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 AR vol 43,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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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play architecture!” management camp

construction management camp

planning camp urban/masterplan design camp

architecture camp

graphic camp

remodeling camp

sustainable architecture camp

“We do architecture hard!”

2012여수세계박람회 주제관 2012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

네이버데이타센타 2014 건축문화대상 우수상

김대중컨벤션센타증축 2013년 광주광역시 건축상 금상

엔씨소프트 R&D 센터 2014 경기도건축상 대상 2014 건축문화대상 우수상

AIA 타워 2014 서울시건축상 우수상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42-22 디엠피빌딩 TEL. 02.550-7500 FAX. 02.550-7506

www.dmppartners.com


43

CONTENTS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WIDE ArchitectuReReport

2015.1-2

와이드 ISSUE

와이드 WORK 2

21

72

와이드 COLUMN “현대” 건축의 식민성에 관하여 | 전진성

연결된 집 Linked Houses 김원진 Kim Wonjin

28 이종건의 COMPASS 40 Brave New Architectural World

74 개별화된 전체

31 와이드 FOCUS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32 심사평 | 김영철 34 당선 소감 | 이경창 35 주평론 :

차운기 건축에 나타나는 고향의 의미

47 단평론 1 :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 이은영 건축 비평

52 단평론 2 :

융복합과 일상의 건축 사이에서

와이드 WORK 3 80 펼친집 Spreading House 정수진 Jung Sujin 86 바닷가 언덕 위의 ‘작은 집’ 88 크리틱 : 창호지 문 | 임성훈

와이드 WORK 1

와이드 REPORT 1

57

94

수헌정

매스스터디스 건축하기 전/후

Leaning House

조민석 개인전

임동우+임창복 Yim Dongwoo + Yim Changbok 96 58

건축의 재현(Representation of Architecture)으로

인터뷰 : 토폴로지와 타이폴로지

서의 ‘건축 전시’ 이정희


심원문화사업회 7차년도(2014~2015) 사업

제7 회 심원건축학술상 [추천작] 발표 SIMWON Architectural Award for Academic Researchers, SIMWON Foundation of Architecture & Culture

지난 해 11월 15일 접수 마감된 제7회 심원건축학술상 응모작의 예비심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 추천작: 없음 ■ 심사위원: 김종헌, 박진호, 우동선, 함성호 제7차년도 사업을 준비하며 심원건축학술상은 꽤 큰 변화를 도모한바 있습니다. 미발표작 뿐 아니라 단행본으로 출간된 발표작에까지 응모작의 범주를 확장시켜 제시된 기간 내에 출판된 학술적 가치가 높은 도서를 경쟁에 가 담시킨 것입니다. 그로써 신진 연구자는 물론 건축학의 질 높은 연구서 저자들의 경쟁 의지를 북돋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동시에 연구 및 출판문화의 진작을 도모할 수 있다고 의미부여를 한 바 있습니다. 아카데 미즘을 기반으로 활약하는 교수사회의 학문적 성과를 진작하고, 경계하며, 심도 있는 연구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 에도 일정부분 기여하리라 기대심을 키웠습니다. 제7회 응모작 집계 결과 미발표작 부문에서는 한 편의 응모도 이뤄지지 않았고, 대신 발표작 부문에서만 두 편의 응모가 이뤄졌습니다. 응모작에 대하여 1개월여에 걸친 심사위원들의 개별 독회를 마치고 지난 1월 5일(월) 심사 위원회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예비심사를 진행하였습니다. 건축학의 우수도서를 선정하는 것이 아닌, 연구논문 혹은 도서가 품은 학술적이며 논쟁적 가치를 조명하는 심원건축학술상의 엄정한 심사 기준이 논의의 중심에 있었 고, 그 결과 아쉽게도 금회에는 추천작을 선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추천작 선정 시, 공개포럼을 통해 건축사회 일반과 공유하게 되고 그 후 당선작을 선정하는 수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그 같은 프로세스는 한 해 뒤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귀한 연구물로 성원해주신 두 분 응모자께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제8차년도 사업은 본지 3/4월호 (통권 44호)에 서둘러 공지할 예정입니다. 변화된 사업의 방식이 혼란스러워 금회에 응모를 꺼린 많은 예비 응모 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주최

심원문화사업회

주관

심원건축학술상 심사위원회

기획

격월간 《와이드AR》·간향 미디어랩&커뮤니티

후원

(주)엠에스오토텍

문의

070-7715-1960


CONTENTS

그림字 05

공익

화폐와 우표에는 인물을 모델로 많이 씁니다. 국가나 민족에

와이드 REPORT 2

지대한 헌신과 업적으로 모든 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 입니다. 화폐나 우표는 일상생활에 항시 쓰이는 것이기에 늘

100

접하게 되는 공식적인 모델이 됩니다.

크로싱 우사단로

몇 나라의 화폐와 우표에는 건축가가 모델이 되고 있습니

Crossing Usadanro_Projective Informal City

다. 그들이 어떤 연유로 그 모델로 선정되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그 나라에서는 존경받고 사랑받는 인물임에는

101 풍요로운 삶이 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대안적 실험 이재원, 전진홍

틀림없습니다. 건축가가 나라와 국민에게 헌신과 기여를 할 수도 있다는 반증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해 봅니 다. 우리나라에는 화폐나 우표에 모델로 선정될 만한 건축 가가 있을까?

102

건강한 사회는, 누가 알아주건 말건 각자가 자기 할 바를 열

전시장 풍경

심히, 묵묵히 해 나가고 그것이 그대로 존중되는 사회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면서 생활이 피폐 해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잘 하는 것의 가치보다 빨리, 값싸

건축가 초청 강의 : Strong Architect 04

게 하는 것이 더 선호되는 것 같습니다. 소비자는 좋은 것을 찾고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좋은 것의 평가 기준이 쓸 모 있거나 아름다운 것이냐, 싸거나 폼 나는 것이냐 하는, 그

108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 기준에 따르는 것이지 싶습니다. 시대

곽재환

는 흘러갑니다. 사회의 최고 가치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합

인간의 장소-삶, 앎, 놂, 풂, 빎 | 박성용

니다.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의 절대선이 있습니다. 변덕스러운 시대의 흐

건축가 초청 강의 : Power & Young Architect 04

름에 편승하여 이익을 창출할 수도 있지만, 불변의 가치를 추 구하는 것도 참 매력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건설회사의 설계 겸업 추진 등 날로 어려워지는 여건에 처한 건축계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오히려 우리 건축가들이

113

먼저 공익 추구를 최고 가치로 삼고 각자 열심히 작업에 임하

이은경

여 그 진심을 국민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

Form of Living | 이은경

니다. 화폐나 우표에 얼굴을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그 헌신과 기여를 환영하고 성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글 | 임근배(간향클럽 대표 고문, 그림건축 대표)

<42호 내용 정정 안내> -지난호(와이드AR 2014년 11/12월호, 통권 42호) ‘전진삼의 para-doxa 11’ 30쪽 원고 내용 중 ‘기오헌(

)건축’은 ‘기오헌(

)건축’으로 바로 잡습니다. 최종 작성된

원고를 대조한 바 편집물 파일 전환 과정 중에 뜻하지 않는 오류가 발생하였음을 확인하 였습니다. 민현식 선생님과 기오헌건축 구성원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지난호(와이드AR 2014년 11/12월호, 통권 42호) 41p.-45p. <장소의 재탄생: 한국근대 건축의 충돌과 확장> 전시 기획 기사 중 공동 기획자의 이름이 누락되어 바로 잡습니다. 상기 전시는 도코모모코리아와 국립현대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것으로 도코모모코리아 측에서 전성은(세상숲건축도시네트워크) 대표가 함께 수고해 주셨습니다. 편집 과정 중 놓친 부분에 대해 주최측과 독자 여러분께 사과 드립니다.


(주)제효에서 지은 집 건축가 상상 속의 건물을 구현하다 | www.jehyo.com

보고재 빌딩 | 운생동_장윤규, 신창훈 | 사진_문정식









자 연 에 사 람 을 더 합 니 다

곧게 뻗은 나무처럼 언제나 바른 마음으로 자연과 사람을 생각하겠습니다 품격 있는 건축과 도시의 미래 가치를 선도하는 대한건축사협회 인천광역시건축사회는 인천시민의 삶과 역사, 그리고 공동체적 가치를 공유하며 보다 나은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오늘도 모든 정성과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부평작전교회_김헌

G-Tower, 2013 인천광역시건축상 대상 수상작

2014 인천광역시건축상 대상 수상작

건축사는 국토교통부장관으로부터 자격을 취득하여 건축물의 설계·공사감리업무를 수행하는 조형창작예술인입니다.

KIRA Incheon

A Chapter of Korea Institute of Registered Architect

회장 부회장 이사 감사 사무국

조동욱 윤희경 공만석, 류재경, 박창용, 양인성, 이인경, 이창호, 임재철, 장성수, 정영식 김현미, 정재남 인천광역시 남동구 석산로 159(보인프라자 704호)





간향 미디어랩 & 커뮤니티 <건축비평 총서> 제1탄

건축 없는 국가 [개정판]

이종건 비평집 214쪽 | 신국판, 15,000원 판매대행_ 시공문화사 영업팀 02-3147-1212, 2323 건축은 근본적으로 서구 문화의 한 양상이다. 20세기에 들어서기 전에는, 우리나라에는 그것을 가리키는 낱말마 저 없었다. 어떤 대상을 지칭할 언어가 없다는 것은, 그에 대한 개념이 부재하다는 것은, 그리하여 그로써 그것을 포획해서 그려낼 방도가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게, 그 세계를 밝혀낼 조망지점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설령 서구와 다른 모종의 다른 건축 개념 혹은 정의가 우리에게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거울은 서구의 것밖에 없다. 이것은 정체성 개념의 이치와 정확히 똑같다. 나의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 다. 우리나라와 우리 건축을 서구 좌표계에 배치시키려 드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인식론적 불가피성/필연성 에서 연유한다. 그리함으로써 나는 다음의 욕심을 품는다. 서구 좌표계에 배치할 수 없는, 혹은 강제로 배치할 경 우 균열이나 변형 곧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형국의 조건을 생성할 지반을 우리 건축에 만들어낼 실 마리를 찾는 것이다. 저자 이종건 | 경기대학교 교수. 저서로 『건축의 존재와 의미』, 『해체주의 건축의 해체』, 『해방의 건축』, 『중심이탈의 나르시시즘』, 『텅 빈 충 만』, 『문제들』 등이 있고, 역서로 『기능과 형태』, 『추상과 감통』, 『차이들: 현대 건축의 지형들』, 『건축 텍토닉과 기술 니힐리즘』, 『건축과 철학: 건축과 탈식민주의 비판이론, 바바』 등이 있고, 작품으로 한국건축가협회 초대작가 전에 출품한 <삼가>가 있다. 최근 비평저널 <건축평단> 창 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간향저널리즘스쿨 [2015 년도 제6 기 모집요강] The 6th Journalism School of GANYANG 2015 2010~2014년에 걸쳐 《와이드AR 저널리즘스쿨》 1∼5기(1라운드)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에 힘입어 본지는 2015년도 2라운드의 개막과 함께 《간향저널리즘스쿨》로 체제 개편을 하며 제6기 수강자를 모집합니다. 올해는 전년도에 이어 이론과 실제를 결합시킨 현장 중심의 교육과정을 보다 강화시키고 저널리스트의 기본 덕목 인 글쓰기 훈련은 물론 본격적인 저널 작업에의 참여기회를 확충하게 됩니다.

■ 교육 과정

6) 추가 합격자 발표: 개별 공지

[신청자격]

Ⓦ 입교식 및 Introduction

7) 추가 합격자 등록기간: 2월 16일(월)∼17일

대학 4학년 재학생 이상으로서 건축, 도시, 디

Ⓦ 코스 1_기초과정

(화)

자인, 조경, 인테리어 관련학과 전공생(휴학생

Ⓦ 코스 2_집중과정

8) 최종 합격자 발표: 2월 21일(토)

및 졸업생 포함)에 한함

Ⓦ 코스 3_심화과정

* 네이버 카페_‘와이드AR’ 게시판 발표 및 개

Ⓦ 수료식 및 Review

별 통지 예정.

[신청서류]

* 내부 방침에 의한 최소 등록인원(모집인원의

1) 자기소개서(양식, 다운로드 받아 활용)

50% 이상) 미달 시 개설하지 않을 수 있음.

2) 지원동기서(양식, 상동 )

■ 모집요강

3) 재(휴)학 또는 졸업증명서

[교육 기간 및 강의 장소] : 2015년 2월∼11월(입교 및 수료식 포함 총

[교육목표 및 추진방안]

10개월 3단계 12교과 과정)

학생에게 건축잡지사를 포함한 주요 언론사 입

[신청서류 양식 다운로드 방법]

사를 위한 준비 과정을 제공해주고, 각 언론사

네이버카페 <와이드AR> ‘저널리즘스쿨’ 게시

[강의 코스]

에는 기자로서의 소양과 저널리즘에 입각한 윤

판에서 다운로드 가능

입교식 및 Introduction: 2월 28일(토)

리의식 및 실무능력에도 충실한 인력을 공급하

코스 1_기초과정: 3월∼6월_월 1회 수업

고자 한다.

코스 2_집중과정: 7월 29일(수)∼31일(금)_3

[서류 제출방법 및 주소] 이메일 제출로 한함. e-mail: widear@naver.com

일 연속수업

[수료자 특전 등]

코스 3_심화과정: 8월∼10월_월 1회 수업

1) 최종 과정 수료 시 ‘수료증’ 발급(단, 전체

수료식 및 Review: 11월 하순(예정)

교육 과정 중 70% 이상의 출석자에 한하여 ‘수

[등록/교육비 납입방법]

료증’ 발급됨.)

1) 합격자는 교육과정에 따른 최초 등록비 및

[강의 구성]

2) 수료성적우수자에 한하여 언론사 취업 시

교육비를 지정 기간 내에 아래 방법을 통해 입

: 코스 1 기초과정은 주 1회 테마별 글쓰기 과

‘추천서’ 발급

금해야 함.

제를 수행하며, 1:1 첨삭 지도, 6기 밴드활동

3) 본지 취재 및 편집과정에 참여 기회 부여하

(최초 등록비 미 입금 시, 예비 합격자에게 등

병행

며, 최종 수료자 포트폴리오로 활용토록 함

록 자격을 부여함)

: 코스 2 집중과정은 워크숍의 형식으로 진행

2) 통장이체 : 국민은행, 491001-01-156370

하며 강의와 실습, 견학 프로그램으로 운영됨

[등록 및 교육비 분할 납입]

(최종 프로그램은 별도 공지 예정)

최초 등록비: 15만원(합격자 등록기간 중 납입)

: 코스 3 심화과정은 본지의 인턴기자로서 현

교육비 1: 15만원(코스 1 시작 전_3월 21일 한

[교수진]

장 취재 등 참여의 기회 제공

납입)

: 담임_전진삼(본지 발행인 겸 편집인, 간향 미

교육비 2: 15만원(코스 2 시작 전_7월 25일 한

디어랩&커뮤니티 대표)

[수강생 모집 개요]

납입)

: 강의_본지 발행편집인단 구성원을 포함한 국

-모집인원: 5인 이내

교육비 3: 15만원(코스 3 시작 전_8월 22일 한

내 건축·미술·디자인잡지 데스크 및 주요 매

-신청기간: 2015년 1월 5일(월)∼1월 24일(토)

납입)

체에서 활약해오고 있는 전·현직 기자, 칼럼

자정까지

(단, 교육과정 중 발생되는 개인별 필요경비

니스트, 비평가, 사진작가, 건축 책 저자 및 대

-전형방법 및 합격자 발표

(교통비 등)는 각자 부담함을 원칙으로 하며,

학교수로 구성 예정

1) 1차 서류심사 합격자 발표: 1월 30일(금)

과정별 납입된 등록/교육비는 환불되지 않음.

2) 인터뷰심사: 개별 통지

또한 과정 중 개인사정으로 인해 중도 포기한

교육 프로그램 등 상세 내용은 네이버 카페

3) 2차 인터뷰심사: 2월 2일(월)∼3일(화)

자는-이 경우 담임교수의 확인을 전제로 함-

<와이드AR> ‘저널리즘스쿨 게시판’ 참조바람.

4) 합격자 발표: 2월 7일(토)

잔여 교육비를 납입하지 않아도 됨)

5) 합격자 등록기간: 2월 9일(월)∼12일(목)

(예금주: 전진삼(간향미디어랩))

■ 문의 070-7715-1960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

땅집사향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우리 건축의

(약칭, 땅집사향)

초청 강의’(시즌4)로 그분들이 관심하는 건축의 주제를

홀수 달은 선배 건축가들이 ‘Strong Architect’의 이름으로 초대되며 짝수 달은 후배 건축가들이 ‘‘Power & Young Architect’의 이름으로 초대됩니다.

[땅집사향_소개의 글] 땅집사향은 2006년 10월 이래 매월 한차례, 세 번째 주 수요일 저녁에 개최되어 왔습니다.

선후배 건축가들을 가로지르는 기획을 가지고 ‘건축가 듣고 묻는 시간으로 꾸립니다.

1월(제97차)과 2월(제98차)의 이야기손님과 주제의 방향

> 1차 프로그램(2006∼2007)

12회에 걸쳐 국내의 건축책의 저자들을 초대하여 관심주제를 공유했고,

> 2차 프로그램(2007∼2008) 6회에 걸쳐 국내의 건축, 디자인, 미술 전문지 편집장 및 일간지 문화부 데스크들을 초대하여 저널리즘의 세계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으며, > 3차 프로그램(2008∼2009)

20회에 걸쳐 30대 중반∼40대 초반 국내의 젊은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건축가 초청강의’(시즌 1) “나의 건축, 나의 세계”를 펼쳤습니다.

12회에 걸쳐 40대∼50대의 중견건축가들을 중심으로

2015년 1월 제 97 차 Strong Architect 06

‘건축가 초청강의’(시즌 2) “Power Architect_내 건축의 주제”를

기획한 바 있습니다.

이야기손님 우경국(예공아트스페이스건축 대표 건축가)

> 4차 프로그램(2010)

> 5차 프로그램(2011∼2012)

24회에 걸쳐 ‘건축가 초청강의’(시즌 3)로 기획하여

차세대 건축을 리드할 젊은 건축가들이 현재 관심하고 있는

건축의 주제와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듣고 물었습니다.

일시

1월 14일(수) 7:30pm

장소

토즈 홍대점 H1 방

주제

관계 현상의 미학

> 6차 프로그램(2013∼2014)

전반기 6회에 걸쳐 ‘건축기획’에 초점을 맞춘 6회의 강좌를 진행하여

이 분야의 연구자, 활동가, 행정가의 현장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후반기 6회에 걸쳐 ‘건축사진가열전’(시즌 1)로 국내의 내로라하는

건축사진가를 초청하여 ‘이미지 건축의 거처’를 주제로 건축 사진의

세계를 접한 바 있습니다.

[행사 당일 시간표] 7:30∼9:30pm 발표 및 질의응답 9:30∼10:30pm 뒤풀이

2015년 2월 제 98 차 Power & Young Architect 06

[참가 신청방법]

이야기손님 신혜원(Lokaldesign 대표 건축가)

사전 예약제(네이버 카페 <와이드AR> 게시글에 신청)

일시

2월 11일(수) 7:30pm

장소

토즈 홍대점 H1 방

주제

lokaldesign: Minimum_Maximum

[참가비] 1만 원(뒤풀이 자리 after party에서 접수)

|주관 격월간 건축리포트<와이드>(약칭, 와이드AR) |주최 그림건축, 유오스 Knollkorea, 간향 미디어랩 & 커뮤니티 |문의 02-2231-3370, 02-2235-1960

*<땅집사향>의 지난 기록과 행사참여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카페 (카페명: 와이드AR, 카페주소: http://cafe.naver.com/aqlab)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WIDE 건축영화공부방 -노매딕 스크리닝 1

2015년 <시즌4> 개막을 맞아 《NESⓌ건축영화스터디클럽》이 《WIDE 건축영화공부방》으로 이름을 바꿔 노매딕 스크리닝으로 운영됩니다. 올해도 본지 독자 및 후원회원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성원과 참여 기대하겠습니다. 참가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 일정을 꼭 확인 바랍니다.

■ 제18차 상영작: 슈페어와 히틀러 1

-감독: 하인리히 브렐뢰Heinrich Breloer

-제작연대: 2005

-개관: 히틀러, 슈페어, 이데올로기 3부작 집중 스터디 첫 시간

■ 일시: 2월 9일(월) 7:00pm ■ 장소: 서울시 광진구 군자동 243 태영빌딩 1층 (Tel. 02-518-9266) ■ 방장: 강병국(간향클럽 자문위원, WIDE건축 대표) ● 참석 신청 예약 총원: 총 30인 이내로 제한함 ● 신청 예약 방법: 네이버카페 <와이드AR> 게시판에 각 차수별 프로그 램 예고 후 선착순 접수 *참가비 없음 주최

간향 미디어랩&커뮤니티

주관

WIDE건축, 와이드AR

후원

유오스 Knollkorea


Wide Issue | 와이드 이슈

와이드 COLUMN

“현대” 건축의 식민성에 관하여 전진성 간향클럽, 부산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Issue

I. 부산의 명물로 자리잡은 광안대교를 타고 해운대로 들어서다 보면 푸른 바다를 머금

21 와이드 COLUMN

은 거대한 유리 건축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 계했다는 아이파크다. 단색의 거대한 유리 면이 부산의 상징인 동백꽃잎과 돛을 연

28

상시키는 곡선의 흐름들로 ‘해체’된 이 건축물은 해양도시 부산의 새로운 분위기를

이종건의 COMPASS 40 Brave New Architectural World 31 와이드 FOCUS 1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당선작가 | 이경창

대변한다. 거친 부두와 신발공장, 판자촌 대신 호텔과 컨벤션센터, 고급 주상복합단 지가 주를 이루는 디지털 첨단도시의 가상 이미지가 현실을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움은 표피적인 것에 불과하다. 부산은 해체주의 건축이 따로 필 요 없을 정도로 어차피 구조적으로 해체되어 있는 도시다. 본래 식민지 개항도시로 급조된 부산은 조선 왕조의 전통적인 거주지역이었던 동래부를 도외시한 채 항만 매 립과 경부선 철도의 건설을 중심으로 오로지 일본만을 바라보는 형태로 건설되었으 며 해방 이후에도 귀향민과 한국전쟁기의 피난민 등 거대한 밀물과 썰물이 지나가면 서 체계적인 도시의 구획이 불가능했고, 냉전 체제 하의 대한민국에서는 수출주도형 산업의 전진 기지라는 또 다른 멍에가 씌어짐으로써 그야말로 “해양문화 없는 해양 도시”로 성장해 왔다. 이처럼 항만과 일상이 대립하고 외부의 상위 권력이 시민의 주 권을 억눌러온 조화롭지 못한 도시에서 해체주의 건축의 현란함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ISSUE

“현대” 건축의 식민성에 관하여 | 전진성

해체주의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세계 각지에 추모시설을 세워 흔히 “추모사 업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때 살아남은 폴란드 유대인 가 정 출신으로, 미국 이민자로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이다. 그의 해체주의 건축 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족사에 깃든 20세기의 비극적 역사를 충격적으로 재현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세계라는 미국적 이상을 대변 한다. 그가 세운 건축물 중 가장 의미심장한 것으로는 독일 수도 베를린의 유대박물 관Jüdisches Museum을 꼽을 수 있다. 그야말로 해체주의 건축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이 독특한 건축물은 마치 부러진 뼈대처럼 지그재그 형을 이루고 있으며 온통 비틀리고 불안정한 공간을 통해 상실과 공허를 형상화하고 있다. 해체주의 건축은 분명 희생자의 고통을 드러내기에 안성마춤이다. 그렇지만 그 형태 가 상업화될 시에는 자칫 고통이 기억이 현란한 미관에 가려질 위험이 있다. 옛 뉴욕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현재 공사 중인 자유의 탑(Freedom Tower, 공식 명칭은 One World Trade Center)이 그 분명한 사례이다. 첫 설계안에 따르면, 원래의 쌍둥이 빌 딩이 사라진 바로 그 자리를 네모꼴로 움푹 파인 빈 공간으로 남겨두어 방문객들이 파괴의 흔적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고 유리 재질의 탑 외벽에는 저 멀리 엘리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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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자유의 여신상이 비치도록 배치된다. 9.11 테러로 위협받은 ‘아메리칸 드림’을 다시 이어간다는 취지이다. 이처럼 ‘해체’라는 형태언어가 미국식의 ‘자유’라는 이념 과 결합될 때 고통의 기억은 성공담으로 변질되고 비극의 장소는 또 한 차례의 테러 에, 이번에는 승자 위주의 역사와 사회적 불통이라는 더욱 치 명적인 테러에 해를 입 게 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과연 부산의 아이파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한 도시의 삶과 기억을 진지하게 고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고 주변을 그늘지게 하면서 도, 미관만 보고 ‘첨단의 건축’, ‘열린 공간’으로 치부되는 이 괴물을 과연 ‘선진’ 부산 의 랜드마크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일종의 환경적 테러로 보아야 옳을까? II. 이와 같은 몰지각함이 비단 부산만의 문제이겠는가? 마치 신천지에 세워진 듯 역사 와 기억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엿보이지 않는 신축 서울시청과 동대문플라자에 비하면 그나마 해운대 아이파크는 시원한 바다의 느낌이라도 전한다. 한국사회는 건축을 위 시하여 거의 모든 분야에서 늘 ‘첨단’을 원한다. 사회의 모든 가치 기준이 정당성의 여부보다는 남보다, 이전 것보다 ‘앞서는’ 것을 향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한국사회 에서 특히 두드러져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보편적인 현상이기도하다. 소위 ‘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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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이라는

용어는 – ‘포스트모던’까지 포함하여 - 늘 가장 최신의 현재이고자 하

는 감각을 지칭한다. 늘 새로운 현재가 요구됨에 따라 주어진 현실은 뒤로 밀려나고 ‘비非모던’으로 간주되는 것들과의 ‘차이’가 끊임없이 생산된다. 역사적 시대 개념으 로서의 ‘근(현)대modern times’란 최신의 현재가 규범이 되는 시대를 지칭한다. 더 이상 옛 것이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역사적 교양이나 박물관의 유물로 전락하 는 시대 말이다. 구한말 이래 한국사회에서 활용되어온 외래어인 ‘모던’ - 일본식으 로는 “모단” - 이란 단어의 음가에는 실제로 사람들의 공포와 상상력을 자극했던 이 미지들이 얽혀 있다. “현대” 건축도 일제시대 이래 한국인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처럼 받아들여져 왔 다. 최신 국제 동향에 따른다는 것은 무조건 정당한 것으로, ‘왜’라는 물음은 ‘어떻게’ 라는 물음으로 즉각 대체되어야 했다. 그러나 현대라는 말만큼이나 현대 건축도 절 대적 진리로 상정되어서는 곤란하다. 소위 모더니티modernity는 여느 민족, 여느 사회 에나 무리없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원칙이 아니라 식민지배에 나선 서구 세력의 일방적 요구였음이 이미 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모더니티 특유의 과잉된 자기표현과 개입의 논리는 시간과 공간의 혁명적인 재조정 을 야기했던 바, 이는 ‘역사’라는 개념에서 가장 전형적이고도 명징한 표현을 얻는다. 역사는 새로움을 앞당기는 현재라는 계기를 통해 늘 시간을 압박한다. 하나의 현재 에서 그 다음 현재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보’의 흐름이 균질화된 선형적 시간의 거 푸집을 이루어 지리적 공간을 재편한다. 제반 민족국가의 영토들이 진보의 도상에서 높은 단계로부터 낮은 단계로 정렬된다. 전제정/입헌정, 중세/근대, 봉건주의/자본 주의의 이항대립적 발전 도식이 지구상의 지역적 구분으로 탈바꿈되어 “처음에는 유 럽, 그리고는 여타 지역”이라는 지극히 일방적인, 실로 제국주의적인 팽창의 의지를 노골화하는 ‘세계사’의 거대서사가 등장한다. 인류의 세계사가 이처럼 유럽 밖 ‘타자’ 의 박탈과 통합의 형식을 통해 구축됨에 따라 결국 역사는 모든 민족이 제 차례를 기 다리는 일종의 대기실로 화한다. 인도계 미국 역사가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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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서 『유럽을 지방화하기 Provincializing Europe』(2000)에서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아직은not yet”이야말로 근대 서구가 창조해낸 ‘역사’의 본원적인 존재양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더니티가 본원적으로 시공간의 무리한 ‘구조 조정’으로 인한 변위, 탈구, 지 연에 다름 아님을, 그럼에도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편적 진리를 가장하는 은 폐의 메커니즘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을 절대적 실체로 ‘물화reification’시키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되기 힘들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전방위적 문화이론가 월터 미뇰로Walter D. Mignolo에

따르면, “서구적 모더니티의 어두운 이면”을 함축하는 범주가 바로 식민

성coloniality이다. 종래의 식민주의colonialism 개념이 제국과 식민지 간의 관계를 제국 본토에서 창출된 모더니티의 이식 내지는 연장으로 보았다면, 식민성은 오히려 그 러한 ‘근대적’ 인식 틀로 수렴되지 않는 ‘외부’의 가능성, 그 ‘식민지적 차이’를 부각 시킨다. 이처럼 ‘식민성’의 관점으로 볼 때 서구적 모더니티의 규범성은 못내 의심 스러워진다. III. 호반 도시 시카고는 부산처럼 수평선을 즐길 수 있는 도시이다. 바다와 같이 드넓은 미시간호 연안에 자리잡은 시카고는 미국 3대 도시의 하나로 꼽히며 ‘마천루skyscraper’ 라는 단어가 바로 이곳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현대식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이중 현 둥이 아파트먼트 타워가 시선을 끈다. 1951년에 준공된 순전한 유리·철골조의 건 물로, 이후에 심지어는 개발도상국이던 대한민국의 서울에까지 짝퉁 건물을 낳았던 이 현대 건축의 도상을 설계한 이는 독일 출신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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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건축의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기념비적 건축물로, 호수변에 자리잡은 26층의 쌍

고층의 유리 건물은 부산과는 달리 산도 없이 평평하기 이를 데 없는 호반도시와 참으 로 잘 어울린다. 이처럼 건축물의 형상이 자연적 조건을 고려한 것은 참으로 고무적이 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치가 않 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미국으로 건너온 후 현대 건축의 첫 선을 보인 곳은 호수변에 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카고 일리노이 공과대학IIT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곳에 새로 마련된 캠퍼스 전체를 설계했다. 그런데 그 위치가 대단히 의미심 장했다. 그곳은 전설적인 흑인 구역인 ‘브론즈빌Bronzeville’의 북쪽 가장자리였다. 시카고 남부의 브론즈빌은 ‘구리빛 지역’이라는 명칭 그대로 미국 흑인의 역사와 문 화를 대표하는 곳이다. 뉴욕에 할렘이 있다면 시카고에는 브론즈빌이 있다. ‘대이민’ 의 시대인 1910-20년대에 수많은 흑인이 남부 농장지대를 떠나 참된 자유와 직장 을 찾아 북부의 공장 지대로 이주했다. 당시 시카고는 미시간 호반을 따라 도축업이 활발했으며 도시 남쪽 가장자리에는 미국 최대의 철강공장 단지가 들어서서 일자리 가 많았기에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정착 후 얼마 되 지 않아 세계적 규모의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미시간 호반의 겨울만큼이나 매서운 실업의 한파가 찾아왔다. 그리하여 공장지대와 가까운 시카고 남부에는 일자리를 하 염없이 기다리는 흑인들의 빈민가가 자리잡게 되었다. 도시 안에 고립되어 존재하는 또 하나의 도시, 브론즈빌. 이곳은 미국인들 사이에 곧잘 “블랙 메트로폴리스”라는 별칭으로 불려져 왔다. 어차피 검은 피부색으로는 온갖 인격 모독과 폭행을 감수하 지 않는 한 백인 거주지에서 버텨내기 힘들었다. 시카고의 백인 공무원들은 흑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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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가 점차 북쪽으로 확장되자 브론즈빌 안쪽에 일렬로 늘어선 대규모의 공공 주택 을 지어 흑인들이 그들만의 지역에 살도록 조장했다. 또한 브론즈빌의 북부 가장자 리, 즉 시카고 도심과 가장 가까운 구역에는 일종의 장벽처럼 일리노이 공과대학을 자리잡게 했는데, 시카고에서 시작된 현대 도시의 고층 유리건물은 바로 이 학교에 서 첫 선을 보였다.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냉혹한 장벽이었다. 미시간호의 푸른 수면 을 가득 머금은 찬란한 유리 건물들에는 이 같은 비정함이 배어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탈국적 연대를 모 색했던 “국제주의” 운동의 주역 중 하나였으며,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등 그 의 독일인 동료들과는 이미 그 전에 독일 예술가와 산업가의 연합조직인 공작동맹 Werkbund에서

함께 활동했다. 영국의 “미술·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의 독일식

변형인 이 조직은 1907년 남독일 뮌헨에서 창립되었으며 산업사회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독일 민족문화의 전통에 입각한 독일적 디자인을 창조하자는 대의를 표방했다. 독일제국의 엘리트 집단을 두루 포함한 공작동맹은 영국식 “미술·공예 운동”이 표방했던 수공업 낭만주의를 비판하고 기계문명의 가능성을 민족의 번영을 위해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이 노선은 한마디로 보수주의적 모더니즘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발터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 후 이 조직의 주역으로 등장하여 이곳을 대중의 일상에 부응하려는 현대 건축과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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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디자인의 발상지로 키우고자 부심했으며, 이는 국립교육기관 바우하우스Bauhaus에 서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이들은 앞 세대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고 세계 시민적이었으나 모더니티가 지닌 과도하게 자기만족적이고 일방적인 성격을 제한하 기보다는 오히려 극대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더 비정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기본 성격이 일리노이 공대로 고스란히 이어졌던 것이다. IV. 공작동맹의 창립자이자 초기 주역이었던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는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에 비해 지극히 국수주의적인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젊은 시절, 영국 런던 소재 독일 대사관의 프로이센 기술·문화 담당관으로 봉직한 경력으로 인해 영 국 건축 전문가로 통했으며, 보다 이전에는 베를린의 한 건축사무소의 직원으로 멀 리 일본으로 4년간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경력도 있었다. 머나먼 동아시아에서의 경 험이 그로 하여금 기존의 주류를 이루던 역사주의 건축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게 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모더니즘 건축과 일본 건축계의 만남은 후속 세대의 독일 건축가에 의해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된다. 후기의 공작동맹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건축가 중 하나인 브루노 타우트Bruno Taut는 1936년 일본 체류 중에 집필하여 발간한 『유럽적 시각으로 본 일본 예술Japans Kunst mit europäischen Augen gesehen』에서

