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ytoyou Culture Magazine
2014 .08 .27 .Wednesday
Editor 서한영교
혼자 걸어요 걸음은 가장 인간적인 포즈이다. - 롤랑 바르트
문화
멈춰! STOP! 스무 살 언저리쯤에 뭔가 엄청난 고민과 갈등에 휩싸일 때 지리산 등반을 하곤 했다. 힘들 었다. 다리도 아프다.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 겨울에도 땀이 바가지로 흐른다. 온갖 정체 모를 벌레들의 공습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1년에 한 번씩 혼자 지리산에 가는 이유는 모든 걸 ‘멈춰! STOP!'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하는 “중단하는 본능”이 1년에 한 번씩은 끓어오르나 보다. 2박 3일 코스로 지리산을 한참을 걷고 또 걷다보면 내가 하고 있 는 고민들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일인지에 대해서 알고서는 늘 놀라곤 했다. 지리 산 능선을 타면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작고 작았다. 고민을 해결하기 보다는 고민의 무게를 덜어내는 일을 지리산을 걸으면서 했다. 사실, 고민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힘든 것이 아니 라 고민을 둘러싼 ’주변‘의 무게가 힘든 것이다. 고민의 무게를 덜어내면 생각보다 쉽게 풀 리는 일들이 다반사이다. 머리로만 하던 고민을 온 몸으로 하면 가벼워진다. 움직이고, 걷 고, 숨 쉬다 보면.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 수많은 걷기의 달인들은 산에, 운동장에도 많다. 하지만 걷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또 그만큼 찾아보기 힘들다. 걷기를 사랑하는 한 남자(다비드 르 브르통)의 책 <걷기 예 찬>에서는 온갖 종류의 산책 예찬을 펼쳐 놓는다. 걸으면서 듣고, 보고, 느끼고, 냄새 맡고 등등 걸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온 갖 감각들의 향연을 펼쳐 놓는다. 특히 ‘혼 자서 걷기’에 대한 브르통의 통찰은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다. 둘이서, 셋이서 같이 걷기 보다는 혼자서 걷는 시간은 전혀 눈 치 볼 것 없는 시간이다. 입은 꼭 다물고 걷 는 시간에 “가끔씩 천사가 찾아오기도 하 고” 낯선 손님들이 내리기도 한다. 브르통
은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 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 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 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 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명상 에 빠져든”다고 말한다. 혼자서 걷는 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 다. ‘살을 빼야겠어.’의 걸음이 아니라 그저 홀로 걷는 일은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 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 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 인다. 걷는 다는 것은 잠시 동안,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
궁뎅이를 털고 일어나기 장에서 일도 하고, 한 없이 노숙을 하기도 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한 없이 길을 걷고 걷던 주인공은 “이봐 젊은이 도대체 뭐로 부터 그렇게 도망치는 건가?”라는 질문 앞 에 “익숙해 미칠 것 같은 세계로 부터”라고 대답한다.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궁뎅이를 깔고 있는 영감”으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새로운 경 험을 할 수 있는 걸음”으로부터 나오는 것 수많은 영화들 중에 로드무비라는 장르가
이라고 말한다. 슈퍼 트램프는 걷고 또 걸
있다. 이들 장르의 특징은 길을 가고 또 간
으면서 끊임없이 세계를 탈주한다. 슈퍼
다. 끝도 없이 펼쳐진 길 위에서 그들은 방
트램프에게는 걷는 것이 곧 벗어나는 것이
황하고, 깨닫고, 뉘우치고 성장하며 길을
다.
가고 또 간다. 영화 <인투더 와일드>의 주 인공 슈퍼 트램프는 예약된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길을 떠난다. 히피들을 만나고, 공
걷는 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 법정 스님 역시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요즘에 와서 사람들은 자동차에 너무 의 존하면서 직립보행 기능을 잃어 가고 있 다. 자동차로 인해 행동반경은 넓어졌지만 내 다리로 땅을 딛고 걸을 때의 그 든든함 과 중심 집합이 소멸되어 가는 듯싶다.”고 지적한다. 걸어서 30분이면 걸어 갈 수 있 는 거리면 웬만하면 버스를 타거나, 자동 차를 타고 ‘이동’한다. 직장까지, 마트까지 걸어갈 수 있으면서도 우리는 일부로 시간 을 내어 저녁에 운동장 트랙을 돌거나, 러 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걷는 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 은 끊임없이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러닝머신 위로 탈주 시인 황인숙은 <인숙만필>에서 “서울엔 걸을 만한 곳이 아주 드물”지만 자신은 남산에“20분짜리부터 3시간짜리 까지 산책코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산책 코스 는 “뻥 뚫린 하늘과 살랑거리는 나무 사이의 긴 복도를 부 지런히” 걷는다. 산책을 하면서 “고아 소녀 같은 느낌을 주는 나무”를 만나기도 한다. 산책은 여러 풍경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그저 지나쳤던 평범했던 풍경들이 낯설
어지기도 하고, 늘 지나가던 나무에 이름 을 붙여 주고 싶기도 하다. 이렇게 걷는 걸 좋아하던 황인숙 시인은 헬스클럽을 다니 면서 산책을 다니지 않았다. 봄이 오자 그 는 문득 “러닝머신 길에는 봄도 없고 벚꽃 나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다시금 걷 기 시작한다. 걷기 시작한 세상은 온통 꽃 이 피어있고, 담벼락에 작은 낙서들이 눈 에 들어오고, 버려진 쓰레기를 몰래 주워 담으며 주변을 가꾸는 걸음을 걷는 황인숙 의 걸음걸음에 꽃이 피는 듯하다.
천사가 되는 길 하루에 20km씩 총 한 달을 걸어야 다 걸을 수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전 세계 여행자들이 찾는 길이다. 이 순례길의 상업화를 막기 위해 스페인 정부에서 모든 게스트하우스와 편의시설들을 관리하고 있다. 단 돈 5유로만 주면 게스트하우스 에서 숙박을 할 수가 있다. 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련된 책이 출판된 것만 100권이 넘어간다. 이 아무것도 아닌 길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 은 그 곳에서 천사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이 천사로 보인다고. 그래서 그 곳에 가면 숱하게 천사를 만날 수 있다고. 한 달을 그렇게 걷 고 걷다보면 스스로 천사가 되 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걷 고 걷다 보면 잘하면 날아다닐 수도 있다고. 걷다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정말 걸어봐야 안다. 그 래, 걷자. 발길 닿는 대로.