다. 1933년에는 서부동에 안동운송이, 법상동에는 안동목재가 들어선다. 1935년에는
군자정에서 바라 본 중앙선. 사진 우측에 사선을 이루는 방음벽 너머에 중앙선이 지난다. 법흥동 전탑. 사진 좌측의 방음벽 옆으로 중앙선이 지난다. 임청각—안동의 근대 기행은 안 동의 올곧은 양반 정신이 살아 있는 임청각에서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 법흥 종택으로 입향조 이증의 셋째 아들인 이명(李洺)이 1519년에 세운 집이다.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은 1911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이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팔 았다. 다른 이의 손에 넘어간 임청각은 중앙선 부설로 행랑채 일부와 문간채, 중층 문루가 철거 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지금도 곳곳에서 지은이의 정성을 느낄 수 있다.—최근 안동역과 중앙선 선로의 시외 이전에 따라 임청각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임청각 주인의 숭고한 뜻을 더 크게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Wide AR no.26 : 3-4 2012 Report
안동역 급수탑, 안동역. 안동역 급수탑과 안동역—급수탑은 다른 건물에 비해 키가 커서 쉽게 눈에 띈다. 그러나 안동역 급수탑은 역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자세히 살펴야 보 인다. 이 급수탑은 12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급수탑 가운데 12각형은 이 급수탑이 유일하다.—안동역사는 1938년 당시 4만7천 원이 투입되어 중앙선 역사 중에서 가 장 큰 규모로 세워졌다. 1942년 3월 중앙선 전 구간 개통식이 거행되기도 한 이 역사는 한국전 쟁 당시 파괴되었다. 그 뒤 임시 역사를 사용하다가 1960년 8월에 이르러서야 콘크리트 2층 건 물을 준공했다.
안동상공이라는 회사가 동부동에 세워져 인쇄 및 서적을 판매했고, 이어 법상동에 곡 물·목재를 판매하는 안동물산과 안동흥업(업), 안동가마니 공장 등이 창업되었다. 안동에 일본인이 본격적으로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늦은 것 으로 보인다. 그 배경에는 안동이 간직하고 있는 강한 전통성과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발상지라는 지역적 특성이 함께 작용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국권 상실의 시대를 맞은 상당수의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일제와 타협하거나 굴종의 길로 접어든 것과 달리 많은 안동 지역 지식인들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제 는 안동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생각은 중앙선 철도 건설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안동에 철도가 들어온 것은 1922년 착공된 경북선 전구간이 개통된 1931년 10월의 일 이다. 경부선 김천역과 안동을 연결하는 경북선의 종착역으로 세워진 안동역이 새롭 게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중앙선 부설 때문이다. 중앙선은 1923년에 수립된 조선총독부 의 조선 제2의 종관선 건설 계획에 따라 건설된 것으로 경성과 경주를 연결하는 철도 라는 뜻에서 경경선(京慶線)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경성(東京城, 현 청량리)역과 경 주역 양쪽에서 공사가 시작되어 1942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 그런데 안동시 일 대를 지나는 중앙선 철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철도 관사 단지 안에 위치한 안동 평화동 삼층석탑. 탑 옆으로 관사 두 채가 보인다. 사 진 좌측으로 보이는 절은 최근 관사를 개조하 여 만든 것으로 석탑과는 관계없는 사찰이다.
데 선로의 모습이 ㄷ자에 가까울 정도로 심하게 구부러져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안동 을 우회하는 북후면에 위치한 옹천역에서 남후면을 거쳐 현재 운산역이 위치한 일직 면에 이르는 지역은 직선 선로 부설이 가능할 뿐 아니라 평지이다. 결국 직선화가 가 능하고 공사도 상대적으로 쉬운 구간을 놔두고 구불구불 산악 지대를 돌아가는 곳에 선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안동역이 시내에 위치하고 있기 때 문이다. ⓦ 중앙선 건설 당시 안동에서는 옥동을 중앙선 안동역이 들어설 유력한 후보 지로 꼽았다. 옥동은 직선 선로 부설이 가능할 뿐 아니라 미개발지인 옥동에 역이 들 어서면 기존 도시와 연결되어 안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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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반장 관사, 역무원 관사. 이하역—1942년 4월 1일 중앙선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영 업을 시작했다. 2007년 6월 1일 여객 업무를 중단했으며, 현재는 무인역이다. 이하역 관사—이하역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역장과 선로반장이 각각 거주하던 단독 주택 2동과 역무원 4가구가 살던 2호 연립 주택 두 채가 남북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남향 배치되었다. 현 재는 역무원 관사 한 채가 철거되어 3동만 남아 있다.