재로 지어진

일본의 전통 건축에 새로운 의의를 제공했다. 히노끼 목

이세신궁伊勢神宮이

“농부의 오두막”같이 “형태 그 자체로 구성이 될 만

큼 개방적이고 단순”하여 “일본 문화의 장점을 한데 모은 결정체”라면, 교토 소재의 가쓰라이궁桂離宮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그곳의 프로필레온, 파르테논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일본의 고전 건축”으로, 출입구의 앞뜰에 펼쳐진 대나무 빗물받이처럼 “모든 허식을 피한” 채 “그 기능을 마지막 세부까지 완전히 충족”시킴으로써 “고전적 단순성과 선명성”을 보여준다. 타우트의 관점으로는 이들 건물은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형식을 찾아 척도와 비례를 통일시켰다는 점에서 “완전히 모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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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타우트는 자연의 비례를 고스란히 담아 “그 구성의 완전한 순수함”을 보여주 는 일본 전통 건축이야말로 자신이 지향하는 현대 건축과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했다. 이 독특한 저서는 1940년 출판사 메이지서방明治書房에서 『일본문화사관』이라는 제목 으로 일역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수많은 “일본문화론”의 변종을 낳았는데, 서 구의 영향은 물론 심지어 불교나 중국의 영향마저도 비일본적이라고 배제하면서 오 로지 신도와 천황제만을 일본 문화의 근간으로 삼는, “순수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 은 타우트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일본에서도 미래에 대한 특정한 기획과 결부되었다. 1914년 독일 쾰른에서 공작동맹 주최로 개최된 국제전시회에서 독일관인 유리집 Glashaus을 공동 설계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던 브루노 타우트는 나치 치하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이주한 후 ‘일본 인터내셔널건축회’의 공식 초청을 계기로 1933년 일 본에 망명을 와 있던 터였다. 타우트가 일본을 찬양하기 이전에 이미 국제적인 모더니즘 건축의 물결이 일본에 밀 려들어온 상태였다. 직선을 조합시킨 기하학적 형태의 디자인을 창조한 독일, 오스 트리아의 분리파Secession 운동은 곡선을 선호하는 아르누보에 비해 일본인의 감각에 맞았다. 일본 최초의 모더니즘 건축운동은 다름 아닌 “분리파 건축회”의 창립이었다. 분리파를 의미하는 소위 “세쎄쑌セセッション”은 메이지말기부터 다이쇼시대 초기 일본 건축계의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말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건축 공법상 의 변화도 한몫을 했는데, 1923년의 간토 대지진 이후 메이지시대의 문명개화를 상 더불어 서양인 건축가들의 개입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전통 건축과 모 더니즘 건축을 직결시킨 브루노 타우트의 입장은 일본 건축에서 영감을 얻어 전원적 인 수평선을 강조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초원prairie 양식”과 더 불어 일본 건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들 외국인의 건축은 당시 “신흥 건 축”으로 불렸는데, 1927년에는 간사이關西 지방의 건축가를 중심으로 일본 인터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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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하던 적벽돌 건축에서 철근 콘크리트 건축으로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와

널건축회가 교토에서 결성되어 발터 그로피우스와 브루노 타우트 등 고명한 외국인 회원 10명이 가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렇지만 서구 모더니즘과 일본 전통의 만남은 양측 모두 억측에 기반한 것이었다. 서구인들에게는 일본이 여타 문명권에 대해서 느끼는 혐오감이나 거슬림 없이 자신 들의 심상을 자유로이 투영해 볼 수 있는 백판과도 같은 존재였다면, 일본인들에게 모더니즘 건축은 후발국으로서의 위치를 역전시켜 서구보다도 더 앞설 수 있는 절 호의 기회로 간주되었다. 어쨌든 이 모두는 보편타당한 원리로서의 모더니티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후 일본의 ‘무뢰파無賴派’ 작가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가 타 우트의 베스트셀러와 동일한 제목의 『일본문화사관』이라는 책을 통해 타우트의 일 본 찬양을 희화화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카구치는 전통이란 그저 우연적 소산일 뿐으로, 가쓰라이궁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고 속악한 도시 문화야말로 자신이 필요하 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도발적으로 말했다. 그가 간파했듯이, 서양인의 찬사에 감격 한 일본인들의 모습이란 실로 나르시시즘적인 것으로, 아시아의 이웃 민족들을 멸시 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V. 제국 일본의 현대 건축은 메이지유신 이래 줄기차게 추진해온 서구화·근대화의 새 로운 단계를 나타내는 도상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기회로 일제가 건립한 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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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수도 신쿄新京에는 일본식 모더니즘 건축의 향연이 펼쳐졌으며, 그 전형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서양식 건축에 일본식 지붕을 올린 소위 “제관 양식帝冠様式”이었다. 그것은 “동양 건축을 기조로 삼은 국제적 신흥양식”으로, 서구적 근대화를 넘어선 “근대의 초극”을 체현했다. 순수한 과거와 전혀 새로운 미래, 가장 동양적인 것과 가 장 서구적인 것 간의 모순적 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동양식 맞배지붕과 서양식 박공을 연결시키는 사고는 이미 일본 최초의 건축사가로 꼽히는 이토 쥬타伊東忠太에 의해 논구된 바 있었다.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대학원생 시절이던 1893년에 『건축잡지建築雜誌』에 실린 그의 논문 「호류지 건축론」은 세계 최 고의 목조 건축물인 호류지法隆寺가 “서양 고전양식”을 포함하여 고대 세계를 풍미하 던 여러 양식의 정수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호류지를 이루는 건축 적 구성부분들 중에서 특히 장대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중문中門은 층간 높이와 기둥들 사이의 거리가 동일한 비례를 이루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지붕의 경 사에 있어서 고대 에트루리아 사원의 박공, 기둥의 구조와 유사하다. 이에 더하여 금 당金堂의 기둥이 보여주는 중간이 불룩한 배흘림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엔타시스エソ タツス, entasis”와

동형을 이룬다. 결국 호류지는 “고대 동서교류의 역사”를 보여주는 최

상의 유증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대 일본의 오랜 건축적, 역사적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기는 했으나, 제관 양식은 다소 돌출적으로 등장한 양식이었다. 1933년 신쿄에 준공된 제2호 정부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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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1936년에 준공된 만주국 국무원國務院 등이 보여주는 신고전주의적 파사드와 파 고다 지붕의 어색한 결합은 정치적 후광으로 신성화되었다. 그것은 “대일본제국” 의 민족적 사명과 문명적 보편성을, 한마디로 “대동아大東亞”의 이념을 건축적으로 표현했다. 제관 양식을 위시한 일본식 모더니즘 건축의 유산은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에 뚜렷 한 자취를 남겼다. 일제강점기 초반에 들여온 서구 고전주의 및 역사주의 건축의 바 통을 이은 모더니즘 건축은 과학적 합리성의 이름으로 식민통치의 문명적 정당성을 드높이는 기능을 행했으며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이름으로 온갖 고통의 기억을 일방적으로 삭제해 버리는 역할을 맡았다. (포스트)모 더니즘 건축의 마치 무관심한 듯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외관이야말로 불가항력적인 권능의 표상으로 받아들여졌다. 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인 이왕가미술관은 그 한 사례를 보여준다. 대한제 국의 마지막 유산인 석조전의 서관으로, 1938년에 준공된 이 건물의 설계자는 도쿄 제국대학 출신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다. 그는 조선은행 다롄大连 지점 사옥을 설계하는 등 만주의 일제 거점도시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식민지 조선에도 조선 식산은행 본점과 동양척식회사 목포 지점 등 수많은 건물들을 세운 인물이다. 만주 에서 주로 추상성이 강한 고전주의 형태의 건물을 설계하던 그는 이왕가미술관에서 도 코린트식 열주를 지닌 네오르네상스 양식에 거의 장식이 없는 수직창과 박공 없 이 단순화된 수평면의 지붕 등 모더니즘적 요소들을 가미시켰다. 결국 강고한 열주 가 삼엄하게 늘어선 프로이센식 요새 안에서 한국의 오랜 문화적 전통은 새 보금자 리를 찾게 된다. 그곳은 일방적으로 재단된 기억/망각의 공간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흐름은 지속되었다. 만주국식 제관 양식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옆에 지어진 세종문화회관이다. 설계 공모에서 당선된 엄덕문과 전동훈의 설계안을 수정한 형태로 1974년에 착공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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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에 준공된 이 건물은, 설계자 엄덕문에 따르면 “전통과 기능의 조화”를 지향 했다. 한국 고유의 건축 양식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이 건물은 세종로를 향해 펼쳐 진 파사드를 장엄한 화강석 열주와 좌우 벽면으로 처리했는데, 양 벽면에는 2개의 비 천상이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화강석 열주와 좌우 벽면의 비천상 부조는 서양과 동 양, 근대적인 것과 민족적인 것이 결합되는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모순된 양측 은 여기서 무조건적인 통일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어디에도 중간은 없다. 쉬어갈 마 당도 없다. 관객은 건물의 옆으로 돌아 출입하고 보행자는 파사드 앞의 길가에서 발 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권력자의 면전에서 눈길을 마주치지 못하고 움 츠러들 듯이 말이다. 이처럼 맥락을 결여한 전통과 국적불명인 현대의 비대칭적 병립, 그리고 양자를 매 개할 근대기 유산의 실종이야말로 건축 영역을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자체의 기 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국민들의 균열된 기억이 비교적 잘 다듬어진 유적과 초고층 마천루의 뒤편에 함몰된 지층처럼 남아 있는 나라…. 그 외형적인 활기에도 불구하 고 대한민국의 주요 도시, 특히 수도 서울은 구조적으로 비어있다. 일제시기의 프로 이센식 고전주의와 개발독재 시기의 무채색 모더니즘,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미국 식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의 주변을 끊임없이 겉돌고 있는 듯하다. 그 어느 것도 시 민의 삶과 정체성이 안착할 참된 보금자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이렇게 볼 때, 해체주 의를 위시한 현대 건축 조류의 번성은 이 땅에 뿌리내린 (포스트)모더니티의 풍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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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이 아니라 오히려 식민성의 끈질긴 현존을 입증해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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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의 COMPASS 40

Brave New Architectural World 이종건 간향클럽 고문, 경기대학교 대학원 교수

건축가가 있다. 건축가를 둘러싼 건축가 무리 곧 건축계가 있다. 건축계를 둘러싼

Issue

사회가 있다. 사회를 둘러싼 국가가 있다. 국가를 둘러싼 세계가 있다. 21 와이드 COLUMN

건축가는 자신의 의뢰자에 기댄다. 건축 의뢰자가 없으면 건축가도 없다. 건축가는

“현대” 건축의 식민성에 관하여 | 전진성

자신의 의뢰자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욕심이 많든 적든, 그/녀의 요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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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른다. 의뢰자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일을 잃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면 명함을 잃는

이종건의 COMPASS 40

다. 변호사도 그렇다. 자신의 의뢰자가 명명백백한 악인일지언정, 그/녀를 위해 최

Brave New Architectural World 31

선을 다하는데, 키아누 리브스가 변호사로 열연한 영화 <Devil's Advocate>는 극적

와이드 FOCUS

인 경우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자본주의 세상이라, 구조가 좀 다르다. 대부분의 건

당선작가 | 이경창

축가는 고용주를 따른다. 대부분의 의사도 그렇고, 대부분의 변호사도 그렇다. 자신 의 고용주에 따르지 않으면 직업이 위태롭다. 건축가 또한 자본가를 따른다. 실제의 건축주든, 치고 빠지는 시행사든, 턴키, 설계경기, 입찰에 목매는 건설사든, 모든 형태의 건축 의뢰자는 자신의 모든 방편으로써 시장경제에서 살아남을 뿐 아 니라, 더 잘 살고자 한다. 거기에 보탬이 되지 않는 건축 일은 소용에 닿지 않는다. 건축 일로써, 돈을 최대한 많이 절약하거나, 최대한 많이 벌고자 한다. 건축가의 고 용주, 의사의 고용주, 변호사의 고용주, 곧 자본가는 정도가 훨씬 심하다. 수익에 목 을 맬 정도다. 건축은 경제에 완벽히 종속된다. 건축가는 건축가로 존재하기 위해, 건축 의뢰자(때로는 건설회사)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한다. 건축가가 습득한 건축 지식은 모두 건축 의뢰자를 만족시키는 범위 안에 서 소용에 닿는다. 건축 설계비도, 건물 형식도 건축 의뢰자의 경제 논리에 따른다. 그리고 건축가는 그와 동시에 그 구조 안에서 가급적 자신의 생존이 최대한 유리하 도록 작업한다. 나중에는 그것이 제 살을 깎는 일일지언정 당장은 그리해야 살아남 고, 부흥할 수 있다. 건축가는 모두 각개전투로 생존을 도모한다. 건축가는 무조건 을이다. 각종 건축단체는 건축가가 살아남는 데 소용에 닿아야 성립가능하다. 안으로는 각 종 상을 주거나 여러 매체에 홍보하여 건축가의 생존력을 높이려 애쓴다. 물론 문 화적 허영도 제공한다. 밖으로는 건축가의 이익을 위해 사회에 개입한다. 설계비도, 설계 조건도, 건축가의 지위도 지킬 뿐 아니라, 가급적 더 좋게 만들고자 하는데, 결 국 정치력에 달렸다. 심지어 국가권력과 감히 대놓고 맞짱 뜰 만큼 가공할 위력을 지닌 의사협회에 비하면 조족지혈인데, 그것은 건축가 무리가 넘볼 수조차 없을 만 큼 큰 돈을 움직이는 건설인 무리가 그 만큼이나 큰 정치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건 축가와 각종 건축단체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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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의 COMPASS 40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Wide Issue | 와이드 이슈

학계도 다르지 않다. 건축학자는 논문 없이는 대학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대학은 사 회 속에 살아남기 위해 평가지표에 매달린다. 논문의 질은 아무 의미 없다. 오직 편 수가 문제다. 건축학자는 무조건 각종 학회에 회원으로 등록해 돈을 헌납한다. 각종 학회는 건축학자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건축학자가 제출 한 논문은 ‘적당한’ 절차와 수준으로 판단하여 통과시킨다. 건축학자와 건축학자들 이 운영하는 각종 건축학회는 피차 먹고 먹히는 관계다. 건축(가)을 둘러싼 사회는 돈과 정치가 지배한다. 학문의 전당이라 불렀던 대학도 시장경제에 따른다. 대통령의 최우선 공약은 경제성장이다. 서민 경제 활성화다. 정 치권력은 자본주의 논리에 복속된다. 국가와 국가들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주의 시 장경제다. 온 세상의 중심은 돈이다. 그러므로 시장경제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 세상에서 퇴출된다. 혹은 극도 로 약화된다. 그리고 인간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력과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력에 불과하다. 팔 리지 않는 지식은 소용없다. 예술도 그렇다. 문학, 역사학, 철학 등이 대학기업과 기 업대학에서 소멸한다. 노동력은 오직 생산력의 도구로서, 기업이 필요할 때 쓰고 필요하지 않을 때 버린 다. 일부 핵심 인력만 제외하고, 모두 임시 노동자다. 극단적인 형태는 일용직 노동 이다. 개인은 오직 노동력으로 쓰이기를 바란다. 노동 기회가 박탈되면 생존이 위 주야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수입이 현격하게 늘어가고, 가계경제는 점 점 나빠진다. 국가는 기업이 번성하도록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든다. 노동조합은 철저히 탄압하고 감시하고 파괴한다. 어떤 형태의 연대도 없애야 할 문제이니, 모든 사람이 개인으로 살아가도록 다스린다. 삶의 행복과 불행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노동력이 줄어들지 않도록 결혼과 출산 문제도 심각하게 관리한다.

이종건의 COMPASS 40

태롭다. 자칫 노숙으로 떠밀린다. 해서 더 좋은 노동력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불철

소비력 진착도 국가의 몫이다. 국가는 시장경제 활성화를 위해 개인이 가진 것을 넘 어 빚으로 소비하도록 모든 방도를 강구한다. 빚 사슬에 묶어둔 채, 삶의 에너지를 가급적 많이 거기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휴식은 노동력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기업 은 최고의 예술적 능력과 심리학 전문가들과 영상 제작자들로써 광고물을 만들어 안방 깊숙이 배치시킬 뿐 아니라, 최고의 인간행태학자들과 공간디자이너들과 마케 팅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상품 판매 공간을 배열하고 디자인하여, 개인의 무의식과 잠재의식까지 파고들어 소비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인간뿐 아니라 자연도 철저히 착취한다. 돈이 될 만한 것은 모조리 상품으로 만든다. 인간의 욕망도 창출한다. 삶 에 불필요한 것도 필수품으로 간주해서 욕망하도록 심리와 문화를 조작한다. 세계화 흐름에 떠밀려가는 소국들은, 증대하는 빈부 격차며 사회보장 위축이며 각 종 사회문제들을 도외시할 뿐 아니라, 도리어 자본 통제력을 글로벌시장에 넘겨, 사 태를 악화시킨다. 미래가 위태로운 개인은 불안에 시달리고, 노동력으로 대치된 개 인은 늘 우울하다. 해서, 행복약인 ‘항우울제PROZAC’가 발명된다.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용감한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는 소마soma라 불리는데, 개인들이 저항하지 않고, 반발하지 않고, 우울하지 않고, 건강한 노동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 럴 때 기업이 만들고 나라가 배급해 주는 소마를 먹으면 충분하다. 연애도 사랑도 필요 없다. 소마만 있으면 모든 쾌락 욕구가 해소된다. 소마 세 알이면 완전한 행복 의 경지에 빠진다. 세계의 통치 철학은 진리나 미로부터 안락과 행복 추구로 바뀌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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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다. 사유를 촉발하고 정신을 추구하는 예술과 종교는 금기다. 고독도 금지다. 선과 악의 구분선을 이분법이라 조롱하고 경멸하며, 부정한다. 흥미로운 점은, 어떤 완벽한 세상도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두뇌에 화학 반응을 일으켜 환각 상태나 흥분 상태에 빠뜨리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통제 속에 놓인 듯하지만, 소수의 저항자들이 반드시 존재하고 출현한다. 『용감한 (멋진) 신세계』의 존이,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매트릭스2>의 트리니티가 그 러한 인물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지금 곳곳에 있다. 소비하지 않거나 최소로 소비하는 삶도 전파하고, ‘아큐파이’ 집단 항의시위도 벌이 고, 공정 무역도 전개하고, 풀뿌리 코뮨(조합)도 조직한다. 공산주의 콘퍼런스를 열 어 대안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천주교는 과거 약 400년 동안 시성 과정에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제도를 운영 했다. ‘신앙의 옹호자Promoter of Faith’라고도 불리는데, 추천된 성인에 맞서 그가 지닌 모든 성격적 결함이나 시복에 유리하게 쓰이는 잘못된 증거들을 드러내려 애쓴다. 악마의 대변인이 떠맡는 일은, 지원자의 성격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취해, 제시된 증거의 구멍을 찾고, 그에게 속한 모든 기적이 사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의 규범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이에 맞서 성인을 옹호하고 지키는 ‘신의 대변인(God’s Advocate; 정의의 옹호자라고도 부른다)’도 있다. ‘악마의 대변인’만큼이나 열정적

이종건의 COMPASS 40

으로 주어진 규범을 사수한다. 흑색파와 백색파 건축가가 있다. 흑색파는 건축을 성립시키는 사회적 조건들에 맞 선다. 말하자면 사회 저항자인 셈인데 ‘악마의 대변인’과 흡사하다. 백색파는 주어 진 현실에 맞춰 살며, 그리함으로써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거기에 안주한 채 현실 세계를 지키는데 ‘신의 대변인’과 흡사하다. 흥미로운 점은, 백색파(혹은 회색 파로 불러도 좋겠다)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흑색파에 의해 존재를 부여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흑색파만 오직 선과 악을 분명히 나누기 때문이다. 마치 ‘신 의 대변인’이 ‘악마의 대변인’으로 인해 성립되듯 말이다. 그리고 원심력이 실제의 힘인 구심력과 달리 그에 대한 반작용이듯 말이다. 건축으로 혁명하여 세상을 바꾸 려던 모더니즘 건축의 기획이 완벽히 두절된 후, 흑색파 건축가 세 명이 출현했다. 존 헤이덕, 레이먼드 아브라함, 레비우스 우즈가 그들이다. 이들은 심지어 실제의 구축적 가능성까지 기꺼이 포기한 채, 건축을 지키고자 애썼다. 삼차원 공간이 상품 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며, 공간을, 심지어 시간까지, 붕괴시키려 시도했다. 사람들 은 유토피아를 꿈꿨던 르 코르뷔지에와 같은 이를 ‘꿈꾸는 자’라 부르고, 현실적인 건축을 버림으로써 건축을 지키려했던, 그야말로 ‘불가능한 저항’을 시도했던 그들 을 ‘자살자’라 부른다. 헤이덕은 2000년 향년 71세에 암으로 죽었고, 아브라함은 10 년 뒤인 2010년 향년 77세의 나이에 차 사고로 죽었으며, 우즈는 2년 후인 2012년 향년 72세에 알코올 남용에 의한 합병증으로 죽었다. 이 세 명의 건축가가 우리 곁 을 떠난 후, 그들의 저항 정신을 이어받은 건축가는 아직 없는 것 같다. 타푸리는 아주 오래 전에 이렇게 썼다. “건축에 부여된 새로운 과제는 건축 이외이 거나 건축을 넘어선 어떤 것이다.… 디시플린(참고로 나는 ‘깨닫고 정진하는 행위’ 로 해석한다)의 역할은 사라진다.… 그 과정은 우리 눈앞에 매일 벌어진다.… 이념 은 자본주의 발전에 무용하다. 건축가의 프로페셔널 지위가 하강하고, 건축 이념의 역할이 최소인 프로그램 속으로 인도된다. 건축가는 이제 걸어온 길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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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Focus | 와이드 포커스

와이드 FOCUS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당선작 ‖ 주평론 차운기 건축에 나타나는 고향의 의미 단평론-1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 이은영 건축 비평 단평론-2 융복합과 일상의 건축 사이에서

Issue

21 와이드 COLUMN “현대” 건축의 식민성에 관하여 | 전진성

당선작가

이경창

28 이종건의 COMPASS 40 Brave New Architectural World 31 와이드 FOCUS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

주최 | 간향 미디어랩 & 커뮤니티 주관 | 와이드AR 후원 | 건축평론동우회

당선작가 | 이경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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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심사평 심사 위원_김영철, 건축이론연구소 군자헌, 건축평론동우회 동인

2014년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에는 모두 4인이 응모했고 응모자는 각각 주평론 1편 과 단평론 2편씩 총 3편을 응모하였다. 심사자에게 무기명으로 제시된 평론들은 예년과 비 교하면 월등히 정교하게 다듬어졌고, 문제의식도 날카로웠으며, 논리도 비교적 정연해서 건축비평의 문화가 성숙의 단계에 들어서 있음을 보여주었다. 건축 학습 과정에서 습득된 지식의 구성이나 나열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판단의 제시나 불합리의 상황을 문제로 의식 하고 있는 점도 두드러졌다.

와이드 FOCUS

심사의 평가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비판 의식

2.

논제 구성과 문제 파악의 정교함

3.

논증을 뒷받침하는 사실들

4.

문제의식으로부터 대안을 도출해 나가는 과정의 명료함

5.

제기한 문제의 시대성과 역사성 부합 여부

I. [주평론] <차운기 건축에 나타나는 고향의 의미>의 저자(응모자: 이경창)는 다른 세 응모자 에 비해서 월등하게 풍부한 지적 자산을 갖고 있었다. 현대 문명과 도시화의 과정에서 균형 을 잃어가고 있는 주거의 의미, 구축의 가치, 인간의 삶이 함께해야 하고 또 스스로 보살펴 야 할 의미의 영역을 문제로 내세운 점은 탁월하다. 그가 제시한 ‘고향’, ‘은둔과 자적’, ‘졸 박’, ‘기억’, ‘향수’ 등의 개념어들은 많은 오늘날의 건축인들에게 오히려 아득한 과거의 정 취를 환기시킬 수도 있지만, 저자에게는 이들이 건축의 의미 영역을 담당할 주제였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거주를 가능하게 할 ‘진정한 의미의 집’을 논증해 나갔다. 이러한 주제를 차운기의 건축과 작품에서 발견하고, 그 의미를 해명한 점이 놀라웠다. 그 해명의 과정과 논리가 단순히 과거 어느 한 건축가에 대한 연민과 그의 건축작품에 대한 주관적 찬사가 아 니라는 점은 그가 추적해 간 현대 문명과 건축 양상들의 대비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가 선택한 주제와 그의 해명을 위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까? 여기에 대 해 단지 찬사를 던져 그것이 일회의 사건으로 머물기에는 그가 제시하는 건축의 비전은 근 본적이어서, 이를 더욱 굳게 다듬어야 하고, 그 위에 세워질 것을 위해 하나의 척도로 작용 할 수 있으며, 당위성도 가진다. 저자가 읽어낸 차운기의 건축이 유토피아, 즉 꿈의 세계를 목적하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 세계는 마찬가지로 철학자 벤야민에게도 진정한 가치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거의 방식이 주장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눈을 떴을 때 모 든 꿈의 요소들을 살리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의 정석이 되어야 한다.” 그가 기록한 이 인용 문은 분명 오랫동안 건축가들이 그려내려고 다투어 온 건축의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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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Focus | 와이드 포커스

II. [주 평론] <조민석-이질적 접합의 건축>의 저자(응모자 : 박성용)는 이론의 역할과 가치를 배경으로 현대건축, 특히 창작의 문제를 진단하고 있다. 이론을 대체하는 개념어로 ‘규율’ 을 선정하고 있고 그 규율이 작동하는 방식, 또 현대건축의 규율이 보편성의 영역에 머무 르는 것으로 다루기보다 ‘개별성 차원의 문제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이 규율이 ‘사회의 이질성을 강화하는 퇴행적 성향으로 사회에 비춰진다’고 보며, 세속화를 부추기고 상업화의 경향으로 치닫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를 근거로 건축의 영역, 특히 창작 의 내부 논리에서 ‘이질성’이 하나의 원칙으로 작동할 가능성을 보고 있으며, 이를 하나의 비평 도구로 설정하여 조민석의 건축을 ‘이질적 접합의 건축’으로 해명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의 논리 구성에서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 현대 건축가들이 ‘건축작업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잃어버린’ 상황이라는 전제가 타당한지, 보편성과 개별성이 등가의 영역이 고 또 대립이 가능한지, 더 나아가 조민석의 픽셀하우스Pixel House의 이질성이 Y-염색체로, 딸기테마파크 작품이 Χ-염색체로 대별될 수 있는지, 또한 조민석의 건축이 ‘남성성+여성 성’의 추구의 이질적 접합인지 의아스럽다. 이 논제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 출처를 밝히는 것이 좋겠지만, 저자는 이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이들이 ‘편의를 위한’ 논제로 설정된 것이 라면 도구의 가치 이외에는 다른 역할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용 대상에 적합한지의 문제에 답을 제시해야 하는 과제도 남게 된다. 비평 실천의 저자에게 기대하는 것 중에서 우선은, 그가 작품이 스스로 드러내는 의미의 영역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그가 이 과정에서 집중해서 던졌던 시선이 내용이나 형식 규정의 활자들로 옮겨졌다는 확 신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면 좋겠다는 점이다.

[주평론] <기억과 치유의 건축언어>(응모자 : 박지영)에서는 건축의 역할과 기능을 다루었 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났던 큰 사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문제로 삼은 다음, 건축을 이를 해

와이드 FOCUS

III.

결할 수 있는 담지자로 설정하였다. <세월호 추모관> 건립의 촉구 상황에서 건축의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했을 때, 저자가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은 건축물의 기능 혹은 목적이다. 그렇 게 한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자가 건축에서 기억, 또 치유가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를 묻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들을 ‘남겨두다’, ‘물성’, ‘체험’, ‘빛’의 개념어들로 구성해 가고 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건축물이라는 대상을 설정하고 그 상황에서 한정적으로 다시 건축 물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건축물이 현존하지도 않을뿐더러, 예시의 기념 관, 기념비들에 대한 비평도 저자는 실천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예리한 관찰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논의는 건축 각론과 유형학의 영역에 머무르게 되는 단점이 있다. IV. [주평론] <정기용론 : 건축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저자(응모자 : 임한솔)는 회화의 영역과 건축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는 기량을 보여 주었다. 또한, 건축을 구축 의 형식 논리에서만 보려고 하지 않고 의미의 영역을 인문의 차원에서 해명하려고 한 노력 은 찬사의 가치가 있다. 형신론形神論, 전신론傳神論이라는 동아시아 이론 틀을 제시한 점, 형 을 가시의 영역으로, 신을 정신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이를 근거로 정기용 건축론을 펼쳐간 점이 돋보였다. 그런데 정기용의 흙건축에 대한 예찬에서는 논리적 귀결이라기보다는 저 자의 주관이 앞서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건축이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 적으로 경험하는 공간’이라는 전제는 타당하다. 그런데 ‘공동체적 세계관을 가꾸는 데에 가 장 효과적인 방법’이 과연 ‘흙을 이용한 건축에 담겨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다. 정기용의 건축이 흙을 재료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흙이라는 정신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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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러 일으켰던 것이다’라는 맺음말에 대해서는 저자에게 공감을 표하고 싶다. 이 주장 이 현대건축의 경향에 대한 비판이기는 하지만, 만약 저자가 정기용의 건축을 대변 할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숙고의 입장을 보였더라면, 현대건축에서 형의 영역보 다는 신의 영역에 사유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많은 건축가가 보일 저항감이 줄어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V. 네 응모자 작품들 가운데 주평론과 단평론이 모두 각각 균형을 이룬 유일한 경우는 이경창의 응모작뿐이었다.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건축적 상황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의 근본 개념들이 소통되는 방식에 대한 비판 의식도 함께 보여 주었 다. 그의 글은 다소 거칠고 분절이 더 필요한 주장들이기도 하였다. 엄밀한 인용 방 식도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건축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의지 를 읽었다. 그리고 더욱, 이런 의지가 건축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며, 주 장에 힘이 실려 있고,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위해 구사할 수 있는 지적 자원들도 풍 부해서 비평가로서 해야 할 역할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와이드 FOCUS

금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의 수상자 이경창에게 찬사를 보낸다.

<당선 소감> 평생 상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고 글쓰기에 관 해선 기초부터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을지, 상을 감당할 깜냥이나 될지 덜컥 겁부터 납니다. 더구나 제 글이 비평상에 걸맞는 시의성도, 어떤 새로운 기치도 제시하지 못한 글이기에 더욱 그렇습니 다. 저로선 큰 용기와 격려를 주신 것으로 생각 합니다. 더 많은 가르침을 청하는 계기로 삼겠 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경창 1972년 부산 출신으로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김경수 교수 밑에서 건축이론 및 역사 를 전공하였다. 학부시절에는 <민중건축연구 터>라는 건축 동아리에서 건축의 사회성에 관심을 가 졌으며, 대학원 진학 후 건축과 현대성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아도르노, 벤야민 등 프랑크푸르 트 학파의 철학과 타푸리 등 베니스학파의 비판이론을 접하였다. 학위 논문으로는 「진보성향 한국 현대건축가 연구」(2001년), 「현대건축의 비판성과 자율성 연구」(2010년)가 있으며, 학술지 논문 으로는 「현대 영미 건축계의 비판/탈비판 논쟁 연구」(2013년) 등이 있다. 역서로는 힐데 하이넨의 『건축과 현대성Architecture and Modernity』(2008년, 시공문화사), 브라이언 엘리엇의 『건축가를 위 한 사상가 시리즈 05 건축가를 위한 벤야민』(2012년, 시공문화사) 등이 있다. 주로 명지대학교에 서 현대건축론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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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Focus | 와이드 포커스

주평론 차운기 건축에 나타나는 고향의 의미 실내는 단순히 개인의 우주일 뿐만 아니라 방물 상자이기도 하다.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 -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유행은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호랑이의 도약이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 황지우, 「노스탤지어」

거주 | 고향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건축의 기본적 임무는 거주를 다루는 데 있다. 바슐라르에게 집이란 “육체이자 영혼

옮김, 2003년, p.80 주2. 바슐라르, 같은 책, p.84

이며, 인간 존재 최초의 세계”주1이다. 그에게, 집은 추억과 “꿈들의 집적체”이다. 그 런데 바슐라르는 추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닌 공간이라고 보았다. “우리 들이 오랜 머무름에 의해 구체화된, 지속의 아름다운 화석들을 발견하는 것은, 공간

주3.

에 의해서, 공간 가운데서인 것이다. … 추억은 잘 공간화되어 있으면 그만큼 더 단

바슐라르, 같은 책, p.107

단히 뿌리박아, 변함없이 있게 되는 것이다.”주2 즉, 집이란 기억을 담는 곳이다. 문

주4.

제는 바슐라르에게 집은 과거 시제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슐라르가 보기에,

“대도시에서는 집들이 이젠 자연

현대인은 집이 아닌 “포개어져 놓인 상자들 속에서”주3 살아갈 뿐, 꿈과 추억, 기억을

속에 있지 않다. 거소와 공간의 관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진정한 의미의 집은 없다.주4

계는 거기서는 인위적인 것이 된

와이드 FOCUS

주1.

다. 거기서는 일체가 기계이고, 내 밀한 삶은 어느 부분에서나 도망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의 시대

가 버린다.” 바슐라르, 같은 책,

라고 한다. 진정한 거주는 고향과 통하는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짓기 building와 거

p.108 주5. 마틴 하이데거, 「건립, 거주, 사유

주 Buan의 “고대어 ‘bauen’을 통해 인간이 지상에 존재하는 방식이 바로 ‘거주Buan’ 이며, 인간은 거주할 때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주5 하지만 ‘고향상실’의 시대에 고

(Building, Dwelling, Thinking)」,

향을 떠나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은 진정한 고향이라는 의미로서의 집을 잃어

조희철 옮김, 이상건축 9 7 0 7 ,

버리고 거주지로서의 주택만 소유할 뿐이다. 현대인은 집을 잃어버린 존재이며, 고

p.145

향을 잃어버린 존재이다. 이런 문제의식이 차운기의 건축을 관통하고 있다.

주6. 차운기, 「여수 재건교회」, 건축세 계 9706, p.146

아이들은 자연을 배우며 자랐다. 그들이 아이들을 멀리한 채 떠난 후 우리의 아이들은 무엇을 벗 삼고 무엇을 배우며 어떤 추억을 간직할 수 있을까? 그들 이 영원히 자기네 땅을 찾아 가버린 지금 영원한 고향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어리석은 인간만 그곳에 덜렁 남아 빈 허공에 허우적거릴 뿐....주6 차운기에게 고향과 자연, 추억은 건축이 추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이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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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향에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을 잃어버린 세대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우리를 순화시키는 방법은 없”다주7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전략은 잃어

주7.

버린 고향을 되살리는 것이며, 자연을 닮은 건축을 짓는 것이 된다.

차운기, 건축세계9506, p.150 주8. 翰因見秋風起, 乃思吳中菰菜, 蓴羹, 鱸 魚膾, 曰, 人生貴得適志 何能羈宦數

은둔과 자적

千里以要名爵乎 遂命賀而歸.

윤수영,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은 현대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동양의 오랜 전통 속에

「도연명시에 나타난 자적의 의

고향으로의 귀환, 자연으로의 은둔은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었다. 『晉書』 「文苑傳 張

미」, p.54에서 재인용

翰傳」에 보면, “장한은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문득 고향의 줄나물・

주9.

순채국・농어회가 생각이 났다. 그 생각이 간절해지자, ‘인생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오비 고오이치(小尾郊一), 『중국

할 것이 자적하는 삶이다. 어찌 고향을 떠나 수천 리 타향에서 관직에 묶여 명리와

의 은둔사상』, 윤수영 옮김, 강원

작위만을 바라고 살아갈 것인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수레를 준비하라고 일러 고

고오이치(小尾郊一)에 따르면, 중

향으로 돌아가 버렸다”주8고 하는 기록에서 보듯 이런 생각은 노장 사상 이래로 동양

대학교 출판부, 2008년, p.7 오비 국의 사서(史書) 가운데에 은둔자 의 전기가 처음 기록되기 시작한

의 전통을 이루어왔다.

것은 『후한서(後漢書)』의 「일민 열전(逸民列傳)」이다. 「일민열전

또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은둔이 처세지도處世之道의 하나로서 존중되어 왔다. 그러 나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은둔하는 것은 아니었다. 역시 자신의 사상이나 행위가 전 혀 현실화될 수 없을 때, 즉 세상의 사고방식과 부합하지 않을 때, 비로소 은둔이라 는 행동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와이드 FOCUS

주9

이후에는 이것이 시와 그림에서 산수와 자연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동 기는 은거함으로써 그 뜻을 추구 한다, 둘째는 회피함으로써 그 도 를 온전하게 한다, 셋째는 자신을 평정하게 함으로써 그 조급함을

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 나아가 자적하는 삶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졌다. 즉, 아무

진정시킨다, 넷째는 위기를 제거

런 위협 없이도 스스로 은둔과 자적의 삶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도연명

함으로써 그 안전을 도모한다, 다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도연명은 「九日閑居」에서 은둔 자적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 사한 바 있다.

섯째는 세속을 더러운 것으로 생 각하여 그 절조를 지키려는 마음 을 품는다, 여섯 번째 동기는 물질 적 욕망을 비하함으로써 그 맑음 을 격동하게 한다로 구분하고 있

옷깃을 여미고 혼자 한가히 시를 읊으니 歛襟獨閒謠 끝없이 깊은 정이 일어나는구나! 緬焉起深情 은둔하며 사는 삶이 즐거움이 많고 棲遲固多娛 머물러 오래 사니 어찌 이룬 바 없다 할 것인가! 淹留豈無成 현대 한국인에게는 산업화에 따른 도시화, 탈고향 역시 세상에 닥친 거대한 어려움 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어려움을 피하고자 하는 경향은 고향에 대한 향수로 두텁게 자리잡고 있다.

자연 | 졸박拙撲 차운기는 자연친화적인 요소를 “오래되어도 변할 게 없는” 것,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오래 된 듯한 요소”, “편안함을 주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이것은 과거 한옥에서 찾아낸 중요한 가치이다. 집이라는 게 자연친화적인 요소가 있을 때 더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 되어도 변할 게 없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오래된 듯한 요소가 있는 것 이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 같다. 과거 한옥의 경우 몇 대를 거쳐서 사는 데 그렇게 대를 물려 살면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것이 배어 나온다고 생각한다.주10

36

(逸民列傳)」에는 은둔의 동기를 6

다. 같은 책, pp.26~28 참조. 주10. 차운기, C3 KOREA 9901, p.52


Wide Focus | 와이드 포커스

한편, 자연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질문에 선이나 면을 정교하게 만드 주11.

는 것은 ‘기계적’이라고 생각하며 그에 반하는 개념으로 “너무 정확하게 맞아 떨어

차운기, 건축세계, 9506

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흐트러진 듯한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너무 정형화된 것

주12.

은 기계적인 반면, 조금 흐트러진 것은 사람에게 편안함을 준다는 것이다. 그에게

차운기, 「어머니의 젓무덤과 한국

자연이란 “흐트러진 듯한 것”,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고향의 이미지와 상

적 곡선의 건축가, 대담: 차운기

통하는 것이다.

vs 임석재」, 1997년 2월, p.331 주13. “중광 스님 주택을 지을 때 얘기 다. … 생각다 못해 ‘걸레 스님’이

쑥스럽지만 나의 건축관을 이야기하자면 내가 만드는 건축이 조금은 자연에 가까웠으면 하는 것. 마음의 고향처럼 사는 이, 보는 이가 편해졌으면 좋겠다

란 별명에 맞게 집을 걸레처럼 짓

는 것.주11

기로 했다. … 집을 걸레처럼 만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가장 적합한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컴퓨터를 모

려 아이디어를 짜냈다. 예를 들어 서 흙담벽을 만드는데 진흙을 바

른다. 되도록 불편하지만 감각을 요하는 집, 기계가 배제된 집, 사람의 손길을

르는 게 아니라 던져서 만들고 돌

요하는 집을 좋아한다.주12

을 쌓는 데도 차곡차곡 쌓는 게 아 니라 위에서 떨어뜨려 앉는 대로 그냥 그대로 쌓아나갔다. 막 쌓기

고향으로의 귀향과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차운기의 전략은 형태의 자유분방함과 재

보다 더한 방법이었다.” 차운기,

료의 사용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차운기는 기계문명보다 수공예적 작업을 추구한

「어머니의 젖무덤과 한국적 곡선 의 건축가, 대담: 차운기 vs 임석

다. <곤지암 주택>에서 흙담벽을 만들면서 일부러 위에서 떨어뜨려 쌓아가는 방법

재」, 계간 『Review』, 1997년 봄호,

은 그것이 자연스러움을 만든다고 믿어서이다.주13 <택형이네 집>과 <곤지암주택>

pp.344~345

의 경우만 보더라도, 불규칙적인 창문을 하나하나 수공예로 제작하여 만들며, 철근 과 시멘트 뿜칠을 이용하여 초가와 같은 지붕을 만들어낸다. 너와를 씌운 지붕과 막

차운기, 「삼청동 재즈 이야기」, 건

돌과 흙을 이용한 벽체 쌓기는 차운기 건축을 고향 재현하기의 주된 방법이다. <재

축세계 9511, p.126

즈 스토리>를 지을 때는 “6・25 때 폭격 맞았다고 가정하고 그렇다면 집주인이 어떻 게 수리할까를 생각하며” 짓는다. “완전히 신축을 하되 새로운 부분들에 대해 아무 도 눈치채지 못해야 된다. 오래된 이 동네의 환경적인 정서와 정신적인 정서를 건드

와이드 FOCUS

주14.

리지 않아야 한다. 신축이지만 더 오래된 것 같은 집. 엉성하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 해 정리된 것 같은 집주14”이어야 한다. 오래된 집이 새 집보다, 엉성한 집이 정돈된 집보다 낫다는 생각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 구절은 큰 기교는 졸렬하다 고 해석할 수 있지만, 인위적인 기교를 배격하고 졸박함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읽을 수도 있다. 즉, 일차적으로는 대교大巧와 졸拙은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듯 보이 지만, 대교약졸의 졸은 단순히 기교와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교를 포 괄하면서 한 차원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기교가 발달하기 전의 소박미와

곤지암 주택

37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는 다른 것으로서 기교를 속에 내포하고 있는 세련된 소박미이다.주15 퇴계가 도산서 당을 지으면서 “비로소 내가 시내 가에 거처할 곳을 골라 시냇가에 집 두어 간을 얽

주15.

어매고 서책을 저장하고 졸박을 기르는 장소로 삼았다”주16고 한 표현에서 알 수 있

박석은 이를 3차원의 정반합적 변

듯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인 퇴계와 율곡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추구한 미 의식 중에 ‘졸박’의 미학이 창출”주17되었다.

증법적 관계라고 말한다. 박석, 「대교약졸의 미학적 의미」, 어문 학연구, Vol.7 No., 1998 참고.

차운기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요청은 바로 이런 맥락을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일부러 폐자재, 고재료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방식에서도 일관되게 드러 난다. 폐자재, 고재료는 그에게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고 사람손길이 많이 닿으면

주16. 李滉, 退溪先生文集 권3 시, 도산 잡영, “始余卜居溪上 臨溪縛屋數 間 以爲藏書養拙之所”

닿을수록 좋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른바 고졸미(古拙美)에 대한 예찬으

주17.

로 볼 수 있다.

신두환, 「조선의 도학과 ‘졸박’의 미학 담론」, p.135

나의 건축 작업에서 자주 쓰이는 폐자재, 고재료 등은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 고 사람 손길이 많이 닿으면 닿을수록 좋아질 가능성이 있어서 좋다. 나는 그

차운기, 「세월을 입은 古材」

자체를 누드라고 보기 때문에 그러한 재료들을 좋아한다. 또한 자주 사용하는

주19.

또 다른 이유를 든다면, 죽음에서 또다시 생명력을 갖게 되는 희생된 생명력은

“내 건축은 디테일이 많이 생략된

우리에게 엄청난 희망과 기쁨을 줄 것이라는 확신에서다. … 예를 들면 목재 같은 경우, 오랜 세월을 통해 찌들고 뒤틀리고 썩고 패어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고 좋아질 것도 없는, 손길이 가면 갈수록 깊이가 더 생기는 속성이 좋고 옷

와이드 FOCUS

주18.

건축이다. 나는 완벽한 디테일은 싫어한다. 기계 생산된 디테일을 쓰느라고 창이 밀폐되어 바람 한 점 안 통하는 건물은 잘못된 건물 이다. 건축가가 디테일에 신경 쓰

도 못 입고 버려져 썩은 철판, 썩는다는 것은 산화되는 것, 산화된다는 것은 재

는 일은 쓸데없는 짓 같기도 하다.

가 된다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은 재가 된다는 것. 그래서 이미 재로 변해가는

내 건물이 다소 거칠어 보일 수는

썩은 철판이 좋고, 멋대로 휘어지고 구겨진 철근은 삼라만상 모든 군상의 형상 이 그대로 다 있어 좋고 뻐얼건 황토흙에 지푸리기를 썰어서 비빈 반죽은 뻐얼

있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말끔하 게 가공된 마감재는 결코 위안을 줄 수 없다. 벽면이 마감처리 안 된 상태로 남아 있더라도 공간이

건 고추장에 맛있게 비빈 비빔밥같이 좋다.

주18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p.332

우혁이네 집

우혁이네 집 난간

우혁이네 집 차양

<우혁이네 집>의 경우, 창문차양으로 사용된 철판과 작은 베란다 난간용으로 사용 된 철근은 일부러 모양을 그리 낸 것이 아니라 철공소에서 버려진 것을 주워 와서 그대로 붙였다. 그리고 세월에 녹이 쓸어 녹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조차 그대로 방치 해 뒀다. 또한 그는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 완벽한 디테일은 싫어한다고까지 말한다. 그 렇게 인공적으로 말끔하게 가공된 마감재는 결코 위안을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주19

38


Wide Focus | 와이드 포커스

삼회리 근생 전경

삼회리 근생 지붕

프랭크 게리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삼회리 근생>이나 <수입리 근생>의 경우, 자유로운 곡선과 형태를 만들기 위한 처 주20.

절함이 읽힌다. 이는 비슷한 시기 유명했던 프랭크 게리의 건축을 연상시키지만 프

“차운기 : 나는 집 만들 때면 집주

랭크 게리가 철저히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을 받아 만든 디지털화된 건물이었다면,

인 관상 보고 땅을 본 후 이 땅에 집을 어떻게 지어야 이 사람하고

차운기의 건축은 수공예적으로 현장에서 만들어낸 건물이다. 게리의 건물이 티타늄

잘 맞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연 강판이라는 기계가 만들어낸 첨단의 재료였다면, 차운기의 강판엔 망치질 자

임석재 : 주택을 집주인의 초상화

국이 새겨져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차운기의 자유분방함은 치열한 작가정신에

로 생각한다는 뜻인가. 차운기 : 그렇다. 집안에 여러 사람이 모여

서 비롯된 것이었다.

있을 때 집을 보고 이 중에서 집주 인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이다. … 건축가의 마음에 드는 집을 만들 면 잘못된 것이다. 들어가 살 사람

기억 | 수집

마음에 들어야 좋은 집이다.” 임

차운기는 반듯한 도면보다는 손으로 그린 스케치만을 가지고 건축주를 만난다. 건

곡선의 건축가, 대담: 차운기 vs

축주와 대화하며 건축주의 인상을 스케치로 남기며 그것이 그대로 집이나 건물의

임석재」, 1997년 2월, p.338

이미지가 된다.주20 벤야민에 따르면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주21 사

주21.

람은 살며 흔적을 남기고 관상을 보는 사람는 그 흔적의 의미를 해독한다. 벤야민이

“타동사로서의 ‘살다wohnen’-예

도시의 관상학자를 자처했다면, 차운기는 건축을 집주인의 관상을 살피는 것에서

를 들어 ‘사는 데 익숙해진 생활

출발한다. 그는 설계에 들어가기 전 오랫동안 집주인과 대화를 하며 그의 관상을 스

gewohntes Leben’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는 이러한 행위 속

케치로 남기고 그 스케치를 통해 집을 만든다. 즉, 집주인의 관상과 집의 모습에서

에 감추어져 있는 시시각각의 현

일종의 유비를 본다. 차운기는 “건축이 환하고 밝은 표정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나

실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그것 은 용기에 우리의 모습을 각인시

와이드 FOCUS

석재, 「어머니의 젖무덤과 한국적

의 바람”이며 “당연히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집안의 악을 쫓아내

키는 데 있다.” 벤야민, 『아케이드

기 위해서 붙이던 부적도 정신적으로는 힘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집의 표정이라는

프로젝트』, p.568

것이 그 집에서 평생 살아가야하는 구성원들의 정신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

주22.

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쓰

차운기, C3 KOREA 9901

다듬어 주고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주22 고 말한다.

우혁이네 초기 스케치

곤지암 주택 초기 스케치

여수재림교회 초기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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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벤야민이 썼듯 “수집가는 사물 세계의 관상학자들이다.” 수집가는 삶의 흔적을 수 집한다. 차운기의 건축 작업은 수집을 통해 이루어진다. 잠수함의 원형 창을 구해서

주23.

창문으로 갖다 붙이고 깨어진 옹이를 지붕에 가져다 붙인다. 철공소에서 철근을 수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집하고, 철판을 수집하며 오래된 한옥의 고재료를 수집한다. 시골의 곡괭이를 수집

1』, p.103

한다. 뿐만 아니다. <곤지암 주택>에서 중광 스님이 거처하던 방은 그 자체가 하나

주24.

의 예술작품이 되어 있다. 기거하는 방의 벽과 천장 전체를 거대한 캠퍼스 삼아 중

차운기, 건축세계 9506, p.150

광 스님은 거대한 붓으로 그림을 그려놓은 것이다. “실내는 예술의 피신처이다. 그

주25.

리고 수집가가 이 실내의 진정한 거주자이다.주23라는 벤야민의 말을 이보다 더 확증

이러한 기억의 사회적, 집단

해주는 사례가 있을까? 인간은 수집을 통해 시간을 탐구한다. 과거를 끌어와서 ‘저 장하고’ 미래의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성에 저항한다.

적 측면을 이름하여 ‘집단기억 (collective memory)’이라고 하는 데 이 개념은 프랑스 사회학자인 알박스(Halbwachs)와 러시아의

수집은 차운기에게 놀이와 유희이며 삶의 치열함이고 또한 상처 치유과정이다. 우 선은 일찍 어머니를 여읜 건축가의 슬픈 자기 고백 및 자기 치유과정이다.

심리학자인 비고츠키(Vygotsky) 의 연구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 가게 된다. 알박스는 모든 인간의 기억은 집단적인 상황에서 형성 되고 조직화되며, 실제적으로 모

다듬어서 보이는 모든 형상들은 내 자신의 고백이요, 내 살아온 인생의 얘기

든 사건, 경험, 인식은 개인이 타

이며, 동시에 나의 추억이기도 하다. 또 집 만드는 작업은 내게 있어선 내 생의

인과 가지는 상호작용에 의해 형

한이기도 하다. 한이 한으로 남아선 한 일 뿐이겠지만 승화된 한이야말로 내겐 무한한 희망이며 기쁨이다. 한편 보는 이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나의 건 축에 밝디 밝은 표정을 주려는 것은 나의 추억 찾기인 동시에 한 서린 내 인생

와이드 FOCUS

얘기를 기쁨으로 승화시키려는 손짓이자 발버둥일지도 모른다.주24

성된다고 하였다. 알박스는 집단 기억을 ‘같은 집단 안에 속하여 있 는 사람들에 의하여 공유되고 있 는 이미지, 생각, 느낌’이라고 정 의한 바 있다. 비고츠키 역시 인간 의 기억은 사회나 지역사회에 의 존적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선

이때 수집행위는 개인적인 기억 뿐 아니라 각 개인이 기여할 수 있고 기여해야 하는 공동의 전통 즉 집단적 기억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그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의 수립과 보존과도 연결된다. 기억이란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인 동시에, 사회

전우택, 「집단의 정신적 상처 치 유 과정으로서의 예술」, 임상미술 치료학연구 Vol.1 No.1, 대한임상 미술치료학회, 2006년 참조.

적이고 집단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는 과 정에서 한 개인이 살아온 사회의 신조, 행동 기준 등에 절대적 영향을 받게 된다. 그 리고 기억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은 사회화된다. 언어는 필연적 으로 사회의 약속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된 개인의 기억은 집단의 기 억으로 바뀐다.주25 그래서 차운기의 건축은 개인을 넘어선 집단의 정신적 상처 치유 과정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급속한 도시화와 탈고향의 경험은 이른바 집단적 기억으로 존재한다. 차운기는 그 상처의 기억에 대한 치유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 스토리>와 삼

택형이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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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 근생

고칠재

콘체르트 하우스


Wide Focus | 와이드 포커스

청동 < 꼴에>는 도시의 기억을 남기려 한다. 50년대 전쟁의 기억, 달동네의 오래된 주26.

기억을 건축에 담으며 그의 건축은 당시의 치열한 삶의 흔적을 몸에 새긴 상처처럼

차운기, 「어머니의 젖무덤과 한국

삶을 기록하는 장치가 된다. 한편으로는 일부러 옛 건물의 일부분을 그대로 보존해

적 곡선의 건축가, 대담: 차운기 vs 임석재」, 1997년 2월, p.334

둔다. <고칠재>처럼 기존의 한옥 부재를 활용하여 새 건물의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 고, 때로는 옛 집을 기억할 수 있는 흔적을 새집에다 새기기도 한다.

주27. 발터 벤야민, 「꿈 키치」, 최성만 옮김, 발터 벤야민 선집5, 도서출

경기대학교 옆에 있는 오래된 동네에 있는 집을 헐고 새 집을 짓는데 창문에

판 길, 2008년, p.136

빗물 받치는 차양을 만든 적이 있다. 오래된 동네의 옛날 집들이 전부 헐리고

주28. ibid., p.139

새 집이 들어서게 되면 그 동네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나는 사 람들이 어릴 때 자란 동네의 기억을 부분으로나마 남기고 싶었다. … 이 동네 에서 이 집을 보면서 살다가 지금은 딴 동네로 이사 갔던 사람이 나중에 이 동 네를 찾아왔을 때 이 집에 대한 추억을 하나 정도는 살려낼 수 있게 해 주고 싶 었다. 그래서 헐리기 전의 옛집에 남아 있던 빗물 받치는 차양을 그대로 따와 서 새집에 붙인 적이 있다.주26

키치 | 소망이미지 수집을 통해 건축을 해나간다는 점에서 차운기의 건축은 키치다. 그것은 꿈을 담는 키치다. 벤야민은 키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시는 못 볼 듯이 챙겨버린다. 이제 우리의 손은 그 외양을 다시 한 번 꿈속에서 붙잡으며 낯익은 윤곽들을 마지막으로 더듬는다. 우리의 손은 그 대상들을 붙

와이드 FOCUS

기술은 사물들의 외양을 마치 효용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지폐들처럼 영영 다

들 때 그것들의 가장 해진 부분을 잡는다. … 그런데 사물은 꿈들에게 어떤 면 을 드러내는 것일까? 가장 해진 부분이라는 게 무엇일까? 그것은 습관으로 닳 아빠지고 싸구려 격언들로 양념을 친 면이다. 사물이 꿈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면은 키치다.주27 이 말처럼 가장 닳은 것, 가장 습관에 가까운 것이야말로 꿈으로 전환된다. 모든 예 술 중에 건축이야말로 가장 습관에 관계하는 것 아니던가. 평범한 사물을 추적함으 로써 “키치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대화에서 사멸한 사물세계의 힘을 빨아들이기 위 해 두르는 평범한 것의 마지막 마스크이다.”주28 따라서, 차운기가 수집하는 사물은

곤지암 주택 처마 상세

곤지암 주택 거실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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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가장 익숙했던 것들이다. 그래서 차운기는 삶의 흔적을 수집 한다.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 과거의 환기가 숨어 있다고 본 프루스트의 마를린

주29.

과자처럼주29, 차운기는 회상에 이르는 대상을 모은다. 물론, 프루스트의 말처럼, 그

“우리의 과거도 그와 마찬가지다. 과거 의 환기는 억지로 그것을 구하려고 해도

대상을 통해 회상에 이르는 일은 우연에 달려 있을 뿐이다.

헛수고요, 지성의 온갖 노력도 수용없다. 과거는 지성의 영역 밖, 그 힘이 미치지

근대의 기술이 사물의 오래된 이미지를 사라지게 만든다면, 차운기는 기술과 손이 만나는 지점 즉 수공예적 작업을 통해 기술이 가진 그 의미를 되묻고자 한다. <곤지 암 주택>의 경우, 처마와 거실 천장에 철근을 똬리 틀 듯 구부려 새끼줄처럼 보이게 한 것은 조약하다기보다는 아직 아우라를 담지한 근대초기 기술의 모습으로 읽힌

못하는 곳에,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던 어떤 물질적인 대상 안에(이 물질 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거나 하는 것 은 우연에 달려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다. 차운기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였지만, 근대기술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김창석 옮

집의 새끼줄을 철근이 대신하고 있고, 흙대신 콘크리트-그 위에 다시 흙을 발라 넣

김, 국일미디어, 1998년, p.64

었지만-가 대신할 뿐이다. 벤야민은 사진이라는 복제 기술이 아우라의 소멸을 가져

주30.

온다고 말했지만, 인간의 얼굴을 담는 초기 사진에 제의 가치의 최후 보루로서 아우

“초기의 사진에는 그 주위에 미묘한 아우

라가 있었음을 인정했던 것처럼주30 차운기의 철근과 콘크리트는 마치 이런 초기 기

라, 다시 말해 그러한 사진을 보는 사람의 시선에 충만감과 안정감을 부여하는 어

술의 형태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깃들어 있다. 차운기가 사용한 철근과 콘크리

떤 매질이 있었다. 기술적인 면에서 보아

트는 새끼줄과 흙을 꿈꾸는 철근이며, 콘크리트이다.

도 초기 사진의 기술은 이러한 분위기 내 지 매개물에 상응하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벤야민은 훈련Dressur과 연습Übung을 구분한다.주31 훈련은 기계 노동에 속하는 것으로

와이드 FOCUS

‘경험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밀봉 처리되어’ 있는 반면, 연습은 수공업에서 결정적

주31.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인 형태인데 경험을 축적해서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차운기의 건축에 특징

관하여」, p.217 ‘“모든 기계 노동에는 노

적으로 보이는 수공예적 모습은 결국 연습에 해당되는 것으로, 그의 건축은 어떤 실

동자의 조기 훈련이 요구된다”고 마르크

험이라기보다 장인이 추구했던 연습에 가깝다. 스스로를 장인으로 생각하였던 그는 이런 연습을 통해 경험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경험을 되살리려는 것은 어떤 소망을 이루기 위함이다. 현대건축의 대량생산기술이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의 ‘탐욕’을 위

스는 위에서 언급한 맥락 속에서 말하고 있다. 이 훈련(Dressur)은 연습(Übung) 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수공업에서 유일 하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연습은 공장 제 수공업(매뉴팩처)에서도 아직 적용되

한 것이라면, 차운기의 건축은 ‘소망’을 향하고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소망은 탐욕

던 원칙이었다. 즉 연습의 기반아래 “모

과는 달리 ‘경험의 질서에 속하는 것’

든 특정한 생산 부분은 경험(Erfahrung)

이다.

주32

속에서 그것에 맞는 기술적 형태를 발 견”하게 된다. 그 생산 분야는 “그 경험

벤야민에 따르면, 오늘날은 근대화의 충격을 통해 지속되는 것으로의 경험Erfahrung 이 상실되고, 이를 순간순간 몸으로 부딪쳐 얻는

체험Erlebnis이

대체해 버렸다. 경험

이 (무의식적인/무의지적인) 종합적 기억Gedächtnis의 산물이라면, 체험은 의식적 기

을 서서히 완성해간다.” 물론 “일정한 완 성도에 도달하자마자” 그 생산 분야는 그 경험을 재빨리 결정체로 만든다.’

억Erinnerung에 대응한다. 문제는 이 사이에 근본적 단절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니체 의 말을 빌리자면, 근대인은 “경험을 통해 배울 줄 모르고 또 한 번 빠졌던 구덩이에

주32. 벤야민, p.222

늘 빠지기 때문에, 그는 더 자주 고통을 당한다. … 그는 소리 높여 외치지만, 어떤 위안도 얻지 못한다.”주33 따라서 위안을 주고자 하는 차운기의 전략은 경험이 불가 능한 시대에 회상을 통해 경험을 되살리는 것으로 간다. 이는 사실 모순적이다. 경 험조차 불가능한 시대에 회상이 어떻게 가능할까? 회상은 결국 종합적 기억에 대응 하는 것이며, 이것은 경험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상에서 경험으로

주33. 이 글에서 니체가 말한 ‘그'는 ‘직관적 인 간’이지만, 이를 근대인으로 고쳤다. 니 체,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 에 관하여」, 이진우 역, 『니체전집』 3, p.461

직접 이어질 순 없을 터, 하나의 단계를 우회해야 하는데, 여기서 차운기의 전략은 수집이라는 행위인 것이다.

주34.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4

차운기가 어머니의 젖무덤을 생각하며 <택형이네 집>의 둥근 지붕을 초가집 모습 으로 흉내 낸 것과 시골의 담장을 재현한 것은 벤야민이 말한 “집단의식 속에 존재 하는 새 것과 옛 것이 뒤섞인 이미지” 즉, “소망 이미지”주34에 부합한다. 차운기의 건 축 만들기에는 마치 이런 근대초기 기술이 보여 주는 소망이 담겨있다. 현대적 재료

42

년,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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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콘크리트와 철근, 철판, 슬레이트를 가지고 자연스러움, 오래됨을 표현하며 수공 주35. 차운기, 건축세계 9506, p.150

예적으로 이 기법을 표현해 내는 모습에는 이런 과거의 기억과 꿈, 소망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36. “이미지는 정지 상태의 변증법이다. 왜

누구나 그렇긴 하지만 난 어릴 적 내 눈에 비치는 자연과 집 여러 풍경에 대한

냐하면 현재가 과거에 대해 맺는 관계는

추억이 많다. 내가 꿈꾸고 그리고 만들어지는 집이란? 이런 나의 추억으로부

순전히 시간적 · 연속적인 것이지만 과 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에 대해 갖는 관계

터 시작되어진다. 그것은 몇 번의 강산이 변하는 세월동안 내 추억을 모두 앗

는 변증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적

아간 현실에 대한 반항도 있다. 내 생각일는지는 모르지만 자꾸 어린 시절로

인 성질이 아니라 이미지적인 성질을 갖 는 것이다. 변증법적 이미지만이 진정 역

돌아가고 싶다는 것. 모든 사고를 그때로 묶어두려는 것. 참으로 내겐 즐거움

사적 이미지이다.” 발터 벤야민, 『아케이

이다.주35

드 프로젝트』2, p.1056 주37.

하지만 벤야민에 따르면, 소망 상징은 유토피아적 차원에 속하지만, 결코 진정한 의

벤야민은 파리 아케이드 연구를 통해 근

미의 이미지는 아니다. 벤야민이 파악하는 진정한 이미지는 변증법적 이미지이다.주

대사에서 근대적 기술혁신이 출현할 때 에는 언제나 예외없이 역사적 복원의 형 식을 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소 망 이미지에는 사회적 생산 질서의 불완 전성을 조명하는 동시에 극복하려는 집

36

변증법적 이미지는 현재와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따라서, 차운기의

건축이 주는 위안은 자칫 과거에 대한 아름다운 미화로 그치거나 현실에 대한 도피 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벤야민에 따르면, 소망이미지는 진정한 유토피아에 이

단적 시도가 담겨 있다. 벤야민은 과거의

르지 못한다 해도 인류해방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주37 벤야민은 파리

신화 내용이 미래의 청사진을 제공한다

아케이드 연구를 통해 근대사에서 근대적 기술혁신이 출현할 때에는 언제나 예외없

고 주장하진 않는다. 하지만 한시적인 순 간으로 긍정했다. 이런 이미지는 새로운

이 역사적 복원의 형식을 띤다는 사실을 발견했다.주38 즉, 이런 소망 이미지에는 사

기술과 고대적 이미지가 결합됨으로써

회적 생산 질서의 불완전성을 조명하는 동시에 극복하려는 집단적 시도가 담겨 있

망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인간을 해방시

다. 벤야민은 과거의 신화 내용이 미래의 청사진을 제공한다고 주장하진 않는다. 하

키는 것은 아니지만, 소망 이미지는 인류

지만 한시적인 순간으로 긍정했다. 이런 이미지는 새로운 기술과 고대적 이미지가

해방의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된다.” 수

결합됨으로써 오히려 혁명적 잠재력을 보유한다. 여기에서 벤야민의 독특한 철학이

잔 벅 모스, ibid, p.163 주38. 발터 벤야민은 파리 아케이드 연구에서 철이 새로운 건축 재료로 사용되었을 때 건축가는 철의 기능적 본질을 이해하지

나오는데, 그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후 아직 남아있는 옛 것의 이미지에서 유토피

와이드 FOCUS

오히려 혁명적 잠재력을 보유한다. “소

아적 흔적을 모색하려 했던 것이다. 벤야민이 파악한 진정 급진적이란 바로 이런 것 이었다. 과거로의 회귀도 아니며, 미래로의 급진적 도피도 아니었다. 과거속에서야 말로 진정 급진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못했으며 “건축가들은 기둥을 만들 때는 폼페이풍의 원주를, 공장을 만들 때는 주 택을 모방”했음에 주목한다. “집단 의식

어느 시대든 다음 시대를 여러 가지 이미지를 통해 떠올려볼 수 있도록 해 주

속에서는 처음에는 아직 낡은 형태의 생

는 꿈속에서 다음 시대는 근원의 역사의 요소, 즉 계급 없는 사회의 요소들과

산수단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듯한 새로 운 형태의 생산수단(마르크스)에 새로

단단히 결합되어 나타난다. 집단의 무의식 속에 보존되어 있는 그러한 사회에

운 것과 낡은 것이 철저하게 상호 침투하

대한 경험은 새로운 것과 철저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유토피아를 낳는데, 이 유

고 있는 형상들이 상응하고 있다”고 말

토피아는 오래도록 길이 남을 건축물에서 한순간의 유해에 이르기까지 삶의

하며,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것에서 자 극받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판타지가

무수한 배치 구성 속에 흔적을 남겨왔다.주39

사실은 지나간 근원적인 것과 이어져 있 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고 말한 다. 발터 벤야민, 「파리-19세기의 수도」, 『아케이드 프로젝트』1, 조형준 옮김, 새

향수 | 유토피아

물결, 2008, pp.93~94

차운기의 건축에서 어떤 향수를 느끼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

주39.

일으키며 위안을 주는 것이야 말로 건축의 목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 ibid, p.92

새로운 것들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고, 그러면서 자연스 럽게 찾거나 기댈 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 온 세대가 특히 그런 과도기를 겪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그것을 꼭 그대로 복제한 다기보다는 것을 적용해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되면 거기서 위안을 받으며

43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주40 노스탤지어는 ‘귀환’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노스토스nostos와 ‘병’을 의미하는 알고스

주40.

algos의

차운기+이종건, 「고향 되살리기

합성어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이

다. 하지만 “노스탤지어는 과거를 이상화함으로써 과거를 왜곡”주41시킬 위험이 있

와 형태 흩트리기」, C3 KOREA, 9901, p.52

다. 사람에게 실제 과거가 마냥 좋기만 할 순 없을 것이다. 또한 집은 과거를 회상하 는 곳이기도 하지만, 현재의 삶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차운기의

주41.

건축에 회상되는 과거는 행복한 모습뿐이다.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특정 장소

of Memory(Cambridge/M.A.:

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이라는 특정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문제는 공간과는 달리 시간은 되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는 데 그 비극의 단초가 있는

Avishai Margalit, The Ethics Harvard UP, 2002), p.62 ; 임철 규, 『귀환』, 한길사, 2009년, p.15 에서 재인용

것이다. 따라서 임철규가 말하듯, 역설적으로 “노스탤지어는 귀환의 불가능성을 전 제로 한 욕망이다. 황지우는 시 「노스탤지어」(1998)에서 ‘나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라고 노래했다. ‘아직도 고향으로 가고 있는 중’ 이 노스탤지어의 본질이므로, 이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주42 이런 점에서 볼 때, 차운기의 다음 고백은 자기 건축의 한계와 비극을 스스로 예고 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묏동에 띠 잔디가 벌거벗도록 미끄럼질 하던 친구들은 다 어디가고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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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숙인 할미꽃, 다래 따던 아이들도 다-아 도망갔다. 미국 사는지, 영국 사는지, 이 땅에 사는지, 답답할 뿐. 친구도 보고 싶고 가보면 다-아, 다-아 뭉개버렸다. 엎어버리고 콘크리트 덩어리로 꽈악 눌러놨다.

재즈스토리 예전 모습

재즈스토리 근래 모습

택형이네 집 현재 모습

고향을 잃어버린 현 세태를 비판한 글이지만, 필자가 느끼기로 이 글은 자기 건축의 비극성을 스스로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재작년 찾았던 <삼청동 재즈스토리 >는 ‘가보면 다-아, 다-아 뭉개버렸다.’ <택형이네 집>은 옹이가 전부 벗겨져 아스팔 트 싱글로 바뀌었으며, 수공예로 제작된 창과 문은 기성제품으로 죄다 대체되어 버 렸다. 기억과 그에 대한 회상이나 위안조차 자본의 논리 앞에선 사치스러울 뿐이다.

44

주42. 임철규, 위의 책,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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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붕괴는 바로 경험의 붕괴이다. 벤야민의 말처럼, ‘더는 어떤 경험도 할 수 없는 주43.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 무능력이 분노의 본질

벤야민,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

을 이룬다.’주43 이런 분노가 현실 비판의 힘과 만나게 된다면, 노스탤지어는 단순히

지 모티브」, 『발터 벤야민 선집』 4, 김영옥 외 옮김, 도서출판 길, p.233 주44.

기억과 그에 따른 위안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사회에 대한 비전으로 변화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현재의 희망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으 며주44, 차운기의 건축이야말로 과거의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증오와 희생정신…은 해방된

흥미로운 것은 차운기가 증언하는 바에 따르면, <택형이네 집>을 짓고 난후 전국 도

자손의 이상에서가 아니라 억압 받은 선조의 이미지에서 그 자양

처에서 2, 3년 사이에 200여 채의 건물이 그의 건축을 모방하여 지어졌다는 것이다.

을 취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

우리는 지금도 그 유행의 여파를 도자기나 옹이 조각을 얹은 집에서 더러 확인할 수

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

있다.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B급 건축가가 만들어낸 이 유행은 왜 생겨났으

터 벤야민 선집』5,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년, p.345

며 왜 그런 유행이 만들어졌을까? 그것은 어떤 주류 건축도 하지 못했던 ‘호랑이의 도약’ 아니었을까?