대 심리에 힘입어 옥동 일대에 땅 투기도 벌어졌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기존 경북 선 안동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역 부근의 철도 용지 7만 평과 철도 관사 및 철도 공원 용지 4만5천 평을 구입했다. 이 결정으로 투기에 나섰던 이들과 이 일대에 살던 주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동시민들의 이러한 움직임과 함 께 안동역의 위치 설정이 잘못된 것임을 꼬집고 있다. 안동역의 위치가 도심지로 결 정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안동역 일대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 본다. ⓦ 안동역이 도심에 위치함에 따라 선로는 기형적으로 만들어졌고, 안동의 도시적 발전은 상당히 지체되었다. 이때 개발 이 유보된 옥동 일대는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해 현재는 안동의 신도심으로 부상해 있다. 또한 중앙선 복선 전철화 사업으로 선로의 직선화가 이루어질 전망이며, 안동역도 시외 지역으로 이전될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는 데 무려 70여 년이 흘러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이를 토대로 더욱 발전하는 안동이 되길 기대한다. ⓦ 중앙선 철도의 안동 시내 통과가 촉발한 또 다른 문제는 문화재 훼손이다. 일제는 1910~20년 사이 전탑 보수 공사를 실시했다. 전문 지식 없이 진행된 탓에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지만, 탑 주변에 철책을 두르고 나 무 문을 설치하는 등 문화재 보전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중앙선 부설은 많은 문화재 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중앙선 선로 바로 옆에 위치한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과 안동역 구내에 있는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 (보물 제56호), 그리고 철도 관사 단지 안에 위치한 안동 평화동 삼층석탑(보물 제114 호)이다. 사찰 안에 석탑이 세워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주변은 절터가 분명하지만, 조선총독부는 탑 주변을 파헤치고 철도역과 관사를 세웠다. ⓦ
이하역 구내에 위치한 나무의 밑둥. 역의 기능이 멈추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도 같 이 생명을 잃어야 하는가 보다.
Wide AR no.26 : 3-4 2012 Report
이하역, 운산역. 운산역—1940년 3월 1일에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여 1961년에는 하루 평균 이용객이 530명에 달하는 제법 큰 규모의 역이었다. 현재는 화물역으로 인근 광산에서 채 굴한 사문석을 취급한다. 이 화물은 포항 괴동역으로 운송된 뒤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소로 간 다. 최근 이곳에서 운반되는 사문석에 발암 물질인 석면이 함유되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운산역은 또한 권정생 선생의 책 『몽실언니』의 무대로 유명하다. 책에서 어린 몽실이는 두 집 살림을 위해 기차를 타고 운산역과 의성역을 오가며 곡절을 겪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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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 사진 더하기 건축 06
사진은 사진이 아니다 Photograph is not a photograph
백승우
Back Seungwoo
나은중・유소래 | 본지 자문위원, NAMELESS 공동 대표
ⓦ 사진학과 출신이라는 것이 자신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말하는 사진가가 있다. 그 는 학교에서 배운 사진에 대한 기술과 관습들이 오히려 작업의 틀을 제한시켜 왔다고 이야기한다. 사진 찍기의 기술과 다듬어진 경험의 데이터는 의도된 아름다움 혹은 추 함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충실히 기능하지만 해석의 차이를 존중하는 현대 사진의 틀 안에서 이러한 축척된 경험 혹은 편견은 오히려 사고하는 방식을 한정시킨다는 요지 이다. 또한 그는 누가 더 사진을 잘 찍는가의 논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이 잘 찍은 사진과 구글 이미지 창에서 검색되는 수많은 익명의 이미지들 사이에 서 별다른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백승우는 이 시대의 사진가란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 그는 개념적 사고를 통해 끊임없이 사진을 실험한다. 무엇이 더 아름답고 무엇이 덜 아름다운지는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이 시대 사진의 의미와 함께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고민을 표출한다. 1. 사진은 사실을 기록하는 장치인가? 현실을 기록하는 장치로서의 사진의 태생적 가
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사진이라는 현실 복제의 매개체가 갖는 허구적 진실성을 꼬집는다. 그가 언급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실재와 실재 가 아닌 것들 사이의 관계는 이러한 사진의 본성에 대한 고민을 드러낸다. 2. 사진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인가? 누구나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시대에 작가적 행
위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고해상도의 디지털 카메라와 보편화된 기술 복제 시대에 그는 누가 더 좋은 사진을 찍는가는 중요치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사진가는 무 엇을 하는 사람인가. 3. 사진을 본다는 의미는 유효한가? 평면적이며 시각적 미디어인 ‘사진을 본다’라는
의미는 어쩌면 시각화된 매체의 관점에서 논박할 사안이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사 진에서 보이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 인식되며, 이는 이미지라는 매체의 부조리함에 대 한 일종의 역설일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백승우는 사진을 보는 자에게 ‘판단의 보 류’를 제안한다. ⓦ 이런 맥락에서 <블로우 업/Blow Up, 2005 - 2007> <유토피아/ Utopia, 2008 2011> <메멘토/Memento, 2011> <아카이브 프로젝트/Archive Project, 2011> 등 그의 최근 작업에서 읽히는 주요한 키워드는 아카이브(archive)와 해석(interpretation)이다. 아카이브는 객관적인 시선을 통해 사실을 기록, 정리한 일련의 자료들 이다. 이는 사진의 기록적 속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미지가 곧 현실이라는 선입견
Wide AR no.26 : 3-4 2012 Report
Archive project - # 001, 150Ă&#x2014;193cm, Digital print, 2011. Archive project - # 009, 150Ă&#x2014;194cm, Digital print,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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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 Up - # 011, 182×160cm, Digital print, 2006.
을 만드는 가장 믿음직한 수단이기도 하다. 백승우는 이 객관적이며 체계적인 자료 에 그만의 해석을 더한다. 그 해석은 이미지를 확대하고 조정하며 때로는 상황을 연 출함으로써 진짜가 진짜가 아닐 수 있음을, 동시에 보이는 것이 실제가 아닐 수 있음 을 역설한다. ⓦ <블로우 업 / Blow Up, 2005 - 2007>은 백승우가 35mm필름에 담은 ‘통제된, 그리 고 검열된’ 북한의 사진들을 기반으로 한다. 여행의 가이드이자 사진 촬영의 감시자 였던 현지 관리는 그의 옆에서 어떤 구도로 어떤 장면을 담을 것인지를 간섭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검열 후 허락된 일부의 필름만을 돌려받았다. 이러한 정부의 감시 와 통제 속에서 그가 찍은 사진들에는 다른 이들의 카메라에 담긴 결과물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구도와 장면들이 남아 있었다. 사진은 실체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통해 보이
Wide AR no.26 : 3-4 2012 Report
Blow U p- # 065, 100×122cm, Digital print, 2007.
는 세상이 진짜라고 말하기는 힘들 수 있다. 백승우는 이를 확대(Blow Up)라는 방식 으로 거기 그렇게 있었으나 쉽게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작가의 해 석은 이미지의 부분 확대라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드러나는 실체들 간의 관계이며 이 는 사진가의 역할이 더 이상 사진 찍는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장소의 특수 성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 <유토피아 / Utopia, 2008 - 2011> 연작에 와서 그는 사진가의 행위로서 사진 찍기 를 배제한다. 이 작업은 그가 직접 찍은 사진이 아닌 북한 당국이 제작한 선전용 엽서 나 포스터에서 ‘발견한 사진’들을 사용하였다. 기존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그 안의 건 축물들을 뒤틀거나 과장되게 반복, 확대하여 형태와 내재된 속성을 적극적으로 변형 시켰다. 또한 배경과 건물의 색을 원본과 눈에 띄게 변화시켰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진짜지만 가짜 같은 북한의 건물들은 작가의 손을 통해 가상의 유토피아로 재현된다. 북한에서 자국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그들의 실제 모습이라고 단 정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것이 비록 현실이지만 소수 사람들에 의해 연출된 세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짐작한다. 북한이라는 특수성은 실체와 가상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장소이며, 백승우는 이러한 가능성에 적극 개입함으 로써 사진가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 또한 그는 최근작에서 아카이브와 해석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아카이브 는 작가의 개입을 통해 해석되어 또 다른 일련의 이미지, 즉 새로운 아카이브로 재현 된다. 2011년 발표된 <아카이브 프로젝트 / Archive Project, 2011>는 폐허가 된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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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ia - # 001, Left 150×180cm, Right 150×97cm, Digital print, 2008.