주45. 발터 벤야민, ibid,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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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 가든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옹이를 깨서 덮은 지붕

유행은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호랑이의 도약이다. 다만 그 도약이 지배 계급이 지휘를 하고 있는 경기장에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 펼쳐질 그와 같은 도약이 마르크스가 혁명을 파악했던 변증법적 도약이다.주45 물론 차운기의 건축은 퇴행적이다. 가속화되는 기술 문명의 시대에 그의 건축은 다 시 반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꿈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 야민의 말처럼, “눈을 떴을 때 모든 꿈의 요소들을 살리는 것이 변증법적 사고의 정 석이 되어야 한다”면, 그의 건축을 통해 그 꿈이 말하는 바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차운기의 너무 이른 죽음 이후, 그의 건축은 주류 건축계에 서 사라졌고 다시 반복될 수 없다 해도, 주류 건축으로는 채울 수 없는 그의 꿈은 여 전히 회상되어야 한다. 차운기의 건축은 공동체의 삶을 기록하고 수집하는 기억의 저장고였다. 차운기가 사용한 콘크리트와 철근, 철판, 슬레이트는 초가집의 새끼줄과 흙벽이 되고자 하며, 부서진 도자기와 장독으로 만든 지붕에는 파편화된 꿈이 담겨 있다. 건축가 스스로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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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건축하기가 치유의 방법이기도 했지만 집단의 기억에 작용함으로써 과거의 상처 에 대한 치유와 위로가 가능한지를 보여 주었다. 이제 치유와 기억을 넘어 건강한 망각

주46.

과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것은 차운기의 몫이 아니게 되었다.주46 앞으로의 세대는 회상

좋은 기억은 추억으로 남게 되지

할 고향조차 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끝없이 현재의 고향을 만들어 가야 한다. 희

만 나쁜 기억은 항상 트라우마를 동반하게 된다. 이런 트라우마에

망은 추구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쉰이 『고향』을 통해 말하고자

는 망각의 능동적 작용이 필요하

했던 바와 같다. 소설 『고향』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다. 능동적 망각이란 애써 잊겠다 는 각오나 결심이 아니다. 오직 새 로운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제대

몽롱한 가운데, 나의 눈앞에 해변의 초록빛 모래밭이 펼쳐졌다. 그 위의 쪽빛 하늘 에는 황금빛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

로 잊을 수 있는 것이다. 니체는 이런 망각과 나란히, 기억의 한 형 식을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으로

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가

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말한 본래적 의지의 기억은 약속 하는 능력이며 미래에 기능하는 기억이다. 우리가 ‘그 약속을 기억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어떤 순간에 우리가 약속 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어떤 순간 에 우리가 무언가를 실행해야 함 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미래로 향 해 있다. 이 점에서 본래적 기억이 란 미래의 새로운 활동을 만들어 야함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진은영, 「기억과 망각의

와이드 FOCUS

아고니즘」, 『시대와 철학』 제21권

46

1호,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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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론 1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이은영 건축 비평 주1.

한국인으로서 독일에서 거둔 성공만큼이나 독특한 이은영의 건축은 합리주의 건축

이은영은 “인간에 관한 하나의 기

가의 전형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꽤나 교육적이다. 그 스스로도 강연이나 글

본적 입장이 어떻게 물질로 정리 되어 나오는지에 관심을 두는 이

에서 자신의 건축이 교육 또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하니 이보다

들이 있다면, 나의 작업이 가치

잘 맞아떨어질 수 없다.주1 이 글은 인간에 관한 하나의 기본적 입장 즉, 건축가의 삶

와 윤리와 미를 논하는 그들의 논 쟁에 좋은 재료가 되길 바란다”고

에 대한 태도를 중심에 놓고 서술하고자 한다.

말한 바 있다. C3 KOREA 0407, p.76 주2.

나의 관심은 늘 본질적인 질문들에 있었고,…20대의 한국에서의 시간들이나

이은영, C3 KOREA 2006

30대의 독일에서 보낸 시간들 모두 그러한 절대적 가치가 있는 건축적 행위에 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다다르고 싶고, 그것을 담는 건축을 단 한 차례라도 할 수 있다면 살았던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하며, 비효율적이라 할 만큼 그 일에 외곬으로 집착하였다.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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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갈구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그 어떤 것, 진리

슈투트가르트21세기 도서관의 계획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 이 도서관의 ‘심장’공간을 ‘2001 스페이스 오딧 세이’의 한 장면에 비유하는 것은 결국 합리주의자의 영속성에 대한 갈망, 즉 과거를 곧바로 미래로 연결짓 고자 하는 건축가의 욕망을 나타내는 징후로 읽힌다.

그의 글과 강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를 고르라면 단연 “본질”이라는 단어일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이나 어지러운 세상의 타락에 맞서 그의 건축은 오히 려 역행이라 할 만큼 현대 건축의 유행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그것은 건축의 오래 된 가치에 대한 공부와 이를 통한 수련이라는 지난한 과정의 산물인 동시에, 오랜 고행의 결과이다. 유행과 수다스러움에 집착하는 세태를 거슬러 본질적 가치에 대 한 천착은 윤리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그의 건축을 통해 오래된 전통적 가치인 비 례나, 공간의 순수성, 유형의 명료함이 재확인된다.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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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프로포션에 관해서나, 공간의 순수성에 관해서나, 유형의 명료함에 관해 보편성과 완전성을 부여하는 것은 현대건축이 추구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작업이 다. 그것은 수다스러운 조급함이 아니라 기본 원리에 입각한 사고와 관련된 것이 기 때문이다.”주3

주3. 이은영, space 2010년 11월호 (516호)

본질의 추구는 건축에서 역사적 선례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 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모든 건축가, 모든 예술가들의 기본적인 욕망이라면, 시 대를 초월한 걸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합리주의자들은 이를 기본 유형의 확립 에 있다고 보았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고전 또는 훌륭한 역사적 선례에

주4. 슈투트가르트 21세기 도서관의 ‘심장’ 공간을 ‘2001 스페이스 오 딧세이’의 한 장면에 비유하는 것 은 바로 이런 욕망을 잘 나타낸다. 결국 합리주의자의 영속성에 대

서 발견되는 시대를 초월한 기본형을 찾고 이를 활용하면 자신의 건축 또한 고전의

한 갈망은 과거의 가치를 통해 미

반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생각이다.주4 이를 유형학이라 부른다. 이은영이 테세노프

래라는 영원한 가치로 나아가고

(Heinrich Tessenow, 1876-1950)의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유형학적으로 활

있다.

용한 것은 이태리 신합리주의 건축가 조르지오 그라씨(Giorgio Grassi, 1935-)의

자 하는 건축가의 욕망을 읽을 수

치에티 학교(1976) 계획에서 슁켈(Karl Friedrich Schinkel, 1781-1841)과 테세노

주5.

프의 건축적 선례를 활용한 사례와 유사하다. 건축설계의 결과물이 주관적으로 흐

시점에 보이는 착란적 현상에 대

르는 것을 피하면서, 역사적 유형에 의해 추출된 형태의 객관성을 확보하겠다는 것

항해서 싸우는 소모적인 노력보

이 신합리주의자의 의도였다. 따라서 이은영은 정확히 신합리주의자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합리주의자로 부를 수 있다.

“인류역사에 있어 어느 혼란의 한

다는, 그 윤리적 선량함을 바탕으 로 행해지던 건축 작업을 우리 시 대의 정서로 지속해 나가는 것이 다. 모든 부수적인 것을 제하고,

와이드 FOCUS

실존처럼 남는 건축의 원형적인

하지만 알도 로시와 조르지오 그라씨의 합리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아 사

타이폴로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회개혁적 함의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웅어스(Oswald Mathias Ungers, 1926-2007)

작업이다.” 이은영, C3 KOREA

를 거쳐 이은영으로 이어지는 합리주의는 이제 하이데거식 실존주의와 만나 “구도

0407, p.76

자의 길”이자 “윤리적 선량함을 바탕으로” “실존”을 모색하는 것으로 전환되었다.주5 본질추구의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한양대학교 안산캠퍼스의 <한양정>이라 는 건물일 것이다. 만약 통일성 없는 이질적인 환경의 한 복판에서 주변 모두와 어 울릴 수 있고 이 모두를 매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은영 은 이에 대한 명쾌한 해법 중 하나를 보여주었다. 모든 다양성에 반응하며 그 다양 성과 어울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모든 다양성의 근원으로 가는 것이다. 가장 근본적 인 것을 제시해 버리면 이후 주변의 모든 다양한 변화는 그 근원의 파생이므로 모 든 건물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이은영은 이 건물의 선례를 하인 리히 테세노프의 “프로라 홀” 계획안(1936)에서 찾는다. 모든 서양건축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신전의 형태에 삼각형 페디먼트만 제거된 모습이다. 가느다란 열 주와 지붕 슬라브로만 이루어져 극히 절제된 형태를 띠고 있다. 그야말로 중심없이 부유하는 캠퍼스에 중심을 세우려는 시도가 잘 맞아 떨어진 결과다.

Herzog & de Meron, Stade Bordeaux Atlantique, 2011. 이것 역시 테세노프의 계획안과 유사하다

한양정

48

한양정

하인리히 테세노프, 프로라 홀 스케치,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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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이 건물을 바라볼 때가 아니라 이용하려 할 때다. 그림에서 보듯 여 주6.

기를 이용하려면 테이블을 가져와야 되고 앉을 자리도 기대어 쉴 곳도 없다. 정자亭

“거주한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

子를

는 것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1, 조형준 옮 김, p.103, 주7.

뜻하는 한양정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머물 곳이 없는 것이다. “亭, 停也”라고 중

국 한나라 때 허신許愼이 문자 해설서 『說文解字』에 밝히고 있듯 정자亭子에서 정亭은 곧 머물다停는 뜻이 아닌가. 본질은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 이므로, 그 외의 모든 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애초에 여기에 의자를 둔다든지, 테

“작업 과정의 중심에 놓인 테마는

이블을 두는 행위는 바로 본질에 대한 타락에 불과하다. 백색의 색채도 그렇다. 순

독특하고 완결성 있는 비례의 추

수 또는 순결을 뜻하는 백색은 모든 색의 근원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러기에 모든

적이다. 드러내고자 하는 건축적 테마를 극명하게 하고자, 모든 부

색과 어울릴 수 있지만, 행위를 담는 순간 즉, 삶의 때가 타는 순간 쉽게 얼룩져버린

수적 요소를 배제하고 색채와 재

다. 왜냐하면 삶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이다.주6 문제는 흔적이 본질과 완전히

료를 단순화하여 그 추상성을 상

대척점에 있다는 점이다.

승시켰다.” 이은영, C3KOREA 0407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헤이리에 있는 <소담갤러리> 또한 역사적 선례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으며, 주변 대지의 여건에서 강한 선형성을 부여하기 위해 테라스가 전면 에 배치되어 계단형으로 계획되었다. 정면 형태는 그야말로 한양정의 반복 즉, 그리 스신전의 단순화로 보인다. 이은영은 “완결성 있는 비례의 추적”이 가장 중심에 놓 인 테마였으며, 이를 위해 모든 부수적 요소를 배제하고 색채와 재료를 단순화시켰 다고 한다.주7 잡지에 실린 정면의 모습은 백색의 색채와 간결한 기둥의 비례감이 얼 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며 극적인 성공을 거뒀는지 얘기해 준다.

symmetry를

위해 엄격한 대칭을 유지하고 있다. 이 침실은 흥미롭게도 아이젠만의 주

택연작 중 주택6을 즉각적으로 연상시킨다. 아이젠만의 침실은 벽체 중앙에 수직으 로 유리창을 내어 침실을 반으로 나누고 있어 강제적으로 부부는 침대를 달리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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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문제는 이를 사용하려 할 때이다. 2층 침실의 내부조차 고전건축의 균제

서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전혀 다른 성향의 건축가들 건축에서 비슷한 현상이

소담갤러리 정면

소담갤러리, 2012년

소담갤러리 2층 침실

아이젠만 주택6 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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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아이젠만의 건축이 자신의 자율적 건축 의 프로세스에 의해 침실을 강제적으로 나누어 버린 것처럼,주8 당시 잡지에 실린 소

주8.

담갤러리의 침실 사진은 완전한 비례와 엄격한 대칭을 위해 침대도 두 개 대칭적으

라파엘 모네오는 아이젠만의 주 택6에 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로 놓여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여기에 커튼을 달 수 있을까?

전하고 있다. <House & Garden> 지에 싣기 위해 주택6을 가구와

최근에(2012년) 답사한 헤이리 소담갤러리는 많이 변해 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 는 위치에, 지금은 독도관련 단체의 사무실로 변하여 커다란 독도 그림이 한쪽 벽면 을 가리고 있으며 테라스의 난간엔 태극기가 걸려 있다. 정면의 6개 열주는 10개로 늘어나 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예상컨대 건축주가 바뀌면서 일어난 변화로

화초로 장식한 것이 아이젠만의 화를 돋구었다는 것이다. “그가 설계한 이상적인 주택은 순결함 을 잃었다. 실제로 주택6은 일상 의 역동서을 갖게 된 순간부터 가 치와 흥미를 일부 상실했다. 그것

보인다. 이로써 그의 독특하고 완결성 있는 비례의 추적은 이렇게 허망하게 망가지

은 테이블에 등장하는 화병이나

고 변해버렸으며, 본질과 시대를 초월하고자 했던 기본형은 오래가지 않아 변질되

아침식사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

고 타락(?)해 버렸다. 이는 건축가의 고상한 의도를 모르는 건축주의 잘못인가? 태

오브제로 만들게 한 전체 프로세

극기와 독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애국심은 본질에서 벗어난 비본질이 며, 시대를 초월한 기본형에서 벗어난 일탈이나 타락일까? 애초 아래층은 갤러리로 위층은 주인의 거주지로 계획되었는데, 프로젝트 진행 과정 속에 폭 5.5m의 규제 때문에 2층 주거 부분의 공간 확보가 어려웠다고 한다. 당연히 테라스까지 넓힌다 는 수정이 제시되었지만 엉뚱하게도 열주가 없어지고 건축가의 계획개념이 어긋나 는 것을 우려한 건축주는 본래의 계획대로 진행해 버린 것이다.주9

젠만에게 중요했던 것은 주택을 스와 사용되기를 거부할 정도로 초현실적인 분위기였다.” 라파엘 모네오, 『8인의 현대건축가』, 공 간사, 2008년, p.205 주9. “열주가 없어지는 것을 우려한 건 축주는 본래의 계획대로 진행하 기로 했다. 이는 건축주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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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은영 씨의 건축을 유지하

이런 에피소드처럼 그의 비례와 본질 추구는 삶과 무관한 곳에 있다. 삶을 건축가가

고 싶었기 때문이고, 지금은 계

생각한 본질적 형상, 기본형에 맞추어 버린 결과이다. 그 결과를 생생히 보여주는

획 당시 느꼈던 생각들과 변함이

또 다른 예가 2004년 <함양 수해이주민 마을 계획>이다. 그는 한옥의 기본 형식인 3 칸의 공간을 건축디자인 요소로 끌어들여 이를 7개의 유형으로 조합하고 다양한 형 태를 구성하여 이를 “주민들은 자신들의 요구와 취향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

없음에 만족하고 있다.” 최준, C3 KOREA 0407, p.82 주10. “극단적 미학 추구 경향”이란 평

다고 말한다. 뒤집어 보자면 결국 건축가가 자의적으로 만든 형태 속에 주민들이 끼

가는 김미상의 이은영에 대한 비

어들어가 살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유형의 탐구와 본질 추구가 과연 건축주와의 의

평글에서 따온 말이다. 김미상, 마

사소통을 통해 그들의 삶의 요구와 욕망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알도 로시의 갈라라테제가 균일한 격자로 만들어졌으나 그 속엔 일상 삶의

지막 모던–모던 아이디어의 트 위스트와 블루스, C3 KOREA 0407, p.79 참고.

다양함이 끼어들 여지를 허락한 것과 비교하지면 이은영의 건축은 얼마나 이를 허 용하고 있을까?

함양 수재 이주민 마을

알도 로시, 갈라라테제 입면. 단순한 격자는 오히려 일상 삶의 다양함을 강조하는 바탕이다.

본질에 대한 추구는 결국 “극단적 미학 추구의 경향”주10으로 기울어 버렸다. 극단적 미학 추구는 윤리적 선량함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애초 그의 윤리성과는 어긋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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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를 엿보게 된다. 백색의 건축이 순수함의 추구로 보며 이를 윤리와 연결짓는 근 주11.

대건축의 모습은 이미 지나간 신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은영에게 듣는 말은 고전

“이러한 나와의 씨름의 시간 속에

건축의 시대를 초월한 목소리라기보다 철지난 근대주의자의 목소리에 가깝다.

서 결국 나는 그토록 갈망하던 절 대적 가치 혹은 절대적 진리를 손 안에 잡아넣지 못하였다. 그러나

<슈투트가르트21세기 도서관>의 가장 본질에 해당하는 공간은 완전히 백색의 균일

어느 순간부터인가 깨달음과 같

한 격자로 사각형의 개구부가 뚫려있다. 사방의 개구부로 둘러싸인 이곳은 주변의

이 그것을 조금씩 감지하고 있었 다. 현상계에서 벗어나 그것을 초

시선에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 곳은 건축가 스스로 제시

월한 인지력으로 전체를 파악할

한 그래픽 이미지에서조차 머물지 못하는 공간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머물기에는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 로 받아들일 때에 갑자기 얻게 되

눈길을 끄는 다양함이 전혀 없으며, 주변의 격차 창을 통해 내려다보는 시선의 부

는 놀라울 정도의 새로운 인지력

담감은 그저 빠르게 스쳐 지나가야 할 통로가 될 뿐이다. 본질의 추구는 항상 비본

을 체험할 수 있다. ‘나’라는 하나

질을 구분 짓는 차별주의의 씨앗을 잉태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상 현대철학자들이

의 존재가 나를 포함하는 현상 속 으로 녹아 들어가며, 현상계라는

“본질”이라는 단어를 가장 터부시하는 이유이다. 그의 본질 추구와 합리주의는 스

경이로운 세계속에 기적과도 같

스로 고백하듯, 한양정의 격자 체계가 어긋나면서, 슈투트가르트 21세기 도서관의

이 존재하는 ‘인류’라는 총체적 현 상이 인지되어 들어오며, 그 존귀

입면이 완전한 정사각형이 아니게 되는 이유에서부터 틀어지기 시작한다. 슈투트가

함과 내재된 웅장함이 천상의 음

르트 21세기 도서관의 입면에서 표현된 격자 속의 격자는 무한 공간을 암시하는데

악처럼 들려오는 것이다. 인류라

이는 곧 영원함의 추구와 연결되는 것이다. 9×9의 격자로 배열된 입면은 4.85×4m

는 존재가 수만년의 시간을 통해 엮어온 그 장엄한 서사시 그들의

로 계획되어 엄격한 합리주의적 도식에서 벗어나 버렸다. 현실은 그렇듯 부지불식

작업 속에 들어있는 놀라운 지혜,

간에 스며들어 이상을 어긋나게 만든다. 그도 이런 현실과 이상의 어긋남을 인정하

그 진지하고 집중된 힘을 만나면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고 겸허해 지며,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들이

게 되는 것은 합리주의자들이 가진 이성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점에 조 우하게 되는 숙명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그의 탈출구는 이런 점을 인정하는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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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되며 나 자신에 대한 애 정과 그 장엄한 흐름 속에 내게 주 어지는 소명을 확인하게 되는 것 이다.” 이은영, C3 KOREA 2006

슈투트가르트21세기 도서관 외관

슈투트가르트21세기 도서관의 심장 공간

에 위태로운 초월적 힘으로의 탈출을 추구하는 것 같은 우려가 든다.주11 이국에서 오랫동안 어떤 본질적 가치를 목표로 몰두해온 이은영의 성공은 많은 스 포트라이트를 받은 만큼, 한국 땅으로 이식되어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게 될까? 회 남의 귤이 탱자가 될 것인가橘化爲枳, 아니면 토양을 바꾸게 될 계기가 될 것인가. 삶 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근원으로의 침잠은 우리 세태에 울리는 경종의 의미로서 소 중하다. 하지만 이런 구도자의 길이 미학주의로 변해 버린다면, 자칫 삶의 다양함을 환원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문득, 상상컨대, 신화 속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는 세상 어느 침대보다 아름다운 침대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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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평론 2 융복합과 일상의 건축 사이에서 최근 문화계에서 새삼스럽게 융복합과 통섭이라는 말이 유행하며, 인문학적 건축 이 붐이 되고 있다. 학문 간의 융합 그중에도 인문학과 여타 분야의 통합이나 인문 학을 건축과 연관시킨다는 점은 좋은 징조임에도 “왜”라는 물음을 묻게 되는 것은 건축이야말로 애초 융복합의 학문이 아니었나, 건축이야 말로 인문학과 별개로 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반문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새롭게 그런 말이 필요한 것일까?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고 볼 때, 그건 어떤 유행에 편승하려는 것 아닌가 미심쩍을 수밖에 없다.

주1. h t t p : / / w w w. b r o o k l y n r a i l . org/2013/09/criticspage/what-isarchitecture-art 주2. 니콜라우스 페브스너, 『유럽 건축 사 개관』, 김복지 외 공역, 태림문 화사, 1988, p.13 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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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세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이론서를 쓴 비트루비우스가 건축의 3대 요소 를 강Firmitas, 용Utilitas, 미Venustas라 불렀던 것처럼 건축은 기술과 기능, 미가 결합된, 가장 오래된 융복합-느슨한 의미에서-의 학문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비트루비우 스의 규정은 조금씩 변형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데, 최근 유명 건축가 스티븐 홀

Kaminer, Architecture, Crisis and Resuscitation, Routledge, 2011, pp.73~113을 참고. 이 책은 최근 탈 카미너, 『현대성의 위기 와 건축의 파노라마』, 조순익 옮

은 한 인터넷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추상, 사

김, 시공문화사, 2014년으로 번역

용, 공간, 아이디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중 흥미로운 것은 추상인데, 스티븐 홀은

되었다.

“예술가들이 실재에서 추상으로 작업한다면, 건축가는 추상에서 실재로 작업해야 한다”주1고 말한다. 예술이 그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나 하나의 이벤트로 만든다면, 건축은 거꾸로 이를 구체적인 건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건축은 건물과 다른 것으로 얘기되곤 한다. 예를 들면 니콜라우스 페 브스너는 “자전거 보관소는 건물이고 링컨 성당은 건축이다. … 건축이라는 명칭 은 ‘미적 호소력’을 위해 설계된 건물에만 해당된다.”주2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런 생각은 지극히 근대적인 산물이다. 무엇을 건축으로 볼 것인가는 미적 판단을 요 구하는 것으로, 이에는 필연적으로 그 기준을 부과하는 권위에 호소하게 된다. 이런 권위에 대한 물음과 도전은 이미 오래되었다. 근대란 각 분야의 자율성이 돌이킬 수 없는 출현을 특징으로 하고, 여러 학문과 규 율을 분화시켜 각자만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발전시켰다. 건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대 건축가와 역사가들, 이론가들은 공간 또는 형태 개념을 미학화하고 건축의 독 자적 역사관을 부각시키는 등 하나의 독자적 규율로 규정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 과정에서 건축은 하나의 예술 분야로 인정받게 되며 새로운 규율로 정립되기에 이 른다. 이것은 건축의 미학화와 추상화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뵐플린의 예술에 대 한 형식주의 이론을 건축에 이식한 루돌프 비트코버와 콜린 로우의 형식주의를 거 쳐 뉴욕 파이브의 존 헤이덕과 아이젠만, 그리고 벤추리의 포스트모던 건축과 리베 스킨트의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건축의 자율성에 대한 집착은 현대건축을 주도하 는 흐름이 되었다.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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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Tah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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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이 때문에 건축은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사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주4.

한 건축가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갖춘 엘리트로 대중과 격리되어 버렸다. 근대이

하이데거의 건축관에 대해

후 영웅적 건축가 상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이른바 스타 건축가들이 장악하며 난해

선 Adam Shar r, Heidegger for Architects, Thinkers for

한 이론적, 철학적 담론이 지배하게 되었고, 건축 교육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추상화

Architects 02, Routledge, 2007

된 담론으로 재편되었다.

참조.

이런 주류 건축에서 일상은 종종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면, 실제로 일상

주5.

에 대한 관심은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주요 관심사였다. 하이데거에게 일상성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

Alltäglichkeit은

상성』, 박정자 옮김, 에크리, pp.94~95 주6. Mary Mcleop, Henri Lefebvre’s

부정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일상성을

불안과 방향상실과 연결지은 바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근대가 초래한 일상 삶의 산 만함에 빠져 존재의 생생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하이데거 의 건축 모델은 일상에서 겪는 인간 경험의 질에 중심을 두었다. 건물과 거주를 다

critique of Ever yday life: an

시 통합해야 한다는 그의 요청은 장소만들기를 거주자의 활동과 특성에 맞춰 다시

introduction, Architecture of the

통합해야한다는 것인데, 책과 저널에 실리는 ‘뛰어난’ 건축이나 어떤 완성된 상품보

everyday, pricncton architectural press, 1997, pp.14~15

다는 일상 삶에 적합한 비전문적 건축을 찬양한다.주4 퇴행적이라는 한 켠의 비판도 있지만, 하이데거는 사방세계와의 합일된 삶 속에서 누리는 참된 일상적 삶은 인간 에게 존재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계기라고 믿었다.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으되, 이를 급진적인 맑시즘의 사유로 끌어온 프랑스 사회 학자 르페브르에게도 일상 삶은 자본주의 사회가 초래한 부정적인 측면과 혁명적 인 동기를 유발해 내는 긍정적 측면이 동시에 교차하는 곳이다. 르페브르에 따르 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며, 다른 하나인 선적인 반복은 ‘합리적’이라고 알려진 과정 에서 나타나는 것이다.”주5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은 합리적이라는 이름아래 반복적 인 삶, 단조롭고 지루한 삶 즉 일상의 비참함을 강요받지만, 일상은 완강한 지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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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일상은 두 가지 반복적 형식이 교차되는 지점에 있다. 하나는 순환으로써, 자연

으로 인해 고된 삶을 안정화되고 유지되게 만드는 위대한 것이기도 하다. 르페브르 는 이런 모순이 일상의 삶에 본질적이라고 보았다. 철학의 대상이지만 본래 비철학 적이고 정적이며 불변적이자 일시적이며 불확정적이다. 그리고 직선적 시간의 반복 적 진행이자 자연 순환적 시간이며 단조롭고 판에 박힌 것이자 축제와 유희의 장이 며 기술관료적 합리주의의 지배를 받지만 그것의 밖에 있다. 일상 삶은 가장 끔찍한 경험이자 변화의 가장 강력한 잠재력이다.주6 또한 르페브르는 “(사회적) 공간은 (사 회적) 산물이다”는 말을 통해 공간은 사회적 매개체의 복잡한 상황을 통해 생산된다 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사회적이란 경제적, 정치적, 기술적, 예술적인 모든 것을 아우 르는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즉, 추상화된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삶이 일어나 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객관적 결정주의보다 주관적 실천을 강조한다. 따라서 르페브르가 제안하는 건축가 상은 고상한 예술가로 서 또는 이론가로서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더욱 어울린다. 실무 건축가는 홀로 어떤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건물주의 대리인agent로서 건 물주의 의도를 파악하고 이를 설계로 옮긴다. 뿐만 아니다. 법규를 다루며 공무원을 상대하고, 건설업자와 상의하고, 예술적/문화적 의미를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의 눈 치에 휘둘리기 쉽다고 생각하지만, 기든슨에 따르면, 이 때문에 대리인으로서의 건 축가는 세상의 제약에 맞서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여기서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은 안정적 지식이 어떤 해법으로 이끌 것이라는 전문적 사고방식에 반대되는 것 이다. 전문가들이 이런 안정적 지식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에 권위를 내세운다면, 행 위자agent는 지식을 테이블로 가져와 협상해야 한다. 무엇보다 타자들과 유연하게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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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면서. 에이전트는 혼자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작업의 일부로 행동한다. 그 래서 기든슨은 이를 “상호 지식mutual knowledge”으로 규정한다. 상호 지식은 전문가

주7.

의 기준과 예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류, 협상에서 발견된다. 상호 지식

Nishat Awan, Tatjana

은 “담론적 의식”이라 부른 것과 대비되게 성격상 실무적이다. 담론의 영역은 일상

Schneider, Jeremy Till, Spatial A g e n c y : O t h e r Way s O f

생활의 직접적인 요구와 거리가 있는 지식의 발전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라면, 상호

Doing Architecture, (London:

지식은 일상 내에서 지식의 실천적 배치이다. 각각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런 담

Routledge, 2011), pp.31~33

론과 실무 사이의 거래는 전문적 기준에 도전한다.주7 기든슨에 따르면, 이렇게 작인

주8.

agency은

초기 이키케에는 100개의 유니

돌이킬 수 없이 권력의 문제에 묶여 있으며, 자신의 공간적 환경에 참여하

게 함으로써, 재배치된 사회공간의 결과로서 새로운 자유와 잠재력을 열어준다. 이 로써 건축적 지식은 지식의 공유로 나아갈 수 있다.

트로 구성되었고 각각 30 평방미 터로 이루어졌으며 각 유니트 당 7500 달러의 비용으로 지어졌다. 3층의 좁은 정면을 가진 건물은

대행자로서의 건축가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는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디자인한 <엘리멘탈 주거>를 들 수 있다. 2004년 칠레 주

진입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 주자가 직접 확장할 수 있게 유니

시화에 따른 도심지 빈민가를 재개발하는 사업으로, 건축가는 이들을 이주시키기보

나누어져 있어 벽 사이에 쉽게 여

다 삶의 터전인 도심지에 그대로 머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최소한의 돈으로

분의 방을 만들 수 있다. 블록 레

을 반만 짓겠다는 것이다. 반만 지음으로써 건축비는 절반으로 낮출 수 있었고 따라 서 최소의 정해진 예산으로 이들의 이주를 막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반 은 시민이 스스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비전문가인 시민은 공간 생산에 참여할 수 있

와이드 FOCUS

거실과 부엌, 욕실과 침실 그리고

택부의 원조아래 칠레 타라파카Tarapacá주의 이키케Iquique에 지어진 이 프로젝트는 도

건물을 짓고 이들에게 자립의 방식을 만들어주려는 해법은 아주 단순하였다. 건물

었으며 이것이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끌게 된 것이다. 즉, 건축가는 대리인으로써 현실적 제약에 맞춰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주민은 비전문가로서 자신이 살 공간에 직접 참여하여 스스로 지어내는 계기가 된 것이다.주8

칠레 엘리멘탈 하우징

주민과의 협업 장면

이런 로우 테크를 활용하여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은 웹을 기반으로 하 여 네트워크화되고 있다. 이른바 공유적 지식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카메론 싱 클레어와 케이트 스토가 설립한 <architecture for humanity>라는 단체이다. 종족 간 혈전 이후 코소보 피난민을 위한 보호소를 짓는 것이 계기가 되어 오픈 디자인 설계경기를 연속으로 개최하고 개발과 재건을 위한 대안을 개발하였고 2005년 ‘오 픈 소스’ 모델을 적용, 오픈 아키텍처 네트워크Open Architecture Network를 웹상에 만들었 다. 28개 나라에 245개 프로젝트를 완성하였으며, 사회적 디자인 운동으로 건축을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건축 솔루션이 절실한 공동체에 전문적인 디자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탄생하였다고 말한다. 이와 유사한 단체로는 위키하우스wikihouse라는 곳도 있다. 위키하우스는 영국 런던 의 건축디자이너가 프로젝트 형식으로 시작했다. 오픈 소스를 이용하여, 스케치업 으로 모든 도면을 웹에 올려놓았다. 공유된 설계안을 다운로드하여 인근 목재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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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블록으로 지어졌으며

트는 동일한 폭의 여유공간으로

이아웃은 또한 공유 공간으로 기 능할 수 있는 일련의 작은 마당 을 만든다. 이에 대해선 Kenneth Frampton, Modern architecture : a critical history, 4th edition, Thames & Hudson, 2007, p.3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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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re for Humanity 웹사이트

주9. http://jyarchitects.com/

Architecre for Humanity의 활동을 모아낸 책

위키하우스 조립모델

가공 후 이들을 조립하면, 바닥과 벽체 그리고 지붕이 서로 지지하는 방식으로 특별한 사전 지식이나 기술 도구 없이도 누구나 가장 싸게 집을 짓는 것이 가능하다.

주10. 동아일보 2012년 9월 25일자

한국에서도 젊은 세대 건축가들이 이와 비슷한 작업을 한 사례들이 있다. 2013년

주11.

<젊은 건축가상>을 받은 제이와이아키텍츠JYA-RCHITECTS는 시민단체와 연계하여 예산

제레미 틸, 『불완전한 건축』, 이황

4000만 원에 4인 가족, 7인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벌

옮김, 시공문화사, 2012년, p.209

교 주택>은 단열을 위해 에어캡을 17겹으로 겹쳐 지붕을 덮었으며, <장흥 주택>은

주12.