건물 혹은 작동을 멈춘 기계 등 산업화의 단면을 드러내는 기록 사진이다. 아니 외형 상 그렇다. 사실 이것들은 모두 선별, 추출되어 만들어진 사진들이다. 미국의 이름 모 를 공장과 채석장, 우리나라의 경성방직 등 사진의 출처도 애매하며 동일한 시간과 공간도 아닐뿐더러 각각의 사진을 찍은 행위자도 다르다. 그는 이렇게 다양한 출처의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새로운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여기서 작가의 물리적 행위는 사 진의 수집, 선택, 조작을 통해 다른 시공간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만든 것이다. 도대체 왜일까? 행위의 과정에서 그는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언어를 통해서라 기보다 이미지에 암시가 놓여 있다. 흘려 보던 온전한 형태의 공장 사진을 자세히 읽 어 보면, 이어 붙인 곳의 경계가 드러나며 보정된 색의 톤조차 일치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흔적 없이 조작한, 눈속임을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관객의 보는 관 습과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이 작업을 포함한 최 근 전시에 <판단의 보류>라는 제목을 붙였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수용하는 행위에 대 해 그는 왜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재고해 보라고 권유한다.
Wide AR no.26 : 3-4 2012 Report
ⓦ 이쯤 되면 ‘사진가 백승우’라는 호칭이 애매하다. 사진을 잘 찍지 않는 사진가이자 더 나아가 관객의 보는 방식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 는 누구보다 사진의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경우, 의미 있는 가 치 전복은 전통 혹은 기성의 가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해법을 동반한다. 그의 사진 행위가 예상치 못한 차이와 새로움을 만드는 이유는 어쩌면 ‘아카이브’와 ‘해석’이라 는 각각의 전통적인 방식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 짓는 행위에 의함일 수 있다. 사진가 백승우는 이 시대의 유동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들을 조합해 ‘지금 여기 의’ 이야기로 풀어 내는 진짜 동시대의 작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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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26 | Wide Architecture Report 26 | 2012.3-4
전진삼의 FOOTPRINT 05 이 란은 본지 전진삼 발행인의 ‘공적/사
동 그림건축 내 안방마루에서 제63차 땅
을 점검하기 위한 시험 상영의 성격을 띠었
적’ 기록의 장으로 구성된다. 현장성에
집사향이 열렸다. 바우(B.A.U)건축의 권
다. 이 영화의 제작 지원을 한 심원문화사
바탕을 둔, 건축계 이슈와 개인의 동선
형표, 김순주 소장이 이야기 손님으로 초
업회(이사장 이태규) 심원건축학술상 운
이 이뤄 내는 건축과 문화판의 지형도를
대된 이 자리에는 70여 명의 방청객이 몰
영위원회 전봉희, 안창모 위원이 함께 초
전달하게 될 것이다.
려 성황을 이루었다. ‘ambivalence’를 주
청되었다. 당일 입장객 중에는 안상수, 이
제로 열린 세미나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
진오, 오영욱, 이치훈, 정소익, 신지혜 씨
성시키기까지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의 시
등이 눈에 띄었으며 전 좌석 매진되는 큰
간을 요구하는 냉혹한 현실을 노정시키는
호응을 거두었다.
자리였다. 공동 대표 민우식의 독립으로
1월 26일 (목) 오후 5시. 금년 신학
1월 6일 (금) 낮 12시, 서울 인사
B.A.U의 위상에 변화가 감지되어 보였지
기를 기해 숙명여자대학교 공간디자인학
동 누리레스토랑에서 제4회 심원건축학술
만 실상은 이들의 출발이 그러했듯이 유닛
과 교수로 임용된 장정제 박사가 내방하
상 추천작 선정을 위한 운영위원회가 신
의 분화 정도로 이해될 만한 것이었다. 이
였다. 다수의 저서와 번역서의 출간으로
년 인사회를 겸하여 열렸다. 운영위원 안
진오, 임태병(SAAI건축), 윤태권(엔진포
필명을 날리고 있는 장 교수의 가세로 숙
창모, 전봉희, 전진삼, 사업회 신정환 사무
스건축), 김광유(하우스), 전숙희, 장영철
대 공간디자인학과는 디자인 도서 기획 및
장이 참석하였다. 총 6편의 응모작 가운데
(WISE건축), 아주대, 인천대, 인하대 건
전시 등 새로운 영역으로 학생들의 경험을
2편이 최종 심사 자격이 주어지는 추천작
축과 학생들, 골목길포럼 기획자 김헌준
확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에 선정되었다. 안식년 차 영국에 머물고
(동우건축), 이태상(간삼건축) 등등 많은
1월 27일 (금) 오후 3시, 잠실 종
있는 배형민 교수는 서면으로 대체했다.
분들이 함께 했다.(본문 ‘New POwer AR-
합운동장역 인근에 새롭게 사무소를 개설
1월 9일 (월) 오후 3시, 이로재 건
chitects’ 권형표, 김순주 글 참조)
한 GNA파트너스건축(대표 황한구)의 박
축을 방문하여 승효상 대표를 만났다. 수
1월 19일(목) 오전 10시 30분, 2012
민철 공동 대표(사진)를 만났다. 90년대
류산방 대표 심세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년도를 맞아 새롭게 진용을 정비한 편집위
중반, 간향건축을 설립하여 운영하며 차세
박상일 방장이 동행하여 4월 초, 발간 목표
원회의 첫 모임이 편집실에서 열렸다. 김
대 건축 디자이너로 주목된 바 있는 박 대
로 작품집 제작 관련 논의를 하였다. 국내
영철(단우건축연구소), 박인수(파크이즈),
표와 삼우설계 임원 출신인 황 대표가 공
건축 잡지 지면을 통한 작품 발표가 뜸한
최상기(서울시립대), 최춘웅(고려대) 4인
동으로 운영하는 GNA파트너스 건축사사
그의 작업들이 시리즈물의 단행본 성격으
의 편집위원들과 건축계 전반의 상황을 점
무소는 건축과 인테리어, 도시, 환경 전반
로 묶여져 나오게 되었다.
검하고, 금년도 잡지의 방향성에 대하여
에 걸친 질 높은 디자인그룹의 완성을 목
1월 17일 (화) 오후 2시 30분, 시간
개관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편집위원회의
표로 설립되었다.
건축 박유진 대표와 토탈조명서비스업체
는 4인의 편집위원과 정귀원 편집장, 박상
NES코리아 차영민 대표와의 만남을 주선
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구성된다.
1월
했다. 건축 설계와 조명 기기 분야의 접목 을 꾀하는 양사 대표 간의 진중한 대화가 오고갔다. 1월 18일 (수) 오후 2시, 도서출판 기문당 강해작 사장을 방문 면담했다. 40 년 가까이 한국 건축 단행본 시장의 강자
1월 31일 (화) 오후 3시, 서울 신사
로 군림해 온 기문당의 역사이자 여전히
동 원도시건축을 방문, 변용 회장을 만났
현역으로 활약 중인 강 사장은 건축 도서
1월 19일 (목) 저녁 8시, 서울 지하
다. 기독 신앙에 기반한 건축과 사회의 제
출판 시장의 전반적인 쇠퇴에 대하여 우려
철 3호선 압구정역 인근 CGV 압구정 4관
반 가치들에 대하여 눈 깊게 바라보는 변
를 금치 못했다. 책을 읽지 않는 건축판의
에서 정기용의 건축과 세계관을 주목한 건
회장의 식견을 접할 수 있는 자리였다. 또
병폐가 오늘날 우리 건축의 경쟁력을 저하
축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를 정재은
한 2012원도시아카데미세미나의 방향성
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감독의 초청으로 관람했다. 영화는 3월 8
에 대하여 개략적인 의사를 교환했다.