건설 비용을 낮추기 위해 콘테이너 3개로 방을 지었고 그 위에 경량철골로 전체를

ibid, p.234

외피로 감싸고 반투명 폴리카보네이트로 단열을 하는 계획안을 내었다. 제이와이아 한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건축의 기본’에 주목하고자 한다. … 디자인 접근방법과 건축주를 포함한 주변인들과의 협력관계, 재료의 사용과 특성에 대한 관찰, 구축 과정에서의 간결성 등을 끊임없이 구상하고 탐구하고자 한다”고 말하며

와이드 FOCUS

키텍츠는 “건축은 처해 있는 다양한 물리적, 사회적, 기능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

“서로가 고민해 오고 있던 사회 변화, 주거문화, 건축, 건축가의 사회성이라는 키워 드로 연결되는, 우리 사회가 가진 많은 문제들에 대해 다른 건축환경에서의 경험들 을 공유하고 교합시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주9고 자신들의 건축적 테 마를 설명한다. 또 다른 사례를 꼽자면, 젊은 건축가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소박하게 기존 2층 주택을 매입하여 리모델링한 이 건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재능기부이자, 건축의 사회성을 보여주는 프로젝트였다. 와이즈 건축 WISE Architecture의

당선작 자체도 어려운 현실 여건을 딛고 건축가의 좋은 아이디어로

완성되었다.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기존 2층 주택을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좁은 공간 을 긴 동선으로 엮어 위안부할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진입은 1층 건 벌교 주택 내부

물 뒤편 담벼락으로 시작하여 지하로 진입하며 2층으로 연결되고 다시 1층 마당으로 까지 연결된다. 소박하며 전벽돌을 반복적으로 쌓아 엄숙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을 준 다. 가장 감동적인 곳은 기존 건물의 벽체를 벗겨내고 그대로 드러낸 시멘트 벽돌로 이루어진 벽체와, 또 하나는 바깥마당이다. 둘 다 기존 건물의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 게 도출된 건축적 결과물이다. 시멘트 벽돌로 이루어진 벽체는 벽돌에 새긴 할머니 들의 육성을 기록하는 틀이 되고 있다.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처를 드러 내는 드라마틱한 공간보다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소박한 공간이 되도록 설계했어 요. 언제 와도 꽃을 볼 수 있도록 야생화를 심었지요. 피해 할머니들은 작은 야생화를 보며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을 떠올릴 수 있으실 겁니다.”주10 물론 박물관에 전쟁에

장흥 주택 외관

대한 간접 체험을 들여온 것은 조약해 보이고 가벽으로 쌓은 추모 공간은 아직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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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주13. 제레미 틸은 “사회적 윤리성이란 주제는 어떤 경우든 건축설계 자 체에 이미 내재된 것”이라 말한다. ibid, p.246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내부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마당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에서 시작된 건축가의 고민은 비극적 과거 를 치유할 일상의 가치를 재발견해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건축가는 단순히 실무적인 해법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비전을 제시 하는 일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건축과 건축가의 위상은 달리 정의되어야 한다. 제레미 틸에 따르면, 건축은 애초 예술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 천재의 상상력 에 기대는 작업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협업과 협력을 강조하는 윤리적인 상상력이 중요하고 전체를 조종하려 하기보다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

와이드 FOCUS

다. 이것은 바로 건축가의 윤리적 책무이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제레미 틸은 단언한다.주11 이렇게 윤리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의식하는 것”주12을 뜻한다. 건축에 윤리성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관점에 만 가능하다. 여기서 ‘타자’란 건축주뿐 아니라 건설관계자, 사용자, 점유자 및 실제 적 삶이 건물의 완성에 의해 영향받는 거의 모든 이들을 지칭한다. 이런 윤리적 책 임을 가질 때, 그리고 그것을 건축설계 자체에 구현할 때주13 오히려 건축가는 건설 과정에 참여하는 어떤 주체보다도 눈앞의 요구와 장기적인 비전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을 조정할 수단과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건축에서 화두처럼 등장한 것도 오래 되었다. 3D 소프트웨어의 혁신 에서, 인터넷을 통한 빅데이터의 활용 가능성이 논해지고 있고, 뿐만 아니라 3D 프 린터를 이용해 프린터로 뽑아서 건물을 짓는 사례까지 등장한다. 앞으로 이런 방향 의 문화적 혁신이 가속화됨에 따라 건축을 융복합으로 끌어들이려는 흐름이 생긴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상당 부분 상업적 이용에 휩쓸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또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초래할 변화가 낭만적인 예언만을 가능케 할지 낙 관하기에는 여전히 어렵다. 지난 세기 인류는 이에 버금가는 수많은 변화와 혁신을 경험했다. 어린 시절 공상과학 만화에서 보았던 미래의 모습, 곧 기계가 등장하여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것이고 인간은 일을 할 필요 없이 편히 생활을 즐기게 될 것 이라는 낙관이 항상 이에 동반된다. 하지만 오늘날 과연 그러한가? 이미 역사를 통 해 그런 미래는 균등하게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건축이 융복합 적 본성을 회복하는 길은 건축을 일상 삶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는 건축가 의 창의적 개입을 필요로 한다. 견고한 아카데미즘의 벽과 갈수록 강화되는 상업화 의 길을 벗어나 일상에 대한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실천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일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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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Work | 와이드 워크

와이드 WORK

수헌정 Leaning House 임동우+임창복 Yim Dongwoo + Yim Changbok 사진 진효숙

본지 전속 사진가

설계 PRAUD(임동우)+임창복+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대성리

용도

홈오피스

구조

(주)공간엔지니어링

대지 면적 484.0 m2

전기

산정종합건축사사무소

건축 면적 96.8 m2

기계

산정종합건축사사무소

연면적

127.9 m2

조명

임창복 + 알토조명

건폐율

19.98%

조경

임창복 + PRAUD(임동우)

용적률

26.44%

시공

(주)위빌

규모

지상 2층

감리

(주)삼희건축사사무소(오동준)

구조

철근 콘크리트조

인테리어 PRAUD(임동우) + 임창복

마감

라인징크, 고밀도 목재 패널

주방

한샘키친

설계 기간 2012.2 – 2013.10

모형

PRAUD

공사 기간 2013.10 – 2014.7

CG

PRAUD

WORK1

위치

산정종합건축사사무소

임동우 | PRAUD 프라우드 공동대표. 서울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하바드대학교(Harvard University)에서 도 시설계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라파엘 루나(Rafael Luna)와 함께 PRAUD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건축 작업과 도시 리서치를 병행하고 있다. 건축 작업을 통해 PRAUD의 건축어휘인 Topology & Typology 를 기 반으로 하여 근대주의를 넘어 현대건축의 건축적 언어가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있으며, 도시 리서치를 통해 도시 형 태(urban form), 도시 공간(urban space), 그리고 건축 유형(architectural typology)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연구한 다. 현재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RISD)에 출강하며 세미나와 스튜디오를 통해 학생들과 함께 이들 주제

를 발전시키고 있다. 2013년 뉴욕젊은건축가상을 수상하였으며, 뉴욕 MoMA,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베 를린 DNA Galerie에 작업과 작품을 전시한 바 있다. 저서로는『북한도시읽기』, 『I Want to be METROPOLITAN; Boston Case Study』, 『평양, 그리고 평양 이후』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Casa Periscopio와 수헌정(Leaning House) 등이 있다.

임창복 |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전 한국건축학 교육인증원 원장.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졸업 후 캐나다 토론토대 학에서 건축학으로 석사를, 서울대학교 건축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MIT건축도시연구소의 객원교수로 있 으면서 주택 관련 연구를 심화한 후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 도시 단독주택의 유형적 지속성과 변용성」을 발표하 였고, 동경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을 거친 후에는「일제시대 한인 건축가에 의한 주거 개선 연구」와 「서울지방 근대한옥의 공간 분석 연구」를 발표하였다. 주요 저서로『건축계획론』, 『주거론』, 『21세기엔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이상 공저),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등이 있고『주거공간의 의미』,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 등 을 옮겼다.

산등성이와 나란히 뻗은 캔틸레버 지붕. 테라스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건축주(좌)와 건축가 57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INTERVIEW

토폴로지 앤드 타이폴로지

프로그램 와이드 꽤 오래전부터 이 집을 구상하셨던 것으

응접실 프로그램을 추가할 수 있었고, 대신 거실을

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두 분이 함께 집을 짓게

워크샵이나 친교를 위한 공간으로 비워둘 수 있었

되었는지요?

습니다.

임창복 오랫동안 대지 위에 여러 가지 대안들을

임창복 살림집 개념보다는 다목적의 세미나실,

모던classical

공연장 등의 공간을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을 갖

주제로 접근했던 것 같고…. 그러다가

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집에 들어왔을 때 누

2011년 임동우 소장과 본격적으로 얘기하기 시작

구든 거부감이 생기지 않게 공적인 기능을 강화하

했어요. 저는 무엇보다 이 집짓기가 임 소장의 작품

게 되었고요.

이 되길 원했지요. 사실 젊은 건축가는 신축의 기회

언젠가 한국 모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이탈

를 잡기 힘들죠. 기회가 없으니 자신의 건축을 표현

리아 건축가가 이 집을 보더니 “팩토리 오브 컬처

해 볼 길이 없고요. 젊은 건축가의 딜레마가 아닌가

factory of culture”

생각합니다. 저 역시 오래전에 부딪혀 본 경험이 있

교외에는 이런 집들이 많다고…. 집이 하나의 문화

으니까요. 아무튼 젊은 건축가에게 기회를 주는 거

예술의 거점이 되는 거죠.

고민했었죠. 예전에는 대개 “클래시컬

와이드 WORK1

& modern”을

개념의 집이라고 하더라고요 자국의

라고 생각하니까, 그동안 망설여졌던 집짓기가 일 사천리로 진행됐어요. 역할도 분명하게 나뉘어졌구

와이드 거실-서재-침실이 일자로 연결되어 유동

요. 저는 건축주로서, 임 소장은 건축가로서….

적인 공간을 이룹니다. 그리고 상승하는 공간의 맨 안쪽에 가장 정적이고 편안한 침실을 두었고요. 각

와이드 <수헌정>은 집필과 연구, 혹은 작은 세미

실의 배치는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나를 열 수 있는 주말주택입니다. 애초에 설정된 프 로그램이었나요?

임동우 프로그램의 배치는 오히려 단순하게 생 각했습니다. 많은 주택들이 거실이 주택의 중심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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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우 아버지께서 수헌정의 대지를 처음 구입

간이 되고 다른 공간들은 거실에 인접해 있는 방

하고 대안들을 만들 당시 (근 20여년 전)에는 보통

식을 취하는데, 수헌정은 동선의 특성상 선형으로

일반적인 주택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침실 2개와 거

(linear하게) 프로그램들이 구성되어야 했습니다.

실이 주된 프로그램이었어요. 하지만 실제 수헌정

그래서 가장 공적public인 공간부터 가장 사적private

프로젝트가 재개되었을 때는, 이미 부모님이 모두

인 공간까지 그라데이션을 갖고, 응접실-거실(부

교직에서 은퇴를 하였고, 수헌정을 교외 주택으로

엌)-서재-침실 이런 식으로 배치가 되었습니다. 이

사용하기보다는 그분들의 작업 공간, 워크샵 공간,

는 수헌정의 이용자가 개인 뿐만 아니라 외부 게스

친교공간 등으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보

트도 종종 포함할 것을 염두에 두고 순차적으로 배

니 자연스레 침실은 하나만 남게 되었고, 대신 서재

치한 것입니다. 따라서 수헌정에서 외부로의 진출

가 생기게 되었지요. 그래서 침실-서재-거실이 주

입은 모두 응접실 쪽에서만 가능하도록 제한하였

요한 프로그램이 되었는데, 매싱을 들어올림으로써

습니다. 이용 편의상 거실에서 앞마당으로 나아가


Wide Work | 와이드 워크

기울어진 건물 사이에 유리 구조체를 삽입함으로써 남쪽 빛에 노출되는 표면적을 극대화시켰다. 이로써 집의 남쪽에 배치된 응접실과 침실은 빛을 가능한 힘껏 받아들인다.

남측 전경. 수헌정은 집필과 연구, 혹은 작은 세미나를 열 수 있는 주말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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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북쪽에서 바라본 전경. 지형에 따라 동향을 면하고 앉아 있는 박스의 남향 부분을 들어 올렸다.

캔틸레버 볼륨의 끝은 발코니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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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Work | 와이드 워크

는 출입을 고려해 보기도 하였으나, 현관에서와 야외데크

시키는 것에는 특별한 중요성을 못 느낀 점도 있습니다.

에서 모두 응접실을 통해 내부로 진입할 수 있도록 동선을 임창복 150평 대지에 건폐율 20%면 약 30여 평 됩니다.

통일하였습니다.

어디에 마당을 둘 것이냐의 문제인데, 이 집은 대지 남쪽으 임창복 이 집이 가진 공간의 유동성은 우리의 옛집에서

로 인접 대지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드라마틱하게 풍광

볼 수 있는 그것과 닮았습니다. 마루와 방의 구분이 있기는

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지만, 우선적으로 인접 대지를 고려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열려 있는 관계가 수헌정에서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저희 집이 남쪽에 마당을 두

실현되고 있는 것이죠. 침실이 안쪽에 자리잡은 것도 옛집

고 앉았다면, 앞집을 바라보는 격이겠지요. 담장을 높이 쌓

의 안채가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

는다면 모를까, 서로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방법이 필요했

구요. 그런 의미에서 응접실은 사랑채 역할을 합니다. 가장

어요.

바깥쪽에서 사람들을 맞아 들이는 공간이지요. 또, 이 응접 실은 대청마루격인 데크, 나아가 대문 옆 툇마루까지 이어 창

집니다.

와이드 결과적으로 동쪽으로 마당을 두고 거실이 수려한 산세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거실에서 창을 통해 배치

고즈넉한 경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볼 수

와이드 수헌정이 담고 있는 얘기는 크게 배치placement와

있는 대형 통창은 아닙니다.

토폴로Topology/타이폴로지Typology 개념인 것 같습니다. 우 임동우 개인적으로 대형 창을 싫어한다거나 특별한 선입

는 공간의 절정에서 뭔가 극적인 것, 이를테면 눈앞에 갑자

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멋진 뷰 = 대형 창”이라

기 펼쳐지는 풍광을 기대할 수도 있겠는데요(웃음), 그런

는 공식은 어딘지 모르게 “창”에 대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측면에서 집이 전망 좋은 동쪽으로 놓였으면 어땠을까 싶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건축학개론>의 제주도집에서 탁

기도 합니다.

트인 전망을 향해 폴딩창이 쫘악 펼쳐질 때 다른 관객들처 럼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수헌정의 컨텍스트는 이

임동우 이 부분은 저희도 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매우 고

것과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우선 창은 외부의 풍경을 내

심하며 논쟁했던 부분 중 하나입니다. 매스의 형태만 본

부로 담아내는 데 그 프레임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다고 하면, 열명 중 아홉은 그러한 클라이맥스를 기대하

역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 거실-서재-침실의

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창들은 모두 청평호를 향하고 있는데, 이들 공간에 나 있는

architectural

세 개의 창은 모두 그 크기와 비율이 다르고, 또 위치하는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저는 개인적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뷰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우리가 (혹은 건축가들이) 너무 “건축적 산책로 promenade”에

으로 부석사를 건축적 산책로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와이드 WORK1

선 배치와 관련해서 궁금한 것은, 거실에서 침실로 이어지

생각을 했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으로 가는 길 은 예불을 드리기 위한 과정이지 무량수전에서 돌아서서

임창복 저는 이것을 설명할 때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

탁 트인 전경을 보기 위한 프로메나드는 아니기 때문입니

明 使我久坐”라는

다.) 건물이라고 하는 것이, 특히 이런 산중턱에 위치하는

지만 많은 빛을 받을 수 있는 창문이 오래 앉아 있게 한다

건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선은 지형을 따라 순응해서 배치

는 뜻이지요.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작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지형에 순응한다는 것 은 주변 집들과도 (듬성듬성 있긴 하지만) 조화를 이룰 수

와이드 오히려 적절한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하루종일

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모두들 각자의 대지에서 지형에

다른 빛모양을 만들어내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순응하여 청평호 쪽으로 마당을 두고 집을 배면에 두고 있 는데, 수헌정만이 다른 방식을 취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욕

임동우 서재에서는 청평호를 향한 동향과 맞은편의 서향

심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토폴로지로도 설명을

에 모두 창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수헌정 내부에 늘 해가

드리겠지만, 수헌정의 매싱massing 형태는 전적으로 향과 프

다양한 각도에서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같습니다.

로그램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건축적인 산책로를 완성

이는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완공 후 경험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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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특별한 경험인 것 같습니다. 와이드 북쪽 벽면 상부에는 가로로 긴 창이 나 있습니다. 기울어진 벽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이 창을 통해 바깥 풍경 이 내부로 전해지는 느낌이 꽤 좋았습니다. 임동우 이 클리어스토리 창은 시공 중에 더 높이 폭을 키 운 경우입니다. 한창 콘크리트 공사 중일 때가 작년 가을 기울어진 박스의 외관 전체를 징크 패널이 감싸고 있으며,

단풍이 들었을 무렵이었는데,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단풍

이것은 건물에 단일성과 견고함을 부여한다.

의 모습이 아름다워 좀 더 시야를 확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창 덕분에 침실에서 서재를 통해 내려 오는 과정 중에 청평호를 향한 뷰와는 또 다른 전면의 자연 을 내부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와이드 침실 벽면에도 클리어스토리 창이 나 있습니다. 단면도를 보면 확연하게 클리어스토리 창들의 관계, 심지 어 침실 남쪽 전면 창과의 관계까지, 어떤 의도가 숨어 있 는 듯 보입니다.

땅의 지형에 따라 집은 동쪽을 면해 마당을 두었다. 62


Wide Work | 와이드 워크

임동우 수헌정은 기본적으로 공간 간의 (혹은 실 간의)

어 만든 창이라 더욱 애착이 갑니다. 이 클리어스토리 창은

유기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 중

침실 내부에서는 간접조명이 설치되어 흡사 제임스 터렐

하나였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단절된 공간들로만 이루어

James Turrell의

진 아파트 생활을 한 건축주 부부에게 아파트에서는 느끼

의 창도 역시 비슷한 예입니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

지 못하는 유기적인 공간의 경험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만, 이 창도 공사 과정 중에서 외부의 자연을 더 적극적으

제 개인적인 바람이 컸던 이유도 있습니다. 종종 프라이버

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확대되었고, 이 역시도 애시당초 시

시라는 이유로 모든 실들이 단절되어있는 것이 합리화되

선이 천정의 경사면을 따라 갔을 때 그 끝지점이 내부의 경

곤 하는데, 수헌정에서는 그 틀을 깨고 싶었습니다. 침실의

사벽이 아니라 외부의 자연이라면 내외부가 더욱 적극적으

클리어스토리 창은 내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으면

로 소통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도 납니다. 북쪽 경사벽

서 불빛을 통해 밖에서도 침실과 하나로 연대가 될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 줍니다. 이는 기능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창의 유무는 수헌정 내부 공간

토폴로지와 타이폴로지

경험의 큰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경사진 천정의 면

와이드 거실-서재-침실이 한쪽 벽면의 긴 계단으로 연

(혹은 빛)을 따라 시선이 따라 갔을 때, 시선이 닫혀진 벽

결되며 최대한 열린 구조를 갖습니다. 이것은 건물 한쪽 끝

에 부딪히고 끝나게 할 것인지, 아니면 그 벽 너머의 공간

을 들어올림으로써 가능했는데요, 여기서 토폴로지topology

에 대하여 상상할 수 있게끔 할 것인지는 매우 큰 차이라고

가 얘기됩니다. 이 개념은 열린 내부 공간을 만들면서 지면

생각합니다. 이 클리어스토리 창은 로컬업체와의 커뮤니

과 들어올려진 건물 사이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들기도 하고,

케이션상에서 실수로 누락되어 현장에서 배제가 되었으나,

이를 통해 남쪽 빛과 풍광을 더 많이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재차 강력하게 요구하여 현장에서 콘크리트를 다시 깎아내

결국 이것으로 주변 맥락에 대응하면서 작은 집의 규모를

거실에서 바라본 응접실 너머의 테라스. 길게 이어진 계단으로 거실(1층), 서재(메자닌 층), 침실(2층)이 연결된다. 63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보완한 셈이에요.

건축의 구축 시스템과 요소를 병합하여 타이폴로지라는 개 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토폴로지는 어떠한 기하학적인

임창복 처음부터 임동우 소장에게 주문한 것은 “건축적

형태를 가졌던지 간에, 공간의 위상이 같으면 같은 토폴로

으로 의미있는 집”이었어요. 그가 늘 얘기했던 게 토폴로지

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르거나 붙이는 과정

에 관한 것이었지만 처음에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죠.

없이 형태의 변화로만 같은 형태를 만들 수 있는 도너츠와

그런데, 이 집과 관련한 다이어그램을 보고 명확하게 이해

머그컵은 토폴로지가 같다고 해석합니다. 건축에서의 이러

가 되었어요. 개념에 대해서는 임 소장이 자세히 설명하겠

한 개념은 그 동안 건축 내부의 위상학적인 공간을 구축하

지만, 저는 그가 이 개념을 끝까지 끌고 갔으면 했고, 실제

는데 사용되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위상학에서 이야기하

로 개념의 적용 사례가 된 듯합니다. 그로서도 나름 의의가

는 “같은 공간의 위상”을 갖는다라고 하는 것은, 공간space

있을 거예요.

과 비공간non-space, 즉 솔리드solid와 보이드void, 존재presence 와 부재absence, 혹은 건축과 컨텍스트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와이드 PRAUD의 건축 작업이 모두 이 개념의 틀 안에

에 더 적합한 개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토폴로지는 건축

서 진행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소개를 해 주

의 기하학적인 형태보다는 건축과 도시가 관계맺는 공간적

세요.

위상에 더 주목하고자 합니다.

와이드 WORK1

한편, 타이폴로지는 건축의 시스템과 요소에 주목합니다. 임동우 토폴로지 & 타이폴로지Topology & Typology는 저희

르 꼬르뷔제는 건축계에 돔-이노dom-ino 시스템을 ‘선물’로

가 건축을 함에 있어서 사용하는 건축 언어입니다. 저는 현

주면서 건축가가 원하는 파사드를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재 라파엘 루나Rafael Luna와 함께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후 많은 현대

데, 예상하시겠지만 서로 다른 스타일의 두 명이 함께 작업

건축가들이 표피의 형태나 디자인을 통해서 ‘새로운’ 건축

하려다 보니 여간 어려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건

을 시도는 하지만 시스템적으로는 그대로 돔-이노를 차용

축에는 단지 개인적인 스타일이나 취향이라는 주관적인 부

하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모더니즘의 근간인 이

분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고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있

시스템을 별다른 비판없이 어떠한 형태나 표피에 사용한다

다고 생각하였고, 그 합의점을 찾기 위해 연구한 것이 저희

고 하면, 아마도 현대건축은 모더니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작업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토폴로지/타이폴로지라는 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폴로지에서는 건축의 요소가

념입니다. 이는 안토니 비들러Anthony Vidler가 이야기하는 건

되는 것들, 즉 기둥Column, 슬래브Slab, 벽Wall, 계단Stairs, 파사

축의 세 가지 타이폴로지에 관한 정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

드Façade 등이 통합과 융합을 통하여 구축 시스템으로 발전

습니다. 비들러는, 첫 번째 타이폴로지는 건축의 기본적인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요소와 그 구성을 통해 정립되는 타이폴로지로 설명하고

이 두 가지의 개념이 모더니즘을 탈피하고자 하는 현대건

있고, 두번째는 르 코르뷔지에가 정립한 건축의 구축 시스

축에서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는 개념들인데, 저희는 이

템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도시의 맥

두 가지, 즉 토폴로지와 타이폴로지를 어떻게 하나의 완결

락과 연계되는 건축의

형태form로서의

타이폴로지를 이야

체로 조화시키는가가 “콘템포러리즘”(Contemporarism,

기하고 있습니다.

모더니즘이 건축 언어를 대변하는 말이지 시대를 설명하는

저희는 도시 컨텍스트와 관계를 맺는 건축적 형태를 수학

말이 아닌 것처럼, 콘템포러리Contemporary도 단순히 시대를

의 용어를 빌어 토폴로지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고,

대변하는 단어가 아니라 이즘ism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

토폴로지 다이아그램

program box

64

lifting box

supporting box

environment


Wide Work | 와이드 워크

북쪽 거실 경사벽의 창은 외부의 자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거실 동쪽 창이 끌어들이는 아침 햇살

메자닌에서 부엌 상부로 뻗어나가는 브릿지

각기 다른 뷰를 제공한다.

와이드 WORK1

거실-서재-침실의 창들은 모두 청평호를 향하며

65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까 하는 의미에서의 콘템포러리즘)을 만들어낼 수 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토폴로지와 타 이폴로지는 어떠한 건축적 형태가 형성될 때, 그에 적합한 구축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하고, 또 다시 그 과정에서 형태 가 변형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건축의 형태와 시스템이 하나의 완결체로 구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 하고 있습니다. 와이드 이러한 개념이 수헌정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 용되었는지 말씀해 주세요. 앞서 말씀드린 바 같이 토폴로지와 타이폴로지는 형태와 시 스템의 결합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즉, 건축적 형태는 천 지 차이인데 그것을 구축하는 시스템이 모두 돔-이노 시스 템이라고 하면, 형태와 시스템이 제대로 결합된 것이 맞는 가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수헌정은 작은 프로젝트이 긴 하지만, 여기서도 나름 형태와 시스템의 조합을 많이 고 민하였습니다. 수헌정의 영어 명칭은 건축적 개념에서 따온 <Leaning House>인데, 이는 하나의 리닝 박스box가 다른 박 스에 얹혀져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형태의 구

와이드 WORK1

성도 두 개의 박스가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를 구축하는 시스템도 하나의 박스가 다른 박스에 얹혀지는 구조를 갖추 침실의 창. 작지만 많은 빛을 받을 수 있는 창문이 오래 앉아 있게 한다.

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수헌정의 형태는 지형에 따라 동 향을 면하고 앉아 있는 박스의 남향 부분을 들어 올려 남향

서재와 침실 사이 벽의 클리어스토리 창은 내부의

66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불빛을 통해 밖에서도 침실과

1층 경사벽을 스크린 삼아 다양한 이벤트 공간으로의

하나로 연대가 될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 준다.

활용이 가능하다.


Wide Work | 와이드 워크

쪽으로 2개의 실(응접실과 침실)이 위치할 수 있게 하고, 동 시에 그 하부를 외부 데크(마루) 공간으로 쓸 수 있도록 하 기 위하여 나타난 형태입니다. 이 경우, 기울어진 박스를 지 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박스는 응접실이 있는 수직의 유리 박스입니다. 그리고 기울어진 박스 역시 박스 내부 공간에 서 기둥과 같은 별도의 구조 시스템 없이, 박스의 표피에서 그 구조 시스템을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의 박스가 다른 박스 위에 얹혀진 형태일 뿐이지, 시스 템은 그것을 따르지 않는 간극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개념적인 것이라 해오던 방식대로 하기를 좋 아하는 구조업체를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나, 결과적으 로는 원하는 구축시스템으로 수헌정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 다. 개인적으로 유리 박스의 구조는 좀 더 새로운 방식의 시

타이폴로지 다이아그램

스템-창의 멀리온mullion을 구조체로 사용한다든지 하는-을 시도해 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한 점이 아쉽습니다. 하지 만, 유리 박스에서 사용된 기둥을 기울어진 박스의 열린 공 간까지 끌고 올라오지 않고 기울어진 박스를 무주공간으로 만든 것은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념의 실 현이라는 차원을 떠나, 공간적으로도 훨씬 깊은 감흥을 주 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폴로지와 타이폴로지는 훨씬 더 어휘라고 생각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수헌정 작업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unfolded drawing of leaning

와이드 WORK1

많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들을 통해 발전시켜야 하는 건축

0

42

45°

표피와 패턴 와이드 수헌정을 소개하는 글에서 “… 모더니즘을 탈피 하고자 하는 현대건축에서는 더 이상 파사드가 건물의 공 Align

Ref. Point A

Align

Align

륨이 투영된 면이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매스를

Gutter

Roof Angle Reference : Angle b/w Ref. Point A, Point B and Point C

하나의 단일한 볼륨으로 구성하기 위해 건물 표면에 연속

B

가요?

B

A

적 패턴을 사용한 것이 이해되고요. 그런데 왜 사선 패턴인

B

A

Align

B

Align

Align

간과 시스템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표면surface은 볼

36°

Align

Ref. Point C

가 이루어졌었습니다. 처음에는 창 자체도 지면에 수직으

488

Align

Align

Align

Gutter

Ref. Point B

Align

임동우 사선 패턴을 사용하는 데까지는 다양한 스터디 Working Point

로 할 것인지, 매스의 경사도를 따를 것인지 여러 고민이

45°

있었구요. 징크의 줄눈 역시, 지면을 기준으로 수직으로 갖 42 0

Align

고 갈 것인지, 매스의 경사도를 따를지 여러 스터디들이 있

0

42

45°

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던 생각은 매스의 모든 면 A

이 하나의 전개도를 통해 연속적인 줄눈을 가져야 된다는

A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표피가 아닌 볼륨으로 읽힐 수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붕면이 시야에 그대로 노 출되는 수헌정의 특성상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습니

67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다. 그런데, 그런 경우 매스의 경사에 수직인 방향으로 줄

에서 벗어나지도 않아 프레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

눈이 생기면, 지붕면의 줄눈은 지붕의 경사와 대치되는 상

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내부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입

황이 발생합니다. 지붕의 빗물이 흐르는 방향과 줄눈의 방

니다. 거실에서 서재를 통해 침실의 클리어스토리를 바라

향이 서로 수직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볼 때 이 공간들이 고개를 치켜들지 않아도 편안한 시각으

물론 지붕의 줄눈을 지붕 경사 방향과 일치시길 수도 있었

로 한 시야에 들어오게 됩니다. 실제 수헌정의 내부 공간은

겠지만, 그러면 측면의 줄눈과 단절됨에 따라 볼륨의 힘을

크게 열려 있으면서도 지나친 보이드의 과잉으로 느껴지지

잃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기능과 개념의 공유 지점이 없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사람이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

는 옵션이었습니다. 다른 경우는 지면의 축을 따라, 지면에

라보지 않아도 자신의 시야에 편안하게 얹혀지기 때문이

수직으로 줄눈을 넣는 것이었습니다. 이 경우는 이미 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면의 축을 따르고 있고, 또한 지면의 규칙을 따르는 유리 박스와는 달리, 기울어진 박스는 그 자체가 지면으로부터

와이드 기울어진 매스와 유리 박스가 만나면서 의외의

독립하고자 하는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이 면의 패턴(줄

공간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를 들어 침실 아래 피트 공간

눈)은 지면의 축을 따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나, 응접실 부분 겹벽 사이의 공간 같은…. 실제 여러 용

그리하여 새로운 각도, 매스의 역동성을 더 부여해 줄 수

도로 활용 가능할 듯합니다.

있는 줄눈의 각도를 찾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매스보다 더 기울어져서 매스의 운동감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지금

임창복 침실 아래 피트는 실제로 창고로 쓰고 있구요. 1

의 패턴을 찾게 되었습니다.

층 응접실의 벽면에 캔틸레버 지붕으로 이어지는 사선의

와이드 WORK1

구조체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기울어진 집의 운동성을 더

68

기울어진 집과 의외의 공간

욱 강조하고, 또 건물 내외부의 연결성을 보여주기도 합니

와이드 대략 19도 정도의 기울기인 것으로 압니다. 현장

다. 그 너머 유리창에서 햇빛이 들아올 때 느낌이 좋구요.

에서 결정이 된 건지요?

처마 밑에 삼각형 형태의 공간은 겹벽이라 가능한 건데, 그 안에 채워지는 빛도 아주 매력적이지요. 우리 전통 주택에

임동우 대지에서 어떤 물리적인 장치를 통해서 건물의

도 처마 밑에 재미있는 공간들이 많이 생깁니다.

경사각을 결정할 수 있었다면 가장 이상적이었겠지만, 사 실 그것은 쉬운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건물의

임동우 사실 피트층에 애착이 많습니다. 로컬업체와 일

경사를 결정한 요소는 메자닌(서재 부분)의 높이와, 침실

하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이 구조업체였는데, 처음에

의 높이 등의 요소가 가장 컸습니다. 평면 스터디가 많은

는 구조업체가 캔틸레버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서 이

대부분의 주택과 다르게, 단면 스터디가 주를 이루었던 수

피트층이 불필요해지고 또 그러다 보니 다른 구조체들이

헌정의 설계 과정이 이를 설명해 줄 듯합니다. 특히 필지의

무거워지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 끝에

폭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실의 높이가 살짝만 바뀌

삼각형 구조로 캔틸레버를 풀었고, 그러면서 피트층이 유

어도 (평면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없어서) 매스의

지될 수 있었습니다.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경사도가 심하게 바뀌는 상황이었습니다. 설계 초반에는

필요한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피

침실의 남향 면이 매스의 경사를 그대로 따라 (현재 거실

트층에 슬라이딩 침대 등을 두어 경우에 따라서 임시 게스

의 경사벽처럼) 경사면이었습니다. 이 부분 역시 매스의 경

트룸으로 쓸 수 있는 아이디어까지 생각할 정도로 이 공간

사도가 너무 기울면 이 경사면이 덩달아 많이 기울기 때문

을 더 적극적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에, 침실 공간 면적과 기능상의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 되

이 공간말고 제가 좋아하는 공간이 서재 메자닌에서 부엌

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고 여러 스터디 과정 속

상부로 뻗어나가는 브릿지 공간입니다. 사실 이 공간은 기

에서 현재의 경사가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단면도상에서도

능적으로는 대단히 유용한 공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조

과하지 않고 편한 느낌을 주었는데, 도면상에서의 이 ‘편안

그만한 브릿지가 있음으로 해서 자신이 올라온 계단을 돌

하다’라는 느낌이 현실에서도 실로 신기하게 나타나기도

아볼 수 있고 서재와 거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합니다. 실제로 수헌정 경사진 매스의 하부, 즉 야외 데크

지점을 만들어 줄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습니다.

에서 외부 전경을 바라볼 때, 이 경사도는 매우 ‘편안한’ 느

낌의 프레임을 만들어 줍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전면을 바

임창복 찰스 무어Charles Moore의 책을 보면, 자신이 돌아

라보았을때, 우리의 시야를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또 시야

온 궤적을 볼 수 있는 위치를 만들었을 때 인간은 공간에


Wide Work | 와이드 워크

새로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가 산꼭대기에서 자

공동 작업

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바라볼 때,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

와이드 마지막으로, 부자가 함께 지은 집입니다. 즐거운 일

지만 전혀 다른 감흥을 받는 것처럼요. 물론 이 집은 아래

도 있었겠지만 힘들었던 순간도 많았을 듯한데요,(웃음) 이

층에서도 전체를 바라볼 수 있지만, 브릿지 부분에서 돌아

자리를 빌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떠올려 주신다면?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지요. 한편으로는 공연이나 세미 나 등을 진행할 때, 무대로 돌출된 객석(ㄷ자 형태 객석)의

임창복 미국과 한국이라는 지리적 거리감이 있었기에 망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엄청 싸웠을 거예요.(웃음) 임 소장이 한국에 나올 때마다 대화를 많이 하면서 의견을 좁혀 나갔지요. 그래도 건축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재료

저로서는 젊은이들의 감각을 많이 믿어 주는 편에 속합니

와이드 집의 외장재는 징크와 이뻬목입니다. 임 소장님

다. 건축의 역사라는 게 뭐겠습니까. 무엇이든 시간이 지나

은 처음에 블랙 징크를 제안하셨다고 들었어요. 현재는 흑

면 자연스럽게 오래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

연색 라인 징크가 쓰였구요. 지금의 재료를 선택한 배경이

까. 아무튼 저는 전체적인 개념과 감각적인 부분은 임동우

궁금합니다.

소장을 전적으로 믿었고, 대신 조금 더 디테일한 부분, 기 능적인 부분에서는 함께 얘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물론 의

임창복 임동우 소장이 블랙을 제안하고 나서 한겨울에

견이 갈릴 때는 결국 제가 따라가게 됐구요. 처음의 개념을

헤이리 마을로 벤치마킹하러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

흐트러 놓기 싫었기 때문에 개념이 크게 변하지 않는 선에

사례들을 보았는데, 무난하다고 생각했던 회색 계열의 징

서 기능을 고려하고자 했습니다.

크가 너무 삭막하고 차갑게 느껴졌어요.(겨울이라서 더 그 임동우 제가 안 좋은 일들은 빨리 까먹는 편이라 가장 힘

들더라구요. 검은색으로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하지

데 막상 블랙 계열 중에서 고르려니 적합한 게 없고…. 그

만 확실한 건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타협점이 안 보이는 아

러다가 지금의 흑연색 라인 징크를 보게 됐죠. 이뻬목은 흑

버지와의 논쟁 때문에 밤잠 못 잔 적이 하루이틀은 아니었

연색에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하구요.

다는 사실입니다. 이메일로 온갖 이론들을 들먹여가며 논

와이드 WORK1

랬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검은색 계열이 따뜻한 느낌이

쟁한 것도 기억나구요. 가장 컸던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는, 임동우 프로젝트 초반에는 목재도 주요 재료로 고려되었

아버지는 기능이 우선되어야 했고, 저는 개념을 지키고 싶

습니다. 하지만 진행 과정에서 측면과 켄틸리버 하부면 뿐만

었던 게 컸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모든 논쟁

아니라 지붕 부분까지 같은 재료를 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

과 토론이 그렇듯 그 과정이 생산적인 결과로만 이어진다

였고, 지붕에 사용하기 쉽지 않은 목재는 자연스럽게 배제가

고 하면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헌정 프로젝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지붕에 사용할 수 있게 디테

트가 그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헌

일만 잘 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아버지 생각은 한국 환경에

정에서 기능과 개념을 동시에 만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

서는 힘들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지

자지간에 박터지게 싸우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

붕과 입면에 함께 쓸 수 있는 재료를 찾게 되었고, 징크가

나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가장 즐거웠던 순간이 완공됐을 때

경사진 매스와 줄눈을 잘 표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공사 기간 중에

니다. 제 개인적인 취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메탈을 쓸 때에

아버지와 함께 온갖 종류의 자재를 보며 결정하고 다닐 때가

는 어두운 색이 좀 더 따뜻하고 무게감을 준다고 생각합니

제일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외국에서 주로 활

다. 수헌정의 재료 계획의 경우, 외부는 메탈을 써서 어둡

동하다 보니 공사 기간 중에 자주 나와보지는 못했는데, 언젠

고 현대적인 느낌을 살리고자 했다면, 내부는 그 반대로 가

가 한번 3, 4주 가량 머물면서 그동안 아버지와 많은 걸 함께

고 싶었습니다. 내부는 비교적 밝고, 목재로 인해 따뜻한

고민하고 결정하던 때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애초 계획에는 천정도 목재로 마감 하는 것이었는데, 간접 조명으로만 실내를 조명할 때에 충

진행 | 정귀원

분한 조도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아 페인트 마감으로 바꾸었

* 이 글은 임창복 교수와의 인터뷰와 임동우 소장과의 서면

습니다. 대신 조명을 따뜻한 색깔을 쓰면서 페인트도 약간

인터뷰를 정리, 편집했음을 밝힙니다.

의 아이보리 칼라를 섞어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69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X5

X3

X4

X2

X1

EL+103.83

12900 1900

4350

3650

3000

EL+99.91 EL+99.83 EL+99.87

Bathroom EL+99.86

Master Bedroom Study Room Terrace

Library

Y2

1200

Y1

1079

Kitchen/Bar

Family Room 7200

Y3

1000

Y4

5000

FL+550

Bathroom

DN

EL+99.34

EL+95.43 EL+98.62 DN

EL+98.83

EL+95.43

배치도

X1

X3

X2

X5

X4

X1

X3

X2

12900 900

3000

3650

4350

1900

1500

3860

7

8

OPEN

2F

2560

1200

7700

5000

7200

1500

UP

6

Y2

1900

1280

Y3

4350

DN

X5

X4

12900

3650

3000

1000

Y4

900

Y1

OPEN

1F

250 200

2층 평면도

GL

1

서측 입면도

X1

X3

X2

X5

X5

X4

X3

X4

1900

1500

1500

2.응접실

1200

5

3.테라스

Y1

Y2

1.거실 4

UP

6.서재 7.침실

1층 평면도

70

3650

X1 3000

900

2F

1F GL

4.현관 5.주방

N

4350

3860 7700

3

5000

2

1900

1280

UP

1 7200

4350

2560

Y3

3650

DN

1000

Y4

3000

X2

12900

12900 900

8.발코니

동측 입면도


Wide Work | 와이드 워크

X1

X3

X2

X5

X4

12900 900

3000

3650

4350

1900

4

1280

1

3

2

450

2560

7700

1500

3300

3860

2950

단면도3

X1

X3

X2

X5

X4

12900 900

3000

3650

4350

1900

2950

1500

3300

3860

4

3

5

2

450

2560

7700

1280

1

단면도2

X5

X3

X4

X2

X1

12900 1500

1900

4350

3650

3000

900

2950

1

1280 450

2560

7700

3860

3300

2

1.서재 2.테라스 3.거실 4.침실 5.응접실

단면도1

71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와이드 WORK

연결된 집 Linked Houses 김원진 Kim Wonjin 이미지내러티브웍스 + YKH

사진 김용관

WORK2

설계, 감리 김원진

위치

강원도 인제군 북면

시공

이인시각

용도

연수원 게스트 하우스

구조

터구조

대지 면적

1,768㎡

기계

삼영MEC

건축 면적

527㎡

전기

한양전력

연면적

499㎡

조경 시공

뜰과숲

건폐율

29.81%

용적률

22.23%

규모

지상1층, 지하1층

구조

철근 콘크리트조

마감

마천석, 와편 쌓기, 자연석 쌓기

설계 기간

2013.06-2013.08

공사 기간

2013.10-2014.07

김원진 세종대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매스스터디스를 거쳐 YKH디자인랩의 디렉터로 활동 후 ‘이미지 내러티브 웍스’를 설립했다. ‘IMAGE NARRATIVE WORKS’는 건축의 형식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모든 작업을 의미하며,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해 시대적 가치에 다가가기를 희망한다.

72

집은 연수원이 위치한 뒷산을 배경으로 앉았다.


Wide Work | 와이드 워크

이 집은 한 개 집이면서 때로는 네 개의 집이다. 매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연결된 단위 공간과 내·외부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관계 그리고 공간의 중첩을 통한 경험의 조합으로 인식되는 공간이다.

73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개별화된 전체 어느날 한 기업가가 노년을 보내기 위한 집을 의뢰해 왔다. 조건은 뒷산을 배경으로 전면에 오미자 밭과 내설악 매봉 산 자락의 풍경이 바라보이는 대지 위에 자녀 세대가 모일 수 있는 공간과 근처 기업 연수원과 연계된 기능, 이를테면 임원 연수원이나 게스트하우스로 사용 가능한 공간을 포 함하는 것이었다. 건축가는 외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이 교외와 도시가 다르다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하였다.

퍼블릭 존에 해당하는 거실 부분은 20m의 끊김 없는 수평창을 가진다. 역보에 의한 구조 계획은 12m의 기둥 없는 주차 공간을 가능하게 하였다.

건축가 도시는 옆집과의 경계가 담이나 건물 그리고 도 로에 의해 자연스럽게 규정되고, 그래서 특별한 의도가 없 이도 앞마당과 같은 외부 공간을 획득하게 된다. 상대적으 로 산과 들로 연속된 교외 지역에서는 그 경계 짓기가 무 의미해지며, 집과 집 사이에 존재하는 외부 공간은 친밀하 게 다가오기보다는 무덤덤한 영역으로 인식된다. 사적인 외부 공간을 원하는 건축주의 요구 사항과 담이 아닌 방식 으로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건물 자체가 안과 밖의 경

와이드 WORK2

계를 이루는 방향으로 제안되었다. ‘ㅁ’자 중정을 감싸는 것은 25평 규모의 4개의 단위 공간마스터존Master Zone/세미 퍼블릭 존Semi-Public Zone/퍼블릭 존 Public Zone/게스트

존Guest Zone-이다. 이중 마스터 존은 뒷산

과 가까운 안쪽에 자리잡고, 퍼블릭 존은 이것과 대칭을 이 룬다. 건물 양끝에서 이 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세미 퍼 블릭 존과 게스트 존이다. 거주자가 생활하는 최소한의 집 에 다른 기능의 건물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긴밀하면서도 때로는 느슨한 관계 맺음이 가능하도록 계 획”된 각 영역을 좀 자세히 들여다 보자. 마스터 존은 침실 과 서재, 다실, 화장실 및 드레스룸 등으로 구성된 한 세트 의 주거 공간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침실에서 감상하는 중 정과 지붕 너머 매봉산의 경치인데, 이는 집주인이 누릴 만 한 특권이겠다. 마스터 존은 서재 문을 통해 세미 퍼블릭 존과 연결된다. 외부 손님들이 드나드는 정식 현관과 도우 미 방은 마스터 존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반면 주방은 단 차이를 둬서 마스터 존보다는 퍼블릭 존의 거실과 더 밀접 하게 연결된다. 거실은 연회나 가족 모임이 가능한 공간인 데, 수평으로 난 긴 창이 시원스럽다. 건축가 퍼블릭 존에 해당하는 단위 공간은 20m의 끊김 없는 수평창에 의해 공간감은 극대화되고, 건물과 마주하 는 매봉산의 사계절 모습을 긴 액자 속의 산수화처럼 담아 낼 것이다. 또한 역보에 의한 구조 계획은 요철 없는 마천

74


Wide Work | 와이드 워크

주차장과 중정을 연결하는 계단.

중정에서 바라보는 세미 퍼블릭존 입면.

전면으로 마스터존의 입면과 대면한다.

높이가 다른 지붕선 너머로 걸쳐진 산세의 모습들을 통해 주변 경관을 각기 다르게 담아낸다.

석 마감의 천장과 12m의 기둥 없는 주차 공간을 가능하게

갤러리(복도)는 ‘연수원 게스트 하우스’ 용도가 지켜야 하

하였다.

는 규정 1.2m복도 폭에서 얻어냈다. 이 공간은 퍼블릭 존 의 거실과는 레벨 차이를 두고 계단으로 연결이 되고, 반

거실의 아래쪽은 주차장이다. 이곳은 계단으로 중정과 연

면 마스터 존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가장 사적인 공간과 외

결되는데, 이를 통해 건물 중앙에서 내부 진입이 가능하다.

부인의 공간을 완전히 분리한 셈이다. 이처럼 각 공간들은

재미있는 것은 단높이가 다른 두 개의 계단이다. 폭이 넓

고저 차이를 갖는 바닥판으로 “긴밀하거나 느슨한” 관계를

고 단높이가 높은 계단은 의도하지 않은 공간을 연출하기

다시 한 번 유지한다.

크린이 되어) 영화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건축가에 따

건축가 방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단위 공간들은

르면, 한여름 계단에 걸터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오미

5.8m × 16m의 동일한 크기로 계획되었으며, 2.5m, 2.6m,

자 밭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꽤 괜찮다고 한다. 폭이 좁

2.7m, 3m에 이르는 각기 다른 천정고를 가지고 있어 담겨

은 계단길을 선택하면 중정에서 갑자기 시야가 확장되는

진 프로그램에 따라 적절한 볼륨을 제공한다.

와이드 WORK2

도 한다. 문을 열면 바람길이 되기도 하고 닫으면 (문이 스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또 하나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단위 공간들이 서로 만나는 건축가 (다양한 공간의 변화는) 중정에 오르는 좁은 계

방식이다. 건축가는 이를 ‘매개 공간’으로 해결하고 있다.

단을 벗어날 때 느끼는 확장된 공간에서도 이루어진다. 또

네 개의 귀퉁이를 잘라 만든 네 개의 매개 공간은 단위 공

한, 중정을 중심으로 높이가 다른 지붕선 너머로 걸쳐진 산

간들의 프로그램에 따라 또 다른 기능을 갖는다. 즉 마스

세의 모습들을 통해서 주변 경관을 각기 다르게 담아낸다.

터 존과 세미 퍼블릭 존 사이의 발코니가 바람을 쐬고 볕 을 쬘 수 있는 서재 앞 휴식 공간이라면, 주방과 거실 사이

중정에서 바라본 각

매스mass의

입면은 공간 기능에 따라

의 매개 공간은 내부의 확장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마스터 존 침실과 시각적 간섭

매개 공간은 벽난로 장작을 다루거나(게스트 존과 거실 사

이 우려되는 거실의 한 부분은 솔리드한 벽면으로 마무리

이), 연수원에서 산길로 이어진 랜딩landing 부분(마스터 존

됐다. 대신 이 부분의 빛은 천창이 담당한다. 게스트 존의

과 게스트 존 사이)이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사각 모서리의

입면은 아랫 부분의 가로로 길게 찢긴 창을 제외하면 평평

네 공간은 높낮이가 서로 다른 바닥판 위에 제안되었는데,

한 면 벽이다.

이로써 <연결된 집>은 전체적으로 바닥판 위에 얹힌 형태 가 되었다.

건축가 객실로 접근하기 위한 공간을 복도가 아닌 갤러 리로 구획하였다. 미술품 설치를 위한 높이2.2m, 폭 11m

건축가 지형을 따라 놓여진 단위 공간들을 하나로 통합

의 떠있는 벽과 뒷산의 풍경을 끌어들이기 위한 천창, 그리

하기 위해서 여러 고저 차이를 갖는 ‘분절된 바닥판’이 제안

고 하부로 길게 열린 창이 위치한다.

되었다. 단위 공간들의 개별성과 통합성을 유도하는 매개 공간 즉, 중정과 외부를 감싸는 발코니 그리고 마치 중정을

75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3

2

1

4

중정에서 바라본 각 매스(mass)의 입면은 공간 기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3

2

4

1

1.master zone 2.semi-public zone 3.public zone 4.guest zone 0

다이아그램

배치도

4

76

1

2

3

0

2.5

5.0

10m

2.5

5.0

10m


3

0

2.5

5.0

10m

Wide Work | 와이드 워크

7

1.거실 2.주방 3.다용도실 4.현관 5.침실 6.화장실 7.라이브러리 8.다실 9.드레스룸 10.갤러리 11.중정 12.테라스

12

9

12

6

5

8

5

5

6

6

11

4

10

3

10

5 6

2

5 1

12

6

3 1

0

2.5

5.0

4

1.주차장 2.기계/전기실 3.거실 4.다실 5.드레스룸 6.중정 7.PIT

5

7

2

1.주차장 2.거실 3.침실 4.중정 5.PIT

10m

12 0

2.5

5.0

10m

3

2

4 5

1층 평면도

1

1.현관 2.갤러리 3.화장실 4.중정 5.PIT

4 1.기계/전기실 2.중정 3.주차장 4.PIT

4 2

1

1 4 5

13

0

2.5

5.0

4

0

2.5

5.0

3

5

6

1

10m

2 6

0

2.5

5.0

10m

단면도 12

9

6

5

8

5 4

5

7

1 지하 1층 평면도2

6

1.기계실 2.주방 3.갤러리 4.화장실 5.중정 6.PIT

10m

4

6

3

7

3

2

3

12

2 5

5 9 11

12 7

103

3

5

8

4

10

5

11

4

10

3

12

6 6 5

2

5 1

6

6

2

5

6

5 10

1

12

5 12 6

2

5 1

1

12

12

3

2

4 5

5

정면도

6

배면도

좌측면도

2

5

3

4

우측면도

6

1

0

2.5

5.0

10m

입면 전개도

6

3 1

4

5

7

2

77 6

3 1

2

4 7

5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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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의 수평창은 건물과 마주하는 매봉산의 사계절 모습을 긴 액자 속의 산수화처럼 담아낸다.


Wide Work | 와이드 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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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이러한 물음들과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나가는 과 정이었다. 문득, 우리 언어에 스며있는 ‘적당한 곳’, ‘애매한 곳’이 그 경 계 어딘가에 있음을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리고 그러한 표현들이 불명확함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그 의미하는 바가 폭넓어,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담을 수 있 는 공간을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나는 그러한 의미들을 공간과 공간 사이의 매개 공간들로 새 롭게 정의되는 곳에서 찾고자 하였다. 부분에서 시작하여 전 거실에서 바라본 매개공간과 주방(세미 퍼블릭존), 그리고 중정. 이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체를 이루어 가는 과정은, 부분들의 개별성으로 그들 사이에 명확한 차이를 만들게 되지만, 그만큼 더욱 더 주변과의 다양 한 관계 맺음을 통하여 풍부한 의미를 갖는 장소를 만들 것이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각기 다른 공간들이 개 별성을 유지하면서도, 매개 공간들에 의해서 다양하게 정의 되고 재편되는 장소를 위한 생각들의 근간이 되었다. 각각의 단위 공간들은 매개 공간을 둠으로써 두 방향이 아 니라 네 방향의 입면을 갖는다. 이로써 코너 창의 계획이 가능해지고, “결과적으로 외부에서는 닫혀진 형식을 지니

와이드 WORK2

면서도 내부에서는 다양한 개방감”을 부여할 수 있게 됐 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은 중정 쪽의 창들을 포함하여 코너 창, 천창 등이 제각기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 낸다. 네 개로 나눈 것과 같은 모서리 주변 공간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내외부 공간을 결합시킨다. 이는 단위 공간과 매

건축가 최소한의 매스를 중첩하는 과정에서 15개의 확

개 공간의 관계들을 통해서 다양한 액티비티activity가 이루

장된 입면과 31개의 창이 계획되었다. … 내부로 열린 창

어지는 플랫폼platform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들을 통해서 중정의 공간을 프레임frame하여 드러내기도 하 고, 하늘로 열린 천창들과 하부의 긴 창을 통해 다양한 공

건축가의 말처럼, 완전히 독립적인 성격의 영역들은 중정

간의 변화를 경험하게 한다.

으로 맞닿아 있고 매개 공간들로 소통된다. 처녀작에서 “개별화된 전체”를 이야기하는 그는, 부분이 모여 전체를

푸르게 옥상녹화된 지붕도 입면의 하나이다. 옥상녹화를

이루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나아가 거실을 중심에 두

하게 된 것은, 연수원이 있는 산에서 내려오며 가장 먼저

고 부차적으로 배치되는 방들이 아니라 각각의 실들, 즉 단

만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지열 냉난방 시스템 도입

위 객체들이 개별성을 찾으면서도 전체가 어떻게 구상되

과 더불어) 에너지 절약의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에 앞

는지에 주의를 기울인다. 여기서 그가 찾은 것은 마당이나

서 “무덤덤하게 읽히기 싫다”는 건축가의 취향이 크게 작

발코니 같은 매개 공간이다.

용했다. 산에서 바라보는 집의 모습은 지붕들이 서로 맞물린, 영락

건축가 아파트와 같이 보편화된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면,

없는 ‘ㅁ’자다. 마치 뜰을 중심으로 대청과 안방, 건넌방이

거실을 중심으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든 실들이 연결

배치되고 정지와 광이 놓이고 전면에 사랑방이 자리잡는

되어 편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가 있는 곳이, 거실과 혹

우리네 뜰집과 닮았다.

은 다른 공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홀로 존재했으면 하는

80

생각이 든다. 어쩌면 개별적이거나 통합적이지도 않는, 그

건축가 나뉘어진 단위 공간의 주변은 중정과 발코니와

사이에 존재하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으로 적절하지

같은 매개 공간들이 결합되어 확장된 영역을 이룬다. 이는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집을 구성하는 공간들이 이러한

한국의 ‘뜰집’을 떠올리게 한다. 뜰집이 처음부터 현재와

모호한 경계에 이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프로젝트는

같이 ‘ㅁ’ 자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


Wide Work | 와이드 워크

단위 공간들은 마당이나 발코니 같은 매개 공간으로 연결된다.

하나 깨어 가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임의적 형태가 반영

물이듯이, 이 집은 최소한의 ‘모서리’ 연결을 통해서 각기

되기를 의도하였고, 외벽을 이루고 있는 와편의 경우 이미

다른 개별성을 갖는 단위 공간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굽는 단계에서부터 색과 모양이 다양하다는 점 그리고 그것

이러한 최소한의 연결은 집을 구성하는 영역을 4개의 단위

들을 쌓을 때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결과물들이 어우러지도

공간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조합하는 방식이었기에 가능

록 계획되었다.

와이드 WORK2

면서 여러 채의 가옥이 하나의 몸채로 결합된 집합의 결과

하였다. 은근하고 천연한 외벽과 지붕 너머 걸린 산. 건축가는 이 건물을 감싸고 있는 것은 와편과 자연석, 짙은 색의 마천석

집에서 이와 같은 장면을 늘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계절

이다. 오래가는 재료, 손맛이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재료가

에 따라 변화하는 주변 풍광들, 세월의 더께만큼 자연스런

선택의 이유였다. 그래서 비록 멀리서 보면 견고한 구조물

멋을 더하는 건물의 표정을 상상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이지만 가까이에서는 인간적인 느낌을 자아내기를 바랐다.

“호모지니어스homogeneous”하다거나 “단조롭다”는 평을 듣

기단부의 자연석 쌓기는 모두 손으로 이루어져 자연스럽고

기도 했다지만, 나지막히 읊조리는 음악이 선호되기도 하

예측불가능한 형태를 만들어 낸다. 와편은 인사동 덕원갤러

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만족하고 살아가는 방식으로 기승

리의 와편을 참조삼았다. 그러나 정형화된 품질이 예전만

전결을 만들낼 수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 족하다.

못해 폐기와를 찾아보기도 했다. 마침 해체되는 도심지 사 찰에서 기와를 구하긴 했지만 물량이 부족하고 단면 색깔이

건축가 결과적으로 이 집은 한 개 집이면서 때로는 네 개

맞지 않아 결국 지금의 와편을 쓰게 되었다. 다행히 이 역시

의 집이다. 매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연결된 단위

수작업 쌓기여서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공간과 내·외부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관계 그리고 공간 의 중첩을 통한 경험의 조합으로 인식되는 공간이다. 부분

건축가 재료의 사용은 이 집을 구성하고 있는 균질하면서

이 모여서 전체를 구성하고 각각의 구성 요소가 그 개별성

도 통제된 형식과는 다르게 제안되었다. 자연석 쌓기로 이

을 유지하면서 그들 사이에 다양한 관계들을 확보하는 것

루어진 건물의 기단부는 수작업으로 이루어져 큰 돌을 하나

이 이 집의 주안점이다. 글 | 김원진, 정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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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와이드 WORK

펼친집 Spreading House 정수진 Jung Sujin 설계팀

정우영, 박준희

위치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 사곡리 209-1

사진 남궁선 본지 전속사진가

지역 지구 자연녹지지역 용도

단독주택

규모

지상 1층, 지하 1층

WORK3

대지 면적 1,656 m² 건물 높이 5.95 m 건축 면적 225.40 m² 연면적

326.68 m²

건폐율

13.61%

용적률

13.56%

주차 대수 3대 구조

철근 콘크리트조

재료

외부-백색 사암, 송판 노출 콘크리트

내부-석고보드 위 VP, 타일, 무늬목

감리

건축 에스아이

건축주

김대후

자료 제공 건축 에스아이

정수진 영남대학교, 홍익대 대학원, 파리-벨빌 건축대학교(DPLG/프랑스 건축 사)에서 수학했다. 현재 건축 에스아이(Architecture SIE-Simple, Identity, Emotion)의 대표이며, 경희대학교 건축학과의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하늘집, 노란돌집, 붉은벽돌집, 각설탕, 별똥집, 횡성공방 등의 주택경기도 건축상 은상을 비롯한 다수의 수상-과 미래나야 사옥, 해인사 무릉헌, 의왕 선물 등 기타 건축 작업이 있으며,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 아트페어’, ‘DDP-한강 건축 상상전’ 등의 전시 작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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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Work | 와이드 워크

북동측 전경. 바닷가 언덕 위에 세 개의 하얀 매스가 자리를 잡았다.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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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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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은 북측을 돌아 동쪽 입면에 나 있고, 서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진다.


Wide Work | 와이드 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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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바닷가 언덕 위의 ‘작은 집’ 서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에 하얀 집이 가파른 경사

해 받기도 한다. 이에 대해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를 타고 앉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어촌 마을이 있지만

“대부분의 건축주들은 시원하게 뚫린 것을 좋아합니다. 좋

주변은 온통 산이다. 언뜻 보기에도 여성이 혼자사는 집으

은 경치라도 앞에 있으면 더욱 그래요. 저와 가장 많이 부딪

로는 입지가 그리 녹록하지 않아 보인다.

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좋은 경치일수록 아껴야 한

건축가는 500여 평의 경사 대지 위에 가장 평평하고 전망

다고 생각합니다. <펼친집>도 침실의 창을 두고 설왕설래

좋은 곳을 찾아내어 세 개의 매스mass로 쪼개진 집을 펼쳐

했었죠. 건축주는 바다로 열려야 한다고 했지만, 산이 사람

놓았다. 말 그대로 <펼친집>이다. 이는 경사가 가파르니 절

의 심리적 안정에 좀더 도움된다는 말로 설득하였어요. 물

토하지 않는 이상 한 동에 배치하기 어렵고, 독신 여성의 집

론 마스터룸에서 바다를 전혀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

이니 방범이나 관리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

요. 어느 부분에서는 바다를, 어느 부분에서는 어촌 마을의

로 건축주는 때때로 사용하지 않는 구역을 차단시켜 에너

정경을…. 적절한 위치에서 작은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습

지 절약의 효과까지 얻게 되었다.

니다. 이동하면서 브릿지의 긴 창을 통해 받아들이는 바깥

세 개의 매스는 크게 세 개의 기능, 즉 거실/다이닝룸dinning

풍경도 꽤 재미있는 그림이고요. 제가 설계한 집이 다소 폐

room

- 마스터룸master room –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로 나뉘

쇄적이라고 하는데, 겉에서 보기에만 폐쇄적일 뿐이지 실

어진다. 거실/다이닝룸 존은 이 집의 중심이다. 각각 서쪽

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이 집의 주인도 직접 살아

바다(다이닝룸)와 남쪽 산(거실) 쪽으로 데크deck를 두어

보니 의외로 파도 소리가 과하게 들린다는 걸 알았다며, 지

최대한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이 중심 존의 서쪽과 남쪽 한

금은 나의 제안에 만족해 합니다.”

귀퉁이에 최소한의 브릿지로 연결된 것이 마스터룸과 게스

이 집의 외관은 “비싼 재료를 망치느니 싼 재료를 제대로

트하우스이다. 이중 서쪽의 마스터룸은 바다를 향하고 있

공사하여 돋보이게 하는 게 낫다”는 건축가의 소신에 따라

지만 그렇다고 바다의 전망을 한껏 끌어들이진 않는다. 복

백색 사암을 세 번이나 뜯고 붙이기를 반복하여 나쁘지 않

도 끝과 욕실 정도에 아주 작은 창이 달렸을 뿐, 침실의 외

게 시공이 됐다. 이 뿐만 아니라 내외벽 단열 공사를 다시

부 전망은 오히려 산쪽으로 나 있다. 남쪽의 게스트하우스

하는 등, 공사에 최선을 다하느라 실제로 집이 완성되기까

도 최소한의 창을 갖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는 건물

지는 2년이 걸렸다. 시공 과정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건축

의 남측면이 지형에 묻히다보니 처음부터 조건이 좋지 않

가의 작업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조경이 계획대로

았다. 두 개의 방이 공유하는 작은 데크는 이러한 조건 속에

실현되지 않아 아쉬움은 남지만, 전반적으로 건축가나 건

서 제안되었다.

축주의 만족도는 높은 편. 그에게 집을 설계한다는 것은 어

게스트하우스와 거실/다이닝룸 사이에는 이 집의 주출입구

떤 의미일까.

가 있다. 건축가의 다른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결코 실내를

“집은 사는 이가 훌러덩 벗고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현관은 길고 좁을 뿐더러

그러니까 나의 컨셉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사용하기 편하고

막다른 벽과 마주한다. 벽 앞에서 게스트하우스로 통하는

따뜻하고 시원하고 견고해야 합니다. 어느 부분이든지 하

좌측 계단 대신 벽을 돌아 나서면 거실을 만나게 되지만, 여

자가 적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 모든 것을 우선적으

기서도 시야가 죄다 동시에 트이지는 않는다. 다만 동선과

로 충족시키면서 나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완성도를 염두

시선을 유도하는 작은 틈이 있을 뿐. “사람의 움직임과 그에

에 두고 각 부분마다 나의 건축 어휘를 어떻게 집어넣을 것

따라 변화하는 공간”은 건축가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하다.

인가를 고민하는 거죠.”

거실과 나란히 놓인

다이닝룸/홈바home bar는

이 집의 압권

이다. 게스트하우스와 함께 지역 사회 활동이 활발한 건축 주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춤한 공간으로, 데크의 유리문을 열어 젖히면 눈부신 바다의 풍광을 가진 넉넉한 연회장이 된다.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액자같은 최소한의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게 하는 방법” 때문에 <펼친집>은 종종 감옥으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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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귀원(본지 편집장)


Wide Work | 와이드 워크

남쪽 거실 앞 데크.

거실 앞 데크에서 바라본 게스트하우스.

거실과 침실은 유리 브릿지로 연결된다.

바다로 열린 다이닝룸・홈바 전면 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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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CRITIQUE

임성훈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명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건축의 여러 이야기를 이어가는

창호지 문

자유로운 비평에 관심이 있다.

임성훈

<펼친집>에는 무언가 강렬한 느낌이 있다. 건축주

라르는 그렇게 내밀한 것이 땅이라 했다. 먹고 살

도 벽에 그림을 걸려다 걸지 못하고 마지못해 바닥

아갈 양식을 주는 땅이 풍요로운 것은, 그 속에 무

에 내려둔 것을 보면, 그 느낌은 건축가들이나 아

엇이 더 있다는 상상 때문이다. 땅 속에서 죽음의

는 현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집을 대하는 사람이

세계를 상상하는 것도, 지하실이 무서운 것도 내밀

항상 느끼게 되는 감각의 문제다. 하지만 현학적이

함 때문이다. 그 땅의 내밀함이 오랜 세월 건축의

되더라도 그 느낌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큰 상상력이었다.

느꼈다. 그 느낌이라는 것은 우리 건축에 대한 문 제 제기이기 때문이다. 무겁고 덩어리진 장난감이 좋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다치지 않게 가

볍게 만든 것이나, 속이 빈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 남감은 좋지 않다. 부수어 보려는 욕망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어촌 마을이 있지만 주변은 온통 산이다.

뜯어보려는 마음이 일지 않는다면 좋은 장남감이 아니다. 바슐라르는 장남감이라면 “내밀한 상상력” 을 일깨워야 한다고 말했다.주1

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허깨비는 그 속이 궁금하지 않고, 그러면 상상력이

휴식의 몽상』,

일어날 기회가 사라진다. 건축이 켜켜 만들어지는

정영란 옮김, 문학동네,

것도 좋지만, 꽉 차 있는 것도 좋다. 건축은 원래 안 이 비어야 하지만, 그런 육중한 덩어리가 아니라도 내밀한 느낌은 곳곳에 있다. 한옥은 켜켜 만들어지 지만 내밀한 지붕이 있고 기둥이 있다. 내밀한 것은 숨어서 우리를 궁금하게 하지만, 그렇 다고 부정적이거나 음성적인 것은 아니다. 숨고 싶 은 마음이 일어서 내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속이 꽉 차 있지만 무언가 더 담을 수 있어서 태어나는 것이 내밀성이다. 분석을 한다고 잘라 보아도 얻는 것이 없고, 감추어 만들려 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 내밀 성이다. 감추면 ‘가면假面’ 밖에 남지 않는다. 순수하 고 굳건하게 덩어리져 있어야만 내밀성이 보인다. 그래서 내밀성에는 아이 같은 마음밖에 없다. 속이 꽉 차 있는 것은 우리를 궁금하게 한다. 바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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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2002, 18-19면.

북서측 전경. 백색 사암의 하얀 집


Wide Work | 와이드 워크

주방에서 바라본 다이닝룸.

다이닝룸에서 바라본 데크

어촌 마을의 전경을 바라보는 창

건축은 속이 보이지 않고, 두께를 가지면서 신비스

집>의 박공牔栱도 결국에는 징크zinc로 바꾸었지만,

러움을 더한다. 두께를 가질 수 없다면 빌려올 수

처음에는 벽과 똑같이 벽돌로 계획했다고 한다. 벽

그 열등함을 주장해 받아들이게

도 있다. 그렇게 비어있는 곳에 내밀성을 끌어오는

과 지붕을 같은 재료로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해서, 공동체가 가져야 하는

것이 ‘차경借景’이다. 한옥에서는 창窓에 창틀이나

덩어리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면이 하

담당하게 만든다고 한다.

문틀을 켜켜 쌓거나, 살짝 보이는 처마를 더하거나,

나씩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묘한 것은 열등한 자들이 자신들

아니면 툇마루 조각을 걸쳐서 비어있는 곳을 덩어

주2.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우월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에게

각각의 기능을 그들이 순순히

의 평등을 말할 때다. 우리

리지게 만드는데,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내밀성을

오늘 우리의 건축은 가면을 쓰고서 “평등한 자들의

가치를 설명해 우월함을 증명하

가져와 그곳을 채운다. 차경은 시각을 빌리는 것이

공동체”에 속하려고 한다.주2 건축은 우월한 자들의

고 평등을 실현하려는데, 그게

지만, 흐트러짐 없이 내밀성을 재단裁斷하여 담는

것인데, 평등의 이미지를 ‘가면’처럼 쓰고 있다. 그

된다. “그러나 열등한 자들이

것이 중요하다.

아래에도 겹겹이 가면이 있다. 건물의 이쪽과 저쪽

우화를 그들 나름대로 손질해서

두께가 없어 내밀성을 가지지 못하고 빌려오지도

열등한 자들은 스스로의 기능과

열등함을 받아들이는 행동이

스스로 자신들의 평등을 말하고

적 요소인데, 외부와의 연계라는 맥락으로 반전된

평등한 자는 평등한 이미지를

상상력을 없앤다.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다들 ‘평

다. 내부는 아무것도 없어서 균일한데, 제대로 기능

지닌 자다. 자신의 유용성을 내세

면平面’을

그려 붙여 보았

하고 있는 양 위계적인 구성으로 꾸며진다. 비非 기

은 비유사성을, 복종해야 하는

을 것이다. 기능에 따라 평면을 구성한 다음, 그 평

능적 균일함을 평등의 가면으로 덮어서 여러 목적

사지들의 역할을 유지하는 것이

면에 따르지 않는 입면을 그려서 붙여 보았을 것이

에 부합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입면은 허술한 내부

다. 사지들, 기능들, 가치들을

다. 그때 건축은 하나씩 떨어져나가 ‘면’이 되고, 텅

와 뒷면을 숨겨 건축비를 줄이면서도 유용한 건물

유사하지 않은 것을 유사한

빈 장남감이 되고 만다. 건축가 정수진의 <하늘집>

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사

것으로 전환할 수 없다.”(자크

입구에서 보이는 두께는 그런 면과는 다르다.

람들은 아파트 내장재가 무늬목을 덮어쓰고 있는지

리에서), 양창렬 옮김, 개정판, 길,

“나는 입면을 그리지 않는다.” 건축가 정수진의 말

시트를 덮고 있는지 구별하고 좋다 나쁘다 말하는

2013.) 랑시에르의 비판은 기능과

을 들으며 <펼친집>이 아니라 그의 건축에 대해 글

데, 건물은 그 이상의 가면을 쓴다.

유사성의 관계로 축소해도

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해졌다. 그에게 ‘면’은

나쁘게 쓰이는 경우가 많아도 가면 자체가 나쁜 것

하다. 우리 건축의 숨겨진 의도와

없다. 모든 것은 덩어리다. 그래서 지붕도 벽과 똑

은 아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너무 강력

기능이 왜 가면 위로 나타나지

같이 만들려고 한다. <미래나야 사옥>의 경사 벽은

하기 때문에 가면은 대하기가 어렵다. 건축가가 원

어렵게 시공해서 수직의 벽을 연장했다. <붉은벽돌

하지 않아도 스스로 태어나서 일을 벌이고, 떨치려

우는 것, 기능들의 게임을 하는 것

어떤 식으로 재분배하더라도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

혹은 관계를 역전해도 아직 강력

않는지 알려 준다.

못하면서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는

으로 출입할 수 있는 것은 건축주에게 유용한 기능

건축의

자 할 때, 딜레마는 회귀한다….

만들고 그에

‘입면立面’을

‘면面’은

89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고 해도 잘 사라지지 않는 것이 가면이다. 그런데

하나의 시점으로 나아가게 하면서 “산책로”를 만든

덩어리를 만들면 가면은 그 속에 숨어 잠든다. 그

다. 하지만 “산책로”에서 덩어리는 무엇일까? 안쪽

래서 덩어리를 만들려고 힘을 쏟는 것은 큰 비판이

창을 만들고, 길을 다듬는 역할에 만족할 뿐인가?

된다.

그렇게나 힘들게 덩어리를 만들어서 건축적 공간 의 바탕을 만들고, 중요한 역할을 창에 넘겨준다면

건축은 균일한 덩어리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복

아쉽지 않은가?

합적인 것으로 덩어리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지만,

나는 우선 덩어리가 시점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해야

완전히 다른 것을 서로 이어야 하는 때도 있다. 건

겠다. 내밀성에는 눈이 없다. 이곳을 보아도 저곳을

축가 정수진의 집에서는 덩어리와 덩어리에 난 구

보아도 안보여서 우리를 꿈꾸게 하는 게 내밀성인

멍에서 그런 일이 있다. 그 속에 문제 제기가 있고

데, 어디 시점이 있을까? 땅에 시점이 있는가? 시

한 가지 더 큰 비판이 있다.