1월 18일 (수) 저녁 7시, 서울 신당
일 극장 개봉을 앞두고 사전 관객의 호응
Wide AR no.26 : 3-4 2012 Report
와이드 AR 26 | Wide Architecture Report 26 | 2012.3-4
전진삼의 FOOTPRINT 05 2월
2월 6일 (월) 오후 6시. 제2차 편집
2월 8일 (수) 영국 런던에서 활동
위원회의가 동교동 본지 편집실에서 열렸
중인 김정후(런던대학 UCL)박사와 간향
다. 편집위원 김영철, 최상기, 최춘웅 3인,
미디어랩 부설 ‘와이드SA 도시건축아카
2월 1일(수) 저녁 7시, 인천 배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상일, 정귀원 편집
데미’(가칭)에 대하여 협의를 시작했다. 김
리 스페이스빔 고두밥실에서 ‘배다리도시
장이 참석한 회의는 동교동 와이드 안가 1
박사의 주된 관심 분야이기도 한 유럽 도시
학교’(가칭) 준비 운영위원회의에 참석했
호점(포항막회집)으로 이어져 밤 10시 가
건축에 대한 현지 기반의 생생한 자료와 정
다. 민운기, 이희환, 강현주, 조주연, 박준
까이 이어졌다. 잡지 제호 로고 변경, 콘텐
보를 토대로 꾸며질 아카데미의 이름은 ‘와
호, 이승연, 박진한, 진정미 씨가 동석하여
츠 카테고리 재정비 및 주요 사안에 대한
이드SA 유럽 도시 건축 아카데미’로 정하
학교 설립의 의의를 공유하고, 향후 스케
검토가 이뤄졌다.
고, 21세기 첫 10년의 유럽을 해부하는 흥
줄을 짜기 위한 사전 모임이었다.
2월 8일(수) 오후 2시, 강서구 송정역
미로운 주제로 펼쳐질 예정이다. 4월 한
2월 4일(토) 오전 10시. 제3차 <와이
부근 월간 <C3> 편집실에서 개최된 2011
달 4주에 걸친 연속 강좌로 기획된 이 프
드AR> 발행편집인단 워크숍을 위한 버스
건축문화학교 정기 강좌를 수행했다. ‘건
로그램의 참가비는 20만 원으로 책정되었
가 출발했다. 1차 목적지는 조성룡 교수가
축 저널리즘’ 주제 하에 ‘국내 최강 건축 잡
다.(본문 ‘<와이드SA 유럽 도시건축 아카
설계한 충남 홍성의 ‘이응노의 집’ 답사, 2차
지사’ <C3>를 방문, 현장의 소리를 접하는
데미’ 관련 글 참조)
목적지는 광천굴관광단지(깐돌네)에서 굴
프로그램이었다. <C3> 이우재 편집장으로
구이 파티로 이어졌다. 총 60인의 구성원 중
부터 1984년 9월 잡지 창간 후 현재까지에
임창복, 최동규(이상 운영고문), 김원식(편
이르는 편집 방향 변화의 시대별 이슈에 대
집고문), 김연흥(발행편집자문단장), 오섬 훈, 박유진, 황순우, 손도문(이상 발행위 원), 김재경, 임형남, 박준호, 임지택(이상 자문위원), 김영철, 최상기(이상 편집위 원), 박상일, 정귀원(이상 편집실), 서경애,
2월 9일 (목) 오후 2시 30분, 서교동
노은주, 정현주(발편단원 배우자) 씨 등 20
NES코리아를 방문, 차영민 대표와 ‘건축
인이 참여했다.
인의 서교 사랑방’(가칭)에 대하여 논의했
<와이드AR> 발행편집인단 워크숍은, 2010
사진 제공│한국건축가협회
년 경남 함양 아름지기 한옥과 인근 개평마
한 발표를 들었다. 학부모와 함께 온 중학3
데미를 구상하기로 한 데에서 진일보하여,
을 등을 돌아보는 1박 2일 프로그램을 필
년생, 고교2학년생 등 건축에 대한 관심이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함께 건축 영화를 감
두로, 2011년 충남 부여 롯데리조트콘도미
높은 청소년들도 참가한 이 자리는 건축과
상하고, 공부하는 정기 프로그램을 마련하
니엄 답사가 진행된 바 있으며, 금년이 세
전공 대학생 및 설계 사무소 직원 등 총 18
기로 합의했다.
번째 행사로 발행편집인단 구성원(배우자,
명의 신청자와 현유미 편집차장 등 <C3>
2월 10일 (금) 오후 2시, 목동 예
파트너 포함)들을 초대하여 잡지의 발전을
편집실 기자 및 디자이너, 그리고 홍선희 건
술인회관 9층으로 이전한 한국건축가협회
도모하고, 구성원 간의 친목을 다지는 성
축문화학교 본부장, 월간 <건축문화> 이경
열린 회의실에서 <2000 - 2009 한국현대건
격을 지녔다.
일 편집장 등 30여 명이 함께 했다.