점은 땅 위에 놓인 것이지, 땅 속에 있는 것은 아니

집에는 사람도 빛도 바람도 들어야 하니까 구멍을

다. 땅을 파서 그 속에 시점을 만들면 내밀성에 묻

내야 한다. ‘창’이 필요하다. 건축가 정수진은 창을

힌다. 하지만 내밀성을 생각하지 않고 시점을 만들

겹쳐서 깊이도 만들고, 다양한 시점을 실험하기도

면 재미가 없다. 차경이 경이롭다면 이 딜레마를

한다. 그걸 “건축적 산책로”라고 말한다.주3 거기서

가장 깊은 곳에서 풀어냈기 때문이다.

창은 덩어리에 뚫리는 구멍이다. 하지만 나는 덩어

건축가 정수진의 집 속에는 덩어리의 내밀성 위에

리와 창이 전혀 다르게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만들어진 시각이 있다. 창에 테두리가 있고 그 창

처음 건축가 정수진에게 창은 내던져진 것이었다.

이 안쪽 창의 테두리와 공모하기에 나타나는, 내밀

덩어리를 면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일

성과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창은 시점을 만들고,

부러 집의 안쪽에서 필요한 부분만 창을 냈다. 크

시점은 산책로와 함께 ‘깊이’를 만든다. 창이 덩어

기와 위치도 그에 맞추어 조절했다고 한다. 그러니

리와 화해할 수도 있겠지만, 건축가 정수진의 집에

밖에서는 어색한 부분도 보인다. 밖에서 살피지 않

서 덩어리와 창은 서로 싸운다. 그게 창이 어색한

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창이 덩어리에 붙으면 입

이유다. 하지만 덩어리와 창이 서로 상대편에 서서

면이 떨어져 나올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 그 둘이

요상한 공모를 하기도 한다. 이 묘한 관계가 더 큰

이어지는 것조차 막으려고 한다.

하나의 비판이 된다.

그런데 덩어리니까 창을 뚫으면 그 반대편에도 구

깊이는 내밀성과 다르다. 깊이는 시각에서 태어난

멍이 난다. 바깥쪽으로 창을 내면 안쪽으로도 보이

다. 태생이 다르다. 사람들이 ‘세잔Paul Cézanne은 깊

지 않는 창이 뚫린다. 그러면서 의도한 시점대로,

이를 찾으려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건축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지점에 따라 창들이 이야기

가 정수진이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과

를 한다. 안쪽의 창을 따라 걸어가면 갑자기 펼쳐

플로쉬Bernard Plossu의 사진 작품에서 보았다고 말하

졌다 줄어들었다 하는데, 덩어리는 그 강약을 이어

는 것처럼, 깊이는 눈의 마술이다. 사진이나 회화에

주고 끊어내며

고수鼓手가

된다. 그 사이에 건축가

서는 가끔 깊이가 덩어리를 만들고 내밀성을 이루

는 여러 시점을 한 번에 놓아둔다거나, 자연스럽게

는 때도 있다. 건축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건

거실. 창호지 문을 통해 데크와 연결된다.

게스트하우스 내부. 왼쪽 계단을 통해 현관 홀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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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와이드AR>, 2009년 1・2월.

다이닝룸에서 보는 거실과 주방


Wide Work | 와이드 워크

지하 1층 평면도

1.거실 2.주방 3.다이닝룸 4.홈바 5.마스터룸 6.룸 7.패밀리룸 8.옥실 9.드레스룸 10.주차장 11.현관 12.데크 13.창고

1층 평면도

단면도 2

단면도 1

91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축이 2차원을 추종해서 다시 돌아 나올 필요는 없

담지 못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다. 사진을 벽에 붙이기도 했던 에르조와 드 뫼롱 Herzog & de Meuron 마저도

“건축은 건축이고 예술은

예술”이라고 했다.주4

아직 건축가 정수진의 집에서 온전한 답이 나타나 지는 않았다. 온전한 답을 찾을 때도 아니다. 건축

와이드 WORK3

가가 깊이와 내밀성을 이어 붙여 또 다른 내밀성 덩어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태어나는 마술이다.

의 한옥을 보여줄지, 아니면 지금처럼 대립을 놔두

마치 마술과 같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온전히 드

고서 그 강약을 조절하여 공간을 만들어 낼지, 혹

러나지 않아도 깊이는 시각적이라 매체로도 알 수

은 내밀성의 중심을 숨겨진 창으로 이끌면서 깊이

는 있지만, 내밀성은 시각에서 비켜나 있어 직접

속에 내밀성을 담아 또 다른 근대성을 보여줄지 알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깊이와 내밀성 그 둘의

수는 없다. 깊이와 내밀성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무

이야기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슨 이야기를 더 하게 될지 기대된다. 다만 깊이와

형태를 만드는 방법으로 ‘구축構築’과 ‘절석切石’이

내밀성 어느 한쪽으로 너무 기울지 말고 천천히 가

있다. 구축은 쌓는 것이고 절석은 파내는 것이다.

기를 바랄 뿐이다.

옛날의 통나무 집과 동굴 집을 상징한다. 굳이 구

건축가 정수진의 집에는 나무로 만들어 창호지를

분할 필요가 없는 것을 합리적이라며 구분해 놓았

바른 덧문이 있다. 바깥으로 난 큰 창에는 어김없

는데, 구축이 내밀성을 버리면서 그 구분이 더 뚜

이 달려 있다. 깊이와 내밀성의 격한 대립 속에 있

렷해지고 필요해졌다. 그래서 건축하는 사람들은

어서, 그 문이 열리고 닫히면 내밀성의 이야기가

이런 구분을 따른다. 구축과 절석을 창과 덩어리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창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

고 하자.

는다. 최근에 새로 지은 집의 창호지 문은 달라졌

약간 어색해 보이는 창이 재미있는 것은, 덩어리가

다는데, 그 창호지 문은 깊이와 내밀성의 이야기를

절석에 있고 창은 구축에 자리하면서 제각각 깊이

또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된다.

주4. 한노 라우테르베르크, 『나는 건축가다: 20인의 건축 거장, 삶과 건축을 말하다』, 김현우 옮김, 서울:현암사, 2010, 153면.

와 내밀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둘 다 나름의 공 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창은 테두리를 가지는 데, 덩어리의 구멍을 관통하면서 창을 더 만들며 테두리를 이어간다. 그 자체가 공간을 이룬다. 그런 데 그 둘이 약간 어긋나고, 방향이 틀어지고, 덩어 리 사이의 빈 부분이 끼어들면서 구축이 살짝 깨진 다. 거기서 덩어리의 내밀성이 빛과 함께 등장한다. 나는 <펼친집>의 산책로를 걷다가 그 거실에서 깊 이와 내밀성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서구 적인 창과 우리의 오래된 내밀성이 함께 있는 듯이 보였다. 서로 질시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그럭저럭 잘 지내는 듯 보이기도 해서 흥이 났다. 구축은 건축을 상징하고 절석은 땅을 상징하기 때

침실 브릿지에서 바라본 거실

액자 같은 최소한의 창을 통해 조망되는 바깥 풍경

문에 덩어리와 창의 관계는 다시 땅과 건축의 관계 를 이끌어 낸다. 여기 차경을 넣어본다면, 차경의 깊이와 내밀성을 생각해 본다면, 한옥에서도 땅과 건축이 덩어리와 창의 문제로 다시 나타난다고 생 각하게 된다. 비약은 있지만, 나는 여기서 오늘 건 축의 창과 한옥의 창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하게 되 었다. 우리의 건축 담론이 품어가야 하는 하나의 주제가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땅과 마당과 집의 이야기는 집 안에도 있고 벽에도 붙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우리가 집을 만들면서 온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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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의 천창


Wide Work | 와이드 워크

작은 틈을 통해 스치는 장면들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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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와이드 REPORT 1

매스스터디스 건축하기 전|후 조민석 개인전

2014. 11. 20-2015. 2. 1 삼성미술관 플라토 사진 제공 삼성미술관 플라토

REPORT1

건축가 조민석의 첫 개인전이 지난해 11월 20일

했다. 이중에는 실제 건축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을 시작으로 오는 2월 1일까지 삼성미술관 플라

아이디어로 끝난 프로젝트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토에서 열린다. 2003년부터 매스스터디스의 대표

작가의 상상력에서만 존재하는 다양한 아이디어

로서 본인의 건축 세계를 차근히 구축해 온 그는

의 결과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건물의 완성 후를

주문생산이라는 건축 메커니즘 안에서 비판적이

보여 주는 ‘After이후의 세계’ 전시장에서는 무수한

면서도 상황주도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독창적 건

타협과 충돌 끝에 현실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건

축을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체계적인 건축 디자

축물의 사진과 동영상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인 사업가임과 동시에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섬세

건물이 완성되고 사람들에게 사용되면서 변화하

한 건축가의 모습을 함께 보여 주고 있는 셈. 그는

는 건축 이후의 모습까지 전시의 한 모습으로 담

2014년에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 커미셔

아냈다. 또 매스스터디스 프로젝트들이 소개된 다

너로 참여하여 황금사자상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

양한 매체들이 원형 지도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

로서는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가 꽤 시의적절한

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전시가 건축가 조민석의 이번 전시는 그가 매스스터디스 설립 후 12년간

전시임을 보여 주는 것은 원형 임시 구조물 ‘링돔’

진행한 69개의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

이다. 750개의 훌라후프를 엮어서 만든 지름 9m

는 자리이다. 이를 위해 사진 및 동영상 자료 뿐

의 이 구조물은 글라스 파빌리온 안에 설치되었

만 아니라 건축가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살펴볼

다. 덕분에 전시 기간 동안 글라스 파빌리온은 시

수 있는 리서치, 드로잉, 도면, 모형, 자재 등 283

민들의 문화 휴식 공간으로 무료로 개방되며, 건

점의 자료가 3개의 공간에 나뉘어 전시됐다. 특히

축가와의 대화, 워크숍 등 다채로운 행사를 통해

주요 작품으로 분류되는 픽셀하우스(2003), 링돔

관람객과 적극적인 소통을 도모하고 있다.

(2007), 부티크 모나코(2008), 상하이 엑스포 한 국관(2010), 다음 스페이스닷원(2011), 오설록:

조민석은 건축을 바둑과 비교하며, 바둑판의 규칙

티스톤, 이니스프리(2012), 사우스케이프:클럽하

적인 선 안에서 기사가 자유롭고 창의적인 방법

우스, 선라이즈&선셋(2013) 등이 건축 완성 이

으로 바둑을 두듯이 건축가 역시 현실 인식과 고

전Before과 이후After의 단계로 구분된 흑백 공간에

도의 지식, 그리고 몇 수 후를 내다볼 줄 아는 통

전시 구성되었다.

찰력을 갖춰야만 자신만의 건축관을 정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의 건축관인

건축물 완성 이전을 보여 주는 ‘Before이전의 세계’

‘체계적 불균질성Systematic Heterogeneity’을 확인해 보

전시장은 건축가의 창작이 실제로 이뤄지는 현실

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다.

속의 공간을 재현했다. 매스스터디스 사무실을 그

자료 제공 | 삼성미술관 플라토

대로 옮겨온 듯한 공간에는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해 왔던 과정의 결과물들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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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Report | 와이드 리포트

After Room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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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건축의 재현 Representation of Architecture으로서의 ‘건축 전시’ 이정희

2014년은 유독 건축소식-이를테면 세계적 건축가의 동대

여기서 특히 중요하게 봐야 하는 부분은, 이 시도들은 결국

문디자인플라자 DDP오픈,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 황

대중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변천사란 것이다. 대중은 더 이

금사자상 수상 등-이 언론에 많이 소개된 한 해였다. 그리

상 관객만이 아니라 하나의 미술 작품을 이루는 중요 요소

고 마치 그에 편승이라도 하듯 많은 ‘건축’ 전시 소식이 있

가 되었다. 이를 위해 작가들은 대중이 존재하는 장소의 특

었다.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건축의 존재

성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고민하고 접근을 시도한다. 예술

론적 입장에서는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건축의

작품에서 피상적 배경으로 다뤄지던 장소성은 이제 더 이

여러 재현 방법 중 하나로 전시를 이야기해 보고, 최근 인상

상 뒷배경이 아닌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됐다.

깊게 본 전시 ‘조민선 건축전’을 사례로 들어보고자 한다.

이렇듯 미술사적 ‘공공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부

와이드 REPORT1

분이 바로 장소성Site-Specificity과 공공성Publicit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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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건축’ 전시가 열리는 이유

물론 늘 다뤄지던 요소지만 한정된 미술, 즉 페인팅, 조각

미술관이 건축을 하나의 아이템으로 다루게 된 점에 대해

등에서 소재로만 표현되어 오다가 공공미술의 장르가 발전

두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면서 더욱 중요한 주제로 강조되고 있다.(이런 시도로 미

첫 번째는 퍼블리 아트의 광의로서의 확장이다.

술계에서 공간을 차지하고 공간을 이야기하는 현대미술이

즉 공공미술의 시간적 발전 흐름에서 나타나는 미술관의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 영역 수용이다. 현대미술사에서 퍼블릭 아트는 20세

건축에서는 이미 익숙한 특성이라 여기겠지만 현재라는 시

기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특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퍼블

대적 배경에 의해 더 많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릭 아트 또한 미술사의 큰 흐름을 주도한 다양한 미술시도

특성들로 인해 드디어 ‘공공미술’과 ‘건축’이 만난다. 이제

들과 직접적 관계를 갖는데 이는 차후에 다른 기회를 빌리

공공미술에서 ‘건축’은 삶을, 대중을 대변하는 하나의 재료

기로 하겠다).

가 된다. ‘주’ 라는 측면에서 개인의 삶과 직접적 연관이 있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공공미술이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

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맞닿는 공공성

고 있다. 하지만 시간적, 점진적으로 발전된 형태를 한 번에

도 함께 가지는 것이다.

수평적으로 받아들이다보니 시기마다 조금씩 다르게 쓰인

이런 점에서 미술관은 건축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공공미술의 의미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에 미술계에서는

된다. 즉, 건축가라는 아티스트가 ‘건축 작품’을 위해 시작

용어 정리에 따른 시대적 구분을 짓는 시도도 있었다.

단계부터 관객과의 소통을 장소성과 공공성으로 풀면서,

‘퍼블릭 아트’의 초기 태동은 퍼블릭이 강조되어 공공 장소

다시 대중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건축이 공간 예술로 편입

에 있는 아트의 형태를 의미했다. 즉 화이드 월(white wall,

되는 것이다. 이런 관심의 확장으로 ‘건축’이라는 장르가 르

전시장의 흰벽)을 벗어나면 그 어떤 것에도 붙여질 수 있는

네상스 이후 다시 자연스럽게 미술과 함께 회자되기 시작

미술 형태이다.

한 것이라 본다.

퍼블릭 아트 용어에서 ‘퍼블릭’과 ‘아트’ 중 어느 것에 더 힘

두번째 가능성은 건축의 존재론적 생존 방법이다.

을 실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고민이 있었다. 이후

전시의 사전적 의미는 “관람되기 위해 드러내고 보여주는,

‘뉴장르 퍼블릭 아트’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등장하며 관객

관객과 만나기 위해 공개적으로 진열하는 것Exhibiting, showing

과 함께 공공 속에서 공공의 주제를 가지는 장소특성적 퍼

presenting to view, Public display, To meet an audience”

포먼스가 나타났고, 결국 최근에는 공공을 묶는다는 개념

건들–산업혁명, 기계의 발전, 자본주의 등–에 힘입어 소

이 확대되면서 예술에 의해 커뮤니티 형성이 가능하다는

유권을 행사하는 후원자・의뢰인Patron에 의해 유지되던 미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 더 나아가 그 아트의 형태가 늘

술품 제작은 패트론의 확장으로 활기를 띄게 된다. 무엇보

유형적이 않다라는 추상적 개념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다 소수에서 다수의 대중으로 관객이 확대됨으로써 일대

이다. 시대적 사


Wide Report | 와이드 리포트

링돔

이정희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골드스미스 대학 미술대학원을 수료하고 런던대 바틀렛에서 건축을 공부했다.(런던대 바틀렛건축 디자인대학 박사과정 수료, 런던대 바틀렛 환경대학원 건축학 석사) 현재 Karts(한국예술 종합학교) 명동스튜디오 책임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학교, 인하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2015 “산업단지 및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사업” 자문위원, 문화로 장소재생(가제) 출판물 편집 등의 일을 병행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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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REPORT1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일 접촉에서 벗어나 ‘전시회’라는 형식이 등장한다. 또 미술

위치한 장소이니만큼 건축 전문가라는 특정 집단보다 일반

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예술가의 양적 증가가 이루

대중을 수용하는 힘을 가진 공간이다. 즉, 일반 대중이 삼성

어질 뿐 아니라 미술품 제작방법도 진화하게 된다. 후원자

미술관 플라토(장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조민석 개인전(주

의 의뢰로 소극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던 방식에서 예술가가

제)을 보러 가는 것이다. 삶과 밀접한 건축은 대중에게 굉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적극적 방식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

장히 매력적인 분야이긴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전문성을

다. 이때 전시회는 다양한 소비자와 공급자가 만나는 가장

요하는 생소한 분야이다. 건축 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대중

좋은 장소이자 시장이며 현장이다. 여기서 소비자는 다양

들은 매일 지나치는 건물의 디자이너가 누군지조차 알 길

한 완성품을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 이제는 전시회를 통하

이 없다. 따라서 조민석의 전시를 찾는 대중이라면 베니스

지 않으면 공급자와 수요자가 만나기 쉽지 않은 구조가 됐

비엔날레 건축분야 황금사자상 수상의 쾌재를 가져온 건

다. 또한 전시장 자체가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면서 그

축가가 누구이며 어떤 건축을 하는지, 혹은 그가 전시장에

성격에 따른 맞춤형 관객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서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알려고 할 것이다. 여기에 시각적

건축도 시기적으로는 다르지만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

향유의 기대를 동반하는 것은 물론이다. 공연장에서 음악

다. 물론 자본과 규모 면에서 여전히 건축은 의뢰를 통해 이

을 감상하며 청각적 즐거움을 누리듯, 관객들은 미술관에

루어지지만, 소비자의 확장은 건축가의 태도를 변하게 만

서 시각을 통한 감각적 이해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

들었다. 이런 측면에서 건축 전시의 도래는 시대적 흐름에

서 본다면, 준비되지 않은 관람객들에게 건축 프리젠테이

서 당연한 것이다. 건축가들이 소비자를 만나기에 전시는

션 전시는 당혹감을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가지고 진화해 온

또한 이 전시는 각각의 건물 프로젝트에 대해 엄청난 양의

미술전시와는 분명 다르다. 또한 완성된 건축물을 미술관

정보를 주고, 그 정보의 범위 안에서 건물을 이해시키려는 방

안으로 들여와 전시할 수는 없으므로 다른 노선을 취할 수

법을 취하고 있다. 공간에 펼쳐져 있는 내용들은 단지 감각적

밖에 없다.

시각으로는이해 불가능하기에 손에 사용설명서를 들고 하나

전시는 ‘드러내어 관객에게 보여주기’이다. 이에 건축 전시

하나 기호와 색깔과 모델 등을 체크하면서 봐야 한다.

는 ‘건축을 드러내어 관객에게 보여주기’가 될 것이다. 미술

이보다는 평소 봐 오고 지나쳤던 장소들을 만든 이가 누구

관(장소)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혹은 지정된 전시장에서 관

인지 확인하고, 그런 장소에서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으로

객과 대중을 만나기 위해 드러내야 한다. ‘어디에서’, ‘누구

건축가의 의도를 관객 스스로 알아가는 즐거움을 남겨 주

에게’, ‘무엇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람들이 책이 아 니라 전시를 통해 작품과 만날 때 무엇을 기대하게 되는지

조민석의 개인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사실 관객들의 이해 수준이

개인적으로 다양한 볼거리, 학습이 되는 아카이브 전시를

처음부터 안내서를 꼭 봐야 할 만큼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호하기에, 작정하고 조민석 개인전을 찾았다. 그리고 이

단지 건축적인 소통언어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전시는 나의 선호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전시였다. 입장료 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많은 내용과 엄청난 집중도를 요구

어떤 전시든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보여주고, 드러

하며 공부하게 하는 전시였기 때문이다. 조민석 개인전은

내려는지가 명확하면 관객들이 전시장안에서 길을 잃지 않

건축학과 학생들에게는 만점짜리 모범 답안지처럼 완벽해

고 마음껏 지각적 향유와 정보의 증식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였다. 마치 프리젠테이션 패널에 들어가야 할 것들을 전

생각한다. 이제껏 접하던 ‘전시’와는 구분시켜 보자면, 그것

시에 평면적으로 풀어낸 듯하다. 확실한 전제를 달아준 적

은 이미 ‘공간을 다루는 건축’을 ‘새로운 공간(전시장)’ 안

절한 다이아그램의 효과적 인용, 실제 건물의 크기나 그 건

에서 ‘다뤄진 공간’을 만나게 하는 것이라 본다. 그리하여

물이 주는 공간감을 최대한 전달해 주는 대형 사진들, 작업

공간을 다루는 ‘건축’ 전시는 다른 공간예술 분야의 전시처

하나하나의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는 엄청난 양의 텍스트

럼 전시장의 공간성을 주제로 다루어, 말하고자 하는 건축

및 도면 정보, 심지어 주어진 대지에 대한 분석 및 사용까지

을 시각적 인지뿐 아니라 촉각(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프리젠테이션이었다. 학생들에

예술품에서 말하는 건축의 특징)적 향유까지 불러낼 수 있

게 꼭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을 것이라고 본다. 앞으로 예정된 ‘건축 전시’에서 이런 즐

그러나, 반대로 그런 점에서 아쉬운 측면이 있다. 이 전시는

거움을 느껴보기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건축학과의 행사가 아니다. 버젓이 미술관에서 열리는 ‘조 민석’의 개인전이다. 더구나 전시 공간은 서울 사대문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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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Report | 와이드 리포트

Before Room 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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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와이드 REPORT 2

크로싱 우사단로 Crossing Usadanro_Projective Informal City 2014. 11. 14-2014. 12. 14 스페이스 엘로퀀스 자료 제공 B.A.R.E

재개발의 빈틈으로 다시 젊음의 기운이 채워지고 있는 우사단로에 젊은 아티스트들이 대안적 시선을 모았다. 이곳의 새 로운 가능성을 담은 <크로싱 우사단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도시

REPORT2

조직과 건축이 형성되고, 이를 기반으로 내부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한남 보광동 지역에 과연 전면 재개 발만이 가장 적합한 방법일까? 기존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부각시킬 새로운 가치를 넣기 위한 대안 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지역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고 더욱 풍요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도시에 대한 대안적 실험을 하였던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한남대교에서 본 대상지 전경

우사단로10길 원경 100


Wide Report | 와이드 리포트

풍요로운 삶이 가능한 도시를 만드는 대안적 실험 이재원, 전진홍 시작 주1. 자연발생도시 (informal city)와 주거 지역을 결합한 개념으로 필자들이 제안한 용어이다. 주2. '우사단로'는 이슬람사원에서 도깨비 재래시장을 거쳐 한강 방면으로 난 내리막길을 따라 형성된 길이다.

한국전쟁 이후 급속한 인구 증가로 발생한 서울의 많은 ‘자연발생주거지역’주1들은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어느 순간 아파트 단지로 변 모하고 말았다. 특히 한강변을 따라서 형성되었던 구릉지 경관들이 아파트 벽으로 대체되면서 자연 경관과 어우러졌던 서울의 모습은 그 빛을 잃은 지 오래다. 한강변의 풍경이 아파트 풍경으로 일상화된 오늘날, 우리는 한남대교 북단과 남산 좌측에 위치하면서, 현재까 지도 자연발생주거지역으로 남아있는 우사단로주2 일대를 주목하게 되었다. 배경 최근 예술가들의 젊은 에너지가 이슬람 사원 근처 곳곳에서 전시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필자 중 한 사람도 2013년에 기업 사회공헌사업으로 진행된 공공예술 전시 형태의 <촉촉 어반아트> 에 참여하는 기회가 있었다. 우사단로의 변화가 아직 미비한 도깨비 재래시장 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중국집으로 사용되던 건물 내부를 세 명의 예술가(빠키,박길종,박 진우)와 함께 시장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공 공예술 프로젝트로는 그 지역만의 변화 시간과 건강한 발맞춤을 하기 어려운 한계를 경험 하게 되었고, 이는 2014년 초 도시팀(이재원)+건축팀(전진홍)+프로그램 예술가팀(류성 효)이 한자리에 모여 우사단로 일대의 변화 현상을 탐색, 제안하는 프로젝트 구상의 계기

우사단로10길 전경

우사단로> 전시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의도 전시 <크로싱 우사단로>는 한남재정비촉진지구에 계획되어진 도시의 고유 조직과 지역 공동체를 제거하는 기존의 전면적 철거형 재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이 지역의 고유한 시 간의 흐름에 따라 개발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점진적 개발이라는 시나리오를 토대로

와이드 REPORT2

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지난 8개월간 고민의 흔적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크로싱

심포지엄 사진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실험한 대안의 협업 결과물이다. 도시, 건축, 예술 및 사회의 각 분야 전문가들이 협업을 통해 지역의 물리적 특성 및 잠재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한편 기존의 삶의 방식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 한 고민을 담아내고자 했다. 주거환경관리사업이라고 불리며 뉴타운 해제 지역의 대안으로 시행되는 공공사업은 2009년에 ‘살기 좋 은 마을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래 ‘휴먼타운’,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으로 변천되어 왔다. 하지만 아직 계획된 개발이 지연되 는 상황 속에서 민간과 공공의 시간 호흡의 다름에서 오는 한계에 대한 해결책은 미비해 보이며, 우리는 이를 중간 제 3의 영역에서 극 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전시라는 구성 방식을 빌어 탐구하고자 했다. 이는 도시 이멀젼(urban immersion), 순차적 도시전략과 그에 따른 개별 프로젝트들에서 구체화되며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의의와 성과 단순히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일회성 협업이 아니라 8개월 이상의 지역 리서치 및 주민 교류가 바탕이 되었고, 전시 이후에도 우리 의 빈자리를 채워줄 지역 활동가의 참여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 전시를 준비하며 얻은 가장 값진 성과는, 매달 ‘계단장’으로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우사단단’이란 젊은이 단체, 보광마을살이-지역 어린이 복지단체, 그리고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한 무슬림 커뮤니티와 교회 중심의 커뮤니티, 보광초등학교에서의 다양한 지역커뮤니티 프로그램들과 같은 지역의 잠재적 자생력의 발판이 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다만 앞으로 전시를 너머 더욱 구체적인 방향 제시를 위해서는 이 지역의 시간과 프로젝트 팀과의 시간을 하나로 맞추고 길게 호흡하면서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얼마 전 한남재정비촉진지구 3구역의 단독개발사업인 가 소식으로 우리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힘을 보태주셨던 주민들에게 마음의 빚만 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자연발생적 도시를 위한 제안에는 하나로 규정된 대규모 마스터플랜(masterplan)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열린 구조에서 많은 실험과 다양한 가능성이 작은 단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의 작업이 전시라는 형태로써 하나의 결론이기보다는 우사단로 지역뿐 아니라 더 나아가 비슷한 성격을 가진 다른 지역의 변화를 함 께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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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전시장 풍경

복도와 같은 길의 풍경을 바꾸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도시 풍경 과 커뮤니티는 기존 도시 조직과 이질적으로 만나면서 도시를 극적으로 변화시켰고, 주민들과도 교류하면서 도시를 활기차게

전시장 외부 모습

전시는 시간의 흔적을 간직한 전

유도하였으며, 이슬람 사원 중심의 무슬림 커뮤니티는 이 지역

시 공간 ‘스페이스 엘로퀀스’에서

을 다양성의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렇듯 시간에 따라 형성되

지난 <촉촉어반아트> 프로젝트의

고 다양한 그룹이 모여 사는 이곳은 덧붙여서 만들어진 도시 공

잔상 위에 더해져 진행되었다. 전

간의 묘한 긴장감과 함께 서울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시장과 전시물을 밀접하게 연결

일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시켜 관람객에게 자연발생주거지

-Phase 01: Mobile Architecture Station (MAS)

역인 우사단로 지역의 변화 현상

제안의 첫 단계로 공공공간에 스며들어 이벤트를 수행하고, 그

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노력했다.

곳의 잠재력을 파악하는 이동식 건축을 제안한다. MAS 는 이

또 다양한 크기와 여러 위치의 개

동식 구조물Mobile Architecture과 건축물이 결합되는 건축 정거장

구부로 구성된 전시장 공간의 특

Architecture Station을

성을 부각시켜 각기 다른 프로젝

역주민들을 위한 활동을 수행하고, 제안된 건축정거장 (본 전시

트가 시각적으로 연결되며 ‘순차

장 건물)의 가변적인 부분에 정착하여, 의자 또는 테이블 등 가

적 도시 전략’의 관계가 드러나도

구의 역할을 한다. 일시적으로 거주민들이 특정 목적을 위해 용

록 구성하였다. 순차적 도시 전략

도를 바꾸어 사용하는 물품들을 관찰하며 재발견한 애드혹이즘

은 E1, E2에서 제시되며 이를 토

Ad-hocism을 시험해 보고자 한다.

대로 도시 건축아이디어가 E3,

-Phase 02: Usadanro Urbanism (UU)

E4, E5에서 제안되었다.

1단계에서 테스트한 위치를 바탕으로 2단계 전략을 제안한다.

뜻한다. 다양한 형태의 이동식 구조물은 지

윗길인 우사단로 10길에 문화적, 공공적 성격의 시설들을 집중 하고, 물리적인 변화를 강조하고자 한다Physical Line. 이 길은 양 쪽에 위치한 허브hub들, 즉 ‘이슬람 사원’, ‘한광교회’와 길 중간 에 두 개의 성격을 가진 결절점교환/상호교환지점으로 구성되

전시장 내부 모습

며, UU 1에서 구체화된다. 이와 대비해서 아랫길 ’우사단로 4 E1.

길’과 ‘대사관로 6길’은 지역에 스며드는 사회적 성격을 지닌 길

Phased Urban Strategy_순차적 도시 전략 | 이재원, 전진홍

Social Line로 제안한다. 이 제안은 지역에 부족한 교육, 서비

순차적 도시 전략은 총 5단계로 이루어졌고, 2000년 이후

스 시설들 담고 우사단로 10길과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한 시설

우사단로 지역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뉴타운 현상, 자연발생

facilities points들과

적 지역 변화와 3개의 단계별 제안, 즉 모바일 건축/정거장

워크로 구성되고 UU2에서 구체화된다. 윗길과 아랫길의 물리

Mobile Architecture Station,

우사단로 어바니즘Usadanro Urbanism

적, 프로그램적 연결은 외곽으로 연결하는 다른 길들을 더욱 활

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단계별 제안은 도시 이멀젼(urban

성화activated route한다. 게다가 부족한 교통 인프라를 보완하기

immersion; 도시에 침투하고, 몰입해서 그곳의 성격, 시스템 등

위하여 한광교회 앞 주차장과 주변 교통 시설을 연결하는 트램

을 직접적으로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서 이 지역의 공간적, 사

또는 케이블카를 제안한다.

회적 구조를 분석해서 가치를 드러내고, 그것의 가능성을 극대

-Phase 03: Usadanro Urbanism (UU)

화하면서 부족한 시설과 공간을 새롭게 삽입하는 것을 주요 디

2단계에서 활성화된 길activated route들을 보다 넓은 도로로 확장

자인 전략으로 취했다.

하면서 동시에 도로 주변의 블록을 1000평에서 3000평으로 분

-New TownPhenomenon(뉴타운 현상)

류하며 점진적인 주거 개발을 제안한다.

1, 2

이 시설들을 운영 관리하는 주체들과의 네트

인간 스케일의 도시 공간, 다양한 외부 공간이 풍부한 구릉지에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도시 조직으로 인해 커뮤니티가 잘

이재원 | 한양대 건축학부와 영국AA School졸업하고, HNS건축에

유지되던 이곳은 ‘뉴타운’이라는 재개발 정책 때문에 커뮤니티

서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였다. 도시 프로젝트 팀 ‘Urban

와 지역 환경이 황폐해지기에 이르렀다. 1평 단위까지 면적을

치적, 문화적 구조를 연구하고 그것과 건축, 어바니즘의 상호관계에 대해

쪼개서 여러 채를 매입한 투자자들 덕분에 60%의 주민들은 동

관심을 두고 작업 중이며 <크로싱 우사단로>의 도시전략수립 및 전시기

네를 떠났다.

획을 진행하였다.

-Informal Change_자연발생적 변화와 도시 공간적 특성 도시의 물리적인 변화는 멈추었으나 도시는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2010년을 기점으로 아티스트, 디자이너, 자영업자들이 우사단로 10길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길에 연속적으 로 면해 있는 건물의 쇼윈도 공간을 적극적으로 바꾸면서 외부

102

Architecture Station’(도시건축정류소)를 설립하여 도시의 사회적, 정

전진홍 | 영국AA School졸업하고, 네덜란드의 OMA와 한국의 공간건 축에서 실무를 쌓았다. 세계자본주의 흐름에 편향된 건축사무소 흥망의 양 면을 경험 후, 옛 것과 새 것의 자생적인 공존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이태 원 우사단로 일대를 중심으로 <촉촉어반아트>, <크로싱우사단로>를 기획 및 전시를 진행하였다. B.A.R.E.를 설립하여 리서치를 기반으로 건축 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의미있는 공간의 탄생을 모색하고 있다.


Wide Report | 와이드 리포트

E1. Phased Urban Strategy

E1. Urban Values

E1. Usadanro Inter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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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E3. Mobile Architecture Station(MAS) | 최윤희, 장태훈+김동훈, 한혜민, 김태범 MAS 프로젝트는 사라지는 장소의 기억을 담기 위해 과도할 정 도로 대지 특성에 집중한 접근 방식을 취한다. 동시에 전면 재개 발 방식의 대안으로 지역 맞춤형 개발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 해 프로그램 예술가와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가치를 발견 E2. Experiential Sequences

하는 리서치를 수행한다. 또 이동식 구조물들과 정거장이 커뮤 니티 공간으로 순간적으로 탈바꿈되어 시간과 대화가 멈춰진

E2.

우사단로 지역에 일상과 비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촉진제 역

Experiential Sequences | 노정연

할을 제공하고자 한다. -지역 주민을 각각 네 개의 그룹 ‘새로 이주한 우사단단’, ‘오랫

작가의 도시 공간 체험을 통해 재현된 드로잉 꼴라주는 일상적

동안 거주한 도깨비시장 상인’, ‘이슬람 커뮤니티’, ‘어린이’로 규

인 아름다움, 다양한 도시 조직들의 집합적 모습, 공간의 극적인

정짓고 각 커뮤니티 관련 리서치, 도깨비시장 구조물의 현황 파

변화와 같은 특이성을 가진 이 지역이 도시공간으로서 중요한

악 및 지역의 특징적 재료에 대한 리서치, 주민 간 주차 문제 및

가치가 있는 곳임을 보여준다.

재개발 압력 분쟁에 관한 리서치, 이동식 구조물의 활용 방안에 대한 리서치 등을 통해 도시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노정연 |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원 회화전공, 영국 첼시 예술대 학원을 졸업 하였으며, 현재 한국과 런던에서 활동 중이다. 2회의 초 대 개인전 외 다수 그룹전에 참여하였다.

E3. MAS Docking system and operating situation 104

-지역 특성의 확장과 잠재력의 재발견을 통해 커뮤니티를 강화


Wide Report | 와이드 리포트

E3. Proposed Model

E4. Proposed N-S Section

시키는 역할을 하고, 구역별로 필요한 활성화 및 기억 수집을 위

E4.