축총람> 발간을 위한 출판위원회 필자 회
다. 애초 조명 및 음향을 주제로 하는 아카
의가 소집되었다. 이선영(출판위원장), 김 태만, 권영, 이봉, 조익수, 황희연, 전진삼 이 참석하여 각자 집필 원고분에 대한 최 종 확인 작업을 수행했다. 책은 도서출판 대가(김호석 대표)에서 발행한다. 2월 13일 (월) 저녁 7시, 서교동 NES舍廊(약칭 내사랑)에서 본지 발행편 집인단 일부 위원이 모여 3 - 4월호 특집 기 사진 제공│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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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26 | Wide Architecture Report 26 | 2012.3-4
전진삼의 FOOTPRINT 05 사 준비를 위한 건축 다큐멘터리 영화 <말
새천년관 지하2층 대공연장에서 한국건축
젊은건축가포럼코리아만의 유니크한 프로
하는 건축가>의 약식 시사회를 가졌다. 최
가협회(회장 이상림) 제54회 정기총회가
그램의 형식성 개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동규, 이일훈, 박철수, 강병국, 김재경, 함
25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하태석 운영위원은 2월 행사를 필두로 5월
성호, 김영철, 최상기, 박상일 씨 등 위원
이 날 2012 - 13년도를 이끌 새 집행부로
(공공주거), 8월(지속가능한 건축), 11월
과 차영민, 심세중 씨 등이 동석했다.
제28대 신임회장에 이광만(간삼건축), 부
(서울2022 도시비전, 전시연계) 프로그램
2월 15일 (수) 저녁 7시, 서울 신당
회장단에 한종률(수석, 삼우설계), 김병윤
등 올해 내 4차례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동 그림건축 내 안방마루에서 제64차 땅집
(연구, 대전대), 김성대(사업, 서울건축)
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은 정림건축문화재
사향이 열렸다. 건축가 초청강의 <시즌3>
씨가 호선 및 직선으로 선출되었으며 협회
단이 후원한다.
New POwer ARchitect 시리즈 열네 번째
장의 이·취임식이 함께 열렸다.
이야기 손님으로 최진석(one o one건축)
이날 한국현대건축총람(2000 - 2009)이 발
실장이 출연했다. 소속 사무소 원오원건축
간되어 참석한 회원들에게 배포되었다. 이
의 작품을 중심으로 각각의 디자인 이슈를
선영(서울시립대) 출판위원장의 경과 보
발표한 당일의 화제를 요약하면, ‘Space in
고와 집필진에 대한 공로장 수여가 있었다.
Details’, ‘틈의 다이얼로그’로 정리될 수 있
2월 24일 (금) 오전 10시 30분, 인
었다. 지난 1월 제63차 땅집사향에 이어 연
천 구월동 인천광역시건축사회 사무국에
속으로 70여 명이 넘는 만원 사태를 이어간
서 조동욱 회장과 면담하였다. 금년도 인
2월 29일 (수) 오후 4시, 동교동 <와
이 날의 세미나에는 젊은 건축가들(윤태권,
천 지역 내 젊은 건축가들의 포럼을 제안
이드AR> 편집실에서 ‘와이드BEAM’ 책임
장영철, 최춘웅, 박창현, 이진오, 임태병)이
하는 자리였다. ‘인천건축콘서트’(가칭)의
파트너 초빙 공모 면접 심사가 열렸다. 사
참석하여 분위기를 띄워 주었다.(본문 ‘New
정례화 등 2012인천건축문화제의 사업과
전 서류 심사를 통과한 지원자를 대상으로
POwer ARchitects’ 최진석 글 참조)
병행하는 방안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결과는 3월 5일(월)
2월 20일 (월) 오후 5시, 시공문화사
2월 24일(금) 저녁 7시 30분, 젊은
개별 통보된다.
를 방문하여 신승수 씨가 지은 책 『공공을
건축가포럼코리아 주최 제1회 컨퍼런스파
그리다』를 전달 받았다. 디자인그룹 오즈를
티가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운영하고 있는 신 소장은 서울대에서 공공
열렸다. 신승수, 신혜원, 최성희, 안기현,
성에 관한 주제로 박사를 받았고, ‘공간 사
이민수, 이소진, 장영철, 성상우, 윤재민,
용자들의 창조적 행위에 기반한 도시 공간
이정훈, 김정주, 윤태권, 서승모(공동사회)
3월 5일 (월) 오후, ‘와이드BEAM’
및 시설의 새로운 가능성 및 조직 방식에 관
건축가들과 지역주민 장진영(변호사)의 공
의 책임파트너 공개 초빙 공모 결과를 발
심’을 두고, 공공 디자인의 현장에서 실천
동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행사는 1부 성미
표했다. 초빙 대상자는 김정은 씨로 <건축
적 삶을 살아오고 있는 젊은 건축가다. 그
산마을의 소개, 2부 12인(팀) 건축가들이
인POAR>, <공간> 기자를 역임하고 현재
의 책 말미에 밝히고 있는 건축가로서의 전
3패로 나뉘어 각자의 작업 내용을 4분에
서울대 환경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 중
문성이 부딪히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환경
걸쳐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다. ‘와이드BEAM’은 온오프라인 단행
을 읽을 때쯤이면 이 책을 통해 호소하는 젊
성미산마을은 1994년 우리어린이집을 모
본 작업 및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한 출판
은 지성의 진정성을 느끼게 된다.(자료 제
태로 출발하여 현재는 ‘크고 작은 커뮤니
사업에 대한 진출을 위한 전담 부서이다.
공 : 시공문화사)
티의 네트워크형 마을’로 자리잡았다. 경쟁
3월 5일 (월) 오후 3시, 서울 강남
보다는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이 마을에
신사동 원도시건축 1층 회의실에서 2012
서 벌인 컨퍼런스파티의 주제는 ‘건축일상’.
원도시아카데미세미나의 방향 설정과 업
집/마을/문화의 세 영역에 걸쳐 건축가들의
무 협약을 위한 사전 미팅이 열렸다. 원도
그룹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파티
시건축 허서구 사장과 홍재정 상무가 참석
의 형식성 면에서 기존의 페차쿠차나이트의
한 자리에서 세미나(미래학강좌 2)와 젊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점과, 기획과 준비의
건축가포럼 전시 지원 사업 개최의 큰 틀
소홀, 플로어의 참여 유도 미진 등에서 아쉬
에 합의하고, 향후 구체적 제안서를 내기
운 점이 많은 첫 행사였다. 그런 면에서 향후
로 하였다.
2월 23일 (목) 오후 2시, 건국대학교
Wide AR no.26 : 3-4 2012 Report
3월
와이드 AR 26 | Wide Architecture Report 26 | 2012.3-4 워크 Work 포천 피노키오 예술 체험 공간 리모델링 Art Space Pinocchio in Pocheon | 김창균 Kim Chang g yun
김창균 서울 남산 야외식물원과 남산 장충체육회, 상상어린이공원, 비석골공원 등의 화장실 작업으로 ‘화장실 건축가’로 잘 알려 진 김창균의 새로운 리모델링 작품을 소개한다. 피노키오의 모험 속에 등장하는 고래 뱃속 같은 집으로 어린이들의 상상력 과 감성을 자극하는 공간은 물론 스스로 이야기하는 동네 건축과 일상성을 부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진행—정귀원(본지 편집장), 사진—진효숙(본지 전속 사진가, 별도 표기 외)
김창균 | 1971년생. 서울시립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 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해병대사령 부 건축 설계실, 에이텍건축 등에서 손 도면으로 시작하 여 건축 설계뿐 아니라 다양한 작업에 참여하며 실무 경 험을 쌓았고, 2006년 (주)리슈건축사사무소 공동 대표 를 거쳐 2009년 대치동에 (주)유타건축사사무소(UTAA Architects)를 개소하여 남산공원화장실 프로젝트를 시 작으로 활동 중이다. 이후 서울시립대학교 미디어센터 리모델링과 삼청 가압장 프로젝트를 계기로 본격적인 작업을 수행하며 일상의 중·소규모 건축물을 바탕으 로 하는 도시 재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주요 작업 으로 포천 피노키오 예술체험공간, 서울시립대학교 미 디어센터와 정문, 모악 상가주택, 진관동 근생, 용인흥 덕 Sooda, 삼청 가압장, 남산 공원화장실, 상상어린이 공원 화장실, 카페 ‘Be’, 진천 크리스탈카운티C.C 클럽 하우스 등이 있다. 현재 그랜드C.C 클럽하우스 리모델 링, 양평 주택, 보성 주택, 강화 주택, 서교동 BNB 사 옥 리모델링 등을 설계하고 있다. 2011년 젊은건축가상 을 수상했다.
97 2012.3-4 | Wide Architecture Report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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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26 | 엣지 Ed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