한 네 개의 다른 성격, ‘음식’, ‘나눔’, ‘놀이’, ‘기억’의 이동식 구

Usadanro Urbanism Project 1-Collectivism as a new

조물 아이디어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이동식 구조물들이 이벤트

form of urbanism | 이장환, 조종성

가 없을 시, 대부분의 시간을 정거장에서 머무는 점에 착안하여, 한남동과 보광동은 두 개의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이

블 등과 같은 가구로 활용될 수 있는 ‘도킹docking 디자인 전략’

다. 이태원 거리를 기준으로 북쪽으로는 부촌의 단독 주택지가

을 제안한다.

닫힌 공동체gated community를 이루며 개인주의individualism 문화

-본 프로젝트는 커뮤니티 기반의 지역 활동가가 지속적으로 진

의 정수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반면 이태원 거리의 남쪽에 위

행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프로젝트 종료 후 전문가 팀이 부재하

치한 보광동은 작은 필지 위에 고밀의 다세대 건물들이 밀집하

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등 이동식 구조물이

여 응축된 도시 형태를 띄고 있다. 이런 보광동의 건조환경은 한

꾸준히 활용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역의 미비한 변화까지도

남동의 개인화된 문화와는 대비되는 집단 문화collective culture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여 지역이 자생력을 갖출 수 있는 능력을

특징을 갖는다. 이곳의 밀도 높은 삶의 방식은 공유와 점유 그

키우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리고 전용appropriation으로 점철되는 성격을 갖고 있어 내외부의 관계 그리고 공과 사의 관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특징을 가지고

최윤희 |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와 AA School졸업하고 영국건축사를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역설적이게도 물리적으로 밀집된

취득했다. B.A.R.E. 소장으로 있으며 오래된 것의 가치 위에 새로움

도시 구조로 인하여 보광동의 밀도 높은 삶의 내용을 적극적으

을 더하는 공공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로 펼쳐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장태훈, 김동훈 | Zerolab디자인 스튜디오를 이끌고 있으며 그래픽,

우사단로 10길은 보광동의 중심 가로로서 지역의 집단 문화가

제품 디자인 관련 전방위적인 문화활동을 지향하고 있다.

표출되는 장소이다. 길의 좁은 폭과 그에 상응하는 높이 그리고

한혜민(반디) | ‘어린이공연연구집단 앙꼬’를 결성하여 활동하는 독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공간적 위요감과 더불어 길을 둘러싸고

립공연예술가로 마음껏 꿈꾸지 못하는 아이들과 연극을 통한 만남으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은 이곳을 지역 사회의 구심점이 되게

로 함께 꿈을 키워나가고자 한다

만든다.특히 가로의 양끝단에 위치하는 이슬람 사원과 교회는

김태범 | 영국 AA School졸업하고 건축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활동하 는 설치 예술가이며 친근한 소재의 재활용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작업

와이드 REPORT2

이들을 정거장의 가변적인 건축 요소와 결합시켜 의자나 테이

이 길에 다양한 행위가 창발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다.

을 진행해 오고 있다.

E4. Proposed perspective collage 105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본 프로젝트는 우사단로 10길의 가로 체계와 직각으로 교차하 는 두 개의 거대 볼륨에 대한 이야기다.각각의 볼륨은 서로 다른 조건을 내재하며,수직으로 적층된 두 개의 볼륨 사이로는 어떠 한 건축적 개입없이 완전하게 비워진다. 저층 볼륨은 인공적으로 조절되는 단일 거대공간으로 우사단4 길과 대사관로 6길을 연결하며 주변의 자동차 교통 흐름을 흡수 통합한다. 이 거대공간은 보광동의 자연발생적 도시 구조가 갖 는 작은 규모의 공간들과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하며 지역의 사회적 관계에 다양성을 제공한다. 이와 반대로 고층 볼륨은 보 광동의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모사로 물과 벚꽃나무 군락이 결 합된 형태의 집단 수영장이다. 이곳은 집단적 의식의 장소로서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촉매함과 동시에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 러내 보여주는 장소이다. 마지막으로 저층과 고층볼륨 사이의 비워진 공간은 보광동의 좁고 가는 길에 대한 상대적 대응으로 이 지역에 산개하는 고밀의 집단 문화가 펼쳐지는 무대이다. 이 곳은 어떠한 건축적 개입이나 프로그램이 없는 무無의 상태로만 존재하며 단지 국지적 조명과 인공적으로 흩뿌리는 안개에 의 해서만 그 존재가 드러난다. 이 프로젝트는 보광동 지역 전반과 변증법적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단절과 불연속을 긍정한다는 이야기다. 건축이 주변의 물

와이드 REPORT2

리적 컨텍스트와 연속적인 관계로 사고되기 보다, 반목과 이접 을 통해 그곳에 이미 존재하는 건조물과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전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보광동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삶의 방식과 이야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함이며, 더 나아가 또 다른 이야기들을 생성하고자 함이다. 이장환 | 홍익대 건축학과와 서울건축학교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TU Delft를 우수 졸업하였다. 로테르담 소재 OMA에서 건축가로 활동하

E5. Usadanro Urbanism Project 2-Collaborative territories_협력적동네만들기 | 박진석, 황미경 ‘협력적 동네 만들기’ 프로젝트는 재개발 대상으로 논의되고 있 는 우사단로 지역의 쇠퇴한 유, 무형의 주거 환경을 점진적으로 개선시키고, 지역주민 및 외부 유입 인구들의 지속 가능한 공동 체 형성을 위해서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단계적 프레임워 크에 대한 실험을 보여준다. 단계 1. 지역의 유형적, 무형적 자산은 무엇인가? (WHAT’S THERE?) 단계 2. 지역 자산들이 필요한 양분은 무엇인가? (NUTURE THE POSSIBLE) 단계 3. 지역에 결핍된 것을 파악하고, 만들어 준다.

며, 아시아와 유럽, 중동 등지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대표 작업으

(DEFINE WHAT IS MISSING)

로는 카타르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다. ‘Urban Operations’를 운영하고

지역의 유, 무형 자산들과 파편적으로 운용되고 있는 사회적 공

있으며 도시와 문화, 건축 전반에 관심을 두고 작업하고 있다.

공 프로그램들을 지역 커뮤니티 및 기관들과의 협력을 통해 우

조종성 | 동아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이며, 지역

사단로10길과 4길 주위에 형성된 사회적 공간들에 삽입시켜, 서

마다 다른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생기는 각각의 시점과 공간에 관심을

로 소통하지 않거나, 고립된 지역 구성원들의 일상적인 교류를

가지고 작업 중이다. 2014년 <숨겨진 시점, 풍경을 거닐다> 개인전 외

유도하고 도시 영역의 공적 성격을 강화시킨다.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여하였다.

건축공간Architectural Space , 도시공간Urban Space , 사회적 체계 Social Structure가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우사단로는 최소한의 물

리적 환경 변화와 기존 사회적 체계 및 공공서비스의 유기적인 활용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지역으로 부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박진석 | 사용자와 도시의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을 적극 활용하는 어 바니즘을 영국 AA School에서 공부한 후 10여년 동안 영국의 다양 한 협력적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수행한 후, 귀국하여 현재 경남대학 교 조교수로 재직하며 창원시 전략계획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황미경 | 미국 Pratt Institute와 BMCC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 후 뉴욕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다양한 영역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였 다. 이후 귀국하여 홍익대학교와 영산대학교에서 외래교수로서 재직 하고 있으며 현재 지오커뮤니케이션의 대표로 디자이너 활동을 하고 있다.

106


Wide Report | 와이드 리포트

E5. Collaborative Territories

E5. Main Activities 107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Strong Architect 05

위 심장중심-배꼽중심 세계관-차이

위 形-象(실체-인식적-이성적) 아래 象-形(현상-존재적-감성적)

아래 意境度量(一切唯心造)

곽 재 환

인간의 장소 삶 앎, 놂, 풂, 빎,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Strong Architect 05

(심장과 배꼽,좌상과 입상,정태와 동태)

곽재환 집의 5場(삶,앎,놂,풂,빎-Penta Place)에 대한 가치를 ‘意境度量’을 통해 형상화 하고자 하는 ‘營造理念’의 건축관을 지니고 있다. 작업은 장중한 경향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하늘에 대한 지향성’의 내적 특성이 있다. 이를 건축의 정체성과 장소성의 기반으로 삼고, 數詩일체, 內外일체, 物我일체를 통해 집의 평화를 추구한다. 그동안 비전힐스 골프클럽하우스, 은평구립도서관, 제일영광교회, 흑빛청소년문화센터, 등의 작업이 있으며, 한국건축문화대상, 한국건축가협회상, 서울시건축상, 대한민국공간문화대상, 문화관광부장관상, 예총예술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건축그룹 칸(間) 대표와 삼육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으며, 몽환적 화풍의 그림 전시회 <시베리안 랩소디>를 여는 등,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제95차 땅집사향 강연회에서 만난 삶의 고수 건축가, 사상가, 예술가, 활동가, 풍류가, 생활인. 건축가 곽재환을 묘사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말해주 듯, 이미 필자가 이해해서 서술할 수 있는 범위가 아 니다. 철저한 이해가 부재한 상황에서 쓰는 이 리뷰 는 평론이라기보다 차라리 고백성사와 같은 성격일 주1. ‘정신감응’은 곽재환 선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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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를 쓸 수밖

제95차 땅집사향을 구성하는 주제 중

에 없는 이유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 가슴 깊은 곳

하나이기도 하다.

에서 울리는 공감 혹은 ‘정신감응’주1 때문이다.

삶앎놂풂빎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축을 한다는 것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유물론은 근대 이후 합리성과 효율성의 도입과 함께 가속화되어 왔다. 합리와 효율은 측정 가능 한 것, 즉 물질로써 정량화되는 것들을 기반으로 잘 작동하는 가치들이다. 결과적으로 현대사회에 서 근본이란 어느덧 물질적인 것이 되어버렸고, 정신적인 것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반면, 곽재환은 건축의 단순 물질적 측면과 유물론적 측면에 완강하게 저항한다. 강연을 시작하면서 곽재환은 건축을 지적 작업이 자 사변적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세울 건建’과 ‘쌓 을 축築’으로 구성된 ‘건축’이란 일본식 용어가 이

形象化 次元의 10境

미 물질주의적 선입견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 번 역이 규정하기 이전 건축이 가지는 본연의 모습 을 발견하자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아키텍트’ 의 그리스어원인 ‘아키텍톤’은 최고 관리자를 의

언어가 되고 언어는 다시 사고 즉 ‘상’이 된다. 세

미했다. 최고 관리자는 의사나 집짓는 자 같이 세

상은 ‘삶’, ‘앎’, ‘놂’, ‘풂’, ‘빎’으로 풀어진다. ‘삶’,

세한 물리적 직능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리적 측

‘앎’, ‘놂’, ‘풂’, ‘빎’은 인간사를 구성하는 행위들

면에서 집짓는 행위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원, ‘오

의 명사형 개념어들이다. ‘삶’은 생물학적 생명 활

이코도모스’라는 단어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동, ‘앎’은 지식 활동, ‘놂’은 유희 활동, ‘풂’은 노

‘아키텍톤’이란 단어가 별도로 존재했다는 것이

동 활동, ‘빎’은 소망 활동을 의미한다. 이를 영어

그 증거다. ‘아키텍톤’, 즉 건축가는 최고 경영자

로 표현하면, ‘Live’, ‘Know’, ‘Make’, ‘Work’,

이자 관리자이고 물리적 행위보다는 사변적 활동

‘Want’다. 또한 각각은 생명 활동으로 힘을 키우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개념이다. 협소한 물리

고, 지식 활동으로 뜻을 세우며, 유희를 통해서 멋

적 의미에 국한된 ‘건축’이라는 일본식 용어보다

을 표현하고, 노동을 통해서 땀을 흘리고, 소망을

짓는 행위를 경영하는 행위와 관련시키는 ‘조영’,

통해서 얼을 다스리는 행위로 발현된다. 전통 학

‘영건’, ‘영조’라는 우리의 옛 단어들이 ‘아키텍톤’

문의 측면에서 보면 ‘삶’은 ‘기’에 대한 논의, ‘앎’

과 의미상 더 가깝다.

은 ‘이’에 대한 논의, ‘놂’은 ‘격’에 대한 논의, ‘풂’

“건축이란 정신과 근본의 세계인 상象의 세계를

은 ‘덕’에 대한 논의, ‘빎’은 ‘도’에 대한 논의이기

물질인 형形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다.”(문장

도 했으며, 각각이 ‘인’, ‘의’, ‘예’, ‘지’, ‘신’이기도

인용은 필자가 문맥에 맞춰 각색했음을 밝힌다.)

했다. 다시 ‘기’는 ‘키움’, ‘이’는 ‘배움’, ‘격’은 ‘나

곽재환에게 건축 행위란 물질인 ‘형’을 통해서 세

눔’, ‘덕’은 ‘베품’, ‘도’는 ‘이룸’을 말한다. 곽재환

계의 근본인 ‘상’을 발견해 가는 한 과정이다. 곽

에 따르면, 이러한 가치들을 모두 실현했을 때 인

재환이 인용한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간은 비로소 존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에 따르면 ‘형’은 ‘상’, 즉 근본을 드러내는 신적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어들은 건축과 어떻게 연결

언어다. 언어가 인간의 세계에 속한다면, 형상은

될 수 있을까? ‘삶’은 영역과 환경, ‘앎’은 원리와

신의 세계다. 건축은 또한 물질만능주의인 자본

개념, ‘놂’은 구조와 형태, ‘풂’은 기능과 체계, ‘빎’

주의에서 점점 더 소외되어 가고 있는 ‘나’를 찾아

은 이념과 사상으로서 각각 건축적 문제가 된다.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신, 즉 근본과 ‘나’는 건축

이러한 개념들은 다시 ‘몸’, ‘맘’, ‘넋’으로 수렴된

을 통해서 연결되고 ‘감응’한다.

다. ‘몸’은 육체를 나타내며 ‘공간태’를 대변하고,

‘형’과 ‘상’의 감응에 대한 탐구 과정은 40년이라

‘맘’은 인간의 본성을 말하며 ‘인간태’를 대변하

는 그의 건축인생을 통해서 거대한 사고 체계를

며, ‘넋’은 영혼을 가리키며 ‘시간태’를 대변한다.

구성한다. 물질 세상인 ‘형’에 대한 치밀한 탐구는

천부경과 같이 땅, 인간, 하늘의 삼위구성이다. 이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Strong Architect 05

삶앎놂풂빎

현대사회는 ‘유물론’이라는 말로 수렴되는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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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칸(CAAN-공간의 최소단위)- 穴-工-間-房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Strong Architect 05

(가로 2.7m, 세로 2.7m, 높이 2.7m,면적7.3m2-약 2.2평)

러한 인간 활동들은 다양한 투쟁 하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평화’ 혹은 우리말로는 ‘어울림’이다. 이는 곽재환 건축의 궁극적 목표다. 건축가 곽재환은 자신이 처음 설립한 건축사무소 를 ‘Message in Architecture to Cosmos’라고 명 했는데, 이는 우주Cosmos를 큰 집으로 보고, 건축 과 우주 사이의 의미 있는 어울림을 만들고자하 地-天, 음-양, 카타콤-바벨탑-空間-장인(工)이 만든 구멍과 그 사이(間)

는 생각과 꿈, 즉 ‘빎’을 반영한다. 그의 사고 체계는 우주의 표현이며 만다라다. 공 허, 여백, 관조, 명상, 이미지, 원리, 기호, 개념, 도 식, 골격, 형태, 체계, 기능, 소멸이 펼쳐지고 순환 반복하는 만다라다. 인간은 우주 속에서 반복 순 환된다. 인도 길거리에서 만난 어느 남자아이의 눈동자 속 심연은…태풍의 눈…은하계 중심 속 심연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의 본성은 무었인가? 인간(나)과 우주는 분리 되어 있지 않다. 인간과 우주의 어울림이다. 건축 가 곽재환은 자신을 키운 것은 7할이 하늘(과 골 목)이라고 고백한다. 현대유물론은 ‘만물조응’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세상의 물질적 통합을 설명해 내려고 하는데, 그 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인간의 소외였다. 반면, 곽 재환이 주목하는 어울림이란 그 시작에 있어서 이미 인간의 ‘몸’, ‘맘’, ‘넋’을 기반으로 하며,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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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Report | 와이드 리포트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Strong Architect 05

위 物我一體 가운데 數詩一體 아래 內外一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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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땅과 하늘의 삼위의 관계 안에서 바라보고 있

다. 정신적인 것에 가치를 둔 어울림은, 인간의 소

다는 점에서 유물론과 다르다. 곽재환 선생이 어

외가 아닌 행복을 지향한다. 곽재환에게 “건축은

울림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풀어내는 정신적인 것

머무는 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행위”이다.

들은 현대 물질 사회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자각 에서 기인한다. 유물론에 기반한 기하학 비례로

정신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은 쉽사리 정적으

표현된 르네상스적 인간은 앎(머리), 놂(팔과 몸

로 머물기 쉽다. 하지만, 예술가이자 활동가인 곽

통), 풂(다리)이 표현하는 인간 활동들의 관계 속

재환은 머무는 이의 행복을 위해서 단지 기다리

에서 재해석된다. 서양건축이 시각 요소에 중점

는 자가 아니다. 그는 행복을 찾아 떠나는 유랑을

을 둔다면, 건축가 곽재환이 집중하는 사변적 건

마다하지 않는다. 시인 박남준, 가수 인디언 수니

축은 보이지 않는 건축으로서 오간의경(五間意

와 함께하는 유랑유랑공연을 뽐내듯 이야기하는

境, 5가지의 개념 사이에서 풀어내는 뜻의 경지)

그의 얼굴에 어느 때보다 함박웃음이 가득한 이

의 건축이다. 이러한 정신적 가치를 풀어내자면

유다. 그 함박웃음이란, 왠지 절대로 훼손해선 안

(‘만물조응’ 개념에 대한 대안으로서) ‘정신감응’

될 것 같은 삶의 고수들의 어린아이와 같은 순박

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감응’을 꿈꾸는

한 웃음이다. 삶의 고수 곽재환의 다양한 활동을

곽재환에 따르면, 인간은 두뇌, 즉 정신을 통해서

통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웃음과 행복을 공

우주와 교신하고 감응한다. 그에게 “인간이란 우

유하고 어울림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주의 꿈이다.” 이러한 ‘정신감응’이 바로 곽재환

글 | 박성용(땅집사향 리뷰어, 이가건축 실장)

건축의 궁극 목표인 ‘어울림’을 의미한다고 믿는

평화(天地如我同根 萬物如我一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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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Power & Young Architect 05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건축사사무 소 기오헌의 건축가 민현식 문하에서 건축 실무를 익혔다. 이후 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Berlage Institute)에서 엘리아 젱겔리스(Elia Zenghelis), 피에르 비토리오 아우렐리(Pier Vittorio Aureli)의 지도 하에 도시건축 석사 학위를 받고, 벨기에의 자비에 드 가이터 사무소(Xaveer de Geyter Architects), 일본의 리켄 야마모토 건축사무소(Riken Yamamoto & Field Shop)에서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2011년부터 이엠에이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해 왔으며 현 시대의 ‘도시성’에 대한 질문에서 공공성을 넘어선 공유, 집합, 공동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건축과 도시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도시와 거주 서울은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농경 사회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Power & Young Architect 05

Form of Living

이은경

이은경

에서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한 서비스산업 사 회까지의 발전이 압축된 도시이다. 인구 천만의 도시는 하부 구조와 이동이 그의 주요한 활동이 되고, 과밀화로 인하여 더 이상 개발지가 남아있 지 않는 도시에서 잉여의 자본은 재개발의 형식 으로 도시를 변형시킨다. 필지는 통합되고 건물 이 부수어지고 지어지고 과정을 통하여 도시는 흐름과 유통에 최적화되어 더 이상 읽을 수 없고 파편화된 단위들이 모여있는 상태가 된다. GPS 와 같은 기술의 발전은 이 비가독성, 분절성을 더 욱 합리화한다.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생산 기계이다. 도시로 몰 려든 혼잡한 상황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움직임으 로 변환된다. 네트워크기술은 이러한 이동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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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을 서로 공유하는 방식과 참여와 시간이 전제된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진 집합의 형collective form이 우리 도시에서 거주를 위한 형form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거주를 위한 일상 공간 하나의 공유주택은 각자의 비용 부담으로 적정한 기능을 가진 시설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30평 내 외 3LDK의 일괄적인 기준으로 정해지는 주택 공 급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 로 여러 세대를 포함하는 확장된 규모에서는 공 공이 담당해야 할 복지제도와 시설들을 개인에게 그 비용과 책임을 전가하는 위험성도 내재되어 있다. 어떠한 공간을 공유하며 그것을 어떻게 조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Power & Young Architect 05

직할 것인가가 중요해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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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하게 접하는 복도형 아파트에서 복도는 실내공간이 최대한 양질의 향을 가지고 남는 북 측에 최소한의 면적으로 계획되었다. 항상 어둡 욱 자유롭게 만들고,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네트

고 추워 집에 이르기 위한 통로만으로 사용되기

워크에 접속한 채 이동하며 끊임없이 일하게 된

때문에 사람들이 머물지 않는다. 개인이 집을 보

다. 우리의 삶은 유목민과 같이 다음날을 위해 잠

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인 철창과 철문은 스

시 몸을 쉬어 가는 최소의 공간만을 필요로 하고

스로를 외부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로 인해 도시에는 개인과 공동체의 경계가 불

대규모 집합주택이 생긴 근대 이후 건축가들은

명확한 공간들이 생겨나게 된다. 한편 명확한 개

지속적으로 이 복도를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고

인 공간으로 규정되는 아파트는 우리나라에서 도

자 시도하였다. 세곡동 3블럭은 필자가 리켄 야마

시중산층이라는 사회적, 경제적 가치로서 존재한

모토의 스텝일 때 현상설계에 참여한 프로젝트로

다. 아파트 ‘단지’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형태가

서 사람들이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화

아니라 집단적으로 다른 계층과 분리된 공간으로

하는 방식으로 복도를 재조직하였다. 복도를 남

도시를 조직하기 위한 물리적 경계로 작용한다.

향으로 두고 남측 복도와 북측 복도가 ‘커먼필드

이렇게 오늘날의 도시는 포스트 포디즘의 생산

common field‘라고

체제를 위한 터전으로서 극단적인 효율성을 추구

였다. 3층과 4층의 저층 접지면이 적당한 거리를

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왔다. 우리의 행위들은

두고 마주하는 공유공간은 흔히 아파트 단지에서

최첨단의 기술 도구들로 끊임없이 매핑되고 우리

필요한 조경과 복도 면적이지만 공유공간 조직의

의 삶은 생산을 위한 잠재적인 원천으로 조직된

차이로 인해 동을 먼저 배치하고 남는 공간을 조

도시의 물리적 환경을 따르게 되었다. 자본주의

경으로 채운 아파트 계획과는 달리 거주자들의

도시는 굳게 닫힌 철문과 철창 있는 창문으로 사

쓰임과 머뭄이 있다.

생활을 보장하고, 거리 곳곳에 놓인 CCTV로 안

<가양동 공공주택>은 내부공간의 면적을 최대한

전을 지킨다. 한정된 물리적 공간에 모여 살면서

활용하기 위해 발코니를 확장하면서도 채광과 환

벌어지는 갈등을 효율과 기능으로 해결한 결과는

기가 잘되는 복도형 집을 만들기 위해 평면은 가

지금의 도시 형태로 드러난다.

로로 길게 복도를 따라 배열하고 큰 길을 향해서

분절과 단절, 흐름과 이동을 위한 거대한 시스템

는 부부방과 거실을 두고 복도를 향해서는 큰 창

인 도시 공간을 마주하며 지금 시대의 환경에서

이 있는 주방과 아이방이 면하도록 하였다. 거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 본다. 사람

실-주방-복도-마당으로 사적인 공간에서 공유

들과 대면하는 일상적 공간에서부터 한정된 영역

하는 공간으로 점진적 전환이 이루어지며 그 사

하는 공동공간을 마주보도록 하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Power & Young Architect 05

가양동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복도

가양동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중정

고덕 강일 3지구 11블록 공공주택 마당

고덕 강일 3지구 11블록 공공주택 배치도 115


건축가 초청 강의 시즌 4 : Power & Young Architect 05

와이드 AR no.43 | Wide AR no.43

이의 복도는 햇빛이 드는 공동의 발코니로 사용

성에 주목한다. 규모 면에서는 도시적 관계를 만

된다.

들어 낼 수 있으며, 세대를 기준해서 보면 공동주

<만리동 공공주택>의 경우에는 개인의 생활공간

택의 형식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으며, 설

은 작지만 이외의 가능한 모든 공용공간을 활용

계 면에서는 개인의 바람을 다수의 바람과 조율

하여 예술가들을 위한 작업장이자 갤러리를 계획

하는 과정을 거쳐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 둘 사이

하였다. 법적인 이격 거리는 골목길이 되며 이에

에 놓인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면하여 커뮤니티룸을 둔다. 서로 독립된 3개 동은

많은 사람들이 주거의 질이 실내 마감재료로 결

골목길, 작은 마당, 계단, 브릿지, 테라스, 옥상을

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이웃의 관계에 기반

통해 연결되며 이들을 다층의 연속된 갤러리로

하며 커뮤니티를 통해 주거의 질이 향상될 수 있

만든다.

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택이 공

<고덕 강일 3지구 11블록 공공주택>에서는 가장

급자 중심의 상품적 가치를 지닌 마케팅의 대상

넓게 공유하는 접지면의 공간 조직에 주목해서

이었다면 소비자 중심의 자발적 필요와 개인이

아파트의 볼륨은 저층고밀로 분절하고 이 볼륨의

해결할 수 없는 높은 주거 비용을 함께 모여 분담

입면들이 연속된 마당의 네 면을 규정하여 거주

하는 주택은 경제적으로도 대안적 모델이 된다.

자들이 서로를 인식할 수 있는 거리를 가진 작은

공유함으로 인해 건설 비용을 줄이고 필요한 공

마당의 연속체를 만든다. 다양한 주거 면적을 섞

간도 함께 쓰며 이웃과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어 내부공간에서 가족이 모이고 식사를 하는 공

주택은 자본으로 인한 도시화, 가구 분화가 남긴

간이 마당을 면하게 한다. 마당은 일상에서 적극

인간소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복지의 대안적

적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면서 이웃을

방법이 된다. 거주할 사람들이 주거의 공급 과정

만나기도 하는 대면 공간이 된다.

에 참여하고 도시 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에 대해 서로 갈등・이해・합의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

프로세스

면 주택의 양적 공급 이후 질적 전환기에 거주의

서울시에서 기획하고 SH공사에서 발주한 프로젝

가치를 공유하는 접점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트인 <가양동 협동조합형 공공주택>과 <만리동

글 | 이은경(이엠에이 건축사사무소(주) 대표)

예술인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은 입주 이전에 입 주자 커뮤니티를 만들어 입주 이후에는 공동체 를 활성화한다는 프로세스로 진행되었다. 일반적 으로 임대주택 입주자는 후분양과 추첨제로 선정 되지만 가양동 공공주택은 설계와 동시에 아이가 있는 가족 입주자를 모집한 선분양의 형식이 전 제되었고, 거주자들은 직접 살아갈 집 설계에 참 여하고 시공을 포함한 기간 안에 서로를 알아가 는 시간을 가졌다. 만리동 공공주택은 예술인과 그 가족을 입주자로 모집하였고 더 나아가 예술 인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에 대 한 입주자의 의견을 반영하여 기획을 조정하였 다. 예술인들은 예술작품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다수의 1인이 모인 레지던시가 아닌 가족을 중심 으로 한 집에서 오래도록 거주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면서 예술적 재능을 지역사회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고, 이에 스물아홉의 예 술가 가족을 위한 집이 계획되었다. 혼자만의 꿈을 투영한 단독주택과 상업적인 마케 팅으로 지어지는 아파트 사이에 놓인 집의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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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동 예술인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설계 회의


만리동 예술인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브릿지

만리동 예술인 협동조합형 공공주택 골목길

세곡동 3블럭 커먼필드(common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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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향 클럽, 미디어랩 & 커뮤니티》 GANYANG CLUB, Media Lab. & Community 우리는

우리는

건축가와 비평가 및 다방면 건축의 파트너들과 함께

격월간으로 발행하는 잡지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지방locality, 지역region,

월례 저녁 강의 《땅과 집과 사람의 향기(땅집사향)》

진정성authenticity”에 시선을 맞추고 “건축을 배우는 후배들에게

건축가들의 이슈가 있는 파티

꿈을, 건축하는 모든 이들에게 긍지를” 전하자는 목표 아래

《Architecture Bridge(ABCD파티)》 《ICON Choice》

이 땅에 필요한 건강한 건축 저널리즘을 구현함은 물론,

건축역사이론비평의 연구자 및 예비 저자를 지원하는 《심원건축학술상》

건축한다는 것만으로 반갑고 행복한 세상을 향해

내일의 건축저널리스트를 양성하는 《간향저널리즘스쿨》

나아가고자 합니다.

신예비평가의 출현을 응원하는 《와이드AR 건축비평상》 독자와 비평가가 함께 선정하는 《와이드AR Awards》 색깔 있는 건축도서 출판 《간향》 《AQ Insight Books》 국내외 건축과 도시를 찾아 떠나는 현장 저널 《WIDE 아키버스》 건축인을 위한 《WIDE 건축유리조형워크숍》 인간·시간·공간의 이슈를 영상으로 따라잡는 《WIDE 건축영화공부방》 어린이·청소년 건축학교 《AB스쿨》 등의 연속된 프로젝트를 독자적으로 또는 파트너들과 함께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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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도요의 『내일의 건축』 이정환 옮김, 안그라픽스, 2014 추천, 젊은 이론가들의 북리뷰 어느새 2015년이다. ‘벌써’라는 말이 떠오른다. 왜냐면 지난

고도 말한다. 근대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의식은, 메타볼리즘

2014년 4월 16일이 머릿속에 너무도 또렷이 각인되어 있어

의 전성기인 60년대 말에 건축실무를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서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간 세월의 진실은 아직도 제대로 규

반문화가 지배한 70년대에 독립하고 자연스레 시대적 폐쇄성

명되지 못했다. ‘세상을 뛰어 넘는다’는 뜻인 ‘세월’호의 침몰

이 느껴지는 자율적 건축을 설계했다가 버블경제 시기인 80

이후, 우리 사회의 배는 아직 침몰 이전 세상을 뛰어 넘지 못

년대의 탈근대적 신자유주의 속에서 소비사회를 따라 유목적

했다. 물론 침몰 이전 세상의 감춰진 진실이 좀체 드러나지 않

인 ‘이미지로서의 건축’을 추구할 때부터 이미 본격화한 걸로

아서일 테다.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이상, 시계는 당연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그 이미지의 건축을 넘어 90년대 초부

히 그 진실이 종적을 감춘 그날에 맞춰질 수밖에 없으므로. 멈

터 공공건축에 관심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특히 2011년의 동

춰버린 세월은 이중의 의미를 함축한다. 시간이 전방으로만

일본대지진을 통해 “우리 사회에 건축가는 정말 필요한 존재

직진하는 근대적

‘세월歲月’의

침몰과, 그러한 근대적 시간에

일까?”라는 가슴 아픈 질문(29쪽)을 떠올리며 재난지역 주민

‘세월世越’의

요청. 이

들과 함께 ‘모두의 집’을 설계해온 그는 “건축가들이 건축가

것은 파국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과제를 잉태한 파국이다. 성

의 에고이즘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중략) 틀림없이 개인을

장주의를 뛰어넘는 과제란 전혀 변하지 않은 본질을 자각하

초월한 공동의 결과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215쪽)이라며 공

는 문제의식에 근거하여,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키운 근대적

공성을 강조한다.

개발주의를 벗어나 ‘지금 여기’의 모순을 직시하는 일이리라.

이렇듯 이 책은 근대주의에서 유목적 탈근대주의를 지나 현

근대적 진보사관은 무릇 ‘미래’로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생산

대 자본주의 사회의 파국적 국면까지 목격해온 건축가가 자

하지만, 그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시스템의 균열

연스레 공공성에 주목하게 된 여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가

을 방치하며 모순을 심화해왔다. 이러한 근대적 문명의 균열

말하는 ‘내일의 건축’이란 파국 이후 종래의 명확성에 입각한

은 사실 세월호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전례 없는 재난과 파

건축가의 근대적 에고를 버리고 더 자연스럽고 주민과 함께

국의 형태로 발생해왔다. 멀게는 2001년 미국의 9/11이, 가깝

만들어가는 공통적 건축임이 드러나는데, 이렇게 재난에서

게는 2011년 일본에서 발생한 3/11 대지진 및 원전사고가 그

공공성을 직시하는 그의 태도는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시사하

랬다.

는 바가 적잖아 보인다. ‘세월호’라는 인재가 우리에게 “다가

일본 대지진은 자칫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로 생각하기 쉽지

올 재난의 선행적 기표”이자 그 이후의 시간이 결코 없는 “영

만, 이토 도요는 『내일의 건축』에서 이를 자연재해가 아닌 ‘인

원한 재난상태”(전규찬, 『눈먼 자들의 국가』 151~73쪽) 그 자

재’로 규정한다. 즉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쓰나미가 자

체라면, 이러한 잠재적이고 현행적인 재난사회를 사는 우리

연재해이고 원전 사고는 인재’라는 항간의 이야기에 대해 “두

역시 이토처럼 가슴 아픈 반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

가지 재해 모두가 인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그는

이다. ‘과연 이러한 재난사회에서 우리는 정말 필요한 존재일

이것이 “어떤 재해이건, 기술의 발달로 자연을 정복할 수 있

까?’ 필요하다면 어떤 면에서? 공동성의 호출이 필연적인 재

게 되면서 기술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온 근대주의 사상”(41

난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에고이즘’을 뛰어넘어 ‘개인을 초

쪽) 때문이라 말하며, “수치를 설정하면 그 다음에는 아무도

월한 공동의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사람들 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자세”(42쪽)가 재난을 키운다는 것이

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건축가라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다. 그는 근대주의의 명쾌함이 “그레이존(중간지대)을 완전

순수한 인간으로서 건축을 생각해야”(75쪽) 한다는 이토의

히 없애버렸다”(43쪽)고, “건축가들은 ‘근대’라는 틀에 흠뻑

말처럼, 여기서 ‘우리’도 건축이란 갑옷을 벗은 순수한 인간으

젖어 건축을 생각해왔다. (중략) 하지만 동일본대지진은 그

로서의 우리일 뿐이리라.

틀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충분히 깨닫게 했다”(61~4쪽)

글 | 조순익

제동을 걸며 성장주의를 뛰어넘으라는


와이드

건축리포트 와이드(와이드AR)

ArchitectuReReport, Bimonthly

통권 43호, 2015년 1-2월호, 격월간 2015년 1월 15일 발행, ISSN 1976-7412 2008년 1월 2일 창간 등록, 2008년 1월 15일 창간호(통권 1호) 발행 2011년 1월 19일 변경 등록, 마포 마-00047호 ⓦ 발행인 겸 편집인 전진삼 ⓦ 발행소 간향 미디어랩 Ganyang Media Lab. 주소|(121-816)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 175, 909호(동교동, 마젤란21오피스텔) 전화|02-2235-1960 팩스|02-2235-1968 독자지원서비스|070-7715-1960 홈페이지|cafe.naver.com/aqlab 네이버 카페명|와이드AR ⓦ 본지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 본지에 게재된 기사나 사진의 무단 전재 및 복사, 유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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